12. "플루토스", ("부富의 신")
1. 이 연극은 한 노예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유일한 것이다. 노예 카리온의 독백은 주인인 크레뮐로스가 있는 데서 이루어지는데 그 주인은 듣지도 않고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평화"에서의 한 노예를 연상시키면서 카리온은 주인의 어리석음을 불평하고, 또 자기 몫에 대해 불평하는데; 노예의, 즉 한 육체가 그것의 본성적인 지배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산 사람이나 그의 노예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의 몫은 그 주인이 분별 있는 사람일 때 받아들일 만하다. 만일 이 연극의 제목이 "플루토스"(부의 신)이 아니라면 노예가 그 주인의 재물의 일부분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카리온의 독백에서 알 수 있듯이 크레뮐로스의 어리석음 혹은 광기는 아폴론의 신탁(필로클레온의 광기처럼)에 기인한 것이다. 크레뮐로스는 신에게 물어보기 위해 델포이로 갔었고, 그리고 신의 답을 받았었는데, 왜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느냐는 카리온의 질문에는 대답도 없이 맹인의 뒤만 쫓았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신탁의 영향으로 볼 때, 카리온은 아폴론이 사람들의 말대로 진짜로 신성하며 그리고 치료사인지 의문이 들게 된다. 주인에 대한 그의 인내가 바닥이 난 것이 틀림없다: 크레뮐로스는 이제 여기서 왜 그가 맹인의 뒤를 쫓으며, 카리온도 역시 그를 쫓도록 하는지 말해야만 하고; 그는 그에게 그 맹인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주인이라는 것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크레뮐로스는 카리온에게 미친 듯이 보이는 그의 행동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경건하고 정의롭지만 가난한 반면에, 불경스럽고 불의한 사람들은 부자이다. 그래서 그는 불경스럽고 불의한 것이 영화를 얻는 방법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중대한 일에 대해 그는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다 살아 버린 그 자신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하나 아들을 위해 아폴론에게 갔다: 그의 아들이 영화를 위해 생활 태도를 바꾸고 불의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신은 분명하게 대답하기를 크레뮐로스는 신전을 떠나 만난 첫 번째 사람에게 매달려야 하며, 그리고 그를 설득해서 그와 함께 집에 오도록 해야 한다: 그가 델포이로부터 아테네까지 좇아온 그 맹인은 그가 신전을 떠나서 처음 만났던 사람이다. 크레뮐로스는 스트렙시아데스와 같이<주1> 아들이 하나인데; 그러나 불의한 스트렙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갔고, 정의로운 크레뮐로스는 아폴론에게로 간다.
2. 카리온은 신탁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주인이 바보 같아서 어안이 벙벙하다. 신은 가장 명확한 방법으로 말했는데, 크레뮐로스는 그의 아들의 행실을 그가 처음 만난 사람, 즉 지금 나라에서 공통으로 실행되고 있는 것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이 대답은 아주 생생하게 분간이 서서, 신이 다른 어떤 것을 의미했을 수가 없고; 아폴론은 결국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현명하다. 달리 말해 아폴론은 그의 아들이 전통과 법nomos, 즉 옛 관습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러나 닳아빠진 노예는 옛 관습을 따르는 것이 유익하다는 의미에 대해, 또 그것이 타락한 시대에서는 분명하게 유익하지는 않다며 시비를 걸고; 그래서 신은 그 아들이 그 시대의 타락한 행위들을 따라야 한다고 의미해야 한다. 신이 크레뮐로스에게 분명하게 분간이 서게 정의로운 태도를 계속하라고 충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소크라테스의 교습에 대한 스트렙시아데스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알게 되었듯이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언제나 바보스러운 것은 아니다. 크레뮐로스는 카리온이 한 신탁 해석을 믿지 않는다. 아폴론이 불의의 행위를 추천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맹인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크레뮐로스가 신전을 떠나 처음 만난 사람이라는 사실로 그를 아테네까지 크레뮐로스의 집 앞에까지 따라갔다는 것이 신탁은 반드시 글자 그대로 이해되어야만 하고, 카리온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높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의미를 찾기 위해 그 맹인이 누구이며, 그리고 왜 크레뮐로스와 카리온을 신탁에 적힌 대로 복종하지 않았어도 왔을 집으로 끌고 왔는지 알아야만 한다. 카리온이 무례하게 그가 누구인지 맹인에게 묻고, 그는 무례하게 대답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크레뮐로스가 점잖게 묻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없다. 오직 주인과 노예가 그를 죽이겠다면서, 그가 누구인지 알고 났을 때에도 그에게 해를 입히고 보내 주지 않겠다는 협박만이 그가 말하게 한다. 그래서 최소한 그에게 손은 대지 말아 달라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자, 겨우 그는 그들에게 그가 플루토스라고 말한다.
3. 크레뮐로스에게는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는데, 특히 플루토스가 전적으로 플루토스처럼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불쌍한 행색에 몹시 더럽기 때문이다. 플루토스는 그의 상태에 대해 제우스가 사람들을 시샘하는 것에서 찾는다. 플루토스가 아직 어렸을 때, 그는 오직 정의롭고, 현명하며, 엄전한 길로 가야 한다고 위협했는데; 그가 그렇게 할까 봐, 그가 가치에 대해 분별할 수 없도록 제우스는 그의 눈을 멀게 했다. 이런 제우스의 행동을 크레뮐로스는 이상하게 보는데, 제우스는 오로지 가치를 생각하여 명예를 누리기 때문이고, 그것은 아마 인간의 덕목에 대한 경험이 신성을 경배하는 근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우스가 부나 권력이 아니라, 정의로움, 현명함, 그리고 엄전함, 즉 사람들이 진정으로 명예를 부여하는 것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플루토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다. 플루토스는 크레뮐로스에게 그가 만일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는 나쁜 사람들을 피해 올바른 사람들에게 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그의 신분에 관한 크레뮐로스와 카리온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데; 그들의 놀라움은 너무나 대단해서, 어쨌든 크레뮐로스가 아폴론의 신탁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가 왜 델포이로부터 아테네로 왔는지 묻는 것도 잊는다(53-55).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준 대가로 플루토스는 그 두 사람에게 놓아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는 그 맹인이 누구인지 알고 나자 그전보다 더 풀어 주기가 싫은데, 단지 신전을 떠나 처음 만난 사람을 그의 집까지 데려가야 한다는 문자 그대로 해석한 신탁 때문에 그는 플루토스가 그와 함께 머물기를 원했다. 그는 착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라는 플루토스에게 그가 그런 가장 착한 사람들 속에 속한다며 함께 머물기를 간청한다. 플루토스는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는데; 그가 크레뮐로스의 정의에 대해서 묻지 않지만, 그는 어떤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가를 통하여 결과적으로 그가 있는 것이 그들을 너무나도 나쁘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고, 또 그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는지 모르고 제우스가 그에게 한 행위를 옹호한다: 만일 부가 절대적인 타락이라면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플루토스는 그의 착한 동료들로부터 격리되어야 하고; 제우스는 그의 부유나 불의함을 시샘해서가 아니라, 가치와 정의에 대한 사랑으로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의- 제우스의- 전제를 부인한다: 재산에 관한 모든 것이 나쁜 것은 아닌데; 그러나 이런 부정이 플루토스에게 어떤 감명도 주지 않는다. 다음으로 크레뮐로스는 정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의 이익 때문이라며 같이 머물라고 설득하는데; 신들의 의지로 그가 플루토스의 눈을 치료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그렇지만 플루토스는 치료를 받아서 그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낫고 싶지도 않다. 그리하여 카리온은 그를 본성적으로 비참한 사람이라 부른다: 본성적으로 플루토스는 좋은 것들에 비해 나쁜 것들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고, 혹은 본성이 그의 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이유로 그는 부가 절대적으로 타락한다거나,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사람들은 나쁘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카리온은 두 번 실수한다. 플루토스의 적은 제우스이다: 만일 그가 플루토스의 눈을 회복시키려 하는 크레뮐로스의 의도를 안다면 제우스는 그를 파멸시킬 것이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가 지적하듯이 제우스는 이미 그의 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플루토스는 감히 이것을 수긍하지 못한다: 제우스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너무 크다. 크레뮐로스 자신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없다. 그는 경건하게 델포이로 갔던 경건한 사람이고, 그리고 신탁을 가장 경건하게 이해했다. 그가 변한 것은 단지 신인 플루토스로부터 제우스에 대해 알게 된 것에 기인한다: 그는 제우스를 경배했는데 제우스의 정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플루토스를 신성들 가운데서 가장 비겁하다고 비난한다: 제우스에게 정의로부터 나온 힘이 없기 때문에 그는 오직 플루토스에게서 나온 힘만을 가지고 있는데; 플루토스가 다시 보기만 한다면 그는 그 힘을 잃을 것이고, 정의도 그리고 정의만이 부로 이끌 것이다. 제우스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플루토스는 크레뮐로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는 카리온을 증인으로 세우며 "하늘에 걸고" 맹세하면서 힘에 있어 플루토스가 제우스를 능가한다고 시범을 보인다: 사람들이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지만 오직 플루토스를 위해서이고, 또 그들은 오직 플루토스를 통해서만 제우스에게 제물을 올리는데; 재물을 통해 혹은 재물을 위해서이든, 빛나는 것이든, 좋은 것이든, 고마운 것이든 간에 사람들에게서 생긴 것이다. 사실 부 자체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들의 이유이며,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방법이다. 다른 모든 것들을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가질 수 있지만 부는 결코 그렇지 않다. 플루토스는 그의 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사람들이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슬퍼지기 시작하는데, 부가 그런 나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 말고도 사람들이 단순히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하나의 두려움만 가지고 있다: 그는 크레뮐로스와 카리온이 말하는 그가 가진 힘의 주재자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지 못한다. 부가 모든 사람을 타락시키지는 못하므로, 그는 그가 바라는 대로 올바른 사람들과 지내고 싶은 것을 이룰 수 있는데; 그는 제우스가 정의를 위한다는 일치된 생각으로, 그의 눈을 멀게 하여 올바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있도록 했다는 믿음을 고쳤다. 그렇지만 그는 제우스에게 아직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최소한 제우스의 의지에 대항하는 행동이 성공할까 하며 실망하고 있다. 크레뮐로스의 눈에 이것은 단지 모든 사람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뿐인데, 다른 말로, 부는 즉 부유하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겁이 많다는 것이다. "플루토스"가 기초로 삼는 불가능성은 플루토스가 부의 순수와 단순함, 인간의 자질 혹은 부속성과,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로서 혹은 문자로 말하는 존재로서, 신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주2>.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가 바라는 것이 있고 기꺼이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기만 하다면, 그의 시력은 그가 회복시킬 수 있다고 장담한다. 고작 인간인 크레뮐로스가 그런 위업을 성취할 수 있을까 하는 플루토스의 의문은 아폴론이 그 계획을 승인한다는 크레뮐로스의 단언으로 사라진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는 제우스의 의지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하는 다수 인간들끼리의 동맹 역시 자발적으로 언급한다: 가난한 많은 올바른 사람들이 부자가 되거나 혹은 부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플루토스의 동의도 기다리지 않고, 그의 노예에게 아마 지금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의 동료 농부들을- 그들이 지금 가난한 많은 올바른 사람들이다- 플루토스와 함께하는 데 합류하도록 부르라고 지시한다. 그는 이제 플루토스를 최고의 신성으로 대하는데, 그를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요청하고, 플루토스는 오늘 제대로 된 방법이거나 아니면 사술로거나 그 집을 부자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는 플루토스의 옛 믿음을 이해가 되도록 일깨워 준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는 그의 신성한 손님에게 자신을 극단적인 것들에 몰입하지 않는 사람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플루토스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그에게 확실하게 하여 주는 것으로 그의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가 있는 것으로 사람들을 간단히 불의하게 만드는 것을 벗어나, 플루토스는 어떤 면에서 그들을 최소한 정의롭게 만든다: 모두가 세상에 그 무엇보다 더 플루토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에게 진지하게 말한다. 제우스조차 플루토스에게 왜 그가 그의 눈을 멀게 했는지 그 진실한 이유를 말한다. 크레뮐로스로 말하면 그는 모두에게 진실을 말하는 극단으로는 흐르지 않는데; 그는 중간적이거나 평균적으로 정의롭다.
4. 크레뮐로스는 아폴론이 그에게 하라고 말한 것을 글자 그대로 이행했다. 그는 신탁을 영리하게 이해하기를 거부했고; 그 영리한 이해는 불의한 위치에 곧 바른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이해를 통해 그는 결국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려 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다시 말해 정의의 실천이 그전에는 결코 없었던 보상을 받는 일로 되었고; 가장 어리석고 터무니없어 보이던 신탁의 해석이 맞는 해석으로 밝혀진다. 플루토스를 쫓아가도록 크레뮐로스를 유도하여, 아폴론은 그가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일을 도울 것이라는 보장을 그에게 해 준 것으로 보인다(210-14). 크레뮐로스가 이해하는 것처럼 신탁은 카리온이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의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만 플루토스의 시력 회복은 제우스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으며- 마치 "평화"에서 평화가 제우스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듯이-, 그리고 그 결과가 보여 주듯이 플루토스를 제외한 모든 신들의 힘을 빼앗지 않고서는 될 수가 없다. 이런 결과는 확실히 아폴론에 의해 의도되었을 리가 없다. 크레뮐로스가 아폴론의 신전을 떠나 처음 만났던 사람이 플루토스였다는 것도, 그리고 플루토스가 무작정 델포이에서 아테네까지 어슬렁 걷는 일이 생겼던 것도, 아폴론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cf. 121). 플루토스가 맹인인 것은 카이로스가 맹인인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크레뮐로스가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의 기회를 없애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플루토스가 델포이에서 아테네까지 걷는 것이 그 자체로 신탁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카리온의 신탁 해석이 맞았다는 뜻은 아니고; 아폴론이 시대의 타락성을 몰랐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시대가 카리온이 생각하는 만큼 타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폴론이 크레뮐로스의 어리석음이나 아니면 신탁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 그리고 그의 단순성이나 아니면 그의 단순한 경건심을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새들"에서 신들의 몰락과 구별하여, "플루토스"에서의 신들의 몰락은 신들 중의 하나가 선경지명이 없이 행동했던 것에 기인한다. 그렇지만 아폴론의 행동은 헤라클레스의 옷차림으로 하데스로 내려간 디오뉘소스의 행동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카리온의 경박한 신탁 해석은 사소한 결과를 가져올 뿐이지만, 크레뮐로스의 경건한 해석은 경건심을 파괴시키는 형태로 끌고 간다.
5. 분별력을 동원해 다시 보자. 아폴론이 크레뮐로스가 신전을 떠나 처음 만나게 될 사람이 플루토스일 것이라는 것과, 플루토스가 아테네까지 갈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므로; 이 경우에 신의 신탁은 정의로움이 부라는 생각을 지키기 위해 크레뮐로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이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크레뮐로스의 강요로 플루토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말 것이라는 점과, 또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효과를 드러낼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신의 크레뮐로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크레뮐로스가 그 자신이나 동료 시골 사람들에 관해서 정의롭다고 보는 것은 틀리지 않다. 농부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정의롭다고 여겨져 존경받고 사랑받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신들의 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주3>.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일련의 연극들에서 보는 이런 추측을 얼마나 많이 따를 것인가? 농부들의 정의는 플라톤이 천한 정의, 정제되지 않은 종류의 정의라고 부를 만한 그런 것인데, 어떤 방법으로도 대단한 유혹들에 빠져드는 것을 막지 못한다. 만일 크레뮐로스가 그의 아들을 정의로운 방법으로 키우는 것이 현명한가, 신들은 불의스런 행위에 대해 단단히 반대하는가 하는 등의 의문을 가지게 되지 않았었다면, 그는 델포이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플루토스는 정의에 대해 더 엄격한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따라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는, 혹은 본성은 정의에게 해로우며 그래서 정의의 애호자인 플루토스에게 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크레뮐로스는 암묵적으로 사람들에게 엄격한 요구 조건을 만드는 것을 부인한다.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로부터 제우스가 정의로운 사람들을 시샘하며 그래서 그들에게 적대적이고, 그리하여 보통의 정의로운 사람조차도 부자가 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우스조차 보통의 정의에 못 미친다. 제우스는 정의로운 사람들을 시샘하는데, 그는 정의롭고 싶지만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플로토스가 제우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가 모든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더 믿을 만한데, 그가 제우스의 시샘을 관찰할 때 그는 아직 보고 있었고, 반면에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는 견해가 생길 때에 그는 이미 맹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는 그가 혹은 그의 아들이 철저하게 불의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제우스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 충분히 정의롭다. 그에게 남은 오직 한가지 대안은 더 이상 제우스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의 규칙들을 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는 정의롭고 또한 부자가 되고 싶은데; 그는이러한 소원이 플루토스의 원래의 의도와 일치한다는 것을 플루토스로부터 알게 되고; 그가 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원래의 의도대로 돌려 놓기 위해 그 신의 시력을 원래대로 돌려 놓는 것이다.
6. 카리온이 농부들로 구성된 코러스와 함께 돌아오는데, 그들은 제우스의 분노로부터 그 신과 사람들을 보호하도록 되어 있다. 카리온은 굉장히 바쁜데, 그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의 주인에게 오라고 말했을 뿐이어서; 마치 그들이 도망치는 노예를 추적하는 것처럼 그의 뒤를 따라 헐떡거리고 있다. 이제 왜 그들을 불렀는지 알고 싶다. 카리온은 그들이 근면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곤궁으로부터 벗어나 즐겁게 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이런 이야기가 듣기 거북한 늙은 사람들은 한참 후에서야 기쁨에 넘쳐 그들을 놀리면서 즐거워하는 노예로부터 크레뮐로스가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해 플루토스를 데리고 집에 왔다는 말을 듣는다. 잠시 동안 그들은 그 좋은 소식이 진짜인지 의심하는데, 노예의 단순한 서약이 그들을 거의 믿게 만든다. 원기왕성하게도 카리온과 코러스는 명쾌하고 조롱스런 성격의 서정적인 대화를 나눈다: 카리온은 명쾌하게 양들과 염소들을 불러 모으는 퀴클롭스와, 그녀를 추종하는 자들을 산돼지로 바꾸는 키르케를 흉내질 하는 역을 맡는데, 그래서 실제의 양들과 염소들 그리고 잠재적인 산돼지로 취급당한 코러스는 명쾌하게 오뒷세우스를 흉내 내겠다고 알린다. 이런 종류의 파로드는 다른 어떤 연극의 파로드들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예를 들어 "여자들의 의회"의 파로드는 여자들이 암묵적으로 남자들인 척할 뿐이다. 퀴클롭스를 눈 멀게 하는 오뒷세우스를 참고로 한 코러스의 암시는 제우스가 플루토스를 눈 멀게 한 것에 대한 절박한 배상을 예측하는 한 종류로 읽히는데, 마치 헤르메스를 통해 키르케로 부터 구원받는 오뒷세우스를 참고로 삼는 암시가 그 연극에서 헤르메스의 행동이 선견지명의 한 종류처럼 읽히는 것과 같다. 농부들과 오뒷세우스는 초인간들을 초인간들의 도움으로 물리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밖에 "말벌들"에서 필로클레온이 퀴클롭스의 동글을 탈출하는 오뒷세우스를 흉내 내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필로클레온이 그랬던 것처럼 "플루토스"의 코러스가 비록 모르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신탁에 순응하여 행동한다.
7. 카리온은 약간의 음식을 훔쳐 먹기 위해 주인의 집으로 들어간다. 크레뮐로스가 밖으로 나와서 그의 동료들에게 그들의 새로운 상황에 걸맞는 새로운 표현으로 인사한다: 그들은 이제 그 신의 구원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누군지도 모르는 그 신의 적에 대해 전쟁하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들은 크레뮐로스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그와 논쟁을 한다거나, 아니면 그런 일들로 연극에 부수되는 행동에 군소리를 할 필요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 블렙시데모스가 도착하지 상황이 달라진다. 그 역시 허겁지겁 도착하는데; 그가 무언가 큰 일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크레뮐로스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에게는 더욱 대단히 놀라운 것이 크레뮐로스가 그의 친구들을 부르고 있다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할 때 친구들을 찾는다. 크레뮐로스는 자신이 친구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블렙시데모스는 그의 친구가 아폴론의 신전에서 금이나 은을 훔쳤거나, 혹은 살인과 같은 돈벌이가 되는 범죄를 저질러 이제 들킬까봐 겁을 내고 있다고 의심한다. 크레뮐로스가 많은 맹세들로 반박하자 블렙시데모스의 의심은 더 굳혀져 간다. 그는 크레뮐로스가 전에는 정직했었는데, 이제는 부정직하게 되었다고 확신하고; 그는 이제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고, 즉 그들이 소득에 굴복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크레뮐로스는 블렙시데모스가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에 한몫 끼이려 안달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의 의심은 블렙시데모스가 그에게 일부 떼어 줄 경우 고발자를 매수해서 크레뮐로스가 처벌받는 것을 막아 주겠다고 공표하자 굳어진다. 크레뮐로스는 엄전한 사람들만 부자로 만들 것이라는 말로 블렙시데모스에게 그의 정직성을 믿게 할 수 있다고 믿는데, 그러나 이것은 블렙시데모스에게 그의 친구가 아주 많이 훔쳤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대답이 보여 주듯이 크레뮐로스의 논쟁이 아주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대답으로 블렙시데모스는 엄전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은근히 인정하는데, 즉 그는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고 한 앞서의 추정을 은근 슬쩍 철회한다. 이 추정의 철회로 블렙시데모스는 그 역시 정의로운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 편하게 해 준다. 달리 말해 크레뮐로스는 그의 친구들을 그리고 엄전한 사람들 양쪽 모두를 부자로 만들고 싶어서, 그는 그의 친구들이 모두 엄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하려는 모양이다. 어쨌든 처음으로 블렙시데모스는 그의 친구에게 플루토스가 그의 집에 와 있으며, 그로부터 혜택을 얻기 위해 친구 둘이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할 기회를 준다. 블렙시데모스가 가진 크레뮐로스의 정직성에 대한 믿음은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 플루토스를 보지 않았는데도 블렙시데모스는 그가 플루토스가 그의 집에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 신들에 대한 언급들은 그 말의 신빙성을 위해 말하는 사람의 정직성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좋은데, 왜냐하면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의 신성을 플루토스가 확연히 정의롭다는 것을 근거로 시험해 보지도 않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 비록 그가 제우스가 정의롭다는 믿음을 버려 버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제우스의 신성은 믿는다. 블렙시데모스는 의사를 한 명 부르자고 하는데, 아직 그는 아테네에서 현 시점에 데려올 만한 의사가 누구인지는 한 사람도 모른다. 크레뮐로스는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대로 플루토스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 가서 드러눕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앞에서 그는 블렙시데모스에게 신들이 바란다면 플루토스가 시력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는 그에게 플루토스의 시력 회복이 제우스의 뜻에는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크레뮐로스의 정의로움에 대한 블렙시데모스의 불신은 그다지 깊지도 넓지도 않았다. 그는 그 이름이 지적하는 대로 데모스demos를 지향한다.
8.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그럭저럭 잘 되어 왔다. 크레뮐로스는 블렙시데모스의 재촉으로 플루토스를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으로 데려가는 것을 서두르고자 한다. 이런 순간에 두 친구는 크레뮐로스가 줄곧 알고 있었고 두려워 해 왔었던 그들의 일에 눈에 띄는 인간 이상의 장애를 만난다. 이제 그의 주된 동조자는 그의 눈으로 직접 크레뮐로스의 우려가 어떻게 정당화되었는지를 본다. 정말 그들은 제우스나 혹은 그의 벼락에 의해서가 아니라, 플루토스의 여성 상대방인 페니아(가난의 신)에 의해 대항하게 된 것이다. 그 둘은 가난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해서 페니아를 알지 못한다. 그녀의 등장은 맹인 플루토스 때처럼 혐오스럽다. 그녀는 블렙시데모스에게 막연하게 끔찍한 여신 에리뉘에스를 연상케 한다. 역겨운 목소리로 그녀는 두 친구의 불경스럽고 불법적인 구도를 비난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어느 신이나 인간도 감히 하지 못했던 것을 감히 하는데- 그들의 과감함이 페이세타이로스의 그것을 능가하는지 궁금하다-, 따라서 그녀는 바로 그날로 그들을 파멸시키겠다고 위협한다. 제우스가 그녀를 보냈다고 추정할 이유는 없지만, 그러나 확실히 그녀는 제우스를 대신해 행동한다. 마치 플루토스가 제우스를 고발하듯이 페니아는 그를 옹호한다. 그렇지만 플루토스와는 다르게 페니아는 제우스의 손에 달렸다고 기대되는 어떤 처벌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따라서 그 둘이 그녀에 대한 것을 더 많이 알고 그리고 그녀가 더 많은 말을 할수록 더 많은 용기가 그들에게 되살아난다. 그들은 그녀를 그녀에게 조금도 잘못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고함치는 앙심이 가득하고 천한 여자로 간주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그녀가 가난의 신이어서 사람들과 오랫 동안 같이 살아 왔었는데, 특히 아테네에서 그녀가 있을 만한 곳 모든 데서 그녀를 쫓아내려 하면서, 비통스럽게도 그녀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고 대답한다. 블렙시데모스는 그녀가 누구인지 듣고 나자 달아나고 싶어진다. 크레뮐로스는 그렇지만 이제 용기에 있어서도, 정의로움에 있어서 이미 그의 친구를 능가하는 것을 보여 주었듯이, 그의 친구를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 두 사람은 플루토스를 단 한 여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생긴 곤경에 버려둘 수가 없다. 블렙시데모스에게 공정하도록 말하면, 크레뮐로스가 플루토스에게 마주 서는 데 성공한 까닭에 그 친구보다 페니아에게 마주 서는 데 더욱 잘 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인데; 그밖에 그는 만일 어떤 위험이 그들을 조금이라도 위협한다면, 그것은 페니아로부터가 아니라 제우스로부터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9. 크레뮐로스는 블렙시데모스에게 플루토스의 힘을 상기시켜 주어 그의 용기를 되살린다. 페니아는, 크레뮐로스가 그의 협조자의 두려움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 즉 그 두려움을 증가시키려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것을 말없이 듣기만 하다가, 그 두 사람이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목을 반복해서 든다. 크레뮐로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줄 축복을 구하는 것이 어떻게 잘못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범세계적 행복의 길을 막고 선 한 존재는, 만일 그것이 제일 먼저 그리스로부터 그 다음은 세상으로부터 쫓겨났다면, 오로지 그것이 받아들일 만한 것만 가진다. 다른 말로, 그녀가 인간이든 초인간이든 상관없이, 페니아는 불의한 행동을 하고; 모든 인간들에게(혹은 한 사람만 뺀 모두) 이익이 되는, 그러나 신들에게는 해로운, 행동은 정의롭다. 만일 어떤 신이 인류의 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신은 정당하게 적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리하여 페니아는 그녀 혼자서만 사람들이 가진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 즉 크레뮐로스가 그녀에게 잘못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그녀에게서부터 혜택을 받아 왔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다툰다. 그녀는 가난이 없어서는 안 되는 부가 있음의 조건이라고 다투는 플루토스의 주장보다 훨씬 멀리 가는데; 플루토스가 다투는 주장이 오직 부가 있는 사람들에만 매력적인 반면, 페니아가 다투는 주장은 부가 없는 사람들에도 마찬가지로 매력적이거나 혹은 매력적인 것으로 될 수 있다. 그 밖에 그녀의 견해는 플루토스의 것보다 더 합리적인데, 정의로운 사람들이 부를 이루도록 바라기도 또한 바라지 않기도 하였고; 그래서 그녀는 플루토스보다 더 무섭게 생각될 수 있었다. 페니아는 또 부나 혹은 부에 대한 욕구가 전적으로 모든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의 원인이라는 크레뮐로스가 다투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182-83). 부에 대한 욕구는 우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지만, 그러나 더 많은 부를 쫒는 부자들에게도 역시 활기를 불어 넣어 그들은 스스로를 충분한 부자가 아니라고, 즉 어떤 면에서 가난하다고 여기는데; 그래서 크레뮐로스는 그의 주장을 가난만이 오로지 모든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의 원인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페니아가 다투는 주장이 크레뮐로스의 것보다 역시 더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녀의 주장이 매력적이라 해도 그녀 자신은 혐오스럽다. 그녀는 그녀의 주장을 증명하는데 성공하기 위하여 그녀의 운명을 기꺼이 위험 속에 내놓는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려는 욕구나, 정의로운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려는 욕구나, 모두 똑같다고 취급하는데, 정의가 눈에 보이도록 보상받는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사람이 정의로워질 것이라는 말로 넌지시 뒷받침한다. 그 둘을 가르쳐 놓겠다는 그녀의 약속과 그녀의 합리적인 논변을 그 둘은 경멸하며 듣는다. 그래도 그 두 편은 어느 편이든 지는 한 편이 그냥 한 사람의 죽음보다 더한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서로 동의한다. 그 토론의 결과가 무엇이든지 간에 힘이 아닌 논쟁으로 이 문제를 풀자고 페니아가 제안했다는 것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것이 그녀의 저주가 크레뮐로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그녀가 논쟁으로 돌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신들이나 사람들에 의해 한번도 이행된 적이 없는 가장 과감한 행동의 결과가 힘이 아닌(그리고 특히 제우스가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닌) 논쟁에 의존한다.
10. 코러스는 토론에서 페니아에게 이기라며 그들의 두 친구를 짧게 격려한다. 크레뮐로스는 그와 그의 친구의 대담한 행동에 대해 그가 알기에는나쁘거나 착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잘못할 때 정직한 사람들이 잘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는 근거로 정당화하면서 토론을 시작하는데; 만일 플루토스가 다시 눈을 뜬다면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정직해지고, 신성한 것을 숭배하게 되니 이것이 인류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현상을 보면 광기나 오히려 나쁜 악마의 지배가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악한 사람들이 부자이고, 그리고 많은 정직한 사람들은 가난하다. 크레뮐로스는 그 자신을 특출하게 대담하지는 않다고 소개하고; 그는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킨다는 구도가 "우리", 즉 최소한 블렙시데모스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밝힌다. 그의 경건심에 대한 칭송 때문에 그가 위장하고 있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데,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그가 바라는 높은 행복이 플루토스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페니아는 잠시라도 크레뮐로스와 그의 협력자가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부자로 만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 크레뮐로스의 전제에 이어진 화제를 택하지 않는데, 그것에 따르면 정의로운 사람들은 잘 살아 가야 하고, 불의한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 크레뮐로스가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려는 시도에 관한 것만 빼고, 무엇보다 그녀는 크레뮐로스의 정의에 대해서는 플루토스에 대해서 만큼이나 거의 묻지 않는다.
11. 페니아는 그녀의 적수가 바라는 상태가 그들에게 좋을 것이라는 것을 힘주어 부정하는 것으로 그녀의 반격을 개시한다: 만일 플루토스가 다시 볼 수 있다면, 즉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면, 아무도 어떤 기술이나 여러가지의 지혜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크레뮐로스가 노예들이 기술들을 발휘할 것이라고 반박하자, 페니아는 그에게 만일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면 더 이상 노예상도 없을 것이며, 그것에 더하여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더 이상 없어져, 노예들이 했던 일들 모두를 이제는 크레뮐로스가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밖에 기술자들의 휴업은 물론 기술자들의 제품이, 즉 모든 오락물들이 사라진다는 뜻인데, 페니아가 공예 기술자들에게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만들도록 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여전히 오락물들도 풍부하게 있다. 크레뮐로스가 플루토스와 말다툼을 벌릴 때, 그 자신이 모든 기술과 훌륭한 발명품도 모두 플루토스로부터 나온다고, 즉 부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부에 대한 욕구로부터 나온다고 언급했던 적이 있다(160 ff.). 그는 부는 인간이 일을 해서 생기고, 일은 다시 돌아 인간의 필요나 궁핍으로부터 생긴다는 페니아의 주장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에 쫓겨 만든 오락물들을 가난한 사람들이 줄긴다는 것은 부정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역겹고, 힘들고, 그리고 불결하다. 페니아는 그가 가난을 거지짓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거지 생활을 끌어간다는 것은 가진 것 없이 생활을 끌어간다는 의미이고, 가난하게 살아 간다는 것은 부자로 되지도 않고 더 빈곤해지지 않고, 그저 일하며 검소하게 살아 간다는 의미이다. 크레뮐로스는 이런 구분이 아무 소용이 없고; 그는 그것을 마치 희극 소재로 알맞는 것 정도로 취급한다. 여전히 페니아의 논점은 분명한 결점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거지 노릇보다 가난이 더욱 낫다고 증명하는 것은 부유한 것보다 가난이 더 낫다는 증명이 되지 못한다. 페니아가 흙을 가는 것을 기술들 속에 포함시키지만 농사 일보다 다른 기술들을 더 강조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cf. 617-18); 농부들과는 구분하여, 탁월한 가난뱅이가 공예 장인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라기보다 남들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 아주 명확해진다.
12. 페니아는 전체 토론의 중간 부분이기도 한 그녀의 첫 번째 논점의 결점을 보정하려 노력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잘 산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 이제 그녀는 그녀가 플루토스보다 사람들을 더 낫게- 마음과 외양이 더 낫게- 만든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논점은 그와 그의 친구의 정의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는 크레뮐로스에게 호소력이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다. 페니아는 그녀가 사람들을 말벌과 같게, 즉 도시를 위한 전사로 그리고 온건하고 엄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반면에 부는 성질이 그와 반대되는 것들을 가져 온다. 그녀는 모든 부자들은 나쁘다고 하는 플루토스의 확언을 반복해 말한다. 그녀는 처음 그녀의 논지들 중에 정의를 언급하지 않는다. 크레뮐로스는 그녀에게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범한다고 보여지는 어떤 범죄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블렙시데모스가 그의 친구 크레뮐로스에게 품었던 의심을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페니아는 웅변가들이 아직 그들이 가난한 동안은 데모스와 도시에 대하여 정의롭지만; 그러나 공공의 수입으로 그들 자신을 부자로 만들고 나서는 불의한 행동을 하고, 다수의 사람들에 반하는 음모를 꾸미고, 데모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고 대답한다. 이것이 크레뮐로스도 동의를 하여 페니아가 앞서 나가는 유일한 논점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분명히 아니다: 불의로 돌아선 웅변가들은 그들이 가난한 동안은 여전히 수입을 올린다. 페니아는 그녀가 칭송했던 덕목이 마치 기술들이나 아니면 그들의 훈련이 그러하듯 필요에서 나온 결과물인지 분명하게 단언하지 못하는데(534); 예를 들어 기사들의 덕목처럼 좋은 양육의 결과가 일반 덕목과 같은 종류가 아닌 것은 틀림없다. 달리 말해, 크레뮐로스와 마찬가지로 페니아는 전적으로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은, 중간층인, 그런 계층으로부터 추론하는데, 그들이 부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보다 덕목을 말하는 데 더 알맞다고 생각될 수 있다<주4>. 크레뮐로스는 만일 페니아가 옳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달아나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녀에 의하면, 바로 이런 사실이 그녀가 시람들을 더 낫게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그 아버지로부터 달아나듯이 그녀에게서 달아난다. 크레뮐로스는 그녀의 이런 논점에 대해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그것이 페니아가 덕목에 관해서는 플루토스에 비해 더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처럼 보인다.
13.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도 조용히 있지 않는다. 그는 제우스가 필요나 가난에 의해 정의롭도록 강요받지 않고도 정의롭다는 것을 익숙하게 물고 늘어진다. 플루토스에 의해 알게 된 것을 통해 그는 제우스의 정의로움에 대해 믿는 것을 그만두었는데, 그러나 그는 제우스가 부를 가진 존재라는 것, 혹은 여전히 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믿는다(130-31, 140-41). 그래서 그는 페니아의 가난함이 부유함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단언에 대해, 만일 그녀가 옳다면 제우스는 부유하기 때문에 판단력이 모자랄 것이라며 반격한다. 페니아는 이런 낡은 형태의 견해를 경멸할 뿐이다: 제우스는 가난하다. 제우스의 지혜나 혹은 정의에 대한 옹호가 신학에 있어 광범위한 영향을 끼칠 혁신을 가져오는 지점에 도달했다: 제우스는 가난한 사람들 부류에 속해 있지 부자들에게가 아니다<주5>. 그럼에도 페니아는 제우스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고, 그것은 제우스를 정의롭고, 인정적이며, 그리고 현명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는데; 의문이 들지는 모르나, 그녀가 의미하는 것은 그가 정의롭고 현명하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서, 이 말은 결국 그가 가난하지 않다는 의미이다<주6>. 그렇지만 페니아가 다투며 주장하는 대로, 만일 그가 가난하다면 그는 아주 힘이 세어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이 결론은, 그럴 경우, 단지 페니아의 변론만으로 플로토스를 치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물론 페니아는 제우스가 힘이 없다는 것으로 그의 가난을 증명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그녀는 그것을 올림픽 경기에서 주는 상이 제우스의 법령에 따라 대단히 싼 것이라는 사실로 증명한다. 크레뮐로스는 정의를 염두에 두고, 이 사실 자체가 제우스는 가난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지만 제우스의 인색함의 결과일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페니아는 단지 제우스를 인색하다고 하는 것이 그를 가난하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큰 모욕이거나 신성모독이라 대답할 뿐이다. 그것이 신성모독이라는 것을 증명하며 내세우는 가설을 아무도 논박하지 못해, 제우스에 관한 말싸움은 비긴 것으로 끝난다. 첫 두 부분의 논쟁에서 그녀의 명백한 성공을 기억하면서, 페니아는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들을 가난에 빚지고 있다고 다툼의 주장을 반복한다. 이제 크레뮐로스는 또 다른 신(헤카테)의 말이나 행동을 참고로 언급하여 그녀를 간단히 논박한다. 페니아가 되받을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그는 엄청난 모욕을 가해 그녀를 쫓아 버린다. 그녀가 졌다고 시인할 이유가 없는 페니아는 그럼에도 크레뮐로스가 오늘 안에 처벌을 당할 것이라고는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433). 단지 이제 그녀는 언젠가는 그가 그녀를 다시 찾을 것이라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연극의 나머지 행동들은 그녀의 저주들이나 공포들이 "개구리들"에서 하데스의 공포들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14. 만일 보통의 사람들도 자신있게 판단할 수 있는 그 부분만의 논쟁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약간의 타당성을 가지고 페니아가 행동에 의해서는 졌지만 변론으로는 크레뮐로스에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의 논쟁이 합리적 논쟁의 희극적 등치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곤궁으로 촉발되어 나타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들이 부를 얻을 수 없다는 것에 누가 의문을 가지겠는가? 더욱이나 놀라운 것은 크레뮐로스의 말도 안 되는 구도가 끝에 가서는 전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판명 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플루토스"는 전체 구도가 그것보다 더 합리적인 단단한 적수를 만나서, 변론으로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데도, 모호하게 승리하는 유일한 연극이다. 페니아가 정직한 일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녀의 가설을 '정의의 변론'과 비교하는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인데; "정의의 변론" 역시 변론에 의해 패배하지만, 그의 패배를 "구름"의 결말이 보복하는 반면, 페니아의 패배는 "플루토스"의 결말에 의해 인정된다. "새들"의 경우에는 페이세타이로스의 전체 구도가 아무런 합리적인 적수를 만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괜찮다. "플루토스"를 뺀 모든 다른 희극에서 승리의 연유들은 승리할 만한 연유들인데; "여자들의 의회"에서처럼,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말벌들"에서처럼, 그것들이 간단하게 혹은 분명하게 승리하지 못한다. 스스로 택한 페니아의 패배는 "여자들의 의회"에서 노파들이 젊은 연인들을 이기는 것만큼 충격적이다. 그래서 "플루토스"는 그런 점에서 "여자들의 의회"만큼 추하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15. 그렇지만 아무리 페니아가 합리적이라 해도 그녀는 혐오스럽다. 그녀는 왜 역거운가? 분명하게 하기 위해 조금 과장한다면, 어째서 '분별'이 혐오스러운가? 어째서 그녀는 변론에서 이겼는데도 행동으로 패배하는가? '합리'를 '불합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크레뮐로스가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던 가장 강력한 그녀의 논거는 부가 인간이 일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진실은 연극의 근본적인 전제에 모순되는 것인데, 그것에 의하면 부는 어떤 신이 단지 어떤 사람과 함께 머무는 것으로 그 사람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고, 아니면 페니아를 그의 한 바탕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플루토스라는 신이 있어, 페니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가 그의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일어나도록 한다. 그녀의 합리적인 가설은 단지 플루토스의 존재로 인해 명백하게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녀는 플로토스에 비춰 보면 혐오스럽다. 다른 말로 가난이 뷰유 한 것보다 낫다는 그녀의 단언으로 사실 페니아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좋다고 말하고; 크레뮐로스의 전체 구도는 지금 있는 그대로 인간의 삶은 아주 불완전하고, 그래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데; 이 불완전함은 신들이 있다는 사실로 명백하게 된다.
16. 플루토스는 다른 모든 신들과는 같지 않은 신이다. 제우스가 정의로운 사람들을 시샘하는 반면, 플루토스는 그들을 사랑한다. 플루토스가 그의 시력이 회복되는 것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게 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그리고 더군다나 그가 많은 좋은 협력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제우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다. 다른 신들 역시 사람들이 일을 해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이나 욕구를 성취한다. 그러나 다른 신들이 때때로 하는 것을 플루토스는(그의 시력이 회복된 다음이라면) 언제나 한다: 그는 인간의 일을 전적으로 남아서 필요가 없도록 만들고, 그리고 바로 이 사실로 모든 사람들을 정의롭게 만든다. 지금 하는 그대로는 부의 창출이 기술들의 실행을 요구하지만, 기술의 실행은 부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인간의 좋은 삶은 인간의 일에 더해 행운을 필요로 해서; 그것은 기술에다, 선견지명, 희생, 또 기도를 요구한다<주7>. 다른 신들의 유용성은 기회의 대중없는 성격을 상기시키는데, 플루토스의 유용성은 세계적이고 또 필수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플루토스를 독점적인 신으로, 아니면 그들이 그의 힘을 알았던 적이 있는 최소한 가장 높은 신으로 경배하는 것으로 비난받을 수는 없다. 플루토스는 모든 다른 신들과 다르다고 말해도 좋은데, 그 홀로 유용성 그 자체이고, 그 자신이 세계와 통하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는 착함이기 때문이다. 다른 신들과 비교하여 볼 때, 이것이 그가 그 자신에게 돌아가기 위해 아니면 그 자신이기 위해,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그는 신성- 신을 신으로 만드는- 그 지체이다. 만일 이것이 그렇다면 제우스 옹호자인 페니아는 플루토스가- 아직도 크레뮐로스가 경배하는 유일한 신이다- 신이 아니라는 것을, 즉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그녀는 플루토스의 시력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조차 않는다.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려는 그녀의 시도조차 불명예스럽게 실패한 것이 그녀의 혐오스러움에 대한 비밀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17. 이것은 아주 명확해 보인다: 만일 플루토스가 없다면, 페니아는 혐오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말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 페니아는 그녀가 사람들이 가진 모든 좋은 것의 전적인 연유라고 주장한다(470-72). 이것이 사람들이 좋은 것에 대해 신들에게 신세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그들은 제우스가 지금 플루토스를 맹인이게 한 것, 혹은 페니아의 효능의 덕을 보고 있다. 페니아는 기술들의 근원이 되는, 혹은 기술들을 요구하는 필요이다. 이것은 기술이 없는 필요 그 자체가 나쁘다거나, 아니면 빈곤하게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즉 혐오스럽다. 페니아가 기술이 없는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러나 기술을 지향한다고 임시로 한번 말해 보자.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로 나쁘지만 그러나 예술이나 법을 통해 좋아지거나 혹은 구제된다<주8>. 만일 법이 짐이라면<주9>, 본성도 역시 짐이다. 그렇지만 신들은 모든 짐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신들의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플루토스는 기술들을 필요 없는 잉여물로 만드는데; 그가 기술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전적으로 인자한 지배 아래서 사실로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게 되도록 필요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도 채워질 것이다. 본성에 어떤 왜곡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플루토스 덕분으로 본성은 적이 아닐 것이며, 정복된 적은 더욱 아닐 것이다.
18. 그렇지만 이런 행복한 완성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플루토스는 아직 맹인이다. 크레뮐로스의 구도의 성공은 그의 페니아에 대한 변론의 승리 위에 그로서는 실행할 수 없는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 그는 여전히 의약의 기술이라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상하게 우연의 일치로 그 시점에서 그런 기술을 구사하는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406-9). 그래서 플루토스의 시력 회복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에 의해 기적적으로 치유될 수 밖에 없다: 신들이 기술들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카리온의 도움으로 크레뮐로스와 블렙시데모스는 플루토스를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으로 서둘러 데려가서 온밤을 거기서 새우는데; 이 일에서 그들은 법nomos을 따르는 수 밖에 없다. 블렙시데모스는 여전히 "어떤 사람"이- 페니아는 아닌 어떤 사람이- 그들의 행동을 방해할 것 같아 겁이 난다. 제우스에 대한 그의 두려움은 완전한 사실무근으로 판명된다.
19.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서 일어나는 일은 크레뮐로스의 구도가 성공이냐 실패냐에 결정적이다. 이 진행에 대해서는 눈으로 볼 수 없고; 다음날 아침 신전에서 맨 처음 돌아온 카리온이 전하는 보고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지금까지 가난했던 진짜 농부들과 그들에게 견줄 만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복이 많다고 치하한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치료 덕분으로 플로토스의 시력이 회복되었다. 코러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고함치며 칭송한다. 실내에서 결과를 기다려 왔던 크레뮐로스의 아내가 고함 소리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는데; 그녀는 노예로부터 먼저 좋은 소식을 대충 듣고, 그 다음 신전에서의 진행들에 대해 자세히 듣는다. 아마 그들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성에 의해 깊이 감명을 받은 탓이지만, 그러나 또한 확실히 플루토스의 모습이나 몸가짐이 거의 신과 같지 않아(cf. 78,118), 카리온과 그 여주인은 단지 플루토스가 한 인간인 것처럼 그에 대하여 말한다. 카리온이 보고하는 대로 신전에서의 절차들은 가능한 한 최대의 어둠과 침묵 속에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더 나은 조건 아래서 실시되었다. 모든 환자들과 그들과 같이 온 사람들은 누워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잠이 들어 있었다. 카리온은 배가 고파서 깨어 있었다. 그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제가 몸소 성소의 탁자에 신에게 바치는 먹을 것들인 제물들을 차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전에 한 늙은 여자의 머리 근처에 죽 단지가 서 있는 것을 본 터라, 카리온은 사제가 스스로 단지의 내용물을 골고루 다루는 행동을 당연하게 느꼈다. 그는 사제보다 신이 먼저 단지에 손을 대지는 않을까 두려웠는데; 그는 그가 아스클레피오스의 독사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그 여자가 믿게 만드는 것으로 보고를 이어갔다. 아스클레피오스가 몸소 나타나자 그는 숨어서 그가 하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그 신은 먼저 대략 맹인이자 고발꾼인 도둑부터 처치하였는데; 그의 사악함을 처벌하기 위해 지독한 고통을 가하면서 더욱 더한 맹인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그는 플루토스에게 돌아와서, 그의 딸들과 거대한 두 독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를 처치하였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 아스클레피오스 신은 플루토스 신을 치료하고 나서,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와 그의 독사들은 시야에서 곧 바로 사라졌고, 그리고 카리온은 크레뮐로스를 깨웠다. 분명히 아스클레피오스는 그가 누구를 치료하는지도 모르고 플루토스를 치료하였고; 신들의 행동들은 조율된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플루토스와 아스클레피오스는 서로 짝인데; 아스클레피오스의 고발꾼에게 대한 태도는 플루토스 말고도 어떤 신이 정의로우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어쩌면 플루토스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해질지 모른다. 건강이 부보다는 대단히 더 좋을 뿐만 아니라(633-36); 플루토스와는 구별하여, 아폴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11), 아스클레피오스는 현명하다. "플루토스"에서는 아스클레피오스와 아폴론 간의 관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20. 아스클레피오스는 플루토스를 이른 저녁에 치료하였다. 플루토스의 근처에 누워 있던 사람들은 깨어 있었고, 치료를 받을 기쁨에 차 있었으며, 그 밤을 온통 깨어 지냈다. 플루토스는 카리온처럼 아침 일찌기 떠날 수 없었는데, 지금까지 가난하고 정의로운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군중이 기쁨에 차서 그를 뒤쳐지게 붙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불의로 부자들이 된 사람들은 물론 대단히 걱정하였다. 불의가 아닌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플루토스의 치료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는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암시는 있다(cf. 110). 이 시점에 플루토스와 그가 행복하게 만든 사람들이 크레뮐로스의 집으로 가고 있다. 플루토스가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먼저 태양에게, 그 다음에 아테나가 아닌<주10>, 그녀의 땅에 경건하게 절한다. 여기서 다른 모든 연극들에서 나오는 것들보다 "플루토스"에서 "하늘에 걸고"라는 말로 서약하는 것이 훨씬 자주 나오는 것을 주목한다<주11>. 플루토스는 그의 이전의 불운이나 실수들이, 즉 가치 있는 것을 피하고 가치 없는 것들과 함께 살아온 것이 부끄러운데; 이제 그의 무지가 치료되었고; 그는 그의 생활을 위에서부터 아래에까지 바꿀 것이다. 크레뮐로스는 약간 늦게 도착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이 되어 그는 플로토스에 비해 더 많은 군중에게 붙들려 있었다. 크레뮐로스의 아내는 마치 새로 산 노예를 환영하듯이 무화과와 그 밖의 디저트들을 가지고 플루토스를 환영하고자 하는데, 그러나 플루토스가 생각하기에, 그가 선물들을 주기보다 선물을 받는 것은 꼴사나운 일이다. 특히 실외에서, 즉 그가 실지로 구경꾼들에게 그것들을 던져야만 하고, 그래서 그들을 웃게 만들어야 하는 무대에서, 선물들을 받는다는 것은 꼴사나운 일일 것이다. 그의 견해로서는 이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가치 없는 행동일 것이다: 눈을 뜬 플루토스가 작가의 대변인 노릇을 한다. 작가처럼 플루토스는 사람들을 더 낫게 하거나 혹은 정의롭게 하고<주12>, 또한 작가처럼 그는 그가 즐기면서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나누거나, 아니면 그가 만나게 되는 그런대로 정의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웃게 하지 않을 수 없다(758).
21. 플루토스가 작가를 대신하여 말하는 네 단락의 운률이 이 연극의 파라바시스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들은 확실하게 다른 연극들에서 파라바시스가 나타난 상황에서, 즉 주인공이 완전히 승리를 거두고 난 후, 그리고 그 승리의 열매가 소개되기 전에 나타난다. 다른 배역들이 크레뮐로스의 집으로 들어간 후에, 카리온이 밖으로 나와 그가 속한 가정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기쁨을 나타낸다: 어느 것에 투자하지 않았고, 어떤 불의의 행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부자가 되었고; 이런 방식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카리온조차 정의롭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대로 집 안은 탁월한 음식과 마실 것들 뿐 아니라, 금과 은 그리고 상아 같은 것들로도 채워졌다. 재물들은 노예들에게도 충분히 나누어졌다. 분명 그들의 법적 지위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최소한 그들의 주인들이 가진 만큼 잘살게 되었다: 크레뮐로스가 아주 통이 크게 제물로 쓸 동물들을 잡고, 그의 아내와 함께 멋진 음식들을 준비하는 동안에, 예민한 카리온은 그의 주인과 안주인이 참을성 있게 견디는 연기를 피해 집을 떠난다.
22. 플루토스에게 온 첫 번째 방문자는 정의로운 사람인데, 신의 덕으로 부자가 된 그는 신에게 기도하고 싶어 한다. 그가 카리온에게 말하는데, 그는 아버지로부터 충분한 재물을 상속받았고, 우정 어린 행동은 인생에 유용한 것이 된다는 생각으로 궁핍한 친구들을 돕는 데 써 없앴다. 그런 다음 일들은 그가 가난하게 되었고, 버림받았으며, 그가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들에 의해 경멸당했다는 것이다. 크레뮐로스와 같이 그는 분명히 불의가 인생에 있어 정의보다 더 유용하지 않은 것인지 아닌지 의문을 품기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13년을 대단한 가난 속에서 그의 운명에 반항하지 않고 살았다. 확실히 첫 번째 방문자가 실행했던 혹은 기대했던 정의 종류는- 친구들을 돕는 것 아니면 은혜를 베푸는 것- 불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새로운 질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카리온과 첫 번째 방문자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번째 방문자가 도착한다. 플루토스의 덕분으로 그는 고발꾼인데 망했었다. 그는 분개하고 있는데, 만일에 그의 시력이 회복된다면 그 즉시 "우리들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모든 정의로운 사람들 중에 그만 홀로 망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고발꾼은 자신을 정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그의 재산은 정의로운 사람들과 카리온에 의해 불의한 방법으로 나누어졌었고, 평소에 그가 하던 대로 그는 그들을 범죄 행위자로 처리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들은 단지 그를 비웃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정의롭다 여기는데, 왜냐하면 누구나 원하면 고발자로서 행동해도 좋았기에, 그는 범법자들을 고발하여 법치의 확립에 조력하는데 헌신하였기 때문이고; 그는 또 전적으로 도시를 위해 살았다고 주장한다. 옛날 질서에서 그는 잘살았었기 때문에, 옛날 질서에서는 정의가, 즉 공공심이 법에 의해 보상받았었다는 것을 그가 암시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그들의 생계를 위해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농사나, 장사나, 기술을 통해 번다는 것을 견지하는데; 그들은 소문들을 옮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 고발꾼은 그에게 양들의 생활을 연상시키는 개인적인 삶에 대해 오로지 경멸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그에게 플루토스 그 자신이 주어진다 해도, 그가 고발에 헌신하는 그의 생활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페니아는 별개로 하고, 그는 연극에서 유일하게 새로운 질서를 혹은 이상적인 삶을(921-23) 간단하게 거부하는 사람이다. 플루토스의 치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고, 즉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고, 아니면 그들 자신의 일을 신경 쓸 것이라서, 더 이상 법정 같은 것은 없을 것이고, 그래서 고발꾼들도 없고; 고발꾼들은 전적으로 제우스의 시대에 속한다. 전환의 시대에는 그들과 또 다른 불의한 사람들은 여전히 처벌당한다. 어떤 면에서 고발자들을 플루토스 그 자신으로부터 그의 재산을 빼앗기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비공식적인 행동은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그는 카리온으로부터 공식적인 처벌을 받는데, 카리온은 이제 옛날 질서에서 고발꾼들이 담당했던 역활을 빼앗아서(928-29; cf. 918-19); 그 정의로운 사람의 전적인 승인을 얻어, 고발꾼의 좋은 외투와 신발을 벗겨 내고, 그 정의로운 사람이 입었던 날고 닳은 것들을 강제로 입힌다. 고발꾼은 저항하기에는 너무 허약하지만 순순히 굴복하지는 않는데; 카리온이 단지 플루토스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도움을 받을 사람을 찾는다면, "그 강력한 신"은 혼자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해체한 죄로 오늘 당장에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한다. 요점은 잘 알았고; 만일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다면, 더 이상 법이 필요할 일은 없고, 따라서 법과 관련된 기관도 없을 것이다. 물론 고발꾼의 협박은 전적으로 쓸데없다. 플루토스의 혁명으로 고발꾼의 자리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바뀔 것이고, "기사들"에서 클레온이 소시지장수와 자리 바꿈을 했듯이, 플루토스의 존재 덕분이라고 알고 있는 대로 더 이상 인간인 지배자에 대한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가 또 다른 고발꾼을 처벌하는 것과 카리온이 그 고발꾼을 처벌하는 것을 비교하면, 새로운 질서가 얼마나 관대한 것인지 안다(716-26). 그 고발자가 달아난 다음, 그 정의로운 사람이 플루토스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카리온은 그와 함께 집으로 들어간다.
23. 세 번째 방문자는 늙은 여자인데 고양이 새끼처럼 젊은 소녀와 같은 행동을 한다. 그녀는 어서 오라고 하는 크레뮐로스에게 플루토스가 보기 시작한 이래로 그녀는 견딜 수 없는 끔찍한 불의에 시달려 왔다고 말한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잘생기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 주던 남자 친구가 있었고, 그녀는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돌보고 왔었다. 그는 그 자신과 그의 여동생 그리고 그의 어머니를 위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적은 액수의 돈이 필요했다. 틀림없이 그는 그 집안에서 유일한 남자였고, 그의 나이 든 여자 친구는 그를 간직하기 위해 그의 전가족을 "간직"해야만 했다. 그는 확실하게 그의 헌신적이고 끊이지 않는 그녀에 대한 사랑을 그녀에게 각인시켰다. 지금 그는 완전히 변했다. 사악해진 것도 아니고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그는 그녀의 사탕 선물을 그녀의 나이에 대한 무례한 주석을 달아 돌려보냈다. 전에 그가 그녀를 대했던 방식과 지금 그가 그녀를 대하는 방식의 대조는 충격적이고, 그리고 과연 그에게 플루토스가 그를 부자로 만들어 줄 자격이 있는지 의아스럽게 만든다. 그 노파는 그에게는 없다고 확신한다. 크레뮐로스는 신에게서의 연유를 옹호하며, 그녀의 정당한 불만은 시정될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그녀는 전 애인이 그의 빚을 그녀에게 갚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크레뮐로스는 그 젊은 남자가 그녀와 지금까지 같이 산 것으로 그 빚을 갚았다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가 살아 있는 한 그녀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었다. 크레물로스가 이 어려움을 풀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당사자인 남자 친구가 등장한다. 그는 그가 그의 전 애인에게 입혔던 상처 위에 모욕까지 더하는데, 크레뮐로스는 이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합세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가 그 우스꽝스러운 노파에게서 얼마나 즐거움을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정의에 대한 분별은 그에게 그 노파의 정당한 요구들을 잊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 젊은이가 포도주를 마셨으므로 그는 그 나머지도 마셔야만 한다. 젊은이는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리고, 그러나 크레뮐로스의 나이를 존중하여, 그를 때렸었을 것이다. 플루토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와 있는 그 젊은이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부탁한다. 그 노파 역시 신에게 말하고 싶다고 하자, 젊은이는 떠나가고 싶어 하는데, 크레뮐로스는 그에게 반해 어떤 강제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그는 그가 약속을 위반한 보상을 그 노파에게 해야 할지 모르나, 그 보상 역시 그에게는 그다지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그의 경우는 명백하게 고발꾼의 경우보다 복잡한데; 그래서 그것은 전환기를 이해하는 데 후자보다 더욱 도움이 된다. 그의 노파에 대한 의무는 그전의 가난의 결과이지만, 그가 지금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돈으로 그 의무를 없앨 수 없다.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궁핍 가운데 있지 않는 한 남자의 인내의 한계를 넘는 것이어서, 크레뮐로스와 같은 사람에 의한 중재가 필요하다. 젊은이와 노파의 장면은 "여자들의 의회"에 있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데, 거기서는 노파들이 사랑에 빠진 소녀가 있는 젊은이에게 손을 대고 있다. 만일 "여자들의 의회"에 나오는 노파들의 승리를 "플루토스"에서 나오는 위축된 노파의 불쌍한 상황과 대비해 보면, 프락사고라의 전체 구도가 크레뮐로스나 플루토스의 전체 구도에 비해 얼마나 열등한지 안다. 프락사고라가 가차없이 본성의 부등성을 법적 동등성으로 (아니면 본성의 우월성을 본성적인 열등함의 법적 우월성으로) 희생시킨 반면, 플루토스는 전통적인 부등성을 폐기시키고, 그래서 본성의 부등성을 마음껏 펼치게 회복시키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남자 친구가 약속을 파기한 데 대해 그 무슨 보상이 노파에게 주어지더라도, 지금부터는 어느 젊은이도 가난에 의해 그가 했던 일을 하도록 몰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락사고라와 플루토스는 모두 에로스를 노예상태에서 부까지로 자유롭게 하지만; 프락사고라는 이것을 부가 했던 것보다 에로스에 더 큰 폭동을 일으켜서 이루고, 플루토스는 에로스를 다른 어떤 노예 상태로 그것을 제한하지 않고, 노예 상태에서 부까지로 자유롭게 한다. 부나 법을 통해 도착된 에로스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마치 그가 부가 더 이상 타락의 절정으로 되지 않아야 하도록 하려 하는 것처럼, 그는 에로스가 그 본래 속으로 들어오게 하려 한다. 이것이 플루토스가 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노파들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페니아에게 한 대답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람들 가운데 부나 가난에 대한 부등성은 본성적인 질서를 혼란시킨다. 페니아의 모습을 통해 본성에 던져졌을지도 모르는 의심이 플루토스에 의해 지워진다: 페니아는 필요이고- 아니면 필요에 관련되고-, 그러나 에로스는 간단히 필요가 아닌데; 기술들이 페니아의 자식일지 모르지만, 에로스는 아니다. 디오티마의 말 가운데서 '사랑의 신Eros,Love'은 '가난의신Penia,Poverty'과 '부의 신Plutos,Wealth'의 결합으로부터 뻗어 나온다는 말이 있다.
24. 다섯 번째 방문자는 헤르메스이다. 그는 플루토스가 아닌 크레뮐로스와 그의 가족 전체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는 결코 플루토스를 신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크레뮐로스와(그리고 그의 가족과) 이야기하는 데 실패하는데, 그는 문간에서 카리온을 만났고, 그리고 그의 카리온과의 대화로 그가 크레뮐로스와 대화하는 것이 불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의도는 크레뮐로스에게 제우스가 그와 그의 가족들을(모든 정의로운 사람은 아닌 그의 친구들도) 불경죄로 다스리고자 한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인데, 왜냐하면 플루토스의 시력이 회복되었는데도 누구 하나 신들에게 제물을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카리온이 대답하기를 제물을 중단은 최종적이며 더군다나 정당한데, 신들이 인간들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정의로운 사람의 친구들만큼 불의한데, 즉 그들은 연극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 더 불의하다. 헤르메스는 그를 반박하지 않는데; 제우스의 위협조차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카리온이 보기에 그는 그 불의함으로 그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얼마간의 도벽이 있는 노예는 한번 이상 카리온의 친구로 행세하였던 도둑질의 신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어려움 속에서도 힘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여 그 신을 도울 생각을 한다. 헤르메스는 사람들과 살고 싶고, 특히 크레뮐로스 가정의 구성원이 되고 싶다. 얼굴도 붉히지 않고 인정하듯이 그는 그의 동료 존재들을, 말하자면 그의 조상의 땅을 버리려고 하는데, 진짜 조상의 땅은 누구가 아주 잘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의가 다른 것들은 없고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는 것이라면, 헤르메스는 정의롭다. 플루토스의 치세 아래서의 그의 운명이 보여 주듯이 그는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진짜로 정의롭지 않다. 그래서 그는 지금부터 정의로운 사람들을 위해 남겨둔 부를 나누어 가질 수 없고; 그는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여러가지 종류들의 직업을 제의해 보지만 그 모두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일로 판명이 난다. 마침내 그는 음악과 체육의 경기들을 관장하는 책임자가 되겠다고 제의한다: 플루토스 치세가 가져온 세계적인 여가에 힘 입어 그런 경기의 수요가 그전 어느 때보다 더 대단하다. 카리온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헤르메스가 인간의 하인으로서 행동하여 생계비를 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남기지 않는다. 한 노예가 제우스의 위협과 헤르메스의 불평 혹은 요청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 플루토스의 치세가 얼마나 인간의 치세인가를 충분히 보여 준다. "플루토스"의 새로운 질서에서는 플루토스가 "새들"의 새로운 질서에서 '새들'이 차지했던 지위를 차지한다.
25. 마지막 방문자는 구세주 제우스의 사제이다. 그 역시 플루토스가 아닌 크레뮐로스를 찾는다. 역시 플루토스를 결코 신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된 이후 더 이상 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아 그 역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신전들은 버려졌으며 또 경멸로 채워졌다. 그 역시 신들을 버리고 크레뮐로스와 머물고 싶어 안달한다. 크레뮐로스는 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가 받아들이는 대로 구세주 제우스가 솔선하여 여기에 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구세주 제우스는 플루토스이다. 새로운 질서에서 사제는 필요할 것이고, 경기 운영자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플루토스를 그전에 좋았던 옛 시절에 그를 소위 아테나 신전의 후실opisthodomos 수호신 격으로 옹립하였던 곳, 바로 아테네의 보물들을 간직하던 곳에 옹립할 때가 왔다. 크레뮐로스는 그 행렬을 준비한다. 그는 그 행렬에서 역활을 사제와 노파에게 맡긴다. 그 노파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날 저녁 그녀에게 올 것이라고 크레뮐로스로부터 듣고 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방문이길 희망한다. 플루토스는 어떤 의미에서 그행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데 침묵하고 있다.
26. 젊은이와 그의 혐오스런 여자친구의 관계는 클레뮐로스와 페니아의 관계와 또 덧붙여서 제우스의 시대를 연상시킨다. 이에 따라 플루토스를 방문한 여섯 가운데 오직 노파와 제우스의 사제만이 마지막 행렬에 관련하여 언급된다. 크레뮐로스가 주도한 덕분에 오직 충동이나 쾌락 한쪽에만 바탕을 둔 한 불명예스런 종속자가 전적으로 친절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플루토스의 종속자- 사실은 플루토스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그를 조정하고 있는 종속자에게 굴복한다. 젊은이가 노파를 버리는 것이나, 사제가 제우스를 버리는 것의 유사성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7. "플루토스"는 지금의 쇠퇴로부터 바라던 아테네의 복구와, 바라던 옛날의 부유함에로의 회복을(1191-93) 기적적이고 불가능하고 웃기는 방법으로 회복하게 되는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경축한다. "플루토스"에 담긴 진실은 "여자들의 의회"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희극에 담긴 진실이다: 그것들 모두는 아테네에 대해, 아니면 어떤 아테네 사람에 대해 바라던 축복을 기적적이고 불가능하고 웃기는 방법으로 그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경축하는데; 소크라테스의 "꾀 주머니"가 불에 타 내려 앉는 것이 아테네에 대한 축복을 의미한다. "플루토스"가 시작되는 현재는 아테네가 절정에 있던 지난 시절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기 전에 혹은 그 전쟁 이전에- 비교해서 뿐만 아니라, 크로노스 때와 비교한 제우스의 시절을 통해서 보더라도, 아니면 차라리 플루토스가 아직은 젊고 눈으로 볼 때(88-89, 95, 221, 581)와 비교해서도 그 수준이 낮다. "플루토스"는 제우스의 폐위가 부로써 보상되는 정의를 위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소개한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크레뮐로스의 전체 구도를 인정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정의를 잘 나타낸다. 제우스의 지배의 종말이 신성의 지배의 종말은 아닌데, 플루토스가 제우스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두 가지 도시의 근본적인 요구들은- 아버지 폭행과 근친상간의 금지는- 최소한으로 말해서 제우스의 지배에서 플루토스의 지배로의 전환에 의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이 없다.
28. 제우스의 퇴위는 도시의 세 가지 근본적인 요구들이 똑같이 존중되는 "새들"에서도 역시 경축된다. 그렇지만 "새들'에서는 전체 구도에 책임을 지는 그 사람이 제우스의 후계자가 되는 반면, "플루토스"에서는 전체 구도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니라, 신인 플루토스가 제우스의 후계자가 된다. "새들"에서는 페이세타이로스가 전적인 주도권을 쥐고; "플루토스"에서 주도권은 경건한 크레뮐로스가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그리고 문자 그대로 따른 아폴론의 신탁과 함께 크레뮐로스에게 있다. "플루토스"에서 올림포스 신들의 몰락은 이들 신들 자신에 의해 한 인간으로서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에서라기보다 신들의 부조리한 행동에 의해 연유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연극의 결과에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결정적이고 의도하지 않았던 기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플루토스가 맹인이었던 수 세기 동안 플루토스의 시력 회복에 대해 결코 꿈꾸지 않았고, 그리고 그가 치료한 그 맹인이 플루토스라는 것을 그가 알았을까 하는 것은 더욱 의문스럽다. 그 초-알키비아데스인 페이세타이로스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한 농부인 크레뮐로스는 그의 정의와 그 또래 닮은 사람들의 정의가 부로써 보상받는 것에 관심이 있다. 크레뮐로스가 실행한 변화는 아테네에서 일어나고; 페이세타이로스에 의한 변화는 명백히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크레뮐로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창조한 가장 평범한 주인공이다. 이것에 따르면, "플루토스"는 그의 가장 평범한 연극이다. 그것에는 다른 연극들에는 있는 다른 차원에서 비교해서 그들의 존재가 고마운 남성이나 혹은 여성의 본성적인 지배자들, 소크라테스,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작가 자신과 같은 광택이 나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늙은 사람들의 연극이다: 크레뮐로스의 아들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젊은이는 겨우 노파를 위해 필요한 존재일 뿐이며; 아름다운 여자는 아무도 무대 위에 서지 않고, 이것으로 연극을 꾸민다. 플루토스가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은 자주 듣는데; 그가 다시 젊고 아름답게 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한다. "플루토스"는 "새들"과 같이 결혼식으로 끝나는 결말이 아니다. 크레뮐로스와 플루토스의 진실은 그들이 가져온 새로운 질서의 진실이다. 새로운 질서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부유하고 그래서 정의로울 것이다: 그 속에 정의나 신사정신을 가르칠 장소는 없다. 이것이 크레뮐로스의 아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것은 크레뮐로스를 델포이의 신탁에 물어보게 한 그의 양육과 관계가 있었다. 새로운 질서에는 기술과 공예를 위한 장소는 없다. 늙음, 죽음, 질병은 남을 것이고; 더 이상 의사들이 없어 사람들은 착한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도움이 그전보다 훨씬 더 필요할 것이다. 인간의 정부는 더 이상 없고, 그래서 지배에 대한 욕구는 시들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범죄는 부나 지배에 대한 욕구에서가 아니라도 일어난다. 그 범죄는 역시 에로스로부터 생길 것이다. 근친상간이 그런 범죄이다. 누가 새로운 질서에서 근친상간이 범죄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인가? 노예제도가 존속된다는 사실은 가족제도 역시 존속한다는 것을 가르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플루토스"에서 에로스는 무시되고 있고, 그리고 고작해야 겨우 아프로디테에 걸고 맹세한(1069-70) 이 연극에서 유일한 배역인 노파의 존재로 암시할 뿐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새로운 질서에서는 누구도 에로스나 다른 동기로 어떤 범죄도 짓지 않을 것인데, 모든 범죄는 즉각 가난으로 처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새로운 질서에서 에로스가 더 이상 재물을 통해 변용되자 않을 것이라는 것과, 그러나 이것이 단지 가난을 없애면서 생긴 피할 수도 없고 의도되지도 않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에로스와 음악 혹은 일반적인 지혜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새로운 질서에는 천박한 공예품들이나 정부를 위한 장소도 없지만, 그런 만큼 더욱 에로스나 지혜를 위한 장소가 없는 곳이라고 진정으로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즉시 이런 근거로 "플루토스"가 새로운 질서를 경축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해야만 할 것이다: 늙음(또한 죽음)과 단순성의 생존이 에로스나 지혜의 생존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보인다. 플루토스는 작가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데(796-99), 연극이 아프로디테의 지배와는 다르게 부의 지배는 경축하기 때문이다. "플루토스"의 평범한 배역은 제우스의 폐위에까지 따져 보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은 "새들"에서 충분히 판명되기 때문이다.
29. 제우스는 마치 그가 페이세타이로스가 공개적으로 지배할 때 '새들'보다 훨씬 더 힘이 없었듯이, 크레뮐로스가 인도하자 플루토스보다 훨씬 힘이 없다. 플로토스를 대신한 크레뮐로스의 행동은 '새들'을 대신한 페이스테타이로스의 행동 뿐만 아니라, 에이레네를 대신한 트뤼가오스의 행동까지도 연상시킨다. 플루토스는 에이레네가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의 승리에 대해 조금도 혹은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플루토스가 살아 있고, 그리고 걷고 말할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그는 에니레네의 아름다움은 없다. 여러 다른 점으로 플루토스와 에이레네는 서로 각각 신성 그 자체이다. 플루토스의 시력이 회복되자, 지금까지 기술, 법nomos, 그리고 기회가 차지했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아니면 그 자체로 기술, 법nomos, 그리고 기회를 통합하는 존재가 되는 것으로, 그는 필수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용한 것이 된다<주13>. 그렇지만 이것은 플루토스가 신성의 내용물이 오직 하나라는 것을 뜻한다. 마치 에이레네의 해방이 폴레모스에 대한 거역이듯이, 플루토스의 해방은 페니아에 대한 거역이다. 폴레모스와 페니아는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제우스를 대신하여, 혹은 제우스의 뜻에 따라서 행동한다. 에이레네나 플루토스가 매력적이거나 우아한 반면, 폴레모스나 페니아는 공포를 유발한다(438, 575). 폴레모스와 페니아는 쉽게 방해받는다. 신성의 그런 내용물에 대한 불패의 적수는 그것의 희극적 등치물이 에이레네라기보다는 차라리 플루토스이고, 폴레모스라기보다는 "뤼시스트라테"의 마지막 부분에서 경축받는 팜마코스의 아테나이다. 페니아와 폴레모스 간의 상응점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전쟁 따위를 공개적으로 칭송하는 것으로, 가난 따위를 공개적으로 칭송하는 것이 연극의 어느 데에서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30. "플루토스"는 제우스의 지배를 대체한 플루토스의 지배를 경축한다: 제우스의 지배가 멈추자 사람들 가운데 불의가 멈춘다. 헤르메스의 예가 새로운 질서에서는 신들 역시 정의롭지 않으면 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인다. 연극의 초입에서 플루토스는 그의 눈을 멀도록 한 제우스의 지혜에 대해 반 넘게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는 부가 절대적으로 타락시킨다고 확신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아울러 제우스가 불의하다는 것도 믿었는데, 그는 제우스가 그를 눈 멀게 한 것이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시샘이라는 것을 따져 보았었기 때문이다. 페니아는 제우스의 정의를 타락하게 만드는 부의 성격을 추론하면서, 제우스는 가난하고 그래서 정의롭다고 옹호한다. 무엇보다 만일 부가 절대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것이라면, 플루토스 그 자신은 절대적으로 불의하다. 확실히 부가 절대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을 나쁘다. 그렇지만 연극은 이런 사람들의 (그리고 플루토스의) 슬픈 견해를 진실이 아니라고 보여 준다: 만일 정의가 명백하게 보상받는다면, 혹은 만일 불의를 저지를 기회가 없다면- 달리 말해서, 만일 정의가 부의 필요충분 조건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정의롭게 될 것이다. 플루토스의 정의는 그의 승리가 정의로운 사람들의 승리이며, 그리고 불의한 사람들의 패배라는 사실로 증명된다. 플루토스의 지배는 완벽히 정의로운 질서이고; 그것은 법이 이루기를 소망하는 것, 소위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보상과 불의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완전하게 이루며; 그래서 그것은 법을 불필요한 잉여물로 만든다. 또한 "플루토스"는 법의 정신의 승리라고 말해질지도 모르겠다. 법은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사람들이 옳은 것을 한다고, 그리고 단지 그것이 그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르게 행동하는 것을 피한다고, 기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법은 보상과 처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루토스나 혹은 크레뮐로스가 확립한 질서는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찾는 것은 법의 준수나 정의가 아니라, 부라는 전제 위에, 그리고, 그래서 부에 대한 욕구가 소득을 사랑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전제 위에 근거를 둔 것이다. "플루토스"는 제우스의 폐위를 정의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에 대한 사랑의 옹호를 통해 옹호한다. 플루토스의 치세에서 정의는 보장되는데, 정의가 명백하게 필요하기 때문이고; 정의는 그전 어느 때보다 훨씬 더 "필수적"인데,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서 오만hybris의 위험이 그전보다 훨씬 더 대단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불의는 그 즉시 가난으로 처벌된다. 정의는 필수적인데, 즉 그 자체를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아; 사람들의 생활의 즐거움은 에로스나 음악 등의 것에서보다 그들이 정의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서는 적게 나온다. "플루토스"는 이런 정의에 대한 견해의 희극적 등치물을 늙고 가난한 농부의 정제되지 않은 정의에 대하여 원근법적 시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소개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은 이런 정의에 대한 시각이 모든 중대한 것들 가운데서 올바른 것들에 대해 가르치려는 가장 진지한 욕구에 완벽하게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플루토스" 끝.)
<주1> 다섯 번째 '가설hypothesis'(Hall-Geldart)에 따르면, 크레뮐로스의 이름은 "빚debt"과 "속임수deceiving"에서 나왔는데: "가난 때문에 그 채권자를 속이는 사람"이다.
<주2> 플루토스와 돈과는 특별히 긴밀한 관계에 있는데(131, 141, 147, 154, 194-96), 즉 전통적으로 뛰어난 것들이다.
<주3>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1381a19-23.
<주4> Cf.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95b1-34.
<주5> Cf. "아카르나이 사람들" 53; cf.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1391b1-3.
<주6> Cf. 크세노폰, '회상' I 6.10.
<주7> Cf. 크세노폰, '회상' I 1.6-9
<주8> Cf. '도시와 사람' 42 그리고 86.
<주9>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6-1), "평화"에서 여섯 번째 단락을 보라.
<주10>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8-3) "뤼시스트라테"에서 끝에서 두 번째 단락의 후반부를 보라.
<주11> "플루토스" 129, 267, 366, 403, 1043. Cf. "기사들" 705.
<주12> "아카르나이 사람들" 649-51; "개구리들" 1008-10.
<주13>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2-2) "플루토스" 아홉 번째 단락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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