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새들”
이것은 전체적인 사건이 아테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유일한 연극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논의하여 온 연극들과 다르게 그들을 아테 네 시민이라고 소개하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 두 사람은- 에우엘피데스(유망한 자, 또는 유망한 자의 아들)과 페이세타이로스(peisetairos, "동무 를 설득하는 자"와 "믿을 만한 동무"의 혼합어, 페이스테타이로스peisthetairos, 피테타이로스pithetairos)는- 문자 그대로 그들의 등을 도시로부터 돌렸다. 그들은 거대한 도시의 번잡함과 영일이 없음에서, 특히 끊임없는 송사에서 벗어나 조용한 도시나 장소로 가고 싶은 욕구에 끌려 있다. 그들은 이미 만들어진 조용한 도시, 그들이 알고 있는 가장 조용한 도시보다 더 조용한 도시, 그렇지만 아테네처럼 거대한 도시의 시민이 되고 싶어 한다: 조용한 아테네 말이다. 그들이 그런 장 소를 알고 있지 못해서, 그들은 테레우스로부터 알아내겠다 생각하고 그로부터 알아내기를 바란다. 테레우스는 한때 인간이었고, 사실 아테네 여자와 결혼했던 왕 이었는데 그는 후투티가 되었고, 한편 그의 아내는 꾀꼬리가 되어; 그리하여 그는 아테네 사람들과 새들 사이의 자연적인 연결 고리이다. 이제 한 마리의 새로서 테 레우스는 땅 전체를 총괄적으로 조망하고 있는데; 그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골짜기 속에 숨어 있는 조용한 곳을 위에서부터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테레우 스 새를 찾기 위해서 반드시 새가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이 목적으로 그들은 아테네에서 새장수로부터 각각 새 한 마리씩 샀다. 연극의 초입에 황량한 지역에서 그 들이 새를 잃어버리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마치 징조를 나타내는 새들인 것처럼 그 새들을 따라, 혹은 지시하는 대로(5,7) 그 곳까지 갔다: 도시에 대해서는 그들의 등을 돌렸지만 신들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지 않았다.
"아카르나이 사람들", "기사들", 그리고 "구름"에서는 연극의 전체 구도에 대한 구상이 처음 128행 또는 그 정도의 운문으로 나타나 있다. "말벌들"과 "평화"에서 는- 노예들 간의 대화로 시작하는 연극들에서는-, 전체 구도가 노예들의 주인에 의해 연극 전에 구상되어 있었다. "새들"에서도 역시 전체 구도가 연극에 선행하고 있지만, 연극의 시작에서 누구에 의해 구상되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연극들에서 연극의 시작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그가 암묵적으로 관 객에게 말하든("기사들"에서의 데모스테네스), 혹은 그렇지 않든("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의 디카이오폴리스와 "구름"에서의 스트렙시아데스) 간에- 그가 문자 그 대로의 노예가 아닌 경우, 한 개인이 전체 구도를 책임진다는 사실과, 그리고 에우엘피데스가 "새들"에서 연극의 초입에 관객에게 말을 건네면서 이 기능을 달성한 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아테네를 떠나 조용한 곳으로 간다는 전체 구도는 에우엘피데스의 책임이었다고 추정하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이것은 페이세타이로스가 연극의 초입서부터 그의 동무를 뛰어넘는 어떤 우위를 보인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56-59).
연극의 초입에 그 두 아테네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 그들의 두 새가- 에우엘피데스가 1 오볼로스를 주고 산 갈가마귀 한 마리와, 또한 페이세타이로스가 배심원 수당과 맞먹는("기사들" 255) 3 오볼로스나 주고 산 까마귀 한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르키는데, 그 갈가마귀는 전방을 그 까마귀는 후방을 가르킨 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어느 곳으로 방향을 돌려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그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막다른 길에 와 있다. 그렇지만 정 확히 이 사실은 그들의 여행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마리 새들이 주는 모순되는 지시는 새들을 뒤따를 것인지 시키는 대로 할 것인지 하는 지혜를 논박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여행의 끝이라는것을 정당화하는데; 그것은 "전방으로"와 "후방으로" 모두를 서로 상쇄하고, "여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그 직후 에 새들은 새들의 습성대로, 후투티새 테레우스의 습성대로, 어떤 높이 있는 것을 가르킨다. 에우엘피데스가 소리쳐 부르자, 그 역시 새인 후투티새의 시종이 나타 난다. 그가 새들을 가진 그들을 보자, 그는 그들을 새 잡는 사람들로 알고 놀라서 죽을 지경이 된다. 그 두 아테네 사람들도 시종 새를 보고 그만큼 놀란다. 먼저 놀 람을 진정한 에우엘피데스가 그 새에게 그들이 인간들이 아니며 새들이라 안심시킨다. 새가 된 에우엘피데스는 어떻게 새가 종이 필요한지 이해하기 약간 어려운 데; 그는 그 시종 새로부터 그가 본디 테레우스의 인간 하인이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게 된다. 에우엘피데스가 부탁하자 테리우스를 불러내기 위해 그가 떠난다. 그 두 아테네 사람이 테레우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 동무보다 더 많이 놀란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의 동무를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뻔뻔함을 가지고 있는데; 에우엘피데 스는 그의 동무가 용감한 척하는 것을 공손한 말투로 경멸해 버린다.
테레우스가 등장한다. 그의 모습은 에우엘피데스를 놀라게 하고 재미있게 하는데, 페이세타이로스가 그 동무 손에 의하여 눈에 띄게 기가 꺾여 고통을 받고 있는 이 후에, 그는 한동안 새-사람과 대화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에우엘피데스의 질문들은 새들에 대한 놀라운 무지를 테레우스에게 드러낸다(105-7). 테레우스의 차례 에 그는 그를 찾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재미있어 하지 않는다. 그 둘에게 왜 그를 찾아왔느냐고 묻자, 에우엘피데스는 테레우스도 처음에는 그들처럼 인간이었으며, 빚을 졌고, 또 그 빚을 갚는 데에서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고, 그리하여 새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과 새들이 이해하는 모든 것들을 이해한다고(그들이 테레 우스에게 오는 것은 스트렙시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가는 것과 멀긴 하나 닮았다) 대답하는데; 그래서 그들은 그가 아마 그들에게 어디 쾌적하고 부드러운 도시 를 찾을 수 없겠는지,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있지 않겠느냐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테레우스는 아테네의 배심원 제도를 싫어하고, 조용한 도시를 찾고 있는 에우엘피 데스가 귀족들이 지배하는 도시를 찾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그는 이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에우엘피데스는 한 사람의 친구들이 고통에 처했을 때 그들을 도우는 것보다 차라리 가장 강력한 모시는 말로 결혼식 잔치에 초대하는 도시를 찾고 있다. 페이세타이로스가 염원하는 것은 같은 종류의 것들이지만 그러나 같은 것들은 아니다. 그는 한 친구가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한창 때인 아들에게 사랑스런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모욕감을 느끼는 그런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한 다. 에우엘피데스는 음식 상床에서의 즐거움에, 반면 그의 동무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페이세타이로스는 동성애에서의 즐거움에 더 관심이 있다<주1>.
테레우스는 그 방문자들에게 세 도시를 제시하는데, 그리스에 있는 두 도시는 그들의 조건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에우엘피데스는 각각을 거부한다. 이 점에서 그의 전체 구도가 아무 것도 아니게 되고 말 즈음에, 갑자기 그에게 새들과 함께하는 인생이 그들에게 최선의 해결책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데; 테레우스는 전에 인간이었지만 새들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고, 그는 그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테레우스는 새들 속에 사는 것이 대단한 이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돈이 필요 없고, 새들이나 사람들에게 똑같이 즐겁고 좋은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에우엘피데스가 하는 말 가운데 새들의 생활이 새로 결혼한 사람들의 생활이라는 말도 있다. 에우엘피데스는 그의 동무가 에우엘피데스의 구상을 발전시켜 더 큰 전체 구도를 구상하 자, 새들의 세상에 단순한 구성원이 거의 되어 가려고 한다. 그 첫 단계는 새들이 더 이상 여기저기 바쁘게 날아다니지 말고, 한 도시를 찾아서 그곳에 정착하는 것 으로 그들의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테레우스는 디오뉘소스에 맹세하면서 새들의 정착에 전적으로 찬성하는데; 그것은 한번도 날아 본 적이 없고, 편안한 생활 을 사랑하는 에우엘피데스 역시 찬성한다고 추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테레우스는 새들이 근거지로 삼을 도시가 어떤 종류의 도시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페이세타이로스는 그가 다른 방향에서 찾아보기를 요청하는데, 마치 "기사들"에서 데모스테네스가 소시지장수(본성적인 지배자)에게 다른 방향 에서 찾아보기를 요청하는 장면 같다<주2>. 그렇지만 데모스테네스와는 다르게,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의 학생에게 그가 주위를 둘러보고 무엇을 보았는지를 묻는 다. 테레우스는 구름과 하늘을 보았다. 이제 그는 페이세타이로스로부터 하늘이 청결한 세상이, 즉 폴로스pollos가 새들의 도시(폴리스polis)로 만들어질 수 있다 는 것을 배워 알게 된다. 탁월함의 도시, 즉 전체 혹은 본성에 따르는 도시가 새들이 찾아낼 수 있는 도시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천상(신들의 장소)과 지상(인간들의 장소)의 사이를 차지하여 요새로 만드는 것으로 새들은 신들과 인간들을 지배하는 온 세상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인간들은 물론 신들에게 의지하고; 그렇지만 신들은 그들대로 사람들이 그들에게 올리는 희생물의 냄세에 의존한다. 그 냄세는 새들만이 차지할 수 있는 벌어진 공간을 통해 지나갈 것이 틀림없으며; 새들은 그 생명선을 좌지우지하고, 그리고 원한다면 신들을 멜로스의 기근으로 파멸시킬 수도 있다<주3>. 페이세타이로스는 인간들과, 새들과, 신들 사이에서 얻는 상황을 아테네와, 보이오티아와, 그리고 델포이 간에서 얻는 것에 비교하는데; 그 비교로 아테네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탁월함 그 자체라고 암시하는 것까지는 만족스럽지만, 그것은 또한 그 자체의 약점이 있어; 그는 그 약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우리 아테네 사람들"과, "우리 새들"이라고 말하여 동시에 치료한다(188,191). 그는 자신을 사람-새로 바꾸어 놓는다. 그 새-사람 테레우스는 그 제안으로 들뜨게 된다. 그는 다른 새들도 동의한다면 기꺼이 페이세타이로스와 함께 새들의 도시를 세울 것이라는 것을, 적절한 이름을 가진 어떤 신들이 아니라 다른 것들 가운데서의 한 방법으로, 구름에 맹세한다. 그렇지만 에우엘피데스는 침묵하고 있다. 이 페이세타이로스의 원대한 전체 구도는 완전히 성공할 것으로 판명나는데, 휴식과 정치로부터의 자유, 즉 에우엘피데스와 함께 테레우스에게로 오는 여행을 이끈 그 자유를 원하는 것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 욕구는 그의 마음 속의 단지 한 순간의 변덕이었는지도 모르고; 그가 여기저기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이며, 바탕이 정치꾼이라는 표시를 하나 이상 관찰해 왔다. 무엇보다 그는 한 사람이 망치가 되든 모루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또 한 사람은 그가 어떻게든 정치 권력 속에 있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자유로워 질 수 없다는 것을, 또 그리고 도시에 의한 지배 행위는 가능한 한 그 범위를 넓히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거나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휴식의 생활은 안전과 보호가 요구되는데 즉 도시이고, 그리고 만일 안전이 완전히 이루어진다면 온 세상의 제국은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아니 모든 사람들과 모든 신들을 지배하는데, 한 사람의 행복이란 비단 동료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시기하고 변덕스러운 신들에 의해서도위협당하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것은 다른 새들이 페이세타이로스의 구도를 승인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는 테레우스에게 새들에게 계획을 제시할지를 묻는데, 테레우스는 새들이 그에게서 그리스 말을 배워 알고 있기 때문에 페이세타이로스가 말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 질문은 수사학적이다. 첫 눈에 테레우스가 오로지 새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보인다. 그럼에도 페이세타이로스의 질문은 테레우스가 새들을 설득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그리고 그는 아직 새들이 그리스 말을 이해하는지 알고 있지 않아, 그 자신이 새들이나- 혹은 그 일에 대해서 어떤 존재들이라도- 그리스 말이나 다른 인간들의 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그 자신을 모든 존재들을 매혹시키는 오르페우스로 간주한다<주4>. 그 다음 그는 테레우스에게 새들을 함께 부르라고 부탁한다. 테레우스는 그의 아내 꾀꼬리와 함께 이 일을 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에게 지체하지 말라고 권한다. 테레우스는 노래를 불러서 그의 아내를 깨우고, 그의 아내가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 그들이 많이도 탄식했던 아들 이튀스를 애도하는 노래-를 부르라고 부탁하는데, 그의 노래는 두 아테네 사람들의선입관 때문에 완전히 잊어버렸던 어떤 것을 기억나게 한다: 바로 아폴론과 그가 부르는 신들에게 바치는 합창들을 가르키는 음악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이다. 신들의 아름다움은 테레우스와 그 아내와 그 아들을 묶어 주는 그런 사랑에 속하는데; 그 두 아테네 사람들은 설사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해도 아무 후회없이 그들을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에 끌리지 않는다. 이것은 테레우스가 페이세타이로스로부터 신들을 파멸시키자고 내놓은 제안에 대해 열의를 가지고 받아 들인 바로 직후에 그가 신들을 칭송하는 것이 어쩐지 이상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꾀꼬리의 음악 응답은 에우엘피데스를 도취하게 만들어 그의 칭찬을 가져오고, 그는 그 일을 손에 쥐고만 있다고 페이세타이로스로부터 힐책을 받는다. 테레우스는 그의 아내가 말없이 부르는 것에 따라서 여러 새들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찾아온 잽싼 두 늙은이의 새로운 구상에 대해 듣고 논의하자며 소집한다.
새들이 모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이미 조금씩 참기 힘들어지고 있고, 그러자 첫 번째 새가 도착한다. 처음 새들은 하나씩 하나씩 오다가 이윽고 구름처럼 몰려온다. 테레우스는 그들을 방문자들에게 소개하고 방문자들은 무어라 한마디씩 한다. 모든 새들이 도착하자 그들은 코러스를 형성하는데;그전에는 한번도 조직적으로 모인 적이 없어서인지, 혹은 그들이 서로 다른 종류들에 속하기 때문인지, 그들은 앞선 연극들에서 했던 것처럼 정식 복장을 하고 입장하지 못한다. 처음 단지 '새들'로 인해 놀라기만 하던 두 아테네 사람은 결국 '새들'로 인해 겁 먹는다. 그들의 공포가 그럴 만한 것임이 판명난다. 테레우스는 '새들'에게 그와 함께 불러 모은 이유가 아주 즐겁고 유용한 정의의 변론을 지금 도착해 있는 두 늙은이로부터 듣기 위해서라 말한다. 코로스의 대장이 테레우스가 애초부터 새들의 불구대천의 적이었던 불경한 종족의 구성원인 인간과 얘기하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신들과 새들의 신성한 법칙을 어기는 가장극악무도한 죄를 지었다고 비난하는데; 결국 더 이상 인간이 아닌 테레우스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이라도, 그 두 외래인은 즉시로 처형되어야 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그 자신과 그의 동무를 잃는다는 것을 안다. 에우엘피데스와 페이세타이로스가 아테네로부터 그를 데리고 왔었기 때문에, 그 혼자서 이 곤경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339-40). 페이세타이로스는 에우엘피데스를 마치 테레우스가 새가 될 때 추종자가 필요했듯이 그냥 추종자가 필요해서 데리고 왔다(73). 애초의 계획조차도-아테네를 떠나 조용한 도시로 가는 것 혹은 아마도 테레우스로부터 조용한 도시의 위치를 알아보려는 계획이거나- 페이세타이로스의 풍부하고 분주한 두뇌에서 나온 것이다: 정확히 말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에우엘피데스는 활기찬 아테네에서 영원히 머물고 있었을지 모르는데; 그가 페이세타이로스를 따라오게 된 사정은 페이세타이로스가 끈질기게 강요하는 것을 물리치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 전적으로 에우엘피데스 자신의 유일한 구도는 늘상 그랬고 지금도 그런 새들의 세상에서 평범한 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었다.
'새들'은 그 두 사람을 공격하거나 차라리 죽여서 먹어 버릴 태세이다. 에우엘피데스는 전적으로 무기력하지만, 반면에 페이세타이로스는 장군다움을 뛰어넘는 것이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테레우스는 그 동료 '새들'을 제지하려 노력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새들의 적이라고 당연히 받아 들이며, 그러나 그는 그보다는훨씬 강하게 그들 앞에 있는 두 사람은 그들 생각으로 새들의 친구라고 단언한다. 그들은 새들에게 어떤 유용한 것을 가르치려 왔는데; 현명한 사람들은 친구들로부터보다 적으로부터 배우고; 어떻게 조심스러울 수가 있는지를 배우고, 어떻게 도시를 요새화하는지를 배우고, 그리고 어떻게 해군을 건설하는지 적으로부터 배운다. '새들'은 어쩔 수 없이 이 교육이 진실이라 받아 들인다: 착함은 명백히 조상이나 그 자신 속에 있지 않다. 거기다가 그들이 이제 기억해 보니, 그들은 지금까지테레우스가 추천해 주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으면서 잘 대접했었다. 테레우스는 최소한 잠시 동안은 그 아테네 사람들을 구했다. 그렇지만 그 둘은 '새들'의 감시속에 있고; 그들은 여전히 싸워야 할지 모르며, 싸우다 죽어야 할지 모른다. 에우엘피데스는 그들이 어디에 묻힐지 궁금하고; 페이세타이로스는 그들이 전투에서쓰러졌다고 아테네의 관청에 말하면, 무공과 함께 아테네에 묻힐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그들이 죽음에서 살아 남을 것처럼 추정한다. 그렇지만 위험은 지나갔다.지극히 최소한으로 '새들'은 이제 외래인들이 무어라 말하는지 기꺼이 들어 보려 한다.
그들에게는 술수로 가득 찬 존재인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망설임이 있는데, 그러나 그들은 또 그들이 어리석어서 사람의 조언으로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페이세타이로스에게 만일 그의 조언으로 좋은 것들이 생긴다면, 그도 그들과 같이 나누어 가질 것이라고 약속하는데; 그들은 그가 그자신의 이익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믿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그의 변론을 듣는데; 디카이오폴리스와 '아카르나이 사람들', 디카이오폴리스와 라마코스, 데모스테네스와 소시지장수, 소시지장수와 클레온,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 혹은 브델뤼클레온과 필로클레온과 같은 그런 사이에서의 논쟁같은 것은 없다. 페이세타이로스는 테레우스가 그의 동료인 새들을 한 종족의 유전적인 적들로부터라도 배우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설득한 것에 힘 입어 그의 경우를 여섯 운문 행으로(373-80) 이긴다. 이리하여 결정적인 행동은 페이세타이로스가 테레우스를 설득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비록 테레우스가 새들이야 본능적으로 그렇지만 모든 인간들에게 숙명적인 적은 아니지만 그가 '새들'을 설득하는 행동보다 상당히 더 길다(162-93). 새들은 미워할 수도, 싸울 수도, 죽일 수도, 먹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논쟁을 걸 수 없으며, 반박할 수도 없는데; 그들은 장갑차림의 보병들을 연상하게 하지만(353, 402, 448), 의회의 의원들을 연상시키지는 않는다. 테레우스가 '새들'을 설득한 것에 가장 가까이 유사한 것은 트뤼가이오스가 헤르메스에게 고기를 선물하면서, 해와 달이 그리스의 신들에 대항하는 음모를 확실하게 말하여("평화" 192, 406-13) 헤르메스를 설득하는 것이다. 결정적이라는 측면에서 '새들'은 어쩐지 인간들보다는 신들을 더 닮아 있다.
그의 의도를 새들에게 설명하면서 페이세타이로스는 그가 테레우스에게 설명했을 때와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풀어 간다. 테레우스에게 설명할 때, 그는 단지 만일새들이 천상과 지상 사이의 지역을 차지하고 요새화한다면, 그들이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신들을 파멸시킬 수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는 제안한 '새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증명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테레우스는 그런 증명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페이세타이로스의 제안은 분명하게 정당한 것이었다(316). '새들'의 경우에서는 페이세타이로스가 새들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성을 느낀 듯하다. 아마 '새들'이 테레우스보다 더 경건하고 더 정의로운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확실하게 테레우스보다 지능이 덜하다. 페이세타이로스가 '새들'에게 말한 것에 따른다면 그들은 전에 제우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들의 왕이었는데, 그들이 대지의 신Earth이나 그냥 대지보다 더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천상과 지상을 나누는 벌어진 공간이며 그 가운데를 새들이 날아다니는 카오스chaos가 하늘과 땅보다 오래되었다는 단순한 사실이 새들이 하늘과 땅보다 오래 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새들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그들도 모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어리석고 안이하며 아이소포스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은 탓이다. 그들이 가장 오래된 존재이기 때문에 왕권은 마땅히 그들에 속한다. 옛날에는 신들이 아닌 새들이 사람들을 다스렸다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 제일 먼저 선두에 있는 세 나라- 페르시아, 그리스, 이집트(또 페니키아)<주5>- 각각은 왕들이 지배하기 전에 새가 지배하였다. 페르시아의 원래 지배자는 수탉이었는데 여전히 페르시아의 새라고 부른다. 에우엘피데스가 관찰하기에는 수탉은 페르시아의 왕(뛰어난 과시자)처럼 거들먹거리고; 따라서 페이세타이로스가 관찰하고 에우엘피데스가 그 자신의 경험으로 확인한 것처럼 여전히 수탉이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지배를 행사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사람들이 그리스의 개개의 도시들을 왕으로서 지배했을 때조차 새는 그들의 왕홀에 올라 앉아 왕들이 받는 선물을 공유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세상을 다스리는 제우스는 그의 머리 위에 독수리를 쓰고 있고, 한편 아테나는 부엉이를, 아폴론은 매를 데리고있으며; 이 새들은 신들보다 앞서 희생 제물의 몫을 받는다. 왕권이 새들로부터 사람들을 통해 신들에게 옮겨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도 이야기가 나온 모든 것으로부터 옛날에는 새들이 전부 웅장하고 신성한 것으로 지켜졌는데, 한편으로 이제는 그들이 노예로 또한 바보로 취급된다. 어떤 보호구역도 그들을 잡아 사람들에게, 특히 식충이들에게 먹을거리로 파는 새잡이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새들'은 페이세타이로스가 생각하는 그들의 예전의 위대함과 그로부터 비하에 대하여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들은 그들이 비하된 것이 조상들의 비겁함이라고 추적해 간다. 그들의 조상들이 신들의 술수에 굴복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이 원래 웅장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 인간에게 감사하며, 그들은 그를그들의 젊음과 그들 자신의 구원자로서 신뢰를 보내고, 그래서 그들의 왕권을 회복하기 전인데도 그것을 넘긴다. 그들은 어떻게 그들의 잃어버린 왕권을 회복할 수있는지를 배우고 싶어 한다. 페이세타이로스에 따르면, 그들은 반드시 하나의 도시를 이루어야 하고, 그런 다음 천상과 지상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의 둘레에 벽돌 벽을 둘러야 하며, 그런 다음 제우스로부터 그가 탈취해 갔던 지배권을 되찾아야 한다. 만일 제우스가 순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성전을 선포해야 하고, 새들의 영역을 통과하는 신들의 통로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제우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말고, 그들은 인간들에게 우선적으로 그들을 위한 희생 제물을 바치고, 신들에게는 그 다음에 바치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제안에는 페이세타이로스가 테레우스에게 제안했었던 것에서 빠진 것이 있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새들'에게 그들이 신들을 굶게 해야 한다는 것은 제안하지 않는다. 왜 그가 '새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전적으로 중단하도록 지시하라는 조언을 하지 않는가는 아주 쉽게 알 수 있는데;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바꾸는 것은 너무 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진실이라는 것은 최소한으로 새들의 진실이라는 것과 비슷하다. 혹 테레우스가 신들을 싫어하는 그 자신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면, 이것이 그가 왜 '새들'에게는 테레우스에게 한 것과 달리 말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제는 훨씬 화기애애한 태도로 계속해 가면서, 페이세타이로스는 더 근엄한 진행의 이점을 앞서 가지 않는데; 그들의 영역 주위에 벽돌로 벽을 둘러, 새들은 그들이 가하고 싶은 어떤 벌도 신들에게 가할 수 있게 되었다. 테레우스는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새들이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새들이 날아 가는 것을 보고서 새들을 신들로 여길 것인지 묻는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언제나 신들과 새들에 대하여 두 가지의 다른 존재로 말해 왔는데; 그는새들을 신들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의 제안에 따라, 향후에는 어떤 종류의 자연적인 산물이 가장 높은 존재가 되도록, 새들이 신들이 되지 않아도 새들이 신들을 좌지우지할 터이다. 그럼에도 테레우스는 새들이 그냥 정식으로 신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의 질문은 사람들이 올림푸스의 신들 같은 존재만 신으로 이해하는 것에 젖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새들을 신들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는데(603, 606);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무엇이 신이냐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테레우스의 암시적인 질문에 많은 신들이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또 날아 다닌다는 주석을 달아서 대답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새로운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만일 올림푸스의 신들이 이런 저런 방법으로 날개를 가지고 있다면- 예를 들어 제우스의 번갯불은 날개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신들이 새들의 모든 힘을 가진데다가 다른 힘도 가지고 있어, 새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고, 그리하여 오로지 올림푸스의 신들만을 계속 인정하고 경배할지도 모른다. 그 경우에 페이세타이로스는 새들의 힘이 더욱 세고, 신들의 힘은 모자란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해 새들이 사람들을 굶게 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는 새들이조상 때부터 가진 인종에 대한 적대감에 호소하는데; 그는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를 스파르타에게 팔아 넘길 그런 조짐을 들먹인다. 그리고 그는 다른 맥락에서 계속해 나간다. 새들은 신들도 고칠 수 없을 만큼의 해악을 인간에게 끼쳐서는 되지 않지만; 오직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들이 모든 좋은 것들을 가질 것이라는 것을알 경우에 사람들은 새들을 신들로, 생명으로 여길 것이므로; 신들은 반드시 인정스러워야 한다. 먼저 부wealth에 대해 생각해 보자. 부wealth는 올림포스 산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새들이 그것을 얻어 낼 수 있다. 현재로서는 사람들은 번영을 위해 새들과 상의하고; 그들은 오로지 새들이 절대로 속이지 않는다는 것과,그리고 그들이 새들을 신들이라 여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점괘의 전망은 너무나 호소력이 강해서, 에우엘피데스조차도 더 이상새들과 살고 싶지 않아 다시 사람들과 살고 싶다. 건강과 장수는 진짜로 올림푸스 위에만 있는데, 그러나 살림새가 좋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을 포함하고 있고; 또한새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명의 한 단락을 쉽게 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오래 산다. 인간인 에우엘피데스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제우스의 왕권 아래사는 것보다 새들의 왕권 아래서 사는 것이 훨 씬 더 낫다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이세타이로스는 마지막의 추천으로, 새 시대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값비싼 신전들을 짓도록, 아니면 델포이나 암몬으로 여행하도록, 혹은 값비싼 희생 제물을 가져오도록, 강요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탠다. 그래서 그는 비록 오로지새들에게 먼저 희생 제물을 바친 후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신들에게 희생물을 계속 가져와야 한다는 그의 잠정적인 양보를 철회한다. 이제 '새들'은 완전히 신들에 대항해서 페이세타이로스와 함께 기꺼이 나아가려고 한다: 그들이 힘을 줄 것이고, 그는 지혜를 줄 것이다. 행동으로 보였기 때문에 '새들'과 페이세타이로스, 이둘이 필요한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방패를 하늘에 던져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cf. "말벌들" 22-23). 새들의 왕권은 페이세타이로스의 왕권이 될 것이다. 새들의 신성이 또 페이세타이로스의 신성인지 꽤 궁금하지만, 그가 반드시 죽는 존재라는 사실이 더 이상 확실히 그의 신성에 대한 장애가 될수 없다.
페이세타이로스의 제안을 전적으로 수락한 다음에 의회는 끝이 났다. 에우엘피데스의 의견에 따라 이제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행동해야 한다. 그는 그 두 사람에게 자기의 둥지로 가자고 요청하며 그들의 이름을 묻는다. 에우엘피데스가 같은 지역deme 출신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처럼 같은 종족phyle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주6>. 들어가기 전에 페이세타이로스는 테레우스에게 그와 에우엘피데스가 날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새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묻는다. 테레우스는 어떤 뿌리를 먹고 나면 날개가 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비록 그가 그의 인간 손님에 대한 새들의 적의를 알고 있었지만, 그 뿌리에 대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었다. 코로스의 대장이 테레우스에게 그의 아내 꾀꼬리더러 밖에서 다른 '새들'과 놀라고 하라고 부탁한 사실로 보아, 그 둥지가 손님들로 인해 약간 넘쳐났을지 모른다. 그 두 아테네 사람도 그렇게 바라는데, 페이세타이로스는 새들의 호의를 간직하고 싶고, 에우엘피데스는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다. 둘 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였지만, 오직 에우엘피데스만 그녀를 안고 싶어 한다.
테레우스가 손님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고, 그리고 대부분의 '새들'이 꾀꼬리와 같이 즐기고, 그리고 벽을 쌓는 일이 시작하는 동안, 파라바시스가 진행된다. 파라바시스의 유일한 화두는 새들이다- 그들이 가장 오래된 신들이라는 것, 그리고 새들과 함께 혹은 새들처럼 산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인지이다. '새들'은 아테네 사람들에 대해 칭찬도 비난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가에 대해서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새들"의 파라바시스는 작가 자신을 그 주제로 독점한 "평화"의 파라바시스와는 정반대의 깃대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평화"와 "새들"만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 가운데 유일하게 제우스에 대항하는 행동들을 연출한다. 그러나 "평화"의 행동은 단지 '즉흥적인ad hoc' 반란인데 비해, "새들"의 행동은 세상을 다스리는 기구를 완전히 영구적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평화"에서 연출된 반란은 희극작가의 작품이다: "새들"에서 연출된 반란은 희극작가의 작품이 아닌데; 페이스테타이로스는 희극작가가 아니다. "구름"으로 알고 있듯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혁신적 발상은 전통적인 판테온을 넓히는 것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새들'의 (첫 번째) 파라바시스에서는 작가에 대해 전혀 말이 없기 때문에 이전에 논의해 왔던 연극들의 (첫 번째) 파라바시스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연극 행동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주7>. 파라바시스에서 새들은 그들의 이유로 인종들을 이기려 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코로스로서 그들이 전체 인종에까지는 못 미치고, 겨우 아테네 사람들에게만 미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구름'의 경우는 다르고; 그들의 파라바시스에서 그들은 오직 아테네 사람들에게만 말을 건네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특히 아테네 도시로부터 여신들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들은 '새들'보다 덜 의욕적이다. 똑똑하다는 점에서 '새들'을 '구름'에 비교할 수 없는데, 새들은 간교한 술수 없이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인종에게 엄숙한 의사를 전달하는데, 그들은 고작 신들에 대항하는 반란이 임박해 있고, 사람들도 거기에 합세한다는 것을 넌지시 언급할 뿐이다.
파라바시스에서 좁은 의미로 '새들'은 오르페우스를 닮은 페이세타이로스가 테레우스와 나눈 사적인 대화와는 다르게, '새들'에게는 그의 변론을 발전시켜서 했던 그 주제를 완전히 발전시킨다: 대지와 신들보다 더 오래 된 존재인 새들은 최고로 오래인 존재이다. 그들은 페이세타이로스가 말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말한다. 그들의 신학체계를 적절하게 음미하기 위하여, 그들과 페이세타이로스의 다른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구원자보다 덜 지능적이지만 그 구원자보다 더 나은 가수들이며; 그들의 기원에 대한 생각은 헤시오도스의 생각을 상기시킨다. 이제 그들은 전적으로 스스로를 신들이라 여기고; 그들은 그들을 죽지 않고 언제나 존재하고, 천상에 있는, 늙지 않는 그리고 불후하다고 묘사한다. 그들은 새들의 출생에 대해서, 그리고 신들, 강, 구천Erebos, 또 카오스chaos 등을 물려받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둠 속에 사는 하루살이 인간들에게 높이 떠 있는 것들에 대하여 가르친다. 그들의 교습은 프로디코스를 능가한다. 프로디코스는'구름'이 소크라테스와 함께 그들이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언급된 바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멜로스" 사람이었다<주8>. 스트렙시아데스와 같이, '새들'과 페이세타이로스는 신들의 존재는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왕권이나 힘을 잃을 것이라는 것만은 단언한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번개를 치는 존재로서의 제우스를 부정하는 것은 페이세타이로스에 의해 묵시적으로 거부된다(576. ff.).
'새들'에 따르면 애초에 네 가지 것들이 있었는데, 물론 네 가지의 구성인자라는 말은 아니고, 즉 카오스, 닠스, 에레보스, 또한 타르타로스이고; 땅과, 공기와, 그리고 하늘이며, 신들은 말할 것 없이, 강이 그 다음에 왔다. 잉태하지도 않고 검은 날개를 단 닠스가 에레보스의 무한한 자궁에다 알을 하나 낳았고; 그 알에서부터 바람처럼 재빠른 회오리를 닮은 황금의 날개를 가진 에로스가 나왔다. 광대한 타르타로스 속에 날개를 가진 카오스와 짝짓기를 해서 에로스가 새들을 생성하였고; 새들은 빛으로 나온- 에로스거나 어떤 것에 의해- 첫 번째 것들이다. 에로스가 모든 것을 다른 모든 것과 섞어 버렸을 때- 추측컨데 카오스, 닠스, 에레보스, 그리고 타르타로스-, 하늘과, 바다와, 땅과, 그리고 불멸의 신들이 있게 되었다. '새들'은 여기서 대기의 창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페이세타이로스에게 교습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땅이 없었더라도 새들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반면(469-74), 공기나 에테르에 앞서 새들이- 에테르같은 존재(689)-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를 아는 것은 힘들다. 기원에 대한 새들의 어두운 생각들 가운데 가장 어두운 점 하나는 틀림없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따른 탁월함, 그 자체의 기본 바탕인 공기의 신분이다<주9>. 에로스의 신분도 마찬가지로 어둡다: 새들과 그리고 여전히 모든 다른 신들을 앞서가는 에로스는 그 자신이 신인가? 마치 어떤 아테네 사람이 아테네 사람 아버지와 아테네 사람 어머니의 아들이기에 첫 번째 아테네 사람은 아테네 사람일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신은 반드시 신들의 자손이기에 그래서 첫 번째 신들의 창조자는 신이 아닌 것인가<주10>? 에로스에 관한 어두움은 새들에 관한 어두움에 연결되어 있다: 에로스에 의한 새들의 창조는 에로스가 모든 것을 다른 모든 것들과 섞는 것에 선행하는가, 즉 새들의 구성 인자들은(만일 그들의 경우에 그 재료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새들'의 생각에는 두 개의 촛점이 있는데 공기와 에로스이다. '새들'은 소크라테스적인 원칙인 공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에로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는 아니지만 매우 강조해서 말한다: 그들은 공기를(혹은 에테르를) 에로스로 바꾸어 놓는다(cf. 574-75). 그들의 생각으로 틀림없이 에로스가 태초의 밝고 빛나는 존재로 다른 모든 것의 시초이며, 그리고 새들은 에로스가 처음 낳은 것이고, 그래서 애인들과, 특히 동성애자들과 같이 사는 신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들은 가장 오래된 신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혜택을 주는 것들이다. 그들이 계절에 따라서 오고 가는 것으로 그들은 인간에게 계절을 가르켜 주고, 그래서 정의로운 사람들이나 불의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다른 여러 일들이 다른 계절에 따라 일어나도록 가르켜 준다. 그들이 하는 일은 예상할 수 없어서, 그렇게도 많은 징조들을 풀기 위해 새를 부를 만큼 사람들을 신탁처럼 이끌어 가는데; 그들은 아폴론이나 점치는 무우사에게 불필요하게 의지한다. 그들은 인간들을 위해 모든 종류의 행복을 가져다 주니 부유함은 최소의 것이라 말할 것 없고, 그들은 그들에게 그들을 신들로 모시라고 충고한다. 그들은 그들이 얼마나 인간들과 가까이 있는가를 제우스가 구름 위에 살면서 위엄을 떨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비교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제우스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숲이 우거진 무우사의 땅을 찾아가는 파라바시스의 스트로페는 '말벌들'이 좋아하는 옛 비극작가 프뤼니코스를 칭송하는 것으로 끝나고; 안티스트로페는 백조가 아폴론과 올림포스 전체와 그곳에 사는 신들을 칭송하는 것의 효과를 칭찬한다. '새들'은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구름'만큼 경건해 보인다<주11>.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우스가 꾀꼬리에게 아폴론과 신들의 합창들의 반향을 불러 올 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라고 부탁하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하는데(209-22); 파라바시스에는 더 이상 그런 반향에 대한 참고사항이 나오지 않는다.
'새들'은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약속보다 더한 것을 해 나간다. 에피레마에서 그들은 관객들 가운데 즐거운 생활을 바라는 사람은 그들과 함께 하자며 그 관객들이 그들을 신들로 여겨야만 한다는 조건도 달지 않고 촉구한다. 그들은 그들의 방법으로 에우엘피데스를 페이세타이로스와 구별하여 응대한다. 그들은 이런 이유를 든다: 무엇이든 "여기서"는 "법에 의하여" 격하되는 것이 '새들'에게는 "거기서" 더 좋게 하거나 고상하게 하는 것이며; '새들'의 생활이나, 아니면 '새들'과의 생활은 본성에 따른 생활이다. 무엇보다 아버지 폭행이 법에 의한 처벌 근거이지만, 그러나 '새들'과에서는 아니다. 그 밖에 '새들' 가운데서 시민과 외래인의 구별이 없고, 그리고 자유민과 노예 사이에도 없고; '새들'의 사회는 평등주의, 그리고 세계적인 사회이다. 안티에피레마에서 그들은 관객들에게 날개가 달린 것에서 오는 이점과 즐거움에 대해 칭송한다. 만일 지겨운 비극의 합창을 듣고 있다가 날개가 달렸다면,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지겹게 하지 않는 희극의 합창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간통은 날개가 없는 사람들보다 날개가 달린 사람에게 훨씬 쉽다. '새들'의 기원에 대한 신조는 마치 거부된 소크라테스식 신조가 극단적인 자제심과 극기심으로 이끌듯, '불의의 변론'이 추천을 시작해 나가는 대로 이끌어 간다. 소크라테스는 공기 혹은 에테르가 최상위임을 단언하고; '새들'은 모든 실질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에로스가 최상위라고 단언한다. 소크라테스는 높이 떠 있는 것들을 밝혀 보여야 하도록 되었고; 만일 그가 한 '구름'에 대한 예비수업과 야외교습을 깡그리 무시하여도, 그가 본성에 의한 아름다움이나 고상함을 위해 그 방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새들'은 에로스가 최상위라는 주장으로 자연스레 축제 분위기의 특출한 난공불락의 장소를 할당 받는다. 이 결과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가 그런 것보다 훨씬 제우스와 다른 신들에 대해 관대하다. 소크라테스의 신조는 철저히 반무우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에로스를 위해 아무 할 것이 없기 때문이고; 그가 에로스적이지 못한 것이 그의 신조가 에로스에 대해 말이 없다는 사실을 반영하거나 아니면 말해 준다. 그러나 '새들'의 신조는 에로스적이고, 그러므로 무우사적이다. 만일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적 신조와 '새들'의 신조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는 '새들'의 신조를 택했을 것이고, 그 신조는 파르메니데스와 엠페도클레스의 도움으로 쉽게 철학적인 용어들로써 언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 아리스토파네스가 단순히 철학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에로스와는 관계없이 단지 시詩와는 연결되어 있지 않는 철학에 대해서만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것은 또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이 적합한 것이라고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대화편들 가운데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주역으로, 혹은 그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작가와 대화하는 것이 소개되는 것은 유일하게도 에로스에게 바쳐진 것이고, 거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신조는 아리스토파네스나 다른 어떤 작가의 것보다 훨씬 깊숙히 에로스적으로 보여진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신조를 디오티마에게 돌리는 것은 일생의 초기에 그가 에로스에 대해 적절히 평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신조와 '새들'의 신조 사이의 반대점을 강조하여, 그 두 신조 사이의 중요한 일치점을 감추려 하거나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두 신조는 '법이 다스리는 지역nomos'의, 도시의, 혹은 정의의, 경계를 초월해 있는데; 그 두 신조는 아버지 폭행을 허락한다.
페이세타이로스와 에우엘피데스가 다시금 등장하는데; 그 사이에 그들의 날개가 자라났다. 에우엘피데스는 그 동무보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더 민감하다. 페이세타이로스가 보기에는 그 다음에 해야 할 두 가지 것들이 '새들'의 도시의 이름을 찾는 것과, 그리고 신들에게 희생물을 올리는 것이다. 에우엘피데스의 제안에 따라서, 페이세타이로스에게 '네펠로코큐기아(구름뻐꾸기마을)'라는 이름이 문득 떠오른다. 그 이름은 인간과 신성을 과시하는 것을 내비치는 의미인데; 페이세타이로스는 허풍쟁이이다. 새로운 도시에서는 새들이 오래된 신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명쾌하게 한 다음, 페이세타이로스는 에우엘피데스에게 벽을 쌓는 일에 새들을 도우고, 그리고 위에 있는 신들에게 전령 하나를, 그리고 아래 쪽에 있는 인간들에게 다른 전령을 보내라고 지시한다. 그런 다음 그는 새로운 신들을 위한 희생제로 접어든다. 에우엘피데스는 심하지는 않게 페이세타이로스를 욕하며 떠난 뒤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사라지는 것으로 처음으로 진실된 행동을 한다. 그는 조용한 도시에서 조용하게 살고자 바랬었는데; 가능한 한 '새들'처럼, 즉 파라바시스에서 '새들'이 관갣들에게 말을 건네어 촉구한 대로 그에 따라서 '새들'과 함께 살아 가는 것은 그에게 아주 알맞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의 어쩌지 못하는 동무가 가져다 놓은 새들 생활의 완전한 혁명이 그의 희망을 부셔 버렸다. 페이세타이로스의 거대한 전체 구도는 비록 그가 그것에 대항하는 일을 하기에 너무나 안이한 사람이지만, 그의 취향에 맞지가 않는다. 페이세타이로스가 그의 전체 구도를 테레우스에게 제시했을 때에는 에우엘피데스는 침묵으로 대하였고; 페이세타이로스가 '새들'에게 제시했을 때에는 에우엘피데스는 그것에 반대하지 않았는데, '새들'이 그것을 받아 들이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들'에게 페이세타이로스가 한 연설에다 갖다 붙인 그의 촌평들은 관객들을 재미있게는 했더라도 '새들'을 설득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에우엘피데스가 "새들"의 후반부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데모스테네스가 "기사들"의 후반부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중요성에 비해, 이 연극이 가진 의미의 중요성에 덜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 두 경우의 유사성에도 다른 점이 있다: 데모스테네스와 소시지장수가 정치적 사람들인 반면, 에우엘피데스는 정치적인 페이세타이로스와는 달리 비정치적인 사람이다.
새로운 신들에 대한 희생제는 약간의 어려움을 일으키는데(846,862), 왜냐하면 그 행동은 '새들'이 '새들'에게 희생물을 올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cf. 853-54). 아니면 새로운 신들을 올림포스의 신들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잠시 동안에 그런 어려움은 페이세타이로스가 인간인 사제를 불러들여 해결되는데, 그 사제는 올림포스의 새들이 네펠로코큐기아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릴 것을 기도한다. 그렇지만 페이세타이로스 눈에 사제가 하는 기원은 너무 광범위해서, 그 사제는 맹금류 같은 새들에게 특히 제물의 고기가 모자라게 주어졌을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그는 사제를 가 버리라고 말하고, 그 스스로 제물을 가져올 채비를 한다. 바로 이때 네펠로코큐기아를 위해 여러가지 종류의 시를 지어 왔던 한 불쌍한 시인이 떨면서 도착하여, 그것의 설립자에게 운문으로 부끄럼없이 기부를 구걸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사제에게서 벗겨내었던 약간의 따뜻한 옷을 준다. 그 시인은 새로운 도시에 대한 또 다른 시의 시작 부분을 읊으며 떠나간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시인의 방문이 그렇게 기쁘지 않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그의 주된 반응은 새로운 도시의 설립에 대한 뉴스가 그 시인에게까지 닿았던 빠른 속도에 대한 놀라움이다. 비록 이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는 여전히 무엇이 쉬운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간의 차이를 구별하는 감각은 보유하고 있었고; 이런 시인과의 처치에서 그는 누구라도 시인을 도와야 한다는 속담에 따라 행동한다. 그가 다시 희생제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또 다시 방해를 받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도시에 대한 바키스의 신탁을 가지고 온 점쟁이이다. 그는 신탁에 따라 페이세타이로스가 그에게 상당히 많은 선물을 주지 않을 경우, 구름 속에서 독수리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에게 점쟁이는 허풍쟁이이니 엉덩이를 맞아야 한다는 아폴론의 신탁을 암송하며 대답하고; 그 방문자는 단지 도망칠 뿐인데, 도망가면서도 볼기를 얻어 맞는다. 페이세타이로스가 희생제를 지내러 가야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세 번째 방문자로- 중간에 있는 방문자인데, 모두 다섯의 방문자가 있으며 사제는 방문자가 아니다-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에게 붙잡힌다: 그는 메톤으로 유명한 기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그는 공중을 콤파스로 재어 가지고 새로운 도시의 평면도를 그려 보기 위해 왔다. 그에 의하면, 공중은 전체가 난로와 대단히 비슷하다. 그는 새로운 도시의 시장터가 별과 같기를 바란다. 페이세타이로스가 이런 이야기를 듣자, 그는 메톤을 마치 스트렙시아데스가 한 학생으로부터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콤파스를 가지고서 그의 무리들을 위해 저녁식사를 마련하였는가를 들었을 때 그를 존경하였던 것과("구름" 175-80, 95-96) 거의 똑같은 태도로 존경한다. 메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다른 어떤 배역보다 소크라테스(그리고 그의 학생)에 가깝게 가 있다. 그 앞에 거쳐 간 시인과 점쟁이를 비교해 보면, 절대로 그는 어떤 신성한 것들에 대하여 무우사조차도 언급하지 않으며; 그는 어떤 선물도 요구하지 않는다. 페이세타이로스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러나 스트렙시아데스의 경우와는 현저하게 다르게 그를 쓸 필요가 없는데; 시민의 한 부분에 대한 반대는 모든 허풍쟁이들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해 온 그에게는 너무 강한 것일 것이다. 페이세타이로스가 시인과 점쟁이를 다룰 때에는 그러한 반대를 참고하지 않았다. 메톤은 그에게 가해지는 위협의 소리에 떠나고 싶어하는데; 그전에 페이세타이로스가 그를 때린다. 그가 메톤을 매우 사랑했건 존경했건 간에 그는 도시의 설립자이고; 도시는 오묘한 것들이- 시인과 점쟁이가 내놓은 오묘한 것들과는 다르게, 최소한 메톤이 제안해야 하던 종류의 오묘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주12>. "기사들"에서 보아 온 것들, 이름하여, 본성에 따르는 지배자는 교육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에우엘피데스였다면 메톤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어쩔 수 없다. 아낙사고라스와의 연관에 대한 생각으로, 페리클레스에게 일어났던 일은 페이세타이로스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 페이세타이로스의 암묵적인 "소크라테스" 거부에 깔린 원칙이 '새들'의 암묵적인 "소크라테스" 거부에 깔린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명백하다: '새들'은 무엇이 도시에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메톤에 이어 나타나는 방문자들 둘은 메톤이 방문자들의 장면에서 그 복판에 놓이게 하기 위해 필요한데; 물론 이것이 그들이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 둘 가운데 첫 번째는 아테네가 보낸 감독인데, 아테네는 네펠로코큐기아를 아테네에 의존하는 다른 어떤 도시들과 같이 취급하려 한다. 두 번째는 법령을 파는 장사꾼인데,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새로운 법들을- 민주정은 법law과 법령decree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명확한 구별을 해 두지 않는다- 팔고 싶어 하고; 그 법들은 물론 아테네 법이다. 그 두 사람은 모두 아테네의 제국주의를 대표하는데, 몸을 가지고 나타난 훨씬 더 높은 것에 의해 또 총체적인 제국주의에 의해 자연스레 쫓겨나고, 그리고 그는 그의 엉덩이를 때린다. 그가 아테네 도시의 통치권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었던 것은 오래된 일이다.
다섯 방문자 장면은 바로 두 번째 파라바시스로 이어진다. "평화"에서는 첫 번째 파라바시스가 전적으로 작가에게 주어졌고, 두 번째는 농부들에게 전적으로 주어졌었다. "새들"에서 첫 번째 파라바시스가 전적으로 '새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한번쯤 "새들 지상주의"라고 부를 수 있었는데, 한편으로 아테네에, 다른 한편으로 작가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파라바시스의 필요성은 명백해 보인다. 첫 번째 파라바시스가 끝난 다음, 페이세타이로스는 다음으로 해야 할 일 두 가지를 말했던 적이 있었는데, 새로운 도시의 이름을 짓는 것과 신들에 희생물들을 올리는 것이었다. 비록 좋은 도시란 아주 우수하고, 본성을 따르는 도시지만, 관습적인 것들도 필요하다. 그 도시에 이름은 지어 주었지만, 그러나 희생물은 아직 올리지 못했고; 기대했던 희생제 장면은 다섯 방문자의 장면으로 대치되었다. 메톤의 일이 가운데에 놓여서 메톤을 축출하는 것이 희생제의 자리를 차지했다거나, 혹은 그것이 희생제와 서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희생제는 그냥 포기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의 파라바시스 동안 "실내"에서 올려졌다. "구름"에서 두 번째 파라바시스로 페이딥피데스에 대한 실내교습을 가린 것이 기억난다.
두 번째 파라바시스의 스트로페에서 '새들'은 그들을 제우스의 후계자들로 소개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지배하며, 그리고 모든 인간들이 그들에게 제물과 기도를 드린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만을 볼 뿐, 모든 것은 보지 못한다고 인정한다: 그들은 희극작가의 쇠똥구리만큼 높이 오르지 못한다. 이와 비슷하게 그들이 인간들에게 갖게 해 주었다고 주장하는 혜택은 그들이 곤충들과 그 밖의 나쁜 병원체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첫 번째 파라바시스에서 제기했던 주장들을 제기하지 못하는데; 어쨌든 그들은 그들의 한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피레마에서 아테네 사람들이 멜로스의 무신론자 디아고라스와 참주들을 처벌한 것을 본보기로, 그들은 새잡이들과 그와 유사한 것들에게는 중대한 벌칙이 있다고 알리는데; 그들이 아테네 사람들보다 더 가혹한 이유가 아마 인간들에게 참주나 무신론자가 위험한 것보다 새들에게는 새잡이들이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메톤의 장면에서 부분적으로 알고 있듯이, 불경함과 반역은 오래된 도시에서도 그렇지만 새로운 도시에서도 범죄이다. 안티스트로페에서 '새들'은 그들이 어떻게 다른 계절들을 지내는지 보여 주며, 그들의 행복을 칭송하고; '새들'이 카리스여신들과 님프들에게 거부감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안티에피레마에서는 "구름"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를 상기시키는데, 그들은 더 이상 단순히 '새들'로서가 아니라, "새들"의 코로스로서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두 스트로페와 에피레마가 서로가 어울려 한데 뭉쳐 전체를 형성하면서 물론 그것이 에피레마의 중심이 된다. 그 전체는 첫 번째 파라바시스 전체로서, 연극의 행동들의 한 부분 이상이다. 안티에피레마에서 '새들'은 심사원들에게 정당하게 혹은 부당하게 그들이 코로스에게 상을 줄 경우 그들 각자가 받을 혜택과, 그렇지 못할 경우 그들이 받을 벌칙에 대해서 말한다.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아테네와 특히 작가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안티에피레마가 특히 "새들"의 공로에 대하여 한마디도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어쩐지 그래서 실망스럽게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새들"의 두 파라바시스에서 자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런 침묵은 도시가 경배하는 모든 신들에 대한 혹은 모든 오래된 신들에 대한 성공적인 반란이거나, 아니면 그와 동시에 아테네 도시와 신들에게서 등을 돌린 한 아테네 사람의 성공에 대해 연극이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면 가장 합당한 것이다. 작가의 이 침묵은 에우엘피데스의 퇴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새들'과 살라거나, 아니면 '새들'처럼 살라고 촉구하는 것을 내비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페이세타이로스가 실내에서 희생제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난 뒤 다시 등장한다. 한 전령이 도착하자, 그는 벽을 쌓는 일의 진도에 대해서 소식을 듣고 있지 않았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는 페이세타이로스를 지배자인 것처럼 인사 올린다: '새들'이 새가 아닌 지배자의 처분에 맡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왜 그들이 그들의 힘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전령이 지배자에게 벽이- 아테네를 보호하는 성벽은 말할 것 없고, 바빌론의 성벽보다 월등한 가장 아름답고 장대한 작품이- '새들'에 의해, 오로지 '새들'만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알린다: 에우엘피데스는 '새들'에게 페이세타이로스의 지시를 전해 준 다음에 집으로 돌아갔다고 생각된다(cf. 1160-61과 841-42). 비록 페이세타이로스가 '새들'에게 전체 공중을 둘러싸는 벽을 쌓자고 제안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그 제안이 실행된 데 압도되었다: "진짜로 이런 것들이 내게는 거짓말과 같아 보인다." 코러스가 언급하는 것처럼 페이세타이로스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신경 거슬리게 하던 것을 실행하는 재빠름이 계획보다 덜하지 않다고 믿게 된다. 확실히 '새들'의 놀라운 위업이 그 지배권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는데, 그렇지만 아무리 벽을 건설하는 사람들이 능력 있고 빠르다 해도, 그 벽이 아무리 높고 넓다 해도, 그것들이 정치적 지배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새들'은 페이세타이로스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임금도 없이 일한다. '새들'이 벽을 빨리 쌓는 것은 다음의 장면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또 다른 전령이 도착하면서 열리고, 그는 페이세타이로스를 지배자로서 인사 올리는 것에 매우 흥분해 있다. 그는 제우스와 관련이 있는 신들 중의 하나가 보초병을 피해 새로운 도시, 즉 공중으로 들어왔다고 알려 준다. 이 신에 관하여 알려진 유일한 것은 그가 날개를 달고 있다는 것인데; 맹금들이 그를 찾아서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받았었다. 페이세타이로스는 무장하라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그 자신도 무장한다. 여기가 '새들' 스스로가 처리할 수 없던 상황인데; '새들'은 그들의 인간 지배자와는 달리 신들에 대항하는 데 무력하다. 코러스가 언급하듯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전쟁이 '새들'과 신들 간에 시작되고; 하늘과 땅을 나누는 공중에 다시 어떤 신이 침입하는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이때 이미 공중에 들어온 신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리스이다. 그녀의 모습이나 그녀의 이름도 그녀의 신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녀는 전혀 그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새들'이 벽에 관한 경고를 전달하러 천상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날개를 단 페이세타이로스는 날개를 단 여신을 체포하라고 지시한다. '새들'은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혹시 그들은 여신이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에 혼란을 일으킨 것인가? 페이세타이로스는 '새들'을 일사분란하게 다루기 위하여 이리스와 말로 하는 시합을 벌여야 하게 된다(cf.1211). 이리스가 새로운 도시로 들어왔을 때, 어떤 벽이나 혹은 경비를 서는 어떤 새들로부터 제지를 받지 않았었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즉 페이세타이로스는 '새들'을 믿을 수가 없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이리스가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말하면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노력하고; 그러나 이리스는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처형될 수 없다는 대답으로 쉽사리 그를 이긴다. 그렇지만 페이세타이로스는 어떤 불가능성에도 좌절하지 않고, 이리스의 나무랄 데 없는 삼단논법에 따른 결론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가 그 자신을 발견한 그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나 혹은 디아고라스도 그에게는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만일 한 사람이 신과 마주쳤는데도, 그 신을 그리고 신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단지 신들은 존재하지만, 그러나 힘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스트렙시아데스의 전제에 따르는 것 뿐이다. 페이세타이로스는 당분간 신들의 불멸성으로부터 이리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옮겨 가면서 논점을 지켜 간다: 우리-'새들'이 지배자이고, 너희-신들은 죽임을 당하든 말든 상관없이 이제 우리-'새들'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비록 신들이 죽임을 당할 수 없다 하여도 그들은 심하게 다칠 수 있는데, 모두들 보았듯이 불가능의 가능성을 수긍하는 것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배역들은 쉽고 빠르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과 어려움과, 그리고 오랜 시간 끝에서야 이룰 수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부정하도록 강요받지는 않는다. 사실 신들은 제물을 필요로 한다: 이리스는 하늘에 있는 신들에게,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하려고, 신들에게서 사람들에게로 가는 도중에 공중으로 들어왔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이제 올림포스의 신들이 이제 신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화제를 완전히 명쾌하게 만드는데; 신이다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위한 신이란 뜻이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이제 '새들'이 사람들을 위한 신들이다. 마치 신들 없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없듯이, 사람들 없이는 신들이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제우스다운 척하던 클레온이 절대적으로 데모스demos에 의존한다는 사실이<주13> 제우스 그 자신의 지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불멸하는 존재라는 것이 신들의 요체라는 관점을 사람들을 위한 신들이라는 것이 신들의 요체라는 관점으로 침묵 속에 바꾸어 놓는다. 그의 침묵을 이해하는 것은 비록 '새들'이 여전히 새잡이들을 두려워하지만, '새들'이 신으로서 불멸의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을(688) 떠올리게 할 뿐이다. '새들'은 그들 종족들의 불멸을 각각의 새들의 불멸로 오해했을런지 모르고; 비슷하게 이리스(무지개)종의 불멸성을 페이세타이로스가 마주친 이리스란 개인의 불멸성으로 추론하는 오해일지도 모른다. 이리스는 페이세타이로스의 어리석음을 아주 경멸할 뿐이다: 페이세타이로스와 그의 종족들은 제우스의 벼락을 사용하여 디케Dike가 파멸시킬 것이다. 이 협공으로 '새들'이 실수로 잠시 동안 잃었던 페에세타이로스의 지배력을 완전히 회복시켜 놓는다. 그는 물론 잠시라도 제우스의 존재에 대해 의심함이 없지만 제우스의 힘으로 이리스가 위협하는 것에는 겁 먹지 않는데; 결국 야만인 노예가 아닌 그는 어찌 되었든 제우스가 벼락이나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그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그를 성가시게 할 수 있고, 그러나 그 역시 하늘에 갈 수 있는 제대로 된 새를 보내 그곳에서 모든 종류의 파괴를 일으켜 제우스를 성가시게 할 수 있다. 비록 무엇이 가능하고, 또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 너무 지나치게 까다로울 것은 없지만, 쇠똥구리가 그랬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페이세타이로스의 새들이 하늘에까지 닿을 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에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이리스 그녀 자신에 대해 말하면, 페이세타이로스의 늙은 나이(그리고 그의 동성애적인 취향)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심한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 위협을 받는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제우스가 그의 오만함hybris를 멈추게 할 것이라고 위협하고는 그에게서 떠난다. '새들'은 그들 지배자와 이리스 사이의 말다툼의 결과에 만족한다. 신들이 공중에 들어올 수 없다는 금지가 신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신들에게 보냈던 전령이 하늘에 들어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금지를 공포하고, 아울러 사람들이 신들에게 제물을 올리는 것을 금지한다고 공포한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인정하여, 신들에게 대한 반역이 페이세타이로스와 '새들'의 협조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오직 한 마리의 새로서 '새들'을 위해 변론하는 것만으로도 페이세타이로스는 소크라테스가 극복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만일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간의 구별이 그 자체에서 상당한 점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지 않았다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그리 사소하다고 안 할 것이다: 스트렙시아데스가 소크라테스로 되는 것은 가능할 수 없을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리스와 장면 이후에도 페이세타이로스가 여전히 그 자신을 필멸의 인간으로 간주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는 인간들에게 보냈던 전령이 돌아왔는지 궁금해진다. 그가 처음으로 그에 대해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전령이 돌아온다: 모든 것들이 그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cf. 1119-21과 1269 ff.). 전령은 무엇보다 페이세타이로스가 복이 많고 지혜롭다면서 칭송하고, 그리고 그는 그에게 황금의 왕관을 선물하는데, 그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지혜롭다는 영예를 안길 것이다. 페이세타이로스는 그 왕관을 받고- 그는 그의 지혜로움으로 그것을 받을 만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지혜가 한 일 중에 어떤 것이 혹은 어떤 면이 인간들로 하여금 그에게 특이한 명예를 안기게 하는지 알고 싶다. 전령은 그가 공중의 도시를 세워서 전적으로 새로운 그리고 가장 만족스러운 방향의 인간 생활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그런 대단한 명예를 얻는 것이라 가르쳐 준다.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도시 스파르타에 대한 사랑에 미친듯이 빠져 있었는데- 에우리피데스는 아니었고(125-26, 813-16),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그의 극단적인 자제력과 극기심으로 인해 라코니아화 된 것으로 보인다(1282)-, 이제는 그들 모두가 새들과 같은 생활에 대한 사랑에 미친듯이 빠져 있다. 그들은 법을 사랑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에 대한 사랑에 미친듯이 빠져 있었는데; 그들이 법에 비해 본성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이해하자, 그들은 스파르타에 대한 사랑을 멈추고, 새들의 생활을 사랑하는 것에 빠져들었다. 전령이 이러한 생각을 제시하자 그는 그것을 철회시키는데; 왜냐하면 그가- 한 마리의 새거나 혹은 '새들' 도시의 한 시민으로- 새들의 생활을 모방한다고 해석하는 그것이 사실은 보통 아테네 사람들의 생활이기 때문이고; 그는 한 마리의 초애국적 새이다. 여전히 그는 과장하고; 그가 완벽하게 납득시킬 수 있는 예를 들어 보여 주듯이 조류 애호가는 아테네에 늘려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날개와 휘어진 발톱을 얻기 바라면서, 이제 새들에게 오려고 열망한다. 전령은 페이세타이로스에게 그들에게는 날개만 주라고 침묵으로 경고를 하는데, 만일 그들에게 새들의 무기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그들이 새들로서만 남아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가? 물론 페이세타이로스도 조용하게 동의한다. 그는 이주자들을 위한 성대한 환영회를 준비하고, 그의 하인들에게 날개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져오라고 주문한다. 그가 조바심을 내며 날개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새들'은 그들의 도시에 사랑이 퍼져 나가는 것과, 도시의 명성이 자자해지는 것, 그리고 도시가 단기간에 성장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터뜨린다. 그들은 인간들이 보여 주는 새로운 도시, 즉 그 속에서는 아름답게 보이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도시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에 놀라지 않는데; 신들이 '새들'의 도시에서 사는 것으로 언급한 것은 모두다 "의인화"한 것이다(cf. 1320-21과 "평화" 456). 그들에게 조용함Hesychia(Rest)은 조금도 없다. '새들'은 휴식을 칭송하는 것으로 페이세타이로스가 휴식이 없다는 것을 가장 날카롭게 대비시킨다. 전령이 충분히 명백하게 보고하였듯이, 실질적으로 세상이 '새들'의 도시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반역심에서라기보다는 조류 지상주의에서 나온 페이세타이로스보다는 에우엘피데스의 정서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새들'은 페이세타이로스에 대하여 저항할 내부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들은 그가 참지 못하고 서두르는 것에 전염되어 버리지만; 그들이 정주하는 것이 그들에게서 그들의 변덕스러움을 빼앗아 가지는 못했다.
이주 예상자들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에 속하기 때문에, '새들'이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지적하는 대로 그들에게는 서로가 다른 종류의 날개들을 주어야 한다. 그들에 따르면 세 종류의 서로 다른 날개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우사의 노래하는 새들, 예언하는 새들, 또는 바다 새들의 날개들이다. '새들'이 잘 예언한 만큼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이주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첫 번째는 아버지를 죽이려 작정한 젊은 사람이다. 그는 독수리가 되고 싶은데, 바로 예언하는 새이다. 그는 '새들'의 법칙에 따라서 사는 것이나, '새들'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한 관심이 날개를 다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 더하다고 보여진다.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에게 "'새들'의 많은 법들 중에 어떠한 법이냐"고 묻는다. 스트렙시아데스보다도 더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 젊은이는(cf. "구름" 1430-31) '새들'의 모든 법들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아버지를 쪼아 죽게 하는 것이 고상한 일이 되는 법을 좋아한다. 제우스에 걸고 맹세하고 '새'처럼 말하며, 페이세타이로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버지 폭행이 '새들'에게는 고상한 일로 여겨진다고 대답한다. 그 젊은이는 아버지 살해와 아버지 폭행의 훌륭한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데; 그에게는 아버지 폭행은 별로 소용이 없고; 그의 아버지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 그는 분명히 '새들'과 같이 살거나, 혹은 한 마리 '새'로 살기는 바라지 않고, 그는 새들과 인간들의 이점을 합쳐 두 배의 효과를 얻으려는 불가능한 것을 바란다. 왜냐하면 페이세타이로스도 그에게 말하듯, "우리 '새들'"은 예전부터의 법이 있는데, 그 법에 따르면 어린 황새들은- 황새들은 네펠로코큐기아 성벽의 경비병들이다-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을 양육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반드시 그들의 늙은 아버지를 부양하여야 한다. 이 법에 의해 그 부친살해 의도자는 그가 순간적으로 알아차리듯이 그가 떠나온 곳보다 '새들'과 있는 것이 더욱 나쁠 것이었다. 그래서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에게 날개와, 갈퀴와, 볏을 하나씩 주는데; 그가 때리기나 싸우기를 그렇게나 갈망하기 때문이고, 그는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가야 한다. 디오뉘소스에 걸고 맹세하며, 그 젊은이는 이를 받아들이고 떠난다. 그것이 무엇이든 '새들'이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법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페이세타이로스가 '새들'에게 말하는 대로 '새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니고, 마치 사람들이 제우스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를 족쇄로 묶은 것은 따라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새로운 법으로, 예전의 법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근친상간은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폭행이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다. 페이세타이로스는 도시의, 그리고 신들과 사람들이 어우러진 이 특별한 도시의 설립자로서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면 페이세타이로스가 '새'로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올림포스에 사는 존재들과 아주 다른 존재들이 신들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만일에 한 존재가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도 그것이 신이 될 수는 없고; 특히 사람들에게 그들의 어버지를 때리는 것이나 유사한 행동이 허용되서는 안 된다: 신이란 반드시 도시의 기본적인 요구와 부합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가 천문학자 메톤을 쫓아내고, 아버지 폭행을 금지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고; 천문학과 아버지 폭행 간의 관계는 "구름"에서 충분히 명백해졌다. 그는 메톤에게보다 아버지 살해 의도자에게 더 친절하다. 처음부터 바로 그 젊은이는 그의 사악한 의도를 포기하도록 쉽게 이끌려 가는 반면, 메톤으로 하여금 천문학자이기를 그만두게 이끌어 갈 수가 없다. 그 밖에 그 젊은이는 아버지 폭행이나 살해가 금지되어 있는 옛날 도시에서 그런 종류의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가 '새들'에게로 온 것은 합법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가 합법성에 신경 쓰는 것과, 그러므로 그가 기본적으로 정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그는 페이세타이로스를 만든 아리스토파네스를 키워 낸 디오뉘소스에 걸고서 맹세한다. "말벌들"에서 나온 유익한 아버지 폭행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의의 변론'이 아버지 폭행자이긴 하지만("구름" 904-6,911), 천문학자는 아니다.
두 번째 이주 예정자는 시인인 키네시아스이다. 그는 그 자신을 에로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읊조리는 노래로 나타낸다(schol. on 1372). 그는 꾀꼬리가 되고 싶다. 시적으로라기보다는 진실되게 말해서, 그는 구름으로부터 새로운 서정시의 노래를 얻을 수 있도록 날개를 달고 싶어 한다. 트뤼가이오스가 하늘에서 내려오며 보았던 디튀람보스 시인들의 영혼은 서정시의 노래들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러나 확실히 구름에서는 아니었다("평화" 827-31). 그렇지만 키네시아스가 보기에 디튀람보스 시인들이 전적으로 구름에 의존하여 탈것으로 삼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시가 높이 떠 있을 뿐만 아니라, 구름도 역시 끼어 있기 때문이다. "구름"(350)에서 알게 된 관점으로 보면, 희극과는 다르게 디튀람보스 시들은 반짝이긴 하지만 어둡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키네시아스는 몹시도 불경스럽다는 나쁜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주14>.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에게 날개를 주기는 커녕 날개로 엉덩이를 때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새들'과 같이 있으면서 새들에게 합창곡을 가르치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그는 아버지 살해자처럼 '새들'과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데; 그는 오로지 새들로부터 어떤 좋은 점만 얻어려 한다. 그래서 그는 한번 골리려는 심보로 페이세타이로스의 제의를 거절한다. 그 제안은 의심할 것도 없이 우스꽝스럽기는 하나,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우스꽝스러운 것과 진지한 것 사이에 금을 긋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트뤼가이오스가 어떠한 경우에("평화" 173) 그가 농담하고 있다고 하는 것과는 달리, 확실히 페이세타이로스는 아무 말이 없다.
세 번째인 마지막 방문자는 밀고자이다. 그의 성격은 '새들'이 날개를 달고 있다는 것만큼 '새들'이 무일푼이라는 것에 그가 충격 받는 사실로 충분하게 드러난다. 애초부터 그는 날개를 달기 위해 왔다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다는 것에 대해 조그만큼의 의심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바다 새의 날개가 필요한데, 그는 섬사람들의 정보원이기 때문이다.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의 생활과 직업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생계를 위하여 정당한 일로 벌이를 하도록 그를 바꾸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조언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는 날개를 달라는 요구를 되풀이한다. 그리하여 페이세타이로스는 변론하는 것으로 날개를 준다: 모든 사람들은 변론에 의하여 날개를 달게 되고, 띄워 올려지게 되는데; 진실된 변론을 가지고- 왜냐하면 그 중에는 불의스러운 것도 있어서, 밀고자보다 그것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돌아서게 된다. 밀고자는 바꾸기를 거부한다. 이 주제는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마치 아테네에 있는 것처럼 너무나 철저히 아테네적이다. 구제할 수 없는 악당이라서 변론으로 날개를 달아줄 수가 없어, 정의를 대신하여 정의롭게 행동하는 설립자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에게 회초리로 된 날개를 달아 쫓아 버린다. 그의 영역에는 아버지 폭행이나, 혹은 다른 종류의 불의스러운 것이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전령의 유쾌한, 아니 과장된 알림과는 딴판으로 이주 예정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아 온 대로 어느 단 한 사람도(에우엘피데스는 예외이다)'새들'과 함께 살거나, 혹은 '새'처럼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타났던 세 사람은 단지 인간의 능력들에 새들의 능력을 합치기 위해 날개를 달기를 바랄 뿐이다. 그 무리들 가운데 복판에 있는 것은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린 시인 키네시이스이고; 이것은 마치 제례를 뒤로 미루게 하던 다섯 사람 중에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린 천문학자 메톤이 복판에 자리했던 것과 같다. 시와 천문학은 모두 높이 떠 있는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 그리고 과장된 것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들은 또한 서로 반대되기도 하는데, 뛰어난 설립자가 한편으로는 시인을, 다른 한편으로 천문학자를 서로 다르게 응대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시인은 다섯 사람들 가운데서 페이세타이로스로부터 선물을 받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설립자는 메톤은 그냥 쫓아 버렸고, 그러나 키네시아스는 붙들어 두려 노력하였지만 그의 시는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시인들에 대하여 역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931-32); 메톤은 힘이나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오로지 시인 자신과, 그의 불의스러운 형제 페르세스 사이의 불화에 관한 것이라고 읽어야만 하는 헤시오도스의 새들에 대한 이야기를- 매와 꾀꼬리, 즉 왕과 가수- 옮겨 교훈으로 다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왕은 가수를 쉽사리 죽일 수 있지만, 가수가 널리 알린 진실을 죽일 수는 없다. 페이세타이로스는 페르세스의 매보다 현명하다. 이것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가 올바른 쪽에 서 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그는 인간의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날개를 달고자 갈망하는 방문자 셋에 대항하여 올바름을 막아내는데; 날개는 그들에게 하데스의 투구가 수행할 것이라 생각되는 역활을 수행하는 의미를 가진다(cf. 793-97). 날개는 그가 그들에게 해주는 변론인데; 그들에게 초인간적인 능력을 주는 대신 그는 그들에게 정의로워지라는 충고를 해준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간들 가운데 유일하게 날개를 달고 있는 사람이 페이세타이로스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그 혼자만 처벌당하지 않으면서 불의스런 행동을 할 능력을 스스로 보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들에게서(옛날 신들에게서) 그들의 힘을 빼앗으려 시도하는 그 사람의 생각에 달려 있다. 결국 그들 신들에 대한 숭배가 정의에 필수불가결이라 말하는 것은 못 받아들일 일만도 아니다. 올바름에 대한 최고의 보장자는 단순히 올바름에 매여 있을 수 없으나, 손 쓸 필요가 없도록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못 받아들일 일만도 아니다<주15>.
페이세타이로스가 무대를 떠난 뒤에 '새들'의 코러스는 정보원이면서 비겁자인 클레오뉘모스, 그리고 오레스테스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경이를 나타낸다. 그 의사 표출은 연극의 행동이나 혹은 합창단으로서의 코로스의 관심과는 관계가 없다. 이것은 처음 겪어 보는 종류의 의사 표출이다. 이제까지 이와 약간의 유사성을 가진 경우는 유일하게 "아카르나이 사람들"(1150-73)에서 있었는데, 그러나 거기서 코로스가 그들에게 저녁도 사지 않고 떠났던 안티마코스를 비난하고 욕한 것은 분명히 연극의 사건에 관계가 있다: 자기의 즐거움 밖에는 어떤 것도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디카이오폴리스와 관계가 있다. '새들'은 오직 그들만이 날아다니며 볼 수 있었던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 노래를 부르고; 그리고 그들이 클레오뉘모스를 정보원이라 비난하는 것은 그 앞의 장면에서 페이세타이로스가 밀고자를 정의롭게 처리하였던 것과 어렴풋한 관계가 있다. 그렇지만 한번 언급한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면 자세하게 알 수가 있듯이, '새들'의 전체 노래에는 페이세타이로스가 연속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이주자 셋을 다루었던 그 앞의 장면 셋과 깊은 관계가 있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디카이오폴리스에게 실망하였듯이, '새들'은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실망하고; 그들은 페이세타이로스가 전제적 방법으로 지배권을 강탈한 것에 대해, 혹은 '새들'의 도시에서 '새들'이 지배에 참여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배척한 것에 대해 분개한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들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란 빚을 그에게 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대항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페이세타이로스의 권력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불의의 사람들이나, 혹은 차라리 아테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일반적인 불의를 비난하는 것을 감히 넘지 못한다.
또 다른 방문자가 도착하여 페이세타이로스와 이야기하기를 간청한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고, 위에서 신들이 볼까 두려워서 우산을 쓰고 있다. 페이세타이로스로부터 제우스가 구름을 모으고 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제우스가 벼락을 칠 것을 겁내기보다 오히려 안심한다: 제우스는 구름을 뚫고 그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cf.1608-9). 그래서 그는 얼굴을 드러내고; 페이세타이로스는 즉시 그가 인간들은 사랑하고, 신들은 미워하는 프로메테우스임을 알아 본다. 프로메테우스는 소리지르거나 그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 간청하는데, 그는 여전히 제우스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친구에게 말하듯이 제우스는 망했는데; 공중 도시의 기본 원칙에 따라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아 굶고 있다. 올림포스 신들 위에 살고 있는 야만인들의 신들은 제우스에게 만일 그가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전쟁을 하겠다며 협박한다. 페이세타이로스의 이득을 위하여 올림포스의 신들을 위협한 야만인들의 신들은 물론 야만인들에 의해 숭배되는 신들, 즉 트뤼가이오스가 이들을 가지고 올림포스의 신들을 위협했던 해와 달은 아닌데("평화" 406-13), '새들'의 그리고 오직 '새들' 밖에 없는 이 신성에는 해와 달과 그리고 야만인들의 신들과 올림포스의 신들 역시 마찬가지로 제외된다. 여기에 페이세타이로스가 메톤을 쫓아내는 것과, 그가 올림포스의 신들 대신에 해와 달에 매달리는 것에 실패한 것과 연관될 수 있었는가? 야만인들의 신들은 마치 올림포스의 신들이 하늘에 있는 그리스 사람들이듯이, 하늘에 있는 트리발로이(트라키아 사람들의 나라) 사람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제우스와 위에 있는 트리발로이 신들이 '새들'과 신들 사이의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려 한다고 말하고, 그는 그에게 제우스가 '새들'에게 왕홀을 회복시켜 주고, 바실레이아(왕권Kingship)를 아내로서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주도록 요구하라고 충동한다. 본래 '새들'이 그들 스스로 그들 자신을 위한 왕권을 찾으려 했는데(549-50); 프로메테우스가 이러한 의중을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좋도록 바꾼다. 바실레이아는 가장 아름다운 소녀로 제우스의 벼락과 다른 모든 힘의 원천이나 수단을 맡아 있는데; 바실레이아를 소유하는 것을 통해 페이세타이로스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그가 인간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조언한다: 그는 제우스의 힘을 '새들'에게 넘겨 주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 자신이 신인 프로메테우스는 모든 신들을 싫어하는데, 그래서 그 자신 역시 싫어하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을 못하도록 막는다. 만일 그가 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경건한 니키아스를 닮아 있을 것이었다. 그는 암묵적으로 인간 페이세타이로스가 모든 신들보다 낫다고 수긍한다.
프로메테우스와 페이세타이로스 사이의 대화는 '새들'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악화시킬 뿐이다. 본성적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신들을 미워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새들'에게 그들이 본성적으로 신들이 아닌 인간을 미워한다고, 그래서 신들에 대항한 페이세타이로스와 그들의 동맹은- 그들이 그로부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동맹은- 비본능적인 성격이라고 상기시켜 주었어야 했다. 그 밖에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모든 기술의 창안자로서 프로메테우스는 새들을 잡아서 죽이고, 그리고 요리하는 기술의 창안자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인정하듯 모든 신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는 '새들'에게 신들로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그가 떠난 뒤, '새들'이 프로메테우스 장면에 앞서 그들이 노래 속에 다루었던 불의의 두 사람보다 훨씬 더 깊이 불의스런 두 사람에게 노래를 헌정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연설가 페이산드로스를 둘러싼 멜로스 사람 소크라테스와 그 동료 카이레폰에게 말이다. 그 이름이 페이세타이로스를 연상시키는 페이산드로스는 '새들'에게 어쩐지 오뒷세우스를 상기시켜 준다. 이 노래가 끝나자마자 하늘에서 사절단이 도착하는데; 그들과 페이세타이로스와의 대화는 '새들'을 조금도 진정시키지 못한다. 사절단이 떠난 뒤에, '새들'은 그들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노래를 내뱉는데, 그것은 분명 연극의 사건이나, 혹은 합창단으로서의 코로스와 연관이 없다. 그 노래는 비틀어진 고르기아스와 그의 아테네 학생인 필립포스를 풍자하고; 필립포스는 '말벌들'의 올바른 분노에 희생당했었다("말벌들" 421). 서로 친척 간인 노래 셋을 분석해 보면, 그 노래에 표현된 일곱 불의스런 사람 중 최소 세 사람(소크라테스, 카이레폰, 또한 고르기아스)은 수사학retoric과 생리학physiologia을 합쳐 엮는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새들'의 자세는(그래서 카이레폰에게 역시 같다)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닌데; '새들'의 기원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프로디코스가 가르치는 것을 몰아내자는 뜻이다.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그것으로써 이제까지 옛 신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들에게 대항하도록 지시를 받았다는 것과, 그리고 한 인간이 신성시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자연스레 '새들'이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왜냐하면 어떻게 '새들'이 소크라테스가 지닌 정치적이지 않은 성격의 의중을 이해하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의문시되는 일곱 사람 중에, 시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새들'은 노래하는 존재로서 시인들에 대해서는 반감이 없다. 어쨌든 이러한 관점에서 '새들'은 페이세타이로스와 같다: 도시는, 그리고 더 한층 강력한 이유로 본성을 따르는 도시는, 시와 어우러지고 그리고 시를 찾기까지 하는 반면에, 그런 도시는 천문학이나 생리학은 용납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지금 논의하고 있는 노래들 종류는,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연극들과는 달리, "새들"에서는 적합한 것인데, 왜냐하면 "새들"에서만 주인공이 지배에 관련해서("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의 대응되는 불화는 지배에 대한 것이 없다), 그리고 또 주인공이 코러스를 속이고 있다는 것으로(소시지장수는 '기사들'과 데모스테네스를 속이지 않았다) 야기된 결정적인 싸움을 이기고 난 후, 유독 주인공과 코러스 사이에 그런 불화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온 세 사신은 포세이돈, 헤라클레스, 그리고 트리발로이 사람들의 신 트리발로스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적인 포세이돈의 설명과 같이, 지금 신들이 민주적으로 살지 않았다면 모든 신들 중에 가장 야만적인 트리발로스가 사신으로 보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벽에 신들을 가두어 버린 인간에 대한 노여움에 가득 차서, 그를 목졸라 죽이고 싶어 하는데; 포세이돈은 그에게 그들은 그와 협상하러 온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고; '새들'이 그 사이에서 어떤 역활을 하리라 기대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헤라클레스는 그의 집착 탓으로 신들 셋 가운데 가장 사태를 잘 받아들이는 것으로 판명이 나는데; 그는 마치 그가 트뤼가이오스에게 그랬듯이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수그리고 든다(키네시아스는 오직 헤라클레스에게만 걸고 맹세했다,1391.). 그래서 헤라클레스는 페이세타이로스가 처음서부터 유독 그에게 주목하는 신이다. 신들이 도착헤 올 때 그는 분주히 그의 음식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고기는 새들이다: 어떤 귀족적인(그래서 육질이 좋고, 기름지고, 그리고 육즙도 많은) 새들이 민주적인 새들의 비난으로 죽임을 당했다. 마치 올림포스의 신들이 언제나 그리스식이어서 그리스 사람들이 민주적일 때 민주적으로 되었듯이, 새로운 신들인 '새들'도 그리스식은 아니라도 역시 최소한 민주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새들'의 정치 체제는 오로지 이름만의 민주체제여서; 사실 그것은 제일 처음 사람의, 혹은 '새들' 가운데 한 사람만의 지배체제이고, 그는 말안장 위에 아주 단단하게 있어서, 만일 '새들'이 좋은 재판으로 선고를 받아 잘 처형되었다면, 좋은 양념으로 잘 요리된 그것들을 먹는 걸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아주 엄격하게 본다면, 이제 '새들'이 그의 신들이기 때문에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이 동족을 먹는 풍습보다 더 나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포세이돈은 신들과 '새들' 사이의 평화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로 협상을 시작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동의한다: 우리(우리 '새들')는 정당한 평화를 구축하고 싶고, 그리고 정의는 제우스가 왕홀을 '새들'에게로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얼마 동안에 그는 자신이 '새들'에게 제기하라고 충고했던 요구를 넘어서지 않는데(554); 그는 아직까지 프로메테우스가 조언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그는 원래의 요구사항을 단지 그 신성의 사절단이 자기 요구를 들어줄 경우 음식을 한끼 대접하겠다는 약속으로 넘어설 뿐이다. 포세이돈은 역겹지만, 헤라클레스는 즉각 그 요구들을 받아들이는데; 포세이돈이 그에게 말하듯이 그는 한끼를 위해 그의 아버지 제우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참이다. 이 같은 논쟁이 제법 묵직하여, 페이세타이로스는 평화의 정착이 제우스와 그 혈족들을 위한 영속적인 이점이라는 것을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일에 '새들'이 그 아래를 지배하면, 혹은 신들이 '새들'을 동맹자로 가진다면, 신들의 힘은 늘어날 것이고; 신들이 구름 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위증하는 것을 관찰할 수 없는 반면, '새들'은 그들을 지켜볼 수 있어서 벌을 줄 수도 있다. 신들은 위증자들에게 벌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새들'은 그럴 수는 있지만 이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페이세타이로스는 신들이 위증자들을 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일치하지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런 사실로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까지 올라가지만, 페이세타이로스는 그들의 능력이 모자라는 부분에까지 연역한다. 포세이돈은 페이세타이로스의 지적을 즉각 알아 듣는다: '새들'이 신들의 능력을 확장시켜 주기 위해 본성적으로나 나중에 얻은 것이거나 간에 그들의 능력을 모두 사용할 경우에만, 신들은 그것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새들'은 신들과의 동맹이 필요하지 않고, 신들은 '새들'과의 동맹이 필요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신들은 인간들을 벌 주기를 갈망하고, '새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새들'이 그 동맹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지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페이세타이로스의 이 제안은 신들이 '새들'에게 왕홀을 넘겨주는 것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페이세타이로스가 한 수 앞서 가고, 그리고 헤라클레스가 추인하여, 다른 두 신성의 사절들도 그의 요구를 수락한다. 그는 이 승리를 얻고 난 다음에야 프로메테우스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는데; 그는 역시 프로메테우스보다 한 수 위다. 평화 협약이 전쟁 당사자 간의 주고 받기라는 인상을 주어야 하기에, 그는 헤라는 제우스에게 남겨 두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러나 바실레이아는 그가 갖겠다고 요구한다. 포세이돈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요구를 거절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평화 협약에는 관심이 없는 척하거나, 혹은 진짜로 관심이 없는지 그가 하던 음식 장만으로 돌아가는데, 물론 그 음식은 신성의 사절단에게는 나누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헤라클레스에게 너무 심한 것이다. 신성의 모든 가식을 던지고, 또 포세이돈을 사람으로까지 표현하면서, 그는 한 여자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저지런 실수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 사람들이 저지런 실수를(cf. "아카르나이 사람들" 524-27) 또 하지 않을 것이다. 포세이돈은 헤라클레스의 어리석음이 놀랍다. 그가 이미 페이세타이로스에게 말해 준 보장은 잊어버리고, 그는 헤라클레스에게 만일 왕으로서의 지배가 '새들'에게 넘어가면, 헤라클레스는 제우스가 죽은 다음 힘없는 가난뱅이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신들의 불멸성은 그전에 페이세타이로스가 의문을 던진 바 있지만(1224), 이제 신들이 스스로 부인한다: 신들은 가장 인간스럽다. 페이세타이로스는 포세이돈의 논거를 논박하는데, 헤라클레스에게 법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적자가 아니라서, 어떠한 방법으로도 제우스의 소유물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신들은 그리스식 존재이기에 그리스 법을 따라야 하는데; 아마 제우스의 결혼이 근친상간적 성격이라서, 유일한 제우스의 적법한 상속자는 아테나이다. 하여 헤라클레스는 바실레이아를 달라는 페이세타이로스의 요구를 보장하는 수밖에 없고, 더 잃을 것도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페이세타이로스가 그에게 말한 것처럼 그가 '새들'에게 합류할 경우, 페세타이로스는 그를 왕으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헤라클레스는 바실레이아를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주는 쪽으로 투표하고, 포세이돈은 여전히 반대에 투표한다. 도대체가 지적이지 않은 트리발로스의 결정이 페이세타이로스의 도움으로 헤라클레스의 결정에 동의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포세이돈은 다수의 뜻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헤라클레스는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우리"와 함께 하늘로 가서, 거기에서 바실레이아와 "그리고 모든 것"을 받자고 제의한다. 그리고 그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페이세타이로스가 쇠똥구리 없이도 트뤼가이오스처럼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데; 그는 확실하게 '새들'보다 높이 올라간다. 그렇지만 트뤼가이오스가 하늘에 있는 것은 보게 되었지만, 페이세타이로스가 하늘에 있는 것은 보게 되지 못한다. 적절한 것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감각 때문으로, 페이세타이로스가 그의 선임자인 제우스를 만났다거나, 아니면 제우스가 어떻게 그의 퇴위를 받아들였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한다. 헤라클레스는 약속된 음식을 혼자 독차지하기 위해 그 제의를 내놓았고; 그는 하늘로 돌아갈 의사가 없다. 그러나 페이세타이로스는 엄격하게 그를 그 제안의 문구대로 붙잡아 두는데: 너는 "우리"와 함께 하늘로 갈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그 전이나 그 후로 그 누구도 결코 동등한 크기의 양보를 내놓지 못한 그런 양보의 덕으로 챙긴 음식을 가지지조차 못한다.
전령 하나가 세 배나 축복을 받은 종족 '새들'에게 새로운 지배자가 오고 있다고 알려 준다: 어느 별도 페이세타이로스처럼 밝게 비추어진 적이 없었는데, 그는 한 손에 그의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신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우스의 번개를 내리치면서 온다. 페이세타이로스는 황홀함에 있어 올림포스의 신들과 우주의 신들 모두보다 월등하다. 전령은 '새들'에게 신성한 무우사에게 영감을 얻은 숭배의 노래를 읊으라고 요청한다. '새들'이 페이세타이로스가 그들을 몰아서 거래를 성사시킨 데에 대하여 실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페이세타이로스와 바실레이아의 처분에 따라 그들이 그 부부의 황홀함을 함께 나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고 '새들'의 변덕스러움에 대해서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숨막히는 그들 감각의 느낌에 특히 그들이 보고 냄세를 맡는 느낌에 견딜 수가 없다. 결국 페이세타이로스와 바실레이아의 결혼에 있는 승리는 '새들'의 도시의 것이고; 또한 그들이 잠시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들 도시의 승리는 바로 "그 사람"으로 인한 것이다. 특이함은 집에서 잃는 자유를 보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외래의 정책을 성공시킨다. 따라서 그들은 전령의 요청대로 따른다. 그들은 페이세타이로스와 바실레이아의 결혼을 제우스와 헤라의 그것에 비교한다. 여러 관점에서 이런 비교가 적합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을 허풍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페이세타이로스는 대단한 위엄으로 '새들'의 고상한 노래를 즐기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이 지금까지 제우스에게 있던 힘을 이제는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서도 역시 노래로 불러야 한다고 느낀다. 그가 고귀하게 바라는 것을 말하자, 바실레이아가 디케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을 절차대로 분명히 하면서, '새들'도 고상하게 순응한다. 그가 바실레이아를 하늘에서 데리고 왔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이제 그는 그녀와 함께 그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새들'의 마지막 말은- 연극의 마지막 말은- 페이세타이로스를 가장 높은 신으로 인사 올리는 말이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모든 연극들 중에 "새들"이 가장 충격적이다. 만일 변론이나 행동이 권위적인 의견이나, 혹은 더욱 특별하게 신들에 대하여이거나, 연설자들이나 비극작가들에 대해서거나, 그리고 대중들에 대하여 반대되는 경우, 그 변론이나 행동은 충격적이다<주16>. "새들"은 어떤 아테네 시민이 그의 모국을 등지고 떠난 후(35) 제우스와 다른 신들의 권력을 빼앗고, 그리고는 스스로 가장 높은 신 제우스의 후계자로 만드는 것의 성공을 축하한다.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상기시키고; 소크라테스처럼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의 모국에 대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고, 신들에 대항하는 행동을 한다. 어떤 면에서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이 소크라테스보다 더욱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행동은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가정에서 나아가고, 그래서 전체가 실패하는 비극적인 것인데 반해,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그 반대되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뽑아내기 때문이다. "평화"에서의 행동은 "새들"에 비교하면 훨씬 덜 충격적이다: 트뤼가이오스가 제우스의 암묵적인 금지를 위반하는 것은 그의 목표가 공공의 평화라는 사실로 재판원들의 의견 앞에서 정당화되는 반면,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공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새들"의 충격적인 성격은 페이세타이로스가 소크라테스에게보다 작가 그 자신에게 더 가깝다는 사실로 강조된다: 페이스테타이로스는 아버지 폭행과 천문학 이러한 모두를 거부하고; 오르페우스의 신들에 대한 기원을 발전시킨 그의 무우사 같은 '새들'은 비무우사적인 소크라테스의 깃대 반대 편에 서 있다. 이러한 것들의 상태는 분명히 이 연극의 두 파라바시스에서 작가가 그 자신에 관하여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
페이세타이로스로 하여금 이런 혁명을 수행토록 한 이유를 따져 보고, 한편으로 지금까지 보여져 왔었던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참고 자료들을 정리해 보자. 페이세타이로스의 원래 구도는 아테네에서 그를 성가시게 하였던, 특히 재판이나 비난의 형태로 끌어가고 싶어하는 온갖 간섭의 분주함으로부터 벗어난 곳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구도가 비난하고자 하는 열정과 신들의 권력 사이에 상관이 있다고 추정하지 않는다면 그의 혁명적인 행동은 설명이 안 된다. 그런 상관은 "말벌들"에서 제시되었다: 필로클레온은 만일 그가 치죄하는 것을 멈춘다면 신들에게 벌을 받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치죄하는 일에 열심이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왜 그가 신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구도를 위하여 원래 구도를 포기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두 구도 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상관이 있을 것이다: 한 도시는 그들 이웃에 의해 편안하도록 그냥 두어지지 않는 한, 편할 수 없고; 오로지 이웃들이 없는 도시만이 그 도시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도,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도시는 신들을 그것의 지배자로 반드시 가져야 하는데; 올림포스의 신들은 결코 그런 도시를 구축하려 노력한 적이 없었고; "평화"에서 본 바와 같이,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리스 내부의 평화를 만드는 데조차도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 신들은 스스로 야만인들이 숭배하는 신들이나, 야만적인 신들과 평화스럽지 않고; 올림포스의 신들과 야만적인 신들을 함께 불러 오는 것은 페이스테타이로스의 행동이라; 신들이 인간들의 지배 속에 있지 않는다면 그 도시는 편안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페이세타이로스는 신들이 없이는 도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신들이 필요하다. 그가 새들을 선택한 것이 우연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이것이 그 우연을 선택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선택이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는다. 신들은 인종과는 다른 것의 종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신들은 사람들과 충분하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인간들과 성교를 하고, 그것을 통해 자손을 퍼트리지만(cf. 557-60), 새들은 인간들과 성교를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신들은 사람들이 치어다보는 존재이고; 그들은 높은 곳에 살며; 그리고 오래된 신은 너무 높은 곳에 사는데; 새들은 오래된 신들을 제외하면 다른 어떤 것보다 높이 날아서, 결코 인간과 가까이하지 않는다(726-29). 새들은 인간들을 싫어하지만, 그러나 니키아스가 "기사들"에서 신들이 존재하는 것을 시범을 통해 보여 주었듯이 그리고 "새들"에서 유일하게 인간을 좋아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존재가 있긴 하지만, 오래된 신들도 인간을 싫어하는데; 그렇지만 새들은 역시 인간들을 두려워한다. 새들의 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페이세타이로스가 스스로를 새들의 지배자가 되게 한다거나, 또 그렇게 할 수가 있었고, 그래서 가장 높은 신이 되고, 또 모든 신들과 모든 사람들의 지배자가 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그는 날개를 달고 있다.
"새들"의 충격적인 성격은 이 연극에서 축하하는 행동을- 순전한 위대함에 있어, 그 전후에 일어난 모든 행동들을 뛰어넘는 하나의 행동을- 한 아테네 사람이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 아테네 대중들의 눈에 충분한 반작용을 일으켰을 것이라 이야기되겠지만; 그래서 이 연극은 아테네의 영광에 "평화"에서 아테네 사람 트뤼가이오스가 행동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바지한다<주17>. 이런 경우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이 아테네 사람들의 악덕들을 비춰 주는 거울을 들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도록 사용할 수도 있고, 사실 신들이 아테네에 대해 해 준 것과 달리, 신들에게조차 훌륭한 일들을 아테네 사람들이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아테네를 칭송하는 것도 된다. 그런 일들은 아테네의 개개인들 스스로가 법이나 혹은 도시에 의해 권한을 받았다거나 위임받은 것이 아니면서 이루어 낸 것들인데; 그 시민들 덕분에 아테네는 도시가 고통받는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나쁜 점들을 내부적으로 고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관련 있는 모든 정치적 감각의 관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위협하는가? 스트렙시아데스는 이런 위협을 법이나 치안 판사들의 도움없이 한 손으로 떨쳐 버린다. 스트렙시아데스는 단지 그가 다른 모든 아테네의 사람들이 자격도 없이 속해 있는 두 계층 사이의 사람이기 때문에 진짜로 두드러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페이세타이로스는 알키비아데스조차 뛰어넘는 사람으로 표현될지도 모르는데; 그는 극단적인 불경함을 세상의 지배를 위해 분투하는 것과 성공적으로 혼합하는데 반해, 알키비아데스는 이 둘을 혼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알키비아데스의 의도는 실패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을 클레온의 실패와 견줄 수는 없는데; 그것이 성공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가 아테네를 그의 기반으로 사용했어야 했기 때문이었던 반면에, 페이세타이로스는 다른 기반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희극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연출한다. 그래서 "새들"은 아테네가 실제적으로 추구한 정책이- 서쪽으로 확장하는 것과<주18>, 알키비아데스를 불경죄로 처형하는 것- 불가능한 것이며, 그리고 동시에 위대함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아테네에게 거울을 비쳐 준다(415).
우스꽝스럽다는 것이 충격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새들"이 충격적이지 않다고, 그리고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명백하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스꽝스럽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페이세타이로스의 허풍을 비웃는 것은 올림포스의 제우스 뿐만은 아니며; 모두가 공중에 도시를 세울 수가 없다는 것과 신들을 굶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화"에서 지금의 평화가 조만간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듯이, "새들"은 지금 제우스의 퇴위는 늦어지기보다 더 가까운 장래에 그의 재등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만일 왕권이 원래 새들로부터 사람들을 거쳐 신들에게로, 그리고 연극 안에서 신들로부터 새들을 거쳐 사람에게로 옮겨 갔다면, 그것은 연극이 끝난 후에는 사람으로부터 신들에게 옮겨 갈 것이라는 것은 합리적이다. 제우스가 퇴위당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여전히 제우스 혼자서 그가 퇴위당할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하였다<주19>. 더군다나 "모두"가 제우스가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몰랐고, 그리고 그가 제우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단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닌 충격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의 행동은 스트렙시아데스가 책임져야 하는 더 커다란 전체를 이루고 있고; 그렇지만 스트렙시아데스의 행동은 충격적이지 않은데, 그는 말도 안 되는 솜씨로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트렙시아데스 행동의 진실은 여전히 페이세타이로스가 하는 행동보다 더욱 진실하다. 만일 한 작가가 한 사회에 모든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아버지 폭행과 근친상간을 허가하고, 그러고도 또 행복하다는 것을 소개하려 한다면, 그는 모든 사람에게 충격을 줄 것이지만; 그러나 그가 만일 동시에 그 사회 역시 불가능한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요구한다면(말하자면 가난, 전쟁, 질병 등을 없애거나, 혹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매우 아름답고 지성적이어야 한다는 것 등), 그는 훨씬 적은 충격을 줄 것이다. 그가 연극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모호할지도 몰라서 그런 면에서 충격을 줄 것이다. 그는 진실로 가난과 같은 것을 없애지 못하는 것처럼 신들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인데; 그러나 그는 역시 신을 없애는 것이 가난을 없애는 것만큼 바람직하다는, 아니면 다른 말로 해서 신들은 비록 그것이 필요하더라도 하나의 악덕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것으로써 신성한 것을 품는것"에 대한 경건심을 줄일 것인데; 그것은 신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주20>.
아리스토파네스가 성공이라고 소개하는 전체 구도들은 그가 인정하는 것인지, 반면 그 자신이 실패라고 소개하는 그것들은 그가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혹시 페이세타이로스의 승리가 단지 놀라운 것일 뿐이라면, 소크라테스의 폐망도 역시 놀라운 것일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승리는 그의 폐망만큼이나 놀라운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폐망을, 페이세타이로스의 경우에는 승리를 선택하였는가? 작가가 그의 작품이 단순히 놀랍도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것을 가르치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다시 점검해 보지 않고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이것이 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단순히 충격적인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고, 그래서 왜 소크라테스의 폐망과 또한 페이세타이로스의 승리가 모두 의식을 고양시키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소크라테스의 폐망은 교화적인데, 왜냐하면 그의 행동이 그저 충격적이고 견딜 수 없는 것이라 특히 아리스토파네스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행동과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 사이의 차이는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어 보일 것이다.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공중에다 도시를 세우는 등 그와 같은 명백한 불가능성 때문에 단순히 충격적이지만은 않은데; 소크라테스의 신들 존재에 대한 부인은 그 부인이 명백히 가능하기 때문에 단순히 충격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올림포스 신들의 존재 뿐만 아니라, 도시가 신들을 우러러볼 필요가 있다는 것까지도 예상한다. 그가 기존의 범신전pantheon을 넓히는 것을 넘어 그 기존의 판테온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사실인데;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아버지 폭행을 반대하면서, 천문학자를 쫓아내며; 실질적으로 소크라테스와는 다르게, 페이세타이로스는 도시의 근본적인 요구에 따라 행동한다. 이것이 아리스토파네스가 정의로운 것들을 그런 주인공들의 승리를 통해 가르치는 이유이다. 달리 말하서,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파네스가 존중하는 그 불가능성은 도시의 근본적인 요구를 성공적으로 부인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연극의 행복하거나 불행한 결과물이 작가가 연극의 행동을 촉발한 전체 구도에 대한 판단을 드러낸다고 단언해도 좋을까? 그 단언은 그것이 제대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맞는 것이다. "구름"의 불행한 결과물은 작가가 스트렙시아데스의 의도 뿐 아니라,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행위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기사들"에서의 해피엔딩은 데모스테네스의 의도가 소시지장수의 권력에로의 접근을 이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데모스테네스 자신에 대한 중요한 비평을 시사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작가가 데모스테네스의 의도를 인정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말벌들"에서는 브델뤼클레온의 의도가 그 결과물과 간단히 일치하지 않는데, 그는 그의 아버지가 재판정에 앉기를 원하는 것을 진짜로 고치는 것에는 성공하는 만큼, 그를 신사로 만드는 것에는 실패하는데; 그렇지만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브델뤼클레온의 이 실패는 그냥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새들"에서 그 결과물은 페이세타이로스와 에우엘피데스 사이의 차이를 숙고하지 않고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에우엘피데스는 페이세타이로스가 그런 것들보다 더 더욱 올림포스의 신들에 매달려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올림포스의 신들 대신에 '새들'이 지배하는 것으로 바꾼다는 페이세타이로스의 의도에 더욱 매료되고 놀라워한다. 그렇지만 그의 영광스러운 동무와 비교하여 보면, 그는 한 안식자apragmon로 태평스럽고, 조용한 것을 사랑하고, 한 개인 장소에 은퇴한 사람으로 남는다. 그는 결코 과시자가 아닌데; 그는 주저하지 않고, 새들과 함께 새들처럼 사는 것이 새들이 그리고 새들을 거쳐 신들과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좋아서; 그는 시골뜨기이며<주21>; 한 마디로 그는 페이세타이로스에게보다는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더욱 가깝다. 에우엘피데스가 연극의 중간에서 퇴장하는 사실을 통해서 작가는 그가 페이세타이로스와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정의에 대한 고려를 근거로 하지 않은 의견의 불일치를- 요란하지 않게 표현한다. 그렇지만 "새들"에서 페이세타이로스의 의도에 대한 타당성은 보여 주면서도, 에우엘피데스의 의도에 대한 타당성은 소개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에우엘피데스는 그의 방식대로 소크라테스처럼 정치적 생활의 필요성에 눈을 감고 있다. "새들"에서의 두 주인공 사이의 차이는 작가와 그의 한 시민으로서의 역활 사이, 도시와 현명함 사이의 차이와 서로 대응한다.
<주1> Cf. 플라톤의 '향연'에서의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191e6-192b5)과 크세노폰의 '히에로' 1.29-38과 8.6. Cf. p.101 그리고 주12.
<주2> Cf. 175-177, "기사들" 173-75.
<주3> 멜로스는 기아로 인해 아테네에 항복하였다. "구름" 830에서 소크라테스은 멜로스 사람이라 불리는데, 즉 무신론자인데, 왜냐하면 멜로스 사람 디아고라스가 가장 악명 높은 무신론자였기 때문이다; cf. "새들"1073.
<주4>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1629-30; 에우리피데스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1211-14; 시모니데스 fr.27 Diehl.
<주5> 키케로, '공화정' III 14 (cf. 헤로도투스)
<주6> Schol. 645;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32b2.
<주7> "새들"에서 이 파라바시스의 성격은, 코러스가 연극의 공연에 대한 수상을 주장하는 것이 파라바시스 안에 있지 않고, 훨씬 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것이다(445-47).
<주8> "구름" 361; cf. 키케로 N.D. I 118.
<주9> Cf. schol. 1218: 여기서 "카오스"는 공중을 가르킨다.
<주10> Cf.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75b22-34.
<주11> "말벌들"의 파라바시스 장면을 보라.
<주12> Cf.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77a18-22.
<주13> "기사들"의 데모스에 대한 해설 부분을 보라
<주14> J.M. 에드몬드, 'Lyra Graeca', III,262-264.
<주15> 세 종류의 새와(예언하는 새, 노래하는 새, 그리고 바다새), 세 사람의 방문자의(아버지 살해자, 시인, 그리고 밀고자) 조합이, 올바름에 대한 다음의 세 가지 태도를, 즉 1)정의는 합법성과 동일하다. 2) 정의는 합법성과 구별된다. 3) 정의를 그냥 배척한다., 가르키지는 않는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주16> "구름"의 '변론'들 장면을 보라
<주17> '미노스'(318e6-319b2, 320e2-321a1)에 나타난 경건심과 애국심(시) 사이의 마찰을 비교해 보라
<주18> "기사들"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 장면을 보라.
<주19> 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170-172. '프로메테우스' 755 ff.
<주20> Cf. 투키디데스 II 64.2 와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1391b1-3.
<주21> 585; cf. 494-96 그리고 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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