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개구리들"
"개구리들"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중에 그 연극의 첫 도입부에서 유일하게 어떤 신을 보고 듣는다. 그것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가운데 유일하게 그 연극의 사건이 그 신의 구상에 의해 진행된다. 그것이 주인과 노예 사이의 대화로 막이 열린다는 사실로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모든 연극들과는 다르다. 주인은 극장의 신인 디오뉘소스 그 자신이다. 그의 노예 크산티아스는 그에게 관객들이 습관적으로 웃을 것들 중 하나를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디오뉘소스는 그가 혐오스럽게 느끼는 표현을 쓰는 것만 빼고 그 마음대로 하라고 일임한다. 그가 금지하는 것이 야비한 것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 있는 약간의 파라바시스로부터 알고 있는 것과의 차이를 상기시키는데; 디오뉘소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보통 때 말했던 것들을 선호한다고 언급한다. 아무튼 아리스토파네스는 디오뉘소스가 키워냈다("구름" 519). "개구리들"은 확실히 연극에서 출연자가 관객들이 웃게 하겠다는 생각을 무엇으로 나타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유일한 연극이다. 이것은 "개구리들"이 단순하게 불평이나 신음 소리로 막을 올리지 않는 유일한 희극이라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크산티아스는 농담이 하고 싶어 죽겠는데, 비록 그는 그 짐을 당나귀를 타고 운반하고 점잖은 그의 주인은 걷지만, 그가 운반하는 짐으로 생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크산티아스는 어깨의 통증에 대해 불평한다. 그 자신이 운반되고 있으면서 크산티아스가 어떻게 어떤 것을 운반하고 있을 수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크산티아스는 그가 당나귀에 의해 운반되고 있을 때 받은 어떤 도움도 부인하지만, 그 통증의 어려움이 해결된다 해도, 디오뉘소스가 말할 차례에서 그가 왜 당나귀를 운반하지 않는가라고 의아해 하는데도, 그를 뒤따라가는 것은 별 볼 일 없는 짓이다. 디오뉘소스는 그가 크산티아스보다 더 좋은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보다 더 나은 논쟁자이어서; 그는 주인 대접을 받아야 한다. "개구리들"의 초입부에 불평이 빠져 있지 않지만, 불평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농담이나 혹은 웃음거리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웃는 것은 고통당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그 반대는 진실이 아니다. 하여튼 디오뉘소스는 처음 나타날 때 올바른 종류의 희극에 관심을 가진 듯하더니, 곧 무엇보다 올바른 비극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디오뉘소스는 크산티아스에게 당나귀에서 내리라고 명령하는데, 그것을 운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 신의 첫 번째 목적지인 헤라클레스의 집에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디오뉘소스는 사자 가죽을 걸치고 커다란 채찍을 든 채 거칠게 문을 두드리고, 헤라클레스 스스로 문을 열어, 그는 분명히 하인이 없는데; "아카르나이 사람들"에 나오는 에우리피데스와 "구름"에서 소크라테스가 나오는 각각의 상응하는 장면들을 대비해 볼 때, 그는 확실하게 빈둥거리고 있다. 크산티아스에게는 말하지 않은 디오뉘소스의 기대와는 반대로, 헤라클레스는 그의 이복형제가 나타나는 것에 놀라지는 않지만, 참을 수 없는 웃음에 빠지는데, 디오뉘소스가 헤라클레스의 역활을 위해 옷을 입고 있을 때 자기의 여자 같은 옷들을 벗어 버리는 것을 잊었었기 때문이다. 디오뉘소스는 명백히 그냥 헤라클레스에게 간 것이 아니라, 마치 디카이오폴리스가 에우리피데스에게 갔듯이, 또한 에우리피데스가 아가톤에게 갔듯이, 가면을 빌리러 갔고; 극장의 신은 모든 종류의 가면들을 가지고 있다. 헤라클레스가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 여행했느냐고 묻자, 디오뉘소스는 자기가 아르기누사이의 해전에 참여했었다고 대답한다: 사람이든 신이든 헤라클레스식의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반드시 많은 아테네 시민들이나 노예들조차도 행했던 것을 행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의 군사적 명예에 대한 겉치레는 마찬가지로 그가 가진 어떤 다른 성격들은 폴스타프Sir. John Falstaff of Shakespeare의 징조를 보인다. 극장의 신은 싸움꾼인 헤라클레스에서 반대되는 깃대 아래 있다. 비록 "개구리들"에서의 극중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는 배역은 신이지만, 그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에서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배역은 반드시 아테네 시민이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규칙에 따른다. 그가 헤라클레스에게 말하기를, 그가 아르기누사이로 가는 혹은 그곳에서 오는 군함에 있었을 때, 에우리피데스의 "안드로메다"를 읽었고, 그리고 그의 가슴은 죽은 작가를 위한 말할 수 없이 강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어떤 인간도(특히 헤라클레스는 아니다)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데려오기 위하여 하데스로 내려가는 것을 단념시킬 수 없는데 아직도 살아 있는 작가들은 나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디오뉘소스를 본성적으로 경멸하는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의 동생이 에우리피데스를 좋아하는 것을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왜 차라리 에우리피데스보다도 소포클레스를 하데스에서 다시 데려오려 않느냐고 묻는다: 아이스퀼로스를 다시 데려오는 것은 고려의 대상도 아니다. 디오뉘소스가 에우리피데스는 좋아하면서도 소포클레스를 좋아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이란 그가 속한 곳에서 특히 죽었다면 하데스에서 도망가려 노력하기 위해 반드시 에우리피데스처럼 악한이어야 하는데, 그러나 소포클레스는 이곳에서는 온화한 성격이었으며(그래서 꽉차고 정의롭고), 그리고 저곳에서도 온화한 성격이다(그래서 꽉차고 정의롭다). 헤라클레스는 디오뉘소스의 주목을 또 다른 비극작가들에로 이끄는데; 그들 가운데 에우리피데스를 찬양하는 디오뉘소스도 역시 찬양하는 아가톤이 있지만, 그러나 그가 보기에 그를 에우리피데스에 견줄 수조차 없다. 디오뉘소스는 그는 좋아서 미치는데도 헤라클레스는 나쁘다고 전적으로 거부하는 "시간의 발자욱"과 같은 위태로운 표현을 말할 수 있는 풍성한 본성을 가진 작가는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새들"에서 그렇게 초라하게 보이는 헤라클레스는 디오뉘소스의 심취하는 모습을 대하자, 마치 카이레폰이 "말벌들"에서 필레클레온의 마지막 광기를 대했을 때 법과 질서의 편에 서는 것으로 나타나듯이, 술이 확 깬 것 같은 냉정 그 자체이다. 디오뉘소스가 볼 때 헤라클레스는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시에 대한 이해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방문의 본래 목적으로 돌아선다. 하데스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이상 그는 헤라클레스의 안내가 필요한데 왜냐하면 그는 하데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디오뉘소스와 하데스는 똑같다라고 하는 것에 진실은 없다<주1>. 디오뉘소스는 스스로가 유약하고 아니면 편안한 것을 좋아해서 더욱 특별하게 헤라클레스의 안내가 필요하고; 그는 가장 즐겁게 내려가는 길과, 또 그가 케르베로스를 데리러 내려갔었을 때, 그 주인공이 이용하도록 해 주었던 하데스의 접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그는 그 아래에 가 있는 동안, 헤라클레스처럼 여겨지고 대접 받기 위해 그 자신 사자 가죽과 큰 채찍을 마련하였다. 그의 유약함이 왜 그가 크산티아스를 동행할 필요가 있는지 또한 설명해 주는데; 그는 제법되는 양의 짐이 필요하고, 그래서 그것을 운반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사랑하는 것도 그의 유약함이 그 밑에 깔린 것이 아닌가 의문스럽다. 헤라클레스는 그의 미친 것 같은 과감함에 놀라나 디오뉘소스의 마음은 이미 굳혀져 있고; 그의 극장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대단해 모든 그의 겁쟁이 같은 면들이 그 사랑 앞에 무력하다. 헤라클레스가 케르베로스를 데려오려고 하데스로 내려간 것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몰렸기 때문이었지만, 디오뉘소스가 에우리피데스를 데리러 하데스로 내려가는 것은 그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디오뉘소스는 헤라클레스가 하데스로 가는 길로 그에게 제안한 세 가지 자살 방법 중에 어느 것도 고려해 보길 거절하는데, 그는 돌아오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헤라클레스가 내려갔던 그 길을 배우고 싶어 하는데 헤라클레스는 돌아왔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그에게 크고 심연처럼 깊은 호수에 대한 섬뜩한 내용을 전하는데, 수많은 뱀들과 가장 끔직한 야수들, 그리고 불결한 뻘과 넘치는 하수구에, 가장 불의한 사람들이(그들 중에는 어머니 폭행자도 있는데 에우리피데스는 없다) 던져져 있는 그 호수는 카론의 작은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그러나 디오뉘소스는 두렵지 않다. 그는 하데스의 공포를 믿지 않는 것인가? 그는 확실히 여행의 모든 편의를 찾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비록 헤라클레스는 그가 하데스에서 받은 대접에 대해 과묵하지만, 디오뉘소스가 그런 공포스러운 곳들을 지나면, 태양과 같은 가장 아름다운 빛 속에 축복 받은 그곳에 입회한 남자들과 여자들을 보게 될 것인데, 그들은 하이데스의 대문 가까이서 살기 때문에 그가 알고 싶은 필요한 것들을 모두 그에게 말해 줄 것이라고 덧붙이는 진실함을 보인다. 이렇게 많은 말을 한 다음 헤라클레스는 더 이상 그가 여행을 못하도록 그를 단념시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디오뉘소스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한다. 그는 그에게 왜 하데스에서 그와 같이 보이고 싶어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이 이상한 희망에 대해 이런 설명이 어떨지? 디오뉘소스는 에우리피데스를 볼 수 있기 위해 그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그는 그 아래에 있는 신들이 가장 좋은 작가를 데리고 있기를 간절하게 바란다고 예상하기 때문에, 마치 헤라클레스가 케르베로스를 훔쳤듯이, 반드시 에우리피데스를 훔쳐야 하고; 헤라클레스가 어떤 것을 의심을 했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에우리피데스를 훔친다고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고; 헤라클레스의 모습이 유일하게, 다시 말해 하데스에서는 아무도 헤라클레스 차림의 사람이 작가를 찾는다는 의심을 불러 일으킬 수 없다.
크산티아스는 물론 디오뉘소스와 헤라클레스 간의 대화에서 제외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당연히 그 제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세 번이나 그에게 주목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였는데; 여하튼 그의 어깨는 아직 아프다. 그는 그의 주인이 그에게 주목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데; 디오뉘소스는 친절하지는 않아도 쉽게 쉽게 가는 주인이어서, 그 노예와 평등이라는 기초 위에 살아간다. 그는 즉시 그를 지상에 남겨 두고 그 대신에 짐꾼으로 이 상태로 하데스로 가는 송장 하나를 고용하라는 크산티아스의 요청에 응한다. 디오뉘소스는 분별 있게 방금 운반되어져 온 송장이 요구하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지불하기를 거부하고, 그래서 겨우 분별이 생긴 크산티아스가 짐을 하데스까지 기꺼이 운반하겠다고 말한다.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라기보다는 친구들 관계를 닮았다. 그 밖에도 하데스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어깨가 아픈 것이 크산티아스로 하여금 그의 주인이 그가 없이 내려가도록 하는 유혹에 빠지게 했었다.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는 카론의 배를 타고 건너가는 호수에 도착한다. 카론은 크산티아스가 그 배에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아테네의 법에 따라 그는 노예인데다가, 그가 솔직히 인정하였듯이 그가 해전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의 주인과는 달리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불쌍한 친구는 짐을 진 채 호수가를 걷게 되는데; 이는 마치 자유인과 노예의 차이가 지상에서 그렇듯이 하데스에서도 중요할 것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카론의 버릇없는 명령에 따라서 해군의 경험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디오뉘소스는 배를 저어야 한다. 카론은 '개구리들'의 노래를 들으면 그 일이 쉬워질 것이라며 그를 위로하는데 그 노래는 그들이 곧 들을 것이다. '개구리들'은 그 제우스의 아들에게 바치는 아테네 축제에서 디오뉘소스의 명예를 위해 그들이 읊었던 아름다움의 노래를 노래한다. 그들은 그 신이 이제 그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들은 디오뉘소스를 카론이 그런 것처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그러나 그들은 카론과는 다르게 디오뉘소스에게 관심을 가진다. 디오뉘소스가 '개구리들'의 음악을 혐오하는데도 계속 노래하면서, 무우사들, 판, 또 아폴론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디오뉘소스의 예민한 귀가 '개구리들'의 개굴거리는 소리로 고통을 받는 반면, 그의 예민한 손은 노를 젓느라 고통당한다. '개구리들'이 디오뉘소스를 얼마나 많이 짜증나게 굴었는지 알게 되자, 그들은 일부러 더 그를 짜증나게 한다. 그래서 디오뉘소스는 그들을 잠잠히 하려고 되려 개골 소리를 내는데 그는 그것으로 성공한다. 그래서 코러스와 연극의 내용에 책임이 있는 한 개인과의 경쟁이 벌어지고, 그 경쟁은 "아카르나이 사람들", "말벌들", 그리고 "새들"에서와 같이 "주인공"의 승리로 끝난다. 그렇지만 "개구리들"에서는 변론으로 하는 시합도 아니고, 연극의 중간부에서 벌어지지도 않는다. '개구리들"에서 주인공과 코러스 간의 불화는 단지 코러스가 주인공을 알아보는 데에 실패하는 것에 기인한다. 그 실패가 디오뉘소스의 변장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디오뉘소스가 '개구리들'과의 시합에서 이기는 것이 그의 여행에 있어 길조라고 간주할지도 모르나 ,디오뉘소스가 '개구리들'을 이겼다는 말은 오직 그 혼자의 이야기라는 것도 말해야 할 것인데; 그가 '개구리들'에게 이겼다고 주장하는 순간이 바로 카론의 배가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이어서, 즉 그 사이 '개구리들'의 지역을 지나쳤던 것이다.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가 호수의 저 먼 건너쪽에서 만났을 때 각기 헤라클레스가 말했던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어쨌든 디오뉘소스는 노를 저어 호수를 건너 오는 동안 그들을 보았다는 어떤 표시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크산티아스는 계속 걸어가자고 하는데, 그들이 있는 장소가 헤라클레스에 의하면 괴물 야수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에 의하면, 괴물 야수의 지역은 극악무도한 죄인들의 장소에 도달하기 전에 있다. 디오뉘소스는 이제 헤라클레스가 하데스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주었거나,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그래서 그가 미워하는 에우리피데스를 다시 데려오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 자신이 하데스에 내려간 것을 부풀리기 위해 하데스의 공포를 과장했다고 확신한다. 디오뉘소스가 경험한 유일한 하데스의 공포는 '개구리들'이었고 그는 그것들을 쉽사리 극복했다. 전적으로 비밀이지만 이제 그는 하데스의 진짜 괴물을 만나 보고 싶다. 크신티아스는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어 엠푸사를 보자고 주장한다. 디오뉘소스는 그것을 보지 않는데, 그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너무 겁을 먹어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나 겁을 먹어서 객석의 첫 줄에 앉은 그의 사제에게 그를 구해 달라고 촉구한다. 그리하여 그가 작가의 대변인이 되지 않았는데도 극적 환상을 깬다(297; cf. 276). 그러나 공포는- 오직 디오뉘소스가 겁 먹는 하데스의 공포- 곧 지나간다. 그 신은 자유스레 어느 신이 그를 망치려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크산티아스는 요컨데 궁금한 그 신이란 에우리피데스를 원하는 디오뉘소스의 욕구이거나, 아니면 에우리피데스가 디오뉘소스에게 위험하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해석은 별 효과가 없는데, 이 순간에 주인과 노예는 피리를 연주하는 소리를 듣고 횃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포의 지역을 지나 축복받은 자들이 입회한 지역에 들어섰다. 그들은 입회한 자들,즉 주된 코러스의 행진을 보기 위해 옆으로 물러선다. "개구리들"은 서로가 부딪치는("뤼시스트라테"에서 남자들 코러스와 여자들 코러스처럼) 일 없이 서로가 이어가는 두 코러스를 가진 유일한 연극이다. 이 연극은 주된 코러스로 그 이름이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개구리들'의 코러스로 불려지는데, 그들은 디오뉘소스와 짧은 시합을 가진 뒤 다시 들리지 않는다. 코러스들의 이중성은 하데스의 공포와 하데스에서의 행복이라는 이중성과 상응한다. '개구리들'의 코러스는 있음 직한 하데스의 극악무도한 죄인들, 즉 에우리피데스 찬양자들의 코러스의 자리를 차지 하는데 (771-80), 그것이 불의의 기본을 외치는 극악무도한 죄인들의 코러스, 즉데모스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죽은 뒤에 처벌을 받아도 바뀌지 않는다. 이 연극의 제목은 이러한 있음 직한 불가능성에 대해 주목을 끌게 한다.
하데스 입회자들의 행진은 물론 그들은 여전히 아테네 사람들인데, 살아 있는 엘레우시스 행진을 흉내낸다. 그들은 횃불지기 이아크코스에게 그와 디오뉘소스와의 연관은 어둠 속에 남겨 둔 채, 자기들과 함께 신성하고 명랑한 춤에 동참하라 부른다. 그들은 비입회자들, 즉 반- 무우사들과 정치적 범죄자들을 내보내고; 이 부분 본문에서는 희극에 관련하여 디오뉘소스를 언급하는데; 그들은 세 번이나 희극을 인용하나; 비극은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조롱만 할 뿐 그것으로 별 의미 없이 흉내내는 축제와도 일치한다. 그렇지만 입회자들은 그들 나름으로 디오뉘소스를 위한 경축을 흉내내었던 '개구리들'이 몰랐듯이, 디오뉘소스가 있다는 것을(그의 의도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 없이) 모르고 있다. 하나의 규칙으로 아리스토파네스 연극에서 코러스의 입장을 알리는 노래들과 변론들은 코러스의 극적 기능을- "아르카나이 사람들"의 코러스가 반역자 디카이오폴리스를 추격하는 늙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역할을 하는 것 등을- 엄격히 따르고 있고, 또한 코러스를 희극적인 코러스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구리들"에서는 파로드parode,parodos에서 코러스가 자신을 데메테르의 코러스로 뿐 아니라(384-86), 희극들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하는 연극의 코러스로도(392-93) 소개한다. 입회자들의 코러스는 암묵적으로 디오뉘소스가 하데스에서는 높게 예우 받는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세련된 아테네 사람인 아리스토파네스의 디오뉘소스이든, 아니면 무엇보다 야만인들이 경배하고 그리고 데메테르와 함께 그들에 속하는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 사람들bakchai"의 디오뉘소스든 상관없이(아리스토파네스의 디오뉘소스는 하데스에 있을 때조차 데메테르의 딸을 만나지 않는다), 거기서 환대를 받았었을 것이라고 알려 준다.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가 비록 그들 신분으로는 아니지만 코러스에게 알리고 모습을 드러내자, 코러스는 그들에게 몇 사람 아테네 시민들을 놀리는 데(416 ff.), 즉 디오뉘소스의 일을 하는 데 동참하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다. 디오뉘소스가 디오뉘소스로 하데스에 내려왔더라도 하등의 위험이 없었을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가 헤라클레스로 변장한 것은 완전히 불필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가 디오뉘소스로 나타났었다 하더라도, 그 아래의 권력자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에우리피데스를 두고 싶어 한다고 추정하더라도, 그가 작가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작가와 함께 알맞은 기회가 왔을 때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코러스가 아테네 사람 셋을 조롱하고 난 직후, 디오뉘소스는 파로드parodos에서 거론된 주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플루토스의 거처쪽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그가 하데스의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코러스는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를 계속 경축하며, 입회하여 경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둔 행복을 칭송한다. 하데스의 방법에는 완전히 문외한인 디오뉘소스는 어떻게 하데스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 모른다. 크산티아스는 그에게 변장한 모습인 헤라클레스의 방식에 따라 하라고 조언한다. 그에 따라 문을 두드리자, 아이아코스가 문을 열고, 그 자신을 헤라클레스로 그에게 소개한다. 그러자 아이아코스는 "평화"에서 헤르메스가 트뤼가이오스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이하며, 그가 케르베로스를 데리고 달아난 것에 대해 그의 귀에 욕설의 홍수를 퍼붓는다: 이제 그는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인데; 모든 하데스의 공포들이 그에게 풀어져 나오게 될 것이다. 아이아코스는 잘 알려진 하데스의 공포들에 대해 말하는데, 헤라클레스는 아마 재빠르게 철수하여 도망했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디오뉘소스는 전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을 느끼고;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 제일의 비겁자로 경멸하면서 크산티아스가 그를 도우러 와서; 디오뉘소스는 그가 비겁하다는 것은 부인하고, 그러나 그가 크산티아스보다 더욱 용감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는데, 크산티아스는 엠푸사를 두려워하는 만큼은 아이아코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노예보다 더 약삭빠른, 그리고 헤라클레스로 변장하고 하데스로 내려온 것이 비단 불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실수라고 깨달은 그는 크산티아스에게 서로 역활을 바꾸자고 제안하는데; 크산티아스는 헤라클레스의 변장을 할 것이고 또한 그 자신은 짐을 운반하는 노예로 변장할 것이다. 크산티아스는 그의 용감무쌍함을 알아주는 것이 자랑스러워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디오뉘소스는 크산티아스와 평등을 기초로 살아 가는 데 익숙하여 역활의 변경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다음 바로 그들이 하데스의 공포와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페르세포네의 처녀 하인과 대면하는데, 그녀는 헤라클레스를 환영하고, 그가 하데스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말자 페르세포네가 마련한 맛있는 음식을 그에게 대접하기 위하여 그 여신의 집에서 나선 것이며; 그 여신은 명백히 케르베로스를 도둑맞은 것을 분하게 여기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한 피리 부는 소녀와 약간의 춤추는 소녀들이 실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그가 춤추는 소녀들에 대해서 듣자, 크산티아스는 이 초대를 아주 기뻐하며 노예 디오뉘소스에게 그를 따라 짐을 들고 집안으로 오라고 지시한다. 디오뉘소스는 물론 달라진 상황이라 그가 벌렸던 역활의 변경을 철회한다. 크산티아스를 설득하기 위해 그는 굳게 항거하는 그에게 노예이면서 필멸인 그가 헤라클레스라고 믿는 바보같고 정신 나간 사람일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크산티아스는 복종한다. 그는 디오뉘소스가 그의 마음과 역활을 바꾼데 대해 후회하며 살게 될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한다. 아직 디오뉘소스의 신분을 모르는 코러스는 그를 가장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칭송하는데(533,540), 변절자 테라메네스 같은 사람, 상황마다 그에게 맞는 더 무난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디오뉘소스는 이 칭송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것은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디오뉘소스는 에우리피데스를 찬양하고, 그리고 테라메네스는 에우리피데스의 교습생이다(967-70). 디오뉘소스는 왠지 에우리피데스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진짜 하데스의 공포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아이아코스의 분노로부터 페르세포네의 개입으로 구출되었다. 이제 다른 하층의 하데스 거주자들이 아이아코스가 미완으로 남겨둔 일을 맡는다. 두 접대하는 여자가 디오뉘소스를 헤라클레스로 알아보는데, 그 악한은 옛날에 그들 사업장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먹고, 돈을 지불하라고 하니까 지불을 거절하면서 칼로 그 두 여자들을 위협하였는데; 이제 그는 그 잘못에 대한 값을 지불할 것이고; 클레온이 나와, 그가 그를 바로 이날에 정의로 다스릴 것이다. 크산티아스는 디오뉘소스가 그에게서 헤라클레스의 역활을 빼앗아 간 것에 대해 그렇게 빨리 벌 받는 것을 즐거워하며, 그가 그 두 여주인이 처벌하고 싶어 하는 누가 봐도 분명한 헤라클레스임을 확인해 준다. 디오뉘소스는 다시 대단히 겁이 나서, 그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두 여주인이 욕하는 것 정도는 응대하지 않고, 다시 또 크산티아스 노릇이 매우 하고 싶어 하면서 크산티아스가 헤라클레스로 역활하기 바란다. 극단적인 반성과 자기 비하와 그리고 크산티아스로부터 다시는 헤라클레스 역활을 빼앗지 않겠다고 최고로 굳게 맹세하며, 그 노예에게 다시 헤라클레스가 되어 달라 꼬신다. 코라스는 크산티아스에게 부분적인 신 헤라클레스로 행동하라고 촉구한다. 코러스는 크산티아스를 편들고, 아니면 두 여주인에 반하여 오히려 신의 편을 든다. 비록 디오뉘소스를 매우 비겁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여도, 여주인들이 디오뉘소스를 헤라클레스로 여기는 것이 코러스로 하여금 크산티아스가 헤라클레스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고; 코러스가 그들보다 여주인들의 판단을 더 믿고, 혹은 그렇길 바란다면, 코러스는 디오뉘소스의 변장에 속은 것이다. 코러스는 한 쌍의 스트로페에서 디오뉘소스의 다재다능함에 대해 그를 칭송했었기 때문에 그들은 크산티아스를 칭찬하지 않는데; 그들이 디오뉘소스의 월등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디오뉘소스의 행동은 헤라클레스를 위협한 것에 대한 처벌이 사법적 처리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명되어 모두 현명한 것처럼 보이는데, 클레온이 '말벌들'이 부를 때처럼 여주인들의 호출에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아코스가 약간의 노예들을 대동하고 등장하여, 그들에게 크산티아스-헤라클레스를 묶으라고 지시한다. 헤라클레스를 흉내내며 크산티아스는 스스로 싸울 준비를 하지만, 그는 아이아코스의 수하들에 쉽게 제압된다. 얼마간 겁도 나고 얼마간 크산티아스에게 보복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로, 디오뉘소스는 헤라클레스의 잘못에 대해 크산티아스-헤라클레스에게 벌 주어도 좋다고 표시한다. 이에 대해 크산티아스는 디오뉘소스에게 보복하려, 자기가 전에 하데스에 왔었다는 것을 부인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기 노예를(디오뉘소스) 가장 혹독하게 고문하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디오뉘소스에게 너무한 일이어서; 디오뉘소스는 진실하게 그가 제우스의 아들 디오뉘소스이며, 헤라클레스로 알려진 사람은 그의 노예라고 선언한다. 크산티아스는 디오뉘소스의 단언을 부인하며 그것에 집착하고; 그가 만일 신이라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므로 채찍으로 더 많이 때리라고 요구한다. 디오뉘소스가 크산티아스에게 역습한다: 크산티아스 역시 헤라클레스라며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니까, 그는 디오뉘소스가 맞는 만큼 맞아야 한다. 크산티아스는 디오뉘소스의 제안이 공정하다며 받아들인다: 그 둘을 채찍질해서 아이아코스는 어느 누가 신이 아닌지 볼 것인데; 채찍질에 먼저 비명을 지르면 그가 신이 아니다. 디오뉘소스의 제안은 채찍이 다른 고문 수단에 비해 낫기 때문에 그에게 득이고, 크산티아스도 재청한 그 제안은 단련된 노예가 유약한 디오뉘소스보다 고통에 덜 민감할 것이므로 크산티아스도 받아들인다. 크산티아스의 제안에 따라 시험될 것은 엄밀히 말해 채찍질에 대한 둔감성이 아니라, 그 둔감성이 어느 정도냐인데; 신들이 사람들과 다른 것은 (느끼느냐 아니냐라는)종류가 아니라 (얼마나 느끼느냐라는)정도이다. 고통에 대한 민감성은 상처받기 쉬운 약점과 유사해서 그것이 도덕성과 관계가 있게 된다. 여기서 "새들"에서 신들에게 나타난 부도덕성을 기억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7-3)에서 헤라클레스가 사절로 온 장면을 보라). 아이아코스는 크산티아스가 공정하다고 칭찬해서; 그가 그를 헤라클레스로 여기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그를 확실히 인간으로 간주하는데(640,652), 즉 한 사람이 사기치는 것은 채찍질로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크산티아스에게 넘어가서, 아이아코스는 둘 중 하나가 신이라고 추측하는데, 둘이 신들이라 주장하면서 서로가 다른 하나가 신이라는 것을 부인할 경우 둘 가운데 하나는 신이 틀림없다고 그는 추리하는데, 혹시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둘 중 하나가 그가 다루어야 할 헤라클레스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채찍질 시합으로는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고 판명되는데; 만일 채찍질의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신성의 표시라면, 크산티아스도 최소 디오뉘소스와 같은 신이다. 확실히 아이아코스는 채찍질 시합 이전에 크산티아스가 인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합을 하고 나자 더 이상 그것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 두 신성 수험자에게 집안으로 들어가라 지시하여 하이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신들 자기들끼리 누가 둘 가운데 신인지 결정하게 한다. 그의 행동은 마치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에서 여자들이 다른 여자들에게 여자로 알려진 존재는 여자로 변장한 남자일 수 없다는 추론을 근거로 행동했듯이(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9-2)에서 클레이스테네스의 심사 장면을 보라), 신들에게 신으로 알려진 존재는 신으로 변장한 인간일 수 없다는 추론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한 존재가 신인지 아닌지는 신들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을, 혹은 인간들은 또 그 방법으로는 신들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을 것이고; 신은 그 스스로 신이라고 선언한 존재이다deus est quem dei deum esse declarant.(이것은 분명 진정한 신들이나 혹은 추정된 신들의 진실에 대하여 더 깊은 의문으로 이끈다.) 디오뉘소스는 아이아코스가 그들을 채찍질하기 전에 하이데스나 페르세포네의 결정에 맡긴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토를 달며 그의 마지막 지시를 따른다. 이런 토는 디오뉘소스가 채찍질에 둔감하지 않다는 것 뿐 아니라 무엇보다 디오뉘소스 그 자신이 오직 신성을 가리는 진짜 시금석만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디오뉘소스가 자신의 신분을 아이아코스가 채찍질을 하기 전에 밝혔기 때문에 그가 모든 것을 무릅쓰고 자신이 디오뉘소스라는 것을 숨기고 싶어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아주 명확하다: 디오뉘소스는 선견지명이 부족하다. 하데스로 내려갈 때 헤라클레스로 변장하겠다는 그의 결정이 이것을 충분히 보여 주었었고, 그 결정은 그가 노예처럼 채찍을 맞도록 이끌었다. 그로 하여금 하데스로 내려가도록 유도했던 것이- 에우리피데스를 데리고 다시금 돌아온다는 욕구가- 같은 결점의 결과물인지 아닌지를 즉각적으로 의아스럽게 한다: 에우리피데스를 증오하는 바보같은 대식가 헤라클레스가 극장의 신인 자신보다 더 나은 비극들의 심판원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인가? 어리석음과 식탐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스의 용감무쌍함이 무우사들의 일들에 관해서도 특히 "과격한" 작가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사랑이 깔린 디오뉘소스의 성격인 난봉꾼의 유약함보다 더욱 좋은 길잡이는 아니지 않은가? 신들의 적인 에우리피데스를 다시 데려오려 노력하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사람들을 신들에 대한 경외심에서 풀어 주려 시도하였다. 그의 에우리피데스 사랑은 프랑스 혁명에 앞서 일부 프랑스 귀족들이 가졌던 철학자들philosophes 사랑과 닮았다. 디오뉘소스는 그의 유약한 버릇을 그의 사회적 지위라 해야 할 것에 의해 응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런 지위는 채찍질 시합에서 가장 분명한 의문이 되는데, 그것이 그 신성을 총체적으로 의문스럽게 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모두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신들의 신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889-94;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 451). 디오뉘소스는 채찍질을 통해, 에우리피데스의 불경이 그 동류와 그래서 그에게 끼친 손상의 첫 조짐을 느끼고, 그리고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성격의 채찍질을 통해 그의 구원을 위해 그가 동료 신들에게 의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정치적인 교습을 받는다. 그래서 디오뉘소스가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하데스로 내려가는 수고가 그의 그 사랑을 치료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디오뉘소스의 영리함과 과격함은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에서 알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영리함과 과격함에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열등함은 디오뉘소스가 그의 에우리피데스 사랑을 치료하는 데- 그 치료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헤라클레스로 변장하고 하데스로 내려간다는 그의 어리석은 결정의 결과물이다-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신들이 실내에서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의 신성에 대한 재판 건으로 의견을 나누는 동안 무대에서는 코러스가 파라바시스를 펼친다. "개구리들"의 파라바시스는 지금까지 논의했던 다른 연극들의 파라바시스와는 다르게, 파라바시스 내용 그 자체만 빼고는 모든 부분들이 정상적인 파라바시스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파라바시스의 내용 그 자체는 코러스가 관객에게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관습상의 곳이다. "개구리들"의 파라바시스는 앞에서 계속해서 논의해 왔던 연극 세 편의 파라바시스들처럼 작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코러스 자신, 즉 입회자들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연극들의 파라바시스들과 다르다. 비록 이 파라바시스가 무우사에 대한 기도로 시작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신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무우사들의 일들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개구리들"의 파라바시스는 엄격히 정치적인데; 코러스는 자신들을 신성한 사람들이라 한다(675, 686). 이 "개구리들"의 파라바시스가 가진 특이성은 이 연극의 파로드에 들어 있는 무우사에 속한 것들에 대한 독특한 강조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이 코러스는 디오뉘소스의 영혼에 자리 잡은 감동을 기대하거나 모방한다. "뤼시스트라테"와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의 경우를 보면, 작가에 대한 대변인의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 파라바시스의 위축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그 두 연극에서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 "뤼시스트라테"는 비정상적으로 정치적이며,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은 비정상적으로 정치적인 것을 넘어가 있는데; 이들 중 어떤 이유가 "개구리들"에서 파라바시스의 위축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지가 과제로 남는다. 이 코러스는, 당연하게도 두 여주인공들에 반하여, 헤라클레스로 알려진 사람을 편들었는데, 도시에 대해 평등을 시행하라고 하면서, 그래서 특히 과두정치의 실수들에 관련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테네를 위해 해군에서 싸웠던 사람들에 대해 관대하라고 조언한다. 코러스는 도시가 신사들을- 체육관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코러스들을, 다시 말해 음악 속에서 양육된 좋은 집 태생의 예의 바르며 정의로운 사람들을- 최근에 찍은 질 나쁜 동전, 이를테면 이방인들이나 하층 사람들로부터 내려온 동전, 다시 말해 하층 사람들은 사용하면서도 지금은 쓰지 않는 옛날 동전이나, 새 금전을 다루듯이 부당하게 대우한다고 불평한다. 그렇지만 코러스는 도시가 올바른 종류의 사람들을 일하게 할 경우라 해도 도시의 성공을 약속하는 것은 꺼린다.
파라바시스 동안, 실내에서는 아이아코스와 크산티아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 중요한 행동의 결과를 듣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의 내용은 마치 "구름"에서 상응하는 장면인 실내교습의 내용을 듣지 못하였듯이 들을 것이 불충분하다. 여기서 "구름"과 "개구리들"은 연극의 사건을 촉발하는 전체 구도가 전부 이루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연극들이란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마치 스트렙시아데스가 그의 빚을 없애지 못하듯이 디오뉘소스는 에우리피데스를 데려오지 못한다. 아이아코스와 크산티아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이제 크산티아스가 노예라고 알려졌다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디오뉘소스가 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아코스는 디오뉘소스를 "귀족"(737)으로 말하는데, 즉 디오뉘소스에게 채찍질 시합에 앞서 크산티아스에게 적용하였던 표현을(640) 적용한다. 아이아코스는 디오뉘소스가 노예를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존경하게 된다. 그와 크산티아스가 디오뉘소스와 주인들을 일반적인 노예들의 시각에서 본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아이아코스가 디오뉘소스를 신이라 말하지 않는 것을 너무 인상적으로 받을 필요는 없는데; 노예들이 아마 가장 나쁜 신성 심판원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다른 종류의 탁월함을 심판하는 데도 역시 가장 나쁠 것이라 생각된다. 크산티아스는 실내에서 시끄러운 욕지거리를 듣게 된다. 그는 아이아코스로부터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가 서로에게 욕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이것이다: 하데스의 법칙에 따르면, 어떤 크고 똑똑한 기능들 속에 그 최고의 장인은 하이데스의 왕좌 옆에 놓인 왕좌에 앉혀진다. 하데스에서 아테네에서와는 다르게, 야망의 가장 높은 목표는 비극과 같은 예술에서 발군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데스의 지배자가 이 예술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인정한 것을(cf. 810-11) 생각하면 이것은 무엇보다 주목할 만하다. 비극의 왕좌는 지금까지 아이스퀼로스가 차지해 왔었는데, 에우리피데스가 내려와서는 그에게 홀딱빠진 수많은 범죄자들에게 그의 술수들을 자랑하였고; 그 갈채로 우쭐해진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의 왕좌를 주장하게 되었다. 하데스의 데모스는 그들의 기술에 관해 두 비극작가 중에서 누가 더욱 현명한지를 심판하라며 고함쳤다. 그렇지만 아이스퀼로스 지지자들은 숫자가 적은데, 진솔한 사람은 적기 때문이어서, "마치 여기와 같고", 아이아코스가 말하듯 극적 환상을 깬다. 아직은 데모스, 즉 악한들이(779, 781) 모두가 비열하지는 않있는데, 기꺼이 중재인에게 심판을 전적으로 위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두 노예들은 그런 미묘한 것들에는 주목하지 않고; 신사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cf. 768 역시) 그들은 하층 서민을 혐오해서, 마치 그들이 에우리피데스를 싫어하는 헤라클레스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다행하게 하데스는 민주주의가 아니라서: 비극의 왕좌에 대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하이데스에게 달렸는데; 하이데스는 즉시 그 두 비극작가 간의 시합이 열릴 것이는 결정을 내렸다. (왜 하데스에서 가장 높은 야망이 정치적인 것이 아닌지 혹은 왜 정치적인 시합이 없는지 하이데스의 지배력이 설명할 것이다.) 하데스에는 신사들과 데모스로부터 서로 독립적인 기관이 있기 때문에, 크산티아스는 왜 시합이 한편으로는 신사들을 옹호하는 쪽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반대로 데모스를 옹호하는 쪽으로 제한되는지 합리적으로 궁금해 한다: 왜 소포클레스는 비극의 왕좌에 대한 권리를 제기하지 않는가? 소포클레스가 하데스로 내려왔을 때, 그는 기쁘게 아이스퀼로스가 최고라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아이아코스로부터 알게 된다: 그는 하데스에 와서의 그의 자리를 하데스에 그가 와 있는 것을 받아들였던 것과 똑같은 마음의 평정으로 받아들였다(80-82). 오직 아이스퀼로스가 질 경우에만 소포클레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에우리피데스와 싸울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아이스퀼로스에 대한 자세는 크산티아스의 아이코스에 대한 그것과 닮았다(cf. 788-89 754-55). 소포클레스는 시합에 참여하지 않아서 "개구리들"에서의 배역이 아니다.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가 흉내를 과장하거나 혹은 희극적으로 연출하게 하는 극단에 치우쳐 있어 적격인 데 반해, 소포클레스는 평균적인 쪽에 있기 때문에 희극의 배역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희극에서 극단주의가 필수불가결한 희극의 최고 형식이기 때문에, 비극에서 비극의 최고 형식이 희극적 처치와는 상관없다는 것인가? 이것이 어떻든 간에 자기 주장에 관한 한, 에우리피데스는 소포클레스의 깃대와는 반대 편에 있고; 그는, 물론 아이스퀼로스는 아니고, 이름하여, 두 경쟁 작가들의 비극 작품들을 정확히 재고measure, 다는weighing 일이 벌어질 비극 작품들 시합의 형식에 대해 책임이 있다. 어려움은 단지 누가 심판이 되어야 하는가인데,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가 동의하듯 현명한 사람들이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으로 디오뉘소스가 하데스에 내려와 있고; 그 두 작가는 그들의 기술에 대한 그의 경험 때문에 그를 심판으로 받아들인다.
비극작가들의 시합은 "어느 누가 기술에 관해서 더 현명한가"를 결정하도록 계획되었다(780). 채찍질 시합은 "둘 중 누가 신인가"를 결정하게 계획되었었다(664). 마치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들이 시합에 놓여질 것이듯이(802),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도 시합에 놓여 있었었다(642). 마치 임박한 시합이 그들의 기술에서 두 경쟁자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보다 더 월등한가를 가릴 것이듯이, 채찍질 시합도 둘 중 고통에 대한 둔감성에 누가 다른 쪽보다 더 월등한가를 가리도록 계획되었었다. 후자의 시합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전자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채찍질 시합에 앞서 디오뉘소스와 '개구리들' 사이의 시합이 선행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직 중간의 시합이 디오뉘소스의 신분이- 그가 누구이며 그리고 그는 무엇인가- 주제인데, 첫 번째 시합에서는 그의 신분을 묻지조차 않았고, 그리고 세 번째 시합에서는 신분이 알려져 있다. 아마도 처음 시합은, 그러나 두 번째 시합은, 확실하게 결론을 내지 못했다. 다시 처음의 시합을 언급하는 것으로 다른 두 시합에 비교하여 처음 시합의 중요성을 부각하려는 의도는 없다. "개구리들"에서 채찍질 시합과 노래 시합을 연속으로 소개하는 것은 마치 이 연극이 (성격이 다른) 두 개의 이어진 코러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필수적이다.
코러스는 두 작가들 사이의 절박한 싸움에 대해 웅장한 언어, 거대한 장엄, 그리고 분노의 아이스퀼로스와, 미묘하고 예리한 변설, 그리고 시샘의 에우리피데스로 대비하며 묘사한다. 더 높은 차원에서 그것은 헤라클레스와 두 노예처럼 똑같은 우선권을 내민다. 디오뉘소스는 이 연극에서 에우리피데스를 선호하는(에우리피데스 자신은 제외하고) 유일한 배역이다. 그렇지만 디오뉘소스가 두 작가로부터 심판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이듯이, 신의 관점은 모호하지 않게 아이스퀼로스를 선호하는 신사들의 관점이나, 혹은 에우리피데스를 모호하지 않게 선호하는 하층민들의 관점과 똑같지 않다. 더군다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디오뉘소스는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그리워한 대가를 끔찍히 지불해야 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디오뉘소스는 원래 하데스로부터 달아나려는 최고의 비극작가에 비해 그냥 최고의 비극작가에게는 별로 많은 관심이 없었는데; 이러한 생각이 소포클레스를 제외시켰고, 아이스퀼로스는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소포클레스는 그의 온화한 마음으로 인해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그렇지만 아이스퀼로스는 온화한 성격과는 반대여서(cf. "말벌들" 883-84), 완벽하게 기꺼이 하데스를 떠나려 할 것이다. 어쨌든 디오뉘소스는 이제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 둘 중에서 비극의 탁월성에 관해, 아이스퀼로스가 살아 있는 것으로 기꺼이 돌아가려 하는지에 대해, 총체적으로 독립하여 선택하도록 몰린다. 그가 두 작가를 대동하고 나타날 때, 그는 그저 에우리피데스에게 그가 주장하는 비극의 왕좌를 포기하라고 충고해 놓았다. 왜 그가 그랬는지 알기 위해, 그가 하이데스를 만나 왜 그가 하데스로 와 있는지 설명했다는 것과, 그가 에우리피데스에게 그를 아테네로 다시 데려가겠다고 단단히 약속했다는 것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1411-14, 1469-70). 하이데스는 디오뉘소스의 행동을 하늘이 준 자연스런 것으로 간주했을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가 사라지는 것은 확립된 질서, 즉 아이스퀼로스의 지배권에 대한 폭동의 허위 선전을 끝내게 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이데스는 이미 두 작가들 간의 시합을 약속해 버렸다. 그가 그 약속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 하면, 에우리피데스가 공개적으로 시합을 기권하여 시끄러운 그의 데모스가 부당하다고 걸고 넘어오는 것을 피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디오뉘소스에게 에우리피데스로 하여금 그의 주장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라고 부탁하였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이 에우리피데스가 암묵적으로 아이스퀼로스의 특출함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었고, 그리고 이것은 구별을 바라는 에우리피데스 같은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데스에서 그들에게 주어질지도 모르는 명예에 비교될 수 있는 명예가 아테네에서는 없다. 에우리피데스에게는 아테네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과 하데스에서 비극의 왕좌에 앉을 가치가 있다고 공표되고 싶은 욕망, 이 둘 모두가 전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그가 조만간 하데스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스퀼로스는 에우리피데스가 그 경쟁자의 유명한 거드름을 본뜬 경멸 조의 침묵으로 그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결국 에우리피데스의 모욕이 아이스퀼로스가 같은 종류로 응대하게 하는 데 성공한다. 에우리피데스가 그의 배역들이 야만인들이라고 들추자, 아이스퀼로스는 에우리피데스의 배역들이 근친상간적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거지들이고 장애자들이라 응대한다. 디오뉘소스는 에우리피데스에게 아이스퀼로스의 무서운 분노를 경계하라고 말하고(그 신은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아이스퀼로스에게는(그는 그가 신인 양 말을 건넨다) 그의 화를 조절하라고 촉구한다: 작가들이 여자 생선장수처럼 입사납게 굴어서는 안 된다.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이 기꺼이 그의 비극 작품을 심사받는 첫 번째 사람이 되겠다고 엄중하게 선언한다. 그렇지만 아이스퀼로스는 에우리리피데스와 하데스에서 경쟁을 하는 것이 싫다: 그의 시는 산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살아 있고, 에우리피데스의 시는 그와 함께 하데스로 내려와 있는데; 그렇지만 그 신에게 내색하지 않고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도전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디오뉘소스는 코러스에게 무우사들을 노래하라고 지시하는데, 그가 시합에서 심판으로 가장 무우사다운 태도로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러스는 그 말에 따라 신성한 무우사들을 부르고, 다가올 지혜의 시합을-그 시합은 양쪽에서 나오는 최고로 대단한 힘과 꾀로 이어질 것이다- 지켜봐 달라고 한다. 심판의 지시로 기도하며, 코러스는 이제 완전히 공평하다- "구름"에서 '구름'이 '정의의 변론'과 '불의의 변론'이 벌이는 시합에서 공평했던 것만큼이나 공평하다("구름" 952-56).
그 다음 디오뉘소스는 두 작가에게 기도하라 지시한다. 아이스퀼로스는 즉각 지시에 따른다. 그는 데메테르에 기도하는데, 그녀는 그의 심성을 키웠고, 그것은 그녀의 신비스러움들을 값지게 하였다. 데메테르는 코러스가 따르고 있는 여신이다. 에우리피데스는 디오뉘소스의 지시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주저하는데, "다른 신들"에게 기도한다는 사실 때문이고, 신들은 아이스퀼로스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소크라테스와 그와 같은 사람들은 제외하고) 기도하는 신들과는 다른 신들이며, 그에게는 독특한 신들이라; 그는 에테르에 기도하는데, 에테르가 그에게는 자양분이자 혀를 움직이는 축이고, 또한 마찬가지로, 그는 지능의 신과 재능의 신에게 기도하는데, 그가 화제로 택해야 할 그것들로 변론들을 정확히 반박할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신들은 한 지방이나 국가가 아닌 세상과 우주의 신들이다. 그의 신들에 관한 혁신은 코러스가 공평함을 버리도록 이끌지는 않는다. 결국 작가들에 기대하는 것은 혁신이냐 아니면 근본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라고 요청받지 않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논쟁을 시작한다. 아이스퀼로스는 이제 그의 이킬레스와 니오베처럼 침묵하지만(832, 911-13), 작가들이 기도하라고 요청받았을 때, 아이스퀼로스는 시작을 부탁받지 않았는데도 맨 처음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에우리피데스는 '불의의 변론'이 한 것처럼("구름" 940-44) 그 상대편의 주특기인 영역에서부터 논의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먼저 논쟁을 개시한다. 에테르의 경배자인 그와, 데메테르의 경배자인 아이스퀼로스 사이에는 공통되는 기저가 없다. 신들에 관해 두 작가들 사이가 불일치한다는 사실은 왜 에우리피데스가 그 자신을, 원래 그가 의도한 대로(862-64), 두 작가의 비극 작품들에 대한 시적이나 기술적인 질을 토의하는 것에 제한하지 않는지를 충분히 설명하는 기도의 장면 동안에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가 보기에 아이스퀼로스는 과시꾼인데, 고의적인 모호함으로- 이를테면 그의 주인공들의 오래 끄는 침묵으로, 또한 새롭고 모호한 단어들을 황소 같은 크기로 구사하여- 속기 쉬운 그의 관객을 겁주는 데 집중한다. 아이스퀼로스에 대한 에우리피데스의 비평은 페이딥피데스의 그 작가에 대한 비평을 연상케 하는데("구름" 1366-67), 그는 명확성, 솔직성과 합리성 위에 서 있다. 하여 그는 그의 연극에서 서막prologue과 그리고 민주적인 배역을 사용한다<주2>. 디오뉘소스가 테라메네스의 스승인 그에게 그의 민주주의democratism를 너무 많이 쓰지 말라고 충고할 때, 그 작가는 그의 관객- "개구리들"의 관객(954, 972)-이 작가가 한 일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도록("말벌들" 1179-80), 말하고, 생각하고, 보고, 바라고, 원하고, 이해하고, 논쟁하고, 또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익숙한 가정의 일들을 들고 나와, 그것들에 의문을 품어 보라고 그들에게 가르쳤다 언급한다: 그는 아이스퀼로스가 관객의 경험을 뛰어넘는 화제를 들고 나와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버릇에서 결별하였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구별하고, 그리고 특히 집안 일에 대하여 의문을 일으키는 버릇을 가지게 만들었다<주3>. 이 주장의 정당성은 디오뉘소스가 강력히 확인해 주었다: 에우리피데스는 아테네 사람들을 총명하며 지성적으로 만들었고; 그 신은 에우리피데스가 아이스퀼로스에 비해 우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코러스 역시 에우리피데스의 강력한 공격 성향에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아이스퀼로스가 경멸로 응대할 것이 두렵지 않다. 그들은 그가 그의 엄청난 화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까 두렵다. 그렇지만 아이스퀼로스는 그의 대답을 가장 이성적인 태도로 시작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오로지 그 자신과 아이스퀼로스 간의 차이점에- 아테네 사람들을 더 총명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명확성과, 또한 아이스퀼로스의 몽매주의자적 애매모호함의 대립성에- 대해서만 말하였다. 아이스퀼로스는 에우리피데스가 말하는 두 작가 사이에 대립이 있다는 관점이나, 혹은 그의 아테네 사람들을 더 총명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에 대해 다투지 않는다. 그는 단지 에우리피데스가 작가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어떤 것이 그의 주장 속에 함축되어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달라고 빌 뿐인데; 달리 말해 그는 그에게 그 둘의 차이점보다 더욱 근본적인 그 둘 모두의 공통의 기저에 대하여 상기시킨다. 에우리피데스는 존경받을 수 있는 작가는 도시들에서 인간들을 더 좋게 만드는 작가라고 대답한다: 에우리피데스가 한 것처럼 사람들을 더 총명하게 만드는 것이 좋은지는, 총명한 사람이 반드시 좋은 시민인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달려 있다. 에우리피데스와 아이스퀼로스는(아리스토파네스는 말할 것도 없이) 작가들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관점에 대해 합의한다. 에우리피데스는 그 수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도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듯이, 그는 시(연극)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소크라테스가 어찌 해 볼 수 있었던 것을 도시와 말을 건네고 있는 작가는 할 수 없다. 아이스퀼로스는 에우리피데스에게, 시민들을 더 좋게 만드는 것과는 별개로, 만일에 그가 진솔하고 고상한 사람들을 완전히 나쁜 사람들로 바꾸어 놓았다면, 그가 무슨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고 계속해서 묻는다. 디오뉘소스는 에우리피데스가 그의 목숨을 걸고 나오는 것을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아, 그 질문에 에우리피데스 대신 대답한다: 그런 작가에 대한 적절한 처벌은 죽음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어떻게 같은 대답을 하는 것을 피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데스에서 그가 정치적 책임에 대하여 약간의 초보적인 훈련을 겪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디오뉘소스가, 유약하고 겁 많은 디오뉘소스가, 어떻게 그러한 대답을 줄 수 있었는지 역시 알기가 쉽지 않다. 그는 두 작가들의 시적 탁월함에 대한 기준에 동의하면서도 아이스퀼로스가 완전히 그 수준으로 살아 왔을까 하는 약간의 의문을 가진다. 아이스퀼로스가 호전적이고 애국적 성향의 그의 연극으로 주장하는 것을 고상한 작가 역시 신비 제의들, 유혈의 자제, 질병의 치료, 신탁들, 밭에서의 일, 수확의 계절, 파종의 시기 등에 대하여 쉬면서 가르칠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데; 여전히 이 성스러운 호메로스는 전투의 명령들과 뇌물의 수수, 그리고 사람들의 무장 등을 가르쳤었다고 주장한다. 호메로스-아이스퀼로스식의 작품이 성취한 특출한 보기는 라마코스인데, 그는 이 희극작가의 적대자로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평화"를 통해 기억된다. 사자의 정신을 가진 전사들을 소개하면서, 아이스퀼로스는, 그런 전사들을 키웠고, 품성이 떨어지는 여자들을 소개하면서, 에우리피데스는 여자들을 불법적인 욕구들로 채웠었다. 에우리피데스는 그가 전사들을 키우지 못했다는 질책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가 관객의 품성을 떨어트렸다는 질책을 부인하기 위해 그는 그에게 영감을 주었고, 아이스퀼로스에게는 누구나 인정하듯 이방인인 여신을 언급한다: 바로 아프로디테인데, '평화'가 같이 속해 있고("아카르나이 사람들" 989), 디카이오폴리스가 에우리피데스의 도움으로 그 자신을 위하여 확보한 축복이며, 그리고 디오뉘소스와 함께 아리스토파네스의 독점적인 관심의 대상이다(플라톤, '향연'117e1-2). 그렇지만 도시의 주장들에 대해 에로스의 신성을 반대하기에 불충분하다. 에우리피데스는 아프로디테의 힘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가 불법적인 사랑에 대한 고상한 여자들의 저항을 약화시켰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공격을 직면했던 다른 모든 작가들과 같이, 오직 작가들만은 아니지만, 그가 아프로디테의 압도하는 힘을 소개하는데 있어 그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했다는 사실에 기댈 수 밖에 없게 된다. 도시를 대변하여 아이스퀼로스는 이것이 근거가 타당한 방어라는 것을 단호히 부인한다: 악덕을 감추는 것이 작가의 의무인데; 성적 매력 속에 있는 나쁜 것을 소개하여 그는 악을 가르치고; 왜냐하면 그는 젊은이들의 교사이기 때문이며; 작가들은 오직 온전한 것들만 말해야 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퀼로스의 이러한 결정적인 지적에 반박할 수가 없다. 그는 아이스퀼로스식 큰소리가 온전한 것들을 가르치는 적절한 방법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그 화제를 피해 간다. 아이스퀼로스는 웅장한 결심들과 생각들이 웅장한 낱말들과 웅장한 모습들을 부른다면서 합리적인 대답을 하는데; 에우리피데스는 주인공들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저급한 단어들과 저급한 모습들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가 보기에 동정심 유발은 좋은 일이다. 마치 에우리피데스가 악을 숨기는 것이 작가들의 의무인지 아닌지라는 질문을 피해 갔듯이, 아이스퀼로스는 동정심 유발이 비극작가의 의무인지 아닌지라는 질문을 피해 간다. 그는 에우리피데스가 비극의 품위를 떨어트렸고, 그것으로 아테네 주민들에게도 그랬다는 것을 계속해 보여 주고; 아이스퀼로스는 '정의의 변론'이 '불의의 변론'을 비난한 것과 같은 죄로 에우리피데스를 비난한다: 그는 시민들을 체육관보다는 언변에 더 관심이 가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더 나은 사람들에 대한 대중들의 경의심까지도 부수어 버렸다. 그럼에도 디오뉘소스는 아이스퀼로스가 에우리피데스에게 책임을 묻는 그 변화가 전적으로 더 나쁘게 하는 변화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런 의문이 아이스퀼로스로 하여금 에우리피데스에게 오늘날 아테네를 괴롭히는 모든 악에 대하여 그 책임을 지우도록 유도한다. 헤라클레스 애호가 디오뉘소스는 아테네 운동선수들이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라는 것을 기쁘게 인정한다. 그는 아이스퀼로스에 비해 에우리피데스가 우월하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확실히 아이스퀼로스가 에우리피데스에 비하여 우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지는 않았다. 코러스로 말하면 그들이 시합을 완전히 판정 불가하다고 간주하는 것에 아무런 의문이 있을 수 없고; 그들 눈에는 판정이 전적으로 시합의 후반부에 달려 있을 것인데, 즉 후반부에는 비극의 목적이 아니라, 두 작가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덕행들과 악행들의 비극의 시적 혹은 기술적 실행에 대해 토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토론은 그다지 현학적이지 못한 관객이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코러스는 이 두 작가에게 아테네 사람들은 언제나 탁월한 본성을 지니고 있어, 더 이상 아테네 사람들이 교습을 받지 않았거나 현학적이지 않거나 하지 않다고 보장해 준다. 그래서 코러스는 관객이 아이스퀼로스보다는 에우리피데스 편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cf. 954-59, 1069-76).
반복해서 말하면, 지금까지 두 작가 간의 시합은 채찍질 시합처럼 판정 불가로 남는다. 도시와 아레스, 또 노여움(말벌과 같은)의 편에 서 있는 아이스퀼로스는 집 일과 아프로디테 또한 동정심의 편에 서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논박을 받지 않고 있다. 또 에우리피데스도 아이스퀼로스의 논박을 받지 않고 있다. 이것이 그 누구에게도 충격을 주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시합이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두 작가 간의 시합과 약간 닮은 점이 있는 "구름"에서의 두 변론 간의 시합에서, '불의의 변론'이 이기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 두 시합은 같은 것에 속하는데; 그것들이 이와 닮은 다른 모든 시합들과 다른 이유는 그 주제가 정치적 화제 그 자체를, 네펠로코큐기아의 건설 기반에 포함되어 있는 것조차, 아니면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구박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취했던 입장이 두 '변론'이 취했던 입장과는 깊숙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두 '변론' 사이의 시합은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장이- 아리스토 파네스의 스승이며, 아이스퀼로스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디오뉘소스의 입장이-, 한편으로는 아이스퀼로스의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에우리피데스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기 시작한다. 디오뉘소스가 입싸움의 당사자가 아니라, 단순한 구경꾼이라는 사실이 이런 의문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두 작가가 서로 어느 쪽으로부터도 단순히 논박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틀림없다. 서로의 입장은 그들끼리 강점과 약점이 있다. 아이스퀼로스는 그런 것들을 아프로디테나 동정심에서 구하지 않고; 에우리피데스도 그런 것들을 도시나 아니면 호전적인 애국심에서 구하지 않고, 그리고 건전하지 않은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마도 아리스토파네스가 보기에 비극에 의해 충족되어야 하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비극이 아니면 충족될 수 없는, 두 가지의 이질적인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아이스퀼로스에 의해 성취된 종류의 필요가 일차적이라는 사실은 그것 자체로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성취된 필요가 하위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디오뉘소스만큼이나 아이스퀼로스를 지지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격분에 차서 분노를 내뿜는 아이스퀼로스는 호전적인 애국심을 기르고 그리고 성적 매력의 불법적인 에로스를 감춘다. 어느 누구도 호전적인 애국심과 굳센 자제력이, 예전의 신들을 경배하는 것은 여기서 더 말할 것도 없고, 도시의 버팀목이라는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의문을 품을 수 없다. 그렇지만 "말벌들"과 다른 연극들에서 보았듯이, 말벌과 같음은 만일 시민에게가 아니라면 사람들에게는 위험한데; 그것으로 도시를 교화한다는 것은 고칠 필요가 있다. 말벌과 같은 배심원들은 동정심이나 웃음으로 달래어진다(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5-1)에서, 필로클레온의 배심원에 관한 설명 장면을 보라). 아이스퀼로스 비극은 그것의 부교재로 에우리피데스 비극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이 필요하다. 우스운 이야기로 아리스토파네스는 아이스퀼로스가 아닌 에우리피데스와 경쟁하거나, 아니면 아리스토파네스는 에우리피데스의 적이다. 아리스토파네스와 에우리피데스가 아이스퀼로스에 대항하는 데 함께 속해 있다는 것은 아리스토파네스가 아이스퀼로스를 에우리피데스보다 훨씬 더 대단한 작가로 여겼다는 가능성과 분명히 모순이 없고; 그가 진짜로 그랬느냐 하는 것은 작가들 시합의 후반부에 가서 확실하게 될 수 있다. 시합의 전반부에서 제시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임시적일, 즉 그러한 기능들을 한 작가나 아니면 한 작품에서 달성하는 불가능성보다는 차라리 이질적인 두 개 기능을 담은 연극 작품을 아리스토파네스가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하튼 그는 그의 연극이 교화하는 것과 고치는 것 둘 다 성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모든 좋은 작가들은 각자 그들 방식으로 두 기능을 달성할 것이다. 소포클레스에 대한 침묵이 이런 방향을 가르키는 잣대가 아닌지 궁금해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를 연결하는 고리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에우리피데스는, 그가 모호하다고 비난하는 아이스퀼로스의 서막들을 점검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가 다투고 있는 모호함은 부분적으로 동어의 반복에 기인하는데, 즉 허풍을 떠는 것이다. 그는 한 보기로 제법 긴 길이의 세 단락으로 구성된 운률을 가지고 논의한다. 비록 그가 각 단락의 운률이 많은 잘못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지만, 중간 단락에 대해서는 두 번씩이나 읊으면서도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 첫 번째 단락에 대한 아이스퀼로스의 정당성 주장에는 디오뉘소스가 보기에 신성에 대한 모독이 들어 있다. 세 번째 단락에 대한 그의 정당성 주장에 디오뉘소스도 만족하지만, 그 신은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에우리피데스의 반박이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이어서 에우리피데스가 보기에 동어 반복과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는, 그러나 이 비평은 죽은 사람에게 말을 하는 어려움을 에우리피데스가 간과했다는 판단으로 반박되는, 두 번째 보기에 대한 아주 짧은 논의가 따른다. 아이스퀼로스의 이 승리가 그로 하여금 에우리피데스의 서막epilogos의 점검에 나서게 유도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이 반복하기나 혹은 여백 채우기를 하는 잘못은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아이스퀼로스는 암묵적으로 그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확인한다(cf. 1184-85). 에우리피데스식 미세 분석을 에우리피데스의 서막에 적용하는 시도로 한번 성공을 거둔 후, 그는 신의 도움으로, 에우리피데스가 문장을 구축하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그런 문장들을 "그가 항아리를 잃어버렸다"와 같은 구문들과 쉽게 견주도록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는 아이스퀼로스의 서막이 모호할지는 모르나, 에우리피데스의 분명한 서막은 단조로움의 고통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이스퀼로스가 디오뉘소스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경우에서 성공을 거두고 나자, 에우리피데스는 싸움을 단념하지 않고 처음으로 데메테르에 걸고 맹세한다. 아이스퀼로스는 세 번이나 더 성공한다. 여기까지 아이스퀼로스는 에우리피데스의 문장을 모두 일곱 구절 인용했는데; 이 문장들의 네 번째 인용이(1217-19) 아이스퀼로스가 제기한 첫 번째 비평(1182)에 대한 대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에우리피데스가 아이스퀼로스의 "그가 항아리를 잃어 버렸다"로는 겨룰 수 없는 그의 운률 하나를 읊자, 디오뉘소스는 변덕인지 확신인지, 이 부분의 시합에서 에우리피데스의 패배를 감추고서는 그에게 아이스퀼로스의 노래들에 대해 점검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라 요청한다. 서막들에 관해서는 아이스퀼로스가 약간이라도 이겨 있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에우리피데스는 그가 아이스퀼로스가 나쁜 서정 시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선언한다. 코러스는 이 방면에 대한 아이스퀼로스의 탁월한 최고의 지위를 생각할 때 에우리피데스가 어떻게 그의 논점을 증명하는 데 성공할지 궁금한데; 그들은 서막들에 대해서는 이 같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기고자 하는 에우리피데스의 욕구 때문에, 아이스퀼로스는 서막들에 대해서도 마지막 말을 하였듯이, 노래에 매진하는 이번에도 마지막에 말하게 되는데; 사실로 말하면 아이스퀼로스는 시합 모든 부분에서 마지막에 말한다. 더더구나 놀라운 것은 디오뉘소스가 아이스퀼로스의 승리를 공표하지 않은 것인데; 사실 그는 어느 한 작가의 월등함을 판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갑자기 두 작가의 노래를 멈추라고 지시한다. 아이스퀼로스 역시 충분한 노래들을 가지고 있었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에우리피데스를 두 작가들의 운률들의 무게가 재어질 저울 쪽으로 데리고 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 무게 달기만으로 그들 사이의 시합을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은 후반 시합에서 아이스퀼로스가 시합 부분의 과제를 정하는 첫 번째 시합이다. 비극의 무게 달기는 정말 처음부터 준비된 것이었다(796-802). 그렇지만 에우리피데스는 그가 연극의 성격의 무게나 혹은 무거움을 줄이는 것으로 아이스퀼로스로부터 그것을 이어 받았을 때, 그가 비극의 성격을 바꾸었었다고 주장하였다(939-41). 아이스퀼로스는 두 작가들의 운률을 무게로 다는 것이 시합을 그에게 유리하도록 해결할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디오뉘소스조차 아이스퀼로스의 운률이 저울을 아래로 누르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디오뉘소스는 그 제안을 수락한다. 코러스는 그들 운률의 무게를 비교하여 작가들 간의 시합을 결정하는 새로운 개념에 매혹된다: 그 누구도- 아이스퀼로스를 제외하고?, 아리스토파네스를 제외하고?- 이것을 생각지 못하였을 것인데; 확실히 영리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수고를 다 한다. 시합이 진행되어 가는 동안에 에우리피데스가 첫 번째로 이야기한다. 이 마지막 부분의 시합에서는 일찌감치 결론에 도달하고; 각자 세 번씩 그의 운률들을 저울에 올리는데, 세 번 모두 아이스퀼로스가 승리한다. 두 번째 경우를 보기로 드는 것으로 그 이유가 충분할 것 같다. 에우리피데스의 운률이 '설득의 신'은- 뤼시스트라테의 여신("뤼시스트라테" 203)은- '변론' 이외의 다른 신전이 없다고 선언하지만, 그러나 디오뉘소스의 눈에 '설득의 신'은 어쩐지 가볍고 지적 수준이 떨어져 보이고; 그렇지만 아이스퀼로스의 운률은 '죽음의 신'이 현재에 연연하지 않는 유일한 신이라고 선언하는데,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조차 부인할 수 없듯이, '죽음의 신'은 가장 무거운 악이다. 탁월함의 기준으로 무거움이 채택되었을 때, 에우리피데스가 무엇보다 에테르를 경배하기 때문에(cf.1352-53) 이미 에우리피데스가 질 수 밖에 없다고 눈치채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스퀼로스는 이제 그전보다 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다. 알기 쉬운 분명한 결정을 가장 평균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시합의 유일한 부분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아이스퀼로스가 이긴다. 그는 가장 가벼운 아니면 가장 얇은 근거- 그가 현명하게 선택한 근거- 위에서 두 작가 중에 더 무게가 나간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지만 코러스는 침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오뉘소스는 침묵을 지킬 수가 없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 시합에서 그가 아이스퀼로스의 손을 드는 판정을 거절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그에게 대단한 찬사를 보내는데, 왜냐하면 그 신이 작가들의 엄청난 상호 논박의 말 때문에 완전히 어리둥절해졌었다고 추정하는 것조차, 마지막이면서 완전히 단순한 시합의 부분에서, 전적으로 어리둥절하지 않는 결과가 나온 뒤의 그런 어리둥절함을 기억하는 데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디오뉘소스가 하나는 현명한 것으로 다른 하나는 즐거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두 작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간직하고 싶다는 것을 근거로 그 시합의 판정을 내리기를 거부한다. 두 작가들과 친밀한 사이를 간직하기 위해 그 신은 두 작가 중 누구에게 무겁고 가벼운 어느 것을 배정할지 백지로 남겨 둔다. 한 경우를 어느 쪽으로든 만들 수 있는데도(cf.916-18), 디오뉘소스는 아이스퀼로스가 에우리피데스보다 더 현명하고,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퀼로스보다 더 재미나다고 여기는 것으로 믿게 된다. 왜냐하면 더 이상 교화하는 것과 교정하는 것 간의 차이에 대해 말할 것 없이, 아이스퀼로스는 무게감에 있어 에우리피데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였고, 그리고 무게감 같은 그런 것들은 죽음의 예에서 충분히 보여 주었듯이 재미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밖에 "개구리들"과 "테스모포리아 측제의 여자들" 두 편에서 에우리피데스의 지혜에 대한 불완전한 성격은 충분히 증명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에우리피데스가 지혜에 있어 아이스퀼로스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신이 현명하다는 말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cf. "작가와 여자들" 450-5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대해 두 작가들 간의 시합이, 마치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 간의 채찍질 시합이 판정불가로 남아 있듯이, 판정불가로 남아 있다고 말하는 편이 가장 현명할런지도 모른다.
신성에 대한 시합은 채찍질로는 결판을 낼 수 없었지만 하이데스에 맡겨서 결판났다. 비슷하게 비극에 있어 우월성에 대한 시합은 두 작가나 디오뉘소스가 비극을 검증하는 것으로는 결판이 날 수 없었는데, 하이데스가 끼어든 덕분에 결판이 난다. 만일 하이데스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두 작가 간의 사합의 자연스런 결과로 아이스퀼로스가 비극의 왕좌를 계속 차지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왔었을 것이고; 이것은 에우리피데스를 이승으로 다시 데려가겠다는 디오뉘소스의 욕구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하이데스가 끼어들어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간단한 해결책이다. 하이데스는 두 작가 간의 시합에서 그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한 작가를 이승으로 데려가려는 디오뉘소스의 욕구가 성취되도록 한다. 만일 그가 두 작가 중 하나를 편들어 공표하지 않는다면, 디오뉘소스가 하데스로 내려온 일은 헛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에우리피데스를 데려간다는 것은 에우리피데스에게 유리하게, 혹은 아이스퀼로스가 아닌 그를 비극의 왕좌에 합당한 승자로 공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스는 사실상 디오뉘소스가 그의 변덕이나 즐거움에 따라 두 작가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데; 그는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만 디오뉘소스는 시적 탁월함으로는 어느 작가가 더 좋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두 작가에게 그가 하데스에 내려온 목적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그의 곤궁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구원받았던 적이 있는 도시가 도시의 코러스들을 지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려왔다고 선언하고; 따라서 그는 도시에 좋은 충고를 할 수 있는, 즉 도시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고 그래서 아테네의 극장의 탁월함을 위한 도시의 외연적 조건들을 지킬 수 있는, 두 작가 중 하나를 아테네로 다시 데려갈 것이다. 이것은 디오뉘소스가 시적이 아닌, 정치적인 근거로 판정하고 공표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훔치려고 헤라클레스로 변장하고 내려갔을 때, 그는 도시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채찍질당하는 것을 끝내기 위해 그가 그의 신분과 의도를 하이데스에게 드러내도록 몰리자; 그는 그가 속한 신들의 사회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약간의 무게를 얻었는데;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하데스로부터 들키지 않고 달아난다는 데 더 이상 어떤 의문도 없다. 더군다나, 하이데스가 그를 중재인으로, 즉 공평하게, 두 작가의 시합에서 행동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단점들- 특히 도시에서 인간들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단점들에 주목하게 되고; 그는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선택하는 이유, 즉 정치적으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를 대지 않고서는 에우리피데스를 데려갈 수 없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채찍질 시합을 통하여 사회의 중요함을 깨닫고 나서, 그는 결과적으로 작가들의 시합에 판정을 내리려 하는 과정에서 사회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데스에서, 거기서는 시가 아테네에서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데, 디오뉘소스는 시의 조건으로서 도시가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는다.
신성의 시합은 그것이 일차적인 기준(고통에 대한 둔감성)의 관점에서 결정되어야 하는 한 결판이 나지 않는데, 그러나 그것은 다른 기준이(동료 신에 의해 신으로 인정되는) 적용되자마자 결정된다. 비슷하게 비극에서 최고수를 가리는 시합도 그것이 일차적인 기준(시적 탁월성)의 관점에서 결정되어야 하는 한 결판이 나지 않는데, 그러나 그것은 다른 기준이(정치적인 충고를 주는 데에 좋은 것) 적용되자마자 결정된다. 더구나 신성의 시합은 중재자들의 교대를 불러 왔고; 중재자가(하이데스) 시합을 결판내는데, 왜냐하면 첫 중재자와 대비해 볼 때, 그는 능력을 요구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작가들의 시합의 경우에는 중재자들의 교대가 없는데; 마치 디오뉘소스가 최고의 비극작가가 누구인가를 판정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듯이, 그가 정치적인 지혜를 판정하는 능력도 역시 갖추고 있는 것으로 어쩐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 밖에도, 한 작가를 그가 다른 작가에 비해 정치적인 충고를 하는 데 더 낫다고 반드시 선호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만일 이 의문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작가들의 시합은 판정불가로 남는데; 신성에 대한 시합에서 이와 유사한 상응물은 디오뉘소스 혹은 크산티아스가 신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끝으로 두 시합들에 대한 비교는 신성의 시합이 디오뉘소스가 크산티아스보다 도시에 더 유용하다는 것을 근거로 결정되었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디오뉘소스는 맨 처음 두 작가에게 알키비아데스에 대해 무슨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데, 도시가 그에 대해 판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스퀼로스는 먼저 도시가 알키비아데스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알고 싶은데; 그가 생각하기에 그는 도시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지 못하고서는 도시에 충고를 해 줄 수가 없다. 디오뉘소스는 그에게 도시가 그를 그리워하고, 그를 미워하며, 그를 갖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에우리피데스가 알키비아데스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확실하게 한다: 알키비아데스는 길게 보았을 때 조국에 도움이 될런지 모르나, 그는 먼저 대단히 위험한 짓을 할 것인데; 그는 그 자신을 돌보는 데는 좋은데, 도시를 돌보는 데는 비효율적이다. 디오뉘소스는 그의 대답을 칭찬한 다음 아이스퀼로스의 견해를 묻는다. 아이스퀼로스는 알키비아데스를 편들어 이야기한다: 도시에서는 사자를 기르지 않는 것이 최선이나, 한번 키웠으면 반드시 도시의 방식들에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 디오뉘소스는 아이스퀼로스의 대답을 칭찬하지 않는데, 그것이 에우리피데스 것보다 도시가 바라는 것에 더 따르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이번에도 다시 판정을 내릴 수 없다: 작가들 중 하나는 현명하게, 다른 쪽에서는 확실하게 말하였다. 이 결과는 놀라운 것이 아닌데; 디오뉘소스는 시작서부터 알키비아데스에 관한 질문을 단지 그의 첫 번째 질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마지막 질문을 작가들에게 건넨다. 알키비아데스가 도시를 구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한 것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작가들에게 도시를 구하는 방법으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는다. 에우리피데스는 디오뉘소스의 기대가 터무니없는 것이라 간주하고,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희극배우인 양, 해전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런 다음 아이스퀼로스가 끼어들며, 그가 알고 있는 한 방법을 말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에우리피데스는 진지한 대답을 하도록 몰린다: 현재의 정책이 재난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반대의 정책이 구원으로 이끌 것이라고 당연히 받아들여서, 지금 신용하고 그리고 지금은 그들을 맡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도시의 일들을 맡긴 시민들을 신용해서는 안 된다. 이 제안은 파라바시스에서 코러스가 만들었던 것을 기억나게 한다(717-37). 디오뉘소스는 이런 제안에 대단히 기뻐하는데, 단지 그것이 에우리피데스 자신의 것인지만 궁금하고; 작가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며 그를 안심시키는데; 처음의 우스개 제안은 그의 조력자 혹은 하인인 케피소폰에 근원을 둔 것인데; 아이스퀼로스가 끼어들면서 압박감을 받기 이전에 그가 했던 우스개 제안은 그래서 그의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디오뉘소스는 아이스퀼로스의 견해를 묻는다. 아이스퀼로스는 다시 약간의 정보를 요구한다: 지금 도시는 그들의 일을 온전한 사람에게 맡기고 있는가? 도시가 나쁜 사람에게 지배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눈에 구원의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디오뉘소스는 그가 이승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도시를 구원하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촉구한다. 아이스퀼로스는 분명하게 이승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어서, 그는 "거기에서" 충고를 주겠다고 대답하고, 하데스에서 충고를 주는 것을 거절한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들 적들의 땅은 그들의 것으로, 또한 그들의 땅은 그들 적들의 땅이라 여기지 않으면 안 되고, 그들의 해군을 그들의 재산으로, 그들 재산을 그들의 장애물로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페리클레스나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책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그래서 작가들은 디오뉘소스의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각자 다른 두 대답을 내놓는데, 에우리피데스의 첫 대답은 우스개였던 반면, 아이스퀼로스의 첫 대답은 공개적으로 낙담되런 것이었는데; 작가들은 약간의 압박감을 느껴 각자 두 번째의 대답을 내놓았고, 그것들은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디오뉘소스는 아이스퀼로스가 추천하는 정책이 이런 상황에서 적용 가능한 것인지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는 확실히 에우리피데스의 충고를 칭찬한 만큼 아이스퀼로스의 것을 칭찬하지 않는다. 하이데스는 그에게 결정하라 재촉한다. 그는 그의 영혼이 선호하는 작가를 선택할 것이라 선언한다. 모두가 그 신의 판결을 최고의 긴장 속에 조용히 기다리는 동안 에우리피데스는 이기고 싶고, 이승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에 쫒겨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다. 그는 그 신에게, 비록 그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없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를 택하도록 되어 있다고 말한다: 디오뉘소스가 선택함에 있어,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데려오겠다고 신들에게 맹세한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디오뉘소스에게 너무한 것이다. 에우리피데스는 디오뉘소스나 혹은 다른 어떤 신들이나 사람들에게 그가 한 서약을 지키라고 끝까지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신은 에우리피데스의 운률 가운데 한 구절, "혀는 맹세했었으나 마음은 아닌"을 인용하고, 그가 아이스퀼로스를 선택한다고, 즉 그를 승자로 판정한다고 선언한다. 에우리피데스가 그 신의 행동 방침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자, 그는 작가의 작품 가운데서 다소 간에 문학적인 다른 반대의 어구를 인용하여 대답한다. 에우리피데스는 그 자신의 무기에 의해 패배하였다. 첫 눈에 보기에 디오뉘소스가 영리한 에우리피데스를 능가하는 영리함을 보이려는 유혹을 단순히 이기지 못했다거나, 혹은 그의 결정이 단지 변덕일 뿐이라고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들의 시합에서의 결정은 채찍질 시합에서의 결정과 같이 변덕스런 점은 거의 없다. 채찍질 시합에서의 위태로웠던 것은 신들과 인간들 간의 차이점이었고; 신들은 서약의 성스러움을 위해 반드시 꼭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cf. "구름" 395-97). 에우리피데스는 그것을 양쪽 모두의 방법으로 가질 수는 없는데; 신들을 부인하는 것은 위증으로 보복하고(아니면 그 위증을 부인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맹세를 지킨다고 기대하는 것은 그에게 가망 있는 것이다. 디오뉘소스는 에우리피데스가 신들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아이스퀼로스에게 상을 수여하는 것으로 정당하게 처벌한다. 그 신 스스로 위증의 행동으로 위반한 신성한 서약의 기저를 파괴하기 위해 그가 작가를 처벌한다는 것을 이것이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는 진정 사악한 행동을 하였지만, 그러나 '구름'처럼 정당하게 하였다("구름"1462). 무책임한 난봉꾼이 이제는 전적으로 교화적으로 되었다. 그 배역들이 한 말들에 대하여 작가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을 근거로 디오뉘소스 행동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힙포뤼토스의 "혀는 맹세했었으나 마음은 아닌"을 그 말의 본문에 대해서는 고려하지조차 않고 에우리피데스에게 그 책임을 지우려 하면,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소크라테스에게 제우스는 존재하지조차 않는다라는 말을 하게 했기 때문에, 그에 따르면 제우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해야 만 공정한 것이다. 디오뉘소스가 전에 그의 굳센 맹세들을 어겼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26-29, 586-89, 591-601).
디오뉘소스가 에우리피데스를 괘멸시킨 그 뒤에, 하이데스는 디오뉘소스와 아이스퀼로스가 길 떠나기 전에 그들을 식사에 초대하여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들이 들어가자 코러스는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고, 동료 시민들과 그의 친척들과 그 친구들의 이익을 위해 축복 속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완벽하게 분별력 있는 사람과,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함께 앉아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면서 음악적인 것을 버린 채 비극 예술의 최고 부분을 저버린 정신나간 사람을 대비하는 것으로 시합의 결과를 총정리한다. 이 노래를 전적으로 오해하지 않으려면, 즉 코러스가 외치는 이것이 아리스토파네스 그 자신을 위한 외침이라는 오해를 피하려면, 에우리피데스가 아프로디테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을 배운 데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가 평화의 챔피언이라고 알았던 아이스퀼로스는 "개구리들"에서 그 자신이라고 소개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코러스가 표현하고, 그리고 전체로서 연극이라는 방법에 의해 전달된 견해는 아이스퀼로스식이거나, 아니면 지하 세계의 견해이거나, 부분적인 견해이고 사실은 낮은 견해이다: 그 견해는 하데스에 속한다. 특히 "평화"에서 소개된 대로 높은 천상의 견해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교정적인 경우가, 하데스에서조차, 교화적인 것과 구별하여, 얼마나 강력하게 언급되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하이데스, 디오뉘소스, 그리고 아이스퀼로스가 다시 등장한다. 하이데스는 아이스퀼로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면서, 그에게 좋은 조언자들과 함께 "우리들의 도시"를 구하라고 격려하고, 몹시 불쾌한 약간의 아테네 사람들에게 만일 하이데스의 폭력적 행동에 의해 끌려 내려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자살을 택해 빨리 그에게 오라 하라고 말한다: 하데스는 바람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알맞는 곳이다. 아이스퀼로스는 그가 하이데스가 하라고 한 것들을 모두 할 것이라고 대답하고, 그에게 다음 차례로 왕좌를 아이스퀼로스 다음의 2 인자인 소포클레스에게 줄 것과,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잘 지켜 달라 한다: 아이스퀼로스는 결코 하데스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계속해서 비극의 왕좌를 악한이나, 거짓말쟁이나, 익살꾼, 즉 에우리피데스가 차지하는 일을 막아 달라고 하이데스에게 촉구한다. 아이스퀼로스가 에우리피데스를 과시자로 표현하지 않는 점을 주목하라(cf. 909).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마지막 말은 전적으로 아이스퀼로스의 말이다: 하이데스가 그의 그의 마지막 뜻이나 유언을 집행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디오뉘소스 자신은 이 마지막의 장면에서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얼마 있지 않아 아이스퀼로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돌아올 하데스에 남겨지는 것으로 충분하게 처벌받았다: 그는 두 번이나 죽어야 할 것이다<주4>. 에우리피데스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벌이 소크라테스에 비해 덜 엄중하다는 것을 알텐데; 대다수의 그의 숭배자에게 그의 특이한 구상을 펼쳐 보이는 것을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의 벌이 소크라테스의 것보다 덜 엄중한 것이 정당한가는 잘 알려져 왔었다. 하이데스는 작가의 마지막 말에 자기가 침묵했던 것에 대해 코러스에게 전송의 노래로 그 자신의 노래들을 부르라며 아이스퀼로스를 위로한다. 크산티아스가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는데, 쇠똥구리가 하늘에 남겨졌듯이 하데스에 남겨졌을지도 모르고, 디오뉘소스의 짐을 운반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코러스는 지하의 신들에게 아이스퀼로스에게 좋은 여행과, 그리고 도시를 위해 대단히 좋은 것들을좋게 생각해 내도록 보장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그들은 평화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표시한다.
"개구리들"은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무작정의 숭배로부터 아이스퀼로스에 대한 선호에 이르기까지 아리스토파네스의 교육자에 대한 교육을 소개한다. 이 교육은 하데스에서 이루어진다. 디오뉘소스가 아테네와 똑같은 하데스로 내려가는 것은 트뤼가이오스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그리스 신들과 우주의 신들과의 마찰 때문에 전적으로 성공인 것에 비하면 전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디오뉘소스의 전환은 헤라클레스로 변장하고서 하데스로 내려가는 그의 실수에 의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왜냐하면 그 실수가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 사이의 지혜에 관한 시합과 아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절대로 닮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채찍질 시합으로 이끌기 때문이다.("개구리들" 끝.)
<주1> 디엘스Diels,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Vorsokratiker', fr.1
<주2> Cf. 플라톤, '테아이테투스' 180c7-d5.
<주3> Cf.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 383-432;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에 대한 회상' III
<주4> Cf. 크세노폰, 가정(경제)론Oeconomicus 끝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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