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여자들의 의회"
1. 이 연극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나 "구름"과 같이 연극의 사건을 보여주는 전체 구도를 책임지는 배역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렇지만 프락사고라는 디카이오폴리스와 스트렙시아데스보다 훨씬 모호하지 않은 주도권자인데, 디카이오폴리스의 전체 구도는 암피테오스의 개입을 전제로 하고, 그리고 스트렙시아데스의 전체 구도는 '구름'이 개입하지 않으면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락사고라는 뤼시스트라테를 연상케 하는데, 그녀가 여주인공인 그 연극은 그녀의 독백으로 열리지만, 그러나 뤼시스트라테의 독백은 유별나게 짧다. 뤼시스트라테와 같이 프락사고라도 동료 여자들을 기다리는데, 그러나 그녀의 개막 발언은 다른 어떤 배역들의 개막 발언들보다 그녀가 처한 상황에 더욱 강인함을 보인다. 그녀는 가지고 온 등불을 드는데, 그녀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신호이다: 그 등의 불빛은 여자들의 비밀들, 백일 하에서는 반드시 감추어져야만 하는 비밀들에 대한 그들의 비밀스런 즐거움들을- 그들의 절친한 사람들과 그들의 도둑질들을- 반짝이게 하는 유일한 불빛이고; 그 인공의 등불이 태양도 달도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이를테면 프락사고라는 법을 고치는 기술을 요청한다. 등불 역시 여자들이 얼마 전에 결정했었던 계획들의 집행을 지켜볼 것이다. 여자들은 새벽이 오기 전에 의회의 좌석을 차지하기 위하여 남자로 변장하고 밤중에 모이기로 결정했다. 프락사고라는 동료들을 기다려 왔었고, 뤼시스트라테와는 달리 그녀는 그들이 기다리게 하는 것에 화를 내지 않는데, 한밤중에 남편 몰래 집을 나오는 것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며; 이제 평화가 와서 그들 남편들은 군복무로 집을 떠나 있지 않다. 다른 여자들이 하나 둘씩 혹은 여러 명이 모여 등장한다(모두 결혼했으며 성내에 산다). 그들이 전부 모였을 때, 프락사고라는 지난 번 회의에서 결의한 대로 오늘 회의에서 완전히 남자들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도록 모두 앉아 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은 아직 완전히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예를 들면 그들이 가지고 온 턱소염을 아직 붙이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들은 만족스레 점검을 끝낸 뒤, 날이 밝아 의회가 열리기 전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화제를 바꾼다. 그들은 오늘 이행하기로 결의했던 행동의 중차대함을 직면해야 한다: 도시의 이익을 위해 도시에 관한 일들을 인수한다. 성공하려면 그들은 의회에서 무엇을 말하고 행동할 것인지 예행 연습을 해야 한다. 예행 연습이 꼭 필요한 것이 프락사고라는 예외지만 여자들이 의회에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242-44). 여자들은 특히 여자들만이 걸고 맹세하는 여신들로 실수들을 하여 여자라는 것을 드러내곤 해서, 프락사고라는 한 사람이 의회에서 여자들을 대신하여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보기를 하나 들어 준다. 의회의 결정이 잘 이루어지도록 신들에게 기도한 다음, 그녀는 도시의 지배자의 빈약한 자질과 데모스의 빈약한 자질로 인한 결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시는 의회가 없었던 시절 동안 더 좋았었다. 모두가 오직 자기의 이익만 챙기고, 아무도 공동의 선은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의회가 집안 일들의 아주 좋은 관리자인 여자들에게 도시를 넘겨주면 도시는 아직 구제될 수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좋은 특성이 있다: 그들은 옛날 법과 옛날 관행을 모든 면에서 그대로 따르는 반면, 남자들은- 적어도 아테네 남자들은- 무엇이든 바꾸고 싶어 해서 지금의 완벽하게 건전한 관행도 바꾸고자 한다. 따라서 프락사고라는 여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묻지 말고 도시를 여자들에게 넘기라고 아테네 남자에게 촉구한다. 그들의 어머니로서 또한 집안 일의 관리자로서의 자질이 충분하게 보증한다. 특히 그들은 속임을 당하지 않을 만큼 속임수에도 뛰어나다.(속임수에서도 얼마나 그들이 뛰어난가는 현재 그들의 행동으로 보여 준다.) 프락사고라의 그들에 대한 생각처럼 좋은 지배자란 예전의 법을 따르고 또 남을 속이는 사람들에게도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녀와 다른 몇 사람의 의회에서의 행동에 대해 질의응답을 마친 후, 프락사고라는 그들에게 모두 남자 옷들을 입고 서둘러 남자들처럼 의회로 행진하라고 지시한다: 만일 그들이 정시에 도착하지 못할 경우, 회의 수당을 받지 못할 것이다. 여자들이 모두 남자들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남자들처럼 개인의 수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cf. 205-7).
2. 프락사고라의 제안과 뤼시스트라테의 제안("뤼시스트라테" 493-95)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지만, 그러나 뤼시스트라테가 힘으로 얻으려 한 것을 프락사고라는, 그녀의 이름에 걸맞게, 대화나 아니면 속임수로 얻으려 한다. 무엇보다 뤼시스트라테의 목표는 프락사고라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다. 뤼시스트라테는 평화를 가져 오게 하고 싶고; 프락사고라는 아직은 듣지 못한 정치 체제의 변화를 가져 오고 싶다. 뤼시스트라테가 가진 연극의 전체 구도의 진실이란 것은, "새들"만 빼고, 지금까지 논의해 온 모든 다른 연극의 사건들에 생명을 불어 넣는 전체 구도들의 진실인데; 모든 그들의 전체 구도는 프락사고라의 전체 구도에 비해 그 폭이 모자란다. 프락사고라의 전체 구도가 가지는 폭은 그녀가 연극을 개막하는 것을 지켜보는 관찰의 폭에 반영된다.
3. 프락사고라와 다른 두 명을 제외하고, 마치 "새들"에서 '새들'이 무대에서 그들끼리 코러스를 만들었듯이,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코러스를 형성한다. 그들이 들킬 경우 당할 위험을 상기시킨 다음, 절반의 코러스가 마치 회의 수당을 받길 갈망하며 의회로 행진하는 남자들로 구성된 것처럼 노래한다. 여자들은 한번 여자들이란 것을 드러내는 위험에 빠진다. 나머지 절반의 코러스는 교외에서 온 남자들처럼 행세하며, 수당이 적어 시민들이 수당 때문에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던 좋았던 옛 시절을 칭송한다. 어느쪽 절반의 코러스도 늙은 나이를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이 남자 역활을 하는 데는 성공적인지는 몰라도, 늙은 남자 역활을 하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다.
4. 그들이 떠난 뒤 여자들이 모였던 프락사고라의 집 앞에 프락사고라의 남편인 블레퓌로스가 등장한다. 그는 날이 밝았는데도 아내가 없자 매우 어리둥절해 있다. 그는 그의 구두와 외투가 필요했기 때문에 아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그것들이 필요했던 것은 그 스스로를 급작스런 압박감으로부터 편하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의 옷을 걸치고 아내의 신을 신을 수 밖에 없다. 그의 아내의 자발적인 변장이 그를 어쩔 수 없이 변장하게 한다. 아직은 어두워서 그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는데; 그래서 그는 어디든지 앉을 수 있다. 스트렙시아데스가 그의 불안의 뿌리에 대해 회상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반성하면서, 그는 이미 늙은 몸으로 아내를 얻은 자신에게 욕하는데; 그녀는 사랑에 대한 모험으로 집을 나간 것 같다. 그의 신음 소리가 이웃을 깨운다. 그리하여 그의 망신스런 불안은 비밀로 남지도 못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웃은 똑같은 불안으로 고통 받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아내 역시 그의 신과 외투를 가지고 사라졌다. 그 이웃은 그의 아내가 다른 여자 친구의 아침 식사 초대를 받았었을지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아니면 블레퓌로스를 위로한다. 두 사람은 의회에 가고 싶은데도 둘 다 그러지 못하는데; 그 이웃은 외투가 하나 밖에 없고, 블레퓌로스는 그가 편해지는 것을 지체시키는 변비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도움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서, 그는 여자들이 아이를 낳을 때에 도움을 주는 여신들에게 그가 희극의 부류에 드는 요강이 되는 것을 막아 달라고 기도한다. 그의 주위 사정들이 그의 아내보다는 소화작용에 더욱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다. 그는 끝없는 혼란 속에 간신히 그의 불편을 없애는데 성공하고, 그리고 끝이 난 의회로부터 돌아와서 크레메스가 나타나자 다시 생기려 한다. 블레퓌로스의 주기는 의회의 회기만큼 길게 지속된다. 이제 곧 보게 될 것이지만, 프락사고라는 도시에 있는 인간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높이에 오른 반면, 그 남편은 최저로 낮은 곳에 도달했다. 쇠똥구리에서 뭉쳤던 것이 프락사고라스가 최고로 높은 염원의 목표에 간 것에 비해 블레퓌로스가 최저로 낮은 염원의 목표에 더 가까이 가는 방법으로 프락사고라와 블레퓌로스 사이를 갈라 놓았다. 반드시 그래야 되지만, 그의 아내가 그와 동시에 처해 있는 상황의 시각으로 들여다볼 때, 완벽한 명쾌함이 나타나는 어떤 아리스토파네스적인 성격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블레퓌토스는 처해 있다. 우스꽝스러움 자체의 탁월함은 겉치레이거나 과시로 보여졌다. 블레퓌로스는 그가 젊은 아내와 결혼해 있었던 것이 과시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과시와는 아무 상관 없는 우스꽝스러움이라는 종류가 있다는 것을 가장 격렬한 방법으로 상기시켜 준다. 이 다른 종류의 우스꽝스러움은 모든 희극들 안에, 전부가 아니라면, 특히 대부분의 주인공들과 여주인공들 안에 존재한다. 확실히 디카이오폴리스나, 소시지장수도, 에우엘피데스도, 뤼시스트라테도 과시자가 아니다. 블레퓌로스는- 그의 젊은 아내가 도시의 지배자, 그래서 역시 그 자신의 지배자가 되는 동안, 변기 앉아 시간을 보내는 늙은 남자는- 우스꽝스러운데, 그는 아무런 동정심도 일으키지 않는 무기력함과 혹은 어리석음 같은 것에 고통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상황의 우스꽝스러운 성격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는 희극 부류의 한 소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 두렵다(371). 그가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트뤼가이오스처럼 그는 그 자신에게 농담하지 않는다. 그는 이 연극에서 "디오뉘소스에 걸고" 맹세하는 유일한 배역이다(344, 357, 422). 블레퓌로스와 특히 프락사고라와 대비하여 볼 때, 희극작가를 연결하는 것은 희극작가 역시 하나의 웃음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연극들을 읽으면서 아리스토파네스나 그의 대리인에 대해 껄껄 웃을 뿐만 아니라, 그를 조롱하기도 하는데; 스트렙시아데스의 미친 구상을 만든 사람과 나머지 모두 다 함께 어떤 면에서 그들의 광기를 나누어 가져야 한다. 이런 피할 수 없는 희극의 부수물이,그것의 작가에게 무슨 보호의 역활을 하는지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5. 크레메스는 블레퓌로스가 그의 아내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웃이 놀랐던 것만큼 놀라고; 블레퓌로스는 그에게 어두워서 어쩌다가 그 옷을 입게 되었노라고 말하는데; 그는 분명히 조롱당하고 싶지 않다. 그는 크레메스에게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으면서 그가 당혹스런 질문을 더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는 그가 의회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레메스는 그에게 오늘 의회에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말한다. 모였던 시민들은 얼굴들이 창백해서 구두장이들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나중에 온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도록 이른 시각에 의회를 열었다. 크레메스는 심의한 안건이 도시의 구제였다는 사실까지 말하며 오늘의 의회의 모습을 전한다. 두 번째의 변론자는- 닳아서 올이 드러난 외투를 입은 가난뱅이였다- 옷감 다루는 사람들과 가죽 다루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겉옷과 따뜻한 잠 잘 곳을 제공하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민주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블레퓌로스는 비슷한 의무를 씨멘트 공급자들에게 부과하여 효력이 있게 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서 사람들이 가장 긴급히 필요로 하는 것들의 공급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게 하는 것은 공정하다. 도시의 구원을 위한 두 번째 변론가의 제안은 그 자신을 구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세 번째이자 마지막 변론자는 완전히 다른 경우였는데, 창백한 안색의 잘 생긴 젊은이였다. 그는 누구라도 도시를 여자들에게 넘겨 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구두장수들 대부분의 박수를 받았고, 시골 사람들은 야유하였지만; 구두장수들이 다수였다. 블레퓌로스는 시골 사람들의 반대에 동의한다. 프락사고라는 완전히 성공한다.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실패는 햇살에 그을린 것처럼 되려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창백해 보였다는 것이다(59-64). 세 번째 변론가는 그의 주장을 여자들의 덕행과 남자들의 악행에 대해 이야기하여 정당화한다. 그는 오늘 그리도 놀랍게 시범을 보여 준 여자들의 비밀을 지키는 능력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끼리 서로에 대한 정직성과 신뢰성에 대해 칭찬한다. 프락사고라는 그런 여자들의 덕행에 대해서는 침묵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바꿔 말해, 그들의 옛날 것의 고수, 혹은 그들의 보수주의에 대해서는, 예행연습 변론에서 단단히 강조하여 두었었다. 사실 왜 그녀의 제안이 의회에서 채택되었는가 하는 주된 이유는 여자들의 지배라는 것이 도시에서 한번도 없었던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행연습의 변론과 의회에서의 변론 사이의 그런 모순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융화될 수 있다. 프락사고라는 그녀의 제안이 압도적 다수에 의해 채택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론이 그녀의 특히 예행연습에 든 전제 조건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밖에 가장 합리적인 질서로서 완전히 새로운 질서는 본성에 따른 질서인데, 그러나 본성은 인간의 어떤 고안품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옛날 법과 옛날 관행의 고수가 가장 대단한 덕목이라면, 그리고 이 점에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뛰어나다면, 그 옛날 법은 여자들을 남자들에게 종속시키는 것으로 스스로 모순된다. 크레메스는 새로운 질서에 아주 만족한다. 블레퓌로스는 그를 더욱 편안하게 하는 이 모든 혁신을 받아들이나 단지 하나의 반대만 가지고 있다: 여자들이 지배한다면 그들은 그들 남편들이 혼인의 의무를 다하는 것과, 그리고 가장 끔직한 것들에 속하는 동거의 의무도 다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크레메스는 그런 동거가 도시에 유용할 경우 모든 남자가 반드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감시하는 일을 블레퓌로스에게 맡긴다. 아마 크레메스는 블레퓌로스처럼 아주 늙고 쇠약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6. 코러스, 즉 여자들이 의회에서 돌아온다. 그들은 여전히 남자로 변장하고 있고, 남자처럼 행진하려 애를 쓰고 있는데; 이 아침의 행동의 성공은 남성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여자주의가 선출된다는 것을 그들이 믿고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 코러스는 여자 대장 프락사고라의 집 앞에 멈추어 선다. 자발적이기도 하고, 그들보다 잠시 뒤에 집으로 온 프락사고라의 요청도 있어, 그들은 최대한 가능한 대로 변장을 벗으려 한다. 프락사고라는 남편이 그의 것들을 보기 전에 돌려 놓으려고 집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여자들은 완전히 그들 스스로를 지금까지 그들이 본 여자들 중에 가장 영리한 프락사고라의 종속물로 여긴다. 프락사고라는 그 보답으로 그들 모두를 그녀의 자문위원으로 삼겠다고 보장해 준다.
7. 그녀가 집으로 들어갈 즈음 프락사고라는 남편과 마주치고, 그는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묻는다. 이어지는 대화 동안 프락사고라는 여전히 남자 차림이고, 그녀의 남편은 여자 차림이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어디 갔다 오든 당신에게 뭐 다를 게 있나요?", 즉 그녀는 바보처럼 대답하는데, 블레퓌로스가 그녀에게 말한 것도 그렇다. 왜냐하면 새로운 그녀의 지위로 볼 때, 더 이상 어디로 가든 어디서 오든 그에게 말할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은 당연한데, 그녀가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직도 새로눈 지위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고,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그랬다고 인정할 수 도 없을 것이다. 물론 블레퓌로스는 그녀가 애인과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프락사고라는 이런 의심을 블레퓌로스가 그녀의 성적 습관에 대해 너무 생소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며 반박한다. 그녀는 그의 옷가지들을 가지고 살짝 사라진 일에 대해 금방 들통날 뻔뻔한 거짓말로 설명하는데, 그는 오늘의 의회에 온 대부분의 시민들이 눈에 띄게 창백한 얼굴이었다는 것을 크레메스에게 들어 알고 있다. 그건 그렇다 해도, 그는 마치 아내의 비밀을 너무 깊이 캐는 것이 이득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한다. 그는 그녀에게 그녀의 잘못으로 의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고 지적하며, 의회가 도시를 여자들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프락사고라는 단지 조금 놀랄 뿐이다. 경이로운 뉴스에 대해 그녀는 "아프로디테에 의해" 도시는 지금부터 축복받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블레퓌로스는 이유를 묻자, 새롭게 얻은 권력을 여자들은 오히려 그녀 자신은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말할 기회를 그녀에게 준다.
8. 프락사고라는 여자들이 착한 것에서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더 이상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착함에 대한 부인, 혹은 최소한 남자에 비해 여자들이 열등하다는 단언이 에우리피데스와 옛날의 법 사이를 잇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주1>. 여자들이 월등하다고 단언하면서 프락사고라는 암묵적으로 옛날의 법 뿐만 아니라 에우리피데스에게도 반대로 돌아선다. 여자들의 우월함이 그들에게 지배하는 권리를 주었다. 지금 무엇이 중요하냐는 착함의 덕으로 모든 사람이 착해질 어떤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더 이상 아첨꾼들은 없다. 블레퓌로스는 지금까지 아첨으로 살았는데 이제 이것을 재난으로 간주한다. 무엇보다 새로운 질서에서는 누구도 가난하지 않을 것이므로, 누구도 이웃에 대해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크레메스는 전적으로 프락사고라의 목표를 찬성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지는 의문이다. 프락사고라는 그것이 가능한 일임을 보여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데, 크레메스는 만족할 것이고, 그녀의 남편은 입을 다물 것이다. 코러스는 프락사고라에게 행동 뿐 아니라 변론으로도 새로운, 전적으로 새로운 구도의 혜택을 증명해 보여 주는 것으로 권력을 사용하여 여자들을 옹호하라고 격려한다. 그것이 그녀에게 구경꾼들은 새 것과 빠른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데; 그들은 오래된 것과 느린 것을 싫어하고, 즉 그들은 중용을 싫어한다. 그리하여 프락사고라는 정확하게 이것이 가장 크게 두려운 것이라고 고백한다: 구경꾼들은 옛날을 너무 강력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그녀의 구도를 뒤집을지도 모른다. (이 두려움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옛날에 집착한다는 것을 근거로 그녀에게 그전에 여자들의 지배를 권고하도록 유도하였었다.) 블레퓌로스는 그런 것으로 낙담할 이유가 없다며 그녀를 안심하게 한다: 정확하게 말해 옛날에 대한 경멸은 오직 하나 아테네 고민들의 시발점이다. 새로운 질서의 시발점은 좋은 것과 옛날이 같다는 등식을 간단히 거부하는 것이다. 프락사고라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질서를 회복시키려 하였고, 그리고 그 밖에 아테네에서는 그의 과격한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던 페이세타이로스에 비해 훨씬 더 멀리 간다. 그녀의 방법으로는 그녀가 '불의의 변론'보다 더 과격한데, 그러나 그녀는 도시에 이득이 되는 변화, 즉 정치적인 변화를 구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정의의 영감을 받고 있다.
9. 그녀가 블레퓌로스나 크레메스와 대화를 나누며 소개한 새로운 구도는 모두 그녀 자신의 것이고; 그것은,다른 여자들과의 상의해서 나온 것이 없는 그녀 자신의 생각이다. 프락사고라는 마치 그녀가 아테네의 독점적인 지배자거나 혹은 입법자인 것처럼 이야기하고(594, 597, 673 ff.), 그리고 그녀는 사실 그대로이다. 장군이라는 그녀의 공식적인 지위는 페리클레스의 경우에 그가 지녔던 그 지위보다 그녀의 지위가 덜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녀의 새로운 구도는 남자들만으로 합법적으로 구성되고 합법적으로 개의한 의회가 여자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리고 프락사고라를 장군으로 뽑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합법적이고; 그리고 여자들은 그들 차례가 오자 이를 묵인하고, 프락사고라의 지배권에 동의한다. 프락사고라에 의하면, 여자들의 천성적 선함이 남자들을 착하게 만들 것인데, 솔선수범이 아니라 나쁜 것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모든 재산은 시민들 모두의 공용이다: 더 이상 가난뱅이도 부자도 없고; 모두가 한가지 방법으로 살아 갈 것이다. 이런 공용으로부터 집안 일의 관리나 절약으로 이름난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음식이나 다른 모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할 것이다: 훔치거나 속이는 기회나 동기가 없을 것이다. 이런 변화는 정말 필수적으로 여자주의를 따른 것이다: 앞으로는 여자들이 도시를 돌보게 되어, 더 이상 개인의 집안 일들을 돌볼 수 가 없다. 그들은 즉각적인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이는 전에 여자들이 해 왔던 의무들을 남자들에게 부과할 수 없는데; 도시를 하나의 살림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방법도 없다. 재화들의 공동체나 아니면 개인 살림의 폐지는 성적인 관계에서의 깊숙한 변화를 적지 않게 요구한다. 여자들의 공동체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런 세상에서는 그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재산에 관련된 어려움이 일어난다: 남자의 욕구의 대상으로서 여자들끼리의 동등함은 여자들의 아름다움이 동등하지 않기에 가능하지 않다. 이런 이유와 또 거기에 관련해서 여자들의 공동체에서의 토론은 재산의 공동체에 대한 토론보다 대충 두 배가 더 된다. 프락사고라는 여자들의 타고난 부동등성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못생긴 여자들부터 우선권을 주어 모든 여자들을 동등하게 만드는 법으로 극복한다. 어느 남자도 못생긴 여자와 같이 잠을 자기 전에는 아름다운 여자와 즐길 수 없다. 프락사고라가 본성적인 부동등성을 법의 동등성으로 대치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주2>. 그렇지만 블레퓌로스는 반대하는데, 못생겼거나 혹은 늙은 여자들에게는 그리도 공평한 이런 조치가 소녀들의 환심을 살 돈도 가지지 못할 새로운 질서 아래서 어쨌든 더 나빠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의 늙은 남자들에게는 공평하지 않다. 프락사고라는 여자들이 못생긴(그리고 늙은) 남자들을 만족시켜 놓기 전에는 잘생긴(그리고 젊은) 남자들과 같이 자서는 안 된다는 법을 준수해야 한다며 그 남편을 침묵시킨다. 그녀는 이런 조치가 민주적이라고 지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당당한 척하거나 점잖은 척하는 것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주석이 그녀의 전체 구도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자주의 그 자체는 두 성별이 같지 않다는 전제를 인정할 때, 민주적이라는 전제의 결과물이고; 이들 두 전제는 어느 성별이 최고의 평등주의자이며, 그래서 지배자가 될 만한가라는 질문에 봉착하는데, 결국 그 질문에는 여성에게 호의적인 답을 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여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여자들과 경쟁하지만, 그러나 모든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과 경쟁하지는 않는다. 블레퓌로스는 그렇지만 또 다른 어려움을 안다: 새로운 질서 아래서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알아 보는가? (블레퓌로스와 프락사고라가 아이들을 가지고 있나에 대해 아무 언급도 없다.) 프락사고라는 여자들의 공동체는 아이들의 공동체를 요구한다며 의문을 불식시킨다: 젊은 세대는 늙은 세대의 모든 남자들을 그들의 아버지들로 여길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 폭행이나 아버지 살해로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다: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에게 얻어 맞으면, 그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모두들 얻어 맞는 그 늙은이를 구하러 나설 것이다. 이래서 프락사고라는 아버지 폭행에 대한 충분한 방지책을 마련하나; 새로운 질서 아래서 그녀는 근친상간이 일상화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방지책은 마련하지 못한다. 그와는 반대로, 새로운 질서에서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늙은 사람들과 동침하도록 법으로 되어 있어, 근친상간이 드러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된다(cf. 1041-42). 도시의 근본적인 요구사항 중의 하나인 근친상간의 금지는 페이스테타이로스의 변화가 가져온 효과보다 훨씬 과격한 변화의 효과이다. 블레퓌로스와 크레메스가 근친상간의 문제에 관심이 없어 하는 사실이 "구름"의 작가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프락사고라가 구축한 질서는 가정들이나 식구들이 없는 도시이다. 블레퓌로스는 알고 있는 대로 아이들이 없어서 근친상간에는 관심이 없고, 시민들이 공동으로 즐길 부의 생산이나 재생산에 대하여 관심이 있고; 결국, 부자들보다는 그 숫자가 훨씬 더 많은 옛 질서에서의 가난뱅이들은 그들의 생계를 위해 더 많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런 경향은 빈곤이 제거된 관계로 이제 사라지려 한다. 이 의문은 프락사고라와 블레퓌로스 간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대화 속에 중간의 짧은 부분에서(네 단락의 운률로) 논의된다. 프락사고라는 경작은 노예들이 하고 베는 여자들이 짠다는 결정을 내리는데; 남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노예들과 여자들이 하는 노동의 열매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블레퓌로스는 질문을 하나 더 한다: 아무도 자신의 돈이 없을 텐데 치안관에게 벌금을 맞으면 어떻게 내느냐? 프락사고라는 더 이상 송사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청중에게 더 이상 재산에 관한 송사는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폭행으로 일어나는 송사는 처벌로 음식을 주지 않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개인 재산의 폐지로 더 이상은 도박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여주자, 블레퓌로스는 아직도 또 다른 화제를 가져 오고 싶은데, 대화의 마지막 화제이다: 총체적으로 새로운 생활 방식이다. 프락사고라는 모든 개인적인 것들을 폐지하고 단일의 가정으로 마을을 바꿀 것과, 그리고 재판정을 식당으로, 유치장은 포도주 항아리와 물병들을 놓는 곳으로 바꿀 것이라 선언하는데; 지금까지 배심원을 추첨으로 할당하던 시민들의 명부는 식당의 좌석을 할당하는 데에 사용될 것이다. 말하자면, 특히 민주주의와 관련된 기관은 폐지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폐지될 것이다(cf. 229-32). 모든 사람이 풍부한 음식을 먹을 것이고, 또 저녁 식사 후에는 늙은 남자들이 가장 매혹적인 소녀들과 즐길 것이다. 블레퓌로스는 이제 완전히 만족하고; 크레메스는 아무 말이 없다. 프락사고라는 시민들이 도시에 내어 놓는 동산들을 접수하고, 바로 이날 실시되는 공동급식을 돌보기 위해 시장터로 가야만 한다. 그녀는 매춘도 역시 끝장을 낼 것인데, 코러스를 이루는 여자들처럼 존경받는 그들을 젊은이들이 만족시킬 것이고; 그리하여 그녀는 새로운 질서 아래서는 더 이상 간통의 금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같은 이유로 그녀는 자유민과 노예 소녀들과의 동침도 금지해야 한다. 블레퓌로스는 그 여자 장군의 남편으로서 존경받기 위해 그녀를 따른다.
10. 프락사고라는 지배하는 것이나 도시에 관심을 가진 아리스토파네스의 다른 어떤 배역보다 더 과격하고 개방적으로 옛 것들을 부순다. 그녀의 새로운 질서와 그 앞의 것 사이에는 하나의 연계가 있다: 평등주의이다. "구름"에서 배웠듯이 그녀의 가장 중대한 혁신은 부모들과 자식들 간의 근친상간에 대한 그녀의 암묵적인 합법화이다. 이런 혁신은 두 전제들의 협조로부터 나온다: 도시의 단일 가정에로 전환과, 나이와 아름다움에 관한 본성적 부등함을 제도적인 동등함으로의 대체인데; 그 동등함은 사실 늙고 못생긴 것에 더 높은 권리를 주는 부등함이다. 규칙으로 늙은이들은 젊은이들보다 옛날을 더 높은 수즌으로 아낀다. 프락사고라가 새로이 출발하는 평등주의자라는 전제는 어떤 면에서 옛날을 제척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라도 가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과 반대로 작용한다. 이제 프락사고라의 전체 구도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생각이 무엇인지 꼭 짚어 보아야만 한다.
11. 프락사고라는 새로운 질서에 대해 미래 시제로 말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이 법이고 그녀의 말에 대한 저항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는 이제 실시되어 있거나, 혹은 그녀의 전체 구도가 실현되어 있다. 따라서 파라바시스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여자들의 의회"에서는 파라바시스가 없다. 단 하나의 다음 작품인 "플루토스"에서도 파라바시스는 없다. 아테네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당한 이후에 나온 단지 두 편의 연극에서만 파라바시스가 빠져 있다는 것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파네스의 의도를 벗어난 외부의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의문을 생각하며 "아카르나이 사람들"로부터 "개구리들"에 이르기까지 겪어 온 파라바시스의 변화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처음의 다섯 연극에서 아리스토파네스 자신은 파라바시스의 중요한 주제이었다. 그 다음에 이어진 네 연극의 파라바시스에서는 작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만일 파라바시스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작가로 하여금 그 자신이나 그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후반의 연극들의 파라바시스가 그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파라바시스의 위축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의 위축이 자연스레 그것을 사라지게 했을 것이다. "새들"에서 작가가 어떻게 자신에 대해 침묵하는지, 그리고 "뤼시스트라테"에서는 이들 연극들의 주제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지적하였고<주3>;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과 "개구리들"의 경우는 이 연극들이 명백히 단지 작가들의 운명을 다룬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어쨌든 간에, "여자들의 의회"는 앞서 나온 다른 모든 연극들과 파라바시스가 사라졌다는 것 말고도 서로 다른데; 그것은 앞서 나온 다른 모든 연극들과, 전체 구도를 책임지는 배역이 연극의 중간에서 약간 과장이라 부를 만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프락사고라의 퇴장을 그녀의 전체 구도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디카이오폴리스도 역시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연극의 중간에서 그 구도를 실현하고도 그 연극의 끝까지 남아 있는다. 디카이오폴리스가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반드시 끝까지 있어야 하는 이유로 그렇지 않으면 디카이오폴리스가 개인적인 평화를 무엇에다 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프락사고라의 부적당한 공공심을 생각할 때, 유일한 의문은 그녀의 새로운 질서를 도시가 무엇에다 쓸까 하는 것이다.
12. 프락사고라와 블레퓌로스가 떠난 뒤, 정직한 크레메스는 도시에 바칠 재물들을 준비하는데; 그의 노예들이 여러 가지 물건들을 집에서 들고 나와 길 가에 쌓고, 그는 또 마치 그것들이 아테나의 영광을 위한 행진을 하려는 것처럼 운반을 위해 널어 놓는다. 블레퓌로스가 새로운 법을 따를 것인지는 그가 그의 아내와 동행하고 없어 알지 못한다. 크레메스가 법에 복종하는 동안 또 다른 시민이 등장하는데 그는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먼저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면서 절약과 땀으로 얻은 열매를 주어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먼저 크레메스가 그의 재산을 주어 버리려 한다는 것을 믿지 않고, 다음 사람들이 법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 내용을 부정하는데; 그 법을 많은 시민들이 따르는지 보기도 전에, 그 법을 따르는 것은 바보 짓이다. 크레메스는 많은 시민들이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새로운 법이 도시에게 주기보다는 도시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더 좋아하는 옛날 관습에 어긋난다는 것을 근거로 부정직한 사람은 동의하지 않는다. 주기보다는 역시 가져가기를 좋아하는 신들의, 아니면 그들의 조각상의 태도에도 그것은 역시 반대로 나타난다. 크레메스는 낡은 질서가 신들과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에 반대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는 확실히 새로운 법이 오래 묵은 관습을 완전히 파괴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그는 법이란 사람들이 신들의 행동들을 흉내내어서는 아니 되게 되어 있는 실정법을 말한다는 관점에서 행동한다. 그의 반대자는 법에서조차도 사람들이 항상 법을 따라야 한다고는 하지 않고, 더욱이 무엇보다 아테네에서는 너무나 많은 법들을 제정한 뒤 곧 바로 폐기하였기 때문에, 재산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법도 폐시시킬지 모른다는 사실에 그가 주목하게 만든다. 크레메스는 세상이 온통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변해 버렸다고 대답한다: 이제 여자들이 지배한다. 그는 시민들이 새로운 법을 따를 것이라 믿지만, 그러나 만일 다수가 그들의 재산을 도시에 넘겨 주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들을 강제로 그렇게 하도록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수긍할 수 밖에 없다. 두 사람의 말다툼은 마을사람들에게 프락사고라스에게로 가라고 고함치는 전령의 등장으로 중단되는데, 그녀는 식당들 중의 한 곳의 좌석을 추첨으로 배정할 것이고; 모든 종류의 진수성찬과 모든 감각을 기쁘게 할 것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크레메스는 시큰둥하지만 그 반대자는 이 도시의 명령에 순응하는 그의 시민의 의무를 기꺼이 다하고자 한다. 그는 그의 재산을 도시에 내놓는 것을 더 이상은 거부하지 않고; 거부하면 훌륭한 저녁 식사와 함께 모든 반주들을 즐길 수가 없기 때문인데, 그러나 기부는 미룬다. 이렇게 그가 암묵적으로 법을 따라야 하는 의무를 인정하기 때문에 크레메스는 그가 행렬에 끼여서 따르는 것은 허용하지만, 크레메스의 재물을 나르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져왔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끝날 때까지 그는 그의 재산을 간직하면서도 공동의 식사에 초청으로 참가할 방안을 찾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풍성한 공동의 식사에 참석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재산에 관한 새로운 질서가 작동할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크레메스가 법에 순응하는 것이 일반적 순응을 보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법이 전적으로 불법으로 제정되었다는 사실과, 프락사고라가 다른 부를 창출할 방법은 없고 오직 흙을 갈고 베를 짜는 일만 준비하였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지금까지 생계를 위하여 열심히 일해 온 다수가 새로운 법을 따르고, 나머지들에게도 따르도록 강권할 것이라고 기대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정직한 크레메스는 틀림없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나, 도시의 돈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그는 새로운 법이 도시에 이롭다고 믿고 따르는데(471-72), 그것이 모든 범죄나 악덕이나 고난을 걷어 낸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560-68). 그렇지만 만일 다수가 그 법을 따르지 않고, 다수가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약속을 지킬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반대자에 대항해서 법에 순응하는 그를 옹호하는 데에 그는 법이 사실 유익하다는 말을 책임 있게 하지 않는다. 그가 법을 지키는 순전한 동기는 법을, 즉 어떤 법도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 그리고 다른 시민이 지키느냐 마느냐를 떠나, 지키는 것이 올바르고 좋은 것이라는 그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부적절한 '법 질서 준수'의 화신이거나, 아니면 얼간이이다. 그의 반대자와 그가 나눈 언쟁은 '정의의변론'과 '불의의 변론' 간의 언쟁을 연상케 하지만, 크레메스의 정의와 반대자의 불의는 신들과 옛날에 대한 덕목들에 관한 의문들에서 추출한 완전한 개념으로 소개되고 있고; 크레메스가 부적적하게 충직한 법은 오로지 인간들로부터 유래하고, 그리고 전적으로 새롭다. 이것이 그의 반대자가 전적으로 불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비록 바보스럽지만 정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사람에 비해 뛰어나다.
13. 개인의 재산을 공동의 재물로 변환하는 것을 둘러싼 어려움에 대해 작가가 어렴풋이 보여 준 뒤라, 그가 남자들과 여자들의 공동체에서 결혼의 변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 대신에 그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공동체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나 혹은 더 이상 결혼하지 않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여자들의 공동체가 아닌 남자들의 공동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 준다. 다음의 설명은 어떨까? 프락사고라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그리고 겨우 그녀의 공공의 활동만 들을 뿐이지만, 도시의 지배자라는 지위를 떠나 그녀는 여전히 한 여자이기에; 그녀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한 여자로서의 운명은 어떤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지울 수가 없다.
14. 그 다음 장면은- 프락사고라의 퇴장 이후에 이어진 부분에서 중간 부분은- 늙은 여자와 소녀 사이의 대화로 시작된다. 그들은 남자들을, 소녀는 그녀의 애인을, 늙은 여자는 어떤 남자든지 기다리고 있다. 늙은 여자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인공적이고, 소녀의 아름다움은 자연적이다. 늙은 여자가 노래로 어떤 남자를 매혹시키려 하고, 혹은 주의를 끌려 하기 때문에, 소녀는 반대되는 노래로 그녀를 위협한다. 이런 싸움이 구경꾼을 짜증나게 하지만, 아울러 이런 종류의 짜증이 재미 있고, 희극에 맞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는 관객들이 재미 있게 즐거움을 느끼라고 호소하는데, 프락사고라는 그들에게 정치적인 혁신과 같은 것에서 느끼라고 호소했었다(581-87).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서, 그리고 애인을 기대하는 데서 나오는 왕성한 혈기가 그녀의 웃음 속에서, 그리고 아울러 그녀의 역활이 웃음을 자아내는데 기여하고 싶은 마음에서, 최고조로 오르고; 그녀는 자신이 아닌 그 늙은 여자가 우스꽝스럽게 될 것이라고 알고 있다. 블레퓌로스가 희극에 알맞는 대상이 되는 것을 겁 냈었다고 기억되는데, 그는 그때 가장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었다(371). 그는 훨씬 전에 그런 상황에서 벗어났지만, 그러나 그 소녀는 이제 곧 그런 상황에 처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질서가 늙은 남자들에게 좋다고, 그리고 특히 프락사고라의 남편인 그 늙은 남자에게 좋다고, 그리고 젊은 소녀들에게는 나쁘다고 추측할지도 모른다. 자세히 보면 새로운 질서 덕분으로 블레퓌로스는 완벽하게 우스꽝스럽고 행복한데, 반면 그 소녀는 완벽하게 불행하고, 그리고 단지 우스꽝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을 생기게 한 새로운 질서가 분노의 대상이 된다는 면에서 동정심의 대상이 된다.
15. 그 늙은 여자는 피리의 반주로 노래한다. 그녀는 옛 시절의 지혜와 성에 관련된 경험과 마찬가지로 늙은 사람들의 불변함을 칭송한다: 늙은이들은 사랑에서조차도 젊은이들보다 월등하다. 같은 방법으로 그녀에게 답하며 그 소녀는 더욱 명확하게 결정적으로 젊음의 이점을 칭송하고, 그리고 그녀의 적수에게 젊은 소녀들을 시샘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부러움은 없어진다고 여겨졌던 새로운 질서 속에(565) 부러움은 여전하게 지속된다. 그녀는 늙은 여자에게 한편으로 젊음과 생명 사이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늙음과 죽음 사이의 밀접함에 대해 상기시키고; 그 늙은 여자는 소녀에게 욕설로 대응한다. 어떤 욕설도 그녀의 젊은 꽃봉우리를 다칠 수 없다고 확신하는 그녀는 그 노파의 욕설보다는 애인이 늦는 것을 더 걱정한다. 젊은 남자가 나타나자 늙은 여자는 아무 남자나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가 그녀의 애인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척한다. 그 소녀는 그가 그녀의 애인이며 당연히 그녀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보요 주기 위해 그 적수를 끌어당긴다. 늙은 여자도 같이 끌어당길 수밖에 없다. 그 젊은이는 먼저 늙은 여자와 자도록 강제하는 새로운 법으로 인해 그가 그 소녀를 원하는 것이 방해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는 자유민으로서 이런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그렇지만 늙은 여자로 보면 새로운 법은 정확하고 완벽하게 자유와 일치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민주주의와, 즉 동등하게 자유가 지배하는 자유의 체제와, 그리고 모두의 동등성이 본성적 우월함의 희생 위에 본성적 열등함이 대접받는 법에 의해 지켜지는 체제와 일치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유에 대한 요구들이 그러한 동등성을 위해 포기되기를 바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늙은 여자를 실내에 있도록 해서 바보로 만들었다고 믿고 그 젊은이를 같이 있자고 부르는데, 그는 그러고 싶을 뿐이다. 둘은 에로스에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덧붙여서 서로에게 기도한다. 젊은이가 소녀의 집 문 앞에 있는 동안에 늙은 여자가 다시 등장하여 새로운 법에 따른 그녀의 권리를 그에게 주장하고; 그녀를 만족시켜야만 하는 그 법은 그에게도 저녁을 대접받을 수 있도록 한 반대 급부가 딸린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새로운 법의 조문을 인용하고, 그 법에 따르면 늙은 여자는 젊은이가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경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데; 그녀가 인용한 그 법에는 늙은 남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젊은이로 보면 그 법, 여자들의 법에 위배되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어찌할 수가 없는 그가 굴복하려 하자, 그 소녀는 같은 젊은 사람으로서 여자들의 법에 불만을 품고 있는데, 그녀가 그의 어머니 뻘이 될 만큼 늙었고. 또한 새로운 법은 어머니와 아들 간의 근친상간을 유도한다며, 즉 명백히 무효라고 지적하여 그를 그 노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런 소녀의 승리는- 새로운 법으로는 오로지 여성들만이 승리할 수 있다- 아주 잠시 동안의 일이다. 두 번째 노파가 등장하는데, 더 늙고 더 못생겨서 새로운 법에 따라 첫 번째보다 더 특혜를 받아야 하고, 또 젊은이의 어머니이기에는 너무 늙어서, 이번에는 그 소녀의 마지막 항의도 소용 없고; 그녀는 젊은이에 대한 권리를 내세워 그를 끌고 간다. 그녀는 아포로디테에게 세번이나 맹세한 첫 번째 노파가 떨던 애교도 부리지 않고 단지 법을 인용할 뿐이다. 그 순간에 더 늙고 더 못생겨서 두 번째 노파보다 더 특권을 가진 세 번째 노파가 그를 붙드는데, 그는 그 두 사람에 의해 조각조각 찢어질 위험에 처한다. 가장 늙은 노파가 이기고 만다. 그 소녀의 암담함은 말할 수 없다. 젊은이의 고통은 세 배나 되는데, 그에게는 그의 소녀와 즐기기 전에 법에 따라 두 번째 노파도 만족시킬 의무가 있다는 두려움- 아주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때문이다. 동침의 의무가 아무리 무서워도 그것이 도시에 이익이 된다는 생각으로는 그를 위로하지 못한다(cf. 471-72). 새로운 질서 아래서 에로스는 연인들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 죽음과 부패가 생명과 청춘에 승리를 거둔다.
16. 두 번째 장면에서 프락사고라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그녀는 노파들이 포악스럽게 구는 것이나 위협하는 것을 인정하는가? 여주인공의 침묵은 연극이 끝날 때까지 내내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주역은 얼근히 취한 하녀인데, 그전에는 지금처럼 행복한 때가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안주인이 가장 축복받았다고 말한다: 그녀의 안주인이 프락사고라일 수 있을까? 그녀의 안주인은 그녀더러 그 남편을 저녁식사에 데려오라고 보냈고; 그녀가 그를 만나자 그녀는 그에게 세 배의 행복으로 축복받은 사람이라며 인사한다. 블레퓌로스는 그가 도시의 지배자 남편이기 때문에 세 배로 행복한 사람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녀는 이런 이유로가 아니라, 그가 아직도 저녁식사를 하지 않은 유일한 시민이기 때문에 그를 세 배나 행복한 사람이라 부른다: 그는 경탄할 만한 어떤 일을 기대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것으로, 남자들과 여자들의 공동체가 아직은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하녀의 안주인과 바깥주인은 여전히 아내와 남편이고; 남편들과 아내들 사이의 인정은 여전히 지속된다. 그 하녀는 구경꾼들 가운데서 특히 심판들 가운데서 인정 많은 사람들을 역시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그녀 주인은 그녀에게 초대의 범위를 훨씬 넓히라고,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도록 초대하라고 말하는 반면에, 그는 공공의 저녁식사에 갈 것이다. 여자들의 코러스도 아직 저녁식사를 하지 않아서 안주인의 남편과 같이 가려 한다. 아마 이 여자들의 속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 하녀의 상태로 짐작컨데, 역시 분주히 저녁 준비를 하고 포도주를 마신 나머지 아테네 여자들의 속내와 같을 것이다. 약속된 저녁식사는 도무지 믿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풍부함과 다양함의 요리로- 분명히 아무도 믿지 않을 과시용이다. 전체 시민이 도시의 비용으로 한 끼 저녁식사를 대접받는다는 구도 덕분이라는 것 하나 뿐이라면, 프락사고라의 구도가 과연 아테네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는지 당황스럽다. 그들 중에 확실히 행복해진 사람들은 노예 소녀와 늙은 노파들 밖에 없다. 코러스의 행복은 프락사고라의 구도보다 희극들의 경연에서 승리의 기대감에 달려 있다.
17. 연극의 결말은 만족스럽지 않다. 재산과 여자들의 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지 못한다. 프락사고라가 도시 전체를 행복하게 했는지, 불행하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른 모든 연극들에서는 결말에서 사건에 생명을 불어 넣는 배역의 전체 구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혹은 부분적으로 성공했는지, 그리고 그런 면에서 작가가 그 전체 구도를 인정하는지 여부를 알게 되는데; 어쨌든 이런 관점에서 모든 다른 연극들의 결말은 만족스럽다. 다른 모든 연극들에서는 이길 만한 사람들의 승리나 혹은 가치가 있는 구도의 승리를, 아니면 질 만한 사람의 패배나 혹은 가치가 없는 구도의 패배를 보며; 아니면 승리나 패배가 단지 부분적일 경우, 어떤 점에서 그들이 이기거나 지는지, 즉 이길 만한지 질 만한지 본다. 브델뤼클레온은 재판을 통해 남을 비난해야 하는 강박증을 가진 아버지를 치료하는 데는 성공하는데, 그러나 그를 신사로 만드는 데는 실패하고; 에우리피데스는 여자들로부터 완전히 무죄방면되는 데는 실패하지만, 조건부로 무죄방면되는 데는 성공하며; 디오뉘소스는 에우리피데스를 하데스에서 데려오는 데는 실패하지만, 다른 비극작가를 다시 데려오는 데는 성공한다. 가치 있는 구도와 가치가 없는 구도의 이러한 단순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으로 작가는 올바른 것들에 대해 가르친다. 그렇지만 전체 구도들은- 평화처럼 결말 그 스스로와 구별되는- 모든 경우에서 웃기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을 웃게 만들면서 올바른 것들을 가르친다. 전체의 구도들은 웃기는데, 그것들이 (다소 간에)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관객의 일부분에게 왜 이 전체 구도가 불가능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들면서, 작가는 우스개들과는 구별을 하여 현명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1155-56).
18. 작가가 프락사고라의 구도에 대한 판단을 그가 전념하여 새로운 질서를 행동으로 옮기는 가장 공을 들인 장면, 즉 늙은 여자들과 젊은 연인들 사이의 갈등을 보여 주는 장면을 통해 드러내기 때문에, "여자들의 의회"의 결말이 다른 어떤 희극의 결말로 정해졌던 것의 관점에서 보아 만족스럽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 장면은 프락사고라가 진짜 도시 전체가 아니라 여자들만 행복하게 했고, 진짜 전체 도시가 아니라 젊은 연인들만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꾸어 말한다면 그녀는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이, 고통의 폐기가 아니라 고통과 불행의 재분배를 가져왔다. 옛날 질서에서는 노파들이 비참하였는데, 그들은 그들이 원했다면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레, 그래서 엄전하게 남아 있었을 박탈감으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고; 새로운 질서에서는 노파들의 행복이 공공으로 필수적이고, 그리고 불칙할 뿐 아니라 역겹다: 승리를 가지지 못할 사람들이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은 마지막 장면의 피상적으로 떠들썩한 성격 속에 약간 감추어져 있다. "여자들의 의회"의 결말은 그 마지막 장면이 다른 모든 연극들에서는 신나는 데 반하여 역겹고 구역질이 난다는 점에서 불만스럽다. "여자들의 의회"가 가장 추한 희극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고; 그것은 추한 사람들의 희극이다. "뤼시스트라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을 분별이 있도록 해 놓는데; 그들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저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말 어리석은 것을 고쳐 놓는다. "여자들의 의회"에서는 여자들이 최소한 젊은 남자들은 아니나 남자들에게 아낌없이 먹을 것을 주고, 또 여자들이 돌보아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여, 고상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에 관련된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유도하거나 강요한다:여자들의 행동이 모든 아름다운 생활을 빼앗는다. 프락사고라의 행동이 어떻게 아테네의 영광을 되가져올 수 있는지 모른다. "여자들의 의회"는 남자들이나 연극의 전체 구도를 알리는 행동들의 요소들에 의해 의미 있는 저항을 받지 않는 유일한 연극인데; 노파가 젊은이를 잡아채는 것을 공개적이고 공정한 승리라고 부르고 싶지 않는 한, 공개적이고 공정한 싸움에서 얻는 승리의 아름다움은 확실히 모자란다.
19.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서 어떤 승리가 승리할 만한 것이라는 연유나 성향에 따른, 그리고 역으로 이유나 성향이 있어 거둔 어떤 승리에 따른, 그 앞에 있었던 논쟁의 전제에 대해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만일 노파들의 승리가 그들이 승리할 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면, 노파들의 승리는 만일 노파들이 승리하는것이 승리할 만하다는 것을 뜻하는 경우에 비해 확실히 덜 역겨울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서 승리나 패배는 무슨 의미인가? 노파들은 단순히 그들의 승리가 패배하는 경우보다 더 우스울 것이기 때문에 승리하는가? 소크라테스는 단지 그가 승리하는 것보다 패배하는 것이 더 우스울 것이기 때문에 패배당하는가? 평화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이기는 경우는 단순히 그들의 승리가 그들이 패배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인가? "여자들의 의회"의 독특한 결말의 성격을 그것의 분명한 주제의 독특한 성격에 비추어서 이해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여자들의 의회"는 작가가 배심원과 같은 민주주의 제도나, 스파르타에 대항하는 전쟁에 대한 정책이나, 클레온과 같은 선동정치가가 아니라, 평등주의 같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유일한 연극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는 이 연극에서 지금까지 논의해 온 연극들과는 달리 역설적으로 엮어 가는데, 즉 그는 마치 그것이 전적으로 용납할 만하고 승리할 만한 것인 양 그가 거부하는, 그리하여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극단적인 평등주의의 결과물을 소개하는, 그 전제를 받아들이는 척한다. 어떤 경우에도 평등의 적들이 승리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평등주의의 몰락은 보여 주지 않고, 평등주의의 결과물을 보여 준다. 평등주의는 절대적인 공산주의(재산과 여자들과 아이들의 공산주의)를 위해 모든 불평등한 것들의 폐기를 요구하는데;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불평등한 것들은 뿌리를 뽑을 수 없기 때문에, 평등주의는 그들의 결점들을 덮을 보상을 위해 열등한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는 것을 필요로 하고; 그들의 시샘은 반드시 달래어 주어야 한다. 평등주의의 불합리성은 성적인 경우처럼 재산의 경우에도 분명한데, 남자들이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간에 우연만큼 본성적인 불평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파들과 젊은 연인들 간의 장면이 왜 그렇게 중요하고 왜 그렇게 명확한가를 모두 설명해 준다. 노파들의 승리는 프락사고라의 승리를 나타낸다. 그것은 본성을 넘는 기술의 승리이다: 태양이 아니고, 등불이 프락사고라의 상징물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프락사고라의 구도가 아테네에서 저항의 말을 만나지 않는 평등주의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락사고라가 그녀는 어느 성별에도 평등하지 않으며, 연극 후반부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거의 들리지도 않는데, 순수하고 단순한 평등주의의 살아 있는 논박이기 때문이다.
20. 그럼에도, 비록 그녀가 특출한 인간이긴 하여도, 프락사고라가 한 여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애욕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늙은 남편에 비해 훨씬 젊다. 그녀의 새로운 법이 자유민 여자들의 성적인 만족을 위해 의도된 것이기에(718-20) 그들 역시 그녀를 돌본다. 그녀의 새로운 질서에서 간통은 더 이상 금지될 수 없다. 옛날 질서와 새로운 질서의 변혁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우의는 지속된다: 남편이 좋다 하면, 프락사고라는 언제나 그녀의 성가신 의무를 다했다고 그리고 젊은 남자들과 동침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녀는 옛날보다 새로운 질서에서 훨씬 더 잘나간다. 그래서 새로운 질서는 혐오스런 노파들에게 뿐만 아니라, 늙은 남자와 결혼한 젊은 아내들에게도 행복을 가져다 준다. 노파들의 특권은 옛날에 간통이 그랬듯이 한 종류의 형평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 매혹적이지 않은 특권이 범죄의 자리를 대신하고; 크레메스가 어떤 경우에도 법을 준수하는 데 최고인 그가 새로운 질서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것이 놀랍지 않다(cf. 471-72). 그래서 프락사고라는 그녀의 혁명을 위한 강력한 개인적인 동기를 가지는데, 그것은 어쩌다가 필수적으로 늙은 여자들에게 그런 대단한 특권을 부여한다. 블레퓌로스도 그녀의 아내가 새로운 질서에 대해 그녀의 방식으로 만족하듯이 그의 방식으로 만족한다. 이것이 만일 노파들의 새로운 법에 대한 해석이 맞다면, 프락사고라가 먼저 다른 늙은 남자를 만족시켜야 젊은 남자와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데; 그러나 누구가 이런 해석은 도시를 지배하는 데 있어 더 공평하고 더 용인되는 해석에게 밀린다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겠는가? "여자들의 의회"의 이상한 결말이 프락사고라의 개인적인 승리를 숨기지만, 그녀는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을 뛰어넘는데, 즉 그녀는 승리를 거둘 만하다.
21. 그렇지만 이 거둘 만하고 즐거운 승리는 노파들의 충격적인 승리가 소개되는 것에 반해 소개되지 않는다. 전자의 승리가 안 보여지기 때문에 그것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프락사고라의 추측된 승리는 노파들의 명백한 승리와 냉혹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프락사고라가 패배할 만하다든지, 혹은 아마도 그녀는 승리할 만하지만, 그녀의 구도는 패배할 수 밖에 없다는 관점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디카이오폴리스가 했던 것처럼 그녀가 오직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였다면 모든 것이 잘 흘러갔을 것이다. "여자들의 의회"의 이상한 결말이 프락사고라의 구도가 패배한 것을 감춘다. 왜 아리스토파네스는 패배를 감추는가? 그녀의 구도는 믿기지 않는 대담한 것이다. 그것은 이런 점에서 페이스테타이로스와 비교할 수 있다. 그것은 여타 페이스테타이로스의 구도에 비해 떨어지지만, 무엇보다 근친상간에 관한 것을 암묵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즉 도시의 근본적인 요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담함에 있어 페이스테타이로스의 구도를 능가한다. 확실히 그것은 여자가 구상한 구도로서는 최고로 대담한 것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한 작품 내용에서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서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던 그의 남자들-연극들과 그의 여자들-연극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주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자들-연극들에서 신들이나 신성한 것들( 암피테오스를 통한 신성의 개입, 클레온의 신탁들, 그리고 필로클레온에 주어진 신탁 같은 것들)이,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사건을 보여주는 전체 구도의 원래 혹은 마지막 형태를 위해 중요하다. 신들이나 신성한 것들은 여자들- 연극들에서는 그런 역활을 하지 않는다.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에서 여자들이 에우리피데스의 무신론에 대해, 마찬가지로 뤼시스트라테의 구도에 깔린 본성과 법의 특별한 의미 부여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역시 기억할 것이다. 아무리 프락사고라가 대담하다 해도 누구도 그녀가 신들에 반대하여 행동한다고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남자이다. 진솔하게 말해서 남자들에게보다는 여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절제(sophrosyne)가 요구되고<주4>, 반면에 그 반대는 진짜 남자다움이다. 위대한 처녀 여신들 아르테미스와 아테네를 잊어서는 안 된다. 가장 특출한 여자에 의해 구상된 최고로 대담한 구도의 실패를 숨기는 것으로 아리스토파네스는 여자 신의 실패를 여자 신의 한계를 숨긴다: 그는 여자 신을 아낀다. 그의 에우리피데스가 필요로 했던 교훈을 그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확하게 할 목적으로 전체적으로 과장하면, "여자들의 의회"의 추함은 절제의 추함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가혹한 표현을 삼가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플라톤의 '파에드로스'에 새겨진 사상을 다시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열정mania에 대한 칭송이다. 만일 가장 현명한 여자라도 성별이 소크라테스와 다르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공화국republic'국가'<주5>이라는 글자 자체에 반해-, 플라톤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프락사고라의 구도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수정이 적절히 이해되지 않은 것이 확실한데; '국가'에서 소개된 구도는 전적으로 남성 지향적인 것이다.(11. "여자들의 의회" 끝)
<주1>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9-2)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에서 마지막 단락 끝부분을 보라
<주2> 루쏘, '사회 계약론' I 9끝; cf. "아카르나이 사람들" 718과 본문
<주3>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7-2 )"새들"의 두 번째 단락과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8-2)"뤼시스트라테"의 첫 번째 단락을 보라.
<주4>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77b20-23.
<주5> 플라톤, '국가' 540c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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