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5. 말벌들

병든소 2022. 8. 18. 21:51

5. "말벌들"

 

이 연극은 "기사들"에서와 같이 두 노예들 간의 대화로 시작한다. 그렇지만 "기사들"에서의 두 노예는 사실 장군들이고, "말벌들"에서는 문자 그대로 노예들이다. 따라서 "기사들"에서의 대화는 연극의 사건에 생명을 불어 넣는 전체 구도의 사전 준비이지만, "말벌들"을 여는 대화는 이미 실행의 단계에 있는 전체 구도의- 전적으로, 노예들의 주인이자 필로클레온의 아들인 브델뤼클레온("클레온을 미워하는 자")이 벌였던 일의 연출 의도에 대한 전체 구도의- 한 결과물이다. "기사들"에서 위태로운 것은 두 노예의 운명이거나, 되려 새로 사온 노예(클레온)인데 반해; "말벌들"에서는 위태로운 것이 그 주인이거나 오히려 주인의 아버지이다. 디카이오폴리스나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구상과 구별되는 브델뤼클레온에 대한 구상의 특징은 노예들의 도움 없이는 실행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어둡다. 두 노예- 소시아스와 크산티아스-는 경비를 서고 있다. 크산티아스는 잠들어 있고, 그 역시 잠시 잠들었던 소시아스에 의해 깨어난다. 그들은 포도주를 마셔서 졸린다. 아마 크산티아스가 소시아스보다 더 많이 마셨기 때문인지 그가 소시아스보다 더 졸립다. 그들은 방금 전에 그들이 꾼 꿈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장갑 보병들의 일과도 비슷하다(359-64). 따라서 그들의 꿈은 시민들의 꿈과 같은데; 그들은 각기 도시의 일들에 대해 자기 방식으로 꿈꾸고; 각기 자기 방식으로 한 시민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꿈을 꾼다(41,44,51). "기사들"에서는 노예들이 진짜로 정치적인 사람들이지만, "말벌들"에서는 노예들이 그들의 꿈속에서 정치적인 사람들이다. 크산티아스는 방패를쥐고 그것을 하늘 높이 쳐들어 가지고서 시장터를 휩쓸어 내려가고, 그러자 악명 높은 비겁자, 저 클레오뉘모스가 그것을 멀리 던져 버렸던 힘좋은 독수리 꿈을 꾸었었다. 소시아스에 따르면, 이것은 클레오뉘모스가 땅이나 바다 위에 만이 아니라 하늘에도 역시 그의 방패를 던졌던 것을 의미한다(cf. "평화" 1186). 소시아스의 해몽을 수긍하면서, 크산티아스는 그의 꿈이 소시아스가 신들에게 맹세하며 부정하는 나쁜 징조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이 그의 동료들보다 한층 높은 생각의 용감함을 지닌 크산티아스는 만족하지 않는데; 한 사람이 무기들을(방어용이거나 공격용이거나) 던져 버리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크산티아스의 꿈(15-27)에 대한 토의는 개막 장면(1-53)의 중심을 이룬다. 소시아스의 꿈은 국가의 전체 덩어리에 관련된 것인데; 그것의 주제는 클레온과 클레온의 시종들 중의 하나와 알키비아데스의 혀짧은 발음에 의해서 의도된 악독한 계량에 대한 것들이어서; 그의 꿈은 크산티아스의 것보다 더 정치적이고; 소시아스 역시 그의 꿈으로 염려스러워진다. 그렇지만 소시아스도 수긍한 크산티아스의 해몽에 따라서, 그 꿈은 길몽임이 밝혀지는데, 꿈에 끼어든 알키바네스에게 고맙게도, 그래서 그 꿈은 클레온과 그에 딸린 사람들에게 나쁜 조짐이다. 연극의 초반에 두 꿈 중에 하나가 자세히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덜 정치적인 꿈은 수상쩍은 징조라고 판명나고, 반면에 더 정치적인 꿈은 정치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우나, 전적으로는 만족스럽지는 않을 연극의 결과물들을 앞서서 보여주는 좋은 징조라고 판명난다.

 

왜 소시아스보다 크산티아스가 관객에게 연극의 초반에 있었던 상황에 대해 알려주기 위하여 말을 건네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 충분하도록 관찰을 진행하여야 한다. 이 "도입부prolog"는 그것이 연극의 행동으로 형성되지는 않지만, 짧게 말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연극을 가지고서연극으로 다루는 것으로, "기사들"에서 데모스테네스가 관객들에게 말을 건네는(35-70) 같은 부분과 구별된다<주1>. 그는 관객에게 능력을 뛰어넘는 웅장한 어떤 것("구름"과 같은 것)이나, 아니면 다른 한편으로 클레온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에우리피데스를 또 다르게 남용하는 다듬지 않은 희극("아카르나이 사람들" 이나 혹은 "기사들" 같은 희극)을 기대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결말이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기사들"과 같이 행복하지도, "구름"처럼 불행하지도 않은 한 연극을 보기를 기대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말벌들'에서 주된 배역들의 단순한 이름들이 연극이 다듬지 않은 희극으로 되는 것을 피할 것이라는 작가의 약속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그에 상응해서, "말벌들"이 지혜롭지 않거나 혹은 지혜로워지지 않는 관객들의, 즉 대다수의 능력을 뛰어 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말 것 역시 주의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다른 어떤 희극과 마찬가지로, "말벌들"은 다듬지 않은 희극과 관객의 수준을 뛰어 넘는 어떤 것과, 그리고 매우 낮은 어떤 것과, 매우 높은 어떤 것의 조합이다. 크산티아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열망조차 하지 않는 행복한 중간점을 대충 그려 보인다. 그가 연극의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노예들의 주인은 그가 실내에 감금한 그의 아버지가 집을 떠나지 못하도록 집에서 나가는 모든 출구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그들에게 내렸다. 그 이유는 필로클레온이 관객들 중에 누구도 추측할 수 없는 묘한 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필로클레온이 각각 주사위 놀음의 사랑에 빠져서라거나, 아니면 술 마시는 것의 사랑에 빠져서 고통받는다고 추측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두 사람은 틀렸는데; 특히 이것은 온전한 사람들의 병이기 때문에, 그는 술을 마시고 싶어서 고통받을 수 없다. 세 번째 사람은 필로클레온이 희생을 사랑하여, 혹은 손님의 환대를 사랑하여, 고통받는다고 추측한다. 크산티아스는 필로클레온이 희생하고 싶어서 고통받는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남을 대접하고 싶어서 고통받는다는 것은 부인한다. 관객들이 필로클레온의 병을 추측하는 것에 완전히(거의 완전히) 실패하고 난 후, 크산티아스는 그가 배심원heliast으로 재판정에 앉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폭로하는데; 사실로 그는 그 사랑에 사로잡혔다. 아주 다른 이유로 비록 그가 더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디카이오폴리스가 의회에 일찌기 나타나듯이 재판정에 일찌기 나타나는데; 이런 관점에서 그는 늙은 '데모스'를 닮아 있지만, 그가 가능한 가장 대단한 처벌을 가하는 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는 그와 다르다(cf. "기사들" 67-70). 그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사람을 싫어하는 병을 강하게 수용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퀴벨레의 정화시키는 의식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써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강제로 아버지가 집에서 나가는 것을 막는 방법 이외에는 그 아들에게 남은 방법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노예들의 도움없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아주 어려운 것이다. 크산티아스는 관객들에게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결론 짓는데; 그는 그 아들의 태도를 오만하고 젠 체하는 짓이라고 부른다.

 

집 지붕에서 잠들어 있었던 브델뤼클레온은 잠에서 깨어, 어쩐지 부주의해 보이는 노예들에게 그의 아버지가 굴뚝을 통해 도피하려 한다고 주의를 준다. 그 자신이 강제로 그의 아버지를 다시 밀어 넣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필로클레온은 그 다음 문을 열려고 애쓰고; 브델뤼클레온의 즉각적인 행동이 역시 그의 희망을 앗아 버린다. 그 늙은이는 강제로 인한 그의 법정 불출석으로 피고가 처벌로부터 벗어날 것이어서 충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한번은 델포이에서 신탁에 대해 의논할 때, 신이 말하기를 만일 피고가 필로클레온에게서 벗어나면, 필로클레온이 시들어 가게 될 것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배심원으로서 투표는 그것으로 죽게 하는 칼이고; 그는 목을 매다는 재판관이다. 크산티아스는 악을 피하는 아폴론이 사람을 싫어하는 신탁을 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필로클레온은 그가 탈출하는것을 막기 위해 그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펼쳐 놓은 그물을 물어 뜯을 것이라고 위협하고; 그의 이빨 상태를 여하튼 과장하여 상기시키자 단념한다(164; cf. 155dhk 368-71). 결국에는 그가 힘으로 탈출하려는 모든 노력이 실패하였고, 그는 교활함에 의지하고자 하는데; 오뒷세우스가 폴뤼페모스의 소굴로부터 탈출했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집을 벗어나려 노력하는데; 그는 오뒷세우스의 희극적 등치물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오뒷세우스(폴뤼페모스와 구애자들을 벌한 영웅)와 그의 아들- 그의 아버지에게 폴뤼페모스가 오뒷세우스에게 대하는 의도와 같이 대하는 한 아들, 즉 아버지 폭행자보다 더 나쁜 아들에게 식인종 폴뤼페모스의 역활을 떠맡기는 그의 주장을 빼고서는 전부 실패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 그는 집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집은 다시 단단히 자물쇠로 채워진다. 완전한 무기력에 빠져서 그는 그의 배심원들과 클레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번 더 탈출을 시도하는데, 이것 역시 진짜로 실패하고, 그러나, 그것이 지치지 않는 추진력을 가진 늙은이의 성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이 이제는 그의 아들이 실망으로 힘이 빠지게 한다. 감시자들에게 휴식은 없는데, 이제 어느 때라도 법정으로 행진할 때 필로클레온을 불러내던 버릇이 있는, 그리고 감금을 문제로 제기하는 것을 의지할 수 있는, 그의 동료 배심원들이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인데; 그들의 수적인 우세를 떠나, 그들 각자는 말벌처럼 등에 침 하나씩 무장하고 있고, 그리고 그들이 화가 날 떄 말벌처럼 행동한다. 이것은 필로클레온이 도전이 있건 없건 화를 내는 반면, 그의 친구들은 도전을 받았을 때만 화를 낸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자 브델뤼클레온이 그들을 진정시켜 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희망이 있다.

 

필로클레온은 세 가지로 알려진 시도들을 모두 해보았으나 모두 실패했는데, 그 자신을 다른 것들로 바꾸거나, 혹은 바꾼 척하여 탈출하려는 것이었다: 연기로(144), 오뒷세우스로(184-85; cf. 193-94), 그리고 참새로(207). 그의 친구들은 곧 바로 그들을 대단히 성공적으로 바꾸어서, 즉 '말벌들'로 변신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태도나 모습에서 말벌들과 닮은 늙은이들인 '말벌들'의 코로스가 등장한다. 그들의 젊은 시절 장난들이나 공훈들을 애잔하게 기억하면서, 또 그들의 나이를 아주 민감하게 느끼면서, 그들은 활발히 행진하려 노력한다. 아직은 어둡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중에서 남자 아이들이 들고가는 등불의 도움을 받아 나아간다. 그들의 보호자인 클레온은 그들에게 부자 라케스를 비난하기 위해 정시에 법정에 가 있도록 격려했다. 그들 스스로는 가난하고, 지금은 전쟁으로 생활비도 올라가서; 그 무슨 대단한 것보다 한 작은 가족이 겨우 하루를 버티도록 해 주는 배심원 수당이 필요하다: 법정에서 재판이 없는 날에 그들은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을까? 클레온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든지 간에, 이런 종류의 그의 추종자들은 동정심만 불러 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비록 불충분한 불빛과 아무 것이나 갉아 먹을 굶주림 때문에 말벌들 중의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 간에 열 받은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에 대해 평화스럽다. 평범한 배심원 하나와 그의 아들은 필로클레온과 그 아들과를 비교해 볼 때 서로가 필요한데; 자식은 아버지가 배심원 수당을 벌지 않고서는 굶을 것이고,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등불을 밝혀 주는 도움 없이는 그 수당을 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필로클레온의 집 앞에 도착하자, 평소와는 달리 필로클레온이 아직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놀라는데; 그는 결코 동정심을 가지지 않고, 그들 가운데 가장 사납게 굴고, 언제나 배심원석에 앉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피고 하나가 무죄로 방면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필로클레온이 병이 났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노래를 불러 그들은 그를 불러 내려 애쓰는데- 기억들을 더듬어 볼 때, 그는 비록 술 마시는 것은 애호하지 않지만, 노래하는 것은 애호하기 때문이며<주2>- 그들은 오늘 또 다른 부자 피고인을 파멸시킬 다른 기회가 있기 때문에, 어제의 일로 불만을 마음 속에 너무 많이 담아 두지 말라고 그를 격려한다.

 

필로클레온은' 말벌들'에게 비록 그가 평소처럼 아무 악이든 벌주고 싶지만, 잠시 잠들어 있는 아들과 그의 노예들이 그가 그들과 합류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제우스에게 그 스스로 그가 탈출하는 것을 맡아 주든지, 아니면 그를 없애버리는 것으로 그의 고통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도록 기도한다: 악에게 벌주는 것을 뺀 인생은 아무런 살아갈 가치가 없다. 분명히 그는 '말벌들'의 도움을 받는다 하여도 인간의 방법으로 빠져나가는 희망을 모두 잃었다. 왜 그의 아들이 그가 법정에 나가는 것을 막는냐 하는 그들의 질문에 그는 브델뤼클레온이 그가 어떤 나쁜 짓도 하지 못하게 막지만 호사스런 잔치는- 필로클레온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며; 그는 몸으로 느끼는 즐거움보다 주변의 남들을 해치는 것을 즐긴다- 기꺼이 베푼다고 대답한다. '말벌들'은 도무지 이런 상태의 것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배심원 수당에는 관심이 없는 두 사람, 한 늙은 배심원과 그의 아들은; 틀림없이 그 수당이 필요하지 않고; 그들은 부자이다. 그렇지만 그 아버지는 (민주적인) 법정에 대해 좋은 감정으로 열광하는 반면 그 아들은 반대하는데; 이리하여 클레온에게서 잘 단련된 '말벌들'은 브델뤼클레온이 데모스를 해치는 음모를 꾸민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필로클레온이 감시자들 몰래 집을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운 구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창의력이 바닥났다고 믿는 필로클레온은 그들에게 창의적으로 되라고 요구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량이 풍부한 오뒷세우스를 모방하는 데에 아직은 필로클레온보다 훨씬 못미친다. 그들이 그에게 전쟁 비슷한 공적에 대해 상기시켜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브델뤼클레온이 독재자처럼 그의 노예를 풀어 놓고 무장시켜, 그의 아버지를 가두는 데에 사용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는 더 이상 젊거나 민첩하지 않기 때문이다<주3>. 여전히 이제 거의 아침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즉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벌들'은 여기서 필로클레온을 "작은 벌"로 부르는데; 그들은 어쨌든 그가 말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필사적인 상황에서 필로클레온은 필사적인- 그의 이빨 조건이 필사적이기 때문에 필사적인- 방법으로, 비록 "그물diktyon"이란 말이 그에게 디크튀엔나(아르테미스)를 떠오르게 하여 그가 경건심에 약간 가책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탈출을 막기 위해 감시자들이 쳐놓았던 그물을 물어 뜯는 것을 다시 시도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번은 그가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일을 끝내기 전에 그의 아들에게 들킬까봐 겁난다. '말벌들'은 그가 엘레우시나의 신비함을 손상하지 않고, 또 여신들의 포고를 짓밟지 않는 것을 그가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브델뤼클레온을 맡을 것이라 그에게 보장한다. 필로클레온과 '말벌들'은 경건하고, 반면에 브델뤼클레온은 불경하다. '말벌들'의 제안으로 필로클레온은 창문을 통하여 밧줄에 매달려 자신을 내려 보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노예들이 그의 탈출을 막으려는 시도로 그 아래에 배치될 경우에, 그들의 정신력을 불러 모아 노예들을 이겨낼 것이라 약속해서; 그는 겁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는 그의 가족의 신들에게 기도한 뒤, 용감하게 그 자신을 내려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주4>. 그는 영웅 뤼코스- 그와 같이 언제나 피고인들의 눈물과 탄식으로 즐저워하지만, 그러나 영웅들 중에 외톨이이고, 그리고 제우스와는 확실히 구별되어서(392-93; cf.327-28), 비난당하는 사람들 옆에 앉아 젠 체하는-에게 그를 불쌍히 여겨 도와 달라고 기도한다. 어느 동정심 없는 신들과도 구별되는 동정심 없는 필로클레온은 도움이 필요하고, 이리하여 동정심이 필요하다.

 

필로클레온의 은밀한 하강은 아슬아슬한 때에 브델뤼클레온에게 발각된다. 그는 크산티아스를 깨우고, 그리고 그가 다시 올라가도록 필로클레온을 때리라고 명령한다. '말벌들'이 화가 잔뜩 나, 그들의 날카로운 침들을 사용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필로클레온을 도우러 앞으로 나선다. 그렇지만 명백하게 그들의 노약함을 느끼고, 그들은 무엇이 위태로운지 말하면서 클레온을 데리러 자식들을 보내고; 그들은 누구도 법정 다툼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설교하는 도시의 적 하나와 마주치게 된다. 필로클레온 그 자신은 이미 클레온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197). 그러나 클레온은 마치 "기사들"에서 배심원들이 클레온을 돕기 위해 나서지 않았듯이, 배심원들을 돕기 위해 오지 않을 것이다(255-57). 그러나 "기사들"에서 배심원들의 행동이 설명되어야만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말벌들"에서 클레온의 행동은 그 데마고그가 브델뤼클레온이 데모스테네스나 '기사들'과는 달리, 그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나 아니면 남의 관심을 끄는 것이라 말하지 않아도, 그의 이름이 잘못 오해하게 하는 필로클레온이 정말로 그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까지 따져 들 수 있다. 작가의 대변인으로서 처음 '말벌들'이 클레온을 글로써 비방하는 것에 매달려 있지 않다고 했었다. "기사들"은 정치적인 화제(클레온의 수치스런 지배)를 한 개인의 인생으로 변장시켜 소개한다: 정치적인 사람들은 집 주인 '데모스'의 노예들로 소개된다. "말벌들"에서 처음부터 개인적인 것이 화제이다: 브델뤼클레온은 질병, 즉 델포이의 신탁에서 필로클레온 스스로가 이끌어 낸 열정인 비정치적 질병 이외에는 특히 그의 아버지에게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를 다른 배심원들과 구별짓는 이 열정은 그를 마음내키지 않는 클레온의 지지자로 만들고, 그의 비난과 비방 그리고 의심들은 해악을 주려 하는 그 자신의 욕망을 먹여 키운다. 브델뤼클레온과 필로클레온 사이의 화제는 클레온의 요청으로 법정으로 행진하고(242) 브델뤼클레온을 반민주적인 권모술수를 쓴다고 비난하는(342-45) 바로 그들인 '말벌들'을 통해 정치적으로 된다. 그의 근본적인 관심이 비정치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브델뤼클레온이 정치적 화제로 맞닥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크산티아스와 소시아스가 그의 아버지를 또 다시 붙잡아 단단히 묶은 다음 그에게 데려가는데, 브델뤼클레온은 '발벌들'과 마주친다. 그는 '말벌들'에게 조용히 그의 말을 들어 보라고 권하지만 그들은 절대적로 거절한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그의 아버지를 가도록 하지 않겠다고 그들에게 말한다. 그는 '말벌들'이 고르기아스의 "아들" 필립포스를 파멸시켰듯이(cf. "새들" 1701), 그를 그렇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침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크산티아스는 그제서야 알게 된다(420,427; cf. 211-29)- 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그가 그의 아버지를 놓아 줄 것을 요구하는데; 듣지 않으면 그들은 공격한다. 필로클레온은 즉시 브델뤼클레온과 그의 지원자들을 그들 몸의 가장 알맞는 부분을 공격하라고 조른다. 브델뤼클레온은 이 모든 협박에 흔들리지 않고, 나머지 그의 노예들을- 그들 숫자가 그가 가난하지 않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불러, 그의 아버지를 '말벌들'에게 날치기 당하지 않도록 확인하고, 임박한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집으로 도로 돌아간다. 그의 침착함은 정당하게 최소한 효과적으로 보이는데; 그의 아버지는 다시 한 영웅의 도움을 호소하고, 그리고 '말벌들'은 필로클레온이 그 많은 혜택을 주었던 그 아들의 노예들에게 죄수처럼 갇혀 있는 것으로 드러나듯이 나이 먹은 비참함을 불평한다. 가혹한 대접을 받는 필로클레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예들에게 그 전 시절에 그가 했던 재찍질을 상기시키며 위협한다. 그 자신들을 성이 마르고 정의롭다고 묘사하는 '말벌들'과 필로클레온, 이 둘이 노예들에게 겁을 주지만, 그러나 '말벌들'은 침을 사용하지 않는다: 필로클레온은 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싸움은 브델뤼클레온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집에서 돌아와 막대기 하나를 노예에게 주고, 연기통은 다른 노예에게 주어 무장하고는, '말벌들'을 집 밖으로 몰아내라고 명령한다. '말벌들'을 상대한 그들의 쉬운 성공은 크산티아스에게, 브델뤼클레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말벌들'이 위험하지 않다는 그의 선입견을 확인시킨다. 싸움에 진 "말벌들', 브델뤼클레온이 법을 전복시키려 하고 그리고 그 자신을 독재자로 만들려고 시도한다고 비난한다. 그는 재삼 대화와 화해를 제안하지만 그들은 분개하여 거부한다. 브델뤼클레온은 '말벌들'의 능력 아니면 싸우려는 의지를과대하게 평가하여, 그가 그의 아버지를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의아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말벌들'이 그에게 경고하듯이, 그가 이제 데모스에 반대하는 음모자로 알려지기 때문에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많이 나가 있었다. 그는 별 소용이 없지만, 특히 그의 경우 그의 아버지가 배심원으로 행동하는 것에 심취해 있는 것에서 해방시키고,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의 온전한 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것 이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데, 모든 곳에서 체제 전복이라며 몰아 세우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려 노력한다. 그의 아들이 집에서 돌아온 이후에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이제 그에게 빈약한 재판보다는 부유한 요리를 선호한다고 대답하는 필로클레온에게 고맙게도, 교착상태가 풀린다.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는 클레온의 정책과 그의 법정의 조종력보다 차라리 더 주요한 연극의 화제이다. 브델뤼클레온은 그의 아버지의 이상한 선호가 오로지 몸에 베인 습관 때문이며, 그리고 만일 그가 오직 그가 하는 말만 듣는다면, 그는 그가 배심원으로 행동하여 저지른 나쁜 짓들을- 그가 그를 경멸하는 사람들의 노예라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겠다고 대답한다. 필로클레온은 그가 그 누구의 노예라는 것을 부정한다: "내가 그 모두를 지배한다." 그는 이제 그날에 배심원으로 행동하기 위해 탈출하는 것에 더 이상 관심이 없지만, 배심원으로 행동하여 그의 품위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는 모두를 지배하는데; 그는 근본적으로 체제 전복을 막는 것이나, 민주체제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말벌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갈라 놓는 화제에 대하여 결정할 것을 제안한다. 브델뤼클레온은 이에 동의하고, 그의 노예들에게 그의 아버지가 자유스럽도록 놓아 주라고 명령한다. 필로클레온은 만일 그가 논쟁에서 패한다면 자살할 것이라고 선언할 만큼 그의 경우가 강력하며, 또 '말벌들'이 그의 편이라고 아주 확신한다. 비록 판결하지 않고, 남을 비난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가치없는 것이지만, 그가 판결과 비난에 심취해 있는 것이, 만일 그것이 바보같다고 판명된다면, 그가 습관이나 열정에의 탐닉을 계속할 것이라고까지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브델뤼클레온은 그의 아버지의 자살 의지나(필로클레온은, 니키아스처럼 그 자신이 신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여기지 않는다.) 합리성에 대해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가 '말벌들'의 결정에 따르지 않을 경우에 어떤 처벌을 받으려고 준비하고 있는지 묻는다. (이 질문의 구조에서, 그는 법률적인 용어들를 기억하는 데에 약간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 경우에 필로클레온이 다시 법정에 출석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금지될 것이며, '말벌들'이 그에 대해 더 이상 흥미를 가지는 것을 거둘 것이라 말해도 괜챦다. 필로클레온의 말대로 그 경우에 그는 다시는 배심원 수당을 받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제 배심원들이 모두를 지배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선동정치가demagogue들의 노예들인지에 대한 논쟁에 돌입하려 한다. '말벌들'은 그들의 동료 배심원에게 논쟁에서 무엇이 위태로운지를 상기시킨다: 만일 브델뤼클레온이 이기면 그 늙은 시민들은 어디에서나 비웃음을 살 것이고, 그들의 모든 품위를 잃게 될 것인데; 늙은이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보호하려면 필로클레온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코로스가 아버지를 격려하는 동안, 아들은 늙은이가 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주석을 적어 두는 것을 준비하는데; 그의 법률적 용어에 대한 기억 뿐만 아니라, 단순히 그의 기억력 자체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어쨌든 그는 스트렙시아데스를 연상케 하고, 반면에 그의 아버지 폭행은 페이딥피데스를 연상시킨다. 그는 확실히 스트렙시아데스나 페이딥피데스가 그렇게 하는 만큼 가족을 도시의 위에 둔다.

 

필로클레온은 배심원들의 지배가 특히 배심원이 늙고 가난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그 어느 제왕적 지배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배심원들에 대해, 특별히 자기 자신이 아닌 일반적으로 말하고; 예를 들어 그가 묘사한 대로 대표적인 배심원은 가난하고, 그리고 늘상 논죄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가 변론의 마지막에서 언급할 것과 같이 배심원들의 권력은 제우스의 그것과 어떤 면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논죄에 겁을 먹는 모든 사람들은- 아테네에서 논죄가 겁이 나지 않는 사람이 그 누구인가?-  그의 분노를 달래려고 아첨을 떤다. 그가 부자이건 강력하건 간에, 모독이라는 것을 모르는 피고인들은 풀려나기 위해 스스로 죄가 있다고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갈고리로 걸든 아니면 교활한 수법으로든 그들은 어떤 면에서도 배심원보다 우월하다고 보이는 것을 피하고; 그들은 그에게 믿을 수 없거나 놀랄 만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거나, 아니면 우스개 소리를 만들어 그를 헷갈리게 하려 노력하며; 그들은 그들 자식들의 눈물로 그의 동정심에 호소하도록 만들어서 그를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하며; 그들은 신인 것처럼 그에게 간청한다. 그리고 신인 것처럼 그는, 특히 높거나 권위를 가진 자들이 그가 그전에 보여주었던 자비와, 그리고 자비를 약속한 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의 그들의 실망에 유도되어, 자비를 애원하는 그들의 자기비하를 즐긴다. 배심원의 천성적이거나 습관적인 분노는 그가 아첨을 받거나 웃음으로 유도될 때나, 그가 불쌍하다고 감동받으면 수그러든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희극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나 '말벌들' 같은 사람들의 분노나 분개에 대응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과,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가 이룰 수 없는 것을 오직 에우리피데스는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든다. 이제 아리스토파네스가 관객을(배심원들을 포함해서) 웃음으로 감동시켜 가는 것이 에우리피데스가 관객을 일어나는 동정심으로 감동시켜 가는 것을 계속해서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인지를 의문을 가지고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들의 분노와 분개를 중화시키는 것은, 진실로 도시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브델뤼클레온은 그 아버지에게 그가 아직 배심원heliast들의 자랑인 '지배하는 것rule'으로부터 배심원들에게 생기는 어떤 견실한 혜택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필로클레온은 온건한 성적 즐거움과 약간의 음악적 즐거움이 배심원들이 즐기는 것이라고 짤막하게 언급한다. 이것에 브델뤼클레온은 만족하지 않는다. 필로클레온은 그들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들 중에, 그 다음 것으로, 마치 클레온과 소시지장수가 '데모스'를 위해 하고 있었던 것을 연상시키는듯이, 클레온과 다른 저명한 인사들이 그들에게 그들의 육체를 편안하게 하는 그런 것들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브델뤼클레온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더 그가 승리하리라 확신한다. 그래서 필로클레온은 자기가 잊어버린- 분명히 그것이 엄격하게 가정적인 것이고, 그래서 모두 주의 깊게 여기지 않는 성격의 것이라-, 이름하여 배심원이 법정에서 집으로 가져오는 수당을 생각하며 그의 딸과 아내의 손으로 받는 아양과 친절이라는 항목을 기억해 낸다. 음식과 음료를 그의 아들이나 그의 시종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벗어나 그는 존경받는 가족의 중심이 된다. 여기서 다시 필로클레온은 무엇보다 그가 아닌- 알려진 한 그 자신에게는 아내나 딸이 없다- 대표적 배심원에 대해 이야기한다<주5>. 브델뤼클레온이 그를 최고로 무서워하는 반면, 그가 브델뤼클레온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그의 진술 또한 사실이다: 브델뤼클레온은 일반적으로 배심원들을 무서워하지만, 그러나 그는 필로클레온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여전히 현재 경우에 필로클레온은 배심원들을 그 자신과 다른 모든, 혹은 대부분의 동료 배심원들과 구별한 모습으로 묘사한다: 대부분의 배심원들은 유복한well-to-do 아들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이 보탬이 배심원들에게 그들이 웅대하다는 느낌을 고양시킬 뿐이기에, 필로클레온의 변론은 전체적으로 보아 '말벌들'로 하여금 그들 모두가 '축복받은 섬Isles of Blessed'에 살고 있다고 믿도록 만들고, 이제까지 어느 변론보다 더욱 그들을 즐겁게 한다. 필로클레온은 그 아들의 패배와 그의 명백한 실망을 즐긴다. 그들 방식으로 '말벌들'은 브델뤼클레온에게 그의 아버지를 반박하는 어려운 일을 아무 희망도 없이 해내려 하지 말고, 그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라며 기회를 준다.

 

브델뤼클레온은 어려움을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이 어려우며, 그리고 희극작가들이 도시에 오래 전부터 뿌리내려 왔었던 질병을 치료하려는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강하게 마음을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와 '말벌들' 간의 동맹자는 그에게 그의 아버지의 병 뿐만 아니라 '말벌들'의 병도 치료하도록 노력하라고 밀어 부친다. 그는 그가 치료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는 그의 첫 진술에서 그가 희극작가가 아니라고 분명히 해 놓는다. 그는 지금까지 경건심을 표시해 본 적이 없는데, 이제 제우스의 도움없이는 그 병을 고칠 수 없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느끼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임무가 어려워서 너무 몸서리쳐진다. 그가 "우리들의 아버지,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를 족쇄로 채웠던 신들과 사람들의 아버지-이라고 제우스를 부르자, 그의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며, 브델뤼클레온에게 그가 이 논쟁에서 이기지 못할 경우 그를 죽이겠다고 경고하면서 제지하는데; 그래서 브델뤼클레온은 더 이상 "우리들의 아버지" 제우스를 부르지 못하고, "조그만 아버지" 필로클레온을 부른다. 그는 그에게 도시의 수입과 육 천여명의 재판 관계자들에 대한 연간 지출을 어림잡아 계산해 보라고 요청한다. 브델뤼클레온이 계산한 것을 바탕으로 필로클레온은 재판종사자들에게 나가는 돈이 전체 수입의 10분의 1이 되지 않는 것을 계산해 낸다. 그는 이 결과에 충격을 받아서 수입의 큰 덩어리는 어디로 가는지 의아해 한다. 물론 브델뤼클레온이 배심원들은 그런 뇌물과 선물을 전혀 받지 못하는 반면에, 예속된 도시로부터 굉장한 뇌물과 선물을 받는 데마고그들에게 추가로 간다고 대답한다. 필로클레온은 이런 것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런 관점들에서 보면 배심원들이 거스름돈을 덜 받은 사실로 그들이 데마고그들의 노예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브델뤼클레온이 이것을 배심원들의 힘들고 궁핍한 생활과, 그들로부터 배심원들이 지시를 받아야 하는 편안한 생활과, 돈이 되는거래들을 하는 데마고그들과를 대조하여 결정적인 요점을 증명한다. 그러한 거래에 대해서 전적으로 모르고 있던 필로클레온은 그가 제우스다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심각히 의심하기 시작한다. 브델뤼클레온은 아테네 제국의 범위와 부를 볼 때, 모든 아테네 사람들은 호화롭게 살 수 있어야 했지만, 데마고그들이 구호한답시고 주는 무시할 만한 돈이 고마워서 사람들이 언제나 복종할 것이므로,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가난하게 붙들어 두는 데마고들 때문이라고 가르치면서 슬슬 문지른다. 디카이오폴리스가 라마코스에게 이기고,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그의 승리를 인정하는 논점을 떠올리게 하는 이 논점은 성공한다: 필로클레온은 무너졌다. 그는 그의 아들이 질 경우 그를, 아니면 그 자신이 질 경우 그 자신을 죽이겠다고 약속한 그 칼을 내려 놓는다(714; cf. 522-230 그리고 653-54). 브델뤼클레온은 데마고그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때조차 결코 지키지 않은 커다란 약속들을 만드는 것 밖에 그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가 아버지를 감금한 것은 배심원들이 데마고그들에 의해 바보 취급당했기 때문이어서, 이제 그는 언제나처럼 그가 원하는 것은 배심원으로 행동하는 것만 빼고 무엇이든 기꺼이 들어 줄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브델뤼클레온은 배심원 일의 웅대함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돌볼 부자 아들들이 없어서 먹고 살기 위해 그 수당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일을 갈망하는 다른 사람들이 배심원들로 봉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에, 혹은 달리 말해서 그가 기존의 배심원 제도를 개혁하거나 폐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는 단지 그 자신의 일에만 신경쓰는 사람일 뿐이다.

 

'말벌들'은 이제 결정을 알릴 자세가 되어 있다. 그들은 브델뤼클레온의 승리를 단단하게 결정한다. 그들은 필로클레온에게 고집을 부리거나 엉뚱하게 나오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 분명히 있는 신들의 선물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한다. 그들은 그렇게 친절하고 분별있는 아들을 가진축복받은 그와 그들과 사이의 차이점으로 그의 주의를 돌린다. 그러자 브델뤼클레온은 그의 아버지에게 제공할 즐거움들과 안락함들을 열거한다. 그럼에도 필로클레온은 아무 말없이 있는데, 그래서 그의 아들이 아직도 그가 절망한 상태로 있지나 않는지 걱정하게 한다. '말벌들'이 그의 아버지가 침묵하는 것은 아마도 이전의 과오를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며 그를 위로한다. 그들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난다. 언제나처럼 강하게 필로클레온은 여전히 모든 즐거움과 안락함을 비난하는 것을 선호한다. 브델뤼클레온의 변론이 그에게 미친 유일한 영향은 이제 그가 기꺼이 클레온을 그의 횡령으로 비난하려는 것이다: 클레온보다 그가 더 강하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주는 것으로 그는 마침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가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던 제우스다운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말벌들'의 지지를 잃었기 때문에 그는 다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이 제안한 진짜 공공의 법정이 아닌, 판결을 받아야 하는 노예들이 충분히 많은 집안에서 재판을 계속하는 절충안을 약간 주저한 다음, 그가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브델뤼클레온이 그의 아버지에게 "저기서"보다 "여기서" 그가 더욱 더 편안하게 재판을 할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필로클레온에게 남은 유일한 어려움은 그가 집에서 재판할 때, 누가 그에게 배심원 수당을 주는지를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브델뤼클레온은 이 어려움을 단 두 마디로 처리한다. 필로클레온은 이제 완벽하게 그의 운명과 화해한다. 이제 보이듯이 그에게 인생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비난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어서거나, 혹은 그것이 그를 제우스와 동등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비난하는 그 자체이다. 브델뤼클레온의 아버지 폭행은 전적으로 성공했다. 그는 암묵적으로 디카이오폴리스가 반역이라는 그의 행동의 정당성을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확신시켰듯이, 아버지 폭행이라는 그의 행동의 정당성에 대해 노쇠한 '말벌들'에게 확신시켰다. 이 아버지 폭행은 데모스로부터 전적인 승인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현명한 아들의 선의로부터 그의 바보같고 은근히 무례한 아버지에게로 데모스가 판단하기에 충분한 일로 진행한 것이 명백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며; 그것은 생리학적physiologia인 것이나, 아니면 분명한 불경에서부터 진행되지 않았다. 브델리클레온은 그가 그에게 대응하려고 힘을 쓰기로 작정하기 전에, 그의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모든 고대의, 혹은 경건한 수단들을 시도하였다는 것을 첨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112-25).

 

브델뤼클레온은 필로클레온의 오랜 박탈감을 보상해 주기 위하여 지금 당장 열려야 하는 법정에서의 심리에 필요한 도구들을 가지러 집 안에 들어간다. 브델뤼클레온이 그의 변론을 끝마친 후에 '말벌들'은 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필로클레온은 만일 어떤 피고인이 그에게서 벗어난다면 그가 시들어 갈 것이라고 델포이에 있는 신이 그에게 신탁을 주었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는 화해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배심원으로 행동할 필요를 거두는 것에까지 모두 멀리 떨어져 있었다(158-60, 733). 이제 신탁의 명령을 계속 따를 수 있도록 해결되고 나자, 필로클레온은 공공의 법정이 집에서의 법정으로 대치된 것이 또 다른 신탁이 약속했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래서 그가 아들의 소원에 응하는 것이 신의 뜻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장받게 된다. 브델뤼클레온이 도구들을 가지고 돌아오자, 그의 아버지는 처음 단 한 항목, 그가 좋아하는 영웅, 영웅 뤼코스의 사당을 빠트리는데, 그러나 그가 실수한 것이고, 브델뤼클레온은 그것을 잊지 않았었고; 그럼에도 그는 또 다른 신성한 것들을 잊지 않고 있어서, 필로클레온은 집에서 그것을 가지고 온다. 그와 동시에 라베스라는 개가 시켈리아에서 만든 치즈 조각을 훔쳐 굴꺽 삼켰는데, 그래서 필로클레온의 재판 활동에 적당한 꺼리가 되었다. 노예들 가운데 하나의 제안으로, 또 다른 개 한 마리가 라베스를 고소하는 역활을 할 참이다. 법정 심리를 위해 마지막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 아버지는 논죄하고 싶어 어쩐지 안달하게 되고, 아버지 폭행자 아들은 아버지가 그의 아들이 한 두 가지 관습적인 도구들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우려를 보여 주려는 것인지, 지방 관습에 극단적으로 매달리는 것 때문에 어쩐지 안달하게 되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뛰어난 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브델뤼클레온은 법정의 심리를 신성을 경배하는 새로운 행동으로 개시한다. '말벌들'은 델포이의 아폴론에게 브델뤼클레온의 사업이 그들의 이익으로 이어지도록 기도한다. 브델뤼클레온은 그의 아버지의 가혹함과 화를 잘 내는 기질을 녹여 주고, 그리고 점잖고 동정심 많아 지도록 해 달라고, 집안의 수호자인 아구이에우스의 아폴론에게 기도한다. 퀴온이라는 개( 클레온과 같은 고을 이름을 따서)가 라베스(라케스와 같은 고을 이름을 따서)를 시켈리아 치즈 조각을 다른 개들과 나누지 않고, 혼자 먹어 치웠다고 고발하였다. 필로클레온은 고발자에게나 마찬가지로 피고에게도 심술궂지만, 이런 사정에서 그가 이루기를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피고를 치죄하는 것이다. 퀴온이 먼저 라베스에 대한 고발 내용을 정식으로 진술한다. 고발자를 짓는 개로, 혹은 짓는 개를 고발자로 보는 것은 쉽다. 퀴온의 정확한 고발 내용은  라베스가 시켈리아산 치즈를 훔쳤고, 그가 조금 요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조금도 나누어 주지 않았다는 취지이다. 필로클레온에 따르면, 라베스의 범죄가 훔친 행위로는 성립되지 않지만, 노획물을 구성원들- 즉 배심원들-과 나누지 않은 것으로는 성립된다. 그는 피고의 이야기를 모두 듣기 전에 판결하지 말라는 그의 아들의 요청을 무시하는데; 그는 언제나처럼 가혹하고 심술궂다. 라베스는 그를 변호하는 말을 하기에 너무 겁이 나서- 짖는 개가 사죄하는 것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브델뤼클레온이 그를 대신한다. 그는 그를 지금 살아 있는 최고의 개라고, 양떼를 모는 데에 매우 소질 있고, 즉 고소자보다는 더 훌륭하며, 지휘자로 그를 더 선호할 만하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봉사는 굉장한 것이어서; 만일 훔쳤다면 뮤즈에 대한 교육이 모자란 것이니 그가 저지런 것을 용서해 주어야한다고 변호한다<주6>. 브델뤼클레온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힘들게 생활하는 라베스와, 한번도 집을 벗어나 본 적이 없이 안락한 생활을 하는 퀴온을 비교하자, 필로클레온은 처음으로 피고가 불쌍하다는 생소한 감정을 가지는데, 그 감정을 브델뤼클레온이 라베스의 강아지를 가져와, 이 목매다는 것을 좋아하는 재판관에게 간청하고 알랑거리게 하여 심화시켜 보려 한다. 필로클레온이 눈물을 흘리지만 불쌍해서는 아니다. 일들이 라베스에게 아주 좋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브델뤼클레온이 속임수를 실행하여 그 아버지가 무죄 방면에 표를 던진다. 그 늙은이가 피고를 놓아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는 실신하는데; 일이 생기고 난 다음 그가 설명하듯이, 그는 피고를 무죄로 놓아 준 것이 께름직해져서, 그리고 신들이 그에게 무슨 일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라서; 그는 그들에게 본의 아니게 그의 평소 태도와 반대되는 짓을 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빈다. 델포이의 신탁이 생각난다. 다시는 그가 공공의 법정 심리에 참석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해결되었을 때 그가 실신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생각난다. 마지막으로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그가 지닌 강박관념의 깊은 이유가 비난자의 제우스다운 성격에 대한 그의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 생각난다. 그 이유가 동정심에 대한 신의 격노를 그가 무서워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 두려움이 그가 동정심에 면역되게 만들었고, 또 그가 악에 벌주는 것을 즐기게 만들었다. 이 두려움이 경제적으로가 아닌 정치적인 것으로 고무되는 그를 '말벌들'과 구별한다. 필로클레온은 '말벌'이 아니다. 말벌 같다라는 것이 신사 같다 라는 것의 반대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필로클레온은 앞서 지적한 이유로 '초말벌'이라고 불러도 좋은 반면, 브델뤼클레온은 단순히 '비말벌'이다. "말벌들"의 핵심적 행동은 '말벌들'과는 아무 상관없고, '초말벌' 필로클레온과 '비말벌' 브델뤼클레온 사이의 싸움이다. 이 모든 것을 본 후에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의문은 브델뤼클레온이 그의 아버지에게 완전히 이긴 것으로 보이는 것이 필로클레온이 그의 께름칙함이나 두려움을 그때부터 걷어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신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브델뤼클레온은 그에게 염려말라고 말하고,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즐거움들을 상기시키는데; 확실히 그는 그 늙은이의 동요를 이해하거나 같이 느끼려 하지 않는다. 필로클레온은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가 그의 아들을 따라서 집안으로 가버려, 그의 우려에 대해 일어나는 일은 한동안 숨겨지는데, 그것은 파라바시스로 가려진다.

 

"말벌들"에서 파라바시스는 매우 늦게 들어 있는데, 비례적으로 "기사들"이나 "구름"에 비해 많이 늦고, 그리고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보다조차 더 늦다. "기사들"과 "구름"에서는 연극의 전반부가 끝나기 훨씬 이전에 파라바시스가 끝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후반부 안에 파라바시스가 들어 있지만 3분의 2가 되기 훨씬 이전에 끝난다. 그럼에도 "말벌들"에서는 파라바시스가 대략 3분의 2의 끝 부분에서 시작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파라바시스가 늦게 들어 있는 것은 그 연극에서의 행동이 근본적으로, 코로스('아카르나이 사람들')와 작가(주역 배우) 사이의 갈등이어서,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디카이오폴리스와 완전히 화해하게 되기 전에는 코로스가 작가의 말을 할 수 없고; 파라바시스가 바로 그 화해의 직후에, 즉 가능한  가장 빠른 때에 이어서 나온다. "기사들"과 "구름"에서는 작가와 코러스 사이에 갈등이 없다. "말벌들"에서는 '말벌들'이 클레온의 편을 드는 만큼 작가가 클레온에 대해 반대하는 코로스와 작가 사이에 명백한 갈등이 있다. 다른 말로, 브델뤼클레온의 필로클레온에 대한 반박은 디카이오폴리스의 라마코스에 대한 반박을 연상하게 하는데; 그러므로 파라바시스가 '말벌들'과 브델뤼클레온의 화해 즉시 나오는 것으로 예상하게 된다. 이 예상이 어긋난다는 사실로 브델뤼클레온과 '말벌들' 사이의 화해가 디카이오폴리스와 '아카르나이 사람들' 간의 화해와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만하고 젠 체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 그의 이름이 아리스토파네스의 배역들의 추한 이름들 보다 더 추한 브델뤼클레온은 디카이오폴리스와는 다르게 희극작가가 아니다. 정책에 관해서거나, 아니면 클레온에 관한 '말벌들'과 작가 사이의 갈등은 '말벌들'과 작가 사이에서 사람이 그래서 나온 갈등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의 파라바시스 위치로 지적되고, 다른 한편으로 "말벌들"의 파라바시스 위치로 지적되듯이,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디카이오폴리스 간의 화해와의, 즉 '아카르나이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바꾸어 놓는 것과의 상등관계는 '말벌들'과 브델뤼클레온과의 화해가 아니라, 필로클레온이 가진 '치죄해야 하는' 강박관념을 치료하거나 바꾸어 놓는 것이다. "말벌들"을 위한 '말벌들'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을 위한 '아카르나이 사람들'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 "기사들"이나 "구름"에서 '데모스'와 스트렙시아데스를 치료하는 것은 연극의 끝 부분에 가까이 가서가 아니면 일어날 수가 없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파라바시스에 뒤따라 나오는 부분이 디카이오폴리스가 평화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 보여 주어 그의 개인 평화의 의미를 드러낸다. 그렇지만, "말벌들"에서는 파라바시스에 뒤따라 나오는 부분이 브델뤼클레온이 그의 아버지를 치료하거나 바꾸어 놓는 것으로(그는 이에 대해 충분할 만큼 자주 말했다) 하는 무엇이 아니라, 치료되었거나 바꾸어진 필로클레온이 하는 무엇을 보여 주는데; 필로클레온을 치료하거나 바꾸는 것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바꾸는 것보다는 덜 마무리된 것으로 판명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브델뤼클레온은 희극작가 아닐 뿐만아니라; 그는 필로클레온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

 

파라바시스에서 '말벌들'은 암묵적으로 작가의 이름으로 관객들을 탓한다. 작가 활동 초기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연출된 희극들을 통해 복화술사처럼 이야기 했고, 그 뒤로는 그 자신의 뮤즈의 입에 걸린 고삐를 쥐어서, 작가가 시민들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부당하게 대접했다. 그는 부풀린다거나, 불건전한 것을 쓴다거나, 그의 뮤즈를 여치료사로 사용하는 것 없이도, 진정 아테네에서 다른 나머지보다 더 높게 명예를 누렸다. 그는 한번도 단순한 사람들을 공격한 적 없지만, 그러나 헤라클레스다운 노여움으로 대단한 것들을 겁내지 않고, 저 괴물 클레온을 끌어들이는 굉장한 것들을 시도하였고- 그는 그 일에 여전히 관여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시민들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작가는 클레온과 싸운 그의 공적들이 아테네 사람들에게서 정식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가 굳이 불평하려 하는 것의 동기는 그 희극으로 그가 법정에서의 연설가들을- 아버지들을 목조르고, 그리고 남을 참견하지 않고 자기 일만 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위험한 나쁜 것들을- 공격하면서, 가장 새로운 구상들을 보여 주었던 작년에 나온 희극의 운명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 씨들이 싹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구름"을 의미한다). 그는 몇 번이나 디오뉘소스에 맹세하며(1064; cf. "구름" 519), 그들이 작년에 나온 연극의 운문들보다 더 나은 것들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그 즉시 보지 않았다는 것은 아리스토파네스에게는 수치이다. 작가는 아테네 사람들이 "구름"에 나오는 법정 연설가들에 대한 공격을 제대로 느끼는 데에 실패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번호가 붙지 않은 무수한 것들"의 실패는 어떤 방법으로 그가 현명하게 보류하고 있어서 알려지지 않는다. 그는 만일 아테네 사람들이 지혜의 향기 속에 있기를 소원한다면,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 찾아 나서야 하고,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소중히 품어 주고 길러 주어야 하며,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을 귀중품 상자에 넣어 보존해야 한다고, 경고를 곁들여 결론 짓는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클레온과의 싸움보다 "구름"에 더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벌들"에서도 클레온과의 싸움은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보았었다.

 

나머지 "말벌들"의 파라바시스는 마치 "구름"이나,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나, "기사들"이 각각 '구름'이나,,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나 '기사들'을(아니면 '구름'이나,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나, '기사들'에게 속하는 것들을 가지고) 다루듯이 '말벌들'을 다룬다. '구름'이나 '기사들'과 달리, '말벌들'은 어떤 신도 부르지 않고; 이런 점에서 다른 많은 것들처럼 그들은 오직 아카르나이의 무우사만 부르는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비슷하다. '말벌들'은 비록 그들이 제멋대로인 현재의 젊은이에 비해 활기 왕성함에 있어 여전히 우월하다고 여기지만, 그들은 코로스나 전투(법정에서가 아닌)에서 가장 싸우기를 좋아하였던 오래 전에 가버린 그들의 젊은 시절을 노래한다. 그들이 젊었을 때 그들은 겁도 모르고 적을 무너트렸는데, 그들은 말을 잘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젊은 사람들이 훔친, 많은 도시들이 바치는 공물을 책임지고 가져왔다. 그들은 관객에게 왜 그들이 말벌들의 본성을, 즉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한다. 그들은, 가장 남자답게 자라서, 가득찬 분노와 원기로 페르시아를 무찔렀던, 진짜 토착의 아티카의 아들들이다. 옛 아테네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태도는 말벌들을 닮았다. 그들은 누가 건드리면 단순하게 화를 잘 내고 그리고 사나워지며; 그들은 떼를 지어 행동하고; 그들은 침을 찔러 생계를 유지하는데;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침이 없는 '암펄들'이 있다. 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전쟁에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말벌들'이 가진 것으로 급료를 받는 것이다. 그들이 제안하는 유일한 정치적 개혁은 침이 없는 사람이 지금으로부터 아무도 배심원의 수당을 받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기존의 배심원 제도를 굳건히 고수한다는 것과, 혹은 그 제도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것을 바탕으로 브델뤼클레온과 화해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어떤 꺼림직한 것도 걷어낸다. (그들은, 브델뤼클레온의 환상적인 "선거 공약"에 대해 아주 작은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cf. 698-712.) 그렇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그들이 전쟁에서, 특히 야만인들과의 전쟁에서 행했던 것에 관해서 가장 높이 칭송한다. 그들의 취향은 근본적으로 '정의의 변론'의 것과 같다. 말벌다움은 전쟁에서 최선의 쓰임이고, 물론 필수불가결하다. 재판에서의 말벌다움은 아마도 말벌다움을 적절하게 사용했을 때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군더더기일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외부의 적들에 대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도시가 필요로 하는 자질들이, 특히 전시에는, 동료 시민들의 행위에 대해 서로 간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필로클레온이 그의 아들을 데리고 다시 등장하는데, 그는 습관적인 심술을 잃지 않았지만, 그러나 신들의 명령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께름직한 마음은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늙은이 기질은 알려진 것처럼 그가 잘 대접 받아야 한다거나, 아니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좋은 것들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는 남을 나쁘게 다루면(168,322,340), 그것으로 자기가 잘 대접받는다는 것을 여전히 선호할 수 있었을까? 그는 확실히 그의 아들이 강제로 입으라고 하는 에크바타나에서 털실로 짠 망토와  강제로 신으라는 라코니아식 구두를 혐오한다. 그의 아들과 대비해 볼 때, 그는 모든 외제와 그리고 특히 스파르타를 연상케 하는 모든 것들을 싫어하는데; 그의 아들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브델뤼클레온이 수긍하듯이, 그는 어쩐지 부자 남자가 여자처럼 보이게 입은 패션 같은 그의 새옷들 들여다보고 그리고 걸칠 수가 없다. 그 아들이 페르시아제 망토를 강제로 입히는 동안, 필로클레온은 보통 때보다 더 자주 맹세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것에 대한 그의 불쾌함을 나타내고; 그가 그의 아들을 죽이고자 한 것을(653-54) 기억하며; 이제 곧 그가  그의 아들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을(1352-5) 보게 될 것인데; '말벌들'과 대비해 보면 그는 가장 본성적이지 않은 아버지이다. 그는 전적으로 그의 아들이 그에게 가르치려 애쓰는 세련된 즐거움의 생활과는 맞지 않는다. 브델뤼클레온이 그의 아버지가 적절한 옷을 입는 것을 주선한 뒤에, 이 오만하고 위풍당당한 태도의 사나이는 이 장면의 중간 부분에서 학식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위풍당당한 연설을하기 위해 그 늙은이가 준비하도록 방향을 바꾼다. 필로클레온은 신화나 혹은, 예를 들어, 어머니 폭행 같은 우화를 이야기할 것이고, 브델뤼클레온에 따르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에 관한 것들의 경우에 대하여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데; 말하자면 대화는 아이스퀼로스식보다 반드시 에우리피데스식이어야 한다(cf. "개구리들" 959-60). 필로클레온은 가축들에 대한 우화라면 쉽게 이야기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물론 이것은 그의 아들이 그가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중요한 사람들 속에서 경기를 관람했다거나, 혹은 더욱 특별히 육상경기를 관람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하듯이 경쟁자들의 신체의 단련과 기량에 대한 적절한 판단들을 수반해야 하는 관전평을 하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이 경험했던 웅장한 것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 필로클레온은 이런 종류의 것들에는 뛰어나지 않다. 그렇지만 그가 심술궂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쩐지 점점 더 까다로운 그 자신을 드러내는 죄짓지 않고 착하기도 한 그의 아들에 비해 단순히 열등하지 않다는 것이 의심되기 시작한다. 그 다음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다른 도시에서 온 저명한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즉 실제로 약간의 과시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야기할 만한 그의 젊은 시절에 거둔 어떤 종류의 남자다운 위업에 대해 묻는다. 브델뤼클레온은 그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가 사냥에 나서 세운 무용담과 같은 것을 말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필로클레온은 이런 종류의 것은 이야기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필로클레온이 사회적인 우아함이 부족한 것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었었다는 것의 결과가 아닌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되기 시작하는데; 브델뤼클레온은 오래된 부자 집안에서 이어 나온 것으로 믿고 싶어하는 신흥 부자nouveau riche가 아닌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되기 시작한다. 브델뤼클레온이 아버지를 고매한 모임에 소개하는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은 어떻게 하면 그가 연회 인사가 되는지를 그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짜여 있다. 이 단계에서 그가 그의 아버지를 다루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스트렙시아데를 다루는 그것을 어렴풋이 연상시키는데(cf. 1208-9와 함께 "구름" 649, 694), 그러나 이 두 짝 사이의 차이점은 너무나 명백해서 이 주제에 대해 말을 더할 것이 없다. 필로크레온은 다른 여러 것들 중에 드러눕는 것에도 온전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 연회 장면을 예행 연습하면서, 브델뤼클레온은 동료 연회 참석자 중 하나를 그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연기하는 클레온으로 간주하는데; 비록 브델뤼클레온이 (더 이상) 장사꾼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브델뤼클레온과 클레온이 같은 사회적 계층에 속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필로클레온은 아마도 그가 클레온에 대해 부적절하게 공격적이지 않나 하는 것을 제외하면, 술을 마시는 노래에 관하여서는 브델뤼클레온의 수준에 올라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술 마시는 것과 관계되는 어떤 것도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다(cf.78-80): "음주는 나쁜 짓이다", 왜냐하면 음주가 주먹질로, 몽둥이질로, 그리하여 결국에 가서 벌금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브델뤼클레온은 신사다운 모임에서 술을 마실 때,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데; 벌금을 내는 곳은 우아하고 환심을 사는 농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차지한다. 필로클레온은 나쁜 짓을 하고도, 즉 다른 사람들을 다쳐 놓고도, 그로 인한 벌금을 내지 않아도 좋을지 모른다는 전망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는 그 자신이 사법적으로 비난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없이, 어떤 비사법적 역활 속에서 남들을 해치는 그들을 비난하므로써 남들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브델뤼클레온과 그의 아버지가 포도주를 마시며 저녁을 먹는 동안, 바라바시스 이후부터 말이 없었던 '말벌들'은 초보적인 종류의 두 번째의 파라바시스를 소개한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말벌들'로서 더 이상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연극의 주인공들이 나누는 저녁식사가 클레온과 엮여 있는 아테네의 어떤 굶주린 사람들의 저녁식사에 대비되어 그들로 하여금 연상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그 다음으로, 대단히 무우사적인 세 아들을 둔 한 아버지를 칭송하는데, 그들 중 가장 재주가 좋은 아리프라데스는 "기사들"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에서 묘사되었던 대로 사악한 자 클레온과 마찬가지로 음악과 시를 음란하게 타락시킨 자인데; 그는 이제 그가 거둔 모든 성과가 교육과는 아무 관계없으며, 본성에 기인한다고 한 것으로 그려진다. 비록 브델뤼클레온과 아리프라데스가 어떤 두 인간이 서로 반대될 수 있는 만큼 서로에게 반대되고, 말하자면 중용적인 브델뤼클레온의 장점들이 전적으로 그의 교육에 기인한다 하더라도, 그 아버지가 위풍당당한 것을 열망하는 한 아들의 아버지인 필로클레온으로 그들에게 연상되었을까? '말벌들'은 마지막으로, 마치 스스로 작가인 것처럼 그들의 첫 번째 사람을 단수로 표시하면서, 클레온이 잠시 동안 그를 입 닫게 할 수 있겠지만, 그는 무력해져서 자기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작가가 가진 힘의 한계들은 그 밖의 곳에 놓여 있다.

 

연회에 대한 이야기는 전 배심원 필로클레온에게 얻어 맞는 고통을 당한 연회에서 돌아온 브델뤼클레온의 하인에게 듣는다. 필로클레온은 그의 동료들 누구보다도 포도주에 취했었고, 그리고 가장 불손한 사람 모두들보다 훨씬 더 심했다. 지금까지 모든 좋은 것들과, 그리고 특히 포도주를 혐오하던 그는 많은 좋은 것들로 그 자신을 채우자마자, 춤추고, 뛰어 오르고, 놀리고, 또 다른 방법들로 못된 짓들을, 즉 '불의의 변론'이 권하는 것에 따른 짓들을('구름" 1078) 하기 시작했다. 그 동료들 중 하나가 여러 종류의 치사한 사람들에게 하는 그의 행실 때문에 그를 무어라 비유하자, 그는 앙갚음으로 크게 고함치면서 그에게 더 심하게 했다. 그것이 취향에 거슬리는 한 사람을 제어하고, 그 동료들은 이 광경에 매료되었는데; 필로클레온이 그를 특별히 목표로 삼아 그를 스스로 으시대는 사람으로 비난하였다. 그는 번갈아 가며 천한 태도로 요점 없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말하면서 한 사람씩 모두 욕하였다. 한 마디로 그는 가장 천박한 희극에 나오는 배우처럼 행동했다. 그가 그의 아들에게 어떻게 행동했으며, 그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짓거리에 대해 어떻게 행동했는지 듣지 못하는데; 아마 브델뤼클레온은 당혹감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필로클레온은 술에 완전히 골아 떨어지자,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때리면서 집으로 간다. 그가 얼레에 가까이 가는 것을 본 하인이 얻어 맞을까 겁이 나서 다시 도망가 버린다. 필로클레온의 뒤를 그가 욕했던 사람들과, 또 그를 법정으로 끌고 가겠다고 위협하는 사람들이 쫓아 간다. 그는 더 이상 재판이란 말을 들을 수조차 없다고 선언하면서 그들을 쫓아 버린다. 최소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진 이후와 마찬가지 그대로 그는 악랄하고 악의적이다. 그러나 그 악의의 형성은 급격하게 변화했는데; 그것은 더 이상 신탁에 의해서가 아니라 포도주에 의해  좌우된다. 그가 신성한 명령을 위반했으나 그에게 나쁜 결과가 초래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그의 의식이 이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았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더 이상 남들을 사법적으로 비난하는 일에서 본성에 의해 내몰리지 않지만,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사법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가 상냥하고 환심을 사는 변론들로 범죄의 처벌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그의 아들의 희망은 그 늙은이가 그의 본성의 즉각적인 반응에 무모하게 따르면서 실망스럽게 보인다. 이제 그의 모든 관심은 그가 같이 술 마시던 동료들로부터 빼앗아 와서, 그리고 그 여자도 그처럼 그와 즐기기를 바라는 어떤 기대도 없이 그가 즐기기를 열망하는 벌거벗은 피리 부는 여자에게 있다. 보상으로 그는 아들이 죽자 말자 첩으로 삼겠다고 제의하는데; 그 동안에는 아직 그 나이에 이르지 않아, 그의 재산을 처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술궂고 극단적으로 예민해진 그 아들은 그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 보는데, 그의 유일한 아버지가 타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필로클레온은 치죄하는 열망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역활을 그의 아들과 맞바꾸었는데; 그 아들의 아버지로 남는 반면에, 그는 늙는 것을 멈추었고; 그가 회춘하게 되었던 반면에, 그의 까다로운 아들은 이제 회춘이 불가능한 한 늙은 사람으로 드러나 있다. 그의 아들에게 얻어 맞은 덕분으로, 브델뤼클레온의 아버지로서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그 자신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한 젊은 아들로 되었고(cf. 1297-98); 아버지- 아들 관계는 뒤바뀐다: 정의로운 아들이 그의 버릇없는 아버지가 타락할까 염려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제 필로클레온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1363). 그가 법정으로부터 포도주로 그리고 여자들에게로 돌아서 버리는 것은 디카이오폴리스가 전쟁으로부터 돌아서 버리는 것과  상응해서 연상하게 한다. 

 

브델뤼클레온은 그가 한 재교육이 완전히 성공한다는 것을 다음 장면에서 알게 되는데, 그 장면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부분에서 그는 피리 부는 소녀를 필로클레온의 아주 많은 늙은 나이를 핑계로 아버지로부터 떼어내고; 이리하여 그는 전에 했던 약속을 어긴다(739-40). 그렇지만 그 늙은이는 더 이상 그의 권리를 고집할 기분도 혹은 처지도 아니다. 그는 그 아들이 그에게 조언한 것과 같은 선상에 있는 이야기 하나를- 그가 육상 경기를 관람할 때 본 적이 있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는 것으로 복수하는데; 그는 이름들도 빠트리지 않고, 그 이야기는 그 상황에 적절한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빵 굽는 여자 하나가 필로클레온이 자기를 때렸다고 비난하며, 자기 물건을 망쳐 입힌 손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한다. 그의 행실과 그리고 그들 서로가 부담이 되는 송사를 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경고를 브델뤼클레온이 용납하지 않자, 그는 그의 아들이 그에게 한 지시와 같은 선상에 있는 대답을 하는데, 즉 그가 그 여자에게 똑똑하고 상냥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어 화해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가 그 여자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는 그 여자를 모욕할 뿐인데, 그래서 그 여자는 담당 관청이 그를 소환하도록 한다. 카이레폰이 그 여자와 함께 와서 그 여자를 위한 증인 역활을 한다. 필로클레온은 그 여자와 카이레폰 둘을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도 덤으로 조롱한다. 그는 그가 만인에게 그리고 만인이 그에게 대항하는 상황으로 접근하는데; 제일 가는 불복종주의자 소크라테스의 변함없는 동료인 카이레폰조차도 그의 불복종주의에 부딪쳐서 법과 질서의 편에 서 있다. 브델뤼클레온도 기가 죽어 침묵한다. 그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서 필로클레온은 순수하고 단순한 분개 때문에 역시 증인을 대동한 한 사람으로부터 소환된다. 브델뤼클레온은 고발자에게 법적 행동을 단념하라고 권고한다: 그는 그가 요구하는 어떤 보상도 그에게 지불할 것이다. 그를 때리고 그에게 돌을 던졌다고 흥겨운 마음으로 고백하고 나서, 필로클레온은 이 피해자에게 역시 브델뤼클레온과 같은 선상에 있는 이야기 하나를- 모욕으로 상처를 더해 주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면서 끼어 든다. 브델뤼클레온과 피해자 둘 모두 역겨워하는데; 반면에 필로클레온은 같은 영향을 미치는 같은 종류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다시 완력을 쓰면서 집안으로 끌고 갈 때조차 그는 같은 종류의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제껏 요약해 본 장면들은 그의 아버지를 재교육해 보려는 브델뤼클레온의 시도가 완전히 실패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전체 장면은 그의 버릇없는 아버지에 의한 엄숙한 브델뤼클레온에 대한 한 가지의 패러디이다. 순전한 오만hybris으로 필로클레온은 술 취했을 때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행패도 상냥하고 환심을 사는 변론들로 범죄로 처벌되는 것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브델뤼클레온의 약속을 무효화시켜 버렸다. 브델뤼클레온의 실패를 그의 아버지 폭행에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 행동은 완전하게 성공하였기 때문이며,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지원없이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금욕주의와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정신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브델뤼클레온은 그의 아버지가 좋은 생활을 즐기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아버지에게 완력을 사용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재교육의 실패는 정녕 소크라테스의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재교육의 실패를 떠올리게 한다. ( "구름"의 마지막에서의 스트렙시아데스와 같이, 필로클레온은 카이레폰으로부터 반대가 되는 진영에 있고;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를 그가 희극배우처럼 농담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힐책해야 한다.)("구름" 296.) 소크라테스와 브델뤼클레온 둘은 교육의 힘을 과대 평가하거나, 아니면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늙은이들의 본성을 잘못 판단하는데; 그렇지만 브델뤼클레온은 그의 학생을 오랜동안 알고 있었고, 그는 그가 하루살이 같은 것들을 경멸한다는 변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마치 그가 그의 아버지를 위한 신탁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지 않는듯이(위의, p. 125), 오만하고 젠 체하는 태도의 이 사람은 교육과 신사정신의 관념에 너무 고양되어 있다(위의 pp.107-108).  "말벌들"의 행동 속에 암시되어 있는 신사정신에 대한 의문은 "기사들"의 사건 속에 다른 방법으로 암시되어 있듯이, 그의 아들은 좋은 모임이라고 여기는 무미건조한 즐거움에 대한 필로클레온의 섬뜩함 속에, 그리고 그가 그의 아들을 패러디하는 속에 표면화된다.

 

만일 브델뤼클레온이 실패하였다면, 그것은 작가가 승인한 그의 설계를 뒤따르는 것이다: 어떤 악의적인 배심원이 피고들에게 그의 악의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명백하게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브델뤼클레온의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브델뤼클레온이 실패하였다면, '말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부드러운 생활의 여생을 가진 필로클레온의 운명을 부러워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들은 진짜로 사람이 본성이나 습관을 걷어 없애는 것이 어려우므로, 그가 그것을 가질 것인지 아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남들의 생각들 속을 잘 알고 있을 때도 아무도 '말벌들'보다 잘 알고 있지 않지만, 사람의 습관들을 바꾸는 것이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아직 필로크레온을 판단할 수 없는 동안(그들은 단지 그의 난폭한 행실을 보았을 뿐이다), 그들은 그가 자기 아버지와 그의 지혜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저없이 그의 아들을 아주 많이 칭송하고; 그들은 브델뤼클레온처럼 친절하고 온화한 사람을 결코 본적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그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그 행동을 칭송하는 것으로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그의 아버지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그의 온화함을 증명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들은 브델뤼클레온의 온화함을, 그가 그의 아버지를 더욱 위풍당당한 것들을 비난하는 그의 편견으로부터 데리고 나오고자는 소망을 말했던, 그 변론으로 증명한다. 상충하는 경우에- 이제 그 경우가 발생했다- '말벌들'은 필로클레온에 반대해서 브델뤼클레온을 편든다. 필로클레온은 완전히 고립된다.

 

하인 하나가- 연극의 초입에 작가의 대변인으로 행동했던 아마 크산티아스로 보이는- 격에 맞게 디오뉘소스에 맹세하면서, 코러스에게 혹은 관객에게 어떤 신이 집안으로 몰고 온 난리들에 대해 말한다. 포도주와 피리의 영향으로 필로클레온은 기쁨이 넘쳐; 현대 비극작가를 시대에 뒤떨어진 늙은이라고 비난하면서, 고대의 방식으로 멈추지 않고 춤춘다. 회춘이 되어 있어서, 그는 "기사들"에서의 '데모스'처럼 좋았던 옛날 시절로 돌아왔다. 아마도 폴뤼페모스를 연기하는듯 그는 고독한 식인종 차림으로 등장한다. 그는 확실히 사람들을 해치기 위해 그가 배심원이었던 동안 그가 필요했던 연합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연극 먼저 부분에서 그는 오뒤세우스를 흉내내었고, 그리하여 그의 아들로 하여금 억지로 폴뤼페모스 역활을 하도록 했지만; 이제는 그가 폴뤼페모스가 되었는데(1502, 15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통성이 훨씬 덜한 브델뤼클레온이 오뒷세우스로 변신하는 일은 없다. 다음으로 그는 한 비극적 춤꾼을 패러디한다. 그 하인은 그 늙은이의 미친 짓에 대해 불평하는 것에 지치지도 않는다. 필로클레온은 마지막으로 춤을 잘 춘다고 주장하는 현대 비극작가들에게 도전한다. 자그만한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삼인조 형제들이다(cf. 1275-83). 필로클레온은 그들을 잘 모르지만, 하인이 그에게 누구라고 알려 준다. 그들은 모두 다 불쌍한 춤꾼들인데; 그들 가운데 하나는 불쌍한 비극작가이고, 그리고 필로클레온은 그들과 미친듯이 현대의 춤에 뒤섞이면서 그들을 차례로 우스개로 만든다. 코로스는 그 장면에 갈채를 보내면서 춤에 합류하는데; 빠르게 그리고 미친듯이 춤추면서 그들 모두 무대를 떠난다. 이전에는 아무도 춤추는 가운데 희극의 코로스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었다. 필로클레온은 그의 고발자들로부터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는데; 그는 희극작가 스스로가 즐기는 면책을 즐긴다. 브델뤼클레온이 그를 '더 나은 사람들'로 만드는 것에 실패하는 반면, 필로클레온은 그의 본성의 덕택으로 브델뤼클레온이 그를위해 열망하던 것에 비해 훨씬 월등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한 재료의 의인화는, 오직 그것의 가장 낮은 재료로서만 있게 한다.

 

두 주인공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말발들"의 화제는 클레온이나 아테네의 배심원heliast 제도에 대한 것이 브델뤼클레온이 전적으로 전형적 배심원이 아닌 그의 아버지를 악을 벌하고자 갈망하는 만큼 좋은 것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한 사람에서(1125, 340-41), 좋은 것을 즐기기를 갈망하고 악을 벌주는 것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에 대한 것보다 더 적다. 이 시도는 부분적으로는 성공적이다. 필로클레온이 좋은 것들을 즐기도록 유도할 수 있지만, 그가 악을 벌주는 것을 포기하도록 가르칠 수는 없다. 그는 그의 재판에 대한 갈망을, 혹은 엄격하게 말하여 비난하는 것을, 혹은 그가 가장 대단한 위풍당당함이나 제우스다운 웅장함을, 그리워하는 것을 치료할 수 있다. 그는 그의 본성적인 악의나 악행을 지향하는 성향과, 그리고 본성적인 심술궂음이나 혹은 씁스레함을 끝까지 지니고 간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에서 악의가 필수불가결한 재료라는 것은 분명하다. 소시지장수의 예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이 정말 최고도의 부정한 독설과 그리고 비양심적인 중상을 구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고,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런 악의를 가지지 않고도 구사하는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소시지장수는 그의 '더 나은 사람들'의 명령으로 행동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그 스스로에 대해 헤라클레스의 분노와 같은 종류라고 주장한다(1030). 고발자들과 비난자들과 싸우기 위해, 고발자들을 고발하고 비난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그의 배역들 안에서 그것을 재생해낼 수 있기 전에 그는 그 자신 안에서 고발과 비난의 정신을 재생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벌다움'의 부산물과 싸우기 위해, 그는 그 부산물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데; "말벌들"은 이런 수정을 위하여 맨 처음 필로클레온에게 특이하던 '말벌다움'의 부산물을 희극에게 특이한 '말벌다움'의 부산물로 변환시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말벌들"이 결점이 있는 양쪽 극단 모두를 피하려는 희극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천박하지도 탁월하지도 않은데; 그것은 정확히 형평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으로 두 주인공들의 바로 그 이름들이 지적하듯이, 그것은 올바른 것들을 가르치고, 그리고 특히 불의한 클레온을 공격한다. 희극이 형평을 유지한다는 것은 마라톤 시절의 중용적인 체제에-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설 곳이 없는 체제에-, 형평을 유지하는 체제에, 봉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벌들"을 대신하여 제기된 주장과 그리고 그런 주장의 암시들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사실 그것 자체로 제기되는 주장의 희극적 등치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한편으로 천박함을, 다른 한편으로 탁월한 지혜를 피해 가서가 아니라, 천박함과 탁월한 지혜를 다른 것들 가운데서 중용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전체인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정확한 형평을 이루어낸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천박함과 탁월한 지혜 사이에 있는 형평을 맴도는데, 즉 그것은 그것으로부터 피하고, 반면에 그것을 향해 가르킨다. 그것은 양 방향에서 극단적이다: 그것은 '더 나은 사람들'에게 너무 낮고 또 너무 높다. 그것의 가장 낮은 재료, 아니면 예를 들어 신분이 디카이오폴리스와 구별되듯이, 필로클레온 속에서- '그'라고 '된' 것과 '그''인' 것 속에- 소개되는데; 필로클레온은 전적으로 동정심이 부족하고, 반면에 디카이오폴리스는 최소한 사랑에 굶주린 여자들에게 동정심이 있다. 





<주1> 크산티아스는 관객에게 로고스logos를 설명하고(54), 데모스테네스는 실용pragma를 설명한다("기사들" 36)

<주2> 269-70; cf. 220과 365.

<주3> Cf. 359-61와 플라톤, '국가' 562e3-563a2 그리고 567ㄷ5-7과 함께

<주4> 디오페이테스(381)는, 신성한 것들을 믿지 않거나, 그리고 높이 떠 있는 것들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을 반드시 탄핵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법을 제정했던 아테네 사람을 연상시킨다( 플루타르코스, '페리클레스' 32.15. "말벌들"

 <주5> 975-76에서 단수형을 복수형으로 바꾸어 가르키는 반대되는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라. 

<주6> 플라톤의 '라케스'에서 라케스를 소개하는 것과 비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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