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2. 구름

병든소 2019. 3. 18. 04:11

2. "구름"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가 남들에게 웃음을 살 만한 말과 행동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그는 그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는 그의 등장인물들 모두를, 최소한 그의 중요한 배역들 모두를 그들이 신식의 역활을 맡았든 구식의 역활을 맡았든 간에 똑같이 웃음거리로 만든다. 구식이라고 해서 최신형보다 덜 우습거나 덜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에 따라 결론을 낸다면 아리스토파네스는 모든 곳에서 터무니없는 것이나 아니면 미친 것의 승리를 축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주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름"에서 분명히 이런 일을 벌이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그의 우스꽝스런 뤼시스트라테가 이기는 반면, 그의 우스꽝스런 소크라테스는 진다: 옛 제자 하나가 소크라테스의 학원에다 불을 지르고,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화염 속에서도 죽지 않는 것은 그냥 운이 좋았거나 그저 우스꽝스런 사고일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불의의 변론'이 '정의의 변론'을 이기는 것에 대해 책임이 있었고, "제우스는 없다Zeus is not"라고도 단언했었다. 그렇게 단언 짓는 것은 확실히 중대한 범죄였는데; 그런 중죄를 범한 사람 치고는 당장 그가 아무런 큰 탈을 겪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런 일이 그 희극에서 그에게 터질 수 있다는 것은 결정적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연극들의 결말로 그의 판단들을 드러낸다고 믿게 되겠는데; 그가 성공이라고 보여주는 구도들은 그가 마땅해 하는 것이고, 반면에 그가 실패라고 보여주는 것들은 그가 못마땅해 하는 것이다. 설사 이 기준이 그에게서 굳어진 것이라 여길 수 있고, 그래서 설사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의 방식을 못마땅해 했다고 보는 것에 틀림이 없을 수 없다 하더라도, 아리스토파네스의 시각에서 소크라테스가 그의 생각들 때문에 겪어야 하는 그의 운명은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아직 동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을 받아 들일 수 있는가? 아리스토파네스는 페이스테타이로스가 신들에게 거역하는 것이나, 아니면 분별력 있는 여자 '페니아poverty'가 크레뮐로스에게 쫓겨나는 것을 마땅해 했는가? 그래서 그가 파라바시스parabasis들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 가운데서 작가의 판단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되는가?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 부분 부분에 들어 있는 그의 이런 말들이라 해 보았자 그의 클레온에 대한 비난만큼도 되지 않는 분량이 아닌가?

 

소크라테스를 몰락하게 만든 사건은 소크라테스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트렙시아데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구름"은 스트렙시아데스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신음한다. 모든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신음이나 불평으로 시작한다. 다른 희극들과 대비해 볼 때 "구름"은 유쾌하게 끝나지 않는다. 스트렙시아데스는 불분명한 소리를 내뱉으며 심사가 불편함을 드러내고, 그는 제우스를 왕이라며 찾는다. 제우스가 왕일까 하는 것은 이내 그의 의문이 될 것이다. 말을 건넬 사람이 없어 그는 혼자서 떠드는데; 아들 페이딥피데스에게 말하고 싶지만 그 아들은 일찌감치 잠들어 있다. 여전히 어둡다. 그는 낮, 문자 그대로 빛을 바란다. 그의 하인들도 잠들어 있다. 스트렙시아데스도 그들처럼 잠을 이루고 싶지만 너무 큰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그 걱정들을 여전히 어둡기만 한 그의 집 구석에서 말한다. 전쟁 때문에 그 좋았던 옛 시절이 끝나버리자 그런 걱정들이 생겼다. 전쟁이 그에게는 골칫거리다. 전쟁이 소크라테스에게는 하등의 골칫거리가 아니라는 것에 먼저 주목하자. 스트렙시아데스에게도 전쟁은 승마에 불이 붙은 아들 페이딥피데스 때문에 쌓인 빚들에 비한다면 소소한 것이다. 잠을 못이루고 스트렙시아데스는 가계부의 수지를 맞추어보려 노력한다. 그러나 말과 경마의 꿈에 젖어 인생을 허비하는 그 아들은 아버지의 가계부를 엉망으로 만들고, 꿈속에서도 말에 대해 잠꼬대하면서, 지출을 줄여 가계 수지의 균형을 맟추어 보려는 아버지를 방해한다. 그 아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수면을 뒤흔든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아들의 수면을 뒤흔든다. 그럼에도 빚을 걱정하지 않는 아들은 다시 잠든다. 계속해 독백하면서 스트렙시아데스는 그 걱정의 뿌리를 그의 결혼에까지로 추적해 간다. 그는 페이딥피데스의 어머니와 결혼하도록 소개한 중매쟁이를 욕하는데; 그는 이것으로 그가 사랑하는 그 아들을 간접적으로 욕한다는 것을 알지는 못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단순하고 버릇없이 거칠었지만 시골에서 편안하게 잘 살다가, 곱상하고 어리광쟁이고 음란한 도시 귀족의 조카딸에게 장가갔는데, 그 마누라는 여러모로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였고, 그의 가산이나 수입을 넘는 지출을 부추기어 그들의 아들과 하인들까지 물들게 했다. 이름부터 그가 나기까지 신세진 서로 맞지 않는 재료들의 혼합이라는 표현대로, 그의 아들은 어머니의 특출한 기호와 가닥을 물려 받아 아버지를 망쳤다. 이제 그 아들도 그 안에 빠져 있는 어려움을 벗어나려면 스스로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는 아주 부드럽게 아들을 깨운다. 그러나 이 부드러움이 계산에 의한 것은 아닌데; 그는 진심으로 그 아들이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 아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이것이 아버지의 그리고 아들의 사랑에 끝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밤새 번민한 스트렙시아데스는- 신적인 도움이 없이가 아니고- 간단하고 놀라운 구원의 길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가 그 방법을 취하기에는 더이상 젊지도 않고, 충분히 민첩하지도 않아서; 페이딥피데스가 해야만 한다. 그의 아들은 그에게 디오뉘소소의 이름을 걸고 아버지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맹세한다. 아들은 포세이돈, 아버지는 데메테르가 더 좋았겠지만; 그 둘이 택한 차선이 디오뉘소스였고; 디오뉘소스는 둘에게 모두 다 맞는 근거를 제공한다. 아버지는 어떤 지혜로운 영혼 혹은 귀신이 운영하는 "꾀 주머니think-tank"라는 이웃의 작은 학원에 아들의 주의을 환기시킨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그들의 이름이 오락가락하지만; 얼굴이 창백한 그들 떠벌이들을 경멸할 뿐인 페이딥피데스는 그 학원의 주재자가 소크라테스와 카이레폰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가 그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생활 방식을 바꾸고, 승마도 포기하고,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동료나 학생이 되라고 요구하자, 그는 결단코 거부하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그가 했던 맹세를 파기한다. 혹 그가 아버지의 요구에 따른다면 동료 승마꾼들 눈에 그가 스스로를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자 스트렙시아데스는 그를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욱박지른다. 어머니가 말을 타지 않는 그를 그냥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그리고 아버지가 집 밖으로 쫓아내지 않을 것이라는 더 큰 자신감으로 페이딥피데스는 아버지에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그 아들과는 더 이상 어찌해 볼 여지가 없어; 스스로가 소크라테스의 학생이 되어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신들에게 기도하고 나서, 바로 그 시도를 이행한다.

 

소크라테스의 몰락은 거의 스트렙시아데스에서 잉태된다. 극의 도입부에 그는 소크라테스의 이름조차 몰랐는데, 전문 승마꾼인 아들은 일상의 일처럼 알고 있다. 상류계급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알지만 그는 무용지물이고; 그들은 그를 특히 우스꽝스런 가난뱅이 종류로 경멸한다. 하층 사람들도 그가 아무 소용 없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 오직 그 사이 사람들만 소크라테스에 흥미를 가질 수 있어, 그들이 그를 폐망하게 한다. 달리 말해 소크라테스가 남을 타락시키는 영향력은 소수 사람들에게만 효력을 미칠 수 있다. 결혼으로 스트렙시아데스는 상류와 하류 계층의 중간 사람이 된다. 소문을 통해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현명한 영혼의 소유자이며, 사람들에게 하늘은 난로고 사람은 숯이라고 가르치는가 하면, 누가 옳은 논조를 가졌든 그른 논조를 가졌든 상관없이, 특히 아주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른 논조를 가진 경우에도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들을 돈을 받고 가르친다고 대충 그렇게 알고 있다. 현명한 영혼들은 아마도 하늘과 사람에 관한 것이 그 자체로는 무용지물이라, 무료로 교훈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이런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하늘이 난로와 같고 사람은 숯과 같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은 난로, 사람은 숯이라고 가르친다. 어쨌든 소크라테스가 하늘과 사람들에 관해 그런 이상한 것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채권자에게 마지막 동전 하나까지 사취해 내는 방법들을 가르칠 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별반 이상하지가 않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그 아들이 소크라테스의 학생이 되어 그가 어떻게 그들의 채권자들을 속이는지 배웠으면 한다: 그는 그 아들이 타락했으면 해서; 그는 그가 소크라테스와 친해져서, 그 자신이 먼저 타락하고, 그 아들에게 친해져 보라고 꼬드긴다.

 

스트렙시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어떤 학생이 문으로 오는 것을 알고는 "꾀 주머니"의 문을 촌놈 힘으로 두드려서 그 학생이 품고 있던 생각을 유산하게 만든다. 그가 학생이 유산한 생각에 대해 묻자, 학생은 그에게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살짝 알릴 일이라 말한다. 단지 그 학원의 제자가 되고자 왔다고 하는 스트렙시아데스의 단호한 말은 그 학생이 그에게 이런저런 비밀을 누설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소크라테스의 수하들이 비밀을 지키는 것에 결함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 학생이 스트렙시아데스에게 한 어떤 말도 잠시 후에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할 말에 비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심대한 해를 끼칠 말이 절대 아니다. 그것에 따르면 유산한 생각이, 즉 사건이 무엇인가를 물어 보는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그 학생의 대답에는 어떤 생각의 유산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이 학생이 보기보다 덜 바보일 수도 있을까<주2>? 그가 대답하기를, 소크라테스가 벼룩의 발을 기준으로 벼룩이 얼마나 멀리 뛰어오르는가와 그 발이 덮는 면적이 얼마나 되는가를 방금 전에 카이레폰에게 물었는데, 그것들이 가장 똑똑한 방법으로 재어졌다고 한다. 스트렙시아데스의 섬세하지 못한 문 두드리기가 벼룩이 뛰어오른 거리를 재는 것을 방해했을까? 이 위업에 대한 스트렙시아데스의 찬사가 학생이 또 다른 이야기를 하도록 꼬드긴다. 카이레폰이 소크라테스에게 각다귀의 웅웅 소리가 입에서 나는가, 아니면 똥구멍에서 나는가 하고 물었었다: 이러한 질문은 첫 질문보다 훨씬 더 민감한데 그것에 대한 대답이 살아있는 각다귀의 내장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작고 민감할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눈에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찬사를 점차로 올려 간다: 각다귀 내장을 아는 그들만의 방법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인 채권자들을 쉽게 사취할 수 있다. 이제 그 학생은 소크라테스가 달의 진로와 회전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을 때 당했던 봉변에 대해, 스트렙시아데스와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우스꽝스럽지만 소크라테스의 학생들에게는 꼭 그렇지도 않은 봉변에 대해, 스트렙시아데스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그렇지만 스트렙시아데스는 단념하기보다; 거의 안도하기까지 한다. 아마도 똑같이 우스꽝스러울 것이지만, 확실히 더 나은 소크라테스의 시도는 기하를 공부하는 척하면서 영리하게 좀도둑질을 해서 배고픈 학생들에게 간소한 저녁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이 위업에 대해 열광한다<주3>. 이제는 소크라테스가 "꾀 주머니"를 가진 여러 현명한 영혼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재자라는 점이 그에게 여명이 되어 비추어져 왔다; 이제 스트렙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직접 만나고 싶은 욕구를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어 그가 들어갈 수 있게 그 학생이 문을 열도록 보채고는 드디어 성공한다. 신선한 공기마저 어느 일정 기간 이상 들이마실 수도 없는 비인간적인 고행을 수행하는 학생들의 광경에 매혹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천문학과 기하학에 대하여 듣는데; 채권자들로부터 신비스럽게 사취해 내는 기술이 하늘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농사꾼이었던 그는 천체와 천체의 운동에 관한 천문학에 대해서는 조금도 흥미가 없다. 그는 애국시민으로서 그의 능력을 키워 줄 측량 기술과, 지구나 땅의 지도 작성에는 바로 그 즉시 깊은 흥미를 가지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그 학생들은 그들이 하는 연구에 대한 동기가 모자라는 것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공중에 높이 떠 있는 한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임이 틀림없다고 알게 되는 순간, 스파르타의 위험에 대하여 중대한 경고를 말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스트렙시아데스나 스파르타의 위험이나 똑같이 경멸스러운데, 그들 모두가 하루살이인 것이다. 하여튼 그는 태양을 모든 각도에서 관찰하기 위한 그의 이상한 자세에 대하여 스트렙시아데스에게 잔뜩 재면서 설명하지만, 스트렙시아데스는 그가 신들을 내려다 보려는 의도로 받아들인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스트렙시아데스가 왜 왔는지를 듣고 나서야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인상을 에둘러 고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명백하게 신들을 경멸하는 것에 놀라지만, 그가 왜 그냥 땅에 내려와서 그런 일을 하지 않는가가 기묘할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대지의 생각과 구분되는 대기의 생각 없이는 공중에 높이 떠 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개의치 않는데; 그는 소크라테스가 좋으나 싫으나 당장에 대지 위로 내려와서, 틀림없이 대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대지의 생각을 찾아야만 하는 중대한 사업 때문에 왔던 것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자기의 아들과 생활에 대하여 한마디도 않고 왜 자기에게 변론 기술이 필요한지를 설명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는 스트렙시아데스는 열성적인 승마꾼에 가족이 없는 외톨이일 것인데; 그는 충분하지 못한 자료를 바탕으로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그를 학생으로 받아야 할지에 대한 판단을 굳힌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기꺼이 신들에 걸고 소크라테스가 요구하는 수업료를 지불하겠다고 자의로 언명하고 맹세하려고 하지만; 그는 현찰로 선금을 지불하는 습관이 없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수업료를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이 틀림없는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무엇이든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지불하겠다고 신들에 맹세하겠다는 스트렙시아데스의 언명에만 흥미가 있다. 처음에서부터 소크라테스는 맹세 따위는 믿지 않아서; 혹 그가 스트렙시아데스의 특이한 경우를 고려했다면, 그가 보통 때 맹세 따위를 믿는 것보다도 훨씬 덜 믿을 것임이 틀림없는데, 왜냐하면 스트렙시아데스가 '한 푼도 지불하지 않는 변론이나 연설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크라테스의 학생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짜로 신성한 것들인지, 바꾸어 말하면 어떤 신들에 걸고 어떤 분별있는 사람이 믿음으로 맹세하려는지 알고자 하는 욕구이다.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기 때문에; 그가 걸고 맹세할 신들은 '구름'이다. 아마도 이 여신들은 부채를 갚는 것이나, 위증들에 대한 보복을 지켜보라고 모셔질 수는 없을 것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엄청난 지불을, 아니면 사실 전혀 지불을, 스트렙시아데스의 현재 상태로는 어떤 지불도 엄청나지만, 요청한 적이 없다고 믿었었겠지만 '구름'과 대화하고자 하는 지극한 열망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가 위험하지 않으니 '구름'의 모습에 따르고 또 '구름'에 입회하여야만 똑똑한 변론가가 될 수 있다고 구슬리자, 최악의 경우를 이해하고 절차에 따르는 스트렙시아데스를 엄숙하게 이끌어 나간다.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를 한 마리의 각다귀로 경멸하던 것을 포기했던가? 아니면 이러한 경멸은 꼭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그의 동료 인간들이 신들에 대하여 건전한 의견을 가지는 것에 대한 시샘 어린 관심과 공생하는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대기의 신 에테르, 그리고 무엇보다 스트렙시아데스에게 나타나야만 할 구름의 여신들에게 엄숙한 기도를 드린다. 이 기도를 스트렙시아데스가 소크라테스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일반적 보통의 신들에게 드린 기도와 비교해 볼 때, 둘 다 참으로 마지못한 기도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구름'은 소크라테스의 경건한 부름에 그들의 노래로 응답하며 현신한다. 이처녀 여신들은 모든 신들의 기원-아니면 모든 것의 기원-인 그들의 아버지 오케아노스를 제치고 가장 높게 찬양할 만한데, 무우사의 경건과 함께 하늘의 신들과 지옥의 신들  모두를 경배하는 처녀 여신인 아테나의 땅으로 온다. 소크라테스는 '구름'의 프로메테우스이다: 빛을 다른 사람에게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선경지명은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경배하는 여신들은 그들에게 경배하는 사람보다 아테나를 더 아끼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노래에 경건하게 대하지만, 스트렙시아데스는 흉내꾼 희극배우처럼 굴어 소크라테스가 그를 꾸짖을 정도로 어이없이 대한다. 그렇지만 스트렙시아데스는 경박하기보다 어리둥절하다. 오로지 비범한 것들만이 채권자들로부터 그를 구제할 수 있다고 그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가 소크라테스에게 갈 때는 비범한 것을 기대했어야만 했다. 그는 그가 똑똑한 연설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놀라지 않았고, 그래서 하늘이 난로고 인간이 숯이 아니고서는 그가 채권자들을 사취할 수 없다는 것 알고서도 그랬다; 그는 여전히 여신들인 '구름'과 절친으로 알고 지내지 않고서는 그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에도 덜 놀랐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이것이라 단언하는 것을 듣는 것은 별개이고, 여신들 스스로를 보거나 듣거나 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성, 그의 배움, 그리고 그의 필사적인 상황 때문에 무엇이든 아주 쉽게 믿어버리는 스트렙시아데스의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에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아리스토파네스를 받아들이는 관객이나 독자들은 왜 '구름'과 친숙해지는 것이 똑똑한 연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인지에 대해, 혹은 달리 말해 '구름'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신들인지에 대해, 의아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그가 들은 것이 여신들의 음성이라는 것과, 구름이 즉 그가 지금까지 단지 구름일 뿐이라고 보아 왔던 바로 그 구름이 여신들이란 보장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단언했던 것을 강조해 다시 보장해 주면서, '구름'이 이해력과 똑똑한 변론술 그리고 경이와 기적에 대한 화술 등의 능력을 가진 게으름뱅이를 좋아한다고 더 보태는데; 어떤 면에서 그는 전번에 '대기ether'에 비교했던 그런 취지로 이번에는 '구름'에 비교한다. 소크라테스가 묘사했던 '구름'에 대해 스스로 약간 감을 잡은 스트렙시아데스는 여신들을 또렷하게 보고 싶어한다. 그가 소크라테스의 문을 두드린 이후, 그냥 경이롭게 보지 않고 찬사를 보냈던 경우들이 변론과 노래들, 그리고 눈에 보인 광경보다는 그 광경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소크라테스보다 그가 더 힘든 것은 '구름'이 입장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가 눈으로 보는 '구름'과 그가 지금까지 그럴 것이라 생각해 왔던 구름과의 차이 때문에 당황해 하는 것은 이해할 만 하다. '구름'이 자기들에게 베푼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노래나 다른 무우사에 관한 것들로 '구름'을 찬양하는 많든 적든 모든 종류의 광적인 교양인들이나 상류층 협잡꾼들을 모두 거두어 준다는 '구름'에 관련된 모든 사실을 무시한 스트렙시아데스의 옛날 실수들을 소크라테스는 따져 나간다. 이렇게 따져드는 것이 스트렙시아데스를 당황하게 하지는 않지만 나머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결국에 소크라테스 스스로는 '구름'에게 아주 뛰어난 헌신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우사답다고 주장하는가? 또 그는 허풍쟁이인가? 이것 하나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윽고 드러날 것이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는 그와 아리스토파네스를 닮은 사람들이 다른 아종이기는 하나 똑같은 종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이런 어려움으로 곤경에 빠지지는 않는데; 그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오로지 '구름'을 찬양한 대가로 사람들로부터 가장 맛있는 음식들을 가득히 차려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작가에게만 적용하는데; 소크라테스는 더 보태서 이 대가는 공정해 보인다고 동의한다. 이 소크라테스의 모습, 그리고 그의 학생이 그리는 모습들에 의하여 지적되는, 그 학생이 알려준 어제 밤의 저녁식사는 말할 것도 없이, 소크라테스는 작가와 대비해서 볼 때 잘 사는 것을 위해 '구름'을 찬양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구름'의 애완종은 배가 고픈 종과 배가 고프지 않은 종으로 되어 있다. 스트렙시아데스를 대단히 어렵게 하는 것은 구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를 둘러싼 존재들이 보이는 것처럼 인간인 여자들로 보이는가; 이제는 눈에 완전히 보이는 그 존재들이 불멸의 여자들처럼 (비록 소크라테스는 여신들이라고 하지만), 또 구름처럼 (비록 소크라테스는 구름이라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가; 구름은 분명 불멸의 여자들이 아니며, 그렇게 보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펼쳐 놓은 양털 덩어리처럼 보이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스트렙시아데스식으로 투박하게 말하면, 구름은 코도 없고; 반면에 지금 스트렙시아데스와 소크라테스를 둘러싸고 있고, 또 인간인 여자들처럼 보이는 존재들은 코가 있다. 스트렙시아데스가 코를 확실한 여성성의 증거로 간주한다고 곧바로 유추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코 달린 괴수?같은 코 달린 구름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스트렙시아데스가 그것을 설명하는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소크라테스가 설명할 때 구름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모든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이 보는  대로 똑같이 할 수 있으며; 그 형태를 취함으로써 그들이 보는 모든 것들의 본성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특히 그들은 우스꽝스런 사람들의 모습들을 과장해서 흉내내며 놀린다. (그들은 특히 희극작가들의 모델이다.) 그들은 켄타로스의 형태와 같이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굉장한 형태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그것은 그들이 신성하다고 증명하는 구름의 유사신<주4>이다. 한마디로 '구름'은 모방의 여신들이며, 그래서 모든 모조 또는 유사제작술이며, 그러므로 특히 화술이다. 스트렙시아데스도 이제서는 그 구름이 여신들이며, 모든 것들의 여왕이라 확신하고, 그에 걸맞게 그들에게 절한다.

 

'구름' 코로스는 그들의 차례가 되자, 스트렙시아데스와 그 누구보다 소크라테스를 띄우고 어르면서, 프로디코스를 제외하고는 공중에 높이 뜬 것들에 대한 이 시대의 그 어떤 수다꾼보다 더 좋아한다고 선언하며 그에게 인사한다. 그들은 프로디코스를 그의 지혜와 판단 때문에 좋아하는 반면, 소크라테스는 거리에서의 거만한 처신과 금욕주의 그리고 '구름'과 친밀하다는 표시로 걸친 근엄한 외양 때문에 좋아한다. (그래서 연극 "구름"에서의 소크라테스는 단순한 한 가지만의 대리인이 아니다.<주5>)  그들은 그에게 원하는 것에 대해 묻고, 그들은 그것을 들어주고 싶어서이지만, 그는 너무나 잘 갖추고 있어서 대답을 멈추지도 않는다. '구름'에게 그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보장해 주었었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정말로 그들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스트렙시아데스에게 '구름'은 그 자체로 여신들이며, 그 나머지는 쓸 데 없는 이야기라고 선언한다. '구름'은 이것을 침묵 속에서 듣는다. 스트렙시아데스의 놀라움은 이해할 만하다: 대지는 여신이 아닌가? 무엇보다 올림푸스의 제우스는 신이 아닌가? 태양을 경외하기보다는 이를 연구하던 전천후로 대담한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의 마음에 어떤 의문도 남기지 않는다: 제우스는 신이라 하기 전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터무니 없다: 만일 제우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구가 비를 내릴 것인가? 물론 '구름'이다: 구름이 없는데도 비가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비에 대한 진실은 공포심을 일으키는 천둥의 '진실한 본질mutatis mutandis'이고; 천둥은 위협이 아니다. 그러나 '구름'이 없다면 비도 천둥도 없을 것이고; 이것으로 그들이 비나 천둥의 근원이라거나, 그들이 다른 어떤 것이나 다른 어느 누구- 제우스에 의하여 비가 내리도록 천둥을 울리게 한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제우스의 생명을 위해, 용맹스레 싸우는 스트렙시아데스에 의해, 벽에까지 내몰린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으면 이 문제들을 '구름' 자체의 신성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구름'보다 더 높은 것이 있다고 인정하지만, 더 높은 것이 제우스라는 것만은 절대적으로 부정하는데; 더 높은 것은 에테르의 소용돌이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이 주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지금까지 왕이던 제우스는 그 자신이 크로노스를 폐위시켰듯이, 소용돌이에 의해 왕에서 물러나고, 또 그가 왕이 되었지만; 스트렙시아데스는 여전히 증거를 원한다. 소크라테스는 축제일에 과식으로 속탈이 나는 스트렙시아데스가 자주 겪어 본 경우를 들어 천둥의 기원을 설명함으로써 그에게 증거로 내놓는다. 이런 가정적인 보기가 논란을 끝낸다. 스트렙시아데스의 이해가 현저하게 늘었다: 그는 천둥이 설사에 따르는 소리와 같다고 말하지 않지만(cf.165) 비슷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닮았다는 것은 대단한데; 그것이 높이 떠 있는 것들의 모든 놀랄 만한 매력을 빼앗는다.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정의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하여 높이 떠 있는 것들의(소문에 의하면 그가 하늘을 난로라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정체를 폭로하는 것일 것이다. 한 사람이 명백하게 압도한다면 어려움이 남는다: 벼락은 거짓 증언하는 자들을 그것으로 때리는 제우스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따위를 믿는 구식 늙은이에게 경멸의 말을 내뱉아 쉽게 스트렙시아데스의 공포를 걷어 낸다: 제우스를 모신 신전과 신성한 참나무들이 거짓 증언자들보다 훨씬 더 많이 벼락을 맞는다. 비와 천둥의 경우에는 제우스가 '구름'과 대기의 신으로 대체되었고; 위증자들을 처벌하는 것에는 제우스가 다른 어떤 것이나 어느 누구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위증자나 어떤 다른 범죄자에게 내리는 신성한 벌은 없다.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를 구식이라 부른다: 높이 떠 있는 것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은 경외감을 불러오는 황홀함을 걸친 골동품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스트렙시아데스에게는 소크라테스에게 번개에 대하여 구름과 공기로 설명해 달라고 하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설명이 되고 스스로 납득하자 때 맟추어 스트렙시아데스는 다른 축제일의 경험들을 기억하면서 '구름'이 말이 걸어도 좋을 정도가 된다. 그는 축복도 받고, 유명해지며, 좋은 기억을 갖도록 배려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사고력도 얻으며 그리고 그는 힘든 삶을 끌어가는 것으로써, 운동을 그만두는 것으로써, 행동에서, 정치 모임에서, 혀로 하는 다른 모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것으로, 지극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데에 자신을 바치는데; 성적 금욕은 말없이 요구사항들 속에 포함시킨다. 스트렙시아데스는 한 사람의 검소함이나, 인내심이나, 자제심에 대하여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이행하겠다고 보장해 준다; 그의 생활 태도는(그의 아들과는 다른) 언제나 소크라테스와 그의 학생들의 그것과 비슷했었다. 그의 기억과 생각이 충분한지 아닌지를 찬찬하게 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받아들이는, 이름하여, 카오스와 '구름'과 그리고 혀와 같은 것들을 제외한 어떠한 다른 신들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하면서 스트렙시아데스가 입교하는 것으로 결론 짓는다. '구름'은 반대하지 않는다. 스트렙시아데스는, 혹시나 그들을 만나더라도 다른 신들을에게 말을 걸지 않겠다고 그리고 희생물이나 다른 어떠한 명예스러운 제물을 그들에게 바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그는 신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왕위나 권력을 부정하는 것과 그들을 부정하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고칠 기회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스트렙시아데스가 하는 약속에 완전히 만족한 '구름'이 스트렙시아데스에게 그들이 그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그들에게 은밀하게 말하라고 하는 당부의 말로 끼어든 때문이다: 만일 그가 '구름'을 명예스럽게 하고 경배한다면- 그들은 만약에 '구름' 이외의 다른 신들을 명예스럽게 하거나 경배한다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그가 똑똑해지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그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것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그가 헬라스 최고 변론가가 되는 것 이상 더는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여신들은 앞으로 그가 아테네 의회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변론가들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그에게 쉽사리 약속한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그다지 높지가 않다; 그는 아테네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 똑똑한 어떤 채권자들로부터라도 사취할 능력만 되면 대만족이다. 가능한대로 더욱 편안하게 '구름'은 그런 힘을 그에게 부여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기쁨에 취한다: 잘 알려진 악한이 되기 위하여 죽음이 아니라면 어떠한 고난도 겪는데; 그는 수단들을 위해 그 끝을 거의 잊는다. 그가 영원히 그들의 동료로서 가장 부러운 삶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그들은 그가 "가장 똑똑한 악한이라는 명성"을 가질 것이라 말하려고 허리를 구부리지는 않는다. 그에게 약속한 다음에 그를 소크라테스에게 넘기고, 소크라테스는 그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그래서 그의 지능을 시험한다. 그들은 스트렙시아데스의 성공이 완전히 '구름'에 대한 경건심과 극기력과 열망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그가 그의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그들은 네 번째의 조건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그들은 똑똑하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똑똑하게 변론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겠는가?

 

소크라테스는 '구름'이 유일한 여신들이라 말한다(365). 그리고 그는,대기와 에테르도 역시 신들(264-65)이라고 인사드리는 것처럼 보인지만 그는 신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는 스트렙시아데스에게 오로지 카오스와 '구름'과 혀(423-24)<주6>만을 신들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만일, "신들"을 생각을 하고, 의지가 있으며, 그리고 말도 하는 초인간적 존재들이라 이해한다면, '구름'은 소크라테스를 위한 유일한 신들이다. 만일, 단지 생각하고, 의지만 가진 존재들을 초인간이라 부를 수가 있다면, 소크라테스에 따라서, 가장 높은 것(공기,에테르)은 초인간이고, 또 그리고 오로지 '구름'만이 초인간이다. 달리 언급되었으나, 포세이돈과 같이(85), 에테르나 대기의 신 역시나 나쁜 것들을 불러 오지만, 반면에 '구름'은 오로지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아주 큰 이익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 유일한 신들로서의 '구름'은 알려진 그대로 "연기"(320,330)이다; 반면에 다른 신들은 알려진대로가 아니라 진짜로 "연기"이다. 확실히 "구름"이, '구름'들로 구성된 코러스가, 배우들 그들 자체보다 상위에 있는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유일한 현존물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왜 '구름'은 여성의 신들인가?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외양이 인간인 여자의 모습인 것을 그들이 그냥 한 성질이 더럽고 여자같은 아테네인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여자들이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나타나기 오래 전에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다(252-53). 이 성스러운 처녀들은 작가와 다른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들은 제우스의 처녀 딸들인 무우사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소크라테스는 무우사들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단언하는데, 만일 제우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의 딸들도 존재할 수 없다. 제우스는 소용돌이, 아니 그것보다 대기의 신이나 에테르로 대체된다. '구름'과 대기의 신이나 에테르와의 관계는 제우스와 무우사들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들은 스스로 에테르를 아버지라고 부른다(569-70). 그들은 확실히 대기의 신에 "속한다"<주7>. '구름'은 자연의 무우사들<주8>이고 소크라테스는 자연적인 무우사들의 사제이다. 만일에 모방적 예술이 지혜의 한 종류라면, 예술은 아르카이archai와 유사함이 틀림없다. '구름'은 즉시에 모든 것들의 시작을 이끄는 것에서 유래해서 동시에 그들이 의문이 있는 것들이라 주장하는 그것들을 모방하므로써 그것들을 숨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속인다. 그들은 사물들의 본성을, 그것을  감추어서 들어내는데, 수사법이 그러하듯 거꾸로도 한다. 그들은 모방의 여신들이다: 만일 모방이 자연에 뿌리를 두지 않는 것이라면, 만일에 자연의 모방이 없다면, 인간의 모방하는 기술 역시 없을 것이다. '구름'은 높이 떠 있거나, 가장 높은 것과 비슷한 자연의 모방자들이다<주9>. 이것이 어째서 그들이 자연학physiolosia을 바탕으로 수사학을 가르치는, 즉 수사학과 자연학physiolosia 둘을 가르치는 사람인,  소크라테스의 유일한 신들인가 하는 것의 이유이다.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의 본성과 행실에 대하여 신경 써 보려 하는데 왜냐하면 각 학생마다 또 다른 접근이 필요하고, 스트렙시아데스의 경우에는 그가 새로운 방책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스트렙시아데스에게 대놓고 기억력과 학습력이 좋은지를 묻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저지런 단 한번의 아니면 최악의 어리석음은 아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스트렙시아데스를 입교시킨 후에야 그를 시험한다는 것이다: 그는 스트렙시아데스가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도 전에 신들에 대한 가장 놀라운 혁신을 들추어내어 버렸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는 우수한 기억력과 이해력이 극기력이나 인내력과 그를 여신들에게 내놓는 것보다는 덜 급한 것으로 보였다고 여겨진다<주10>. 그리고 또한 그가 스트렙시아데스를 '구름'이 그렇게 하라고 한 뒤에야 겨우 그를 시험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외골수가 되, 그는 그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는데; '구름'이 사람들 가운데서 기억력과 지적 능력에 대한 자연적인 차이의 중요성을 소크라테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스트렙시아데스의 기억력과 이해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그의 대답은 기대 이하이다. 그가 현재 타고난 능력은 지혜를 얻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는 다른 본성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높이 떠 있는 것에 대하여 질문 하나를 던져 보려하지만; 그의 대답은 정말 멍청한 것이다. 그래도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 때리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묻자, 비록 그것이 스트렙시아데스가 그의 학생인 경우에 그가 벌릴 짓과, 소크라테스 그 자신에 대한 예언처럼 읽히지만, 그는 소크라테스가 보기에도 별로 틀린 데가 없어 보이는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는 점치는 능력도 없으며 신에게서 얻는 영감daimonion도 없다. 따라서 그는 스트렙시아데스를 엄숙하게,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를 가르칠 마치 공포스러운 동굴 안인 것 같은 실내로 들어가기 위해 두 번째 입교를 준비한다. 지금까지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을 성스러운 계시나 아니면 미스테리들에 대하여 관찰해 왔었다. 그러나 교사와 그의 나이 든 신참 학생 간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가 개인교습을 가지는 동안, '구름'은 관객에게 연설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파라바시스의 첫 번째 부분 전체가 작가 스스로 첫 째번 화자로 나서서 '구름'의 대장으로서 관객에게 연설한다. 이것은 연극 "구름"에 있는 또 다른 독특한 특징이다. '구름'의 본질이 무엇인지 관찰하고 나면 아리스토파네스 자신이 코러스인 '아카르나이 사람들', '기사들', '새들'의 단원으로서가 아니라 코러스 '구름'의 단원으로 나오는 것에 절대 놀라지 않는다. '구름'을 경배하는 소크라테스와 대비하면 아리스토파네스는 하나의 '구름'이고; 그는 그를 길러 준 것으로 디오뉘소스에게까지 좇아 올라간다. '구름'과 같이 그러나 소크라테스와는 다르게 그는 도시가 받아들이는 신들을 받아들인다. 그는 처녀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그 앞의 소개에서, "구름"을 나쁘게 대접한 것에 대하여 관객들을 나무란다. 그는 이 희극을 가장 지혜로운 것으로 또한 그가 다른 어느 것보다 더 많은 작업을 한 것으로 여기고; 관객들의 현명한 부분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작품을 짰다. 그는 그의 다른 작품을 통해서는 이런 주장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는 "구름"을 청순한 처녀 엘렉트라에 비교하는데, 왜냐하면 그 주장으로 보면 그것은 어떠한 야비함도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름"의 독특한 예의범절이 소크라테스식 극기심에 의해 요구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구름"이 상을 받기를 열망하며,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의 관객에게 그의 먼저의 희극에 보냈던 그들의 좋았던 호응을 상기시키고 그의 나무람을 부드럽게 한다. 엘렉트라가 그의 동생 오레스테스를 보았을 때, 그의 머리칼이 그녀에게 그가 살아서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듯이 "구름"은 현명한 구경꾼들을 찾는데, 왜냐하면 현명한 관람객이 살아서 가까이 있는 것을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보여 줄 놓쳐서는 안 되는 신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관객에게 그가 작가로서 탁월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의 경쟁자들과 대조적으로 그는 언제나 가장 똑똑하게 새로운 자부심을 그려내는데; 그는 용감하게도 권력의 초고조에 있던 클레온을 공격하였던 반면에, 그가 몰락한 뒤에는 점잖게 그냥 두었고; 그는 또한 여러가지 면에서 야비함을 피하고; 여기서 솔직하게 그는 그가 정의 같은 것의 교사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에피레마epirrhema에서 '구름'은 그들이 여신들이라 말한다. 그들의 관심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것과 현저하게 다른데; 그들의 관심은 연극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위대한 것들을 찾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들은 관객을 나무라는데 아테네시가 그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다른 신들보다 도시에 혜택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경건함으로 유명한 아테네로부터 경배나 그 무엇도 받지를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암묵적으로, 암묵적으로만은 아니고, 왜 소크라테스를 좋아하는지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구름'을 경배하는 유일한 아테네 사람이고, 그리고 오로지 '구름'만을 경배한다. 그들의 혜택 중에는 무엇보다, 아테네 사람들이 바보같이 그들과 다른 신들이 미워한 클레온을 장군으로 뽑기 전에 천둥과 비와 그리고 번개를 통하여- 해와 달과 함께, 아니면 그들의 해와 달에 미치는 영향력을 통하여- 그들이 주었던 경고들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그들은 어떻게 하면 지금도 도시가 클레온을 없앨 수 있는지 한마디 충고를 더한다. 그들은 제우스가 아니라 그들이 비와 천둥을 만든다고 대충대충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화제를 그들이 무시하는 여신인 그들처럼 아테네 사람들에게 혜택들을 주는데도, 지금은 아테네 사람들의 달력에 대한 부주의 때문에 다른 신들의 손에 놓여 위험에 처한 달의 이름으로, 아테네 사람들을 나무라는 안티에피레마antepirrhema로 계속해서 이어간다. '구름'이 판테온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그래서 무엇보다 제우스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동안은 그들이 달과 해와, 즉 '구름' 그들에게 만큼이나 소크라테스에게도 중요한 존재들로서,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여신들이 여덟 신들의 이름을 불러 칭송하는 파라바시스의 부분을 이루는 두 스트로페strophe 가운데서 가장 명백하게 그들이 보여주는 신들에 대해 '구름'이 소크라테스에게 동의한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다섯 신들을(제우스, 에테르, 아폴론, 아테나, 그리고 디오뉘소스) 이름으로, 세 신들은(포세이돈, 해 그리고 아르테미스) 이름이 아닌 다른 것으로 언급한다<주11>. 각각의 스트로페strophe에서 '구름'은 신 하나를, 한번은 "우리들의"라고 말하는데; 그들은 에테르를 "우리들의 아버지"(도입부 노래에서 오케아노스를 그들의 아버지로 말했고, 반면에 신 에테르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테나를 "우리들의 여신"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경우에는 그들 자신을 '구름'이라 말했고,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을 아테네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아테네시가 그들을 입양하기를 갈망하고, 그들은 땅 위에서 살 집을 찾기를 바란다<주12>. 이것은 '구름'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같은 이유로 처음 '구름'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연설할 기회를 가질 때, 그들이 완전히 그들과 소크라테스와의 관계에 대하여 침묵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똑같이 부적절한 침묵은 "구름"에서 아리스토파네스 그 자신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에 의해 드러난다. '구름'이 부르는 유일한 여신들은 처녀들이고, 그리고 그들에 의해 그가 우주적으로 은혜를 베푼다고 칭송을 받은 유일한 신이 에테르라는 것 역시 주목할 일이다.

 

소크라테스와 그 뒤를 이어서 곧 바로 스트렙시아데스가 빛이 있는 바깥으로 돌아온다.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의 우매함에 역겨워졌다. 실내에서 그것이 무엇이든 가르치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가르쳐 보려고 하는데; 그러나 지금은 바깥에서 어쨌든 그가 그전에는 한번도 배워 보지 못한 것들을 가르칠 것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실내에서 스트렙시아데스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어렴풋이 알게 해 주는데; 그가 지금 가르치려 하는 이름하여, 시, 문법 그리고 수사법 등 이런 것 중에 어느 하나도 그곳에서는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었다. 이 이후에post hoc 그 때문에propter hoc가 되지 않을까 해서, 호기심이나 현학심으로 실내 수업 전후에 사제 간의 행동들에 생긴 서너 가지의 사소한 변화들을 주목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스트렙시아데스를 이름으로 부르고; 스트렙시아데스는 이제 적어도 그가 소크라테스의 문을 두드린 이후 처음으로 외설적인 쌍소리를 사용하는데; 개인교습privatissimum 전후로 두 사람의 맹세가 현저하게 다르다. 그의 재등장 후 그리고 스트렙시아데스의 재등장 이전에 소크라테스가 내뱉은 첫 번째 맹세는 호흡에 걸고, 카오스에 걸고, 대기에 걸고인데; 이들 세 단어는 하나이며 같은 것인 공기의 다른 면들을 참작한 것으로 보인다<주13>. 뒤를 이어서(667) 스트렙시아데스가 "대기에 걸고" 맹세한다. 이전에는 아무도 공기(혹은 에테르)에 걸고 맹세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공기가 얻은 것을 '구름'은 잃는다. 누구도 "구름에 걸고"(아마도 그들을 걸고 맹세하기에는 너무나도 명백히 변화하기 때문일 것이다) 맹세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실내수업 이전에 두 사람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는 '구름'을 여신이라 말하고 그들을 여신들이라고 호칭하는데; 그러나, 그래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는 그 일 이후, 소크라테스는 전혀 그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호칭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리고 스트렙시아데스는 그들을 '구름'이라고는 부르지만, 더 이상 여신들로는 호칭하지는 않는다.(793,1452,1462). 소크라테스는 이제, 바깥에서의 개인교습pravatissimum이 진행되는 사이에, '구름'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보이는 "카리스 여신들에 걸고"(773) 맹세하고; 그리고 스트렙시아데스는 이제 "안개에 걸고"(814), 즉 진짜는 '구름'인 것(330)에 걸고 맹세한다. 실내교습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구름'을 "모든 것의 여왕"으로 불렀고, 그후로 잠시 동안, '구름'을 협잡꾼인 "모든 것의 여왕"으로 부른다(357,1150). 이것에 따르면, 스트렙시아데스는 실내교습 뒤에 소크라테스를 "멜로스의 사람"으로 묘사한다(830).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구름'에 대하여 무엇이라 생각하든, 스트렙시아데스에게 무어라고 가르쳤든 간에, '구름'은 그들 자체의 생활이 있으며 그들 자체의 의지가 있다: 그들은 그들이 신적인 존재임을 주장한다(804,1121). 한 사람의 정신을 주술로 빼았는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 설사 '구름'에서는, 오로지 '구름'에서는 그렇다 해도, 관중들에게는 이러한 행동의 의미가 결코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중요한 행동이 파라바시스 가운데 자리 잡는다<주14>. 추측하거나, 그 둘을 둘로 같이 두는 수 밖에 없다. 파라바시스에서 '구름'이 소크라테스에 침묵했던 것과 같이, 파라바시스 동안 소크라테스는 '구름'의 정체를 들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실내교습에 이은 교외의 수업은 처음부터 시의 격과 절 그리고 운에 전념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격이나 운에 대해 배울 능력도 의지도 없고; 그는 오로지 '불의의 변론'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불의의 변론'을 배우기 전에 그가 정확한 용어의 사용법을 배워야만 한다고 설명하는데; 시에 대한 강습은 조용히 거두어지고 이리하여 마지막 파멸이 결정적으로 준비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최소한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라는 소크라테스의, 아마 소크라테스의 눈에조차 별무소용인, 모순되지만 파악하기는 쉬운 교습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소크라테스는 그 다음 불의에 대하여 가르치기로 방향을 바꾸고, 더 일반적으로는 그 자신의 일들(신성한 것이나 앞에서 말한 높이 떠 있는 일과는 구별되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인데; 교습의 이 부분은 최소한 스트렙시아데스의 경우 '불의의 변론'에 드러내는 초보적인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식 교습의 엄격한- 경건하다고 말하지 말라- 요구사항들에 따르면, 스트렙시아데스는 최대한의 인내심이 요구되는 위치에 있는 동안에 심사숙고하여 그의 교습을 받아야만 하고; 그러므로 그는 어떻게 하면 그의 채권자들을 사취할 수 있을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그가 현재의 불편함에서 살아 남을 것인가를 깊이 숙고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굉장한 인내심을 발휘하는데; 이런 인내력과 극기력의 대가는 벼룩이라는 군대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해도 왜 사람이 집중할 수 없으며 심지어 잠을 잘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소크라테스의 많은 자극을 받은 뒤 희미하게나마 스트렙시아데스가 달과 거울 사이의 어떤 유사성을 기억했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스트렙시아데스는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달을 거울 같은 상자 속에다 집어 넣는 방법으로 달을 수중에 두고, 그의 채권자에게 줄 돈을 무한정 연기할 수 있다는 술수를 창안한다. 스트렙시아데스가 물론 소크라테스는 모르는 달력과 법적 이자 지불일과의 관련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를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자,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의 술수에 대하여 만족한다<주15>.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에게 그가 송사에서 이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그를 하늘에서 땅으로 불러 내리려고 애쓴다: 필요한 것이란 더 적은 천문학(어쩌면 마법의 천문학)이며 그리고 더 많은 법정에서의 수사법인데; 너는 틀린 방법으로 너무 많이 나를 흉내내며; 너는 나를 희화화하기까지 하는데[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의 학생인 스트렙시아데스는 희화 중의 희화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면 네가 채무 불이행의 거액에 대한 서면 지불 청구를 타파할 수가 있는가?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돋보기 즉 태양열로 은밀히 밀랍의 고발장을 녹일 것이라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우아한 술수에 대단히 만족하고;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하여 어느 때보다 더 즐거워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즉각적인 결과이다.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스트렙시아데스의 대답은 여전히 너무 직설적이고 수사적으로 불충분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증인이 필요함에도 증인을 구할 수 없는 송사에서 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즉 하늘도 도울 수 없는 오로지 똑똑한 혀만 있는 그런 상황에 처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묻는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죽은 사람은 재판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법정에 그의 사건이 오기 전에 달아나서 스스로 목을 맬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모든 기대대로 또한 최대한의 잔인함으로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와의 관계를 단박에 짜른다. 그는 스트렙시아데스가 그가 배운 것을 그 즉시 까먹는다는 이유로 교습을 계속하기를 거부한다. 실제로 스트렙시아데스는 개인교습에 이은 교습의 초기에 그가 배운 것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왜 스트렙시아데스가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 목을 매겠다 하는 것이 빈약한 기억력의 탓이며,  혹은 어느 때인지 그가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 특히 교외교습의 초기에 배운, 어느 것과 모순이 되는지 이상한 것으로 남는다. 아마도 스트렙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아무도 몰래 어떤 경우에도, 아니면 최소한 돈이나 돈의 부족 때문에 자살해서는 안 된다는 교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스트렙시아데스의 방안에 대한 그의 반응이 전적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행동으로 남는다면, 스트렙시아데스가 잊어버린 것은 소크라테스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스트렙시아데스의 기억력이 빈약하고, 그가 바보인 것은 꽤 오래 전부터 소크라테스가 알고 있었고; 그의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은 실내교습부터 교외에서의 교습에까지 그를 절망에 빠트리는 원인이 되었었다. 그러나 그가 실내교습을 중단하였을 때는 이런 결점을 긍정적인 면에서 말하였던 반면에, 교외에서의 교습을 중단할 때에는 최고라는 면에서 그의 결점을 말하였고, 그래서 모든 교습을 끝낸다(629,790)<주16>.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를 그의 학원에서 쫓아낸다. 늙은이는 절망한다. 똑똑한 변론도 배우지 못한 채로 채권자들에 의해 그는 망하게 될 것이고; 그는 끝이 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재난은 커다란 이점도 있을 것이다. 극빈자인 소크라테스를 협박하는 바람에 철저하게 가난해지고, 신용이 없어지고, 그리고 생계를 이을 수입도 없어져서, 스트렙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저홀로 남겨두고 떠날 것이고, 소크라테스의 "꾀 주머니" 활동은 방해받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소크라테스-스트렙시아데스 일은 누구가 불공정하지 않게만  말한다면 소위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 일은 절망한 스트렙시아데스가 조언을 구하려고 '구름'에게로 돌아가면서 다르게 결말난다. 만약에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의 관계가 소크라테스가 스트렙시아데스에게 그의 학원을 떠나라고 하는 조금도 획기적이거나 놀랄 만하지 않은 결말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면 '구름'의 흥미는 생기지 않았었을 것이다. 최소한 소크리테스-스트렙시아데스 일의 연속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구름'이 스트렙시아데스에게 준 조언은 결정적이다. 지금까지 이 일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이 스트렙시아데스에게 있었다면, 지금부터는 그 책임이 '구름'에게 있다.

 

'구름'은 스트렙시아데스에게 만일 그에게 다 큰 아들이 있을 경우 그 아들을 소크라테스의 학원에서 배우도록 보내라고 조언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가 모자란다고 여겼던 그 아들의 굳셈에 대해 말하며 그를 고무한다. 스트렙시아데스가 페이딥피데스를 데리러 떠나가자, 여신들로서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차가운 것을 모를 까닭이 없는'구름'은 그들에게 대단한 혜택을 입은 그에게 그들이 유일한 신들임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기회가 이어지는 동안 스트렙시아데스의 현재 심리상태의 이점을 재빨리 최대한으로 살리라고 그에게 충동질 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이제 페이딥피데스를 소크라테스의 학원에 강제로 입학시켜야만 하는 겁나는 임무를 수행하여야만 하는데, 그 자체로도 구별되는 그 젊은 사람의 취향은 소크라테스와 공통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떠나 보내기 이전에 그가 페이딥피데스에게 한 마지막 말은 그를 집에서 쫓아낼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효과가 있었다. 그가 여전히 집에 있는 것을 보자 그는 그의 협박을 실행하는 것처럼 굴었다. 페이딥피데스는 그의 아버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그의 그런 단호함을 본 적이 없었다. 스트렙시아데스가 최고로 낡은 견해를 가진 작은 아이처럼 제우스의 존재에 대하여 그를 웃게 만들자, 그의 아버지가 실성했다는 걱정과 놀라움이 커진다. 그는 페이딥피데스에게 비밀로 지닐 것을 약속받고-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교외수업에서 그런 예방을 한 적이 없었다-, 제우스가 '소용돌이'에 의해 쫓겨났었다고 폭로한다: 소크라테스와 카이레폰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제우스의 왕권을 부정하는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달리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을 맹세로써 속일 수 없기 때문에 비밀로 지켜져야 한다. 예상대로 스트렙시아데스는 그 아들에게 '구름'에 대하여, 특히 그들의 신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가 신들의 가장 불쾌한 것들에 대하여 말하는 동안 그는 어리석고 낭비벽 있는 페이딥피데스가 그의 낡은 기질로, 스트렙시아데스가 보기에는 지능과 검소함에는 발군인 사람들인, 소크라테스와 카이레폰에게 경멸을 나타내자 몹시 분개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물론 페이딥피데스와 소크라테스가 그들 자신은 모자라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843,803) 것을 알아내지 못한다: 페이딥피데스는 배울 능력이 있으며; 그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유용한 어떤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이 점에 대하여 페이딥피데스가 회의하자, 그의 아버지는 그가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자각과, 예를 들어 단어의 정확한 사용법처럼, 가치 있는 여타 모든 것들에 대하여 말한다. 페이딥피데스는 그의 아버지가 미쳤다고 더욱 더 믿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소크라테스의 학원에다 겉옷과 신발을 두고서 돌아온 것을 알아내자, 그는 가족에게 남겨진 재물들에 대해서도 역시 걱정하게 되어서, 그래서 비록 무서운 경고를 발하지 않지는 않아도 그의 아버지와 함께 소크라테스에게 가기로 동의한다: 아직도 그는 보통의 예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제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우려는 기술로 보전하거나 얻게 되는 돈으로 대소 간에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지 않겠냐며 약간 쉽게 그에게 신 사과를 베어 물게 만든다. 불결하고 우아하지 못한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와, 그의 기호는, 길고 긴 승마의 시간들 사이의 한 순간의 막간일 뿐이다. 이러한 전망이 페이딥피데스의 우울함을 완전히 가볍게 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하여 더 큰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고, 또 배우려는 의지가 더 적은 학생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에 대한 페이딥피데스의 무례에 대하여 화를 내기에는 너무 자만심이 강한데; 그는 고작 어리석은 젊은이에게 그의 나쁜 발음에 대해 꾸짖을 뿐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페이딥피데스가 변론의 기술을 배울 만한 자연스런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안심시키고; 어릴 때에도 그는 모방의 기술을 포함한 예술에 대한 대단한 자질을 보였다고 안심시킨다: 그를 가르쳐! 지금. 그 무엇보다 '불의의 변론'을! 소크라테스는 페이딥피데스가 소크라테스가 없는 가운데, '정의의 변론'과 '불의의 변론'으로부터 직접 그의 교습을 받을 것이라고 겨우 대답할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불의를 가르치지 않고; 그는 정의와 불의의 변환을 학생들에게 표출시켜 줄 뿐이다. 그는 그 변환에 영향력이 없고,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도 없다. 반드시 두 가지 변론들을(사실은 모든 변론을) 들어야 하며, 그리고 어디서 그들을 이끌고 나가야 하며, 그들의 어떤 점에서 이겨야 하는지를  미리 정할 수 없는데; '구름'처럼 그들에게도 그들의 인생이 있다. 

 

페이딥피데스는 시험이나 가입을 거치지 않고 두 변론으로부터 교습을 받는다. 두 변론을 듣는 것이 관객들에게 소개된 그가 받는 유일한 교습일 뿐이다. 그는 계속 더 교습을 받았어야만 했었는데 왜냐하면 나중에 그가 소크라테스로부터 두 변론들로부터는 배우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배웠다는 것을 그가 증명하기 때문인데; 그의 시험이 아마도 엄격한 실내교습을 앞서 나갔었을 것이다. '구름'이 두 변론 사이의 논쟁에 사회를 보는데,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이 논쟁에 더 책임이 있다고, 아니면 소크라테스보다 더 논쟁에 가깝다고 밝히는데; 그들은 양쪽 변론 모두를 그들의 "친구"라고 부른다. 그들은 모든 것을 모방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즐기고; 그들은 양쪽 모두, 기쁨으로 신들을 칭송하는 한편, 소크라테스가 다른 신들을 거부하는 것도 기쁘게 듣는다. 그들은 무책임함 그것이며, 비실질 그것이며, 구름 바로 그것이다. 논쟁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부분은 전적으로 자발적이어서, 즉 '구름'에 의하여 조정되지 않아; 변론들은 그저 모욕하고 도발하는 말들만 서로에게 퍼붓는다. 그들 각자는 페이딥피데스를 자기 편으로 붙잡으려 노력하고; 그들이 주먹을 날릴 기세에 이르러서야 '구름'은 중재해야 하겠다고 느낀다. 그들의 모욕을 통해 변론들은 각자 그들의 성격을 드러낸다. '정의 변론'은 구식이고; '불의의 변론'은 뻔뻔하다. (그들의 관계는 투키디데스의 책 속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변론과 닮았다.) '정의의 변론'은 옳은 것들만 발언하고 (아리스토파네스가 하라고 주장하는 대로); 따라서 그는 대중들의 갈채에는 냉담하다(소크라테스와 비슷한데 아리스토파네스와는 다르다): 그는 관객을 모독한다. '불의의 변론'은 대중적이고 관객에게 현명한 것으로 비춰져 호소력이 있는데(아리스토파네스가 어떤 면에서 파라바시스에서 그의 이름으로 했던 대로);  '정의의 변론'이 그를 몰염치한 것, 야비한 것, 남색자, 그리고 존속 살해자라고 부르자, 그는 이러한 욕설들을 칭송으로 받아 들인다. 이제 '정의의 변론'은 주눅들어 아테네의 빈민구호소가 되는 반면에, 전에 거지였지만 가면을 쓰고 왕인 척했던 '불의의 변론'은 이제 아테네에서 잘나간다. 이러한 사정으로 그리고 두 변론은 희극이 그러하듯 상을 타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불의가 이길 운명이다. 두 경쟁자를 진정시킨 다음, '구름'은 그들 각자에게 옛날과 지금으로 나누어 교육의 종류에 대해 그가 지지하는 경우를 진술하라고 요구한다. 그의 우월함을 확신한 '불의의 변론'은 임의로 그의 경쟁자에게 선공하라고 한다: 그는 '정의의 변론'을 어느 면에서는 전에 이미 그리했듯이 경쟁자의 논점을 바탕으로 반박하려고 한다. 논쟁의 전반부에 일어난 추론의 단 한 부분 때문에 다음과 같은 전도가 일어났다. '불의의 변론'은 올바름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마치 소크라테스가 제우스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단언했었듯이); '정의의 변론'은 올바름이란 신과 함께 있다고(즉 사람들에게는 있지 않다고, 특히 동시대의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불의의 변론'은 만약 올바름이 신과 함께 있었다면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를 족쇄로 채웠는데도 처벌 받지 않고 무사할 리 있었겠느냐고 대꾸하자; 그래서 정의의 변론은 모욕감으로 쳐졌는지, 숨었는지, 주눅들어 침묵하였다. 양쪽 변론은 제우스가 존재한다라는 논거와, 그리고 사람은 제우스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만 한다는 논거에 대해 다투었다. 그러나 '정의 변론'이 사람들은 제우스가 하라고 말한 대로 해야 한다고 암시한 반면에, '불의의 변론'은 사람은 제우스가 하는 짓을 따라서 해야 하거나 혹은 해도 좋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패배의 결과로 정의의 변론은 올바름을 지지하는 존재로서의 제우스나 다른 신들에 대한 나머지 논쟁에 완전 침묵한다.

 

체면의 방어자인 '정의의 변론'은 향수에 젖어 그의 긴 강론에서 그가 잘나가고 겸손이 존경받던 옛날을 회상한다. 소년들은 보였으나, 들리지 않았고; 그들은 행실이 반듯했으며, 극기와 인내로 키워졌다. 전통 음악과 시를 배웠으며; 기준을 벗어나면 엄하게 벌을 받았다. 사람들의 소년들에 대한 사랑은 관습의 한 부분이었지만 그 사랑은 모든 천박함과 무절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옛날에는 바라던 대로 지켜졌던 순결에 대하여 말할 때, '정의의 변론'은 한 사람이 순결치 않음을 혐오한다는 것이 순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들어간다. 소년들이 신체단련 훈련을 받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교육이 이제는 구식으로 우습게 되었지만 마라톤의 전사들을 키웠으며; 반면에 '불의의 변론'이 좋아하는 교육 방법으로는 나약한 자들을 키운다. '정의의 변론'의 쪽을 선택하므로써 페이딥피데스는 시장판을 질색하게 될 것이고, 놀림을 받으면 분노에 가득 찰 것이고, 그의 부모들 특히 그의 아버지에게 무례하지 않을 것이고, 노는 무희들과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연장자들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존경과 염치로 가득찰 것이다. 따라서 '정의의 변론'은 여기서 그의 강론의 중간 부분에서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고, 페이딥피데스가 해야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 삼가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 더욱 더 많이 이야기한다. 세 번째이면서 마지막인 그의 강론에서, '정의의 변론'은 여전히 더욱 분명하게 페이딥피데스가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그와 대립한다: 그는 입담 좋은 참견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인생을 시장판에서나 재판소에서 보내는 얼굴이 창백하게 되어 버린(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처럼), 황음에 빠진(소크라테스나 그의 동료들과는 다르게), 사기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는 그의 나날들을 체육관에서 보내고 건강하고 금욕적인 신체임을 나타내는 표시를 지닌 축복 받은 고상한 젊은이가 될 것인가? '정의의 변론'은 여기서 영혼의 건강에 대해 말하지 않는데; 사실 그는 결코 영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고- 무슨 다른 이유 때문인지(그는 영혼을 공기로 대체했다), 영혼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전혀 없는 소크라테스와 이 점에서 일치하여-, 반면에 '불의의 변론'은 언급한다<주17>. '구름'은 '정의의 변론'의 연설에 담긴 타고난 중용에 대하여 칭송하고; 그들은 역시 나이 든 사람들의 더 없는 기쁨에 대해 칭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화시키는 그들에 익숙한- 그들은 불의의 변론에 대해서도 역시 칭송하고 그리고 그가 정의의 변론을 논박하라고 북돋아 준다.

 

'불의의 변론'은 그 대안에 대해 논박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신교육을 추천한다. '정의의 변론'에 끼어들거나 수긍하면서 들어낸 그의 논점들은 자발적인 것이었으나, '정의의 변론'이 '불의의 변론'이 하는 강론 차례에서 내놓은 논점들은 '불의의 변론'이 그에게 질문을 던져 유도된 것들이다: '불의의 변론'은 '정의의 변론'에 대한 말꼬리잡기elenchos이며; '불의의 변론'은 인신공격적이다. '불의의 변론'은 그가 일반적으로 가장 강력한 것으로 인식되는 법과 정의의 처벌에 반대하는 명백하게 절망적인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덜떨어진 변론으로 불린다. 그는 법과 정의를 그것들의 바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뒤집어 버린다. '정의의 변론'은 따뜻한 물에서 하는 목욕을 그런 목욕이 사람들을 비겁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그 무엇보다 거부한다. 그러나 가장 용감하고 최고로 어려운 일들을 헤치고 나온 사람은 제우스의 아들인 인간 헤라클레스였으며 헤라클레스의 목욕탕은 온수 목욕탕이어서;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에 대한 논쟁은 박살난다: 따뜻한 물 목욕과 인생의 노고는 서로 모순이다. 양쪽 '불의의 변론'과 '정의의 변론'은 제우스의 아들을 보통 인간의 모델로 보고 논거로 삼아 시작한다. 두 번째로 '정의의 변론'은 한 사람이 그의 인생을 시장판에서 허비하는 것을, 즉 의회에서 연설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나; 호메로스는 네스토르와 또 다른 현명한 사람들을 의회에서의 명연설가로 소개했었다. 양쪽 변론들은 가장 오래 된 작가가 도덕에 대한 최고의 안내자라는 논쟁을 또 시작하는데, 왜냐하면 오래된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이어서; 양쪽 변론들은 그들의 논의를 작가에 맞춘다. 마지막으로 '정의의 변론'은 한 편으로는 오만hybris에 반대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방탕함에 반대되는 중용에 대하여 칭송하였다. 첫 번째 뜻의 중용을 다음 번의 뜻에 더하면, 그것은 소년들과 여자들로부터 사랑의 기쁨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도박 식도락, 음주, 웃음- 한마디로 인생을 사는 즐거움의 모든 것을 빼앗는다. 첫 번째 의미의 중용은 인생 그 자체를 망하게 한다. 사람들은 본능적인 충동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주18>. 아마도 그는 잡힐 것이고; 법과 정의의 약한 점에 기대는 변론으로 그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면 그는 다치거나 심지어 파멸할 것이다. 오직 '불의의 변론'의 도움만이, 제우스를 예로 들어 가며, 그가 저지런 어떠한 범죄도- 특히 에로스의 영역 안에서의-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능한 제우스가 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연약한 인간이 에로스에 저항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신들은 인간이나 신들이 본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잘못을 저지런 사람들을 합리적으로 용서할 수 없었는데<주19>; 그들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것을(혹은 우리에게 하라고 말하는 것을 잠시보류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짓을 함으로써 신들의 뜻에 복종하자! 오로지 '불의의 변론' 편에 있는 것만이 페이딥피아데스가 그의 본성이 즐기라고 부추기는 것들을 아무 부끄러울 것 없다며, 웃고, 춤추고 하는 것들을 즐길 수 있게 할 것이다. 반면에 '정의의 변론'은 침묵으로 본성에 대한 법을 지지하였고, '불의의 변론'은 법으로부터 본성에 호소한다. '정의의 변론'은 방탕으로 인생을 이끌면 페이딥피데스가 수치스러워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대답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러나 '불의의 변론'이 그로 하여금 가장 유명한 연설가들이나 비극작가들 그리고 대다수의 관객들마져도 모두 수치스럽다고 자인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하자, '정의의 변론'은 그의 패배를 인정하고 반대 쪽의 진영으로 도망가 버린다. 신들에게도, 연설가들에게도, 비극작가들에게도, 그리고 대다수의 관객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을 수가 없는 생활 방식은 변호의 여지가 없다. 아니면, 분명하게 하기 위해 좀 과장하면, 신들에게도 인간들에게도 없는 올바름은 오직 로고스로만 존재하지만, 그 로고스는 정작 로고스가 모자라는 것으로 판명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름'은 '정의의 변론'에게는 갈채를 보낸 반면, '불의의 변론'의 강론에 대해서는 박수치지 않는다.

 

'정의의 변론'의 완벽한 패배로 절정에 이른 두 변론 간의 논쟁이 소크라테스적 교습의 한 부분임에 반하여, '불의의 변론'에 의해 권장된 생활방식은 실수로라도 소크라테스적 생활이 될 수 없는 것인데; 성적인 즐거움의 생활은 특히 돈에 관해서나, 어떤 세련된 성적인 즐거움에 무모하게 투신하는 어쩔 수 없는 조건에서나 간에, 모든 면에서 자제심이 강한 소크리테스에게는 전적으로 이질적이다. 극에서 알려진 소문과 달리 그는 "돈을 받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가 변론의 기술을 가르치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였다면 쉽사리 부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나(876), 비록 그의 여신들이 학생들을 이용하라고 하지만 그는 수입에는 조그만치의 관심도 없고; 가난뱅이가 아닌 그의 학생들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건네는 선물은(그 선물이 돈과 같은 것인지는 모른다) 별개이다<주20>. 소크라테스의 자제력은 '정의의 변론'의 권장 사항들을 상기시키지만, 이는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른데, 왜냐하면 그는 신체의 단련을 깔보고 무엇보다 그 용어의 깊은 뜻으로 보아 중용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는 신들과 법에 비해 그 이상 되는 오만hybris한 사람이며; 그는 좀도둑이지만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죄로부터 위축 받지 않는다. 크세노폰이 구별한 것을 인용한다면, 자제력은 있으나, 그의 중용은 경건함이나 정의심으로 짜여진 것이 아니다. '불의의 변론'과 같이 그는 똑똑하고(지혜) 또 과감한 성격을 가졌으며; 중용과는 구별되는 그의 자제력과 극기력은 높이 떠 있는 것을 연구하는 데에 요구되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소크라테스의 생활 방식이 변론들이 권장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데, 후자는 신들이 인생의 희열을 이끈다는 작가들에 의해 증명된 논거에 기초하고,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지하는데; 설사 그들이 존재한다 해도 배움에서는 별로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보여준 그들의 치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모델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계획에서는 변론들 간의 논쟁은 오직 올바른 생활로 올라가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불의의 변론'은 늘 그랬듯이 신들에 의해 지지되던 정의의 자기 파괴이다. 소크라테스의 생활 방식은 신들에나, 연설가들이나, 비극작가들이나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에 의해 지지 받지 못한다. (이 점에서 '불의의 변론'의 공격으로 생긴 충격 속에 들어난 생활 방식은 '정의의 변론'이 칭송했던 생활 방식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파네스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변호의 여지가 없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올바른 것들에 대해 '정의의 변론'처럼 말하고; 그는 '불의의 변론'처럼 성적 즐거움과 웃음의 생활을 타이른다<주21>. 아리스토파네스 작품 속의 이런 두 부분은 간단하게 화목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변론들의 논쟁으로부터 도출된 주된 교훈이 될 것이다.

 

'불의의 변론'이 이기고 난 후에,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에게 페이딥피데스를 소크라테스의 학생으로 만들려는 그의 결정을 재고하도록 기회를 주지만, 그 승리가 스트렙시아데스의 결의를 강화시킬 뿐이다: 페이딥피데스의 수업은 계속되어야만 하고, 특히 그는 "주요 과목"들은 수업을 받아야만 한다. 논쟁 전부터서도 스트렙시아데스는 페이딥피데스가 "모든 올바른 것들"을 반박하는 것을 배우기를 갈망했었지만, 모든 종류의 불명예를 좋아하는 것과, 논쟁에서 이겼던 모든 종류의 성적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간에는 아주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페이딥피데스는 논쟁이 전적으로 인상적이지 않은데; 그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모든 일들을 그전처럼 싫어하고, 다시 그의 아버지가 그의 결정을 후회할 것이라는 믿음을 표시한다. 두 변론 사이의 논쟁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 페이딥피데스에 대한 그의 교습의 초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지 못했고; 그는 또한 다른 실수도 했다. 페이딥피데스는 '불의의 변론'의 남색 생활에 대한 칭송 탓으로는 쫓겨났었을 수가 없었어야 했지만, 남색 생활은 이것이 부족한 소크라테스식에 대한 페이딥피데스의 주된 이의 사항인 건강한 겉모습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그의 단언 탓으로 쫓겨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다. 바꾸어 말하면, '정의의 변론'의 패배는 바로 신체단련의 패배이고, 신체단련과 승마 사이는 친족 관계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논쟁의 논거는- 성적인 즐거움의 생활과 상류층의 신체단련적 노력은 서로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히 틀린 것이며, 그리고 경마 트랙의 냄세보다는 "꾀 주머니"의 냄세가 나는 것으로 드러났어야 했다. 이러한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가면, 올바른 것들을 말하는 것과 감각의 즐거움을 칭송하는 것의 아리스토파네스식 조합이 본성에 의한 것이라는 살아 있는 증거로서 아직은 소크라테스에게로 전도되지 않은 페이딥피데스를 볼 것이다.

 

페이딥피데스에 대한 실내교습은 그의 아버지의 경우만큼이나 많이 감추어져 있다. 스트렙시아데스의 갈망에 따라 그 교습 역시 "주요 과목"에 대하여 다룰 것이며;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페이딥피데스가 능력이 있는 소피스트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소크라테스가 페이딥피데스의 교습에 치는 장막은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된다. '구름'은 그들의 신성함을 그 어느 때보다 더 힘있게 재차 단언한다. 그들은 인간들인 관객들에게 만일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대로 정의롭게 '구름'의 코러스에게 상을 줄 경우, 그들 각각의 심판이 받을 보상을 알려 주고, 마찬가지로 만일에 '구름'에게 그들이 누릴 명예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들 각각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한다: 모두가 적절한 양의 비가 적절한 때에 오기를 '구름'에게 완전히 의존하기 때문에, '구름'은 다른 어떤 신들을 더 이상 언급조차 않는다. 그들은 이제 미래형 시제로 말할 뿐이다. 그들은 관객들에게 첫 번 파라바시스에서는 그랬었지만, '구름'에 신세져서 얻은 혜택에 대해 상기시키지도 않는데, 왜냐하면 그 혜택들은 도시에 베풀어졌었기 때문이고; 반면에 지금 여신들이 말하는 보상들(그리고 벌들)은 앞으로 닥쳐올 개인들 각각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각각은 "구름"에 대해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 투표하려 한다. '구름'은 그들을 처음으로 아테네시에 여신들로 소개한 "구름"의 성공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행사한다. 그들의 호소는 서약한 심판들을 매수하려 할 만큼 되지만; 만일 아테네 사람들이 '구름'을 명예롭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인정하고, 그리고 그 속에다 이빨을 감춘 호소로 '구름'이 단지 불의를 바로 잡는 것이라면, 이것은 단순한 불의의 행동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시대의 옛날 아테네, 마라톤 시절의 아테네, 단 한 사람도 그들이 '구름'을 경배하리라고 꿈조차 꾸지 않았던 그때에는 높은 급수의 불의였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혹은 '구름'과 신식의 방어자인 '불의의 변론' 사이에 보내는 동정은 필요하거나 정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구름' 스스로 그들이 가장 오래된 고대 유물들과 과도한 신앙의 나라인 이집트에서는 전체적으로 무력하다고 명백히 말한다.

 

페이딥피데스의 실내교습 동안까지는 파라바시스가 계속 지속한다고 생각되어야만 하는데; 동시에 벌어지는 이 두 가지 일들의 각각에 걸리는 시간은 다른 길이의 단위로 재어진다. 페이딥피데스가 소크라테스의 힘든 훈련을 겪었던 반면에 그리고 진짜로 이런 고초 때문에 스트렙시아데스는 그의 지불 날짜가 꽉 차 오는 것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최소한 스트렙시아데스의 실질적 목적에는 필수적인 것이라 할 페이딥피데스의 공부가 이제 끝이 났다. 소크라테스에게 선물을 전하고, 이제는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능력을 넘칠 정도로 지닌 그의 아들을 돌려 받는 것으로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꾀 주머니"에서 불러낸다.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 사이의 좋은 관계가 완전하게 복원되는데; 사실 그들의 관계가 그 이전에는 한번도 지금처럼 좋았던 적이 없었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열광한다. 페이딥피데스의 지금의 모습은 소크라테스가 약속했던 대로 똑똑한 소피스트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록 그의 아버지를 놀랍도록 하지는 않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겪어내야 했던 고초와 그가 함께 살아야 했던 동료들에 대한 원한으로부터 그가 완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모습과 기술로 만이 아니라 전혀 딴 사람이다. 그가 새로이 습득한 법적 추론의 한 예를 아버지에게 보여 주는 것으로 그는 그의 아버지의 마음에 미적거리고 있음직한 어떠한 우려도,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안도하게 한다.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즐겨 보지 못한 함께 사는 시민들에 대한 우월감으로 인해서 생긴 완벽한 안도감을 아버지에게 느끼게 하는데;  최소한 그의 결혼식이 진행되었던 그날 이후에 스트렙시아데스의 정신이 지금처럼 항진된 적은 없었다. 그는 그의 오만hybris에 두려움 없이 탐닉한다. 지금이 아버지와 아들이 완벽한 화목함 속에 있는 유일한 장면이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하였는데도 지금까지는 그들의 기호나 취미가 언제나 광범위하게 달랐었는데; 소크라테스에 대해 완벽하게 화해하게 되는 것으로,페이딥피데스는 그의 아버지와도 완벽하게 화해하게 되었다.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자로 알려진 사람이 그의 아들이 생애 처음으로 아들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그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완벽한 화목도 틀을 잡아 주었다. 이 축복의 순간이 지속되기를!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위한 잔치를 벌릴 순간으로는 안성맞춤이다. 

 

잔치가 계속되는 동안 첫 채권자가 나타나서 스트렙시아데스를 부른다. 스트렙시아데스 가 밖으로 나온다. -그의 이름이 불렸는데; 페이딥피데스가 아닌 그가 채무자이다. 스트 렙시아데스가 받은 온건한 훈련으로도 상황을 처리하는데 충분 이상인 마당에, 최상으로 훈련된 페이딥피데스는 그의 잔치나 수업의 노고로부터 얻어 취하는 휴식을   방해 받아 서는 않되며, -페이딥피데스는 재판정에나 갈 때 쓰고- 그리고 스트렙시아데스 는 그를 여러 밤 잠 못 이루게 한 사람을 되치는 즐거움을 거부할 수 없다. 스트렙시아데스가 그의 채권자와 다투는 것은 잘 묘사될 수 없는데 법률적인 추론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필요도 없이 오직 오만함hybris만으로 그가 "꾀 주머니"에서 배웠다는 가장 무서운 사실을 공식 화 한다. 그의 채무자가 그에게 그가 빚을 갚겠다고 신들에게 걸고 맹세한 것을 상기시키 자, 스트렙시아데스는 신들에 걸고 한 맹세를 믿는 그의 단순함을 비웃고, 아는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에게 의무 따위는 없다면서, 그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명백하게 말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스트렙시아데스가 법적으로는 소크라테스에게 아무런 진 빚도 없으면서 지불했던 그 이유 때문에, 그는 그의 법적 채무를 그의 무지한 채권자들에게 지불하지 않는다. 첫 번째 채권자를 몰아낸 성공이 그를 겁이 없게 만들어 두 번째 채권자는 일차에 비하여 더욱 심한 불손함으로 대한다. 그가 두 번째 채권자를 처리한 것은 그 자체로도 놀랄 일인데, 왜냐하면 이 경우는 그가 아닌 페이딥피데스가 채무자이기 때문이다. 본디 땅이나 흙을 다루는 것 이외에는 모든 공부에 애시당초 완전 무관심했었던 스트렙시아데 스가 이제는 그의 땅 위의 결말을 위해 하늘과 바다의 지식을 몽땅 다 이용한다. 그의 이러한 악랄한 태도의 형성을 한동안에 소크라테스와 함께 찾아보았던 경우가 있었다. 이제 그는 그의 아들의 채권자에게 매번 비가 올 때 내리는 물은 항상 새 것인지 아니면 그전에 태양에 의하여 끌어 올려진 물과 같은 것인지 묻는다. -바꾸어 말하면 전체 물의 양이 늘어나는지를 묻는다.- 채권자는 알지도 못하고 또 상관하지도 않는데, 스트렙 시아데스의 원칙에 따라서 그는 그의 돈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잃는다. 아는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의무도 없다는 그의 원칙은 미친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들에 비해 적은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따른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원칙으로부터 나온다. 그 불쌍한 채권자는 스트렙시아데스에게 그에게 달린 이자라도 지불하라고 요구한다. 그가 그전의 질문에서 건드린 주제를 계속 건드리면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하는 절차임을 예시하는 반대심문을 통해, 강물이 유입된다 해서 바닷물이 늘어난다는 것은 부당할 것이므로, 시간이 늘어가는 덕분으로 돈이 늘어나야만 한다고 하는 것은 더욱 부당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채권자를 압박한다. 그는 두 번째 채권자에게 첫 번째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은 모욕을 주어 쫓아낸다. 그의 불손함이 늘어나고 있다는 인상은 그가 첫 번째 채권자에게 사용한 논쟁과 그런 가운데 그가 공공에 호소한 것은 신성모독인 반면에, 두 번째 채권자에게 사용한 논쟁과 그러한 가운데 공공에 호소하지 않은 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사실에 의해 명백하게 모순되는데; 그러나 첫 번째 논쟁에서 그는 그가 빚지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명시적으로 법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만 부인하지만, 두 번째의 논쟁에서는 그는 이자 받는 것을 허용하는 법을 공격하고 있다.

 

스트렙시아데스가 채권자들을 대하는 행실을 지켜본 뒤 '구름'은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무모해진 그 늙은이에 대한 엄중한 예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좋은 감지능력에 대하여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스트렙시아데스는 학생들 이외(104,824) 모두에게 어떤 것들을 비밀로 지켜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로부터 경고를 받았음이 틀림없지만, 이러한 경고는 확실히 필요한 만큼 충분한 힘이 실리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경고의 말들이, 천 명의 불리한 증언자가 증언하려 나서는데도 유리한 증언자는 한 명도 없는 경우라 해도, 페이딥피데스가 그 재판에서 이길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약속으로 쓸모없게 되었다. 그래서 스트렙시아데스는 하데스의 투구를 쓰고 누리는 보호보다 더 상급의 보호물을 하나 가졌다고 생각하도록 유도되고 만다. 무엇보다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는 하루살이들에 대한 거만한 태도는 소크라테스와 함께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전적인 경멸심으로 스트렙시아데스를 채웠을 것임에 틀림없는데; 그가 관객을 "돌들, 숫자, 양"이라 부를 때, 그가 그의 선생이 쓰는 단어들을 쓴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겠지만, 무모한 늙은이가 소크라테스를 망치려 한다는 것, 그리고 채권자들과의 장면을 생각하면 '구름'이 소크라테스와 결별하기에 지금이 최적의 시간이라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결별과 같은 일은 일절 하지 않는다. 이제 진정으로 그들은 스트렙시아데스의 부정직함이라거나 혹은 어쨌든 그의 그런 심한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고 그들은 어떤 불길한 일이 갑자기 그에게 닥칠 바로 그날에 대하여 예견한다. 관객들은 그들이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재빠른 처벌을 발표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그를 처벌할 것이라고 발표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서 그들은 어떤 불길한 일이 그 앞에 준비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럼에도 불길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곳에 대한 한 조짐을 가지고 있다. 스트렙시아데스의 원칙에 따라서,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 의무가 없다는 원칙은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은 더 적게 아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 의무가 없다라는 새로운 정리- 페이딥피데스의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의무를 취약하게 하는 재정리를 허용한다. 그 원칙이 '구름'으로 하여금 스트렙시아데스의 원칙에 바탕을 둔 부정직함에 대한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학생이 되라고 부채질하는 것으로 '구름'은 사술로 그의 부채들을 없애려는 그의 갈망을 더욱 부채질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그러한 원칙을 그에게 가르치지 않았으며; 그리고 게다가 그들은 스트렙시아데스가 단순히 무지하다고 부르는 사람들에 비교하면 훨씬 더 우수한 아는 사람들이다. '구름'은 스트렙시아데스의 채권자들에게 대한 행실 때문으로 재판에 의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도 알고 있듯이, 그들은 페이딥피데스가 그가 최근에 획득한 변론 기술로 누구라도 패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이딥피데스에게 진실이라 하는 것은 여전히 소크라테스에게는 더한 진실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법의 손길 바깥에 있다. 이제 유일하게 위험에 처한 사람은 스트렙시아데스이고, 그리고 그 위험의 원천은 그의 아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스트렙시아데스의 비명이 들리자, '구름'은 겨우 그들의 예견 내용을 발표한다. 그는 그 아들에게 얻어 터지고 있는 것이다. '구름'의 주의 깊은 예견이 현실화 되었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아들을 말려서 그를 도와 달라고 그의 이웃 사람을 부르기보다는 친척들을 부르는데; 그의 결혼으로, 그의 아들에 의해, 그리고 끝으로 소크라테스에 의해, 소원해져 있었던 그의 친척들에게 예전처럼 돌아간다. 이제서야 그는 분별심을 회복한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때렸는지 아닌지, 그 실내 폭행을 보지 못한 증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는 그의 아들에게 묻는데; 왜냐하면 실내 폭행은 범인의 자백이 없으면 실내 교습처럼 법정에서 범죄로 밝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페이딥피데스는 뻔뻔스럽게도 그 사실을 인정하는데; 극분한 아버지의 다음 단계는 그의 아들을 정식으로 법정에 고발하는 것이다(494-96).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와 '구름'이 단언했던 것 가운데 만일 어떤 진실이 있다면, 그리고 스트렙시아데스가 페이딥피데스의 법정 변론 능력에 대하여 믿는다면, 스트렙시아데스가 다음 단계를 밟는 것으로서는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가 그것을 준비한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동요했는지 보여 준다. 그가 바깥에 나가 도주하자 아버지 폭행은 중단되었고, 그래서 그는 법정으로 가는 가는 것이 별무소용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얼마 동안 그는 아들에게 야만스런 욕설을 퍼붓는데, 그것은 '불의의 변론'에게 '정의의 변론'이 퍼붓던 욕설을 연상하게 하고, 그리고 페이딥피데스는 조용하게 그리고 자진해서 '불의의 변론' 방식으로 욕설에 대응한다. 처음으로 친척들을 기억했었던 스트렙시아데스는 이제 처음으로 정의에 대해 기억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입에 발린 소리지만 최악은 지나고; 그에게 그렇게 빨리 닥친 불길한 일은 스스로 가라앉았다. 페이딥피데스는 그가 아버지를 정당하게 폭행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선언하며 공세적으로 돌아온다. 스트렙시아데스가 그의 증명을 들으면서 그에 대한 폭행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지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동시의 일이다: 그렇게도 이론적인 사람이 되었고, 아니 최소한 그렇게도 그의 아들의 기술을 칭송하는 사람으로 그 늙은이는 이제 이 업보를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 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수단을 다해 그는 그 증명을 들어야 한다. 페이딥피데스는 증명하는 방법이나 아니면 증명하는 근거로 두 가지 변론 중에 그가 좋아하는 것을 고르라고 요구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정의의 변론'과 '불의의 변론'이라 불리는 두 변론을 잊었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두 변론! 정말!" 하는 그의 외침에 페이딥피데스는 " 더 강한 것 아니면 더 약한 것" 하고 대답하는데; 물론 오로지 '불의의 변론' 방법이나 근거에 따라서 아버지 폭행의 정당성 증명을 할 수 있다는 결과에 아버지는 다시 홀려 든다. 따라서 페이딥피데스가 아버지 폭행의 정당성을 두 가지 변론 모두로 증명할 수 있다는 그 주장은 허튼 자랑이어서 틀림없이 기각되어야 하고; 페이딥피데스는 확실히 그의 제안을 즉각적으로 철회하여야만 한다. 그래도 페이딥피데스가 그의 아버지보다는 더 똑똑하고 더 나은 훈련을 받았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아마도 페이딥피데스는 그의 아버지가 따라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철회하겠다고 했거나; 아니면 그의 마음에 두었던 더 강한 그리고 더 약한 변론은 '정의의 변론'이나 '불의의 변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먼저 어떻게 한 사람이 어디에서나 아버지 폭행이 법에 어긋난다고 알려져서 있는 마당에, 그리고 '정의의 변론'이 법을 신성하다고 간주하는 마당에, 설마하니 '정의의 변론'에 기초하여 아버지 폭행을 정당화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정의의 변론'을 '불의의 변론'으로 전이를 통해서만이, 아니면 '불의의 변론'의 기원과 같은 의미인 '정의의 변론'의 자멸을 통해서만이, 페이딥피데스가 그의 단언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만일에 '정의의 변론'이 신들이 사람들에게 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신들 스스로에 의해 엄격하게 골라졌다면, 이것이 한 사람의 아버지를 때리거나 족쇄로 채우는 것의 정당성을 세우는 데는 사용될 수 없을 것이고(904-6);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는 "신들이 하라는 것을 하라"로부터 "신들이 한 짓을 하라"에 이르는 의문스러운 메타바시스를 만들어야만 한다. 무엇보다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에 '정의의 변론'과 '불의의 변론'으로 이루어진 쌍과는 또 다른 한 쌍의 변론이 틀림없이 있다. '불의의 변론'은 어떤 사람 자신의 성적인 즐거움에 무자격한 침잠의 정당화이고, 그러므로 이것은 소크라테스식 지극한 자제와 극기의 생활 태도를 정당화하는 변론이 아니다. 다음 번의 변론은 지금까지에 스트렙시아데스의 원칙이라고 불러 왔던 것 속에서 하나의 편파적인 표현을 찾는다: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자는 무지한 자에 대해 아무런 의무가 없지만 그러나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만이다. 달리 말하면, '불의의 변론'은 신들에 대한 이야기나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의 권장사항들을 그래서 특히 아버지 폭행의 정당성을 옳다고 내세우지만, 반면 페이딥피데스는 보다시피 아버지 폭행의 정당성을 "물리적" 논쟁으로 내세운다. "'더 강한 변론'과 '더 약한 변론'"은 "'정의의 변론'과 '불의의 변론'" 그리고 "'시적인 변론'과 '물리적인 변론'" 이 둘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구름'은 스트렙시아데스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변화를 겪었다. 이들 변론들의 친구는- 그들의 계산에 대해 말할 것도 없이- 더 이상 스트렙시아데스가 채권자들에게 한 짓의 결말로 생긴 불길한 일이라거나 아니면 그가 그의 아들의 손으로 고통을 받았다는 불길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아버지 폭행에 대한 토론이나 오히려 스트렙시아데스가 페이딥피데스의 증명에 감탄하는 대응에 대하여 더욱 듣고 싶어하는데; 그들은 아버지 폭행에 대하여 반대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마도, 이들 오케아노스의 딸들이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를 때린 것에 대하여 오래된 원한을 가진 탓인지, 스트렙시아데스를 두둔하는 편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스트렙시아데스를 도우려고 하지 않는데; 아마 그들은 비기술적인 본성에 대한 조언- 페이딥피데스를 소크라테스의 학원에 보내라는 것 같은 조언-을 주는 것으로만 도울(비를 내려 주거나 보류해 두는 것을 제외하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트렙시아데스는 페이딥피데스를 그가 뜻하는 방법으로 깨부수어야만 한다. 처음부터 그들은 스트렙시아데스가 그들에게(관객들에게 보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 생겼던 여신들이나 관객들이 볼 수 없었던 실내에서 일어났던 싸움으로 시작된 불화의 단초를 말해 주기를 바란다(1354-1361).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전대미문의 완벽한 화목으로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들 부자가 잔치를 여는 동안, 그는 그의 아들에게 리라를 가지고서 시모니데스의 노래 가운데 하나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고 스트렙시아데스가 '구름'에게 말한다. 페이딥피데스는 술을 마시면서 노래하는 구식 습관을 따르는 것을 그 즉시 거절했는데; 물론 말 그대로 누구도 술을 마시는 것과 노래하는 것을 동시에 모두 할 수 없다<주22>. 더우기 그는 시모니데스가 나쁜 시인이라 말한다. 여기에서 스트렙시아데스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아들에게 아이스퀼로스의 한 대목을 읊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다시 즉각적으로 페이딥피데스는 아이스퀼로스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들어냈다. 스트렙시아데스는 화가 더욱 더 올랐다. 옛날 시인들에 대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불일치가 자연스럽게 아버지 폭행에까지 그리고 아버지 폭행에 대한 불일치로까지 끌고 갔다- 오래된 것에 대한 존경과 나이 든 사람들과의 차이 사이의 관계는 이렇게나 가깝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그때까지는 그의 화를 참을 수 있었고, 그리고 어렵게 얻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화목을 지키기 위해 그는 페이딥피데스에게 좀 더 근래의 시인들의 것을 읊어 달라고 제안하는 데까지 갔다. 그리하여 술에 취한 페이딥피데스는 즉각적으로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남매 사이의 근친상간적 행위를 다룬 에우리피데스의 한 구절을 읊었다. 이것은 스트렙시아데스가 참아내기에는 너무나 심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아들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그 아들도 똑같이 응수했으며, 그리고는 마침내 그의 아버지를 때렸다. 부끄러움도 없는 가장 부정직한 것과 가장 뻔뻔한 모독도 군소리 없이 기꺼이 삼켜버리려 했었었던 스트렙시아데스가 근친상간은 지지하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금 하나가 어딘가에 그어져야만 한다. 그렇지만 페이딥피데스로 하여금 아버지를 때리도록 유도한 것은 반드시 근친상간에 대한 그 어떤 열의가 아니라, 단지 에우리피데스 예술을 칭송하지 못하는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분개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친상간과 아버지 폭행 사이에는 명백한 관계가 있는데; 이 두 범죄는 모두 가족을 파괴한다. 그렇다 해도 페이딥피데스의 행위로 인하여 화제는 이제 더 이상 근친상간이 아니고 아버지 폭행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이런 범죄에 대항하는 경우에 대해, 그가 페이딥피데스에게 부성애를(분명 모성애는 없었다) 주는, 그리고 그 아들의 불효한 행실이 쉽사리 둔갑되는, 아니면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장 감동적인 탄원이거나 서술로 둔갑되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보기들을 들어가며 강력한 용어들로 진술한다. 그렇지만 '구름'은 이 건이 종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의 증명이 강력할 경우에 아버지들이 어두운 미래와 대면하게 된다는 것을 그들이 인식하고 있다 해도 그들은 페이딥피데스의 아버지 폭행의 정당성에 대한 증명을 듣고 싶어 하는데; 애시당초에는 '구름'이 아버지 폭행에 반대하는 편견을 가졌다고 쳐도 지금 그들은 더 이상 가지지 않고 있다. 스트렙시아데스의 실내 불화에 대한 설명이 그들을 아버지들의 경우나 혹은 나이 든 사람들의 경우나 그리고 오래된 것 간의 관계를 실감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그들은 만약 아테네 도시가 새로운 신성한 것들을 채택한다면, 내내 오래된 것의 경우는 반드시 패퇴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약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페이딥피데스는 그에게 주어진, 처음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 그리고는 '구름'에 의해, 오래 전에 세워진 법들을 공격하는 기회에 대하여 완전히 기뻐한다. 그는 자신이 단지 발음도 제대로 못하던 일개 승마꾼이던 때를 경멸로 돌아다 본다. 기대와는 반대로 설사 그가 가족의 재산을 되돌렸다 해도 그는 결코 그의 예전 생활 방식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인데; 그는 승마에 관한 모든 취미를 잃고 말았다. 그가 새로이 취득한 기술과 능력에 대한 완벽한 만족으로 인하여, 그에게 억지로 소크라테스의 학원에 가도록 하여 지금의 그를 만들었던, 그래서 그에게 아버지를 때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일 수 있게 배우도록 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게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스트렙시아데스는 여전히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의 아들이 단지 승마꾼이었을 뿐이고, 그리고 그를 파산하도록 하였을 뿐이었던 행복했던 날들을 회한으로 뒤돌아 보는데; 건강한 신체가 건전한 가계부보다도 훨씬 중요하다. 처음으로 그는 페이딥피데스의 예전 생활 방식을 아쉬워한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로부터 되돌아 나오는 꿈에서는 여전히 멀리 있는데, 왜냐하면 결국은 '구름' 그들이 명백하게 말했듯이, 아버지 폭행이 부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의문으로 남아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만약 스트렙시아데스가 어렸을 때부터 몰랐었다면 그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어떤 것이 한 사람에게는 대단한 육체적 고통을 야기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틀림없이 배웠을 것이다. 페이딥피데스는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를 때렸는지를 물어 보는 것으로 그의 탄원을 시작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그를 위한 좋은 마음으로부터 그랬다고 대답하는데; 페이딥피데스는 그가 만약 그에 대한 좋은 마음으로 그의 아버지를 때렸다면, 그의 행위는 정당하다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는 진짜로 언제나 그의 아버지를 사랑하였고, 아직까지 사랑하는데, 그를 능력 있는 변론가가 되도록 강제한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 사랑은 그동안에도  강해져 오고 있었다. 전번의 추론은 진정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평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는데; 이러한 전제는 아버지와 아들 둘 모두 평등하게 자유로운 영혼들이라는 사실로 세워진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의 평등은 다른 관점에서의 불평등을 배제하지는 않는데; 지혜의 안에서는 아버지들이 그의 아이들보다 지위가 높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만약 지혜가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때릴 권리를 준다면, 소크라테스의 훈련 덕분으로 아버지(그 훈련을 끝내지 못했던)보다 더 현명한 다 큰 아들이 그의 현명하지도 않고 늙은 아버지를 때릴지도 모른다. 이 결론은 분명히 모든 곳에서 적용되고 있는 법과 모순된다. 그렇다면 누군가 법에 물어야 한다. 페이딥피데스는 당연하게 여기고, 스트렙시아데스는 반박하지 않으니, 모든 법은 인간에서부터 비롯되는데; 이것은 고대인들을 변론으로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던 사람들, 즉 예를 들어 법에 앞선 것이나 권위의 덕택으로 아버지 폭행을 용서함으로써 법을 집행하지 않은 사람들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 무엇보다도 페이딥피데스가 그의 또래들을 설득하여 아버지 폭행을 허용하는 신법을 제정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신법과 구법이 둘 다 모두 같은 지위를 가진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었는데, 양쪽은 둘 다 모두 단지 설득이나, 합의나, 아니면 관례에 의해 만들어진 법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경우이다: 아버지 폭행은 수탉들에게나 다른 모든 짐승들에게 흔한 일이고, 즉 이것은 오직 본성에 따른 것인데; 왜냐하면 짐승들은 어떠한 관습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그것이 페이딥피데스로 하여금 여러 면에서, 예를 들면, 배설물을 먹고 그리고 횃대 위에서 잠자는 것처럼 수탉을 모방하도록 할 것이라는 근거로 이런 추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페이딥피데스는 이런 것들은 아버지 폭행과 같은 종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도 그것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용히 대답한다. 그는 심지어 왜 그것들이 아버지 폭행과 어떻게 다른지를 여러모로 보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페이딥피데스가 모든 면에서 사람의 모델로서 수탉이나 다른 새들을 내세우지 않았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짐승들이 배설물을 먹는 것이 아니며, 횃대에 올라 잠자는 것도 아니다. 페이딥피데스가 무엇이냐와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무엇과의 차이를 구별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는 선생의 말로 맹세하지 않는다. 스트렙시아데스에게는 아직 한 가지 논쟁이 남아 있다: 내가 맞다면 너는 너의 아들을 때릴 것인데; 반면에 네가 맞다면 너의 아들이 너를 때릴 것이다. 페이딥피데스는 그는 아들을 갖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꾀 주머니" 안에서는 소크라테스도 또 다른 사람들도 아이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리고 이래서 "꾀 주머니" 집단은 자손의 번성이 없는 모두가 남자인 집단처럼 보이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철저하게 논박당했다. 그런지도 모르고 아는 사람들의 최고의 권리를 받아들이도록 그가 배웠을 때, 즉 페이딥피데스가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는 아버지 폭행의 권리를 부여했었다. 관객들 속에 있는 그의 연배들에게 말을 건네며, 그는 대범하게, 그의 아들이 만족스럽게도 아버지들이 부당한 것들을 행할 경우에, 아들들은 정당하게 그들의 아버지를 벌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암묵적으로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는 짐승과 같은 짓과 아버지 폭행 간의 차이를 인정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화목이 회복되었다. 그의 아들에게 얻어 맞은 것이 스트렙시아데스에게 불길한 일인 것도 멈추었고; 그는 만일에 어떤 것들이 적절하게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만일에 페이딥피데스가 적절하게, 즉 불의의 행위에 대하여 그의 아버지를 때린다면 '구름'의 무서운 예언은 무효가 되어 버린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에우리피데스를 칭송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어 맞았는데; 이제에는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칭찬하지 않은 잘못을 범했다고 수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칭찬하지 못한 것은 에우리피데스가 근친상간을 비난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그는 근친상간을 수긍하는가, 아니면 그는 단지 얻어 맞은 고통과 그리고 회복된 화목으로 얻은 기쁨 때문에 아버지 폭행에까지 이르는 이 불화를 일으키는 쟁점을 까먹어 버렸는가? 아니면 페이딥피데스에 의해 진전된 논거로 아버지 폭행의 정당성을 수긍함으로써, 이미 근친상간의 정당성을 수긍했다고 추정하여야만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딥피데스는 만족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그로 하여금 한 단계 더 나아가게 충동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그 낌새로 경고를 받는다. 페이딥피데스는 그가 말하려는 것이 아마도 그의 아버지를 불쾌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를 안도시킨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이런 말을 듣고 의아스럽다. 페이딥피데스는 그의 어머니도 역시 때릴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이 행위에 의한 완전한 징벌에 대한 전망으로 즐거워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렇지만 그가 낭비벽 강한 아들 때문에 돈을 갚지 못하고 있는 채권자에 대한 분노로 고생했으며, 그래서 소크라테스식 기술이라는 최상의 혜택을- 알려진대로 세상의 모든 말들의 가치를 뛰어 넘는- 그에게 갖도록 해 준 그 아버지를 위하여 했다는 것 속에는 충격적인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 그 아버지의 온갖 고통 가운데 첫 번째 원인이던 그녀는 스트렙시아데스가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어도 그녀의 철없는 귀염둥이의 손에 의하여, 그것으로 그녀의 무한한 인내력의 남편을 괴롭혀 왔었던 주된 도구에 의하여, 응분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효도의 완성으로 보이는 이것이 스트렙시아데스에게는 역겨울 뿐이다. 즐겁기는 커녕 그 어느 때에도 결코 받은 적이 없었던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 폭행의 정당성을 인정했던 그가 이제 절대 어머니 폭행의 정당성을 부정한다. 그는 이런 추론이 일관성의 부족으로 보인다는 것을 안다: 아버지 폭행으로 이끌었던 근친상간의 쟁점이 스스로 거듭 주장되는데; 만일 어떤 아들이 그의 어머니를 합법적으로 때릴 수가 있다면, 왜 그의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저지르는 것은 그에게 비합법적인 것이 되어야만 하는가? 결국은 페이딥피데스가 아버지 폭행의 권리를 확립하고, 이른바 짐승들의 범우주적인 행태로부터 취한 논쟁에 의하여, 약한 변론(1444-5)은 분명하게 아들과 어머니 사이의 근친상간 역시도 정당화시킨다. 스트렙시아데스와 그의 아내 사이에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파산의 나락으로 그를 끌고 갔을 때를 제외하면, 근친상간이 언제나 그의 가장 사랑스러웠던 것의 바탕을 파괴한다: 그의 아들로서 그리고 오직 한 아들 뿐인 그의 아들과의 관계<주23> 말이다. 페이딥피데스가 그의 아버지의 감정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닳아 빠졌다. 늘 그렇듯이 그의 순발력으로 그는 약한 변론의 수법으로 어머니 폭행의 정당성을 증명한다고 제안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옹호하는 것을 듣는 것조차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벼랑의 끝에 이렇게 가까이 온 다음에서야 그는 되돌아 간다. 이제 그는 처음으로 소크라테스식 훈련의 나쁜 점을 느끼지만, 소크라테스가 그의 교습을 강요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탓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처음은 스스로 그를 위해, 그리고는 그의 아들을 위해 찾았으므로; 그가 탓할 곳이라고는 오직 그 자신이며; 페이딥피데스가 아버지 폭행의 정당성을 믿는 것을 배웠던 사실도 그를 통해서였기 때문에, 그는 맞아서 싸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와 '구름'을 접했었던 스트렙시아데스는 더 이상 자기 탓만 하고 물러날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그가 이러한 들을 수 없는 대화를 그 자신과 나누었다고 추측해 봄직하다: " 한번 생각해 보자. 내가 소크라테스식 훈련을 페이딥피데스를 위하여 구했었나? 물론 아니다. '구름'이 제안했다." 오직 그의 아들이 학생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소크라테스의 학생이 되려 노력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없는 '구름'은 그를 그 자신에게로 도로 던진다: 너는 탓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 네가 가진 부정직함 말이다. 이것은 너무나 진실이지만,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고 그가 상기시키는 것과 같이, 두 배나 무지한 스트렙시아데스에게 그의 사악한 계획을 위하여 온갖 격려를 보냈던 '구름'으로부터 나오는 최선의 인자함은 아니다.  '구름은 그에게 사악한 행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도록 그를 비참함 속에 던지는 때까지 격려하는 것은 그들의 일상이라고 신성하게 대답한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사악한 것들을 통한 '구름'의 절차는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구름'은 거부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악함은 정의를 수행하는 것에 있으며, 반면에 스트렙시아데스의 사악함은 불의를 수행하는 것에 있는데, 그들은 어떤 면에서 스트렙시아데스를 모방하면서 그들의 본성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겨우 그가 그의 채권자들의 돈을 사취할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되었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채권자를 사취한다는 것이 그렇게나 괴물 같은 잘못인가? 한 사람이 자기 가까운 친척도 아닌 채권자를 사취한다고 해서 그가 가족의 기초를 파괴하는가? 신들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의 채권자를 사취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이 있지 않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약간의 정신 있는 사람이 자기가 가진 마지막 동전까지 잃게 된- 왜냐하면 스트렙시아데스가 페이딥피데스의 기술을 쓴다는 온갖 생각을 포기했다는 것이 떠오르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치욕을 탓할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라는 기분으로 걸어 다닐 수가 있겠는가? 제대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이후를 제외하고 그런 모욕을 받은 채권자는 다시 없었던 것처럼 그가 모욕했던 채권자들의 승리만을 생각해 보라. '구름'이 오직 신들에 대한 두려움만이 헤아릴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스트렙시아데스가 채권자들 사취의 계획에 책임이 있었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신들을 두려워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고 그에게 말하기 전까지는, 제우스로 인하여, 신들이 두렵지 않다는 생각은 결코 그의 머리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스트렙시아데스가 자신에게 탓해야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죄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카이레폰은 중대한 사안들에 대해서 그를 속였었으며; 그들이 그와 그의 아들을- 죄 없이 산다는 소리를 듣는 가족을- 가장 괴물 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하여, 가장 괴물스러운 범죄의 벼랑으로 데리고 왔는데, 누가 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근친상간 금지에 대한 유일무이의 견실한 지지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가? 따라서 소크라테스와 카이레폰은 파괴되어야만 한다. '구름'의 민감한 제의가 없었더라면 스트렙시아데스가 그의 부채를 지불했을 것이고, 물론 여전히 그가 빠져 나왔던 것보다 더 거대한 무명 속으로 끌어 들여졌을 것인데; 소크라테스에게 페이딥피데스를 보내라고 그에게 조언한 바로 그 '구름'의 제안이 소크라테스를 파괴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그를 꼬득인다.

 

스트렙시아데스의 경건과 정의로의 회기가 합법으로의 회기는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의 손으로 소크라테스를 처벌하는 것을 택한다. 그는 이것으로 비난당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어떤 법도 이 변론수사학 대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스트렙시아데스는 페이딥피데스가 그에게 와서 그의 토벌에 함께 참가할 것이라 당연하게 여기는데; 왜냐하면 '구름'의 말들이 그에게서 가졌던 효과와 똑같이 그의 아들에게서도 가졌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고, 정확하게 그 이유는 '구름'이 지금까지 그들이 신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데에 있어 참피온들이라는 아주 작은 신호도 주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이 그에게 했던 온갖 끔직스런 행위와 말들은 그러므로 용서되었고; 그는 다시 그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며; 단지 유일한 범죄자는 소크라테스 뿐이다. 그러나 뼛속으로 조상들의 제우스를 부정하는 것이 뜻하는 바를 느꼈던 사람과 그것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과의 차이, 아니면 달리 말해서 소크라테스식 교습이 철회되었던 사람과 소크라테스식 교습이 완성되었던 사람과의 차이를 여기서 본다. 페이딥피데스는 그의 선생을 나쁘다고 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제우스나 다른 신들의 부재에 대한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그는 '구름'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 첫 번째 근거라고 알려진 것들이, 신들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고풍의 믿음에 그의 아버지가 다시 빠져든 것을 경멸할 뿐인데; 그의 아버지는 제우스가 존재조차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결정적인 경우 속에서, 모든 것을 너무나 문자 그대로만 이해했던 늙은이는 한 가지 주장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스트렙시아데스는 더 이상 페이딥피데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에게 그가 정신 나갔었던 것에 대하여 그를 용서하라고 부탁하고, 그리고 그 아들에게 조언하면서 그의 아들의 용서를 받아 그는 헤르메스에게로 돌아간다. 그의 아들이 그의 토벌에 가담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그는 소크라테스를 재판정으로 데려와야 하는지 아닌지가 더 이상 확신이 서지 않는다. 신의 대답은 들리지도 않지만 스트렙시아데스는 그의 법적 행동에 반대하는, (신은 아마도 법이 소크라테스를 따라 잡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듯하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죽이겠다는 그의 계획에 반대하는 두 가지 조언을 듣는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꾀 주머니"를 반드시 태워 없애야 한다. 이 조언의 공평함은 이것이 높은 곳에서 온 것이라는 보증은 아닐 것이지만, 그러나 틀림없이 그것과 일치하는데; 헤르메스는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으로부터 공격당할 수는 없다. 스트렙시아데스는 그 즉시에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이 처벌을 집행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놀란 비명 소리를 듣고, 그는 소크라테스가 스트렙시아데스로부터 금전적 이득을 취하지 않았던 것을 함축적으로 들어내는 야유로 대답하지만; 신중하게 말한다면,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신들에 반대하고 그리고 달에 대하여도 불경스럽게 계속 묻는 그들의 오만hybris 때문에 응당하게 받아야 할 것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스트렙시아데스가 헤르메스로부터 듣는 것에 대하여 생겼던 어떤 의심도 그 자체로 헤르메스의 존재에 맡겨 버리자, 신의 출현으로 사라지고 만다. 많은 이유로 그러나 무엇보다 신들에 대해 잘못했기 때문에 스트렙시아데스와 그의 하인들이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을 아프게 때리도록 (그렇지만 죽이라는 것은 아니다) 격려하는 것으로써 그는 스트렙시아데스의 토벌에 합류한다. 제우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크라테스의 대담한 주장은 행동ad oculos으로 논박되었다: 소크라테스조차도 신들을 두려워 하는 것을 반드시 배웠어야 했는데, 즉 그 역시 '구름'의 알려진 목적을 달성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말을 향하여 그들의 이중적인 자세를 유지하는데;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처벌을 반대하지도 않지만, 역시 그들은 그것에 참여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토벌은 "구름"의 수상을 보장하지 않을 불의의 심판들 때문에 유보된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신성모독을 철회한다는 것도 듣지 못한다.

 

"구름"'은 스트렙시아데스의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결말난다: 어떤 신의 도움을 받아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신들의 정당함을 밝힌다. 한편으로 그의 빚을 지워 버리려던 그의 모든 노력들이 허사가 되었고,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을 잃는다. 그렇지만 스트렙시아데스는 그의 승리와 그의 패배 간에 서로 균형을 이루었으며, "구름"이 소크라테스에게 나쁘게 결말이 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의 생활 방식의 가시적 상징인 "꾀 주머니"는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성공에 대한 천한 경배자가 아니라면, (그 경우라면 그가 그의 "구름"에 대해 자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불행한 결말로부터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무턱대고 비난했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없다. 이런 추론은 정말로 소크라테스를 망친 사람이 칭찬할 가치가 거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로는 논박되지 않는다: 정의로운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망치려는 생각을 결코 가지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소크라테스와는 별로 관련이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경건심과 정의감의 결핍에 대한 지식을 결코 얻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결코 무턱대고 비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구름'의 현상으로 성립되는데; '구름'이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를 연결한다. 소크라테스는 '구름'이 좋아하는 사람이고; 아리스토파네스는 그 자신이 '구름'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는 '구름'의 대장으로서 이야기를 한다. 만약에 다른 방법이라면 '구름'은 소크라테스의 신성들이며,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신성들인데; 그들이 더욱 아리스토파네스 쪽의 신성들인 것은 탄식하는 신들이 카르키노스의 신성들이기 때문이다(1261).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 그 두 사람은 임시로 말한다면 모방하는 기술의 대가들이며; 그들은 비록 다른 아종이지만 같은 종에 속한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의 차이점은, 왜 결국 '구름'이 소크라테스에 반대하여 돌아서는가를 설명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불인정은 의심해 보건데 '구름'의 그에 대한 불인정에까지, 더 멀리는 아니고, 간다. '구름'은 정말로 소크라테스와 처음서부터 정당한, 만일 사악하다면, 시합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의 사악한 행위를 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그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격려하였는데; 그들은 그랬을 것이지만, 신들을 대신하여 그랬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 주장은 어떠한 사실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모든 신들의 기원인 오케아노스의 딸들이라고, 즉 모든 신들이 속하는 같은 가족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이 주장은 잘 알다시피 오케아노스의 후손이 될 수가 없는 에테르의 딸들이라는 그들의 주장과는 모순이다. 그들의 지향하는 점은 아테네시의 경배를 받는 것이다. 그들은 아테네 사람들이 다른 신들에 대해 경배하는 것을 멈추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소크라테스와 굉장히 다르다. 연극 속에서 행해진 것이나 말해진 것 중 어느 것도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의 소망과 함께 한다는 것으로, 그리고 그가 이런 점에서 기존 신성에 대한 경배에 대해 갖는 소크라테스의 불만과 같이 한다는 것으로 추정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전통의 범신전pantheon은 반드시 더욱 커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마도 '구름'의 모든 행동이 그들의 지향점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에 아테네에서 그들의 유일한 경배자는 소크라테스 뿐인데; 그래서 그들은 그를 좋아하고, 부드러운 웃음으로 대한다: 그가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써 그들에게 가장 나쁜 것을 말할 때, 비록 그들이 다른 신들의 존재를 알지만, 아니 최소한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그것에 개의하지 않는데; 또 다른 중요한 측면에서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과격성을 피해 간다. 그들이 아테네시로부터 신으로 인정 받을 전망은 매우 희박한데; 소크라테스는 그 추종자들과의 작은 모임을 벗어나서는 아테네에서 영향력이 없다. 그의 모임을 벗어나서는 '구름'이 넓은 경배를 받을 첫 번째 기회가 스트렙시아데스의 등장으로 떠오르는데, 그는 여러 계층 사이의 사람이어서; '구름'은 열망으로 그 기회를 잡는다. 만약 스트렙시아데스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그들의 명성은 그의 명성처럼 퍼져 나갔을 것이다. 아무도 그러한 경우에 그들의 야망이 그들이 그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부드럽게 남아 있었을지 아니었을지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트렙시아데스의 어리석음과 그리고 특히 수다스러움이 모든 것과 타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반드시 그의 계획으로부터 그들을 떼어 내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그를 조용히 버렸더라면, 그들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었을 것인데; 그들은 스트렙시아데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장엄한 결말이 필요하고; 스트렙시아데스는 그를 진실로 정의롭고 경건하게 했고, 그리고 그로 하여금 신들의 정당성을 증명하게 이끌었던 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기꺼이 들어 줄 모든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하는데 쓰일 수 있다: 그의 파산은 그가 떠벌릴 수 있는 높은 관계로 저명하게 덧칠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신성을 아테네에 소개한 이후, 그의 시범이 진행될 때의 태도 때문에 그가 얼마나 이치에 닿지 않으며, 변호의 여지가 없는가를 알고는 그들은 그를 버리고 만다. 지금에서는 이런 다재다능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단지 다른 신들의 경배에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소개하여야만 한다. "구름"이 소크라테스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동안에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여신들을 최대한으로 띄어 올린다. '구름'의 시각에서는 "구름"의 결말은 불행하지가 않다. 만약에 이 구절에서의 어떤 관찰과 전번의 관찰 사이에 틀림없는 모순이 있다면, 결국은 자기 모순 덩어리인 '구름' 그 자체를 추적해 감으로써 누구나 쉽게 풀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구름'을 참고하지 말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판을 파악하라고 조언할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이 행한 마지막 행동은 스트렙시아데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불만을 전제로 한다. 스트렙시아데스의 결점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그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불만에는 한 가지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가족에 대한 그의 염려 때문이다. 가족은 도시의 한 부분이 아니고서는 안전할 수도 번성할 수도 없는데; 말하자면 가족은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로 도시 속에서 성장한다. 이러한 금지는 그것의 합리성을 가족의 (아니면 도시의) 필요에서 빌려 온 것이고; 그것은 그 힘이나 아니면 성스러움을 신성한 제재에서 빌린다. 스트렙시아데스는 맹세 때문에 신성한 제재로써 거부당한 데 대한 불만이 없는데; 그와 반대로 그는 그 거부를 환영했다. 그를 그의 채권자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똑같은 생각이 근친상간을 합법적으로 하는 것을 볼 때만, 유독 그는 경건심과 정의감으로 돌아간다. 달리 말하면 그는 언제나 도시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이익과 상충할 때는 도시의 법을 위배하는 것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소크라테스식 교습으로 인해 그는 모든 법을 거의 무시하게 되었고; 결국 그에 관한 한 누구라도 어떤 법을 위반하는 것은 도시를 파괴하는 것이란 말은 거짓이다. 스트렙시아데스의 가족에 대한 염려는 그의 도시에 대한 염려의 뿌리이고, 그러므로 신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반면에 소크리테스는 전적으로 도시거나 가족에 대해 무관심한데; 이런 면에서 그는 불의의 변론과 일치한다. 그는 무엇보다 높이 떠 있는 것들에 대한 지식에 관심이 있고, 그 다음에 변론의 기술에 있다. 그의 관심은 가족과는 다른 굉장한 결집을 요청하는데, 그 결집은 그의 동료들이거나 학생들이다. 그들은 자족하는데; 그들끼리 살며, 공부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밥도 같이 먹고; 모든 하루살이 같은 것들을 깔보면서, 자제력과 극기심을 최고위의 경지에까지 실행하고, 그들은 공산주의 사회를 형성한다. 그들은 외부인들에 대한 의무를 알지 못하며; 그들은 오로지 아는 사람들의 권리만 인정한다<주24>.  소크라테스는 그의 작은 사회가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좀도둑질이나 선물을 받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두가 남자인 사회이므로 일반 사람들로부터, 즉 이미 다른 무식쟁이들과 연관을 맺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의 보충이 반드시 필요하다<주25>. 그것은 친구들의 사회이고. 그래서 에로스가 없는 사회이다. 만약 소크라테스나 그의 학생들이 참나무나 바위로부터 가지 친 것들이었다면 그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외부 지원의 필요는 그리고 수입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 모든 하루살이를 경멸했슴에도 불구하고, 스트렙시아데스 같은 하루살이를 환영하도록 그를 꼬신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의 도시에 대한 의존도는 깨닫지 못한다. '정의의 변론'에는 '불의의 변론'이 대면하지 않는 단 한 가지 논점이 있다: '정의의 변론'은 그의 반대자에게, 도시가 그를 먹여 살린다고 말한다. 똑같은 비난을 도시에 대한 그 책임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에게 정당하게 가져 올 수 있다. 그는 순전한 이론가의 결점을 가지고 있는데<주26>; 그는 자기 발전의 동기phronesis가 부족하고; 그 자신의 행위에 대한 조건이나 배경을 잘 보여 주지 않았으며; 그는 자기 인식이 부족하다(cf.842). 그의 자기 발전 동기phronesis 부족 때문에 그는 인생을 적절하게 모방할 수 없는데; 그는 무우사의 반대자이다<주27>. 이런 신중함의 결여는 그의 전체적인 스트렙시아데스로 인한 일들을 관리하는 것에서 그대로 나타나는데; 이 본능의 학생은 그것의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면에서 본능을 적절하게 고려하지 못한다: 사람들 간의 자연스런 차이를 그는 실제로 스트렙시아데스에게 '구름'에 대한 경배를 통해 감동을 주는 데 성공하는데; 그는 결코 '구름'의 공적인 사제가(359) 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연설의 기술에 정통한 것에 감사하는데, 그는 진짜로 법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거나, 혹은 변론으로서의 법은 자기 마음대로이다. 그에게는 신성한 것이 하나도 없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의 로고스와 대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고, 그러나 그는 가족의 그래서 도시의 바탕이기도 한 지극한 힘alogon의 능력을 잊고 있고; 그는 그 힘의, 상위의 그 힘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거나, 혹은 그 힘이 지극한 이성ultima ratio, 지극한 도시의 로고스라는 것을 잊고 있다. 이 힘에 관해서는 도시의 우월성 그 자체라는 사실 때문에, 그뿐만 아니라 우월성의 토대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보다 가족의 구성원이고 아는 사람들 집단의 구성원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변론으로 진술될 수 있다. 그 변론은 탁월한 정의의 변론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연극에서 등장인물로 나오는 '정의의 변론'은 정당하게 '불의의 변론'에게 패배한다:  진짜 정의의 변론은 "구름"이다. 앞 부분의 정의의 변론은 옛 견해들이고; 진짜 '정의의 변론'은 사람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기초로 한다. 진짜 '정의의 변론' 역시 인간의 힘을 쓰지 않고는 효과가 없으나, 그러나 그것은 그 힘을 움직이게 한다- 소크라테스의 신념이 도시가 아니라 그의 "꾀 주머니"를 파괴하고, 아니면 틀림없이 소크라테스 자신을 파괴한다. 그는 어쩌면 그가 창조했던 그러나 파악하지 않은 "'구름'"이라는 것의 노리개이다. 

 

만일 페이딥피데스가  그의 아버지에게 아버지 폭행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만족했 었더라면, 그리고 어머니 폭행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까지 가지 않았었더라면, 소크라 테스의 몰락은 피해졌었을런지도 모르는데; 바꾸어 말해서 만일 그가 보통의 조심성으로 행동했었더라면 소크라테스의 몰락은 면하였을 것인데, 그러나 그가 본래 가졌던 그러한 조심성은 소크라테스식 훈련으로 제거되었다. 그럼에도 경솔함이나 광적인 것의 종류는 무한하기 때문에, 그의 행실에 대한 더 많은 탐구가 필요하다. 본래 그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강력한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최소한 두 변론들 간의 논쟁이 있기 전까지는 이 편견이 약해지지 않았었다. 그가 겪었던 완전한 변화는 -그의 소크라테스에 의한 소크라테스로의 변환은- 겨우 실내교습 동안에 일어났다. 그래서 그의 변화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 그의 이왕의 생각들에 반하여 소크라테스가 사용하였던 논리들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 논리들은 소크라테스가 스트렙시아데스의 이왕의 생각들에 반하여 사용했던 것들과 똑같지가 않았다(cf.478-80). 예를 들면, 페이딥피데스는 '구름'에 대한 경배나 아니면 그들의 신성에 대한 믿음을 솔선했었다는 흔적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신들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그리고 법을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을 뿐인데; 그의 교습은 이런 점에서 그의 아버지의 교습보다 더욱 철저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아버지는 아버지 폭행이나 근친상간이 본성에 따른 정당함이라는 것 같은 것은 배우지 않았었다. 페이딥피데스는 그가 승마를 통해 얻고자 기대했던 것을 연설의 기술로 더 낫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웠다. 소크라테스가 페이딥피데스를 스트렙시아데스보다 다르게 다루었던 것은 결코 오로지 그가 마음 쓰는 것이 그의 어버지보다 나아서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 사이에는 자제력과 극기심에 대한 동류의식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와 페이딥피데스 사이에는 전적으로 다른 측면의 동류의식이 있었는데; 페이딥피데스는 승마에 미쳐서 그의 가족의 재산을 망쳤고, 소크라테스는 높이 떠 있는 것들에 대해 연구를 하느라 거지 신세이다. 그렇지만 만일 먼저 소크라테스가 그의 승마술 솜씨나 혹은  승마술 같은 매력으로 -그의 매력은 페이딥피데스로 하여금 그의 나머지 생애에서 승마를 역겨워하면서, 그리고 그를 연설에 대한 헌신적인 애인으로 개조하는 데 대단하고 충분한 매력으로- 페이딥피데스의 그에 대한 깊은 혐오를 극복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었더라면 가장 강력한 혹은 가장 적합한 논리도 페이딥피데스에게는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페이딥피데스 개조는 매우 놀라운 승리이다. 이 승리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패배에 대해 웃는 사람들에게는 가려진다. 한번만 이 승리를 주목했었다면, 승리가 대단한지 아니면 패배가 대단한지가 궁금할 것임에 틀림없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공"을 경배하지 않아서, 이 때문에 페이딥피데스가 스트렙시아데스보다 더 나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것의 함의를 반드시 숙고해야만 할 것이다.

 

페이딥피데스에 대한 실내교습을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하지 못해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매력을 소개하지 못했다. 그는 그의 희극을 희극다운 것을 망치지 않고서는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는 호메로스가 헬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듯이 소크라테스의 매력을 오로지 그 효과로만 보여줄 수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희극의 정수나 혹은 한계를 고려하면서 반드시 그 한계를 뛰어 넘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자제력과 극기심을 어떻게 소개했는가를 기억해 보라. 그와 같이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 소개도 그를 '인간이란 수없는 벼룩들이 설치는 판에서 잠을 자거나 집중할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르는 무식쟁이로 보여준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플라톤과 똑같은 현상에 대해 보여준다. 마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자제력을 소개하기 위하여 소크라테스는 술에 취하지도 않고, 벼룩에게 물려도 괜찮으며, 알키비아데스의 꽃다운 젊음을 아버지처럼 대하는 것을 더 보태는 것으로 소크라테스의 자제력 소개를 확대해야만 하는 것처럼, 같은 것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소개는 더 높은 주문의 유사한 보완으로 확대해야만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확실한 이차원적 성격의 희극은 하나의 변성 희극 성격의 삼차원적인 것으로 변환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변환된다 하여도 이런 변성 희극이 곧 비극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는 사건들의 순서가 일련의 가장 우스운 공중제비나 또 다른 종류들로 첫 눈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확실한 이차원 성격이라 말하는 것의 한 부분이다. 하나하나의 일과 그 일들의 순서에 대해 생각하며 이차원성을 뛰어넘는다. 벼룩을 소크라테스가 가진 높은 경지의 자제력과 극기심의 희극적인 똑같은 보기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희극적 동치물들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매력에 대한 희극적 동치물은 하나도 없는데;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매력을 소개할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를 희극의 소재로 만드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그의 모습, 그의 태도, 그리고 그의 생활 방식에서 들어나는 이런 차이들이 아니라도, 명백한 것으로, 즉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그만의 우월성으로도 그가 나머지 모든 사람들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인데; 더 구체적으로 말해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의 일이 가능하게 한 신중함의 결여 때문에 희극의 소재이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바보와 섞이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헤겔의 말이 있는데; 이런 선호에 대해 헤겔은 그 사람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으로 재치있게 설명하였다. 확실히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를 이해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를 그가 있는 그대로 본다.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의 관계를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소개한 수 많은 관계들과 똑같은 희극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수 있을런지 모른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와 그의 학생들 사이의 어떤 적절한 교제는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할 것인데; 학원 안에서의 관계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는 그다지 희극적으로 소개할 만한 것이 아니다. 이 자체로도 왜 그가 소크라테스의 페이딥피데스 교습에 대한 언급은 없으면서도 그의 스트렙시아데스 교습은 많은 부분을 소개하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정수 혹은 한계는 페이딥피데스가 아들과 어머니 사이의 근친상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왜 허용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런지도 모른다: 아버지 폭행이 우스개감인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렇지 않은 범죄가 있다. 그러나 정의로운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의도하는 사람이 고려하지 말아야 하는 범죄란 없다. 투키디데스가 한 군사 연대기 작가로서(같은 여름, Y장군 휘하의 X사람들은....) 가능한 한 가까이 두려한 표현 방식에다 그 자신을 묶은 것처럼, 아리스토파네스도 새로운 개념으로 가득차고, 비범하게 기지를 내보이며, 그리고 힘든 일을 강요하는 군중을 만족시키는 한 광대극 연출가 그리고 작가로서 가능한 한 가까이 두려고 한 표현 방식에 묶인다.

 

다시 페이딥피데스에게 돌아가서, 무엇이 그에게 잔치 동안이나 그후에 그의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서와 같은 그런 태도를 취하게 충동하는가? 그는 언제나 그의 아버지를 사랑했으나 그 사랑은 그가 그의 어머니 쪽으로부터 물려받았던 성향과 충돌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성향들로부터 그를 자유스럽게 하였는데; 소크라테스가 그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의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것은 그 아들이나 그의 아버지 모두가 전적으로 새롭게 겪는 경험이다. 그리하여 그 아들은 그 자신과 그의 아버지 사이의 화목이 완성된 것이 아닌 것을 깨닫고; 그는 완성시키기를 원한다. 자식 세대의 차이점이라는 구식 사고의 마지막 흔적들로부터의 탈출로 그는 현명하지 않은 그의 아버지보다 단순히 더 현명한 그 자신을 보고; 그는 그를 그 자신의 수준을 높히려고 애쓰는 어린아이로 취급하며; 그는 부자 관계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관계나 아니면 진짜 친구 관계로 변환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마치 그의 아버지가 소크라테스에게보다는 그에게 더 붙어 있듯이, 그는 소크라테스에게보다는 그의 아버지에게 더욱 붙어 있다. 그의 아버지의 고집불통이 그의 노력을 갑자기 중단시킨다. 그는 소크라테스에 반하는 행동에 합류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가 소크라테스를 불쾌하게 할 그 어떤 짓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그를 활짝 받아들였다는 가능성들로 사로잡혔다. 한편으로는 그가 소크라테스를 도우러 갈 생각 역시 하지 않는데; 소크라테스에게 닿은 끈이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추종자가 아니며; 그는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소크라테스 방식의 지극한 자제심이나 극기력에까지는 전환되지 못했다. 그는 소크라테스로부터 그가 승마로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연설의 기술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그의 결말을 소크라테스식 결말로 바꾸어 놓는 것을 배우지는 못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매력에 의하여 단지 '불의의 변론'이 추천한 생활 방식으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를 향한 최후의 행위는- 그의 소크라테스를 해치지도 도우지도 않는 행위는- 이런 '구름'과 닮아 있고,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이런 아리스토파네스와 닮아 있다. 역시 소크라테스에 의해 매료되고 교습되었을 그는, 역시 소크라테스식 교육의 한 부분만을 받아들인 그는, 역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적 등치물인가? 

 

이 질문은 페이딥피데스가 오이디푸스의 희극적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거의 똑같은 권리를 근거로 해서는 해소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리스토파네스가 신들에 관해 그의 소크라테스와 일치하였었다고 추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따르면 제우스는 존재조차 하지 않으며,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바로 그 대답이 되는 질문에 봉착하지 않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스트렙시아데스가 바로 그에 의해서 소개된다는 사실이 아리스토파네스 그 자신이 그것에 봉착하였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질문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어떤 다른 희극에서도 "구름" 속에서 제기된 것만큼은 분명하게 제기되지 않는다. "구름"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가장 현명한" 희극이다. 달리 말해 단호하다라는 면에서 그의 소크라테스와 견줄 만한 아리스토파네스의 등장인물은 아무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구름"에서는 신들 대한 질문에, 이름하여, 가족과 도시, 즐거움과 정의, 본성과 관습, 오래된 것과 새 것, 무우사들, 그리고 아버지 폭행 등등으로 줄줄이 연결된 것과 같이, 그의 모든 다른 희극들도 최소한 몇 개의 주제들을 채택한다. "구름"에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의 다른 희극들이 개별적으로나 혹은 연결되어서 제공하는지 아닌지 보기 위해 아리스토파네스의 다른 희극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주 1> 하이네, '전집' V,283-84. Cf. 프리드리히 쉴레겔, '유럽 문학' pp.88ff. 그리고 헤겔, '미학'(전집,XIV,560-61).

<주 2> 스트렙시아데스와 스트렙시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알기 이전에의 학생과 대화 속에, 아홉 과제의 질문들이 있는데, 그중 다섯이 스트렙시아데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주 3> 오직 마지막 과업이 실질적인 목적에 부합하는데; 다른 세 과업 둘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기인하였고 각각 스트렙시아데스와 도마뱀의 행동들 때문에 둘 다 실패하였다: 도마뱀은 소크라테스를 우스꽝스런 천체학자로 만들었고, 스트렙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닌,우스꽝스런 수사학자로 만들 판이다.

<주4>  Cf. 플라톤, '국가' 596b12-e3; '소피스테스' 233e5-234a6.

<주5>  문맥으로 보아 소크라테스와 비교하면 프로디코스가 오히려 더 나약하다; cf.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315d4-6.

<주6>  Cf. 크세노폰, '회상' I 1.19와 3인조triad에 대한 언급 419.

<주7>  무우사들은 외출 시 짙은 공기의 베일을 쓴다: 헤시오도스, 신통기 9

<주8>  플라톤, '이온' 534에서는 마치 무우사들이 단지 신(여신이 아닌)들처럼 읽힌다. 아니면 신(단수)로 읽히든지.

<주9>  Cf. 플라톤, '법률' 945e. 

<주10> 크세노폰, '회상Memorabilia 'IV 3.1-2와 5.1-2.

 <주11> Cf. 플라톤, '법률' 945e

<주12> 거기서 언급된 신들의 거소는 노래의 일절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런 종류의 거소를 그 단락에서 말해지는 에테르의 경우에 돌리는 것은 매우 힘든 것이었다.

<주13> Cf.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 B4-5(Diels Kranz,7thed.);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대하여' 404a9-10.

<주14> 이것을 작가가 '기사'에서 한 것과 대조하라: 파라바시스 동안 취해지는 의회에서의 중요한 행동은, 파라바시스 이후 즉각적으로 정식 보고되었다.

<주15> 엠페도클레스 B43

<주16> 스트렙시아데스의 기억력이 소크라테스의 학원에서의 축출 위협으로 긴장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것만큼 나쁘지 않다는 점은, 787-89와 1248-58의 비교에서 나타난다.

 <주17> Cf. 1048-49과 1046 그리고 1011-1019. 투키디데스 (I 49.1-3) 투키디데스는 그 옛 시절을, 지식이나 예술 현재의 성격에 대비하여" 불굴의 의지spiritedness와 강인함"strength으로 성격 짓는다. 

<주18> Cf. 투키디데스 III 45

<주19> 투키디데스 V 105.2

<주20> 버넷이나 A.E.테일러와는 다른 과정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들의 견해의 일부분에서만 동의하게 되었다. 서로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나, 두 가지 이유에서 그들과 불일치한다. 버넷과 테일러는 "구름"을 연극 그 자체를 이해하는 도구로보다, 하나의 소식통source으로 관심을 둔다. 무엇보다, 그들의 입장은, 더 편리한 용어를 찾기 어려우니, 화성학으로 불러도 좋을 그런 것이다. 예를들어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의 문맥들을 따르면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가 생리학자이고, 그리고 플라톤(또는 크세노폰)의 느낌으로는 군주나 정치 기술에 관심을 가진 한 사상가라는 테일러의 단정 속에 역사 단계에 대한 성향이 그 자체로 보이는데; 영혼과 이를테면 공기와의 확연한 차이를 파악하지 못하면 정치(혹은 군주) 기술에 대해 무시하게 된다는 법률Laws X에 있는 플라톤의 단정에 대해 그는 적절히 주목하지 않는다. 버넷과 테일러는 플라톤의(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가 어느 면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반동이거나 응답일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버넷에 대한 비판을 좀 더  간단히 하면, 그의 희극 해석을 위한 두 대포 중의 하나가 "사실들에 대한 진술은 재미있지않다"(그리스 철학 sect.113)라는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라고는 결코 없을 경우에만 진실일- 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주21> 소크라테스와 정의의 변론과 구별되는,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불의의 변론 둘 다 디오뉘소스에 걸고 맹세한다.

 "구름"에서 디오뉘소스에 걸고 맹세하는 또 다른 등장인물은 페이딥피데스 뿐이다.

<주22> 플라톤, '법률' 671c6-7

<주23>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 1361, 1403-7

<주24> 플라톤, '클리토포스' 410a7-b1과 '프로타고라스' 337c7-d4.를 염두에 두라.

<주25> "구름"에는 기꺼이 받아 들일 수 없는 그런 경우를 빼고는 여자들이 없다.

<주26> Cf. 플라톤. '테아이테투스' 173a6-174b6.

<주27> Cf. "새들" 1491-95. Cf. 플라톤, '파이돈' 60c9-61b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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