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3. 아카르나이 사람들

병든소 2017. 10. 8. 02:38

3. "아카르나이 사람들"

 

 

"구름"에서와 같이 "아카르나이 사람들"도 불편함에 쇠소리 내는 늙은 시골사람의 혼잣말로 시작하지만;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실내 대신 여러 사람들 앞에서 혼잣말을 하고,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공에 대한 문제라는 것과 관련시킨다. "구름"에서 주인공이 늙은 시골사람 스트렙시아데스인지 아니면 소크라테스인지를 잘 알 수 없는데,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늙은 시골사람 디카이오폴리스 가 주인공이다. 디카이오폴리스는 평소 그의 습관대로 매우 일찌기 프닠스에 왔다. 도시의 관심사에 늘 무관심한 일반 시민들은 물론 행정관조차 제각기 다른 어디에서 미기적거리고 있다가 겨우 마지막 순간에 도착하지만, 그는 의회가 시작하기 훨씬 전에 첫 번째로 도착한 사람이다. 그는 의회를 아무리 빨리 열어도 늦지 않을 오직 한 사람의 아테네 시민이다. 전쟁 때문에 성내에 들어와 살아야 하게 되었지만 그는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했던 그가 살던 동네가 그리운데; 의회의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하품도 하고 끄적거리기도 하면서 대단히 많은 여러가지 것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연극의 시작 부분에서 그가 그의 마을에서 수없는 고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몇 개 되지 않는 그곳에서의 즐거움을- 정확하게 넷이다- 헤아리려 애쓰고 매달리는 것을 본다. 정치적 즐거움, 무우사로 인한 고통, 무우사로 인한 즐거움, 그리고 다른 무우사로 인한 고통까지 열거하는데 성공한다. 그가 열거한 것들로부터 그가 아이스퀼로스를 사랑한다 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그의 두 번째 고통을 말한 다음, 세 번째 즐거움으로 가지 않고, 바로 그의 지금의 고통인- 너무나 크고 너무나 강해서 그가 네 번째 고통을 꼽아 볼 수도 없게 하는- 그의 세 번째 고통으로 간다. 그의 수없는 고통의 근원인 지금의 고통은 전쟁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고통과 비교했을 때 나쁜 시나 노래로 인하여 생긴 고통은 그에게 즐거움이었던 것처럼 보일런지도 모르는데; 웃을 수도 있는 것이기에 나쁜 시나 노래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약간의 즐거움을 줄 수도 있다. 그가 느꼈던 정치적 즐거움은 클레온이 엄청난 벌금을 두들겨 맞았다는 것에서 나왔는데, 이는 정말 기사들에게 고마운 일이고; 이런 일은 생활에서보다 희극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확실히 디카이오폴리스는 스트렙시아데스처럼 작고 고만한 시골뜨기인데; 그는 희한하게 무우 사식의 촌뜨기이다. 그는 무우사를 사랑하기 때문에 보통 촌뜨기들보다 훨씬 더 전쟁을 싫어한다. 온 마음으로 전쟁을 싫어하여, 그는 오늘 의회에서 평화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려고 왔다. 그가 가진 개인적 고뇌는- 스트렙시아데스의 것과 대비해서 볼 때- 정치적인 행동이 아니면 제거될 수 없고, 혹은 그의 개인적인 즐거움도 도시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면 얻어질 수가 없다.

 

디카이오폴리스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오히려 기적과 같은 도움을 발견한다. 의회의 첫 연설자 암피테오스에게, 그리고 유독 그에게만, 신들에 의해 스파르타와 평화를 협의할 임무가 주어졌는데; 그는 아테네 시민이지만 인간이 아니고(cf.46,57) 신적인 존재이다. 그는 의회의 도움이 필요한데, 행정관이 그에게 스파르타로 가는 여행경비 지급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신들은 명백히 그들이 진지하게 평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그런 진지함이 없다면 그들은 평화를 지닐 가치가 없거나, 진정한 평화는 없다) 아테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바라는데; 사람들이 무언가를 진지하게 바란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위해 비용을 쓰겠다고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평화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협의되어야 하지만; 만일에 신적 존재가 아테네를 위해 협상한다면 그 자신 아테네 사람이어야 하고, 그는 반드시 아테네 사람처럼 스파르타로 여행해야 하기에 그는 여행 경비가 필요한데; 신적인 존재로서 암피테오스는 그의 말 그대로 돈이 없다. 아테네 사람들은 신들의 뜻에 대해 조그만치의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디카이오폴리스가 떠들었지만 암피테오스를 경비원이 조용하게 만들었다. 의회가 스파르타와의 평화를 토의하기보다는 스파르타에 대항하기 위해 야만인들과 동맹하는 쪽으로 돌아가자, 디카이오폴리스의 고통은 커져 갔다. 몇 해 전 페르시아의 왕에게 사절로 보냈던 아테네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 중 한 명은 그들이 딴 나라에서 겪었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들이나, 도시를 대신하여 그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노력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혐오스럽게도 사절들은 그들의 경험과 그 사이에 아테네 시민 다수가 겪었던 경험들 간의, 그리고 아테네의 전시 내핍 생활과 잘 먹고 잘 마시며 다닌 그들의 지극히 편한 페르시아 궁전까지의 휴가여행 간의- 그의 내지로 가는 페르시아 왕의 더욱 웅장한 여행은 말할 것도 없고-,  놀라운 차이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한다. 아테네 사절은 '왕의 눈'이라 불리는 한 페르시아의 사절을 소개한다. 그는 그의 이마 한가운데 거대한 눈을 하나 가지고 있다. '왕의 눈'이 눈만 하나 달랑 있는 아무것도 아닌 아리스토파네스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왕의 눈'을 '큰 눈'으로 소개한다. 작가는 스스로 스트렙시아데스가 하는 짓을 한다. 그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그는 일반적으로 말하는는 원래 그런 것보다 더 바보스럽게 만들어서, 스트렙시아데스화하는 방법으로 희극적 효과를 거둔다. 달리 말해, 소크라테스의- 어떤 사람의 근본적인 결점이 다른 것 가운데, 스스로 모방을 모방에 앞선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한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스트렙시아데스는 희극배우이다("구름" 296). 디카이오폴리스가 가진 페르시아의 허풍과 아테네의 과시에 대한 강한 증오가, 또한 전쟁을 지속하게 할 소지가 있는 모든 것들에- 아마 페르시아의 말과 페르시아의 몸짓에 대한 그의 무지와, 페르시아 사람이 그리스 말과 그리스 몸짓에 대해 무지한 것이 서로 협력하여- 대한 강한 증오가, 페르시아 왕의 사절 운운하는 이 모든 것이 아테네 사절들에 의해 저질러진 총체적인 사기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러나 아테네 사람들의 전쟁 중독은 너무 대단해서 디카이오폴리스가 페르시아 사절들의 가면을 분명하게 벗겨내어 보여주는데도 의회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다. 그는 전반적인 통 큰 결정을 내린다. 신적 시민이 오직 그와 그 아내 그의 자식들만을 위한 휴전을 얻어 오도록 그의 주머니에서 암피테오스에게 필요한 스파르타 왕복 여행의 경비를 지불한다. 그는 신들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며, 평화는 전체적으로 도시에 최선이어서, 즉 그의 행동은 정당하며;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도시는 부당하다. 그는 도시의 뜻에 대항하여 도시에게 좋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시로 하여금 평화를 택하게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혼자서라도 정당하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을 위한 평화를 구하는 것이다. 스파르타와의 평화를 구하도록 유일하게 신들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암피테오스는 그 평화를 유일하게 디카이오폴리스를 위하여 구하려 한다(52,131). 초인간과 한 사람의 개인이 도시에 반대하여 음모를 꾸민다.

 

암피테오스가 떠난 다음 의회에서는 연합군으로 아테네에 군대를 보낸 시탈케스 왕에게 갔던 아테네의 사절이 연설한다. 디카이오폴리스는 페르시아의 왕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금을 보내 주리라고는 결코 믿지 않지만, 지금 살인자들 같고 도적들 같은 트라키아 용병들이 모든 아테네 사람들에게 위협이되고 있기 때문에, 트라키아의 왕이 금을 받고 지독하게 비싼 용병을 보냈다는 것만은 확실히 믿한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의회의 모임을 끝내는 것으로 트라키아에게 지불하는 결정을 막는 한 핑계거리를 보게된다. 아니 오히려 만든다. 그의 페르시아의 사절에 관한 실패와 트라키아의 사절에 관한 성공 사이의 대비가 사기는 진실과는 싸울 수 없으며, 오로지 사기들끼리의 싸움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회는 암피테오스가 스파르타에서 돌아오자 간신히 산회되는데; 그는 그 임무를 신적인 속도로 수행하였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급파와 비밀은 성공적인 반역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들이다. 그가 그 짧은 시간 안에 여행을 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여행 경비에서 꽤 많이 절약했음이 틀림없었지만; 그는 돌려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 디카이오폴리스에게 남은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 몇몇의 늙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쫒기느라 그는 굉장히 바빴기 때문에 암피테오스가 탐욕스럽다고 추측할 필요는 없다. 디카이오폴리스는 암피테오스를 위협하는 위험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암피테오스가 가지고 돌아온 협약서에만 흥미가 있을 뿐이다. 글자로 된 문서의 스폰다이를- 'spondai'라는 말은 '휴전'과 '제사용 술'의 두 가지 의미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최고의 향과 맛을 내는, 즉 가장 위대한 몇 년을 보내는 휴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전쟁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는 시골에서 디오니소스 세상을 축하할 것이다. 암피테오스는 그를 쫓는 아카르나이 사람들로부터 도망가야만 한다. 그는 다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암피테오스 사건은 연극의 주요 사건들과는 완전히 격리되는데; 암피테오스는 에우리피데스의 '졸지에 출연하는 신deus ex machina'이거나 아니면 그 속의 희극적 동치물이다. 그의 속도는 그의 공포와 똑같다. 그는 디카이오폴리스의 휴전 덕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가 그의 인정 많은 행동으로부터 얻어내는 유일한 덕은 여행 경비를 챙기는 것 뿐이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암피테오스를 못 찾는다. 그들은 디카이오폴리스를 암피테오스로 착각한다. 그 착각은 피할 수가 없다: 디카이오폴리스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시골에서 디오니소스의 세상을 축하하지 않는다. 착각은 사실 전혀 착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애국적인 분노를 야기시킨 범죄를 처음부터 디카이오폴리스가 저질렀으며, 그리고 그 열매도 역시 혼자서만 즐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카이오폴리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을 대면해야만 한다. 암피테오스가 행동한 것이 디카이오폴리스 개인의 평화를 위한 조건일 뿐임을, 그리고 충분하지 않은 조건 뿐임을 보여준다. 그는 그의 개인적인 고뇌를 개인적으로, 거기에 더해서 순전히 인간적으로 없애야만 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는 소위 신들과 사람들에 대한 범죄는 바로 반역인데; 그는 도시를 완전히 무시하고, 도시가 미워하는 적군과 개인적으로 협상하여, 그는 그 자신을 위해 평화를 만들었으나; 도시를 대신한 그 추적자들은 행동으로; 도시의 정신을 구현하였다: 늙은 노인들이기는 하지만; 마라톤에서의 전사들이고; 도시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그들에게 더욱 많은 고통을 준 스파르타를 아테네에서 가장 열렬히 증오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은 클레온을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디카이오폴리스를 미워한다. (디카이오폴리스도 클레온을 미워하는데; 디카이오폴리스와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같은 편에 속하며; 그들의 반대 편은 정치판에 없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정의의 변론'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그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디카이오폴리스는 '불의의 변론'을 연상하게 한다. 확실히 디카이오폴리스와 스트렙시아데스는 도시보다 그들의 가족을 위에다 두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스트렙시아데스는 도시의 법에 반하여, 아니 최소한 몇몇 가지의 법들에 반하여 돌아서지만, 디카이오폴리스는 도시의 전쟁에 반하여 돌아서고; 스트렙시아데스가 신들의 뜻에 반하는 짓을 하지만, 디카이오폴리스는 신과 일치된 행동을 한다. 즉 "구름"이 아버지 폭행이라는 화제를 장난스럽게 연출하는 반면에,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정치적이고, 중대한 그리고 폭발성 있는 반역이라는 화제를 장난스레 연출하고; 그리고 아버지 폭행이 부분적으로 성공하는 반면, 반역은 완전히 성공한다.

 

디카이오폴리스는 조금도 죄의식이 없다. 그는 그냥 도시를 잊어버렸다. 그 밖에도 그는 그와 그의 가족을 위하여 스파르타와 평화를 맺은 신을 자기 편으로 가졌다. 가족은 "구름"에서보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데; 디카이오폴리스의 가족 사이에는 싸움이 없다. 디카이오폴리스는 스트렙시아데스에 비하여 덜 호색적이지 않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에게 희생물을 올리며 기도하는 그를 발견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는 그런 일로 아카르나이 사람들에 반해서 신으로부터 도움을 얻을지도 모른다. 디오뉘소스는 성애性愛의 신이지만 가족을 위한 신은 아닌데; 그는 남근 숭배의 노래에다 더하여, 사랑스레 그리고 환호로 신의 간통자와 남색자 동료를 부르고, 또한 그는 숲에서 젊은 노예 여자와 누워 뒹구는 즐거움을 칭송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그의 휴전을 정당화하려 할지 모르는 어떠한 디카이오폴리스의 말도 듣기를 거부하는데; 그의 반역은 분명히 이루어졌었고, 죽음으로 그를 벌주는 것 이외에 그들이 할 일은 없다. 그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스파르타를 옹호하는 어떤 말도 못하게 할 것이라고 깨닫고, 처음 스파르타와의 휴전임에 관한 언급없이 그의 스파르타와의 휴전에 대한 변호를 시도한다. 적이 누구냐 어떤 성질이냐를 완전히 무시하고, 모든 휴전이 옹호될 수 있거나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말하는데;  아마도 그의 개인적 휴전이 합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겁하기(싸우기보다는 노예가 되기를 선호하기) 때문이어서는 아니 되며, 아니면 신들에게서 반드시 인증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가 비겁자가 아니란 것을 행동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암피테오스의 임무를 언급하는 것으로 그의 태도를 정당화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는데; 그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나 어느 누구에게도 암피테오스에 대한 언급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조차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 간단히 말해 만일 평화는 좋고 전쟁은 나쁘다면, 적이 누구이건 어떤 성질이건 차이가 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평화가 절대적으로 부당한 적들과의 전쟁보다 더 나을 수 있는가? 그래서 디카이오폴리스는 스파르타가 절대적으로 부당한 것은 아니며, 모든 불의의 일들이스파르타에 의해 저질러진 것도 아니며, 또한 어떤 것은 불의의 일이 스파르타에게 저질러진 것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여전히 적을 옹호하는 디카이오폴리스의 뻔뻔스러움보다는 오히려 대담함에 더욱 성이 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더욱 더 나아간다. 그는 그의 경우의 정당성을 법정에서 입증하도록 기회를 달라고 거의 강요하는데; 그는 확실히 처형대에 목이 붙어 있을 때, 그의 경우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이 허락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제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억제할 수가 없다. 이런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 디카이오폴리스는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들을 자기의 목숨에 대한 인질로 데리고 있다고, 즉 그가 그들의 생계의 원천을 완전히 쥐고 있다고 믿도록 하여 그들의 처벌을 멈추게 한다. 거기서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그를 살리어 두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스파르타 친구들을 즐겁게 할 어떠한 말이라도 하라고 허락한다: 스파르타가 그들의 재산에 입힌 손해 때문에 스파르타의 열성적인 적이었던 그들은 그들의 열성이 그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으로 이끌어 간다고 보여서 이제 스파르타의 열성적인 적이 되기를 멈추는데; 다른 말로, 조상의 땅에 대한 배반을 그 자리에서 극형에 처할 수 있는 흉악한 범죄로 간주하는 그들은 그들의 생계의 원천에 대한 배반보다 그들의 조상의 땅에 대한 배반에 대해 더 관용적이다(340, 290). 디카이오폴리스는 조국보다 더 높고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불도 삼키는 마라톤의 전사들에게 확신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는 그들을 멈추게 하였고, 그들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는 그들을 되돌려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당한 사람이고; 그는 극악한 범죄로부터의 도주가 아니라, 오로지 그의 편에서 유리한 청문회를 갖기 위해서 그의 목조르기를 그들에게 구사한다. 그의 승리 때문에, 아니 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가 스파르타의 정당성을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확신시키지 못하면 처형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서, 처형자의 블록에서 목을 단 채 스파르타에 대한 그의 경우를 진술하려 한다. 그의 정당성은- 그의 명백한 반역 행위에 대한 정당성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대한 아테네 사람들의 부당성으로나, 아니면 아테네에 대한 스파르타의 전쟁의 정당성으로 세워지거나 쓰러진다. 전쟁의 피로 때문에 아테네가 평화로 기울었다는 것은 약간 충분치 않은데; 그들은 처음 그들의 전쟁이 죄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와야만 하고; 그들은 그들의 애국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오로지 그래서야만이 디카이오폴리스의 평화가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사실이 그것이 합법적이라고는 증명하지 않는데; 그는 한 도시의 부당한 전쟁이 도시의 시민하나가 그 전쟁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을 정당화하는가 하는 질문을 불법적으로 해결한다. 여전히 디카이오폴리스의 가족을 위한 도시의 뜻에는 반한 행위가 성공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공공에서의 시위로 발전해 가고, 그래서 도시에로의 길을 보여주는데; 반면 도시의 뜻에 반하고 그의 가족을 위한 스트렙시아데스의 행위는 도시로에의 길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디카이오폴리스가 정직한 사람임을 알게 된 다음부터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그렇게 기대했듯이, 그에게 그들의 열린 호의를 회복하는데; 이제 그들은 그가 약식 재판을 받을 것을 열망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는 아직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다. 그는 그의 처지를 관객들에게 독백으로 들어낸다. 그는 적인 스파르타를 편들면서 솔직하고 용감하게 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고, 그는 죽고 싶지도 않다. 그는 많은 공포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그가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하는 한 사람임을 알고 있고<주1>; 그에게 반하여 아카르나이 사람들과(늙고 투박한 마라톤의 전사들과) 클레온이 뭉쳤으며, 그가 소크라테스보다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다는 것들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대비할 때, 그는 그의 경우를 거짓이나 남을 걸고 넘어지는 것으로 이길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는 가장 위험한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똑똑함이나 아무 가식없이 동료시민들에게 들어내어야만 하는데; 그는 그 자신을 들어내고; 그는 발가벗어야만 한다. 지금까지 그를 특별하다 말해도 무우사식의 시골뜨기나 아티카식의 헤시오도스 같은 늙은 시골사람으로 알았다. 이제 그는 그를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로 들어낸다. 달리 말하면, 아리스토파네스가 처음으로 시골뜨기로 변장하여, 실제의 자신보다 더 낮은 것으로 눈 앞에 나온다. 디카이오폴리스가 공포라고 말하는 여러 것들 가운데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일등 상을 받지 못할 위험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꼽을 것이다. 디카이오폴리스의 공포는 아주 대단한데, 그의 정당성과 그로 인한 비대중적인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올바른 분노로 넘쳐 나는 사람들에 대한 유일한 힘을- 바로 희극 작가의-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희극 작가가 마련해 줄 수 없는 그런 어떤 것들이다: 그는 그의 인간인 적들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켜야만 한다. 단지 도전적이면서 겁없고 혹은 공포를 유발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불쌍하고 겁쟁이인 혹은 순종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으로 해서, 죽는 것이 겁나는 사람이면서도 겁을 모르고 뭔가를 저지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의 엄청난 용기에도 불구하고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알듯이, 그는 가장 똑똑하고 완벽한 가면을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의 가면이 그의 똑똑함을 들어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 어떤 경우에라도 그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반드시 똑똑하게 보여야 한다. 시골뜨기라는 그의 가면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아서, 그는 여전히 더 낮은 가면이 필요한데; 그는 스트렙시아데스화 하는 것을 반드시 뛰어넘어 가야만 한다. 그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쨌던 그는 동정심 유발의 대가인 비극 작가가 마련할 수 있는 그런 가면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가 아이스퀼로스를 대단히 사랑하는 만큼 이제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거나 들어내지 못하는 것으로, 가족을 도시 위에 올려 놓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인 그는 언제나 '정의의 변론' 혹은 마라톤의 전사인 아레스나 라마코스를 칭송하고, 그의 주된 적수인 아이스퀼로스보다 에우리피데스와 '불의의 변론'(혹은 페이딥피데스)에 동감했다<주2>.  스트렙시아데스의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기술을 통해 여러 사람 앞에서 변호되었고 그래서 스스로를 파괴하는데; 디카이오폴리스의 이유는 여러 사람들 앞에 에우리피데스의 기술로 변호되고 그래서 그 스스로를 보호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상당한 부분이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패러디이지만;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다른 등장인물들과 똑같이 그의 비극 패러디 역시 그들의 비희극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매번 패러디가 그것이 일어나는 특별한 희극 속에서 필요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단순한 사실로 나타난다. 확실히 지금의 경우에 에우리피데스 패러디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에우리피데스를 필요로 하거나, 아니면 디카이오폴리스가 에우리피데스를 필요로 하는 것을 희극적으로 반영하는 방법으로 그에게 "의존한다" 

 

디카이오폴리스가 에우리피데스에게 다가가는 것은 스트렙시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가는 것과 닮았다. 처음으로 소크라테스의 지혜에 대하여 어렴풋이 알게 해 준 소크라테스의 학생 하나를 스트렙시아데스가 처음으로 만나는 것처럼, 디카이오폴리스도 에우리피데스의 지혜를 어렴풋이 느끼게 하여 주는 에우리피데스의 하인을 처음 만나는데; 에우리피데스의 하인에 따르면 한 사람의 그 자신이란 그의 마음이 아니라 그의 육신이다(cf."구름"1275-76). 그러나 디카이오폴리스는 스트렙시아데스가 대화 가운데 저지르는 예의에 어긋나는 짓들 저지르지 않는다: 비록 그가 스트렙시아데스에 비해서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지만 그는 신들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점은 소크라테스에게 접근하기보다 에우리피데스에게가 훨씬 쉽다는 사실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에우리피데스에게로의 접근의 용이성은 알려진 바와 같이 그것의 "불가능성"(402,408)과 대비되는데; 디카이오폴리스는 에우리피데스 자신이 쉽게 '갑자기 나타나는 신deus ex machine'으로 불가능성 위에 가능성을 덧칠하는 데에 대가이기 때문에, 에우리피데스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에우리피데스를 확신시킨다: 에우리피데스는 그 자신이 '졸지에 나타나는 신deus ex machina'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에게 내려가는 반면에 에우리피데스는 내려가지 않는다: 비극은 희극과 뒤섞여서는 안 되는데; 희극은 비극의 운률과 잘 맞을지 모르지만, 아니 반드시 맞아야 하지만, 비극은 희극에서의 운률과 잘 맞지 아니한다. 희극은 반드시 비극에 의하여 이끌어진다. 스트렙시아데스와 대비할 때, 디카이오폴리스는 자기 이름에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더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목숨을 구하는 데 필요하다면서, 에우리피데스에게 가장 불쌍한 거지이며 동시에 가장 똑똑한 연설가인 주인공의 넝마 옷과 여섯 가지의 분장 도구들을 부탁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별로 까탈을 부리지 않고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똑똑한 연극 배우마냥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디카이오폴리스는 연극 같은 환상을 완전히 무시해 버릴 수 있게 된다: 거지의 옷차림이 관객을 속인다는 뜻은 아니지만, 오로지 늙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인 척하는 코러스만이 유일하게 그를 목숨이 걸린 가장 위험한 것의 처분에 맞겨진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희극작가가 관객에게 그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말라는 충동을 더 할 수는 없지만, 그를 그와 함께 웃어주라고는 충동질 한다. 그럼에도 이런 극단적인 자기 평가절하가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 진짜로 아니지만, 가장 우스운 것 혹은 가장 저급한 가면은 된다. 희극 그 자체가 지혜의 가장 효과적인 가면이다. 더러운 넝마의 비극 주인공 패러디는 여전히 비극 주인공 그 자신보다는 더 나은 가면이다. 달리 말해, 대부분의 시민들을(주로 진짜 아카르나이 사람들인 관객을) 아주 적은 사람들에( 아카르나이 사람들로 알려진 코러스에) 대해 자기를 믿어주는 척하는 것으로, 그는 사실 대다수를 상대로 적은 수의 똑똑한 관객과 함께 음모를 꾸민다.

 

에우리피데스의 홀에서 떠난 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배역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거지로서 충실하지만, 그는 그의 연설을 통해 거지이지만 그 이상인 척하고, 옛날 한때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불의의 변론'을 닮았다(구름" 921-22). 그는 그의 막중한 임무로 인하여 다시 한번 몸을 떤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목이 달아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스파르타를 편들어 연설해야 하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떨지 말라며 진정시킨다. 그렇지만 아르카나이 사람들은 애써 끌어가는 그의 대담한 행위를 얄팍한 뻔뻔함으로 여긴다. 그는 코러스가 아닌 관객에게 그의 연설을 전하는데, 연설에서 그는 거지로 변장한 희극작가로서가 아니라 거지와 희극작가 둘 모두로서 말한다. 말하자면 그의 연설은 전적으로 익살맞지가 않다. 그는 도시에게 도시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그것을 단순한 시골사람으로 나타났을 때 의회에서 말하려고 했어야만 했지만 거기서는 완전히 실패했고; 이제 극작가로서 그것을 말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는 도시에게 희극 중에서 도시에 관해 말하는 것을 사과한다: 개인의 미약함과(367), 도시의 웅장함, 그리고 도시를 존립케 하는 정의로운 것들 간에 굉장한 차이가 있어, 혼자서는 어지간히 겸손하지 않고서는 도시 전체에 대해서 반대할 수가 없다.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도시가 올바른 것들을 얕보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생활 방법이 희극에서처럼 저급해지거나, 아니면 오로지 희극만이 올바른 것들을 안전하게 말할 수 있도록 되는 일 말이다. 그는 관객에게 장차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혹할지 모르나 정당한 것이라고 주의를 준다. 그것은 단지 그것을 말하는 것에 의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말 뜻을 전하는 방법에 의해서이기도 하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아테네 사람들이-시민이거나 외국인 거주자들이- 모이는 레나이아 축제에서 상연되기 때문에, 디카이오폴리스-아리스토파네스가 낯 선 사람들 앞에서 도시의 나쁜 점들을 이야기 한다고 해서 클레온에 의해 비난 받을 수가 없다. 물론 그의 스파르타에 대한 증오는 그 누구의 것보다 뒤지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의 재산도 역시 그들에 의해서 손상되었기 때문이지만(그래서 그가 거지라는 암시는 부정한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이 모든 나쁜 것들의 원인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스파르타는 이 전쟁에 책임이 없다. 아테네 사람들이, 즉 아테네 도시가 전쟁을 시작했다고 디카이오폴리스가 구태여 그렇게 말하는 것을 신이 용서한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비난할 수 없는 법과 또한 비난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의 법 운영을 구별하듯이, 디카이오폴리스는 비난할 수 없는 도시와, 또한 비난 받아 마땅한 사람들의 도시 운영을 구별한다. 주요한 것들만 보면, 한 바보 아테네의 젊은이가 메가라의 매춘부 하나를 유괴했는데, 이에 화가난 메가라 사람들이 아스파시아가 소유한 매춘부 둘을 유괴했고, 이에 대해 페리클레스는 메가라 사람들에 대한 포고령을 통과시켜 그 이방 여자의 명예를 지켜 주는 것이 온당하다고 판단하였다. 메가라 사람들은 최악을 피하려 스파르타에게 아테네가 그 포고령을 폐지하도록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도시가 그 폐지를 거절하였다. 이것은 전쟁을 의미했다. 스파르타는 부당한 공격을 받은 자기의 동맹인 메가라를, 마치 아테네가 그들의 다른 어떤 동맹이 부당한 공격을 받으면 그리 했듯이, 도우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반-페리클레스적인 편견에 대해 약간은 겸연쩍게 하소연을 한 다음에, 디카이오폴리스는 페리클레스가 아닌 오로지 아테네가 전쟁에 대하여 책임이 있으며, 그리고 스파르타에게는 죄가 없다고 분명히 주장한다: 오직 도시의 전쟁이 전적으로 부당하기 때문에 그의 개인적인 평화는 전적으로 정당하다. 누가 암피테오스의 또 신들의 행동이 아테네가 전쟁을 시작했으므로 아테네가 반드시 평화를 위해 먼저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말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의회에서 그는 아테네의 전쟁이 죄악이라고 하는 어떤 힌트도 주지 않았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디카이오폴리스의 평화는 이제 막 성립된 현실이라서, 그는 최선을 다하여 공인된 변호 방법으로 그것을 지켜내어야만 한다. 이것은 그의 공인된 변호가 반드시 전쟁의 발단이나, 아니면 그의 개인적인 평화의 진정한 동기에 대한 그의 시각을 들어낸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디카이오폴리스의 잘 짜여진 연설은 성공적인 반향을 몰고 온다. 그는 반이 되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준다. 그 나머지 반이 전보다 더 화가 난 것은 상관이 없는데(도시에 반대한 그의 정당한 일에 관한 연설은 일을 더 낫게 하기보다 더 나쁘게 만드는데); 도시가 양분되면서 반역이 반역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디카이오폴리스는 강력한 옹호자들을 가지고 있는데; 여전히 그에게 적대적인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그를 죽일 수 있기에 앞서 이제 나머지 아카르나이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 진짜로는 협력자인 사람들로부터의 첫 번째 공격을 성공적으로 견디어 내고, 그는 스스로 그 협력자들을 둘로 나눌 수 있게 된다. 비록 그가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심각하게 위협을 받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전쟁 정신의 화신인 라마코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혹시 라마코스와 그의 적대적 반이 되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뭉치는 경우에 디카이오폴리스가 질런지도 모른다. 그는 라마코스를 자기 편으로 하는 것이 전연 불가능해서; 그는 라마코스와 아카르나이 사람들 사이에 반목을 조장하려 하여야만 한다. 그는 라마코스와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공통점을 부정해야 하고; 대신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자기와의 공통점을 찾아야만 한다. 그와는 여전히 적대적인 아카르나이 사람들 사이에는 전쟁의 책임에 관한 공통점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도시에 대한 비난을 침묵 속에 아니 침묵보다 더 나쁜 것 속에 묻는다. 대신에 그는 그를 거지라고 하는 라마코스의 비난을 가지고 화제로 삼는다. 거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유리할 때는 주저하지 않았지만(497), 이제는 거지가 될 수가 없는데(그리고 여전히 덜 작가적이다), 왜냐하면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거지와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을 존경받는 시민으로 묘사한다.- 다른 평범한 시민처럼 그저 평범한 시민일 뿐이고, 또한 시민 병사이며, 그리고 라마코스처럼 청동상은 아니다. 라마코스에게 남은 유일한 방어로<주3>, 그와 그의 동류들은 그들의 높은 지위를 데모스demos에 의해 적법하게 뽑혀 얻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동류들에 대한 불평은 한 사람이 데모스에 대해 불평하는 것과 똑같은 말이라는 것 뿐이다. 디카이오폴리스는 이런 방어를 받아들일 수 없어, 데모스에 의하여 뽑혔다는 것이 데모스처럼 산다는 것이 아니며, 또 정녕 데모스에 속하여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의 반-페리클레스적인 분개에 대한 호소는 고작 부분적으로 성공한 반면에, 많은 다수의 사람들은 청동상에 속하지 않으므로, 그의 반-청동상의 분개에 대한 호소는 전적으로 성공한다. 그가  개인적으로 평화를 만들었던 것은 아테네의 전쟁에 대한 죄책 때문이 아니라,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특혜층들에 대한- 전쟁 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거나 거지 였으며; 전쟁 도중에는 전선의 뒤에서 돈 벌기 좋은 임무들을 맡았던 특혜층들에 대한-, 그리고 고난의 보통 사람들에 대한- 평화 시에는 열심히 일하는 정직한 시민들, 전쟁 중에는 머리가 세었고, 임금도 덜 받았고, 밥도 덜 먹었던 그들의 아들 뻘인 동료들에 둘려싸여 지휘했던 전사들에 대한- 그의 분노 때문이라고 말하였을 때, 모든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그의 편으로 넘어 온다. 디카이오폴리스의 논점이 데모크라시에 대한 공격이라는 라마코스의 지적조차도 데모크라시라는 것은 모두가 데모스를 위한 것- 그것이 아닌가?- 이라는 말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전쟁의 정당성은 상호의 논쟁꺼리로 남지만; 전쟁 부담의 부당 배분은 질 수 없는 논쟁 감이다: 스파르타에 대한 증오와, 또는 단순한 애국심으로 인하여 아테네의 전쟁에 대한 죄책을 들어 넘길 수 없었던 아카르나이 사람들조차 그들의 질시에 호소하는 바람에 넘어가고 만다.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훈련된 그 어느 누구도 디카이오폴리스만큼 아니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없었다. 에우리피데스의 무기와 정치적인 예민함으로 무장한 한 사람이 '구름'과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술을 능가하여, 도시의 월등한 힘을 이겨낼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종류의 무기를 가지고 의지를 다하여 스파르타와 그들의 동맹군들과의 전쟁에 봉사하러 갈 것이라 선언하면서 라마코스가 떠난다. 그럼에도 디카이오폴리스는 도시의 모든 이방의 적들이 그에게 와서 교역하도록 초대하는데, 즉 그들이 가진 물건을 라마코스가 아닌 그에게 팔도록 초대한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인데, 거지가 물건을 살 자금이 없어서가 아니라(이미 알고 있듯이 디카이오폴리스는 거지가 아니다), 그가 첫 부분에서 독백으로 말했듯이, 왜 그가 성내의 생활을 싫어하고 그래서 평화를 원했는가는 정확하게 그가 시골에서나 평화의 때에는 어떤 것도 사지 않았던 것을 성내에서는 모두 사야 하기 때문이다. 더 큰 놀라움이 나오는데, 디카이오폴리스가 논쟁에서 이기고 또한 그의 휴전에 관해서 데모스를 설득한다고 전한다. 이러한 데모스의 행동은 그것 자체로 그의 휴전을 안전하게 만든다. 그가 이루어 가진 개인적인 휴전이 공공의 휴전으로 공식적으로  바뀌는것이 그 다음 단계로 기대된다. 이것은 정확히 그의 애초의 희망이다: 평화를 이루어, 공공의 평화로 그런 물건들을 사지 않아도 되도록 이제 그의 마음이 바라는 것을 채우는 데 거치적거리던 장애물을 모두 극복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공공의 평화와 사지 않는 것"을 원하던 것을 완전히 멈추었다. 디카이오폴리스는 도시의 나쁜 운영 뿐만 아니라 그냥 그 도시로부터도 떠난다. 이 급작스런 변화는 태도를 바꾼 데모스가 기꺼이 그에게 경비를 돌려줄 것이므로 그가 혼자서 그의 개인적인 휴전을 이룬 경비를 감당했다는 사실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가 여러 역활을(무우사의 시골뜨기, 희극작가, 거지로 변장한 희극작가, 거지, 평범한 시민 병사) 맡는다는 사실로 자기 모순을 설명해야민 하게 되는데; 구매에 관한 두 가지 상반되는 역활은 다른 배역에 속한다. 바로 이것이 누가 진짜 디카이오폴리스인가, 아니면  디카이오폴리스 그 자신은 누구인가라고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되도록 만든다. 디카이오폴리스가 여러가지 역활들을 수행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최소한 이들 역활들 중의 하나는, 만일 그것이 에우리피데스 집의 사적인 일이었다면, 눈 앞에서 공개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약간의 과장을 한다면, "구름"과 비교해서 볼 때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모든 것들이 공개적으로 일어나는데; 스트렙시아데스의 (혹은 소크라테스의) 행동과 비교해 보면, 디카이오폴리스의 행동은 공공의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평화를 이루는 것과 달리, 한 사람의 채권자를 사취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혁명적인 방법으로 빚을 없애는 것과는 구별하여) 공공적으로 옹호될 수가 없다. 따라서 "구름"에서는 파라바시스 동안에 스트렙시아데스나 페이딥피데스에 대한 실내교습이 이루어지는 반면,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파라바시스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구름"과 달리 한 사건이 파라바시스 이전에 완성되기 때문이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으며; 그는 더 이상의 위험에 빠져 있지도 않으며,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가면이나 가리개 따위가 필요하지 않는데; 파라바시스 이후에, 그리고 오로지 그래서야만이, 그는 그 자신을 보일 수가 있고, 즉 그의 개인적인 평화를 만드는 진정한 동기를 보여 줄 수 있다. 따라서 "구름"에서의 행동들은 관객들의 행동과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구름"의 관객들이 예상하는 유일한 행동이란 연극의 결론에 따르는 것인데, 이름하여, 연극으로서 그 연극에게 상을 주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디카이오폴리스가 그의 개인적 평화의 안전을 위하여 관객들의 지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연극의 행동들은 결정적으로 관객의 행동에 의존한다: 극적 환상의 파괴는 (디카이오폴리스가 맡은 연극에서 역활에 의해 공개적으로 알게되듯이) 극적인 환상의 한 부분이다. 이것은 "아카르나이 사람들" 중에서 한 중요한 배역이 희극작가 그 자신이라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파라바시스는 "구름"의 그것과 기능 면에서 아주 다르다. "구름"에서는 '구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디카이오폴리스가 아리스토파네스를 대신해 말하고(377-79, 502-3), 그리고 아카르나이 사람들로 된 코러스는 디카이오폴리스의 결사적인 적들이다. 그들은 작가를 대신하여 파라바시스 가운데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처음 그들은 그들이 말을 할 수 있기 전에 디카이오폴리스에 의하여 그의 변론의 이유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 변환은 파라바시스 바로 직전에 완성된다. 발가벗겨진 후, 즉 그들이 늙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인 척하는 것이 끝난 후에, 코러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탁월함을 칭송하는 노래를 한다. 이러한 칭송은 그가 클레온에 의하여 도시를 희극적으로 다루고 데모스를 모욕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대응은 클레온의 행동에 약간의 근거가 있었다는 것을 알도록 해 준다. 그는 코러스가 그를 대신하여, 그가 아테네를 위하여 그들의 허영을 아니면 과시를 부셔버리는 것으로, 그래서 이방인들로부터 아첨을 받아 바보가 되는 것을 막아 주는 것으로, 아주 대단한 봉사를 했었다고 주장하게 만든다. 과시는 희극이 어떤 다른 악덕보다 더 직접적으로 때리고 상처주는 악덕이다<주4>. 만일에 올바른 경멸이 항상 과시로 돌아가는 테두리에 있지 않다면, 희극은 올바른 경멸에 대하여 무력할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 역시 아테네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딸린 도시들을 정당하게 다루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들 이방인들이 이제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감히 정의로운 것들에 대하여 말하는 아주 탁월한 작가를 보기 위하여 열정을 가득 담고 아테네로 온다. 작가는 진정으로 과시자임을 증명해 주는 하나의 방법이 바로 그들을 더욱 과시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과시는 그가 코러스로 하여금 작가가 대담하다는 명성이, 가장 잘난 체하는 또한 점잔을 빼는 것의 중심인 페르시아의 왕이 아테네는 우수한 해군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마치 자기가 그의 군대에게 그리 하듯이, 아테네를 진지하게 힐책하는 것으로 스스로 최고의 자문관임을 증명하는 한 작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아테네의 승리를 예견했을 정도로, 이제는 페르시아의 왕에게까지 닿았다고 주장하게 만들 때에 최고조에 이른다. 이래서 작가는 암묵적으로 페르시아의 왕이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맺지 않을 것이며, 아테네의 전쟁 전망은 밝고, 그래서 지금 평화를 지키는 것이 도시로서는 바보와 같은 짓이 될 것이라고 제언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탁월함은 어째서 스파르타가 이 작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기회인 평화를 갈망하는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왕이 말로 한 사실을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아테네의 안녕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리스토파네스이다. 작가는 암묵적으로 그의 동료 시민들에게 그가 옳은 것들을 희극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몹시 필요한데, 앞에서 언급한 조건 아래서, 즉 지금 평화를 얻기 위한 오로지 하나의 조건으로 스파르타와의 평화를 맺는 것에 대해서 경고한다. 작가는 왜 그가 개인적인 평화를 공공의 평화로 바꾸지 않는지 두 개의 가장 강력한 이유를 보여 주었다. 정의로운 것들에 대한 희극적 처치는 도시가 그 부당함에 대한 불평을 폭넓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연장 위에서 필요한 것이고; 이러한 위험한 주제의 유일한 안전 처치는 바로 희극적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의로운 것들에 대한 비희극적 가르침은 과시로 되어 버리는 위험이 있다. 거기다가 작가는 아테네 사람에게 최선의 것을 가르쳐서 행복하게 이끈다: 그는 정의로운 것들의 희극적 처치를 보여주어 (마치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펠로폰네소스전쟁의 근원의 옳고 그름에 대한 희극적 처치처럼) 최선의 것들을 가르친다. 그래서 그 최선의 것들이 그냥 단순하게 가장 정의로운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그의 적이 클레온인- 클레온은 악과 불의 둘 모두이며(664),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싫어했던 사람이며, 그리고 그들이 지금에는 더욱 더 미워하는 사람인 클레온인- 반면에, 선과 정의는 둘 모두 아리스토파네스의 협력자이다.

 

"구름"의 파라바시스 그 속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 사람들을, 즉 도시를(525-26) 그 자신의 이름으로 비난한다. 그러한 것에 대응하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파라바시스에서는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응답만 하는 것으로 그 자신을 제한하고 있는데; 만일에 그가 그 가운데서 한 명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클레온이다. 이것은 그 이전에 지나간 모든 것들에 따른 것인데(515-16), 특히 디카이오폴리스 역활로서 그가 도시를 이겨 자기의 편으로 만든 사실에 따른 것이다. 그는 도시에 대한 비난을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파라바시스에서 작가의 염려와는 구별되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염려를 말하는 것에 맡기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신과 아카르나이 사람들 사이의 깊은 차이를 드러내고<주5>, 그리고 그러므로 그의 평화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그것에 대한 이해와의 깊은 차이 역시 드러낸다. 그는 너무나 명백히 하였기 때문에 도시는 도시의 한 사람으로서의 그 자신보다 더욱 더 그를 필요로 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 역시 도시에 대해서 대단한 이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들은 지난 시절에 한 봉사를 통한 것들이다: 그들은 늙은 시민들이며, 그리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그들은 두 세대 전에 마라톤에서 싸웠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도시의 무용지물이고, 그리고 도시에 의하여 그에 따라서  취급되고 있다. 디카이오폴리스는 스스로를 돌볼 수가 있지만,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도시에 의존한다. 디카이오폴리스는 단순히 거지 역활을 맡았지만, 그들은 진짜로 거지들이다. 이래서 그들에게 그들에 의하여 드러난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진짜 성격이 디카이오폴리스에 반대한 그들의 행동을 설명한다. 그것이 어째서 그들이 디카이오폴리스가 아닌 도시에 대하여 불평하는지를 아울러 설명한다: 도시는 도시의 최고 시민들을, 즉 가장 나이 많은 시민들을 무시한다. 그들의 무우사란 바로 아카르나이 사람들이고, 그리고 아카르나이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데;  이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무우사는 아니다. 무우사의 효과는 그들에게 가장 입맛 당기는 고기가 마련되었을 때, 부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상기시킨다. 그들은 늙고 굼뜨고 쇠약해 진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젊고 똑똑하고 그리고 법정에서 입심 좋은 연설가의 자비에 매달린 존재가 되는 것을 막아주는 법을 제안한다: 오로지 늙은이는 늙은이에게만, 젊은이는 젊은이에게만 반드시 탄원해야만 하는데; 말하지면 자연적으로 쇠약해진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강하여진 사람들에 대하여 법으로 보호되어야만 하며; 법은 자연적인 불평등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고려하는 것으로 평등함을 세워가야만 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분명히 그들이 스스로의 쇠약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디카이오폴리스의 승리의 영광을 줄이는지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디카이오폴리스와 싸운 것은 그들의 지나간 싸움이었고; 그들의 경멸은 그들의 나이 먹음에 따라 약해져 갔으며; 그들은 젊은이들에 대해 화나지 않았기 때문에 설득당할 수 있었다.

 

연극의 후반부(719-끝)는 디카이오폴리스가 그의 승리나 평화를 어떻게 써 먹느냐를 보여 주는데; 그것을 위해 평화를 추구하였던 결말이 드러난다. 그의 첫 번째 행동은 그의 시골 집 앞에서 적들인 도시들과 장사를 하기 위해 시장을 여는 것이다. 그의 휴전의 불명료함에 의해서 그 시장은 그의 개인 시장이기도 하고, 시장터agora이기도 하다. 그는 확실히 그곳의 소유자처럼 행동한다. 맨 처음 그 시장에 오는 사람은 그의 어린 두 딸을 팔려고 안달하는 메가라 사람인데; 전쟁과 페리클레스의 포고령으로 인하여 그와 그의 두 딸은 굶주려 있다. 아무도 불쌍한 두 딸을 사려고 하지 않아, 그 아버지는 비의에 제물로 쓰일 작은 돼지인 것처럼 팔아 보려 하고; 팔려서 살아 남기 위해 딸들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어린 돼지처럼 행동한다. 그렇지만 디카이오폴리스는 의심이 가는데; 장사꾼이 자루에 넣은 것이 돼지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두 딸이 어린 돼지 소리를 내고, 그리고 어린 돼지라는 그리스 말이 외설적인 중의성을 가지고 있어, 디카이오폴리스는 두 딸을 어린 돼지로 간주하여, 약간의 마늘과 소금을, 즉 평화 시에는 메가라 사람들이 주로 내다 팔던 것들을 주고 바꾸어,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사들인다. 전쟁이 메가라 사람들에게 아내와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어린 딸들조차 약간의 소금과 마늘보다 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그래도 그 두 딸은 어린 돼지로 디카이오폴리스에게 팔리지만, 그냥 메가라에서 아버지와 지낸다면 틀림없이 굶어 죽을 것인 반면에, 그는 그들을 사육하거나 아니면 불쌍한 딸들처럼 데리고 있을 것이다. 이 거래는 첫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그렇게 야만적인 것이 아니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이 명확히 뜻하는 대로, 정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정의는 불명료함에서 벗아나지는 못한다. 메가라 사람은 그의 자식들, 그의 아내, 그의 도시에 대해서 말하는데;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자식들, 그의 아내, 그의 도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는 메가라 사람의 어린 돼지들을 그 자신만을 위해서 사들이고; 그는 그의 사설 시장을 가장 사적인 결말을 위하여 사용한다. 듣는 것과 말이 서로 구별되듯이, 보는 것과 만지는 것으로 들어나는 추상적인 개념에 고마워 하며 거래는 성사된다. 이것은 디카이오폴리스의 맛을 보고 냄세를 맡는 spondai의 중의를 훨씬 더 넘는 것이다. 개인적이면서 어떻게 보면 공공적이기도 해서, 공공에서나 혹 건전하게 말하면 어린 돼지를 뜻하고, 또 외설적으로는 여자의 신체 부위를 의미하는 단어의 중의에 대해, 디카이오폴리스의 개인 휴전의 중의성에 대한 관계를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이 거래는 이방의 적으로부터 들여온 물건들을 몰수하려 하는 감시원이 나타나자 곧 바로 결론이 나는데;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테네는 여전히 메가라와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카이오폴리스는 시장 감독이 쫓아내는 대로 거역하지 않고 쫒겨나면서, 그는 그와 그리고 그의 농장은 더 이상 전쟁 중이 아니라고 그에게 설명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지친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이제 단순한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시장에 앉아서 그가 평화의 열매를 수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그들은 디카이오폴리스의 축복을 외친다. 전쟁의 악덕들로부터 벗어나서 그는 그의 시장에서, 아고라에서, '불의의 변론'이 칭송하고 '정의의 변론'이 비난하는 신식 교습을 받고 나온 학생처럼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의 사설 시장으로써 그가 앉아 있는 그 시장은 합법적인 시장터보다 훨씬 우월한데; 아고라를 더럽히는 불쾌하고 미움받는 패들은 디카이오폴리스의 시장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제 디카이오폴리스의 시장에서 퇴출된 도심<주6>형의 사람들은 나쁜 시인들과 음악가들이다.

 

디카이오폴리스의 시장을 찾는 두 번째 방문자는 하인 하나와 디카이오폴리스에게는 말벌들이 내는 소음을 연상시키는 그런 음악을 하는 조금 질이 떨어지는 피리 연주자들을 함께 데리고 온 테베 사람이다. 테베 사람들은 굶주리지 않는다. 그 테베 사람은 새와 그리고 많은 다른 종류의 짐승들을 팔려고 왔다. 메가라 사람과는 다르게, 그는 결코 디카이오폴리스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823, cf.959). 디카이오폴리스는 희극의 코로스들에게 특히 환영받는다는 어떤 한 종류의 물고기를 보고 특별한 짜릿함을 느끼는데; 그는 그 맛있는 것이 코로스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디카이오폴리스와 그 이방인은 그들의 가족과 도시에 대해 서로 말이 없는데; 이렇게 늘어난 "개인적인 비밀"은 어린 딸들로부터 먹을거리로 옮겨가는 하나의 기능이다. 테베 사람의 물건과 바꾸기 위해 디카이오폴리스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나머지 모두 테베에서는 넘쳐나는 것들이어서 결국은 감시원들 밖에 없다. 따라서 이방의 적들의 물건을 압수하려 하는 감시원 하나가 디카이오폴리스에게 잡혀서 잘 포장된 채 테베 사람에게 넘겨진다. 테베 사람이 가져온 물건들이 메가라 사람이 가져온 것보다 디카이오폴리스에게는 훨씬 더 값진 것들이어서, 테베 사람은 단순한 소금과 마늘이 아니라, 감시원을 산 채로, 뛰어난 감시원을, 아니면 승리와 지휘라는 드높은 이름으로 장식된 것과 똑같은 감시원을, 그것의 매우 높은 대가로 받는다. 아니면 소크라테스가 그와 그의 동료들을 위해 초라한 저녁을 좀도둑질로 마련하였듯, 디카이오폴리스는 속임수로 사치스런 저녁을 그 자신을 위해 마련한 것이라 말해야 하는가? 코로스는 디카이오폴리스의 감시원의 뜻에 반한 행동에 대해 마음으로 용인하면서 따라가는데, 이것이 코로스와 디카이오폴리스 사이의 대화로 이어진다. 대화는 전적으로 포장하는 것, 운반, 그리고 감시원의 용도(그는 더 이상 공공용이 아니어서 특히 개인적인 용도)에 대해서만 다루는데; 대화에서 디카이오폴리스가 테베 사람으로부터 받은 맛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조용하다: 그것들은 코로스용이 아니라 디카이오폴리스용이다. 디카이오폴리스의 결말을 드러내는 진행은 코로스가 메가라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지만, 테베 사람에게는 연설하는 사실로써 밑줄이 그어진다. 이 테베 사람과 메가라 사람은 디카이오폴리스의 시장에 오는 유일한 사람들인데(스파르타 사람들은 오지 않는다); 마치 페르시아와 트라키아 사람들이 아테네 의회를 둘러싸듯 그들이 디카이오폴리스를 둘러싼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극은 과시와 야만적인 이방인들(그리고 그와 같은 종류의 아테네 사람들) 세상에서 평화로운 그리스의 맛있는 먹을거리 장사꾼들(그리고 그들의 아테네 손님들) 세상으로 옮겨 간다.

 

이제 디카이오폴리스의 승리가 정점에 이른다. 그의 주된 적수인 전쟁 애호자 라마코스가 디카이오폴리스에게 그의 하인을 보내 이방의 적이 만든 약간의 맛있는 것을 사고자 한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 요구에 따르는 것을 절대 거절한다: 라마코스는 절대 그 평화에 지분을 가져서는 아니 되는데; 디카이오폴리스는 그 맛있는 것을 자신을 위하여 구입했기 때문이다. 이런 디카이오폴리스의 행동이 아카르나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체 도시에게 디카이오폴리스의 월등한 지혜에 대하여 주목하도록 유도한다: 그의 평화에 감사하, 그는 엄청나게 많은 모든 종류의 좋은 물건들을 팔려고 가지고 있는데; 그런 좋은 물건들은 스스로 온 것들이다. 이것이 한 사람이 기대하는 것이다: 평화는 온갖 좋은 것들을 가져오고, 전쟁은 나쁜 것들을 가져온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말을 건넬 수 있는 모두에게 전쟁의 정당함이나 유용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전쟁에 대해 거짓으로 맹세한다. 그들은 약간의 에로스가 아포로디테와 그라이케 사이의 중매장이로서,아름다운 여인의 화해자로서, 그들을 뭉치게 하리라 바란다. 여전히 그들의 늙은 나이를 의식하면서도 그들은 다시금 젊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들의 전쟁에 대한 열정의 마지막 깜박거림은 그들로 하여금 디카이오폴리스를 처형하자고 이끌었고; 그들의 디카이오폴리스와의 화해를 감사해 하며, 이제 그들은 사랑에 대한 열정의 마지막 깜박거림을 경험하는데; 그럼에도 그들이 그리워하는 그 에로스는 그림으로 그려진 에로스와 닮아 있다. 

 

다음은 술마시기 대회에 참가하는 조상들의 관습에 따라 술통 축제를 즐기라고 떠드는 홍보자 하나가 나타난다. 비록 그 혼자만이 아테네에서 축제를 즐길 수 있는 한 사람이긴 하지만, 이것은 더 이상 디카이오폴리스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는 그의 순서가 되자,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하여 그가 테베 사람으로부터 구입한 물건들과, 그리고 넘겨받은 도구들로, 더 빨리 요리하고 구우라고 그의 사람들을 소리쳐 부른다. 거기에는 또 다시 코로스와 디카이오폴리스 사이의 대화가 따른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그들은 참여하지 않는 지금 그의 잔치보다 더 앞서서, 이제 디카이오폴리스의 지혜 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신기한 요리 기술과 식도락에 대해서 칭찬과 부러움을 표시한다. 그는 그의 기묘한 솜씨를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할 뿐 아니라(326 ff.), 이러한 즐거움으로 도시를 더 선호하게 된다. 그것에 대한 대응으로 디카이오폴리스는 그들이 그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들을 구경하는 이외에 더 나은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의 방문자는 보이오티아 사람들이(그들 중의 한 명에게 디카이오폴리스는 맛있는 음식거리를 샀었다) 그의 주된 생계 수단인 황소를 빼앗아 가 버려 비참한 지경에 있는 농부이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개인적인 평화의 한 방울을 그에게 주는 것으로써 그의 고통을 구제하는 수단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농부임이 분명한 디카이오폴리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나눌 것이 거의 없듯이, 이 진짜 농부에 대해 한 푼의 동정심도 없는데; 그는 거의 라마코스를 다루듯이 그를 나쁘게 다룬다: 그는 "정의가 공공에 봉사하지 않고 있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가 개인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는 모든 점에서 개인으로의 한 명인 그 자신을 위해 그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고; 그는 오직 그 자신만을 구제하며; 그는 그의 평화와 그것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 조각도 주지 않는다. 이제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그에 대해 하는 말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그 혼자서만 즐길 저녁을 마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디카이오폴리스의 되지 않은 이기심에 대해 알게 된다. 그들은 그의 면전에서 그가 그들을 굶겨 죽일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는 대꾸하는 수고조차도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디카이오폴리스의 평화의 작은 조각과 바꾸어 얻기 위하여 결혼식에서 쓸 고기를 가지고 신랑이 보낸 사람이 오는데, 신랑은 군대로 나가는 대신 사랑의 기쁨을 즐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디카이오폴리스는 또 다시 도우기를 거절한다: 그는 그의 평화를 어떤 대등한 것들과도 바꾸거나 팔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는 대등한 것이 아니면 어느 누구에게도 그의 평화의 한 조각도 양도하지 않으려 한다고, 혹 아니면 라마코스와 같은 그런 전쟁 애호가에게는 그의 평화의 어떤 조각도 팔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 그가 그의 평화의 독점을 유지하는 것으로(이것은 어쩐지 "독점의 폭력"이라기보다 문자 그대로 "독점"이다.) 무자비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신랑의 친구와 같이 온 신부의 들러리가 신부의 이름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그 신부가 전쟁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도록 신부에게 평화의 작은 조각을 보내는데, 왜냐하면 여자이므로 전쟁 탓으로 고통받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디카이오폴리스의 이기심은 사랑병에 걸린 여자들에 대한 동정심에 의해서만 괜찮은 것이 된다. 이것은 더 비교할 만한 일이 없어 말없이 있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는 차거운 위안이다.

 

마지막 장면은 두 전령이 무사히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 중 하나는 장군들이 라마코스에게 그가 반드시 보이오티아가 아티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전선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전하도록 보내어졌고, 다른 하나는 디오뉘소스의 사제로부터 디카이오폴리스에게 그가 반드시 축제일을 축하하기 위해  공공의 향연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전하도록 보내어졌다: 모든 것이, 무희를 포함한 다른 소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고; 나열된 매혹적인 것들 가운데 빠져 있는 하나는 포도주 뿐이다. 전쟁 애호가 라마코스는 그가 축제를 즐길 수 없어서 가장 불행한 반면에 디카이오폴리스는 가장 행복하다: 모든 것이 그에게 너무 좋게 되어 갔다. 이 두 적대자들 각각이 경합을 위하여 준비하는데, 한 쪽은 아테네의 적들과의 경합을 위해서, 다른 한 쪽은 술마시기 경합을 위해서이다. 각각은 그들의 하인들에게 필요한 지시들를 내리는데; 디카이오폴리스의 지시는 라마코스의 지시의 패러디이고; 라마코스는 디카이오폴리스의 건방진 조롱에 대해 세 번이나 항의하고; 그는 디카이오폴리스에게 비겁하다며 탈주한 범죄로 다스리겠다고 위협을 하기까지 한다. 디카이오폴리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코로스의 대장이 늙은(1129-30) 아버지 디카이오폴리스가 술마시고 가장 매력적인 소녀와 잠자리에 들려고 떠나가려 하는 것에는 말이 없는 반면에, 라마코스가 적들을 꼼작 못하도록 하고 수비에 임하러 떠나가라는 견지로 라마코스에게만 연설하는 것으로 마라톤 전사들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데; 이리하여 그는 역시 연극의 결말을 향해 자리 잡아 가는 음식의 즐거움에서 마시는 것과 성적인 즐거움으로<주7>,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과는 아무 관계가 필요하지 않는 즐거움에서 다른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관계를 맺는 즐거움으로 뒤바뀌는 것에 더욱 신경을 쓴다. 디카이오폴리스가 절대로 확약을 하지 않는 행실에 관하여 주의를 기울여 본다면, 코로스들이 이제 한 덩어리가 되어 제우스에게, 이 앞의 경우에서 코로스들에게, 저녁을 대접하지 않았던 작가를 망쳐 놓으라고 부탁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코로스가 하는 비방의 내용으로부터 사악한 작가 안티마코스 (그의 이름은 디카이오폴리스에게도 꼭 맞다)가 승마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약간 건전한 예감에 바탕을 둔 코로스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디카이오폴리스에게는 앞으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데; 이제 비극의 전령 하나가 알맞은 때에 알리는 대로 사실 괴롭힘을 당한 쪽은 라마코스이다. 왜냐하면 코로스가 노래하는 동안 라마코스는 적들과 싸웠고, 그리고 디카이오폴리스는 술마시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라마코스는 부상을 당해 돌아왔으며, 아니면 어쨌던 불구자가 되었고, 또한 확실하게 그는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반면에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욕망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기 위해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젊은 소녀와 서로 껴안은 채 돌아온다: 거의 문자 그대로, 전쟁의 영웅과 평화의 영웅으로서, 죽음과 삶이 서로 반대이듯이 서로 반대인 그들을 보여 준다. 코로스는 디카이오폴리스의 승리를 축하하며, 그를 희극들의 심판들에게 데려 가는데, 그는 계속해서 그가 술마시기 대회에서 이겼으며, 그러므로 그는 희극들에 관한 경합에서도 역시 반드시 상을 받아야 한다고 모두들에게 상기시키고; 그는 다시 한번 그가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위대한 희극작가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코로스는 그로부터, 정의로운 한 사람으로부터, 그가 한번도 약속한 적이 없는 저녁 식사에 대한 말은 결국 한마디도 듣지 못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전하려는 뜻은 디카이오폴리스의 이름으로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정의로운 시민이며, 바로 정의로운 도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장 애국적인 시민들인 마라톤의 전사들이 그를 클레온보다 더욱 못된 가장 불의로운 시민이라고 고발한다. 디카이오폴리스가 그의 고발자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올바른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써 그의 정당성을, 정당함에 있어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증명하리라는 생각을 아무도 진지하게 가질 수 없는데; 그가 아카르나이 사람들을 바꾸어 놓아 버린 논점들은 올바른 것들에 대한 희극적 등치물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단지 정치소인배demagog들의 연설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의 불의함은 그가 만든 수사학적인 승리의 용도를 보아도 잘 알게 된다: 바로 그 승리로써 엄격히 오직 자신만을 위해 그것을 즐기기 위해 그는 그의 개인적인 평화를 안전하게 하는데; 그는 도시 뿐만 아니라, 즐거움의 감각들까지도 혼자 즐기기 위하여 그의 가족들까지 배반한다. 연극의 후반부에서 그를 칭송할 때,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도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어떠한 봉사들과도 구별하여, 오로지 엄격하게 그의 개인적인  기쁨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는 '불의의 변론'과 괘를 같이하여 행동한다. 그는 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본성을 활용한다". 그의 "본성으로 돌아감"은 반드시 적절히 이해되어야 한다. 그가 평화에 연연하는 알려진 동기가 성내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화 시에는 그의 땅만으로도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져다 주었던 그런 물건들을 구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동기는 전시에 그가 바라는 이방의 적들에게서 생산된 맛있는 먹을거리들의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어서(36,967); 그래서 그는 그의 즐거움을 높혀 주는 모든 기술들을 전부 활용한다(1015-17). 그의 기술 활용과 식품의 수입은 '불의의 변론'의 추종자로서 그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 그의 불의한 면을 가지고 그가 어떻게 이런 가장 불의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하여, 사람들 중에 가장 정의로운 사람, 그 한 사람은 그가 그의 반대자들에게, 즉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하는 짓을 반드시 심사숙고하여야만 한다. 그가 그의 개인적인 평화를 안전하게 하는 것에 그들이 그를 돕도록 만들던 동안 그는 그 속에 든 어떤 부분도, 그 열매의 어떤 부분도 그들에게 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반역을 처벌하는 것으로 어떠한 이익도 얻어내지 못하였듯이, 그의 행동으로부터도 어떤 이익도 얻어내지 못하는데; 그들이 그를 처벌하는 것으로 스파르타에 대한 복수를 갈망하는 무력함을 만족시키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좋은 시민답게 행동했다고 믿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그를 편들고, 아니면 그의 보호자가 되는 것으로 좋은 시민답게 행동했다고 믿는다. 여전히 그들이 바뀌기 전에는 그들은 증오와 공포에 꽉 차 있었던 반면에, 그후로 그들은 동정심의 대상이다: 디카이오폴리스의 행동을 통하여 그들은 과시하는 것을 멈추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가난과 또한 노쇠함에 대해 정직하게 수긍한다. 그러한 행동을 통해 디카이오폴리스는 더욱 좋아지는 반면에,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정작 그것을 통해서는 더욱 좋아지지는 않지만, 그러나 더욱 착하고(650) 더욱 신사답고 더욱 정의롭다. 이것이 잠시라도 그가 그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을 길들인다는 사실과, 또는, 그들에 따르면, 그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젊은 연설가들이 그들을 다루듯이 그가 그들을 다룬다는(679-80) 사실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아니 되는데;  비록 그의 경우에 그 늙은이들이 그들 스스로가 우스꽝스럽게 되어 가는 것을(442-44) 깨닫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만일 최고의 도리들 속에 정의가 한 사람의 동료 시민을 더욱 착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포함된다면, 그리고 만일 과시가 모든 죄악의 뿌리라 한다면,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이름을 가질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정의로운데, 왜냐하면 도시가 그 구성원들에게 행하라고 하는 것과는 구별하여 정의로운 도시가 행하는 것을- 정의로운 도시 역시 오로지 그 자신만을 돌보며, 혹은 다른 도시들에게 참견하지 않는것을- 그도 행하기 때문이며; 그는 단지 한 부분이 아닌 전체이고; 그는 더 이상 한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도시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도시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대비하여, 그 스스로를 돌볼 수 있고, 그리고 그 자신만을 돌보는 디카이오폴리스가 그 자신만을 돌보는 그 방법으로- 즉 단지 최고의 경지에까지 그 자신을 즐기는 것으로써, 그의 본성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으로- 도시의 가장 커다란 수혜자가 되는데; 이 이유로 그의 희극을 구상하고 그리고 그것을 공들여 만드는 것으로써 희극작가가 최고의 경지에까지 그 자신을 즐겼다는 것을 그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러한 즐김은 반드시 그것 스스로와 교감한다. 희극은 그 어머니가 웃음인데도 웃음을 낳는다. 비록 단순히 정치적이지는 않으나, 희극작가가 즐기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것이고; 그것은 비록 맛있는 것이라해도 음식으로부터 얻어 즐기는 것보다는 성적인 것이나 포도주로부터 얻어 즐기는 것과 방법은 다르나 똑같은 종류의 것이다. 결국 디카이오폴리스가 궁극적으로 돌아가는 즐거움들이란 그것들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과는 달리, 희극로부터 얻는 즐거움의 등치물이다. 이러한 감각의 즐거움들을 갈망하는 흥분으로 그는 그의 동료 시민들을 명랑하게 하고, 살고 싶게 하고, 그래서 평화를 갈망하게 하고(하나의 공동선으로), 정의롭게 한다. (평화가 지금 쓸모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만일의 경우 이것이 그 자신이 정의롭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것은 그의 정의가 그의 인생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cf.357). 이것을 원색적으로 말하자면, "비극은 인생을 녹이지만, 그러나 희극은 인생을 굳세게 만든다."<주8>

 

디카이오폴리스나 소크라테스 이 둘의 생활방식은 '정의의 변론'이나 '불의의 변론' 이 둘이 추천했던 생활방식과 서로 다르다. 겉으로는 앞의 둘은 뒤의 둘 사이에 놓이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은 앞의 둘은 다른 하나의 평면에, 뒤의 둘에 비해 한층 높은 평면에 속한다. 소크라테스식 생활 방식은 단순히 비정치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도시를 능가하는 디카이오폴리스의 것은 도시에 이롭다. 소크라테스는 도시에 반하여 시골뜨기를 도우는데 실패하고; 그는 시골뜨기의 겉옷을 입을 수 없으며; 그는 시골뜨기들과 그 자신 사이에 있는 물을 다리로 이을 수 없고; 그의 자만심은 겸손함으로 변장을 못하게 방해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제력의 화신이고; 디카이오폴리스는 그 반대이다. 그럼에도 디카이오폴리스의 무자제는 보통 사람의 범위 안에 들어 있고<주9>; 그는 아버지 폭행이나 근친상간의 논점을 키우지도 않는다. 

 

누구도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동시대의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하는 단순한 의미를 들어 넘겨 버릴 수 없다: 그것이 유용할 때 평화를 이루라!; 무분별한 살륙자들을 끝장 내고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에 박살내라!; 이것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메시지가 연극의 의미의 단지 작은 한 부분이라는 것을 즉시 더 보태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이 그것의 단순한 의미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면, 한 사람이 요구해야 할 최소한의 것은 이러한 의미들이 작가 자신의 말로써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가 무엇이 도시를 위해 최선인가와, 그리고 특별히 올바른 것들 이 두 가지 모두를 가르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리고 그는 관객들을 웃게 만든다. 진지한 것과 우스꽝스러운 것이 단순히 병립하여 존재하느냐와, 또는 그것들이 함께 종횡으로 짜여져 있느냐와,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 두 가지 요소들 가운데 어느 것이 두드러진 것이냐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특출한 위대함은 그것이 총체적 희극total comedy이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인데; 우스꽝스러운 것은 전편에 걸쳐 있고; 진지한 것은 오로지 우스꽝스러운 것의 옷을 입고 나타나며; 진지한 것들은 우스꽝스러운 것들에 통합되어 있다. 그는 자주 극적인 환상을 망쳐 놓는데, 왜냐하면 극적인 환상을 파괴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희극적 효과를 높히기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희극적 환상만은 파괴는 커녕 손상조차 시키지 않는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그는 특히 라마코스를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패배하는 사람으로 소개하여, 전쟁의 불의함과 어리석음을 징벌한다. 그렇지만 정의로운 사람의 승리와, 그리고 승리한 정의로운 사람인 그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지 않고서, 어떻게 불의의 패배를 우스꽝스러운 방법으로 소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정의로운 사람을 희극의 희극적인 배역으로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고 소개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어려움을 정의로운 사람의 승리를, 혹은 불의의 우스꽝스러움으로부터 다른 종류의 우스꽝스러움에로의 이동으로써 정의에게로의 이동을, 소개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승리한 정의로운 사람은 모든 성적인 즐거움을 즐기는데; 그는 그것들을 솔직하게 즐기고; 그는 그의 즐거움을 솔직하고, 전적으로 억제되지 않은 표현으로 나타내는데; 그는 공공에서 적절하게 (말)할 수 없는 공공의 것들에 대해 (말)하며; 그는 우스꽝스럽게 행동한다. 그는 불의를(클레온, 페리클레스, 등등) 뜬소문이나 중상을 이용하여 징벌하고; 그는 정의를 상스런 말로 칭송하며; 그는 다른 두 가지 종류로, 비극을 패러디하는 것과 신성모독으로, 이러한 종류들의 '의식에서의 불경alschrologia'을 거스르는 거대한 권력들을 패배시킨다. 그는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아 그 자체로 우스꽝스러운 이 네 가지의 '의식에서의 불경alschrologia'을 줄거리의 요구에 따라 적절히 구사한다. 예를 들면 "구름"의 줄거리는 신성모독을 비극을 패러디하거나, 상소리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요구하는 데 반해, 그 반대는 분명히 진짜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다. 단순하면서 진지한 의미로 그것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병행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리고 복잡한 의미는 우스꽝스러운 것을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즉 희극작가를 따라서 모방할 때 들려 온다.

 

 

 

<주2> "개구리들" 959,9<주1> 493; cf. 플라톤, '라케스' 185a1-2

76-77,1021-27,1040,1063-64.

<주3> 투키디데스는 라마코스에 대해 그의 전쟁의 기원에 대해 그리고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초연된 시기을 포함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주4> Cf. 87,109, 135, 373, 605.

<주5> "아카르나이 사람들"에는, 코러스가 코러스의 관심과 작가의 관심 사이에서 커다란 일치를 들어내는 "구름"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에 병행하는 것이 없다.

<주6> 아고라agora에 대한 세 가지 언급과 836-59에 있는 세 가지의 적절한 이름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주7> 1000-2 그리고 1003-17 사이의 대비를 계속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라. "개구리" 739-40을 반대 편, 그 연극에서 결정타, 디오뉘소스와 헤라클레스 사이, 등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라.

<주8> Cf. 카이벨Kaibel, '그리스 희극배우들에 대한 단편들' p.141b 1.48-50; ibid.,p.66 1.13

<주9> Cf. "구름" 1089-94에서 희극작가에 대한 묵언. 괴테도 '작가와 예언자"로 적절하게 해설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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