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草)

11. 도시의 자유 (1)

병든소 2019. 3. 30. 23:14

11. 도시의 자유自由(1)

 

11.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도시의 정의를 놓고 벌어진 시인과 철학자 간의 불화는1 대代를 이어 벌어진 헬라스의 내전2보다 더 오래오래 천년만년을 두고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재판정에서 안티스테네스가 바라는 대로 10년 전에 죽은 소크라테스의 신원伸寃이 풀리고 그래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와 철학자 소크라테스 사이의 불화가 사라진다 해도, 그리고 또 오늘 이 재판에서 10년 전 소크라테스에게 저기 선 아뉘토스보다 더 무서운 고발자로 찍혔던 이 아리스토파네스 역시 죄가 없다며 풀려나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와 시인 사이의 불화 역시 풀린다 해도, 그것으로 소크라테스와 이 아리스토파네스의 불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인과 철학자 사이의 불화가 해소되는 유일한 길은 시인이 철학자가 되고 철학자가 시인이 되어 도시를 정의롭게 하므로써 도시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소크라테스가 시를 쓰고 싶어 했던 것도3, 죽음을 앞둔 제가 프락사고라나 크레뮐로스의 경우를 통해 도시와 도시민을 구원하는 길을 찾기 위해 나섰던 것도, 그것이 불화를 해소하고 도시를 정의롭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모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철학을 시로 남기지 못했듯이 저의 프락사고라와 크레뮐로스 역시 그들의 길이 도시를 구원하는 길이라는4 확신을 여러분께 심어주지 못한 듯 보입니다. 불의한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철학자가 도시민의 윤리를 말하고 시인이 도시의 정의를 말했지만, 아테나이 시민인 여러분이 그 누구의 말에도 귀기울이지 않는 사이, 도시민 사이에 돈과 권력의 불평등이라는 골은 점점 더 깊어져서 아테나이라는 우리 모두의 공동체는 이제 더 이상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잘 사는 고른 삶의 터전이5 되지 못하고, 오로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이 돈 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의 불복과 불화를 무자비하게 억누르며, 없는 사람들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다구치는 없는 사람들의 노역장으로 바뀌어 왔습니다. 이런 불의한 도시에 소크라테스가 오늘의 이 재판으로 다시 돌아올 수는 있겠지만, 디오뉘소스가 하데스에서 시인 아이스퀼로스를 데려왔어도6 이 도시를 구원할 수 없었듯이 하데스로부터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해서 헌옷 입은 안티스테네스나 대대로 잘 사는 플라톤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오만과 탐욕을 위한 없는 사람의 노역장이 아니라,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잘 사는 고른 삶의 터전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나서지 않을 것은7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가 도시의 정치 지도자로 나서서 도시의 정의를 구현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한 도시민이 잘사는 크레뮐로스의 세상으로 바꿈으로써, 더 이상 시인들이 도시가 불의하며, 도시가 불의한 것이 돈과 권력의 오만과 탐욕이 부리는 힘이 불의하기 때문이며,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한 도시민이 그런 불의를 거부하고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노래 부르지 않아도 좋은 날이 오기를 천 년을 또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천 년이 지나 그날이 오면 바로 그날로 시인과 철학자의 불화는 사라지고 말겠지요. 그러므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저는 지금부터 이 천 년을 또 기다리고 드디어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가 정치를 맡아 도시의 정의를 구현하는 때를 맞이하기 위해,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도시가 없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지켜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지켜서 지니고 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11.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테세우스가 널리 헬라스에8 사는 같은 신을9 믿고 같은 말을10 하는 사람을 모아 세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안타깝게도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의 여러 도시 전체를11 하나로 아우르지 못했습니다. 테세우스가 아티케의 여기저기에 흩으져 있던 이온의 마을들을 하나로 엮어 아테나이라는 도시로 새롭게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을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안전과 자유를 찾아다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세우스 이전의 이온의 마을들은 막강한 크레테의 침공을 막는다고 막았지만 결국 더 이상 싸울 힘이 없게 되었고, 그래서 강화를 조건으로 인질 조공을 바쳐야 하는 처지에 빠진 데다가12, 산적들에13 둘러싸여 다른 도시와의 왕래가 어려운 지경이었음에도 그 산적들을 소탕할 힘이 없어 마을들이 도시를 이루지 못하고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이런 이온의 마을들을 위해 테세우스가 그 산적들을 소탕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인질이 되어 크레테로 가서 크레테와의 관계를 인질 조공에서 호혜 평등의 우호적인 관계로 바꾸었고, 이로써 이온의 도시가 안전하고 자유로운 도시로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전과 자유를 찾은 이온의 마을들이 모여 아테나이라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오랜 질곡과 공포 속에 갇혀 불안정하고 침체된 그 도시를 활짝 열고 아테나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열린 아테나이는 헬라스 세계의 여러 도시와 지역에서 전쟁과 내분과 억압을 피해 안전하고 자유로운 곳으로 옮겨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모두 오라며, 오는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면서 그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와 함께 오는 그들의 부와 재능을 받아들였습니다. 진정 포악한 권력자가 아닌 한, 도시의 권력자가 도시민의 안전을 위협하여 복종을 요구하고 자유를 빼앗는 횡포가 테세우스 시대의 헬라스 세계에서 쉽게 또 자주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울러 도시의 권력자가 도시와 도시민의 소유자인 양 군림하는 것 역시 예사로운 권력 행사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지만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는 도시민이 권력자에게 보이는 복종에 대한 권력자가 내리는 대가이자 시혜였지, 도시의 의무이자 도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라는 믿음까지는 아직 없었을 때, 이런 시대에 테세우스의 아테나이는 달랐습니다. 테세우스의 아테나이는 헬라스 세계의 모든 도시민들에게 아테나이의 이름으로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한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해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것이 도시가 할 일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테세우스의 이 선언은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를 헬라스 세계의 도시들에게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최절정의 전성기를 누리던 뮈케나이도15, 크노소스의 영광 미노아도, 헤라클레스의 테바이도, 프리아모스의 트로이아도, 그 어느 이오니아의 도시들도, 그 어느 헬라스 세계의 도시들도, 그 어느 이어족들의 도시들도, 우리의 도시는 안전한 자유의 도시라고, 그러니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면 모두 다 우리의 도시로 오라고 선언하지 못했습니다. 테세우스의 도시 아테나이는 안전한 자유의 도시였습니다. 안전과 자유의 도시라는 전통과 긍지는 아테나이를 언제나 헬라스 세계 아니 전 세계에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명예롭게 할 것이었습니다. 그 어느 도시도 아테나이의 안전을 위협할 수 없을 것이었으며, 아테나이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행동이 존중되는 완전한 자유의 도시일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가 지켜지는 한 아테나이는 헬라스 세계의 다른 도시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지하고 존중할 것이었습니다.

 

11.3. 그렇게 언제까지나 안전한 자유의 도시여야 할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가 처음 흔들린 것은 단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왕위도 마다했던 테세우스가 아테나이에서 쫓겨나야 했을 때였습니다.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는 먼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가 돈과 권력의 오만과 탐욕이 부리는 힘 때문에 손상을 입으면서 흔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테세우스의 민주적 귀족정 체제는 테세우스로 인해 생긴 새로운 귀족들이 주축이 되었고, 이들은 아직 땅을 갖지 못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테세우스 이전까지 새로운 귀족이었지만 이미 땅을 가지고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같은 에렉테우스의16 후손들 가운데 메네스테우스가17 땅도 뿌리도 없는 테세우스의 새로운 귀족들의 득세에 반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메네스테우스는 테세우스의 아테나이에 새로운 귀족들이 두각을 나타내자, 권력에서 소외된 예전 귀족들의 불복과 불화를 자극하여 그들끼리 모이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일반 시민들에게는 안전과 자유에 새로운 지위까지 얻은 것 같지만 사실 다른 도시에서 굴러들어온 포악한 이주자들에게 도시와 신전을 빼앗겨 오히려 학대를 받고 있다며 선동하여18, 먼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에 손상을 입힌 다음, 다른 도시를19 사주하여 흔들리는 아테나이를 치도록 해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손상시키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시 안에서 도시민 간에 무력 충돌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도시라는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극한적인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메네스테우스가 기여코 왕정을 복고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메네스테우스를 도운 스파르테의 튄다레오스가 아테나이에게 그 옛날 인질을 요구하던 크레테처럼 굴지 않아서 도시의 자유는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귀족들 간의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과 불복 때문에, 그리고 헤라클레스의 후손들과 도리에이스에 밀려난 뮈케나이의 아카이오이 왕족들의 이주 때문에, 아테나이의 정치 체제는 그후로도 왕가의 교체와 왕정에서 귀족정으로 번갈아 바뀌어지기도 했고20, 자신의 안전과 자유를 바라는 도시민들의 요구와 귀족들의 돈과 권력에 대한 오만과 탐욕이 서로를 견제하여 서로 간에 균형이 이루어졌고, 이런 와중에 안타깝게 아테나이에서 처음 꽃 피운 테세우스의 민주적인 가치는 그 빛을 잃고 말았지만, 점차 소수 귀족들의 과두정 체제로 정치적인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아테나이는 어렵사리 그 긴 세월21 동안 도시민과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었지요.22

 

11.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테세우스의 아테나이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도시민과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갔던 것과는 달리, 당시 최고의 도시 아가멤논의 뮈케네는 궁정의 분란이 점점 더 심해져서 자멸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결국 트로이아를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십 년이 넘는 오랜 전쟁으로 뮈케네의 궁정을 비운 사이23, 아가멤논이 칼을 드느라 궁정에 놓고 온 백성을 이끄는 목자의 지팡이가 찬탈을 꿈꾸는 음모자의 요술 지팡이로 변해 있었고, 그는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이자 찬탈자인 아이기스토스의 칼에 죽어야 했으며, 어린 아들 오레스테스는 누이 엘렉트라와 작별도 못한 채 어머니를 피해 황급히 도망쳐야 했고, 시정에 숨어 성장한 오레스테스는 누이 엘렉트라의 도움으로 찬탈자와 어머니를 죽이고 뮈케나이의 왕이 되었지만, 어머니를 죽인 죄책감으로 정신병에 걸려 누이 엘렉트라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도 결국 왕위를 잃고, 어머니를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자 아테나이로 도망쳐 와야 했습니다.24 이렇게 시작된 아가멤논 일가와 뮈케나이 왕국 몰락의 비극은 어느 비극시인 하나 무대에 올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그 어느 비극시인 하나도 도시를 잃고 자신의 안전과 자유를 잃은 뮈케나이 왕국의 아카이오이 사람들이 겪은 참혹한 비극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25 왕을 죽이자 궁정의 질서가 흔들렸고, 도시가 할 일을 제 때 못했고, 생산과 분배가 갈팡질팡했고26, 도시의 경제가 무너져가자 도시에서 법과 질서가 사라져갔고, 도시가 무뢰배들의 난장판으로 변했고, 도시민은 생계의 안전과 자유를 잃었고, 수시로 그리고 예사로이 생명을 위협당하였습니다. 이제 도시민은 그들이 바치던 근면과 복종의 대가로 왕이 기꺼이 베풀던 생계의 안전과 자유를 그들 스스로가 생명을 걸고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엎쳐진 도시민의 형편에 신들마져 가뭄으로, 역병으로, 지진으로, 무뢰배들이나 비적들보다 더 끔찍히 그들을 덮쳤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여물지 않아 거둘 수 없었고, 여물어도 거두기 전에 빼앗기기 예사여서, 사람들이 농경지와 마을을 버리고 유리걸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무뢰배가 되기도 했고, 그렇게 무뢰배가 된 사람들이 모여 비적이 되었고, 비적들도 근거지로 삼을 마땅한 곳이 없었고, 결국 바닷사람이27 되려 떠나며 이 마을 저 마을 파괴하며 분탕질이나 해댔고, 그래서 또 다른 유맹이 생겼고, 그렇게 유리걸식하는 유맹과 비적이 되는 유맹이 늘어갈수록 도시가 없어졌고, 도시를 이루던 마을들은 작아지고 적어졌고, 무엇보다 모진 시련을 견디며 마을을 지킨 사람들이 가난해졌습니다. 작아지고 적어지고 가난해진 마을이라 해도 부자나 권력자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28, 그래도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모여 사는 마을은 어차피 모두가 가난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을 모아 근면과 복종의 대가로 생계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할 강력한 지도자도 없어, 대부분 평등하게 같이 상의하며 지냈고, 설사 누구에게 권력이 있었다 해도 결코 오만하고 탐욕적일 수 없었습니다. 적은 수의 작은 마을 사람들이 가난하게나마 정착하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유리걸식하는 유맹과 비적이 된 유맹들과 가뭄과 역병과 지진으로부터 스스로는 물론 마을 전체가 함께 생계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마을을 버린 유맹은 한 마을을 노략질하기 위해 목숨을 걸기보다 다른 마을로 가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었지만, 살기 위해 마을을 지킨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마을을 지키는 길 하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스스로와 마을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건 그들은 스스로는 물론 마을의 안전과 자유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적은 수의 작은 마을들이 조금씩 조금씩 다시 도시를 이루었습니다. 유리걸식하던 유맹이 양과 염소를 키우는 도시의 유목자가 되었고, 그렇게 몇 마리의 염소와 양을 데리고 떠돌다가 경작하기 좋은 땅이라도 만나면 정착하기도 하면서 도시의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고, 바다를 안식처로 삼았던 사람들도 조금씩 예전처럼 교역에 나서 새로운 문물을29 도시에 들여왔습니다. 그렇게 백 년 이백 년이 지나 헬라스의 세계가 암흑을 뚫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암흑의 시대에 스스로와 마을의 안전과 자유를 지킨 사람들이 도시민과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마땅함을 헬라스 세계의 정신으로 밝힌 것입니다.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는 도시에 바친 도시민의 근면과 복종의 대가가 아니라, 마땅히 스스로 지켜내어 얻은 것이며, 그것이 도시의 권능에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도시민의 긍지로부터 나온다고 온 세상에 밝힌 것입니다. 이제 도시민은 스스로 얻은 안전과 자유를 다시는 잃는 일이 없도록  그가 이룬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자신의 그것처럼 지킬 것이었습니다.

 

11.5. 그런 까닭에 그 긴 암흑시대를 지나 헬라스 세계가 다시금 활기를 찾았을 때 헬라스 세계의 도시들은 미노아나 뮈케나이 시대의 도시들과 완전히 다른 성격의 도시들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뮈케나이 시대에도 강력했었지만 뮈케나이의 붕괴와 함께 도시의 붕괴를 피할 수 없었던 스파르테의 새로운 변신이 이 모든 변화의 과정과 성격을 스파르테식으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암흑시대를 이겨낸 스파르테의 변신은 헬라스 세계의 그 어느 도시도 감히 흉내낼 수 없었던 너무나 독특한, 그야말로 스파르테식이었습니다. 본디 라코니케Lakonike 지역에는 렐렉스Lelex가 처음 왕이 되어 선주민들을 다스리게 되면서 선주민들에게는 처음으로 렐렉스의 사람들이란 뜻의 렐레게스Leleges라는 이름이 붙었었고, 그의 손자 에우로타스Eurotas의 아들이 없어 딸 스파르테Sparte와 결혼한 라케다이몬Lakedaemon이 왕위를 이어간 이후 지금까지 그가 다스리게 된 지역을 라케다이몬,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라케다이몬 사람, 그들의 도시는 그의 아내의 이름을 붙여 스파르테라30 부르는 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이 라케다이몬과 스파르테의 후손들이31 페르세우스가 세운 뮈케나이 왕국의 일원으로 같이 번창하다 같이 망하자, 주인이 없어진 뮈케나이 왕국의 여러 곳에 스스로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32 일컫는 사람들이 도리에이스33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와 이리저리 분탕질하다 바닷사람이 되기 위해 떠나거나, 혹은 주저앉아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기도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라코니케에 들어온 사람들이 훗날 세운 나라가 지금의 스파르테라는 것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라코니케에 정착한 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는 사람들은, 본디 그들의 땅을 되찾는 것이라 했기 때문인지, 라코니케와 그 중심 도시를 그대로 라케다이몬과 스파르테로 불렀지만, 그들이 도시를 이끌어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그들 앞에 있었던 라케다이몬의 후손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라코니케가 그들의 옛 땅이라며 찾아온 이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희한하게도, 그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옛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큰 반발 없이34, 그들뿐만 아니라 데리고 온 도리에이스 사람들까지도 정착시켰고, 오히려 그들이 그런 마을들의 수장이 되어 마을들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에 정착촌을 이루며 한동안 서로 잘지냈으나,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곳에 정착한 무리들로부터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위협받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도시들을 치러 나섰고35, 도시 간의 싸움에서 이기기도 하고 전리품을 챙기기도 하자 전쟁을 주도하는 자리를 둘러싼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 발동했고,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가 전쟁을 주도한 그들로부터 나온 것이라며 오만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삐어져나온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과 오만은 이제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흔들었습니다.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는 사람들이 처음은 그들끼리, 나중에는 그곳에 오래 살고 있었던 옛 라케다이몬 사람들까지 끼워넣어, 극심한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다툼은 오랫동안36 지속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암흑을 깨고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찾아가고 있을 때, 땅과 권력을 두고 벌이는 이들의 거친 싸움은 그들이 사는 곳을 무법 천지로 만들었고, 마지막 남은 두 세력이 균형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에 대해 더는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남은 두 세력이 따로 따로 스파르테의 왕을 내는 바로 아기스Agis와 에우뤼폰Eurypon의 세력이었습니다.37 이 두 세력의 다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올 만큼 치열하여, 이 두 세력이 각자 한 명의 왕을 내어 두 명의 왕이 도시를 다스리기로 하고도, 스파르테는 서로 간의 견제와 탐욕적인 경쟁으로 내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력을 펼치기 위해 더 많은 도리에이스 사람들을 불러 정착시키다 보니 라코니케 바깥의 땅까지 넘보게 되었고, 라코니케 주변을 정복해야 했고, 정복하여 굴복시키니 불복과 반발을 막아야 했고, 이리하여 도시는 칼을 든 전사들의 독무대가 되었고, 독무대에 오르고 보니 칼을 든 전사들끼리의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도드라져 보이기 시작했고, 칼을 든 전사들의 불평등에 대한 앙앙불락 앞에 도시를 다스리는 제대로 된 법과 제도가 자리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38 칼을 든 전사들이 도시의 주인이었고, 이들이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책임졌기 때문에 그들이 법과 제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지친 두 세력 간의 힘이 조금씩 안정되어 갔고, 도시가 소강小康을 이루자 칼을 든 전사들에게도 도시의 질서를 잡는 법과 제도가 필요해졌습니다.39 천금 같은 소강을 허비하고 다시 전사들의 칼이 도시를  밤낮으로 헤적이기 시작한다면 스파르테에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 누구의 눈에도 틀림없어 보였을 때, 도시의 전사들은 헤라클레스의 후손 뤼쿠르고스에게 스파르테에 법과 제도를 만들어 도시를 평화롭게 하는 일을 일임했습니다.

 

11.6. 그리하여 그 법은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담보하는 법이어야 했고, 그 법으로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책임지는 전사들은 모두 자유시민이자 동등同等인이어야40 했으며, 그들의 도시는 그들이 이루고 지킨 도시여서 그 법으로 그들이 주인이어야 했으며, 그들이 도시의 주인이므로 그 법 아래 왕은 도시의 권력자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책임을 신들과 세상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대표자이자 전쟁과 같은 단합된 행동이 필요할 때의 지휘자일 뿐이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평상시의 도시 일은 다수의 게론테스들이41 돌보고, 특히 도시의 안전과 자유에 관한 문제는 동등인 모두가 모이는 아펠라에서42 결정하여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사이므로 오로지 그 법과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일에만 종사할 뿐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생계를 위한 땅을 동등하게 나누어야 할 것이었고43, 비록 그렇게 땅을 나누어 받는다 해도 그 땅에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용할 생활용품을 만들거나 구해서 파는 사람들도 따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도시를 다스리고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책임질 동등 자유시민과, 도시의 양식糧食 생산을 책임질 농부와, 나머지 생필품 조달을 책임질 상인과 공장工匠, 이 세 부류가 도시를 이끌고 떠받칠 것이었습니다. 도시를 있게 하는 데 안전과 자유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양식을 얻는 일이어서, 마치 전사이자 도시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도시의 일에만 매달리듯이, 이 중요한 일을 농부들에게 맡겨 오로지 농사 일에만 매달리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농부들에 대한 관리를 그 땅의 주인인 스파르테의 동등인에게 일차적으로 맡기되, 궁극적으로는 도시 전체의 필요에 따라 도시가 전체 농부들을 관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런 농사 일은 도리에이스 사람들의 정착 시기에 정복의 부산물로 새롭게 생겼던 헤일로타이라는44 신분의 사람들이 맡아 왔던 만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그들이 맡아 갈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들 헤일로타이 신분은 헬라스에서 다른 비슷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 것인 만큼 차제에 그들의 신분도 확실히 정하고, 스파르테 시민과 스파르테가 그들을 관리하는 기준도 마련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주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가나 산골 같은 변두리에 살면서 정치에는 나서지 못하지만 그밖의 생활은 어느 정도 자유를 가지고 있어 라케다이몬 사람으로 인정받아 땅도 가지는 페리오이코이라는45 신분의 상인이나 공장들과는 달리, 다른 헬라스 도시들이 농사 일을 맡긴 노예들을 아테나이 사람이나 다른 도시 사람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그들은 스파르테 시민이 아닌 것은 물론 라케다이몬 사람이 아니며, 독특하게도 스파르테라는 도시가 소유한 노예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가 소유한 노예도 아닌 신분으로, 경작지 안에 살면서 전문으로 농사를 짓다가 때로 도시의 부름에 따라 노역이나 병역도46 수행하는, 독립된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로 신분을 정하고, 얼핏 이들이 다른 헬라스 도시의 소작농처럼 보여 이들을 소작농이라 부른다 해도 보통 헬라스의 소작농들이 지주들에게 소작료로 내는 소출의 1/647이 아니라, 지주인 도시나 동등인에게 내는 세는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정해진 양의 곡식만48 내도록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부들이 내는 곡물로 먹고 사는 전사들은 그것으로 사치하고 호화롭게 살 것이 아니라, 농민들보다 더 맛없는 밥을 먹으며 근검하게 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사들은 평소에도 전쟁에 나가 먹는 병영의 밥처럼 공동식사를49 하고, 어린 자식들은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전사로 키우기 위해 혹독히 훈련50시킬 것이었습니다.

 

11.7. 그리고 뤼쿠르고스가51 델포이로 가서 자신이 스파르테의 전사들로부터 일임받은 일에 대한 아폴론의 축복을 받고 돌아와 스파르테를 변신시키기 위해 펼친 법과 제도가 요즘도 우리가 말하는 바로 그 '메갈레 레트라'였습니다.52 뤼쿠르고스는 스파르테라는 도시의 평화를 위해 모든 시민 사이가 평등해야 하며, 그리고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도시와 모든 시민이 군사적으로 적합해야 하며, 그리고 도시의 정의를 위해 도시와 모든 시민이 근검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것이 스파르테라는 도시의 영혼으로53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시의 모든 법과 제도를 바꾸고 또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 뤼쿠르고스의 '메갈레 레트라'는 지금까지도 훌륭하게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며 도시의 평화와 정의가 스파르테에 살아 숨쉬게 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메갈레 레트라'는 암흑시대를 뚫고 나온 스파르테 사람들의 긍지와 신념이 스파르테라는 도시에 불어넣은 그들만의 특별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언제나 스파르테식이라고들 하지요. 스파르테의 영혼이 된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도시의 평화와 정의 그리고 도시의 안전과 자유에 관한 한 우리는 스파르테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도시의 안전과 자유가 몇몇 권력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도시를 지키고자 하는 도시민에 의해 지켜진 것이라는 긍지와 신념은 암흑시대를 뚫고 살아남은 전체 헬라스 사람들 모두의 깨우침이었고, 아울러 그 긍지와 신념이 헬라스 사람들에게 모든 도시민은 평등하다는 깨우침을 불러일으켰는데, 스파르테는 그 가운데서 도시민 간의 부와 권력의 평등을 가장 군더더기 없이 펼친 아주 특이한 도시였습니다.

 

11.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가 누구이든 마주하여 숙연해 하지 않는 사람을 보기 힘든 스파르테라는 도시의 영혼에 대해 잠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 다시 화제를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로 돌려야겠습니다. 그렇게 스파르테가 온갖 풍상을 겪고, 전사들이 스파르테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갖은 고초를 견디며, '메갈레 레트라'라는 도시의 영혼을 만들어 가는 동안,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 역시 어둡고 힘든 긴 세월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다행스럽게도, 단 한 번 있었던 거친 도리에이스의 침략을 어렵사리 막아낸54 이후 어느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았고, 견디지 못해 고향을 등지고 유맹으로 전락해야 할 만큼 혹독한 지진이나 가뭄이나 역병 같은 신들의 분노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우리의 도시만이 누린 행운이었지요. 물론 아테나이가 부를 쌓을 비옥하고 넓은 땅을 가졌던 게 아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는 스파르테보다 강성하지 못했습니다. 스파르테 사람들이 권력의 선출과55 토지의 재분배와 생활의 검소함으로 도시민 간에 권력과 부의 평등을 이루고, 이웃 멧세니아를 스무 해에 걸친 전쟁 끝에 평정하여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확보하고, 펠로폰네소스는 물론 헬라스 최강의 도시로 부상하는 동안, 아테나이 사람들은 다른 도시 사람들의 침입이나 신들이 보낸 천재지변의 혼란 대신 도시의 권력과 돈이 몇몇 가문에게만 쏠리는 극심한 불평등의 혼란을 겪어야 했고, 그런 혼란의 끝에 결국은 도시를 참주에게 넘겨주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전사들의 세상인 스파르테야 말로 극심한 땅과 권력 다툼 끝에 일사불란한 참주의 도시가 되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들은 왕보다도, 그것도 둘이나 인정하면서도, 실제 모든 전사들의 합의 아래 땅을 재분배하고 권력을 투표로 선출된 사람들이 행사하도록 하는 땅과 권력의 평등을 이루어낸 반면, 테세우스의 아테나이는 귀족정이 가졌던 민주적 색채를 점점 잃어 세습적 귀족들이 오만과 탐욕으로 돈과 권력을 과점하면서 파놓은 극심한 돈과 권력의 불평등의 골을 메우지 못해 터져나온 불화와 불복을 같은 도시 사람들의 몽둥이와 다른 도시 사람들의 칼로 다스리는 참주가 도시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세운 칼을 든 전사의 도시 스파르테의 불평등 대처 과정은 칼을 든 전사의 힘이 아니라 그 전사들의 생각으로 돈과 권력의 평등을 이룬 것이었던데 반해, 테세우스가 세운 민주적 시민의 도시 아테나이의 불평등 대처 과정은 도시민의 생각이 아니라 몽둥이와 칼의 힘으로 참주가 돈과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불평등을 완성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테의 평등화 과정은 이미 말씀드렸고, 아테나이의 독점화 과정도 이미 수차례 말씀드려온 터라56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만, 그 대신 부와 권력의 독점화 과정에서 눈에 띄는 다른 도시의 힘을 빌리는 대목만은 앞으로 전개될 도시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 반드시 여기서 한번 드러내어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중대한 문제라,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에서부터 도시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펼쳐보려 합니다.

 

11.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저는 지금부터 여러분께 아테나이에서,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파놓은 도시민 사이의 깊은 골이 이미 노예가 되었거나 지주에게 예속되어 곧 노예로 전락할 병들고 가난한 자유민의 불화와 불복으로 메워지기 시작했을 때, 다시 말해 가난한 자유민이 돈 때문에 노예로 전락하는 판에, 돈과 권력을 움켜쥔 사람들이 그들은 그들대로 더 많은 돈과 권력을 놓고 피를 흘리며 다투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들 가운데 하나인 퀼론이, 돈이 없어 노예로 전락하는 아테나이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갖기 위해 참주가 되어야겠다며 장인丈人인 메가라의 참주 테아게네스의 군대를 아테나이로 불러들였다 죽임을 당하고, 그의 기도를 분쇄하고 그에게 죽음을 준 그의 정적이자 당시의 '대표 아르콘'이었던57 메가클레스 역시 퀼론을 죽이는 과정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이유로 아테나이에서 쫓겨나는, 결과적으로 내전에 가까운 분란이 아테나이에서 또 다시 일어났던 일에 대한 것입니다.58 이 퀼론의 무모한 반정 시도는 아테나이가 겨우겨우 막아오고 있던 극단적인 불화와 불복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만들었고, 과두정을 이끌어 오던 정치 세력 알크마이온 집안을 저주를 받았다는 이유로 퀼론의 집안과 함께 축출하는 바람에 더 이상 메가라의 추궁을 피해 도시의 자유는 지킬 수 있었지만, 두 세력의 몰락으로 정치 세력들 간의 균형까지 무너지자 도시의 평화가 깨어지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지게 되었습니다. 불안해진 시민들이 엄격한 법으로 도시의 소란을 가라앉히길 바라자 드라콘은 여러분이 지금도 '피로 쓴 법'이라 부르는 드라콘법을 새로 만들어 눌러보았지만59 가혹한 처벌만으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은 불문가지, 결국 아테나이는 솔론에게 왕이 되어서라도 아테나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지요. 스파르테의 법이나 뤼쿠르고스의 개혁을 모를 리 없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그 스파르테의 일을 자기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솔론에게 도시를 바꾸어 달라고 한 것은, 아테나이도 스파르테처럼 도시민 간에 피를 흘리지 않고 서로 좋은 말로 돈과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솔론이 그 일을 맡아 달라고 한 것 아니었겠습니까?60 그러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솔론이 보는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 달랐습니다. 그 어려운 암흑의 시대를 헤쳐오는 동안, 헤라클레스의 후손들과 도리에이스의 스파르테는 전사 하나 하나가 도시의 주인이었고, 도시를 지킨 주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도시를 살린 주역이었고, 그래서 모두가 도시의 주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서로 간에 돈과 권력의 불평등 때문에 다툴 일이 생기자 목숨을 걸고 서로 다투기보다는 불평등을 해소하여 같은 시민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땅과 권력을 재분배하자는 뤼쿠르고스의 요청에 선뜻 자기의 땅과 권력을 스파르테에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암흑의 시대를 헤쳐오는 동안,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면 모두 같은 시민이던 테세우스의 아테나이는, 이렇다 할 외적의 침입도 없었고 힘들긴 했어도 용케 잘 견디어 왔으므로, 모두가 도시의 주인이자 도시 일의 주역이 되어 도시를 더욱 민주적으로 서로 간에 부와 권력이 평등하도록 도시를 지켜냈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저 오랜 어려운 시대를 견디다 보니 빚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고, 그냥 꾸어줄 수 없으니 땅이라도 잡아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땅으로라도 빚을 갚아야 하게 되고, 땅으로 빚은 받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그 땅을 부치게 해주었고, 남의 땅을 부치니 그 땅에 예속되어 소작농이 되고, 그냥도 견디기 힘든데 소작료까지 내니 더 먹고 살기 힘들어서 또 빚을 내어야 하고, 더 맡길 게 없으니 몸을 맡기고서라도 빚을 내어 견디다 노예가 되어 갔고, 이렇게 돈과 권력이 소수의 귀족들에게 모이는 일이 워낙 오랜 기간 동안에 진행되다 보니, 땅이 더 생긴 사람도, 땅이 없어져서 노예로까지 전락한 사람도, 어느 하나 네 탓이라고 서로 손가락질할 수 없이 자연스러위져서, 소수의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도시 일의 주역이 되고 도시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어려운 때를 지나며, 땅을 잡고 돈을 꾸어주는 대신 누구 하나 곳간을 열어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지 않았습니다. 빚과 가난을 피하다 많은 아테나이의 자유민들이 다른 도시를 떠돌며 노예 생활을 하는데도 말입니다.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같은 시민의 어려움을 힘을 모아 돌보기는커녕 높은 이자를 붙이고 심지어 같은 시민의 몸까지 잡아도 도시의 주인을 그럴 수는 없다고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헬라스의 많은 도시들이, 특히 스파르테는, 그 어려운 암흑의 시대를 거치며 모두가 도시의 주인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모두가 주인이던 테세우스의 아테나이만 그 어려운 암흑의 시대를, 그것도 헬라스의 그 어느 도시보다 쉽게 견뎠으면서, 도시의 주인이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로 바뀌어 있었습니다.61 그래서 솔론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극심한 돈과 권력의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도시의 붕괴를 가져오고, 도시의 붕괴는 바로 돈과 권력을 독점한 사람들의 붕괴를 말하는 것이니,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며 땅과 권력을 재분배해야겠으니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라 한들 누구 눈 하나 깜짝할 사람 없을 것이라고요. 물론 땅 없는 사람들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며 부자들의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 고루 나누자고 불쑥불쑥 대드는 걸 모르지 않아, 모두들 자기에게 그들을 달래어 줄 것을 바라고 있지만, 막상 땅을 재분배 하자며 땅을 내놓으라고 요청하면, 당장에, 이래도 빼앗기고 저래도 빼앗길 것 같으면 죽고 살기로 막아 보고 빼앗기겠다며, 남은 알크마이온 사람들을 백주 대낮에 죽이고 나선 퀼론 집안 사람들처럼, 오히려 칼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올 사람들이란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테나이에서 솔론이 도시를 구원하겠다며 나선 것 자체가 애저녁에 쑨 죽과 같아 보였지만, 도시의 구원을 위해 솔론이 그 일을 맡았던 것은, 테세우스가 그랬듯이, 보통의 아테나이 사람들을 도시의 주인으로, 도시 일의 주역으로, 돌려놓지 않고서는 아테나이는 결코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솔론의 아테나이는 뤼쿠르고스의 스파르테와 같을 수 없었습니다. 아테나이는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같은 시민의 도시여야 하지, 같은 칼을 들고 같은 밥을 먹는 전사의 도시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솔론이 무엇보다 먼저 드라콘의 법을 없앤 것도62, 그 법은 스파르테가 그들의 노예인 헤일로타이들에게 적용하기 좋은 법이지, 도시의 주인인 도시민에게 도시가 적용할 법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전에 솔론은 백주에 피의 복수를 자행한 퀼론 집안 사람들에 대해 산 사람은 물론 죽은 사람들까지 아테나이에서 추방하고,63 저주를 받았다며 쫓겨난 알크마이온 사람들을 다시 도시로 불러들인 적도 있었는데, 도시는 서로 화합하고 사는 곳이지 서로 죽이고 대립하는 전쟁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화합하는 도시의 도시민이 빚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면 그들을 모두 자유민으로 풀어주고, 노예가 되어 다른 도시로 팔려 갔거나, 노예가 되기 싫어 다른 도시로 달아난 도시민들을 모두 다시 도시로 불러들여 자유 시민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솔론은 돈과 권력의 극심한 불평등 때문에 도시민이 자유를 잃는 불화와 불복이 도시의 안전과 평화를 흔드는 판이었지만, 돈과 권력을 독차지한 사람들에게서 돈과 권력을 거두어 그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지 않았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이 도시를 위한다는 가면을 벗고 맨낯으로 으르렁거릴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몸을 맡기고 빚을 얻어 썼는데 갚지 못해 노예나 예속농으로 전락한 사람들에게 자유민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빚만 탕감해주는 선에서 도시의 분란을 끝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칼을 든 전사들의 도시 스파르테와는 달리, 쟁기를 든 농부들의 도시인 아테나이에 가진 게 없는사람들의 폭동이 일어날 리도 없거니와, 들고일어난들 이미 도시를 위한다는 가면을 벗어 던진 가진 자들의 오만과 탐욕이 그들에게 덮칠 혹독한 참극을 미리 막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보다는 도시를, 도시의 일을,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로부터 거두어 그들보다 수적으로 언제나 우세한 독립된 도시민에게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솔론은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도시가, 소수의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들의 것이며, 그들이 움직여 나가야 할 그들의 공동체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도시의 일에 대해 자긍심과 명예을 가지고 그들이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솔론은 말했습니다. "모든 시민은 자유민이다, 예속되지 말라!"  "자립하라!"  "아이들에게 한 가족을 건사할 기술 하나라도 반드시 가르쳐라!"  "누가 도시를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하면 반드시 저항하라!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시민이 아니다!64"

 

11.10. 그렇지만,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결과적으로 솔론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돌아온 알크마이온 집안의 메가클레스가 흩으진 세력을 다시 모아 해안당을65 만드느라 솔론의 개혁을 지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리스톨라이데스Aristolaides로 대표되는 귀족들이나66 알크마이온 집안에 대항하기 위해 숫적으로 우세한 산비탈의 목동들을 모아 새로 산악당을67 만들어서가 아니라, 부자들의 땅을 빼앗아 나누어주지 않았다고, 빚을 탕감해주는 바람에 나만 손해를 보았다고, 서로 불만인 아테나이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68 해소되지 않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은 여전히 도시민 간의 불화와 불복을 부추겼고, 부와 권력을 놓칠 수는 없는 세습 귀족들은 그들 대대의 기반에 엮인 사람들을 규합해 불화와 불복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데 온 정신을 팔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솔론이 떠난 도시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에서 모집한 군대와 트라케의 용병을 데리고 들어와 칼과 몽둥이로 불복과 불화를 잠재웠을 때까지, 아르콘을 뽑을 수조차 없었을 때도 있었고, 아르콘을 뽑는 방법을 바꾸어 열 명으로 늘이고 직종별로도 뽑아 보기도 했고, 한 번은 산악당의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69, 또 한 번은 평지당의 뤼쿠르고스에게, 또 한 번은 해안당의 메가클레스에게 전권을 주기도 해보았고, 메가클레스가 뤼쿠르고스와 연합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전권을 빼앗는 걸 지켜보기도, 우습지도 않은 연출이었지만 메가클레스가 페이시스트라토스와 연합하여 뤼쿠르고스를 축출하게도 해보았지만, 그렇게 권력을 잡은 어느 누구 하나 도시민 간의 불평등을 해소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만연한 볼복과 불화로 도시는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다른 도시의 군대를 데리고 아테나이에 들어올 때, 수하들을 데리고 나갔지만 상대가 되지 않자70 제일 먼저 메가클레스와 뤼쿠르고스 집안 사람들부터 보따리를 싸고 달아나 버려, 남은 아테나이 사람들을 상대로 단 한 번의 칼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도, 아크로폴리스까지 당당하게 올라가 테세우스의 사당 앞에서 열병식을 거행한 뒤,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이제 도시 일은 자기에게 맡기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 모두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던 것도71,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가 참주의 도시가 되고 그들이 참주의 시민이 된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던 때문으로 보입니다. 솔론은 소수의 돈과 권력을 빼앗아 여럿에게 나누는 것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길이 아니라,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각자가 도시의 주인이 되라고, 도시 일의 주역이 되라고, 그것을 막는 그 어떤 것에도 저항하라고, 그것이 도시민 간의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첩경이라고 말했었지만, 솔론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몰랐던 아테나이 사람들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예전에 혜택을 준 바 있는 다른 도시들의 도움으로72 용병들을 데리고 들어와 참주가 되는 것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였을 때 완전한 솔론의 실패가 증명되었습니다.

 

11.11. 그리고, 솔론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아테나이 시민 모두의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퀼론이 데리고 온 칼을 든 메가라의 군대를 쟁기로 제압했던 아테나이의 농부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데리고 온 에우보이아와 텟살리아의 군대가 아테나이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퀼론 때의 메가클레스는 아티케의 농부들이 쟁기를 들고 떼로 모여든 덕분에 퀼론의 군대를 아크로폴리스에서 결딴낼 수 있었지만, 그의 손자인 페이시스트라토스 때의 메가클레스는 아티케의 농부도 아고라의 장사꾼도 어느 누구 하나 다른 도시의 군대를 막지 않는 것을 보고 정적 뤼쿠르고스와 함께 제일 먼저 아테나이를 버리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돈과 권력을 쥐었다는 그들의 오만과 탐욕이 솔론으로 인해 얻은 많은 기회와 시간을 슬기롭게 쓰지 못하고 오히려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위해 허비하는 동안 민심은 그들을 떠났고, 그들은 그 좋은 돈과 권력을 두고 아테나이에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들의 돈과 권력이 언제나 그들을 지켜줄 것이란 믿음은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군대를 막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오히려 은근슬쩍 기대하고 반기는 듯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반응 앞에 산산히 조각났고, 그 돈과 권력의 그늘 안에서 먹고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감쌀 것이란 기대는 오히려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며 쳐다보는 싸늘한 눈초리에 두려움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돈과 권력이 도시민으로부터 외면당하자 힘을 쓸 수 없었고, 지나간 세월 그 돈과 권력이 부린 오만과 탐욕의 행실 때문에 그 돈과 권력을 빼앗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목숨마져 부지하기 힘들 것이란 생각이 그들을 한시도 도시에 머물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뤼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는 금과 은을 싸들고 인근의 다른 도시로 달아났고, 열병식을 본 도시민은 모두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칼 한 번 쓰지 않고 아테나이를 그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11.12. 은혜를 갚으려는 페이시스트토스의 지극한 정성으로 에우보이아는 물론 큰 돈을 보낸 테바이도, 용병을 보낸 텟살리아도, 군대를 보낸 아르고스도, 뤽다미스의 낙소스도 모두 아테나이로부터 각종의 이권을 받아 챙기며 참주의 진정한 지원자가 되어 도망자들이 머무는 메가라에 대해 아테나이를 넘보지 말라며 눈을 부라려 주었습니다. 도시민은 솔론의 자유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참주를 택했고73, 참주는 도시의 자유보다 다른 도시에게 감사해야 하는 군사적 도움을 택했습니다. 도망친 뤼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가 신변에 대한 위협을 받을까봐 망명지에서의 정치적 활동을 극도로 조심하는 가운데 참주는 아테나이를 성공적으로 참주의 도시로 변모시켜 갔습니다. 스키타이의 궁수弓手를 고용해 순찰을 돌게 하고 텟살리아의 용병들로 신변을 경호하게 하면서, 아테나이 시민들에게는 자기를 칭송하고 따를 자유를 마음껏 주었고, 자기를 반대하는 자유는 인질과74 축출과 죽음으로 눌렀습니다. 부자들이 남기고 간 땅과 재물과 권력의 자리는 모두 그의 차지가 되었고, 그를 칭송하는 자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그 재물과 권력의 자리로 보상하며 격려했습니다. 도시를 출입하는 모든 물자에 세금을 거두어 개간하는 데나 작은 땅을 가진 농부들의 영농자금으로 지원하고, 검은 유약을 바른 질항아리를 구워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수출했습니다. 지난 날 어떤 때 한번 자신을 참주로 이끌어준 아테나이 여신의 현신을 기리기 위해 판아테나이 축제를 성대하게 베풀고, 내친 김에 디오뉘소스 축제도 키워 비극 경연을 시작하고, 신들을 위해서 아크로폴리스를 정비하고, 시민들을 위해 새로 길을 내거나 귀족들이 소유했던 길과 우물을 도시의 길과 공동우물로 바꾸었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바야흐로 미노아 시절의 크노소스처럼 번창하고 행복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황금의 시대를 연 참주를 칭송하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실패한 솔론에게 훈계라도 하는 듯 완전히 성공한 참주가 되어 천수를 다하고 죽었습니다75. 참주가 죽자 에우보이아에서 반정군을 이끌고 아테나이로 들어올 때부터 이미 참주의 공동 창업자였던 장남 힙피아스가 아무런 저항없이 자연스럽게 참주를 승계하였고 동생 힙파르코스는 참주의 조력자가 되어, 메가클레스의 아들 클레리스테네스에게 대표 아르콘이76 되게 해 주는 등 이들 형제는 참주 노릇도 제법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하던 대로 잘했습니다.

 

11.13. 그런데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천년만년 갈 것 같던 참주의 권세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참주의 권세를 두려워한 한 시민과 권세에 의해 모욕당한 것에 대한 다른 한 시민의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힙피아스의 조력자 힙파르코스는 평소 정열적인 풍류객이어서77 한 미남 청년 하르모디오스에게 빠진 것까지는 좋았으나, 하르모디오스에게는 이미 아리스토게이톤이라는 중류층의 애인이 있어 힙파르코스의 사랑을 거절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지요. 아리스토게이톤은 힙파르코스의 권세가 자기를 겨누고 애인 하르모디오스를 빼앗아갈까 두려웠고, 사랑을 거절한 하르모디오스와 그 가족은 힙파르코스로부터 모욕을 받아78 오기가 끓어오르자, 이 둘은 가만히 앉아 당하느니 참주 일가를 먼저 치기로 작정하고 동지들을 모아 판아테나이 제전에서의 거사를 준비했지요. 제전은 시작되었지만, 거사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은 것은 거사 동지 하나가 힙피아스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밀고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나머지 동지들의 준비가 미쳐 덜 된 상태에서 행렬을 지휘하고 있던 힙파르코스를 이 둘이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었는데, 다행히 힙파르코스는 죽일 수 있었으나79 하르모디오스는 그 자리에서 창에 찔려 죽고 아리스토게이톤은 사로잡혀 동지들의 이름을 대라며 가해진 온갖 고문을 견디다 못해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80 이 사건 이후, 처음은 복수를 한답시고, 나중에는 자기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81 많은 피를 본 참주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이후 반세기가82 다 되도록 지켜온 민중을 위한다는 정치 기만술을 버리고 자신을 지키기에 몰두했고, 참주가 민중을 위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민중이 참주를 기휘하기 시작했고, 민중이 참주를 멀리하자 참주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한 요새와 힘과 다른 도시로부터의 도움을 찾기 시작했고, 대표 아르콘 일을 끝내고 바로 또 망명 길에 오른 클레오메네스는 인보동맹의83 도시들이 델포이에 신전을 새로 짓는다는 것을 알고 공사를 맡아 주로 델포이에 머물면서, 돈은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신전을 설계보다 더 잘 지어주면서84 신전의 여사제들과 사귀는 한편, 아테나이의 사람들과 참주의 수상한 움직임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과 같이 참주의 권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들처럼 분개하여 오기를 부릴 동기도 용기도 없이, 그저 참주의 다음 행패가 무엇 때문에 누구에게 떨어지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힙피아스는 만에 하나 민중 봉기라도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아크로폴리스 구석의 옛 펠라스고이 사람들의 성터를 요새로 삼아 아테나이를 탈출할 시간을 벌 요량으로 성벽의 수리에 나서는 한편, 혹시 아테나이를 떠나게 되더라도 장기적으로 머물면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군대를 빌려 다시 아테나이로 돌아올 거점으로 이어족의 나라 페르시아와 관계가 좋다는 멀리 헬레스폰토스의 람프사코스를 택하고, 자신의 딸 아르케디케를 그곳 참주 힙포클로스의 아들 아이안티데스에게 출가시켰고85, 클레이스테네스와 아테나이의 망명 귀족들은 아테나이에서의 참주와 시민들의 움직임을 주시한 끝에 아테나이 사람들이 참주에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한 끝에, 그들 스스로 밖에서 군대를 모아 참주를 치기로 하고 돈으로 거병하여 아티케의 파이오니아에 요새를 세우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참주의 공격에 패퇴하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86 스스로의 군사 행동에 실패한 클레이스테네스는 다른 도시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고, 다른 도시를 내세워야 한다면 역시 스파르테가 가장 확실하다고 보고, 신의 뜻에 가장 민감한87 스파르테를 움직이기 위해 델포이의 여사제들을 동원하여 공사公私의 일로 찾아오는 스파르테 사람들의 신탁에는 아테나이의 참주를 타도하여 아테나이를 해방시키라는 취지의 문구를 넣었고, 하도 잦은 같은 내용의 신탁에 스파르테 사람들이 흔들려 드디어 스파르테가 앙키몰리오스에게 군대를 주어 배편으로 아테나이로 보내도록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테의 거병 소식에 힙피아스의 지원 요청으로 미리 와 있던 텟살리아 기병들이 간단히 물리쳐버렸고, 많은 동료 전사들과 함께 죽은 앙키몰리오스를 위한 앙갚음이었는지 다음은 스파르테의 왕 클레오메네스가 직접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육로로 아티케로 들어와 텟살리아의 기병들을 가볍게 격파하고, 아크로폴리스의 펠라르기콘 요새로 들어간 힙피아스를 오히려 가두어버렸습니다.88 클레오메네스로서는 요새를 공격하여 결딴을 낼지 협상으로 끌어낼지 고민스러울 때 마침 요새로부터 탈출하려던 참주의 어린 가족들이 붙잡혀 일이 싱겁게 끝날 수 있었는데, 힙피아스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닷새 안으로 아테나이를 떠나라는 조건을89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참주 힙피아스는, 아테나이 시민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는 자유민이 아닌, 참주가 베푸는 안전과 자유에 만족하여 참주에 복종하고 감사하는 참주의 노예로 살았다는 불명예를 남겨주고, 그리고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게는 아테나이 사람들 스스로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없어 스파르테라는 다른 도시의 군대가 아크로폴리스까지 들어와서야 비로소 참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불명예를 남겨주고, 가족들과 함께 옛 트로이아의 폐허 옆으로 흐르는 스카만드로스 강구의 시게이온 곶으로 호송되어 갔습니다.

 

11.1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테세우스가, 주어진 왕위도 마다하고, 온 세상에 안전한 자유의 도시라며,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오라며 새로 세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그 테세우스를 쳐내고 왕이 되기 위해 남도 아닌 같은 핏줄의 메네스테우스가 스파르테라는 다른 도시의 군대를 도시로 불러들이는 일이 생기더니, 그리고 그날 이후 조금씩 조금씩 도시의 땅과 권력이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로 몰려가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점점 땅을 잃고 자유를 잃고 심지어 예속되거나 노예로 전락하여 다른 도시를 전전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는데도, 이런 소수의 부와 권력의 화신인 퀼론 같은 천둥벌거숭이가 나타나 도시의 참주가 되겠다며 다른 도시의 군대, 메가라의 군대를 아크로폴리스에 주둔시키다 돌에 맞아 죽는 일도 생기더니, 부자들의 땅과 재물을 빼앗아 나누어주지 않는다고 자유민으로 만들어 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유민으로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 솔론을 팽개치는 일이 생기더니, 아예 몽둥이와, 마차를 탄 여신과, 아르고스고 텟살리아고 에레트리아고 할 것 없이 헬라스의 여러 다른 도시들에서 온 군대를 앞세운 페이시스트라토스 앞에 도시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자유마져 내팽개치는 일이 생기더니,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맡아주는 고마운 참주를 복종과 칭송으로 모시는 참주의 노예시민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일까지 생기더니, 사랑싸움 끝에 참주의 동생이 죽자 도시에 불어닥친 피바람에도, 스파르테의 왕이 그의 군대를 데리고 와 아크로폴리스에 진을 쳐도, 그저 도시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눈만 굴리지 이러고도 도시와 도시민이 안전하고 자유스러울 수 있을지 과연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고민하고 논의하는 사람이 없는 죽은 도시가 되어 있더니, 다행히 아테나이에서 참주를 쫓아내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해방시키라는 신의 뜻을 이룬 클레오메네스가, 그 옛날 메네스테우스를 도왔던 스파르테 왕 튄다로스처럼, 인간적인 욕심을 조금도 내지 않고 순순히 아테나이 일을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맡기고 스파르테로 돌아가주는 바람에, 이제는 마음만 잘 먹으면 아테나이의 앞날을 아테나이 사람들끼리 결정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되었습니다.

 

11.15. 눈에 띄는 뤼쿠르고스 집안의 사람도 보이지 않는 아테나이에 참주로부터 가장 핍박받았고 참주에게 가장 극심하게 반대했던90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알크마이온 집안의 클레이스테네스가 참주의 법과 제도를 바꾸어 새로운 아테나이를 만들기 위해 나선 것은 누가 보아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게다가 그는 힙피아스 시대에도 아테나이의 대표 아르콘을 맡은 적이 있었던 정치나 행정의 유경험자였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민중을 위한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치 기만술을 겪고 나서야 민중을 위한다는 솔론이 왜 정치나 행정이나 재판에 있어서 민중의 참여도를 높이면서 먼저 그 민중들에게 예속민이나 노예가 아닌 독립된 자유시민이 되라고 했는지 뚜렷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솔론이 못다 이룬 민중을 위한 법과 제도를 자기가 완성할 수 있다고 또 완성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침 아버지 메가클레스가 마주해야 했던 민중을 위한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치 기만술은 이미 드러난 판이었고, 땅부자들의 대표 뤼쿠르고스도 그의 뒤를 잇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 아테나이에 진정 민중을 위한 새로운 법과 제도를 도입하기에 딱 좋은 기회였습니다. 참주와 가까이 지낸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언제부터인지 옛 귀족들과 부자들을 모으며 스파르테 왕 클레오메네스에게 알랑거리던 테이산드로스의 아들 이사고라스의91 움직임이 마음에 거슬렸지만, 자신도 이미 민중의 대표자로 자처하고 나선 이상, 자신이 진정으로 민중을 위한다는 것을 알아주고, 그래서 마음이 통해 민중들의 지지만 받을 수 있다면, 부자와 빈자에 끼여 있던 솔론이 그랬듯이, 자기도 일 년이면 개혁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클레오메네스가 아테나이를 떠나자 클레이스테네스는 전광석화처럼 제일 먼저 도시의 구조를 바꾸려 했습니다. 사회계층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아티케가 이온의 도시였던 시절부터 아테나이 사회계층의 근간을 이루던 혈연적 행정 구역 네 개를92 아테나이와 아티케를 통털어 지리적 행정 구역 열 개로 개편하자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사고라스도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 일이 이쯤 되자 민중을 위한다는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중을 위한다는 것이 솔론처럼 빚이나 덜어주고 자유민이 되라는 것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할 능력은 되었고, 물론 클레이스테네스의 구상을 당장에 저지하고, 그 대신 자기에게 알맞는 옛날의 과두정체제를 아테나이에 굳히기 위해 클레오메네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능력도 있었지요마는, 많은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아들였던 참주를 무너트린 스파르테를 보며 고마워할 수도 그렇다고 아직 자기들 도시의 문제를 스파르테에게 맡겨 풀었다는 부끄러운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뭔가 자기들이 잘못한 것 같아서 꺼림칙한 마당에93, 참주를 무너트려 주었다 해서 아테나이의 정치 문제까지 좌지우지하는 스파르테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리 판단해볼 능력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사고라스의 도움 요청에 클레오메네스의 첫 반응은 저주받은 자를 아테나이에서 쫓아내라는 전령을 보내온 것이었고, 저주에 가위 눌리는 아테나이 사람들을 본 클레이스테네스는 조용히 혼자 아테나이를 다시 떠났습니다만, 곧이어 스파르테의 왕 클레오메네스가 비록 적은 수의 힙페이스近衛隊였지만 무장한 병력을 데리고 아테나이에 득달같이 들이닥쳐서는 이사고라스가 지적해주는 대로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며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 700여 가구 모두를 쫓아내고, 심지어 무덤까지 파내어 아테나이 밖으로 내던져버리는 일을 저질렀습니다.94 어쨌거나, 비록 저주를 받았다고는 하나, 솔론의 사면을 받아 아테나이 시민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며, 참주를 무너트리는 데 공을 세웠고, 스스로 민중을 위하겠다고 하는 클레이스테네스 때문에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가, 아테나이의 참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파르테의 왕에 의해 아테나이의 참주가 저질렀던 핍박보다 더 악랄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도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전에 아테나이의 참주가 피바람을 일으키는 걸 보고도 가만 있었듯이, 스파르테의 왕에게도 가만 있었습니다.95 조용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반응에 자신을 얻었는지 클레오메네스가, 참주의 몰락 뒤 제일 먼저 아테나이 사람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복원한 솔론의 불레를96 해산하고, 이사고라스가 추천하는 이사고라스의 친구들 300명에게 그 일을 맡기고 나서자, 아테나이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해산 명령을 받은 불레타이가 저항했고, 아테나이 사람들이 처음으로 아고라에 모이기 시작했고, 놀란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는 아크로폴리스로 피했고, 이들 간의 대치는 사흘을 끌었고, 결국 아테나이 사람들은 클레오메네스와 그의 힙페이스들이 이사고라스를 데리고 안전하게 스파르테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었습니다.

 

11.1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기서 잠시 저의 숨을 좀 고르고 가야겠습니다. 이제, 스파르테 왕에게 이사고라스를 데리고 아테나이를 곱게 떠나라고 했던 우리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린다 생각하니 이 늙은 시인의 가슴이 너무나 벅차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평생을 희극시인으로 살았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디오뉘소스께서는 제게 이 장면을 무대에 올려 여러분과 함께 박수치고 파이안을97 부를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주시지 않아, 지금까지 이 장면을 위한 파이안을 지을 수 없었는데, 이 재판정이 디오뉘소스께서 우리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을 위해 파이안을 부를 수 있는 마지막 무대를 열어 주신 것이라 생각하니 이 늙은 시인의 목이 다 메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디오뉘소스의 도움으로, 그때 우리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맨주먹으로 사흘이나 스파르테의 왕과 대치하며 얻었던 각성과 각오를 여러분께 고스란히 전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여러분이 또 여러분의 손자의 손자에게 고스란히 전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안전한 자유의 도시로 지켜나가,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도시의 정의를 세우고, 아테나이가 신을 두려워 하는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잘사는 도시가 되는 날이 올 때까지 천년만년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우리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저와 함께 잠시 숨을 좀 고르시지요.

 

11.17. 가볍게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지금의 여러분은 엑클레시아에98 나가면 3오볼로스의 돈을 받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바빴던 한때는 엑클레시아에 참석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었지요. 그것도 지금의 참가비에 비하면 서너 배나 되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꼭두새벽부터 프뉙스까지99 가다니 말이 안 되던 때라 큰 돈의 벌금을 매기지 않으면 프뉙스에 6,000명 이상을 모으기 쉽지 않았습니다. 벌금이 겁이 나서 너무 많이 모이자, 슬그머니 벌금이 없어졌고, 벌금이 없어 다시 잘 모이지 않자 이번에는 참가비를 주었지요. 아마 도시의 일을 보는 사람들에게 수당을 주기 시작한 때라 엑클레시아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수당을 주자 그렇게 된 일일 테지요. 프뉙스에 나오는 할아버지들에게는 손자들 과자 값으로 참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할아버지들이 3오볼로스로 하루를 먹고 살기 위해 꼭두새벽에 프뉙스로 갑니다. 도시민으로서 도시의 일을,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3오볼로스를 받기 위해서 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도 조금이라도 늦어 6,000명이 다 차면 스퀴타이의 궁수들이 붉은 줄 밖에 세워 놓고 그냥 집으로 가라고 말하지요. 엑클레시아는 6,000명 이상이 모여 해가 뜨면 열리니 해뜨기 전까지 시간 맞춰 오는 사람 모두에게 돈을 주고 참석시키면 좋을 텐데, 전쟁 때문에 도시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6,000명까지만 돈을 주고 말아 경쟁이 심합니다. 아티케에서 오는 디카이오폴리스나 튀가이오스에게는 정말 꼭두의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잠을 설치고 꼭두새벽부터 모인 사람들이라 자리를 차지하자마자 모두 졸 것 같지만 그런 사람 찾아보기 힘들지요. 에피스타테스가100 나와 안건을 올리고, 안건의 내용을 설명하고, 잘 들은 사람 잘 듣지 못한 사람 잘 알아 들은 사람 잘못 알아 들은 사람 서로 묻고 서로 가르치는 통에 웅성거리고, 대뜸 반대하는 사람 무조건 찬성하는 사람 조용히 하고 이야기 좀 들어보자 하는 사람도 나오고, 그래서 6,000명 이상이 모이면 굳이 안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오늘 안건이 무엇인지 자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도시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반대하는 사람은 왜 반대하는지 찬성하는 사람은 왜 찬성하는지 다 알게 되니, 그 속에서 잠을 자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찬성 토론자와 반대 토론자가 맞붙기라도 하면, 정말 신경을 곤두세우고 듣지 않을 수 없지요.101 그리고 사이 사이 듣는 사람 자기들끼리 언성 높히고 다투기도 하다가, 굳이 누가 이것이 어찌 당신의 일이 아니냐고 바로 도시의 일이 아니냐고 말하지 않아도, 결국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거나 도시의 일을 위해서이거나 찬반을 결심하고, 그 결심을  표결로102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도시의 시민이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고 도시를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하루의 끼니를 때울 3오볼로스까지 손에 쥐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뿌듯하기도 했지요.

 

11.18. 언제 누구에 의해서인지는 몰라도, 이런 엑클레시아가 아주 오래 전부터 아테나이나 헬라스의 여러 도시들에서 도시의 중대한 일에 대한 결정이 필요할 때, 이를 테면 다른 도시와 전쟁을 한다든지, 다른 도시와 동맹을 맺는다든지, 도시의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한다든지 할 때, 도시의 최고 권력자나 최고 집정관이 함께 도시를 이끄는 상위의 도시민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도시의 결정을 알리는 수단으로 이따금 열렸던 것으로 보입니다.103 아테나이에서 지금의 엑클레시아와 같은 대규모 집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솔론이 이 엑클레시아에 테테스까지를104 포함하는 모든 시민이 참석하도록 하면서부터였으며, 지금처럼 도시의 정치제도의 하나로 도시의 일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기구가 된 것은 클레이스테네스 이후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솔론은, 테테스까지 참석하는 엑클레시아의 크기를 생각할 때, 엑클레시아에서 모든 시민들이 도시의 일을 제대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중구난방이 되지 않고 효과적으로 논의하여 도시민의 생각이나 바람의 핵심을 여과없이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엑클레시아를 준비하고 소집하고 운영할 별도의 기구가 필요하다고 보고, 그 기구가 평소에는 대소의 도시 일에 대해 작은 엑클레시아 역할을 하다가 도시의 중대사가 있으면 엑클레시아를 소집해 도시민이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구는 도시의 법과 제도를 수호하는 아레오파고스의 구성원 숫자나 그들의 역할과 영향력을 생각할 때105 그 두 배는 넘는 것이 좋겠고, 구성원은 아레오파고스에 들 수 있는 계층과 아직 온전히 자립하여 독립적인 자유민이 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는 테테스 계층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에서106 나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테세우스 이래로 유지해온 세 가지 사회 계층을 바꾸어 새로 네 가지 계층으로 나눈 만큼 각 계층의 참정 범위를 조정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었으므로, 테세우스 이래의 네 부족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적용하여, 각 부족에서 서른이 넘은 자립하여 살림을 꾸린 사람들로 도시의 일에 참여하고자 지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100명씩 제비로 뽑아107 모두 400명으로 새로운 시민 의회를 구성하고 불레108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마도 솔론은 불레의 구성원 불레테스가 신을 두려워하는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언제라도 내란이 일어날 것 같은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테테스까지를 포함한 모든 시민들을 한 곳에 모은다는 것 자체가 도시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솔론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솔론은 다수 시민의 불화와 불복이 도시를 내란으로 이끌 것 같지만, 그들의 불화와 불복이 도시의 부와 권력을 거의 모두 거머쥔 소수 도시민의 오만과 탐욕이 낳은 도시민 간의 부와 권력의 불평등 때문인 만큼, 다수의 불화와 불복이 권력의 장소로 나오고, 거기에서 그들이 겪는 불평등의 모순을 그들이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면, 궁극적으로 도시의 부와 권력을 몇몇 소수의 시민들이 쥐고 흔들지만 도시는 결코 그들의 것이 아니며 도시민 모두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면, 도시는 절대 내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지 않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론은 엑클레시아에는 하층민도 참석시키고, 불레에는 중산층을 집중 배치하여, 도시의 일이 소수 상위층의 아르콘이나 행정관들만의 일이 아니라, 하층민이나 중산층을 포함한 도시민 모두의 일이라는 사실과, 그런 도시의 일마져도 정해진 도시의 법과 질서를 다루는 일은 소수 상위층의 아르콘이나 고위 행정관들이 계속 맡게 하되, 앞으로 해야 할 도시의 일은 불레에서 주로 중산층이 논의해서 하층민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이 모인 엑클레시아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한다면 숫적으로 열세인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양보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솔론의 생각이 제대로 맞아들어가기 위해서는 도시 일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이, 특히 테테스들이 자립하여 진정한 자유민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솔론이 보기에 먹고 사는 살림이 예속된 사람이 엑클레시아나 불레에 나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그를 예속한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다수를 예속한 그 소수의 뜻대로 움직인다면, 그런 엑클레시아나 불레는 도시민이 아니라 소수의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노예를 대리 참석시켜 장악한 엑클레시아나 불레와 다름없고, 그런 엑클레시아나 불레는 없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솔론의 생각이 제대로 맞아들어가기 위해서는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아테나이 시민이기 위해, 도시에서의 자기 역할을 다하기 위해, 불레에 나가서 엑클레시아 나가서, 도시의 일에 대해, 도시민에 대한 도시의 의무에 대해, 도시의 주인으로서 도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다른 도시민에게 자기의 생각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솔론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렇게나 자립하라고 당부했던 까닭이, 누가 도시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하면 반드시 저항하라고 한 까닭이, 마치 불을 보듯 훤합니다. 

 

11.19. 이렇게 시작된 솔론의 불레를 본 다른 말을 쓰는 어떤 나라에서 온 신사 한 분이109 그 놀라움을 이렇게 나타냈다고 합니다. '헬라스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 논의하고, 결정은 바보들이 하는군.'110 불레를 본 이 헬라스 말도 잘하는 신사의 놀라움이 우리에겐 참으로 놀라운 놀라움입니다. 이 사람이 불레에 갔을 때 솔론도 같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솔론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아테나이 사람이라도 불레의 회의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이 함께 있었다면, 전혀 익숙치 않은 광경이어서, 틀림없이 그 신사분과 함께 놀랐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 아테나이 사람은 찬반을 논의 하는 사람들이 똑똑하다고는 생각했겠지만 그 똑똑한 사람들의 논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을 꿈에도 바보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역시 비슷한 광경을 엑클레시아나 불레나 이런 재판정에서 늘상 봐오셨을 테니, 그의 놀라움이 오히려 왜? 하며 의아스러울 것입니다.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굳이 그 까닭을 쉽게 풀어 말씀드리면, 6,000명이 모이는 엑클레시아를 들먹이지 않아도, 솔론 때의 불레처럼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모두가 한마디씩 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실제 모두가 다 한마디씩 할 필요도 없고요. 자연히 서로 직접 이해가 걸린 열 사람 정도가 나와 이쪽 사정 저쪽 사정을 미주알 고주알 온갖 예를 들어 좋고 나쁜 것을 말하게 되고, 그렇게 모두를 말하고 나면 그 위에 더 붙여 할 말이 더 없게 되지 않습니까? 이해가 걸린 사람이 이해가 걸린 일을 모를 리 없고, 나쁘게 말할 리 없고,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을 리 없지요. 반대하는 사람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니, 실제 이해가 걸린 사람들이라 해도 열 명 스무 명의 설명과 설득을 듣는 동안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말이 필요없어지지요. 그러니 물시계까지111 놓고 이세고리아를112 지키던 에피스타테스가 논의는 충분했으니 이제 결론을 내자고 하면 찬반에 손을 들거나 투표하고 결론냅니다.113 이런 광경을 보고 발언자들이 똑똑하다고 알아볼 수 있었던 그 신사분이, 다른 말을 쓰는 곳에서 보던 대로 왕이나 족장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회의를 이끌던 에피스타테스도 아닌, 회의 내내 아무 말도 없던 사람들이 투표를 해서 결론을 내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이야 충분히 이해가 가고, 또 그래서 별로 놀랍지도 않지만, 불레에서 논의에는 참가하지 않고 단지 그 논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을 바보들로 보고, 그 사람들이 결론 내는 일에 참가하여 결정이 나자 그것을 바보들이 결정했다면서 놀랐다는 사실은 참으로 우리를 놀랍게 합니다. 그 신사분은 회의 내내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바보들이 그 회의에서 논의된 사안의 결론을 낸다는114 사실에 놀랐고, 우리는 그 신사분이, 그 안건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에 놀랍니다. 그래도 불레에서는 나중에 투표를 할 불레타이가 나가 찬반 토론이라도 하지 그래서 그들이 똑똑하다는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지, 만일 그 신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와서 하루 종일 아무 말없이 듣기만 하다가 들은 이야기로만 재판정에 나온 이 늙은 희극 시인의 죄가 있다 없다를 판단하시는 여러분을 보고 여러분을 무어라고 할지, 혹시 이렇게 말하지나 않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건 숫제 바보들도 아니고, 연극에서나 보는 대사 없는 배우로군.'115

 

11.2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 모두는 연극을 사랑하시어 공연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디오뉘소스 극장을 메워주시는 관객이십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저를 재판하시듯이 관객으로 저의 연극이 맞다 싶으면 발을 구르며 웃고, 아니다 싶으면  손을 뻗고 우우하며 심사하시기도 하십니다. 연극을 만든 사람이나 연극을 공연하는 사람이나 연극을 보는 사람이나 디오뉘소스 극장 안에서는 모두 연극에 몰입하고 열광하는 연극의 한 부분들입니다. 이 모두가 디오뉘소스 극장을 채워야 비로소 연극 하나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보이시지요, 연극이 시작되면 디오뉘소스가 어떻게 극장에 생명을 불어넣는지 말입니다. 연극을 만든 사람은 무대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무대 뒤의 아주 작은 공간에서 공연자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을 때, 무대에 오른 공연자들은 무대와 오케스트라라는 작은 공간에서116 자기의 역할을 펼쳐내느라 혼신의 힘을 쏟을 때, 함께 부를 노래 하나 따라 읊을 시 하나 큰 목소리로 건넬 대사 하나 그 어느 것 하나 없는 관객들이 발을 구르며 웃고 손을 뻗어 우우하며 열광할 때, 디오뉘소스는 관람석의 그의 제단에서117 나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연극의 탄생을 축복하고, 그 연극의 극작가에게, 코로스와 배우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그 연극에 열광하는 관객에게 새로운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디오뉘소스가 이들 모두를 축복하는 것은 이들 모두가 똑같이 그가 주관하는 극장의 주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듯이 디오뉘소스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디오뉘소스의 극장에 극작가가 배우와 코로스가 있어도 열광하는 관객이 없다면, 신들도 사제도 다 있지만 염소의 넓적 다리 태우는 참배객이 없는 신전처럼118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디오뉘소스나 신들은 그들이 극장과 신전의 주관자로 있을 뿐 극장이나 신전의 진짜 주인은 열광하는 관객이며 염소의 넓적 다리를 태우는 참배객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그 진짜 주인인 여러분보다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극장과 신전의 번쇠繁衰가 디오뉘소스와 신들에게 그런 사실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11.21. 솔론은 열광하는 관객이 디오뉘소스 극장의 주인이듯이, 신들에게 경건하게 제물을 바치는 참배객이 신전의 주인이듯이, 도시의 주인은 도시의 일을 제 일처럼 생각하는 도시민이라는 사실을 아테나이 사람들이 스스로 터득하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솔론은 연극이 거짓을 다룬다고 연극을 싫어했지만, 극장의 진짜 주인은 극작가도 코로스나 배우도 아닌, 열광하는 관객이라는 사실만은 그의 철학자적인 통찰력으로 확실히 꿰뚫고 있었고, 도시의 진짜 주인은 아르콘도 아레오파고스도 부자들도 아닌, 도시에 모여사는 모든 도시민이라는 사실은 정치가로서의 신념으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시민이 도시가 그들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도시의 일에 바보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그의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도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바보일 수도 있겠지만, 도시의 주인으로서의 수 백 수 천 수 만의 도시민은 결코 바보가 될 수 없다는 전체 도시민에 대한 믿음이 확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말을 하는 나라에서 온 그 신사분은 아무리 헬라스 세계에 오래 머물어 헬라스의 문물을 접하고 헬라스 말이 늘어도 도시민이 도시의 주인이란 솔론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신사분 나라의 사람들이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그들 나라 말로 하는 저의 연극 "새들"을 본 소감을 물었다면, 아마도 그 신사분이 솔론의 불레를 보고 난 소감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헬라스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 연기演技하고, 웃고 즐기는 건 바보들이 하는군.'

 

11.22. 부와 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아테나이 사람이 아니라, 아테나에 사는 모든 시민이 아테나이의 주인이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이 모든 솔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솔론 시대의 아테아이 사람들은 그 신사분이 말한 바로 그 바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아테나이의 주인이라는 솔론의 말대로 불레에서 그들 모두를 잘살게 하고 동시에 그들의 도시를 이롭게 할 궁리를 했던 것이 아니라, 솔론이 무어라 했든 그들이 도시의 주인이라는 말 자체가 도무지 허망하기만 하여, 도시의 주인으로서의 자긍심도 없었고 도시의 주인이 되어야겠다는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아테나이의 어떤 세력이, 누구가 그들을 잘살게 해줄 것인가에만 매달리다 보니, 먹고 사는 길이 매달린 세력에게거나, 막연히 자기들을 위해 듣기 좋은 말을 많이 하는 세력에게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솔론은 도시의 주인이 되라고 했는데, 정작 그 도시의 주인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자기들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에게 매달려 잘살아 보려고 스스로를 예속민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속을 자임하고도 잘 살 수 없었던 솔론의 한 세대가 실망하여 무너지는 사이, 그 다음 세대는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스스로 예속되는 실험을 감행하는 바보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들을 잘 살게 해주겠다는 똑똑한 연기자 페이시스트라토의 연기에 넘어가, 도시와 그들을 참주의 것으로 송두리째 넘긴 바보들이었습니다. 수만 명의 아테나이 사람들이 한 사람의 똑똑한 연기에, 솔론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거짓 연기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권력의 덕에 부자가 되어 보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거꾸로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부자들의 탐욕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탐욕 역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들의 탐욕이, 한 가지 기술을 배워서라도 자립하라는 솔론의 당부 따위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게 만들면서, 세상의 부자가 모두 땅을 물려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그러므로 물려받은 것 하나 없는 그들로서는 한 가지 기술로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는 눈만 밝게 만들고, 그들을 잘살게 해준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거짓을 알아차리는 눈은 멀게 만들었습니다. 탐욕이 솔론이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생기는 현명함을 무너트리고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눈에도 솔론은 틀렸고, 그 신사분이 맞았다고 보일 정도였습니다. '아 이런 건가! 탐욕은 많은 사람들이 모으는 지혜마져도 바보들의 것으로 만드는 건가!'

 

11.23. 이렇게 탐욕으로 바보가 되어 스스로 참주에게 도시와 자신들의 안전과 자유를 맡긴 아테나이 사람들이 반 세기 동안 참주의 노예로 사는 동안 터득한 것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아무도 일하지 않는 노예에게 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이 집에 둔 노예들에게 늘상 하던 것이었는데도, 참주의 노예로 있는 동안 새삼스레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안전과 자유를 버리고 참주의 노예가 되면서 은근히 기대했던 부자들의 재산을 나누어받아 부자가 되려던 탐욕은 차마 버릴 수가 없어 잠시 접고 다음 기회로 넘겨야 했지만,119 참주가 솔론처럼 땅을 개간하라고 하고 올리브 기름을 짜라 하고 항아리를 만들라고 했을 때 그들은 허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똑같은 일들을 솔론은 자유인이 되었으니 계속 자유인으로 남아 도시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 말이 싫어 솔론도 싫었는데, 자신의 안전과 자유를 몽땅 참주에게 맡기고 참주의 노예가 되어주었는데도, 솔론이 하라던 일을 군소리 하나 없이 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하고 한심했지만, 참주의 몽둥이와 창칼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어쨌던 그 덕분에 살림이 나아진 것은 틀림이 없으니까 입이 닳도록 참주 칭송 하나는 마음대로 하는 자유나마 누렸으니 다행이라 할까요. 그렇게 살다보니 참주의 동생이 칼에 찔려 죽고,120 참주가 복수는 당연히 복수고, 자기도 그렇게 당할까봐 길길이 날뛰던 어느 날 스파르테의 군대가 아테나이에 들어와 참주를 아크로폴리스로 몰아넣었고, 스파르테의 군대와 같이 클레이스테네스와 약간의 아테나이 사람들도 같이 있다는 걸 알았고, 반 세기를 참주 시키는 대로 살다가 참주가 갇혔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참주가 붙들려 어디론가 끌려나갔고, 참주만 끌어내면 일이 끝났다는 건지 스파르테 군대가 돌아가버렸고,121 참주가 사라지고 스파르테의 군대도 사라지자, 도시를 이끌 사람이 보이지 않아 도시가 갑자기 풍랑에 뱃머리가 깨어진 배처럼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고, 아레오파고스 사람들과 참주와 함께 아테나이를 다스리던 사람들은 참주의 친구이던 티산드로스의 아들 이사고라스를 앞세워 클레오테네스를 비롯한 참주에게 핍박받던 다른 아테나이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숨죽이며 눈치를 보고 있었고, 클레이스테네스는 매일같이 아르콘들이 있는 테스모테테이온에서122 그리고 아고라에서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불레를 열어 도시의 일상을 정상화시키면서 앞으로 도시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를 논의하고 엑클레시아에서 결정해야 한다며, 자기는 진정 도시민을 위해 일할 테니 자기가 도시를 새로 만들 수 있도록 해달라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참주의 친구들이나 참주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듯, 틀림없이 이런 날을 위해 미리 준비했는 듯, 구체적으로 도시의 구조를 바꾸는 것부터 어떻게 도시민이 도시의 주인이 되는지까지 이야기하며 돌아다녔고, 며칠 지나지 않아 불레타이가 하나 둘씩 모여 참주의 시대에 그런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몰랐던 솔론의 불레가 열렸고,123 클레이스테네스가 불레에 나가 새로운 아테나이를 만드는 자기의 구상을 불레타이를 상대로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신의 새로운 아테나이의 정치 체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그들을 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아버지 메가클레스처럼 해안당을 이끌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그들을 위한다며 참주가 되어 오히려 그들을 참주의 노예로 만든 상처를 아물게 해주기 위해 해안당은 버리고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참주가 하는 일이라면 다 망치게 하고 싶었던 보복도 참주가 아테나이를 떠난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알크마니온 집안 사람들의 도움은 절실했지만,124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한번 속아본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이 진정 그들을 위하는 사람이라는 걸 믿어주지 않는다면 해안당이든 무엇이든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해안당을 떠나 혼신의 힘을 다해 그들에게 다가가기로 마음 먹었고, 어쩌면 그것이 가능하겠다는 희망이 보일 때, 클레오메네스의 전령이 스파르테에서 와서 이사고라스에게 클레이스테네스는 저주받은 집안의 자손이니 아테나이에서 쫓아내어야 한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사고라스가 자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이사고라스가 추방 이외에 다른 핑계를 곁들여 자기에게 가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은밀히 아테나이를 떠났습니다.125 스파르테가 저주받은 집안 출신 클레이스테네스를 추방하라고 해 클레이스테네스가 은밀히 아테나이를 떠났다는 소문이 도시에 다 퍼지고, 이제 도시의 일은 어떻게 되어갈지 염려스럽고 궁금할 때, 근위병 몇몇만 데리고 스파르테의 왕 클레오메네스가 다시 아테나이에 왔다는 소문이 돌았고, 곧이어 알크마니온 집안 사람 700가구를 저주받았다며 쫓아내느라 온 도시가 뒤숭숭해졌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저항하자 그들 조상들의 무덤까지 파헤쳐 뼈들을 아티케 바깥에 내던졌다는 말까지 퍼졌고, 겁 먹은 아테나이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이는 바람에 아테나이가 온통 클레오메네스의 도시가 되어버린 듯 신이난 클레오메네스의 숨소리와 분주한 알랑쇠 이사고라스의 발소리만 들렸습니다. 이사고라스가 참주의 친구와 자기의 친구들 300명의 명단을 내보이며 아테나이의 새로운 과두체제를 설명하였고,126 클레오메네스는 자신만만하게 솔론의 불레를 해산하고, 그 일을 이사고라스의 새로운 300인 회의가 맡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11.24.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나이를 은밀히 떠난 후에도 솔론의 불레는 매일 아침이면, 서로의 안녕을 확인할 겸, 새로운 소식이나 소문을 들을 겸,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의견도 서로 나눌 겸, 겸사겸사 나오는 불레타이들로 매일 회의 아닌 회의가 열렸습니다. 온종일 도시에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을 듣고 확인해보고 다음 일을 예상하는 동안, 클레오메네스가 두 번째 아테나이로 온 이후 며칠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하나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하도록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들은 처음 스파르테의 왕 클레오메네스가 이 모든 일들을 벌이는 줄 알았습니다. 스파르테의 왕이 아테나이에서 할 일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가 아테나이 일에 일일이 신경쓸 까닭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하나씩 틀어졌고, 지나고 보니 스파르테 왕이 움직인 덕은 이사고라스가 다 보는 것을 알고서야, 이사고라스가 아테니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스파르테 왕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이사고라스가 눈에 들어오자 그들은 참주가 어디론가 끌려가고 난 후 지금까지 아테나이를 누가 이끌고 있는지, 다시 말해 아테나이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던 까닭을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아테나이에 열중하는 클레이스테네스에게 눈이 팔려 참주의 친구이자 소수 귀족들을 대표하여 현실적으로 클레이스테네스의 최대 정적인 티산드로스의 아들 이사고라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교활한 이사고라스는 참주의 빈 자리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으면서 스파르테의 왕이 알게 모르게 그 자리에 앉아 있도록 하여127 그로 하여금 자기가 아테나이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계획을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가도록 할 것이었습니다. 클레오메네스로서도 끝을 알 수 없는 클레이스테네스보다 자기에게 알랑거리는 이사고라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테나이에 대한 자기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나쁠 것이 없어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작정하고 있을 것이었고요. 이렇게 불레테스들에게 아테나이의 새로운 주인이 되려는 이사고라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자, 그들은 그들이 모인 불레가 도시에게 또 그들 불레테스에게 그리고 또 나머지 다른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새삼스러워졌고, 솔론의 시대 이래 참주의 시대를 거치며 오래 잊고 살았던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1.25. 그러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 불레테스에게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깊게 생각해볼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불레를 해산한다는 전령이 왔고, 이내 낯설지 않은 옛 참주의 용병들이지 싶은 사람들을 데리고 이사고라스 수하들이 들이닥쳐 그들을 쫓아내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옛 참주가 아니라 틀림없이 이사고라스에게 고용되어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을 내쫓았을 그 낯설지 않은 용병들이 든 몽둥이와 칼을 보자 모두들 하나같이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습니다. 어줍잖은 공직에서 쫓겨나게 되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되었길래 아테나이 시민이 또 다시 다른 도시의 사람이 든 몽둥이와 칼을 피해 쫓겨나야 하는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울분으로 하얘진 머리로 그들이 도시의 주인은 도시민이라던, 누가 도시를 제 마음대로 하려 하면 저항하라던 솔론의 말을 떠올렸을 리는 만무하고, 그저 아테나이 사람이 다른 도시에서 온 용병이 칼과 몽둥이를 피해 쫓겨난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그렇게는 안 되겠다고 버텼고, 숫자가 더 많았으므로 되려 그 용병들을 아고라 거리로 몰아냈고, 아고라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자 대뜸 그들과 함께했고, 용병들이 놀라 아르콘들이 있는 테스모테테이온으로 도망쳤고, 사람들이 몰려오자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가 용병들과 수하들을 데리고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갔고,128 그래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갇히고 말았고, 이제 아테나이에서 아크로폴리스에 갇힌 그들을 따르고 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나 여신도 그들을 거부했습니다.129 사흘을 그렇게 갇혀 지내다가 여신도 거부하는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를 떠나 안전하게 스파르테로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클레오메네스가 아테나이 일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스파르테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이사고라스가 목숨을 애걸하자 혹시 다음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몰라 대동하기로 했고,130 아테나이 사람들도 스파르테의 왕을 해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클레오메네스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도시를 정상적으로 돌려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131 

 

11.26. 그러나 아테나이 사람들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몽둥이와 칼로 아테나이 사람들을 겁박하던 다른 도시에서 온 용병들과 그들을 데리고 아테나이 시민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던 참주의 수하들이었습니다.132 그들은 한마디로 주인을 해치고 겁박한 노예들이었으므로 용서할 수가 없었고, 스파르테 사람들이 안전하게 아테나이를 떠나자 모두 처형했습니다.133 그것은 이제 그 누구도, 다른 도시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아테나이 사람들이라 해도, 몽둥이와 칼을 들고 아테나이의 주인인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해치는 것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결의이자, 자신들의 안전과 자유를 스스로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용병들은 이런 아테나이 사람들이 결의와 다짐의 의식에 쓴 희생 제물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 제의를 통해 그들이 오래 참주의 노예이자 불명예 시민이었다는 부끄러움을 씻어야 했고,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사면하여 모두가 명예로운 아테나이라는 도시의 도시민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했고, 도시의 주인으로서 그들 모두가 안전하고 자유로운 도시민임을 서로 축복해주어야 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솔론이 그렇게나 가르쳐주고 싶었던 도시와 도시민의 할 바에 대한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테나이 사람들은 아테나이의 주인으로서 자신 있게 클레이스테네스를 불러들이어, 헬라스에 전례없는, 아니 온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아테나이만의 새로운 법과 제도를 가지고 온 세상에 대해 새로운 아테나이를 알릴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리고 우리 아테나이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주인인 민주정을 세울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도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위한 파이안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아테나이 민주정 만세! 아테나이시민 만세! 아테나이 만세!

 

11.2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확실히 준비된 클레이스테네스 덕분에 아테나이 사람들이 민주정이라는 새로운 법과 제도로 아테나이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은 순조로웠지만,134스파르테가 언제 또 시비를 걸고 아테나이에 군대를 보낼지 알 수 없어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와 아울러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을지 염려스러워졌습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 퓌티아를 매수하여 신탁을 위조하는 꼼수로 스파르테를 움직여 참주를 내치기는 했으나, 그후 이사고라스와 자기를 대하는 클레오메네스의 태도를 잘 아는 클레이스테네스로서는 자기가 썼던 꼼수 때문에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가 스파르테에 의해 언제든지 훼손될 수 있다는 염려를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자신감으로 가득찬 아테나이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에 대한 믿음이 새록새록 솟아오르긴 했으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티케로 쳐들어오는 메가라를 결딴낸 일 이래 참주가 되고나서는 혹시 칼끝을 자기에게 겨눌까 두려워 군대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스파르테가 쳐들어오면 과연 아테나이가 그들을 막아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이사고라스는 자존심 상한 클레오메네스를 자극하여 스파르테를 움직이려 하고,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 사람들은 본디 참주의 친구들이었는데다가 이제는 칼키스까지 힙피아스를 돕고 나서고 있고, 코린토스도, 아르고스도, 메가라도, 테바이도, 텟살리아도, 헬라스에서 제법 힘을 갖춘 도시들은 모두 참주의 친구거나 클레오메네스의 친구들이 다스리고 있어, 누구에게 사정하여 도움을 청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것도 자신의 염려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개혁을 마친 솔론이 아테나이를 떠난 것과는 달리, 클레이테네스는, 비록 참주를 치기 위해서였으나,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위험해질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제 그는 여전히 복권을 노리는 참주 힙피아스나 이사고라스의 정변을 일으킬 빌미가 되더라도 아테나이 사람들과 함께 아테나이의 민주정과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는 물론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했습니다.

 

11.28. 마침내 스파르테왕 클레오메메스가 아크로폴리스에서 당한 모욕을 갚고 자신을 쫓아낸 다음 자기와 함께 온 이사고라스를 참주로 앉힐 의도로,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도시들에게 클레이스테네스와 아테나이에 대한 응징을 위한 전쟁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움직임을 보이자,135 클레이스테네스는 불레에 나가 자신의 염려를 그대로 전하고, 자신의 은퇴와 출국도 침략의 빌미를 주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렇다고 스파르테나 힙피아스나 이사고라스가 아테나이를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맡기고 조용히 지낼 리 없으니, 그 대안이 어디 없겠는지 조심스럽게 물었고, 아이가이온 바다 건너 사정에 밝은 한 사람이 최근 뤼디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와의 동맹을 제안했고,136 불레는 잃을 것 없어 보이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동맹을 맺을 사절들을 뽑아 뤼디아의 사르데이스로 보냈습니다. 아테나이의 사절들을 맞이한 페르시아의 뤼디아 총독 휘스타스페스의 아들 아르타프레네스는 아테나이가 어디에 있는지도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도 몰라 사절들이 설명을 해주었어야 할 정도였지만, 동맹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사절들에게 정리해주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요구는 동맹을 위해 아테나이의 물과 흙을 바치라는 것이었고,137 어떡하든 도시를 구할 마음뿐인 사절들은  이 조건을 수락하고 돌아왔고,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과의 조약에 대해 어두웠던 당시의 아테나이는 물과 흙을 바치는 것이 대등한 동맹 관계가 아니라 페르시아 왕에게의 예속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페르시아 조건을 수락했던 사절들을 엄히 문책하고, 일방적으로 페르시아와의 조약은 없던 일로 돌려버렸습니다.138  페르시아가 당장 군대를 보내어 눈 앞에 움직이는 보이오티아의 테바이나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나 화가 잔뜩 난 스파르테를 막아줄 수 있을런지 회의적인 판에, 불확실한 아테나이의 안전을 걸고 확실한 페르시아에의 예속으로 아테나이의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정말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절들이 가져온 결과에 실망했지만, 도시의 자유를 위해 예속을 단호히 거부하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태도가 믿음직한 클레이스테네스는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에게 아테나이 침공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이 은퇴하고 아테나이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아테나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무슨 대가를 치르고도 다른 도시들까지 동원하여 아테나이의 권력을 독점하려는 힙피아스와 이사고라스에게 아테나이를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뒤,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아테나이 사람들 스스로가 그 혼란을 잠재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테나이를 떠났던 솔론처럼 그 짧은 시간 동안 자기와 함께 개혁을 이루고 이제 진정한 도시의 주인이 된 아테나이 사람들이 틀림없이 아테나이와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낼 것이라 믿으며 아테나이를 떠났습니다.139 

 

11.29.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나이를 떠났다는 소식이 엘레우시스에서 아티케로 쳐들어오려던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에게 전해지자 전투를 준비하던 코린토스가 그렇지 않아도 아테나이를 치는 이유가 석연치 않아 께름칙했던 차에 클레이스테네스도 없는 아테나이를 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며 철수하기 시작했고,140 이를 본 또 다른 스파르테의 왕 데마라토스가 평소 클레오메네스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도 스파르테의 아테나이 침공이 명분 없는 부당한 것으로 보고 뒤따라 철수하기 시작했고,141 그러자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동맹군들도 코린토스의 철수에 이어 스파르테 왕들의 불화까지 보게 된 터라 진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려 나서는 바람에, 치욕스러웠지만 클레오메네스도 동맹군을 해산하고 스파르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철수한 것을 확인한 아테나이는 방향을 바꾸어 아티케 서쪽에서 분탕질하는 칼키스를 치러 갔고, 보이오티아 사람들이 칼키스를 도우려 몰려왔고, 보이오티아를 먼저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아테나이가 많은 보이오티아 사람들을 죽이고 또 700명이나 되는 포로를 잡는 대승을 거두었고, 그 사이에 달아난 칼키스를 쫓아 그날로 배를 타고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가서 칼키스를 점령했고,142 말을 키울 정도로 부자인 칼키스 사람들의 농지에 이주하여 살기를 원하는 사람 4,000명을143 남겨 놓은 다음, 많은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왔고, 보이오티아와 칼키스의 포로들은 모두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고, 몸값으로 받은 돈의 일부로 봉헌문을 새긴 청동 사두마차를 만들어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퓔라이아Prophylaia前門 왼쪽에 모두가 쉽게 볼 수 있도록 놓아두었습니다.

 

11.30. 굳이 그 청동 마차를 보지 않아도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 짧은 시간 안에 달라진 자신들이 이룬 것들에 대해 스스로가 대견하였습니다. 비록 스파르테의 힘으로였지만 참주를 내쫓았고, 그 누구도 대사면을 말하지 않았지만, 참주시대에 참주를 제외하고는 누구라도, 비록 참주의 친구라며 거들먹거리던 사람들이라도, 결국은 같은 참주의 노예들이었으므로, 참주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참주의 노예가 되었던 불명예를 서로 서로 용서하여 모두가 명예로운 아테나이 시민으로 받아들였으며, 한발 더 나아가, 모든 아테나이 시민이 평등하게 새로운 도시의 민주적 정치 제도에 대해 듣고 말하고 결정함으로써 헬라스 세계 최초로 명실상부하게 도시민이 도시의 주인인 새로운 아테나이로 만들었으며, 혼자만의 권력을 위해, 자기만 도시의 주인이 되기 위해, 모두가 도시의 주인이 된 길을 부수기 위해, 자기가 나고 살았던 도시에 다른 도시의 군대를 불러들여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부수는 자를 단호히 거부하고,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평생에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무기를 들고 나서서, 아티케에 쳐들어온 보이오티아와 칼키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아테나이와 자신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볼수록 솟아나는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이제 아테나이 사람들은 모두 헬라스 최강의 전사들이 될 것이며, 그들의 도시 아테나이를 헬라스 최강의 도시로 만들 것이었습니다.144

 

11.3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렇지만,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모두가 평등한 아테나이의 주인이 되는 동안 일어난 도시 내부의 권력 투쟁과, 그것이 불러온 다른 도시의 간섭과, 그 간섭을 뿌리치기 위해 숨돌릴 틈도 없이 치루어야 했던 전쟁 때문에, 그것도 태어나서 처음 치르는 전쟁 때문에, 어떤 도시의 영혼이, 새롭게 만든 민주정이란 그들의 정치 체제로 하여금 지난 시절의 아테나이가 물려준 도시민 간의 불화와 불복을 녹이고, 그런 불복과 불화를 자아내는 도시민 간의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없애고, 이 모든 문제의 씨앗인 도시민의 오만과 탐욕을 억누르는, 그런 장치가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인지, 그런 도시의 영혼을 찾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테나이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도시의 정치 체제로 민주정을 만들기 위해 열렸던 매일 매일의 불레와 마흔 번의 엑클레시아에서 쏟아져 나왔을, 도시민이 바라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도시가 또 도시민이 해야 할 것, 바라지 않는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이 모든 것들을 도시의 영혼으로 담아내어 도시민의 영혼에 심을 기회 역시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이, 민주정을 논의하던 과정에서, 과두정과 참주가 만들어 물려준 그것들 때문에 그들이 오래 고통받아왔던, 불화와 불복, 부와 권력의 불평등, 오만과 탐욕, 이 모든 문제들 가운데 오로지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에 온 신경을 쏟아 민주정의 법과 제도를 만든 것은, 마치 권력의 불평등만 없애면, 바꾸어 말해 마치 모든 도시민이 도시의 주인만 되면, 부의 불평등이 자동적으로 없어지기라도 할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불평등에 대한 논의보다 더 잦고 치열했던 부의 불평등에 대한 논의 결과, 모든 부의 원천이 도시가 아닌 한, 부의 불평등 문제를 도시의 법과 제도로 없앤다는 것은,145 그것의 가능 여부를 떠나, 도시에 부의 불평등보다 더 크고 많은 문제를 가져올 것이라는 대다수의 의견에 따라, 우선 민주정으로 권력의 불균형 문제부터 해결하고, 부의 불균형 문제는 앞으로 민주정을 통해 도시가 최우선적으로 취할 정책으로 삼자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146 그렇지만 스파르테의 전사들에게 평등하다는 말은, 전사의 목숨이 똑같다는 것 정도는 더 말할 나위도 없어서, 가진 것의, 먹고 사는 것의 평등이 진정한 평등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장에서나 도시에서나 지휘자가 있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능하거나 정직하지 않거나 오만하거나 탐욕스럽지 않는 한,147 그가 누구든, 세습이든 선출이든, 지휘를 위해 쓰는 그의 권력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먹고 똑같이 살다가 똑같이 싸우고 똑같이 죽는데, 따로 무엇을 들어 불평등이라며 내보여 다툴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등이 스파르테의 영혼이었고, 부의 평등이 스파르테 사람들의 평등이었고, 스파르테 사람들은 도시의 영혼과 그들의 평등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모두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평등은 검소한 일상 생활이었습니다. 평등이라는 도시의 영혼이 도시민 모두의 영혼에 심어져, 스파르테 사람들은 모두 일상을 평등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은 전사가 아니라 참주의 노예였었기 때문인지, 그들이 생각하는 평등은 달랐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평등하다는 말은, 똑같이 도시의 주인이 되는 것이어서, 부의 평등도 좋지만, 정치적인 평등이 진정한 평등이었습니다. 도시의 주인으로서 도시의 일에 똑같은 기회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똑같은 법으로 대하고, 똑같은 기회로 도시 일을 맡는 평등을 말했습니다. 따라서 아테나이에서의 평등은 정치적 평등이었고, 정치적 평등은 바로 기회의 평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기회의 평등은, 때로는 운이 때로는 능력이 또 때로는 다른 시민이 그 기회를 살리게 하기도 놓치게 하기도 했기 때문에,148 결코 일상에서 평등하게 살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인 평등이 이럼에도,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안전하고 자유로운 도시의 주인이 되어, 아테나이에서 자격만 갖추면 권력을 가질 기회가 평등하듯이, 능력만 갖추면 부를 이룰 기회도 평등하다고 보았기 때문인지 부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모두가 도시의 법과 제도가 아닌 도시의 정치가들이 펼칠 정책에 맡기고 넘어간 듯 보입니다. 그 결과 그들이 만든 민주정이라는 아테나이의 새로운 정치제도마져 과두정이나 참주가 그랬듯이 부의 불평등이 가져오는 도시민 간의 불화와 불복을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 대신, 기회가 닿는 대로 도시가 그로부터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바를 다하기야 하겠지만, 우선은 운에 능력에 다른 도시민의 선택에 따라 주어진 기회를 살려149 스스로 부를 이룰 도시민에게 그 일을 맡겼던 것처럼 보입니다.150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내려온 부의 불평등이란 골치 아픈 유산을 정리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그대로 물려받아 놓고서는, 짐짓 이제 도시의 문제는 민주정으로 모두 해결해 나갈 것이라며 뿌듯해 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11.32. 정말 그랬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보이오티아와 칼키스를 물리치느라 치른 전쟁의 끝에 나왔습니다. 그 전쟁의 끝에 세운 청동 사두마차에 이 답을 적어두지 않아 후세가 모르고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가 함께 덮고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덮고 사는 그 답은 이것입니다. '그랬다. (아테나이는 그 전쟁에서) 칼키스를 점령하고, 칼키스 부자들의 농장에 4,000명의 이주자들을 남겨두었다.151' 이것이 또 다른 도시의 정책 때문이었든 아니든 간에,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에 관련하여 아테나이의 민주정이 첫 번째로 취한 이주 정책이었던 만큼,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아테나이의 길고 긴 전쟁의 역사가 시작된 만큼, 그리고 한 번 전쟁에 져서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잃게 되었던 만큼, 이 한 줄도 되지 않는 짧은 말을 제법 길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네요. 

 

11.33. 클레오메네스는 아테나이를 치기 위해 펠로폰네소스에서 몇 명이나 되는 군대를 모았을까요? 1,000명 정도였을까요? 헤일로타이를 포함한 스파르테만 그 정도였을 것이니 2,000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막기 위해 몇 명이나 모았을까요? 틀림없이 군사적 가용 인원을 대대적으로 모았을 것입니다. 3,000명? 아니 10,000명까지 되지 않았겠습니까? 전쟁의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스파르테의 전사들을 상대하려니 숫자라도 많아야 되었겠지요. 아마 코린토스가 개전 직전에 철수한 이유가 아테나이 군대의 개미 떼처럼 많은 숫자에 기가 죽어서였을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이렇게 시작된 전쟁 끝에, 아테나이가 보이오티아와 칼키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칼키스를 점령하여 칼키스 부자들의 땅에 4,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남겨두고 왔다는 것입니다. 4,000명이나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겨두고 온 4,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이냐 하는 것이 궁금하시지요? '대체 몇 사람이나 에우보이아 섬의 조그마한 도시 칼키스를 치러 갔길래, 4,000명이나 남길 수 있었느냐'부터, '아니야 칼키스를 치러 가는 배를 탈 때 이미 칼키스를 점령하면 그곳에 남아 살겠다는 사람들을 위주로 태웠고, 그래서 죽자 살자 싸워 이겼고, 부자들의 말 농장을 보상으로 받아 4,000명이 남았던 거야'에서, '아니야 그 4,000명은 칼키스로 가서 싸운 사람들 가운데서도 있었지만, 칼키스를 점령하고 난 다음 아테나이 군대가 철수하는 조건으로 말을 키우던 부자들의 농장을 전쟁 보상금으로 받았고, 그래서 그 땅에서 살 이주자를 모집했고, 나누어 받은 땅에 살고자 하는 4,000명을 이주시켜 남겨두고 왔다는 말이야'에서, 또 다른 '아니야', 더 다른 '아니야'까지 많은 설명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설명하든 그 전쟁의 끝에 아테나이가 칼키스를 점령하였고, 땅이 생겼고, 그 땅에 대규모의 아테나이 사람들이 이주했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이렇게 시작된 아테나이 사람들의 이주의 성격과, 그것이 아테나이의 식민지나 더 나아가 제국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게 해주는 단서이기 때문입니다.152 앞에서 아테나이의 민주정은 논의 과정에서 부의 불평등의 해소를 도시가 취할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기회가 닿는 대로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도시가 할 바를 다하기로 했었다고 말씀드렸던 대로, 이들 4,000명의 이주는 민주정이 취한 최우선 정책의 결과물이고, 민주정이 잡은 첫 번째 기회를 첫 번째로 살린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아테나이의 첫 번째가 아니라 굳이 민주정의 첫 번째라 하는 것은, 규모도 이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고 성격도 서로 다르지만, 아테나이가 도시의 정책으로 이미 다른 지역에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케 한 적이 아주 옛날이 아니어도 여러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테나이의 올림픽 우승자 프뤼논이153 시게이온을 두고 뮈틸레네의 핏타코스와 결투를 벌인 이야기는 이주가 전쟁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데,154 아티케의 아테나이나 레스보스 섬의 뮈틸레네 양쪽 다 정적靜寂의 땅155 시게이온을 두고 오래 다툰 것이, 남의 땅에서 남의 농사나 짓고 살기 보다는 작은 땅덩어리라도 내 땅에서 내 농사를 짓고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흑해 연안의 곡물을 헬라스에 내어보내는 이권을 확보할 기지로 삼기 위해 필요한 땅이었기 때문이라, 아테나이가 그 기지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사람들을 이주시켰던 것이 그 하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같은 목적으로 그리고 그 이권을 그의 아들 헤게시스트라토스에게 줄 겸 참주가 되어 다스리게 할 겸 사람들을 이주시켰던 것도 또 하나,156 트라케 남쪽에 헬레스폰토스를 향해 뻗은 케르소네소스 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무력 지원 요청을157 받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나이의 정식 군대를 보내는 대신, 점점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아지는 강력한 잠재 정적 밀티아데스에게158 지원을 맡기고 사람들을 알아서 데려가 돕도록 했는데,159 밀티아데스는 돌롱코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주는 데 성공한 뒤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곳에 정착하여, 아테나이에서 이주 아닌 이주를 하게 된 것도 또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프뤼논이 시게이온으로 갈 때는, 아테나이가 뮈틸레네와 전쟁 이유를 시게이온의 곡물 유통을 둘러싼 전략적 가치를 앞세웠지 가난한 사람들의 이주로 아테나이가 안고 있는 부의 불평등이 가져온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앞세우지는 않았을 것 같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시게이온으로 군대를 보냈을 때도 변치 않은 시게이온의 전략적 가치를 앞세웠지 아들 헤게시스트라토스를 참주로 앉히기 위해서라거나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밀티아데스를 케르소네소스 보낼 때도 트라케 남부의 전략적 가치를 내세웠지 정적 밀티아데스나 도시의 문제인 부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람노스 섬이며 암피폴리스처럼 아테나이 이주민들이 이룬 식민도시들이 많이 생겼지만, 그들의 이주가 전쟁과 연관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4,000명이나 되는 칼키스로의 대규모 이주가 다시 전쟁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참주의 노예가 아니라 아테나이의 주인이 된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들이 치른 첫 번째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것만으로 벅찬데다가,160 4,000명이나 되는 이주자를 칼키스에 정착시켜, 민주정에 적대적이고 여전히 참주 힙피아스의 희망인 에우보이아 섬과 에레트리아를 견제할 아테나이의 기지를 영구히 배치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 4,000명에게 이제 자기 땅에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사실로 뿌듯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어디 그뿐이었습니까? 그 전쟁은 포로의 몸값으로 받은 돈으로 보이오티아와 칼키스의 분탕질로 피해를 입은 아티케 사람들의 보상은 물론, 청동으로 사두마차를 만들어 받은 몸값을 자랑할 만큼 괜찮은 수입을 아테나이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확실히 경험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도시를 끝이 없는 전쟁 속에 던져넣을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미쳐 몰랐겠지만, 전쟁에 이겨 다른 도시와 그 도시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빼앗으면, 그들의 도시와 그들의 안전과 자유가 더 굳세어질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의 부를 옮겨와 더 잘살게 된다는 사실은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도시민의 것을 빼앗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도시의 것을 빼앗아 나누고 그래서 도시민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잘살게 된다는 것은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아테나이 사람 그 누구도 거부할 일이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테나이 사람들은 모름지기 필승의 전사가 될 것이었습니다. 평생 무기 한번 들어보지 못했던 참주의 노예들이 도시의 주인이 된지 다섯 해 만에 필승을 다짐하는 전사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그들 스스로에게도 커다란 놀라움이었을 것입니다.

 

11.3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자신만만해진 아테나이 사람들이 아이기나에 따질 일이 있어 갔다가 몽땅 죽고 한 명만 살아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고, 아이기나를 응징하기 위해 부산을 떨고 있을 때, 스파르테 왕 클레오메네스의 다음 움직임이 곧바로 아테나이 사람들을 긴장시켰습니다. 칼키스야 4,000명의 이주자들이 그들이 할당받은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칼키스의 움직임을 그들 스스로 견제해주겠지만, 보이오티아의 테바이는 지난 번의 패배를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테바이가 지난 번처럼 스파르테와 공조하여 쳐들어온다면 지난 번과는 아주 다른 전쟁이 될 것이었고, 게다가 클레오메네스는 아테나이에게 갚아줄 것이 많았습니다. 지난 번 공격 때 아테나이 내부의 동조를 끌어내지 못한 이사고라스에게 실망한 클레오메네스는 시게이온에 있던 참주 힙피아스를 스파르테로 부른 다음,161 동맹 도시들의 사절들도 불러, 자유를 찾아준 은덕을 잊고 오만방자해진 아테나이를 쳐서 힙피아스를 다시 참주로 앉힌다면 더 이상 다른 도시들이 보이오티아나 칼키스처럼 당하지 않을 것이라며 거병할 것을 제안했지만, 엘레우시스에서의 철수를 주도했던 코린토스가, 참주에 대한 스파르테의 이중적인 태도를 힐문하고,162 아울러 그들이 겪었던 참주들에 대한 경험을 말하며,163 이번에도 아테나이에 참주를 세우기 위한 출병을 거부하고 나서자, 다른 도시들도 스파르테가 헬리스의 다른 도시의 일에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클레오메네스의 두 번째 아테나이 침공 기도 역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164 힙피아스는 스파르테나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에게서는 더 이상 기댈 일이 없다는 소득만 가지고 스파르테를 떠났지만, 안테무스에서 살라는 마케도니아의 왕 아뮌타스의 제안이나 이올코스에 살라는 텟살리아의 제의도, 기여코 아테나이의 참주로 복귀하고야 말겠다는 힙피아스의 결의를 모르는 단순한 호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힙피아스는, 스파르테 다음의 마지막 방법을 위해, 우선은 사위가 있는 람프사코스와 가까운 시게이온으로 다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시작할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의 참주로 복귀하려는 힙피아스의 마지막 방법은 아테나이를 페르시아가 지배하게 하고, 자기가 아테나이에 대한 페르시아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뤼디아 총독 아르타프레네스를 움직이기 위해서 자기가 머물 곳은 사르데이스와 가까운 시게이온이어야 했습니다. 힙피아스는, 자기를 몰아내기 위해 클레이스테네스가 델포이의 퓌티아를 움직였듯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르데이스의 아르타프레네스를 움직였고, 이에 대응하려고 찾아온 아테나이의 사절에게 아르타프레네스는 아테나이가 살고 싶으면 힙피아스를 데려가 모시라 했고, 페르시아에 종속되어 도시의 자유를 잃으면서 힙피아스가 다시 참주가 되어 도시민 모두가 다시 자유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아테나이는 이제 페르시아와 적대적으로 지낼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165 메네스테우스로부터 시작된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에 다른 도시의 힘을 들여와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해치던 일이, 퀼론과 페이시스트라토스를 거쳐 힙피아스에 와서는, 다른 신을 믿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해쳐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권력을 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었습니다.

 

11.35. 힙피아스라는 한 쫓겨난 권력자의 권력에 대한 탐욕이 이렇게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을 때, 보이오티아와 칼키스를 상대로 싸워 이긴 아테나이 사람들의 자신감이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오만으로 바뀌어져 있을 때, 그리고 그 전쟁으로 몸값과 말 농장이라는 망외의 소득을 얻어 생긴 만족감이 전쟁으로 재물을 얻겠다는 탐욕으로 바뀌져 있을 때, 그래서 어디 전쟁 한번 할 데나 없나 바라는 오만과 탐욕이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위태롭게 하고 있을 때, 페르시아의 왕 다레이오스는,166 제국에 퍼진 모반과 찬탈의 음모에 대한 숱한 소문들을 잠재운 다음,167 정복하여 복속된 땅에서 번갈아 일어나는 끊임없는 반란을 모두 분쇄한 다음,168 왕국의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왕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안정시킨 다음,169 이제 그런 왕국의 거대한 힘을 밖으로 돌려 스스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려 저항하는 변방의 민족들과 그들의 도시들에게 복속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170 그리고 그런 페르시아의 서쪽 변방 에우로파로 들어가는 땅의 길목에 트라케가 있었고, 트라케의 서쪽으로 헬라스가 있었고, 바다의 길목인 페르시아의 땅 아시아의171 서쪽 해안에 헬라스 사람들이 세운 도시들이 있었고, 그 해안 서쪽으로 아이가이온 바다가 있었고, 섬들에는 헬라스 사람들이 있었고, 그 바다 서쪽 끝에 헬라스가 있었습니다.

 

11.36. 그리고 그 서쪽 끝 헬라스에 아주 가까운 곳에 온 세상의 대왕 다레이오스가 나타났습니다.172 메디아를 괴롭히던 카스피 바다 쪽의 스퀴타이 사람들을 쫓아낸 다음,173 그가 흑해 서쪽 변방 가까이에 처음 나타난 것은 흑해 연안의 스퀴타이 사람들을 내쫓기 위해서였습니다. 수사에서 출발한 다레이오스의 거대한 무력 시위 행차는 스퀴타이들의 본거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모든 도시들이 동참하였는데, 헬레스폰토스의 헬라스 사람들 도시들 뿐만 아니라, 아시아 서안의 아이올리스, 이오니아, 도리아에 있는 헬라스 도시들도 참전했고, 사모스나 레스보스 같은 아시아에 가까운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들까지 참전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모은 대군은174, 그냥 못 본 채하는 트라케를 지나, 도망만 치는 스퀴타이의 본거지까지 갔는데, 거기는 마을도 없고 도시도 없는 황량한 벌판이라 이리 저리 헤매다 기습을 당하기 일수고 피해서 돌아서면 또 당하니 천하의 다레이오스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175 물러서는 다레이오스는 길을 몰라 돌아와야 했고, 온 동네가 제 집 같은 스퀴타이가 갈 때 놓았던 배다리에 먼저 도착했고, 스퀴타이는 배다리를 지키던 사람들에게 다리를 부순 뒤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했고, 배다리를 지키던 사람들 사이에 다레이오스가 무사히 돌아가게 할 것인가 아닌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고, 케르소네소스의 밀티아데스는 스퀴타이와 뜻을 같이해 페르시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다리를 부수자고 했고, 밀레토스의 히스티아이오스는 다레이오스의 은덕으로 참주가 되었으니 다레이오스가 망하면 자기가 가진 자기 도시에서의 권력도 망한다며 반대하고 나섰고, 페르시아로부터의 해방보다는 자기가 다스리는 도시의 참주로 남고 싶은 대다수의 참주들이 동조하였고, 다레이오스를 구하기로 한 이들은 눈 앞의 스퀴타이가 겁이 나 꾀를 부릴 수밖에 없었고, 스퀴타이가 보라고 배다리의 중간을 허물었고, 다레이로스가 오자 허문 다리를 다시 이어 페르시아의 대왕 다레이오스를 구했습니다.176 그러나 페르시아로부터의 해방보다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레이오스를 구원한 헬라스 참전 도시의 권력자들은, 그것으로 그가 그들의 권력을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이 다레이오스의 신하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들의 권력에 대한 탐욕이 그들의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다른 신을 믿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복종의 대가로 얻게 된다는 사실을 자기 좋을 대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어차피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는 참주인 그들에게 바치는 복종의 대가였으므로 그거나 그거나 다를 것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겠지요. 그들이 그들 도시의 참주로서 권력을 쥐고 있는 한 문제될 것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스퀴타이 정벌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렇게 헬라스 사람들 덕분에 무사히 사르데이스로 돌아올 수 있게 된 다레이오스는 원정 길에 그냥 못 본 채만 하던 트라케를 복속시키기 위해 에우로파에 팔만의 군대와 함께 메가바조스를 남겨두고 일단 그의 스퀴타이 원정을 마무리했고, 메가바조스는 어려움없이 트라케를 복속시켰고, 대왕을 위해 마케도니아의 흙과 물도 받았습니다.177 사르데이스에서의 다레이오스는, 밀레토스의 히스티아이오스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땅을 주었으며, 뮈틸레네의 코에스는 그의 조언에 대한 보답으로 그가 원하는 대로 뮈틸레네의 참주를 시켜주었고, 행렬에서 주의를 끈 탄원자를 위해 메가바조스로 하여금 파이오니아를 치도록도 하는 등, 그야말로 온 세상의 대왕다운 권위를 다 보인 다음, 사르데이스의 총독은 아르타프레네스에게 맡기고, 오타네스를 메가바조스의 후임으로 아시아의 해안에서의 군사적 책임을 맡기고, 메가바조스의 우려를 알아듣고는 새 도시를 건설하러 갔던 히스티아이오스를 불러 고문관으로 삼아 그를 대동하여 수사로 돌아갔습니다.

 

11.37. 인질이 되다시피 한 히스티아이오스가 밀레토스를 비우고 다레이오스와 함께 수사로 가게 되자 페르시아에 복속되어 더 행복해 보이던 밀레토스와 다른 이오니아의 도시들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다레이오스가 수사로 돌아간 뒤에도 오타네스는 계속 폰토스와 헬레스폰토스 그리고 아이가이온 바다 섬들의 도시들을 함락시켜 페르시아에 복속시켜 나갔습니다. 헬라스 본토가 아닌 한 오타네스도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을 때,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들 가운데 가장 부유한 낙소스가,178 그들 못지않게 전무후무한 번영을 누리며 이오니아의 자랑거리가 된 밀레토스179 때문에, 밀레토스와 다른 이오니아 도시들의 군대와 함께 페르시아의 군대에게 침공을 당하는 환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환난 역시, 밀레토스의 힘을 빌려 낙소스의 권력을 잡으려는 일군의 낙소스 부자들과, 그 부자들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자기가 낙소스의 권력을 쥐고 싶어, 자기에게는 없는 낙소스 공략의 힘을 페르시아에게서 비용을 대는 조건으로 빌리는 밀레토스의 참주 대리 아리스타고라스의, 자기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해치고서라도 권력을 잡겠다는 권력에의 탐욕이 불러일으킨 환난이었습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사르데이스로 가서 낙소스 공략을 설명하며, 원정 비용도 자기가 대겠다고 했고, 군비까지 대어주면서 낙소스는 물론 인근의 파로스 안드로스 심지어 에우보이아까지 넘볼 수 있다는데, 더 바랄 것이 없는 아르타프레네스는 당장에 수사의 다레이오스에게 보고하고 페르시아 군대와 인근 복속 도시들의 군대를 모아 밀레토스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려니 아리스타고라스와 페르시아의 메가바테스 사이에 알력이 생겨 메가바테스가 낙소스에게 침공 계획을 누설하는 바람에180 낙소스 침공이 넉 달이나 계속되자 군자금이 바닥나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침공이 길어지자 자기 돈까지 털어넣은 아리스타고라스는 아르타프레네스의 침공 비용 독촉에 시달리는 판에 메가바테스와의 불화마져 불거져 나오면 틀림없이 밀레토스에서의 권력을 잃을 것 같아 두려워졌고, 때마침 바다가 있는 밀레토스로 돌아가고 싶은 히스티아이오스로부터 깜쪽같은 전갈이 오자,181 그는 페르시아에 대한 모반을 결심하고 거사에 들어갔습니다. 헤카타이오스의 반대와 조언을 일축하고 측근들의 동조를 받았고, 낙소스에서 철수한 원정군들이 정박 중인 뮈우스로 가서 여러 도시들의 지휘관들을 사로잡은 뒤, 이제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고, 앞으로 아리스타고라스는 다레이오스에게 해로운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밀레토스에서 명목상으로 참주제를 폐지하여 밀레토스 사람들부터 자진적으로 반란에 가담하도록 유도했고, 참주들을 추방하여 이오니아의 다른 도시들도 따르게 했으며, 뮈우스에서 사로잡은 참주들은 모두 그들의 도시로 돌려보내 그들의 도시 사람들이 처리토록 하자182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모두 참주제를 철폐하였고, 참주 대신 장군을 선임했습니다. 이렇게 이오니아에서 반란을 주도한 아리스타고라스는 강력한 동맹을 찾아 먼저 스파르테로 갔습니다.

 

11.3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시작된 페르시아에 대한 밀레토스의 반란은 밀레토스가 저항만으로는 복속을 피할 수 없어 그 거대한 힘을 상대로 거역의 몸짓을 보여주려 나서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낙소스 침공의 실패와 전쟁 비용 지불이 어려워진 밀레토스의 참주 대리 아리스타고라스와 인질 신세를 면하고 싶은 참주 히스티아이오스가 페르시아로부터 그들의 권력을 박탈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밀레토스라는 도시 안전과 자유는 물론 그들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마져 걸었던 것이었습니다. 아시아의 헬라스 도시들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트로이아와 뮈케네가 싸우던 시절에는 아니었지만,183 크로이소스가 뤼디아의 왕이었을 때도 그에게 복속되어 있었고, 그 뒤 퀴로스와 캄비세스와 다레이오스 때에도 그들에게 복속되어 있었습니다. 복속의 예를 갖추고, 세금을 내고,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스퀴티아를 정벌하려는 다레이오스를 도와 선교를 놓아준 사람들도,184 퇴각할 때를 대비해 선교를 그냥두고 지키게 하라던 사람이나,185 스퀴타이의 압박에도 선교를 허물지 않고 다레이오스가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해준 사람도186 모두 페르시아의 땅에 살거나 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인근 섬들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속의 대가로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복속의 대가로 권력을 쥐고 아무 탈없이 잘 지냈었는데, 낙소스를 두고 불거진 아리스타고라스의 권력에 대한 탐욕이 페르시아와 불화를 불러오고, 그 때문에 권력을 빼앗기게 될까 두려워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타고라스에게 밀레토스와 밀레토스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자기가 책임지고 참주 대리를 그만두고 추방을 당하겠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있을 수가 없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권력 문제를 밀레토스와 밀레토스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의 문제로 돌려놓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갑작스런 그의 반란이 이오니아의 헬라스 사람들을 페르시아의 압제에서 구해내기 위한 거역의 몸짓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참주제를 없애고 이제 밀레토스를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한 도시로 둔갑시킨 다음,187 헬라스로 가서 둔갑한 밀레토스의 사정을 잘 설명하면서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이오니나 사람들을 다른 신을 믿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구해달라고 할 것이었습니다. 헬라스 세계의 도움없이 이오니아만으로는 페르시아의 힘을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은 헬라스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잘 알 것이라 믿었으므로, 아리스타고라스는 제일 먼저 헬라스의 최강 스파르테를 찾아 도움을 청했고,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는 거절했고, 그러자 아테나이에 와서 똑같은 도움을 요청했고,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는 듯 선뜻 아테나이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188 전사들의 왕인 클레오메네스는 사흘을 두고 숙고하였고, 아리스타고라스가 집에까지 찾아와 출정 사례비까지 주겠다며 그 액수를 여러 차례 올리면서 간청했지만 그전에 혼자서 일언지하에 내렸던 출병 불가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는데, 민회에 나온 그 많은 아테나이 사람들은 단 하루만에 아리스타고라스의 설명으로 출병을 결정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페르시아의 복속 강요에 저항하고, 거역의 몸짓을 보이는 이오니아에 있는 헬라스 사람들의 의지와 용기에 대해,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는 또아리를 튼 뱀처럼 냉정했고, 아테나이 사람들은 화가 난 곰처럼 피가 끓었던 건가요?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 아테나이로 오라 하던 테세우스의 후예들답게 말입니다. 스퀴타이에서 온 그 신사분이 본 대로 스파르테는 똑똑한 사람이 판단하여 결정을 내리고, 아테나이는 똑똑한 사람은 논의하고 바보들이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었을까요?189 혹시 힙피아스를 내세우는 페르시아를 이미 적으로 간주했었고, 밀레토스가 또 이미 참주제를 버렸기 때문에 돕기로 한 것이서 결코 바보들의 결정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아테나이는 왜,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무너트리고 다시 참주가 되기 위해 페르시아까지 넘나드는 그런 힙피아스를 돕는 에레트리아가 아리스타고라스를 돕기 위해 다섯 척의 함선을 밀레토스로 보내는 것을 알고서도,190 스무 척의 함선으로 멜란티오스를 밀레토스로 보낸 것일까요? 이것도 그들이 바로 몇 해 앞에 스파르테와 힙피아스가 아테나이를 치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소집하려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을 만큼 아테나이 사람들이 바보였기 때문이었습니까? 잠재적인 적인 에레트리아도 돕는 그런 밀레토스를 돕는데 왜 아테나이는 밀레토스더러 아테나이의 출전 비용을 대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을까요? 위험에 빠진 아테나이의 식민도시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사르데이스에서 도망친 멜란티오스는 왜 밀레토스를 지키기 위해 다시 밀레토스로 돌아가지 않고 아테나이로 와버린 걸까요? 만일 멜란티오스가 아무 소득없이 도망치듯 돌아오지 않았어도, 아니 만약 멜란티오스가 사르데이스를 엉겁결에 불태우지 않고,191 잠자던 도시를 조용히 점령하여, 약탈 대신 차분히 보상금을 받고, 페르시아가 보복은 꿈도 꾸지 못할 중요한 인질들을 가득 싣고 돌아왔는데도, 밀레토스는 거역의 대가로  더 이상 페르시아의 내정 간섭이나 복속 강요를 받지 않는 안전하고 자유로운 도시가 되었는데도, 그렇게 말할까요? 아테나이에서는 바보들이 결정한다고요. 엉겁결에 불을 내는 바람에 제가 먼저 놀라서 노략질도 못하고 밀레토스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배를 타고 도망치지 않았는데도, 그 뒤로 페르시아가 그들을 거역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헬라스의 도시들에게 보여주는 본보기로 밀레토스라는 도시를 절멸시켜버리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말할까요? 아테나이에서는 바보들이 결정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교활한 아리스타고라스는 클레오메네스에게나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도움을 요청했지만, 클레오메네스에게 저질렀던 두 가지 실수를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전형적인 전사인 클레오메네스는 전쟁을 누구하고 해야 하는지 과연 그 상대를 어떻게 대적해야 하는지 그래서 과연 이길 수 있는지가 중요했지, 그들이 얼마나 잘살고 그래서 얼마나 빼앗을 것이 많은지 더더구나 자기에게 돈이 생긴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관심 밖이었습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스파르테의 전사들이 세상에 최강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스파르테의 전사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습니다. 그는 스파르테를, 세상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칼을 쓰는 전사들의 도시로만  알았지, 스파르테에서 그런 전사들은 메갈레 레트라가 정착된 이후에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은 미쳐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의 보물들로 클레오메네스의 탐욕을 불러일으키려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틀이나 따져보고 이오니아에서 수사까지의 거리를 묻는 전형적인 전사의 질문에 무너지고 말았고, 수사까지 치지 않더라도 자기가 돈을 주겠다며 매수하려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것이 나쁜 짓임을 아는 클레오메네스의 어린 딸의 말대로 클레오메네스가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더 이상 스파르테에 기댈 것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타고라스가 스파르테 다음으로 강성하다고 생각한 아테나이에 와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전히 사르데이스에 있는 페르시아 군사들의 창은 짧고 방패는 없다는 이야기와 사르데이스에는 빼앗을 것이 많다는 이야기에 더해 도와만 준다면 무엇이든 다 해준다고만 했지,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 이야기와 받을 사람이 너무나 많아 뇌물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아리스타고라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오니아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테나이 사람들은, 수사의  이야기는 쏙 빼고 허약한 페르시아 사람들이 금은보화를 많이 가졌다고 설명하는 그에게, 클레오메네스 같은 질문은 할 수 없었다손 쳐도, 그런 사르데이스라면 밀레토스가 쳐서 몽땅 차지하지 왜 아테나이더러 그렇게 하라고 청하는지 묻지도 않았을까요? 사르데이스 뒤에는 수사가 있고 수사 뒤에는 엑바타나가 있다는 것을 밀레토스 사람들만 알고 아테나이 사람들은 몰랐을까요? 사르데이스는 이미 몇 차례 아테나이의 사절들이 다녀가기도 했던 곳인데 말입니다.

 

11.3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밀레토스로 스무척의 함대를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아테나이 사람들은 정말 바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이 힙피아스 때문에 이미 적으로 간주한 페르시아를 상대하는 일을 놓고 많은 논의를 했을 것임에도, 스파르테와는 달리, 결국 밀레토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 조금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아테나이가 먼저 페르시아를 적으로 돌려 공격하도록 했는지도 별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아시아나 메디아는 말할 것도 없고, 바빌로니아도 앗시리아도 아이귑토스까지도 저들의 나라로 만든 페르시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밀레토스를 돕는 일이, 쫓겨난 참주 힙피아스를 돕는 페르시아, 아시아에 있는 헬라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빼앗은 페르시아에 대한 공분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이 아리스타고라스가 사르데이스에 있다고 하는 수많은 금은보화와 아리스타고라스가 약속하는 보답의 내용에만 온 정신이 다 팔려 있었음에 틀림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더러 말로만 들었던 사절로 다녀온 사람들의 사르데이스 이야기와 겹쳐, 한 번의 공격으로 그것들을 약탈해 올 수 있다는 상상이 그들의 끝이 없는 재물에 대한 탐욕을 자극했고, 방패도 없는 짧은 창 정도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들의 한이 없는 오만을 부풀어 올렸습니다. 게다가 출전 보상금으로 받을 밀레토스의 보답이 어머어마하여 당장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잘 살지도 않는 보이오티아와 칼키스를 상대한 승리가 가져다준 전쟁 소득과 비교만 했지 사르데이스는 칼키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사르데이스는 페르시아의 한 도시가 아니라 바로 페르시아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아리스타고라스의 약속들이 지켜질 수 있는 것들인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밀레토스가 왜 페르시아를 상대로 싸우는지 따지지 않았고, 왜 싸우는지를 따지지 않으니 그 전쟁이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도 따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바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다는 오만과 전쟁으로 돈을 번다는 탐욕, 다시 말해 전쟁에서는 틀림없이 이길 것이며, 그래서 노략질로 재물을 빼앗고, 적들을 포로를 잡아 몸값을 받거나 노예로 팔고, 또 밀레토스로부터 보상금도 받아, 전쟁으로 돈을 챙긴다는 오만과 탐욕이192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11.40. 이렇게 아테나이 바보들의 재물에 대한 탐욕만 가득 싣고 떠난 멜란티오스가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만 싣고 빈 배로 돌아왔을 때,193 아테나이 사람들의 실망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얻지 못한 실망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들의 사르데이스 원정이 페르시아에 어떤 원한을 심어 놓았는지 따져볼 차분함도 잃고 말았고, 오히려 그뒤에도 계속된 아리스타고라스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다시는 밀레토스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 또아리를 튼 뱀의 냉정함만 키웠습니다. 별 수 없어진 아리스타고라스는 새로운 지원자를 만들고 얻기 위해 뷔잔티온을 점령하고, 프로폰토스고 헬레스폰토스고 아이올리스고 도리아고 카리아고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이고 할 것 없이 분주히 뛰어 다니며 제 살 길을 찾을 것이었지만, 그리고 퀴프로스도 이들과 동조하여 퀴프로스 대로 페르시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제 살길을 찾아나설 것이었지만, 아테나이의 함선 스무 척이 가서 사르데이스를 불태운 이 바보들의 작은 소동이 밀레토스와 아테나이와 가져다 줄 엄청난 고난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 사람들에게도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도, 무엇보다 헬라스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없는 재앙이194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11.41. 매일 저녁이 차려지면 시종더러 아테나이를 기억하라고 세 번이나 외치게 했던 다레이오스가 히스티아이오스를 밀레토스로 보내준 것은 큰 힘들이지 않고 아리스타고라스를 처벌하고 밀레토스를 모반에서 복속의 제자리로 돌려주기를 바란 것이었지만, 그가 사르데이스에서 야반도주하여 키오스로 갔고, 키오스에서 전에 사귀었던 역심을 품은 사르데이스의 페르시아 사람들을 부추겨 반란을 획책하는 것을 포착하고 내부의 적들은 처치했지만, 히스티아이오스가 밀레토스로 돌아가지 않고 뷔잔티온으로 가서,195 흑해에서 나오는 페르시아에 우호적인 배들을 나포하는 등, 반란의 기치를 더욱 높게 세우는 것을 보자 다레이오스는 먼저 밀레토스를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그 다음 아테나이를 손보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참주의 귀환을 거부하면서 이런 페르시아와의 일전을 아시아와 인근 헬라스 도시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려는 전쟁으로 바꾸어 놓는 데 성공한 듯 보이는 밀레토스의 동조 도시 규합을 위한 분전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여전히 그들의 권력이 하루 아침에 페르시아 왕의 명령 하나로 다른 사람에게로 넘겨주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담한 도시들도 있었는데196 그들은 그들의 권력을 버려도 좋을 만큼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나서는 것은 아니어서,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권력을 계속 누릴 수 있다는 믿음만 생긴다면, 마치 누구보다 먼저 아리스타고라스가 복속의 대가로 얻는 권력에 만족하고 반란은 꿈에도 꾸지 않았을 것이었듯이, 밀레토스의 반역에 동조하고 나서지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밀레토스가 이런 동조자들까지 모으느라 분주할 때, 페르시아는 멀리서부터 물뭍으로 차근차근 이오니아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뭍으로는 사르데이스를 불태우고 도망친 밀레토스 지원군들을 에페소스 근처에서 도륙한 것으로부터 곧바로 반격을 개시하여, 페르시아의 두 부대가 밀레토스의 반란에 가담했던 프로폰티스와 헬레스폰토스 연안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도시들이 복속되자 헬레스폰토스를 맡았던 부대를 이오니아 바로 아래의 카리아로 돌렸고, 총독 아르타프레네스와 장군 오타네스가 아이올리스의 퀴메와 이오니아의 클라조메나이까지 점령했습니다.197 이렇게 뭍으로 페르시아가 밀레토스를 향해 죄어오자, 아리스타고라스는 밀레토스의 결사 방어를 택하는 대신, 교활한 본색을 드러내며 도망갈 궁리부터 했고, 도시의 방어는 밀레토스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운 퓌타고라스에게 맡겼고, 자기는 동행하기를 바라는 수하들 모두를 데리고 트라케로 갔고, 거기서 뮈르키노스를 군사 기지로 삼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싸울 생각이 없는 인근의 트라케 도시를 공격하다 수하들과 함께 죽어버려,198 마치 닥쳐올 밀레토스의 운명을 보는 듯했습니다. 한편 바다로 밀레토스를 치러 가는 페르시아와 포이니케 연합 함대는 이오니아와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킨 퀴프로스 섬의 도시 살라미스를 점령하여 원상을 회복해 놓고 밀레토스로 가기로 했고, 이들의 움직임을 들은 살라미스는 반란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같은 섬의 도시 아마투스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이오니아의 도시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함선과 군대를 보냈고, 바다에서는 이오니아의 함선이 뭍에서는 살라미스의 군대가 각각 페르시아의 공격을 막기로 했고, 사모스의 활약으로 이오니아 함대는 포이니케 함대를 거뜬히 막아내었으나, 살라미스는 먼저 적장을 죽여 기선을 제압해 놓고도 퀴프리스의 도시 쿠리온의 군대가 도망가고 이어서 자기들의 전차 부대도 도망치자 우세했던 전세가 뒤집어져 살라미스가 점령되었고, 이윽고 퀴프로스의 다른 도시들이 공격당하는 것을 본 이오니아 지원군들이 지체없이 돌아가는 것을 끝으로 퀴프로스의 반란이 진압되고 말았는데,199 동조자의 이탈로 실패한 살라미스의 반란은 밀레토스의 운명을 미리 보는 같아 씁쓸하네요. 카리아에서 두 번이나 대승을 거두고도 야습에 걸려 잠시 멈칫하게 되자200 페르시아 군은, 페르시아 군에 가담한 이오니아 도시들의 참주들에게 반란에 가담한 도시들을 회유토록 다구치면서, 이오니아의 다른 도시들은 나중으로 미루고 모든 군대를 모아 밀레토스를 집중 공략하기로 하였고, 이런 페르시아의 움직임에 대해 밀레토스와 지원 도시들은, 다시 페르시아에 복속되라는 회유를 물리치면서 이오니아 사람들의 성지인 판이오니온에 신속히 모여 뭍에서의 페르시아 공격을 막기 위한 지원군은 따로 모으지 않고 밀레토스가 자력으로 방어하도록 하고, 대신 지원 도시들이 동원 가능한 모든 함선과 선원을 밀레토스 앞의 섬 라데에 배치하여 해전으로 밀레토스를 지키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지면 문책을 받아 권력을 놓을 수밖에 없는 페르시아의 지휘관들과 지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잃는 이오니아 도시들과의 싸움이어야 했는데, 그래서 이오니아의 도시가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싸움이었는데, 그래서 모두가 합심하여 죽기 살기로 싸웠어야 했는데, 이오니아 함대의 지휘를 맡아 맹훈련에 돌입한 포카이아의 디오뉘시오스에 대한 반발로201 결속이 무너지고 있었고, 이런 동맹들의 모습과 페르시아의 군세를 생각하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것 같은 사모스의 장군들이, 페르시아가 이기도록 해주고 다시 사모스의 참주로 돌아가고 싶은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밀레토스의 예에 따라 참주제를 폐지했을 때 쫓겨났던 사모스의 참주 아이아케스의 이오니아 동맹에서 탈퇴하라는 회유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라데 섬 앞 바다에 양측의 함선들이 진을 차리자,202 퀴프로스 섬에서 이미 사모스 함대에게 기가 눌렸던 페르시아 함대의203 포이니케 해군은 기세가 등등한데 반해, 이오니아 함대의 좌익을 맡았던 사모스 함선들이 돛을 올리고는 전열을 이탈하기 시작했고,204 레스보스의 함선들도 뒤따라 도망쳤고, 다른 함선들도 슬금슬금 도망치자 졸지에 좌익이 달아나 전력의 균형이 무너졌고, 주력이던 우익의 밀레토스 함대와 본진 키오스 함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이오니아 함대와 지휘하던 포카이아의 디오뉘시오스는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지고 말았습니다.205 이 라데 해전의 패배 뒤, 밀레토스는 성벽 아래에 땅굴까지 파고 들어오는 페르시아의 물뭍에서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점령되었습니다. 아리스타고라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섯 해가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밀레토스 사람들은 그들 도시와 그들의 안전과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도시에 밀레토스 사람이 없어지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디뒤마의 신들도 머리칼을 길게 기른 이어족들에게 약탈당해야 했고,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어 티그리스 강 어귀로 끌려갔으며,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들 축에 끼었고, 살기 좋은 땅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높은 산지는 카리아의 페다사 사람들이 차지했습니다. 밀레토스와 그렇게 돈독하던 쉬바리스는 밀레토스의 비극을 보고도 어떤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으며,206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 사람들이 밀레토스의 비극에 보인 태도는 "밀레토스 함락"이라는 연극을 만든 프뤼니코스와 그의 연극에 보인 태도와207 같았습니다.

 

11.42. "밀레토스 함락"을 본 관객들은 밀레토스 사람들의 비참함을 마치 그들이 겪는 것처럼 슬퍼하였고, 아테나이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생각은 이들보다 훨씬 냉정했지만, 그들은 페르시아가 아테나이에 대해 어떻게 나올 것인지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르데이스를 불태운 아테나이를 잊을 리 만무한 다레이오스의 페르시아는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본격적인 응징에 나서기 전의 사전 작업으로 아시아와 그에 가까운 섬들에 있는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킬 엄두를 낼 수 없도록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습니다. 이들 가운데 키오스가 당한 고난은 밀레토스보다 결코 가볍지 않았는데, 그들은 세 번 네 번이나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처음 신들이 보낸 어떤 나쁜 조짐 같은 일도 있었고, 그래서였는지 100척의 함대가 거의 괴멸되다시피한 패배의 큰 고통도 있었지만, 페르시아가 보복을 가하기도 전에 이미 허약해진 섬이 쫓겨난 밀레토스의 전 참주 히스티아이오스와 그가 동원한 레스보스 사람들에게 노략질당하여208 받은 고통도 작지 않았는데, 끝내는 페르시아가 섬을 점령해 키로스 사람들을 소탕하면서209 당한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키로스만큼은 아니었다 해도 섬들인 레스보스도 테네도스도 소탕을 당해야 했고, 아시아에 있는 도시들은 소탕은 면했지만 신전과 도시가 불태워졌고, 잘생긴 사내아이들은 거세당해 내시로 잘생긴 여자 아이들과 함께 왕에게 보내어졌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함대는 헬레스폰토스로 갔고, 특히 포이니케 함대가 설치며 아시아의 헬레스폰토스 연안에 있는 도시들을 불태우고 건너편 케르소네소스로까지 넘어갔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페이시스트라토스기 싫어 추종자들과 함께 케르소네소스로 갔던 밀티아데스의 조카가 되는 밀티아데스가210 그곳의 참주 노릇을 하고 있다가, 다레이오스가 스퀴타이를 칠 때 페르시아의 동맹으로 참전했던 일 때문에 스퀴타이가 응징해오자 달아났다 돌아온지 두 해도 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포이니케 함대가 쳐들어오자 다레이오스가 퇴각할 때 스퀴타이가 요구하는 대로 선교를 허물자고 한 것 때문에 다섯 척의 배에 가족들과 세간을 챙겨 아테나이로 도망쳤고, 아들 메티오코스가 탄 배가 포이니케 함선에 나포되어 수사로 잡혀가는 일이 생겼고, 밀티아데스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아테나이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211 페르시아도 반란 세력들에 대한 토벌과 응징으로 복속을 강화한 마당이라 이제는 아르타프레네스도 이오니아의 도시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새로 부임한 장군 다레이오스의 새 사위 마르도니오스가212 오자마자 헬라스 사람들 도시의 참주들을 몰아내고 도시들이 민주정을 택하도록 해줌으로써 이오니아의 도시들에게 결정적인 환심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오니아 도시들의 반란을 바라보는 현지 총독 아르타프레네스의 시각과 온 세상을 바라보는 수사의 대왕 다레이오스의 시각 차이를 보여주는 이 결정은, 이오니아의 반란의 원인이 도시 간의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참주들의 태도 때문이라고 보고, 앞으로 모든 도시 간의 분쟁은 중재로 해결할 것을 종용한 아르타프레네스의 해결책과, 이오니아의 반란 원인이 도시를 자기의 것으로 아는 참주들의 오만과 탐욕 때문으로 보고 도시에 참주제 대신 민주정을 도입케 한 마르도니오스의 해결책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세수 면에서도 페르시아는 아르타프레네스가 새로 정한 세금을 예전과 다름없이 받을 것이지만, 참주가 없으니 참주 몫이 없어져 이오니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부담이 확실히 줄어들게 된 것도 큰 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헬라스 도시들을 복속시켜야 할 마르도니오스로서는 자기 본거지에 사는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를 적으로 돌리고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에우로파로, 혹은 아이가이온 바다를 넘어 헬라스 사람들의 본토로 가는 것은 무리라고 본 것도 주된 이유였겠지요.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새로운 세상의 정복을 꿈꾸는 젊은 페르시아 장군의 패기가 헬라스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는 에우보이아와 아테나이를 목표로 원정에 나섰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헬레스폰토스를 건넌 다음, 함대는 따로 헬라스 본토에 가까운 섬들을 공략하면서 에우보이아로 오도록 해놓고, 자신은 에우로파를 지나 트라케에 인접한 마케도니아까지만 정복하고 철수해야 했습니다. 함대는 타소스 섬을 쉽게 공략했으나 헬라스 본토의 해안에 바싹 붙어 움직이다가 아토스 곶에서 풍랑으로 300척의 함선이 파괴되고 2만여 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고, 마르도니오스 자신은 마케도니아의 동쪽 도시들을 복속시키고 나머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려던 참에 진지가 브뤼고이 사람들에게 야습당해 많은 병사들이 죽고 자신도 부상을 입는 일이 있었는데 끝까지 마케도니아를 복속시키기는 했지만, 더 이상 원정을 계속할 수가 없을 정도로 육군과 해군 모두 피해를 입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정을 접고 사르데이스로 돌아와서부터 마르도니오스는 곧바로 다음 원정 준비에 몰두하였는데, 타소스가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소문을 핑계로 성벽을 허물게 하고 타소스의 함대를 넘겨받았고,213 아사아의 해안 도시들에게는 전함과 군마 운반선을 건조하도록 하는 한편, 헬라스 본토의 도시들에게 페르시아 왕의 사절들을 보내 물과 흙를 바치라고 최후통첩을 했습니다.214

 

11.43. 이유야 어떻든 스파르테가 밀레토스 지원 요청을 외면하고, 다른 속셈을 했던 아테나이가 사르데이스를 불태우고 돌아온 이후, 스파르테나 아테나이가 아이가이온 섬들과 아시아의 모든 해안에 있는 도시들, 심지어 트라케 너머 마케도니아에서 벌이는 페르시아의 응징과 복속 강요에 대해 그들과의 연대 의식을 보이는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한심한 스파르테는 왕들끼리의 치졸한 싸움으로215 날을 지새고 있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아테나이는 나름대로, 사르데이스에서 친 사고 때문에 이오니아쪽으로는 문을 걸어 잠그는 대신, 페르시아에 대해서 화해의 신호를 보내기도 하면서,216 와중에 아이기나와 결말 없는 전쟁을217 치런 덕분에 해군이 중요하고 해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냈고, 해군이라면 땅을 가진 귀족들보다는 아고라 저자 사람이 더 나을 것이어서 아고라 출신으로 하여금 도시의 일을 보도록 할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을 시험하고 있었다는 것도218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페르시아의 움직임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제각각 제 일에만 몰두하여 지내는 동안, 아시아와 아시아 해안 가까이에 있는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가 다시 페르시아에 복속되는 것을 보고서도, 마르도니오스가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트라케를 지나 올륌포스 산 북쪽의 마케도니아에까지 와서 마케도니아 왕을 복속시키는 것을 보고서도, 그래서 그 마르도니오스가 또 다시 헬라스 땅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세상 모두처럼 다 짐작을 하고서도, 헬라스의 모든 도시들이 함께 뭉쳐 페르시아의 야욕을 꺾어놓아야 한다고, 제일 먼저 당할 올륌포스 산 남쪽의 보이오티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다른 헬라스 도시도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219 역시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페르시아의 움직임을 한가로이 바라보고만 있을 처지가 아니었는데 그것을 막을 궁리를 하고 있지 않았다는 말은 그들 모두 거대한 페르시아의 움직임에 질려 페르시아가 달라는 대로 흙과 물을 퍼줄 생각이었다고 밖에는 다르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윽고 헬라스에 흙과 물을 바치라는 다레이오스의 사절이 도착했고, 그 가운데 섬에서는 아이귑토스나 포이니케와의 장사로 먹고 사는 아이기나가, 뭍에서는 페르시아가 아테나이로 가는 길목에 있는 보이오티아가 페르시아에게 주저없이 물과 흙을 바치겠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 둘씩 복속의 예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스파르테와 아테나이 사이에 그 사절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희한한 일이 똑같이 벌어졌습니다. 어쩌면 아테나이가 아이기나의 복속을 스파르테에게 알려준 것이 계기가 되었을지도, 아니면 스파르테에서는 데마라토스를 귀빈으로 받아준 다레이오스에 대한 클레오메네스의 반감이,220 아테나이에서는 자신을 케르소네소스에서 도망치도록 한 다레이오스에 대한 밀티아데스의 반감이, 똑같이 작용했을지도 모르지만, 스파르테와 아테나이 이 두 헬라스의 도시들은 다레이오스의 사절을 곡절없이 또는 재판에 부쳐 죽여버렸습니다.221 십여 년 전만 해도 몇 번의 전쟁을 치를 뻔한 서로 앙숙인 두 도시가 이어족의 점잖은 최후통첩에 대해 똑같이 이어족들보다 더 야만적인 방법으로 대답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들 두 도시는 어쩔 수 없이 서로 협력하여 이어족들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잃고, 이어족들에게 복종한 대가로 그들이 주는 만큼의 안전과 자유를 얻을 것이었습니다.

 

11.4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시작된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줄은 스파르테도 페르시아도 심지어 우리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도 몰랐습니다. 보이오티아아 칼키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로 전쟁에 대한 자신감이 오만으로 바뀌어 갈 때, 에페소스에서 페르시아 기병에게 당한 패퇴는 진짜 전쟁에서 적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고, 아이기나 섬 하나를  요절내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녔을 때는 자신감을 잃기보다는 적을 가볍게 본 오만이 가져온 결과에 황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두 번의 경험으로, 원정에 대한, 남을 공격하는 전투에 대한 준비가 얼마나 어렵고 그래서 또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고, 아울러 도시의 안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침략하는 적들에 대해 어떤 자세로 막아야 하는지도 함께 배웠습니다. 에페소스에서의 패퇴는, 페르시아 보병의 창이 짧지도 방패가 없지도 않다는 사실을 덤으로 알려주었고, 공성의 수단이 없어 사르데이스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추격해 오는 기병의 엄습으로 유린당했던 경험은 다양한 형태의 반격에 대비하지 못했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바다를 건너간 아이기나 원정은 많은 함선을 가진 함대 없이는,222 그리고 그 함대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훈련된 좋은 선원들이 없이는, 한마디로 강력한 해군이 없이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확실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창이 짧지도 방패가 없지도 않은 벌떼처럼 많은 보병과 엄습해오는 기병의 위력에 더해, 이들을 별 어려움없이 실어나를 수 있는 함대의 엄청난 함선 수에 주눅이 드는 건 덤이었고, 그 많은 함선을 움직이는 포이니케 해군의 능란함에는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래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 화친의 뜻을 보내기도 했지만, 기여코 쳐들어온다면 본때는 한번 제대로 보여줄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는 아테나이의 주인인 아테나이 사람들이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테나이로서는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의 다른 도시에 바치는 굴종의 대가로 얻는 것조차 생각해 볼 수도 없는데, 하물며 다른 신을 믿고 다른 말을 하는 이어족에게 바치는 복종의 대가로 얻는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것이어서, 이제 아테나이는 죽기로 각오하고 페르시아에 맞설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스파르테든, 인근의 다른 도시든, 저 먼 곳의 이어족 페르시아든,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일은 오로지 죽기로 각오한 도시민이 해야 할 바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1.45.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는 아직 부상에서 온전히 회복하지 않은 마르도니오스 대신 악바타나에 주재하던 장군 다티스와 사르데이스 총독 아르타페르네스의 아들 아르타파르네스를 지휘관으로 삼아 수사를 출발했고, 밀레토스에서 바다를 건너 한가한 나들이를 하듯 낙소스 섬을 짓밟아 주위의 모든 섬들에게 겁을 주었고, 델로스 섬에는 들러 아폴론 신에 향을 피워 올리면서 순무의 몸짓을 표시하기도 했고, 드디어 도착한 에우보이아 섬에서 내부 배반자 덕분으로 이레만에 열린 성문으로 들어가 농성하던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사르데이스를 불태운 응징으로 신전을 약탈하고 불질러 가볍게 몸을 풀고는, 이제 곧 다시 아테나이의 참주가 될 것이라 들뜬 늙은 힙피아스의 안내를 받아 아티케에 상륙하여 기병들이 활동하기 좋은 마라톤에 진을 쳤습니다. 이런 페르시아의 움직임을 밀레토스를 떠날 때부터 마라톤에 진을 칠 때까지 지켜보던 아테나이는, 압도적인 적의 규모에 눌려 나아가 싸우는 대신 농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메디아 사람들의 저승사자로 이름난 밀티아데스가 아르콘 폴레모스이던 칼리마코스를 앞세워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설득하자 민회를 열어 나가서 싸우기로 결정했고, 애초부터 스파르테의 지원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지원 여부를 알려줄 전령이223 도착하기도 전에, 처음으로 민주정이 정한 대로 뽑힌 열 명의 장군들의 지휘 아래 칼과 방패를 가진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로 마라톤을 향해 나섰고, 거기에서 헬라스 도시들에서의 유일한 지원군인 플라타이아 군사들이 합류했고224, 산을 등지고 진을 차린 아테나이 군대를 페르시아의 기병이 함부로 유린하러 나설 수 없어 양 진지의 대치가 시작되었고, 몸싸움에 앞선 양측의 머리싸움을 하느라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이윽고 8월의 보름달이 떠올라 스파르테의 군대가 출진을 준비할 무렵, 야밤에 페르시아 진지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그것이 페르시아 기병이 철수하여 승선하는 것임을 알았고, 기병이 없으니 선공을 하자는 밀티아데스의 주장을 이번에도 칼리마코스가 찬성해, 어마어마한 진지를 보고 기가 질린 장군들이 전투를 회피하기 바랐지만 밤을 도와 전투 태세를 갖춘 아테나이 군대는 아침 햇살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전투를 시작하였고, 왠지 알 수 없었지만 소극적으로 대하며 주력들이  철수하는 것이 보였고, 그래서 아테나이가 오히려 공세를 취했고,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페르시아 군대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그때서야 아테나이 군대는 텅 비워 두고 온 아테나이가 생각났고, 죽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들 죽어라 아테나이로 달렸고, 죽은 사람들만 남은 마라톤을 향해 스파르테의 군대가 막 펠로폰네소를 벗어나 이오니아로 들어서는 참에, 그래서 이틀 뒤면 마라톤에 도착하여 피아의 죽은 사람들 숫자를 세며 아테나이의 전과에 놀라고 있을 참에, 팔레론 항에 도착한 페르시아의 함대는 마라톤에서 돌아와 이미 항구를 지키고 섰는 아테나이 군대를 보자 다음을 기약한 채 아쉬움을 전리품 삼아 돌아가야 했습니다.

 

11.46. 에레트리아와는 달리 성문을 여는 아테나이 사람이 없어225 아테나이를 눈 앞에 두고 돌아서고만 다레이오스만큼이나 실망이 컸던 힙피아스의 죽음 뒤로,226 마르도니오스가 당장에 다시 헬라스를 침공할 기회를 찾으려 앙앙불락하는 동안,227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 새롭게 반란을 일으킨 아이귑토스를 상대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하던 다레이오스의 죽음 뒤로, 크세르크세스가228 단숨에 아이귑토스의 반란을 진압하여 물려받은 제국에서의 권위를 확립하는 동안, 그래서 위세등등해진 크세르크세스의 관심을 부왕이 남긴 숙제 헬라스로 돌리기 위해 마르도니오스가 노심초사하는 동안,229 그 십 년의 세월 동안 아테나이는 테세우스로부터 클레이스테네스에 이르기까지에 겪었던 그 모든 정치적 변화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를 아고라의 저자 출신으로 페르시아가 아시아의 헬라스 도시들이 일으킨 반란을 완전히 평정하고 마르도니오스가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시작하던 해에230 서른둘의 나이로 아테나이에서 처음으로 대표 아르콘이 된 테미스토클레스가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그 작동 원리에 충실하면 권력을 쥘 수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그 작동 원리를 좇아 움직였고, 그 작동 원리로 정적을 제거했으며, 그리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그 민주정의 작동 원리를 좇은 덕분에 아테나이는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 사람들이 배를 저어 바다로 나가 먹고 사는 길을 찾게 되었고, 게다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도 그렇다고 꼭 필연이었다고 말 할 수 없지만, 배를 저어 먹고 사는 길로 나선 덕분에 아테나이는 도시를 지킬 돌로 쌓은 성벽에 더해 도시를 지킬 함선이라는 바다에 세운 목책을 가지게 되었으며,231 스스로 비워버린 도시를 위해 돌로 쌓은 성벽이 아무 할 일이 없었던 동안, 그 바다에 뜬 목책은 무엇보다 유효하게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구해낼 수까지 있었습니다.

 

11.4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런데 이 테미스토클레스가 꿰뚫고 적용했던 민주정의 작동 원리란 바로 다수의 아테나이 사람들 의견이 아테나이를 이끈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시의 일을 400명의 바보들이 모여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손을 들어 결정하는 것을 본 스퀴타이에서 온 신사분이 백 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 6,000명 이상의 더 많은 바보들이 새벽부터 프뉙스에 모여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손을 들어 도시의 일을 결정하는 것을 본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의 장기인 직설적 스퀴타이식 말솜씨로는 6,000명 이상이 모인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손도 들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을 만큼, 테미스토클레스가 자신이 가진 언변 하나로 그 6,000명 이상을 설득하여 그의 주장에 손을 들게 했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상 대대로의 명망과 재산으로 도시나 도시민의 일에 별 생각이 없어도 영향력을 인정받고, 그 영향력 덕분에 마치 도시나 도시민의 일에 통달한 것처럼 보여 쉽사리 도시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귀족 집안의 사람들과는 달리, 아테나이 레온티스 부족의 프레아르리 촌락에 살던 지독히 가난한 촌부 네오클레스가 트라케에서 온 파니아스를 아내로 얻어 낳은, 그저 가진 것이라고는 도시의 일을 맡아 하고 싶다는 열정뿐인 테미스토클레스가 그 열정을 인정받기 위해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자신의 머리와 몸으로, 반쪽 시민인 남자들이 늘 그랬듯이, 매일같이 성 밖의 퀴노사르게스로 나가 좋은 집안의 자식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누리고 즐기는 것들을 누리고 즐길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습성이나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을 익히고, 그들과 구별을 지울 수 없는 말솜씨를 발휘하여, 아테나이 사람들로 하여금 아테나이를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게 했다는 사실은232, 클레온 이후로 너무나 많은 테미스토클레스가 많이 나와 지금의 아테나이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놀라지 않겠지만,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를 놀랍게 만든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젊은 나이에 제비로 자기 부족을 대표하는 아르콘으로, 또 아테나이를 대표하는 아르콘으로 뽑힌233 행운은 명망과 재산을 손에 쥐고 태어난 귀족집 자식들의 행운보다 더 훌륭히 퀴노사르게스에서234 쌓은 그의 군사적 재능 못지 않은 정치적 재능을 뒷받침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계속되는 행운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두 번째 행운은 다레이오스의 침공을 마라톤에서의 승리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이었고,235 세 번째 행운은 밀티아데스의 불운과 자멸이었으며,236 네 번째 행운은 클레이스테네스가 참주가 되려는 권력자를 쫓아내라고 만든 오스트라키스모스로 정적인 귀족 출신의 아리스테이데스와 크산팁포스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쓸 수 있었으며, 다섯 번째 행운은 라우레이온에서 나오는 은으로 배를 만들어 아테나이가 먹고 사는 터전을 아티케라는 땅에서 헬라스의 바다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었고, 마지막 여섯 번째 행운은 그 배들로 살라미스에서 거둔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헤라스 침공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두 번의 불운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행운이라 할 마라톤에서의 승리로 그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능력 있는 장군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 마라톤의 전투를 주도한 사람은 밀티아데스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티아데스를 제치고 누구보다도 높게 승리자로 받들어질 수 있었던 아르콘 플레마코스 칼리마코스가 분전 끝에 전사 하는 바람에 테미스토클레스를 포함한 나머지 여덟 명의 장군들은 그들 역시 열심히 싸웠지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마라톤의 승리와 페르시아 대왕 다레이오스를 격퇴한 공을 밀티아데스가 독차지 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의 첫 번째 불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그의 불운은 밀티아데스의 파로스 원정 실패와 그것을 이유로 밀티아데스를 재판에 회부하고 그 재판으로 밀티아데스의 집안이 거들나도록 한 크산팁포스의 공격과 그 공격 끝에 다가간 밀티아데스의 죽음으로 그의 불운은 다시 그의 행운으로 바뀌었는데, 귀족 출신의 정치 인사는 아리스테이데스와 크산팁포스 둘이었는데 반해 빈민 출신은 자기 혼자여서 더 많은 빈민들이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테면 도편 추방 투표를 해야 하는지를 정할 때는 세 사람의 지지자가 모두 찬성하였으므로 문제없이 도편 추방 투표를 실시할 수 있었고, 누구를 추방할 것인지를 두고도 아고라의 빈민이 참주가 되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 때라 자연히 아리스테이데스와 크산팁포스가 다투면 테미스토클레스의 지지자는 그들 둘 중 인기가 더 높은 먼저 아리스테이데스를 골라 투표하여 그를 추방하면 되었고,237 아리스테이데스가 없는 크산팁포스는 그 뒤에 추방하면 되었습니다.238 테미스토크레스가 이렇게 시민의 뜻으로 정적을 쫓아내고 가장 많은 아테나이 시민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정치가가 되었다는 것은 그전까지만 해도 그냥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던 라우에이온에서 나는 은 수입을 시민들의 뜻으로 함선을 만드는 데로 돌려 쓰도록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잘 설명해주고 있는데, 이는 몇몇의 부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라우에이온에서 나는 은을 그냥 나누어 받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없는 사람들이 도시가 나누어 주는 돈을 마다하고 그 돈을 200명의 부자들에게 주고 200척의 배를239 짓도록 하자는 데 군소리없이 손을 든 것은, 200명의 아테나이 부자가 도시로부터 1탈란톤의 돈을 받아 삼단노선 한 척을 만들어 운영할 경우, 삼단노선 한 척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근 200명의 사람이 필요하고 그 가운데서도 대부분이 힘만 있으면 농사 짓는 것만큼이나 손쉽게 익힐 수 있는 노를 젓는 노꾼들이어서, 200척의 함선은 새로 40,000명의 사람이 일자리를 얻는 것을 말했고, 그 일자리는 고단한 일이었던 만큼 노꾼의 품삯이 아테나이 최고 기술자의 품삯에 비해 떨어지지 않아 수익 면에서 최고였을 뿐만 아니라 배가 없어지기 전에는 그 일자리가 없어지지도 않고 더우기 한번 바다로 나가면 보름이고 한 달이고 계속 품삯을 받는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일자리를 놓고 테테스는 말할 것도 없고 제우기타이들도 이런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에 두 손 모두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펜타코시오메딤노이들은 똑같이 나누어받는 적은 돈 대신 도시로부터 1탈란톤을 받아 배를 만들어 도시에 주어야 하지만 그 배를 운영하는 권리를 얻어 잘만 운영하면 거기서 생기는 이익을 챙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들 손이 둘밖에 없는 것이 아쉬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테미스토클레스는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찬성을 이끌어낼 아주 좋은 구실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 새로 200척의 함선을 더하면 이제 아테나이가 아이기나를 능가하는 온 세상을 망라하는 교역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기나라고 하면 일찌기 해상 교역 일에 나서 아시아나 포이니케나 아이귑토스를 망라하는 교역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사사건건 아테나이에 맞서 왔었는데, 아테나이를 겨눈 다레이오스가 헬라스의 섬과 도시들에게 물과 흙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들이 가진 교역력이 손상을 입을까봐 누구보다 먼저 물과 흙을 바침으로써 헬라스의 단결을 저해했던 일 등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아이기나에게 반드시 갚아주어야 할 빚이 있었기 때문에 주던 돈을 다른 데로 돌리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240 아테나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고루 나누어 받던 은으로 도시가 소유하는 200척의 함선을 마련하도록 바꾼 테미스토클레스의 지도력은,241 비록 아테나이가 민주정이라는 체제를 갖추었지만 밀레토스에 지원군을 보내 화를 자초한 일이래 주눅이 들어 도시의 일을 귀족들이 과두정처럼 처리하게 하던 타성을 일순간에 허물고,242 굳이 귀족이거나 특출하지 않은 평범한 도시민도 내일을 내다보고 도시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아테나이 사람들은, 테미스토클레스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자부하는 민주정과 그 민주정의 작동 원리대로 적용한 그들의 결정이 그들의 도시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고 나아가 어떻게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고 또 번영하게 할 것인지, 그리고 그 영광과 번영으로 얻은 오만과 탐욕으로 그들의 도시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해치고 나아가 어떻게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을 굴욕스럽게 하고 또 쇠망하게 할 것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11.4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테나이에 200척의 함선이 새로 만들어져 함선을 많이 가진 헬라스의 섬과 도시들 가운데 아테나이도 그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일찌기 바다로 나섰던 섬과 도시들로부터 여전히 바다로 나간 도시로는 인정을 받을 수 없었던 아테나이가 그 많은 배를 움직일 노꾼을 구하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데 골몰하고 있었던 동안, 즉 아테나이가 새로운 함선 200척을 가지게 된 이태 뒤의243 새봄에,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마르도니오스를 대동하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치기 위해 수사에서부터 지상군과 보급 군대를 모으며 아시아로 나아가 가을이 되어서는 사르데이스에 도착했고, 포이니케의 함대가 아시아의 해안과 섬의 도시들로부터 함선을 차출하여 이룬 페르시아 연합 함대 역시 크세르크세스의 진군에 맞춰 그 뒤를 따라 이오니아로 집결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의 수사 출발은 클레오메네스에게 쫓겨나 헬라스의 다른 도시들을 거쳐 수사로 가서 크세르크세스의 보호를 받고 지내던 데마라토스가 스파르테에 그 소식을 전하면서244 아테나이가 아닌245 스파르테가 가장 먼저 알게 되었고, 10년 전에 먼저 다레이오스가 아이가이온 바다를 건너 델로스 섬과 에우보이아 섬을 거쳐 헬라스 본토인 아티케의 마라톤까지만 다녀갔을 때 800명의 군사를 보낸 플라타이아를 빼고는 아무도 아테나이를 도와주지 않아246 아테나이 혼자 다레이오스를 감당했던 것과는 달리, 스파르테는 처음부터 이번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을 전체 헬라스 도시들이 연합하여 막아내야 할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10년 전 다레이오스가 그랬듯이, 크세르크세스는 사르데이스에 도착하여 겨울을 보내면서 아시아의 젊은이들 징집을 계속하는 가운데, 물론 예전에 다레이오스의 사절들을 죽여버린 아테나이와 스파르테는 빼고247 나머지 헬라스 도시들에게 사절들을 보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지키려면 도시와 도시민의 자유 정도는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치는 것과 바꾸는 게 좋다며 들쑤시고 다녔고, 실제로 많은 헬라스의 도시들이 물과 흙을 바쳐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구하려 나서는 바람에 스파르테가 '헬라스동맹Hellenion'이라는 기치로248 헬라스의 도시들로 사절을 보내 페르시아 침공에 대응하는 모임에 참여토록 독려했을 때 스파르테에서 열린 헬라스동맹 회의에 사절을 보낸 도시는 700여 헬라스 도시들 가운데 고작 30여 도시들 뿐이었고, 그나마 사절을 보낸 도시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물과 흙을 바쳐 자유를 잃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헬레스폰토스를 건넌 페르시아가 처음 거칠 에우로페와 헬라스의 길목에 있는 트라케가 일찌감치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쳤고, 트라케를 지나면 바로 또 새로운 길목이 될 마케도니아가 트라케의 뒤를 따랐으며, 마케도니아를 지나 여기서부터가 진정 헬라스의 세계라고 알리는 올륌포스 산이 보이는 텟살리아 역시 페르시아 군대가 지나는 길을 내어주고 그들 도시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쳤으며, 텟살리아 다음으로 페르시아가 발을 들여 놓을 보이오티아는미리 아테나이의 아티케를 칠 크세르크세스의 전초 기지가 되어줄 것인지 아니면 크세르크세스를 막을 헬라스동맹의 전초 기지가 되어줄 것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엉거주춤 머뭇거리고 있었지만 보이오티아의 작은 도시 테스페이아와 마라톤에도 지원군을 보냈던 플라타이아를 빼고는 언제든지 페르시아에 길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249 다시 말해 크세르크세는 아티케에 이르기까지 도중에 누구에게도 침공을 저지당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다수의 헬라스 사람들이 그들의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종속의 길을 택하고 있었고, 스파르테에 대한 반감 때문에 아르고스는 여전히 동맹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편 다레이오스에게는 누구보다 먼저 물과 흙을 바쳤던 아이기나가 이번 크세르크세스에게는 물과 흙을 바치지 않고 왠 일인지 아테나이와의 오랜 반목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테나이가 참여하는 헬라스동맹에 들어온 것은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응하는 스파르테의 달라진 태도 때문이었을런지도 모르지요. 그러므로 스파르테와의 반목으로 동맹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아르고스를 달래야 한다는 말들이 오가는 사이, 이런 스파르테의 주도적 역할이 가공할 페르시아 침공군의 위세에 눌렸지만 그렇다고 이어족에게 자유를 헌납하여 종속되고 싶지는 않은 서른 남짓의 헬라스 도시들을 헬라스동맹으로 묶을 수 있었고, 그들은 아이기나나 아르고스의 경우를 고려하여 더 많은 헬라스의 도시들이 동맹에 참가하도록 도시들 간의 분쟁을 페르시아 전쟁 동안은 중단할 것을 제일 먼저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스파르테에 모인 이들 도시들의 사절들은 동맹군의 지휘권을 모두 스파르테에게 맡기는 등 일사천리로 대응 행동에 들어갔는데, 비록 동맹군의 지상군 지휘는 스파르테에게 맡기더라도 해군만은 아테나이가 지휘권을 갖고 싶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바람이 깨어지고 그것마져도 스파르테에게 맡겨야 하기는 했지만,250 헬라스동맹의 도시들이 헬라스동맹에 들지 않은 헬라스의 도시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준엄한 경고를 보낸 것은251 훗날 그들 도시에 신의 징벌을 내릴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특히 아테나이에게는, 아주 잘 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이름으로 된 이 경고와 훗날의 징벌은 한 헬라스의 도시가 그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스스로 목숨을 걸고 지키기보다, 아니 설사 목숨을 걸고서라도 혼자서는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되더라도 헬라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 듣고 그래서 헬라스 사람과 소통하는 그래서 헬라스 사람들이 같이 믿는 신들에게 의지하는 도시들끼리 뭉쳐 지키려 하기보다, 단지 더 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물과 흙을 바쳐 가며 말도 통하지 않고 그래서 소통도 되지 않는 다른 신들을 믿는 이어족에게 종속되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맡기는 행위는 헬라스 신들의 징벌을 받아 마땅할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특히 아테나이가 신들이 내린 그 징벌을 집행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스파르테가 주축이 된 헬라스 도시들이 크세르크세스를 격퇴하기 위해 진영를 가다듬고 있는 사이, 크세르크세스는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그의 취미 생활까지 즐기며 전에 다레이오스가 아테나이의 참주 힙피아스를 길잡이 삼아 바다를 건너 헬라스를 침공했듯이 이번에는 스파르테 왕 데마라토스를 길잡이 삼아 천천히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에우로파와 헬라스로 가는 길목인 트라케에 들어섰습니다. 이미 메디아와 아시아의 모든 도시들이 그렇게 했듯이 물과 흙을 바친 트라케의 도시들 역시 이제 크세르크세스가 수사를 출발할 때 데리고 온 페르시아의 정예 군대를 지원할 젊은이들을 내놓아야 했고 그들이 편히 먹고 쉴 수 있도록 온갖 것들을 바쳐야 했습니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종속된 도시가 치루어야 하는 안전과 자유의 대가였으므로 마케도니아도 텟살리아도 테바이도 한결같이 그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용의주도하게 페르시아 함대와 함께 해안을 따라 움직였는데, 페르시아 함대 역시 포이니케 해안 도시들의 함대를 정예로 삼아 포이니케에서 헬레스폰토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해안과 섬의 도시들로부터 함선과 해군을 징발하여3,000척의 연합함대를 이루고252 있었습니다. 지난 해 봄 수사에서 출발하여 겨울을 사르데이스에서 보내면서 군세를 보강하고, 새봄이 다 되도록 함대와 배다리를 준비해 헬레스폰토스를 건넌 뒤 여름이 한창일 무렵 올륌포스 산자락을 돌아 텟살리아로 들어섰습니다. 수사를 떠나 헬라스 땅의 중심부까지 오는 동안 한두 부족들이 복속하지 않고 산속으로 달아나는 일은 있었어도 그 일 년 반이 지나도록 여태 단 한 번도 길을 가로막고 서는 자를 본 적이 없었던지라 크세르크세스는 동행한 데마라토스에게 아직 물과 흙을 바치지 않은 나머지 헬라스 사람들이 과연 자기를 상대로 싸울 것인지 물어보기도 했지요. 스파르테가 주도하는 헬라스동맹은 하나의 도시라도 더 동맹에 힘을 더하도록 권고도 하고 경고도 하였지만 그래도 동맹군의 전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던 아르고스는 스파르테에 대한 원한에다 최근에 나온 델포이의 신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시켈리아의 쉬라쿠사이는 포이니케의 사주를 받은 카르케돈의 침공에 대비하느라 제 코가 석 자인 신세라 양해를 구하는 대신 헬라스동맹군의 지휘권을 달라는 등 허세를 부리다 지휘권을 주지 않는다는 핑계를 찾아 헬라스동맹에서 벗어났는데,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그래도 헬라스동맹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이들 두 도시는 태도는 확실히 페르시아에 종속되기로 결정한 마케도니아만큼이나 분명한 것이어서 그 때문에 동맹이 혹시나 하는 기대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11.49. 그러나 텟살리아는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저는 여러분께 이 텟살리아가 페르시아의 헬라스 침공에 대해 페르시아와 헬라스 세계의 다른 도시들에게 보였던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태도를 들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도시와 도시민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가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텟살리아가, 아니 텟살리아의 알레우아다이 왕가가 아테나이의 망명 정객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 가족을 텟살리아로 받아들이고 또 그의 재기를 도우면서부터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전환기를 맞이했을 때마다 결정적인 역활을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을 두고 벌인 텟살리아의 행각도 결과적으로는 아테나이가 해군국가로 전환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군대를 보내주어 아테나이에 참주가 되도록 했고, 힙피아스에게 기병을 보내 스파르테를 물리쳤지만, 결국 힙피아스의 몰락과 함께 아테나이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고, 그래서 알레우아다이 왕가 역시 텟살리아에서의 권력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자 수사까지 가서 크세르크세스 앞에서 그곳에 머물던 페이시스트라토스 일가를 좋게 띄우면서 크세르크세스로 하여금 헬라스를 정벌하라고 부추겼습니다. 헬라스 세상의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종속되어 페르시아의 힘으로 그들의 권력을 회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차피 텟살리아가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원정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트라케가 그랬고 마케도니아도 그랬듯이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치고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판이라면 그 명분으로 자기의 권력도 그대로 지키려는 의도에 더해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에 무너지고 페이시스트라토스 일가가 다시 집권한다면 금상첨화 아니냐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텟살리아에는 이런 알레우아다이 왕가의 음모를253 부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지킨다는 이유로 다른 신을 믿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종속되어 도시와 도시민의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다며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헬라스동맹에 들어가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 사람들끼리 뭉쳐 페르시아와 싸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알레우아다이 왕가를 쫓아내고 정권을 잡으려는 세력이 헬라스동맹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크세르크세스의 길목에 있는 텟살리아에 와서 함께 막아준다면 텟살리아가 트라케나 마케도니아처럼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은 텟살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오티아가 왜 헬라스동맹에 가담하기보다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치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말과 한 도시의 가담도 이쉬운 형편이어서 헬라스동맹은 당장에 만 명의 군사를 모아 텟살리아 사람들이 크세르크세스의 진격로라고 주장하는 템페 계곡으로 가서 고개 길목에 진을 쳤습니다.254 며칠 동안 주위를 살피고 크세르크세스의 군세와 움직임을 예측하여 진을 치고 전투 대형을 꾸리는 동안 동맹군은 그곳이, 비록 해군을 대동하여 주로 해안을 따라 움직이는 크세르크세스이긴 하지만, 페르시아 해군의 접근성이 좋지 않은 해안이라 적의 진격로가 아닐 수 있으며, 만일 적이 다른 진격로를 통해 텟살리아로 들어온다면255 그곳은 더 이상 방어의 요충지가 아니라 배후에 적을 두는 사지라는 것을 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밤을 도와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헬라스동맹군을 불러들여 크세르크세스의 진격로가 아니라 텟살리아를 지키겠다는 욕심은 동맹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아르고스나 쉬라쿠사이보다 훨씬 더 동맹군에게 해를 끼칠 속임수였음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크세르크세스가 헬레스폰토스를 지나면서부터 3000척의 페르시아 함대와 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크세르크세스가 3000척의 페르시아 함대가 자기 가까이 정박할 수 없는 해안 쪽의 진격로는 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파르테를 위시한 동맹군 전체가 깨달았던 것은 헬라스동맹을 위해서는 정말 운이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텟살리아에서 다른 동맹군과 함께 아무런 손상없이 사지를 빠져나온 테미스토클레스는 다행히 아테나이의 전술에 하나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지상전 대신 해전이라는 자기의 전술을 그때까지 가로막고 서서 해전 대신 지상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던 마라톤의 승리를 기억하는 아테나이의 열혈 중무장보병들에게 지상전만으로는 크세르크세스의 육해군을 동시에 투입하는 침공 전술을 저지하는 것이 어림도 없다는 자각이 들도록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템페로의 출전 경험은 한차례의 전투도 없이 아테나이의 용맹들을 델포이의 신탁이 말했듯이256 돌로 쌓은 성곽이 아니라 나무로 지은 목책에 올라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아테나이 시민은 돌로 쌓은 아테나이의 성곽을 버리고 도시를 비운 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흩으져 지낼 것이었고, 추방에서 풀린 아리스테이데스도 크산팁포스도 젊은 키몬도 모두 테미스토클레스와 함께 아테나이의 전함에 올라 페르시아 함대와 건곤일척의 일전으로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낼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가 텟살리아 파병에서 한 수 배운 것처럼 스파르테 역시 텟살리아에서 한 수 배웠습니다. 델포이의 신탁이 말했듯이257 이제는 페르세우스의 후손인 크세르크세스를258 막기 위해 템페로 출격했던 에우아이네토스 같은 장군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스파르테의 왕이 나설 때였습니다. 온갖 불명예스런 잡음 속에 이복형 클레오메네스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레오니다스가 그 모든 불명예를 지우고 진정한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스파르테 왕임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일 것이었습니다. 마침 아테나이와 스파르테가 배운 크세르크세스를 효과적으로 대적할 단 한 수는 다름 아닌 헬라스동맹군도 적들처럼 육해군이 공동으로 대적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은 군세로 큰 군세에 대치하기 위해서는 바다에서든지 땅에서든지 결코 적들이 그들의 전체 군세를 한꺼번에 마음껏 펼칠 수 없는 곳, 그저 헬라스 군대가 노출되는 만큼만 적들이 대응할 수밖에 없는 곳, 그런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 수 때문에 템페에서 돌아와 이스트모스에서 열린 동맹군 회의는 그리 어렵지 않게 헬라스로 들어오는 크세르크세를 처음으로 맞이할 곳을 정할 수 있었는데, 이제 땅에서는 스파르테의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동맹군이 텟살리아를 지나 보이오티아로 들어오는 길목의 테르모퓔라이에서 맞이할 것이었고, 바다에서는 아테나이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헬라스동맹의 함대가 테르모퓔라이의 레오니다스를 지원하면서 페르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에우보이아 섬 북쪽 끝 아르테미시온 곶에서 제어할 것이었습니다.

 

11.5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사실 크세르크세스는 다레이오스를 승계한 뒤 제일 먼저 아이귑토스를 원정하여 아이귑토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고, 바로 그 다음 해부터 곧장 네 해 동안이나 굳이 감출 일도 없다는 듯이 헬라스 원정을 준비했는데, 심지어 다레이오스 때 마케도니아까지 원정했던 마르도니오스가 그 자신은 습격으로 부상을 입고 또 풍랑으로 해군을 잃었던 곳에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여 운하를 파서 마르도니오스가 겪었던 실패를 피하려 했을 만큼 일부러 눈에 띄는 움직임도 마다하지 않으며 전쟁 준비를 충실히 마친 다음,259 아이귑토스 원정에서 돌아온 다섯 번째 해 봄에 수사를 떠나 겨울이 시작될 때 사르데이스로 왔습니다. 그의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에게 흙과 물을 바친 도시와 나라들에게서 헬라스 정벌에 필요한 군대와 물자를 징발하는 것과 그가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도시들이 그에게 물과 흙을 바쳐 굳이 전투를 하지 않고도 헬라스를 그의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겨울을 사르데이스에서 지나는 동안 그가 준비한 대로 페르시아 제국의 여러 지역들에서 속속 캅파도키아의 크리탈라로 군대를 보내왔는데,260 근위부대인261 페르시아 군대와 이미 페르시아 사람처럼 되어 차림도 비슷해진 메디아 군대, 킷시아 군대, 휘르카니아 군대가 정예부대로262 크세르크세스와 함께 왔고, 멀리서로부터는 인디아에서263, 아리비아, 그리고 홍해에서, 아이귑토스 서쪽의 리뷔에, 남쪽의 아이티오피아에서, 박트리아와 아리오이와 파르티아 그리고 아뮈르기온에서264, 카스피 바다 인근에서, 아르메니아에서, 그리고 앗시리아에서 왔고, 아시아에서는 사르데이스가 있는 뤼디아를 중심으로 파플라고니아, 쉬리아265, 프뤼기아, 카리아, 이오니아에서 징집된 군대가 모여들었고, 에우로파의 트라케와 헬라스 세계의 마케도니아와 텟살리아 역시 군대를 보냈습니다. 이들 지역이 보낸 병력은 주로 보병이었고, 따로 기병을 보낸 지역도 있었는데, 주력인 페르시아와 메디아에 같은 차림의 사사르티오이와 킷시아가 가세했고, 멀리 인디아, 박트리아, 서로 다른 두 지역의 카스피오이, 파리카니오와 리뷔에도 가세했습니다. 물론 낙타를 타고 온 아라비아도 있었고, 전차를 타고 오기도 했고 짐을 옮길 당나귀를 타고 오기도 했지요. 이렇게 모인 군대는 보병과 기병 그리고 지원병 모두를 합해 170만이나266 되었답니다. 크세르크세스가 이 대군을 거느리고 헬레스폰토스를 건너기 위해 아뷔도스로 나아가는 동안 포이니케 사람들은 흑해쪽으로 360척의 오십노선과 삼단노선을 흰 아마 밧줄로 엮어 배다리를 놓았고, 아이귑토스 사람들은 314척의 오십노선과 삼단노선을 파피루스로 꼰 밧줄로 엮어 배다리를 놓아, 우여곡절 끝에 그들이 만든 두 줄의 배다리는267 크세르크세스의 지상군이 건너기만 기다리고 있었고, 바다에 접한 도시들로부터 차출한 삼단노선과 운반선들 역시 속속 아뷔도스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주력인 포이니케가 팔라이스티네의 쉬리아 사람들과 함께 모은 300척과 아이귑토스의 200척은 일찌기 배다리를 놓기 시작할 때부터 모여 있었고, 퀴프로스가 함선 150척을 보냈으며, 아시아 남부 해안의 칼리키아가 100척, 팜퓔리아 30척, 그리고 뤼키아가 50척을 보냈고, 아시아의 서부 해안에서는 카리아가 70척, 도리에이스 사람들의 도시들이 30척, 이오네스 사람들의 도시들이 100척,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들이 17척, 아이올레이스의 도시들이 60척, 그리고 헬레스폰토스 연안의 도시들이 100척을 보내 모두 1007척의 삼단노선이 모였고, 그리고 삼단노선에 딸려온 삼십노선, 오십노선, 군마운반선, 그밖의 작은 배들이 더 더해져 전체 3000척의268 페르시아 함대가 아뷔도스로 왔습니다. 아뷔도스의 땅과 바다가 군마와 함선들로 가득 들어찼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군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뿌듯해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269 봄이 다가기 전에 드디어 에우로파로의 도해가 시작되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질을 당해 가며 이레에 걸쳐 모두가 헬레스폰토스를 건넜을 때, 세스토스에 살던 한 사람은 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질려 신을 원망했습니다.270 세상 사람들을 다 데리고 에우로파로 건너온 크세르크세스는 케르소네소스 반도를 거쳐 트라케로 나아가 부왕 다레이오스가 생전 스퀴타이 정벌 때에 남겨둔 요새 도리스코스에 도착하여 온 세상의 기병과 보병을 넓은 벌에 정렬시켜 전차를 타고 다니며 일일이 질문하였고, 해군을 사열할 때는 모래 위로 끌어올려졌던 함선들을 모두 바다로 띄워 전차 대신 포이니케 시돈의 함선을 타고 일일이 함선의 이물을 지나며 사열하고 사기를 북돋았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여러 세상에서 온 부대들을 일일이 만났고, 그들의 각오를 듣고 격려하였으며 바라는 바를 묻고 보답을 약속하였습니다.271 이제 온 세상에서 모인 군대가 그의 군대였으므로 온 세상이 그의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크세르크세스는 헬라스의 세계로 진군할 것이었습니다. 

 

11.51. 그런데 그렇게 늘어선 세상 모든 곳의 군대와 함선은 한결같이 페르시아 사람이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개개 부대를 이끌고 있는 개개 지역 출신의 대장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페르시아 지휘관들 뒤에 선 졸병이나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272 그 가운데서도 페르시아와는 가깝지만 헬라스로부터는 먼 곳에서 온 부대가 특히 더 그랬습니다. 그들에게 헬라스 침공은 어떤 의미에서도 그들과는 상관없는 전쟁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동쪽 끝 어디 인디아에서 온 병정들은 그들의 도시가 페르시아에 복속되어 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헬라스의 세상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을 것이었으며, 설사 알았다 해도 그들이 짠 카페트나 그들이 길러서 모은 향신료들을 당나귀에 싣고 팔러 왔으면 왔지 창과 방패를 들고 싸우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헬라스 세계에서 멀면 멀수록 그들은 더 많이 지쳤고 군비도 더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출전은 전사로서의 가치보다는 인질로서의 가치가 더 높았습니다. 페르시아가 멀리 서쪽으로 움직이는 동안 페르시아의 빈틈을 노릴 수도 있는 모든 곳의 힘을 인질로 삼아 대동하여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부와 관심을 참전한 병사들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허비하도록 했습니다.273 변방에서 온 군대가 제일 먼저 허약해져 갔으므로 그들의 힘은 적을 무찌르는 데 적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죽이기 위해 적들의 힘을 빼도록 하는 데 적합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헬라스에 가까운 곳에서는 지역마다 조금씩 페르시아의 헬라스 침공을 보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랐습니다. 그 어느 지역 그 어느 사람에게도 헬라스 침공이 그들을 위한 전쟁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던 만큼 그 전쟁을 피하기 위해 아무도 자기가 그 전쟁을 가로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그 전쟁을 어찌하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인가에 온갖 눈치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 피할 수 없는 전쟁을 거슬러서 치르느냐 아니면 페르시아에 붙어 치르면서 그들의 안전을 지킬 뿐만 아니라 전리품이 생겨 조금이라도 덕을 볼 수 있다면 비록 물과 흙을 바쳐 잃은 자유에 대한 보상이라 치고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트라케와 마케도니아가 그랬고, 페르시아 군대가 앞에서 나타나는 대로 텟살리아와 보이오티아가 그럴 것이었습니다. 길을 터주고 군대에 먹을 것을 내는 정도의 비용과 복종하여 자유를 잃은 대가가 전란을 피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라면 견딜 만하다고 복속의 길을 택한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들은 거의 모두 페르시아에 지상군을 보낸 지역들이었지요. 그들은 바다가 삶의 터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로 해군을 보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일찌기 캄비세스 때부터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친 대가로 페르시아로서는 결코 구축할 수 없었던274 페르시아의 해군 역활로 살길을 찾았던 포이니케의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포이니케는 밀레토스가 대표하던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의 도시들이 가졌던 해군력을 다레이오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나서 분쇄하고 장악한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이르는 제해권이275 헬라스의 코린토스나 아이기나 같은 도시들에게 잠식되는 것이 불쾌했는데 아테나이가 함선 200척을 꾸려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바다로 진출해오자 다시 한번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헬라스 함대를 괴멸시키고자 작정하고 전쟁에 나선 것이었습니다.276 비슷한 생각으로 할리카르낫소스의 아르테미시아277도 밀레토스의 이오니아 함대의 재건을 꿈꾸며 여자의 몸으로 함대를 이끌고 참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온 세상의 군대들이 제각기 사연을 가지고 복속을 택해 전쟁에 나섰고, 제마다 그 전쟁이 자기에게 어떤 손익을 가져다 줄 것인지 따져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헬라스 도시들의 군대에 의해 괴멸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는 마치 메뚜기 떼처럼 진군 길의 강물이란 강물은 죄다 마셔버리고 마주치는 먹을 거리라는 먹을 거리는 죄다 먹어치우면서 지나친 곳의 그 누구도 그들의 배후를 칠 여력이 없도록 진을 빼며 천천히 움직여 칠월의 한여름이 되었을 무렵에야 텟살리아로 들어와 올륌포스 산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11.52. 칠월이 되어 여름이 한창일 때 헬라스 천지를 먼지로 뒤덮으며 페르시아 군대가 텟살리아로 들어오는 길을 내기 위해 마케도니아 남단의 피에리아에서 머물며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위해 물과 흙을 바치는 헬라스 도시들을278 점검하고 있다는 소식에 헬라스 동맹군들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스트모스에는 헬라스동맹 도시들의 지상군과 해군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달포 전 텟살리아에 속아 템페 계곡에서 황급히 철군한 뒤 잡아놓은 첫 번째 봉쇄 장소인 테르모퓔라이로 지상군을 보내고, 그에 가까운 아르테미시온 곶으로 해군도 보내 페르시아 함대를 견제하면서 이 지상군을 지원하도록 결의하고 출동했습니다. 물론 지상군은 스파르테의 왕이, 해군 역시 스파르테의 지휘관이 지휘토록 했지요. 이복형 클레오메네스가 난행 끝에 죽자 출생에 대한 온갖 모멸적 구설을 견디며 그 형의 딸과 결혼까지 하면서279 스파르테의 왕이 된 레오니다스는 왕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의심하는 전사들의 눈흘김을280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이며 조용히 자신의 피를 증명해 보일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레오니다스가 기존의 청년 근위대를 해산하고 이미 '가정을 이루어 아들을 둔 퇴역 전사'들 가운데서 300명을281 새로 뽑아 자신의 근위대로 꾸렸을 때 근위대로 뽑혀 다시 현역으로 돌아온 전사들은 그들이 호위해야 하는 왕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알 수 있었겠지요. 살아서 돌아올 생각이 없는282 왕을 호위하여 전투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스파르테의 전사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테의 왕으로 자라지 않았습니다.283 그는 스파르테의 전사로 자랐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스파르테의 왕 이전에 먼저 스파르테의 전사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왕이 되고서도 온갖 폄훼와 비하의 수모를 겪어야 했지만 그는 그 수모를 스파르테 최고의 전사들과 함께 치를 전투로 말끔히 씻어낼 것이었고, 그 전투의 결과로 스파르테의 안전과 자유는 물론 스파르테의 왕으로서의 명예도 지킬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테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헬라스 도시와 헬라스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스파르테의 왕이 최고 전사들과 함께 적들 앞에서 어떻게 싸우는가를 확실히 보여줄 것이었습니다.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이 그들의 일이듯이, 전장에서의 죽음도 그들의 일이었으므로 그들은 아무도 살아서 돌아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의 팔월은 도시들마다 신을 기리는 평화의 계절이었습니다.284 평화의 계절에 무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 꺼림칙하기만 한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에게 군대를 보내라 하는 것이 서로에게 눈치 보이는 일이었지만, 일부러 신의 계절을 노려 쳐들어오는 것처럼 보이는 야만인들의 불경함을 응징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병력을 차출하는 것에 신도 노여움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 믿고 레오니다스는 펠로폰네소스와 보이오티아와 가는 길의 곳곳에 참전을 요청하는 사절들을 보내 지원군을 모으며 테르모퓔라이로 나아갔습니다. 이제 레오니다스와 헬라스 동맹군 팔천은285 평화의 기간이 끝나서 헬라스동맹이 완전히 전쟁에 돌입할 수 있기까지 크세르크세스의 사십만을286 하루라도 더 테르모퓔라이에 묶어둘 것이었습니다.

 

11.53. 어느 덧 그들의 도시와 도시민뿐만 아니라 헬라스 도시들과 헬라스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나서고 있는 스파르테도 비장했지만, 다레이오스의 침공 때에 그랬듯이 어느 모로 보아도 자신들이 페르시아의 주적이 될 수밖에 없는 크세르크세스 침공을 맞는 아테나이의 움직임 역시 비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크세르크세스와의 전쟁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그것이 다레이오스와는 수준이 다른 것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비장함 속의 아테나이를 이끌던 테미스토클레스는 마라톤의 전사들이 비분강개하여 몇 해 전에 새로 노를 저어 먹고 살게 된 사람들이 테미스토클레스를 위해 쫓아냈던287 크산팁포스와 아리스테이데스를 다시 아테나이로 불러들이는 것을 지켜보며, 그가 앞장서서 무역을 하겠다며 만든 함선들로 해상 전투 연습에 몰두하는 한편, 일찌감치 헬라스동맹 지상군의 지휘를 맡은 스파르테를 따라 몸소 아테나이 군대를 이끌고 텟살리아의 템페 계곡으로 가는 성의를 보이거나, 심지어 헬라스동맹 해군의 지휘권마져도 흔쾌히 스파르테에게 내어주며, 스파르테를 통해 코 앞의 전쟁이 페르시아와 아테나이의 전쟁이 아니라 페르시아 대 헬라스 세계의 전쟁이며, 그래서 헬라스 동맹이 페르시아의 응징을 받는 아테나이를 지원하기 위해 치르는 전쟁이 아니라 헬라스 도시들과 헬라스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인식하도록 하는 데 정성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스파르테를 통해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으로부터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려는 이런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이 헬라스동맹의 도시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마라톤의 승리만 기억하는 고지식한 마라톤의 전사들과 누가 무어라 해도 두려기만 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먹혀든 것은 템페 계곡이 텟살리아가 페르시아와 그들을 위해 파놓은 함정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다음부터였습니다. 누구보다 템페의 함정에서 황급히 빠져나왔던 마라톤의 전사들이 아티케와 펠로폰네소스를 제외한 모든 헬라스가 이미 페르시아에 복속되어 있다는 사실과 아테나이가 기댈 곳이 결국 펠로폰네소스의 도시들이라면 그들의 중심인 스파르테를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고, 아울러 스파르테를 통해서 페르시아의 침공으로부터 아테나이를 구해야 한다면 스파르테의 강점인 지상군은 스파르테에게 맡기고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의 약점인 해군에 집중하여 전체적인 헬라스동맹의 전력을 키우는 것이 옳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습니다.288 아테나이 해군에 대해 아테나이 사람들이 모처럼 일치된 생각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289 아테나이를 어떻게 방비할 것인가는 그래도 함선에 오르는 것이 마뜩치 않은 마라톤의 전사들에게 맡긴 채 테미스토클레스는 아직도 뻣뻣한 일부 마라톤의 전사들 대신 모자라는 병력을 바다에는 미숙하나 용감하고 열정적인 플라타이아의 전사들을 태워290 127척의 삼단노선을 이끌고 이스트모스로 갔고, 고작 10척의 함선으로 참전한 스파르테의 에우뤼비아데스가 이스트모스에 집결한 전체 271척의291 헬라스함대의 지휘권을 갖게 하자는 다른 동맹도시들의 주장에 순순히 따랐습니다.292 지휘권의 문제로 앞으로 닥쳐올 아테나이 선장들의 불복과 헬라스함대 내부의 이견과 내분의 수습은 이제 순전히 테미스토클레스의 몫이 되었지만 아테나이에게는 헬라스동맹의 지휘권보다는 백오십 척 남짓의 다른 동맹도시들 함선이 더 중요했습니다. 아무도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어날 불복과 반목을 안은 헬라스 함대는 테르모퓔라이에서 크세르크세스의 군대와 대결할 레오니다스를 인근 바다에서 지원한다는 전쟁 계획대로 이스트모스를 떠나 에우보이아 섬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11.5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레오니다스가 테르모퓔라이에서293 허물어진 포키스 사람들의 옛 성곽들을 고치고 군사들의 배치를 끝내고 틈틈이 전투 훈련을 시키는 동안 드디어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이 트라키스의 넓은 벌을 흐르는 멜라스 강을 뒤로 두고 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길이라고는 겨우 마차 한 대 지나갈 만한 바닷가에 진을 칠 수 있다면 도대체 그 병력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데 그 병력으로 벌판을 뒤덮고 강을 말려버리는 대군 앞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좁은 벼랑 길에 진을 차리고 버틴다는 말인가? 수사에서 출발하여 트라키스 벌판에 오기까지 수없이 많은  진을 쳤지만 단 한 번도 적을 앞에 둔 적이 없었는데, 이처럼 말도 되지 않는 적들을 앞에 두고 진을 쳐야 하다니, 정말 이 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찰병의 보고라면 적의 진지는 고친 흔적이 있는 성벽 뒤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병사 몇몇이 성밖에서 웃통을 벗고 훈련을 하거나 몇몇은 머리를 감고 있었다니294 이런 대군의 진지를 바라다보고도 이들은 두려움도 일말의 주저도 없단 말인가? 크세르크세스는 우선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알고 달래기도 해보자 싶어 사자를 보내 무기를 넘기고 투항하면 친구가 되어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고,295 레오니다스 진지라고 해서 모두가 두렵지 않은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펠로폰네소스에서 온 부대들이 철수하여 이스트모스로 가서 훗날을 기약하자고 했고, 그럴 경우 당장 자기의 도시가 유린당하게 생긴 포키스와 오푸스 로크리스는 결사항쟁을 주장했고, 그리고 끝으로 레오니다스가 동맹군의 결론을 사자에게 전했지요. "와서 가져가시오!"296 이런 대답에도 크세르크세스는 그가 갈 길을 막은 자들의 사생결단이 가소로웠고 그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는 것을 기다리며 느긋하게 트라키스의 본진에서 나흘을 보냈습니다. 페르시아의 군세를 보고 잠시 흔들렸던 내부 이견은 결사항쟁으로 잘 정리되었지만, 테르모퓔라이에 도착하여 옛 포키스 사람들이 쌓았던 성벽을 보수하며 알게 된 성벽 길 대신 멀리 칼리드로모스 산과 아노파이아 산 사이를 돌아오는 오솔길이297 있다는 사실 때문에 레오니다스는 페르시아 대군 앞에서 그의 적은 군사를 또 쪼개지 않을 수 없는 어려운 결정을 더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포키스 군대가 그 길의 방어를 자청하여 오솔길이 보이는 산 꼭대기에 진을 차리게 했지만, 자칫 잘못되면 언제든지 등 뒤로도 적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레오니다스에게 지금쯤은 말리스 만 근처의 바다에서 연락을 보내야 되는 헬라스함대로부터의 소식마져 없었습니다. 서로 대치한지 닷새 째가 되는 날 아침 고개 위에서 본 트라키스 벌판이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흘을 기다려도 달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방자하고 어리석은 헬라스 군대 때문에 화가나 있는데 전날 저녁에는 마그네시아의 아페타이라는 작은 만으로 가던 페르시아 함대가 폭풍우를 만나 조금 피해를 입었지만 아페타이에 정박하여 함선들을 점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298 닷새 째 아침 크세르크세스가 당장 벼랑 길을 막고 선 시건방진 놈들을 사로잡아 오라며 메디아와 킷시아 군대를 내보냈습니다.299 중문 앞에서 온종일 계속된 첫날 전투에서 페르시아는 메디아 군대에 이어 다음에는 킷시아 군대를300 그리고 마지막에는 불사부대까지 순번을 바꾸어 공격했지만 그들의 방패는 무르고 창은 짧았던 반면, 헬라스 동맹군이 적의 숫적 우위를 무색하게 만드는 가운데 스파르테 군대가 그들이 완전히 노련한 전사들임을 보이며 거짓 후퇴로 유인하여 짓밟는 등 기념비적인 분전으로301 불사부대마져 막아내자, 마침내 크세르크세스가 그날 세 번째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결국 불사부대를 철수시켜야 했습니다. 첫날의 전투로 기가 꺾였나 싶어 페르시아가 이튿날 역시 같은 방법으로 공격했지만 대오를 갖추어 제자리를 지키는 헬라스 동맹군을 어쩌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틀 동안의 공격이 무위로 끝나 난감해진 크세르크세스 앞에 트라키스 사람 에피알테스가 나타나 동문으로 가는 우회로에 대해 말하고 자기가 길잡이로 나서겠다고 말했고,302 크세르크세스는 당장에 휘다르네스와 그의 불사부대를 움직이게 했고, 날이 어둑해졌을 때 일만의303 중무장한 페르시아 최정예부대가 아소포스 강을 건너 아노파이아 산길에 달라붙었고, 밤이 깊어 중천에 뜬 보름달이 산길을 밝힐 무렵에는 경무장보병 정도나 움직일 수 있다던 오르막을 곧바로 올라 아노파이아 산 등선으로 난 길을 따라 칼리드로모스 산꼭대기를 보고 중무장을 하고도 날랜 걸음을 다그쳤고, 동이 틀 무렵 자다가 기척을 느끼고 막아서는 포키아 군사들을 상대하다가 그들이 산꼭대기로 물러서고 또 그들이 스파르테의 군대가 아니라는 길잡이의 말을 듣고는 그들을 산꼭대기에 남겨두고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이렇게 아노파이아 산길이 허무하게 뚫린 사실을 사흘날 아침에야 알게 된304 헬라스 동맹군은 대처 방안을 놓고 사분오열했지만 스파르테만 남고 모두 이스트모스로 살아서 돌아가 다음 결전을 대비한다는 레오니다스의 결단이305 모두를 편하게 했고, 포키스와 로크리스의 병사들은 뿔뿔이 흩으져306 페르시아에게 물과 흙을 바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벌이 무엇인지 나머지 헬라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본보기 유린이 기다리는 고향으로307 돌아가 그들 고향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것이었고, 펠로폰네소스에서 온 병사들은 어떻든 살아서 돌아가 이스트모스에 열심히 성벽을 쌓고 거기를 또 다른 테르모퓔라이로 만들어 거기서 펠레폰네소스 사람들과 헬라스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건 일전을 준비해야 할 것이었습니다.308 돌아가는 군대를 모두 떠나보낸 뒤 레오니다스는 떠나라고 해도 남은 사람들309 그리고 죽음으로 도시가 맡긴 일을 다할 스파르테의 전사들을 위해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될 아침을 든든히 먹인 뒤310 레오니다스는 적을 하나라도 더 많이 죽이기 위해 진을 중문 밖으로 옮기고 기다렸습니다. 동문에 도착한 불사부대가 아침도 먹고 쉴 시간을 주느라 그랬는지 크세르크세스는 서문에서의 공격을 최대한으로 늦추다가 해가 하늘의 반까지 올라 갔을 무렵에야 몰려들기 시작했고, 얼마나 싸웠는지 창이 부러지고 칼이 동강나 주먹과 칼자루로 싸워 적의 공격을 네 번이나 몰아내는 동안 크세르크세스의 이복형제 둘도 그리고 레오니다스도 죽었고, 레오니다스의 주검을311 놓고 다투던 헬라스 전사들의 등 뒤로 불사부대가 나타났고, 남은 헬라스 전사들이 중문 안의 작은 언덕 위로 올라가 단검과 손과 이빨로 싸우다 죽자312 이들의 마지막을 끝으로 테르모퓔라이에 남았던 헬라스 동맹군이 전멸되었을313 때는 팔월의314 해가 중천에 떠 있었습니다.

 

11.55. 레오니다스가 이스트모스에서 테르모퓔라이로 떠나자 에우보이아로 출발한 헬라스 함대는 레오니다스가 테르모퓔라이에서 허물어진 성벽을 고치며 크세르크세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을 동안, 아르테미시온 곶에 도착하여 함선들을 곶의 해변 자갈밭에 올려 놓고 페르시아 함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적의 함선이 언제 어디로부터 나타날지 몰라 일단 텟살리아의 마그네시아 반도 끝에 붙은 스키아토스 섬에 함선 3척과 감시병을 파견하여 아무래도 거친 마그네시아 해안을 따라올 것 같은 적의 동태를 살피도록 해놓고 그렇게 자갈밭에서 야영하고 지냈습니다. 팔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헬레스폰토스 쪽에서 불어오는 보레아스가315 전에 마르도니오스가 끌고온 페르시아 함대를 아토스 반도의 끝자락에서 결딴내었던 것처럼316 이번에도 도움을 줄 것인지, 그렇지 않고 보레아스의 다구침을 피해 적의 함대가 멀리 에우보이아 섬을 돌아 말리스 만으로 오는 것을 아르테미시온에서 만나게 된다면 큰일이라는 기대와 염려로 헬라스 함대는 편하게 기다리고만 있지 못했습니다. 1,000척이 넘는 거대한 적의 함대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아르테미시온을 앞을 가로막고 다른 하나가 에우보이아를 돌아와 아르테미시온을 포위한다면 그것은 바로 헬라스 함대의 죽음을 의미할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기약하고 떠난 레오니다스야 아노파이아 오솔길을 돌아온 불사부대의 움직임에도 오관불언 죽음으로 일전을 겨룰 수 있었지만, 헬라스 함대의 에우리비아데스도 테미스토클레스도 어느 누구도 아르테미시온에서 죽기로 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테르모퓔라이에서 레오니다스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평화의 기간을 보낸 다음 제대로 무장하여 페르시아에 맞설 수 있을 때까지 죽기로 싸울 수 있도록 페르시아 함대의 테르모퓔라이 공격을 막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어떻하든 살아서 돌아갈 생각뿐인 그들 앞에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포이니케의 시돈 사람들이 테르메로부터 밤낮으로317 직항해 스키아토스 섬에 먼저 도착한 열 척의 척후함이었습니다. 페르시아 함선 열 척을 본 세 척의 헬라스 함선은 필사적으로 도주하였지만 두 척은 나포되고 한 척은 배를 마그네시아 해안에 버리고 도망치는 사이318 스키아토스 섬의 감시병들이 봉화를 올렸고, 이를 본 아르테미시온의 헬라스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가 나타난 것을 알고 서둘러 배를 띄웠으나 적이 나타나지 않아 척후를 보냈고, 섬 근처 암초에 걸린 세 척의 배가 침몰하는 것을 보고도 페르시아 전체 함대의 움직임을 알지 못한 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일단 아르테미시온을 떠나 에우보이아 섬 해안 곳곳에 감시병을 남겨두고 에우리포스 해협을 지키기 위해 칼키스로 갔습니다.319 한편 열 척의 척후함으로부터 헬라스 함대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페르시아 함대는 크세르크세스가 테르메를 떠나고 열하루가 지나서야 마그네시아 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온종일 노를 저어 펠리온 산 아래 마그네시아 반도의 목에 있는 도시 카스타나이아를 지나 반도의 끝 세피아스 곶으로 가는 중간 넓지 않은 해변에서 일부 함선은 뭍으로 끌어올리고 나머지는 닻을 내려 정박했고, 이튿날 아침에 불기 시작한 헬레스폰토스 바람으로 바다가 들끓자 해안 가까이 정박했던 배부터 뭍으로 끌어올리는 동안 바깥 쪽 배들이 닻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하여 멀리는 북쪽으로 멜리보이아와 남쪽으로 세피아스곶까지 이르는 해안 곳곳에서 난파당했는데, 사흘이나 계속된 폭풍우로 페르시아 함대는 보급선을 포함한 400여 척의 함선과 보급물자를 잃는 피해를320 입었습니다. 바다에 뜬 함선의 잔재를 본 에보이아 해안 감시병들이 즉각 칼키스로 알렸고, 사흘 간의 폭풍으로 페르시아 함대가 거의 괴멸되었을 것이라 짐작한 헬라스 함대는 바다가 잠잠해지자 이제는 한판 붙어도 좋을 것 같은 생각으로 다시 아르테미시온으로 갔고, 그때 이미 페르시아 함대는 건너편 마그네시아 반도 끝 아페타이에 정박하여 함선들이 대오를 갖추고 난파당한 함선을 구조해 열심히 수리하고 있었는데, 왠지 뒤늦게 함대를 따라붙던 페르시아 함선 열다섯 척이 아르테미시온에 있는 헬라스 함대를 자기네 함대로 착각하고 기어드는 바람에 헬라스 함대는 그들을 쉽게 나포하였고, 그들로부터 페르시아 함대의 상황을 소상히 파악한 바321 사흘에 걸친 폭풍우로 페르시아 함대가 피해를 입긴 했으나 당장 헬라스 함대가 맞붙어도 좋을 만큼 약화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그것이 건너 편 바다에 펼쳐져 눈으로 보이는 페르시아 함대의 군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살아서 돌아갈 생각밖에 없는 헬라스 함대는 두려움에 기가 질렸습니다. 그 두려움은 트라키스에 진을 친 크세르크세스의 군세에 눌려 레오니다스에게 철수를 주장했던 살아서 돌아가고 싶은 펠로폰네소스 병사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펠로폰네소스 함선들이 똑같이 에우뤼비아데스에게 나서 철수를 주장했습니다.322 에우뤼비아데스가 테미스토클레스의 눈치를 살피느라 결정을 못하고 있는 사이, 헬라스 함대가 에우보이아에서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에우보이아 함선들에게 퍼졌고, 헬라스 함대를 에우보이아에 묶어두어 그들의 도시와 주민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고 싶은 에우보이아는 스파르테의 에우뤼비아데스에게 연약자들을 피난시킬 동안만이라도 남아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은밀히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접촉하여 30탈란톤의 거금을 주며 에우보이아를 떠나지 말라고 부탁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그 돈이 마치 자기 돈인 것처럼 5탈란톤을 에우뤼비아데스에게, 그리고 3탈란톤을 강경한 철수론자인 코린토스 지휘관 아데이만토스에게 전해, 헬라스 함대가 적의 함대가 말리스 만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그래서 테르모퓔라이에서 레오니다스가 크세르크세스의 진군을 하루라도 더 막고 버틸 수 있도록, 헬라스 함대가 계속 에우보이아에서 적과 대치하는 것으로 결론 짓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나머지 돈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챙겼지요.323 그렇게 돈만 밝히다 나중에는 아테나이에서 도망쳐야 했던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때도 그 돈을 혼자 꿀꺽했는지 아니면 아르키텔레스처럼 노꾼들 품삯을 주지 못해 전쟁이고 뭐고 우선 배를 가지고 돈벌이에 나서야 될 처지에 있던 선장들에게324 나누어주어 아테나이 함선의 노꾼들 품삯으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과 그들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스스로 싸워 지킬 힘이 없어 돈으로 사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에우보이아 사람들의 돈이 그 전에 이미 전쟁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아테나이 사람들을 타락시켜 아테나이로 하여금 그저 물과 흙만 요구하는 페르시아와 다름없이 힘으로 헬라스 도시들을 누르고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으며 그들을 종속시켰고 그래서 페르시아 제국에 버금가는 아테나이 제국을 열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 그들은 정녕 몰랐습니다. 테르모퓔라이에서는 헬라스 동맹군 병사들이 그들의 도시가 신에게의 경배를 훌륭히 마치고 이제는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원 무장하여 적과 대치할 수 있을 때까지 돈 한푼 오가지 않아도 목숨을 걸고 좁은 길을 지키고 서 있었을 때, 거금이긴 하지만 30탈란톤의 돈에 낚일 정도로 허술한 전의를 가지고 아르테미시온에 남기로 한 헬라스 함대는 그제서야 이튿날부터 탐색적인 해상 전투를 벌이려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한편 아페타이의 페르시아 함대는 건너 편 아르테미시온 해안의  몇 척 안 되는 헬라스 함대가 가소로웠지만 자칫 잘못 건드리면 모두 도망치고 말까봐 성화 봉송자까지 송두리채 결딴낼 요량으로 함선 200척을 에우보이아 섬을 우회시켜 그들이 돌아서 오면 앞뒤로 치겠다는 계획을 세운 다음, 헬라스 함대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몰래 스키아토스 섬 바깥으로 200척을 보내고 조용히 아페타이에 남은 함선들 점검이나 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늦게 아페타이 페르시아 진영에서 스키오네 사람 스퀼리아스가 물 속을 걸어 아르테시미온까지 와서325 페르시아 함대가 200척의 함선을 뒤로 돌려 헬라스 함대를 포위 공격할 것이라고 알렸고, 헬라스 함대는 회의 끝에 그날은 그대로 야영을 하며 지내고 아침에 에우보이아 섬 뒤로 돌아서 오는 200척을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테르모퓔라이에서는 레오니다스의 선방에 막힌 크세르크세스가 그날 세 번째로 의자에서 일어나 불사부대를 철수시키고 첫날의 전투를 끝내던 무렵, 아르테미시온의 헬라스 함대는 해가 넘어가는데도 페르시아의 200척이 나타나지 않자 탐색전이라도 해보고 싶어 아페타이로 가서 페르시아 본진을 공격했고, 페르시아 함대는 실성한326 헬라스 함대를 여유롭게 포위했고, 포위망 속의 좁은 공간에서도 평소 훈련했던 대로 신호에 맞춰 움직인 헬라스 함대가 적 함선 30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리는 가운데 헬라스 함대와 페르시아 함대 간의 첫날 전투는 해가 넘어가는 바람에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각자 정박지로 돌아가면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이 문제였습니다. 일전에는 헬레스폰토스 바람이 일으킨 풍랑으로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밤새 천둥 소리가 울리고 폭우가 쏟아져 아페타이 만으로 쓸려온 온갖 부유물이 함선에 엉겨붙으며 노의 날과 섞여 노를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아페타이의 함선들은 만에 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했던 만큼 많은 피해는 입지 않았으나, 에우보이아 섬을 우회하던 200척의 함선들은 밤에 코일라 앞바다를 지나고 있었는데327 풍랑과 폭우를 만나 바람과 파도에 무작정 떠밀려 다니다 모두 좌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밤새 시달린 페르시아 함대는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지쳐 움직일 기색이 없었던 반면, 헬라스 함대는 아테나이의328 함선 53척이 증원군으로 합류하여 사기가 드높아진 데다가 우회하던 200척의 페르시아 함선들이 모두 폭풍으로 파괴되었다는 소식까지 들어오자 충천한 기세로 어제처럼 해가 넘어갈 무렵 출동해서 킬리키아 함선들을 요절내는329 전과를 올리고 해가 지자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와 이튿날의 전투를 끝냈습니다. 사흘날이 되자 페르시아 함대도 적은 함선에 이틀이나 계속 당하다 보니 화가 나서 제법 정신을 차렸는지 크세르크세스에게 추궁당할까봐 두려웠는지 먼저 싸움을 걸기로 하고 준비가 끝나자 바다로 나갔는데, 이때는 해가 중천에 떠오른 한낮으로 테르모퓔라이에서 레오니다스의 주검을 두고 헬라스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손톱과 이빨로 적들과 싸우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폭풍우와 지난 이틀 사이의 전투로 세력이 꺾인 페르시아 함대가 초승달 모양으로 퍼져 포위하려 하자 어제 증원군까지 얻어 호각을 이룬 전력으로 헬라스 함대는 그 중앙을 찔러 들어가 전투가 시작되었고, 서로 물러서지 않아 비좁아진 바다에 함선들이 뒤엉켜 함선이 파괴되고 죽는 사람이 속출하여 결국 각자의 정박지로 돌아갔을 때는 페르시아 함대가 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헬라스 함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특히 아테나이 함대의 피해가 극심하여 함선 수의 반이나 파손되었습니다.330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온 헬라스 함대는 살아서 돌아갈 생각뿐인 도시들이 철수를 결정하였고, 철수 시점에 대해서는 안전하게 철수시킬 테니 염려말라는 아테나이 함대의 지휘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일임한 다음,331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으로 일단 근처의 눈에 띄는 양과 염소를 잡아332 배불리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테르모퓔라이로부터 전령이 도착하여 테르모퓔라이를 지키던 헬라스 동맹군 대부분은 페르시아의 포위를 피해 새벽에 철수했지만 남은 레오니다스와 헬라스 동맹군이 전멸한 사실을 전했고, 테르모퓔라이가 뚫렸다는 소식에 헬라스 함대는 지체없이 코린토스를 선두로 아테나이가 후미를 맡아333 철수했습니다. 이 와중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나이의 쾌속선들을 차출하여 아르테미시온 근처의 샘터마다334 페르시아 함대에 차출된 아시아의 이오니아 지역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새겨 놓게 했는데, 그들이 헬라스 편이 되어 넘어오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어려우면 중립을 지키고 카리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권유하고, 정 힘들어 전투에 나갈지라도 소극적으로 싸워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335 아테나이가 이오니아에 사는 아테나이의 후손들이 이어족의 힘에 자유를 잃고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섰던 것이 십수 년 전의 일이고, 다레이오스에 이어 크세르크세스까지 페르시아의 헬라스 침공도 모두 그때의 일로 빚어진 것인데, 이제 선조의 땅에 와서 선조까지 이어족의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일에 가담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묻고, 당장의 굴레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해도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해치는 일은 피해달라고 당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철수하는 도중에 헬라스 함대가 이스트모스로 갈 것이 아니라 살라미스 섬에 정박하여 아테나이 사람들의 소개를 돕고 또 한편으로 페르시아 해군의 움직임을 보아 이에 대응하자고 요청하여336 아테나이 함대는 아테나이로, 나머지 헬라스 함대는 살라미스 섬으로 향했습니다.

 

11.5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죽기를 각오하고 보름 정도 버텨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던 레오니다스는 비록 이레만에 테르모퓔라이의 좁은 길을 크세르크세스에게 내주고 말았지만 그가 끌고온 대군으로도 헬라스로 들어가는 길이 험난할 것임을 충분히 알리며 헬라스 전사의 기개를 드높이고 죽었고, 살아서 돌아가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던 테미스토텔레스는 비록 이기지는 못했어도 북풍의 신 보레아스의 가호 아래 자신의 전술이 주효함을 입증하여 아테나이 함대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북돋우고 헬라스 함대 전체에도 아테나이 함대의 전투 의지와 능력에 대해 충분한 신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함대에게도 헬라스 함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헌신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들은 페르시아의 헬라스 진입을 막지 못했고, 따라서 적의 침공은 이제부터 본격화될 것이었고, 헬라스 세계의 안전과 자유는 헬라스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저지하고 물리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크세르크세스의 지상군을 대비하는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태도는 아테나이가 볼 때 섭섭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보이오티아에서 대적하여 적의 아티케 침공을 저지해줄 줄 알았는데 헬라스 동맹의 지상군은 어이없게도 이스트모스 지협에 방벽을 쌓고 지협을 통해 펠로폰네소스로 가는 유일한 길인 절벽 길을337 허물어 펠로폰네소스 방어에만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338 한마디로 스파르테는 아테나이를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고, 그렇다고 함대를 버리고 아테나이 혼자 보이오티아 경계로 나가 십 년 전 마라톤에서 다레이오스의 대군을 물리쳤듯이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별수없이 이제 아테나이는 도시민을 소개시켜 도시를 비워두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테나이에게는 불행 중 다행인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크세르크세스가 테르퓔라이에서 바로 보이오티아를 지나 아티케의 마라톤으로 들어오지 않고 무슨 조화인지 한가하게 도리스를 지나 그냥 두어도 결코 배후에서 공격할 능력이 없는 포키스로 들어가 그곳을 유린하며 시간을 보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상군의 서남진으로 왕과 멀어져 활동이 자유로워진 페르시아 해군이 다레이오스의 침공으로 고난을 겪었던 에우보이아를 또 다시 유린하느라 시간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번 시간으로 아테나이는 대다수의 아테나이 사람들을 트로이젠으로 보내면서 아르테미시온에서 파괴된 함선을 트로이젠의 항구에서 수리하며 인원을 보충하여 아테나이 함대를 새롭게 구축할 수 있었고, 아울러 그 함선으로 아테나이 사람들 일부는 안전하게 아이기나와 살라미스 섬으로 소개시킬 수 있었습니다.339 고마운 것은 트로이젠이 온갖 정성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을 맞이해 주었고, 전쟁 전만 해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이기나도 선뜻 아테나이 사람들을 수용한 것이었습니다만, 헬라스 동맹이, 아니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아니 스파르테가 아테나이를 버렸다는 섭섭함은, 그런 작전을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 아테나이를 버리고 떠나야 했던 아테나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남았고,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 아닐런지요. 가족들과 가산을 옮긴 아테나이 사람들이 다시 함대로 복귀했고, 이제 그들은 굳이 신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이제 그들의 도시와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것은 오직 바다를 지키는 길밖에 없다고 다짐하며 크세르크세스의 해군과 건곤일척의 일전을 겨룰 것이었습니다.

 

11.57. 한편 테르모퓔라이가 뚫린 것을 본 텟살리아는 이어족에게 소위 흙과 물을 바치면서, 다시 말해 노예가 되어 돈과 물자와 사람을 바치면서, 한마디로 도시와 도시민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로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얻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바친 것에 비해 얻은 것이 적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본전 생각이 간절했던 텟살리아는 페르시아가 그들에게 했듯이 오랜 숙적이던 포키스에게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지켜줄 테니, 바꾸어 말해 이어족들의 유린을 막아줄 테니 돈을 바치라 했고,340 거절당해 자존심 상한 텟살리아는 크세르크세스의 길잡이가 되어 포키스로 들어갔고, 헬라스 땅에서 물과 흙을 바치지 않은 땅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만천하에 보이기 위한 침공자의 유린이 온 포키스를 짓밟았으며, 그래서 기가 오른 이어족의 군대가 델포이까지 넘보았지만 델포이의 신은 작은 조화로 침공군을 당황하게 했고, 약간의 낭패를 본 크세르크세스의 지상군이 포키스에서 방향을 바꾸어 보이오티아로 들어섰습니다. 텟살리아만큼 충성스럽고 유용한 종속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물과 흙을 바친 테바이의 요청도 들어주면서 페르시아에 복종한 자들과 거역한 자들이 얼마나 다른 대접을 받는지 보여주기 위해서였겠지요. 어차피 아테나이로 가는 길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같은 보이오티아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테바이가 복종하는 판에 그 테바이의 응징 요청을 받고도 중뿔나게 헬라스 동맹에 가담하여 테르모퓔라이에 파병까지 하더니 한술 더 떠 철수 결정까지 거부하고 레오니다스와 함께한 테스페이아와, 배 한 척 없고 배를 띄울 바다도 없지만 아테나이의 함선에 올라 아르테미시온에서 크세르크세스에 맞서 싸운 플라타이아를 그냥 두고 지나친다는 것은 복종자에 대한 올바른 대접이 아닐 뿐만 아니라 거역자들에 대한 매서운 응징도 아닐 것이어서 크세르크세스는 그 두 도시를 불로 태워버렸습니다.341 텟살리아가 숙적 포키아를 이어족의 힘을 빌려 굴복시키려 하였다면 보이오티아의 맹주 테바이는 같은 보이오티아 사람들이면서 평소 자기들보다 아테나이를 따르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던 두 도시를 이어족의 힘을 빌려 보복한 것이었습니다. 텟살리아도 테바이도 자기보다 강한 이어족에게 물과 흙을 바친 대가로 이어족을 등에 업고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동족을 복속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크세르크세스도 결코 나쁠 것이 없는 것이 어차피 지나야 하는 침공 길의 불복자들을 응징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인데, 그렇게 텟살리아나 테바이나 그들의 경쟁자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면서 서로 싸우도록 한다면342 어느 쪽도 페르시아를 넘보거나 반란을 일으킬 힘을 기를 수 없어질 것이고 그래서 복속은 충성으로 바뀔 것이니 말입니다. 헬라스 사람들끼리 짓밟고 죽이는 것을 고소해 하며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케 역시 보이는 족족 모두 불태우며 지났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거지들이나 어설렁거리는 텅빈 아테나이로 들어갔고, 어렵지 않게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갔고, 신탁이 이른 대로 아크로폴리스 대문은 걸어 잠근 채 그 앞에 목책을 두르고 신전에 있으면 신의 가호로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소개에 응하지 않았던 몇몇 아테나이 사람들이 안간힘을 쓰며 대드는 걸 간단히 제압한 다음, 파르테논과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워 십수 년 전 한밤중에 사르데이스에 몰래 쳐들어와 도시와 신전을 불태웠던 아테나이의 만행을 되갚았습니다. 아버지 다레이오스는 에우보이아의 빚만 받았지만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나이의 빚도 받았고 파발을 띄워 수사에 아테나이 점령 사실을 만천하에 고하게 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스스로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겠다며 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추고 있는 바보들로부터 물과 흙만 받아 돌아가면 될 일이었습니다.

 

11.58. 아테나이의 소개가 완료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나이에 남은 함선 180척에343 태운 아테나이 해군을344 이끌고 살라미스 만345 안에서 정박 중인 헬라스 함대에 합류했는데 이때는 헬라스 동맹 도시들에서 보낸 함선들도 속속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각 도시의 함선들이 모여 헬라스 함대를 새로 구성하게 되었을 무렵 아테나이 함락 소식이 들어왔고, 모두들 공황 상태에 빠져 일부는 함대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결정도 하기 전에 신속히 살라미스에서 철수하기 위해 그들의 함선으로 달려갔고, 나머지는 모여 밤까지 회의를 연 끝에 함대를 이스트모스로 옮겨 그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습니다.346 그런데 이 결정을 안고 함선으로 돌아온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므네시필로스라는 선장이 찾아와 함대의 결정에 대해 물었고, 이스트모스로에서의 결전이라고 하자 살라미스를 떠나면 누구도 헬라스 함대가 분산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라며347 재고하라고 촉구했고, 에우뤼비아데스를 찾아가 므네시필로스의 말을 자기 말인 양 설득했고, 다시 함대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다시 헬라스 함대의 작전을 놓고 지휘관 에우뤼비아데스가 회의 주재하며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각자의 작전 계획에 대해 개진하라고 했를 때, 그는 이미 아테나이의 함락을 보고 나누어진 헬라스 도시들의 의견을 어떻게 하나로 조율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스파르테가 여섯 척을 더해 열여섯 척의 함선으로 합류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헬라스 함대 378척의348 반이 더 되는 함선을 가지고 명실공히 헬라스 함대의 주축인 아테나이와 생각이 다른 도시들이 있다는 사실을 테미스토클레스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지요. 다시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설득에 나선 테미스토클레스를 비아냥으로 말문을 막고 나선 코린토스의 아데이만토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크세르크세스의 다음 목표는 펠로폰네소스였으므로 헬라스 동맹의 지상군은 이미 이스트모스 지협에 방벽을 쌓아 뭍에서의 싸움에 대비하는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헬라스 함대에서는 어느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맞아 싸울 것인가를 두고 살라미스 섬과 아테케 사이의 좁은 바다를 싸움터로 삼자는 아테나이와 이미 지상전을 펼치기로 한 이스트모스 앞 바다로 옮겨 그곳의 지상군을 도우면서 적의 함대를 막자며 그곳이라면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직 점령되지 않은 안전한 해안으로 갈 수 있지만 살라미스에서는 그렇지 못하지 않냐는 코린토스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트모스가 뚫리면 바로 적군의 공격 목표가 될 펠로포네소스의 입구에 있는 코린토스는 해전의 전술에 신경 쓰기보다는 그냥 육해군 할 것 없이 가용한 헬라스 동맹의 병력이 이스트모스에 총집결하여 이스트모스만 지키면 된다 싶었고, 보레아스의 가호로 적의 함선들이 적잖이 파괴되는 바람에 다행히 어느 정도 함선 수의 열세를 만회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은 수의 함선으로 절대적으로 많은 수의349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큰 바다로 나가서는 절대로 안 되는 아테나이는 살라미스를 떠나서는 적을 이길 가망이 없다고 설득했습니다. 게다가 이스트모스의 절벽 해안은 헬라스 함대냐 페르시아 함대냐를 가리지 않고 바다로부터 지협으로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란 점도 지적했지요. 이스트모스가 자기네 관할지인 코린토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막무가내로 나오는 것은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잃는다는 두려움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고, 그래서 코린토스를 달래는 테미스토클레스는 더욱 차분하고 부드러워야 했습니다.350 아테나이 말고도 헬라스 함대의 살라미스 체류가 절박한 도시들이 또 있었다는 것은 테미스토클레스로서는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함대가 살라미스를 떠나면 그들의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가 아테나이 다음으로 그리고 코린토스보다 먼저 무너질 것이 뻔한, 보이오티아나 아티케로부터 이스트모스로 가는 길목의 첫 번째 도시, 그래서 평소 아테나이보다는 펠로폰네소스 도시들과 더 가까이 지내던 메가라와 결전지가 그들이 사는 곳 앞바다라면 그들 도시와 그들의 안전과 자유가 위태로워질 것이 뻔한 아이기나를 위시한 트로이젠 같은 사르니코스 만을 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 도시들은 대다수의 아테나이 피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도시들이기도 했습니다. 메가라에 이어 아테나이에 대한 반발로 다레이오스에게 물과 흙을 바쳤을 만큼 줄곧 아테나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이기나도351 테미스토클레스에 동조하는 기미를 보이자 표결을 피할 수 없게 된 코린토스의 아데이만토스는 이제 아테나이라는 도시가 없어졌으니 아테나이는 표결에서 빠지라는 말까지 하게 되었고, 코린토스의 막가는 이 말에 테미스클레스도 더 이상의 부드러운 설득을 접었고, 대신 200척의 함선을 가진 아테나이는 헬라스의 그 어느 도시보다 큰 도시이며 그 어느 헬라스의 도시도 아테나이 함대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352 더는 코린토스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에우뤼비아데스에게 헬라스 함대의 이스트모스 결전은 아테나이 함대의 헬라스 함대의 이탈을 말하는 것이라고353 결별 예고를 분명히 했고, 아테나이 함대 없는 헬라스 함대를 상상도 할 수 없는 에우리비아데스와 헬라스 함대의 지휘관들이 헬라스 함대를 이스트모스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살라미스에 남아 페르시아 함대와 일전을 겨루기로 하고 앞의 결정을 뒤집었지만 코린토스를 위시한 코린토스 만을 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앙앙불락을 잠재울 순 없었습니다.

 

11.59. 아테나이를 태우는 검은 연기가 헬라스 사람들에게 안긴 두려움은 아직도 그 실체를 본 적 없는 페르시아 군대의 막강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테나이도 무너지는 판에 우리 도시의 도시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헬라스와 헬라스 사람들 모두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함께 모인 헬라스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모인 사람들의 도시 포키스와 에우보이아가 유린당하고 테스페이아와 플라타이아와 결국 헬라스 최대의 도시 아테나이까지 불태울 수 있는 적의 힘에 압도당해 그들이 왜 함께 모였는지마져 잊은 듯했습니다.354 헬라스 전체가 함께 힘을 모아 이어족의 침공으로부터 헬라스와 헬라스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고, 나아가 이미 종속된 헬라스까지 해방시키자고 하던 사람들이 그 적을 눈 앞에 두고 어디서 어떻게 분쇄하는 것이 좋은지를 결정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며 이탈까지 거론했던 까닭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함께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먼저 지키게 하고 싶었기 때문 아니었겠습니까? 왜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한다고 했는지를 잊고, 동맹의 이름으로 자신만의 이익을 앞세울 때 그 동맹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는 페르시아라는 이어족의 침공을 물리치고 난 다음 그 전쟁의 끝에서야 아테나이 덕분에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테르모퓔라이로 아르테미시온으로 갔을 때 함께했던 동맹의 뜻이 약간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모두 철수하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아테나이가 스파르테를 위시한 펠로폰네소스의 도시들이 전체 헬라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펠로폰네소스를 위해서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에게 섭섭함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오니다스를 잃은 스파르테가 전체 헬라스 동맹군을 소집하여 보이오티아로 나가지 않고 우선 9개의 펠로폰네소스 도시들만으로 부랴부랴 이스트모스에 방벽을 치며 펠로폰네소스를 지키려는 것을 보는 아테나이는 섭했지만, 아직 전쟁을 할 수 없는 기간에 있는 스파르테의 응급조치로 이해할 수도 있었고 아직 지상군을 한 명도 내지 못한 도시로서 무어라 말하기도 그래서 섭섭한 채로 스파르테가 이스트모스에서 담을 쌓는 동안 우선 허겁지겁 아테나이 사람들만 피난시키면서 아테나이가 불타는 것은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섭섭함 때문에 펠로폰네소스와 함께 아테나이를 그리고 헬라스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을 가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유일한 길은 적을 소극적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적을 적극적으로 분쇄하는 것이었습니다.355 이스트모스 같은 좁은 길목에서 적의 진출을 막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적을 살라미스 해협 같은 좁은 바다에 적을 가두어 부셔버리는 것이었으므로 아테나이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테나이가 보기에 적을 살라미스 해협에 가두기 위해서 헬라스 해군이 살라미스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헬라스 해군이 없는데 페르시아 해군이 그들 함선 모두를 이끌고 살라미스의 좁은 바다로 들어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살라미스에 남아서 가두어야 했고 가둔 다음에는 적의 배를 한 척이라도 더 많이 부수어야 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코린토스를 부드럽게 달래야 했습니다. 자기들 도시만 생각하고 사지인 줄도 모르고 이스트모스 앞바다로 가자며 오히려 망한 아테나이를 구하기 위해 살라미스에 남을 수는 없다고까지 말하는 코린토스가 섭섭했지만, 코린토스더러 선뜻 너희는 너희 배를 가지고 이스트모스로 가라 살라미스에는 내가 남아 있겠다라고 말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코린토스라도 주저앉혀야 적의 배를 한 척이라도 더 부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도시가 불타버려 자기보다 더 곤궁에 처한 동맹이 먼저 동맹 전체를 구하는 길이 그들을 구하는 길임을 믿고 동맹 전체를 구하는 길로 나서고자 할 때, 이제 자기가 곤궁에 처할 것이라며 징징거리는 동맹 하나가 그 길을 이미 을 당한 도시가 그들을 구하려 하는 일 정도로 치부하면서 동맹의 이름으로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우선 자기의 도시를 지키는 데 함께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을 참고 달래야 하는 이미 도시를 잃은 동맹의 심정은 도대체 동맹이라는 것이 무언가 하는 회의를 가지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동맹이라 하지만 이미 코린토스의 장군 아데이만토스의 눈에는 아테나이가 코린토스와 함께해야 하는 친구가 아니라 망한 도시의 유맹들에 지나지 않았고, 아테나이의 선장 므네시필로스 눈에는 코린토스가 달래서 쓰면 없는 것보다 낫겠지만 고집을 부리면 없는 것이 더 나을 자기밖에 모르는 응석받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어족의 침공으로 도시를 잃은 아테나이의 선장 므네시필로스가 보는 헬라스 동맹에 대한 이런 시각이 전쟁 후의 헬라스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지 그때는 헬라스 사람 그 누구도, 심지어 이런 와중에 섞여 동맹에 대해 고민하던 아테나이 장군 테미스토클레스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11.6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보레아스와 헬라스 함대에 시달리긴 했지만 에우보이아를 유린하고 함선도 보충받은 페르시아 함대까지 팔레론에 도착하자 퀴트노스 섬에 남겨둔 파로스 부대를356 빼고는 페르시아 군대가 모두 아테나이에 모였습니다.357 크세르크세스는 몸소 팔레론으로 나가 전군의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해전에 나서야 하는지 물었고, 모두가 한결같이 왕의 참전이 지당하다고 조아리는 가운데 홍일점 할리카르낫소스의 참주 아르테미시아가 나서 참전이 아니라 관전을 하라고 했고, 마침 헬라스 함대는 살라미스에 있었고, 살라미스라면 왕이 건너편 아티케 해안의 어느 경치 좋은 언덕 위에 차일을 치고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페르시아 함대의 승전을 구경하기 알맞았으므로 크세르크세스는 그 자리에서 모든 군대의 출동을 명령했고, 페르시아 함대는 당장에 살라미스로 지상군은 그날 밤으로 펠로폰네소스로 진군했습니다. 이스트모스 지협에는 분주히 쌓은 방벽358 뒤로 죽은 레오니다스의 동생 클레옴브로토스의359 지휘 아래 펠레폰네소스 도시들에서 모인 헬라스 동맹군이360 전혀 헬라스 함대에 기대하지 않고 그들이 최후의 보루라 생각하며 똘똘 뭉쳐 크세르크세스의 지상군을 맞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살라미스에 남은 펠로폰네소스 해군들은 그들의 도시와 도시민을 구하기 위해 이스트모스로 가야 한다며 이미 적의 손에 들어간 아테나이를 위해 여기서 싸울거냐고 불만에 가득차 대들고 있었고, 아이기나와 메가라는 아테나이와 함께 살라미스에서 싸워야 한다며 이들을 욱박지르고 있었습니다. 헬라스 함대가 아직도 내분에 휩싸여 있을 때, 팔레론을 떠난 페르시아 함대는 느긋하게 살라미스에 도착해 바로 전투를 벌이기에는 너무 늦은 때라 내일의 전투를 대비해 일찌감치 퀴노수라 반도 동쪽 끝 퀴노수라 갑 근처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아테나이 장군의 밀사라며 시킨노스라는361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페르시아 진영에 와서 헬라스 함대가 친반 페르시아파로 나뉘어 다투다가 이제 도망치려 하고 있으니 페르시아 함대가 헬라스 함대의 도주를 막는다면 내일이면 그들끼리 벌이는 전투를 보게 될 것이라고 전했고,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은 페르시아 함대는 헬라스 함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밤이 새도록 포위작전을 펼쳤습니다.362 그들은 함대를 셋으로 나누어 아이귑토스 함대를 좌익으로 삼아 살라미스 섬 서쪽 끝을 봉쇄하도록 했고 혹시 배반할지도 모르는 이오니아 사람들이 탄 아시아 함선들을 본진으로 삼아 살라미스 섬 동쪽과 프쉿탈레이아 섬 사이를 봉쇄토록 했고 우익을 맡은 포이니케 함대는 무니키아까지 전진시키면서 프쉬탈레이아 섬 사이를 봉쇄하여 헬라스 함대가 결전을 피해 몰래 빠져나가지 못하게 완전히 포위한 다음 본진과 우익 사이에 있는 작은 섬 프쉿탈레이아에는 따로 군대를 상륙시켜 해전 중에 표류해 올 적군은 도륙하고 아군은 구조할 수 있게 조치했습니다. 이 모든 준비가 조용히 이루어지는 동안 헬라스 함대 안에서는 코린토스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한밤중인데도 계속 이스트모스로 가겠다고 반발하고 있었고, 이런 와중에 아이기나로부터 아리스테이데스가 황급히 테미스토클레스를 찾아와 페르시아 함대의 포위 사실을 알렸고,363 테미스토클레스의 권유로 아리스테이데스가 직접 헬라스 함대에 이 사실을 설명했으나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들은 척도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페르시아 함대에 징발되어 참전한 테노스의 삼단노선 하나가 탈출하여364 이 사실을 확인해주자 철수 주장이 진정되었고, 이튿날 아침에서야 전투 준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테나이 함대가 좌익을 맡았고, 우익은 아이기나와 메가라의 함선들이, 그 가운데 에우뤼비아데스와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자리했습니다. 아침을 든든히 먹은 헬라스 함대가 훈시를 듣고 나서 배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치며 살라미스 만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이자365 좌우익과 본진의 대열을 갖추고 포위망을 좁히며 가까이 오던 페르시아 함대가 달려들었고, 겁 먹은 듯 헬라스 함대가 만 안쪽으로 노를 거꾸로 저으며 다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자 등 뒤의 아이갈레오스 산 언덕에서 크세르크세스가 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페르시아 함대가 앞다투어 뒤를 쫓아 들어왔고, 이때 아테나이의 함선 하나가 앞으로 나아가서는 쫓아오는 함선 하나를 들이받자 배들이 뒤엉켜 서로 떨어질 수 없게 되면서 양측이 서로 돕겠다고 나서는 통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렇게 시작된 전투가 겉잡을 수 없이 전 함대로 퍼졌는데, 그럼에도 헬라스 함대는 대열을 갖추고 대적한 반면 페르시아 함대는 대열이 무너지거나 말거나 왕이 지켜본다는 생각만으로 무작정 열심히 싸우다 보니 아테나이 함대가 포이니케 함대를,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이오니아와 아시아 함대를, 그리고 아이기나와 메가라 함대는 아이귑토스 함대와366 대적하던 것이 점점 무너지고 말았고, 급기야 맨 앞에 섰던 페르시아 함선들이 물러나면서 뒤에서 공을 세우려 뒤에서 밀치고 나오는 함선들과 자기들끼리 부딪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해전의 홍일점 아르테미시아가367 아군의 함선인 칼륀다의 왕이 탄 함선을 들이받아 모두가 죽자 관전하던 왕의 눈에 오히려 적의 함선을 파괴한 것처럼 보이면서 크세르크세스가 아르테미시아를 칭찬하여 우리 군대는 남자들이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이런 혼돈의 와중에 생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좁은 해협에 천오백여 척의 배가 뒤엉켜 맹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많은 배들이 파괴되면서 헬라스 사람들은 살라미스 해변으로 포이니케 사람들은 아티케 해변으로 헤엄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헤엄을 못 치는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대로 빠져 죽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간 포이니케 사람들은 배가 파괴되거나 빼앗긴 핑계로 이오니아 사람들의 배신 때문이라고 크세르크세스에게 변명했지만, 마침 왕이 보는 앞에서 사모트라케368 배 하나가 아테나이 배를 들이박아 침몰시키고, 곧이어 근처의 아이기나 배가 이 사모트라케 배를 들이받았는데, 받힌 사모트라케 선원들이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도 창을 던지며 대항해 결국 아이기나 배의 선원들을 제압하고 오히려 그 배를 탈취하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단한 전투 장면을 직접 본 왕이 이오니아 사람들을 모함한 포이니케 사람들의 목을 치라 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는데, 사실 이오니아 사람들은 테미스토클레스가 남긴 호소문에도 불구하고 몇몇을 빼고는 오히려 펠로폰네소스 함선들을 나포하는 바람에 왕의 은인이369 된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열심히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전이 헬라스 함대의 우세로 기울어진 것은 대항하든 도주하든 적의 함선이라면 닥치는 대로 파괴한 아테나이 함대의 활약 때문이었고, 우세해진 전투가 완승으로 끝날 수 잇엇던 것은 지친 아이귑토스 함대를 일찌감치 제압하여370 활동 범위가 넓어진 아이기나가 해협을 지키고 있다가 팔레론으로 도주하는 적들을 무차별 파괴하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기371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해전이 한창일 때 아리스테이데스는 살라미스 만 해안에 배치되어 있던 아테나이의 중무장보병들을 배에 태우고 프쉿탈레이아 섬으로 건너가 어젯밤 섬에 상륙했던 페르시아 군대를 모조리 도륙해버리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372 코린토스가 끝까지 고집을 걲지 않고 격전의 장소를 빠져나와 이스트모스로 갔느냐 일단 전투가 벌어지자 코린토스 역시 누구 못지않게 잘싸웠느냐를 따질 필요도 없이373 결전은 명백히 헬라스 함대의 승리였으며, 승리의 원인은, 물론 도시가 점령당해 불태워진 아테나이와 막아내지 못하면 그들의 도시 역시 같은 꼴을 당할 수밖에 없는 아이기나와 메가라의 분전이 만든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결전지를 살라미스 만 앞의 좁은 바다를 택한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레오니다스의 헬라스 동맹군이 테르모퓔라이와 같은 좁은 길목을 택해 페르시아의 막강한 기병을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페르시아가 압도적인 숫자의 군대를 가지고도 좁은 길에서의 교전에 노출된 소수의 군대만으로밖에 싸울 수 없도록 해, 4,000의 전사자를 내는 동안 20,000의 페르시아군이 죽이면서 테르모퓔라이에서 사흘이나 묶어 둘 수 있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던 때문이었습니다. 헬라스 동맹군이 이스트모스에 방벽을 치고 페르시아 지상군을 기다린 것도 이 같은 이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헬라스 사람들이 이런 작전을 구사하는데도 불구하고, 쌍방의 함선이 880척이라고 해도 서로 움치고 뛸 수 없을 만큼 비좁은 살라미스 만 앞의 해협에서374 페르시아 함대는 아르테미시온에서 맛본 헬라스 함대의 돌진 전술도 기억하지 못했고, 테르모퓔라이에서 그나마  순번을 나누어 공격했던 페르시아 지상군의 대응도 배우지 못했고, 그저 왕에게 보일 전과만 다투는 두 배를 훨씬 넘는 함선 수의375 우세만 믿고 그들의 800척을 그 좁은 바다에 일시에 풀어놓았으니 함대의 대열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고, 대열이 무너지자 저들이 저들을 서로 포위하여 앞으로 나서지 못하게 만든 꼴이 난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선원과 해군 병사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책략에 빠져 헬라스 함대를 포위하느라 밤새도록 진을 뺀 뒤 아침부터 격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해가 뉘였해지고 이제 살라미스 바다에는 적의 배라곤 한 척도 볼 수 없었을 때 비로소 이날의 해전이 끝났는데,376 이때 헬라스 함대는 고작 마흔 척의 함선을 잃은 반면 페르시아 함대는 겨우 반 정도만 팔레론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377

 

11. 61. 전투가 끝나고도 헬라스 함대는 다음 해전에 대비하여378 바다에 떠다니는 함선의 파편을 모아 한 척이라도 더 많이 복원하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도망쳐서 살아남은 페르시아 함선들은 전의를 잃고 팔레론에 모여 망연자실해 있었고, 겉으로는 당장에 살라미스로 쳐들어 가겠다며 바다를 메우고 배를 묶어 둑길을 만들라고 고함치며379 다른 한편으로 또 다른 해전을 준비하는 양 보이고 있었지만, 이미 크세르크세스는 방금 관전했던 전투의 결과가 자신에게 닥친 대재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명예의 손상을 입지 않고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고, 이런 크세르크세스의 속마음을 잘 아는 마르도니오스는 크세르크세스가 헬라스 원정을 강력하게 주장한 자신에게 그 책임을 묻기 전에 남은 헬라스와의 전쟁이 지상군만으로 자신이 나서 치루어야 하는 자신의 전쟁이 되도록 바꾸어 그 결과가 자신이 헬라스의 첫 사트라프가 되는 또 다른 기회가 되든지 아니면 명예로운 생의 마감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수사에서는 아테나이를 불태웠다는 파발이380 도시를 환호로 날뛰게 한 것도 잠시, 사흘이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패전의 소식을 전하는 파발이 그들의 도시를 탄식과 왕의 안위에 대한 염려로 가라앉히고 있었습니다. 마르도니오스는 아테나이를 불태운 크세르크세스가 페르시아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의 해전 패배로 아테나이를 불태운 크세르크세스의 위업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며 이제 왕의 원정 목표였던 아테나이에 대한 응징도 끝났으니 이제 왕은 수사로 돌아가고, 남은 헬라스 도시들을 복속시키는 일을 자기에게 맡겨주면 정병 30만을 골라 자기가 이루겠으며, 그렇게 된다면 그것 역시 왕의 업적이라고 진언했고, 여기저기 의견을 물어 마르도니오스의 진언이 가당하다는 답을 듣자381 크세르크세스는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수사로 돌아가기로 했고, 그러자면 아뷔도스의 선교의 안전이 최우선이라 선교를 지키기 위해 페르시아 함대를 곧바로 헬레스폰토스로 움직이게 했습니다.382 그 다음날 헬라스 함대는 지상군이 머물고 있는 것을 보고 함께 팔레론에 있을 페르시아 함대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가 페르시아 함대의 이동 사실을 알고 안드로스 섬까지 추격에 나섰으나 보이지 않아 그곳에 정박하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는데, 이때는 크세르크세스가 퇴각할 것이며 아뷔도스의 선교를 지키기 위해 페르시아 함대가 지난 밤에 떠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쫓아가서 선교를 부수느냐 마느냐를 두고 헬라스 함대는 또 다시 분란에 휩싸였고, 아테나이의 테미스토클레스는 당장에 선교를 부수어 크세르크세스의 퇴로를 차단하자고 나섰고, 이에 반해 스파르테의 에우뤼비아데스는 선교를 파괴해 크세르크세스를 에우로파의 땅에 남기면 그가 그냥 에우로파에 머물고만 있겠느냐며, 다시 헬라스로 들어올 것이고, 증원군이 올 것이고, 그렇게 장기전이라도 벌어지면 헬라스 전체가 모두 전장이 되고 이 땅의 사람들은 장기전에 시달림을 받을 것이니 왕이 빨리 떠날 수 있도록 선교를 그냥 두자고 나서자, 헬라스 함대는 왕이 곱게 떠나도록 놔주는 것으로 결론을 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나이 단독으로라도 가서 선교를 부수자는 아테나이의 선장들을 달래야 했고,383 크세르크세스는 올 때처럼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갈 것이었습니다.

 

11.6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페르시아 함대가 헬레스폰토스로 가버려 이제 헬라스 바다의 어디에서든 헬라스 함대가 상대해야 할 적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적이 없어진 헬라스 함대가 정말 이상한 짓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스 함대가 그들이 회의하느라 안드로스 섬 해안에 잠시 정박하고 있던 안드로스 섬의 도시 안드로스를 공격하여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안드로스가 헬라스 동맹에 가담하지 않고 자진하여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친384 잘못이 있지만, 헬라스 함대가 이 잘못을 응징하기 위해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해친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짓이었습니다. 게다가 헬라스 동맹의 기치에는 헬라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것 이외에도 복속된 헬라스 사람들의 해방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드로스에 페르시아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면 또 모를까, 어쨌거나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친 덕분에 외부세력 하나 들어오지 않고 그저 그들끼리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을 공격하여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페르시아에 부역했다고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페르시아에게는 물과 흙을 바쳤으면서 헬라스 함대에는 돈 바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나서 전쟁 비용을 지원해달라고 설득하니, 안드로스 사람들은 그들의 섬이 가진 거라고는 가난밖에 없다며 거절했고, 내놓지 않으면 안 되게 섬을 포위 공격하며 강요하니, 그들은 스스로 그들 도시와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지 못하는 무능함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385 결국 헬라스 함대는 안드로스를 점령했고, 안드로스를 기지로 삼은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쳤던 카뤼스토스와 파로스를 위시한 다른 섬들에게 예의 그 노예를 보내 전쟁 비용을 좀 대라고 설득도 하고, 좋은 말 할 때 내지 않으면 함대가 와서 강요할 것이라 위협도 하여 거액을 받았는데, 헬라스 함대에 돈을 내면서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따로 돈을 준 파로스는 페르시아 부역에 대한 응징 없이 무사히 넘어갔지만, 그렇게하지 않았던 카뤼스토스는 돈을 내고도 함대의 공격을 받아 곤욕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것으로 테미스토클레스의 밀사들은 다른 여러 섬들로부터 다른 장군들 몰래 테미스토클레스의 돈을 따로 더 거둘 수 있었지요.386 헬라스의 해방을 위해 싸운다던 헬라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가 물러갔는데도 해방은커녕 오히려 그 부역자들에게 페르시아가 했던 것과 똑같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협하며 돈을 뜯는 일을 벌이다니 세상 천지에 이런 해괴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이전에 이미 이스트모스에 모여 헬라스 동맹을 결성하면서 페르시아에 부역한 헬라스 도시들에게 그들 재산의 1/10을 델포이의 신에게 바치게 한다고 결의한 바 있었다 해도387 헬라스 함대가 그렇게 다급하게 돈을 요구하고 나오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요.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어족에게 물과 흙을 바친 사람들의 입장에선 단지 그들이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할 뿐 아무리 보아도 하는 짓은 이어족인 페르시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어족은 물과 흙을 바치라며 점잖은 척 말이라도 돌려서 했는데, 그들은 왜 이런 이어족의 점잔도 떨지 않고 강도처럼 불문곡직 좋은 말 할 때 돈을 내놓으라고 했을까요? 왜 헬라스 함대는,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친 도시와 섬들에게 돈을 내라고, 좋은 말 할 때 내지 않으면 도시를, 섬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실제로 그 본보기로 안드로스섬을 점령하여 기지로 삼았을까요? 그 대답은 너무나 뻔하지 않습니까? 헬라스 함대는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전장에 나선 군대가 돈이 필요하다는 걸 말해 무엇합니까? 우선 먹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건 지상군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군역시 우선 먹어야 배를 움직이지요. 마실 물을 싣는 것은 돈이 들지 않는다 해도 지상군과는 달리 해군은 결정적으로 돈이 드는 곳이 있습니다. 배를 움직이는 돈입니다. 지상군은 병사가 제 발로 움직이지만 배는 노를 저어야 움직입니다. 돛을 세우기도 하지만 누가 무어라 해도 함선은 노가 움직이고 노는 노꾼들이 저어야 합니다. 그것도 숙달된 힘과 기술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온갖 경험으로 숙련된 노꾼들이 배의 성능을 좌우하지요. 숙달된 힘과 기술이 전투를 좌우하기는 지상군이나 해군의 중무장보병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들은 모두 자기 돈으로 무장하여 전장에 나서는 반면, 배를 젓는 노꾼들은 전사가 아니라 노삯을 받아야 노를 젓는 일꾼으로 배에 탑니다. 본디 노꾼들은 물건을 실어나르는 배가 생업의 터이나 전쟁 때문에 그 배가 전함으로 바뀌자388 그들도 전장에 나서지만, 노꾼들 대부분이 테테스인389 그들은 전쟁에 전사로 나서야 하는 의무도 영광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테나이 시민인 그들이 어찌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일을 자신의 생업보다 더 가벼이 하겠습니까? 적의 배와 부딪치는 순간 다치거나 죽는 사람은 갑판의 승무원이나 궁수나 중무장보병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지요. 갑판의 승무원이나 중무장보병은 모두 지킬 재산이 있어 전쟁을 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의 일을 맡아보는 권리와 영광도 누릴 수 있었지요. 그래서 노꾼들에게 노삯을 주는 것은 선장들의 의무였고, 그 돈은 교역을 해서 돈을 벌었을 때 그랬듯이 전쟁 중에도 선장의 호주머니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아테나이가 돈이 없었거든요. 피난민이 된 노꾼들의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390 그 배를 다치지 않게 잘 모는 것을 의미했지요. 전쟁이 한두 달 안에 끝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선장들의 고민은 전쟁이 길어지면 마냥 노삯을 마냥 자기 돈으로 내면서 버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391 아테나이 선장들이 테미스토클레스가 함대의 지휘권을 스파르테에게 넘겨주는 것을 반대한 것도, 헬라스 함대가 아르테미시온에 남기로 하고 에우보이아로부터 받은 돈을 넘겨주는 것을 반대한 것도, 피난 길의 파르테논 신관들이 신상에 입혔던 금을 떼내어 몰래 가지고 가는 것을 빼앗아 전비로 쓰도록 했던 것도,392 살라미스에서의 결전이 아니라면 헬라스 함대와 결별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당장에 아뷔도스로 가면서 페르시아 함대를 결딴내고 선교를 파괴하자고 했던 것도, 그들의 함선이 바로 아테나이였고, 아테나이 함대가 바로 아테나이였으므로393 그 함대가 떠 있는 바다 역시 반드시 아테나이여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싸움에 이기기 위해 어디가 좋으냐는 당연하지만, 어느 바다가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의 바다냐는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함대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 바로 아테나이것이 아테나이가 산다는 것은 함대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고, 함대를 움직이는 것은 함대 안의 아테나이 시민, 바로 노꾼들이었으므로 아테나이가 살기 위해서는 바로 노꾼들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함대인 아테나이 역시 함선에 탄 사람들 모두가394 함선과 함대의 주인이어야 했고, 그런 면에서 배에 탄 노꾼들은 분명히 그 배의 주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을 지키는 싸움에 질래야 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테나이의 주인이었으므로 그들 도시와 그들 자신의 안전과 자유를 함부로 남에게 넘긴다거나 맡긴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당장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은 그들과 그들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전쟁 탓에, 아티케를 두고 바다로 나온 탓에, 평화롭게 돈을 얻는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전쟁은 은을 캘 수도 올리브 기름을 짤 수도 포도주를 담글 수도 항아리를 구울 수도 없도록 했고, 그것들을 내다 팔 길도 없었습니다. 전쟁은 언제 어디에서나 돈을 필요로 했지만, 그 전쟁은 언제 어디에서든 돈을 만들 수 없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쟁이 없었을 때 돈이 되던 것들을 무참히 부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을 통하지 않고는 돈을 만들 수 없었고, 돈이 없어서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고, 전쟁을 계속하지 않고는 이길 수 없었으므로 아테나이는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친 헬라스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정을 말하고 이해를 구하며 돈을 좀 달라고 설득했습니다. 다행히 돈을 좀 주면 좋았지만, 같은 신을 믿지도 않고 같은 말을 쓰지도 않는 페르시아에게는 선뜻 물과 흙을 바쳤던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능해서 줄 돈이 없다고 버티면 정말 없어서 그런지 쳐들어가 뒤져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득이 통하지 않으면 강요했지요. 이어족에게 복속되지 않기 위해,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나아가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와 헬라스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아테나이는 이어족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고, 이길 때까지 전쟁을 멈출 수 없었으므로, 설득이 안 되면 강요를 해서라도 적에게 물과 흙을 바친 헬라스 사람들에게 전쟁 비용을 부담시킬 수밖에 없다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그런 방법으로 제국을 이룬 페르시아의 짓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니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짓이므로 페르시아보다 더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아테나이가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헬라스의 다른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훼손시키기 시작했지만, 앞으로 이것에 재미가 붙어가면서 아테나이는,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가 아니라, 안드로스 사람들이 지적했던 대로,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그들로부터 그 비용을 걷어 아테나이 제국을 건설하고 그 돈으로 아테나이의 번영을 구가할 것이었습니다.

 

11.6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헬라스 함대가 안드로스 섬에 며칠 정박하며 전쟁 비용을 모은 뒤,395 살라미스로 돌아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획득한 전리품들을 고루 나누고, 이스트모스로 옮겨 전공 포상까지 마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포상에서 아테나이의 공적을 질시한 동맹들의 이상한 투표로 살라미스에서 세운 아테나이의 전공을 제대로 상찬하지 않아 아테나이를 또 다시 섭섭하게 만들고 있을 때, 그래서 섭섭해진 아테나이를 달래기 위해 에우뤼비아데스가 테미스토클레스를 데리고 스파르테로 돌아가 그를 최고로 환대하고396 있을 때, 마르도니오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안전을 위해 새로운 진을 이번 헬라스 원정에서 가장 유용했던 충실한 헬라스 종복 텟살리아에 치기로 하고 일단 아테나이에서의 퇴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깊어진 이역의 가을이 겨울을 재촉하고 있었고, 불태워진 아테나이나 아티케는 대군이 겨울을 보내기엔 너무나 황량한 적지敵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나이에 머문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397 전체 지상군을 이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 텟살리아로 갔고, 거기서 레오니다스의 목숨 값을 내놓으라며 찾아온 스파르테 사신의 요구에 실소하며, 마르도니오스에게 기병을 위주로 불사부대까지 포함한 30만의 최정예부대를 남겨주어 헬라스 원정의 뒷처리를 맡긴 뒤, 테미스토클레스가 일부러 사람을 보내 아뷔도스의 배다리가 안전할 것이라고 다짐도 해주었겠다 그렇다면 한겨울이 오기 전에 사르데이스에 도착할 것이므로 불사부대 대장 휘다르네스가 따로 편성한 근위부대 6만의 호위를 받으며398 특별히 올 때보다 더 서두르지도 않고 느긋하게399 헬레스폰토스로 향해 떠났습니다. 마르도니오스에게 뽑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왕을 호위하는 일을 맡지도 못한 병들고 다친 허약한 병사들 역시 왕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섰지만, 느긋한 왕과는 달리 그들에게 그 길은 죽음에의 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감히 누가 페르시아 왕의 대군 앞에 맞선다 해도 결국은 패하여  가진 것을 내놓고 엎드릴 수밖에 없을 때 전리품이나 챙겨 돌아오는 길의 여비로 쓸 수 있을 것이라는 불을 보듯 확실한 기대를 가지고 그들은 고향과 고향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머나먼 원정 길에 따라나섰지만, 병들고 다쳐 쓸모가 없어지자 그들은 왕으로부터는 말할 것고 없고 지나가는 길의 왕에게 복속된 사람들로부터도 그 어떤 도움이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왕은 그들 병사를 잘 먹이고 잘 재워 건강한 몸으로 고향에 돌려보내 고향에 가서 적은 숫자로 왕에게 맞서 싸운 사람들 이야기로 꽃을 피우게 할 수는 없었고, 지나는 길의 사람들도 제 앞가림하느라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고향이 가까운 사람들부터 슬그머니 대열에서 이탈하여 하나둘씩 제 갈 길을 찾아 떠아기 시작해도 왕은 그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레스폰토스를 건너야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병사들은 길에서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왕의 대열을 벗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결국 극히 일부분의 병사들이 왕을 따라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아뷔도스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그들과 함께 따라온 죽음을 뿌리치지 못하고 이번에는 텟살리아를 떠나 처음 받아보는 아뷔도스 사람들의 대접을 허겁지겁 받아 먹다 죽어갔습니다.400 일찌기 고향과 고향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페르시아에 대항해 싸우다 죽었더라면 고향에 명예롭게 묻힐 수 있었을 텐데 페르시아에 복속한 대가로 자유를 바치고 얻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왕의 원정에 나섰다가 거리에서 병들어 죽어가야 했습니다. 왕을 호위하고 왔던 6만의 근위부대는 크세스크세스가 무사히 아뷔도스로 건너는 것을 본 뒤401 아르타바조스의 지휘 아래 마르도니오스에 합류하기 위해 되돌아갔고, 아뷔도스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노독이 풀리는 대로 대열을 정비하여 사르데이스로 돌아가 겨울을 보내고 새봄에 보내올 마르도니오스의 승전보를 거기서 들을 것이었습니다.

 

11.64. 크세르크세스가 아뷔도스를 떠나자 페르시아 함대도 겨울을 나기 위해 헬레스폰토스에서 나와 퀴메로 내려가면서 바다에서의 전투는 새봄이 올 때까지 소강을 이룰 것이었지만, 놀랍게도 크세르크세스가 지나간 땅에서는 새봄은커녕 아직 겨울이 오기도 전인데도 페르시아에 대한 반기를 싹틔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맨처음 팔레네 반도의 포테이다이아가 반기를 들고 나서자 인근의 올뤼토스도, 스키오네도 따라나섰고, 왕을 배웅하고 텟살리아로 돌아가던 아르타바조스가 이들 진압에 나섰는데, 먼저 올뤼토스를 결딴낸 다음 여전히 페르시아에 충실한 칼키디케 사람들에게 도시를 넘겨주어 정리했고, 스키오네는 내부에서 여전히 페르시아와 내통하는 자가 있어 포테이다이아를 끝장낸 뒤 처리하기로 하면서 포테이다니아에 대한 공격에 주력했으나, 당장에 끝낼 것 같았던 공격이 석 달이나 계속되었지만 곧 새봄이 오는데도 함락시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조급해진 아르타바조스가 큰사리 썰물 때 군대를 물이 빠진 바다를 통해 이동시키다 밀물이 닥쳐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자, 그것으로 포테이다이아 진압을 포기하고 텟살리아로 돌아가면서 지상의 팔레네 반도 역시 봄이 올 때까지 소강을 이룰 것이었습니다.

 

11.6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해 봄 헬레스폰토스를 건너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을 보고 제우스가 헬라스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해 크세르크세스의 가면을 쓰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라며 놀라 신을 원망했던 세스토스의 한 촌부처럼, 크세르크세스가 헬라스로 진군하는 길목의 모든 도시와 도시민은 모두가, 정말 막으려 해도 막을 능력이 없어 보이는 올뤼토스나 포테이다이아 같은 작은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막을 의지만 있다면 뭉쳐서 싸울 수 있어 보이는 마케도니아와 텟살리아와 보이오티아의 큰 도시들조차도 그들이 사는 곳이 쑥대밭으로 되는 것이 두려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재물이고 사람이고 페르시아가 내라면 내라는 대로 다 내면서 어떻게 하든 그들과 그들 도시의 안전만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와 도시민의 자유를 지키지 못하고 노예가 되어 누리는 안전이 무슨 소용이냐며 자유에 대한 의지만으로 페르시아의 대군과 맞서 싸우는 도시들도 있었는데, 헬라스에서 가장 큰 두 도시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야 의당 그러려니 해도, 마을들을 불태우며 쫓는 교활한 길잡이 텟살리아 군대와 잔학한 페르시아 군대를 피해 산으로 도망다니며 델포이를 지켜낸 가진 것이라고는 아폴론의 신전밖에 없는 포키스가, 돌아가 고향을 지키라는데도 테르모퓔라이에 남아 레오니다스와 함께 죽은 700명 전사들의 작은 도시 보이오티아의 테스페이아가, 십 년 전 다레이오스의 침공 때 온 헬라스가 외면하는 마라톤에 전사 800명을 보내 아테나이와 함께 다티스의 메디아 군대를 물리치더니 이번에는 배라고는 타 본 적이 없는 전사 1,200명을 아테나이 함선에 태워 아르테미시온에서 싸우게 했던 또 다른 보이오티아의 작은 도시 플라타이아가, 십 년 전 다레이오스에게 물과 흙을 바친 일로 스파르테로부터 도시의 안전을 위협받았던 전력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지 이번에는 30척의 함선을 이끌고 헬라스 함대에 합류하여 아르테미시온에서부터 살라미스에 이르기까지 아테나이의 선전을 무색케 했을 정도로 분전한 아이기나가, 그리고 지금 일일이 그 이름을 다 댈 수 없는 서른에 가까운402 헬라스의 크고 작은 도시들과 그 도시민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스토스의 촌부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크세르크세스는 포키아와 테스페이아와 플라타이아와 아티케와 아테나이의 텅 빈 집들을 불로 태우고 유린하여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도시를 잃고 물 위에 나앉았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앞에 살라미스 해전을 앞둔 테미스토클레스가 밝혔던 대로, 단지 자유를 바치고 얻은 목숨을 부지하며 노예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그들 도시의 영혼만은 결코 유린할 수 없다는 것을 이들은 살라미스의 승리를 통해 만천하에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룬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가 크세르크세스를 헬라스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헬라스에 남겨진 30만명의 정예 부대로 틀림없이 헬라스를 정벌할 것으로 믿어지는 마르도니오스 곁에 그들의 군대를 보내 페르시아에 바친 물과 흙의 대가를 결국 마르도니오스에게 패망할 헬라스 도시들에게서 찾을 기회를 엿보는 마케도니아와 텟살리아와 보이오티아의 아주 큰 도시들이 있는가 하면,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전해 듣고 또 눈 앞에서 크세르크세스의 퇴각 행렬을 보고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이 그들의 자유를 포기하여 노예가 된 대가로 얻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얻어지는 자유에의 의지가 없이는, 다시 말해 도시의 안전은 자유를 갈망하는 도시의 영혼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전을 위한답시고 물과 흙과 함께 바쳤던 자유, 곧 스스로 버렸던 그들 도시의 영혼을 찾아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펠레네 반도의 작은 도시들, 포테이다이아이와 올뤼토스와 스키오네 같은 도시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해 겨울의 짧은 소강이, 마르도니오스에게는 헬라스 여러 곳에 사람을 보내 신탁을 모으고 신탁이 말하는 대로 아테나이를 마케도니아나 텟살리아나 보이오티아 같이 페르시아에 아주 유용한 종복으로 만들어 새봄의 전쟁을 대비하려던 시간이었고,403 헬라스의 어떤 도시들에게는 괜히 나섰다가 도시만 결딴나고 다시 종속의 늪에 빠진 펠레네의 올뤼토스처럼 덤볐다가 혼날 것에 대한 두려움의 시간이었는가 하면, 도시의 영혼을 되찾고 싶지만 도시의 역량 부족 때문에 장군 티목세이노스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도시를 페르시아에 팔아넘기려 하는 것을 알고도 그 시민들이 어쩌지 못했던 스키오네처럼 반기와 종속 사이를 오가는 내분의 시간이었는가 하면, 석 달에 걸친 페르시아의 집요한 포위 공격을 꿋꿋이 견뎌내어 스스로 안전과 자유를 지켰던 포테이다이아이처럼 그들도 똘똘 뭉쳐 스스로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싹트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11.66. 이런저런 궁리 속에 새봄이 오자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퀴메에서 겨울을 난 페르시아 함대였습니다. 겨우내 페르시아는 함대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엄청난 변화를 모색하였고, 봄이 되자 그 변화의 지향점이 엿보이는 새로운 페르시아 함대의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퀴메에서 나와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으로 향하는 페르시아 함대의 일부인 300척의 함선은 포이니케 함대가 아니라 이오니아 함대가 주축이었다는 것이 그 첫 번째 변화였으며, 그 함선들에 오른 페르시아와 메디아 사람들은 더 이상 그 함선들의 운행 감독관이 아니라 직접 해전을 수행할 해군 지휘관이자 해군 전사들이었고 또한 직접 배를 움직일 선장이자 선원들이었다는 것이404 두 번째 변화였습니다. 페르시아가 라데 해전의 승자로 십 년 넘게 페르시아 함대의 주축이었던 포이니케 함대에게 헬레스폰토스 수비를 맡겨두고, 지난 겨울 펠레네 반도의 작은 도시들이 일으킨 반역의 물결이 키오스 섬까지 번진405 이오니아를 감시하기 위해 이오니아 함대를 이끌고 사모스로 왔다는 사실이 페르시아가 이오니아 함대의 살라미스 분전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함대에 승선한 자신들의 함선 장악력을 굳게 믿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페르시아 함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함대가 아직 실전을 감행할 정도로 훈련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서쪽 아이가이온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모스에서 얼마 있지 않아 들려올 마르도니오스의 승전 소식만 기다리며 이오니아 지역의 반란을 막는 데만 온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었습니다. 한편 헬라스 함대 역시 봄이 오자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110척의 함선밖에 아이기나에 집결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스트모스 밖으로 나오지 않는 스파르테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한 아테나이의 소극적인 헬라스 함대 지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함대의 지휘부도 바뀌어 살라미스의 주전 에우리비아데스와 테미스토클레스 대신 헬라스 동맹의 육해군 총지휘관인 스파르테 레오튀키다스 왕과 아테나이의 크산팁포스가 함대를 이끌었는데, 마침 함대에는 반란을 획책했다 발각되어 도망쳐온 키오스 사람 여섯이 키오스의 해방을 청원하며 이오니아로 가자며 승선하고 있었습니다. 청원을 듣고 말고는 추후 판단키로 하고 헬라스 함대는 일단 델로스 섬까지 갔으나 페르시아 함대와 조우할 것이 두려워 더 이상 동쪽 아이가이온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델로스에서 헬라스 동맹군의 지상전 결과를 지켜보기로 했고, 이로서 델로스 섬과 사모스 섬 사이 아이가이온 바다는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 사이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406 있게 되면서 뜻밖의 소강이 이루어졌고, 양쪽 함대는 그저 육지에서 들려올 격돌의 결과에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습니다.

 

11.67. 에우로포스 사람 뮈스를 시켜 겨우내 수집한 신탁이 이르는 대로407 아테나이와 강화조약을 맺고 아테나이 함대 힘으로 제해권을 장악해 전체 헬라스를 정복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마르도니오스는 봄이 완연해지고 나서야 아테나이와의 강화조약을 주선할 사절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를 아테나이로 보냈고, 이 사실을 안 스파르테도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와 강화조약을 맺지 않도록 설득하기 위해 사절을 아테나이로 보내오자, 아테나이에 모인 이들은 서로의 입장을 주고받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와 강화조약을 맺는다면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에 저지른 모든 과오를 용서하여 도시를 돌려주고 그 위에 원하는 땅을 덧붙여주며 아테나이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페르시아 왕의 조건을 제시했고,408 스파르테는 처음 이 전쟁이 아테나이로 인해 아테나이만을 목표로 일어났으나 헬라스로 번졌고 스파르테도 윈치 않은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으니 이제 와서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와 강화조약을 맺어 다른 헬라스 도시들을 페르시아의 노예로 만드는 일에 가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지적하였고, 이에 아테나이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태양이 지금의 괘도로 돌아가는 한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와 강화조약을 맺는 일은 없을 것이니 더 이상 주선에 나서지 말라고 단호하게 짜르면서 스파르테에 대해서는 페르시아는 아테나이의 복수의 대상이지 강화의 대상이 아니니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 사람들을 배신하는 일은 없다고 단언하면서, 강화조약의 결렬로 페르시아가 곧바로 아테나이를 침입할 것이므로 그들이 앗티케로 오기 전에 헬라스 동맹이 보이오티아로 나가 맞서는 것이 좋으니 스파르테도 바로 출병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와 스파르테가 돌아가고 이제는 누가 보아도 페르시아와 헬라스 동맹 사이에 건곤일척의 일전만 남았을 때, 마르도니오스는 다시 아테나이를 점령하기 위해 텟살리아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길을 터주는 라리사를409 지나 보이오티아로 들어왔고, 스파르테는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의 아테나이 침입을 예상하며 간곡한 출병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와 일전을 겨룰 움직임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이스트모스 방벽 위에 성가퀴까지 쌓아 올리며 방벽공사의 마무리에 열중했고, 마르도니오스는 아테나이로 갈 것 없이 여기 보이오티아에서 일전을 겨루어야 한다는 테바이의 조언도 무시하고 페르시아 군대는 물론 헬라스의 마케도이아 텟살리아 보이오티아는 물론 오는 길의 작은 지역에서도 징집한 헬라스 군대까지 이끌고410 아테나이로 가서 두 번째로 텅빈 아테나이를 점령했습니다.411 마르도니오스로서는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을 이스트모스의 방벽 뒤로 계속 가두어 두면서, 두 번째로 살라미스로 피난하여 겪는 고통 때문에 아테나이가 쉽게 타협하여 강화조약 체결토록 압력을 가할 심산이었겠지요. 그래서 마르도니오스는 헬레스폰토스 사람 무뤼키데스를 살라미스로 보내 알렉산드로스가 전했던 강화 조건을 다시 전하게 했고,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아테나이 사람 뤼키데스가 그의 제안을 민회에 넘기자고 하자 아테나이 사람들이 무뤼키데스가 보는 앞에서 그를 돌로 쳐죽이고 뤼키데스의 망발 소식을 들은 여자들은 그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돌로 쳐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월 초여름의 휘아킨토스 축제 때라 온 도시가 신에게 봉사하느라 바쁜 스파르테로 아테나이와 플라타이아와 메가라의 사절단이 갔고, 그들은 스파르테의 에포로스들에게 다시금 스파르테의 이스트모스 바깥 보이오티아로의 출병을 간청했지만 왠일인지 스파르테는 열흘이나 가부 간의 대답을 미루기만 했는데, 기실 스파르테는 스파르테 대로 최후에라도 그들의 도시를 지킬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그들이 가진 전체 병역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몰래 이스트모스 너머 보이오티아로 출격시키고 있었습니다. 괜히 사르데이스를 불질러 페르시아를 헬라스로 불러들인 아테나이에게 먹일 골탕을 다 먹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은 아테나이 함대 앞에서 펠레폰네소스 반도는 열려 있을 것이고 이스트모스의 방벽은 무용지물이라는 테게아 사람 킬레오스의 조언 때문인지,412 아니면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에 붙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심어주자 스파르테가 아테나이를 안중에도 없이 고작 이스트모스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분노에 찬 아테나이의 최후통첩성 항의 때문인지, 아니면 페르시아에 붙어 마르도니오스에게 스파르테가 이스트모스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선 아르고스를 속이려 한 때문인지, 스파르테는 동등인 1명당 7명의 헤일로타이들이 붙은 동등인 전사 5,000명을 파우사니아스에게413 주어 아테나이가 일전을 벌이고 싶어 하는 보이오티아의 트리야 평원을 향해 진격시켰고, 마지막으로 항의하고 돌아가려는 사절단들에게 그때서야 출병 사실을 전하며 동등인들의 뒤를 이어 출병하는 5,000명의 페리오이코이 출신 부대와 동행하도록 조치해주었습니다.414 스파르테 군대가 이스트모스로 진출하는지 그 기미도 몰랐던 아르고스의 화급한 연락을 받은 마르도니오스는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던 아테나이와의 강화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에 화가나 점령만 했지 장차 동맹이 될지도 몰라 유린하지 않고 있던 앗티케와 아테나이에 대해 성벽이건 집이건 신전이건 똑바로 서 있는 것을 모조리 부수고 허물고 불태운 뒤, 파우사니아스의 군대가 이스트모스 바깥으로 나오기 전에 기병전에 불리하고 협소한 통행로 뿐인 적의 땅 앗티케를 벗어나 충실한 종속자의 땅 테바이로 철수하기로 했는데, 그 와중에 메가라에 스파르테의 선발대 1,000명이 왔다는 소식이 들리자 발길을 돌려 기병으로 메가라를 한번 쓸고 난 다음,415 보이오티아로 돌아가 스콜로스 들판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방책을 만들고 에뤼트라이에서 휘시아이를 거쳐 플라타이아 부근까지의 아소포스 강변에 진을 쳤습니다. 아소포스 강가의 페르시아 진영에 마지막으로 끌려온 헬라스 부대는 1,000명의 포키스 군대였는데, 그들은 들판에 따로 진을 쳐서 페르시아 기병의 용맹성 시험 공격을 받은 뒤에서야 페르시아 군으로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군대가 미덥지 못한 포키스의 중무장보병 1,000명까지 받아들이며 군세를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동안,416 스파르테의 마지막 부대가 이스트모스에 도착했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시들과 아카르나니아 그리고 아이톨리아에서 온 군대도 합류하여 보이오티아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헬라스 동맹군은 메가라를 지나며 메가라 군대와 동행했고, 엘레우시스로 나아가서 살라미스에서 건너온 아테나이 군대와도 동행하여 보이오티아의 에뤼트리아에 도착했고, 거기서 페르시아 군대가 아소포스 강 건너 북쪽에 진을 치고 있다는 걸 알고 헬라스 동맹군은 강 남쪽 키타이론 산 아래의 완만한 기슭에 진을 쳤습니다.417

 

11.68. 아소포스 강을 두고 포진한 양측의 첫 격돌은 페르시아 기병의 출격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헬라스군이 산기슭 진지만 지키면서 평지로 내려와 대적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르시아 기병이 부대를 나누어 헬라스군 진지를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기병이 움직이기 좋은 곳에 진을 차렸던 메가라가 심하게 타격을 입고 교체를 요구하자 아테나이가 자원해서 300명의 정예부대와 궁수들을 올륌피오도로스에게 주어 그곳을 막게 했고,418 격전 끝에 페르시아 기병 대장 마시스티오스의 말이 화살을 맞아 쓰러지자 아테나이 전사들이 말에서 떨어진 그의 눈을 찔러 죽였고, 한참이 지나 대장의 죽음을 깨달은 페르시아 전 기병이 그의 주검을 거두기 위해 공격해오자 헬라스군에서도 지원군이 몰려와 기병을 격퇴했고, 대장을 잃은 페르시아 기병이 별수없이 본진으로 돌아가자 첫날의 전투는 헬라스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마시스티오스를 잃은 마르도니오스와 페르시아 군대가 호곡으로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고, 헬라스군은 페르시아 기병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격퇴했다는 자신감에 마시스티오스의 주검을 수레에 싣고 진지를 지나다니며 구경시키고 있었고, 그러는 가운데 헬라스군은 그 첫 번째의 전투를 통해 에뤼트라이에 세운 그들이 진지가 튼튼하지도 못하고 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진지를 솟는 샘물이 있는 플라타이아의 가르가피아 샘 근처로 옮겨가기로 결정했고, 키타이론 산기슭을 따라  휘시아이 옆을 지나 가르가피아 샘이 있고 야트막한 언덕들과 들판으로 이루어진 안드로크라테스 성역 부근에 새로운 진지를 세웠습니다. 서로 좌익을 맡는다며 테게아와 아테나이가 다투었지만 우익의 스파르테가 아테나이를 지목하여 헬라스군의 전체 전열이 갖추어졌고,419 이제 헬라스군도 아소포스 강을 마주보고 적을 맞이할 것이었습니다. 마시스티오스에 대한 애도를 끝낸 마르도니오스는 헬라스군이 포진한 플라타이아로 와서 헬라스군에 맞설 전열을 새롭게 짰는데, 테바이의 조언대로 페르시아 군대가 좌익에 서서 스파르테를 맡고 우익에는 테바이와 나머지 복속된 헬라스 지역에서 차출된 군대가 아테나이를 맡도록 배치했습니다. 아소포스 강을 두고 대치한 두 진영은 서로 상대가 공격해오기를 기다리며 이레를 보냈는데, 여드레가 되던 날 헬라스 진영에 계속 유입되는 지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테바이의 권유대로 페르시아 기병이 밤중에 키타이론 산의 고갯길들을 점령하여 펠레폰네소스에서 오는 군량 보급을 차단하고 인마를 도륙하는 성과를 올리는 등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페르시아 기병들만 움직이며 헬라스 진영을 괴롭혔을 뿐 서로 진지만 지키면서 열흘을 보냈고, 열하루쨋날 마침내 마르도니오스가 헬라스 진영에는 계속 병력이 유입되고 있는데420 대치만 하고 있을 거냐며 아르타바조스에게 물었고, 아르타바조스는 테바이의 동조를 받으며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테바이 성 안에서 느긋하게 돈으로 헬라스 도시들의 유지들을 설득하면 될 일이라며 빨리 테바이로 철수하자고 했고, 다른 지휘관들은 마르도니오스가 왕의 대리자여서 그를 지지했고, 마르도니오스는 모든 지휘관들에게 그 이튿날, 플라타이아 대치 열이틀쨋날, 새벽에 전투를 개시하겠다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 지시했습니다. 그날 밤 아테나이 진영을 찾아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군의 이튿날 새벽 공격을 알렸고,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 상의했고,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와 교전 상대를 서로 맞바꾸기를 제의했고, 이튿날 아침 헬라스군의 전열 이동을 눈치 챈 테바이 때문에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고, 마르도니오스가 비아냥을 섞어 페르시아군과 스파르테군이 대표로 싸워 전군의 승패를 가리자고 제안했고, 스파르테가 말이 없자 의기양양해서 기병을 출동시켜 이번에는 가르가피아 샘을 훼손시켰는데 군량까지 바닥이 난 동맹군들이 모여 그날 페르시아군의 전면적인 공격이 없다면 한밤에 다시 진지를 아소포스 강의 강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하루 종일 계속된 페르시아 기병의 공격을 견뎌냈습니다. 밤에 중앙의 본진부터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들은 아소포스강의 강섬이 아니라 플라타이아 시가지로 들기 전에 있는 헤라 신전 옆에 진을 쳤고, 본진의 움직임을 보고 따르던 우익의 스파르테 안에서 진지 이동 결정을 모르고 있었던 아몸파레토스가 적 앞에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버티는 소동이 벌어졌고, 그를 설득하느라 남아 있게 된 파우사니아스 앞에 아테나이의 기마 전령이 나타나 아테나이는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고 묻자 스파르테 내부의 이견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니 아테나이군도 스파르테군이 어떤 결정을 내든 같이 움직일 것을 요청했고, 밤새 결론을 내지 못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결국 파우사니아스가 아몸파레토스를 두고 약속된 장소로 가기 위해 적의 기병대를 피해 언덕 길로 나섰고, 아테나이는 뒤쳐지지 않기 위해 평지로 나섰습니다. 파우사니아스는 남겨진 부대가 공격을 받으면 돌아와 도우려고 걸음을 늦추고 있었는데, 정말 혼자 남겨지자 아몸파레토스가 부대를 이끌고 뒤따랐고, 이들이 데메테르 신전 근처의 아르기오피온에서 합류했을 때 페르시아의 기병들이 들이닥쳤고, 파우사니아스의 지원 요청을 받고 움직이려는 아테나이군 앞에 페르시아에 붙은 헬라스 지역의 군대가 가로막고 나서는 바람에 스파르테군도 아테나이군도 모두 따로 떨어져 고립된 채 일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파우사니아스는 기병들의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나아가지 않고 페르시아 보병들의 접근을 기다렸는데, 접전이 되면 적의 기병을 물론 궁수들도 힘을 쓰지 못하게 되고 적의 보병은 거의 모두가 경무장이어서 중무장인 헬라스 동맹군은 일당백이 되고 중무장보병을 돕기 위해 나온 경무장의 헤일로타이까지 모두 우수한 전력으로 바뀌기 때문이었습니다.421 드디어 백마를 탄 마르도니오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보병의 접근이 눈에 보이자 더는 참고 기다리지 못한 테게아군이 제일 먼저 적을 향해 뛰쳐나갔고, 파우사니아스의 지시만 기다리던 스파르테군도 마침내 진격에 나섰고, 적들도 활을 놓고 잔가지로 만든 방패로 울을 만들어 맞서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허약한 페르시아 보병들의 방패 울이 무너지자 백병전이 벌어졌고, 백병전이 벌어지자 스파르테 중무장보병의 진가가 드러나서 전투의 주도권이 스파르테군으로 넘어왔고, 백마에 올라 천 명의 정예를 이끌고 스파르테군을 휩쓸던 마르도니오스가 스파르테의 저명한 전사 아림네토스에게 죽임을 당할 무렵에는 그가 이끌던 천 명의 페르시아 정예도 괘멸되었고, 그들이 괘멸당하자 나머지는 모두 등을 돌려 달아났고, 그렇게 파우사니아스와 스파르테군은 레오니다스의 목숨 값을 돌려받았을 뿐만 아니라422 가장 영광스런 승리를 거두면서 플라타이아 전투를 끝냈습니다.

 

11.69. 크세르크세스가 마르도니오스를 헬라스에 남겨둔 것부터가 못마땅했던 아르타바조스는 마르도니오스가 아소포스 강가에 진을 치는 것도 거기서 결전을 벌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테바이 성 안에 주둔하며 돈으로 헬라스 도시들의 지도자들을 매수하여 복속시키자고 주장했었지만 마르도니오스가 헬라스군과의 결전을 결정하자 할 수 없이 자기 휘하의 4만 군사를 데리고 페르시아군 전열 속에서 그저 전투 대형만 유지한 채 마르도니오스가 분주하게 기병을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르도니오스가 보병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는 것을 보고는 휘하의 부대에게 자기의 지시에만 따라 움직이도록 단속하며 전투에 나서는 것처럼 움직였고,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423 패주하는 페르시아 병사가 보이자, 그들을 되몰고 마르도니오스에게로 나가 그를 지원해야 마땅함에도, 아니 마르도니오스의 죽음을 확인하고 대신 지휘권을 행사하여 최소한 마르도니오스의 주검이라도 찾고424 돌아서야 마땅함에도, 임시 방어용으로 나무를 베어 만든 목책으로 간 것도 아니고 테바이 성으로 가서 훗날을 도모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루라도 빨리 헬레스폰토스를 건너기 위해 포키스 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달아났습니다. 이렇게 마르도니오스와 아르타바조스의 페르시아군이 혹은 괘멸당하고 혹은 도망치는 것을 본 나머지 지역에서 온 페르시아 군대 역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를 쳤고, 페르시아가 당연히 이길 줄 알고 그 뒤에 숨어 페르시아가 남겨주는 것이나 챙길까 하고 페르시아에 붙었던 헬라스 지역의 군대도 본디 태생이 비겁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슬그머니 숨어버리자, 끝까지 전투를 벌이는 군대는 아테나이를 맡은 테바이와 도망치는 보병을 돌보는 페르시아의 기병들 뿐이었습니다. 마르도니오스의 죽음과 페르시아군의 패퇴가 알려지자 플라타이아 헤라 신전 옆에 웅크렸던 헬라스군도 제멋대로 뛰쳐나와 도망치는 페르시아 군대를 덮쳤고, 메가라와 플레이우스 군대가 무질서하게 덤비다 테바이 기병에게 도륙당하고 일부는 도로 키타이온 산으로 쫓기는 일도 있었고, 도망친 페르시아 군대가 에뤼트리아 마르도니오스의 본진에 둘러친 목책 안으로 몰려들었고, 플라타이아에서부터 뒤쫓던 스파르테군이 목책을 어쩌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테바이군 속을 끊임없이 헤집고 전투를 벌인 데켈레이아 구역의 소파네스처럼 모두가 분전하여 테바이군을 물리친 아테나이군이 도착했고, 아테나이군이 끈질기게 방벽을 오르며 목책 하나를 허물자 테게아군이 제일 먼저 목책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겁에 질린 수 만의 페르시아 군대를 도륙하여 결국 금은보화도 모두 버리고 겨우 3천 명의 병사들이 목숨만 건져 도망치자 플라타이아에 이어 에뤼트리아의 전투도425 헬라스 동맹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11.70. 헬라스 동맹군이 크세르크세스의 텐트를 비롯한 페르시아 진지에서 거둔 전리품들을 정리하고 있을 즈음에야 만티네이아 군대가 도착하였는데, 이미 전투가 끝나 있자 도망친 아르타바조스를 쫓아 텟살리아로 가겠다 했으나 스파르테가 반대하여 소득없이 돌아가야 했고, 이어서 도착한 엘리스의 군대 역시 실망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만티네이아도 엘리스도 돌아가서는 그들의 지휘관들을 모두 도시에서 추방시켜버렸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애초부터 출발이 늦었기 때문에 헬라스 동맹군에 합류할 수 없었다면 군대의 지휘관을 내쫓을 일이 아니라 도시의 지도자들을 탓했어야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 두 도시 군대의 지휘관들이 키타이온 산의 통로를 가로막은 페르시아 기병의 습격을 피해 헬라스 동맹군과의 합류를 늦추면서 여차하면 도로 그들의 도시로 돌아가 아르고스처럼 페르시아에 붙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게지요.426 하루 아침에 페르시아 기병이 사라진 키타이온 산을 넘어 에뤼트리아의 페르시아 본진에 도착해서 그들이 보고 실망한 것은 널부러진 적의 주검 때문이 아니라 크세르크세스가 남긴 천막 주위로 쌓여가는 값진 전리품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각 때문에 적을 베어넘겼다는 명예를 얻을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보다는 지각 때문에 적이 남긴 무수한 무구와 값진 군수물자를 챙길 기회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실망이 더 컸겠지요. 이들이 놓친 기회를 아이기나가 약삭빠르게 차지해 금을 본 적이 없는 헤일로타이들을 속여 금을 청동 값으로 사들이며 재미를 보는 사이, 파우사니아스는 전리품 수거가 끝난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으로427 동맹군의 지휘자들을 불러모으고 그들에게 마르도니오스의 숙수들을 시켜 만든 마르도니오스의 저녁 식사와 그의 하인이 만든 그의 저녁 식사를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요. 저 호화로운 밥을 먹으면서 이 빈약한 저녁을 빼앗으러 오다니요."428

 

11.71. 그러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파우사니아스가 잘도 지적한 크세르크세스와 마르도니오스의 어리석음은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에 모였던 파우사니아스 그 자신을 포함한429 헬라스 동맹의 지휘관 모두나 천막 주위에 쌓인 전리품들을 보는 헬라스 동맹의 병사들 모두에게 두루 좋은 교훈이 되지는 못했습니다.430 어떤 헬라스 사람들에게는 파우사니아스의 빈약한 저녁을 빼앗으러 온 크세스크세스나 마르도니오스의 어리석음보다 파우사니아스의 저녁보다 더 빈약한 저녁을 먹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들의 저녁을 덜어 그 천막 안에 금은보화를 쌓게 한 크세르크세스와 마르도니오스의 힘이 더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 모두의 안전과 자유를 해칠 수 있는 크세르크세스의 힘이 그 스스로를 오만하고 탐욕에 빠지도록 하여 세상 모두를 발 아래 두고자 무모한 전쟁을 벌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했다는 사실을 꽤뚫어보지 않고, 그보다는 그 힘이 두려운 세상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너무나 쉽게 먹혀들어 세상 사람들이 기꺼이 그들과 그들 도시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버리고 복종하고, 그 복종의 표시로 그들의 빈약한 저녁을 덜어 금은보화를 구해 바치고, 또 생업을 뒤로 하고 전장에 나가 목숨까지 바치는 사실에 더욱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스파르테의 파우사니아스가 크세르크세스의 어리석음을 보았을 때 우리 아테나이의 병사들은 크세르크세스의 천막 안에 쌓인 금은보화를 보았던 것입니다.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원정은 과감히 도시를 버리고 바다로 나간 아테나이가 보인 살라미스에서의 분전과 이에 자신감을 얻은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응전으로 마르도니오스가 전사하고 아르타바조스가 도주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은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목숨을 걸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암흑시대 이래의 헬라스 세상의 전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힘으로 다른 도시와 그 도시민의 안전을 위협하여 안전의 대가로 자유와 재물과 목숨을 거두어들이는 페르시아의 제국주의 상징으로 헬라스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이 파우사니아스에게는 혹독한 암흑시대를 뚫고 온 그들 조상들이 세운 전통을 지켰다는 스파르테의 자부심을 일깨우는 본보기였지만, 어린 페리클레스에게는431 페르시아처럼 힘만 있으면 다른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담보로 얼마든지 금은보화를 얻을 수 있다는 힘의 본보기가432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한 세대 전 아테나이도 보이오티아와 칼키스를 이기고 스스로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켰다는 자부심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로 얻은 전리품과 받은 보상금 때문에 돈을 벌 수 있었던 아테나이는 그 경험을 살려 페르시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되찾겠다는 밀레토스도 도우고 또 전쟁으로 다른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해치고 그 대가로 금은보화도 얻겠다며 나서 사르데이스를 불태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 어리석은 오만과 탐욕은 헬라스 세상에 페르시아를 불러들였고, 아테나이는 도시민이 모두 도시를 버리고 도망쳐 페르시아에게 두 번이나 도시의 신전과 집들을 모두 태우고 허물게 하는 치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살라미스에서 승리를 거두어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적을 물리치고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자마자 아테나이는 전쟁 비용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페르시아에 복속된 섬과 도시들에게 아낭케를 들먹이며 페르시아도 직접 보이지 않았던 무력을 쓰며 돈을 뜯고 있었습니다. 아테나이가 페르시아를 상대했던 힘을 페르시아보다 더 모질게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 사람들을 상대로 쓸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런 아테나이가 페르시아를 축출하고 난 뒤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을 보며 확신했었던 것이 무엇이었을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지금부터 저는 크세르크세스가 남긴 천막이 헬라스 동맹의 두 강자 스파르테와 아테나이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으며, 그 때문에 나머지 헬라스 도시들과 도시민들의 안전과 자유가 또 어떻게 훼손되어 갔는지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11.7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헬라스 동맹군이 테바이에 결집한 페르시아군과 페르시아에 스스로 복속된 헬라스 도시들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이스트모스에서 메가라와 엘레우시스를 향해 나아갈 무렵, 레오튀키다스가 이끄는 헬라스 함대는 페르시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헬라스 사람들의 섬 키오스의 반군을433 지원해달라는 키오스 사절을 싣고 델로스까지 나아갔으나 더 이상 움질일 엄두가 나지 않아434 델로스 섬에서 파우사니아스의 지상군 소식이나 기다리고 있었고, 파우사니아스가 페르시아 기병을 피해 몇 차례 진을 옮기다 플라타이아 바깥의 데메테르 신전 근처에 새로운 진을 치고 있을 무렵, 이번에는 사모스 섬에서 탐폰과 아테나고라스와 헤게시스트라토스 세 명의 사절이 페르시아와 사모스의 참주 테오메스토르의 눈을 피해 헬라스 함대로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헤게시스트라토스가 장군들 앞에 나서, 헬라스 함대가 사모스 섬에서 보이기만 해도 사모스 사람들이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 것이니 그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장광설로 간청했고, 레오튀키다스는 그들로부터 사모스 섬이 헬라스 동맹의 일원이 되겠다는 서약을 받은 데다 신들도 길조를 보내오자 페르시아에 복속된 이오니아의 헬라스 도시들의 해방을 위해 바로 출동을 결정하고 델로스를 출발해 사모스로 갔습니다.435 헬라스 함대가 사모스의 칼라모이에 정박하여 해전을 준비하는 동안, 포이니케 함대가 귀향하여 빠지고 없는 페르시아 함대는436 해전을 포기하고 페르시아 지상군의437 보호 아래 있기로 작정했고, 함대를 페르시아 지상군이 주둔하고 있는 뮈칼레로 몰고가서 데메테르 신전이 있는 스콜로포에이스 해안에 배를 끌어올려 놓고 주위의 나무를 베어 방벽을 쳤습니다. 헬라스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가 아시아 쪽으로 물러난 사실을 알고 잠시 델로스로 되돌아갈까 했으나 페르시아 함대의 뒤를 쫓기로 하고 해전에 필요한 장비들을 챙겨 뮈칼레로 갔고, 거기서 해안에 끌어올려진 함선들과 해안에 늘어선 페르시아 군대를 보았습니다. 이제 헬라스 함대가 뮈칼레의 해안에 올라 그곳을 지키는 페르시아 군대와 전투를 벌인다면 그것은 헬라스 군대가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곳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 되어야 할 것이었고, 그들이 해방시켜야 할 이오니아의 헬라스 사람들과 싸워서는 아니 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오튀키다스는 먼저 전령선을 해안으로 보내 전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아르테미시온에서 철수하며 샘터마다 남겼던 글처럼 페르시아 군대 안에 있는 이오니아 군대의 반란을 부추기고 또 페르시아가 이오니아 군대를 불신하여 전투에서 배제시키도록 수를 쓰는 한편, 함대를 정박시키고 해안에 상륙하여438 전투를 준비했는데, 이를 본 페르시아 군대는 먼저 사모스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였고 이어서 밀레토스 군대를 후방의 뮈칼레 산을 넘는 고갯길에 배치하여439 이오니나 부대의 반란을 예방했습니다. 마침 플라타이아에서의 헬라스 동맹군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440 좌익을 맡은 스파르테 해군이 골짜기과 언덕을 우회하는 사이 우익의 아테나이 해군은 이미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전투가 시작되었고, 아이가이온 바다와 헬레스폰토스에서의 제해권이 뒤바뀌는 중요한 전투임을 잘 아는 페르시아군 역시 온 힘을 다해 싸웠기 때문에 아테나이군이 처음에는 약간 고전하였으나 코린토스 해군을 위시한 시퀴온 해군 그리고 트로이젠 해군이 합류하면서 백중을 이루자 무장을 해제당했던 사모스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헬라스 군대를 지원하고 나섰고, 이를 본 다른 이오니아 사람들도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고 공격에 합류하면서부터 페르시아군이 방책 안으로 밀려갔고, 언덕을 돌아온 스파르테군까지 합류하자 페르시아군의 방책마져 무너졌고, 방책이 무너지자 페르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온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탈자가 생기자 페르시아군도 뮈칼레 산으로 후퇴하기 위해 밀레토스군이 지키는 고갯길로 갔고, 길 안내를 맡은 밀레토스군은 페르시아군을 엉뚱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도륙해버렸습니다.441

 

11.73. 플라타이아와 에뤼트리아 전투에 페르시아 군대의 일원으로 참전한 헬라스 도시들의 군대는 전세가 기울자 본디 비겁자여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슬그머니 도망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페르시아를 도와 싸운 테바이가 무슨 영광을 얻은 것도 아니고 결국 많은 돈과 부역 주동자들을 헬라스 동맹군에게 내어주며 납작 엎드려야 했었지만,442 페르시아 군대의 일원으로 뮈칼레 전투에 참전한 사모스와 밀레토스 군대는 모반을 의심 받아 무장을 해제당해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거나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산길이나 지키도록 쫓겨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스군과 페르시아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별로 망설이지 않고 헬라스 군대에 호응하여 페르시아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가 하면 퇴각하는 페르시아군을 섬멸함으로써 십수 년 전의 이오니아의 반란에443 이어 두 번째로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고, 본디 그들이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헬라스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본디 흐지부지한 비겁자여서 어쩔 수 없는 헬라스 본토의 페르시아 부역 도시들이 꼬리를 감추고 돈을 바치며 조아려 헬라스로 회귀한 것보다는 이런 사모스와 밀레토스의 페르시아로부터의 이탈과 헬라스로의 회귀 결정이 이오니아의 나머지 헬라스 도시들 뿐만 아니라 트라케나 아시아나 케르소네소스와 헬레스폰토스 그리고 프로폰티스에 흩으진 대부분의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들과 그 도시민들의 안전과 자유에 대한 페르시아와 헬라스 사람들의 인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우선 뮈칼레에서 살아남은 페르시아 군대가 도주 길에 책임 문제로 내분까지 일으키며444 사르데이스로 돌아오자, 이미 마르도니오스의 죽음과 아르타바조스의 귀환 소식을 듣고 있었던 크세르크세스가 헬라스 원정에 대한 흥미를 더 이상 보이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헬라스 군대가 뮈칼레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땅에 상륙하여 페르시아 군대를 축출하고 페르시아 땅을 점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페르시아에 복속되어 있었던 사모스와 밀레토스가 자신의 목전에서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두를 페르시아 제국의 문제로 다루고 단호하게 처리했던 다레이오스와는 달리, 마치 사르데이스의 사트라프가 해결해야 하는 차원의 문제인 양 외면한 채, 서둘러 사르데이스를 떠나 수사로 돌아가고 만 것이 페르시아 사람들의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에 대한 인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고,445 다음은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들 자신과 그들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페르시아에 복속되어 물과 흙을 바친 대가로 그들과 그들 도시의 안전이나마 지킬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던 트라케나 아시나 케르소네소스와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들의 헬라스 사람들과 그들의 도시들이 그들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 헬라스 동맹의 도시들이 뭉쳐 그들로서는 도저히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거대한 페르시아와 싸워 이기고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내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듯이 페르시아 왕이 머무는 사르데이스의 턱밑까지 와서 페르시아 군대를 섬멸하고 왕을 사르데이스에서 수사로 황급히 도망치게 만드는 것을 보고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에 대한 인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446 마지막으로 헬라스 동맹군에 가담해봤자 이기든 지든 자기네의 도시와 산야가 주된 전장이 되고말 것이 뻔하다며 그럴 바에야 승리가 약속된 페르시아의 동맹군이 되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도모하면서 승전자로서 또 페르시아의 대리자로서 틀림없이 패전할 헬라스 동맹들의 도시와 도시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꾀했던, 한마디로 말해 이어족의 힘을 빌려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과 그 도시들을 지배하려 꾀했던  마케도니아와 텟살리아와 테바이와 같은 도시들이  그들의 도시에서 그들 도시민들이 지켜보는 동안 불패의 대군으로 믿어졌던 페르시아 군대가 그저 자기들보다 조금 세다고 여겼지만 결코 굴복하고 싶지 않았던 스파르테나 아테나이 같은 헬라스 도시들에게 여지없이 무너지고마는 것을 보고 그들과 그들 도시의 안전과 자유에 대한 인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었습니다.447 

 

11.7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세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헬라스 원정448 가운데 마지막이 되었던 크세르크세스의 원정이 남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앞에서 말씀드린 페르시아, 특히 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는 사트라프들이 관할지인 헬라스 사람 도시들로부터 소정의 세금을 거둘 수 있는 한 그들의 안전과 자유에 더 이상 종전과 같은 강압을 가하지 않겠다는 변화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유화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에게 세금을 내고 싶지 않은 아시아의 헬라스 사람 도시들은 더 이상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치지 않아도 헬라스 도시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헬라스 세계의 일원이 되겠다는 쪽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런 변화의 결과가 아시아의 이오니아 도시들의 이반으로 나타났고, 해군력이 없는 아시아의 페르시아 사트라프들은 바다에 의지하고 사는 헬라스 사람 도시들의 이반을 적절히 응징하려면 지상군을 동원해야만 했음에도, 원정 실패의 후유증으로 군대를 동원할 능력이 없어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게 했으며, 페르시아로부터 떨어져 나온 헬라스 사람 도시들은 지금 당장 응징을 받지는 않겠지만 결국 페르시아의 응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준다는 보장을 헬라스 도시들로부터 받아두어야만 되도록 했습니다. 자유를 버리고 물과 흙을 바친 종속의 대가로 페르시아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는 것과 달리, 페르시아로부터 벗어나 기존의 헬라스 동맹에 합류해 헬라스 동맹 도시들과 대등한 동맹 관계로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더 낫다고 나선 아시아의 헬라스 도시들이 보이는 이런 변화는 암흑 시대를 이기며 세운 스스로 도시를 지킨다는 오랜 전통을 지닌 헬라스 동맹의 도시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불러일으켰고, 그 감명은 또 언제 또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페르시아의 응징으로부터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 도시들에게 자신들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헬라스 동맹이 보장하는 방법을 두고 동맹의 두 축인 스파르테와 아테나이는 서로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449. 자랑스러운 불패의 중무장보병이 주축인 전통적 육군국 스파르테는 그들이 페르시아의 압박을 피해 아시아에서 트라케 등지로 이주하여 새로운 식민도시를 세우고 스스로 안전과 자유를 지키며 사는 것이 페르시아의 압박을 피해서 좋고 헬라스에 가까워야 여차하면 헬라스 동맹이 구원에 나서기도 용이하다고 주장한 반면, 짧은 시간 안에 큰 해전들과 상륙전을 서너번 치루는 사이 불패를 기록하며 성장한 막강 함대가 주축인 신흥 해군국 아테나이는 이오니아에서 헬라스 사람들을 소개疏開하여 이주시키는 것을 극렬히 반대했고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트라케나 다른 곳의 아테나이 식민 도시들에 대해 부역 여부를 심사하는 것도 달가워 않았기 때문에 결국 헬라스 동맹은 페르시아에서 이반해와 헬라스 동맹에 충실하고 이탈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사모스, 키오스, 레스보스, 밀레토스, 그리고 헬라스 편에 섰던 다른 섬들과 동맹을 맺으며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으로450 모든 헬라스 사람들은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페르시아의 헬라스 원정이 던진 헬라스 사람들과 그들의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내렸습니다. 이제 같은 신을 믿고 같은 신을 믿는 헬라스 사람들 모두는 헬라스 동맹의 기치 아래 헬라스 사람들 스스로 뭉쳐 함께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나갈 것이었습니다.

 

11.75. 이렇게 페르시아 땅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아시아의 이오니아 헬라스 도시와 섬들을 해방시킨 헬라스 함대가  크세르크세스의 선교를 끊기 위해 헬레스폰토스로 갔습니다. 헬레스폰토스를 건너는 선교를 끊어야 페르시아의 침공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헬레스폰토스를 건너는 선교를 끊어야 페르시아의 왕에게 물과 흙을 바치라는 요구를 끊고 페르시아의 침공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교를 끊어야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 사람들과 헬라스 도시들끼리의안전과 자유가 이어질 것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역풍을 만나 고생했지만 아뷔도스에 도착한 헬라스 함대는 온전히 남아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선교가 해체되어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451 크세스크세스의 헬라스 침공은 거기서 선교와 함께 해체되어 없어졌던 것이었습니다. 400개가 넘는 헬라스 도시가 지레 겁을 먹고 모두 크세르크세스에게 복종하여 엎드릴 때 겨우 40개도 되지 않는 헬라스 도시들이 뭉쳐 두 해에 걸쳐 네 번의 결전을 치루어 낸 결과가 바로 크세르크세스가 끊어서 없애버려 보이지 않는 선교였던 것입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스스로 선교를 끊고 달아났으므로 다시는 헬레스폰토스를 건너오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전쟁의 종식을 눈으로 확인한 헬라스 함대는 앞으로 할 일을 논의했고, 선교가 끊어져 돌아가지 못한 페르시아 패잔병을 섬멸하여 에우로파와 헬라스는 물론 헬레스폰토스 도시들을 완전히 해방시키고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되찾아주는 일을 계속해나가야 한다고 결의한 다음, 우선 헬라스 함대를 새로운 전력으로 교체하고 함선도 정비하기 위해 귀향키로 했습니다. 레오튀키다스의 스파르테를 필두로 펠레폰네소스 함대는 곧바로 귀향했지만, 아테나이 함대는 귀향 전에 먼저 아뷔도스 건너 케르소네소스의 세스토스로 가서 포위하고 공격했습니다만, 페르시아 사람인 세스토스 태수 아르타윅테스의 농성이 늦가을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함락이 늦어졌고, 도망친 태수와 페르시아 사람들을 처치하고 크산팁포스가 아테나이로 돌아갔을 때는 전쟁 두 번째 해 겨울에 들어서였습니다.452

 

 

11.7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크산팁포스가 이끄는 아테나이 함대는 왜 아테나이가 그들이 귀환해도 좋다는 전갈을 보내지 않는지 그 사정을 이해했고, 세스토스의 끈질긴 농성으로 함락할 가망이 없어 병사들이 돌아가자고 할 때에도 포위를 풀지 못하고 버틴 것도 아테나이의 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453. 결국 세스토스를 함락하고 거두어들인 아르타윅테스의 재물로454 밀린 노삯을 지불하고 당당하게 전승 함대로서 아테나이로 돌아갈 수 있었고, 남은 재물은 이태에 걸친 전쟁과 두 번에 걸친 도시 파괴로 피폐해진 도시의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도시와 도시민 모두가 어렵게 지낸 것을 어쩔 수 없었지만 다행히 전쟁에 이겨 전리품들이 생기자 두 번이나 적에게 도시가 유린되어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도시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보다 노를 젓거나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은 받은 수당으로 형편이 오히려 더 나아졌습니다. 이렇게 전쟁에 이겨 승리자의 명예를 얻은 데다 수당을 받아 생활의 여유를 상대적으로 더 가지게 된 이들의 거의 대부분은 테테스들인 삼단노선의 노꾼들이었는데, 이들은 전승자로서 영예와 받은 수당으로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솔론이 그렇게나 바라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자유 시민이 되었고, 따라서 도시 일에 대해 참여할 권리를 더 달라고 요구하게 되었습니다.455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아테나이의 노꾼들은 이태 동안의 참전으로 이미 세상 최고의 노꾼이 되어 있다는 걸 스스로 잘 알았고, 무엇보다 그들은 그들의 열정과 기술이 도시의 안전과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시의 살림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스스로 잘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르콘들과 장군들도 이들이 스스로 터득한 것 이상으로 이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해군으로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겠다고 결정한 아테나이는 그 해군을 받치는 노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더욱 민중 위주로 바꾸었습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 끝에 아테나이의 민주정이 더욱 민중 중심으로 바뀌자 아테나이는 솔론의 유지遺志456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에 심어졌고, 시민들의 해군에 대한 신뢰도 더욱 깊어져 자신만만해진 아테나이는 이제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새로운 장군들을 뽑아 헬레스폰토스와 에우로파와 트라케의 페르시아 도시들과 페르시아에 부역한 도시들에 대한 응징에 나설 것이었습니다.

 

11.77. 한편, 플라타이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파우사니아스가 헤일로타이들이 챙긴 전리품들을 가지고 스파르테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헬라스 함대를 이끌던 레오튀키데스는 뮈칼레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눈에 띄는 전리품 없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동등인을 비롯한 다수의 인명 손실을 입어야 했지만 소수의 스파르테의 전사들은 이어족의 대군을 물리쳐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내었을 뿐만 아니라 전사들의 도시로서의 전통도 이어갔습니다. 스파르테는 크세르크세스로부터 얻은 승리와 전리품에 흥분하지도 않았고, 자만심에 빠져 행운의 여신을 포함한 모든 신들에게 보낼 감사와 찬사를 잊지도 않았습니다. 전사들이 귀향하고 얼마 있지 않아 겨울이 왔고, 스파르테의 전사들은 평상의 생활로 돌아갔지만 페르시아가 아직 트라케와 에우로파와 헬레스폰토스 등지의 헬라스 사람들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한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고 스파르테의 전사들은 그들을 해방시켜야 할 신과의 약속이 남아 있어 페르시아와의 전쟁응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곧 봄이 오면 농장의 헤일로타이들이 농사에 매달리듯이 스파르테의 전사들은 무구를 정비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이어족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할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가 아직 남아 있다면 그들의 일인 것처럼 그리로 달려갈 것이었습니다.

 

11.78. 봄이 되자 스파르테는 플라타이아의 승자이자 아기스 왕가의 섭정 파우사니아스를 헬라스 함대의 지휘관으로 정했고, 아테나이는 아리스테이데스와 마라톤의 승자 밀티아데스의 아들 젊은 키몬을 장군으로 뽑아457 아테나이 함대의 지휘를 맡기면서 헬라스 함대에 합류하도록 했습니다. 헬라스 함대가 모였을 때 다른 도시들의 함선을 모두 불태우고 아테나이가 헬라스에서 가장 강한 도시가 되어 전 헬라스를 지배하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응큼한 제안을458 거부한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를 아테나이 함대의 지휘관으로 삼은 것과 함대 운용에 있어 군사적 재능을 가진 젊은 키몬을 발탁한 것은 아테나이의 행운이었고, 헬라스 함대의 새로운 지휘관으로 플라타이아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점점 오만해져 스파르테의 병영 식사가 싫어지고 크세르크세스의 호사가 좋아진 파우사니아스를 지명한 것은 스파르테의 불운이었습니다. 헬라스 함대가 퀴프로스로부터 아나아 해안을 돌며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들을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면서 헬레스폰토스로 가서 뷔잔티온을 함락시킨 다음 그곳을 기지로 삼아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오만한 파우사니아스와 스파르테의 장군들은 동맹이 모인 함대에서 스파르테 우선을 강조하며 예사로 동맹의 장군들에게 무례하고 불손하게 대하고 동맹의 병사들에게도 횡포를 부렸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헬라스의 통치자가 되기 위해 크세르크세스와 뒷거래를459 하면서 노골적으로 친페르시아적 행동을460 보였는데, 동맹의 장군들이 아리스테이데스에게 불만을 토로하자 아리스테이데스는 스파르테의 에포로스에게 편지를 보내 전후사정을 알리면서 파우사니아스의 소환을 요청했고,461 스파르테는 플라타이아의 승리가 스파르테의 전사들을 오만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동맹의 지휘권을 깨끗이 내놓고 파우사니아스와 다른 스파르테 장군들을 소환했습니다.462 테미스토클레스는 다른 도시의 함선들을 모두 불태우고 헬라스 전체를 지배할 야망을 펼치고 싶었지만 파우사니아스는 페르시아 왕의 도움으로 헬라스 동맹의 맹주로서 헬라스 전체를 다스린다는 야욕을 조악하게 펼치다 미수에 그쳤는데, 아테나이는 정직한 아리스테이데스와 온화한 키몬과 오만하고 탐욕스레 변한 파우사니아스 덕분에 다른 도시들의 함선을 불태우지 않고도 슬그머니 헬라스 함대를 지휘하며 밖으로 밖으로 나가 아테나이를 헬라스 최강의 도시로 만들어갔고, 파우사니아스의 조악한 야욕과463 장군들의 세련되지 못한 오만 덕분에 스파르테는 이미 많은 도시들을 해방시킨 헬라스 동맹의 맹주가 되기보다는 다시 한번 전통적인 전사들의 도시로 돌아가서, 헬라스의 일보다는 그들만의 관습과 법대로 그들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나가기로 결정하고464 스스로를 펠레폰네소스 반도 안의 라코니케로 가두어갔습니다. 이제 스파르테의 견제에서 벗어난 아테나이는 그들 뜻대로 헬라스 함대를 지휘할 수 있어 좋았고, 스파르테는 모처럼 전쟁의 혼란과 동맹들 간의 다툼에서 벗어나 평화를 즐기게 되어 좋았지만, 모두에게 좋아 보이던 스파르테의 헬라스 함대 철수가 결국 아테나이 제국주의를 여는 단초가 되었으며465 아테나이의 제국주의 때문에 헬라스 내부의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놓고 벌어진 끊임없는 도시 간의 분쟁으로 헬라스 세계가 서서히 피폐의 길로 가게 될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요.

 

11.7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해가 바뀌어 아리스테이데스는 아테나이 함대를 떠나고 나서도 그의 공정성을 신뢰하는 동맹들의 요청으로 헬라스 함대를 유지하기 위해 동맹 각각이 분담할 함선이나 금전을 조정하는 일을 맡았는데, 함대의 한 해 비용을 460탈란톤으로 정하여 동맹도시들의 영토와 수입을 감안하여 배분하되 함선을 제공하는 도시와 공물을466 제공하는 도시로 나누었고, 공물은 주로 돈으로 받기로 하고 재무관들을467 두어 돈을 거두고 지출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공평하게 배당된 금액에 만족한 동맹도시들은 공물을 모아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 금고에 보관하여 함대 운용비로 쓰기로 했는데, 이때 함선이나 공물을 낸 도시들은 150개에468 육박하였습니다.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동맹을 결성했던 만큼 계속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함대를 운용하기로 했고, 페르시아 영토를 약탈하여 전쟁 피해를 보상받는다는 명분도 세운 다음, 함대 운용은 동맹도시 대표로 회의체를 구성하고 델로스의 신전에 모여 아테나이가 회의를 주재하고 안건을 결정하기로 했습니다.469 이렇게 새롭게 출발한 헬라스 동맹의 모든 도시들은 페르시아라는 이어족으로부터 서로 힘을 합쳐 헬라스 사람들과 그들 도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자유롭게 스스로 모였고, 그 가운데 아테나이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도시들이 서로 의견을 모아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 의장국이자 그 결정을 시행하는 헬라스 함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을 내는 도시였을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아테나이에는 아리스테이데스와 테미스토클레스가 각각 귀족과 민중을 대변하며 도시 일을 잘 꾸려나갔고, 장군들은 새로운 헬라스 함대를 아테나이에 도움이 되는 쪽을 우선으로 운용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키몬이라는 군사적으로 뛰어난 젊은 장군이 있어 바다로 나간 아테나이의 도시와 도시민을 지키기 위해 철옹성을 쌓았고, 아울러 식민과 동맹의 확대로 아테나이가 제국주의로 번영을 이룰 기틀을 마련했으며, 결정적으로 페르시아가 바다와 육지에서 다시는 아테나이를 넘볼 수 없도록 칼리아스 강화조약을 맺었습니다. 헬라스 동맹은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어느새 아테나이의 동맹으로 성격이 굳어져갔고, 이에 따라 아테나이도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던 동맹국에 대해 전쟁 수행이나 정치적 결정을 요구하는 일이 잦아지자 동맹 도시들은 조금씩 아테나이 제국의 구성원으로 바뀌어갔던 것입니다.470 이런 사정에 반발하면 무서운 응징이 가해졌고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가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아테나이에 의해 훼손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동맹 도시가 아니라 아테나이 제국의 한 종속도시로 전락한 것을 참지 못하는 도시들이 스파르테를 찾아 도움을 구하고, 아테나이의 위세에 눌려 무역이 원활치 않아진 테바이나 코린토스 같은 펠로폰네소스 동맹 도시들이 스파르테의 행동을 촉구하는 일이 잦아지자, 결국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의 군림을 저지하기 위해 나섰고,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의 저지를 거부하자 두 도시 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여의치 않은 아테나이가 강화를 제의하여 30년 평화를 약속했지만, 민주정이라는 아테나이의 정치체제는 이미 제국주의의 번영을 맛본 아테나이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을 제어하고 평화를 지켜나가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저자거리에서 난 테미스토클레스나 에피알테스는 말할 것도 없고 키몬이나 페리클레스 같은 귀족들까지 민중의 등에 업혀 정치 권력을 잡았고, 민중은 민중들대로 그들이 도시를 움직인다는 오만과 절제되지 않은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끊임없이 다른 도시들에게 도발하도록 권력자들을 몰아붙였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그 전쟁이 대를 이어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테나이를 상대로 전쟁을 포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저는 대를 이어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간의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아테나이가 자신들의 번영을 위해 헬라스 도시들의 안전과 자유를 어떻게 훼손시켜갔는지, 헬라스 세계에 대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잠시 여러분과 함께 되새겨본 다음 대를 이은 전쟁 이야기로 갈까 합니다. 

 

11.8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뮈칼레 전투 후 아테나이 함대는 세스토스를 점령을 시점으로471 이듬해 다시 모인 헬라스 함대와 합류하여 뷔잔티온을 점령하고 헬라스 함대의 거점으로 삼아 헬레스폰토스의 다른 페르시아 점령 도시들을 해방시켜 나가는 가운데 드러난 파우사니아스의 비행으로 헬라스 함대의 지휘권을 인수하고 동맹을 아테나이 위주로 재편하였습니다.472 재편 후 아리스테이데스는 새로운 동맹의 활동보다는 동맹의 구성과 체계를 갖추는 데 주력하였고, 본격적인 활동은 함대를 이어받은 아테나이의 젊은 장군 키몬이 맡았는데473, 키몬의 활동전략은 단순했습니다. 앞으로 아테나이가 활동하는 지역의 거점이 될 수 있고 아울러 그 거점이 자립하여 부를 창출할 수 있는, 한마디로 힘이 되고 돈이 되는 곳을 확보한다는 것이었지요. 예를 들면 트라케의 스트뤼몬 강변의 에이온과 같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지역 교두보로 세운 도시를 점령하여 아테나이의 속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에이온이 트라케 지역의 전략요충지이다 보니 먼저 차지하고 있던 페르시아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점령하고 보니 역시 비옥하고 아름다운 곳이라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아테나이의 속주로 삼았습니다.474 에이온이 아테나이 사람들의 도시로 바뀌자 스트뤼몬 강 하구에 사람들이 몰려왔고 주변의 트라케 사람들 도시도 안정을 찾게되었고, 트라케의 안정은 곧 헬라스와 헬레스폰토스 사이의 교류를 활성화시켰으며, 해상 통행 역시 해로의 안전성이 요구되었지요. 키몬은  아테나이와 헬레스폰토스를 잇는 해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해적의 은거지로 악명이 높은 스퀴로스 섬처럼475 아이가이온 바다의 안전 항해를 위협하는 해적들의 은거지를 청소한 다음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로 바꾸어 놓았고, 내친 김에 동맹 가입을 거부하고 있는 에우보이아의 카뤼스토스 같은 항로 인근의 도시를 동맹에 가입시켜 아이가이온 바다의 모든 섬들이 서로 항해의 안전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카뤼스토스로 가서 다른 에우보이아 도시들은 공격에서 제외하고 나머지 동맹군으로 포위공격하여 항복을 받은 뒤 동맹에 가입시키기도 했습니다.476 이렇게 아이가이온 바다와 헬레스폰토스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그 연안의 동맹 도시들도 바쁘게 살아가느라 동맹의 활동에 등한해졌고,477 그러다 보니 동맹도시들을 대하는 아테나이의 태도가 동료가 아니라 부하를 다루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바뀌니478 아테나이에 대한 적대감만 키우게 만들었습니다. 또 그러다 보니 동맹도시들은 전투에 병사를 보낸다든지 함선이나 물자를 내어 동맹의 일에 직접 참여하기보다 그에 상응하는 돈으로 내는 편리함을 택했고, 아테나이는 그 돈을 받아 함선을 늘이며 동맹의 함대를 막강한 아테나이 함대로 바꾸어갔고, 막강해진 아테나이의 함대가 지키는 평화로 세상살기가 한결 나아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화 속에 몇 해 지나는 동안 동맹도시들은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함께 뭉친 연합체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도시에서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돈을 주고 사는 안전과 자유 구매자로 바뀌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안전과 자유를 파는 아테나이는 단골에게 상냥하고 찬절한 판매자가 아니라 내게서가 아니면 살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오만하고 탐욕스런 판매자였습니다. 아테나이의 군사력이 그들의 돈으로 증강되면 증강될수록 아테나이의 간섭과 요구가 심해졌고, 아테나이의 간섭과 요구가 드세어지면 드세어질수록 그들의 신세가 십여 년 전 페르시아에 종속되어 물과 흙을 바치던 때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안전과 자유를 산다고 생각했던 것이 돈과 자유를 바치고 안전을 얻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스스로 지킬 힘을 기르기보다 아테나이에게 바치는 돈으로 해결한 결과 그들은 스스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최소한의 군사적 능력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되는 헬라스와 페르시아의 평화로 아테나이에 더 이상 돈을 내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도 어찌 대들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퀴클라데스 섬들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독자적인 함대를 가지고 있어 따로 공물을 내지도 않았던 낙소스가479 동맹 탈퇴를 들고 나온 것은 결코 페르시아에 다시 붙는다는 둥의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480 낙소스는 그들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도시이며 그들의 안전과 자유는 그들 스스로 지킬 일이었으므로 스스로 그들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뿐이었는데, 아테나이의 즉각적이고도 무자비한 응징을 받아 도시는 성을 허물어야 했고, 도시의 함대도 빼앗겨 더 이상 함대를 가질 수도 없었고, 투표권을 빼앗겨 동맹으로서 의사 결정에 참여할 권리는 없고 오로지 의무만 지면서 아테나이의 동맹에 남아 가장 큰 의무인 공물을 황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이 혹독한 응징은 앞으로 계속될지도 모를 동맹도시들의 이탈 기도에 대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며 보낸 초강력 경고였지만, 이것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듯, 그리고 아테나이가 돈값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듯, 아테나이는 키몬을 내세워 다시 대페르시아 전쟁을 들고 나왔습니다. 아스펜도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200척의 삼단노선으로 카리아의 크니도스로 간 아테나이와 동맹 함대는 뤼키아 지역에도 함대의 근거지를 두기로 하고 크니도스를 출발해, 마냥 페르시아에 충직한 헬라스 사람들 도시 파셀리스를 단숨에 점령하고 아테나이 동맹에 가입시킨 다음, 아스펜도스로 향했습니다. 아테나이의 움직임을 보고 페르시아는 가진 200척을 더 키워 싸우기로 하고 함대를 아스펜도스에서 팜퓔리아의 에우뤼메돈 강 하구로 옮겨 포이니케 함대의 합류를 기다렸는데,481 이 사실을 탐지한 키몬이 득달같이 달려가 먼저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다음 상륙하여 도망친 페르시아 해군이 합류한 페르시아 지상군과 결전에서도 대승을 거두었고, 포이니케 하대가 근처 휘드로스에 정박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쫓아가 전멸시켜버렸는데, 이날 아테나이와 동맹군은 플라타이아와 뮈칼레 이후 10년이 지나 또 다시 벌어진 대형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완전히 압도해버린 것이었습니다.482 에우뤼메돈 전투 이후 페르시아는 기세가 꺾여 헬라스 쪽이라면 땅에서나 바다에서나 페르시아 군대 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483 그리고 얼마 뒤 타소스가 관리하던 섬 맏은 편 트라케 땅의 시장들과 금광을 두고 타소스와 아테나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타소사 동맹을 이탈하느니 마느니 하는 일이 일어나자 키몬이 이끄는 아테나이와 동맹 함대는 타소스로 가서 단숨에 타소스 함대를 격파하고484 섬을 포위했는데, 간단히 제압해버린 해군과는 달리 타소스의 성벽은 견고했고 그들 도시와 그들 자신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지는 완강하여 배가 고파 죽기 전까지는 함락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장기전에 대비하면서, 한편으로 시간을 벌어 횡포를 벌이고 있는 트라케쪽 케르소네소스 반도와 에우로파의 페르시아 군대를 쫓아내기 위해 작은 규모의 군대로 헬레스폰토스로 갔습니다. 헬레스폰토스에 도착하자 키몬은 놀랍게도 겨우 삼단노선 네 척으로 케르소네소스로 건너가서 열세 척의 페르시아 함선들을 나포하고 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밀티아데스가 참주로 다스리던 지역을 탈환하여 고작 이태만에 아테나이의 속주로 바꾸어놓음으로써485 동맹도시들에게 아테나이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이태에 걸쳐 케르소네소스 정벌과 타소스 포위를 수행한 키몬의 아테나이 함대는 기진맥진하는 타소스에 대해 항복 조건을 제시하며 함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타소스는 낙소스처럼 타소스의 참주가 되려는 밀레토스의 참주 히스티아이오스의 침략을 물리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486 또 낙소스처럼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 함대의 함선을 보충해주기도 했으나 전후 아테나이의 동맹에 가입해 키오스나 사모스처럼 독자적인 함대도 운용할 정도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이었습니다. 이런 타소스가 섬 건너 육지에서 금광을 발견하여 부를 쌓으면서487 동맹 탈퇴를 꿈꾸기 시작했던 것이 아테나이의 경계를 불렀고, 타소스는 타소스대로 동맹 이탈에 대한 아테나이의 응징을 막기 위해 스파르테와 비밀리에의 지원 약속을 받아두고 있었는데, 이때는 이미 스파르테도 자유를 잃은 헬라스 도시들의 진정과 아테나이의 독주로 영향력을 잃어가던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원성이 드높아 아테나이를 그냥 버려둘 수 없다고 견제에 나서기로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키몬이 바로 타소스를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도 아테나이가 이런 스파르테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또 그런 스파르테의 견제를 무시해버리는 모험을 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면서 포위만 하고 키몬이 케르소네소스에 왔다갔다 하는 동안 타소스에게는 최악이고 아테나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일이 스파르테에서 일어났는데 바로 전대미문의 대규모 지진이었습니다.488 지진으로 스파르테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고, 특히 피해가 극심했던 멧세니아 지역에서 헤일로타이들이 혼란을 틈타 일으킨 반란으로 스파르테는 더 큰 궁지에 몰려 원래의 계획이었던 스파르테군이 아티케로 진격함으로써 아테나이군이 타소스 공격에 매달릴 수 없도록 하는 방법으로 타소스를 지원할 겨를이 없었고, 혼자서는 아테나이와 그 동맹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들 도시와 그들 자신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능력이 모자랐던 타소스는 오랜 포위 속에 버티느라 탈진하여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소스는 낙소스의 예와 같이 성벽을 허물고 함대를 빼앗기고 동맹에 남아 공물을 내면서도 동맹의 의사 결정에는 배제되는 것에 더하여 시비가 걸렸던 섬 건너 시장들과 금광은 물론 전쟁 보상비까지 따로 아테나이에게 바쳐야 했습니다.489 키몬은 의기양양하게 아테나이로 돌아갔지만 타소스 문제 해결에는 수훈갑이었던 스파르테의 지진이 아테나이에까지 미쳐 자신의 정치적 입지마져 흔들어놓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는 그의 오만이 너무 컸습니다. 지진과 헤일로타이 반란 때문에 스파르테의 아테나이 견제가 늦추어져 스파르테와의 충돌 없이 타소스 문제를 해결했지만, 아테나이의 팽창을 보는 스파르테의 눈이 부릅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의 민중은 페르시아를 축출하여 식민 개척으로 제국을 건설하던 키몬의 역량보다, 이제는 페르시아가 아니라, 스파르테의 견제를 물리치고 헬라스에서의 거대한 제국을 완성시킬 새로운 지도 역량을 원할 만큼 세상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오만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11.8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테나이와 동맹의 함대의 위세는 곧 아테나이의 위세여서 이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이 위세는 날마다 드세어져갔고 또 그만큼 오만해져갔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이 이주한지 채 십 년이490 다 되지 않았는데, 이미 오랜 세월 텟살리아 사람들의 섬이던 스퀴로스가 거의 완전히 아테나이의 섬으로 바뀌어간 건 말할 나위도 없고, 트라케의 스트뤼몬 강 하구의 에이온은 여전히 중요한 군사 요충지의 아테나이 요새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조금씩 목재는 말할 것도 없고 금과 은도 생산하는 자원확보 활동의 거점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이런 경제 활동 때문에 키몬이 케르소네소스에 이주할 사람들을 아테나이와 동맹도시들에서 모집했던 때와 거의 같은 무렵에491 모집된 만 명이 에이온에서 스트뤼몬 강을 따라 올라가 트라케의 에도노이족이 살던 엔네아 호도이를492 점령하여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이들은 엔네아 호도이에 정착하여 이웃 에도노이족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기는커녕 나무를 생산하는 숲과 새로운 금은광산을 찾아 북쪽 내륙으로 더 진군하여 들어갔다가 트라케 사람들에게 거의 모두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493 그들의 탐욕은 트라케 내륙의 울창한 숲과 광맥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고, 그들의 오만은 트라케 사람들 정도라면 간단히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게지요. 마치 테바이와 칼키스를 무찌르고 오른 기세로 사르데이스를 불지르고 혼비백산 도망쳐왔듯이 이 이후 아테나이는 당분간 트라케에 식민도시를 건설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실망한 민중들은 그들의 좌절된 탐욕과 오만을 보상받을 구실을 찾아나섰고, 그래서 3년이나 걸려 고작 타소스의 트라케 금광에 만족하고 돌아온 키몬에게 분풀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나이 민중들은 마케도니아로 가는 길목인 타소스를 점령하고도 페르시아에 부역했던 마케도니아를 응징하여 보상을 받지 않고 돌아온 것은 키몬이 마케도니아의 알레산드로스로부터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공격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를 도편추방하는 데 앞장선 뒤로 자연스레 새로운 아테나이의 민중 세력 대변자가 된 에피알테스가 10년 가까이 승승장구해왔던 키몬에 대한 민중들의 공격을 지휘하고 나섰습니다. 에피알테스의 눈에 키몬은 페르시아라는 이어족의 침입을 막는 헬라스 동맹이라는 낡은 체제에 갇혀 언제 어디서나 헬라스 동맹의 지휘자 스파르테를 신경 쓰며 움직이는 구닥다리에 지나지 않았고, 이미 더 이상 현실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페르시아가 아니라 서서히 아테나이를 견제하고 나오는 스파르테를 응대하는 새로운 체제를 준비하는 데에 그는 걸림돌일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키몬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없는 귀족들을 대변하며 아테나이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정적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에피알테스에게 다행스럽게도 페리클레스라는 귀족 출신이지만 귀족보다는 민중을 기반으로 정치 판에 나서려는 젊은 정치 지망생이 지원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에피알테스와 페르클레스는 타소스 원정 중의 회계 부정과 공금 횡령을 이유로 키몬을 고발하였고, 키몬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지난 십여 년 자신이 아테나이를 위해 희사한 돈들을 생각해보라며 그런 자기가 작은 돈을 횡령했겠냐며 나섰고, 아레오파고스 재판정도 키몬의 무죄를 판정해주었습니다. 비록 이 재판은 아테나이에서 아직은 살아있는 권력과의 작은 충돌의 모습이었지만, 키몬도 재판에 회부시킬 정도로 아테나이의 민심이 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작지 않은 신호였습니다.494 아레스파고스의 판결은 민중들의 불복을 불러왔고, 이런 재판 결과에 대해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는 아레오파고스가 귀족들과 원로들로 구성되어 있어 키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며 이제 재판권을 아레오파고스로부터 민회로 이관해야 한다고 아테나이 민중들을 선동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빠진 아테나이에 스파르테가 헤일로타이와 멧세니아 사람들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기 위해 아테나이의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이 왔고,495 고발과 재판에서 겨우 빠져나온 키몬이 이 요청에 아테나이도 스파르테의 동맹인 이상 지원군을 보내야 되지 않겠느냐며 마케도니아 일로 자신을 비난하는 도시 분위기의 반전에 나섰습니다. 그랬습니다. 크세르크세스가 사르데이스에 나타나서 요구한 흙과 물을 바치기를 거부한 헬라스 도시들이 이스트모스에 모여 결성했던 헬라스동맹 체제는 크세르크세스가 수사로 돌아간 뒤에도, 비록 아테나이의 독자적 동맹 결성으로 그 결속이 훼손되어가고 있긴 했으나, 해체를 결의한 바 없는 여전히 유효한 동맹 체제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가 지원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할 때496 보여준 키몬의 태도는 그가 영락없는 대페르시아 전쟁을 위한 동맹 체제 속의 아테나이 사람이며, 개인 성향마져 스파르테에 경도된 아테나이 사람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지만,497 또 스파르테의 내란이 아테나이로서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곤란에 빠진 옛 동맹에게 동맹 파기를 선언할 수도 없었던 아테나이 민중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키몬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로 정돈된 지원군을498 주어 스파르테로 향하게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키몬은 지진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던 스파르테를 도와 스파르테가 본격적인 진압에 나서는 것을 보고 아테나이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인명과 가옥이 죽고 무너진 지진의 혼란 속에서의 진압이 시간을 끌었고, 시간을 번 반란군에 멧세니아까지 동조하여 이토메 산성에서 장기전으로 나오자 공성에는 무기력한 스파르테 전사들로는 간단치 않아진 농성 해제 때문에 낭패감에 빠진 스파르테가 공성이 장기長技인 아테나이의499 지원을 재차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지원 요청에는 선뜻 나서지 않았던 아테나이가 두 번째 요청에는 무슨 무력 시위라도 하듯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전에 느끼지 못했던 굴욕감으로 견딜 수 없게 된 스파르테의 전사들이 멧세니아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아테나이군을 라코니케에 들여놓을 수 없다고 나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500 그러나 라코니케 국경에 도착하여 입경을 거부당한 키몬과 아테나이 지원군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자신들의 처지에 어안이 벙벙해졌고,501 다른 동맹 도시들의 지원군이 스파르테 전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입경할 때 되돌아서야 하는 아테나이 지원군의 황당함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바뀌어져 있었지요. 처음 사절이 와서 신전에 엎드리며 지원을 요청하여 내키지 않는 걸 도왔지만,502 이토메 산성 공격에 도움을 달라는 두 번째 요청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납득할 만한 이유도 대지 못하면서 얼렁뚱땅 입경을 거부하는 스파르테의 태도 때문에 분노가 치솟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테나이의 분노는 스파르테와의 대페르시아 동맹을 파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파르테의 오랜 숙적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고 나아가 텟살리아도 그 동맹에 넣었으며, 나중 메가라가 국경 문제로 코린토스와 다툴 때 메가라와 동맹을 맺고 성벽까지 쌓아주고 그 성벽을 지킬 수비대도 보내줄 정도였습니다.503 이런 둘도 없는 기회를 놓칠 리 없는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테라면 이가 갈리는 민중들을 동원하여 재판으로 처치하지 못한 키몬을 도편추방하여 페르시아와 전쟁을 위한 체제에 종언을 고하고, 아레오파고스의 재판권을 민회로 넘겨는 민중 위주의 체제 개혁을 단행하며 스파르테와의 대결을 위한 새로운 체제를 열었습니다. 이 과정에 에피알테스가 암살을 당하는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귀족을 대변하는 투퀴디데스의 존재감은 날이 갈수록 엷어졌고 에피알테스가 없는 페리클레스는 유일한 민중의 지도자가 되어 아테나이를 장악하였지요. 아테나이에, 아니 헬라스에 페리클레스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습니다.504

 

11.8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스파르테와의 대결이라는 분위기 속에 권력을 잡은 페리클레스는 그의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 때문에 도편추방당했을 크산팁포스의 아들 페리클레스는 그가 얼굴은 물론 목소리까지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똑 닮았다고 말하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주목을 피해 정치에 뜻을 두고도 정치적으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으면서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었던 반면, 그 세월 동안 키몬은 발군의 실력으로 페르시아 전쟁 뒷처리를 끝내고 아테나이에게 헬라스에 아테나이 제국을 건설하는 기초를 닦아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헬라스의 페르시아가 되는 제국의 꿈을 키워주었지요. 아테나이 사람들은 칼키스와 보이오티아로부터 싸워 이긴 보상을 받자 전쟁에서 이기면 돈을 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밀레토스의 독립을 위한다는 명분 뒤에 숨어 사르데이스를 약탈하여 돈을 벌려다 실수로 사르데이스를 불태운 대가를 치르느라 페르시아가 두 번이나 아테나이를 불태우는 걸 보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키몬이 권력을 쥔 그 십 년 동안 전쟁으로 얼마나 그들과 그들의 도시가 안전과 자유가 튼튼해졌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는가를 기억했습니다. 돈을 버는 전쟁을 위해 키몬을 장군으로 뽑아주었고, 전쟁의 승리는 키몬에게 권력을 안겨주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나 아리스테이데스나 크산팁포스와 달리 키몬은 아테나이 권력자의 대표적인 지위인 아르콘에 단 번도 오르지 않았지만 전쟁이 있는 한 장군으로서 아르콘보다 앞선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 이기는 것이 그 어떤 도시의 일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모두가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말했지만 전쟁의 승리로 생기는 돈은 도시와 도시민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것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스파르테와의 대결에 미온적인 키몬이 아테나이의 번영을 위해 스파르테와의 전쟁을 불사할 리 만무해보이자 아테나이는 키몬을 버릴 준비가 되었고, 에피알테스를 앞장세운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 사람들로 하여금 키몬을 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키몬의 십 년 권력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잘 아는 페리클레스는 권력을 위해 아르콘 대신 이미 키몬이 잘 닦아둔 장군의 길로 나섰고, 장군의 권력은 전쟁에서 나올 것이므로 그가 권력을 쥐고 싶은 한 언제나 전쟁이 필요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는 이제 죽을 때까지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킨다며 그리고 이에 더해 전쟁으로 돈을 벌어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번영을 이룬다며 아테나이를 끝없는 전쟁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었습니다.505

 

11.83. 이런 페리클레스가 권력을 쥐었고, 그 보답으로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그가 권력자가 되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으로 200척의 아테나이와 동맹 함대를 퀴프로스로 보내 지중해 진출 공략을 계속하였고, 그가 권력자가 되어 달라지는 것으로 지상군을 새로운 동맹 아르고스로 보내 과감히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와의 전쟁에 휘말리도록 만들었습니다.506 물론 전쟁은 스파르테가 비록 소수이긴 했지만 군대를 아르고스로 보낸 것에서 발단하게 되었는데, 스파르테는 스파르테대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정이 있었지요. 일단 반란자들을 이토메 산성에 가두었고, 지진 복구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도시 안의 급한 불이 꺼지자,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은 아르고스에 군대를 보내 힐난한 것은, 비록 지진 때문에 타소스의 경우에는 보여주지 못했지만, 지진의 재해를 입기 전에 이미 아테나이의 제국 건설이 페르시아가 헬라스 도시들에게 물과 흙을 받아 그들을 종속시키고 억압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고 타소스 섬의 구조 요청을 받이들이면서 나머지 헬라스 도시들이 아테나이로부터 스스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인다면 이를 도와주어야만 한다고 나섰던 자신들의 태도를 다시금 헬라스의 도시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가 서둘러 아르고스에 지원군을 보낸 것도 아테나이 역시 동맹 도시의 안전과 자유에 대해 그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직접 스파르테를 상대로 아르고스의 오이노이에서 싸워 간단히 격퇴시켜버렸고, 비록 상대가 소규모의 군대였고 이쪽은 아르고스와 연합이긴 했으나 아테나이는 스파르와의 첫 전투에서 이겼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의기양양했습니다.507 반면에  오이노이에서 당했던 의외의 일격에 의기소침해진 때문인지 스파르테는 이듬해 국경 문제로 코린토스의 공격을 받은 메가라의 지원 요청을 방치했는데, 이 바람에 메가라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서 이탈하여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고 아테나이의 지원을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새로 얻은 동맹 아르고스 앞에서 자신들의 힘을 보여 신이 난 아테나이가 메가라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고 동맹을 체결한 것은 헬라스 도시들에게 스파르테보다 높아진 아테나이의 위상을 증명해주는 것이어서, 내친 김에 아테나이는 안전과 자유를 위협당하는 동맹도시를 지켜주기 위해 아테나이가 얼마나 진지하게 지원하는지를 모두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메가라에서 외항 니사이아까지 성벽을 쌓아주고 덤으로 아테나이군이 수비토록 조치해주었습니다. 이 일로 코린토스의 미움을 사기는 했지만, 아테나이는 군사적 영향력을 펠로폰네소스 입구인 이스트모스에까지 넓힐 수 있었으며, 메가라가 코린토스 만에 가지고 있던 페가이 항구도 아테나이의 기지로 쓸 수 있어 필요하다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단인 코린토스 만까지 함대를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508 이런 와중에 아테나이가 퀴프로스를 치기 위해 동맹도시들과 함께 200척의 거대한 함대를 꾸려 원정에 나선 일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509 키몬이 에우뤼메돈 하구에서 거둔 전과로 퀴프로스 섬 근처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페르시아 함대 대신 퀴프로스 섬 도시들의 함선들이 준동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지중해 진출로 경제적 성과를 거두고 있던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자칫 도편추방당하고 없는 키몬의 공적을 상기시킬 수 있다는 정치적 이유였을 것이었지만, 마침 페리클레스로서는 욕심이 생길 만한 일이 아이귑토스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퀴프로스에 머물던 아테나이 함대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3년이나 버티던 타소스가 아테나이에게 항복할 즈음 페르시아의 수사에서는 궁정 반란으로 크세르크세스가 비밀 고문관과 내시에게 암살당하고 박트리아 총독으로 지내던 셋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모반을 평정하여 페르시아 왕이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510 캄뷔세스 이후 페르시아의 왕이 바뀔 때마다 일어난 속주들의 반란이 이번에는 박트리아에서 시작되어511 아이귑토스에서까지 일어났는데, 이번 아이귑토스 반란의 특이한 점은 자체 내의 동력이 아니라 이웃 리뷔에의 선동으로 일어났다는 것이었지요. 아이귑토스 국경의 리뷔에 왕 이나로스가 파로스 섬 건너 마레이아를 기지로 삼아, 거의 모든 아이귑토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도록 하면서, 아울러 스스로 그들의 지도자로 나서자, 마침 박트리아의 반란도 진압하고 왕권도 확립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숙부인 아카이메네스에게 기병과 보병을 합해 300,000명이 넘는 군대를 주어 토벌에 나섰고,512 이에 이나로스가 아테나이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요.513 마침 아테나이는 함대가 퀴프로스에 있었고, 이나로스가 내건 보상의 조건도 좋았고,514 아이귑토스에 기지 얻어 지중해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가질 수 있겠다 싶어, 아테나이와 동맹들의 함선 200척을 보냈고,515 네일로스 강을 거슬러 올라 강을 장악하고 멤피스를 3분의 2나 점령한 다음, 페르시아와 메디아 사람들과 반란에 가담치 않은 아이귑토스 사람들이 들어가 버티는 나머지 3분의 1을 공격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516 그리고 해가 바뀌자 마치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쟁 솜씨를 계속 보여주고 싶었는지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에 남은 함대를 아르골리스 만으로 보냈는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헤르미오네 부근 할리아이에 상륙했지만 코린토스와 에피다우로스 연합군에게 격퇴당하자 함대를 이끌고 에피다우로스로 갔고, 에피다우로스의 작은 섬 케크뤼팔레이아에서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만나 이김으로써 일진일퇴했습니다.517 아테나이 함대가 자기들 눈 앞을 지나 아르골리스 만으로 가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발을 들여놓질 않나 에피다우로스 앞바다에서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상대로 해전을 벌이며 사르니코스만을 휘젓질 않나 더 이상 두고보기만 하다간 그들의 살길이 막힐 것이 뻔한 아이고스는 아테나이 함대와 건곤일척의 일전을 외치고 나왔으나 레오크라테스가 이끄는 아테나이 함대에게 70척의 함선을 잃고 오히려 섬이 포위공격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고, 위기에 처한 아이기나를 돕기 위해 인근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지원군을 보냈고, 코린토스는 아테나이 군대를 아이기나에서 메가라로 돌리도록 메가라를 공격했지만 아테나이는 메가라를 지원하기 위해 소년병과 장년병을 보내면서518 아이기나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고, 메가라를 공격한 코린토스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해야 했고, 결국 아이기나는 타소스처럼 농성으로 버텨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11.84. 한편, 소년병과 장년병들을 투입해해야 할 만큼 전선의 확대를 피할 수 없게 된 아테나이는 아테나이대로 텅 빈 아테나이를 지키는 성벽 뿐만 아니라 함대와 상선의 출입을 보호할 성벽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팔레론과 페이라이에우스 두 외항 둘레와 아테나이를 잇는 통로에 성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519 그런데 그 성벽은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함선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었지만, 아티케에 포도와 올리브 농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을 아테나이의 안전으로부터 격리시키는 방벽으로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를 벌써 세 해 연속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었고, 비록 아르고스와 함께 스파르테를 아이노이에서 이겼다고는 하나, 언제라도 스파르테가 전면에 나설 경우 틀림없이 전세가 뒤집힐 텐데 그때 아티케의 안전을 아테나이 함대와 그 배를 젓는 노꾼들이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런지 묻지 않아도 대답은 뻔해보였습니다. 페리클레스도 그렇고 함대도 그렇고 그 함대의 노꾼들 그렇고 저렇게 성을 쌓는 것은 아티케나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의 권력 유지와 그들의 돈벌이를 위해 안심하고 배를 저어 전쟁에 나가기 위한 것으로 보였지요. 전쟁에 나서며 남은 가족들에게 그들이 도시를 비워도 성벽이 지켜줄 것이라고 말할 것이므로, 자기들에게도 농장을 그냥두고 집을 비운 뒤 성벽 안으로 피난하면 안전하다고 대답할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땅을 가지고 가지는 못 한다고 말이지요. 기가 찰 노릇은 이 모두가 아고라의 테테스도 아티케의 농장 주인도 한 손을 들어 결정하는 민주정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도시 일을 맡아볼 때에는 가급적 전쟁을 피하려 했고,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해야 하더라도 농사철은 피해서 했는데, 노꾼들이 중무장보병들을 배에 태우고 함께 전쟁에 나서면서부터는 전쟁이 시도 때도 없이 이곳 저곳 동시에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농사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성벽 안에서 민주정이 더 튼튼해지기 전에 무슨 일이라도 벌여야 했지요.520 이제 성벽이 높아지는 것을 보는 아티케의 농장 주인들의 분노는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뒤엎으려는 내분을 준비하고 있었고, 농사보다는 전쟁으로 먹고살려는 사람들을 위해 신은 본격적인 전쟁을 따로 마련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스파르테와 동맹들이 아테나이와 동맹들이 보이오티아에서 혈전을 벌인 타나그라 전투였습니다. 포키스가 이웃이자 같은 신성동맹이면서 오랜 앙숙인 도리스로 쳐들어가 도리스 사람들의 도시들을 점령하자,521 오이노이 이후 오래 참고 있었던 스파르테가 직접 도리스 구원에 나선 것은 도리스가 그들의 본디 고향이기도 해서지만, 보이오티아까지 넘보는 아테나이의 제국 팽창을 위한 군사적 모험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일 것이었습니다. 사실 포키스가 왜 느닷없이 스파르테의 개입이 뻔해보이는 도리스를 침략했을까요? 테살리아와 메가라와 동맹을 맺은 아테나이가 보이오티아를 넘본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이는 보이오티아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는 말이고, 설사 스파르테가 도우려 해도 보이오티아로 가는 길목이 먹혔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스파르테가 보이오티아로 나올 수 없다면 더 먼 도리스를 도우러 오긴 애초에 걸렀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도리스를 구원하기로 나섰지만 스파르테가 도리스로 가는 길이 마땅치 않았는데, 크리사 만을 건너기엔 아테나이 함대가 마음 쓰였고 이스트모스로 나가 게라네이아 고원을 넘자니 높고 험한 지형인데다가 작년에 코린토스군이 이곳을 거쳐 메가라를 침공한 이후 메가라와 아테나이의 감시가 거슬렸지요. 그런데 포키스를 치러 가기는 가야겠는데, 진로가 마땅찮아 출발을 미루고 있던 스파르테에 은밀히 접근해온 진객이 아테나이의 민주정 폐지와 장성 축조의 중단에 스파르테의 도움을 달라고 하는 일이 생기자, 스파르테는 곧바로 포키스로 가는 대신 일단 보이오티아로 가서 거기서 아테나이의 움직임을 보아가며 안전하게 포키스로 가는 방법을 찾기로 정하고, 스파르테에서 1,500명, 동맹도시들에서 10,000명의 중무장보병을 뽑아 니코메데스에게522 지휘를 맡겨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로 나아가게 했고,523 이렇게 스파르테가 보이오티아로 출병하는 것을 본 아테나는 스파르테가 게라네이아 고원을 통해 곧바로 포키스로 가지 않고 보이오티아로 나오는 것이 아테나이를 직접 겨냥하여 출병한 것으로 보고,524 소문처럼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전복하려는 것 아닌지 의심하는 가운데, 그래도 아테나이가 스파르타의 퇴로를 장악하는 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도시에 남은 전군을 동원하여 아르고스가 보낸 1,000명과 다른 동맹의 지원군을 포함 모두 14,000명을 이끌고 보이오티아로 나아갔는데, 물론 텟살리아도 기병을 보내 합류하였습니다.525 3년 앞서 오이노이에서의 일전이 맛보기 전투였다면 타나그라의 전투는 스파르테와 아테나이 양대 진영이 동맹군을 합류시켜 본격적으로 벌인 첫 전투여서 쌍방이 모두 격렬하게 다투었고, 텟살리아가 아테나이를 배신하고 스파르테 쪽에 가담하는 변고도 일어나서, 결국 스파르테의 승리로 끝났지요. 스파르테와 그 동맹군은 메가라로 들어가 농장의 과수를 모조리 베는 등 동맹을 바꾼 분풀이를 한 다음 게라네이아 고원과 이스트모스를 경유하여 돌아갔지만, 원정이 스파르테에게 가르쳐준 것은 잦아질 것 같은 아테나이와의 전쟁에 거리낌 없이 나서기 위해서는 이토메 산성에 반란 노예들을 어떤 형태로든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끝난 전투의 두 달 뒤526 해가 바뀌고 봄이 오자 아테나이는 다시 또 다른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빼앗아 돈을 버는 전쟁에 나섰습니다. 보이오티아로 나가 타나그라를 점령하고 성벽을 허물었고, 테바이를 제외한 보이오티아 도시들을 아테나이의 동맹으로 바꾸었으며,527 아이기나를 점령해 강제로 아테나이의 동맹에 가입시키고 분담금을 부과하는가 하면,528 코린토스 사람들의 도시 칼키스를 점령하고, 코린토스 만의 시퀴온을 공격하기도 하고, 스파르테가 축출한 반란 헤일로타이들을529 오졸라이 로크리스에게서 빼앗은 나우팍토스 항에 집단 이주시키는 등, 아테나이는 헬라스에서 이 모든 눈부신 활약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11.85. 헬라스에서 아테나이의 성과가 눈부셨던 반면, 아이귑토스에서는 처음 네일로스 강을 장악하고 멤피스를 점령한 아테나이와 동맹 함대의 눈부셨던 활약이 새로 구성된 페르시아 군대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네일로스 강 하구 델타의 한 섬에 자랑스러운 삼단노선들과 용맹스런 군사들과 함께 조금씩 파묻히고 있었습니다. 박트리아의 반란도 진압하고 왕권도 확립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주위의 반대로 아이귑토스 반란 진압에 직접 나서지 못하게 되자 함대와 대군을 붙여 동생 아카이메니데스를 보냈으나 멤피스에서 이나로스와 아테나이 연합군에 패해 동생도 위신도 모두 잃고말았고,530 아테나이와 동맹군은 계속 온갖 전투를 이어가며 아이귑토스를 지배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테를 매수하여 이들이 아티케를 공격하면 아테나이가 아이귑토스의 병력을 뺄 것을 기대하고 매부인 메가바조스에게 돈을 주어 스파르테로 보냈으나 돈만 쓰고 별 소용이 없자, 그에게 대군을 주어 직접 토벌에 나서게 했는데,531 아이귑토스로 간 메가바조스는 흩으졌던 아카이메네데스의 군대를 다시 규합하여 전열을 갖추는 한편,532 이나로스의 반군의 지원을 분리시킨 다음, 일제히 공세를 취해 아테나이와 동맹군을 멤피스에서 물러나게 했고, 아테나이와 동맹군이 네일로스 델타의 프로소피티스라는 섬으로 들어가 버티자, 1년6개월 동안 섬을 포위공격하면서 네일로스 강의 물줄기를 바꾸었고, 강이 바닥을 드러내고 함선들이 땅에 얹히자 프로소피티스 섬으로 걸어서 들어가 남은 아테나이와 동맹군들을 모두 죽였는데,533 이로써 페르시아는 6년에 걸쳐 아이귑토스에 쏟은 아테나이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이런 사정도 모르고 섬에 갇힌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아이귑토스에 도착한 50척의 아테나이와 동맹의 함대가534 네일로스 강 하구의 멘데사에 정박하고 상륙한 순간 지상에서는 페르시아 군대가 바다에서는 포이니케 함대가 동시에 습격하는 바람에 또 다시 전멸당하고말았지요. 결국 두서너535 사람이 리뷔에를 거쳐 퀴레네까지 도망쳐 왔을 뿐 아이귑토스에서 함선과 군대가 전멸당한 타격이 너무나 커서,536 이 이후 헬라스는 더 이상 지중해와 아이귑토스를 넘겨볼 엄두가 날 수 없게 되었지요.537 아테나이를 섬멸하고 같은 반군에 배신당한 리뷔에 왕 이나로스를 잡아 책형에 처한 페르시아는 아이귑토스의 대부분을 다시 장악했고, 아이귑토스에서 가장 호전적인 부족이 사는 광활한 늪지가 남았지만 당장에 어쩔 수 없어 시간을 두고 진압키로 했습니다.538 

 

11.86. 아이귑토스에서 아테나이와 동맹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은 아테나이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그 누구도 당장 아이귑토스로 가서 페르시아를 몰아내자고 나서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민회에서도 아고라에서도 더 이상 아이귑토스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페리클레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충격에 빠져 넋을 잃은 아테나이 사람들은 함께했던 동맹도시들의 상심에 대해서는 아랑곳없이 페르시아 함대가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으로 와서539 빼앗아갈지도 모른다며 그들에게 가부도 묻지 않고 신전 금고에 모아둔 동맹이 낸 분담금을 아테나이 아크로폴리스의 불에 탄 파르테논 신전 금고로 옮겼습니다.540 아테나이 사람들은 물론 꼬박꼬박 분담금을 내던 동맹들도 이런 이유로 아테나이로 옮겨진 금고의 돈이 페리클레스가 주장한 대로 아테나이 사람들을 위해 쓰이면서 그들의 분담금이 조공으로 변하고 그들의 지위가 분담금을 내는 동맹에서 조공을 바치는 종속도시로 바뀌고, 아테나이가 종속된 도시들과 그 도시민들의 안전과 자유를 좌지우지하는 제국을 이루었다는 것을 그때는 미쳐 깨닫지 못했습니다.541 그렇지만 금고를 둔 불에 탄 신전만은 아테나이 사람들의 마음에 쌓인 재를 털어내고 싶도록 만들었을 것이어서, 아이귑토스에서 또 다시 당한 페르시아와의 관계 설정이 끝나는 대로 아크로폴리스에서 페르시아의 흔적을 쓸어낼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크로폴리스오 옮겨온 분담금 금고는 페르시아고 아이귑토스고 포이니케고 하는 이어족들에게는 물론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 사람들에게 세상을 지배하는 새로운 아테나이의 위상을 과시할 것이었습니다.

 

11.8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아이귑토스의 참담한 실패에 대해 서로 암묵적으로 입을 다물게 하고, 아테나이의 동맹들이 낸 동맹군 유지 분담금을 델로스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옮겨서, 그 돈으로 침울해진 도시와 도시민에게 무슨 무슨 명목을 달아 돈을 주면서, 아테나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운을 차린 아테나이는, 아이귑토스에서의 참담한 실패와 혹시 모를 페르시아의 대규모 반격이 마음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스 안에서 제국을 확장하려는 군사적 모험을 끊지 않고 계속해나갔지만 페르시아의 반격 우려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탓인지 그 성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지요. 쫓겨난 텟살리아 왕 오레스테스를 복권시켜주기 위해 아테나이군은 동맹에 새로 편입된 보이오티아와 포키스에소 차출된 병력과 함께 텟살리아의 파르살로스로 갔으나 함락시키지 못해 아테나이로 되돌아왔고, 메가라의 코린토스만 항구인 페가이에 있던 아테나이 함대는542 시퀴온에 상륙하여 이겼으나, 새로 동맹이 된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단 아카이아의 군대와 함께 코린토스 만을 건너 아카르나니아의 도시 오이니아다이를 점령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아테나이로 되돌아와야 했지요. 이 이후로도 펠로폰네소스 견제와 제국 확장을 위한 군사 활동이 3년이나 계속되었지만 별무성과였고, 도편추방되었던 키몬이 10년이 지나 아테나이로 돌아오자543 갑자기 아테나이의 군사 활동이 전과 달라졌습니다. 아테나이의 아이귑토스 진출 실패는 반대로 포이니케의 활발한 아시아 진출을 가능케 하여 무엇보다 먼저 아시아의 헬라스 도시들을 움츠려들게 하여, 이에 대한 불만이 아시아의 동맹도시들 사이에 팽배해지고 있는 데다가, 지금까지 탈 없이 이끌어온 아테나이 내정의 변화나 격돌을 바라지 않는 페리클레스가 키몬이 페르시아를 상대로 이룬 군사적 성과로 아테나이에 바친 영광과 재물로 쌓은 명성을 존중하면서544 그에게 아이귑토스 실패 이후로 포이니케 주도의 페르시아 함대에 밀려온 퀴프로스와 아이귑토스에 걸친 지중해에서의 제해권 회복 과제를 맡아달라 했고, 같은 이유로 키몬은 10년 공백이 낳은 내정에서의 취약한 지지층을 일시에 규합할 기회로 삼을 작정으로 페리클레스의 제의를 수락함으로써 내정의 변화 대신 군사 활동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이제 헬라스 문제는 페리클레스가, 대외적인 문제는 키몬이 맡기로 되었고, 다시 장군으로 뽑힌 키몬은 전선의 확대를 피하고 아테나이의 군사력을 오직 페르시아를 막는 데만 쓰기 위해 헬라스 안에서의 모든 분쟁을 향후 5년 동안 중단할 것을 제안하고, 직접 나서 펠로폰네소스 도시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다음, 동맹들과 꾸린 200척의 함대로 퀴프로스로 나아갔습니다.545 키몬은 제일 먼저 페르시아 함대의 기지가 된 퀴프로스의 키티온을 포위공격했고, 마침 아이귑토스에서 유일하게 계속 페르시아에 저항하고 있던 아뮈르타이오스가 구원을 요청해 함대에서 60척을 떼어 아이귑토스로 보낸 뒤, 한동안 이어진 키티온 공략 중 전사하고 말았고,546 키몬이 죽고 공략도 여의치 않자 귀국을 결정한 아테나이와 동맹 함대는 키티온에서 물러나 살라미스547 앞바다에서 조우한 페르시아 함대를548 상대로 해전과 지상전을 치러 모두 이기고, 아이귑토스로 간 60척을 기다려 함께 돌아왔습니다.549 이제 더 이상 페르시아를 상대할 키몬이 없는 아테나이는 대부분이 동맹인 아시아의 헬라스 도시들이 받을 페르시아의 압박을 해소시켜주지 못할 경우 일어날 그들의 반발을 고민해야 할 것이었고, 아울러 페르시아나 퀴프로스나 아이귑토스 때문에 약해진 군사력 때문에 그동안 아테나이와 동맹들의 대함대를 이끌고 헬라스 안의 여러 섬들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를 마구 휘젓고 다니면서 동맹이든 아니든 모든 헬라스 도시들에게 근심을 끼쳤던 업보에550 대한 반발도 고민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제 아테나이와 페리클레스는 더 이상 페르시아나 퀴프로스나 포이니케나 아이귑토스 등 헬라스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을 것이었고,551 헬라스 안에서의 아테나이 제국을 확장할 여유도 없이 어떻게 하면 다른 도시들의 반발을 물리치며, 오로지 이미 건설된 제국을 건사하는 일에만 매달려야 할 것이었고, 과연 지금까지의 제국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지 늘 노심초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11.8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키몬의 죽음으로 헬라스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끈552 페리클레스는 남은 평화의 시간을 단지 군사력이나 키우면서 지내지 않았습니다. 한풀 꺾인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도시 아테나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도시인가를 보여주고, 다시 한번 아테나이 사람이아는 자부심을 갖도록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함선의 숫자를 늘이고 군사를 키워 패전에 대한 부담감을 지우고, 기회가 오는 대로 다시 전쟁을 벌이고 이겨서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아 제국을 키워나가는 것이 민중들의 기세를 올리는 가장 확실한 길이겠지만, 전쟁을 통해 제국을 키우고 무력으로 제국을 유지하기에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숫자가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고,553 용병이 움직이는 함대로 제국을 이끌기에는 모반의 위험이 너무 커 보였습니다. 페리클레스가 볼 때 전쟁에 이겨 전리품으로 도시를 풍성하게 했던 시절은 키몬과 함께 땅에 묻혔고, 이제는 더 이상 도시민을 줄이는 전쟁이 아니라 도시민을 늘이는 평화가 진정 도시와 도시민을 풍요롭고 번창하게 하는 시절이 온 것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그 평화가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어떠한 경우에도 훼손되서는 아니될 것이므로 당장은 아테나이와 제국을 지키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회복하여 그 누구도 아테나이를 넘볼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긴 하지만, 아테나이 사람들이 전쟁뿐만 아니라 지금 같은 5년짜리 평화 속에서도 제국을 지키고 번영을 이끌어 나간다는 긍지를 가지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제일 먼저 전쟁 일이 아닌 일반적인 도시 일을 하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수당을 지급했고,554 판아테나이아 축제에 노래 경연 대회를 열고 노래하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주어 지원했습니다.555 이것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노를 젓는 일 말고도 먹고 사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고, 반응이 너무 좋아 자신감을 얻은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나면 아테나 여신을 위한 신전을 새로 지어올리겠다고 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맹세를 기억하고 불에 탄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은 이어적의 침공을 기억하는 기념물로 그냥두고 아크로폴리스에 새로 터를 잡아 더 큰 파르테논을 다시 짓는 계획을 세우고 준비가 되는 대로 공사를 착수토록 했습니다.556 이렇게 페리클레스가 군사력 회복과 함께 아테나이를 평화로 번영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이 다섯 해의 휴전이 끝났습니다.557 그래서 휴전이 끝나고 처음 움직인 것은 아테나이가 아니라 스파르테와 보이오티아였는데, 먼저 스파르테 군대는 델포이로 가서 아폴론 신전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포키스 사람들을 몰아내고 신전을 델포이 사람들에게 되돌려준 뒤 돌아갔고,558 이어서 아테나이에게 쫓겨났었던 보이오티아의 오르코메노스, 코로네이아, 그리고 그밖의 몇몇 도시 사람들이 돌아와 그들 도시를 아테나이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되찾겠다고 나섰지요.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아테나이는 델포이에 군대를 보내 신전을 다시 포키스 사람들에게 돌려주고,559 또 1,000명의 자신들 중무장보병과 다른 동맹의 지원군을 톨미데스에게 주어 진압에 나섰는데, 코로네이아를 함락하여 주민들을 노예로 삼은 뒤 수비대를 남기고 돌아가던 중, 보이오티아는 물론 로크리스와 에우보이아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이 연합한 공격에 패해 결국 아테나이는 포로로 잡혔던 아테나이 사람들을 데리고 철수하고, 추방자들은 복권되어 보이오티아의 모든 도시들이 주권을 회복했습니다. 보이오티아 사람들이 아테나이에 반기를 들어 그들과 그들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되찾는 것을 본 에우보이아 사람들이 반기를 들고나서자 페리클레스는 바다 건너 에우보이아 섬으로 갔고, 이 틈을 노려 이번에는 메가라가 반기를 들자 코린토스를 위시한 시퀴온과 에피다우로스가 지원했고, 메가라에 주둔하던 아테나이의 수비대가 니사이아 항으로 도망친 몇몇을 빼고는 메가라 군대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자 페리클레스는 황급히 에우보이아로부터 돌아와야 했는데, 이렇게 다급해진 아테나이로 스파르테의 플레이스토아낙스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군대도 함께 데리고 쳐들어와서는 엘레우시스와 트리아를 약탈하고 아티케까지 들어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스파르테 왕을 돌려세우고 아테나이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560 다시 에우보이로 건너가 섬 전체를 완전히 복속시켰고, 섬의 도시들 가운데 헤스티아이아만은 주민들을 내쫓고 아테나이 사람들 1,000명을561 이주시켜 그곳을 새로운 식민도시로 만들었지만,562 강제로 복속되어 동맹이된 도시들이 반기를 들고 동맹을 이탈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이오니아에서는 그들끼리 주도권 쟁탈을 벌이며 아테나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판에다, 이미 한번 아티케로 쳐들어온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내일이라도 다시 쳐들어오리라는 것도 너무나 뻔해서, 불안정한 상태에서 제국을 유지하기보다는 분쟁의 일부를 양보하면서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과 평화를 이루어 안정된 상태에서 제국을 재정립하고 군사력을 회복시켜나가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고, 에우보이에서 돌아온 뒤 바로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에게 평화를 제의하고 협상에 들어갔고, 골자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한다는 것으로 아테나이는 니사이아와 페가이 두 항구를 메가라에게 돌려주고, 트로이젠과 아카이아의 주권을 회복시켜주면서 향후 30년 동안 휴전하고 분쟁이 생기면 전쟁이 아니라 먼저 조정으로 해결한다는 조약을 맺었습니다.563 

 

 

11.8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조약으로 평화를 얻은 페리클레스는 지금까지 전쟁으로 일군 제국 덕분에 이제는 평화로 아테나이를 번성케 하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공무를 보는 시민들에게 지급하는 범위를 넓혀나갔고, 그렇지 못한 시민들은 아테나이가 벌인 아크로폴리스 단장과 도시 건설 사업에 기술자로 혹은 일꾼으로 일해 돈을 벌 수 있게 했습니다. 물론 군사력 증강을 위해 한 해 60척의 함선을 새로 건조했고, 아울러 그 배들을 한 해 여덟 달을 운용하며 노꾼들 훈련도 시키면서 먹고 살 돈을 주었지요. 이 돈들은 주로 제국의 동맹들이 낸 분담금으로 충당하였으므로 허약한 정적 투퀴디데스가 동맹의 돈을 동맹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아테나이를 위해 쓴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대들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그가 드세게 나오자 그 돈으로 잘 먹고 잘 살게 된 민중들이 일찌감치 그를 멀리 추방시켜버려,564 그 이후로는 권력을 독점하고 명실상부한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열었지요.565 이제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제국의 중심 아테나이가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안전하고 자유로운 도시임을 만방에 알렸고, 제국의 도시 아테나이에는 모든 세상의 뛰어난 신과 사람과 문물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고, 춤과 노래가 모두의 흥을 북돋우고 있었습니다. 두 번이나 도시를 버리고 도망쳤던 아테나이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불과 한 세대만에 헬라스에서 최고의 번영을 누리는 성공의 바탕에는 그동안 이룬 아테나이 제국이 있고, 그 제국은 아테나이 함대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테나이는 물론 전체 헬라스에서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566 물론 아테나이 함대가 강력한 이유가 그 함대를 움직이는 노꾼들이 바로 아테나이를 움직이는 민중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말해 아테나이의 민주정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테바이와 같이 해군이 없거나 스파르테와 같이 있어도 강력하지 못한 도시들은 몰라도 코린토스나 사모스 같은 제법 강력한 독자 함대를 가진 도시들은 모두가 그들도 아테나이처럼 식민도시를 세우고 스스로 안전과 자유를 지킬 힘이 없는 도시들을 종속시켜 제국을 건설할 꿈을 펴고 싶었지요. 물론 낙소스나 타소스나 아이기나가 그 꿈 때문에 아테나이에 꺾여 성벽과 함대가 없어지고 조공까지 바쳐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아테나이의 융성은 많은 도시들에게 그 꿈을 쉽게 접지 못하도록 했고, 그 때문에 이번에는 사모스가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사실 사모스의 꿈은 아테나이처럼 원대하지 않아 이오니아의 도시들 가운데서 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정도여서 프리에네를 손아래 두려 했는데, 밀레토스가 반발하여 싸움이 났고,567 싸움에 진 밀레토스가 사모스의 민주정파와 연계하여 아테나이에 사모스를 탄핵했고, 페리클레스는 당장에 달려가 사모스의 집권 귀족들을 권력에서 내리고 인질로 잡아568 반발에 대비하면서 사모스에 민주정을 세우는 것으로 며칠 만에 간단히 마무리짓고 약간의 수비대만 남기고 돌아왔는데, 권력을 빼앗긴 사모스 사람들이 섬을 빠져나가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용병 700명을 데리고 돌아와 섬과 권력을 탈환하고 아테나이의 수비대와 공직자를 페르시아로 보내고 렘모스 섬에서 인질들을 구출한 다음 밀레토스를 응징하러 나섰지요.569 마침 뷔잔티온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아테나이는 우선 사모스 반란 문제부터 처리하기로 하고 동맹들과 함께 나서 우여곡절 끝에 아홉 달만에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570 결국 사모스는 함대를 잃고 성벽을 허물고 인질을 내고 전쟁 보상비를571 분납하는 조건으로, 사모스가 결딴나는 것을 본 뷔잔티온은 그저 원 상태로 돌아가기만 해도 감지덕지하여, 다시 이테나이 제국에 편입되었습니다. 낙소스나 타소스나 아이기나가 삼년을 버틴 것에 비하면572 사모스가 펠로폰네소스의 도움을 받는 데 실패하고573 결국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았지만 1년도 채 버티지 못한 것은, 물론 페르시아가 개입된 것이라면 최단 시일 안에 가장 혹독한 방법으로 끝내야 다시는 제국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페리클레스가 새로 공성기까지 동원하며574 사모스 귀족들의 농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사모스의 민주정파가 귀족들의 농성에 전폭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겠지요. 사모스 귀족들에 대한 응징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누구나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했고, 아테나이 사람들까지도 아스파시아의 베개송사 탓이라고 수근거릴 정도였지요.575 모반 이후 사모스는 아예 아테나이의 식민도시이기나 한 듯이 정치 체제를 민주정으로 바꾸었고, 섬은 아테나이 함대의 이오니아 기지가 되고 말았지요. 특히 이번 사모스의 반란에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이오니아에서의 반란이 주로 귀족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페르시아에 붙느냐 헬라스에 붙느냐로 일어난 것이었는데 반해, 이번 사모스 반란은, 비록 사모스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활동이 발단이었지만, 아테나이의 개입으로 귀족들과 민중들의 내부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면서,576 섬이 페르시아냐 헬라스냐로 갈라져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모스를 평정하고 민주정을 세워 뒷 걱정을 없앤 페리클레스는 이제 제국의 통제를 강화하고 제국의 안전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것이었지만, 헬라스 세상의 사정은 아테나이의 민중의 대두와 그들의 성공을 닮으려는 다른 도시 민중들의 권력투쟁이 싫든 좋든 헬라스의 다른 도시들로 아테나이를 끌어들일 것이었습니다.577

 

11.90. 그리고 또 여러 해가 지나578 아크로폴리스의 새로운 파르테논이 마지막 단장과 채색만 남겨놓은 채 그위용을 드러내고 있을 때, 케르퀴라579 섬의 사절이 아테나이를 찾았습니다. 케르퀴라가 시켈리아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아드리아스 바다를 낀 이어족들과 연결하는580 뱃길의 중요한 기항지라 그 중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워낙 아테나이가 아이가이온 바다와 아시아 연안 바다에 군사적 경제적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30년 휴전조약이 펠로폰네소스 건너에 대해서 아테나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정에 대해 별반 아는 게 없었는데, 그들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과 동시에 코린토스에서도 사절을 보내 아테나이가 케르퀴라 문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청했지만,581 아테나이의 관심은 그들 간의 마찰이582 아니라 케르퀴라가 가진 아테나이 다음으로 강하다는 해군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첫날 민회에서는 코린토스의 반론에 솔깃했던 사람들이 다음날 민회에서는 케르퀴라의 동맹 요청을 더 신중하게 따지더니 케르퀴라와의 동맹이 세력의 현상 유지를 골자로 한 30년 평화조약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케르퀴라의 지원 요청을 들어주는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30년 평화조약을 맺은지 겨우 10년이 조금 지나 미움과 두려움으로 자기들을 보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의 눈을 아테나이도 느끼기 시작했지만, 아테나이는 아테나이대로 최고조에 이른 국력을 바탕으로 양보하기보다는 전쟁으로 누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스파르테는 스파르테대로 지진 후 한 세대동안 충분히 회복한 국력을 바탕으로 더 이상 온 헬라스 세상이 아테나이의 손 안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행동에 나서지 않는 스파르테를 제치고 아테나이가 케르큐라와 방위조약을583 체결하여 먼저 펠로폰네소스와의 전쟁불사라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아테나이는 케르퀴라와 코린토스가 벌인 쉬보타에서의 대해전에584 10척의 함대를 보내 지원하였고, 코린토스는 1,000여명이나 되는 포로를585 잡는 분전을 하였음에도 아테나이가 다시 20척의 함대를 보내 코린토스의 케르퀴라 섬에 대한 공격에는 완강한 반대 의사를 보이자 그냥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요. 대해전 끝에 케르퀴라는 살아남고 코린토스는 물러났지만, 30년 평화조약 아래 아테나이가 케르퀴라를 도와 코린토스와 전쟁을 벌인 셈이어서, 아테나이의 눈에 얻은 게 없는 코린토스의 불복이 새로운 분쟁으로 터져나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지요. 미리 화근을 제거한답시고 아테나이는 코린토스의 식민도시임에도 아테나이의 동맹에 가입해 분담금도 잘 내고 있던 팔레네 지협의 포테이다이아에게 성벽을 허물고 인질을 보내고 코린토스에서 보낸 감독관들을 추방하고 더 이상 받지도 말라고 통보하면서, 동시에 마케도니아에 보냈던586 30척의 함대와 중무장보병 1,000명을 동원해 포테이다이아가 통보 사항을 이행토록 하고, 이웃 도시들이 덩달아 반기를 들지 못하게 감시토록 했고, 포테이다이아는 아테나이에 사절을 보내 철회를 요청했지만 철회는커녕 마케도니아로 가던 함대가 오히려 그들에게 오자, 아테나이가 그들을 공격할 경우 스파르테도 앗티케에 침입하겠다는 스파르테의 언질에587 고무되어 칼키디케와 봇티아와 함께 반기를 들었습니다. 페르딕카스의 마케도니아가 칼키디케를 지원했고, 반란 도시들을 진압하기엔 역부족인 아테나이의 마케도니아 원정군은 포테이다이아로 향하는 대신 페르딕카스의 동생들과 함께 마케도니아의 테르메를 공격하며 지원군을 기다렸고, 포테이다이아를 지키려는 코린토스의 아리스테우스를588 따르는 자발적인 지원병과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도시 용병들 2,000명이 포테이다이아로 나아가 올륀토스 지협에서 아테나이군을 기다렸고, 아테나이 역시 2,000명의 중무장보병과 40척의 함대를 증원군과 테르메를 함락시키고 퓌드나를 공격 중이던 원정군을 합쳐 코린토스의 아리스테우스가 합류한 포테이다이아 공략에 집중키로 하고, 페르딕카스와의 전쟁을 접고589 포테이다이아로 가서 기노고스에 진을 친 다음, 지협의 아리스테우스가 기다리는 쪽으로 나아가 포테이다이아에서의 첫 전투가 벌어졌고, 밀린 포테이다이아군이 포테이다이아 성으로 들어가자590, 아테나이가 오히려 펠레네 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방벽을 쌓고 바다는 함선들로 봉쇄해 가두어버린 다음, 인근의 작은 도시들과 칼키디케와 봇티아를 약탈하고 몇 군데 도시들을 함락하였습니다. 이렇게 또 한번 아테나이에게 당한 코린토스는 그들처럼 아테나이 때문에 기가 죽은 동맹국들과 함께 스파르테를 부추겨 아테나이와의 전쟁을 결의할 목적으로 동맹회의 소집했고, 스파르테에 모인 동맹국들 앞에서 스파르테와 아테나이를 비교하면서, 스파르테의 안일과 방관 때문에 아테나이의 대외 확장을 막지 못했고, 아테나이의 압박으로 많은 동맹이 고통당하는 지경이니 더 늦기 전에 약속한 대로 포테이다이아를 돕고 앗티케 공격하라고 요구했으며,591 아이기나는 아테나이가 겁나 사절을 보내는 대신 코린토스를 통해 조약이 보장한 그들의 자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며 불평했고, 메가라는 아테나이가 그들의 영토와 시장과 항구들에 메가라의 출입을 배제한 것은592 조약 위반이라고 지적했고 다른 도시들에도 아테나이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으며 스파르테 사람들과 동맹의 사절들에게 적극적으로 아테나이와의 전쟁을 부추기고 나섰는데,593 마침 다른 일로 스파르테에 머물던 아테나이 사절들이 회의 내용을 전해들었고, 스파르테로부터 말할 기회를 얻어, 아테나이가 가진 것은 모두 정당하게 얻었으므로 잘못이 없으니전쟁은 심사숙고해서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고, 아테나이가 얼마나 강한지 설명하고 문제가 있으면 중재재판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라며 스파르테가 전쟁을 해오면 아테나이는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지킬 것이라 말했고,594 모두의 주장들을 들은 스파르테가 연 그들만의 회의에서 다수가 아테나이의 불의를 지적하며 당장의 개전으로 기울자595 아르키다모스596 왕이 나서 서로의 전력 분석과 전쟁 준비의 필요성을 들어 신중론을 제기했고,597 에포로스인598 스테넬라이다스가 이를 반박하면서 심사숙고는 침략자가 해야지 피해자의 몫이 아니므로 아테나이가 더 커지기 전에 스파르테의 명예를 위해 전쟁에 찬성해야 한다며599 에포로스의 자격으로 아테나이가 침략자인지600 아닌지를 민회가 결정토록 회부했고, 민회에서는 아테나이가 침략자라고 결정하여 14년만에 30년 평화조약의 파기를 확인했고, 전쟁은 따로 동맹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결의하기로 했습니다.601

 

11.9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스파르테가 얻은 델포이의 신탁이 긍정적이어서였는지,602 혹은 코린토스가 전쟁에 투표하라고 동맹들에게 열심히 꼬드긴 덕분이었지, 코린토스 사절의 연설이 움직였는지, 얼마 뒤 소집된 동맹회의에서 비록 만장일치는 아니었지만 다수가 전쟁에 찬성했고, 동맹들은 전쟁 분담금을 거두었고, 각자가 돌아가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603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에 전쟁의 단초를 얻을 구실 찾기에 나섰고, 그래서 스파르테가 처음 보낸 사절은 대뜸 아테나이에서 '여신의 저주'를 추방하라고 요구했고,604 아테나이도 스파르테에게 똑같은 것을 요구했고,605 다음 사절은 포테이다이아에서의 철군과 아이기나의 독립과 아테나이의 '메가라 포고' 철회를 요구했고,606 아테나이는 어느 하나 들어주지 않았고, 스파르테는 마지막 사절을 보내 종전의 요구들은 언급하지 않고, 다만 '스파르테는 평화가 계속되길 원하는데, 아테나이가 헬라스 사람들이 독립하게 놓아준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최후통첩했고,607 이에 대한 답변을 결의하려 모인 아테나이 민회는 전쟁을 하자느니 메가라 포고만 풀자느니 찬반이 나뉘었고, 이때 아테나이의 제일인자608 페리클레스가609 나섰습니다. 그는 결코 아테나이가 양보해서 안 된다며,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에게 헬라스 사람들에게 자주권을 돌려주라 하는 것은, 결국 아테나이의 동맹들에게 자주권을 주라는 말이고, 그 말은 바로 아테나이 제국을 해체하라는 것인데, "어찌 '메가라 포고' 같은 사소한 일로 전쟁을 하냐?"고610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절대로 아주 사소한 일로 전쟁을 벌였다는 자책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면서,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 이번에는 막상 전쟁이 나면 드러날 서로의 우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611 그러니만치 전쟁비용이 충분한 아테나이가612 반드시 이길 것이지만, 그래도 전쟁 중에는 앗티케를 버릴 수 있어야 하며,613 제국의 확장을 멈추어야 한다고,614 그러지 않는 것은 실수라고, 그런 실수가 아니면 줄어들지 않은 아테나이 제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아테나이 민회는 페리클레스가 하자는 대로 결의했고, 스파르테의 마지막 사절은 조약에 따라 중재로 모든 분쟁을 해결하자는 말만 듣고 돌아갔는데, 성급한 제우스가 폴레모스를 얼마나 심하게 다구쳤는지, 전쟁을 촉발하는 사달이 엉뚱한 사람들에 의해 엉뚱한 곳에서 나고 말았습니다. 

 

11.92. 슬픈 오이디푸스의 도시 테바이는 보이오티아는 말할 것도 없고 아테나이까지 얻을 욕심으로 페르시아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일로, 페르시아를 물리친 헬라스 동맹들의 응징을 받아 성벽을 헐고 책임자를 넘기고 보상비를 내면서 가까스로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었는데, 스파르테가 은둔하고 아테나이가 바다를 통해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여, 델포이를 점령한 포키아를 두고 스파르테와 아테나이가 보이오티아에 번갈아 출동하고 드디어 타나그라에서 충돌했을 무렵에는 적어도 보이오티아의 도시들만은 그들에게 종속시켜야 되겠다고 나서, 스파르테의 용인 아래 보이오티아의 종주도시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보이오티아를 복속시킨 바 있는 기세등등한 아테나이와 경계를 나누고 있다는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지요. 그리고 그 경계에 플라타이아라는 작은 도시 하나가 있었습니다. 플라타이아는 비록 작은 변방의 도시였지만 대대로 어느 도시에도 종속되지 않고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스스로 지키며 살고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그들은 헬라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일에도 그들의 일처럼 나서, 비록 적은 숫자였지만, 다레이오스를 물리치기 위해 밀티아데스와 함께 마라톤의 전사가 되었고, 크세르크세스의 진군을 막기 위해 레오니다스와 함께 테르모퓔라이의 전사가 되었으며, 배 한 척 없는 내륙의 도시 사람이 해군이 되어 아테나이 함선에 올랐고, 페르시아와 싸운 벌로 크세르크세스에게 도시가 유린되고 도시민이 유리되었어도 마르도니오스를 쫓아내기 위해 고향 들판으로 모여 파우사니아스와 아리스테이데스와 함께 싸웠습니다. 그리고 플라타이아 들판에서 대승을 거둔 헬라스동맹은 그곳 사람들이 보여준 자신들의 안전과 자유를 스스로 지킨다는 의지와 행동에 감동하여 페르시아를 이긴 그곳의 사람들에게 그들과 그들 도시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보상했지요. 그러나 보이오티아의 종주도시가 된 테바이로서는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아테나이 경계의 작은 이 도시가 눈엣가시 같았고, 이를 모를 리 없는 플라타이아는 점점 아테나이와 가깝게 지내다가 결국 테바이의 핍박을 피하려 자주권을 가지는 아테나이 동맹이 되었고, 자연스레 도시는 친아테나이파가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오래 권력에서 멀어진 친테바이파들은 그들의 집권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노렸고, 이 틈에 테바이는 모반자들로 하여금 야밤중에 성문을 열게 하여 소수의 군대를 잠입시켰고, 잠입자들은 모반자들이 주장하는 그들의 정적 제거와 도시 점령 대신 평화적으로 포섭하기로 하고 보이오티아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나와 그들 곁에 서라고 전령을 돌려 포고했고, 그래서 모인 사람들이 잠입자가 소수임을 알고 해가 뜨기 전에 기습했고, 몇 번의 전투를 벌이는 중 폭우가 쏟아지자 겁 먹고 흩으져 도망치다 대부분이 죽고 일부가 붙잡혔고, 잠입 성공을 기다리던 후속 부대가 폭우로 불은 강을 건너느라 너무 늦게 도착했고, 혹시 붙잡힌 동료와 바꿀 수 있을까 성 밖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자 플라타이아가 곱게 물러나면 포로들을 풀어주겠다 했고, 그들이 물러나자 180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모두 죽여버렸고, 변고를 통보받은 아테나이가 보급물자와 함께 군대를 보냈으나 포로들은 이미 죽고 없어 플라타이아에 수비대를 남기고 전투에 나서지 못할 사람들을 데리고 아테나이로 돌아왔습니다. 아테나이와 전쟁이 오늘 내일의 문제로 보였을 때, 테바이가 보이오티아를 향한 아테나이의 교두보 플라타이아를 아테나이로 향한 그들의 교두보로 바꾸어 놓자고 벌인 작전이었지만, 이로써 누가 보아도 30년 평화조약은 파기되었고, 아테나이도 스파르테도 헬라스든 페르시아든 하나라도 더 많은 동맹을 구하기 위해 분주한 가운데, 헬라스의 여론은 해방자로 자임한 스파르테로 기우는 가운데 스파르테의 아르키다모스가 이스트모스에 동맹의 군대를 모아 앗티케로 나아가자,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615 아테나이 사람들616 간의 대를 두 세대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1. 도시의 자유(1). 끝)

 

 

 

('11. 도시의 자유(1)'은 '11. 도시의 자유(2)'에서 계속됩니다.)

 

 

 

 

 

 

  1.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덕이 앎에서 나오므로 도시민이 무지에서 벗어나 덕성을 갖추는 것을, 다시 말해 도시민의 윤리를 강조한 반면,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도시가 도시민을 위해 할 바인 도시의 윤리를 강조하면서 생긴 불화를 가리킨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가 도시민의 윤리를 강조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좋은 도시민이 좋은 도시를 만드는 데 좋을 것이라는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는 도시민과 도시는 서로 다르다고 본다. 비록 불의하지는 않다 해도 자기 좋을 대로만 하고 사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불의한 사람들까지도 도시에 살면서 도시민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이 바르고 훌륭한 도시민이 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도시는, 도시민이 불의하든 정의롭든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불의해서는 안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 어떤 경우에도 도시는 정의로워야 하며, 착하고 정직한 도시민이 잘 살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철학자건 시인이건 만일 도시와 도시민의 할 바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도시의 할 바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시민의 윤리를 말하는 것에 앞서, 그리고 바르지 못하고 훌륭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앞서, 철학자건 시인이건 간에, 무엇보다 먼저, 도시의 윤리, 즉 도시의 정의에 대해 말하며 도시의 불의를 고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민의 윤리만 말하고 도시의 윤리, 즉 도시의 정의에 대 해서 침묵하는 소크라테스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 비판 때문에 시인과 철학자 간의 불화가 생긴 것이다. [본문으로]
  2. 이른바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BC)이다 [본문으로]
  3.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그들의 저술 속에 여러 시인들의 시를 다루어 자신의 논점을 강화하는 소크라테스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소크라테스가 지은 시를 소개하지 못하며, 시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의 면모도 보여주지 못한다. [본문으로]
  4. 일찌감치 아리스토파네스는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민주정의 가치를 신뢰하여,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노년에는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공동체로서의 역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아테나이를 구원하기 위해 부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프락사고라('"여인들의 민회"'"주인공; 프락사고라와 그녀의 동지들인 가정주부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가정과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민회에 나가 정권을 잡고 피폐해진 도시에 여전한 빈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아테네를 공산화한다.)와 크레뮐로스('"부의 신Ploutos"'주인공;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하게 살았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어 자식들에게는 악하게 살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를 묻기 위해 델피로 가고, 신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처음 만나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가라 하는데, 처음 만난 사람은 눈이 먼 부의 신이다. 제우스 때문에 눈이 멀어져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지 못하는 부의 신의 눈을 고쳐주어 부의 신이 제대로 부를 나누어줄 수 있게 한다.)을 통해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을 찾으라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5.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정의로운 도시이다.(앞의 글 '도시의 정의'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본문으로]
  6. 아리스토파네스,'"개구리들"',1471행,'나는 (아테나이를 구원할 시인으로) 아이스퀼로스를 택하겠소.',1599-1503행,(디오뉘소스가 아테나이를 구원할 비극시인으로 아이스퀼로스를 선택하자, 하데스의 신 플루톤이 아이스퀼로스를 이승으로 돌려보내면서)'잘 가시오, 아이스퀼로스/가서 그대의 훌륭한 생각들로 우리 도시를/구하고, 지각없는 자들을 혼내주시오./그곳엔 그런 자들이 많기 때문이오.' [본문으로]
  7. 안티스테네스는 도시의 저의보다 끝까지 시민의 윤리를 중요시하였는데, 다만 그는 소크라테스가 덕성의 근원을 앎이라 본 것에 비해 금욕에서 찾았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견지를 유지하다가 쉬라쿠사이에서 더 이상 도시의 전형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자기만의 도시의 정의를 찾아나서게 된다. [본문으로]
  8. BC 13세기 무렵 테세우스 시대에 헬라스라 불릴 만한,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던 세계는, 넓게 잡아 오늘날의 그리스 영토(발칸반도의 남부, 아이가이온Aegaion 바다의 섬들, 크레테krete, 퀴프로스kypros 일부)와 오늘날의 터어키 영토의 일부(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 서안西岸 몇 개 도시들과 퀴프로스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이 당시 헬라스 사람들의 이탈리아 남부와 시켈리아에의 이주는 아직 미미하여 헬라스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본문으로]
  9. 헬라스 세계의 형성은 여러 갈래의 이주민(주로 이주해온 시기 별로 보아 이집트로 대표되는 아프리카계, 포이니케로 대표되는 중동 아시아계, 아리안으로 대표되는 유럽계이다)의 헬라스 지역 정착에서 비롯되었는데, 신들 역시 이들 이주민과 함께 헬라스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새로운 성격과 이름의 헬라스의 신들로 지위를 얻었을 것이다. BC 13세기 무렵의 테세우스 시대에 헬라스의 여러 도시들이 믿었던 신들의 성격과 이름은 여러 세대에 이어 구전되어 오다가 BC 8세기에 이르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비롯한 여러 시가들이나 도시의 연혁이나 도시에 공헌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설화들을 통해 소개되었고, 헤시오도스가 이 모든 구전을 엮어 '신통기'로 기록하면서, 이 신들의 성격과 이름 그리고 신들 간의 관계, 즉 신들의 계보가 정리되었다. [본문으로]
  10. BC20세기의 인도-유럽인(아리안)의 파괴적인 대이동이 끝날 무렵, 헬라스 세계로의 마지막 이주자였던 그들은 이주의 시기와 경로에 따라 그 이름이 달랐던 만큼 말도 달랐을 것이지만, 이주자들의 첫 문명인 뮈케네 문명이 늦어도 BC16세기에는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아도 3세기가 지난 뮈케네 문명의 절정기였던 BC13세기, 다시 말해 테세우스가 아테나이를 열 무렵에는 각 지방의 말들은 방언으로, 뮈케네인들의 말이 헬라스 세계 지배층에서 공통어로 쓰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의 헬라스 세계의 언어 소통에 대해 호메로스는 눈여겨볼 기록을 남겼는데, 트로이아를 징벌하기 위해 모인 뮈케네 중심의 29개 지역에서 모인 연합군 간 소통에 있어서는 어떤 문제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반면, 트로이아를 방어하기 위해 16개 지역에서 모인 트로이아 중심의 동맹군은 소통 문제 때문에 동맹군을 한 지휘 체제로 묶지 못하고 지역별로 지휘 체제를 유지하도록 해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일리아드'803-806행,'.../큰 도성에는 맣은 동맹군들이 와 있는데/그들은 사방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라 저마다 말이 다르오./그러니 그들의 지휘자로 하여금 저마다 자기 백성들을/명령하고 정렬하여 싸움터로 인솔해 나가게 하시오./...'), 이는 뮈케네의 연합군은 헬라스 세계의 도시들로 이루어진 반면, 트로이아의 동맹군에는 헬라스 세계의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의 이어족 지역(이를 테면 프뤼기아, 파플라고니아, 뮈시아, 카리아, 등등)에서도 참가했기 때문에 생긴 소통의 문제였다는 이야기여서, 결국 BC13세기의 헬라스 세계는 비록 지역마다 방언을 쓰고는 있었지만 소통에 지장이 없을 만큼의 같은 공통된 언어를 쓰고 있었고, 그 언어가 그 시대를 주도하던 뮈케네의 언어였을 것이라는 추정은 합리적일 것이다.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헬라스 세계에서 쓰이던 같은 말을 정리해 보면, 고대 헬라스 세계의 같은 말은 뮈케네 말이었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코이네 말이다가, 지금의 현대 헬라스어로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11. 호메로스는 테세우스가 아테나이를 열었을 당시의 시세市勢를 가름할 자료를 남겼는데('일리아스',II.함선목록,484-760행 가운데 546-556행), 트로이아를 징벌하기 위해 29개 지역, 170개 도시가 이룬 1136척의 연합함대에 코린토스 등 16개 도시를 묶어 100척을 낸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도시 뮈케나이와, 뮈케나이의 직속지 퓔로스와 트리온이 낸 90척, 뮈케나이의 직속지이자 아가멤논의 동생 메넬라오스(트로이아의 파리스에게 아내 헬레네를 빼앗겨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가 관장한 라케다이몬(스파르테)과 10개의 도시를 묶어 낸 60척, 다시 말해 뮈케네 직속지 28개 도시가 낸 250척의 1/5인 50척을 하나의 도시 아테나이가 낼 수 있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출발한 아테나이가 페라클레스 시대에 와서는 400여개의 도시를 동맹 또는 식민, 또는 직할로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적대적 도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패권을 행사하느라 제국을 이룬 400여개의 도시들을 하나로 아우르지 못해, '헬라스 도시들의 자유를 위하여'라고 선언한 스파르테와의 전쟁으로 헬라스 세계를 피폐시키고 말았다. [본문으로]
  12. 크레테의 미노스 왕은 아들 안드로게오스가 아케타에서 살해된 일에 아테나이가 책임이 있다며 아테나이를 침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는데, 마침 아테나이는 흉년에 전염병까지 돌아 최악의 상황이었고, 신탁도 크레테와 강화해야 한다고 나와, 강화를 조건으로 매 9년마다 소년 소녀 각 7명씩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플루타르코스,'테세우스전') [본문으로]
  13. 테세우스가 소탕한 산적들로는 코린토스 길목 이스트모스의 시니스, 메가라 스케이론 절벽 길목의 스케이론, 엘레우시스 길목의 프로크루스테스가 있는데, 이들의 퇴치로 아티케와 펠로폰네소스 육로가 안전해졌다.(같은 책) [본문으로]
  14. 뮈케나이Mykenai 왕 아가멤논Agamemnon의 처신을 생각하면 그 시대 최고 권력자들의 권력의 한계를 쉽게 가름해 볼 수 있다. 그 한계 가운데 하나는 아가멤논이 트로이아 정벌군 궐기를 위해 자기의 딸 이피게네이아Ipigeneia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것인데(아이스퀼로Aeskylos스,'"아가멤논"'1523-1526행,'내가 그에게서 잉태했던 내 자식을,/두고두고 눈물 흘리게 했던 이피게네이아를/남들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히 죽였으니까.', 에우리피데스Euripides,'"아울리스Aulis의 이피게네이아"','1383-1390행,'...제가 죽음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며,/헬라스의 해방자라는 제 명성은 두고두고 축복을 받게 될 거예요./...어머니는 어머니 혼자만이 아니라, 전 헬라스인들을 위해 절 낳으신 거예요.../...무수한 사람들이 손에 노를 들고/ 적과 용감히 싸우다 헬라스를 위해 죽으려 하는 마당에,/ 이 한 목숨이 그 모든 것을 방해해야 하나요?', 에우리피데스의 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막기 위해 출전을 포기하려 하지만 딸 이피게네이아가 스스로 희생이 되어 아가멤논의 출정을 독려하는 것으로 그린다.), 결국 이것이 그의 집안을 풍지박산으로 만들어, 아들 오레스테스의 안타까움처럼, 자신은 원정에서 트로이아의 전투 중에 죽는 영광을(아이스퀼로스,'"제주를 바치는 여인들"',345-350행,'아아 아버지께서 차라리/일리온Illion(트로이아Troia)의 성벽 밑에서/뤼키아Lykia인의 창에 쓰러지셨더라면,/집안에는 명예가 남았을 것이고,/자식들에겐 남들이 우러러보는/영광스런 앞날이 약속되었겠지요.') 아퀼레우스Akyleus에게 넘기고, 10 년이 넘는 전쟁 끝에 결국 개선 장군으로 돌아오지만, 배신한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Klytaimnestrs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고(같은 극,1527-1529행,'그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올린) 자기 행동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은 것이오. 칼에 찔려 죽음으로써/죗값을 치른 셈이니 저승에 가서도/그는 큰소리치지 못할 것이오''), 또 다른 한계는 아가멤논에 대한 불복을 다스리는 방법인데, 아퀼레우스의 전리품 브리세이스를 가로채는 바람에 야기된 아퀼레우스의 불복을 끝내 돌려 놓지 못한 권력의 한계는 그렇다쳐도, 그러나 평민Thes인 한 병졸 테르시테스Thersites(호메로스는 이 테르시테스를 질서를 무시하고 공연히 왕들과 시비하는 아가멤논의 연합군 가운데 가장 못생긴 자라고 소개하는('일리아드'II.211-219행) 반면, 아가멤논에 대해서는 백성들의 목자라고 한다.(같은 책,II.243,255행))가 자기에게 대어드는 불복(아가멤논이 전리품을 독차지하며, 그래서 아킬레우스와 척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며, 아가멤논의 탐욕을 위해 싸울 필요가 없으니 귀향할 것을 주장한다.(같은 책,II.225-242행)을 곁에 있던 오딧세우스가 나서 꾸짖으며 매로 다스리는 걸(같은 책,II.246-269행) 지켜보아야 하는 한계이다. [본문으로]
  15. BC15-14세기의 뮈케나이는 장거리 항해를 통해 지중해 연안에 식민도시를 세우고, 크레테의 미노아를 완전히 제압하여 헬라스 세계의 독보적인 문명을 구축했다. [본문으로]
  16. 아테나이의 두 수호신 '아테나 폴리아스Athena Polias'와 '포세이돈 에렉테우스Posaidon Erektheus' 가운데 한 수호신인 포세이돈 에렉테우스와는 다른, BC14세기 무렵 아테나이의 왕이었던 에렉테우스Erektheus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17. 메네스테우스Menetheus에 대해서는, 플루타르코스가 '테세우스전'에서 테세우스를 내쫓고 왕정을 복고하여 다시 왕이 된 사람으로, 호메로스가 아가멤논의 트로이아 원정군에 검은 함선 50척을 가지고 참전한 아테나이의 지휘관 페테오스Petheos의 아들 메네스테우스를 기병과 보병의 열병 기술이 탁월하여 당대에서는 네스토르Nestor에 필적한 인물로('일리아스',II.552-556행,헤로도토스,'역사'VII.161), 그렇지만 별로 용감하지도 않으며('일리아스',IV.327-348), 방벽 탑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도 몸을 떨며, 근처에 있던, 전쟁에 물리지 않는 두 아이아스Aias와 활 잘 쏘는 테우크로스Theukros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무능력자에다(같은 책,Xii.331-350), 헥토르Hektor의 매제 임브리오스Imbrios의 시신이나 나르다가(XIII.196), 딱 한번 함선들로 달려드는 불길 같은 헥토르를 막았을 때의 지휘관으로 (XIII.690),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그가 트로이의 목마 속에 있던 전사들 중의 한 명이었으며('그리스 서술'1.23.8), 아폴로도로스Apollodos는 트로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미마스Mimas와 멜로스Melos 섬을 정복했다고('위僞전서全書Bibliotheka',4.6.15b) 소개하고 있다. 파우사니아스는 메네스테우스를 에렉테우스Erektheus의 자손으로 테세우스와 함께 '에렉테우스 왕가Erekteid'의 왕으로 넣고 있는데('그리스 서술',1.15,2.18), 플루타르코스도 '테세우스전'에서 메네스테우스가 에렉테우스의 증손, 오르네오스Orneos의 손자, 페테오스Peteos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어, 테세우스와 메네스테우스는 재종再從second cousin六寸 형제 사이로 보인다. [본문으로]
  18. 플루타르코스,'테세우스전' [본문으로]
  19. 스파르테이다. 스파르테의 왕 튄다레오스Tyndareos(라케다이몬 왕가의 마지막 왕, 동생 힙포코온Hippocoon에 의해 축출되었으나,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정화cleance를 거절한 데 대한 보복으로 힙포코온과 그 아들을 죽이고 복위시켰다. 뮈케나이의 두 왕자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숙부 튀에스테스Thyestes에게 쫓겨 튄다레오스에게 오래 의탁하고 살다가 아가멤논은 튄다로스의 큰딸 클뤼타임네스트라Klytaimnestra,Clytemnestra와, 메넬라오스는 의붓딸 '헬레네Helene,Helen of Troy'(제우스 신은 백조로 변신하여 튄다레오스의 아내 레다Leda에게 두 개의 알을 낳게 하여, 이 두 알에서 각각 쌍둥이들이 태어났는 바, 바로 카스토르와 클뤼타임네스트라 남매와 폴루데오케스와 헬레네 남매이고, 전자는 튄다레오스의 자식들로 후자는 제우스의 자식들이지만 튄다로스가 의붓자식들로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한다.) 결혼했고, 후일 아가멤논은 뮈케나이의 왕이 되었고,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테의 왕이 되어 라케다이몬 왕가에 이어 스파르테에 '아트레우스 왕가Atreidai'를 열었다.)는 테세우스가 딸 헬레네를 납치해 갔다며 헬레네를 찾는다는 이유로 아들 카스토르Kastor와 의붓아들 폴루데오케스Polludeokes,Pollux를 아티케로 보내 아테나이를 침공하였고, 이때 아테나이에서는 아카데모스Akademos,Hekademos(그는 침공군에게 헬레네가 아피드나이Apidnae에 있다고 알려준 대가로 그의 이름을 따서 그의 출신지를 아카데메이아Akademeia,Hekademeia라고 불렀는데, 이 일로 후일 스파르테가 아티케를 침공했을 때도 아카다메이아 지역은 손상을 주지 않았다.)와, 마라토스Marathos(그는 신탁에 따라 기꺼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그의 출신지를 마라톤marathon이라 불렀다.)가, 그리고 코린토스에서는 알리코스Alykos(메가라에서 전사하여 그곳에 묻혔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곧잘 메가라를 알뤼코스라 불렀다.)가 이 침공군을 돕고 나섰다. [본문으로]
  20. 테세우스가 여기저기 흩으져 있던 이온의 도시를 통합하여 아테나이를 세우기 위해 왕위를 버리고(테세우스는 아버지 아이게우스왕의 왕위 계승자였다.) 아테나이의 정치 체제를 왕정에서 민주적 귀족정으로 바꾸면서 아테나이에서는 왕정이 사라질 듯했으나, 스파르테 군대까지 동원한 메네스테우스가 테세우스를 내쫓고 왕정을 복고한 이후, 테세우스의 아들 데모폰이 메네스테우스에 이어 왕이 되어 한동안 왕정이 이어져 갔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데모폰이 메네스테네스 다음 왕이었다고 직접 거명하지 않았지만, 이 데모폰에 대해 솔론이 이집트 방문 뒤에 퀴프로스 섬에 들러 '(아마 메네스테네스의 핍박을 피해 퀴프로스 섬에 갔다가) 데모폰이 세운 작은 도시'를 새롭게 건설하여 그 이름을 '솔리'라 했다며 이 데모폰을 언급하고, 에우리피데스는 테세우스의 후처 파이드라가 의붓아들인 테세우스의 장남 휩폴뤼토스에게 연정을 품다 거절당한 앙갚음으로 휩폴뤼토스를 죽음으로 몰고간 비극을 그렸는데('"휩폴리토스"'), 바로 이 파이드라의 소생이 데모폰이다. 이 데모폰 다음으로 테세우스 왕가의 왕이 티모이테스까지 이어지다가, 도리에이스와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에 의해 축출되어 멧세니아에서 이주한 넬레오스 왕가의 멜란토스에게 양위되었고, 다시 같은 넬레오스 왕가의 코드로스로 이어졌으나, 코드로스가 도리에이스의 아티케 침공에서 전사하자(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 정치제도사,단편Frg.7'에서 코드로스 집안이 사치하고 유약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 아들 메돈이 최초의 종신 아르콘으로 집권함으로써 아테나이에서 더 이상 왕이 나오지 않았다.(파우사니아스,'그리스 서술'2.18,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III.3) [본문으로]
  21. 테세우스 시대의 BC13세기로부터 BC7세기 아테나이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퀼론 시대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을 가리킨다. BC8,9세기의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가 당대의 세상을 노래했더라면 그 긴 세월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지만, BC8세기에 접어 들어서서 BC12세기부터 시작되어 BC10세기까지 이어진 파괴와 혼돈의 무질서가(역사학자들은 BC9세기부터 질서의 회복과 건설이 시작되었음에도 대체로 BC12세기 뮈케나이 붕괴부터 BC8세기까지의 이 시기를 그리스의 암흑시대라 부른다.) 가라앉고 일반인들의 생활도 안정되어 갔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새로운 세상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던지, 이 무렵까지도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통해 옛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믿는 신들에 대한 이야기에만 심취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역시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한 일에 긍지를 느끼도록 그들을 서사시로 읊어 헬라스 세계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 힘과 긍지를 심어주지 못하고, BC13세기의 일만 아야기나 신들에 대한 이야기나 하고 다니는 바람에 우리는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보다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고 지냈는지, 바꾸어 말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이야기를 듣고 좋아한 사람들의 세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본문으로]
  22. 테세우스, 메네스테우스 이후의 아테나이 정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나이 정치제도사'의 퀼론 이전 기록 산일과 어딘가 있을 다른 기록을 아직 찾지 못해 생긴,) 이 침묵이 BC620 퀼론이 참주가 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의 실패로 아테나이의 정치 세력 사이의 균형이 일거에 무너져 도시민과 도시의 안전과 자유가 손상될 위기를 맞을 때까지 600여 년 이상 지속된 것을 보면, 이 침묵 시기의 아테나이는 BC10세기까지 이어진 헬라스 세계의 붕괴 속에서도, BC8세기부터 다시 살아난 헬라스 세계의 팽창 속에서도, 기록에 남길 변화나 변고 없이, 도시민과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23. 오딧세우스의 경우는 자기의 궁전 아타케로 돌아가는 데 또 다른 십 년이 걸려야 했다. [본문으로]
  24. 다음의 비극 내용을 종합하였다.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 이야기 3부작Oresteia, '"아가멤논"',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그리고 에우피데스의 '"엘렉트라"", '"오레스테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이다. 비극시인들이 그린 이런 궁정 비사와는 달리, 역사가들은 BC12세기에 들어 이집트의 신왕국의 몰락,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왕국의 몰락, 메소포타미아의 혼돈, 그리고 뮈케나이 문명이 몰락의 이유를 대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먼저 이집트 상왕국의 파라오와 사제들 간의 불화나, 뮈케나이의 궁정 불화에서 보듯이 권력 내부의 불화가 궁정 경제의 생산과 분배의 조직을 손상시켜 갔고, 다음으로 이런 와중에 닥친 지진과 가뭄, 그리고 역병 등의 천재지변으로 많은 유맹流氓이 발생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이 유맹들이 처음에는 소규모로 떠돌아다니며 분노의 파괴와 노략질을 저지르다가 바다를 은신처로 삼아 모이면서 대규모 파괴와 노략질을 시작하자(이집트의 변방을 침략한 이들을 물리친 람세스3세의 기록은 이들이 여러 다른 인종들로 구성되었다고 했는데,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해적이라 부르지 않고 '바닷사람sea-people'이라 부른다.), 도시들 간의 경제 교류가 육로는 물론 해로를 통해서도 단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으로]
  25. BC494 페르시아는 밀레토스를 함락한 뒤, 성인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아녀자들은 노예로 팔고, 도시는 완전히 허물어 버렸다. 프뤼니코스는 이 사건을 소재로 연극 '"밀레토스의 함락"'을 만들어 이듬해(BC493) 봄 디오뉘소스 축제의 비극 경연에 올렸는데, '"밀레토스의 함락"'이 도시를 잃은 밀레토스 사람들의 비참함을 너무나 절실하게 보여주어 온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테나이가 그 연극이 시민들의 전쟁 기피를 조장한다며 프뤼니코스에게 1,000드라크메(6,000오볼로스로 당시 최고 기능공의 하루 품삯이 3오볼로스였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큰 벌금이었다.)의 벌금을 물리고, '"밀레토스의 함락"'의 재상연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자, 이 이후 프뤼니코스는 물론 어느 비극시인도 당대의 비극을 소재로 비극을 만들지 않게 되었다.(헤로도토스,'역사',VI.21) (아마 프뤼니코스와 연극 '"밀레토스의 함락"'에 취한 아테나이의 조치는 기록으로 남은 세계 최초의 문화 검열일 것이다.) [본문으로]
  26. 크노소스의 궁정과 뮈케나이의 궁정은 도시민에게 생산을 할당하고 수거하여 도시민에게 분배하는 중앙 집중식 계획경제의 본부였고, 이 모든 경제 운용 내용을 충실히 기록하여(미노아는 소위 '선형문자 A'로, 뮈케나이는 '선형문자 B'로 기록하였다.) 다음 해의 계획 자료로 삼을 정도였는데, 궁정 안에서의 분란과 무질서로 도시는 계획에 따라 움직일 수 없었고, 따라서 생산과 분배가 갈팡질팡, 왜곡되기 시작했다. (계획경제의 붕괴로 경제 운용 내용의 기록이 불필요해지자, 기록의 권위도, 기록자도, 문자도, 모두 사라졌다.) [본문으로]
  27. 이 바닷사람에 대해, 토마스 마르틴Thomas R. Martin은, 이들이 아마도 미케네 그리스, 에게 해 제도, 아나톨리아, 키프로스, 근동의 여러 지역 사람들이었을 것이며, 어떤 통일된 민족집단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본거지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으로 본거지를 떠나온 독립된 집단(의 혼성)으로, 일부는 과거의 강력한 지도자들의 용병이었다가 권력과 전리품을 노려 반기를 든 자들이었고, 또 다른 일부는 외국에서 노략질을 하려고 먼 곳에서 온 자(비적)들이었다고 설명한다.(그의 책,'고대 그리스 역사Ancient Greece'pp53.,이종인역,가람기획), 그런데 이들, 즉 '토마스 마르틴/이종인'의 'Sea-People/바닷사람'에 대해, '마틴 버낼Martin Bernal/오홍식'은 '블랙 아테나Black Athena'(여러 곳에서,대표적으로II.pp92,93)에서 '?/바다의(해상) 민족들'로 표현하면서, 이들이 히타이트 제국을 멸망시키고 레반트의 해안 국가들을 일시적으로 파괴하였으며, (이집트 쪽의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도 침략하였다며, 이들의 성격에 대해,오늘날 '그리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 약탈과 그에 뒤따른 정착에 연루되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어떻게 이러한 이주가 동시대에 그리스 자체에서 발생하고 있었던 소요(이 소요의 핵심은 북서 그리스에 있던 도리스인들의 남부 그리스에 대한 습격과 정복이었다고 설명한다.)에 연결되는가는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본문으로]
  28. 이런 사실을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가 헬라스 에우보이아 섬 레프간디 유적지에 있는 한 대형 건물 지하에서 BC950경 매장된 부유한 부부의 무덤에서 나왔다. [본문으로]
  29. 암흑시대의 끝에 헬라스 세계에 들어온 새로운 문물 가운데 중요한 두 가지는 문의 문자와 물의 철 야금 기술이었다. 포이니케 문자는 우선 누구도 익히기 쉬워 널리 퍼질 수 있었고(미노아나 뮈케나이의 선형문자들은 익히기 어려운 궁정 기록자 전유물이었지만, 포이니케 문자는 비록 헬라스 말을 표기하는 데 불충분해도 읽고 쓰기가 쉬워 모두에게 친숙해졌고, 불충분한 점은 모음을 만들어 보충함으로써 해결해 헬라스 알파벹이 되었다.), 철의 사용은 농기구를 발달시켜 경작지와 생산량을 늘였다. [본문으로]
  30. 라케다이몬과 스파르테의 통칭으로 헬레니즘 시대까지는 스파르테보다는 라케다이몬을, 로마 시대 이후로는 스파르타(Sparta,라틴어,영어,그러나 이글에서 사용하는 스파르테Sparte는 아테나이의 말이었던 '아티케 방언Attic Greek'이고, 스파르테 사람들이 쓰던 '도리에이스 방언Doric Greek'은 스파르타Sparta였으므로, 사실 스파르테보다는 스파르타가 맞지만, 이 글에서는 고대 그리스 지명이나 인명을 아티케 방언으로 통일해서 쓴다.)를 썼다. 당시의 여느 도시와는 달리 스파르테는 성곽이 없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스파르테를 라케다이몬에게서 따로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31. 호메로스는 이들을 아카이오이 사람들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32. 소위 '헤라클레이다이Heracleidai의 귀환'으로 불리는 도리에이스 사람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진출은, BC13세기 트로이아 원정 전에 이미 그리스 북부에 망명했던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인, 크레스폰테스Kresphontes, 테메노스Themenos 형제와 그들의 또 다른 형제 아리스토데모스Aristodemos의 쌍둥이 형제인 에우뤼스테네스Eurysthenes와 프로클레스Procles, 이들 넷이 주도하였는데, 트로이아 원정 후 뮈케나이 왕국이 시들어 가는 틈을 타서 뮈케나이 왕국이 있던 펠로폰네소스의 동북부는 테메노스, 남서부 멧세니아Messnia는 크레스폰테스, 그리고 라코니케는 에우뤼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 형제가 정착하였다. 이들의 정착이 펠로폰네소스 안에 세워진 도리에이스 도시들의 주축이 되었고, 또한 후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이루는 근간이되었다. [본문으로]
  33. BC13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헬라스 세계의 유맹들 가운데는 헬라스 북쪽에 살던 도리에이스Dorieis,Doria,Doris족도 있었다. 그들은 암흑시대 내내 삼삼오오 이동하여, 동으로 아나톨리아, 남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로 시켈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로 떠돌다 정착하였다. 뮈케나이가 망할 무렵 이미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들어와 떠돌던(아마 이들도 뮈케나이 멸망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도리에이스족이 라코니케에 정착한 것은 암흑시대가 조금씩 안정되어 가던 BC10세기에 들어서면서였다. [본문으로]
  34. 그리스에서의, 특히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 조사의 결과는 도리에이스의 남하와 정착 과정에 대규모의 파괴나 다툼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어, '도리에이스의 펠로폰네소스 정벌론' 주장이 힘을 잃고 있는데,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선주민들이 비운 곳에 이주민들이 정착하기도 하고, 선주민들의 모자라는 일손을 메우기도 하면서 정착하다 보니, 큰 반발이나 다툼이 없이 동화되어 갔다고 본다. [본문으로]
  35. 헤로도토스는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저들끼리도 타국 사람들과도 거래가 없이 지내다가 다른 도시들과 싸워 이기도 지기도 했다고 한다.('역사'I.65) [본문으로]
  36. 짧게 잡아도 BC10-8세기 동안이었다. BC13세기부터 시작된 헤라클레스 후손들의 귀환은 BC10세기에 이르러서야 펠로폰네소스에서 본격적인 정착 생활을 할 수 있었고, 그 이후 정착자들 사이, 그리고 이전 거주자들과의 다툼은 BC8세기까지 펠레폰네소스 전역에서 일어났다. 처음 라코니케에 정착한 헤라클레스의 후손들과 도리에이스 사람들은 한동안 이런 다툼에서 스파르테에 처음 법과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계속되었다.(플루타르코스,'뤼쿠르고스전') [본문으로]
  37. '아기스 왕가Agiadai'와 '에우뤼폰 왕가Eurypontidai'이다. 이들이 아리스토데모스Aristodemos의 아들 에우뤼테네스Eurithenes의 아들 아기스와 프로클레스Procles의 손자 에우리폰의 이름을 딴 것일 뿐 같은 집안의 후손들이라고도 하고(헤로도토스,'역사',VI51-2), 아기스 왕가는 본디 라케다이몬 사람들 세력이고(아기아다이 출신 클레오메네스Kleomenes가 아테나이의 이사고라스Isagoras의 집권을 돕기 위해 소수 병력을 이끌고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려 했을 때, 아테나 신전의 여사제가 클레오메네스를 도리에이스 사람이라며 신전 출입을 막자 클레오메네스는 자기가 도리에이스 사람이 아니라 아카이오이 사람, 즉 원 라케다이몬 사람이라 밝혔다고 헤로도토스는 전한다.('역사',V.75)), 에우뤼폰 왕가는 헤라클레스 후손들 세력을 대표한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38. 헤로도토스,'역사'I.65. '...(뤼쿠르고스 입법) 전에는 헬라스 전체에서 가장 열등한 법을 갖고 있었고,...' [본문으로]
  39. 투퀴디데스는 헬라스 도시들의 참주제 폐해를 지적하면서('펠레폰네소스 전쟁사'I.17,18), 스파르테가 참주를 겪지 않은 까닭을, '...도리에이스의 스파르테가 오랜 내전으로 시달렸지만 맨 먼저 법치를 확립하였기 때문'이라며, 스파르테의 오랜 내전이 오히려 헬라스에서 가장 빨리 법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40. 스파르테의 자유시민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스파르테 시민Spartiatai,Spartiates으로 불렀는데, 크세노폰은 이들을 따로 '동등인Homoinoi,Equals'이라 부르고 있다.('헬레니카',III.3.3,'라케다이몬 정치제도',XIII.1) 스파르테 사람들은 모두 도시의 일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시민들 사이에서 돈과 권력의 평등은 스파르테라는 도시의 영혼이었다. [본문으로]
  41. 마을들에서 추대된 60세 이상의 장로를 '게론테스Gerontes,elders,senators,元老'라 했는데, 이들 28명과 2명의 왕이 모인 30명의 '게루시아Gerusia,senate,元老院'는 스파르테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다. [본문으로]
  42. 스파르테의 민회를 가리키는 '아펠라Apella,assembly,民會'는 게루시아가 소집하였는데, 처음에는 18세 이상의 스파르테 시민이 아고라에 모여 제시된 의제에 대해 토론하고 의결하였는데, 나중에는 나이가 18세에서 30세 이상으로, 장소도 아고라에서 인근의 스키아스Skia로, 토론한 다음 의결에서 토론 없는 찬반투표로, 최종 의결에서 게루시아나 왕들의 거부권 행사 가능으로, 그 구성과 기능이 바뀌어 갔다. [본문으로]
  43. 스파르테가 도시의 법과 제도를 확립할 무렵, 스파르테에서는 (아마도 기록에 남은 세계 최초로 보이는, 토지 소유자들의 동의 아래 이루어진) 농지개혁, 즉 대대적인 토지의 재분배가 실시되었다. 이때 토지kleros는 스파르타 시민과 페리오이코이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스파르테와 인근의 땅은 9,000등분하여 스파르테 동등인들에게, 그리고 라코니케 지역은 30,000등분하여 페리오이코이에게 배분하였다.(플루타르코스는 이 분배 내용 이외에도 다른 분배 내용, 이를 테면, 동등인에게 뤼쿠르고스Lykurgos 때는 6,000등분하여 주었다가 나중 폴뤼도로스Polydoros 때에 3,000등분을 추가로 나누었다거나, 처음은 스파르테 인근의 땅으로 4500등분만 주었고 나중 멧세니아Messenia를 정복한 뒤 나머지 4500등분을 멧세니아의 땅에서 나누었다는 것이다.) 스파르테가 멧세니아를 정복하고 그 땅을 배분한 후로는 식민의 목적이 아닌 한 스파르테 시민에게 더 이상 땅을 배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뤼쿠르고스의 배분으로는 전사들의 생계에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고 멧세니아를 정복하여 또 한번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44. '헤일로타이Heilotai,Helots,Heilotes,helot'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분이 도리에이스의 스파르테 정착 과정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헬라니코스(Hellanicos,BC490-405,뮈틸레네 출신의 설화가logographer.)는 헤일로타이라는 이름이 라코니케 남부의 헬로스Helos라는 마을과 관계가 있다고 했고('단편Fragments',188j), 파우사니아스(Pausanias,AD110-180,뤼디아계系 그리스인, 여행가이자 지리학자geographer)는 그의 책, '그리스 서술(Hellados periegesis,Description of Greece',3.20.6)에서, '...(도리에이스에 반발한) 그 헬로스의 주민들은 라케다이몬에서 처음 노예가 되었고, 헤일로타이로 불렸다...'고 하고, 언어학자linguists들은 추포追捕수배자를 가리키는 그리스말, 'haliskomai'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스트라본(Strabon,strabo,BC64-AD24,폰토스Pontos의 아마세이아Amaseia,Amasya 출신의 지리학자, 철학자, 역사가, 저서로는 '지리서Geographica,Geography'가 있다.)은 안티오코스(Antiochos,BC5세기 쉬라쿠사이 출신의 역사가,그의 책 '시켈리아의 역사'의 단편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사실史實에 대한 신뢰가 높다.)가 '(멧세니아)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재판하여 노예로 삼고 이들을 헤일로타이라 불렀다'고 했다며 인용하고 있고(스트라본,'지리서'6.3.2), 아테나이오스(Athenaeos Naukratites,AD2세기말-3세기초에 활동한 수사학 교사Rhetorician이자 문법학자Grammarian, 여러 저술 가운데 '연회의 철학자들Deinosophistae,Dinner-table Philosophers'만 비교적 온전히 남았다.)는 테오폼포스(Theopompos,BC378-320경,키오스 출신의 수사 역사가one of the representatives of Rhetorical Histoty, 그의 책 '그리스 역사Hellenika', '필립왕전Phillipika'의 단편이 전해지고 있다.)가 '...어떤 나라는 그들의 노예들을 헤일로타이라 불렀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들을 '페네스타이(Hoi Penestai,Penestae,토지에 예속된 텟살리아의 농노)'라 불렀다...'('단편Frag.',122)라고 한 구절을 인용cite하며, '이 모든 전거들로 보아, 그들이 농노로 전락했던 시기의 중심적이고 상징적 시기에 헤일로타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둘로이douloi,salves奴隸'라는 말anonymous과 제도적으로 구별되었다.'('향연의 철학자들',VI.416c)'고 한다. 이와 같이 정복과의 관련이 헤일로타이의 한 단면인 것은 틀림없어서, 헤로도토스는 BC8세기의 멧세니아Messenia 전쟁 이후 정복된 '멧세니아 사람들'을 '헤일로타이'와 같은 의미synonymous로 쓰고 있다. 테오폼포스에 따르면, 초기의 헤일로타이는 도리에이스 사람들에게 정복당한 원주 아카이오이 사람들의 후손이라 하는데, 휘아신티아Hyacinthia 축제가 열리는 아뮈클레스Amycles 마을처럼 다른 마을들도 특별한 신분으로 대해졌던 걸 보면 모든 아카이오이 사람들이 헤일로타이로 전락한 것 같지 않아, 초기 헤일로타이의 경우는 더욱 그 유래가 불분명하다. 후대 저술가들은 또 다른 주장들을 펼치는데, 쉬라쿠사이의 안티오코스에 따르면, 헤일로타이가 멧세니아 전쟁에 참전치 않았던 라케다이몬 사람들이었으며, 이에 비해 에포로스(Ephoros,BC400-330,퀴메cyme 출신의 역사가, 저술로는 각기 29권의 역사서Proomnion으로 구성된 '세계사Historiai,Universal History'가 있다.)는 그들이 반란에 실패하여 노예로 전락한 헬로스 마을의 페리오이코이였다고 한다.(에포로스,'그리스 역사',단편FGH'70f117,스트라본,'지리서'8.5.4) [본문으로]
  45. '페리오이코이Perioikoi,perioeci'라는 도리에이스 스파르테의 새로운 신분의 이름은 그들의 '거주지poleis,perioecis,settlement'가 주로 라코니케와 멧세니아의 해안 쪽이나 고지대 쪽에 집중되어concentrated 있어, 'Peri'='around'+'oikos'='dwelling/house', 즉 'Perioikos,Perioeci주변거주자'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유인이었으나, 스파르테의 '동등인들Homoioi'처럼 스파르테 시민은 아니었고, 단지 라케다이몬 사람으로는 인정되었으며,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나 허가 없이 여행하는 것도 가능했고, 동등인들과 함께 (아마 같은 부대에서도) '중무장보병Hoplites,ammonite'으로 참전도 했으나, 참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스파르테 시민인 동등인들을 그 어떤 경제적 생산 활동에도 종사engage할 수 없게 만들었을 때, 이들이 무기와 생필품의 제조와 교역을 도맡아 보았다. [본문으로]
  46. 헤로도토스는 헤일로타이가 스파르테 병력의 일부로(주로 경輕무장 보병으로 전투시 중重무장 보병을 엄호하는 역활과, 전투가 없을 때는 식사나 취침 준비, 다른 전투 준비 일을 하였을 것이다.) 참전한 사실을 기록했는데, 페르시아의 크세스크세르와의 전투가 헬라스 땅에서 처음 벌어진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레오니다스의 지휘 아래 중무장한 동등인 300명을 따라온 경무장한 헤일로타이 900명('역사'IX.225에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차출한 중무장보병의 숫자가 레오니다스의 호위대 300명과 다른 여러 도시들이 낸 2,800명, 도합 3,100명인데 반해, IX.228에는 테르모퓔라이에 세워진 추모비 명문에 펠로폰네소스에서온 전사들을 4,000명으로 적고 있어, 그 차이 900명을 스파르테 동등인 300명을 따라온 중무장 페리오이코이 300명과 경무장 헤일로타이 600명으로 보았다.)과, 먼저 퇴각한 크세르크세스에 이어 마르도니오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퇴각군과 헬라스 땅에서 마지막 벌어진 플라타이아 전투에는 파우사니아의 지휘 아래 스파르테 동등인 5,000명, 페리오이코이 5,000명, 경무장 헤일로타이 35,000명이 참전하였다고 한다.(같은 책,IX.28) 이렇게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테가 전쟁을 수행할 때마다 동등인과 페라오이코이와 함께 참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투퀴디데스는 헤일로타이의 반란이 두려웠던 스파르테가 이런 식으로 참전했던 헤일로타이에게 자유를 줄 테니 빠짐없이 모이라고 해 2,000명을 모은 뒤 어떻게 죽였는지 모르게 제거해버렸다면서('펠레폰네소스 전쟁사'IV.80.3,4,이런 대량 참살이 일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신뢰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스파르테는 헤일로타이의 숫자도 줄일 겸 칼키디케에 원정을 나서는 브라시다스에게 중무장한 헤일로타이 700명을 기꺼이 내주었다고 한다.(같은 책,IV.89.2,5) 그런데 스파르테는 결국 중무장보병으로 참전한 헤일로타이를 '네오다모데이스Neodamodeis,Neodamodes,신주민新住民'라는 신분으로 만들어 페리오이코이 정도의 자유를 주었고, 한 번은 이들 300명을 브라시다스와 원정한 헤일로타이 700명과 함께 트뤼퓔리아와 레프레이온과 같은 정복지에 정주시키기도 했다. 스파르테는 계속 헤일로타이를 징병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 코린토스 전쟁, 아게실라오스의 아나톨리아 반도 원정 등에 참전시켰다. [본문으로]
  47. 가장 온건한 소작료의 대표격인 고대 중국의 1/9세나(정전법井田法,'口'자와 같은 한 권역의 땅을 '井'자로 나누면 9등분이 되는데, 이렇게 나눈 가운데 부분을 나머지 부분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소출을 '세금調'으로 내는 법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1/10세는(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VI.5,6), 소작료라기보다는 농민이 내는 국세였고, 고대 그리스 도시들의 지주들이 받던 일반적인 소작료 1/6세稅는, 역사적으로 볼 때, 비교적 온건한 소작료였다. 스파르테의 초기 정량제 소작료가 두 번에 걸친 오랜 멧세니아 전쟁을 거치면서 멧세니아에 생긴 새로운 헤일로타이에게는 수확의 반을 거두었을 정도로 혹독하게 매긴 적도 있었지만(2차 멧세니아 전쟁 당시의 스파르테 엘레기아 시인 튀르타이오스Tyrtaios는 멧세니아 헤일로타이가 아포포라apophora定量小作料가 아니라 수확의 반을 내어야 했다는 시를 남겼다.), 전체적으로 1/6세가 그다지 혹독한 것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48. 수확의 일정양을 미리 정해 받는 소작료를 '아포포라Apophora,定量小作料'라고 불렀는데, 소작료가 가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스파르테는 이 아포포라의 양이 보통의 1/6세의 양을 넘지 않도록 조정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테 동등인이 이 정량의 소작료를 지나치게 많이 받을 경우 저주를 받는다는 서약을 하도록 했다고 하는데, 뤼쿠르고스는 스파르테 동등인들에게 클레로스kleros小作地를 배분하는 기준으로, 그들이 한 해 생활하는데 필요한 양식을 남자 곡물 70메딤노이medimnoi(1medimnos=52.4litre)와 여자 20(12라고도 한다)메딤노이에 적당양의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로 삼았다고 한다.(플루타르코스'뤼쿠르고스전', 솔론이 정한 년수입 곡물과 포도주 올리브 기름 등200메딤노이 미만의 테테스보다는 수입이 많았을 것이지만 결코 힙페이스의 수준은 되지 못했을 것이고, 겨우 제우기타이 수준에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아포포라 제도는 자연재해에 의한 흉년의 경우를 제외하면, 소작농의 노력 여하와 일기가 좋으면 더 많은 수확을 소작농들이 가질 수 있어, BC223에는 6,000 헤일로타이가 축적한 부로 500드라크메라는 거금을 내고 자유를 산 적도 있었다. [본문으로]
  49. 도리에이스 사람들의 유맹시대에 생긴 전통이었던 공동식사는 그들이 진출한 헬라스 곳곳에 공동식사의 문화를 남겼다. 쉬시티아Syssitia는 스파르테의 병영식 공동식사로 스파르테식 훈련인 '아고게Agoge,Agoga'의 과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사들이 화합을 다지는 행사이기도 했다. 공중식당syssition을 세우고 15명 정도로 공동 식사 구성원을 조직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다. 비용은 각자가 자신의 클레로스kleros小作地에서 나온 아포포라에서 한 달에 보리 77리터, 포도주3리터, 치즈 3킬로그램, 무화과 1.5킬로그램, 그리고 고기를 살 돈 10오볼로스를 내어(내지 못하면 불명예 처분되어 쉬시티아에서 제명되었다), 돼지고기와 돼지 피를 넣고 끊인 '검은 국melas zonos,black broth'을 주로 먹었다. 공동식사 모임은 쉬시티아 이외에도 페이디티아peiditia와 안드레이아Andreia라고 부르는 모임이 있었고, 크레타에서는 헤타이리아hetairia라는 모임도 있었다. [본문으로]
  50. 아고게Agoge(도리에이스 방언으로는 아고가Agoga)는, 비록 뤼쿠르고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나, BC7세기에 와서야 정립된 것으로 보이는, 7세부터 21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파르테 남자들에게(승계가 인정된 두 왕가의 장남만 예외였다) 그들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한 전사가 될 수 있도록 의무적으로 부과한 군사훈련이었다. 모든 스파르테의 사내 아이는 튼튼해지도록 태어나서 바로 포도주에 씻겼고, 마을의 게론테스長老가 보고 건강하니 키워도 좋다고 하면(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타위게토스Taygetos 산의 작은 골짜기들에 만든 유기장apothethae,deposits遺棄場 아포테타이에 이레 정도 두어 시련을 겪고 살아나거나, 죽게 버려두었고 하는데, 아직까지 이런 유기장들에서 범죄자로 보이는 성인의 유골 이외에 유아의 유골이 나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아이를 죽이는 일은 아테나이를 포함한 그리스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부모가 키워, 7세가 되면 '파이도노모스Paidonomos訓育官'에게 등록하고 세 단계(첫 단계는 파이데스Paides로 대략 7-17세, 다음은 파이디스코이Paidiskoi로 17-19세, 마지막 단계는 헤본테스Hevontes로 20-29세)의 아고게를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노인들의 지도 아래 아겔라이Agelai,herds共同生活體에 들어가 이따금 공동식사장Syssiteion에서 '쉬시티아Sysitia共同食事'(의도적으로 적은 양의 맛없는 식사를 주었다)를 하며 가족보다는 스파르테에 충성하도록 양육되었다. 12세가 되면서 일 년에 진보라색 외투(포이니키스poinikis인데 외투cloak를 포이니케 원산의 진보라색 염료Tyrian purple로 물들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하나를 주어 모든 토포뉨toponym敎場에서 입도록 했고, 상하 간의 전우애는 물론 교육적 목적으로 젊은 성인과의 교제(플루타르코스는 이 교제를 스파르테식 남색Spartan Pederasty의 기원으로 본다.)를 시작하게 하였다. 파이디스코이 단계의 18세가 되면 스파르테 군대의 예비병eiren(24세가 되어야 정식 전사가 될 수 있었다)이 되고, 더러는 비밀경찰인 크륍테이아Crypteia가 되어 헤일로타이를 감시하고 심야에 나다니거나 언행이 불순한 헤일로타이를 죽일 수 있게 하였다. 헤론테스 단계인 20세가 되면, 비록 공동 생활을 하며 힙페이스Hippeis近衛隊에 뽑히기 위해 경쟁하기도 했지만, 비로소 쉬시티아의 정식 구성원(공중 식당 구성원들의 무기면 투표로 구성원이 되고, 거절된 사람은 십 년까지 다른 공중 식당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옮겨다닐 수 있었는데, 30세가 되도록 쉬시티아의 구성원이 되지 못하면 스파르테 시민인 동등인이 될 수 없었다)이 되었다. 이런 훈련을 거쳐 30세가 되면 완전한 스파르테 시민인 동등인으로서, 결혼도 하고 투표권도 얻고 공무도 담당할 수 있었다. 이런 아고게 교육 비용은 아버지가 부담하였다. [본문으로]
  51. 뤼쿠르고스의 실존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지만, 이 글에서의 뤼쿠르고스는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뤼쿠르고스이다. [본문으로]
  52. '메갈레 레트라Megale Rhetra,great proclamation,大宣言'은 도리에이스 스파르테의 불문법이다. 비록 플루타르코스는 이 메갈레 레트라가 뤼쿠르고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메갈레 레트라가 돌에 새겨진 적도 없는 불문법이며, 두 왕이 동시에 같은 전장에 나갈 수 없게 했다거나, 왕들을 감독할 5명의 에포로이를 선임했다거나 하는 후대에 필요에 따라 정치 제도가 바뀌어 온 걸 보면, 도리에이스 사람들과 함께 스파르테에 정착하여 함께 발전하였을 전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본문으로]
  53. 포레스트W.G.Forrest는 그의 책 '스파르테의 역사A History of Sparta 950-192BC'에서 뤼쿠르고스의 모든 개혁reform이 '스파르테의 세 가지 덕성Three Spartan Virtues', 즉 '시민 사이의 평등Equality among citizens', '군사적 적합성Military fitness', 그리고 '내핍耐乏Austerity'을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54. 도리에이스 사람들과 헤라클레스 후손들의 펠로폰네소스 정착은 BC11세기 아테나이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멧세니아의(궁전은 퓔로스Pylos에 있었다.) '넬레오스Neleos 왕가Neleidae'의 마지막 왕이 된 멜란토스Melanthos가 그의 가족과, 같은 왕가 사람 알크마이온Alkmaion,Alcmaeon 가족, 그리고 네스토르Nestor(넬레오스의 아들이자 트로이아의 대표적 전사,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100번이 넘게 그의 이름을 말한다.)의 아들 파이온Paion,Paeon의 가족들과 함께 아테나이로 이주해(파우사니아스는 아테나이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조상이 이때 함께 이주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헤로도토스는('역사'V.65)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조상이 넬레오스의 후손들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버지 힙포크라테스도 넬레오스의 손자, 네스토르의 아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테나이의 테세우스 왕가의 튀모이테스Thymoites,Thumoetes로부터 양위받아 '멜란토스 왕가Melanthid'를 열었기 때문이다. 멜란토스에 이어 코드로스Kodros,Codrus가 왕이 되었을 때, 힙포테스Hippotes의 아들, 알레테스Aletes가 이끄는 도리에이스의 아티케 침공이 있었는데, 잦은 왕가의 교체로 아테나이가 혼란스러워지고, 코드로스왕 역시 사치하고 유약했기 때문에(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단편Frag.7) 아테나이가 잘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레테스가 코드로스를 응징해야 할 무엇이 있었는지, 코드로스가 전사하자(전승은 알레테스가 아티케 침공 전에 받은 델포이의 신탁, 즉 아테나이의 왕이 다치지 않는 한 침공은 성공한다는 것, 바꾸어 말해 아테나이의 왕이 죽으면 침공은 실패한다는 내용을 알게 된 코드로스가 자신을 희생하여 침공을 막기로 결심하고, 자진하여 농부로 가장하고 도리에이스 진영으로 가 싸움을 걸어 죽었고, 죽은 자가 코드로스인 것을 파악한 알레테스가 철수했다고 한다.), 도리에이스가 물러났다. 이 전쟁으로 코드로스가 죽자 그의 아들 메돈이 왕위를 버리고 최초의 종신 아르콘의 자리에 올랐고(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 정치제도사'III.3에서 그의 뒤를 이은 그의 동생 아카스토스가 최초의 종신 아르콘이란 설도 소개한다.), 이때부터 아테나이 정치제도에서 최고 통치자가 왕에서 아르콘으로 바뀌게 되었다.(파우사니아스,'그리스 서술'2.18.) [본문으로]
  55. 스파르테는 선출이 아니라 세습하는 두 왕가에서 나오는 왕들이 둘 있었지만 이들의 지위는 제사나 전쟁에서의 지휘자라는 제한적인 역활에 머물렀으며, 이마져도 후일 스파르테의 다섯 부락에서 한 명씩 투표로 뽑은 에포로이Ephoros,Ephoroi라는 감독직의 감독을 받아야 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도시 일은 당연직으로서의 두 왕과 28명의 선출된 게론테스로 구성된 게루시아가 집행했는데, 다만 도시 전체의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 한해, 게루시아는 아펠라民會를 소집하여, 아펠라에서 결정하였다. 후일 아펠라의 결정에 대해 왕들이나 게루시아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는데, 에포로스 제도와 함께 테오폼포스Theopompos 때 더해진 것으로 플루타르코스가 '뤼쿠르고스전'에서 전한다. [본문으로]
  56. 이 글, '9.도시의 평화',9.13-18,'10.도시의 정의',10.11,10.26, 참조. [본문으로]
  57. 고대 그리스 도시들은 대부분 도시의 최고 집정관magistrate을 '아르콘Arkon,Archon,ruler,'이라 불렀다. (스파르테에서만 아르콘은 공동식사의 주관자를 가리켰다.) 아리스토 텔레스와('아테나이 정치 제도사'III.3) 파우사니아스에('그리스 서술',7.2.1) 따르면, 아테나이의 첫 번째 아르콘은 BC11세기 메돈Medon으로(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에서의 마지막 왕 코드로스Kodros 이후 메돈이 첫 종신 아르콘이 되었다는 설과, 아르콘이 9명으로 된 때에도 아카스토스 때의 서약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것을 증거로 아카스토스가 첫 종신 아르콘이라는 설을 소개하는데,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이들 두 사람은 코드로스의 아들들로 메돈의 후임이 아카스토스였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정하듯 누가 먼저라도 별 상관없어 보인다.), 이 이후 왕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 세습 종신 아르콘직은 BC8세기 알크마이온Alcmaeon까지 이어지다가, 10년 임기의 여러 아르콘을 뽑았다. 처음은 '아르콘 에포뉘모스Arkon Eponymos,(최고 집정관으로 아르콘들을 대표하며,그의 이름을 연호Eponymos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에포뉘모스 아르콘이다)', '폴레마르코스Polemarkos,(국방 담당 아르콘으로 군의 최고 지휘관이다. BC501 클레이스테네스 이후 이 자리는 선출된 임기 일 년의 장군Strategos들로 대치되었다)', '아르콘 바실레우스Arkon Basilleus,(제사장이자 최고 재판관을 맡은 아르콘이다)'의 세 명이다가, 나중 각 부락에서 아르콘을 선출해 모두 9명으로 늘어났고, 나머지 6명은 '테스모테타이Thesmothetai,(재판관들이다)'라 불렀다. BC7세기에 들어서 아테나이는 아르콘의 임기를 일 년으로 줄이고 매년 아레오파고스에서 지명 또는 선출하기 시작했고, 솔론 이후의 혼란기에는 아르콘을 뽀비지 못하기도, 직능 별로 10명을 뽑기도 하다가, 클레이스테네스 이후 아르콘은 10개 부락에서 1명씩 제비로 뽑아 모두 10명으로 늘었다. 이렇게 이어진 아테나이의 아르콘 제도는 마케도니아,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도 존속되어 오다가 AD485 니카고라스Nikagoras를 마지막 '대표 아르콘Arkon Eponymos'으로 끝나고, 아테나이는 콘스탄티노플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본문으로]
  58. BC13세기 테세우스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스파르테의 군대를 아테나이에 불러들인 메네스테우스에 이어, 기록 상으로는 두 번째로 BC632에, 전前올륌피아드 우승자 퀼론Kylon이 참주가 되기 위해 아테나이에 메가라Megara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메가라의 군대는 성공적으로 아테나이에 입성하는 듯하였으나, 당시의 '대표 아르콘Arkon Eponymos,Eponymous Archon'이던 '알크마이온 가문Alcmaeonidae'의 메가클레스Megacles가 아티케의 농부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아크로폴리스로 몰아붙였고, 쫓긴 그들은 결국 아크로폴리스의 복수의 여신 사당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오래 피신하였다. 이에 다른 아르콘들이 중재에 나서 그들을 해치지 않고 재판에 회부한다는 조건으로 사당에서 나오게 했고, 이 협상을 믿고 나오는 그들을 죽여버리는(헤로도토스와('역사'V.71), 투퀴디데스는('펠로폰네소스 전쟁',I.126) 극도의 냉정함으로 퀼론의 추종자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쓰고 있는데 반해, 플루타르코스는 '솔론전'에서 그들 가운데 퀼론 형제도 있었으며, 그들은 협상의 이행을 믿지 못해 복수의 여신상을 묶은 끈에 그들을 연결해 사당 밖으로 나왔는데 어쩐 일인지 그 끈이 끊어지자 진압군들이 돌로 그들을 쳐죽였다는 극적인 장면을 소개한다.) 과정에서 진압군이 복수의 여신에게 불경(miasma,stain or pollution,흠집汚染)을 저질러, 여신의 저주가(사람들은 이 때문에 복수의 여신이 저주를 내렸다고 믿고 이 저주를 '퀼론의 저주'라 불렀다) 내렸다는 이유로 메가클레스를 포함한 알크마이온 가문에 대한 대규모 추방령exile을 내렸고, 살아남은 퀼론의 추종자들은 그들대로 복수를 위해 권토중래를 모색하고 있다가 솔론의 집권 직전에 시가지에서 대 알크마이온 살륙전을 펼쳤다. '퀼론의 저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알크마이온 가문 출신의 권력자가 나올 때마다(이를 테면 직계손인 클레이스테네스나 외손인 페리클레스이다) 조심스레 건너야 할 징금다리가 되었다. [본문으로]
  59.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타이크모스가 대표 아르콘이었을 때의(BC623) 일로 소개하는데, 정작 이 드라콘법이 공표되어 시행된 해는 BC621(이 해의 대표 아르콘 이름은 미상이다)인 것으로 보아 드라콘이 아리스타이크모스 때 법을 만들었으나 형벌과 정치제도의 개혁 내용이 너무 과격하여 바로 시행하지 못했던 듯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형벌의 과중함 때문에 '피로 쓴 법'이라 불리며, 솔론이 개혁할 때 살인죄에 대한 것만 빼고는 드라콘법을 모두 버린 것을 감안하면, 기록으로 남은 드라콘 법이 모두 제대로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소개하는 드라콘법으로 바뀐 아테나이의 정치제도들로는, 무기를 소지한 시민에게만 참정권을 주고(무구를 갖추는 비용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아르콘과 회계를 담당하는 관리들에 대해서는 9므나라는 소유 재산 하한선을 두었고, 장군과 기병대장의 자격을 100므나 이상의 재산과 합법적인 부인과의 사이에 10세 이상의 아이들을 가자고 있는 사람으로 정하고(아르콘과 회계 관리들의 재산 하한선과 비교할 때 이들이, 전쟁을 구실로 따로 수입을 챙겼을 때 구상求償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이런 재산을 가졌어야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고위 공직자들은 회계 감사를 받도록 했으며(주로 임기가 1년이었던 대표행정관인 프뤼타네이스와 장군과 기병대장은 임기 동안의 회계를 감사하는 동안 구금이 원칙이었던 모양으로, 그들과 같은 정도의 세금을 내는 4명의 보증이 있어야 풀어주었다), 30세 이상의 제비로 뽑힌 사람들 401명으로 의회를 구성하고(만일 이 법이 시행되었다면 이것이 아테나이 최초의 불레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부 학자들은 솔론의 불레가 최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해당자들이 의원으로 봉사한 다음에야 다시 뽑힐 수 었었는데, 민회나 의회에 불참하면 고액의 벌금을 매겼고(계층에 따라 차등으로 매겼는데, 500메딤노이는 3드라크메, 힙페이스는 2드라크메, 제우기타이는 1드라크메였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면 이 당시 아테나이 사회에는 이미 재산의 소유 정도에 따라 솔론이 정했다는 그런 사회계층이 형성되어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레오파고스는 법을 수호하고 모든 공직자가 법을 지키는지 감독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은 관련 법을 제시하며 아레오파고스에 제소할 수 있었으며, 그밖에 몸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은 허용되었다는 것들이다.('아테나이 정치제도사',IV.1-4) [본문으로]
  60.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나이 부자들이 솔론이 부자여서 자기들 편이라 생각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솔론이 정의로웠기 때문에 자기들 편이라 생각했으며, 레스보스의 역사가 파니아스를 인용하면서, 솔론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토지를 분배해주고, 부자들에게는 빚을 돌려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쓰는 한편, 부자들의 횡포와 가난한 사람들의 탐욕을 보면서 정치에 나서지 않으려 했으나 아르콘이 되었다고(BC594-3) 쓰고 있고('솔론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이 첫 번째 민중 정치가였으며('아테나이 정치제도사'II.3), 자질과 명성은 일류지만 재산과 언동은 중류인 중재자로서 양편을 위해 양편과 싸우면서, 분열이 부자 때문으로 적의가 오만과 탐욕으로 생긴다고 우려했고(같은 책,V.2,3), 정치를 개혁하며 민주적 색채를 많이 넣었는데도(이를 테면, 인신 담보 금지, 신원 해소를 위한 제3자 고발 또는 청원, 민중 주도의 상소심 재판소dikasterion 창설, 등(IX.1)), 민중들은 모든 것을 재분배하기를 원했고, 부자들은 옛 질서로 돌아가거나 조금만 바꾸기를 바랐으나, 양편 모두에게 상황이 기대에 어긋났으므로 모두에게 외면당했다고 쓰고 있다.(같은 책,XI.2) [본문으로]
  61. 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II.1-2,IV.4,V.1, [본문으로]
  62. 살인죄에 관한 법은 그대로 두었다,(같은 책,VII.1) [본문으로]
  63. 이 혼란을 수습할 사람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은 솔론을 뽑았는데, 솔론은 300명의 재판관을 구성하여 플리아 구區의 미론에게 재판장을 맡겼고, 이 재판에서 퀼론 일가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아티케 밖으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솔론은 죽은 자의 추방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던지, 후일 개혁 입법을 통해 죽은자에 대한 모독을 금지시켰다. 추방 후, 도시에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나자, 솔론은 크레테에서 에피메니데스를 초정하여 아테나이를 정화하는 제사를 주도하게 하였다.(플루타르코스,'솔론전') [본문으로]
  64. 같은 책,VIII.5,'...도시에 내분이 잦았으나 일부 시민들이 무관심하게 사태를 방치하는 것을 보고 법을 만들어, 도시에 내분이 일 때 무기를 들어 양편 중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명예를 주거나 도시의 일에 동참하지 못하도록...' [본문으로]
  65. BC600 살라미스 점령 후, 솔론이 살라미스 문제의 영구적 해결을 위해 동맹 도시 간의 중재를 요구하여 아테나이의 영유권 확인하고 난 다음의 어느 때, 그리고 BC594 대표 아르콘이 되어 개혁에 착수하기에 앞선 어느때, 퀼론 일가가 추방당하지 않고 남아 있던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을 살상하며 보복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때 시민 300명과 함께 이들의 재판을 맡았던 솔론이 피의 복수를 감행한, 퀼론 집안인 플뤼아의 뮈론은 처형하고, 나머지는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모두 추방하는 일이 있었는데(플루타르코스가 '솔론전,7'에서 전하는데, 이것이 처음 기록된 부관사골이었다), 이때 메가라가 살라미스와 니사이아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도시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지자, 도시에서의 세력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쫓겨났던 알크마니온 집안 사람들을 다시 아테나이로 불러들이면서, 한편으로는 크레테의 에피메니데스를 초청해 아테나이의 정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이때 아테나이로 돌아온 메가클레스의 손자 메가클레스가 솔론의 개혁 이후 다시 혼란스러워진 아테나이에서 아리스톨라니데스를 중심으로 뭉친 귀족들에 대항하기 위해 주로 해안가에 살며 상공이나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결성된 '파랄리오이Paralioi,海岸黨'를 결성하고 이끌었다. [본문으로]
  66. 솔론의 개혁 이후에도 실제 아테나이에서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층은 아테나이 평지의 농토를 대부분 소유한 소수의 귀족들이었고, 이들을 아리스톨라이데스가 대표하고 있었지만 당파를 결성하지는 않고 있었는데, 이들이 장악한 아레오파고스가 더 이상 아르콘을 지명하거나 선출할 수 없을 정도로 분화되기 시작하자 아리스톨라이데스의 아들 뤼쿠르고스가 지주인 귀족들을 모아 '페디에이스Pedieis平地黨'를 만들고 이끌었다. [본문으로]
  67. BC632 퀼론의 쿠데타 실패 이후 더욱 불거진 살라미스와 니시아스의 영유권 문제는, BC600 아테나이에서 살라미스를 포기하는 정책이 나올 정도로 전쟁이 계속해야 하는 골치꺼리였고, 이때 솔론이 이 정책에 반대하여 개인적으로 모집한 군대로(어린 페이시스트라토스도 있었다)살라미스를 점령하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는데, BC565에 벌어진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승리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아테나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빈곤한 산지 사람들을 위한다며 '디아크리오이Diakrioi,山岳黨,Hyperakrioi'를 결성하고 그들을 이끌면서 정치에 뛰어들었다. [본문으로]
  68. 같은 책,VIII.1-5. [본문으로]
  69. BC560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몽둥이를 든 경호원을 데리고 처음 참주가 되었고, 시민들의 무장 궐기로 참주를 반대하자던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막지 못하고 이듬해 BC599에 죽었다. [본문으로]
  70. 아테나이 사람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다른 도시의 군대를 앞세워 에레트리아에서 마라톤으로 건너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다가 아티케의 팔레네로 다가오자 겨우 막으러 나갔지만, 낮잠이나 자고 주사위 놀이나 하다가 기습을 받고 패주하던 중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명령이라며 겁내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순순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고(헤로도토스,'역사'62,63.), 아리스토텔레스는 간단히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반정군이 팔레네에서 승리한 후 아테나이를 장악했다고 썼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V.3.) [본문으로]
  71.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치 기만술의 대가였다. 그는 가장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는 참주가 되기 위해, 아테나이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민중을 위하는 가장 민주적인 정치가로 보이도록 하는(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IV.1) 기만술을 정치 기술로 채용했는데, 이 기만술을 간파한 헤로도토스를 빼고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루타르코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비록 참주이기는 했어도, 솔론의 법을 따르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펼친 것으로 평가했을 정도로, 그는 민중을 위한다는 단순한 정치 기만술로 참주가 되고 참주로 죽을 수 있었으며, 아들에게 참주를 물려줄 수도 있었을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민중을 위하고 민주적인 정치가로 보이도록 하는 큰 정치 기만술 말고도, 참주가 되기 위해 민중을 기만하는 몇 가지 작은 정치 기만술도 발휘하곤 했는데, 그 하나가 자해를 해놓고 괴한들에게 피습당했다며 몽둥이를 든 경호원을 데리고 다닐 수 있게 한 다음 그들을 데리고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여 첫 번째로 참주가 된 것이고, 이어서 뤼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의 합작으로 참주에서 쫓겨나 테켈리아로 망명하던 중, 둘 사이가 틀어져 세불리를 느낀 메가클레스의 참주직과 메가클레스의 딸과의 혼인 조건부 합작 제의를 받아들이며 두 번째의 참주가 되기 위해 아테나이로 오면서 벌인, 현신한 아테나이 여신의 인도 행렬을 연출한 기만은, 헤로도토스의 표현대로('역사'I.60) 좀 유치했지만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먹혀들었으나(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IV.4), 메가클레스의 딸과의 혼인의 기만은 메가클레스에게 먹혀들지 않아('역사',I.61,'아테나이 정치 제도사'XV.1) 에레트리아로 도망쳐야 했고, 세 번째로 참주가 되기 위해 다른 도시의 군대를 이끌고 아테나이로 들어왔을 때는 아직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미덥지 않아 무장을 한 채 동향을 살피는 아테나이 시민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위해 기만술을 펼쳤는데, 아크로폴리스의 테세우스 사당 앞에서 열병식을 벌이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연설하자, 아테나이 사람들이 아크로폴리스 입구 바깥에서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에 가까이 와서 들으라고 하여, 아테나이 사람들이 연설을 들으려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기기 위해 무기를 아크로폴리스 입구에 놓고 들어가자 미리 남겨둔 부하들이 그 무기들을 거둔 것을 확인하고는 무기를 거둔 사실을 말한 뒤 놀라거나 겁내지 말고 이제 도시의 일은 자기에게 맡기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이었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V.3-4) [본문으로]
  72.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반정을 도운 도시들로, 테바이를 위시한 많은 도시들은 헌금했고, 아르고스에서 용병들이 왔고, 낙소스Naxos에서는 뤽다미스Lygdamis가 직접 군대와 돈을 가지고 왔는데, 이들이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Eretria에서 바다를 건너 마라톤에 도착하자, 아테나이에서 추종자들이 와서 합류했고, 농촌에서는 자유보다 참주 정치를 더 환영하는 무리들이 몰려왔고(이상 헤로도토스,'역사'I.61), 텟살리아에서 은광 개발로 돈을 벌어 텟살리아의 판가이오스에서 모집한 용병,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후처 아르고스Argos 여자 티모나사Tamonasa가 낳은 헤게시스트라토스Hegesistratos가 외가에서 데려온 아르고스 용병 1,000명, 테바이 사람들, 낙소스의 뤽다미스, 에레트리아의 기병도 있었다.(아리스토텔레스,'그리스 정치제도사'XV.2,XVII.3) [본문으로]
  73. 헤로도토스,'역사'I.62,'...자유보다 참주 정치를 더 환영하는 무리들이...' [본문으로]
  74.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기를 도운 낙소스의 뤽다미스를 낙소스 섬의 참주로 만들어 준 다음, 아테나이의 반대자들이 반대하지 못하도록 그 자식들을 인질로 잡아 낙소스로 보내 뤽다미스의 감시 아래 두었다.(헤로도토스,'역사'I.64) [본문으로]
  75. BC527 [본문으로]
  76.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나이의 대표 아르콘이 된 적이 있었는데, 바로 힙피아스 참주 때인 BC524이었다. [본문으로]
  77. 헤로도토스는, 힙파르코스가 암살된 판아테나이 축제 전날 꿈에 한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 '사자여,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성 있는 마음으로 참도록 하라. 죄를 짓고도 벌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느니라.'라며 위험을 경고했는데도, 더구나 아침에 해몽가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고도, 그 위험 경고를 이내 잊어버린 경박함을 말하고('역사'V55-6), 아리스토텔레스는 힙파르코스가 철없고 정열적이고 시가를 사랑하여 아나크레온, 시모니데스 등의 시인들을 불러모았다고 전한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VIII.1) [본문으로]
  78.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VI.56.1,'...하르모디오스에게 거절당하자 계획대로 그를 모욕했다. 하르모디오스에게는 미혼의 누이가 있었는데, 힙파르코스는 그녀더러 와서 축제 행렬에서 바구니를 들라고 초청해놓고는 그녀가 오자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는 만큼 처음부터 아예 초청한 적이 없다며 그녀를 돌려보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VIII.2,'...그에 대한 사랑의 제안이 거부되자 정욕을 참지 못하고 여러 가지 못된 짓을 저질렀다. 마침내 판아테나이 제전에서 하르모디오스의 누이가 (미혼이지만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물에 뿌릴 보리와 제물을 나눌 칼을 넣은) 바구니를 들고 행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면서 하르모디오스를 변변치 못한 놈이라고 욕하였다...' [본문으로]
  79. BC514 [본문으로]
  80.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VI.57-8. 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VIII.4-6. [본문으로]
  81.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아테나이의 확장에 대한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보았듯이, 인간의 두려움이 낳는 비극적 상황에 대해 관심이 높다.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의 힙파르코스를 죽이는 행위나, 힙피아스가 시민들을 죽이는 행위가 모두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VI.59.1,2) [본문으로]
  82. BC565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민중을 위한다며 산악당을 만들어 처음 참주가 된 것이 BC560의 일이고, 힙파르코스의 죽음으로 힙피아스가 피의 복수를 시작한 것이 BC514의 일이니 50년 내지는 46년 동안이다. [본문으로]
  83. '인보동맹Amphiktyonia,Amphictyonic League,League of Neighbors,隣保同盟'은 델포이Delphoi,Delphi에 있는 아폴론Apollon,apollo 신전의 봄 제사와 안텔레Anthele에 있는 데메테르Demeter 신전의 가을 제사에 함께 제물을 바지고 제사를 지내는 델로스와 안텔레 인근에 위치한 12개 도시들의 동맹체이다. 그 12도시들은 다음과 같다. 1)아이니스Ainis(오이타이아Oitaia를 포함하여) 2)테바이Thebai,Thebes(Boiotia) 3)돌로피아Dolopia 4)스파르테Sparte 5)아테나이Athenai 6)프티아Phthia 7)로크리스Lokris(동서 로크리스를 포함하여) 8)마그네시아Magnesia 9)말리에이스Malieis 10)페르라이보이Perraiboi 11)포키스Phokis 12)텟살리아Thessalia [본문으로]
  84. 한 예로, 사암砂岩으로 설계된 신전 전면을 파로스의 대리석으로 바꾸어 시공해주었다.(헤로도토스,'역사'V.62) [본문으로]
  85. 힙피아스의 이 원모遠謨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힙포클로스 집안의 주선으로 페르시아의 수사Susa에까지 가서 다레이오스를 만났고, 다레이오스의 헬라스 침공 때 길잡이로서, 그리고 함락된 아테나이의 참주로서, 에레트리아를 거쳐 마라톤까지 다레이오스와 함께 왔다.(투,'펠'VI.59.3-4) [본문으로]
  86. 헤로도토스,'역사'V.62 [본문으로]
  87.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테가 본디 페이시스트라토스 집안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신의 뜻이 너무 확실하여, 신에 대한 의무가 인간끼리의 의무에 우선한다는 생각으로 군대를 보냈다고 한다.('역사'V.63)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참주제를 보는 스파르테의 다른 시각을 전하는데, 오랜 내전에 시달렸던 스파르테가 헬라스 세계에서 맨 먼저 법치를 확립하여 참주의 지배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법치를 확립한 도시의 안정을 기반으로 다른 도시의 내정을 간섭할 여력이 생기자, 시켈리아의 참주들을 제외한,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와 아테나이보다 먼저 된 헬라스 세계의 참주들 대부분을 축줄했다고 한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I.18.1) 클레이스테네스는 틀림없이 신탁에 의지하는 스파르테 사람들의 습성을 헤로도토스의 그것처럼, 참주를 보는 스파르테의 시각을 투퀴디데스의 그것처럼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고, 이런 스파르테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델포이의 퓌티아女司祭를 이용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88. 헤로도토스는 그것이 독자적이었는지 클레오메네스와 연대하고 있었는지, 혹은 그의 지휘 하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이, 그러나 클레오메네스의 포위에 대한 언급('역사'V.65)과는 별도로, 클레이스테네스와 자유를 원하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옛 펠레스고이 성벽 안으로 들어간 참주 일파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며('역사'V.64) 아테나이로 돌아온 클레이스테네스를 처음 언급했다. [본문으로]
  89. 헤로도토스가, 참주를 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하지 않고 추방으로 끝내는 이 중대한 조건을 클레오메네스도, 클레이스테네스도, 이사고라스도 아닌, 그저 아테나이 사람들이 했다고 적은 것을 보아('역사'V.65),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클레오메네스가 아테나이 사람들의(클레이스테네스의 이름은 없다) 도움을 받아 요새를 봉쇄했고, 탈출하려던 가족들이 붙잡히자 안전을 조건으로 닷새 안에 재산을 이전하고 아크로폴리스를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아테나이 정치제도사'XIX.5-6), 이때까지 클레오메네스는 힙피아스에 대한 처리나, 힙피아스 이후의 아테나이에 대한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90. 헤로도토스는 알크마이온 집안의 참주에 대한 반대를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뒤(파이오니아 거점에서의 패주 이후) 알크마이온 집안은 페이시스트라토스 집안을 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역사'V.62)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클레스나 클레이스테네스 이외에도 케돈Kedon이라는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이 참주를 공격했었다고 전하며(공격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어디에서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테나이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도 한 소절 소개하고 있다. '.../케돈에게도 잔을 채우는 것을, 여보게, 잊지말게./좋은 사람에게 술을 부을 때는 말일세...'('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5) [본문으로]
  91. 헤로도토스도 테이산드로스가 아테나이의 저명한 사람이라는 것 이외에 그 가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했을 정도이고('역사'V.66), 참주제 붕괴 이전의 이사고라스에 대한 행적 역시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고, 클레오메네스가 자유를 원하는 시민들과 함께 도성으로들어가 참주의 요새를 포위 공격햇다고 했을 때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참주의 축출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사고라스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첫 번째 평가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일족을 포위 공격할 때부터 클레오메네스는 그의(이사고라스의) 친구가 되었고, 클레오메네스는 이사고라스의 아내의 정부情夫라는 소문이 돌았다...'('역사'V.70)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의 친구였다는 단 한마디로 이사고라스의 성향을 드러내면서, 참주가 물러난 후의 아테나이에서 이사고라스가 클레이스테네스와 대립하였다고 쓰고 있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1) [본문으로]
  92. 이온은 아티케를 그의 아들 넷에게 나누어주고, 그 네 지역을 '퓔레Phyle,clan'라고 불러 지역보다는 혈연적 색채를 더했는데, 이들 부족의 이름으로 아들 겔레온Geleon 퓔레를 '겔레온테스Geleontes', 아기코레스Agikores의 퓔레는 '아기코레이스Agikoreis', 아르가데스Argades의 퓔레는 '아르가데이스Argadeis', 호플레스Hoples의 퓔레는 '호플레테스Hopletes'라 붙여 혈연적 색채를 확실히했다.(헤로도토스,'역사'V.66) 이 퓔레 넷은 한 해의 사계절을 의미했고, 퓔레를 다시 셋으로 나누어 '트리티스Trittyes,thirdings' 또는 '프라트리아Phratria(phatria),Phratry,brotherhood,kinfolk,兄弟團'라 부르고 한 해의 열두 달을 의미했으며, 이 프라트리아를 다시 서른 개의 '게노스Genos,Gene,kin'로 나누어 한 달의 하루를 의미했는데, 이 게노스는 서른 명의 남자를 기본으로 획정하였다.('아테나이 정치제도사'단편Frg.5) 솔론은 이온 이래의 이 같은 부족 구분은 그냥 두고, 다만 테세우스가 종사하는 부분에 따라 나누었던 사회계층 셋을 직업이 아니라 가진 재산의 정도에 따라 넷으로 나눔으로써 정치를 귀족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도시에 기여할 수 있는 재산의 능력에 따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을 정해 개방하였다. [본문으로]
  93. 헤로도토스는 참주의 요새를 포위 공격한 시민들을 도성 바깥의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며('역사'V.64.) 그 범위를 극히 제한하고 있는데, 참주가 도시를 떠나자 환호를 질렀을 그 사람들과는 달리, 본디 도성 안에 있으면서 관망하던 많은 수의 시민들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94. 투퀴디데스가 이 부관사골剖棺捨骨(관을 쪼개어 뼈를 버림) 사건을 보고하고 있다.('펠로폰네소스전잴사',I.126) 이런 경우는 퀼론 일파가 복수를 위해 알크마이온 일파를 기습했을 때, 알크마이온 일파가 퀼론 일파를 추방하며 그 조상들의 무덤까지 부관사골하여 쫓아낸 적이 있었는데(플루타르코스,'솔론전'), 같은 일로 알크마이온 집안에게 보복한 것을 보면 이사고라스가 퀼론 집안과도 관계가 있었다고 보인다. [본문으로]
  95. 스파르테 왕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가 죽은 자에 대한 모독을 금지한 솔론의 법을 어기는데도 아테나이 사람들은 이를 지적하거나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96. 솔론의 법을 따랐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때에도(플루타르코스,'솔론전') 솔론의 '불레Boule,Council of Citizens,義會'가 계속 활성화되어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지만, 아르콘직이나 다른 아테나이의 제도가, 참주를 따르고 칭송하는 한,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불레가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97. '파이안Paian,paean'은 찬시ode,lyric poem讚詩, 찬송chant讚頌, 찬가song讚歌를 통털어 일컫는 말로, 승리triump의 축하나, 신에 대한 감사thankgiving, 제의solemn ritual에 사용하였고, 희극에서 파도로스와 엑소도스에 코로스가 부르는 노래처럼 주로 합창으로 불러졌으나 때로 독창monody을 염두에 둔 것도 있었다. [본문으로]
  98. '엑클레시아Ekklesia,Ecclesia,Assembly,總會,民會'는 공동체 구성원의 총회, 도시의 민회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99. '프뉙스Pnyx'는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 근처 언덕에서 엑클레시아가 열릴 때, 여러 사람이 '비좁게 모여 앉았다,pnyx,tightly packed together'고, 그 언덕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테나이에서는 초기의 엑클레시아가 아고라에서 열렸으나, 점점 참가자가 늘고 클레이스테네스 이후 법적 제도로서 발전하게 되자, 프뉙스에서 열었다. 규모가 커진 엑클레시아를 위해 프뉙스도 커졌는데, 자연상태의 언덕 평지는 연단인 '베마Bema,speaker's platform'를 두고 보통 6,000명 정도를, 빽빽하게는 1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조금씩 바닥을 고르고 옹벽을 쌓아 개선해 나갔다. BC4세기에는 일 년 두 번의 정기 엑클레시아는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임시 엑클레시아는 프뉙스에서 열다가, BC1세기에 와서 디오뉘소스 극장이 엑클레시아 회의장이 되었다. [본문으로]
  100. 불레에서 500명의 불레테스 모두를 상근케 할 수 없었으므로, 열 개 부족의 불레테스 가운데 매년 한 개 부락씩 50명의 불레테스가 번갈아 상근하는 일 년 임기의 '프뤼타니아Prytania,Prytany,常任委員會'를 두었다. 그리고 위원인 프뤼타네이스Prytaneis 가운데 1명을 24시간 근무하는 '에피스타테스Epistates,foreman,caretaker,當職'로 매일 추첨으로 뽑아, 그날 그날 프뤼타니아는 물론 불레와 엑클레시아의 의장이자 책임자로 일하게 하였다. 따라서 불레가 주최하는 엑클레시아 진행은 에피스타테스가 맡았다. 그후 BC4세기에 들어, 에피스타테스의 역활은 비상근 9개 부족에서 1명씩 추첨으로 뽑은 불레테스들로 구성된 '프로에드로이Proedroi'라는 기구로 이관되어, 이 기구가 불레가 주관하는 회의 의장을 맡았다. [본문으로]
  101. 프뉙스에서의 의사 진행 원칙은 '이세고리아Isegoria,Equal Speech,', 즉 도시의 일에 대해 토론할 때 모든 시민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뉙스에서 토론을 여는 에피스타테스의 첫 마디는 언제나 이것이었다. '누가 발언하시겠습니까?','Tis agoreuein bouletai?'.'Who wishes to speak?' [본문으로]
  102. 아테나이 민주정에서 가장 주요한 시민의 권리는, 민회에서의 동등한 발언권으로 대표되는 '이세고리아Isegoria,Equal speech', 재판에서 동등한 법적 권리로 대표되는 '이소노미아Isonomia,Equality under the law,同等法適用', 그리고 공무를 맡을 동등한 권리로 대표되는 '이소폴리테이아Isopoliteia,Equal political opportunity同等參政權', 이 세 가지였다. 이 가운데 이소폴리테이아의 '동등한 공무담임권Equal opportunity to assume political office,同等公務擔任權'에 앞선, 보편적인 이소폴리테이아의 행사가 바로 투표였다. 엑클레시아에서의 표결처럼 비밀투표를 할 필요가 없는 경우 대부분 찬반에 손을 들어 거수 표결하였고, 찬반의 비밀이 지켜져야 할 경우에는 찬성과 반대 혹은 1안 2안 3안 등을 구분한 항아리에 '프세포스psephos,pebble,조약돌'를 넣는 투표로 표결하였다. (정치학의 한 부분인 '선거학', 'Psephology'는 고대 그리스에서 투표지처럼 사용된 'Psephos'에서 나온 말이다.) [본문으로]
  103. 스파르테의 경우, 민회의 성격으로 동등인들이 모이는 아펠라가 열렸는데, 토론도 질문도 대안도 낼 수 없이 가부만 표시했고, 그나마 멧세니아 전쟁 후 왕들이나 게루시아에서 거부할 수 있도록 고쳤다. 이로보아 초기 헬라스 도시들에서 열린 엑클레시아는, 시민들의 의사로 도시의 일을 결정하기보다, 집권자들이 내린 결정에 대한 홍보와 협조를 구하기 위한 모임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04. 솔론이 새로 구분한 아테나이 네 가지 사회 계층의 최하위 계층이다. 주로 일용직wage worker이나, 소작농serf이 대부분이었다. 솔론은 이 '테테스Thes단Thetes복,貧民'에게 공무담임권은 주지 않고, 엑클레시아의 참석권과 발언권만 주었기 때문에 많은 테테스가 자신은 테네스가 아니라 제우기타이 계층이라고 말했다. [본문으로]
  105. 이 글에서는 '아레오파고스 회의會議,Council of Areopagus,그Areopagos'를 그냥 아레오파고스로 쓴다. 아레오파고스는 전직 아르콘이나 고위직들로 구성된 회의체로, 아테나이의 귀족정이나 과두정에서 소수가 장악한 권력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며, 체제를 수호하고, 아르콘을 뽑고, 도시의 법을 제정하고, 재판 업무를 맡았다. (그래서 솔론이 개혁에 나섰을 때 아레오파고스는 그 권능를 솔론에게 위임하였다.) 회의가 주로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바위Areios Pagos,Ares Rock', 즉 아레오파고스Areopagos라 불리는 곳에서 열렸기 때문에 '아레오파고스 회의'라 했다. 솔론시대의 아르콘은 임기 일 년에 9명이었으므로 아레오파고스의 인원이 150명에 육박했고, 도시 일에 대한 영향력도 그들이 지명했거나 선출한 현직 아르콘보다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에서 시작된 역할 줄이기로 페리클레스 시대에 와서는 역할이 거의 없어졌다. [본문으로]
  106. 솔론은 아테나이 시민을 재산의 정도에 따라 네 개의 계층으로 나누었는데, 가진 재산이나 한 해 수입이 곡물과 포도주 올리브 기름 등을 합해 500메딤노이(Medimnoi,1메딤노이는 대략 50리터, 12갤론, 두 말 닷 되, 1/4섬) 이상이고, 군대 지휘관strategoi이 될 능력을 갖춘 시민을 '펜타코시오메딤노이Pentakosiomedimnoi'라 하여, 아르콘이나 고위직이 되어 아레오파고스까지 진출할 수 있게 했고, 가진 재산이나 연수입이 곡물과 포도주 올리브 기름 등을 합해 300메딤노이 이상이며, 기병cavalry으로 무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시민을 힙페이스Hippeis,knight,騎士'라 하여, 고위 공직을 담당할 수 있게 했으며(후대에는 아르콘이나 장군으로도 진출할 수 있었다.), 가진 재산이나 연수입이 곡물과 포도주 올리브 기른 등을 합해 200메딤노이 이상으로, 중무장보병Hoplite의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시민을 제우기타이Zeugitai,yeoman,鄕士'라 하여 도시의 일반 공무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가진 재산이나 연수입이 곡물과 포도주 올리브 기름 등을 합해 200메딤노이에 미치지 않는 시민을 테테스Thetes,worker/serf,勞動者'라 하여 일체 공무를 맡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솔론이 불레를 열었을 때는 펜타코시오메딤노이도 뽑힐 수는 있었지만 주로 힙페이스와 제우기타이가 주축이었을 것이나, 힙페이스에게 아르콘 같은 고위직의 기회가 열리면서 불레의 구성원 불레테스는 제우기타이가 주축이 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107. 솔론이 불레테스 선정 방식으로 '제비뽑기Kleros,lot,抽籤'를 채택한 이래, 클레이스테네스가, 장군직을 제외하고는, 아테나이의 아르콘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공직자 선정 방식으로 채택하였는데, 공정한 제비뽑기를 위해 아테나이는 클레로테리온Kleroterion,sortition device,抽添器'를 만들어, 각 부족들, 재판정, 아고라, 등지에 비치하였다. [본문으로]
  108. '불레Boule,Council of Citizens,議會,市民委員會'는 엑클레시아의 확대와 활성화, 그리고 '헬리아이아Heliaia,supreme court,上告法院' 창설로 재판에서의 시민 참여와 함께, 솔론의 개혁을 민주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든, 시민 입법의 핵심 요소이다. 도시의 일을 처리하는 집행 분야는 이미 아르콘들과 고위 집행관으로 자리 잡은 소수의 귀족들이 과점하고 있고, 도시의 전통과 법과 체제 역시 이런 일을 하던 사람들로 구성된 아레오파고스 회의가 맡고 있어, 이들에게 쏠린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만든 것이 불레인데, 불레는 이들의 집행을 감독하고 평가하여 견제하는 기능과, 도시에 필요한 새로운 일을 위한 법이나 칙령을 제정할 기능을 수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레가 실질적으로 테테스까지 참석하는 엑클레시아의 의제를 설정하고 소집하고 진행하여 도시의 일에 대한 도시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함으로써, 도시 일에 대한 결정권을 소수 집권자들에게서부터 시민들에게로 돌려놓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에도 불구하고('아테나이 정치제도사',VIII.4), 솔론의 400명 불레 창설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클레이스테네스의 500명 불레 창설 사이에는 솔론 이후의 혼란기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 시대밖에 없어, 솔론의 개혁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400인 불레가, 첫 째 솔론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거나(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의 개혁법보다 앞선 드라콘법이 401인 의회를 두도록 했다고 한다.), 둘 째 솔론 이후의 혼란기에 만들어졌거나, 셋 째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이 셋이 솔론이 만들었다는 것보다 더욱 신빙성이 없어, 이 글에서는 솔론이 처음 400명으로 구성된 불레를 창설한 것으로 보았다. [본문으로]
  109. 아나카르시스Anakarsis이다. 그는 스퀴타이Skythai 출신 철학자로, 흑해Euxine,Black sea 연안의 유목민 족장 그누로스Gnuros와 그리스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그리스 말로 교육받았다. 그는, 아테나이가 솔론 이후의 무정부 상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어 직종별로 10명의 아르콘을 뽑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세 개의 파당이 세력을 넓히기 위해 서로 극렬한 다툼을 벌이기 시작할 무렵인, BC578경 외교 사절로 아테나이로 와서 시민과 같은 특전을 누리며 지냈다. 이때 솔론과 교유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플루타르코스가 '솔론전'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 하나로, 아나카르시스가 솔론을 찾아와 사귀기를 청하자, '고향 사람과 사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솔론의 말에, '솔론이 이미 고향에 있으니 자기랑 사귀면 되지 않느냐'고 해서, 솔론이 빈객으로 대접했다는 것이고, 다음은, 솔론이 정치와 법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법이란 거미줄과 같아서 약한 사람만 다 걸리고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은 다 찢고 달아난다'고 말하자, 솔론은 '법이란 어기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고,(이에 대한 플루타르코스의 논평은 결과적으로 아나카르시스가 옳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의 의회 경험 소회이다. 그는 한동안 헬라스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헬라스 철학과 문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국 문물의 영향을 꺼리는 혈족들에게 살해되었다. 특이한 점은 그가 헬라스 견문을 통해, '스퀴타이식 변설Skythian Eloquence(솔직하게 말하는 방식)'의 대가로 불릴 만큼 사통오달했음에도 오직 라케다이몬 사람들하고만 분별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고 할 만큼 스파르테식 사고방식을 좋아했다는 점이고, 또 퀴지코스에서 본 '신들의 어머니,퀴벨레Kybele'에 대한 제사에 감명을 받아, 이를 고향에서 재현했을 정도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헬레네 문물로 부족을 오염시킨다고 보는 형이자(아마 아버지 그누로스의 스퀴타이 여자 사이에서 난 이복형이었을 것이다) 족장이던 사울리오스Saulios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헤로도토스,'역사'IV.76-7) [본문으로]
  110. '...또 어느 날 회의에 참석했던 아나카르시스는, 그리스에서 정치에 대한 논의는 현명한 사람들이 담당하는데 반해 그 결정은 무식한 사람들이 담당한다는 점에 놀랐다.'(플루타르코스,'솔론전',홍사중역), '...Anacharsis, being once at the assembly, expressed his wonder at the fact that in Greece wise men spoke and fools decided.'(Plutarch,'Lives,Solon,5.,Dryden trans.) 플루타르코스를 번역한 홍사중은 '민회'도 '의회'도 아닌 두리뭉실 '회의'라고 하고, J.드라이덴은 'assemly민회'라고 하지만, 이 글에서는 아나카르시스가 경험한 곳을 '민회Assembly', 즉 '엑클레시아'가 아닌, '불레'로 보았는데, 솔론 때까지의 민회는 의사 결정 기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플루타르코스가 간과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11. '크렙쉬드라Klepsydra,clepsydra,water thief,盜水器'라 불린, 시각을 재는 물시계가 아니라, 같은 시간을 재는 물시계를 사용했다. 두 개의 항아리를 위 아래로 두어, 한 항아리에 같은 양의 물이 담기는 시간을 재거나, 한 항아리에 담은 같은 양의 물이 빠지는 시간을 재었는데, 발언자에게는 모두 같은 시간을 주는 것을 기본으로, 사안에 따라 항아리의 크기를 달리하여 시간의 장단을 조정하였으며, 발언자가 많을 경우 몇 번이나 항아리 물을 다시 채웠다. [본문으로]
  112. Isegoria同等發言權 [본문으로]
  113. 찬반을 비밀로할 필요가 있을 경우(주로 재판의 경우) 이외에는 주로 손을 들어 표결하였다. [본문으로]
  114. 400명의 불레테스 가운데 열 명 정도의 찬반 토론자로 나선 사람들을 빼면 380명 정도는 논의를 지켜보기만 한 사람들인데, 손을 들거나 투표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95%가 이 사람들이니 이 사람들이 결정한다고 본 것은 타당하다 할 것이다. [본문으로]
  115. 솔론은 연극이 허구라는 이유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므로('솔론전') 아나카르시스를 극장에 데려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으나, 그가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았다면, 관객을 허구나 보고 웃고 우는 바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무대 상황을 설명하는 무대 장식처럼 무대에 오른 무언배우는 바보보다 더 쓸모없이 보였을런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재판에 나온 500명의 재판관들을 관객으로 취급하였는데(플라톤,'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서의 관례대로 재판관들을 '재판관 여러분'이라 부르지 않고 변론 처음부터(17a이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으로 불러 그 재판의 당사자가 아니라 관객 정도 생각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유죄 판결과 사형 판결을 받고 나서도 한동안 유지되다가, 유죄 판결과 사형 판결을 내린 사람들에 대한 힐문을 던지면서 부터(39a이하) 저승에서 진짜 재판관을 만날 기대를 말하면서 변론을 끝낼 때까지 그들을 관객이 아니라 재판 당사자로서 '재판관 여러분'이라 부르고 있다. [본문으로]
  116. 고대 그리스의 극장의 구성과 배치, 무대와 오케스트아의 구조와 위치 등에 대해서는 이 글 '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3.희극시인의 세계,3.58,주115 참조. [본문으로]
  117. 극장의 관람석 하단 중앙, 오케스트라Okestra圓形舞臺 맞은 편에 디오뉘소스의 제단을 두었다. [본문으로]
  118. 아리스토파네스,'"새들"',1516-1519행 [본문으로]
  119. 부자들의 탐욕도 그랬지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탐욕이 어떻게 아테나이를 망치게 했는지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 자주 접하게 될 것이므로, '차마 버리지 못해 잠시 접었다'고 했다. [본문으로]
  120. BC514 [본문으로]
  121. BC511/510. (아리스토텔레스는 힙파르코스가 죽고 4년째 아르콘 하르파크티데스 때의 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BC511 6월부터 BC510 5월 사이를 말한다.) [본문으로]
  122. 본디 아르콘은 각자 맡은 일에 따라 아르콘 에포뉘모스는 아고라 복판에 여신 헤스티아Hestia의 불꽃을 피우고 있는 프뤼타네이온Prytaneion, 아르콘 폴레마르코스는 에필뤼케이온Epilykeion(전에는 이름이 폴레마르케이온Polemarkeion이었다.), 아르콘 바실레우스와 (아르콘) 테스모테테스Thesmothetes 6명Thesmothetai은 테스모테테이온Thesmotheteion에 각각 근무하다가 솔론 때 모두 테스모테테이온으로 옮겼다. [본문으로]
  123. 클레오메네스가 불레를 해산하라 했을 때, 불레가 열려 있었고, 그래서 불레테스가 저항했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참주 시대에도 불레는 참주의 입맛에 맞도록 기능하고 있었고, 특히 스파르테의 군대가 참주가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요새를 포위하고 있을 때부터는 매일 모여서 사태를 논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본문으로]
  124. 클레오메네스가 이사고라스가 지적하는(헤로도토스,'역사'V.72)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 700세대와 죽은 조상들까지 축출한 것을 보면, 참주 축출 전후의 클레이스테네스의 활동에는 알크마니온 집안의 지원이 대단했을 것이고, 이사고라스는 이들의 제거가 자신의 집권에 필수라고 보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125. 이때 아테나이를 떠나는 클레이스테네스의 태도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간단히, '...클레이스테네스는 혼자 떠났다...'고 말해('역사',V.72) 정식으로 추방령을 받고 떠난 것처럼 보이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클레이스테네스는 은밀히 도피하였고...'고 말해('아테나이 정치 제도사',XX.3) 추방령을 받기도 전에 몰래 아테나이를 빠져나갔음을 강조한다. [본문으로]
  126. 이사고라스가 정말 300명 과두정을 바랐는지, 참주가 되기 위한 과도기로 생각했는지 알 수 없으나, 클레오메네스는 그의 두 번째 아테나이 방문에서 이사고라스의 300인 과두정을 수용하고, 불레 해산 조치를 취해 주었는데, 그후 클레오메네스가 '아테나이 민중들에게 복수하고, 자기와 함께 아크로폴리스에서 축출된 이사고라스를 아테나이의 참주로 앉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이끌고 아테나이를 침공한 것으로 보아(헤로도토스,'역사',V.74), 과두정의 지도자인 이사고라스보다 참주인 이사고라스가 자신이 아테나이에 대한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127. 클레오메네스가 첫 번째 아테나이에 진주했을 때는, 이사고라스는 클레오메스의 알랑쇠였지만 클레오메네스가 아테나이 내정에 직접 간섭하도록 유도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모든 기록들이 참주를 끌어낸 이후 아테나이에서의 클레오메네스의 행적이나 역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전령의 전갈대로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나이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로 아테나이에 왔을 때는(아마도 이사고라스의 간곡한 초청이 있었을 것이다.) 마치 클레오메네스가 아테나이의 참주이기라도 한 듯, 아테나이 내정에 직접 명령을 내리도록 유도하고, 그 실행을 자기가 맡아 하였다. [본문으로]
  128. 헤로도토스는, '...의회가 저항하며 명령에 따르려 하지 않자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와 그의 당파가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다...'라고 하고('역사'V.72),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회가 이에 저항하고 민중이 결집하자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측 사람들은 아크로폴리스로 피신하였다...'라고 한다.('아테나이 정치 제도사,XX.4) 점령을 했든 피신을 했든, 아크로폴리스에서 클레오메네스는 퓌티아를 매수하여 벌인 가짜 신탁 놀음의 증거들과, 앞으로 아테나이가 스파르테를 불쾌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한 신탁들도 수집할 수 있었고, 이것이 클레오메네스로 하여금 아테나이에 참주정 복고를 두 번이나 시도하도록 만들었다. [본문으로]
  129. 헤로도토스는, 아크로폴리스로 쫓긴 클레오메네스가 아테나 신전으로 들어서려 하자 여사제가 일어서며, '라케다이몬에서 온 이방인이여, 물러가고 신전 안에 들어오지 마라. 도리에이스족은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되느니라!'라며 거부했다는 것이다.('역사',V.72) 그런데, 이 여사제의 거부에 클레오메네스가 대답한, '여인이여, 나는 도리에이스족이 아니라 아카이오이족이요.'라는 말이 스파르테의 두 왕가의 성립과 관련되어 자주 인용되는 까닭은, 이 두 왕가가 모두 이주민인 도리에이스 사람이라는 주장에 대해 아기스 왕가는 선주민인 아카이오이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헤로도토스의 이 구절을 주로 인용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30. 이사고라스의 거취에 대해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는 것이 있는데 신빙성이 없다. 헤로도토스는 클레오메네스가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이끌고 아테나이를 치는 의도로 아크로폴리스에 갇힌 모욕에 대한 앙갚음과 이사고리스를 아테나이의 참주로 앉히는 것으로 꼽고 있는데('역사'V.74), 이것을 보아도 이사고라스가 클레오메네스와 함께 스파르테로 간 것이 맞다. [본문으로]
  131. BC508 여름이 시작되기 전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132. 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II.4,'...참주의 친구들 가운데서 혼란기에 범법에 동조한 사람만 빼고 나머지를 도시에 거주케 함으로써 이른 바 민중의 관용을 발휘하였다...' [본문으로]
  133. 헤로도토스는 이들을 처형한 사실을 전하고('역사',V.7),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의 처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134. BC508(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I.1'에서 '대표 아르콘 이사고라스(스파르테도 간 이사고라스와는 동명이인) 때'라 한다.), 처음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주정Demokratia,Democracy民主政(이 말은 BC5세기 어느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이란 말 대신 이소노미아Isonomia(iso+nomos=equality+law=equality vis a vis law,법 앞의 평등)라는 말로 축약해 불렀던 그의 개혁은, 모든 계층에서 6,000명 이상의 아테나이 시민이 모여 마흔 번이나 열린 엑클레시아를 통해, 아테나이 사람들이 직접 주도하여 이룬 것이다. 이 개혁은, 먼저 아레오파고스는 재판만 관장하게 하고, 엑클레시아가 아테나이의 법과 제도의 의결자이자 수호자가 되도록 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테세우스 이래 솔론도 지켰던 아테나이를 넷으로 나눈 혈연적이고 지역적인 행정구역이던 '퓔레스Phyles,Tribes,部族'을 해체하여 전의 이온의 아들들 넷의 이름들 대신 새로 아테나이의 영웅들 이름을 붙인9개와 살라미스의 아이아스 이름을 붙인 1개를 더한 모두 10개의 퓔레로 재구성하되, 그 구성 방법으로, 우선 전체 아테나이를 아테나이 도시지역, 아티케의 산악지역, 아티케의 해안지역, 이 셋으로 나누어 '트릿튀에스Trittyes,Thirds,三地域'아 부르고, 다음 이 셋의 트릿티에스를 다시 각각열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눈 뒤 기존의 기초 행정 단위이던 데모스Demos,Deme,部落(139ro 부락이었다고 하나 이견이 많다)를 모두 추첨으로 할당한 뒤, 마지막으로 이들 10개씩의 행정구역들을 다시 추첨으로 매 트릿티에스에서 하나씩 모두 열 개의 새로운 퓔레스에 배당함으로써, 퓔레스에서 기존의 혈연적이고 지역적이던 색채를 완전히 뒤섞어버렸다. 예를 들면, 한 퓔레는 평균 14데모스로 구성되는데, 산악지역의 데모스가 4개가 있다면 이 4개의 데모스가 아티케의 동북쪽 끝의 데모스와 서북쪽 끝의 데모스가 추첨으로 뽑힐 수 있었고, 이것은 해안지역과 아테나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한 퓔레에 속한 14개 데모스의 혈연적 지연적 특수성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소수의 귀족들이 가졌던 혈연적 지역적 기득권을 무력하게 만든 새로운 10개의 퓔레스에서 평생 1회 1년 임기의 아르콘 1명씩 모두 10명, 평생 2회 1년 임기의 불레테스 50명씩 모두 500명, 나머지 일반 공무 담당자 역시 일 년 임기로 약간명, 등을 모두 제비로 뽑았고, 다만 국방을 담당하던 '아르콘 폴레마르코스Arkon Polemarkos,War Ruler,國防長官격' 대신 '장군Strategos將軍'직을 새로 두어 각 구역에서 임기 1년이나 무제한 재선임이 가능한 장군 1명씩 모두 10명Strategoi만은 투표로 선출하는 것, 등으로 뼈대를 이루었다. [본문으로]
  135. 헤로도토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사르데이스로 사절을 보낸 것은 '...자신들이 라케다이몬인들과 클레오메네스와 교전 상태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역사'V.71), 아테나이를 치려는 클레오메네스의 의도를 적고 있다('역사',V.74) [본문으로]
  136. 클레이스테네스가 페르시아와의 동맹에 간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헤로도토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과 동맹을 맺기 위하여 페르시아로 사절단을 보냈는데, 자신들이 라케다이몬인들과 클레오메네스와 교전 상태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며, 스파르테의 아테나이 침공 앞에 고립무원의 아테나이가 뤼디아를 정복할 수 있는 페르시아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정도로 다급했던 상황을 한 구절로 전하고 있다. [본문으로]
  137. '아테나이인들이 다레이오스 왕에게 물과 흙을 바친다면 전하께서는 그들과 동맹을 맺으실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오.' [본문으로]
  138. 헤로도토스,'역사',V.73) 페르시아에 통보되지 않은 이 일방적인 조약 파기가 훗날 다레이오스가 물과 흙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빌미가 되었고, 요구가 거절되자, 물과 흙을 받기 위해 헬라스를 침공하는 구실이 된다. [본문으로]
  139. BC508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나이 사람들이 관용으로 포용한 참주의 친구들 가운데 추후 세력을 키워 민주정을 뒤엎고 반정을 도모할 우려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보고(이를 테면 참주의 친족으로 카르모스의 아들 힙파르코스이다.),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도시에서 축출할 수 있도록 하는 '오스트라키스모스Ostrakismos,Ostracism,陶片追放制度'까지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을('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II.3,4) 끝으로, 이 이후 클레이스테네스에 대해 모든 기록들이 침묵하고 있어, 그의 행적이나 죽음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가 계속 아테나이에서 정치를 하고 있었다면, 당시 아테나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서 그의 이름이 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그 당시 사건들을 기록한 모든 기록물에서 더 이상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개혁을 마친 어느 시점에 그가 아테나이를 떠나 헬라스의 어느 도시에서 조용히 살다 죽었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도록 한다. 이런 사정을 두고 이 글에서는, 클레이스테네스가 스파르테와 펠레폰네소스 연합군이 엘레우시스까지 진출했을 무렵, 아테나이 사람들과 자기를 향한 클레오메네스의 복수심을 누그러트리고, 아울러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아테나이를 치는 명분을 약하게 할 요량으로 아테나이를 떠난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런 설정을 하게 된 데에는,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동맹군과의 전쟁을 피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인 전투 개시 직전에 있었던 코린토스의 철군에 대해, 헤로도토스의 설명이 없다는 것도 한몫하였다. [본문으로]
  140. (클레오메네스와의) 사전 협약에 따라, 아티케의 북부는 보이오티아가, 서쪽은 에우보이아의 칼키스가 동시에 침공했으나, 아테나이가 이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대처하기로 하고, 우선 엘레우시스에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에 맞섰을 때('역사',V74), 전투 개시 직전 먼저 코린토스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은 옳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뒤돌아서 가버린(V.75) 까닭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 까닭을 헤아릴 수 있는 단초도 함께 제공하고 있는데, 바로 '클레오메네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역에서 군대를 모으면서 왜 모으는지 밝히지 않았다'(V.74)는 것이다. 그렇다면 엘레우시스에 와서야 코린토스는 클레오메네스가 왜 아테나이를 치는지 알았을 것이고, 이 이전에 이미 그들의 참주에게 당한 혹독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코린토스로서는(V.92), 그것이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허물고 이사고라스를 참주로 앉힐려는 것이라면 이 전쟁은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고 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41. 헤로도토스는 엘레우시스 전투에 앞선 이 클레오메네스와 데마라토스 간의 불화 사건으로, 스파르테에서는 두 왕이 동시에 출정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한다.('역사',V.75) [본문으로]
  142. 천병희는 '이겼다'로, 매컬리G.C.Macaulay는 'conquered'로, 펠버바움S.Felberbaum은 'defeated'로 번역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점령했다'로 바꾸어 놓았다. [본문으로]
  143. 이들 4,000명의 성격에 대해 천병희는 '소작 이주민'으로, 매컬리는 'holders of allotments,할당지 소유자'로, 그리고 펠버바움은 '클레루크스cleruchs,Klerukos,settler定着者,(클레루크스는 종속국에 할당지를 가진 시민을 가리킴),이주자'로 번역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이 모두를 풀어서 설명했다. [본문으로]
  144. 헤로도토스,'역사'V.66,77,78. [본문으로]
  145.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가 시행했던 토지 반납 토지 재분배를 제외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폭력으로나 법과 제도로 부의 불평등 해소에 성공한 예가 없다. 그리고 그런 스파르테에서조차도 동산의 반납과 재분배는 어렵다고 보고, 돈을 금은에서 철로 바꾸어 해결하려 했을 뿐이었다.(플루타르코스,'뤼쿠르고스전'9.1) [본문으로]
  146. 민주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아테나이 사람들이 권력의 불평등이 아닌 부의 불평등을 놓고 여러 가지의 문제를 제기했다거나, 대책을 논의했다거나, 그것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민주정의 작동 원리가 모든 권력이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나오도록 한 것이었기 때문에,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투표자가 좋아할 정책으로 표를 얻을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더 잘 살게 해주겠다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민주정이 시행된 이래 아테나이에서 '부의 불평등'이나 '부의 불평등의 해소'란 말은 오히려 금기시 되다시피 했는데, 이 말은 언제 누구에게나 스파르테와 솔론 시대의 혼란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시민의 인기를 얻어 권력을 쥐려는 정치가들은 언제나 더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말로 그들의 정책을 앞장세웠다. [본문으로]
  147. 많은 스파르테의 왕들이 이런 이유 때문에 스파르테에서 축출당했다. [본문으로]
  148. 민주정의 공직자들은 제비運와, 상위 공직자의 지명能力과, 다른 시민의 선택投票에 의해 뽑혔다. [본문으로]
  149. 민주정 도입기의 아테나이는 아직 수요에 달리는 농사 수확물이 주된 부의 원천이어서, 새로운 부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주로 대외교역과 관련된 교역품의 생산, 교역, 그리고 해륙운송에 넓게 퍼져 있었는데(솔론이 직접 무역업으로 중류 정도의 재산을 모았다), 이런 기회는 신분이나 법이아 제도의 제한을 받지 않아 기회의 평등은 보장되었으나(제한을 언급한 기록물이 없다), 그 기회로 부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자들과 겨루지 않을 기회를 잡는 판단運, 기술과 돈能力, 도시민의 선택販路이 있어야 했다. [본문으로]
  150. 민주정은 부자들의 탐욕이 기회의 평등을 파괴하는 것을 막을 수단마져도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들과의 경쟁은 힘든 일이었다. [본문으로]
  151. 아테나이의 이주 정책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주고, 생각하게 해주는 헤로도토스의 아주 짧은 보고인데('역사',V.77), 우선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전쟁에서 이겨 이주지를 확보했다는 것이고, 그 이주지가 칼키스 사람들의 생업이 걸린 땅이 아니라 칼키스의 부자들이 말을 키우던 농장이어서 칼키스 사람들에게 큰 손해를 입혀 반감을 살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4,0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이주였다는 것이고, 생각하게 해주는 것들은 이주의 목적, 이주지와 이주자의 선정 방법, 정착 자금 지급 여부, 개인 이주자와의 차이, 등이다. [본문으로]
  152.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에서 I권 전체를 통해 그 전쟁의 발발 배경을 설명하는 가운데, 여담이라며 아테나이 제국의 형성 초기의 일들을 소개하는 중, 아이가이온 바다의 스퀴로스 섬을 점령하여 아테나이 이주민을 정착시키고 그 섬 주민은 노예로 삼았다는 예를 들고 있다.(I.98.2) [본문으로]
  153. BC636, 제36회 고대 올림픽 '판크라테이온pankration格鬪技' 우승자로, 시게이온을 두고 벌어진 뮈틸레네와의 전쟁에 아테나이의 지휘관으로 출전했고(BC608-606경), 핏타코스(헬라스 일곱 현인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와의 결투에서 죽었다. [본문으로]
  154. 플루타르코스,'헤로도토스의 악의Of Herodotos's Malice'15., 플루타르코스는 헤로도토스가 시게이온을 둘러싼 여러 차례의 전쟁들 가운데, (BC606경) 뮈틸레네Mytilene의 핏타코스Pittakos가, 거구의(...stout and giant-like man...) 올림픽 우승자인 아테나이의 프뤼논Prynon이 내놓은 둘 사이의 결투duel로 싸움을 끝내자는 제의를 받아들이고(디오게네스 라오르티오스는 '핏타코스전'I.4.74,에서 핏타코스가 결투를 신청했다고 한다.), 결투에서 프뤼온에게 방패 뒤에 숨긴 그물을 던져 움직임을 둔화시킨 다음 죽인 일 대신, (BC590경) 뮈틸레네의 시인 알카이오스Alkaios가 방패와 무기를 버리고 도망간 사실만 기록하였다고('역사'V.95) 비난한다. [본문으로]
  155. 시게이온Sigeion은 '조용한 곳,sige+ion,silent place'이란 말로, BC8세기 어느 때, 레스보스의 뮈텔레네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헤로도토스,'역사',V,94.1), BC7세기에 들면서, 예의 프뤼논과 핏타코스의 전쟁처럼(BC7세기말이다), 인근의 아퀼레이온(트로이아 전쟁 때 죽은 아퀼레우스의 무덤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을 차지하고 있던 뮈텔레네와 일진일퇴의 전쟁을, BC6세기초 코린토스의 참주이자 헬라스 일곱 현인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되는(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꼽지 않는다) 페리안드로스의 중재로 영유권이 아테나이로 정해질 때까지 계속하였다.('역사'V.95,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핏타코스전',I.7.74) [본문으로]
  156. 헤로도토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들 헤게시스트라토스를 시게이온의 참주로 앉히기 위해, 그리고 헤게시스트라토스는 참주로 남아 있기 위해, 시게이온의 영유권을 두고 뮈틸레네와 장기전을 벌였으며, 그 장기전 가운데 알카이오스가 무구를 버리고 도망친 일도 있었으며, 결국 페리안드로스의 중재로 종전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역사'V.94-5), 이것은 헤로도토스가 시게이온을 두고 벌인 아테나이와 뮈틸레네 사이의 오랜 전쟁들의 시기에 대해 혼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헤로도토스가 악의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플루타르코스로부터 비난받은 프뤼논과 핏타코스의 전쟁은 대략 BC608-606경의 일이고, 시인詩人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친 사실만 기록했다고 플루타르코스에게 비난받은 알카이오스가 참전했던 전쟁은 (알카이오스가 BC620생이므로 참전을 그의 나이 서른 전후의 일로 보면) BC590 전후의 일이고, 또 페리안드로스가 BC581경에 죽었으므로, 양측이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에게 중재를 맡겨, 시게이온은 아테나이에게 아퀼레이온은 뮈틸레네에게 속하는 것으로 결정난 것은(헤로도토스,'역사',V.95) 아무래도 BC590과 BC581 사이의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헤게시스트라토스를 시게이온의 참주로 앉힐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쥔 것은 세 번째로 참주가 된 BC546 이후이므로, 헤로도토스의 말대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다시 시게이온의 영유 문제를 두고 뮈틸레네와 전쟁을 벌여야 했다면, 그것은 살라미스를 두고 스파르테가 내린 중재에 불만을 가졌던 메가라가 BC600경 살라미스를 점령했듯이, 뮈틸레네가 페리안드로스가 죽은 BC581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세 번째로 참주로 복귀한 BC546 사이 어느 때 시게이온을 다시 점령했고, BC546 이후 어느 때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전쟁을 통해 시게이온을 수복하여, 아들 헤게시스트라토스를 참주로 앉혔으며, 시게이온의 참주 헤게시스트라토스 역시 시게이온을 방어하기 위해 뮈틸레네와의 전쟁을 계속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런 헤로도토스의 혼동을 바로잡고, 전쟁이 아니라, 참주가 있는 도시로서의 시게이온의 면모를 갖추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 도시의 자력 방위를 위해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킨 것으로 해석했다. 한편 페리안드로스는 솔론과 동시대 사람이었으므로, 살라미스의 중재를 스파르테에 맡긴 예에서 보듯이, 케르소네소스로의 이주를 권장할 만큼 평소 헬레스폰토스에서의 아테나이의 역할 증대에 관심이 많았던 솔론이 시게이온의 다툼도 페리안드로스의 중재에 맡긴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본문으로]
  157. 압신티오이와의 전쟁에서 밀리던 돌롱코이의 왕은(헤로도토스가 이름을 말하지 않아 미상이다) 델포이에 와서, 신전을 떠난 후 맨 먼저 그를 손님으로 초대하는 사람을 ('케르소네소스kersonesos,반도半島'의 새로운) '창건자Oikistes'로서 모시고 가라는 신탁을 받았는데, 델포이를 나선 후 여러 도시들을 거치고 '성스러운 길hiera hodos,sacred way(엘레우시스에서 아테나이에 이르는 길)'을 따라 아테나이에 이르러서야, 밀티아데스로부터 맨 먼저 손님으로 초대를 받았고, 이에 밀티아데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신의 뜻에 따르기를 요청한 것이다.(헤로도토스,'역사'VI.34-5) [본문으로]
  158. 당시 아테나이에서는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전권을 쥐고 있었지만, 밀티아데스도 영향력이 있었다.(헤로도토스,'역사'VI.35) [본문으로]
  159. 헤로도토스는 밀티아데스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통치에 염증을 느끼고, 이를 벗어나고자 케르소네소스의 돌롱코이Dolonkoi 사람들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으며, 개인적으로 지원자들을 모집하여 떠난 것으로 기록하는데('역사',VI.35), 케르소네소스라는 큰 지역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할 다수의 지원자를 모집하는 일이 참주의 지시나 허가 없이 밀티아데스 개인이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 군사 활동을 목적으로 한 이주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지시와 허가 아래 이루어졌던 것으로 본다. [본문으로]
  160. 보이오티아와 칼키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아테나이는 벅찬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테나이 사람들의 아들들은 보이오티아 사람들과 칼키스 사람들을/전쟁에서 제압하여 무쇠 족쇄를 채워 감옥에/쳐넣음으로써 그들의 콧대를 꺾어놓았노라. 그리고/그들의 몸값의 10분의 1로 이 말을 만들어 팔라스에게 바쳤노라.'(헤로도토스,'역사'V.77) [본문으로]
  161. 클레오메네스는, 자기와 이사고라스를(엘레우시스에서의 철수 이후 이사고라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모든 기록이 침묵한다.) 내친 배은망덕한 아테나이 사람들에 대한 복수는 말할 것도 없고, 힙피아스를 아테나이의 참주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힙피아스가 아테나이 사람들을 다시 허약한 참주의 노예로 만들어 놓을 것이고, 힙피아스 역시 자기와 스파르테에게 고분고분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한편 이런 클레오메네스의 기대에 호응하여 힙피아스는,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가 스파르테에 의해 손상을 입는 한이 있어도, 다시 아테나이의 참주가 되어 권력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헤로도토스는 이런 둘의 사정을, '스파르테가 힙피아스를 소환했다. 힙피아스가 소환에 응했다.'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역사',V.91) [본문으로]
  162. '...만약 자유와 평등을 철폐하고 여러 도시에 참주제를 도입하려든다면, 하늘이 대지 밑으로 내려가고, 대지가 하늘 위 허공에 걸릴 것이며, 사람들은 바닷물에서 살고 물고기들은 전에 사람이 살던 곳에 살게 되겠지요. 세상에 참주제만큼 불의하고 피에 굶주린 것은 없소. 진실로 그대들이 도시를 참주가 지배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면 남들을 위해 참주제를 도입하기 전에 그대들이 먼저 도입하시오. 그대들은 참주제를 경험해보지 않았고, 또 참주제가 스파르테에 도입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면서 그대들의 동맹국인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관심하시구려. 그대들도 우리처럼 참주제를 경험해보았더라면 참주제에 관해 지금보다 더 나은 제안을 했을 것이오.'(헤로도토스,'역사',V.92a) [본문으로]
  163. 코린토스의 첫 참주 큅셀로스는 수많은 코린토스인들을 추방했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이렇게 당한 사람들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코린토스인들을 죽였는데(같은 책,V.92e), 두 번째 참주인 큅셀로스의 아들 페리안드로스는, 처음에는 아버집보다 더 온건했으나 도시를 잘 다스리려면 탁월한 사람들을 없애야 한다는 밀레토스의 참주 트라쉬불로스의 조언대로, 큅셀로스가 시작한 코린토스 시민들에 대한 만행을 완수했다.(같은 책,V.92g) 그 밖에 페리안드로스의 만행을 꼽자면, 죽은 부인 멜렛사를 위해 코린토스 여자들의 성장盛裝을 모두 빼앗아 불태웠으며(같은 책,V.92g), 첩들의 중상에 임신한 부인을 발로 차고 댓돌을 던져 죽이고, 나중 중상한 첩들을 불에 태워 죽였으며, 작은 아들 리코프론이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한다고 추방했고(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I.7.94), 올림픽 사두마차 경기에서 승리하면 바치겠다고 약속한 황금 봉납물 마련을 위해 여자들의 장신구를 빼앗았으며(같은 책,I.7.96), 자신의 무덤 자리를 알리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으며(같은 책,I.7.96), 최초로 호위병을 두었고 시내 거주자들을 제한했다(같은 책,I.7.98)는 것들이다. 이런 기록들은 페리안드로스가 헬라스의 일곱 현자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말을 의심케 하는데, 실제 페리안드로스를 자신의 '그리스 철학자 열전'에서 소개하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조차도, 현자 페리안드로스를 암브라키아(이오니아 바다 연안의 코린토스 식민도시) 출신이라며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와 구별하는 소티온이나 헤라클레이데스, 그리고 이들 둘이 사촌 간이라는 네안데스까지 인용할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자로 꼽지만(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근거를 밝히지 않아 잘 알 수 없으나, 헬라스의 일곱 현인들을 거명하는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물은 없다. 다만 '정치학,5.4,1304a17'에서 암브라키아의 참주 페리안드로스의 축출에 대한 내용을 짧게 기술하고 있을 뿐인데, 이나마도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와의 혼동인지, 소티온, 헤라클레이데스, 네안데스의 페리안드로스인지 분명하지 않다.), 플라톤은 제외했다는 사실을(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343a'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헬라스의 일곱 현인들로, 밀레토스의 탈레스, 뮈틸레네의 핏타코스, 프리에네의 비아스, 아테나이의 솔론, 린도스의 클레오볼로스, 켄의 뮈손, 그리고 스파르테의 킬론을 꼽으면서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는 뺐다.) 지적하고 있어, 누가 그를 헬라스의 일곱 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 꼽는다면 그 현인들을 꼽는 기준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어지고 만다. [본문으로]
  164. 펠로폰네소스 동맹에서 처음으로 나온 스파르테의 제안에 대한 동맹도시들의 거부로 인해(포레스트W.G.Frrest,'스파르테 역사History of Sparts'89쪽) 클레오메네스의 두 번째 아테나이 침공 계획 역시 좌절되자, 스파르테의 또 다른 왕 데마라토스에 대한 견제력과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동맹도시들에 대한 클레오메네스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의 회복을 위해 BC495 아르고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이로 인해 펠로폰네소스의 아르고스를 아테나이로 몰아버린 결과를 가져왔으며, BC491 페르시아에 굴복한 아이기나를 응징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데마라토스와의 불화로 데마라토스는 제거할 수 있었지만, 데마라토스 제거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자신도 추방당하고 말았고, BC489 스파르테로 돌아와 죽었다. [본문으로]
  165. 헤로도토스,'역사'V.96. [본문으로]
  166. 다레이오스(그Dareios,고페Darayavahus,라,영Darius)는 퀴로스Cyrus II와 삼종간이며 페르시아의 주도 세력으로 다레이오스가 즉위할 무렵에는 박트리아Bactria 총독strap이던 휘스타스페스Hystaspes의 아들로 BC550에 태어나, 캄뷔세스Cambyses II의 누이 아톳사Atossa와 결혼하여 그의 매제가 되었고, 아들 크세르크세스를 얻었다.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에는 근위창수lance bearer로 참전했다가, 캄뷔세스의 동생 바르디야(고페Bardiya,그Smerdis)의 모반을 막기 위해 급거 귀국하던 중 캄뷔세스가 허벅지 부상으로 죽자, 왕가의 여섯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바르디야를 죽이고 BC522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중앙집권제, 변방 안정, 행정 언어, 도량형, 화폐, 달력, 등의 통일로 페르시아 제국을 안정시켰고, 아카이메니드 왕조의 근거지인 페르시아에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였고, BC486 죽었다. [본문으로]
  167. 바르디야에 대해서는, 캄뷔세스가 이집트 원정으로 오래 왕실을 비우자 동생인 그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설과, 캄뷔세스가 이집트 원정 전에 동생 바르디야의 왕위 찬탈을 막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그를 모살했는데, 이 사실을 아는 조로아스트 사제 가우마타가 자기가 죽은 바르디야와 닮았고, 아무도 바르다야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며, 캄뷔세스가 오래 왕실을 비워 통치가 느슨해진 틈을 이용해 바르디야를 자처하고 모반을 일으킨 것이라는 설이 있고, 캄뷔세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가족을 잃고 상심하여 나무를 깎던 중 자기 허벅지를 칼로 찌르는 사고로 부상을 입고 죽었다는 설, 캄뷔세스가 이집트 원정 때 이집트인들이 신성시하는 황소Apis Bull의 상를 해쳤기 때문에 미쳐서 자기 허벅지를 찔렀고 그래서 황소 상 앞에서 죽었다는 설, 캄뷔세스가 말을 타다 우연히 삐쪄 나온 자기의 칼에 허벅지를 찔려 생긴 부상으로 죽었다는 설, 바르디야의 모반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다 엑바타나(혹 다마스쿠스, 바빌론)에서 죽었다는 설, 바르디야의 지지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설, 캄비세스의 동생 모살을 잘 아는 근위창수였던 다레이오스가 바르디야 모반이 가짜의 소행임을 알고 오히려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캄비세스를 죽였다는 설이 있는데, 결국 다레이오스가 여섯 귀족 집안과 합세하여 바르디야를(가짜이든 진짜이든) 죽이고 모반을 평정하여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헤로도토스,'역사',III.29,30,61,64,66,70,78,84,86)(크테시아스Ktesias of Knodos,'페르시아 역사Persica'단편Frag.,11,14-17)(요세푸스Josephus,'상고사Antiquities',6.2.2) 이 같은 모든 소문들은 결국 왕권을 잡은 다레이오스에 의해, '왕가의 여섯 가문과 함께 가우마타를 토벌하고 아카이메네스의 6대손인 다레이오스가 페르시아의 왕위를 승계했다'는 것으로 정리되었다.('베히스툰 명문銘文Behistun Inscription',1.2&1,10-14) [본문으로]
  168. 퀴로스Cyrus II는 페르시아의 북쪽 메디아Media(BC550), 그 서쪽 아나톨리아의 뤼디아Lydia(헤,역,I.86), 그리고 페르시아의 동쪽 바빌로니아Babilonia(BC539), 그리고 서북쪽의 안샨Anshan과 중앙아시아를 정복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열었고, 그가 카스피Caspi 바다 동쪽의 맛사게타이Massagetai 정벌 중 전사하자(BC530)(헤,역,I.204-214), 이런 제국 설립 과정에서 그의 중요한 막료였던 아들 캄뷔세스Cambyses II가 왕위 뿐만 아니라 제국의 확장 정책까지 승계하여, 캄뷔세스는 이집트까지 정복하였는데(BC525), 2대에 걸친 장기간 정복 사업의 치중으로 내외의 통치에서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런 허점은 왕실 내부에서 먼저 드러나 동생 바르디야Bardiya가 왕위를 찬탈하는 모반을 일으켰다.(헤로도토스와 다레이오스는 조로아스터 사제Magus 스메르디스 혹은 가우마타가 바르디야로 사칭했다고 한다.) 혹은 바르디야의 모반은 다레이오스와 여섯 귀족들이(인타프레네스,오타네스,고부뤼아스,휘다네스Hydanes,메가뷔주스,아르두마니스Ardumanis) 협력하여 진압하여 아카이메니드 왕가의 분란을 수습하였으나(BC522겨울), 이 모반을 시발점으로, 엘람Elam에서 앗시나A?ssina의 반란이, 바빌로니아에서는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Nabonidus의 아들 네부카드네짜르Nebuchadnezzar라 자칭하는 니딘투-벨Nidintu-Be?l이 왕이되어 반란을 일으키자 다레이오스가 직접 나서 티그리스Tigris 도하를 막는 반군을 격퇴하였고, 유프라테스Euphrates 강변의 자자나Za?za?na에서 격파하자 바빌론으로 도망친 니딘투-발을 죽이고 반란을 집압했다.(헤,역,III.153-9참조) 그리고 다레이오스가 바빌론에 머무는 동안에도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계속 일어났는데, 다시 엘람에서 마르티야Martiya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다레이오스가 두려운 엘람 사람들에 의해 진압되었고, 메디아에서는 프라오르테스Phraortes가 옛 메디아의 왕 퀴아크사레스Cyaxares의 후예라며 메디아의 왕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진압도 하기 전에 아르메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아르메니아 출신인 다다르시Da?darsi를 보냈으나 만만치 않아 지원군으로 페르시아 출신 바우미사Vaumisa를 보내 진압된 것을 보고, 다레이오스가 직접 바빌론에서 메디아로 가서 프라오르테스를 잡아 엑바타나에서 십자가에 매달았고, 이어서 메디아의 사가티아Sagatia에서도 트리탄타이크메스Tritantaechmes가 역시 퀴아크사레스의 후예라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메디아 출신 타크마스파다Takhmaspa?da가 그를 아르벨라Arbela에서 십자가에 매달았고, 파르티아Parthia와 휘르카니아Hyrcania에서는 프라오르테스를 지지하는 반란이 일어나 다레이오스의 아버지 휘스타스페스가 진압했고, 마르기아나Margiana에서는 프라다Fra?da가 왕을 자처하고 나서서 박트리아 총독이던 다다로시를 보내어 진압했고, 다레이오스가 메디아에서 반란을 진압 중일 때 페르시아(아카이메네스가 처음 왕국을 세운 지방 이름이 페르시아이고 여기서 페르시아 제국이 출발했다.) 지방의 바우티위Vautiy에서는 바휘아즈다타Vahyazda?ta가 나타나, 가우마타에 이어 두 번째로 자기는 퀴로스 대왕의 아들 바르디야(스메르디스Smerdis,헬라스 사람들이 바르디야를 부르는 이름)라며 반란을 일으키자, 아르타바르디야Artavardiya를 보냈고, 이들이 아라코시아Arachosia로 넘어가자 아라코시아 총독 비바나Viva?na가 진압했고, 다레이오스가 메디아와 페르시아를 오가고 있을 때 바빌로니아에서 두 번째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아라카Arakha라는 아르메니아 사람이 바빌론을 장악하고 자기가 네부카드네짜르의 아들이며 바빌로이아 왕이라고 나서자 다레이오스는 인타프레네스Intaphrenes를 보내 진압했다. 인타프레네스가 바빌론의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세 번째로 또 다시 엘람에서 아타마이타Atamaita가 반란을 일으켜 고브뤼아스Gobryas를 보내 진압하였다.(베히스툰 명문,10-50)(헤로도토스,'역사',III.61-87) BC522 여름에 시작된 가우마타의 반란에서부터 BC521 겨울에 들면서 끝난 아라카의 반란까지 도합 열 번의 반란을 겪으면서, 다레이오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국을 완성시킬 필요성을 확인했다 할 수 있다. [본문으로]
  169. 다레이오스는 제국을 모두 36개의 사트라피에스Satrapies,Arci直轄地로 나누고, 페르시스Persis,Persia를 제외한 모든 곳에 왕이 임명한 사트라프Satrap總督,太守을 보내 통치토록 하였고, 사트라피에스의 세금Tributes租庸調은 구체적으로 정해진 액수를 금과 은으로 징수하였으며, 금은의 가치 기준은 바빌론 탈란톤으로 정하고, 새로운 제국 화폐로 왕만이 주조할 수 있는 '금gold 다릭Daric,Darayaka'과 주요 장군이나 사트라프가 주조할 수 있는 '은silver 다릭'을 통용시켰다. 사트라프의 권력 비대를 방지하기 위해 그들의 수지收支를 평가하는 위원회를 두었고, 사트라프의 일을 도우면서 왕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중앙 관리 둘을 붙였는데, 사트라프의 일반 통치 행위는 서기관Secretary이, 군사에 관한 일은 재무관treasurer이 맡았고, 따로 '왕의 눈과 귀'라는 왕실 감독관을 두어 견제했다. 제국의 공용어로 아람어Aramaic를, 공식 기록 문자로는 아뤼안Aryan 문자를 채택했지만, 그밖에 일상생활과 궁중에서라도 학술에 관해서는 지역의 언어 사용에 관대하였다. 수사의 왕궁이나 페르세폴리스 도시 건설 같은 제국의 위엄을 보이려는 건설도 있었지만, 생산과 유통 등 경제 활동을 늘여 세수를 올릴 수 있는 건설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지하 수로를 포함한 수로의 신설과 관개시설의 확장과 보수, 홍해와 나일 강(BC497 다레이오스는 직접 준공식에 참석했다.),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운하를 개설했고, '왕의 도로Royal highway'를 신설하고 기존 도로를 개선하면서, 도로망 곳곳에 역참을 두어 통신과 여행의 편의와 통제를 수월하게 수행하게 했다. 포이니케를 모항으로 상업적 해운업과 바빌로니아의 닙푸르Nippur에 기반을 둔 마라수 같은 은행업을 육성하였다. 잘 짜여진 도로망과 해로, 안전한 통행은 페르시아를 중심으로하여 전 세계적인 무역과 통상을 발전시켰다. [본문으로]
  170. BC516 다레이오스는 제국의 동쪽 변방 중앙아시아 너머로 진출하여, 박트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정벌하고, 겨울을 간드하르(Gandhara간다라)에서 보낸 후, BC515 인더스Indus 강 하류까지 가서, 카뤼안다Caryanda 출신의 헬라스 사람 스퀼락스Skylax를 시켜 인더스 하류에서 수에즈Suez까지의 인도양을 탐험하게 한 뒤, 볼란Bolan Pass, 아라코시아, 드랑기아나Drangiana를 거쳐 페르시아로 귀환했다. [본문으로]
  171. 당시 헬라스 사람들이 말하던 아시아Asia는 오늘날 소小아시아(Asia Minor,그Mikra Asia,터Kucuk Asya) 또는 아나톨리아(Anatolia,Anantole,터Anandolu) 지역이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나 '오딧세이아'의 주무대인 트로이아Troia,일리온Illion으로도 불렸다))가 있는 이 지역의 이름을 아시아로 따로 부르지 않았고(호메로스 때도 이 지역을 아시아로 불렀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IV45'에서 아시아라는 지역의 경계와(리뷔에와의 경계는 아이귑토스의 네일로스 강으로, 에우로파와의 경계는 콜키스의 파시스 혹은 타나이스 강이라 한다), 이름의 유래를(헬라스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아내 아시아의 이름에서, 뤼디아 사람들은 이 지역의 주요 지역 뤼디아의 대표 도시 사르데이스의 아시아스 씨족의 조상 아시에스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소개하면서도, 정작 본문에서는 아시아란 이름 대신 아시아 지역 부분이나 도시 이름, 이를테면 뤼디아나 사르데이스 등으로 부르거나, 통칭이 필요하면 페르시아나 심지어 메디아(아나톨리아 고원의 서쪽 끝과 카스피 남동 해안 사이)로 언급하고, 투퀴디데스 역시 헤로도토스 처럼 주로 부분 이름이나 도시 이름으로 언급하면서, 통칭으로는 아시아라는 이름을 여러번 썼다. 아리스토파네스 시절 이 지역의 이름은 '아시아'로 불렸으나, 아직 '아나톨레'나 '미크라아시아'로는 불리지 않았으므로, 이 글 본문에서는 이 지역을 '아시아'로 부르고, 각주에서만 아시아 대신 오늘날 지명인 '소아시아'나 '아나톨리아'로 부른다. [본문으로]
  172. 동방 정벌에서 돌아온 다레이오스는 한 해 뒤, BC513 훅해 연안의 스퀴타이를 정벌하기 위해 아나톨리아에 나타났다. [본문으로]
  173. 아카이메네스가 페르시아를 연 본거지 페르시스 동북쪽의 메디아가 카스피 바다 동쪽의 유목민 스퀴타이에게 자주 침범을 당하고 있었는데(퀴로스도 이곳의 맛세게타이에서 전사했다.), 메디아의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소탕전에 나섰으나 습지에 이르도록 적대적이던 스퀴타이가 보이지 않아 돌아선 적이 있었다. [본문으로]
  174. 다레이오스가 보스포로스를 시찰한 뒤 참전한 모든 민족들의 이름을, 하나는 앗시리아 문자로, 하나는 헬라스 문자로, 새긴 흰 기둥 둘을 세우게 했는데, 그렇게 모은 군대가 기병을 포함하여 70만, 함선은 600척이었다고 한다.(헤로도토스,'역사',IV.87) [본문으로]
  175. 헤로도토스,'역사',VI.118-136 참조. [본문으로]
  176. 헤로도토스,'역사',VI.137-141 참조. [본문으로]
  177. 같은 책,V.1-21 참조. 그러나 크테시아스Ctesias(카리아Caris의 크니도스Cnidos 출신 치료사Physician,크세노폰과 동시대 사람으로 BC401 소少younger 퀴로스의 반역에, 혹은 BC410 뤼디아 총독 핏사트네스의 반란에, 용병으로 나가 포로로, 혹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II,Mnemon에게 치료사로 고용되어, 대략 BC404-397까지 페르시아에 살면서 들은 이야기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가치는 낮으나 재미는 있는, '페리시아 역사Persica,History of persia', '인도 역사Indica,History of India'를 썼다.)는 '페르시카'에서 다레이오스의 스퀴타이 원정과 남겨둔 팔만의 군대에 대해 헤로도토스와는 다른 사실을 전하는데(포티우스,'발췌본EXerpt',I.21,'페르시카'는 23권에 대한 내용의 일부가 시칠리의 디오도로스의 '역사'에 인용된 단편들과, 포티우스Photius의 '발췌본Exerpt I.1-24, II.25-51'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그 내용인 즉, '아나톨리아의 카파도카아 총독 아리아람네스가 다레이오스의 명에 따라 감옥에 갇힌 스퀴타이 왕의 동생을 붙잡아 왔는데, 이에 스퀴타이 왕이 격렬히 항의했고, 다레이오스는 팔십만 군대로 보스포로스 해협과 이스테르Ister,Danube 강을 선교로 건너, 스퀴타이 지역에 15일만에 도착하여, 스퀴타이 왕과 조우했지만, 스퀴타이의 반격이 거세 급하게 후퇴해야 했고, 페르시아 군대가 모두 철수하기도 전에 선교를 불태우는 바람에 팔만의 군사가 에우로파에 남겨졌고, 스퀴타이에 의해 줄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178. 헤로도토스,'역사',V.28 참조. [본문으로]
  179. 같은 책,V.28 참조. [본문으로]
  180.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 군을 용병들로 생각했고, 페르시아의 메가바테스Megabates는 대왕을 위해 낙소스를 정벌하러 가는 것이었는데, 이 둘 사이에 지휘권 분쟁이 생긴 것은, 낙소스로 직행하는 바람을 기다리며 키오스에 정박하던 중 메가바테스가 함선을 지키는 경비가 없는 뮌도스의 함선 한 척을 발견하고 함장 스퀼락스Skylax를 노의 구멍에 집어넣어 벌을 주었는데, 이를 아리스타고라스가 자기가 지휘관이니 상관말라며 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분노한 메가바테스가 그날 밤 낙소스로 몰래 배 한 척을 보내 그들의 침공 사실을 누설했던 것이다.(헤로도토스,'역사'V.33) [본문으로]
  181. 인질이 된 수사에서의 생활을 벗어나고 싶은 밀레토스 참주 히스티아이오스는 밀레토스에 반란이 일어나면 다레이오스가 자기를 밀레토스로 보낼 것이라 생각하고, 한 충복의 머리칼을 자르고 먹으로 반란을 일으키라는 전갈을 새긴 다음 머리칼이 다시 자라자 밀레토스로 가서 아무 말없이 그냥 머리칼을 다시 잘라 아리스타고라스가 보게 하라고 보냈고, 아리스타고라스가 이것을 보고 무슨 뜻인지 알았다.(같은 책,V.35) [본문으로]
  182. 다른 도시의 참주들은 그들의 도시로 돌아가서 도시민들에 의해 방면 되었으나, 유독 뮈틸레네의 코레스만은 사람들이 도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돌로 쳐죽였다는데, 그 까닭이 짧은 기간 동안의 폭정 때문이었는지 평민 출신으로 페르시아에 봉사한 덕으로 참주가 되었기 때문인지 이에 대해서는 헤로도토스가 침묵하고 있다.(같은 책,V.38.) [본문으로]
  183. 출진에서 귀향까지 거의 20년이 넘게 걸린 트로이 전쟁은 출진한 전사들이 트로이 인근의 트라케나 아나톨리아의 땅을 경작하며 지내도록 했는데(그래서 트로이아가 있는 트로아스 지역 아래 아나톨리아의 북쪽 해안 지역을 아이올리스라고 부른다.), 이들이 트로이아의 동맹인 뤼디아에 복속되어 있었을 수는 없었다. [본문으로]
  184. 사모스 섬의 만드로클레스가 설계했다.(헤로도토스,'역사',V.88) [본문으로]
  185. 다레이오스가 선교를 건넌 다음 허물라고 하자, 레스보스의 뮈틸레네 사람 코에스가 선교를 허물지 말고 돌아갈 때까지 지키도록 하라고 조언했는데(헤로도토스,'역사',IV.97), 이 조언 덕으로 뮈틸레네의 참주로 임명되었다가(V.11) 낙소스 공략에 실패하고고 돌아와 뮈우스에 정박하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에게 붙잡혔고(V.36,37), 뮈틸레네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를 뮈틸레네 사람들에게 넘겨주었고, 그는 도시 바깥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V.38) [본문으로]
  186. 후일 아테나이로 돌아가 마라톤에서 다레이오스의 군대를 격퇴한 밀티아데스는 이 당시 케르소네소스의 참주로 다레이오스의 스퀴타이 정벌의 후원군으로 다레이오스를 돕고 있다가, 다레이오스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스퀴타이의 압박 때문에 열린 다레이오스 원정에 참가한 헬라스 사람들의 회의에서 선교를 허물어 다레이오스를 끝장내자고 주장하였으나, 밀레토스의 참주 히스티아이오스가 적극 반대하고 페르시아의 위세에 눌려지내던 다른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이 반대하여 선교를 허물지 않고 다레이오스의 퇴로를 지켰다. 그렇게 다레이오스를 구한 히스티아오스는 결국 인질이 되다시피 수사로 가야 했고, 그를 대신한 아리스타고라스는 아테나이를 페르시아의 적으로 만들면서 아나톨리아에서의 페르시아의 패권을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본문으로]
  187. '...명목상으로 참주제를 철폐하고...'(헤로도토스,'역사', v.37) [본문으로]
  188. 클레오메네스는 처음 만나는 아리스타고라스가, 이오니아의 헬라스 아들들이 페르시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스파르테에게도 고통과 치욕이 될 것 아니냐며, 페르시아 군대는 바지를 입고 두건을 쓴 채 활과 짧은 창으로 싸우기 때문에 스파르테에게는 쉬운 상대이니 도와달라고 헬라스 신들의 이름으로 간청하고, 아나톨리아 사람들의 부유함과 아나톨리아에서 나는 많은 금은보화, 짐 나르는 동물, 노예 등을 마음껏 가질 수 있다면서, 지도를 보이며 아나톨리아를 지나 페르시아의 대왕이 있는 수사까지의 지역에 대해서도 설명한 뒤, 수사를 함락하여 대왕의 보고寶庫를 차지하면 제우스와 겨룰 부를 가질 수 있으니, 여기서 작은 도시들과 싸우기나 하지 말고 손쉽게 아시아 전체를 차지하라는 그의 이야기만 듣고 이틀 뒤에 답을 주겠다고 한 다음, 사흘이 되는 날 수사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묻고 석 달이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지원 요청을 거부했는데, 해가 지기 전에 떠나라는 명을 어기고 그날 밤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든 탄원자로서 아리스타고라스는 클레오메네스의 집을 찾아 이번에는 돈을 주겠다며 10탈란톤에서 50탈란톤까지 올리며 여러 차례 간청했으나 같이 듣던 클레오메네스의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다른 방으로 가라고 해 스파르테의 지원을 받는 일은 무산 되었고(헤로도토스,'역사'V.49-51), 그 다음 아테나이로 간 아리스타고라스는 아테나이의 민회에 나가, 스파르테에서 했던 말을 반복하며 아시아가 부유하다는 점과 페르시아가 방패와 긴 창을 쓰지 않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고, 밀레토스가 아테나이의 식민도시인 만큼 아테나이가 밀레토스를 보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고, 궁한 나머지 온갖 약속을 남발하여 결국 아테나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같은 책,V.97) 그런데 사실 헤로도토스의 보고에 따르면, 아테나이 사람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선뜻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 같지는 않은데, 아리스타고라스를 궁하게 만든 여러가지의 질문이 쏟아졌을 것이고, 그런 질문에 답하느라 온갖 약속을 남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아테나이 사람들의 태도를 이렇게 표현한 것은,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의 수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 질문에서 보듯 그는 스파르테 사람들과 함께 이틀에 걸쳐 아리스타고라스의 말들을 검증했음을 알 수 있는데 반해, 궁해서 내놓은 온갖 약속들에 대한 검증없이 아테나이 사람들이 바로 그날 그 자리에서 아리스타고라스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89. 스퀴타이 사람이 아니지만 할리카르낫소스 사람 헤로도토스의 이 결정에 대한 평가를 보라. '... 분명 한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을 설득하기가 더 쉬운 것 같다. 라케다이몬의 클레오메네스 한 사람을 설득할 수 없던 아리스타고라스가 3만 명의 아테나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역사',V.97) '바보'라며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아나카르나스의 '스퀴타이식 화법Schythian Eloquence'은 아니지만 헤라도토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90. 에레트리아가 전에 칼키스와 전쟁을 했을 때, 밀레토스는 에레트리아를 사모스는 칼키스를 지원했는데, 이때의 신세를 갚기 위해 밀레토스를 지원했다고 한다.(헤로도토스,'역사',V.99) [본문으로]
  191. 밀레토스 지원병력들이 도착하자, 아리스타고라스는 밀레토스에 남고 그의 동생 카로피노스와 다른 밀레토스 사람 헤르모판토스를 장군으로 삼아 이들을 지휘케 했는데, 먼저 에페소스로 가서 함선은 코레소스에 남겨두고 사르데이스로 갔고, 아르타프레네스가 적잖은 병력으로 지키는 아크로폴리스를 제외하고는 저항이 없어 도시 전역을 점령했고, 약탈에 돌입한 한 병사가 한 집에 불을 지르자 갈대로 지붕을 덮은 집들로 옮겨붙어 삽시간에 도시가 불에 타올랐고, 놀란 사르데이스 사람들이 몰려나왔고, 그제서야 저항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겁이 난 밀레토스 지원군들이 철수하기 시작했고, 대오를 갖춘 사르데이스 군대와 지원하러 나온 인근의 페르시아 군대가 에페소스까지 추격해 일전이 벌어졌고, 많은 사상자를 낸 지원군들이 뿔뿔히 흩으져 집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멜란티오스도 아테나이로 돌아갔다.(헤로도토스,'역사',V.9-102) [본문으로]
  192. 호메로스는,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1)/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2)/숱한 영웅들의 혼백을 하데스로 보내고(3)/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4)/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아들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5)/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6)/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7)'라는 '일리아스'의 이 처음 일곱 행line行으로, '전쟁으로 재물을 챙긴다는 인간의 오만과 탐욕이 그 전쟁으로 인간들 스스로를 파멸시키고만다'라는 '일리아스'라는 이야기의 주제를 말해준다. 제1행에서 말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전리품을 독차지하려는 아가멤논의 오만과 탐욕에 대한 분노를 말하는데, 결국 '일리아스'는, '전쟁으로 돈을 챙긴다'는 아가멤논의 오만과 탐욕이 어떻게 아퀼레우스와 트로이아를 망하게 했으며, 결국 그 자신과 뮈케나이도 망하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호메로스는, 이런 오만과 탐욕이 전쟁을 부르고, 또 그 전쟁으로 결국 모든 전쟁 당사자들이 서로를 파멸시키고마는, 이 모든 인간의 불의함을 제7행에서 말하는 '제우스의 뜻' 때문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 '제우스의 뜻'은, 세상에 인간들이 너무 많아져서 '가이아Gaea,Gaia,Earth,大地,地球'가 그 인간들을 부양하느라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가이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전쟁으로 인간들의 숫자를 줄이겠다'('퀴프리스Kypris',단편Frag.,3.)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는 한정된 세상의 재물을 놓고 보이는 인간의 오만과 탐욕이 결국 자기 스스로를 망치고마는 것은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193. BC498 봄이 다 가기 전이었다. [본문으로]
  194. 헤로도토스는, '이 20척의 함선은 헬라스 사람들에게도, 헬라스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화근이 되었다.(천병희역)/These ships proved to be the beginning of evils for the Hellenes and the Barbarians(G.C.Macaulay trans.)'고 말한다.('역사',V.97) [본문으로]
  195. 일부를 빼고는 밀레토스 사람들은 참주를 다시 도시에 들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는데, 야반에 억지로 들어오다 한 시민에게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히스티아이오스는 다시 키오스로 돌아가 함대를 지원해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레스보스의 뮈틸레네를 설득하여 뮈틸레네의 함대로 뷔잔티온을 점령하여 흑해를드나드는 선박들을 통제했다.(헤로도토스,'역사'VI.5) [본문으로]
  196. 뮈틸레네의 한 평민 코에스는 다레이오스의 명령 하나로 있던 참주를 몰아내고 뮈틸레네의 새로운 참주가 되었음을 상기하라.(헤로도토스,'역사',V.11) [본문으로]
  197. 사르데이스를 불태운 이오니아 연합군을 에페소스까지 추격해 섬멸한 페르시아의 세 지휘관 중(공교롭게도 이 셋은 모두 다레오스의 사위들이었다)(헤로도토스,'역사'V.116), 다우리세스는 헬레스폰토스로 가서 그곳 도시들을 하루에 하나씩 치고 노략질하다가 카리아 역시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식에 카리아로 옮겼고(V.117), 마침 프로폰티스의 뮈시아를 평정한 휘마니에스가 헬레스폰토스로 와서 트로이아 주변을 도시들을 점령했으나 병으로 죽고(v.122), 카리아로 간 다우리세스도 두 번의 대승을 거두고 진압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카리아의 뮐라사 출신 헤라클레이데스의 매복에 걸려 부대가 섬멸당하고 그도 죽었다.(v.118-121) 이렇게 페르시아 군이 잠시 주춤거리자, 이때까지 사르데이스에서 지켜보고 있던 오타네스와 아르타프레네스가 직접 전장에 나서 지휘하기 시작던 것이다.(V.123) [본문으로]
  198. 사르데이스를 불태운 이듬해 BC497의 일이다.(같은 책,V.124-126) [본문으로]
  199. BC498 페르시아의 사르데이스가 불타는 것을 본 퀴프로스의 도시 살라미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듬해BC497 진압되었었다. (같은 책,V.104-115.) [본문으로]
  200. BC497 페르시아와의 첫 전투를 마르쉬아스Marsyas 강을 두고 치르기로 한 카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강을 건너 배수진을 치는 대신 강을 건너온 페르시아를 치기로 했으나 대패했고(V.119), 다시 라브란다Labranda,or Labraunda에 집결해 투항과 도피를 논의하던 중 밀레토스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그곳에서 두 번째 전투를 벌였으나 참패했고(V.120), 다시 집결한 카리아 사람들은 항전을 계속하기로 하고, 본거지 소탕을 위해 진군하던 페르시아 군대를 페다소스Pedasos에서 야습하여 다우리세스와 그의 지휘부를 섬멸하자(V.121,헤로도토스는 페다소스의 야습이 두 번의 참패를 당한 그해의 일이었는지 한 해 뒤의 일이었는지에 대해 말이 없으나, 앞선 두 번의 참패가 워낙 힘이 빠졌었기 때문에 그 이듬해인 BC496의 일로 본다.), 페르시아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BC496-5 간에는 페르시아의 군사 행동이 없었다.) 이태 뒤인 BC494 밀레토스 공략에 집중했다. [본문으로]
  201. 이오니아 함대는 우익을 맡을 밀레토스의 80척, 프리에네의 12척, 뮈우스의 3척, 그리고 테오스의 17척이 있었고, 본진을 맡을 키오스의 100척, 에뤼트라이아의 8척, 그리고 포카이아의 3척이 있었고, 좌익을 맡을 레스보스의 70척과 사모스의 60척이 있어, 모두 353척의 삼단노선이 있었다.(헤로도토스,'역사',VI.8) 전체 함대의 지휘를 3척을 가지고 온 포카이아의 디오뉘시오스가 맡았는데(VI.11), 이레가 넘도록 계속되는 맹훈련에 지친 선원과 병사들의 불만과 3척을 가지고 온 작은 도시의 디오뉘소스가 전체 함대를 지휘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겹쳐 군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VI.12) [본문으로]
  202. '라데 해전Battle of Lade'이라 불리는 이 전투는 BC494 밀레토스의 작은 섬 라데 앞 바다에 디오뉘시오스가 이끄는 353척의 이오니아 함대와 다티스(?)가 이끄는 600척의 페르시아 함대가 맞붙어 페르시아 함대가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본문으로]
  203. 페르시아 연합 함대의 함선은 모두 600척이었는데도, 페르시의 지휘관들은 이오니아 함대를 제압하지 못할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이오니아 도시들에서 쫓겨난 참주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옛 도시들이 이오니아의 함대에서 이탈하도록 회유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같은 책,VI.9) [본문으로]
  204. 아이아케스의 회유를 받아들인 장군들과는(VI.13) 달리, 사모스의 함선 11척은 장군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끝까지 남아 분전했는데, 후일 사모스는 이들과 그 아버지들의 이름을 새긴 돌기둥을 아고라에 세위주었다.(헤로도토스,'역사',VI.14) 이들 가운데 일부 부유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페르시아와 다시 참주가 될 아이아케스의 노예가 되느니 식민도시를 세워 거기서 살기로 하고 시켈리아의 칼레 악테로 가던 중 장클레라는 도시가 이웃 도시를 공격하느라 도시를 비운 틈을 이용해 장클레를 점령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같은 책,VI.22-24) [본문으로]
  205. 키오스는 100척의 함선에 40명의 군인들을 태우고 참전했는데, 라데에서 이오니아 함대가 패하자 몇 척의 남은 배로 키오스로 돌아갔으며, 배가 부서지고 없는 키오스 사람들은 육로로 귀환하다 무장한 도적들로 오인한 에페소스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포카이아의 디오뉘시오스는 패배 이후 돌아가도 노예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3척의 배로 포이니케로 가서 상선을 털어 자금을 마련한 다음 시켈리아로 가서 해적이 되었는데, 헬라스 선박들은 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역사',VI.15-17) [본문으로]
  206. 옛날 쉬바리스가 크로톤에 함락되어 쉬바리스 사람들이 라오스와 스키드로스에 흩으져 살아야 했을 때, 밀레토스 사람들은 그들을 동정하여 노소 불문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애도를 표한 적이 있었다.(같은 책,VI.21) [본문으로]
  207. 이 글 주22 참조. [본문으로]
  208. 뮈틸레네 함선들로 뷔잔티온을 점령하고 있던 히스티아이오스는, 밀레토스의 함락 뒤 곧바로 뮈틸레네와 함께 키오스를 점령하고, 키오스를 기지로 삼아 이오니아와 아이올리스 사람들로 군대를 짜서 타소스를 공격하던 중, BC493 포이이케 함대가 밀레토스를 떠나 헬레스폰토스로 움직인다는 소식을 듣고 레스보스로 철수하였고, 부족한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아나톨리아의 카이코스강 유역의 곡식을 약탈하러 갔다가 오히려 페르시아의 하르파고스에게 군대가 섬멸당하고 자신은 붙잡혔고, 사르데이스로 끌려가서는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책형으로 죽임을 당한 뒤, 머리는 수사로 보내어졌다.(같은 책,VI.27-30) [본문으로]
  209. 천병희는 페르시아가 행한 이 반란 참가자 소탕 방법을 저인망식이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섬들을 소탕할 때 페르시아 군대가 서로 손을 잡고 인간 사슬을 만들어 섬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훑어가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찾아내었기 때문에 역자가 그렇게 붙인 것이다. 물론 이 방식을 반란을 일으킨 육지의 도시에서는 적용할 수 없었다.(같은 책,VI.31) [본문으로]
  210. 처음 케르소네소스 참주 밀티아데스는 상속자가 없어 이부동복동생 키몬의 아들 스테사고라스에게 재산과 참주직을 상속했는데, 스테사고라스 역시 후계자가 없이 암살당하자 그의 동생 밀티아데스가 재산을 상속받고 참주직을 승계했다.(같은 책,34-41) 밀티아데스의 아버지이자, 케르소네소스로의 첫 이주자 밀티아데스의 이부동복동생 키몬에 대해서는 '같은 책,VI.103' 참조. [본문으로]
  211. BC493 밀티아데스가 아테나이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가 케르소네소스에서 독재적인 참주 노릇을 했다며 고발당해 받아야 하는 재판이었다. 아레오파고스의 재판이어서 결국 무죄방면되기는 했지만, 결코 이기기 쉬운 재판은 아니었을 것이다.(같은 책,VI.104) [본문으로]
  212. '마르도니오스Mardonios,페Mardoniye'는 다레이오스와 함께 바르디야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레이오스를 왕으로 추대한 여섯 귀족 가운데 하나인 고부뤼아스의 아들로, 다레이오스의 딸 아르토조스트라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 [본문으로]
  213. BC495 밀레토스가 함락되고 이태 동안의 응징과 복속 강화에 나선 결과 '이오니아의 반란Ionian Revolt,BC499-493'이 매듭지어질 무렵, 밀레토스의 히스티아이오스가 이끄는 이오니아 아이올리스 사람들로부터 공격당한 바 있었던 타소스는(VI.28), 섬과 섬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함을 건조하고 성벽을 강화하고 있었는데, 이런 타소스를 두고 타소스가 반란을 준비한다며 다른 도시들이 다레이오스에게 모함을 했고, 이에 BC491 다레이오스가 성벽을 허물고, 전함들을 압데라로 보내라고 지시하자 타소스가 이에 따랐다.(VI.46,48) [본문으로]
  214. BC491 [본문으로]
  215. 펠레폰네소스 연합군의 아테나이 침공에서 벌어진 클레오메네스와 데마라토스 간의 불화는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친 아이기나에 대한 응징 문제를 두고 최악으로 치달았고, 결국 클레오메네스는 데마라토스를 제거하기 위해 클레이스테네스의 신탁 조작술을 원용하기에 이른다. [본문으로]
  216. BC495 아테나이는 페르시아의 아르타페르네스와 친분이 있다는 힙파르코스를 대표 아르콘으로 뽑고, 페르시아와의 강화를 시도한다. [본문으로]
  217. 아이기나 섬은 에피다우로스 사람들의 식민지로 일찌기 해양 교역에 나서 번성하게 되자 종주도시 에피다우로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에피다우로스는 어느 해 흉년이 들자 신탁대로 아테나이의 올리브 나무로 풍요의 신상을 만들어 봉안한 덕분에 풍년이 들었고, 올리브 나무 값으로 아테나이의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독립 문제로 아이기나가 종주도시 에피다우로스를 공격하고 신상을 약탈하여 아이기나에 봉안하자 에피다우로스는 아테나이에 공물을 보내지 않았고, 연유를 알게 된 아테나이는 아이기나에게 에피다우로스가 내던 공물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함선들을 보내 아이기나를 침공했고, 아이기나는 아르고스의 도움으로 이를 막아서, 이후 두 도시는 서로 앙숙이 되었다. 한편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축출하기 위한 스파르테의 아테나이 침공 때 에우보이아의 칼키스와 함께 아티케를 유린하고 있다가 스파르테가 철수해버리자 아테나이의 반격으로 패퇴하고 보상까지 해야 했던 보이오티아의 테바이는 아테나이와 앙숙인 아이기나를 사주하여 아테나이를 괴롭히게 했는데, 평소 테바이로부터 신상을 공급받고 있던 아이기나가 기꺼이 아테나이를 공격하여 아테케의 해안을 유린하였고, 이에 아테나이는 30년 동안 아이가나의 괴롭힘을 참지 않으면 종국에는 이기겠지만 서로 많은 고통을 주고받을 것이라는 신탁에도 불구하고 아이기나를 응징하려 했으나, 스파르테가 또 다시 아테나이로 침공해 오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 뒤에도 두 도시 간의 결말 없는 전쟁은 계속되었는데, 아테나이는 엄청난 국력의 차이에도 그들이 아이기나를 응징하지 못하고 결말 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이유가 아이기나의 해군력을 당하지 못하는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해군력을 키울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218. 페르시아가 아나톨리아와 이오니아에서의 반란의 평정을 끝낸 BC493, 아테나이는 이제 나이 32살의 아고라 저자 거리 출신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BC524-459)를 대표 아르콘으로 뽑았다. [본문으로]
  219. 마르도니오스의 헬라스 본토 원정을 막기 위한 범 헬라스적인 움직임에 대해 모든 기록들이 침묵하고 있다. [본문으로]
  220. 데마라토스가 스파르테를 떠난 시기나 그가 페르시아로 간 시기에 대해서는 어느 기록도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클레오메네스가 레오튀키다스를 부추겨 데마라토스를 왕위에서 밀어냈을 때, 이미 그는 클레오메네스는 물론 레오튀키다스의 박해를 피해 스파르테를 떠나 수사로 가서 다레이오스의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았다. [본문으로]
  221.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는 물과 흙을 바치라는 페르시아 사절을 알아서 가져가라며 우물 속에 던져버렸고, 아테나이의 밀티아데스는 재판에 붙여 사형시켜버렸다. [본문으로]
  222. 충분한 함선이 없었던 아테나이는 아이기나 내부의 동조자를 얻고도 코린토스에게서 배를 빌려 가느라 약속 날짜를 맞추지 못해 동조자를 잃고 아이기나를 점령할 기회를 놓쳤다. [본문으로]
  223. 이 전령이 필립피데스였는데, 그는 장거리 전담 전영으로 이틀만에 스파르테까지 가서(무려 240km이다!) 스파르테가 카르네이아 축제 기간에는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엿새 뒤인 보름에야 출병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또 다시 [본문으로]
  224. 플라타이아의 지원 병력은 800명이었다. [본문으로]
  225. 헤로도토스는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의 배반에 대해 [본문으로]
  226. 참주가 되기 위해 페르시아의 길잡이로 마라톤까지 돌아왔던 힙피아스는 [본문으로]
  227. 마케도니아에서 입었던 부상 후유증으로 마르도니오스는 다레이오스의 헬라스 원정에 참전하지 못하고, 메디아 출신의 다티스가 이끄는 메디아 병력과 사르데이스 총독 아르타페르네스의 아들 아르타페르네스가 이끄는 리뒤아 병력이 나서는 것을 보아야 했다. [본문으로]
  228. 크세르크세스는 [본문으로]
  229. 헤로도토스는 헬라스 정벌을 두고 드러난 페르시아 최고 지도부의 이견과 크세르크세스의 결정 과정을 [본문으로]
  230. BC524경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 테미스토클레스는 BC493-492 아테나이의 에포뉘모스 아르콘이었다. [본문으로]
  231. 앞의 글, '도시의 정의'10.36.주105 참조. [본문으로]
  232. 플루타르코스,'테미스토클레스전'1-3. [본문으로]
  233. BC493-492. 마라톤 전투 세 해 전이다. [본문으로]
  234. '퀴노사르게스Kynosarges,cynosarges,white/swift dog'는 아테나이 남쪽 성 밖 일릿소스 강 근처의 지명으로, 헤라클레스와 그의 어머니 알크메네Alcmene와 그의 아내 헤베Hebe, 그리고 그의 조력자 롤라오스Lolaos를 위한 성소sanctuary가 있던 곳으로 근처에 청소년 체력단련장이 있었는데, 테미스토클레스와 같은 '노토이nothoi,illegitimate boys(부모 어느 한 쪽이 아테나이 시민이 아닌 아이들)'들이 많이 모였다. 안티스테네스가 주로 이곳에서 가르쳤으므로 그의 학파를 '견유학파Cynics犬儒學派'라 불렀다. [본문으로]
  235.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에 참전한 장군들 열 명 가운데 아르콘 폴레마코스 카리마코스와 밀티아데스의 이름만 거론했을 뿐이고, 플루타르코스는 '아리스테이데스전,5'에서 테미스토클레스가 아리스테이데스와 함께 마라톤에 참전했음을 알리고 있을 뿐이지만, 이 글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는 물론 아리스테이데스와 크산팁포스까지 모두 마라톤의 장군 열 명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데, 그 까닭은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에 대비하여 아테나이가 도편추방당해 아테나이를 떠나 있던 아리스테이데스와 크산팁포스를 불러들이고 테미스토클레스도 이들 정적들의 귀환을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전쟁을 지휘하고 수행하는 능력이 이미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정평이 나 있었다고 보이고, 그 평가는 마라톤에서가 아니면 얻을 수 있었던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36. '도시의 정의',10.32. 참조 [본문으로]
  237. ca.BC485 [본문으로]
  238. ca.BC484 [본문으로]
  239. 헤로도토스는 200척으로, 플루타르코스는 100척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아르테미시온의 해전에 테미스토클레스가 끌고간 아테나이의 함선 수와 살라미스 해전에 동원한 아테나이의 함선 수를 감안하면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당시 아테나이가 투입할 수 있었던 전체 함선 수를 200여척으로 볼 수 있어, BC483에 민회의 결정으로 아테나이가 건조한 함선 수를 200척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본문으로]
  240. 플루타르코스,'테미스토클레스전',4.2.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에 따라 은광 수입으로 건조한 함선 200척은 아테나이기 소유하였으나 부자들에게 나누어주어 운용 수익으로 유지 보수케 했는데, 물론 개인이 소유한 배들도 있었지만 민주정 수립 직후 아니기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아르고스에서 배를 빌려 아이기나를 공격하려 했던 것을 보면, 개인 소유의 아테나이 함선 숫자는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41. 후대의 플루타르코스와는 달리, 헤로도토스는 역사 속에서 테미스토클레스를 아테나이가 함선 200척을 건조하게 된 내력을 설명하는 가운데 처음 소개한다.('역사',VII.144) [본문으로]
  242. 라우레이온 은광에서 나오는 은으로 200척의 함선을 건조하자고 주장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눈에는, 그냥 예로부터 하던 대로 은을 팔아 모든 시민들에게 10드라크메씩 나누라고 하는 아리스테이데스를 위시한 귀족들의 주장은 그들의 보수적인 타성을 그대로 반영한 대표적 행태로 보였을 것이어서, 테미스토클레스는 귀족들을 대변하는 아리스테이데스와 귀족 출신이면서 그리고 본디 해안당이 그 뿌리여서 스스로 민중을 위한다고 나서지만 보수적인 타성에 젖어 새로운 아테나이를 만들 수 없어 보이는 크산팁포스를 차례로 도편추방한 다음, 새로운 아테나이의 출발점으로 은관 수입을 100척의 함선 건조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 [본문으로]
  243. BC481. [본문으로]
  244. 데마라토스가 보낸 빈 목판 하나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가 지원을 거절하는 클레오메네스의 집에까지 탄원저로 가서 뇌물로 지원을 흥정하려 했을 때 클레오메네스에게 다른 방으로 가라고 했던 클레오메네스의 딸이자, 클레오메네스의 이복동생으로 클레오메네를 이어 왕이 된 레오니다스의 아내가 된 고르고가 빈 서판의 밀랍을 벗겨보라고 한 조언 덕분이었는데, 그 내용이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침공 계획이었고, 이 내용 때문에 침공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잠시 스파르테는 주전파와 주화파 간의 내홍이 있었고, 그 내홍이 바로 데마라토스나 크세르크세스가 노리는 것임을 깨닫고 스파르테는 헬라스 연합을 통한 격퇴를 결심하게 된다. [본문으로]
  245. 다레이오스의 헬라스 침공에 길라잡이로 왔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힙피아스는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원정 결정 당시에는 죽고 없었던 모양인지, 헤로도토스는 수사에 머물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일족들이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원정을 부추기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역사',VII.6), 그러므로 이들이 조국인 아테나이에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소식을 먽저 전하지는 않앗을 것이다. [본문으로]
  246.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축제를 핑계로 스파르테가 뒤늦은 파병을 했지만, 그나마도 스파르테는 다레이오스의 침공을 페르시아의 헬라스 세계 침공으로 본 거이 아니라 아테나이 침공으로 보고 동맹국으로서 지원군을 파병한 것이었다. [본문으로]
  247. 헤로도토스 역사 VII.133.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크세르크세스의 사절을 죽이는 대신 물과 흙을 바치라는 사절의 더러운 말을 헬라스 말로 옮겼다며 대신 통역을 죽였다고 쓰고 있다.('테미스토클레스전'.6.2) [본문으로]
  248.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테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인 것 때문에 참가를 기피하는 도시가 없도록 하기 위해, '헬라스 연합Hellanion'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본문으로]
  249. 헤로도토스는 테바이와 테스페이아와 플라타이아를 제외한 다른 보이오티아 도시들이 페르시아 왕에게 물과 흙을 바쳤다고 기록하면서('역사'VII.132), 레오니다스의 테르모퓔라이 농성전에 테바이가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지원군을 보낸 사실을 밝히며(VII.202) 테바이 역시 텟살리아처럼 페르시아에 붙느냐 헬라스동맹에 붙느냐로 도시가 갈팡지팡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한편, 레오니다스가 그 지원군을 믿지 못한 사실들을 기록하여(222), 테바이의 이중적 태도를 은연 중에 비난하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이런 견해를 부도덕적이라며 공격하는(플루타르코스,'헤로도토스의 악의On the Malace of Herodotus') 보이오티아의 카이로네이아 출신인 플루타르코스는 남은 테바이 군사들의 분전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으로]
  250. 특히 아이기나가 반대하고 나서자 에우보이아 섬의 도시들 그리고 코린토스도 아테나이의 해군 지휘권 행사를 거부하고 나섰다.(플루타르코스,'테미스토클레스전'6.) [본문으로]
  251. '...헬라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페르시아에 항복한 자들은 가진 재산의 1/10을 델포이의 신에게 바쳐야 한다...'(헤.역.VII.132) [본문으로]
  252.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연합함대 3,000척의 내역을 일일이 꼽고 있는데, 이 가운데는 얼마 있지 않아 벌어질 살라미스 해전의 홍일점 할리카르낫소스의 아르테미시아가 지휘를 자원하고 나선 5척의 함선도 포함되어 있었다.(헤.역.VII.99) [본문으로]
  253. 헤로도토스,'역사',VII.172. [본문으로]
  254. 에우아이네토스가 이끄는 스파르테와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나이의 중무장보병이 주축이 된 헬라스동맹군 만 명은 배를 타고 텟살리아 남부의 아카이아 알로스로 가서 그곳에 배를 두고 템페 계곡을 통해 마케도니아에서 텟살리아로 들어오는 고갯길에 텟살리아의 기병들과 함께 진을 쳤다.(같은 책,VII.173) [본문으로]
  255.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도 사람을 보내 크세르크세스가 템페 계곡을 통하지 않고 다른 길을 택해 텟살리아로 들어갈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실제 크세르크세스는 마케도니아에서 페르라이비아와 곤노스를 통해 텟살리아로 들어갔다 한다.(헤로도토스,'역사'VII.173) [본문으로]
  256. '팔라스(아테나 여신)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교묘한 재치로 애원한다 해도 올륌포스의 주신 제우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못하리라. 그래서 나는 재차 그대에게 강철처럼 단단한 말을 하리라. 케크롭스 언덕(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과 신성한 키타이론 산(테바이 남쪽에 있는 산) 골짜기 사이에있는 모든 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지만 트리토게네이아(아테나 여신)여, 멀리 보시는 제우스께서는 그대에게 나무 성벽을 주실 것인즉, 이 나무 성벽만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도와주게 되리라. 그대는 대륙에서 기병과 보병의 대군이 다가오기를 가만히 기다리지 말고 등을 돌려 도망쳐라. 언젠가는 적군과 맞설 날이 다가오리라. 신성한 살라미스 섬이여, 데메테르가 씨를 뿌리거나 수확할 때, 너는 여인들의 자식들을 죽이게 되리라.'(같은 책,VII.141) [본문으로]
  257. '광활한 스파르테의 주민들이여, 너희들의 운명을 들어라. 너희들의 크고 영광스런 도성이 페르세우스의 자손들의(페르시아 사람들의) 손에 파괴되든지, 아니면 온 라케다이몬 땅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자신의 왕의 죽음을 슬퍼하게 되리라. 황소의 힘도, 사자의 힘도 적에게 대항할 수 없으리라. 그는 제우스처럼 강력하나니 단언하건데, 그는 멈추지 않으리라. 둘 중 어느 한쪽이 갈기갈기 찢기기 전에는.'(같은 책,VII.220) [본문으로]
  258. 헬라스에서는 케페네스족이라 불렸던 옛날 페르시아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고 주위에서 모두 아르타이오이족이라 불렸으나, 제우스와 다나에 사이의 아들인 페르세우스가 벨로스의 아들인 케페우스에게 갔다가 케페우스의 딸 안드로메다와 결혼하여 아들 페르세스를 얻고, 마침 케페우스에게 후사가 없어 아들 페르세스가 케페우스를 이어 아르타이오이족을 다스린 이후 페르세스의 이름을 따서 페르시아 사람들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259. BC486말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BC485 바빌론과 이집트 반란을 평정한 뒤, BC484 헬라스 원정을 결정하고 준비하기 시작했고(헤로도토스,'역사'VII.20), BC483 아토스 산이 있는 반도의 지협에 운하를 파고(VII.22-24), 포이니케와 아이귑토스를 동원하여 선교를 만들 준비와 병참 기지를 설치하고 군량과 지원 물자를 비축토록 하는 등 준비를 마치자(VII.25) BC481 봄 페르시아와 메디아 정예부대를 데리고 수사를 떠나면서 헬라스 원정이 시작되었다.(VII.22) [본문으로]
  260. 크세르크세스는 제국에서 차출된 전체지상군을 일단 캅파도키아의 크리탈라에 집결시킨 다음 이들을 대동하고 프뤼기아, 뤼디아를 거쳐 헬레스폰토스로 나아갔다.(같은 책,VII.26) [본문으로]
  261. 페르시아 사람 일 만명으로 구성된 근위부대이자 급습부대로 한 명의 부대원이라도 결원이 생기면 바로 충원되어 늘 만 명을 유지했기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이들을 '일 만명' 또는 '불사부대Athanatoi,Immortals,不死部隊'로 불렀다.(헤,역,VII.83) [본문으로]
  262. 오늘날의 이란Iran에 속하는 이들 네 부족은 페르시아 제국의 주력 정예부대로 활약하였는데, 군장軍裝은 본디 '메디아Media,Medes,Mada'의 것으로(헤,역,VII.62) 페르시아와 킷시아Kissia 휘르카니아Hykania가 따른 것이다. [본문으로]
  263. 페르시아 제국의 동남쪽 지역인 간다라Gandara, 힌두쉬Hindush, 삿타기뒤아Sattagidya로 지금은 파키스탄 지역이다. [본문으로]
  264. '아뮈르기온 사람들Saka Haumavarga,Amyrgioi,Amyrgians'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박트리아Bactria와 소그디아나Sogdiana 인근에 살던 사카Saka족(스퀴타이족)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65. 카파도키아의 페르시아 이름 [본문으로]
  266. 헤로도토스는 부족별(지역별) 참전 인원수는 생략하고 총 지상군의 숫자를 170만으로 기록했다.('역사'VII.60) 그러나 지역별로 천 명에서 만 명 정도의 병력이 차출되었을 것으로 보아 전체 지상군의 수는 이십오 만명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본문으로]
  267. 헤로도토스는 다레이오스가 카스피 서안의 사카족(스퀴타이족)을 치기 위해 프로폰토스를 건넜던, 헬라스 사람들이(사모스의 만드로클레스가 설계Enginered by Mandrocles of Samos) 보스포로스에 설치한 '배다리pontoon bridge,船橋'에 대한 공법은 소개하지 않았지만, 크세르크세스가 헬라스를 치기 위해 헬레스폰토스를 건넜던, 포이니케와 아이귑토스 사람들이 아뷔도스와 세스토스 사이에 설치한 배다리에 대한 공법은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의 배다리 설치공사는 한 번의 실패를 겪고 두 번째에서야 완성시킬 수 있었다.('역사'VII33-36) [본문으로]
  268. 크테시아스는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 원정에 1,000척의 삼단노선을 동원했다고 한다.('페르시카',포티우스의 발췌,27(단편15권28)) [본문으로]
  269.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그 위세를 누리는 인생의 짧음 때문에 눈물을 보였다고 말한다.(역,VII.45-46) [본문으로]
  270. 헬레스폰토스를 건너온 크세르크세스를 보고 주민 하나가, '제우스시여, 그대는 왜 페르시아 사람으로 변장하시고 제우스란 이름 대신 크세르크세스란 이름을 쓰시나이까? 헬라스를 쑥대밭으로 만드시는 것이 그대의 소원이라면 혼자서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거늘 어찌하여 세상 사람들을 다 데려오시나이까?'라며 제우스를 원망했다.(역,VII.56) [본문으로]
  271.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사열하는 동안 각 부대의 지휘관들에게 일일이 질문했으며 그 내용을 기록토록 했다는데, 이로 보아 크세스크세스는 출전 부대의 소망을 묻고 전공을 세울 경우 그 소망을 들어주기로 약속하였던 것 같다.('역사'VII.100) [본문으로]
  272. 헤,역,VII.96 [본문으로]
  273. 헤로도토스는 박트리아나 인디아에서 온 군대가 어떤 신분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는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각 지역에서 페르시아가 정한 징집 대상에 대해서 쉽게 짐작해볼 수 있는 실마리 하나는 분명하게 남겨 놓았는데, 바로 뤼디아의 갑부 퓌티오스에 대한 일화이다. 퓌티오스는 크세르크세스 군대의 집결지 케레나이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비로 군대를 융숭하게 대접한 뒤, 크세르크세스에게 자진하여 자기도 전쟁 비용을 대고 싶다고 제안하고, 이에 크세르크세스는 놀라움으로 그의 태도를 칭찬하며 오히려 재산을 더 보태주는데, 그러나 이 퓌티오스가 아들 다섯 모두가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장남만은 남겨달라고 청원하자 그가 바라는 대로 군대가 지나가는 사르데이스의 길가에 두 토막을 내어 남겨둔다.(역.VII.27-29,38-39) [본문으로]
  274. 포이니케 사람들이 페르시아가 자기들의 협조없이는 결코 독단적인 해군을 운용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캄비세스가 포이니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세운 식민도시 칼케이돈을 공격하라고 지시했을 때 자손들의 도시를 공격할 수 없다며 뻗대었을 때 드러났었다.(헤.역.III.19) [본문으로]
  275. BC495-7 포이니케 함대는 퀴프로스와 라데 해전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아이가이온 해의 섬들과 헬레스폰토스 프로폰토스 바다의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가 가졌던 함대를 괘멸시키고 제해권을 확보했었다. [본문으로]
  276.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를 이렇게 시작한다. '페르시아의 학자들에 따르면, 헬라스인들괴 비헬라스인들이 반목하게 된 것은 포이니케인들 탓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77. 아르테미시아Artemisia는 카리아의 도리에이스 도시 할리카르낫소스의 참주 뤽다미스의 딸로 남편이 일찍 죽고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참주가 되어 통치하고 있었는데, 크세르크세스의 원정에 6척의 함선을 가지고 자진 참전하였고, 아르테미시온 해전과 살라미스 해전에서 분전하여 크세르크세스의 주목을 받았다. [본문으로]
  278.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위해 도시와 도시민의 자유를 페르시아에 바친 헬라스의 도시들은 텟살리아, 돌로피아, 에니에네스, 페르라이비아, 로크리스, 마그네시아, 멜리스, 프티아의 일부, 테바이를 비롯한 보이오티아(보이오티아에서는 테스페이아와 플라타이아가 페르시아복속되기를 거부하고 헬라스동맹에 가담했다.)이었다.(헤.역.VII.132) [본문으로]
  279. 레오니다스와 결혼한 클레오메네스의 무남독녀 고르고Gorgo는 여덟 또는 아홉이었을 때,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가 집에까지 찾아와 아버지 클레오메네스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자리를 피하라고 권했던 그 딸이다.(이 글의 주84. 헤.역.V.51) [본문으로]
  280. '당신은 왕이지만 우리들보다 더 낫지 않아요.'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물론 레오니다스의 답은, '내가 당신보다 더 낫지 않다면 왕이 되었을 리 없잖소.'였다.)(플루타르코스,'스파르타인 어록Spartan Sayings',레오니다스.1) [본문으로]
  281. 헤로도토스는 레오니다스가 새로 뽑은 '힙페이스Hippeis近衛隊' 300명의 숫자만 스파르테 군대로 언급하면서 나머지 펠로폰소스에서 차출한 군대의 숫자를 오르코메노스가 보낸 120명, 뮈케나이가 보낸 80명의 작은 숫자까지 꼽으며 2,800명을 더해 전체를 3,100명으로 보고한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다른 구절에서 스파르테 병사 하나에 헤일로타이 한 명씩 딸렸다고 하고, 테르모퓔라이에서 페르시아의 300만 대군과 맞선 펠로폰네소스 군대 숫자를 4,000명으로 새긴 명문을 소개하는데, 이를 역산하면 900명의 소속이 불분명한 펠로폰네소스 군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자료를 종합하면 스파르테의 파병 규모가 힙페이스 300명 페리오이코이 300명으로 구성된 600명의 중무장보병과 이들에게 붙은 헤일로타이 600명을 더해 1,2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으로]
  282. 아내 고르고가 테르모퓔라이로 출진하는 남편 레오니다스에게 남겨줄 말이 있는지 물었을 때, '용감한 사내들과 결혼하시오, 그래서 그래서 그들에게 용감한 자식들을 낳아주시오.To marry brave men and bear them brave children.'('좋은 사람들과 결혼해서 좋은 아이들을 낳으시오.To marry good men and bear good children.'라는 번역도 있다.)고 답했는데(같은책,레오니다스.2), 이는 고르고 역시 레오니다스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283. 스파르테 왕이 될 왕가의 아들은 아고게의 혹독한 훈련을 거치지 않았다. 레오니다스는 왕이 되기 전 먼저 아고게를 거쳐 전사가 된 몇 안 되는 스파르테 왕 가운데 한 명이다. [본문으로]
  284. 팔월에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을 필두로 다수의 헬라스 도시들이 '올륌피아 제전Olympia(현대 올림픽 경기의 시원으로, 펠로폰네소스의 도시 엘리스Elis가 주관하던 제우스를 기리기 위한 범 헬라스 경기 축제)'과 '카르네이아 제전Karneia,Carnea(아폴론 카르노스Karnos,god of flocks and hqrds,牧神을 기리는 스파르테의 대제전)'을 치루었는데, 제우스와 아폴론을 기리는 축전이었던 만큼 평화의 제전인 이 기간 동안은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본문으로]
  285. 실제 레오니다스가 테스모퓔라이에 도착했을 때의 헬라스동맹의 중무장보병 숫자는 스파르테 600(힙페이스300,페리오이코이300), 테게아 500, 만티네이나 500, 아르카디아 1,120, 코린토스 400, 플레이우스 200, 뮈케나이 80, 테스페이아 700, 테바이 400, 오푸스 로크리스 전군全軍(500명 정도?, 1000명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포키스 1,000, 합계 6,000명 정도로 오푸스 로크리스의 병력을 800으로 잡아도 전체 중무장보병 숫자는 7,0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고(헤.역.VII.202,203), 이들 중무장보병을 돕는 경무장보병이나 전투지원자를 더한다 해도 테스모퓔라의 헬라스동맹군은 대체로 8,000정도였을 것이다. 스파르테 전사 1명에 헤일로타이 1명씩 붙던 스파르테 수준의 경무장보병인나 전투지원병이 있었다 해도 최대 12,000명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286.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지상군 병력이 보병 2,000,000, 기병 80,000, 낙타병과 전차병 20,000, 모두 2,100,000명이었다 하고, 전투지원 병력을 동수로 보고 있으므로 이를 감안하면 총병력은 4,000,000명을 넘었을 것인데(역.VII.184-186), 그런데 헤로도토스가 이들 가운데 크세르크세스를 위해 트라케에서 마케도니아와 마지막으로 헬라스의 마그네시아까지 이르는 지역에서 300,000명의 병력이 차출되었다고 보고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 지역이 이 정도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쉽게 물과 흙을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 뻔한데, 당시 이들 지역에서에서 차출할 수 있었던 병력을 최데 30,000으로 보면 전체 크세르크세스의 군세 역시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4,000,000의 1/10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크테시아스는 그의 페르시아 역사책 '페르시카Persica'에서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 원정에 동원한 인원men을 전차를 제외하고 800,000명이었다고 한다.('페르시카',포티우스의 발췌Photius' Excerpt,27) [본문으로]
  287. 아테나이 사람들이 은광에서 나온 서로 돈을 나누지 않고 부자들에게 주어 함선을 만들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부자는 부자대로 배를 가질 수 있어 좋았고, 대부분의 하루 노역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겐 노를 저어 먹고 살 수 있어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테이데스와 크산팁포스는 각각 귀족들과 서민들을 위한다는 정치적 처신과는 달리 교활하다고만 여긴 아고라 출신의 정적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양 진출 정책이 권력의 주체를 바꾸는 고도의 정치 개혁일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 경제의 틀을 바꾸는 경제 개혁이라는 사실과 그런 개혁이 소수의 상층 기득권자들이 아니라 다수의 하층민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까닭에 하층민을부터 도편추방당해야 했다. [본문으로]
  288. 플루타르코스,'테미스토클레스전',7.2 [본문으로]
  289. 마라톤의 전투에는 당시 급히 뽑혔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장군 밀티아데스가 있었고, 그의 작전이 먹히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데, 헬라스 함대에 함선을 보낼 때 아테나이 사람들은 테미스토클레스를 아테나이 함대의 총지휘관으로 삼았다. 이때 아리스테이데스와 크산팁포스는 아테나이로 소환되어 있었지만 장군이 되어 함께 출전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테미시온에서 퇴각하여 아테나이 시민들의 소개가 진행되고 있었을 때의 일로 살라미스로 가는 피난민을 태운 배에 크산팁포스의 개가 오르지 못해 헤엄을 치고 따라 오다 죽었다는 이야기를('테미스토클레스전',10.5) 전하고, 헤로도토스는 헬라스 함대가 살라미스 해협에 안에 포위된 사실을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알리기 위해 한밤중에 피난갔던 아이기나에서 온 아리스테이데스 이야기를(역.VIII.79)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이들 둘은 아테나이 함대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290. 헤.역.VIII.1 [본문으로]
  291. 헬라스 함대는 아테나이 127척, 코린토스 40척, 메가라 20척, 칼키스 20척, 아이기나 18척, 시퀴온 12척, 스파르테 10척, 에피다우로스 8척, 에레트리아 7척, 트로이젠 5척, 케오스 2척, 모두 271척의 삼단노선과 케오스 2척, 오푸스 로크리스 7척, 모두 9척, 모두 16척의 오십노선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가운데 칼키스의 삼단노선 20척은 아테나이가 대여해준 것으로 실제 아테나이는 147척의 삼단노선을 출전시키고 있었다. [본문으로]
  292. 이스트모스에서 헬라스 함대의 지휘권을 두고 아테나이의 선장들은 헬라스 함대의 지휘권을 아테나이가 맡는 게 순리라고 여겨 지휘권 양보에 불복하였다.(플루타르코스,'테미스토클레스전'7.2,3) 그러나 테미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의 지휘에 대해 참전 거부까지 들먹이며 아테나이의 함대 지휘를 완강히 반대하는(틀림없이 아이기나와 코린토스였을 것이지만 헤로도토스는 이들을 거명하지는 않는다) 동맹들을 존중해 스파르테의 에우뤼비아데스가 함대를 지휘하는 것을 받아들인다.(헤.역.VIII.2-3) [본문으로]
  293. 레오니다스가 진을 친 '테르모퓔라이Thermopylae,Hot gates,熱門'의 '좁은 길defile狹路'은 말리스 만 남쪽의 동서로 뻗은 6km 정도의 해안 구간으로 칼리드로모스 산과 아노파이아 산의 북쪽 자락이 말리스만 으로 쏟아지는 절벽의 끝자락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생긴 길이다. 특히 동서 양단은 마차 하나가 겨우 지날 정도로 좁아 작은 성문으로도 길을 막을 수 있었고, 그 사이 협로의 중간 부분에 조금 넓은 곳에 옛 포키스 사람들이 절벽과 바다 사이를 성벽으로 쌓아 세운 성벽과 중문이 있었다. 동문 가까이 온천이 있어 외지 사람들이 이곳을 '테르모퓔라이,thermo熱+pylae門'라 불렀다. [본문으로]
  294. 헤.역.VII.208 [본문으로]
  295. 헤로도토스는 사자를 통한 교섭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다만 크세르크세스가 헬라스 군대가 그들의 군세에 겁을 먹고 도망가기를 나흘 동안(이 나흘 동안 사흘은 폭풍우가 심해 지상군이 전투를 수행하기 힘들었으며, 해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기다렸다가 도망칠 기색이 없자 방자하고 어리석다며 생포해 오라며 공격을 명령한 것으로 보고하고(역.VII.210), 플루타르코스는 크세르크세스가 편지를 보내(사자가 들고 갔을 것이다), '신에 거역하여 싸우지 말고 내 편에 서면 헬라스의 유일한 지배자가 될 수 있다.It is possible for you, by not fighting against God but by ranging yourself on my side, to be the sole ruler of Greece.'고 했더니, 레오니다스가, '당신이 조금이라도 인생의 숭고한 것에 대해 안다면, 남의 것을 탐하는 짓을 삼가할 것이오; 나로 말하면 동족 위에 군림하는 유일한 지배자가 되기보다 헬라스를 위해 죽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이오.If you had any knowledge of the noble things of life, you would refrain from coveting others' possessions; but for me to die for Greece is better than to be the sole ruler over the people of my race.'라고 답했다고 한다.('스파르타인 어록',레오니다스.10) [본문으로]
  296. 이 대목 역시 헤로도토스는 침묵하고 있지만 대신 레오니다스가 철수를 주장하는 펠로폰네소스 도시들보다 결사항쟁을 주장하는 포키스와 오푸스 로크리스를 편들면서 테르모퓔라이 진지를 지키되 인근 도시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적고 있고(역.VII.207), 플루타르코스는 계속해서 크세르크세스와 레오니다스 간의 편지 왕래를 전하는데, 크세르크세스 편에 서서 헬라스의 지배자가 되기보다는 헬라스를 위해 죽겠다는 레오니다스의 답신을 보고, '(그렇다면) 너희들 무기를 넘겨라!Hand over your arms!'고 편지를 보내자, 이에 레오니다스의 답이 '와서 가져가시오!Come and take them!'였다는 것이다.(같은 책, 레오니다스.11) 그런데 '와서 가져가시오!Come and take them!'를 플루타르코스는 'Molon Labe!'이라 썼고, 이 말은 지금 테르모퓔라이와 다른 몇 곳에 세워진 레오니다스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플루타르코스의 간결한 이 한마디 말을 디오도로스는 제법 긴 말로 풀어 전하고 있는데, 스페르케이오스 강가애 진을 친 크세르크세스가 헬라스 사람들이 자기와의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고 싶어 레오니다스에게 사자를 보내, '크세르크세스 왕은 모두에게 무기를 버리고 몸성히 고향으로 돌아가 페르시아 편이 되라고 명하노라. 그리고 이리하는 모든 헬라스 사람들에게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고 더 좋은 땅을 줄 것이노라.'라고 하자 레오니다스의 대답이, '우리가 왕의 편이 되어야 한다면 우리가 무기를 간직하는 것이 더 쓸모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그와 싸워야 한다면 우리는 무기를 지니고 마땅히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할 것이노라; 그리고 그가 주겠다고 약속하는 땅에 관해 말한다면, 헬라스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땅을 비굴하게가 아니라 용감하게 얻으라고 배워왔노라.'였다.('역사전서',11.6.4,5) [본문으로]
  297. 이 오솔길이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아노파이아Anopaea'라 불리는 이 길은 '트라키스 암벽Trachis Cliffs' 아래의 헤라클레아heraclea 마을에서 아소포스Asopos 강을 건너 아노파이아 산을 따라 이어지다가 칼리드로모스Kallidromos 산 아래에서 테르모퓔라이 동문 바깥의 알페노스Alpenos 마을에서 타르페Tarphe 마을로 가는 길과 연결되는 30km가 넘는 험한 길인데, 이 오솔길로 우회하여 테르모퓔라이 동문에 이를 수 있었다.(헤.역.VII.216,) [본문으로]
  298. 페르시아 함대와 함께 움직인 크세르크세스는 함대의 도착을 기다리느라 나흘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99. 헤.역.VII.210. 원정 계획 당시 마르도니오스가 원정군을 페르시아와 메디아와 '킷시아kissia,Cissian(Elamites)'의 세 지역 군대로만 편성하자고 했을 만큼 크세르크세스 원정군의 주력부대였다. [본문으로]
  300.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메디아Media(페르시아의 여름 수도 엑바타나가 있는 지역으로 아나톨리아와 파르티아 사이의 고원지대),'킷시아Kissia(페르시아의 행정 수도가 있는 옛 엘람 왕국의 땅으로 오늘날 이란의 걸프만 동쪽 해안 지역)와 사카이Sakae(스퀴타이의 페르시아 호칭), 그리고 자신의 근위부대인 불사부대를 투입했다고 하고는 정작 킷시아 군대의 전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데, 디오도로스가 킷시아 군대가 메디아 군대와 순번을 바꾸어 전투를 맡았고 그 뒤가 불사부대였다고 한다.(디오도로스Diodoros Sikelicos,'역사전서Library of histories',XI.7.3) 한편 크테시아스는 '페르시카'에서 크세르크세스가 레오니다스를 대적하기 위해 첫날 처음은 지역 구분 없이 10,000명을, 그 뒤에 20,000명, 그 이튿날은 50,000명을 투입했다고 한다.(Photius' Excerpt,27)r.15.28) [본문으로]
  301. 헤로도토스가 묘사한 첫날 전투에서 스파르테 전사들의 '분전emaksonto aksios logou'을 고들리는 '인상적으로 싸웠다fought memorably'로, 맥컬리는 '인상적인 방식memorable fashion'으로, 박광순은 '기념비적인 것'으로, 천병희는 '용감하게 싸웠다'로 번역했다. [본문으로]
  302. 헤로도토스는 우회로를 알려주고 길잡이로 나선 사람이 카뤼스토스 사람 오네테스와 안티퀴라 사람 코뤼달로스라고도 하지만, 나중 인보동맹이 현상금을 에피알테스에게 걸고 이에 에피알테스가 도주한 점을 들어 포상금을 노린 에피알테스였다고 지목한다.(헤.역.VII.213-4) [본문으로]
  303. 디오도로스는 2만이었다고 한다.('역사전서',XI.6.5) [본문으로]
  304. 헤로도토스는 전투 사흗날 새벽 산꼭대기에서 정찰병들이 달려와 아노파이아 산길이 뚫렸음을 알렸다고 했고(역.VII.219), 디오도로스는 불사부대가 아노파이아 산길을 걷고 있을 시간에 튀르라스티아다스Tyrrhastiadas라는 그 나름으로 올곧고 명예를 아는 퀴마이Cymae 사람이 페르시아 진영에서 테르모퓔라이로 와서 불사부대가 우회로로 출동했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하는데('역사전서',XI.6.5), 전자이든 후자이든 레오니다스가 철수를 결정했다면 희생 없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본문으로]
  305. 디오도로스가 말한 것처럼 페르시아 진영에서 온 퀴마이cymae(아나톨리아의 아카이오이 헬라스 사람들이 사는 아올리스Aeolis의 한 지역) 병사 튀르라스티아다스가 심야에 레오니다스를 찾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헬라스군의 자진 철수를 유도하기 위한 크세르크세스의 공작이었을 것이다. 사실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원정 전략은 자신의 안전도 걸릴 수 있는 위험한 전투를 통한 정복이 아니라, 대군이 보이는 위세에 눌려 자발적으로 복속토록하는 것이었는데, 테르모퓔라이에서 벌어진 이틀 동안의 전투에서 더욱 그의 전략이 옳았음을 느꼈을 것이다. 불사부대를 보내 앞뒤로 포위하여 헬라스 군대를 테르모퓔라이의 협로에 가둔다 해도 협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난 이틀의 희생보다 더 큰 희생이 불가피해 보이자 포위될 사정을 미리 알려주어 헬리스 군대가 미리 자진해서 철수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테가 평화의 기간을 끝내고 무장할 수 있을 때까지 하루라도 더 벌기 위해 테르모퓔라이를 지켜야만 했고, 그렇다고 가진 병력으로 테르모퓔라이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박멸하여 전쟁이 끝낼 수 있을 것도 아니어서 펠로폰네소스 군대는 돌려보내어 후일을 기약하고 스스로는 본래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306. 헤로도토스는 일부가 뿔뿔이 흩으졌다고 하는데, 이는 테르모퓔라이 인근에서 온 로크리스와 포키스 병사의 경우였을 것이다.(역.VII.219) [본문으로]
  307. 크세르크세스는 테르모퓔라이 이전까지 스스로 흙과 물을 바친 지역을 거쳐 왔으므로 징병과 징발 이외에 혹독하게 굴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테르모퓔라이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스스로 복속하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혹독하게 유린하여 다른 지역에 보이는 본보기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크세르크세스가 헬레스폰토스에서부터 테르모퓔라이에 이를 때까지 그렇게 했듯이 페르시아 함대와 같이 움직이려면 해안을 따라 로크리스를 통과하여 아테네로 가야 했는데 로크리스가 아닌 포키스를 통과하며 그곳을 유린하고 델포이까지 침범하였다.(헤.역.VIII.32-39) 헤로도토스는 포키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텟살리아가 페르시아가 포키스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같은 책,VIII.27-31)32-36) [본문으로]
  308. 헤.역.VIII.40. [본문으로]
  309. 테르모퓔라이에 남은 숫자는 1,500-2,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스파르테군 1,200명 이외에 보이오티아군이 함께 남았는데, 헤로도토스는 보이오티아의 테스페이아군 700명은 흔쾌히 남았고, 테바이군 400명은 잔류를 원치 않았지만 레오니다스가 일종의 볼모로 잡아두었다고 했는데, 이들 2,300명 중 지난 이틀의 전투에서 일부가 전사했을 것이므로 최대 2,000명으로 보았다. [본문으로]
  310. 디오도로스,'역사전서'XI.9.4) [본문으로]
  311. 크세르크세스는 레오니다스의 주검에서 목을 쳐 장대에 매달았다.(헤.역.VII.238) [본문으로]
  312. 헤.역.VII.225 [본문으로]
  313. 헤로도토스는 사흘 간의 결전이 있은 후 크세르크세스가 그들의 전사자 20,000명 가운데 19,000명은 정중하게 매장한 뒤, 1,000명만 전장에 흩어 놓고, 헬라스 전사자 4,000명은 무더기로 쌓아 놓은 뒤 페르시아 함대의 군인들에게 마치 페르시아군이 헬라스군 4,000명을 죽이고 1,000명이 죽어 얻은 승리인 것처럼 꾸민 것을 구경시켰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사흘 동안의 테르모퓔라이 전투는 헬라스군이 페르시아군 20,000명을 죽이고 4,000명이 죽은 패전이었다고 정리하고 있다.(역.VIII.24,25) 그리고 사실 헤로도토스는 마지막 결전에서도 헬라스군이 전멸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바로 레온티아데스가 지휘하던 테바이 군대의 투항 사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역.VII.233) 헬라스 군이 작은 언덕으로 몰리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소수의 헬라스군이 생존해 있었을 것이므로 그 가운데서도 얼마 되지 않았을 테바이군의 투항에 대한 기록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보이오티아의 카이로네이아 출신인 플루타르코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게 되는데, 헤로도토스가 악의를 가지고 스파르테와 함께 테바이군도 분전한 사실을 가리고 전투의 끝에 몇몇이 투항한 사실만 기록에 올렸다는 것이다.(플루타르코스,'헤로도토스의 악의Of Herodotos' Malice',34) 그리고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테군도 전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지 제법 많은 분량의 글로 힙페이스 가운데 세 사람이 눈병이 나서든 사자로 나가 있었든 어떤 사정으로 최후의 결전이 벌어진 날 테르모퓔라이에서 벗어나 있었다면서, 그들 가운데는 급히 진지로 돌아와 전사한 에우리토스도 있었지만, 진지로 돌아오지 않고 살아남은 아리스토데모스와 판티테스도 있어, 그들의 후일담까지 소개하는 소상함을 보이고 있다.(역.VII.229-232) [본문으로]
  314. 학자들 가운데는 이 일이 일어난 날을 오늘날의 날짜로 환산해서 9월10일이라 밝히기도 한다. [본문으로]
  315. 헬라스 사람들은 이 바람을 북붕의 신 보레아스가 헬레스폰토스에서 보내는 헬레스폰토스 바람이라 했다.(헤.역.VII.188,189) [본문으로]
  316. BC494 마르도니오스의 헬라스 원정은 마케도니아에서 불의의 일격을 맞은 마르도시오스의 부상과 아토스 반도의 끝자락을 돌던 페르시아 함대가 풍랑으로 전파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크세르크세스가 아토스 반도를 돌지 않고 반도의 목에 운하를 파서 지난 것도 그 당시와 같은 피해를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17. 이 당시 포이니케가 예사로이 야간 항해를 했던 것과는 달리 헬라스는 그러지 못했다. [본문으로]
  318. 이 세 척 가운데 아이기나의 함선은 대적도 못해보고 나포되어 가장 잘생긴 선원 레온(헤로도토스는 사자라는 뜻의 이름도 한 몫 했으리라 짐작한다)이 희생 제물이 되었고, 트로이젠의 배는 퓌테아스가 끝까지 분전했지만 나포되었고, 아티케(이럴 때 헤로도토스는 아테나이라 하지 않고 아티케라 불렀다) 함선은 도주에는 성공하였으나 마그네시아 해안에 배를 버리고 아테나이로 도주했다. [본문으로]
  319. 디오도로스는 헤로도토스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때 이미 페르시아 함대가 와 있었으며, 페르시아 함대가 공격해 오면 응전하자며 소극적인 헬라스 함대의 분위기를 테미스토클레스가 선공을 주장하여 적극적으로 공격했고, 전투는 해가 져서야 끝났는데 상방 우열을 가리지 못했는데(역사전서,11.12.5,6), 그 이튿날부터 폭풍우가 몰아쳤다고 적고 있다.(같은 책,11.13.1) [본문으로]
  320. 헤.역.VII.190 [본문으로]
  321. 플루타르코스는 건너 편에 보이는 페르시아 함대의 군세에 기겁한 에우뤼비아데스가 200척의 페르시아 함선들이 에우보이아를 우회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는 결정적으로 헬라스 함대의 철수를 결심했던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테미스토텔레스전',7.4), 헤로도토스는 헬라스 함대가 철수 문제를 종결하고 계속 주둔키로 결정한 다음 페르시아 진영에서 물 속을 걸어 탈출한 스키오네 사람 스퀼리아스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고 한다('역사',VIII.8). [본문으로]
  322. 플루타르코스는 헤로도토스와는 달리, 코린토스가 주동이 된 펠로폰네소 해군이 아니라, 헬라스 함대의 지휘관 스파르테의 에우뤼비아데스가 철수를 결정했다고 했다.('테미스토클레스전'7.4) [본문으로]
  323. 헤.역.VIII.4,5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헤로도토스를 인용하면서도 그 내용을 다르게 전하는데, 에우보이아는 펠라곤을 은밀히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보내 막대한 금액(헤로도토스는 30탈란톤이다)을 제시하며 떠나지 말 것을 애원했고,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돈을 받아 다시 에우뤼비아데스에게 넘겨주었다고 했다. 이때 노꾼들에게 줄 돈도 없어 걱정이던 아테나이의 선장 아르키텔레스가 그 돈을 에우뤼비아데스에게 넘겨주는 것을 격렬히 반대하고 나오자, 테미스토클레스는 그가 적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테나이에 알리겠다고 협박하여 주저앉혔다는 레스비스 사람 파니아스의 말을 덧붙이고 있다.('테미스토클레스전'7.4-6) [본문으로]
  324. 헤로도토스는 에우보이아가 보낸 돈에 대해 아테나이 선장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침묵하면서, 아테나이의 선장 클레이니아스가 200명의 선원을 태운 자기 함선을 가지고 자기 비용으로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기록한(역.VIII.17) 반면, 아테나이 선장들이 평소 교역으로 돈을 벌어 노꾼들의 품삯도 주고 수리도 하며 함선을 유지하다가, 해군으로 차출되어 전쟁에 나서자 수입원이 끊어져 개인 지출로 함선을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사정이 있었는지,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텔레스 같은 선장은 철수를 궁리하기까지 하는 판에, 에우보이아가 전쟁 비용으로 낸 거금을(헤로도토스나 플루타르코스 모두 에우보이아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은밀히 전했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공식적인 전쟁 비용 부담이라기보다는 뇌물이었을 것이지만 아테나이의 선장들에게는 에우보이아가 에우뤼비아데스나 나데이만토스에게 전하지 않고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전했으므로 이는 헬라스 함대의 주력인 아테나이 함선들을 위한 전쟁 비용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테나이 함선 유지에 쓰지 않고 남에게 주자 아르키텔레스는 거세게 반대했던 사실을 기록한다.('테미스토클레스전'7.4) [본문으로]
  325. 스퀼리아스는 당대 최고의 잠수부로 [본문으로]
  326. '크세르크세스의 군사들과 지휘관들은 소수의 함선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헬라스 사람들이 '실성한 줄 알았다.judged them to be moved by mere madness.'(헤.역.VIII.10) [본문으로]
  327. 야간 항해에 서툴러 밤에는 배를 움직이지 않았던 헬라스 사람들과는달리 포이니케 사람들은 야간 항해에 능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328. 헤로도토스는 아테나이Athenai가 아니라 '아티케Attikai' 함선으로 표현했다.(역.VIII.14) [본문으로]
  329. 킬리키아(kilikia,cilicia,아나톨리아 반도의 남동쪽 시리아와의 접경 지역)는 100척의 함선으로 참전하고 있었는데(헤.역.VII.91), 헤로도토스는 이튿날의 헬라스 함대 상대로 킬리키아 함대를 지적하며 섬멸되었다고 했을 뿐(역.VIII.14) 정확한 전투 상황에 대해 침묵하고 있어 전투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본문으로]
  330. 아르테미시온 해전에 아테나이는 처음 147척, 칼키스 대여 20척, 그리고 증원 53척, 모두 220척의 삼단노선을 투입했는데, 그 중 반이 파괴되었다면 100척 가까운 배가 피해를 입었다는 말이 된다.(헤.역.VIII.18) [본문으로]
  331. 사흘 동안의 아르테미시온 해전은 먼저 공격을 주장한 전투 의지에서부터 어린진으로 다수의 함선을 가진 페르시아의 학익진을 깨는 작전으로 100여척의 함선이 파괴되는 과감한 전투로 얻은 전과에 이르기까지 명실상부한 아테나이 함대의 독무대였으므로, 스파르테의 에우뤼비아데스도 코린토스도 아이기나도 테미스토클레스의 실질적인 지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32. 헤로도토스는 에우보이아 사람들이 아르테미시온 해변으로 양과 염소를 몰고오는 것을 본 테미스토클레스가 적군보다는 아군이 먹는 게 낫다며 원하는 만큼 잡아 먹으라고 했다며(역.VIII.19), 에우보이아 사람들이 전쟁에 대비해 재산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도, 생필품을 비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한 자업자득이라고 평한다.(VIII.20) [본문으로]
  333. 후퇴하는 군대의 후미는 불리한 최전방이다. 이제 아테나이 함대는 헬라스 함대의 최전방을 맡아 사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본문으로]
  334. 플루타르코스는 적군이 정박하기 편한 곳이라 했다. [본문으로]
  335.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이 글의 존재를 모른다면 이오니아 사람들이 헬라스 편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안다면 이오니아 사람들을 전투에 참가시키는 것을 꺼려 할 것이란 의도로 테미스토클레스가 새기게 했다고 추정한다.(역.VIII.22) [본문으로]
  336. 헤.역.VIII.40 [본문으로]
  337. 이스트모스 지협 양끝에 해안 절벽 사이로 난 좁은 길로,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불러세워 발을 씻기면서 돈을 빼앗던 강도 스케이론의 이름을 따서 스케이론 길이라 불렷다. [본문으로]
  338. 헤.역.VIII.40,71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헬라스 함대의 귀환 중에이 소식을 듣고 함대의 정박지를 살라미스 섬으로 정하고 아테나이 소개를 돕도록 요청했고, 헬라스 함대도 그 요청에 따랐다고 한다. [본문으로]
  339. 헤로도토스는 떠나기 싫어하던 아테나이 사람들의 소개가 신속히 이루어진 이유로 파르테논 신전 지키미인 큰뱀이 갑자기 공양을 먹지 않는 것이 아테나 여신이 아테나이를 떠난 때문이라 본 시민들이 아테나이를 떠나기로 결심한 덕분이라 말한다.(역.VIII.41) [본문으로]
  340. 헤로도토스가 만일 텟살리아가 페르시아에 종속을 거부하고 헬라스 동맹에 가담했더라면 텟살리아를 증오하는 포키스가 페르시아에 종속되기로 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둘 사이가 좋지 않게 된 것은(역.VIII.30) 오래 전부터 포키스가 열문에 성벽을 쌓아서 막았을 만큼 여러 차례의 걸친 텟살리아의 침공을 번번이 좌절시켰기(역.VII.176,VIII.27,28) 때문이었다. 드디어 페르시아의 등에 업혔다고 생각하는(실제로는 페르시아를 등에 업은) 텟살리아는 페르시아의 유린을 피하게 해주는 조건으로 50탈란톤의 거금을 요구했다.(30탈라톤의 거금을 같은 동맹국에게 내고도 결국 페르시아 해군에게 유린당한 에우보이아의 경우와 비교해보라!) [본문으로]
  341. 다행히 이 두 도시 사람들은 한통속이 되어 펠로폰네소스로 소개하여 텅 비어 있었다.(헤.역.VIII.44, 디오도로스,'역사전서',11.13.5) [본문으로]
  342. 크세르크세스는 테르모퓔라이에서 잃은 군세를 물과 흙을 바친 헬라스 도시들, 멜리스, 도리스, 로크리스, 그리고 보이오티아에서 징집 보충하여 출발 당시의 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헤.역.VIII.66) [본문으로]
  343. 칼키스에 임대해준 20척이 그대로 참전하고 있었으므로 참전 아테나이의 함선은 모두 200척이었다. [본문으로]
  344. 아테나이는 아테네이 함선에 올라 아르테미시온 해전에 참전했던 플라타이아 군사들이 그들의 도시로 돌아가 가족과 가산을 소개시킬 수 있도록 귀로에 칼키스 건너편 보이오티아 해안에 그들을 내려주었다.(헤.역.VIII.44) [본문으로]
  345. 살라미스 섬 동쪽 중아에 위치한 살라미스 마을 앞의 작은 만이다. [본문으로]
  346. 헤.역.VIII.56 [본문으로]
  347. 헤로도토스는 므네시필로스를 선장이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아테나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므네시필로스를 굳이 선장이라고 하는 까닭은 아테나이 함대의 선장들이 살라미스가 아닌 이스트모스에서 결전을 벌인다는 헬라스 함대의 결정에 불복하여 헬라스 함대가 살라미스를 떠날 경우 아테나이 함대도 헬라스 함대를 떠나 독자적인 행동을 하자고 결의했고, 그 결의 내용을 테미스코클레스에게 알리기 위해 선장들이 보낸 대표였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48. 헤.역.VIII.48. 아르테미시온 해전 이후 정박한 살라미스에서 새로이 구축된 헬라스 함대의 함선 수에 대해서는 헤로도토스가 밝힌 378척이 유일한 자료인데, 그나마 그가 제시한 함선 목록의 함선 수는 371척이어서 함선 목록에 누락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역.VIII.43-48) 그러나 실제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헬라스 함대의 함선 수에 대해서는 헤로도토스는 침묵하는데(헤로도토스는 코린토스의 불참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코린토스도 참전한 것으로 논쟁을 피한다) 반해, 크테시아스는 아테나이 함선 110척을 포함한 700척('페르시카'포티우스의 요약,30), 휘페리데스Hyperides는 220척('세계사universal history'), 그리고 실제로 참전했던 아테나이의 비극시인 아이스퀼로스는 그의 비극 '"페르시아 사람들"'('...헬라스인들의 함선은 모두 합하여 열 척의 서른 배밖에 안 됐고, 그 외에 열 척의 별동대가 있었습니다....,338-340행')에서 310척이라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349. 헤로도토스는 헬라스 원정에 나섰을 때 페르시아 함대가 해상 전투를 맡을 1,207척의 삼단노선과 나머지 삼십노선, 오십노선, 군마 수송선, 소형선 등 총 3,000척으로 이루어졌다고 했고(역.VII.89,97), 아르테미시온 해전이나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페르시아 함대의 함선 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그는 풍랑으로 파괴된 함선 수로 마그네시아의 세피아스에서 100여척(역.VII.190, 헤로도토스는 세피아스 정박 중 풍랑으로 파괴된 선박이 모두 400여척이라 했으나 모두 삼단노선은 아니었을 것이므로 출발 당시의 삼단노선 비율로 따져 삼단노선을 100여척으로 본다.), 에오이아의 코일라에서 200척(역.VIII.14,배후 공격을 목적으로 움직인 함선들이었으므로 모두 삼단노선이었을 것이다.)으로 모두 300척을 꼽았고, 또 헬라스 함대에 의해 나포되거나 파괴된 함선 수로 아르테미시온으로 잘못 찾아든 함선 15척(역.VII.194), 아르테미시온 해전 첫날에 나포된 30척(역.VIII.11), 이튿날 섬멸된 칼리키아 함선 50여척(칼리키아는 100척의 함선으로 페르시아 함대에 합류하여(역.VII.91) 아르테미시온에서의 이틀날 해전에서 섬멸당했다고만 했지 섬멸당한 함선 수는 밝히지 않았는데(역.VIII.14) 섬멸이안 표현을 쓰려면 적어도 반 이상은 파괴되었을 것이라 여겨 50여척으로 보았다.), 사흘날 100여척(정확한 숫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페르시아 함대의 피해가 더 컸다고 말하면서(역.VIII.16), 피해가 더 적은 아테나이는 함대의 반을 잃었다고 하므로(역.XIII.18)) 100여척으로 보았다.)으로 모두 200여척으로 꼽고 있어, 출발 당시의 함선으로는 700여척만 남았을 것이나, 수리되거나 보충된 함선을(트라케와 인근 섬들에서 보낸 120척만 말하고(역.VII.185) 나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므로) 감안하면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페르시아 함대의 함선 수는 최소 900척 이상이었을 것이고, 크세르크세스로부터 출발 당시의 함선 수로 보충하라는 지시라도 있었다면 1,200여척으로(역.VIII.66,'...육로와 해로로 아테나이에 침입한 페르시아 군대는 세피아스 곶과 테르모퓔라이에 도착했을 때보다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페르시아 함선 수를 언급한 자료들을 보면, 실제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했던 아이스퀼로스가 1,207척이라 했고('"페르시아 사람들"','...제가 알기로 일천 척의 함선이 있었고, 그 밖에 쾌속선이 이백하고도 일곱 척이었사옵니다...'341-3행), 에포로스도 출발 당시의 1,207척으로(세계사), 이소크라테스는 1,200척('연설집Oration'IV.93,VII.49), 크테시아스는 1,000척 이상('페르시카',포티우스의 요약,30), 심지어 플라톤까지도 1,000여척으로('법률Law',III.699) 꼽았다. [본문으로]
  350. 헤.역.VIII.60 [본문으로]
  351. 아테나이와 아이기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213 참조. [본문으로]
  352. 헤.역.VIII.61 [본문으로]
  353.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은 가족들을 데리고 이탈리아의 시리스로 갈 것이라고까지 말한다.(헤 역.VIII.62) [본문으로]
  354. 헬라스 동맹의 구호, '헬라스의 해방을 위해 함께하자Come together!'는 오을날 미국이 그 동맹을 이끄는 구호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355. 아테나이는 아르테미시온 해전을 겪으며 다수의 적을 그저 막고 피하기만 해서는 적으로부터 헬라스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살라미스에서 건곤일척의 일전을 생각한 반면, 스파르테는 테르모퓔라이 이후에도 이스트모스에 또 다른 테르모퓔라이 구축에만 전념하다가 살라미스 해전을 보고 나서야 지상전에서도 건곤일척의 일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해 보인다. [본문으로]
  356. 크세르크세스는 전쟁의 추이를 보아 투입할 예비 병력으로 파로스 섬에서 징집한 군대를 아이가이온 바다 퀴트노스 섬에 남겨두고 있었다.(헤.역.VIII.67) [본문으로]
  357. 테르퓔라이와 아르테미시온에서 벌인 사흘 간의 전투 다음날 테르모퓔라이의 전과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뒤 엿새만에 다시 아테나이의 외항 팔레론에서 만난 것이다. [본문으로]
  358. 레오니다스의 전사 소식을 듣자마자 시작된 거의 8km(지금은 7km 정도의 자취만 남아 있다)에 이르는 방벽공사를 엿새만에 완성하였다. [본문으로]
  359. 레오니다스가 죽고 그와 아르고 사이의 아들 플레이스타르코스Pleistarkos가 아기스 왕가의 왕위를 계승했는데, 아직 미성년이어서 클레옴브로토스가 섭정Regent의 자격으로 출정해 있었다. [본문으로]
  360.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테, 아르카디아, 엘리스, 코린토스, 시퀴온, 에피다우로스, 플레이우스, 트로이젠, 헤르미오네 등 아홉 도시에서 그들의 전병력을 동원했다는데, 그 숫자는 언급하지 않았다.(역.VIII.72) [본문으로]
  361. 테미스토클레스의 노예로 자식들의 가정교사였다.(플루타르코스는 그가 페르시아인 포로였다고 한다.'테미스토클레스전',12.3) 전쟁 후 보이오티아의 테스페이아가 새로운 시민을 모집했을 때 그를 그곳 시민으로 만들어주고 또 부자가 될 수 있게 해주었다.(헤.역.VIII.75) [본문으로]
  362.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함대의 심야 헬라스 함대 포위를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이탈을 막기 위한 테미스토클레스의 책략이었다고 말하는(역.VIII.75,76) 이 대목을 살라미스의 용사 아이스퀼로스는 이렇게 시로 읊었다. '아테나이인들의 군대에서 찾아온 한 헬라스인이/...크세르크세스께 말했사옵니다./'"칠흑 같은 밤의 어둠이 내리자마자/헬라스인들은 이곳에 머물지 않고/함선의 노 젓는 자리로 달려가서는 각자 은밀하게/ 뿔뿔이 달아나 제 목숨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크세르크세스께서는 이 말을 들어시자 마자/헬리스인의 계략과 신들의 시기를 눈치 채지/ 못하시고 전 제독들에게 이렇게 하명하셨사옵니다./'"태양이 햇빛으로 대지를 그을리기를 멈추고,/어둠이 대기의 역을 덮거든/그대들은 함선들을 세 개의 선대로 나누어/출구들과 파도 소리 요란한 해협들을 봉쇄하고/다른 함선들은 아이아스의 섬을(아이아스는 살라미스 출신으로 아테나이 선단과 함께 트로이아 원정에 나서 전사했다.) 포위하시오./하나 만일 헬라스인들이 사악한 운명을 피하여/배를 타고 은밀히 도주할 길을 찾게 된다면,/장담하건데, 그대들은 모두 목이 달아날 것이오."'('"페르시아인들"',355-371행) [본문으로]
  363.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리스테이데스에게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이탈을 막기 위한 자신의 책략으로 페르시아가 포위했음을 털어놓았다.(헤.역.VIII.80) [본문으로]
  364. 이 테노스 섬의 삼단노선 한 척은 아르테미시온 해전 이후 헬라스 지역에서 징집해 보충한 120척의 함선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헤로도토스는 전에 아페타이에서 아르테미시온으로 탈출해온 렘노스의 심단노선 한 척을 포함해 이로써 헬라스 함대가 380척이 되었다고 한다.(역.VIII.82) [본문으로]
  365.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훈시가 인간의 본성과 기질의 좋은 점을 따르라고 했다 하고(역.VIII.83), 아이스퀼로스는, '...낮이 백마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나타나/온 대지를 찬란히 빛나는 빛으로 채웠을 때,/ 맨 먼저 헬라스인들 쪽으로부터 노랫소리와도/같은 함성이 들려왔는데.../.../...오오. 헬라스인들의 아들들이여, 진격하라!/우리의 조국을 해방하라! 우리의 자식들과, 아내들과,/ 조국의 신들의 처소들과, 조상의 무덤을 해방하라!/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페르시아인들"',386-405행)'라며 노래와 함성을 소개하는데, 이때 해가 하늘에 반쯤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66. 아이귑토스 함대는 페르시아의 함대 좌익을 맡았었는데, 퀴노수라에 정박 중일 때 살라미스 만에 정박 중인 헬라스 함대에 들키지 않으려고 살라미스 섬의 서쪽을 돌아 섬의 북쪽 끝으로 가서 포위하고 있다가 아침에 남쪽으로 내려와 헬라스 함대와 마주선 페르시함대의 좌익 자리로 갔던 것이니까 아이귑토스 함대는 하룻밤 사이에 살라미스 섬을 한 바퀴 돈 다음 전투에 나선 셈이다. [본문으로]
  367. 아테나이는 여자가 아테나이에 쳐들어온 것에 화가나 아르테미시아 생포에 만 드라크메의 상금을 걸었었다.(헤.역.VIII.93) [본문으로]
  368. 트라케 앞바다의 섬으로 일찌기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 사람들이 이주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사모트라케 사람들은 투창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369. 헬라스 함선들을 나포한 공로로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 사람인 테오메스테르는 사모스 섬의 태수가 되었고, 퓔라코스는 '오로상가이Orosangai페,왕의 은인' 명단에 올라 방대한 토지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370. 아이귑토스 함대는 이튿날의 해전에 참전하지 않고 패주하는 헬라스 함선들을 공격하기 위해 살라미스 섬 북단을 봉쇄하고 있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도주하던 코린토스 함대가 귀환한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크세르크세스가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의 수훈갑 아이귑토스를 전투에서 제외시키고 멀리서 망이나 보게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약해 이 글에서는 아이귑토스 함대를 그들의 원래 위치이던 좌익에 배치하여 아이기나와 대진한 것으로 했다. [본문으로]
  371. 결말 없는 전쟁을 벌였을 만큼(주213 참조) 오래 아테나이와 오랜 앙숙이던 아이기나가 아다레이오스에게 물과 흙을 바친 것 때문에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를 앞세운 아테나이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었는데, 그 아이기나가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에는 30척의 함선으로 참전한 동맹군이 되어, 살라미스에서 세운 수훈갑의 공으로 헬라스 도시들에 진 다레이오스 때의 빚을 말끔히 갚게 된 셈이다. 이런 인과를 헤로도토스는 그가 살라미스 해전의 최고 용장으로 꼽은 아이기나의 선장 폴뤼크리토스의(역.VIII.93) 집안 내력을 통해 아테나이와 아이기나의 앙숙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살라미스 해전의 막바지에 테미스토클레스가 탄 아테나이 기함을 만나 큰 소리로 테미스토클레스를 찾아 조롱했던(역.VIII.92. 아테나이의 310척이 세운 공적에 대해 30척ㅇ의 아이기나가 세운 공적에 대한 과시였을 것이다) 아이기나의 선장 폴뤼크리토스는, 바로 십여 년 전 아이기나가 다레이오스에게 물과 흙을 바친 것을 페르시아와 함께 아테나이를 치기 위해서라고 본 아테나이의 고자질로 스파르테가 아이기나를 공격했을 때 그 공격을 막아낸 아이기나 사람 폴뤼크리토스의 아들 크리오스의 아들인데, 이에 앙심을 품은 스파르테가 결국 아이기나를 응징하고 크리오스를 인질을 잡아 아테나이로 보냈다는(역.VI.73) 것이다. [본문으로]
  372. 아리스테이데스의 이 전과를 헤로도토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역.VIII.95) 가볍게 소개하고 있는 반면, 아이스퀼로스는 이 전과로 페르시아가 살라미스 해전으로 입은 것보다 두 배 무거운 고통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하게 본다. 그는 살라미스에서의 해전을 80행 정도로(355-432) 소개했는데, 프쉿탈레이아 섬의 지상전 전투 상황 20행 정도에(447-464행) 왜 페르시아가 두 배의 고통을 받았는지 그 이유를 10행으로('...페르시아인들 중에서 가장 형기가 왕성하고,/가장 전신력이 뛰어나고, 명문가 자제로,/대왕께 언제나 가장 충성스럽던 자들이/모두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럽게 죽었사옵니다....',435-444행) 덧붙여 설명한다. 헤로도토스는 이 부대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부대원들에 대한 아이스퀼로스의 이 설명은 그가 이들이 불사부대원으로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크세르크세스가 이들이 참살당하는 것을 보고 황급히 도주하는 아이스퀼로스의 설정은 그가 그들이 불사부대원이었음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373. 코린토스에 대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섭섭함 때문이었는지 아테나이 사람들은 살라미스 해전이 개시될 때 코린토스의 아데이만토스가 겁에 질려 돛을 올리고 달아났고 코린토스 함선들과 곁에 잇던 다른 도시들의 배도 그 뒤를 따랐다가(그래서 아이스퀼로스가 이들의 70척을 뺀 310척의 헬라스 함대가 싸웠다고 했을 것이다.), 신의 뜻을 전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한 쾌속선이 따라와 헬라스 함대의 승리를 전하는 말을 듣고 다시 살라미스 만 앞바다로 돌아왔을 때는 전투가 끝나 있었다고 하고(그렇다면 해가 반이나 넘어갔을 때였을 것이다), 코린토스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구 못지않게 용감히 싸웠다고 주장하고 다른 헬라스 사람들도 인정했다고 한다.(역.VIII.94) [본문으로]
  374. 현대의 군사전문가들에 의하면 살라미스 해전 지역은 삼단노선 800척 정도가 겨우 서로 움직이며 해전을 벌일 수 있을 면적이라 한다. [본문으로]
  375.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헬라스 함대의 함선 수를 아이스퀼로스가 말한 310척으로 보는데, 헤로도토스가 말한 380척 가운데 40척의 코린토스와 15척의 시퀴온, 그리고 15척의 코린토스에 동조하는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함선 등 70척의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전열을 이탈하였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고, 페르시아 함선 수는 800척으로 보는데, 처음 연합 함대를 이룬 1,207척 중 세피아스에서 풍랑으로 잃은 400척, 코일라에서 풍랑으로 잃은 200척, 아르테미시온에서 잃은 150여척을 뺀 나머지 650척에 복속된 헬라스 섬들에서 징발한 함선 120척과 그 사이 복구한 함선을 30척으로 보고 이를 더해 모두 800척으로 간주한 것이다. [본문으로]
  376. 아이스퀼로스는, '...밤이 어둠을 가려줄 때까지 우리가 당한 재앙으로 말하면...'('"페르시아인들"',428-9행)'이라며 전투가 해가 질때까지 계속되었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377. 살라미스 해전의 내용을 전하는 헤로도토스와 그 전후의 저술가들, 그리고 이들의 기록을 정리하여 분석하고 현지 답사를 통해 검증한 근현대의 많은 학자들끼리 살라미스 해전의 대치와 전개 또 종결 과정, 그리고 전과에 대해 일치된 자료와 견해를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이 글이 소개하는 살라미스 해전의 내용도 앞서 말한 저술가들이나 학자들이 제시하는 자료나 견해와 다를 수 있는데, 이 글에서 제시하는 자료와 내용이 주로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보일 수 있는 것들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78. 헬라스 함대는 이제야 함선 수가 비등해진 페르시아 함대와의 결전을 기대하고 있었다.(헤.역.VIII.96) [본문으로]
  379. 헤로도토스는 살라미스 해전 뒤의 일로 말하지만(역.VIII.97), 그테시아스는 해전 전에 둑길 조성을 시도했으나 아테나이가 크레테의 궁수들을 동원해 무산시키자 해전이 일어난 것으로 전한다('포티우스 발췌록',30). [본문으로]
  380. 페르시아 사람들이 가장 처음 도입한 이 '앙가레이온Angareion,擺撥'은 [본문으로]
  381. 크세르크세스는 할리카르낫소스의 여참주 아르테미시아에게도 의견을 물었고, 마르도니오스의 의견에 찬성하자, 그녀의 배편으로 원정에 동행했던 왕자들을 에페소스까지 데려다주라며 맡겼다.(헤.역.VIII.101-103) [본문으로]
  382. 헬라스 함대에 들키지 않으려고 밤에 출발한 페르시아 함대는 전날의 해전으로 얼마나 마음이 졸았는지 바다 위로 보이는 작은 갑들을 헬라스 함선으로 오인해 도망쳤다 모였다 하며 아티케를 빠져나갔다.(헤.역.VIII.107) [본문으로]
  383. 이 대목에서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텔레스에 대해 놀라운 험담을 남겨놓는데(역.VIII.109,110), 그가 헬라스 함대 회의에서 선교 파괴를 주장해놓고는 함대의 의견이 페르시아가 죽기살기로 나오는 전쟁으로 헬라스가 피폐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왕을 곱게 보내자는 에우뤼비아데스 쪽으로 기울자, 페르시아가 도망치게 두는게 싫어 단독으로라도 움직일 기세인 아테나이 선장들에게 지금까지의 승리는 요행이었고 더 이상 적을 몰면 죽기로 나올 테니 이쯤에서 보내주자며(헤로도토스는 이것을 기만이라고 한다) 설득하여 그들을 주저앉혔을 뿐만 아니라, 예의 노예 시킨노스를 크세르크세스에게 밀사로 보내 그가 주도하여 왕의 안전한 귀환이 가능하게 된 것처럼 공치사하였는데, 그 이유가 나중에 그와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가 나빠졌을 때 페르시아로 가서 왕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했다.(아테나이 참주 힙피아스는 참주가 되기 위해 자진해서 페르시아로 가서 다레이오스의 보호를 받다가 다레이오스의 헬라스 침공 때 아테나이를 점령하면 참주가 될 욕심으로 길잡이가 되어 왔고, 스파르테 왕 데마라토스는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지내기 위해 페르시아로 갔다가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침공 때 동행했고, 테미스토클레스도 도편추방 당한 뒤 결국 페르시아로 가서 지내다 죽었다.) [본문으로]
  384. 에누보이아 섬의 남단 도시 카뤼스토스와, 그 남단의 지척에 있는 안드로스 섬, 그리고 안드로스 섬에 거의 붙어 있는 테노스 섬에서 징발된 함선들이(이들의 함선 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페르시아 함대에 보충된 120척 에 포함된 함선들이다.) 에우보이아를 유린하고 팔레론으로 가는 페르시아 함대에 합류하였다.(헤.역.VIII.66) 이들 가운데 테노스 섬의 삼단노선 하나가 살라미스 해전 전날 밤 페르시아 함대를 탈출해 와서 헬라스 함대가 포위되었음을 확인해주었고, 살라미스 해전에 헬라스 함대로 참전한 덕분에 전승 도시 명단에 올랐지만(헤.역.VIII.82) 안드로스는 헬라스 함대에게 공격당해야 했다.(헤.역.VIII.111) [본문으로]
  385. 테미스토클레스가 안드로스 사람들에게 아테나이 사람들이 '설득Peitho'과 '강요Ananke,必然,業報'의 위대한 두 신을 모시고 온 만큼 돈을 좀 내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자, 안드로스 사람들은 아테나이 사람들이 두 유용한 신을 모시고 왔으니 아테나이가 틀림없이 위대하고 번창하겠지만, 안드로스 섬은 농토가 가장 적은 데다가 '가난Penia'과 '무능Amechania'이라는 쓸모없는 신들이 머물고 있어 돈을 낼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헤.역.VIII.111)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도 그의 희극에서 예사로 평화eirene, 전쟁polemos, 소란kydoimos, 부ploutos, 가난penia, 등을 신격화해서 무대에 세우곤 했고, 이 대목에서도 헤로도토스가 테미스토텔레스와 안드로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설득이니 강요니 가난이니 무능이니 하는 말을 신격화해서 쓰는 대화를 소개하는 걸 보면, 옛날 헬라스에서는 일반인의 대화에서도 필요하면 구상 추상할 것 없이 모든 명사를 쉽게 신격화해서 대화에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386.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에 부역했던 카뤼스토스, 안드로스, 파로스, 그리고 다른 섬들에서 돈을 거둔 주체가 헬라스 함대가 아니라 테미스토텔레스인 것처럼 기록하면서, 그 과정에서 테미스토클레스가 돈에 욕심이 많아 개인적인 착복도 했다는 점을 부각한다.(역.VIII.111,112) [본문으로]
  387. 헤.역.VII.132 [본문으로]
  388. 상선에서 전함이 된 삼단노선은 외양 장식이 바뀌고, 이물코에 충각이 달리고, 약간의 궁수가 포함된 중무장보병 20-40명이 해군으로 승선한다. 나머지 승무원들과 노꾼들은 그대로이다. [본문으로]
  389. 이때까지만 해도 주로 아테나이 시민인 테테스가 노를 저었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는 메테스(methes,아테나이 거주 헬라스 도시민)가, 다음은 헬라스 도시민, 마지막에는 노예를 자유민으로 만들어 노를 젓게 했다. [본문으로]
  390. 이 당시 배들은 가능하면 거의 매일 항구에 정박하면서 물과 식료품을 조달했는데(하루치 물만 1.5톤이 넘었다. 물과 식품은 행해 사정에 따라 2-3일 치를 싣기도 했는데, 그만큼 배가 무거워지기 때문에 가급적 매일 매일 조달하려 했다.), 이때 노삯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91. 선장들 중에는 아르테미시온 사흘날 해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클레이니아스처럼 자발적으로 자기 배를 자기 비용으로 끌고와 참전한 사람들도 있었다.(헤.역.VII.17) [본문으로]
  392. 아테나이의 아레오파고스 회의가 함선 장식과 함선 노꾼들에게 출전비 8드라크마씩 지급하느라(노삯을 미리 지급해 노꾼들 가족 피난 비용으로 쓰게 했을 것이다.) 국고를 비우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신상의 메두사 방패가 없어졌다는 핑계로 피난자의 짐을 조사하고 피난자들의 금을 압수해 이 돈으로 함선의 식품 조달에 썼다.(플루타르코스,'테미스토클레스전'10.4) [본문으로]
  393. ...테미스토클레스가...'아테나이인들은 아직도 200척의 함선에선원들을 배치하고 있는 이상 그들의 나라보다 더 큰 도시와 나라를 갖고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헤.역.VIII.61)테미스토클레스가 대답했다...'그렇다...우리는 집도 성도 버릴 것이다. 그런 생명도 정신도 없는 무생물 따위에 집착하여 노예가 되는 비열한 자는 이미 틀려먹었기 때문이다. 두고 보아라. 우리 아테나이야말로 헬라스 전체에서 가징 큰 도시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200척의 군함이다....'(플루타르코스,'테미스토클레스전',11.4) [본문으로]
  394. 삼단노선 한 척의 승선 인원은 대략 200명이었는데, 선주인 삼단노가 한 단에 [본문으로]
  395. 헬라스 함대는 안드로스를 포위 공격했으나(헤.역.VIII.111) 끝내 함락시켜 약탈하지는 않았고, 대신 에우보이아 섬의 카뤼스토스로 가서 그곳을 약탈하고 살라미스로 돌아갔다.(VIII.121) [본문으로]
  396. 스파르테는 펠레폰네소스 도시들이 보이오티아로 나가지 않고 이스트모스에 방벽을 치는 바람에 아테나이를 페르시아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일에 대한 아테나이의 섭섭한 마음을 모르지 않았는데, 아테나이의 주도로 살라미스에서 대첩을 거두게 되었음에도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질시로 아테나이 대신 아이기나가 최고 수훈으로 뽑히는 일이 벌어지자 테미스토클레스를 스파르테로 초청하여 올리브 나무 관을 씌우고 지혜와 덕성의 상을 주는 명예를 안기면서 스파르테의 최고 전차를 선물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귀로에는 그 전차를 탄 테미스토클레스를 300명의 스파르테 전사로 하여금 국경 바깥까지 호송케 하였다. [본문으로]
  397.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아테나이 체류 기간을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하는 크세르크세스의 진군 일정을 정리하면 대개 한 달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398. 헤.역.VIII.126 [본문으로]
  399.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에우로파에서 한 달을 지체한 뒤 계속 느긋하게 진군하여 두 달만에 아테나이에 도착했는데(역.VIII.51), 퇴각했을 때는 텟살리아에서 출발하여 한 달 반만에 헬레스폰토스에 도착했다고(역.VIII.115) 하는데, 여기서 테르모퓔라이에서 레노니다스에게 묶여 있었던 7일과 그후 아테나이에 입성하기까지의 4일을 감안하면 크세르크세스는 올 때나 갈 때나 모두 헬레스폰토스에서 텟살리아까지 한 달 반 정도 걸릴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400. 헤.역.VIII.115,117 [본문으로]
  401.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트라케의 암피폴리스 근처 에이온에서 포이니케 함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아나톨리아로 돌아갔다는 설을 소개하면서 이 설이 신빙성이 없다며(역.VIII.118-120) 크세르크세스가 헬레스폰토스에 설치했던 선교로 도해했음을 확인하고 있다. [본문으로]
  402. BC5세기 말의 헬라스 세상은 400여개의 도시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처음 헬라스 동맹에 합류한 도시들은 모두 32개 도시였다. [본문으로]
  403. 텟살리아의 겨울 진지에서 마르도니오스는 헬라스의 전 신탁소에 사람을 보내 신탁을 모으고 분석한 결과 아테나이를 제편으로 삼는 것이 헬라스 정복의 지름길이라 판단하고 마케도니아 왕 아뮌타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이 알레산드로스는 일종의 인질로 마케도니아 군대를 이끌고 마르도니오스에게 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테나이로 보내면서 건곤일척의 지상전을 앞둔 치열한 합종연행의 시도가 시작된다.(헤.역.VIII.133-136) [본문으로]
  404. 헤.역.VIII.130. [본문으로]
  405. 헤로도토스는 키오스 섬의 참주 스트랏티스를 암살하려는 7명의 키오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누설하는 바람에 발각되자 나머지 6명이 탈출하여 스파르테로 와서 이오니아를 해방시켜달라고 간청했고, 다시 헬라스 함대가 집결한 아이기나로 가서 이오니아의 해방을 간청했다면서, 이들을 이오니아의 사절단으로 불렀다.(역.VIII.132) [본문으로]
  406. 헤.역.VIII.132 [본문으로]
  407. 헤로토스는 뮈스가 수집한 신탁의 내용들을 인용하지 않고, 신탁들이 아테나이를 동맹군으로 삼으라고 예언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역.VIII.136) [본문으로]
  408. 불에 탄 아크로폴리스의 신전도 페르시아의 돈으로 지어주겠다고 했다.(헤.역.VIII.140a) [본문으로]
  409. 텟살리아는 아테나이 유린을 기대하고 페르시아의 아테나이 점령을 격려했고, 크세르크세스를 헬레스폰토스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라리사의 토락스는 라리사를 페르시아 군대의 진군 길로 제공하기도 했다.(헤.역.IX.1) [본문으로]
  410. 헤.역.IX.1,17 [본문으로]
  411. 크세르크세스가 BC480 8월 말에 텅빈 아테나이를 점령한 이후 10개월이 지난 BC479 6월 초의 일이다. [본문으로]
  412. 헤.역.IX.9. [본문으로]
  413. 레오니다스와 아르고 사이에서 테어나 아기스 왕가의 새로운 왕이 된 플레이스타르코스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 지휘관의 자리는 그의 후견인이던 사촌 파우사니아스가 맡았다.(헤.역.IX.10) [본문으로]
  414. 스파르테는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에게 두 번째로 도시를 점령당하면서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고 강화에 동조하는 뤼키데스를 돌로 쳐죽이는 결기를 보인 뒤 사절을 보내 출병을 간청했을 때부터 보이오티아로의 출병을 결심하고 준비한 듯하다. 동등인 5,000명, 페리오이코이 5,000명, 헤일로타이 35,000명 등 전체 45,000명을 동원하는 데 축제 기간을 포함하여 한 열흘 걸린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스파르테가 이 정도의 병력을 동원했던 적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본문으로]
  415. 마르도니오스의 메가라 침공은 페르시아 원정군의 헬라스 최서단 진출이었다.(헤.역.IX.14) [본문으로]
  416. 헤로도토스는 이소포스 강가에 진을 친 페르시아의 군세가 페르시아 원정군에서 뽑은 30만 명 과 페르시아에 복속된 헬라스 지역의 군대 5만 명을(역.IX.32) 더해 모두 35만 정도였다고 하고, 디오도로스는 5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역사 전서',11.30.1), 이는 크세르크세스가 남겨둔 40만보다 적지 않은 군대와(11.19.6) 마르도니오스가 트라케와 마케도니아 등 페르시아에 복속된 지역에서 징집했다는 20만이 넘는 군대를(11.28.4) 더한 60만에서 10만이 적은 숫자이어서, 디오도로스의 군세는 헤로도토스의 그것보다 신빙성이 더 떨어진다. 플라타이아로 간 페르시아 군세가 12만 명이었다는 가장 합리적인 군세를 제시한 크테시아스의 '페르시카' 기록은 크테시아스의 혼동인지 아니면 '페르시카'를 발췌 기록한 포티우스의 혼동인지, 마르도니오스가 이끄는 이 12만에 대항했다는 스파르테의 파우사니아스는 (레오니다스가 테르모퓔라이에서 싸운 일과 혼동했는지) 300명의 스파르테 동등인 전사와 1,000명의 스파르테 페리오이코이, 그리고 동맹군 6,000명 등이었다고 해(포티우스,'페르시카 발췌'2.28), 자신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 [본문으로]
  417. 헤로도토스는 중무장보병 38,700명, 경무장보병 69,500명, 비무장보병 1,880명(이들은 테르모퓔라이 이후 크세르크세스의유린을 피해 도시를 버리고 피난을 떠났던 보이오티아의 테르모퓔라이 사람들이었다) 등 모두 11만 명이라(헤로도토스의 셈은 이따금 틀리기도 한다. '역'IX.30) 하고, 디오도로스는 10만 명이었다고('역사 전서'11.30.1) 한다. [본문으로]
  418.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보인 그의 역할을 폄하하지는 않았는데, 플라타이아 전투에 참전한 아테나이군의 지휘관에 대해서 철저히 함구하고 있어 올륌피오도스를 보낸 지휘관이 누구였는지 알수 없다. 다만 후대의 플루타르코스만 그의 '아리스테이데스전'에서 아리스테이데스가 사실상의 지휘관이었음을 내비치고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419. 스파르테의 파우사니아스가 지휘하는 헬라스 동맹군은 아소포스 강을 바라다보며 키타이론 산을 등에 두고 세 번이나 진지를 옮겼는데, 첫 번째 진지는 너무 안전을 중시하는 바람에 물이 없어 장기 주둔 자체가 불가능한 데다가 기병의 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어 진지를 옮겨야 했고, 이 두 번째의 진지에서 비로소 동맹군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잔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지만, 역시 기병의 습격에 노출되어 세 번째로 진지를 옮기다 동맹군의 전열이 와해되었다. [본문으로]
  420. 펠로폰네소스의 엘리스와 만테네이아에서 보낸 군대는 플라타이아 전투가 끝나고나서야 플타이아에 도착했다. [본문으로]
  421. 헤로도토스는 파우사니아스가 전투 전에 제물을 바치며 전투에서 이기는 전조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기병과 궁수들의 공격에 궁지에 몰렸었다고 한다.(역.IX.61) [본문으로]
  422. 전투가 모두 종결되자 아이기나 지휘관 중에 람폰이 파우사니아스에게 크세르크세스와 마르도니오스가 레오니다스의 목을 베어 장대에 달았으니 마르도니오스에게도 똑같은 벌을 주어야 한다고 나섰을 때, 파우사니아스는 야만인의 그 짓도 불쾌한데 무슨 말이냐며 람폰을 질책하며 레오니다스와 테르모퓔라이에서 죽은 사람들은 여기에 누워 있는 무수한 목숨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말한다.(헤.역.IX.79) [본문으로]
  423. 헤로도토스는 아르타바조스가 마르도니오스의 패배를 예상하고 도주를 준비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역.IX.62) [본문으로]
  424. 헤로도토스는 이 마르도니오스가 페르시아 군대에서 가장 잘 싸웠다고 한다.(역.IX.71) [본문으로]
  425. 헤로도토스는 '플라타이아 전투는 그렇게 끝났다.(역.IX.66)'며 파우사니아스와 스파르테군이 마르도니오스를 죽이고 승리한 플라타이아의 데메테르 신전 부근 아르기오피온에서의 전투는 '플라타이아 전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같은 날 계속된 마르도니오스의 본진이 있었던 에위트리아에서의 아테나이군과 합동 전투에 대해서는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아테나이군과 테바이군의 전투, 그리고 아테나이와 합동으로 벌인 '에뤼트리아의 전투'도 모두 '플라타이아 전투'로 부르고 있다. [본문으로]
  426. 페르시아군과의 전투에 참전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진 헬라스 도시들의 군대들이 카타이온 산길을 막은 페르시아 기병의 눈을 피해 헬라스 동맹군에 합류하고 있었다.(헤.역.IX.41) [본문으로]
  427. 크세르크세스가 야전 궁전 겸 지휘소로 사용하다가 먼저 철수하면서 마르도니오스에게 물려주었고, 마르도니오스 역시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을 숙소 겸 지휘소로 쓰고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428. 헤.역.IX.82 [본문으로]
  429. BC479 플라타이아에서 마르도나오스를 죽이고 승리를 거둔 뒤부터 BC469 스파르테에서 국가전복죄로 굶어 죽기까지 그 10년 동안의 파우사니아스의 변신과 이를 저지하는 스파르테의 굳건함에 대해서는 앞으로 헤로도토스에 이은 투퀴디데스가 증언한다. [본문으로]
  430. 헤일로타이를 속여 얻은 아이기나의 횡재를 제외하면 헬라스 동맹군의 전공 포상과 전리품 분배는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본문으로]
  431. 아버지 크산팁포스가 뮈칼레Mykale에서 대승을 거둘 BC479 여름, 페리클레스는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로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이해하고, 조국 아테나이 역시 페르시아처럼 강성한 나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포부를 지닐 수 있을 만한 나이는 되어 있었는데, 훗날 페리클레스가 델로스 동맹의 돈으로 파르테논을 지으며 아크로폴리스를 새로 단장했을 때 새로 62x68m의 거대한 '오데온Odeon音樂堂'을 '크세르크세스의 천막Xerxes' Tent'처럼 지었던 것을 보면(BC435에 지었던 것을 BC1세기 어느 때 중건한 것을 파우사니아스가 보고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을 본떠 지었던 것a copy of Xerxes' Tent'이라 그의 책 '그리스 서술,1.20.4'에 기록했고, 플루타르코스는 '페르클레스전,13.5'에서 '페르시아 왕의 막사를 그대로 본뜬 것an exact reproduction of Great king's pavilion'이라 했다.)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이 어린 페리클레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본문으로]
  432.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은 페르시아가 호화로운 군장으로 헬라스까지 와서 전쟁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본보기였다. 크세르크세스의 천막은 전장에서보여주는 힘의 과시였으며 오만한 위협이었다. [본문으로]
  433. 이때까지만 해도 키오스는 본격적인 페르시아의 지배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페르시아가 지명한 참주 스트랏티스를 암살하려는 정도의 내부 반란 정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발각되자 스파르테로 갔고, 헬라스 함대의 지원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헤.역.VIII.132) [본문으로]
  434. 헤로도토스는 키오스 섬 반란 지원 요청에 대한 헬라스 함대의 소극적인 대응을, '그들에게는 사모스까지 가기가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들로 가기까지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seemed to them that it was as long a votage to Samos as to the Pillars of Heracles.'고 적었다.(역.VIII.132) [본문으로]
  435. 헤로도토스는 플라타이아 전투와 뮈칼레 전투가 같은 날에 일어났다는 점과 둘 다 데메테르 신전 부근에서 벌어졌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역.IX.90,101), 그렇다면 레오튀키다스는 파우사니아스가 마르도니오스의 기병들의 유린을 참고 견디고 있었던 그날 아침에 헬라스 함대를 출동시켰을 것이므로, 키오스의 요청에는 소극적이었던 헬라스 함대가 사모스의 요청에 갑자기 적극적 대응으로 바뀐 까닭은 더 이상 지상군의 동향에 매달리지 말고 헬라스 함대의 독자적 행동을 요구하는 (틀림없이 아테나이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436. BC479 새봄에 헬레스폰토스의 퀴메에서 나와 사모스 섬에 집결한 페르시아 함대는 모두 300척이었는데(헤.역.VIII.130), 이때 모항이 가깝고 살라미스에서의 분전으로 신임을 얻은 이오니아 함대를 주축으로 삼고 모항이 멀어 오래 함선 수리와 승무원을 교체하지 못했던 포이니케 함대를(아이귑토스 그리고 퀴프로스 함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귀향시켜(헤.역.XI.96), 사모스 섬에 남아 있던 페르시아 함대는 겨우 100척을 넘는 정도였을 것이다.(헤로도토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함선 피해 상황은 물론 크세르크세스의 도해를 위해 아뷔도스에 결집했던 함선의 숫자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사모스에 있던 이오니아 함대를 100여척으로 보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먼저, 크세르크세스 출진 당시 페르시아 함대의 규모는 삼단노선, 오십노선, 삼십노선, 군마수송선, 기타 소형선을 포함해 모두 3,000처이었는데, 이 가운데 해전의 주력인 삼단노선은 모두 1,207척으로, 포이니케와 팔라이스티네의 쉬리아 300척, 아이귑토스 200척, 퀴프로스 150척, 킬리키아 100척, 팜퓔리아 30척, 뤼키아 50척, 소아시아 지역의 도리에이스 사람들 도시 30척, 카리아 70척, 소아시아의 이오네스 사람들 도시 100척,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들 17척, 아이올레이스 지역 60척, 헬레스폰토스 지역 100척으로 구성되었고(헤.역.VII.89-97), 이 가운데 헬라스 사람들 도시와 섬들의 삼단노선은 헬레스폰토스 지역 100척, 아우올레이스 60척, 이오니아 100척, 도리에이스 사람들의 도시 30척,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들 17척, 모두 307척이나 되었다.(살라미스 해전에 나온 헬라스 함대의 삼단노선 380여척과 비교하면 소아시아의 헬라스 도시들의 해양 활동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일 년 반 뒤 [본문으로]
  437.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지상군 60,000명을 뮈칼레에 주둔시키고 있었다고 하지만(역.IX.96), 실제 뮈칼레 곶의 데메테를 시전 근처 스콜로포에이스 해안에서 전투를 벌인 수는 페르시아 함대의 해군을 포함하여 10,000명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438. 살라미스 해전 뒤 소집된 헬라스 함대의 함선 수는 110척였는데, 삼단노선 한 척에 중무장병 20명과 궁수 5명이 승선하고 있었으므로 뮈칼레 전투에 참전한 헬라스 해군의 숫자는 최대 3,0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439. 혹시 후퇴할 경우 길잡이 겸 호위부대로 쓸 생각도 있었다.(헤.역.IX.104) [본문으로]
  440. 헤로도토스는 뮈칼레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헬라스 함대가 플라타니아 전투에서 거둔 헬라스 동맹군의 승리를 알고 있었다고 언급하는데( [본문으로]
  441. 이런 밀레토스군의 행동은 20년 전(BC499) 아리스타고라스 주도로 밀레토스가 일으킨 이오니아 반란에 이은 두 번째의 이오니아 반란이 되었고(BC479), 같은 이오니아 사람으로서의 아테나이가 이들의 후견인으로 나서게 만들게 된다. [본문으로]
  442. 플라타이아 전투를 정리하고난 헬라스 동맹군은 테바이 성을 포위하고 테바이를 페르시아에 복속토록 주도한 테바이의 지도자들을 색출해 넘기라고 통첩하자, 서로 누구라고 지적하여 넘기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테바이가 페르시아의 힘을 빌려 헬라스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자며 종속을 결정한 일이어서 이에 불복하고 농성에 돌입하였는데, 몇 차례의 공격을 받고 도시가 결딴나게 된 테바이 사람들은 [본문으로]
  443. BC499 밀레토스의 참주 대리 아리스타고라스의 주도로 [본문으로]
  444. 뮈칼레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 지휘관 아르타윈테스는 패잔병들을 이끌고 사르데이스로 돌아가던 중 크세르크세스의 아우 마시스테스로부터 전투에서 여자처럼 비겁했다는모욕을 당하자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 하다 할리카르낫소스 출신의 프락실라오스에게 저지를 받아 실패한 일이 벌어졌었다.(헤.역.IX.107) [본문으로]
  445. 헤로도토스의 '역사' 마지막 권인 제9권은 후대의 가필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데, 그 제9권에서 헤로도토스는 사르데이스에 머물고 있던 크세르크세스가 마르도니오스에게 맡기고 온 헬라스 원정의 마무리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대신 궁중 [본문으로]
  446. 키로스 섬과 사모스 섬은 이미 헬라스 함대에 사절을 보내 페르시아로부터의 이탈을 밝힌 바 있었지만, 십수 년 전 도시가 폐허로 된 이래 이제서야 겨우 다시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가던 밀레토스의 모반은 그들의 재건 역시 헬라스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었음을 [본문으로]
  447. 마케도니아, 텟살리아, 보이오티아, 그리고 아이가이온 바다 쪽 트라케 도시들은 페르시아에 자진 복속된 값을 아테나이에게 톡톡히 물게 된다. [본문으로]
  448. 다레이오스의 흑해 서안 스퀴타이 정벌은 페르시아가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에우로파로 진출한 첫 번째 원정이었으나 이때 다레이오스는 에우로파와 트라케에 페르시아의 군사적 거점을 남겨두는 선에서 원정을 마감하고 헬라스로는 진출하려하지 않았는데, 이오니아의 반란을 진압한 여세를 몰아 헬레스폰토스를 건넜을 때, 마르도니오스의 원정 목표는 분명 헬라스 정벌에 맞추어져 있었으므로 이것이 페르시아의 첫 번째 헬라스 원정으로 꼽았다. 마르도니오스의 이 첫 번째 헬라스 원정은 트라케를 정벌하고 마케도니아까지 침공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르도오스의 부상과 풍랑으로 잃은 함대 전력의 손실로 실패하여 철수하였다. 두 번째는 함대를 이끌고 아이가이온 바다를 건너 에우보이아를 거쳐 마라톤에 상륙했던 다레이오스의 원정이었다. [본문으로]
  449. 헤.역.IX.106. 여기서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테를 지명하지 않고(레오튀키데스는 이오니아 사람들의 식민도시 문제에 소극적이었을 것이다) 대신 펠로폰네소스의 지도자들과(이미 제해력에서 아테나이에 밀리는 것에 두려움이 생긴 코린토스가 앞장섰을 것이다) 아테나이 사이의 이견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으로]
  450.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 제9권에 대해 후대 사가나 서지학자들이 제기한 가필의 의문보다 병든소는 삭제에 더 큰 의문을 가지는데, 그것은 바로 뮈칼레 전투 후 이오니아의 헬라스 동맹 편입을 두고 벌어진 펠로폰네소스와 아테나이 간의 불화를 기록한 IX.106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불화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그 앞에서 수많은 그들 사이의 불화를 다루며 상술했던 기록 태도를 버리고, 그런 불화들에 비해 결코 가볍다고 할 없는, 오히려 그가 '역사'를 저술할 당시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중대한, 불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빈약하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으로]
  451. 헤.역.IX.114. [본문으로]
  452. 현존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BC479 늦가을 세스토스를 함락하고 태수를 처형한 크산팁포스와 아테나이 함대의 귀향까지(IX.122) 남아 있는데, 이 다음의 기록들은 산일된 것으로 본다. [본문으로]
  453. 헤.역.IX.117 [본문으로]
  454. 포로가 된 아르타윅테스는 옛날 트로이와의 전쟁 때 맨 먼저 상륙하다 죽은 장군 프로테실라오스 사당을 턴 데 대한 보상금으로 100탈란톤,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의 몸값으로 200탈란톤를 제의했을 만큼 재물이 많았는데, 크산팁포스는 그 둘을 처형하고 재물을 빼앗았으니 그 재물의 가치는 적어도 300탈란톤 이상이었을 것이다.(헤.역.IX.120) [본문으로]
  455.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무렵 테테스의 참정권을 확대하는 아테나이 정치제도 변경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아리스테이데스가 귀향한 참전자들이 '더 민중적인 정치체제more popular government'를 '갖기를 바라는 것desire to receive'에 대해 그들의 강인한 용기와 전승으로 고양된 강력한 무력을 앞세운 그들의 바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아르콘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 테테스 계급의 참정을 허용하는 법령decree을 공포했다고 하는데(아리스테이데스전,22.1), 아테나이의 대페르시아 전쟁 승리는 해군의 승리였고, 해군의 승리는 바로 노꾼들이던 테테스 계급의 승리였으므로, 그들도 아르콘에 선출될 수 있도록 된 것으로, 이때 아테나이 민주정 요소의 하나인 '평등참정권Isopoliteia'이 확립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456. 솔론의 유지라 했으나, 이는 솔론 생전의 평소 지론이었는데, 하나는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은 모두 독립적인 자유시민이어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도시가 정치 변혁의 시련을 겪을 때 반대든 찬성이든 자유시민으로서 반드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457.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활약이 아리스테이데스의 눈에 띄었고, 이듬해 봄에 처음 장군이 되어 아테나이 함대에서 아리스테이데스를 보좌하였다.(플루타르코스,'아리스테이데스전',23.1,'키몬전',5.3-4) [본문으로]
  458. 아테나이의 헬라스 세계 패권 추구 움직임에 대한 첫 번째 증언인 셈인데, 아리스테이데스가 테테스에게도 '평등공무담임권'(아르콘을 포함한 도시의 모든 공무를 담임할 수 있는 권리)을 공포할 무렵, 테미스토클레스가 민회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아테나이에 커다란 이익과 안전을 가져다줄 안이 있다고 말하자 민중들이 아리스테이데스로 하여금 들어보고 판단하라고 위임했을 때 테미스토클레스가 내놓은 안이었다.(플루타르코스,'아리스테이데스전',22.2) [본문으로]
  459. 파우사니아스가 뷔잔티온 함락 때 잡은 포로 중에는 크세르크세스의 친구와 친척 몇도 있었는데, 동맹들에게는 도주했다고 말하고는 이들을 몰래 풀어주며 크세르크세스에게, '나를 왕의 사위로 삼아준다면 스파르테와 헬라스를 왕에게 복속케 하겠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연락할 심복을 보내라'는 편지를 보냈고, 이에 크세르크세스는 아르타바조스(플라타이아에서 도망친 페르시아 장군)를 뷔잔티온 근처 태수로 보내 돈과 병력을 마음대로 쓰게 해주겠다고 화답했다.(투퀴디데스,'펠레폰네소스 전쟁사'I.128.4-129) [본문으로]
  460. 페르시아풍 옷을 입고 뷔잔티온 거리를 나다니고, 트라케 순시 때는 페르시아인과 아이귑토스인들의 경호를 받았으며, 페르시아식 요리로 식사했다.(같은 책,I.130) [본문으로]
  461. 투퀴디데스는 헬라스 함대 지휘관 파우사니아스가 헬레스폰토스에서 소환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방면되었었다고 간단히 언급했지만('펠로폰네소스 전쟁사',I.128.3), 플루타르코스는 오만해진 파우사니아스의 횡포를 열거한 다음, 이 때문에 불만을 품은 사모스와 키오스가 아리스테이데스의 내락을 받아 파우사니아스의 함선을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았고(플루타르코스는 또 다른 설명도 하는데, 파우사니아스가 클레오니케라는 처녀를 탐내어 시침케 했는데, 수줍은 처녀가 불을 끄게 한 다음 침대로 가다가 등잔을 쓰러뜨리자 놀란 파우사니아스가 칼로 죽였고, 처녀는 유령이 되어 파우사니아스에게 정욕과 폭력의 길로 가도록 몰았고, 이런 행동 때문에 분노한 동맹군을 데리고 키몬이 감금했다는 것이다.), 이에 아리스테이데스가 스파르테의 에포로스들에게 그를 소환해주기를 요청하여 스파르테가 그를 소환하면서 헬라스 함대의 지휘권이 아리스테이데스에게로 넘어갔다고 파우사니아스의 소환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아리스테이데스전',23, '키몬전',6.2-6) [본문으로]
  462. 사실 스파르테는 파우사니아스와 다른 장군들을 소환하면서 도르키스와 몇몇 장군들을 소규모 부대와 함께 헬라스 함대의 신임 지휘관으로 보냈으나 동맹들이 통수권을 넘기지 않자(아테나이가 그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스파르테로 다시 돌아갔고, 스파르테도 더 이상 지휘관을 보내지 않아 자연스레 아테나이에게 통수권이 넘어가게 되었는데, 스파르테는 해외에 파견된 전사들이 타락할까 두려웠고, 그때까지도 우호적이라고 믿고 있었던 아테나이가 남은 대페르시아 전쟁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투.펠,I.95.6-7) [본문으로]
  463. 스파르테로 소환된 뒤 재판을 받고 무죄방면된 파우사니아스는 크세르크세스의 도움으로 헬라스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욕을 이루기 위해 헬라스 함대의 대페르시아 전쟁을 돕겠다며 개인 자격으로 삼단노선 한 척으로 다시 뷔잔티온으로 갔으나 아테나이 함선이(키몬이 지휘했을 것이다) 포위 공격하여 쫓아내자 트로아스의 콜로나이에 정착하며 크세르크세스와의 접촉을 이어가다가 반역 고발을 받은 에포로스들에게 두 번째로 소환당해 투옥되었고, 계속 의심을 받는 가운데서도 증거불충분으로(그는 여전히 미성년인 레오니다스의 아들 플레이스타르코스 왕의 섭정이었으므로 명백한 증거없이 처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풀려나 있으면서도 자유와 시민권을 주겠다며 헤일로타이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려했다고 고발을 당하는 등 계속 감시를 받고 지내다, BC470 크세르크세스와의 서신교환을 새로 맡은 그의 연동戀童이 그전의 사자들 가운데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 편지를 뜯어보고 추신으로 적힌 사자를 죽이라는 내용에 분개하여 파우사니아스의 편지를 들고 고발하자 에포로스들은 사실 확인을 위해 고발자를 탄원자로 내세우고 파우사니아스에게는 탄원을 들어주도록 시킨 다음 에포로스들은 칸 뒤에 숨어 대화를 듣고 파우사니아스의 모반을 확인하고 체포하는 과정에서 파우사니아스가 아테나 신전 성역으로 피신하자 오히려 보초를 세워 그곳에 감금하고 굶어 죽게 했다.(투.펠.I.131-134) [본문으로]
  464. 플루타르코스,'아리스테이데스전'23.6 '"(파우사니아스의 잘못을 알고나자) '스파르테인의 드높은 지혜the lofty Spartans wisdom'가 '그들의 경이로운 태도wonderful way'로 분명히menifest 드러났다. 그들 지휘관들이 '부여받은 막중한 권력으로 부패했다는 것corrupted by the great powers entrusted to them'을 알고나자, '자발적으로 지휘권을 포기했고voluntarily abandoned leadership' 아울러 (남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장군들을 보내지 않았는데ceased sending generals for the war', 그들은 '전체 헬라스의 지배권the sway over all Hellas'을 가지기보다는 '조상들의 관습에 엄중하고 진실된 시민들이 되기로citizens discreet and true to their ancestral customs' 작정했던 것이다. [본문으로]
  465. 같은 책,I.97.2 [본문으로]
  466. 공물貢物,phoros,tribute,controbute [본문으로]
  467. '헬라스 공공기금 재무관'이란 직명으로 'Hellenotamiai'라 불렀다. [본문으로]
  468. 주로 아이가이온 바다를 낀 도시와 섬들로 구성되었는데, [본문으로]
  469. BC478 스파르테와 함께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빠진 '헬라스 동맹'은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들과 연안 도시들, 그리고 아나톨리아 해안이나 헬레스폰토스의 헬라스 사람들 도시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때도 동맹의 목표는 대페르시아 전쟁 수행이었으므로 아테나이와 동맹 도시들은 각자 능력에 따라 공물 갹출하여 전쟁을 수행하고 페르시아 영토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보상받도록 한다는 데 합의하고 동맹의 본부를 델로스 섬에 둔 사실상 새로운 동맹체였음에도 불구하고, BC479 대페르시아 전쟁 수행을 목표로 이스트모스에서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했던 '헬라스 동맹'이란 명목을 바꾸지 않았었다. 다만 후세 사람들은 '헬라스 동맹'과는 구성이나 성격이나 운영방식이 다른 새로운 이 헬라스 동맹체를 본부를 둔 섬 델로스의 이름을 따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 Delian Confederation'이라 불렀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 때에는 '델로스 동맹'이라는 명칭이 없었고, 단지 '아테나이(와 그)의 동맹', '아테나이의 동맹함대'로 불렸던 것으로 보이므로 이 글의 본문에서는 '아테나이의 동맹' 또는 '아테나이의 동맹 함대'라 부르고, 다만 각주에는 '델로스 동맹'으로 부른다. [본문으로]
  470. 투.펠.I.97.1 [본문으로]
  471. BC479 늦가을 [본문으로]
  472. BC477 소위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 Delian Confederation'으로 재편되었다. [본문으로]
  473. BC476 [본문으로]
  474. 트라케의 스트뤼몬 강이 아이가이온 바다와 만나는 강구에 있는 에이온은 에우보이아 섬의 에레트리아 사람들이 이주하여 세운 도시였으나, BC492 마르도니오스의 트라케 원정 당시 페르시아에 점령당해 페르시아의 요새도시가 되었는데, 그후 크세르크세스 원정의 배후 기지로 부테스가 주둔하여 많은 물자를 보유하고 있다가 BC475 키몬이 탈환하고 BC437에 수립된 인근의 암피폴리스와 함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아테나이의 트라케 지역 전략적 거점이었다. 투퀴디데스는 키몬이 에이온을 함락하고 그 주민을 노예로 삼았다고(펠.I.98.1) 간단히 언급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키몬의 포위공격에 견디지 못한(첫 공격은 BC476이었고 BC475에서야 함락시켰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부케스가 도시에 불을 질러 자멸하자 전리품은 챙기지 못했지만 아름답고 비옥한 곳이라 키몬이 불에 탄 에이온과 인근에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로 만들었다고 소상히 전한다.('키몬전',7.1-3) [본문으로]
  475. 에우보이아 섬의 동쪽에 있는 스퀴로스 섬은 아테나이 함선들이 헬레스폰토스로 가는 해로 상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따라서 BC475 아테나이가 이 섬을 점령하고 식민도시를 세운 것은 다분히 전략적인 행동이었다. 투퀴디데스는 키몬이 이 섬을 점령하여 거주민 중 돌로피아인들은 노예로 삼고 아테나이 이주민을 정착시켰다고(펠,I.98.2) 간단히 기술하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스퀴로스 섬에는 본디 텟살리아에서 온 돌로피아 사람들이 살았는데, 농사를 게을리 하고 그 대신 해적질이나 섬에 온 교역자들을 상대로 강도짓을 하다가 심지어 섬의 크테시온 항에 정박한 텟살리아 배의 선원을 감옥에 가두는 행패를 부렸는데, 탈출한 선원들이 제소하여 벌금을 물게 되자 스퀴로스 섬 정부는 해적들에게 그 돈을 내라고 했고, 이에 해적들이 키몬에게 섬을 넘기겠다고 제의해 BC475 키몬이 섬을 점령하고 돌로피아인 해적들을 소탕하여 아테나이의 식민지로 만들었다면서, 옛부터 테세우스가 이 섬에 갔다가 점령을 걱정한 원주민에게 떠밀려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때 키몬이 테세우스의 묘를 찾고 그 유해를 가져와 아크로폴리스의 테세우스 사당에 모셨다는 이야기까지 더해 기록했다.('키몬전'6.3-6) [본문으로]
  476. 에우보이아 남서쪽의 작은 도시 카뤼스토스는 델로스 동맹이, 페르시아의 점령지가 아니라, 헬라스에 있는 헬라스 사람의 도시를 공격하고 점령한 첫 번째 경우이다. 카뤼스토스는 폭풍과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파괴된 페르시아 함선의 보충에 참여했는데(헤.역.VIII.66), 이 때문에 살라미스 해전 뒤 헬라스 함대가 안드로스 섬에 머물렀을 때 보상금을 내고도 도시가 유린당했다.(헤.역.VIII.112,121) 그후 아테나이가 델로스 동맹을 창설할 때 가입하지 않고 버텼는데, 아테나이가 함대를 이끌고 공격하자 교전 끝에 항복하고 델로스 동맹에 가입하였다.(투.펠.I.98.3) [본문으로]
  477. 투퀴디데스는 '희생을 감수하는 데 익숙하지도 않고 그럴 의향도 없는 동맹도시들'이라고 표현한다.(펠.I.99.1) [본문으로]
  478. '...아테나이인들은 공물 부과나 함선 징발에 엄격했고.. 미움을 샀다. 그들은 더 이상 대등한 전우로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고...'(투.펠.I99.1,2) [본문으로]
  479. 낙소스는 BC500무렵 헬라스의 섬들 가운데 가장 부유하다고 알려져왔었는데, 이 때문에 BC499 밀레토스의 참주대리 아리스타고라스가 낙소스의 참주가 되기 위해 사르데이스의 페르시아 총독 아르타페르네스의 군대를 빌려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이것이 이오니아 도시들의 반란과 아테나이의 사르데이스 습격 그리고 페르시아의 헬라스 원정으로 이어졌다. [본문으로]
  480. BC471경의 일로 보인다. [본문으로]
  481. 투퀴디데스는 포이니케 함선 200척이 모두 파괴되거나 나포되었다 하고(펠.I.100.1), 플루타르코스는, 파노데무스를 인용하며 페르시아 함대의 규모가 600척, 에포로스를 인용하며 350척이었는데 파괴된 함선을 제하고도 200여 척을 나포했다고 하면서('키몬전'12.5-6), 키몬이 페르시아 함대의 이동 사실을 알고 곧바로 추격해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정작 80척의 포이니케 함대는 에우뤼메돈 전투에는 참전치 못하고 휘드로스(Hydros,Hydrus,현위치불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키몬의 습격을 받아 전멸했다고 한다.('키몬전'13.3) [본문으로]
  482. BC479 여름 헬라스 동맹은 헬라스 땅 플라타이아에서는 지상군이, 페르시아 땅 뮈칼레에서는 해군이 모두 페르시아군을 격파함으로써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원정을 종식시켰는데, 10년이 지난 BC469(BC466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테나이와 동맹군은 페르시아 땅의 에우뤼메돈에서 같은 날 해전에 이어 지상전을 벌이고 또 모두 이긴 것이었다. [본문으로]
  483. 나중 페리클레스와 에피알테스가 각각 50척, 30척의 함선을 이끌고 켈리도니아 군도까지 갔는데도 페르시아 함대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고도 하고, 칼리아스가 페르시아로 가서 왕과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페르시아 육군은 헬라스 땅에서 말로 하루를 달릴 거리 안에는 가지 않으며, 해군은 키아네아 군도와 켈리도니아 군도 사이의 바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놀라울 정도로 페르시아에게는 굴욕적이고 앝나이에게는 자랑스런 조건이어서, 아테나이가 '평화의 제단Altar of Peace'을 세우고(장소는 불상) 칼리아스에게도 '특별한 명예을 주었다고paid distinguished honours' 한다.('키몬전',13.5) [본문으로]
  484. 타소스 함대의 함선 33척을 나포했다.(플.'키몬전',14.2) 플루타르코스는 키몬이 케르소네소스를 정벌한 뒤 타소스 함대를 친 것으로 기록한다. [본문으로]
  485. 플루타르코스,'키몬전',14.1 [본문으로]
  486. BC494 히스티아이오스는 사르데이스를 탈출해 키로스로 갔고, 거기서 키로스 함대를 이끌고 타소스를 침략했으나 타소스의 농성 반격에 물러서고 말았다. [본문으로]
  487. BC500 무렵 낙소스는 헬라스 섬들 가운데 제일 부유했고, 타소스 섬의 금광에 이어 건너 육지에서도 금광을 발견한 BC460 무렵은 타소스가 헬라스 섬들 가운데 제일 부유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488. 투퀴디데스는 지진이 일어난 틈을 노려 멧세니아의 투리아와 아이타이아 사람 헤일로타이와 페리오이코이가 반란을 일으켜 이토메 산성에서 농성하게 되었다며(펠.I.101.2), 헤일로타이의 반란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고 지진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데 반해, 디오도로스는 지진으로 기초가 흔들린 집들이 무너지고 또 오래 계속되는 바람에 20,000명이 죽었다고 하고('역사 전서'11.63.1,2), 플루타르코스는 땅이 갈라지고 타위게토스 산을 흔들어 작은 삼봉우리들을 날려버리는 전대미문의 지진이 일어나 스파르테의 경우 다섯 채의 집만 남기고 모두 파괴되었다고 하느데('키몬전'.16.4), 오늘날에 와서 학자들은 진도 7.2 정도의 BC464 스파르테 지진으로 라코니케와 멧세니아 지역에서 20,000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하나, 일부는 과장되었다고도 본다. [본문으로]
  489. BC463 투.펠.I.101.3 [본문으로]
  490. BC475-465 사이의 10년. [본문으로]
  491. BC465경. [본문으로]
  492. Ennea Hodoi. '아홉 갈래 길'이란 뜻으로, 에이온으로부터 5Km 북쪽 스트뤼몬 강변에 위치했다. [본문으로]
  493. 엔네아 호도이를 점령하여 정착한 이들은 북쪽 내륙으로 진군을 계속했고, 트라케 에도노이족들의 도시 드라베스코스 근처까지 나아갔으나, 트라케 연합군에게 참패했다.(투.펠.I.100.3) 참패한 아테나이는 엔네아 호도이를 버려두고 있었는데, 스파르테와의 30년 평화가 틀어지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BC437 아테나이는 하그논이 이끄는 이주자들을 다시 엔네아 호도이로 보내 암피폴리스Amphipolis를 세우고 트라케 지역의 경제활동 거점도시로 삼았다. [본문으로]
  494. BC463 타소스의 항복을 받고 돌아온 키몬에게 씌어진 횡려죄에 대한 재판에 대해 플루타르코스은 키몬의 누나 엘피니케가 페리클레스를 만나 청원해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전한다.('키몬전',14.4) [본문으로]
  495. 투.펠.I.102.1,2.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나이에 온 사절이 페리클리다스였다고 한다.('키몬전'16.7) [본문으로]
  496. 논의 과정에서 많은 아테나이 사람들은, 십여 년 전 그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테가 다른 펠로폰네소스 도시들과 함께 보이오티아로 나가 페르시아군과 결전을 벌이는 대신 이스트모스에서 방벽이나 쌓으면서, 그들이 피난 가느라 비워둔 아티케와 아테나이를 페르시아군이 두 번이나 유린하도록 방관했었다는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본문으로]
  497. 플루타르코스,'키몬전'16.1-3.'....(스테심브로토스의 말을 인용하며, 아테나이 사람들을 나무랄 때 키몬은,)'스파르테 사람들은 그런(그렇게 할) 사람들이 아니요Lacedaemonians are not of such a sort.'라고 해서 아테나이 사람들의 질시와 미움을 키웠다...' [본문으로]
  498. 아리스토파네스에 따르면 4,000명의 중무장보병이었다.(뤼.1143행) [본문으로]
  499. 아테나이는 에이온, 낙소스, 타소스의 농성을 짧게는 몇 달 길게는 3년에 걸쳐 모두 해제하고 성을 함락시킨 데 반해, 스파르테는 간단한 이토메의 산성조차도 이태가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고, 아테나이의 지원을 거부한 뒤에도 어쩌지 못하다 결국 농성 10년이 된 해에 이주 허용으로 해결햇고, 이들은 아테나이가 제공하는 나우팍토스에 정착했다.(투.펠.I.103.1-3) [본문으로]
  500.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테가 아테나이 지원군이 반군과 결탁하는 것이 두려워 거부했다고 한다.(펠.I.103.3) [본문으로]
  501. 투퀴데디스는 스파르테가 이토메 산성에 대한 공성을 위해 아테나이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막상 아테나이가 적지 않은 군대로 지원해오자 공성 중 반란군과 합류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아테나이의 도움이 필요없게 되었다며 돌려보냈다고 하고(펠.I.102.3), 아리스토파네스는 페리클리다스의 요청을 받은 아테나이가 키몬과 중무장보병 4,000명의 지원군을 보내 도움을 주고 돌아왔다고 말하고 있고('"뤼시스트라테"'1143-4행), 디오도로스는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의 지원군을 받아들여 처음에는 반란군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테나이가 반란군과 합류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 스파르테가 아테나이군에게 철수하라 했다 하고('역사 전서'64.2,3),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테가 반란 초기에 페리클리다스를 아테나이에 보내 지원을 요청하자 아테나이는 논란 끝에 키몬의 주장대로 지원군을 보내 초기 진화를 도운 뒤 돌아왔고, 반란군의 이토메 산성 농성 이후 스파르테가 재차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때 도착한 아테나이군을 보고 겁을 먹은 스파르테가 아테나이군이 정변을 일으키려 한다는 누명을 씌워 이병을 가로막았다고 하는데('키몬전'17.1,2), 이 글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와 플루타르코스에 따랐다. [본문으로]
  502. 아리스토파네스,'"뤼시스트라테"1137-1144행,'...(스파르테 사람들은) 전에 페리클레이다스가/스파르테에서 여기로 와서 새파랗게 질린 채/붉은 외투를 입고 제단 가에 쓰러져/원군을 청하던 일을 잊었단 말이오? 멧세니아와/지진의 신이 한꺼번에 그대들을(스파르테 사람들을) 공격했을 때 말예요./그래서 키몬이 4,000명의 중무장보병을 이끌고 가서/스파르테를 구해주었지요/...' [본문으로]
  503. 투.펠.I.102.4,103.4 [본문으로]
  504. BC461, 이 해에 키몬이 도편추방당했고, 에피알테스의 주도로 민회가 아레오파고스의 재판권을 담당토록 체제를 바꾸었으며, 에피알테스는 암살당했고, 페리클레스는 유일한 민중파의 지도자로 정권을 잡았다. [본문으로]
  505.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가 스파르테를 위시한 펠로폰네소스 도시들과의 전쟁을 회피하지 않았을 만큼 그 힘이 성장한 배경과 과정, 다시 말해 아테나이 제국 건설 과정을, BC479 페르시아의 헬라스 원정군 패퇴부터 BC431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까지 50여년(투퀴디데스에 대한 고주석scholion古註釋은 이 시기를 '50년기Pentekontaetia,The period of fifty Years,五十年紀'라 했다) 일어난 일을 간단히 정리하여 설명했지만('펠로폰네소스 전쟁사',I.89.1-118.2), 이 글에서는 페리클레스 시대 앞의 20여년과 페리클레스가 집권하여 케르퀴라와 방어동맹을 체결하는 무렵까지의 20여년에 걸친 기간에 일어난 일을 추적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 시기는 페르시아의 헬라스 원정 뒷처리와 아테나이 제국 건설로 전쟁의 연속이어서 헬라스나 비헬라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에 수없이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지만, 이에 대한 체계적이고 자세한 기록이 없어, 여러 자료들을 모아 새롭게 재구성하여 아테나이와 페리클레스의 끝없는 전쟁을 설명해나갈 것이다. 자료는 주로 투퀴디데스가 BC479 헬라스 동맹의 플라타이아와 뮈칼레 대승이후 크세스크세스가 사르데이스를 떠나 수사로 돌아간 시점부터 자신이 본격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하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의 전쟁 발발의 원인인 BC436 에피담노스 내전 시점 사이 40여 년 동안에 대한 빈약한 역사 기록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펠.I.97.2,'...유일한 역사가는 앗티케의 역사를 쓴 헬라니코스이지만, 그의 기술은 상세하지 못하고 연대도 정확하지 못하다...'), 이 시기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아테나이 제국 건설 과정으로 엮어놓은(펠.I.98-115) 것을 기둥 삼아, 비록 서로 일치하지 않거나 사실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동시대 저술가인 크니도스의 크테시아스가 '페르시카Persica'(포티우스의 발췌본만 남아 있다), 후대 저술가들 가운데서는 시켈리아의 디오도로스가 '역사전서Biblica Historica,Library of history,歷史全書', 카이로네이아의 플루타르코스가 '생애 비교Bioi Paralleloi,Parallel Lives', 그리고 뤼디아의 파우사니아스가 그의 여행기 '그리스 서술Hellados Periegesis,Description of Greece', 등에 각각 단편적으로 소개한 내용들을 참고할 것이다. [본문으로]
  506. BC460 아르고스의 오이노이Oenoe에서 벌어진 소규모의 스파르테 군대와 아테나이와 아르고스 연합군 사이의 '오이노이 전투Battle of Oenoe'는 후세 사가들이 말하는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First Peloponnesian War'의 시작이었다. [본문으로]
  507. 파우사니아스는 아테나이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아고라의 주랑Portico에 그려져 있던 오이노이 전투에서 아테나이군이 스파르테 격퇴하는 장면을 설명하고 있는데('그리스 서술Description of Greece'1.15.1), 이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아이노이에서 처음으로 스파르테에게 이긴 사실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다. [본문으로]
  508. BC459 메가라가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 confederacy'(그러나 투퀴디데스는 '라케다이몬 동맹,Lacedaemonians'으로 부른다)을 이탈하고revolt '아테나이 동맹League of Athenians'이 된 것을 두고 투퀴디데스는 '메가라와 페가이가 아테나이의 수중에 떨어졌다Megara and Pegae were put into the hands of Athenians'고 했다.(펠.I.103.4) [본문으로]
  509. 투퀴디데스는 BC460 아테나이와 동맹 함대의 대규모 아이귑토스 진출 배경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고, 그들이 아이귑토스에서 6년 동안 활동한 내용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1년반이나 포위당해 있는 동안 그들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혹은 아테나이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없다가, 결국 BC455 전멸당한 사실과 그들을 구원하러 갔던 함대마져 전멸한 사실만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이 아이귑토스 반란 지원 실패에 대해 [본문으로]
  510. 투퀴디데스의 관심이 아무리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간의 전쟁에 맞추어져 있었다 해도, 아테나이와 동맹 함대의 아이귑토스 진출과 실패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던 페르시아 궁정 모반 사건과 크세르크세스의 죽음에 이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왕위 승계에 그가 침묵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는 무엇보다 헬라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 원인을 밝히고자 했던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크세르크세스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대해 보고하면서 대미를 장식하지 않은 것에 더 큰 의아심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런 의문을 풀 단서를 마지막 제9권(아홉 무우사이의 이름을 붙인 아홉 권 '역사'의 마지막 제9권은 서사시를 관장하는 무우사 칼리오페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에서 보게 된다. 이 마지막 권은 사가들에 의해 그 내용이 첨삭된 흔적이 있다고 지적받아 왔지만, 첨삭은 몰라도 이 마지막 권의 마지막 부분이 산일된 것만은 틀림없는데, 현존하는 말미에 헤로도토스가 장황할 정도로 상세하게 사르데이스에 머물던 크세르크세스의 치정과 난행을 기록해놓은 것으로 보아(역.IX.108-113) 그 산일된 부분의 중요한 기사가 페르시아 궁정 내부의 문란 때문에 크세르크세스가 지근의 내시에게 죽임을 당하는 궁정모반 사건 장면이었을 것이라 볼 수 있게 하고, 이 어처구니 없는 크세스크세스의 죽음에 더하여 헬라스 침공의 부질없음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서사적인 소회가 '역사'의 대미였으리라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비록 헤로도토스가 언급하지도 않은 내용을 궁정 모반과 결부시키고는 있지만, 크테시아스가 그의 '페르시아 역사Persica'에 남긴 BC465에 일어난 궁정 모반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소아시아로 건너와 사르데이스로 가는 길에 크세르크세스는 사위인 메가뷔조스에게 헬라스로 가서 델포이를 유린하라고 했는데, 거부하자(크테시아스가 그의 거부 이유를 말하지 않았으나 아내의 부정에 대해 무고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냄세를 풍긴다), 대신 내시 마타카스를 보내 아폴론 신을 모욕하고 신전을 약탈하라고 했다.(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 군대가 포키스를 유린할 때 델포이도 유린하려 했으나 신적 작용으로 실패했다고 한다,(역.VIII.35-39)) 2)크세르크세스가 바빌론에서 페르시스에 도착했을 때 임무를 마친 마타카스가 왕에게 돌아왔다. 3)메가뷔조스는 그의 아내인 왕의 딸 아뮈티스가 (그가 참전한 사이) 간통을 저질렀다고 고발했고(크테시아이는 메가뷔조스와 크세르크세르 사이를 이간질 하기 위해 음모자들이 무고했다는 냄세를 풍긴다.), 크세르크세스가 엄중히 힐책했으나, 아뮈티스는 결백을 주장했는데, 왕의 비밀 고문인 아르타파노스(아르타바노스)와 내시 아스파미트레스는 서로 의논하여 크세르크세스를 죽인 다음, 왕의 셋째 아들 마크로케이르(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왕이 되기 전 이름)에게 큰 아들 다레이오스가 왕을 죽였다고 고발했고, 마크로케이르에게 잡혀간 다레이오스가 맹렬히 부인했지만 죽임을 당했다. 4)마크로케이르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되었고, 아르타바노스에 감사했지만, 메가뷔조스와 함께 아르타크세르크세스마져 해칠 음모를 꾸몄던 아르타파노스의 죄상이 메가뷔조스의(이때는 아내의 결백을 의심한 것에 대해 깊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는데, 아마 내시들의 무고였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고발로 백일하에 밝혀져 오히려 아르타파노스가 죽임을 당했고, 아스파미트레스 역시 잔혹한 죽임을 당해 여물통에 버려졌으며, 그후 아르타파노스의 세 아들과 추종자들이 반격해왔으나 세 아들은 죽고 메가뷔조스는 중상을 입었는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아뮈티스, 로도귀네(아뮈타스의 동생),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인 아메스트리스까지 깊은 슬픔 속에 코스의 의사 아폴로니데스에게 치료를 맡겼다.(포티우스,'페르시카 발췌',31-34) 크테시아스의 기록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르타파노스가 다레이오스부터 죽이고 크세르크세스를 죽였다고 언급한다.('정치학'5.1311b) 그리고 후대의 시켈리아의 디오도로스 역시 이 페르시아 궁정반란에 대해 대동소이한 기록을 남겼는데, '1)크세르크세스의 경호대장이던 휘르카니아 사람 아르타바노스는 찬탈을 위해 그의 친척이자 친구인 왕의 시종내시 미트리다세스와 공모하고, 2)아르타바노스는 미트리다테스의 도움으로 왕의 침전에서 크세르크세스를 죽인 다음 왕의 세 아들을 죽이러 나섰는데, 첫째인 다레이오스와 둘째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궁중에 있었고, 박트리아 총독이던 셋째 휘스타스페스는 외지에 있었다. 3)그 밤에 아르타바노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찾아 다레이오스가 왕을 죽였고 왕권이 그에게로 간다고 했고, 4)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는 노예처럼 사실을 외면하지 말고, 다레이오스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부왕을 죽인 죄를 물어 처벌하고 왕위에 오르겠다면, 경호대장으로서 자기가 이 모든 일을 수행하겠다고 조언했고, 5)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즉시 수락하고 아르타바노스의 도움으로 다레이오스를 죽이자,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을 본 아르타바노스는 그의 아들들과 함께 이제 왕권을 쥘 때가 되었다고 고함치며 칼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쳤는데, 6)경상만 입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오히려 아르타바노스를 죽이고, 뜻하지 않은 변고를 마무리한 다음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역사전서',11.69.1-6) [본문으로]
  511. 크테시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왕위에 오른 뒤 바로 박트리아 총독이던 다른 아르타바노스가 박트리아 사람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는데(포티우스,'페르시카 발췌'35), 이는 반역자 경호대장 아르타바노스의 친척이었던 박트리아 총독의 모반이었든가, 아니면 디오도로스가 말한 박트리아 총독으로 나가 있던 크세르크세의 셋째 아들 휘스타스페스가 불복하여 일으켰던 모반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512. 디오도로스,'역사전서',74.1. 투퀴디데스나 크테시아스는 아카이메네스의 출동에 대해 언급이 없다. [본문으로]
  513. 투.펠.I.104.1. BC465 페르시아의 왕위 교체 이후 어느 시점부터 리뷔에 왕 이나로스가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에 나섰는지 투퀴디데스는 침묵했지만, BC460에는 아이귑토스 도시들의 대부분을 반란에 참여시켜놓고 아테나이의 지원을 요청했던 것을 보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왕권 강화를 위해 속주들의 징세와 억압의 도를 높혔을 승계 이듬해부터 한 5년에 걸쳐 반란을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부추겨졌다는 투퀴디데스와는 달리 디오도로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죽음 뒤 아이귑토스 사람들이 스스로 해방을 위해 투쟁에 나섰는데, 군대를 조직해 징세를 위해 나와 있던 페르시아 사람들을 쭟아내고 이나로스를 왕으로 세우고 항쟁에 나섰다가, 차차 아이귑토스 사람들만 모인 군대에 여러 나라의 용병을 합류시켜 군대를 키웠으며, 아테나이에 지원을 요청했다고 하는데('역사전서'11.71.3-4), 이는 BC464 이후 체제를 정비한 페르시아의 진압이 거세어져 이나로스의 반란군이 용병도 모아야 했을 정도로 점점 열세에 몰리다가, 결국 페르시아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동생 아카이메니데스에게 80척의 페르시아 함대와 400,000명의 보병을 주어 진압에 나설 무렵인(포티우스,'페르시카 발췌'36) BC460에는 아테나이에 지원을 요청해야 할 정도로 열세에 빠져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본문으로]
  514. 이나로스의 사절이 아테나이 민회에 제시한 보상 내용은, 아테나이에게 아이귑토스의 지분을 주고give a share of the kingdom, 지금까지의 좋은 편의 제공보다 몇 배나 큰 호의를 보장한다grant favours many times great than good service rendered는 것이었다.(디오도로스,'역사전서'11.71.4) [본문으로]
  515. 투퀴디데스는 퀴프로스에 나가 있던 아테나이와 동맹들의 함선 200척이 아이귑토스로 갔다고(펠.I.104.2) 간단히 전하지만, 크테시아스는 이나로스의 요청에 아테나이가 40척의 함선을 카리티미데스에게 주어 아이귑토스를 돕도록 했다고 하고(포티우스,'페르시카 발췌'36), 디오도로스는 아테나이 민회가 아이귑토스와 협력하는 것이, '페르시아를 누그러트리는 데advantage to humble the Persians' 좋고, '닥쳐올 불확실한 일들에 대비하는 것against the unpredictable shiftings of Fortunes'에 좋다고 판단하여, 삼단노선 300척을 보내기로 결의했지만('역사전서',11.71.5), 실제 아이귑토스에 온 함선 수는 200척이었다.(같은 책,74.3) [본문으로]
  516. 헤로도토스는 아이귑토스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의 해골의 부식 차이를 설명하면서 아이귑토스의 파르레미스에서 이나로스와 아카이메네스가 격돌한 사실을 언급하는데(역.III.12,), 이때 아테나이 사람들의 해골을 같이 비교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나일 강 하구의 파프레미스 전투는 아테나이가 참전하기 전에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전력을 손상당한 이나로스가 아테나이의 지원을 얻어 나일 강을 장악해나가자 페르시아 군대를 멤피스에 집결시킨 아카이메네스를 아테나이와 함께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투퀴디데스는 앞의 파프레미스 전투에 대해서는 엄급이 없고, 이 멤피스 전투에 대해서만 아테나이의 활약을 단 한 줄로 기록했고(투.펠.I.104.2), 크테시아스는 아예 두 전투 모두 침묵하는 반면, 디오도로스는, 물론 투퀴디데스처럼 헤로도토스의 파프레미스 전투에 대한 언급 없이, 아카이메네스는 아이귑토스에 도착하자 바로 나일 강변에 진을 차리고 행군 뒤의 휴식과 전투 준비에 들어갔고, 아이귑토스군은 리뷔에와 아이귑토스에서 모은 아이귑토스 반군은 아테나이 지원군을 기다렸는데, 함선 200척으로 도착한 아테나이는 아이귑토스군과 페르시아 진지에 대해 전열을 정비하였고, 전투가 벌어지자 처음은 우세한 군세의 페르시아가 우세를 보였으나 아테나이가 전면의 적들을 베며 공세를 취했고, 아이귑토스군도 '한덩어리en masse'되어 전투를 이어갔는데, 다수를 잃은 페르시아군이 '흰 성城White Fortress,White Castle(이집트말로 '멤피스Memphis'이다)로 패주하였다고 기록했다.('역사전서',XI.74.1-4) [본문으로]
  517. BC459. 투퀴디데스는 할리아이 상륙군이 패퇴했다지만(펠.I.105.1), 디오도로스는 적잖은 적을 베고 이겼다고 한다.('역사전서'11.78.2) [본문으로]
  518. 아테나이는 현역병으로 20세 이상 50세 미만의 장정을 징집했고, 예비병으로 50세 이상의 장년을 훈련병으로 20세 미만의 소년을 뽑아 아티케의 경비와 방어에 복무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코린토스는 아테나이가 아이귑토스로 원정군을 보낸 사정을 잘 알고 그들이 메가라를 공격하면 아테나이가 아이기나의 포위 병력을 메가라로 옮길 것이라 판단했던 것인데(투.펠.I.105.3), 이에 아테나이는 메가라 지원에 소년병과 장년병까지 투입하는 것으로 응수했다.(투.펠.I.105.4) BC458에 일어난 이 코린토스와 메가라 사이의 전쟁에 대해 디오도로스는 소년병이나 장년병으로 언급치 않고 그저 아테나이가 용맹으로 이름난 뮈로니데스가 지휘하는 군대troops를 지원군으로 보냈고, 두 번의 거친 전투를 모두 이겼다고 한다.('역사전서'11.79.3,4) [본문으로]
  519. '장성Long Walls長城,Legs(아테나이 사람들은 이 장성이 개다리처럼 생겼다고 다리로 불렀다.)'으로 불리는 6km의 이 성벽이 계획된 것은 아테나이가 외항을 팔레론에서 페이라이에우스로 옮기면서부터로 보이는데, 플루타르코스가 키몬이 성벽의 난공사 지역 기초공사 비용을 사비로 완공했다고 한 것을 보면('키몬전'13.7) 이미 이 앞부터 조금씩 공사가 진행되어 오다가 BC458 본격적으로 축조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벌어진 타나그라 전투를 치르는 도중에도 공사를 계속해 그해 BC457에 완공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520. '...일부 아테나이 사람들이 그들의(스파르테의) 도움을 받아 민주정부와 긴 성벽들의 축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은밀히 그들에게 접근해왔던 것이다...'(투.펠.I.107.4) '...그들이(스파르테가) 자신들의 민주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의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투.펠.I.197.6) [본문으로]
  521. 투.펠.I.107.2. BC457. 헤로도토스가 크세르크세스 원정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텟살리아와 도리스에 대해 만일 텟살리아나 도리스가 헬라스동맹으로 갔다면 포키스는 페르시아에 부역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역사'VIII.30) 포키스와 텟살리아, 거기에 끼인 도리스까지 이 셋은 오랜 앙숙이었다. [본문으로]
  522. BC480 테르모퓔라이에서 전사한 레오니다스(클레오메네스의 바로 손아래 동생으로 클레오메네스가 광기 증상을 보여 축출된 BC490 승계하였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플레이스타르코스가 왕위를 올랐으나 후사가 없이 죽자, BC459 파우사니아스(클레오메네스의 셋째이자 막내 동생으로 형 클레옴브로토스가 죽은 뒤 미성년인 조카 플레이스타르코스의 섭정 자격으로 헬라스동맹군 총지휘자가 되어 플라타이아 승리를 이끌었고, 그 뒤 크세르크세스와 내통한 일로 BC470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의 아들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왕위를 승계했는데, BC457 스파르테의 도리스 구원 출병 당시 미성년이어서 클레옴브로토스(클레오메네스의 둘째 동생으로 형 레오니다스가 테르모퓔라이에서 전사한 뒤 미성년으로 왕이 된 조카 플레이스타르코스의 섭정으로 이스트모스 방벽공사를 마치고 돌아온 BC479에 죽었다.)의 아들로, BC457 미성년인 왕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섭정 자격으로 도리스 구원군의 지휘를 맡았다. [본문으로]
  523. 투퀴디데스는 도리스를 침공한 포키스를 응징하고 도리스를 구원하기 위해 거병한 스파르테가 진군 길 문제로 아테나이와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로 나아간 것으로 설명하면서 타나그라 전투 기록에 매달려 정작 스파르테가 포키스와 도리스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펠.I.107.2-4) 그러나 디오도로스는 BC458 포키스가 도리스를 침공해 도시들을 점령하자 스파르테의 니코메데스가 스파르테의 1,500명과 동맹군 10,000명으로 포키스로 출병하여 포키스를 진압하고 둘 사이의 평화를 주선한 뒤 귀로에 올랐는데('역사전서'79.4-6,디오도로스는 스파르테의 출병과 귀국을 포키스의 도리스 침공 기사와 연결했으나 스파르테의 출병은 BC457의 일이다.), 이에 대해 아테나이가 50척의 함선과 아르고스와 텟살리아를 포함한 14,000명의 연합군으로 스파르테의 귀로에 일전을 벌이기 위해 BC457 게라네이아 고원에 진을 치고 기다렸으나, 이를 알고 스파르테가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로 귀로를 잡자 아테나이 연합군이 타나그라로 내려와 저녁까지 상방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예를 들어 명예 회복을 바라는 키몬의 부족 200명이 전원 전사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전투가 잠시 소강 상태에 있을 무렵 갑자기 태도를 바꾼 테살리아가 저녁 식사를 가져오는 아테나이 보급부대를 습격하였고, 아테나이가 구원에 나서자 스파르테가 다시 공격에 나서며 전투가 이어졌지만 승부를 내지 못하고, 밤이 되어 서로 사람을 보내 4개월 간 휴전을 합의하고 전투를 끝냈다고 하고('역사전서',80.1-6), 플루타르코스 역시 델포스를 포키스의 점령에서 해방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타나그라에서 야영encamped하는 스파르테 군을 아테나이가 도발했으나 패배했다고 하는데('키몬전',17.3-6), 이 글에서는 투퀴디데스의 기록에 따랐다. [본문으로]
  524.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의 보이오티아 출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퇴로를 차단하여 타나그라에서 스파르테군과 일전을 벌일 결의를 했는데, 아테나이 사람들이 얼마나 이 일전을 중요하게 보았는가는 도편추방을 당해 나가 있던 퀴몬이 그의 부족과 함께 참전을 호소한 것과 페리클레스 쪽이 키몬의 참전은 거부하고 그의 오이네이드 부족에 대해서는 참전을 허용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플루타르코스,'키몬전'17.3-5,'페리클레스전'10.1-3) [본문으로]
  525. 투퀴디데스는 BC457 스파르테를 맞기 위해 보이오티아로 나아간 아테나이 연합군의 총지휘관에 대해 침묵할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도 페리클레스의 전쟁 주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디오도로스 역시 이때까지는 페리클레스의 전쟁 주도에 대한 언급 없이 이 당시 아테나이군 활동의 지휘관으로 코린토스의 메가라 침공을 막아낸 뮈로니데스를 언급하지만 정작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로 나아간 지휘관으로는 말하지 않고,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나이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페리클레스를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열심히 싸웠다고 한다.('페리클레스전'10.2), [본문으로]
  526. 투퀴디데스는 정확히 '62일째 되는 날'이라 했다.(펠.I.108.3) [본문으로]
  527. 디오도로스는 아테나이의 이 황급한 타나그라 점령이 스파르테의 용인 아래 전체 보이오티아의 지배권을 확보한 뒤 자체 군사력으로 아테나이를 견제하겠다고 나서는 테바이와 스파르테의 협력을 분쇄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 본다.('역사전서,81.1-4) 그리고 디오도로스는 테바이를 격퇴하고 나머지 보이오티아 도시들을 점령해 아테나이 동맹에 편입시킨 뮈로니데스의 승전을 마라톤이나 플라타이아나 다른 그 어떤 승전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라고 평가한다.(같은 책,82.1,2) [본문으로]
  528. 아이기나도 타소스처럼 3년의 농성 끝에 항복했다. [본문으로]
  529. 타나그라에서 이기고 돌아온 스파르테는 이토메 산성의 반란 헤일로타이에 대한 압박을 가속했고, 견디지 못한 반란군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 펠로폰네소스를 떠나겠다고 제의했는데, 마침 퓌토의 신탁도 살려주라는 것이어서 스파르테는 다시 펠로폰네소스로 돌아와 잡힌 자는 잡은 자의 노예가 된다는 조건으로 쫓아내며 10년에(BC464-455) 걸친 반란 진압을 끝냈다.(투.펠.I.103.1-2) [본문으로]
  530. 크세르크세스 왕의 동생 아카이메니데스의 진압 원정에 대해서 투퀴디데스도 디오도로스도 모두 침묵하는 반면, 크세르크세스의 숙부 아카이메네스의 진압 실패에 대해서 침묵하던 크테시이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스스로 출진을 원했으나 반대가 심해 대신 동생 아카이메니데스에게 80척의 함대, 400,000명의 보병부대를 주어 이나로스가 주도하는 아이귑토스 반란을 진압토록 보냈는데, 지상군은 이나로스에게 패해 페르시아군 100,000명과 아카이메니데스가 죽었고, 이나로스는 아키이메니데스의 시신을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보냈으며, 해전은 카르티미데스가 이끄는 40척의 아테나이 함대에게 50척의 페르시아 함대가 패해 20척은 나포되고 30척은 침목당했다고 한다.(포티우스,'페르시카 발췌'36) 크테시아스는 이 전투가 어느 해 어디서였는지에 언급하지 않는데, 아마 멤피스에서 포위된 숙부 아카이메네스를 구하기 위해 출전했을 것이므로 BC458 이후, 그리고 메가바조스의 출전 이전이었을 것이므로 BC456 이전, 즉 BC457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531. 투.펠.I.109.1-3 [본문으로]
  532. 투퀴디데스도 디오도로스도 메가바조스의 군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데, 크테시아스는 메가바조스가 아카이메네데스가 남긴 300,000명에 크세르크세스스가 보강해준 200,000명을 합한 500,000명에 더해 오리스코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함대 300척이 있었다고 한다.(포티우스,'페르시카 발췌',37) [본문으로]
  533. 투.펠.I.109.4,110.1 그러나, 크테시아스는, 아카이메니데스의 진압 실패 후 메가뷔(바)조스와 오리스코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육해군이 이나로스의 반군과 아테나이군을 격파했고, 부상을 입은 이나로스와 반군과 함께 살아남은 6,000여명의 아테나이군이 뷔블로스Byblos의 요새로 들어가 농성하자, 메가뷔조스가 안전을 보장하며 투항을 권유했고, 협상을 통해 이나로스와 아테나이군이 인질로 잡히고 나머지는 방면되었는데, 이 인질들은 결국 아들 아카이메니데스를 잃은 모후 아메스티스(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모후)에 의해 5년 뒤 이나로스는 책형에, 아테나이군 50명은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하며(포티우스,'페르시카 발췌',37-39, 크테시아스는 모후의 처분에 실망하여 쉬리아 총독직을 사임하고, 나머지 아테나이군 인질들을 풀어준 뒤 150,000명의 반군을 규합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같은 책,40') 투퀴디데스와는 다른 말을 하고, 디오도로스 역시 연대도 내용도 투퀴디데스와는 다른 기록을 남겼는데, 아테나이와 동맹의 함대가 퀴프로스에서 아이귑토스로 간 이듬해인 BC459, 메가바조스와 아르타바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킬리키아, 쉬리아, 포이이케를 거쳐 군대를 모은 뒤 300척의 함대와 함께 해안을 따라 아귑토스의 멤피스에 도착하여, '흰 성벽'을 장악하고 있던 아이귑토스 반군과 아테나이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해서, 격전을 피하고 서서히 조여가는 전법을 구사하면서 반군과 아테나이군이 프로소피티스 섬으로 들어가 버티자 물줄기를 바꾸어 섬을 뭍으로 바꾸어버렸고, 아테나이는 땅에 얹힌 함선들을 페르시아가 쓰지 못하도록 모두 불로 태워 없애는 한편 헬라스를 구하기 위해 맞섰던 테르모퓔라이의 용사들처럼 불퇴전의 결의로 버티자, 페르시아가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피해 퇴로를 열어주었고, 아테나이군은 안전하게 리뷔에와 퀴레네를 거쳐 기적처럼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역사전서',77.1-5) [본문으로]
  534. 아테나이와 동맹들은 BC457 이후 너무나 많은 곳에 전선을 펼치고 있어, 프로스피티스 섬에 1년6개월이나 포위되어 있는 200척의 함선과 40,000명의 군대를 구원하는 일에 겨우 50척에 10,000명을 BC454에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535. 박광순은, '대부대 가운데 소수만이 리비아를 통해 키레네로 도망쳐 살아 남았고, 대부분은 섬멸되었다.'로 번역했고, 천병희는, '그토록 많던 군사들 가운데 소수만이 리뷔에를 통과해 퀴레네로 도망쳐 목숨을 구했고, 대부분은 죽었다.'고 번역했고, 크롤리Richard Crawley는, 'Of all that large host a few travelling through Libya reached Cyrene in safety, bur most of them perished.'라 번역했고, 홉스Thomas Hobbes는, 'and few of many passing through Africa saved themselves in Cyrene, but the most perished.'라 번역했고, 조웨트Benjamin Jowett는, 'A few survivors of their great army found their way through libya to cyrene, by far the larger number perished.'라 번역했는데, 이 글에서 특히 살아서 귀환한 사람을 '두서너'라고 한정한 것은 나머지의 전멸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투퀴디데스 역시 그것으로 대규모 아이귑토스 원정이 끝났다고 말한다.(펠.I.110.4) [본문으로]
  536. 처음 퀴프로스에서 간 200척의 함선과 최후에 도착한 50척의 함선을 포함 모두 250척의 함선이 파괴되었으며, 함선 1척의 승선 인원이 200명 정도였으므로 총 50,000명의 군사, 선원, 노꾼들이 죽었다. [본문으로]
  537. 그러나 아이귑토스는 120여년이 지난 BC332, 헬라스의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정복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이귑토스를 정복하고 새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워 수도로 삼게 하고 클레오메네스를 대리자로 아이귑토스를 통치케 한 뒤 BC331 다음 원정을 위해 포이니케로 떠났는데, BC323 그가 죽은 후 '지역 사령관들 사이의 분쟁,Wars of the Diadochi(BC322-301)'을 치르는 가운데 BC305 프톨레미Ptolemy가 '구원자Soter,Saviour' 파라오가 되면서 아이귑토스에서 헬라스인 왕조인 프톨레미 왕조를 열었고, 프톨레미 왕조는 BC30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로마에 멸망당했다. [본문으로]
  538. 투.펠.I.110.2,3. [본문으로]
  539. 실제 BC490 다레이오스가 페르시아 함대를 이끌고 헬라스 침공해 왔을 때, 선봉장 다티스가 제일 먼저 낙소스를 점령하고 다음으로 델로스 섬에 들러 신전에 300탈라톤(약 8톤)의 유향을 태워 올린 다음 에우보이아 섬의 에레트리아로 갔다.(헤로도토스,'역사'VI.97) [본문으로]
  540. BC454 아이귑토스 지원군의 전멸 이후 곧바로 집행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541. 아테나이의 제국 건설 진행을 요약 설명하는 투퀴디데스도 아테나이의 델로스 금고 이동에 대해 아직까지 침묵하고 있다. [본문으로]
  542. BC454의 일이다.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1,000명의 군대를 데리고 페가이로 가서 거기 정박해 있던 아테나이 함대에 합류했다면서 처음으로 페리클레스를 그의 역사에 등장시키고(펠.I.111.2), 크테시아스는 '페르시카'의 남은 글에서 페리클레스에 대해 침묵하고 있고, 디오도로스 역시 아테나이가 이 해에 (처음?) 장군으로 뽑힌 페리클레스에게 50척의 함선에 1,000명의 중무장보병을 주어 펠로폰네소스로 출병시켰다며 그의 역사에 처음 페리클레스를 소개하고 있다.('역사전서'XI.85.1) [본문으로]
  543. 키몬이 BC461 도편추방되었으므로 BC451에는 아테나이에 돌아와 있었을 것이지만, 플루타르코스는 타나그라 패배 이후 키몬을 기리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페리클레스가 민회에 키몬의 소환을 요청했고 아테나이 사람들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돌아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키몬전',17.4-6) [본문으로]
  544.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를 말하면서 키몬을 28번이나 언급할 정도로 페리클레스에게 키몬은 반면이든 어떻든 중요한 길잡이였음에 틀림없어 보인다.(플루타르코스가 키몬을 말할 때는 페리클레스가 5번 언급되었다.) [본문으로]
  545. 투퀴디데스는 BC450에 맺어진 이 5년 평화조약 기사에 이어 바로 키몬의 퀴프로스 출정을 언급하는데, 디오도로스는 BC450 평화협정 체결 후 BC449에 출정한 것으로 기록했고('역사전서',XI.86.1,XII.3.2), 플루타르코스는 타나그라 전투에 참전한 키몬 일족이 모두 전사하는 헌신에 감동한 아테나이 사람들이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의 공세를 염려하며 도편추방된 키몬을 아쉬워하기 시작하자, 페리클레스가 이듬해(BC456) 봄에 키몬의 소환을 발의했고, 돌아온 키몬이 주선하여 바로 평화협정을 맺었고, 5년의 평화 기간을 보내며(BC455-451) 전쟁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해진 아테나이 사람들의 패기를 헬라스 안에서 싸움이 아니라, 페르시아와의 싸움에 돌리기 위해 퀴프로스 원정에 나섰다고 했다.('키몬전',17.3-18.2) [본문으로]
  546. 투퀴디데스가 키티온 공략에서 키몬이 죽고(by the death of Cimon) 전력도 부족해(by scarcity of provisions(천병희는 군량이 떨어졌다고 번역했지만 군량이라면 가까운 소아시아의 동맹도시들로부터 얼마든지 보급받을 수 있었을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4,000명의 중무장보병 중 아이귑토스로 간 1,200명이 빠지자 포위공격의 전력이 약해진 때문으로 보았다.) 철수해야 했다고 아주 간단히, 전투의 내용이나 키몬이 죽은 사정에 대한 언급 없이, 기록했기 때문에 BC450 출정했던 해에 전사했다는 것으로 읽을 수밖에 없으나, 디오도로스는 키몬이 출정 둘째 해인 BC448 퀴프로스에서 '병사died of an illness'했다고 하고, 플루타르코스는 출정한 해(BC450)에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일부는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병사했는데('died of sicknees, as most say'), 아테나이로 돌아가기까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해 한 달이나 숨겼다고 한다.('키몬전'19.1) [본문으로]
  547. 퀴프로스 섬의 동쪽 끝 살라미스. [본문으로]
  548. 포이니케, 퀴프로스, 그리고 킬리키아의 연합함대.(투.펠.I.112.4) [본문으로]
  549. 투퀴디데스는 키몬이 죽고 치른 아테나이 함대의 해전과 지상전의 내용이나 아이귑토스로 간 60척의 활동에 대해서는 말이 없는데(펠.I.112.3-4), 디오도로스는 아테나이가 아이귑토스의 프로소피티스에서 함선 모두를 잃은 후 얼마되지 않아(after a Short time, 즉 BC453과 BC450 사이) 소아시아의 헬라스 사람들을 위해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하여 키몬에게 뛰어난 인원들과 풍부한 물자를 가진 200척의 함대를 주어 퀴프로스로 보냈고, 이때 페르시아는 아르타바조스가 이끄는 300척의 함대를 퀴프로스에, 메가뷔조스가 이끄는 300,000명의 보병은 킬리키에, 배치해놓고 있었는데(디오도로스와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이들은 페르시아의 아이귑토스 반란 진압군이었는데, 이때 아이귑토스를 떠나 퀴프로스와 인근 킬리키아에 집결해 있었으므로 투퀴디데스가 말한 아이귑토스에 60척의 지원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어서 디오도로스는 언급치 않는다), 출정 첫 해 키몬은 키티온과 마리온의 공략에만 나서 함락된 주민들의 포무에 집중했고, 킬리키아와 포이니케로 이루어진 페르시아 함대가 공격해오자 많은 함선을 침몰시키고 100척을 나포했으며, 도망치는 포이니케 함선을 포이니케까지 쫓아 몰아냈고, 나머지 킬리키아의 메가뷔조스의 진지로 도망친 함선들을 따라가서 상륙한 뒤 전투를 벌여 이기고 퀴프로스로 돌아왔고, 이듬해(BC448) 키몬은 퀴프로스 섬의 도시들을 복속시켜나가기로 하고, 그들 가운 페르시아 군 수비대가 가장 크고 보급물자도 풍부하며 농성무기도 많이 갖춘 살라미스를 골라 포위공격에 나섰고, 연일 공격과 방어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헬라스와 강화해도 좋다고 지시하자 아르타바조스와 메기뷔조스는 아테나이에 사절을 보내 협상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고(아테나이는 칼리아스가 협상을 주도하여, 아시아의 헬라스 도시들은 자주권을 가지며, 페르시아 총독들은 해변까지 3일 여행 거리 너머로는 나갈 수 없고, 페르시아 전함들은 뤼키아로는 파셀리스, 흑해 쪽으로는 퀴아니아 암초 안쪽으로 항해할 수 없으며, 이런 조건들이 지켜지는 한 아테나이는 페르시아 왕이 다스리는 지역에 군대를 보낼 수 없다.), 이 과정에서 키몬이 병을 얻어 죽었고, 아테나이는 퀴프로스에 철수했다며('역사전서',XI.XII.1.1-4.6) 투퀴디데스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플루타르코스는 펠로폰네소스 도시들과 5년 화평을 이룬 키몬이 군사 단련과 전리품 획득을 목표로 200척의 함대로 퀴프로스와 아이귑토스 원정에 나섰는데, 먼저 퀴프로스를 친 다음 아이귑토스로 갈 요량으로 60척의 선발대를 아이귑토스로 보내고 나머지로 키티온을 공격하다 (부상을 입고 생긴) 병에 걸려 죽었고, 이 이후 아테나이 함대는 키몬의 죽음을 한 달이나 감추며 무사히 돌아갔다고 한다.('키몬전',18.2-19.1) [본문으로]
  550. 플루타르코스,'키몬전',18.1 [본문으로]
  551. 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22.1 [본문으로]
  552. 플.페.22.1 [본문으로]
  553. 전선戰線의 확대를 견디지 못한 아테나이가 5년 휴전을 먼저 제의할 수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554. 아테나이가 공공업무 종사자에게 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은 [본문으로]
  555. 판아테나이 축제에 노래 경연이 시작된 것은 5년 평화 시기인 BC [본문으로]
  556. 이 새로운 파르테논은 메가라가 동맹을 이탈하여 또 한번 아테나이가 상심하던 BC447 착공되었다.(파르테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 글 '아리스토파네스의 변명',1.도시와 시인, 주34. 참조) [본문으로]
  557. BC449 [본문으로]
  558. 투퀴디데스의 표현대로(펠.I.112.5) 소위 '신성神聖 전쟁Sacred War'으로 불리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운영과 신탁 사업권을 둘러싼 이웃간의 이 전쟁은, 처음 델포이의 이웃 키르라Kirrha가 자주 순례자들에 대해 강도 짓을 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 '델포이 인보隣保동맹Delphoi Amphiktyonia,The Delphic Amphictyony,델포이의 신성을 보호하기 위해 맺은 델포이 이웃들 동맹'이 키르라를 상대로 10년에 걸쳐(BC595-585) 전쟁을 벌인 끝에 도시의 물길을 끊었다 다시 터주면서 독을 타 마침내 키르라를 절멸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1차 신성 전쟁First Sacred War'이라 부르고, 다음 '2차 신성 전쟁'은 타나그라에서 패한 아테나이가 BC457 보이오티아의 맹주가 되려는 테바이를 견제하기 위해 보이오티아와 포키스를 완전 장악했을 때 델포이를 인보동맹에서 떼어 포키스에게 관리토록 넘긴 이후, BC449 스파르테가 출정하여 델포이를 해방시켰고, BC448에 아테나이가 페리클레스를 보내 델포이를 다시 포키스에게 넘긴 것까지의 두 해에 걸친 스파르테와 아테나이 간의 간접 전쟁을 가리키는데, 이 2차 신성 전쟁이 바로 투퀴디데스가 언급하는 전쟁이다. 이 이후로 포키스가 델포이를 계속 지배하다가 BC421 '니시아스의 평화'의 한 조건으로 다시 델포이 사람들의 독립적인 도시가 되었다. 한 세기 가까이 지나 신성 전쟁이 또 일어났는데, 1차처럼 또 10년에 걸친(BC356-346) 이 '3차 신성 전쟁은' 테바이를 위시한 인근의 많은 도시들이 연합하여 전쟁을 벌이면서 앞의 두 번과는 양상이 사뭇 달라져 서로 많은 희생을 낸 큰 전쟁이 되었고, 결국 마케도니아의 참전으로 끝을 보아 마케도니아가 헬라스 도시들에게 그들의 힘을 확실히 드러낸 전쟁으로 되었다. 처음 헬라스에 대한 주도권을 쥐려는 테바이가 주도한 인보동맹이 BC357 포키스에게 델포이 신전에 부속된 신성한 땅에 경작하는 불경을 저질렀다며 벌금을 부과하자 포키스가 반발한 것이 발단이 되었는데, [본문으로]
  559. 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21.1,2 [본문으로]
  560.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테군과 싸워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플레이스토아낙스 왕의 아티케 출정에 스파르테의 감독관들이 붙인 군사고문들 가운데 왕의 신임이 두터운 클레안드리다스를 아테나이의 공금 10탈란톤으로 매수하여(이 매수 행위에 대해 플루타르코스는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의 글이라며 페리클레스가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공금으로 매년 10탈란톤의 돈으로 스파르테 지도자들을 매수했고, 아테나이 사람들도 페리클레스에게 용처를 묻지 않고 비용을 승인해주었다고 한다) 펠로폰네소스군이 아티케에서 철군하도록 했는데, 이에 스파르테가 이 철군에 대한 책임을 물어 플레이스토아낙스 왕에게 도저히 납부할 수 없을 만큼 큰 벌금을 부과하여 왕이 스파르테를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축출했고, 미리 도망친 클레안드리다스에게는 사형을 선고했다고 한다.(페리클레스전'22.2-23.1) [본문으로]
  561. 디오도로스,'역사전서',XII.22.2 [본문으로]
  562. 투퀴디데스는 원정군의 규모나 헤스티아이아 주민을 소거한 뒤 식민한 이유에 대해 침묵하였으나,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가 50척의 범선에 5,000명의 중무자보병을 태워 에우보이아로 다시 가서, 섬의 도시들을 복속시켰는데, 특히 칼키스에서는 칼키스의 힙포보타이(Hippobotae,명망 높고 부자인 기사 계급)들을 내쫓았고, 아티케의 배들을 포획하여 승무원들을 죽였던 헤스티아아에 대해서는 그 주민들을 모두 소거하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켜 아테나이의 식민도시로 만들었다고 한다.('페리클레스전'23.2) [본문으로]
  563. BC445. 투.펠.I.115.1, 디오도로스,'역사전서',XII.7.1, 플.페.24.1 [본문으로]
  564. BC454 이집트 원정군이 전멸한 뒤, 델로스에서 분담금 금고를 아크로폴리스로 옮겨 올 때만 해도 아테나이 사람들은 물론 동맹들까지 급박한 상황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이후 페리클레스가 그 분담금을 아테나이의 공금인 양 아테나이의 공무에 쓰다가 점점 공공 공사비로 확대했고, BC447부터는 파르테논 신축공사비까지 이 분담금에서 지출되자 동맹에서는 물론 아테나이 내부에서도 이의가 제기되기 시작했고, BC444 30년 평화협정 이듬해부터는 키몬의 인척으로 키몬 사후 귀족들을 대변하고 나선 페리클레스의 정적 투퀴디데스가 이것을 문제 삼아 본격적으로 페리클레스 공격에 나섰는데, 투퀴디데스는 금고를 아테나이로 옮긴 것부터 잘못되었고, 대페르시아 전쟁 기금으로 아테나이의 공무에 쓰는 것도 모자라 아테나이를 치장하는 데 1,000탈라톤이나 나간 것은 '부도덕한 사용profiligacy'이어서, 이 때문에 동맹들이 모욕감으로(분담금이 아니라 조공이 된다) 격분하고 있다고 질책하면서, 마치 아테나이가 한 독재자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다고 페리클레스를 공격했고, 페리클레스는 동맹들은 대페르시아 전쟁에 그들의 시민들의 희생 없이 그저 돈만 냈기 때문에(사모스나 키오스나 레스보스처럼 독자 함대를 가지고 아테나이 함대에 합류하는 동맹들은 따로 분담금을 내지 않았다) 아테나이가 페르시아를 막아주고 있는 한 그 돈을 아테나이가 어떻게 쓰는지 그들에게 보고할 필요도 의무도 없고, 그 돈은 낸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값을 한 사람의 것이므로 아테나이가 페르시아로부터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주는 데 쓰고 남은 돈으로 아테나이를 위해 쓰는 것은 결코 '부도덕한 사용profiligacy'이 아니라고 반박했는데, 이 이후에도 투퀴디데스의 공격이 그치지 않자 BC442 아테나이 사람들은 투퀴디데스를 도편추방해버렸고, 이후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제일 시민The Greatest Citizen'이 되어 15년 연속 장군으로 선출되는 명실상부한 '페리클레스 시대'를 열었다.(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11.1,12.1-4,14.2,16.3) [본문으로]
  565. 플루타르코스는 텔레클레이데스를 인용해 페리클레스의 권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도시의 세금도 원하는 대로 부과하고, 돌벽도 마음대로 쌓았다 허물고, 조약도 전쟁도 평화도 부도 심지어 행운까지도 마음대로 한다.'('페리클레스전'16.2, 텔레클레이데스의 이름을 알 수 없는 희극 작품 중의 한 대사라고 하는데(Bill Thayer의 주석36), 당시 희극시인들이 페리클레스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희극을 많이 올렸기 때문에 페리클레스가 개인을 실명으로 비난하고 풍자하는 희극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폐기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566.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간의 전쟁'에서 헬라스 세계의 시작에서부터 30년 평화조약이 파기되기까지의 이야기로(펠.I.1.1-23.6) 그가 쓰고자 하는 책의 주제와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열쇠로 해군을 제시하고 있고, 이 해군은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열쇠가 된다. [본문으로]
  567. BC440 [본문으로]
  568. 투퀴디데스와 플루타르코스는 모반 주동자 가운데 50명과 그들의 어린 아들 50명을(펠.I.115.3,페.25.1,), 디오도로스는 각각 80명씩을(역.XII.27.2) 인질로 잡아 렘노스 섬에 가두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69. 투.펠.I.115.4-5. 디오도로스는 페리클레스 철수 후 사모스에서는 민주정파와 귀족정파 간에 내분civil discord이 일어났고, 이때 귀족정파가 페르시아의 사르데이스 총독 핏수트네스(투퀴디데스는 총독 휘스타스페스의 아들이라 한다)에게서 700명의 군대를 얻어 와 섬을 장악하여 반대파들을 섬에서 쫓아내고 인질을 구출한 뒤 아테나이를 적으로 규정하고 나섰다고 하고('역사전서'XII.27.3),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에게 인질들 몸값으로 금화 만 잎을 제의했던 페르시아 장군 핏수트네스가 렘노스에서 인질들을 구출해주고 전쟁 비용도 대주어equipped 사모스의 귀족정파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페리클레스전'25.3) [본문으로]
  570. 아테나이는 44척의 함대와(본디 60척으로 출발하였으나 16척을 나눠 일부는 포이니케 함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카리아 지방의 바다로 보냈고, 일부는 지원군 모집을 위해 키오스와 레스보스로 보냈다.투.펠,I.116.1) 페리클레스를 포함하여 장군 10명을 모두 동원하여 사모스로 갔고, 사모스는 밀레토스를 치기 위해 보낸 50척의 삼다노선과 20척의 수송선을 소환하여, 이들이 사모스 섬 근처 트라키아 섬 앞바다에서 만나 해전을 벌여 아테나이가 이겼고, 이어서 도착한 지원군 아테나이 함선 40척과 키오스와 레스보스에서 온 25척의 병력과 함께 상륙하여 지상군을 물리치고 사모스 도시를 삥 둘러 방벽을 쌓아 가두고 함선들로 바다도 봉쇄했는데, 5척의 함선을 가지고 사모스의 스테사고라스가 포이니케의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는 사실을 안 페리클레스가 60척을 가지고(봉쇄를 위한 함선들만 남기고 나머지 함선들은 모두 그들의 도시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포이니케 함대를 막으러 카리아의 카우노스 쪽으로 나간 틈을 이용해 사모스가 초계 중인 아테나이 함선과 진지를 기습하여 페리클레스가 돌아올 때까지14일이나 사모스 인근 해역을 장악하면서 보급 문제를 해결했고, 페리클레스의 60척과 지원차 다시 돌아온 아테나이 60척 키오스와 레스보스의 30척, 모두150척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성벽 안으로들어가 논성에 돌입했고, 아홉 달을 버티다 항복했다.(투.펠.I.116.2-117.1-3) 디오도로스와 플루타르코스도 대동소이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엘리아학파이자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로 알려진 철학자 밀렛소스Milssos가 사모스군의 장군으로 지휘하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그가 페리클레스를 한차례 이겼다는 것이고(플.페.26.2-3), 아테나이에서는 비극시인 소포클레스가 장군들 가운데 한 명으로 참전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571.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200탈란톤이다.('역사전서XII.28.3) [본문으로]
  572. 낙소스는 아무런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혼자 힘으로 3년을 버텼고, 타소스는 스파르테의 지원을 약속받았으나 지진으로 스파르테가 지원에 나서지 못해 3년만에 항복했고, 아이기나는 코린토스를 위시한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3년 뒤 항복했다. [본문으로]
  573. 투.펠.I.40.5,41.5 [본문으로]
  574. 디오도로스,'역사전서'XII.28.3,'...'숫양ram'과 '자라tortoise'라 불리는 공성 기계를 제일 처음 제작했다...'(성벽을 부딪는 부분은 양뿔처럼 만들고, 성벽에서의 공격을 피해 그 위를 자라의 등처럼 가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세계 최초라는 디오도로스의 언급에 대해 주석가는 이보다 6-7세기 앞서 앗시리아 사람들이 공성기를 만들었었다고 한다.) 이 공성기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언급이 없고, 플루타르코스는 기계 자체에 대한 설명 없이 에포로스의 말을 빌려 공성기라는 새로운 기계를 아르테몬이 만들었다면서 아울러 헤리클레데스 폰티쿠스의가 아르몬은 수 세대 이전 사람이라 반박한 내용도 전한다.('페리클레스전',27.3-4) [본문으로]
  575. 투퀴디데스와 디오도로스는 침묵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사모스의 비극시인 두리스Duris를 인용하여, '아테나이군이 사모스의 장군들과 병사들을 멜레토스의 광장으로 끌고가서 열흘이나 기둥에 묶어두어 반죽음에 이르자 몽둥이로 머리를 쳐 죽였다'고 하면서, 이런 기록이 투퀴디데스, 에포로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기록에는 없는 것을 보아, 두리스가 사모스 사람이라 아테나이에 대한 증오로 과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페리클레스전',28.1-3) [본문으로]
  576. 70척의 사모스 함대가 44척의 페리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나이 함대에게 많은 피해를 입지 않고 패한 뒤 나중 사모스 독자 함대가 아니라 아테나이 함대로 편입되었던 것도 민주정을 지지했을 사모스 노꾼들의 소극적인 임전 태도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577.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의 동맹들이 일으킨 반란을 다루면서 낙소스의 경우 단 두 줄로(펠.I.98.4,낙소스 단독 탈퇴), 타소스의 경우 단 세 줄로(펠.I.100.2,101.1,스파르테의 도움을 바랐으나 얻지 못했다.), 아이기나의 경우 단 다섯 줄로(펠.I.105.2-4,코린토스 등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지원군이 참전했다) 기록한 반면, 사모스의 경우 모두 24줄로(펠.I.115.2-117.3) 상세하게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권두의 케르퀴라 사건 등 '당시의 전쟁(투퀴디데스는 현재 사가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 일컫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의 전쟁'을 '당시의 전쟁the present war'라 불렀다.)의 원인이 된 사건들과 이어가고 있는데, 이 가운데, 그가 별도로 주목하는 낌새를 보이지는 않지만, 사모스 섬 내부의 정치 체제를 둘러싼 분열의 정황을 전하고 있어, 향후 아테나이가 다른 도시들의 정치 체제를 둘러싼 내분에 민주정을 주장하는 그런 도시들의 민중들 입장에 동조하고 지원하는 개입을 통해 제국의 확장과 안정을 도모하므로써 스파르테나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었음을 밝히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578. BC435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기 이태 전이다. [본문으로]
  579. 오늘날의 코르푸Corfu 섬. 옛 그리스어로는 케르퀴라Kerkyra 혹은 코르퀴라Korkyra. [본문으로]
  580. 이런 목적으로 코린토스와 케르퀴라가 세운 도시가 바로 '에피담노스Epidamnos'(오늘날 알바니아의 두레스Durres)이다. 에피담노스는 케르퀴라와 코린토스가 아드리아스 바다 동쪽 연안의 이어족들과 교역을 위해 이오니오스 만 오른쪽에, 일뤼리콘인에 속하는 타울라티오이족의 땅에, 연 식민도시였다. [본문으로]
  581. 이들은 아테나이 민회에 나와 각자 주장과 반론을 제기했는데, 먼저 케르퀴라가, 1)비동맹을 고수하여 코린토스와의 해전도 혼자 힘으로 승리했지만, 코린토스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지원을 받아 공격하고 있어 고립에서 벗어나 아테나이의 동맹이 되고자 하며, 2)아테나이에 버금가는 해군력을 가진 케르퀴라와 동맹을 맺을 경우 아테나이는 명성을 얻고 전력을 강화하게 되지만, 반대의 경우 케르퀴라의 전력이 코린토스를 통해 아테나이를 두려워하여 전쟁을 원하는 스파르테의(투퀴디데스는 이것을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주요 요인을 꼽았다(펠.I.246) 전력으로 바뀌게 될 것이며, 3)코린토스의 식민도시이긴 해도 비동맹인 케르퀴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 30년 평화조약을 위빈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고(투.펠.I.32.1-36.3), 이에 코린토스는, 1)케르퀴라가 비동맹이었던 것은 선의가 아니라 많은 선박들이 기항한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저지르는 악행을 자기들끼리 하는 재판으로 감추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고, 2)에피담노스의 도움 요청을 외면하던 케르퀴라가 코린토스가 지원에 나서자 인근의 이어족 일뤼리콘까지 동원해 에피담노스를 점령하고 나서 중재를 요청한 것은(중재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디오도로스는 케르퀴라가 에피담노스 점령 후 종주권 문제를 전쟁이 아닌 중재로 해결하자고 했다고 한다.('역사전서',XII.30.5)) 어불성설이라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그 다음 바로 아테나이에게 동맹을 제의하고 나서는 것은 아테나이에게 공범자가 되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3)사모스가 아테나이에 반기를 들었을 때 코린토스가 아테나이에게 동맹의 반란을 응징할 권리가 있다며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사모스 지원을 반대하여 무산시켰듯이 아테나이도 모母도시 코린토스를 배반한 케르퀴라와 동맹을 맺지 않기를 바란다며, 아테나이의 지원을 받는 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전쟁은 자연히 코린토스와 아테나이의 전쟁이 될 것이므로 동맹을 맺지 않는 것이 순리하고 반론했다.(같은 책,I.37.1-43.4) [본문으로]
  582. 케르퀴라와 코린토스가 이어족 일뤼리콘 지역의 교두보로 세운 에피담노스는 원주민들의 잦은 침공과 내부의 귀족 평민 간 권력투쟁으로 피폐해지고 있는 판에, 귀족들이 일뤼리콘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잡은 평민들을 축출하자, 평민들이 모도시 케르퀴라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반응이 없어 종주도시인 코린토스에 중재를 요청했고, 코린토스는 페르시아 침공 때 빠져 있었던 덕분에 섬의 부와 군사력이 강성해지자 오만해져 모도시 코린토스에 대해서도 방자하게 구는 케르퀴라를 응징하는 기분으로 군사를 보냈으나 케르퀴라가 일뤼리콘까지 끌어들이며 오히려 에피담노스를 점령한 뒤, 지원하러 가던 코린토스 함대를 레우킴메에서 격파하고, 코린토스를 도운 레우카스와 엘리스까지 공격했고, 이에 자존심 상한 코린토스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합세하여 응징에 나설 기세를 보이자 케르퀴라가 아테나이의 지원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투.펠.I.24.1-31.2, 상세한 마찰 내용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4.도시의 불화,4.17-18 참조.) 디오도로스 역시 마찰의 내용을 대동소이하게 전하면서, 특이하게도 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마찰을 그 당시 사람들은 '코린토스 전쟁'이라 불렀다고 하고(...the 'Corinthian War', as it has been called,...), 그것이 BC438 코린토스가 에피담노스에 수비대와 이주자들을 보내자 케르퀴라가 50척의 함대를 보내 섬을 점령한 것, 그리고 이듬해인 BC437 70척의 코린토스 함대와 80척의 케르퀴라 함대가 해전을 벌여 케르퀴라가 이겼고(투퀴디데스가 말하는 레우킴메 해전에서는 코린토스 함대가 75척이었고 그중 15척이 파괴되었다는 걸 제외하면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이후 코린토스가 해군을 증강하면서 BC435 케르퀴라가 동맹을 요청하는, 그리고 코린토스도 동맹을 거부하라는 사절을 아테나이에 보냈고, 결국 아테나이의 지원을 받은 케르퀴라가 이긴 것까지라고(연대는 다르나 투퀴디데스의 쉬보타 해전과 대동소이하게 전한다) 설명한다.('역사전서'XII.30.2-5,31.2,32.1-3,33.1-34.1)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디오도로스가 말하는 그 시대 사람들이 불렀다는 '코린토스 전쟁'에 대해서는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고, 대신, '코린토스 전쟁Corinthian War'이란 이름을 BC395-387 스파르테를 상대로 코린토스, 테바이, 아르고스, 그리고 아테나이 연합이 벌인 전쟁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본문으로]
  583. 일반적으로 동맹이라 하면 공수동맹으로, 어느 한쪽이 공격을 하든 공격을 당하여 전쟁에 돌입하면 자동적으로 양쪽이 모두 개입되는 것이었는데, 아테나이는 케르퀴라의 공격 행위에 자동적으로 개입되어 30년 평화조약을 위반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케르퀴라가 공격당할 때만 자동 개입하는 방위조약을 내세웠지만, 펠로폰네소스 편에서 보면 잘못을 저지런 케르퀴라를 응징하는 것을 막는 아테나이의 행위는 30년 평화조약 위반인 것이다. [본문으로]
  584.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한 해 전인 BC433 케르퀴라 섬 근처 쉬보타 섬 앞에서 벌어진 이 해전은 투퀴디데스가 헬라스 사람들끼리의 해전 중 가장 큰 규모였다고 했을 만큼 코린토스의 150척(펠로폰네소스 연합함대로 엘리스 10척, 메가라 12척, 레우카스10척, 암프라키아 27척, 아낙토리온 1척, 그리고 코린토스 90척이었다)과, 케르퀴라의 110척에 아테나이의 10척을 더한 120척이 맞붙은 해전으로, 코린토스는 30척 케르퀴라는 70척의 함선이 파괴되고 쌍방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투.펠.I.45.1-54.2) [본문으로]
  585. 코린토스는 노예 800명을 포로로 잡아 바로 노예로 팔았고, 잡힌 케르퀴라 사람들 250명이 모두 유력인사라는 것을 알고도 몸값을 받는 대신 코린토스 편으로 만들기 위해 정중히 억류시켰는데(투.펠.I.55.1), 나중 이들이 케르퀴로 돌아가 정권 탈취를 기도하면서 섬은 아테나이와 코린토스의 외세를 등에 업은 내전으로 돌입했고, 그 내전으로 많은 인명을 잃은 케르퀴라는 두 번 다시 강성한 도시를 이룰 수 없었다. [본문으로]
  586. 마케도니아는 아테나이와 우호적이었으나, 아테나이가 마케도니아 왕 페르딕카스의 적이자 동생들인 필립포스와 데르다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이에 반발한 페르딕카스가 코린토스와 스파르테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인근 칼키디케와 봇티아에게 반란을 촉구하고 나오자, 이를 응징하고 다른 도시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아테나이가 마케도니아에 파병한 것이다.(투,펠.I.57.1-6) [본문으로]
  587. 스파르테는 비슷한 언질을 타소스에게도 주었으나 지진 때문에 지키지 못해 타소스가 아테나이에 항복하고 말았는데,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의 약점이 앗티케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아테나이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페리클레스는 앗티케의 집들을 모두 태워버리고 싶다고 토로한 적이 있었다. [본문으로]
  588. 디오도로스나 플루타르코스는 아리스테우스Aristeus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나, 투퀴디데스는 아리스테우스를(레우킴메 해전에서 패한 코린토스 함대 지휘관 아리스테우스와는 동명이인) 포테이다이아의 변함없는 친구이고, 코린토스의 지원병들도 그를 좋아해 원정대로 나섰다고 (펠.I.60.2), 그에 대해 설명한다. [본문으로]
  589. 아테나이는 페르딕카스와 내키지 않는 동맹을 맺고, 군대를 포테이다이아로 돌렸으나(투.펠.I.61.3), 페르딕카스는 바로 동맹을 깨고 이올라스오스를 자신의 대리로 200명의 기병들과 함께 아리스테우스 에게로 보냈는데(같은 책,62.2), 페르딕카스가 동맹을 깬 것은 그의 적이자 아우인 필립포스가 파우사니아스와 함께 600명의 기병을 데리고 아테나이군에 합류한 사실을(같은 책,61.4) 알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590. BC432 올륀토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리스테우스가 이끄는 코린토스군은 아테나이군을 멀리까지 쫓아냈으나, 포테이다이아와 다른 펠로폰네소스 지원군 쪽이 패퇴하여 결국 아리스테우스의 코린토스군도 포테이다이아 성안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는데, 아테나이는 장군 칼리아스와 150명의 안테나이군이, 포테이다이아와 동맹군에서는 300명이 전사했다.(투.펠.I.62.5-63.3.) 디오도로스 역시 비슷한 전투 장면을 그려보이나, 올륀티아 지협의 전투가 쉬보타 해전(디오도로스는 이 해전 역시 BC435의 일로 기록했다) 이듬해인 BC434의 일로 기록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포테이다이아 전투에 다같이 참가한 소크라테스의 일화를 알키비아데스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데(219e-220e), 그 일화가 이 전투에서의 일이었다면 알키비아데스는 열여덟으로 처음 징집되어 기마병으로, 스무 살이 많은 소크라테스는 서른여덟의 중무장보병이었을 것이지만, 아테나이의 포테이다이아 포위공격은 이 이후에도 3년을 넘게 이어졌었고, 투퀴디데스가 이 전투에서 기병은 싸우지 않았다 하므로(펠.I.63.2) 알키비아데스가 다칠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의 일은 아닐 것이다. [본문으로]
  591. 투.펠.I.68.1-71.7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테 사람들 앞에 선 코린토스 사절의 입을 빌려, 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헬라스 내부의 대전을 야기한 중요한 요인이라 믿는,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에 대한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상반된 태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먼저, 1)스파르테가 자기들 정체constitution와 사회 안정social order에 자만하여, 외교에 무능하고, 동맹도 잘 챙기지 않는 사이, 아테나이는 자기들 도시를 요새화한 다음, 펠로폰네소스 동맹도시들을 종속시켰고, 또 시키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케르퀴라와 포테이다이아를 예로 든다) 지적하면서, 2)이는 아테나이가 그들에게 예속된 도시들의 자유를 유보시키고 있을 때, '헬라스의 해방자Liberator of Hellas'라는 스파르테는 이것을 나서서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의 동맹들의 자유마져 유보시키고 있는 작금에도, 그것을 막을 힘을 쓰지 않고 수수방관하며, 해방자라는 명성만 누리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밝힌 다음, 이 모두는, 3)아테나이가 진취적이고, 계획을 세운 뒤 실행에 민첩한 반면, 스파르테는 보수적이며, 창의력이 모자란 데다 실행의 달성율도 떨어지고, 스파르테가 능력 이하로 행동하며, 상식도 불신하고, 역경이 지속될까 비관하며, 주춤거리고, 집에 틀어박혀 집을 비우면 가진 것조차 잃을까 염려하는 동안, 아테나이는 능력 이상으로 저돌적이고, 모험을 감행하며, 역경에도 낙천적이라 주저함 없이 바깥으로 나가 무언가 얻으려 하고, 4)아테나이가 적을 만나 이기면 멀리 쫓고, 지면 조금만 물러나며, 자신의 지성을 나라를 위해 쓰기 위해 가꾸고, 그 몸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바치며, 축제도 모르고 일만 하는, 한마디로 자신도 가만 있지 못하고 남들도 가만 버려두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스파르테는, (지성을 소홀히하며 몸을 가꾸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들도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이 공정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592. BC432 아테나이는 인근 도시 메가라에 대해 오늘날 가하는 경제제제 조치와 같은 성격의 소위, '메가라 포고Megarian Decree'를 발동했는데, 주된 내용은 [본문으로]
  593. 같은 책,67.2. [본문으로]
  594. 같은 책,73.1-78.4.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사절의 입을 빌려, 어떻게 아테나이가 그들 제국 건설의 정당성을 찾고 있었는지와, 얼마나 그들이 가진 힘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아테나이 사절들은 이 문제로 온 사람들이 아님에도 자신만만하게, 아테나이는 그들이 가진 것을 정당하게 얻었기 때문에 주목받아 마땅하다고 으시대며, 전쟁을 결정하면 누구와 싸우게 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호의를 비것이 아닌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라며 스파르테 사람들과 그 동맹 사절들을 자극하며, 먼저, 1)실제적으로 페르시아를 물리친 것은 아테나이 해군이었고, 2)스파르테가 페르시아의 잔존 군대와 싸우는 것을 포기하였으므로자, 동맹들이 자진하여 아테나이의 지휘하에 모였기 때문에 아테나이가 제국을 가지게 된 것이며, 3)일단 제국을 가지게 되니 두려움, 체면, 그리고 제국의 이익을 위해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4)그 과정에서 동맹들의 미움도 사고 일부는 반기를 들다 제압되고, 반기를 든 동맹이 아테나이에 우호적이지 않은 스파르테의 편이 되는 판에 아테나이가 제국을 해체하는 것은 모험이며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고, 5)그러므로 위기에 처한 아테나이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 뒤, 다음으로, 6)아테나이가 두려움, 체면, 이익 때문에 제국 유지하는 것이 처음도 아니고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며, 약자가 강자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인데 7)아테나이는 그런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있고, 8)힘으로 이익을 더 얻을 수 있는데 정의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는 없고, 9)아테나이는 남을 지배하려는 본성을 따르긴 하지만 그래도 가진 권력에 기대되는 정의보다 더 정의롭고 공정한데도 불공정하게 칭찬보다 비난을 더 많이 듣고 있고, 한마디로 말해 , 페르시아에게는 더 험한 꼴을 당하고도 참고 견디더니 아테나이가 가혹하다고 비난하고 있다고 발명한다. [본문으로]
  595. 같은 책,79.2 [본문으로]
  596. Arkidamos,Archidamus(476-469-429BC) [본문으로]
  597. 같은 책,80.1-85.2. 투퀴디데스는 아르키다모스의 입을 빌려, 결국 전쟁을 결심한 스파르테가 어떤 어려움을 겪으며 전쟁을 수행해야 했는지를 미리 정리해주고 있다. 아르키다모스는 이제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와 전쟁을 벌인 다면, 여러번 전쟁에 나가본 경험으로 이 전쟁이 대전으로 확대되고, 또 대를 이어 오래 끌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며 서로를 비교분석하는데, 1)아테나이는 멀리 떨어져 있고, 부유하고, 사람도 많고, 바다 경험도 많고, 함선이나 기병이나 중무장보병이나 어떤 군사력도 군수물자도 많고, 공물을 바치는 동맹도 많은데 반해, 스파르테는 해군도 약하고, 증강시킬 돈도 없으며, 오로지 하나 우세한 중무장보병이 가서 약탈이나 할 수 있을 뿐인 처지이고, 2)스파르테의 해군 지원이라는 담보가 없는데 대부분이 바다 멀리에 있는 아테나이 동맹들의 반란을 부추길 수도 없는데, 3)그렇다고 아테나이의 잘못과 도전을 눈감아줄 수는 없지만, 우선은 시간을 벌어, 스파르테로스에게 해군력 증강을 돕고 돈을 주는 새로운 동맹을 헬라스와 이어족 가리지 않고 얻어 전쟁 비용을 마련해야 하고, 아울러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규율대로 언제든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그동안 충분히 군사훈련을 쌓아야 하고, 4)그렇다고 아테나이의 음모를 그냥둘 수 없으니 사절을 보내, 포테이다이아와 다른 동맹들이 당한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아테나이도 중재에 응한다 하니 중재로 넘기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본문으로]
  598. '에포로스Ephoros/Ephoroi,Ephor/Ephors,監督官'는 스파르테의 민회인 아펠라에서 매년 선출하는 5명의 스파르테 최고 관리이다.(투퀴디데스 다음 세대의 그리스 역사가 '에포로스,Ephoros,Epphorus,퀴메의 에포로스Ephorus of Cyme (400-330BC)와 구별할 것) [본문으로]
  599. 스테넬라이다스의 주장은 전형적인 스파르테 전사의 품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인데, 그는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의 동맹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지 않는 것에 분개하며, 당장에 스파르테의 동맹이 겪는 고통은 사절을 보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아테나이가 함선과 말을 많이 가졌다면 스파르테는 훌륭한 동맹을 가졌으니 전쟁에 나서자며, 왕의 제안을 일축한다. [본문으로]
  600. 천병희는 가해자라고 번역했으나, 이 글에서는 영역본들이 공통적으로 쓴 'aggressor'를 적극적으로aggressively 따서 '침략자'로 표현한다. [본문으로]
  601. 같은 책,87.3-6 [본문으로]
  602. 아폴론은 스파르테에게 힘껏 싸우면 이길 것이라며, 신도 스파르테를 편들겠다고 했다.(투.펠.I.118.3) [본문으로]
  603.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BC432 전쟁을 결의한 뒤 전쟁 준비에 1년이 걸렸다.(같은 책,125.2) [본문으로]
  604. 투.펠.I.126.2,139.1. 스파르테는 먼저 평화를 깬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것이다. 다시 말해 페리클레스를 추방하라고 한 것이다.(같은 책,127.1-3) 페리클레스의 외가는 퀼론을 아크로폴리스 복수의 여신 사당에서 죽인 일로 여신의 저주를 받은 메가클레스의 알크마이온 집안이라, 페리클레스도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테의 이 '주문order'을 '...여신의 저주를 몰아내라drive out the curse of goddess...'(126.2)와 '...저주받은 자들을 축출하라the expulsion of accursed persons...'(139.1)라고 따로 기록했지만, 둘 다 페리클레스를 지칭한 것이다. [본문으로]
  605. 스파르테가 페리클레스를 추방하라고 한 것에 대해, 아테나이는 에포로스들을(주전파 에포로스 스테넬라이다스를 겨냥했을 것이다.) 쫓아내라 응수한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여신의 저주'를 설명하느라(펠.I.126.3-12) 최후통첩을 앞둔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에 대한 이야기도 끊고, 계속해서 아테나이가 응수한 스파르테의 저주받은 자들, 다시 말해 '타이나론의 저주'와 '청동 신전의 아테나 여신의 저주'에 대해 설명하는데, '타이나론의 저주'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 타이나론 곶의 포세이돈 신전에 탄원하러 들어간 몇몇 헤일로타이를 끌고나가 죽인 일로 생긴 저주로, 스파르테의 대지진도 이 저주 때문이라 믿었다는 것이고(같은 책,128.1), '여신의 저주'는 플라타이아 승리의 주역 파우사니아스의 비행과 반역 행위에(이 글,11.78과 주461 참조) 대한 스파르테의 처벌과 연유된 사연으로, '청동 신전의 여신', 즉 아테나의 성역에 있는 신전의 작은 방에 파우사니아스가 피신해 있다는 걸 알고 오히려 그를 그곳에 가두어 굶게 만들고, 죽기 직전에 끌어내어 죽게 한 다음, 시신을 함부로 처리하려다 델포이의 신이 파우사니아스에 가한 짓들로 여신의 저주를 받았으니 그 성역 안에 묻어주고, 또 청동 신전의 여신에게 시신 하나 대신 둘을 바치라고 해서, 스파르테 사람들이 파우사니아스를 그가 죽은 성역 안에 묻고, 죗값으로 청동상 두 개를 만들어 청동 신전에 바쳤다는 것이다.(같은 책,128.2-135.1) [본문으로]
  606. 같은 책,139.1. 스파르테는 책임자 처벌 다음으로, 평화를 깬 현안 문제 해결을 요구한 것이다. [본문으로]
  607. 같은 책,139.3. 스파르테는 마지막으로 전쟁의 궁극적인 목표인 평화는 헬라스 사람들의 독립으로 이루어진다고 통보한 것이다. '... Lachedaemon wishes the peace to continue, and there is no reason why it should not, if you would leave the Hellenes independent...' 다시 말해 스파르테의 전쟁 목적은 헬라스의 해방이라고 아테나이에 최후통첩한 것이다. [본문으로]
  608. 투퀴디데스가 단 한 번 '제일인자The first man'라는 표현을 썼을 때 이 말은 '페리클레스'를 가리켰고(펠.I.139.4), 플루타르코스가 아이스퀴네스를 인용하여(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지금은 산일된 대화록 '아스파시아'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똑같은 표현을 단 한 번 썼을 때는 페리클레스가 아니라, 페리클레스가 죽고난 후 아스파시아의 새 동거남이(페리클레스는 이혼하고 아스파시아와 결혼했다) 된, '천출의of low birth and nature' 양羊 장수 뤼시클레스를 가리킨 것이었는데, 뤼시클레스가 아스파시아와 같이 산다는 이유로 아테나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the first man'이 되었다고 한 것이다.(페리클레스전',24.4) [본문으로]
  609.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수 년 전부터 페리클레스는 정적들의 공격으로 아테나이 제일인자로서의 영향력이 점점 떨어져가고 있어 반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때의 페리클레스 사정에 대해서는 이 글, '"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9.도시의 평화,9.25-27'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610. 투퀴디데스는 메가라 포고가 결코 전쟁으로 이끌 만한 사유가 아니었다고 보고, 포고를 발동한 사연이나 포고 내용에 짧게 언급하면서(펠.I.67.4,139.2), 페리클레스가 사소하다고 양보하면 더 큰 것을 요구할 것이라며 반대한 사실만은 크게 부각시켰고(140.2-141.1),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날 무렵 나이 열다섯의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많은 소년이던 아리스토파네스는, 당시 스파르테와의 전쟁을 두고 벌이는 메가라 포고에 대한 어른들의 논쟁을 기억하여, 훗날 그의 희극에 그것이 본디 아주 사소한 것이었는데 페리클레스가 전쟁으로 이끌었다고 희화화했고('"아카르나이 사람들"'518-534행,'"평화"',246-9행,481-3행,500-3행), 디오도로스는 페리클레스가 메가라 포고의 철회는 노예가 되는 첫걸음이라며 아테나이 사람들을 설득했다 하고('역사전서'XII.39.5), 플루타르코스는 메가라 포고를 철회했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페리클레스가 철회를 요구하는 스파르테 사절에게 석판에 새겨놓은 법령은 뜯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있어 철회할 수 없다고 하자, 그 사절이 뜯지 말고 돌려놓으면 될 게 아니냐고 하는 걸 듣지 않았던 것은, 비록 페리클레스가 메가라 사람들이 접경지역의 신성한 땅을 함부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표면상의 이유를 대었지만, 메가라에 대한 개인 감정 때문에 철회하지 않아, 페리클레스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난받았다고 하면서('페리클레스전'29.5-2), 아리스토파네스의 시구를 인용해('"아카르나이 사람들""524-7행) 그 사사로운 감정이 아스파시아로부터 비롯되었다는것을 넌지시 비치고 있다.(같은 책,30.4) [본문으로]
  611.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테와 아테나이 두 전쟁 당사자의 전력과 전쟁 양상에 대한 분석이나 예상을 똑같은 기조에 두고, 아르키다모스는 스파르테의 입장에서 스파르테 사람들에게 설명하게 하고,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입장에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설명하게 하는데, 그 기조는 1)전쟁은 장기전이고(해양국인 아테나이가 기동성 보급 조달 면에서 장기전일 때 유리하다), 2)전세와 승패는 지상전이 아니라 해전에서 결정될 것이고(해전은 함선의 숫자, 항해 기술, 숙련 노꾼 고용, 훈련의 정도에 따라 승패가 결정지어질 것이므로 아테나이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3)따라서 결국 전쟁의 승패는 전쟁비용 조달 능력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는(농업 생산이 주수입원인 스파르테와 그 동맹들보다 해양무역이 주수입원인 아테나이와 그 동맹들이 숫적으로도 많아 훨씬 안정적이다) 세 가지이고, 이 세 가지 모두에서 아테나이가 우위에 있다는 점을 두 사람 모두 인정하여, 아르키다모스는 스파르테 사람들에게 전쟁에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고(펠.I.80.1-85.2),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양보하지 말고 걸어오는 전쟁에서 이기자고 말한다(같은 책,140.1-144.4). [본문으로]
  612. 페리클레스의 전쟁비용 우세 전망은 초기 포테이다이아 포위공격에 차질을 빚으면서(3년이나 포위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결국 역병으로 군사 활동이 급격히 떨어지자 협상을 통해 포테이다이아 주민의 안전 이주를 허용하는 바람에, 몸값이나 약탈로 전비를 회수할 수도 없었다.) 어긋나기 시작했고, 역병으로 적에 대한 초기 강력 제압이 무산되어 오히려 아테나이의 전비가 부족하게 된 데다, 전쟁으로 인한 동맹들의 피폐가 분담금 인상도 징수도 어렵게 만들어(아테나이의 분담금 징수관이 살해되기도 했다), 페리클레스의 예상처럼 우위를 지키기 힘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축금도 바닥이 난 반면, 시켈리아 지원으로 숨통이 트인 스파르테는 망명해온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페르시아에게서 받은 충분한 전비로(투퀴디데스는 아르키다모스로 하여금 이 경우를 이미 상정케하였다) 해군을 키우면서 해전에서 마지막 단 한 번의 승리로 전세를 뒤집게 되었다. [본문으로]
  613. 민주정으로 해양국이 된 아테나이에서, 옛 과두정 하의 든든한 허리였던 앗티케는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변방이 되었고, 전쟁을 대비하는 페리클레스의 아테나이 방어전략은 아테나이를 성벽과 바다로 가둔 요새섬으로 지킬 것이었으므로, 페리클레스에게 아테나이 성벽 밖의 앗티케는 농가가 없는 텅 빈 바다여야 했고, 그 때문에 앗티케의 농가를 모두 없애야 했음에도 불구하고(페리클레스는 앗티케의 농가들을 모두 부셔버리고 싶어했다), 그곳이 삶의 터전인 앗티케 사람들의 반발을 어쩔 수 없어 적이 움직일 때 마다 피난하고 복귀하도록 조치 했다. 그러나 이 조치가 결국 역병을 불러와 페리클레스 자신도 죽고, 군사력에 중대한 차질을 빚었을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전쟁을 더욱 오래 끌게 되어 앗티케 사람들의 불만이(아리스토파네스는 앗티케 방어 포기를 둘러싼 논란과 그들의 불만을 반영하여, 앗티케의 자작농 디카이오폴리스('"아카르나이 사람들"')와 포도농장 주인 트뤼가이오스('"평화"')를 무대에 세우고 반전과 평화를 주장했다) 아테나이에 내분을 일으키게 했고, 결국 전쟁 중에 과두정 수립과 민주정 복고라는 자중지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페리클레스는 텅빈 앗티케에 적의 요새가 들어서는 것을 염려했지만, 장기 원정을 고려치 않는 스파르테의 군사 전통을 믿고 따로 방비하지 않았는데, 스파르테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을 따라, 스파르테가 요새를 세우고 장기 주둔하면서 아테나이의 요새섬 방어전략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본문으로]
  614. 제국 불확장 정책은 제국에서 이탈하는 동맹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로 이어졌는데(남자는 모두 죽이고 아녀자는 노예로 팔았다), 제국을 와해시킬지도 모르는 다른 동맹들의 동조 이반과, 이탈한 도시가 적의 군사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동맹의 숫자도 줄고 분담 능력도 떨어지자 제국의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고(알키비아데스의 시켈리아 원정과 실패), 이 실수가 아테나이를 패배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본문으로]
  615. 펠레폰네소스에서는 중립을 지킨 아르고스와 아카이아를 제외한, 그러나 아카이아의 펠레네와 인근 도시들을 포함한 전도시가, 펠로폰네소스 밖에서는 메가라, 보이오티아, 로크리스, 포키스, 암프라키아, 레우카스, 아낙토리온이 모두 스파르테의 동맹도시들이었다.(투.펠.II.9.2) [본문으로]
  616. 아테나이의 동맹들은 키오스, 레스보스,플라타이아, 나우팍토스, 아카르나니아의 대부분, 케르퀴라, 자퀸토스, 그리고 카리아의 해안도시, 그 인근의 도리에이스 도시들, 이오니아, 헬레스폰토스, 트라케, 펠로폰네소스와 크레테 동쪽의 섬들, 멜로스와 테라를 제외한 퀴클라데스 섬들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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