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도시의 평화
9.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제가 이 재판정에 서서 지금까지 여러분께 말씀 드렸던 내용의 대부분은 저와 함께 여러분들이 직접 아테나이에 살면서 겪어 왔었던 일들이었거나, 부모나 주위의 연로한 분들에게 들었던 적이 있는 일들이라 새삼스럽기는 해도 몰랐던 일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아시는 내용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해에 걸쳐 쉴 새 없이 지금까지 힘들여 여러분께 주저리 주저리 이 이야기들을 엮어 온 까닭은 단 하나,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오늘 이 자리의 재판과 같은 형식적인 정당성을 빌미로 한 사람의 언행을 시비 삼고, 그 핑계로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을 단죄하는 데에 재미를 붙인 이후, 우리의 도시에서 자유와 정의가 사라져 도시가 평화가 깃들어 사는 곳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모든 시민을 상대로 싸우는 이전투구의 저자 거리가 되었으며, 자유와 정의가 평화를 지키던 그 자리에 억압과 위선이 들어서면서 도시의 영혼이 갈갈이 갈라져 분열과 증오가 도시를 지배하였고, 억압과 위선이 가져 온 도시민의 분열과 서로 간의 증오는 갈갈이 갈라진 도시의 영혼을 메마르게 하여 도시로 하여금 스스로를 살찌울 그 어떤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이끌 수 없도록 하고 말아, 영혼이 메말라 없어진 도시는 먹을 것을 위해 다른 도시를 약탈하는 것이 가장 손쉽고 효율적이라며, 도시의 생존을 폭력적인 전쟁에다 걸었고, 그래서 계속된 전쟁의 폭력은 다른 도시들 뿐만 아니라 결국은 우리 도시의 몸체인 도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 이제는 도시의 생존마져 위태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께 똑똑히 보여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9.2. 이온의 도시1가 테세우스를 받아들이고, 그의 항해로 미노아를 연 덕분에 크레타가 지진에 무너졌을 때 그들의 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뮈케네가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 이온의 도시는 뮈케네가 개척한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의 도시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아티케의 한 작은 이온의 도시를 테세우스가 아티케의 마을들끼리의 크고 작은 싸움을 멈추게 하고 아테나이라는 새로운 도시 이름으로 뭉치게 하면서,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테나이로 오라고 도시를 활짝 연 다음부터 아테나이는 조금씩 조금씩 헬라스 사람들에게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도시로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2. 우리의 도시는 포세이돈과 다른 신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지진이나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늘 우리의 도시를 지켜 주는 신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신들을 똑같이 믿는 다른 도시들의 사람들을 같은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테세우스를 비롯한 옛날 우리의 도시를 이끌었던 많은 사람들의 출생지를 보거나, 아테나이에서 태어났던 사람들조차도 그들 이름을 보면 그들의 조상이 어디에서부터 아테나이로 와서 살다가 그 후손들이 아테나이를 살찌우고 아테나이 사람으로 존경 받게 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자유스럽게 어울려 살아가는 동안 아테나이는 번성하였고, 아티케의 작은 마을들과 아테나이의 큰 마을들에 사람들이 늘어나 아테나이가 제법 큰 도시로 되었을 때까지도 아테나이는 자유와 정의가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어 늘상 평화로운 도시였지요.
9.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제가 오늘 여러분 앞에 테세우스의 아테나이를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도시라고 말씀 드리는 까닭은 지금의 아테나이가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테세우스 이후 아테나이가 언제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도시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테세우스가 왕위를 버리고 대신 민주적 귀족정3으로 이루었던 '테세우스식 평화'가 과두 정체의 폐해4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오백여 년이나 쌓아 올려, 솔론의 때에는 그 폐해 때문에 도시의 존폐를 걱정해야 될 지경에 이르렀지요. 도시의 체제를 바꾸는 전권을 위임 받았을 때 솔론은 테세우스가 자기가 가진 왕권을 버리고 수립한 정체의 지향점을 다시 한번 곰씹어 보았을 것입니다.5 그리고 솔론은 테세우스의 아테나이와 자신의 아테나이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밖에 도시 생활의 여러 분야에 걸쳐 어떻게 달라졌는지 꼽아 보았을 것입니다. 오백여 년이 더 지난 도시의 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솔론의 결론은 테세우스와 같았습니다. 아테나이에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과 권력 때문에 시민의 자유가 억압되고, 탐욕으로 불의가 성행하고, 이런 억압과 불의가 도시민 간의 불화와 반목을 불러와 도시가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자유스럽지 못하고, 불의가 득세하여 횡행하고, 불화와 반목으로 증오를 감추지 못하는 도시는 번성할 리가 없습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자의 탐욕은 그들의 탐욕만을 왕성하게 했을 뿐, 그들이 입만 벙긋하면 떠벌리던 그들의 활동이 왕성해야 도시가 번성한다는 큰소리와는 달리, 그들의 왕성한 탐욕적 활동은 도시를 번성하게 하기는커녕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솔론은 이온과 테세우스의 방법대로 아테나이를 개혁했습니다. 솔론에게 도시에서의 개혁의 첫걸음은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온이 관할을 네 구역으로 나누어 권력을 분산했듯이 이제는 더 넓어진 아테나이와 아티케의 구역을 그 넷에 따라 확충하고, 테세우스가 시민의 계층을 직분에 따라 셋으로 나누어 권력을 분산했듯이 아테나이 시민의 계층을 경제적 능력에 따라 넷으로 재편하여, 각 계층의 능력에 따라 권력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담당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넘기되, 그것들이 '아테나이를 하나로 뭉치는 힘과 정의'가 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6, 그에 상응하는 의무도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나누어 지도록 했습니다.
9.4. 그 다음 도시에서의 정의 구현을 위해 재판이 불의를 조장하는 일이 없도록 재판권을 소수 권력자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상식적인 다수에게도 넘겨, 권력자의 불의에 의해 정의가 농락당하거나 불의가 상식을 농락하여 정의로 둔갑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아테나이를 하나로 뭉치는 정의'가 구현 되도록 했습니다. 불의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타인이 당하는 불의를 본 사람은 동등한 권리로 아고라에서나 민회에서나 재판정에서 그 불의를 고발하도록 했습니다. 정의는 불의를 응징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정의는 모든 불의가 평등하게 응징당할 때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정의는 권력자가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자기 입맛에 맞춰 그리고 자기 권력을 위해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정의라면 그 정의는 그 자체로 바로 도시에서 가장 큰 불의가 되고 말지요. 불의를 응징하는 정의가 평등을 잃으면 정의가 곧바로 불의가 되고 만다는 것은 천고의 경험입니다. 평등을 잃은 정의를 고발하여 재심을 요구할 수 있도록, 그래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9.5. 그리고 생활이 어려운 시민의 자유가 가진 자의 탐욕으로 돈으로 억압되거나 팔리는 일을 막기 위해 부채를 탕감하였으며,7 새로운 생업을 찾아 의무적으로 기술을 익히도록 했고, 다시 자유민으로 돌아가 자주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솔론은 시민의 자유가 바로 한 시민의 신체와 영혼의 자유임을 확실하게 하였습니다. 경제적인 자립은 신체의 자유 뿐만 아니라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예속은 신체의 예속에 앞서 영혼의 굴종과 예속을 담보로 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체의 예속은 채워진 굴레가 가시적이어서 남들이 바로 알아보지만, 영혼의 예속은 지성이라든가 법이라든가 전통이라는 이름이나, 상하관계의 자연스런 복종이라든지, 일반적인 인간 관계에서의 친밀, 겸손, 존경, 예의, 신뢰 따위의 이름에 가려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솔론은 도시민의 보이지 않는 영혼의 예속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도시민이여 노동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기술을 배워 일하라! 그래서 자립하라!"8 그리고 솔론은 어떤 경우에도, 부자나 권력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경제적 자립을 위한 빈자들의 작은 경우라 해도, 불의한 부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9
9.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번에는 솔론이 아테나이에 가져다 준 '솔론식 평화'10입니다. 저는 이 '솔론식 평화'를 솔론이 아테나이에 가져다 준 세 번의 평화를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께 서로 다른 이 세 가지 '솔론식 평화'를 따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말씀 드리면서, 어떻게 도시에 평화가 깃들이는가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9.7. 먼저, 일찌기 솔론이 아테나이의 공직자로 나서기도 전에, 자신의 고향 살라미스 섬을 둘러싼 메가라와의 분쟁에 개입해, 결국 중재에 의해 평화적으로 살라미스를 아테나이로 귀속시킨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이 살라미스에 대한 솔론의 일화가 바로 '솔론식 평화'의 성격을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옛날부터 살라미스의 영유권 문제는 아테나이와 메가라 사이의 오랜 골치거리였습니다. 오랫동안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충돌로 양측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어떻게 그 끝을 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살라미스를 두고 벌인 아테나이와 메가라 사이의 불화는 솔론이 태어날 당시에도 계속 살라미스에서 일전일퇴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던 것인데, 메가라의 참주 테아게네스가 그의 사위 퀼론이 체제 전복을 통해 아테나이의 참주가 되려는 기도를 무력을 동원해 도운 것도 어쩌면 그 대가로 살라미스를 넘겨받아 살라미스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시작된 불화는 솔론이 청년이 될 때까지 지속되다가, 별 다른 실익도 없이 계속 사상자만 나오는 전쟁을 견디지 못하고, 드디어 아테나이가 살라미스를 포기하기로 작심하고 살라미스의 영유권을 주장하면 사형에 처하는 법까지 만들었는데, 이때 이미 장년의 티를 내고 있던 솔론이 정신이 나간 척하고 아고라에 나가 자기가 쓴 시 '살라미스'를 읊으며 살라미스에 대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11 사람들이 솔론의 편을 들자 처형법은 취소되었고, 또 다시 시작된 전투 공방을 기화로 문제 해결을 제3자의 중재에 맡기기로 하여, 스파르테 사람들을 중재관으로 뽑았고, 중재 재판에서 솔론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근거로 살라미스의 아이아스가 일리오스를 치러 갈 당시부터 아테나이와 함께 했으며12, 그의 아들들이 아테나이 시민이 되면서 살라미스는 아테나이가 영유하게 되었다고 밝혔고, 결국 스파르테의 다섯 중재관들은 살라미스가 아테나이의 영유지로 판결하였지요. 이 일로 젊은 솔론이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로 인해 메가라와의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화는 그것을 가장 평화스러운 방법인 재판정에서의 중재에 의해서 얻을 수는 있겠지만, 평화를 위한 결정을 지킬 수 있을 만큼 당사들에게 모두 이익이 되어야지, 그것이 어느 일방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어느 한 당사자의 심각한 불이익을 전제할 경우, 그 평화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직은 젊고 경험이 적은 솔론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가 잘 알지 못했습니다.13
9.8. 다음으로 솔론이 아테나이에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도시의 정파 간의 과도한 싸움이 신의 저주까지 붙어 세대를 두고 이어져 와, 도시의 체제가 불안정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졌을 때였습니다. 솔론이 태어나기 이태 전, 아테나이의 정치 체제를 전복하고 참주가 되고자 했던 퀼론의 시도는 아테나이 농민들의 궐기로 실패했지만14, 퀼론이 벌인 아테나이 최초의 폭력에 의한 집권 시도15는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메가클레스의 대응 폭력으로 상호 폭력의 반복을 불러와, 아테나이 시민들로 하여금 아테나이에 오백여 년 동안 쌓아진 심각한 정치적 불균형의 모순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드러내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스레 정치만큼 깊이 쌓여져 있던 빈부 격차와 소수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들여다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당장의 생활고는 말할 것도 없고 오랜 빈곤이 가져다 주는 신분 저하라는 사회적 도태에 대한 불안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번쯤 되돌아 보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정변은 막아 내었지만, 퀼론의 저주니 뭐니 해서 도시는 손에 쥘 수 없는 불안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귀족집에서 갓 태어났을 어린 솔론으로서는 어찌할 수도 없었지만, 오백여 년을 이어온 체제에 대한 이런 이반의 조짐에 놀란 기득권층은, 테세우스의 민주적 귀족정 체제가 탐욕스런 과두정 체제로 변질한 사실은 돌이켜 보지 않고, 더 이상 퀼론의 모반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법을 만든다는 핑계로, '빚을 갚지 않으면 노예로 만들고', '작은 잘못에도 목숨을 잃어야 하는' '폭력 치안'16까지 동원해 이반을 막기는 했지만, 그것은 변질된 정치 체제의 모순과 경제력 집중의 폐해와 신분 도태의 불안을 죽음의 공포로 누르고 덮었을 뿐, 법을 빙자한 억압으로는 평화를 만들어 낼 수는 없어, 도시에서 평화를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법의 공포에 질려 도시가 당장은 무너지지 않고 굴러가서, 솔론이 장년으로 접어들 때까지 아테나이는 겉으로 별 탈이 없는 것 같았지만, 오랜 세월을 기다려 힘을 기른 퀼론의 세력이 메가클레스의 세력들에게 폭력으로 복수를 자행하면서 두 세력 간의 충돌이 도시를 둘로 가르고, 도시가 분열하여 민심이 들끓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쪽에도 들어 있지 않았던 솔론에게 도시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을 요청하였고, 솔론이 중재에 나서 300명으로 재판단을 구성하고 미론으로 하여금 퀼론 일파들을 고발하여 재판토록 했는데, 시민들은 퀼론의 세력에게 신성모독의 유죄 판결을 내렸고, 형벌은 산자나 죽은자나 퀼론의 세력이라면 모두 아테나이에서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17. 솔론이 태어나기도 전에 도시를 흔들었던 퀼론이 솔론이 장년이 되어 다시 망령으로 나타나 또 한번 도시를 흔들었고, 메가라는 이렇게 아테나이가 내란에 준하는 혼돈에 빠져 있을 때 아티케까지 치고 들어와 살라미스는 물론 니사이아마져 빼앗았지요. 도시 내부의 유혈 충돌 여파와 퀼론 일파에 대한 대축출로 어수선한 도시가 또 다시 메가라의 침공으로 혼란에 빠지자, 사람들은 작은 재앙이나 전에 없던 작은 현상에도 미신적인 흉흉한 소문과 근거 없는 공포에 뒤덮히기 일쑤여서 도시에 동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무력으로 도시의 평화를 깨는 퀼론 일파의 축출로 아테나이에 일단 두 번째 '솔론식 평화'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도시가 안정을 찾지 못하는 것을 본 솔론은, 도시의 정화가 필요하다며 크레테의 현인 에피메니데스18를 모셔와, 황폐해진 도시민의 영혼 치료에 나섬으로써 '솔론식 평화'를 정착시켜 보려 했지요. 다행히 에피메니데스의 신에 대한 경건심과 세상사에 대한 사려 깊은 언행이 각박한 영혼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제사나 예식을 간소화하되 영혼의 경건심으로 신을 대하도록 바꿀 수 있었으며, 머무는 동안 솔론과 가까워져 도시를 살리는 법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도움을 준 것은크레테 현인의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정화를 마치고 에피메니데스는 올리브 나뭇가지 하나만 가지고 크레테로 돌아갔지만, 그는 도시에 진정한 평화가 필수라는 것을 누구나가 인정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아테나이는 세 번째 '솔론식 평화', 다시 말해 정치적인 평화가 필요했습니다.
9.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테나이에 세 번째의 '솔론식 평화'가 마련된 것은 절대적으로 도시에 평화가 정착되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피를 부르는 법으로 억누르고, 또 한편으로는 경건한 에피메니데스를 앞세워 신에게 순종하듯이 권력에 순종하도록 바람도 잡아 보았지만 불거져 나오는 노골적인 거역과 반항의 기운을 막을 수 없는 기득권층과, 내전으로 내몰리기 전 마지막 희망을 찾는 하층민들이 함께 이제 장년으로 접어든 솔론19에게 비상 대권을 제안하며 개혁으로 도시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을 요청한 것이지요. 물론 솔론이 대권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것을 빌미로 왕이 된다든가 참주가 되지는 않았습니다.20 개혁을 한답시고 비상 대권을 쥐고, 그 권력으로 도시에 평화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요. 솔론은 도시의 평화가 도시의 지도자의 역활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간과하지는 않았지만, 궁극적으로는 권력과 금력에 대한 탐욕이 도시의 평화를 깬다는 사실에 더욱 주목하였습니다. 솔론은 모든 시민의 경제적인 자립이 그들의 자유를 보장하고, 모든 시민의 자유민으로서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탐욕적인 권력과 금력 추구를 막아, 도시에 궁극적인 평화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습니다. 바꾸어 말해 도시의 평화는 정치의 평화를 말하며, 정치의 평화는 도시민 개개인의 경제적인 자립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도시민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이 정의로워야 했으며, 불의로운 생각이나 행동은 공평하게 제제당하거나 응징당해야 도시민 개개인의 자유가 온전하게 지켜질 수 있다고 믿고 재판 제도를 고쳐 보완했습니다. 그리하여 완성된 '솔론식 평화'는, '가문 세습적 과두정'21으로 변질된 '테세우스의 민주적 귀족정'을 '계층적 민주정'22으로 바꾸어, 모든 시민이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정치적인 권리와 의무를 나누어 지님으로써 도시의 정치적 평화를 도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론식 평화'는 모든 시민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빚을 탕감해 주었을 뿐,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그것으로 빈자들을 자립시켜 주는 방법은 쓰지 않았는데, 솔론이 보기에 자립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모든 시민 개개인이 자유 의지와 노력으로 스스로 이룩해야 진정한 자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상 대권을 위임 받고 한 해가 지났고, 법령 제정을 마치자마자 빗발치는 법령 개정 요구와 불평 불만들을 물리치며, 자신의 개혁을 100년 정도 지켜야 '솔론식 평화'가 완성된다고 말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서약도 받았지요.23 개혁이 새로운 형태의 뷴열과 혼란을 불러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솔론이 아니더라도 도시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개혁이 억압과 불의와 폭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누구도 솔론의 개혁을 막지는 못했지만, 어느 누구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24 개혁이 이루어져서 도시가 번성하고 도시민이 행복하려면 그의 개혁대로 사람들이 따라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솔론은 10년을 기한으로 외국 여행을 떠났습니만, 솔론이 없는 '솔론의 평화'는 100년은커녕 4년이 지나자 깨어져, 다섯 번째 해는 아르콘을 뽑을 수조차 없었습니다.25
9.1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살라미스를 아테나이에 귀속시킨 첫 번째 '솔론식 평화'는, 비록 평화적인 중재로 얻긴 했어도, 아테나이는 살라미스만 챙기고, 살라미스를 잃는 메가라가 그 대신 얻을 것을 아무 것도 주지 않은 일방적인 평화였기 때문에, 퀼론 일파의 폭력으로 도시가 혼란에 빠졌을 때 곧바로 앙앙불락하던 메가라의 침공을 받아26 살라미스는 물론 니사이아까지 빼앗기고 아티케가 유린당하면서 깨어지고 말았고, 비록 퀼론 일파가 알크마이온 일파에 대해 폭력적인 복수 행각으로 도시를 혼란에 빠트렸다 해도, 퀼론 일파에 대해 산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은 사람들까지 무덤을 파헤쳐 도시 바깥으로 쫓아내는 방법으로27 도시에 평화를 가져올 쓸 양이었으면, 전례에 따라 남아 있던 알크마이온 일파마져 함께 쫓아내는 방식이었어야 퀼론의 저주를 떠올리는 도시의 민심이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퀼론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쫓아내었던 알크마이온 가문의 메가클레스 일파를 아테나이로 불러들인 처사는28 이 두 번째 '솔론식 평화' 역시 일방적인 어느 한 쪽의 득세와 다른 한 쪽의 일방적인 파멸로 얻어진 것이어서, 복수의 여신 사당을 둘러싼 퀼론의 저주로 야기된 민심의 동요 정도야 에페메니데스의 경건심으로 어떻게 평화로 이어 갈 수 있었지만, 퀼론 일파가 사라진 힘의 공백이 고스란히 알크마이온 일파에 쏠려 가면서 도시의 정치적 균형이 깨어지는 바람에 두 번째의 '솔론식 평화'도 깨어지고 말았지요. 결국 평화라는 것이 모든 당사자가 그것을 지킬수록 얻는 것이 많아야 지켜지는 것이고, 어느 한 당사자라도 그것을 지키면 잃기만 하고 그것을 깨어야만 얻을 수 있다면, 그 당사자는 언제나 그것을 깨려고 한다는 것을 현명한 솔론이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솔론식 평화'는 당사자들의 절제를 토대로 아테나이 시민 모두가 자기의 직분을 다했을 때 이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솔론이 서약까지 받으며 단속했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절제의 미덕이 가져다 줄 100년의 평화보다는, 당장에 줄어든 권력이나 금력에 불만인 사람들과 당장에 생기지 않은 권력과 금력에 실망한 사람들이 마지막 세 번째 '솔론식 평화'를 깨는 것을 방관했고, 그렇게 옛날 우리들 조상들의 탐욕이 '솔론식 평화'를 깨고 말았습니다. 권력이든 금력이든 가진 사람들의 탐욕이 평화를 깨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이 마지막 '솔론식 평화'를 깨는 데는 권력도 금력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의 탐욕도 한몫 단단히 했지요. 그들의 탐욕은, '솔론식 평화'가 권하는 근면에 의한 자립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빚의 탕감 덕분에 노예나 다름없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민으로 신분이 회복된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가진 사람들의 것들을 빼앗아 나누어 갖겠다는 데까지 갔었습니다.
9.11. 이리하여 아테나이에서 '솔론식 평화'가 깨지고, 솔론의 개혁이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아테나이는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부자와 빈자, 과두정과 민주정, 농부와 기술자, 등으로 나누어져 서로 반목하고 다투는 가운데, 솔론의 은전으로 아테나이로 돌아온 메가클레스가29 주로 바닷가에 농토를 가지고 있던 자기 집안 알크마이온 일파를 모아 솔론의 중용적 태도를 지지하여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아테나이의 분열이 더 깊어졌을 뿐이었습니다. 알크마이온 일파의 정치적인 대두가 솔론의 은전이라 하지만, 사실 대대로 정권을 쥐고 군림하며 주로 평지에 농토를 가지고 있던 부자들 집단의 반발을 제어하기 위한 대응책이었지요. 빚을 탕감하는 바람에 재산이 줄어들어 불만인 데다가, 그러고도 농토까지 나누어 주기를 바라는 그 이전 예속농들의 탐욕에 대한 분노까지 겹쳐, 일부 귀족들이 극단적으로 바뀌면서 퀼론 일파의 추방으로 비어 버린 정치적 과격파의 공간을 메워 가는 것을 보고, 이에 대응하면서 '솔론식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솔론의 응급처방이었지만, 이에 대한 반동으로 뤼쿠르고스가30 보수적인 귀족들을 규합하여 과두정을 주장하고 나서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지요. 자유민으로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 여전히 공무를 담당할 수 없었던 최하위 노동자 계급들은 부자들이 다시 정치를 독점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불만과 불안을 행동으로 보이면서, 아르콘을 열 명으로 늘이고, 그 중 다섯은 귀족eupatridai에서, 나머지 다섯 중 자유농geomoroi에서 셋, 상공 중산층demiurgoi에서 둘이 함께 아르콘직을 맡아 보도록 바꾸기도 할 정도였습니다.31 이렇게 다수의 행동으로 도시에 자기 주장을 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치 세력으로서는 보잘 것 없었던 이들을 눈여겨 본 페이시스트라토스는32 메가라가 침공해 왔을 때 세운 무공의 명성과 자신의 산골 농장에서 찾은 은광의 수입으로, 산골에 농지를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끌어들여 민주정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으로 규합하였지요. 이렇게 '솔론식 평화'가 깨진 아테나이에 세 당파33가 생겨 도시를 혼란으로 몰았고, 이 이후로 아테나이는 정치적 혼란이 생겼을 때마다 과두정이나 참주정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설치고 나섰으며, 오늘날에도 이런 정치 세력들이 남아 있는 것을 우리 아테나이 시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9.1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저와 함께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전해 온 뿌리 깊은 악습인 정적 제거의 틀과 그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면, 자연스레 여러분이 왜 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했으며, 한 희극작가일 뿐인 이 아리스토파네스를 재판정에 세웠는지, 그 연원에 대해 이해하실 것이고, 이제는 아테나이에서 더 이상 이런 식의 재판이 필요없다는 데 동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저는 깨어진 '솔론식 평화'를 대치한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34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만일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서 이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고, 왜 우리 아테나이의 조상들이 효율적이고 지키기 쉬워 보이는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를 버리고, 말 많고 탈 많아 제일 지키기 힘든 '솔론식 평화'로 돌아서게 되었는지를 이해하실 수 있다면, 여러분은 오늘 디오뉘소스가 불어 넣어 주신 이 아리스토파네스의 영혼을 충분히 들여다 보실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9.1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솔론이 외갓집 친척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본 눈은35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소크라테스를 본 델포이의 퓌티아의 눈보다 훨씬 정확했고 정곡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론이 자신의 예측대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민중을 기만하여36 무력으로 집권하는 것을 보고, 무기를 자기 집 대문 밖에 내놓고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자기와 함께 무력으로 궐기할 것을 호소했지만, 몽둥이를 든 페이시스트라토스대 호위대의 위세와 동조하는 민중들의 기세에 눌렸는지, 뤼쿠르고스는 숨고, 메가클레스는 가족들을 데리고 아테나이에서 도망가 버리자, 낙담한 솔론은 칩거에 들어갔고, 그리고 얼마 후 죽었습니다.37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자기의 개혁 입법을 시행하지 않고 참주가 되어 아테나이의 정치를 무력으로 평정할 것을 상심하여 죽음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바로 억압적인 참주가 되는 대신 자신이 아테나이의 공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로 보이도록 민중들이 좋아하는 정책들을 펼치며 참주로서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지만, 첫 번째 집권은 권력의 뿌리도 채 내리기 전에 다섯 해 뒤 뤼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의 연합 세력에게 축출당했고, 두 번째는 뤼쿠르고스와의 오랜 정쟁에 지친 메가클레스와 야합하여 참주로 복귀하였지만, 야합의 미끼였던 메가클레스의 딸과의 결혼에서 자식 생산을 기피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낀 메가클레스의 분노를 피해 도망쳐 버렸고,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또 다시 도진 뤼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 간의 정쟁에 신물이 난 아테나이의 민심을 읽고, 자신의 용병들과 주변 도시들 군대의 지원으로 아테나이를 공격하고 무력으로 평정한 다음, 정권을 잡고 명실상부한 참주가 되어 반대자들을 축출하고38 도시에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를 구축하였지요.
9.14. 여러분도 다들 한번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만, 도시에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가 유지되었던 그 기간을 사람들은 '크로노스의 시대'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황금시대라고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페리클레스의 시대도 그와 비슷한 말로 칭송했지요. 페리클레스는 권좌에 있었던 18년 동안 죽기 전 한 해를 빼고는 자리를 내놓은 적이 없었고, 더구나 도시에서 쫓겨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만,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렇게 훌륭한 통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치세를 칭송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권좌에서 쫓겨난 까닭을 단지 정적들의 집권욕 때문으로 몰 수 있겠습니까? 민심이 감싸고 도는데도 뤼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가 무력으로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참주라 해도, 어떻게 도시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지도자를 쫓아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비록 정쟁을 일삼아 도시를 혼란에 빠트리긴 했지만, 그들은 민심이 아닌 무력으로 정권을 잡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심에만 매달리다 보니 생긴 것이 정치적인 혼란이었는데, 민심을 얻는 수단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왜냐하면, 시민들은 모두가 잘살게 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해 주겠다는 사람에게 정권을 잡게 해 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정권을 쥐게 해 주어 보았지만, 그래도 별 볼 일 없었고, 그래서 민심도 혼란스러워져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무력으로 정권을 잡는 것도 이런 민심의 혼란 속에 무력으로라도 누가 나서 잘살게 해 줄 사람 없나 하는 민심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우길 분들도 계시겠지만, 만일 그것이 민심이라면, 그런 민심이 받쳐 주는데 애시당초 무력으로 정권을 잡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다는 말은 무력이 아니면 정권을 잡을 수 없었다는 뜻이고, 이것은 바로 정권을 쥐기 위해선 민심을 등져야 했으며, 민심을 등지고도 정권을 잡으려니 무력이 필요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민심을 등지고 잡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했던 일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9.15.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비록 몽둥이를 든 호위대로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참주가 되었지만, 그 몽둥이로 민심을 돌려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고, 민심을 돌려 놓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려 했습니다. 처음 그는 누구보다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중을 위하는 참주라는 것을, 그래서 민생을 위한, 다시 말해 그 민중들의 생활을 위한 정치를 하는 참주로 인정 받고 싶었습니다. 빚은 탕감되었지만 여전히 돈이 없는 농부들을 위해 농기구를 살 수 있도록 개인 돈을 빌려 주기도 했지요. 누가 좋아라 하지 않았겠습니까? 한편 그는 달아난 정적들의 남은 세력들에게도 자신이 민중과 몽둥이를 앞세워 그들의 안녕과 기득권을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신호도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바꾸지 않았습니다.39 그렇지만 솔론의 생각과는 달리40, 아테나이 민중들은 여우와 같은 조심성과 영악함으로 언제 그가 솔론의 법을 고쳐 부자들의 재산을 뺏어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인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민중들의 이런 탐욕을 모를 리 없는 그가 민중들에게 보낸 손짓은, 다른 헬라스 도시들 같은 도시 규모의 축제가 없었던 아테나이에, 아테나이 도시가 주관하는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를 처음으로 열고, 춤과 아우성의 행렬과 포도주 마시기와 디튀람보스 공연에 더해, 디튀람보스의 풍자나 고발보다 당시 사람들의 화제에 더 많이 오르는 테스피스의 비극을 사재를 들여 공연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41 이제는 디튀람보스의 형태를 완전히 벗어나 연극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테스피스의 비극을 민중들의 축제인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 공연하도록 한 것으로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솔론의 법에 갖힌 꼭두각시가 아니라, 참으로 민중을 위하는 아테나이의 참주임을 그들에게 넌지시 알린 것이었습니다. 솔론은 테스피스에게 "연극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 마구 거짓말을 해도 부끄럽지 않소?"라고 꾸짖고, "연극이라서 괜찮다"는 대답에, "그러다가는 언젠가 진실에도 거짓말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지팡이로 땅을 치며 탄식했지만,42 지금까지 민생의 노고에 대해 누구 하나 위로와 동정을 보내지 않았었는데, 이제 참주가 아테나이가 주관하는 잔치를 열고, 술과 고기, 노래와 춤, 웃음과 고함으로 흥청거리는 시민들에게 테스피스의 비극을 보여 주며, 신산한 민생의 노고로 거칠어진 심성을 달래고 정화시켜 준 것이었습니다. 농사 지을 땅을 원하는 사람들을 달래어, 봄이 되어 만물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디오뉘소스의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려 했었는지도 모르지요. 이것이 그가 보여 준 첫 번째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민중들에게는 실망을, 가진 자들에게는 언제 민중들의 흥이 광기로 바뀔지 모르는 불안을 불러왔습니다. 디오뉘소스의 생명력으로 해가 갈수록 축제는 규모가 더욱 커져서 흥청거렸지만, 그만큼 한 쪽의 실망과 다른 한 쪽의 불안 역시 더욱 커져서 앙앙불락하였습니다. 창 대신 몽둥이를 들고 만들었던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는 아테나이에 디오뉘소스의 넘치는 생명력을 뿌리 내리게 하지 못한 채, 축제라는 흥만 남기고 다섯 해만에 아테나이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9.16. 아티케의 북쪽과, 테바이, 트라케 등지를 전전하며 그곳 도시들의 귀족들과 사귀고 지내다가, 홀연히 메가클레스가 내민 손을 잡고, 그가 마련해 준 대로 다시 참주라는 권좌에 앉은 다음, 마치 결혼 기념 하사품이나 되는 듯이 아테나이에 가져다 준 두 번째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는 참주라는 그의 권좌만큼 어정쩡한 것이었습니다. 추대된 참주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메가클레스로부터 추천된 일이었을 뿐 참주의 본령인 독재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몽둥이를 든 호위대가 아니라, 마차를 탄 아테나의 인도를 받고43 아크로폴리스로 와, 다시 참주가 된 그의 입장에서 아테나 여신에 대해서는 소홀히 해도 좋을 어떤 핑계도 결코 댈 수 없었겠지요. 게다가 아테나는 모든 아테나이 시민의 여신이었고, 비단 참주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는 도시 전체가 여신의 가피 아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두 번째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는 아테나 여신을 받들어 여신이 아테나이에 평화를 주시길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치 솔론이 도시의 정화를 통해 신에 대해 순응하듯 도시에 대해 순응하기를 바랐던 두 번째 '솔론식 평화'를 의식했을지도 모르지요. 전통적인 귀족들을 규합해 파당을 만든 뤼쿠르고스가 아테나이의 전통을 살린다며 아테나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만든 이래44, 흐지부지하던 제사의식을 재건하고, 아티케의 모든 마을들이 각자 제물을 들고 오는 행렬을 추가하여, 이런 제의과 행렬을 통해 아테나이 시민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단결된 도시의 평화를 느끼게 한다는 발상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도시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였으므로, 도시의 정통성과 도시민 모두의 공통된 가치를 함께 확인하는 데서부터 도시의 평화를 구축하겠다는 두 번째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는 어떤 경우에도 성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겉으로는 그와 메가클레스 사이의 평화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시에 만연했던 빈부의 갈등도 어느 정도 진정된 듯 여겨졌지요. 그렇지만, 첫 번째는 물론 이 두 번째의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 역시 재물을 먹는 불가사리였지 재물을 낳는 화수분 플루토스는 아니어서, 전통적으로 부의 근원이었던 농장을 운영하는 귀족들은 현상 유지라도 할 수 있었지만, 메가클레스의 힘의 원천인 상공업과 무역업이 도시의 안정에 힘입어 일취월장하는 바람에, 기술은 물론 경험도 자본도 없어 이 새로운 부의 원천에 접근하기 어려운 산골 빈농들과 도시 노동자들은 생활고와 소외감으로 불만만 커져 갔습니다. 이런 불만으로 야기된 민중의 반발은 그로 하여금 그가 여전히 그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급기야 아테나이에 참주가 메가클레스의 딸과의 사이에 여태 자식이 없는 이유가 은밀하게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부부 간의 일이 정치적 행위의 연장으로 풀이되는 이 고약한 소문은 즉각 메가클레스에게 경고음을 발했고,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딸의 고백으로 저간의 사정을 알고는 있었으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믿고 참고 기다리던 메가클레스에게, 이제 참주를 해친다 해도 결코 정치적 보복이 아닌, 어디까지나 모욕을 받은 한 가장의 정당한 보복을 보장하는 대단히 위험한 내용이었습니다.45 아테나이 여신의 인도로 만들었던 두 번째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는 아테나이에 아테나 여신의 지혜를 펴지 못한 채, 한 여름의 긴 행렬만 남기고46 야반도주하고 말았습니다.
9.17. 두 번의 실패가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준 교훈은 정치가 아닌 통치만이 도시에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결심이 서자 처음 망명 때처럼 오래 아테나이를 떠나 있을 생각이 없어졌으며, 늙어 가는 아버지를 보는 아들들 역시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아테나이의 추종자들로부터 반정의 거사를 요구하는 재촉이 잦아지자, 도주한지 네 해째 에레트리아에서 대규모 반정군을 모아 마라톤으로 건넜고47, 팔레네에서 아테나이가 보낸 진압군을 격파하고는 곧바로 아테나이에 입성해, 세 번째로 또 참주가 되었지만48 그는 예전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테나이에 시민들에게 맨 처음 보여 준 것은 자신의 용병과 헤게시스트라토스가 데리고 온 아르고스 군대와49 테바이의 군대와 에레트리아의 기병들을 테세이온50 앞에 세워 놓고 사열한 것이었습니다. 몽둥이를 든 호위대의 추종이나, 아테나 여신의 가피는 말할 것도 없고, 그는 이제 테세우스의 무력까지 가진 진정한 참주임을 선언했습니다. "놀라지도 겁먹지도 말고 일상으로 돌아가라. 도시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한다."51 이것이 세 번째로 아테나이에 펼쳐진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의 요체였습니다. 뤼쿠르고스도 메가클레스도 모두 이미 떠나 아테나이를 버려 버리자, 그들이 버린 토지는 몰수되었고, 도시에 남은 그들의 추종자들은 무장 해제되었으며52, 도시 바깥에서 계속되는 저항은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무력화시켰습니다53. 드디어 도시 안팎에서 평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도시는 참주를 지지하고 사랑하는 한 무엇이든 마음껏 누릴 자유가 넘쳐 흘렀으며, 참주에게 불의한 언행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 조용한 응징의 정의가 세워졌습니다.54 무기만 놓지 않았지, 그는 새로 법을 만들어55, 그 법에 따라 중립적이며, 합법적으로 통치했고, 시민들에게 자애롭고 온화했습니다.56 진정한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가 도시에 정착되어 갔고, 그는 민중을 사랑하는 지도자가 되어 민중들의 생활, 소위 민생을 돌보았습니다.57 처음 두 번의 집권 때는 개인 재산으로 민생 사업을 벌였는데, 그것으로 인기를 얻는 데는 좋았으나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살려, 이제 그다지 인기를 따로 구할 필요가 없어진 진정한 참주로서, 그는 개인 재산 대신 공적 자금을 쓰기로 작정했고,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시대에 앞서 정치를 하던 그 누구도, 테세우스는 물론 솔론도, 생각할 수 없었던 세금 거두기는,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를 유지하고, 진정한 참주통치를 위한 최고의 통치 도구였습니다.58 그리고 그는 걷힌 세금으로 도시를 바꾸어 나갔습니다. 영농 자금 지원에 이어 시민들의 생활 환경 개선을 위해 토목 일을 벌였는데, 물이 모자라는 시민들 사정을 살펴 아고라의 샘에서 물을 끌어 도시에 공급하는 수로를 건설하면서, 우물 개발과 도로를 정비했고, 아고라를 단장하여 시장에 활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다음은 아크로폴리스였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입구에 문탑propylaia을 세우고, 처녀신 아테나를 모신 파르테논을 세우는 한편, 엘레우시스 비교 입문식을 위한 텔레스테리온을 짓고, 예전에 세워졌던 여러 신들의 사당들도 정비했습니다.59 그리고 도시를 막 벗어난 일리소스 강 언덕에 제우스 신전 공사60도 벌이는 한편,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 근처 무덤들을 치워 신전 주위를 정화했습니다. 무기를 내려 놓지는 않았지만, 전통적으로 신들에 대해 경건심을 갖는 것은 시민의 최고 미덕이었으므로, 신들에 대한 자신의 돈독한 경건심을 시민들에게 보여 주어, 그것으로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무기보다 훨씬 부드럽고 안전하게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61 그리고 그는 시민들에게 무슨 일이든 신들의 말씀을 잘 따르라며 신탁을 받아 보는 것을 장려하여 신관들까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했습니다. 이렇게 신들을 위한 일련의 일들이 자리를 잡아 가는 것과 함께, 이미 앞서 두 번의 집권 때 키워 놓았던 신들과 시민을 잇는 축제와 제사 의식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새봄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는, 그동안의 비극 공연으로 늘어난 작가와, 배우와, 코로스들을 동원하여 경연을 벌이고 심사를 하여 상금을 주는 순서를 넣었고,62 한여름의 판아테나 제의에는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헬라스의 다른 도시들도 참여하도록 유도해 행사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제의에 참여한 마을끼리의 체육대회를 4년마다 개최하여 제우스가 아닌 아테나여신이 주관케 하였습니다. 이제 아테나이가 생산하는 올리브와 포도주가 다른 도시들로 팔려 나가면서, 이들을 담는 항아리는 코린토스를 제치고 일등 인기 제품이 될 정도로 헬라스의 도시들에게 아테나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되었지요.63 이런 성공도, 신들의 축복도, 민중들의 칭송도 모두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의 산물이었습니다.
9.1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고64, 그의 큰 아들 힙피아스가 참주가 되어 형제들과 아버지의 친구들과 함께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를 이어 갔습니다. 아버지가 하던 대로 했지만, 만일에 대비해 아버지 때보다 더 많은 친척과 친지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신흥 재력가들을 위시한 잠재적 정적들에 대한 감시와 억압의 끈을 조이면서, 한편으로 일반 시민들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하던 통제보다 압제로 다루었습니다. 힙피아스는 제법 대범하게 메가클레스의 아들 클레이스테네스를 아테나이로 불러들여 아르콘을 시켜 주기도 했습니다만, 민심은 전과 달랐습니다. 사실 그전에 밀티아데스65가 아테나이를 떠나 케르소네소스로 떠날 때66 이미 민심이 힙피아스로부터 떠나고 있었지요. 클레이스테네스가 아르콘 직을 한 해만 마치고 다시 아테나이를 떠난 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힙피아스가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를 별 탈 없이 제법 오래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같은 민중들의 지지는 없었지만 아버지 곁에서 오래 도시를 다스려 온 경험이 있었고, 도시를 순찰하는 '스퀴타이 궁수'와 몽둥이가 아닌 무기를 지닌 참주의 호위대 테살로니아 용병이 있었고67, 명망과 재력으로 시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사람들이 도시 밖으로 달아나야 할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이나 잠재적 정적들에게 가한 압제와는 달리, 힙피아스는 형제들의 방종을 제어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복의 막내 헤게시스트라토스의 방종이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를 깨고 말았습니다. 헤게시스트라토스가 그의 남자 애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하르모디오스를 핍박하다가 끝내 판아테나 제전의 행렬에 꽃을 든 하르모디오스의 누이를 희롱하며 하르모디오스를 모욕한 것이 하르모디오스를 격분시켰고, 하르모디오스는 친구 아리스토케이톤과 주변 친지들을 모아 참주 일가를 암살하기로 모의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동참했던 친지 하나가 힙피아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고변하는 줄 알고 일을 서두르다 참주의 동생 힙파르코스만 죽이는 데 그쳐,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힙파르코스를 죽인 하르모디오스는 현장에서 죽었고, 붙잡힌 아리스토케이톤은 공모자를 밝히라는 고문을 끝내 견디지 못할 것 같자, 힙피아스에게 많은 공모자를 댈 테니 신의의 징표로 악수를 하자고 꾀었고, 힙피아스가 오른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고 힙피아스가 형제를 죽인 자와 오른손 악수를 했다고 욕하고 떠들며 힙피아스를 자극했고, 흥분한 힙피아스가 자제하지 못하고 바로 칼을 뽑아 아리스토케이톤을 죽여 주었습니다.68 그로부터 아테나이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고 나서도 지켜졌던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는 사라지고, 살벌함과 포악함이 지켜 나갈 '힙피아스식 평화'69가 자리 잡았습니다.
9.19. 이테나이 시민 여러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19년과 힙피아스의 13년을 참주의 지배 아래 살았던 아테나이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돌변하여 참주를 몰아내자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수의 살벌함과 의심의 포악함으로 아테나이에 '힙피아스식 평화'를 4년이나 더 끌고 갔습니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참주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자유를 누리고, 참주 일가나 친지가 세운 법과 정의에 익숙해졌으며, 스퀴타이 궁수나 참주의 호위대 테살로니아 용병이 지켜 주는 평화에 고분거리다 보니70, 아테나이 시민들 가운데서 테세우스나 솔론이 가르쳐 주었던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기억하는 민중이 없어지고 만 것이었지요. 형편이 이러니 이것은 아니라고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민중은 더더구나 있을 리 없었지요. 도시에 민중들이 사라지고 대신 권력에 대한 아첨꾼들이 새로 생겨났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길을 닦고 돌을 쪼는 일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무슨 은사恩賜라도 받은 듯 감지덕지하는 버릇이며, 자기가 낸 세금으로 축제에서 고기도 먹고 포도주를 마셨지만, 새로운 놀이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무슨 축복을 받은 듯 흥겨워 하는 버릇까지 생긴 아첨꾼들이 생긴 것입니다. 마을에서나 민회에서나 할 것 없이 투표로 뽑은 사람들이 공무를 맡아 있을 때는 그들이 민중들에게 아첨을 떨었었는데, 투표로 뽑지 않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갈아치울 수 없는 참주 앞에서는 거꾸로 모든 시민이 참주에게 아첨을 떨지 않으면 안 되고 만 것입니다. 창칼도 없이 가래와 써레만 들고 아티케의 여러 마을에서부터 구름처럼 몰려들어 창칼을 든 퀼론의 군대를 아크로폴리스에서 쫓아냈던 민중들이었었는데, 숨 쉬는 것조차 참주의 은덕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가래와 써레는커녕 포도나무 받침대조차 하나 손에 들고 아크로폴리스 아래 아고라까지도 갈 용기가 나지 않았지요. 그렇게 용기가 사라진 아테나이 사람들 영혼에는 영악한 계산이 들어앉았습니다. 계산에 밝은 영혼은 역시 장사꾼들이지요.71 '힙피아스식 평화'가 그들을 적대시하지 않고 그들의 이권을 보호하고 챙겨 주는 한, 그것 때문에 그들의 재물이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는 한, 정쟁과 중구난방의 어지러운 세상보다는 조용하고 일사분란한 '힙피아스식 평화'가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보다 굳이 더 나쁘다 할 이유가 없었지요. 어떤 신흥 부자들은 더 많은 아첨으로 '힙피아스식 평화'를 부추기고 그 덕으로 더 많은 이권을 챙겼는지도 모르지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농투산이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도시 노동자든 어떤 처신이 이익인지 모를 리 없었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모두가 셈에 밝아졌습니다.
9.20. 아테나이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계산하고, 그에 따라 몸을 사렸는지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이 아테나이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모아 참주를 몰아내려고 아티케의 한 마을72을 기지로 삼아 아테나이로 쳐들어가려 할 때도, 그리고 그 기지가 힙피아스의 군대에 포위되어 박살이 날 때도,73 오관불언 네 떡 내 몰라라 하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권력 잡으려는 놈들은 모두 그 놈이 그 놈이고 이 참주나 저 참주나 다 똑같다 싶었거나, 클레이스테네스가 고작 집안 사람들이나 데리고 힙피아스와 붙어 봤자 당하기나 하겠냐고, 이미 애저녁에 쑤어 놓은 죽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이제 참주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다시는 아테나이로 갈 수 없는 처지에 빠진 클레이스테네스와 그의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은74 언제까지 아테나이 민중들의 궐기나 기대하며 지날 수도 없어, 참주에게 배운 대로 다른 도시의 힘을 빌려 참주를 치기로 했습니다. 테바이나 에레트리아는 참주와 가까워, 결국 펠레폰네소스 쪽 도시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도리에이스들의 맹주 스파르테를 움직이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었지요. 스파르테의 지도자들과 연분이 별로 없었던 클레이스테네스는 신들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신탁 받아 보기를 장려한 이래 한창 주가가 오른 델포이의 신 아폴론이 스파르테를 움직이도록 계책을 세웠고75, 퓌티아는 스파르테 사람들만 보면 참주를 축출해 아테나이를 해방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신의 뜻을 전했고, 계속되는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없게 된 스파르테는 처음 앙키몰리오스에게 군대를 주어 해로로 팔레론에 상륙했지만, 텟살리아 기병에게 유린되고 말았습니다.76 약이 오른 스파르테는 그들의 왕 클레오메네스를 내보내 이번에는 육로 진격했고, 또 한번 텟살리아의 기병이 아티케에서 그들을 엄습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만만치 않아 약간의 전사자를 내고는 바로 텟살리아로 돌아가 버렸고, 힙피아스는 가족들을 데리고 아크로폴리스의 옛 펠라스고이의 성채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스파르테 군대와 그들을 뒤따라 들어온 망명자들이 힙피아스 일족을 포위하고 공격할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안전한 도시로 대피하려던 힙피아스 일족의 어린이들이 붙잡히는 바람에 농성도 공성도 할 일이 없어, 힙피아스는 닷새의 말미를 얻어 재산을 정리하여 일족들을 데리고 아테나이를 떠났고,77 도시 운영 체제가 무너진 아테나이를 스파르테의 군대가 해방군이 되어 진주했고, 자연스레 해방군을 뒤따라 들어온 망명 세력들이 도시의 운영 체제를 정비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78 이제 아테나이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계산에 바쁜 도시민들과,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눈치보기 바쁜 참주정의 은덕으로 잘 살았던 사람들은, 망명에서 돌아온 클레이스테네스와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자기들을 대하고, 해방군을 다루는지 지켜보며, 과연 그들이 어떤 권력자의 모습일지 쑥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참주정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는 않을 것이라 대비책을 세워 보려 해도 민중들의 관심이 클레이스테네스 쪽으로 쏠리고 있어 쉽지 않았지요. 클레오메네스와 해방군은, 핍박 받아 망명에서 돌아온 알크마이온 집안의 클레이스테네스나, 참주의 세력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하는 참주 힙피아스의 친구 테이산드로스의 아들 이사고라스나, 아테나이의 정치 세력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도시가 안정을 보이자 바로 스파르테로 돌아갔고, 처음 열세를 보이던 클레이스테네스는 해가 갈수록 아테나이 민중들의 신뢰를 얻어 세력을 키워 갔고, 드디어 아테나이의 권력 구조를 분산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서, 지도자를 내는 부족 단위를 넷에서 열개로 늘이는 것을 추진할 정도로 강력해지자, 불안해진 이사고라스가 나서 클레오메네스와 맺은 교분79을 이용해 반격에 나섰습니다. 이사고라스는 퀼론의 저주를 다시 작동시켰고, 클레오메네스가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을 아테나이에서 추방하라고 사절을 보내자, 클레이스테네스는 자기 혼자면 된다며 아테나이를 떠났지만 클레오메네스는 소수의 병력을 대동하고 직접 아테나이로 와 이사고라스가 찍어 주는 알크마이온 집안 700가구를 추방한 다음, 이사고라스와 그의 동료 300명에게 아테나이를 넘겨 주려 했습니다.80
9.2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스파르테의 왕인 클레오메네스가 아테나이의 정치체제를 함부로 바꾸어, 민회를 없애고 이사고라스가 뽑은 300명에게 민회의 역활을 맡기면서 이사고라스를 권력자로 찍어 주는 이 황당한 현실 앞에 아테나이 사람들은 더 이상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참주를 내치지는 못했지만, 참주 없이 지낸 지난 세 해가 살기 더 좋았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었을까요? 어쨌든 먼저 민회가 새로운 체제를 거부했고,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는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고, 시민들이 나와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했고, 사흘만에 협상을 통해 클레오메네스와 스파르테 병력은 이사고라스를 데리고 스파르테로 돌아갔고, 아테나이는 클레이스테네스와 700가구를 다시 불러들였고, 정권을 잡은 클레이스테네스는 오늘날 우리가 민주정이라 부르는 아테나이만의 정치 체제의 근간을 마련하고 시행해 나갈 것이었지만,81 당장 그렇게 아테나이에서 도시의 질서는 안정을 되찾아 갔다고 해서 도시민들까지 안정을 찾앗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테나이 시민들은 닥쳐올 고난이 불안하고 두려워 평화스럽지 못했습니다. 실패한 퀼론이나 성공한 페이시스트라토스 모두 참주가 되기 위해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켰고, 그 무력 가운데는 다른 도시 군대나 용병의 지원도 있었지만, 정변의 주체가 무력을 지휘하고 통제했기 때문에 다른 도시의 개입을 정변의 주체가 책임질 일이었고, 그런 정변에 대해 아테나이 시민이 그들 판단으로 좌절시키거나 용인했기 때문에 그런 정변의 결과도 아테나이시민이 책임질 일이었음에 반해,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이 페이시스트라토스 집안의 참주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쓴 방법은 아폴론으로 하여금 정말 에우리피데스식 '기계를 타고 나타나는 신deus ex machina'처럼 헬라스 최강 스파르테를 움직이게 했기 때문에, 스파르테는 신의 뜻을 따른 도덕적 당위성을 가지고82 다른 도시의 정치 체제를 무력으로 붕괴시킨 데 대해 책임질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 시민 역시 스파르테가 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침략에 준하는 아테나이 내정 간섭에 대해 그들의 판단으로 좌절시킬 수도 용인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렇게 신의 뜻으로 참주를 내쫓고 돌아가 놓고, 이번에는 스파르테의 왕 클레오메네스의 뜻으로 이사고라스를 점지하고 그를 위해 그의 정적의 추방을 요구하고 더군다나 민중의 모임인 민회를 없애고 대신 이사고라스 일당으로 구성된 300인 회의를 만든다는 것은 내정 간섭을 넘어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의 속국에 다름 아니라는 말이어서, 그것은 정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들이 단연코 거부하고 클레이스테네스를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국력이나 군사력으로 스파르테와는 견줄 수 없이 약한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의 보복이 불보듯 뻔한 판에 한가로이 정치 체제나 정비하고 있을 수 없었고, 불안해진 시민들은 어디 기댈 곳이 없나 찾다 보니, 헬레스폰토스 진출 이후 알게된 페르시아의 존재가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뤼디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페르시아 왕의 총독을 찾아 사르데이스로 사절을 보내고 흙과 물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동맹을 맺고 돌아와 사절들이 흙과 물 때문에 문책을 당하는 등 부질없이 난리만 피우고는83, 피할 수 없는 전쟁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스파르테가 코린토스를 위시한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병력과 함께 엘레우시스로 진격했고, 동시에 테바이와 보이오티아의 동맹들은 변경 마을들을 점령했고, 칼키스와 에우보이아의 동맹들은 그들과 인접한 아티케를 유린하고 나왔습니다. 병력을 분산시킬 여력이 없는 아테나이는 우선 스파르테를 대적하기로 하고 엘레우시스로 나아갔는데, 스파르테와 펠레폰네소스의 동맹도시들 병력이 갑자기 철수하고 없어,84 다음으로 농지를 황폐화시키고 있는 칼키스를 치러 방향을 틀었고, 테바이와 보이오티아가 가로막자 이를 쳐부수고, 에우보이아 섬으로 건너가 칼키스를 점령한 뒤, 앗티케의 소작 농민 4천명을 이주시켜 응징했습니다.
9.2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크로폴리스에서 스파르테의 왕과 비록 소수이긴 했으나 그 왕의 정예 호위대를 제압하였고, 칼키스를 응징하러 가는 길을 막은 테바이를 격파했으며, 칼키스를 점령했고 숱한 포로를 잡는 등, 이제 아테나이는 군사적으로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주를 쫓아내고 불과 서너 해만에 아테나이 시민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몸으로 깨달았고,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칠 준비가 된 전사가 된 것입니다.85 '솔론식 평화'는 지키기에 각자의 언행이 권력에 대해 너무 분방芬放하였고,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는 지키기에 모두의 언행이 권력에 대해 구차苟且하게 아부阿附해야 했으며, '힙피아스식 평화'는 지키기에 모두의 언행이 권력에 대해 비굴卑屈하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제 아테나이는 시민이 권력 앞에 아부하지 않아도, 복종하지 않아도 될 것이므로, 참주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에게조차도 옛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자유스런 아테나이 시민으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주의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이었습니다.86 그들의 준동을 보며,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나이에 '솔론식 평화'를 정착시키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더 광범위한 권력의 분산과, 그 평화를 깰 수 있는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도나 시도가 있든 없든, 사전에 차단할 장치가87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아테나이의 진정한 평화는 도시민 모두가 자유로운 가운데, 도시민 모두가 공평하게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도시에 정의가 공기처럼 퍼져 있을 때88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의 정치 체제를 바꾸려는 시도에 대해 모든 도시민이 반드시 가부를 표시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무기를 들고 나서야 한다는 솔론의 정변 방지책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몽둥이를 든 호위대로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을 때 솔론이 직접 무기를 들고 이를 분쇄하러 나섰음에도 시민들이 동조하지 않아, 실효가 없음이 드러났고, 이제는 그런 의도를 가질 만한 정치적 위치에 있고 정치적 기질이 민주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민주정을 뒤엎고 정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도시민이 스스로 판단하여 선제적인 조치, 다시 말해 그렇게 보이는 권력자나 권력 지향자를 미리 도시로부터 장기간 추방하는 것으로 민주정을 지켜나가기로 했습니다. 도시가 민주정이라는 하나의 정치 체제를 최고의 것으로 믿고 지킨다면 '솔론식 평화'가 도시에 정착될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런 방법으로 참주정 복고를 꿈꾸는 참주의 친구들을 아테나이로부터 추방함으로써 아테나이에서 또 다시 정치적 분란이 야기될 꼬투리를 원천적으로 분쇄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시민들의 정치적 권한을 신장시켜 민주정을 확립해 나감으로써 진일보한 '솔론식 평화', 즉 '클레이스테네식 평화'를 아테나이에 정착시켜 갔습니다. 그리하여 짧은 시간 안에 아테나이는 활력을 되찾았고, 아테나이는 날로 강성해져 갔습니다.89
9.2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테나이 사람들은 도시의 평화가 다름 아닌 도시민 하나 하나의 자유와, 그 자유를 제약하는 모든 법들, 다시 말해 민회가 만든 법들 뿐만 아니라 도시의 전통이나 관습, 심지어 자연이 인간들에게 가하는 법칙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법들이 도시민 모두에게 공평하고 공정하게 적용되는 정의에 의해 지켜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고, 그렇게 법과 제도를 바꾸어 갔습니다.90 도시의 평화는 살아가는 데 일용할 양식만큼이나 필수불가결한 것이어서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도시민에게 더 많은 자유와 더 확실한 정의를 구현해 주어야 했는데, '클레이스테네스식 평화'91는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 평화를 위협한다고 보이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단지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런 의심을 받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도시로부터 쫓아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92 왠만하면 다 쫓아내다 보니 참주와 관계없고 민주정에 위협이 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 비해 두드러진다 보이는 사람도 쫓아내었습니다.93 마구잡이로 쫓아내다 보니 추방당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시가 위기에 처해 위기를 구할 사람이 모자라, 쫓아낸 사람을 다시 불러들여야 하기도 했지요.94 이런 결과를 보면 도편추방에 관한 한 '클레이스테네스식 평화'는 도시에 평화를 이루는 제도라기보다 오히려 도시에 새로운 불화를 부추기는, 그래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클레이스테네스식 불화'라고 해야 할 정도로 도시의 불화를 조장하는 제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 우리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이 한 목소리로 아테나이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이 도편추방 제도를 가장 많이 사용되었지만, 이 제도만으로는 그 수많은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는 데 모자람이 있었던지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하는 형식적 정당성을 찾아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신통한 것은, 힙피아스가 원하던 참주정 복고에 얼마나 깊은 연고가 있는지 모르는 힙파르코스가 맨 처음으로 도편추방된 이래, 휘페르볼로스가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짜고 파이악스가 동조한 삼자연합에게 되치기당해 추방당하고, 그래서 도편투표가 폐지될 때까지 한 세기 가까운 동안 도편투표 결과에 불복하거나 항의해서 재심을 요구한 경우가 한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95 다시 말해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이 이 도편추방 제도를 도시의 평화를 위해 작동시키는 한 '클레이스테네스식 불화'가 아니라, '클레이스테네스식 평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아도 되겠지요. 스파르테는 리쿠르고스 이래의 정치체제를 바꾸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부 단속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코린토스는 한번 참주정을 겪은 다음 참주정 복고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고, 다른 헬라스의 도시들도 그들의 도시가 참주의 지배하에 놓일까 늘상 염려하고 지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96, 민주정을 아테나이의 정치체제로 삼은 뒤, 과두정이나 참주정 지지자들의 도전을 경계하고 있었을 아테나이 민중들의 노심초사가 얼마나 심각하게 도시를 억누르고 있었는지, 그래서 민주정의 이름으로 또는 민주정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비민주적인 발상이나 행동이, 이를테면 민중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가 도시에 해를 입힐 의도를 가졌는지에 상관없이 도시로부터 격리시키는 도편추방 같은 제도가, 도편투표를 하던 아테나이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추방 당사자에게조차도 너무나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추방된 당사자들마져 도편추방 제도가 도시에 불화를 조장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 평화를 이룬다고 받아들였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냥 남다른 크산팁포스97, 지겹게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 돈을 너무 밝힌 테미스토클레스, 친 스파르테적인 키몬, 제일 시민적 가치의 보루 투퀴디데스, 능수능란한 다몬, 그리고 정치 건달 휘페르볼로스, 등을 10년이나 도시에서 떨어져 지내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저간의 사정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멀쩡한 정치 지도자를 시치미 딱 떼고 도시에서 추방시킨 아테나이 사람들이나, 도시에 기여한 공로도 잊고 배은망덕하게 추방시키는 시민들에게 불평 한마디 없이 아테나이를 떠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시의 평화라는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9.24. 아테나이 사람들이 힙피아스 시절 잘나가던 사람들 가운데 세 사람을 골라 3년 거푸 추방했을 때, 맨 처음의 힙파르코스는, 참주와의 인척이라든가 남은 참주정 추종자들의 두목 노릇을 했다는 등, 쫓겨난 이유라도 알려졌지만, 두 번째의 메가클레스는 행색도 이유도 없이 겨우 이름만 알려져 그저 부두목 노릇이나 했었겠구나 추측할 뿐이고, 세 번째 사람은 행색이나 이유는커녕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걸 보면, 이 사람이 과연 10년이나 아테나이를 떠나 있었어야 했을 정도로 아테나이의 정치체제에 위협적이었을까 싶어, 이 사람이 순순히 추방에 응하지 않고 시비를 걸었었더라면 휘페르볼로스보다 70년을 앞당겨 도편투표를 없앨 수 있었을런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이듬해 이 사람 다음으로 추방당한 페리클레스의 아버지98 크산팁포스의 경우를 생각하면, 다시 말해 집안의 명망이나 정치 세력을 넓히는 과정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용모와 목소리에 말투까지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빼닮은 크산팁포스99를 볼 때, 만약 페이시스트라토스 일족이나 그 잔당이 아닌 다른 사람이 참주가 되려 한다면 첫 번째로 꼽힐 사람이 바로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팁포스여서, 더 이상 참주의 일족이나 잔당 중에는 눈에 띄는 위협적인 인물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들보다 더 참주가 될 것 같은 사람이 있어 아테나이 시민들은 그를 골랐고, 졸지에 도시에서 쫓겨나게 생긴 크산팁포스가, '아니, 나는 당신들 민중의 편이고 바로 여러분의 대변자인데 여러분이 나를 쫓아 내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요?"라며 한번 제대로 따져 봤던들 '페이시스트라토스도 처음에는 다 그랬었다'는 대답이나 듣고 말았을 것이어서, 군소리 없이 추방에 응한 경우를 생각하면, 크산팁포스가 도편추방제도의 효용 범위를 넓힌 장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페이시스트라토스와 닮았기 때문에 참주가 되려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었지만, 실제 내막은 정적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크산팁포스에 대한 이야기를 침소봉대해 도편추방제도를 이용한 것이었으며, 이태 뒤 아테나이 사람들이 아리스테이데스를 추방했을 때는, 쫓겨난 크산팁포스의 민중 세력까지 장악한 테미스토텔레스100와의 정쟁이 격렬해지자 정치적 유연성이 없는 아리스테이데스101를 추방하여 정치적 혼란을 기화로 새로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출현할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었고, 10년만에 또 다시 국난을 당해102 먼저 쫓겨났던 크산팁포스는 물론 쫓아내었던 정적 아리스테이데스까지 소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테미스토클레스를 아테나이 사람들이 버렸던 것은 그가 비록 참주가 되려 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공로를 앞세우며 너무 오래 권좌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모으는 솜씨가 남달라103 거부가 되기까지 해서, 사실상 참주나 다름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으며104, 전쟁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그 돈으로 도시의 일을 하는 데나 빈민 구제에 좀스럽지 않았던, 그래서 공사 간에 별로 나무랄 데 없었던 키몬이 추방된 것은, 스파르테와의 신경전을 빙자로, 오랜 도광양회 끝에 이제는 정치 무대에 나서고 싶었던 페리클레스가 에피알테스를 내세워 벌인 정권교체 공작이었으며,105 그 키몬이 남긴 귀족들의 중심 자리를 그의 사돈 투퀴디데스가 이어받아 페리클레스를 상대로 선전하였으나, 동맹의 공납금으로 시민들에게 공돈을 주는 것은, 동맹의 맹주로서 동맹에 대한 도리를 깨는 배임에 동맹의 돈을 횡령하는 짓일 뿐만 아니라, 도시의 지도자로서 시민을 타락시키는 행위라며 반대하다, 제일 시민적 가치보다 공돈이 더 좋은 민중들에게 쫓겨나고 말았고,106 투퀴디데스를 추방하고 페리클레스 일인 천하가 되자 공돈 받는 재미가 솔솔하여, 무슨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까지는 없었지만, 왠지 뒷목이 땡기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아테나이 사람들은 유난히 페리클레스에게 알짱거리는 다몬이107 페리클레스에게 참주가 되라고 사주하는 간신배로 몰아 아테나이에서 추방했는데,108 이는 사실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공모하여 휘페르볼로스를 아테나이에서 쫓아낸 것보다 더 심하게 도편추방의 의의를 훼손시킨 것이었습니다. 참주가 우려되면 참주가 될 페리클레스를 쫓아내야지 그의 선생을 쫓아내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이 같은 해괴한 일을 벌여 놓고는 내침 김에 페리클레스와 가까운 똑똑한 사람들 소탕에 나섰습니다. 조각가 페이디아스, 동반자 아스파시아, 소피스테스 프로타고라스, 그리고 자연철학자 아낙사고라스를 신성 모독으로 재판에 회부했던 사실을 여러분 모두 잘 알고 계시겠지요.109 이들의 구명을 위해 조아리고 사정하는 페리클레스를 보고 민중들은 정말 재판정에서의 그들 권한이 어떤 왕권에도 못지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까요?110 이런 장면을 보면 마치 페리클레스가 민중에게 봐달라고 사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민중들이 페리클레스에게 매달려 아부하고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요? '이들을 살려 줄 테니 제발 참주만 되지 말아 주세요. 권력은 죽을 때까지 쥐시고, 그 대신 꼭 하나 돈만은 거르지 말고 나누어 주시면 우리는 행복해요'라고 애걸복걸하고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요? 이 뒤로는 전쟁이 나서 참주고 뭐고 전쟁에 나설 사람도 모자란 판에 도편투표로든 민중의 재판으로든 과연 쫓아낼 사람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네요.111 휘페르볼로스 같은 아고라의 건달이나, 헤르메스 신상 파괴자들이 나타나서 알키비아데스를 쫓아내겠다고 나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9.25. 사실 페리클레스를 도편추방하지 않고 대신 다몬을 추방했을 때, 실력자를 보호하기 위해 그 주변 인물을 희생양으로 삼은 도편추방이 이미 수명을 다했음을 알리는 포고였으며, 그리고 아테나이 사람이 아닌 페리클레스의 측근 네 사람을 골라 신성모독으로 재판에 회부했을 때, 아테나이 사람들은 다수의 민중에 의해 판결되는 새로운 재판 제도가 도편추방 제도를 어떻게 대체 작동되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에피알테스를 앞세운 페리클레스가 키몬이 타소스의 뇌물을 받았다며 고발했지만 아레오파고스가 무죄를 선고하는 것을 보고, 테미스토클레스를 매개로 아레오파고스의 권한을 축소하고 민중들이 직접 재판을 하도록 제도를 고친 이래112, 이제는 2오볼로스의 일당까지 받게 된 민중 재판관들이 어떤 대중들 민심에 반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투퀴디데스를 쫓아내고 나니 잘 봐라 이제 페리클레스가 참주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페리클레스가 바로 참주야. 그를 쫓아내야 해."가 먹혀들 것 같지 않으니까, "페리클레스를 봐. 민중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지 않나. 착실하지, 돈에 깨끗하지, 민중들 사정 잘 알아주지. 이런 민주적인 지도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귀족들이나 부자들 중에 페리클레스가 참주가 될 거라고 쑥덕거리는 놈들이 있는데, 이게 다 페리클레스 옆에서 알짱거리는 놈들 때문이야. 다몬 때문이야. 다몬을 쫓아내야 해. 문제는 다몬이야." 이런 식의 여론 조작이 아니었다면, 무슨 수로 일개 교사였던 다몬이 도편투표에서 페리클레스 대신 일등으로 당첨되어 명예스럽게 10년이나 아테나이를 떠나 사는 영광을 누릴 수 었었겠습니까? 적어도 아리스테이데스 정도로 정의롭다고 이름이 나야 그 정의롭다는 말이 지겨워 쫓아낼 생각이라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식의 여론 조작으로 도편투표에서 재미를 본 어느 도당이 이번에는 500명이나 되는 다수의 배심원들이 참여하는 신성모독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시험해 보고 싶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계산에 밝은 사람답게 아테나이 사람들 역시 변질된 도편추방이 더 이상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겠지요. 시민의 투표로 나타난 대중의 뜻이 부정된다면, 그것은 바로 민주정의 훼손이고, 그것은 다수의 판단을 거부하는 소수의 독단이며, 결국 그것은 다수의 이익을 소수가 저해하겠다는 폭력이어서, 많은 도시의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여 민주정의 훼손을 막고, 대중의 판단과 이익을 존중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며, 불복으로 야기될 분쟁을 피하고 도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10년 간 아테나이를 떠나 있는 것을 받아들였던 것이었는데, 권력자 페리클레스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추방하는 변질을 보고도 과연 사람들이 고분고분 투표 결과에 따를 것인지, 오히려 이제는 도편투표가 도시의 평화를 깨는 새로운 분쟁의 이유가 되지는 않을지, 그래서 앞으로는 어떤 방법으로 정쟁으로부터 도시의 평화를 지켜낼 것인지 지켜보고 있었는데, 신성모독에 대한 재판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9.2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페리클레스가 법정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은 시민 재판관들의 권한이 어떤 왕권에 못지않음을 보이기에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재판으로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심어 주기에도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아테나이 민중들에게는 도편투표 말고도 권력자들을 다룰 민중 법정이라는 새로운 수단이 생긴 것입니다. 페리클레스는 이런 민중의 태도에 대해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난공불락처럼 보이던 키몬의 인기가 반스파르테라는 민중의 감정 앞에 맥없이 스러지는 것을 보았던 터라, 자세를 낮추고 재판정으로 나가 친구들의 목숨은 구했으나 민중들이 언제 자기를 그들의 법정에 세울지 모르게 되어 버린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오래 정권을 쥐고 있었다는113 반성보다는 스파르테와 헬라스의 헤게모니를 놓고 다투는 엄중한 시기에 자기가 아니면 마땅히 아테나이를 이끌어 갈 자질을 갖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자만이, 권력에 대한 탐욕이라는 도덕적 판단을 가리고, 페리클레스로 하여금 독선적인 태도로114 아테나이 시민들을 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불안정한 권력 기반 위에 선 자만과 독선이 그가 권력을 쥐고 있는 동안 스파르테와의 패권 경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그를 부추기고 있었으며, 그것 때문에 스파르테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지더라도 전쟁을 통해 스파르테를 누르고 아테나이가 헬라스의 패권을 잡도록 하는 것이 조국에 대한 그의 의무라고 충동질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계산에만 밝은 전형적인 아고라의 아테나이 시민 클레온과 그의 추종자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전쟁이라는 국제 정치를 통해, 되지 않은 놈들이 자기에게 대드는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하겠다는 오기도 불끈불끈 솟아올랐을 것이지만, 노회한 페리클레스는 그들을 전쟁 옹호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전쟁 필수론자로 바꾸어, 일차적으로는 스파르테와의 전쟁 때문에도 더 이상 자기의 자리를 흔들 수 없도록 조치하는 데는 일단 성공했습니다. 막바지에 오른 '페리클레스식 불화'는 아테나이 내부의 불화를 넘어 헬라스의 불화에 불을 당겼고, 이제 페리클레스는 전쟁이 도시의 불화를 잠시 잠재우는 동안 그의 권력을 지켜 나갈 것이었습니다. 키몬을 공금 횡령으로 재판에 회부하면서 시작한 페리클레스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탐욕은115 정적들과 벌이는 권력 투쟁의 온갖 형태를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펼쳐 보였었는데, 그 투쟁의 끝에 헬라스에서 헤게모니가 어찌 사소한 일이냐며 내놓은 스파르테와의 전쟁은 '페리클레스식 불화'의 최고봉이었습니다.
9.27. 정치적인 분쟁으로부터 도시의 평화를 지키려는 수단으로 만든 도편추방으로 페리클레스를 쫓아낼 수 없었던 정적들이 그 도편추방의 의의를 변질시키면서까지 그의 졸개 하나를 대신 추방함으로써 그에게 참주라는 정치적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는 데는 성공하여, 이 때문에 그의 언행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고, 이윽고 정적들에 의해 민중들의 재판으로 주변이 공격당하자 권력 기반이 허물어질까 염려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권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도시들 간의 긴장을 조성하여 전쟁으로 바싹 다가갔습니다. 도시의 부를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쟁에서 이긴다면 도시가 더욱 융성해질 것이며, 아테나이는 질래야 질 수 없는 전력을 가졌으니 돈까지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도시를 뒤덮어, 이제 페리클레스는 전쟁이 벌어지는 한, 그리고 그 전쟁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하지 않는 한, 도편추방이든 민중의 재판이든 그런 것들로 권력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을 것이었습니다. 전쟁이라는 폭력적 국제 정치의 수단이 도시 내부의 권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전쟁이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봉사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전쟁은 선택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피해 갈 수 없는 필연이 되어 버렸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그 전쟁을 지휘하고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그의 권력을 계속 지켜 나갈 것이었고, 권력을 일찍 놓을 생각이 없어 그 전쟁을 길게 끌고 갈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전쟁으로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잘살게 되리라는 환상의 덫에 걸려 누구 하나 전쟁은 안 된다 하는 사람 없이 그 전쟁을 피해 갈 수 있는 길들을 스스로 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도시의 살림이 형편없이 어렵게 바뀌어 갔습니다. 평소 아티케의 농사가 도시 살림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마져 버리고 성곽 안으로 피난 온 사람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평화 시절에는 도시 곳곳에서 돌을 쪼는 공사장의 인부들의 임금은 말할 것도 없고 재판정에 나가 재판관으로 일한 대가며, 디오뉘소스 극장 일반석에서 연극을 보는 돈도 모두 공돈이었던 동맹의 공납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지만, 몇 년의 전쟁을 치르고 나자 동맹의 공납금으로는 전쟁은커녕 도시의 살림에조차 턱없이 모자랐고, 도시의 비축금도 바닥이 나 처녀 신 아테나가 걸치고 있던 금과 은의 옷도 벗겨야 했었지요.116
9.2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마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의지로 상황을 보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신들 중에서도 최고의 신인 제우스가, 같은 불멸의 신들이 자행하는 오만한 행동을 참고 넘기지 못했는데, 하물며 한낱 하루살이일 뿐인 필멸의 인간이 보이는 오만hybris을 어떻게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먼저 전쟁을 오래하고 또 그 전쟁을 이기는 데 거추장스럽다고 대지의 아들딸들이 살고 가꾸는 집과 농장을 불태우고 싶다는, 다시 말해 바다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는 오만에 대해 신이 힘들여 응징해야 할 까닭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피난객들로 북적이는 아테나이의 성벽 안으로 조용히 역신을 들여보내기만 하면 되었지요. 그리고 역병의 재앙에 놀란 사람들이 지금이라도 휴전을 해야 한다며, 휴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페리클레스를 횡령으로 몰아 재판하고 벌금까지 물리면서 권좌에서 내리게 한 뒤, 황급히 스파르테로 달려갔지만 사정을 잘 아는 스파르테가 반길 리 만무하여 아테나이는 휴전도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렸고, 별수없이 페리클레스를 다시 권좌에 앉혀 전쟁을 이끌게 하였으니, 과연 페리클레스가 기대했던 대로 아테나이가 전쟁을 해야 하는 한 권력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그에게 다시 돌아온 권력은 바로 그 전쟁 때문에 닥쳐온 역병의 재앙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지는 못했습니다. 권력을 위해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인간의 오만과 탐욕을 응징하려는 신은 전쟁이 돌이킬 수 없게 확대되기 전에 역신을 보내 인간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반성할 기회를 주었지만, 인간의 우매함이 승패를 떠나 서로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며 전쟁을 그만두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할 수 없게 만들어 화해와 평화 대신 전쟁을 택하는 것을 보자, 신은, 역신에게 신이 아닌 하루살이 인간의 의지로 언제든지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페리클레스의 목숨을 거두게 하여, 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인간들 마음대로 적당히 끝내는 일이 없을, 다시 말해 어느 한 쪽이 항복하고 패망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바꾸어 말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전대미문의 대전쟁을 헬라스 사람들에게 안겨 주었습니다.117 이 뿐만 아니라 신은 이런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신이라면 엎드려 코부터 박는 니키아스118 대신, 전쟁으로 권력을 쥐고 싶고 전쟁으로 거부가 되고 싶은, 그래서 설사 신이 시켜도 결코 전쟁을 그만두지 않을, 그리고 무엇보다 뮈틸레네의 전체 남자를 다 죽이고 아이들과 여자들을 노예로 팔자고 할 정도로 잔혹한, 클레온으로 하여금 퓔로스를 치고 스팍테리아 섬에서 스파르테의 동등인들을 포로로 잡는, 제우스 자신도 크게 놀랐을, 전과를 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도취는 오만을 키우는 제일의 자양분, 일거에 상승의 대장군 니키아스를 누른 클레온은 동맹도시들이 낼 공납금을 올려 받아 재판관들의 일당을 올리고 아크로폴리스에 신들의 집을 짓는 공사판을 벌이는 등 페리클레스를 흉내내기 시작했습니다만, 단 한번의 전과로 니키아스를 언제까지나 누르고 있을 수는 없어, 브라시다스에게 함락당한 고향 엠피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브라시다스와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아마 제우스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거나 십 년이 넘는 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반성의 기미를 보이는지 시험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니키아스는 신에게 감사하며 모처럼의 평화를 헬라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니키아스로서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보다는 클레온이 없는 아테나이의 정치적 안정이 더 편안했을 것입니다.
9.29. 평화조약과 민중의 힘을 업고 대드는 정적의 부재가 아테나이에 '니키아스식 평화'를 정착시켰고, 도시는 빠르게 기운을 회복해 갔습니다. 그러나 사실 '니키아스식 평화'는 트뤼가이오스 같은 아티케의 농장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고마운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이를테면 전쟁 중에 노를 저어 먹고 살던 사람들에게는 점점 일자리를 얻기 어렵게 만드는 답답한 것으로 느껴지게 했는데, 고지식한 니키아스로서는 키몬처럼 사재를 털거나, 페리클레스처럼 공납금을 털 수도 없어,119 그들을 달랠 마땅한 수단을 찾지 못하자 '니키아스식 평화'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니키아스의 한계였지요. 애초에 그는 정치가가 될 소질이 없었던 게지요. 아테나이에 평화는 찾아왔으나 정치가 그 평화를 지켜 주지 못하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정치적 관심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그들 가운데 젊은 일부는 과격한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기도 해, 아테나이의 정치 체제를 두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니키아스가 민중들의 마음을 모으지 못한 자리에 아고라의 등불장수 휘페르볼로스가 발을 들여 놓으며 마치 환생한 클레온이나 되는 것처럼 거친 말과 건달 행세로 정치를 시작했고, 또 한편으로는 명문가의 미남 청년 알키비아데스가 페리클레스의 후광을 입고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워낙 권력에 대한 탐욕이 없었던 니키아스의 처신은 이들의 저돌적인 정치 활동에도 불구하고 알키비아데스가 펠로폰네소스에서의 스파르테의 패권이 탐탁치 않았던 아르고스와 엘리스 그리고 만티네이아와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를 하기 전까지는 '니키아스식 평화'가 아테나이를 안정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가 깨어진 것은 스파르테가 힐난을 받을 만한 일을 벌인 것도 있지만, 이것을 계기로 당장에 평화조약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 보려는 니키아스를 제치고 출세의 기회로 삼으려는 알키비아데스의 속셈 때문이었지요.120 그 길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의 평화는 물론 헬라스의 평화도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을 잡으러 나섰고, 인간의 탐욕과 오만에 또 한번 질린 제우스는 폴레모스를 알키비아데스에게 붙여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란 파멸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젊은 알키비아데스가 권력에 다가가는 가장 빠른 길은 전쟁에서 전공을 세우는 것이었고, 노를 저어 먹고 살고 싶은 도시의 노동자들을121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가장 확실하고 간편한 길이었지만, 그 길은 바로 알키비아데스를 파멸로 인도하는 길이기도 했으며, 결국 아테나이를 그리고 헬라스를 파멸로 이끈 길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이룬 평화가 깨어지고 전쟁이 목전에 와 있는 걸 본 늙은 니키아스는 그 전쟁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임을 진작에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전쟁에 나서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습니다만, 젊어 한때 입으로 전쟁을 외치는 클레온이 보기 싫어 자신이 나섰어야 했던 퓔로스 공략을 클레온에게 넘겨 주는 바람에 전공도 권력도 모두 클레온에게 넘겨 주어야 했던 기억이 새로웠던지 입으로만 전쟁을 외치는 휘페르볼로스를 전장에 내보내지 않았고,122 그러다 보니 기회가 자연히 알키비아데스에게로 쏠렸는데, 휘페르볼로스로서는 전쟁이 권력으로 다가가는 길이기는커녕 오히려 권력에 접근하는 길 자체를 막고 있는 것으로 보여, 그가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니키아스든 알키비아데스든 모두 없어져 주어야 했고, 전장에서 그들이 전사하지 않는 다음에는 그들이 아테나이를 떠나는 것이어서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편추방 뿐이었습니다. 신성모독으로 재판을 하려 해도 꼬투리를 잡기에 니키아스의 경건심은 도시 전체에 너무 잘 알려져 있었고, 알키비아데스는 그 인기 때문에 재판관들을 움직일 자신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이 아고라의 등불장수는 도편투표를 실시하자고 나섰고, 그 결과 오히려 자기가 도편추방 당해123 사모스로 갔다가 나중 아테나이의 과두정 체제 출범에 맞춰 사모스 역시 과두정으로 바꾸려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124 이 과정에서 사모스의 민주정 지지자들이 사모스에 주둔하고 있던 아테나이 해군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주둔군들이 그들에 대한 지원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아테나이의 과두정을 부정하고 민주정을 옹호하는 무력시위를 벌여125 아테나이의 과두정 체제가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9.30. 그런데 사실은 니키아스나 알키비아데스가 아니라면 쫓아낼 사람이 없어야 마땅할 때 말도 안 되게 휘페르볼로스를 도편추방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도편추방제도를 취지에 어긋나게 잘못 사용한 죄값을 톡톡히 치루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그 때문에 받아야 했던 우리 아테나이의 죄값이 무엇이었는지 여러분 앞에 제가 한번 꼽아 볼까요? 우선 둘이서 합작해 도시를 소란스럽게 하는 불량배 하나를 쫓아내고 나니, 의기양양해서 무슨 일이든 거리낌이 없어진 젊은 알키비아데스와, 왠지 떨떠름하기만 했지 무슨 죄라도 지은 것 같이 느껴졌을 니키아스가 그 뒤로 무슨 짓을 했는지부터 따져 보십시다. 글쎄요 전쟁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어 상승常勝의 장군이었던 늙은 니키아스의 이런 기분을 젊은 알키비아데스가 거들떠나 보았겠습니까?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테와의 전쟁에서 추방된 키몬의 백의종군 요청에 대해서는 거부했지만, 참전을 거부할 명분이 없어 참전시킨 키몬의 수하들이 키몬의 당부대로 목숨을 걸고 스파르테와의 싸움에 임하는 걸 본 아테나이 사람들의 마음이 키몬에게 기울자 키몬을 즉각 소환하고,126 그에게 퀴프로스와 아이귑토스 인근의 원양 평정의 임무를 주어, 그곳에서 명예롭게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할 큰 통이나 있었지만, 알키비아데스로서는 니키아스를 제치고 권력의 정점으로 가기 위해 아테나이 시민들을 감동시킬 전광석화의 용맹무쌍한 무공과 전쟁 비용을 뽑고 남을 어마어마한 전리품만 필요했지, 스파르테와의 평화에나 매달리는 늙은 니키아스 정도는 혼자 욕 얻어 먹고 도시의 살림이나 아껴 전비나 많이 대어 주면 그만인 존재 쯤으로 치부하고 있었지요. 곧이곧대로인 스파르테의 사절단을 속여 니키아스의 평화를 깨트렸을 때127 이미 니키아스는 술수에서도 알키비아데스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이 판명되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노회하단 말을 들어도 별로 욕이 되지 않을 협상의 순간에 젊은 알키비아데스의 술수에 놀아나 7년이나 지속된 소강의 평화를 지키지 못하고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 니키아스가 알키비아데스를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이런 갈등은 시켈리아 원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증폭되어 민회의 대중 앞에서 서로를 인신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시켈리아 도시들의 비용으로 돈을 남기며 치를 생각이던 시켈리아 원정이128 아테나이가 비축해 두었던 비상금을 모두 털어 넣는 대규모 원정단으로 바뀌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129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원정단을 이끌 세 명의 지휘관 중의 한 명, 알키비아데스가 출전 중에 신성모독 혐의로 재판에 소환되는 망조가 들었고, 더욱 놀랄 일은 그 알키비아데스가 재판에 응하는 대신 스파르테로 도망가 버려 그의 신성모독 여부에 대한 진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휘페르볼로스의 도편투표 제안이 정말 그의 의도대로, 아니 도편투표의 의의대로 니키아스나 알키비아데스 둘 중 하나를 추방하는 결과를 낳았더라면130 전쟁 중에 제국을 더 이상 확장하려 말라던 페리클레스의 당부가 없었어도 시켈리아 원정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그런 규모의 원정이 불가피했었다 해도, 크산팁포스와 아리스테이데스를 소환했던 테미스토클레스나 키몬을 소환했던 페리클레스의 예에 따라, 쫓겨난 둘 중 하나를 소환하여 뭉쳤었더라면, 시켈리아 정도는 출전도 하기 전에 굴복시킬 수 있었을 텐데, 인간이 조금만 절제하고 겸허했었더라면 더 좋아질 수 있었던 상황들을 하루살이 인간들이 하나 같이 모두 탐욕적이고 오만하여 신의 작용 없이도 모두 스스로 파멸의 길로 이끌었던 것 아니었겠습니까?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알키비아데스가 소환당한 그를 데리러 온 쾌속선 살라미스호를 타고 아테나이로 돌아가 재판에 응하고 당당히 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더라면, 무죄로 판결 받고 다시 시켈리아를 치는 원정단으로 돌아가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이 물음의 대답은 이미 알키비아데스가 해 주었지요. 모두가 도시에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흥분해 있던 시켈리아 원정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유리한 상황 속에서 받을 수 있었던 재판을 미루었던 것은 시켈리아 원정의 성공이 가져다 줄 면책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출전 중에 소환당하자 아테나이로 가는 척하다가 스파르테로 도주한 것은 면책은커녕 무죄를 입증하기조차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 페리클레스의 집에서 자라며 근거 없이 키운 자신도 권력자가 될 것이라는 자신감과, 신에 대해 남다른 견해를 가졌던 프로타고라스나 아낙사고라스로부터의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소크라테스 어울리며 건방으로 키운 모른다는 것 정도는 안다는 자부심으로,131 모른다는 것도 모르는 주위 젊은이들에게 신을 두려워하여 신에 대한 독실한 경건심을 보이기보다는 신에 대해서도 자신만만하게 함부로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자신이 신성모독으로 재판을 받을 때 불러올 자기를 옹호해 줄 증인의 얼굴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던 반면,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이 불러올 자기를 탄핵할 증인들의 얼굴은 일일이 꼽을 수도 없이 많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고발자가 메가클레스라는 사실이 재판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도록 만들었었겠지요. 그렇게 알키비아데스가 속절없이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본 니키아스가 일말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든지132, 아니면 아테나이의 모든 유력한 인사들을 모두 시켈리아로 보내 놓고 그 뒷전에서 재판 놀음을 벌여 알키비아데스를 잡은 그 사람들이 그 다음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든지, 또 아니면 알키비아데스를 시켈리아에 혼자 보내 그에게 퓔로스의 클레온과 같은 출세의 발판을 만들어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출전은 했으나, 나이 탓에 허약해진 몸으로 전장에서의 생활이 힘든 데다가, 알키비아데스의 일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막상 시켈리아에 도착해 현지 사정을 보니 전쟁으로 돈을 벌기는커녕 전비마져 보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몸에 힘이 쑥 빠지는 데다가, 스파르테의 지원을 받아 예상 밖으로 맹렬한 쉬라쿠사이의 저항 때문에 생긴 당혹감으로 정신이 흐려졌든지, 그 어느 경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니키아스는 원정단의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결정했어야 할 일들을 아테나이로 떠넘기거나133 손에 쥐고 미루기만134 하고 있었습니다.
9.31. 이렇게 니키아스가 미적거리고 있는 동안 스파르테의 귈립포스가 지원군을 데리고 와 공세를 취할 무렵에는 쉬라쿠사이의 두려움은 아테나이에 대한 경멸로 바뀌어 있었는데, 마침 데모스테네스 역시 아테나이의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해 공세를 펼쳤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방향을 돌려 에피폴라이로 나아가 한밤중까지 대접전을 벌였지만135, 새벽에 대열을 다시 정비했을 때는 쉬라쿠사이와 스파르테는 두 곳에다 승전비를 세우고 있었을 정도로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작전의 실패에서부터 습지에 진을 쳐 얻는 병마로 무기력해진 군사들까지 참패의 원인들은 밝힐 수 있었으나 그 대응책을 세울 수 없었는데, 데모스테네스는 전비가 엄청난 시라쿠사이 포위 작전을 포기하고 해전으로의 방향 전환을 요구했고, 니키아스는 쉬라쿠사이 안에 있는 친아테나이 세력들이 보내는 정보와136 그들이 요청하는 대로 포위 작전을 계속할 것을 고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데모스테네스나 에우리메돈으로서도 존경하는 노장의 뜻에 거슬리면서까지 굳이 철군을 위해 투표를 감행하기도 그렇고 해서, 일단 니키아스와 그의 정보를 믿어 보기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릴없이 포위 작전을 고수하는 사이 쉬라쿠사이를 지원하는 스파르테의 증원군이 도착했고, 쉬라쿠사이로서도 살 길을 찾아 해륙 양면에서 건곤일척의 결전으로 나서게 되었지요. 사람 좋은 니키아스는 서로 많은 희생을 내는 격전을 피해 상대를 굴복시키고 싶었겠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오히려 에피폴라이에서의 공격이 실패했을 때 철수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진지를 뒤덮자 니키아스도 조용한 철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몰리고 말았고, 할 수 없이 보름밤을 정해 은밀히 철수하기로 했는데, 출항을 앞두고 갑자기 하늘의 보름달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137 군대가 동요했고, 니키아스도 점쟁이의 말에 따라 아흐레가 세 번 지나기 전에는 철수 논의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또 한 달을 기다릴 동안, 아테나이가 철수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차린 스파르테와 쉬라쿠사이는 철수하는 아테나이가 자기들에게 유리한 곳에서 해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부치는 훈련을 한 다음, 자신이 붙자 아테나이군 진지의 방벽을 공격하여 간단한 전과를 올린 뒤, 이튿날 본격적으로 육지의 방벽은 보병이 그리고 해안은 함대가 나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함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선 에우뤼메돈을 죽이고 그의 함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면서, 이제 쉬라쿠사이의 목표는 어떻게 위기를 벗어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아테나이의 도주를 막느냐로 바뀌어 갔을 만큼 육지와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제 쉬라쿠사이를 포위하던 아테나이 진지가 오히려 그들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철수를 결정하면서 카타네에서 오는 군량 공급을 중단시키고 난 뒤라 진지에서 버틸 수도 없었지요. 이제 바다로 나가 결판을 내는 일만 남았었습니다. 좁은 바다에 200여척의 함선이 부딪쳐 해전이 아닌 갑판 위의 전투가 온종일 벌어졌고, 서로 많은 피해를 입어 누구 하나 똑바로 이겼다고 졌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쉬라쿠사이는 아테나이의 대군을 상대로 지지 않았다는 기쁨이 이긴 것 이상으로 사기를 끌어올리고 있었고, 반면에 아테나이는 진 것보다 더한 충격으로 급격히 사기가 떨어져, 시신이나 함선의 잔해를 돌려받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날 밤으로 당장 그곳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정도였지요. 간신히 정신을 차린 데모스테네스가 움직일 수 있는 남은 함선이 아테나이 쪽에 더 많다며 새벽에 다시 한번 일전을 겨루어 보자고 해 니키아스도 동의하였지만, 주눅이 든 선원들이 승선을 거부하는 바람에 육로로 철수하기로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한편 쉬라쿠사이에서는 헤라클레스 축제일에다 승전의 기쁨까지 더해 도시가 취해 있었는데도 헤르모크라테스는 아테나이 군대의 움직임이 염려스러웠습니다. 비록 지금은 지리멸렬하여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전락해 버렸으나, 일단 포위에서 벗어나 인근 도시의 지원을 받아 대열을 정비한다면 대적하기 어려운 상대로 돌변할 것이라는 잘 알고 있었지요. 당장에 군사들을 탈출할 수 있는 길목 요소 요소에 배치해야 했지만 온종일의 전투로 녹초가 된 데다가 승리의 기쁨과 축제일의 즐거움을 더해 마신 술로 뻗어 있는 군사들을 배치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헤르모크라테스는 가만히 니키아스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친아테나이 사람인 것처럼 하고 쉬라쿠사이가 야간 탈출을 기습하기 위해 요소 요소에 군사들을 배치했으니 야간 탈출을 감행하기보다 대오를 정비하여 밝은 날에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그 말을 듣고 니키아스와 아테나이 군대는 그날 밤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9.3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무리 경황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밤중에 군대를 움직일 계획을 가진 사람들이 적의 움직임을 살피지도, 갈 길 앞으로 척후를 내보내지도 않고, 친아테나이 사람이 하는 말만 믿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니, 육로보다는 함대를 정비하여 바다를 통해 철수하고 싶은 데모스테네스는 핑계 삼아 주저앉았다 하겠지만, 전쟁터에서 늙은 니키아스가 척후를 내보내 정보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만, 그러고도 아테나이 군대는 이틀이나 더 머물면서 쉬라쿠사이와 스파르테 군대가 전열을 가다듬고 길목에서 기다릴 시간을 벌어 주었다니 죽으려고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틀 동안 아테나이 군대가 한 일이란 함선들을 불에 태워 없애고 걸어서 아테나이로 돌아갈 짐을 꾸리는 일뿐이었습니다. 아테나이를 떠나 시켈리아로 출진할 때는 이기고 돌아오라며 파이안의 노래를 들었는데, 싸움에 져서 이제 시켈리아를 떠나 아테나이로 돌아갈 때는 부상당해 걸을 수 없는 전우들이 같이 데려가 달라고 울며 조르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살아 남아 움직일 수 있는 4만이 군대의 행군이 아니라 피난민들의 행렬 같은 움직임으로 출발했고, 니키아스의 부대가 길을 열며 앞서고 데모스테네스의 부대가 그 뒤를 좇았지만, 첫날부터 노예들부터 도망가기 시작했고 대열은 흩으러졌습니다. 곳곳에서 방책으로 길을 막고 기다리는 쉬라쿠사이와 스파르테 군대를 뚫고 나아가려 했으나 불리한 지형에 떨어진 체력으로는 희생자만 낼 뿐이어서 이튿날 밤에는 불을 밝히며 방향을 돌려 해안 길을 택해 나아갔지만, 니키아스만 앞서 나가고 데모스테네스는 뒤쳐지고 말았고, 날이 밝은 사흘 째 평지의 해안 길에는 스파르테 군대가 느슨하게 풀어주었다고 믿으며 독한 마음을 먹은 쉬라쿠사이 군대가 기병으로 허리를 지르고 매복으로 잘린 행렬의 꼬리를 치며 데모스테네스의 군대를 집중적으로 공략했고, 온종일 시달리던 데모스테네스는 결국 남은 6천여명과 함께 투항하고 말았습니다. 데모스테네스가 항복하던 사흘 째 저녁 니키아스는 에리네오스 강변의 고지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는데, 이튿날 나흘 째 아침 데모스테네스가 항복했으니 나머지도 모두 항복하라는 통첩에 놀란 니키아스가 기병 하나를 보내 데모스테네스의 투항을 확인하고 항복 조건을 내걸었으나 쉬라쿠사이는 그 조건을 거부하고 온종일 괴롭혔고, 일부는 니키아스의 통제를 받지 않고 야음을 이용해 따로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닷새 째 되는 날에는 아침부터 서둘러 군대를 이동하여 시달림 속에 앗시나로스 강에 도달했으나, 물도 마시고 싶고 강도 먼저 건너고 싶은 군사들이 대오를 벗어나 강으로 뛰어들었고, 헝컬어진 행렬 뒤를 추격해 온 쉬라쿠사이 군대가 덮치자 강은 졸지에 도륙장으로 변해 버렸고 간신히 강을 건넜지만 기다리던 기병들에게 도륙당하고 말았습니다. 니키아스는 스파르테의 귈립포스가 눈에 띄자 곧바로 투항했고,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리기 위해 빼돌려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상승의 대장군 니키아스와, 개전 초부터 케르퀴라에서 시켈리아에 이르기까지 함대를 끌고 가지 않은 곳이 없었던 에우뤼메돈과, 퓔로스와 스팍테리아에서의 빛나는 전과는 말할 것도 없고, 시켈리아 원정의 증원군으로 출발하면서부터 스파르테의 코 앞 라코니케 해안에 주둔 기지를 세웠던 데모스테네스가, 아테나이와 동맹도시들의 함선 200여척은 물론 4만이 넘던 군사들을 데리고 한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모두 죽고나자, 그들의 죽음과 함께 시켈리아의 원정은 끝났고138, 그 다음 도시가 그들로부터 받았던 대가는 전쟁으로 벌어들인 돈이 아니라, 텅 비운 도시의 금고와 도시가 멸망하고 도시민이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습니다. 이렇게 끝난 시켈리아의 원정은 아테나이에서 '니키아스식 평화'의 종말을 뜻했고, 이것이 아테나이에서 평화가 영원히 종식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9.33. 그리고 그 공포 때문에 시켈리아 원정 실패가 아테나이에서 빼내어 간 것은 장병들과 돈과 함선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공포에 짓눌려 우왕좌왕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도시민을 간수할 사람들을, 바꾸어 말해 그 전까지 소위 지도자라고 불리며 권력을 쥐고 놓지 않았던 사람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소포클레스나 하그논 같은 원로들이 모여 당면한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혜를 보태어 주도록 요청했고, 원로들은 회의체139를 만들어 민회의 의제를 미리 협의했는데, 이런 도시 운영이 민주정의 원리를 훼손시키는 일이라고 말하는 따위의 문제는 이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사소하게 여겨졌을 만큼 도시의 존립 여부가 문제였고, 도시의 존립을 위해서라면 어떤 종류의 개혁이나 규제도 마다않고 받아들일 것이었습니다. 도시는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함으로 누구도 감히 누가 도시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핏대 올리지 못하는 절대적인 평화를 얻었지만, 절망과 공포로 엎드려 얻은 이런 평화도 평화라고 한다면 이런 평화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그래도 그 원로회의를 소포클레스가 이끌고 있었으니 그 평화를 '소포클레스식 평화'라 부를까요?
9.3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원로들의 지도와 모든 것을 감수하려는 사람들의 따름으로 아테나이는 데모스테네스가 시켈리아 원정 길에 세워 두었던 라코니케의 요새140를 포기하는 대신 수니온 곶에 새로 요새를 세워 해상 식량 보급로를 확보하고, 먼 곳의 동맹들은 당장에 어쩔 수 없다 해도 가까운 에우보이아만은 꼭 우군으로 남도록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집을 뜯어서라도 나무를 구해 헌 배를 수리하고, 도시나 개인 살림의 지출을 줄여 모은 돈으로 그 배에 선원들을 태우는 등, 아테나이 내부의 결속을 다져 나가자 도시가 조금씩 멸망의 공포로부터 헤어나는 것 같았습니다만, 마치 이런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너무나 빨리 드러난 동맹들의 이탈이 그렇지 않아도 힘든 아테나이에게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수고까지 더해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티케의 데켈레이아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스파르테의 아기스가 해군 양성에 적극 나서면서141 동시에 에우보이아를 위시한 레스보스와 키오스의 이탈을 부추기기 시작했는데, 아테나이로서는 그들의 이탈을 막는 것도 힘든 판에, 페르시아까지 헬레스폰토스와 이오니아 도시들의 이탈을 부추기며 스파르테와 손을 잡으려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페르시아와 스파르테의 움직임 속에 동맹의 이탈을 막기 위한 급선무가 스파르테와 페르시아의 협력을 막는 것이었는데도 아테나이에게는 페르시아와 이어지는 줄이 없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9.35. 신성모독으로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던 알키비아데스가 우리 아테나이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을 다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스파르테로 하여금 아티케로 들어와 테켈레이아에 요새를 세우게 하고, 아기스가 그곳에 장기 주둔을 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아티케를 버리고 아테나이가 스스로를 성벽 안으로 가두어 넣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로 빠져 버리게 된 것이 가장 뼈 아픈 타격이었습니다. 전에는 스파르테 군대가 아티케로 쳐들어와도 한 보름, 길어야 한 달 성 안에서 지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데켈레이아에 스파르테 군대가 주둔하고 나서는 사시장철 성 안에서 살아야 하게 된 아티케의 농부들은 시켈리아 원정 실패로 도시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절박감 때문에 그들의 불평 불만을 당장은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형편이 더 나빠진다면 스파르테와의 전쟁 자체를 거부할 아티케의 농부 디카이오폴리스나 트뤼가이오스들이 수두룩했습니다. '니키아스식 평화'가 가져다 준 7년여의 꿀 같았던 시절은 그들에게 전쟁이 부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티케의 농부들로서는, 배를 저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농부들보다 더 많다는 것을 이용해 정치가들을 손에 쥐고, 아티케에서 자기들이 만든 포도주와 올리브를 팔아 주는 무역선이 아니라, 해군의 함선을 저어 먹고 살기 위해 전쟁을 부추긴다면, 그래서 어떤 도시의 일에 대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 수대로 도시의 일을 결정하는 민주정이라는 것이 결국 전쟁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도시의 정치체제로 존립하는 것이라면, 바꾸어 말해 더 이상 전쟁을하지 않으려면, 다시 말해 스파르테의 아기스가 데켈레이아에서 철수하고 더 이상 아티케가 전장이 되지 않으려면, 민주정을 버리고 다른 정치체제를 아테나이에 수립해야 한다고 결론 짓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였습니다. 아티케의 농부들은 이미 민주정 체제가 아닌 과두정과 같은 원로들의 회의체와 그들이 이끌고 있는 아테나이가 절대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아 가며 그들의 목소리를 낼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민회가 소포클레스가 이끄는 원로회의라는 과두정적 민주정을 받아들이고 있어, 그들의 목소리를 내기에 한결 우호적으로 변해 가고 있어, 그들의 목소리는 이미 일부 정치가들에게 귓속말로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분위기 속의 '소포클레스식 평화'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아테나이가 다시 일어서리라는 희망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나이 아흔이 넘은 소포클레스로 하여금 아테나이에 힘이 되는 사람들을 찾아 뭉친다면 좌절과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당부를 담은 연극 필록테테스142를 무대에 올리도록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9.3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동맹 이탈을 부추기는 스파르테만으로도 모자라 페르시아까지 스파르테와 손잡고 나서는 판에, 그리고 언제 피난 생활이 끝날지 모르는 아티케의 농부들의 드러나지 않은 불만은 여차하면 도시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쌓여 가는 와중에, 낡은 배를 저어서라도 도시를 지키고 아울러 동맹 도시들을 감시해야 하는 긴장이 도시를 옥죄어 누구 할 것 없이 모두들 지쳐 가고 있는데, 땅 위의 하루살이 인간들의 가없는 탐욕과 오만이 하루살이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줄 심산이었는지, 스파르테로 도망갔던 알키비아데스가 이오니아에 나타났습니다. 알키비아데스가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를 오가며 스파르테에 붙었다, 페르시아에 붙었다, 아테나이에 붙었다, 온갖 이간질로 자신의 보신을 위해 줄타기를 한 사연이야 이미 제가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께 말씀 드린 바 있으므로143 생략하고, 여기서는 그 가운데서 이것 한 가지, 페르시아의 원조 조건이라며 페이산드로스에게 전한 아테나이의 민주정 폐기와 과두정 수립에 대한 전후 사정144만은 반드시 한번 더 짚고 넘어 가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재판을 통해 직접적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버릇의 연원이 바로 이 알키비아데스를 신성모독으로 재판에 회부하면서부터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알키비아데스가 그 재판을 회피하고 도피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재판으로 정적을 제거할 수 있다는 성공적인 나쁜 선례를145 남긴 데다가, 페르시아의 원조를 받아서라도 살아남으려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페르시아를 핑계로 페리클레스가 그렇게도 자랑하던 민주정이라는 아테나이만의 독자적인 정체를 버리는146, 그래서 아테나이가 외세에 눌려 도시의 최고 가치를 버리는 나쁜 선례를147 남기도록 사주하였기 때문이며, 그래서 벌어진 정변에 정변의 불화가 도시를 이끌 지도자들을 서로 암살로 죽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재판으로 전쟁에서 이긴 장군들은 대량으로 죽이고 패하고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한 장군들을 오히려 중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임으로써 아테나이가 패망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9.3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 드린 바 있지만, 우리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의 위세에 눌려 페르시아이 도움을 얻으려 한 적이 그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은 아무도 안 계시겠지요? 참주를 내치는 데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이사고라스를 앞세운 스파르테의 내정 개입을 시민들이 나서 단호히 물리치고 난 뒤, 후환이 두려웠던 아테나이 사람들이 페르시아로 달려가 동맹을 맺자고 한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왜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를 그들 스스로 지킬 생각을 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달려가야 했을까요? 바로 크로노스의 시대와 같았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부자의 참주정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솔론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민주적인 과두정과 독재적인 참주정을 지적하신다면 반밖에 맞추지 못하셨습니다. 솔론은 아테나이의 일을 아테나이 시민 모두가 자유롭게 간여하고 행동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살라미스를 둘러싼 메가라와의 분쟁에서도 그랬고, 퀼론의 집안 사람들의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에 대한 테러 행위를 진압할 때도 그랬고, 헬레스폰토스를 거쳐 들어오는 식량의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하려고 시게이온 곶에 기지를 세울 때도 그랬습니다. 아테나이 시민들이 결의하고 행동하도록 이끌었지요. 아테나이가 살라미스를 포기했을 때나, 아테나이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반정을 받아들이려 했을 때처럼 시민들이 따르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나섰습니다. 무엇보다 도시를 지키는 것이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도시를 내란으로 이끌 정도로 정치적인 혼돈이 일어나면 모든 시민이 빠짐없이 정치적 결단을 내려 어느 한 쪽을 지지하여 나머지를 타도함으로써 도시를 지켜야 한다고 법으로 명시했고, 이 말은 바로 모든 도시민이 외부의 공격 뿐만 아니라 내분에 대비해 도시를 지킬 수 있도록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반면,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부자는 그들의 집권 반 세기 동안 시민들이 창칼을 자기에게 겨눌까 두려워 시민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에 대적해 시민들에게 창칼을 들고 나서게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시게이온 곶의 아테나이 기지를 두고 시비를 걸어 오는 뮈틸레네 사람들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해 보내는 대신 시민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신예 밀티아데스에게 개인 자격으로 헬레스폰토스 쪽으로 나가 시게이온도 보호하고 인근에 새로운 아테나이의 교두보를 만들도록 조치하는 것으로 제법 이이제이의 수법을 써 도랑치고 가재 잡은 것 같았지만, 이런 일을 도시가 조직적으로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테나이는 다른 도시와의 분쟁에서 마땅히 보여야 할 군사적 능력을 얻을 기회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포도주나 올리브 기름을 항아리에 담아 다른 도시에 팔아 돈을 버는 재미 하나로 크로노스 때와 같은 시대를 즐겼을지는 모르겠으나, 도시는 솔론이 바라던 외적이나 내분에 대응해 자기의 도시를 지킬 군사적 능력은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시의 영혼이 있다면 솔론 때 아테나이의 영혼은 자유민의 영혼이었던 반면 페이시스트라토스 때 아테나이의 영혼은 노예의 영혼이었던 것이었지요. 이것이 바로 도시의 가치를 정하는 솔론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차이였던 것이지요. 그래도 노예의 영혼을 가졌던 도시가 헬라스에서 가장 강력한 자유민의 영혼을 가졌던 스파르테의 도움을 받아 참주를 무너트리고 민주정이란 진정한 자유민이 누릴 정치 체제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 행운을 놓치기 싫었던 아테나이 사람들이 창칼의 달인들이 모인 스파르테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의 도시와 그들의 새로운 자유민 영혼을 지키기 위해 페르시아로 달려간 것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인근의 도시들이 모두 스파르테의 동맹들이었고, 게다가 아테나이는 그들의 친구 참주를 쫓아내고 시민들이 모여 다스리는 가히 혁명적인 체제를 세워 그들의 시민들을 자극하고 있는 마당에 어느 도시가 아테나이를 돕겠다고 나섰겠습니까? 헬라스에서 아테나이는 이제 겨우 유명해지기 시작한 포도주와 올리브와 그것들을 담는 항아리를 빼고는 그저 힘없는 외톨이에 지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의 위협에 대해 누구에게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 수 있었겠습니까? 막다른 골목에 들었다 생각하고 아테나이는 페르시아로 달려갔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황망 중에 흙과 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페르시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페르시아로서야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도시 하나가 이웃 간의 다툼으로 이웃의 종이 되기 보다는 페르시아의 종이 되겠으니 지켜 달라고 찾아온 착한 신민 하나를 얻는 기분으로 아테나이를 받아들였겠지요. 헬라스의 도시들이 가지고 었었던 상호 호혜 평등의 공수동맹이란 개념을 페르시아도 가지고 있었다 해도148, 알지도 못하는 아테나이가 대등한 입장의 공수동맹을 맺자고 했더라면, 아마도 페르시아로서는 아테나이와 그런 동맹을 맺는 수고 대신 아테나이를 소나무 베듯 베어 버리는 일이149 더 쉽고 격에 맞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페르시아와 동맹이라는 것을 맺고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흙과 물을 바치는 것이 종속의 예를 말하는 것이었고, 진정한 자유민의 영혼을 가진 새로운 아테나이를 지키기 위해 벌인 노력이 오히려 그 영혼을 이민족에게 종속시키고 만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아테나이는 마치 그 때문에 스파르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기나 한 듯이 페르시아에 통보도 아니하고 일방적으로 페르시아와의 동맹을 폐기하였습니다. 아테나이는 자유민의 영혼을 가진 도시이어야 하고, 그 영혼을 가꾸고 지킬 책임이 바로 자기들 아테나이에게 있다는 자각은 아테나이로 하여금 당장에 취해야 할 군사적 대응을 실행에 옮기게 만들었고, 그 대응의 성공적인 실행이, 이를테면 참주 힙피아스를 끼고 도는 에우보이아의 칼키스에 대한 응징에 나서려는 참에, 때 마침 스파르테가 메가라 쪽으로부터 쳐들어오자 방향을 돌려 먼저 스파르테를 격파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겪으며 아테나이는 도시를 지킬 능력을 키우는 만큼 지켜야 할 도시의 영혼의 가치도 키워 갈 수 있었고,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물과 흙을 바치라며 찾아온 페르시아의 사절을 재판에 회부해 처형했고, 그 책임을 물어 쳐들어온 세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치고 도시를 지켜내었지요.
9.3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세 번의 침공이 실패로 돌아간 후 페르시아는 물과 흙을 바쳤던 마케도니아나 테살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해안 도시들에 대한 장악력을 잃고, 그 자리를 아테나이에게 넘겨주고 말았었지요. 그리고 비록 오랜 헬라스 내전의 전비를 대느라 등골이 빠지기는 했어도 시켈리아의 원정이 실패로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 도시들은 동맹국으로서 맹주인 아테나이에 대해 여전한 복속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켈리아 원정 실패가 먼저 아테나이의 패권을 시들게 했고, 그러자 스파르테가 그곳 도시들을 아테나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며 들고 나섰고, 급기야 아나톨리아의 페르시아 총독들마저 그들 영지 안의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 회복을 위해 스파르테와 손을 잡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백 년 전 물과 흙을 바치라던 페르시아의 사절을 우물 속에 집어 넣고 우물 속의 물과 흙을 가져 가라며 죽여 버린 스파르테에게 물과 흙은 고사하고 오히려 함선을 지을 돈과 그 함선을 저을 노꾼들의 품삯까지 주어 가며 그들이 장악하고 싶은 도시들을 아테나이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했습니다. 이 모든 변화에 알키비아데스가 있었고, 알키비아데스는 그 모든 변화가 자신이 일으킨 조화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공을 들였지만, 이탈하려는 동맹 도시들과 스파르테가 직접 만나고 나서부터는 스파르테에게 더 이상 알키비아데스는 쓸 데가 없어졌고, 페르시아와 스파르테가 직접 만나 돈을 주고 받기 시작하고 나서는 페르시아도 알키비아데스가 귀찮아져서, 결국 스파르테와 페르시아 양쪽으로부터 버림 받고 말았습니다. 이 모두가 알키비아데스의 권력에 대한 탐욕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허영에서 비롯된 자업자득이었지만, 시켈리아 원정 실패로 도시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절망감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는 아테나이 사람들 눈에는 스파르테를 인도하여 이탈하는 동맹 도시들과 손잡게 해 주고, 그 위에 스파르테를 인도하여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도록 해 주는 알키비아데스가 바로 아테나이를 구할 능력자로 보였습니다. 스파르테와 페르시아로부터 버림 받아 오갈 데가 없어진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나이의 다급한 형편을 놓칠 리가 없었지요. 알키비아데스는 사모스에 나와 있는 해군 지휘관들 앞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설명하고 아테나이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래서 자기가 아테나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나서고 싶다는 고해가 아니라, 자기가 페르시아를 아테나이의 친구로 만들어 주겠다고 과시하며, 자기를 추방한 부패한 민주정 대신 과두정이 들어서면 아테나이로 돌아가겠다고 금의환향을 꿈꾸는 모습을 드러냈지요. 알키비아데스가 이 편지를 쓸 무렵에는 사모스에 나와 있던 아테나이의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아테나이와 사모스에 민주정을 전복하고 과두정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었고150, 알키비아데스가 그 낌새를 알고 영악하게 마치 그들과는 과두정 정변으로 정권을 잡는 공동 이익이 있는 것처럼 미끼를 던진 것이었는데, 이 과두정 미끼는 사모스에 나와 있던 아테나이의 과두정파를 낚는 데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지만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도록 해 주겠다는 제안은 그 과두정파로 하여금 그들이 과두정을 수립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될 노꾼들을 끌어들일 훌륭한 미끼가 될 것이어서, 갈 곳 없던 알키비아데스에게 아테나이와 페르시아를 엮는 활동 공간이 생긴 것입니다. 손조로울 것 같던 알키비아데스의 복귀는 그의 속셈을 꽤뚫고 있던 프뤼니코스의 딴죽걸기에 부딪쳐 곡절을 겪었지만151, 이제 정권도 잡고 전쟁에서도 이겨 그동안 아무런 수익 없이 부담만 해 왔던 많은 전쟁 비용을 회수하고 수익을 거두리라는 희망이 지휘관들과 선장들로 하여금 프뤼니코스가 알키비아데스의 역활을 부정하며 일으킨 문제로 미리 가르쳐 준 과두정의 한계에152 눈을 감도록 만들었고, 페르시아로부터 노삯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노꾼들로 하여금 민주정 전복에 대한 반감을 접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제 아테나이와 사모스에서 민주정을 전복하고 과두정을 세울 일만 남았지요. 페이시스트라토스 일가의 참주정을 뒤엎고, 스파르테의 내정 간섭을 물리치고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나이에 민주정을 세운지 꼭 백년이 지난 뒤153, 아테나이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그들만의 정치 체제라며 자랑하던 페리클레스가 헬라스의 헤게모니를 가지는 일이 어찌 사소하냐며 전쟁을 불사한지 스무 해를 넘긴 뒤, 부자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들은 노삯을 받기 위해 민주정을 버리고 과두정으로 바꾸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겨 전쟁으로 돈을 벌던 때는 함선을 운용하던 부자들이나 그 배를 저어 먹고 살던 노동자들 모두가 민주정이 그들 모두의 이익을 대변하게 해 주고 그래서 지켜 준다고 믿으며 굳건히 지켰지만, 시켈리아 원정에서 지고 언제 도시가 패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자, 부자들은 그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말해 재산을 싸들고 도시를 떠나기 전에 한번 정권을 쥐고 어떻게 도시를 버리지 않고도 재산을 지킬 수 있겠는지 기회를 엿본다는 의미에서 자기들 좋은 대로 도시를 움직이기 위해, 과두정으로 바꾸어 보려 했던 것이었고, 가난한 자들은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로부터 전쟁 비용을 얻어 쓸 수 있다는 말에, 언제 제대로 받을지 모르는 노삯을 기대하고 있느니 차라리 페르시아로부터 받더라도 노삯을 틀림없이 받기 위해 과두정으로 바꾸어 보기로 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장에 노삯을 받아야 하는 사모스에 나와 있던 병사들과 노꾼들은 스파르테의 함대가 페르시아의 돈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지휘관과 선장이 아테나이로 가서 과두정을 수립할 수 있도록 제일 먼저 동의해 주었습니다만, 당장에 페르시아의 돈과는 관계가 좀 먼 아테나이 사람들을 민회에서 설득하기는 쉽지 않아, 민회에 버금가는 5,000명 회의를 둔다는 조건으로 겨우 과두정을 성립시켰습니다. 프뤼니코스가 본대로 민주정이냐 과두정이냐에는 별 관심이 없고 자신의 금의환향에만 주목하고 있었던 앝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 과두정의 수립 과정에서 드러난 자신의 귀환에 대한 정적들의 거부와 신들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사제들의154 노여움을 확인해야 했는데, 자신에 대한 이 모든 거부를 잠재우는 데는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도록 주선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페르시아의 사르데이스 총독 팃사페르나스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였으나 별무소용이었지요. 이 와중에 정권을 잡은 아테나이의 과두정파들은 아테나이에서 절실히 경험한 자신들의 세부족을 보완해 줄 전체 헬라스 과두정파의 규합을 위해 사모스를 위시한 나머지 아테나이의 동맹 도시들에게도 민주정을 전복하고 과두정을 수립하라고 사절단을 보내 닥달하고 있었는데155, 이것이 오히려 사모스 사람들의 거센 거부를 불러왔고156, 빼앗긴 아티케를 대신해 채소와 고기를 공급하던 에우보이아마져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이자 놀란 정권이 스파르테와의 화평을 구하려 했고, 화평을 위해 바다를 포기하라는 스파르테의 요구가 알려지자 노를 저어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페이산드로스의 과두정은 넉 달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페이산드로스의 과두정은 좌절과 절망 속에 엎드려 받아들인 원로들의 '소포클레스식 평화'를 마치 아테나이 사람들이 과두정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오해하고 벌인 민주정 전복과 과두정 수립은 '페이산드로스식 평화'는커녕 도시를 정적 암살의 어둠 속으로 몰아간 '페이산드로스식 불화'만 심화시켰습니다.
9.39. 넉 달짜리 과두정의 혼란 끝에 신이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께 드린 선물은 그나마 도시에 남아 있던 몇몇 배를 댈 능력자들을 소탕하게 하고, 과두정보다 더 적은 수의 능력자들과 더 못한 사람들이 도시를 이끌어 결국 또 다시 전쟁으로 살길을 찾아 나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티케에 이어 에우보이아까지 도시를 먹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고, 헬레스폰토스를 통한 식량의 보급마져 위험해진 상황에서 배를 몰아 약탈이라도 하지 않으면 전쟁은커녕 먹고 살기조차 힘들어진 도시에, 페이산드로스와 안티폰이 처형되자 아고라의 뤼라 장수 클레오폰이 정치 지도자로 자처하고 나타났지만157, 사람들은 휘페르볼로스에게 그랬듯이 아무도 그에게 전장터에 나가라고 요청하지 않을 정도의 인물이었지요. 아테나이에서 도시의 불화가 도시가 키운 인재들을 죽이고 줄여 나가는 동안, 사모스에서 아테나이의 과두정에 반대해 궐기한 트라쉬불로스가 아테나이와는 상관없이 사모스의 아테나이 사람들만으로 독자적인 민회를 열어 자신을 포함한 지휘관들을 장군으로 뽑았을 때도, 지휘관들의 경험 부족을 가장 뼈아파 했을 것입니다. 트라쉬불로스가 그 사모스의 민회를 설득하여 알키비아데스를 사모스로 소환하고 장군직을 준 것도 따져보면 알키비아데스를 보는 트라쉬불로스의 안목이 프뤼니코스보다 못해 그 알키비아데스를 이용해 어떻게든 팃사페르나스의 돈을 좀 얻어 용병들과 노꾼들을 정상적으로 운용해 보겠다는 속셈 때문이었겠지만, 그래서 그 돈에 대한 기대 때문에 민회도 알키비아데스의 소환을 결의해 주었겠지만, 상황이 그렇게 돌아간 데는 돈만큼이나 절실했던 경험 있는 지휘관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전쟁이 아니라 그 전쟁을 위해 다른 도시를 약탈하러 나갈 만한 지휘관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정의 다급함은 사모스의 민주정 사수와 스파르테와의 화평 결사 반대 궐기를 성공적으로 이끌긴 했지만 일개 중무장 보병일 뿐이었던 트라쉴로스가 선장이던 트라쉬불로스와 나란히 장군으로 선임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아테나이를 불화에서 건지고 도시에 평화를 이룰 정치가도 없고, 전장에서 믿을 수 있는 지휘관들이 없는 도시가 버티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대답은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9.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는 전의를 회복하고 약탈로 돈을 대며 성공적인 해군 재건에 나설 수 있었는데, 그것은 페르시아의 총독 팃사페르나스의 미지근한 지원과, 지리멸렬한 스파르테의 해군 운용 능력과, 이 둘에 실망한 시켈리아 함대의 스파르테 연합 함대에서의 이탈과158, 애초 스파르테의 연합 함대 운용에 한 축이 되기로 했던 페르시아의 포이니케 함대의 참여 지연, 등으로 생긴 약탈 활동 공간이 생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도시가 패망한다는 절박감으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재화를 털어 넣은 가진 자들의 결단에 시민권을 얻으려는 노예들의 참전이 가장 눈에 띄는 그전과는 다른 이유였을 것입니다. 시켈리아 원정 후 아테나이는 동맹 도시들로부터의 조공은커녕 병력지원도 받을 수 없어 급한 대로 용병을 사서 쓰고 있었으나, 과두정 정변과 민주정 복고 과정에서 그 용병을 살 돈을 댈 사람들마져 줄어들자 시민권을 주는 조건으로 노예들을 참전시키기에159 이르렀던 것이지요. 아테나이 해군이 재건의 모습을 보이는 동안, 아테나이의 영향력 퇴조로 헬레스폰토스의 아뷔도스가 아테나이와의 동맹을 끊고 스파르테와 동맹을 맺기를 바라고, 이런 헬레스폰토스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페르시아의 총독 파르바나조스가 스파르테의 해군 유지비를 부담하겠다고 나서자 스파르테는 더 이상 팃사페르나스에 매달리지 않고, 그들의 주둔지를 이오니아의 밀레토스로부터 헬레스폰토스의 아뷔도스로 옮겨 가기로 결정하는 변화가 생겼는데, 제법 힘이 붙은 아테나이가 이를 차단하려 나섰고, 대규모 해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지요. 능숙한 지휘관도 모자라고 능숙한 병사나 노꾼도 모자라 노예까지 배에 태웠지만, 그래서 트라쉴로스의 실수도 있었지만160, 못 믿을 알키비아데스의 허풍에 속아 그를 아테나이로 소환해 육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로 인해 함대를 잃고 그를 다시 쫓아내는 웃지 못할 소동도 있었지만, 그래서 알키비아데스의 자리를 코논으로 메웠으나 이번에는 코논이 함대를 잃고 포위되는 바람에 처녀신의 황금 옷까지 벗기고 노예들을 태워 내보내야 했지만, 그러나 돈을 벌어야 살고 살아야 자유민이 되는 악착스러움 덕분에, 반면 해전에서의 능숙함도 없고, 돈을 벌어야 살고 살아야 자유민이 되는 악착스러움도 없고, 아테나이에 묶인 도시들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허약한 명분 뿐인 스파르테 해군 덕분에, 아르기누사이에서의 대첩에 이르기까지 아테나이 해군은 연전연승했습니다. 해군이 연전연패하고 펠로폰네소스의 도시들에 주둔하던 중무장보병들 덕분에 버티고 있던 스파르테는 두 번에 걸쳐 화평을 제의했고, 아테나이는 술에 취해 갑옷을 입고 민회에 나타난 클레오폰에161 휘둘려 그 두 번의 평화를 걷어 찼습니다.
9.41. 그런데 아고라의 뤼라장수 클레오폰의 평화를 거부하는 선동을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이 군소리 없이 받아들인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뤼라를 만들어 판다고 북이나 피리 같은 악기를 팔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장에서 행군할 때 쓴다고 북과 피리가 평화로울 때보다 더 많이 팔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악기를 많이 팔아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악기는 태평성대에 더 많이 팔릴 것 같은데 평화를 마다 하다니, 그렇다고 도시에 무슨 돈이 있어 클레온처럼 전쟁을 핑계로 도시의 돈을 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클레온이 데모스테네스를 앞세워 스파르테의 동등인들을 포로로 잡고 퓔로스를 점령하여 아테나이의 요새로 삼았던 것처럼 당장에 어느 능력 있는 장군을 앞세워 스파르테의 아기스를 포로로 잡고 데켈레이아를 점령하여 아티케를 탈환할 것도 아니면서, 평화를 받아들이면 데켈레이아를 내어 놓고 아티케에서 철수하겠다는 스파르테에게, 아테나이를 이탈한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의 동맹 도시들을 다시 끌어안을 무슨 대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스파르테가 그 도시들을 점령이나 하고 있다는 듯이 스파르테가 그들을 다시 아테나이에 복속시키지 않는 한 평화는 없다며, 낮술162까지 한잔 걸치고 나와 민회가 스파르테와의 화평을 거부하도록 몰아 가고 그것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다니, 이것을 '클레오폰식 불화'라고 불러도 좋다면, 클레오폰은 신이 아테나이를 짓이길 마지막 절굿대로 택했음이 틀림없나 봅니다. 이 아고라의 뤼라 장수에게 평화는 그가 누리는 권력의 끝을 가리키는 것이었겠지요. 전쟁이 계속되어 트라쉬불로스나 테라메네스 같은 유명인들이 전장을 떠돌아 다녀야 텅 빈 아테나이에서 권력을 만끽할 수 있을 텐데, 혹시 평화라도 와서 선장들이나 장군들이 아테나이에 머물 경우, 그들과 권력 다툼을 벌이고 그들을 이겨 권력을 계속 누릴 가망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에게 걷어 차였던 아고라의 등불 장수 휘페르볼로스와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면, 그런 평화는 디카이오폴리스나 트뤼가이오스에게나 좋은 것이지 아고라의 뤼라 장수 클레오폰에게는 결코 반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 이 마지막 절굿대는 헬라스에서의 불화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아르기누사이에서의 승리를 이용해 전승 장군들을 미래의 정적으로 간주하고 미리 재판으로 때려잡는 '클레오폰식 불화'를 아테나이 안으로 불러오기로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9.4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코논이 스파르테의 칼리크라티다스에게 쫓겨 함대를 잃고 레온과 에라시니데스와 함께 레스보스의 뮈틸레네 항구로 쫓겨 들어가 간신히 아테나이에 그의 위험한 처지를 알려 왔을 때, 아테나이가 어떤 결정을 내렸고,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클레오폰이 얼마나 광분하여 설쳐 댔는지 이 재판정에 나와 계신 분들 가운데서도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만, 클레오폰이 그렇게 광분했던 까닭을 알고 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민주정 복고가 이루어지고 클레오폰이 그 덕으로 정권의 실세가 된 이듬해, 퀴지코스 앞바다에서 스파르테의 함대를 맞아 트라쉴로스가 분전하고, 트라쉬불로스가 전세를 뒤집어 갈 때 알키비아데스가 합류하여 스파르테 함대의 전열을 격파하고, 마지막으로 달려온 테라메네스가 스파르테의 민다로스와 그의 함대를 끝장내고 나서 이제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와의 오랜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163 클레오폰이 그 작은 희망을 부추기며 스파르테가 제의한 평화를 기를 쓰고 반대한 데 대한 시민들의 원망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고도 보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절대 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때 클레오폰이 한사코 스파르테의 평화 제의를 반대한 것은 평화가 온다면 아테나이는 금의환향하는 알키비아데스의 차지가 될 것이고, 자신은 사모스로 쫓겨나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던 휘페르볼로스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너무나 잘 알았던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클레오폰은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와의 전쟁이라는 '헬라스의 불화' 속으로 알키비아데스든 나머지 미래의 정적들이든 모두 전장으로 내보내려 했고, 그래서 금의환향한 알키비아데스에게 육해군 총사령관이란 직함을 주어 곧바로 전쟁 터로 내보낸 것은 그로서는 정적을 도시 바깥으로 내모는 도편추방과 같은 효과를 가지는 것이어서 나름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고요. 그 퀴지코스의 승리 뒤로 클레오폰이 제법 호기를 부리며 페리클레스 때 도시가 주다가 페리클레스가 죽고 슬그머니 없어졌던 극장 관람비 2 오볼로스를 다시 도시가 주기로 하는 등 도시를 승리에 대한 희망으로 채워 나가려고 애쓰고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시켈리아에서의 참패의 상흔을 다 아물게 할 수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 사람들의 마음을 알키비아데스나 전공이 혁혁한 장군들로부터 떼내어 자기에게 쏠리도록 하기에도 모자라 안타까웠는데, 때마침 알키비아데스의 부관이 무모한 공격으로 함대를 잃는 일이 벌어져 도시가 다시 불안에 휩싸이자 그 책임을 물어 알키비아데스를 육해군 총사령관직에서 내쫓고 그 자리에 코논을 새로 앉혀 사모스로 내보내며 안도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코논이 함대를 잃고 뮈틸레네 항구에 간신히 피난해 있으면서 구조 요청을 해 오니 그것이 정적들로 하여금 자신을 코논과 함께 그 책임을 물어 권좌에서 끌어내리게 할 좋은 구실이 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클레오폰이 아테나이를 구하겠다는 일념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부자들을 몰아 세워 돈을 거두고, 마지막 남은 처녀 신 아테나의 황금 옷을 벗겨 한 달 사이에 무려 백쉰 척의 함대를 꾸린 다음 노예들까지 배에 태워 새로 뽑은 장군들 여덟으로 하여금 코논을 구하도록 아이가이온 바다 건너로 보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제가 어렸을 적에 기회가 닿는 대로 클레온의 반 도시적인 행동을 비난하고 고발했듯이 클레오폰의 이런 반 도시적인 행동 역시 기회 있을 때마다 비난하고 고발했지만, 코논이 함대를 잃은 뒤 여덟 장군이 백쉰 척의 함대로 그를 구하기 위해 출격하는 그 한 달 동안 클레오폰이 보여 준 광분은 일곱 해 전 시켈리아의 패전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 아무도 도시를 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겨우 늙은 소포클레스와 하그논을 불러 내고, 누구 하나 선뜻 재물을 털어 배를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해 고작 살림집의 문틀이나 뜯어 헌 배를 고치던 지리멸렬에 비해 그야말로 전광석화에 쾌도난마여서 그런 클레오폰의 광분을 비난하고 조롱할 겨를도 없었지요. 그리고 그들이 아르기누사이에서 스파르테의 칼리크라티다스와 그의 연합 함대를 격파했다는 소식이 왔을 때 클레오폰의 기세등등함이 하늘로 만장이나 뻗혀 그 누구도 그 앞에 설 수 없게 할 정도였지요. 클레오폰에게 그 위세를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보여 줄 일이 생긴 것은 절굿대를 제대로 쓰려는 신의 조화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신은 저녁에 뮈틸레네 건너 편 아르기누사이에 도착한 아테나이 함대를 야습하려는 칼리크라티다스의 작전을 강력한 뇌우를 보내 막고, 그 바람에 이튿날 새벽에야 출격한 칼리크라티다스의 함대를 아테나이 함대가 격파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 다음 신은 전투를 끝낸 아테나이 함대가 둘로 나뉘어 난파당한 배들의 조난자들과 뮈틸레네에 갖힌 코난을 구조하는 일에 나섰을 때, 아르기누사이 앞바다의 풍랑을 거세게 일으켜 둘로 나뉜 함대가 그 어느 구조도 성공하지 못하게 막고, 승전의 소식과 함께 조난자 구조 실패의 소식을 들은 클레오폰이 승전의 기쁨보다 짐짓 죽은 조난자들에 대한 과도한 애도와 함께 그들을 구하지 않은 분노로 그의 위세를 떨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클레오폰의 분노가 사모스로 전해지자 약삭빠른 테라메네스는 과두정에서 빠져 나와 민주정에 붙었듯이 트라쉬불로스를 앞장 세워 황급히 아테나이로 돌아와 앞앞이 다니며 극구 해명하며 오히려 그 책임을 장군들에게 전가했는데 반해, 클레오폰의 분노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채지 못하는 장군들은 풍랑이나 핑계 삼으며 편지로 해명하려 했지요.164 클레오폰의 분노 앞에서 고개를 조아려도 마땅치 않을 판에 여유롭게 시민들에게 편지질이나 해 대는 승전 장군들을 그냥 둘 경우 그들 가운데서 또 다른 알키비아데스가 아니 나온다고 자신할 수 없는 클레오폰은 함대를 잃고 뮈틸레네 항구에 숨어 지내던 코논의 장군직을 유지시켰지만 아르기누사이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 여덟은 해임했고, 심상치 않은 아테나이의 분위기에 놀란 장군 둘은165 아예 아테나이를 버리고 돌아오지 않았으며, 나머지 여섯은166 아테나이로 돌아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화려한 개선 행진이 아니라 횡령 혐의로 구금당하거나167, 조난자 구조 실패에 대한 재판을 받기 위해 구금당하는168 일이었습니다.
9.43. 그렇게 승전 장군들에 대한 재판으로 시작된 아테나이의 '클레오폰식 불화'는 클레오폰의 동류들인 아르케데모스와 티모크라테스가 선봉에 서서 장군들을 고발하면서 시민들의 편가르기가 시작되었고, 장군들의 해명을 들은 민회의 분위기가 불화꾼들의 예상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장군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지 않자 표적을 잃은 클레오폰의 분노가 어디로 벼락을 내리칠지 모를 리 없는 영악한 테라메네스가 가짜 유족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벌이게 하는169 한편 칼릭세노스를 앞장세워170 조난자 구조와 코논 구조를 맡은 장군들의 행적에 대해 각각의 유뮤죄를 묻는 표결에 붙이지 않고 장군들 전부를 일괄로 한 번의 투표로 유뮤죄를 가리자고 몰아세우면서 불화꾼들의 고함과 위협이 재판을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클레오폰이 전승 장군들을 한꺼번에 제거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줌으로써 자신에게 떨어질 화를 피하려는 테라메네스의 교활함이 시민들을 움직인 데다가 클레오폰 동류들의 고함과 위협이 일괄 표결 쪽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성공하는가 싶었을 때, 뜻밖에도 소크라테스가 의장으로 있던 평의회가 일괄 표결의 불법성을 문제 삼아 걸고 넘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법이라며 반대하던 의원들이 고함 부대의 고발하겠다는 위협에 굴복해 찬성으로 돌아섰을 때도 자신만은 끝까지 반대했었다고 뒷날 자신을 변호하며 소크라테스는 자랑 삼아 말했지만, 그런 소크라테스의 소극적인 행동으로는 클레오폰이 전승 장군들을 제거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재판의 불법성을 고치지도 못했지요. 소크라테스의 돌출 행동이 고함 속에 묻혀 버리고 만 다음, 전승 장군들을 변호하던 알키비아데스의 사촌 에우립톨레모스가171 다시 한번 일괄 표결이 칸노노스의 법172에 위배되며, 또 그 당시 조난을 당해 그 자신이 구조를 받아야 했던 처지에서 가라앉은 배의 갑판에 올라 겨우 목숨을 구한 한 장군의 경우를 들며 그런 장군까지 포함하는 일괄 투표의 몰합리성을 지적했지만, 그 정도의 저항으로는 '클레오폰식 불화'를 막을 수도 없었거니와, 작고 소극적인 '소크라테스식 정의'나 차분하고 합리적인 '에우립톨레모스식 관용'으로는 사람들의 관심마져도 불러올 수가 없었을 만큼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이미 '클레오폰식 불화'에 지배당하고 있었고, 전승 장군 여섯은 아직 끝나지 않은 스파르테와의 전쟁에서 또 다른 공을 세우지도 명예롭게 전사하지도 못하고 그저 한낱 분풀이의 제물이 되어 속절없이 죽음의 구덩이 속에 던져졌지요.
9.4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를 스퀴로스 섬에서 데려오고, 네옵톨레모스로 하여금 독사에 물려 살 썩는 냄세를 풍기며 고통으로 울부짖는 괴성이 싫어 렘노스 섬에 버려 버린 필록테테스를 그가 가진 헤라클레스의 활을 들고 다시 트로이아 정벌에 참전토록 설득하여 오딧세우스가 그 둘의 도움으로 결국 트로이아를 함락시키러 출진한다는 이야기를 디오뉘소스 극장 무대에 올린 소포클레스의 당부를 들을 리 만무한 신이 장만한 전쟁의 절굿대 클레오폰이, 그렇게 아테나이의 네옵톨레모스에 다름 아닌 에우립톨레모스의 설득을 물리치고, 또 스스로 필록테테스와 그가 가진 헤라클레스의 활보다 더 귀중한 여섯 전승 장군들을 구덩이에 던지고, 오히려 함대를 잃고 도망친 코논이 전쟁을 수행한 경험도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모자라는 새로 뽑은 장군들과 함께 헬레스폰토스에 나가 있는 동안, 민다로스를 잃고 또 다시 칼리크라티다스마져 잃은 스파르테는 한 번 이상 해군 제독에 임명하지 못하도록 한 법을 피해 편법으로 뤼산드로스를 제독의 고문관이라는 직책을 주어 출진시키고,173 그 뤼산드로스는 메디아의 총독으로 부임한 젊고 패기 있는 페르시아의 왕자 퀴로스와 그의 돈을 얻기 위해 마치 그가 아킬레우스의 젊은 아들 네옵톨레모스나 되는 것처럼 그의 입 안의 혀처럼 굴며 그가 내어 주는 필록테테스가 가진 헤라클레스의 활이라 할 새로운 함대를 편성하여 그의 돈으로 조련까지 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아테나이가 승전한 장군들을 죽이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아테나 여신과 시민들에게 나누어 줄 때, 스파르테는 남의 돈으로 함대를 꾸리고 그 함대를 운용하였던 것입니다. 아테나이가 동맹 도시들의 돈을 쥐어짜거나 적대적인 도시를 약탈하는 동안 스파르테는 이어족의 돈을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테나이의 장군들이 돈을 뺏기고 흔쾌할 리가 없는 동맹 도시들의 거취에 온 신경을 쓰는 동안 스파르테는 그런 도시들의 자유를 외치고 페르시아의 돈을 흔들어 보이며 자발적인 연합군들과 함께 전투 훈련에 여념이 없었지요. 그리고 일년이 채 되지 않아 아테나이의 함대는 아이고스포타미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아테나이의 함대가 아이고스포타미의 바다로 빠져 들 때,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는 조난자를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덕분인지, 아니면 신이 나중에 또 다른 절굿대로 쓸 요량이었는지 코논은 살아남았으나, 이제 임무를 마친 신의 절굿대 클레오폰은 스파르테와 그 동맹군들에 의해 아테나이가 포위되어 식량조차 구할 수 없는 처지에서 스파르테와의 결전을 외치다, 오늘의 처지가 승전자로서 누릴 평화를 두 번이나 걷어 차고, 전승 장군들을 재판으로 죽인 결과라는 사실이 떠올라 분노한 시민들에게 칼릭세노스와 함께 돌에 맞아 죽었고, 나머지 똘마니들은 도시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174
9.45.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해도 도망치거나 죽고, 자신의 탐욕을 위해 도시를 망쳐도 죽거나 도망치다가 보니, 아테나이에는 정말 지도자가 살아남아 있지 못했습니다. 점령군이 왔는데 항복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벽을 허물고 항복하자는 아르케스트라토스를 감옥에 집어 넣고 아무 대책 없이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을 정도였지요. 다시 말해 아테나이를 점령한 뤼산드로스와 함께 아테나이의 미래를 이야기 나눌 아테나이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항복할 사람이 나타나 항복할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또 아테나이 사람들은 굶어 죽어 나가야 했습니다. 헬라스 내전의 단초가 코린토스에 대한 아테나이의 적대적 태도였다는 것을 잊을 리 만무한 코린토스가, 사실은 아테나이가 항복조차 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몰라, 항복도 하지 않는 아테나이를 응징하기 위해 아테나이를 허물어 양들의 풀밭으로 만들어 버리자고175 할 만했지요. 그러나 아테나이가 없는 바다에서 코린토스가, 그리고 아테나이가 없는 땅에서 테바이가 스파르테를 어떻게 대하고 나올지 불 보듯 뻔한 스파르테는 아테나이를 양떼들의 놀이터로 만들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무엇보다 코린토스와 테바이의 아테나이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누그러졌다 싶을 때, 그리고 아테나이의 결사 항전 주장자들까지 우선 무엇보다 배가 고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슨 짓을 당해도 받아들여야만 되었을 때, 뤼산드로스가 테살리아에 민주정을 세우기 위해 권력자들에 대항할 농민들을 무장시키고 있던 크리티아스176를 찾아 스파르테에 항복한 충직스런 동맹 도시로서의 아테나이를 맡길 준비가 되었을 때, 뤼산드로스에게 가서 해를 넘기며 석 달이나 머물던 테라메네스가 다시 아테나이에 나타났고, 그리고 그가 사절단을 데리고 스파르테로 가서 항복을 하였고, 뤼산드로스가 점령군 지휘관으로서 항복한 아테나이를 접수했고, 항복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항복 조건에 따라 조상들의 정치 체제로 아테나이를 다스리기 위해 조상들의 정치 체제로 정비할 서른 명의 대표를 뽑았고, 그들은 빠른 시간 안에 새롭게 정비된 조상들의 정치 체제에 따라 뽑힌 아테나이의 정치 지도자들이 뤼산드로스로부터 다시 아테나이를 돌려받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른 명의 대표들 가운데 들어 있던 크리티아스가 아테나이에 지금까지 나타났던 그 어떤 불화꾼보다 더 영리하면서도 오만스레 탐욕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일삼는 최악의 불화꾼임을 드러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스파르테가 이 괴물 같은 크리티아스를 끝까지 보호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뤼산드로스가 아테나이에 최악의 재앙을 주기 위해 일부러 심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저로서도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 30인은 선출이 되자마자 조상들의 정치 체제를 정비하는 대표가 아니라 마치 과두정의 집권자들인 양 행세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그들은 제법 온유하고 전통적인 정치 체제를 갖추는 것처럼 아레오파고스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재판관들에 대한 권한도 축소하며 이것 저것 손을 대더니,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과 비난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런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재판으로 죄를 주고 처형했지요. 그러면서 민란이 두려웠는지 한편으로는 비용을 대겠다며 뤼산드로스에게 민란을 진압할 스파르테 군대의 주둔을 요청해, 칼리비오스가 700명의 군대를 데려와 아크로폴리스에 진을 치도록 하면서177, 다른 한편으로 크리티아스식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 그렇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계속 죽여 갔지만, 또 그것으로 권력을 굳히면서 그들의 재물도 빼앗아 갔지만, 크리티아스는 아테나이에 평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크리티아스식 불화'만 키워 갔습니다. 나중 거류외인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을 때는 그들의 행각이 단순히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을 넘어선 그들에게 반대하여 저항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병적인 발작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재물을 빼앗고 죽인 사람들의 숫자가 뤼산드로스가 전투를 통해 죽인 아테나이 사람들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을 천오백178을 넘었으니까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소크라테스가 한때 자기 근처에서 얼씬거렸던 크리티아스에게 소를 키우는 사람이 소를 수를 늘리지는 않고 오히려 줄이고 있다고 비난하고 다녔겠습니까? 그래 보았자 한번 불려갔다가 나와서부터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크리티아스식 불화' 앞에 소크라테스가 입을 다물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어떠했겠습니까? 하나씩 둘씩 아테나이를 떠나기 시작했고, 아테나이의 인근 스파르테의 동맹도시인 메가라와 테바이에는 아테나이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가득했으며, 이들 가운데는 트라쉬불로스와 테라메네스의 보좌관 역활을 하던 아뉘토스도 있었습니다.179 테라메네스와 평소 가까운 사이인 이 둘의 망명 사실은 크리티아스의 불화 본능을 자극하여 결국 테라메네스에게 강제로 독약을 먹여 죽게 하였고180, 테라메네스의 죽음은 트라쉬불로스와 아뉘토스의 불화 본능을 자극하여, 이 둘이 망명객들로 조직된 반정군을 이끌고 아테나이로 들어오는, 다시 말해 아테나이에서 아테나이 사람들끼리 싸우는 소위 내전을 마다않게 만들었습니다.
9.4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페리클레스가 사소한 일이라 하지 말라며 벌인 헬라스의 내전이 스무일곱 해 반만에 아테나이가 성벽을 허물어 항복하면서 끝났고, 그래도 아테나이는 아테나이가 절멸시켰던 스키오네나 밀로스 같은 신세는 면했지만, 헬라스의 패권을 스파르테에게 넘기면서 스파르테의 동맹국 중의 하나로 전락하며 겨우 살아남았는데, 페리클레스의 아테나이도 아니고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겉옷이 벗겨진 처녀 신의 집만 휑뎅그레 서 있는 이 헐벗은 도시의 권력 때문에 함부로 같은 시민을 죽이고, 그런 죽음으로부터 또 한번 살아남기 위해 같은 시민끼리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다니요! 스무여덟 해에 걸친 전쟁 동안 역병의 재앙으로 죽고, 전장에 나가 죽고, 권력 다툼으로 죽고, 그렇게 죽고 죽고 또 죽었는데 이제 그 전쟁이 끝난 마당에 우리끼리 전쟁을 벌여 서로 죽여야 하게 되다니요! 이 모두가 신의 노여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숱한 죽음으로도 풀지 못한 우리 아테나이에 대한 신의 노여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을까요?
9.4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스무일곱 해 반에 걸친 전쟁 동안 과연 아테나이가 몇 번이나 전투에서 졌습니까? 처음이 암피폴리스의 패전입니까? 그렇다면 클레온이 퓔로스에서의 작은 승리로 얻은 평화의 기회를 걷어찬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전쟁을 해야 권력을 유지하고 권력을 유지해야 재물을 얻는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고 클레온만 욕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어땠습니까? 여러분은 전쟁에서 이겨 얻는 재물을 나누어 얻으며, 민회에서나 재판정에서 고함치는 작은 권력의 재미를 나누어 얻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권력과 재물을 나누어 주는 클레온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여러분은 클레온이 승승장구할 줄 알았지요? 그러나 신은 클레온과 여러분의 탐욕에 가득찬 오만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클레온이 죽고 첫 패배에 놀란 아테나이는 황급히 평화를 주선하였지요. 그리고 또 아테나이가 패배한 것이 시켈리아 원정군의 전멸입니까? 페리클레스가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지 말라고 했지만 여러분이 그 말의 뜻을 알기나 했습니까? 그나마 니키아스가 평화를 주선하여 잠시 신의 노여움을 진정시키는가 했는데, 그 평화를 깨트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아테나이의 알키비아데스가 아니었습니까? 가슴과 머리가 온통 자신감이란 건방과 공명심의 허영으로 가득찬 알키비아데스가 나이 서른에 장군이 되어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평화가 그를 영광스럽게 할 것은 오로지 올륌피아에 나가 우승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는 그런 정도로는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지요. 알키비아데스의 허영을 채워 줄 것은 전쟁에서 이겨 자신을 드러내는 것 뿐이어서 알키비아데스에게 '니키아스식 평화'는 니키아스보다 먼저 쳐야 할 적이었습니다. 아테나이가 스키오네를 절멸시키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켜 스키오네를 새로운 식민 도시로 만들었을 때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아들이라 할 알키비아데스가 제일 먼저 나서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니키아스의 평화 아래였었다고요? 그래서 아르고스를 지렛대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흔들고 스파르테와의 불화를 야기시켜 보려다, 플라타이아이를 쳤다는 죄책감에 니키아스의 평화가 있기까지의 전쟁이 꺼림칙하기만 했던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의 도발에도 동요를 보이지 않자, 스키오네에 이어 애꿎은 멜로스를 절멸시키고 그곳에 아테나이 사람들을 보냈나요? 이런 저런 시비의 작은 성과가 그 큰 허영을 채워 주지 못해 앙앙불락하던 알키비아데스가 시켈리아 원정을 제안했을 때, 물론 알키비아데스가 원정에 나서자고 했지만, 사실은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이 반대하던 니키아스를 누르고 알키비아데스와 똑같은 건방과 허영으로 원정을 몰아붙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뒤에 원정을 반대했던 니키아스가 알키비아데스가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원정을 거두고 아테나이로 돌아가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결국 니키아스도 건방과 허영으로 가득찬 여러분의 오만에 끌려가고 만 것 아니었습니까? 브라시다스를 도와주었다고 스키오네를, 그리고 아테나이에 조공하지 않는다고 멜로스를 절멸시킨 건방이 쉬라쿠사이도 까불면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던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신은 건방과 허영으로 가득찬 아테나이의 오만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잠시 보름달을 감춘 동안 경건한 니키아스의 정신도 어두워졌고, 그래서 우리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군은 전멸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에는 스키오네나 멜로스처럼 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만 남았지요. 그리고 마지막 패전이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이었지요? 아이고스포타미에서 여덟 척의 배만 남기고 처참하게 군사들과 근 이백 척의 함대가 침몰했을 때 페리클레스가 그렇게도 자랑하던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함께 가라앉고 말았지요.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시켈리아 원정군의 전멸이 도시를 절멸의 공포와 생존의 절박감에 짓눌려 잠시 도시에 평화를 가져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시의 안전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 그래서 정체마져 한번 바꾸어 보았지만, 페이산드로스의 과두정으로 페르시아의 지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밝혀지자마자 민주정으로 돌이켰고, 그런 정변의 과정에서 정적들 사이에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은 벌어졌으나 결코 내란의 수준으로 번지지는 않았지요. 아테나이의 절박감은 지워지지 않았고, 외부의 도움없이 도시의 안전을 보장하기가 힘들다는 인식을 아테나이가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는 일이 무망하다는 것을 알고서야 시작한 다른 도시들에 대한 본격적인 약탈로 겨우 해군이 제 모습을 찾았고, 조금씩 이전의 절박감이 안도감으로 바뀌어 갈 때, 아테나이가 거둔 퀴지코스에서의 승리를 기화로 도시의 안전을 구하는 것이 목표인 생존이 아니라 도시가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지려는 것이 목표인 탐욕으로 바뀌어 갔고, 아르기누사이에서의 승리를 기화로 도시가 필요한 것을 모두 얻으려는 탐욕 정도가 아니라 전쟁 전에 도시가 가졌던 것을 모두 가지려는 오만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변화가 클레오폰의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물론 클레오폰이 민회에 나와 저저 거리의 건달처럼 여러분을 그렇게 몰고 가긴 했지만, 그 영악한 클레오폰이 여러분이 평화를 원하는데도 어떻게 잡은 권력인데 그것을 내던지기라도 할 듯 여러분이 원치 않는 전쟁을 해야 한다며 낮술까지 한잔 걸치고 자신만만하게 민회에 나타나 평화를 걷어찾겠습니까? 클레오폰이나 여러분이나 모두를 평화가 아니라 전쟁으로 이제는 스파르테를 이길 수 있다는 망상에 빠지게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은 아테나이가 페리클레스의 시대로 돌아간다는 오만을 과시하고, 클레오폰은 아테나이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오만을 과시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클레오폰의 오만과 과시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도록 전승 장군들을 모두 제거해 주었을 때, 아테나이의 끝없는 탐욕과 오만 앞에 신은 질려버렸습니다. 아테나이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신은 노여움을 넘어 아테나이를 포기했고, 아테나이는 아이고스포타미의 해전에서 패했고, 그리고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에게 항복했습니다. 그 스무여덟 해에 걸친 전쟁에서 아테나이에게 수없이 패하고, 패했을 때마다 평화를 얻으려 했던 스파르테가 마지막 전투에서 아테나이를 이기고 전쟁을 끝냈습니다.
9.48. 그렇다면 스무여덟 해에 걸친 기나긴 전쟁 동안 스파르테가 이긴 것은 몇 번이나 되었을까요? 페리클레스가 전쟁을 결심하며 말했던 것처럼 스파르테는 전쟁을 오래 수행할 능력도 없었고 더구나 해군을 가질 능력도 없었으며, 그 전쟁은 한번 벌어지면 대를 이어갈 오랜 소모전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전쟁을 수행할 강력한 동기나 의지조차 없었음에도 스무 여덟 해 동안이나 전쟁을 유발시켜 온 아테나이에 끌려다니다 마지막 한번의 승리로 전쟁을 끝냈습니다.181 페리클레스는 사소한 것이라며 물러서면 그것이 굴복이고 그런 굴복의 끝이 곧 예속을 의미한다며 여러분을 전쟁으로 몰아갔지만, 그것은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의 동맹 도시들에게 자행한 패권의 행사였지, 스파르테가 펠로폰네소스 동맹 도시들에 대해 그런 패권을 자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테나이가 다른 도시들에 대해 굴복을 요구하고 그래서 예속 시키고 그래서 조공을 받아 먹고 살았으므로 페리클레스의 그 말은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을 설득하는 데는 좋은 예이었지만, 스파르테를 설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스파르테는 전쟁이 벌어지면 그 전쟁은 대를 이어 갈 오랜 소모전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스파르테는 그 때문에 그 전쟁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아티케에서 더 좋은 포도주와 더 많은 올리브 기름을 만들고 곱게 빚은 항아리에 담아 다른 도시들에 팔아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 얻은 전쟁에 대한 자신감으로 다른 도시를 굴복시키고 예속시켜 먹고 사는 재미에 흠뻑 빠진 아테나이와는 달리, 스파르테는 전쟁이 도시를 번영시키지도 도시민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페르시아와의 전쟁과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물론 도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코린토스나 테바이와 같은 큰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펠로폰폰네소스 반도 안의 작은 도시들에 대해서도 전쟁이 일어나 모두의 안전을 지켜야 할 때만 병력을 차출하고 전쟁 비용을 나누어 부담케 했지만, 일상에서는 모든 동맹 도시들을 동등한 주권을 가진 도시들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스파르테가 육로로 외부로 나가는 길목을 차지한 아르고스가 동맹 가입을 거부하고 스파르테보다 아테나이와 더욱 친숙하게 지냈지만 스파르테는 무력으로 그들을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도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스파르테 역시 스스로를 스무여섯 해에 걸친 전쟁의 고난 속으로 몰고 간 결정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테나이가 역병의 재앙으로 시달리며 평화를 제의했을 때 평화를 받아들여 전쟁을 끝내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역병이 옮길까봐 아티케로 나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아테나이의 동맹 도시들을 공격한 것도 아니면서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전쟁을 벌인 아테나이가 얄미운데다가, 도시가 역병으로 고통 받는 와중에도 전쟁을 고집하는 페리클레스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이었겠지만, 신은 평화를 걷어찬 스파르테의 어리석은 오만을 용서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벌로 스파르테는 세 번이나 평화를 제의해야 했고, 스무여섯 해 동안이나 그들의 도시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전쟁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께름칙하여 피하고 싶은 전쟁을 수행하는 스파르테의 입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페리클레스는 평화를 거부당해 의기소침해진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전쟁을 위한 용기를 북돋우고 자신감을 심어 주기 위해 전쟁을 피할 경우 아테나이가 당할 굴복과 예속의 위험을 또 다시 말했습니다.182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에게 예속당할 가능성을 얼마나 높게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테나이에게 조공을 바치는 예속된 도시들을 계속 예속시켜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했으므로 아테나이는 별 수 없이 다시 전쟁의 길로 나섰고, 전쟁의 길로 다시 들어선 아테나이가 보기에 좋았던지 페리클레스는 그 전쟁을 클레온에게 맡기고 죽었고, 끝낼 수 있었던 전쟁을 끝내지 않았던 스파르테는 평화를 걷어찬 첫 번째 벌로 자기 집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멧세니아 퓔로스의 스팍테리아 섬에서 스파르테의 동등인 120명이183 클레온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해야 했고, 그 포로를 구하기 위해 평화를 구걸해야 하는 수모까지 당했지만 그들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스파르테의 땅에서 스파르테 동등인들을 폴로 잡은 클레온의 기세는 아테나이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 동맹 도시로 퍼져 나갔고, 그것으로 조공을 올려 받는 등 전쟁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고, 이제 처음 전쟁으로 돈이 생긴 판에 스파르테가 구걸하는 평화를 들어 주어 확실한 수입원을 놓아 버릴 까닭이 없었고, 스파르테의 동등인 120명을 인질로 잡은 터에 무서울 것도 없었습니다. 무기를 놓고 아테나이의 선처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포로들을 구할 수 없었던 스파르테가 가질 수 있는 대안이라고는 전쟁을 이기는 길 뿐이었습니다. 스파르테는 나날이 줄어드는 동등인들을 투입하는 전투 수행에만 더 이상 기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차제에 젊고 건장하여 언제라도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헤일로타이를 뽑아 전투에 투입함으로써 반란에 대비해 스파르테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던 동등인들을 전투에 배치할 수 있게 되고, 전투에 공을 세운 헤일로타이를 자유민으로 식민지에 거주토록 함으로써 라코니케에서의 동등인과 헤일로타이의 비율을 동등인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유지시킬 수 있게 되므로, 헤일로타이를 전투 요원으로 투입하여 그 전쟁을 계속 수행해 나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헤일로타이를 전투에 투입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스파르테는 지금까지의 전쟁 수행 양식과는 전혀 다른 장기간에 걸친 원거리 출정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헤일로타이를 투입한 장기의 원거리 출정은 헤일로타이를 무장시켜 스파르테 인근에서 벌어지는 전투나 짧은 시간의 원정에 투입했다가 생길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로를 장악한 아테나이에 대항해 육로로 아테나이의 동맹 도시들에 접근하여 그들을 아테나이로부터 떼어 내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페리클레스의 판단대로 스파르테는 아직 해군을 갖출 능력이 없었지만, 페리클레스의 판단과는 달리 장기 원정을 통해 많은 도시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의 도움으로 아테나이로 들어가는 곡물이나 배를 만들 목재 따위의 전략 물자 보급을 끊고, 대신 그런 물자를 스파르테로 돌려 전쟁을 끌어나갈 새로운 동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전략의 선봉에 브라시다스가 선 것은 아테나이로서는 최악이었지요. 브라시다스는 전투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뛰어난 전사이기도 했지만 스파르테가 치르고 있는 전쟁의 성격을 가장 정확히 파악한 전략가이기도 했습니다.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와 다른 것이 있다면 제국을 건설하고 패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을 무너트리고 헬라스의 도시들을 패권의 질곡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다른 도시들을 대할 때마다 실행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클레온이 뮈틸레네의 동맹 이탈 행동에 대해 사모스를 응징했던 페리클레스보다 더 극악하게 도시를 절멸시키려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응징함으로써 다른 동맹 도시들에게 본때를 보이고자 했다면184 브라시다스는 무력 시위 대신 우호와 설득으로 다른 도시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고 아테나이의 세력을 좁혀 나갔습니다. 이런 일을 위해 브라시다스는 헤일로타이로 구성된 중무장보병 700명을 데리고 트라케로 원정을 떠났고185, 결국 클레온의 고향이자 아테나이의 주요 목재 공급처인 암피폴리스를 함락시킴으로써 전쟁을 끝내기 위해 그가 한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헬라스의 여러 도시들에게 알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브라시다스가 한 일이 무슨 일인지를 모를 리 없는 클레온이 브라시다스의 일을 중단시키기 위해 암피폴리스로 달려 왔지만, 브라시다스와는 달리 전장에서의 뛰어난 전사도 아니고, 더군다나 운 좋게 건진 스팍테리아의 포로들 덕분에 재물과 권력을 거머쥐고 오만에 빠져 페리클레스로 물려받은 전쟁을 이끌 전략도 무시한 그로서는 비록 방패병의 방패에 맞아 죽기는 했어도 전장에서 죽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명예로운 것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아테나이로서는 다행스러웠던 것이 신이 클레온과 함께 브라시다스도 하데스로 데리고 가면서 아테나이의 니키아스가 포로로 잡혀 온 스파르테의 동등인들을 지렛대 삼아 어정쩡하게 스파르테로 돌아온 파우사니아스의 탕자 플레이스토아낙스를 상대로 평화를 논의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스파르테 왕 파우사니아스의 아들로 방탕하여 뇌물을 받았다가 추방되었었는데 파우사니아스가 죽자 어물쩡 스파르테로 돌아와 그의 귀국을 두고 스파르테 안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아테나이에 포로로 잡힌 동등인들의 가족들이 모두 고관 대작들이라 아들 때문이라 손가락질 받을까봐 함부로 평화를 말할 수 없을 때 그가 대신 나서 주었고, 스파르테는 모른 척하고 그에게 역활을 준 것이었지요. 그렇게 내부의 분위기가 평화로 잡히자 스파르테는 코린토스와 테바이와 메가라 등 주요 동맹 도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머지 동맹 도시들의 찬성 표결에 힘입어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고, 비록 메가라를 봉쇄하는 아테나이의 도발이 있었기 때문이기는 했지만, 그 전쟁이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전쟁을 피하고 싶었음에도, 동맹 도시 테바이의 어리석은 플라이타이아이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는 바람에 결국 페르시아를 물리칠 때의 헌신에 보답하고자 지켜 주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 플라이타이아이를 지켜 주지 못했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늘상 께름칙했던 마음을 털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물론 스팍테리아의 포로들을 데려 올 수도 있었지요. 그리고 스파르테는 퓔라이에 요새를 지어 스파르테를 괴롭힌 데모스테네스가 시켈리아 원정 길에 이번에는 스파르테의 직할지 라코니케의 남쪽 해안에 요새를 세우기까지, 아르고스를 앞장 세워 알키비아데스가 벌인 펠로폰네소스에서의 분탕질이나, 스파르테를 믿고 버틴 스키오네와 밀로스에 대한 도륙한 뒤 그 도시와 그 섬에 아테나이 사람들을 살게 하는 새로운 식민 정책을 보고서도, 참고 평화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아테나이가 라코니케를 침범해 요새를 세우는 것을 본 스파르테는 이제 아무런 꺼리낌없이 전쟁에 나섰고, 이제는 새로운 전략으로 아테나이를 상대할 것이었습니다. 아기스가 헤일로타이를 중무장 시켜 아티케의 테켈레이아에 요새를 짓고 육상에서 아테나이를 봉쇄하였으며, 쉬라쿠사이에 군사 자문단을 보내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군을 쉬라쿠사이가 전멸시키도록 도왔으며, 아테나이 동맹 도시들이 아테나이의 질곡에서 벗어나도록 자극하고 원조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원조를 위해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아테나이를 해상에서도 봉쇄하기 위해 스파르테의 해군을 창설했습니다. 물론 코린토스의 해군력을 더 키워 쓸 수도 있었지만, 코린토스의 세력 강화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독자적인 해군력이 필요했겠지요. 스파르테가 전략을 바꾸고 새롭게 전쟁을 수행하자, 페리클레스의 전략을 무시하며 아티케의 농부들을 무마하지 않았던 것이나 스키오네와 멜로스를 절멸시키고 새로운 식민지를 확장한 것이나, 시켈리아를 원정하여 실패한 모든 일들이 아테나이의 실책으로 부각되었고, 페리클레스가 돈이 없어 전쟁을 못할 것이라던 스파르테는 페르시아라는 돈줄을 잡아 해군을 창설하게 된 반면, 돈이 있고 해상을 지배하는 한 승리는 우리 것이라던 페리클레스의 말과는 달리 돈이 떨어진 아테나이는 해적질로 겨우 군대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스파르테는 해군을 통한 해상 봉쇄만 빼고는 초기의 전략을 모두 성공시켰고, 아테나이는 시켈리아 원정군을 잃고, 아티케를 잃고, 에우보이아와 헬레스폰토스의 동맹 도시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테는 쉬라쿠사이 해군과 페르시아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뤼산드로스가 스파르테 해군을 맡을 때까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스파르테의 두 왕들 아기스와 파우사니아스는 아테나이 해군에 대적하는 해군을 키우고 그 해군과 페르시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를 장악해 가는 뤼산드로스의 놀라운 능력에 잠시 질투가 나 스파르테 해군 제독의 임기를 한 해로 정하고 사실상 뤼산드로스를 스파르테로 소환했지만, 아르기누사이의 패전 뒤 뤼산드로스를 원하는 페르시아 왕자 퀴로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에게 다시 해군을 맡기는 정확한 판단력을 보였고, 그 보답으로 단 한 해 동안 해군을 재건한 뤼산드로스는 아이고스포타미에서 그의 조국 스파르테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한 번의 승리를 선사했고, 아테나이는 스무여덟 해에 걸친 전쟁 동안 아테나이에 단 한 번 이긴 스파르테에 항복하고 전쟁을 끝냈습니다.
9.4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으로 재물을 얻고 전쟁으로 권력을 잡는다는 전쟁을 통한 재물과 권력에 대한 탐욕과 그 전쟁으로 재물과 권력을 쥐었다는 오만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산 아테나이가 전쟁에 져서 망했는데, 아테나이에 아테나이 사람들끼리 전쟁을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페리클레스가 상찬한 헬라스의 최고 전통의 도시가 변방의 신생 식민 도시 에피담노스와 다를 바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서른 해 전 에피담노스라는 변방의 작은 도시에서 평민과 귀족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일어난 내전에서 파생된 전체 헬라스의 내전이 이제 아테나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내전이 일어나 마감하게 되었으니 에피담노스나 아테나이가 다를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아직 우리의 도시를 버리지 않았는지 아테나이는 에피담노스와는 달랐습니다. 뮈틸레네를 절멸시키려는 클레온에 맞서 끔찍한 도륙을 피하게 했던 디오도토스와 같은 무명의 아테나이 시민이 있어, 한 번의 시가전이 끝나자 클레오크리토스186가 내전을 종식시키자고 조용한 음성으로 설득했고 그의 설득이 메아리처럼 퍼져 나가 더 이상 아테나이 사람끼리의 전투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던 것은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고, 그 내전이 있은 하루 뒤 30인이 해체되고 대신 뽑힌 10인이 다시 칼리비오스의 군대와 합세하여 반정파들의 아테나이 진입을 결사적으로 막으려 하는 바람에 또 다시 내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아테나이에 남았던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이들 10인을 내쫓고 이번에는 리논과 파일로스가 포함된 10인을 새로 뽑아 내전을 막기 위한 전권을 주었고, 결국 그들이 스파르테에서 온 10인의 중재자들 그리고 반정파 대표들과 함께 화해를 성사시켰고187 그 덕에 아테나이에서 더 이상의 내전은 없었습니다. 단 한 번 전투 뒤의 클레오크리토스의 설득에 더해,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가 페이라이에우스의 무니키아 언덕길을 두고 벌어진 그 한 번의 시가전에서 죽은 것도, 리논과 파릴로스 같은 과두정 치하 관리들의 내전 불가의 화해 주선도, 아테나이 내전을 진압하러 나선 스파르테의 아테나이 총독 자격의 뤼산드로스와 그 뤼산드로스의 아테나이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한 스파르테의 왕 파우사니아스의 동반 출진으로 스파르테의 두 지휘관들 사이의 견제도, 30인들과 추종자들이 아테나이를 더 이상 내전 상태로 끌고 갈 힘을 빼는 데 한 몫을 했습니다. 트라쉬불로스에 이어 클레오크리토스가, 그 뒤를 리논이, 그리고 그렇게 합의한 화해 조건을 원만하게 이행하는 과정에 아르키노스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은 뒤늦게나마 아테나이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지를 알게 해 주는 참으로 좋은 일이었습니다. 아르키노스는 극악했던 30인들이나 그 추종자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엘레우시스 이주 등록을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그들을 아테나이에 포용하기 위해 과감히 더 이상 등록자가 없다며 등록을 취소해 버렸고, 반정파를 도와 함께 들어온 모든 사람들에게 아테나이 시민권을 주자는 트라쉬불로스의 제안을 불법이라고 고발하여 취소해 버렸고188, 결정적인 것은 한 사람이 반정파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 몇몇에 대해 좋지 않은 과거 행적을 들추자 그를 민회로 끌고가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처형할 것을 설득하고 그를 처형해 서로의 잘못을 들추어 생길 도시의 불화를 잠재워 버렸습니다. 보복이 두려운 사람들에 대해 크리티아스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로189 자유 의지로 독립적으로 엘레우시스로 가서 살 수 있도록 조치해 주고, 아테나이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30인들이 다스린 짧은 동안190의 그들 행적에 대해 대사면령을 내리고, 그렇게 사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를 묻거나 따지는 사람이 있을 경우 오히려 그 사람을 처벌하도록 하면서 아테나이는 과거에 짓눌려 서로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일이 올 것을 믿고 테세우스 이래 가장 정의롭고 평화로운 태도191를 보이면서 내전의 악몽을 털고 아테나이에 다시 민주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트라쉬불로스와 아뉘토스가 이끄는 민주정 복고파들이 리논이나 파릴로스 그리고 아르키노스와 같은 과두정에서 봉사했던 관리들의192 이런 노력을 받아들이고 함께 한 것은 솔론도 풀 수 없었던 도시의 불화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고 가히 '트라쉬불로스식 평화'라 불러도 좋을 만큼 테세우스 이래 아테나이의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참다운 평화를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께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대사면 다음으로 '트라쉬불로스식 평화'가 보여 준 가치 있는 행동은 아테나이 주둔 스파르테 군대에 지급하기 위해 진 빚을 30인이나 그 가족에게 갚도록 한 것이 아니라 트라쉬불로스를 위시한 민주정 복고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두어 갚아 주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앞서 단행한 대사면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도시의 평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직접 보고 느끼게 해 준 행동이었습니다. 오래 사라지고 없던 테세우스가 아테나이에 불어 넣었던 도시의 영혼이 그때서야 비로소 다시 아테나이에 깃든 것으로 보였습니다.
9.50. 이렇게 아테나이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 평화스러워지고 있었지만 엘레우시스로 이주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헬라스 내전이 끝나고 두어 해가 지나자 새로운 분란을 찾는 전직 용병들이 도시들을 전전하였고, 그들은 천하 최고의 불화꾼들이 이주해 간 엘레우시스로 모여들었고, 불화꾼들은 전직 용병들과 아테나이를 공격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아테나이는 군대를 조직해 엘레우시스로 가서 불화꾼들의 지휘관들을 처형하고 전직 용병들을 엘레우시스에서 축출하는 한편, 아테나이에 남은 이주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을 통해 나머지 이주자들과의 화합을 도모하고 원만히 더불어 살기로 서약하는 선에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내전이라 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과두정파들이 일으킨 이 두 번째 분란은 때마침 벌어진 페르시아에서의 심상치 않은 군사적 행동과 이에 호응하지 않을 수 없는 스파르테의 움직임과 무엇보다 헬라스에 흩으져 있던 용병 출신 전사들의 아나톨리아 집결 등을 바라보는 아테나이의 민주정 지도자들에게 도시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193 성벽은 허물어 버려 없고 바다를 지킬 함선 한 척 없는 무방비의 도시 저 건너에서 풍기는 전쟁 냄세는 언제 무슨 연유로 아테나이에게 애꿎은 희생을 요구할지 몰라 날카로운 신경을 곤두세우고 전전긍긍했습니다. 이제 아테나이에 민주정 정권과 함께 '트라쉬불로스식 평화'가 안정적으로 정착되어 가서, 그렇게 한 오 년만 계속되어도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고 함대도 다시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안에 무슨 일이 터져 도시가 예속되고 가진 것을 빼앗기는 정도가 아니라 예전에 아테나이가 절멸시킨 도시들처럼 아테나이가 절멸당해 남자는 죽고 아녀자는 노에로 팔려 가는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습니다.194 아테나이가 많은 헬라스 사람들에게 저지른 만행이 어디 한둘이었습니까? 그 숱한 만행들을 떠올리며 이제 그런 일들이 고스란히 자기들에게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기가찬 아테나이 사람들은195 도시의 안전을 해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9.51. 헬라스 내전이 발발하기 전 페리클레스가 헤스티아이아를 쳐서 그곳 사람들을 내쫓고 거기에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만들 때만 해도 아티케 북방의 보이오티아를 경계하기 위해 아테나이에 꼭 필요한 일인 줄만 알았지, 아테나이는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헤스티아이아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노예로 팔아 돈을 벌 생각까진 하지 않았었지요. 페리클레스가 늘상 눈에 가시라며 못마땅해 하던 아이기나를 헬라스 내전이 터지자마자 마치 아이기나를 수중에 넣기 위해 전쟁을 벌인 듯 아이기나로 쳐들어가 라코니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모두 쫓아낼 때만 해도 아테나이의 앞바다를 장악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로 생각했지, 어느날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고 낯선 곳으로 쫓겨가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거나 노예로 팔아 돈이나 벌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코린토스와 가깝게 지낸다며 성벽을 허물고 코린토스 사람들을 쫓아내라며 포테이다이아를 핍박하여 스파르테가 전쟁을 결심하게 해 놓고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함대를 보내 포위하여 오래 굶긴 다음 옷보따리 하나씩만 들려 쫓아냈을 때에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지도 않았거니와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노예로 팔지 않고 그냥 내쫓았다고 오히려 포위했던 장군들을 욕하고 재판에 회부해 죄 주었습니다. 포테이다이아의 경우 때문이었는지 뮈틸레네의 동맹 탈퇴를 응징하기 위해 도시를 점령했을 때는 뮈틸레네 사람들을 쫓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클레온의 주도로 민회가 뮈틸레네의 성인 남자는 모두 죽여 후환을 없애고,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팔아 돈도 벌면서 뮈틸레네를 절멸시킨다는 참혹한 결정을 내려 놓고도, 밤사이 그 참혹한 결정이 마음에 걸려 번복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그렇지만 그때 그 순간으로 끝났을 뿐 클레온이 잡혀 온 포로들을 몰래 죽이든 몰래 노예로 팔든 아무 상관 않을 정도로 참혹해지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한번 시작한 다른 헬라스 도시들에 대한 참혹한 만행은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죽어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지킨다 해 놓고서는 마치 브라시다스의 칼키디케 원정 성공이 토로네나 멘데나 스키오네 같은 도시들이 스파르테에 협조한 때문이었고, 그래서 암피폴리스가 함락당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분풀이도 할 겸 돈도 벌 겸 그 도시들을 결딴낸 다음 아녀자들을 노예로 파는 일로 번졌고, 아테나이는 그곳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기는커녕 약탈과 노예 값으로 돈 버는 재미에 부끄러운 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런 만행의 최악이 바로 멜로스 섬의 도륙이었습니다. 멜로스는 비록 라코니케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는 섬이기는 해도 전쟁 내내 한번도 아테나이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고 향후에도 평화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가 요구하는 대로 아테나이의 동맹이 되어 아테나이에 예속된 채 조공을 바치는 것은 거절한다고 멜로스 섬 전체를 도륙하고 약탈한 다음 그 섬에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을 때는, 전략도 경종도 아닌 오로지 약탈과 도륙이 목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9.5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테나이가 저질렀던 다른 헬라스 도시들에 대한 만행을 떠올리며 여러분은 같은 일이 여러분에게 닥칠까 두려워만 했지 그 참혹한 만행을 당한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반성하며 부끄러워하지 못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크로티아스의 공포 정치가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크로티아스에게 대어들지도 그로부터 도망치지도 못했습니다. 두려움에 맥 놓은 여러분의 영혼과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만 모인 도시의 영혼에서 신들이 떠나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과 도시는 도망간 노예는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 여러분과 도시의 영혼을 떠난 신들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과 도시의 영혼에 신들이 떠나자 신들이 떠난 그 영혼에 지혜가 메말라 버렸습니다. 아무도 지혜를 구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무도 시인을 철학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디오뉘소스 축제에서 소포클레스가 에우리피데스가 그리고 아가톤이 세상을 떠나 버린 뒤 디오뉘소스 축제에서 비극을 볼 수 없었고, 아티케에서 포도주를 생산하지 못하게 된 뒤 레나이아 축제에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축하하는 흥철망청한 희극을 볼 수 없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를 아낙사고라스를 쫓아낸 후 아테나이를 찾는 철학자가 없었으며, 축제에서 연극을 올리지 못하게 되자 시인들이 시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전쟁과 정쟁이 아테나이를 시인도 철학자도 없는 도시로, 영혼이 없는 도시로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9.53. 그런데 아폴론과 디오뉘소스와 무우사들이 떠나 버린 이 황량한 도시에 사람들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주느라 분주하게 거리를 헤메고 다니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였지요. 오직 소크라테스만이 사람들에게 도망친 노예는 찾으려 그토록 애쓰고 다니면서 어째서 잃어버린 영혼은 찾아 나서지는 않느냐며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영혼을 찾아 나서라고, 그리고 그 영혼을 살찌우고 가꾸라며 성가시게 굴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누구에게도 도시의 장래를 보여 주지 않았고, 도시를 위해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에게 따로 도시의 장래에 대해, 그런 도시를 위해 그들이 해야 할 바를 비의를 전하듯 따로 조용히 말해 준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크세노폰이 퀴로스 밑에 있다는 친구의 편지 하나만 믿고 훌쩍 사르데이스로 떠나 버린 일만 보아도 알 만했지요. 소크라테스는 도시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그렇게 많은 관심을 쏟는 소크라테스에게 도시의 영혼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에게 태양이 불타는 돌덩어리196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귀신 씨나락 까는 소리를 나불거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테나이에서 태어났고, 아테나이에서 자랐고, 아테나이에서 돈도 벌고 아이도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아갔으며, 도시 일로는 중무장보병으로 세 번 참전하고, 순번으로 돌아온 평의회의 의장직을 한 번 맡아 보았을 뿐, 허구한 날 욕을 얻어 먹어 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안다는데 진짜 알고 있는 건지 확인하러 다니느라 그가 사는 도시가 무슨 어려움을 겪는지, 그를 키워 준 도시의 영혼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지 걱정하여 참견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해야 할 바에 대해서는 입은 옷에 밥 먹는 방법까지 일부러 찾아가 시시콜콜 따졌지만, 도시가 탐욕에 빠져 포악해지고 차마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만행을 헬라스의 도시들에게 저지를 때에도,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의 눈에 자기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무식꾼으로 보였을 디오도토스197나 아데이만토스198는 민회에 나가 만행을 규탄하고 저지시키는 때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느라 바빴는지 도시의 영혼이 어떻게 일그러져 가든 오관불언하여 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희극적 대치물이 된 연극 "구름"이 무대에 올랐을 때는 상연되는 동안 내내 객석에서 일어서서 연극 속의 소크라테스가 객석에 서 있는 자신과 얼마나 다른가를 관객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일인시위까지 벌이면서, 도시의 영혼이 탐욕과 오만으로 타락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민회에 나가 지금은 도시의 영혼을 여러분의 영혼처럼 가꾸어야 할 때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여러분의 영혼을 가꾸는것도 중요하지만 마찬가지로 도시의 영혼을 가꾸는 것도 중요하니 지금은 여러분의 영혼을 가꾸듯 도시의 영혼을 가꾸어야 할 때라며 왜 도시의 함대를 잃는 것에는 신경 쓰면서 도시의 영혼을 잃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느냐며 시위하지 않았습니다.199 시위는커녕 크레오폰이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물에 빠진 선원들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며 장군들을 한 묶음으로 재판에 회부했을 때에는 평생 딱 한 번 도시의 일을 맡은 평의회 의장으로서 자기에게 넘어 온 클레오폰의 불법적인 안건의 통과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었지만 클레오폰 일파가 위원들을 죽음의 협박으로 찬성하도록 만드는 것을 보고도 일괄로 재판에 회부하는 것이 불법이라며 발을 빼고 물러 났을 뿐200, 그 불법 행위를 막기 위해, 다시 말해 도시의 영혼이 부당한 법 집행으로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불법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자신의 영혼만은 지킬 수 있어 만족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하던 소크라테스도 크리티아스가 같은 아테나이 시민을 죽이기 시작하자 참을 수 없었던지 '소 치는 사람이 소를 줄이고 있다'며 뒷구석에서 궁시렁거리며 옳으니 그르니 하는 '소크라테스식 불화'를 나타내기도 해 보았지만, 크리티아스에 불려가서는 '그런 말 계속했다간 그 바람에 소가 더 줄어드는 수가 있다'는 크리티아스의 한 마디 말로 다시 '소크라테스식 침묵'이라는 방관으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티아스에게는 아니라도 카르미데스에게는 정치를 해 보라고 직접 권유했었다는 이야기를 여러분도 들어 잘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소크리테스는 크리티아스에게는 아니라도 카르미데스에게는 자신이 해 보라고 했던 정치는 소를 줄이는 정치가 아니라 소를 늘이는 정치였다며 소를 줄이는 정치를 하고 있는 카르미데스201에게 직접 호통을 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뒷구석에서 궁시렁거리기나 하다가 크리티아스에게 야단이나 맞고, 그런 소크라테스를 조롱이라도 하듯 크리티아스가 살라미스의 레온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던지자 이번에는 그 명령을 거부하느라 '소크라테스식 불복종'을 선보여야 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지요.202 한 평생 스스로 가꾸고 살찌운 훌륭하디 훌륭한 영혼을 가진 철학자 소크라테스만의 평화도 아테나이의 영혼이 탐욕과 오만에 오염되어 타락해 가자 '소크라테스식 불화'로, '소크라테스식 침묵'으로, 그리고 '소크라테스식 불복'으로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9.54. 알로페케 출신 석공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가 어느 날 문득 돌 쪼는 일을 그만두고 지혜를 찾는 일을 시작한 이후로, 친구 카이레폰으로부터 델포이의 퓌티아가 아테나이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소크라테스라고 했단 말을 전해 듣고, 그럴 리가 싶어 직접 델포이로 가서 신전 입구에서부터 아폴론이 '너 자신을 알라'며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를 보고 돌아와, 안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아는지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알고 싶어 캐묻고 다닌 이후로, 철학 입문자 소크라테스에게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 것이 '소크라테스식 불화'였지요. 그리고 이 '소크라테스식 불화'는 간혹 여러분을 성가시게 할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언제나 여러분을 빙그레 웃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캐묻는 '소크라테스식 불화'를 우스개 삼아 그 누구와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는 '소크라테스식 평화'이기도 했지요. 물론 소크라테스가 가까이하고 또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사람들끼리는 애초부터 그것은 불화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식 평화'203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소크라테스가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 알 만한 사람들에게 캐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알 만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캐묻는다는 사실이 소문이 나자, 그전에 소크라테스의 캐물음을 당해 웃고 넘겼던 사람들에게 우스개로 받아들여졌던 '소크라테스식 불화'가 그후에 소크라테스의 캐물음을 당해 불쾌감을 참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여졌던 '소크라테스식 불화'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렇게 적대적인 불화로 끝이 나는 경우는 주로 지식으로 먹고 사는 시인이나 철학자나 소피스테스, 기술로 먹고 사는 장인이나 의사와 같은 전문가, 입으로 먹고 사는 변론가나 정치가, 등 도시를 이끄는 사람들과의 만남 뒤였는데, 그 만남 뒤에 남는 '소크라테스식 불화'는 이들로부터 소크라테스를 점점 소외시켜 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에서 '소크라테스식 불화'를 피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청소년들과 어울리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소크라테스는 집안 일을 돕지 않아도 되는 부유한 집의 한가한 청소년들을 찾아 다니며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몰라도 부끄러울 필요가 없는 그들과 소크라테스 사이에 불화가 있을 수 없었지요. 물론 대다수는 어른이 되기 전에 혹은 어른이 다 되어 소크라테스를 떠나 소크라테스와 척진 사람들이 이끄는 도시로 돌아갔고, 그들 가운데 어른이 되어서도 곁에 남아 소크라테스와 어울린 사람들은 한결같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지요. 소크라테스가 청소년들이나 철학 입문자들과 어울리며 이룬 '소크라테스식 평화'는, 그들 사이에서는 따로 무슨 논의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도시의 일에 대한 '소크라테스식 침묵'을 뜻했습니다. 도시의 일에 무심하다는 힐책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자기는 도시의 일을 할 사람을 키워 내보내는 것으로 도시 일을 한다고 큰 소리 쳤지만, 알키비아데스가 도시를 버리고 달아나 도시에 이루 말을 다 할 수 없는 해악을 끼치며 돌아다니자 '소크라테스식 침묵'은 더욱 깊어졌고, 젊은 한때 소크라테스와 어울렸던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가 도시를 황폐하게 하는 동안 강요당한 '소크라테스식 침묵'은 더 이상 '소크라테스식 평화'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식 불화'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침묵하는 불화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앙앙불락 아니겠습니까? 앙앙불락이 무엇입니까? 바로 불복이지요. 소크라테스가 아르기누사이 장군들에 대한 일괄 기소를 위법이라며 발을 뺀 것이나 살라미스의 레온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을 거부한 것은 지극히 소극적으로 도시의 법에 복종하고, 권력자의 불법에 불복한 것이어서 이 정도 에피소드를 가지고 '소크라테스식 불화'와 '소크라테스식 침묵'이 '소크라테스식 불복'으로 바뀌어 갔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요. 보다 근본적인 '소크라테스식 불복'의 이유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크리티아스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 스스로 인정했듯이 그들을 가르치어 정치에 내놓았다는 인식에 대해 소크라테스의 적극적인 자기 옹호, 바꾸어 말해 소크라테스는 그들과 어울리기는 했어도 가르치지는 않았다는 것과 알키비아데스나 크리티아스의 난행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책임질 일이지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명쾌한 반박이 맞부딪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불복'은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벌이고 자신들이 겪은 일들에 대해 자신들을 뒤돌아보고 자신들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끌어들여 스스로를 지우는 행위, 한 마디로 말해 그들 스스로를 알려고 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에 대한 불복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영혼에 대해 생각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과 불화가 '소크라테스식 불화'라면, 그것은 델포이의 아폴론이 퓌티아를 통해 신탁을 주기 전에 자신의 신탁을 구하러 온 사람들에게 미리 너 자신을 알라고 고함쳐 준 경구를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고 살찌우려 노력하지 않고 그저 신탁에나 믿고 의지하려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소크라테스식 불복'이 사람들에게 나타난 결과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시당초 '소크라테스식 불화'는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식 불복'이었던 게지요. 소크라테스에게 앎이란 자신을 안다는 것이었고, 자신을 안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고 살찌워 자신의 영혼을 훌륭하디 훌륭한 상태로 간직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철학하는 것이고, 철학이 지혜로 다가가는 길이고, 철학을 한다는 것이, 그래서 지혜를 찾아 가는 것이 바로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아폴론이 말한 대로 사람이 자신을 아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러기 위해 스스로의 영혼을 훌륭하디 훌륭한 상태로 보존한다면, 그러기 위해 철학을 한다면, 그래서 자신을 안다면, 그렇게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 도시를 이룬다면, 그 도시의 영혼 역시 훌륭하디 훌륭할 것이고, 그 도시는 아는 사람 즉 철학자가 다스리고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 도시는 '소크라테스식 평화'가 충만할 것이었습니다. 도시가 도시민이 모여 만든 공동체인 만큼 소크라테스에게 도시의 영혼이란 결국 도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의 결집이어서, 훌륭하디 훌륭한 도시의 영혼을 간직한 도시에 살려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마땅히 자신을 알고 자신의 영혼을 훌륭하디 훌륭한 상태로 지녀야 할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과연 그런지 사람들을 만나고 묻고 확인해 봤지만 좀처럼 훌륭하디 훌륭한 영혼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려웠고, 이 지칠 줄 모르는 영혼의 소유자는 묻고 묻고 또 묻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 행세 꽤나 하고 도시를 위해, 다시 말해 도시민을 위해 일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영혼을 지닌 것이 아니라 돈과 힘을 지녔다는 이유로 오만에 빠져 제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굴었고, 훌륭한 영혼을 지니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돈과 힘을 지니기 위해 탐욕으로 지새는 것이나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패를 나누어 전쟁과 정쟁의 터로 앞다투어 나갔고, 실망한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가꾸기 위해 그를 따르는 철학 입문자들과 함께 청소년들이 모이는 교외의 체력 단련장으로 나갔으며, 그들이 버려 둔 도시, 우리의 아테나이는 더 이상 아테나이 사람들끼리의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반목과 불화로 서로 싸우고 죽이다가 점점 황폐해져 나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황폐해진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결국 도시와 척지고 사는 도시의 최고 불화꾼 소크라테스가 도시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 불화를 일으키고, 도시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켜 도시에 대해 불화를 불러 일으킨다며 그의 죄를 물었고,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은 소크라테스가 조장하는 도시의 불화를 막아 도시의 평화를 지킨다며204 그를 사형에 처했습니다.
9.55.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 온 소크라테스 철학 입문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장사를 치르고 난 후 뿔뿔히 그들의 도시로 돌아가고, 플라톤이 그들 뒤를 따라 아테나이를 떠나 버리자, 아테나이는 소크라테스를 잊었고, 이제 철학자 하나 없는 아테나이에는 일용할 양식과 도시의 안전을 걱정하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엮는 평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30인 때의 잘못도 사면하고 그들이 물 돈도 대신 내며 이룩한 '트라쉬불로스식 평화'가 '소크라테스식 불화'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없으나, 철학자들이 떠난 아테나이에 모처럼의 평화를 이룬 트라쉬불로스는 코논과 함께 바다에서 그리고 아뉘토스는 아테나이에서 스파르테고 페르시아고 코린토스고 테바이고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심부름도 하고 용병이 되기도 하면서 도시에 양식을 대는 한편 도시의 안전을 위해 성벽을 다시 쌓고 함선을 다시 가질 돈을 모았습니다. 모처럼 도시는 아무 불화도 없이 모두들 스파르테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였고, 그렇게 열심히 모은 돈으로 성벽을 다시 쌓고 함대를 다시 가질 수 있게 된 덕분인지, 아니면 아테나이 최고의 불화꾼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 입문자들이 도시에서 모두 사라진 덕분인지, 아테나이가 다시 전쟁으로 나서기 전까지 '트라쉬불로스식 평화'는 계속되었습니다.
9.56. 소크라테스가 죽기 한 해 전부터 부글거리다 이듬해에 본격화된 스파르테와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이205 아테나이에게 스파르테의 눈을 피해 바다로 나가 돈을 벌 기회가 된 것은 테바이는 항복 직후부터 이미 스파르테의 패권 추구를 경계하여 트라쉬불로스의 반정 때부터 노골적인 지원을 해 온 터였는 데다가, 아테나이라면 철천지 원수로 여겼던, 그래서 아테나이를 허물어 양떼를 위한 풀밭으로 만들자고까지 고집했던 코린토스 역시 어느덧 스파르테의 패권을 견제하기 위해 아테나이에 우호적으로 나온 때문이었지요. 이들 세력들 사이에서 돈이나 벌던 아테나이가 결국 또 다시 전쟁에 휩싸이게 된 것은 아나톨리아에서의 패권을 두고 스파르테와 다투던 페르시아가 또 다시 헬라스의 도시들끼리 싸우도록 돈으로 조종하고 나섰는데, 이번에는 파르나바조스와 팃사페르나스가 공동으로 돈을 모아 테바이와 코린토스에게 뇌물을 주면서 스파르테와 싸우도록 부추겼고, 물론 아테나이는 그 누구도 페르시아의 뇌물을 받지 않았지만, 항복 후 테바이와 코린토스가 보여 준 후의에 대한 보답도 보답이려니와 그보다는 스파르테로부터의 예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테바이와 코린토스를 도와 코린토스를 주장主將으로 한 전쟁에 그들의 동맹 도시로서 참전하였습니다. 물론 전쟁은 그 옛날 펠로폰네소스 동맹 도시들 간의 패권 다툼이었지만, 아테나이는 필요할 때마다 스파르테를 견제해 주었고, 불의의 일격으로 트라쉬불로스가 원정 길에서 죽기 전까지 그 전쟁으로 도시의 살림이 점점 어려워 가고 있는 가운데서도 스파르테의 예속에서 벗어날 희망을 가지고 싸우고 있었는데, 트라쉬불로스가 아아톨리아 원정 길에 불의의 일격으로 죽어 버리자 갑자기 아테나이의 '트라쉬불로스식 평화'가 흔들리며 전의를 잃었고, 때 마침 스파르테의 안타르키다스가 주선한 평화 제안을 페르시아가 받아들이면서 근 십 년을 끌었던 전쟁이 끝났습니다. 항복으로 끝낸 먼젓번 헬라스 내전과는 달리 강화로 전쟁을 끝내면서 아테나이는 항복 조건이던 스파르테로부터의 예속은 끊었지만, 트라쉬불로스가 전사한 것이 말해 주듯 아테나이는 크고 작은 희생이 따른 전투들을 십 년이나 겪어야 했으므로 그 두 번째의 헬라스 내전 동안 도시는 또 다시 피폐해지고 말았고, 가난에 지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도시의 힘을 기르지 않은 집권자들 아뉘토스나 아귀르리오스에게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런 불만은 십수 년을 집권하며 전쟁을 주도해 온 트라쉬불로스와 아뉘토스 일파를 권력에서 내몰고 새로 정권을 잡으려는 권력에 눈이 먼 네오클레이데스를 앞세워 권력 투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도시에 다시 불화의 불길이 피어올랐습니다. 이렇게 불이 붙은 도시의 불화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트라쉬불로스가 죽었단 말을 듣고 아테나이로 돌아온 소크라테스 철학 입문자 안티스테네스 등이 십수 년 전에 있었던 소크라테스 처형이 잘못되었다며 아뉘토스에게 그 잘못의 책임을 물으려는 복권 투쟁이었습니다. 네오클레이데스로서는 굳이 자신이 정적을 내치기 위해 공금횡령이나 뇌물수수 같은 아뉘토스의 비행을 들추지 않고도, 그렇잖아도 철학자를 처형했다는 자격지심으로 개운치 않아 했던 아테나이 사람들 영혼의 흠집을 지워 주면서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다시 없이 좋은 기회를, 손 안 대고 코 풀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겠지요.
<다음 '10. 도시의 정의'에서 계속>
- 헤로도토스는 아테나이가 알 수 없는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던 그리스 선주민인 펠라스고이족이 살고 있던 아티케 부락들의 중심지 정도였는데, 이주민인 헬라스인들과 융합으로 언어도 헬라스어를 쓰는 이오네스족의 도시로 알려졌다고 소개하고(그의 책,'역사'제1권56-58), 투퀴디데스는 아티케가 척박한 지역이어서 그 덕분에 오히려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나 내부의 쇄락으로 도시를 떠나는 일이 없이 같은 사람이 오래 정착해 살 수 있었는데, 다른 지역의 잦은 부침으로 발생한 이주민이 비교적 안정된 아티케에 정착하므로써 성장한 도시가 아테나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그의 책,'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2(5),(6)),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연극 '"이온"'을 통해 선주민 펠라스고이족의 지배로부터 이주민의 지배로 넘어가는 과정(에렉테우스 왕의 딸 크레우사는 아폴론의 아들 이온을 낳았지만 아버지로의 질책이 겁나 이온을 버리고, 버려진 채 따로 성장한 이온은 아폴론과 아테나의 도움으로 크레우사와 그의 남편 크수토스의 양아들로 입적하여 새로운 이오네스족의 선조로서, 그간 아티케를 다스리던 펠라스고이족의 권력을 승계한다.)을 통한 아테나이의 근원 하나를 연극의 소재로 삼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온의 아테나이 왕위 계승을 아테나이에서의 첫 번째 정변으로 꼽으며 이때 아테나이가 처음 도시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그의 책,'아테나이 정치 제도사'41.2) 밝히고 있는 정도가 아테나이의 연원에 대한 자료의 전부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테세우스가 집권하고 도시의 이름을 '아테나이'라고 짓기 전까지 아티케의 여러 마을들의 중심 역활을 하고 있었을 '아테나이'의 전신 마을을 사람들이 무엇이라 불렀는지 알 수 없어, 아테나이를 '크라나오스의 도시여'라 부른('"아카르나이 사람들"'75행) 아리스토파네스의 경우나, '에렉테우스의 도시'라 부른('"휩폴리토스"'1095행) 에우리피데스의 경우와 같이 전설적인 옛날 왕들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예에 따라 그 이름을 '이온의 도시'라 불렀다. [본문으로]
- 테세우스 치세의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도 매우 한정적이다. 신화나 전설이 아닌 테세우스에 관한 기록은 플루타르코스의 '테세우스전'이 유일할 것인데, 그 기록에 따르면,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보다는 늦지만 그와 동시대 사람일 뿐만 아니라, 헤라클레스와 혈연 관계라고(구체적으로 말해 헤라클레스의 외할머니 리지디케와 테세우스의 외할아버지 핏테우스는 남매 간이어서, 헤라클레스의 어머니 알크메네와 테세우스의 어머니 아이트라는 내외종 간이 된다) 소개하고 있어,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가 동시대 사람임을 재확인할 수 있고,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리쿠르고스전'에서 스파르테의 리쿠르고스가 헤라클레스의 11대 후손이라고 하는 디에수키다스의 설을 인용하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리쿠르고스가 BC9세기(그의 활동기에 대해서는 가장 올려 잡은 것이 크세노폰의 BC11세기부터 가장 낮게는 BC7세기까지로 내려 잡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서는 플루타르코스 시대의 견해에 따랐다.) 사람이라고 할 때, 헤라클레스 시대, 즉 테세우스의 시대는 BC13세기로 가늠하게 된다. 한편 헤로도토스는 '역사'(제2권145)에서 헤라클레스가 900년 전에 태어났다고 했는데, 기록 당시 BC450/440 기준으로 보면 헤라클레스는 BC1350/40에 태어나 BC14세기 말부터 BC13세기 초에 걸쳐 그의 시대를 열었을 것이므로 테세우스의 시대를 BC13세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는 아킬레우스와 다투는 아가멤논이 그 자신이 테세우스와 사귀었다고 말하는 장면(제1권264행)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보아 테세우스의 치세를 트로이 전쟁 전후(BC13세기)로 잡아도 별 무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와의 복수전을 말리는 어머니 테티스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다'며 '헤라클레스도 죽었다'라는 말로 헤라클레스를 죽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일리아드'제18권118-9), 헤라클레스가 비록 동시대라 해도 테세우스보다는 적어도 30년 정도 나이가 많았던 것까지 알 수 있는데(그 까닭은 호메로스가 '오딧세이아'에서는 테세우스 역시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오딧세이아'제11권630-1행), 테세우스의 죽음을 말하는 이 오딧세우스의 귀향 여정 속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와, '일리아드'에서 헤라클레스도 죽었다고 말하는 아킬레우스와 복수를 말리는 테티스 에페소드 사이에는 30년 가량의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이 호메로스의 기록과 상호 보완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을 바탕으로, 테세우스의 치세를 BC13세기로 보기로 한다. 이렇게 테세우스의 치세를 BC13세기로 잡으면 테세우스가 집권하여 아테나이를 건설하고 경영한 지향점을 이해할 수 있는데, 고대 그리스와 지중해 주변의 BC13세기는 이 이후 삼세기에 걸친 소위 암흑기라고 부르는 붕괴의 시대에 접어드는 시기로, 천재지변으로 거주지와 생산 수단을 잃은 유맹流氓이 도시들을 전전하고 일부는 무장하여 비적이나 해적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도시들의 교역과 생산 활동이 위축되었고, 따라서 지배 세력의 수입이 줄고 지배 체계가 흔들리자, 임금을 받지 못하는 용병들의 이탈과 모반으로 기존의 지배 세력들이 와해되기 시작하던 시기여서, 아티케의 작은 부락들을 결집하여 도시 공동체를 만들어 도시의 방위와 생업 활동을 안정시키고, 나아가서 불안정한 도시들로부터 탈출하는 재산가나 생산 기술자들을 수용하여 도시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으면서, 아티케의 기존 세력들끼리의 불화는 물론 이주민들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새로운 사회구조와 정치체계로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도시 아테나이를 건설하게 된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필연이었다 할 수 있다.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이집트의 신왕조, 아시리아, 트로이, 크레테의 미노아, 크노소스에 이은 미케네인의 미노아, 그리고 뮈케네가 모두 이 시기에 붕괴했고, 이런 멸망의 시대를 맞기 전 지중해 세계를 황폐화시키던 지상의 비적들과 바다의 해적들을 상대로 벌인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영웅적 활동, 특히 테세우스가 보인 뮈케네의 펠로폰네소스와 아티케를 잇는 육로의 비적들과 해로의 해적들을 제압한 공로는 아티케와 주변 도시 사람들의 신망을 얻기에 충분했고, 결정적으로 직접 크레테로 항해하여 그곳 뮈케네 지배세력과의 교섭으로 조공 관계를 단절시키므로써 아티케의 자주와 독립을 확보한 것이, 헤라클레스의 경우와는 달리, 테세우스로 하여금 아티케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했고, 테세우스는 아티케를 기반으로 하는 아테나이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테세우스가 건설한 도시 아테나이가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도시라고 부르는 근거는, 다른 도시들이 재앙과 전쟁에 휩싸여 붕괴하고 있을 때 테세우스가 아테나이를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티케의 안정과 평화였으며(테세우스는 조공을 바치던 크레테의 뮈케네 세력으로부터 자주 독립도 전쟁이 아닌 교섭을 통해 이루었다.), 그 평화를 찾아 이주해 오는 사람들에게 기존의 주민들이 누리는 자유로운 거주와 생업을 보장하였으며, 자유롭고 이질적인 기존과 신규 주민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하고 그들 모두의 자유와 그들 간의 평화와 화합을 위해 평등이라는 정의를 구현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테세우스가 크레타와의 조공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을 때 아이게우스 왕이 죽어 곧바로 왕위를 승계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테세우스는 분열하여 전쟁도 마다않는 아티케의 여러 부락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도시국가를 만들자며, 왕정을 폐지하고 새로운 정체를 도입하는데, 이 새로운 정체는 도시민을 직분에 따라, 제사,정치,법령,풍속, 등에 관한 일을 맡는 귀족 계층, 농지를 소유하여 농사에 종사하는 농민 계층, 그리고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상공인 계층, 등 세 가지 계층으로 나누되, 서로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상호 보완하고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플루타르코스,'테세우스전') 그런데 플루타르코스는, '새로운 제도가 왕을 두지 않는 민주 정치'라며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을 설득한 테세우스의 설명과, '아테네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불렀다며 이 정체가 민주적이었다'고 한 호메로스의 언급과(플루타르코스는'테세우스전'에서 이 언급의 출처를 호메로스의 '함선 목록'이라고 밝혔는데, 소제목이 '아가멤논의 꿈-함선 목록'인 '일리아드' 제2권의 483행까지는 제우스가 보낸 거짓꿈을 꾸고 출진을 준비하는 아가멤논 이야기이고, 이어서 877행 끝까지는 참전한 도시들 이름과 그 도시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 그리고 지휘관들 이름과 함선수를 각 10행 내외로 기록한 함선 목록인데, 이 목록 가운데 아테나이 부분인 546-556행 가운데는 플루타르코스가 인용한 호메로스의 언급은 없다.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솔론전'에서도 솔론이 살라미스 영유권 문제가 중재에 부쳐졌을 때, 이 '함선 목록'에서 '아이아스는 살라미스에서 열두 척의 함선을 이끌고 아테네 군이 싸우고 있는 전쟁터로 달려 왔다'라는 구절을 증거물로 아테나이의 살라미스 영유권을 주장했다고 인용하고 있는데, 이 구절과 유사한 557-8 두 행, '아이아스는 살라미스에서 열두 척의 함선을 이끌고 왔고, 아테나이 사람들의 대열이 있는 곳에 섰다.'라는 구절은 있다.), '대중에게 호의를 보이고 민주 정치를 펴기 위해 왕위를 내던진 사람은 테세우스가 처음이었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를 인용하면서, 이 정체에 대해 '민주적' 또는 '민주 정치'라는 성격을 부여하고 있지만 정작 이 정체가 어떤 정체였는지는 밝히지 못한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주창한 열린 국가(테세우스의 정치적 선언은 '모든 민족이여! 이 땅에 오라!'였다)의 이상을 실현하는 정체라면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정체일 것이어서, 플라톤식 정체 구분으로는 과두 정체나 민주 정체보다는 최선자 정체에 가깝고(플라톤,'국가'제8권544c-564d),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체 구분에 따르면 민주 정체나 과두 정체라기보다는 귀족 정체(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제7장1293b1)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플라톤식 최선자 정체의 실천 무망성을 감안하여, '민주적 가치를 지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식 귀족 정치'가 합당한 이름이 아닐까 하여, 테세우스가 아테나이를 건설하며 도입한 정체를 '민주적 귀족정'으로 불렀다. [본문으로]
-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치 이야기의 도입을 위해 딱 한번 '귀족 정치'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제1권338d), 이때까지 그는 아직 그의 최선자 정체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끝내지 못했고(플라톤이 '국가'제1권을 쓴 시기와 제8권을 쓴 시기는 짧아도 10년은 더 된다.) 단지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써 귀족(혈통에 의한 신분으로서의 귀족이라기보다는 자질적 신분으로서의 신사라는 표현에 더 가까운 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플라톤은 나중 이런 신사적 귀족을 최선의 수호자, 즉 최선자로 구체화하였다.) 정체를 언급하였을 뿐, 현실 정치의 체제로는 민주, 과두, 참주 정체만으로 나누고, 현실 정치 체제에서는 예가 없어 그 폐해를 지적할 수 없는 최선자 정체를 옹호하가 위해 나머지 현실 정치 체제의 폐해들에 대해 제법 신랄하게 지적하였는데, 아테나이의 '테세우스식 민주적 귀족정' 역시 귀족의 자질이 무너지면, 과두정의 한 형태로 되고 말아 결국 플라톤이 지적한 과두정의 폐해('국가'제8권553a-555a)를 벗어날 수 없었다. [본문으로]
- 솔론은 한때 왕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에 놓여 있었고, 아테나이 사람들 역시 그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단호히 거절했다.(플루타르코스,'솔론전','솔론과 포플리콜라 비교') 테세우스도 그랬다. 테세우스나 솔론은 아테나이의 정치가이자 지도자로서 자신의 권력이 최대한이 되도록 하는 데보다, 도시의 권력이 도시에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최대한으로 구현되도록 하는 데에, 다시 말해 도시의 권력이 권력자의 만족과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도시의 번영과 도시민의 행복을 위해 행사되도록 하는 데 관심을 집중시켰다. [본문으로]
- 솔론은 자신의 개혁법들을 '아테나이를 "하나로 만드는 힘과 정의로써" 만들었다'고 말했지만(플루타르코스,'솔론전'), 그의 이런 태도는 '아테나이가 하나로 뭉치게 하는 권력과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테나이를 번성케하고 시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확신의 발로였다. 그는 그가 개혁법들을 만든 정신이 그 법의 준수를 통해 도시에 충만하기를 바랐다. 그는 그것을 구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모든 시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라 믿고, 최하위 노동자 계급인 테테스에게도 민회에서, 그리고 재판정에서 투표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했는데, 이들은 공무까지 담당하고 싶어 아무도 자신을 공무는 담당할 수 없는 테테스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었고(아리스토텔레스,'아테네 정치 제도사'VII.4), 그런 시민들에게 솔론은 심지어 내란과 같이 도시가 극단적으로 분열될 경우, 시민 모두는 각자의 정치적 소신에 따라 무기를 들고 반드시 어느 한편에 가담하도록 했으며, 수수방관하는 시민은 불명예를 주거나 도시의 공무를 담당할 수 없게 할 정도로,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도시를 하나로 뭉치는 힘과 정의'라고 믿었다.(같은책,VIII.5) 솔론은 이런 의미에서 도시의 구성원 모두가 도시의 주체로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민주'라는 개념을 제일 먼저 아테나이에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도시를 하나로 뭉치는 정통성 있는 정치권력이 도시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으로]
-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진 빚 때문에 경작한 수확의 6분의 1을 바쳤고, 자기 몸을 저당잡힌 사람들은(솔론은 신체 저당을 금지시켰다.) 노예가 되거나 다른 도시로 팔려가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도망가거나 자식을 파는 일까지 벌어졌다.'(플루타르코스,'솔론전') 솔론은 이 일에 대한 소감을 시로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팔려간 많은 사람들을 신이 세운/조국 아테나이로 데려왔다. 어떤 이는 부당하게/어떤 이는 당연하게, 빚에 쪼들려 어쩔 수 없이/고향을 떠나 아티케 말을 쓰지 않는 곳으로 가서,/여기저기 방황한 사람들,/또한 이 땅에서도 비루한 노역에 처하여/주인의 눈치를 보며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자유인으로 만들었다...,아리스토텔레스,'아테네 정치제도사'VII.4) [본문으로]
- '노동은 전혀 수치가 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수치이다'(헤시오도스,'노동과 나날'1.4), 그리고 '도시의 땅이 농민들의 생활마져 부유하게 해 주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솔론은 실정에 맞추어 기술을 존중하는 한편,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법을 고쳤다.(플루타르코스,'솔론전'), 그리고 '손바닥만 한 금과 은, 말과 노새 몇 마리, 약간의 밀밭, 등에 걸칠 옷들과 신발 한 켤레, 젊은 아내와 자식, 건강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부유한 사람이다.'(솔론의 시) 이상 세 가지 언급들을 조합하여 솔론의 경제관을 표현해 보았다. 솔론은 귀족이었지만 아버지의 너그러움 때문에 부자는 아니어서, 성인이 되자 직접 무역업에 뛰어 들어 앞에서 든 그의 시 내용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자립하였다. [본문으로]
- 솔론은 이집트의 아마시스 왕 치세에 시행한 수입신고 제도를(전체 이집트 국민은 매년 관할 행정 관청에 자신의 일년 수입을 신고 해야 하는데, 신고를 누락하거나 신고 수입이 정당한 것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사형에 처했다.) 아테나이에 도입하여 시행했는데(헤로도토스,'역사'제2권177), 오늘날의 연말 세금 정산 제도와 같은 것이지만, 목숨을 걸어야 했을 만큼 훨씬 엄격했던 모양이다. 다음 시는 불의한 재산에 대한 그의 예언이다. '재물을 갖는 것은 좋지만/부정한 방법으로 얻기는 싫다./그렇게 쌓은 재산에는/언제든 반드시 재앙이 따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솔론이 남긴 시편들 가운데는(여기서는 플루타르코스의 '솔론전'(18편68행)과 아리스텔레스의 '아테나이 정치제도사'(8편62행)에 실린 시편들을 대상으로 했다.) 그의 개혁이 지향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자신이 개혁에 나서는 심중을 '나는 알지, 내 가슴에도 슬픔이 깃들이네/가장 오래된 땅 이오니아가 죽어가는 것을 보노라면.'이라 나타내고, 도시의 평화가 깨진 것이 기득권자들의 탐욕에서 나온 것이라 보고, '가슴 속에 있는 극단의 마음을 억제하시오/당신들은 많은 재물을 신물나게 향유하였소/중용을 중히 여기시오. 우리들도 극단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당신들에게도 그런 것은 도움이 안 될 것이오.'라며 한걸음 물러설 것을 권하며, 개혁의 주안점이 양측의 불만을 사더라도 도시의 평화를 구하는 일임을 밝히면서, '나는 평민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힘을 주고/귀족들의 권세도 그대로 보호하였으니/서로를 폭력으로부터 지켜주었고/어느 쪽에도 부당한 승리를 허락하지 않았다.'라고 술회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솔론은 그의 개혁으로 잠시 아테나이를 내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지 않도록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당시 사람들의 탐욕과 불만으로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체제 전복을 불러왔다. 그러나 아테나이에서의 정변들 가운데 첫 번째로 성공한 페이시스트라소스는 솔론이 얼마 후 죽는 바람에 그가 펼치려던 민주적인 정치를 보여주지도 못햇고, 정권 역시 잠시 쥐었다가 쫓겨나 솔론에게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없었고, 마지막 세 번째 권토중래에 성공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안정된 권력을 바탕으로 철저히 솔론의 법과 평화를 염두에 둔 민주적인 정치를 펼쳐 결국 죽은 솔론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하겠으나(플루타르코스는 '솔론전'에서 솔론이 죽기 전에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인정하고 자문도 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런 일이 둘 사이에 있기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첫 번째 집권 당시 솔론이 너무 일찍 죽엇고, 세 번째 무언가 보여 줄 수 있었을 때는 솔론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못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자기의 노선을 추종하여 선정을 배풀고 모처럼 도시를 번성시키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후에도 몇 번 아테나이에 정치 체제 변화가 있었지만, 민주적인 정체를 지향한 경우는 모두 도시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도시에 새로운 분열과 혼란을 가져와 자멸하였다. 이런 까닭에 테세우스에 이어 솔론이 세운 정치 지향점은 계속 아테나이 정치 지향점의 전범이 되었고, 그가 제정했던 '솔론의 법'은 아테나이 사람들의 '전통의 법', '선조의 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법 제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의미에서 '솔론식 평화'는 '민주적 정치 체제의 안정'을 가리키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잇을 것이다. [본문으로]
- 살라미스 영유권 주장자 처벌법 논의가 BC600년경이므로 솔론(BC630?-560?)의 이때 나이는 대략 서른 정도였을 것이지만, 성인이 되면서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시를 배우고 학식을 쌓으며 장사로 돈도 번 솔론은 훌륭한 귀족으로서 장년 티를 내면서, 공무를 담당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심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살라미스 출신의 솔론으로서는 아테나이의 살라미스 포기가 자칫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허물 수도 있어, 결코 방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솔론의 엘레이기아 '살라미스'는 전체 100행이었다는데, 현재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6행의 단편을(.../이럴 바엔 나는 차라리 아테네 사람이 아니라 조국을 바꿔서,/포레간드로스 섬이나 시키노스 섬의 사람이고 싶다./당장에라도 소문이 퍼질 테니까./'보아라, 이놈도 살라미스를 배신한 아티케의 사내다'라고./.../이제 살라미스로 가서 사랑하는 섬을 위해 싸우자./그리하여 이 괴로운 치욕을 물리치지 않으려는가!/...,'그리스 철학자 열전'제1권2.(47)), 그리고 플루타르코스가 2행의 단편을(.../아름다운 살라미스에서 소식을 가져왔소./내 노래로 그곳 소식을 전하리라./...,'솔론전') 전하고 있다. [본문으로]
- 호메로스,'일리아드'제2권557-8. [본문으로]
- 쌍방이 서로 평화를 지키는 것이 싸우는 것보다 더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면, 불리한 어느 한 쪽이 때가 되면 반드시 평화를 깬다는 사실은 그 예들을 찾아 근현대사까지 내려오지 않더라도, 고대 그리스 역사에만 국한 시켜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솔론이 중재 재판으로 살라미스를 영유하게 된지 몇 해 되지 않아, 권토중래를 노리는 퀼론 세력의 메가클레스 세력에 대한 테러 활동으로 도시가 극심한 혼란에 빠지자 말자, 제일 먼저 메가라의 침공을 받아 살라미스는 말할 것도 없이 니시이나까지 내주어야 했고, 불편부당하게 처리했다는 솔론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솔론 생전에, 그의 개혁이 실시된지 다섯 해만에, 솔론의 개혁으로 서로가 손해를 보고 있다고 믿었던 당파들이 싸워 아테나이를 무정부 상태에 빠트렸으며, 그리고 그가 죽기 직전 직접 부딪쳐 반대해야 했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속임수 쿠데타의 경우 역시, 정치 세력을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평화적인 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벌였던 일이었으며, 멀리는 소위 제1차 펠레폰네소스 전쟁 후 체결한 30년 평화조약이(BC445) 15년 뒤, 제1차 전쟁보다 오히려 더 크고 오랜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불러왔고, 제2차의 전쟁 후 10년이 지나 체결한 니키아스의 평화는 겉으로 소강 상태를 보이는 듯했으나 아테나이의 경우 실제로는 조약 체결 바로 직후부터 알키비아데스가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동맹들을 앞세워 새로운 전쟁을 꾸미고 있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126(7). [본문으로]
- 퀼론은 아테나이 정치사에 세 가지 새로운 기록을 세웠는데, 첫째가 처음으로 무력 체제 전복 시도, 다시 말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고, 둘째가 그 무력으로 외세를, 즉 그의 장인인 메가라의 참주 테아게네스의 군대에 의존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실패 후 도시의 정치 투쟁을 집안 간의 복수 투쟁과 연계시켰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 최초의 성문법인 '드라콘 법'은 퀼론의 모반과 그 진압 과정에서의 무리를 지켜본 시민들의 동요가 진정되지 않고 계속 사회의 안정을 흔들며 번져 나가자, 이를 누르기 위해 드라콘을 입법자로 임명하여 BC621 제정하였는데, 입법자의 이름을 딴 '드라콘 법'은 억압을 통해 사회의 안정을 도모할 목적으로 만든 법인데다가, 성문이어서 처벌 대상과 형벌의 내용이 구체적이고 과격하여, '폭력 치안'이라 이름 붙여 보았다.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은 '드라콘 법'을 '잉크로 쓴 법'이 아니라 '피로 쓴 법'이라 불렀음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 그들에게 주어진 형벌은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추방이었는데, 죽은 자의 경우가 바로 무덤까지(퀼론의 세력들로 죽은 자라면 대표적으로 퀼론과 그의 형제 무덤이었을 것이다.) 파헤쳐 국경 바깥에 내다 버렸다.'(플루타르코스,'솔론전') 그런데 이런 형태의 사자 추방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퀼론의 세력이 아닌, 알크마이온 가문에 대한 추방 내력을 기록하고 있는데('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126(12)),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전에 전쟁 불사를 주장하는 페리클레스를 아테나이에서 제거하기 위해 스파르테가 퀼론의 일당을 복수의 여신 사당에서 죽인 메가클레스 세력과 외가로 혈연 관계인 페리클레스를 저주 받은 자의 자손이니 추방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추방의 연원을 밝힌 것이다. 내용인 즉, 퀼론의 체제 전복 기도를 분쇄할 당시 복수의 여신 사당에 피신한 퀼론 세력을 사당에서 죽인 일 때문에, 복수의 여신들로부터 저주를 바는다며 민심이 흉흉해지자, 아테나이 사람들은 메가클레스 일당이 저주 받은 자들이며,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도 알크마이온 가문문에 책임이 있다고 하여, 그들을 자식들도 포함해(이 메가클레스는 아테나이에서 민주정을 세운 클레이스테네스의 아버지이자, 해안당을 이끌었던 메가클레스의 할아버지이다.) 추방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페이시스트라토스 부자들의 참주정을 쫓아내고 나서, 과두정파의 요청을 받고 이사고라스의 집권을 돕기 위해 소수의 병력과 함께 아테나이에 잠입해 있던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가 알크마이온 가문 사람들이면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추방시켰는데(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에서, 이때 클레이스테네스는 은밀히 도피하였고, 700가구는 추방당했다고 적고 있다.) 그때 죽은 자들도 퀼론 때의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추방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의 죽은 자 추방을 보면, 그 당시 헬라스에서는 어떤 사안으로 추방형을 받으면 관계되는 사자의 시신도 함께 추방하던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종의 그리스식 부관참시인 셈이다. [본문으로]
- 여기서의 에피메니데스는 논리학에서 자기 언급 명제의 모순에 대한 예, 즉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로 유명한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의 바로 그 에피메니데스이다. [본문으로]
- 솔론이 왕위는 사양했지만 비상 대권을 쥐고 개혁에 착수한 것이 BC594년이니 그의 나이 서른일곱, 아무리 많아도 마흔은 아직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 '폭군의 권세를 휘두르지 않았고/내 이름을 더럽히지도 않았으니/나는 후회하지 않노라./이것이 가장 깨끗한 명예이므로.', '.../단 하루라도 아테나이의 왕으로 지내는 것은/영광스러운 일이겠지만/다음 날은 구렁에 빠져들어/가문까지 망치게 될 것이오.' [본문으로]
- 퀼론 때문에 알려지기 시작한 가문끼리의 정권 쟁탈 역사는 평민 출신의 상인 클레온의 집권과 귀족 출신 알키비아데스의 몰락으로 끝이 날 때까지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도 건재했을 만큼 아테나이 정치에서 뿌리 깊은 것이었다. [본문으로]
-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는 솔론의 정치 개혁에 대해 주목한 언급이 따로 없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의 정치 개혁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는데, [본문으로]
- 솔론은 아르콘들에게 자신의 개혁 법령들을 지켜내지 못할 경우, 그들 몸무게에 해당하는 금을 내놓도록 서약시켰다. [본문으로]
- '내가 민중을 규합한 목적 가운데서/성사시키지 못하고 그만둔 것이 무엇이 있나?/세월의 재판대에서 위대한 올륌피아 신 가운데/고귀한 어머니, 검은 대지의 여신이/이를 함께 증명할지니, 나는 그 땅에/박혀 있는 많은 저당표식 돌을 없애버렸다./전에는 예속되었던 땅이 이제는 자유가 되었다./팔려간 많은 사람들을 신이 세운/조국 아테나이로 데려왔다. 어떤 이는 부당하게/ 어떤 이는 당연하게, 빚에 쪼들려 어쩔 수 없이/고향을 떠나 아티케 언어를 쓰지 않는 곳으로 가서,/여기 저기 방황한 사람들,/또한 이땅에서도 비루한 노역에 처하여/주인의 눈치를 보며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자유인으로 만들었다. 이 같은 일을/힘과 정의와 함께 하여/약속한 대로 이루었다./비루한 사람이나 덕 있는 사람이거나 똑같이/개개인의 경우에 맞추어서/입법하였다. 내가 아닌 다른 심보가/고약하고 탐욕스런 사람이 했더라면/민중을 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일/양 편 가운데 한편만을 위했더라면/다시 다른 편이 반대편을 비난하면서/도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을 것이다./나는 많은 개들 가운데 늑대같이/사방에서 싸움을 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아테네 정치제도사'XII.1.,아리스토텔레스가 솔론이 자신의 '무거운 짐 줄이기seisachtheia'의 결과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인용한 솔론의 시.) [본문으로]
- 솔론은 개혁을 이룬 뒤 바로 아테나이를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을 것이다. 솔론이 떠난 아테나이는 그런대로 평화를 이루며 솔론의 개혁을 따랐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 다섯 해째에(BC589) 아르콘을 뽑지 못할 정도로 혼란이 시작되었고, 솔론의 10년 외유가 다 지나가도록 혼란은 그치지 않았다. 언제 솔론이 아테나이에 돌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그런 혼란기에 솔론의 역활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솔론이 10년 이상 아테나이를 떠나 있었거나, 돌아와 있었어도 건강 때문에 현실 정치에 간여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플루타르코스는 노년의 솔론이 아틀란티스에 대해 저술을 남기고 싶어 했으나, 방대한 작업을 노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플라톤이 상속 받은 기분으로 아틀란티스를 쓰기 시작했지만 그도 끝내지 못했다고 '솔론전' 말미에서 전하고 있다.), 이런 혼란이 당파 싸움으로까지 번져 내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의 극치를 보이다가, 솔론 나이 일흔하나 서른네 해째에는(BC560) 믿었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속임수로 체제를 전복하고 잠시 정권을 잡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솔론이 죽었다. [본문으로]
- 퀼론의 저주로 알려진 복수의 여신 사당 훼손에 책임을 지고 쫓겨난 메가클레스 일가 이외에, 아테나이에 남아 있던 알크마이온 일파에 대한 퀼론 일파의 피의 복수전이 메가라와의 사전 조율로 발생했는지, 아니면 메가라의 사주를 받고 일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메가라는 아테나이의 혼란을 놓치지 않고 아티케를 침공해 유린하고 살라미스와 니시아이를 빼았는 데 성공한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솔론전)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에 대한 피의보복을 감행한 퀼론 집안 사람들에 대한 재판은 그들에게 유죄를 판결하고, 퀼론 집안의 산사람들이나 죽은 사람들 모두를을 추방하였다고 한다. 한편 투퀴디데스는('펠로폰네소스 전쟁사',I.126)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가 알크마이온 집안이 저주를 받았다며, 클레스테네스와 그 집안 700 가구를 죽은자들과 함께 추방하였다. [본문으로]
- 솔론이 퀼론의 모반 때 쫓겨났던 메가클레스의 손자 메가클레스를 다시 아테나이로 불러들인 것은 퀼론 집안의 추방으로 구;족들 간의 무너진 세력 균형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본문으로]
- 퀼론을 복수의 여신들 사당에서 죽여 신성모독으로 쫒겨난 알크마이온가 메가클레스의 손자로, 해안 가까이의 농지를 소유했지만 농업보다는 주로 상공업이나 무역업 쪽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규합한 해안당海岸黨paraliloi을 이끌었다. [본문으로]
- 아티케의 주요 농지들 대부분을 소유한 귀족 지주들을 규합한 평지당平地黨pediakoi을 이끌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아테네 정치제도사'XIII.2.솔론의 개혁 후 15년이 지난 BC579의 일로, 내란이 일어나 당시 아르콘 다마시아스를 내쫓고, 아르콘 직제와 선출 방법을 바꿔 이들 열 명이 일 년간 아테나이를 통치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 참주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면서,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산골의 농부들과 목축업자들 주축으로, 빚에서 풀려났으나 도시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빈민들, 그리고 출생이 아테나이의 자유 시민이 되기에 미심쩍은 사람들을(이들에 대해서는 나중 참주정이 타도된 후 시민 명부를 다시 만들어 참정권을 박탈했다.) 규합한 산지당山地黨diakrioi을 이끌었다. [본문으로]
- 같은 책,XIII.4-5.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 정파의 이름에 대해 주도 세력들의 농지가 있는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라 했는데, 앞의 주에서 설명했듯이, 이 세 당파는 해안당, 평지당, 그리고 산지당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 도시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는 정치 모델로 세운 '솔론식 평화'에 대비되는 또 다른 형태로 '페이시스트라토스식 평화'를 상정하였다. [본문으로]
- 솔론의 눈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민중들을 위하고 민주정을 주장하지만, 참주가 될 야망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런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으로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 정치제도사'가 주가 될 것이고,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페이시스트라토스에 대한 언급은 없고, 스파르테가 아테나이 내정에 간여하게 된 연유를 설명하는 것이어서, 주로 그의 아들들의 암살과 축출에 관한 기록들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그리스철학자 열전'(제1권2,'솔론'편),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의 '솔론전'에 언급된 삽화들이 단편적으로 헤로도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완해 주는 정도이다. 그런데 헤로도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비록 참주였지만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어, 솔론의 눈으로 기록하지 못했지만, 솔론을 기록한 라에르티오스와 플루타르코스는 솔론의 눈처럼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대해 냉담한데, 그래서 그런지 플루타르코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전기를 쓰지 않았고, 다만 솔론의 전기를 통해 그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줄 뿐인데, 솔론과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 어머니들이 사촌 간이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어울렸다는 것, 아테나이가 살라미스를 포기하자 솔론이 미친 척하고 아고라에서 살라미스로 되찾자고 시로써 선동할 때,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솔론의 말이 맞다며 관중들을 설득했으며, 또 솔론과 함께 배를 타고 살라미스에도 갔다는 것, 솔론이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혼란에 빠진 아테나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고 다닐 때,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미 정치에 입문해 산지당의 지도자가 되어, 그 좋은 말솜씨로 여러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온순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착실하고 조심성 있는 사람, 평등을 사랑하는 사람, 혼란 조장에 맞서는 용감한 사람으로서 신뢰를 얻고 있었는데, 다른 정치 지도자들보다 특히 솔론의 의견에 잘 따랐지만, 솔론은 그의 평판이 그의 야망에서 나온 것임을 간파하고, 그에게 그런 장점을 살려 좋은 생각을 갖도록, 다시 말해 독재의 야망만 버리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고 그 야망을 버리도록 충고했었다는 것, 그리고 결국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솔론의 예측대로 무력으로 집권하여 참주가 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솔론의 눈은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대한 솔론의 평가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중선동가demagogos라지만('정치학'제10장1310b31)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세 차례에 걸친 그의 집권 과정에 그가 보인 언행으로 보아, '민중선동가'라기보다는 '민중기만가'로 보인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제1권59-64에서 그의 정치 입문부터 죽을 때까지의 민중 기만술을 자세히 전하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을 '아테네 정치제도사'XIV.1-XV.4.에서, 그리고 플루타르코스는 '솔론전'에서 유사한 내용으로 전하며 헤로도토스의 기록의 신빙성을 높혀 주고 있는 한편, 라에르티오스는 솔론이 에피메니데스에게 보낸 편지로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보는 솔론의 눈을, 그리고 솔론의 귀국을 종용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편지로 참주의 자기 변명을, 그리고 귀국을 거부하며 참주에게 보낸 솔론의 편지로 참주에 대한 솔론의 심경을 보여 주며,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음 내용은 이상 네 사람이 소개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면모를 종합해 본 것인데, 이 가운데 특히 그의 민중 기만술을 주목해서 보라. 페리시스트라토스는 처음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참주가 될 야망을 감추고 민주정을 내세우며 민중들을 산지당으로 규합했으며(BC565경,여기서 나오는 연대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 정치제도사'에 따라 추정한 것이다), 첫 번째 집권 때는 먼저 자기의 몸과 노새에게 상처를 입히고 수레를 몰고 아고라로 가서 시골로 가려는데 정적들이 죽이려 해 간신히 도망쳤다고 속이고는 호위대(라에르티오스는 400명, 플루타르코스는 50명을 요구했다고 전한다)를 붙여 달라고 사정하여 호위대를 얻은 뒤, 그 호위대에게 창이 아니라 몽둥이를 들게 하여 시민의 위화감을 줄이고, 그들에 대해 시민들의 무심해졌을 때 그들을 동원해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참주가 되었는데(BC560), 다섯 해 만에(BC556경) 메가클레스와 뤼쿠르고스의 연합 세력에게 축출당했으며, 그 뒤 뤼쿠르고스와의 정쟁에 지친 메가클레스가 망명 중인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자기 딸과의 결혼을 전제로 참주를 제안하며 협력할 것인지 물어 오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두 번째의 집권을 위해 아테나이로 귀환할 때, 파이아니아 구역의 퓌라라는 여자를 아테나 여신으로 분장시켜 마치 여신이 참주의 귀환을 인도하는 것처럼 꾸며 참주가 되었지만(BC546경), 자기에게는 이미 장성한 자식들이 있는 데다가 퀼론의 저주가 내려졌다는 알크마이온의 핏줄이 섞인 자식을 낳기가 꺼림칙해, 메가클레스의 딸과 결혼은 했지만 결혼생활 내내 비정상적인 교접을 해 왔던 것이 드러나는 바람에 모욕감으로 분노한 메가클레스의 응징을 피해 두 번째 참주가 된지 여섯 해만에 도주해야만 했으며(BC539), 수 년을 라이켈로스와 판가이오스 등지에서 지내다 에리트리아로 가서 아들 힙피아스의 진언대로 무력으로 정권을 되찾기로 결정하고, 옛날 그에게 신세진 도시들, 특히 테바이로부터의 거금, 아르고스의 용병, 낙소스의 뤽다미스가 데리고 온 군사와 돈, 그리고 에리트리아의 기병 등을 동원해 마라톤을 거쳐 아티케로 침공하였는데, 내전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 군사를 모아 마라톤으로 왔을 때까지 무대응이던 아테나이가 그제서야 진압을 위해 나섰지만, 지리멸렬한 아테나이 진압군을 팔레네에서 격파하고, 도주하는 아테나이 군대가 다시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들 힙피아스를 보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명령이라며 겁먹지 말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해산시킨 뒤, 아테나이로 들어가 아고라의 테세우스의 사당 앞에서 자신의 군대를 사열하여 위세를 과시하면서, 민회를 열게 한 뒤, 그 민회에서의 연설을 잘 들리지 않게 처음부터 작은 목소리로 시작해 사람들을 아크로폴리스 정문으로 올라오도록 유도하고, 아크로폴리스로 가기 위해 사람들이 두고 간 무기를 거두어 시민들을 무장 해제한 다음, 자기가 모든 공무를 맡아 할 테니 시민들은 두려워 말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연설을 마친 것으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세 번째 참주가 되었다.(BC534경)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병으로 죽기까지(BC527), 33년에 걸쳐(BC560-527) 세 번 참주가 되었는데, 모두 19년을 통치하였다. 그의 사후 힙피아스가 참주가 되어 아테나이는 반세기 동안 참주의 독재 아래 있었고, 아테나이는 결국 리쿠르고스에 이어 과두정파를 이끈 이사고라스와 메가클레스의 아들 클레이스테네스가 스파르테의 힘을 빌려서야 겨우 힙피아스를 축출할 수 있었다.(BC511) [본문으로]
- 솔론의 생몰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 글에서는 솔론이 퀼론의 정변 기도(BC632) 이후에 태어나, 그가 개혁을 마친 서른두 해 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첫 번째 집권에 성공하고 나서(BC560), 얼마 뒤 나이 일흔이 넘어 죽은 것으로 본다. 플루타르코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솔론을 존경하여 솔론의 법을 지키며 의논해 와서 솔론이 조언도 하고 칭찬도 했다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었다는 헤라클리데스 콘티쿠스와 파나아스의 기록을 전하고 있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솔론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집권 저지에 실패하자 망명 길에 올랐으며, 참주의 귀국 종용도 뿌리치고 80세의 일기로 퀴프로스에서 죽었고,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살라미스에 산골했다고 적고 있는데, 둘 다 신빙성이 없어 이 글에서는 참고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알크마이온 일파처럼 미리 도망친 정적들 이외에 팔레네에서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아테나이가 보낸 진압군의 아들들을 인질로 잡았고, 무력 정변에 협조한 보답으로 낙소스를 정벌해 뤽다미스로 하여금 낙소스를 통치케 한 뒤, 그 인질들을 낙소스로 보내 버렸다.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역사'제1권59,'...기존 관직들을 폐지하거나 법을 바꾸지 않고 기존 제도에 따라 도시를 훌륭하고 탁월하게 다스렸다.', 아리스토텔레스,'아테네 정치제도사'XIV.3.,'...페이시스트라토스는 권력을 잡은 뒤 참주라기보다는 합법적으로 공익을 추구하였다....', 플루타르코스,'솔론전','...페이시스트라토스가 솔론의 법을 거의 그대로 시행했기 때문에...', 등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변을 막지 않고 관망하는 아테나이 시민들의 태도에 실망한 솔론이 그들에게 한 말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리스 철학자 열전'제1권2(52)에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여우처럼 조심성이 많지만, 한데 뭉치면(뭉쳐 놓고 보면) 여러분에게는 분별이 전혀 없게 된다(없다)....'고 전하는데, 플루타르코스 역시 '솔론전'에서 '...그대들 각자는 여우처럼 영리하지만, 서로 모이면 모래처럼 뭉치지도 못하는구려...'라고 전한다. 그렇지만 아테나이 시민은 솔론의 예지는 없었지만 그들 특유의 영악함으로 이왕 벌어진 정변이라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메가클레스나 리쿠르고스와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 테스피스의 비극을 처음 상연한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처음 축제가 열린 BC560과 그가 추방되었던 BC556 사이였을 것이다.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 대해서는 주149, 테스피스에 대해서는 주153 참조.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솔론전'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마차를 탄 아테나 여신의 인도를 받아 아테나이에 입성하는 이 연출된 장면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면서('역사',제1권60, 파니아니아 구역에 살던 키 172cm 정도의 잘 생긴 퓌아라는 여자에게 완전무장에 연기 수업까지 시킨 뒤 수레에 태워 입성하면서, 먼저 전령들을 보내 아테나 여신이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사랑하셔 몸소 자신의 성채인 아테나이로 데려오고 계신다며 모두 나와 환영하라고 외치게 했더니, 사람들은 정말 여신인 줄 알고 경배하며 페이시스트라토스를 환영했다는 기록인데, 이 장면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헤로도토스의 이 기록과 코틸로스 출신의 피에였다는 다른 이들의 전언까지 인용하며 상세히 전하고 있다('아테네 정치제도사'XIV.4)), 페이시스트라토스와 메가클레스가 다른 민족들에 비해 더 현명하고 덜 어리석다는 헬라스계 민족들 가운데 가장 지혜롭다는 아테나이 사람들을 상대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계략을 꾸며 장난을 친 것이라며 비난한다. [본문으로]
- BC566경 아테나이는 도시의 수호신인 여신 아테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제정하고, 심기일전한 도시민들의 결의로 메가라에 빼앗겼던 살라미스와 니사이아의 탈환에 나서, 메가라와의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페이시스트라토스로서는 아테나 여신에 대한 제사의식을 통해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거둔 그의 전공과 참주로서의 자기 존재를 부각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메가클레스가 그의 딸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비정상적인 부부관계에 대해 안 것이 결혼 여섯 해 뒤라고 헤로도토스는 전했지만('역사'제1권61), 결혼 여섯 해가 지나도록 생산이 없는 이유를 몰랐을 리가 없고, 오히려 참주가 마음을 바꾸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 소문의 진원지가 참주라고 단정한 메가클레스의 보복이 두려워 도주한 것으로 본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가 메가클레스의 딸과 함께 살지 않으려고 도주한 것이라고 전하는데, 그렇다면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가 아니라 메가클레스에 의해 거의 감금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아테네 정치제도사'XV.1), [본문으로]
- 판아테나panathenaia 축제는 8월 중순에 열렸다.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장남으로 두 번째의 아테나이 참주가 된 힙피아스는 이때의 경험을 살려, BC490 다레이오스가 아테나이를 치러 나섰을 때(이때 힙피아스는 망명해 있던 시게이온에서 수사까지 가서 다레이오스의 헬라스 침공을 수행한다.) 에레트리아로부터 마라톤으로 진군하는 길잡이 역활을 맡았다. [본문으로]
- BC539경의 일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밝힌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세 번째 집권 연도(BC539/8)는 아리스토텔레스의('아테네 정치제도사')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인데, 참고로전체적인 연대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집권(BC560-556,4-5년),'솔론이 입법한 지(BC594/2) 32년 뒤, 코메아스 아르콘 때'(XIV.2), 첫 번째 추방(BC556/5),'권력을 잡은 지 6년째,헤게시아스 아르콘 때'(XIV.4), 두 번째 집권(BC550/49-543/2,5-6년)(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첫 번째 귀환'이라 불렀다.),'그(첫 번째 권력을 잡은) 후 12년이 되던 해'(XIV.4), 두 번째 추방(BC543/2),'귀환 후 7년째 되는 해'(XV.1), 세 번째 집권(BC539/8-528/7,10-11년,'(귀환 후)11년째 되던 해'(XV.2),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사망(BC528/7),'필로네오스 아르콘 때, 처음 참주가 들어선 지 33년 후,권좌에 19년, 나머지는 추방기간'(XVII.1).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메가클레스의 딸까지 포함하여 세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부인이 아르고스 출신의 티모사나아르게이아로, 이들 사이에 두 아들, 이오폰과 테탈로스라는 별명의 헤게시스트라토스를 두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헤세시스트라토스는 아르곤에서 1,000명의 용병을 모집하여, 아버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팔레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였다. [본문으로]
- 아크로폴리스에 들어서면 바로 있었던 테세우스의 사당이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아테네 정치제도사'XV.4. [본문으로]
- 주578의 작은 목소리 연설 기만책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 주580 참조.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살인 혐의로 고발한 일이 있었는데, 정작 그가 아레오파고스 재판정에 출두하자 오히려 고발자가 겁을 먹고 도주해 버렸다.(같은 책,XVI.8)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세 번째 집권 이후, 더이상 솔론의 법을 따르지 않고(같은 책,XXII.1,'...그리고 솔론법은 참주가 사용하지 않아 사라졌기 때문에 클레이스테네스가 대중을 고려하여 새로운 법들을 만들었다...'), 그의 법을 만들어 시행했다. [본문으로]
- 같은 책,XVI.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구절들을 통해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보는 그의 시각을 드러내는데, 쉬라쿠스의 참주 디온을 최선자 정치의 모델로 만들어 보려던 플라톤의 노력에 대해 '이 사람을 보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본문으로]
- 대표적인 예가 농자금 대여로, 이는 도시의 무직 노동자를 농촌으로 분산 배치하는 효과와, 경작지와 농산물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적당한 수준으로 살면서 사적인 일에 몰두하여 공적인 것에 관심을 가질 마음이나 여가가 없도록 하는(같은 책,XVI.2-4) 일석삼조의 민생책이었다. [본문으로]
- 이전까지 아테나이는 시민들에게 직접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도시 간에 거래되는 상품에 대한 간접세만 거두어 도시 살림에 충당하고 있었는데(이것마저도 얼마 되지 않아, 주로 부지들의 기부나 무급료 공직 담임으로 도시를 살림을 꾸렸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처음 토지의 생산물에 대해 십일조十一租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일을 담당하는 관리(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들과는 별도로 순회 재판관을 두어 재판 업무를 위해 생업을 등한히 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를 마을(데모스)마다 선발해 세금에 대한 저항과 분쟁을 조정케 하는 한편, 이 제도의 정착을 위해 자기가 직접 마을들을 순시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그가 히메토스 지역에 갔을 때 그곳 한 농부가 돌무더기 산을 개간하고 있는 것을 보고(상공업과 무역업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아테나이의 해운업을 필요로 했을 것이고, 조선을 위해 벌목을 했을 것인데, 히메토스 산이 있는 지역이 대표적인 벌목지로, 벌목 후의 황무지를 농부들이 개간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생산하는지 물었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한 농부가 '고통과 노고를 생산한다'면서, '이런 고통과 노고에서 참주가 십일조를 거두어 간다'고 대답하자, 이 농부의 솔직함과 근면에 흡족해진 그가 히메토스 지역에 대해 모든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같은 책,XVI.6, 그런데 이 일화에서 면세의 은전이 그 농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히메토스 지역이었던 것에 주목하면, 사실 이 면세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반정군을 이끌고 마라톤에서 아테나이로 들어오며 히메토스 지역의 팔레네에서 벌였던 진압군과의 전투에서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받았던 지원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화를 뒤집어 보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개간지에 대한 면세를 법제화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그의 말 한마디로 한 지역의 면세를 하나의 은전으로 결정할 수 있었을 만큼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최근의 아고라, 아크로폴리스 발굴 과정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의 공사 흔적들이 줄줄이 발견되고 있다. [본문으로]
- 이 제우스 신전은 완공되지 못했다. [본문으로]
- 신들에 대한 경건심에 덧붙여, 공사장의 노역으로 벌어 먹기 쉬워진 빈민들의 칭송이 그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과는 달리 테스피스의 공연에 끌려드는 민중의 반응에 주목하여, 테스피스가 공연을 발전시켜 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참주가 되던 첫 해 처음 열었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가 자리를 잡아 가자, 축제에서 테스피스의 비극을 공연하게 하고 자비로 민중들에게 보여 주었는데(보통은 작가의 비용으로 공연하고 관람료를 받는 흥행 사업이었는데, 민중들의 형편으로 관람료를 내고 연극을 보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 이후 흥행이 잘 되어 비극을 공연할 수 있는 작가, 배우, 코로스, 연출자, 등이 늘어났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세 번째 집권했을 때는 그들끼리 경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BC534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서 처음 열린 비극 경연은 테스피스가 우승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고, 그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비극도 '"펜테우스pentheus"' 하나 뿐인데, 그나마도 이것이 디오뉘소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정도이고, 이것이 그의 첫 우승 작품이었는지 알 수 없다. 심사위원은 아르콘이 지명했고 심사는 주로 관객들의 반응을 보았으며, 상금은 부자들이 낸 '레이투르가이leiturgai,부자들의 사회 기여'로 지불했는데, 큰 금액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 솔론은 아티케가 생산하는 곡물을 흑해의 곡물로 대체하고, 대신 올리브나 포도를 재배토록 권장했는데,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집권 이전부터 수확이 시작되면서, 가공 운반 판매 등 연관 산업이 발전하여 왔는데,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적극적인 지원과 독려로 아테나이가 코린토스나 밀레토스에 버금가는 무역도시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은 해는 BC527이나, 당시 나이가 알려지지 않아 생년을 알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과는 나이 차이가 많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솔론의 애인이었다거나, 그가 살라미스를 두고 벌어진 메가라와의 전쟁에서(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전쟁을 솔론이 촉발시킨 BC600 때의 전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지휘를 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VII.2) 그렇지만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 BC565경에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니사이아 항구를 함락하는(이 니사이아는 BC594경 퀼론 일파의 테러로 아테나이가 혼란에 빠졌을 때 메가라가 아티케까지 침공해 살라미스와 함께 빼앗았다.) 전공을 세워 아테나이 시민의 신망이 두터웠다는 사실은(헤로도토스,'역사'제1권59),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인용하면서('아테네 정치제도사'XIV.1),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민중들을 규합하여 산지당을 만드는 명성과 인기의 바탕이었음을 밝히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나이를 추정해 보면, BC565경에 있었던 메가라와의 전쟁에서의 전공으로 이름을 날려 정당을 규합할 수 있었다는 말은, 알키비아데스의 예에서 보듯, 이때 그의 나이 서른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그는 BC600-595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다. 다른 한편 플루타르코스가 BC600경에 있었던 솔론의 살라미스에 관한 행적에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소개하는 것을 기준으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생년을 추정해 보면, 이때 솔론의 나이가 서른이 조금 넘었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고라까지 가서 관중들에게 솔론을 지지하라고 말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며, 솔론을 따라 배를 타고 살라미스로 가서 같이 정탐을 수행할 수 있었다면, 그의 나이를 아무리 낮게 보아도 성년이 되기 전 열다섯은 되었을 것으로 보여,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생년을 BC615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럴 경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메가라와의 전쟁에 참여한 뒤 산지당을 만들어 정치에 입문한 것이 그의 나이 쉰 정도였을 것인데, 솔론이 참주의 야먕을 가졌다고 평가한 정치지망생의 입문이 너무 늦어 보이는 데다가, 처음 참주가 된 것이 쉰다섯이 되고, 예순에 쫓겨나 일흔 가까운 때 메가클레스의 딸과 혼인을 전제로(나이 일흔 가까이에 이것은 많이 어색하다) 참주로 복귀한 것이며, 일흔 다섯이 넘어 또 쫓겨나 나이 여든이 되기 전에 세 번째로 진정한 참주가 되었고 나이 여든여덟에 죽었다는 추정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솔론과 나이 차가 맞지 않는다고 한 까닭을 알 수 있어, 이 글에서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생년을 일반적으로 추정하고 있는 BC6세기초로(BC600-595) 보기로 한다. 따라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주었을 때 나이는 솔론처럼 일흔을 넘겨서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 고대 헬라스에서는 격세로(차세와 이름을 같이 쓰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름을 같이 쓰는 경우가 많아, 조손이 모두 유명할 경우 혼동하기 쉬운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 정권과 각별하지 않아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던 큅셀로스의 아들 밀티아데스는, 트라케의 케르소네소 반도에 사는 돌롱코이족의 원군 요청에 지원자들을 데리고 원정하여, 케르소네소스를 개척하고 그곳 참주가 되었으나, 후계가 없어 이부동복 동생 키몬의 아들 스테사고리스에게 지위와 재산을 상속했고, 스테사고라스가 집무 중 괴한에게 횡사하자, 힙피아스가 스테사고라스의 아들 키몬을 제치고, 급히 아테나이에 있는 스테사고라스의 친동생 밀티아데스를 보내 지위와 재산을 상속 받게 하였는데, [본문으로]
- 솔론은 흑해 연안으로부터 수입하는 곡물의 가격과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헬레스폰토스 진출이 필수라고 보고, 헬레스폰토스 초입에 있는 시게이온 곶을 아테나이의 기지로 삼았다. 그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그의 아들 헤게시스트라토스를 시게이온의 참주로 통치케 하였는데, 인근 아킬레이온을 기지로 삼은 뮈틸레네가 시게이온의 소유권을 주장하여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다수의 아테나이 시민을 무장시켜 전쟁을 벌이는 것을 피하고자(자신의 반정을 떠올렸을 것이다) 당시 도시의 명망을 얻고 있던 신흥 부자이며 올륌피아드 마차 경주 우승자인 밀티아데스로 하여금 민간 차원의 원정을 권유하였고(헤로도토스는 케르소네소스에 살던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세 번째 집권을 위해 동원했던 자신의 용병 중에는 이들 스퀴타이 출신 궁수들과 텟살리아 출신 군인들이 있었는데, 집권후 스퀴타이 궁수들은 도시의 순찰대로, 텟살리아 군인들은 참주의 호위대로 고용되었는데, 스퀴타이 출신 노예들 가운데 궁수들을 뽑은 순찰대는 참주정 이후로도 아테나이에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희극들에서 이들의 존재를, 바꾸어 말해 시민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고용한 일종의 노예 신분의 궁수가 위임된 순찰 권한으로 오히려 시민들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모순을, 희극적 대치물로 삼아, 시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권력자들이 그 시민들을 억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비꼬고 있다.(예를 들면, '"뤼시스트라테386행 다음 지문"'에서 노인 코로스와 노파 코로스 사이의 다툼에 감찰관이 등장하는데, 이때 감찰관은 스퀴타이 궁수 순찰대원 2명을 대동하고 있고, '같은 극1151'에서는 뤼시스트라테가 스파르테에서 온 사절단들에게 스파르테 사람들이 아테나이로 와서 힙피아스의 친지들과 그의 호위대 텟살리아 용병들을 죽인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 결국 참주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정을 세운 것은 클레이스테네스이고, 이들 둘 아리스토케이톤과 하르모디오스는 힙피아스를 격분시켰을 뿐이었다는 평가대로('역사'제6권123), BC514에 일어난 이 사건을 단 한 줄로 기술한 헤로도토스와는 달리('역사'제5권55/'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로 참주 힙피아스의 아우인 힙파르코스는 위험을 경고하는 생생한 꿈을 꾸었음에도(따로 이 꿈의 내용은 한 단락으로 전한다.(56)) 게퓌라이오이 가家의 혈통(이 가문의 유래와 그들이 아테나이로 이주하게 된 내력도 따로 한 단락으로 설명한다.(57))을 이어받은 아리스토케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손에 살해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사건 기록들, 이를테면 아테나이 정치사에서 더 이상 중요할 수 없는 스파르테의 개입에 의한 참주 힙피아스 축출이라든가('아테네 정치제도사'XIX.3-6), 아테나이의 정권 다툼에 개입한 스파르테라든가(같은 책,XX.1-3), 아테나이에서의 민주정 수립(같은 책,XX.4-5) 같은 사건들의 기록보다,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고 길게 기록하고 있는데(같은 책,XVIII.1-6), 이는 굳이 솔론의 법(참주에 대한 거부를 시민의 의무로 규정했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사건에 대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시각(아테나이 사람들은 아리스토케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흉상을 아고라의 한복판에 놓고 기렸으며, 그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을 기억하려 했다.)을 그대로 반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에 대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이런 시각은 아리스토파네스에게서도 보여지는데, 그는 그의 희극 곳곳에서(예를 들어, '"기사들786"'에서 권력자가 된 파플라고니아인을 공격하는 소세지장수더러 데모스는 혹시 '하르모디오스'의 후손은 아니냐고 묻는다.) 이들의 거사나, 이름이나, 노래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힙피아스에 대해서는 그의 희극에서 몇 차례 희화화해서 말하거나 희극적 대치인물로 바꾸어 놓았지만(예를 들어, '"기사들449"'에서 파플라고니아인이 참주 힙피아스의 아내 뮈르시네의 친위대 중 한 사람의 자손이라고 놀릴 때, 힙피아스의 아내 뮈르시내를 뷔르시네로 고쳐 부르며 함께 놀리고 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를 그렇게 하지는 않았는데, 이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테나이 사람들의 참주이긴 하나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조금 달리 본 시각을 아리스토파네스 역시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가 '힙피아스는 힙파르코스가 암살되자 아테나이인들에게 압제를 가했다'('역사'제5권62)고 간단히 표현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암살) 후 참주정은 아주 횡포해졌다. 형제를 위한 복수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추방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을 불신하고 경계하였다.'('아테네 정치제도사'XIX.1)고 말한 힙피아스의 마지막 4년간 통치를 '힙피아스식 평화'로 불렀다. [본문으로]
- 참주의 지배 기간이 길어질수록 참주와 가까운 관계일수록 부로 다가갈 더 많은 자유와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본문으로]
- 장사꾼들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시각은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데, 비단 클레온이나 휘페르볼로스나 클레오폰 등 장사꾼 출신 권력자들이 아니라도, 그는 수시로 계산에 밝은 장사꾼들을 조롱하고 있다.(예를 들어, '"기사들"'의 소시지 장수를 보라!) [본문으로]
- 파이오니아 구역의 파르네스 산록 마을 레이프쉬드리온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역사'제5권62. 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IX.3. 위의 두 기록은 이 사건이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이 일으켰다고 밝히고(클레이스테네스의 이름은 아직 거론되지 않고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에서 일부가 레이프쉬드리온에서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과 합류했다 한다. 한편 이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에 대해서는 두 기록 모두 침묵하고 있으나, BC513경의 일로 보이는데, BC514 힙파르코스 암살 사건 후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이 가장 심한 핍박을 받아 추방당하거나 혹은 망명했는데, 참주의 영향력이 드센센 인근 도시에서의 망명 생활이 온갖 난관으로 견디기 힘들어지자 결국 결집하여 반격을 시도하게 된 때가 이들이 아테나이를 떠난 지 한 해를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이 격파당하고 나서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델포이로 가서 아폴론 신전 공사를 맡아 돈도 벌고, 그 돈으로 신전 정면 대리석도 붙이고(전체 신전 신축 공사는 일년 반 이상 걸렸을 것이다), 퓌티아를 매수하여 스파르테를 움직이게 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아무리 늦게 잡아도 BC512년초였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은 레이프쉬드리온에서의 참패 이후 페이시스트라토스 집안에게 해로운 것이면 무슨 짓이든 했다.(헤로도토스,'역사'제5권62) [본문으로]
-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은 인보동맹隣保(봄에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을에는 안텔레(테르모퓔라이이 인근)의 데메테르 신전에서 함께 제물을 올리던 두 신전 인근의 12개 도시가 공동으로 두 신전을 보호하기로 하고 맺은 동맹,amphiktyonia)이 델포이에 새로운 신전을 짓기로 한 것을 알고, 공사를 수주하여 사암으로 된 외부 마감을 정면만 파로스 대리석으로 바꾸어 주어 신을 기쁘게 한 후(같은 책,제5권62), 따로 퓌티아를 매수하여 신탁을 부탁하였다(같은 책,제5권63). [본문으로]
- 페리시스트라토스의 세 번째 집권에 도움을 주고, 계속 참주의 호위대로 활동해 왔던 텟살리아는 키네아스가 일천의 기병으로 힙피아스를 지원했는데, 힙피아스는 기병의 활동을 위해 팔레론 평지의 나무를 전부 베어 버린 뒤 스파르테를 기병으로 유린했고, 앙키몰리오스는 전사했다.(같은 책,제5권63) [본문으로]
- BC511/510경의 일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고 17년만이었으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다스린 기간을 합하면 49년이 된다'고 했는데('아테네 정치 제도사'XIX.6), 이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처음 참주가 된 BC560을 기점으로 계산한 것으로 그가 쫓겨나 있었던 기간 13년여를 빼지 않았다. 추방 기간 13년을 빼면, 헤로도토스가 말한 페이시스트라토스 일가가 통치한 36년과('역사'제5권65) 일치한다. 추방당한 힙피아스는 헬레스폰토스의 시게이온으로 갔다. 거기서 권토중래를 꿈꾸고, 텟살리아의 일천 기병을 두 말 없이 그대로 집으로 돌려보낸 스파르테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찾아 나섰는데, 바로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1세였다. [본문으로]
- BC511의 일이다. 아테나이는 이 당시 헬라스 도시들 가운데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나, 스파르테에 비해 아직 약체에 불과했다. 참주가 반정을 두려워 해 군사력을 키우지도 않았고(호위대까지도 다른 도시의 용병으로 채웠다.), 다른 도시와의 전쟁도 기피했다. 스파르테 군대가 아테나이 해방군 역할로 만족하고 스파르테로 돌아가자, 돌아온 클레이스테네스는 참주의 압제와 레이프쉬드리온에서의 참패로 알크마이온 가문의 약화된 세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참주의 친구 이사고라스가 귀족들을 중심으로 아테나이를 이끌어가려 하자, 그 대안으로 민중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직시했고, 민중을 위한 일련의 정책들, 민주정의 내용르로 민중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는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가 아크로폴리스의 펠라스고이 성채를 포위했을 때 서로 친구가 되었다며, 클레오메네스가 이사고라스의 아내의 정부情夫가 되었다는 소문도 함께 전하고 있다.('역사'제5권70) [본문으로]
- 참주정이 무너지고 3년이 지난 BC508의 일로, 이때 이사고라스는 아르콘이었는데, 민중들이 모두 클레이스테네스에게로 쏠려 있는 상황에서, 정치 권력 기득권자들이 민중들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의도가 뻔한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제어할 현실적인 수단이 없자, 스파르테의 왕 클레오메네스에게 퀼론의 저주를 빙자한 내정간섭을 요청했다. [본문으로]
- 솔론의 정치 부분 개혁의 요체가 정치 담당 세력을 혈통이 아니라 경제 능력에 따라 넷으로 세분한 것이라면,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치 개혁의 요체는 지역(행정과 선거 단위로서의 지역)을 재편하면서 세분화한 것이었다.(자세한 지역 재편과 세분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아테네 정치제도사'XXI.2-6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 스파르테의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인 앙키몰리오스는 아테나이의 페이시스트라토스 집안과 친근한 사이였지만, 신에 대한 도리가 인간에 대한 도리에 우선한다고 생각했다.(헤로도토스,'역사'제5권63) [본문으로]
-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를 추방한 것은(BC508) 바로 스파르테와의 전쟁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 그 동맹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손을 잡아줄 우군도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여서, 어쩔 수 없이 말로만 듣던 뤼디아의 새 주인 페르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기로 했고, 다급한 마음에 사절들은 복속을 의미하는 물과 흙을 바치는 조건으로 보호동맹을맺고 돌아왔지만(BC507이었을 것이다. 아테나이의 사절들은 뤼디아의 수도 사르데이스로 가서 총독strap 휘스타스페스의 아들 아르타프레네스를 만나 보호 동맹을 맺었는데, 이때 상대는 스파르테의 침공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하는 사절들에게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물었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 무지하였다.같은 책,제5권73.), 스파르테와 벌어질 전쟁의 원인인 스파르테에의 복속 불가가 뜻밖에도 잘 알지도 못하는 이민족에게의 복속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자, 사절들은 엄중 문책을 당했고, 아테나이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포기하고 혼자 스파르테와 그 동맹도시들의 연합군과 싸워야 했으며, 물론 권토중래를 노리는 힙피아스의 침략 권유도 한몫을 했겠지만, 흙과 물을 바치는 문제는 나중 페르시아가 헬라스를 침략하는 빌미가 되었다. [본문으로]
- BC507 아테나이를 치기 위해 클레오메네스가 동맹국들로부터 군대를 모을 때 전쟁의 성격이나 목표를 알려주지 않았었는데, 엘레우시스까지 진격하는 동안, 그 전쟁이 클레오메네스 개인적인 복수, 즉 지난 해 아크로폴리스에서 포위당해 협상 끝에 추방되었던 수모에 대한 앙갚음과, 이사고라스를 아테나이의 참주로 앉히려는 한다는 사정을 파악한 코린토스가 먼저 회군하고, 동행했던 스파르테의 또 다른 왕 데라마토스가 다음으로 회군해 버리자 나머지 도시들의 군대도 집으로 돌아가고 만 일이 발생했다.(헤로도토스,'역사'제5권75) [본문으로]
- '...참주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전쟁에서 어떤 나라도 능가할 수 없었지만, 참주들에게서 벗어나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들로 거듭났기 때문이다.'(헤 5.78)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 집안의 카르모스의 아들 힙파르코스가 이들의 주도자였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힙파르코스를 목표로 도편추방제를 도입하였고, 힙파르코스가 도편추방제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본문으로]
- '도편추방제ostrakismos'는 BC508 민주정의 수립과 함께 준비되어 있었고, BC504 참주의 친족인 칼모스의 아들 힙파르코스(참주 힙피아스의 동생 힙파르코스가 아니다)를 도편추방한 것이 첫 시행이었다.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와 아리스토파네스 모두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 개혁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면서 민주정의 장점을 자유 시민의 자율적인 시민의식 확립으로 꼽았다. 그런데, 투퀴디데스는 이런 클레이스테네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는데, 이는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전에도 강력한 도시국가였지만, 일단 참주들로부터 해방되자 더욱 강대해지기 시작했다'(헤,역5.66) '아테나이는 그렇게 점점 강성해졌다...이것은 그들이 압제하에서는 주인을 위해 일하기에 일부러 게으름을 부린 반면 자윰민이 된 지금은 각자 자기를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헤5.78) 그렇지만 헤로도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치세에도 아테나이가 강성해져 갔다고 평가한 점을 감안하면, 그 당시의 아테나이에서 정치 체제의 차이가 도시의 성장을 좌우한 것 같지는 않다. [본문으로]
- 주598 [본문으로]
-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나이의 평화를 추구하는 방법은 참주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나 힙피아스는 자신의 판단으로 정적을 핍박하거나 추방하였지만, 클레이스테네스는 도편투표에 의한 추방이라는 도시민의 판단에 의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도편투표에 의한 추방이라는 장치가 집권자나 유력자의 의지대로 그의 정적을 도시로부터 격리시켰다는 투표의 결과를 본다면, 참주의 정적 제거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런 광점에서 정적 제거를 통해 유지되는 도시의 평화를 '클레이스테네스식 평화'로 이름 붙였다. [본문으로]
- '도편추방제도osrakismos'는 아테나이의 정치 실력자나 장군직 같은 요직에 있는 사람이 페이시스트라토스처럼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쥐는 것을 막으려는 취지의 제도로, 민회는 매년 새해에 민심의 우려나 의심이 가는 대상자의 유무를 파악하여 그해에 도편투표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를 물어, 투표를 실시하기로 의결이 되면, 날짜와 장소를 고시하고, 시민들은 사금파리나 이징가미에 정변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수집통에 던져 투표를 하는데, 그 결과 6000표(이 숫자는 민회의 개회 정족수와 같다.) 이상 이름이 적힌 사람을 10년을 기한으로 아테나이에서 추방하는 내용이다. 이때 추방되는 사람은 10년 동안 아테나이만 떠나 있어여 했는데, 가족이나 재산 등은 그대로 아테나이에 둘 수 있어 10년 후 다시 돌아와 그 전과 같은 시민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정변의 의도나 시도가 없어 추방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기 없는 정책을 시행하려 하거나, 싫어하는 정치가가 있으면 추방하는 제도로 변질되어 갔고, 결국은 민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 실력자의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민의 입장에서 극심한 정쟁으로 도시의 평화가 위태로워질까 염려스러울 때, 어느 일방을 10년 동안 격리시킴으로써 집권자가 정쟁에 시달리지 않고 도시를 이끌어 갈 수 있게 해 주는 장점도 있었다. [본문으로]
- 도편추방제도를 만든 클레이스테네스의 목적은 연속 세 번(BC488,7,6) 힙피아스의 옛 추종자들을 추방함으로써 이루어졌고, 그 다음부터는 참주와 무관하게 도편추방이 벌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와 무관하게 추방된 첫 번째(BC485) 사람은 아리프론의 아들 크산팁포스였다'(아 아 XXII.6)고 하는데, 그가 어떤 점에서 남과는 다르게 두드러졌는지 알 수 없다. 크산팁포스처럼 남과 두드러지게 달라서 도편 추방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리스테이데스나(아마도 두 번째였을 것인데, 크신팁포스 추방 이태 뒤였다.주49) 다몬도(페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의 교사이기도 했는데, 정치를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도편추방당한 사람은 다몬이 유일할 것이다.)주108,109)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 마라톤의 전사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을 다시 불러들인 페리클레스의 처사는 다분히 정치 역학에 의한 타협의 산물이었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대사면령으로 크산팁포스와 아리스테이데스를 소환한 것은 전적으로 페르시아의 대군을 대적할 인재의 부족 때문이었다. [본문으로]
- 클레이스테네스가 BC506/5경 도편추방제도를 만든 후, BC488 맨 처음 이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이때 도편추방된 사람은 참주정 당시의 기득권자들의 구심점이던 페이시스트라토스 집안 사람 힙파르코스(참주 힙피아스의 동생과는 동명이인)였고, 민중들이 궐기하여 투표를 요구하여 이루어졌다. 그후 계속해서 3년 동안 참주의 친구들을 추방하였다. 이렇게 도편추방제도를 실행하여 참주 힙피아스의 옛 추종자들을 추방한 데는, 망명 중에 끊임없이 참주정의 복고를 꾀하는 참주 힙피아스의 망동에 대한 분노는 말할 것도 없고, 아테나이 내부로부터의 부화뇌동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만일 실제로 히파르코스가 힙피아스와 연결되어 움직이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도편추방이 아니라 반역죄로 정식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을 것이다.) 아테나이 사람들이 이 제도를 만들고도 참주정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오래 묵혀 두었다가 8년이 지나서야 꺼내 든 것은, 힙피아스가 참주로 복귀하기 위해, 아테나이가 대외적인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아테나이를 전복시킬 요량으로,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이 자기를 끌어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던 것처럼,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를테면 클레오메네스로 하여금 스파르테가 클레이스테네스의 거짓 신탁을 응징하도록 부추기다가, 코린토스를 위시한 다른 스파르테 동맹국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이번에는 사르데이스의 페르시아 총독 아르타프레네스에게 아테나이를 모함하고, 아테나이를 자신과 다레이오스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테나이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사르데이스로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으나, 총독이 힙피아스의 역성을 들고 나서는 바람에 페르시아와 적대 관계가 되어 버렸고, 이런 분위기 속에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고 나선 밀레토스를 지원하여, 아테나이와 이오니아 도시들의 연합군이 사르데이스를 불태우고 돌아오는 일까지 발생하였고, 그 뒤 아테나이가 냉정을 찾아 이오니아와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밀레토스를 위시한 이오니아 도시들이 가중되는 페르시아의 압박에 대항하면서, 페르시아는 무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그 불길이 헬라스로 옮겨 붙을 것이 뻔히 보일 때, 페이시스트라토스 잡안 사람들이 페르시아와 꾸준히 접촉하며, 물과 흙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아테나이를 복속시킬 필요성을 강조했고, 드디어 다레이오스가 바다를 건너 헬라스를 침공하자, 힙피아스는 에우보이아에서 다레이오스를 영접하고 아테나이를 치기 위한 길잡이로서 마라톤으로 페르시아 군대를 인도하는 등, 참주로 복귀하기 위해 아테나이를 페르시아에 복속시키려는 조국에 대한 반역 행위도 서슴지 않는 것을 본 아테나이 사람들은, 마라톤에서 다레이오스를 쫓아내고 헬라스가 안정을 찾자마자, 도편추방으로 페이시스트라토스 집안에 대해 경고한 것이었고, 그것은 클레이스테네스가 이 제도를 만든 의도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도편추방제도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불신임 내지는 정쟁 종식의 수단으로, 종국에는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갔음에도, 이 제도에 대한 비판이나 불복 없이 이어져 왔었는데, 제도를 만들고 90년 뒤인 BC416 휘페르볼로스를 추방하는 투표를 끝으로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았던 것은, 이 마지막 도편추방(주262) 투표 결과에 대해 틀림없이 휘페르볼로스가 불복하여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고, 니키아스나 파이악스나 알키비아데스가 이의를 힘으로 기각시켰을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이런 다툼을 보며 아테나이 안에서 도편투표의 취지와 적용에 대한 심각한 논의가 있었을 것이고, 그 논의의 결과 아테나이 시민들은 더 이상 정치인들이 정적을 추방시키기 위해 이 제도를 오용하고, 불복으로 도시의 평화가 깨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 이 제도를 사장시키기로 결의한 것으로 여겨진다.(휘페르볼로스의 불복이나, 니키아스나 알키비아데스의 기각, 그리고 더 이상 도편투표를 실시하지 않을 것에 대한 결의, 등에 관한 어떤 역사적 기록도 없지만, 오랜 전통의 제도를 슬그머니 없었던 일로 돌리지는 않았을 것은 틀림없다.) [본문으로]
- 클레오메네스가 클레이스테네스의 신탁 기만을 이유로 아테나이를 힙피아스 참주체제로 되돌리기 위해 두 번째 동맹군 소집을 요구했을 때(BC507/6경이었을 것이다), 코린토스의 소클레아스는 자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헤5.92) 참주정의 폐단을 지적하며, 참주정이 좋다면 스파르테가 먼저 참주정을 실시하지 않고 왜 참주정 정변을 두려워하며 내부 인사들을 감시하는지 묻고, 아테나이에 참주정을 복고하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고, 이에 다른 도시들이 나서 스파르테가 헬라스 도시의 일에 개입하지 말 것을 간청하고 나서, 스파르테의 무력에 의한 아테나이 내정간섭 기도를 무산시켰다.(헤 5.91,93)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출생 내력을 전하는 가운데, 그의 질녀 아가리스테(시퀴온의 참주 클레이스테네스의 딸 아가리스테는 아테나이의 알크마니온 집안 메가클레스와 결혼하여 클레이스테네스와 힙포크라테스를 낳았고, 동생 힙포크라테스의 딸이 할머니의 이름을 물려 받았다.)가 아리프론의 아들 크신티포스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페리클레스라며(역5.69,6.131), 그가 밀티아데스를 탄핵하여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으며(역6.136), 살라미스에서의 패전 후 텟살리아에 머무르고 있는 마르도니오스를 견제하기 위한 헬라스 연합 함대의 아테나이 지휘관이었으며(역8.131), 헬라스 연합 함대의 뮈칼레 승전 당시에도 아테나이 지휘관으로 다른 도시들의 함대가 헬라스로 돌아갈 때, 헬레스폰토스에 남아 아뷔도스에서 케르소네소스로 건너가 세스토스를 포위 공격했고(역9.114), 세스토스의 페르시아 태수 아르타윅테스를 책형에 처하고 아테나이로 돌아갔다(역7.33,9.120)고 소개하고 있고,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크산팁포스가 민중들을 이끌며 명망 있는 사람(귀족)들을 대변한 밀티아데스와 맞서 크산팁포스가 민중들을 이끌었다고 했으며(그XXVIII.2),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전'에서 페리클레스의 아버지로 크산팁포스를 소개하며 아테나이의 으뜸가는 명문으로 뮈칼레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의 어머니 아가리스테 역시 아테나이의 명문 출신으로 클레이스테네스의 손녀라고 헤로도토스와는 달리 소개한다.), 이상의 소개 내용으로는 그의 남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글에서 '그냥 남다른 크산팁포스'라 쓴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표현한 연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인데, 다른 연유가 없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남다른 크산팁포스는 크산팁포스의 생각이나 행동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외양과 음성이 남달리 페이시스트라토스와 닮았었다는 표현이었을 것이다.(주639)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루타르코스, 모두 한결같이 전통에 따라 누구의 아들 누구라고 하거나, 어느 데모스 출신의 누구라거나(처음은 아버지의 이름을 댈 수 없는 없는 사람들을 위해 데모스의 이름을 대며 자기를 소개할 수 있도록 했으나, 나중에는 아테나이 시민들 사이에도 데모스의 이름을 썼다.(아 그 XXI.4)), 가장 확실하게는 둘을 조합해 어느 데모스의 누구 아들 누구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아리프론의 아들 크산팁포스 대신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팁포스로 소개했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젊었을 때 대중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 했는데, 사람들이 그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직접 본 늙은 사람들은 온화한 목소리에 유창한 말투까지 어쩌면 저렇게 닮았나 하고 놀라기도 해서, 위험 인물로 찍혀 추방당할까봐 노심초사했기 때문이었다.(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 그런데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팁포스가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는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참주와 상관없이 그저 남들과 달랐던 때문이었는지 간에) 추방당한 사실은 말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왜 추방을 당했어야 했는지 모를 리 없었을 페리클레스가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까봐 노심초사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앞의 주에서도 언급했듯이 페리클레스 부자의 외양과 음성이 모두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닮았었을 것으로 보고, 그것이 크산팁포스의 도편추방, 페리클레스의 도편추방에 대한 염려의 이유로 보았다. [본문으로]
- 아리스테이데스가, 물론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크산팁포스를 축출하기위해 도편추방제도를 이용하지는 않았겠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명망 있는 귀족 출신의 크산팁포스가 자기의 지지 기반인 민중의 지도자로 부각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펴지 못하게 하는 장애로 여겼을 수가 있고, 그랬다면 도편추방제도를 이용해 크산팁포스를 축출하려 했을 것으로 믿어지는데,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그의 사람 됨됨이나, 그가 바로 처음으로(크산팁포스 역시 그의 제물이었다면 두 번째이겠지만) 도편추방제도를 이용해 정적 아리스테이데스를 추방한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틀림없이 테미스토클레스의 주도로 크산팁포스가 도편추방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아리스테이데스의 눈으로 봤을 때 테미스토텔레스는 거의 정치적 사기꾼 수준이어서, 때로는 그런 현란한 정치적 술수를 막기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도 서슴지 않았는데,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의 이런 태도가 정쟁을 심화시키고 도시의 평화를 깬다고 보았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 BC480 크세르크세스가 침공한 세 번째 페르시아와의 전쟁이다. [본문으로]
- 테미스토클레스의 돈벌이 수단을 짐작케 하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아르테미시온에 진을 치고 있던 헬라스 연합 함대가 철수할 기미를 보이자 에우보이아의 지도자들이 철수를 만류하러 왔을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돈을 준비해 주면 철수를 주장하는 다른 도시들의 지휘자들을 그 돈으로 달래 보겠다고 많은 돈을 받은 뒤, 마치 헬라스를 구하기 위해 자기 돈을 쓰는 척하며 일부를 나누어 주고, 철수 안을 철회시키고, 남은 돈을 착복한 것이었다. [본문으로]
- 테미스토텔레스의 인생유전을 보면 탐욕이라는 것이 뛰어난 자질을 가진 한 인간의 영혼에 깃들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르쳐 주는 전범典範처럼 보인다. 테미스토클레스(BC524?-459)은 타고난 군사 전략가로서 페르시 전쟁 동안 아테나이의 활약을 전 헬라스 세계에 부각시켰으나, 미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때문인지 부에 대한 탐욕 때문에 아테나이에서 추방되었고, 말년과 죽음을 욕되게 맞았다. 자세한 일생은 플루타르코스의 '테미스토클레스전' 참조.) [본문으로]
- BC463 에피알테스는 키몬(이 키몬에 대해서는 주128,129 참조)이 마케도니아의 뇌물을 먹고 타소스를 몰래 지원한 그들을 응징하지 않고 귀환했다며 아레오파고스에 고발했고, 이때를 정치 입문의 기회로 보고 페리클레스는 키몬의 회계보고서 내용을 트집잡아 공격에 나섰으나, 모두 무죄로 판결이나서 바로 키몬을 권력에서 끌어내리지는 못했는데, 오히려 키몬이 민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파르테의 지원에 나섰다가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낭패를 겪자 도편투표를 실시해 추방하고 에피알테스와 함께 권력을 장악했다. [본문으로]
- BC443 투퀴디데스의 추방 이후 페리클레스가 완벽한 일인 독재를 구가한 것은 사실이나, 키몬 때처럼 정치 공작으로 제거했다기보다는 정책 대결에서 투퀴디데스의 정책이 거부된 것, 다시 말해 동맹에 대한 도리나 시민들의 가치관을 타락시킨다며 페리클레스의 동맹 공납금 전용 정책에 반대하는 것에 대한 시민들의 거부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0년의 망명 끝에 아테나이에 돌아왔으나, 페리클레스가 메가라를 봉쇄하는 등 아테나이가 전쟁 분위기에 휩싸여 갔고, 그가 다시 정치에 뛰어들어 페리클레스의 정적이 되기에는 노쇠하고 병약해져 있었으며(아리스토파네스,'"벌들"'947행,'"아카르나이 사람들"'703,708행), 더군다나 페리클레스를 끌어내리려는 클레온은, 아고라의 저자 거리 출신답게, '처음으로 연단에서 소리지르고 욕설을 하고 허리띠로 옷을 졸라맨 채 연설하는 사람(아리스토텔레스,'아테네 정치제도사'XXVIII.3, 플루타르코스 니키아스전')'이라 애시당초 투퀴디데스가 그의 상대가 되기에는 근본부터 역부족이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몬(다모니데스)이 페리클레스로 하여금 개인 돈이 아니라 도시의 돈으로 민중들의 환심을 사라고 조언했으며, 이밖에도 많은 조언을 페리클레스에게 했다는 이유로 도편추방당햇다고 한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VII.4) [본문으로]
- 정치 실력자는커녕 정치가도 아닌, 한낱 음악 교사에(플루타르코스는 음악을 가르치는 채하고 정치를 가르쳤다고 전한다.주109) 지나지 않는 다몬(다모니데스)을 도편추방한 것은, 이미 이때 아테나이라는 도시의 영혼이 마땅히 지녀야 했던 도덕적 가치, 다시 말해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먹고 사는 것과 바꾸어 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정책적인 대립을 정치적인 대립으로 치환하여 투퀴디데스를 추방할 때 벌써 이런 조짐이 있었고, 급기야 다몬을 쫓아내어 페리클레스는 참주가 될 의사가 없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본문으로]
- 페이디아스는 처음 아테나 신상에 입힐 금을 횡령했다고 몰렸으나, 그렇다면 그 금을 떼어 내어(페리클레스는 이 금을 일종의 비상금 비축으로 보고 필요할 때는 떼어 내어 쓸 수 있도록 붙이라고 페이디아스에게 주문했다.) 무게를 달자는 주장으로 모면했으나, 아테나 신상의 방패에 새겨 넣은 자신과 페리클레스의 모습 때문에 신성모독으로 몰려 추방당했는데(플루타르코스는 그가 감옥에서 병으로 죽었다 한다), 아스파시아에 대해서는 신을 모독했다는 죄로 고발되었고, 페리클레스가 눈물을 흘리며 구명에 나서 살았다는이야기가 전해질 뿐(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 구체적인 신성 모독 행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프로타고라스는 '본문,다.34,39', 주106, 그리고 아낙사고라스는 '본문,다.34,43', 주107,108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벌들"'548-551행, '나는 우리의 권한이 어떤 왕권 못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어. 비록 늙어가기는 하지만 재판관보다 더 행복하고, 더 부럽고, 더 즐겁고, 더 두려운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본문으로]
- BC488 첫 추방 이후 BC416 마지막 추방 사이 73년 동안 3년 꼴로 한 번씩 추방된 사람이 나왔다고 가정하면 스무네댓 정도가 도편추방되었다고 보여지는데, 그 가운데 행적이나 이름이 알려진 추방자는 BC488 힙파르코스, BC487 메가클레스, BC486 성명미상의 참주정파, BC485 크산팁포스(BC481 소환), BC483 아리스테이데스(BC481 소환), BC470 테미스토클레스, BC461 키몬(BC456 소환), BC443 투퀴디데스, BC442 다몬, BC416 휘페르볼로스, 등 열 명 정도에 불과하다. [본문으로]
- 주4 참조.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BC463 키몬의 회계보고서를 트집잡고 나오면서 정치에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낸 후, BC461 처음 장군이 되어, BC430 한 해를 빼고는, BC431 역병에 걸러 죽을 때까지 장군으로 권력을 쥐고 있었다. [본문으로]
- 재판에 나가 읍소하여 친구들을 구하려 하고 난 다음부터 페리클레스는 더 이상 민중들에게 아부하지 않기로 작정했는데, 그것이 바로 페리클레스가 일으킨 펠로포네소스 전쟁이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팁포스의 도편추방 이유를 '남들과 달라서'라고 모호하게 말했지만, 크산팁포스나 그의 아들 페리클레스는 그 '남들과 다른 것'이 플루타르코스가 말한 대로 그들 부자가 '남다르게'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외모 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닮았다는 세평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페리클레스는 같은 이유로 또 다시 정치적 타격을 받지 않기 위해 오래 서민 출신의 민중 정치가 에피알테스 곁을 돌며 도광양회하고 있다가, 키몬의 공금 횡령 사실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에피알테스가 암살당하며 물려준 민중 세력을 기반으로 죽을 때까지 권력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본문으로]
- 시켈리아 원정 전 아테나이는 5000탈란트 이상의 비축금이 있었는데 패전 후 500 탈라트도 남지 않았다. 당장 쳐들어올 스파르테를 막기 위해 집의 부재를 헐어 폐선키로한 배들을 수리하였고, 아테나의 금은 장식을 벗겨 전쟁 비용을 마련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쓰는 소회를 전대미문의 전쟁에 대한 기록을 남가가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러나 사실 이 전쟁은 전대미문의 전쟁 정도가 아니라, 어느 한 쪽의 패망을 뛰어 넘는 전쟁 당사자 모두를 패망으로 몰고간 전쟁이었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니키아스의 우유부단함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적인 만큼 그의 신에 대한 경건심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실례를 들어 보이며 증언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니키아스는 신전에 귀한 물건들을 바쳤으며(아크로폴리스의 황금칠 조각상, 디오뉘소스 신전의 향로대,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에 청동 종려나무와 부속 농지, 등), 신을 경외하여 일상의 일에도 점이나 신탁에 의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에게 올리는 제사 때문에 공공의 일을 미룰 정도였다. 그 가운데서도 압권은 시켈리아 원정 때 일어난 월식에 대한 그의 대처 방법이었는데, 그는 그 월식에 대해 점을 치고 신관들의 해석을 듣고도 모자라 한 달 뒤 다시 보름달이 떠서 원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군대를 묶어 두고 움직이지 않았다.('니키아스전') [본문으로]
- 주294 참조.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테가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니키아스와 라케토스만 찾으며, 대대로 아테나이에서 스파르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활을 맡아 왔던 집안의 내력으로 보나, 스팍테리아에서 잡혀 온 스파르테의 포로들을 각별히 살펴 왔던 자신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결코 그래서는 안 될 일인데,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을 어리다고 무시하는 스파르테의 처사에 자존심이 상해, 스파르테와의 평화조약 유지를 반대하고, 오히려 아르고스와의 동맹 체결을 원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알키비아데스가 그 전에 이미 정치적으로 아테나이와 스파르테 간의 평화조약 체결을 반대하고 있었다는 점도 같이 기록하고 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5권43) [본문으로]
- 주229 참조. [본문으로]
- 휘페르볼로스의 이름을 거론한 어떤 사람도 그의 전쟁 참가 이력을 말하고 있지 않다. [본문으로]
- 본문 '마.49' 그리고 주262 참조.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에우폴리스나(그의 희극 '"마리카스"'는 휘페를볼로스를 직접 겨냥해 조롱한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구름"'에만도 여섯 번이나 그의 이름을 들먹이며 조롱하고 있다.) 이상으로 이 휘페르볼로스를 아테나이에 해악을 끼친 불량배로 낙인 찍고('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8권73(3).), 플루타르코스도 희극작가 플라톤의 시를 인용하여(그놈은 그만한 벌을 받고도 남을 자였지만/그런 자를 처벌하라고 도편을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네.) 그를 평가하고 있다. [본문으로]
- 이 사모스의 무력시위에 대해서는 본문 '마.93,94' 참조 [본문으로]
- 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으로 맞선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자력으로는 진압하기 어려워지자 스파르테는 모든 동맹들에게 지원을 요청해 놓고, 정작 동맹을 체결하고 있었던 아테나이가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키몬의 강력한 요구와 설득으로 지원군을 보냈을 때는 헤일로타이와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구실로 입경조차 거절했는데, 이 일로 아테나이의 반스파르테 감정이 격해져 스파르테 지원을 주도하고 직접 출동했던 키몬이 도편추방당하게 된다. 이런 스파르테의 행태로 인해 악화된 아테나이의 스파르테에 대한 악감정은, 몇 년 후 스파르테가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포이를 관할하던 포키스를 내쫓고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에 주둔하는 일을 벌이자, 이를 본 아테나이로 하여금 스파르테를 델포이로부터 몰아내기 위해 파병을 단행하게 만들었다. 당시 추방되어 망명 중이던 키몬이 200여명의 민병을 규합하고 전장에 도착하여 참전을 요청했지만, 아테나이는 키몬이 스파르테와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키몬의 참전을 거부하였고, 이에 키몬은 자신의 누명을 벗겨 달라며 지휘를 에우티푸스에게 넘기고 전장을 떠났는데, 키몬이 남긴 이 200여명의 군사들 전원이 전사했을 정도로 분전했지만, 스파르테를 타나그라와 델포이에서 몰아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비록 패전은 했지만 그들의 분전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고, 사람들이 키몬의 친스파르테 정책과 키몬의 적군 스파르테를 대하는 태도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하자, 이런 민심의 변화를 읽은 페리클레스는 누구보다 먼저 자신이 나서 키몬의 소환을 주장한다.(플루타르코스,'키몬전') [본문으로]
-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테의 전권 사절에게 아테나이의 민회에 나가 말할 때, 협상에 대해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다고 말하고 협상을 진행해 준다면 반대 급부로 자기의 영향력을 발휘해 아테나이가 퓔로스를 스파르테에 되돌려 주도록 하겠다고 약속했고, 스파르테의 사절단이 아테나이 민회에서 협상에 대항 전권을 위임받지 못했다고 거짓 증언하는 바람에 분노한 대중들이 사절단의 철수를 요구, 평화조약의 갱신을 통해 평화를 지속시키고자 했던 니키아스의 노력을 무산시키고 말았다.(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5권45) [본문으로]
- 헬라스의 자유라는 기치를 내건 스파르테와는 달리 이때 쯤의 아테나이는 돈을 받고 전쟁을 해 주는 용병 수준으로 질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시켈리아의 작은 도시 에게스타가 전비를 대겠다며 쉬라쿠시이의 지원을 받는 셀리누스 사람들의 핍박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했을 때, 아테나이가 맨 처음 취한 태도는 에게스타가 정말 전비를 댈 능력이 있나 없나를 검증하는 일이었는데, 그나마도 보낸 사절들의 부실한 검증으로 그 능력이 과대 포장되는 바람에, 전쟁을 통한 부의 창출이라는 기대가 아테나이라는 도시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본문으로]
- 이 해괴한 일 가운데 하나가 출전하는 함선의 함장들이 미관과 속도에서 다른 함선들을 능가하기 위해 경쟁하느라 많은 돈을 지출한 것이었는데, 이런 경쟁은 다른 헬라스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이 원정 준비라기보다 힘과 부를 과시hybris(오만과 같은 말이다)하는 것으로 보였다.(투,펠VI.31.(3-4)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니키아스가 알키비아데스와 짜고 휘페르볼로스를 도편추방할 것이 아니라 알키비아데스와 맞붙었었더라면, 알키비아데스를 추방하고 평화롭게 아테나이를 다스렸거나, 아니면 자기가 추방당해 일생을 망친 무서운 재난을 피하고 뛰어난 장군이었다는 명성을 얻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그의 책,'니키아스전') [본문으로]
- 특히 크세노폰이 알키비아데스가 순전히 자신의 정치적 목적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접근했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미련 없이 소크라테스의 곁을 떠났다고 비난하는 것으로 보아, 소크라테스와의 어울림도 당시 지적 유행에 빠지지 않는다는 건방의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조사위원회는 니키아스 쪽에서도 신상 파괴 행위에 연루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이 사실은 곧바로 출전 중인 니키아스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니키아스가 그런 일에 직접 연루되었을 가능성은 없지만, 신상 파괴나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신성모독 재판이 정적 제거의 틀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라면 자신도 그 표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젊은 알키비아데스의 예기를 꺾어 놓기 위해 벌였던 시켈리아 원정의 판 키우기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니키아스는 원정군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이 결정한 일에 대해 전령을 보내 민회에 통보해야 할 사안에 대해, 두 번이나 민회에 편지를 보내 민회가 결정할 것을 요구하고, 그 결정에 따른 후속 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 예를 들면, 페리클레스가 메가라를 치기 위해 전투에 나섰을 때 마침 일식이 일어나 웅성거리자 '일식이 단지 큰 우산 같은 것으로 잠시 해를 가리는 현상일 뿐이라'며 바로 전투를 개시했는데(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 니키아스는 함대의 정박지를 잘못 잡아, 함대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었는데, 바로 그날 월식이 일어나자 이동 작전을 미루고, 신의 뜻을 헤아려 한 달 이상 그곳에 눌러 앉았다.(플루타르코스'니키아스전',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VII.50.4) [본문으로]
- 이 쉬라쿠사이 경계의 언덕 방벽인 에피폴라이에서의 전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이후 처음 벌인 야간 전투였다. 달은 밝았지만 피아의 구별이 어려워 혼란에 빠졌는데, 아테나이 군대가 큰소리로 암호를 외치는 바람에 아테나이의 암호가 들통나자 쉬라쿠사이 군대가 아테나이 암호를 대며 공격했고, 아테나이 군대는 쉬라쿠사이 암호를 몰라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양편 모두 파이안을 응원가로 불렀는데, 이것 또한 아테나이 군대의 기개를 꺾고 혼란을 파트리게하였다.(투쿠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VII.42-47) [본문으로]
- 데모스테네스는 오랜 습지 주둔으로 군사들이 병에 걸리는 일이 잦고, 포위를 풀지 못해 자리를 지키느라 약탈도 할 수 없어 전비만 까먹고 있는 육군 전투 상황을 해군 전투로 바꾸어야 한다며 작전 변경을 주장했지만, 니키아스는 아테나이 군대의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쉬라쿠사이의 상황 역시 더 나빠지고 있다고 판단했고, 쉬라쿠사이에서 나오는 정보도 그의 예측과 다르지 않아, 용병들에게 지급할 돈도 빋을 내어 충당하는 형편이며, 딸서 이런 용병들은 조금만 형세 불리해도 도주할 것이기 때문에 이제 좀 더 압박하면 큰 전투를 겪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본문으로]
- 이 월식은 BC413 8월 27일에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아테나이와 그 동맹도시 연합군의 시켈리아 원정에 관해 제6권과 제7권 도합 192장의 길이로 보고하고 있는데, 이 시켈리아의 원정을 보는 그의 시각은 놀라울 만큼 객관적이고, 또 그의 기록은 직접 참전이라도 한 듯이 상세하고 사실적이다. [본문으로]
- BC413 시켈리아 원정군의 전멸 소식에 놀란 아테나이 민회는 '필요에 따라 의제를 사전에 협의 할 수 있도록' 원로회를 선출하기로 결의 했는데(투,펠VIII.1.(3))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 정치제도사'에는 이 원로회의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시적으로 운영하다가 과두정 수립과 함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단 라코니케는 스파르테의 직할지로, 데모스테네스로서는 시켈리아로 가는 항해의 중간 보급 기지로써 꼭 필요한 요새였을지 모르나, 스파르테로서는 아테나이가 직할지를 점령하고 요새를 세운 명백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는데, 이 이후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에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적대적 행동을 취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티케에 세운 데켈레이아 요새였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의 아기스는 100척 규모의 함대를 양성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보이오티아와 테살리아의 도시들에게 함선 건조를 할당하거나 자금을 거두어들였다.(투,펠,VIII.3.) [본문으로]
- BC410 아직 시켈리아 원정 실패의 후유증으로 시달리던 아테나이에 과두정 정변과 민주정 복고의 정치적인 혼란까지 더해 도시가 불화로 가득할 때, 소포클레스는 이듬해(BC409) 봄 디오뉘소스 축제의 비극 경연에 올리려 연극 '"필록테테스"'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앞서 같은 필로테테스를 소재로 연극을 만들었었던 아이스퀼로스나 에우리피데스와는 달리(이들의 필록테테스는 단절되고 단편 몇 구절만 전해지고 있다.), 필록테테스를 트로이아 원정에 참전토록 설득하기 위해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를 등장시켜 필록테테스와의 우정을 키우게 하고, 오뒷세우스로서는 설득할 수 없는 필로테테스의 마음을 그 둘의 우정으로 돌려 놓으며, 신의 축복을 받으며 트로이아를 치기 위해 셋이 함께 떠나는 극을 구성하였다. 물론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는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의 여인들"'을 물리치고 경연에서 우승하였고, 그해 여름 아테나이는 시켈리아 원정 후 처음으로 스파르테 연합 함대를 상대로 퀴지코스에서 대승을 거두고, 스파르테가 평화를 제의하도록 만들었다. [본문으로]
- 본문 '마.83-4' 참조. [본문으로]
- 본문,마.84,90 투,펠,VIII.47-54. 참조 [본문으로]
- 재판으로 정적을 제거하려던 첫 시도는 BC463 페리클레스가 키몬을 회계 부정으로 탄핵한 것이었는데, 아레오파고스 회의가 키몬을 무죄로 판결하여 페리클레스의 이 시도는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는 BC430 펠레폰네소스 전쟁 개전과 함께 닥친 역병의 재앙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아티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평화 협상파들이 스파르테와의 평화 협상을 반대하는 페리클레스를 실각시키고 평화 협상을 추진하기 위해 페리클레스를 횡령 혐의로 탄핵한 것인데, 재앙에 눌린 시민들이 유죄로 판결하여 벌금을 매기고 페리클레스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사례이다. 그러나 허약해진 아테나이를 상대로 평화를 협상할 리가 없는 스파르테 때문에, 평화 협상파들은 페리클레스를 실각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협상에는 실패했고, 페리클레스는 곧바로 복권되어, 이 두 번째 시도 역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세 번째의 시도가 바로 알키비아데스를 신성모독으로 탄핵한 BC414의 일인데, 알키비아데스가 재판정에 서서 아테나이가 지금 시켈리아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 설명하고, 신에 대한 자신의 경건심을 의심 받을 행동이 있었다고 오해를 받았다면 그것은 매우 유감이며, 앞으로 그런 오해를 받지 않도록 경건심을 더욱 키워 나가겠다고 설득했었더라면 페리클레스가 곧바로 복권되었듯이 또 다시 시켈리아 원정대의 지휘관으로 복권되었을 텐데, 알키비아데스는 그 재판을 회피하고 아테나이로부터 도망치는 행동으로 재판으로 정적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완벽하게 성공시켜 주었다. [본문으로]
- BC413 시켈리아 원정 실패의 충격으로 아테나이는 BC411 봄 과두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고작 4개월짜리 단명의 이 과두정 성립 과정에 대해 투퀴디데스와(펠,VIII.65-70) 아리스토텔레스는(아,XXIX-XXXIII) 특별히 긴 분량의 상술을 통해 상반된 보고를 하고 있는데, 투퀴디데스는 과두정 거부자를 살해하는 등의 폭력적 강압 아래 정변이 이루어졌다고,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테가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아테나이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아테나이 사람들이 과두정이라면 페르시아가 스파르테와보다는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피토도로스가 발의한 법안에 클레이토폰의 수정 제안까지 받아들여 과주정을 수립했다고, 각각 보고하고 있다. [본문으로]
- 이온이나 테세우스의 정변은 이주 세력이 토착 세력을 누른 것이었고, 퀼론이나 페이시스트라토스나 이사고라스의 정변은 외세를 빌린 쿠데타였는 데 반해, 페이산드로스의 과두정 정변은 페르시아를 스파르테로부터 떼어 내어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알키비아데스의 사주를 받고, 다시 말해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도시를 지키기 위해, 아테나이의 과두정파가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투퀴디데스의 보고처럼 폭력적인 강압이 있었든, 아니면 아리스터텔레스의 보고처럼 민회의 토의를 거쳐 수정까지 하면서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해 입법한 것이든 간에, 아테나이는 참주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정을 세운지 한 세기만에 이방인의 원조를 받기 위해 스스로 정치 체제를 바꾸고 말았다. 그리고 비록 넉 달만에 다시 민주정으로 회복하기는 했지만, 십 년이 자니기도 전에 도시가 스파르테에 항복하면서, 조상들의 정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항복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크리티아스를 위시한 참주정파들이 뤼산드로스의 옹호를 받으며 민주정 대신 30인 참주정을 세우는 것을 스파르테에 밉보이지 않으려고 받아들였다. [본문으로]
-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achaemenes,achaemenid,hakhamanishiya 왕조는 20여개의 지방satrapi에 왕의 대리인, 다시 말해 중앙의 엄밀한 감시를(이 감시자를 '왕의 눈'이라 불렀다.) 받는, 사트라프satrap總督,太守로 하여금 복속된 지방들을 다스리게 했는데, 아케메네스 왕조의 최전성기였던 다레이오스1세 치하에서 페르시아가, 그것도 사르데이스의 총독 휘스타스페스도 아니고, 아테나이라는 도시의 존재조차 몰랐던 총독의 아들 아르타프레네스가(BC507 이 아르타프레네스는 아테나이의 사절을 맞아 그들이 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살기에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기를 원하는지 묻고는 동맹을 원한다면 다레오스 왕에게 흙과 물을 바치라고 하였다.) 변방의 이름 모를 한 작은 도시 아테나이 간의 평등한 동맹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소나무는 한번 베어지면 그 그루터기에서 더 이상 싹을 내지 못하는데, 한 도시를 소나무 베듯 벤다는 말은 그 도시를 절멸시킨다는 말이다.(헤로도토스,'역사'IV.37.;페르시아의 퀴로스2세에게 병합되기 전 뤼디아 왕 크로이소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박해를 피해 개인 자격으로 헬레스폰토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밀티아데스가 람프사코스 사람들에게 잡혀 죽게 되었을 때, 람프사코스 사람들에게 밀티나데스를 풀어 주라는 전갈과 함께 그렇지 않으면 람프사코스 사람들을 '소나무 베듯 베어 버리겠다'고 위협했는데, 람프사코스 사람들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겨우 이해하고 밀티아데스를 바로 놓아 주었다 한다. [본문으로]
- 살라미스 해전 이후 아테나이가 해상권을 장악하자 아테나이의 부자들은 포도주나 올리브 기름의 수출로 돈을 벌기보다는 전쟁을 통한 전리품과 약탈, 그리고 포로들의 몸값을 받거나 아니면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 돈을 벌었는데, 시켈리아 원정 실패는 아테나이의 부자들로 하여금 전쟁을 통한 그러한 반대급부에 대해 확신할 수 없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가 파산 지경에 빠져 심지어 노삯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함선을 운용하기조차 어렵게 되자, 자신들이 대는 전쟁 비용 에 대한 반대급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정권을 담당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결론은 자연스럽게 당시 사모스 주둔 아테나이 장군이었던 프뤼니코스와 페이산드로스를 위시한 선장들과 함께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전복하고 과두정을 세울 것을 결심한 뒤(투,펠VIII.47(2)), 이런 움직임을 아테나이로 전파했는데, 아테나이에사는 안티폰, 므나실로코스 등의 호응을 받고 있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사모스 주둔 장군 프뤼니코스는 페이산드로스와 함께 민중 정치가였으나, 페이산드로스를 위시한 선장들의 과두정 수립 계획에 회의적이었지만 혹시 그들이 성공할 경우 자신도 집권할 수 있겠다 싶었는지 발을 빼지 않고 있었는데,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와의 동맹을 주선하겠다며 과두정파를 포섭하고, 이에 페이산드로스 등이 아나톨리아의 마그네시아까지 찾아가 알키비아데스를 만나고 돌아와 지휘관들과 선장들과 구체적인 반정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알키비아데스가 귀환할 경우 자신의 정치적 입지는 없어진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로 그들의 계획에 딴죽을 걸고 나왔다. 첫째, 지금은 아테나이에 내분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되는 때인데, 알키비아데스는 민주정이든 과두정이든 정치 체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아테나이에 정변이 일어나 그 혼란의 와중에 추종자들을 앞세워 아테나이로 귀환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그래서 아테나이의 내분을 조장하고 있고), 둘째, 페르시아만 해도 스파르테가 페르시아의 관심 지역에 진출하여 아테나이를 누르고 있어 굳이 스파르테와의 좋은 동맹 관계를 깨면서까지 여태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지낸 아테나이와 갑자기 우호적으로 변할 까닭이 없고(그런데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의 생존이 마치 페르시아와의 우호에 매달린 것처럼 오도하며 페르시아와의 우호를 주선한다며 속이고 있고), 셋째, 아테나이가 과두정을 실시하고 동맹 도시들에게도 따라서 과두정을 세우도록 해 준다고 해서 (민주정으로 예속되나 과두정으로 예속되나 예속되기는 마찬가지인데 아테나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동맹 도시들이) 아테나이를 예전처럼 따를 리 없을 뿐만 아니라, 과두정을 세우게 해 주니까 하고 동맹을 떠난 도시들이 다시 돌아오는 일도 없을 것이고, 넷째, 따라서 지금 아테나이가 처한 형편으로 보아 소수의 '상류층hoi kaloi kagathoi勇善者'이 집권한다 해서 그 형편이 더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는데, 이는 상류층이 민중의 범죄를 사주하건나 방조하여 이익을 취하고, 그래서 더 폭압적으로 바뀌었던 도시의 지난 경험으로 잘 알 수 있는 일이어서 민주정 전복이 옳지 않다는 논지였다.(프뤼니코스의 이 논지는 옳았고, 투퀴디데스는 그를 통찰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했지만(펠.VIII.27(5), 아리스토파네스라면 프뤼니코스의 이런 태도를 알키비아데스를 끼어 넣는 데 기분이 상한 '프뤼니코스의 딴죽걸기'로 보았을 것이다.('"개구리"'689행 참조)) 그럼에도 페이산드로스 이하 선장들이 아테나이에서의 민주정 전복과 과두정 수립, 알키비아데스 소환, 아테나이와 팃사페르나스 간의 우호조약 협상, 등을 결의하고 행동에 나서자, 프뤼니코스는 그들의 성공 뒤에 닥쳐올 알키비아데스의 정치보복을 염려하여 알키비아데스를 과두정파로부터 격리시키기로 하고 반아테나이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였는데, 처음은 밀레토스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스파르테의 아스튀오코스에게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를 아테나이의 동맹으로 돌리려고 한다고 밀고한 것이었는데, 아스튀오코스는 마그네시아로 가서 팃사페르나스에게 이 정보를 넘겼고, 팃사페르나스로부터 프뤼니코스의 밀고를 알게 된 알키비아데스가 사모스의 아테나이 선장들에게 프뤼니코스의 처형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 일이 일어났고, 그 다음은 이 일로 난감해진 프뤼니코스가 다시 아스튀오코스에게 정보 누설에 항의하면서 사모스 주둔 아테나이 해군을 공략하면 전체를 괴멸시킬 수 있도록 돕겠다는 반역적인 제안이 담긴 밀서를 보냈는데, 이번에도 아스튀오코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프뤼니코스의 제안을 넘겨 주고, 알키비아데스가 사모스로 이 사실을 전하려 하는 것을 눈치챈 프뤼니코스가 스파르테의 함대가 사모스를 친다는 정보를 얻었다며 사모스에 방어벽(이전의 방어벽은 페리클레스의 사모스 정벌 때 허문 뒤 다시 쌓지 않았다) 설치에 나섰고, 이 때문에 뒤따라 전해진 알키비아데스의 프뤼니코스 반역 행위 고발은 알키비아데스가 개인 감정으로 프뤼니코스를 모함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알키비아데스를 아테나이로부터 격리시키려는 프뤼니코스의 반아테나이적 행동도 묻혀 버렸다.(투,펠.VIII.48(4)-51(2).) 투퀴디데스는 프뤼니코스의 두 번째 제안 역시 반역적인 행동으로 보고, 제안이 누설되어 알키비아데스가 사모스의 선장들에게 자신의 반역 사실을 알리기 전에 선수를 친 것으로 기록했지만, 알키비아데스의 반스파르테적 행동을 고자질한 첫 번째 반아테나이적 행동으로 난감해진 자신의 처지를 역전시키기 위한 프뤼니코스의 장계취계(프뤼니코스는 두 번째의 제안도 틀림없이 아스튀오코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누설 할 것으로 믿고, 누가 보아도 놀랄 엄청난 반역적 행동을 제안했을 것이고, 알키비아데스는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프륀코스를 제거할 좋은 자료라 여겨 사실 여부를 알아보지도 않고 사모스의 선장들에게 알렸을 것이다.)로 보인다. 이 이후에도 프뤼니코스와 알키비아데 간의 불화는 지워지지 않았을 것인데, 그 때문인지 아테나이로 돌아간 프뤼니코스는 페이산드로스가 민회에서 과두정의 필요성을 제기한 뒤, 민심을 얻기 위해 알키비아데스와 팃사페르나스와 우호조약을 협상하러 떠나기 전에, 알키비아데스와의 협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페이산드로스에 의해 탄핵되어 장군직에서 물러났는데, 이때 그의 탄핵 사유는 알키비아데스와의 곡절이 아니라 한 해 전 이아소스 만에서의 해전을 중단하고 물러선 일(프뤼니코스의 이 판단은 옳았고, 투퀴디데스는 그를 통찰력이 있는 사람으로 평가한다.펠.VIII.27(5).) 때문이었다. 그리고 페이산드로스가 협상을 위해 아테나이를 비운 사이 과두정파를 지지하는 청년들이 알키비아데스를 재판에 회부한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민중 지도자였던 안드로클레스를 위시한 다수의 과두정 거부자들을 암살하는 것을 본 프뤼니코스는 장군직에서도 해임되고, 페이산드로스 등이 아스튀오코스와의 일을 안다는 것도 캥겨, 신변의 안전에 위험을 느꼈는지, 아니면 잠시 권력으로부터 소외가 권력에 대한 탐욕을 부추겼는지, 페이산드로스가 알키비아데스를 매개로 한 팃사페르나스와의 협상에 실패하고 아테나이로 돌아왔을 때는 투퀴디데스도 인정한 통찰력을 잃고 과두정의 열렬한 지지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후 그는 과두정의 집권자가 되긴 했으나, 트라쉬불로스가 이끄는 사모스 주둔 해군이 민주정을 옹호하고 나서고 아테나이 민심 역시 민주정 복귀로 기울어 가자, 정권 유지를 위한 최후수단으로 스파르테와의 화평을 맺기로 하고, 평화협정을 위해 안티폰과 함께 스파르테에 갔으나, 제해권 포기를 요구하는 스파르테의 강압으로 협상에 실패하고 돌아온 다음 바로 아고라에서 노리고 있던 자객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러나 더 큰 불행이 프뤼니코스의 최후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는 아테나이의 민주정 회복 후 열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부관참시 당해야만 했다. [본문으로]
- 페르시아로부터 돈이 돌지 않는 한, 아니면 페르시아의 돈이 아니고서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주지 않는 한, 알키비아데스고 프뤼니코스고 할 것 없이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이라면 아테나이에서 민주정 전복이나 과두정 유지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본문으로]
- BC411 가을의 일로, 페이시스트라스스의 아들 힙피아스를 축출한 것은 BC511이었다. [본문으로]
- 엘레우시스 비의의 사제들을 내는 에우몰피다이 집안과 케뤼케스 집안 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엘레우시스 비의를 모독하여(알키비아데스는 특히 알레우시스 비의의 사제 흉내를 내며 비의를 우스개 삼았는데, 이것으로 재판에 회부되고 사형을 선고 받은 뒤) 추방당했다며 신들의 이름으로 그의 귀환을 반대했다.(투,펠.VIII.53(1).) [본문으로]
- 동맹도시들을 과두정으로 바꾼다는 계획은 페이산드로스나 안티폰 등 골수 과두정파들에게 미리 서 있었고, 이 계획을 과두정의 당위성을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어서 몰래 감추고 과두정 지지자들 끼리 추진하고 잇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과두정파들은 왜 과두정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납득시킬 논리도 약했지만 무엇보다 과두정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혜를 받을 사람이 적은 만큼 지지 세력도 적을 수밖에 없어 [본문으로]
- 본문,마.93-94. 참조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클레온은 물론이고, 휘페르볼로스와 클레오폰 등 아고라의 장사꾼 출신 민중 정치가들에 대해 직설적으로 모욕을 가하고 있는데, 클레오폰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무렵에는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의 코로스장이 여자에 비해 남자들이 더 열등하다는 것을 증명해 가는 중에, 클레오폰이 아테나이의 유명한 창녀 살라박코보다 어느 모로 보나 열등하다고 모욕하고 있다.(805행) [본문으로]
- BC412 프뤼니코스가 이아소스 만에서의 결전을 계속하지 않고 전투를 중지시키고 철수하자 프뤼니코스의 지휘에 불만을 품은( 아르고스는 그 해전 중지와 철수가 스파르테의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아르고스도 아테나이와의 연합 함대 운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본문으로]
- 참전의 대가로 노예가 시민권을 얻는 경우는 먼저 스파르테에서 보이는데, 레오니다스가 테르모퓔라이에 근위대 300명을 데리고 출진했을 때 동등인 전사 한 명에 세 명이 붙었던 헤일로타이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보다 숙식과 무구 운반을 맡는 보조원이었고, 그후 스파르테에 동등인의 수가 줄어들자 헤일로타이를 직접 전투에 참여시키도 했었는지, 그들의 공적을 보아 자유민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보상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투퀴디데스는 건장한 헤일로타이를 제거하기 위해 전장에서 공적에 따라 자유민으로 정착토록 해 주겠다며 심사한 뒤 2000여명을 뽑아 아무도 모르게 제거해 버렸다고 했지만(펠,IV.80(3)(4)), 이런 일이 있었던 시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풍문을 사실로 기록했거나,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면 페르시아 전쟁 후 전투 경험이 있는 헤일로타이의 증가가 부담스러웠을 때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확실한 기록으로는 브라시다스가 칼키디케의 요청에 따라 장기 원정에 나섰을 때 원정군을 헤일로타이 700명을 뽑아 중무장보병으로 삼고 나머지는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용병들로 구성했다는 것과(펠,IV.80(5)), 암피폴리스에서 브라시다스가 죽고 니키아스의 평화가 성립된 후 클레아리다스와 함께 돌아온 헤일로타이들을 훗날 네오다모데이스neodamodeis新市民로서 스파르테가 엘리스를 견제하기 위해 점령했던 트리퓔리아의 레프레온에 정착시켰다는 것이다.(펠,V.34(1)) 스파르테는 아테나이가 니키아스의 평화를 깼다고 보고 시켈리아에 지원군을 보낼 때도 헤일로타이나 네오다모데이스로 구성된 중무장보병을 보내고 있고(펠,VII.34(3),58(3)), 아테나이가 시켈리아에서 패전한 뒤에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에 반기를 드는 도시들을 지원하기 위해 시켈리아 참전으로 네오다모데이스가 된 중무장보병을 보냈다.(펠,VIII.5(1)) 그러나 코린토스 전쟁 중에는 참전의 댓가가 아니라 참전과 동시에 신분이 네오다모데이스로 바꾸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테나이에는 헤일로타이와 같은 도시 소유의 노예라는 제도가 없었으므로 시켈리아 원정 이후 급격히 병력 보충이 어려워진 아테나이도 개인들이 소유한 노예들을 전투 요원으로 징발하고 참전 후 자유민이 되게 해 주는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런 제도의 첫 수혜자들이 아르기누사이 해전 참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리스토파네스가 '"개구리들"'(688행-705행)에서 단 한 번의 참전으로 노예에게도 시민권을 주는 마당에 과두정에 참여했다고 여태 불명예 시민으로 묶어둔 이웃들을 사면하자고 나서는 장면에서, 아테나이 역시 노예에게 시민권을 준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본문으로]
- 트라쉴로스는 군자금을 받으러 아테나이에 가서 반 년을 보냈지만 넉넉하지 못한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약탈에 나섰다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본문 마. 참조)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XIV.1.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민회는 해가 뜨고 나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해에 걸쳐 열렸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의제를 이튿날로 넘기지 않고 그날 그날 결론을 내었다. 따라서 클레오폰이 민회에 술이 취해 갑옷을 입고 들어갔다는 것은 낮술을 먹었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 트라쉴로스의 고전에 트라쉬불로스의 분전과 알키비아데스의 적시 출현에 테라메네스의 끝내기까지로 이어진 퀴지코스 해전으로 스파르테는 민다로스 뿐만 아니라 해전에서의 좌절을, 반면 아테나이는 감격에 찬 희망을 얻었는데, 이듬해 봄 BC409 디오뉘소스 축제 비극 경연에 나이 아흔이 넘은 소포클레스는 트로이를 멸망시키는 '"필록테테스"'를 무대에 올려 우승하면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스파르테를 이길 수 있는 희망과 그 길을 보여 주었다. [본문으로]
- 그러나 이 편지는 아테나이에 돌아와 구조 실패에 대해 자신을 변명하던 테라메네스에 의해 가로채져 민화에 전달되지도 않았다.(크세노폰,'헬레니카'1.7.17,18) [본문으로]
- 프로토마코스, 아리스토게네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 디오메돈, 리시아스, 아리스토크라테스, 트라쉴로스, 에라시니데스 [본문으로]
- 에라시니데스 [본문으로]
- 장군들의 해명을 들은 평의회는 민회의 재판으로 회부하면서 구금해 버렸다. [본문으로]
- 전승 장군들에 대한 첫 재판은 날이 어두워져 표결에 부치지 못하고 다음 민회로 연기되었는데, 테라메네스는 그 사이 아테나이 시민들이 그들 각각의 씨족사회에 새로운 구성원들을 입적시키는 축제인 아파투리아 축제에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 수하를 풀어 마치 조난자의 가족인 것처럼 머리를 밀고 상복을 입혀 씨족 모임에 나가도록 함으로써 조난자들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시켰다.(크세노폰,'헬레니카',1.7.8) [본문으로]
- 테라메네스는 칼릭세노스로 하여금 민회에서 장군들을 비난하라고 교사했다.(같은 책,1.7.9,10) [본문으로]
- 크세노폰이 전하는 에우립톨레모스의 변론 내용에 에우립톨레모스는 자신이 페리클레스의 친척이라고 소개하고 있고('헬레니카',1.7.21), 플루타르코스는 '알키비아데스전'에서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나이로 금의환향했을 때, 경계심으로 하선하지 않고 있다가 환영객들 중에 사촌인 에우립톨레모스와 친지들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땅에 발을 디뎠다면서, 이 장면에서 에우립톨레모스를 알키비아데스의 사촌으로 소개하고 있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이 그의 책 '헬레니카'에서 '칸노노스 법'을 두 번 언급하고 있어(1.7.20,'...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이 모두 아시다시피, 가장 권위가 있는 칸노노스의 법에 따르면, 아테나이 민중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누구든지 쇠줄로 묶인 채 민중 앞에서 해명을 해야 하며, 유죄가 되면 구덩이(바라트론)에 던져 죽이고, 그 재산은 몰수하여 10분의 1을 여신에게 바치게 됩니다...';1.7.34,'...칸노노스 법에 따라 피고 개인별로 표결할 것을 제안했다...') 칸노노스가 아테나이의 정치가였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뿐, 그 이외에 그의 시대나 치적이나 특히 그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이는 칸노노스 법에 대해 언급한 자료가 없어 전체적인 내용은 파악할 수 없는 형편이고, 다만 앞에서 인용한 대로 아테나이 민중들에게 잘못을 저지른 경우 쇠줄에 묶인 채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유죄의 경우 처벌 내용과 모든 피고는 개인별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의 왕 파우사니아스가 일탈된 행동 때문에 스파르테의 명예와 신망을 실추시키자 스파르테는 그를 헬라스 해상 동맹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본국으로 소환시키 이후 스파르테의 왕이 해군 제독이 될 수 없다는 법을 만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 제독들의 독직 사건들이 일어나 물의를 빚자 해군 제독의 임기를 일 년으로 단축함과 동시에 연임이나 중임을 할 수 없도록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르기누사이의 패전 이후 페르시아가 스파르테의 연합 함대 재건을 돕는 조건으로 뤼산드로스를 제독으로 보낼것을 요구하자 스파르테는 편법으로 그를 제독의 고문관의 임명해 보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는 클레오폰이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II.2.20 [본문으로]
- 크리티아스에 대한 직간접적인 언급들은 한결같이 크리티아스를 부정적인 인물로 소개하고 있는데, 우선 크세노폰의 책 '회상'과 '헬레니카'가 그러하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소크라테스의 일화와 플라톤의 가계를 소개하면서 (30인 참주들 중의 일원이었다는 설명 없이) 플라톤의 외숙으로 카르미데스, 외종숙으로 크리티아스를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따르고 도우려는 사람으로 부드럽게 언급하고 있고, 그렇지만 플루타르코스가 '알키비아데스전'에서 크리티아스를 아주 부정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역시 '아테나이 정치제도사'에서 크리티아스를 비롯한 30인 참주들의 행적에 대해서 크리티아스나 다른 참주들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참주들 전체의 행적으로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크리티아스에 대한 여러 부정적인 기록 가운데 크리티아스의 진면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테라메네스의 입을 빌린 크리티아스 행적에 대한 폭로인데, 그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프로메테우스와 함께 테살리아에서 민주정체를 수립하기 위해 권세가들(despotai)에게 항거하여 예속 농민들을(페네스타이,penestai) 무장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곳에서 한 일이 여기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를! 나는 누군가가 여러분의 권력을 빼앗고 여러분을 음해하려 하는 사람을 위하려 한다면 당연히 가장 큰 벌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누가 그런 사람인지 여러분은 바르게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테라메네스의 입을 빌려 크세노폰은 크리티아스가 정치 체제를 권력을 쥐는 수단으로 파악하고(테살리아에서는 기득권자들로부터 권력을 뺏기 위해 농민들을 무장시켜 민주정 정변을 꾀하고, 아테나이로 와서는 권력을 빼앗기 위해 민주정이 아닌 과두정을 꾀하며, 권력을 획득하려는 과정에서 자행한 잔혹한 행위가 아테나이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말로 크리티아스의 잔혹한 권력에의 탐욕을 드러내어 보이고 있다. [본문으로]
- 크리티아스가 아이스키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마케도니아 출신 철학자와는 동명이인)를 스파르테로 보내 뤼산드로스로 하여금 칼리비오스와 (700명의) 군대를 아테나이로 파견했다는 기록은 크세노폰이나('헬레니카'II.3.13-14) 아리스토텔레스나('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XVII.2) 마찬가지이지만, 파견 시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데, 크세노폰은 과두정 수립 후, 늦어도 테라메네스 처형 이전이고(테라메네스가 처형당하기 전에 '스파르테 군대의 수당 지급을 위한' 거류외인에 대한 처형과 재산 몰수 문제로 크리티아스와의 불화가 야기 되었다(헬II.3.21)), 아리스토텔레스는 테라메네스 처형 후(아,'XXXVII.2)이다. [본문으로]
- '...막상 그들이 도시를 장악하게 되자 시민 가운데 누구도 가만히 내버랴두지 않았고 재산과 출생과 명성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없앴다. 이는 두려움을 제거하고 재산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기간 동안 1,500명의 사람들을 제거하였다.'(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XV.4) 아테나이가 아이고스포타미에서 뤼산드로스에게 패해 잃은 함선은 200여척 죽은 사람이 3,000여명이었으니까 용병이나 비시민 노꾼들을 제외하면 아테나이 시민들은 1,000명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테라메네스의 입을 빌려 트라쉬불로스와 아뉘토스가 추방된 것으로 전하는데('헬레니카'II.3.42), 그들이 시민들을 죽인 이력을 볼 때 이 둘 정도의 명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슨 핑계로라도 죽였으면 죽였지 산 채로 아테나이에서 쫓아내지는 않았을 것인데, 퀴지코스 해전 이후 이미 아테나이에서 쫓겨나 있던 알키비아데스 역시 이들과 함께 추방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망명할 경우 사후에 추방령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테라메네스와 크리티아스의 관계가 처음에는 좋았으나('헬레니카'II.3.15), 이 둘의 불화는 전에 추방된 적이 있었던 사람들을 처형하면서부터 불화가 시작되어(II.3.16), 크리티아스가 3,000명의 공무 담임자를 정하면서 나머지 시민들의 무장을 해제할 때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였으며(II.3.19), 스파르테 주둔군의 수당 지급을 위해 거류외인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일을 테라메네스가 거부하고 나서자 파경을 맞았다(II.3.23). 이에 30인 회의를 소집한 크리티아스는 대담한 청년들에게 소매에 단감을 숨기고 회의 참석케 한 다음(II.3.24), 기회주의자적인 테라메네스의 전력을 거론하며 지금 또 다시 테라메네스가 30인을 음해하고 배신할 것이라는 죄목으로 기소했고(II.3.24-34), 테라메네스는 자신은 말(기사 계급)과 방패(중무장 계급)로 도시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도시를 다스리는 것이 최선이라 믿어, 그런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지만 30인 과두정을 음해하거나 배신한 적이 없다며, 전에도 언제나 민중의 선택을 따랐을 뿐 변절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발명했는데(II.3.35-49), 투표로는 무죄 판결도 배제할 수 없어 크리티아스는 공무 담임 명단에 없는 사람은 표결 없이 처형할 수 있는 신법에 따라 테라메네스의 이름을 공무 담임 3,000명 명단에서 지우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를 내렸고(II.3.51), 테라메네스는 제단estia에 올라 크리티아스는 명단에서 이름을 지울 권리가 없다며 정의를 요구하자(II.3.52), 사티로스가 지휘하는 열한 명의 무장 청년들이 테라메네스를 끌고가 독약을 마시게 했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테가 장기적인 소모전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스파르테는 스무여덟 해에 걸친 전쟁 동안 아테나이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도, 그리고 힘들어서 평화를 구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해 왔으며, 결국 아테나이를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사소한 일로 전쟁을 벌인다는 자책감에서 벗어나라며, 한번의 양보는 더 큰 양보를 요구하게 만든다며, 전쟁의 폐해를 입기 전에 지금 순종하든지 아니면 지금 가진 것을 두려움 없이 소유하기 위해 전쟁을 하든지 택하라며, 아테나이를 전쟁으로 이끌었는데(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140.(4)-141(1)), 평화가 거부된 뒤에는 '평화와 전쟁 가운데 머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다른 방면에서 잘 나갈 경우 전쟁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굴복하고 곧장 남에게 예속되든지 아니면위험을 무릅쓰며 버텨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 위험을 피해 가는 것이 더 바난받아 마땅할 것이라며 아주 분명한 어조로 전쟁을 촉구한다(같은 책,제2권61(1)). [본문으로]
- 스파르테는 스팍테리아 섬에 400명의 수비대를 보냈는데, 이 가운데 108명이 전사, 292명이 포로로 잡혔고, 포로들 가운데 스파르테 동등인 12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같은 책,제4권38(5)). [본문으로]
- 뮈틸레네를 절멸시키려던 클레온의 계획은 무명의 아테나이 시민 디오도토스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클레온은 아테나이에 잡혀 온 뮈틸레네 반군 2,000여명을 몰래 처형함으로써 동맹 도시들에게 반란의 댓가를 보여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조공을 받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크세르크세스의 삼백만을 맞으러 300명의 근위대로 출진한 레오니다스의 경우에서 보듯 스파르테의 출정은 소수 정예로 나서고, 진격의 길에 동맹 도시들의 병력을 보충 받는 방법이었으므로, 브라시다스의 700명은 칼키디케에 이르렀을 때는 2,000명에 육박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클레오크리토스를 엘레우시스 비교의 전령관으로 그의 짧은 연설 내용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헬레니카'II.4.20)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록한 화해의 주된 내용은 첫째 이주의 조건으로, (과두정파가) 엘레우시스로 이주를 원하면 10일 이내 등록하여 20일 이내 이주한다. 단 남겨진 재산(주로 부동산)에서 나오는 수입을 가지되, 공동방어세를 내고, 그밖에 제식 행사일을 제외한 일상에서의 왕래 제한, 엘레우시스에서 주택 구입 혹은 세입 방식을 정한 것이고, 두 반째는 사면 조건으로, 과두정 치하 관직에 봉사자 외에는 누구도 탄핵해서는 안 되는데, 관직 봉사자라 해도 회계 감사를 받으면 탄핵 대상에서 제외되며, 회계 감사를 피하고 싶을 경우 이주해 나갈 수 있도록 했고, 마지막은 채무 변제 조건으로 내전으로 빌린 돈은 빌린 편이 갚도록 한 것이다.('아테나이 정치 제도사'XXXIX.1-6) [본문으로]
- 아르키노스는 반정파와 함께 아테나이로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는 노예(예속노동자)도 포함된 것을 보고, 트라쉬불로스의 제안이 불법이라고 거절했다.(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L.2) [본문으로]
- 트라쉬불로스의 반군들이 아테나이로 접근해 오자, 크리티아스는 만일의 경우에 엘레우시스를 거점으로 반격할 것을 계획하고, 반발할지도 모르는 엘레우시스의 청년 300명을 골라 유죄 판결을 내려 격리했다.(크세노폰,'헬레니카'II.4.8-9) [본문으로]
- 테라메네스가 뤼산드로스에게 갔다가 아테나이로 돌아온 때를 BC404 초로 보면, 그 뒤 스파르테를 오가며 항복을 하고, 성벽을 허물고, 크리티아스의 과두정파가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을 때는 5월 무렵으로, 크리티아스가 기병을 데리고 트라쉬불로스의 반군을 퓔레의 산골 마을에서 포위했을 때 눈이 와서 실패한 것으로 보아, 페이라이에우스의 무니키아 언덕에서 시가전을 벌였을 때는 BC404-403에 걸친 겨울이었을 것이어서, 크리티아스와 30인이 정권을 쥐었던 기간은 길어야 고작 8개월 남짓이었고, 특히 포악한 권력 행사를 했던 시기는 6개월 정도의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태도에 대해, '아테네인들은 어느 누구보다 과거의 불행에 대처함에 있어 사적이나 공적으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정치가다웠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했다.(같은 책,Xl.2) [본문으로]
- 이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크세노폰에게서는 볼 수 없고,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나이 정치제도사'에 기록했을 뿐이다. 파이아니에우스 출신 리논은 아케르두시오스 출신 파릴로스와 함께 두 번째 10인에 선출되어 그 10인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파우사니아스의 진압군이 도착하기 전에 반정파와 협상을 시작하였고, 파우사니아스가 왔을 때는 반정파의 아테나이 입성을 주선하여, 스파르테가 보낸 10인의 중재자들과 함께 협조하여 평화와 화해를 성립시켰다. 그후 이들 10인은 솔선하여 회계 감사를 받아 사면되었으며, 그래서 리논은 누구의 거부도 받지 않고 장군으로 선출되기도 했다.(XXXVIII.3-4) 그리고 아르키노스에 대해서는 출신지 소개도 없이 화해 조건들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본문에 소개된 행적만 기록했다.(XL.1-2) [본문으로]
-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낸 스파르테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왕권 쟁취에 나선 퀴로스가 스파르테의 군사력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단련된 그리스인 용병을 주축으로 삼는 바람에 그리스인의 군사 활동 영역이 아니톨리아 내륙으로까지 확장되었고(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가 그 기록이다.), 이 경험이 아게쉴라오스의 아나톨리아 원정,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드로스가 힌두쿠시까지 원정할 수 있는 자신감의 원천이 되었는데, 테세우스와 키몬과 페리클레스의 아테나이는 함대를 잃고 성벽을 허문 채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버거운 나락의 길로 들었고, 이 이후 아테나이를 세계적으로 기억되도록 한 것은 플라톤의 글과 올림픽 경기 뿐, 아테나이의 영광은 아직도 재현되지 못 하고 있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아테나이가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의 패배 소식을 듣고,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앞으로 닥칠 자신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기 때문에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멜로스 섬을 포위하여 승리를 거두고 그곳 스파르테 이주민들(성인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아녀자들을) 노예로 팔아 버린 일이나, 헤스티아이아, 스키오네, 토로네, 아이기나 주민들이나, 그 밖의 많은 헬라스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이 그대로 자신들에게 되돌아올 일을 생각하고는 기가 막혀 했다'고 기록했는데('헬레니카',II.2.3), 이런 두려움은 비단 파랄로스 편으로 전해진 아이고스포타미에서의 패전 소식을 들었을 때 뿐만 아니라, 그후 아테나이가 다시 성벽을 쌓고 함대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까지 도시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을 것이고, 그 두려움을 벗어나게 하는 데 방해가 된다 싶은 내부의 어떤 언행도 단호히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II.2.3 [본문으로]
- 아낙사고라스의 이 말은 아테나이의 재판정에 두 번 오르게 되는데, 처음은 물론 아낙사고라스의 불경죄 재판에서였고, 다음은 소크라테스의 불경죄 재판에서였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기록한 디오도토스의 민회 발언 내용을 볼 때('펠레폰네소스 전쟁사'III.42-48), 그는 결코 무식꾼이 아니며 오히려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영혼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아데이만토스는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동료 장군 필로클레스와 함께 생포되어 포로가 되었으나,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나이가 승리할 경우 잡은 포로들의 오른손을 모두 자르기로 결의할 때 혼자서 반대했다가 함대를 배신했다고 기소당해 있었는데, 포로들의 처리 문제로 뤼산드로스와 동맹군 지휘관들이 모여 의논할 때 아데이만토스만이 목숨을 건졌고, 필로클레스는 다른 해전에서 나포한 두 척의 스파르테 연합 함대의 선원들을 모두 익사시켰던 죄값으로 나머지 포로들과 함께 모두 처형당했다.(크세노폰,'헬레니카'II.1.31-32)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가 도시 일에 참여한 기록은 세 차례의 참전 그리고 순번으로 걸린 한 번의 평의회 의장직이었는데, 모두 의무적인 참여였을 뿐, 정작 권리 행사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민회 출석이나 배심원 역임 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무하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다른 위원들이 협박에 굴복에 표결에 찬성했을 때, '합법적이 아닌 일에는 동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전한다.('헬레니카'I.7.15) [본문으로]
- 카르미데스는 크리티아스가 이끄는 30인 과두정에서 페이라이에우스 행정관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페이라이에우스의 무니키아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크리티아스와 함께 죽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가 연극 '"구름"'에서 자신을 희극적 대치물로 삼은 것에 대해 상연 동안 객석에 일어서서 벌인 소크라테스의 일인시위는 한 철학자의 시인에 대한 세계 최초의 반론권 행사였다면, 크리티아스의 레온 체포 명령을 거부한 것은 세계 최초의 철학자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숱한 사람들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며 때로는 언쟁을 때로는 비난도 하지만, '메논'에서의 파국적인 불화를 야기한 아뉘토스를 제외하고는 결론을 내지 못 했을 경우에도 모두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본문으로]
- 트라쉬불로스와 아뉘토스가 반정을 일으켜 민주정을 복고했을 때 소크라테스의 동료 카이레폰도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고, 소크라테스는 카이레폰의 민주정 복고 참여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실과(플라톤,'소크라테스의 변론'20e), 또 30인들이 살라미스의 레온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을 목숨을 걸고 거부한 사실로(같은 책,32c) 보아, 아테나이가 항복한 후의 정치적 혼란기와 소크라테스재판 전의 민주정 안정기에 소크라테스가 정치적 불화를 야기할 특이한 행동을 보였을 가능성이 별무해 보인다. [본문으로]
- 본문,아.2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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