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도시의 영혼
8.1. 반 세기 전 그 많은 시인들과 철학자들을 도시에 두고도 페리클레스는 전쟁으로 도시를 번영케 하리라 믿고 전쟁을 일으켰는데, 50년 뒤 관객이 시들어 시인은 말이 없는 데다가 철학자들마져 떠나고 없는 도시의 위정자들이 도시와 도시민을 위한다며 할 일이란 전쟁 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저를 또 다시 가슴 아프게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죽고, 플라톤과 안티스테네스를 위시한 그를 따르던 잠재적 민주정 반대자들마져 하나씩 둘씩 아테나이를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마치 이제 더 이상 정치 체제에 대한 걱정은 없다는 듯이 득의양양하여 바다로 나갈 건수만 찾는 트라쉬불로스와 아뉘토스를 보는 저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앞에서도 머금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반 세기 전 페리클레스가 해외 원정에 더 이상 동맹들의 군사는 필요 없다며 페르시아와 스파르테와 평화를 이루고, 아테나이가 새로운 모습의 도시 건설을 시작했을 때, 근 15년이나 지속된 그 평화는 스파르테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두 큰 도시 사이에 끼어 숨도 함부로 쉴 수 없었던 헬라스의 대다수 도시들에게 그들 도시의 번영과 도시민의 평안을 증진시키는 데 최고의 동력이자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였고, 그때 이미 사람들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도시와 도시민에게 번영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도시는 놀이와 축제로 이어졌고, 왕이든 정치가든 장군이든 소피스테스든 여자든 남자든 모두 함께 웃음과 눈물의 소재가 되어 신들을 경배하고 도시를 정화하여 빈부귀천 사이에 불화나 반목이 없었습니다. 그 평화로부터 50년이 지난 후, 모든 것을 전쟁에 걸었다 패망한 아테나이는 그렇게 비싼 평화를 얻고도 이미 세 해를 도시 안의 정치 문제로 아픔을 겪어야 했으니, 살기 어려워진 도시에서 제일 먼저 사라진 것이 웃음이었고,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사라지자 이내 눈물도 말라 버린 듯했습니다. 오로지 도시의 재건과 도시민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매진할 밖에 없었습니다. 그 어느 것보다 우선은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당위였습니다. 누구 하나 도시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 힘이 없었습니다. 반기를 들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더 나은 것이나 더 좋은 것을 이야기하기보다 우선 내일 무엇을 먹을 것인지가 더 급히 따져야 할 문제였습니다. 부자들이 움츠리니 축제에 즐거움이 없어졌고, 가난만이 삐어져 나와 축제의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다녔습니다. 부자들이 움츠리니 이번에도 아테나이는 그 급선무와 당위, 바꾸어 말해 먹고 사는 일을 폐허가 된 올리브 밭과 포도밭 밖에 없는 아티케의 농장이 아니라 바다로부터 풀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테나이는 바다로 나서야 했습니다. 바다에 나가 무엇을 가지고 오기 전에는 먹고 사는 문제를 풀 길은 요원해 보였습니다.
8.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세상 돌아가는 것이 어렵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꼭 아테나이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바다가 아테나이를 부르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세상에 가장 큰 변화가 온 것은 아나톨리아에서였는데, 퀴로스의 반란을 꺾은 공으로 팃사페르나스와 파르나바조스가 각각 뤼디아와 프뤼기아의 총독으로 돌아왔고, 그들은 퀴로스 이전부터 아테나이보다는 스파르테와 더 가까운 사이였지만, 퀴로스가 없고 아테나이도 없는 아나톨리아와 이오니아에서의 사정은 전과 확실히 달랐습니다. 팃사페르나스와 파르나바조스는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 그리고 아나톨리아 서해안의 헬라스 도시들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자, 스파르테와 함께 퀴로스의 편에 가담했던 그곳 도시들이 페르시아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오직 스파르테에게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고, 예전 아테나이가 맡았던 페르시아와의 대결을 이제는 스파르테가 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1. 스파르테로서는 퀴로스의 도움으로 스무일곱 해를 끈 헬레네 내전을 끝낼 수 있었으므로 그 은공을 생각하여 퀴로스의 지원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퀴로스의 반란이 실패로 끝난 것은 퀴로스의 불운이었다고 쳐도, 그 바람에 페르시아의 옛 친구를 적으로 다시 만나, 헬라스의 내전에는 이겼으면서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은 스파르테의 불운이었습니다. 이리하여 헬라스 내전이 끝나고 다섯 해만에, 소크라테스가 죽은 그해, 스파르테가 페르시아에 핍박 받는 헬라스 도시들을 돕기 위해 다시 또 전쟁을 치루어야 했을 때, 아테나이는 내전에 대한 나쁜 기억을 모두 털어내고 정치의 안정을 바탕으로, 비록 패전으로 얻은 것이었지만 모처럼의 평화를 도시 재건에 유용하게 쓰고 있었습니다. 트라쉬불로스는 12척의 배로 옛 동맹 도시들을 오가며 무역으로 식량 확보에 진력을 다하고 있었고, 아뉘토스는 도시를 단합시키기 위해 민회에서의 정치적 다툼을 없애고, 도시민에게 그들이 믿는 신의 가호와 축복이 내려지길 빌며 여유가 생기는 대로 조금씩 도시의 축제를 즐거운 화합의 장으로 키우는데 성심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한 세기 전 테미스토클레스의 강권으로 바다로 나가 본 다음부터는 아테나이에서 어느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살길은 바다임을 잘 알고 있었는데, 시켈리아에서의 전쟁 뒤에는 패전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바다로 내몰았다면, 패전으로 얻은 평화 뒤에는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절실함이 그들을 바다에서 희망을 찾도록 내몰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테나이의 모습이, 바다에 눈을 꽂은 트라쉬불로스와 단합에 목을 맨 아뉘토스 모습이, 저의 눈에는 마치 또 다른 전쟁을 기다리는 것 같이 보여, 안타깝고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8.3. 소크라테스가 죽은 그해2 여름이 끝나 갈 때, 티브론의 뒤를 이은 데르킬리다스는 시시포스라는 별명이 말하는 대로 페르시아의 두 총독 간의 알력과 영지 관활의 허점을 이용하여, 팃사페르나스와는 협상으로 당장의 충돌을 피한 다음, 파르나바조스를 목표로 그의 영지로 진출하여 아이올레이스와 그 인근 아홉 도시를 출전 여드레 만에 평정하고, 불안해진 프뤼기아의 파르나바조스를 압박하여 휴전을 맺고, 트라케로 물러나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듬해 봄에3 비티니아에서 람프사코스 나온 데르킬리다스는 유임 통보를 받았고, 파르나바조스와의 휴전을 연장했고, 케르소네소스 사람들의 요청으로 그곳으로 가, 가을이 올 때까지 열한 도시와 그 항구들에 방벽을 쌓아 요새화한 다음, 아타르네우스를 키오스 난민들로부터 빼앗아 비상시의 주둔지로 만들어 놓고, 스파르테의 이오니아 기지인 에페소스로 돌아갔습니다. 데르킬리다스가 에페소스에서 막간의 평화를 즐기며 지내던 내전이 끝난 여덟 해째 이오니아 도시들의 권유에 따라 스파르테는 데르킬리다스에게 팃사페르나스가 살고 있는 카리아를 공격하도록 지시하고, 파락스가 이끄는 해군도 지원케 했는데, 마침 파르나바조스는 팃사페르나스가 뤼디아와 프뤼기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둘이 연합하여 이오니아의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일단 카리아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출동한 두 군대가 마이안드로스 강 인근에서 부딪쳤고, 팃사페르나스의 제의로 각각이 내건 강화 조건들에 대한 본국의 지시를 받을 때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하고, 서로 왔던 길로 돌아갔습니다.
8.4. 헬라스의 맹주로서 스파르테가 페르시아를 상대하기 시작한 헬라스 내전 승리 후 여섯 번째 해, 소크라테스가 죽던 바로 그해, 스파르테는 전체 헬라스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동안 펠레폰네소스 동맹을 이끌어 오긴 했으나 결코 패권을 추구하지 않았던 스파르테가 패권 추구의 태도를 맨 처음 선보인 것은 펠레폰네소스 반도 안에서의 반스파르테 도시들에 대한 응징이었습니다. 아기스는 오래 끌어오던 엘리스와의 반목을 끝장내기로 작정하고, 먼저 엘리스가 장악하여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인근 도시들에게 자주권을 주라고 요구했는데, 엘리스가 거절하자 바로 쳐들어갔으나, 지진이 나는 바람에 철수하고 군대를 해산했습니다. 이런 스파르테의 움직임을 보고 아르고스가 반스파르테 도시들을 결집하여, 엘리스를 도울 태세를 취했고, 이것이 나중 헬라스 큰 도시들의 반스파르테 연대로 발전했습니다.
8.5. 이듬해, 헬라스 내전 후 일곱째 해4, 스파르테는 보이오티아와 코린토스를 제외한 나머지 동맹 도시들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엘리스 침공에 나서, 마음껏 유린한 다음, 에피탈리온에 리시포스를 지휘관으로 약간의 수비대와 엘리스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을 남기고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도 리시포스는 여름부터 겨울까지 내내 엘리스를 공격하여 시달림에 지치게 만들었고, 헬라스 내전이 끝난 여덟 번째 해 봄이 오기도 전에 엘리스는 모든 것을 내놓고 올륌피아 제전을 주최할 권리만 가지는 선에서 스파르테와의 오랜 반목을 청산하였습니다.
8.6. 헬라스 내전 후 여덟 번째 해가5 되자, 데르킬리다스가 맡은 페르시아와의 다툼도 교섭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엘리스 문제도 해결한 아기스는 자기의 죽음을 예감한 듯, 엘리스와 평화와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곧바로 델포이로 가서 전리품을 바친 뒤 바로 병을 얻었는데, 스파르테로 돌아오자 죽고 말았습니다. 아기스는 죽어서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무덤을 차지했고6, 살아서 앉았던 그의 자리는 이복동생인 아게실라오스가 차지하여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아기스의 부인 티마이아가 낳은 레오튀키데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자식이라며 혈통적인 절름발이로 몰린 끝에, 왕위 계승권 차위인 신체적 절름발이인 새로운 왕에게 밀려나서 스파르테에서 추방되었습니다7. 아기스의 뒤를 이은 아게실라오스는, 왕이 될 사람으로 교육 받지 못했지만, 평민으로 교육 받고 자란 겸손함을 앞세워, 처음 한 해 동안에 벌써 스파르테를 움직이는 에포로스들은 물론 원로원의 원로들과 좋은 관계를 이끌자, 그들 일부로부터 도시를 위해 서로 좋은 관계가 아니라,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만, 그 짧은 기간에 키나돈이란 자가 도시를 뒤엎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나는 일이 있어, 그 음모에 가담한 무리들을 일망타진해야 했던 일도 있었고, 포이니케를 다녀온 시켈리아 상인 하나가, 그곳에서 본 300여척의 삼단노선이 전쟁 준비 중인 것을 보았다며,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페르시아 왕과 팃사페르나스가 준비하는 함대인 듯했다고 페르시아의 불순한 움직임을 전해 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특히 한 시켈리아 상인이 전해 온 새로운 페르시아 함대 이야기는, 테르킬리다스와 팃사페르마스 사이에 있었던 휴전의 조건을 페르시아가 어기며, 몰래 전쟁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에 왕이 된 이듬해인 헬라스 내란 후 아홉 번째 해8 봄, 나이 마흔 아홉의 아게실라오스는, 뤼산드로스의 권유에 따라, 뤼신드로스와 30명의 장군들을 데리고 에페소스로 가서, 거기서 직접 페르시아의 움직임을 보아 가며, 그들의 태도에 따라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8.7. 헬라스 내전 후 아홉째 해 늦은 봄, 팃사페르나스는 아게실라오스에게 사절을 보내 스파르테의 왕이 몸소 에페소스에 온 목적이 아시아의 도시들도 헬라스의 도시들처럼 자주권을 행사하며 살도록 해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는, 그 목적에 대한 페르시아 왕의 뜻을 알아보는 동안 휴전하겠냐고 물어, 속임수가 아니라면 좋다는 아게실라오스를 속이고,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더 많은 군사를 얻어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아게실라오스는 이에 개의치 않고 숨을 죽인 채, 휴전을 지키며 에페소스에서 그곳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뤼산드로스가 10여년 전 헬라스 내전 때 심어 둔 조직과 인맥이 여전히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어 자신의 지휘권 확립이 당면한 문제임을 알았고, 뤼산드로스를 헬레스폰토스로 보냄으로써 내부의 결속과 이오니아 도시들의 움직임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바꾸어 놓고 있었습니다9. 마침 뤼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사람 스피트리다데스로 하여금 파르나바조스에게 반기를 들도록 부추겨 성공하자, 그와 그의 아들을 데리고 아게실라오스에게로 왔는데, 이들로부터 파르나바조스의 사정과 팃사페르나스가 곧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팃사페르나스에게 사람을 보내 그가 서약을 어기고 전쟁 준비를 해 신들을 적으로 돌린 일을 꾸짖고, 덕분에 헬라스 사람들이 모두 친구가 되었으니 고맙다며 전쟁을 피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전했습니다. 팃사페르나스는 기병이 없는 아게실라오스가 보병전이 유리한 자기가 머물고 있는 카리아로 진격해 올 것으로 믿고 마이안드로스 강 부근에 기병을 배치하고 기다렸고, 아게실라오스는 카리아의 반대 편 프뤼기아로 쳐들어가며, 대비가 없는 도중의 도시들을 유린하며 나아가다, 다스킬레이온 근처에서 비슷한 수의 파라나바조스 기병과 조우했는데, 그 전투에서 그의 기병이 열세에 빠져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자, 겨울이 오기 전에 다시 에페소스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아게실라오스는 평지의 전투에서는 기병의 전투 능력이 필수임을 깨달았고, 빠른 시간 안에 기병을 양성키로 하고, 그곳 도시들에게 의무적으로 말을 키우게 하고, 당장의 조치로 말과, 무기, 유능한 기병을 내놓을 경우 직접 출진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여 재빨리 기병의 능력을 강화시켰습니다10.
8.8. 헬라스 내전 후 십 년이 되는 열 번째 해이자, 헬라스에 내전이 재발한 첫 해의11 초봄에, 아게실라오스는 대대적인 군사 훈련과 군비 준비에 몰두하면서 에페소스 도시 전체를 무기 공장과 사기를 돋구는 흥행장으로 바꾸어 갔고, 봄에는 스파르테에서 온지 한 해가 된 뤼산드로스와 30명 장군들을 돌려보내고, 새로 헤리피다스와 30명 장군들을 받아 전열을 새로이 한 뒤12, 가장 빠른 길로 적의 가장 비옥한 땅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팃사페르나스는 말은 그렇지만 실제로는 카리아로 올 것이라며 지난해와 같은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명하고, 자기는 따로 사르데이스에 남아 있었는데, 아게실라오스는 공언했던 대로 텅빈 사르데이스로 쳐들어가 사흘을 연속 약탈하며 군량을 마련하다가, 나흘째가 되어서야 겨우 나타난 페르시아의 기병이 아직 보병이 도착하지 않아 뒷받침이 없는 걸 알고, 중무장보병으로 뒷받침이 된 그의 기병을 내보내 이번에는 기병들의 전투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페르시아 왕이 새 뤼디아와 카리아 총독으로 보낸 티트라우스테스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팃사페르나스의 목을 벤 다음, 아게실라오스에게 그의 관할에 있는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가 세금만 그대로 낸다면 자주권을 줄 테니 스파르테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였고, 아게실라오스가 본국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하자, 기다리는 동안 자기 관할에서 떠나 있을 것을 제안하였고, 아게실라오스는 30탈란톤의 이동 비용을 받아 파르나바조스의 프뤼기아로 옮기던 중, 스파르테로부터 해군을 복원하여 함께 지휘하라는 연락을 받았고, 여름 동안 여러 도시들과 개인이 낸 돈으로 120여척의 함대를 꾸린 다음 매부인 페이산드로스13를 지휘관으로 삼아 에페소스로 보내고, 자기는 늦여름에 계속 프뤼기아로 진군하였습니다.
8.9. 한편, 페르시아의 티트라우스테스는, 스파르테가 해군을 복원하려는 것을 보고 아게실라오스가 아나톨리아에서 떠날 생각이 없다고 판단하여, 스파르테보다는 헬라스의 다른 큰 도시들을 상대하기로 하고, 여름이 되자 로도스 사람 티모크라테스를 밀사로 테바이와 코린토스, 그리고 아테나이에 보내, 그 도시들의 지도자들을 매수하여 스파르테에 반대하는 궐기를 일으키고,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스파르테에 대항하도록 일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테바이와 코린토스는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의 항복을 받을 당시 아테나이를 허물어 양떼들을 키우자고 했던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성벽만 허물고 아테나이를 스파르테의 영향 아래 묶어 둔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데다가, 스파르테가 몇 해 전 엘리스와의 문제를 처리하던 행태와, 작금에 아나톨리아에서 벌이는 전쟁의 행태를 볼 때, 그들로서는 예상하지도 못했고, 스파르테가 이전 펠레폰네소스 동맹 때에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던 너무나 패권주의적인 것이어서, 그들 도시의 민심이 우려와 반발로 들끊고 있는 시점에 페르시아가 뇌물까지 주며 자극하자, 당연히 그들은 스파르테를 비난하며 큰 도시들끼리 반스파르테의 기치 아래 서로 연대하자고 나섰고, 또 다른 한편으로, 아테나이는 아테나이대로 당장 먹고 사는 것은 그럭저럭 해결해 가고 있었지만, 스파르테의 제약을 풀고 바다로 나가는 배를 늘이지 않는 한 도시의 재건을 기약할 수 없다는 답답함에 눌려 지내고 있었는데, 테바이와 코린토스가 먼저 반스파르테 전선을 만들고 연대를 제의해 오자, 물론 티트라우스테스가 보낸 뇌물을 취할 트라스불로스나 아뉘토스는 아니었지만14, 이 기회가 아니면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옛 조상들의 영화를 되찾을 기회를 영영 얻을 수가 없다고 판단해, 아테나이를 멸망시키려 했던 테바이와 코린토스와 손 잡고, 그 대신 성벽만 허물고 아테나이를 살려 준 스파르테에 반기를 들기로 작정했습니다. 어쩌다 반스파르테 궐기가 실패한다 해도 더 잃을 것이 없었고, 요행으로 스파르테에 대등하게 전세를 끌고 갈 수 있다면, 반스파르테 진영의 전력 강화를 위하여, 다른 때 같으면 아테나이가 성벽을 복구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서 반대할 테바이가 오히려 성벽 복구를 지원할지도 모르며, 다른 때 같으면 아테나이가 해군을 재건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서 반대할 코린토스가 오히려 해군을 재건하라며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8.10. 언제나 시류에 민감했던 테바이는 백여 년 전 페르시아의 침공 때에는 페르시아에 붙어 도시의 피폐를 막았고, 서른 여섯 해 전 헬라스의 내전이 일촉즉발이었을 때에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독단적으로 먼저 플리타이아이를 공격하여, 전쟁을 피하기 위해 아테나이에게 겁만 주면서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전쟁을 피할 아테나이의 결단을 기다리던 스파르테를 어쩔 수 없이 전쟁으로 끌어 넣고는, 정작 그들은 가급적 싸움을 피하면서 뒷전에서 스파르테와 아테나이가 서로 약해져 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며, 거의 모든 헬라스의 도시들이 그 내전 동안 허물어져 갔을 때 그들만 오히려 몸집을 불려, 전후에는 스파르테를 위시한 다른 헬라스의 도시들이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었는데, 그 헬라스의 내전이 끝나고 십 년이 다 되어 가던 그 즈음에는 스파르테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모아 스파르테의 패권 추구를 저지한 다음, 자기들이 헬라스의 패권을 움켜쥘 요량으로, 좀처럼 조약을 깨면서까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스파르테를 전쟁 속으로 몰아 넣기 위한 사전 작업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테바이와 포키스는 서로의 접경 한 지역을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테바이가 은근히 인근의 동쪽 로크리스의 도시 오푸스로 하여금 그 지역에 가서 약탈하라고 권했고, 오푸스가 그 지역을 유린하고 가자, 포키스가 로크리스 지역으로 쳐들어가 더 많이 약탈하고 나왔고, 이를 핑계로 테바이의 안드로클레이다스는, 티트라우스테스의 돈값을 하느라 그랬는지, 동맹인 로크리스를 친 포키스를 응징해야 한다며 테바이가 포키스로 쳐들어가도록 했고, 테바이의 공격을 받은 포키스는 테바이가 예상했던 대로 스파르테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15.
8.11. 반면에 스파르테가 오랜 동안 참고는 있었지만 사실 테바이의 태도가 거슬렸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어서, 다시 말해 테바이가 독단적으로 플라타이아이를 침공하는 바람에 스무일곱 해나 끈 헬라스 내전을 펠로폰네소스 동맹 쪽이 먼저 일으켰다는 죄책감, 게다가 페르시아와 벌인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의 헌신적인 참여에 감동하여 도시를 지켜주겠다고 한 약속을 깨었다는 죄책감 속에 긴 전쟁을 치르게 했으며, 그렇게 벌인 전쟁에서 테바이는 동맹으로서 열성적이기는커녕 자기들 이속에 맞춰 때로 동맹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모른 척하기도 했으며, 데켈레이아 전투에서 얻은 수확물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고 아폴론에게 속하는 10분의 1 공세를 테바이가 차지해 갔고, 아테나이에서 테바이로 망명해 온 민주정 사람들을 지원하여 스파르테가 세운 30인 참주정을 무너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16, 그들을 지원하러 페이라이에우스로 들어갈 때도 테바이 자기들은 물론 코린토스까지 설득해 전투에 빠졌고, 가장 최근에는 아게실라오스의 아나톨리아 원정에서 동맹으로서 동참하지 않은 것도 얄미운데, 출정을 알리는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제단에서 집어 던져 제사를 방해하기까지 하여, 언제 기회가 오면 버릇을 고쳐 주겠다고 벼르던 참이었는데, 스파르테로서는 이제 기꺼이 테바이를 쳐부술 기회가 온 것이었습니다17. 아게실라오스와 병력 일부가 아나톨리아에 나가 있었지만, 승승장구하고 있어 갑자기 지원군을 보낼 일도 없어 보였고, 헬라스 안에서도 특별히 다른 곳에서 사달이 나서 별도로 군대를 보내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아, 응징은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스파르테는 봄에 에페소스에서 귀환한 뤼산드로스를 포키스에 보내 인근 동맹도시들의 군대를 모아 할리아르토스에 가 있도록 했고, 파우사니아스에게는 스파르테 병력을 주고 펠레폰네소스 도시들의 군대를 모아, 할리아르토스에서 뤼산드로스와 합류하여 정해진 날 동시에 공격하도록 조치했습니다.
8.12. 스파르테는 테바이가 예상했던 대로 움직였고, 스파르테의 공격이 임박하여 아테나이로 온 테바이의 사절은 여러분께 지원을 요청하며, 아테나이를 없애고 그 땅에 양들이나 키우자고 한 것은 테바이의 생각이 아니라 동맹회의에 참석했던 한 사람의 생각이었다고 변명하고, 페이라이에우스에 병력을 보내지 않은 일, 민주정을 도운 일 때문에 스파르테의 미움을 받아 생긴 일이니 아테나이가 테바이를 돕는 것이 옳다고 말한 다음, 아테나이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말해 아테나이가 다시 옛 영화를 되찾는 것에 대한 긴 이야기로 여러분을 설득했습니다18. 그리고 트라쉬불로스는 아테나이 성벽이 무너진지 꼭 십 년이 되는 헬라스 내전 후 열 번째 해에, 또 다시 도시의 살 길이 전쟁밖에 없는 것처럼, 아니 전쟁으로 아테나이의 옛 패권을 찾아야만 도시가 번영을 이루고 도시민이 행복해지는 것처럼, 그 패권과 그 전쟁 때문에 도시의 성벽이 무너지고 도시민이 밥을 굶어야 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테바이를 도와 스파르테와 다시 전쟁을 벌이면 아테나이와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기라도 하는 듯이, 자신있게 여러분을 또 다시 전쟁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8.1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하여 헬라스 내전이 끝난 후 10년이 채 되지 않아 헬라스에서 다시 내전이 발발하였는데19, 전쟁을 결심한 뤼산드로스는 출정에 지체하지 않았고, 할리아르토스에 가서 테바이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찾으라고 했으나, 성벽에 있던 테바이 병사들이 저항해 오자, 마치 파우사니아스가 늦게 도착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애초 계획한 대로 할리아르토스 성벽을 공격했고, 그는 일부러 죽을 자리를 찾아간 사람처럼 별로 치열하지도 않은 성벽 아래의 공방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20. 뤼산드로스가 죽자 동맹도시들의 병사들이 흩어져 인근 야산으로 물러났으며, 이 틈을 타 테바이의 군사들이 그 뒤를 덮쳤으나 스파르테 병사들의 반격으로 제법 큰 피해를 입고 기가 죽어 성 안으로 되돌아 갔고, 그런데도 그날 밤으로 포키스를 위시한 동맹도시들의 병사들이 철수해 버려, 이튿날 뤼산드로스와 다른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파우사니아스와 그의 군대가 도착하여 남아 있던 뤼산드로스의 병사들과 합류하였습니다. 늦게 도착한 파우사니아스는 그의 임무가 테바이의 정벌이 아니라, 뤼산드로스와 그와 함께 죽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거두는 일이기나 한 것처럼 대동했던 지휘관들에게 휴전을 통해 시신을 거둘 것인지 싸워 이겨 거둘 것인지를 묻고 있었고, 답은 자연히 휴전이었는데21, 그 까닭은 동맹군에 코린토스가 빠져 있었고, 동원된 펠레폰네소스의 병사들은 뤼산드로스가 패배한 것을 알고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바이는 그 전날 무턱대고 쫓다가 당한 반격의 피해가 커서 의기소침하고 있었는데 파우사니아스의 군대까지 도착하자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차에 휴전 제의가 들어오자, 마침 아테나이가 보낸 지원군의 도착에 힘입어 시신을 거둔 다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휴전에 응할 수 없다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나왔고, 뤼산드로스가 죽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22 파우사니아스는 테바이의 요구대로 시신들을 거두어 스파르테로 돌아갔습니다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의 행동들, 이를테면 할리아르토스에 약속한 날짜에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나, 싸워서 이겨 시신을 거둔것이 아니라 휴전으로 시신만 거두고 돌아온 것에 더해, 페이라이에우스에서 포위된 아테나이 사람들을 아테나이로 돌려보내 스파르테의 괴뢰이었던 참주정이 무너지고 지금 스파르테에 적대적으로 나오는 트라쉬불로스의 민주정을 세우게 해 준 것들에 대한 재판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망뿐이어서 테게아의 한 신전에 숨어들었는데, 결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그는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결국 병을 얻어 죽었습니다.
8.1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뤼산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를 잃은 스파르테는 테바이에 아테나이의 중무장보병이 나타났던 사실에 주목하고, 그들 두 도시가 연합하게 된 배경과, 코린토스가 파우사니아스에게 군대를 지원하지 않았던 것도 그들의 연합과 연관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그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캐내어 보기 시작했고, 겨울이 끝날 무렵 스파르테는, 헬라스의 큰 도시들, 즉 테바이와 아테나이와 코린토스와 아르고스가 스파르테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 연합에는 페르시아도 가담하여 자금을 대고 있고, 그 전초전으로 테바이가 포키스를 쳐서 스파르테의 개입을 유도한 것에 걸려 뤼산드로스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서,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23. 헬라스 내전이 끝나고 십 년이 다 되어 가는 동안, 아테나이가 보여 주었던 패권의 유혹에 빠진 데다가 스파르테 사람들의 무사적 기질 때문에 동맹으로 함께 승리한 도시들이나 패배한 도시들에 대해 거칠게 대한 적도 있기는 했었지만, 옛날 키몬의 아테나이가 금광을 빼앗기 위해 타소스를 극단적으로 몰았던 것 같은 경우나, 페리클레스의 아테나이가 이오니아에서의 작은 패권에 욕심을 드러내던 사모스를 본보기로 징벌했었던 같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알키비아데스의 아테나이가 적대적이지도 않았는데 단지 조공을 바치지 않겠다고 한다고 멜로스 섬에 가했던 것 같은 잔혹한 처벌의 경우는 결코 그 비슷한 일조차 없었는데, 페르시아의 핍박에 도움을 요청한 아나톨리아 쪽의 헬라스 도시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때 냉담하게 동참을 거절하더니, 스파르테가 그곳에서 페르시아를 제압하고 헬라스인들의 자유를 돌려주고 있을 때, 서로 힘을 합쳐 싸워도 모자랄 페르시아의 사주와 돈을 받아 헬라스 사람들끼리의 내전을 획책하고, 드디어 스파르테에 칼을 겨눈 것이 할리아르토스 싸움의 정체였다는 것을 깨닫자, 스파르테는 새로운 헬라스 내전을 결심하고, 그 다음에 취할 행동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프뤼기아로 옮겨 간 아게실라오스에게 대 페르시아 작전을 멈추고 스파르테로 즉시 귀환하도록 에피키디다스를 아게실라오스에게 보냈습니다.
8.15. 스파르테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다음 행동을 취해 가는 동안, 테바이가 벌여 놓은 반스파르테 연대에 발을 들여 놓게 된 아테나이는 이제 전력을 다해 스파르테를 이기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고, 이기기 위해서는 연대의 크기를 키우지 않으면 안 되어서, 헬라스에서 큰 도시들, 이르테면 코린토스와 아르고스와의 연대가 필수불가결해졌으며, 더욱 절실한 것은 그들 모두가 페르시아와 손을 잡고 페르시아의 돈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민주정을 세운 아테나이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스파르테의 압박에서 도시를 구하기 위해 아테나이라는 도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페르시아에 가서 물과 흙을 바치며 그들의 관심을 헬라스로 끌어들인 후, 그 때문에 헬라스가 세 번이나 그들의 침략을 받아야 하도록 했던 아테나이가 백여 년이 조금 지난 뒤 다시 그들을 헬라스 안의 세력 다툼에 끌어들인 것입니다.
8.16. 한 편 같은 해 초가을, 뤼디아와 카리아의 페르시아 총독 티트라우스테스의 돈이 헬라스 도시들의 지도자 몇몇에게 흘러 들어가고, 그들이 그들 도시민에게 스파르테와의 알력을 조장하고, 스파르테와의 분쟁을 야기하기 위해 일을 꾸미는 동안, 프뤼기아의 페르시아 총독 파르나바조스는, 스파르테의 아게실라오스가 팃사페르나스가 죽고 나자 뤼디아에서 카리아로 가는 대신 프뤼기아로 옮겨, 자기의 영지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겨울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아게실라오스가 스피트리다데스의 주선으로 파플로고니아와 동맹을 맺고, 그 도시로부터 병력까지 지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피트리다데스의 딸을 파플로고니아의 오티스에게 중매 들어 그 두 페르시아 사람들을 인척으로 엮은 다음, 겨울을 나기 위해 자기가 살고 있는 다스킬레이온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에, 귀한 재물을 간추려 마치 유목민들처럼 움직이며 아게실라오스를 피해 다니고 있었습니다. 파르나바조스가 없는 다스킬레이온에서 겨울을 나면서도 적의 공격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스파르테 군대는 식량 조달에 나섰을 때도 방심했었는데, 한번은 파르나바조스가 전차와 기병으로 습격해 온 일이 있었고, 며칠 뒤 이번에는 파르나바조스가 키우에에 진을 친 것을 알고, 아게실라오스의 보좌관 헤리피다스가 스피트리다데스와 함께 기습하여, 도망친 파르나바조가 남기고 간 많은 재물을 노획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헤리피다스의 이 작은 기습 성공이 가져다 준 엄청난 재물에 대한 탐욕이 스피트리다데스와 동참한 파플라고니아 군대의 체면을 구겨 놓고 말아24, 그들 모두를 그날 밤으로 모두 아리아이오스가 있는 사르데이스로 떠나 버리게 했는데, 이 일은 아게실라오스가 아나톨리아로 온 이래 가장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망연자실하는 아게실라오스에게 퀴지코스의 아폴로파네스가 파르나바조스와의 협상을 제안했고, 그해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스파르테가 반 스파르테 연합의 전모를 파악했을 그때, 파르나바조스는 아게실라오스와 스파르테의 30인 군사위원들과 함께 유목민들처럼 풀밭에 얼굴을 맞대고 앉았습니다. 파르나바조스는 헬라스 내전 당시 스파르테가 받았던 자신의 지원을 상기시키며, 은혜를 원수로 갚아 자기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없어진 현실을 두고 스파르테를 꾸짖자, 겸연쩍어 말이 없는 30인들을 대표하여 아게실라오스가 자신은 페르시아를 상대로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에 속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적으로 간주했던 탓이었다며, 파르나바조스가 페르시아로부터 독립하여 스파르테와 친구가 된다면 부를 동시에 누리게 될 것이라고 응수하였고, 이에 파르나바조스는 페르시아 왕이 자신을 그곳 총독으로 인정하는 한 스파르테와 싸울 것임을 분명히 했고, 아게실라오스는 그런 파르나바조스의 태도를 인정하고 그의 땅을 최대한으로 빨리 떠난다는 것과 앞으로 그와 그의 소유물을 건드리지 않을 것을 약속해 주고 회담을 끝냈습니다.
8.17. 헬라스 내전이 끝나고 열한 번째 해, 즉 헬라스에 내전이 재발한 둘째 해의25 봄이 막 시작될 때, 아게실라오스는 약속한 대로 파르나바조스의 영지를 벗어나, 아나톨리아의 테바이 평원에 진을 치고, 아나톨리아 내지 깊숙히 페르시아 땅으로 쳐들어가기 위해26 사방에서 군사를 보충하고 있었는데, 스파르테로부터 에피키디다스가 도착하여 스파르테의 사정을 설명하고, 최대한으로 빨리 돌아오라는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스파르테가 당면하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볼 때 당장에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조급함과, 그래서 페르시아 땅을 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안타까움을 숨길 수 없는 아게실라오스는27, 동맹도시들의 군대와 용병부대의 지휘관들을 불러 스파르테로 귀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며, 사정이 좋아지는 대로 반드시 돌아와 못다 이룬 일들을 그들과 같이 끝내고 말겠다고 약속하고, 에욱세노스에게 4,000여명의 수비 병력을 주어 동맹도시들을 보호하도록 조치해 준 다음, 그와 함께 헬라스로 가고 싶어하는 일부 동맹도시의 군대와 용병부대는 헬레스폰토스를 건널 때까지 그들의 자질을 심사하여 그들 중에서 정예만 골라 데리고 가기로 작정하고, 그 옛날 크세르크세스가 헬라스를 치러 가며 밟았던 길을 따라 이제는 헬라스 안의 반스파르테 도시들을 치기 위해 스파르테로의 귀환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행군은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트라케를 지날 때까지는 친구로서 통과할 수 있었고, 트랄리아는 통행료를 요구한 데에 더해 힘으로 행군을 저지하려 했으며, 마케도니아 왕은 깊이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더니 나중에 친구로서 지나가게 했는데, 테살리아로 들어오면서부터는 스파르테를 적으로 생각하는 테바이와 동맹을 맺은 도시들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큰 어려움 없이 암피폴리스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28. 그리고 거기서 아게실라오스는 그가 헬라스로 돌아오고 있는 동안 벌어졌던 코린토스의 네메아 전투에서의 승전 소식을 데르킬리다스로부터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데르킬리다스 자신이 참전했다는 코린토스에서의 전투는, 새봄에 아게실라오스를 소환하기 위해 에페키디다스를 헬레스폰토스로 보내고 난 다음, 스파르테는 지난 해 뤼산드로스를 잃은 보복과 반스파르테 움직임에 대한 응징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29, 아직 어린 파우사니아스의 아들 아게시폴리스 왕의 섭정 아리스토데모스에게 그 일을 맡겼고, 아리스토데모스가 테게아, 만티네이아, 시키온 등을 거쳐 코린토스 영토로 들어서면서부터 저지를 당하며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해변을 따라 코린토스의 네메아에 도착했을 때는, 이런 스파르테의 반격을 예상하고 있었던 반스파르테 진영은, 코린토스의 주장대로 가급적 스파르테에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30, 네메아에 집결하여31 그곳에서 이미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내 두 진영의 전투가 벌어졌고, 스파르테와 맞붙은 아테나이가 열세에 밀리면서 반스파르테 진영의 일부가 코린토스 성벽까지 달아나기도 했을 만큼 격렬했는데, 그 전투에서 수없이 많이 죽었지만 스파르테는 여덟만 죽는 손실만 입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승전보를 듣고 아게실라오스는 자기를 따라온 군대의 도시들에게 승전 소식을 전해 주면 사기가 오를 것이라며 데르킬리다스를 헬레스폰토스로 보내고, 암피폴리스를 출발하여 계속 행군해 나아가다 그 중간에 테바이의 동맹인 테살리아의 라리사, 크란논, 스코투사 등의 공격과 추격을 받았고, 그 가운데 파르살로스에서는 천하무적이라는 테살리아의 기병 공격을 자신이 훈련시킨 기병으로 직접 격파하는 전과도 올렸는데, 이때 스파르테에서 디프리다스가 와서 보이오티아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아게실라오스로서는 군대가 오랜 행군으로 지쳐 있고 숫자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증원군만 요청하고, 지휘관들을 모아 행군이 끝이 났으며 지금부터는 전투에 돌입하는 것이라며 계속 나아가, 레오니다스와 그의 근위대 300 영혼들의 환영을 받으며 테르모퓔라이를 지나고, 스파르테의 동맹 포키스의 땅을 거쳐, 보이오티아로 들어가며 스파르테가 보낸 쉰 명의 근위대를 받았고, 코로네이아 인근의 케피소스에 진을 차렸을 즈음에는 동맹 포키아의 군대와, 보이오티아에 있으면서도 반스파르테 진영에 가담하지 않은 오르코메노스가 보낸 지원 군대가 합류해 있어, 근처 헬리콘에 집결하고 있다는 테바이 주축의 아테나이, 코린토스, 아르고스, 에우보이아, 아이니아네스, 그리고 동서 로크리스의 연합군과 한판 좋은 싸움을 벌일 수 있겠다며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일이면 코로네이아로 나아가 전투를 벌일 판인데, 해가 초승달로 변하더니, 스파르테의 해군이 크니도스 부근에서 페르시아의 포이니케 함대를 만나 패하고, 페이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페르시아의 함대는 파르나바조스가 이끄는 포이니케 함대와 아테나이의 코논이 이끄는 헬라스 함대32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페이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테 함대에 들어와 있던 이오니아와 헬레스폰스 도시들의 함선들이 전열에서 이탈하여 도주하는 바람에 패했고, 페이산드로스는 끝까지 그의 함선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이었지만, 아게실라오스는 일식이 일어난 데다가 해전의 패전 소식이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려 내일의 전투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페이산드로스는 전사했지만 해전은 이겼다고 말하고 승전 감사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기를 진작시켰습니다. 이튿날 아게실라오스는 케피소스에서 코로네이아 들판으로 나가 중앙의 방진을 헤리피다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우익, 오르코메노스 군대에게는 좌익을 맡겨 전열을 갖추었고, 테바이와 연합군들 역시 헬리콘에서 코로네이아 들판으로 나와 테바이 군대가 우익을, 스파르테를 대적할 좌익은 아르고스가 나머지는 중군으로 포진하였는데, 전투가 벌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아르고스 군대가 스파르테를 막지 못하고 헬리콘으로 패주하는 일이 생겼고, 테바이는 오르코메노스 군대를 뚫었는데, 전열을 정비한 아게실라오스가 테바이 군대로 몰려가자 테바이 군대는 아르고스와 연합군이 헬리콘으로 패퇴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길을 내며 다가왔고, 그 둘이 맞부딪쳐 백병전을 벌인 결과, 테바이 병사 일부가 헬리콘으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해가 질 무렵에는 스파르테의 완승으로 전투가 끝나 있었습니다. 아게실라오스는 델포이에 들러 전리품 가운데서 신의 몫을 바친 다음, 배편으로 스파르테로 돌아가 아나톨리아에서 시작했던 그의 긴 행군을 끝냈습니다33.
8.18. 한편, 크니도스에서 페이산드로스의 스파르테 함대를 쳐부순 파르나바조스는 코논을 데리고 섬과 연안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스파르테가 보낸 총독들을 쫓아내고, 그 도시들이 아크로폴리스를 요새화하지 않는 조건으로 자치를 허용함으로써 페르시아의 틀 속으로 넣은 다음, 에페소스로 가서 코논에게 40척의 삼단노선을 넘기고, 세스토스에서 만나기로 하고 자신은 육로를 택해 그의 영지로 돌아갔습니다34. 아게실라오스의 부탁으로 헬레스폰토스로 온 데르킬리다스는 아비도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다른 도시들이 스파르테를 버리고 페르시아로 돌아서는 것을 보고 아비도스 시민에게 스파르테가 어려울 때 신실한 우정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영원히 기릴 만한 일이라며 스파르테를 버리지 말라고 연설했는데, 아비도스가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쫓겨난 총독들이 모여들어 아비도스에 유능한 인재가 많아지자, 데르킬리다스는 아비도스의 맞은 편 도시 세스토스로 건너가 템노스 같은 작은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예속되지 않고 잘 지내는 것을 가리키며, 세스토스가 강하고 포위하기 힘든 도시인 만큼 용기를 잃지 말도록 격려하고, 그들이 에우로페 쪽 도시들에서 쫓겨난 총독들을 받아들이게 하고 있었습니다. 영지로 돌아온 파르나바조스는 아비도스와 세스토스의 친스파르테적 움직임을 알아채고, 스파르테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도 먹혀들지 않자, 코논을 시켜 바닷길을 막는 등 방해하고, 자신은 아비도스의 땅에 들어가 약탈을 자행했으나 결국 복속시키지 못했고, 코논에게 헬레스폰토스의 도시들을 페르시아 편으로 끌어들이라고 부탁한 다음 영지로 돌아갔습니다.
8.19. 헬라스에 내전이 재발한 세 번째 해가35 되자, 양측은 지난 해 봄부터 여름이 끝날 때까지 두 번이나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고 진이 빠진 탓이었는지 대규모의 힘겨루기를 멈추고, 그 대신 반스파르테 연합군은 코린토스를 기지로 삼고, 스파르테와 그 동맹군은 시키온을 기지로 하여 서로 전쟁을 계속하였는데, 자기들의 영토가 전장으로 바뀌어 연일 사람들이 죽고 남들은 평화롭게 살면서 곡식을 키우고 지내는 것을 보자, 부자들을 중심으로 제법 많은 코린토스 사람들이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얻기 위해 스파르테와의 강화를 바라게 되었고, 그들은 강화를 바라는 사람들을 모아 그들의 의사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헬라스 안에서는 두 진영의 전쟁이 코린토스를 주된 전장으로 삼아 작은 다툼이 이어지는 소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 헬레스폰토스에서는 파르나바조스가 스파르테에 대한 적대감으로 스파르테를 응징하러 나섰는데, 봄부터 많은 배들을 모으더니 용병들을 고용해 새로운 함대를 출범시킨 다음, 코논을 대동하고 멜로스로 갔고, 거기서 스파르테가 있는 라코니케 쪽으로 옮겨, 먼저 페라이에 상륙하여 그곳을 약탈하고 인근의 해안 지역까지도 엄청난 피해를 주고는 키테라의 포이니쿠스 항구에 정박했습니다. 파르나바조스는 도시를 넘겨 받는 조건으로 키테라 사람들을 라코니케로 가게 하고, 성벽을 수리한 다음 포이니쿠스를 기지로 삼아 아테나이 사람 니코페모스를 책임자로 수비대와 함께 지키도록 하고, 이스트모스로 가서 코린토스를 비롯한 그곳 도시들에게 스파르테와 적극적으로 싸워 페르시아 왕의 신실한 동맹임을 보여야 한다며, 가지고 갔던 돈을 나누어 주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코논은 파르나바조스에게 페르시아를 위해 아테나이에게는 은혜를 베풀면서 스파르테를 응징할 수 있는 자신의 역활 두 가지를 말했는데, 하나는 자기에게 파르나바조스의 함대를 운용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섬들이나 해안의 도시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페르시아의 돈을 쓰지 않고도 해군을 유지하겠다는 것이었고36,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 자금을 지원해 준다면 자기가 아테나이로 돌아가 허물어진 아테나이와 페이라이에우스의 성벽을 다시 쌓고 싶다고, 그러면 스파르테에게는 치명적인 징벌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코논은 파르나바조스로부터 성을 다시 쌓을 돈을 받아 아테나이로 돌아갔고37, 아테나이는 성벽이 허물어진지 열한 해 만에 두 도시의 성벽과 두 도시를 잇는 장성을 다시 쌓기 시작했으며, 성을 허물었던 테바이와 다른 도시 사람들도 나서 장성 복구를 거들어 주었습니다. 한편 파르나바조스의 돈을 받은 코린토스는 즉각 함대를 재건하여 아카이아와 레카이온 주변의 바다를 제압했고, 스파르테도 해군을 증강하여 그곳 바다에서 코린토스 해군과 일진일퇴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큰 도시들의 해군 키우기 움직임은 아테나이를 자극하여 아테나이도 돈이 생기는 족족 운용하는 배의 숫자를 늘려 나갈 것이었습니다.
8.2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태에 걸친 페르시아의 헬라스 용병 함대 운용은 아테나이 선원들에게 모처럼의 큰 돈을 벌 기회가 되었고, 특히 코논은 그가 번 돈으로 도시의 성벽을 쌓는 일에 쓰는 바람에 모처럼 도시에 돈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태 동안 이미 세 번의 육상 전투에 나갔으나 더러는 죽고 다치기만 했을 뿐, 전리품이나 일당 수입이 거의 없었는데 반해, 페르시아의 용병이 되어 바다로 나간 선원들은 큰 돈을 모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코논은 성벽을 다시 쌓을 돈까지 챙겨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도시를 들뜨게 하고 있었지요. 이제 스파르테와의 전쟁이 계속될 것이고, 스파르테가 무너질 때까지 페르시아의 돈이 계속 들어올 것이고, 도시는 다시 스파르테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레이니아 축제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가 술과 노래와 춤으로 가득차고, 디오뉘소스 극장의 연극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었습니다. 아뉘토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코논은 코레고스를 자처하고 나와 코로스들이 다시 극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했는데, 그다지 돈이 들지 않는 디튀람보스 경연만이 겨우 봄철 축제들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던 무대에, 도시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패전으로 고생했던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용기를 내도록 격려하는 희극 작품을 올려 경연에 참가해 달라는 주문을 제게 해 온 것이었습니다38. 너무 긴 세월을 무대에서 떠나 있었던 제게 희극을 만들어 디오뉘소스 극장 무대에 올려 달라니, 저는 제가 언제 희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린 적이 있었나 싶게 희극을 만드는 일이 꼭 난생 처음 해 보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극장을 몇 번이고 가 보고, 코로스들을 만나도 보고 배우들과 연출자들을 만나 보아도 그들 역시 한결같이 낯선 말투로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도시의 자랑인 사람이나, 교활한 권력자나, 특출한 사람이나, 이상한 사람이 없는 도시에서 사람들을 웃고 즐거워할 희극적 대치 인물도 없었고, 자기 앞가림에 바빠 아무도 남들을 돌아보지 않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낄낄거리고 기뻐할 희극적 대치 상황도 없었습니다. 비극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는지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피붙이들이 경연에서 입상도 하며 꾸준히 활동하는가 싶더니 전쟁에서 패하고 나자, 소포클레스가 그의 할아버지 유작 "콜로노스의 오디푸스"를 연출했던 것을 끝으로 비극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8.21. 지금도 물론 옛날 같지만, 아테나이가 새로운 전쟁을 벌이며 제게 연극을 만들어 경연에 참가해 달라고 부탁하던 그 당시로 스무해 전의 그 일이 이미 옛날 같았던 시켈리아 원정이 실패했을 그때는, 패망의 공포가 신들의 금장 옷을 벗기게 하고, 부자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사람들의 주머니를 비우게 하고, 노예도 자유민으로 만들어 주며 전쟁에 내보내고 있었을 그때는, 전쟁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 어이없는 짓들에 대한 분노가 '뤼시스트라테'라는 아테나이의 한 가정주부를 불러내어, 온 세상 여자들과 함께 평화를 위한 궐기에 나서도록 만들었었는데, 그나마도 전쟁 준비에 돈을 퍼붓느라 두 해를 기다려 무대에 올렸었는데, "뤼시스트라테"를 상연한지 스무 해가 지나, 아테나이가 네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겨울을 빼고는 세 번이나 남의 땅에 군대를 보내고, 페르시아에 선원들을 용병으로 보내 전쟁을 치런 대가로 도시에 돈이 좀 돈다고, 무어니 무어니 해도 역시 전쟁이 도시를 번영케 하고, 도시민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래서 내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내일의 희망을 찾도록 해 주기 위해, 그리고 희망을 찾아 나서는 그들의 사기를 올리고 그들이 도시를 다시 살린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해 주기 위해, 그리하여 부활의 신 디오뉘소스를 모시고, 전쟁으로 황폐해졌던 포도밭에 다시 심었던 포도가 이제 제대로 열매를 맺어 그 포도주로 도시민에게 도시가 다시 살아났음을 알리기 위해, 부활의 신인 디오뉘소스에 감사하고, 포도주의 신인 그에게 포도주를 제물로 올리고, 극장의 신인 그에게 연극을 제물로 올려, 그를 경배하는 축제를 전통적인 모습으로 성대하게 열고 싶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도시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들이야 그렇기는 했겠지만, 제가 갑자기 희극 경연에 참가해 달라는 초청을 받다니 정말 저는 아무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만일 그 스무 해 사이에 에우리피데스가 죽지 않았다면, 그래서 제가 "개구리들"을 무대에 올리지 않았었다면, 전쟁에 휩싸인 도시의 분위기는 그 스무 해가 마치 어제였던 것처럼 이어져 느껴졌을 것이었는데, 한 아이가 나서 스무 해라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자신의 세계와 영혼을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키워 주는 시간인데, 한 도시는 어떻게 스무 해가 지났음에도, 그 스무 해가 지나는 동안 도시가 전쟁에 패하여 망하기까지 했음에도, 그 도시는 자기들의 세상과 영혼을 가꾸어 나가지 못하고 다시 또 전쟁으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도시가 변영해야 한다고 저 난리들을 피우니, 정말 도시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영혼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8.22. 도시에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도시민 앞에 어떻게 그 존재를 드러내는가? 도시의 영혼이 어떻게든 드러내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깃든 곳은 어디인가? 도시가 믿는 신들의 의지 속인가, 아니면 도시의 권력자나 지도자의 의지 속인가, 아니면 도시민의 욕구 속인가, 아니면 도시의 전통과 관습과 법 속인가, 아니면 도시의 통치 구조와 제도 속인가? 도시의 영혼이 추구하는 최고 도시의 가치는 도시민 개개인이 추구하는 그들의 최고 가치와 일치하는가, 아니면 상충하는가? 그것을 일치시키는 것이 도시와 도시민을 위한 최선이라면 서로 어떻게 일치시키려 노력하는가? 평소에도 도시민 개개인의 영혼과 도시의 영혼은 서로 소통하는 사이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서로 소통하는가? 도시와 도시민, 도시와 도시, 도시민과 도시민끼리 서로 상충하는 가치가 있다면 어떻게 처리하는가? 이럴 때 그 각각의 영혼들이 하는 역활이 무엇인가? 도시민 각각의 영혼의 총화가 도시의 영혼으로 구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도시의 영혼은 도시민 각각의 영혼에 대해 동등한 역활을 하는가? 그렇다면 도시에 가득찬 불평등은 어떻게 설명되며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도시가 취할 행동에 대해 동등한 투표 권리로 결정하고, 도시가 하는 일에 동등한 기회로 참여하는데도 왜 그들에게 돌아가는 기회나 보상은 동등하지 않으며, 사는 것 또한 동등하지 않은가? 사람마다 달리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것이야 지극히 자연적이고 신적인 현상이지만, 잘살고 못사는 것이야 지극히 인위적이고 인간적인 현상 아닌가? 도시민 각각의 동등함을 바탕으로 이룩된 도시가, 지극히 인간적인 불평등 작용 때문에, 바꾸어 말해 도시민 각각의 불평등한 기회 획득이나 경쟁 때문에, 도시민들이 불평등한 삶을 이어 가는 것에 대해, 다시 말해 그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도시의 영혼이 과연 도시민 각각의 영혼의 총화로 나타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도시의 영혼이 도시의 제도와 관습과 법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라면, 도시민의 불평등한 삶을 해소하기 위해 그것들을 바꾸어 갈 필요는 없는 것인가? 그렇게 바꾸어 가는 것이 도시의 영혼을 살찌우는 일이라면, 그 일이 바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과연 우리의 도시에 도시민 각각의 영혼의 총화로서 도시의 영혼을 살찌우는 정치가 있는가? 오히려 총화를 위한다며 어떤 영혼은 죽임을 당하고, 쫓겨나고, 숨고, 소외되고, 금지당하고, 버려지고 있지나 않은가?
8.23. 소재를 찾는 저에게 이런 생각이 분주하게 저를 어지럽히며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저는 연출자를 찾아 나섰는데, 부자들이 유지했던 코로스가 흩어졌고, 오랜 동안 도시가 배우들을 키우고 관리하지 않아, 스무넷의 코로스를 구성하는 일부터 마땅한 배우를 찾는 일까지 어느 하나 쉬운 일 없었습니다만, 저는 경연 초청에 따라 새봄에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디오뉘소스 신께 오래 올리지 못한 저의 희극 하나를 제물로 올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앞 선 두 작품이 모두 에우리피데스와 연관된 소재여서, 그 앞에 레나이아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 뤼시스트라테와 연결되는 작품을 구상하였고, 모두들 전쟁에 몰두하여 용병으로 나가 일당과 전리품으로 거기서 살길을 찾는 남자들과는 달리, 전쟁터에서 돈을 벌 수 없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겪는 고달픈 삶을 들어 사람들이 도시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들에게 도시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그래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묻고 싶었습니다. 아테나이의 성벽이 거의 옛 모습을 되찾고, 코논이 페이라이에우스로 가는 길의 장성을 쌓기 위해 그와 함께 배를 탔던 선원들을 고용하는 것을 보고, 도시가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도시의 경제적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도시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나 선의가 맡고 나설 경우, 자칫 그 보호가, 코논이 성벽 쌓기에서 그의 선원들을 또 다시 고용하고 있는 경우처럼, 그 개인의 자의적인 선택에 따라 도시민들 간의 또 다른 불평등을 초래하거나, 전체 도시의 이익보다 자의적인 선택으로 그 개인의 이익에 추종할 세력을 만드는 도시에 또 다른 편짜기를 부추기지는 않는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전쟁으로는 먹고 살 수 없는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은 틀림없이 여자들이고, 특히 혼자이거나, 혼자가 아니라도 늙었거나 병든 남편과 살고 있는 여자들인데,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전쟁 때문에 남편이나 아버지나 아들을 잃어 졸지에 생계가 막막해진, 그래서 이제는 그들 남편들이나 아들들의 정치 행위를 통해 도시에게 그들의 정치적 의사를 드러낼 수조차 없어진, 고립무원의 사람들인데, 성벽을 쌓는 공사장에 아무 기술도 없이 흙만 날라도 받는 일당 3오볼로스를 벌 기회마져 배를 저을 수 있는 사람들이 차지한다면, 그것이 한 도시의 정의라면 그 도시의 영혼은 결코 도시민 각각의 영혼의 총화라고 말할 수 있겠는지 물어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8.24. 헬라스에 내전이 재발한지 세 번째 해 가을이 시작될 때 굳혔던 도시민 사이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도시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를 도시민에게 물어보자는 생각이, "새들"에서 페이세타이로스가 새로운 도시를 가꾸는 꿈을 "뤼시스트라테"의 뤼시스트라테보다 더 적극적인 한 여자로 하여금 '구름뻐꾸기나라'가 아니라 바로 아테나이에서 새로운 도시를 꾸려 나가는 꿈을 이루도록 해 주자는 구상으로 떠올랐고, 저의 이런 구상은 한동안 제가 연극에서 떨어져 오래 쉬고 있었던 만큼 제게 대단한 열정과 의욕을 불러 일으켜, 제 스스로 제가 만들 새로운 연극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설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 드렸던 대로 연극에 대한 현실적인 형편은 그렇지 못해, 예심을 거쳐 배당된 코로스와 배우들을 만나 저의 연출 계획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미 저는, 급조된 코로스로서는 그들이 겨우내 연습에 매달린다 해도 "새들"이나 "뤼시스트라테"에서와 같은 정통적인 코로스의 역활을 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고, 코로스의 대장조차 관객들을 휘어잡고 그 관객들을 연극 속으로 끌어들일 경험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자, 새롭게 타올랐던 저의 열정과 의욕을 그들 수준에 맞도록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희극 코로스를 통해 에우리피데스와 경쟁하며 희극 무대에 올렸던 주옥 같은 신들에 대한 찬가와 시편들이며,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던 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정형을 과감히 포기하고, 디오뉘소스에 대한 찬가는 물론 아테나이가 믿는 다른 신들에 대한 찬가 없이, 코로스의 유쾌한 율동과 떠들썩한 행진 없이, 오로지 배우들로만 무대를 꾸려기로 결심했고, 막간에 배우들이 분장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그 동안만 코로스가 나서 노래를 부르게 하는 한편, 관객을 사로잡을 수 없는 코로스장에게 어설프게 파라바시스를 맡길 게 아니라, 에페이소디온에서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기로 하면서, 새로운 아리스토파네스식 희극의 정형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8.2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헬라스 내전 재발 후 네 번째 해39 새봄의 레나이아 디오뉘소스 축제 희극 경연에 올린 "여자들의 민회"는 지금까지 아테나이의 희극 애호가들이 보아 왔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희극이었고, 여러분은 "새들"에서 신들의 축복을 받은 새로운 도시 구름뻐꾸기나라를 본 후, 이번에는 여자들만이 가진 가정 살림 기술로 프락사고라가 아테나이에서 새로운 도시를 꾸려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그때 여러분이 본 저의 희극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늙은 남편을 가진 한 아테나이의 젊은 아내 프락사고라가 같은 처지에 있는 주위의 여자들을 규합하여40, 도시의 정치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단지 평화를 가져와 도시민에게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시와 세상을 상대로 태업 궐기하는 뤼시스트라테와는 달리, 남장을 하고 남편들 대신 민회에 참석하여 민회가 여자들에게 도시를 다스리라고 넘기는 결의를 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뒤41, 소란하고 번잡한 아테나이를 떠나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공간인 새들의 공간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자기가 그 새로운 도시민으로서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만 받아들이는 정치적 실험을 하는 페이세타이로스와는 달리, 민회에서의 변장 속임수로 정상적인(?) 정권 인수를 통해 도시를 넘겨 받은 여자들의 주모자 프락사고라는, 집으로 돌아와 늙은 남편에게 자기가 일으킬 정치적 혁명의 내용을 설명하는데, 도시민 각각의 모든 재산을 도시민 모두가 공동으로 소유하여 빈부격차를 없애고, 그 공유재산을 여자들이 공동으로 운용하여 모두가 같은 수준으로 살아가도록 할 것이고, 도시민 각각의 가족을 해체하여 도시 공동의 가족으로 되고, 도시민 각각의 집들도 벽들을 허물어 모두가 드나들 수 있는 하나의 큰 집으로 만들고, 도시의 법정이나 주랑 같은 공공시설들은 모두 공동식사장으로 바꿀 것이라서, 여자들이 다스리는 도시는 궁극적으로 만인이 모두 참여하는 삶을 향유하도록 해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치적 혁명 내용을 두고 늙은 남편과 이웃에서 온 남자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가며, 실행이 미심쩍은 분분에 대해 그녀와의 논쟁이 아닌 일문일답을 통해 집행 가능성을 확인하는데, 그들에게 혁명이 성공할 것이란 예감을 심어 준 뒤, 프락사고라는 혁명 과업을 집행하기 위해 아고라로 옮겨 가고, 거기서 그녀가 혁명 과업을 법제화하고 시행하기 시작하는 동안, 파라바시스 대신 코로스는 막간 노래 하나를 부르고 맙니다42. 코로스의 노래에 이어 펼쳐지는 에페이소디온은 딱 두 가지만 보여 주는데, 혁명 내용을 설명할 때 남편과 이웃이 제기한 의문들에 대한 구체적인 경우로, 혁명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야기되는 분쟁과 억지스런 해결을 그린 희극적인 상황에서 희극적인 인물들이 벌이는 사건들이지만, 뤼시트라테가 성적 태업 궐기가 성공할 때까지, 바꾸어 말해 그 연극이 끝날 때까지 자기의 역활을 다해 나가고, 페이세타이로스 역시 자기의 정치 실험을 성공시키고 신의 사위가 될 때까지, 바꾸어 말해 그 연극이 끝날 때까지 자기의 역활을 즐기고 있는 데 반해, 프락사고라는 법으로 인간 본성을 제어하려는, 다시 말해 법으로 자연의 불평등을 평등해지도록 강제하려는 자기의 혁명 과업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이 두 번의 중대한 에페이소디온에서 모습을 감추고, 바꾸어 말해 이때부터 이 연극이 끝날 때까지 무대에서 사라져43, 자기의 혁명 과업을 방치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그것이 법이라 하기에 출연할 재산을 꾸리고 있는 이웃에게 한 남자가 와서, 자기는 모든 사람이 그 법을 따르는 것을 본 뒤에나 재산을 출연하려 한다며 그 이웃을 어리석다고 놀리면서, 자기는 재산을 출연하지 않고도 공동식사에 초대되어 밥을 얻어 먹는 계략을 세울 것이라는 장면이고44, 코로스의 막간가45 다음에 진행되는 두 번째 경우는 새로운 법으로 성적 행위를 즐길 기회의 평등에다, 그것을 지킬 담보로 우선적인 기회 확보권까지 얻어, 이제는 상대할 젊은 남자를 기다리는 노파들은, 공동 가족이 되어 그들과 같이 지내는 젊은 여자를 찾아온 젊은 남자 에피게네스를 보자, 서로 권리를 내세우며 쟁탈전을 벌이는데, 노파와 젊은 여자의 쟁탈전은 그 노파가 젊은이에게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 같다는 젊은 여자의 항의가 먹혀들어 노파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막무가내로 법을 들고 나오는 다른 노파에게 그 젊은 여자도 어쩔 수 없는데, 그 판에 또 다른 노파가 나타나 이제는 노파끼리의 쟁탈전으로 바뀌고, 결국 에피게네스가 그 두 노파에게 잡혀 집으로 끌려 들어가는 장면입니다46. 이 두 번째 에페이소디온으로 희극적 상황을 극대화 시킨 뒤, 희극적 감정에 고조된 관객들을,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막간가도 없이, 공동식사장의 포도주에 취한 프락사고라의 하녀와, 그리고 코로스장과 코로스가 아직도 저녁 식사를 하지 않은 프락사고라의 남편 블레퓌로스와 나머지 사람들에게 프락사고라가 주최하는 공동식사장으로 인도하는 엑소도스로 연극이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8.2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재판관들에게 일당을 줄 돈이 없어 재판을 미루어야 했을 정도로 쪼들리던 도시에, 민회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참가 수당을 주어야 했을 정도로 도시의 일보다는 우선 자기 먹고 사는 것이 더 급했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민회 참가비를 받아서라도 먹고 살기 위해 별을 보고 프뉙스로 몰려드는 판에, 모처럼 레나이아 디오뉘시아에 연극 경연을 부활시킨 만큼, 디오뉘소스의 도움으로 스무두 해 전의 "새들"을 능가하는 대작을 무대에 올려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경연 무대에 제일 먼저 오른 저의 작품은 주연 배우와 코로스 대장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심사에서 꼴찌를 하고 말았습니다47. 저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새들"에서48, 주인공 페이세타이로스는 아테나이를 떠나고 나서야 '새들'과 함께 그가 바라는 도시를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었지마는, 이번의 "여자들의 민회"에서는 공 프락사고라가 아테나이를 떠나서가 아니라 아테나이에서 아테나이 시민이 바라는 도시를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도록 더욱 크게 만들고 싶었지만, 코로스의 역활이 없어진 작품은 오히려 아주 작아지고 말아, 프락사고라의 혁명적 아테나이는 분명 실패하고 말 것이었습니다49.
8.27. 이렇게 아테나이 사람들이 새로운 전쟁이 가져다 준 작은 부로 모처럼의 연극 경연과 장성 복구라는 도시의 회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동안, 테바이가 든 반스파르테의 기치 아래서 스파르테와의 대적은 스파르테에서 가까울수록 좋다는 전략을 주도하는 바람에 자기들 도시를 주전장으로 만들어 버린 코린토스 사람들은, 멀리 있는 동맹 도시들이, 이를테면 아테나이나 테바이는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곳의 아르고스는, 전쟁에서 벗어나 농사도 짓고 사는데, 자기들만 시키온에 진을 친 친스파르테 군대에게 노출되어 수시로 공격당해 농사도 못 짓고 고통을 받게 되자, 토지를 가진 부자들을 중심으로 스파르테와의 강화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 반대로 전쟁을 해야 페르시아로부터 돈을 받는 반스파르테 동맹의 지도자들이나, 전쟁을 해야 용병으로 나가 돈을 벌 수 있는 군인들은 이런 평화주의자들이 결국 친스파르테로 돌아설 것이라며, 그들에 대한 살륙을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헬라스 내전이 재발하고 삼 년이 지났을 뿐인데, 코린토스에서 케르퀴라에서처럼 같은 도시 사람들이 코린토스에 주둔하고 있던 아르고스와 다른 동맹군과 합세하여 자기들 도시 사람들에 대한 살륙이 또 다시 자행된 것입니다. 살륙은 놀랍게도 사형수도 처형하지 않는 신성한 에우클레이아 축제의 마지막 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노려 벌어졌고, 살륙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가 더 이상 코린토스가 아니라 아르고스로 되어 버렸다고 느꼈으며, 몇몇은 그들의 도시 코린토스를 되찾기 위해 시키온으로 가서 스파르테의 프락시타스를 만났고, 코린토스에서의 살륙을 확인한 프락시타스는 그들의 도움으로 코린토스 안으로 들어갔으나 중과부적임을 깨닫고 방어선을 구축한 뒤 원군이 올때까지 하루 밤을 지냈고, 코린토스의 주전파들은 이피크라테스의 용병 부대와 아르고스의 원군를 이끌고 이튿날 코린토스의 화전파들과 프락시타스를 공격하여, 상호 수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화전파들이 주전파들을 격퇴시켰고, 스파르테의 원군이 도착하자 성벽을 허물고 군대의 출입이 편하게 한 다음 코린토스와 시키온에 각각 수비대를 두고 프락시타스는 메가라를 공략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8.28. 한편 스파르테는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의 돈으로 성벽을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조금씩 배들을 늘려 나가더니 자체적인 해군을 운용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여, 이제는 헬라스의 섬들과 연안의 다른 도시들과 연계하고 나오자, 안탈키다스를 사르데이스로 보내 페르시아 왕의 장군 티리바조스를 만나, 이오니아와 아나톨리아의 헬레네 사람들의 도시들에 대해 페르시아 왕의 의사에 반하여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헬라스의 나머지 섬들과 도시들도 자주권을 갖도록 하여, 스파르테가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페르시아와의 강화를 타결하도록 했습니다. 안탈키다스가 티리바조스를 만나러 간다는 소식에 아테나이도 코논을 위시한 사절단을 반스파르테 연합 도시들의 대표들과 함께 티리바조스에게 보냈고, 그들은 스파르테가 내놓은 조건대로 강화가 이루어질 경우 자주권을 얻은 헬라스의 섬들과 도시들이 그들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것을 우려하여 강화를 반대했는데, 티리바조스는 우선 아테나이의 코논을 독자적으로 해군을 운용한 잘못을 물어 구금하고, 안탈키데스에게는 따로 해군을 증강할 수 있는 자금을 주어 반스파르테 도시들이 스파르테의 강화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한 다음, 강화 조건과 코논 구금 사실 등을 보고하기 위해 페르시아 왕에게로 갔습니다.
8.29. 헬라스 내전 재발 다섯 번째 해50 초에 페르시아 왕은 티리바조스의 보고를 듣고, 헬라스와 아나톨리아 쪽 사정을 좀 더 알아보라며 스트루타스를 보냈는데, 아게실라오스에게 페르시아가 얼마나 당했는지 잘 알고 있는 그가 스파르테에게는 적대적이고 아테나이에게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스파르테 역시 그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티브론을 에페소스로 보내 그에게 대항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다시 아나톨리아로 돌아온 티브론은 에페소스에서 마이안드로스 평원으로 나가, 그곳의 프리에네, 레우코프리스, 아킬레이온을 거점으로 확보한 뒤, 주위의 페르시아 땅을 마음껏 유린했는데, 이런 일방적인 약탈과 유린이 계속되자 티브론은 물론 그의 군대도 전열이 흩으러지고 방만하게 되었고, 결국 스트루타스의 대규모 정예 기병들의 공격을 받고 티브론은 죽고 군사들은 죽거나 도망쳐 버려 그의 군대가 괴멸되고 말았습니다. 스파르테는 로도스 섬에서 정변이 일어나 아테나이의 영향권으로 들어갈 판에 놓이자, 여덟 척의 함선을 꾸려 엑디코스를 해군 장군으로 로도스로 보내면서, 전사한 티브론의 후임으로 디프리다스도 함께 보내 괴멸된 티브론의 부대를 재건하고 다름 병력도 보충하여 스트루타스에 대항하며, 스파르테를 따르는 도시들을 보호하도록 했는데, 디프리다스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엑디코스는 로도스가 이미 정변으로 뒤집어져 있는 데다가 함선도 스무 척이 넘게 가지고 있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크니도스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8.30. 펠레폰네소스에서는 친스파르테 진영과 반스파르테 진영이 고용한 용병들의 대리전이 계속되었고, 반스파르테 진영이 고용한 용병부대를 이끄는 코린토스의 이피크라테스는 플레이우스를 공격하고, 아카르디아 지역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자행하는 등, 전쟁의 양상이 용병들의 무대로 바뀌어 가는 듯했습니다. 스파르테는 도움을 요청하는 플레이우스로 출병했고, 스파르테의 움직임에 겁이 난 코린토스 주둔 아테나이 군대는 황급히 다른 도시들 군대의 도움을 받아 프락시타스가 허물어 버린 코린토스의 성벽을 다시 쌓아 방어에 들어 갔고, 가을이 되자 이번에는 스파르테는 아르고스가 아무 어려움 없이 전화를 피해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아게실라오스로 하여금 아르고스를 치도록 했는데, 아게실라오스는 아르고스 땅 전체를 유린한 뒤, 테네아를 거쳐 코린토스로 가서 아테나이 군대가 다시 쌓은 성벽을 장악했고, 때마침 그의 동생 텔레우티아스가 열두 척의 삼단노선을 가지고 코린토스의 해군을 깨고 해군기지를 점령하여 형제가 육지와 바다에서 전공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아게실라오스는 스파르테로 돌아가고, 코린토스 해군을 격파한 텔레우티아스는 그 열두 척의 함선을 끌고 엑디코스를 지원하기 위해 떠났는데, 가는 길에 사모스에서 일곱 척의 함선을 얻어 크리도스에서 엑디코스와 합류했을 때는 모두 스무일곱 척의 함대가 되었습니다. 한편 아테나이는 페르시아에 대항해 싸우는 에우아고라스를 지원하기 위해 에피알테스의 아들 퓔로크라테스에게 스무 척의 함선을 주어 퀴프로스로 보냈는데, 동맹 도시들을 보호하기 위해 항해 중이던 텔레우티아스의 함대에 걸려 배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고51, 텔레우티아스는 크니도스로 가서 전리품을 팔아 모은 돈으로 로도스의 친스파르테 정파에 자금을 원조해 주었습니다.
8.3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헬레스 내전 이 재발한지 여섯 번째가 되던 해52 봄이 오자, 아테나이는 트라쉬불로스에게 마흔 척의 함선을 마련해 주고 스파르테의 해군을 견제하도록 했는데, 트라쉬불로스는 로도스의 민주정파들이 충분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로도스 대신 먼저 헬레스폰토스로 갔고, 거기서 오드리사이와 트라케 사이의 불화를 중재하여 양쪽을 아테나이의 동맹으로 만들었고, 비잔티온을 민주정 체제로 바꾼 다음, 칼케돈과도 우호 관계를 맺는 등 헬레스폰토스에서 아테나이의 영향력을 복원하였습니다. 헬레스폰토스에서 성공한 그는 내친 김에 레스보스 섬으로 가서 뮈틸레네만이 아테나이에 호의적인 것을 알고, 그들이 앞으로 레스보스 섬을 지배할 것이라며 섬 안의 인근 도시들을 공격하도록 부추기고 자기 병력도 동원하여 메튐나로 쳐들어갔는데, 메튐나에 주재하고 있던 스파르테의 테리마코스가 메튐나 주민들과 함께 분전했으나 서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전사하였고, 이로써 레스보스 섬은 뮈텔레네가 지배하게 되면서 아테나이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8.32. 아테나이의 트라쉬불로스가 헬레스폰토스에서 활약하고 있던 그해 여름, 아게실라오스는 코린토스 사람들이 페이라이온 산록에 가축을 대피시켜 놓고 식량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번에는 이스트모스르 통해 다시 코린토스 원정에 나섰습니다. 마침 그때가 이스트모스의 경기 축제53가 열리는 달이어서 아게실라오스는 포세이돈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여유롭게 페이라이온으로 향하다가 그곳에 이미 많은 군사가 지키고 있어 코린토스로 공격 방향을 바꾸려 했었는데, 이런 스파르테의 움직임을 본 코린토스는 급히 페이라이온으로부터 이피크라테스와 그의 용병 부대, 그리고 아테나이의 지원군을 코린토스로 불러들였고, 밤사이 군대가 움직인 것을 안 아게실라오스는 새벽에 페이라이온으로 가서 산정으로 군사를 보내 산록을 장악하자, 페이라이온에 있던 코린토스 사람들은 방어를 포기하고 헤라이온으로 도주했으며, 스파르테는 페이라이온 산록 아래의 메가라 경계 요새인 오이노에를 점령했고, 이런 와중에 멀리서 포세이돈 신전이 불타는 것이 보였지만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포로와 전리품을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게실라오스가 페이라이온 산정으로 군대를 올려 보내고 있을 때, 레카이온에 주둔하고 있던 스파르테 수비대는 함께 있던 아미클라이 군대가 아폴론을 경배하는 그들의 히아킨티아 제전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하자 그들이 코린토스 경계를 안전하게 지날 수 있도록 시키온 너머까지 호송하고 있는 걸 아테나이의 칼리아스와 코린토스의 이피크라테스가 급습하였고, 양측은 서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으나, 스파르테 측의 피해가 점점 커졌고, 마침내 레카이온에서 배가 와서 남은 군대를 구출해 갔으나 그 피해는 아주 컸습니다. 아게실라오스가 기병의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왔으나 상황은 끝이 나 있어, 그는 레카이온 주둔군을 교체 배치한 후 스파르테로 돌아갔고, 이피크라테스와 그의 용병 부대는 스파르테의 중무장병을 깬 여세를 몰아 연전연승하며 그전에 프락시타스가 구축한 시두스와 크롬미온은 물론, 방금 아게실라오스가 구축하고 떠난 오이노에 요새를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8.3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헬라스와 아나톨리아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장기적인 소모전의 양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던 전쟁 여섯 번째 해 가을에, 저는 그 전 겨울에 만든 새로운 희극 하나를 가지고 다음 해 새봄에 상연하기 위해 배우들을 연습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새로운 희극은, 아테나이가 퓔로크라테스에게 이끌도록 했던 스무 척의 함대를 스파르테에게 빼앗긴 다음, 새로 함선을 만든다며 부자들에게 있는 돈 없는 돈 걷어 쌓는 것을 보면서, 저 돈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안다면, 바꾸어 말해 자기가 어디에 쓰이는 것이 좋은 것인지를 안다면, 그리고 그 돈이 눈이 멀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점에 어디에 가서 쓰일 것인지 하는 생각이 나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죽은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돈을 쌓아 두는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지요. 재물을 쌓지 말고 영혼을 살찌우라고요. 그리고 욕망과 기대를 가장 적게 하는 것이 적은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길이기에 필요한 것이 가장 적은 사람이 신에게 가장 가깝다며, 자기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사람인지 모른다며 혼자 중얼거렸지요. 그래서 소크라테스 개인의 영혼은 살이 쪘고, 매사에 만족할 만큼 필요한 것이 없어 그가 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크라테스야 그렇다손 쳐도 그렇지 못한 도시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이 재물을 모으고 잘 사는 것과 영혼을 살찌우는 일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지 따져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마치 그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고 느낄 만큼, 돈을 버는 것이, 그래서 돈을 가지는 것이, 그래서 돈을 모으는 것이, 마치 나쁜 일인 것으로 비춰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이 가난한 도시에, 의사에게 줄 돈이 없고, 재판관에게 줄 돈이 없고, 배우들에게 줄 돈이 없는, 이 가난한 아테나이에, 아직도 전쟁을 위해 배를 만드는 데 돈을 낼 수 있는 부자가 밥을 굶는 사람들만큼이나 많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한데,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재물을 가진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도시의 경우로 바꾸어, 도시가 재물을 쌓기보다 도시의 영혼을 살찌우는 것에 힘쓴 나머지 가난하지만 영혼이 살찐 도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도시의 영혼이 살찌면 도시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많은 부자들은 그들이 근면했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더 많은 부자가 신의 덕분에 운이 좋았었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착하고 올바른 사람들이란 말인지도 따져보고 싶었습니다. 부자가 되는 데도 신적 작용이 개입한다면 가난한 사람이 되는 데도 신의 입김이 불어 넣어진 것은 아닌지 알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롭고 착한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가난해져야 한다면, 지금처럼 가난한 아테나이도 그 도시의 영혼이 정의롭고 착해서 그런지 알고 싶었습니다.
8.34. 신을 두려워하며 정직하게 살았어도 늘 가난했던 늙은 농부 크레뮐로스는, 자신의 인생은 이제 끝났지만, 하나 뿐인 그의 아들이 사는 방법을 바꿔 악당이나 불의한 자나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면 성공한 인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신에게 자기의 이런 생각이 맞는지 물어보러54 델포이로 노예 카리온을 데리고 왔는데, 신탁은 그의 물음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고, 다만 신전을 나설 때 처음 만나는 사람을 설득하여 집으로 데려가라고만 하자, 크레뮐로스는 신전을 나오면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인 한 봉사를 뒤따라가고, 영문을 모르고 따라가던 노예가 너무나 황당한 주인의 행동을 독백으로 그 주인이 있는 데서 비난하는데, 연유를 말하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겠다는 노예에게 아폴론의 신탁을 이야기해 주면서 그 신탁을 곧이곧대로 믿는 그 농부와, 신탁이 농부의 아들을 아테나이식으로 기르라는 뜻, 다시 말해 봉사도 볼 수 있을 만큼 명백하게 그의 아들이 아무 쓸모없는 삶을 살도록 하라는 뜻이라는 노예 사이의 다툼 때문에, 도대체 그 봉사가 어떤 사람이기에 신이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는지 알지 않으면 신탁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없다고 여겨, 그 둘은 델포이에서부터 아테나이까지 따라왔던55 그 봉사를 붙잡아 신분을 밝히라고 다구치고, 견디지 못한 봉사는 자기가 '부의 신' 플루토스임을 밝힙니다. 그가 부의 신이라는 말을 듣고도 그의 초라한 몰골 때문에 농부와 그 노예가 믿지 못하자, 부의 신은 제우스가 인간들을 미워해서, 특히 착한 사람들에게 악의를 품고 있어, 어릴 때 자기가 정직하고 현명하며 점잖은 사람들에게만 찾아가겠다고 서약했더니 그러지 못하도록 눈을 멀게 만들었다고 설명하는데, 크레뮐로스는 부의 신이 시력을 회복할 경우 사악한 사람들을 멀리하고 정직한 사람들에게 갈 것이라는 말에 그의 눈을 뜨게 해 주겠다고 나서고, 부의 신은 제우스의 보복이 겁나 눈을 뜨지 않겠다고 버티자, 크레뮐로스는 부의 신을 달래면서, 제우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수단은 돈인데 그 돈은 부의 신이 대주는 것이니 돈을 끊으면 아무도 제우스에게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제물을 바칠 리 없어, 제우스는 무력화되고 말기 때문에 눈을 떴다고 제우스가 괴롭히면 제우스를 무력화시키면 된다고 가르쳐 줍니다. 이제 농부와 그 노예는 반신반의하는 부의 신에게 인생에 찬란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것이 있다면, 제우스에 맹세코, 그건 부의 신 때문이라며, 어디서나 돈이 판치는 세상에 대해 말해 주는데, 돈 때문에 노예가 되며, 돈 때문에 남자나 여자나 몸을 팔고, 돈 때문에 도둑 강도가 되며, 사랑도 예술도 기술도 돈이 없으면 기를 펼칠 수가 없고, 전쟁도 돈이 없으면 이길 수가 없다고 여러가지 예들을 든 다음, 세상 모든 것에 물리는 사람들이 돈에는 물리지 않는다며 설득하자 솔깃해 하지만 아직은 소극적인 부의 신을 비겁하다며 욱박지르고, 인간이 신의 눈을 뜨게 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는 부의 신에게 델포이에서 아폴론의 언약을 받았다고 안심시키면서, 일용할 양식이 늘 달리는 정직한 동네 농부들을 부의 신의 지지자로 불러 모으게 하고, 드디어 크레뮐로스는 부의 신을 자기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56. 노예 카리온은 코로스장과 흥겨운 말장난 싸움을 벌이며 동네 농부들로 구성된 코로스와 함께 오케스트라로 달려 들어와, 불러 모은 까닭을 묻는 코로스장에게 그의 주인이 부의 신을 모시고 왔는데, 그들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알려준 다음, 코로스와 함께 유행하던 디튀람보스를 파로이디아 하고 오딧세이아의 한 부분도 넣은 새로운 형태의 파로도스를 선보입니다57. 이제 부자가 된 코로스를 대표하여 코로스장이 크레뮐로스의 요청대로 아직 앞이 보이지 않는 부의 신을 빼앗기는 없도록 지키겠다고 상무정신을 보일 때, 노랍게도 하룻밤 사이에 부자가 된 크레뮐로스가 친구들까지 불러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정말 더 놀라운 소문을 들은 블렙시데모스가 찾아오고, 크레뮐로스는 불의를 저질러 부자 되었다고 믿는 그 친구에게 부의 신이 자기 집에 와 있는데, 봉사라서 우선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부의 신이 자기 집을 찾지 않은 까닭을 이해하게 된 그 친구는 크레뮐로스의 제안대로 부의 신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데려가기로 합니다58. 그들이 서두르고 있는데 느닷없이 무섭게 생긴 쪼그랑할멈 모습을 한 가난의 신 페니아가 고함을 치며 달려와 그 둘이 부의 신을 는 뜨게 하여 자기를 모든 나라에서 쫓아내려는 해코지를 한 죄를 묻자, 크레뮐로스는 부의 신이 눈을 뜨는 것은 전 인류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며 그것이 어떻게 가난의 신에게 하는 해코지냐고 되물어, 가난의 신과 크레뮐로스 사이의 논쟁이 시작되고, 코로스장의 간단한 응원을 받으며59 크레뮐로스가 먼저 착한 사람들이 행복해야 하고 나쁜 사람들들은 그 반대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앞세워 부의 신의 시력 회복을 옹호하면서, 부의 신이 봉사라서 벌어진 현실, 부의 신이 사악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가난의 신이 착한 사람들과 같이 지내는 현실을 미친 지랄이거나 신의 악의 때문이라며 극렬히 비난하는데, 가난의 신은 세상에는 사람들이 각자 맡아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일들도 있는데, 누군가가 그런 일들을 수행하도록 하는 동기로 가난이 필수적이라며, 모두가 부자가 된다면 누가 그런 일을 하겠냐고 공박하여, 논쟁은 상방이 구체적인 실례들을 들어 다투다 가난의 신이 논리적으로 압도해 가자, 결국 크레뮐로스가 던진 부자가 되는 것이 나은지 가난뱅이가 되는 것이 더 나은지 헤카테 여신에게 물어보라는 일격에 논쟁은 의미를 잃고, 더 나은 것에 대한 선택의 문제를 논박할 수 없는 가난의 신은 아테나이의 제일 가는 거지 파우손에게 도움을 받으라는 최후의 일격으로 나가떨어지고60, 크레뮐로스와 블렙시데모스는 계획했던 대로 부의 신을 데리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갑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에페이소디온은61 이튿날 신전에서 먼저 돌아온 카리온이 크레뮐로스의 아내와 코로스, 그리고 관객들에게 아스클레피오스가 어떻게 부의 신을 치료했는지 설명한 뒤, 이제 눈을 뜬 부의 신이 사람들로부터 환영 받으며 이리로 오고 있다고 전하자, 그 아내 역시 부의 신을 환영할 준비를 하는데, 막간가로 잠시 뜸을 들인 부의 신이 등장하여 이제는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겠다고 말하고, 이어서 크레뮐로스가 등장하여 신전에서 오는 동안 벌써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알은 채한다며 염량세태에 화를 내는 가운데, 크레뮐로스 아내의 환영을 집 안에 들어가 받겠다는 부의 신의 뜻에 따라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갑니다. 제물로 올릴 음식 만드느라 재물만큼 집 안에 가득 들어찬 연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나온 카리온에게 어려운 친구들을 돕느라 충분했던 유산을 다 쓰고 몰락했다가 부의 신 덕분에 다시 잘살게 된 정직한 청년 하나가 가난했을 때 입었던 다 해어진 외투와 구두를 봉헌물로 부의 신에게 경배 드리고자 왔다고 말하는데, 마침 공사 불문하고 아테나이의 모든 업무를 감독하는 자원봉사자이자 뛰어난 애국자로 자처하는 밀고자가 부의 신 때문에 쫄딱 망했다며 항의하러 오고, 그에게 직업을 바꾸어 좋은 일을 하고 살도록 권하는데도 불응하자62 둘이서 그를 쫓아버리는 세 번째 에페이소디온과, 돈으로 묶어 두고 남자 친구로 지내던 잘생기고 착한 젊은이가 부의 신 때문에 부자가 되는 바람에 자기 곁을 떠나 버려 인생이 살 가치가 없게 되어 버린 노파 하나가, 그 젊은이를 부자로 만든 것은 좋지만 예전처럼 자기에게 대한 봉사도 계속하게 하는, 부의 신의 공평한 처사를 요구하기 위해 찾아와서 우선 크레뮐로스에게 하소연하는데, 마침 거나해진 그 젊은이가 부의 신에게 바칠 화관을 들고 나타나고, 티격태격하는 둘 사이의 중재를 위해 부의 신에게 들여보내는 네 번째 에페이소디온과63, 모두 부자가 되는 바람에 아무도 신에게 제물을 올리지 않아 허기져 죽을 지경인 헤르메스는 크레뮐로스 집으로 찾아가 제우스가 그의 일가족과 하인들은 물론 가축들까지 모두 처형할 것이라며 협박해 보지만, 그 신을 응대하는 카리온은 신들이 제물을 바쳤을 때 사람들을 보살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제물을 바치지 않을 것이라 단언 하자64, 신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사람들이 시켜주는 새로운 역활을 맡아 하겠다고 나서고, 카리온으로부터 겨우 경기를 주관하는 신의 역활을 허락 받아 크레뮐로스의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난 다음, 구원자 제우스의 사제가 찾아와서 역시 제물을 받지 못하는 관계로 구원자 제우스에게 작별을 고하고 크레뮐로스 곁에 머무르기를 바라는데, 마침 부의 신을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아테나 여신의 보물창고 수호신으로 안치시키기 위해 나서던 참이라, 크레뮐로스는 구원자 제우스도 와서 함께 있다며 그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당장 횃불을 들고 부의 신을 모시고 가는 행렬을 인도하는 일을 맡기면서 다섯 번째 에페이소디온이 끝나고, 이어서 부의 신을 따라 나온 노파에게 젊은이가 밤에 찾아갈 것이라며 음식 나르는 일을 주어 행렬을 따르도록 하여, 자연스럽게 코로스의 엑소도스 노래로 연극은 끝을 맺습니다65.
8.3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헬라스 내전이 재발한지 여섯 번째가 끝나가는 한 겨울에 저는 이 희극 "플루토스"의 연습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코로스의 대장이 제게 왜 관객들과 경연의 심사위원들에게 늘 하던 인사를 넣지 않았느냐고 물어66, 저는 함께 한 배우들과 코로스에게 "플루토스"가 저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희극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저의 아들 아라로스가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작품을 경연 무대에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고67, 그를 잘 부탁한다고도 말했는데, 그것은 아들이 오르는 무대에 아버지가 올라 같이 경연에 나서는 것이 겸연쩍어서가 아니라, 그 당시 저는 이미 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관객의 기대에 맞출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희극 작가 인생을 마감하는 "플루토스"가 관객들의 호응은 물론 심사위원들에게도 주목을 받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심사위원들이 희극에 더 이상 정치나 도시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의 공상적 희극 소재가 코로스와 함께 왁자지껄 그냥 한번 박수치고 노래 부르며 춤추고 놀자는 판에는 어울리지만, 너 잘 웃긴다며 오늘 나 한번 웃겨 보라고 지켜보는 판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미 관객의 관심이 달라져 있었고, 그들은 더 이상 제가 제기하는 도시의 문제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는데, 이미 그들이 자기들의 이익에 직접 관계가 없는 일, 다시 말해 남의 일에 크게 주목하지 않게 되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야 했는데, 보통 사람들에게서 희극적 인간상을 찾아내고 그들이 맞닥뜨리는 희극적 상황을 연출해 내는 일은 저의 아들과 그의 동료 작가들이 그렇게 할 것이었습니다. 젊은 작가들은 관객들이 이제는 저의 뤼시스트라테나 아낙사고라나 크레뮐로스에 더 이상 열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연극에 저나 에우리피데스가 담았던 주옥 같은 시가 사라진 것이, 그 시를 노래하는 코로스가 사라진 것이 그런 변화를 증명하고 있었습니다68. 여러분도 불과 십수 년 전의 디오뉘소스 극장 분위기를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디오뉘소스 극장에 입문했을 때의 관객들은 극장에 오기 전부터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극장에 들어와 앉으면 웃기부터 하였습니다. 그들은 에우리피데스를 보러 올 때도 울 준비를 하고 왔고, 주인공의 비탄가가 나오기도 전에 벌써 울고 있었습니다. 연극의 경연은 코로스의 경연이었고, 바로 배우들의 경연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연극 즐기기 경연이기도 했습니다. 무대에 올리기 위해 짧아도 석 달을, 길게는 여섯 달을 연습하였고,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코로스와 배우들의 친지들에 의해 노래가, 대사가, 도시에 퍼져 나갔고, 극성스런 애호가들은 대본을 사서 같이 외우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열성적인 관객들 앞에서 가면을 쓴 주인공이 굽 높은 장화를 신고 큰 옷을 입고 둔탁하게 움직여도 관객들과 소통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배우들이나 코로스가 관객의 호응을 일으키기보다 오히려 관객들의 호응이 무대를 뜨겁게 달구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희극의 경연장에 온 것 자체를 흥겨워했으며, 혹은 경연에 나선 비극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하며, 비록 그 희극의 주인공들이나 비극의 주인공들이 겪는 상황들이 비록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처지를 같이 웃고 울며 극장 안에서 겪었습니다. 여러분과 무대의 주인공 사이를 이어 주는 오케스트라의 코로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일부러 주목하여 지적하지 않아도 되었을 만큼 디오뉘소스 극장에서의 코로스는 자연스러운 구성인자였고, 그만큼 절대적인 존재였었는데, 그들이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슬그머니 역활을 감추고 나자, 다시 말해 무대와 객석 사이의 오케스트라가 텅 비고 나자, 관객 여러분은 극장에 놀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갑자기 배우들을 지켜보러 온 사람들이 되고 말았고, 가면을 쓴 주인공이 굽 높은 장화를 신고 큰 옷을 입고 둔탁하게 움직여서는 보여 줄 것이 따로 없었으니, 관객들과의 소통 역시 텅 빈 오케스트라의 공간만큼 멀어지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한창 때 제가 늘였던 희극에서의 코로스 스무넷은 지난 번의 "여자들의 민회" 공연에서 그 화려함과 요란스러움을 잃었고, 에우리피데스가 열다섯까지 늘였던 비극에서의 작은 코로스조차 그 역활을 잃어 비극이 무대에서 흥행에 실패하고 있어, 옛날 관객들 가운데서는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을 다시 보게 해달라고 조르고 있을 만큼69 축제에서의 연극 경연이 관객들을 모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코로스가 없는 연극은 이제 오케스트라가 없는 새로운 극장에서 배우들이 가면을 벗고 말과 몸짓으로 관객들과 직접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관객들이 더 이상 디오뉘소스 극장에 놀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었습니다. 3오볼로스를 받는 재미로 재판에 나섰던 필로클레온과 3오볼로스를 벌기 위해 새벽부터 민회에 갔던 크레메스처럼 이제 3오볼로스를 내고 놀러 오던 디오뉘소스 극장에도 3오볼로스를 받으러 오는 크레뮐로스 정도나 오는 곳으로 바뀌고 말 것이었습니다.
8.36. 그전의 해 가을 급한 대로 스무 척을 꾸려 퓔로크라테스에게 주고 퀴프로스로 보냈다가 몽땅 잃고 만 뒤 아테나이는 시켈리아 패전 후만큼이나 절박하게 마흔 척의 배를 모아70 그해 봄 트라쉬불로스에게 주었던 것처럼 아테나이는 돈이 생길 때마다 배를 만들고 무기를 보충하였고, 시민들도 이미 돈을 받고 전투에 나서는 용병이 되어 있었고, 설사 전투에 이겼다 해도 약탈할 것도 없었으며 전리품을 경매에 내놓아도 돈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차츰 전쟁이 더 이상 돈을 벌어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전쟁 때문에 돌보지 못한 올리브 밭이나 포도밭이 황폐해져 올리브 기름이나 포도주를 만드는 일이, 그것들을 담는 도자기 항아리를 만드는 일이 부를 가져다 주지도 않았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너무 많은 배가 가라앉다 보니 배를 만들 나무가 없어졌습니다. 나무를 멀리서 가져 오다 보니 배를 만드는 일도 나무 값이 너무 비싸 예전에 열 척을 지을 돈으로 두 척 짓기도 힘들어졌습니다. 지난 다섯 해를 전쟁이 가져다 줄 부를 기대하고 열심히 전쟁을 해 왔는데, 그래서 페르시아가 돈을 대고 전리품도 생기고 약탈도 하여 돈이 돌긴 돌았는데, 그 돈은 모두 전쟁을 위한 일들, 성벽을 쌓고 배를 만들고 용병 삯을 주는 데 돌았을 뿐, 그래서 전쟁 종사자들에게나 돈이 좀 돌았을 뿐, 아테나이는 돈이 없었습니다. 도시가 고용한 의사들에게조차 임금을 주지 못하는 일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런 아테나이에 부의 신 '플루토스'을 보낸 것은 희극작가로 한 평생을 보낸 저의 보은 인사였습니다. 전쟁으로 파르테논의 보물 창고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정의로 도시를 채우지 않고서는 도시에 재물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저는 디오뉘소스 극장의 무대에서 내려올 것이었습니다.
8.3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헬라스에 내전이 재발한지 일곱 해째가71 되던 봄에 저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 "플루토스"가 상연되었지만, 저의 예상대로 그해에도 꼴찌를 했고, 저는 아라로스에게 새로운 희극의 탄생에 대한 기대를 걸어 보기로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지냈는데, 아테나이에 좋지 않은 소식이 이오니아로부터 전해져 왔습니다. 함대를 가지고 이오니아로 떠났던 트라쉬불로스가 헬레스폰토스며 레스보스 섬의 도시들을 친스파르테에서 친아테나이로 돌려 놓았다고 마치 이제는 스파르테와의 전쟁에서 다 이긴 것처럼 그전 가을부터 봄의 아테나이 디오뉘시아 때까지도 좋아서 야단들이더니, 어디 큰 싸움이 벌어졌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그전 가을 트라쉬불로스는 레스보스 섬의 메튐나를 평정한 다음 서둘러 본디 임지였던 로도스로 돌아갔고, 봄이 오자 자신의 군대를 더 강화할 목적으로 로도스 섬 근처의 여러 도시들로부터 자금을 모으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죽기 전에는 아스펜도스로 가서 에우리메돈 강 어귀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아스펜도스 사람들은 이미 트라쉬불로스에게 군자금을 제공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트라쉬불로스의 군대가 그들의 땅을 약탈하자, 화가 나서 한밤중에 트라쉬불로스의 막사로 들어가 그를 죽이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기회 있을 때마다 칭송했던 트라쉬불로스가72 전투 중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화가 난 폭도들에게 자다가 죽임을 당하다니73 어쩌면 아테나이의 전쟁 운도 다한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워졌습니다만, 아테나이는 곧바로 아기리오스를 그의 후임으로 보내 트라쉬불로스가 확보해 두었던 함대와 병력을 인수하게 하는 걸 보고는 역시 전쟁에는 귀신들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는 귀신과 같은 아테나이 사람들은, 아기리오스와는 별도로, 마침 코린토스가 아르고스의 일부로 병합되자 할 일이 없어진 이피크라테스가 코린토스의 친아르고스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아테나이로 도망쳐 와서 머물고 있는 것을 보고, 트라쉬불로스의 죽음으로 잃게 될지도 모를 헬레스폰토스 도시들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하도록 이피크라테스와 그의 옛 용병 부하들을 고용하여 그곳으로 파견했는데, 처음은 아비도스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스파르테의 아낙시비오스를 피해 케로네소스 지역에서 약탈로 피해를 입히고 지내다가, 아낙시비오스가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안탄드로스와의 우호를 위해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방문하고 아비도스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매복전을 벌여, 아낙시비오스와 다른 도시 총독들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과연 이피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전쟁 귀신이다 싶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르고스에 먹힌 고향 코린토스의 흥망보다 돈을 받고 싸울 수 있는 전장이 더 중요했을 테니까요.
8.38. 트라쉬불로스를 잃은 아테나이의 분투가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에서 계속 이어지는 동안, 스파르테는 스파르테대로 헬라스 곳곳에서 분투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기나 사람들이 아티케로 들어와 약탈하기 시작했고74, 아테나이가 팜필로스를 아이기나에 보내 토벌 준비를 하자, 스파르테는 텔레우티아스를 보내 아이기나를 지원하였고, 그 후임으로 온 히에락스가 해군을 나누어 아이기나는 그의 보좌관 고르고파스에게 열두 척의 함선을 주어 맡긴 다음, 자신은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로도스로 갔는데, 이런 움직임 바람에 토벌은커녕 다섯 달 넘게 아이기나에서 고립되어 있던 팜필로스가 겨우 구출되어 아테나이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편 펠레폰네소스에서는 아카르나니아가 반스파르테 연합의 지원을 받아 아카이아가 장악하고 있던 칼리돈을 공격하였는데, 아카이아가 동맹 탈퇴까지 언급하며75 스파르테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아게실라오스는 그해 여름의 끝에 다른 동맹 도시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아카르나니아가 반스파르테를 청산하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전지역을 유린겠다고 보낸 통첩을 거부하자, 아카르나니아 전지역을 유린하고 약탈한 뒤, 파종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 유린하자는 아카이아의 주장을 다음 해에 다시 원정을 오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설득하고는 겨울이 오기 전에 각자의 도시들로 돌아가는 것으로 헬라스 내전 재발 일곱 번째 해도 저물어 갔습니다.
8.39. 헬레네 내전 재발 여덟 번째 해가76 되는 이듬해 새봄이 오자 아게실라오스는 아카이아에게 했던 약속대로 아카르나니아로 출격하기 위해 움직였는데, 이에 농사를 망칠까 질겁한 아카르나니아가 사신을 보내 아카이아와 강화는 물론 스파르테의 동맹도시가 되겠다며 제안했고, 아카르나니아 문제를 해결한 스파르테는 내친 김에, 아테나이와 보이오티아로 원정할 경우를 생각할 때 적대적인 펠레폰네소스 어귀의 아르고스를 등 뒤에 둘 수 없다고 보아, 이번에는 아게실라오스 대신 아게시폴리스를 내세워 원정을 감행했고77, 아게시폴리스는 마치 아게실라오스와 경쟁이라도 하는 듯이 아르고스를 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돌아왔습니다. 펠레폰네소스에서 스파르테의 두 왕들이 번갈아 활약하는 동안, 아이기나에 남았던 고르고파스는 아이기나 사람들과 함께 아티케를 약탈하여 아테나이를 괴롭히고 있었고, 아테나이는 에우노모스에게 열세 척의 함선을 주어 고르고파스에 대적토록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스파르테는 궁극적으로 페르시아의 도움이 있어야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보고 안탈키다스를 페르시아의 티리바조스에게 보내기로 했고, 안탈키다스는 아이기나로 와서 고르고파스의 함대의 호송을 받아 에페소스에 도착한 다음, 고르고파스와 그의 함대는 아이기나로 다시 돌려보내고, 에페소스에서 스무다섯 척의 함대를 새로 편성하여 자신의 부관 니콜로코스로 하여금 아낙시비오스와 다른 총독들의 죽음으로 흔들리는 헬레스폰토스를 안정시키도록 한 다음, 티리바조스를 만나 헬라스와 페르시아 간의 항구적인 평화를 이룩할 방안에 대해 논의했는데, 그 논의의 결과에 대해 페르시아 왕 아크타크세르크세스를 설득하기 위해 티리바조스와 함께 수사로 떠났습니다. 한편 니콜로코스는 가는 길에 테네도스를 약탈한 뒤 아뷔도스로 들어갔고, 헬레스폰토스 인근에 있던 아테나이의 해군은 이피크라테스와 디오티모스의 지휘 아래 서른두 척의 배로 케로네소스를 기지로 삼아 니콜로코스를 아뷔도스 항구 안에 가두어 두고 있었습니다78. 한편 안탈키다스를 내려 놓고 에페소스에서 나오던 고르고파스는 아테나이의 에우노모스가 에페소스 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그의 눈을 피해 아이기나로 급속히 돌아왔는데, 밤중에 에우노모스가 선두에 불을 밝히고 나서서 그의 함대를 이끌고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고, 야습을 감행해 아테나이 함선 네 척을 나포하는 성과를 올린 일도 있었지만, 아테나이 해군의 카브리아스와 데마이네토스의 지상군이 연합하여 펼친 아이기나 상륙작전을 막으려다 전사하고 말았고, 그 뒤 스파르테 함대를 맡은 에테오니코스가 선원들의 급료를 주지 못하자 함대는 움직이지 못했고, 그제서야 바다는 아테나이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테는 텔레우티아스를 보내 해군을 재건했고79, 방심하고 있던 페이라이에우스 항구를 어느 한 새벽에 급습하여 삼단노선은 파괴하고 상선들이나 화물선들은 나포하여 아이기나로 끌고 가서 밀린 급료는 물론 선원들의 급료를 선불하기까지 했습니다. 바다라면 자신만만하던 아테나이가, 코논이 묶이고, 트라쉬불로스가 죽고, 돈이 없어 더 많은 배와 우수한 선원들을 대어 주지 못하게 되자, 아이기나 앞바다는 물론이고 이제는 페이라이에우스까지 피습을 당해야 하는 지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내전이 재발한 여덟 번째 해의 일이라니 아주 먼 옛날 일 같지만,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 일은 바로 이태 전에 우리 코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80.
8.4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리고 헬라스에 내전이 재발한지 아홉 번째 되던 해, 바로 작년에81, 스파르테에 적대적이고 아테나이에 우호적이던 파르나바조스가 페르시아 왕의 딸과 결혼을 위해 수사로 가고 없는 사이, 수사에서 티리바조스와 함께 돌아온 안탈키다스는 몰래 육로로 아뷔도스로 가서 이피크라테스의 함선들을 아뷔도스에서 프로폰티스 안쪽 카르케돈으로 유인한 다음, 니콜로코스의 스무다섯 척, 쉬라쿠사이의 폴리크세노스가 보낸 스무척, 그리고 티리바조스가 운용하던 이오니아의 페르시아 함선 스무일곱 척, 그리고 트라쉬불로스가 이끌던 아테나이 함선을 나포하여 선원을 교체하고 합류시킨 여덟 척 등, 모두 여든 척의 배로 헬레스폰토스를 장악하고 폰토스에서 나오는 식량이 아테나이로 가지 않도록 통제하였습니다82. 안탈키다스의 헬레스폰토스 장악을 확인한 티리바조스는 헬라스의 도시들에 사발통문을 보내 페르시아 왕의 강화 조건에 대해 알고 싶으면 모두 모이라고 했고, 반스파르테 연합 도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화 조건이 공개되었는데, 그것은 이미 안탈키다스와 티리바조스가 합의하고, 나중 수사로 가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승인을 얻은 내용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에서 클라조메나이, 그리고 퀴프로스 이 둘만 페르시아 영토로 인정 받고, 헬라스에서는 아테나이만이 렘노스, 임브로스, 스키로스, 이 세 섬을 영토로 인정 받고, 나머지 헬라스와 아나톨리아의 섬과 육지의 모든 크고 작은 도시들에게 자치권을 가지게 한다는 이 조건에는, 반대할 경우 찬성자들이 연합하여 싸울 것이라는 협박이 붙어 있었고, 식량 보급마져 어렵게 된 아테나이는 유불리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으며, 아르고스는 코린토스와의 병합을 유지시켜 보려 했으나 신성한 기간도 통하지 않는 스파르테의 기세에 눌려 선택의 여지가 없이 코린토스에서 철수했고, 테바이는 그래도 한번 테바이가 아니라 보이오티아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버텨 보았지만 아게실라오스가 출진하여 테게아로 나오자 꼬리를 내리고 보이오티아의 다른 도시들에게 자치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아르고스는 마지막까지 코린토스와의 병합을 유지시켜 보려 했으나, 아게실라오스의 경고와 신성한 기간도 통하지 않았던 아게시폴리스의 기세에 눌려 코린토스에서 주둔군을 철수시켰고, 코린토스는 다시 자치권을 회복하였습니다.83
8.41.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이 서로 강화로 전쟁을 끝낸 헬라스의 도시들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요. 스무일곱 해가 넘는 헬라스의 내전을 끝내고도 피폐해진 헬라스 도시들을 지원하기보다 퀴로스의 반란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스파르테와, 헬라스의 내전을 끝내자마자 왕권을 둘러싼 퀴로스의 반란에 휩쓸린 페르시아의 아나톨리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 스파르테의 영향력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지역의 페르시아 도시들, 그렇게 시작된 스파르테와 페르시아 간의 충돌은 아나톨리아의 해안이나 이오니아 그리고 헬레스폰토스 정도의 진출에 만족하던 스파르테로 하여금 아나톨리아 깊숙한 페르시아의 영토에까지 진출하도록 만들었고84, 이에 놀란 페르시아는 스파르테에 호의적이지 않은 헬라스 도시들에게 전쟁 비용을 대는 조건으로 반스파르테 궐기를 부추겨 헬라스에 세 번째 내전85을 불러왔는데, 이 전쟁으로 친스파르테 도시들이든 반스파르테 도시들이든 헬라스의 도시들이 얻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페르시아에서 받은 전쟁 비용 덕분으로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가 델로스동맹 도시들로부터 전쟁 비용을 명목으로 조공을 받았을 당시처럼 아테나이가 흥청망청 번영을 누리기라도 했습니까? 아니 그보다 전쟁으로 텅빈 아크로폴리스의 금고를 다시 채워 놓기라도 했으며, 함선을 만드느라 파르테논 신전의 신상들에게서 떼어낸 금을 다시 붙여 놓기라도 했습니까? 아고라의 아테나이 시민들의 입성도 그럴 테니 아크로폴리스의 신들이 헐벗은 것은 그렇다 치고 여러분의 먹는 것은 어떻습니까?86 아크로폴리스의 신들과 나누어 먹을 정도는 됩니까? 아고라의 여러분이 굶주리고 있는데 아크로폴리스의 어느 신인들 굶주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입성과 먹거리가 시원찮다고 행복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그래서 어떻습니까 여러분? 오랜 전쟁으로 재물은 그렇게 모을 수 없었다손 쳐도 그 오랜 전쟁 덕분으로 도시의 자주권을 지킬 수 있었고, 그래서 도시민과 도시가 더 자유롭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욱 더 정의롭게 된 데다가 그 오랜 전쟁을 패전이 아닌 강화로 매듭짓고 평화를 얻었다 싶어 정말 뿌듯하고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8.4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또 한번의 헬라스 내전이 페르시아와 스파르테의 합작으로 끝이 났습니다만87, 아테나이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허탈해진 아테나이는 책임을 지울 희생양이 필요했고, 불의에 눈 먼 플루토스를 눈 뜨게 해 정의를 찾아볼 수 있게 했었던 아스클레피오스도 권력에 눈 먼 네오클레이데스의 눈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가 아뉘토스를 지목하자, 돌아온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가운데 안티스게네스가 제일 먼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뉘토스와 뤼콘 그리고 멜레토스를 고발했고88, 그들과 함께 그들보다 더 무서운 고발자라며 소크라테스로부터 고발당했던 제가 덩달아 그들과 함께 오늘 이 재판정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9. 도시의 평화'에서 계속)
- 크세노폰,'헬레니카'제3권3-5. BC401 퀴로스의 반란이 무위로 끝나고 일 년이 지나 페르시아가 다시 아나톨리아 지역의 질서를 회복한 BC400 가을부터 시작된 페르시아와 스파르테 간의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 그리고 아나톨리아 서안 도시들에 대한 패권 다툼은 15년에 걸쳐 지속되다가 BC386 스파르테와 헬라스의 큰 도시들이 페르시아가 내건 강화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끝이 났다. [본문으로]
- BC399 [본문으로]
- BC398의 일이다. [본문으로]
- BC398 [본문으로]
- BC397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아기스가 사람을 위해 만든 것으로는 가장 호화로운 무덤에 묻혔다고 전한다.('헬로니카'제4권3.1)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3권3.2,3., 플루타르코스,'아게실라오스전'. [본문으로]
- BC396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3권4.7-10, 플루타르코스,'아게실라오스전', '뤼산드로스전'. 뤼산드로스는 아게실라오스와 소년 시절 같은 동아리에서 훈련하고 지냈던 친구였고, 아기스 사후 왕위 승계에서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아게실라오스는 이런 뤼산드로스가 출진을 권했을 뿐만 아니라, 총사령관이 되도록 해 준 것에 대해 왕위 승계에 도움을 준 것보다 더 고마워했다. 그러나 에페소스에 도착한 뒤로는 뤼산드로스가 헬라스 내전 당시 심어 두었던 각 도시들의 10인회 지배 조직과 그 인맥이 그를 싸고 돌아, 마치 뤼산드로스가 스파르테의 왕처럼 보일 지경에 이르자, 우선 30명의 군사위원회 장군들이 가만있지 않았고, 아게실라오스 역시 불쾌해져서, 뤼산드로스가 하는 일이면 모두 툇자를 놓게 되었는데, 모욕감을 느낀 뤼산드로스가 담판 끝에 헬레스폰토스로 가게 된 것이었다. [본문으로]
- 이때 크세노폰은 아게실라오스의 기병으로 봉사하고 있었을 것이고, 기병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크세노폰의 헌신적인 노력은, 한 번 믿은 친구에 대해 신읠르 저버리지 않았던 아게실라오스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그 인연이 아게실라오스의의 호의로 연결되어 크세노폰을 펠로폰네소스의 장원 생활로 이끌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BC395 [본문으로]
- 아게실라오스는 기병대대 둘과, 네오다모데이스의 중무잘 보병대와, 과거 퀴로스의 용병 출신 부대와, 동맹 도시들의 부대로 편성하였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페이산드로스가 아게실라로스의 매부로 소개하고 있고(그의 책,'헬레니카'제3권4.29.), 플루타르코스는 아게실라오스의 처남으로 소개하는데, 그는 지휘관으로서의 인품을 좋았으나, 해군 경험이 없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3권5.1,2. 크세노폰은 테바이와 코린토스의 경우, 티모크라테스가 건네주는 페르시아의 티트라우스테스의 돈을 받은 지도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지만, 아테나이의 경우 지도자들이 돈은 받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3권5.3-4. 크세노폰은 코린토스 전쟁의 발단이 페르시아의 이이제이 계책과 테바이의 계획적 도발에 의한 것으로 기록했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에 그들의 괴뢰정부라 할 수 있는 30인 참주정을 세운 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헬라스의 도시들에게, '모든 도시는 아테나이에서 온 망명자를 발견하면 즉시 체포하라. 스파르테는 그들을 체포하지 않거나 체포를 방해하는 도시와는 동맹을 파기한다.'며 협조를 요청할 정도였는데, 이에 대해 테바이는, '보이오티아의 모든 도시와 집들은 피신처를 구하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 둔다.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이 도움을 요청할 때 도움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1탈란톤의 벌금을 부과한다. 또 과두 정치 제도를 타도하기 위해 아테나이 시민이 아티케로부터 보이오티아를 통과할 경우, 테바이 사람들은 그들을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라는 법령을 선포하며 스파르테에 대응하였다. (플루타르코스,'뤼산드로스전')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3권5.5. 크세노폰은 스파르테가 오랜 동안 테바이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꺼이 테바이를 칠 수 있는 구실을 찾았다고, 코린토스 전쟁 발단의 또 다른 일면을 보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플루타르코스는 코린토스 전쟁이 늙어가면서 점점 완고해지고 괴퍅해진 뤼산드로스의 테바이에 대한 개인적 경험들이(전리품 분배와 30인 참주정 붕괴, 그리고 페이라이에우스 진입 불참이다.) 악감정을 가지게 했고, 그 악감정으로 뤼산드로스가 스파르테를 전쟁으로 이끌었다고 보는 시각도 앞의 크세노폰의 시각과 함께 전하고 있다.(그의 책,'뤼산드로스전')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3권5.8-15. [본문으로]
- 이 글에서 헬라스 내전이라고 말하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것이 BC404이고, 앞으로 헬라스 내전 재발이라고 말할 코린토스 전쟁의 시초인 할리아르토스 전투는 BC395의 일이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뤼산드로스가 아테나이를 패배로 몰아 넣은 스파르테 사람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그가 모시던 아게실라오스 [본문으로]
- 플루타르크는 병사들이 한사코 싸워서 이겨 시신을 거두어야 한다며 휴전을 반대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그의 책,'뤼산드로스전') [본문으로]
-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테의 두 왕가 중 아기스 왕가와는 다른 한 쪽의 왕이었는데도, 평민 출신의 뤼산드로스가 펼쳐 보이는 화려한 성과와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을 것으로 보이는 스파르테의 체제 변혁에 대한 그의 꿈을 견제하는 데 많은 수고를 펍붓다 뤼산드로스와 함께 정치적인 생을 마감하였다. [본문으로]
- 이때 스파르테의 지도자들이, 아르키다모스가 그 전쟁이 대를 이어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과 같이, 전쟁이 오래 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단느 증거는 없으나, 사태를 심각하게 느꼈던 것은 틀림없는데, 페리클레스가 전선의 확대를 경계했듯이, 스파르타도 전선을 헬라스 내로 국한하려는 조치를 제일 먼저 취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10년 간의 전쟁을 코린토스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이 전쟁은 결국 페르시아와 스파르테 간의 강화조약 체결로 끝을 맺은 만큼, 헬라스 밖에서의 헬라스 도시들의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본문으로]
- 헤리피다스는 파플라고니아 군대가 가져 간 노획물을 몸을 뒤져가며 수거했고, 심지어 스피트리다데스에게도 몸수색을 했다. [본문으로]
- BC394 [본문으로]
- 아게실라오스는 아나톨리아 해안 도시들이나 헬레스폰토스나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페르시아의 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페르시아의 왕이 자기는 그런 분쟁에서 멀리 떨어져 호화 생활을 하며, 그들끼리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들이 공격을 받고 위험함을 느껴야 다른 도시들이 서로 싸우도록 부추기지 않을 것이므로, 아나톨리아 내륙은 물론, 페르시아 왕이 있는 수사나 엑타바나까지로 전쟁터를 옮길 작정이었다. [본문으로]
- 아게실로스가 스파르테가 처한 상황을 듣고 보인 첫 번째 반응은, '헬라스가 같은 민족끼리 싸우고 있다. 이것은 이민족의 침입보다 더 큰 재난을 끼치면서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일이다.'였는데, 그는 헬라스의 몇몇 도시들이 이민족의 돈으로 야합하여 스파르테에 반기를 드는 짓은, 스파르테가 이민족을 무찌를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무기를 돌려 동족의 가슴을 겨냥하도록 만드는 짓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나라 밖으로 밀어냈던 전쟁을 다시 나라 안으로 불러들이는 짓이어서, 특히 그가 닥친 상황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했는데, 그는 이런 그의 처지에 대해, 그가 '천 명의 페르시아 궁수들에 쫓겨(이 당시 페르시아의 금화에는 활을 쏘는 궁수의 모습이 찍혀져 있었다.) 아나톨리아에서 물러난다'고 표현하고 있었다.(같은 책 참조.) [본문으로]
- 아게실라오스는 귀환 길 처음부터, 지나야 할 도시들에게길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그를 친구로서 지나가게 해 줄 것인지, 적으로 싸울 것인지 물었다. 페르시아와 다른 이민족 도시들은 환영으로 길을 내주었고, 트라케도 친구로서 대했는데, 옛날 크세르크세스가 지날 때도 통행료를 받았다는 트랄리아는 은 100탈란톤과 여자 100명의 통행료를 요구했는데, 그것들을 받을 준비나 마치고 왔느냐는 비웃음에 통과를 저지하고 나서다 격파되고 말았고, 마케도니아 왕은 같은 질문에 깊이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는 답을 보냈는데, 아게실라오스가 그렇다면 깊이 생각하라면서 그 동안 자기는 통과하겠다고 진군을 계속하자 그제서야 친구로서 대하겠으니 통과하라고 했고, 테살리아로 들어가서는 테바이와 동맹을 맺고 있는 곳이어서 바로 약탈과 유린으로 길을 만들며 나가면서, 라리사로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플루타르코스,'아게실라오스전') [본문으로]
- 스파르테가 일으킨 군사 규모는, 스파르테 6000여, 엘리스, 트리필리아, 아크로레이아, 라시온 등의(플레이우스는 제전을 이유로 동참하지 않았다.) 3,000여, 시키온 1,500여, 에피다우로스, 트로이젠, 헤르미오네, 할리아이 등에서 3,000여, 그리고 스파르테 기병 600여기, 크레테 궁수 300여, 마르가나, 레트리나, 암피돌로이 등의 투섯병 400여, 도합 15,000이 조금 못 되었다.(크세노폰,'헬레니카'제4권2.16)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헬레니카'(제4권2.11-12)에서 코린토스의 티몰라오스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스파르테의 상황은 큰 강과 같습니다. 강은 그 수원에서는 물살이 세지 않아 쉽게 건너갈 수 있으나, 멀리 흘러갈수록 다른 지류가 합쳐져 세어집니다. 스파르테도 이와 같아서 처음 출발할 때는 혼자이나 나아갈수록 다른 도시 병사들이 합세하여 자꾸만 커져서 싸우기 힘들어집니다..... 이런 이치를 생각할 때, 전투는 주로 스파르테 영역 안에서 하는 것이 더 유리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면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해야 합니다.' [본문으로]
- 반스파르테 진영의 군세는, 아테나이 6,000여, 아르고스 7,000여, 테바이와 보이오티아(보이오티아의 오르코메노스는 반 스차르테 진영에 가담하지 않았다.) 5,000여, 코린토스 3,000여, 그리고 기병이 보이오티아 800여, 아테나이 600여, 칼키스 100여, 오푼티오이 로크로이 50여기, 그리고 경무장 보병이 코린토스, 오졸라리, 멜리아, 아카르나니아 등에서 3,000여, 도합 27,000이 조금 못 되어, 스파르테 진영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군세였다.(같은 책,제4권2.17)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BC394의 이 헬라스 함대를 아테나이의 코논이 지휘하였다고는 했으나, 이 함대의 규모나, 역활이나, 참여 도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본문으로]
- 이때 크세노폰도 그의 페르시아, 아나톨리아 왕복의 대장정을 끝내고 헬라스로 돌아왔는데, 코로네니아 전투에서 조국 아테나이와 대적한 죄로 영구 추방당했고, 아게실라오스의 배려로 엘리스 근처의 스킬루스에 정착하였다. [본문으로]
- 아게실라오스와 담판 뒤 파르나바조스는 페르시아 왕에게 해군의 지원을 요청하여 포이니케 함대를 불러들였고, 동시에 헬라스 용병들로 자신의 지휘를 받는 헬라스 함대를 만들어 아테나이 사람 코논에게 지휘를 맡겨 바다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BC393 [본문으로]
- 코논의 이 발상은 코린토스 전쟁 중에는 실현되지 못했고, 이로부터 16년 뒤인 BC377에, 아리스테이데스가 헬라스 해상동맹을 델로스 동맹으로 바꾸어 놓은지 꼭 100년이 지난 해에, 제2의 델로스 동맹이라 할 수 있는 '아티케 해상동맹'의 결성으로 구체화되었다. [본문으로]
- 파르나바조스는 아테나이에게 해군을 운용케 하는 모험을 택하지 않았는데, 이태 간 코논을 데리고 헬라스 사람들 용병으로 해군을 운용해 본 결과, 아테나이가 독자적인 해군을 가질 경우 스파르테를 견제하는 데는 더없이 좋겠지만, 코논이 말했듯이 운용 비용 갹출을 명목으로 새로운 델로스 동맹을 만들 것이고, 그것을 발판으로 새로운 스파르테를, 아니면 또 다시 페리클레스의 아테나이를 키울 수 있기 때문에, 아테나이가 외부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해군보다는 내부에서 수동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농성 능력을 키워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파르테를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테나이의 입장에서는 선후의 문제일 뿐, 해군을 가지는 것과 성벽을 쌓는 일은 둘 다 도시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어서, 어느 것이든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했을 뿐이었다. [본문으로]
- BC405 새봄의 레나이아 축제에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들"'이 우승, 프뤼니코스의 '"무사이",단절'가 2등을 했고, 4년이 지난 BC401 소포클레스의 유작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상연되었다는 기록을 끝으로, 그후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들에서 연극 경연이 계속되었는지, 그랬다면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들이 올랐었는지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했는데, 7년 뒤인 BC393 아이스퀼로스의 증손자 뻘인 아스튀다마스의 처녀작인 비극 한 편이 상연되었다는 기록과, 이듬해 BC392에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여인들의 민회,ekklesiazousai"'가 상연되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 이후로도 뛰엄 뛰엄 연극 상연 기록이 계속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 아테나이가 연극 작가들에게 연극 경연 참여를 권장하며 축제에서 경연의 부활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나 보여진다. [본문으로]
- BC392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여자들의 민회"'1-284. 이 극의 프롤로고스는 주인공 프락사고라('민회의 여자'라는 이름이다.)가 꼭두새벽에 등불을 들고 자기 집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자기가 든 등불에 대고 하는 혼자말을 통해, 비록 남장은 했지만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과, 기다리는 사람들도 남장을 한 여자들임을 관객들에게 넌지시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뒤이어 여자 속옷에 남자 외투를 걸치고 라코니케 풍의 끈을 매는 신을 신은 24명의 코로스가 조용히(요란하고 떠들썩한 보통 희극에서의 코로스 입장이 아니다.) 오케스트라에 입장하고, 프락사고라의 옆집 여자 둘이 무대에 등장하고 나면, 프락사고라스와 옆집 여자 둘이 이제 곧 민회로 가서 그곳에서 취할 행동들에 대한 예행 연습을 벌이면서, 관객들에게 연극의 내용과 진행 방향을 설명해 준 다음, 그들이 민회로 출발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연극의 프롤로고스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코로스를 맨 처음부터(프락사고라의 독백 30행이 끝날 때부터) 등장시켜 놓고, 프롤로고스가 끝날 때까지거의 침묵으로(2행과 3행짜리 코로스들의 대사 두 번, 그리고 '좋은 말이오'라는 단 한 번의 코로스장의 대사가 있을 뿐이다.) 세워 두고는, 단지 많은 여자가 모였다는 것을 관객에게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일종의 무대 장치로 쓸 뿐인데, 더군다나 코로스들이 주인공이 되어 관객들에게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느끼게 해 주고, 계속되는 연극에서 관객들이 배우나 코로스의 말 한마디에도 마음껏 웃을 수 있을 준비를 시켜야 하는 파로도스에서도 어쩐지 코로스의 역활을 홀대하고 있는데, 이 연극의 파로도스에서는 신에 대한 찬가도 없을 뿐더러, 그나마 한 차례밖에 없는 스트로페와(같은 극,289-299) 안티스트로페도(300-310) 3오볼로스를 받기 위해 새벽부터 민회로 가야 하는 도시민들의 처량한 신세를 노래할 뿐, 축제의 분위기를 띄우기 우한 시도는 보여 주지 않고 있다. 민회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라거나, 계속되는 장면이 무대 정경을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다른 작품의 파로도스들에 비해 이 연극의 파로도스는(같은 극,285-310,26행) 신을 찬양하는 노래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들의 처량한 신세를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노래가 너무나 초라하고, 코로스의 역활도 빈약하여, 파로도스라기보다는 막간가처럼 보인다. [본문으로]
- '같은 극',376-459. 민회에서 일어난 일은, 한 무리의 창백한 얼굴의 참가자들 때문에 이날 따라 6000명 성원이 일찍 이루어진 바람에 3오볼로스도 못 받고 되돌아온 한 늙은이 크레메스로부터 프락사고의 남편과 그 이웃 사람에게 전해지는데, 이날 민회의 의제는 '어떻게 하면 도시를 구원할 수 있을까'였고, 눈병 난 네오클레이데스가 나섰다가 제 눈도 못 고치면서 도시를 구원한다고 나서냐고 욕만 먹고 물러났으며, 외투도 없이 속옷 바람으로 나선 에우아이온은 겨울에 옷 만드는 사람들이 외투를 나누어 주고, 무두질하는 사람들이 그들 공방에서 사람들이 가죽을 덮고 자도록 해 준다면 도시가 구원될 것이라고 하는 등 중구난방일 때, 니키아스를 닮은 준수한 한 젊은이가 일어나, 밀고도 하지 않고, 고소도 하지 않으며, 민주정 체제를 전복하려 하지도 않는 여자들에게 도시를 넘겨주어야 한다고 연설하자,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렸지만 얼굴이 창백한 사람들이 찬성하여,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도시의 일을 여자들에게 넘기기로 결의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정책이 얼빠지고어리석어도 종래에는 도시민에게 이익이 된다'는 조상 대대로 전해 오는 말을 상기시키며 좋은 일이기를 바라면서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며, 민회 소식의 막이 끝나는데, 이때 코로스가 민회를 마치고 프락사고라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막간가를 부르고(489-503), 그 사이 배우들은 의상과 가면을 바꾼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처음 네 편의 희극에서 주로 자신에 대한 화제로 관객들과 이야기했고, 후기 네 편의 희극에서는 주로 도시의 일에 관한 자기 생각을 관객들과 이야기했다. '"여자들의 민회"'에서는 프락사고라가 아고라로 떠난 뒤(그전에 벌어진 일은 논쟁이 아니라 일문일답식 해설이었다.), 재산 출연 에페이소디온으로 넘어가기 전의 마지막 행과(729), 재산 출연 에페이소디온이 시작되는 첫째 행(730) 사이에, '코로스가 여기서 간주곡을 부르지만 가사는 남아 있지 않다'라는 언급만 있는데, 아리스토파네스가 이 막간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간주곡 노래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고희극에서 중희극으로 바뀌어 가는 희극의 형태 변화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갔을 것이지만, 코로스의 역활 축소와 함께 파라바시스의 소멸은 더 이상 페레시아(직설)이 용인되기 어려워진아테나이의 언론자유에 대한 가치 상실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이미 이때 아테나이에는 굳이 새로운 비방 금지법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언론자유가 자기검열의 형태로 제한되었으며, 흔히 전체의 가치를 최고로 치는 독재 전권 아래서 그러했듯이 아테나이에도 이때는 도시를 부끄럽게하는 범죄- 도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고발하는 일도 도시를 부끄럽게 하는 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에 대해서는 재판에서부터 감옥에 가두고 재판정에서는 포승에 묶여, 두 사람이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칸노노스 법이(같은 극,1089) 시행될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아리스토파네스의 이런 변화가 언론자유의 위축과 관련이 있지 않나 보여진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민회의 여자들"'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전체 1183행(누락되고 없는 두 군데의 코로스 노래를 도합 50행 정도로 보더라도 총 1230행 정도일 뿐이다.)인 그의 비교적 짧은 희극에서, 처음 관객들에게 마치 주인공처럼 비춰진 프락사고라의 모습은 730행 이후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겨우 네 번, 즉 첫 번째 에페이소디온에서 전령에 의해 '여장군'으로 한 번(835), 그리고 두 번째 에페이소디온에서는 아예 거명조차 없고, 마지막으로 엑소도스의 시작 부분에서 그녀의 노예- 이 노예는 아직도 공유 재산이 아니라 프락사고라의 노예로 자처하고 있다-에 의해 '여주인'으로 세 번(1113,1126,1137) 간접적으로 거명될 뿐이고, 첫 번째 에페이소디온에서는 끝까지 재산 출연을 미루고 있는 남자가, 그리고 두 번째 에페이소디온에서는 젊은 애인을 만나러 왔다가 노파 셋에게 보쌈당하는 청년 에피게네스가, 각각 주인공역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리스토파네스는 비록 프락사고라의 혁명이 진행형이기는 하지만-그녀가 주최하는 공동식사는 성공적으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성공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어-그녀가 시도하는 재산 공유나 공동 가족 제도는 눈치보기와 반자연적인 행동들이 실패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관객들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같은 극',730-876. 아리스토파네스는 비인격적인 재물을 도시민들이 동등하게 소유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146행이라는 비교적 짧은 에페이소디온으로 꾸려 가는데(이문제를 토론하는 두 사람의 대화 역시 매우 짧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재물이 소유주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토론이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의 의지, 즉 프락사고라의 혁명을 이행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한정되기 때문인데, 이것은 '"구름"'에서 '정의의 변론'과 '불의의 변론'이 다투는 것을 보고, 어느 하나를 고르는 것과 같은 희극적 대치 상황이다. [본문으로]
- 이 막간가는 가사가 남아 있지 않다. [본문으로]
- '같은 극',877-1111. 아리스토파네스는 한 인격체를 성적 대상으로 공동 소유할 때 생길 수 있는 경우를 234행의 길이로 보여 주는데(재물의 공동 소유 경우에 비해 두 배나 길다.), 이것은 본성적인 비동등성을 법으로 동등하게 만든 반발이 소유물이 되는 경우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희극적 대치 상황이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코로스장으로 하여금 경연 심사위원에게, 관객들의 호응이 심사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때로는 관객들에게, 우승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게 했는데, '"여자들의 민회"'에서는 프락사고라의 하녀와(1141-2), 코로스장(1154-1162), 그리고 코로스가(1182) 나서 엑소도스에서 심사위원들을 공동식사장으로 초대하며, '"여자들의 민회"'에 투표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의 현존 작품들 가운데, 경연에서의 성적을 알 수 없는 것이 '"뤼시스트라테"',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 그리고이 '"여자들의 민회"'와 제일 마지막 작품인 '"플루토스"'이고, 경연에 출품했던 축제가 레나이아 디오뉘시아인지 아테나이 디오뉘시아인지 모르는 것이 이 '"여자들의 민회"'와 '"플루토스"'인데, 이 글에서는 연극의 내용과 발표 당시의 전후 사정(코로스 배치와 외투에 대한 언급들, 추첨에서 경연 첫 작품이 된 사실 등)을 미루어 보고, '"여자들의 민회"'이 레나이아 디오뉘시아에서 3등 즉 꼴찌를 했다고 밝혔다. [본문으로]
- BC414 아테나이 디오뉘시아에 출품하여 2등을 차지한 '"새들"'은, 시켈라아 원정으로 얻을 부에 대한 기대와 도시 내부의 정치 분열로 도시의 혼란이 최고조에 있었을 BC415에 만들어진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으로, 총 1766행에 달하는 그의 최대작이다. '"새들"'의 구성은 전통적인 고희극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프롤로고스(1-267), 파로도스(268-450), 아곤(451-626), 제1파라바시스(676-800), 제1에페이소디온(801-1057), 제2파라바시스(1058-1117), 제2에페이소디온(1118-1694), 엑소도스(1695-1766)로 짜여져 있고, 새들의 날개를 달고 새들로 분장한 코로스가 24명, 배우는 3명이 모두 23개 배역을 나누어 맡으며, 이 밖에 무언 배우가 여럿 출연한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가 프락사고라의 혁명을 받아들여 얻는 대가로 고작 공동식사(그나마도 아리스토파네스는 익살스런 꼬리말 달기로 부정하고 있지만.) 밖에 없다는 것이 프락사고라의 실패를 암시하고 있다. [본문으로]
- BC391 [본문으로]
- BC371에 일어난 이 작은 해전은 당시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와 페르시아가 서로 간에 어떻게 얽히고설켰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아테나이는 아게실라오스 때문에 스파르테에 적대적이 된 페르시아의 스트루타스의 호의로 친페르시아로 돌아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의 무역 거래에 중요한 고객인 퀴프로스가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자, 퀴프로스의 에우아고라스를 돕기 위해 필로크라테스에게 스무 척의 함선으로 지원군을 보내는 반페르시아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 반대로 스트루타스 때문에 반페르시아로 돌아선 스파르테는 퀴프로스의 반페르시아 궐기를 돕기 위한 아테나이의 반페르시아적 군사 행동을 분쇄하고 있어, 페르시아는 처음 스파르테와 아테나이가 서로 연합했던 세 번의 그리스 침공 실패 이후에, 그들 둘이 서로 다투고 있는 동안은 언제나 들인 비용보다 더 큰 이득을 보았다 할 수 있다. [본문으로]
- BC390 [본문으로]
- 고대 그리스 3대 경기 축제 중의 하나로, 엘리스의 제우스를 경배하는 올륌피아 경기 축제(올륌피아드), 델포이의 아폴론을 경배하는 델포이 경기 축제, 그리고 코린토스의 포세이돈을 경배하는 이스트모스 경기 축제(이스트미아)를 3대 경기 축제로 꼽았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에서 사악한 방법으로 채무 문제를 해결하려는 스트렙시아데스로 하여금 자신과 자기 아들을 위해 소크라테스에게 찾아가게 하고, '"플루토스"'에서는 크레뮐로스가 착하지만 가난하다는 그와 그의 아들의 문제를 사악한 방법으로 해결할까 하여 아폴론을 찾게 만드는데, '불의의 변론'과 같은 소크라테스에게 간 스트렙시아데스는 실패로 끝났지만, 아폴론 신에게로 간 크레뮐로스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문으로]
- 아폴론의 신탁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크레뮐로스는 앞을 볼 수 없는 봉사를 아테나이의 자기 집으로 인도하기는커녕, 마치 그것이 신탁을 따르는 것이나 되는 듯이 그 봉사의 뒤를 따라 자기의 집 앞까지 왔는데, 그렇다면 혼자서 크레뮐로스의 집 앞까지 온 그 봉사의 움직임도 아폴론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일까? [본문으로]
- '"플루토스"'의 프롤로고스는 아리스파네스의 다른 연극들이나 다른 비극작가들의 그것들보다 결코 길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모두 252행의 프롤로고스를 통해 이 희극을 만든 그의 의도와 구상을 완벽하게 드러내어 보인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플루토스"'의 파로도스(253-321행)에서 신에 대한 찬가 없이 그 당시 유행했을 필록세네스의 디튀람보스 '"퀴클롭스 또는 갈라테아"'의 패러디물로 코로스의 스트로페로 대치하고(290-301),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 가운데 키르케 이야기(제10권210-574)에서 뽑아 코로스의 안티스트로페로 대치하면서(302-315), 코로스장 대신 카리온 역의 배우가 코로스를 이끌며 퀴클롭스로 가장하자 코로스는 봉사가 된 부의 신을 연상시키며 퀴클롭스의 눈을 빼겠다고 응수하고(스트로페의 대치물), 다음 카리온이 키르케로 가장하자 코로스는 오딧세우스가 되겠다고 응수하는데(안티스트로페의 대치물), 이것은 아리스파네스가 한번도 구사하지 않은 전적으로 새로운 역활의 코로스를 만들어 보려 가볍게 처리해 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316-318, 아리스토파네스는 카리온의 입을 통해, '자 이제 농담은 그만하고 여러분은 다른 방법으로 즐기도록 하세요'라며 앞의 스트로페와 안티스트로페 대치물을 농담으로 치부하고 있다.). 이 밖에 이 희극에서는 엑소도스의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 이외에, 모두 여섯 번 코로스가 부르는 막간가(희곡에서 가사는 누락되어 있지만, "'여자들의 민회"'의 경우를 감안하면 한 번에 25행씩 모두 150여행이 빠져 있다고 불 수 있어, '"플루토스"'는, 남아 있는 1209행에 빠진 여섯 막간가 150여행을 더해, 전체 1350여행의 희극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 코로스장의 대사 다섯 번의 도합 12행(328-331,467-8,631-2,962-3,1208-9), 코로스의 대사 두 번에 도합 3행 (637,639-640)이 더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 '"플루토스"'의 파로도스가 끝나 아곤이 이어져야 하는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첫 번째 에페이소디온(322-414,613-626) 안에 아곤(415-625)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 가운데 처음 코로스의 역활이 축소되어 있는 '"여자들의 민회"'의 경우, 논쟁은 없고 아낙사고라와의 일문일답만 있어, 논쟁을 부추기는 코로스장의 진행과 코로스의 에피레마나 안티에피레마가 없어도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는데 반해, '"플루토스"'에서는 논쟁도 있고, 제법 격렬한 다툼이 예상되는데도 논쟁의 개시를 알리는 코로스장의 2행짜리 대사, '논쟁에서 이기려면 당신들은 지혜롭게 말해야 해요. 양보를 하거나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되오.'(4887-8)가 전부일 뿐, 코로스의 에피레마도 안티에피레마도, 코로스장의 부추김도 전혀 없고, 단지 블렙시데모스의 추임새 정도가 논쟁의 호흡을 조절하고 있다. [본문으로]
-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 희극의 논쟁은 처음 논박을 시작하는 쪽이 지는 것으로 진행되지만, '"플루토스"'에서의 논쟁에서는 먼저 시작한 크레뮐로스가 논쟁에서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기 아들이 사악하게 되더라도 부자가 되는 것이 어떨까 싶어 아폴론에게 물어보러 갔던 만큼, 착하고도 부자가 된다는데, 가난이 더 나아지고 싶은 모든 삶의 동인이라 한들 가난의 신이 모두를 가난하게만 만든다면, 그들 둘 간에 무슨 논쟁이 필요했을까? 만일 부의 신이 눈을 떠서 부자가 된 과정을 심사하는 데 그 눈을 써서, 사악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나 사악하게 그 부를 쓰는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본업이 되고, 마찬가지로 가난의 신이 무서운 쪼그랑할멈에서 얘쁜 모습과 고운 목소리의 젊은 아가씨로 바뀌어 선량한 가난뱅이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본업이 된다면, 이들 둘 간의 논쟁이야말로 한번 붙여 볼 만하지 않을까? 가난의 신이 제기하고(566-570), 크레뮐로스가 동의한(571), 가난했을 때는 도시와 도시민들에게 정직하게 행동하다가, 공금으로 부자가 되고 나면 금세 악당이 되어 음모를 꾸미고 도시민을 해코지하는 정치가의 처결을 두고.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여느 희극이라면, 이 대목에서 부의 신이 아스클레피오스로의 치료를 받는 동안 파라바시스가 펼쳐치고, 이어서 치료의 결과로 나타나는 새로운 상황들이 에페이소디온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여자들의 의회"'에서처럼 "플루토스"'에서도 파라바시스가 없고, 그 자리에 신전에서의 치료 장면과(627-770), 치료 후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771-801) 하나의 에페이소디온으로 상세히 전해진다. 파라바시스를 없앤 이런 희극 구조의 변화가 관객의 취향 때문이거나, 경연 주최의 요구에 의한 것이거나에 상관없이 아리스토파네스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관객들에게 무리 없이 다가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희극의 직설 본능을 끝까지 감추지 못하고 이 에페이소디온 안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부의 신이 치료 받으려는 그 자리에 따로 눈병을 고치러 온 네오클레이데스에게 아스클레피오스가 고통스런 약을 발라 주며 그가 위증으로 민회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한다든지(716-726), 시력을 회복한 부의 신이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자기 고백과 반성, 그리고 새로운 각오를 피력한다든지(771-781) 하는 것들이다. [본문으로]
- 이 밀고자는 정직한 남자와 카리온에 의해 크레뮐로스 집 앞에서 쫓겨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크레뮐로스가 분명히 시민들의 회의체나 민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혼자서 제멋대로 민주정체를 전복하려 했다'고 고발한다(944-950). [본문으로]
- 이 노파와 젊은이의 경우는 '"여자들의 민회"'에서 젊은 여자 친구를 마나러 온 한 젊은이를 두고 세 노파가 벌이는 쟁탈전의 경우를 연상시키는데, 아낙사고라가 자연적인 부등성을 법적인 동등성으로 바꾸어 놓으려 한 반면, 부의 신은 우월적 지위 때문에 응한 일방적 약속이라는 전통적 부등성을 자연적 부등성으로 환원시켜 놓아 에로스가 본성으로 작동되도록 하고 있다. [본문으로]
- 카리온이 지적하듯이 사람들의 제물을 받고도 사람들을 돌보지 않은 신들은(1116-7), 정직한 남자의 유산이 동이 날 때까지 도움을 받고도 그 때문에 몰락한 그 정직한 남자를 돌보지 않은 그의 불의한 친구들을 닮았다(829-839). [본문으로]
- '"플루토스"'의 엑소도스 역시 파로도스와 같이 신에 대한 찬가도 없으며, 코로스의 노래도 없기 때문에, 과연 이 희극이 고대 그리스 희극의 구조와 형식에서 말하는 파로도스와 엑소도스는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때 이미 아리스토파네스가 고데 그리스의 희극 구조와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희극의 구조와 양식을 구상하고 보여 주고 있었다고 보면, 새로운 파로도스는 코로스가 등장하는 253행부터 코로스가 가사가 전해지지 않은 막간가를 부르기 직전의 321행까지, 엑소도스는 사제가 횃불을 들겠다고 말하고 난 다음 크레뮐로스가 부의 신을 행렬로 나서게 하는 1191행부터 연극이 끝이 난 뒤에도 부르는 코로스의 노래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여자들의 민회"'에서 파라바시스가 빠졌고, 경연에서의 지지를 부탁하는 말도 연극의 마지막에 가서 코로스장의 며 마디 말과 코로스의 한 줄 말로 줄어들더니, 드디어 '"플루토스"'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에게 자기 연극에 대한 지지를 부탁하는 말도 빼 버렸다. [본문으로]
- BC387 아리스토파네스의 아들 아라로스의 '"아이오로시코"'와 '"코카로스"'가 상연되었는데, 아리스토파네스가 대작했다는 설도 있다. 이런 소문 때문에 아라로스가 절필하였는지, 이 이후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한 기사는 찾아볼 수가 없다. [본문으로]
- 오케스트라를 채우던 코로스의 춤과 노래 대신 짧은 막간가가 놓인 아리스토파네스의 마지막 두 작품의 무대는, '"여자들의 민회"'나 '"플루토스"'의 프롤로그부터 마지막 엑소도스에까지, 모두 아낙사고라의 집과 크레뮐로스의 집 안팍에서, 보통 아테나이의 사람들이 특별한 분장 없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가운데 연극이 진행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연극의 진행을 위해 스케네를 바꿀 필요가 없도록 에페에소디온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되고, 스케네를 바꾸지 않으므로, 무대에서는 퇴장했던 배우가 분장을 바꾸고 다시 등장하는 동안의 짧은 시간만 메우면 되었다. 따라서 작가는 이 짧은 시간의 막간을 위해 따로 노래를 만들기보다 그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코로스로 하여금 부르게 했지 않았나 짐작되고, 따라서 그 노래 가사는 당연히 작가의 희곡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으로 본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BC386에 결국 옛 비극을 재상연해도 좋다는 결의를 하게 된다. 이런 결의가 그리스 비극의 발전을 저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희극의 경우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들"'이 우승했을 때 재상연 허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연의 기록이 없고, 재상연보다는 오히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희극의 내용이나 구성이 바뀌면서 동시대의 문제에 천착한 희극의 특성을 살려 온 것으로 보여진다. [본문으로]
- 헬라스 내전이 시작될 무렵부터 시켈리아에 원정 함대를 보냈을 때까지도 아테나이는 200여 척의 삼단노선을 운용할 정도의 해군력이 있었고, 아르기누사이의 해전이나 헬라스 내전의 마지막 해전이었던 아이고스포타미에서도 150여 척의 함선을 동원했는데, 코논이 페르시아에서 구금되고 어쩔 수 없이 트라쉬불로스가 바다로 나서야 했던 헬라스 내전 재발 여섯 번째 해에 아테나이가 그에게 줄 수 있었던 함선의 수는 고작 마흔 척이었다. [본문으로]
- BC389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30인 참주정을 끝내고 민중이 복고 되기 전의 작품에서는 트라쉬불로스를 그의 작품에서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그 이후의 작품 '"여자들의 민회"'에서 두 번(203,356),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 '"플루토스"'에서 한 번(550), 도합 세 번에 걸쳐 그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세 번 모두 희극작가가 그의 희극에서 언급하는 인물로는 결코 비난이나 비방이 아닌 긍정적인 시각을 보여 준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트라쉬불로스의 죽기 전 일 년여의 행적에 대해 기술한(그의 책,'헬레니카'제4권8장25-30) 다음, 그의 이런 죽음에 대해 단 한 줄의 감회를 남기고 있다(같은 책,제4권8장31첫줄). '세상에서 매우 유능한 사람으로 평가 받던 트라쉬불로스는 이렇게 죽었다.' [본문으로]
- 아기스가 알키비아데스의 권고로 아티케에 요새를 [본문으로]
- 이 당시 헬레네 도시들에 대한 스파르테의 영향력은 동맹 탈퇴를 무기로 삼는 펠레폰네소스 반도 안의 작은 분쟁에도 직접 군대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 BC388 [본문으로]
- 아르고스는 스파르테의 침공에 대해 소위 '신성한 기간'의 휴전을 기대하였으나, 성년이 되어 첫 출전의 아게시폴리스는 코린토스 전쟁 내내 보아야 했던 아게실라오스의 공적을 덮고도 남을 전과가 필요했다. 아게시폴리스는 아르고스가 주장하는 '신성한 기간'의 휴전을 거부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신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인지, 먼저 올륌피아의 제우스에게 물어 괜찮다는 답을 얻었고, 곧바로 델포이의 아폴론에게서도 같은 답을 들은 다음, 아르고스를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지진이 일어나 휘하 병사들이 주저하자, 포세이돈에게 제사까지 지내고 공격을 감행했다. 아게시폴리스의 집요한 공격으로 스파르테의 강한 적대감을 확인한 아르고스는 이 이후 스파르테와의 대결보다는 강화에 더 매달리게 되었다.(크세노폰,'헬레니카'제4권6장2-7,제5권1장29 참조)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트라쉬불로스가 아스펜도스에서 죽고 난 다음 뚜렷한 아테나이의 전쟁 지도자의 이름을 들지 못하고 있는데, 트라케와 타소스 등지의 헬레스폰토스 인근에서 서른두 척의 함선을 모은 아테나이 해군의 지휘관 이름을 대지 못하고, '아테나이의 장군들' 또는 코린토스 출신의 용병대장 이피크라테스와 디오티모스가 케로네소스를 기지로 삼아 아뷔도스를 포위했다라고 전한다.(같은 책,제5권1장7,25)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아게실라오스 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 텔레우티아스에 대해서도 놀랄 만큼 많은 찬사를 늘어 놓고 있는데, 그가 선원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급료를 지불하지 않고서도 흩어졌던 선원들을 모아 해군을 재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같은 책,제5권1장3-4,13-24참조) [본문으로]
- 스파르테의 페이라우에우스 습격은, 장성을 복구하고 새로운 영화를 꿈꾸던 아테나이가 코린토스 전쟁을 겪으며 입었던 타격들, 이를테면 아이기나의 아티케 약탈이나 트라쉬불로스의 죽음 같은 타격들 가운데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것이어서, 아테나이의 민심은 또 다시 다가올지 모르는 패전의 굴레에 대한 공포와, 지금까지 코린토스 전쟁을 이끌어 온 트라쉬불로스와 아뉘토스 등이 대표로 하는 민주정 복고파들의 전쟁 수행 능력 한계에 대한 실망 때문에, 조용히 패전이 아닌 종전을 바라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같은 책,제5권1장29참조) [본문으로]
- BC387 [본문으로]
- 용병 이피크라테스에 의해 운용되던 서른다섯 척의 아테나이 함대는 안탈키다스의 연합 함대의 숫자에 눌려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같은 책,제5권1장29) [본문으로]
- 안탈키다스의 화평으로 알려진 강화의 조건들은 크세노폰의 '헬레니카' 참조. [본문으로]
- 아게실라오스의 아나톨리아 원정 [본문으로]
-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전의 10년 전쟁을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기서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헬라스의 내전으로 표현하여 왔으므로 펠레폰네소스 전쟁 후의 코린토스 전쟁 역시 헬라스 내전으로 보고 이것까지 포함하여 세 번의 헬라스 내전으로 표현한 것이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가정론家政論' [본문으로]
- 퀴로스의 반란에 참여해야 했던 스파르테가 BC400 페르시아와 벌인 전쟁 때문에, 그리고 스파르테의 헬라스 패권 추구를 막아야 자신들의 헬라스 패권 추구 야망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테바이를 주축으로, 페르시아와 스파르테 간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패전의 굴레를 벗어날 기회를 찾은 아테나이와, 펠레폰네소스의 영원한 반스파르테 친아테나이의 아르고스, 그리고 스파르테의 패권 추구가 그들의 번영을 막는다고 보는 코린토스, 헬라스의 이 넷 큰 도시들이 연합하고, 이에 페르시아가 적극적으로 전쟁 자금을 공여하면서 BC395에 일어난 두 번째의 헬라스 내전은, 코린토스의 스파르테를 라코니케 밖으로 나오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코린토스의 전략으로 코린토스가 주된 전장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코린토스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BC387 스파르테의 안탈키다스와 페르시아의 티리바조스 간에 이룩된 강화로 스파르테 페르시아 전쟁 상태가 해소되었고, 스파르테와 페르시아가 내놓은 강화 조건을 먼저 아테나이가, 뒤 이어 테바이와 아르고스도 받아들이고, BC386 코린토스가 아르고스에서 벗어나 다시 자치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스파르테가 치루어야 했던 두 개의 전쟁이 완전히 끝이 났다. [본문으로]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2권1(43),제6권1(9),(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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