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쟁과 시인
5.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과 역병의 재앙으로 혼란을 겪는 아테나이에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것 저것 따지면서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페리클레스 때부터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갖가지 설을 풀던 소피스테스들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그들은 그 재앙이 가져다 준 신이나 인간관계나 도시의 가치에 대한 회의로 마음이 황폐해진 아테나이 사람들, 특히 아테나이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선보이며 다가갔습니다. 그전에는 서로 같은 가치를 배웠던 도시와 시골의 젊은이가 그 재앙 이후에 받아들인 가치는 확실히 서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도시의 젊은이들은 그 새로운 가치에 급격히 적응해 갔고, 시골 젊은이들은 그들의 황폐해진 마음에 고집스럽게 박혀 있는 시골 어른들의 전통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서로 부딪치는 혼란을 겪으며 지내야 했습니다. 이 새로운 가치는 도시를 유지하는 공동의 의지나 지식이 아니라, 다시 말해 도시와 같은 공동체에 섞인 한 사람의 의지나 지식보다 세상에 홀로 선 자신의 의지나 지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로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의 빈 자리를 단자로 자연을 따지는 데모크리토스와 지식 즉 앎으로 인간의 훌륭함을 따지는 소크라테스가 차지했습니다.
5.2. 이런 가운데 재앙이 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하게 아테나이는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남긴 권력의 빈 자리 때문에 전쟁이 끝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가 집에 데려와서 키운 양자와 같은 알키비아데스는 아직 어려 권력을 쥘 수 없었고, 경건하지만 우유부단한 니키아스가 페리클레스가 물려준 밥상을 어찌할지 몰라 허둥대는 동안, 약삭빠른 암피폴리스의 가죽장사 클레온이 숟가락을 들고 나타났습니다1. 돈에 밝은 장사치의 말솜씨가 상실감으로 허전한 아테나이 시민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돈으로, 그것도 키몬처럼 자기 돈을 쓰야 한다면 절대 정치 같은 것에 뛰어들 사람이 아닌 아고라의 가죽 장사 클레온이 도시와 동맹의 돈으로, 시민들을 사는 방법은 이미 페리클레스로부터 감명 깊게 배워 두었고, 시민을 설득할 논조 역시 그 잘난 페리클레스가 이미 세워 둔 그대로면 되었지요. 아테나이가 번영하려면 동맹을 더 견고히 묶어둬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계속해야 하고, 그래서 스파르타를 눌러야 한다는 논조였지요. 동맹은 전쟁을 핑계로 동맹도시에서 조공을 거두는 아테나이의 수입원이었으며, 그 돈으로 사재를 키우지는 않았던 페리클레스와는 달리 이제 클레온은 그 돈으로 그의 가업을 융성하게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 클레온이 화평을 만지작거리는 니키아스를 누른 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5.3. 페리클레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한 아테나이의 가치가 무너져 내리는데, 소피스테스들은 신이 어떠니 인간이 어떠니 해대며 헛바람을 황폐해진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어 넣고 있었고, 드디어 장사꾼까지 정치에 나서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여러분을 부추기기 일쑤였습니다. 정치꾼은 입만 벌리면 돈을, 전쟁을 말했고, 철학자나 소피스테스는 자연을, 인간을 말했습니다. 아무도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5.4. "도시는 정의로워야 한다. 도시가 무너지면 시민은 그냥 무너진다. 정의로운 시민도 좋지만 먼저 도시의 정의가 살아야 한다. 정의로운 시민은 불의한 도시에 살 수 있을지 몰라도, 불의한 도시는 정의로운 시민들이 있건 없건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 정의가 도시의 뼈대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평화로워야 한다. 도시는 결코 전쟁으로 번영할 수 없다. 아무리 비싸도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면, 평화는 전쟁으로 얻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지고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 전쟁으로 얻는 것이 있다면 소수의 것일 뿐, 평화만이 도시민 모두에게 골고루 번영을 약속할 수 있다. 전쟁은 짧은 동안 도시와 도시민이 지켜야 할 가치 있는 것을 무너뜨리지만, 평화는 도시를 오래도록 지킨다. 평화가 도시의 살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로운 도시에 활력이 넘친다. 도시의 정의나 평화가 자유를 누리는 도시민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모두 칼과 거짓에서 나온 것이다. 살고 싶은 곳에 살 자유,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 생각할 자유, 말할 자유, 이 모든 자유가 도시를 살아 꿈틀 거리게 하고, 도시를 움직인다. 자유스러운 도시에서만 정의와 평화가 도시민의 생활 속에 살아 움직인다. 자유가 도시의 핏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무엇보다 우선하여, 정의, 평화, 자유, 이 셋이 도시민을 안전하게 지키고, 행복하게 하고, 도시를 번영하게 한다."
5.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것이 약관의 이 아리스토파네스가 도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화두로 삼고 푼 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화두와 답을 가지고 연극으로 꾸며 여러분들 앞에 나타내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도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당시 제가 아테나이에 물었던 시대의 화두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화두를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제일 먼저 떠들고 답을 내고 여러분들의 마음을 모아야 할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정치지도자들이 딴짓이나 벌이며 젠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나설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연극 무대라는 것을 찾자마자 저는 한 평생 도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로지 전쟁이나 외치는 클레온과 같은 정치꾼들은 물론, 인간의 의지나 품성에만 몰두하는 소크라테스나2 인간의 의지나 감성에만 몰두하는 에우리피데스3와 언제나 마주하는 도시의 영혼으로서 그들과 맞서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마주서서 도시가 해야 할 바에 대해 목소리를 높혀 왔던 것이었습니다.
5.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네 번째 해부터 병마의 재앙이 다소 진정되어 갔지만 사람들의 태도는 더욱 거칠게 바뀌어 갔습니다. 병마와 전쟁으로 재앙을 겪는 동안 도시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너져 내리는 아테나이를 생각하며, 저는 디오뉘소스가 불어 넣어 주신 광대의 영혼으로 연극 하나를 처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전염이 최고에 달해 되도록 바깥 나들이를 삼가라는 주의를 받으면서, 사람들이 그 재앙을 어떻게 대처해 가는가를 지켜보던 전쟁 세 번째 해의 가을에 만든 저의 첫 작품 "잔치에 온 손님들"이 이듬해 여름 예비 심사를 받았는데, 사실 그때는 제가 아직 어려 경연의 연령 제한4에 걸렸었기 때문에 연출자didaskalos 칼리스트라토스5의 이름으로 통과했지만, 배우들과 코로스를 배정 받아 연습하는 반 년 동안은 칼리스트라토스보다 제가 더 열심히 그들을 연습시켜 새해 레나이아 축제의 무대에 올렸습니다. 전쟁 다섯 번째 해인6 그해는 아테나이가 두 번째로 개인을 비방하여 공격하는 희극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시행하는 첫해여서 그랬는지, 프뤼니코스가 겁을 먹고 좀 소심한 연극을 무대에 올린 덕분인지, "잔치에 온 손님들"은 저의 처녀작이고 첫 출품이었음에도 이등이나 했었습니다. 아마 제가 넣은 에페이소디온의 경우들이나 두 주인공들이 벌였던 논쟁의 내용이 모두 제 또래의 자식을 가진 부모들의 우려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생각됩니다. 연극의 제목은 잔치집에 온 손님들로 꾸려진 코로스들의 역활을 따서 정했고, 주인공들은 아티케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란 두 형제로, 하나는 '성실이'인데, 시골에 남아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모시고 사는 소박하고 성실한 형이고, 또 하나는 '불량이'인데, 공부해서 출세한답시고 일찌감치 큰 도시로 나가 바람끼 많은 도시 사람이 되어버린 동생으로 세웠습니다. 모처럼 도시에서 돌아온 동생을 위해 형이 연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매사에 '성실이'와 대비되는 '불량이'의 행실과 말하는 내용을 앞세워 도시 생활에 맞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피스테스들의 교육이 끝내 한 인간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어 놓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면서, 시골 젊은이의 순박하고 진지한 모습과 맛있는 음식과 흥겨운 놀거리만 찾는 교활하고 불량한 도시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대비하여, 그들을 부추기는 그 당시 소피스테스들의 행태를 우스개거리로 만든 작품이었습니다7.
5.7.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그 역병은 전쟁 세 해째에도 수그러들 줄을 모르더니, 전쟁 네 해째가 들고 나서야 제법 숙지근해지나 싶었는데, 전쟁 다섯 해째로 들어가던 늦겨울부터 다시 창궐하기 시작해, 그 한 해를 온통 같은 재앙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도시가 내환의 재앙과 외우의 전쟁으로 혼돈에 빠진 그 당시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만큼 강력한 정치지도자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도 재앙의 수습도 그럭저럭 꾸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클레온만은 페리클레스의 죽음으로 비어 있는 권력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전쟁 네 해째 여름에도 스파르테는 아르키다모스를 보내 아티케를 유린하려 했지만, 이미 아티케는 현지 보급을 얻을 수가 없을 정도로 황량해져 있어, 자기들이 가져온 보급 물자가 바닥나자 한 달 만에 돌아갔습니다8. 그런데 정작 큰 일이 저 멀리 레스보스 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르키다모스가 스파르테로 돌아가고 나서 여름이 한창일 때, 레스보스 섬의 도시 뮈틸레네가 섬의 패권을 잡으려고 스파르테의 도움을 기대하며 재앙과 전쟁 수행으로 허약해졌다고 보이는 아테나이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나온 것입니다. 사실 아테나이는 생각보다 전쟁 비용을 많이 지출해 국고가 비상금 수준으로 떨어지자, 앞에서 한번 말씀 드렸던 대로, 전쟁 네 해째 여름이 끝날 무렵 비상 대책으로 동맹도시들이 부담하는 조공의 액수를 올렸는데, 이에 대한 반응 역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동맹들의 심한 저항으로 나타나 조공 수금책인 뤼시클레스가 살해되기까지 했고, 그해 겨울이 시작되기 전 뮈틸레네를 포위했을 때는 응급으로 전쟁세 에이스포라eispora9를 직접 여러분에게 거두어야 했을 정도였지요.
5.8. 아테나이는 이제 본격적으로 치열해지는 전쟁과 재앙의 수습 때문에 대규모 원정의 여력이 없다고 보아, 클레온이 앞장서서 퍼부은 심한 비난들을 무릅쓰고 사절단을 보냈지만 뮈틸레네를 주저앉히지는 못했고, 오히려 동맹에 남은 메튐나와 아테나이에 우호적인 일부 뮈틸레네 사람들의 조속한 개입 촉구로 아테나이는 무력으로 이들을 응징하기로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뮈텔레네 쪽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서인지 사절을 보내왔고, 성의 없는 협상은 결렬되었고, 뮈틸레네는 스파르테 동맹에 의지하여 마침내 두 동맹 간의 대결로 매듭짓게 되었지만, 펠로폰네소스 해군의 늦장으로 지원군에 대한 기대를 접은 뮈틸레네가 협상 끝에 아테나이의 진압군 장군 파케스를 도시로 들이자, 파케스는 곧바로 퓌르라와 에레소스를 함락시켜, 스파르테에서 파견되어 와서 반란을 돕고 있던 살라이토스와 반란자들을 잡아 아테나이로 보냈고, 아테나이는 즉시 살라이토스를 죽여 버렸습니다. 더 나아가 아테나이에 잡혀 온 뮈틸레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뮈틸레네에 있는 모든 성년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아이들이나 여자들은 모두 노예로 삼기로 결의하고, 삼단노선을 보내 이 결의를 이행하도록 하면서, 근 일년을 끈 동맹 파기 반란 진압을 마감하는 듯 보였습니다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아테나이에 클레온과는 다른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어 대량 살륙의 결의가 께름칙해진 사람들이 이튿날 아침부터 결의를 재고하자고 나서자, 민회를 소집해 전날의 결의는 재의에 부쳐졌습니다. 전날 대량 살륙의 결의를 주도한 클레온이 다시 나서 정의를 들먹이고 일벌백계를 들먹이면서 대단히 긴 연설을 했지만, 까부는 사람들은 다 죽여야 한다는 데야 정의는 무슨 정의 어디 여기에 옮길 만한 좋은 말 나왔겠습니까? 그보다는 전날부터 대량 살륙을 반대했던 그냥 야무지고 반듯하고 도시의 일을 자기 일로 알던 한 아테나이 시민 에우크라테스의 아들 디오도토스의 호소를 한번 되새겨 보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분노와 졸속은 깊고 신중한 생각과 상반되는 것으로 분노는 어리석음을 동반하기 쉽고 졸속은 조잡함과 짧은 생각을 낳기 쉽습니다. ... 특히 자유나 지배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다루는 도시는 개인 이상으로 전체에 대해 도시 자신을 불합리한 정도로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도시가) 법의 힘이라든가 뭔가 다른 제약으로 사람들이 무언가 하고자 하는 욕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단순한 생각일 뿐만 아니라 무능하고 또 크게 모자라는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파케스가 죄인이라 보낸 뮈틸레네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재판을 하여) 판단하고, 뮈틸레네에 남은 사람들은 그 땅에 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장래를 위해 가장 좋은 정책이며 동시에 적에게는 가장 두려운 정책입니다. 적에 대해 좋은 정책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맹목적인 폭력으로 맞서는 것보다 강력한 것입니다."10 그리고 아테나이는 이 뒤집힌 결의를 전달하기 위해 삼단노를 또 다시 보냈습니다. 대량 살륙을 피했다는 안도감과, 늦으면 무고한 사람이 많이 죽는다는 절박감이 노를 빨리 젓게 했고, 마침 순풍도 불어 뮈틸레네에 빨리 도착한 덕분에, 또한 대량 살륙에 대한 꺼림칙함으로 처형을 늦추고 있었던 파케스 덕분에 레스보스에 있던 미틸레네 사람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아테나이에 잡혀 온 이천 명이 넘는 뮈틸레네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재판을 통해 판단하자는 디오도토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클레온의 사주를 받은 아테나이 사람들에 의해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11. 전장도 아닌 우리 도시 아테나이에서, 재앙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던 우리 도시 아테나이에서, 이제는 또 전쟁으로 붙잡혀 온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해 죽어나가다니. 헬라스의 신들이 그들의 영혼을 모두 거두어 주시길.
5.9. 뮈틸레네가 그들 도시의 번영을 위해 레스보스 섬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섬의 다른 도시들과의 마찰을 일으키자, 이익이 상충한 같은 섬의 도시 들이 아테나이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이에 맞서 뮈틸레네가 스파르테를 보호자로 택하면서 생긴 도시들 간의 싸움이었다면, 한 도시 안에서의 상충된 정치세력 간의 싸움이 종주도시들의 개입을 부르고, 또 그 개입을 실패로 끝낸 한 종주도시의 상충된 정치세력이 내전에 가까운 싸움을 일으키면서, 끝내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의 싸움으로까지 이끈 사건도 케르퀴라12 섬에서 같은 해인 전쟁 다섯 해째 여름에 일어났습니다.
5.10. 일곱 해 전, 그러니까 헬라스 내전이 일어나기 두 해 전 케르퀴라와 아테나이의 연합과 벌인 쉬보타 해전 뒤에 코린토스가 잡았던 케르퀴라의 유력인사 이백예순 명을 귀환 길에 확보한 아낙토리온에 거주시키고, 그들을 환대하여 코린토스에 우호적으로 바꾼 뒤, 전쟁 다섯해 째 그들이 케르퀴라를 아테나이의 동맹에서 코린토스로 돌려 세우겠다고 약속하자 보석금을 받았다며 풀어 주었습니다. 섬으로 돌아간 그들은 보통시민들의 대표인 페이티아스가 케르퀴라를 아테나이에 예속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며 재판에 회부했는데, 그가 무죄 판결을 받고는 되려 그 정적들 가운데서 최고로 부자인 다섯을 골라 제우스와 오딧세우스의 벗으로 알려진 케르퀴라의 왕 알키오노스 성역의 포도나무 덩굴 받침을 잘랐다는 죄로 고발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게 만들었지요. 벌금을 나누어 내겠다는 탄원에도 불구하고 페이티아스가 벌금을 그대로 내게 하고, 나아가 아테나이와 공수동맹을 맺으려 하자, 그 다섯 명은 동료들과 민회로 쳐들어가 페이티아스와 민회의원 등 예순 명을 죽인 다음, 케르퀴라 시민에게 그것이 아테나이에의 예속을 막는 최선이었음을 설명하는 한편, 아테나이에 같은 내용을 전해 반발을 피하려 했으나 아테나이는 사절과 뇌동자들을 아이기나에 유폐시켜 불인정의 뜻을 밝혔습니다. 이리하여 케르퀴라는 권력이 다시 뒤짚혀 여자까지 동원한 보통시민들이 섬을 장악했고, 그 뒤에 코린토스의 배가 와서 귀족들이 뒤짚고, 다시 뒤짚힌 걸 펠로폰네소스의 선단이 와서 또 다시 뒤짚고, 마침네 아테나이의 선단이 와서 보통시민들이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대학살이 벌이기까지, 케르퀴라에서는 정파들 간의 내전이 지원하는 도시의 선단이 올 때 마다 승패가 바뀌어, 수많은 시민들이 잔혹하게 죽어 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내전의 살륙은 아테나이의 에우뤼메돈이 케르퀴라에 일주일 머무는 동안 그의 암묵적인 지지와 방관으로 절정에 이르러, 정치적인 반대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 원한이나, 재물을 탐하거나, 빚을 갚지 않기 위해, 민주정을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13.
5.11. 정말 뼈다귀만 간추렸는데도 제법 장황해진 뮈틸레네와 케르퀴라의 이야기는 전쟁 다섯 해째가 되자 헬라스의 내전이 이성을 잃을 만큼 치열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아울러 이 두 섬에서 일어난 내전과 지원 세력 간에 벌어진 전쟁의 형태가 그 뒤로도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반복적으로 일어나, 도시 안의 싸움이나 도시 간의 싸움이 어떻게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의 동맹들을 불러들여 전체 헬라스의 전쟁으로 번지게 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가 앞에서 말씀 드렸던 전쟁이 왜 벌어지는지에 대한 저의 생각의 좋은 보기가 되는 것 같아, 여러분께서 이미 너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일부러 한번 정리해 말씀 드렸습니다.
5.1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잡혀 온 뮈틸레네 사람들을 제대로 된 재판도 하지 않고 모두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도시의 재앙이 전염병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뒤 이어 아테나이에 거주하던 동맹도시들의 사절들이 클레온의 초청에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젊은 제 가슴을 터지게 하였습니다. 도시는 이미 전염병 재앙이 가져온 충격으로 정신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클레온이 그런 아테나이의 혼란을 자기의 정치적 야심의 성취와 전쟁을 통한 축재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바로 클레온을 고발하는 희곡을 써 내려가면서, 클레온이 연 그 연회에는 때마침 바뷜로니아에서 온 대규모 사절들에게 전 헬라스에 떨치는 자기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그들도 초대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바뷜로니아 사절들에게 코로스의 역활을 맡기기로 하고, 따라서 제목을 "바뷜로니아 사람들"이라 붙인 다음, 주인공은 바로 클레온으로 지명했습니다. 저는 설마 고발을 하랴 싶어 조금도 겁먹지 않고, 소크라테스라면 별 고민 없이 따랐겠지만14, 저는 '희극에서 개인을 공격하지 말라'는 법 같지도 않은 법은 따르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자신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희극이 상연되자 참지 못하고 희극의 내용을 제한하는 법을 처음 만들었다가, 사람들이 그것을 두고 더 많이 조롱하고 비웃자 곧바로 그 법을 취소한 것은 그나마 페리클레스 정도 되니까 그럴 수 있었지만,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만들어진 두 번째 금지법은 클레온 같은 정치꾼들이 극작가와 관객들이 자기들을 소재로 웃고 까불고 저자의 술집에서도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안주로 삼아 씹어 대니까 아예 사람들을 겁주려고 다시 또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 해도 극작가는 그들의 행실머리를 약간 비틀어 보여주기만 했지 사실을 밝힌 것이니까 겁 먹을 것 없었습니다. 그리고 뮈텔레네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동맹도시를 대하는 클레온의 태도는 언젠가 또 다른 뮈텔레네를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참으로 비열하다고 표현해야 알맞는 패권주의적 행패였기 때문에, 아테나이와 동맹도시 사이의 강한 유대를 위해 반드시 비난 받고 고발당해야 할 사안이라 생각했었습니다. 이 아리스토파네스가 이 같은 도시의 문제에 대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지요.
5.13. 전쟁 여섯 해째15 저는 두 번째로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 클레온이 동맹도시의 사절들을 불러다 모아 놓고, 어루고 공갈치며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행패를 소재로 한 "바뷜로니아 사람들"을 이번에도 역시 경연의 나이 제한에 걸렸기 때문에 칼리스트라토스 이름으로 무대에 올렸습니다.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하는 클레온을 고발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클레온을 이미 무섭게 보았는지, 그 연극으로 저는 경연 참가 두 번째만에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일등을 차지했고, 그 일등에 대한 상은 그 다음에 따로 클레온에게서 받았습니다. 클레온은 자기가 동맹도시의 사절들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사절들도 자신의 환대에 고마워했다면서, 제가 코로스로 배치한 이방인인 바뷜로니아 사람들 앞에서 마치 동맹의 사절들을 어르고 뺨 친 것처럼 묘사한 것은 제가 자신을 비방하고 무고한 것이라며, '희극이 개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한 그 법을 위반했다고 저를 법정에 세웠는데, 그 뒤 언제나 제가 그때 죽을 뻔했다고 말할 정도였던16 그 재판은 바로 클레온이 제게 준 일등상이었습니다.
5.1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저도 그해에 처음 일등에 뽑힌 작품 탓으로 클레온의 괴롭힘을 받고 있었지만, 아테나이도 전년 겨울부터 다시 창궐한 전염병으로 다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름에도 어김없이 스파르테는 아티케로 왔는데, 아르키다모스가 건강을 잃고 들어눕는 바람에 그의 아들 아기스가 동맹군까지 데리고 왔지만, 아티케와 헬라스의 다른 곳에서 지진이 나고 해일이 덮치는 천재지변이 생기자 돌아가서 그해는 다시 오지 않았고, 멀리 시켈리아에서는 식량 확보가 걸린 전투가 계속되었고, 아이트나는 오십 년만에 다시 분화했으며, 해상 동맹을 거부하는 멜로스 섬의 길들이기에 실패한 니키아스는 보이오티아로 나아갔습니다. 데모스테네스는 선단을 이끌고 펠로포네소스의 해안을 돌며 여러 도시들을 건드렸고, 신탁에 따라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도 정화했습니다만, 그해는 여러 곳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들 뿐만 아니라, 역병에서 지진 해일 화산폭발까지 큰 자연 재앙도 곳곳에서 연달아 터진 힘든 한 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재앙 속에서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도시를 쥐어짜는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테나이로서는 아직은 아테나이나 동맹도시를 쥐어짜서 도시를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겠지만, 수입에 한계를 느끼자17 평소에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내버려 두던 멜로스 같은 섬에도 조공을 요구하여 듣지 않자 니키아스의 선단을 보내야 했는데, 상대적으로 느슨한 동맹 관계를 가진 스파르테는 동맹을 쥐어짤 수도 없고, 일찌기 페리클레스가 지적한 대로 농사를 지어 가면서 전쟁을 수행해야 되었기 때문에 도시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더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스파르테가 단숨에 처치할 수 있었던 플라타이아이를 무력으로는 점령하지 말라며 포위만 하고 있었던 이유도 이미 평화를 염두에 두었던 것 아닌가 싶기는 한데, 그래도 자존심 강한 스파르타가 정말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테나이가 아이기나만 돌려주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의사를 비쳤는데도 클레온이 그 제안을 물리쳤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이 소문이 클레온과의 재판과 역병의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 심신이 지쳐 있던 저를 일깨웠습니다.
5.15. "아테나이에는 평화가 필요하다. 스파르테가 아닌 아테나이 시민을 위해. 대부분 전원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그 생활을 즐기던 아테나이 시민이 가족을 데리고 도시에 들어와 짐승들과 같은 거주 환경 속에 병마와 다투며 산다는 것은 그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아테나이에는 평화가 필요하다." 무엇을 말할지가 정해지자 주인공은 전원에서 피난 나온 시골 농부가 당연했고, 코로스들은 전쟁 내내 자기 마을이 유린당하는 것을 성벽 북쪽에서 눈을 뜨고 보면서도 뛰쳐나가지 못한 아티케의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전쟁 일곱 해째 새해의 레나이아 축제에는 저의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그때까지로 마지막이 될 경연 나이 제한 때문에 다시 칼리스트라토스의 이름으로 무대에 올라 일등을 차지하며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연속 두 해에 걸친 우승이었습니다.
5.1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오래 갈지도 모른다던 전쟁이 터지고 여섯 해가 지났습니다만 그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리고 그 전쟁의 와중에 들이닥친 역병의 재앙으로 도시의 세 사람 중 하나가 죽어 나갔는데도,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나서 전쟁을 끝내자고 말하지 못하고, 클레온이 나서서 흔드는 전쟁의 깃발 아래 내몰려 있어야 했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요? 노를 저어 번 돈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전쟁이 바로 돈이자 전쟁이 바로 생활이었지만18, 아티케의 올리브밭과 포도밭에서 농사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돌을 쪼거나 구두를 깁는 사람들은 전쟁이 바로 빈곤이자 전쟁이 바로 고통이었지요. 게다가 역병의 재앙은 집을 두고 성 안으로 피난해 지내던 아티케의 농투산이들에게 더 큰 비극을 안겨주었습니다. 아티케의 농촌 집들과 밭들을 모두 불에 태우고 싶다던 페리클레스의 우려가 도시의 일각에서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전쟁으로 생활이 피폐해진 사람들이 평화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도시는 아직 전쟁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컸고 평화를 이야기할 계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도시를 배반하고 혼자만의 평화라도 이루어 가는 것이 불의한 짓인가? 그렇다면 도시의 정의는 전쟁으로만 지켜지는 것인가? 전쟁이 정의라면 평화는 불의한 것인가? 불의한 평화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그래서 디카이오폴리스가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농투산이 디카이오폴리스가 개인적인 평화를 이룬 그 연극은 도시가 도시민의 행복을 도외시 할 때 도시민이 도시에 대하여 취할 태도를 아주 극명하게 잘 보여준 가작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연극에서 오밀조밀한 소품으로 관객의 감성을 건드리는 에우리피데스를 저의 연극에서 처음으로 패러디paroidia,parody해 에우리피데스를 등장시키고, 에우리피데스에게 얻은 소품으로 디카이오폴리스를 에우리피데스 연극의 입심 좋은 텔레포스처럼 최대한으로 불쌍하게 보이도록 만든 다음, 스파르테라면 송장이 되었어도 벌떡 일어나는 아카르나이의 늙은 전사들에게 전쟁의 발단과 평화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장면을 만들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전쟁이 페리클레스의 동반자 아스파시아의 창녀 둘을 메가라 사람들이 납치한 것에 대한 징벌로 벌어진 일이라고 전체 헬라스에 퍼져 있었던 소문을 넣은 것은 페리클레스가 메가라 사람들이 아테나이와 메가라에 있는 신역에 함부로 출입했다고 경제봉쇄령을 내린 사소함에 비해, 사모스의 경우처럼 동반자인 아스파시아의 창녀 둘을 빼앗긴 화를 풀어 주기 위해 그랬다고 하는 것이19 농투산이 디카이오폴리스의 눈에 이런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전쟁이 일어난 이유로 이것이 훨씬 더 사소하지 않다고 비쳐진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라도 평화가 필요한 디카이오폴리스와 전쟁하기를 좋아하는 클레온 같은 라마코스의 논쟁과20, 이어서 코로스장이 여러분께 토로했던 파라바시스21는 지금도 여러분께서 반드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5.1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제가 클레온이 재판으로 심신불편형이라는 드라콘의 법에도 나오지 않는 벌을 주는 것을 견디며 레나이아 축제에서 일등하는 동안22, 클레온 역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전쟁 일곱 해째인 그해는 가히 클레온의 전성시대라 불러도 좋을 만큼 그의 일이 잘 풀렸습니다만,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위해 찾아든 천재일우의 평화를 이룰 기회를 그 클레온이 그의 권력과 바꾸어 버린 해이기도 했습니다. 전쟁 다섯 해째 겨울에 다시 들이닥친 전염병이 일 년을 끌다 조금씩 호전 되는 기미를 보였고, 첫 번째 재앙이 두 해를 끈 것에 비한다면 그래도 나은 편이어서 전쟁 일곱 해째에는23 조금 정신 차릴 만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름이 되자 어김없이 스파르테와 그 동맹군은 아르키다모스가 죽어 이제는 그를 이어 새로 왕이된 아기스를 보내 펠레폰네소스와 아티케 사이의 지협까지 와서 아티케를 공격하려 할 정도로 확전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 일곱 해째 전쟁은 운수대통의 클레온이 메세니아의 퓔로스를 점거하고, 스팍테리아에서 스파르테와 동맹군 포로 이백아흔두 명을 잡아 데리고 오면서 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아테나이에게는 정말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을, 스파르테에게는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은 치욕을 가져온 클레온의 눈부신 이 전과는 이 자리에서 굳이 세세한 경과를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라서 생략하겠습니다만, 데모스테네스의 활약에24 니키아스 대신 클레온이 올라타게 된 사연도, 스파르테와 같은 사투리를 쓰는 메세니아 전사들의 고육책도, 두 달 보름에 가까운 고립 속에 지휘관을 잃고 정신을 놓은 백스무 명이나 되는 스파르테 동등인 전사들과 나머지 동맹군의 믿어지지 않는 투항까지도 이 모두가 클레온의 행운이었겠지만, 그보다 출전에 앞서 아테나이 시민에게 그 적들을 스무 날 안에 모두 사로잡아 오겠다며 큰소리친 말도 안 되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그로 하여금 그가 그토록 원하던 페리클레스에 버금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만든 결정타였습니다.
5.18. 퓔로스와 스팍테리아 섬에서 거머쥔 클레온의 행운은 곧 아테나이와 전체 헬라스의 행운이 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클레온은 그 행운으로 평화를 구하는 대신,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아테나이 배심원의 일당을 1 오볼로스 인상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스파르테는 브라시다스와 스파르테 해군의 분전에도, 자국의 동등인 백스무 명이 포함된 동맹군 사백여 명이 스팍테리아 섬에 갇혀 있는 전대미문의 황당한 사건 앞에 당황해서, 그리고 물론 오랜 전쟁으로 도시가 지쳤고, 농장 노예들의 탈출이 늘고, 인근 도시의 반란 조짐도 보이는 등 여러 어려움이 있어 퓔로스와 포로들를 돌려 받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서둘러서 화평을 제안했겠습니다만, 아테나이와 클레온은 스파르테가 가진 속령 가운데 이것 내놓으라 저것 내놓으라 놀리면서 그 제안을 거부했고, 데모스테네스를 앞장세워 직접 그들을 포로로 아테나이로 데려 갔습니다. 모멸감의 스파르테는 전쟁에서 이기는 길만이 살 길임을 깨달아 내부 단속과 전략 수정의 길로 나갔고, 반면 아테나이는 정말 동맹도시들 앞에 거들먹거리며 전쟁 수행 비용으로 조공을 두 배 심지어 어떤 도시에게는 세 배로 올렸고, 클레온은 그 돈으로 페리클레스가 주던 배심원 일당 2 오볼로스를 3 오볼로스로 올려, 여러분들의 인기를 얻은 덕분에 그토록 원하던 권좌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며, 그 보답으로 클레온은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을 평화의 길로 모신 것이 아니라 또 다시 힘겨운 전쟁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이것을 본 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메가라 포고령 하나면, 아이기나 섬 하나면, 그리고 퓔로스와 포로들 놓아 주면 평화를 얻을 수 있었는데, 아테나이는 그 세 번의 기회에 한결같이 평화 대신 전쟁만을 택했습니다25. 전쟁과 재앙으로 지샌 지난 일곱 해가 고단한 아테나이에 행복과 번영은커녕 피난 생활과 병마의 재앙으로 간난과 절망만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맹도시들도 허리가 휘는 조공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도, 클레온이 동맹도시들을 쥐어짠 수입으로 여러분의 입을 헤벌레하게 만들어서 잡은 권력으로 전쟁을 선언하는 것을 본 저는 클레온을 더 이상 권좌에 두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점잖게 말해 그에게 전쟁의 기술은 있는지 모르겠으나 전쟁을 하지 않을 기술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고, 나쁘게 말해 그에게는 전쟁으로 돈을 버는 재주는 있었지만 평화로 돈을 벌 수 있겠는지 두려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클레온을 권좌에서 몰아내자! 아테나이에는 평화로 도시를 번성하게 할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
5.1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저는 이러다가는 영원히 평화를 이룰 수 없겠다는 절망감 속에 "기사들"을 만들었습니다. 전쟁 여덟 해째26 새봄의 레나이아 축제에는 이제 경연에 정식으로 저의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나이 스물다섯이 되어 처음으로 이 "기사들"을 저의 연출로 올렸고, 그때도 역시 여러분의 사랑으로 삼년 연속 일등상을 차지했습니다. 어쩌면 그 상은 디오뉘소스가 주신 영감으로 연극의 전체 구도를 알레고리로 구성한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코 "바뷜로니아 사람들"로 당한 혹독한 시련 때문에 클레온을 직접 공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 연극에 알레고리를 깐 것은 아니었습니다. 클레온의 퇴출은 아테나이 시민보다 전쟁으로 찌든 클레온 휘하의 장군들과 기사들이 더욱 더 바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 연극의 전체 구도에 조심스런 알레고리를 깔도록 이끌었습니다. 장군들과 기사들이 무력으로 민회가 선출한 권력자를 물러나게 한다는 것은 민주적인 정치 체제의 가치를 최고로 믿고 있는 제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여 누가 클레온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 방법도 좋다고 말했다면, 저는 분명하게 그런 방법을 생각하는 장군들과 기사들을 내쫓고 클레온을 지키겠다고 대꾸했을 것이고, 또 행동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부정하는 반역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클레온은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장군들과 기사들이 무력이 아니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클레온을 권력에서 퇴출시키는 연극의 전체 구도를 짜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그 연극의 알레고리였습니다. 아테나이의 주인인 시민 여러분 모두를 집주인인 '데모스'로 대입하고, 아테나이의 집주인인 여러분이 뽑아 쓰는 클레온이나 다른 장군들 같이 아테나이를 위해 일해야 하는 공직자들을 데모스 집의 하인들로 대입했습니다. 클레온은 데모스 집 하인들 중 가장 최근에 들어와 희한한 방법으로 데모스에게 입 안의 혀처럼 굴어 데모스의 마음을 휘어잡은 뒤, 오래 전부터 일해 온 다른 하인들을 압도하며 데모스 집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는 하인, 가죽을 잘 다루는 수완 좋은 하인, 데모스가 파플라고니아에서 사들여 파플라고니아 사람으로 불리는 하인으로 대입하고, 클레온을 내쫓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장군들은 파플라고니아 사람에게 당하는 다른 하인들로 대입했으며, 마지막으로 클레온보다 수완도 입심도 좋고, 특히 아테나이와 시민을 잘 모셔 진정 도시를 번영으로 이끌고 시민을 행복하게 할 대항마로 집주인 데모스에게 파플라고니아 사람의 정체를 밝혀 주어 데모스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내쫓도록 할 새로운 하인, 다른 하인들이 물색한 아고라에서 소시지를 파는 소시지장수 아고라크리토스를 설정해 대입했던 것입니다. 물론 코로스는 언제나 아테나이에 충성하는 기사들로 배치했고, 제목도 "기사들"이라 붙였지요. 연극에서 데모스가 정신 차려 파플라고니아 사람이 쫓겨나고, 소시지장수 아고라크리토스가 새롭게 자리 잡는 것을 보고는, 여러분 모두 그렇게 환호하며 끝이 아주 잘 되었다고 칭찬했지만 아테네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클레온은 승승장구했습니다. 제가 "가사들"로 우승을 거둔 전쟁 여덟 해째에도, 여름이 되자 내실 다지기에 들어간 스파르테의 소극적 대응 덕분에 활동 공간이 넓어진 아테나이는 원정군의 활약이 계속되어 곳곳에서 승전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동맹도시들에 증가시킨 조공을 클레온이 난민들에게도 잘 나눈 탓인지, 아테나이에도 피난과 재앙이 몰고온 어두운 분위기를 걷고 조금씩 새로운 질서의 자리를 잡아 가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고 여덟 해가 되면서 모처럼 스파르테가 아티케로 들어오지 않았지요27. 틀림없이 우리 디카이오폴리스도 시골집에서 가족과 함께 작은 평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5.2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런데 그 "기사들"의 결말과 달리 클레온은 나날이 여러분의 지지를 더 많이 받고 있어 저의 실망이 커지기만 했는데, 실망한 저의 눈에 도저히 그냥 참고 넘어갈 수 없는 일들이 아테나이에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시골집에 돌아간 디카이오폴리스와 전쟁에 나선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비운 아테나이 거리를 연일 재판정을 가득 메우는 송사들, 특히 전쟁과 재앙으로 죽은 사람들이 남긴 재산을 나누는 문제로 고르기아스의 제자 이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많았던 송사들과, 행복을 보장하는 비밀스런 종교의 제의인 미스테리 행사가 채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한 풍조 뒤에 제가 정치꾼들만큼이나 미워하는 소피스테스들이 설치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클레온이 페리클레스의 놀이나 축제 대신 이런 것들을 풀어 놓았던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디오도토스처럼 변론으로 민회에 나가 뮈틸레네에 대한 처분을 두고 당당히 클레온에 맞서 도시를 설득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변론을 배워 허구한 날 재판정에 나가 옳으냐 그르냐 자기 이익에나 관심을 쏟았습니다. 언제나 도시가 지향하는 가치를 보호하고, 그 도시에 대해 권능을 보이며, 그 도시의 가치를 지켜 나가려는 도시민에게는 잊지 않고 복을 주는 도시가 믿는 신들을 외면하고, 비밀스러운 집단의 이상한 제의에 빠져 자기만의 행복을 누리려는 풍조, 다시 말해 도시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도시와 분리된 디카이오폴리스와는 또 다른 독불장군으로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뒤덮고 있는데도, 그와 같은 풍조를 조장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려 놓고, 자기의 권력 유지와 전쟁으로 얻는 수입에만 관심이 있는 클레온은 지치지도 않고 또 다시 메가라를 쳤습니다. 아테나이가 메가라 내부 연통의 도움으로 니사이아를 점령하고 메가라를 공격하자, 메가라 항구와 땅 없이는 서로 왕래할 수가 없을 정도인 두 동맹 보이오티아와 펠로폰네소스는 더 이상 그냥 웅크리고만 있을 수 없어, 두 동맹의 연합군을 스파르테의 브라시다스가 지휘해, 아테나이를 철수시키고 메가라를 수복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던 전쟁 여덟 해째 여름부터 겨울까지, 저는 변론술을 가르쳐 송사를 부추기고, 자연의 현상을 제법 무슨 신비로운 조화인 양 꾸며 혹세무민하는 소피스테스들을 다시 한번 무대에 올려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께 그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야 되겠다고 작심하고, 디오뉘소스의 격려와 이미 거둔 삼연승에 힘입어 다음해 레나이아 축제에 선보일 새로운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5.21. 사실 그 연극에선 소크라테스 말고 소피스테스들의 행적 중에 전통에서 벗어난 변설(정치에 대한 생각)과 우주관(신에 대한 생각)을 고발하기 좋은 모델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소피스테스의 원조이면서 인간이 그만의 인식을 통해 판단한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혁명적인 인식 기준을 제시한 프로타고라스였고, 실제로 사론을 펼쳤다고 아테나이에서 쫒겨난 그를 무대에 세우는 것이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께도 합당해 보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희극적인 요소가 너무 없었습니다. 자칫 무리하게 그의 변설(정치에 대한 생각)이나 우주관(신에 대한 생각)을 희극적 대치물로 올린 것이 정론으로 비칠 경우 소피스테스를 고발하겠다는 저의 의도가 오히려 희극적 바뀌고 마는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인식을 전할 수 있겠다 싶어, 대안으로 찾은 것이 그의 제자였던 데모크리토스였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동년배로 소크라테스가 돌을 쪼을 힘도 없었을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물려 받은 재산으로 천하를 돌며 온갖 지식들을 섭렵하였는데, 아이귑토스에서 그 신들과 기하학을 신관들로부터 배웠으며, 페르시아 가서도 그 신들과 지혜를 배웠고, 홍해를 건너 에디오피아까지 가서 신들과 그들 생각을 배웠으며, 심지어 그는 인도에서 자이나 알몸 수행자들과 교제하며 그 신들과 지혜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가 스승이었던 프로타고라스와 마지막 탈레스식 자연철학자 아낙사고라스를 만나려고 아테나이에 왔을 무렵에는 이미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할 정도로 박학다식한 이 철학자, 아브데라의 데모크리토스가 딱 알맞는 모델이라고 꼽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아테나이에 도착했을 때는 프로타고라스는 이탈리아로 쫓겨간 뒤였고, 얼마 되지 않아 또 아낙사고라스가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그 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아테나이서 쫓겨나는 것을 보고, 그 역시 틈틈이 우주와 세상의 만물의 근원에 대한 책을 쓰고 있던 차라 더 이상 아테나이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잠시 머문 아테나이를 떠난 것은 명망에 별 관심 없던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러나 그 바람에 데모크리토스가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모두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피스테스의 희극적 대치인물로서 희극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결론 짓고, 다른 희극적 대치인물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정했습니다.
5.22. 그런 데모크리토스가 언젠가 "내가 아테나이에 갔을 때, 거기에는 누구 하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었는데, 한참 지난 뒤 방대한 그의 저술들만 접하고도 그를 가리켜 변설은 물론 자연, 윤리, 수학, 교양, 이 다섯 가지의 철학 5종경기 선수라며,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우리 아테나이서 나왔는데, 그가 바로 소크라테스였습니다28. 데모크리토스를 인정할 수준이라면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모든 소피스테스들 중에 군계일학, 그들을 대표한다고 믿었고 그 당시 소크라테스는 정말 그랬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실 여러분들이 나중 제 연극을 보고 인정했을 정도로 그 연극에 딱 알맞는 희극적 대치인물입니다. 돌을 쪼다 공부를 시작한 내력이나, 울퉁불퉁한 용모에 꼿꼿한 자세가 보여주는 비대칭이나, 집안 일은 돌보지 않고 공부만 하는 소크라테스를 구박하는 그의 첫 번째 마누라 크산티페에 대한 이야기나, 무엇보다 산파술이라 불리는 그 특유의 문답식 교습법은 거리에서 젊은들이 늙은이들을 골탕먹이거나, 집에서 어린아이들까지 어버지를 골탕먹이는 방법으로 쓰이고 있어, 이미 이런 특징들 자체로 그를 모르는 아테나이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런 요소들 자체로 아테나이를 웃음으로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 이상 가는 모델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한가지 제가 처음부터 그를 꼽지 않았던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그가 신에 대해서나 자연이나 우주에 대해 일체의 언급을 끊고, 오로지 하나 사람의 생각이나 태도에 대해서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29. 그런 소크라테스의 신들에 대한 평소 언행은 그것을 빗대어 전쟁과 재앙으로 어두운 아테나이 구석에 나타난 비밀스런 종교집단의 이상한 제사 미스테리를 고발하는 것과 너무나 이질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고민 끝에 저는 소크라테스를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나 신을 한 개인의 가치관이나 한 개인에게 내리는 신기로 파악했지, 도시의 가치관이나 도시를 품는 신기神氣로 파악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저의 연극의 전체 구도에 맞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5.23. 도시를 말싸움으로 오염시키는 재판의 변론술을 고발하는 데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보다 더 좋은 희극적 등치물이 없었는데, 그렇지만 도시를 미신으로 오염시키는 비밀스런 집단의 이상한 제사를 고발하는 데는 소크라테스의 종교적 태도만큼 부적합한 것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데모크리토스의 다양한 종교적 접촉이라면 어느 나라의 이상한 신 하나를 얻어 와 얼마든지 재판의 변론술과 기복의 미신을 접목시켜 가면서 머리 속에 맴도는 연극의 전체 구도를 완성시켜 가겠는데, 소크라테스의 꽉 막힌 종교적 태도 탓에 그 구도가 꽉 막혀 한 해가 다 지나가도록 진척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릴없이 그해를 보내고 만 저는 전쟁 아홉 해째인 그해 처음으로 레나이아 축제의 경연에 작품을 올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의기소침해진 저에게 그보다 더한 위로의 선물이 새봄이 오자 바로 날아들었습니다.
5.24. 클레온이 퓔로스에서 거둔 망외의 소득은 스파르테로 하여금 전쟁 수행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하였습니다. 퓔로스 이전에는 스파르테가 장기 원정에 나선 적이 없었습니다. 농한기를 이용해 늘 한 달 정도 길어야 한 달 반 정도 전투를 벌이다가 다시 펠로폰네소스로 돌아가 전열도 가다듬고 수확도 거두는 식으로 전쟁을 수행해서 아테나이로서도 그다지 힘들지 않게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만, 제가 소크라테스 때문에 좀 헤매고 있던 전쟁 여덟 해째의 겨울이 오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스파르테가 장기 원정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5.25. 그해 여름 메가라에서의 공방에 실패하고 철수한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나이에서 출발하는 히포크라테스와 델리온에서 합류해, 타나그라 속지 안의 아폴론께 바쳐진 땅 델리온을 확보한 다음, 그곳을 거점 삼아 보이오티아를 장기적으로 유린해 무너뜨릴 전략으로 움직였고, 스파르테의 브라시다스 역시 메가라를 안정시킨 다음, 종래 하던대로 펠로폰네소스로 돌아가지 않고 장기 원정에 나서 아테나이의 전략 물자 공급 요충지인 트라케를 점령할 전략으로 움직였습니다.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소크라테스가 참전하여 라케스보다 더 용감하게 전후를 살피며 퇴각했다는 델리온의 전투에서30, 아테나이의 데모스테네스와 히포크라테스는 초전에 델리온을 점거했으나, 보름 정도 지키다가 결국 보이오티아의 거센 반격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해야 했던 것에 반하여, 브라시다스는 설득과 회유로 칼키디케에 들어가 아테나이의 공격을 두려워하고 있던 그들과 합류하고, 서리가 내리기 전에 아칸토스에 들어가 포도 수확이 걱정되는 그들을 도닥거려 아테나이 동맹에서 빼내고, 그해 겨울이 되자 장기원정의 마지막 목적지 아테나이의 금과 은과 선박용 목재의 집하지인 아테나이 식민도시 암피폴리스로 나아갔습니다. 브라시다스가 그해 여름 장기원정에 나서, 새해가 되기 전에 암피폴리스는 말할 것도 없고 트로네까지 장악하자 아테나이는 놀라움에 어쩔 줄 몰랐는데,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스파르테가 처음으로 감행한 장기 원정이었고, 그 다음에 놀랐던 것은 그들이 거둔 전과보다 그런 전과를 거둔 과정이었습니다. 브라시다스가 직접적인 전투를 톨해 무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가진 무력으로 시위만 하고, 그보다 온건한 회유책으로 설득한 것에 힘입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아테나이는 동맹도시들이 더 무너지는 것을 막을 시간이 필요했고, 스파르테는 잡혀 간 포로의 송환에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서로 협상을 진행한 끝에, 일 년 동안 휴전을 하기로, 잘 되면 휴전이 더 연장 될 수도 있을 것이라 믿고, 양쪽이 합의한 것입니다. 전체 헬라스에 내전이 벌어진지 처음 이룬 이 짧은 평화는 전쟁 아홉 번째 해31 새봄과 함께 왔었습니다.
5.2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을 멈추게 되었다는 소식이 저의 레나이나 축제 불참의 의기소침함을 날려 버리고, 아테나이의 디오뉘소스 축제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필로니데스32에게 연출을 맡기면 연습이 좀 부족해도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렇다. 어차피 소크라테스가 연극의 희극적 대치인물이라면 알로페케의 소크라테스는 잊고 내가 고발하고 싶은 소피스테스들의 행각을 고발하는 일에만 집중하자. 돈 문제가 소송에서 제일 많은 것이라면 이것을 변론하는 기술 하나에만 집중하자. 또한 미신을 조장하며 행복을 준다는 비밀스러운 집단의 이상한 제의에 대한 고발은 연극의 한 장치로 바꾸어 보여주자. 주인공은 소피스테스가 아니라 그에게 변론술을 배우는 학생들이다." 연극의 전체 구도가 잡히자 지난 겨우내 숱하게 지우고 쌓았던 그 많은 아이디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단숨에 쓸것과 버릴 것이 가려졌고, 이어서 주인공들이 빚쟁이 아버지 스트렙시아데스와 날라리 아들 페이딥피데스와 학원 원장 소크라테스로 구성되었으며, 또 도시가 대지의 신 데메테르와 딸 페르세포네를 위해 오래 지내 온 엘레우시스 비의를 본받아, 도시에 창궐하기 시작한 비의의 미신들을 고발하는 장치로 쓸 믿을 수 없는 신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체도 보여주기 힘든 공기나 에테르 따위보다 눈에는 보이지만 실체가 불분명한 변화무쌍의 구름으로 정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구름들'의 코로스도 정해졌고, 따라서 제목도 "구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구름"으로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 싶었던 것들은 스트렙시아데스를 통해 모두 보여 드렸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꾀주머니 학원'33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구름 신을 만나 구름교에 입교하면서 허황된 미신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그럴듯하게 보이는지도 스트렙시아데스가 보여 드렸습니다. 그의 아들 날라리 페이딥피데스를 통해서는 소크라테스로부터 받았던 교습의 효과를 보여 드렸습니다. 해와 달이 서로 어긋나게 움직이는 우주의 법칙에 따라 빚도 갚지 않아도 되고, 신이 한대로 해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정당하게 때릴 수 있으며, 도시가 믿는 신도 부정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의 효과를 모두 보여 드렸습니다. 스트렙시아데스를 부추기던 구름 코로스가 페이딥피데스를 보며 얼마나 쉽게 변신하여 입장을 바꾸는지도 보여 드렸습니다. 한가지 못 보여 드린 것이 주인공 사이의 논쟁이었는데, 이것은 제일 마지막 장면으로 처리했습니다. 어리석은 스트렙시아데스와 약삭빠른 꾀주머니 소크라테스와의 논쟁은 소크라테스가 일방적으로 이길 말싸움이 아니라, 스트렙시아데스가 일방적으로 이길 분노의 한 방, 방화로 끝냈습니다. 그래서 이 연극의 끝은 축제로 휩씁려 들어가는 떠들썩한 즐거움이 아니라, 축제에서 멀어지는 씁씁한 퇴장으로 마무리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나는 코로스장의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자 우리 나갑시다. 오늘은 춤도 많이 추었으니까."34
5.2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저의 "구름"이 그해 새봄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의 희극 경연에서 꼴찌를 한 것은 믿을 수 없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구름"이 상연되는 내내 소크라테스가 객석에 일어서서 일인시위를 했다거나, 비밀스런 집단의 패거리들이 구름 입교 장면에서 괭가리를 치며 난동을 부렸다거나, 혹은 희극에 정치 풍자를 최초로 도입한 크라티노스가 이제는 늙고 술에 찌들어 아무것도 못한다며 제가 저의 연극 "기사들"에서 놀렸다고35 분발하여 출품한 그의 연극 "술병"이 "구름"을 제치고 일등을 한 것이 제가 꼴찌를 한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았듯이, 여러 관객들의 지적처럼 "구름"의 마지막을 코로스가 관객과 함께 춤추고 떠들며 축제의 거리로 나갈 수 있도록 즐겁게 끝맺지 않고, 관객들이나 코로스가 씁씁한 기분으로 나가도록 끝맺은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일인시위나, 꽹가리 난동이나, 크라티노스의 "술병"이나, 학원 방화로 씁씁한 끝맺음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그때의 관객들이 "구름"을 보며, 그동안 미쳐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던 현실을 너무나 갑작스레 "아! 그게 그런 것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된 충격으로 정신없었던 것이 주된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했습니다. 종래에 보던 희극과는 너무나 다른 주제와 그 구성이 관객들에게 무겁게 다가간 결과였겠지요36.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꼴찌라니. 저도 씁씁했습니다.
5.28. 씁씁한 기분은 저나 그날의 관객들 뿐만 아니라, 헬라스 전체에 퍼져 나갔습니다. 전쟁 아홉 해째의 여름이 오기도 전에, 휴전이 깨지고 평화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클레온은 스키오네와 멘데가 동맹을 떠나 스파르테에 붙자 피의 응징을 결의했고, 전쟁 아홉 해째의 겨울이 가고 새봄이 올 때까지도, 아테나이와 클레온은 동맹도시들이 왜 아테나이를 버리고 스파르테와 브라시다스에게 가는지 그 이유를 찾기보다 모름지기 패권으로 누르려고만 했고, 또 스파르테와 브라시다스는 트라케 진출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트라케 주변에 있는 아테나이의 동맹을 와해시키는 데만 공을 들였습니다. 씁씁하게도 이 모든 움직임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5.29. 저는 꼴찌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결코 남을 탓하지 않고 그 한 해 내내 "구름"을 다시 뜯어 보고 있었습니다. 워낙이 처음 구상할 때부터 막히다 풀리다를 반복했기 때문에 "구름"의 전체 구도가 이상한 것은 아닌지, 특히 저의 욕심이 무리한 구도를 만들어 놓지 않았는지, 면밀하게 뜯어 보고 있었습니다. 찬 바람이 불 때쯤 마음을 굳혔습니다. 더 이상 의기소침할 일도 자신을 탓할 일도 없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렇다 고치더라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자. 그보다 먼저 "구름"의 후속편을 만들자. "구름"의 두 화제를 보완하는 두 개의 작품을 각각 따로 만들어 보자. 하나는 변론술에 좌지우지 되는 아테나이의 재판제도와 배심원의 자질 문제를 가볍게 다루어 보자. 만일 배심원들의 자질 때문에 재판정에서 진실보다 변론술이 배심원들을 지배한다면, 진실보다 변론술에 매달리는 이 풍조를 고칠 방법이 배심원에게 있는지 도시에 있는지 알아보자. 그리고 하나는 구름과 같은 허황된 신이거나, 미신이 믿는 요상한 능력의 신이 아니고,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신이 있어 그가 만든 도시가 있다면 과연 그 신국은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이며, 신국의 지배자는 누구일지, 신일지, 도시민들이 뽑는 인간일지, 신이 지명하는 인간일지, 알아보자"
5.30.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도 좋을 만큼 아테나이는 모처럼 전쟁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조용했습니다. 폭풍의 전야와 같다는 말이 그래서 생겼던 모양입니다. 그해 조용한 겨울 동안 저는 우선 배심원들의 재판에 관한 문제를 연극으로 올리기로 하고, 연극의 전체 구도를 잡아 나갔습니다. 일당으로 3 로볼로스 받는 배심원들은 일당 이외에 재판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에 변론술이 진실을 가리려고 노력하기보다, 배심원들의 권력에 대한 허영심을 채워 주는 데 변론 기술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을 고발하는 가벼운 연극을 하나를 만들었고, 저는 전쟁 열 번째 해37 레나이아 축제에 올렸습니다. 그 연극 "말벌들"이 비록 이등을 했지만 여러분이 아직도 주인공인 필로클레온을 그의 동료인 말벌들을 모두 녹여 하나로 탄생시킨 당대의 가장 전형적인 배심원이라고 칭찬하시고, 또 다른 주인공 필로클레온의 아들 브델뤼클레온의 재판을 보는 눈이 너무나 정확하다고, 말벌의 가면을 쓰고 코로스로 나온 필로클레온의 동료 배심원들까지 공감해 주어, "구름"의 저조 때문에 심란하던 저도 일등한 것 못지 않게 기분 좋았습니다. "말벌들"은 간단한 구도와 명료한 구성 또 간결한 논쟁과 깔끔한 에페이소도스로 희극의 한 전형이 되었고38, 작품의 의도 역시 여러분이 경험으로 알고 있던 문제를 고발하는 것이라 관객의 이해와 호응 또한 높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벌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말벌의 덩치와 날 때 나는 붕붕거리는 소리가 크기 때문이거나, 말벌이 무슨 권력자나 되는 양 거드럼이나 피워서가 아니라, 말벌이 쏘는 침이 독하고 야무지기 때문인데, 도시의 말벌인 배심원들이 하루 3 오볼로스를 주는 권력자의 농간에 놀아나서, 그 침을 도시를 해치는 일에 대해 쏘지 못한다면 무슨 말벌 즉 배심원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아울러 모름지기 아티케의 사내라면 당연히 몸과 얼굴을 곧추세울 반듯한 등뼈가 있어야 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바로 도시를 지키는 말벌의 침도 하나씩 가져야 한다고 한 말씀 올린 거지요. 자기 먹고 살기 위해 비겁하게 숨어서 찌르는 침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향해 붕붕 소리를 내며 찌르는 한방 말입니다39.
5.3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열 번째 해40 봄은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휴전 기간이 끝났지만, 아테나이나 스파르테가 모두 휴전 연장의 제안이나 합의 없이도 휴전은 사실상 가을 퓌티아의 경기 축제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조용한 시간은 불행하게도 휴전을 항구적으로 전환시켜 평화를 이루는 데 쓰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클레온은 암피폴리스를 탈환하여 트라케의 지배력을 회복해야 한다면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을 설득해 다시 전쟁의 길로 나서 퓌티아의 경기 축제가 열리는 가을에는 암피폴리스 근처까지 진출해 있었고, 마찬가지로 브라시다스는 클레아리다스와 동맹의 장군들과 함께 이제 곧 클레온이 걸어올 싸움에 대비해 암피폴리스와 트라케를 방어할 준비에 골몰하고 있었습니다41. 암피폴리스로 접근한 클레온이 암피폴리스 성벽 안에 있는 브라시다스가 출격할 기미를 보이자 지원군과 합류할 때까지는 격돌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먼저 좌익을 에이온으로 퇴각하라고 지시한 다음, 자신은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 우익도 방향을 바꾸어 같이 퇴각하게 하였는데, 그 결과 자신의 중군만 남고 좌우익 모두 등을 적으로부터 돌린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방향을 바꾸는 아테나이의 동요를 놓칠 리 없는 브라시다스가 즉각 출격했지요. 브라시다스는 암피폴리스 성벽의 첫 번째 문 아래 가파른 길을 곧바로 달려 내려와 혼란에 빠져 허둥대는 클레온의 중군을 바로 찔러 갔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이 용맹스런 브라시다스의 직접적인 공격은 클레온의 중군마져 놀라 돌아서게 했고, 성벽 안에서 기다리던 클레아리다스까지 트라케문을 열고 나가자, 클레온은 양측면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클레아리다스가 나오는 것을 본 브라시다스는 클레온의 본진은 그에게 맡기고, 이미 본진과 분리되어 패주하는 좌익 대신 우익을 목표로 공격 방향을 바꾸어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브라시다스가 부상을 입어 암피폴리스로 옮겼지만, 아테나이는 이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달아났습니다. 한편 클레온은 처음부터 그렇게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도망치기에 바빴고, 불운하게도 미르키노스의 방패병에게 사로잡혀 죽고 말았습니다. 아테나이의 참패였고, 브라시다스가 클레아리다스의 마무리로 완승을 거둔 것을 알고 숨을 거두었을 때는 전쟁 열 번째 해 겨울이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습니다. 아테나이는 육백 구의 시체를 인수하고 난 후 귀로에 올랐으며, 클레아리다스는 동맹 공금으로 암피폴리스 시내에 브라시다스를 매장하고 난 후, 암피폴리스에 계속 남아 닥쳐올 일들에 대비했습니다. 한편 브라시다스를 돕기 위해 그 여름에 출발했던 람피아스 일행은 트라케의 도시들 이곳 저곳 손보다가 지체되어 테살리아 근처까지 와 있었는데, 브라시다스의 전사 소식을 듣자 임무수행을 단념하고 스파르테로 돌아갔지요.
5.32. 이리하여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자, 지난 십 년 동안 벌어진 전쟁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일 다시 무슨 일이 터지더라도 지금 당장은 전쟁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아테나이와 스파르테 사람들을 움직였습니다. 전쟁에 살길이 있다고 믿었던 클레온과 브라시다스도 지하에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만큼, 많은 헬라스의 사람들이 지난 십 년 간의 기나 긴 전쟁에서 벗어나, 우선 좀 쉬고 싶어 했습니다. 아울러 아테나이에는 클레온 후의 전쟁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런지 걱정과 부담이 너무 큰 니키아스가, 스파르테에서는 자신의 복위에 대한 정당성을 물을까 두려운 파우사니아스의 아들 플레이스토아낙스가, 헬라스의 많은 사람들 못지 않게 평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주도적으로 협상에 나섰습니다42.
5.3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열 번째 해 봄에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평화보다는 결전으로 치닫는 것이 눈에 보이자 저는 곧바로 그동안 만지작거리던 "구름"의 두 번째 후속 작품의 구상을 접어 두고, 전쟁보다 평화를 이루어 내기를 기원하며 새로운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시간이 촉박해서 지난번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서 "구름"을 상연했던 악몽이 생각났지만, 일단 새해의 레나이아 축제를 목표로 하되, 연출 준비가 그때까지 충분하지 않으면 새봄의 아테네 디오뉘소스 축제에 올리기로 마음먹고 바로 시작했습니다. 예심을 통과하고 배우들과 코로스를 배정받고 연습에 돌입한 얼마 후, 그해 추수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저는 연습 중인 대본을 일부 고쳐야 했지만, 전쟁 열한 번째 해의 새봄이 오기까지 평화가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평화"를 상연하기 위한 연습을 계속했습니다. 작품을 쓰는 동기가 평화인데 무슨 작품의 의도니 목적이니 하는 것이 필요했겠습니까? 바로 제목부터 "평화"로 정하고 전체 구도의 구상에 들어갔었지요.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아티케의 농부 디카이오폴리스가 신이 바라는 평화를 주선하러 온 암피테오스를 스파르테로 보내어 개인적인 평화를 얻었다면, 이번 "평화"에는 아티케의 포도밭지기 트뤼가이오스를 신에게 직접 보내어, 헬라스 전체의 평화를 가져오도록 연극 구도를 짰었고요, 물론 홀아비 트뤼가이오스를 응원하는 코로스는 평화를 염원하는 헬라스 사람들로 정했었지요. 트뤼가이오스가 하늘에 가서 만날 신들에 대해서도 "구름"의 후속편 '신국'을 구상하며 생각해 둔 신들의 모습들이 있어 어렵지 않았습니다. 헬라스의 도시들이 믿는 신들은 헬라스 사람들도 그렇듯이, 신들의 의지도 아닌 인간들의 의지로 벌이는 전쟁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놓칠 리 없었던 풍자 하나, 트뤼가이오스가 하늘로 신을 만나러 올라가는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에우리피데스의 벨레로폰테스가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을 오르려고 한 것을 떠올리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에우리피데스의 신들이 느닷없이 기중기를 타고 인간에게 내려와서 인간들끼리나 신들 때문에 꼬인 이야기 타래를 단번에 풀어 버리는 뻔뻔한 장면을 비꼬아서 저는 트뤼가이오스가 풍뎅이를 타고 기중기에 매달려 무턱대고 신들에게로 올라가는 용감한 장면을 보여 드리기로 했습니다. "평화"는 새봄의 아테네 디오뉘소스 축제에 올라 홀아비 트뤼이오스가 하늘에서 '평화' 에이레네와 함께 데려온 '풍요' 오포라와 결혼식 잔치에 참석하신 관객 여러분들의 열화 같은 환호와 축하 속에 이등을 거두었고, 그 때문인지 "평화"가 상연된 열흘 뒤 협상의 타결로 헬라스에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5.34. 그렇지만 저는 극작가 특유의 눈으로 트뤼가이오스가 데리고 온 '평화'나 '풍요'가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우스를 위시한 신들이 인간들이 하는 싸움이 보기 싫고 기도 소리도 듣기 싫어 더 높은 하늘로 피난가고 없는 빈 하늘에, 세간살이를 지키는 헤르메스 이외에, 헬라스를 절구통에 넣고 빻아 없애려는 '전쟁' 폴레모스와 그의 조수 '소란' 퀴도이모스를 두고, 최근까지 '전쟁' 폴레모스가 클레온과 브라시다스 두 개의 절굿대를 번갈아 가며 헬라스를 잘 짓찧고 있다가, 갑자기 그것들이 부러지는 바람에 짜증을 내며 전쟁을 일으킬 새로운 절굿대를 '소란' 퀴도이모스를 시켜 찾는 장면을 넣은 것이나, '전쟁' 폴레모스가 땅속 깊이 파묻고서도 안심이 안 돼 돌로 덮어 눌러 둔 '평화' 에이레네가 파르테논의 처녀신만큼은 크지 않더라도 사람 정도는 돼야지 겨우 한줌 밖에 되지 않고, 게다가 부서지기 쉬운 돌조각이라 묘사한 까닭은 전쟁의 굵고 야문 절굿대는 도처에 있고, 평화의 작고 무른 조각상은 아무 데나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정말 이 작고 여린 평화는 파묻어 버리기는 아주 쉬운 반면, 보듬어 안고 지키기는 매우 힘든 것인 모양입니다.
5.3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열한 번째 해의 아테네 디오뉘소스 축제가 끝나고, 여러분이 모처럼 찾아온 평화를 풍요로 바꾸어 가려 하는 그해 여름이 오기도 전에, 퀴도이모스가 찾아온 절굿대들이 나타나, 정말 작고 여린 평화를 조심스레 보듬고 안아 지키는 대신 그것을 다시 파묻어 버리려고 덮었던 땅을 파헤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사실 봄에 니키아스와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이룬 평화는 아테나이에서의 니키아스의 맥없는 정치력이나, 스파르테에서 따돌림당하는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신세처럼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임이 여름이 오기도 전에 드러나고 만 것이었습니다. 평화를 위해 아테나이에 건네고 왔어야 할 암피폴리스를 그냥 버려 둔 채 철수하는 바람에, 스파르테의 지시를 듣지 않을 암피폴리스를 아테나이가 다시 찾기 위해선 개전 초 포테이다이아에서처럼 포위와 공성이 필요하게 만들어 버린 스파르테의 주전파43, 개전을 야기시켰던 플라타이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난해 빼앗았던 아테나이와의 국경 요새 파낙스와 아테나이의 전쟁 포로들을 돌려주기는커녕 포로들을 인질로 삼아 열흘씩 아테나이와 독단적인 휴전을 이어 가고 있는 테바이 주도 하의 보이오티아, 니사이아를 돌려받지 못해 앙앙불락인 메가라, 포테이다이아와 솔리온과 아낙토리온을 아테나이에 빼앗긴 채로는 평화를 받아들일 수 없는 코린토스,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평화보다는 스파르테로 하여금 전쟁을 재개토록 하여 아테나이를 없앨 궁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스파르테는 지도부에도 친족이나 친지가 있는 스팍테리아의 포로들을 돌려 받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고, 지금은 잠자코 있는 아르고스가 개전 초의 케르퀴라처럼 향후 아테나이와 동맹이라도 맺을 경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도 당장은 아테나이와의 평화가 필요했습니다. 스파르테는 어쩔 수 없이 전쟁으로 몰리는 그들의 형편을 아테나이에게 보여 주고, 전쟁을 피할 방법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암피폴리스를 돌려받기 위해 칼키디케의 도시들에 대한 지위나 조공 액수까지 스파르테와 협의하도록 양보했었는데, 아테나이는 이제 그 평화와 등을 돌려야 하는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퓔로스와 키테라의 반환은 물론 스팍테리아의 포로들 송환도 거부하고 평화를 버린다면, 개전 초의 케르퀴라처럼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을 수 있을 것인데다, 덩달아 만티네이아나 엘리스 같은 펠로폰네소스의 반 스파르테 도시들도 따라올 테니, 이 때문에 전쟁이 다시 시작되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이고, 아르고스와 손잡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어도 좋은 것이 그들끼리 싸우다 지쳐 어느 한 쪽이 나가떨어지면 그때 봐서 판단해도 충분하고, 혹시 싸움이 스파르테로 기울거나 하면 스팍테리아의 포로들을 상기시키거나, 퓔로스를 거점으로 메세니아의 헤일로타이를 부추겨 스파르테를 괴롭힐 수도 있는, 그 중대한 기로에서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동맹의 이탈과 아르고스와 아테나이의 연합이 두려운 스파르테의 15년 한시 상호동맹 제안을 수락하고44, 아테나이는 신뢰의 표시로 퓔로스와 키테라는 물론 스팍테리아의 포로들도 모두 돌려주기로 했습니다45.
5.3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평화조약에 동맹조약까지 맺은 아테나이와 스파르테가 곧바로 돌아서서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던 다른 도시들이 그해, 즉 전쟁 열한 번째 해 겨울이 다 갈 때까지 또 다른 전쟁을 위해 무슨 일들을 벌이고 있었는지 여러분께 한번 보여 드리지요. 먼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 동맹까지 맺으며 간섭을 피할 장치를 마련했다고 믿고 원래의 패권주의 본색을 드러내었는데, 바로 동맹도시들이 지난 십 년의 전쟁 동안 보여준 충직도를 심사한 것이었습니다. 맨 처음 심사 대상은 스키오네였습니다. 브라시다스의 트라키아 원정 후 불기 시작한 아테나이 동맹들의 이탈 바람의 근원지로, 브라시다스의 장기원정이 성공을 거두게 된 첫 발판을 제공해, 아테나이가 델리온에서 참패한 패전 단초인 스키오네를 그냥 둘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스키오네가 이탈할 당시, 클레온의 주장에 따라 여러분이 이미 피의 응징을 결의한 대로46 아테나이는 스키오네를 쳐서, 성인 남자들을 살륙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모두 노예로 팔고, 그 땅에 플라타이아이 사람들이 와서 살도록 했습니다. 이 참극은 아테나이가 이성을 잃고서 참혹한 일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브라시다스가 대피시켰던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평화를 믿고 돌와와서 다시 가정을 이룬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 참극의 피해가 더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47. 이런 참상을 보여 주고도 칼키디케와 트라키아 방면의 도시들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할 수 없었고, 암피폴리스 역시 건드리지 못해 아테나이는 속을 끓이며 스파르테와 이탈한 동맹들에 대한 분노를 키워 가고 있었습니다.
5.37. 동맹을 이탈한 뮈틸레네를 치고 난 후, 뮈틸레네의 처분을 두고 민회의 결의를 받으려 했던 클레온도, 그 클레온에 맞서 대량 살륙을 막기 위해 여러분을 설득하던 디오도토스도, 그 대량 살륙의 명령을 전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노를 건성으로 젓던 사람들도,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밤을 새워 노를 젓던 사람들도, 대량 살륙이 마음에 걸려 처형을 미루고 있던 파케스도, 무엇보다 언제나 사람이 훌륭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소크라테스도 델리움에서의 패전과 암피폴리스에서의 퇴각이 억울했었는지 스키오네에 살륙을 단행할 때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죽은 클레온이 남긴 피의 응징만이 아테나이에 남아, 전쟁 다섯 해째 닥친 두 번째 재앙 속에서도 뮈틸레네에 대한 처분을 이성적으로 처리했던 아테나이가, 델리온 이후 다섯 해가 지나 이제는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마음 놓은 작은 도시, 스키오네를 송두리째 도륙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때 여러분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요? 여러분에게 그 평화는 다시 일으킬 전쟁을 위한 눈가림에 지나지 않았던가요? 여러분은 진정으로 평화를 이루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던가요? 저만 그렇게 평화를 원했던 건가요?48
5.38. 한편 아테나이와의 동맹조약으로 아테나이가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는 일은 일단 막아 둔 스파르테는 아카르디아의 파르라시아 지역의 한 정파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자, 플레이스토아낙스에게 전군을 주어 만티네이아가 지배하는 그곳에 출동시켰고,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자기들의 본거지 라코니케의 스키리티스 지역을 넘보고 있는 그곳의 큅셀라 요새를 허물고, 파르라시아 사람들을 독립시켜 준 다음 돌아왔는데,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반스파르테 움직임에 대한 평탄의 의지를 나타낸 첫 신호였습니다. 이어서 클레아리다스가 브라시다스의 원정 군사들을 데리고 돌아오자, 그들 중의 국가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스파르테로서는 '새로운 계층neodamodeis'의 출현으로 사회 계층의 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겠지만,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동등인들을 대신해, 유사시에는 징집도 하고, 평상시에는 한 지역에 살면서 그 지역을 지키도록 할 수도 있었습니다49.
5.39. 다른 한편 이런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의 조약 체결과 후속 움직임은 코린토스로 하여금 아르고스에 자극해 새로운 동맹 체제로 양대 도시의 상호 동맹에 대응토록 만들었습니다. 지난 10년의 전쟁에서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아 힘을 기를 수 있었던 아르고스는 동맹 도시들을 얻기 위해 여러 도시들에 사절단을 보냈고, 지난 10년 동안 조금씩 영역을 넓혀 오던 만티네이아가 스파르테에게 빠앗길까 봐 같은 민주정의 아르고스와 제일 먼저 동맹을 맺었고, 코린토스는 바로 나서기보다 먼저 스파르테와 불편한 관계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엘리스와 동맹을 맺어 주어, 든든해진 엘리스가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는 걸 보고 난 뒤, 세 번째로 아르고스 동맹에 가입했습니다. 보이오티아와 메가라는 동맹 가입에 여전히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스파르테가 아르고스 동맹에 대한 견제에 나서면서, 아테나이와의 약속대로 반환할 것은 반환하라고 요청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아테나이 역시 스파르테의 진정성을 의심하여, 퓔로스의 반환은 중단시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스파르테는 보이오티아가 원하는 동맹을 맺어 주었고, 전쟁 열한 번째 해 겨울이 끝나자 보이오티아는 파낙스 요새를 아테나이에 돌려주기보다 그 자리에서 허물어 버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평화로 시작한 전체 헬라스 내전이 일어난지 열한 번째 해는 스키오네에서 피비린내를 풍기고, 헬라스 도시들 간의 힘의 균형을 이루려는 새로운 모색이 시작되는 가운데 저물어 갔으며, 그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어렵게 얻은 평화를 굳히려는 노력이 아니라 새로운 전쟁을 위한 새판 짜기임을 모를 리 없어, 망연자실한 저는 더 이상 연극이고 뭐고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5.4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열두 해째에50 접어들자, 드디어 퀴도이모스는 다시 헬라스의 도시들을 절구통에 넣고 짓부실 수 있도록 우리 도시 아테나이에서 새 절굿대 알키비아데스를 찾아 폴레모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전쟁의 귀신 폴레모스는 그 젊은 알키비아데스가 오래 동안 전체 헬라스를 짓빻는 데 쓸 페리클레스보다 더 좋은 절굿대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보고는 알키비아데스를 키워 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그해에 나이가 겨우 서른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부러 상층 출신의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하층 출신 정치불량배 휘페르볼로스와, 이제 정치는 슬슬하고 그동안의 전쟁으로 쌓은 부로 여생을 즐기며 지내고 싶었던 니키아스 덕분에, 쉽게 정치에 입문했을 만큼 아테네 시민 여러분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지요. 여러분은 자기를 알아주는데 니키아스와 라케토스로부터는 어리다고 경시당했고, 스파르테로부터는 조상 대대로 친스파르테인 자기를 통하지 않는 무시를 당한, 알키비아데스가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는 스파르테와의 동맹을 깨고, 다시 대립하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바로 그 길로 나선 것으로 볼 때51, 그가 얼마나 좋은 전쟁의 절굿대 자질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지요. 한번 보실까요? 알키비아데스의 등장을52.
5.41. 해가 바뀌자 아르고스는 불안해졌습니다. 보이오티아가 스파르테와 따로 동맹을 맺었다는 것은 아테나이와도 동맹 관계인 것으로 보였지요. 황급히 스파르테에 사절을 보내 갱신을 미뤄 오던 오랜 조약의 갱신 조건을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스파르테는 보이오티아로부터 파낙톤과 포로들을 넘겨받아 아테나이에 전하는 일이 더 급했습니다. 파낙톤은 허물어지고 없어, 포로들만 받아 넘겨주었습니다만, 아테나이의 반응은 거칠었습니다. 파낙톤 요새 반환 조건을 어긴 보이오티아에 대해 함께 제제를 가해야 할 스파르테가 동맹까지 따로 맺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알키비아데스는 자기가 등장할 때라는 걸 즉각 알아차리고 그의 자리를 전쟁을 통해 만들어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개인적인 밀사를 아르고스에 보내, 만티네이아와 엘리스의 사절들과 함께 아테나이로 와 동맹을 맺자고 제의하면 자기가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테와 아테나이 동맹이 그동안 자기들만 누렸던 평화의 이득을 깨리라고 불안해 하는 아르고스를 만티네아와 엘리스도 함께 아테나이로 불러, 그들과 새로운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습니다. 엘리스와 스파르테 간의 마찰로53 그해 여름의 올림피아 경기 축제에 스파르테는 참가하지 못했고, 겨울에는 트라케의 헤라클레이아를 둘러싸고 작은 전투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전쟁 열두 번째 해도 저물었지요. 그리고 저는 그해에 처음으로 레나이나 축제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의 경연에 제 작품을 올리지 않았습니다54.
5.42. 전쟁 열세 번째 해는55 헬라스가 전반적인 소강상태를 유지한 가운데 작은 도시끼리의 서로 손보기 싸움에 나이 서른둘의 젊은 알키비아데스가 벌써 아테나이의 장군이 되어 동맹 아르고스와 함께 펠로폰네소스에 나타나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였는데, 아르고스가 벌인 에피다우로스와의 전쟁에 알키비아데스가 두 번씩이나 나타난 것과, 또 스파르타의 아기스가 남의 눈을 피해 펠로폰네소스 국경의 레욱트라로 진출했다가 돌아온 일과, 또 그해 겨울 스파르테가 아테나이를 속이고 에피다우로스에 수비대를 파병한 일 등으로 볼 때, 이것은 사실상 헬라스에 다시 전쟁이 시작된 것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와 아기스가 헬라스를 짓부수는 '전쟁'의 새로운 절굿대가 되어, 이제 그들이 다시 피워 올리는 전쟁의 기운을 보며, 낙담한 저는 전쟁 열세 번째 해에도 역시 축제들의 그 어디에도 저의 작품을 경연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5.43. 전쟁 열네 번째 해56 여름이 한창일 때, 드디어 스파르테는 펠로폰네소스의 분열이 통제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고 판단하고 아기스를 지휘관으로 삼아 농노들까지 포함한 스파르테의 전병력과 아카르디아와 펠로폰네소스 안의 동맹들, 보이오티아, 코린토스 그리고 플레이오스가 합쳐 동맹도시 에피다우로스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아르고스로 출격했고, 아르고스는 만티네이아, 엘리스와 함께 이에 맞섰습니다. 몇 번의 접전을 거쳐 두 동맹이 네메아에서 대치하자, 아르고스의 트라쉴로스는 독단적으로 아기스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스파르테의 아기스도 독단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여, 휴전 넉달 동안에 아르고스가 약속한 것들을 이행하라며 조약을 맺고, 동맹들의 강력한 반발을 무시하고 곧 스파르테로 돌아갔습니다만, 늦게 아르고스의 원군으로 도착한 아테나이는 알키비아데스를 사절로 보내 휴전을 깨고 싶지 않은 아르고스와 싸우면 이길 것만 같은 그 동맹들을 부추겨, 아르카디아의 포로들을 인질로 유폐시켜 놓고 있던 오르코메노스를 농락해 스파르테가 맡긴 인질들을 만티네이아에 넘겨 주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독단적으로 휴전을 성사시킨 일로 아르고스의 트라쉴로스는 돌에 맞아 죽을 뻔 했고, 오르코메노스 일로 스파르테의 아기스는 분노한 스파르타 사람들로부터 집을 파괴당하고 벌금도 물 형편에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다시 출격해서 죄값을 갚겠다는 약속으로 겨우 그들의 화를 달랬지만, 그들은 아기스에게 막료 열 명을 붙이고, 막료들의 승인 없이 독단적 군사적 행동을 못하도록 했습니다. 한편 아테나이와 아르고스는 다음 번 진격지로 레프레옴을 주장한 엘리스가 동맹들이 테게아로 정하자 철수해 버려, 남은 동맹들과 테게아로 나아갔고, 스파르테도 농노는 물론 노년병과 청년병까지 동원하여 테게아로 황급히 나아갔고, 아카르디아의 동맹들도 뒤따라서 합류하였으며, 출격을 요청 받은 코린토스, 보이오티아, 포키스, 로크리스도 적지를 뚫고 같이 모였습니다. 이후 서로 진용을 갖춘 스파르테 동맹과 아르고스 동맹은 만티네이아 외곽에서 조우했으나 위치가 불리함을 느낀 스파르테가 돌연 테게아로 후퇴하는 통에 전투를 피했고, 이튿날 아침 드디어 헬라스 내전 이후 최대의 육상 격전이라 할 만티네이아 전투가 벌어졌지요. 기병을 양날개에 배치하고, 좌익부터 스키리티스, 브라시다스가 훈련시킨 트라케군과, 중군으로 스파르테와 아카르디아 동맹, 우익으로 테게아와 스파르테를 배치한 스파르테 동맹군에 맞서, 아르고스 동맹은 우익에 자국에서 나선 만티네이아와 다른 아카르디아 동맹, 중군으로 아르고스의 정예와 아르고스 북방의 동맹들, 좌익은 아테나이가 그들의 기병과 함께 배치했습니다. 아르고스 동맹이 기세를 올리며 달려 나온 것에 비해 스파르테 동맹은 나팔 소리에 맞춰 나아가서 시작된 전투는 쌍방의 전술 실수도 있었고, 특히 스파르테의 아리스토클레스와 히포노이다스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스파르타의 전열이 잠시 흐트러지기도 하였으나, 아기스와 삼백 기사들이 주축이 된 중군의 활약으로 아르고스 중군을 격파해 그들을 이분한 것이 결정타가 되어 이후의 전투는 일패도지, 스파르테 동맹군의 완승이었습니다. 아테나이는 기병의 도움으로 전멸은 면했지만, 장군 둘이 죽는 등 다른 동맹들처럼 크게 피해를 입었고, 스파르테도 전투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그 두 장군이 스파르테를 떠나서 망명해야만 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돌아온 엘리스 군대와 새로 온 아테나이 증원군이 에피다우로스를 공격해 방벽을 쌓은 후 각각 제 나라로 돌아가는 사이 그해 가을이 왔습니다.
5.44. 그해 겨울, 스파르테가 다시 테게아로 나와 화평을 제안해 오자, 아르고스는 평화냐 전쟁이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는데, 아테나이에서 사절로 가 있던 알키비아데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스파르테를 지지하는 아르고스 사람들 때문에 아르고스는 결국 화평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아테나이는 알키비아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진출로 얻었던 성채들을 내놓고 펠로폰네소스를 떠나야 했고, 얼마간 버티고 있던 만티네이아도 아르고스 없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해 다른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스파르테 동맹에 들어 갔으며, 아르고스는 친스파르테 과두정이 섰습니다. 헬라스에 내전이 일어난지 열 네번째 해는 그간의 어느 전투보다 크고 치열했던 전투를 경험하고, 스파르테에 새로운 힘을 실어 주며 저물어 갔으며, 그리고 저는 그해에도 역시 그 어느 축제에서도 경연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5.45. 전쟁 열다섯 해째에도57 헬라스는 전체적으로 소강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아르고스의 민주파들이 펠로폰네소스에 아테나이의 영향력을 고수 하려는 알키비아데스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 스파르테가 귐노파이디아이gymnopaidiai 제례 중에는 국외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하여 시가전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은 뒤 아테나이와 동맹을 추구하는 한편, 전시에 육로가 막히더라도 해안을 통해 아테나이의 도움을 받기 위해 여름이 끝나 갈 무렵까지 장벽을 구축했습니다. 겨울이 되자 스파르테는 다시 동맹들을 동원해 아르고스의 장벽을 허물고 아르고스 내란을 진압했고, 아테나이는 아테나이대로 니키아스의 주된 관심 아래 마케도니아의 페르디카스를 포위해 페르디카스가 아테나이에 적대적인 것을 응징하고 있었습니다.
5.46. 그리고 전쟁 열여섯 번째 해에58 저는 역시 그 어느 축제에서도 경연에 나서지 않았지만, 새봄의 레나이아 축제의 비극 경연에서 아가톤이 처음 출품하여, 에우리피데스의 "미친 헤라클레스"를 누르고 첫 우승을 거두었고, 그날 밤 소크라테스는 만티네이아의 여사제 디오티마에게서 들은 에로스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고, 알키비아데스는 제게 그의 스승에 대한 칭송을 늘어 놓았었지요.59 한편 제가 오래 쉬고 있는 동안에도 뛰어난 동료 희극작가 에우폴리스는 그의 열정적인 아테나이의 정치꾼들 풍자를 멈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가 새봄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서 "평화"를 여러분께 보여 드리던 그해에, 그 에우폴리스는 벌써 정치불량배 휘페르볼로스가 곧 아테나이를 망치게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저의 "기사들"을 파로이디아한 "마리카스"를 레나이아 축제 희극 경연에 올렸었는데, 정작 저는 평화를 이루자고 소리쳐야 할 때 고작 하층 출신 정치불량배와 아고라에서 메기 파는 그의 어머니나 건드리며 웃음을 파는 타락에 빠지는 것 같아, 그가 저의 "기사들"을 표절했다고 욕을 했더니, 그것이 다 저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니까 나중에 두고 보라며 콧방귀만 뀌었었지요60. 그 에우폴리스가 이번에도 또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새로운 풍의 노래 가락만 있을 뿐 한없이 가벼운 내용의 아가톤의 비극을 비웃는 듯, "바프타이"로 알키비아데스의 자기 밖에 모르는 허영심이 아테나이를 어떻게 망칠지를 목청 높혀 고발하는 것을 보고, 평화가 필요할 때 에우폴리스가 저를 지원했듯이 저도 이제는 그를 지원해야 되는데 하며 가슴만 아파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5.4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우리 도시 아테나이에는 평화에 대한 희망도 없고, 더우기 전쟁을 끝낼 힘도 없는데, 언제까지나 사람의 '할 바'만 따지는 소크라테스는 물론,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나 힘을 쏟는 노병 소포클레스 역시 말할 것도 없고, 마찬가지로 전쟁의 비참함을 혼자 온몸으로 껴안은 헥토르의 미망인 '안드로마케'의 입으로만 말하는 에우리피데스까지, 그 어느 누구 하나도, 봄이 되어 전쟁을 시작한지 열다섯 해가 더 지나갔는데도, 모두 도시가 '할 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 가운데, 저는 어쩌면 "구름"을 희극 대신 비극으로 바꾸어야 할지 모른다 생각하며, "구름"을 새롭게 다듬어 보면서 에우폴리스가 애써 지키고 있는 희극으로 도시가 '할 바'에 대해 말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5.48.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도 끝난 봄에 벌써 몇 해째 계속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알키비아데스를 겨누고 휘페르볼로스가 도편추방 투표를 하자며 들고 나왔습니다. 이 정치불량배가 생각하기에 우선은 알키비아데스가 목표지만, 혹 바람만 잘 탄다면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에게 육천 표 이상씩을 나누어 먹일 수도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에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금상첨화 아니냐 싶어 도편투표를 하자고 나왔지요. 휘페르볼로스는 그 둘의 사이가 견원지간이라 절대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그러나 뜻밖에도 그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짜고, 되려 그 정치불량배를 도편추방해 버린 일이 생겼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 사건으로 아테나이는 그 뒤 더 짧은 쇠망의 길로 접어 들게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그렇게 본 까닭을 들면, 첫째 휘페르볼로스가 도편추방 당하자 힘이 붙은 것은 니키아스보다 알키비아데스였는데, 이 무절제하고 자기 중심적인 젊은이가 도시가 아니라 자기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벌인 여러 전쟁들 때문이고, 둘째 아테나이에 민주정이 들어선 뒤 하나의 버팀목으로 작용하던 도편추방 제도가 휘페르볼로스에게로 잘못된 적용61이 가져온 결과로 인해 정치꾼들이 더 이상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쓰지 않아 아테나이에서 사라지면서, 필요하면 언제나 불러 쓸 수 있었던 추방 대신에 위증과 증오에 의한 애매한 재판으로 정적을 죽이는 인적자원의 소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오늘 이 자리에서도 두 번째 이유로 아뉘토스를 불러 낸 이 재판으로 비슷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다시 화제를 전쟁 열여섯 번째 해 여름으로 이야기를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5.4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전쟁 열여섯 번째 해에 아테나이가 다섯 해 전에 저질렀던 스키오네의 대량 살륙에 이어, 다시 멜로스에 가한 그 잔인한 처분에 대해 지옥에 가서도 정녕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멜로스는 그해 아테네가 잔혹한 대량 살륙을 가하기 십 년 전에도 한번 니키아스가 조공을 받기 위해 친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테나이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해로운 일을 벌인 것도 아니고, 아테나이에 적대적이지도 않은 가난한 섬을 단지 스파르테가 뿌리인 그 사람들이 스파르테와의 관계를 끊고 조공을 바치겠다 말하지 않는다고, 성인 남자들은 모두 도륙하고, 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두 노예로 팔아 넘기고, 그 땅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서 정착시킨 처사가, 소크라테스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훌륭한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들 가운데 어떤 것과 일치하는지를 바로 그 소크라테스에게, 또 그런 결정에 책임이 있는 그의 제자 알키비아데스에게62, 또 특유의 그 삽상한 어조로 왕자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의 슬픔만 노래하고, 스키오네와 멜로스에서 노예로 팔려 가는 촌부들의 슬픔은 노래하지 않는 에우리피데스에게, 또 그런 일을 저지르는 아테나이에게, 또 그런 일을 저지르게 하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모두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도시민이 가져야 할 어떤 덕목과도 맞지 않는 행동이라면, 도시에게는 그렇게 해도 좋은 덕목이 따로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덕목인가?"
5.50. 그해 여름, 알키비아데스가 멜로스의 처분에 대한 결정을 주도한 뒤, 선단을 이끌고 아르고스로가서 아르고스의 친스파르테 사람 삼백 명을 잡아 외딴 섬에 유폐시키는 동안, 아테나이의 또 다른 선단은 멜로스로 가서 클레오메데스와 티시아스를 보내 항복과 죽음 둘 중의 하나를 강요하는 회담을 열었습니다. 그때 멜로스 섬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칠백 년의 전통이 있는 이 섬에서 촌각이라도 자유가 사라지는 일을 우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테네의 우호자로 중립을 유지하는 조건에 대해 서로 양해하고, 아테네가 철군하는 조약을 맺을 것을 촉구합니다." 메가라에 대한 포고령 철회가 사소한 일이 아니었던 까닭이 그 뒤에 올 더 큰 요구에 굴복하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랬던 아테나이가 촌각이라도 자유가 사라지는 것을 살아 있는 동안은 허용할 수 없지만, 철군을 위한 협상은 하겠다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좋은 말로 다독거려 주지 못했습니다63. 그리고 스키오네의 일로 이미 대량 살륙에 무덤덤해진 탓인지 그해 겨울이 될 때까지 아테나이에는 멜로스의 도륙을 재고하자는 사람도 없었고, 니키아스나 알키비아데스에게 달려드는 디오도토스도 없었고, 일부러 노를 천천히 젓는 사람들도 없어, 그해 겨울이 되자 아테나이는 필로크라테스에게 증원 부대를 주어 멜로스를 점령하였고, 그도 파케스와는 달라서 조금도 처형을 미룰 생각이 없어, 스키오네에서 이미 한번 해 본 대로 위에서 말씀 드린 대량 학살의 처분을 강행한 뒤, 아테네 사람 천오백 명을 그곳으로 이민시켜 정착토록 했습니다64.
5.51. 이런 피비린내 속에 저는 전쟁 열여섯 번째 해의 경연에도 불참한 채, 비록 스스로를 지킬 힘은 모자라나 그들의 자유를 위해 굴종하지 않고 버틴 한 섬의 작은 도시 멜로스에 살륙을 자행하는 우리 도시의 잔인함에 절망하는 저와, 그런 잔인한 우리 도시의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이 할 바나 따지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비교하며, 숙제 같았던 "구름"의 개작을 더 이상 진행시킬 수가 없어 그때까지 고쳐 온 그대로 더 이상 손보지 않고 끝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하여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어떤 젊은이가 우리 도시에 필요한가를 가지고 관객들과 이야기하기에는 파라바시스만 가지고는 시간도 충분하지 않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도 알맞지 않아, 본디 처음 상연했던 "구름"에는 뺐던 '논쟁agon'을 희극의 전형도 따를 겸, 아울러 아테네 시민 여러분께서도 한번 같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드리고 싶기도 해서 새로 넣어 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논쟁'을 논쟁답게 꾸려 나가기 위해 사론자 소크라테스와의 대결에 필요한 정론자를 정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연극을 만들 때는 얼치기 소피스테스의 모델로 소크라테스를 찾는 일이 그렇게 어려웠었는데, 이제는 정론자를 찾는 일이 더 어려웠습니다. 너무나 많은 철학자나 소피스테스들이 떠올랐으며, 그만큼 많은 이유들로 부적당했지요. 그러다가 논쟁을 먼저 만들어 둔 다음 그 논쟁에 맞는 정론자는 천천히 생각이 나면 바꾸어 넣기로 하고 '정론'과 '사론'으로 의인화된 이름을 붙여 논쟁 편을 정리해 두었었는데, 결국 모델을 따로 찾지 못한 채 그것으로 그냥 두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에우리피데스로부터 소개 받았던 적65이 있는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유아독존식 철학자 하나를 골라 상대시키면66 얼치기 소피스테스 소크라테스의 사론이 제법 논쟁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되었고, 원조 소피스테스 프로타고라스가 얼치기 소피스테스를 상대해도 좋겠지만, 사론가로 찍혀 아테나이에서 쫒겨난 소피스테스를 정론가로 내세우기에는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예의가 아니었지요67. 결국 에우리피데스처럼 헤라클레이토스나 프로타고라스를 기중기에 태워 등장시킬 수도 없고, 결국 기중기 타고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에우리피데스식 '졸지 출현' 방식으로 의인화된 '정의의 변론dikaios logos'(正論kreitton)과 '불의의 변론adikos logos'(邪論hetton)이 무대에 나타나 논쟁을 벌이도록 한 꼴이 되었고, 스트렙시아데스가 아들 페이딥피데스를 소크라테스 앞으로 데려와서 모든 올바른 것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여 이길 수 있도록 가르쳐 달라고 하는 장면과, 소크라테스가 페이딥피데스를 훌륭한 소피스테스로 만들어 주겠다며 실내 교습소로 데리고 들어가는 장면 사이에 '논쟁agon'을 넣어, 스트렙시아데스가 그 논쟁을 보고 아들의 교육을 맡길 것인지 그런 교육이라면 받지 않도록 하겠다며 도로 데려갈 것인지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으로 어떻게 희극의 전형을 따르게 한 것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논쟁의 미완성은 논쟁자로 나올 배우들의 가면과 의상 갈아 입을 시간을 떼우는 코로스의 역활에 대해서도 미완성으로 남게 했는데, 논쟁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코로스의 논쟁자 소개와, 논쟁자들의 논박을 촌철살인하는 기지로 정리하여 관객의 이해를 돕게 하면서 동시에 논쟁을 가열시키는 재미의 코로스 부분도 만들지 못한 채 끝을 내어야 했습니다68. 다시 말해 저의 '"구름"' 개작은 여러모로 미완성 작품이란 말씀입니다69. 어쨌든 논쟁이 들어간 만큼 다른 에페이소디온 장면들을 간추려 전체 상연 시간은 거의 같도록 조정했는데도, 이 새로운 "구름"은 다른 희극들에 비해 좀 긴 편이 되었습니다. 씁쓸한 종말에 엑소드도 흥겹지 않아 꼴찌를 했다는 말들이 있었지만, 저는 저의 주인공 스트렙시아데스의 분노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가 소크라테스의 학원을 불지르도록 그냥 두면서, 여러분들이 자제들의 교육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도록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5.5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같은 겨울에 천우신조를 믿던 멜로스 사람들의 원성이 하늘에 뻗쳤던지, 그 일 뒤로는 아테나이가 좀처럼 회복할 길이 없었던 엄청난 타격을 가지고 온 전멸 사건을 아테나이는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테나이가 시켈리아 섬 안에서 벌어진 패권 다툼에 원군으로 초대 받은 것을 기화로 시켈리아를 정복할 마음을 세우고,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전멸하고만 사건의 씨앗이 그 겨울에 심어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해 겨울 아테나이는 시켈리아의 에게스타 사람들로부터 쉬라쿠사이의 비호를 받는 셀리노스의 핍박으로부터 구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실상도 파악할 겸 또 에게스타가 정말 전쟁 비용을 댈 수 있겠는지 확인도 할 겸 시켈리아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사절단은 이듬해 전쟁 열일곱 해째 봄에 에게스타의 사절단과 예순 척의 배를 한 달간 운용할 수 있는 돈 예순 탈랄트의 은괴와 함께 아테나이로 돌아왔습니다.전쟁 열일곱 번째 해 여름이 시작되자 아테나이는 돌아온 이들로부터 시켈리아의 현황과 신전과 국고에 쌓여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재산에 대한 이야기를 믿고, 예순 척의 선단을 보내기로 하고 본국 훈령 없이 현지 재결할 수 있는 전권장군들에 알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 그리고 라마코스를 선임했습니다. 십 년 전에 스무 척의 선단을 이끌고 이미 시켈리아에 다녀온 적이 있는 라케스, 그리고 그 일 년 뒤에 마흔 척의 선단으로 두 번째로 다녀온 에우뤼메돈보다, 더 큰 예순 척 규모의 장비를 지닌 선단을 세 장군들에게 주어 세 번째로 시켈리아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지요. 그렇지만 니키아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가 클레온이 죽은 뒤로는 전투에 나가는 것을 저어하고 있기는 했지만, 시켈리아 원정에 대해서는 평소의 그와는 달리 소심하거나 유유부단하지 않고, 단호한 어조로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으며70, 알키비아데스가 젊은 지지자들을 민회에 동원해 바람몰이를 하고 있으므로 나이 든 시민들은 비겁해 보이더라도 원정을 반대해야 한다며71, 언제부터인가 아테나이에서 설치기 시작한 젊은이들의 정치 모임이 전쟁 분위기를 이끄는 아테나이에 세대 간의 분열을 확인시키면서, 지금은 제국을 확장할 때가 아니라 흩으진 제국의 모습을 복원할 때라고 원정 반대의 이유를 밝혔습니다. 한편 알키비아데스는 그 모든 것이 도시와 도시민에게 좋은 것이니 오히려 자부심을 느낀다며 니키아스의 인신공격을 받아치고는72, 도시민을 나이로 편가르지 말라며 제법 준수한 훈계까지 곁들이며73, 아테나이 제국은 도와 달라는 도시들을 도와 주면서 형성되었다며, 도와 달라는 시켈리아의 도시들을 외면하면 되겠냐며, 제국이 얼마나 커져야 하는지는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지만, 남을 지배하지 않으면 남에게 지배당하고 마는 만큼 원정이 아테나이의 힘을 증강시켜 줄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반복된 반대에도 원정 쪽으로 여론이 거의 기울자, 니키아스는 원정을 하더라도 규모가 훨씬 커져야 한다고 주장해 전쟁 비용 때문에 아테네가 원정을 포기하도록 할 속셈이었지만, 원정으로 시켈리아에서 왕창 재물이 들어올 것으로 믿는 아테나이 시민은 규모만 키우면 원정은 확실히 성공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원정대의 규모를 키우는 것도 승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테네는 점점 더 패망의 크기를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5.53. 페리클레스에서 시작된 전쟁을 통해 도시를 번영시킨다는 몽상이 그 병마의 재앙을 겪고도, 피폐해진 동맹도시들의 이탈로 야기된 클레온의 몰락을 보고서도, 조공을 바치는 동맹들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 아리스테이데스나 브라시다스의 공정과 상호존중이 아니라 스키오네와 멜로스에 대량 살륙까지 쓰더니, 이제는 아예 헬라스가 아닌 시켈리아로까지 나가자고 하는 알키비아데스에게까지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페리클레스가 사소하다 하지 말라며 시작한 전쟁으로, 우리 아테나이는 말할 것도 없고 전체 헬라스의 도시들의 살림이 지난 열일곱 해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전쟁이 터진 그해보다 더 좋았던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가 지날수록 더 나빠져 가고 있었는데도,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은 마치 주사위 노름이라도 즐기는 듯이 혹시나 모를 승전이 가져다 줄 큰 것 한방에 온통 정신을 쏟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클레온의 죽음이 가져다 준 니키아스의 평화 덕분에, 그 재앙과 오랜 전쟁 속에서도 조금씩 자리 잡아 가는 살림살이며 늘어 가는 젊은이들을 보고 평화가 얼마나 도시와 도시민의 위해 좋은 것인지를 깨닫기보다, 그 평화로 얻은 작은 여유를 밑천 삼아 새로운 번영의 돌파구로 다시 전쟁을 생각하는 여러분은 전쟁으로 출세를 확실히 하고 싶은 젊은 알키비아데스와 어찌 그리 짝짜꿍이 잘 맞아 갔던지요.
5.54. 그런데, 휘페르볼로스의 함정은 니키아스, 파이악스와 손잡고 잘도 빠져나가며, 도리어 그를 자기가 판 함정에 빠뜨렸던 알키비아데스가 이제시켈리아 원정군의 최고지휘자가 되어 원하던 것을 모두 쥐게 된 그날 밤, 분명히 고의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헤르메스 신상 파괴라는 함정에는 한 치의 분별력도 보이지 못하고 스스로 그 속으로 빠져들고 만 것은 알키비아데스가 지닌 깜냥이나 됨됨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짓이었지만, 그 함정에 빠지고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보인 변덕스런 행적은 그가 한평생 개인적으로 추구하던 것들에만 매달려 살았지, 도시와 도시민에게 좋은 일은 어떤 일도 좋은 일이라며 자기 합리화할 때는 그렇게도 앞세우던 바로 그 도시나 도시민을 위하여서는 결코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았음을 너무나 잘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74. 가문이나 교육이나 신체 조건에서 어느 것 하나 아테네의 최고에서 빠지지 않고, 소크라테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많은 아테나이사람들이 그들의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었던 알키비아데스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우리 도시 아테나이가 전쟁과 재앙에 짓눌려 놀라운 자질을 지닌 우리의 젊은이들을 우리 도시와 도시민을 위해 살도록 가르치지 못하고, 그보다 우선하여 먼저 개개인의 야망을 위하여 살도록 가르치다 보니, 우리의 젊은이들을 저 마라톤의 전사들 같이가 아니라, 개인의 허영과 탐욕에 빠지는 저런 알키비아데스 같이 키운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의 아테나이를 헬라스 내전 기간 내내 가급적 전쟁과 거리를 두며 관망하고 지낸 까닭에 피폐를 면한 테바이보다 못한 도시라고 할 정도로 쇠망의 길에 들어서게 하였던 여러 과정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돌아보게도 되는 것입니다.
5.55. 원정 계획을 마무리할 즈음 한 노예의 증언을 바탕으로 피토니코스가 '알키비아데스와 그 일행 아홉이 풀리티온의 집에서 엘레시우스 비의를 조롱했다'고 고발했는데, 비록 이것이 그날 밤의 신성모독 범죄와의 연관성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알키비아데스의 정치적 적들은 은연 중에 연관성의 냄세를 피우며 종래에는 민주정 파괴의 음모로까지 몰아 갔고, 알키비아데스와 그 일행의 평소 언행을 미루어 짐작해 이 주장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알키비아데스가 혐의를 부인하며 당장 재판을 받겠다고 나선 것까지는 아주 좋았는데, 끝까지 재판 개시를 요구했다면, 아테나이 시민 모두가 시켈리아로 빨리 출발해 원정을 성공시키고 새로운 부를 창출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때라 재판이 일사천리로 끝나 아무 문제도 없었을 일을, 원정에서 돌아오면 그때 재판을 하자는 말만 믿고 정치적 적들에게 온갖 구실을 남겨 둔 채, 니키아스의 원정군 증강론에 대해 데모스트라토스가 구체적 증강 규모를 물었을 때 니키아스가 그냥 한번 대꾸해 본 백 척의 아테나이 대선단과 쉰 척의 레스보스와 키오스 선단을 이끌고 호기롭게 나선 것이 그의 운명을, 그리고 우리 도시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5.5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이 원정군이 시켈리아에서 벌인 행적을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테를 이길 수 있는 전략으로 해군에 의한 전쟁 수행을 택한 이후로 여태까지 숱한 어려움에도 잘 견뎌 왔었기 때문입니다. 그 큰 규모의 원정이 에게스타의 허풍스런 농간에 놀아난 바보 짓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알키비아데스 때문에 니키아스가 당장의 회군을 더 이상 주장하지 못했던 일, 알키비아데스는 사라지고 라마코스는 전사하고 자신은 중병을 앓는 어려움 속에 헤르메스상 훼손에 두 동생이 연루되었다는 조사 결과로 자기도 알키비아데스 꼴이 날까 두려웠던지 혼자 남은 전권장군인 니키아스가 회군을 결심하지 못한 일, 쉬라쿠사이에 결정타를 날려 원정을 끝낼 수 있었는데도 이를 피하고 현상만 유지하다 스스로 내려야 했던 회군할 것인지 계속 싸울 것인지의 결정을 본국에 그것도 증원할 것인지를 선택사항으로 끼어 넣어 물은 일, 이 세 번의 회군에 대한 자기 결단의 기회를 놓치고서 니키아스가 한 일이란 자기가 데리고 간 원정군은 말할 것도 없고, 증원군까지 모두 물 속에 집어 넣었을 뿐만 아니라, 에우뤼메돈을 전사시키고, 그 자신 데모스테네스와 함께 사로잡히고, 스파르테의 신병 인도 요구를 무시한 쉬라쿠사이의 손에 데모스테네스와 자신의 늙고 병든 몸을 맡겨 죽임을 당한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리하여 니키아스는 아테나이가 운용할 수 있었던 해군력의 반 이상과, 그 쟁쟁하던 장군들을 모두 데리고 하데스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7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테나이는 바로 망하지 않고, 그래도 남아 있던 도시의 힘을 끝까지 소진시켜,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스파르테에 항복할 때까지 십 년을 더 버티고 있었으니, 그 원정이 아테나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5.57. 전쟁 열일곱 번째 해에는76 이 시켈리아 원정 출발 말고도, 그전 전쟁 다섯 해째에 일어난 일들만큼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극작가인 저에게 전쟁의 상황을 다른 도시에 가서 벌이는 전투에서의 승패보다 더 잘 설명해 주는 아테나이 안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일들 말입니다. 그 같은 일은 사람들이 그것에 쏠려 가는 이유를 말해 주기 때문에 극작가인 제가 함부로 보아 넘기는 법이 절대 없지요. 멜로스의 도륙이나, 시켈리아의 원정의 결의가 말해 주듯, 이런 일에 대한 찬성이 마치 자기가 아테나이를 얼마나 위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단한 증거이기나 한 듯이 앞다투어 나서는 정치소인배들이 아테나이의 정치 수준과,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도시가 마땅히 지녀야 할 윤리 수준을 떨어뜨리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웠는데, 이번에는 휘페르볼로스 뺨치는 정치불량배 쉬라코시오스가 클레온이 죽은 뒤 그와 함께 묻었던 '희극으로 개인을 공격하거나 비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세 번째로 만들어, 그 당시의 인기작가 페레크라테스나 에우폴리스가 자기와 같은 정치꾼들을 공격하고 비방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 여섯 해 전에 아테나이가 저지른 스키오네에 대한 대학살을 보고 더 이상 희극을 쓸 마음이 뚝 떨어져 희극에 대한 마음을 닫고 살다가, 아테나이가 해가 갈수록 망가져 가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우리의 도시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어, '나라도 나서야지' 하고 "구름"을 손보며 조금씩 희극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가, 그해 다시 멜로스의 대참극을 보자 그때는 정말 아테나이에 정이 떨어져 어디 다른 세상이 없나 하며 '신국'을 구상했는데, 세 번째의 희극 금지법은 화가 나서가 아니라 챙피해서 우리의 아테나이를 떠나고 싶었을 만치 또 한번 정 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하기야 그렇다고 제가 아테나이를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었겠습니까마는. 아테나이를 떠나가서 살 수 있는 도시가 있다면 그 도시는 어떤 곳일까, "구름"을 손보면서 생각했던 '신국'은 어떤 도시로 만드는 것이 좋을까, 이 두 그림을 겹쳐 보며 궁리에 몰두하는 가운데 들린 이 금지법 소식은, 저로 하여금 다시 다음해의 경연에 나서도록 결정적으로 떠밀었지요. 아테나이 시민에게도, 희극작가에게도, 또 무엇보다 날이 갈수록 질이 떨어지는 정치꾼들에게, 도시에 대해 희극이 어떤 일을 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희극작가가 도시에 대해, 또 도시민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들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도시와 도시민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희극이 다시 한번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5.58. 이듬해 봄의 경연에 올릴 '신국'에 대한 구상을 이어가는 동안 시켈리아 원정군이 떠나간 도시의 빈 자리에 유월의 무더위가 몰려 왔고, 민회의 헤르메스 신상 훼손 진상조사위원회는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보기에도 틀림없는 고의로, 다수가 동시다발적으로 저지른 신성모독 행위여서, 그들이 누구이며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고 싶은 것은 비단 민회 뿐만 아니라 저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사위원회에서 면책과 보상이 보장된 가운데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 증인은 아테나이에 살던 딴 도시 사람 테우크로스라는 자였는데, 그는 신상 훼손이 일어난 뒤 조사가 시작되자 메가라로 도망갔다가 면책을 보장 받고 돌아와서, 자신도 비교를 조롱하는 모임에 참석했었다며, 신상을 훼손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고, 비교를 조롱한 열한 명과 신상을 훼손한 열여덟 명을 고발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붙잡혀 처형당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치고 없었지요. 이 자가 밝힌 이름들에 알키비아데스는 없었습니다. 다음 증인은 디오클레이데스라는 자였는데, 그는 신상 훼손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날 밤 밤길을 걷다가 디오뉘소스 극장의 코로스들 자리에 삼백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무슨 나쁜 짓을 꾸미는 것 같아, 이튿날 아침 그들 가운데 제가 아는 사람에게 찾아가 돈을 요구했더니 주겠다고 해 놓고 지금까지 주지 않아, 오늘 그들을 고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름을 알아 고발한 마흔두 명 가운데는 조사위원회의 위원이 둘이나 있고, 또 다수의 부자 귀족들도 들어 있어, 이미 신성모독이 민주정 파괴 음모라는 소문을 듣고 공포에 질려 있던 사람들은 충격에 빠져, 이들이 민주정을 뒤엎을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 페이산드로스의 긴급 동의로 아테나이 시민에게 증언을 받기 위한 고문은 금지했던 법을 일시 중단시켜, 고문을 해서라도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메가라와 보이오티아로 고문을 피해 도망친 뒤 바로 보이오티아가 아테나이 경계 가까이 나타나자, 시민들이 무장을 하고 밤을 세웠을 만큼 과두정이나 참주정을 위한 반정에 과도한 공포를 나타냈지요. 아테나이는 고마워서 디오클레이데스를 올림피아 우승에 맞먹는 대접을 결의할 정도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고발당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인 여러분도 잘 아시는 지금 아테나이의 명연설가 안도키데스가 면책을 받고, 그도 참석한 한 헤타이리아hetairia77가 신상 훼손에 책임이 있다며 주도자로 에우필리토스와 멜레토스를 꼽고 나머지의 이름도 밝혔으며, 그들은 테우크로스의 명단에도 올라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네 명은 그 즉시 도주했고 나머지는 죽었거나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디오클레이데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사촌의 아들과 또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서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해 처형당했고, 사주 했다는 둘은 달아났습니다. 그의 위증으로 휘말렸던 사람들은 모두 무죄가 되었지요. 신상 파괴자들은 소수의 별 영향력도 없는 정치꾼들이 모였던 헤타이리아 패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음모도 보이지 않아 아테나이는 헤르메스 신상 훼손이 정변의 음모가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을 놓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5.59. 신성모독의 건을 해결한 위원회는 다음으로 데메테르가 전수한 비교를 조롱한 사건을 조사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의 적대자들이 비교 조롱을 민주정에 대항하는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어, 이 또한 과두정이나 참주정에 과도한 예민 증상을 보이던 다수의 아테나이 시민이 그 결과를 주목하고 있었지요. 노예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피토니코스의 증언에 더해, 이번에는 아테나이 최고 가문의 하나인 알크마이온 집안의 한 며느리인 아가리스테가 증언을 했는데, 이 알크마이온이나 아가리스테 집안은 모두 클레이스테네스나 페리클레스와 혈연으로 관계가 있어, 증언에 실린 무게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가 사촌 악시오코스와 친구 아데이만토스 등과 함께 한 귀족의 집에서 조롱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키논의 아들 테살로스가 정식으로 위원회에 알키비아데스와 그 일행을 고발하자, 테살로스의 집안과 다른 귀족들도 힘을 실었는데, 그 고발의 내용이 상세하고 구체적이라78, 주목하던 아테나이 사람들도 마음이 움직였고, 위원회는 애초 그 사이 법이 바뀔 것도 아니니 원정에서 돌아오면 재판을 하겠다던 태도를 바꾸고, 알키비아데스와 일행을 당장 법정에 세우기 위해 아테나이의 쾌속 연락선 살라미스호를 보낼 정도로 문제는 심각히 진행되었습니다. 소환당한 알키비아데와 일행이 다른 배로 살라미스호와 나란히 투리오이까지 왔다가 살라미스호가 한눈파는 사이 짐배를 타고 사라져 버리자, 위원회는 궐석재판을 열어 도망가고 없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사형을 언도한 다음, 그의 목에 상금까지 걸었고요.
5.6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제가 특별히 알키비아데스를 감쌀 까닭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신다면, 당시 조사위원회 활동의 의문스러운 점 몇 가지를 들춘다 해서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며 야단치지 말아 주십시요. 왜냐하면 이 의문에 대한 답이 결국 여러분에게 그 당시 아테나이에는 정치적 반대자는 없고, 무슨 꼬투리라도 잡아 그것을 빌미로 죽여야 하는 정치적 적만 있는 살벌한 도시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헬라스의 도시들을 모두 동맹과 적으로 나누어, 스키오네나 멜로스처럼 따르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해 죽여 버려야 하는 존재로 구별하던 살벌함이 어느새 아테나이 안에서의 정치판에도 스멀스멀 기어 든 것을 여러분께 보여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5.61. 이제 저는 그날 밤 사건에 대해 제가 가졌던 의문들을 들출까 합니다. 저의 맨 먼저 의문은 신성모독의 종교적 행위가 '헤르메스가 아레스에게 까불다가 혼이 났다' 따위로 소문이 나지 않고, 어떻게 해서 '민주정을 엎고 과두제나 참주제를 세우려 한다'라는 정치적 행위로 소문이 났느냐였습니다. 물론 아테나이의 젊은이들에게 언제부터인가 스파르테식 행세가 유행하기 시작하여79 사람들이 민감해지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왜 하필 그것을 정변의 기미로 읽고, 또한 그렇게 소문을 퍼트린 사람이 누구냐, 그 이유가 무어냐도 의문이었지만, 그 소문에 흔들렸던 아테나이 시민이 진짜 두려워 할 만한 정변의 실체가 과연 아테나이에 있었는가도 의문이었으며, 혹시 있었다 해도 누가 민주정을 엎는 정변을 일으킬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을까도 의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문을 믿고 실제 그것에 대비해 도시를 지킨다며 시민들이 무장하는 소동을 피워 대고, 한술 더 떠서 조사위원회는 만약에 대비해 아크라폴리스로 피난했을 정도로 도시가 예민해졌는데도80, 정작 그런 의심을 살 만한 인물들은 모두 다 전장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 다음 의문은 그런 소동까지 피우며 도시가 무너질듯이 야단법석을 떨던 사람들이 주모자들이 별 볼 일 없는 정치꾼들이라는 정말 어이없는 결말이 지어지자 대번에 그 방향을 돌려, 위원회의 조사 대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고, 설사 같은 신성모독이라손 치더라도 그 무게에 있어 신상 훼손에 비한다면 말이 안 되게 가벼워 보이는 '신성한 비의에 대한 조롱'을 왜 또 '민주정을 파괴하는 음모'로 몰아갔느냐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물론 아무리 면책을 받았다 해도 그 내막을 발설치 않았겠지만, 안도키데스의 증언 어디에도 정변에 대한 낌새는 전혀 없었는데도 어떻게 해서 그 사람들은 신성 조롱의 경우에도 종교적 동기가 아닌 정치적 동기를 찾으려 했는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 신성한 비의에 대한 조롱을 가지고도 알키비아데스나 다른 거물이 걸려들지 않았더라면, 신성모독 때처럼 그 모든 정변의 소문은 없었던 일로 돌리고, 또 다시 아테나이의 거물을 잡기 위해 또 다른 꼬투리를 찾아 나섰을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 때의 경우 그것에 연루된 사람들이 별 볼 일이 없는 정치꾼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정변을 겁내던 아테나이 시민이 안도했다는 대목 때문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휘페르볼로스가 대놓고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그 좋은 제도를 오용한 까닭에 아테나이가 오스트라키스모스 제도를 없애 버린 뒤부터 아테나이 시민은 정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거물에 대해 줄곧 공포를 느끼고, 그 싹을 꺾어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아테나이가 민주정으로 바뀌고 난 후로 오스트라키스모스가 분명히 그 몫을 했다고 믿어집니다마는, 그런 정변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시민 여러분 가운데 과연 몇 분이나 그런 거물이 나타났다고 걱정해서 그런 공포를 느끼고, 그 싹을 짜르려 나섰는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바람은 누가 잡았던 것일까 하는 의문도 따라서 들었고요. 스파르테와 싸워 이겨야 하는 전쟁 중의 아테나이가 적대적인 다른 도시와 전쟁을 수행하는 자기 도시의 거물은 도시의 정치제제 유지를 위해 잡아 족쳐야 하고, 있으나 마나 한 조무래기는 그냥 두어도 괜찮다고 한다면81, 결국 이 말은 스파르테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뒷전이고, 그보다 아테나이 안에서의 정치적 승리가 그 어느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도시 아테나이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렇다면 신성모독이나 신성 조롱이 결국 아테나이에서 니키아스나 알키비아데스 같은 정치 거물이나 혹은 데모스테네스나 에우리메돈 같은 전쟁 거물을 잡아 내기 위한 덫이었지는 않았나 하는 또 하나의 의문이 들었습니다.
5.62. 아테나이의 정치체제를 민주정으로 바꾸면서 함께 들여온 도편추방 투표가 과두정이나 참주정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면서 아테나이의 정치세력들의 자연스런 정권교체까지 거들어 줄 수 있었는데, 전쟁으로 장사꾼들이 정치에 간여하면서부터 도편추방 투표로는 그들이 오히려 추방당할 수 있다는 것을 휘페르볼로스의 경우를 보고 알게 되자, 도편추방 제도를 더 이상 시행하지 않는 대신 새로운 정적 제거 수단으로 신들에 대한 태도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도시가 믿는 신들에 대한 태도를 묻는 단죄의 효과는 이미 프로타고라스나 아낙사고라스의 추방을 통해, 페리클레스도 어떻게 해 볼 수 없었을 만큼 확실하다는 것을 모두가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당대 최고의 정치적 배경을 가진 알키비아데스가 쉬라쿠사이 원정군의 총지휘자로 이제 막 날개를 달려고 하는 순간, 원정이 성공하면 그 날개가 너무 커질 것 같아 한번 신성모독으로 엮어 보았는데, 덫에 걸린 알키비아데스의 그 어처구니없는 도주 때문에 이제 신을 걸고 넘어지면 누구라도 다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63. 아테네 시민 여러분,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테에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니키아스와 라마코스가 비운 아테나이를 저의 물음에 대답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치꾼들이 채우고 있는 동안, 긴 사연의 전쟁 열일곱 번째 해가 저물어 갔고, 저는 아테나이를 떠나 새 '신국'으로 가는 구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늦어도 새봄의 디오뉘소스 축제에는 오래간만에 저의 작품을 경연에 올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평화"에서 제가 생각했던 대로 정말 신들의 거처가 하늘이라면82, 그래서 헤르메스의 설명대로 헬라스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전쟁 놀음에 학을 떼고 신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옮겨 가 버려 그 하늘이 비어 있다면, 그리고 그 빈 하늘을 '전쟁'과 '소란'이 차지한 다음, 절구통에 헬라스를 넣고 페리클레스와 아르키다모스나 클레온과 브라시다스나 알키비아데스와 아기스 같은 절굿대들로 빻고 있는 것이라면, 트뤼가이오스를 풍뎅이에 태워 보내 그 연약하고 작은 돌조각 에이레네를 데려와 겨우 일 년짜리 평화를 이루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아예 그 빈 하늘에 '신국'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들이 버리고 간 하늘에 새로운 도시를 세운다면 그 도시를 풍뎅이들로 하여금 오르내리게 해 세울 수는 없고 반드시 새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사실 새들이 신들의 반열에 올라 있었거나, 적어도 인간들과 신들의 사이를 매개하는 반열에 올라 있었던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라83, 새들을 설득하여 하늘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도록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다만 인간을 경계하는 새들의 속성으로 볼 때, 새들에 접근하여 새들에게 하늘에 도시를 만들어 평화롭게 살아가자라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인간들 가운데 이미 새가 되어 그들과 서로 터고 지내는 중개자가 필요했는데, 이것도 에우리피데스나 다른 비극작가들이 이아손과 메데이아를 가지고 놀았듯이, 누구나 한번은 비극으로 만들어 보는 '테레우스'와 '프로크네'가 벌써 제우스의 배려로 '후투티'와 '밤꾀꼬리'로 변해 있어, 그들을 매개로 새들을 설득하면 되었고, 다행스럽게도 제우스는 필로멜레까지 제비로 만들어 모두가 새들로 바뀌긴 했지만, 새가 된 다음에는 각자가 다른 종류의 새들로 지내고 있어, 더 이상 서로 애욕과 사랑 따위의 복수로 자식까지 죽이며 싸울 일이 없어 좋았습니다84.
5.64. 그리고 저는 새들의 가면을 쓴 코로스의 숫자를 스무넷으로 늘렸는데, 전에 에우리피데스가 비극에서 코로스를 열둘에서 열다섯으로 늘이긴 했었지만85, 희극의 무대를 요란한 새소리들로 채우면서 그 새들이 새로운 '신국'인 '구름뻐꾸기도시'의 도래를 마음껏 즐기기엔 두 배가 좋지요. 친구들에게 믿음을 주는 주인공 페이세타이로스는 낙관주의자인 그의 친구 에우엘피데스와 함께 테레우스를 만나 신국이 어디 있는지 묻지만, 지금은 새가 되어 새들의 좋은 친구가 된 그도 그곳을 몰라, 그들은 새들과 함께 스스로 하늘에 그들의 도시를 새로 세우고, 이주민들도 골라서 받고, 프로메테우스의 조언으로 신들이 보낸 평화 사절들을 설득해, 제우스의 왕홀을 넘겨 받을 뿐 아니라, 그 딸 바실레우스와 결혼까지 하면서 신들과 평화를 이룬 명실상부한 '신국'의 최고신이 되도록 전체 구도를 짰습니다.
5.6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비록 저의 "새들"이 전쟁 열여덟 번째 해86 봄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축제 경연에서 이등을 하고 말았지만, 저는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제가 경연에서 오래 쉬는 동안에 많은 희극작가들이 만든 희극의 소재나 내용들이 별로 변하지 않았던 것에 반해, 저의 "새들"은 그 무대에서의 구성이 웅장하고 화려한 것 이외에도 신과 대등한 도시를 세운다는 내용이 기발하고 담대하여, 그 당시 관객들이 소화해 내기에는 너무나 벅찬 희극이란 걸 제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정도가 되니 이등이라도 했지, 쉬라쿠사이에서라면 예심에서 떨어져 무대에 올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등수에 별로 개의치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새들"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으로, 희극에서 소재나 무대 연출을 다양하게 해도 좋다는 관객들의 신호를 보았고, 따라서 다음 작품들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었지요.
5.66. 봄에 "새들"을 보여 드렸던 전쟁 열여덟 번째 해의 여름이 되자 아테나이에는 도망간 알키비아데스의 새로운 인생이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고, 스파르테는 페이세타이로스가 세운 '구름뻐꾸기도시'의 평화만큼이나 부자연스럽던 전체 헬라스의 평화를 깨고, 전쟁을 새롭게 이끌 결심을했습니다. 아테나이가 막강한 원정군을 이끌고 시켈리아로 진출해 새롭게 제국주의적 세력 확장을 꾀하는 것을 보고, 그것으로 헬라스 전체에 대한 스파르테와의 세력 균형이 깨어지는 것을 수수방관 할 수 없었고, 그 억지스러운 평화를 깰 구실을 이번에는 아테나이가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스파르테는 테바이가 플라타이아이를 잠입하는 통에 별 수 없이 먼저 삼십 년 평화조약을 깼고, 더우기 마라톤에 전사를 보내 준 은공으로, 신들의 뜻이 아닌 한, 언제나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플라타이아이를 치는 것으로 전쟁을 시작했다는 일종의 죄의식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평화로 되돌려 놓으려고 노력한 반면, 아테나이는 그때마다 평화 대신 전쟁을 고집해 왔었는데, 이번에는 스파르테가 그래도 평화가 겨우 성립된 마당에 되도록 먼저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 사소한 공격에는 조약 위반이라 따지지 않고 지내 왔으나, 다시 말해 아테나이가 그동안 돌려주기로 했던 퓔로스를 거점으로 펠로폰네소스 연안의 도시들을 건드리는 것을 꾹 참고 지내 왔으나, 이제 드디어 아테나이가 자기 도시의 앞마당인 라코니케까지 기습 공격하는 가장 극악한 방법으로 나오자, 그 죄의식을 훌훌 털고 기꺼이 전쟁으로 나가길 결심했지요87.
5.6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간간이 시켈리아 원정군 소식을 들으면서도, 아테나이에 남은 사람들이 무언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도, 그것이 원정군의 뒷치닥거리인 줄로만 알았지 진짜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엄청난 구실을 만들고 있는지는 몰랐으며, 더구나 그것들이 스파르테에 다시 또 전쟁의 기미를 피워 올리게 하는 전쟁의 불씨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언제고 다시 전쟁이 터질 것 같다는 기분 나쁜 예감은 늘 곁에 끼고 살았는데, 그 좋은 평화를 이루고도 최대의 선단을 꾸려 다른 도시를 치러 나가는 모습은 그 누가 보아도 결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동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알키비아데스가 없는 원정군의 초기 성공 소식도 그 불안을 더해 가는 판에, 여름이 한창인 때 들려왔던 아테나이의 라코니케 공격 소식은88 평화가 깨어진다는 소리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했습니다. 평화를 지키고 싶다는 저의 염원과 그 평화가 곧 깨어진다는 절망감이 뒤죽박죽이 되고, 디오뉘소스가 불러 일으켜 주신 모처럼의 연극에 대한 열정이 전쟁에 대한 분노로 또 다시 바뀌어 버려 그해 가을까지 아무 것도 못하고 지내다가, 시켈리아에서 보낸 병들고 지친 니키아스의 음울한 편지에 대한 대답으로 민회가 시켈리아의 두 번째 원정을 지휘했던 에우뤼메돈과 스팍테리아의 영웅 데모스테네스를 지원군으로 보내기로 하는 결정한 뒤, 해가 바뀌기 전에 우선 에우뤼메돈에게 배 열 척과 약간의 전쟁 비용을 주어 지원군 파견의 소식을 전달하게 하는 한편, 겨우내 배를 모으고 전사들을 소집하고 전쟁 비용을 걷으며 부산을 떠는 아테나이를 보며, 그저 시켈리아를 쳐서 얻을 재물에 대한 탐욕과 적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무지가 빚어내는 전쟁의 광기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의 절망보다 더 큰 온 몸으로 그 절망을 뱉아 내고 있는 아테나이의 그 수많은 전쟁 과부들, 다시 말해 남편을 전장에 보내고 홀로 아기를 돌보며 사는 아직 젊은 여자들이나, 남편을 전장에서 잃은 늙은 과부들의 절망을 보고, 이런 전쟁의 광란에 빠진 우리 도시 아테나이에 대하여 희극작가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가 다시 한번 제게 비추어져 왔습니다. "그렇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여자들 밖에 없다. 여자들이 나서서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게 하라!89"
5.68. 전쟁에서 이겨 약탈로 한탕하고, 그 뒤로도 제국의 동맹으로 묶어 전쟁 비용을 대도록 한다는 이 탐욕적이고 패권주의적인 기대를 버릴 수가 없는 남자들을 데리고는 결코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저의 생각이 한 인간으로서의 여자 문제를 비극적으로 다루는 데 선수인 에우리피데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창조할 수 없는 '군대를 해산할 수 있는' 한 아테나이 여자 '뤼시스트라테'와, 남편들과의 잠자리를 거부함으로써 전쟁광인 남편들의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있는 헬라스의 여자들과, 파르테논 신전에 쌓아 놓은 비상금을 점거하여 그것이 전쟁 비용에 쓰이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노파들을 한데 엮어, 이들 여자들로 하여금 평화를 이루게 하는, 정말 모든 관객이 깜짝 놀라 뒤집어질 발상으로 아테나이의 강한 여자 "뤼시스트라테"를 창조했습니다. 잠자리를 매개로 한 평화라는 발상 자체가 워낙 희극적이라 그 자체로도 잠자리의 평화가 전체 헬라스의 평화라는 전체 구도를 웃음 속에 녹여 놓을 수 있어, 구성은 간명하면 할수록 전달력이 좋다고 판단하고 파라바시스마져도 뺐습니다. 그 파라바시스는 전쟁을 하려는 노인들 열둘로 짠 코로스 그리고 아크로폴리스를 지켜 평화를 이루려는 노파들 열둘로 짠 코로스 간의 대결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코로스가 "새들"에 이어 모두 스무네 명이나 되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무대에 서는 배역들의 수도 늘였는데, 배우들이 여러 번 다른 여자 목소리를 내며 가면을 갈아 쓰야 되겠지만, 전체 헬라스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스파르테나 테바이의 여자들도 잠자리 거부에 나서야 좋을 것 같아 배역을 늘이기로 했지요90.
5.69. 전쟁 열아홉 번째 새봄의 레나이나 축제가 열렸습니다만 저는 그때까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해, 봄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 경연에 참여할 요량으로 성적인 대화의 농도를 조절하는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면서 새봄을 맞았고, 동지에 에우뤼메돈을 시켈리아로 보내고 아테나이는 웬지 모르는 승리의 흥분 속에 데모스테네스의 출진을 준비하며 새봄을 맞았는데, 새봄이 오자 위풍당당히 시켈리아로 간 데모스테네스의 출진과는 달리 저의 "뤼시스트라테"는 그해 봄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 경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우리 도시 아테나이에 가득한 남자들의 전쟁에 거는 광기 어린 기대를 여자인 뤼시스트라테와 그녀의 동료들이 막아낼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우리 도시 아테네에는 지금 그 무엇보다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뤼시스트라테를 빌려 고함친다 해도, 전쟁에 미친 사람들이 뤼시스트라테가 보여주는 평화보다는 그녀와 그 동료들이 보이는 기발난 성적인 시위에만 팔려, 정말 웃기는 우스개로써 축제에 이어 전쟁의 분위기만 북돋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해 새봄에는 에우리피데스가 올린 "엘렉트라"를 감상하며 에우리피데스는 도시가 벌이는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뜯어 보고 있었지요91.
5.70. 아테네 시민 여러분, 그렇게 그해 봄의 디오뉘소스 축제의 경연도 빠지고 전쟁만 생각하는 동안 여름이 채 오기도 전에 스파르테의 아기스는 가까운 보이오티아의 테바이 지원군과 함께 아티케 깊숙히 들어와 아테나이를 강력하게 압박한 뒤, 날이 좋으면 아테나이의 북쪽 성벽도 보일 만큼 가까운 데켈레이아를 점령하고, 그곳에 아테나이를 겨누는 요새를 만들어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예전 같으면 짧게는 보름, 보통 한 달, 길어야 한 달 보름을 넘지 않았던 스파르테의 아티케 유린이 이제는 사시장철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고, 데켈레이아를 근거로 오로포스로 나가 에우보이아로 통하는 육로를 차단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아테나이는 시켈리아로 가고 싶어 하는 기병들을 데켈레이아를 감시하는 데 써야 하는 고단함을 견뎌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이나 도시에 필요한 물품의 반입도 모두 바다를 통해야만 하는, 그것도 수니온 곶을 돌아 드나드는 어려움을 겪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식량의 양이 줄고 가격이 오른 데다, 더 나쁜 소식은 거의 이만 명에 가까운 라우리온 은광의 노예들이 스파르테로 도망가 버려, 아테나이는 은 생산으로 얻던 수입을 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곳 노예의 공급을 맡아 짭짤한 수입을 올리던 니키아스도 손해가 막심했겠지요. 어쨌든 아테나이는 그제서야 비상한 상황을 이겨낼 조치로 열 명의 관리를 뽑아 오백 명 평의회 역활을 맡겨 보기도 했습니다만, 이런 재정의 궁핍은 아테나이로 하여금 말로 다 할 수 없는 끔찍한 살륙을 저지르게 하였습니다.
5.71. 아테나이는 전해 겨울 시켈리아 원정대에 보충할 용병으로 트라케의 검술 특수부대원 천삼백 명을 고용했는데, 이들의 도착이 늦어 데모스테네스 선단에 합류하지 못하자 아테나이는 돈을 감당하지 못해 트라케로 돌려보내야 했고, 아테나이는 디에이트레페스를 안내자로 삼아 그들의 귀환 길에 가급적 많은 곳을 약탈하여 비용을 벌충토록 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무방비 상태에 있던 보이오티아 내륙의 마을 뮈칼렛소스도 들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전쟁 중에 아테나이가 몇 개의 도시에 대해 대살륙의 처분을 내렸던 것을 아시겠지만, 살륙은 모두 성인 남자를 대상으로 하고 아이들과 부녀자들은 노예로 팔았지 죽이지는 않았는데, 아테나이의 디에이트레페스는 출발 전 아테나이에서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내륙 깊이 뮈칼렛소스까지 들어가, 아침 일찍 학교에 나온 아이들까지 포함해 산 생명이라면 사람은 물론, 짐승까지 눈에 보이는 대로 모두 칼 쓰는 특수부대답게 칼로 죽였습니다. 부활의 신 디오뉘소스에 비오니, 그 영혼들을 구원하여 다시 태어나 새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5.7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열하홉 번째 해에92 들려온 참담한 살륙의 소식은 비단 보이오티아의 한 작은 도시 뮈칼렛소스 뿐만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헬라스에서 이름을 떨치던 아티케의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이 이제는 포도주는커녕 아티케에서 포도를 수확할 일조차 없어져 버렸는데, 무심한 계절은 돌고 돌아 트뤼가이오스가 포도를 거둘 가을이 오자, 그 여름 시켈리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조금씩 소식이 들려왔지요. 원정에 나섰던 그 많은 장군들과 병사들과 말들이 모두 배와 함께 가라앉았거나 잡혀서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칠천이 넘는 병사들이 포로가 되어 시라쿠사이의 한 작은 채석장에 갇혀서 노예로 팔려 가거나 죽어가고 있었을 때,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을 특히 좋아하는 그곳 쉬라쿠사이 사람들이 그의 비극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독창곡monoidia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외워 부를 수 있는 포로들을 살려주었기 때문에93, 그렇게 풀려난 몇 사람들이 돌아와 전하며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시가 몇 편이 병사들의 목숨을 살려 낼 수 있었다니, 에우리피데스가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처럼 직접 전쟁에 나갔더라면, 시켈리아 정도는 쉬라쿠사이 극장에 그의 연극 몇 편을 상연하는 것만으로 아테나이 편이 될 뻔하지 않았겠는지요? 예전 시켈리아로 이주했던 헬라스 사람들이 가져 갔던 흉내극mimos을 소프론이 나서 제법 연극처럼 만들어 가면서부터 그곳 시켈리아 사람들이 점점 연극 맛에 빠질 때 일어났던 일이니, 정말 에우리피데스가 그의 배우와 코로스를 상선에 태워 쉬라쿠사이로 갔더라면 예전 중무장 보병을 삼단노 함대에 태워 사모스로 갔던 소포클레스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으로 시켈리아를 석권할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쉬라쿠사이 사람들이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의 주인공들이 가슴을 치며 탄식하여 부르는 '애통한 노래kommos'보다는 에우리피데스의 간장을 녹이는 사랑 노래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었더라면, 굳이 대함대에 대군을 실어 가지 않았어도 얼마든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얻는 평화로는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전쟁으로 그들을 복속시켜 그들이 가진 것을 단박에 모두 가지려는 탐욕 때문에, 아테나이의 쉬라쿠사이 원정은 비참한 결말로 대가를 치르고 말았습니다.
5.73. 시켈리아 원정 부대의 전멸 소식을 듣고 도시가 모두 비탄에 젖어 맥을 놓고 있었던 것도 잠시, 아테나이는 도시가 맞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아테나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는 가을이 되자 놀라운 도시의 힘을 다시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남은 백여 척의 배들 가운데 우선 항해가 가능한 배부터 정비를 시작하고, 나머지 항해가 불가능한 배들도 도시의 여기저기에서 목재를 뜯어 와 손을 보기 시작했습니다94. 이러한 놀라운 움직임 역시 불행하게도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선 혹시 있을지 모를 스파르테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전쟁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데켈레이아에서 아티케를 통한 육로를 스파르테가 막은 그 당시의 형편을 볼 때, 정말 페리클레스가 주장한 대로 바다를 지키지 않고는 도시를 지킬 수 없다는 절박감이 나타난 결과였을 것입니다. 바다와 배라는 아테나이의 살길에 강력한 도시민의 의지가 모이자, 아테나이는 니키아스며, 라마코스며, 데모스테네스며, 에우뤼메돈 같은 아테나이의 지도자들이 모두 죽고 없는 공백을 그들이 전장터에 나가고 없는 동안 의사 결정의 효율을 생각해 이미 시행하고 있던 오백 인 평의회를 대신한 원로회의에, 다시 말해 페리클레스와 사모스의 징벌에 함께 했던 여든이 넘는 고령의 소포클레스와 예순이 넘는 하그논95까지 포함시켜 가며 모두 열 명의 원로들probouloi에게 도시를 이끌 막강한 지도력을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민회도 그 옛날 페리클레스 시대에 보였던 절제와 신중함으로 그들을 도와, 배를 만들고, 동맹도시들 특히 에우보이아의 안전을 감당하면서, 그 나머지 공적인 지출은 최대한으로 줄이기로 했습니다96. 이와 아울러 피폐해진 동맹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감시를 강화했으며, 그들의 조공 부담을 없애면서도 아테나이의 수입을 늘이기 위해 바다를 통한 모든 무역 상품에 대해 5 퍼센트의 관세를 일괄적으로 매겨, 납세의 부담을 토지 소유주들로부터 상인들에게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맹들의 이탈 기미는 사라지지 않았고, 겨울이 되어 시켈리아 원정군 이야기들이 아테나이에 자세히 퍼지자, 패전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은 그들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관계없이 이제 기꺼이 도시의 결정에 따를 준비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97.
5.74. 이런 아테나이의 놀라운 대처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되자 헬라스 곳곳에서 아테나이 동맹도시들의 이탈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나이가 필사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에우보이아가 데켈레이아에 있는 아기스에게 이탈의 의사를 표시해 왔으며, 거의 같은 때에 레스보스도 아기스에게 이탈을 상의하고 지원을 요청해 왔고, 스파르테에는 키오스 사람들과 함께 페르시아의 서부 해안 총독인 팃사페르네스도 와서, 스파르테가 키오스를 도울 경우 군량을 지원하겠다고 했고, 같은 때에 헬로스폰토스의 파르나바조스의 사절이 와서 헬레스폰토스 지역이나 그 근처의 아테나이 동맹들이 이탈하는 것을 스파르테가 돕는다면 그들이 전쟁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나오고 있었습니다98. 이제 힘으로 엮였던 동맹의 와해가 가시화된 것입니다.
5.7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스무해 째는99 새봄의 축제부터 규모가 축소되는 어려움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테나이가 공적 지출을 줄이기로 한 것도 이유였지만, 특히 희극이나 비극의 경연에서 항상 우승을 뒷받침해 왔던 니키아스의 코로스도 라우리온 은광에 일하던 그의 노예들이 모두 스파르테로 도망가고 니키아스마져 시켈리아에서 죽자 다른 코레고스들처럼 코로스를 지원할 수 없어져, 예심에 통과한 작품이라고 해도 다수 작품의 상연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매년 희극과 비극 각기 다섯 편씩 뽑아 경연에 올렸었는데, 그해에는 세 편씩만 골랐습니다. 그전 전쟁 열아홉 번째 해에 아테나이가 겪어야 했던 온갖 전쟁의 나쁜 결과를 본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전쟁에 대한 망상을 가지지 않으리라 단단히 믿고, 저의 "뤼시스트라테"만은 반드시 상연하게 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다음 해에 꼭 무대에 올리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만 받고, 그해의 경연에 나온 작품들 가운데 에우폴리스의 "데모이"와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가 아테네 시민 여러분의 갈채를 받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약간 약이 오른 저는 어쩌다 이듬해의 경연에 "뤼시스트라테"를 올리지 못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비단 아테나이 사람들 뿐만 아니라 쉬라쿠사이의 병사들조차 그의 노래 한마디로 포로들을 풀어 줄 만큼 모두가 좋아하는 에우리피데스를 아테나이의 여자들은 진짜 어떤 속내로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줄 연극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고 작심했지요.
5.76. "테스모포리아 축제 같은 데에서 시집가 사는 여자들이 모이면 어떤 이야기들을 할까? 과연 그들은 그해 봄 경연에서 새로 본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며, 전쟁 때문에 고귀한 삶에서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안드로마케나, 헤카베나, 헬레네의 전도된 운명에 인생의 신산함을 느끼어, 고귀한 그들의 슬픈 운명에 고개 떨구며 울고, 또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면서, 그래도 그들보다 자기들 팔자가 한결 더 낫다며 서로 위로하고 등 두드려 줄 것인가? 그리고 나서 집에 돌아가, 그 고귀한 집의 여자들도 전쟁에 지면 저리도 비참해지는데 자기 같은 신세는 어떻게 되겠느냐며, 죽어도 전쟁에서 져서는 안 된다고,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전장으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뤼시스트라테와 그 동료 여자들처럼 아버지들이나 남편들끼리 하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말을 어깨 너머로 듣고, 거기서 깨달은 평화의 절실함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 잠자리를 거부하고, 도시의 돈을 전쟁에 쓰지 못하게 막는 길로 나설 것인가? 에우리피데스는 그가 보여주는 고귀한 여자들의 비극으로 저자의 여자들이나, 부자나 귀족 여자들이 어떤 감흥을 보이길 기대하는가? 오히려 그것으로 에우리피데스는 남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상황의 여자들도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길을 결정해 나가는데, 남자인 당신들은 이제 당신의 문제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신 앞으로나 운명 앞에 가서 대면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의지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만일 신이나 운명에 기대려 한다면, 그 신이나 운명은 어디 있는가, 신전에인가 하늘에인가, 아니 과연 있기나 한가? 설사 에우리피데스가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에우리피데스의 고귀한 여자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아테나이의 보통 여자들, 시집가서 아이 낳고, 지지고 볶고 사는 여자들의 삶은 모두 다 어디로 갔길래 구태여 고귀한 여자들의 삶으로 말해야 하는가? 그들의 보통 삶은 어떤 연극도 관심을 보일 필요가 없는 그런 삶인가? 그들에게는 안드로마케나, 헤카베나, 헬레네가 겪는 전쟁의 비극적 후유증이 하나도 넘어 오지 않는가? 축제에 나온 그들의 일상은 어떤 것이길래 그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 대신, 에우리피데스의 고귀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할 것이라 기대하는가? 그들의 일상은 에우리피데스를 비롯한 작가들이 눈여겨 보고,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는, 그런 사람 사는 가치는 없는 것인가? 따라서 그 무가치한 삶이 전쟁이나 다른 이유로 무너지고 전도되어 생기는 대단히 극적인 상황마져 극작가들에게나 관객들에게 모두 무가치한 것인가? 그들의 개인적 삶이 그렇다면, 그들은 도시에게 무가치한 존재이며, 그들 또한 도시를 그들의 삶에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가? 단지 전쟁에 보낼 아이들만 낳고 키우면 되는 그런 존재인가? 그렇다면 그들이 가정을 이루며 사는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은 가치니 삶이니 하는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없는 존재들이라 그저 삼삼오오 서로 잘 아는 몇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의 작은 허물들을 놓고서 서로가 흉보며 싸우거나, 서로의 작은 비밀들을 놓고서 서로가 부러워하며 낄낄거리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중구난방의 여자들을 어떤 화제로 한데 모을 수 있을 것인가?"
5.77. 테스모포리아 축제에 나온 여자들로부터 여자들을 경멸한 사실로 그가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 이튿날 형량을 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에우리피데스는 누구를 여자로 변장시켜 변론에 나서게 하려 하지만, 먼저 자신의 외모로는 도저히 여자 차림으로 축제장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 대타를 찾아 한 친척을 데리고 늘 여자처럼 보이게 꾸미고 행동하는 동업자 아가톤에게 가서 통사정했지만 거절당하자, (그 친척을 보내려는 꼼수에) 같이 간 친척이 가기로 하고, 위험에 처하면 에우리피데스가 나서 구해 준다는 조건으로 테스모포리아 축제에 참가하는데, 그의 신분이 들키자 곡절 끝에 에우리피데스가 나타나 같이 탈출한다는 간단한 줄거리입니다만, 연극이 진행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동안 에우리피데스가 자신의 연극에서 선보였던 여자들에 대한 표현들이나 그때 상황들을 파로이디아해서 그 줄거리를 엮어 갔기 때문에, 코로스나 배우들의 이야기 하나 하나에 얽힌 에우리피데스 연극의 대사나 시가를 떠올리며 그때의 장면과 무대에서 벌어지는 장면과의 비틀어진 차이를 음미하지 않고서는, 제가 만든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은 그냥 우스꽝스럽고 재미나는 음담패설의 연극일 뿐, 여자들에 대해서나 그 여자들을 포용하는 도시에 대하여 에우리피데스와 영혼으로 맞선 저 아리스토파네스는 즐겁게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5.7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런 전체 구도를 가지고, "말벌들"을 만들 때의 그 경쾌함을 되살린 저의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은 새봄에 열릴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의 경연 예심에 통과했고, 이와 함께 이미 상연을 약속 받았던 새해 레나이아 축제에는 몇 년 묵힌 "뤼시스트라테"를 드디어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운이 좋았는지 전쟁 스무한 번째 해에는 작품을 만든 순서에 맞춰 두 편을 경연에 올릴 수 있게 되었지요.
5.79. 헬라스에 전쟁이 시작된지 스무해, 그 전쟁을 아테나이의 입장에서 돌이켜 보면, 처음 페리클레스가 전쟁을 일으키고, 앞의 십 년은 '클레온의 전쟁'이었고, 다음 십 년은 '알키비아데스의 전쟁'이라 할 수 있으며, 스파르테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 아르키다모스가 어쩔 수 없이 전쟁으로 내몰렸고, 앞의 십년은 '브라시다스의 전쟁' 다음은 '아기스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전쟁 동안 아테나이의 불행은 페리클레스가 첫 3 년 안에 평화로 되돌리지 못하고 죽은 것과, 알키비아데스가 자기가 만든 전쟁의 결정판인 나중 3 년에 도망가 버렸다는 점이고, 스파르테의 불행이라면 아르키다모스가 페리클레스의 의도를 잘 알면서도 그의 생전에 스파르테의 주전파를 설득하지 못해 평화를 이루지 못한 것과, 아기스가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 실패 후 아테나이에 자기 손을 뻗쳐 평화를 구하지 않고, 스파르테 헤게모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헬라스 제패를 위한 전쟁을 페르시아까지 끌어들여 계속했다는 점 아니었겠습니까? 결국 이 두 도시의 불행이 전체 헬라스의 불행이 되었고, 그래서 신들이 모두 헬라스 하늘을 떠나고 없는 전쟁 스무 번째 해는, 아나톨리아에서의 패권을 추구하는 페르시아를 이오니아는 말할 것도 없고 헬레스폰토스, 프로폰티스, 그리고 보스포로스로 불러들인 새로운 전쟁, 즉 '페르시아의 전쟁'을 준비하는 해가 되고 말았습니다100. 시켈리아 원정의 실패로 하나씩 드러내던 동맹도시들의 이탈은 전쟁 스무 해째에 이오니아의 레스보스, 로도스, 밀레토스, 에페소스 같은 주요 도시들까지 스파르테의 도움을 믿고 이탈을 시도하려 했는데, 그렇지만 도움을 주어야 할 스파르테나 스파르테의 동맹들의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101,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으려는 꽤 어려운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아테나이는 아이가이온 해와 이오니아와 그밖에 아나톨리아 해안 여러 도시들에 대한 지배를 잃지 않기 위해 페르시아를 지렛대로 스파르테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페르시아는 그런 사정의 스파르테와 아테나이가 서로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싸우도록 밀고 당겨, 끝내 그들이 지쳐 나가 떨어지면 이오니아와 아나톨리아의 지배권을 회복한다는 전략을 세우게 된 것102, 이 세 가지가 서로 충돌한 새로운 전쟁, 이것이 바로 '페르시아'의 전쟁의 구도였습니다.
5.80. 아기스의 아내 티마이아의 침실에서 알키비아데스를 튀어나오게 했던 전쟁 스무 해 초봄의 지진은, 스파르테의 지원군이 그들을 기다리는 아테나이로부터 동맹 이탈을 시도하는 도시로 가는 발목을 잡았고, 게다가 코린토스가 이스트모스 축제를 지낸 다음 출격하겠다고 고집 부리는 바람에, 스파르테 동맹은 이미 칼키데오스가 키오스로, 알카메네스는 레스보스로, 그 다음은 레스보스 작전이 끝난 후에 클레아르코스가 헬레스폰토스로, 각각 가기로 정해 놓고서도, 여름이 한창일 때에야 겨우 알카메네스가 먼저 출발했는데,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사이 아테나이는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탈하려는 키오스를 힐난하여 겁이 난 키오스로부터도 일곱 척의 배를 지원 받는 등 급히 배를 모아 에피다우로스 앞바다에서 기다리다 알카메네스를 스피라이온 항으로 몰아 넣고 결딴내어 버렸습니다. 알카메네스의 죽음과 패전 소식은 스파르테를 극도로 위축시켜 이오니아로 가기는커녕 바다에 나가 있던 배들까지 불러들이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5.8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도망간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테에서 아기스에 빌붙어 살면서, 제 딴에는 밥값이라도 할 요량이었는지, 아니면 꼴에 자기를 낳고 길러 준 아테나이에 복수라도 할 심보였는지 모르지만, 그가 저질렀다고 소문이 난 몇 가지 나쁜 짓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스파르테로 하여금 시켈리아에 먼저 지휘관들을 보내 쉬라쿠사이를 정비하게 하고, 이어서 지원군까지 보내도록 하는 바람에 아테나이가 망했다는 소문이나, 아티케에 영구 기지를 설치해 아테나이를 사시장철 성벽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육상의 보급로를 끊으라고 했다는 소문이나, 그 때문인지 아기스가 데켈레이아 기지를 설치하며 장기 원정에 나간 사이 아기스가 비운 침실을 차지해 아기스의 아내가 그의 아이를 낳았다거나, 지진이 나는 통에 아기스 아내의 침실에서 갑자기 뛰쳐 나오다 모두에게 들켰다거나, 그래서 아기스가 죽이려 하자 또 다시 도망도 칠 겸 스파르테에게 큰 것 한 건 해주어 목숨을 건지려고 이오니아로 가서 그곳 도시들에게 아테나이와의 동맹에서 벗어나도록 충동질을 했다거나, 등등의 이 모든 소문들을 확실한 사실이라고 증명하고도 남을, 아니 그런 소문들은 하찮은 일로 치부하여 그냥 덮어 버리고도 남을, 그런 엄청난 나쁜 짓을 알키비아데스는 그를 낳고 길러 준 우리 도시 아테나이에게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5.82. 이오니아에 알키비아데스가 나타난 것은 전쟁 스무 해째 여름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알카메네스가 죽기까지 한 스피라이온 항의 패전 소식은 스파르테에 공황을 불러와 모두 맥 놓고 있을 때, 알키비아데스는 이오니아에 패전의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칼키데오스를 이오니아로 보내야 한다고 역설해, 다섯 척의 배를 끌고 극비리에 키오스에 도착한 다음, 미리 연통한 키오스 과두파의 도움으로 민주파를 제압하여, 스파르테에게 맨처음 아테나이 동맹의 이탈자를 얻도록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키오스가 가진 예순 척의 전함과 이오니아에서의 굳건한 기지까지도 확보하도록 했고, 이어서 자신이 가진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에서의 경험과 이오니아의 유력자들과의 친분으로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여세를 몰아, 밀레토스마져도 아테나이 동맹에서 이탈시켜, 스파르테의 꺾여진 전의를 되살려 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때까지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나이에 끼친 해악을 모두 다 더한 것보다도 더 큰 해악을 끼쳤고, 헬라스에 전쟁이 더 오래 가게 했으며, 더우기 그 긴 전쟁의 끝에 스파르테가 승리하도록 인도해 준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헬라스에 전쟁이 끝나지 않았듯이, 그 알키비아데스의 악행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테나이의 반격이 곧바로 이오니아에서의 전세를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가 전쟁 비상금으로 따로 적립해 둔 돈을 풀어서 전열을 다듬고 바로 이오니아로 가서, 수적인 우세에도 해전을 피하는 칼키데오스 덕분에 바로 사모스에 거점을 확보하면서, 마침 벌어진 사모스 내분으로 사모스를 동맹으로 다시 편입하고, 이탈한 동맹도시들의 탈환에 나서 어렵지 않게 레스보스를 확보한 후, 키오스로 나아가 바다와 해안을 장악하여 키오스를 가두어 두고, 포도 수확이 끝나갈 즈음 도착한 증원군과 함께 밀레토스를 쳤습니다. 스파르테의 지원군도 도착했기 때문에 사모스로 일단 철수했습니다만, 다 이긴 전투를 끝내지 않고 철수를 결정한 때문에, 아테나이는 몇 가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프뤼니코스가 이 일로 두고두고 비난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일로 실망한 아르고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그 이후로 전쟁에 일절 가담하지 않았고, 아테나이의 철수 사실을 모르고 무방비로 있던 이아소스를 페르시아의 요청으로 스파르테가 처음으로 양군 합동작전으로 치게하여 동맹도시 하나를 잃는 등의 대가를 치렀지만, 아테나이는 이오니아에서 동맹들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5.83. 한편, 아테나이의 반격으로 이오니아에서의 체류가 점점 길어지자 스파르테는 전쟁 비용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던 차에, 겨울이 되어 약속한 대로 페르시아의 팃사페르네스가 전쟁 비용을 가져오긴 했으나, 차후로는 그 반만 내겠다고 해 스파르테의 격분을 샀고, 이때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테에 도움이 되는 아무런 역활도 하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키오스를 얻고 나서 칼키데오스가 맺은 페르시아와의 조약 때문에 그에 대해 스파르테는 그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스파르테를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마침 스파르테에서의 후견자 엔디오스도 권력을 놓았고, 이오니아에서도 칼키데오스가 기습을 받아 죽고 없어서, 결국 그는 고립무원에 빠졌고, 별 수 없이 이번에는 페르시아의 팃사페르네스 품에 안겨 그로부터 신체의 안전을 보호 받으며 살아남아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요. 그 영특한 알키비아데스가 자기 유용성의 한계를 모를 리 없었고, 이 점은 페르시아의 팃사페르네스도 모를 리 없었지요. 이제 알키비아데스가 새로운 상황으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오직 하나 제우스가 떠난 하늘에서 아직은 좀 더 절구통에 헬라스를 넣고 빻아야 하는 '전쟁' 폴레모스만 그 질 좋은 알키비아데스 절굿대를 벌써부터 버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뛰어난 폴레모스의 절굿대는 팃사페르네스가 그를 아기스에게 넘기기 전에 세 번째로 도망갈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팃사페르네스와 스파르테 사이의 불화를 잘 이용하면 아테나이가 자기를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겠다고 보고, 아테나이에게 자기가 대단한 영향력을 팃사페르네스에게 행사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사모스에 있는 아테나이의 장군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 역활에 대해 떠벌리며 그들의 반응을 떠보았습니다. 일차로 페르시아를 스파르테에서 떼내어 아테나이와 협력하도록 하겠다는 자기의 제안이 먹혀들자, 이번에는 본색을 드러내며 아테나이가 자기를 받아 들이고 과두정을 세우면 페르시아가 전쟁 비용을 대겠다고 한다며 아테나이를 떠보았는데, 이 제안에 대해서는 선장들과 부유층의 지휘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몇몇이 잘만 되면 권력도 쥐고 전쟁까지 이길 수 있겠다며 페르시아 땅으로 가서 알키비아데스를 만나고 돌아와,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공언하기까지 했습니다103. 그러자 과두정의 지지자이기도 한 프뤼니코스가 나서서 알키비아데스는 민주정이나 과두정 따위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안전한 귀환이 목적일 뿐이며, 더구나 페르시아가 스파르테와 약간 안 좋긴 하지만 지금 스파르테를 버리고 아테나이와 협력하는 모험을 할 리 없다고 반대를 했는데도, 지휘관들은 다수의 결의로 페이산드로스를 아테나이로 보내, 알키비아데스의 복권과 과두정의 수립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협력에 대해 아테나이의 결의를 받도록 할 만큼 알키비아데스의 꿍꿍이는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불안해진 프뤼니코스가 스파르테의 아스튀오코스를 이용해 알키비아데스를 제거하려 하던 일이 불거져 나와 결국 프뤼니코스가 오히려 탄핵당하는 일이 생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시켈리아 원정 중에도 신성 조롱을 핑계로 과두정의 가능성으로 보인 총지휘관을 제거할 수 있었던 아테나이에서, 그 원정이 실패한 직후라면 또 몰라도 한 해가 지난 후에, 바로 그 아테나이에서, 공식적으로 과두정의 필요성을 제기할 수 있을 정도로 아테나이는 아주 변해 있었습니다104. 민회에서 과두정은 물론 알키비아데스의 복권도 거부하자, 한때 과격 민주정 지지자로 알려진 페이산드로스가 나서, 정치 체제는 언제나 바꿀 수 있는 문제고, 지금은 아테나이가 죽느냐 살아남느냐의 문제라며, 이 방법 말고도 아테나이를 살릴 수 방법이 있다면 나서라고 노골적으로 겁박하여, 아테나이는 페이산드로스와 열 명에게 팃사페르네스와 알키비아데스와의 협상을 맡기기로 결의해 주었고, 그 결의를 받아 낸 페이산드로스는 아테나이의 여러 헤타이리아이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민주정의 전복에 나서 달라고 당부한 뒤 출발했습니다. 협상단을 맞은 알키비아데스는 자기가 팃사페르네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허깨비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아테나이와 팃사페르네스에게 서로가 무리한 요구를 내놓도록 유도하여 협상을 결렬시키고자 했고, 팃사페르네스도 지금까지 유지해 온 스파르타와의 관계에 대한 부담으로 이미 결렬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담 세 번째에서야 과두정도, 전쟁 비용도, 모두 알키비데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챈 페이산드로스가 사모스로 돌아가 버려 협상은 그것으로 끝났고, 페이산드로스는 알키비아데스 때문에 만든 과두정 수립 계획을 접거나 고쳐야 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5.84. 전쟁 스무 해째 겨울, 스파르테는 밀레토스에 아테나이는 사모스에 진을 치고, 서로 견제만 한 채 새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스파르테는 그 못된 아테나이의 망명자와 엔디오스의 입김으로 페르시아의 팃사페르네스의 관할지역으로 왔으나, 아테나이의 반격으로 발이 묶인 데다가 약속 받은 전쟁 비용의 조달도 여의치 않자, 팃사페르네스를 버리고 애초 아기스의 생각대로 파르나바조스 요청에 따라 헬레스폰토스로 거점을 옮겨가기로 전략을 바꾸고 있었고, 아테나이 역시 비상금까지 털어 출진한 마당에 한정없이 겨루고만 있을 수는 없는 사정이어서, 페르시아의 팃사페르네스와의 협상이 알키비아데스의 허풍으로 물거품이 된 마당에, 팃사페르네스가 계속 스파르테에 계속 전쟁 비용을 댈 경우 아테나이가 끝까지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 예상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는 가운데 전쟁 스무 번째 해가 저물었습니다.
5.85. 전쟁 스무한 번째 해의105 새봄 레나이에 축제에 저의 "뤼시스트라테"가 상연되어, 모처럼 그 기발한 여자들의 직설적인 말 때문에 관객들 모두가 뒤집어졌습니다. 아쉽게도 페리클레스 때부터 파르테논에 보관해왔었던 비상금이 프뤼니코스의 사모스 해군 지원 비용으로 얼마 전에 나가 버려, 늙은 여자들의 코로스가 그 비상금 지출을 막기 위해 아크로폴리스를 지키는 농성의 빛이 조금 바래긴 했어도, 늙은 남자들의 코로스와 주고 받는 스트로페의 진지함과, 그에 대비되는 걸쭉한 입심과 경쾌한 논리로 각각 전쟁과 평화를 옹호하는 두 코로스장들의 파라바시스와 에피레마의 명료함으로 여러분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전쟁이고 평화고를 떠나, 즐겁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좋은 것인가라는 감동에 새삼 저의 가슴이 뭉클해졌지요. 새봄의 디오뉘소스 축제에서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이 또 어떤 반응을 얻을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뤼시스트라테의 평화가 트뤼가이오스의 에이레네처럼 연약했는지, 축제 뒤에 들려온 동맹들의 이탈 소식이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5.86. 소식은 먼저 이오니아에서 왔는데, 로도스가 린도스와 이알리소스와 함께 동맹을 이탈해, 스파르테가 이미 로도스 섬을 장악했다는 것이었고, 곧 이어서 에우보이아에서도 오로포스가 보이오티아에 넘어 간 것에 자극 받아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어왔지요. 로도스 섬도 그렇지만 아테나이로 보면 아티케보다 더 중요한 에우보이아 섬의 반란은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니어서, 이 소식을 들은 이오니아의 아테나이 군은 로도스 섬은 뒤로 한 채, 우선 사모스로 철수하여 에우보이아로의 출진에 대비하며 스파르테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5.8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스무해 째 겨울부터 본색을 드러낸 팃사페르네스의 헬라스끼리 싸움 붙이기 전략의 결과가 전쟁 스무한 번째 해의 새봄이 오자마자 아테나이의 코 앞 에우보이아에서 반란으로까지 나타나, 아테나이의 민심이 꽃샘추위로 얼어붙어 버린 것처럼 차가운 가운데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가 열렸고, 저의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도 예정대로 상연되었습니다. 초봄의 "뤼시스트라테" 때문에 오랫만에 희극의 즐거움을 맛본 여러분을 또 다시 결혼한 여자들끼리만 지내는 '테스모포리아 축제'에 초대하여, 건강한 아테나이 여자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드렸더니, 모두들 시월에 열릴 그 축제에 마나님들을 꼭 보내시겠다며 여자들이 중심을 잡아야 집안도 중심을 잡고 도시도 중심을 잡는 법이라며 한마디씩 건네 주셨지요. 에우폴리스는 새해에 저의 "뤼시스트라테"는 보았는데 새봄이 오기 전에 이오니아로 출진하고 없었고,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에서 너무 가볍게 취급당한 아가톤이나106, 희극적으로 꾸며진 에우리피데스는 좀 기분 언짢았겠지만, 그래도 그가 마지막에 여자들로부터 탈출하는 장면으로 그의 "헬레네"에서 헬레네가 메넬라오스와 아이귑토스를 탈출하는 그 계략을 파로이디아해서107 갚아 드렸으니 양해해 주셨겠지요. 저 역시 그해 가을이 아테나이 여자들의 건강한 웃음 소리로 가득하길 바라면서, 에우보이아에서의 반란의 진행과, 심상치 않게 눈에 띄기 시작한 아티케 피난민들과 젊은 귀족들의 움직임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5.88. 봄이 와서, 헬라스에 번진 반란과 이탈의 상황이 계속되자, 돈으로 스파르테를 가지고 놀려 했던 팃사페르네스는 전쟁을 같이 하는 조건으로 화해를 제의했고, 스파르테는 전쟁 명분이던 헬라스 도시의 자유를 수호하는 역활을 아시아에 있는 헬라스 사람들에 한해 포기해야 하는 당착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의 돈이 없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절실함 때문에, 이전에 만들었던 조약의 기초들을 놓고 펄쩍 뛰었던 리카스를 위시한 다른 스파르테의 지도자들도 이 화해를 받아들였지요. 돈이 돌자 스파르테는 육로로 헬레스폰토스로 가서, 봄이 한창일 때 아뷔도스와 람프사코스 그리고 인근 도시들의 이탈을 촉발하고 있었고, 이를 막으려 아테나이는 스트롬비키데스가 사모스의 주력을 끌고 헬레스폰토스로 떠나야 했고, 이 틈을 타서 밀레토스에서 웅크리고 있던 스파르테의 아스튀오코스가 밀레토스와 키오스까지 가서 모은 백여 척의 함대를 가지고 사모스로 와서, 아테나이와 일전을 요구할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스파르테의 이런 도전에 사모스에 있는 아테나이는 아무런 응전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우보이아를 염려하며 스파르테를 감시하던 그들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이었을까요?
5.8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협상 결렬 후 사모스로 돌아온 페이산드로스는 동료 트라쉬불로스108가 과두정 수립 계획을 반대하고 대열에서 이탈하자, 그 계획을 접기보다 탄로 나기 전에 곧바로 수행하기로 결심하고, 사모스의 해군 기지를 장악하도록 하면서, 사모스에도 과두정을 세우기 위해 사모스의 유력인사들과 접촉한 뒤, 동맹도시들에도 사절단의 반을 흩어 보내 과두정으로 바꾸게 하는 한편, 남은 사절들과 함께 아테나이에도 과두정을 세우러 바로 떠났습니다. 페이산드로스가 도착한 아테나이는 극단적인 귀족 청년들이 알키비아데스를 도망치게 하는 데 책임이 있는 유명 선동 정치꾼 안드로클레스를 위시해 그들이 불편하게 여기던 민주정 지도자들이나, 민회에서 그들의 행위에 대해 항변하는 사람들까지도 암살해 버렸는데, 이런 행위에 대해 중도파들이 반대하였지만, 과두정 반대자들을 누르고 민주정을 파괴하는 데는 효율적이어서, 얼마 안 있어 민주정 지지자들끼리도 함부로 마음을 열고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공포가 아테나이를 뒤덮었지요. 사람들은 평소의 정치적 태도를 보아 안티폰이나 테라메네스가 과두정을 지지하고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역시나 했는데, 평소에 민주정에서 정치 선동으로 출세한 프뤼니코스나 페이산드로스가, 특히 페이산드로스가 과격한 과두정 지지자들을 이끌고 아테나이를 암살과 폭행으로 짓누르는 것을 보고는 정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전쟁 스무한 번째 해의 봄이 한창인 오월에 소수의 무력에 의해 꼭 백 년을 이어 온 아테나이의 민주정이 허물어지는 것을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은 정신 나간 듯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지요. 쿠데타로 사백 명 회의라는 과두정이 아테나이에서 성공한 것입니다.
5.90. 페리클레스가 전쟁 첫 해의 전몰자 위령제에서, 아테나이의 민주정이 어디서 모방한 것이 아니고 아테나이만의 것이라고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그 아테나이가, 그래서 전체 헬라스의 규범이라고 했던 그 아테나이가, 그래서 헬라스 곳곳의 도시들이 민주정을 세우겠다며 힘들어 할 때마다 배를 띄워 돕던 그 아테나이가, 그래서 가진 것을 지키고 예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소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던 그 아테나이가, 전쟁 스무 해가 지나고 난 그때, 그동안 헬라스 곳곳의 가히 규범적이지 못하던 도시들 안에서 정치 체제를 두고 벌어졌던 서로 죽이고 죽이는 짓을, 그 짓을 우리 도시 아테나이가 그대로 배워, 우리 도시 아테나이 시민을 상대로 암살과 폭력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또 칼로 위협하여 일으킨 과두정 정변으로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아테나이를 배신하고, 스파르테에서 쫒기고, 페르시아에서도 용도 폐기된 자기 신세를 구하기 위해 거짓으로 말한 과두정이 피의 공포로써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무너트리고 들어서다니! 신들이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위해 죽은 모든 영혼들을 다시 아테나이로 보내 주시기를!
5.91. 본디 선동가였던 페이산드로스나 프뤼니코스의 자질로는 테미스토클레스나, 키몬이나,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의 민주정 아래에서도 얼마든지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 내면서, 장기간에 아테네의 권력을 실질적이고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 알기 힘들었겠지만, 과두정의 이론가였던 안티폰이나, 페리클레스의 동료 하그논의 아들인 테라메네스109조차 그 권력의 원동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시 말해 페리클레스가 전쟁을 시작하면서 아티케의 시골 집들을 태워 버리고 싶다고 한 말과, 또 새롭게 제국을 넓히려 하지 말라고 한 말의 정치적 수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꾸어 말해 일단 전쟁에 돌입하면 디카이오폴리스식 평화를 추구하여 농사와 같은 작은 것 때문에 바다와 같은 큰 것을 놓치지 말라거나, 그렇다고 해서 알키비아데스식 시켈리아 원정 같은 것으로 전선을 확대시켜서는 절대 안 된다는 페리클레스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비록 아테나이에서 오랫동안 겪어 본 적이 없는 시민을 죽이는 공포로 잠시 정신이 나간 사이에 정변이 성공했다 하나, 그것이 결국 과두정의 앞날을 말해 주는 것이었는데, 이를 증명하는 일들이 뒤이어 바로 나타났지요.
5.9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정변의 원동력은 바다가 아니라 땅을 갈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특히 그들은 아기스가 테켈레이아에 사시장철 죽치고 아티케를 지키고 있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생업의 터전을 이제는 가 볼 수조차 없게 된 데에 대한 불만 때문에 정변을 지지했던 터라, 정권 담당자들로서는 그들이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 아티케의 평화를 선물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를 두고 그 권력 내부가 다투다 결국 아기스에게 평화를 타진했고, 아기스는 오히려 테켈레이아에서 나와 아테나이 성벽을 두드리면서 엇박자를 놓다가 정신차리고 평화를 이야기하려면 테켈레이아보다 스파르테로 사절을 보내라는 등, 아테나이에 어떤 변화의 조짐이 생기는 듯할 즈음, 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이 미리 충분히 공감을 나누지 못했던, 바다를 오가며 먹고 사는 그 사람들에게서 문제가 터져 나왔습니다. 정변을 일으키라는 말만 던져 놓고 떠났던 사모스로 정변에 성공한 과두정 권력자들이 대표를 보내, 새로 세운 과두정 권력의 구조도 설명하고 해군의 지지도 얻으려 했는데,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사모스에서는 그 문제를 아테나이 지휘관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끼리 슬기롭게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뱃사람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전장에 나가 있고, 농사 짓는 시골 사람들이 주로 남아 있던 아테나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그곳 사모스에는 사모스 사람들이나 아테나이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나 거의 대부분 바다를 끼고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페이산드로스의 사주를 받았던 일군의 과두파 사람들이 도편추방으로 사모스에 망명해 있던 휘페르불로스를 포함해 여러 민주정 지지자들을 죽이면서, 아테나이에서처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정변을 시도했으나, 사모스의 민주파 사람들은 오히려 아테나이의 지휘관들 중에 그들이 믿을 수 있다고 본 레온과 디오메돈 두 장군과 선장인 트라쉬불로스 그리고 놀랍게도 일개의 중무장 보병에 불과한 트라쉴로스를 찾아가, 사모스의 민주정을 지켜 주기를 간청했고 그들은 그 정변 시도를 분쇄해 주었지요. 다행히 이들 네 명의 충고와 사모스 민주파의 자제력으로 반정 주모자 서른 명은 처형, 세 명은 추방, 나머지 관련자는 모두 사면하는 선에서 매듭지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아테나이의 정변을 몰랐던 이들은 이 일을 아테나이에 알리기 위해 관선 파랄로스를 띄웠는데, 아테나이의 과두정은 정변 소식을 차단하기 위해 그들을 격리시켰지요. 그런데도 용케 그 선원들 중 카이레아스가 빠져나와 사모스로 돌아와서, 아테나이 사태를 아주 나쁘게 부풀려 전하는 통에 사모스의 아테나이가 격렬한 내분에 빠져 들어, 병사들이 장군 둘을 해임하고 그들을 포함해 과두정에 관여되었다 싶은 동료들을 죽이려 하는 일이 벌어졌었는데, 그때 마침 앞에서 말했던 스파르테의 아스튀오코스가 싸움을 걸고 있었고, 그때 그들은 사모스의 아테나이가 심각한 내분으로 '응전하지 못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5.93 이 분열은 중도적이지만 사모스 사람들과 사모스의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에게 신뢰를 받고 있던 트라쉬불로스와 트라쉴로스가 나서서 적전 분열의 부당함을 설파한 뒤에, 과두정 정변 계획의 초기 단계에 관여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면을 이끌어내면서, "민주정에 의해 지배 받고, 다같이 어울려서 살며, 스파르테와 힘을 다해 싸우고, 과두정을 적으로 간주해 협상하지 않는다"110고 모두들 아테나이와 사모스의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민주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해, 정치체제 때문에 불거진 분열의 문제를 털어냈습니다. 그리하여 사모스와 사모스의 아테나이는 민주정으로 일치단결하여, 그들이 해임했던 레온과 디오메돈 대신 트라쉬불로스와 트라쉴로스를 장군으로 모심으로써, 그들이 아테나이의 정통성이 있는 주체이며, 그들이 아테나이 제국을 지배하는 아테나이 해군을 대표한다고 선언한 것이었지요. 그들에게 아테나이는 과두정파의 반란으로 잠시 점령된 도시라서 당분간 그들은 아테나이 대신 사모스를 거점으로, 스무 해 전 페리클레스가 전쟁을 시작했을 때의 전략 그대로 보급이며 이동이 자유스러운 해군으로 스파르테와 겨룰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들은 모두 아테나이와 사모스의 뱃사람들이었거든요.
5.94. 한편, 스파르테 동맹들은 팃사페르네스의 돈이 모자라기도 하거니와 주는 시기도 들쭉날쭉해 불만이 가득차 있었는데, 사모스에서 아테나이가 응전하지 않았던 까닭이 내부 분열임을 알고도 아스튀오코스가 죽치고 있는 데 대해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오자, 하는 수 없이 아스튀오코스는 전체 함대를 동원해 그 해 여름이 시작되는 유월 중순에 또 다시 사모스로 나아갔고, 이 소식을 듣고 사모스의 아테나이는 스트롬비키데스에게 귀환을 요청하여 이번에는 일전을 기하러 나섰지요. 대등한 아테나이 함대 규모에 놀란 아스튀오코스가 싸움을 접고 멜레토스로 돌아가 버려, 또 다시 아테나이가 이오니아의 제해권을 잡게 되자, 팃사페르네스와 아스튀오코스에 대한 스파르타 동맹의 불만이 스파르테로 하여금 그때 마침 전해진 폰토스 지역의 페르시아 총독 파르나바조스의 전쟁 비용 지원 조건에 끌리게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자기들을 고사시키려 한다는 의심이 들던 팃사페르네스를 버리고, 전에 세워 두웠던 헬레스폰토스의 기지로 옮겨 가는 것을 곧바로 결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여름이 한창일 때 클레아르코스는 마흔 척의 배로 아테나이의 눈을 피해 우회하다 풍랑 때문에 메가라의 헬릭소스만 열 척의 배로 보스포로스로 가는 데 성공하여, 뷔잔티온을 아테나이로부터 이탈시키고, 계속해서 해협 맞은 편의 칼케돈과 함께 여러 도시들을 이탈시켜 보스포로스 해협을 장악했는데, 이 일로 스파르테는 파르나바조스의 지원에 보태어 전쟁 수행 능력을 더 키우게 되었고, 아테나이는 흑해 주변에서 얻던 식량의 보급로를 잃는 치명상을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5.9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런 상황 아래 트라쉬불로스가 사태를 반전시키고 전쟁에 이길 생각으로 페르시아가 스파르테 대신 아테나이를 돕게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일을 직접 할 생각은 않고, 알키비아데스를 쓸 마음으로 그의 소환을 요구해, 다수의 찬성으로 직접 가서 사모스로 데려온 것은 아주 나쁜 일이었지요. 알키비아데스의 허영으로 보면, 이 초치가 트라쉬불로스가 의당 바랐을 조국에 대한 헌신의 기회가 아니라, 단지 오갈 데 없어진 자신의 새로운 기회일 뿐이라, 그는 그를 초치한 사람들에게 솔직히 자기 처지를 설명하기보다 거짓으로, 자신이 팃사페르네스에게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있으며, 팃사페르네스도 아테나이를 도우려고 하므로, 스파르테와 연합할 페르시아 함대를 아테나이로 데려 와야 할 텐데, 그러자면 자기를 복권시켜 아테나이의 진심을 팃사페르네스에게 보여야 한다고 그 순진한 사람들을 속였으며, 그 거짓말로 그는 장군이 되고 전권을 위임받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당장에 아테나이로 가서 과두정을 뒤엎기를 원했지만, 그는 따로 할 일이 있었는데, 바로 팃사페르네스에게 더 이상 뜨내기가 아닌 자기를 과시하고 그가 자기에게 매달리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팃사페르네스에게는 아테나이를 지렛대로 쓰고, 아테나이에게는 그를 지렛대로 쓰면서 자기 인생을 새로 개척할 것이었지요. 알키비아데스가 팃사페르네스를 만나는 동안 멜레토스에는 아스튀오코스의 전쟁 수행 태도와 동맹군에 대한 급여 지불 문제로 시비가 붙었는데, 이를 기화로 멜레토스는 그 도시 안에 페르시아가 건설한 요새를 점령하고 요새 수비대를 쫓아내었지요. 알키비아데스는 자기 역활이 새로 생기는 것 같아 쾌재를 불렀고, 멜레토스의 스파르테에는 뇌물에 팔렸다고 의심받았던 아스튀오코스가 쫓겨나고 새로운 최고지휘관 민다로스가 왔습니다.
5.96. 전쟁 스무한 번째 여름이 끝날 무렵 알키비아데스는 사모스로 돌아왔고, 마침 아테나이 과두정이 보낸 정변 설명단이 그간 델로스에서 사모스 사태를 지켜보다 도착했는데, 성난 군중을 누르고 알키비아데스가 나서 트라쉬불로스와 중도파가 내세우는 강령을 채택할 것과, 스파르테와는 어떠한 협상도 하지 말 것도 아테나이에 요구했습니다. 특히 협상을 언급한 이유는 과두정이 스파르타로 보낸 협상 사절단이 선원들의 반기로 아르고스를 거쳐 사모스에 잡혀 와 있어 과두정이 맺으려는 협상 전모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페이산드로스에게 과두정으로의 정변을 구체화시킬 용기를 주었던 알키비아데스가 이번에는 트라쉬불로스보다 더 큰 목소리로 트라쉬불로스의 강령을 채택하라고 아테나이에 요구하는 모습을 그 사절들이 빙빙 돌려서 전했음에도, 과두정 안의 중도파 지도자 테라메네스와 제가 연극 "새들"에서 에우엘피데스의 말발을 빌려 한방 먹였던 이름 그대로 귀족적인 스켈리오스의 아들 아리스토크라테스111가 자극을 받아, 오천 명 회의를 즉각 구성할 것과, 대다수 동의 없이는 협상하지 말 것을 들고 나왔고, 극단파들 특히 안티온과 프뤼니코스는 민주정의 회귀도 그렇지만 알키비아데스의 출현 때문에, 다른 것 보다 그들의 안전이 더 급하게 되어 일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5.9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정치인들은 생각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도시를 위해 또는 도시민을 위해 잘해 보려 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움직이다가, 자칫 실수와 무리로 도시와 도시민에게 해를 끼치게 되면, 명분이던 도시와 도시민을 위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안전만을 위하는 짓들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과두정의 극단파들은 시민들은 물론 믿었던 동료들마져 마음을 돌리는 것을 보고, 정말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는데, 마치 배들과과 성벽을 부수고 적군을 끌어들이기라도 할 듯이 한편으로는 안티폰과 프뤼니코스를 스파르테로 보내어 협상을 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페이라이에우스 항구의 방파제 역활을 하는 에에티오네이아에 요새를 지어 적은 병력으로도 항구에의 출입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면서, 그 요새와 통하는 창고도 크게 지어 아테나이로 들어가는 모든 곡물을 일단 그곳에 부려 놓도록 한 것 들이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도시를 적에게 넘길 생각이 아니면 취할 수 없는 행동들이라, 테라메네스는 정변 초기의 암살과 폭력처럼 그렇게 당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를 막으려 나섰고112, 아테나이의 처녀신이 도와주셨는지 테라메네스가 아니라 도리어 프뤼니코스가 아고라에서 암살당하는 일이 벌여졌으며, 극단파들과 무슨 짬짜미가 있었는지 에우보이아의 반란을 지원하러 가는 것처럼 보이던 스파르테 함대가 페이라우에우스와 최단 거리에 있는 에피다우로스에 기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테라메네스는 그들의 목표가 아테나이라며 즉각 대응하라 촉구했고, 아리스토크라테스는 휘하의 페이라이에우스에 있던 중무장 보병으로 알렉시클레스를 구금해 과두정 군사력의 중심을 묶어 버렸는데, 테라메네스를 데리고 알렉시클레스를 구하러 온 극단파 장군 아리스타르코스의 부대가 페이라이에우스에 도착해, 이제 아테나이도 헬라스의 다른 도시들이 겪었던 정치체제로 인한 내전이 일촉즉발에 이르렀었지요. 그 와중에 싸움을 재촉받은 병사들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나왔는데, 그들이 에에티오네이아 요새를 부수어야 하지 않겠냐고 장군들에게 물어온 것입니다. 이에 테라메네스가 그들이 원한다면 자기도 동조한다고 대답했고, 그들은 '사백 명보다 오천 명이 다스리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은 모두 나서라'며 우루루 달려가 그 요새를 부수어 버린 다음, 이튿날 알렉시클레스를 풀어 주고 아테나이로 가서, 오천 인회의를 당장 구성하여 그 회의가 새로 사백 명을 뽑도록 요구했고, 우선 시간을 벌어야 하는 극단파들이 이를 수용해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내전은 피했는데, 며칠 후 스파르테의 함대가 살라미스를 지나 페이라이에우스로 향한다는 소식이 오자 모두들 그곳을 방어하기 위해 달려갔고, 요새가 무너지고 없는 걸 본 스파르테의 아게산드리다스가 그냥 에우보이아로 향하는 바람에 일단 페이라이에우스에 들어오는 것은 막았지만, 아티케를 잃은 아테나이로서는 에우보이아마져 잃을 수 없어, 있는 배를 다 동원하고 훈련이 안 된 선원들이지만 배에 태워 중도파인 티모카레스를 지휘관으로 에우보이아로 보냈으나, 에레트리아가 이미 동맹에서 이탈해 있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지요. 이 패전 소식은 얼마 전 시켈리아아에서 당한 패전 때보다 더 큰 공포를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스파르테나 사모스에서 아테나이의 정변에 대해 간섭하지 않아, 아테나이는 사백 명 회의를 해산하고 오천 명 회의를 소집해 과두정이 일으킨 정변을 끝냈습니다. 전쟁 스무한 번째 해의 가을이 시작된 무렵이었습니다.
5.98. 이런 와중에 과두정은 아테나이 중무장 보병 계급 이상만이 민회에서의 투표권과 공직 담임권을 갖도록 제한해, 그들이 주축이 된 오천 명 민회는 민주정 때와 같은 오백 명 평의회를 추첨 대신 선거로 구성했고, 재판도 민주정 때와 같이 운용했습니다. 과두정을 정리하기 위해 민화가 제일 먼저 택한 조치는 암살당했던 프뤼니코스를 재판할 법을 통과시켜 그를 재판에 회부한 일이었는데, 반역죄로 기소된 프뤼니코스에 대한 재판은 아리스타르코스와 알렉시클레스가 나서 변호할 정도의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지만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 벌을 그의 시신이 받았습니다113. 그리하여 이 재판의 결과가 살아 있는 과두정 지도자들을 겨누자, 페이산드로스와 알렉시클레스 등은 테켈레이아로 아기스에게 도망갔고, 아리스타르코스는 용병들을 데리고 오이노에로 가서, 그곳을 거짓말로 속여 함락한 다음 보이오티아에 자신들과 함께 넘겼고, 아르케프톨레모스와 안티폰은 끝까지 자신을 옹호하며 재판을 받았지만 처형되었는데, 이와 반대로 폴리스트라토스는 벌금만 내는 등 많은 사람들이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티모카레스는 해군 지휘관을 그대로 맡기까지도 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극단파들의 반역과 내전을 막고 아테나이를 지킨 테라메네스와 아리스토크라테스는 트라쉬불로스나 트라쉴로스와 함께 그 뒤 여섯 해 반이나 계속된 '페르시아의 전쟁'에서도 아테나이를 굳건히 지켜 나갈 것이었습니다. 정변이 일어나는 동안 암살 따위로 여러 사람이 죽긴 했지만, 신중하고 사려 깊은 테라메네스나 아리스토크라테스 같은 중도파가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중심을 잡아, 내전을 피하면서 새로운 체제를 유도하였고, 과두정의 극단파들에 대한 처리도 재판을 통한 최소한의 처벌로, 아테나이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살리면서도 과두정을 아테나이 시민에게서 자연스럽게 떼어 내는 정치의 원숙함으로 헬라스의 다른 도시에서 있었던 내전이나 피의 보복을 피해 간 것은 페리클레스가 자랑스러워하던 그 아테나이가 그때까지는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테나이는 알키비아데스도 소환하고, 사면도 단행하여 사모스와의 관계도 복원해 가며, 놀라울 정도로 빨리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만, 오직 하나 바다를 싸움터로 삼는 페리클레스의 전략이 그대로 유효한데도 불구하고, 중무장 보병이나 기병을 연결할 배들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서 아테나이 시민의 권리를 빼앗은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5.99. 아테나이에 새로운 체제가 선 그해 시월에 들 무렵에, 스파르테의 민다로스는 페르시아의 포이니케 함대와 연합하여 곧 전쟁을 끝낼 수 있기를 바라며, 한 달 넘게 밀레토스에서 기다리는 동안 팃사페르네스를 겪어 보았고, 또한 포이니케 함대가 아나톨리아의 남부 해안의 아스펜도스까지 왔다 가는 것을 보자, 그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조약 때문에 이오니아에서 팃사페르네스와 엮여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함대를 헬레스폰토스로 옮겨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중무장 보병에서 장군이 되어 지휘 경험이 없었던 트라쉴로스가 민다로스의 움직임을 키오스로 가서 막았어야 했는데, 오히려 레스보스의 반란 진압을 돕기 위해 함대를 나누어 두 가지 일을 함께 처리하려 했었기 때문에, 레스보스 섬과 육지 사이의 좁은 수로를 통해 빠져나간 민다로스를 놓치고 말았고, 민다로스는 하루도 걸리지 않아 아뷔도스에 봄부터 기지를 만들어 자리잡고 있던 스파르테의 헬레스폰토스 함대와 합류했지요. 닷새나 늦게 추격한 아테나이의 트라쉬불로스를 기다린 것은 케르소네소스 반도 끝 해협의 가장 협소한 곳에 있는 '개들의 무덤'이라는 퀴노스세마kynossema 곶을 중심으로 해협을 따라 좌우로 배들을 펼쳐 놓은 스파르테 함대였습니다. 트라쉬불로스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재빠르고 솜씨 좋은 배 다루는 기술 밖에 없었는데, 그는 그것을 무기로 스스로 맨 앞에 나서 분투했고, 오후 한나절이 지났을 때쯤에는 그 전투에서 이겨 있었지만, 우리 도시 아테나이는 열다섯 척의 배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졌던 최고의 동시대 희극 유망주이자 언제나 경연에서 저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에우폴리스도 잃고 말았지요114. 극장의 주인이신 디오뉘소스께 비오니, 희극의 천재 우리 에우폴리스를 주인께서 거두어 주시길! 그리고 그의 영혼이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극장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 있게 하시길! 그래도 트라쉬불로스가 거둔 이 승리로 아테나이는 시켈리아와 에우보이아에서의 악몽을 씻고 다시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그 과두정이 꾀했던 디카이오폴리스식 평화도 더 이상 누가 나서서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이제는 오로지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울 일만 남았습니다.
5.100. 이렇게 아테나이의 새로운 체제가 자신을 소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로 가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복권이 아니어서라기보다 돌아가기에는 들고 갈 선물이 아직 없어, 그는 그런 초라한 귀환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퀴노스세마의 승리로 동맹들의 이탈이 주춤해지자, 그해 시월 말 알키비아데스는 카리아 등지에서 조공을 걷어 사모스로 돌아왔고, 그 돈으로 사모스에 있는 병사들의 환심이나 사면서 자기가 포이니케 함대가 이오니아로 넘어오는 것을 막았다고 헛소문 내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그의 주임무였던 로도스에 있던 시라쿠사이의 도리에오스가 헬레스폰토스로 가는 것은 막지 못했습니다115. 민다로스와 합류하려 새벽에 해협으로 들어온 도리에오스를 공격하는 것으로 다시 시작된 아뷔도스 앞바다에서의 해전은 저녁이 되어서도 계속될 만큼 치열했는데, 저녁이 되어서야 나타난 알키비아데스의 배를 보고 민다로스가 아뷔도스로 퇴각하고, 육지에서 페르시아의 파르나바조스가 개입해 전투가 일단락되었지요116. 퀴노스세마 해전 한 달 뒤에 아테나이는 아뷔도스에서 또 다시 스파르테를 이기고 헬레스폰토스의 바다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만, 중무장 보병과 기병의 부족으로 뭍으로 물러간 민다로스를 끝장낼 수 없었고, 더구나 돈이 떨어져 헬레스폰토스에서 겨울을 나기도 어려울 지경이라, 이탈한 도시들을 수복하기는커녕 민다로스의 증원군을 막아 내는 것도 힘들었지요. 한편 에우보이아로 간 테라메네스는 그곳 문제는 풀 수 없었지만, 에우보이아와 보이오티아 해안을 유린하여 약간의 돈을 모았고, 키클라데스 섬들을 손보면서도 약간의 돈을 모은 다음, 배를 만들 목재의 주공급자인 마케도니아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그들이 퓌드나를 공략하는 것을 도와 주고, 마지막에 트라쉬불로스와 합류하기 위해 트라케로 옮겨 갔습니다. 다른 한편, 알키비아데스는 세스토스에 남아 케르소네소스 반도의 한 쪽에 작은 요새같은 집을 하나 짓고 있다가 마침 헬레스폰토스로 팃사페르네스가 건너오자, 아테나이 사람들이 여전히 그 둘의 관계가 좋아 자기가 설득해서 포이니케 함대가 물러갔다고 믿고 있는 것을 사실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그를 찾아 갔는데, 오히려 그에게 잡혀 사르데이스에서 갇혀 있다 한 달 만에 겨우 탈출해 오는 소동이 나는 바람에, 그와 페르시아와의 관계의 진실이 단번에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알키비아데스는 스스로가 아테나이에 줄 선물을 만들지 않고서는 그가 바라는 식으로 아테나이로 돌아가기는 틀려 버렸지요. 탈출한 알키비아데스는 레스보스에 머물고 있었고, 트라쉴로스는 전황도 설명하고 배들과 병사들의 보충을 받기 위해 아테나이로 떠났으며, 트라쉬불로스는 헬레스폰토스에 함대의 반을 남겨서 민다로스를 경계하도록 조치한 다음, 자신은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들과 트라케의 해안도시들을 유린하고 타소스에 머물며, 금품도 좀 모으고 겨울도 보낼 겸 해서 나머지 배들을 데리고 헬레스폰토스를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아테나이가 연달아 이기고 있었는데도 동맹의 이탈은 멈추지 않아, 그해 겨울 그 전쟁 초기에 내전으로 아테나이 동맹이 되었던 코린토스의 식민도시 케르퀴라에 다시 내전이 일어나 이번에는 동맹을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전체 헬라스를 파란만장하게 했던 전쟁 스무한 번째 해도117 지나갔습니다.
5.10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스무한 번째 해 가을에 헬레스폰토스에서 거둔 두 번의 승리가 그해 겨울의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전쟁에 몰입해 스파르테에게 이기자는 희망을 키우고 있었다면, 헬레스폰토스에서의 에우폴리스의 죽음이 가져온 희극에 대한 낙담과, 다시 도시를 덮어 오는 전쟁에 대한 광기는 그해 겨울의 저를 절망으로 몰아 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인 디오뉘소스의 덕으로 새봄이 가져오는 새로운 생명으로 인해 세상이 늘 새롭게 이어지듯이, 저와 에우폴리스가 나서지 않은 전쟁 스무두 번째 해 새봄의 레나이아 축제 희극 경연에서 피로니데스가 처음 일등상을 받아 에우폴리스를 이어 갈 새로운 재목으로 떠올랐는데,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의욕을 잃고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한 채 웅크리고 지내던 저에게 좋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아테나이의 희극 무대는 피뤼오스나 테오폼포스나 스트랏티스와 함께 피로니데스가 꾸려 나갔지요118. 크라티노스가 페리클레스를 희극 무대에 세워 아테나이의 정치를 풍자하기 시작한 이후, 제가 클레온을 또 에우폴리스가 알키비아데스를 역시 희극 무대에 올려 여러분께 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정치 행태를 우스개 삼아 비꼬며 고발했었는데, 이런 전통이 피로니데스에게까지 이어져, 그는 아테나이가 겪었던 정변의 와중에서 새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클레오폰이 전쟁을 통해 도시의 번영을 추구하는 위험성을 한눈에 척 알아보고, 그런 클레오폰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희극 무대에 올렸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들은 그냥 즐겁게 웃고 박수치며 피로니데스를 일등으로 뽑았지만, 저는 희극작가 특유의 눈으로 피로니데스가 보여주는 클레오폰의 위험성을 무겁게 받아들이면서, 전장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전쟁을 외치는 클레오폰이 가진 전쟁의 광기에 몸서리쳤습니다. 어쩌면 알키비아데스로는 모자라서 폴레모스가 새로 하나 장만한 절굿대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지요.
5.102. 그리고 전쟁 스무두 번째 해119 새봄에도 전쟁은 헬레스폰토스에서 계속되었습니다. 겨울 내내 민다로스는 파르나바조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이데 산의 나무로 함대를 재건해, 헬레스폰토스의 해협에 있는 아뷔도스 대신에 좀 더 넓은 프로폰티스 바다 쪽의 퀴지코스로 기지를 옮기려고 움직이자, 세스테스에 있던 아테나이는 민다로스가 공격해 오는 줄 알고 일단 카르디아로 피하면서, 겨우내 따로 지냈던 트쉬불로스에게 급히 사정을 알렸고, 트라쉬불로스는 테라메네스는 물론 알키비아데스까지 파리온으로 소집해 폭풍우 속을 무릅쓰고 퀴지코스로 나아갔는데, 마침 훈련 중이던 민다로스는 열세를 느끼고 배를 육지 쪽으로 붙여서, 육상에서 지원하는 파르나바조스의 군대와 연합하여 아테나이에 대적하려고 함대를 움직였습니다. 함선들과 육지의 병사들이 서로 뒤엉켜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본디 배에 탄 무장 병력이 적었던 트라쉬불로스가 맨 먼저 위험에 빠졌고, 그 다음은 알키비아데스가 민다다로스와 파르나바조스의 협공에 밀려 거의 전멸당할 지경에 빠졌는데, 고비마다 테라메네스가 나타나 트라쉬불로스와 알키비아데스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민다로스를 그 전투에서 죽임으로써 확실한 승기를 잡았지요. 전투는 스파르테와 파르나바조스가 퀴지코스에서 퇴각하고 나서야 끝났는데, 트라쉬불로스는 남은 배들을 수습하여 헬레스폰토스로 되돌아갔으며, 테라메네스는 보스포로스의 크리소폴리스 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또 다른 출진을 준비했고, 뒷정리를 맡은 알키비아데스는 퀴지코스와 프로폰티스에 스무 날이나 머물면서 돈을 모아, 그 돈과 자기 사람을 아테나이에 보내 퀴지코스는 물론이고, 퀴노스세마와 아뷔도스에서의 승리에 자기가 큰 몫을 했다고 떠벌리기 시작했습니다. 공치사 선전에 바빴던 알키비아데스와는 달리, 말없이 다음 임무로 돌아간 테라메네스와 트라쉬불로스가 거둔 그곳의 전투 결과는 민다로스의 부관이던 힙포크라테스가 스파르테 사람 특유의 문체로 짧게 적어 스파르테로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배를 잃었다. 민다로스는 죽었다. 병사들은 굶고 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120"
5.103. 퀴지코스에서도 패전한 스파르테는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세 번의 싸움에서 근 백쉰 척의 배를 잃었고, 또 많은 수가 포로로 잡혀 있어, 전쟁 일곱 해째 클레온이 퓔로스를 공략할 때 스팍테리아 섬에서 항복한 포로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평화를 제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전쟁 스무두 번째 해에도 마찬가지 이유로 평화를 제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와의 협정 위반을 감수하고,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테에 도망가 있을 때 그를 돌봐주었던 엔디오스를 내세워 협상에 나섰는데, 퓔로스와 데켈레이아를 맞바꾸고, 포로들을 교환하며, 헬라스의 지배 구조는 현상대로 유지한다는 조건에 대해, 헬라스의 지배 구조 문제에서 아테나이의 내부 간에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소집된 오천 명 회의에 나온 대다수 중도적인 명망가들이 평화를 이루기 바라는 가운데, 악기 장사꾼 클레오폰이 거칠고 본데없는 저자 거리식 말투와 주먹질로 회의에 나온 젊잖은 계급의 시민에게 현 상태의 제국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느냐고 욱박질렀습니다. 이렇게 클레오폰이 반대하고 나서자, 어려운 도시 형편을 이용해 돈을 벌고 있었던 사람들과, 퀴지코스에서의 승리로 스파르테를 완전히 이길 것으로 보는 낙관파 사람들이 클레오폰에게 지지를 보내 평화는 무산되었습니다. 페르시아가 스파르테를 위해 돈을 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도, 또 동맹에서 이탈한 도시들이 무거운 조공과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도, 여러분은 그때 페르시아가 스파르테에 더 이상 돈을 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었으며, 이탈한 동맹들을 다시 제국의 틀 안에 옭아 넣고, 그 조공으로 페리클레스 시절의 번영을 다시 구가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기 때문에, 테라메네스가 크리소폴리스 일에 매여 있어 대변할 수 없던 중도파들이나, 니키아스의 평화처럼 언제 또 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평화를 주장하는 평화파보다는 클레오폰과 같이 전쟁을 하면 꼭 이길 자신이 있어 보이는 전쟁파에게 쏠려 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아테나이는 그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클레오폰을 위시한 전쟁파들이 평화를 바라는 온건한 사람들이 모인 오천 명 회의를 해산하고, 옛 오백 명 평의회를 새로 구성하여, 한 달 새 옛 민주정의 체제와 법령으로 돌아가는 또 다른 정변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클레오폰은 새로운 선동정치가로 주목 받게 되었고, 아테나이는 민주정 체제로 복귀하여 시켈리아와 에우보이아에서의 패전의 좌절을 털고서, 키노세마와 아뷔도스와 퀴지코스에서 연달아 스파르테와 페르시아 연합군을 패퇴시켰듯이 앞으로 남은 전쟁에서 확실히 이기고, 페리클레스 때의 제국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시의 역량을 결집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아테나이는 이렇게 또 한번 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고, 그때 저의 절망은 더 이상 희극으로 정치를 풍자하고, 도시에 대해서나 도시민에게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말한다는 것이 도무지 부질없는 짓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5.104. 아테나이가 퀴지코스에서 얻은 승리로 평화를 얻는 대신 전쟁을 계속하기로 택하면서, 그 전쟁을 일사분란하게 뒷받침할 민주정으로의 복귀를 진행하던 동안 테라메네스는 보스포로스의 크리소폴리스에 요새를 세워, 아테나이의 식량 보급로도 확보하고, 인근을 통과하는 배들의 화물에 일 할의 관세를 거두는 등 힘을 기르고 있었고, 다른 한편 스파르테는 비록 해전에서 연달아 세 번이나 져 백쉰여 척의 배를 잃었지만, 보병이 세스토스와 뷔잔티온과 칼케돈 같은 주요 도시들을 지키고 있었을 뿐 아니라, 파르나바조스로부터 잃은 만큼의 배들을 만들 수 있는 돈을 받아 함대의 복원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평화를 거절당한 탓인지 그해 여름이 한창일 때, 아기스가 아테나이 성벽 아래까지 와서 여러분의 신경을 건드렸지만, 지난 해 겨울부터 지원군 모집차 와 있던 트라쉴로스의 반격으로 데켈레이아로 돌아가 버려, 이제 서로 숨고르기를 하나 싶었는데, 웬걸 스파르테는 데모스테네스에게 빼앗겼던 퓔로스 요새의 아테나이를 급습하여 되찾아 갔습니다. 좋은 흥정거리를 잃어버린 아테나이는 곧 아뉘토스에게 함대를 주어 탈환하려 했지만, 아뉘토스 가지고는 잃어버린 퓔로스를 다시 찾는 일이 어려워 그냥 돌아오고 말았는데, 그 뒤부터 스파르테는 오래 동안 들어 있던 눈엣가시를 뽑아 시원했습니다. 다만 같은 무렵, 키오스에서는 친스파르테 세력이 정권을 빼앗겼고, 겨울에는 트라키스에 세운 스파르테의 식민도시인 헤라클레아가 그 이웃 도시들에게 점령당해 칠백 명이나 되는 이주민들과 총독이 죽는 등, 스파르테의 실패도 잇달았지만, 그렇다고 아테나이가 퀴지코스 승리 후에 세운 크리소폴리스 요새 이외에 별다른 데서 무슨 큰 활약을 한 것도 아니어서, 전쟁 스무두 번째 해는121 그렇게 아테나이가 민주정을 다시 캐내는 대신 평화에 대한 기대는 다시 묻어 버리고 저물어 갔습니다.
5.10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스무세 번째 해122에도 저는 아무 작품을 내지 못한 채 젊은 희극작가들의 왕성한 혈기에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는데, 봄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는 놀랍게도 거의 근 십 년 가까이 조용하게 지내던 소포클레스가 호메로스의 헬레네와는 전혀 다른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를 보고 한 수 가르칠 생각이 들었는지 호메로스의 한 구절을 제대로 떼어 와 "필로크테테스"를 만들어 올렸고, 그 "헬레네" 이후 삼 년 동안 쉬고 있던 에우리피데스는 소포클레스의 이런 낌새를 알고 있었는지 소포클레스의 주특기인 오이디푸스 집안 이야기 가운데 그 아이들의 다툼을 가지고 "포이니케 여자들"을 만들어 올려, 둘이서 나란히 새봄의 아테나이에 눈물을 뿌려 주었습니다.
5.106 평화를 버리고 전쟁을 택하긴 했지만 아테나이는 겨우 조금씩 추스리고 일어설 정도여서, 트라쉴로스가 온지 일 년 반이 다 되어서야 지원군을 갖추어 줄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트라쉴로스는 헬레스폰토스로 바로 가지 못하고 약탈로라도 돈을 만들기 위해 이오니아를 둘러서 가야 했고, 여름이 시작될 때 사모스에 도착해 클로폰을 위시한 이오니아의 작은 도시들을 탈환하기도 했지만, 결국 욕심 때문에 에페소스에서 패퇴한 뒤 이오니아를 떠나, 해안을 따라 약탈해 가며 그가 헬레스폰토스에 도착한 것은 그해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한편 스파르테는 새 제독인 크라테시피다스를 내세워 지난 겨울에 있었던 키로스의 정변을 수습하고, 아이가이온 바다와 보로스포로스에서도 작은 승리를 만들어 갔는데, 그런 노력들 가운데 압권은 전해에 스파르테가 거둔 퓔로스 탈환에 버금가는 그해 여름에 메가라가 거둔 니사이아 탈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스파르테나 아테나이나 모두 전쟁에 시달리고 지친 데다가 전쟁을 치를 돈도 충분치 않아 돈을 모으고 힘을 기를 휴식이 절대로 필요했습니다. 병사들이 전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간에, 아테나이는 도시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처벌이 약해서 민주정이 전복된 것은 아닐 텐데 처벌 조항을 강화하고, 여러분에게 그 법을 지키도록 서약시켰고, 프뤼니코스를 암살한 자에게 황금과 시민권을 주었고, 과두정에 참여한 것 자체는 죄가 없다면서도 연관된 사람들이 고발당하면 재판하여 처벌했는데, 그 와중에 앙갚음이나 돈을 노린 고발도 있었지만, 다른 도시들 경우 같이 참혹한 일은 없었습니다. 공직에 대한 수당 지급도 다시 했고, 클레온이 되고 싶은 클레오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루 생활비로 2 오볼로스를 지급하는 디오벨리아를 새로 만들었고, 시켈리아 원정 뒤로 중단되었던 아크로폴리스에서의 공사도 소규모로 일거리 제공에 덧붙여 전쟁에서 이기고 도시를 번창케 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니케 신전 난간 공사와 아테나 폴리아스 건립공사가 재개되었는데, 당장에 국고는 비어 있지만, 클레온의 퓔로스 승리 때처럼 퀴지코스의 승리로 앞으로 관세 대신 동맹들로부터 밀린 조공까지 거두어 들일 수 있을 것이고, 그때까지는 전쟁 다섯 째 해에 한번 거두고 중단했던 전쟁세를 다시 여러분에게 직접 부과해 도시의 살림을 꾸려 나가는 한편 전쟁 비용도 댈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강 속에 전쟁 스무세 번째 해도 저물었습니다.
5.10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번영이나 행복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 돈과 힘을 비축하는 가운데 한 해가 가서 아테나이에 전쟁 스무네 번째 해가123 왔고, 저는 희극작가로서의 그 모든 열정을 잃고 지냈는데, 노익장 에우리피데스는 지난 해의 오이디푸스 집안 아이들 이야기 대신 아가멤논의 집안 아이들 이야기로 새봄의 디오뉘소스 축제에 "오레스테스"를 올렸습니다. 아무튼 비극의 마르지 않는 눈물 샘은 트로이아의 프리아모스 집안과 테바이의 오이디푸스 집안과 뮈케나이의 아가멤논 집안을 번갈아 오가며, 아이스퀼로스로부터 소포클레스를 거쳐 에우리피데스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한 해 빠지지 않고 여러분에게 울음 짜는 훈련을 잘도 시켜 온 데다가, 벌써 스무다섯 해가 다 되어 가는 전쟁이 헬라스 도처에 새로운 눈물 샘을 파 놓아, 이제는 누구라도 그들 집안에 가서 눈물 한 방울 길어 와 여러분에게 그것을 손끝으로 튕겨 주기만 해도 모두를 눈물 바다에 빠트릴 수 있게끔 되었는데, 희극의 걸쭉한 웃음 보따리는 기나긴 전쟁이 여러분에게서 뿐만 아니라 희극작가인 저에게서도 함께 앗아 가 버렸는지, 노래하고 춤추는 떠들썩한 소란 속에 빠트리지 않고 담아, 우리 도시 아테나이가 할 바에 대해 가르치려 했던 열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저는 축제의 한 모퉁이를 서성이면서 비극의 효용에 대해, 다시 말해 도시보다 이성과 감성 앞에 흔들리는 한 사람을 앞세우는 에우리피데스의 태도에 대해 곰곰히 따져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태도와는 어떻게 다른가를 다시 한번 비교해 보면서 말입니다.
5.108. 다른 한편, 잘 생긴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폴레모스의 절굿대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이제는 아테나이로 금의환향할 때라고 보고 그 준비에 나섰습니다. 겨울 이전에 도착한 트라쉴로스의 지원군은 에페소스에서의 실패로 환영받지 못하면서도,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람프사코스로 이동해 겨우내 그곳을 요새화하고, 봄이 오기 전에 서둘러 아뷔도스를 공략했고, 비록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파르나바조스의 영토를 유린해 재물을 거두었고, 봄이 되자 그들은 크리소폴리스에 있던 테라메네스와 함께 보스포로스의 칼케돈을 포위했는데, 그곳의 스파르테 지휘관 힙포크라테스가 죽자, 파르나바조스와의 협상을 통해 아테나이는 비록 칼케돈의 점령은 포기했으나, 밀린 조공과 보상비를 받기로 했을 뿐 아니라, 다레이오스 2세에게 아테나이가 보내는 사절단을 파르나바조스가 수사까지 직접 데리고 가기로 해, 페르시아와 협상할 길을 트는 성과를 거두었지요. 만족한 아테나이는 그 협상으로 칼케돈에서 철수할 수 있어 그 병력으로 바로 뷔잔티온을 포위했는데, 그사이에 알키비아데스는 프로폰티스의 셀림브리아로 가서 그곳 내통자들과 그 도시를 점령한 다음 서둘러 합류했고, 잘 버티던 스파르테의 클레아르코스가 돈 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내통자들이 테라메네스를 불러들였습니다. 가혹한 처벌이 아테나이 동맹들의 이탈 이유들 중 하나였고, 스파르테의 느슨한 동맹과 '헬라스의 자유'도 이유였는데, 스파르테는 클레온식 가혹한 통치로 내부 반발을 불렀고, 아테나이는 브라시다스식 회유책으로 내부 동조를 얻어 일을 풀고 있었지요. 전쟁 스무네 번째 해는 아테나이가 보스포로스를 다시 지배하게 되면서 저물어 갔습니다.
5.10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스무다섯 번째 해에는124 모든 축제의 비극 경연에도 희극에서처럼 새 작가들의 작품만 보였습니다. 에우리피데스가 아가톤과 함께 아르케라오스 왕의 초청을 받아 마케도니아로 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별로 사교적이지도 않던 그가 왜 고향 살라미스의 동굴 글방에서 혼자 내려다 보던 바다를 두고, 여든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다른 도시의 초청에 응했는지 잠시 궁금했지만,저는 오래 묵은 문제를 푸는 기분으로 아이스퀼로스 다음으로 소포클레스의 희곡들을 읽는 일에 다시 몰두했습니다.
5.110. 한편, 파르나바조스와 아테나이 사절단은 프뤼기아의 고르디온에서 겨울을 보낸 뒤, 봄에 다시 수사를 향해 나선 길에서 다레이오스 2 세와의 협상을 끝내고 오는 스파르테의 보이오티오스와 만났는데, 왕의 아들 퀴로스가 동행하고 있었지요. 아테나이가 평화를 버리고 전쟁을 택할 때 가졌던 기대 중 이탈한 동맹들을 탈환하여 옛날의 제국을 회복한다는 기대는 보스포로스에서부터 이루고 있었는데 반해, 페르시아를 스파르테로부터 떼어 내어 전쟁에서 이긴다는 기대는 그것으로 무너졌지만, 칼케돈의 협상 이행을 다른 장군들과 함께 반드시 알키비아데스가 맹세해야만 한다고 우겼던 파르나바조스 덕분에, 그에게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사람들의 새로운 기대가 그의 값을 올려, 전쟁 스무다섯 번째 해 봄에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로 금의환향할 최고의 바람을 탔지요. 그렇지만 그는 여름에 트라쉬불로스와 우호적 인사들이 새 장군으로 뽑힌 것을 보고 아테나이로 갔을 만큼 극히 조심하며 귀환했는데, 사실 그는 그가 아테나이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비록 그 당시는 아테나이가 받아들여 준다 해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가 실체를 보이는 순간 단숨에 자신을 낚아챌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125. 알키비아데스는 사람들이 벌써 일년 중 가장 불길한 플린테리아 의식을 행하는 날 아테나이에 온 그를 두고 말이 나기 시작한 것을 알고, 신성한 종교행사를 영악하게 정치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했는데, 그것은 아기스가 테켈레이아에 진을 친 이후 중단되어 버린, 자신의 신성 조롱 혐의와 엮여 있는 엘레우시스 비의 행사를 자신의 주도로 성대하게 치른다는 것이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성대한 행렬을 꾸며 엘레우시스를 왕복하는 과감함을 보여줌으로써 신성 조롱 문제와 불성실한 태도에 대한 우려를 단숨에 잠재웠고, 그는 그의 귀환을 금의환향으로 바꾸어 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아테나이산 절굿대 알키비아데스가 제 허영심을 채우며 아테나이를 망치도록 자리 잡는 동안, 뤼산드로스라는 새 스파르테산 절굿대가 나타났는데, 그는 다음번 페르시아 왕이 될 야심을 가진 열일곱 살의 왕자 퀴로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의 전세를 바꾸어 놓을 것이었습니다.
5.111. 전쟁 스무다섯 번째 해 봄, 뤼산드로스는 스파르테 해군 지휘를 맡아 처음은 이오니아로 가면서 일흔여 척의 삼중노 배들을 모았고, 그 다음 해군 기지를 사모스의 남쪽에 있어 늘 아테나이의 견제를 받는 밀레토스에서, 사모스의 북쪽이고 퀴로스가 머무는 사르데이스도 가까운 에페소스로 옮겨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는 한편, 그가 스파르테에서 출세하기 위해 그랬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여름에 사르데이스로 온 퀴로스에게 가서, 그 입 안의 혀처럼 굴어 그동안 밀렸던 급료는 물론 한 달 선불에 급료 인상 몫까지 받아 온 다음, 급료를 올려 아군의 사기도 올리고, 적군 이탈도 부추기고 있었는데126 반해, 알키비아데스는 엘레우시스 비의 행렬로 아테나이의 희망이 된 다음, 세 명의 장군과 삼중노 백여 척의 함대와 함께 제국 회복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아테나이를 떠나, 안드로스 섬을 공략한 뒤 그 섬을 점령하라며 병력과 배 스무 척을 남기고, 로도스로 가서 그 섬을 유린해 돈을 챙기고 나서야 사모스에 도착했는데, 이제 이오니아에서 그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아테나이가 잠시 주춤한 사이 제법 함대의 틀을 갖추어 가는 뤼산드로스를 깨는 일이었습니다. 퀴로스가 준 돈으로 함대를 보강하고 고강도 훈련을 시키면서 에페소스에서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는 뤼산드로스와, 황금관을 씌워 주고 육해군의 총사령관이라며 맞아 준 아테나이에 무언가 보여 주기 위해 다급해진 알키비아데스라는 '전쟁' 폴레모스의 두 절굿대가 이오니아에서 맞닥뜨리면서 전쟁 스무다섯 번째 해도 저물어 갔습니다.
5.11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스무여섯 번째 해에도127 레나이아 축제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 눈에 띄는 작가나 작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민주정으로 회복되었지만 아테나이는 아직 축제의 경연에 예전처럼 돈을 쓸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 작가들을 움츠리게 만들지 않았는지요? 그리고 저의 비극 읽기가 끝나 가고, 에우리피데스를 넣고 새로운 희극을 하나 쓰겠다고 구상하고 있던 차에 마케도니아로 간 에우리피데스가 거기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에우리피데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매우 낙담하며 슬퍼했었다는128 나이 아흔의 소포클레스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퀼로스가 비극작가로 무대에 자기 작품을 올리기 시작한 무렵 태어나 아이스퀼로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퀼로스가 겔라에서 죽은 해에 처음 비극작가로서 무대에 자기 작품을 올린 다음 소포클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비극 무대를 풍성하게 키워 왔었는데, 아테나이는 그해 두 명의 최고 비극작가를 한꺼번에 잃고 말았습니다. 그 죽음의 소식이 제가 구상하고 있던 에우리피데스에 관한 희극의 전체 구도를 바꾸게 했지만, 오히려 그 비극작가들 모두가 하데스에 있다는 것이 재미난 희극 재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저를 재촉해, "개구리들"의 전체 구도를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 둘 가운데 누가 더 전쟁으로 피폐해져 가는 도시와 거칠어져 가는 도시민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묻는 것으로 짰는데, 그 무렵에 마침 아르기누사이에서의 승전 소식도 들려와, 모처럼 관객들을 즐겁게 할 작은 말장난들도 에우리피데스 연극의 간지러운 대사들과 함께 엮어 가면서 완성했고, 그해 여름의 끝에 저의 "개구리들"이 다음 해 레나이아 축제에 올려지도록 결정이 났지요. 정말 오랜만에 마음 먹고 올리는 연극이라 코로스의 가면은 말할 것도 없고, 배우들의 몸짓과 발성까지 제가 구상한 대로 철저히 준비하였고, 또 연습하게 했습니다. 대사는 물론 춤과 노래도 연습 중간 중간에 상황에 따라 많이 고쳐 관객이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도록 했지요. 제가 우리 도시 아테나이를 구하는 문제를 놓고, 비극작가들을 가지고 희극을 만든 것을 하데스에서 에우폴리스가 본다면, 그도 틀림없이 배꼽 잡고 소리내어 웃을 것입니다. 비극이, 비극작가들이 도시를 어떻게 한다고?
5.113. 제가 도시에 대해 비극의 역활을 생각하고, 에우리피데스를 넣은 희극 하나를 구상하고 있던 전쟁 스무여섯 번째 새해 겨울에, 알키비아데스는 사모스에서 클로폰의 외항인 노티온으로 함대를 옮겨, 뤼산드로스가 바다에서 싸우도록 유인했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에페소스에서 움직이지 않는 뤼산드로스를 그냥 두고, 겨울이 끝나 갈 때 보병들만 데리고 포카이아를 포위하고 있는 트라쉬불로스에게로 갔습니다. 그는 함대를 그의 배 조타 장교였던 안티오코스에게 맡기면서, "뤼산드로스의 배들을 공격하자 마라"고 확실히 명령했는데도, 안티오코스는 자신의 승리로 출세하고 싶은 욕심에 퀴지코스와 같은 전법으로 뤼산드로스를 유인하기 위해 에페소스로 들어가서 뤼산드로스에게 죽고, 남은 배들마져 공격당해 스무 척이 넘는 배를 잃는 일이 생겼는데, 알키비아데스가 급히 트라쉬불로스의 배 서른 척을 가지고 돌아와, 설욕도 하고 안티오코스가 잃은 배들만큼 빼앗고자 했으나, 뤼산드로스가 응하지 않아 사모스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지요. 노티온에서의 패배는 전력 손실보다 퀴지코스 뒤 아테나이로 쏠리던 전쟁의 기세가 꺾인 것이 더 큰 문제였는데, 이를 역전시키려는 알키비아데스의 노력은 성과가 없었고, 급기야 퀴메 주변을 약탈하다가 퀴메의 반격을 받아 쫒겨 온 것이 꼬투리가 되어, 마침 아기스가 아테나이 성벽을 직접 공격하고 아티케를 약탈한 일로 어수선해진 민심을 자극하는 바람에, 클레오폰이 주도적으로 나서 알키비아데스를 해임하고 코논을 그의 후임으로 뽑았습니다. 사모스 민심도 싸늘해지자 알키비아데스는 이런 자신의 몰락129을 예견이라도 했었던지, 몇 년 전 세스토스에 있을 때 마련해 두었던 케르소네소스 반도에 있는 작은 집을 피난처로 삼아 떠났고, 그의 퇴출은 트라쉬불로스와 테라메네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은 그해 봄 장군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테나이를 떠나 사모스까지 온 행적을 트라쉬불로스가 호화스런 유람이었다고 개탄한 걸 보면 알키비아데스 같은 사람은 죽어야 행실이 바뀌나 봅니다.
5.114. 그리고 이런 지휘관 교체는 스파르테에서도 있었습니다. 스파르테 사람답게 선이 굵고, 서른이 갓 넘은 칼리크라티다스는 봄이 한창일 때 에페소스로 와서 임기가 다한 뤼산드로스와 교대했는데, 뤼산드로스가 자기 야심 때문에 퀴로스가 그에게 지원하지 않도록 하자 이방인에게 매달리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보급을 받기 위해 그 기지를 도로 밀레토스로 옮긴 다음, 당장 키오스의 델피니온과 테오스의 아테나이 요새와 레스보스의 메튐나를 점령했을 정도로 강단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때 잡은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 돈을 마련하자는 사람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스파르테가 전쟁에 나선 이유, 즉 '헬라스의 자유'를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지휘하는 한 어느 한 헬라스 사람도 노예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천명했을 정도로 전임 뤼산드로스와는 격이 다른 지휘관이라는 것도 보여 주었지요. 칼리크라티다스가 메튐나를 점령하자, 헬레스폰토스 뱃길의 안전을 지키려 나온 코논을, 그 젊은 지휘관이 전 함대로 따라가 서른 척은 나포하고, 나머지 마흔 척은 뮈텔레네 항구에 가두었는데, 코논이 어렵사리 자기 처지를 아테나이로 알렸고, 그해 여름이 시작될 때 연락을 받은 아테나이는 아크로폴리스의 황금 니케를 녹이는 등 온갖 힘을 다해 한 달 동안에 무려 백열 척의 함대를 만들었고, 경험 있는 선원과 군인이 없어 배를 움직일 수 있는 나이의 사람들, 이를테면 노예까지 자유를 주겠다며 모두 태워130, 한 여름에 사모스로 향할 때는 동맹들의 배까지 모두 합해 백쉰다섯 척의 함대가 되었는데, 이 대함대를 여덟 명의 장군들이 매일 한 번씩 바꿔 가며 지휘했고, 그전에 알키비아데스 때문에 장군에 뽑히지 못했던 트라쉬불로스와 테라메네스는 선장으로 참전했습니다. 칼리크라티다스는 갖혀 있는 코논과 오고 있는 아테나이의 지원군에 협공당하지 않으려 쉰 척으로 코논을 막고, 나머지 백스무 척으로 뮈텔레네 남쪽 말레아 곶에서 아테나이 지원군을 맞아 싸우려 계획했었는데, 아테나이 지원군이 아르기누사이의 가리파다시 섬 앞에다 사모스 배들로 본진을 한 줄로 배치하고, 좌우익은 앞뒤 두 줄로 배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지난번 코논을 공격할 때처럼 한밤중에 기습하려 했으나, 폭풍이 불어 해가 뜨는 것을 보고서야 아르기누사이로 향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젊은 지휘관은 수적인 열세에도 아랑곳없이 헬라스 사람들끼리 붙은 최대의 해전을 개시해, 아테나이 함선 스무다섯 척을 부수었으나 자신의 함선 일흔일곱 척을 잃고, 그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아테나이는 전투에서 이겼지만 도망치는 배들을 추격하느라 장군들이 먼 바다에 흩으져 있어 모두 모여 왈가왈부 다음 할 일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는데, 그나마 결정을 내려 그 장군들은 뮈텔레네로 가서 스파르테의 에테오니코스가 가진 쉰 척을 없애고, 두 선장 트라쉬불로스와 테라메네스는 구조대를 결성해 생존자들과 시신을 수습하기로 일을 나눈 뒤 각각 그에 따라 움직였지만, 그때는 이미 폭풍이 드세어져 구조 작업이 불가능해지고 말았고, 앞서 뮈텔레네로 갔던 그 장군들도 폭풍 때문에 가지 못하고 돌아와, 그들 간에 구조를 못한 것을 놓고 불화가 생겼지요. 어쨌거나 폭풍이 잦자 그들은 함께 뮈텔레네로 갔고, 도중에서 코논을 만나 에테오니코스가 쉰 척을 가지고 달아난 것을 알고, 키오스의 스파르테 기지로 추격했으나 실패하여 사모스로 돌아간 것으로 모든 전투가 끝났습니다. 비록 아테나이가 생존자들과 시신을 잘 수습하지 못했고, 스파르테에 쉰 척의 배를 남겨 주어 약간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아르기누사이에서의 대승은 아테나이에게는 대단한 자신감을 주는 눈부신 전과였고, 스파르테에게는 또 다시 위축감을 주는 심각한 타격이였습니다.
5.115. 그런데 처음 아르기누사이 대승을 조금 빛바래게 한 정도라 여겨졌던 구조 실패가 아테나이에서 점점 큰 사건으로 번져 갔는데, 소식이 사모스에 전해지자 구조를 맡았던 두 선장은 자기 변호를 위해 아테나이로 갔고, 장군들은 구조가 두 선장들에게 맡겨졌었다고 밝히는 편지를 아테나이로 보냈지요. 처음에 사람들은 그 편지를 보고 두 선장에게 분노했다가 나중에는 그들의 변명, 이를테면 장군들의 헛된 추격과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했으며, 결국 자기들에게 명령이 떨어졌을 때는 폭풍이 드세어져 구조가 불가능했다는 설명을 듣고는 장군들에게 분노하여, 장군들을 해임하고 아테나이로 불러 재판한다고 민회에서 결의했습니다. 둘은 사모스에서 도망쳤고131 여섯은 돌아와 재판을 받았지요132. 생존자와 시신 수습보다 뮈텔레네로 바로 가서 스파르테의 남은 함대를 궤멸시키자고 주장했던 에라시니데스가 그 때문인지 제일 먼저 공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고, 나머지는 열심히 변호하여 사정이 좋아져 가고 있었는데, 날이 저물어 민회는 평의회가 재판 절차를 정하여 그 다음날 표결키로 하는 바람에, 이튿날 아파투리아 행사로 더 원통해진 젊은 전사자들의 가족이 삭발 시위를 벌이며 처벌할 것을 드세게 요구하자, 평의회에서 칼릭세이노스가 '더 이상 변론 없이 "해전에서 승리한 병사들을 구조하지 않은 것"이 유무죄인지만 가리자'는 재판 절차를 제안하여, 마침 그때 제비에 뽑혀 난생 처음 공직에 나가, 그것도 그의 부족이 의장 순번이라 의장을 맡아야 했던 소크라테스가 평의회의 소위원회 격인 프리타네이스에서 이 건을 다루게 되었는데, 소크라테스가 자기 재판에서 밝혔다시피, 해전에서 승리한 병사들을 구조하지 않은 것이 유죄냐 무죄냐고 묻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을 뿐더러, 더구나 여덟 장군을 한덩어리로 기소하고 재판하는 절차도 불법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칼릭세이노스와 그 일파가 감옥에 보내겠다고 협박하는 가운데 혼자만 그것이 불법이라고 반대했지만, 결국 통과되어 민회에서 재판이 열렸고, 이번에는 알키비아데스의 사촌이자 그의 보좌관도 했던 에우리프톨레모스가 전날에 이어 다시 훌륭한 연설 솜씨로 개별적인 재판 절차를 제안하여, 다수의 동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협박이 난무해 결국 민회는 이를 번복하고, 도망친 장군까지 여덟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말았습니다.
5.116. 전쟁 스무여섯 번째 해 여름에 아테나이가 황금 니케 상을 녹이며 혼신의 힘으로 일으킨 함대가 아르기누사이에서 기적처럼 거둔 승리를, 그해 가을도 다 가기 전에 아테나이는 스스로 난도질하여 깎아 먹으면서, 전사자 가족들이 토하는 울분과 원한의 감정을 슬기롭게 다독이지 못하고, 칼릭세이노스 같은 그릇된 정치선동가 몇몇에 휘둘리어 적과의 싸움에 나가 이기고 돌아온 사람들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적과의 싸움에서 죽을 각오로 싸울 사람들을 적들이 아니라 아테나이가 먼저 죽여 없애고 있었습니다. 처형당한 여섯 장군들의 영혼을 신들이 보살펴 주시길! 특히 페리클레스가 가문을 잇기 위해 민회에 나가 구걸로 시민권을 얻었던 아스파시아의 아들 페리클레스의 영혼도 거두어 주시길!
5.117. 아르기누사이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은 스파르테는 퀴지코스에서 패한 뒤 그랬듯이 평화를 제의하며, 헬라스에서의 세력 판도는 현상대로 두고 스파르테가 데켈레이아에서 철수하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브라시다스처럼 직접 무기를 들고 전투를 벌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데모스테네스의 등을 타고 자주 전투에 나섰던 클레온과는 달리, 평소 전투는커녕 전장 근처에도 얼씬 않던 클레오폰이 가슴 갑옷을 입고, 술에 취한 채 민회에 나타나서, 스파르테가 모든 도시들을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평화가 솔깃한 사람들을 몰아세워, 다시 아테나이는 평화 대신 전쟁의 길로 나갔습니다. 아테나이가 전쟁을 택할 때마다 스파르테는 생존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퓔로스를 잃고 먼 곳 암피폴리스를 쳐야 했을 때 브라시다스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뤼산드로스가 그 일을 맡아 나선 가운데, 전쟁 스무여섯 번째 해도 저물어 갔습니다.
5.11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뤼산드로스가 헬라스 본토와 아이가이온 바다와 헬레스폰토스와 이오니아에 있는 모든 동맹들과 에페소스에서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 어떻게 아테나이를 이기고 전쟁을 끝낼 것인가를 계획하는 동안, 전쟁 스무일곱 번째 해133 새봄의 레나이아 축제 희극 경연에 올린 저의 "개구리들"이 여러분의 열화 같은 박수와 갈채 속에 오랜만에 일등을 하였습니다. 아마 "기사들"이 오르고 스무 해가 더 지났을 것입니다. 클레오폰이 스파르테에게 요구한 대로 전체 헬라스의 도시가 아테나이에게 조공을 바치는 날이 가까이 왔다는 즐거움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제까지도 여러분의 심금을 온갖 말로 울려 주던 노래 가사의 달인, 그래서 그의 노래 한 구절만 불러도 포로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이 시대의 최고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 대신, 페르시아와 싸워 이긴 마라톤의 전사이자 한 평생 전쟁 터에서 아테나이의 기상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신이 정해 준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들의 슬픔을 언제나 무겁고 굵직하게 노래하여, 여러분이 운명처럼 겪는 슬픔을 위로했던 아이스퀼로스를 데려온 것 때문이었는지, "개구리들"은 우승에 더해 재상연134을 해도 되는 특별한 대접도 받았지요.
5.119. 이제 황폐해진 이 도시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것은 전쟁 뿐, 다른 방법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 아테나이가 너무 가여운데, 디오뉘소스의 눈에 이제는 더 이상 전쟁에 찌든 도시민의 영혼을 눈물로 정화해 주고, 도시가 그 도시민에게 마땅히 할 바에 대해 말해 주는 좋은 비극작가가 보이지 않자, 디오뉘소스는 아르기누사이에서 싸우던 중 극장의 수호신답게 배에서 "안드로메다"를 읽다가 에우리피데스에 반해, 그를 하데스에서 데려와 부활의 신답게 그로 하여금 아테나이의 연극을, 다시 말해 아테나이를 부활시키도록 하려 합니다. 신이 왜 인간 노예가 필요하며, 신이 신의 나라로 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마는, 사람들을 울리려 멀쩡한 자기를 미치광이로 만든 에우리피데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이복 동생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인간 노예 크산티아스를 데리고 하데스로 가고, 호수를 건너면서 개구리 가면을 쓴 코로스를 만나는데, 비록 신들과 디오뉘소스를 칭송하지만 겉만 번드레한 백조처럼 꽥꽥거리는 백조개구리들이라, 디오뉘소스에게는 그 개구리들이 요즘 자기 극장을 시끄럽게만 하고 감동은 주지 못하는 극작가들 같아 큰소리로 쫓아내고, 그 개구리들은 다시는 "개구리들"에 코로스로 나타나지 못하게 되는데135, 그러는 동안 디오뉘소스는 호수를 건넙니다. 아르기누사이에 참전하지 않아 신분도 자유인으로 바뀌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때문에 카론이 배에 태워 주지 않아 호수가로 삥 돌아온 크산티아스와 함께 여기저기 지옥의 무서운 곳들을 둘러 다니다가, 엘레우시스 비교에 입문한 여자와 남자들로 된 코로스를 만난 다음, 드디어 하데스의 문에 도착합니다. 하데스에서 헤라클레스 변장은 봉변과 환대를 경험하는데, 그때마다 크산티아스와 역활을 바꾸는 것으로, 전쟁이 신분을 뒤집어 사회 구조의 변혁을 재촉하는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하고136, 아울러 신과 인간을 구별하는 차이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동안137, 코로스장의 파라바시스로 전쟁이 가져온 신분의 개벽을 수긍하면서, 동시에 여덟 장군들의 경우처럼 한번 실수로 인재를 내치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태도를 꾸짖고, 서로 공평하게 화합하고 살아야 한다고 한마디 합니다138.
5.120. 플루톤의 노예가 하데스에서 지내는 세 비극작가의 근황과 다툼을 크산티아스에게 말해 주고, 이제 플루톤의 입회 아래, 다시 극장을 수호하는 신으로 돌아온 디오뉘소스가 비극왕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스퀼로스와 그 자리에 앉으려는 에우리피데스의 다툼을 주재합니다. 소포클레스는 물론 그 인품대로 아이스퀼로스가 지면 그때서야 그 자리를 놓고 에우리피데스와 다툼을 벌일 것이지요. 코로스가 무우사에게 두 시인을 격려하도록 기원하고, 아이스퀼로스는 데메테르 여신에게, 에우리피데스는 신이 아니라 대기와, 말하는 혀와, 냄세 맡는 콧구멍에게, 서로 이기게 해 달라고 비는 가운데,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퀼로스 연극의 단순한 구성, 과장이 많은 직선적 표현의 긴 대사와 노래, 그 반대로 한마디 말없이 분위기만 잡는 배역의 배치, 그리고 결국 야인으로 몰락하게 하는 주인공 처리 등을 공격하고, 아이스퀼로스는 무엇보다 자기는 장엄한 구도로 도덕적 인물들을 내세워 도시민이 도시에 유익한 행동을 하도록 가르쳤다고 반박하며, 에우리피데스 연극은 비윤리적이고 사악한 인물들을 내세워, 감각적이고 불경한 노래와 춤으로 호리고, 동정을 사기 위해 주인공을 거지나 병신으로 만든다고 공격하는데, 이에 대해 에우리피데스는 거대한 것들을 말하면 도시에 유용하냐며, 자신은 사실적인 상황에서 인간답게 생각하고 말하도록 가르쳤지만 도시에 해악을 끼치지 않았다고 반박하자, 아이스퀼로스는 에우리피데스가 도시에 끼친 해악을 몇 가지 꼽아 줍니다. 왕에게 넝마를 입혀 불쌍한 척하니까 부자들이 거지라고 징징거리며 전쟁이나 연극 비용을 대지 않는 것139, 젊은이들이 수다와 잡담에 열중하여 운동도 하지 않고, 배를 젓는 일 같이 힘든 일을 기피하여 배를 움직일 수 없고, 그렇다고 나무라면 심지어 윗사람에게 대들기까지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의 경우 역시 한결같아 뚜쟁이 노릇하는 유모, 신전에서 아이를 낳는 여자, 오라비와 살을 섞는 여자,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따위의 여자들을 연극에 불러들여, 세상에 여자들을 비천하게 보이게 한 것 등을 예로 들며, 에우리피데스가 도시에 끼친 해악에 대해 그를 욱박지르지요. 그 뒤에도 두 사람은 서로 프로로고스의 역활이나 시구의 표현에 대해서 계속 주고 받지만 결론을 낼 수 없고, 하데스에서 오직 한 명만 데리고 나갈 수 있다는 플루톤의 말에 디오뉘소스는 알키비아데스를 어떻게 보는지 묻지만 신통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결국 아테나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에우리피데스는 횡설수설 끝에, 지금 하는 일이 실패라면 모두 거꾸로 하면 도시를 구할 수 있는 것 아니냐140고 대답하고, 시켈리아의 겔라에서 하데스로 온지 반 세기가 넘어 아테나이 사정에 어두운 아이스퀼로스는 지금의 지도자가 어떤지 묻는데, 부정적인 대답을 듣자, 지도자가 유능하지도 않는 데다가, 도시민이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어 그냥 둔다면, 그런 도시를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으며, '적을 자기로, 자기를 적으로 여기고, 함대를 부로, 부를 재앙으로 여긴다'면141, 바꾸어 말해 역지사지에 탐욕을 없앤다면, 그 도시를 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 대답합니다. "안드로메다"를 읽고 에우리피데스에 반해, 그를 아테나이로 데려오려 하데스로 갔던 디오뉘소스는 도시의 문제에는 얼렁뚱땅 넘어가는 에우리피데스를 버리고, 도시의 문제에도 도시가 해야 할 바를 도시 간의 배려와, 도시의 탐욕을 경계하는 윤리에서 찾는 것을 보고, 아이스퀼로스를 데리고 나옵니다. 그리고 아이스퀼로스는 그 비극왕 자리를 소포클레스에게 물려줍니다.
5.12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디오뉘소스가 데려온 아이스퀼로스가 도시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그의 재상연 인가 작품들은 제쳐 놓고, 전쟁 스무일곱 번째 해의 봄철 아테나이의 디오뉘소스 축제 비극 경연에 에우리피데스의 유작들이 상연되었는데, 첫 번째 "박코스 여신도들"은 디오뉘소스의 신성을 부정하는 오만이 한 가족과 그 도시를 어떻게 망치는지 보여주며, 아들을 죽인 아가우에와 그런 딸을 보는 디오뉘소스의 외조부 카드모스의 구구절절한 에우리피데스적 비통함과 함께 디오뉘소스를 부각시키더니, 두 번째는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상연하여, 제물로 바쳐지는 자기 신세를 에우리피데스적으로 고민하다가, 아버지가 전쟁에 이길 수 있게 제물이 되기를 자청하는 아이스퀼로스적 행동을 보이는 이피게네이아를 보여주며, 연극의 아이스퀼로스적 역활을 부각시키까지했는데, 일이 그렇게 된 데는 저의 "개구리들"을 보고 느낀 게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진이 빠질대로 빠져 무슨 짓을 해서라도 스파르테와의 전쟁에서 꼭 이겨야 하는 여러분이 곧 그 이피게네이아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5.122.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야 하는 사정은 스파르테 쪽도 마찬가지여서, 겨울부터 에페소스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던 스파르테와 그 동맹들은 새봄에 퀴로스의 사절단과 함께 뤼산드로스에게 해군의 지휘권을 주도록 요청하자, 스파르테는 정치적 이유로 탐탁치 않았지만 편법까지 동원해 가며 그에게 실질적인 지휘권을 부여했고, 뤼산드로스는 부임 즉시 배를 모으고 배를 만들면서, 사르데이스로 가 퀴로스에게서 돈은 물론, 퀴로스가 왕족을 죽인 일로 수사로 소환되어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를 대신하여 그의 영지의 공납금도 거두는 권한까지도 얻어 왔는데, 퀴로스의 요구는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아테나이를 공격하지 말라는 것 뿐이었고, 그것은 뤼산드로스가 어차피 몇 달 안에는 아테나이와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따로 해결해야 할 일들 때문에라도 퀴로스의 그 요구는 지켜질 것이었습니다. 뤼산드로스는 함대를 숫자를 늘이고 훈련을 통해 전투 능력을 키우는 한편, 칼리크라티다스의 '똑같은 헬라스 사람'이라는 정신 대신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밀레토스에 가서, 정변을 유도하여 참혹한 살상과 가차없는 추방으로 민주정을 허물고, 새로 세운 과두정이 스파르테보다 그를 더 따르도록 바꾸어 놓았지요.
5.123. 새로 사모스에 부임한 여섯 명의 장군들은 우세한 전력을 가진 만큼 당연히 싸움을 걸어 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야 했는데 뤼산드로스가 배로 사모스를 지나는데도 가로막기는커녕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싸움에서 크게 이긴 장군들을 처형한 후유증이었겠지요. 뤼산드로스는 볼 일 보고 난 뒤 밀레토스에서 빠져나와, 카리아와 로도스의 아테나이 동맹도시들을 공략하여, 칼리크라티다스와는 정반대의 심리전으로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노예로 팔아 버리는 참혹한 짓을 저질러 아테나이 동맹들의 의기을 꺾으려 했습니다. 그 여름 이제 준비가 끝난 뤼산드로스는 사모스의 아테나이 함대와의 싸움을 피하면서 헬레스폰토스로 가기 위해, 성동격서의 전술로 아이가이온 바다를 가로질러 아테나이의 본거지로 와서 살라미스를 유린하고, 아티케에 상륙해 웅크리고만 있던 여섯 장군들이 사모스에서 나올 수 밖에 없도록 한 다음, 남쪽을 돌아 로도스로 갔고, 거기서 텅 빈 사모스 섬 앞을 지나 아나톨리아의 해안을 따라 올라가 헬레스폰토스의 아뷔도스에 갔고, 즉시 군대를 모아 모타케스는 육로로, 자신은 바다로 람프사코스를 공략해 순식간에 점령하고, 프로폰티스와 보스포로스의 목줄을 쥐었습니다. 뒤쫓아 온 아테나이의 여섯 장군들은 뤼산드로스가 보스포로스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람프사코스 맞은 편의 아이고스포타미에 진을 치고 싸움을 걸었지만 형편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지요. 그들도 하루씩 번갈아 지휘했는데, 일이 안 되려면 별 일이 다 생기는 법, 하루는 과대망상 알키비아데스가 나타나, 트라케 지원군이 있다고 사기치며142, 지휘권을 요구하다 쫒겨나는 엉뚱한 일까지 생겼는데, 닷샛날의 지휘관인 필로클레스는 군기가 흩어지고 사기도 떨어지자 결전을 결심하고는, 먼저 서른 척으로 세스토스로 퇴각하는 것처럼 보여주고, 뤼산드로스가 잡으러 나오면 그때 나머지 함대가 덮치는 작전을 세운 다음, 스스로가 미끼가 되었는데, 한편 뤼산드로스는 그동안 전광석화 같은 기동성을 훈련했기 때문에, 아테나이 함대가 진짜 세스토스로 퇴각하든 미끼로 나오든 간에 배가 움직이기만 하면 전광석화처럼 달려들 기동성을 앞세우고 있었지요. 뤼산드로스의 기동성 앞에 필로클레스의 유인이 여지없이 무너졌고, 에테오니코스가 상륙해 아테나이의 진지까지 점령하자, 위대한 아테나이 해군은 겨우 배 열 척을 남길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5.12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이고스포타미에서의 패전은 아테나이의 패전을 의미했습니다. 국고는 비었고 도와줄 동맹도 없었습니다. 전쟁 중에 아테나이가 저질렀던 스키오네와 멜로스에 가했던 참혹한 살륙이 이제는 쌍방 간에 자행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의 재앙으로 죽었고, 끊임없는 전쟁으로 죽었으며, 정치체제를 두고 서로 의심하여 벌인 재판과 암살로 죽었으며, 아티케가 황폐해지고, 무역도 끊긴데다가 전쟁 비용을 대느라 그야말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장군 페리클레스가 사소한 것이 아니라며 벌였던 전쟁은 이미 스무일곱 번째 해에 접어들었는데, 군대도 가지 않은 클레오폰이 제일 용감하게 마지막 그것도 아주 유리한 평화를 전부가 아니라고 던져 버렸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스파르테의 뤼산드로스가 잡은 포로들 삼천 명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이 클레온이 뮈텔레네의 동맹 이탈의 주동자 천 명을 죽여 버린 것과, 얼마 전 일당을 더 받기 위해 이탈한 선원들의 오른팔을 자르기로 한 아테나이의 결의와, 필로클레스가 나포한 적의 배 선원들을 그 배 밖으로 던져 버렸던 것과, 무엇이 얼마나 다르겠습니까마는143, 이 소식을 들은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날 밤 아무도 잠들지 못했고,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싸우다 죽자는 클레오폰의 말대로 스파르테의 포위 공격을 막다가 죽기로 결의했습니다144.
5.125.뤼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에서 프로폰티스를 거쳐 보스포로스까지의 도시들을 통제하는 데, 더 이상 잔혹함을 보이지 않고 인정을 베풀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곳의 아테나이아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아테나이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지만, 식량이라면 어떤 것도 아테나이로 보낼 수 없게 막았습니다. 그런 다음 이오니아에 가서 아테나이의 동맹도시들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정리했는데, 오직 사모스만이 아테나이에 충성하여 내부 이탈자를 막기 위해 정적들을 모두 죽이고 농성에 돌입했고, 뤼산드로스는 마흔 척의 병력을 남겨 처리하도록 하고, 아이가이온 바다의 여러 섬들을 평정한 뒤, 전쟁 스무일곱 번째 해 가을이 한창일 때 아티케에 도착했습니다. 스파르테의 모든 군대가 아테나이 성벽 바로 밖에 있는 아카데메이아에 집결했는데, 아기스는 데켈레이아에서 병력 전부를 데리고 왔고, 파우사니아스는 펠로폰네소스에 남은 병력 모두를 데리고 왔는데, 스파르테의 왕 둘이 모두 한 전장에 모인 것은 근 백 년만의 일로 아테나이의 즉각적인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나 즉각적인 항복도 기습에 의한 즉각적인 공략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겨울이 오기 전에 포위 병력만 남기고 일단 각자 왔던 데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이 시작될 때, 전체 동맹 대표들이 스파르테에 모여 아테나이 처리 방법을 논의했는데, 테바이와 코린토스가 아테나이의 완전 해체를 주장하자, 아기스와 뤼산드로스도 스파르테 민회의 승인 없이 이에 동조하여, 아테나이의 파괴는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5.126. 아테나이는 데켈레이아로 사절을 보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기스에게 아테나이 성벽과 페이라이에우스 항구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제국을 포기하고 스파르테의 동맹에 가입하겠다고 했지만, 아기스는 스파르테로 가라고 했고, 스파르테로 갔더니 라코니아 경계의 셀라지아에 멈춰 놓고 그 제안을 거부하면서, 슬쩍 아테나이와 항구 사이의 장성을 허무는 조건을 흘렸습니다. 아테나이의 대응은 그 조건을 받아들이자는 아르케스트라토스를 감옥에 가두고, 클레오폰의 주도로 그와 같은 제안을 금지하는 결의를 통과시킨 것이었습니다. 클레오폰이 다시금 평화를 가로막는데 성공했고, 덕분에 아테나이는 좀 더 굶주려야 했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평화를 말할 수 없어, 그 누구도 평화가 가져올 내일에 대한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한 겨울에, 테라메네스가 나서 자신이 아테나이의 "고귀한 어떤 것"을 가지고 뤼산드로스에게 가서 평화협상을 해 보고 싶으니 전권을 달라고 민회에 제안했습니다. 클레오폰도 언제까지나 무작정 평화를 막고 있을 수만 없어, 민회는 "고귀한 어떤 것"에 대한 비밀 유지가 혹시 협상에 도움이 될까 해서 더 묻지 않고 승인했고, 테라메네스는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이미 사모스를 점령한 뒤 거기에 스파르테의 해군 기지를 갖추고 있던 뤼산드로스를 찾아가 협상을 시작하는 동안, 전쟁 스무일곱 번째 해가 저물어 갔습니다.
5.12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스무여덟 해째의145 축제는 축제라 할 수도 없었지요. 술도 행렬도 연극도 즐거움에 관한 것이면 어느 것도 거기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즐거움을 접고, 평화를 물리치고, 유약함을 미워하고, 굶주려 가면서, 그 성벽을 지켰지만, 희망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희망은 오늘을 딛고서 내일을 보게 하지만, 절망은 오늘에 짓눌려 어제와 다투게 합니다. 희망은 어제를 용서하고, 절망은 어제에 분노합니다. 절망으로 분노한 사람들이 지난날을 들출 동안, "고귀한 어떤 것"이 곧 희망임을 알아챈 사람들은 그 희망을 아테나이에 심어 줄 것이었습니다.
5.128. 새봄이 되어도 테라메네스로부터는 아무 소식도 없고, 배를 만들어 전쟁을 하기는커녕 양식도 실어 올 수 없고, 창칼을 들고 성벽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가래와 호미를 들고도 나갈 수 없고, 장성은 온전해도 들락거리는 것이 없고, 도시가 이 지경이 되었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그때, 처음의 공포가 이제는 절망이 되었고, 절망이 지난날을 들추자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분노가 사람들에게 지난날의 기억을 불러왔고, 그 기억은 가까운 데 있었지요. 천당과 지옥과 같은 아르기누사이와 아이고스포타미의 차이가 그 지휘관들의 경험과 능력의 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아르기누사이에서 대승을 거둔 여덟 장군들을 죽이자고 입에 거품을 물고 나섰던 칼릭세이노스와 나머지 넷은 재판에 회부되자마자 모두 도망가 버려 화풀이를 할 수 없었고, 곧바로 다음 기억에 따라 아르기누사이의 승리로 스파르테가 제시했던 그 좋은 평화의 조건을 걷어차고 전쟁을 택하여, 아이고스포타미에서 쫄딱 망하게 한 클레오폰을 찾아내어 재판에 회부하고 처형시켰습니다. 스파르테와의 평화가 민주정의 몰락과 그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민주정 지지자들은 클레오폰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도 테라메네스를 불평하며 평화를 반대하였는데, 이제 다수가 된 평화 지지자들이 그들을 또 재판에 회부하여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아테나이에서 재판이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로 쓰인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이때만큼 자주 대량의 정적을 처치하는 데 봉사한 적도 없었고, 그래서 재판의 정치 봉사는 앞으로도 아테나이에서 계속될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이제 아테나이에는 평화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5.129. 아테나이의 처리를 두고 아기스나 뤼산드로스가 테바이와 코린토스가 주장하는 아테나이 완전 파괴를 스파르테 민회의 승인도 없이 동조했던 것은 동맹들과 스파르테의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서였겠지요. 테바이와 코린토스가 왜 아테나이를 평지로 만들어 양이나 키우자고 하는지 모를 리 없는 아기스나 뤼산드로스가 테바이나 코린토스의 속셈쯤이야 스파르테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한번의 연설로 밝히면 되겠지만, 그보다 스파르테 내부의 과격파들이 문제여서, 그들을 달랠 수 있는 약은 시간 뿐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었는데, 그런 문제는 아테나이와 테라메네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모두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테나이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 평화를 이루는 협상은 사실 며칠이면 충분했고, 그 석 달은 뤼산드로스와 테라메네스가 만든 평화를 양쪽의 과격파들이 대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라도 받아들이게 하는 데 쓰이고 있었습니다.
5.130. 석 달 뒤, 전쟁 스무여덟 번째 해 봄이 오자 테라메네스가 돌아와 보고한 다음, 다시 사절단을 이끌고 스파르테로 가서 그곳 지도들과 논의하고 돌아온 그 이튿날, 민회에서 평화의 조건을 보고했는데, "장벽을 허물고, 배는 가지되 척수는 스파르테가 정하며, 제국은 포기하되 아티케는 유지하고, 추방자들의 귀환을 허용하되 정체는 아테나이 조상들의 것을 따르며,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 같은 적과 동맹을 가지되 스파르테에 따른다146"라는 것이었고, 민주정 지지자들이 얻은 것이 무어냐며 굽히지 않았지만, 많은 아테나이 사람들이 테라메네스가 가져온 평화를 받아들여 민회가 이를 승인했고, 이제 디카이오폴리스도 아티케의 시골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요. 그리고 한 달 뒤, 뤼산드로스와 함께 아테나이로 들어온 두 부류 가운데 스파르테 동맹들의 군대는 장성을 허물었고, 망명했던 아테나이 사람들은 과두파들과 합세하면서 뤼산드로스의 도움을 받아 아테나이에 새로운 정치 체제인 "30 명 참주정"을 세웠습니다. 이 새로운 체제는 처음부터 도시에 공포를 조성하여, 민주정 지도자들과 그 동조자들을 재판으로 죽이고, 부자들은 그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죽이기까지 하자, 많은 사람들이 테바이로 메가라로 도망치는 가운데, 전쟁 스무여덟 번째 해이면서 전쟁이 끝난 첫 번째 해가147 저물었습니다.
5.13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후 두 번째 해에도148 레나이아나 디오뉘소스 축제가 열리긴 했으나 연극의 경연은 없었습니다. 에우리피데스가 왕에게 누더기를 입혀 관객들의 동정을 산 뒤 그것을 본 부자들이 돈 없다고 징징거려서가 아니라, 실제 아테나이의 전체 분위기가 너무나 살벌해져서 모두들 숨만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봄이 되자, 뤼산드로스는 사모스의 포위를 끝장내러 그곳으로 갔고, 아기스도 데켈레이아에서 철수하고 스파르테로 돌아갔습니다. 아테나이에서는 크리티아스의 극악함은 날로 더해 갔고, 급기야 친구이자 중도파 대부인 테라메네스가 참지 못하고 그런 짓에 비난하자 그를 죽이고, 그들 내부의 중도파들마져 죽이는 한편, 뤼산드로스와 아기스에게 알키비아데스의 위험성을 상기시켜 페르시아의 프뤼기아에 숨어 거주하던 그를 파르나바조스의 수하가 찾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149. 잔혹한 참주정의 행태에 사람들의 적개심이 커졌고, 새로운 정치 체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름이 끝날 무렵 사모스를 평정한 뤼산드로스가 모든 배들을 각자의 도시로 보내 함대를 해산한 다음,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잡은 배들 중 열두척만 남기고, 나머지 심중노선들을 가지고 스파르테로 돌아가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크리티아스와 그 일파들은 뤼산드로스에게 체류 비용은 그들이 대겠다면서 스파르테가 군대를 파견하여 주도록 요청했고, 칼리비오스가 데리고 온 스파르테 군대가 그들을 보호해야 되었습니다. 테라메네스의 평화가 아테나이 사람들끼리의 살륙으로 번져 그 자신이 희생되었으며, 이제는 스파르테의 군대를 불러와, 그들의 비용 때문에 재산을 빼앗을 목적으로 또 생사람을 잡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예를 들어 아테나이에 거주하는 다른 도시 사람들을 족쳤는데, 시켈리아 출신인 뤼시아스의 아버지와 형들도 그렇게 당했고, 소크라테스더러 잡아오라고 한 살라미스의 레온도 그 때문에 잡아들이려 한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명령의 집행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참주정의 잔학한 주민 학살을 비난하며, 소 키우는 사람이 소를 죽여 없앤다고 젊은이들 앞에서 공공연히 떠들어 데는 바람에, 크리티아스와 칼리클레스는 그들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불러, 소크라테스에게 '앞으로는 아테나이의 젊은이들과 만나 대화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지경에까지 갔지요.
5.132. 그렇게 아테나이의 민심이 참주정으로부터 떠났고, 그렇게 돌아가는 참주정과 스파르테의 관계와 아테나이 민심의 변화를 면밀히 주시하던 사람들 중에서 테바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트라쉬불로스가, 크리티아스의 잔혹함에 질려 테라메네스의 부관직을 버리고 테바이에 망명해 있던 아뉘토스와 함께, 그해 가을 무렵에 그곳에 있는 아테나이 사람들을 규합해 칠십 명의 아주 작은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트라쉬불로스와 아뉘토스는 처음 그 칠십 명의 병력으로 파르네스 산의 퓔레 마을 언덕에 있는 한 요새를 점령했고, 참주정 사람들이 기병을 앞세워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그 요새를 둘러싸는 봉쇄벽을 쌓으려 했는데, 이틀 동안의 폭설과 퓔레 사람들의 기습으로 실패하자 결국 아테나이로 돌아오면서 대신에 스파르테 군대를 보냈고, 트라쉬불로스는 퓔레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야영 진지를 급습해 깨트린 다음, 퓔레 마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가담자들을 데리고 페이라이에우스로 가서 무니키아의 언덕에 진을 쳤을 때는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합세해 있었습니다.
5.133. 칼리비오스의 스파르테 군대와 아테나이의 기병들이 트라쉬불로스의 기습에 속절없이 당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크리티아스 일파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엘레우시스를 참주정의 거점으로 삼을 생각으로, 비우호적인 엘레우시스 주민들을 누르기 위해 호구조사의 명목으로 젊은이 삼백 명을 골라 죽이는 등 거점 확보를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트라쉬불로스가 페이라이에우스로 진출했다는 소식에 황급히 아테나이로 돌아왔습니다. 크리티아스는 스파르테 군대와 아테나이의 기병과 보병들을 동원했고, 이에 맞선 트라쉬불로스는 그곳 주민들까지 합세한 인원들 대부분이 무기가 없어 돌을 던져 싸우도록 준비했는데, 무니키아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벤디스 성역으로 가는 길을 가운데 두고, 드디어 아테나이에서도 도시의 두 정파가 지켜야 할 정치 체제를 위해 불퇴전의 기세로 맞붙었고150, 크리티아스가 돌에 맞아 죽고, 히포마코스와 카르미데스도 전사하는 등 사상자가 많이 나오자 일단 싸움을 멈추고 화약을 맺어 시신들을 서로 돌려주는 과정에서, 아테나이 사람들끼리 싸우지 말자는 말이 나오자, 참주정 휘하의 군대는 이런 말을 듣지 못하도록 일단 아테나이로 돌아갔습니다. 크리아스와 카르메니데스가 없는 아테나이는 그 이튿날 참주정이 뽑았던 삼천 명 회의를 열어 참주정 해체를 결의했고, 참주정 사람들은 엘레우시스로 피신해 거기서 뤼산드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스파르테는 자기들의 군대가 공격 받았으므로 당연히 뤼산드로스가 출병했고, 한편 파우사니아스는 뤼산드로스를 견제하기 위해 자기도 출병하겠다고 나섰는데, 그는 아테나이에 좀 관용적이어서 페이라이에우스에서 트라쉬불로스와 자신의 장군 둘이 죽는 일전을 겨룬 뒤151, 아테나이와 페이라이에우스 양쪽에 몰래 사람를 보내, 서로 화해하도록 종용했고, 참주정파는 새로운 참주 10명을 대표로 뽑아 화해를 성사시켰는데, 참주정 사람들 중 신변의 안전이 불안한 사람들은 엘레우시스로 옮겨 주기로 하고, 그 나머지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두 그들의 평소 생활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선에서 화해를 매듭 짓고, 파우사니아스와 뤼산드로스는 스파르테로 돌아갔으며, 그렇게 전후 두 번째 해도 저물어 갔습니다.
5.13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후 세 번째 해가152 시작되었을 때 아테나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공포로 인한 혼돈이 도시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화해라고는 했지만 크리티아스 일파의 극악함이 남긴 상처가 너무 컸고, 과격 민주파가 선동한 피해자들은 그들에 대한 징벌적 처단을 원했습니다. 도시의 정치 체제를 다시 민주정으로 돌려 놓는 데는 아무 이견이 없었으나, 참주정의 처리를 놓고는 자칫 헬라스의 다른 도시들에서 벌어졌던 정변 후에 생기는 보복의 악순환이 아테나이에서도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부자들이 돈을 잘 쓴다 해도 축제에서 연극을 상연하기는 어려웠지요. 그해에도 레나이아 축제나 디오뉘소스 축제에 연극 경연을 없었습니다. 축제가 무겁고 시들해졌습니다. 디오뉘소스가 다시 한번 하데스로가서 이번에는 소포클레스마져 데려와야 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5.135. 아테나이가 참주정의 시민에 대한 살륙에 정신을 놓고 있었을 때, 저는 크리티아스의 광기가 어떻게 테라메네스를 죽일 수 있는지를 보았으며153, 아테나이가 파우사니아스의 후의로 간신히 내전과 도륙의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 저는 과격파들이 참주정의 관련자들을 왜 죽여야만 하는지를 놓고 민회에서 다투는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참담한 일 가운데서 한 맑은 영혼이, 소크라테스는 평생 한 번도 행동으로 옮겨 본 적이 없는 선한 행동을 보이면서, 도시를 참혹으로 몰고 갔던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선의로 임하라고 훈계하는 것을 들었을 때, 테라메네스가 환하게 밝혀 놓으려고 그렇게 노력한 내일에 대한 희망의 불빛을 제가 본 사실을 여러분께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트라쉬불로스가 스파르테에 등 떠밀려 차려진 아테나이 두 정파 간의 협상장에서, 아테나이 시민에게 더 이상의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그리고 모두가 전통의 법을 지켜야 한다며, 30인 참주들과 함께 했던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말한 한마디 따끔한 훈계를 통해 그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깊은 지혜를 가진 철학자도 아니고, 인간의 할 바를 가르치는 도덕 교사도 아니고, 뛰어난 화술을 가진 정치가도 아니고, 다만 도시를 구하기 위해 함선의 선장으로 나서 전쟁을 수행했으나, 전쟁에 져서 희망을 놓아 버린 도시가 악랄한 정권에 의해 더욱 황폐해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칼을 들고 일어나 그 도시를 구했을 뿐인 한 전사의 훈계는, 숱한 사람들에게 정의와 용기와 덕에 대해 캐묻고 다녔던, 그리고 소치기가 소를 늘이기는커녕 줄이고 있는데도, 그 소치기가 바로 그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불러서 훈계하지 못하고 고작 사람들 만나면 뒤에서 궁시렁거리기나 하더니, 그 소치기에게 불려가 꾸지람이나 듣다가 하는 짓이 말꼬리 하나 잡아 비꼬기나 해 주고154, 그들이 나쁜 일을 시켰을 때 그 나쁜 일을 막지는 못하고 기껏해야 자기만 가담하지 않으면 되었던155 소크라테스는 말할 것도 없고, 십수 년전 그런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을 준 여러분이나, 오늘 이 자리에 저 아뉘토스와 저를 불러 세운 여러분도 꼭 다시 듣고 새겨야 할 교훈이기에 여기서 한번 옮겨 보려 합니다. "시내에 있는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 자신을 잘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려고 한 여러분의 무모함을 잘 반성한다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두 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정당할까요? 민중은 여러분보다 더 가난하나, 지금까지 돈 때문에 부정한 짓을 한 적이 없지만, 여러분은 다른 어떤 이보다 부유하면서도 부를 도모하기 위해 염치없는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정의감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여러분이므로, 혹 용기의 덕이라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그러다 보니 우리끼리 싸우지 않으면 달리 그 용기를 증명할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혹 우리보다 유복하다고 말씀 하시렵니까? 그래서 성벽, 무기, 돈, 펠레폰네소스 사람들 동맹도시156를 가지고도 그런 것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포위, 체포되는 상황을 초래했습니까? 아니면 혹시 스파르테 사람들 덕에 잘난 체한 것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 스파르테 사람들이, 무는 개의 목에 차꼬를 채워서 남에게 넘겨주듯이, 여러분을 성난 민중의 손에 넘겨 버리고 가게 된 것입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불구하고,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서약을 어기지 말고, 모든 일에 선의로 임하며 맹세를 지켜, 신들을 경외하기를 바랍니다."157
5.136. 그리고 저는 페리클레스와 클레온과 니키아스와 클레오폰의 민주정을 생각하였고, 아울러 헬라스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혹은 그 전쟁 때문에 혹은 그 전쟁의 빌미로 나타났던 도시들의 내전, 이를테면 에피담노스와 케르퀴라와 키오스와 사모스와 밀레토스 등등 헬라스 곳곳의 도시들이 겪어야 했던, 민주정과 과두정 간의 반복되는 정변과 참혹한 내전을 생각했습니다. 전쟁 전에 페리클레스가 그렇게도 자랑스러워하던 전체 헬라스의 규범이던 아테나이가, 전쟁에 패하고 나서, 이제 와서 다른 도시들의 전철을 밟아, 또 다시 일어난 정변으로 시민들이 같은 시민인 반대자들을 죽여야 한다니, 이것이 정말 페리클레스의 아테나이던가 싶어 한심했던 마음이 그의 이 훈계 한마디로 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5.137. 그리고 트뤼가이오스가 폴레모스가 떠난 하늘에 다시 신들을 잘 모셨는지, 트라쉬불로스가 아뉘토스와 같은 중도파 사람들과 함께 민회와 민주정 과격파들을 설득하여, 참주정에서 극단적인 행동을 보였던 몇 사람들만 빼고 모두 죄를 묻지 않는, 그래서 지난날의 일로 재판을 벌이는 일이 없도록하는, 일찌기 세상의 그 어느 도시도 행한 적이 없는 대사면을 실시하는 것을 보았을 때, 디오뉘소스에 맹세코, 저는 그때야 비로소 정치가 도시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158. 평소에 그렇게도 싫어하던 아테나이의 정치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선의는 반드시 신들과 닿아 있어, 그 다음 그들은 참주정이 그들과 싸우기 위해 스파르테 군대를 불러 들이면서 진 빚을 갚기 위해, 남의 재산을 빼앗는 방법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금씩 돈을 내는 방법으로 공적 자금을 조성했는데, 이 모금으로 여러분의 자존심과 스파르테로부터의 독립심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159. 아테나이에는 패전의 악몽이 서서히 걷혀졌고, 스파르테가 부과하려 했던 질곡도 떨쳐내면서, 아테나이는 자유와 독립을 되찾을 것이었습니다. 테라메네스가 찾았던 아테나이의 "고귀한 어떤 것"은 이제 트라쉬불로스의 정치로 아테나이에 희망으로 다시 피어났습니다. 한때 해전 승리의 희망이었던 테라메네스와 트라쉬불로스, 이 두 사람 덕분에 아테나이에 다시 희망이 생겼습니다. 공포와 절망 속에 분노의 광기로 서로 의심하고 서로 편을 갈라 죽이던 아테나이에, 안도와 희망이 회개와 화해를 가져다 주어,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에게 내일을 다시 꿈꾸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는 대사면 때문에 참주정 때 빼앗긴 재산을 되찾을 길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해져 버린 트라쉬불로스와 아뉘토스가 군소리 없이 대사면의 약속을 지켜 나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모두에게 대사면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 것도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대화합의 전후 세 번째 해도 저물어 갔습니다.
5.13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후 네 번째 해의160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 삼 년만에 다시 연극이 상연되었는데, 지난 해의 축제가 너무 무겁고 또 침울하길래 그냥 답답한 마음에 디오뉘소스가 하데스에서 소포클레스마져 데려와야 되는 것 아닌가 혼자말했었는데, 디오뉘소스가 그런 저의 혼자말을 들어 주신 덕분인지, 소포클레스의 손자 소포클레스161가 연출해 올렸던 그 연극이 바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였습니다. 그해는 그가 죽은지 다섯 해가 지난 뒤라 그는 그 작품을 적어도 다섯 해 이전에 썼을 텐데, 최근의 민주정 회복에 테바이가 아테나이 사람들의 궐기를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페이라이에우스를 포위했던 스파르테에 군대를 보내지 않아 아테나이에 도움을 준 것을 예언이라도 하는 듯, 오이디푸스가 콜로노스에 와서 테세우스를 만나 콜로노스에서의 자기 죽음을 잘 거두어 주기를 부탁하고, 그러면 신탁에 따라 아테나이에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아주 간단한 줄거리의 또 다른 테바이의 오이디푸스 집안 이야기로 만든 연극이었습니다. 사실 그 긴 전쟁이 엉뚱하게도 테바이의 플라타이아이 전복 기도로 촉발된 것을 감안하면, 페리클레스와 함께 초기의 그 전쟁을 치른 당사자로서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린 전쟁 때문에 생각보다 더 황폐해진 아테나이를 보며 생긴 테바이에 대한 회한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하면서, 죽을 자리를 찾는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자기의 고향인 아티케의 콜로노스에 와서 그의 운명에 대한 신탁을 마무리하도록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의 죽음을 노래하는 콜로노스 노인들의 코로스는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늙은 시인의 노래였으며, 고향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코로스는 바로 소포클레스 그 자신이었고, 천둥과 벼락이 몰아치는 숲속에서의 오이디푸스의 비장한 죽음은 그 오이디푸스에게 유난하게도 가혹한 운명을 걸머지도록 했던 신들과 그와의 화해 의식이었는데, 이것들로 늙은 시인은 전쟁이나 재앙으로 죽음을 늘상 삶의 옆에 놓고 살아야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물론 그 자신도 포함하여,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간들에게 다가올 죽음을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쟁과 재앙이 가져왔던 지나간 세월의 모든 죽음들에게 바치는 늙은 전사의 진혼곡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의 생전에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상연되는 것을 보았거나, 그의 희곡을 읽을 수 있었더라면 소포클레스의 장례식에서 올린 저의 조사는 이렇게 바뀌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클로노스의 노인들 코로스가 부르는 첫 번째 노래의 첫 구절162과 마지막 노래의 마지막 구절163로 말입니다.
'나그네여, 그대는 명마가 나는 곳, 다시 없이 아름다운 삶의 터, 이 하얀 땅의 클로노스에 왔습니다.'
'이제 저 손님이 죽은 자들이 가는 지하의 들판 길로 나서는 것을 아무도 가로막지 말기를, 영원한 잠을 주시는 이에게 기원합니다.'
5.139. 형편은 비극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저는 새로운 작품의 의욕을 잃고 극장 주변만 맴돌고 있었고, 에우폴리스의 뒤를 이을 것으로 보이던 피로니데스와 프뤼니코스마져 작품을 올리지 않아, 이제 희극이 시민들의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비극에서도 아이스퀼로스의 아들이나 조카를 빼고 이렇다 할 새로운 작가들이 나타나지 않아, 페리클레스 시절의 감동도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옛날 피로니데스 이전에 노래와 시 낭송으로 시작했던 비극이 그날 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노래보다 더 긴 대사로 관객과 대화하고, 또 그런 대화를 나누는 배우를 셋도 모자라 간단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코로스가 죽음의 노래를 부르는 그 장면을 위해, 오이디푸스와 테세우스 이외에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까지 모두 배우 넷을 등장시킬 만큼 무대 분위기로도 감정의 표출을 충실하게 전하려는 새로운 수법을 도입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으로 끝, 축제에 온 사람들은 티모테우스의 디튀람보스 유행가만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취향의 소포클레스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전쟁이 바꾸어 놓은 사람들의 감동을 느끼는 대상이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이끌어 나갈 힘 있는 에우리피데스 같은 작가가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케도니아에 갔던 아가톤마져 그해에 죽어, 관객들의 달라진 입맛에 영합할 능력을 가진 비극작가도 없는 아테나이의 디오뉘소스 극장은 곧 바람 소리만 윙윙거릴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황폐화시킨 극장에 다시 관객들로 채울 날이 과연 올 수 있을런지요?
5.14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다오뉘소스 축제에 다시 연극이 올랐듯이, 아테나이도 패전과 정변 그 이전의 전통과 법대로 움직여 나갔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당장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전쟁이나 정변으로 인한 내일에 대한 불확실함이 없어진 만큼, 이제 조금만 참고 견디면 옛날의 생활로 자리 잡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도시를 활기차게 하였습니다. 그해 새봄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르데이스의 퀴로스는 그의 형 크세르크세스 2 세가 페르시아의 왕위를 이어받은 것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킬 준비에 들어갔고, 스파르테는 퀴로스의 요청에 응해 군대를 보내는 등164, 계속 전쟁에 휩싸여야 했지만, 아테나이는 모처럼 그런 전쟁에서 벗어나, 비록 스파르테가 할당해 준 열두 척의 배지만 그것을 밑천으로 무역을 다시 시작하고, 여기저기 황폐해진 도시를 복구하며 조용하게 내실을 다질 수 있어 좋았습니다.
5.141.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생업과 도시의 일에 매달려 있을 때, 아뉘토스만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알키비아데스나 크리티아스처럼 과두정의 장점을 평소에도 늘 주장하던 크세노폰이, 따로 돈벌이가 없는 전쟁 귀향자들이 퀴로스의 반란에 용병으로 참가하러 가는 판에, 퀴로스에게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아뉘토스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든 것은 그 크세노폰이 퀴로스에게 가는 문제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상의하고165 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민주정의 안정을 걱정해야 하는 아뉘토스의 염려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엘레우시스로 옮겨 간 참주정파들이 아테나이로 쳐들어가 내전을 일으킬 목적으로 용병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아뉘토스와 민주정 지지자들이 쫓아가 용병 모집 주도자들을 죽였고, 나머지 참주정파들에 대해서는 트라쉬불로스가 아테나이에 있는 그들 가족들을 통해 그들이 다시는 정변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 대신 아테나이도 과거를 들추지 않는 선에서 그 문제를 매듭지었습니다. 한편 퀴로스를 돕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갔던 헬라스 지원군은 봄이 되자 사르데이스를 출발했고, 한 여름에 에우프라테스 강을 건너 바뷜로니아를 지났으며, 가을이 시작될 때쯤 에우프라테스 강변 쿠낙사에서 첫 전투를 벌였는데, 그 전투에서 퀴로스가 전사해 버려 우왕좌왕 흔들렸고, 왕의 편에 서 있던 팃사페르네스의 중재 함정에 빠져 다수의 헬라스군 장군들이 처형을 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겨울이 되어서야 흑해 쪽을 목표로 회군을 시작했다166는 소식들이 전해졌습니다. 이렇게 아테나이와 페르시아에서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전후 네 번째 해도 가고 사람들은 편안히 새해를 맞을 것이었습니다.
5.14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후 다섯 번째 해는167 디오뉘소스 극장에서나 프뉙스에서나 전체 헬라스에서도 눈에 띄는 특별한 일 없이 조용하게 지나 갔고, 전후 여섯 번째의 레나이아 축제나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에서도 여전히 티모테오스의 디튀람보스 유행가만 인기를 끌고 있었을 뿐, 연극은 여전히 관객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극장은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데 계속 실패하고 있었지만, 봄이 되어 들려온 크세노폰의 페르가몬으로의 귀환 소식은, 아직도 민주정의 정착이 걱정스러운 아뉘토스에게는 크세노폰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보아야 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아뉘토스로 하여금 과두정의 뿌리를 뽑고 민주정을 굳건히 세울 새로운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5.143. 크세노폰이 참여한 헬라스의 퀴로스 지원군은 퀴로스가 전사하고 나서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스파르테 출신 클레아르코스와 헬라스 각지에서의 동료 장군 다섯과 그들의 휘하 지휘관 스물이 팃사페르네스의 초대에 응했다가 그에게 속아 모두 죽고 나자, 크세노폰은 나머지 용병 지휘관들의 투표로 전체 헬라스 용병들의 지휘관이 되었고, 그들을 안전하게 헬라스로 데리고 가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는 거기까지 오는 동안 현지 보급 물자들을 모두 소진해, 온 길로는 더 이상 보급 물자를 구하며 갈 수 없다고 판단한 클레아르코스의 판단을 좇아, 에우프라테스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 바다와 만나는 쿠나다에서 인근의 티그리스 강 하류의 싯타케로 갔고, 거기에서 티그리스 강의 상류로 따라 올라가며 아르메니아를 지나, 흑해의 남동쪽 트라페조스에 도착한 것이 전후 다섯 번째 해의 새봄이 오기 전이었고, 그들이 보스포로스 뷔잔티온에 나타난 것은 그해 가을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그들은 멸시와 냉대 속에 뷔잔티온 도시 밖에 머물며 보스포로스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고, 전후 여섯 번째 해168 새봄까지 돈을 얻기 위해 트라케의 세우테스의 요청으로 트라케 내부 문제 해결에 나서, 도움은 주었으나 돈을 받지 못하다가 힘들게 그 대가를 받아 트로아스로 건너 갔고, 봄이 되어 그들은 페르가모스로 갔는데, 그것은 아나톨리아의 해안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 문제로, 퀴로스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아나톨리아 지방 총독으로 다시 부임해 온 파르나바조스나 팃사페르네스와 티격태격하던 스파르테의 티브론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아 용병을 모집하고 있던 차라, 세우테스의 중개로 티브론에게 고용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그들을 이끌고 거기까지 온 크세노폰도 아테나이로 돌아오지 않고 스파르테의 티브론의 휘하에 들어갔지요169. 어릴 적 벗 프로크세노스가 퀴로스와 친하게 해주겠다고 보낸 편지를 받고 이 년 전 봄에 사르데이스로 가서 퀴로스를 만나, 그의 용병으로 페르시아로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다시 헬라스로 돌아온, 소크라테스가 직접 내게서 배우라며 골랐던 제자, 아테나이의 크세노폰이 이제 스파르테 군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5.144.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런 크세노폰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아뉘토스의 눈에는 그 크세노폰이 크리티아스나 카르미데스처럼 스파르테의 등에 업혀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뒤집을 잠재적 정변 유발자로 보였고, 그래서 아뉘토스는 민회에서 그 옛날 스파르테로 간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나이에 대해 무슨 짓을 했었는지 상기시켜 가며, 이제 스파르테의 군인이 된 크세노폰을 고발하고, 민회가 그를 아테나이에서 영구 추방시키도록 했습니다170. 이렇게 해 놓고도 마음을 놓지 못하던 아뉘토스는, 그때까지도 그전처럼 크리티아스나 알키비아데스나 크세노폰와 같은 부류의 젊은이들을 모아 한결같이 헛바람을 넣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아테나이에서 쫓아내어야 할 다음 목표로 찍었습니다.
5.145. '자신은 직접 정치에 나서지 않지만 정치를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걸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171고 주장하는 그 소크라테스가 길러 낸 면면들이 아테나이에 저질렀던 해악은 이루 말을 다 할 수 없을 지경인데, 반성은커녕 한 술 더 떠 이리저리 몰려 다니며 정치적 출세만 따지는 젊은이들에게 요즘에도 '아는 것이 힘'이라며, 그래서 '정치를 아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며, 자기나 클레온처럼 가죽을 다루는 기술자거나 휘페르불로스나 클레오폰처럼 저자 거리의 건달이거나 간에, 그 어떤 사람이라도 민회에서 표만 많이 얻으면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아테나이의 민주정에 대해, '병을 아는 기술자인 의사에게 환자를 맡기지 않고, 병을 모르는 사람을 의사라고 뽑아 환자를 맡기는 꼴'이라고 경멸하며, 당나귀를 말이라고 속이는 연설 솜씨에 홀리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만이 한 도시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로, 민주정이 그런 사람들 대신 민심에만 영합하는 엉터리를 지도자로 뽑기 때문에, 나쁜 정치 체제라는 인상을 은연 중에 풍기면서, 마치 민주정이 타도의 대상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는 소크라테스를172 아테나이의 젊은이들로부터 격리시켜 놓기로 결심했습니다. 대사면 이전의 정치적 행태로는 재판에 회부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평소 자신은 도시의 문제에는 흥미가 없고, 오로지 도시민이 가져야 할 덕목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 왔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인 행태를 고발하여 재판으로 엮기가 어려웠으므로 아뉘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일상적인 행태, 다시 말해 젊은이들을 만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나 도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아는 척하는 하는 것을 들통내어 그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젊은이들이 아테나이의 관습을 따르는 경륜 있는 사람들을 우습게 알도록 하는 것으로 젊은이들을 오도하고, 자기에게는 따로 신이 어떤 일에 대해 지시를 해 주는 신기神氣가 있다느니 하는 것들을 엮어 전가의 보도인 불경죄로 고발하고, 그 재판으로 그를 아테나이에서 격리시키기로 작정했습니다173.
('6. 찰학자의 문제'에서 계속)
-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나이의 정치 권력은 귀족들의 손에서 멀어져 갔다. 알키비아데스가 이어갈 수 있었으나, 그의 성격적인 결함이 그 기회를 걷어 차 버렸고, 그런 귀족 정치의 공백에 새로운 정치 집단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농업으로 부를 쌓은 귀족들이 전쟁으로 부의 원천을 잃어가는 동안, 물품 제조와 교역으로 귀족들에 버금가는 부를 쌓았고, 소피스테스들에게 교육을 받아 지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보이는 집단이었다. 페리클레스 사후 대표적인 두 정치가를 보면, 니키아스는 은광에 노예를 파견하여 돈을 모았고, 클레온은 가죽 제품 생산과 교역으로 돈을 모은 신흥 부자 출신들이었다. [본문으로]
- 전쟁 당시 소크라테스의 시민적 행적은 세 차례의 참전과 한차례의 재판 참여만이 알려져 있고, 전쟁을 겪는 데 대한 그의 철학적 행적에 관해 따로 알려진 것은 없다. 플라톤의 대화편들 가운데서 몇 편은 헬라스 내전 기간 동안을 무대로 삼고 있기는 해도 소크라테스의 전쟁에 관한 철학적 행적을 보여 주지는 않고 있다. [본문으로]
- 에우리피데스는 전쟁 중 '"메데이아"BC431현존'를 필두로 유작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BC405현존'까지 모두 17편의 작품을 발표하여, 그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두 디오뉘시아 연극 경연에서는 25세 이상의 시민에게 출품 자격을 주는 연령 제한이 있었지만, 출품 경쟁자가 비교적 많았던 비극 경연에서는 잘 지켜졌으나, 작가 층이 얇았던 희극에서는 에우폴리스나 아리스토파네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연령 미달의 작가도 출품하여 경연에 참가하였는데, 이때 작가들이 연출자의 이름으로 출품하여 연령 제한을 피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칼리스트라토스는 연극 전문 연출자로,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이후로도 그의 이름으로 경연에 참가하면서 그에게 연출을 맡기고 있다. [본문으로]
- BC427 [본문으로]
- 여기서의 '"잔치에 온 손님들"'에 대한 해설 내용은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의 첫 파라바시스에서(528-532) 약간 맛을 보여 준 내용과, 여러 단편들이 전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해 본 것이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의 사후에도 스파르테 침공에 대비한 아티케 소개疏開 작전은 계속되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따로 봉급을 주지 않았다. (지주들의 소작료는 15% 정도였다.) 다만 도시에 필요한 경우 한시적으로 특별한 용도를 위한 세금을 걷었다. 처음 세금은 주로 소유한 토지를 기준으로 매겼으나, 점차 교역물에 대해 관세를 붙였다. 에이스포라는 전쟁 비용을 염출하기 위한 세금이었는데, 아테나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두 번 이 세금을 걷었다. [본문으로]
- 같은 책,제3권42-48 가운데서 발췌. [본문으로]
- 전쟁 포로나 인질을 억류하고 있으면, 해당 도시나 가족들이 거금의 보상금이나 보석금을 물고 데려 갔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해도, 노예로 팔았지 대규모 학살로 처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클레온은 페리클레스의 사모스 경우보다 더 강력한 본보기를 동맹도시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디오도토스에 의해 손상된 지도력의 훼손을 감추기 위해서도 그런 살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케르퀴라는 그들의 식민도시 에피담노스가 정파 간의 내전을 도외시하다가 코린토스의 개입을 허용했고, 이어서 코린토스로부터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아테나이를 불러들였는데, 그들은 아테나이의 정치 체제 민주정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헬라스 내전이 터지자 코린토스는 케르퀴라에 에피담노스와 같은 정파 간 내전을 촉발시켰는데, 그들 정파들은 각각 아테나이와 스파르테를 끌어들여 서로 피로써 보복하였고, 결국 도시는 피폐해지고 말았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아테나이의 제국주의와 패권 추구 이외에, 헬라스 내전의 또 다른 원인으로 보는 것이 정치체제 문제이다. 한 도시에서 어떤 정치체제를 가질 것인가, 예를 들어 민주정인가 과두정인가 때문에 그 도시의 정파들이 내전을 일으키고, 그중 민주정파의 집권이 패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아테나이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스파르테가 개입하면서 불가피해진 다툼이 헬라스 전체의 내전으로 번졌던 이유로 들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에피담노스에 이은 케르퀴라의 도시 내전이다. 투퀴디데스는 케르퀴라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일들에 대해 16장에 걸쳐 아주 상세하게 전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소회도 절절하게 풀어 놓고 있다.(그의 책,제3권70-85 참조.) [본문으로]
- 플라톤,'크리톤'49e이하. [본문으로]
- BC426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아카르나이 사람들'379-382. 이 장면에서 디카이오폴리스는 보통 코로스장이 맡는 작가의 대변인 역을 자기가 맡아, '"바뷜로니나 사람들"' 때문에 클레온에게 당한 수모에 대해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토로한다. [본문으로]
- 전쟁을 결심할 때, 전쟁이 3년은 끌 것이라고 예측했던 페리클레스는 전쟁 비용으로 년 2천탈란트로 상정해(평균 200척의 해군 유지비 16백, 육군 유지비460, 등 총 2060탈란트), 6천탈란트 넘게(은화 6천, 금은괴 5백, 기타 신상에 입힌 도금 40, 등 총 6540탈란트) 확보하고 있었고, 개전 당시 아테나이는 관세등 세수입 년 4백, 동맹의 공납과 지원 수입 년 6백, 총 년 수입 1천탈란트 정도였다. 3년을 예상했던 전쟁은 6년이 지났고, 역병의 재앙으로 과외 비용까지 써야 했기 때문에 개전 초 확보했던 6천탈란트의 비축분도 바닥이 났고, 전쟁으로 인한 무역의 축소는 아테나이 자체 세수를 줄였을 뿐만 아니라, 동맹도시로부터의 공납과 지원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테나 자체 수입으로는 전쟁세를 받는 방법과, 밖으로는 동맹들에게 공납금을 올리는 방법과 조공을 바칠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 함선 한 척을 한 달 운용하는 비용이 1탈란트(6천드라크마)이므로, 노꾼들 전체의 하루 품삯은 200드라크마 정도인데, 삼단노선의 경우 노꾼이 170명 정도였으니까, 노꾼들의 하루 품삯을 1드라크마 정도였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그 1드라크마의 품삯은 아테나이 수련공의 하루 일당과 같은 돈이고, 노꾼들은 한번 배를 타면 보통 8개월은 고용되었으므로, 바로 전쟁이 그들을 먹여 살리고, 전쟁이 바로 그들의 생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정치 기반으로 삼는 정치가들은 평화를 주장할 수가 없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아카르나이 사람들'524-532. 디카이오폴리스는 에우리피데스를 만나 얻은 텔레포스의 넝마를 걸치고(393-487),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자기 변론을 늘어 놓는데(496-556), 그 변론 가운데 아스파시아의 창녀 이야기가 나온다(524-532).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아카르나이 사람들"'480-625. [본문으로]
- '"아카르나이 사람들"'에는 두 번의 파라바시스가 있는데, 디카이오폴리스와 라마코스 간의 논쟁이 끝난 뒤의 첫 번째 파라바시스는 그의 전작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내용을 맛보기로 들려 주며, 아이기나에 관련된 자신의 이야기와, 클레온이 음모와 술수로 핍박하는 것에 대해 불퇴전의 각오를 말하자, 코로스의 에피레마는 무우사들이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강림하기를 청하고, 이어지는 코로스장의 파라바시스는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상대로 송사를 벌여, 노인들이 재판으로 고통 받는 세태를 고발하며, 재판에서 노인들이 특별한 변호를 받을 수 있도록 도시가 조치해 줄 것을 요구하고, 안티에피레마는 노인에 대한 공정하지 못한 재판에 대해 코로스장의 주장을 옹호하는데, 코로스장은 젊은이는 젊은이들끼리, 늙은이는 늙은이끼리 다툴 수 있게 하라고 한 뒤, 다시 연극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 파라바시스는 디카이오폴리스가 그의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려고 라마코스가 보낸 노예를 쫓아내고 집으로 들어간 뒤 시작되는데, 에피레마는 송가도 없이 개인적인 휴전이 가져온 상품의 매매를 칭송하고, 코로스장은 반전反戰을 말하면서 전쟁의 악행을 포도나무 받침대를 불지르는 것이라 비난하는데, 안티에피레마가 그 휴전이 가져다 준 호화로운 요리들을 나열하자, 코로스장은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와 올리브나무를 심는 평화로움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연극으로 돌아간다.(같은 극,626-718,971-999.) [본문으로]
- 권력기관에서 조사한다며 오라 가라 성가시게 불러 놓고는, 가면 본체만체 구석에서 오래 기다리게 한 다음, 겨우 몇 마디에 이것 저것 증명하라면서 그런 것 있으면 가져오라고 돌려 보낸 뒤, 또 부르고 하다가, 무죄 날 것 뻔히 알면서 기소하여 재판 받느라 고생시키는 형벌이 심신불편형인데, 형벌은 판사가 주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재판까지의 절차를 이용해 권력기관이 교묘하게 고통을 주는 형벌을 말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클레온의 고발로 재판을 받는 고통을 받았지만, 정작 그가 벌금형이나 다른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소문이 서로 화해했다고 난 때문인지, 아리스토파네스는 '"벌들"'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의 안티에피레마에서(1284-1291) 그런 소문에 대해 해명하고 있고, 그 뒤에도 기회만 있으면 클레온에 대한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본문으로]
- BC425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4권2-23,26-41 참조. 투퀴디데스는 이 퓔로스 사건을 38장이나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정작 데모스테네스의 퓔로스 축성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 단지 그의 즉흥적인 발상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데모스테네스의 퓔로스 축성은 치고 빠지는 해전에만 의존하고 더 이상 아테나이 밖에 거점을 만들지 않는다는 페리클레스 전략(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144(1))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런 아테나이의 전략 수정은 스파르테에게 해군의 증강이라는 기존의 전략 이외에도 장기 원정과 장기 주둔이라는 육군의 전략 수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헬라스의 내전은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어 가게 되었다. 데모스테네스의 이런 전략은 시켈리아 원정에 나섰을 때도 나타났는데, 그때는 스파르테 본토인 라코니아 남부 해안을 공격하여 기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스파르테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50년 평화조약과 동맹조약을 깨고 전쟁을 속개할 명분을 주었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는 평화를 위해 간단한 요구 사항을 아테나이에게 세 번에 걸쳐 제시하였는데, 첫 번째가 개전 전인 BC432 스파르테의 사절들이 아테나이에 가서 했던 메가라에 대한 포고령 해제 요구였고, 두 번째는 BC430 역병으로 곤궁에 처하자 페리클레스의 만류를 뿌리치고 스파르테에 사절을 보내 화평을 타진했을 때, 스파르타가 내놓은 아이기나 반환 요구였으며(페리클레스는 개전과 동시 눈에 가시라던 아이기나를 점령하고 섬의 친스파르테 사람들을 추방해 버렸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BC425 스팍테리아에서 잡혀 간 포로의 송환과 퓔로스 요새의 반환과 퓔로스에서의 철수(펠로폰네소스에서의 아테나이 거점 확보 포기) 요구였다. [본문으로]
- BC424 [본문으로]
- 스파르테는 스팍테리아 섬에 갇힌 400여 자국과 동맹의 병사를 구하기 위해 약간의 수모를 각오하고도 전쟁을 종식시키려 60척의 함선을 담보로 내놓고 아테나이를 방문했고, 그들이 아테나이로 잡혀 간 이후에도 그들의 신변 안전을 염려해 아테나이에 대해 종전과는 다른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매년 여름 정례적으로 아티케를 침공했던 일을 BC424에 중단한 것이다. [본문으로]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9권7(37). 데모크리토스의 방대한 저술 목록은 같은 책(46) 참조. [본문으로]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2권5(45).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회상'에서 그의 자연학에 대한 기억은 단 한 줄도 적지 않았고, 플라톤 역시 그의 어느 대화 편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자연학에 대한 경력이나 관심을 전하지 않고 있다. [본문으로]
- 플라톤,'향연'221a-b,'라케스'181b,'소크라테스의 변론'28e. [본문으로]
- BC423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직업 연극 연출가로,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의 연출을 직접 맡지 않고, 전문 연출가 필로니데스에게 맡겼을 만큼 '구름'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가 사용한 소크라테스 학원의 이름은 '프론티스테리온phrontisterion,think-tank'인데, '꾀주머니 학원'으로 옮겼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전작 '"기사들"'에서 대단원을 시끌벅적한 코로스의 노래와 춤을 곁들인 흥겨운 엑소도스가 아닌, 데모스와 순대장수인 아고라크리토스 사이의 긴 대화(1335이하 끝인 1408까지 73행)로 끝내었는데도, 클레온을 쫓아내고 데모스가 다시 주인 노릇을 하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이 충만했기 때문에 경연에서 일등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반해, '"구름"'의 대단원은 엑소도스의 흥겨운 노래와 시끌벅적한 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관객이 받은 성취의 기쁨도 없고, 소크라테스에게 보복하는 스트렙시아데스를 보는 씁씁함만 남았기 때문에 그것은 희극의 본연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결말지은 것이었다. 이 이후 아리스토파네스는 코로스의 노래나 코로스의 노래를 유도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전통적인 희극의 마감 수법을 견지하였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기사들'526-537. [본문으로]
- 지금 희곡으로만 전해지는(노래의 선보와 춤의 무보는 전해지지 않았다.) '"구름"'은 비록 미완성의 개작품이지만, 소크라테스를 희극적 대치물로 뽑은 희극 감각과, 약한 논리로 강한 논리를 제압한다는 소재로 신과 정의에 대한 전통적 가치가 왜곡되는 사회상을 고발하는 비판 정신은, '구름' 코로스들 노래의 서정성과 함께 젊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정수라 부를 만한 작품이지만, 당시의 관객들이 즐기던 희극과는 소재나 구성이 너무나 동떨어져, 관객이 친근함과 재미를 느끼기에는 너무나 낯설고 심각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개작된 '"구름"'의 파라바시스에서 당시 관객들이 좋아했던 그의 경쟁자들의 작품 수준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데,('"구름"'534-562), 그들은 그때까지도, 주인공의 거대한 모조 남근으로 웃기는 일, 대머리를 놀리는 일, 코르닥스 춤을 추며 돌아다니는 일, 저질의 익살에 관객이 웅성거리면, 갑자기 열변을 토하면서 옆 사람을 다짜고짜 쳐서 그 웅성거림을 가리는 일, 햇불을 들고 뛰어 들어와 와와하고 고함치는 일, 따위로 관객을 웃기려 하고, 같은 소재로 재탕 삼탕 하는 일, 표절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이 세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힘이 빠졌거나, 미천한 출신임을 드러내어 인신공격하는 일, 따위로 희극을 쉽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는 그런 희극이 재미있다고 여기는 관객은 자기 작품을 보지 말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은 지혜로운 작품을 보여 주고 있으니, 자기의 작품을 보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말벌들"'의 파라바시스(1043-1059)에서도 새로운 것을 찾아 말하는 시인의 발상을 관객의 것으로 만들어, 레몬과 함께 옷장 안에 넣어 두면, 지혜의 향기가 날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 BC422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말벌들"'을 희극의 한 전형으로 보고, 그 구조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프롤로고스 1-135, 제1에페이소디온 136-229, 파로도스 230-393, 아곤394-748, 제2에페이소디온 749-1008, 제1파라바시스 1009-1121, 제3에페이소디온 1122-1264, 제2파라바시스 1265-1291, 제4에페이소디온1292-1449, 제5에페이소디온 1474-1515, 엑소도스 1516-1537.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말벌들"'1071-1090,1102-1121. [본문으로]
- BC411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 두 주전파가 전쟁을 고집한 이유에 대해, 브라시다스는 전쟁을 통해 얻는 명성 때문에, 클레온은 전쟁을 통한 비리 은닉과 탄핵 방지 때문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전쟁이 지도자들의 개인적 이유로 계속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5권16(1) 참조.)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 두 도시의 화의파가 평화의 길로 나선 이유로, 니키아스는 전투에서 진 적이 없는 행운을 유지하면서, 도시의 간난을 끝낸 지도자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고, 플레이스토아낙스는 19년 전 아티케로 쳐들어 갔을 때 페리클레스의 뇌물 공세로 철군했다는 혐의로 망명했다가 최근 복권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끊이지 않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평화를 얻어 무사한 날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며, 평화 역시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펠레펀네소스 전쟁사'제5권16,17(1) 참조.) [본문으로]
- 플레이스토아낙스를 니키아스의 상대로 내세운 스파르테의 지도자들은 결코 전쟁을 선반에 올려 놓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테나이가 암피폴리스의 탈환이 평화의 목표였다면, 스파르테의 목표는 스팍테리아의 포로들의 송환이었을 뿐이었다. [본문으로]
- BC421 봄의 평화조약과 여름의 동맹조약을 끝으로 투퀴디데스는 전쟁의 처음 10년의 기술을 마감한 뒤, 이어서 겉으로 드러난 6년 10개월의 소강을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간의 전쟁 기간에 포함해야 하는 이유, 즉 조약을 위반하여 벌인 만티네이아 전쟁과 에피다우로스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트라케와 아테나이의 적대 행위들과 보이오티아와 아테나이의 열흘마다 갱신했던 휴전조약 등의 이유를, 그의 책 제5권25,26에서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가 BC421 여름에 스파르테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아테나이가 10년 간의 전쟁과 4년의 역병으로 재정은 고갈되었고, 수입원도 황폐해졌는 데다가, 무엇보다 도시 전체가 너무 지쳐서 우선 좀 쉬고 싶었을 것이라고는 이해가 가지만, 그럼에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니키아스의 결정인데, 니키아스는 장군으로서 도시를 위해 전쟁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전쟁으로 패권을 지켜야 도시를 번성케 할 수 있다는 페리클레스도 아니었고, 전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릴 수 있었던 클레온도 아니었다. 니키아스 역시 오랜 전쟁에 지쳐, 전쟁에서의 불패라는 그 조았던 행운을 더 이상 시험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 2년 전인 BC423 아테나이 민회는 클레온의 주도로 이번에는 하루 밤을 지난 번복도 없이 스키오네를 결딴내기로 결정했었다.(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4권122(5).) 이 결정을 보고 아리스토파네스는 뮈틸레네 이후에도 케르퀴라나 스키오네 등 다른 섬들이나 도시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꾸준히 반대해 온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평화"'751-761 참조. [본문으로]
- BC421 여름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의 조약을 체결하자마자 2년전 클레온이 민회에서 결의를 받아 둔 대로 스키오네로 쳐들어가 살륙을 저질렀다. 이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제5권32(1)에서 겨우 한 문장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헤로도토스가 밀레토스를 함락과 참혹한 결말에 대한 이야기로 그의 책 '역사'의 최고 절정이라 할 마라톤 전투를 다룬 제6권의 도입부 전체로 할애하고 있는 것과, 투퀴디데스 역시 뮈틸레네에 대한 응징 건에서 그의 책 제3권의 전반부 절반을 활애하며, 아테나이가 클레온에 반대해 그들을 살린 사실을 전한 것에 비교해 보면, 아테나이가 자행한 스키오네에 대한 참혹한 행위에 대해, 바로 그 투퀴디데스가, 겨우 한 문장으로 지나가다 한 마디 하는 투로 전하는 까닭이 암피폴리스를 지키지 못한 그의 불명예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나이가 유리한 상황에서 동맹조약까지 맺어 주자, 아테나이가 정말 평화를 바라는 줄 알았다. [본문으로]
- 실제 스파르테는 그전에 이미 자유를 주었던 도시 소유 노예들과 이들을 합쳐, 엘리스와 다툼을 벌이던 레프레온과 엘리스와의 경계에 정착시켰다. [본문으로]
- BC420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5권43(2,3).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전쟁 열두 번째 해인 BC430 여름에 처음 알키비아데스의 행적을 소개하였는데(그의 책,제5권43(3)), 그의 첫 행동은 니키아스의 평화를 깨기 위해 아르고스에 개인 밀사를 보낸 것이었다.(그리고 플루타르코스,'알키비아데스전'도 참조.)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5권31,34,49-51. 엘리스는 고대 헬라스의 3대 경기 대회 중의 하나이면서, 근대 올림픽 경기의 원형인 고대 헬라스 올륌피아 경기의 주최도시였다. 엘리스와 스파르테의 라코니케 경계의 작은 도시 레프레온은 아카르디아와의 싸움에서 엘리스의 도움을 받고, 올륌피아의 제우스에게 소작료를 지불해 왔었는데, 헬라스 내전이 터지자 지불을 중단했고, 이에 엘리스가 압력을 가하자 레프레온은 스파르테에 중재를 요청했고, 엘리스는 반발하여 레프레온을 약탈했고, 스파르테는 중무장 수비대를 보냈는데, 이에 엘리스가 스파르테와의 동맹을 깨고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는 한편, 스파르타에게 올륌피아 경기 기간에 퓌르코스 요새를 공격하고 레프레온에 중무장병을 보내는 등 휴전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벌금을 부과했고, 스파르테가 불복하자 스파르테의 경기 참가 및 제우스 신전 참배를 금지시겼다. [본문으로]
- 이 글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열셋만 다루기로 하다 보니, '처음으로 경연에 작품을 올리지 않은 해'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앞으로도 이 글에서 출품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해는 그 열셋 가운데 어느 것도 발표되지 않은 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는 44편(어떤 이는 47편이라고도 한다)을 작품을 썼다 하고, 은퇴 후에도 아들을 위해 두 작품을 대필했다고 할 정도인 걸 보면, 그들 작품이 단절되었을 뿐 실제로는 계속해서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 BC419 [본문으로]
- BC418 [본문으로]
- BC417 [본문으로]
- BC416 [본문으로]
- 그날 밤의 모임에 대해서는 플라톤의 '향연'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구름"'553-562. BC421 '"평화"'와 함께 아테나이 디오뉘시아에서 발표된 에우폴리스의 '"마리카스"'(마리카스marikas는 거리에서 호객하는 남색 매춘 소년을 가리킨다. 램프 장사를 하며 시장의 건달 노릇을 하던 휘페르볼로스를 마리카스로 놓고 비꼰 작품이었다.)에 대해 격이 떨어지고, 자신의 '"기사들"'을 개악한 것이라며 타박하고 있는데, 사실 '"구름"'은 이태 전에 발표된 작품이므로 에우폴리스에 대한 타박은 나중 그것을 개작하면서 넣은 것이다. [본문으로]
- 도편추방은 그 대상이 주로 도시의 집권자나 그의 정적으로 그들 정책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경우거나, 정치 세력이 비대해지고 명망이 높아 참주가 되려 하거나, 정변을 일으킬 우려가 높은 인사이어야만 했는데, 즉 그 당시 집권자였거나 유력자였던 니키아스나 파이악스나 알키비아데스 정도가 투표의 대상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에게 날아온 화살을 아직 도편추방 대상자가 아닌, 이제 정계에서 목소리를 높히던 휘페르볼로스에게 돌려 버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졸지에 니키아스급 정치 거물이 되어 버린 휘페르볼로스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사모스로 망명해 갔지만, 이 잘못된 도편추방 적용으로 이 뒤로 다시는 아테나이에서 도편추방 투표가 실시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정치재판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 BC415 알키비아데스는 이미 거대한 제국 확장을 기획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니키아스의 평화라고 말하는 헬라스의 소강小康은 물론, 클레온도 감히 깨트리기 주저했던 새로운 세력 확장을 꾀하지 말라는 페리클레스의 경고까지 무시하며 나서는 건곤일척의 도발일 것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시켈리아 원정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십 년전 니키아스가 굴복시키지 못한 멜로스를 굴복시키는 것을 아테나이 시민에게 보여줌으로써 그의 원대한 전쟁 기획을 실마리를 찾으려 했을 것이었지만, 멜로스는 아테나이나 스파르테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던 계륵이었고, 그래서 니키아스 이래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는데, 폴레모스의 절굿대 알키비아데스가 이미 절구통에 든 헬라스에 시켈리아까지 넣고 찧기 위해 우선 멜로스를 넣고 빻아 본 것이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5권85-113. 조공을 바쳐 살륙을 피하라는 아테나이 앞에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자유와 전통을 지키겠다는 멜로스의 결단은 이즈음 아테나이가 전쟁을 통해 얻어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적나나하게 보여 주고 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5권84-114,115(4),116(2)-(4) 참조. [본문으로]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2권5(22),제9권1(11,12). [본문으로]
- 헤라클레이토스(540?-480?)는 크세르파네스로부터 배웠다고 하지만 그는 독학파라는 점에서, 재물이나 명성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점에서, 틀렸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유사점이 보이지만, 헤라클레이토스가 에페소스의 왕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을 멀리하고 고독한 삶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젊었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다가 늙어서는 모두 다 안다고 했다는 점에서, 남의 무지를 지적하는 방법에 있어서, 짧게 분명하지 않는 어투를 썼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자연에 대하여'란 책을 내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와 닮은 데가 없다. [본문으로]
-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언제나 정론가이므로, 플라톤이 만든 대화극 '프로타고라스'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사론가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이 아리스토파네스의 개작된 '"구름"'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희한하게도 소크라테스(정론을 펴며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만드는 철학자들의 대표로서)와 프로타고라스(사론을 펴는 소피스테스들의 대표로서)의 논쟁은 다른 많은 소피스테스들과(그래서 이 대화극의 부제副題가 '소피스테스들'이다.) 그들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특히 프로타고라스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어린 히포크라테스 앞에서 벌어지는데, 이 장면은 어쩐지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서 '정론'과 '사론'이 스트렙시아데스가 '사론'에게 배우게 하려고 데리고 온 페이딥피데스 앞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과 많이 닮아 보인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 '"구름"'의 888행과 889행 사이에는 코로스가 배치된 흔적은 남아 있으나 그 내용이 빠지고 없어, 그 이유를 대개 같은 극 705행 이하 3행의 코로스 음송 부분이 없어진亡失 것처럼 없어졌다고 간주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정론'과 '사론'의 논쟁이 끝난 1104행과,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가 다시 등장하는 1105행 사이에도 코로스가 빠져 있다는 점이 간과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부분은 코로스가 없이 바로 '정론'과 '사론'의 역활을 한 배우 둘이 나간 뒤를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를 맡은 배우 둘이 곧바로 등장하고 있어, 이 연극의 출연 배우가 넷이 되어야 하는데, 연극 전체를 통해 볼 때 무대에서 대사를 가지고 등장하는 배우는 둘이면 충분히 다른 역들을 번갈아 맡을 수 있어서, '정론'과 '사론'을 맡는 그 장면만을 위해 따로 배우 둘을 더 배치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코로스가 배치되어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불이 난 학원의 지붕을 허는 크산티아스와 불 속에서 고함지르는 학생 1,2,3과 카이레폰 등 다섯과, 스트렙시아데스와 소크라테스 모두 일곱이 한 무대에 있지만 나머지 다섯은 정식 배우가 아닌 보조역들이 잠시 때울 수 있는 역활일 뿐이다.) 그래서 배우가 넷일 수 없고 배우 둘이 출연하여 나머지 역들을 번갈아 맡는 연극이라 한다면, 의상과 가면을 갈아 입기 위해 '정론'과 '사론'이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로 바뀌는 그 장면 사이에는 반드시 코로스가 배치 되어 있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희극의 전형으로 중요한 역활을 하는 논쟁agon 장면은 '"구름"'에서의 '정론'과 '사론'처럼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파로도스에 이어진 첫 번째 에페이소디온(필요하다면 두 번째 에페이소디온까지 가서라도)이 아주 자연스럽게 코로스의 중간 매개를 받아 가며(이때 배우들이 가면과 옷을 갈아 입는다) 이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구름"'의 '논쟁' 장면은 전혀 그런 장치가 없다는 말이어서, 적어도 이 '논쟁'이 앞뒤의 에페이소디온과 연결되는 부분에 관한 한, 아리스토파네스가 개작한 그 부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개작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본문으로]
- 개작된 '"구름"'은 논쟁agon에서 제대로 된 소피스테스나 철학자가 정론 역활을 맡아 사론의 소크라테스와 붙는 것이 아니라, 의인화된 정론과 사론이 논쟁을 담당함으로써, 아테나이에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희극적 풍모에 비교될 만한 정론의 희극적 대치 인물을 찾아, 그 둘의 논점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진 희극적 풍모의 대결이 보여 줄 극적 활력을 보여 주지 못해 희극이 밋밋해지고 말았다는 점과, 그리고 코로스의 노래들이 좀더 아름다운 시들로 채워지지 못했다는 점과, 두 번의 파라바시스가 모두 너무 전작의 저평가에 대한 작가의 섭섭함을 표출하는 데에 치중되어, 개작의 이유와 개작된 부분을 전작과 비교하여 주면서 관객들에게 이런 관점에서 개작의 의도를 봐 달라고 진정으로 요청하는 작가의 작품 해설이 빠진 점, 이 세 가지 미흡함으로 개작이 전체적으로 미완성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전쟁사'제6권9-14. 특히 12(2)에서 드러난 니키아스가 알키비아데스를 보는 눈, 즉 장군이 되기에 너무 젊은 사람이 장군이 된 게 기뻐서, 빨리 장군 노릇 해 보고 싶어서, 시켈리아 원정을 주장하는 사람이며, 경마로 혼자 멋 부리는 비용을 대느라 장군직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도시를 위험에 빠트릴 사람이며, 개인의 사치를 위해 공금을 횡령할 사람이라고 하는 평가를 주목하라. [본문으로]
- 같은 책,제6권13(1). [본문으로]
- 같은 책,제6권16-18. 특히 니키아스의 인신공격을 받아치는 16(2,3,4)에서 드러난 알키비아데스의 자기 합리화 기준들이 보여 주는 그의 가치관, 이를테면 올륌피아 경마 경기에서 개인으로서는 제일 많은 7마리를 내보내 1,2,4등의 성적을 내고, 그외에도 연출을 잘하여 아테나이의 실력을 실제 이상으로 평가 받도록 만든 것이 명예스러운 일이고, 아테나이에서 코로스 비용을 대는 등 여유 있는 시민이 하는 공적의무를 수행했을 뿐인데 우쭐댄다는 비방과 함께 당연히 시민들로부터 시기를 받았지만, 누가 자기 돈으로 자기도 위하고 도시도 위하는 일을 한다면, 다른 도시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음은 아주 쓸모 있는 것이고, 자부심을 가질 이유가 있는 사람이 남을 대등하게 대하지 않는 것은 결코 부당하지 않으며, 불운한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듯 성공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해도 감수해야 한다는(억울하면 대등한 사람이 되어 있는 수밖에 없다.) 등의 가치관에 주목하라. [본문으로]
- 같은 책,제6권18(6).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서, BC411 헬라스 내전 스무한 번째 해의 여름에 아테나이가 퀴노스세마 해전에서 승리하고, 알키비아데스가 가을에 사모스로 돌아온 일까지 기록한 뒤, 그후로 기록을 중단했을 때까지, 모두 네 권의 여러 부분에 걸쳐 쉰여섯 장章에서 알키비아데스의 행적을 밝혔는데, 그 가운데 단 한 번도 알키비아데스가 자기를 버리면서 진정 아테나이를 위해 일한 경우를 들지 못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 원정군의 시켈리아에서의 행적은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6권 30장 이하, 제7권 전체,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의 '알키비아데스전'과 '니키아스전'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 BC415 [본문으로]
- 주로 과격한 성향을 나타내는 젊은이들이 모인 작은 정치 결사. [본문으로]
- '키몬의 아들 테살로스는 클리니아스의 아들 알키비아데스를 고발한다. 알키비아데스는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두 신을 다음과 같이 모독했다. 그는 자기 집에서 두 신의 형상을 꾸며 놓고 신성한 제사 의식을 흉내냈다. 그때 그는 자신을 제사장, 플라티온을 햇불 드는 사제, 테오도로스를 전령이라 칭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비법을 전수 받은 사람들이라 했다. 이것은 에우몰피타이, 케리케스, 엘레우시스 신전 사제들의 여러 율법을 깨트린 행동이다.'(플루타르코스,'알키비아데스전')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새들"'1274-1285. 페이세타이로스는 '구름뻐꾸기나라'를 세우고 난 뒤, 인간들에게 전령을 보내 새로운 나라의 개국을 알렸고, 그 전령은 인간들이 페이세타이로스를 존중해 보낸 것이라고 하며 금관을 들고 왔는데, 인간들이 금관을 보낸 이유인 즉,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아테나이에 유행하던 스파르테식 행세와 소크라테스를 닮는 병에서 벗어나, 새벽부터 부지런한 새들의 행세를 배우게 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새들"'을 시켈리아 원정 중인 BC414에 발표했는데, 시켈리아 원정에 나서 있는 도시의 젊은이들이 머리를 기르고, 곤봉skytale을 들고 다니며, 스파르테식 풍조를 따르는 것과, 또 알키비아데스 덕분인지 소크라테스가 당시 아테나이에서 젊은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데다가, 그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행세까지 닮으려 하는 풍조를 함께 엮어, 도시에서 없애야 할 병폐로 지적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6권61(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조사위원회가 헤르메스 신상 훼손자들이 조무래기 헤타이리아의 소행이라 밝히자, 아테나이 사람들은 안심하게 되었다고 전했다.(그의 책,제6권60(5).)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평화"'67-70,76-78.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새들"'685-704. [본문으로]
- 오비디우스,'변신 이야기I'(이윤기 번역,민음사,pp264-305) 제6부'신들의 복수',6장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편과 제7부'영웅의 시대',1장'이아손과 메데이아' 편을 비교 참고하라. [본문으로]
- 소포클레스가 맨 처음 비극의 코로스를 열둘에서 열다섯으로 늘렸다 하나,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에우리피데스였는데, 에우리피데스의 모방자 아리스토파네스가 코로스의 숫자를 두 배로 늘인 까닭은 코로스를 반을 나누어 노래하면(특히 파라바시스에서의 에피레마와 안티에피레마) 시끌한 분위기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BC414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레폰네소스 전쟁사'제6권105(1),제7권18(2)-(3). [본문으로]
- BC414 여름의 일이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뤼시스트라테"'111-121,144,190. [본문으로]
- '"뤼시스트라테"'는 뤼시스트라테와 칼로니케 두 여자의 대화로 극이 시작된다(1-68). 이어서 아티케에서 뮈르리네가 다른 여자들과 함께 등장하고(69-77), 라코니케에서 람피토까지 보이오티아와 코린토스에서 온 여자들과 함께 등장하여(78-92), 프롤로고스부터 네 명의 배우와 너댓 명의 보조역이 무대에 등장한 가운데 시작된다. 이어지는 파로도스는 배우들이 퇴장한 가운데 노인들로 구성된 코로스가 먼저 오케스트라에 들어와 두 번의 스트로페를 주고 받으면서 시작되는데, 아마 프롤로고스에 등장했던 배우 가운데나 보조역들이 노파 코로스로 분장하고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아닌가 판단되는데, 노파들의 스트로페는 한 번으로 전체 파로도스의 길이를(254-386)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에우리피데스의 현존 작품 19편(최근에는 '"레소스"'를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보는 추세인데, 그렇다면 18편이고, 사튀로스극 '"퀴클롭스"'를 제외하면 그의 비극 작품은 17편이 된다.) 중에, 전쟁이나 그 후유증으로 겪는 비극적 상황을 무대에 올린 것은 아가멤논의 집안 이야기 다섯 편(엘렉트라BC413,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BC413,헬레네BC412,오레스테스BC408,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BC405유작), 오이디푸스 집안 이야기 두 편(탄원하는 여인들BC420,포이니케의 여인들BC409), 트로이아의 프리아모스 집안 이야기 세 편(헤카베BC425, 안드로마케BC419?,트로이아의 여인들BC415), 그리고 헤라클레스 집안 이야기 한 편(헤라클레스의 아이들BC429), 모두 열한 편인데, 모두 펠레폰네소스 전쟁 기간 중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에우리피데스가 과연 그때그때의 전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소재를 골라 작품을 만들었는지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본문으로]
- BC413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니키아스전'에서, 포로들 가운데는 에우리피데스 덕분에 구원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며, 헬라스에서 이민 간 사람들보다 시켈리아 원주민들이 에우리피데스의 시를 더 좋아해서, 에우리피데스의 시를 읊거나 써 줄 수 있는 여행자라도 오면 서로 연락할 정도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아테나이로 돌아온 포로들 중에는 에우리피데스의 시를 읊어 음식물을 얻거나, 노예에서 풀려난 사람도 꽤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시켈리아 사람들이 에우리피데스의 시를 얼마나 좋아했는가 하는 일화 하나도 전하고 있는데, 언젠가 카우노스의 배가 해적에 쫓겨 시켈리아의 어떤 항구에 피항을 부탁하자 거절했다가, 선원들이 에우리피데스의 시를 알고 있다고 해서 피항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 시켈리아에서 잃은 아테나이 연합 함대의 삼단노선은 모두 216척이었는데, 그 가운데 아테나이 것만 160척이었고, 아테나이에는 수리창에 든 함선들을 포함하여 백여 척이 있었다. [본문으로]
- 하그논(생몰연대 미상)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장군으로, 그와 함께 사모스의 반란 진압, 개전 초의 포테이다이아 포위 등에 출전하였고, 그 뒤로도 지휘관으로 포테이다이아와 칼키디케를 원정하였다. 나중 니키아스와 함께 스파르테와 맺은 평화조약과 동맹조약에 서명하기도 했다.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항복 조건에 대해 협상했던 테라메네스의 아버지이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니키아스의 평화로 쉬는 동안 꾸준히 저축하여, 시켈리아 원정 전에는 가용 재원을 거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수준인 5000탈란트까지 확보하고 있었으나, 원정 후인 BC413 가을에는 겨우 500탈란트로 줄어 들었는데, 앞으로 지출은 물가가 올라 가고, 전쟁 과부들과 고아들을 도시가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늘어나야만 했다. [본문으로]
- 원로회의의 원로들은 중도파들이어서, 원정의 실패로 인한 혼란의 와중에서 아테나이의 정치체제를 바꾸려 시도하는 모험을 인정하지 않았고, 도시의 능력을 오로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스파르테의 침공 대비에 집중하였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전쟁 열하홉 번째 해 겨울의 기사에서 처음으로 페르시아의 아나톨리아 쪽 두 총독의 이름을 올리고 있다.(그의 책,제8권5(4);이오니아 쪽의 뤼디아 지역의 수도 사르데이스의 팃사페르네스, 같은 책,6(1);헬레스폰토스 쪽의 프뤼기아 지역의 수도 다스키리온의 파르나바조스) [본문으로]
- BC412 [본문으로]
-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쪽 두 총독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들 영지에 있던 헬라스 사람들을 스파르테에 사절로 보내 이 투키디데스를 통해 처음 헬라스의 내점에 처음 이름을 올린 것은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 실패가 국제적으로 널리 퍼진 뒤, 아테나이의 동맹도시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전쟁 열아홉 번째 해인 BC413 겨울부터였다 [본문으로]
- BC479 스파르테의 파우사니아스가 헬라스 연합군 11만으로 플라타이아이 평원에서 마르도니오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군 20만(헤로도토스가 그의 '역사' 제7권 테르모퓔라이 전투에 임한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 원정군 규모를 전투 병력만 264만여이고 지원부대까지 합해 528만여, 호왈號曰 600만이라 했으나, 보급부대를 합해 30만 정도였을 것인데, 크세르크세스의 사르데이스 복귀에 10만 정도가 따라갔다고 보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는 20만 정도가 참가했던 것으로 본다.)과 맞섰을 때, 스파르테는 병력 4만으로 우익을 맡았는데, 그 가운데 중무장 보병은 스파르테 동등인 5천과 페리오이코이(도시 외곽 거주 반자유인) 5천으로 채운 1만이었고, 나머지 3만은 경무장으로 1만의 중무장 보병을 지원하는 헤일로타이였다. 그런데 BC418 만티네이아에서 아르고스 연합군과의 전투에서는 중무장 보병 삼천오백에 페리오이코이만으로는 전투 보조원을 채울 수 없어 브라시다스의 원정군에 들어 있었던 헤일로타이까지 삼천오백을 채워 겨우 칠천의 병력을 동원할 정도로 국력이 쇠퇴해져 있었다. [본문으로]
-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2세는 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궁정모반을 제압하고 BC424 왕위에 올랐으나, 지역들(시리아,뤼디아,메디아,이집트)의 반란으로 국력이 쇠잔해져 갔고, 아나톨리아의 프뤼기이와 뤼디아가 헬라스의 내전에 개입하여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유지해 주고 있었으나, 이집트가 반란에 성공하여 BC410 페르시아로부터 독립하는 등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조는 쇠망의 길로 접어 들고 있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8권48(2). [본문으로]
- 아테나이에 과두정이 수립된 것은 정작 과두정을 수립할 수도 있는 정치적 역량을 가진 알키비아데스가 도망가서 없고, 또 나머지 니키아스, 데모스테네스, 에우뤼메돈 같은 전쟁 지도자들도 모두 시켈리아 원정에서 죽어 없어진 후의 일이다. [본문으로]
- BC411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99,130-172. [본문으로]
-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파리스가 트로이로 데려간 헬레네는 단지 환영幻影이었을 뿐이고, 진짜는 이집트로 피난가 있었다)'는 난파당해 이집트로 온 메넬라오스를 만나, '죽지 않았지만 죽었다는 말을 듣는 꾀'로 테오클뤼메노스와 이집트로부터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헬레네"'1049-1082), 같이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에우리피데스는 자기 대신 테스모포리아 축제에 갔다가 정체가 폭로나 붙잡힌 그의 인척이, 팔라메데스의 죽음을 노櫓에 적어 아버지에게 알린 오이악스의 기지에 영감을 얻어, 사람들이 신전에 소원을 적어 올린 명패에다 구조를 요청하는 글을 적어 뿌렸을 때는 소식이 없다가(그 인척은 에우리피데스가 '"팔라메데스"'의 흥행이 실패한 것이 부끄러워 반응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 인척이 코로스장의 파라바시스 동안 궁리한 끝에, 에우리피데스의 최신작 '"헬레네"' 중의 헬레네 행세를 하자, 메넬라오스로 나타나 그 인척을 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수많은 계책이 바닥나지 않는 한, 숨을 쉬는 한,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혼자 떠나 버린다.('"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846-927) 에우리피데스와 그 인척이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로 만나는 에페이소디온 102행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무려 22행이나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에 나오는(8행은 헬레네와 메넬라오스가 만나는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들을 따오거나 고쳐서 쓰고 있다. [본문으로]
- 트라쉬불로스thrasybulos(?-BC388)는 함선의 선장으로서나 장군으로서 전장에서 아테나이를 위해 많은 공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정치가가 아니면서도 두 번의 과두정을 두 번 다 무너뜨리고 민주정으로 회복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확실한 민주정 지킴이였다. 특히 그는 민주정 복귀 후 벌어졌을 정치보복을 두 번 모두 막아, 아테나이에서는 케르퀴라와 같은 살륙이 정변 때마다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실망하고 말았지만, 알키비아데스에게 아테나이로 돌아올 기회를 줌으로써 알키비아데스가 또 다시 아테나이에 폐해를 끼치도록 만들어 준 것과, 아르기누사이 해전에 테라메네스와 함께 선장 자격으로 참가했을 때, 승리한 열 명의 장군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아 그들이 더 이상 아테나이의 전력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은 옥의 티였다. 그를 아리스토파네스식으로 소개하면 이렇다. '이번 동맹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가 이 동맹을 체결하려 했을 때 동맹을 맺지 않으면 우리 도시가 멸망하리라고 사람들은 말했지요. 그러나 동맹이 체결되자 사람들은 못마땅해 했고, 그래서 동맹을 지지한 정치가들이 급히 망명했지요. 함대를 진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빈민은 찬성하고 부자들과 농민은 반대하겠지요. 한때 여러분과 코린토스인들은 서로 불만이었지요. 지금은 그들이 호의적이니 여러분도 호의적이어야 한다고 말해요. 아르고스인들은 멍청해요. 그러나 히에로뉘모스는 현명하지요. 우리에게도 구원의 미광이 비치고 있으나, 거기에 자신이 초대받지 않았다고 해서 트라쉬불로스는 화를 내고 있어요.''그는 빈틈없는 남자군요.'('"여인들의 민회"'193-204) '나도 갈래요. 때마침 야생 배가 음식을 내 뱃속에다 봉쇄해 주나 봐요. 트라쉬불로스가 라코니케인들에게 말했던 봉쇄는 아니겠죠? 아니긴요.'(같은 극,354-357) '하지만 우리는 가난과 구걸이 자매 간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너희 말대로라면 디오뉘시오스와 트라쉬불로스는 같은 사람이겠네.'('"플루토스"'549-550) [본문으로]
- 테라메네스theramenes(?-403)는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정치적으로는 두 번의 민주정 파괴에 가담한 온건 과두정파의 모습을 보였는데, 과격하고 극단적인 과두정파의 살상을 동반한 공포정치를 막지 못하였고, 결국 크리티아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협상가로서 그는 스파르테의 리산드로스를 앞장세워 테바이나 코린토스 같이 아테나이를 멸망시키려는 세력들을 막고 아테나이를 존속시키는 항복조건을 만들어 내었다. 다만, 트라쉬불로스와 함께 선장으로 참전했던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승리한 열명의 장군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아 아테나이가 그들을 잃게 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를 아리스토파네스식으로 소개하면 이렇다. '이거야말로 지성과 분별력을 지닌/세상을 두루 돌아다닌 자에게/어울리는 일이라네/그려 놓은 초상화처럼/한 가지 자세로 서 있느니/언제나 유리한 쪽으로/굴라가는것 말이오/더 편한 곳으로 돌아서는 것/그거야말로 제대로 된 인간과/테라메네스의 재주를 타고난 자에게/어울리는 일이오.'('"개구리들"'533-541) '테라메네스라고? 그는 영리하고 매사에 약삭빠른 자라 곤경에 맞닥뜨려도 그 옆으로 벗어나 있고, 주시위가 잘못 던져져 궁지에 빠져도 거기서 빠져나오곤 하지.'('"개구리들"'968-970) 그리고 플루타르코스는 '리키우스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라며 '아테나이에는 애국심이 강하여 민중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셋 있다. 니케라투스의 아들 니키아스, 멜레시아스의 아들 투퀴디데스(역사가가 아닌 페리클레스의 정적), 하그논의 아들 테라메네스가 그들이다. 그러나 맨 나중에 말한 테라메네스는 앞의 두 사람에 비해 좀 떨어진다. 그는 케오스섬 태생의 외국인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진짜 아테나이 시민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정치인으로서 지조 없는 행동을 해서 코토르노스(어느 발에도 맞는 장화)라는 별명까지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8권75(2). 이때 처음 역사에 등장하는 트라쉬불로스(?-BC388)는 이때부터 페리클레스와 클레온과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와 클레오폰과 크리티아스의 유산을 떠맡아, 아테나이의 운명을 책임지게 되는데, 그는 함선의 선장이자 전장에서의 장군이었을 뿐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훌륭히 아테나이를 두 번의 내우와 헤아릴 수 없는 외환에서 굳건히 지켜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새들"'120-145. 에우엘피데스는 후투티로 변한 테레우스에게 그들이 원하는 온화한 도시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데, 후투티는 쾌적한 도시로 '귀족이 다스리는 것aristokratia'을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눙치자(125), '스켈리오스의 아들(그의 아들 아리스토크라테스는 아리스토크라티아와 발음이 비슷하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아테나이의 장군이었다.)은 싫다고 대답하고(126), 그들이 찾는 온화하고 쾌적한 도시를 그런 도시에서의 일상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본문으로]
- 안티폰과 프뤼니코스의 스파르테 협상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고, 테라메네스는 재빨리 이런 민심의 변화를 읽고, 과두정에서 발을 빼어 또 다시 민주정으로 변신한다. [본문으로]
- BC411 9월 아테나이의 민주정은 다른 도시에서 온 노예를 시켜 정적 프뤼니코스를 암살하더니, 정권을 탈환하자마자 그 프뤼니코스를 재판에 회부해 부관참시하는 것으로까지 과두정을 대하는 태도가 거칠어져 있었음에도, 아테나이 정파들 간의 내전에 준하는 살륙은 피해 갔다. [본문으로]
- 에우폴리스가 죽은 해(BC411)인 전쟁 스무한 번째 해에는 헬레스폰토스에서 벌어진 해전은 퀴노스세마 해전 뿐이었으므로, 그가 그곳 해전에서 죽었다고 판단했다. [본문으로]
- 이 시점, 즉 알키비아데스가 사모스로 돌아오고, 팃사페르네스가 스파르테의 여러 오해들에 대한 해명을 위해 이데 산을 넘어 헬레스폰토스로 가기 전에 에페소스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이야기를 끝으로(제8권109) 투퀴디데스는 그의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간의 전쟁'이라는 책을 쓰는 작업을 중단하였는데, 그는 BC431 전쟁 발발 이전의 사정부터 BC411 가을까지의 일들을 총 8권 916장의 기록으로 남겼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이 투퀴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간의 전쟁'이란 책을 언제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정확히 투퀴디데스가 기록을 중단한 전쟁 스무한 번째 해(BC411) 가을부터 기록을 시작한 것으로 보아, 그가 그의 책을 읽고 계속해서 기록해 나가기로 작정했을 것이라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크세노폰의 역사서 '헬레니카'는 다짜고짜 '그런 다음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때'로 시작하여, '나는 여기까지 적는다. 다음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가 적게 될 것이다.'라며 끝낼 때 까지, 총 7권 38장으로 BC411 가을부터 BC369 여름까지 49년 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크세노폰은 그의 작업이 투퀴디데스식 역사 기록을 계승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따로 발문이나 서문의 성격을 띤 글을 넣지 않았고, 끝 맺음 역시 누군가가 자기의 기록을 계승해 갈 것으로 믿고 따로 맺음말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BC411 [본문으로]
- 이들의 작품들이 모두 단절되고 없어, 이들에 대해서는 이름과 그들이 희극작가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기에 활동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본문으로]
- BC410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1권1장23. 플루타르코스,'알키비아데스전' [본문으로]
- BC410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이 해 BC409의 연대를, 투퀴디데스와는 달리(투퀴디데스,'펠레폰네소스 전쟁사'제4권26(1)), 전통적인 연대 표기법인 '제93회 올륌피아 경기의 해(BC409/408), 스파르테는 에우아르키포스가 에포로스이던 해, 아테나이는 에욱테몬이 아르콘으로 있던 해'로 표기하였다.(크세노폰,'헬레니카'제1권2장1.) [본문으로]
- BC408 [본문으로]
- BC407 [본문으로]
- 1.크세노폰은 알키비아데스가 페이라이에우스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배 주위에 몰려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상륙하지 않고 동정을 살펴 친지들이 그 속에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배에서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헬레니카'1.4.13,18,19) 2. 플루타르코스 역시 알키비아데스가 항구에 도착한 뒤에도 배에서 내리지 않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다가, 그의 사촌 에우리프톨레무스가 친구과 친척들을 데리고 나온 것을 보고서야 조심스럽게 배에서 내려올 정도였다고 전한다.('알키비아데스전'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1.5.1-1.5.7, 플루타르코스,'리산드로스전'. [본문으로]
- Bc406 [본문으로]
- 소포클레스는 에우리피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연습 중이던 배우와 코로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기 위해 상복으로 갈아 입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 알키비아데스의 몰락은 그의 참모 하나가 저지른 별로 치명적이지도 않은 노티온 해전에서의 작은 패전으로 야기되었는데('헬레니카'1.5.11-14), 아테나이는 이 패존의 책임을 물어 즉각 그를 총지휘관직에서 해임하고, 열 명의 장군들을 뽑아 사모스로 보냈으며(같은 책,1.5.16), 사모스의 해군들도 그를 신임하지 않고(같은 책,1.5.17) 모멸감을 안겨 주어(플루타르코스,'알키비아데스전'), 고립무원 속에 그가 케르소네소스의 한 요새로 은신함으로써 몰락이 완결되었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I.6.24 [본문으로]
- 아르기누사이에서 15척의 배로 우익의 한 편대를 맡았던 프로토마코스와, 15척으로 우익의 또 다른 한 편대의 트라실로스를 받치는 우익 제2선을 맡았던 아리스토게네스이다. [본문으로]
- 아르기누사이에서 15척의 배로 좌익의 한 편대를 맡았던 아리스토크라테스, 그 뒤를 받치던 제2선의 페리클레스(아스파시아가 낳은 페리클레스의 아들), 15척으로 또 다른 좌익 편대를 맡은 디오메돈, 그 뒤를 받치던 제2선의 에라시니데스, 15척으로 우익의 한 편대를 맡았던 트라쉴로스, 그리고 프로토마코스의 우익 편대를 받치던 제2선의 뤼시아스, 등 모두 여섯 장군들이다. [본문으로]
- BC405 [본문으로]
- '"개구리들"'의 재상연 공연이 실제로 언제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 연극의 재상연을 아테나이가 허락했다는 말은 디오뉘소스(아리스토파네스)가 에우리피데스보다 아이스퀼로스를 하데스에서 데리고 나온 판단을 아테나이 사람들이 찬성했기 때문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부음을 들은 소포클레스가 연습 중이던 코로스와 배우들에게 상례를 올리도록 할 정도로 아테나이에서 훌륭한 비극작가로서 인정 받고, 사랑도 받았던 한 비극작가의 죽음이 주는 아쉬움과, 그런 망자에 대해 일반적으로 쏠리는 예우 성향이 없었을 리가 만무했을 정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이 에우리피데스보다 아이스퀼로스가 더 필요하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시국관에 찬성했던 것은, 에우리피데스보다, 다시 말해 매사에 발랄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의지, 즉 뜨거운 개개인의 의지보다, 아이스퀼로스의 의지, 다시 말해 매사에 신중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의지, 즉 차가운 도시의 의지가 도시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이끌고 풀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프롤로고스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뤼시스트라테"'에서처럼(이때 무대에 나오는 배역은 몇 명 되지 않아, 귿이 코로스가 아니라도 보조역들을 쓸 수도 있다) '"개구리들"'에서도 코로스 중에서 프롤로고스에서도 배우로 나오게 해, 두 가지 역활을 맡겼는데(이때 '개구리들'은 몇 명의 보조역이 아닌 정식 코로스 숫자 정도라 보아야 타당할 것이므로 그들은 배우 보조역들이 아니라, 분명 코로스들이 맡아야 한다), 파로도스 전에 오케스트라가 아닌 무대에 올라 선 코로스는 개구리 가면을 쓰고 디오뉘소스 뒤에 늘어섰거나, 아니면 디오뉘소스 뒤로 휘장을 치고 그 휘장 뒤에 서서, 본디 코로스 역활인 엘레우시스 입교자들의 복장을 한 채 개구리 역활을 했을 것이다. 카론의 구령에 맞춰 디오뉘소스가 배를 저어 호수를 건너 하데스로 가는 동안, 호수에 있는 '개구리들'은 디오뉘소스와 '서정적인 대화(같은 극,209-267)'를 나누는데, 다시 말해 에우리피데스식 서정적인 운률로 대화를 나누되, 그 내용은 절대 서정적이 아닌 개구리 울음 소리와 욕설로 채워 놓은 대화를 나누게 하는데, 꽥꽥거리기만 하는 이 코로스의 노래는,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 같은 출중한 비극작가가 없는, 비극 무대의 질 떨어진 비극 운율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식 희극적 대치물이자 비아냥이다. [본문으로]
- 전쟁이 가져다 준 사회 변혁 중 신변의 변화는 비단 스파르테의 네오페리오이들 뿐만이 아니라, 아테나이에서도 아르기누사이에 참전한 노예들에게 자유를 줌으로써(크세노폰,'헬레니카'1.6,24) 심화되었는데, 이런 사회 구조의 변화에 대해 아리스토파네스는 디오뉘소스와 그의 노예 크산티아스가 세 번이나 서로 역활을 바꾸는, 바꾸어 말해 서로 신분을 바꾸는 상황을 만들어 희극적 대치물로 쓰고 있고, 그 밖에도 극의 대사 가운데 수시로 신분 변환에 대해 언급하면서(같은 극,190,693-696),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그런 신분 변화가 가져다 주는 사회 구조의 변화에 긍정적으로 대응하도록 분위기를 잡고 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헤라클레스가 하데스에 갔었을 때 저질렀던 일 때문에, 헤라클레스로 변장한 디오뉘소스가 곤혹을 치르거나, 환영을 받을 때마다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가 헤라클레스의 변장을 바꾸어 모면하거나(같은 극494-500,579-588), 대접을 받도록(522-533), 희극적 상황을 설정해 둔 다음, 세 번의 신분 전환 끝에 하데스 문지기 아이아코스에게 붙잡혀 둘 중 누가 진짜 신인지를 가리는 작은 시합agon에 나서게 하는데(같은 극,613-671), 구타를 참아 내는 능력으로 신과 인간을 구별하려던 아이아코스의 판별법은 노예로 구타에는 이력이 난 크산티아스가 제안한 만큼(같은 극,637-639) 구타를 신들처럼 잘 견디는 크산티아스 때문에 판별에 실패하고, 아이아코스는 그들을 신들인 플루톤과 페르세포네에게 보내, 신들끼리 판별할 수 있도록 넘긴다. [본문으로]
- 같은 극의 파라바시스,696-705,718-737. [본문으로]
- BC413 가을 시켈리아에서의 패전이 전해졌을 무렵, 아테나이는 도시의 재정 뿐만이 아니라 부자들의 재산과 소득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부자들이 공적 의무를 수행할 차례에 혼자 감당하던 함선 한 척의 비용도 부자 '둘이서 나누어 부담syntrierarkia'해야 했고, 두 디오뉘시아 연극 경연에서 출품 수도 코레고스의 감소로 비극 다섯 명에서 세 명씩으로 줄어 들었다. [본문으로]
- 같은 극,1437-1450. [본문으로]
- 같은 극,1453-1465. [본문으로]
- 이때 알키비아데스는 트라케에 일종의 고문관으로 종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끝까지 아테나이를 생각하여 적절한 조언을 했는데, 아테나이의 무능한 지휘관들이 그를 쫓아내었다고 '알키비아데스전'에서 전하고 있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2권1.30-32. [본문으로]
- 같은 책,제2권1.3-4. [본문으로]
- BC404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2권2.17. [본문으로]
- BC404 [본문으로]
- BC403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알키비아데스전'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 두 가지 소문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크리티아스의 잔혹한 정치에 질린 아테나이 사람들이 대안으로 알키비아데스의 출현을 기대하기 시작하자, 크리티아스는 아기스가 있는 스파르테 쪽과 리산드로스에게 알키비아데스를 제거할 것을 사주했고, 스파르테의 지시에 따라 리산드로스가 살해를 의뢰하자 파르나바조스는 그의 수하들에게 실행토록 했는데, 그들은 프뤼기아의 한 마을에서 티만드라라는 여자와 살고 있던 그의 집에 불을 질러 뛰쳐나오는 알키비아데스를 화살을 쏘아 죽였고, 티만드라가 정성껏 장례를 치뤄 주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티만드라가 어느 지체 높은 가문의 딸인데, 알키비아데스가 납치하여 데리고 살던 중, 격분한 티만드라의 친척들이 집에 불을 지르고 튀쳐나오는 알키비아데스를 화살을 쏘아 죽였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 고대 아테나이의 정치제도 변천에 대한 기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책, '아테나이 정치제도사athenaion politeria,41장2.'에 정리해 두었는데, 그것과는 달리, 쿠데타나 시민혁명에 의한 아테나이의 정변에 대한 기록만을 따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온이 부족을 넷으로 나누고 왕을 두어 도시의 체제를 갖추었다(1).'(이 괄호 속의 번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에 따른 정치체제 변천 순서이다.)는 것이나, 그 뒤 '테세우스 시대에 와서 왕정에 정부 조직을 더하고, 아르콘직을 두어 법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2).'(이때부터 법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는, 이온이나 테세우스의 정권이 수립된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없어(이온의 경우는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이온"'으로 이온의 출생 배경과 입지 과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뿐 그의 집권 과정이나 치적 내용을 알 수 없고, 테세우스의 경우는 아이게우스로부터의 부자 세습 승계였으나, 반대 세력들의 반발로 내전이 발발했고, 테세우스의 승리로 승계를 확정 지은 것으로 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전'에서 전하고 있는데, 내전이 있었다고는 하나 반발을 평정한 것이므로 정변으로 보지 않는다.), 이 두 번의 정치 체제 변혁을 쿠데타나 시민혁명에 의한 정변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따라서 그런 힘에 의한 정변의 첫 번째는 BC632 킬론이 참주가 되기 위해 메가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킬론의 정변은 시민들이 메가라 군대를 쫓아내고 쿠데타를 무산시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 후로 한참이나 도시의 정체를 두고 여러 당파가 나서 서로 싸우는 통에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BC594 솔론이 집권하며 종식시켰고, 그는 각종 개혁으로 민주정의 토대를 갖추어 놓았다(3). 그러나 솔론의 개혁을 고치고자 하는 반대 세력들의 도전을 잠재우기 위해 솔론이 10년 간 아테나이를 떠나 있고, 그 대신 그가 없는 동안에는 솔론의 개혁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솔론이 아테나이를 떠나 있었던 10년 사이, 다시 정파 간의 권력 다툼이 계속되다가, BC560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정적들에게 테러를 당했다고 쓴 속임수에 속은 아테나이 시민의 지원을 업고, 그가 동원한 용병들의 무력에 의한 쿠데타로 참주정을 연 것(4)이 두 번째이다. 솔론 혼자 격렬히 이 정변에 반대하다 이듬해 죽었는데(솔론의 죽음은 자연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참주가 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가급적 민주적 색채로 통치하려 했는데도 저항이 거세어지자, BC546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정적 메가클레스 일문의 저항을 제압하고, 진정한 참주가 된 일을 거쳐(이 또 한번의 친위 쿠데타로 정치적 반대자 메가클레스 일문은 어린 클레이스테네스를 포함하여 모두 추방당했다.), BC527 죽은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승계한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유화 정책을 폈지만(그래서 돌아온 클레이스테네스는 BC525 아르콘이 되기도 했지만), BC514 히피아스의 공동 권력자인 동생 히파르코스가 암살당하자 다시 억압으로 독재 권력을 행사했고, 그래서 BC510 이사고라스와 클레이스테네스가 스파르테의 군대를 불러들여 히피아스를 축출했던 것이 세 번째 정변이며, 그 직후 이사고라스가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귀족 과두정을 세운 것이 네 번째이며(클레이스테네스는 어렸을 때 아버지 메가클레스를 따라 망명한 이래 또 다시 망명해야 했다.), 다섯 번째는 BC508 이사고라스가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와 함께 민회를 해산하려 하자, 아테나이 시민이 들고 일어나 이사고라스와 클레오메네스를 축출한 것인데, 망명 중이던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나이로 돌아와, 지역을 세분하는 등 권력을 더욱 하향 분산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여, 솔론의 체제보다 확실히 민주화된 민주정을 수립하여(5), 아테나이에 클레이스테네스식 민주정 체제가 계속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BC487 페르시아 침공 후, 솔론의 개혁 때 사법 관활을 민회와 아레오파고스회의로 분산시켜,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했던 것을 아레오파고스회의에 과도한 재판권을 부여하며(6) 민주정을 퇴보시키는 일이 있었으나, BC461 아리스테이데스가 기초하고 에피알테스가 완성한, 아레오파고스의 재판권을 해체하고, 아르콘은 사소한 범죄의 처결만, 아레오파고스는 형시적인 절차에 관한 것만, 평의회와 민회는 공공의 이해에 대한 일에 대한 판결만 담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30세 이상 남자 시민들 6000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 가운데 사안에 따라 필요한 배심원 수만큼 제비로 뽑아 그들만으로 하루 동안 판결을 내리도록 바꾼 민주적 사법제도 개혁으로 만회되었다(7). 그러나 이 민주적 사법제도 개혁 이후부터 말을 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었고, 때마침 소피스테스들로부터 고액의 수업을 받고 언변이 능해진 제조업이나 상법 무역업을 하는 신흥부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민중 선동을 무기로 정치 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시켈리아 원정에서 정치 군사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없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도시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알키비아데스의 사주에 뇌동한 과두정파가 BC411 5월 쿠데타로 400인 과두정을 세운 일이고(8), 일곱 번째는 같은 해 9월에 시민 궐기로 400인 과두정을 폐하고 다시 종래의 민주정으로 회복시킨 것이며(9), 여덟 번째는 BC404 아테나이의 항복과 함께 온 점령군 스파르테의 지원으로 4월에 30인 참주정이 권력을 잡았던 것부터(10), BC403 망명 민주정파의 반격으로 아테나이에서 정치 체제를 두고 처음으로 대구모 내전이 발발했을 때, 30인 참주정의 지도자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가 죽고 없는 가운데, 민주파와 스파르테와의 일차 충돌 후 스파르테가 두 정파 간의 협상에 의한 해결을 종용하자 협상을 위해 다시 10인의 참주가 선정되어 협상을 매듭짓고 참주정을 폐지시킨 일까지이고, 아홉 번째는 BC403 새해 트라쉬불로스와 아뉘토스 등 망명 민주파들이 퓔레에서 봉기하고,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승리한 다음 스파르테의 중재를 받아들여 협상으로 내전을 종식시키고, 아테나이에 다시 민주정을 세운 일이다(11).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정변(괄호 속의 번호가 가리키듯, 그에게는 열한 번째의 정치제도 변경이었다) 끝에 세워진 아테나이의 민주정에 대해, '민중이 모든 것에 주권을 행사하고 민중이 좌우하는 행정 명령과 재판소를 통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나아가 민회의 판결권도 모두 민중에게 넘겨졌다. 이것은 올바른 일 같다. 소수는 다수보다 이익과 호의에 의해 더 부패하기 쉽기 때문이다.'라고 이어서 말하고 있다.('아테나이 정치제도사'41장2.) 그러나 아테나이의 정치체제의 변화는 이 이후에도 세 번이나 더 있었는데, 신흥 마케도니아의 압박을 물리치기 위해 아테나이의 데모스테네스는 테바이와 연합하여, BC338 카이로네이아에서 벌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알렉산드로스 부자와의 건곤일척의 일전에서 패한 뒤, 마케도니아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되었으며, BC324 알렉산드로스 사후 데모스테네스의 반마케도니아 반란이 라미아 전투에서 패하고 데모스테네스가 망명지에서 자살하여, 주권 회복에 실패한 것을 기화로 마케도니아 군대가 주둔하면서, 민주정 체제를 변경하여 시민권을 제한하고 과두정을 세웠으며, 헬레니즘 시대인 BC307 미케도니아의 속국으로서 제한된 민주정으로 복고되어 200년 이상을 민주 체제로 유지하다가, BC86 로마가 총독을 보내어 과두정으로 바꾼 것을 마지막으로, 아테나이는 오랫동안 다른 나라들의 속국이 되었고, 더 이상 자체적인 정변은 일어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본문으로]
- 파우사니아스의 출전은 아테나이가 리산드로스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어서 그는 아테나이가 리산드로스의 괴뢰 정부가 아닌 스파르테에 독립적인 정부가 들어서길 바랬기 때문에 이 전투는 리산드로스의 의혹을 막는 파우사이아스의 겉치레 전투였다. [본문으로]
- BC402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2권3장54-56. [본문으로]
- 플라톤,'크리티아스' 크세노폰,'회상'제1권2장, 크리티아스와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회상 가운데서. [본문으로]
- 플라톤,'소크라테스의 변론'32c-d.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 열전'제2권5(24). [본문으로]
- 펠레폰네소스의 대표적인 아테나이의 동맹도시는 아르고스이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제2권4장40-42. [본문으로]
- '얼마 전의 재난(30인 참주제 아래서의 살륙)에 대한 (아테나이 민주파의) 대응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 어떤 사람들이 보여 준 것보다도 가장 뛰어 나고 가장 정치가다운 일이었다.' [본문으로]
- '그들은(아테나이의 민주파) 이것이 조화를 회복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도시들에서는 민주파가 권력을 잡으면 자신들의 돈을 지불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적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재분배했다.'(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인의 국제國制'40.2-3.) [본문으로]
- BC401 [본문으로]
- 아이스퀼로스의 아들 에우폴리온과 조카 필로클레스는 비국 경연에서도 입상했던 비극작가였는데, 소포클레스는 그의 손자 소포클레스가 비극작가로 활약하였다. [본문으로]
- 소포클레스,'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668-673. '나그네여, 그대가 찾아온 이 준마駿馬의 나라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고장이라오. 이곳 백색白色의 콜로노스에서는 꼬꼬리가 단골손님으로 찾아와 푸른 계곡의 덤불 속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한다오.' [본문으로]
- 같은 극,1574-1578. '그대 대지와 타르타로스의 아들이여, 청컨데, 부디 그 파수꾼이 사자死者들의 들판으로 내려가는 저 나그네에게 길을 환히 열어 주기를! 그대를 부르고 있나이다. 영원한 잠을 주시는 분이시여!' [본문으로]
- BC401 퀴로스의 요청을 받은 스파르테는 사미오스와 함대를 보내, 퀴로스의 함대와 연합하여 킬리키아의 쉬엔네시스가 크세르크세스2세를 위해 준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출동했다. [본문으로]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2권6.(49),(50). 크세노폰,'아나바시스'제3권1장(4)-(9). 크세노폰은 친절하게도 소크라테스가 퀴로스에게 갈지 말지에 대해 신탁을 받아 보라 했는데, 자기가 가는 것으로 정하고 어느 신에게 제물을 바칠지 물어보았다고 쓰면서, 그의 퀴로스군 용병 참가에 소크라테스는 무관함을 애써 밝히고 있는데, 아마도 스파르테 군대에서 이미 자기에 대한 아테나이의 추방 결정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어서 벌어진 소크라테스의 재판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반아테나이적 행동이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위해 일부러 그런 사정을 구체적으로 밝힌 듯하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아나바시스'제1권-제3권의 내용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 BC400 [본문으로]
- BC399 [본문으로]
- 퀴로스가 페르시아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군대의 용병인지도 모르고, BC401 3월에 사르데이스를 출발한 14,000(중무장병 11,700, 경무장병 2,300)명의 헬라스인 용병부대는, 같은 해 9월에 쿠낙사에서 벌어진 페르시아 군대와의 대회전으로 퀴로스를 잃고, 10월에는 헬라스인 지휘관들마저 팃사페르네스의 초대에 응한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자, 그해 11월 크세노폰을 지휘관으로 삼아 귀환 길에 올랐는데, BC400 2월 흑해 남동 해안의 트라페쥬스에 도착했을 때는 10,000명이 미쳐 안 되는 병력이 남아 있었고, 갈 곳도 없고 용병으로 고용하는 데도 없어 3월에 보로스포로스로 이동하여, 그해 10월 뷔잔티온에 도착했지만, 보스포로스와 헬레스폰토스 등지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지내다가, BC399 새봄 세우테스를 도와 트라케의 내분에 용병으로 간여한 인연으로, 세우테스의 소개를 받아, 그해 3월 페르가모스에서 스파르테의 티브론의 군대에 용병으로 합류함으로써 긴 원정이 끝났는데,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었던 병력은 모두 5천여명이었다. 2년여의 기간 동안, 처음 1년여가 6500킬로미터에 이르는 페르시아 원정이었다. (각자 헬라스에서 출발한 것을 기준으로하면 1년 3개월여에 걸친 원정이었고, 스파르테의 용병으로 신분이 바뀌기까지는 꼬박 2년에 걸친 여정이었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BC399 봄에 스파르테의 티브론이 페르가몬으로 와서 용병을 모집할 때 그의 휘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아테나이는 기병 300을 지원병으로 보내야 했고(크세노폰,'헬레니카'제3권1장4), 크세노폰이 아테나이의 지원군으로 가지 않고, 개인적인 용병으로 티브론 휘하에 있다는 사실은 아테나이 사람들의 격분을 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크세노폰은 이때 아테나이 민회로부터 일차로 추방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고, 그후 BC396 스파르테의 아게실라오스의 막료로 등용되고, 그의 역활이 증대되어 아테나이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던 BC394에는 재산도 몰수되어 영구추방 신세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게실라오스는 이에 대한 보상이었는지 크세노폰에게 펠레폰네소스의 엘리스 근처에 농장과 거주지를 주고 가족을 데려와 살게 해 주었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회상'제1권6장. 안티폰이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남을 정치가로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된 셈인가'하고 묻는데, 소크라테스의 대답이,'나 혼자서 정치에 관여하는 것과,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유능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될까?'라고 되묻는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런 소극적인 정치 참여자가 아닌, 정치의 대가 소크라테스를 소개하는데(플라톤,'고르기아스'521d.), 법정으로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칼리클레스의 경고에 소크라테스는 그래서 그가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믿건대, 나는 참된 정치술을 시도하며 정치를 하는 몇몇 아테나이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네. 나 혼자 뿐이라고 말하지 않으려고 몇몇이라고는 했지만, 요즘 사람들 중에는 내가 유일하다고 믿네. 내가 매번 하는 발언들은 보답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최선의 것을 목적으로 하며 가장 즐거운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네. 그리고 나는 자네가 권하는 이 세련된 것들(정치 연설)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재판정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거네.' 이로써 플라톤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던, 소크라테스를 정치의 대가로 올려 놓고, 재판정에서 정치에 대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죽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소크라테스의 정치적 죽음을 변명하면서, 그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이 정치하는 것에 반대해 정치를 하지 않았었다면서(31d), 애써 피했던 정치적 이유를, 아뉘토스가 추방되고 난 그 몇 년 사이에 변한 아테나이의 정치 기류를 읽고, 이제는 소크라테스가 정치의 대가였다며 새로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런 정치 대가인 소크라테스에서 출발하여 결국 철학자가 국가를 다스리는 꿈을 키우게 된다.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가 정치가를 의사나 목동과 같은 기능인의 하나로 보았던 것 같지는 않지만, 그가 보아 왔던 정치가들이 한결같이 정치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 연설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사람들의 기호에 아첨해 권력을 잡은 다음, 자기를 뽑아 준 사람들을 오히려 그전보다 더 나쁘게 만들었다고 비난한 것은 틀림없어 보이지만(플라톤,'고르기아스'515a), 그리고 그런 정치 지도자를 가지게 되는 연원이 민주정 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같은 책515d-516a), 소크라테스가 직접적으로 민주정을 나쁜 정치 제도로 비난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제도 자체보다 그 제도로 뽑힌 정치 지도자들의 정치에 대한 무지를 비난했을 뿐이다(같은 책513a-b,'소크라테스의 변론'21c). [본문으로]
- 전쟁이 끝나고 여섯 번째 해 BC399 봄에 아뉘토스는 튀브론의 휘하로 들어가 스파르테의 용병이 된 크세노폰을 추방시키는 민회의 결의를 보고, 민심의 흐름을 읽었을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애써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일로 생각하고, 크세노폰의 행적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아뉘토스로서는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와, 크세노폰에 이르기까지 최근에 이어진 소크라테스 제자들의 악행에 종지부를 찍는 일은 소크라테스를 아테나이로부터 격리시키는 일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뉘토스는 BC399 여름이 오기 전에 소크라테스를 재판에 회부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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