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草)

3. 희극시인의 세계

병든소 2013. 10. 8. 01:06

3. 희극시인의 세계 

 

3.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저는 소크라테스가 이 아리스토파네스로 인하여 오랫동안 그토록 아픈 응어리를 가지고 살았는지 몰랐습니다. 생각해보면 벌써 서른 해가 다 되어갑니다만, 그 당시 에우리피데스가 휩쓸고 있던 아테나이의 비극 무대에서, 레나이아축제의 비극 경연에 아가톤이 처음으로 나와, 곧바로 우승하는 바람에 온 아테나이가 깜짝 놀란 그날 저녁1, 우승 기념으로 아가톤의 집에서 열린 연회에 제일 늦게 도착한 알키비아데스가 그날의 화제였던 에로스 이야기는 제쳐두고, 웬 뚱딴지 같은 소리인지 거기 오기 전에 마신 술로 이미 잔뜩 취한 상태였는 데도 불구하고, 그 짧은 혀2를 잘도 굴려가며 틀림없이 소크라테스로부터 익혔을 잘 자란 귀족 출신 정치 지망자답게 격조 높은 말들만 골라, 그 낱말들의 격변화 하나 틀리지 않게 쓰는 뛰어난 웅변 솜씨를 선보이며,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훌륭한지 그리고 그의 영혼이 또 얼마나 고매한지 현란하게 칭송하는 것을 보고3, 그저 막연히 얼마 전에 아르고스에서 돌아와 이제는 아테나이에서 니키아스와 같은 장군으로 정치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한 젊고 힘 있는 제자가 몇 년 전의 전장에서 목숨과 공적을 신세 진 늙은 전우이자 스승에게 보내는 헌사인 줄로만 알고, 그날은 술도 많이 취하고 해서 탁자에서 졸며 들었지요. 그 뒤 오랫동안 그러려니하고 지나쳤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보니 어쩌면 알키비아데스는 제가 그의 스승과 함께 있는 것을 본 순간4, 비록 술은 취했으나 저에게 소크라테스의 영혼을 비추어주어, 그의 스승이 그렇게 안타까워 하는 제가 가진 그의 스승을 보는 눈을 바꾸어보려 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 와서 불현듯 드네요. 

 

3.2.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던 것 같습니다만, 결국 이 말은 소크라테스나 알키비아데스도 보통 아테나이 시민들이 그렇듯이 제가 평소 소피스테스들을 대하는 눈이 그대로 소크라테스에게도 닿아 있다고 보는 희극에 대한 몰이해, 다시 말해 저의 희극에 나오는 희극적 상황이나, 희극적 주인공이나, 희극적 언행 따위의 구성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어서, 저 역시 그들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일찌기 희극으로 특정 인물에 대한 공격이나 비방을 못하는 법을 세 번이나 만들 정도로5, 우리 아테나이는 희극을 통해 이 사회 여러 방면의 잘못이나 독선 따위를, 재판정에서가 아니라,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시민들에게 직접 고발하거나, 도시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나, 시민이 도시의 안녕이나 번영을 위해 지켜야만 하는 가치에 대한 교훈들을 웃음꺼리 속에 담아 제공해 왔다는 것을 잊고, 그 교훈의 정당성이나 공익성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연극 중의 한낱 우스개에 자기가 나왔다거나, 자기의 비리나 독선이 드러난 것에 대한 앙심으로, 희극과 희극작가를 매도해 왔던 것을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너무 놀랍게도, 소크라테스가 그의 재판에서 이 아리스토파네스를 아뉘토스 무리들 보다 더 무서운 고발자라며, 이름도 형체도 없는, 그래서 따지고 물어 볼 수도 없고 설득할 수도 없는, 영락없이 마치 그림자를 상대해 싸우는 듯한 고발자라며, 그런 매도와 비슷한 비난을 드러냈을 때, 저는 그런 희극적 처치를 당한 당사자가 그런 희극적 처치에 대해 얼마나 깊은 오해를 가지는가를 클레온의 경우에 이어 또 다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가 바구니를 타고 왔다갔다하면서 공기 위를 걷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였으며, 저의 희극 "구름"에 나오는 어리석은 일들도 일절하지 않았다고 강변했습니다. 더욱이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을 미끼로 어떤 돈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도리어 그는 그가 정말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거나 유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으면 나서보라고 그 자리에 있던 재판관들을 욱박지르기까지 했습니다6. 글쎄요 어쩌면 정말로 소크라테스는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피스테스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나온 "구름" 속의 소크라테스가 바구니를 타고 공기 위를 걷거나, 벼룩이 뛰어오른 높이를 재는 우스꽝스러운 그들의 공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어째서 알로페케에서 난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를 이름도 형체도 없이 고발하는 그림자 같은 행동이겠습니까? 그 우스꽝스런 모습을 스트렙시아데스는 놀랍도록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 자신과 아들 페이딥피데스를 '구름'과 '꾀주머니' 학원에 입문시키고, 결국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변론술을 배우게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스트렙시아데스가 교습비를 내겠다고 했지만, 빚도 떼먹는 비법을 전수 받고, 아버지 어머니까지 때릴 수 있는 논리를 터득한 페이딥피데스가 그 교습비인들 제대로 내겠습니까? 왜 소크라테스는 바구니와 돈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경 쓰면서, 그 연극의 중요한 또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장치, 믿을 수 없이 변화무쌍한 신神인 '구름'의 교주로, 비밀스런 의식myesis을 집전하는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7 그렇게 한 적이 없다고 펄쩍 뛰지 않았을까요? 그는 교육 때문에 뿐만 아니라, 그가 믿는 신 때문에도 재판을 받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3.3. 그날 저도 봐서 압니다만, 저의 연극 "구름"이 상연되었을 때 극이 진행되는 내내 소크라테스는 그의 자리에 일어서서, 극중의 소크라테스와 그극장에 와서 서 있는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께 몸으로 직접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것을8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날 소크라테스의 일인시위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가장 아끼는 연극 "구름"은 그날 관객들로부터 외면당해 경연에서 꼴찌를 하는 아픔을 겪었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제가 다시 다듬고 보완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이후 단 한 번도 다시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앉은뱅이 희곡이 되어버렸지마는, 저는 지금까지도 저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그 희곡을 보듬고만 있었지, 한번도 소크라테스의 일인시위를 탓하거나 원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히 제가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 소피스테스에 대한 폐해를 고발하고 경고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 또한 너무나 당연히 자신이 극중에 나오는 그런 소피스테스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여러분들께 알릴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크라테스가 연극의 한 배역일 뿐인 극중의 소크라테스가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굳이 극장에 와서, 연극이 상연되고 있는 동안 줄곳 일어서 있으면서 시위를 벌여야만 했었는가에 대해서는 저 자신 아직 의문을 품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로 인해 제가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이끈 사람이기나 한 것처럼 오늘 여기에 불려 나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희극에서 다루는 비판의 책임과, 그것을 비방과 질시로 보고 소크라테스와 여러분이 제게 묻는 책임에 대한 의문 말입니다. 

 

3.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이 저의 변론의 요지가 될 뿐만 아니라, 바로 희극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자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사는 도시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 드렸듯이 이 대답 역시 희극이나 자유나 도시의 기원을 찾아, 그 기원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지를 추적하여 밝힘으로써 여러분 앞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적은 정치가 아테나이라는 도시의 가치를 바꾸어 가는 가운데, 그 정치 때문에 도시에서 자유에 대한 가치가 어떻게 무너졌으며, 필연적으로 그 정치가 닿는 도시의 모든 분야에서 각종의 억압이 어떻게 나타났는가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이야기의 진행이 더디고 무거워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지시더라도,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뒤돌아보는 일이고, 이런 자리가 아니면 그렇게 해 볼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니 만큼, 오늘 이 자리에서 저와 함께 꼼꼼히 따져나가다면, 오히려 미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달라진 시각 때문에 새롭게 보이는 사실도 나오게 되므로, 오히려 이 추적에 재미를 느끼실 수 있다는 말씀 올립니다.

 

 

3.5.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헬라스 군대가 퇴각하는 페르시아 이방인들을 플라타이아이에서 거의 전멸시키며 물리친 뒤, 아테나이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페르시아가 훑고 남긴 빈 바다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지에서 쫓기던 페르시아 패잔병들이 몰리다가 아이가이온 바다의 작은 섬이나 이오니아나 아나톨리아의 해안도시들에 출몰하자 이들을 페르시아 국경 너머까지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침공에 맞서 뭉쳤던 헬라스동맹은 플라타이아이 승전 이후 한 해가 가기 전에 이미 패잔병 청소를 위한 해상동맹으로 바뀌었고, 동맹도시들은 그 임무를 처음 스파르테의 파우사니아스에게 맡겼는데, 거만한 파우사니아스가 연합군의 통솔 과정에서 거리낌없이 그의 개성을 드러내는 바람에 동맹국들의 반감을 사자, 이 틈을 노려 아테나이의 아리스테이데스가 동맹을 통솔하게 되었습니다. 스파르테는 더 이상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어 홀가분해 했고, 아테나이는 전쟁을 자기 손으로 끝내면서 바다를 장악하게 되어 기뻐했지요. 물론 아리스테이데스의 공정한 동맹 유지비 부과는 아테나이가 맹주가 되는 데 결정적 역활을 했습니다만, 이것이 멀지 않아 아테나이로 하여금 물산경제의 장려가 아니라 군사 패권 행사로 도시의 번영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더 많은 조공을 받기 위한 제국 건설로 전체 헬라스가 내전에 휩싸이게 되는 첫 번째 함정9인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만족했으니까요. 

 

3.6. 페르시아 침공을 물리친 다음 생긴 아테나이의 패권 추구와 제국 건설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의 단초는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지요. 바로 스파르테가 펠로폰네소스로 되돌아가, 도시 소유의 농노들인 헤일로테스나 상공 종사자들인 페리오이코이 같은 하층 계급의 반란에도 대비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 반도 주변의 도시들과의 전통적인 유대를 토대로 전체 헬라스 동맹의 한 형태를 비록 느슨하게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한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테가 펠로폰네소스 반도 속으로 돌아가 자족하며 좋아하는 사이, 아테나이는 아리스테이데스가 나서 페르시아 침공으로 피폐해진 섬들과 해안도시을 묶은 해상동맹을 바탕으로 강력한 제국을 이루는 새로운 동맹을 가질 수 있어 좋았습니다. 처음에 아테나이는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물자를 도시들의 능력에 맞춰 현물로 받다가, 그 공물들을 각 도시가 일일이 만들어 내는 일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나중에는 현금으로 내도록 바꾸었고, 걷힌 동맹국들의 돈을 델로스 섬의 아폴로 신전에 보관해두고 쓰면서, 아테나이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도시에 아테나이 시민을 심어植民 물산을 장려하고, 동맹도시들을 아테나이의 체제와 비슷하게 바꿔나가며 아테나이의 지배력을 더해갔습니다. 해상동맹이 맺어지고, 아테나이가 동맹을 이끈지 스무 해가 채 되기 전에 해상 질서는 헬라스 사람들로만 짜이게 되었으며, 식민과 복속으로 동맹도시들을 제압하면서 아테나이는 제국의 형태를 갖추어갔습니다.

 

3.7. 그렇지만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호황의 불빛 아래 그늘이 없을 리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아리스테이데스가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지겨워진 아테나이 시민에 의해 도편투표로 쫒겨나기까지 했었지만, 페르시아의 재침으로 소환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아울러 전쟁 후에는 해상 동맹을 강화하고 동맹 도시들을 공정하게 대하여 모든 동맹 도시 사람들로부터도 "정의로운 사람"이라 칭송을 받았던 아리스테이데스가 동맹을 결성한 뒤 십 년이 지나 아테나이에서 조용히 죽었을 즈음에는10 이 아테나이에서 동맹 도시에 대한 배려나 공정함 따위를 말하는 사람들도 함께 사라져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동맹 도시들이 동맹의 유지를 위해 흔쾌히 내던 비용이 그들의 맹주 아테나이에 바치는 조공의 형태로 그 성격이 바뀌어갔고, 급기야 아테나이에 반발하면 자유를 빼앗기기도 했고, 심할 땐 타소스 섬처럼 성벽이 허물리고, 무장을 해제당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 정한 조공에 더해 막대한 벌금까지 매겨지기도 했습니다1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리하여 우리 아테나이는 호혜와 협력으로 결속을 다지는 대신 오로지 힘으로 사백 개나 되는 동맹도시들을 복속시켜오면서, 그들에 대한 배려와 공정을 버린 만큼 그들로부터의 존경과 신뢰도 잃어 갔습니다.

 

3.8. 이런 탐욕이 두려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마라톤의 승리자 밀티아데스의 아들인 키몬처럼 전쟁으로 돈을 벌어 거부가 된 사람들은, 해적들이나 패잔병들을 물리치고 그 전리품을 팔아 얻은 재물로, 도시를 지키기보다 그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 아테나이에 방벽을 쌓는 데나, 시민들의 환심을 사서 공직에 선출되거나 장군이나 함장이 되어 전쟁에 나가 돈을 벌기 위해 도시의 공공시설을 만드는 일이나, 도시의 서민들이나 빈민들이 마시고 노는 데 정신 팔리도록 도시의 축제에 비용을 대는 데에다 막대한 자금을 아낌없이 풀었습니다12. 그들은 아테나이 시민을 돈으로 주무르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으로 여러분의 표를 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정치는 더 나은 도시를 위한 공공정책으로 다투기보다는 더 많은 그리고 더 높은 관직 차지와 의회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돈이 정치판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전쟁에 나가 돈을 번 사람들만이 아니라, 장사로 돈을 번 장사꾼들이 정치판에 끼어든 것도 아테나이에 정쟁이 그치지 않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이며, 아테나이가 다른 도시들에게 점점 품위를 잃어 가게 되었던 주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아는 사람이 다스리고, 나머지는 따른다'는 소크라테스의 지론13을 따른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 다시 말해 '돈을 푸는 사람이 다스리고, 나머지는 따른다'는 클레온식 지론14이, 정치판에 먹혀드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쟁이나 장사하던 사람들의 탐욕이 아테나이 정치판을 덮자, 동맹도시들의 내정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의회에서 사라졌으며, 대신에 의회가 동맹도시들에 대해 영향력을 키워 가려는 욕구가 만연해져갔었습니다. 실지로 클레온을 위시해 많은 장사꾼들이 아테나이의 민회를 거쳐 권력자가 되었습니다만, 이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탐욕에 눈이 가려, 배려라든가, 공정이라든가, 공공이라든가, 부끄러움이나, 염치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있는 덕목들은 그들에게서 절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정치꾼들은 어떤 도시든 도시가 미워해야 할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는 그런 정치꾼들이 도시를 이끌었고, 그 때문에 도시에서 도시끼리 더불어 사는 덕목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우리 도시 아테나이는 더불어사는 사람들의 도시가 아니라,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도시로 변해 갔습니다.

 

3.9.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렇게 도시에 공동의 가치가 시들어 가는 동안, 다시 말해 아테나이가 동맹들을 지도하는 맹주에서 지배하는 맹주로 바뀌는 동안15, 구체적으로 말해 아테나이에 자유나, 정의나, 배려나, 공정이나, 절제나, 겸양 같은 정신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부와, 사치와, 타락과, 부패와, 억압과, 독선이 들어와 자리하는 동안,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전에 없던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돈과 함께 우리의 도시에 몰려 들어온 우주나 자연, 그리고 신들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우리 아테나이의 태도였습니다. 

 

 

3.10. 아테나이에 돈이 흘러넘치자, 자연히 그 돈에 젖기 위해 사람들이 전 헬라스에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동맹에서 오는 사절들 이외에도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나 물건을 사고팔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많은 물건과 사람들 가운데는 아주 특이한 것들을 가지고 들어오는 요상한 사람들도 끼여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이 신을 가져와 파는 사람들과 지혜를 가져와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신들 가운데는 요새 우리가 귐노소피스테스라 부르는 자이나라는 벌거벗은 사제들이 모신다는 아주 먼 동방에서 온 수많은 신들도 있었고, 아이귑토스에서 온 수많은 나일의 신들과, 포이니케에서 온 신들도 있었고, 그 가운데서 독특한 페르시아 군대가 헬라스에 오기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마고스들의 신인 조로아스토레스 등등 이루 그 이름과 출신을 따질 수 없는 수많은 신들도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전지전능하여 복을 주고 소원을 들어 준다는 영험한 그 신들이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보다 오십 배 백 배나 많아 팔백 만이 넘게 들어와 흘러 넘치니, 그 신들 덕분에 아테나이에 그렇게 돈이 넘쳐 흘렀나 봅니다. 복을 주고 소원을 들어 주는 신들에게 매달려 살아도 별 큰 효험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팔백 만 신들에 대해 심드렁해질 무렵, 이번에는 신들과 별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데도, 신들이나 우주나 자연의 원리와 도시나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지혜를 말하는 사람', 다시 말해 여러분들이 '(자연)철학자'거나 '소피스테스sophistes'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테나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 놀라운 것은 지혜를 말한다는 그 사람들, 그 자연철학자나 소피스테스들이 이상스럽게도 '시인'들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고 아테나이는 그들이 그들의 신이나 우주나 자연에 관한 새로운 지혜를 펼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 자유스런 태도가 바로 민주정으로 도시를 이끄는 아테나이의 가치였으니까요. 그러나 아테나이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나 파르메니데스나 엠페도클레스의 시가 적힌 책과는 전혀 다른, 그들의 책이 도시의 정통성을 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3.11. 저 하늘을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는데, 아니 그보다 내 주위의 땅 위와 바다에 있는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는데, 아니 그보다 나 자신을 비롯한 같이 사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는데, 그래서 분명히 있는 그 무엇에 대해, 즉 온 몸으로 분별하고 느끼고 생각도 보태어 가며 그것을 구체적인 무엇으로 드러내어보려 해도 명확히 잡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되는 그 무엇에 대해, 다시 말해 우주나 자연이나 인간 세상의 온갖 현상에 대해, 그것들이 왜 그렇게 하나인 것 같은데도 다른 것처럼 보이며, 아니면 분명히 달라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나인 것처럼 보이면서 흐릿한 상태로 있는지, 그것들의 실제 모습은 어떤 것인지가 궁금할 때, 옛날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정도의 태도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직관으로 이해되는 현상들로부터 풀어 나가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이유와 그 원리를 설명해보려는 태도였고, 다른 하나는 그래 보았자 결국 그런 현상이란 것이 직관이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가지한 것이라는 태도였습니다. 누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상관없이 그런 현상들은 인간들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들의 활동 영역이 늘어갈수록 더 깊숙히 인간들의 삶 속에 자리 잡아갔으며, 더구나 그전에는 미쳐 몰랐던 새로운 현상까지 드러내어보이며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깊숙한 영향을 드리우는 현상들에 대해 그것들이 규칙적이면 그 규칙에 따라 규칙적으로 대응했고, 그것들이 불규칙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면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오면서, 그런 현상들에 대한 인간들의 오랜 경험들로부터 '관습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규칙적인 것에 대한 규칙적인 대응은 자연스럽게 도시에 관습이 되어 도시민을 안심시켰으며, 불규칙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현상에 대한 임기응변은 예지豫知와 주술로 도시민을 위무하였습니다. 따라서 확실한 현상에 대한 대응 관습은 그 효과가 검증된 것부터 곧바로 '법'으로 자리 잡았고, 불확실한 현상에 대한 예지豫知와 주술은 그런 현상을 관장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어떤 초인간적인, 아니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소통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그런 소통을 통해 그런 존재로부터 좋은 처분을 얻어 낼 수 있다고 믿어, 그런 존재에 대한 '경건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여살면서 만든 도시에 오랜 관습이 찾아낸 지혜를 바탕으로 한 관습(법)nomos과 신theos이 도입되었고, 그것들을 지키고 받드는 일이 그들 모두의 공동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이 경험과 직관으로 찾아낸 지혜의 총화인 관습(법)과 신은 도시의 구성원 모두에게 공동선으로 똑같이 이해되고 똑같이 받들어져야 했습니다.

 

3.12, 그리고 이런 지혜들은 새로운 생명과 함께 반드시 후대에 전해져야 할 가치였습니다. 그 가치를 공유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같이 모여 도시를 이룰 수 있었으며, 그 가치를 지키는 것이 도시의 정통성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도시 안에서도 그 가치를 신봉하고 그 가치에 맞도록 행동해야 도시민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으며, 능력이 미치는 한 도시를 이끌어 갈 수도 있는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도시가 그들이 얻은 지혜와 그 내력을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들에게 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도시의 전통이 끊어진다는 말이고, 전통이 끊어진 도시는 정통성이 없다는 뜻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헬라스에 사투리를 쓰는 도시들은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이 같은 관습을 지키고 같은 신들을 믿는 한, 이어족barbaroi들과는 확실히 구별되어 헬라스 도시의 헬라스 사람으로서의 정통성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오니아 사람들이 아이가이온 바다를 끼고 소아시아에까지 흩으져 여러 도시들을 일구고 살게 되었고, 또한 도리에이스dorieis 사람들이 펠레폰네소스를 비롯한 헬라스 곳곳에 흩으져 여러 도시들을 일구고 살게 되었으며, 그리고 특히 호메로스 바로 이전 세대에 이르러서는 그 이오니아 사람들과 도리아 사람들이 헬라스 바깥으로 퍼져 나가 시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곳곳과 아프리카에까지 흩어져 여러 도시들을 일구고 살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주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 때문이었고, 이것이 또 도시의 급격한 팽창을 초래하였고, 그래서 생긴 새로운 도시 건설과 신도시에의 정착은 우선 안전을 도모하고 아울러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게 하여, 이런 헬라스적인 지혜를 바탕으로 한 가치, 즉 헬라스적인 관습과 신들에 대한 전승을 등한히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이어족과의 접촉에서 헬라스 사람들 고유의 도시로 그리고 헬라스 사람들 고유의 정통성이 원주민들의 그것들 때문에 약화되거나 융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전승의 대부분을 사람의 기억에 의존한 구전이 맡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기억에 의존한 구전을 통한 전승은 불완전하였고, 이따금 다른 도시의 전통이나 신들과 뒤섞이기도 하여, 이어족과는 말할 것도 없고 헬라스 사람들끼리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3.13, 이러한 건설과 충돌이 여기저기서 이어지다가, 호메로스가 이오니아의 도시를 지팡이로 두드리며 떠돌아 다니면서, 헬라스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들로 만든 '시,敍事詩,epikos,epic'들을 읊어 밥값을 벌어야 했을 즈음에 이르자16, 헬라스에는 인구의 증가도, 그로 인한 이주도, 또 그로 인한 도시의 확장이나 건설도, 모두 숙지막해져서 도시들이 안정을 찾아 갔습니다. 도시의 안정은 도시 사람들에게 그들 도시의 근본 내력과 그들이 지켜야 할 관습 뿐만 아니라, 그들이 경배해야 할 신들에 대한 뿌리를 찾아 도시의 정통성을 과시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하였고, 이런 노력은 도시들마다 열리는 축제에 시가의 경연을 통해서도 나타났는데, 시인들이 축제가 열리는 도시들의 건설에 관련된 영웅들의 활약과 신들의 가호를 찬양하여 그들의 긍지를 높이고, 그들의 정통성을 확인해 주는 이야기로 시가를 만들어 경연에 나서자, 자연스레 그 시가들이 모여 큰 줄기를 이루게 되었고, 마침내 '시가 모음,敍事詩圈(環),epikos kyklos,epic cycle'17이 그 결실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축제에서 시가로 경연하는 일이 영웅들과 신들이 관여하여 건설한 도시의 내력과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관습에 대한 내력에 대한 틀을 갖추게 하는 데 기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호메로스 같은 걸출한 시인18으로 하여금 '시가 모음'의 부족한 부분, 이를테면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두 번째 이야기 '일리아스'와 일곱 번째 이야기 '오뒷세이아'를 확장하여 예술적으로도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승화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경연은 또 하나의 호메로스를 찾아내어, 그렇지만 영웅들끼리, 신들끼리, 혹은 영웅들과 신들 사이를 이야기한 호메로스와는 달리, 보통 사람과 신들 사이를 이야기하는 한 세대 뒤의 헤시오도스를 찾아내어, 그렇잖아도 불완전한 구전 때문에 정통성의 오염이나 훼손이나 산일이 빈번했던 영웅들이나 신들의 이야기들이 경연에 나선 여러 시인들의 여러 도시들에 대한 찬양 때문에 이리저리 함부로 뽑히고 잘려서 쓰이는 바람에 심하게 왜곡되고 상충되어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을 지경에 빠진 때에, 보이오티아 헬리콘 산의 산골 목동으로 양이나 치고 지냈던 헤시오도스를 찾아내어, 그로 하여금 그 산에서 지내던 무사이들에게서 신들에 대해 노래하는 법을 배우도록 한 다음, 그가 여러 도시들 축제의 시가 경연에 나서, 흩어지고 사라진 이야기들을 다시 모으고, 남아 있으나 여기저기의 이야기로 오염된 부분을 바로잡아, 신들의 훼손된 정통성을 지킬수 있도록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온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기원(계보),神統記,theogonia'는 신들끼리의 이야기이고, '일과 나날들erga kai hemerai'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과 그런 인간들의 일상에 들어와 있는 신들이 여러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들로 그는 헬라스 사람들이 믿는 신들의 정통성과, 아울러 그 신들과 헬라스 사람들과의 관계의 정통성에 더 이상 논란이 필요 없도록 완결지었습니다.

 

3.14. 이 완결판을 존숭하는 일은 아테나이에서도 도시가 믿는 신들과 도시민 사이에 통하는 전통과 관습의 정통성을 인정 받는 일로 받아들여져, 아이들에게 영웅들의 서사시가들과 함께 가르치고 외우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로서 아테나이의 정통성은 세계 곳곳에 흩으져 있는 헬라스 사람 도시들의 정통성과 맞닿아 있었고, 따라서 다른 헬라스의 도시들에서부터 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새로운 생각도, 그 가치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단지 하나 그들이 시인들이 아니었던 만큼 그들의 생각과 가치가 전통적인 시가로 전해지기보다 일상의 말로 된 책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나 가치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쉽고 뚜렷하게 전달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르페우스가 맨 처음으로 신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 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19, 어머니 칼리오페로부터 얻은 서판에 펜으로 글을 적어 남기는 방법을 인간들에게 전해 주자, 그를 따르던 그의 신자들이 오르페우스의 노래와 시들을 새겨 두었던 트라케의 서판이나20,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따르던 사람들이 신들과 인간들 관계의 정통성을 그들의 시가를 글로 적어 남겼던 책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찌기 신들이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기억의 전승을 놓고 어떤 태도를 가졌었는지에 대해, 그런 기억의 전승을 담당하는 무우사들로부터 신들의 사연들과 시를 만드는 법을 배웠던 헤시오도스의 설명을 이해한다면, 신들과의 소통을 적은 트라케의 서판이나, 신들의 의지가 인간 세상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 주는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 같은 시인들의 시가집이나, 그런 신들의 지혜로부터 얻어진 인간들의 지혜를 적은 철학자들의 시가집들과는 확연히 다른, 신들과 우주와 자연에 대한 인간들의 생각과 태도를 적은 그들의 책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변화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3.15. 제우스가 티탄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난후, 티탄족이면서 티탄들과의 싸움에서 그를 편들고, 그 싸움의 전부를 기억하는 고모뻘 되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mnemosyne와 올림포스 동쪽 피에리아에서 아흐레를 같이 지낸 것은 여신의 기억으로 그 싸움의 내력이 다른 신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야만 그 싸움의 정당성을 알리고, 또 그 싸움에서 이긴 자신의 정통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었으며, 그 아흐레 동안 그 여신과 같이 지낸 후 얻은 그의 딸들인 아홉 무우사들mousai이 다른 신들과의 불화가 있을 때마다 아폴론과 함께 춤과 음악으로 화합을 주선하여 자신의 전통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21. 이렇게 신들 사이에서 군림자로서, 조정자로서, 또한 조언자로서 정통성을 확보한 제우스는 그 무우사들을 올림포스 뿐만 아니라 근처의 헬리콘 산 언저리에서도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어, 수시로 인간들을 접촉함으로써 인간들 가운데 제우스의 점지를 받은 뛰어난 자들에게 시와 음악을 가르치고, 그 시와 음악으로 인간 세상 역시 조화롭게 이끌어 가는 존경받는 왕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 세상에서도 그의 정통성을 확보하였으며, 특히 그 무우사mousa 아홉 가운데 아름다운 목소리로 능란한 수사rhetorike를 구사하여 남의 심금을 울려 설득하는 연설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펜과 서판을 들고 글로 적는 기록을 맡았던 무우사들의 맏이 칼리오페로 하여금 그런 왕들 가운데 하나인 트라키아의 오이아그라스 사이에서 오르페우스를 낳게 하여, 그 오르페우스가 시와 노래로 인간들에게 자신의 최고신으로서의 능력과 정통성을 인간들에게도 전파하게 하고, 그런 능력과 정통성을 바탕으로 인간들이 그를 위시한 다른 신들을 찬양하게 하고, 아울러 시와 음악으로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이 얻은 지혜를 신들에 대한 찬양에 묻어 전승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한편으로 무우사들이 인간들에게 시와 음악을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 오르페우스가 수금을 곁들여 시와 노래를 전하고 다니자, 사람들은 시와 노래가 운률을 가지고 있어 운률에 맞게 지은 가사들이 사설로 푸는 이야기보다 듣기 좋고 기억하기 좋을 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와 노래가 신을 찬양하는 데 뿐만 아니라 신이나 인간사에 대한 기억을 담아 그 기억을 전하는 데에도 더 이상 훌륭한 것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신들에 대한 감사와 기원의 축제에서, 그리고 인간들이 이룬 것이나 거둔 것에 대한 축하의 장소에서 시와 노래는 늘 같이 있었고, 따라서 신들과 그리고 인간들이 이룬 것들과 거둔 것들에 대한 시와 음악22에 의한 전승은 도시에서 사라질 수가 없었고,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정통성 그 자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3.16. 신들의 뜻이 아닌 인간들의 시각에서 보아도, 처음 문자가 만들어져 가장 많이 쓰인 곳이 법과 신에 대한 이야기인 것을 보면 도시가 그 구성원들에게 공동선인 법과 신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만, 사람들이 글자를 가지고 그들 지혜의 총화를 가르치기 전에는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경험에 의한 관습적인 지혜를 단편적으로 결론만 가르칠 경우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도시에 해를 끼칠 수 있는지 잘 아는 도시의 원로들은 그런 관습적 지혜의 내력까지 가르치고 싶어 했습니다. 글이 없으니 말로 할 수밖에 없었지요. 말로 그런 지혜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 직관에 의한 이해가 뛰어나면서도 감성적인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 자기의 이해와 상상으로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는 몇 번의 반복을 거치는 동안 서로 관계가 있는 여러 이야기들과 이어지면서 살도 붙어 더욱 매끄럽고 알아 듣기 쉽게 꾸며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진 '긴 이야기rhapsodia'로 전하기도 하다가, 더욱 잘 전하기 위해서는 외워서 읊기 좋고 들어서 외우기 좋은 '운률metron로 된 이야기'敍事詩epikos'로 만드는 것이 적당했을 것이어서, 결국 그런 지혜를 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 그런 이야기를 시poetes로 만드는, 다시 말해 '시로 만드는 기술poetike'을 부리는 시인poietes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너무 많은 궁금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흐릿하게 보이는 만큼 그들의 감성적인 상상력이 본 그것들의 모습을 사람들이 늘상 옆에 끼고 살아 그것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뚜렷하게 드러나는 모습metaphor'들로 바꾸어 보여 주었습니다. 시인들의 직관과 상상력으로 파악한 하늘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지혜들은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그러려니 하고 여겨 왔던 오랜 지혜들에 기대고 있어, 사람들은 시인들이 전하는 시로 변형된 지혜에 대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묻거나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것들은 신들이 되기도 하면서 우주와 세상에서 자연과 인간과 함께 살아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인들이 우주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혜를 알아내는 대로 새로운 지혜는 시인들에 의해 사람들에게 하나씩 둘씩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주 먼 옛날 오르페우스와 무사이오스가 그랬고, 그 다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그랬으며, 가까이는 피타고라스나 크세르파네스가 그랬고, 또한 파르메니데스는 물론이고 엠페도클레스도 그랬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모두 시인들이었지요. 이런 시인들의 지혜 역시 음미와 공감의 대상이었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3,17, 그런데 도대체 이런 시인들과 그들의 시에 무슨 일들이 생겼던 것인가요? 파르메니데스는 시인이었는데 어째서 그와 함께 아테나이로 왔던23 그의 제자 제논은 시인이 아니었으며, 아낙사고라스는 말할 것도 없고 프로타고라스도 시인이 아니었는데도 지혜를 말하고 있었을까요? 어쩌면 지혜sophia를 시로 전하던 일은 엠페도클레스에서 끝이 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죽기 전에 시를 쓰고 싶어 했지만 그는 결코 시인이 될 수 없었지요. 그의 지혜는 직관과 상상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캐묻고 따져서 얻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지혜sophia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며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닐 그 무렵 그때 이미 아테나이에서 '은유metaphor로 지혜를 말하는 사람aoidoi,poet'들을 찾기는 어려웠고, 그 대신 '따지고 물어 지혜를 말하는 사람sophos,philosophos,sophistes'들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이 이쯤 되자 저의 선배 희극작가 크라티노스는 한술 더 떠, 그의 연극 "아르퀼로코이"에서 아예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도 소피스테스라 몰았지요24. 다시 말해 그들의 지혜는 시비의 대상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일상의 말로 씌어진 그들의 지혜는 글자를 아는 사람이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고, 이해가 되는 순간 반론이 생긴 것입니다.

 

3.18.오르페우스와 무사이오스가 신들을 찬양하기 위해 노래를 지어 부르고, 글자가 신들과의 소통을 위한 신성한 도구로 쓰일 때만 해도, 아니 그보다 훨씬 뒤, 우주나 자연을 움직이는 것에 대한 지혜와 인간끼리 인간을 움직이는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전할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었는데,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안정되어 가는 이오니아나 보이오티아와 트라케의 도시들을 돌며 신들과 영웅들과 시민들의 할 바를 육절운율로 읊을 때만 해도 시詩라야만 했었는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규모가 커지고, 그런 도시도 점점 늘어나서 서로 간에 물자와 지혜의 교류가 많아져서, 그들 이후의 시인들이 읊었던 운률로 된 이야기들이 긴 시간 여러 곳들의 관습이나 신들의 모습과 섞이어 전해 오게 되었고, 한 도시 고유의 법과 신을 더 이상 시인들의 운률에만 맡겨서는 제대로 지킬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글자를 신들과의 소통을 위한 신성한 도구에서, 평소에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일상의 도구로써 쓰기로 마음먹기 시작했습니다25. 먼저 도시가 그들의 관습부터 글로 남겨 확실히 하기 시작했고, 신들에 대해서는 신들의 업적을 찬양하거나 기원을 적어 올리는 데만 글로 적었습니다. 카드모스가 그에게 테바이를 건설하도록 이끌어준 아테네 여신에게 봉물로 바친 청동 솥에 포이니케 글자가 적혀 있었다고 사람들은 카드모스가 처음 포이니케에서 글자를 헬레네에 들여온 것처럼 말하지만26, 사실은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이야기하고, 헤시오도스가 신들의 족보를 따져 이야기해 주던 그 당시가 되어서야 겨우 이오니아에서 사람들이 다른 나라와 물건을 사고 파는 데 포이니케 사람들이 쓰는 글자로 적은 기록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 터득했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옛날이 되어서야 겨우 우리 인간들끼리의 소통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기록이 기억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편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그런 장사 일이 아니라도 중요한 일들을 사람들의 기억에만 믿고 맡길 수 없어, 포이니케 사람들과 장사하며 썼었던 그들의 글자를 들여와, 그 글자를 '포이니케이아phoinikeia'27라 부르며 헬라스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들, 특히 법이나 재판에서의 증거나 변론들의 내용을 적는 데 쓰기 시작했고, 기록의 용도는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다가 헬라스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데에 맞지 않는 자음들로만 된 포이니케 글자들 가운데 몇 개는 빼내는 대신, 헬라스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데 알맞는 모음을 표기하는 새로운 글자도 만들어 넣으면서, 조금씩 헬라스 말에 맞도록 고쳐서 쓰게 되었습니다. 모음을 표기하는 혁신을 이룬, 그래서 그 글자 이름도 더 이상 '포이니케이아'가 아니고 '알파베토alphabeto'28가 되었을 즈음에는 마침 바다 건너 여러 도시들 간의 문물이 대량으로 넘나들고 있어 파피루스도 그다지 많이 비싸지도 않고 귀하지도 않게 되었고, 따라서 기록이 그전에는 주로 관공서에서 관리들이 중요한 사안들을 적어 남기던 일에서, 이제는 그 뿐만이 아니라 한 개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의 일들을 적는 일에까지도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3.19. 이렇게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일상 생활로 들어오자, 기억으로 중요한 기록을 남기거나 그 기억을 심어 다음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 아주 그만이었던 이야기rhapsodia나 서사시epikos가 당장 그 긴 사연을 외워서 전하는 어려움만 도드라져 나오게 되어, 급기야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남긴 신들의 정통성에 대한 결정판인 그들의 서사시가 두루마기 책으로 나오자 더 이상 신들에 대한 긴 이야기나 서사시는 시인들의 마음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리하여 시는 보통 사람들이 기억하기 좋을 만큼의 길이로 짧아지고, 아울러 운률의 틀29도 여러가지로 새로 생기면서, 전통적인 이암보스iambos 운율 이외에, 사람들의 슬픈 감정을 승화시키기 위해서나 위로하기 위한 엘레게이아elegeia,elegos가 새로운 운율로 자리잡아 갔고, 이암보스나 엘레기의 운율은 아니지만 신들이나 사람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거나 그들을 위한 축제나 연회의 즐거움을 더하는 노래인 멜로스mele,melos 역시 넓게 퍼져 나갔는데, 그 중에서도 멜로스는 결혼식장에서의 축가hymenaia로, 아니면 그 반대로 장례식장에서의 만가threnoi로, 또는 삶의 교훈이나 지혜를 가르치는 격언epigramma이나, 경기나 경연이나 전쟁에서 이긴 사람들을 위한 승리가epinikion나, 훌륭한 사람에게 바치는 찬사enkomia로, 사랑을 주제로한 노래erotika나, 술집에서 술 마시며 부르는 노래skolia 등과 같이 인간들을 대상으로 한 것과, 이와는 별도로 신을 칭송하는 찬가, 이를테면 아폴론을 위한 파이안paian, 디오뉘소스를 위한 디튀람보스dithyrambos, 그리고 여신들을 위해 처녀들이 부르는 노래partheneia나, 신들을 기리는 거리 행진 때 부르는 노래prosodia 등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갔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좋아하시는 파로스의 아르퀼로스와 아모르고스의 세모니데스는 초창기 이암보스의 대가였으며, 에페소스의 칼리노스와 스뮈르나의 밈네르모스 그리고 스파르테의 튀르타이오스가 유명한 엘레기 시인들이었으며, 또 스파르테의 알크만과 레스보스의 알카이오스와 아름다운 여자 사포가 바로 멜로스로 우리가 친숙하게 기억하는 시인들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신들이나 영웅들의 영광과 고뇌를 통해 전통과 생활의 지혜를 기억하던 서사시의 시대는 갔고, 신이나 인간들의 희노애락에 따라 키타라나 리라를 켜며 부르는 노래로 그때 그때의 감정에 충실한 서정시lyrikos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비단 서정시 뿐만 아니라 서사시의 자리를 극시drama도 채워 나와 지금의 비극과 희극으로 발전하였지만, 이 극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뒤 제가 연극에 대한 소회를 밝힐 때 따로 말씀 드리기로 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꼭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이런 서정시들도 책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를 더 이상 기억에 따라 암송하지 않고 책에 적힌 대로 독송으로 접하는 것을 본 서정시인들이 덩달아 너도 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시를 읽히도록 하고 돈도 벌기 위해 그들의 시를 책으로 내었습니다. 이렇게 기억의 자리를 기록이 차지하고 나자, 기록을 대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3.2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헬라스 곳곳에서 참주들이 도시들을 다스리는 것을 본 킬론이 아테나이에서 처음으로 참주가 되기 위해 귀족 친구들과 처갓집 메가라의 군사를 빌려 무력으로 체제 전복을 시도하자 아티케 농부들이 아테나이로 벌떼처럼 몰려와 킬론의 모반을 반대하고 좌절시켰던 당시30,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대가 가서 더 이상 신들이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육절운률로 읊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아르퀼로코스가 당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기 시작한 이암보스 운률의 정형을 완성하고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울분으로 자신을 그런 처지로 몰아간 주위의 사람들을 비방iambizein하고 화풀이하던 즈음31, 그리고 칼리노스가 처음 육절운율에 새로운 오절운율을 더하여 비감에 젖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무렵, 그리고 알크만이 사르데이스에서 스파르테로 옮겨와 살며 스파르테의 소년 소녀들로 된 합창단을 꾸려 당시 새로운 노래의 정형으로 떠 오른 멜로스를 가르치며 퍼뜨리고 있을 무렵32, 다시 말해 서사시가 사라지고 서정시가 번창할 무렵, 아테나이에 새로운 법이 만들어졌는데, 이 새로운 법이 아테나이에서 처음으로 글자로 적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일상에서나 재판정에서 시행되었습니다33. 킬론이 모반을 일으켜 참주가 되고자 하는 것을 본 아테나이 사람들은 드라콘으로 하여금 도시의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고 다시는 아테나이에 킬론 같은 모반이 일어날 수 없도록 조치해 달라고 맡겼는데, 드라콘은 아예 한 수 더 떠 아테나이에서 온갖 잡스러운 범죄들을 몰아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34. 새로운 법은 그때까지 아테나이 사람들이 지녀 왔던 범죄에 대한 인식과 형벌의 범주를 너무 심하게, 거의 혁명적이라 할 만큼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관습적인 형태로 유지되어 오던 옛날 법과는 얼마나 다른지 글로 적어 놓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드라콘은 그의 새로운 법을 글로 적어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글로 적힌 새로운 법은 그 글이 의미하는 대로 엄밀한 집행을 강요하였습니다. 물론 드라콘이 그 법에 너무 심한 형벌들을 정해 둔 때문이기는 했지만, 막상 그 법에 적힌 대로 재판정에서 떨어지는 형벌의 내용은 너무나 인정 사정 보지 않은 법에 있는 글자 그대로의 처분이어서 사람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시무시한 형벌 앞에 사람들은 아테나이가 킬론에게 내린 처분에 대한 응징이자 킬론이 아테나이에 퍼부은 저주 탓이라고 수근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법에 대해 킬론의 저주35니 피의 법이니 하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드라콘이 아테나이에서 맨 처음 글로 적은 법으로 도시의 법 체계와 도시민의 법 인식에 혁명적인 충격을 가져다 준 반면, 그렇게 명확히 적혀 있는 법이라 해도 그런 법은 언제라도 시민의 총의로 시비를 가려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법에 대한 자신감도 함께 가져다 주었습니다.

 

3.21. 한편에서는 쉴로스의 페레퀴데스36가 신들에 대한 이야기나 우주와 자연에 대한 자기 생각을 더 이상 운문으로 된 시가 아닌, 일상의 말로 된 산문pezographia37으로 적어 책을 낸 것은38 도시의 사고 체계와 도시민의 가치 인식에 새로운 경지를 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이는 시초 작업이었습니다. 누구도 알아들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말로 적은 페레퀴데스의 신에 대해서나 자연에 대한 생각은 글을 깨우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페레퀴데스가 가진 생각을 적힌 그대로 이해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누구라도 "아! 그것이 그런 것이었구나"라든지, "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라든지, "아니야, 그건 그렇지 않아! 그 말이 맞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겠어"라든지 따위로,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지혜로 다가가거나, 아니면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 지혜를 더욱 신뢰하게 만든다거나, 아니면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누구의 생각이 옳고 그른지 그 지혜에 대해 따지고 들게 만들었습니다39. 그러나 페레퀴데스 자신을 비롯한 다른 철학자들이 그들의 지혜를 운문으로 윤색하기를 고집하고 있어, 철학에서의 산문은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나 소피스테스 프로타고라스가 나오길 더 기다려야 했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드디어 그들이 바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단지 그들의 기록물이 산문이었다는 정도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아테나이의 문제가 그들과 엮여 있어, 나중에 따로 또 말씀 드리기로 하고, 지금은 계속해서 글자 기록의 변화에 대해, 이번에는 역사의 기록이라는 새롭고 장대한 변화에 대해 말해 나가고자 합니다.

 

3.2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앞서 말씀 드린 법의 기록도 그렇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식의 신들과 연관된 영웅들 이야기에 홀린 도시들의 유력자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글자로 적어 펼치는 매력을 그냥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도시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정통성에 바탕을 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권력 행사가 정당함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가계家系를 신들이나 신과 연관이 있는 영웅들이 조상인 양 꾸미고, 특히 그 가계 안에 있는 그들의 조상들 가운데 처음 도시 건설에 있어서나, 혹은 도시가 위험에 빠진 것을 구하고 중흥을 이루는 데 영웅적인 업적을 이루어, 도시가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기를 오래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행 역시 이오니아에서 시작되어 보이오티아와 아티케는 물론 시켈리아로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권력과 도시의 역사와 그들 조상들과의 관계를 장엄한 서사시가로 만들기에는 이미 시인들이 시인의 능력을 키우려 하지 않고 있어서, 시인이라는 밀레토스의 참주 카드모스조차도 그가 "밀레토스 건국사"를 쓸 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육절음률을 구사하지 못하고, 호메로스풍의 시들을 중간 중간에 끼워 넣은 산문logographia'40으로 쓸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의 글의 소요가 얼마나 많았었던지, 그들은 산문을 쓰는 전기 작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 책으로 펴도록 하고 있었고, 같은 멜레토스 출신의 유명한 여행자이자 설화 비평가인 헤카타이오스는 그런 지어낸 집안 내력이나 설화에 대해 비판하면서, 실제 그들의 집안과 도시들의 내력을 밝히는 "족보genealogia"라는 책을 운률이 들지 않은 산문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가 여행 다녔던 아이귑토스나 뤼비에나 아시아나 지중해의 북쪽 나라들의 땅과 사람 사는 모습을 적은 "세계 여행기periegesis"를 쓰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시가 아닌 산문이어야 했는데, 그는 "족보"로 진실을 말하고 싶었고, "세계 여행기"로는 발로 걸어 다녀 직접 보고 들었던 것들에 대해 본 대로 들은 대로 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시는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적는 데 어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산문의 글마져도 충분하지 않아 자기가 다녔던 자취를 생각하며 처음으로 "세계지도periodos ges"41를 그려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이것은 안개처럼 피어 오르는 문구로 장엄하게만 꾸미면서 진실을 흐릿하게만 보여주는 운문의 지혜에 대한 확실한 부정이었습니다. 헤카타이오스가 예전 그리스 사람들에 대한 설화는 모두 웃어 넘기자며 "족보"를 쓰면서 한 말, '이제 진실을 말하려 한다'의 진실은 운문의 꾸밈이 아니라 산문의 있는 그대로 말함이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산문으로 된 글은 일상의 말을 적을 수 있다는 문체의 이점을 뛰어넘자마자 진실을 담아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3.23. 다시 말해, 이런 기록이 가져온 혁신은 비단 문체의 변화만이 아니었는데, 있었거나 있는 것들에 대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충실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진실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기억으로 진실을 전할 때는 외우기 좋고 듣기 좋게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해서 애매모호한 표현이 있어도 운문이 절대적이었던 반면, 기록으로 진실을 전하게 되자 진실 그 자체가 너무나 중요한 전달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어, 있는 그대로 쓰는 산문이 최상의 기록 수단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혁신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歷史historiai'42라는 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의 기록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그 당시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긴 이야기이면서, 자신이 기록한 내용의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보이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의 선배 가계 내력 작가이면서 여행가이자 여행기 작가인 헤카타이오스의 '이제 진실을 말하려 한다'며 적은 기록에 대해 그가 로고그라포스 문체로 쓴 기록의 내용의 진실성의 의문을 보내면서 말입니다.

 

3.24. 일리오스를 치러 갔다가 생긴 아퀼레우스의 분노와 그 분노의 결과를, 페레퀴데스의 일리아스에 대한 주석을 빌려 바꾸어 말한다면, 신들 가운데에서라도 그가 누구든 방자hybris하게 굴면 제우스는 (주저 없이) 지하의 타르타로스 영역moira에 던져 버린다는 경고를, (그래서 영웅이라 한들 방자함이 신의 응징을 피해 갈 수 없었는데, 하물며 한낱 하루살이라면 신에 대해서 오만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기억으로 전승하도록 한, 호메로스의 만오천 행에 너댓 가지의 에페이소디온을 곁들인 일리아스식 전승 방법 대신에, 헤로도토스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는 말로, 헬라스가 치루어 내었던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야기를 파피루스에 글로 적어 책으로 만들어 전하게 하였습니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노래하라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akaioi' 사람들에게 수없는 고통을 주었고, 많은 영웅들의 굳센 영혼을 하데스로 보냈으며, 그들 자신은 온갖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그렇게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43.'로 이야기의 맨 첫 마디를 열어 그의 저작 의도를 말했었다면,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에서 제일 먼저 '세상 일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그래서) 헬라스 사람들과 (페르시아) 이방인들이 이룬 놀라운 일들을- 특히 그 둘이 무슨 까닭으로 전쟁을 벌이게 되었던가에 대한 저간의 사정을- (다음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스스로 조사하고 연구하여 적어 둔다44.'라고 분명히 전승傳承을 위한 기록이라는 그의 저작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호메로스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시로 남긴 것에서 벗어나, 산문의 기록이라는 새로운 기억의 전승의 방법을 세상에 열어 보인 일이었습니다. 

 

3.25. 밀레토스 남쪽의 한 작은 도시 할리카르나스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교육을 잘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집안에 시인도 있었던 헤로도토스가 그의 연구 결과를 호메로스의 일아아스나 오뒷세이아처럼 육절운률로 된 서사시로 쓰지 못했을 리가 없었지만, 그리고 한 세대 앞선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가 가계나 세계 순회기를 썼을 때나, 동시대 뮈텔레네의 헬라니코스가 아티케를 위시한 서른이 넘는 도시들의 내력에 대해 쓰고 있을 때도, 이들 둘 모두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의 육절운률을 외면하지 못해 중간 중간 옛 서사시풍의 운문을 섞은 산문45으로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와 동시대 사람인 시켈리아의 엠페도클레스가 시켈리아에서 그때까지도 철학자 시인답게 피타고라스나 크세노파네스가 그러했듯이 육절운률로 '자연에 대하여peri physeos'나 '정화katharmoi'를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시켈리아 레온티노이에서 사절로 왔다가 아테나이에 주저 앉은 고르기아스가 변론술을 가르치며 "비유非有(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를 쓰면서, 그리고 트라케의 아브데라에서 온 프로타고라스가 "진리 또는 의견" 그리고 "신에 대하여"를 쓰면서, 호메로스의 시는 말할 것도 없고 피타고라스나 크세노파네스 같은 철학자들의 시도 과감히 버리고, 페레퀴데스가 그랬듯이 산문으로 자연과 신과 인식에 대해 철학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에 박수라도 보내는 듯이, 페르시아 전쟁과 같은 많은 정보를 후세에 전하는 데는 은유나 운률이 아닌 직설적인 사실 표현과 자기 주장을 담은 산문이 더욱 더 알맞다고 믿고, 그렇게 긴 산문의 책을 썼던 것입니다. 그의 "역사historiai歷史"는 처음 사람들에게 생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믿어지지도 않아 거짓말을 모아서 적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 내용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소문인지 따지기 이전에, 이렇게 시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말과 같은 글로도 그 복잡하고 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별다른 오해 없이 더 쉽게 적힌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을 알고 나자, 사람들은 헤로도토스의 '조사 연구 보고서'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습니다.

 

3.26. 그때까지도 살아 남아 있던 마라톤의 전사들이나, 테르모퓔라이를 레오니다스에게 맡기고 그가 시키는 대로 못이기는 체하며 철수하여 살아 남아 있던 각 도시들의 전사들이 그 책을 읽고, 헤로도토스가 어째서 영광스런 마라톤이나 살라미스나 플라이타이아나 미칼레에서의 승리를 노래하지 않고, 호메로스의 일리오스를 치러 가는 아카이오이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아카이오이 사람들의 소아시아나 포이니케 사람들과의 교류 시절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페르시아의 사정을 말해 주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몇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헬라스 전체의 내전을 겪고 있던 도시들의 지도자들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충분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3.27. 사실 헤로도토스의 집안은 그곳 토박이로서의 명망을 얻고 있었음에도 고향 할리카르나소스의 참주 리그다미스를 타도하려는 내부의 정변에 그 집안 사람들이 연루되는 바람에 그가 성년이었을 무렵에 사모스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그 무렵의 헬라스는 해상동맹이 막 힘을 내기 시작할 때였고, 그가 한참이나 사모스에 머무는 동안 할리카르나소스에서는 재차 반정이 일어나 리그다미스를 내쫒고 민주정을 세우는 일이 일어났고, 곧이어 그는 그의 고향이 델로스 동맹의 동맹도시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헤로도토스가 그의 어린 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던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와 같은 세계 여행을 위해 사모스를 떠나, 십여 년을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아테나이에 머물고 있었을 때는 아테나이의 염치없는 독주가 스파르테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때 페리클레스는 이탈리아의 투리오이에 새로운 식민도시를 세우고자 했는데, 아테나이나 스파르테의 식민 도시가 아닌 전체 헬라스의 식민 도시로 세운다는 명분을 앞세워 혹시 나올지도 모르는 스파르테의 힐난을 피할 생각이었으므로, 아테나이에 거주하는 헬라스 여러 도시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트리오이의 건설을 위한 이주를 권장하고 있었고, 그의 여행 본색도 작용했겠지만 페리클레스의 권고도 있어 순순히 새로운 식민도시의 건설을 위해 투리오이로 이주하였습니다. 

 

3.28. 헤로도토스는 그곳에서 자기가 살 새로운 도시 투리오이의 헌법을 만들기 위해 페리클레스가 보낸 프로타고라스를 만났을 것이며, 그때 마침 소피스테스로서의 진면목을 보이고 있던 한창 때의 프로타고라스로부터 정치의 대강을 이루는 헌법 뿐만 아니라, 산문을 쓰는 어법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산문을 쓰는 사람들은 날로 늘어나는데, 문제는 글로 적은 말들이 무슨 말인지는 알려면 한참을 뜯어 봐야 할 정도로 제각기 쓰는 어법들이 다르다는 것이었는데, 프로타고라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마다 다른 사투리는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다 해도, 우선 알파베토의 표기법과 철자법 그리고 문장의 형식과 중문이나 복문의 연결법 등의 문법의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산문이 소통의 매개체로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보고 새로운 헬라스 문법의 틀도 짰는데46, 헤로도토스는 프로타고라스로부터 전해 들은 문법을 아무 문제 없이 이해하고 소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여 년이나 되는 제법 시간이 지나 투리오이가 프로타고라스가 만든 헌법에 의해 민주정을 시행하며 도시의 면목을 갖추어 갈 때 쯤, 프로타고라스는 그가 쓴 책 "신에 대하여" 때문에 아테나이에서 쫒겨나 시켈리아와 헬라스 사람들이 사는 이탈리아 남부를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가 투리오이로 갔고, 거기서 또 다시 헤로도토스를 만나 같이 지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프로타고라스가 아테나이에서 추방되고 얼마 있지 않아 아낙사고라스도 추방되어 헬레스폰토스의 람프사코스로 갔다는 소식이 들렸고, 정치적으로 몰린 페리클레스가 정치적 돌파구로 전쟁을 생각하고 메가라를 봉쇄했다는 소문이 무성하더니,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그 둘 모두 보았겠지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워낙 느슨하고, 스파르테라는 도시가 그들의 도시를 오래 비우면서 길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닌 것을 잘 아는 두 사람은 전쟁이 길어져도 서너 해 정도 아닐까 생각했겠지만, 역병이 아가멤논을 어렵게 만들었듯이 이번에는 페리클레스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가자, 헤로도토스는 바다 건너 헬라스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다시 보기 시작했고, 이 전쟁이 오래 갈 경우 결국 헬라스 전체가 허약해져서 또 다시 페르시아나 다른 이방인의 헬라스 침공을 불러 올 것이라 판단하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책으로 냈던 것이었습니다.

 

 

3.29. 헤로도토스의 페르시아 전쟁 '연구historia'는 투퀴디데스를 자극했고, 그래서 '아테나이 사람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의 전쟁,ho polemos ton peloponesion kai athenaion"47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이 전쟁이 과거의 어떤 전쟁보다 기록해 둘 가치가 있는 전쟁이라 믿고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런 믿음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 진영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최강의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고, 나머지 헬라스 사람들도 더러는 당장, 더러는 조금 망설이다가 어느 한쪽에 가담하는 것을 그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헬라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부 헬라스 바깥 사람barbaroi들에게도, 아니 전 인류에게 일대 사변이었습니다. 먼 옛날에 일어난 사건이나 우리 시대 이전에 일어난 사건은 벌써 시간이 많이 흘러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되도록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여러 증거를 검토한 결과 그는 전쟁이든 그 밖의 일이든 이토록 규모가 큰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기에 하는 말이었습니다48.'

 

3.30, 나중 제가 이 자리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전체 헬라스의 내전"이라고 말씀 드릴 때 그 "내전"은 바로 투퀴디데스가 말했던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의 전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쟁은 처음 아테나이와 스파르테가 시작했고, 마지막도 그 두 도시 사이의 승패로 끝나긴 하였지만, 투퀴디데스가 지적했듯이, 더러는 당장에 그리고 더러는 조금 망설이다가 어느 한쪽에 가담하여, 헬라스의 모든 도시들이 편을 나누어 벌인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도토스는 이 전쟁이 일어나자 한 세대 앞 지난 시절에 벌어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 주기 위해 '페르시아와의 전쟁 연구서'를 썼고, 투퀴디데스는 자신도 참여한 이 전쟁에 대한 역사성을 인식하고, 그가 느낀 역사성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바로 그 거대한 전쟁 중에 그 전쟁에 대해 기록해 나갔습니다.

 

3.31.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몇백 년 된 구전을 서사시로 엮어 기억으로 전했는데, 그로부터 200년이 훨씬 지난 뒤 헤카타이오스는 로고그라피아로 쓴 기록으로 신들이나 영웅들이 아닌 인간들의 가계를 전했고,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헤로도토스는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대해 서사시풍이 거의 없는 산문체로 기록하여 전했으며, 그 헤로도토스와는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투퀴디데스에 와서는 이제 전승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동시대에 일어난 일들은 거의 완전한 산문체로 그때 그때 그 당시의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때의 사실을 기록하는 일의 중요성은 비단 전승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 그때 일어난 일들의 사실 관계를 증명하는 데에도 빠져서는 아니 되는 중요한 일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도 전쟁 때문에 생긴 일이기는 하지만,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식의 서사시 내용에 대해 이제 '다 잊어버리자'며 '진실을 이야기한다'던 헤카타이오스는 헤로도토스로부터 기록의 사실 여부에 대해 의심을 받아야 했으며49, 그런 헤로도토스는 시간적으로 거의 면전에서 투퀴디데스로부터 그의 기록에 사실이 아닌 것이 많다며 힐난당해야 했습니다50.

 

 

3.32. 산문으로 자기의 주장을 그 즉시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과 기록으로 남은 그런 주장에 대한 사실 여부를 따지는 사정은 지혜를 말하는 철학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페레퀴데스가 처음 자연에 대해서나 신들에 대해서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자기의 생각을 써 보인 뒤로도 철학자들은 엠페도클레스에 이르기까지 시가 철학자들이 지혜를 전파하는 전통적이고 권위 있는 소통 수단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시로 그들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지만51, 그런 엠페도클레스도 자기의 또 다른 직업이었던 의사 일에 대한 기록은 산문으로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로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나란히 그들의 신과 우주와 자연에 대한 생각을 산문으로 쓴 책에서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3.33. 그러므로 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테나이에서 활동한 적지 않은 소피스테스들과 철학자들 가운데, 정치가 페리클레스와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키워 만든 프로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 이 두 사람을 소피스테스와 철학자의 대표로 뽑아, 이들의 생각이나 행적에 대해서 만은 반드시 여러분과 함께 짚고 넘어 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모두 그들 고향을 떠나 먼 아테나이로 와서, 그들의 생각을 정리해 책을 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을 가르쳤고, 정치가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펼치다가, 그들의 생각, 특히 신에 대한 생각이 우리 도시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런 생각을 금지하는 아테나이 정치꾼들이 만든 법에 걸려 아테나이에서 재판을 받고 쫒겨난 소피스테스에 철학자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싯적의 소크라테스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사이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3.34. 사실 에우리피데스도 그의 연극에서 말했지만52, 아테나이가 다른 도시들과 확연히 다른 점 하나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 특히 생각하고 말하는 자유입니다. 한 사람이 가진 생각이 도시가 전통적으로 지녀 온 가치와 다르다는 이유로 핍박하거나 금지시키거나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런 생각을 남에게 말하거나 가르친다고 핍박하거나 금지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유 덕분에 아테나이는 헬라스의 그 어느 도시보다 먼저 계급과 빈부에 구애 받지 않고 정치에 참여해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민주정이 자리를 잡았고, 그런 분위기 때문에 헬라스 곳곳의 현자들이나 장인들이 핍박을 피해 아테나이로 옮겨 올 수 있었으며, 또 그들 덕분에 아테나이는 언제나 활기를 잃지 않고 발전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자 페리클레스 때에 이르러 이들이 너무 많이 모여드는 바람에 그들의 중구난방에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고, 이 틈을 노린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아테나이는 처음으로 신과 우주나 자연에 대해 생각할 자유와 말할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생각의 옥석을 가린다는 명분으로 디오페이데스가 발의하여 만든 이 제한법53이 사실은 정적 제거의 도구였고, 이 법을 만든 페리클레스의 정적들54이 그런 민심을 이용해, 틀림없이 페리클레스의 힘이 되어 주고 있다고 보이는 프로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를 페리클레스로부터 떼어 내기 위해, 처음으로 그 제한법을 근거로 그 둘을 재판하고 쫓아내었던 것입니다. 생각할 자유, 말할 자유가 확보되어 있을 때만 정치가 도시를 통합해 가는 제 역활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권력을 쥐기 위해 그런 자유를 제한하는 어리석음을 정치가들 스스로가 저지르고 있었고, 그 둘은 그런 정치의 모순에 속절없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3.35. 이들 두 사람 가운데 프로타고라스는, 마흔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아브데라에서 여기로 와서, 도시에 맞는 인간을 만든다며 페리클레스의 아들을 포함한 웬만한 아테나이 명가의 자제들을 불러 모아, '가정을 잘 경영하는 기술', '도시의 일을 잘 처리하는 기술', 그리고 '말을 잘하는 기술'을 돈을 받고 가르치기 시작했는데55, 테오스 사람들은 그를 자기네 테오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젊어서 여기저기 많은 도시를 옮겨 다니며 가르침으로 먹고 살았던 모양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스스로를 처음으로 '지혜를 탐구하는 사람', 즉 "소피스테스"라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는데56, 그가 고향 아브데라에서 가르쳤던 그의 특출한 제자 데모크리토스를 '소피아sophia賢者'라 불렀던 까닭도 그가 아는 것이 많았고, 소피스테스라 스스로를 칭한 그의 스승 프로타고라스 때문이기도 했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이 한 세대가 늦은 데모크리토스를 프로타고라스의 스승이라고 바꾸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57, 그 두 사람이 모두 소피아와 소피스테스라는 이름을 서로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프로타고라스가 데모크리토스를 가르칠 때 수업료를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객지인 아테나이로 와서는 떳떳하게 수업료를 받아 생활비로 썼습니다. 이 때문인지 "소피스테스"라는 사람은, 돈을 받지 않고 가르치고 있었던 아낙사고라스와는 다른 형태로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 즉 "수업료를 받고 지식을 가르치는 철학자 내지는 교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돈을 받고 가르친다고 한 철학자의 지식이나 지혜를 폄하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저는 글자거나 기술이거나 또 다른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수업료를 주어 생활비로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직업으로써의 교사를 택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수업료를 받느냐 마느냐가 중요했겠지만, 저는 그것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얕은 지식과 천박한 가치관으로 번드르르한 말재주나 교활한 처세술 따위가 출세를 위한 지식이고 지혜인 양 들먹거리는 얼치기들이 자기도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소피스테스라며 나서는 것58에 대해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3.36. 어쨌든 이와 같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따르는 문제는 그가 아는 것에 대해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것이 틀렸다는 비난을 받는 일이어서, 이는 한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옳고 그른 것이나 아니면 그것이 맞고 틀린 것을 증명해야 하는 숙제가 남는다는 말이고, 옳고 그름이나 맞고 틀림을 굳이 증명하지 않고 자기의 지식을 유지하려면 결국 서로의 지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이때에 그들 각자의 지식은 자연히 진리가 아닌 한 지식인의 의견으로 인식되고 맙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이 지식이 진리로 인식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그런 와중에 또 새로운 주장이 나오는 등 주장과 논박이 난무하는 가운데, 프로타고라스 때에 와서는 진리는 신의 영역이어서 인간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단지 인간은 직관이나 관찰등으로 신의 영역을 슬쩍 엿보고 진리와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가질 수가 있을 뿐이라는 데59에 지식인들 사이에 어느 정도 공감을 이루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런 공감대를 부정하는 새로운 생각을 프로타고라스가 들고 나왔던 것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진리 또는 의견'이라는 그가 쓴 책을 통해, '인간은 세상 만물의 척도, 즉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있다고 말하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없다고 말하는 것의 척도이다.'라고 주장하며, 진리는 인간이 세상의 것을 "인식하는", 즉 관찰하거나 경험하거나, 아니면 추론으로나 직관으로 알아내는 것이라며, 다시 말해 진리라는 것은 신이 비밀스럽게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에 대한 "인식"을 통해 인간이 찾아가는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3.37. 인식에 대한 이 새로운 그의 생각은 그가 젊은이들에게 가르칠 때 쓴 수업 방식에도 그대로 나타났던 모양입니다. 페리클레스의 아들이 그의 집에 돈이 있는데도 그 돈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는 아버지를 비난하기 위해 들춘 이야기입니다만, 오종경기를 하다가 다른 선수의 과실로 창에 맞아 죽은 에피티무스를 두고, 그 죽음의 책임이 창이냐, 창을 던진 선수냐, 아니면 경기 진행 요원이냐를 두고, 하루 종일 벌인 쓰잘머리 없어 보이는 페리클레스와 프로타고라스 간의 그 논쟁60도 결국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는, 그래서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지기 때문에 사람이, 다시 말해 사람의 인식이 모든 것을 재는 자尺度라는 그 생각은 사람들 간의 인식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게 하는 수업의 방법이었겠지요. 물론 페리클레스의 못난 아들 크산티포스처럼 이런 인식의 전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얼치기 소피스테스들이 말장난이나 하고 공허한 화제로 논쟁하는 것을 비꼬기 위해, 제가 저의 연극 "구름"에서 소크라테스와 카이레폰이 각다귀의 소리가 어디서 나는가를 두고 벌인 한 논쟁 장면을 그 제자가 스트렙시아데스에게 전하는 이야기로 보여 드리기도 했지만, 프로타고라스가 사람마다 서로 다를 수 있는 인식을 인정하며, 그 상이한 인식을 바탕으로 문답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고 또 인간을 이해하면서, 조금씩 진리에 접근해 가려는 태도는 정말 훌륭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는 진짜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3.38. 이런 프로타고라스의 문답식 수업은, 아버지 밑에서 돌을 쪼는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61, 뜻한 바 있어 공부의 길로 나선 나이 서른을 갖 넘긴62, 소크라테스가 제일 먼저 배운 공부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에게 직접 제자로서 배운 적은 없지만, 칼리아스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가 당대의 명문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배우거나, 그 제자들과 어울리면서도 그 교습법을 배웠을 것입니다63. 사람들이 나중 소크라테스의 독특한 교습법에 대해 '시치미 떼기'라 하고, 그 자신은 '캐묻기'라고 불렀으며, 소크라테스의 어머니 파이나레테가 아이를 낳도록 도와주는 산파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낳도록 도와주는 기술을 쓴다고 '산파술'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사실 소크라테스의 그 산파술은 산파였던 어머니 파이나레테로부터가 아니라 프로타고라스에게 배운 것라 해야 할 옳을 정도로 프로타고라스의 문답식 교습법은 획기적이었습니다64.

 

3.39. 이런 프로타고라스의 인식 태도가, 세상의 일에 대한 중구난방 때문에 진리가 인간들에게서가 아니라 신들로부터 연유한다고 할 수 밖에 없었던, 당대 지식인들 사이의 풍조에 일대 생각의 혁명을 일으킨 것은 너무나 당연했지요. 그가 신들을 인식하는 태도도 '있는 것은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 하는 그만의 인식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그는 "신에 대하여"라는 자기가 쓴 책의 첫머리에, '신들에 대해서는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알 수 없다.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을 뿐만 아니라, 사안이 불분명한 데다가, 그것에 더해서 (그것을 알기 위해 매달리기에는) 인생은 짧기 때문이다.'라면서, 신이 진리를 주재한다면 진리를 찾기 위해 신을 파고 들어야 하는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프로타고라스가 신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지 못하고, 딴에는 신들에 대한 다른 인식 태도 때문에 공격당할까봐 에둘러 한 말이었지만, 신들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바보입니까? 딱 걸려들었지요. 그렇잖아도 페리클레스 일파가 그에게 모이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반대파들이 그냥 둘 리 만무했지요. 문답이라는 새로운 교습법으로 사람마다 다른 인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 남과는 다른 자기만의 인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남과는 다른 자기라는 존재를 깨닫게 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여주던 아브데라에서 온 자칭 소피스테스 프로타고라스를 신에 대한 불경죄로 몰아, 그 글이 실린 책 "신들에 대하여"를 모든 소장자들에게서 빼앗고, 아고라의 공터에서 그 책들을 태웠으며, 급기야는 큰 돈의 벌금을 물리고, 프로타고라스를 아테나이에서 쫓아내었습니다65.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니, 신은 없다'라고 하지 못하고, 책으로 내기 전에 에우리피데스의 집으로 그 책을 가져 가서 에우리피데스로 하여금 먼저 읽어 보게 했을 만큼66 에둘러 피해 간 덕분에 다행히도 목숨은 건져 아테나이를 떠났고, 십여 년 전 도시의 헌법을 기초해 주었던 이탈리아의 투리오이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를 떠돌며 일흔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아테나이에서 한 사람이 그의 생각 때문에 재판을 받고, 그의 책이 수거되어 태워지고, 도시에서 쫓겨난 것은 그가 처음이었습니다67.

 

3.40. 이렇게 소피스테스들의 원조 프로타고라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쳤다면, 다른 한 명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를 가르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낙사고라스는 아테나이로 와서 철학자로 활동하며, 이미 음악을 가르친다는 다몬에게서는 정치술을 배우고, 엘리아의 제논으로부터 자연철학과 토론의 수법을 배운 바 있는 페리클레스를 제법 괜찮은 아테나이의 유망한 정치지도자로 바꾸어 가고 있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서른 다섯 무렵 정권을 잡았을 때68, 소크라테스는 아직 어려 아버지의 공방을 기웃거리며 심부름이나 했을 것이고, 나중에 돌 쪼기를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직접 아낙사고라스에게 배울 수야 없었지요. 소크라테스는 처음 공부를 다몬에게서 배웠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그때 다몬에게서는 음악보다는 그 이외로 정치 수사나 변론술 등을 배웠을 것이지만69, 아무래도 본격적인 학습은 아낙사고라스가 아테나이를 떠나고 나서 그의 제자 아르켈라오스의 제자가 되었을 때 시작되었고, 그에게서 자연학과 철학을 배웠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70. 물론 페리클레스가 정권을 잡고 아낙사고라스가 그의 든든한 조언자로 있을 때에 그의 책 "자연에 대하여"를 읽고 생긴 의문들을 물어 보기 위해 간혹 아낙사고라스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므로, 그에게 직접 배운 제자라기보다는 그에게서 만물의 움직임의 근원이 되고, 그 움직임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지성nous"이라는 개념을 통해 앞으로 자기가 공부해야 할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방향을 정했을 것입니다71. 다시 말해 아르켈라오스가 스승 아낙사고라스가 태초에 세상이 물질과 누스知性로 뒤섞여 있었는데 누스가 물질들에 질서를 부여했다고 한 데서 영감을 얻어, 그 누스가 물질에 부여한 질서를 자연에서 찾아 자연에 대한 공부에만 몰두한 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물론 그도 그의 스승 아르켈라오스로부터 처음에는 자연학을 배우는 데서 공부를 시작했었지만72, 그 사조師祖 아낙사고라스가 누스가 만물에 질서를 부여했다고 하면서도, 근원인 누스를 통해 자연을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우주나 자연에 대해 너무 물질적으로만 강조하여 설명하고, 또 아르켈라오스 역시 그 방면에만 집중하는 것에 실망하여73, 물질보다는 누스를 중시하는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그것도 누스를 자연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에서 찾아, 인간에게 나타나는 누스, 즉 인간의 품성과 그 품성이 '할 바'에 대한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지만, 결국 그의 인간의 품성 공부는 아낙사고라스에게서 출발한 것이므로, 아낙사고라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를 가르쳤다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3.41. 또 하나 소크라테스가 그의 사조 아낙사고라스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재물을 보는 철학자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돌을 쪼으다 철학 공부로 돌아선 것은 그의 영혼이 아름다운 것에 반한 그의 마을 친구 크리톤이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소크라테스의 영혼도 다분히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아낙사고라스의 재물에 대한 태도가 페리클레스에게 미치는 영향을 간과하고서라도 그 자체로 그에게 훌륭한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크세르크세스가 헬라스를 침공했을 때 스무 살이었던 아낙사고라스는 고향 이오니아의 클라조메나이에서 아테네로 유학 와서, 아낙시메네스74로부터 배웠는데, 전쟁으로 다시 고향에 갔다가 크세르크세스가 죽기 세 해 전 서른둘의 나이에 다시 아테나이로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페리클레스와 같은 아테나이의 유망주들을 가르칠 때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이 좀 특이한데, 들었던 바로는 그의 집안이 제법 잘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워낙 아낙사고라스가 재산에는 관심이 없어 가족들이 그 점에 대해 나무라자, 물려받은 재산을 친척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을 만큼 재물에 대해 담백하고 도량도 꽤 넓었던 것으로 보입니다75. 그런 그가 수업료를 받았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소크라테스가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는 것에 목매다는 까닭도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소크라테스의 재산이나 물질에 대한 태도도 그의 사조인 아낙사고라스에게서 배운 것임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좋아 보였겠지요. 그리고 페리클레스 역시, 물론 아낙사고라스가 보인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따라 한 재물에 대한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관직을 수행하여 그 때문에 비난 받았던 일은 없었고, 오히려 검소한 재산 운영으로, 돈을 쓰지 못하게 한다고 자기 아들에게서 욕을 먹을 정도였던 것을 보면, 아낙사고라스가 재물을 대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언행에 있어 제자들의 귀감이 되었던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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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아낙사고라스가 '누스'를 만물의 움직임의 근원으로 보고, 특히 만물이 그들 자신의 축소판인 '호모이오멜레이아同質素'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 생각은, 소크라테스에게 그 누스가 모든 것의 질서를 결정하며, 그 질서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며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했으며, 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프로타고라스에 의해 혁명적으로 부정되었던 신이 관장하는 진리를, 다시 말해 진리가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게 했습니다76. 뿐만 아니라, 아낙사고라스의 누스가 소크라테스가 신의 지혜에 비해 인간의 그것이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를 밝히는 데 주력하게 했던 다리이자, 그가 사약을 받기 전에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 케베스와의 대화를 통해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의 제자 파이돈에게 약간 맛을 보여준 '이데아'로 가는 길77이 아니었나 생각될 정도입니다. 아낙사고라스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각각으로부터 그들 각각의 존재 원리를 찾았던 첫 번째 철학자로 보입니다. 그래서 모두의 스승인 아낙사고라스는 소크라테스 뿐만 아니라 페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78를 포함한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지혜를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위엄 있고 누구든 끌리는 문체로, '누스知性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던 태초에 질서를 부여했다'고 쓴 그의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누스'라고 부른 것도 그의 지성을 높이 평가한 때문이겠지요. 

 

3.43. 그런데 정치라는 괴물이 이런 아낙사고라스를 죽음 직전으로 몰아갔습니다.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나서 신전의 완공을 보던 해에79, 이미 그때 아테나이의 거침없는 권력자로 자리한 페리클레스에게 타격을 입힐 목적으로 아낙사고라스를 목표로 삼아, '전래의 신을 부정하거나, 우주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내면, 처벌하는 법'에 따라 그를 고발하고, 가죽장사로 돈을 벌어 관직에 나간 클레온과 페리클레스의 정적 투퀴디데스가 나서, 그가 '태양을 (신이 아니라) 타오르는 금속의 덩어리'라고 설명하며 신에 대한 불경죄를 저질렀으며, 또한 페르시아와 내통해 간첩죄도 지었다면서,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고, 아테나이 시민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던 아낙사고라스가 페리클레스의 노력으로 겨우 사면을 받고, 아테나이를 떠나 헬레스폰토스의 람프사코스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몸이 병약해졌을 뿐더러 재판 과정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실의에 빠져 있었으나, 다행히 그곳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어 철학자로보다는 교육자로 만년을 보내다가, 역병으로 페리클레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얼마 못 가 이듬해 일흔 둘의 나이로 그곳에서 숨졌습니다80. 한평생 남을 가르치며 살아 왔던 그가 죽기 전에 부탁한 것은 그가 죽은 날만이라도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좋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답니다. 람프사코스에서는 지금도 그가 죽은 날에 아이들이 마음 놓고 놀도록 하고 있다니, 그렇습니다. 그의 생각대로 아이들은 놀면서 배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3.4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옛날에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던 사람들과, 소크라테스를 욕하는 연극을 만들어 아테나이 시민에게 소크라테스를 잘못 소개한 죄를 저질렀다며 저를 불러, 마치 저와 저 세 고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지만, 제가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여러분은 소크라테스 이전에 이미 한 소피스테스와 또 한 철학자에게 신들에 대한 불경죄를 물어, 아테나이에서 내쫓거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한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많은 소피스테스들과 철학자들 가운데 당시의 명문 자제들을 가리치던 소피스테스 하나와 철학자 하나를 골라 신들에 대한 불경죄로 몰았었지만, 그때 아테나이 사람들은 타지에서 온 그 두 사람에게는 책에 글로 적힌 증거가 있었음에도 대단한 아량으로 그 둘을 죽이지 않고 내쫓기만 했는데, 세월이 지나 내전을 겪고 난 뒤인 소크라테스 재판에서는 책은커녕 단 한 줄의 글도 써서 돌린 적도 없으며81, 그렇다고 번듯한 학원을 차려 정식으로 교육을 하거나 신들에 대한 강의를 한 것도 아닌데, 또한 그가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도 없는데, 아테나이의 알로페케 출신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리고 그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프로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와 소크라테스의 세월 사이에 아테나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소크라테스에게는 프로타고라스를 돕던 칼리아스도 없고, 아낙사고라스를 사면시킨 페리클레스도 없었기 때문이었나요? 아테나이로부터 영구 추방을 당하고 갈 데가 없어 아테나이 밖에서 헬라스를 위성처럼 떠돌다 스파르테에 몸을 의탁해야만 했던 알키비아데스와 크세노폰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스슬 퍼렇던 서른 명의 과두정에서 유난히 악독했던 크리티아스는 무니키아에서 돌에 맞아 죽고 없고, 플라톤은 아직 어려 힘을 쓸 계제도 안 되었으니,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스승의 목숨을 구하는 데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나요? 아니면 소크라테스의 열렬한 동지이자 제자이고 민주정의 지지자 카이레폰마져 이태 전에 죽고 없어 그를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나요? 설마하니 오히려 잦은 정변 뒤에 민주정이 회복되고 난 후, 아직 어린 플라톤을 빼고 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힘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아뉘토스가 그들의 스승을 잡도리하는 데 빌미가 된 것은 아니겠지요? 다시 말해 스파르타에 붙었던 알키비아데스나 크세노폰이나, 아니면 특히 잔혹했던 참주정의 지도자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가 그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목숨 줄을 잡았던 것은 아니었겠지요? 아니면 곤봉과 회초리를 들고 설치던 쪼무래기들이 그 옛날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참주로 만들었듯이 지금 소크라테스를 참주로 모시고 나올까 겁이 났나요? 아무렴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뉘토스는 왜 꼭 그렇게 고립무원의 늙은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두들겨 잡아야만 했을까요?

 

3.4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페리클레스가 해야 할 것이지만, 부활의 신이신 디오뉘소스에게 그를 하데스로부터 불러 달라고 부탁 드리기보다는, 그 페리클레스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무슨 변화를 가져다 놓았는지를 보여 드리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 같아, 글자가 가져다 준 우리들 생각의 변화에 이어, 지금부터 페리클레스가,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페리클레스식 정치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추구하는 가치 체계를 어떻게 변하게 했는지 한번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3.4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 다시 말해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눈을 가졌던 소피스테스 하나와 철학자 하나가이 불경죄로 아테나이를 떠나야하는 일이 생기는 동안에도, 아테나이에는 인간을 다시 보는 눈들이 소피스테스나 철학자가 아닌 여러 방면의 전문가82들에게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긴 새로운 눈들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돌을 쪼는 조각이 아니라 철학의 세계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47. 동맹도시로부터 거둔 돈을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 금고에서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나이 공금 금고로 페리클레스가 옮긴83 뒤부터 도시에는 새로운 정쟁거리가 생겼습니다. 아테나이의 이런 몰염치에 대해 그래서는 안 된다는 반대자들이 그때까지도 있었다는 것이 정치의 오묘한 술수 같아 참 씁스레하지만, 반대자들의 항변에 대한 페리클레스의 대답이야말로 그때 아테나이라는 도시의 패권적 타락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델로스에 그냥 두면 그 돈을 페르시아에 빼앗길 수 있다'가 그 대답이었습니다. '아테나이가 페르시아 군대를 막아 주고 있고, 동맹도시는 돈만 내었을 뿐이다. 그 돈은 낸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값어치를 한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하며, '동맹도시에 그 비용을 사용한 내역을 알릴 의무가 없다'고 재차 주장했고, '아테나이가 동맹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 아테나이는 그 돈을 임의로 쓸 권리가 있다.'고 강변했습니다84.

 

3.4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동맹의 돈을 아테나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이러한 패권적 독단이 어떻게 아테나이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 어떻게 전쟁으로 도시가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믿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아테나이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도시들, 동맹이거나 아니거나를 가릴 것 없이, 좀 삐딱한 행동을 보이는 도시들에게 아테나이가 어떤 징벌로 보복했는지, 이 모두의 연원과 인과를 사모스라는 한 섬의 경우를 예로 들어 여러분께 한번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3.49. 크세르크세스는 가을에 아테나이를 떠나 겨울을 사르데이스에서 나고 있었고, 마르도니우스가 이듬해 봄부터 협상을 통해 스파르테와 아테나이를 위시한 헬라스 남쪽의 도시들을 페르시아에 복속시키려 시도하고 있는 것을 지켜본 사모스는 스파르테와 아테나이가 결코 복속에 응하지 않을 것을 알고85, 다른 이오니아의 도시들과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 것이라며, 헬라스 연합 함대에 이들 도시들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고, 헬라스 연합 함대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벌어진 뮈칼레 곶에서의 전투에서 이오니아 반군들의 도움을 받은 헬라스 연합군이 승리함으로써86, 사모스와 밀레토스를 위시한 이오니아 도시들은 페르시아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에서부터 사모스의 경우가, 바꾸어 말해 아테나이의 제국주의와 패권이 어떻게 다른 헬라스의 도시들에 대한 무력시위로 나타나게 되었는지가 비롯됩니다.

 

3.50. 플라타이아이에서의 패전과 마르도니우스의 전사 소식에다, 코앞 뮈칼레에서의 패전까지를 본 크세르크세스가, 그 보름 후 7월의 여름이 한창일 때 서둘러 사르데이스를 떠나 수사로 돌아가자 2년에 걸친 전쟁도 끝이 나서87, 이제 헬라스 연합군은 아이가이온 바다와 이오니아 해역에 출몰하는 페르시아 잔존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헬라스 해상동맹으로 바뀌어 레오티키데스 대신 파우사니아스가 동맹을 이끌었고, 사모스와 밀레토스 그리고 다른 이오니아의 도시들의 참여로 혼란스러진 동맹은 파우사니아스 대신 아리스테이데스를 동맹의 지도자로 뽑았고, 이들은 이듬해에 아테나이와 함께 델로스 동맹을 창설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특히 이오니아에서의 해상 지배권을 두고 페르시아와의 다툼이 그 이후에도 계속된 가운데, 사모스는 자주권을 가지고 독자 함대를 보유하는 동맹 도시로서 확실한 자기 역활을 맡게 되었지요. 물론 아테나이는 계속된 페르시아와의 패권 다툼에 키몬이 눈부신 전과를 거두면서, 그 수확을 아테나이로 보내며 제국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었고요. 이런 자신감이 페르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이집트까지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88. 전쟁은 전리품의 노다지를 의미했고, 제국의 확장은 조공 수입의 증대를 의미했으니까요. 전쟁과 제국의 확장이 도시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의 믿음은 아테나이에 클레이스테네스가 닦은 민주정보다 더 발전된 형태의 민주정을 기대하게 했고, 이 새로운 정치 요구를 페리클레스가 읽고, 빈민을 대변하는 에피알테스를 앞세워 개혁에 나섰고89, 얼마 되지 않아 최대의 정적이자 귀족들의 대표이며 구시대의 지도자이던 키몬을 축출하고, 그가 하던 일을 맡았습니다. 장군으로서의 키몬의 활약은 아테나이에 대단한 것이었지만, 아테나이 사람들은 키몬이 스파르테의 노예 반란을 돕겠다고 갔다가 스파르테의 거절로 체면을 잃게 되자, 타소스 정벌 후 열린 길을 따라 마케도니아를 치지 않은 것은 뇌물을 먹은 탓이라며 재판에 회부하였고, 무죄 판결이 났지만 얼마 후 도편 추방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에서 아테나이가 패한 뒤로 민심이 키몬을 다시 찾는 기색을 보이자, 페리클레스가 키몬을 다시 불러 페르시아를 상대하라며 퀴프로스로 보내고, 그가 거기서 죽기까지 하면서 페르시아를 압박한 덕분에 페리클레스는 칼리아스를 보내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지요90.

 

3.51. 페르시아와의 평화는 이오니아에서의 새로운 분쟁을 야기했는데, 평화가 온 이상 동맹을 위한 공납금은 더 이상 필요 없지 않냐며 동맹들이 이탈하려는 움직임과, 독자적인 함대를 가지고 자주권을 행사하던 도시들이 드러낸 이오니아에서의 세력 확장 기도였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아테나이의 다른 도시의 부에 대한 욕심 때문에 벌어진 타소스 섬의 경우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아테나이는 밀레토스를 본보기로 삼아 밀레토스의 해군을 해체하고, 밀레토스의 내정을 간섭하여 정치 체제까지 민주정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91.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패권 문제와 이오니아에서의 이반이 일단락되자, 헬라스 본토로 눈을 돌려 스파르테와의 30년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이미 이룩한 제국의 토대를 확실히 다지면서, 새로운 아테나이 건설로 헬라스에서의 패권을 쥔 막강한 모습을 아테나이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 헬라스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 시작했습니다. 키몬이 죽자 지리멸렬해진 아테나이의 귀족들은 투퀴디데스를 중심으로 이런 페리클레스의 독선과 대중 조작을 규탄하고 반대했지만,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은 페리클레스가 나누어 주는 작은 선심에 감읍하여 투퀴디데스마져 도편추방하고92, 페리클레스 시대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가 다스리고 시민은 따르는, 페리클레스식 민주정 체제'를 가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3.52. 사모스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가 이오니아의 아테나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고자 했습니다. 밀레토스가 아테나이의 종속 도시로 전락한 것도 그들의 날개를 펴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모스의 움직임에 밀레토스는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도시를 재건하고 4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독립은커녕 주인을 페르시아에서 아테나이로 바꾸었을 뿐인데다가, 조공은 오히려 페르시아에게 바치던 것보다 더 많고, 함대는 빼앗기고 무장도 해제당하여 어디 가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도 없어, 그저 아테나이의 처분에 도시의 안위를 맡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건너 편 섬의 사모스는 아테나이 흉내를 내며 옛날 그들이 개척해 두었던 인근의 도시들에 야금 야금 발을 들여 놓더니, 이제는 프리에네까지 넘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모스에게 프리에네에서 손을 떼라고 몇 번이나 요구했지만 듣지 않아, 전쟁이 나서 지고 말았지요93. 사모스가 밀레토스를 우습게 본 것은 옛날 이야기고 이제는 그들의 도시마져 내놓으라고 욱박지를 판이니, 아테나이에게 하소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94. 밀레토스의 지원 요청을 받은 아테나이는, 사모스가 자주권을 가진 도시여서 스파르테의 눈치를 아니 볼 수 없는 데다가, 델로스 동맹 도시들 가운데서도 함대의 규모나 운용 능력이 뛰어나 함부로 다룰 수도 없고 해서, 처음부터 다짜고짜 무력시위를 보이기보다 좋은 말로 중재에 의한 해결을 사모스에 권유했는데도 사모스가 거부하자, 페리클레스는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3.53. 아테나이에서 이제 그의 뜻을 거슬러 대어들 사람이 없듯이, 델로스 동맹 내에서 아테나이의 뜻에 거슬러 대어들 도시가 없다는 것을 보이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장차 헬라스에서 아테나이의 뜻에 거슬러 대어드는 도시도 없앨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아테나이에서 그런 페리클레스가 동맹주에게 대어드는 하룻강아지 사모스를 징벌하기 위해 나섰을 때, 누구 하나 반대가 없었던 것이 그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었지요. 곧바로 페리클레스는 사모스를 쳐서 점령한 뒤, 과두정을 민주정으로 바꾸고, 과두정파와 그 자제들을 인질로 잡아 다른 섬에 유폐시킨 다음95, 민주정의 권력이 안정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아테나이 군대를 사모스 시내에 아테나이군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철수하였습니다. 과두정파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페르시아 총독의 아들의 사르데이스 유력자 피수트네스의 도움을 받아96 반격을 시도하였고, 주둔군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 다음 페르시아에 보내 버렸습니다97. 이에 페리클레스는 재차 사모스를 공격하였는데, 사모스의 해군 지휘관이던 파르메니데스의 신봉자 멜리소스에게 패한 적도 있기는 했지만 그런 일이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고, 아테나이는 사모스 도시 주위에 방벽을 쌓고 아홉 달이나 봉쇄함으로써 사모스가 시들어 죽게 한 일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98.

 

3.5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 일에 대해서는 페리클레스가 동반자99 아스파시아의 벼개 송사를 듣고, 아스파시아의 고향 도시 밀레토스를 핍박했던 사모스를 망하게 해, 아스파시아의 분을 풀어 준 것이라고 전 헬라스 사람들이 수근거릴 정도로, 그때 사모스에 대한 아테나이의 징벌은 가혹했고, 전 헬라스 사람들도 그것을 결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페리클레스로서는 사모스를 본보기로 삼아, 아테나이가 하는 일에 불만을 제기하거나,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도시들에게 겁 주려 했겠지만, 그래서 자주권이 없는 약체의 도시들에게는 그 의도가 어느 정도 먹혀들어 그런 동맹도시들이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위협으로 유지되는 동맹을 바탕으로 유독 아테나이만 번영을 누린다면, 이를 바라보는 다른 도시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사모스에 대한 아테나이의 태도는, 이오니아나100 헬레스폰토스의 도시들에게101 당장의 이반은 어렵겠지만, 페르시아나 스파르테 같은 외세의 도움을 받는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도록 했는데102, 그렇지만 그 도시들이 당장은 징벌의 가혹함에 눌려 아테네의 패권에 굴복하며 지내도록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렇지요, 이 사모스의 일은 비단 우리의 동맹도시들 뿐만 아니라, 나머지 헬라스 도시들의 두려움을 불러, 곧 전체 헬라스를 내전으로 휘몰아 나가는 두 번째 함정103이 될 줄을 그때 아테나이 시민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오니아에서의 내전은 언제 어느 때에나 페르시아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은 모두 불만이고 불안해 하는데도 흥청망청 우리들 아테나이 사람들만은 모두가 즐거웠으니까요.

 

 

3.5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리하여 페리클레스는 동맹이 낸 돈으로 아테나이를 꾸미는 대단위 토목공사와 건축공사를 벌였고, 아테네 사람들이 그 일로 떨어지는 떡고물을 얻어 먹으며 아테나이의 영광을 떠들어 대고 행복해 하도록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안에 처녀신을 위한 웅장하고 화려한 신전을 짓기 시작했고, 입구에는 그 신전을 본떠 전에 없던 대문까지 세워 나갔습니다. 곳곳의 여러 기술자들이 모여 재주를 뽐냈고, 군대에 갈 수 없어 돈을 벌지 못하던 사람들도 새로 기술을 배워 돈을 벌 수 있었지요. 키몬이 평생 자기 돈으로 도시에 베푼 것과는 달리, 페리클레스는 자기 돈 한푼 쓰지 않고, 동맹도시의 돈을 가지고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에게 마음껏 베푼 것이었습니다. 죽은 키몬은 말할 것도 없고, 산 투퀴디데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발상이어서, 정치적으로 크게 한방 먹었다 싶어 열심히 그래서는 안 된다고 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 와중에 아테나이 시민의 반감을 사서 쫓겨날 것이 분명한데도104,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아테나이의 정신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 제게는 너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만, 그것도 잠시 아테나이에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3.56. 그것이 돈을 낸 동맹도시들에 대한 몰염치한 짓이었든 아니면 펠리클레스의 생각처럼 아테나이의 권리였든 상관없이, 그 돈으로 도시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비단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치장도 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도, 신들의 행적만이 아니라 인간들의 행적도, 장식물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신을 인간의 모습이나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하는 존재로 묘사한 것 때문에, 그런 신들이 그들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인간의 모습이 장식물에 나타나자, 인간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맨처음엔 눈에 보기 좋고 안정감 있게 보이도록 집을 지을 때 주로 쓰던 비례의 기술이105 이제 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모습을 나타낼 때도 적용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 몸의 모든 데가 길어졌습니다. 얼굴도 목도 팔도 다리도 모두 길게 늘어지고 보기 좋은 비율로 바뀌어 갔습니다. 저나 소크라테스 같은 몸은 장식에 적당하지 않게 되었고, 페리클레스나 알키비아데스 같은 인간의 모습만이 장식에 맞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모르지요. 이번에는 얼굴이 길어 스키노케팔로스로 불리던 페리클레스를 띄우기 위해 그랬을지도. 길고 큰 머리를 감추려 투구 쓴 페리클레스가 장식에 많았잖아요? 아테나의 방패에 페리클레스의 얼굴을 한 전사를 둘이나 새겨 넣을 수 있는 재주를 가진 페이디아스 정도의 조각가들은 몰라도, 소크라테스의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 같은 석공들에게는 인간 몸의 실제 비율과는 너무 다른 인간의 모습을 깎는 것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도 느껴졌겠지만, 하나 둘 그렇게 깎고 나서는 오히려 그 비율이 실제의 비율보다 더 편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남에게 보여주는 것의 세상에는 프로타고라스와는 정반대의, 다시 말해 '있는 것은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하는 눈이 아니라, '있는 것도 감추고 없는 것도 집어 넣는다'는 새 눈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있는 것도 빼고, 없는 것도 넣어 가며, 아름다움을 꾸며 가기 위해 돌을 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소크라테스가, 그냥 일꺼리가 많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행복해 하는 아버지의 공방을 떠나, 그것보다는 정말 올바르고 참다운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찾아 나서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날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찾던 것이 무엇이었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3.5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무튼 아테나이에서는 여기저기 돌을 쪼는 일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테나이에는 여러분들이 어린아이처럼 흥청망청 즐길수 있는 볼거리나 놀이와 연회가 매일 벌어지는 거리 행진들과 함께 펼쳐졌습니다. 노래와 악기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각지에서 온 놀이패들과 광대들이 새로운 곡예를 선보이며 여러분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을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거리에서 이런 놀이판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 아테나이의 디오뉘소스 극장을 지키던 연극의 전통적인 구조106도 바뀌어 갔는데, 비극의 구조107는 말할 것도 없고, 희극의 구조108도 비극 구조를 본받아 무대를 키워 나가고 있었으며, 연극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소재와 그런 소재를 다루는 관점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잊혀져 가는 서사시권들에서 따온, 신탁이나 신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이야기라 해도, 주인공들이 연극의 전개에 훨씬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관객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아니, 연극을 보는 관객들의 달라진 눈을 작가들이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3.58. 여러분도 아티케의 작은 마을에서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새봄의 첫 며칠 동안 벌어지는 부활의 신이자, 축제의 신이자, 축제에서는 빠질 수 없는 포도주와 연극의 신인 디오뉘소스를 모시고, 풍요를 비는 작은 마을들의 디오뉘시아dionysia에 남자를 상징하는 물건을 커다랗게 만든 팔로스를 들고 다같이 거리의 행렬에 따라 나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아티케산 포도주가 헬라스의 인기 상품이 된 이후 아테나이에서 열리기 시작한 포도주 마시기 축제인 레나이아lenaia 디오뉘시아109에 가 보시지 않은 분 역시 아무도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 봄이 왔다 싶으면 큰 도시에서 아주 큰 규모의 도시 디오뉘시아110가 열리게 되지요. 작은 마을의 행진을 빼고는 디오뉘시아마다 연극을 들고 나와 시합을 벌이는 차례가 있습니다111. 그리고 도시가 배우들을 육성하여 연극에 출연할 수 있도록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마다 따로 코레고스choregos112를 지정해 주어 공연에 출연하는 코로스 비용을 돈 많은 시민들 가운데서 내도록 한 뒤로, 연극은 출연하는 배우113와 코로스를 부담없이 배치할 수 있게 되었고, 여러가지 면에서 옛날과는 다른 연극이 축제 때마다 무대에 올려져 왔습니다. 배우들 뿐 아니라 전체 코로스의 인원도 늘어났으며, 무대에 연극의 배경이 설치되자114 무대 전체를 모두 사용하게 되었고, 또 작은 이동식 무대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삼각통periaktoi에 흑백 그림을 그려 연극 진행에 따라 돌려 놓기도 했으며, 출연진들이나 배경이나 기구를 무대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기중기mechane와, 집 안이나 신전 안에서의 장면임을 나타내는 배경을 싣고 옆으로 움직이게 하는 수레ekkyklema 따위의 기계 종류들도 무대를 풍성하게 하는 등 전체적으로 연극의 규모가 커졌습니다115. 보다 큰 무대와 출연진을 가질 수 있게 되자, 연극의 소재와 그 소재를 다루어 내는 내용도 달라지기 시작했고, 내용의 전개나 전달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연극에서 노래보다 대화가 늘자 주인공들이 하는 말투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비극은 비극대로 번잡한 디튀람보스 코로스의 공연에서부터 아리온과 테스피스를 거쳐116,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 같은 대가들이 연이어 나타나 여러분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또한 희극은 희극 나름대로 키오니데스나 크라티노스가 그때 그때 일어나는 도시의 문제들을 희극에 접목하면서, 한낱 광대의 치기 어린 난장판으로부터 벌써부터 벗어나 있었고117, 포도주와 디튀람보스 판이던 레나이아 축제에 희극을 선보이면서 레나이아를 포도주 뿐만 아니라, 극장의 신 디오뉘소스를 경배하는 희극의 축제118로도 그 성격을 더보탰지요. 페리클레스 자신은 원치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희극이 도시의 문제들, 특히 정치의 문제들에 '입바른 말直言', 즉 파레시아parrhesia를 통해 도시의 비평 언론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인지, 투퀴디데스를 추방하고 페리클레스가 독점적 권력을 잡던 해부터 도시의 행사로 희극 경연도 생길 만큼 희극은 단순히 조롱조의 단막극이나 가면 쓴 광대극이 아닌, 오늘날 여러분이 즐기는 수준의 본격적인 연극이 되었다는 것 정도는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이라 중언부언 않겠습니다. 

 

3.59. 디오뉘소스가 제게 불어 넣어 준 광대의 영혼으로, 제가 지어 올린 희극은 연극 내용의 독특한 소재는 물론이고, 그 소재를 다양한 장면들로 짠 구성과 시대를 대표하는 등장인물들과 두 배까지 늘린 코러스의 규모와 그들의 특이한 성격과 역활, 그리고 무엇보다 막과 막 사이에나 어차피 시간 끌 일 없어 장면의 생략이 필요할 때, 어김없이 제가 나서 배우나 코러스와는 다른 목소리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께 한 말씀 올리던 톡톡 튀는 파라바시스의 자유분방함과, 마치 무슨 비극의 전유물인 것처럼 형식에 매달려 짜 넣던 코러스의 스트로페는 말할 것도 없고, 파라바시스에도 코로스로 하여금 신들에게 올리는 찬가를 부르게 하고, 에피레마를 넣어 거침없이 앞선 코로스 대장의 주장에 힘을 보태는 새로운 역활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희극의 구성 형식과 더불어, 표현 방법도 희극의 무대만큼 넓혀 나갔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께서도 이런 새로운 희극을 좋게 보는 새로운 눈이 생긴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우리 시대의 흐름이라 하겠습니다.

 

 

3.6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왕에 연극 이야기가 나온 마당이라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고, 지금도 사랑하시는 에우리피데스를 여러분께 자랑스러운 저의 스승으로 소개해 올릴까 합니다. 제가 틈날 때마다 비꼬고, 낮추어 보고, 흠집을 내던 에우리피데스119를 저의 스승이라 부르니 정말 놀라우시겠지요. 앞에서 제가 실제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에게서 문답식의 교습법을 직접 배운 적이 없었는데도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산파였던 그의 어머니에게서가 아니라 소피스테스 프로타고라스에게서 배운 것이라 말씀 드렸듯이, 마찬가지로 제가 단 한번도 에우리피데스로부터 연극의 줄거리를 어떻게 짜는지,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는지, 코러스에게 어떤 역활을 맡기는지, 무대를 어떻게 꾸미는지, 다시 말해 연극의 구성과 연출이 무엇인지를 직접 배운 적은 없었지만, 에우리피데스가 만든 연극을 보고 연극을 어떻게 만드는지, 그 연극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배우고 익혔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에우리피데스를 저의 스승이라 소개해 올리는 것입니다120.

 

3.61. 이 자리에 계신 아테네 시민 여러분 가운데는 나이가 지긋하셔서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121와, 소포클레스의 오레스테스122와,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123를 모두 다 보신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아이스퀼로스가 신의 뜻대로 또 운명이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오레스테스의 비극적 상황을 그려 무대에 올린 비극작가였다면, 소포클레스는 비록 신이 쳐 놓은 운명의 덫 속에서 움직이지만 그런 비극적 상황에서 끊임없이 자기가 누구인가를 찾아 가는 오레스테스의 역정을 그려 무대에 올린 비극작가였고, 반면에 에우리피데스는 신이나 운명에서 벗어난,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자신의 의지로 정하고 그 결정을 감당하는 고뇌의 오레스테스를 무대에 올린 비극작가였습니다. 자기가 저지런 일에 대해 고뇌하고 고통 받는 오레스테스를 보는 에우리피데스의 눈은 아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가 가졌던 눈과는 정말 너무나 다른 시대의 눈이었으며, 그러한 눈으로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보았으며, 그런 인간을 바탕으로 그만의 에우리피데스식 비극을 그만의 구성과 언어로 만들었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페리클레스가 그 멍청한 메가라에 대한 경제봉쇄령을 거두지 않아 헬라스에 내전이 터진 그해, 또 에우리피데스가 그의 처녀작 "펠리아스의 딸들peliades"을 처음 무대에 올린지 스무다섯 해가 되어,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보여 드렸던 "메데이아"는 그때 사춘기를 맞았던 제게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 어떻게 다른가가 빚어 내는 비극이 아니라, 에우리피데스가 원전 아르고스 퀴클로스에는 없는 이야기지만, 이오의 전설과 에 따라 메데이아가 사랑의 복수를 위해 자기가 낳은 이아손의 자식을 죽여, 신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신들이 한 대로 하는 인간들의 모순을 꼬집어 낸 희극처럼 다가왔습니다. 이 '메데이아 삼부작'124은 '이아손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모두를 거는 메데이아', "???"125, '그 사랑을 지켜 나가기 위해 모두를 거는 메데이아', "펠리아스의 딸들", '그 사랑의 배신에 앙갚음하기 위해 모두를 거는 메데이아', "메데이아", 이 세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자기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것에 모두를 거는 메데이아의 이 놀라운 행동들, 다시 말해 마치 올람포스의 신들처럼 자기 의지의 관철을 위해 혈육도 죽이는 행동들은, 이아손의 너무나 인간적이고 태평한 행동들, 다시 말해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한 남자가 권력자의 딸인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빠져드는 행동에 대비되어 너무나 강렬하게 어린 제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서는 얼토당토않은 반전을 위해 신들이 기계나 타고 나타난다면서126비웃기도 하지만, 신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신들이 한 대로 하는 인간들 앞에, 망연자실해진 신들이 기중기나 타고 한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 이외에 그들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을 수 밖에요. 그리고 저는 그때 에우리피데스의 인간을 보는 눈만이 아니라, 신을 보는 눈도 여태와는 다른 새로운 눈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울러 그때 저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 연극으로 무엇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눈을 배웠습니다. "연극에서 신이 아닌 인간을 보게 하라!"

 

3.6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이 모두 잘 아시다시피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퀼로스처럼 마라톤과 살라미스의 용사도 아니었으며, 소포클레스처럼 페리클레스와 함께 살라미스와 사모스에 나간 장군도 아니었으며, 하다 못해 소크라테스처럼 아테네의 작은 위원회도 맡아 본 적도 없는, 그저 저처럼 연극이나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와의 교분을 빼면 그와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지요. 그렇지만 이 조용한 비극작가는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에게 단순한 여흥을 드리거나, 도시 생활에서 지친 영혼들을 슬픔의 지순함으로 정화시키는 이야기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도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 의지로 살아라"고 말입니다. 

 

3.63. 머지 않은 훗날 마라톤의 전사가 될 환갑의 노인 밀티아데스가 밀레토스의 함락 이후에도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부추기다 페르시아 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아테나이로 돌아오자, 카르소네소스에서 참주 노릇했다며 기소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서른 살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아르콘에 선출되기 위해 갖은 짓을 다하며 표밭을 훓고 다닐 무렵, 페리클레스가 갓 태어나 아직 첫 돌도 지나지 못했을 무렵127, 프뤼니코스가 신들이나 영웅들로 인해 벌어지는 비극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인간들의 악행으로 빚어진 비극을 다룬 연극을 만들어 올렸는데, 그 연극을 본 관객들이 극장을 눈물로 채우자, 아테나이는 그에게 벌금을 매겼을 뿐 아니라, 그 연극을 다시는 상연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 일 이후 아테나이의 비극은 현실 세계를 떠나,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세계에, 다시 말해 신들의 세계 안에 묶여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며, 신들이 한 대로가 아니라, 신탁에 따라 신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사는 인간이 겪는 비극이 전부였는데, 에우리피데스는 그 반대로 "메데이아"를 앞세워 신들이 하라는 대로가 아니라, 신들이 한 대로 하는 인간이 겪는 비극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128. 사람들이 도시에서는, 즉 도시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필멸의 인간들은 신들이 하라는 대로 해도, 신들이 한 대로 해도, 결국은 비극을 맞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의지, 즉 인간으로서의 의지가 아니면 안 된다고 가르친 것이지요. 그 인간의 의지가 같은 인간들에게 어떤 선물을 줄 수 있을런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말입니다.

 

3.64. 이제 막 성년이 되었는데 도시는 전쟁을 시작하였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막막한 제게 에우리피데스가 "메데이아"로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에우리피데스의 가르침 덕분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과 도시를 위해 무엇이 가장 소중하며, 어떻게 그것들을 지켜 가여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싶었던 어린 저는, 진짜보다는 얼치기가 더 많은 소피스테스보다는 얼치기로서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시인poet이면서도, 연극을 만드는 극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번 극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나니, 호메로스의 일리오스와 오딧세이아 이야기 속에 머물며, 현실과 동떨어진 어느 시대의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아름답고 올발라야 할 사람들이, 천박하기가 도시의 노예들도 하지 않을 일들을 뻔뻔스럽게 저지르면서도, 시인인 작가 덕분에 말만은 세상의 고난을 혼자 다 떠안은 듯이 고상하게 읊조리는 것으로, 비겁하게 변명이라고는 신들에 기대어 나오는 신관이나 시녀들의 신탁처럼 어렵게 꼬아져 있는 운명에 올려 태우면서도, 그런 운명으로 저질렀던 짐승 같은 짓이 마치 거룩하고 숭고한 고통이나 되는 듯이 미사여구와 구성진 가락으로 노래하는 것으로, 그래서 가난과 질병과 전쟁으로 찌들어 가는 도시민들의 착하고 여린 영혼이 불쌍한 자기의 처지를 동정하여 흘리는 몇 방울의 눈물로, 그들의 뒤틀어진 영혼을 정화하고katarsis129, 그들의 비참함을 위무해 준다고 믿고 비극을 만드는 비극작가보다는, 그들이 매일 같이 보고 듣는 현실 속의 일상 생활에 파고 들어가 있어, 그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들을 골라, 아고라에서나 술집에서 벌어지는 술판komos에서 나오는 그들의 말과 노래로 도시에 일어나는 부조리와 불합리가 얼마나 그들을 힘들게하고 나락에 빠트리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웃음을 통해 그들의 비참한 영혼을 정화시키고katarsis, 그들의 고통을 위무해 준다고 보이는 희극을 만드는 희극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결심이 굳어진 것은 그 이듬해 아직 미성년인 에우폴리스가 그야말로 혜성과 같이 나타나, 그때까지 크라티노스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희극 무대, 새봄의 레나이아 축제의 희극 경연에 연출가 칼리스트라토스의 이름으로 작품을 올려, 크라티노스의 작품과 나란히 상연되는 것을 본 것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또래의 젊은이가 이미 희극 작가가 되었다는 놀라움보다는 경쟁심이 저를 분발시켰고, 정진한 끝에 열일곱에 작품을 상연한 에우폴리스130보다는 다섯 살이나 많았지만, 스무 다섯에 처음 연극을 올린 에우리피데스보다 세 살 어린 나이인 스무두 살에 처음 축제의 연극 경연에 저의 작품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에우리피데스 선생님은 저를 아테나이의 디오뉘소스 극장의 무대로 이끌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3.6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비극이 먼저 인간 세상의 실상을 보여주자, 비극에 들이민 정치가들, 밀티아데스거나, 테미스토클레스거나, 페리클레스였어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름을 남기지 못한 평범한 정치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칼은 단호하고 무자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의 비극은 거의 모두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비극이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정치적 유대나 행동들이 나타날지 몰라 두려워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프뤼니코스가 페르시아에 점령된 자매도시 밀레토스131가 겪는 고통을 그 도시에서 유명한 귀족들이나 갑부들과 권력자들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면 그는 관객들을 울리는데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가 밀레토스의 이름없는 가난한 사람이나 아이들과 아녀자들의 고통을 그렸기 때문에 비록 연극으로 보는 것이었지만, 분노한 페르시아의 대왕이 사르데이스를 침입하여 도시에 불을 질러 자신의 권위를 그을리게 한 아테나이를 그냥 둘 리가 없어, 이제 틀림없이 닥쳐올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아테나이가 겪을 참상132을 관객들에게 그대로 떠올려 주는 것이어서 극장을 울음바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치가들, 특히 하나 주면 열을 달라 할 것이라며 메가라에 대한 경제봉쇄령의 취소를 거부하고, 곧바로 헬라스 전체를 스무일곱 해에 걸친 내전으로 몰아간 페리클레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울음은 사람들이 전쟁이 가져오는 비극적 참상을 보고 전쟁을 두려워해 도시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용납할 수 없는 아녀자들 같은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비극이 현실 세계를 그리는 일이 없게 할 확실한 방법으로 그 뒤로 현실 세계를 그린 비극은 절대 무대에 올리지 못하도록 그런 희곡을 쓰는 것도, 그런 희곡으로 연극을 상연하는 것도 모두 금지시켰습니다133.

 

3.66. 반면에, 희극은 그것 모두가 현실 세계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보여 준다해도 그런 모순이나 부조리가 관객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닐 뿐더러 특히, 그런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꾸민 우스꽝스런 사람이나 우스꽝스런 짓이나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현실 세계에 그대로 있는 것보다 약간 더 과장되거나 변형되어 있어 실제 무대에서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그냥 한낱 우스개로 비춰지기 때문에 아무리 극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어도 별로 간섭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페리클레스가 권력을 잡은 다음 해부터 레나이아축제의 연극 경연에 희극이 포함되는 걸 보고도 그냥 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비극과는 다른 희극의 속성을 과소평가했다가, 막상 자기의 이야기가 무대에 오르자 태도를 돌변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비극이 인간의 고통 속에 있는 현실 세계를 그리는 것과는 달리, 희극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속에 있는 현실 세계를 그려 그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에게 경고와 고발과 교훈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극은 보통 시민들이 행하는 모순이나 부조리보다는 귀족이나 갑부나 권력자들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소재로, 먼저 그 사람들을 우스개거리로 만들고, 그 다음 그 사람들이 하는 짓을 우스개거리로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우리 도시에서 누가 무슨 짓으로 이 도시를 무너뜨리려 하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인데, 이럴 때 페리클레스보다 더 유용한 사람이 우리 도시 아테나이에서 누가 또 있을까요? 제가 클레온을 빌려 와 씹었듯이, 크라티노스가 당시 유일한 권력자 페리클레스를 빌려 와 정치소인배들과 권력자들을 씹은 것은 희극작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3.67. 그러므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결국은 못 참고 이태 뒤에 페리클레스로 하여금 '희극이 한 개인을 실명으로 풍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도록 한 것이야말로 바로 제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희극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주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4. 도시의 불화'에서 계속) 

 

 

 

 

 

 

 

 

 

 

 

 

 

  1. BC416 레나이아 축제의 비극 경연에 아가톤은 그의 처녀작을 들고 나가 우승하였는데, 이 경연에서 에우리피데스는 '미친 헤라클레스'로 2등하였다. 아가톤의 이 우승작에 대한 상세한 내용(제목이나 줄거리 등)은 알려진 것이 없다. [본문으로]
  2. 플루타르코스,'알키비아데스전' [본문으로]
  3. 플라톤,'향연'215a-222b. [본문으로]
  4. "구름"이 상연되고 일곱 해가 지난 후, 아가톤의 집에 이들이 같이 모여 있었을 당시, 소크라테스의 나이 쉰다섯, 알키비아데스는 서른다섯,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서른이었고, 후일 적대감 없는 이들의 만남을 전한 플라톤은 겨우 열셋의 아이였으니, 플라톤은 그날 밤의 이야기를 누구에게서 들었어야 전할 수 있었을 텐데,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를 아뉘토스보다 더 무서운 고발자라고 쓴 플라톤이 아가톤의 집에서 연 그날 밤의 '심포지온'에서는 어인 일인지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해 아무런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고, 소크라테스와 비극과 희극의 전환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좋은 의논 상대로 그리고 있다. [본문으로]
  5. BC440 페리클레스가 다른 동맹들에 대한 본보기로 사모스의 반란에 대해 극심한 처벌을 내렸을 때,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의 동반자 아스파시아가 사모스의 그녀 고향 밀레토스에 대한 핍박을 보복하기 위해 펠리클레스에게 베개송사를 벌인 결과라고 수근거리고, 그에게 적대적이던 희극작가 헤르미포스를 중심으로 그와 아스파시아에 대한 별별 이야기를 희극 무대에 웃음거리로 올리기 시작하자, 특정 개인을 풍자하거나 공격하는 희극 작품의 상연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는데, 오히려 그 법이 사람들을 더 자극하여 놀림감이 되자 바로 철회하였고, BC428 페리클레스의 빈 자리를 넘보는 클레온에 대해, 가죽장사라는 그의 출신 성분을 부각하며 신상에 대한 풍자가 극심해지자, 클레온이 개인을 실명으로 풍자하고 공격하는 희극의 상연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는데, BC422 클레온의 사후 폐지되었고, BC417 불량배 출신의 선동정치꾼 휘페르볼로스의 무식하고 폭력적인 행동들을 풍자하느라 그의 어머니의 신상까지 끌어들이며 웃음거리로 삼자, 세 번째로 개인을 풍자 공격하는 희극의 상연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BC414 휘페르볼로스가 아테나이에서의 마지막이 된 도편추방으로 사모스로 망명하자 바로 폐지되었다. [본문으로]
  6. 플라톤,'소크라테스의 변론'19b-e. [본문으로]
  7. 아리스토파네스,'구름'250-517. [본문으로]
  8.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 '"구름"'을 관람하던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전하는 이 일화는, 클라우디우스 아일리아누스(Claudius Aelianus,Aelian,AD175-235,로마 근처의 프라이네스테에서 태어난 수사학 교사이자 저술가,그리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여 '꿀혀Meliglossos,Honey-tongued'라 불렸는데, 고대 그리스어로 '동물의본성'과 '여러가지 역사'라는 저술을 남겼다.)가 아무런 전거 없이 그의 책, '여러가지 역사Poikile Historia,Varia Historia,Various history'에서 소개하였고(2.13,'...Which he observing, (for he came not thither by chance, but because he knew himself should be abused in the Play, had chosen the most conspicuous Seat in the theatre) to put the strangers out of doubt, he rose up, and all the while the Play lasted continued in that posture. So much did Socrates despise the Comedy and the Athenians themselves.'), 고트프리드 마르틴은 그의 책 '소크라테스'('Socrates',이강서 번역,한길사,pp154)에서, 별도의 전거를 대지 않고 그저 오래된 일화라며 이 일을 소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베터니 휴즈는 그의 책 '아테네의 변명'('Socrates's hemlock cup',강경이 번역,옥당,pp351)에서, 달리 전거를 제시하지 않고 후일 전해진 이야기라며, '"구름"'을 보던 소크라테스가 극중의 소크라테스가 '달의 자리를 훔쳐보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관객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고 전하고 있다. [본문으로]
  9. 이 당시 스파르테는 결코 헬라스는 물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도 패권을 추구하지 않았다. 헬라스 동맹이 해체되고, 해상 동맹이 델로스 동맹으로 바뀌면서 드러낸 아테나이의 패권 추구에 대해서도 크게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스파르테의 방관적 태도가 아테나이로 하여금 상대에 대한 배려를 잊게 만들었고, 결국 두 번이나 헬라스를 전쟁으로 이끌고 말았다. [본문으로]
  10.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아테나이의 외항 페이라이에우스를 해군기지로 건설하고 삼단노선을 200척까지 확보해야 한다며, 재원으로 라우레이온 은광의 수입을 쓰자고 주장했는데, 아리스테이데스가 반대하고 나서자, BC483 민회에 도편추방 투표를 제의해 아리스테이데스를 추방하고, 계획대로 그의 해군 증강책을 실시하였다. 이 도편추방 투표 때의 에피소드 하나를 가지고 아리스테이데스의 사람됨을 보여주기 위해 플루타르코스가 '아리스테이데스전'에 그 이야기를 적어 두었는데, 내용인 즉, '모두들 도편에 추방할 사람의 이름을 적고 있었는데, 글자를 모르는 한 촌부가 아리스테이데스에게 와서 도편에 아리스테이데스라 써 달라고 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깜짝 놀라 그가 무슨 해를 끼쳤느냐고 물었고, 촌부는 대답했다. '아니 그런 일은 없었어요.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도 모르는 걸요. 그런데 어디서나 그가 정의로운 사람이라 떠들어 대기에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그럽니다.' 그리고 아리스테이데스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이름을 도편에 써 주었다. 결국 추방이 결정되어 아테나이를 떠날 때, 아리스테이데스는 두 손을 치켜들고, 아퀼레우스와는 반대의 기도를 올렸는데, 그 기도는 '아테나이에 아리스테이데스가 그리워 해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십시요.'였다. 3년 뒤 BC480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침공해 오자, 아테나이는 아리스테이데스를 소환하여 테미스토클레스와 함께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게 하였고, 아테나이 사람들의 기대대로 아리스테이데스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섬멸하는 데 수훈갑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BC478 아리스테이데스는 스파르테의 파우사니아스로부터 해상동맹을 인수 받아, 동맹도시들을 정의롭고 공정하게 대하면서 그들을 한데 묶어 델로스동맹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 역시 정적들에 의해 아테나이에서 추방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본 뒤, 은퇴자답게 한적하게 지내다가 델로스동맹 결성 10년이 지난 BC468에 죽었다. [본문으로]
  11. 타소스는 제우스가 약취해 간 누이 에우로파를 찾으러 카드모스를 위시한 다른 형제들과 포이니케로부터 헬라스로 왔다가, 에우로파를 찾지 못해 포이니케로 돌아가지 못하고(그들의 아버지 아게노르는 에우로파를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고 했었다.) 타소스 섬에 주저 앉았는데, 섬에 금이 발견되자 포이니케 사람들이 이주해 와 타소스 시를 건설하게 되었고, 포이니케가 페르시아에 정복되어 힘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타 BC8세기 말부터 파로스 섬의 이오니아 사람들이 타소스를 지배하기 시작하였으며, 그후로 금광의 개발이 더욱 활발하여 BC6세기에는 섬의 융성이 절정에 이르렀고, BC5세기에는 북쪽의 좁은 바다 너머 트라케의 스캅테 휠레에서도 금을 발견하여 채굴권을 가질 정도로 번성을 계속하였다. 페르시아의 침공 때는 페르시아의 항복 권유에 따라 자진 복속되었다가 헬라스의 승리 후 델로스 동맹 도시가 되었는데, 스캅테 휠레의 채굴권을 두고 생긴 현지인들과의 마찰을 기화로(금에 욕심이 난 아테나이가 틀림없이 현지인들을 부추겼을 것이지만), 아테나이가 그 마찰에 개입해서 채굴권의 지분을 요구하자 타소스는 이에 반발하여 BC465 델로스 동맹에서 탈퇴한다. 타소스를 응징하기 위해 아테나이는 키몬이 원정에 나서 타소스 함대를 격파하고, 농성하는 타소스를 포위하여 봉쇄하였으며, 2년 넘게 버티던 타소스는 마지막 희망이던 스파르테가 지진과 노예들의 반란으로 약속과는 달리 도움의 손길을 뻗쳐주지 못하게 되자, BC462 아테나이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나이는 타소스의 함대와 금 채굴권을 빼앗았으며, 타소스의 성벽을 허물고 도시의 무장을 해제하였고, 델로스 동맹에 다시 가입시키며 조공을 높게 정해 새로 부과하였으며, 전쟁 보상금으로 타소스의 일년치 금 생산가에 해당하는 30탈란트을 챙겼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아테나이는 타소스의 주민들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끔찍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12. 플루타르코스는 '키몬전'에서 키몬의 경우는 도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거나 표를 의식해서 그런 기부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키몬이 가진 본디 성품이 그랬던 것이었다고 키몬을 옹호하고 있다. [본문으로]
  13. 크세노폰('회상',제3권9장외)과 플라톤('국가',493c11-494e6외)이 그들의 글들에서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정치에 대한 입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바로 '아는 사람哲人이 다스리고政治, 나머지百姓는 따른다腹從.'이다. [본문으로]
  14. 아리스토파네스는 비단 '기사들'이 아니더라도 그의 희극을 통해 기회만 있으면 클레온이나 휘페르볼로스 같은 부자 상인들의 집권과 통치가 금권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 주면서, 그들의 천박성과 그로 인한 정치의 타락을 비판하고 있는데, 아리스토파네스의 이런 비판을 크세노폰이나 플라톤식으로 패러디해 본 것이다. [본문으로]
  15. BC478 스파르테의 파우시니아스가 그의 오만과 독선적 성격 때문에 동맹을 지배하는 지배자로 비춰져 물러난 뒤, 그 뒤를 이은 아테나이의 아리스테이데스는 동맹도시들과 공평하게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태도로 이끌어 해상동맹을 델로스동맹으로 전환시킨 지도자였다. 그후 BC440 페리클레스는 동맹을 이탈하려는 사모스를 정벌하여 동맹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보여 주었는데, 그 40여 년 사이에 아테나이는 동맹의 지도자에서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었다. [본문으로]
  16.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알려져 온 '아폴론 찬가'는 그가 키로스 사람이며, 가난하고, 눈이 먼, 떠돌이 가수였는데, 주로 어부들이나 농부들과 어울렸었다고 자신을 소개한하고 한다. [본문으로]
  17. 기원전 15세기 절정에 오른 뮈케네 문명을 일으켰다고 알려진 이카이오이 사람들은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서서히 몰락해 가다가, 기원전 13세기에 연속적으로 닥친 지진으로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이런 자연의 재앙은 아티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헬라스 지역에서 나타났는데, 그들은 기원전 11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기원전 8세기에 와서는 이오니아 지역에서부터 안정되기 시작하여, 그들의 옛 본거지인 펠레폰네소스나 보이오티아의 영광에 대해 향수 어린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만큼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이 결과 주로 이오니아에서 펠레폰네소스를 그리워하며 부르던 노래들을 모은 것이 '트로이아 서사시권'이고, 헬레네 본토 주로 보이오티아에서 부르던 노래들을 모은 것이 '테바이 서사시권'이다. 제목과 일부 내용이 전하는 여러 서사시권들 가운데 가장 웅대하고, 그 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는 '트로이아 퀴클로스'는, 처음 제우스가 인간들이 너무 많아져서 가이아가 그들을 먹여 살리는 노역이 심해지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인간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전쟁을 기획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 가는데, 첫 이야기가 여신들 간의 아름다움 다툼에 트로이아의 파리스가 엮이고, 그래서 아가멤논의 제수 헬레나를 트로이아로 꾀어 가자, 아가멤논이 이를 핑계로 일리오스를 정복하기 위해 출진하는 '퀴프리아kypria'이고, 두 번째가 호메로스가 이야기의 크기를 키운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헥토르의 죽음을 그린 '일리아스ilias'이며, 세 번째는 아마조네스의 여왕 펜테실레이아는 물론 아티오페스의 왕 멤논까지 죽이지만, 결국 파리스가 쏜 화살을 유일한 약점인 발목에 맞고 죽는 아킬레우스를 그린 '아티오피스athiopis'이고, 네 번째가 '소小일리아스ilias micra'로 아킬레우스가 죽자 그의 무구를 얻기 위해 오딧세우스와 아이아스가 벌이는 시합을 다루었으며, 다섯 번째가 오뒷세우스의 목마와 그 계략을 눈치챈 라오콘, 그러나 결국은 함락되고 마는 일리오스를 그린 '일리오스의 멸망iliou persis'이며, 여섯 번째가 일리오스를 함락하고 돌아가는 여러 이카이오이의 장군들과 전사들의 모험과 험난한 귀향 길 이야기를 모은 '귀향nostoi'이고, 그 다음 일곱 번째는 호메로스가 두 번째로 이야기의 크기를 키워 남겨 준 '오뒷세이아ddysseia'이며, 마지막 여덟 번째가 오뒷세우스가 귀향 후 예언에 따라 또 다시 여행에 올랐던 일과, 결국 아들 텔레고노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을 그린 '텔레고노스 이야기telegoneia'인데, 이상 모두 여덟 편의 서로 다른 그러나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서사시epikos 모음kyklos이다. 또 '테바이 서사시권thebai kyklos'이 있는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운명을 타고 난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그린 '오이디푸스 이야기oidipodeia',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쫓아낸 그의 아들 폴뤼네이케스와 일곱 장군들이 테바이의 일곱 성문으로 공격해 온 이야기를 그린 '테바이 이야기thebais', 마지막으로 테바이 공략에 실패한 일곱 장군들의 아들들이 결국은 테바이를 공략해 점렴하고 만다는 '후예들epigonoi', 이 세 편의 서사시로 엮여져 있다. 그 밖에도 서사시권은 신들의 탄생과 거인과의 전쟁을 노래한 '신화mythos 서사시권', 이아손의 흑해 지역 원정을 다룬 '아르고 원정argonautika' 서사시권, 알크마이온alkmaion' 서사시권, 아테나이의 건국과 미노아 문명과의 관계를 테세우스의 모험과 영광을 통해 이야기 한 '테세우스 이야기theseus' 등이 있었는데, 호메로스의 출현으로 이런 서사시의 음송이나 이야기 모임이 왕성할 때는 직업적인 음유 시인들 모임인 '호메로스 모임homeridai'이 생겼을 정도로 서사시권으로 엮인 이야기들이 많았으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까지 심드렁해졌고, 헬라스 내전을 거치는 동안 암송자들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연극 특히 비극이 흥행에 성공을 거두면서 서사시권은 비극작가들의 소재로 그나마 그 내용들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본문으로]
  18. 호메로스가 처음 어부나 농민들과 어울리며 시가를 읊고, 영웅들과 신들에 관한 이야기로 벌이를 하며 사는 동안, 그의 천재적인 이야기 구성과 시적인 묘사가 그만의 세계를 완성해 갔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자연스레 여러 도시의 부자들과 귀족들에게 알려지면서, 그들의 부름을 받는 동안 점차 그들의 취향에 맞추어 가다가 얻은 것이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라고 믿어진다. [본문으로]
  19. 다마스키오스,'원리들에 관하여'123,124('ffp'dk1b12,13), 아테나고라스,'기독교도들을 위한 탄원'18,20('fpp'dk1b13). 오르페우스가 맨 처음 신론을 썼으며, 신들의 이름을 짓고, 그들의 생성과 역활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에우리피데스,'알케스티스'963-972;'무사 여신들 사이를 거닐기도 고, 공중으로 날아오르기도 하고, 수많은 이론을 접하기도 했으나, 필연ananke보다 강력한 것은 아무것도 본 적이 없으니, 오르페우스의 음성이 적어 놓은 트라케 서판의 치료약도, 고통을 진정시키도록 포이보스가 아스쿨레피오스의 아들에게 준 온갖 약초도 그것(필연)을 막을 수 없다네.' [본문으로]
  21. 헤시오도스는 '신들의 계보'를 노래하면서 전래의 서사시권 '신화muthos'의 구성에 따라 처음 신들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다음 티탄 신족神族에 이기고 권력을 쥐는 올륌포스 신족의 승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이야기 머리에 무우사들의 유래와 역활과 권능을 설명하고, 자기가 직접 무우사들로부터 신들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도록 가르침을 받았다면서, 그 무우사들에 대한 찬사를 바쳤다. 그러나 헤시오도스가 일과 나날을 노래할 때는 이야기 머리를 제우스의 권능을 찬양하며 제우스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려 주기를 비는데, 이때 무우사가 제우스를 찬양하여 자기 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시작할 만큼, 무우사들은 신들을 찬양하여 신들을 기쁘게 하는 데 능통하다. [본문으로]
  22. 아테나이의 시민들은 반드시 그들의 아들들이 성인이(ephebeia,18세가 된 시민은 도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 되기까지 시가mousike詩歌를 가르치고, 체력단련gymnastike을 시키도록 법으로 정했다.(플라톤,'크리톤'50d.) 특히 시가의 가락melos은 음의 높낮이로 서정시에 두르러진 것인데, 플라톤이 '국가'398d에서 멜로스는 노랫말logos와 선법harmonia와 가락rhythmos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을 때의 멜로스는 그냥 노래를 가르킨다. 뤼트모스는 소리나 움직임이 규측적으로 반복하기도 하는 음악에서의 박자에 해당하고, 운문(시)에서는 운률에 해당한다. 메트론은 음절의 강약 장단이 맞추어진 한 , 즉 운율의 단위(운각)및 운각으로 이루어지는 형식(보격)을 뜻한다. 한 마디로 운문,시의 리듬이라 할 수 있다. 고르기아스는 운율을 가진 말logo를 시poieisis로 애초에 분류한 사람이다. 노래와 음악적 요소애 대해서는 플라톤의 '국가'601a-b 참조 할 것 [본문으로]
  23. 플라톤,'파르메니데스'127a-c. 파르메니데스가 아테나이에 왔을 때(BC447경), 그의 나이 예순다섯이었고, 제논은 마흔, 소크라테스는 스물이었다. [본문으로]
  24. 플라톤,'프로타고라스'316d 참조. 크라티노스가 지금은 희곡이 단절되어 내용을 알 수 없는 '아르퀼로코이'를 발표한 것은 BC448이었는데, 이 희극의 제목으로 미루어 보면, 풍자시의 운률 이암보스를 완성한 '서정시의 호메로스' 아르퀼로코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희극으로 보인다. 크라티노스가 그 희극에서 당시 새로 출현한 사조思潮나 유력자를 풍자하기 위해 단편이 전하는 대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도 소피스테스'라고 했다면, 이 말은, BC446에 아테나이로 와서, 짧은 기간 안에 유력한 소피스테스로 자리 잡고, 페리클레스의 조언자가 되었던 프로타고라스가 스스로를 소피스테스라고 제일 먼저 자칭하면서, 소피스테스의 내력에 대해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도 '지혜를 가르치는 기술'을 시를 통해 구사한 사람'이라고 설명하던 말이어서, 크라티노스가 프로타고라스의 그 설명을 인용하여,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도 소피스테스라며, 반어법적으로 그를 비방하고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5. 플라톤은 자기의 생각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펼치기 위해서 글로 대화편들을 쓰고 있었음에도, 글을 기억의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었다.(플라톤,'파이드로스'274e-275a,275d) [본문으로]
  26. 제우스의 에우로파 탈취로 시작되는 카드모스의 설화는 포이니케 사람들의 헬라스 본토 진출과 테바이 건설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때 카드모스는 포이니케에서 청동 제조술 뿐만 아니라, 포이니케 문자도 함께 가져 왔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27. 헬라스 특히 이오니아에서 받아들인 '식민 페니키아 문자'를 일컫는 말이다. 페니키아는 처음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를 차용하여 쓰다가 기원전 15세기에 독자적인 자음 22자의 문자를 만들었고, 기원전 13세기 동안에 걸쳐 개척한 지중해 연안의 식민도시들을 통해 헬라스에도 알려졌는데, 헬라스가 일상에서 '포이니케이아, 다시 말해 포이니케 사람들의 것'라며 포이니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8세기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형B문자'로 알려진 크레타 문자는 미노스 문명의 단절과 함께 헬라스에서 사라지고 없어, 헬라스의 문자로 발전할 수 없었다. [본문으로]
  28. 헬라스 문자를 가리키는 말은 주로 '알파베토alphabeto'이고, '알파베타alphabeta'는 기초라거나 초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쓸 당시만 해도 '글자'라는 헬라스 말은 '포이니케이아'였으므로, '알파베토'가 그들이 쓰던 문자를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은 그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29. 고대 헬라스의 운율 역시 한 음절의 모음이 갖는 강약,고저,장단으로 나타나는 소리의 조화인 음운과, 그런 음운이 불러 오는 몸과 감정의 움직임의 조화인 율동이 서로 또 어울린 것이다. 이런 운율은 감성의 교감을 더 키울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일정한 틀로 다듬어져 나타난다. 이러한 틀은 기본이 되는 운각韻脚metros,foot의 여러 정형들과, 그런 운각의 조합을 통한 운율韻律metron,rhythm의 여러 정형들로 구분된다. 운각은 두 음절 내지 세 음절을 기본으로 강약이나 고저보다는 주로 모음의 장단으로 나누는데, 두 음절의 운각은 '트로카이코스trochaikos'라 불리는 장단격長短格과, '이암보스iambos'라는 단장短長격이 주된 운각이고, 보조로 '스폰데이오스spondeios'라 불리는 장장長長격의 운각도 쓴다. 세 음절은 '닥튈로스daktylos'라 부르는 장단단격이 주된 운각이지만, '아나파이스토스anapaistos'라 부르는 단단장격의 운각도 있다. 이런 운각을 중복 또는 반복하거나 조합해서 시의 한 행을 이루는 운율로 만드는데,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서, 그리고 엠페도클레스가 '자연에 대해서'나 '정화'에서 사용한 '육절六節운율hexametron'은 장단단격을 하나의 운각으로 하는 닥튈로스 운각을 한 절로 하여 그 절을 다섯 번 반복하여 첫 다섯 절을 만든 다음, 여섯 번째 절에서는 닥튈로스 운각인 장단단격 대신 트로카이코스 장단격을 한 운각으로 한 행을 마무리하는 운율을 가리키는데, 장단단이 다섯 번 반복되다가 행의 마지막에 단음절 하나가 빠지면 그것을 채우고 싶은 관성에 의해 다음 행을 저절로 이끌어 내는 맛이 생기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서사시에 적합하고,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가 매듭지는 행에서는 장단격 대신 장장격 스폰데이오스 운각을 넣어, 길게 이어 오던 호흡을 정리하고 고양된 감정을 음미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한다. 간혹 내용에 따라 웅장 또는 비장한 효과를 얻기 위해 장장격의 스폰데이오스 운각을 닥튈로스 운각 대신에 중간 중간에 넣기도 하는데, 그래도 전체 행들의 운율이 장단단격의 닥튀로스로 된 육절이면 육절운율이다. 다시 말해 한 행이 '장단단/장단단/장단단/장단단/장단단/장단(장장)'으로 이루어진 것을 육절운율이라 한다. '사절四節운율tetrametron'은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여, 비극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는 사튀로스 연극에 주로 쓰였는데, 트로카이코스를 중복한 장단/장단을 한 절로 하여, 이것을 네 번 반복하여 네 개의 절로 시의 한행을 이룬 운율을 말한다. 아울러 사튀로스극이 비극으로 점차 발전하면서 극에 대사가 늘어 가자, 대사에 알맞는 운율로 찾아낸 것이 바로 '삼절三節운율trimetron'인데, 단장격 운각인 이암보스를 중복한 단장/단장 한 절을 세 번 반복하여 세 개의 절로 시의 한 행을 이룬 것을 삼절운율이라 한다. 이렇게 같은 종류의 운각을 중복한 절을 반복하여 한 행의 시를 이룬 정형과는 달리, 서로 다른 운율로 두 행의 시를 엮어 하나의 연으로 만든 정형도 있는데, 바로 '엘레게이아elegeia'이다. 엘레게이아의 첫 행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운율인 닥튈로스 육절운율이고, 뒤따르는 두 번 째 행은 새로운 형태의 '오절五節운율pentametron'로써 이들 두 행이 한데 엮여 정형을 이루는 소위 '이행연구二行聯句distichon,elegiac couplet' 운율인데, 이때 두 번째 행의 오절운율은 닥튈로스 장단단격의 운각 하나를 둘로 나누어 장과 단단을 각기 하나의 운각으로 하여 '장/단단/장/단단/장'으로 이룬 오절을 중복한 운율을 가리킨다. 장엄한 느낌의 육절운율 첫 행에 탄식을 부르는 오절운율을 뒤에 붙여, 서로 다른 두 행이 한 연을 이루게 하는 엘레기아는 특히 짧고 강렬한 잠언으로 교훈을 말하는 데 그만이어서, 나타나자마자 비아스나 피타코스는 물론 솔론을 비롯한 소위 헬라스의 현인들이 모두 엘레기아 시인들이 되었다. 멜로스melos는 본디 일정 음절 수로 된 '스탄자stanza'나 '스트로페strophe' 형식의 노래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이런 노래를 사람들이 수금lyre에 맞춰 불렀으므로 '수금 반주 노래lyrike'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가, 그런 노래 가사의 시가 형태인 '서정시lyrikos'를 가리키게 되었다. [본문으로]
  30. BC632의 일이다. [본문으로]
  31. 생몰 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가 남긴 시의 단편들을 보아 대개 BC650 전후가 시인으로서 활동하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아르퀼로코스는 그가 노예의 몸에서 태어난 귀족의 사생아라서 하층민이 되는 세상이 아니꼬워서였는지, 그의 인생을 용병으로서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날 방패를 버리고도 자기를 구하는 길을 터득하고(아르퀼로스 단편5), 노래에 의지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같은 단편128), 온갖 나쁜 것은 죽은 자에게 있으니 사는 동안 삶에 고마움을 표하라며(같은 단편133), 시인이 되었다. 한때 그와 혼인을 약속했던 네오블레가, 틀림없이 자기와 혼인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던 자신의 친구이자 그녀의 아버지 뤼캄베스의 권유에 따라 딴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리자, 사랑의 욕망이 마음 깊은 데를 돌아 안개처럼 눈 앞을 가릴 때 내 손으로 네오블레를 쓰다듬을 수 있다면 그 작은 마음을 훔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의 사랑이(같은 단편118,191) 익을 대로 익어 벌써 처녀의 꽃봉오리는 시들었고 우아함마져 사라져 버린 네오블레는 이제 다른 놈이 가져가라고(같은 단편196), 직설적으로 욕을 할 만큼 미움으로 변했을 때, 단장단장의 이암보스 운율을 쓰고 있다. [본문으로]
  32. BC630경의 일이다. [본문으로]
  33. 드라콘법은 아테나이 최초의 성문법成文法이었다. 그리고 그 법은 틀림없이 산문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므로, 또 다른 최초의 산문 기록이 될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34. 아티케의 농민들이 킬론의 쿠데타를 무산시킨 것이 BC632였는데,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다시 참주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아테나이 시민들 사이에서 나돌아, 마침 아르콘이었던 드라콘에게 무력으로 정체를 바꾸려는 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규정하는 법을 만들 것을 요청하였는데, 드라콘은 다른 경미한 죄들에 대해서도 중벌로 다스리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 공포한 것이 BC621이었다. 솔론이 서른일곱의 나이로 집권한 BC594에야 소위 솔론의 개혁으로 드라콘법은 폐기되었다. [본문으로]
  35. BC632 쿠데타에 실패한 킬론과 그 일당은 신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어 있던 한 신사神祠로 들어가 은신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아르콘이던 메가클레스가 공정한 재판을 받으라며 끌어내어 복수의 여신 제단 근처에서 킬론을 죽였을 때, 그 신전을 그의 피로 더럽힌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아테나이와 메가클레스가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번졌고, 살아남은 킬론 일당이 메가클레스 가문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복수를 자행해, 도시에 불화가 끊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에서 무슨 좋지 않은 일만 생기면, 예를 들어 메가라가 아티케에 쳐들어와 니사이아와 살라미스를 빼앗겼다거나, 결국 메가클레스가 아테나이에서 추방되었다는 이야기(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단편8.)부터, 드라콘이 만든 형법이 사소한 범죄 행위도 죽이거나 추방하도록 된 것이나, 미신적인 재앙이나 이상 현상이 생기거나 하면 사제에게 바친 제물에 귀신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많은 나쁜 일들을 '킬론의 저주'라 치부하는 풍조가 아테나이에 만연하였다. 이런 민심이 계속되어 오자, 솔론 때에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기로 하고, 헬라스 칠현 중 한 분이라는 크레타의 에피메데스를 초청해 도시 정화의 제례를 올리게 하기도 했다. 특히 메가클레스로 인한 알크메오니디아(메가클레스는 알크메온의 아들이고, 클레이스테네스는 그의 아들이며, 페리클레스, 알키비아데스모두 모계의 혈연으로 엮어 있다.) 가문에 대한 킬론의 저주 이야기는 이사고라스가 정권을 잡을 때 클레이스테네스를 치기 위해 클레오메네스를 앞세워 써먹었으며, 페리클레스 역시 모계가 알크메오니다이 가문이어서 정적들로부터 공격당할까 조심했어야 할 만큼 영향력이 깊은 저주였다. [본문으로]
  36. 쉴로스 출신 페레퀴데스(생몰연대 미상,BC600전후-540이후)는 피타코스에게 배우고, 탈레스와 같이 우주의 근원을 물이라 보는 등 학설에 대해 편지로 의견을 나누었으며, 피타고라스와도 교유하였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1권11(116),(120-122)) 그가 쓴 것으로 전해 오는 단편들은, 그가 처음으로 자연과 신들에 대해 산문으로 글을 썼고, 또 책을 내었다고 하나(같은 책(116),'fpp'1.5,56,59,61), 정작 그의 학설을 전하는 단편들은 운문들이 대부분이다.('fpp'1.5,62,68,69,70,75,79.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1권11(119-120)) 그 단편들이 전하는 그의 학설을 요약하면, 만물의 원동자는 자스/젠/제우스(에테르,영혼,능동)와 크토니아(대지,육신,수동)와 크로노스(시간,존재,생성)이라는 것이다. [본문으로]
  37. 주60에서 본 것처럼 페레퀴레스는 자연철학자이면서 시인이다. 시인인 그가 쓴 글이 주로 운문이었을 것이지만, 그것이 남들과 달랐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신들을 이야기하면서도(신학이면서도) 신화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제우스를 신들을 움직이는 제일의 원동자가 아니라, 만물을 움직이는 원동자로서 제일 앞에 두며(아리스토텔레스,'형이상학'n41091b8-) 쓴 운문으로는 그의 학설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의 운문 중간 중간에 산문으로 그의 학설을 부연 설명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늘 운문으로 접하던 신학의 제우스를 어느날 갑자기 자연학의 제우스로 옮겨 가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산문이 꼭 필요했을 것이고, 탈레스에게 보낸 편지(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1권11(122))에서 보듯이,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평가를 요구한다면, 운문은 더욱 더 맞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철학자이면서 시인인 페레퀴데스가 썼다는 산문은 현대식 산문인 '페조그라피아pezogrphia'가 아니라, 헤로도토스 이전까지 주로 쓰이던 운문이 섞인 산문인 '로고그라피아logographia'로 보여진다. [본문으로]
  38.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1권11(116),(122), 'fpp',수다사전(dk7a2), 페레퀴데스가 썼다고 하는 두 권의 책은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산문이지만 단절되고 없어, 그 최초의 산문으로 쓴 책이라는 자리는 100여 년 뒤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historiai'가 그 최초 산문 자리를 차지하였다. [본문으로]
  39.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책을 쓰지 않는 이유로 글은 반박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플라톤,'파이드로스'275e.) [본문으로]
  40. 로고그라피아도 산문이라 한다면,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산문은 카드모스가 쓴 '밀레토스 건국사'가 될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1. 서쪽으로 헬레네와 이탈리아, 북쪽으로 폰토스 바다, 남쪽으로 포이니케와 아이귑토스, 그 서쪽의 뤼비에, 이런 지중해 연안을 항해하던 이오니아 사람들, 이를테면 스퀴락스 같은 사람들이 남긴 글들에 연원을 둔 '뱃길 만리periplous'에 실린 만灣이나 항구나 섬들에 대한 항해 자료의 기록물은 항해 전문가들의 기록인 만큼 단순하고 명확한 산문이었고, 이런 기록을 보고 그 너머 미지의 곳에 대한 여행의 꿈을 실천하고 기록한 '세계 여행기'가 산문으로 적힌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래도 산문만으로는 부족했던 헤카타이오스가, 부족한 여행의 경로 설명을 그림으로 그려 그 책 속에 붙인 것이 '세계지도'이다. 이것은 기록으로 '세계지도'의 존재를 알린 세계 최초의 일인데, 헤카타이오스가 BC475 경에 죽었으므로, 그 세계 최초의 '세계지도'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본문으로]
  42. 흔히 우리가 '역사'라고 알고 있는 'historia'라는 말은 본디 '탐구(하다)'라는 뜻의 헬라스 옛말이어서, 헤로도토스의 책을 처음 편집한 사람들은 그 책을 '탐구 보고서histoie apodeixis'라 불렀는데, 그것은 헤로도토스가 그의 책이 '낯선 것들의 묘사'와 '지난 것들의 분석'이며, 그 결과물을 보고서로 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책이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historiai역사'이다. [본문으로]
  43. 호메로스,'일리아스'제1권1-7. [본문으로]
  44. 헤로도토스,'역사'제1권1-5. [본문으로]
  45. 주61. 페레퀴데스의 경우를 보라. [본문으로]
  4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리스 철학자 열전'제9권8(53),(54)에서 프로타고라스의 문법 활동에 대해 짧게 전하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제19장14-20에서 프로타고라스가 일리아스의 첫 행에 대해 신에게 기원하는 말을 명령문으로 썼다고 비난한 것에 대해 일반 문법을 예술 작품에 대입해 비난했다고 비판하고 있을 만큼 프로타고라스가 만든 문법 체계는 후세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본문으로]
  47. 투퀴디데스의 이 책은 흔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48.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1. [본문으로]
  49. 헤로도토스는 '역사' 곳곳에서 헤카타이오스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구체적 사실은 앞으로 채워 나갈 것임) [본문으로]
  50.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20-22장. [본문으로]
  51. 페레퀴데스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기원전 7세기에 주로 활동했던 헬라스의 일곱 어진이七賢 가운데 한 사람 비아스의 제자였고, 탈레스에게 그가 보낸 편지의 어투와 그가 죽은 뒤 책의 출판을 부탁하는 정황으로 보아, 탈레스(BC624-545)와 같은 세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으로]
  52. 에우리피데스,'힙폴뤼토스'420-425. 아테나이의 창건자 테세우스 왕의 젊은 부인인 크레테의 공주 파에드라paedra가 의붓아들 힙폴뤼토스hippolytos에 대한 연정으로 고민하면서, 자기 아이들이 자랑스런 아테나이에서 자유롭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때의 자유는 특히 아테나이에서의 말하고 생각하는 자유를 가리키는 것이다. [본문으로]
  53. 아테나이에서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최초로 만들어진 이 법은 의외로 민회에서나 정치 세력들 간에 큰 다툼이 없이 발효되었는데, 발의자 디오페이데스 역시 그가 발의한 법의 정치적 중요성에 비해 그의 정치적 역활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본디 종교나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에 대해 놀랄 만큼 관용적이던 아테나이 사람들은 이즈음 자신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뛰어 넘는 종교나 사상의 범람에 막연히 일말의 우려를 가지기 시작한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다만 이런 법이 페리클레스와 관련된 일부 인사들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고, 다시 말해 클레온이 프로타고라스를, 투퀴디데스가 아낙사고라스를 이 법으로 고발하는 것을 보고, 권력자에게만 적용되었던 도편추방제도와는 달리, 일반인에게는 이 법으로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를 가할 수 있는 신종 정치법이란 것에 주목하고 이후 여러 방면에 활용하였는데, 아테나이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 이유가 해소되고 나면, 그 사람이 가졌던 종교나 사상에 대해서는 별 문제 없이 다시금 받아들여 금지시키지는 않았다. 그것은 마치 도편추방 당한 권력자의 생활 기반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던 것과 같이 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법에 저촉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프로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의 저술이나 사상은 페리클레스 사후 아무런 문제없이 아테나이에서 읽히고 논의되었으며, 도시가 믿는 신을 믿지 않은 것이나 젊은이를 타락시킨 것이 그 당시 아테네의 무슨 법에 저촉되었는지 모르는 소크라테스의 경우도 아뉘토스의 실각 후 복권되어, 리시포스가 만든 그의 조각상을 제례에 쓰는 제기 보관소인 폼페이온에 세워 기렸고(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제2권5(43)), 무엇보다 플라톤이 마음 놓고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했던 변론을 책으로 낼 수 있었을 정도였다. [본문으로]
  54. 대표적인 정적으로는 그의 집권 초기부터 보수 귀족파의 투퀴디데스가 있었고, 후반에는 진보 민주파의 클레온이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참주정에 연루되었던 선대들이 남겨 준 정치적 족쇄 때문에 신중하게 정치적 기반을 그의 출신과는 다른 일반 시민들 특히 상공이나 해양 종사자들에게 두었다. 집권할 때 과격 민주파 에피알테스를 지렛대로 했을 만큼 주의 깊게 정치적으로 처신하였다. 다행히 에피알테스가 집권 이듬해에 암살되고, 정치적 반대자 키몬도 도편추방할 수 있어 안정된 정권을 유지하였는데, 배심원들에게 일당 2오볼로스를 지급하는 법을 만드는 등 아테나이에서 표퓰리즘 정치를 제일 먼저 시작한 장본인이다. [본문으로]
  55. 플라톤,'프로타고라스',318d-319a. [본문으로]
  56. 플라톤,'프로타고라스'316d-317c. 프로타고라스는 우선 소피스테스의 내력에 대해, '지혜를 가르치는 기술sophistike tekhne'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배우는 사람들에게 마치 무슨 기술을 거는 것처럼 보여,) 이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이에 대한 거부감을 두려워하여, (다른 모습으로) 가장하고 스스로를 가렸는데, 이를테면 가장 오래된 오르페우스나 무사이오스의 경우 입교 때의 입교의식과 신탁투의 예언 형식을 빌렸고,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나 시모니데스의 경우 시작poiesis詩作으로 가장했었고, 당대에 와서도 익코스와 헤르디코스가 체육을 가르치는 것으로 가장하며(316d), 아가토클레스는 시를, 피토클레이데스는 음악을 가리개로 쓰고 있지만(316e),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찍혀 적대감을 훨씬 더 키우게 되었다고 설명한 다음(317a), 자기는 그 반대로 스스로 소피스테스임과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을 시인하고, 소피스테스로서의 조심성에 다른 조심성까지 더해 오래도록 소피스테스를 업으로 삼아 왔다고 밝힌다(317b-c). [본문으로]
  57.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9권8(50),(53).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전성기를 80회 올륌피아 기간으로 전하는데(같은 책 제9권8(56), 데모크리토스의 출생은 77회 올륌피아 기간으로 말하고 있고(같은 책 제9권6(41), 또 아낙사고라스(BC500생)의 40세 연하라고 하였는데(같은 책 제9권6(34), 그렇다면 프로타고라스가 한창일 때 데모크리토스는 나이가 많아야 16세였을 것인데도, 프로타고라스가 데모크리토스에게 배웠다고 쓰고 있다. [본문으로]
  58. 프로타고라스가 아테나이에서 스스로 자기를 소피스테스라고 소개하고 있을 당시, 소피스테스로 불릴 수 있는 사람들로는 피타코스를 위시하여 히피아스, 프로디코스, 에릭시마코스, 파이드로스, 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가 아테나이에서 추방당한 뒤에도 그의 제자들을 포함한 소피스테스라고 불렸던 일군의 교사들이 계속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소피스테스들 간에도 여러 부류가 있어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소피스테스'에서 그 부류들을 가려내고 있는데, 한결같이 부정적인 교사들이다. [본문으로]
  59. 섹스투스 엠피리쿠스,dk21b34,(크세노파네스 인용)어떤 사람도 신들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한 것을 알지 못하며,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우연히 지극히 완벽한 진실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 자신이 그것을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견dokos은 모든 것(또는 사람)에 형성되어 있다. 플루타르코스,'일곱 현인의 향연',dk21b35,(크세노파네스 인용)이것들이 진실인 것들에 유사한 것들이라 믿어지게끔 하라. 스토바이오스,'선집'I.8.2,dk21b18,(크세노파네스 인용)사실 신들이 가사자들에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밝혀 주지는 않았고, 가사자들은 시간을 두고 탐구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더 나은 것을 발견한다. [본문으로]
  60. 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 [본문으로]
  61. 두리스는 소크라테스가 노예로 돌 깎는 일을 했으며,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신들의 조각상도 만들었다고 하고, 티몬은 소크라테스가 석공인 주제에 법률습관nomos에 대해 억지를 부리고, 그리스의 주술사이면서 엄밀한 토론을 한다고 헛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그가 그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고 전하는(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2권5(19).) 내용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아버지 스포로니스코스를 도와 석공 일을 아주 근면하게 했으며(그래서 노예로 보였을 것이다.), 제법 솜씨도 좋았는데(그래서 아름다운 여신상도 조각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석공 일 하면서도 주위 사람들과 법과 관습에 대해 말다툼을 하면서(그래서 억지를 부린단 소리를 들는다.), 자주 다이모니온을 내세워(그래서 그리스의 주술사로 놀림을 받았을 것이다.) 변론사들과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세련되지 못한 말투였지만(그래서 아티케의 사투리를 쓴다고 교양의 정도를 의심 받기도 했을 것이다.), 열심히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개진하다가(그래서 헛소리나 해댄다는 조롱도 받았을 것이다.), 공사장의 사람들(티몬은 그 사람들이라 불렀다.)로부터 멀어져, 돌 쪼는 일을 그만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62. 소크라테스가 언제부터 공부를 시작하였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그가 오래 수입이 없어도 지낼 수 있었을 만큼 페리클레스의 건설시대 동안 석공으로 돈을 벌어 모아 두었을 것으로 짐작해 보면, 그의 나이 서른이 넘어서 파르테논이 완공되어 더 이상 건설 공사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을 무렵에서야 공부를 하겠다고 나섰던 것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플라톤은 제자 제논을 데리고 아테나이를 방문한 파르메니데스를 스무 살의 소크라테스가 만나서 이데아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파르메니데스'를 썼는데, 이것이 플라톤이 그의 대화편들에 등장시킨 소크라테스의 나이가 가장 어린 것이다. 스무 살에 파르메니데스를 만날 정도였으니 당연히 두리스와 티몬이 전하는 대로(앞의 주 참조) 소크라테스는 석공 일을 하면서도 다방면에 걸친 공부로 식견을 넓혀 갔을 것이어서, 서른이 될 때까지도 스스로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프로타고라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프로타고라스가 아직 아테나이에서 쫒겨나기 전일 것이므로 서른다섯에서 서른일곱 사이로 칼리아스 집에 머물던 소피스테스들과 그들에게서 배우는 아테나이의 명문 자제들 앞에서 프로타고라스에게 말을 짧게 하라며, 그와 대등한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실력을 쌓아 있는 모습이어서, 스무살 전에 공부에 눈을 떠서, 서른 살이 넘으면서 스승을 둔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본문으로]
  63. 플라톤,'프로타고라스'314c-315b. 프로타고라스가 머물며 가르치고 있는 칼리아스의 집을 소크라테스는 별 어려움 없이 들어가고, 거기서 유명 소피스테스들이 제자들과 함께 담소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별 어려움 없이 말을 붙이고 있다. [본문으로]
  64.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9권8(53). [본문으로]
  65.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9권8,(52). [본문으로]
  6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9권8(54). 에우리피데스가 프로타고라스의 일이 있고 20년쯤 뒤 '트로이아의 여인들troiades'에서 헤카베로 하여금 제우스에게 기도하게 하면서 제우스를 가리켜 우리가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자연의 필연이건 인간의 이성이건 누군지 알 수 없는 분이라 말하게 하고, 메넬라오스의 입을 통해 신에게 하는 기도로는 처음 듣는다고 되새김까지 하게 할 뿐만 아니라('트로이아의 여인들'884-889), '이온'에서는 이온으로 하여금 신들의 처신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방하게 해도('이온'429-451) 좋을 만큼 사람들은 신들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에 대해 무디어져 있다. [본문으로]
  67. 클레온은 페리클레스의 지원자로 페이디아스, 프로타고라스, 아낙사고라스 아스파시아를 골라 그들을 고발하였다. [본문으로]
  68. 페리클레스는 신분의 막강함과 본인의 능력 때문에, 정치 입문 전부터 생김새가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닮았다며 경계하는 정적들을 피해, 다몬, 제논, 아낙사고라스, 프로타고라스 등에게 두루 배우면서 도광양회하며 지내다, 테미스토클레스와 키몬의 권력이 약해져서 견제가 무디어졌을 때, 평민 출신 에피알데스 뒤에 서서 정계에 들어섰다. 정치 입문 후 페리클레스는 에피알데스가 피살된 이후 그의 정치 세력을 물려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온갖 혜택을 주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참주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음에도 그를 추방하지 못하고, 견제 수단으로 그가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되도록 돕는다고 여겨지는 주위 인물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아테나이 사람들은 페리클레스를 견제하기 위해 그의 곁에 있는 조력자들을 공격하거나 제거했는데, 아테나이 시민인 다몬은 도편추방을, 거주민인 프로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는 불경죄로 재판에 회부하여 추방하였던 것이다. [본문으로]
  69. 이 다몬에 대해서는 플루타르코스가 '페리클레스전'에서 제법 상세히 전하고 있는데, 그는 세상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음악을 가르치는 척하며(플라톤이 그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316d-e에서, 소피스테스들이 그들에 대한 거부감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가장하고 있었다며, 프로타고라스의 입을 빌려 고발하고 있음을 참조하라.) 실제로는 정치술이나 수사학과 변론술 등을 가르쳤고, 그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들로부터 민주정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정치가들을 몰래 양성하는 사람으로 찍혀 결국 도편추방당했다고 전하고 있어, 소크라테스가 만일 다몬에게서 처음 공부를 배웠다면, 그가 처음 배웠던 것은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이런 다몬의 수업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다몬으로부터 정치술을 배웠다는 것을 기억하는 한, 그가 반민주정적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질 소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런 시선에 별로 개의치 않고, '아는 사람이 다스리고, 나머지는 따른다'는 식의 독특한 정치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그의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심각한 피해의식과 대비해 보라.) [본문으로]
  70.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2권4(16), '같은 책'제2권5(19). [본문으로]
  71. 플라톤,'파이돈'97b-98b. [본문으로]
  72. 플라톤,'파이돈'96a. [본문으로]
  73. 플라톤,'파이돈'98b-d,'소크라테스의 변론'26d. [본문으로]
  74.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자연철학은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로 이어져 결국 아낙사고라스가 아테나이에서 재건하였다. [본문으로]
  75.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2권3(6),(7). [본문으로]
  76. 플라톤,'소크라테스의 변명'23a. 신이 지혜롭고, 인간의 지혜는 별로, 아니 전혀 가치가 없다. [본문으로]
  77. 플라톤,'파이돈',102a-107b. [본문으로]
  78.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2권3(45). [본문으로]
  79. BC447에 공사가 시작된 파르테논 신전은 10년 가까운 공사기간을 거쳐 BC438에 완공되었다. [본문으로]
  80. 페리클레스가 죽은 것이 BC429이니, 아낙사고라스는 BC428에 죽었다. [본문으로]
  81. 소크라테스는 일체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데, 그는 책을 읽은 사람이 내용에 대해 비평을 가해도, 그 책 속의 글은 그 비평에 대해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플라톤,'파이드로스'275c-278e) [본문으로]
  82.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화가나 목수나 키타라를 타는 악사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ergasia에 통달한 사람도 그 방면의 지혜로운 것들을 아는 사람, 즉 그 방면의 소피스테스들이라고 말하면서, 그렇다면 소피스테스는 어떤 방면에서 통달한 사람인지 묻는다. [본문으로]
  83. BC460부터 6년 넘게 아테나이는 델로스 동맹 도시들과 함께 페르시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이집트의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200척의 대함대를 파견하고 있었는데, 이 함대는 BC454 이집트 연안에서 페르시아 해군에 의해 괴멸당하고 말았다. 아테나이가 이집트를 지원하기로 한 내력에 대한 역사 기록이 없어, 페리클레스가 이집트를 지원하는 함대를 보내는 일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함대가 전멸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BC454),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섬의 동맹 금고가 페르시아에게 털릴 수 있다는 이유로 금고를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로 옮겼다. [본문으로]
  84. 플루타르코스,'영웅전','페리클레스전' [본문으로]
  85. 테르모퓔라이를 통과한 크세르크세스는, BC480 9월 아크로폴리스 수비대만 남은 아테나이를 간단히 점령하여 일차적인 원정 성공의 상징으로 삼은 뒤, 살라미스 해전에서 포이니케가 주축인 페르시아 연합 함대가 아테나이가 주축인 헬라스 연합 함대에게 괴멸되는 것을 지켜보게 되자, 헬라스 원정의 결산은 마르도니우스에게 맡기고 사르데이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마르도니우스는 대왕을 호위하여 테살리아까지 가서 배웅한 다음, 거기서 겨울을 보내고 BC479 봄이 되자 헬라스를 위세로 복속시키기 위해 스파르테와 아테나이를 분리하여 협상을 시도 했는데, 이에 대해 테미스토클레스의 아테나이 소개 작전으로 삶의 터전이 황폐해진 아테나이 사람들은 마라톤의 영광을 재현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프시탈레이아 섬에서 페르시아 육군을 섬멸한 아리스테이데스를 육군 지휘관으로 삼고, 함대는 테미스토클레스 대신 크산티포스에게 맡기는 페르시아 항전의 새로운 틀을 잡고 있었고, 한편 스파르테는 페르시아 침략군의 퇴치를 위한 해군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연합 함대에 레오티키데스를 보냈으나, 육군은 이스트모스 너머로 보내지 않고 펠레폰네소스를 지키겠다는 전략을 짜 놓고 있었다. 마르도니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를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에 보내 마지막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협상은 실패하였고, BC479 5월 하순 마르도니우스가 테살리아에서 남하했고 아티케를 거쳐 또 다시 텅 빈 아테나이를 점령하자, 스파르테에 두려움이 퍼졌고, 마르도니우스가 살라미스에 피난한 아테나이 사람들과 강화를 제의하고 일부가 찬성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리자(아테나이의 명문 귀족인 리키다스가 공개적으로 강화를 찬성하다 돌에 맞아 죽었다.), 아테나이 사정이 더 이상 아테나이만의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 이스트모스 너머로가서 마르도니우스를 상대하기로 결정했다.(마르도니우스가 아테나이를 점령한 6월 초는 스파르테의 히아킨티아 축제여서, 아테나이의 지원 요청 사절은 마라톤 때와 같이 열흘이나 스파르테의 지원을 기다려야 했다.) [본문으로]
  86. 사모스의 유력자들은 페르시아가 세운 참주 안드로다마스 몰래 그들의 아들들을 델로스에 있던 헬라스 연합 함대로 반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보냈고, 마침 스파르테의 레오티키데스가 이끄는 헬라스 연합 함대는, 육군을 이스트모스 너머로 보내지 않겠다는 스파르테에 반발하여 아테나이가 연합 함대의 증강에 소극적이어서 겨우 100여척의 약체 함대였는데다가, 혹시 아테나이로부터의 응징이 두려워 델로스로 옮겨 와 있었는데, 이런 헬라스 함대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전 이후 상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모스 인근 해역으로 옮겨 가 그곳에서 나오지 않아, 레오티키데스의 헬라스 연합 함대는 바다에서 마땅한 역활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의 레오티키데스가 사모스의 요청을 쉽게 받아들인 것은, 스파르테가 이스트모스를 지나 진군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아테나이가 크산티포스로 하여금 아테나이 함대를 데리고 델로스의 레오티키데스에 합류하도록 해 그들이 도착하자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실질적인 헬라스 연합 함대가 이오니아로 출발한 것은 BC497 6월 아테나이가 또 다시 페르시아에 점령당하는 것을 알고 난 뒤였다. 사모스의 칼라모이에 헬라스 함대가 정박하자, 페르시아 함대는 15년 전 밀레토스 앞의 라데 섬에서의 상황과는 말할 것도 없고, 바로 지난 해 여름의 아르테미시온 곶과 살라미스 수로에서의 상황과도 정반대가 된 것을 깨닫고, 먼저 본국으로 귀환한 포이니케 함대를 따라 나머지 함선들도 각자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한 다음, 나머지는 티그라네스가 지휘하는 뮈칼레 주둔 6만의 페르시아 경비대에 의탁하기 위해 상한 함선들을 해안으로 끌어 올려 방책으로 만들어 대비했다. 레오티키데스는 본국으로 도피한 페르시아 함대를 놓친 것이 애석했지만, 방책을 치고 해안을 방어하려는 페르시아 해군들을 치기로 결심하고 바로 상륙하여 격파한 다음, 해가 이미 중천을 지난 것을 본( 같은 날 플라타이아이에서의 헬라스 연합군들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나서 중천에 올라 있는 이 해를 보고 있었다.) 아테나이를 비롯한 각 도시들의 군대가 경쟁적으로 올리는 기세를 타고 뮈칼레 산정의 페르시아 진지로 진격하였고, 해가 저물어 전투가 끝났을 때, 살아서 사르데이스로 도망간 페르시아 군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원정군을 BC480 8월 보름쯤의 어느 날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테르모퓔라이 협로에서 죽음으로 맞이한 레오니다스와, 같은 날 아르테미시온 곶에서 해가 질 때까지 접전했던 테미스토클레스였고, 그 크세르크세스가 수사로 돌아 다시는 헬라스로 오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배웅한 것은 BC479 6월 보름쯤의 어느 날 플라타이아이 평원에서 마르도니우스를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잠재운 파우사니아스와, 같은 날 해안에서의 작은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 뮈칼레 요새로의 진격을 주장하여, 누구보다 앞에 서서 해가 질 때까지 페르시아 군대를 몰아내었던 크산티포스(이 크산티포스의 아내가 클레이스테네스의 손녀 아가리스케이고, 그 사이에서 페리클레스가 태어났다.)였다. [본문으로]
  87. BC480 겨울이 시작될 때 아테나이에서 돌아와 사르데이스에서 머물고 있던 크세르크세스는 이듬해 7월 수사로 돌아갔다. 뮈칼레에서 승리를 거둔 레오티키데스와 크산티포스는 사모스 섬의 칼라모이로 돌아가, 분노한 크세르크세스의 반격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심지어 레오티키데스는 이오니아에서의 헬라스인들을 본토로 소개시키는 방안을 제기할 정도였다.(물론 크신티포스가 완강히 반대하여 무산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당장의 크세르크세스의 반격도, 그후로도 페르시아의 반격은 없었고, 다만 헬라스의 내분으로 헬라스가 페르시아의 개입을 불러온 적이 많았을 뿐이었다. [본문으로]
  88. 마르도니오스가 전사하자, 4만여 페르시아 병사들은 테살리아로 가는 길을 찾아 전투 전에 묵었던 진지로 몰려들었고, 스파르테와 테게아의 군대가 뒤를 쫓아 그들의 진지로 쇄도하였으며, 아테나이는 길을 가로막는 테바이 군대를 물리치고 진지 공격에 합류하여, 헬라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진지를 유린함으로써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끝이 났고, 또 그것으로 크세르크세스의 원정도 끝났으나, 헬레스폰토스 지역과 아이가이온 바다와 이오니아에 흩으져 있는 페르시아 세력 퇴치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헬라스 연합군이 BC478 헬라스 해상동맹으로 바뀌어 첫 해는 스파르테의 파우사니아스가, 이듬해부터는 아테나이의 아리스테이데스가 지휘를 맡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해상 동맹은 아테나이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으로 바뀌어 그 일을 맡았는데, BC470까지는 주로 트라케와 헬레스폰토스 지역을 정비하는 데 집중하였으며, BC460까지는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들과 이오니아와 카리아 해역에서의 페르시아 영향력 제압에 주력했다. 키몬은 이 과정에서 BC479부터 BC462까지 17년 동안이나 장군직을 맡으며 이 일을 훌륭히 수행했고, 아테나이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다. 한 예로 키몬이 BC466 아나톨리아 남부 에우리메돈 하구에서 200척의 함선으로 티트라우스테스가 이끄는 350척(600척이었다고도 한다)의 페르시아 함대에 싸움을 걸어 갔는데, 80척의 포이니케 함대가 합류하기를 기다리던 그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 도망치다가 일부는 배를 버리고 페렌다테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의 육군에 피신하는 바람에 키몬은 200척을 나포하고 많은 수릐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렸고, 마침 해군의 패배를 본 육군이 진격해오자, 키몬은 전의에 불탄 병사들의 투지에 이끌려 상륙을 감행 하루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그 두 번을 승리로 장식하여 많은 전리품을 획득한 다음, 함대를 단숨에 히드론으로 출진시켜 지시를 기다리던 포이니케 지원 함대 80척을 격파해 버렸다. 연속된 세 번의 패배로 페르시아는 화평을 제안하였고, 페르시아의 육군은 헬라스 사람들의 경계에서 말로 달려 하루 거리 안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고, 해군은 키아네아 섬들과 켈리도니아 섬들 사이의 바다에는 얼씬도 않겠다는 조건을 내놓았는데, 실제 페리클레스와 에피알테스가 각기 50척, 30척의 배로 켈리도니아 섬들 근처에 갔을 때, 페르시아 함선은 구경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키몬은 전리품을 아테나이로 보냈고, 경매로 거둔 수입으로 국고를 채우고, 아크로폴리스 남쪽의 성벽을 쌓았으며, 흔히 '두 다리'라 불리는 장성의 기초공사도 시작할 수 있었다.(플루타르코스의 '키몬전'은 이 이외에도 여러가지 키몬의 제국 확충에 대한 전공과 아테나이로 보낸 전리품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키몬의 전과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전쟁이 부를 가져다 주는 지름길로 알게 했으며, 페르시아를 누르고 세력을 확충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로 바뀌어 있었는데, 특히 배를 움직이는 계층들의 사회 진출과 영향력 확대가 두드러져, 아이귑토스 지원 원정도 자신에 넘쳐 그들의 주조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찬성자와 반대자가 나타나, 누가 아이귑토스 원정을 주도했는지 알려졌을 것이다.) [본문으로]
  89. 페리클레스의 정치 입문은 매우 용의주도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데, 민중파 에피알테스가 반페리클레스 민심의 가림막이었다. 보통 시민 출신이었던 에피알테스 역시 정권을 쥐기 위해 귀족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릴 중간 매개자가 필요했는데, 비록 귀족들 안에서도 비토 세력을 가진 페리클레스였지만, 보통 시민들에 대한 배려를 앞세우는 그를 내세워서 나쁠 일은 없었다. 페리클레스와 에피알테스의 연합은 그들 둘의정권 쟁취를 성공시켰고, 계속 정권을 잡는 것에도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90. BC461 아테나이의 귀족들을 대변하는 키몬이 도편추방당하자, 귀족을 대표하여 페리클레스에 대항하는 정치 세력의 중심이 나타나지 않아,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내정으로 아리스테이데스가 기초한 재판 제도를 에피알테스로 하여금 밀어부치게 하여, 시민이 직접 재판에 참여하는 제도로 바꾸었고, 대외적으로는 페르시아와 스파르테의 이익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며 무분별한 제국 확장을 시도, 바꾸어 말해 페르시아와 스파르테의 영역을 분간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BC457 아테나이가 보이오티아의 티나그라에서 스파르테와 펠레폰네소스 동맹군에게 패배하자, 민심이 흔들려 사람들이 키몬을 찾기 시작하는 것을 본 페리클레스가 스스로 먼저 키몬 소환을 주장하여, 키몬이 아테나이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BC456 돌아온 즉시 그는 흔들리는 민심을 수습하고, 스파르테와의 분쟁을 화해로 중단시켰다. 그러나 키몬은 자기가 추방되어 있던 동안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바꾸어 버린 재판 제도를 되돌려 아레오파고스 법정의 권위를 되찾으려 노력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키몬은 다시 아테나이 사람들로부터 인신공격을(누나 엘피니케와의 관계나, 과음과 주벽, 친스파르테 성향 등을 놓고, 희극작가 에우폴리스는, '그는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술과 향락을 즐겼다네./그래서 그가 스파르테에서 자는 날마다/ 누나는 쓸쓸히 빈방을 지켰다네.'라며 키몬을 분란의 원인으로 몰아세울 정도였다.) 심하게 받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이에 페리클레스는 수습책을 내놓았는데, 키몬이 아테나이 내부 정치나, 헬라스 본토의 일에는 더 이상 간여하지 않고, 페르시아를 대적하는 일에만 전념한다는 조건으로 그가 함대를 가지고 퀴프로스로 간다는 것이었다. BC454 아테나이의 아이귑토스 원정 함대의 전멸 이후 한동안 이오니아 너머로의 항해를 제한해 왔었는데,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나 스파르테와의 소강 상태가 근질 근질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민심을 읽고, 이번에도 키몬을 내세워 200척의 함대로 페르시아와의 제해권 다툼에 다시 나섰던 것이었다. 키몬은 아테나이가 대함대를 이끌고 아이가이온 바다나 펠레폰네소스 반도 주위를 돌면서 헬라스 도시들에게 겁이나 주는 행동을 하는 대신, 페르시아를 제압하고 아이귑토스까지 진출하여 헬라스 바깥에서 부를 가지고 와야 한다며 나섰고, 아나톨리아 연안의 잃어버린 도시들을 되찾기 시작하면서, 퀴프로스로 다가갔고, 동시에 다시 60척의 함선을 아이귑토스에 보내어 페르시아를 자극하는 등 바다에서의 분쟁을 확대시켜 나가다가, BC449 퀴프러스 섬의 퀴티온을 공격하다가 죽었다. 키몬의 사후 페르시아와 아테나이는 BC448 서로의 관할지를 나누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본문으로]
  91. BC494 라데 해전의 패배로 밀레토스가 페르시아에게 도륙된지 15년 후 BC479 뮈칼레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친 뒤 이오니아에 흩으져 살던 밀레토스 사람들은 히포다모스(밀레토스 출신의 도시계획가로 BC475 격자형grid 가로의 도시를 밀레토스 재건에 최초로 적용하였고, BC470 아테나이 외항 페이라이에우스와 BC443 이탈리아의 투리오이 건설에도 같은 형식의 가로를 도입하였다.)의 주도로 밀레토스의 재건에 나서, 짧은 시간 안에 해군을 가지고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도시로 성장하여, 델로스 동맹의 일원이 되었지만, 도시의 전통은 어쩔 수 없었는지섰다. [본문으로]
  92. BC443 투퀴디데스는 도편추방당해 아테나이를 떠난 뒤 자살하였다. [본문으로]
  93. BC440 여름의 일이다. [본문으로]
  94.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전'에서 허약해진 밀레토스가 가진 구사일생의 끈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페리클레스의 동반자 아스파시아였다고 그 당시의 야담을 소개하고 있고, 투퀴디데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서(제1권115-116) 사모스의 민주정파들이 집권을 위해 아테나이의 힘을 빌려 과두정파를 치기 위해, 아테나이가 세운 밀레토스의 민주정파에게 아테나이로 가서 하소연해서 아테나이를 사모스에 불러들이도록 지원했다고 전하고 있다. [본문으로]
  95. BC440 페리클레스가 소포클레스와 함께 40척의 함대로 사모스에 와서,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때 인질로 잡아 멀리 헬레스폰토스 어귀의 렘노스 섬에 유폐시켰던 과두정파와 그들 자제의 숫자는, 투퀴디데스가 각각 50명으로, 플루타르코스는 각각 500명으로 보고하고 있는데, 이들이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재차 아테나이에 반기를 든 것을 보면, 페리클레스는 사태를 가볍게 보고 과두정의 핵심 지도자급들 50명과 그들 자제 50명만 인질로 잡았던 것 같다. 또한 그들을 유폐한 다른 섬에 대해서도 플루타르코스는 렘노스를, 투퀴디데스는 레스보스로 지적하고 있는데, 사모스의 반격이 있자, 같이 이반을 꾀한 뷔잔티온이나, 이어서 뮈틸레네 역시 이반을 꾀했던 것으로 보아, 그 섬은 렘노스가가 아니라 레스보스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96. 페르시아의 뤼디아 총독 피스트네스는 처음부터 사모스의 과두정파에게 호의적이어서, 페리클레스에게 황금 1만장을 보내 그들에 대한 선처를 요청할 정도였는데(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 페리클레스의 조치를 보고 난 후, 사모스 과두정파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과두정파가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도록 먼저 렘노스에 있던 인질을 몰래 구출해 주었고, 페르시아 역내에서 용병을 모집할 수 있도록 허가했을 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지원도 병행했다. [본문으로]
  97. 사모스 사람들은 아테나이 주둔군을 포로로 잡아 얼굴에 올빼미(아마 아테나 여신의 올빼미일 것이다.) 낙인을 찍어 페르시아로 보냈는데, 그 앞에 아테나이가 사모스 포로들에게 평저선인 사마이아를 낙인 찍은 데 대한 보복이었다. [본문으로]
  98. 과두정복고에 성공한 사모스가 한 일은 아테나이의 재침에 대한 대비가 아니라, 70척(20척은 짐배였다.)의 함대로 밀레토스를 공격한 일이었는데, 그들은 사모스로 돌아오다가 페리클레스의 함대 44척과(60척 가운데 일부는 포이니케 함대의 감시와 나머지 일부는 키오스와 레스보스에 지원군 요청하러 갔다.) 조우하여 패배하였고, 아테나이는 증원군과 지원군의 합류로 상륙하여, 사모스 군대를 도시로 밀어 넣은 다음 도시의 육지 쪽은 방벽을 쌓아 막고, 바다는 배로 지키면서, 사모스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사모스는 포이니케에 지원을 요청하는 배도 보내고, 한때 포위를 뚫고 외부와의 왕래에 성공하고 다시 해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9개월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반기를 든지 두 해만인BC439에 항복하였고, 아테나이는 사모스의 성벽을 헐고, 함대를 빼았고, 언청난 전쟁 배상금을 물리고, 사모스의 지도자들을 인질로 잡는 등, 다시는 자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도시를 철저히 약화시켰다. 이리하여 사모스는 BC404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에 항복하고 난 뒤에도 끝까지 버티다 리산드로스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아테나이의 속국으로서 아테나이의 이오니아 기지 역활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본문으로]
  99. 동반자는 창녀와는 다른 역활을 했는데, [본문으로]
  100. 뮈틸레네는 사모스를 치는 아테나이에 지원군을 보내긴 했지만, 사모스의 경우가 남의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본문으로]
  101. 헬레스폰토스의 뷔잔티온은 사모스의 이반과 댸를 같이 하여 아테나이에 이반하였으나, 사모스가 항복하는 것을 보고 다시 아테나이의 속국으로 돌아갔다. [본문으로]
  102. 아테나이와 델로스 동맹으로 묶여 있는 한, 아무리 자주권을 행사하여 독립적인 함대를 운용한다 해도 더 뻗어 갈 곳이 없다는 한계의 다바답함 때문에 결국 뮈틸레네는 스파르테의 지원 약속을 얻자마자 아테나이로부터의 이탈을 감행한다. [본문으로]
  103. 투퀴디데스는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23(6))에서,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스파르테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전쟁이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104. 결국 투퀴디데스는 BC443 도편추방당했고, 망명지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그의 지지자들도 흩어졌다. 투퀴디데스를 끝으로 아테나이에서 이제 더 이상 강력한 정치적 반대자가 없는 페리클레스는 전쟁 중 역병으로 죽기까지 15년 동안 민주정 아래서 참주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권력의 원천은 동맹도시들이 내는 조공으로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베푼 각종의 인기 정책이었다. [본문으로]
  105. 파르테논 신전의 부재는 하나 하나가 모두 곡면이나 곡선으로 깎아 만들었으나, 조립되고 보면하나 같이 모두 시원시원한 직선으로 보였다. [본문으로]
  106. 축제에서 연극이 경연의 형태로 상연되고 나서, 연극은 그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내용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형식, 다시 말해 연극의 구조도 나날이 진화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연극 구조의 정형이라 내세우기는 정말 어렵지만, 아이스퀼로스 이래,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희극의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들까지 그들의 연극들을 연극 구조의 전형으로 간주하여 그 구조를 살펴본 바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고대 헬라스 연극은 오늘날의 연극보다 오페라에 더 가까운데, 실제로 오페라가 고대 헬라스 연극을 재현하려는 의도로 시작되었듯이, 고대 헬라스 연극에서 음악과 춤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악보와 무보는 사라지고, 가사와 대사만 오늘날까지 전해지다 보니 오늘날의 연극이 고대 헬라스의 연극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2.고대 헬라스 연극의 출연진 구성을 보면, 가면을 바꾸어 써 가며 너댓 사람의 역활을 맡는 2-3명의 배우와, 12-15명이 2-3줄로 서서 방진 대형을 이루어 연극의 진행을 도우는 코로스 이외에, 오울로스 주자 1명, 그리고 교체 대기자 4-5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극과 희극의 구조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각주 참조.) [본문으로]
  107.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비극들을 우선적으로 골라, 고대 헬라스 비극 구조의 전형을 찾아본다면 아래와 같다. 1.서막prologos,prologue; 코로스가 입장하기 전에, 배우 한 명의 독백monologos으로나, 두 명의 대화dialogos를 통해 앞으로 진행될 연극에 대한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극의 주제, 줄거리의 배경, 전후 사건들의 연결 등에 대해 소개하고,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2.파로도스parodos,parode,entrance ode,入場歌; 코로스가 오케스트라의 무대에 입장하면서, 그리고 오케스트라에 들어온 다음 부르는 신을 칭송하는 노래chant이다. 코로스는 입장할 때 흔히 단단장격 아나파이스토스anapaistos,ananpestic운각을 네번 반복하여 한 행이 아나파이스토스사절운율anapaistostetrametron의 행진 리듬에 따라, 손과 팔, 그리고 몸동작으로 감정을 풍부하게 나타내는 춤을 추며 노래한다. 코로스가 입장하고 난 뒤에 부르는 파로드는 입장할 때 부르는 노래와 다른데, 물론 코로스가 다른 송가를 부를 때는 같은 형식이지만, 세 가지의 움직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코로스가 관객석의 제단altar로 향하여 송가의 한 단락stanza節을 노래에 맞는 율동을 곁들여 오케스트라의 원을 따라 돌아가는 스트로페strophe,turn와, 이어서 송가의 다음 단락을 스트로페와 같은 가락과 율동으로 계속 원을 따라 돌면서 이번에는 스케네 쪽으로 오는 안티스트로페antistrophe,couterturn와, 그리고 제자리에 와 서서standing still, 스트로페와 안티스트로페와는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는 가락과 율동으로 송가의 마지막 단락을 부르는 에포드epode,after song, 이 셋을 한 묶음으로 필요에 따라 수차례 반복한다. 그러나 왕왕 에포드는 생략하고 스트로페와 안티스트로페를 한 묶음으로 수차례 이어지기도 한다. 3.에피소드epeisodion,episode,揷話; 코로스의 파로도스가 끝나면 연극을 본격적으로 끌고 가는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1-2명의 배우가 무대에서 코로스와 노래와 음송을 주고 받으며 관객들에게 사건의 내용을 전달한다. 배우들의 대사나 연설이 늘어나면서, 노래와 음송은 많이 줄었으나, 그래도 그런 대사나 연설의 일부분으로써라도 노래와 음송은 꼭 들어가 있다. 대사나 연설은 주로 단장격 이암보스 운각을 중복하여 세 번 반복한 이암보스삼절운율iambostrimetron인데, 단단장격 아나파이스토스 운각으로 행진 리듬을 넣기도 하고, 서정적인 구절이 필요할 때는 운율에 융통성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줄거리의 한 부분이 되는 사건은 전체 연극의 구성plot에 따라 3-5개 정도 이어졌다. 4.스타시몬stasimon,stationary song,停立歌; 한 사건epeisodion이 마무리될 때마다 코로스가 오케스트라에 서서停立, 방금 벌어졌던 그 사건에 대해 논평하거나, 호불호에 대한 반응을 보이고 난 뒤, 다음 사건으로 연결시키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후대에 와서 이 정립가는 앞 사건에 대한 논평이나 호불호에 대한 의견 표시 없이, 단순히 앞의 사건과 뒤 사건 사이의 막간가 역활로 바뀌어 갔다. 5.엑소도스exodos,exode,退場歌; 마지막 사건을 코로스가 스타시몬으로 마감하고 나면, 이어서 코로스가 퇴장하면서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데, 이때 코로스가 무대를 떠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본문으로]
  108. 초기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은 희극 구조의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그의 관심이 특정한 개인의 문제에서 도시 전체의 문제로 옮겨 가면서, 차츰 희극의 구조가 복잡해졌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커졌고, 아울러 비극의 구조도 전보다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현존하는 희극 작품들이 주로 그의 것이라, 그의 작품에서 고대 헬라스 희극의 전형을 찾아본다면 다음과 같다. 1.서막; 비극의 경우와 같다. 2.파로도스; 비극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희극의 경우, 코로스가 주인공의 생각이나 태도에 대해 호의적for,pro인가, 아니면 비판적against,con인가 하는 그들의 태도를 신에 대한 송가를 부르면서 분명히 나타낸다. 코로스의 숫자도 초기에는 비극처럼 12-15명 정도였으나, 24명으로 늘렸다. 3.아곤agon,contest; 그 희극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나와 시비를 가리는데, 먼저 공격하는 사람이 진다. 코로스는 그들의 다툼을 부추기고, 때로 추임새도 넣기도 하는데, 두 사람의 다툼이 끝나면, 코로스의 노래로 마감한다. 아곤에서 다투는 사람들이 하는 연설은 주로 한 행이 단장격의 이암보스 운각을 중복하여 네 번 반복하는 이암보스사절운율iambostetrametron을 쓴다. 4.파라바시스parabasis,coming forward; 아곤이 마감되고 배우들이 무대를 떠나면, 혹은 장면의 전환이나, 직접 무대에 올려 관객들에게 보여 주지 않더라도 어떤 사건이 따로 전개되고 있다고 암묵적으로 관객들도 이해하여 그런 진행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이루어지는데, 그러므로 파라바시스는 희극에서 여러 번 이우러지기도 한다. 파라바시스는 먼저 코로스가 가면을 벗고, 극중의 역활에서 벗어나 관객들에게 다가간다. 그 다음 코로스의 대장이 관객들에게 작가를 대신하거나 코로스 대장으로서 해당 연극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관객들이 듣고 판단해야 한다고 믿는 이슈에 대해 연설한다, 연설은 처음 한 행이 단단장격의 아나파이스토스 운각을 여덟 번 반복하는 아나파이스토스팔절운율anapaistoshoktametron으로 시작하다가, 끝부분에 가서는 숨을 멈추고 혀가 꼬일 정도로 속도를 높혀 끝낸다.(한 행이 팔절운율일 정도로 할 말이 길고 많은데 빨리 전하려니 숨이 가쁘고pnigos 혀가 꼬인다.) 이어서 코로스들의 노래가 시작되는데, 주로 다음과 같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찬가oidos,ode; 코로스가 반반 씩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왼쪽 코로스가 먼저 신을 찬양하는 송가를 부른다. 2)에피레마epirrhema,afterword添言; 왼쪽 코로스의 대장이 나와 야한satyric 이야기나, 전체 코로스 대장이 제기한 이슈에 대해 도움advisory이 되는 이야기를 한 행이 장단격 트로카이코스trockaikos,trochee 운각을 중복하여 네 번 반복한 트로카이코스사절운율trokaikostetrametron로 음송chant한다. 3)답가anteoidos,antode; 오른쪽 코로스가 앞의 송가와 같은 운율로 그에 화답하는 노래를 부른다. 4)안티에피레마antepirrhema,answering afterword再添; 오른쪽 코로스의 대장이 나와 앞의 에피레마에 대해 같은 운율로 화답을 음송하고, 이어서 다시 희극의 다음 장면으로 인도한다. 5.에피소드; 비극의 경우와 같다. 다만 희극에서는 아곤에서 나온 결론을 예증하는 사건들이나, 결과물을 3-5가지 정도 보여 준다. 6.엑소드; 비극의 경우와 같다. 희극은 마지막 에피소드를 결혼식 같은 흥겨운 잔치나, 축제의 행진 같은 떠들썩하고 무질서한 분위기의 것으로 골라, 엑소드와 연결시켜 유쾌하게 극을 끝낸다. [본문으로]
  109. 레나이아lenaia는 레이노스leinos, 즉 포도주를 담그는 큰 술통을 가리키는 말로, 디오뉘소스가 생명을 다시 불어 넣어 주는 신일 뿐만 아니라, 지난 해 가을에 담은 포도주가 익어 새봄에 처음 포도주 통을 열면서, 포도주의 신이기도 한 디오뉘소스를 경배하는 뜻에서 가메리온 달 중순에(지금의 정월 말쯤) 열었던 포도주 축제 디오뉘시아이다.(오늘날 프랑스에서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을 기해 그해 생산된 햇포도주를 전세계에 일제히 출하하는 행사에 포도주의 신 디오뉘소스를 기리며 연극제가 열렸다고 생각하라.) [본문으로]
  110. 아테나이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처음 아티케의 작은 마을 엘레우테라이에서 열리던 시골 디오뉘시아를 원형model으로 삼아, 아테나이에서 지금의 3월 말 쯤 되는 때인 에마페브리온 달에 도시의 축제에 걸맞게 키운 디오뉘시아로, 그후 헬라스의 각 대도시에서도 유사한 축제가 열렸기 때문에, 시골 축제와 구별하여 대大디오뉘시아, 혹은 도시 디오뉘시아라고 불렀고,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대디오뉘시아와 구별하여 아테나이 디오뉘시아라고도 불렀다. [본문으로]
  111. 1. 연극 경연이 있었던 디오뉘시아는 둘인데, 아테나이 디오뉘시아는 BC535에 시작되어 테스피스가 첫 우승을 차지한 기록을 가지고 있고, 레나이아는 BC487 비극 경연을, BC442 희극 경연을 국가적 행사로 시행하였다. 2. 디오뉘시아의 연극 경연은 예선과 본선으로 나누어 두 번 거쳤다. 예선은 작가가 작품의 개요를 심사위원회에 제출하는 서류 심사였고, 본선은 예선을 통과한 작품을 해당 디오뉘시아에서 상연한 것을 보고, 심사위원들이 순위를 매겼다. 3. 비극은 한 작가가 세 편의 비극에 별도의 사튀로스극 하나를 끼워 경연했고, 희극은 한 작가가 한 작품으로 경연하였다. 4. 비극은 다섯 작가 본선에 나가 하루에 한 작가의 작품을 닷새 동안 경연하였고, 희극은 세 작가가 본선에 나가 하루에 경연을 마쳤다. [본문으로]
  112. 연극을 상연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코로스의 비용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도시가 부담하는 배우는 한 명이었는데 반해, 작가가 부담하는 코로스는 50명에서 15명까지 줄어 있었다.), 연극의 활성화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아테나이는 BC487 코로스 후원 제도인 코레고스 제도를 법으로 정했다. 코레고스는 아테나이에서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 도시민들 가운데서 코로스 단원들을 고용하여 그들이 전문적인 직업인으로써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활을 맡긴 사람을 가리킨다. 코로스가 주로 연극 경연에 나서다 보니 코레고스끼리도 경쟁심이 생겨, 더 나은 코로스 단원을 데리고 있기 위해 노력했는데, 경연에 나설 작품은 추첨에 의해 코레고스에게 배정되었기 때문에, 어느 코레고스의 코로스가 맡는가에 따라 경연의 성적이 좌우될 수도 있었다. 코레고스들은 최종 점검과 격려를 위해 공연 하루나 이틀 전에 작가, 연출가, 배우들, 그리고 코로스를 위시한 나머지 출연진이나 연출 조수들을 모아 모임proagon을 가졌다. 페리클레스도 24살 때부터 코레고스로 지명 받았고, 제일 유명한 코레고스는 니키아스로 그의 코로스가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했다. [본문으로]
  113. 연극배우는 따로 도시의 비용으로 도시가 배우 지망생을 선발하여 훈련시키면서 배우로 육성하고 있다가, 경연에 나선 작품들 별로 추첨을 통해 배정하였다. 헬라스에서 연극배우는 존경 받는 직업 중 하나였는데, 소정의 훈련 과정과 시험을 거쳐 전문 배우로서 인정을 받으면, 도시가 생활을 책임졌으며, 병역이 면제되고, 외교 사절로도 활동하였기 때문이었다. 도시가 지원하는 출연 배우의 숫자는 처음 한 명에서 나중 세 명까지로 늘어났다. [본문으로]
  114. 스케네의 전면을 무대 배경으로 쓰기 시작한 소포클레스가 경연에서 우승하며 본격적으로 비극작가로 활동하던 BC468부터이다. [본문으로]
  115. 연극을 상연하는 극장의 구조는 관객석theatron과, 주로 코로스들이나 무용단과 같이 단체 출연진의 무대인 원형무대orchestra와, 그 뒤의 배우들을 위한 여러 시설들로 짜여 있다. 관객석에는 원형무대 가까이 디오뉘소스를 위한 제단이 놓여 있고, 원형무대 뒷쪽에 있는 여러 시설들은 관객석 첫 단의 높이 정도로 높혔는데, 그 가운데 가장 뒤에 있는 것이 배우들이 대기하고, 가면이나 옷을 갈아 입거나, 그 밖에 연극에 필요한 소품이나 장치를 보관하는 장소이자, 전면을 필요에 따라 배경으로 장식할 수 있게 한 시설인 스케네skene가 있고, 스케네 앞으로 배우가 나와 연기하는 무대proskenion,logeion가 있으며, 그 무대 양끝에서 무대보다는 조금 좁게 옆으로 뽑아낸 연장무대paraskenion로 되어 있다. 원형무대로의 등장과 퇴장은 따로 출입로를 두었는데, 파로도스parodos이다. [본문으로]
  116. 도시가 주관하는 축연에는 디튀람보스 코로스의 공연이 있었는데, 소란스럽고 번잡하였다. 레스보스의 아리온(BC628-585)은 우선 코로스 단원의의 숫자를 50명으로 고정하고, 공연장을 도는 원무를 안무하여 출연의 순서도 정해 공연의 질서를 잡았으며, 코로스의 지휘자와 코로스 간에 디오뉘소스의 모험이나 기행에 대한 이야기談詩를 음송chant으로 주고 받는 새로운 형식을 추가하여 원시 연극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BC535 아테나이 디오뉘시아에서 열린 첫 번째 비극 경연에서 우승하면서 고대 헬라스의 연극 무대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테스피스thespis(생몰연대 미상)는 아이스퀼로스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연극 전체를 만든 작가였고, 연출가였고, 배우였고, 무대 감독이었다. 그는 아리온의 디튀람보스 공연 구조를 혁신하여, 코로스 대장이 아닌 한 명의 배우를 내세워, 코로스 대장이나 코로스와 대화를 하며 연극의 주제를 관객에게 전하는 구조로 바꾸었는데, 50명의 코로스는 너무 산만하여 배우의 연기와 대사를 전달하기에 너무 커서 줄였다.(줄인 코로스가 몇 명 정도였는지 기록이 없으나, 그후 아이스퀼로스의 연극에서 배우가 하면 더 늘고, 코로스가 12-15명 정도 였던 것을 감안하면,10-20였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따라서 코로스의 원형무대와는 별도로 배우의 연기를 위한 공간인 무대proskenion를 배정하였으며, 배우가 연극의 진행에 따라 수시로 가면을 바꾸어 가면서 서너 가지 배역을 맡도록 하였다. 따라서 그는 역활 전환을 위한 가면 쓰기를 창안하였고, 배우가 가면과 의상을 바꿀 수 있는 공간을 무대 뒤에 '가림막skene'을 쳐서 만들었다. 그후 밀레토스가 민주정을 세우고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었던 BC499, 아이스퀼로스가 스무일곱의 나이로 첫 작품을 아테나이 디오뉘시아 비극 경연에 올릴 때까지, 코이리로스와 프뤼이코스가 비극 무대를 발전시켜 왔다. [본문으로]
  117. 디오뉘소스 찬가 디튀람보스로부터 발전한 비극과는 달리, 마을 디오뉘시아에서 커다랗게 만든 남근phallos을 들고 마을 곳곳을 다니며 흥을 돋구던 일로부터 발전한 것을 보이는 가면을 쓴 행렬을 지어 다니며 생명의 탄생에 대한 기쁨을 나타냈던 '남근놀이phalloporos,ithyphallos', 잔치의 여흥에서 비롯되어, 마을의 축제에도 흥을 돋구는 순서로 등장했던 동물들의 가면을 쓰고 나와 그것들의 흉내를 내며 웃고 즐겼던 '흉내놀이deikelistes,autokabdalos,mimos', 엘레우시스 제례의 행렬이 아릿소스 강의 게퓌라 다리를 건널 때, 행렬을 구경하는 행인이나 둑에 선 사람들에게 야유를 퍼붓던 '야유놀이gephyristai', 떠들썩한 술집에서 술이 취해 노래하고 욕하고 다투기도 하여 엉망이된 분위기의 '취흥놀이komos', 등등의 놀이들이 점점 도시의 축제에도 여흥 차례로 나서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면서부터 비극의 영향을 받아 연극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BC487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대다수 도시민이 연극을 즐기는 것을 보고 도시가 연극 상연을 후원하기로 하고, 코레고스 제도를 도입했을 때, 희극도 아테나이 디오뉘시아 연극 경연에 포함시켰는데, 이때 키오니데스kionides가 첫 우승을 한 이래 마그네스magnes는 11나 우승하며 희극의 흥행을 이끌어 온 덕분에 BC442 펠리클레스는 레나이아 디오뉘시아에서도 도시가 희극의 졍연을 주최하게 되었다. 특히 크라티노스kratinos,BC490?-423는 BC453 처음 무대에 희극작가로서 이름을 올린 뒤 BC423 마지막 작품 '"술병"'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을 제치고 일등했을 때까지 오늘날 구희극이라 불리는 헬라스의 희극을 완성하였는데, 그는 '"디오뉘스알렉산드로스"'로 펠리클레스와 아스파시아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등 처음으로 도시에서 이름난 동시대의 거물들을 직접 희극에 올려 웃음거리로 만들었고, 이 새로운 희극의 소재는 에우폴리스, 아리스토파네스 등 후배 희극작가들에게 이어져 희극의 흥행을 보장하는 길을 열었다. [본문으로]
  118. BC487 키오니데스가 레나이아 축제에 희극을 상연한 이후, BC442 페리클레스가 레나이아에서의 희극 경연도 도시 행사로써 그 비용을 부담하면서 축제를 주도하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축소되었던 디오뉘시아들에서의 연극 경연 탓인지, 전쟁이 끝난 후로 비극 경연은 아테나이 디오뉘시아가, 희극 경연은 레나이아 디오뉘시아가 주 경연장으로 바뀌어 갔다. [본문으로]
  119. '아카르나이 사람들'393-489. 디카이오폴리스가 에우리피데스를 찾아가 텔레포스의 누더기 변장을 빌리는 장면. '기사들'18. 에우리피데스의 '휩폴뤼토스' 345 인용. '평화'528-534. 트뤼가이오스가 헤르메스에게 하는 말과 헤르메스의 대꾸. '뤼시스트라테'537-538. 노파들과 노인들 코로스 대장들끼리의 다툼에서 여자를 뻔뻔하다고 보는 에우리피데스를 빗댄 노인코로스 대장이 하는 말. 그리고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과 '개구리들'은 전체가 에우리피데스를 주인공으로 그를 희화화하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테스의 희극적 대치물로 보고 희화화한 빈도수나 분량은 에우리피데스 경우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120.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작품에서 수없이 많이 에우리피데스의 감성적인 표현과 톡톡 튀는 대화를 골라 패러디한 것을 제외하고도, 배우와 코로스의 수를 늘린 점, 당시의 여느 희극작가들과는 달리 비속한 말이나 야한 언사의 사용을 가급적 줄인 점,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관객들에게 더욱 실감나게 보여 주기 위해 각종 기계장치나 무대 소품을 가리지 않고 사용한 점, 등 여러가지 연극의 구성과 연출 기법에서 에우리피데스의 예를 따랐다. [본문으로]
  121. 아이스퀼로스는 BC458 아테나이 디오뉘시아 비극 경연에 그로서는 마지막 작품이되어 버린 아가멤논 집안 이야기이자 '오레스테스 이야기oresteia'인 삼부작('"아가멤논"','"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자비로운 여신들"'과 사튀로스극 '"프로테우스"'를 올려 우승하였다. 여기서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라 함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과 '"자비로운 여신들"' 속의 오레스테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122. 소포클레스의 오레스테스라 함은 그의 연극 '"엘렉트라"BC418현존' 속의 오레스테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123. 에우리피데스의 현존하는 아가멤논 집안 이야기는 '"엘렉트라"BC413','"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BC413','"오레스테스"BC408','"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BC405유작' 등 모두 네 편인데, 여기서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라 함은 앞의 세 작품 속의 오레스테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124. 고대 헬라스 비극작가들은 두 디오뉘시아 경연에 출품할 때, 비극 세 편과 사튀로스극 한 편 모두 네 편의 작품을 내었는데, 이 네 편이 모두 이야기의 소재가 다르더라도 하나의 같은 주제로 연결된 것이면 4부작tetralogy으로 불렀고, 비극 세 편만 연결되고 사튀로스극은 별도의 다른 주제이거나 아예 내지 않았을 경우는 3부작trilogy으로 불렀다. 에우리피데스는 사튀로스극을 잘 내지 않았고, 나중에는 세 편의 비극도 연작 형식이 아니고 소재나 주제를 서로 달리 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메데이아 삼부작'이라고 이 글에서 꼽은 것은 한 경연에서의 출품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 가운데서 메데이아를 주인공으로 한 비극 세 작품을 엮어 불러 본 것이다. [본문으로]
  125. 에우리피데스가 만들지 않았을 리가 없는 이 작품은 단편으로도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그러나 이아손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 이국의 마술사 메데이아가 그 사랑을 얻기 위해 오빠와 다른 친족을 죽이면서까지 아버지의 양탄자를 훔쳐 이아손과 달아나는 사랑의 지극함을 에우리피데스가 놓쳤을 리가 없기에, 에우리피데스가 만들었을 그 작품을 "???"'으로 표시한 것이다. [본문으로]
  126. 'deus ex machina' [본문으로]
  127. 이 셋 모두가 BC493의 일이다. [본문으로]
  128. 메데이아는 사라의 성취와, 그렇게 얻었던 사라의 배신에 대한 응징, 이 모두를 동기나 자식을 죽이는, 바꾸어 말해 신들이나 하던 짓을, 다시 말해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짓을, 스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본문으로]
  129. 아리스토텔레스,'시학'제6장1449b28. [본문으로]
  130. 에우폴리스는 아리스토파네스보다 한 해 먼저인 BC446에 아테나이에서 태어나, BC430 열일곱의 나이로 레나이아 축제 경연에 참가한 뒤, BC411 해군으로 참전하여 헬레스폰토스에서 서른여덟에 전사할 때까지 모두 열일곱 편의 작품을 썼고, 그 가운데 일곱 작품이 경연에서 우승한 천재 희극작가였다. 정치비평가로서 많은 정치인들을 풍자 비판하였는데, '추종자들koakles,BC431,단절'은 칼리아스가, '마리카스marikas,BC421,단절'에는 휘페르볼로스가, '바프타이baptai,BC416,단절'는 알키비아데스가 비난의 대상이었다. 특히 주목할 작품으로 '도시들poleis,발표연대미상,단절'이 있는데, 이 작품으로 그는 아테나이의 제국주의와 패권 추구 때문에 겪는 델로스동맹 도시들의 고통을 대변하였다고 전한다. (이상 작품들은 모두 단절되고 몇 개의 단편으로만 알려진 것들이다.) [본문으로]
  131. 탈레스의 도시 밀레토스가 이오니아의 다른 도시들과 함께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주도한 것은 BC499이었다.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와의 연합으로 낙소스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페르시아의 미움을 사, 페르시아가 그의 지위를 박탈하려 하자, 민주정파들과 합세하여 민주정을 세우고 정권을 쥐었는데, 이오니아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이 같은 민주혁명이 일어나 많은 도시에서 참주들을 쫓아내고 민주정을 세웠고, 쫓겨난 참주들은 사르데이스로 가서 페르시아의 무력을 앞장세운 중래를 꿈꿨다. 그해 겨울 아리스타고라스는 눈에 보이는 페르시아의 무력 개입을 물리칠 지원군을 얻기 위해 헬레네 본토로 건너 갔고,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는 거부한 지원을 아테나이가 받아들여, 팔레론 항을 통해 지원군을 보낸 것이 BC498이었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쿠데타로 민주정을 세운지 꼭 10년이 지난 아테나이가 이오니아의 도시 중에 처음으로 민주정을 세웠을 뿐 아니라, 이오니아 전체에 민주정의 바람을 불어 넣은 밀레토스와 자매도시의 결연을 맺고 지원에 나선 것이었다. 아테나이에 민주정이 수립딘 후 처음 원정에 나서 사기가 충천한아테나이의 지원군은 페르시아 군대는 별 것 아니라는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의 말만 믿고 사르데이스 성벽의 암문을 통해 무턱대고 입성하였고, 페르시아 군대를 기습하였으며, 사르데이스에 불을 지른 다음 퇴각했는데,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당한 페르시아의 사르데이스 총독 아르타페르네스가 정신을 수습하고 반격에 나섰고, 아테나이 병사들은 함대로 돌아가다 함대 근처에서 화살과 말발굽에 박살이 나, 삼삼오오 도망쳐 배에 오르고, 아테나이로 돌아갔다. 반란을 일으킨 건 이오니아의 도시들 뿐만이 아니어서, 아테나이가 불을 질러 그을린 페르시아의 권위는 남쪽의 퀴프로스부터 북쪽의 케르소네소스 반도까지 번진 반란의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는 강력한 군세를 동원하여, BC497에는 밀레토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들에서 반란군을 쓸어 내었고, 반란 3년이 지난 BC496에는 그들에게서 빼앗은 함선들로 함대도 재건해 가고 있었다.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는 선대 참주였던 그의 숙부 히스티아이오스가 다레이오스1세의 스키타이 원정 때, 퇴로를 막아 반역을 꾀하는 아테나이 명문가 출신 케르소네소스의 참주 밀티아데스를 주저앉혀, 다레이오스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한 공을 세웠는데, 그후 다레오스로부터 받았던 트라케의 미르키노스에 가서, 용병도 모집하고 배를 지을 목재도 마련하려다가 어이없이 그곳에서 피살당하고 말았다. 아테나이의 그 누구도 더 이상 이오니아와 자매도시 밀레토스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밀레토스의 저항은 계속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아 파벌 간의 다툼으로 날이 새고 있었으며, 350척의 이오니아 함대도 점차 썩어 허물어지고 있었다. BC496 아테나이는 쫒겨난 참주 히피아스의 매부 히파르코스가 집권하여, 아르타페르네스와 우호조약을 맺고, 당장의 아테나이 안전이 확보하였고, 절치부심의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나이를 이오니아와 밀레토스로부터 떼어 내어 혹시 모를 적 하나를 잠재워 두었다. 그리고 BC494 곧 여름이 시작되는 때, 페르시아는 600척의 대함대로 밀레토스 항의 입구를 막아섰고, 자유를 지키려는 이오니아 각지의 사람들이 밀레토스와 이오니아 함대가 정박하고 있는 작은 섬 라데로 몰려들었다. 오랜 포위로 굶주림을 못이긴 라데 섬 사람이 첩자의 농간에 놀아나 페르시아 군대를 불러 들였고, 기습을 받은 이오니아 함대는 결전을 위해 밀레토스 만으로 나갔으나, 사모스 지휘관들은 벌써 페르시아와 내통하고 있었고, 다른 도시의 지휘관들도 그 뒤를 이어 이탈하여, 이오니아 함대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밀레토스 해안은 시체로 쌓였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페르시아가 밀레토스 성벽을 공성기까지 동원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자 밀레토스는 항복했다. 아르타페르네스는 잔혹함으로 밀레토스를 파괴했다. 성인 남자들은 도륙당했으며, 여자들은 강간당했고, 사내 아이들은 거세당했고 계집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그러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략질한 보물을 실은 수레에 묶여 하렘으로 끌려갔다. 한때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풍요롭던 이오니아가, 철학이 탄생한 밀레토스가, 모두 황무지로 변해 버렸고, 다시 사람들이 모여 살기까지 제법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었다. [본문으로]
  132. BC494 여름 밀레토스가 함락되자, 프뤼니코스는 곧바로 밀레토스 사람들이 겪었던 참상을 '밀레토스의 함락'(단절)이라는 비극으로 만들었고, 이듬해 BC493 봄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의 무대에 올렸다. [본문으로]
  133. BC493 프뤼니코스가 '밀레토스의 함락' 때문에 벌금 천 드라크마 부과와 재상연 금지 처분을 받고 난 뒤, 그가 계속해서 어떤 작품들을 만들었는지, 과연 작품 활동을 계속했는지, 기록이 없어 모르지만, 그가 무대에 올린 다음 작품에 대한 기록은 '"밀레토스의 함락"' 이후 17년이 지난 BC476 상연된 '"포이니케의 여인들"'인데, 그 내용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한 페르시아 함대의 주력이었던 포이니케 해군의 참상을 포이니케 여자들(그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여자 가면을 도입하였다.)의 눈으로 그린 것이라는 단편들의 설명에 따르면, 17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그의 눈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비극적 장면을 포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리스 비극 사상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현실 세계를 소재로 한 비극 '"페르시아 사람들"'을 만든 아이스퀼로스의 경우, 그가 BC499에 낸 첫 작품과 BC484에 처음 우승한 작품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가 처음부터 어떤 소재로 어떤 주제에 대해 비극을 만들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프뤼니코스의 '"포이니케의 여인들"'가 발표되던 해, 함께 경연한 그의 작품이 프로메테우스를 소재로 한 3부작 '"불을 가져다 주는 프로메테우스"'(단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현존), 그리고 '"해방되는 프로메테우스"'(단절)인 것을 보면, 아이스퀼로스가 현실 세계보다는 전통적인 신화나 영웅들의 세계에서 빚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비극을 다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스퀼로스가 프뤼니코스의 현실 세계에 천착하는 눈이 부러웠었는지, 아니면 자기의 눈도 현실 세계에서 비극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였는지, 4년 뒤 BC472 서로 소재는 다르지만 같은 주제를 다룬 3부작, '"피네우스"'(단절), '"페르시아 사람들"'(현존), '"그라우코스"'(단절), 그리고 사튀로스 극으로 '"프로메테우스 퓌르카에우스"'(단절) 가운데 '"페르시아 사람들"'이(이 연극은, 아테나이의 살라미스 해전 승리를 한 페르시아 전령의 입을 빌려 길게-249행부터 514행까지- 과장하여 자랑하고, 페르시아의 오만과 신에 대한 불경이 패인임을 죽은 다레이오스의 혼백을 불러 길게-681행부터 842행까지- 비아냥을 섞어 질타하여, 비록 페르시아 원로들로 구성된 코로스가 슬픈 어조와 노래로 마치 페르시아가 망한 것처럼 분위기를 잡고 있지만, 아테나이 관객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적인 요소로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겪은 아테나이의 고통을 승리로 덮어 얻을 수 있도록 만든 전승 홍보물이다.) '살라미스 해전 후 페르시아 왕궁의 슬픈 모습이라는 가상 현실'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었다. 그러나 아이스퀼로스의 이 '"페르시아 사람들"'이(이 작품이 포함된 아이스퀼로스의 3부작은 24살의 페리클레스가 코레고스가 되어 지원하여 그해 우승까지 했고, 그 덕분에 페리클레스는 자기 이름을 공식 기록에 첫 번째로 올리게 되었다.) 발표된 것을 끝으로, 프뤼니코스는 노령 탓이었는지, 또 한번 현실 세계에서, 그것도 적이건 아군이건 전쟁으로 겪는 참상에서 비극을 찾는 태도에 대해 비난을 받아서 그랬는지, '"포이니케의 여인들"'을 끝으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한 흔적이 없고, 아이스퀼로스 역시 어떤 이유에서였든 그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인지 두 번 다시 현실 세계(그것도 가상 현실이었다.)에서 비극의 소재를 찾아 비극을 만드느 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소포클레스고 에우리피데스고 제법 이름을 날리던 헬라스 비극작가들 그 누구도 현실 세계에서 비극의 소재를 찾지 않아, 그리스 비극은 영원히 현실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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