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도시의 자유自由(2)
11.9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에 전체 헬라스 내전이1 벌어진 첫해부터 전쟁의 양상은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그려보였던 그것과 달랐습니다. 우선 150여척의 함대를 보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순회하며 허룩한 곳을 공격하도록 하면서, 나선 김에 이제 틀림없이 나올 이탈자들에 대한 경고 삼아, 이미 스파르테에 붙어 전쟁을 부추겼을 페이라이에우스 항의 눈엣가시 아이기나 섬을 점령하고, 섬 주민들을 쫓아내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켜,2 사르니코스 만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포테이다이아가 아직 함락되지 않아, 적은 숫자의 적을 포위공격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을 쓰며 많은 함선과 중무장보병들이 여전히 묶여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고, 다음으로 요새섬 방어전략에 따라3 성벽 안으로 들어온 피난민들을 수용하기에 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빈 공터도 턱없이 부족해 도로는 물론 신성한 땅에도 움막을 칠 정도였으며,4 스파르테군이 아카르나이에 진을 치고 한여름의 주변 농장을 뒤엎기 시작하자, 방어전략을 충분히 납득했다 믿었던 앗티케 사람들이 요격에 나서려는 것을 애써 주저앉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사정은 아르키다모스에게도 마찬가지였던지, 마치 이런 전쟁을 꼭 해야 하나 하고 보내올 페리클레스의 사절을 기다리기나 하는 듯5 천천히 메가라를 지나, 보이오티아 경계의 오이노에로 갔다가 별무소득이자, 다시 엘레우시스로 내려와 트리야 벌판의 농장들을 유린하고, 아카르나이로 와서야 진을 치고 기다리다 아테나이의 사절도 없고 응전마져 없어, 한 달 정도 머물다가 여름이 다가기도 전에 올 때와 다른 길로 보이오티아로 가서 아테나이 편인 오로포스를 유린하고6 돌아갔지요. 덕분에 앗티케 사람들은 그해 겨울을 아테나이 성벽 안에서 노숙하지 않고 집에 가서 날 수 있어서 좋았을 것입니다. 아르키다모스가 돌아가고 가을이 되자, 앗티케 사람들의 출동 주장 부담을 벗은 페리클레스는 앗티케 출격을 못해 근질근질해진 부대도 달래고, 언제 뒷통수를 칠지 모르는 메가라를 눌러놓고, 메가라의 니시아이 항을 수중에 넣기 위해 중무장보병 15,000여명을 직접 이끌고 가서, 그들의 농장을 황폐화시킨 뒤 돌아왔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던 아테나이 함대는 아카르나니아에서 새로 솔리온과 아스타코스를 쳐서 새 동맹으로 삼았고, 케팔레니아 섬을 확보한 뒤 겨울이 되어서야 아테나이로 돌아온 것으로 개전 첫해의 싸움이 모두 끝났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첫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아테나이가 조상 대대로 우리만 살아온 자유국가이고, 민주정이라 평등하며, 정치는 물론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헬라스의 학교이니만치, 행복은 자유에 있고, 자유는 용기에 있음을 명심하여 전쟁의 위험 앞에 주저하지 말라고 독려했습니다.7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연설과는 달리, 개전 첫해 아테나이가 얻었거나 잃은 것은 앞으로 아테나이가 겪을 전쟁의 모두를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페리클레스도 아테나이 사람 그 누구도 그것을 조심스레 살펴서 신중하게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첫해에 이미 전쟁 비용은 예상보다 너무 많이 들고 있었고, 요새섬 방어전략을 쓰기에는 아테나이 성벽 안이 너무 좁은 반면 피난민과 피난 가재가 너무 많아 문제를 드러냈고, 아테나이의 자유를 자랑하면서도, 전쟁 중에는 제국을 확장해서는 안 된다고 해놓고서도8, 아이기나, 솔리온, 아스타코스의 자유를 빼앗아 종속시키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아이기나로 보내는 이주 장려와 도시가 베푸는 혜택의 수혜자를 한정하기 위한 시민권 제한으로9 스스로 전력 확대를 막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페리클레스는 전쟁을 피하고 싶어하는 친구인 스파르테 왕 아르키다모스의 진중한 진군 의도를 알면서도, 그의 권력 지탱을 위해 필요한 당분간의 전쟁 때문에10 사소한 것이라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견지하며 평화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은 저와 함께 이 네 가지 실패 요인이, 다시 말해 과다한 전쟁 비용, 부적절한 방어전략, 습관적인 제국 확장과 전쟁으로 인한 인력 감소,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 유지를 위한 평화 거부가, 어떻게 그 긴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갔으며, 종래에는 그 전쟁이 어떻게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빼앗아갔는지 모든 전쟁 자료를 통해 살펴볼 것입니다.
11.94. 이듬해 여름 아르키다모스는 평화에 대한 꿈을 접은 듯, 지난해와 같은 규모의11 군대를 이끌고 곧바로 앗티케로 들어와 진을 치고, 약탈에 들어갔고, 앗티케 사람들도 지난해보다 빠르게 움직여 성벽 안으로 피난했고, 약탈을 보고도 지난해 같은 출격 소동이 없는 걸 확인한 페리클레스는 함대의 출동을 준비시켰고, 스파르테 동맹군이 앗티케의 동쪽 해안 라우레이온 산 부근까지 진군했고, 페리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나이 동맹함대는 에피다우로스에 상륙하여 도시 인근을 약탈하고 도시를 공격한 다음 바닷가 도시들을 공격하여 약탈하고 있었는데, 아테나이에서는 피난민들이 들어온 며칠 뒤 역병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역병은 아테나이 안에 무섭게 퍼져나가더니 페리클레스의 함대가 떠난 뒤 따로 포테이다이아로 떠났던 아테나이군에도 돌았고, 스파르테 동맹군이 앗티케에 들어온지 40일이 될 무렵에는 역병의 소문과 시체를 태우는 연기를 보고 감염을 피해 서둘러 철수했고, 포테이다이아로 갔던 군대도 역병이 돌아 40여일 견디다 본디 주둔하고 있던 부대에 임무를 맡기고 철수했고, 페리클레스가 이끈 함대는 라코니케 해안까지 공격하고나서 여유를 부리며 돌아왔는데,12 그가 돌아온 아테나이는 역병으로 지옥이 되어 있었으며, 그 지옥 속의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가 이 모든 재앙의 화근이라고 지목하면서, 그들끼리 스파르테에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안했지만 별무소용이자, 그에게 온갖 화풀이를 했지요. 페리클레스는 민회를 소집하고 좌절하고 분노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자책으로 서로의 책임을 따지는 분열의 재앙 속으로 나라가 빠지면 역병으로 고통받는 시민들 구조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며, 전쟁은 단순한 우리의 자유냐 예속이냐의 문제를 뛰어넘는 제국을 잃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당장의 어려움에 넋을 잃고 지금 제국을 포기하는 것이 고상한 태도라 생각한다면13 제국을 통치하며 받았던 미움이 우리를 얼마나 위험하게 할 지 생각해야 하며, 제국 건설이 비록 그 시작은 나빴다 해도, 권력을 놓을 수 없는 참주처럼, 이제 그만두기에는 너무 위험하니, 더 이상 사절을 보내 평화에 매달리는 약함을 적에게 보이지 말고, 모두 신의 섭리는14 순순히 받아들이고, 적군은 용감히 물리쳐, 헬라스 최강이며 헬라스 최대의 도시라는 우리의 영광과 명성을 영원히 기억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달랬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일단 수긍하여 더 이상 평화를 구하는 사절을 보내지 않았고, 전쟁 준비에 몰두했습니다만, 없는 사람들은 변변치 않은 것마져 잃고 가진 사람은 온갖 좋은 것을 다 잃었는데도 평화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데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 없어, 페리클레스에게 횡령죄를 묻고 엄청난 벌금을 매기며15 화풀이했지요. 그러나 계속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아테나이 사람들은 해가 바뀌자 페리클레스를 다시 장군으로 뽑아, 그의 말마따나 신의 섭리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적군은 용감히 물리치기 위해 나섰지요. 그런데 아테나이는 포테이다이아에서 역병 때문에 돌아왔던 포르미온에게 30척의 함대를 주어 아카이아 사람들이 이어족인 암필로키아 사람들과 함께 암필로키아의 이웃 아르고스와 벌이는 싸움을 지원하라고 보냈고, 덕분에 문제를 해결한 아카이아를 새로운 동맹으로 얻었고, 내킨 김에 포르미온은 나우팍토스 항을 기지 삼아 그곳에 머물면서 코린토스와 크리사 만을 봉쇄했는데, 그것은 초여름 펠로폰네소스 해군의 움직임 때문으로 보였지요. 사실 세 번째 해 여름에 앞으로 바뀌어갈 전쟁의 양상을 예고하는 듯한 움직임 둘이 펠로폰네소스 동맹 쪽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의 조짐은 펠로폰네소스 해군이 처음으로 전투에 나서 아테나이의 동맹인 지킨토스 섬을 공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실패는 했지만16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페르시아의 전력과 비용 지원을 통한 참전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드러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그들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바로 아테나이 함대가 역병으로 묶여 있을 때에야 100척이나 되는 함선을 띄울 만큼17 해군력에 자신이 없었다는 것이고, 겨우 전쟁 두 해를 지냈을 뿐인데 벌써 이어족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전비 지원 요청에 나설 수밖에 없을 만큼 돈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형편이 이런 펠로폰네소스군이 돈을 쓰며 역병이 도는 앗티케에 나가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당연했지만, 아테나이가 분담금 징수를 위해 6척의 배를 멀리 아시아의 카리아까지 보낸 것을 보면18 아테나이의 형편도 생각보다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게지요. 어쨌거나 그해 겨울에 아테나이에게는 조금 좋은 일 하나와 아주 나쁜 일 하나가 일어났는데, 조금 좋은 일은 포테이다이아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협상을 제의하자, 포위하고 있던 아테나이 장군들 셋도 돈만 드는19 포위공격을 끝낼 요량으로 협상을 받아들여, 포테이다이아 사람들과 용병들이 옷보따리와 여행에 필요한 돈을 가지고 도시를 떠나게 하고 포테이다이아를 넘겨받았다는 것이고,20 아주 나쁜 일 하나는 역병의 재앙에 겁먹은 사람들이 강화를 위해 스파르테와 협상에 나서려는 것을 반대하는 페리클레스를 공금횡령죄로 탄핵하여, 그에게 벌금을 매기고 그의 장군직을 박탈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강화파들이 스파르테로 보낸 사절은 빈손으로 돌아왔고, 별수없이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아테나이는 전쟁을 가장 잘 치를 수 잇는 아테나이 최고의 장군 하나만 전쟁에서 몰아낸 꼴이었지요. 봄이 오자 페이클레스는 다시 장군으로 뽑혔고, 그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나가 다시 한번 아테나이가 왜 전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왜 앗티케를 버리고서라도 바다를 지켜야 하는지 강조하고 다시는 강화에 나서지 말라며 전쟁에 매진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1.95. 전쟁 세 번째 해에는 스파르테에 조금 꺼림칙한 한 일 하나와 아주 아쉬운 일 하나가 일어났는데, 조금 꺼림칙한 일은 스파르테가 플라타이아를 포위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고, 아주 아쉬운 일은 정 다급하면 아르키다모스와 서로 사람을 보낼 수 있는 페리클레스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름이 되자 역병이 두려웠는지 페리클레스가 다시 장군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아르키다모스는 앗티케가 아니라 플라타이아로 나아가 진을 쳤고, 플라타이아 사람들은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파우사니아스가 해방자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쳤을 때 플라타이아의 안전과 자유를 전체 헬라스동맹들과 함께 보장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철군을 요청했고, 아르키다모스도 그 약속을 인정하면서 플라타이아가 그때처럼 헬라스 해방에 나선 스파르테 편을 들든지 아니면 철저히 중립을 지키라고 요구했고, 가족들이 아테나이에 가 있고 스파르테 철군 후의 뒷일이 염려되어 어렵다고 하자, 그렇다면 플라타이아를 스파르테에게 넘기면 돈을 줄 테니 다른 도시에 살다가 전쟁이 끝나고 돌려받으라고 했고, 말미를 얻어 아테나이로 가서 아테나이의 보호 약속을 받고 돌아와 성벽 위에서 항전을 통보했고, 아르키다모스는 천지신명에 제를 올려 플라타이아 공격이 불가피함을 고한 뒤, 먼저 공성기를 쓰고 이어서 화공을 해보고 마지막은 해자를 파고 방벽을 쌓아 가둔 후 최소한의 경비부대만 남기고 가을이 오기 전에 돌아갔습니다. 이들이 돌아간 뒤 아테나이의 크세노폰은 중무장 보병과 기병을 데리고 출동하여 포테이다이아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칼키디케와 봇티아를 공격했는데, 서로 치열한 공방 끝에 아테나이는 장군 셋이 모두 죽는 피해를 입고 철수했고, 이 밖에도 스파르테와 아테나이는 아카르나니아를 두고 복잡한 합종연행을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지상전과 해전을 벌였으며, 마케도니아와 트라케에도 내분과 구원舊怨을 해소하고자 하는 전쟁이 사납게 붙고 있었고, 예외 없이 아테나이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겨울이 들자 스파르테와 코린토스가 메가라의 제안으로 메가라의 니시아스항에 있는 40척의 함선으로 평소 경계가 없는 아테나이의 페이라이에우스 항 기습에 나섰다가 역풍을 만나 대신 살라미스를 습격하고 약탈한 뒤 철수했고, 봉화를 본 아테나이는 날이 새자 허겁지겁 페이라이에우스로 달려가 항구의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도 해군이 있다는 걸 작게 드러내고 있었던 게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해 겨울에 스파르테로서는 아주 아쉬운 일인 아테나이의 페리클레스가 죽었습니다. 이미 여동생이며 자녀들을 역병으로 다 잃은 페리클레스가 가을부터 드러누워 겨울이 들자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들어 알고 있는 페리클레스가 한 마지막 일은 그의 가계를 잇기 위해 아스파시아가 낳은 아들 페리클레스에게 특별히 아테나이 시민권을 부여해달라고 탄원해 시민권을 받아주었다는 것이었지요. 그해 전쟁이 전 헬라스로 펴져나가는 것에는 오관불언한 채 말이지요.
11.9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페리클레스가 죽은 그해 겨울에 저는 나이 열여덟의 희극시인 지망생이었습니다. 지금 희극이 자주 상연되지 않는 것은, 다레이오스 이후 100년이 넘도록 이어진 남을 죽여야 이기는 전쟁 때문에, 남을 살려야 하는 디오뉘소스마져 힘이 빠져 극장을 떠나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지금은 도시에 마음껏 조롱하고 비판할 당대의 거물도 없고, 코로스를 유지시킬 부자도 없고, 도시도 돈이 없어 배우를 키우고 지키지 못하고, 축제에 관객을 공짜로 모시지도 못하고, 저기 관람석에 있는 제 아들 아라로스21 역시 희극을 쓰고 있지만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도시 전체가 희극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탓이 아니겠는지요? 그러나 저의 어린 시절, 특히 페리클레스가 한창 날릴 때는 극장이 관객들의 탄식이나 울음이 아니면 야유와 웃음으로 가득 찼지요. 페리클레스가 아크로폴리스에 새로운 파르테논 신전을 개방한 그해 판아테나이 축제에 구경하러 나갔던 아홉 살짜리 소년, 이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어른들이 말하는 페리클레스는 제가 들어 알고 있던 그 어떤 영웅들도 겨룰 수 없는 아테나이의 참된 영웅이었습니다. 어린 눈에도 불에 탄 옛 파르테논은 조국을 지키다 죽은 조상들의 안타까운 유해였고, 그 옆에 세운 찬란하고 웅장한 새 파르테논은 아테나이의 영혼을 담은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치켜세운 페리클레스는 한 소년의 영웅이었지요. 그리고 아테나이는 제가 자라는 것보다 더 빨리 더 크게 자랐고, 온 세상에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가장 뛰어난 물건이나 기술이나 새로운 생각은 물론 신들까지 가지고 아테나이로 몰려오면서, 아테나이의 덩치를 더 크게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놓자마자 제자리에서 속살이 되고 피가 되는 그들의 물건이나 기술을 빼고는, 생각이나 신들은 그리 쉽게 속살과 피가 되어 아테나이의 그 큰 덩치를 채우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들로 젠 채하며 떠벌리는 어른들의 말싸움이 그 큰 덩치에 바람만 넣는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온 생각이나 신들을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아테나이로 와서 제법 유명해진 사람들이 주로 페리클레스의 집이나 칼리아스의 집 같은 돈 있고 권세 있는 데를 들락거리면서 그 집 주인과 그 자제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생각과 신들을 팔고 다닌다는 것도 주의 깊게 보았고, 물론 그 가운데서 그 아버지를 도와 돌을 쪼던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무턱대고 시비를 걸며 얼쩡거리는 것도 주의 깊게 보았습니다.22 그들의 생각과 신들 덕분인지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에서 점점 막강해졌고, 매년 장군에 뽑혀야 하기 때문에 참주나 왕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참주나 왕보다 더 홀가분하게 권력을 누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런 페리클레스를 상대로 그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희극을 쓰는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옛날에 죽은 이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부풀려, 동정하며 신이 쳐놓은 운명의 덫에 걸린 처지라며 간지럽고 얄팍한 말로 눈물을 짜내는 비극시인들과는 달리, 우리와 같이 사는 이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부풀려, 바보 취급하며 오만과 탐욕이 쳐놓은 덫에 걸린 처지를 굵고 분명한 조롱으로 바꾸어 웃음을 자아내었습니다. 그들에게 페리클레스만큼 좋은 우스개거리가 없었습니다. 저의 영웅은 한낱 그들의 노리개였습니다. 저는 그들의 눈으로 저의 영웅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권력자가 되었는지, 그가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그리고 또 하고 있는지, 희극시인들이 그를 보는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23 그때가 바로 페리클레스가 사소한 일이라며 양보하지 말고 전쟁을 하라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몰아칠 때였고, 아테나이 사람들이 그의 말대로 전쟁을 결의하는 것을 보고, 곧바로 나이 열다섯의 소년도 희극을 만드는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1.9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250척의 함선과 함께 500명이 넘는 노련한 지휘관, 5,000명이 넘는 중무장보병, 그만한 숫자의 항해 전문가, 그리고 40,000명이 넘는 숙련된 노꾼들을 한꺼번에 잃은 아이귑토스 원정 실패는 아테나이 건국이래 최고의 비극이어서,24 그것이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던진 충격은 그 비극에 대해 모두의 말문을 닫게 만들 정도였고, 아이귑토스에 대해 말문을 닫았기에 사람들은 그 누구에게도 상세한 내막과 책임을 묻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아테나이의 권력자 페리클레스 역시 전멸의 내막도 말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고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는 원정에 참가했던 동맹들도 마찬가지여서, 페리클레스가 페르시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며 델로스 아폴론 신전의 금고를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로 옮겨도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했지요. 그러나 이 침묵은, 서너 해가 지나 포이니케의 함선들이 퀴프로스를 거점으로 아이가이온 바다 근처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오자,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 도시들의 불만과 함께 아테나이 사람들의 불평이 되어 입 밖으로 터져나왔고, 그 불평불만이 자기의 위상을 흔들 것임을 모를 리 없는 페리클레스는 재빨리 키몬에게25 페르시아와 아이귑토스의 문제를 맡기고, 자신은 헬라스 문제를 맡는 분권으로 권력을 지켰고, 키몬이 퀴프로스에서 죽자 그는 다시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지요. 한번 그의 권력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한 페리클레스는, 키몬처럼 개인 돈으로 도시 일을 할 수없으니 도시의 돈을 쓰라는 다모니데스의 조언대로,26 그동안 도시의 돈으로 공무를 보는 사람들에게 수당을 조금씩 지급하던 수준을 뛰어넘어, 동맹 금고의 돈으로 도시를 정비하고 파르테논을 새로 짓고 아크로폴리스를 단장하는 등 아테나이 건설 공사로 기술자나 노동자도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면서 얻은 인기로 권력의 안정을 다져 나갔습니다. 물론 권력이 전쟁을 하는 동안은 아르콘이 아니라 장군들에게 있었으므로, 장군이 할 일이 있도록 필요한 만큼의 전쟁은 늘 만들어졌고, 국방이 우선이라서 국방을 맡은 장군은 매년 뽑긴 해도 연임 제한이 없어,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매년 뽑히기만 하면 죽을 때까지 권력을 쥘 수 있었지요. 혹시 누구가 페리클레스에게 시비라도 걸면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그를 위해 민중들이 나섰습니다. 동맹이 낸 돈을 동맹의 동의도 없이 아테나이 마음대로 쓰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고상한 반대를 하는 투퀴디데스와, 페리클레스가 참주 아닌 참주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페리클레스는 참주가 될 뜻이 없는데 곁에서 이를 부추긴다며 그의 정치 참모 다몬을27 연달아 이징가미로 쫓아주어28 그의 독점권력은 안정을 이루어갔지요. 그의 아버지 크산팁포스가 추방당한 게 틀림없이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자란 페리클레스가 자기더러 모습은 물론 목소리까지 닮았다고 하는 세평에 선뜻 정치에 나서지 못하다가, 키몬을 공금횡령죄로 재판에 회부한 민중을 대변하던 평민 출신의 에피알테스의 키몬 공격을 뒤에서 주도하면서, 비록 실패는 했지만29, 인기 있는 정적은 도편추방이 아니라 재판으로 제거한다는 새로운 정치 기술을 선보인 이후, 아테나이에서도 스파르테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스파르테 지원으로 키몬이 자멸하고 도편추방당하자, 드디어 에피알테스와 나란히 서게 되었고, 신의 섭리였던지 에피알테스가 암살당하면서 남긴 에피알테스 세력을 인수받아 단숨에 정치 일선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델포이와 보이오티아를 놓고 계속된 스파르테와의 주도권 싸움은 그를 어느 틈에 아테나이의 독보적 전쟁 지도자로 탈바꿈 시켜놓았던 것입니다. 페리클레스에게 전쟁은 권력의 원천이자 부의 원천이었습니다. 전쟁이 없으면 장군은 있으나마나이고, 전쟁이 없으면 아무도 돈을 내지 않을 것이었지요. 전쟁으로 흔들리는 안전을 지키자고 동맹들이 낸 돈으로 전쟁에 나가는 군인과 노꾼들은 물론, 민회에 나오는 시민, 재판하는 시민, 공무원, 기술자,노동자, 예술가, 놀이패, 할 것 없이 표를 찍는 아테나이 시민이면 모두 잘 먹고 잘살게 해주자, 그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고, 그는 아테나이 최고시민으로30 승승장구 했습니다. 오로지 희극시인들만 그를 희극 무대에 올려 조롱하고 비판했지만, 이마져도 그는 실명으로 그러지 말라는 없던 법을 만들어 못하게 했지요. 그러나 이런 페리클레스의 호화스런 치적은 뜻밖에도 아고라의 장사꾼들로부터31 도전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도전은, 그의 맏아들 크산팁포스에게도 욕을 먹을 만큼 깐깐한 자기 돈 씀씀이와는 판이하게 헤픈 그의 아테나이의 돈 씀씀이에 대해, 자기 돈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돈이라면 누구의 것이든 셈이 밝아지는 아고라의 장사꾼들의 돈에 대해서는 그들이 페리클레스보다는 여러 수 위라는 자만심을 바탕으로 나타났고, 그리고 그 도전은, 페리클레스의 독점권력에 맞서는 귀족 출신의 투퀴디데스도, 권력을 나눌 평민 출신의 에피알테스도 없는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 도전은, 인기 좋은 권력자에게 도편추방을 써먹기 힘들 때 쓰는 재판이라는 새로운 정적제거용 정치 기술을 개발한 페리클레스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도 시도해볼 만했지요.32 꿈도 꿀 수 없어 보이던 페리클레스가 정적들의 공격에 노출되는 장면은 어이없게도 그의 최고 공적이라 꼽을 새 파르테논 때문에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페이디아스가 나오스의 아테나 신상에 입힐 황금을 슬쩍했다는 고발로, 슬쩍한 황금이 페리클레스의 손으로 들어갔다고 하지 않는 한 누가 보아도 페리클레스와는 상관없어 보였는데,33 페이디아스가 신상의 황금을 모두 거두어 무게를 재자고나서 왈가왈부하는 과정에서, 여신이 왼손으로 든 창과 방패 중 방패의 겉에 새긴 아마조네스를 공격하는 아테나이 사람들 가운데 대머리의 페이디아스와 투구를 쓴 페리클레스의 모습을 찾아낸 것입니다. 페이디아스는 불경죄로 쫓겨났고, 페리클레스도 불경하다는 공격자들 앞에 자기는 전혀 몰랐던 일이라며 불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등에 식은 땀 꽤나 흘렸을 것입니다.34 이런 불경 논란 속에서 공격자들은 기대치 않았던 페리클레스의 치명적인 약점, 곧 일반적인 아테나이 사람들이 가진 단순하고도 맹목적인 경건심과는 너무나 다른, 아주 논리적으로 그래서 선별적으로 신을 바라보고자 하는 신에 대한 그의 태도를 알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고맙게도, 다른 지식에 관해 보이는 호기심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신에 대해서도 경건심이 높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요상한 이론으로 새로운 지식과 신에 대해 설명하는, 다른 도시에서 온 철학자와 소피스테스가 너무나 많이 몰려들어 있었고, 배 아프게도 그들은 그것으로 돈까지 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재판정에 세운다면 500명이나 되는 보통 아테나이 사람인 재판관들이 가만둘 리 없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다만 그동안 아테나이에 아테나이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신들이 세상 곳곳에서 들어와 살게 하고 또 그 신들에 대해 그만큼 많은 설명이 난무하는 걸 방치한 터라, 새삼 누굴 꼬집어 재판에 회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보완하기 위해, 신에 대한 경건심을 해치는 언행을 금지하는 법을 먼저 만들어두어야 했습니다. 물론 아테나이 사람들도 복을 준다는 신들이 너무 많아 질려 있던 차에 당연히 그 법을 받아들였지요.35 이제 준비가 끝난 아고라의 장사꾼들은 그 법의 첫 번째 희생자로, 스스로 소피스테스라며 아테나이에서 지식을 팔아 가장 돈을 많이 벌었고 또 자기로선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책을 팔아 증거도 확실하고 또 페리클레스와 논쟁을 즐길 만큼 가깝게 지내는, 프로타고라스를36 정해 그를 불경죄로 재판정에 세웠고, 유죄 판결을 받아 그에게 막대한 벌금을 매기고 그의 책을 거두어 불태우고 그를 추방하는 데 성공했지요. 페리클레스는 이때까지도 페이디아스와 프로타고라스에 대한 재판이 자기를 공격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사부 아낙사고라스가37 아폴론인 태양을 불타는 돌이라고 하는 불경죄를 저질렀으며 게다가 적과 내통했다는 죄목까지 더해 재판정에 세웠을 때, 페르클레스는 그의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해 직접 재판정에 나가 변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겨우 벌금을 내고 추방당하는 것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고발자들이 노리는 것이 아낙사고라스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고, 연달아 고발자들이 그의 아내 아스파시아를 같은 죄목으로38 고발하여 이번에도 직접 재판정에 나가 눈물로 변호하여 구명하면서, 그에게는 투퀴디데스와는 결이 다른 정적들이 있으며 그들이 아고라의 장사꾼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지요. 그들은 페리클레스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를 아테나이 사람들로부터 떼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페리클레스와 서먹한 시간을 오래 보낼것 없이 곧바로 그의 증빙할 수 없는 지출을 가지고 직접 그를 공격해 무너뜨려야 할 것이었는데, 불쑥 아테나이에 찾아온 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사절이 아테나이 시민들 앞에서 그들의 국정 능력을 시험했을 때 그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동맹의 돈을 아테나이를 위해 페리클레스보다 잘 쓰면 시민들도 더 좋아할 것이고, 그러고도 자기들 몫은 자기들 몫대로 따로 챙길 수 있다고 나선 일인데, 우선 전쟁이 나면 그 돈 전쟁에 쓰기 바빠 그들의 산통이 완전히 깨지는 판인데, 전쟁은 안 된다 30년 평화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코린토스 사람들 일에 아테나이가 왠말이냐며 민회를 이끌어 첫날 논의를 끝내지도 못했고,39 이튿날 페리클레스의 주도로 나온 케르퀴라와 방위조약 체결에 함선 10척 파견 제안에 그것은 어차피 전쟁이고 30년 평화 파기이니 그럴 바에는 아예 200척을 보내 코린토스 함대를 끝장내고 바로 전쟁에 돌입하자고 반발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도, 그 많은 돈을 쓰면서 포테이다이아를 청소할 일이 뭐 있느냐고도 못했고, 메가라에게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다짐만 받지 아테나이가 옹졸하게 굴 일이 뭐냐고 나서지도 못하고, 오직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페리클레스의 교시에 따라 전쟁에 돌입하는 데 속절없이 따라가고 말았지요. 왜 페리클레스가 방위조약이니 10척이니 하며 그것도 이제 막 장군이 된 키몬의 아들 라케다이모니오스에게 딸려서 보냈는지, 개전 초부터 막대한 돈을 들여 아무 가치 없는 포테이다이아를 포위공격했는지, 정말 사소하디 사소한 이유로 트집 잡아 모든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을 분노케 할 메가라 포고를 내리고는 사소하다 하면 제국을 잃을 거라며 거두지 않았는지, 이 모두를 어찌 그들이 알 수 있었겠습니까? 깜냥이 안 되니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사실 페리클레스는 그들에게서라기보다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았을 때, 그는 아고라의 장사꾼들보다 그에 대해 신뢰를 보내지 않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더 상심했고, 아스파시아를 변호할 때 눈물을 보인 것도 아스파시아가 가련해서라기보다 아테나이 사람들에 대한 깊은 실망 때문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너무나 복에 겨워, 그들과 그들 도시의 안전과 자유, 그리고 안락과 번영이 누구 덕분에 지켜지고 누리는지 잊어버리고, 전에 페리클레스를 살리기 위해 다몬을 쫓아내었듯이 당연히 이번에도 클레온을 내쫓아야 했을 때, 클레온에 놀아나 그가 재판정에서 눈물로 사정하도록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별수없이 아테나이 사람들은 약간의 시련을 통해 그들의 잘못을 깨달은 다음, 다시 페리클레스를 환호하여 부르며 클레온을 한 10년 아테나이에서 쫓아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 시련이 될 전쟁은 페리클레스의 뜻대로 아르키다모스가 앗티케를 치면서 페리클레스는 그만큼 펠로폰네소스의 변방을 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한 달 동안 성벽 안에서 앗티케의 피난민과 그 피난민을 받은 사람들이 겪은 시련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페리클레스에게 제국을 지키면서 여는 새로운 30년 평화의 해법은 없겠냐고 하소연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듬해 그가 꾸민 작은 시련에 인간의 탐욕과 오만을 응징하는 신의 섭리가 더해질 줄은 그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피난의 시련 위에 역병의 재앙이 더해지자 그 시련은 원망이 되었고 원망의 소리가 높자 아고라의 장사꾼들은 그 옛날 그가 정치판에 발을 들이면서 키몬에게 써먹었던 대로 페리클레스를 공금횡령죄로 고발했고, 아크로폴리스의 아레오파고스 언덕이 아니라 아고라 옆의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은 그는 꼭 필요한 곳에서 잃어버린 돈 때문에 장군직에서 물러나고 큰 돈의 벌금까지 물게 되었지요.40 최악의 아테나이를 상대로 평화를 받아들일 리 없는 스파르테를 상대로 전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이듬해 봄 다시 페리클레스를 장군으로 모셨지만, 신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을 설득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페리클레스를 그해 겨울 거두어버렸고,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 없이 재앙과 함께 아고라의 가죽장수 클레온이 이끄는 대로 전쟁을 치루어 나가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린 희극시인 지망생은 권력에 대한 탐욕과 그 권력으로 세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에 가득차서, 제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며 끝까지 장군으로 죽은 페리클레스를 저의 영웅 목록에서 지웠고,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 그리고 안락과 번영을 위해,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동맹들의 그것들을 빼앗아 세운 제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그의 고상하지 않은 주장에 절망했었습니다.
11.98. 헬라스 세상에 다시 봄이 왔고 역병도 숙지근해져서, 세상의 농부들처럼 앗티케의 농부들도 그들 농장에서 씨를 뿌리고 뽑히고 쓰러진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를 심고 일으키고 지지대를 붙여 세웠지만, 그래서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앗티케 들판에 생명의 빛깔이 짙어졌지만, 여름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아르키다모스는 앗티케로 나올 것이고, 이따금 출격한 아테나이 기병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 살다 비운 집들을 부수고 봄에 지은 농사를 뒤엎어 버릴 것이듯이, 전쟁 네 번째 해에도 헬라스 내전은 헬라스 세상이 오래 가꾸어온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부수고 뒤엎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시작되자 아르키다모스가 앗티케로 나왔고 가져온 먹을 것들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아테나이는 아카르나니아 사람들도 지원할 겸, 파괴된 앗티케만큼 펠로폰네소스도 파괴할 겸 죽은 페리클레스의 믿음직한 동료 장군 포르미온이 함대를 이끌고 출동했고, 지난 해부터 테바이를 주축으로 한 펠로폰네소스군의 플라타이아 포위는 계속되었는데, 아테나이의 지원은 요원하고 남은 물자로는 겨울을 넘길 수 없게 된 해자와 방벽 안 플라타이아와 아테나이 수비대 일부가 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는 보이오티아와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을 자극해 이듬해에는 도시와 도시민들에게 더 큰 어려움을 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에게 왜 그들이 전쟁을 벌이는지 되새기게 하는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룰 그들의 의지를 시험하는 중대한 일이, 이 해 여름 아르키다모스가 앗티케로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저 건너 아이가이온 바다의 레스보스 섬에서 일어났습니다. 레스보스 섬의 여러 도시들은 각자가 아테나이의 동맹이면서 서로가 공출한 함선들로 독자적인 섬의 함대를 운용해왔는데, 그 가운데 섬의 가장 큰 도시 뮈틸레네가 섬 안의 여러 도시들을 모아 연맹을 만든 다음 그들이 섬 전체를 이끌어 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었지요.41 이 계획은 헬라스 내전 전부터 세워졌고, 그래서 그때 바로 스파르테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계획대로 방어시설과 물자 축적을 계속 진행했는데, 이런 뮈틸레네에 적대적이던 섬의 테네도스와 메튐나, 그리고 아테나이에 경도된42 뮈틸레네 사람들까지 이들의 계획이 반란을 목표로 한 것이라며 아테나이에 당장 예방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나서면서 문제가 불거진 거였지요. 설마하던 아테나이가 사절을 보내 연맹 계획도, 아테나이에 대한 전쟁 계획도 버리도록 설득했고, 실패하자 뮈틸레네가 아테나이 동맹함대에 파견했던 11척의 함선을 억류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순시키 위해 준비해두었던 40척의 함선을 뮈틸레네로 보내 전쟁도 불사할 각오를 보였고, 뮈틸레네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에 그들의 입장을 설명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아테나이에서 성과가 없자, 작은 전투와 협상과 작은 전투 끝에 이테나이는 바다를 막고 뮈틸레네는 땅을 지키는 대치가 가을까지 되는 가운데, 스파르테로 간 사절들은 올륌피아로 가서 올륌피아드에43 참석한 펠로폰네소스 도시 사람들에게, 그들이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고 함께한 것은 헬라스 사람들을 페르시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였고, 아테나이가 그들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므로 아테나이의 지도에 기꺼이 따랐는데, 아테나이가 점점 동맹을 노예로 삼아나가자 그들도 결국 노예가 되고말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아테나이와의 동맹을 깨고 나왔다면서, 동맹으로 받아주면 그들의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힘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함대는 물론 그들의 분담금까지 아테나이의 것이 될 것이니, 아테나이가 함대를 펠로폰네소스와 레스보스 해안에서 철수시킬 수밖에 없도록 다시 한번 앗티케로 쳐들어가달라고 사정했지요. 스파르테는 뮈틸레네를 동맹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동맹군을 이스트모스로 집결토록 했고, 물과 뭍에서 동시에 공격하기 위해 수륙 양함선들을 코린토스에서 육로로 사르니코스 만으로 옮길 준비를 했지만,44 수확하느라 바쁜 데다가 계속되는 출동에 지쳐 느릿느릿 모였는데,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아테나이는 부족한 전비 충당을 위해 우선 세금을 걷고,45 분담금 징수를 위해 4명의 장군에게 따로 12척의 함선을 주어 동맹들로 보내는 한편,46 가용 자원 총동원 태세에 들어가,47 뮈틸레네 포위 함선들을 철수시키지 않고, 100척의 함선에 영주자들까지48 동원해 이스트모스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한편, 여름부터 포르미온이 이끌던 30척의 함선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며 이곳저곳 상륙하여 주변을 유린하자, 그들의 땅을 지키느라 동맹들이 잘 모이지도 않고 앗티케 침공도 별로 효력이 없어 보이자 알키다스에게 40척의 함선을 주어 뮈틸레네 지원에 나서도록 조치하고, 스파르테의 살라이토스를 뮈틸레네에 이런 사실을 알리도록 보낸 후 스파르테로 돌아갔습니다. 아테나이에 줄을 댄 메튐나와 다른 레스보스 섬 도시들과 작은 전투들이 이어졌지만, 아테나이의 파케스가 1,000명의 중무장보병까지 노를 젓게 하여49 뮈틸레네로 와서 육지 쪽에 방벽을 쌓아 뮈틸레네를 수륙으로 완전히 가두었을 때는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겨울, 아테나이에 줄을 선 플라타이아는 테바이와 펠로폰네소스군에게 포위되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잃는 것이 경각에 달려 있었고, 아테나이로부터 벗어나려는 뮈틸레네는 스파르테에 줄을 대었으나 아테나이와 그 동맹군에 포위되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건 일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뮈틸레네에 묶인 아테나이는 플라타이아를 돌볼 겨를이 없었고, 스파르테는 겨울에 미리 현지 교섭자로 살라이토스까지 보내 스파르테 동맹들 해군의 뮈틸레네 지원을 알렸지만,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움직임은 굼뜨기만 했습니다.50
11.99. 헬라스 내전 다섯 번째 해에도 앗티케에는 어김없이 파괴의 여름이 왔고, 아르키다모스가 어디 아픈가 아직 어린 파우사니아스 대신 출동한 클레이메네스는51 잇티케를 아예 쑥밭으로 만들 작정이었는지, 새로 돋아난 것이나 새로 고친 것들은 물론이고 전에 아르키다모스가 전체 앗티케를 휩쓸 때에도 건드리지 않았던 조상이 스파르테와 연을 맺었던 부락들까지 파괴했는데, 성벽 안에서 내다보고 있을 앗티케 사람들의 약을 올릴 심산이었거나, 섭정으로 출격한 모처럼의 기회인데 전투 한번 제대로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것에 약이 많이 올랐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요.52 클레이메네스가 앗티케에서 난리를 피우는 동안, 겨우 겨울을 지냈지만 여름이 오자 더 이상 먹을 게 없어진 플라타이아가 살려달라고 손을 내미는 탄원자로서 자진 항복하며, 또 재판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포로로서 도시를 펠로폰네소스군에 넘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플라타이아를 점령한 펠로폰네소스군은 협상에 따라 스파르테 재판관이 포로들을 심사하였는데, 전쟁 중에 펠로폰네소스군에 도움을 준 적이 있느냐는 질문 하나로 삶과 죽음을 결정하자, 플라타이아가 헬라스의 규범을 들어 자진 항복한 탄원자를 그렇게 할 수 없다며, 페르시아에 부역한 테바이가 페르시아에 대항한 플라타이아를 핍박하는 바람에 자구책으로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었던 것이고 동맹을 맺었으니 그 동맹을 지킨 것인데 그것으로 재판을 할 수는 없다며, 헬라스 해방을 위해 함께 페르시아와 싸운 공을 생각해서라도 부역자 테바이를 위해 해방자 플라타이아를 해치는 결코 명예스럽지 못한 일을 스파르테가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요. 이에 테바이도 반박에 나섰는데, 당시 부역자는 권력을 쥔 일부 과두세력들이었고 전쟁 후 그들은 모두 처벌되었을 뿐만 아니라 테바이와 보이오티아 사람들도 헬라스 동맹군에 보상금을 내고 사죄하여 테바이와 보이오티아의 페르시아 부역 문제는 일단락된 일임을 지적한 다음, 플라타이아는 아테나이가 보이오티아를 무력으로 예속시킬 때에도 그리고 테바이아가 코로네이아에서 아테나이를 물리치고 보이오티아의 독립을 되찾았을 때에도 보이오티아 사람들이면서 보이오티아가 아니라 아테나이에 붙어 아테나이의 나쁜 짓을 돕더니, 중립이라도 지키라는 요청도 무시했고, 내부 분열로 플라타이아가 보이오티아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성문을 열고 테바이의 군대를 들였을 때에도 술수로 그들 모두를 죽이는53 끔찍한 짓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펠로폰네소스군에 도움을 주었는지 아닌지를 묻는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했지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이런 논란 끝에 스파르테가 내린 결정은 너무나 극단적이었는데,54 그것은 플라타이아 도시민을 흩어버리고 도시는 헐어 신전과 농장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해 뒤에는 플라타이아라는 도시가 없어졌지요.55 레오니다스와 함께 테르모퓔라이의 전사가 되었던 사람들의 도시, 테미스토클레스와 함께 아르테미시온의 해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의 도시, 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짓밟고 불태워도 사라지지 않았던 플라타이아, 고작 25명이56 와서 도와주는 동맹 아테나이를 끝까지 믿고 따랐던57 플라타이아가 없어져버린 것이었습니다.
11.100. 그리고 그 여름 레스보스 섬에는 뮈틸레네가 비슷한 곤경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던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아테나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빙빙 둘러 오느라 때맞추어 나타나지 않았고, 그들의 지원 없는 전쟁을 위해 뮈틸레네는 경무장한 시민들에게 중무장 무기를 배급했고, 중무장이 된 친아테나이 시민들이 식량까지 공정한 배분을 요구하며 도시를 아테나이에게 넘기겠다 나섰고, 결국 분열된 상태로의 전쟁은 꿈도 꿀 수 없는 뮈틸레네가 협상을 제의했고, 아테나이의 파케스는 무혈로 뮈틸레네를 점령했고, 탄원자로 신전에 모여 있던 반란 주도 세력들을 잡아 우선 테네도스 섬에 가둔 다음, 아테나이에 뮈틸레네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었고, 뮈틸레네도 선처를 요청할 사절을 아테나이에 보냈습니다. 한편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알키다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 아테나이에 들키지 않고 델로스 섬까지 왔고, 거기서 뮈틸레네가 이미 함락되었음을 알았고, 7일 뒤에는 함대를 이끌고 이오니아의 엠바톤까지 갔는데, 뮈틸레네를 야습하자는 주장도 듣지 않았고, 다른 이오니아 도시나 아이올리스의 도시로 가서 거점을 만들고 그곳 도시들의 반란을 부추켜 아테나이의 수입을 끊고 지출을 늘이게 하면서 사르데이스의 페르시아 총독 핏수트네스의 지원을 받자는 주장도 듣지 않았고, 다만 펠로폰네소스로의 귀환 길에58 이곳저곳 아테나이 동맹시를 집적이다가 해방자라며 이게 왠 일이냐는 항의를 받은 데다 아테나이의 연락선에 함대가 발각되자 에페소스를 마지막으로 이오니아를 떠나 난바다로 도주했지요. 물론 아테나이 함대는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고, 뮈켈레네로 돌아오는 길에 내분으로 쫓겨난 콜로폰의 친아테나이파 요청에 따라 콜로폰의 친페르시아 사람들과 펠레폰네소스의 아르카디아 사람들 그리고 핏수트네스가 보낸준 아시아인 용병들을 기습해 도륙하고 친아테나이파가 도시를 장악하도록 했습니다. 레스보스로 돌아온 파케스는 섬의 다른 반란 도시들을 진압하며 스파르테의 살라이토스와 반란 주동자들을 잡아 테네도스 섬에 가두었던 사람들 모두를 귀국하는 군대 편에 아테나이로 보내고, 자신은 남은 군대로 뮈켈레네와 레스보스 섬의 일을 처리키로 했습니다. 아테나이 민회는 먼저 자신이 플라타이아 포위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스파르테의 살라이토스를 처형했고,59 다음 1,000명이 넘는 반란 주동자들 처벌을 논의했는데, 뮈틸레네가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면서도60 오래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이오니아까지 끌어들였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클레온이61 주장하는 대로, 잡혀온 포로들은 물론 뮈켈레네의 모든 성인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아녀자들은 노예로 삼기로 결의했고, 이 극단적인 민회의 결의를 즉각 실행토록 삼단노선 한 척을 레스보스의 파케스에게 보냈지요. 그러나 이 극단적 결의가 밤새 계속 찜찜했던 아테나이 사람들과 그 분위기를 읽은 뮈틸레네의 사절들이 재심을 요청했고, 그래서 다시 열린 이튿날의 민회에서 클레온은, 자기가 무슨 페리클레스나 되는 것처럼 뜬끔없이, 민주정으론 제국을 감당할 수 없다는62 걸 재삼 확신했고, 아테나이 사람들이 제국은 하나의 독재정이라는63 걸 잊고 있는데, 복종은 양보를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지배는 호의보다 힘의 우위에 근거하기 때문에, 아테나이와 제국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죽음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자기 생각은 변함이 없다며 재의를 비난하는 장광설을 푼 다음, 뮈틸레네를 특별 대우한 것이 화근이 되었음에도 감언이설에 현혹되어64 온정을 베풀고 공평해지고자 응징의 결의를 바꾸는 더 큰 화근을 만들지 말고, 적이 될 사람들보다 친구가 될 사람들에게 공평한 온정을 베풀고, 반란이 정당하다면 아테나이의 지배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니 제국을 포기하고 안전하게 농사나 짓든지, 아니라면 반란은 죽음이라는 벌로 본때를 보여 동맹과 싸우느라 적들과의 전쟁에 소홀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 주장했지요.65 그런데 클레온처럼 변하지 않은 사람 하나가66 첫날에도 극구 반대하더니 이튿날에도 반대하고 나서, 앞서 클레온이 반대자들의 연설을 공명심이나 경쟁심에서 나온 사리추구로, 그것에 경청하는 사람들을 신기한 논리에 속고 역설을 맹종하며 평범에 냉소하는 소피스테스 앞에 앉은 청중들로 치부한 데 대해, 먼저 서두름에는 어리석음이 함께하고 격정에는 거침과 속좁음이 따라붙으니,67 신중한 토론으로 행동의 지침을 정해야 함에도, 반대하면 모함하여 사리추구나 공명경쟁으로 모는 것은 도시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받아친 뒤, 뮈틸레네 처리 문제는 뮈틸레네의 잘못에 대해 어떤 벌을 주어야 좋으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떤 벌을 주어야 아테나이에 좋으냐로 판단할 문제인데, 많은 도시들이 뮈틸레네 반란보다 훨씬 가벼운 죄에도 처형하고 있지만 사형이 범죄를 억제하지 못했다는 걸 감안하면 극단적 처벌보다는 평소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하듯이 평소 동맹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아도 좋도록 해야 할 것이고, 예방을 해도 범죄가 생기듯이 그래도 반란을 일으켰다 해서 지금처럼 도시 전체에 대해 극단적 처벌을 한다면, 그것으로 더 이상 반란 도시는 없다고 보장하지 못하는 한, 다음 반란자는 틀림없이 뮈틸레네처럼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나서 선처를 바라는 대신 죽음으로 저항할 것이니 그 진압 비용을 감당할 만큼 진압의 실익을 얻기 쉽지 않을 것이므로,68 도시 전체에 대한 처벌보다는 반란 주도자들에 대한 처벌이 아테나이에 주는 이익이 더 크고, 살아넘은 뮈틸레네도 동맹으로서 분담금을 내는 데 기여할 것이므로 이 또한 아테나이에 주는 이익이 더 많아, 아테나이는 마땅히 도시 전체에 대한 극단적인 처벌보다 파케스가 죄 있다고 보낸 사람들에 대해서만 재판을 통해 처벌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갑론을박이 계속되었지만 아테나이는 디오도토스의 주장을 택했고, 화가 난 클레온은 1,000명이 넘는 반란 주도자 하나 하나를 재판하는 대신 전부를 일괄 재판에 부쳐 처형해버렸습니다. 다행히 하루 전의 결의를 가지고 떠난 배가 찜찜함으로 늦어지는 동안 이튿날 두 번째 결의를 가진 배는 순풍에 먹을 것까지 챙겨주는 뮈틸레네 사절들의 독려에 힘입어 앞의 배가 뮈틸레네에 도착해 결의를 전하기 무섭게 뒤따라 도착하여 뮈틸레네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목숨을 구하기는 했으나 뮈틸레네는 성벽을 허물어야 했고, 함대를 압수당했으며, 메튐나를 제외한69 레스보스 섬 전체가 아테나이의 차지가 되어,70 섬 사람들 모두가 소작농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크세르크세스의 300만 대군에도 주눅들지 않고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 헬라스 동맹과 함께 나선지 어언 50년, 숱한 섬들과 도시들이 그전에 페르시아에게 물과 흙을 바치고 그랬듯이 목숨 부지의 안전을 얻고 아테나이에 그들의 자유를 바칠 때에도 독립된 함대를 가지고 자주권을 누리던 레스보스 섬의 도시들이 왜 헬라스 내전이 벌어지자 그들의 독립이, 다시 말해 그들의 안전과 자유가 위험하다고 보았는지, 그리고 그나마 가졌던 독립적 지위를 잃을 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섬의 연합을 통한 안전과 자유를 도모하고자 했는지, 그 이유는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은 물론 헬라스 사람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지요. 아테나이의 제국주의는, 스파르테가 헬라스 도시의 해방을 들고나올 만큼, 그리고 클레온의 말마따나 아테나이가 헬라스 도시들의 참주임을 천명하고 행동한 것이어서, 뮈틸레네 같은 나머지 독립적 지위를 명목으로나마 유지하던 도시들이 예속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지요. 틀림없이 예전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치던 시절로 돌아갈 것이 눈에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로 그런 헬라스의 도시들을 해방시키겠다고 나선 스파르테도 있는데, 한마디로 디오도토스 말마따나 희망이,71 예속의 신세를 면할 희망이 보이는데, 가만 앉아서 안전과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겠지요. 그 여름 동안 뮈틸레네 사람들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그대로 레스보스 섬은 안전과 자유에 더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까지 빼앗기어 자기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도 소작료를 주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었습니다.
11.101. 그런데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플라타이아가 없어지고 레스보스가 소작농의 섬으로 전락한 그 여름에, 또 아테나이는 제국을 챙기기 위해 전선을 넓히고 나섰습니다. 니키아스는 메가라로, 에우뤼메돈은 퀴르케라로 갔지요. 니키아스가 메가라 앞바다의 미노아로 간 것은 그곳 감시탑을 점령하여 살라미스나 부도론 곶에서보다 가까이에서 니사이아 항과 메가라 해군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한 단순한 작전이었지만, 에우뤼메돈을 케르퀴라로 보낸 것은, 케르퀴라 섬으로 출동했다는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물리치기 위해서였을 뿐만 아니라, 차제에 섬에서 벌어진 내분을 종식시키고 케르퀴라와의 방어동맹을 공수동맹으로 바꾸어 약해진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케르퀴르는 섬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아테나이와 방어동맹을 맺고 코린토스를 물리친 민주정파가 득세했는데, 헬라스 내전이 일어난 뒤, 그전 레우킴메 해전에서 코린토스에 포로로 잡혀 보호받던 케르퀴라의 유력인사들이 섬을 코린토스 편으로 돌려놓기로 약속하고72 케르퀴라로 돌아갔고, 이들이 주도하여 케르퀴라를 아테나이에 예속시키려 했다며 아테나이의 현지 영사인 민주정파의 지도자 페이티아스를 고발했고, 무죄를 선고받은 페이티아스가 이들 가운데 부자 다섯을 불경죄로 고발해 거금의 벌금을 물게했고,73 이들은 분납을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료들을 모아 페이티아스가 아테나이와의 방어동맹을 공수동맹으로 바꾸려 회의 중인 의회로 진입해 페이티아스와 60여명의 의원과 시민을 죽였고, 극소수의 민주정파마져 정박 중이던 아테나이 함선으로 도망치고 없는 의회의 귀족과 과두정파는 케르퀴라에 단 한 척으로 된 평화의 배가 아니고 대규모 병력의 함선들이면 어느 쪽이든 적으로 간주한다고 포고하면서 정파 간의 내전으로 번졌습니다. 이 이후 과두정파가 이런 사정을 설득할 사절을 아테나이에 보내는 동안 스파르테의 사절을 태운 코린토스 함선 하나가 도착하자 바로 민주정파를 공격하여 아고라와 본토를 향한 항구들을 장악했고, 내몰린 민주정파는 아크로폴리스와 고지대에 집결하여 진지를 구축하면서 휠라이코스 항을 장악하며 대치했는데, 쌍방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며 민주정파는 자유를 약속하고 평지의 노예들을 포섭해74 전력을 늘이고, 과두정파는 본토에서 용병을 포섭해 보강했지만, 이튿날 열린 본격적인 전투에서 숫자가 많은 민주정파가 이겨 소수의 과두정파를 아고라로 몰아넣었고, 자신들의 재산 남의 재산 할 것 없이 아고라 주변에 불을 질렀고, 이를 본 사절을 싣고온 코린토스 배도 800명의 용병들도 몰래 섬을 떠났고, 때맞추어 나우팍토스에 있던 아테나이의 니코스트라토스가 12척의 함선에 멧세니아의 중무장보병75 300명과76 함께 민주정파를 지원하기 위해 케르퀴라에 도착했지요. 니코스트라토스는 각 정파의 내전 책임자 10명씩만 재판에 넘기는 조건으로 두 정파 간 협정을 맺어 함께 평화롭게 살도록 주선하면서, 케르퀴라는 아테나이와의 방어동맹을 공수동맹으로 전환토록 설득한 다음 떠나려하자, 불안해진 민주정파가 케르퀴라 함선 5척에 과두정파 사람들을 노꾼으로 태워 함대에 합류시켜줄 테니 아테나이 함선 5척에 그 병력을 케르퀴라에 두고가라고 요청했고, 이에 과두정파가 신전에 들어가 반발했고, 결국 그들을 신전 앞 섬에 생필품을 주어 가두었으나 선뜻 나우팍토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물렀습니다. 한편, 레스보스를 구원하러 갔다가 이오니아를 거쳐 난바다를 지나다 크레테 섬 근처에서 폭풍을 만나 뿔뿔이 흩어졌던 알키다스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퀼레네77 항에 도착해 레우카스와 암프라키아에서 보낸 13척의 함선을 합류시키고 브라시다스를 알키다스의 참모로 삼는 등 함대를 35척으로 새로 정비한 뒤, 나누팍토스에는 아테나이 함선 12척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내전이 일어나 어수선한 케르퀴라로 출동했고, 과두정파들이 섬에 갇히고난 닷새쯤 뒤에 케르퀴라에 도착해 공격에 나섰는데, 니코스트라토스가 12척의 아테나이 함선들로 먼저 나가 해전을 벌이면 케르퀴라 해군은 60척 전부가 준비가 되는 대로 일시에 나와서 지원하라고 했음에도 내란에 적의 공격까지 받자 혼란에 빠진 케르퀴라 해군이 일부는 도망치고 일부는 함선에서 서로 싸우질 않나78 혼란스럽기만 하다가 케르퀴라의 함선 13척이 나포되고 해가 져서 그날의 해전이 끝났지요. 물론 케르퀴라는 펠로포네소스 함대가 승리의 여세를 몰고 섬을 공격해올 것이라 대비하고 있었는데도,79 그리고 실제 브라시다스가 그렇게 하자고 했음에도, 알키다스는 퀴르케라가 아니라 본토로 가서 밤을 지냈고, 그 이튿날도 섬의 중심지가 아니라 겨우 레우킴메 곶에 상륙하여 근처 농지나 유린하다가 밤이 되어 아테나이 함대의 출현을 알리는 횃불 신호를 받자 밤을 도와 허둥지둥 귀로에 올랐고, 레우카스 지협에서는 뭍으로 배를 나르기까지 하면서 도주했지요.80 다른 한편, 아테나이는 케르퀴라 사태의 불가피성을 설득하기 위해 온 과두정파 사절과 그들에게 포섭된들까지 함께 반란죄로 붙잡아 아이기나에 감금했고, 얼마 뒤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내전이 일어난 케르퀴라로 출동한다는 사실을 알자 에우뤼메돈에게 60척의 함선을 주어 케르퀴라의 민주정파를 지원토록 했고, 에우뤼메돈이 케르퀴라로 가까이 오자 알키다스가 황급히 퀼레네로 돌아갔던 것이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돌아가고 아테나이 함대가 도착한다는 걸 안 민주정파는 과두정파 학살에 나섰고, 먼저 멧세니아의 중무장보병들을 도시 안으로 불러들여 경비를 맡긴 다음, 그들이 과두정파를 설득해 노꾼으로 태운 함선들을 휠라이코스 항에 정박토록 하고는 모두 끌어내어 죽였고, 헤라 신전으로 도피해 탄원자가 된 과두정파는 재판을 받으면 된다고 설득해 50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죽였고, 이를 본 나머지 탄원자들은 신전에서 서로를 찌르거나, 목을 매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모두 자살하였는데, 며칠 전 함께 평화롭게 살라며 민주정파와 과주정파의 화해를 주선하던 니코스트라토스와는 달리 에우뤼메돈이 머문 이레 동안 케르퀴라에는 과두정파를 죽이는 일 이외에도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또 빚을 갚지 않기 위해 민주정을 전복하려 했다는 죄명을 씌워 죽이는 등, 온갖 행태의 죽음이 난무하여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끔찍한 일도, 신전에서 끌려나와 신전 옆에서 죽임을 당하기도, 심지어 디오뉘소스 신전을 벽으로 막아 그 안에서 여럿이 죽도록 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그러나 에우뤼메돈의 방관에 힘입은 민주정파의 일방적인 살륙으로 케르퀴라와 그들의 안전과 자유만이라도 굳건히 다져지면 좋으련만, 다져지기는커녕 그 와중에서 살아남은 과두정파의 새로운 도발을 불러내고 있었는데, 같은 케르퀴라 사람들끼리의 살륙 참상이 진행되는 것을 보며 아테나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는지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아테나이 함대가 케르퀴라를 떠나자, 죽음을 피해 섬을 떠나 있던 과두정파가 섬 건너 편 본토의 케르퀴라 요새들을 점거하고 주변 농지들을 통제하며 그곳을 거점으로 섬을 습격하여 피해를 입히더니 결국은 섬에 기근을 불러왔고, 드디어 끝장을 볼 작정으로 용병까지 데리고 섬으로 건너가81 이스토네 산에 요새를 쌓은 뒤,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농촌 지역을 통솔하여,82 케르퀴라의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11.10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처음 헬라스 내전이 터지고 다섯 번째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여러분은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나선 전쟁으로 여러 도시가 오히려 아예 도시를 잃거나 안전과 자유를 잃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이 나자 가장 먼저 살던 도시를 잃은 아이기나 사람들은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때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아테나이를 능가하는 공을 세운 수훈갑이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이나 도시를 버리고 피난 길에 오른 아테나이 사람들을 따뜻하게 받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는, 물론 조상 대대로의 해묵은 감정도 있었지만, 그들이 펠로폰네소스 사람이라 언제든지 페이라이에우스 항을 겨눌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그 섬을 점령하고 그들을 내쫓았고, 그 섬에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켜 아테나이의 섬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포테이다이아였는데, 코린토스 사람들의 도시라 전쟁이 나면 반역할 것을 우려해 성벽을 허물어라 코린토스와의 관계를 끊어라 핍박해서 반역하도록 만들고는 3년에 걸쳐 포위공격한 끝에 아이기나와 마찬가지로 포테이다이아 사람들을 내쫓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켜 아테나이의 도시로 만들었지요. 아이기나 사람들과 포테이다이아 사람들은 아테나이의 동맹이었음에도 그들이 적군과 뿌리가 같은 사람들이란 이유로 충직성을 의심받아 그들의 동맹인 아테나이에 의해 도시를 잃었는데, 그런 아테나이와 100년 가까이 동맹을 맺어와 의심할래야 할 수 없는 충실한 동맹 플라타이아가 세 번째로 도시를 잃어야 했던 것은, 보이오티아 사람이면서 아테나이 동맹에 있지 말고 보이오티아의 일원이 되라는 테바이의 회유도 거부하고, 정 그게 싫으면 동맹을 끊고 중립이라도 지키라는 스파르테의 제안까지 거부하며 끝까지 아테나이에 대한 충실함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가 플라타이아를 끝까지 지켜주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페리클레스가 단호하게 반대했던 앗티케에서의 대규모 지상전을 벌여야 할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아테나이를 따르는 플라타이아 사람들만 구하고 도시는 버리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요. 다시 말해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테바이를 견제하기 위한 보이오티아 내부에 둔 전진 기지로써 가치가 있었지만, 앗티케마져 버리는 요새섬 방어전략에서는 적진에 있는 플라타이아가 더 이상 지킬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에 플라타이아라는 도시는 과감히 버렸고, 역병의 재앙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늘어난 전선으로 내보낼 사람은 더 필요해서 영주자까지 징집하던 터라 전쟁에 나설 시민이 더 필요했기 때문에 오래 그 충성을 증명한 플라타이아 사람들만은 아테나이 시민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지요. 뿌리가 다른 데도 충직했던 플라타이아는 아테나이의 안전에 대한 이해타산 때문에 미련없이 버림받았던 것입니다.83 그리고 플라타이아를 버린 덕분에 아테나이는 전적으로 그 여름 내내 뮈틸레네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뮈틸레네는 물론 메튐나를 뺀 레스보스 섬 전체 땅을 빼앗아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분배하고, 레스보스 사람들을 아테나이 지주들의 소작농으로 만들었고, 그 소작료로 앗티케에서 잃었던 소득을 만회할 수 있는 큰 이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레스보스 사람들 전체가, 메튐나처럼 반대한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뮈틸레네를 중심으로 하나의 도시로 뭉쳐야 한다고 믿었고, 왜 아테나이가 이를 반대했으며, 왜 반대한다고 아테나이에 대해 반기를 들었느냐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뮈틸레네 과두정파가 주도했을 반란에 평소 과두정파와 다투며 아테나이를 옹호했을 뮈틸레네의 민주정파까지도 합세해서84 말입니다. 레스보스는 종속이 무엇이며 어떤 고통을 안기는지 페르시아와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고, 페르시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누구보다 먼저 헬라스 동맹군에 가담하여 자주권을 되찾았고, 안전과 자유를 아테나이의 동맹이 되어 확보했고, 페르시아와의 마무리 전쟁을 통해 그리고 트라케나 낙소스나 타소스를 정벌하며 헬라스의 새로운 질서와 아테나이 제국 건설에 참여하면서 그 비용을 넘는 경제적 이득을 얻기도 했지만, 아테나이 제국의 틀을 완성하기 위한 오랜 전쟁과 아이귑토스 원정 실패로 예전 같은 소득은커녕 손실만 누적되어 동맹으로서의 의무가 짐스러워 고통이 되기 시작했고, 그 고통스런 짐을 줄이기 위해 섬 전체적인 대응이 필요했고, 뮈틸레네를 중심으로 모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레스보스 섬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현지인 아테나이 영사들과 이오니아계가 주류인 작은 도시 메튐나 사람들은 아테나이에 레스보스 사람들의 움직임을 반아테나이 행동으로 규정하여 경고를 보냈고, 아테나이 역시 펠로폰네소스와의 전쟁이 여의치 않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 단합된 레스보스를 제국의 힘으로 받아들이는 노력 대신 불순한 반동으로 보았습니다. 레스보스 사람들은 예전 아테나이가 반기를 든 사모스를 응징할 때 아테나이를 지원키 위해 파병했었으므로 사모스가 왜 아테나이에 반기를 들게 되었는지 지금 여러분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지요. 정권 잡으려는 욕심 때문에 사모스의 민주정파가 사모스와 사모스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어떻게 훼손시켜갔는지 말입니다. 설사 그들의 정적인 과두정파가 정권 유지를 위해 프리에네를 두고 밀레토스와 전쟁을 벌였다 해도 전쟁에서 이기고 프리에네에 대한 종주권을 밀레토스로부터 빼앗아 사모스에 이익을 가져왔으면 잘된 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을 그 좋은 일 때문에 사모스에 과두정을 몰아내고 민주정을 세워 정권을 잡으려던 꿈이 멀어지자, 앙앙불락하는 밀레토스를 부추겨서, 그렇잖아도 전쟁 말고 중재로 해결하라고 했는데도 둘 다 말을 듣지 않고 전쟁을 벌인 데 대해85 심히 언짢아진 아테나이에 내보내서, 더더구나 아스파시아의 베개송사로 사모스를 벼르고 있는 아테나이의 제일시민 페리클레스에 내보내서, 사모스의 과두정파가 이오니아의 지배자가 되려한다고 탄핵케 해서, 화가 난 페리클레스가 당장에 달려가 사모스의 과두정을 폐지하고, 그 지도자들을 인질로 잡고, 사모스에 민주정을 세워 민주정파가 사모스의 정권을 잡은 것이 과두정파의 불복을 불러왔고, 이에 반발한 과두정파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요청하고 그 지원을 받아 다시 사모스를 장악하고, 사모스의 독립을 되찾고 아울러 정권의 유지를 위해 도시와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걸고 아테나이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정을 모를 리 없었지요. 물론 예전에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도 한두 번 일어난 것이 아니었듯이,86 도시의 권력을 잡기 위해 자기에게 유리한 정치체제를 고집하여 생긴 도시 정파 간의 반목이 합의거나 혁명이거나 간에 도시 내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되도록 하기보다 자기에게 유리한 정치체제를 선호하는 다른 도시의 힘을 끌어들여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훼손시키나 심지어 침략을 노리는 이어족의 힘도 마다 않고 정권을 잡으려 한 정쟁이 어떻게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스스로 무너뜨리는지 사모스의 경우를 보고 잘 알게 되었던 레스보스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모스와는 달리, 적어도 그들끼리의 정쟁 때문에 서로를 죽이는 일을 피하려 했고, 적어도 내부의 분열 때문에87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결국 아테나이가 그들의 단합을 제어하고 나선다는 것이 그들의 독립적인 지위가 한갖 허울이었으며, 그들의 동맹 가입이 언제부터인가 아테나이에의 종속 인정이었으므로, 그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예상하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는 스파르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피하고 싶었던 종속의 굴레를 스스로 받아들였던 것이었지요.88 그런데 섬의 단합으로 독립을 지키려던 레스보스가 전쟁을 피해 아테나이에 종속되겠다며 스스로 항복을 하고도 온 주민이 죽거나 노예로 팔릴 뻔한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그 레스보스로부터는 너무나 먼 케르퀴라에서는 헬라스 내전에서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아테나이와 함께해야 한다는 민주정파와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과두정파가 이것을 핑계로 정권 쟁탈전을 벌였는데, 이 정쟁이 이견에서 분열을 거쳐 결국 서로를 죽이는 참극으로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전쟁 전에 펠로폰네소스 최강의 함대를 가지고 이탈리아와 아드리아스 바다 연안의 이어족들에게로 가는 길목을 장악하여 부를 쌓고 있던 케르퀴라가 그들의 식민도시 에피담노스의 내분 문제로89 모도시 코린토스를 우습게 알고 덤비면서 코린토스와 한 번의 해전을 치르는 분쟁이 생기자 중재에 시큰둥한 스파르테 대신 케르퀴라가 가진 함대와 그들이 지키는 이탈리아로 가는 길목에 눈이 먼 아테나이에 달려가 동맹을 맺었고, 아테나이를 끌어들인 다음부터 민주정파가 정권을 잡고 섬의 일을 주도해 코린토스와 두 번째의 해전을 벌여나갔고, 이로써 아테나이에 밀착한 케르퀴라는 자청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뒤를 노리는 복병이 되고 말았지요. 등 뒤에 복병을 두고 앞으로 나가 전쟁을 할 수는 없는 법, 코린토스는 막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할 포위공격 대신에 케르퀴라 내부를 뒤흔들 정변의 씨앗을 뿌려 넣기로 작정하고, 여섯 해 전 쉬보타 해전에서90 포로로 잡아 극진히 보살피며 가두어두었던 케르퀴라의 명망가들을 돌려보냈지요.91 이들은 귀환하여 처음 정치적 해법을 모색해 민회에서 케르퀴라가 아테나이가 아니라 펠로폰네소스의 일원으로 돌아가도록 바꾸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다음은 재판을 통한 정적 제거에 나섰으나 오 불경죄로 탄핵당하는 역습을 당했고, 외통수에 걸린 그들이 민회에서 정적들을 죽이는 참혹한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코린토스가 이것을 바랐든 아니든, 아니면 포로로 잡혀 있었던 긴 세월 동안 멀어진 권력에 대한 그들의 집착과 탐욕 때문이든92 아니든, 케르퀴라 섬의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려는 방법의 차이 때문이든 아니든, 이를 분쇄하려는 민주정파의 반격으로 내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내전은 아테나이의 동맹으로 적이 된 케르퀴라를 펠로폰네소스군이 공격하고, 케르퀴라를 동맹으로 지키려는 아테나이군이 민주정파를 지원하는 가운데 벌어져, 마치 다섯 해 동안 계속되어온 전체 헬라스 내전이 케르퀴라 섬 안에서의 정파간 내전으로 옮겨진 듯,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고, 이로써 케르퀴라는 맨 처음 권력 쟁탈 욕심 때문에 도시민 사이에 벌어진 무력충돌로93 헬라스 내전과 함께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가 훼손되는 또 다른 모양을 보여주고 있었지요.
11.103. 이렇게 케르퀴라가 끝없는 내전을 기약하며 자멸의 길로 드는 그 여름의 끝에, 아테나이는 그토록 지켜주고 싶은 케르퀴라의 용도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시켈리아로 출동하는 새로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 출동은 페리클레스가 새로 제국을 넓히려 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전쟁에서 이긴다고 했던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에서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이루어진 일이었지요. 케르퀴라와 마찬가지로 코린토스 사람들이 세웠던 시켈리아 최대의 도시 쉬라쿠사이가 케르퀴라와는 달리 펠로폰네소스와 가깝게 지내면서 바로 옆의 작은 도시 레온티노이의 바다와 육지를 봉쇄하자,94 레온티노이가 아테나이 이주민과 이오네스족들의 도시라며 동족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달라고 요청했기95 때문이었지만, 돈에 쪼들리던 아테나이가 굳이 친족의 도시를 도운다는 명분을 세워 라케스를 카로이아데스와 함께 20척의 함대로 시켈리아로 보낸 것은 그곳의 친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펠로폰네소스로 식량을 공급하는 것을 막고, 아울러 그곳 도시들을 아테나이에 복속시킬 가능성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라케스의 아테나이 함대는 우선 레온티노이의 바다를 봉쇄하고 있던 쉬라쿠사이 함대를 내쫓은 다음, 장기적으로 머물 곳을 찾아 레온티노이와 친족 간인 레기온에 기지를 세웠고,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레기온의 함선 10척을 더해 여름에는 물이 없어 견디기 힘든 아이올로스 섬들을 유린했음에도 복속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레기온으로 돌아와 겨울을 지냈습니다.
11.10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원주민인 시켈리스 사람들과 멧세네 이주민이 살아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라 하나 그다지 전쟁에 간여한 바 없는 아이올로스 섬을 골라 겨울 농토를 유린하며 복속을 시험했지만 의외의 완강한 거부 반응에 실망한 라케스가 시켈리아의 레기온에서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아테나이의 이탈리아 원정군이 레기온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아테나이에는 계속된 지진과 비로 도시가 흔들리고 물에 잠겼고,96 한 이태 사그라지나 싶던 역병이 도져 또 다시 온 도시에 번져나갔습니다. 아녀자와 늙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복무중이던 중무장보병 4,400여명과 기마병 300여명이 역병에 걸려 죽었을 정도였으니 일반 시민이 또 얼마나 죽어갔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지요. 이미 전쟁 이태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장례도 변변히 치르지 못하게 되었던 터라 전통과 풍속을 지키는 것이 부질없어 보이는 데다 내일을 기대할 희망마져 가소로워지자 아테나이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전쟁에 나가서나 아니면 도시의 거리에서 역병에 걸려 죽고말 것이라 체념한 듯 더러는 하루 하루를 즐거이 보내는 일에 몰두하였고, 더러는 아직도 살아야 할 세상이 있다고 믿는 듯 사는 데 필요한 재물을 얻기 위해 죽은 먼 친척의 재산을 두고 싸움을 벌이거나 연고가 없이 죽은 사람들의 재산을 얻기 위해 위증을 일삼으며 재판을 벌였습니다. 레온티노이의 사절 대표 고르기아스가 나중 다시 돌아와 아테나이에 정착했을 만큼 논리적인 변설가의 활동이 절실히 필요하였지요. 아테나이는 이전에 이미 시민들에게 말할 자유를 충분히 누리도록 해주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무한정한 논의를 막고 필요한 시점에 결론을 얻기 위해 말할 시간만은 공평하게 나누어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97 주어진 시간 안에 자기의 주장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아주 중요했고, 그런 변설이 대단히 존중받았었지만, 이런 전통조차 막무가내식 위증과 억지 앞에 맥을 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교양과 지성으로 시민들 앞에서 도시의 일에 대해 자기의 정견을 밝혀왔던 전통조차 웃통을 벗어제치고 주먹을 휘두르며 마구 마구 욕설로 고함치는 클레온의 연설로98 무너지고 있었으니 아테나이의 타락에 대해 더 이상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도시가 제국을 지키기 위해 스파르테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건곤일척의 전쟁을 수행해나가야 했지만 도시는 다섯 해의 전쟁으로 지녔던 돈을 모두 소진했고, 도시민은 역병으로 어린이 아녀자 늙은이는 말할 것도 없고 무기를 들거나 배를 저을 젊은이들까지도 세 사람 가운데 하나는 죽어나갔고, 어찌어찌 살아남은 사람들조차도 하루 하루를 즐거이 보내는 일이나 위증과 억지가 판치는 재판정으로 나가 눈먼 재물을 얻으려 설쳐대고 있었습니다. 아테나이는 스스로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힘을 더 이상 아테나이에서는 창출할 수 없게 되었고, 이제 전쟁을 수행할 힘을 아테나이 바깥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가본 시켈리아에 모든 것을 걸 수 없는 노릇이라 아테나이는 새봄이 오면 또 다시 배를 타고 또 다른 곳으로 나가 전쟁을 계속할 힘을 찾을 것이었습니다.
11.105. 앞서 다섯 해 전쟁은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에게도, 물론 역병의 재앙을 맞은 아테나이만큼은 아니었지만, 잦은 출전으로 농사가 피폐해진 데다가 지진과 해일 같은 자연의 재앙까지 덮쳐 궁핍한 생계를 겪는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대를 이어갈 것이라고 한 자신의 예언대로 스파르테 왕 아르키다모스가 전쟁을 아들 아기스에게 물려주고 지난 여름에 죽자 이제 헬라스 내전은 더 이상 페리클레스의 전쟁도 아르키다모스의 전쟁99도 아니게 되었고, 전쟁을 물려받은 아기스100가 왕으로서 그의 첫 출전을 아버지 아르키다모스가 지난 다섯 해 동안 늘 그렇게 해왔듯이 아팃케 유린으로 정하고 출정하자 헬라스 내전은 비로소 아기스의 전쟁으로 바뀌었고, 이렇게 아버지서 아들로 이어진 전쟁은 결국 이 아기스가 그의 전쟁인 헬라스 내전을 끝낼 것으로 신들은 정해놓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시피 아기스의 전쟁 역시 아기스가 감당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전쟁이었고, 이런 사실 역시 신들이 미리 아기스에게 알려주었는데, 아기스가 이스트모스에 집결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이끌고 앗티케를 향해 이오니아 땅으로 들어서려 할 때 연속적으로 일어난 지진이 바로 그 신들의 알림이었지요. 그런데 지진으로 보낸 신의 알림에 대해 이 젊은101 신출내기 왕이 보인 반응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탁월한 신탁 해설가이기라도 한 듯 그리고 마치 노련한 군사 지휘관이기라도 한 듯 첫 출전이라는 흥분에 빠져들지 않고 냉정하게 철군 결정을 내렸습니다.102 아기스는 자신의 전쟁이 한두 번의 전투로 끝날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쟁이 오래 갈 것이기 때문에 그가 함부로 동맹을 차출하여 동맹의 생업을 흩트리거나 잦은 출동으로 지치게 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을 그의 동맹에게 심어주어야 꼭 필요한 전투에서 꼭 필요한 협력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게지요. 아기스의 응답을 본 신들은 아테나이 사람들의 응답도 보고 싶었던지 이스트모스에서의 지진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스트모스와는 제법 떨어진 에우보이아 섬과 로크리스의 오푸스 앞바다 아탈란테 섬과 아이가이온 바다의 페파레토스 섬에도 지진과 해일을 보내 아테나이의 요새들을 허물었지만 역병의 재앙에 넋을 잃었던 탓인지 아니면 그까짓 지진과 해일은 재앙도 아니다 싶었던지 아테나이가 보인 응답은 오로지 전쟁의 계속이었습니다. 레기온에서 겨울을 난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군은 여름이 되자 쉬라쿠사이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 와중에 카로이아데스가 전사하자 라케스는 혼자 함대를 이끌고 뮐라이 항구를 공격해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고 있었고, 이탈리아와 시켈리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테나이는 라케스를 계속 레기온에 주둔시키면서 틈만 나면 주변 도시들과의 전투를 벌이며 또 한 번의 겨울을 시켈리아에서 나도록 할 것이었습니다. 한편 처음으로 장군으로 뽑혀 아테나이 함대의 지휘관이 된 데모스테네스는 프로클레스와 함께 30척을 이끌고 스파르테가 매년 여름 앗티케로 쳐들어왔듯이 매년 하던 대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을 항해하며 취약지를 골라 괴롭히며 자킨토스 섬, 케팔레니아 섬, 나우팍토스의 멧세니아 사람들, 아카르나니아 사람들, 그리고 케르퀴라에서 보낸 지원군들을 받아 대군을 이룬 뒤 이오니오스 바다까지 나아갔습니다. 레우카스 섬을 종속시키고 싶어하는 아카르나니아가 바라는 대로 레우카스를 공격했지만 저항이 심해 별무소득이었고, 방벽을 쌓아 레우카스를 가두고 굴복시키자는 아카르나니아의 요구가 있었으나 대군이 오랜 시간 한 곳에 묶이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해 레루카스에서 철수했고, 대신 나우팍토스의 멧세니아 사람들의 뜻에 따라 아이톨리아를 치기로 하자 나우팍토스를 제외한 지원군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고, 아테나이와 나우팍토스 둘만 코린토스 만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로크리스의 오이네온 항구를 기지 삼아 아이톨리아를 쳤는데 몇 번의 승리로 신이 나 내륙 깊숙히 들어가는 바람에 프로클레스까지 죽는 기습을 당한 끝에 나머지 군사들이 황급히 함대를 이끌고 아테나이로 돌아갔고, 질책이 두려워진 데모스테네스는 혼자 남아 나우팍토스와 그 인근 도시들을 떠돌며 지냈습니다. 한편 아이톨리아 사람들이 여름에 요청한 펠로폰네소 동맹의 지원군이 가을이 깊어서야 스파르테의 에우퀼로코스의 지휘 아래 델포이에 집결했고, 에우퀼로코스는 나우팍토스로 가는 길에 있는 도시들의 협조를 받거나 인질을 잡아 주저앉히거나 버티면 함락시키면서 나우팍토스까지 진군했고, 스파르테의 나우팍토스 공격을 모를 리 없는 데모스테네스가 직접 아카르나니아로 가서 지원군을 받아 멧세니아 사람들과 나우팍토스에서 농성에 들어간 것을 보고는 공성을 포기하고 아이톨리아 군대를 철수시킨 다음, 아테나이와 가까운 암필로키아의 아르고스를 복속시키고 싶어하는 암필로키아 사람들 요청에 따라 아필로키아로 옮겨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테나이와 펠로폰네소스 사이의 전쟁은 그 전쟁과는 무관하게 지냈던 헬라스의 나머지 지역으로까지 전선을 넓혀갔는데, 헬라스 내전 여섯 번째 해에는 전선이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에서 아주 먼 시켈리아와 암필로키아로 확대되어 있었고, 주로 여름 한철에만 벌이던 전투도 지난 해 시켈리아의 아이올로스 섬에서의 겨울 전투에 이어 또 다시 시켈리아와 암필로키아에서 겨울로까지 철을 바꾸며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테나이의 데모스테네스와 나우팍토스의 멧세니아 사람들을 나우팍토스에 가두어두지 않고 전선을 늘이며 암필로키아로 갔던 스파르테의 에우륄로코스가 먼저 전선을 넓힌 벌을 받아야 했었는데, 겨울이 되자 나우팍토스 농성을 지원하러 20척의 아테나이 함대로 도착한 아테나이군을 주축으로 나우팍토스의 멧세니아 사람들과 아카르나니아 지원군이 아필로키아로 들어간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추격하여 암필로키아에서 겨울을 보내려던 에우륄로코스를 죽이고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결딴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103 졸지에 오합지졸로 변한 동맹군을 이끌고 탈출해야 하는 메네다이오스의 휴전 요청을 비밀리에 받아들인 데모스테네스와 아카르나니아 지휘관들은 고립된 암프라키아 용병들을 매복 습격하였고, 올파이에 있던 암프라키아 군대는 지리에 밝은 암필로키아 군대를 앞장 세운 아테나이 동맹군을의 협공을 피해 이도메네 산으로 갔으나 새벽에 멧세니아 군대가 같은 도리에이스 방언을 쓰며 접근하는 걸 피아 구별을 못하고 허둥대다 습격당해 괴멸되고 말았지요. 아이톨리아의 패전으로 아테나이로 돌아갈 수 없었던 데모스테네스는 올파이의 대승으로 전리품을 싣고 나우팍토스로 돌아갔고, 아카르나니아와 암필로키아는 암프라키아와 100년 유효한 상호 수호 평화조약을 맺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면서 암프라키아는 아카르나니아의 펠로폰네소스와의 전쟁에 참가하지 않으며, 아카르나니아는 암프라키아의 아테나이와의 전쟁에 참가하지 않기로 하고 암프라키아를 둘러싼 다툼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펠레폰네소스와 아테나이 사이의 전쟁을 기화로 그 둘의 세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했던 암프로키아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다행히 암프라키아가 아테나이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그들도 위태해진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아카르나니아와 암필로키아의 배려로 서로를 지킬 수 있는 해법을 찾았던 것이었지요. 겨울이 들면서 델로스 섬을 완전히104 정화시킨 덕분인지 아테나이는 아이톨리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세력을 그대로 지킬 수 있었고, 시켈리아의 동맹도시들의 요청대로 시켈리아에 보낸 함대를 증강할 준비를 하며 새로운 지휘관으로 퓌토도로스를 먼저 보내 라케스와 교대토록 하고 전쟁 여섯 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11.10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일곱 해째에 접어드는 새봄에 시켈리아의 아이트네가 50년만에 다시 용암을 분출하여 기슭의 카타네 땅을 유린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시켈리아는 아이트네의 용암이 아니더라도 아테나이 해군의 진출 이후 도시들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새봄의 분출 이전 겨울에 이미 라케스가 이끄는 시켈리아의 아테나이군은 지난 해 겨울에 점령했으나 동맹이 되기를 거부했던 아이올리스 섬들과 히메라를 재차 공격하다 레기온으로 돌아갔고, 라케스의 지휘를 물려받은 퓌토도로스는 겨울이 가기 전에 그의 존재를 과시라도 하는듯 로크리스의 요새 하나를 공격했지만 반격에 몰려 철수하는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테나이는 레온타이와 레기온과 같은 친아테나이 도시들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서라며 장군들과 병력을 바꾸어가며 계속 함대를 주둔시키면서 더 많은 전쟁 비용을 얻기 위해 아테나이의 동맹이 되라며 인근 도시들의 안전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었고, 이런 아테나이가 신경쓰이는 시켈리아와 이탈리아 남단의 헬라스 식민도시들도 쉬라쿠사이를 중심으로 로크리스가 연대하여 레기온의 영토를 유린하고 멧세네를 점령하는 등 반아테나이 군사행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하면서 아테나이의 대펠로폰네소스 전선은 더욱 확대되어 갔습니다. 밀이 익기 전 여름이 가까워지자 지난 해 이스트모스에서의 지진으로 그의 첫 출진을 포기했던 스파르테 왕 아기스가 아티케로 들어와 한동안 약탈하고 유린하며 돌아다녔고, 아티케 유린이야 개전 초부터 겪어왔던 아테나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가 끝난 40척으로 꾸린 시켈리아 지원 함대를 에우뤼메돈과 소포클레스의 지휘 아래 퓌토도로스에게 보내면서, 가는 길에 펠로폰네소스 해역에서는 비록 개인 자격이긴 하나 나우팍토스를 지키고 올파이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데모스테네스가 요청하는 일은 거들어주고, 케르퀴라 섬을 지날 때는 산속 반군에게 고통받는 케르퀴라 시민들을 보살펴주라고 별도의 임무를 주었습니다. 올파이의 승리로는 아직 아이톨리아의 패전의 멍에를 진 데모스테네스는 독자적인 전쟁을 통해 전공을 세워 그 멍에를 벗어야 했고, 그런 데모스테네스에게 아테나이는 비록 아테나이의 장군으로 쓸 수는 없었지만 그가 가진 특출한 군사적 재능을 살릴 기회를 주기 위해 시켈리아로 가는 함대에 동승시키고 함대로 하여금 펠로폰네소스 해역에서 그의 전쟁을 돕도록 했던 것이었는데, 역시 데모스테네스의 전쟁 운은 반등의 연속이었습니다. 함대가 라코니케 앞바다에 들어섰을 때, 60척의 스파르테 함대가 이미 케르퀴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두 장군은 스파르테 함대와의 일전과 케르퀴라에서의 임무를 수행코자 데모스테네스를 무시하고 곧장 케르퀴라로 향했는데, 마침 함대가 데모스테네스가 독자적인 전쟁을 위해 요새를 세우고 싶어하는 퓔로스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정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육지에 오른 데모스테네스는 따로 방벽을 쌓지 않아도 그 지형만으로도 훌륭한 요새가 될 바닷가 절벽 언덕 위에 방벽을 쌓기 시작했고, 풍랑에 묶인 함대는 엿새나 그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그 엿새 동안 쌓은 방벽으로 싸인 요새와 데모스테네스에게 6척의 삼단노선105 붙여주고 퓔로스를 떠났습니다. 마침 축제 기간이었던 스파르테는 퓔로스가 아테나이에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여늬 때처럼 출동하면 배를 타고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며 버려두고 있었고, 방벽이 쌓였다는 소식에는 아티케에 머물던 아기스도 철군을 결정하고106 귀로에 올랐고, 돌아와 여독을 푸는 동안 페리오이코이로 편성된 부대를 먼저 보내면서, 한편으로 케르퀴라로 간 60척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도 소환하고, 또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도시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한 뒤, 천천히 퓔로스로 나아갔습니다. 한편 급조한 퓔로스 요새의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나이가 남겨준 6척의 함선 가운데 한 척을 자킨토스까지 보내 에우뤼메돈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3척을 해안으로 끌어올려 방벽으로 삼고 멧세니아 지원군도107 포함시켜 해안 진지를 구축하고, 요새 안의 대부분의 군사들을 가장 튼튼히 쌓은 내륙쪽 방벽으로 배치하여 스파르테의 주공격군을 상대토록 한 다음, 스스로 60명의 중무장보병과 약간의 궁수를108 대동하고 요새의 취약한 부분이자 배후를 치기 위해 틀림없이 공격해올 바닷가 절벽의 가장 높은 곳으로 내려가 진지를 구축하고 대동한 소수의 군사들에게 강력하게 독전하면서 스파르테군을 기다렸습니다. 다른 한편, 아테나이 함대를 피해 퓔로스에 도착한 스파르테의 트라쉬멜리다스 휘하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스파르테의 육군이 이미 도착해 있다는 것을 알고 아테나이 함대가 지원차 퓔로스로 오기 전까지도 육군이 요새를 함락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퓔로스 항과 인근의 스팍테리아 섬 사이의 좁은 수로에 함선들을 배치하면서 아울러 무인도라 숲이 우거지고 길도 없는 그 섬에 아테나이 군이 상륙하여 거점으로 삼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중무장보병들을 배치하되 주둔 조건이 좋지 않으므로 수시로 교대시키기로 했습니다.
11.10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전쟁 일곱 번째 해 여름이 채 오기 전부터 시작된 데모스테네스의 스파르테에 대한 작지만 직접적인 도발이 어떻게 헬라스 내전의 양상을 크게 바꾸어놓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사실 헬라스 내전이 처음 벌어졌을 때, 하기 싫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아르키다모스는 헬라스의 모든 도시들에게 안전과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 다시 말해 모든 헬라스 도시들의 해방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대를 이을 전쟁을 받아들였지만, 자신만만한 페리클레스는 자기가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전쟁을 끝내고 새로운 30년 또는 50년 평화체제를 갖출 수 있다고 믿고 비축된 전쟁 비용이 바닥나기 전, 2-3년, 길어도 3-4년 안에, 전쟁을 통해 제국을 재구성하고 지배력을 강화시켜놓으려 전쟁을 촉발했기 때문에, 전쟁이 께름칙하기만 한 아르키다모스는 죽기 전까지도 최소한의 전투로 전쟁을 지극히 소극적으로 수행했지만, 전쟁이 자신만만하기만 한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서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도시들에게 동맹에 충실치 못하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가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가를 보여주며 그 같은 도시들을 단속하느라 그들과 적극적으로 전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맹에 충실치 못한 도시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제국이 굳건해지면 바로 전쟁을 끝내고 새로운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던 페리클레스가 그의 자랑이던 아테나이가 가진 발군의 전쟁 능력과 함께 역병으로 스러지자 헬라스 전쟁이 달라졌습니다. 아기스의 스파르테는 비록 여전히 전쟁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없긴 했지만 아르키다모스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며109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고, 클레온의 아테나이는 역병으로 주춤하는 틈을 노린 동맹 이탈자들이나 독자 세력 추진자들을 응징하거나, 혹은 새로운 수입원을 마련하기 위해, 혹은 두 진영의 힘을 지렛대로 세력 확장을 획책하는 도시들이 부추기는 전쟁에 습관적으로 몰두하는 전쟁이 일상이 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나타난 아테나이의 데모스테네스는 인간들의 전쟁에 진절머리를 흔들며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버리면서 가증스런 인간들에게 보낸 전쟁의 귀재였습니다.110 그렇게 바라는 전쟁을 마음껏 해보라는 신의 비아냥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전쟁 발발 후 매년 앗티케로 출진한 아르키다모스는 주민을 소개하여 텅 빈 앗티케에서 전투 한번 벌이지 못했습니다. 순무 행차였거나 일방적인 유린이었지요. 페리클레스가 전쟁 첫해부터 펠로폰네소스에 상륙하여 해안의 마을들을 유린하였지만 브라시다스를 빼곤111 전투 한번 벌이지 못했습니다. 전쟁터는 정작 언제나 두 진영과의 관계가 모호한 변방이었지요. 아르키다모스도 매년 아티케로 나아갔지만 그곳에 요새를 세워 주둔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페리클레스도 매년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순회하며 바닷가 마을들을 유린했지만 그곳에 요새를 세우고 주둔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 도시 간의 직접적인 전투가 전쟁을 적당한 선에서 끝낼 수 있는 흥정의 수단이 아니라 자칫 두 도시 중 하나가 망하지 않으면 끝낼 수 없는 사생결단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테나이도 스파르테도 전쟁을 흥정의 수단으로 여겼지 사생결단을 내자고 벌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었지요. 아이톨리아 패전은 데모스테네스를 나우팍토스에 머물게 했고, 나우팍토스의 멧세니아 사람들은 이토메 산성에서 농성하다 이주한 반란군의 아들들이었지만 대를 물린 스파르테에 대한 적개심을 올파이에서 보인 격렬한 전투력으로 증명했고, 아테나이 군대가 그들의 옛 땅 멧세니아에 진출해도 내놓고 지원해주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이지는 않을 것이란 자신감을 데모스테네스에게 주었겠지요. 올파이 승리로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나이로 돌아 갈 수 있었고, 적은 병력만 주면 자기 책임 하에 멧세니아에 요새를 세우고 주둔하겠다고 제안했고, 전쟁을 해야만 권력을 쥘 수 있고 전쟁을 해야만 돈을 거둘 수 있는 클레온이 얼씨구하고 들어주었고, 삼단노선 6척의 병력을 얻은 데모스테네스는 시켈리아로 가는 함대에 끼어 멧세니아의 퓔로스로 갔고, 행운의 폭풍우가 아테나이 함대를 퓔로스에 묶어주었고, 함대의 도움으로 엿새 동안 요새를 세울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얼마 가지 못한 함대를 다시 퓔로스로 불러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펠로포네소스 함대의 무능과 스파르테 군대의 공성전 무경험이 아테나이 해군의 간단한 작전과 데모스테네스의 농성을 성공시켜주었지요.
11.108. 누가 보아도 그곳 이외에는 공격로가 보이지 않는 좁은 해안에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중무장보병들이 상륙을 시도하자112 데모스테네스가 이끄는 소수의 아테나이 병사들이 완강히 저항하면서 시작된 전투는 스파르테의 지상군의 요새의 방벽을 공격과 방벽 안의 아테나이군 사이의 공방으로 이어져 온종일 계속되었고, 이튿날에도 똑같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스파르테는 사흘째가 되자 공격을 포기하고 공성 무기를 만들려 함선 일부를 아시네로 보내 목재를 구하러 나섰고, 이 날 자킨토스까지 갔던 아테나이 함대는 나우팍토스의 경비함과 키오스의 삼단노선 3척까지 가세해 50척의 함선을 이끌고 퓔로스로 다시 돌아와 보니 펠레폰네소스 함대는 보이지 않고 곳곳에 적의 중무장보병이 진을 치고 있어 일단 인근의 무인도 프로테 섬으로 가서 정박했습니다. 이튿날 아테나이 함대가 난바다에서의 해전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동안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스팍테리아 섬의 양끝에 함대를 배치해 아테나이 함대가 퓔로스 항만 안으로 들어오는것을 막겠다던 애초의 계획을 버리고 아테나이 함대가 항만으로 들어오면 내해에서 해전을 벌이기로 했고, 기다리던 아테나이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찾아 퓔로스 항만으로 들어오자 일내해에서 전을 벌이겠다던 펠로폰네소스 함선들 일부가 전열에서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들을 덮쳐 단숨에 5척을 나포하고 여러 척을 파손하여 승기를 잡았지만 더 이상 피할 데도 없어진 펠로폰네소스 해군이 나포된 배를 끌어당기며 결사적으로 뭍에서 해전을 벌이고 나오자 아테나이 해군은 함선 위에서 지상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113 서로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일단락되었지만, 아테나이 함대가 퓔로스 항만 안을 장악하자 스팍테리아 섬에 들어간 펠로폰네소스 군대는 섬에 흩어져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11.109. 이틀의 요새 공방전과 하루의 해전이 끝난 후 탈환 실패와 군대의 고립에 당황한 스파르테는 현지의 상황을 보고 바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며 점검단을 퓔로스로 보냈고, 점검단은 섬에 갇힌 군대를 군사 작전으로 구출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그들이 굶어 죽거나 항복하여 포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휴전을 통해 송환받는 것이 최선이라 그곳 지휘관들과 함께 결론을 내린 다음, 아테나이와 스파르테 사이의 휴전 협상을 진행할 동안 우선 퓔로스에서의 휴전을 아테나이 지휘관들과 합의했는데, 휴전의 담보로 스파르테는 라코니케 인근의 모든 함선을 아테나이 함대에 넘기고 육해에서의 요새 공격을 멈추면, 아테나이는 스파르테가 섬의 군대에게 일정한 양의 식량을 공급하는 것을 허용하고 스파르테의 휴전 협상 사정들의 아테나이 왕래를 책임지며, 협상이 끝난 뒤 담보 함선들을 원상태로 돌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60척의 함선을 아테나이 함대에 넘긴 다음, 아테나이의 삼단노선을 타고 아테나이로 간 스파르테 사절들은 장광설을 늘어놓았지만,114 결국 전쟁이란 서로 유리한 국면도 불리한 국면도 있어서 서로가 휴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쯤에서 서로의 체면을 살리면서 휴전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자 그래서 섬에 갇힌 군대가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기 바란다는 제안이었고,115 이에 대해 아테나이 사람들은 스팍테리아 섬의 펠로폰네소스 군대를 볼모로 삼으면 더 유리한 조건으로 언제든지 휴전협정을 맺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졌고, 특히 클레온이 나서 휴전 성립 전에 섬에 갇힌 군대는 무장 해제되어 아테나이로 호송되어야 하고, 그 다음 아테나이가 잃은 니사이아, 페가이, 트로이젠, 아카이아를 돌려받으면 기간을 합의해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다는 요지로 주장하고 동의 여부를 즉답하라고 스파르테 사절들에게 욱박지르자 협상은 결렬되었고, 스파르테의 사절들이 다시 아테나이의 삼단노선을 타고 돌아가자 퓔로스에서의 휴전도 즉시 끝났습니다. 그러나 아테나이는 휴전 중에 요새가 공격을 받았다는 핑계를 대며 담보로 묶어둔 60척의 함선을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아테나이 함대에 20척의 함선을 보태어 봉쇄를 강화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고, 스파르테는 섬에 갇힌 군대를 구출할 기회를 노리면서 다시 격전을 벌여나가야 했습니다. 앞서 전쟁 두 번째 해 역병으로 혼란스런 아테나이가 페리클레스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며까지 스파르테에게 강화를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다섯 해 뒤 섬에 갇힌 군인 몇 백의 안전을 위해 스파르테가 60척의 함대까지 담보로 내며 요청하는 강화를 아테나이는 의기양양하여 물리친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테의 사절이 적절하게 그런 자만심으로 강화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고, 거절하고 나중에 실패하면 퓔로스에서의 성공은 단지 행운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을 받을 것이라고116 점잖게 미리 말했는데도 말입니다.
11.11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펠로폰네소스 지상군은 요새의 아테나이 군대를 포위하며 퓔로스 해안에 친 진에서 아테나이 해군의 상륙을 막고, 아테나이 함대는 스팍테리아 섬을 포위하며 탈출이나 지원을 감시하는 가운데, 몰래 섬의 군대에 먹을 것을 전하고 오는 헤일로타이에게 포상금과 함께 자유를 주는 스파르테의 보급책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 더 이상 협상을 요구하지 않고 무난히 버티고 있었고, 며칠이면 굴복할 것이라 믿고 식수와 식량의 보급도 여의치 않고 정박도 마땅치 않은 포위를 계속하던 아테나이 함대는 스파르테가 무슨 자신이 있는지 더 이상의 협상 요구도 없이 버티는 것이 꺼림칙한 데다가 좋지 않은 보급과 휴식 때문에 봉쇄 작전이 힘들어 함대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퓔로스의 사정을 알릴 전령을 아테나이로 보냈습니다. 소식을 들은 아테나이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보급도 봉쇄도 어려워질 것은 뻔한 이치여서 휴전 제의를 거부한 것을 후회하며 누구보다 휴전 거부에 앞장선 클레온을 원망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클레온이 전령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우기자 전령은 감찰관을 보내어 확인하자고 했고, 아테나이 사람들이 감찰관으로 클레온과 테아게네스를 지명하자 클레온은 전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감찰관을 보내 시간을 허비하느니 바로 군대를 보내 섬의 군대를 공격하면 될 일 이라며 자기가 장군이라면 바로 배를 타고 가서 섬의 군대를 사로잡아 왔을 것이라고 정적인 니키아스를117 조롱하며 감찰관 지명을 받아쳤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이 클레온에게 직접 나서라고 고함쳤고, 니키아스도 퓔로스 전투 사령관직을 내려놓겠다고 했고, 클레온은 다른 도시들의 경무장보병과 궁수들만 데리고 가서 스팍테리아 섬의 펠로폰네소스군을 잡아오든지 도륙내겠다고 큰소리친 다음 그를 도울 장군으로 데모스테네스를 지명하고 민회의 인준 절차를 마치고 퓔로스로 갔습니다. 섬에 불이 나서 주둔한 스파르테군의 규모를 파악한 데모스테네스는 스팍테리아 상륙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동료 장군으로 지명했던 클레온은 퓔로스 도착하자마자 스파르테 본진에 전령을 보내, 섬의 군대가 무구를 가지고 투항하면 스파르테와 아테나이 사이에 포괄적 합의가 나올 때까지 억류는 하겠지만 심하게 대하지는 않겠으니 섬의 군대에게 그렇게 지시하라 요구했으나, 스파르테 본진에서는 거부했고, 이에 800명의 아테나이 군 중무장보병이 이튿날 밤중에 상륙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첫 초소를 야습해118 30명가량의 중무장보병을 죽이고 교두보를 마련했으며, 다음날 아침 70여척의 함선을 타고 800명의 궁수와 800명의 경방패병과 그들을 도울 각각 알아서 무장한 7,000이 넘는 노꾼들과 나우팍토스와 퓔로스 인근에서 합류한 멧세니아 사람들 증원군과 퓔로스에 있던 다른 아테나이군이 상륙했고,119 이들은 200명 단위로 나누어져120 에피타다스 휘하의 스파르테 주력군이 있는 섬 중앙의 급수원으로 섬 전체를 훑으며 나아갔고, 두 군대의 중무장보병들은 일진일퇴의 접전을 벌였으나, 떼로 몰려다니며 돌이고 화살이고 투창을 던지며 숲 사이를 마음껏 피해 다니는 아테나이의 경무장보병을 제대로 응수할 수가 없어121 많은 손실을 입은 채 섬 끝자락의 요새로 퇴각했고, 요새를 지키던 군사들과 합류한 스파르테군은 배후로부터의 공격이 없어 수월하게 정면의 공격을 막을 수 있게 되었는데, 상황을 보던 멧세니아 군대가 궁수들과 경무장보병을 데리고 절벽을 기어올라 스파르테군의 배후에 나타났고, 전후 양면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스파르테군에게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는 항복을 권유하자, 전사한 에피타다스와 중상을 입어 전사자로 취급된 힙파그레타스의 다음 지휘자인 스튀폰 사이에 교섭이 오갔고, 스튀폰은 본진에서 온 전령을 통해 전해지는 스파르테군의 지시에 따라 교섭을 진행하다가 결국 섬의 군대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자결권을 위임받아 그들끼리 협의한 뒤 무구를 넘기고 항복했습니다.122 이튿날 승전비를 세우고 출항을 준비하며 아테나이는 스파르테군이 전사자들 시신을 거두어 가도록 했는데, 회수한 시신이 128구였고 포로는 스파르테군 120명 다른 펠로폰네소스 도시 군대가 172명 도합 292명이어서 섬에 주둔한 병력은 전체 420명이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전날 밤부터 시작되어 이튿날 오전에 끝난 스팍테이아 섬의 전투로 20일 안에 포로로 잡아오겠다던 클레온의 큰소리는 사실이 되었고, 이 일은 모든 헬라스 사람들로 하여금 스파르테군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죽어도 무구를 들고 죽지 않고 무구를 넘기고 포로가 된 사람들이 과연 무구를 가지고 끝까지 싸우다 죽은 스파르테 사람들과 같은 스파르테 사람인지 의아해 할 정도였고, 어떤 이는 포로에게 전사자들이 진정한 용사들 아니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는데, 스파르테 포로는 진정한 용사를 구별하는 것이 가락123이라면 그것들이 가장 값진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답니다. 죽지 않고 포로가 되었다고 약 올리는 비아냥에 대해 야습이나 화살을 날리는 비정규전을 비난한 스파르테 포로의 대답에서 보듯, 퓔로스 전투는 종래의 중무장보병끼리의 정규전 전투 양상을 야습과 돌과 화살이라는 비정규 전투 양상을 도입해 스파르테군의 응전에 혼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퓔로스를 지키기 위한 주둔군을 멧세니아 사람들 위주로 구성하여 스파르테의 헤일로타이들 탈출을 돕고, 같은 말을 하는 이점을 이용해 인근 멧세니아의 스파르테 사람들을 유격하는 일로 스파르테를 피곤케 하였으며, 더더구나 포로 송환 협상을 질질 끌면서 스파르테가 잇티케로 들어오면 포로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스파르테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지요. 아무튼 이 예상치 못한 클레온의 승전은 아테나이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었고, 기고만장해진 클레온은 이 승리로 아테나이와 동맹도시들을 휘어잡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할 것이었고, 비정규전에서의 패전에 대한 반성과 원만한 포로 송환과 헤일로타이의 반란 방지라는 세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풀어야 하는 스파르테 역시 와신상담하며 새로운 전쟁을 준비할 것이어서, 지금까지 벌어졌던 스파르테와 아테나이 사이의 전쟁 양상 역시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어갈 것이었습니다.124
11.111. 전쟁 일곱 번째 해인 이 해의 아테나이는 전쟁 운이 좋았는지 곳곳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는데, 하나는 레기온을 지켜 시켈리아에서의 교두보를 유지한 것이었는데, 시켈리아의 아테나이 함대는 지원 함대가 오는 길에 퓔라이에 묶여 있는데도, 레기온의 땅을 공격하는 쉬라쿠사이와 로크리스를 제어하기 위해 멧세네를 공격하여 쉬라쿠사이와 멧세네의 함대를 카륍디스125 해협에서 격퇴시킨 다음, 시켈리아 도시들끼리의 싸움에 대해서는 방관하며 레기온의 기지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고, 하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도시들의 생업을 유린하여 적의 전력을 약화시킨 것이었는데, 어이없이 퓔로스의 공적을 고스란히 클레온에게 바친 니키아스는 놓친 공적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혼란에 빠진 스파르테 대신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두 번째 도시 코린토스를 치기로 하고 다른 두 명의 장군들과 함께 동맹도시들에서 차출한 병력을 포함한 80척의 함선과 군마수송선에 2,000명의 중무장보병에 200기의 기병을 동원하여 코린토스의 솔뤼게이오스 지역에 스팍테리아 섬에서처럼 이번에도 밤중에 몰래 상륙했는데, 이러한 아테나이의 움직임을 아르고스를 통해 미리 알고 있었던 코린토스는 이스트모스에 동원 가능한 인근의 병력을 결집시켜놓고 아테나이가 어디로 상륙하는지 지켜보고 있다가 솔뤼게이오스로 몰려가 아침부터 백병전이 벌어졌고, 대등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기마병의 지원이 없는 코린토스가 밀려나 언덕으로 올라가 쉬면서 전투가 중단되었고, 한편 크롬뮈온이 공격당하는 걸 막기 위해 켄크레이아에 대기하던 코린토스군이 피어오르는 먼지를 보고 전투를 돕기 위해 달려갔고, 인근 마을 중늙은이들 역시 소식을 듣고 몰려들자,126 아테나이군은 함선에 올라 가까운 섬으로 퇴각했다가 휴전하고 시신을 거두어 크롬뮈온 쪽으로 배를 타고 가서 인근을 약탈하고 야영한 뒤, 에피다우로스, 메타나, 트로이젠을 유린하고, 메타나와 트로이젠 사이의 지협에 성벽을 쌓아두고 아테나이로 돌아간 일이었으며, 하나는 도시가 둘로 나뉘어 서로 싸우면서 동맹이다가 적이 되는 위험을 제거한 것이었는데, 퓔로스에 멧세니아 사람들의 수비대를 남기고 본디 가려했던 시켈리아로 가던 에우뤼메돈과 소포클레스는 케르퀴라에 들려 내전에서 패해 본토로 쫓겨났다 돌아와 이스토네 산에 요새를 만들어 농촌을 차지하고 해안 도시들을 괴롭히던 과두파들을127 토벌하여 요새를 함락하고, 산으로 달아난 과두파를 아테나이로 데려가 재판하겠다며 항복을 받아 포로로 잡고, 간계를 부려128 잡은 포로들을 원한이 쌓인 민중파에게 넘겨주었고, 민중파는 그들을 학살하고129 산속 요새에서 잡힌 아녀자들은 노예로 팔았는데130, 이렇게 과두파들이 몰살당하자 10년전 코린토스와 나머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함대를 두 번이나 쳐부술 수 있었을 만큼 아테나이 해군력에 버금가던 케르퀴라가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고 아테나이처럼 정체를 바꾸는 과정에서 10년을 내란 휩싸이는 동안 도시는 그들 케르퀴라 사람들과 케르퀴라 섬의 안전과 자유를 아테나이에게 맡긴 대가로 확실히 아테나이의 종속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고,131 이렇게 케르퀴라의 힘을 빼는 데 성공한 아테나이 함대는 케르퀴라 민중파의 환송을 받으며 유유히 그들의 목적지 시켈리아로 갔습니다.
11.11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러나 아테나이가 훨훨 날고 있는 동안 스파르테가 마냥 숨죽이고 잡혀간 포로들을 돌려달라며 사정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전쟁 일곱 해째 겨울 동맹 분담금 거두기 위해 에이온132으로 간 지휘관이 스파르테로 여행하는 페르시아 사람 아르타페르네스를 붙잡이 아테나이로 데려왔는데, 그는 페르시아 왕이 스파르테로 보내는 사절임과, 그의 임무가 그동안 왕에게 온 많은 스파르테 사절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해 그 요구가 모호하니 페르시아 왕에게 스파르테의 요구를 분명히 밝힐 사절을 대동하여 돌아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르타페르네스는 스파르테의 사절을 데리고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대신 그는 아테나이의 사절들과 함께 삼단노선을 타고 에페소스로 돌아갈 수 있었고, 아테나이의 사절들은 그곳에서 페르시아 왕133이 최근에 죽었다는134 말을 듣고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아테나이는 칼리아스의 평화 이후 페르시아와 소원해졌고, 스파르테는 메가바조스의 방문 이후에도 계속 페르시아에 사절을 보내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테나이와의 전쟁이 길어지고 해군의 열세로 전세를 반전시키지 못하고 해군을 유지할 전비도 조달하기 어려워지자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고 싶어 기웃거리긴 했으나 차마 돈 달라 말은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 보니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아르타페르네스를 보내 스파르테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확실히 말할 사절을 데리고 오라 했던 것이었겠지요. 스파르테는 해군의 전력 증강은 결국 솜씨 있는 노꾼들 확보이며, 솜씨 있는 노꾼 확보는 충분한 노삯 지불 능력에 달려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돈을 얻을 곳은 페르시아 왕에게서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게지요. 어느날 스파르테가 페르시아 왕에게서 그 돈을 얻는 순간 전세는 뒤집어지고 말 것이었는데, 자존심 센 스파르테가 아직은 차마 이어족의 왕에게 같은 헬라스의 도시를 칠 테니까 돈을 달라 말을 못하고 있었지만, 다급해지면 언제든지 쓸 수 있는 필승의 전략이었음에도 전쟁 일곱 번째 해 겨울 스팍테리아의 일로 기고만장해진 아테나이도 극도로 위축된 스파르테도 이 필승의 전략은 덮어두고 새로운 전단을 열 전쟁 여덟 번째 해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11.11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여덟 번째 해 여름이 시작되자 아나톨리아에서 아테나이나 페르시아 모두가 주목해야 할 심상치 않은 일이 나타났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죽어서 페르시아 왕궁에 무슨 일이 있는지, 그래서 그 영향이 아나톨리아에까지 미쳐 해안도시들에 대한 페르시아 총독의 통제가 느슨해졌는지, 아테나이에게 구박받고 쫓겨나 아나톨리아의 해변도시들을 전전하며 눈치보고 살던 뮈틸레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디 뮈틸레네의 식민도시였으나 지금은 아테나이에 종속되어 있는 도시들을 해방시키고 그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거점으로 삼고 요새를 세울 수 있다면 바다 건너 가까운 레스보스 섬도 다른 아이올레이스 사람들의 도시도 약탈하거나 정복하기가 쉬울 것으로 판단했겠지요. 그렇게 아테나이를 적으로 삼는 세력이 나타난다면 물론 페르시아의 총독들도 뒤를 봐줄 것이라 자신 했겠지요. 그들은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주변에 있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고용하여 군대를 만들고, 먼저 로이테이온 곶을 점령한 다음 그곳 주민들에게 약간의 돈을 받은 뒤 고스란히 돌려주었고, 그 다음 안탄드로스 사람들의 내응을 얻어 그 도시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안탄드로스는 이데 산 아래 있어 배를 만들 목재 구하기가 용이했고, 다른 장비들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지요.
11.114. 그러나 아직 이들의 움직임이 아테나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 만큼 크고 대담하지는 않았는지, 아테나이는 여름에 니키아스와 두 명의 장군들에게 함선 60척과 중무장보병 2,000명 그리고 약간의 기병을 주어 라코니케 남단의 섬 퀴테라 원정에 나서도록 했습니다. 원정대는 협상을 하면서 전투를 벌였고, 협상이 길어지자 요새를 쌓아 수비대를 남기고 아르고스 인근의 튀레아로 갔습니다. 스파르테는 개전 초 아테나이가 아이기나 섬을 점령하면서 내쫓은 아이기나 사람들을 받아들여 이곳에 살도록 해주었는데, 이들이 스파르테를 돕고 있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간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냥 바로 가지는 않았지요. 아테나이 함대는 퀴테라 섬에서 튀레아에 이르기까지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쪽 해안 여러 곳을 유린하고 약탈하며 착실히 돈을 긁으며 갔지요. 한편 튀레아의 아이기나 사람들은 아테나이의 공격을 예상하고 스파르테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해안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아테나이 함대가 몰려오자 중과부적의 스파르테 수비대는 철수했고,135 니키아스는 전군을 상륙시켜 도시를 불태우며 약탈했고, 부상당한 스파르테 행정관136 탄탈로스와 살아남은 아이기나 사람들을 붙잡아 아테나이로 보내고 다시 퀴테라로 갔습니다. 그 사이 퀴테라에서는 협상이 이루어져 아테나이는 4탈란톤137의 공물을 받고 섬을 풀어주었고,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몇 사람들을 이주시킨 다음 아테나이 함대는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는 붙잡아온 아이기나 사람들을 모두 죽였고138, 탄탈로스는 스팍테리아 포로들과 함께 인질로 처리되었습니다.
11.115. 니키아스의 실속 있는 치고 빠지기 작전과는 달리, 전쟁 다섯 번째 해 여름 쉬라쿠사이에게 핍박받는 레온티노이를 돕는다며 20척을 가지고 멀리 이탈리아로 가서 레기온에 진을 친 라케스의 뒤를 이어 60척으로 키운 에우뤼메돈과 소포클레스의 아테나이 함대가 아무런 소득없이 주둔 네 번째 해 여름을 맞이하는 가운데, 처음 시켈리아의 쉬라쿠사이와 레온티노이 사이에 벌어졌던 두 도시 사이의 분쟁이 그들의 섬을 벗어나 이탈리아 반도의 마그나 그라키아에 속한 도시들 간의 전쟁으로 점점 확산되더니 급기야 같은 지역 안에서도 모도시와의 인연에 따라139 같은 지역에 흩으진 헬라스 사람들의 식민도시들끼리 맞붙는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네 해에 걸친 전쟁은 쉬라쿠사이나 아테나이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는 레기온 정도의 도시들은 몰라도 작은 도시들에게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고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전쟁에 지친 시켈리아 남동 해안의 작은 두 도시 카마리나와 겔라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졌고, 이 평화를 계기로 나머지 시켈리아의 도시들이 겔라에 한데모여 그 간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회의를 주도한 쉬라쿠사이의 헤르모크라테스 먼저 왜 전쟁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말하고, 왜 아테나이가 시켈리아 도시들 간의 분쟁에 끼어드는지를 따지고, 마지막으로 평화를 이루어 각각의 도시들이 주권을 가지고 모두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확보하는 길은 양보에와 단결에 있다고 말했지요. 그렇습니다. 헤르모크라테스가 지적한 대로지요.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도 모두들 전쟁의 비참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므로 여기서 제가 그 참상을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그 참혹함을 몰라서 전쟁을 일으키는 도시가 없는 까닭은 바로 탐욕 때문인 것입니다. 이득이 생길 것 같은데 참혹이 두려워 전쟁을 포기합니까? 이익이 위험보다 더 커 보이는데 공격을 포기합니까? 지키는 도시는 어떻습니까? 작은 손해도 손해지만 전쟁을 피해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빼앗길 위험을 감수할 수 있습니까? 서로가 탐욕을 버리지 않는 한 전쟁은 계속되는 거지요. 그래서 아테나이가 시켈리아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이런 아테나이의 속셈을 정확히 꿰뚫고 있던 헤르모크라테스는, 아테나이가 동맹을 내세우지만 속셈은 시켈리아 도시들 사이의 적대감을 부추기고 전쟁으로 이끌어 서로 힘이 빠지길 기다렸다가 더 많은 함선을 동원해 시켈리아 전체를 점령하고 도시들을 종속시킨 다음, 시켈리아의 도시들과 사람들의 자유와 안전을 볼모로 시켈리아의 재물을 빼앗을 것이라 지적하면서, 아울러 이웃 도시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해 도시와 도시민의 자유와 안전을 도모한다며 동맹의 이름으로 그들의 도시에 아테나이를 불러들이고 스스로 아테나이에 종속된 도시들의 굴종적인 태도를 비난하면서, 지금이라도 시켈리아 도시들이 서로 화해하고 양보하여 평화를 이루고 힘을 모아야 거점을 잃은 아테나이는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시켈리아의 도시들을 설득했고,140 끝으로 시켈리아의 도시들에게 저마다의 자유와 주권을 회복시켜줄 평화를 위해 쉬라쿠사이부터 모든 것을 양보하겠으니141 다른 도시들도 서로 양보해서, 두 번 다시 외부에서 동맹군이나 중재자를 불러들이지 말고, 지금 당장에 아테나이로부터의 해방과 시켈리아 내전 종식의 이익을 얻자며 호소했습니다. 시켈리아의 도시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선에서 평화에 합의했고, 아테나이 동맹도시들은 아테나이도 이 평화를 준수할 것을 요구하여 아테나이 장군들이 승인했고, 평화조약이 맺어지자 아테나이 함대도 돌아왔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테나이는 이들 장군들을 가혹하게 다루었어요. 퓌토도로스와 소포클레스는 도시에서 쫓아내었고, 에우뤼메돈은 벌금을 내도록 했지요. 시켈리아를 장악할 수 있었는데 뇌물을 먹고 철군했다고 말입니다. 전에 아테나이 사람들은 내전 발발 이듬해 포테이다이아의 항복을 본국과 상의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였다며 크세노폰과 그의 동료 장군들을 질책만 했지 혹독하게 벌을 주지 않았는데142, 여섯 해 뒤인 전쟁 여덟 해째에 시켈리아에서 돌아온 함대의 세 장군들을 가차없이 잘랐습니다. 왜 아테나이가 흠 잡을 데 없이 임무를 다하고 돌아온 장군들에게 그런 가혹한 처분을 내렸을까요? 포테이다이아에서는 2,000탈란톤이란 막대한 비용을 들여 포위해놓고, 막상 그들이 견디지 못하고 항복해왔는데도 그 농성자들을 모두 죽여 후환을 없애지도 않고, 그래서 다른 도시들에게 아테니에 대항한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보이지도 않고, 농성자들의 아녀자들을 노예로 팔아 공성에 든 비용을 건지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 모두가 겉옷과 여비를 챙겨들고 안전하게 포위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준 큰 죄를 지었음에도 왜 그랬냐고 나무라기만 하더니 다음 해 봄에는 다시 전쟁터에 나가 싸울 수 있게 했는데 말입니다.143 명분은 동맹의 보호였으나 시켈리아의 정복을 위해 함대를 두 해 겨울이 지나도록 주둔시켰는데, 충분히 정복할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쉬라쿠사이와 평화를 지켜야 하는 협정의 한 당사자까지 되고서는 고작 동맹이 거두어 주는 주둔비만 받고 돌아왔으니 그 장군들은 세상에 그냥 둘 수 없는 맹추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파르테에 대한 클레온의 성공 이후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들이 나서기만 한다면 다른 도시들의 자유를 빼앗고 복속시키는 데 더 이상의 장애물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144
11.116. 그러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시켈리아에서의 실패에서 보시다시피 전쟁이 아테나이에게만 행운을 줄 리 만무하지요. 그랬다면 페리클레스가 죽기 전에 전쟁은 끝이 났어야 했을 겁니다. 사실 클레온이 가져온 아테나이의 행운은 데모스테네스145라는 탁월한 군사적 모험가의 상상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지요. 데모스테네스는 페리클레스가 세운 함대의 순항과 일과성 치고 빠지기라는 고식적인 전투 형태에서 벗어나 순항하는 함대와 연계된 주둔과 점령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고안했는데, 코린토스 만에서 육로로 보이오티아를 공격하겠다는 군사적 모험을 강행한 첫 출진의 실패로 비록 나우팍토스에 주저앉아야 했지만, 세상에는 스파르테와 아테나이 사이의 전쟁을 기화로 그 어느 한쪽에 붙어 평소 불편했던 이웃의 안전과 자유를 빼앗으려는 아테나이의 아류가 널려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테의 천적 멧세니아 사람들과의 신뢰를 발판 삼아 암필로코스와 암프라키아 사이의 분란에 개입하여 올파이에서 스파르테 군을 대파하여 첫 실패를 만회한 뒤, 도시가 온통 시켈리아 정복이라는 희망에 들떠 있을 때, 홀로 멧세니아 사람들의 도움으로 퓔로스에 요새를 세우고 스팍테리아 섬에서 스파르테의 동등인들 다수를 포로로 잡는 망외의 성과를 거두어 일시에 헬라스 세계에 아테나이의 기세를 떨치게 했지요. 주둔과 점령이라는 데모스테네스의 군사적 모험의 가능성을 지켜봐준 클레온의 눈썰미가 그 공을 클레온이 독차지하도록 했지만, 퓔로스에서 성공한 데모스테네스의 주둔과 점령 전략은 스파르테의 아기스에게 이어져는데146, 전쟁의 막바지에 아기스가 앗티케의 요충 데켈레이아에 요새를 세우고 앗티케를 일년 내내 점령하며 아테나이 성안을 감시하자 아테나이 사람들이 요새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안에 갇혔다고 느끼는 심리적 압박을 가했지요. 데모스테네스 전략의 화려한 성공은 그저 용맹하기만 했던 스파르테의 브라시다스에게도 전략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의 용맹은 퓔로스의 아테나이 요새를 위태롭게 할 정도였지만 그의 소득은 요새의 함락이 아니라 아테나이 군보다 더 악착같은 멧세니아 군의 저항이었지요. 그리고 그는 아테나이 군이 스팍테리아에서 스파르테의 동등인들과 페리오이코이 그리고 동맹군을 포로로 잡아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고요. 퓔로스의 행운으로 아테나이의 군사적 활동이 활발해져 칼키디케와 트라케에서 아테나이의 압박에 시달리는 도시들이 스파르테의 도움을 청하고 있었지만 퓔로스의 불행은 스파르테를 옴짝달싹 할 수 없을 만큼 쪼그들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여덟 해나 지나자 대소 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스파르테 무력의 주력인 동등인의 숫자를 감소시켰고, 동등인의 감소는 스파르테의 헤일로타이를 통제하는 인력을 뺀 원정 병력의 감소로 이어져 원정을 통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가 없게 되었지요. 브라시다스는 데모스테네스가 퓔로스에서 스파르테에게서 빼앗아 클레온에게 넘겨준 전쟁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그전에 스파르테에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경천동지할 전략수정안을 내놓고 스스로 그 수정 전략을 수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동등인이나 페리오이코이 없이 헤일로타이들로만 구성된 스파르테 원정군으로 칼키디케와 트라케 지역의 도시들을 지원하러 가겠다는 것이었지요. 핍박받는도시들뿐만 아니라 불만에 쌓인 아테나이 동맹도시들도 펠로폰네소스 동맹 쪽으로 돌려놓는 장기적인 장거리 원정을 나서겠다고 한 것입니다. 물론 헤일로타이에서 선발될 군인은 원정이 성공을 거두고 귀환하면 자유인으로 풀어줄 것이므로 그들 가운데서도 제일 가는 전투력 보유자들을 뽑을 것이었습니다.147 스파르테는 이 황당하고 무모해 보이는 브라시다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148 그에게 700명의 헤일로타이만으로 편성된 군대와 용병을 쓰라며149 그를 칼키디케와 트라키아 지역 원정군 지휘관으로 삼아 출정케 했습니다. 아테나이 함대를 주축으로 한 데모스테네스야 동맹군의 지원을 받으며 스파르테의 천적 멧세니아 사람들을 앞세워 올파이와 퓔로스에서 스파르테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지만, 브라시다스는 스파르테 동등인의 주축도 없는데다 주어진 직할부대라는 게 과연 실전에서 어떤 용맹을 보일지 알 수 없는 멧세니아 헤일로타이들로 편성되어 있어 무작정 용병들의 활약만 기대하며 함부로 전투를 벌여 칼키디케와 트라키아에서 아테나이의 절대적 우세를 뒤집어놓을 수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무력으로 뒤집을 수 없다면 뒤집을 방법은 단 하나, 칼키디케와 트라키아의 도시들로 하여금 스스로 아테나이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되찾도록 설득하는 것밖에 없었지요. 아테나이가 함대를 보내 무력으로 그들에게 굴레를 씌웠다면 스파르테는 설득으로 그들 스스로 굴레를 벗고 안전과 자유를 찾도록 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사실 헬라스의 해방이야말로 페르시아 침공 이래 스파르테가 헬라스 세상에 대해 줄기차게 지켜온 역활이었지요.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던 브라시다스가 설득으로 도시를 해방시킨다? 브라시다스로서는 칼키디케와 트라키아 도시들 설득에 앞서 무엇보다 그와 같이 움직일 동맹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전략을 이해시키고 지지를 받아 믿을 만한 용병을 모집하는150 일이 급선무였으므로, 그의 직할부대에게 메가라의 집결지로151 모이라 지시하고 그는 먼저 코린토스로 갔습니다.
11.11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마침 메가라라는 말이 나왔으니 잠시 메가라 이야기로 브라시다스의 계속된 움직임을 따라가 볼까 합니다. 헬라스 내전이 발발한 이래 아테나이에서는 아팃케보다 펠로폰네소스에서는 메가라보다 더 전쟁의 고통을 심하게 받은 데가 또 있겠습니까? 전쟁이 나서부터 거의 매년 봄농사를 마치고 새해를 맞이하고 밀과 보리를 거두고 하지를 지낸 펠로폰네소스 군이 앗티케로 들어와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을 유린하다가 신들을 경배하는 축제의 팔월이 들기 전에 돌아갈 때까지 아테나이 성안으로 피난간 앗티케 사람들이 고통스레 그들의 집과 농장이 유린되는 걸 지켜보아야 했지요. 이런 앗티케 사람들의 고통도 아테나이에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152 이런 유린을 매년 두 번씩 아테나이 전군에게 당했던 메가라 사람들에 비하면 약과였지요. 아테나이는 펠로폰네소스 군대가 여름에 앗티케로 넘어오기 전 봄부터 전군을 동원해 메가라의 평원을 유린했고, 또 한 번 판 아테나이 축제를 마치고 가을이 오기 전에 전군을 출동시켜 메가라 평원과 니사이아 항을 유린하고 돌아가는 통에 메가라 사람들이 겪은 전쟁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지요. 형편이 이런데도 도대체 왜 계속 전쟁을 해야 하는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평을 이루지 않는지 분노하는 사람들은 아테나이나 메가라에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아테나이에 스파르테라면 자다가도 우선 송곳이라도 움켜쥐어야 하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런 아카르나이 사람보다 스파르테를 진저리나도록 더 미워 하지만153 스파르테와 개인적으로라도 평화협정을 맺어 농촌생활의 평온을 되찾고 싶은 콜레이다이의 올곧은 촌부 디카이오폴리스 같은 사람들은 몇 명 되지 않았던 이유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아테나이는 이기고 있었고, 앗티케에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은 나지 않아도 어쨌든 그 전쟁으로 돈이 들어오고 그 돈으로 포도주도 올리브 기름을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메가라의 형편은 아테나이와 아주 달랐습니다. 메가라에는 전쟁을 겪는 동안에도 정파들 사이에 정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정쟁은 곧 내전이라도 터질 것처럼 아주 격렬하게 나타나기도 해서, 메가라 사람들은 아테나이로부터 당하는 고통에 더해 내분을 지켜보아야 하는 분통으로 절망해야 했습니다. 메가라라는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가 아니라 도시와 도시민의 존망이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먹고 살 방도가 없어진 메가라 사람 하나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아테나이로 밀입국해 디카이오폴리스에게 새끼 돼지라며 사달라고 졸랐겠습니까? 두 딸을 팔면 산買 사람이 먹여 살려줄 것이고 판賣 돈으로는 남은 가족들이 연명할 수 있으니 그렇게라도 해야 그 메가라 사람의 가족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는 거지요. 메가라의 사정을 묻는 디카이오폴리스에게 이 메가라 사람이 한 말은 동시에 외침과 내분을 겪는 사실 그대로의 메가라 현실이었습니다. "내가 이 시장으로 올 때, 위정자들은 우리를 가장 빨리 죽게 하는 수단을 쓰고 있었어요."154 일년에 두 번씩이나 침공해 농장을 유린하는 아테나이가 아니라, 도시를 위한다는 메가라의 위정자들이 도시를 망하게 하고 도시민을 죽게 하고 있다니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 메가라 사람이 두 딸을 팔기 위해 디카이오폴리스의 시장으로 떠난 그해에155 도대체 메가라에서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요?
11.118. 사실 메가라는 아테나이의 메가가 칙령이 발효되고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재정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스파르테가 아테나이를 움직이도록 요청할 정도였는데, 전쟁이 나고 매년 두 번씩 유린당하는 일이 몇 해나 계속되었으니 도시와 도시민의 살림이 어땠겠습니까? 살림이 무너져 내리는 판이지만 그렇다고 아테나이에 빌붙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내주고 배를 채우기보다는 이 고통을 참고 견디며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지 않냐는 집권 정파에156 반대해, 더는 견딜 수 없으니 다른 방도를157 찾아야겠다는 민중파가 민중들과 함께 폭동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자,158 권력을 빼앗긴 정파의 주도자들이 쫓겨나 펠로폰네소스 동맹도시들의 도움을 받을수 있는 페가이로 망명했고, 이들이 페가이에서 모도시인 메가라를 수시로 넘나들며 약탈하는 소란을 피우자, 메가라 사람들은 아테나이가 가하는 생활의 고통에 더해 가슴 속에 차오르는 비통으로159 다시 또 절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페가이로 쫓겨간 사람들을 불러들이자는 논의가 일어났고, 숨어 있던 그들의 동조자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이자 집권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민중들이 언제든 또 자신들을 축출할 것이란 두려움에 그들은 차제에 아테나이에 도시를 맡기자고 짬짜미했고, 아테나이에 종속되어 다소나마 메가라 사람들의 생활의 고통을 해소해줄 수 있다면 그들의 목숨도 권력도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아테나이에게 내어주고 먹을 것을 얻는다면 도시민의 고통은 줄어들 것이고 덤으로 그들은 권력을 계속 거머쥘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밀사를 아테나이 장군들에게 보내 메가라를 넘겨주기 전에 우선 니사이아 항에 주둔한 펠로폰네소스 군 수비대를 차단하기 위해 먼저 메가라와 니사이아 항을 잇는 장성을 넘긴 다음 아테나이 본진이 도착하는대로 메가라를 넘기기로 했고, 아테나이 장군 힙포크라테스는 밤에 600명의 중무장보병과 메가라 앞바다를 건너 미노아 섬에 잠복했고,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나이 국경 순찰대와 플라타이아 경무장보병을 데리고 성문에 가까운 신전160에 매복했고, 아테나이에서는 밤을 도와 엘레우시스에 있던 중무장보병 4,000명과 기병 600명을 메가라 성문 앞으로 보내 문이 열리는 대로 쇄도해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했고, 메가라 반역자들은 며칠 전부터 작은 배들을 수레에 싣고 들고나며 장성 성문지기들의 주의를 흩으린 다음 아테나이 군이 매복한 날 새벽에 문을 열게 해 닫히기 전에 쇄도케 했고, 혼비백산한 수비대가 니사이아로 도주하자 장성을 점령했고, 소식을 들은 메가라가 혼란에 빠지자 반역자들이 몸에 올리브 기름을 잔뜩 바르고 나와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자고 선동하며 나섰고, 그들 중 한 명이 반역자들의 음모를 폭로했고, 사정을 알아챈 사람들이 몰려나와 반역 음모를 모르는 척 성문을 걸어닫고 방어해야 한다며 성문을 지켰고, 계획이 틀어진 걸 안 아테나이 본진이 니사이아로 가서 수비대를 포위하고 온종일 차단 성벽을 치자 수비대가 항복했고161, 아테나이는 메가라쪽 장성을 허문162 다음 니사이아를 점령하고 다음 행동을 준비했습니다.
11.119. 칼키디케와 트라키아 원정의 새로운 전략을 설명하며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시키온과 코린토스를 돌던 브라시다스에게 아테나이의 메가라 니사이아 항 포위 소식이 전해졌고, 브라시다스는 곧바로 동맹도시들의 메가라 지원군을 소집하고 테바이에 전령을 보내 보이오티아의 지원군을 트리포디스코스로 보낼 것을 요구한 다음, 자신도 그곳으로 가서 집결한 중무장보병 코린토스 2,700명, 플레이우스 400명, 시퀴온 600명 그리고 자신의 직할부대 700명, 모두 4,400명을 이끌고 밤에 니사이아로 출발했고, 도중에 이미 니사이아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진군을 멈춘 뒤 홀로 직할부대에서 300명을 차출해 메가라로 갔지요. 아테나이 몰래 메가라 사람들을 만나 니사이아 탈환을 말하며 메가라 성안으로 들어가도록 해달라 했으나, 아테나이가 매복하고 있고 자칫 두 정파 간의 내분을 일으킬 수 있는 예민한 문제라163 메가라의 두 정파 모두 이를 거부하고, 틀림없이 벌어질 아테나이와 펠로폰네소스 사이의 전투를 지켜보고자 했습니다. 브라시다스는 다시 지원군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고, 새벽에 도착한 보이오티아 군대는 브라시다스에게 중무장보병 2,200명에 기병 600명을 붙여주고 더 많은 군대는 왔던 데로 돌아가니164, 이제 브라시다스는 중무장보병만 6,000명이 넘는 대규모의 메가라 방어군을 가지게 되었지요. 먼저 양쪽 기병끼리 가벼운 일합이 있었으나 중과부적의 아테나이가 몸을 사리고 대응하지 않다가 니사이아로 철수했고, 지켜보던 메가라가 성문을 열고 브라시다스와 동맹도시들의 지휘관들을 맞이했고, 주눅든 친아테나이 위정자들과 메가라의 내정 문제를 논의한 뒤165 동맹군은 각자의 도시로 돌아갔고, 브라시다스도 코린토스로 돌아가 트라키아 원정 준비를 계속했고, 모두가 돌아간 것을 본 아테나이군도 니사이아에서 모두 귀국해166, 전쟁 여덟 번째 해의 메가라와 니사이아를 두고 벌인 양쪽의 대치도 끝났습니다.
11.12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러나 도시의 내분이 도시의 위정자들로 하여금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다른 도시에 맡기려 시도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목격한 메가라 사람들은 외침의 고통보다 더 가슴아프게 슬픈 고통을 안겨주던 도시 내분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동맹도시들과 논의했던 대로 복수를 잊고 오직 도시만을 위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망명자들을 받아들였지요. 물론 도시를 아테나이에게 넘겨주려던 자들은 그들의 행위가 발각되었다는 걸 알고 도망치고 없었지만, 그들의 남은 동조자들 가운데 크게 반역행위를 자행했다고 믿어지는 100명을 골라 처형하고 도시를 정화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메가라는 엄격한 과두정을 실시했는데, 이제 메가라에 고통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며 전쟁을 고집하거나, 외침으로 받는 살림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포기하더라도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며, 도시에 내분을 일으키고 도시민에게 슬픈 고통을 더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없을 것이었습니다.167
11.121. 언제나 갖고 싶었던 니사이아 항이 저절로 굴러들어와 신이 났다가 브라시다스의 출현으로 도로 뱉어내어 섭섭해진 아테나이는 그래도 어느 누구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자신감을 재확인하며 새로운 먹이감을 찾아 분주히 나섰습니다. 아나톨리아 해안의 안탄드로스를 요새화하고 거점으로 삼으려는 뮈틸레네 난민들의 계획을168 가까운 섬들로 출장간 동맹 분담금 징수관이 알고 인근 섬들에서 차출한 군대를 징수선에 태우고 가서 단숨에 분쇄한 것 정도는 먹이감 사냥이라 할 것도 없었고, 아테나이의 거침없는 자신감을 보여주며 사냥에 나선 본격적인 먹이감은 놀랍게도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또 다른 축 보이오티아였습니다. 사실 보이오티아의 종주 테바이는 개전 전에 이미 같은 보이오티아 사람이면서 페르시아 침공 때부터 아테나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그들이 눈엣가시 같던 플라타이아를 한밤중에 들어가 삼키려다 실패하여 오히려 헬라스 내전만 발발시켜놓았었지만, 결국 전쟁 다섯 번째 해에 플라타이아라는 도시 자체를 허물어 아예 후환을 없애버린 이후 따로 특별히 아테나이에 대한 적대감을 표시하지 않고 그저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써 할 바만 하고 있었는데, 아테나이가 메가라 내부 반역자들의 도움으로 니사이아를 확보하고 이어서 메가라를 점령할 의사를 보이자 강력한 지원군을 메가라에 보내 아테나이에 대응해 이를 무산시켰습니다. 그래서인지 메가라에서 철수한 아테나이는 다 된 밥에 재 뿌린 테바이에게 분풀이라도 하듯 보이오티아에도 퓔로스에서와 같은 주둔과 점령 전략과 메가라에서 내부 반역 전략을 구사키로 했고, 퓔로스처럼 요새화할 주둔지로 델리온을 정했고169, 메가라처럼 보이오티아의 두 도시들에서 아테나이가 델리온을 공격하는 날에 맞춰 기존의 친테바이 정권을 전복시킬 양으로 친아테나이 민주정파가 내분을 일으키도록 내통자를 넣어170 손을 써두었습니다. 보이오티아의 두 도시들이 동시에 다발적인 내분에 휩싸여 델리온 방어에 결집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므로, 순식간에 델리온을 점령하고 재빨리 요새화에 성공하면 설사 정변에 실패한다 해도 시간을 두고 그들을 지원하여 민주정파들이 정권을 잡게 할 수 있을 것이고 마침내 보이오티아의 도시들을 하나 하나 무너트릴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런 원대한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아테나이는 힙포크라테스에게는 아테나이에서 바로 보이오티아로 진격할 준비를 시켰고, 주둔과 점령의 전략가 데모스테네스에게는 40척의 함대를 주어 나우팍토스로 가서 아카르나니아와 다른 동맹도시들의 지원군을 태우고 정해진 날 정변이 일어날 시파이로 오도록 했고, 그리고 오르코메노스에서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여 코로네이아를 아테나이에 넘겨줄 오르코메노스의 망명자들은 독자적으로 포키스 사람들도 포함시키고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정해진 날 일으킬 정변에 대비했습니다.
11.122. 이 무렵 브라시다스는 중무장보병 1,700명을 데리고 칼키디케와 트라케 원정 길에 올랐습니다. 다른 도시들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적대적이지 않은 통과라는 이해를 얻기 위해 그 지역의 길라잡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특히 아테나이와 가깝게 지내는 텟살리아를 지날 때는 잠시 저지당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우호적인 언사로 길이 트이자 달리다시피 텟살리아 지역을 벗어나 한 번의 무력 충돌 없이 마케도니아에171 도착했습니다. 브라시다스의 트라케 원정 소식이 전해지자 아테나이는 마케도니아 왕 페르딕카스가172 배경이라고 보고 페르딕카스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주변 동맹도시들 감시에 들어갔습니다. 브라시다스의 원정 첫 임무는 페르딕카스가 원정 비용의 반을 대겠다며 요청한 마케도니아의 또 다른 지역 륑코스 정벌이어서, 브라시다스는 페르딕카스와 함께 륑코스로 나아갔고, 접경에 닿았을 때 륑코스 왕의 아들 아르라바이오스가 전령을 보내 중재를 요청하자, 중재가 아니라 무력 제거라며 반발하는 페르딕카스를 뒤에 두고 아르라바이오스를 만나 평화를 논의한 브라시다스는 그의 말에 납득하여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고,173 모욕감을 느낀 페르딕카스는 반을 대겠다던 비용의 삼분의 일만 부담하며 불만을 드러내었지만, 브라시다스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두 왕들이 서로 잘지내면서 둘 다 같은 스파르테의 동맹이 되도록 하고 싶었고, 이런 자기 생각을 칼키디케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들도 브라시다스의 행동을 두둔하는 분위기여서 다음 임무인 아칸토스 원정길이 무겁지는 않을 것이었습니다만, 불만을 감추지 않는 페르딕카스가 칼키디케든 트라케든 어디로 가든 늘 등 뒤에 있다는 것이 브라시다스의 마음에 걸리긴 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다음 임무를 재촉하는 칼키디케 사람들의 성화에 밀린 브라시다스는 더 이상 페르딕카스에 연연치 않고 지체없이 아칸토스로 갔습니다. 스파르테의 지원을 요청한 칼키디케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아칸토스의 민중들은 여전히 아테나이에 대한 스파르테의 역활에 믿음이 없어 브라시다스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브라시다스는 군사 행동 대신 혼자 아칸토스로 들어가 민중들을 설득해보기로 했고, 민중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서라기보다 혹시 군사 행동으로 수확을 기다리는 농작물이 망가지지나 않을까 두려워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브라시다스는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서로 다른점을 스파르테 사람치고는 제법 유창하게 그러나 스파르테 사람답게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는데, 처음은 해방 우선의 스파르테와 제국 건설의 아테나이를 구별하며, 스파르테는 전쟁을 결심할 때부터 목표가 헬라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스스로 확보하도록 헬라스를 해방시키겠다는 것이었고, 지금도 스파르테는 스스로 안전과 자유를 지키려는 아칸토스의 동맹이 되려고 왔지 안전과 자유를 지키려면 스파르테의 동맹이 되라고 욱박지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밝히면서, 그러나 아테나이는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줄 테니 아테나의 동맹이 되어 그 비용을 대라 하고, 무엇이든 동맹도시나 동맹 전체를 위해서이니 아테나이 시키는 대로 하라며 헬라스의 도시들을 종속시키며 아테나이 제국에 매진할 뿐이라고 설명했고, 그 다음으로 도시 내정 불간섭의 스파르테와 무력적인 도시 내정 개입의 아테나이를 구별하며, 이런 스파르테의 전통을 무시하고 자기가 다수파를 소수파에 혹은 소수파를 다소파에 예속시킨다면 이는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건 외부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가혹할 것인데, 이런 악덕을 저지르는 아테나이를 비난하며 전쟁을 치르는 스파르테가 그런 악덕을 드러낸다면 아테나이보다 더 큰 미움을 받을 것이라며 아카토스 내부의 결정이 중요하다고 말한 다음, 마지막으로 자기가 군사 행동을 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자기 제안의 거부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헬라스 도시를 아테나이의 예속으로부터 구하려는 행동인 바, 그래도 스파르테에 호의적이니까 하고 아칸토스가 바친 공물이 아테나이의 다른 헬라스 도시들 예속화에 쓰이는 불의를 방치한다는 것은 스파르테가 헬라스의 해방자임을 훼손하고 아울러 해방을 기다리는 다수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일이 되므로 군사 행동이 필요한 것이니 이 점에 유념하여 판단하라며 끝을 맺었습니다.174 아칸토스의 두 정파가 많은 토의를 했고, 비밀투표에 부쳐 아테나이에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지요. 물론 거두어야 할 농작물 걱정으로 찬성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아칸토스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스파르테 당국의 약속을 다짐받은 것을 보면 진정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예속의 대가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지키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뒤이어 아칸토스처럼 같은 안드로스 섬 사람들의 식민도시인 스타기로스도 반기를 든 걸 보면 역시 예속의 대가로 얻는 안전과 자유보다는 스스로 지키는 안전과 자유가 값진 것인 모양이지요.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라는 문제가 이렇게 투표로 간단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란 우려를 남기고 전쟁 여덟 번째의 여름도 이렇게 지나가면서 아칸토스의 농부들은 수확하느라 바쁜 날을 맞을 것이었습니다.
11.123.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해 여름에 보이오티아의 델리온에 스파르테의 퓔로스 같은 요새를 세울 계획대로 착착 추수 후 초겨울의 거사를 준비해오던 아테나이는 데모스테네스가 시파이에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175 시파이 내부의 반정 거사 비밀이 누설되어 스파르테가 알았고, 이 사실을 통보받은 보이오티아가 재빨리 손을 써 시파이와 코로네이아에 군대를 보냈고, 음모의 노출을 눈치챈 반정 거사자들이 내응하지 않아 계획이 틀어져버린 상황에서, 전군을 동원하여 델리온에 도착한 힙포크라테스는 이틀하고 반나절 동안 아폴론 신전과 성역 주변에 해자를 파서 그 흙으로 방벽을 쌓고 말뚝을 박아 요새의 형태를 갖춘 다음, 주력부대는 앗티케 쪽으로 후진 배치해놓고 요새 수비대와 함께 요새 마무리 작업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 사이 보이오티아 각 도시들이 보낸 군대가 타나그라에 집결했고, 모이고 보니 아테나이 군이 앗티케 쪽으로 돌아가고 있어 무구를 놓고 싸우려 하지 않자, 보이오티아 연합군의 수석 지휘관인 테바이의 파곤다스가 나서 나가 싸울 것을 주장하며 무기를 내려놓은 보이오티아 사람들에게 도시의 안전과 자유에 대해 한마디 했습니다. 나라를 침범한 자들이 나라를 점령하려고 우리 땅에 요새를 만들고 군대를 주둔시켜놓았는데 본대가 돌아갔으니 이제 우리는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냐고 묻고, 침공한 적은 나라 안이든 바깥이든 대항에 싸워야지 어느 것이 현명하냐 따지고 있을 일이 아니라고 일갈한 다음, 그 침략자가 아테나이라면 더더욱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될 일이라며, 본디 이웃한 나라 사이는 결연한 의지만이 자유를 보장하는 법인데, 더구나 그 이웃이 더불어 살기에 가장 위험한 아테나이라면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는 우리의 결의만이 우리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득하고,176 곧 저녁이 올 무렵이었지만 신속히 군대를 인솔하여 아테나이 군에게 노출 되지 않을 곳에 진을 쳤습니다. 아테나이의 힙포크라테스도 본진에 전령을 보내 전투 준비를 시키고, 델리온을 지킬 수비대에 300명의 기병을 더해주어 자체 방어에 나서도록 조치한 다음 본진으로 갔고, 파곤다스는 따로 델리온의 아테나이 요새를 견제할 부대의 배치가 끝나자, 10,000명의 경무장보병까지 전열에 세운 전체 부대가 언덕 위로 올라서며 전투 개시를 알렸고, 진격을 외치기 전에 힙포크라테스도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말합니다. 남의 땅에 들어와 위험을 자초하다니라 생각해서 되겠느냐며, 이 전투에서 우리가 이기면 보이오티아 기병의 도움이 없어지므로 펠로폰네소스 군대가 우리에게 쳐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우리는 보이오티아와 우리의 안전과 자유를 얻게 된다며, 전에 우리 아버지들이 오이노퓌타에서 이기고 보이오티아를 차지했듯이,177 우리도 앞으로 나아가 싸우자고 격려했습니다.178 얼핏 서로가 한쪽씩 무너지며 대등해보이던 전투에서 먼저 테바이 본진이 우세를 보였고, 이에 파곤다스가 기병부대 둘을 밀리는 아군에 보내 지원하자 우세하던 아테나이군이 협공당하는 줄 잘못알고 도망치면서 밤이 되어 어쩔 수 없을 때까지 산지사방 도망자들에 대한 도륙으로 전투가 끝났습니다. 다음날이 되자 도망쳤던 아테나이 군대가 델리온과 오로포스로 모였다가 델리온 수비대만 남기고 배를 타고 아테나이로 돌아갔고, 보이오티아 군대도 전사자들 처리를179 맡을 수비대만 남기고 타나그라로 돌아가 델리온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보이오티아는 델리온 탈환을 준비하는 한편, 전령을 보내 아테나이가 부당하게 아폴론 성역을 점령하여 헬라스 관습을 어기면서 불경스레 훼손하고 요새를 세운 만큼 먼저 성역에서 떠나야만 전사자들의 시신을 돌려받을 것이라고 자진 철수를 종용했는데, 이에 아테나이는 성역의 점거가 침략자들을 막을 거점으로 쓰기 위해서고 헬라스 관습에 따라 성역으로 보살피고 있으며 설사 불경이 있었다 해도 전쟁이나 위험에 직면한 부득이한 처사였으므로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며, 오히려 성역을 전사자들의 시신과 거래하려는 것이 더 불경스럽다는 비난과 함께 즉시 휴전하고 시신을 거두어 갈수 있게 하라고 요구하자, 전령은 아테나이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떠나버려 시신 처리가 미루어지고 말았습니다. 보이오티아는 즉각 멜리사 만 출구를 막고, 지원 차 왔으나 오로포스 전투를 놓친 코린토스와 메가라 지원군까지 합세시켜 델리온을 공격했고, 열이레나 버티던 아테나이 수비대도 새로운 기계장치까지 만들어 펼치는 화공을180 견디지 못하고 요새를 두고 배로 돌아갔는데, 더러는 죽고 200명이 포로가 되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테나이 전령이 시신 인도를 요구하자 델리온을 탈환한 뒤라 두말없이 돌려주어 아테나이가 수습한 시신은 장군 힙포크라테스를 포함하여 1,000구에181 가까운 숫자였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시파이 반정이 불발하는 바람에 점령과 주둔 전략이 퓔로스와는 달리 델리온에서 무참히 깨어지고 있을 무렵, 나우팍토스로 돌아가던 데모스테네스는 무슨 만회라도 하는 심정이었는지 기왕에 모인 동맹군들에게 여비라도 좀 안겨줄 셈이었는지 브라시다스에게 용병을 대어준 보복이었는지 무단히 시퀴온을 공격했지만 상륙지점에서부터 반격을 받아 몇몇이 죽고 포로로 잡히면서 퇴각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퓔로스 시작된 아테나이의 행운이 마치 불패의 화신인 양 나대는 오만에 눌려 사그러지고 있었음에도 아테나이 사람들만은 여전히 자신감에 넘쳐나고 있었고, 아테나이는 돌이킬 수 없는 궁지에 몰려야만 정신차릴 것이었습니다.
11.124. 그해 겨울 델리온이 탈환될 무렵, 트라케 오드뤼사이의 왕 시탈케스가 같은 트라케의 트리발로를 치다가 죽고 그의 조카 세우테스가 자리를 이었습니다. 헬라스 전쟁 첫해에 이미 마케도니아의 페르딕카스와 함께 아테나이의 동맹이 되어 칼키디케 지역을 공략하며 아테나이의 이 지역 세력 확장에 일조했고, 이듬해에도 포테이다이아를 지키던 수훈갑 아리스테우스가 포함된 펠로폰네소스의 페르시아 사절단을 잡아 아테나이로 보냈고 아리스테우스가 죽자 포테이다이아의 항전 의지도 꺾였었지요. 후계자가 선왕만큼 아테나이에 우호적인 활동가가 아닌 한182 아테나이는 트라케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칼키디케에서 세력을 더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시탈케스의 죽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미 칼키디케 도시들의 호응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군대까지 지원받은 브라시다스는 칼키디케의 아르나이에서 그가 세운 원정의 최종 목표인 스트뤼몬 강 하구의 암피폴리스로 출동했습니다. 암피폴리스에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아닌 내응자들이183 있었고, 브라시다스는 아무도 모르게 내응자들의 도움으로 암피폴리스로 들어가기 위해 눈까지 내리는 험한 날씨에 밤길을 따라 최대한 빨리 움직여 밤중에 아르길로스에 들어갔고, 새벽에는 강을 건너 암피폴리스로 가는 다리를 손쉽게 장악한 뒤 다리 너머 암피폴리스 성벽 바깥의 모든 것들을 점령하고 유린했지만, 기대했던 내응이 없어 성을 공격하지 않고 기다렸는데, 사실 내응자들이 나서려 했으나 성 안이 혼란에 빠져 있었음에도 반대자들이 더 많아 성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이제 반대자들은 수비대장 에우클레스 장군의 지원을 받아 타소스에 있던 투퀴디데스에게 알렸고, 투퀴디데스가 7척의 함선으로 암피폴리스로 향하는 동안 이런 사정을 파악한 브라시다스가 성안에서 항전의 의지가 굳어지기 전에 스스로 성문을 열 조건을 제시했고, 누구든 성을 떠나고 싶으면 닷새 안에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나갈 수 있고 성에 남는 사람은 누구든 재산을 그대로 소유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하자 성안이 설왕설래에 분주했고, 이때다 싶어 내응자들이 호응하고 나섰고, 암피폴리스는 조건을 수락하고 브라시다스를 성으로 들였습니다. 투퀴디데스는 암피폴리스가 열린 것을 알고 인근의 자매도시인 에이온이라도 구할 작정으로 저녁 늦게 입항하여 방어를 준비하면서 암피폴리스에서 나온 사람들을 수용했고, 브라시다스 역시 암피폴리스 안정을 뒤로 하고 바로 에이온 공격에 나섰으나 수륙 양공 모두 밀리자 돌아와 암피폴리스는 물론 인근의 안정에 전념했는데, 페르딕카스도 찾아와 도왔지만 역시 브라시다스의 온건한 처신과 헬라스 해방자 자임이 많은 아테나이 동맹도시들의 순조로운 이탈을 가져왔습니다. 아테나이로서는 더 이상의 이탈을 방치할 수 없어 한겨울임에도 동맹도시들을 지킬 수비대를 보내야 했고, 이에 브라시다스는 스파르테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암피폴리스에서 삼단노선 건조에 나서면서 계속 주변 도시들을 공략해나가는 가운데 그해 겨울이 지나갔고 전쟁 여덟 번째 해도 가버렸습니다.
11.12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하데스의 페리클레스와 아르키다모스는 그들이 일으킨 전쟁이 이렇게 여덟 해나 계속되면서 헬라스 사람들이 사는 세상 곳곳으로 길어지고 넓혀지고 깊어진 것을 보면서 무슨 말들을 나누었을까요? '이건 아니야'라며 당장에 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 하데스에서 뛰쳐나올 수도 없을 만큼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전쟁 양상을 보며 서로 한숨만 쉬고 있는 걸까요? 포테이다이아를 함락하기 위해 세 해 동안 2,000탈란톤의 거금을 쏟아부은 자신의 전략과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화살 하나 돌 하나 던지지 않고 암피폴리스 사람들 누구나 받아들일 너무나 공정하고 원만한 조건만 내고 하루만에 함락시킨 브라시다스 전략과의 차이에 대해 페리클레스는 아르키다모스에게 무어라 변명했을까요? 그리고 그 페리클레스는 한 세대 앞 파우사니아스가 청동솥에 새기어 페르시아 항전의 공로로 도시를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던184 플라타이아를 전쟁 다섯째 해에 완전히 소멸시켜야 했던 아르키다모스로부터 헬라스 도시의 해방자 스파르테가 안전과 자유를 지켜줄 것이라며 스스로 아테나이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하라고 선동하는 브라시다스의 감당 못할 약속에 대해 무슨 변명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암피폴리스를 잃은 아테나이에게 오직 제국의 건사가 중요했듯이 브라시다스의 성과와 뒷감당해야 할 해방자의 소임에는 관심조차 없는 스파르테는 오로지 아테나이에 잡혀 있는 동등인 120명의 건사만 중요했으므로, 전쟁 아홉 번째 초봄부터 이들은 그 한 해 동안의 휴전을 합의하고 우선 어수선해진 주위를 정리한 다음 서로에게 좋은 일이 무엇일지 그래서 더 긴 기간의 포괄적인 방법은 없겠는지 살펴보기로 했지요. 그러나 스파르테가 가볍게 여긴 브라시다스의 해방은 암피폴리스 점령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행을 관망하던 칼키디케 도시들에게 강력한 자주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아테나이의 동맹도시가 된다는 것은 정체를 바꾸고 조공을 바치는 종속의 대가로 처음은 페르시아 잔당의 위해나, 그 뒤로는 마케도니아처럼 또 다른 아테나이가 되고 싶은 헬라스 도시들의 위해나, 아니면 헬라스 사람들의 세력 확장을 막으려는 트라케 같은 인근 이어족들의 위해로부터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얻는 것을 의미했는데, 페르시아를 잊은 지는 이미 오래고 페르디카스의 야욕은 마케도니아 안의 이어족들에게 쏠려 있고 트라케의 광포한 시탈케스마져 죽어 만일 그들 곁에 더 이상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해칠 상대가 없다면 그 때문에 택해야 했던 종속에 매일 필요가 없어지고, 그래서 그 종속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온전한 안전과 자유를 가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경우 아테나이가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위해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였습니다. 아울러 아테나이에의 종속이 자신과 정파의 이익을 보장받고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는 최선의 길이라 믿는 내부의 아테나이 추종자들이 얼마나 직접적이고 강력한 위해자가 될 것인지도 간과하였습니다. 해방자 제우스를 방불케 하는 온건한 브라시다스의 암피폴리스 함락은 왜 아테나이가 그들을 종속시키고 있는지 아테나이가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그들이 자주나 독립을 외치는 순간 아테나이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또 내부의 아테나이 추종자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지 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와 체념과 두려움을 가시게 만들기에 그저 그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테나이는, 지금도 여전히 여러분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아테나이를 따르지 않고 돈도 바치지 않는 도시를 그냥 둘 리가 없지요. 그냥 두어 어느 한 도시가 온전히 안전과 자유를 누린다면 어느 도시가 아테나이를 따르고 돈을 내겠습니까? 그런 도시의 안전과 자유는 반드시 말살시켜야 할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가 그들 안전과 자유의 가장 강력한 위해자라는 사실을 보이지 않으면, 해방자 제우스나 스파르테의 브라시다스도 이것만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이지 않으면 누구도 아테나이에 돈을 바치려 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암피폴리스의 함락은 아테나이에게는 당혹이자 제국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이런 판에 독립하는 도시들에게 해방자 스파르테가 와서 동맹이 되어준다는 브라시다스의 언행이 증명된다면 이것은 참으로 끔직한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전쟁 아홉 번째 해, 이 한 해의 휴전 동안 아테나이는 스파르테가 애달파하는 동등인 포로를 지렛대로 예전의 30년 휴전과 같은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평화를 제시하여 스파르테가 해방자 브라시다스를 암피폴리스는 물론 칼키디케와 트라케에서 스스로 거두어들이도록 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11.126. 아테나이와 스파르테 사이에 장기적 포괄적 평화가 논의를 위한 단기 휴전이 진행되는 동안 포테이다이아 아래 펠레네 반도의 스키오네가 아테나이에서 이탈하여 브라시다스를 해방자로 받아들였고185, 브라시다스는 수비할 병력과 다음에 지협의 포테이다이아와 아래 쪽 멘데를 공략할 군대까지 주둔시켰는데, 마침 양국 사절들이 도착하여 휴전 내용을 전하자 모두가 수용했지만 아테나이의 사절 아리스토뉘모스가 스키오네의 이탈에 대해서 휴전 비준 후의 일이라며 조약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고, 브라시다스는 비준 이전의 일이라며 포기를 거부했고, 아테나이가 즉각적인 응징을 준비하자 스파르테는 휴전협정 위반이라며 중재를 제의했고, 중재라는 변수가 싫은 아테나이는 클레온이 나서 스키오네의 파괴와 주민의 도륙을 결의하면서 만사를 제치고 이 결의 시행에 매달렸습니다. 이 와중에 스키오네를 지키는 브라시다스의 결기를 본 멘데가 스키오네를 응징하려는 아테나이도 휴전협정 위반 아니냐며 협정 위반을 무릅쓰고 아테나이를 이탈하자, 분개한 아테나이는 두 도시에 대한 공략을 준비했고, 브라시다스는 두 도시의 아녀자들을 포테이다이아 건너의 올륀토스로 소개하고 펠로폰네소스 중무장보병 500명과 칼키디케의 경무장보병 300명을 폴뤼다미다스에게 주어 스스로 방어태세를 갖추는 두 도시를 돕게 했습니다. 이제 아테나이가 이 두 도시를 칠 것이고 그래서 그 한 해의 휴전은 깨어질 것이었습니다. 급한 대로 스키오네와 멘데를 지켜주는 일까지 챙긴 다음, 암피폴리스까지 뛰어와 도움을 주는 페르딕카스의 바람을 모르는 척할 수 없던 브라시다스는 아테나이가 준비해서 펠레네로 오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다고 보고 아르라바이오스의 땅으로 두 번째 원정에 나서주었지요. 그들의 땅에 들어서자 이미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륑코스 군대를 맞아 기병전에 이은 중무장보병전으로 적을 완파했지만, 확실한 정벌을 위해 페르디카스가 고용했다는 일리뤼콘 용병의 도착이 며칠 늦어지자 브라시다스는 펠레네로 들이닥칠 아테나이 군 걱정과 용병의 보강 없는 진격이 꺼림칙해 철수를 원했고, 며칠 머무는 동안 근질근질해진 페르딕카스는 용병 합류 전이라도 먼저 도시를 공격하자고 주장해 서로 진퇴를 놓고 엇갈렸는데, 그 일리뤼콘 용병들이 배신해 륑코스 군대와 합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서로 철수에 동의하면서도 이번에는 철수 날짜를 정하지 못해 하루밤을 더 보내는 동안, 밤중에 페르딕카스 진영에서 헬라스 사람 군대를 제외한 마케도니아 와 다른 지역 군대가 고향으로 돌아가버리자 놀란 페르딕크스가 브라시다스 진영에 연락도 없이 철수했고, 새벽에 일리뤼콘 용병과 아르라바이오스 군대가 공격하려는 걸 보고서야 사태를 파악한 브라시다스는 부대를 밀집 방진으로 갖추어 철수하면서 적과 대응케 했고, 자신은 300명의 직할부대를 이끌고 제일 후진에서 적의 선두를 격퇴하며 따라갔고, 마지막 국경 인근의 언덕을 두고 벌인 접전에서 먼저 언덕을 점령하여 포위하고 공격하려는 적의 주력부대에 앞서 그의 직할부대 300명을 보내 언덕을 점령하자 적은 포기했고, 브라시다스는 같은 날로 페르딕카스 땅의 첫 마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지요. 마을에 도착하자 난리가 났습니다. 화가난 펠로폰네소스 군대가 마을을 뒤집어버렸거든요. 이 일로 페르딕카스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거래를 끊고 다시 아테나이로 붙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다시 토로네로 돌아온 브라시다스는 멘데가 아테나이 군에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펠레네로 간들 별수가 없어 우선 토로네 방어에 집중키로 했습니다. 브라시다스가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을 무렵 니키아스와 니코스트라토스가 이끄는 50척의 함대는 아테나이를 떠나 포테이다이아로 갔고, 거기서 다시 멘데로 가서 니키아스와 니코스트라토스가 군대를 나누어 공격했으나186 폴뤼다미다스가 지휘하는 펠로폰네소스 중무장 용병과 스키오네와 멘데의 중무장보병의187 선방에 막혀 봉변만 당하고 물러났고, 이튿날 아테나이는 스키오네의 외곽 농촌을 유린하였으나 스키오네는 아테나이로부터 이탈 문제로 정파 간에 다투느라 방관했고, 그날 밤에 멘데에 지원 갔던 300명이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에도 니키아스는 군대의 반을 이끌고 스키오네와 멘데의 접경을 약탈했고, 니코스트라토스는 나머지 반으로 멘데의 포테이다이아로 통하는 성문을 공격했는데, 마침 그곳은 멘데 군대와 폴뤼다마다스와 펠로폰네소스 군이 무구를 풀고 쉬던 데라 그는 휘하 군대에 무장하여 전투 대형을 갖추라면서 멘데 군에게 나가싸우기를 요청하자 민중파 군인 하나가 자기들은 나가지 않을 것이고 전쟁도 필요없다고 반발했고, 이에 폴뤼다마다스가 그를 잡아 거칠게 다루자 같은 민중파 군인들이 펠로폰네소스 군과 멘데의 다른 정파 군인들을 향해 공격했고,188 불시에 공격하면서 성문을 열어주자 그들이 아테나이와 공모한 줄 알고 살아남은 자들은 피난성채로 도주했고, 성문이 열리자 니코스트라토스 부대와 마침 유린을 마치고 합류한 니키아스의 부대까지 들어왔고, 아테나이 군이 마치 도시를 함락시킨 군대처럼 약탈하자 지휘관들이 나서 겨우 도륙만은 막았고, 도시를 장악하게 되자 반란 전의 정체를 유지시켜주어 반란 책임자를 재판에 회부토록 했고, 피난성채를 봉쇄하는 담을 바다까지 쌓아 수비대가 감시토록 한 뒤, 스키오네로 돌아가면서 멘데는 다시 아테나이의 수중에 들게 되었습니다. 아테나이 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스키오네는 바위 언덕에 방어진을 쳤으나 저지에 실패했고, 아테나이 군은 도시 봉쇄벽을 쌓기 시작했고, 봉쇄벽이 완성되자 겨울이오기 전에 수비대만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봉쇄벽을 쌓기 시작한지 얼마 뒤 멘데의 피난성채에 있던 펠로폰네소스 지원군들은 바다 쪽 수비대를 피해 스키오네로 와서 봉쇄벽을 쌓던 포위대 사이를 뚫고 들어갔습니다. 봉쇄벽을 쌓는 동안 페르딕카스는 전령을 통한 아테나이 장군들과의 협상 끝에 아테나이와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니키아스가 신뢰성을 보이길 요구하자 마침 브라시다스와 합류키 위해 스파르테에서 오고 있던 이스카고라스와 그의 군대의 테살리아 통과를 저지하려 테살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럼에도 이스카고라스와 그의 군대는 브라시다스와 무사히 합류했고, 브라시다스는 그들과 함께온 클레아리다스를 암피폴리스 행정관으로, 파시텔리다스를 토로네의 행정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스키오네와 멘데에서의 군사 행동 이외에도 테바이가 아테나이와 친하다는 이유로 같은 보이오티아의 테스피아이를 공격해 성벽을 허물어버렸는데, 테스피아이는 지난해 초겨울 오로포스에서 아테나이와의 전투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죽어 방어력이 허약해진 걸 짓밟은 것이었고, 겨울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만티네이아와 테게아가 각각의 동맹들과 함께 싸운 일이 있었고, 새봄에 브라시다스가 포테이다이아를 함락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는 일을 끝으로 전쟁 아홉 번째 해도 저물었습니다.
11.12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아테나이는, 특히 클레온은, 전쟁 열 번째 해 봄에 휴전이 끝났음에도 일체 군사 행동을 벌이지 않고, 오로지 암피폴리스와 칼키디케와 트라케에서 이탈한 도시들을 탈환할 원정 준비에 집중했습니다. 이 해에 아테나이가 조용히 델로스 섬에서 섬 주민들을 이주시키면서까지 델로스를 또 한번 정화한 것을 보면189 아테나이가 이 원정에 얼마나 신경 쓰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여름 퓌토 경기가190 끝나자 클레온은 30척의 함선에 아테나이 중무장보병 1,200명과 기병 300명 그리고 다수의 동맹군을 태우고 직접 원정 길에 올랐습니다. 먼저 스키오네에 들러 봉쇄벽 수비대 가운데서 중무장보병을 차출해 자신의 원정군에 합류시켰고, 브라시다스가 토로네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진격에 나섰고, 따로 10척의 함선을 토로네 항으로 보내 수륙 양면으로 공격했는데, 토로네 행정관 파시텔리다스가 수비대를 이끌고 방어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성벽 안 도시로 물러났을 때는 아테나이 해군이 이미 들어와 있었고 이어서 육군들까지 쇄도해와 백병전을 벌였지만 대개 죽고 파시텔리다스를 포함한 일부는 포로로 잡히면서191 토로네가 함락되었습니다. 이 무렵 시켈리아의 레온티노이 민중파들이 도움을 요청해 파이악스와 두 명을 사절로 2척의 함선을 보내 관심을 표시하긴 했지만 아테나이는 오로지 클레온의 활동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토로네를 함락시킨 후 클레온은 함대를 이끌고 해안을 따라 에이온에 갔고, 그곳을 거점 삼아 스타기로스를 공격해보기도 하고 갈렙소스를 함락시키기도 하면서 페르딕카스의 지원군과 트라케 오도만토이 왕 폴레스가 보내줄 용병들이 합류하면 암피폴리스를 칠려고 그들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브라시다스 역시 트라케 용병 1,500명과 에도노이와 뮈르키노스 그리고 칼키디케에서 경무장보병 1,000명도 확보하여 기존의 중무장보병 2,000명과 기병 300명에 보탰는데, 이 가운데 1,500명을 뽑아 클레온의 움직임을 지켜볼 수 있는 강 건너 아르길로스땅 언덕 케르뒬리온에 진을 쳤고, 나머지는 암피폴리스에 있는 클레아리다스에게 배치해놓고 있었습니다. 브라시다스는 틀림없이 자신의 군세가 브라시다스보다 크다고 본 클레온이 지원군이 합류하기 전이라도 암피폴리스로 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과연 클레온이 자기 군대가 증원군만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는 자신과 브라시다스와 비교하며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증원군은 전투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암피폴리스를 포위하여 힘으로 누르기 위해서라며 사기도 올릴 겸 정찰도 할 겸 군대를 움직여 암피폴리스로 나아갔습니다. 물론 우선은 퓔로스 때처럼 아무도 대적하러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정찰 중 적이 움직이면 언제라도 철수하면 될 것이었으므로 암피폴리스 앞의 전망 좋은 언덕에 진을 치고 지형을 살폈는데, 암피폴리스는 성문도 닫혔고 성벽 위도 조용한 게 아무도 지키지 않는 것 같아 공성기만 가져왔다면 당장이라도 함락시킬 수 있어 보였습니다. 클레온의 움직임을 파악한 브라시다스는 진지에서 철수해 암피폴리스로 돌아갔고, 자신과 함께 적의 본진을 뚫어 혼란에 빠트릴 중무장보병 150명을 직접 뽑아 기습에 나서면서 적진 혼란에 빠지면 바로 전군을 몰고나와 적진에 뛰어들라 당부했고, 클레온은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로 들어간 것을 보고 정찰을 위해 더 다가갔고, 성문으로 인마가 몰린다는 보고를 받고 현장 상황을 살폈으나 증원군 없이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철수를 명령했는데, 창끝과 머리가 돌아선 적군을 본 브라시다스가 목책으로 통하는 성문으로 달려나가 한길로 아테나이군 중앙을 바로 공격했고, 무질서한 퇴각으로 불안하던 아테나이군은 브라시다스 돌격대의 공격을 받자 응전할 생각도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고, 이때를 기다린 클레아리다스가 트라케 문에서 쏟아져 나와 공격에 나서자 이미 에이온으로 향하던 아테나이군의 좌익은 완전히 본진에서 이탈했고, 우익을 공격하던 브라시다스가 부상을 입어 들려나왔고, 아테나이군 우익은 클레아리다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잘 버텼지만 그냥 도망치기에 바빴던 클레온이 뮈르키노스의 무명 방패병에게 잡혀 죽자192 아테나이군 전체가 도주했고, 그들은 여러 경로를 거쳐 에이온으로 살아서 돌아갔습니다. 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펠로폰네소스군은 도시로 후송되었으나 이내 죽고만 브라시다스를193 포함해 7명이 전사했으나, 아테나이는 클레온을 포함하여 600여명이 전사했고, 시신을 돌려받은 아테나이군이 뱃길로 귀국하자 클레아리다스는 암피폴리스에 대한 업무처리에 매진했고, 여름의 끝에 스파르테가 보낸 900명의 중무장보병 증원군은 중간에 다른 도시 행정 간섭하느라 지체되어 힘도 보태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11.128. 스파르테의 람피아스 일행이 암피폴리스로 출전하기 전에 이미 이들이 감지할 수 있었던 평화에 대한 기대는194 암피폴리스 전투가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의 주전파 클레온과 브라시다스를 하데스로 인도하는 바람에 두 도시의 화평파 니키아스와195 플레이스토아낙스로196 하여금 그렇지 않아도 전쟁을 멈추고 싶던 두 도시 사람들에게 그들이 당면한 문제들, 이를테면 델리온과 암피폴리스에서의 잇단 패배로 제국을 이탈하려는 도시들이 한꺼번에 반기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하는 아테나이의 고민이나 헤일로타이들의 잦은 탈출과 반란에 대한 우려나 아르고스와의 휴전을 갱신할 수 없을 경우 맞게 될 아테나이와 아르고스 두 도시를 상대로 한 동시 전쟁에 대한 우려들을 심각하게 설명하면서 이 모든 문제의 해법이 전쟁이 아니라 평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협상은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까지 이어졌고, 스파르테가 앗티케에 각 동맹들의 보루를 세우겠다는197 위협도 가했지만 아테나이가 끝까지 메가라의 니사이아 항을 포기하지 않자,198 펠로폰네소스 동맹에서 보이오티아, 코린토스, 엘리스 그리고 메가라가 반대하는 가운데 나머지 도시들의 찬성을 얻어 스파르테는 전쟁 동안 얻은 것은199 모두 원래대로 반환하되 니사이아 항은 아테나이가 가진다는 조건으로 50년 평화조약을200 체결했습니다.
11.12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4대 주축 도시들 가운데 스파르테를 뺀 나머지 도시들이 반대하는 평화조약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이 지켜야 할 조건들을 스파르테 혼자 지켜내기 힘든 약속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추첨에 따라 펠로폰네소스 쪽이 먼저 전쟁으로 얻은 것들을 내놓아야 해서 스파르테는 포로들을 석방했고, 이어서 칼키디케와 트라케에 사절단을 보내 클레아리다스에게 암피폴리스를 아테나이에 넘겨주라 지시했고, 나머지 동맹도시들에게도 조약에 정해진 사항들을 받아들여줄 것을 요청했지만, 클레아리다스는 칼키디케 사람들 핑계로 또 동맹도시들은 자국 이익에 반한다며 모두 이행을 거부했고, 사절과 동행해 스파르테로 온 클레아리다스는 암피폴리스 반환이 여의치 않으면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이라도 데리고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스파르테는 다시 동맹들의 대표를 모아 조약의 준수를 요청했지만 조약이 불공정하다는 똑같은 이유로 거부당하자 그들을 돌려보내고, 스파르테와 아테나이가 동맹을 맺는 협상에 들어갔는데, 이는 이미 평화조약의 갱신을 거부한 아르고스나 평화조약을 거부하는 도시들이 아테나이와 붙어 스파르테의 위협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아테나이와 스파르테가 서로를 방어하는 데 힘을 합친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사족처럼 스파르테에 노예반란이 일어나면 아테나이가 총력을 다해 돕는다를 붙여, 내용도 매년 서약을 갱신하며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첨삭을 합의해가는 조건으로 50년 상호동맹조약을201 체결했습니다.
11.13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에이온은 지켰으나 암피폴리스가 함락된 책임에 몰려 아테나이에서 추방된 투퀴디데스는 자기가 책임진 그 암피폴리스의 함락이 헬라스 세상에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연다는 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 평화를 받아들인 도시 사람들은 아테나에서의 구금에서 비로소 풀려나 스파르테로 돌아온 동등인들만큼 새로운 평화가 주는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앗티케의 농부 디카이오폴리스도 앗티케의 포도밭 주인 트뤼가이오스도 그랬듯이 말이지요.
11.131.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 평화는, 헬라스 내전 열아홉 번째 해 봄부터 일찌기 스파르테의 아기스 왕이 또 다시 앗티케를 침공하여 데켈레이아에 요새를 세우고 그곳에 주둔하면서 스파르테와 아테나이 간에 직접적인 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 적어도 이 앞에서 벌어졌던 10년의 전쟁 시간만큼 오래 이어져야 했음에도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짧은 평화조차 과연 진정한 평화였을까 의문을 가지는 이유는 그 기간 동안 아테나이가, 스파르테 역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또 다른 10년의 평화, 아니 50년의 평화를 이을 기틀을 마련하기는커녕 오히려 지난 10년의 전쟁보다 더 혹독히 헬라스 세계를 망칠 다가올 10년의 전쟁을 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202 이제 저는 50년의 평화와 서로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주기로 약속한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어떤 행위들이 헬라스 세상을 또 다시 전쟁으로 몰아갔는지 그 행위들의 동기와 결과와 함께 짚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다시 시작된 헬라스 내전으로 헬라스 세상의 도시들과 도시민들이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능력과 의지를 어떻게 스스로 손상시켜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가고자 합니다.
11.132. 그러면,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먼저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쪽에서 일어난 일들부터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왜냐하면 이들끼리의 관계가 이들과 아테나이 사이의 관계보다 감정적으로203 지역적으로204 정치적으로205 군사적으로206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테나이와의 관계라는 것은 싫건 좋건 아테나이에 따르거나 아니면 싫다 하다 전쟁을 벌이거나 일방적인 공격 앞에 도시 자체가 없어지거나 하는 문제라 너무나 간단했지요. 오로지 군사적 해법만 있었으니까요.
11.13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스파르테가 평화조약에 아테나이와 상호동맹까지 맺는 것을 본 펠로폰네소스 동맹도시들의 사절단들은 평화조약에 찬성했던 도시들조차도 스파르테와 아테나이가 서로 서약한 범위 안에서 합의하면 동맹의 역활을 덧붙이거나 뺄 수 있다는 조항에 놀랐고, 그렇게 더하고 뺄 때 스파르테가 모든 동맹도시들의 동의를 받는다는 조항을 넣지 않은 데 격분했고, 이윽고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와 합세하여 아테나이처럼 그들 도시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가지고 사절단들이 스파르테를 떠났고, 그 가운데 평화조약부터 반대했던 코린토스 사절단은 돌아가는 길에 아르고스에 들러 스파르테를 제치고 펠레폰네소스의 패권도시가207 되고 싶은 그들의 허영에 불을 지르며 펠로폰네소스를 구하기 위해 새로운 동맹 결성을 주도하라 권했고, 지난 10년의 헬라스 내전에서208 홀로 벗어나 있는 동안 힘이 쌓인209 아르고스 사람들은 이제 곧 30년 휴전이 끝나면 어차피 스파르테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을 테고, 아테나이와의 동맹 때문에 스파르테를 떠날 도시들을210 그들의 동맹도시로 엮으면 스파르테도 꺾을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스파르테가 누리던 펠로폰네소스의 패권을 그들이 거머쥘 것이어서, 12명의 특별 사절을 뽑아 그들에게 스파르테와 아테나이를 빼고는 헬라스의 어떤 도시와도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헬라스 세상을 돌게 했습니다. 그래서 생긴 펠로폰네소스에서의 첫 이탈자가 아르고스의 허욕에 콧김을 불어넣은 코린토스가 아니라 만티네이아였던 이유도, 스파르테가 아테나이를 상대하는 동안 조금씩 이웃 아르카디아를 침범해 이제는 그 땅의 상당 부분을 가진 자기들을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스파르테를 자기들과 정체도 같은 아르고스와 함께 상대해야겠다는 속셈 때문이었지요. 아르고스나 만티네이아나 서로 단결하여 스파르테를 상대해야 할 처지에 있었던 겁니다. 만티네이아의 아르고스 행을 지켜본 다른 도시들의 동요를 모를 리 없고, 바람을 넣은 코린토스가 아르고스 쪽에 붙는 걸 가만 둘 리도 없는 스파르테가 코린토스에 사절을 보내 서약을 어기면서까지 이탈하지 마라 경고했고, 코린토스는 아테나이로부터 솔리온이나 아낙토리온을 돌려받지 못한 불만을 터놓지 않는 대신, 칼키디케와 트라케의 동맹도시들 핑계로 서약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얼버무리면서 아르고스와의 동맹은 가까운 도시들과 상의해서 결정하겠다고 답했고, 스파르테 사절들은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자마자 레프레온 문제로211 스파르테와 척져 있던 엘리스의 사절이 코린토스로 찾아와 동맹을 맺은 뒤 다시 아르고스로 가서 동맹을 맺었고, 이어서 코린토스도 칼키디케의 도시들과 함께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었는데, 처음부터 아테나이와의 평화부터 반대했던 보이오티아와 메가라는 서로 공동보조로 관망하고 있었고,212 특히 보이오티아는 아테나이와 50년 평화는 아니지만 매 열흘 단위로 휴전을 갱신해나가는 방법으로 아테나이와 휴전하고 있었습니다.213 한편 본격적인 세 확장에 나선 아르고스와 코린토스는 테게아의 합류를 원했으나 좌절되자, 본을 본 다른 도시들이 움직이지 않을 거란 염려 때문에 의기소침한 코린토스는 아르고스와 함께 보이오티아를 찾아 동맹을 맺어 공동보조로 움직이자 요청하는 한편, 함께 아테나이로 가서 자기들도 같은 열흘짜리 휴전협정을 맺도록 해주고, 안 되면 발효 중인 열흘짜리 협정을 파기하고, 차후 코린토스를 빼고는 아테나이와 어떤 조약도 맺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르고스와의 동맹 문제는 시간을 달라며 미룬 보이아티아는 코린토스와 함께 아테나이로 갔지만, 코린토스가 스파르테의 동맹인 이상 이미 50년 평화의 당사자라 코린토스와 같은 열흘짜리 휴전협정을 맺을 수 없다며 거절당했고, 이에 코린토스가 아무리 호소하고 항의해도 열흘짜리 휴전의 실효를 통보하지 않았습니다. 코린토스와 아르고스와 보이오티아가 서로 소득 없는 왕래만 하고 있는 동안, 이탈자들에 대한 응징에 나선 스파르테는 클레아리다스와 휘하의 군대를 암피폴리스로부터 소환하여 참전한 헤일로타이들을 약속대로 해방시켰고, 이미 해방되었던 자들과214 함께 엘리스가 문제 삼는 레프레온에 정착시켜 엘리스에 대비했고, 플레이스토아낙스 왕은215 전군을 이끌고 아르카디아에 있는 만티네이아 땅 파르라시아로 출동하여 요새를 허물고 외지인들을 소탕하고 파르라시아 사람들의 도시로 독립시켜 만티네이아를 견제토록 한 뒤 돌아왔습니다. 이런 스파르테의 군사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테는 지켜보는 동맹들의 신임도 받지 못했고, 그들이 스파르테에 따르지 않아 돌려받을 것을 돌려받지 못하는 아테나이에게 믿음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코린토스가 앞장선 아르고스 중심의 새로운 동맹체제 결성도 견제하지 못했습니다. 중무장 시킨 헤일로타이 부대로 펼친 브라시다스의 활약을 보았지만, 그들이 이제 헬라스 내전 이후 점점 줄어드는 동등인의 보완이 될 것이라 믿을 수도 중용할 수도 없다는 관습의 한계에 더해216, 스팍테리아에서 항복해 포로가 되었던 동등인들의 귀환이 가져다준 상호 신뢰에 생긴 미묘한 틈새는217 스파르테의 대외 문제 해결에 군사적 방법보다는 외교적 수단에 의존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스팍테리아 포로 송환조차 후회하며 강경하게 반대하는 아테나이 사람들을 설득해 아테나이가 퓔로스에 수비대만 남기고 멧세니아 사람들과 이탈한 헤일로타이들을 케팔레니아 섬으로 이주시키게 했지만, 스파르테 사람들은 아테나이의 선의에 기댄 평화와 외교가 그다지 마뜩치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아테나이와 평화와 동맹의 조약을 체결한 이듬해 겨울 스파르테 사람들이 새로 뽑은 에포로스들 가운데는 분명히 이 두 조약을 반대하는 사람이 둘이나218 있었으니까요. 새로 뽑힌 에포로스들과의 상견례도 하고 한 해가 다 가도록 조약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의논도 할 겸 스파르테의 동맹도시들 사절이 모였고, 수많은 말들이 오갔으나 무엇 하나 합의한 것 없이 모두들 돌아갔습니다. 아테나이와의 평화를 깨고 싶은 두 에포로스 클레오불로스와 크세나레스가 돌아가는 보이오티아와 코린토스의 사절단을 따로 만나 그들의 생각을 털어놓았는데, 보이오티아가 아르고스와 동맹이 되어 아르고스를 스파르테와 동맹이 되도록 한다면, 보이오티아는 굳이 평화조약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고, 아르고스와 우호친선의 관계가 된 스파르테는 마음놓고 펠로폰네소스 바깥으로 나가 싸울 수 있으므로, 아테나이가 조약을 파기하며 적대적으로 나오더라도 감수할 수 있다고 하자, 보이오티아는 이태 전 그들이 점령한 앗티케의 변경 요새 파낙톤을219 퓔로스와 교환할 경우 스파르테가 전쟁을 재개하는 데 걸릴 게 없어지니 일단은 보이오티아의 권리로 넘겨달라 요청하고 본국에 보고하겠다며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귀국 길에 그들을 기다리던 아르고스의 고관 둘을 만났고, 보이오티아가 동맹이 된다면 아르고스는 스파르테든 누구든 전쟁을 하든 평화조약을 맺든 할 수 있다며 동맹이 되기를 요청했는데, 돌아온 사절로부터 아르고스와 스파르테의 요청을 보고받은 보이오티아의 행정관들은220 양쪽의 요청을 모두 거둘 수 있겠다 싶어 사절을 교환하며 논의를 이어가는 한편, 메가라와 코린토스와 트라케의 사절들과 함께 모여 전체의 찬성 없이는 개별적인 전쟁도 평화도 없다고 서로 서약했고, 보이오티아의 최고 의결기구의221 인준을 받는 조건으로 메가라와 함께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는다고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테의 두 에포로스의 요청 내용을 듣지 못한 의결 위원들이 스파르테에 대한 적대 행위를 반대했고, 행정관들이 위원들 설득에 나서지 않아 아르고스를 끌고 스파르테로 가서 아테나이와의 평화를 깬다는 일부 스파르테 에로포스들과 보이오티아 행정관들의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모였던 사적들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런 곡절을 모르는 스파르테 사람들은 보이오티아에서 파낙톤과 파낙톤의 아테나이 포로들을 넘겨받아 퓔로스와 바꾸면 답보하는 조약 이행에 큰 진척을 보이리라 기대하였고, 넘겨주는 조건으로 요구하는 보이오티아와의 개별 동맹조약을 내부에서의 촉구도 있고 해서 아테나이 모르게 새봄에 맺었는데, 체결이 되자마자 보이아티아는 결국 반환되면 그들을 겨눌 파낙톤의 요새를 아테나이에게 돌려주기 전에 허물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전투만 없었다 뿐이지 펠로폰네소스의 도시들은 여전히 평화를 모색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11.134. 새봄이222 되었는데도 기다리는 사절을 보내지 않던 보이오티아가 갑자기 파낙톤의 요새를 허문 것과 스파르테와 개별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르고스는 아테나이도 이 움직임 속에 같이 있다 믿었고, 그 때문에 늘 안전판으로 생각되던 아테나이와의 동맹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 여겨지자 맹주는커녕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마져 위태롭다 판단하고 스파르테 사람들이 알아주는 에우스트로포스와 이아손을 평화의 사절로 보냈고, 그들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양국 간의 문제인 퀴누리아 지역에 대한 분쟁을 중재로 해결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약속했고, 스파르테는지난 30년과 같은 조건의 평화를 고집했는데, 결국 퀴누리아 지역 안에서만의 전투로 분쟁을 해결할 권리를 양측이 유보하는223 조건으로 50년 평화를 합의했고, 조약은 아르고스 민회의 승인이 나는 대로 여름의 휘아킨토스 제에서 체결키로 하고 돌아갔습니다. 한편 스파르테도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사람들 셋을 골라 파낙톤에서 요새와 포로를 받아 넘기라고 아테나이로 보냈는데, 보이오티아는 여기가 옛날에 아테나이와 서로 가축을 방목키로 한 곳이라 요새를 허물었으니 포로만 데려가라 했고, 그런가 보다 하고 포로를 데려가 넘겨주고 파낙톤 요새가 허물어진 사정을 전했더니, 발끈한 아테나이가 거친 말로 스파르테 사절들을 돌려보냈습니다.
11.13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테나이로서는 두 개의 조약이 체결된 후에 보인 스파르테의 행동들을 면밀히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파르테는 함께 트라케 사람들을 눌러 암피폴리스를 완전히 원상으로 돌려놓아야 했음에도 일방적으로 철군해버리지 않나, 함께 평화조약 거부 도시들을 눌러 헬라스를 온전한 평화로 돌려놓아야 했음에도 살짜기 보이오티아와 따로 동맹을 맺지를 않나, 그밖에 사사건건 따질 일이 한둘이 아닌 판에 보이오티아가 파낙톤의 요새를 허문 것을 아무 것도 아닌 듯이 본다니 이건 아예 우리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화가 치솟았지요. 그 동안 평화 분위기에 눌려 어디 보자 얼마나 갈지 하며 관망만 하던 사람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전쟁으로 노를 저어야 먹고사는 테티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맨 앞에는 전쟁으로 출세하고 전쟁으로 권력 잡고 전쟁으로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드러내고 싶어 죽는 집안 좋고 풍채 좋은 알키비아데스가 있었습니다. 전쟁만 할 수 있다면, 그 전쟁으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알키비아데스가 있었습니다. 그 전쟁 때문에 그를 키운 아테나이를 배반한들 그게 무슨 대수며, 그 전쟁 때문에 그와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 세상을 배신한들 그 또한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 전쟁 때문에 스파르테에 종군하고 그 전쟁 때문에 헬라스 세상에 이어족을 불러들인들 도대체 그것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전쟁으로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드러내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할 알키비아데스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므로 평화가 못마땅한 사람들 앞에 이제 장군으로 뽑혀 전쟁을 주장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알키비아데스가 자신 있게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깨야 벌어질 그의 전쟁은 그의 오만과 허영이 죽어야 끝날 것이었습니다.224 그는 첫 출진한 포테이다이아 전투에서 소크라테스와 같이 나가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전공戰功도 양보받아225 도시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기병으로 나갔던 델리온에서의 후퇴 때는 소크라테스의 신령이 가르쳐준 길을 따른 덕분으로226 라케스와 함께 무사히 아테나이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왠지 그 뒤부터 점점 전투에 자신이 붙었고, 이제 전쟁만 하면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아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쟁만 있으면 장군이 되고 권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미 그 전쟁으로 잡은 권력과 명예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니키아스 때문에 50년 평화라니, 그 황당함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그 전쟁이 스파르테와라면 금상첨화인데 하필이면 스파르테와 평화라니, 전쟁을 해야 권력을 쥐어나갈 젊은 알키비아데스가 평화라야 권력을 지켜나갈 늙은 니키아스나 라케스를 상대로 아테나이를 평화가 아닌 전쟁의 길로 이끄는 싸움을 시작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가 지난 이태 동안 그토록 평화를 반대했던 것은 정말로 스파르테의 태도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평화의 대화에 어리다고 본 척도 않고 끼워주지 않는 데 대한 반발이 더 컸기 때문이기는 했지만, 이제 그 이태 동안 스파르테가 보여준 행동이 이유야 어떻든 자신의 반대가 옳았음을 만천하에 증명해주고 있었으므로, 젊은 알키비아데스는 자신감에 넘쳤고, 지금부터는 자신이 아테나이를 전쟁터로 움직여 나갈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확신에 찬 그에게 아직도 남은 문제는 여전히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신만큼 자기를 믿어 자신의 확신을 펼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자신의 확신을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펠로폰네소스 내부의 평화를 깨고 그들의 전쟁에 그와 아테나이가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11.136. 여름이 올 무렵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의 전쟁을 위해 그가 맨 처음 한 짓은 아르고스와 만티네이아와 엘리스가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도록 한 것이었는데, 그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보내 자기가 지원할 테니 아르고스가 만티네이아와 엘리스와 함께 아테나이로 와서 동맹 맺기를 요청하라 했고, 스파르테보다 아테나이가 그간의 관계나 체제를 보아 더 친숙한 아르고스는 만티네이아와 엘리스와 함께 사절을 보내자, 스파르테도 이들의 움직임을 막고 퓔로스 반환도 요청할 전권사절들을 보냈는데, 그는 퓔로스 반환을 조건으로 스파르테 사절들이 민회에서 전권사절임을 부인토록해 아테나이 사람들이 협상을 주장하는 스파르테와 니키아스의 무성의함에 반발해 아르고스를 택하도록 만들었고, 다급해진 니키아스가 직접 스파르테의 성의를 확인하러 아테나이의 사절들을 데리고 갔으나 빈손으로 다녀오자, 분노한 아테나이는 기다리고 있던 아르고스와 만티네이아 그리고 엘리스 사절들과 100년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의 계획은 성공했고, 누구보다 먼저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으라 아르고스를 부추겼던 코린토스는 이런 진행을 지켜보면서도 어느 한편에도 가담치 않았고, 다만 펠로폰네소스 안에서 일어날 스파르테의 다음 행동들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제일 먼저 엘리스가 스파르테를 긁고 나섰습니다. 엘리스가 스파르테의 성역 접근을 금지시켜 제물도 못 올리게 하고 올륌픽 경기 참가도 막은 것이었습니다. 엘리스는 스파르테가 올륌픽 휴전기간에 퓌르코스를 공격하고 레프레온에 중무장보병 1,000명을 보냈다며 벌금 2,000므나를 매겼는데, 스파르테가 휴전 선포 전의 일이라며 벌금 납부를 거부했고, 엘리스가 여러가지 다른 방도를 내며 해결책을 찾았지만 스파르테가 모두 거부하는 바람에 올륌픽 경기가 열리는 동안에도 참가들이 스파르테의 무장 병력 출현을 두려워했지만, 스파르테는 스파르테 사람이 심판들에게 폭행당하는 불상사에도227 올륌픽 축제가 무사히 끝나도록 자중했습니다. 여름이 다 가도록 코린토스를 당기는 아르고스와 저지하려는 스파르테의 신경전이 계속된 가운데, 겨울에는 트라키스의 헤라클레이아 요새 인근 부족들은 처음 요새가 생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적대시하고 해코지해오다가 드디어 공격에 성공하여 요새를 완전히 파괴하고 스파르테 지휘관 크니디스의 아들도 죽이는 전과를 올렸는데, 혹시 펠로폰네소스 분란을 노리고 아테나이가 점령할까 염려하여 늦봄에 보이오티아가 이곳을 다시 점령하고 스파르테의 행정관 아게십피다스를 축출하자, 분노한 스파르테와 보이오티아 사이에 이런 소소한 공방이 새로운 불화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11.137. 헬라스 내전 열세 번째 해 여름, 50년 평화를 서약한 뒤 세 번째 여름, 드디어 장군이 된 알키비아데스는228 서너 명의 아테나이 중무장보병과 궁수들을 대동하고 아르고스와 그 동맹들의 협조 아래 펠로폰네소스로 들어가서, 거기서 동맹도시들의 군사들을 모으고 군대를 만들어 돌아다니면서 성벽을 늘이라거나 요새를 새로 세우라며 동맹의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고,229 이를 위협으로 간주한 코린토스와 시퀴온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 막긴 했지만, 나아가 아테나이의 지원 군대 항로를 줄이기 위한 에피다우로스 편입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그 뒤 아르고스가 목초지 사용료 문제로 트집을 잡아230 에피다우로스 침공을 준비하고 있을 때, 스파르테의 아기스가 목적을 감춘 채 동맹 군사들도 포함한 전군으로 출동한 일이 있었는데, 국경을 넘기 전에 친 점이 불길하여 출동을 다음 한 달231 뒤로 미루고 돌아가자, 아르고스가 신성한 달까지 아직 나흘이 남았다며 에피다우로스를232 침공해 약탈했습니다. 지원을 요청받은 에피다우로스의 동맹도시들은 신성한 달을 핑계로 오지 않거나 움직여도 국경 근처에서 머뭇거렸고, 아르고스와 에피다우로스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사이 아테나이가 주선한 여러 도시들 간의 만남이 만티네이아에서 열렸고, 평화를 얘기 하기 전에 일단 대치 상태를 풀자는 코린토스의 제안으로 현장으로 가서 철수를 확약받은 다음 돌아와 논의를 계속했으나 합의에 실패하자 아르고스가 다시 에피다우로스로 들어가 약탈했습니다. 스파르테도 지원군을 움직였으나 이번에도 점괘가 좋지 않아 돌아섰는데, 아테나이도 알키비아데스가 1,000명의 중무장보병을 데리고 나섰다가 스파르테의 귀국을 알고 돌아갔고, 이 와중에 아르고스는 에피다우로스 땅의 1/3이나 유린하고 약탈했습니다. 그리고 여름과 함께 약탈자 아르고스가 돌아가자 에피다우로스 문제는 잠시 일단락되었었는데, 겨울과 함께 스파르테가 헤라클레이아에서 보이오티아에게 쫓겨났던 아게십피다스에게 300명의 수비대를 붙여 아테나이 몰래 뱃길로 에피다우로스로 보내자, 아르고스는 아테나이가 이를 막지 않았다며 응징을 요구했고, 아테나이는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에 따라 조약문 돌비석 하단에 스파르테의 위약을 새기고, 퓔로스에서 이주시켰던 헤일로타이들을 도로 보내 분탕질시키는 정도로 끝냈는데, 아르고스와 에페다우로스는 겨우내 상방 많은 사상자를 내며 매복과 유격을 이어갔고, 봄에 아르고스가 사다리까지 동원해 공성을 시도했지만 별무소득으로 돌아가면서 또 다시 잠시 에우다우로스 문제를 접어두게 되었습니다.
11.138. 이듬해233 한여름에 스파르테가 동맹들을 플레이우스에234 총집결시키며, 아기스 왕에게 헤일로타이까지 포함된 전군을 주어 출동케 했습니다. 아르고스가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고 난 뒤 공공연히 에피다우로스를 괴롭히고, 아테나이의 알키비아데스까지 보란 듯이 설쳐대는 꼴을 볼 수 없어, 지난해 한번 움직여보려 했으나 내키지 않은 억지 걸음에 점괘까지 좋지 않아 잘 됐다 하고 돌아섰었는데, 에피다우로스의 곤궁은 더해가고 동맹들도 일부는 반발하고 일부는 떨어져나갈 기세라 더는 미루지 못하고 움직인 것이었지만, 그렇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스파르테는 평화가 필요했습니다. 평화가 필요했던 것은 전쟁 때문에 도시와 도시민이 너무 지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테나이는 전쟁으로 도시가 번성한다고 믿었지만, 스파르테에게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닌 한 전쟁은 헛된 도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스파르테는 전쟁으로 어떤 재물도 권력도 얻으려 하지도 얻지도 않았고, 그것들을 위해 전쟁을 벌일 필요도 그럴 이유도 그렇게 하지도 않았던 도시였습니다. 스파르테가 10년의 전쟁으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피곤하고 쇠약해진 도시만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쇠약해진 도시와 도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휴식과 재충전이었습니다. 휴식과 재충전은 평화의 시간이라야 가능할 것이었으므로 주위의 도발에도 은인자중했습니다만, 약탈에 재미 붙인 아르고스를 그냥 두고는 펠로폰네소스가 잠잠할 수 없을 것이었고, 그렇게 아테나이를 낀 아르고스 때문에 펠로폰네소스끼리의 분쟁이 계속된다면 펠로폰네소스는 더욱 더 피폐해지고 허약해질 것이고, 그것은 상대적으로 더 강해지는 아테나이로 하여금 또 다시 제국 확장의 야욕을 드러내게 할 것이었으므로 이 참에 한번 나서서 아르고스를 꺾어놓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모처럼 동맹들도 의기투합해 보이오티아와 코린토스도 많은 정예군을 동원해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플레이우스로 가던 아기스가 마침 대응에 나선 아르고스와 그 동맹의 군사와 아르카디아 메튀드리온에서 조우했지만 아기스는 전투를 피해 밤에 이동하여 플레이우스로 갔고, 동맹군을 셋으로 나누어 아르고스 벌판으로 진군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아테나이 군대를 기다리며 아르고스는 그들이 포위되어 위험하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일촉즉발의 전투에 앞서 아르고스의 장군 다섯 가운데 하나가 아기스에게로 가서 아르고스에 대한 스파르테의 불만은 중재로 다루고 조약을 맺고 평화를 이루자고 제안했고, 아기스도 스파르테의 고위직 한 명에게만 알리고 이를 수락하며 아르고스가 이미 약속했던 사안들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아르고스와 스파르테 사이에 자의적인 일부만 간여한 넉 달짜리 휴전을 맺고는 동맹들에게 설명도 없이 철군을 결정해버리자, 네메아에서 행해진 스파르테 동맹의 해단식에서는 보병과 기병의 절대적인 우위에235 걸맞는 군사행동도 없이 철군하는 것에 대한 비난과 불만이 팽배했고, 아르고스는 아르고스 대로 절대적 우위의236 승리 기회를 놓쳤다며 철군하는 도중에 휴전을 맺은 장군 트라쉴로스에게237 돌을 던지고 재산을 몰수할 정도로 비난과 불만이 높았지만, 막상 아테나이가 보낸 1,000명의 중무장보병과 300명의 기병이 도착했을 때는 4개월짜리 휴전을 지키고 싶어 아테나이 군대에게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사정을 알고 아테나이가 아르고스 민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자고 요청했고, 만티네이아와 엘리스 군대도 돌아가지 않고 압력을 가하자 민회가 열렸고, 민회에서 알키비아데스가238 전쟁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고, 동맹들이 동조해 곧바로 아르카디아의 오르코메노스 침공에 나섰고, 마지못한 척 아르고스도 그 뒤를 따라 공격에 합류했습니다. 오르코메노스가 첫 공격 목표가 된 것은 그곳에 스파르테가 잡은 아르카디아 인질들이 구금되어 있어 그들을 풀면 아르카디아를 돌려세울 수 있다고 본 때문이었는데, 오르코메노스는 공격을 견딜 수도 없고 지원군도 올 것 같지 않아 인질을 내고 동맹이 되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다음 공격 목표를 두고 엘리스가 레프레온을, 만티네이아는 테게아를 주장했는데, 아르고스와 아테나이가 테게아로 정하자 화가 난 엘리스는 철군했고, 나머지 동맹군은 내부의 도움도 받을 테게아로 향했습니다. 한편, 오르코메노스 함락 소식은 철군 후 온갖 비난과 불만의 대상이 된 아기스에게 불똥으로 튀겨져 스파르테 사람들이 집을 뭉게고 벌금을 물리자며 그에게 달려들었고, 아기스가 전쟁에 나가 승리로써 잘못을 갚겠다고 간청하자 10명의 감독관을 붙여 그들이 동의하지 않는 철군을 없다는 조건으로 출전을 허용했고, 마침 테게아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급보가 들어와 아기스는 일찌기 보이지 않았던 움직임으로 재빨리 군대를 편성해 테게아로 나아갔고, 동맹들에게 지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아르카디아 군대와 합류해 만티네이아로 들어갔고, 헤라클레스 사당 옆에 진을치고 인근을 약탈하는 것으로 전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아르고스와 동맹군은 접근하기 어려운 언덕에 진을 쳤고, 아기스는 공격을 감행하려다 노병의 질타에 물러섰고,239 아르고스 진영에서는 물러서는 적군을 그냥 둔다는 비난에 몰려 들판으로 내려와 진을 쳤고, 물러선 다음 테게아로 들어가 강물의 물길을 돌리던 아기스가 다시 처음 쳤던 진지로 돌아가다가 어제까지도 언덕에 있던 적들이 내려와 가까운 곳에 전투 대형으로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대경실색한240 스파르테군은 아기스의 명령에 따라 지체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스파르테와 그 동맹들은 좌우에 기병을 배치하고 그 가운데로 가장 왼쪽부터 스키리티스241, 브라시다스의 트라케 군대, 해방된 헤일로타이242, 그리고 중군으로 아기스 왕과 그 근위대 300명을 포함한 스파르테 부대들, 그 오른쪽으로 아르카디아, 마이날리아, 테게아, 다시 스파르테 부대243가 대열을 펼치고 있었고, 이에 맞선 아르고스와 그 동맹은 가장 오른쪽에 만티네이아, 그 다음 아르카디아, 아르고스의 정예 중무장보병244, 아르고스의 일반 부대, 클레오나이, 오르네시아, 그리고 아테나이가 그들 기병대와 함께 왼쪽 끝에 서서 대열을 이루어, 만티네이아 벌판은 두 진영의 전투 대열로 꽉 채워졌습니다. 만티네이아 지휘관은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싸우자고 격려했고, 아르고스 지휘관은 그들의 옛 패권과 펠로폰네소스에서 분점한 권력을 상기시키며 주변 도시들에게 국경을 침공당한 수모를 되갚자고 격려했고, 아테나이 지휘관은 훌륭한 펠로폰네소스 동맹들에게 그들이 누구 못지않음을 보여주자며 스파르테를 이기면 제국은 더 안전하고 더 크게 늘어날 것이라 격려하고 진군한 반면, 스파르테는 훌륭한 전사이니 전에 배운 것들을 기억하라며245 서로에게 격려하고 군가를 부르며 피리소리에 맞춰 진군했습니다. 대열이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진영이 오른쪽으로 밀려246 아르고스 진영의 오른날개 만티네이아는 스파르테 진영의 왼날개 스키리티스보다 바깥에 나가 있었고, 스파르테의 오른날개 테게아와 스파르테 군대는 아르고스의 왼날개 아테나이보다 더 바깥에 나가 있었는데, 이를 본 아기스는 스키리티스와 브라시다스의 트라케 군대의 왼날개가 포위되어 힘을 못쓸까봐 왼날개들을 더 왼쪽으로 옮기게 하고 빈 자리를 스파르테의 두 개 부대로 메우라고 장군들에게 지시했는데, 이들 둘이 거부하여247 메우지 않은 빈 자리를 스키리티스와 브라시다스의 트라케 군대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만티네이아 군대가 먼저 들어와 그들을 흩어버렸고, 이어서 아르고스의 정예부대도 함께 빈 자리로 들어가, 스파르테 진영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테에는 작전의의 실패를 만회할 용감한 전사들이 있었는데, 이 엉망인 자리의 패주와는 달리 아기스 왕과 300명의 근위대와 함께한 스파르테 진영 중군이 바로 그들이어서, 그들의 앞에 있는, 본디 테게아와 스파르테 부대 하나 앞에 있었어야 되는 아르고스 부대, 클레오나이, 오르네아이, 그리고 아테나이 군대를 덮쳐나갔고, 이들를 공격하여 패주시키자 아르고스 진영이 반으로 나누어졌고, 벗어나 있던 테게아와 스파르테의 부대가 이들을 에워싸서 타격을 가하자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고, 이를 본 아기스가 중군과 오른날개 부대들에게 아르고스의 정예와 만티네이나 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왼날개 부대들을 지원하라 지시했고, 스파르테의 진영이 모두 왼쪽으로 움직이는 사이 아테나이와 다른 아르고스 진영 부대들이 도망쳤고, 스파르테 진영의 모든 부대가 왼쪽으로 몰려오자 만티네이아와 아르고스 정예부대들도 모두 도망쳐248 전투가 마감되었습니다. 도망치는 군대를 쫓아가지 않는 전통에 따라 전투는 그것으로 끝을 맺었지만, 쌍방이 동원한 군대가 아주 큰 규모여서249 사상자가 많았는데, 아르고스 진영은 아르고스, 오르네이아, 클레오나이 가 700명, 만티네이아가 200명, 아테나이와 아이기나가 두 명의 장군을 포함해 200명, 도합 1,100명이 죽었고, 스파르테 진영에서는 모두 300명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온 전투는 지난 10년의 전쟁 기간 중에도 없었으니, 50년 평화니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동맹이니 하는 조약은 이 전투로 휴지 조각이 된 것이었습니다.
11.139. 혹시나 해서 스파르테의 플레이스토아낙스 왕이 신병들과 노병들로 모은 증원군을 데리고 왔다가 승전 소식에 돌아갔고, 코린토스와 펠로폰네소스 바깥에서 오던 동맹군들도 돌아가게 한 다음, 전장의 뒷처리도 끝낸 스파르테와 동맹의 군대도 모두 귀국했습니다. 스파르테로서는 스팍테리아 섬의 포로들이 인질이 되는 바람에 그동안 아테나이와의 전투에 소극적이어서 동맹들로부터 불만에 찬 비난을 들어야 했는데, 이번 만티네이아 전투의 승리로 이를 불식시켰고, 스스로도 옛 기백을 되찾아 모처럼 카르네이아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테나이로서도 200명의 손실이 있었지만, 스파르테도 그만큼의 손실을 입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력이 스파르테의 전력이 되어 그들 모두가 잠재적인 아테나이의 적이 될 수도 있다고 보면, 아테나이의 손실로 적은 6배의 손실을 입은 셈이니 별로 억울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테나이는 퇴각 후 남은 부대에 오히려 지원군 1,000명을 더 보냈고, 엘리스가 보낸 3,000명과 함께 만티네이아에 주둔해 있다가 스파르테가 축제에 들어간 걸 보고,250 만티네이아 전투 전날 아르고스 땅을 기습했던 에피다우로스로 진격하여 도시를 가두어둘 방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만티네이아와 엘리스는 대충 쌓는 척하다가 돌아가 버린 반면 아테나이 만은 자신들의 뱃길을 지켜줄 헤라이온 곶에 충실하게 요새를 세운 뒤 수비대까지 남기고서야 여름의 끝에 귀국했습니다.
11.140. 축제가 끝나고 다시 군대를 출동시킨 스파르테는 테게아에서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강화하여 평화로 갈 것인지 묻는 사절을 아르고스에 보냈는데,251 아르고스가 동의해 군대는 철수하고 교섭이 진행되었고, 아르고스의 과두정파가 주도적으로 이끌어,252 아르고스와 스파르테 서로는 물론 펠로폰네소스 도시들 각자의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분쟁은 중재로 해결하며, 조약 가입 역시 모두에게 열고, 동맹군의 활동은 모두에게 공정한 것인지 따져 결정하고, 개인 간의 분쟁은 전통에 따라 조정하는 50년 평화와 동맹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양국은 서로에게 돌려줄 것을 돌려준 후, 정책에서도 공조하였는데, 아테나이가 펠로폰네소스를 떠나도록 했고,253 트라케와 마케도니아의 페르딕카스도254 그들의 동맹에 들어오도록 했고, 아르고스가 없어 무력해진 만티네이아를 스파르테와 같은 협정을 맺도록 하고 아르카디아에서의 종주권을 포기토록 했고, 양쪽이 1,000명씩 군대를 동원해 시퀴온에 가서 시퀴온의 정체를 과두정 쪽으로 바꾸도록 했고, 아르고스의 정체 역시 민주정에서 과두정으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11.14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해 겨울 조약을 맺고 아르고스의 과두정파가 스파르테와 함께 여러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아르고스의 민주정파는, 이듬해 여름255 스파르테의 귐노파이디아이256 축제가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과두정파를 상대로 시내에서 전투를 벌여 여럿을 죽이고 나머지는 도시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것은 지난해 아르고스의 정체를 바꾸어놓은 뒤 새 여름이 될 때까지도 아카이아 지역 도시들의 정체도 계속해서 바꾸어가던257 스파르테가 아르고스의 내전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아니 오히려 그런 분란을 방치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쫓겨난 아르고스 사람들이 스파르테의 출병을 요구했고, 축제를 핑계로 미적거리다가 축제를 연기해서 출정은 했지만, 테게아까지 나갔을 때는 이미 민주정파가 내전을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친 과두정파들의 간곡한 호소에도 그냥 뒤돌아와 축제를 열었고, 얼마 뒤 스파르테에 동맹 사절들이 모였을 때는 아르고스 민주정파와 추방된 과두정파의 사절들이 와서 동맹들 앞에서 서로를 비난하자 논의 끝에 동맹들은 민주정파가 잘못했다 판정하고 아르고스로 군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의해놓고도 출동을 미루고만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조마조마해진 아르고스의 민주정파는 다시 아테나이에 동맹을 요청하는 한편,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그들 도시를 봉쇄해도 아테나이의 도움으로 바다를 통해 생필품을 보급받을 수 있도록 아르고스와 외항을 잇는 긴 성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웃 도시들의 잘 될까 하는 비웃음의 방관 속에 노예는 물론 아녀자까지 총동원하고 아테나이의 기술자들의 지원도 받으며 여름이 다가도록 열심히 쌓아나갔지만, 여름 농사의 수확을 끝내고 겨울이 와서 여유가 생긴 스파르테가 그때서야 코린토스도 부르지 않고 나머지 펠로폰네소스 동맹군만 데리고 출동하여, 아르고스의 실권자들이 내응하겠다는데도 아르고스 공격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저 아르고스가 쌓고 있던 성벽만 까뭉개버리더니, 자꾸 까불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 양인 듯 인근의 작은 도시 휘시아이를 유린하여 그곳 자유민을 모조리 도륙해버린 다음, 각자 그들의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아르고스의 민주정파는 무슨 일만 있으면 스파르테로 달려가는 과두정파가 스파르테만큼 위협적이어서 스파르테에 도발하지 않는 한 아르고스의 내정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스파르테의 일관된 신호를 받아들일 겨를이 없었고, 오로지 그들의 권력을 위해 반드시 과두정파를 끝장내야 했으며, 그러다 보니 허약해지는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탱하기 위해 아테나이, 특히 알키비아데스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펠로폰네소스의 패권을 잡겠다던 그들의 포부와 자신감은 만티네이아에서의 단 한 번 전투 뒤로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다시금 패권을 되찾아가는 스파르테나, 그런 스파르테가 벌이는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에 대한 순무행렬에 아르고스를 시종처럼 따라다니게 하는 과두정파를 두고볼 수도 없었으므로, 흩으진 세勢와 기氣를 모아258 내전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과두정파 사람들이 죽거나 내쫓겨야 했고, 이 때문에 쫓겨났거나 아직 도시에 남은 정적들의 반격을 막는 데 도시의 힘을 쏟아야 했으며, 그 때문에 앞으로는 도리에이스 사람들인 자신들의 안전과 자유를 도리에이스 사람도 아닌 이오네스 사람들의 도시인 아테나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당장은 스파르테가 긴 성벽을 허물고 작은 도시 하나를 유린하는 것으로 똑같은 신호를 보내고 돌아갔지만, 그들의 정적들은 언제든지 스파르테를 다시 불러들일 것이어서, 무엇보다 먼저 쫓겨난 정적들이 거처를 얻어 모여 있는 플레이우스로 가서, 먼저 그들을 받아들인 플레이우스를 응징하고, 그들을 흩어버려야 했습니다.
11.14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 다음의 아르고스 행적에 대해서는 수시로 이야기가 나올 것이므로 그때 그때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지금부터는 50년 평화를 받아들인 다음에도 변하지 않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와 우리들 아테나이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10년의 전쟁 끝에 얻은 50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왜 그 앞의 30년 평화가 깨어졌는지, 그래서 벌였던 10년의 전쟁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또 다시 50년 평화를 받았는지 곰곰히 따져본 다음,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해나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30년 평화가 깨진 것은 우리 아테나이의 늘 이긴다는 오만하고 탐욕적인 제국 확장 때문이었고, 그래서 더 이상 두었다간 그들까지 당해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위험을 감지한 스파르테의 아르키다모스 왕이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군대를 이끌고 앗티케로 쳐들어왔기 때문이며, 이후 10년에 걸친 전쟁을 벌이다 갑자기 50년 평화를 받아들인 것은, 그 전쟁 동안 우리 아테나이가 이겼다고 파이안을 부르며 세웠던 승전탑이 셀 수 없이 많았음에도 두어 번 진 싸움 중에 겨우 한 번인 우리 아테나이 제국이 가진 재산의 상징 같았던 암피폴리스에서 져서 암피폴리스를 잃고 나서야, 그래서 우리 제국의 도시들이 하나씩 둘씩 제국을 이탈할 기미를 보이고 나서야, 그 숱한 승리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와 우리 아테나이 사람들을 더욱 안전하고 더욱 자유스런 생활을 누리도록 해주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디카이오폴리스나 트뤼가이오스 같은 앗티케 농부들의 평화로운 삶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마져 사는 것에 지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역병으로 도시 사람들 3분의 1이 죽어나가도 버텼던 전쟁이었는데 10년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앗티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배를 젓는 노꾼이며, 중무장보병들이며, 기병들이며, 심지어 장군들조차 우리들 모두가 지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가 제국의 도시들로부터 걷어들이는 수익의 재미에서 멀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 때문에 황폐해진 제국의 도시와 도시민들로에게 따로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대로는 우리들 모두의 생활이 더 나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50년 평화는 단지 니키아스 같은 장군들뿐만 아니라, 디카이오폴리스와 트뤼가이오스 같은 남자들뿐만 아니라, 뤼시스트라테259거나 미카와 크뤼틸라260 같은 아테나이 여자들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0년의 전쟁에 지친 스파르테와 아테나이가 필요했던 이 50년 평화는 조약 그 자체로 그들에게 휴식을 주는 평화가 되지 못했는데, 스파르테가 불복하거나 돌아서는 동맹들을 간수하고 도전하는 아르고스를 억누르느라 쉴 여가도 없이 수시로 전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며, 아테나이 역시 돌아오지 않거나 떨어져나가려는 동맹들 다독이느라 쉴 여가도 없이 제국 단속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었고, 전쟁 때문에 피폐해진 제국으로부터의 수입은 전쟁 전의 영광을 기억하는 우리 아테나이 사람들의 성을 결코 달랠 수 없어, 탐욕이 빚어낸 그 성을 채우기 위해 10년의 전쟁 전에 30년 평화를 깼던 제국 확장의 길로 또 다시 나서도록 아테나이를 몰아냈기 때문이었습니다. 혼자 30년이나 쉬어 따로 더 휴식이 필요 없었던 아르고스 때문에 스파르테가 평화의 휴식을 못다 즐기고 전쟁의 길로 다시 접어들어야 했듯이, 이제 출세의 길로 나서 권력을 잡을 더 많은 전쟁이 필요했던 젊은 알키비아데스 때문에 아테나이는 제국 단속에서 내친 김에 확장으로 나아가 또 다시 전쟁의 길로 접어들 것이었습니다.
11.143. 휴전 이듬해 여름 스파르테가 엘리스의 이탈을 알면서도 레프레온에 수비대를 보냈을 무렵, 칼키디케의 악테 반도에 있는 아테나이의 동맹 튓소스가 디온의 침공을 받아 점령당하는 일이 생기자,261 아테나이 동맹을 넘보거나 이탈하려는 도시들에게 본보기도 보일 겸262 제국 단속에 나선 아테나이가 제국의 도시들 가운데 제일 먼저 손을 본 곳은 클레온이 도시를 없앤다고 미리 민회의 결의를263 받아놓은 칼키디케의 스키오네였습니다. 아테나이는 함대를 보내 스키오네를 함락하고,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아녀자들은 모두 노예로 팔아치우고, 다섯 해 전 그들의 도시가 없어지고 난 후 아테나이로 망명했던 플라타이아 사람들에게264 주어 거주토록 했습니다. 그렇지만 스키오네를 작살낸 아테나이 군대는 암피폴리스는커녕 튓소스로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50년 평화는 아테나이 군대가 스스로 트라케의 여러 부족을 상대로 싸워 암피폴리스를 회복할 길을 막았고, 그렇다고 암피폴리스에 사는 트라케 사람들에게 도시를 아테나이에게 넘기라 할 수 없는 스파르테는 브라시다스의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으로 평화의 약속을 지키는 성의를 보였지만,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오히려 제국 단속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평화 때문에 암피폴리스를 되찾을 수 없고, 그런 평화 때문에 제국을 단속할 수 없어 속이 타는 아테나이에게 이듬해 스파르테가 요새가 허물어진 파낙톤을 돌려주자, 우리 아테나이 사람들은 제국을 단속할 수 없는 평화라면 버려도 좋다고 마음 먹게 되었습니다. 스파르테를 골탕먹이면서 펠로폰네소스 안에 가두어두기 위해 알키비아데스에게 장난감으로 준 아르고스가 만티네이아에서 패배해 약간의 차질은 있었지만, 아르고스가 그들끼리의 내전 끝에 다시 아테나이로 돌아온 것으로 스파르테를 적당히 눌러둘 수 있게 되자, 어쩐지 그동안 손해만 본 것 같은 기분을 만회라도 하려는지 드디어 아테나이는 제국의 단속을 넘어 제국의 확장에 나섰습니다.
11.14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 열다섯 번째 해 겨울, 아기스가 다시 아르고스로 나와 바다로 이어지는 긴 성벽을 허물고 있을 때, 아테나이는 아르고스 내부의 안정을 염려하는 한편, 아르고스 때문에 다시 스파르테에 붙은 마케도니아의 페르딕카스의 비협조 때문에 니키아스를 보내 자력으로 암피폴리스를 회복하려던 시도가 무산된 것에 대해 응징했고, 이듬해 전쟁 열여섯 번째 해 여름 알키비아데스는 20척의 함대로 아르고스로 가서, 아직 아르고스에 남은 과두정파 300명을 잡아, 아테나이가 지배하는 이웃 섬들에 가두었습니다. 어느 정도 주변 정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동맹들을 동원해 38척에 중무장보병과 궁수와 기마병으로 3,000명이 넘는 원정군을 멜로스265 섬으로 보냈습니다. 일찌기 멜로스 섬은 도리에이스 사람들이 이주해 살았는데, 퀴클라데스 섬들 가운데서 오래 중립을 지켜왔고, 헬라스 내전 개전 당시에도 테라266 섬과 함께 펠로폰네소스에도 아테나이에도 가담하지 않고 지냈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테나이 동맹에 가입하라며 10년 전에267 니키아스가 60척 함대와 2,000명의 중무장보병으로 섬을 공격하고 약탈했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버텨냈었는데, 10년 뒤 다시 똑같은 이유로 아테나이 동맹군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 장군들은268 섬에 상륙해 진을 쳤고, 공격 전에 협상 사절단을 보냈고, 멜로스는 섬 주민 전체가 아니라 소수의 유력자들이 사절단과 마주하여 긴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테나이는 항복하여 예속되어 살 것인가 전쟁으로 모두 죽을 것인가를 택하도록 압박했고, 멜로스는 중립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설득하려 했으나 새로운 예속자의 돈이 필요한 아테나이의 압박에 결국 항전을 택했고, 아테나이는 방벽을 쌓아 포위한 다음 장기전에 대비하며 수비대만 남기고 주력을 철수시켰고, 쌍방 간에 사소한 공방이 겨울까지 이어졌고, 아테나이가 필로크리테스에게 증원군을 주어 포위 공격을 강화했고, 결국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고통보다 자신의 그것이 더 중요한 내부의 이탈자가 나오자 멜로스가 무조건 항복했고, 이탈자는 살아남았겠지만 싸움에 진 멜로스 남자들은 스키오네의 남자들처럼 모두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아녀자들은 노예로 팔려나갔고, 700년을 스스로 안전과 자유를 지키며 독립적으로 살아왔던 멜로스 사람들의 자긍심과 스파르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와 그들을 중립국으로 인전하여 서로의 이해에 맞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함께269 멜로스와 멜로스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안전과 자유가 죽어 없어졌고, 아테나이는 나중 이 섬에 500명의 아테나이 사람들을 식민하여 멜로스를 이오네스 사람들의 도시로 재생시켰습니다. 이렇게 아테나이가 새로운 식민지 멜로스를 만들어 제국은 확장되었지만, 그만큼 아테나이가 지켜야 할 전선이 확장되었고, 한정된 아테나이의 힘도 그만큼 분산되어야 했고, 과연 그 비용을 암피폴리스도270 아니고 케르퀴라도271 아닌 그저 평범한 섬 멜로스가 감당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었고, 대살륙의 대가로 얻은 것 치고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50년 평화 시절 제국 확장의 첫걸음이었습니다.
11.145. 10년 전 함대가 얼씬거리기만 해도 그냥 손들고 엎드릴 것 같아 건드렸던 멜로스가 죽자고 버티는 바람에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고, 주변에도 한번 찍으면 끝장을 본다는 경고를 심기 위해, 버릴 수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멜로스에 여름부터 겨울까지 묶여 있다 극단적 방법으로 일단락 짓고 보니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느냐는 불만과 회의가 일기 시작했고, 그래서인지 아테나이가 택한 다음 먹이감은 역시 시켈리아272였습니다. 시켈리아는 이미 아테나이가 지난 10년의 전쟁 동안 두 번이나 라케스와 에우뤼메돈이 원정했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던 터라 반드시 끝장을 보아야 할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속 빈 강정 멜로스와는 질이 다른 영양가 높아 보이는 먹이감으로 여겨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꿈은 우리들 특유의 자신감인 오만과 부를 애써 만들기보다 애써 만든 부를 가지려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쉬라쿠사이와273 손을 잡고 셀리누스가274 자신들을 핍박하니 구해달라며 시켈리아에서 온 에게스타275 사람들의 간청에276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구미가 당겼는데, 도리에이스의 쉬라쿠사이가 이오네스 도시들을 핍박하는 걸 버려두다가는 쉬라쿠사이가 스파르테와 손잡고 아테나이 제국을 흔들 것이란 아주 좋은 명분보다는, 그들이 아직 군자금을 댈 수 있을 때 도와달라는 돈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전의 금 이야기에 정말 금이 있는지 당장 조사단을 보냈고, 물론 극도로 성실하게 분쟁 상황도 알아보라 했겠지요. 아테나이의 조사단은 이듬해277 봄에 생은 60탈란톤을 들고온 에게스타 사절과 함께 돌아왔고, 금고와 신전에 많은 돈이 있다는 엉터리 거짓 보고와 가져온 돈을 보고 매우 고무된 아테나이 사람들은 60척이나 되는 함대를 보내기로 그 자리에서 결의했고, 알키비데스와 니키아스와 라마코스에게 시켈리아 원정군의 지휘를 맡기고, 그들에게 우선 에게스타를 지원하고, 그래서 사정이 좋아지면 레온티노이 재건을278 돕고, 그밖에 시켈리아에서 아테나이에 좋은 일이 나오면 알아서 처리하도록 전권을 주는 결의를 했고, 나흘 뒤 함선들을 빠른 시간 안에 수리해 새로 꾸미는 일과 출정할 장군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다시 민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11.146. 나흘 뒤 민회가 다시 열렸고,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에 대해 나흘이나 숙고했던 니키아스가 민회에 모인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원정 준비 회의보다 과연 이 원정을 하지 않는 것이 나쁜 일인지279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며 자신의 생각은 원정이 부당하다고 밝히고, 시켈리아 원정의 가부를 재의에 부치기를 요구했습니다. 자신은 전쟁이 명예를 얻는 길이라 나섰고280 그래서 일신의 안전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며, 바꾸어 말해 자기의 안전 때문에 원정을 피하려는 건 아니라며, 시작한 연설에서 그가 지적한 부당함의 요지는, 첫째, 시켈리아 원정으로 제국을 넓히고 더 많은 재물을 얻는다는 이루기 힘든 모험에 지금의 평화로 얻는 이익을 걸어서는 안 되는데, 군사력 반을 시켈리아로 보내고도 아테나이가 안전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지금의 평화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간과하는 것이고, 둘째, 제국 안에서도 반기를 든 도시들을 미쳐 다 응징하지 못한 판에, 그래도 그들은 응징하여 다잡으면 복속이라도 하지 시켈리아는 멀고 사람도 많아 설사 정복한들 복속시켜 지배하기 어렵고, 실패하면 새로운 적만 만들 판이니 그런 판은 열지 말아야 하며, 셋째, 에게스타는 쉬라쿠사이를 그냥 두면 시켈리아가 그들 손아귀에 들 것이고, 그후 스파르테와 손잡고 아테나이를 위협할 것이라 겁주지만, 이럴 땐 오히려 움직이지 않거나 움직여도 시위만 하면서 명성으로 누르는 것이 좋으므로, 헬라스 사람도 아닌 에게스타를 위해 싸우기보다 우리에게 일격을 가해 그동안 우리에 당한 수모를 갚고 용맹 스파르테라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 경계하고 있어야 하며, 넷째, 역병과 전쟁으로 바닥난 돈과 사람이 지난 몇 년의 평화로 겨우 만회되고 있는데 이 자원을 우리를 위해서 써야지 거짓말로 도움을 청하며 위험을 남에게 떠넘기는 사람들을 위해 쓸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에게 원정을 부추기는 자로, 거명만 하지 않았을 뿐 상대가 누군지 다 아는, 알키비아데스를 지목하고, 그가 너무 젊어 장군이 된 탓에 이기적인 이유로, 즉 전쟁으로 돈을 벌어 자신의 전차 경주마 비용을 충당할 생각을 하고 원정을 부추기고 있다며, 그의 도락을 위해 도시를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며, 그가 민회에 젊은이들을 데리고 나온 만큼 나이 든 사람들이 원정 반대에 나서라고 촉구했습니다. 니키아스는 아테나이에 알키비아데스를 좋게 보고 도시를 위해 큰 일 하나 해주길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밉게 보고 그가 도시를 크게 망칠 것을 우려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해 봄에 있었던 도편추방 투표 시행281 역시 마치 참주가 되려는 듯 그 자신이나 그의 생활 방식이나 그 정신의 대단함에 관련된 것들과 그의 모든 유별난 행동들에 그가 보인 지나침에 질린 사람들이 그의 적이 되어282 그를 겨냥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니키아스가 볼 때, 그런 알키비아데스가 전쟁으로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자신에 반대하여 장군으로 시켈리아 원정은 물론, 이어서 카르케돈까지 정복하겠다고 나서려 하겠지만,283 도시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은284 너무나 뻔했습니다. 이어서 민회는 계속되었고, 몇 명의 찬반 토론 뒤에 드디어 알키비아데스도 나섰습니다. 그는 먼저 니키아스의 인신공격에 응답해 자신은 장군이 될 권리도 자격도 가졌다고 대꾸한 다음, 그가 올륌픽에 나가 실력으로285 아테나이가 전쟁 와중에도 건재함을 알리고 도시를 명예롭게 했으며, 연극의 코로스 비용을 댄다고 비아냥도 들었지만 이 역시 다른 도시에 우리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어서 이런 데 돈을 쓰는 어리석음은 도시나 개인에게 모두 좋은 일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탁월한 사람들과 보통 사람들의 만남이 낳는 부자연스러움을 예로 들며 자신을 옹호했는데, 사람들이 남의 고난을 거들떠보지도 자기의 고난을 나누어가지길 기대하지도 않듯 탁월한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거나 낮추어보는 건 부당한 게 아니며, 높은 기상과 걸출함을 지닌 사람들은 시기 받고 인기 없기 마련이라, 그걸 추구하다보니 자신의 사생활이 비난받지만, 자신이 공무를 누구보다 훌륭하게 처리해왔다는 걸 아르고스와의 동맹 건을 들어 자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젊음과 기이한 어리석음으로 펼친 외교로 아테나이의 안전이나 돈에 부담을 주지 않고 펠로폰네소스의 강자들을 엮어 반스파르테 세력을 구축했고, 그래서 스파르테가 그들의 모든 것을 걸고 만티네이아에서 이들과 맞서야 하도록 만들었고, 비록 그 전투에서는 졌지만 스파르테가 아직도 원기를 되찾지 못하도록 하지 않았냐며, 그러니 젊다고 우려하지 말고 활기찬 자신과 늘 운 좋은 니키아스를 마음껏 활용해야 한다면서, 이어서 본론인 시켈리아 원정에 대한 그의 소견을 밝혀나갔습니다. 그는 먼저 원정 결의를 바꿀 필요가 없다며 시켈리아 원정을 주장했는데, 첫째 시켈리아는 큰 도시들이 있어도 여러 민족이 잡다하게 섞여 유동이 심하고, 정치적으로도 구심점이 없어 스스로 자신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려 하기보다 여차하면 다른 도시로 옮길 생각이니 하나로 뭉쳐 대응하지 못하고 따로따로 놀 것이고, 중무장보병이 있다 하나 그 숫자가 부풀려져 있는 허약체인데다가, 우리가 쉬라쿠사이를 공격하면 그들을 미워하는 많은 도시들이 우리에게 가담할 테니 시켈리아의 점령과 제국화는 어렵지 않으며, 둘째 원정으로 아테나이의 안전이 위태하다지만, 지친 스파르테와 그 동맹이 침공해올 리 만무하고, 온다 해도 육로의 지상군 대비는 10년 전쟁에서 확인되었고, 해상으로의 침공을 저지할 충분한 함대를 남길 것이므로 우리의 도시는 안전하다면서, 마지막으로 평화로 국력을 회복하며 제국의 유지에 신경 쓰자는 니키아스를 반박하며, 동맹의 지원 요청에 응하는 것은 그곳의 우리 적들을 물리쳐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러 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종족을 불문하고 동맹의 지원 요청을 들어주었기에 제국을 이룰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종족을 따져 차별한다면 확장은커녕 제국 유지도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어느 만큼 확장해야 하는지 말하지 말고 우선 예속시킬 곳은 예속시켜 제국을 키워나가지 않으면 우리가 지배당할 위험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우리들 생활 태도를 완전히 바꾸기 전에는 우리의 선택 밖의 문제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론으로 시켈리아와의 전쟁이 헬라스에서 아테나이 힘을 키워줄 것이고, 평화에 매달리지 않는 우리의 원정에 스파르테와 그 동맹들의 기는 더욱 꺾일 테고, 원정으로 얻는 것으로 우리가 헬라스의 패권을 차지할 것이거나 아니라도 쉬라쿠사이를 약화시켜 우리와 우리 동맹들에게 이익이 되니, 본디 결의대로 원정에 나서자고 하면서, 니키아스가 아테나이를 세대로 나누는 것에 반대하고 하나로 뭉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에게스타 사절과 레온티노이 망명자들이 나서 서약을 상기시키며 원정을 요청했고, 민회의 분위기는 원정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무망한 원정 취소 분위기를 뒤집기 위해 니키아스가 내민 제안은 필요 이상의 원정군 규모였는데, 손익에 민감한 아테나이 사람들을 원정 포기 쪽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면 아주 좋고, 받아들여지면 안전한 출전이 되니 그 또한 좋은 일이라, 대단위 원정군과 충분한 군자금이 필요한 이유를 장황하게 나열한 뒤, 누가 규모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다면 그를 발탁해 원정군을 맡기라는 엄포까지 놓았습니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아테나이 사람들은 대규모 원정군이 원정의 안전과 성공을 보장하는 말로 알아들었고, 너도나도 원정의 열정에 휩싸였고, 한 사람이 나서서 결의해야 되는 그 대단위 원정군의 규모를 밝히라 했고, 니키아스가 구체적인 것은 다른 장군들과 상의해야 되겠지만 적어도 100척 이상의 삼단노선, 수송선단, 5,000명 이상의 중무장보병, 궁수와 투석병, 등등을 말했고, 아테나이 민회는 원정군 구성 전권을 출전 장군들에게 위임한다고 결의했습니다. 마침 아테나이는 그 짧은 평화 기간에도 역병과 10년 전쟁으로 위축된 인력과 자금이 회복되고 있어 징발과 징집을 포함한 모든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차출된 동맹들의 참여도 원만히 이루어졌습니다.
11.14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모두가 원정 준비에 바쁜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아테나이 거리의 헤르메스 석상들286 얼굴이 훼손되는 해괴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헤르메스 얼굴의 훼손을 원정의 전조로 받아들인 아테나이 사람들은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누구든 신고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정작 범인은 오리무중이었고, 대신 예전에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는 걸 본 적이 있다는 신고는 제법 있었는데, 그 가운데 주목받은 신고는 술 취한 젊은이들이 장난치듯 비의 흉내를 내며 개인 집 문간에 놓인 헤르메스 석상을 훼손하는 걸 보았다는 것이었고, 놀랍게도 신고자 하나는 이런 젊은이들 가운데 알키비아데스가 있었다고 고발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의 이름이 나오자 석상 훼손은 신성모독과 원정 전조에서 단박에 민주정 전복 음모라는 정치적 사건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는 휘페르볼로스가 도편추방당해 비운 아고라 출신의 민중 대표 자리를 노리는 클레오폰과287 추종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나 사는 방법이 민중과는 전혀 다른 귀족 출신의 알키비아데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니키아스와 대치하는 품새가 전혀 마뜩잖아288 그를 민중의 대표 자리에서 밀어내려던 차에 아주 좋은 구실을 얻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비의와 석상 훼손은 민주정을 엎어버리려는 정치 음모임에 틀림없고, 평소 민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생활 태도를 볼 때, 알키비아데스가 그 중심에 있다고 고발했습니다.289 물론 이런 고발의 까닭을 모를 리 없는 알키비아데스는 고발 내용을 부인하며 바로 재판을 받고 이런 의혹을 깔끔히 정리한 다음 출정하겠다고 나왔고, 원정의 최고 주장자이자 아르고스와 만티네이아까지 원정에 참여시킬 정도로 원정에 적극적인 알키비아데스 재판 때문에 모두가 잔뜩 기대하는 원정 출발이 미루어지는 상황에서는 그들의 알키비아데스 잡도리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고발자들은 빠른 출정을 원하는 사람들을 앞세워, 우선 계획대로 출정한 다음 재판 준비가 갖추어지면 그때 소환에 응해 재판을 받으면 된다는 결의를 얻어내었고, 그래서 출정한 알키비아데스는 원정 기간 내내 뭔가 발목을 잡는 찜찜함을 느껴야 할 것이었고, 고발자들은 한결 여유를 가지고 알키비아데스를 잡을 정교한 덫을 놓을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11.148. 전쟁 열일곱 번째 한여름, 페이라이에우스 항구는 승선하려는 선원과 군인, 그들을 전송하려는 가족과 친지, 화려하게 단장한 함선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 이 모두에게 필요한 일용품, 먹을 것, 마실 것을 팔러 나온 사람, 그런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고, 이들 모두는 눈앞에 늘어선 달라진 함선들의 위용과 그 배에 오르기 전에 이별을 나누며 성능 좋은 새 무구를 든 신참 중무장보병의 기개에 놀라움과 기대를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먼바다를 건너고 오랫동안 벌여야 할 싸움에 대한 대비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찌기 본 적 없는 위용과 기개에는 아테나이의 힘과 부를 보여주려는 과시επιδειξη와 위협이 듬뿍 실려 있었습니다.290 모두 배에 올랐고, 전군이 동시에 신에게 술과 기원을 올렸고, 찬가를 부르며 아테나이 함대는 대오를 지어 항구를 나갔고, 경주라도 하는듯 아이기나까지 내닫더니, 다른 동맹들과 만나기로 한 케르퀴라로 나아갔습니다.
11.149. 아테나이 동맹 함대가 출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쉬라쿠사이 사람들은 민회를 열고서도291 침공 소식이 믿기지 않아 진부를 가리느라 떠들썩했지만, 헤르모크라테스가 나서,292 아테나이와 그 동맹들의 시켈리아 침공 출정은 사실이고, 핑계는 에게스타 지원이니 레온티노이 재건이니 하지만 실제는 시켈리아 정복, 그리고 공격 목표는 쉬라쿠사이, 쉬라쿠사이가 수중에 떨어지면 시켈리아는 그저라 생각하며 오는 중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니 설마 오겠냐는 무대책이나 와봤자라는 과소평가가 아니라, 그들의 대담함과 힘에 눌리지 않고 우리가 가진 자원으로 그들을 막는 상책을 찾아낸다면, 온 시켈리아의 지원이 있을 것이므로 그들의 대군이 끼칠 해보다 그들이 입을 해가 더 클 것이며, 그들을 제압하거나 쫓아내는 영광스런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내고 강력해진 아테나이를 예로 들어, 침략군의 수가 똘똘 뭉친 현지민과 이웃보다 더 많을 수 없고, 보급도 마찬가지라 보급 때문에 그들이 자멸해도 승리는 우리 것이라며, 자신감을 가지고 대응하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쉬라쿠사이가 우선 해야 할 일들을 제안했는데, 먼저 이웃과 여러 연관 도시들의 연대를 요청하는 것으로, 시켈리아 원주민 격인 시켈로이293 사람들, 시켈리아의 이웃들과 이탈리아의294 도시들, 아테나이로부터 위협받는 순망치한의 카르케돈, 그리고 지원군 파견과 아테나이를 곤궁에 빠트릴 헬라스에서의 전쟁 재개를 해줄 가장 중요한 스파르테와 코린토스, 등에 사절을 보내고, 다음은 침공군을 이아퓌기아 곶까지295 나가 응전하는 것으로, 시켈리아의 헬라스 사람들이 가진 함선들을 되도록 많이 모아 두 달 치 먹을 것을 싣고 나가 타라스296 시를 거점으로 이아퓌기아 곶 앞바다를 지키고 있으면, 이탈리아에서 거점을 얻기 힘든 판에 수송선을 데리고 전투를 벌이기 힘들어 아예 케르퀴라에서 출발 자체를 미루고 염탐에 나설 것이고, 그러는 사이 겨울이 오고 시간이 지나면 열기가 식어 그렇잖아도 원정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 장군도 있다는데 우리의 야무진 대응을 보고 원정 자체를 포기할지도 모르니, 대담한 조치로 전쟁 준비를 마치고 있어야 한다며 다시 한번 아테나이는 오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논쟁은 계속되었으나 다수는 아테나이의 침공을 믿지 않고 일소에 붙였으며, 더러는 와도 오히려 해만 입을 거라 반박하는 분위기 속에 신망 높은 쉬라쿠사이 민중파 지도자 아테나고라스가297 나와 헤르모크라테스를 반박했는데, 그는 먼저 아테나이가 침공하러 온다는 소문은 두려움을 퍼트려 도시를 혼란케 하려는 선동자들의 거짓말로 치부하고, 현명하고 경험 많은 아테나이가 전쟁도 다 끝내지 않은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을 뒤에 두고 작지 않은 규모의 새로운 전쟁을 멀리 와서 벌일 것 같지 않고, 설사 온다 해도 모든 면에서 더 나은 장비를 가진 시켈리아가 펠로폰네소스 사람들보다 더 잘 감당할 것이므로 아테나이가 쉬라쿠사이 만한 도시를 가져와 기지를 삼는다 해도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고, 이 모두가 지난날 외적과의 투쟁보다 외적을 핑계로 도시민을 겁박하여 참주가 되고 과두체제로 정권을 잡았던 것처럼 아테나이가 침공한다고 겁주어 정권을 잡으려는 과두정파의 음모에서 나온 것이라며 음모자들을 고발하고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회에 나온 젊은이들에게 묻겠다며 같은 사람끼리 도시에 대한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 옳지δικαιον298 이득은 몇몇 사람들만 챙기고 위험하고 힘든 것은 대중들에게 시키는 것이 옳으냐 묻고, 젊은이들은 이런 부류가 되려고 나쁜 길로 들지 말고 더 배우고 도시 전체를 위한 사람이 되려 노력해야 한다 말한 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외적의 침공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시도를 막을 도시 내부의 조치부터 먼저 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299 또 다시 누가 나와 토론을 이어가려 하자 장군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300,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들어오는 보고들을 검토해서 모두가 성공적으로 적을 물리칠 방도를 찾아 조치해야 한다며, 일부는 이미 행동에 들어 갔고, 나중 필요 없었다 해도 나쁠 것 없으니 장군들이 맡아 전시 동원 체제를 가동하여 점검하고, 여러 도시에 사절들을 보내 필요한 일을 수행할 것이라 말하고, 민회를 마쳤습니다.
11.150. 케르퀴라에 집결한 아테나이와 동맹군은301 사열을 마친 다음, 지휘와 통솔의 편의를 위해 전군을 3등분하여 아테나이의 세 장군들, 니키아스와 라마코스와 알키비아데스에게 배치했고, 도착지에서의 보급과 정박의 편의를 위해 세 부대가 따로 항해하기로 하고, 이탈리아와 시켈리아에 상륙할 만한 우호적인 도시를 알아보고 행해 중인 본대에 보고하도록 먼저 3척의 선발대를 보냈고, 뒤따라 시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이탈리아에 도착했으나 도시들은 고작 정박을 허가하고 식수를 공급했을 뿐 상륙도 못했고, 타라스와 로크리스302에서는 그마져 얻을 수 없어, 결국 레기온까지 갔고, 거기서 비로소 배들을 뭍에 끌어올리고 레기온의 시내 밖의 아르테미스 성역에 진을 칠 수 있었습니다. 열두 해 전에 레온티노이를 구하기 위해서 왔을 때는 같은 칼키스 사람들이라 레온티노이와 동맹도 맺고 있었고, 그래서 아테나이 함대가 그들 해안에 기지를 건설토록 돕던 레기온에게 레온티노이를 같이 돕자고 했더니 이탈리아의 헬라스 도시 전체의 뜻에 따르겠다며 완곡히 거절하고 나오자, 어떻게 시켈리아 원정을 수행할 것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미리 보냈던 3척의 배가 에게스타까지 갔다가 돌아와 에게스타에는 아테나이에 줄 수 있는 전비가 30탈란톤밖에 없다고303 보고하자, 그들에게 속아 아테나이를 속인 조사단을 비난하며 앞으로 원정군이 할 일을 논의했습니다. 먼저 소득 없는 전쟁을 피해 철수하고 싶은 니키아스가 나서, 일단 전군이 원정의 주된 목표인 셀리누스로 가서, 에게스타가 전군의 전비를 대면 목적대로 시행하고, 아니면 애초 약속했던 60척의 유지비를 요구하며 지켜보다가, 두 도시가 힘으로든 합의로든 강화했을 때 해안을 따라 전군을 움직이며 우방과 동맹 도시들을 적극 지원한다는 결의를 보이다가, 레온티노이 재건이 여의치 않고 다른 도시들의 합류가 없으면 귀국해 더 이상 재원의 지출을 막자고 제안했고, 이에 어떻게 하든 원정을 이어가고 싶은 알키비아데스는 대군을 이끌고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쉬라쿠사이와 셀리누스를 제외한 시켈리아의 도시들에 사절304을 보내 쉬라쿠사이에 반기를 들고 아테나이를 지원토록 시도하여 피아를 구별해 놓고, 카륍디스 해협을 지키는 요충 멧세네를305 설득하고, 셀리누스가 에게스타와 강화하지 않고 쉬라쿠사이가 레온티노이 재건에 반대하면 이 두 도시를 공격하자고 제안했는데, 원정의 명분은 버리고 목표인 시켈리아 정복에 바로 들어가고 싶은 라마코스는 주둔지를 바다로나 땅으로나 쉬라쿠사이와 가까운 메가라로306 옮기고, 준비가 덜 된 쉬라쿠사이를 당장에 공격하면 쉬라쿠사이는 전의를 잃어 대적을 못할 것이고, 전투를 피해 이동하는 사람들로부터 돈이 생겨 좋고, 우리의 공격을 보는 다른 도시들이 스스로 우리 편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결국 라마코스가 알키비아데스 편에 섰고, 알키비아데스는 멧세네로 가서 동조하라 설득했지만 적대시하지 않는 선에서 거부당하자, 레기온에 돌아와 장군 한 명은 남고 다른 장군 한 명과 함선 60척에 군량을 싣고 낙소스로307 갔고, 낙소스가 시내를 개방하는 우호적 태도를 보이자, 카타네308로 이동했지만 호응이 없어 강 하구에 진을 쳤고, 이튿날 함대는 한 줄로 쉬라쿠사이로 항해하다가 10척을 먼저 큰 항구로 들어가게 해 쉬라쿠사이 해군이 뭍에서 배를 내려 놓았는지 살펴보았고, 해변을 향해 레온티노이 사람들은 아테나이 원정군에 합류하라고 고함치면서, 기지가 될 만한 곳을 찾아본 뒤, 카타네로 돌아왔습니다. 카타네 사람들은 민회를 열고 할 말 있으면 아테나이장군들만 오라 했고, 카타네 사람들이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에 집중하는 사이 허술한 성벽 암문을309 몰래 헐고 아테나이 병사들이 시내 장터에 몰려들었고, 겁 먹은 친쉬라쿠사이파가 도망쳤고, 남은 사람들이 아테나이와의 동맹을 결의하면서, 레기온에 남은 원정군도 카타네로 옮겨와 새로운 진을 쳤습니다. 이 와중에 카마리나가310 아테나이 원정군이 오면 한편이 되겠다며 쉬라쿠사이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는 전갈을 보내오자, 전군이 나서 쉬라쿠사이로 갔고, 전혀 그런 기척이 없어 계속 나아가 카마리나로 갔지만, 함선 한 척에 탄 인원만 도시에 받아들이겠다는 어이없는 거절을 당했고, 분풀이 삼아 땅에 올라 약탈해보았지만 쉬라쿠사이 기병대에 사상자만 내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온 카타네에는 아테나이로부터 알키비아데스, 그와 함께 고발당했으나 원정에 참가한 몇몇에 대한 소환장을 가지고 관용선 살라미니아가311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1.15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지난 여섯 해의 평화는 디카이오폴리스나 트뤼가이오스처럼 농장을 가지고 그 농장에서 삶을 꾸리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말해 조상 대대로 부자이던 사람들에게는 정말 꿀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벌집에 꿀이 차듯 곳간이 다시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그 10년의 전쟁은 그들에게 역병과 피난의 고통과 피폐한 농장을 주었을 뿐, 나가기만 하면 이기는 싸움에서 건진 전리품 하나 돌아오지 않았지만, 평화는 누구 하나 그들에게 주지 않아도 비와 햇빛이 그들이 원하는 것 모두를 주기 시작했지요. 10년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헬라스 세상에서 무슨 번쩍이는 전리품이 있으랴 기대하지도 않았고, 빨리 스파르테를 이기고 전쟁이 끝나기만 바라면서, 아카르나이 사람들처럼 이 모두가 스파르테 때문이라며 스파르테라면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 욕하면서 살았었지요. 그러면서 얻은 평화여서 그랬는지 다시 가꾼 농장은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크레뮐로스 같은 그들에게 평화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농장이나 가게나 공방이 없어 전쟁에 나가거나 배를 저어야 벌집에 꿀이 차듯 돈이 모이는 사람들은 평화가 가져다주는 가족과 함께하는 모처럼의 휴식이 꿀맛 같았지만, 한두 해가 지나고 보니 오히려 주머니가 비고 앞으로 살 일이 막막해지기 시작했지요. 평화와 동맹의 조약을 체결하고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스파르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는 만큼 이들의 불만과 불복이 거세어졌고, 평화가 길어질수록 이들 둘 간의 반목이 두드러졌지만, 민회에서는 늘 이들이 결의를 좌지우지했지요. 알키비아데스 같은 대대로의 부잣집 아들조차 출세를 위해 그들의 표를 좇았고, 그들에게 좋은 일만 하려 했지요. 에게스타에서 사절이 와서 돈이 있으니 도와달라 했을 때, 앗티케의 농장 주인들이나 배를 젓는 사람들이나 그것이 전쟁을 부르는 초청장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습니다. 민회에 가면 어떤 결의가 나올지 모르는 사람도 없었지요. 평화와 전쟁을 두고 아테나이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전쟁이 필요한 사람이나 평화를 지키고 싶은 사람이나 아테나이가 전쟁을 피하는 결정이라면 그것은 민회가 아니라 참주나 과두정 권력만이 할 수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습니다. 모두들 침묵하고 있었지만, 도시는 참주나 과두정이 나오더라도 평화를 지키고 싶은 사람들과 참주나 과두정이 나타나 민회의 결의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막아야 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긴장의 도시에 야밤에 신상이 훼손되는 일이 일어났고, 이미 결의된 전쟁은 수행되어야 했고, 이 수상한 신성모독이 정변의 조짐인지 아닌지 반드시 밝혀져야 했습니다.
11.152. 그래서 아테나이는 원정군이 떠난 뒤에 비의 모독과 신상 훼손의 불경죄에 대해 계속 조사했는데, 민중들은 이를 단순한 불경죄가 아니라 민주정을 전복하고 참주나 과두정을 세우려는 음모로 보았고,312 그래서 고발 내용과 고발자의 신뢰성을 무시하고 일단 주의 깊게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불량한 사람이 내놓은 증거로 도시의 훌륭한 사람을 체포하고 감금했고, 민중들이 분개할수록 감옥에 명망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민중들의 만행이 심해지자 갇힌 사람들이 나서 그들 가운데 혐의가 짙어보이는 사람에게 사실에 관계없이 뭐를 좀 자복하라고 욱박질렀고, 자백하면 소추를 면제 받는다 하여 하나가 나서 자기와 몇몇이 신상을 훼손했다 폭로했습니다.313 자백자와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방면했고, 나머지는 재판에 넘겨 도망친 자들과 함께 사형을 선고하고 처형한314 다음, 원정군에 있는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일행에 대한 처리를 논의했는데, 그의 정적들은, 그 당시 스파르테의 소규모 군대가 보이오티아로 가기 위해 이스트모스까지 행군하여 그곳 테세우스 신전에서 머문 것도 알키비아데스와 짠 전복 음모의 일환이며, 아테나이가 아르고스 민주정 전복 혐의로 넘겨준 아르고스 인질들도 모두 알키비아데스의 친구들이었다며, 그를 아테나이 민주정 전복 음모자로 고발했고, 아테나이는 그들을 데려와315 재판에 넘기기 위해 살라미니아를 시켈리아로 보냈습니다. 소환에 응한 알키비아데스와 그 일행은 그의 배로 살라미니아와 나란히 아테나이로 돌아가던 중, 중간 정박지인 투리오이에서 종적을 감추었고, 그들을 찾지 못한 살라미니아는 별수 없이 아테나이로 돌아갔고, 아테나이는 궐석재판을 열어 알키비아데스와 그 일행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11.153. 졸지에 동료 장군 하나가 없어진 원정군 지휘부는 전군을 둘로 나누고 제비를 뽑아 남은 니키아스와 라마코스가 지휘토록 한 다음, 전에 니키아스가 주장한 대로 에게스타가 전비를 댈 수 있는지 셀리누스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전군을 이끌고 카륍디스 해협을 지나 시켈리아 섬 북안을 끼고 나가다, 북안에 유일한 헬라스 도시 히메라에 들렀으나 냉대만 받았고, 분풀이하듯 에게스타와 교전 중인 시카노이316 사람들의 도시 휙카라를317 에게스타의 기병과 함께 함락시켰는데, 함락한 도시는 에게스타에게 주고, 포로로 잡은 도시민들을 배에 태우기 위해 보병들은 배에서 내려 도보로 시켈로이 사람들 땅을 거쳐 카타네로 오게 한 다음, 도로 해안을 따라 카타네로 돌아갔고, 니키아스는 따로 에게스타로 가서 다른 일도 보고 전비 30탈란톤도 받아 본대에 합류했습니다. 카타네에 돌아온 그들은 여름이 갈 때까지 휙카라 포로들 몸값 120탈란톤도 챙겼고,318 함선들을 보내 새로 동맹이 된 시켈로이 사람들 도시마다 지원군을 보내라 독촉하며 다녔고, 원정군의 반을 시켈리아 남안의 겔라319 땅에 보내 휘블라를 공격해봤지만 실패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테나이 침공군의 움직임에 쉬라쿠사이 사람들은 자신감에 넘쳐 적을 얕잡아보고 카타네로 우리가 나가자거나, 정찰하는 기병대는 아테나이 진영에 대고 레온티노이 재건이 아니라 너희가 정착하러 왔냐며 놀리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해 겨울이 되자 더는 두고볼 수 없어 원정군이 쉬라쿠사이 공격을 준비했는데, 가급적 쉬라쿠사이의 전군을 도시에서 멀리 나오도록 유인해놓고 밤중에 배로 움직여 쉬라쿠사이 망명자들이 가르쳐준 올륌피에이온320 근처에 진을 치고 대적한다는 계획을 세운 뒤, 간자를 보내 내응자들이 나서 함선에 불을 지를 것이니 아테나이군을 야습하여 방책을 뚫으라고 전했고, 사기충천한 쉬라쿠사이군은 셀리누스와 다른 동맹군이 도착하자 출동 날짜를 정해 알려주고, 날짜에 맞춰 카타네로 진군했고, 하룻밤을 강변에서 야영하고 아침에 카타네를 정찰하고 돌아온 기병이 아테나이가 전군을 배에 태우고 있다고 보고하자 아테나이의 계략에 속은 걸 알고 쉬라쿠사이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렀고, 쉬라쿠사이군의 움직임을 안 아테나이군은 밤에 카타네의 진을 거두고 시켈로이와 다른 도시의 동맹군과 함께 배를 타고 쉬라쿠사이로 움직였고, 새벽에 계획한 곳에 상륙하여 방책을 두르고 진을 차렸고, 먼길을 둘러온 쉬라쿠사이군도 인근에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이튿날 아테나이군은 전투 대형을 갖추고 니키아스의 독전 연설을 들은 뒤 공격에 나섰고, 급박한 공격에 당황했지만 이내 무구를 들고 대열을 갖춘 쉬라쿠사이군은 이내 백병전을 벌였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내리자 전투 경험이 없는 쉬라쿠사이군이 주춤하는 사이, 우익의 아르고스 군대가 쉬라쿠사이 좌익을 밀어내면서 아테나이가 중군을 돌파했고, 전열이 무너진쉬라쿠사이군이 퇴각했고, 기병대로 아테나이군의 추격을 차단하면서 부대를 정비하고, 올륌피에이온의 보물들을 지키기 위해 수비대를 파견한 뒤 시내로 돌아갔습니다. 휴전을 하고 전사자들을 교환해 매장한 다음, 더 이상 겨울 전투를 이어갈 의사가 없는 아테나이는 카타네와 낙소스로 일단 물러났다가, 거기서 전에 미리 짠 대로 친아테나이파의 내응을 기대하고 멧세네를 치러 가서 열사흘이나 기다렸으나, 망명 길에 음모를 누설한 알키비아데스 때문에321 그들이 모두 친쉬라쿠사이파에게 죽임을 당하고 없어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낙소스에 방책을 두르며 겨울나기 진을 차리고, 아테나이에 봄까지 전비와 기병대를 보내달라 전갈을 보내는 것으로 군사행동은 접고, 새로운 동맹을 찾는 외교활동이나 전개할 것이었습니다. 첫 전투 실패 후, 쉬라쿠사이는 민회를 열어 첫 전투를 분석하고 보완책을 논의했고, 민회는 이번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낸 헤르모크라테스의 제안을 결의했는데, 그는 쉬라쿠사이군이 투지와 용맹은 뒤지지 않아 경험 많은 적들을 상대로 대등한 전투를 벌였으나 경험 부족과 지휘의 혼선으로 혼란해진 전열이 무너졌다며, 먼저 장군 열다섯 명의 지휘부를 경험 많은 장군 셋으로 줄여 전쟁 수행에 관한 전권을 위임해 체계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준 다음, 겨울 동안 경무장 군사들에게 무구를 지급하여 중무장보병 수를 늘리고 맹훈련시키다면 승산이 충분하다는 분석과 보완책을 제시했고, 이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이었습니다. 쉬라쿠사이는 헤르모크라테스, 헤라클레이데스, 그리고 시카노스를 전권 장군으로 뽑았고, 군사 훈련과 함께 도시의 방어 능력을 개선했는데, 테메니테스322 성역을 도시 성벽 안으로 끌어들이고, 에피폴라이323 맞은 편 언덕도 방벽을 쌓았으며, 메가라와 올륌피에이온도 요새화했고, 상륙할 만한 해안에는 바다에 말뚝pallisadoes,palisade을 박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가 낙소스로 진지를 옮겨간 것을 알고, 전군을 출동시켜 카타네를 유린하고 아테나이가 남긴 막사를 불태우고 돌아오는것으로324 그 겨울의 군사 행동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쉬라쿠사이는 코린토스와 스파르테에 사절단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면서 아울러 아테나이가 시켈리아 원정군을 철수시키도록, 아니면 적어도 증원은 할 수 없도록 괴롭혀주기를달라 하는 한편, 아테나이가 열두 해 전 라케스와 맺은 동맹을 내세워 카마리아의 지지를 얻으려 거기에 사절을 보낸다는 걸 알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헤르모크라테스 일행이 카마리아로 가는 외교전도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1.15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쉬라쿠사이의 헤르모크라테스는 아테나이의 에우페모스를 옆에 두고 카마리아 사람들 앞에서 그가 보는 아테나이의 제국주의적 행태와 이를 대하는 시켈리아 도시들, 특히 카마리아의 할 바에 대해 말하는데,325 헬라스 도시들을 종속시키려 했던 페르시아를 물리친 뒤, 페르시아 대신 아테나이가 더 영악한326 페르시아가 되어, 헬라스 도시 내부를 이간질하거나 도시들을 이오네스니 도리에이스니 하며 서로 돕기보다 서로 싸우게 하거나, 그때 그때 온갖 핑계를 대며 하나씩 하나씩 예속시켜가더니, 이제는 시켈리아까지 와서 똑같은 짓을 하는데도, 헬라스의 섬과 도시들이 그랬듯이, 먼 데 있는 도시가 당하니까라며, 가까이 있어도 우리는 쉬라쿠사이가 아니니까라며, 혹은 쉬라쿠사이는 강해서 늘 위협이 되었으니 좀 당해서 약해져야 하니까라며, 서로 뭉쳐 아테나이를 물리치는 대신, 당장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노예가 되어 아테나이를 돕는다면, 아테나이가 승리할 때 카마리아는 그들의 전리품이 될 것이고, 반대로 쉬라쿠사이가 이길 때는 이웃을 위험에 빠뜨린 벌을 받게 될 것이니, 쉬라쿠사이를 도움으로써 아테나이를 주인으로 모시는 수모와 오래갈 우리의 원한을 사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라327 했습니다. 뒤를 이어 아테나이의 에우페모스가 카마리아 사람들 앞에 나섰습니다. 그는 데모스테네스 같은 전사가 아니라 클레오폰 같은 장사꾼이어서인지,328 열여덟 해 전 아테나이를 응징해야 한다며 스파르테에 모인 펠로폰네소스 사람들 앞에 나가 우리는 막강하니 전쟁을 할 테면 해보라던 아테나이의 사절과는329 달리, 이오니아 사람들과 도리에이스 사람들과의 불화를 언급한 헤르모크라테스의 말꼬리를 잡아 아테나이가 제국을 이루고 유지하려는 것은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에게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빼앗길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며,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이고, 지금 시켈리아에 온 것도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아주 능청스레 말합니다. 아테나이는 쉬라쿠사이가 도리에이스 사람들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지원하는 것을 막아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왔으며, 쉬라쿠사이로부터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는 카마리아와 아테나이는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에, 아테나이는 카마리아를 노예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쉬라쿠사이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맹을 갱신하여 도우려는 것이라며,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여 강력해진 카마리아가 쉬라쿠사이에게 위협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협한다면, 그들은 여유를 잃어 펠로폰네소스를 지원할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카마리아와 함께 아테나이의 안전과 자유도 지켜지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러고 나서야 그는 아테나이가 제국을 유지해서 얻는 이익을 들먹이는데, 앞서 헤르모크라테스가 같은 이오네스 사람들의 도시인 칼키스는 종속시켜 노예로 만들면서 그들이 세운 시켈리아의 레온티노이는 도시를 재건시키겠다 나선다고 비난한 경우를 그대로 예를 들며, 헬라스에서 칼키스는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스스로 무장하는 것보다 조공을 내는 것이 그들과 아테나이에 이익이 되고, 시켈리아에서 레온티노이나 그밖의 도시들이 우리와 함께하여 스스로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쉬라쿠사이를 함께 견제할 수 있어 우리 모두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아테나이는 같은 칼키스 사람들의 도시지만 헬라스의 칼키스와 시켈리아의 레온티노이를 달리 대하는 것이라며, 실제 헬라스에서 아테나이는 동맹들을 각자의 전략적 가치나 능력이나 태도를 보아 아테나이의 이익에 맞춰 달리 대한다고330 말합니다. 그렇지만 시켈리아는 헬라스와 다르다며 능청을 떠는데, 아테나이가 속임수로 카마리아를 점령하고 노예로 삼은들 먼 뱃길에 얼마나 많은 수비대를 남겨야 계속 노예로 부릴 수 있겠냐며, 아테나의 원정군 규모를 지적하며 아테나이가 쉬라쿠사이뿐만 아니라 시켈리아를 통채로 먹으러 왔다며 시켈리아가 단합해 물리치자는 쉬라쿠사이에 속아 시켈리아 전체가 아테나이를 상대한다면, 아테나이는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남은 시켈리아 도시들은 그들을 도우러 멀리서 온 강력한 지원군을 쫓아내고 고립무원이 되어 하나씩 둘씩 레온티노이처럼 하릴없이 쉬라쿠사이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라면서, 카마리아는 아테나이 편에 서서 실질적인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도모하라 했습니다. 첫 전투에서 쉬라쿠사이를 누른 아테나이와도 같은 도리에이스 사람들의 쉬라쿠사이와도 동맹 관계인 카마리아는 이를 핑계로 어느 쪽도 편들 수 없다는 답을 내놓자, 헤르모크라테스도 에우페모스도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습니다. 아테나이가 낙소스를 거점으로 시켈로이 사람들을 상대로 무력으로 얼르고 달래며 현지 지원 세력 확보에 나서자, 혼자 전쟁을 준비하던 쉬라쿠사이 역시 수비대나 증원군을 보내 방해했고, 겨울이 되자 아테나이는 불탄 병영을 고쳐 카타네로 옮겼고, 카르케돈과의 친선을 위해 사절을 보내거나 공성 장비들을 챙기면서 봄을 맞이했습니다.
11.15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탈리아의 투리오이에서 사라졌던 알키비아데스 일행이 거기서 짐배를 타고 엘리스의 퀼레네 항구로 가서 머물고 있을 때, 펠로폰네소스의 지원을 요청하러 간 쉬라쿠사이 사절들이 먼저 코린토스로 가서 그들의 전폭적인 지원 약속을 받았는데, 코린토스는 한술 더 떠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시켈리아 파병을 독려하기 위해 쉬라쿠사이 사절들과 함께 자신들의 사절까지 스파르테로 보냈고, 쉬라쿠사이와 아테나이가 평화조약을 맺는 것을 막을 사절을 보내는 것은 몰라도 전선을 확대시킬지도 모르는 군사적 지원은 피하고 싶은 스파르테는 아테나이 사정도 알아보고 판단하기 위해 호위대를 퀼레네로 보내 알키비아데스 일행이 사절들과 같은 때 도착하도록 초청했고, 스파르테의 분위기를 파악한 알키비아데스는 차례가 되자 스파르테 사람들을 자극해 움직이게 할 양으로 그들 앞에 나섰습니다. 그는 그가 하는 말에 믿음이 가도록 먼저 자신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겠다며, 대대로 스파르테의 아테나이 현지 영사 였던 그의 집안 내력을 말하고, 자신도 현지 영사로서 스팍테리아의 포로들을 위해 성실히 일했음에도 스파르테는 평화협정에서 자신을 빼고 자신의 정적들과 협상을 진행하여 자신에게 불명예를 안겼기 때문에 그후 아르고스와 만티네이아와 함께 스파르테에게 해를 끼친 일로 자신에게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제 그 생각을 바꾸라 말하고, 이어서 대대로 참주들에 반대하여 민중들의 지도자였던 그의 집안 내력을 소개하면서, 자신도 아테나이 민주정의 가치와 정통성을 받아들이고 온건한 정치로 민주정의 무책임함을 완화하려 해왔음에도 민중을 나쁜 길로 이끄는 자들이 자신을 추방했다며331, 이제부터 누구보다 잘 아는 최근의 아테나이의 움직임에 대해 스파르테가 해야 할 바를 말할 것이니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라 한 다음,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 목적부터 설명했습니다. 아테나이는 궁극적으로 헬라스 세상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는데, 먼저 시켈리아의 헬라스 사람 도시들을 정복하고, 다음 이탈리아의 헬라스 사람들 도시들을 정복하고, 끝으로 카르케돈 제국과 카르케돈 자체를 치는 것인데, 여기까지 대부분을 계획한 대로 이루고나면, 먼저 정복지와 인근 이어족 지역에서 차출할 병력과 이탈리아의 목재로 건조할 함선과 정복지에서 거둘 자금과 군량으로 아테나이 함대를 증강시킨 다음, 그 함대로 펠로폰네소스를 포위하여 봉쇄하면서, 지상군으로 하여금 펠로폰네소스 도시들 하나 하나를 함락시켜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켈리아가 쉬라쿠사이와 단결하여 대항하지 않을 것이고, 미숙한 쉬라쿠사이는 이미 첫 교전에서 패배하고 도시가 봉쇄된 상태라 혼자서 더 이상 아테나이를 막을 수 없고, 아테나이는 계획대로 먼저 쉬라쿠사이를, 다음으로 시켈리아의 나머지 도시들을, 그리고 이탈리아도 손아귀에 넣을 것인데, 이것은 바로 펠로폰네소스의 위험일 것이므로, 지금 당장에 쉬라쿠사이에 스파르테의 지휘관을 보내 그곳 병력을 강화하고 조직화하면서, 손수 노를 저을 수 있고 도착 즉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중무장보병들을 보내332 지원하는 한편, 아테나이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또 쉬라쿠사이와 스파르테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시켈리아와 이탈리아 도시들에게 신뢰와 용기를 주기 위해 헬라스에에서 스파르테의 아테나이에 대한 공세를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며 스파르테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칠 것을 주문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앗티케의 데켈레이아를333 요새화하고 그곳에 주둔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테가 자기의 제언을 열정적으로 신속하게 이행해야 한다 당부했습니다.334
11.15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쉬라쿠사이로 지휘관과 지원군을 보내라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경청하던 사람들이 데칼레이아에 요새를 세우고 주둔하라는 말이 나오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의 조국에 대한 과도한 보복에 놀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청중들을 향해 자신은 조국을 사랑하며 그 때문에 조국을 되찾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라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데칼레이아에 요새라는 말을 듣자마자 스파르테 사람들이 떠올린 것은 알키비아데스나 아테나이가 아니라 퓔로스의 요새와 스팍테리아의 포로들이었고, 치욕의 퓔로스와 스팍테리아라 말 한마디 내뱉지 않고 온갖 굴욕을 견디며 포로를 되찾고 퓔로스 요새를 허물며 평화를 받아들였지만, 속으로는 모두가 언젠가는 똑같은 방법으로 열 배 백 배 갚아줄 것이고 똑같은 방법이라면 그곳은 데켈레이아라고 다짐하며 조용히 새로운 세대의 전사들을 키우고 있는데, 천방지축 알키비아데스가 느닷없이 데켈레이아를 꼭 찍어 요새화를 말하니 천기누설인가 하고 놀랐던 것이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계속해서 한참을 더 주저리 주저리 자기 변명을 늘어놓다가 이윽고 스파르테는 꼭 나서야 하고 그러면 온 헬라스 세상이 스파르테에 감사하고 따를 것이며, 자연스레 스파르테는 헬라스의 패권을 잡는다는 말로 제언을 끝냈습니다. 스파르테는 데칼레이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귈립포스를 쉬라쿠사이 파견 지휘관으로 정했고, 쉬라쿠사이와 코린토스 사절들은 귈립포스와 함께 빠른 시일 안에 지원군을 보낼 함선들을 준비토록 의논한 뒤 돌아갔습니다.
11.157. 스파르테가 시켈리아에 발을 디디기로 결정한 전쟁 열일곱 번째 해 겨울에 아테나이는 시켈리아로부터의 군량과 기병대 증원 요청을 승인하면서 스파르테도 아테나이도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감출 필요 없이 전쟁을 향해 나아갔고, 계절이 바뀌어 전쟁 열여덟 번째 새봄이 되자, 지난 일곱 해 동안 억눌렸던 전쟁의 기운이 도처에서 피어올랐습니다. 새봄에 스파르테가 아르고스를 눌러두기 위해 클레오나이까지 갔지만 지진 때문에 돌아서야 했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아르고스가 스파르테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이웃 도시 튀레아로 쳐들어가서 주로 스파르테 사람들을 약탈해 무려 250탈란톤이나 챙기더니, 시켈리아의 아테나이군도 뒤질세라 쉬라쿠사이가 장악하고 있는 시켈리아의 도시들을 공격하고 약탈했습니다. 전쟁 열여덟 번째 해 봄에 벌어진 움직임은 여덟 해 전까지 10년 동안이나 벌였던 전쟁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테나이와 스파르테는 50년의 평화와 서로 간에 맺은 동맹의 약속에 더 이상 매달릴 의사가 없었지요.
11.158. 헬라스에 솟아나는 전쟁의 기운은 시켈리아에서도 퍼져나와 그해 여름 아테나이와 쉬라쿠사이 간에 여러 번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봄에 이테나이가 보내준 은 300탈란톤과 30명의 기마병을 받아 증원한 기병대는 여름이 오기 전에 650명으로335 늘어나 있었고, 자신감에 가득찬 시켈리아의 아테나이군은 이제 직접 쉬라쿠사이를 목표로 전군을 움직여 레온에 지상군을 내려놓고 함대는 섬 같은 탑소스 반도에 정박했고, 레온에 상륙한 중무장보병은 밤을 도와 쉬라쿠사이의 자연 방벽인 에피폴라이336 고원에 올라 공수의 요충지를 선점했는데,337 임박한 공격을 감지한 쉬라쿠사이는 첫 번째 전투 패인으로 지적받은 다수의 지휘부를 헤르모크라테스를 위시한 두 명의 장군들로 바꾸어 전군을 검열하고 있다가 아테나이이군이 에피폴라이에 있다는 걸 알고 정예 600명을 뽑아 그곳으로 통하는 길들을 막고 그곳을 지키도록 보냈지만, 높은 곳까지 멀리 달려간 이들은 전투를 서두르다 지휘관 디오밀로스를 포함해 정예군의 태반을 잃고338 도시로까지 물러나야 했습니다. 고원을 점령한 아테나이는 마치 멧세네의 퓔로스 절벽 끝에 요새를 쌓듯 먼저 북쪽 끝 랍달론에 장비와 자금을 보관할 요새를 구축한 다음, 쉬라쿠사이를 향한 남쪽으로 내려와 고원으로 오르는 큰 길 가까운 넓은 평지 쉬케339에 둥글게 벽을 쌓으며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고, 놀란 쉬라쿠사이가 보병과 기병을 동원해 둥근 요새 작업을 막으려 했으나 보병의 움직임이 믿음직스럽지 않아 철수시키고 기병만으로 작업을 방해했는데, 이들은 아테나이의 기병을 동원한 중무장보병들을 당하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나야 했고, 활동이 편해진 아테나이군은 둥근 요새의 북쪽 벽에 이어서 동서로 방벽을 쌓는 한편, 특히 서쪽 방벽은 쉬라쿠사이의 큰 항구를 마주보는 해안까지 쌓아 그곳에서부터 공격을 펼칠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아직 인근 해안을 장악하지 못한 아테나이군은 해군의 탑소스 정박지에서 육로로 보급을 받으며 공격을 준비했고, 쉬라쿠사이는 더 이상의 전면전을 포기하고 대신 그들의 도시 성벽 동쪽 끝에서 둥근 요새로 향해 북쪽으로 에피폴라이 고원까지 방벽과 목책과 목탑도 세워 막을 준비를 했지만, 아테나이군은 도시로 마실 물을 대는 땅속 수도관을340 찾아 파괴하는 한편 특공대를 조직해 목책과 목탑 방어벽을 지키는 쉬라쿠사이 경비병들을 쫓아낸 다음 여세를 몰아 도시까지 진격했다가 테메니테스 성역의 성벽 안까지 들어갔으나 반격을 받고 물러나341 목책과 목탑의 목재들을 챙겨 돌아갔고, 아테나이가 다시 공사를 시작해 쉬라쿠사이 큰 항구에 이르는 평지와 늪지 자락의 절벽까지 방벽을 완성하자, 쉬라쿠사이는 늪지를 가로질러 목책을 세우고 해자를 파서 아테나이군이 해안으로 접근하는 걸 막으려 했습니다. 방벽이 완성되자 아테나이군은 탑소스의 함대까지 쉬라쿠사이 큰 항구에 집결토록 조치한 뒤, 때 마침 지병이 도진342 343니키아스는 병구완하는 시종들과 약간의 수비대와 함께344 둥근 요새에 남고, 처음부터 총공격으로 단숨에 끝장내자던 주장을 이제서야 혼자 나서 증명해 보일 절호의 기회를 맞은 라마코스는345 이 보란 듯이 전군을 이끌고 새벽부터 평지로 내려와 늪지의 목책을 넘고 해자를 건너 쉬라쿠사이로 향해 진격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쉬라쿠사이도 뛰쳐나와 전투가 벌어졌으나 이내 무너져 쉬라쿠사이군의 우익은 도시 쪽으로, 좌익은 아나포스 강 쪽으로 물러섰는데, 이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300명의 아테나이 정예군이 다리 쪽으로 달려들자 퇴로가 막힐 것을 두려워한 기병과 좌익 부대가 이 300명을 집중 공격해 패주시키고 그 뒤를 따라 아테나이군 우익을 공격하자 전열이 흩으지기 시작했고, 이를 본 라마코스가 약간의 부대원들을 데리고 지원에 나섰으나 해자에 고립되어 전사하고346 말았고, 이를 본 쉬라쿠사이 우익이 다시 도시에서 나와 전열을 갖추는 한편 혹시 수비대가 없으면 탈환할 속셈으로 에피폴라이의 둥근 요새로 병력 일부를 보냈는데, 이들이 아테나이의 바깥 방벽을 300미터나347 점령하여 파괴한 뒤 둥근 요새로 달려들자 대적할 군인이 없는 니키아스가 시종들을 시켜 성벽 앞에 쌓인 목재와 장비들에 불을 지르게 하여 저지했고, 이 사이 아테나이 좌익 부대가 쉬라쿠사이 우익을 격파하여 도로 도시로 쫓아낸 다음 둥근 요새를 지키기 위해 에피폴라이로 올라갔고, 마침 아테나이 함대가 큰 항구로 들어서 지상군과 합류하는 태세를 갖추자 쉬라쿠사이군은 모두 퇴각해 도시로 들어가 네 번째의 전면전도, 비록 라마코스가 전사했지만, 아테나이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348 네 번의 전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끈 아테나이군의 유일한 장군이 된 니키아스는 해군까지 합류시켜 에피폴라이의 방벽을 이중으로 쌓아 쉬라쿠사이 포위를 완성시켰고, 이를 지켜보던 이탈리아의 도시들로부터 보급 지원이 쇄도했고, 시켈리아에서는 시켈로이 사람들이 동맹이 되어주었는데, 반면 포위되었음을 아는 쉬라쿠사이군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세 장군들을 교체했지만 승산이 없어 보이는 데다, 펠로폰네소스로부터의 지원마져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니키아스에게 수많은 제안을 보내며 항복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11.159. 쉬라쿠사이가 봉쇄되는 형편으로 몰리는 동안, 스파르테의 귈립포스와 코린토스 함선들은 아직 헬라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 레우카스 섬에 있었는데,349 쉬라쿠사이가 어찌 해볼 수 없이 완전히 봉쇄되었다는 과장된 소문을 들었고, 쉬라쿠사이를 도울 수 없다면 이탈리아의 도시들이라도 구하자며, 코린토스 10척, 레우카스2척, 암프라키아 3척, 모두 15척이 모이는 대로 뒤따라 오도록 조치한 뒤, 귈립포스는 서둘러 스파르테 함선 2척과 코린토스의 퓌텐Pythen이 이끄는 함선 2척으로 먼저 이오니아 바다를 건너 타라스로 갔습니다. 타라스에 도착하자 개인적 인연을 앞세워350 사절로서 투리오이를 방문하고351 그들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고, 거기서 다시 우호적인 도시를 찾아 움직이다 테리나 만에서 강풍에 사고를 당해 다시 타라스로 돌아오는 등 달랑 네 척의 초라한 행색은 투리오이와 니키아스의 주목조차 받지 못할 정도였지만, 투지를 잃지 않은 귈립포스는 로크리스로 갔고, 거기서 아직 에피폴라이를 통해 군대가 쉬라쿠사이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시켈리아 도시들의 도움으로 군대를 조직한 뒤 육로로 쉬라쿠사이로 가기 위해 히메라로 갔는데, 이 무렵에서야352 니키아스가 귈립포스를 저지하기 위해 네 척의 함선을 보냈지만 귈립포스는 이미 레기온과 멧세네를 거쳐 히메라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배를 뭍으로 올리고 선원들 700명을 중무장시키며353 귈립포스가 넘치는 투지를 보여주자, 히메라는 보병 1,000명에 기병 100명을 지원하며 호응했고, 셀레누스, 겔라, 다른 시켈로이 도시들 역시 1,000명의 군사를 보내와, 이들 모두는 귈립포스의 지휘 아래 쉬라쿠사이로 나아갔습니다.354 한편 스파르테와 코린토스의 움직임을 알 수 없었던 쉬라쿠사이가 아테나이와의 종전을 위한 민회 소집을 준비하고 있을 때, 레우카스에 결집했던 코린토스 함대도 쉬라쿠사이로 오고 있었고, 그 가운데 코린토스 장군 공귈로스가355 귈립포스보다 먼저 쉬라쿠사이에 도착해 스파르테가 귈립포스를 펠로폰네소스 지원군을 지휘토록 지명했고 그의 군대가 쉬라쿠사이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자, 강화를 준비하던 쉬라쿠사이는 용기백배하여 귈립포스를 마중하러 나섰습니다.
11.16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처음에는 스스로 아테나이의 침공을 거뜬히 막을 수 있다고 자신했던 쉬라쿠사이 사람들은 네 번의 전면전에서 모두 패배하자, 충분한 전투 경험 없이 단지 이길 수 있다는 투지만으로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에 의기소침해졌고, 펠로폰네소스로부터의 지원 소식이 없는 데다 관망하던 시켈리아와 이탈리아 도시들조차 아테나이에게 호의적으로 돌아서는 모양새를 보이자 고립무원의 처지라는 무력감에 빠져, 서로를 탓하고 서로를 의심하는 극심한 분열 속에 도시는 장군들을 바꾸고 아테나이와의 강화를 추진하는 등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선 떠오르는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장군들은 무기력했고 아테나이는 종전에 소극적이어서 어느 하나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도시가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열다섯 척의 코린토스 함대보다 늦게 레우카스를 떠난 공귈로스의 배가 먼저 도착했는데, 그로부터 펠로폰네소스 지원군의 지휘관으로 스파르테의 귈립포스가 펠로폰네소스와 히메라를 위시한 시켈리아 도시들의 지원군들과 함께 도시 가까이 다가온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도시의 분위기가 일시에 잃었던 투지와 용기를 되찾았습니다. 쉬라쿠사이는 전군을 동원했고, 귈립포스와 합류하기 위해 그가 온다는 에피폴라이로 올랐고, 때 마침 귈립포스는 오는 길에 이에타이의 시켈로이 요새 하나를 격파하며 완전한 전열을 갖추고 에우뤼엘로스 길로356 에피폴라이에 올라 쉬라쿠사이 군과 합류했습니다. 이 무렵 아테나이 군의 쉬라쿠사이 봉쇄 방벽은 남쪽으로 이미 큰 항구 바닷가에까지 이르러 마무리까지 거의 다 마쳤고, 에피폴라이 위에서도 둥근 요새에서 트로길로스를 지나 북쪽 해안에 이르는 봉쇄 방벽이 반쯤은 끝났고 나머지도 완성을 앞두고 있었는데, 방벽 축조에 여념이 없는 아테나이 군 앞에 아직 지휘체계나 전열도 이루지 못한 체 그저 만나서 반갑기만 한 쉬라쿠사이와 귈립포스의 군대가 떡하니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경험 많은 아테나이 군은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었고, 아직 양군 합동의 전투를 벌일 준비가 덜 된 것을 잘 아는 귈립포스는 짐짓 전령을 아테나이 군에 보내 닷새 안에 보따리 사서 시켈리아를 떠나겠다고 하면 순순히 보내주겠다 했고, 니키아스는 말없이 전령을 돌려보내면서 전투를 준비했고, 귈립포스도 전투 준비에 돌입했는데 쉬라쿠사이 군만 전열을 이루지 못하고 좁은 곳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어 귈립포스는 전체 군대를 더 넓은 곳으로 후진시켰는데, 이를 보고도 아테나이 군이 공격해오지 않고 방벽 뒤에 진을 지키고 있자 귈립포스는 전투를 포기하고 전군을 이끌고 테메니테스 성소로 가서 야영하면서 양측의 첫 만남을 전투 없이 보냈습니다. 다음날 귈립포스는 주력부대를 방벽을 마주보고 배치해 아테나이 군을 묶어둔 다음, 눈에 띄지 않게 한 부대를 아테나이의 랍달론 요새로 보내 급습 함락한 뒤 모두 죽여버리고, 쉬라쿠사이에서는 작은 항구를 봉쇄하고 있던 아테나이 함선 한 척을 나포하는 등 드디어 아테나이 군을 조금씩 괴롭히기 시작했고, 그 뒤로도 아테나이가 북쪽의 방벽을 완성해 쉬라쿠사이를 봉쇄 할 수 없도록 쉬라쿠사이의 방벽을 쳐나가는 한편, 아테나이 방벽의 약한 부분을 치고 빠지면서 계속 아테나이 군의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이에 니키아스는 귈립포스를 상대로 한 지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 판단해 해전으로 결판 내겠다 작정하고, 함대가 접근하기 좋고, 보급에도 편리하고, 더 가까운 곳에서 작은 항구를 계속 감시할 수 있고, 쉬라쿠사이 해군의 움직임에 재빨리 대응하기 좋은 곳으로, 쉬라쿠사이 도시의 맞은 편에 있는 큰 항구의 남쪽 끝의 플렘뮈리온 곶에 보루 셋을 세운 뒤 그곳을 함대의 새로운 기지로 삼아 옮겨갔고, 그러자 쉬라쿠사이는 올륌피에이온 인근 마을에 기병대를 주둔시켜 물이나 땔감을 구하거나 약탈하러 나오는 선원들을 공격하도록 조치했고357, 이 무렵 코린토스 함대가 쉬라쿠사이로 오고 있다는 걸 안 니키아스는 함선 20척을 보내 로크리스나 레기온 같은 시켈리아로 오는 길목을 매복해 지키도록 했습니다. 니키아스가 에피폴라이에 지상군을 두고 플렘뮈리온에 해군을 두어 쉬라쿠사이를 완전히 봉쇄한 뒤 함락시키려는 계획을 이행해나가는 동안, 에피폴라이의 귈립포스는 아테나이의 이중 방벽이 북쪽 해안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막을 가로막기 방벽을 열심히 쌓아 드디어 아테나이 방벽 앞에 막아서서 전열을 갖추고 섰고, 아테나이 군이 대응하고 나서자 귈립포스가 먼저 공격했는데, 두 방벽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의 전투라 귈립포스의 기병과 투창병이 제 역활을 다 못해 사상자만 내고 물러서야 했고, 앞선 전투에서 너무 깊숙히 좁은 데로 들어가는 바람에 실패했던 귈립포스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쉬라쿠사이에게 가로막는 방벽을 허용할 경우 해안까지 방벽이 이어진다 해도 봉쇄 자체가 뚫리는 꼴이라 이번에는 아테나이 군이 먼저 공격에 나섰고, 귈립포스는 방벽에서 물러서 응전하면서 기병과 투창병을 아테나이 군 좌익 측면의 공터에 배치하여 공격케 하자, 아테나이 군 좌익이 무너지며 전군이 패퇴하여 방벽 안으로 쫓겨들고 말았고, 이에 귈립포스와 쉬라쿠사이 군이 밤을 도와 아테나이 방벽을 넘어 가로막기 방벽의 짧은 구간을 완성하자 아테나이 군은 더 이상 그 방벽 밖의 쉬라쿠사이 군을 제지할 수 없게 되었고, 에피폴라이에서 쉬라쿠사이 봉쇄는 무망해지고 말았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에피폴라이 봉쇄를 막은 귈립포스는 에라시니데스의 코린토스 함대가358 아테나이 해군의 감시를 피해 무사히 쉬라쿠사이에 도착하자 선원들을 신속한 가로막기 방벽 완성을 위해 공사장에 투입했고, 군세를 더욱 확장해야한다는 데 뜻을 모은 뒤, 쉬라쿠사이와 코린토스 사람들로 사절단을 꾸려 스파르테와 코린토스로 추가 지원군을 요청토록359 보내고, 그 자신은 자체적으로 보병과 해군을 모집하기 위해 시켈리아 도시들 순방에 나서는 한편, 이제 사기가 오른 쉬라쿠사이 사람들은 바다에서도 아테나이와 대적할 각오로 선원들을 데리고 해전을 대비한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11.16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는 전쟁 열여덟 번째 해 겨울에 아테나이의 쉬라쿠사이 원정군의 유일한 장군인 니키아스가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를360 민회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서기가361 큰 소리로 읽어주었던 일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는 그 편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미 여러 통의 편지를 전령 편에 보내 전황과 승리를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하기도 해 왔는데,362 니키아스가 원정 한 해 반이 지나는 동안 쉬라쿠사이의 전군과 벌인 수차례의 접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어 쉬라쿠사이가 강화를 제의해오도록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는 협상으로 항복보다 서로 독립적인 동맹 수준에서 종전으로 이끌고363 무엇보다 먼저 원정의 명목이었던 레온티노이 재건을 성사시키면서 원정 비용과 보상금을 챙기는 정도로 원정을 결말을 지으려 하지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굴복시키려는 결기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쉬라쿠사이를 봉쇄하여 공성을 하는 건지, 아니면 쉬라쿠사이 성 밖에서 보호 방벽을 치고 농성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여기저기 요새나 짓고 보루나 쌓으며 지낸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니키아스가, 처음부터 원정을 반대하다 떠밀려 원저에 나선 뒤에도, 원정군의 역활을 원정 명분으로 내세운 에게스타와 셀리누스 간의 분쟁을 깨끗이 해결하여 시켈리아나 이탈리아의 도시들에게 아울러 헬라스의 도시들에게도 아테나이의 위상을 드높이고, 그래서 덤으로 귀국 길에 쉬라쿠사이를 압박하여 해묵은 레온티노이 재건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는 정도로 매우 소극적이고 제한적으로 묶어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도망간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테 사람들에게 토로했던 대로 처음부터 시켈리아와 이탈리아를 아테나이의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매우 적극적이고 원대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시켈리아 원정을 주장했던 알키비아데의 방법, 즉 시켈리아와 이탈리아에서 최대한으로 많은 도시를 아테나이 편으로 만들어 이들과 함께 쉬라쿠사이를 친다는 방법도 알키비아데스 같은 설득자가 없어서 그랬는지 쓰지 않았었는데, 사실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부터 닻도 내리지 못하게 막던 타라스와 레기온의 경우를 보나 시켈리아에서 카마리나 설득에 실패한 경우를 보나, 아테나이 원정군의 규모가 이미 모든 시켈리아와 이탈리아 도시들에게 아테나이의 목표가 단지 셀리누스나 쉬라쿠사이에 있지 않음을 알리고 있어, 알키비아데스가 아니라 안드로스 섬을 방문했던 설득의 신이364 다시 와도 안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 알키비아데스의 방법을 쓰는 것에 대해 조금의 노력도365 기울이지 않았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니키아스는 그 자신의 생각이나 알키비아데스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격렬한 전투 중에서가 아니고 이동 중 습지에 빠져 죽임을 당한 라마코스가 주장했던 쉬라쿠사이 포위 공성으로 내밀려 한 해 반을 보내고 있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아테나이의 지원을 요청하고, 그때마다 자신이 직접 편지까지 써서 그가 겪는 어려운 처지를 주저리주저리 엮어 또 다시 아테나이의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니키아스는 자신을 그의 뜻과는 다른 지경으로 몰아 갔을까요? 이탈리아 도시들의 냉정한 응대가 무슨 뜻인지 잘 알고나서, 쉬라쿠사이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우왕좌왕할 때 전군을 이끌고 단숨에 쉬라쿠사이를 공격해 함락시키자 했던 라마코스의 방법은 그가 일차적인 주둔지를 주민들의 거부가 없을 쉬라쿠사이 인근의 버려진 도시 메가라로 지정했을 정도로 주변의 도움 없이 오로지 아테나이 연합군만의 힘에 의지해야 하는 위험한 작전이라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는데, 지난 한 해 반에 일어났던 일들을 들여다 보면, 특히 지리멸렬하고 내부 분열이 심하고 쉽게 강화를 제안하는 쉬라쿠사이를 상대로, 게다가 펠로폰네소스의 지원군이 도착하는 데만 한 해 반이 걸렸으니, 라마코스의 방법대로 했더라면, 지금 자신의 처지가 바로 라마코스의 방법이 실패한 최악의 경우와 같을 것이어서 그랬을까요? 니키아스는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해 그가 겪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으로 답합니다. 우선 함대 운용의 어려움에 대해 배가 오래 물에 떠 있어 무거워진 것과 선원들이 이탈하여도 시켈리아에서는 충원이 어려워 해군 전력이 약화되고, 다음 지상군의 운용의 어려움은 기병의 약세와 종군 노예들의366 도망으로 중무장보병의 전력 약화를 꼽았습니다. 선원들 가운데는 물론 약탈에 나섰다 더러 죽기도 했지만, 주로 원정의 장기화와 녹녹치 않은 전세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용병들과 탈영하는 돈 벌이 선원들 때문에 함대를 제대로 운용하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게다가 귈립포스는 계속 펠로폰네소스와 시켈리아에서 지원군을 받아 군세를 늘이고 있는데 자기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에 아테나이의 지원이 없다면 그나마 보급품을 팔아주는 이탈리아 도시들까지 돌아설 것이라 그 뒤는 아테나이 군이 가만 앉아 당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하며, 두 가지 대안을 말하는데, 하나는 그대로 철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첫 원정군 규모의 증원군과 충분한 돈367, 그리고 이 모두를 지휘할 새로운 장군들을 보내는 것을 초봄전에 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신장에 병이 난 자신에겐 귀국을 허락해 달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왜 원정을 반대했던 니키아스가 이제 원정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잘 봤냐며 오로지 철군만 주장해야 할 그가 그러지 않고,368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철군하든지 원정군의 규모를 두 배로 늘리든지 선택하라고 던졌을까요? 철군을 주장하면 민회를 장악하고 있는 거칠고 상스럽기가 클레온 맞잡이인 클레오폰이 원정 실패의 모든 덤터기를 자기에게 뒤집어 씌울까 겁나는 소심한 정치가의369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요? 아니면 원정을 포기토록 하고자 놀랄 만한 원정군의 규모를 제시했는데도 받아들인 클레오폰을 보고, 이번에도 틀림없이 철군보다는 두 배 규모의 증원을 택할 것이라 알고 멈칫거리며 늘 이기는 장군의370,371본색을 드러낸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니키아스는 평소 그를 후원하는 귀족들이나 부자들뿐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소심한 정치가로, 조심스런 장군으로 다가갔고, 그렇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에게는 화수분인 라우레이온 은광이 있었고, 키몬만큼은 아니라도 그의 부를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아, 그의 소심함은 정치가 니키아스의 오만과 탐욕을 덮을 수 있었고, 그에게는 승리자라는 이름이372 있었고, 신이 내리는 행운까지 더해 늘 이기고 있어, 그의 조심스러움은 장군 니키아스의 오만과 탐욕을 감추고 지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가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소심함과 망설임으로 가려진 그의 심중 깊숙한 곳의 오만과 탐욕이 늘려 있었지만, 같은 오만과 탐욕을 온통 뒤집어쓰고 사는 클레오폰이나 아테나이 사람들은 편지에 깔린 니키아스의 오만과 탐욕을 알아채고 우려하기보다 소심함과 조심스러움으로 치부하고 웃어 넘겼습니다. 아테나이 제일 시민 페리클레스보다 더 오래 장군직을 하고도 사그라들 줄 모르는 권력에 대한 니키아스의 끝없는 탐욕은373 자신의 신병을 돌보기보다 오히려 그것으로 아테나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시를 위해 더 봉사해야 한다며 또 다시 그에게 권력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끌었습니다. 권력에의 탐욕은 온갖 여려움에도 불구하고 증원군만 오면 반드시 이긴다는 승리에의 열정으로 적혔고, 민회가 별 수 없이 자기를 원정군 장군으로 재신임할 수밖에 없다는 오만함은 병든 노장의 안타까운 사직원으로 읽혔습니다. 이런 니키아스의 탐욕과 오만은 페리클레스가 그랬듯이, 곧바로 그 자신과 그가 사랑해 마지 않는374 그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다시는 끌어올려질 수 없는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것이었습니다.
11.16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제가 잠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정치 체제를 민주정으로 바꾸고 난 뒤 제일 먼저 겪었던 우리 민주정이 가진 문제점 하나를 말씀드리고, 이 당시 아테나이가 똑같은 문제에 봉착해 우리의 도시를 나락에 빠트리고 말았음을 상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아크로폴리스에 가실 적마다 보게 되는 대문 기둥 옆에 놓인 청동화로의 유래를 모르시는 분은 아무도 없으십니다. 그 청동화로는 민주정 아테나이가 보이오티아와 칼키스를 무찌르고 포로들 몸값 1/10로 만든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승리였고,375 그 승리는 아테나이 사람들로 하여금 민주정의 아테나이가 스스로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자부심과 긍지 이외에 기대치 않았던 선물까지 아테나이에 주었는데, 바로 돈이었지요. 전쟁에서 이기면 돈이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수입은 횡재와 같았고, 싸우면 이길 것 같아 전쟁이 기다려졌습니다. 민주정은 그들에게도 민회에 나가 똑같이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고, 그들의 숫자는 쌓아 놓고 먹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군사적 자신감이 오만함으로 바뀌고 여기저기 근질근질하여 아이기나와도 다투고 하던 아테나이 사람들 앞에 제대로 된 돈벌이 전쟁 건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명분도 좋았습니다. 같은 이오네스 사람들이 아나톨리아의 이오니아에 세운 도시 밀레토스가 페르시아의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지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밀레토스의 참주 대리 아리스타고라스는 먼저 스파르테를 찾았으나 클레오메네스에게 거절당했는데, 아테나이는 민회를 열어 뚝딱 단숨에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방어가 허술한 사르데이스에는 금은보화가 잔뜩 있다는 것이었지요. 근질근질하던 아테나이 사람들이 클레오메네스가 사흘이나 궁리하다 거절한 파병을 단박에 결의한 이유를 알겠지요.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잘 아시는 이야기니 더 이상 긴 말 보태지 않겠습니다.376 아테나이는 밀레토스를 잊고 싶어했고, 페르시아의 침공을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았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구축한 함선들 덕분이었지요. 함선이 아테나이 사람들의 새로운 벌이가 되었고, 하루 벌어 하루 먹던 사람들이 몇 달씩 노를 젓고 노삯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겐 배를 띄울 일이 많이 있어야 했습니다. 무역보다 전쟁이 더 수입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으면 약탈로 큰 돈 벌 수도 있었지요. 그 전쟁의 끝에 아테나이는 또 다시 전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페르시아가 가르쳐준 제국의 건설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밀레토스의 기억도 페르시아의 기억도 잊고, 싸우면 이긴다는 오만과 더 많은 돈에 대한 탐욕으로 제국을 확장했습니다. 결국 제국의 확장이 헬라스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싸우면 이긴다는 오만과 제국을 포기할 수 없다는 탐욕이 너무나 당연하게 전쟁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포테이다이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3년이나 포위해야 했고, 함락시키면 비용을 건질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3년이나 농성한 도시에 무엇이 남았겠습니까? 아주 작은 포테이다이아를 처리하는 데 아테나이가 가진 돈의 1/3을 날려버렸지요.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역병이 도시의 근본인 시민의 숫자를 1/3이나 줄였고, 상속을 둘러싼 온갖 송사가 새로운 수입원이 되면서 아테나이는 송사로 날을 새다가 피폐해졌고377, 누가 보아도 아테나이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야 할 전쟁이 대를 이어가게 생긴 것이었지요. 전쟁이 길어지자 노꾼들이야 노삯을 챙길 수 있었지만, 헬라스의 도시들마져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10년이 지나 제국의 수입이 더 이상 전쟁을 감당할 수 없을 무렵 다행히 전쟁을 멈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도 잠시였습니다. 겨우 두 해도 지나지 않아 전쟁이 없어 수입이 전만 못해진 사람들이 어디 전쟁이 없나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전쟁을 발판으로 권력을 잡고 싶은 사람들이 평화조약의 빈틈으로 빠져나가 전쟁을 부추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만과 탐욕은 그대로인 채 밀레토스만 잊고 산 아테나이 사람들 눈에 방어는 허술하고 재화는 가득한 곳으로 시켈리아의 쉬라쿠사이가 그 옛날의 사르데이스처럼 떠올랐고, 한번 발동한 탐욕과 오만은 밀레토스고 사르데이스고 없이 그저 장군들이 이 정도라야 이길 수 있다는 군비를 단박에 뚝딱 결의해주었고, 한 해 반이 지나 또 그만큼의 군비를 결의해줄 것이었습니다. 쉬라쿠사이를 함락하면 그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올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돈을 버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진 아테나이 사람들을 말릴 수 있는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테나이에서 권력을 쥐는 유일한 길이 전쟁을 해서 돈을 벌도록 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테나이의 민주정은 돈을 벌기 위해 전쟁을 벌이기 너무나 편리한 제도였지요. 올리브 기름을 짜고, 포도주를 담는 사람들보다 배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배를 타는 사람들에게 앗티케의 농부 디카이오폴리스와 트뤼가이오스의 평화는 전혀 그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바다의 암초 같은 것이었습니다.378 그리고 아테나이 사람들은 2,000탈란톤을 들여 함락한 3년 굶은 포테이다이아에는 건질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 옛날 밀레토스를 잊었듯이 편리하게 잊고 쉬라쿠사이를 함락해 건질 재화를 꿈꾸며 들떠 있었지만, 이 모두가 물거품이 되면 뱃사람들이 주도해 전쟁만 결의하는 민주정은 위기를 맞을 수도 있을 것이었습니다.
11.16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 당시 아테나이는 도시가 온통 오만과 탐욕으로 가득차 올라 그 누구도 다가오는 전쟁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이 나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르고스가 앞장선 스파르테 골탕먹이기에 동맹의 간청을 더 이상 물리칠 수 없다며 함선 30척을 떡하니 보내 보란 듯이 아르고스로 보내 스파르테와의 평화조약을 위반한 데다가, 함대가 불문률인양 금기해왔던 라코니케에 상륙해 공격하고 약탈했습니다.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도 아니고,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의 땅에 올라 스파르테 사람들의 마을 에피다우로스 리메라와 프라시아이와 그 일대의 다른 마을들을 기습하며 전쟁을 건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테가 그 동안 아테나이가 퓔로스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연안에서 크고 작은 분란을 일으킬 때마다 중재를 요청해도 거부하는 아테나이에 대해 최대한으로 인내하고 자중하며 버틴 것은 지난 전쟁에 대한 자책의 마음으로 그때 아테나이의 중재 요청을 거부했던 일과 테바이가 플라타이아를 공격하는 바람에 속절없이 원치 않았던 전쟁에 휩싸이고 만 일에 대한 응보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는데,379 느닷없이 아테나이가 아르고스에 함대를 보내 조약을 파기하더니, 그 함대가 자기들 땅에 올라 자기들 마을들을 유린하고 돌아가니, 이것은 틀림없이 아테나이가 작심하고 스파르테에 싸움을 건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고 스파르테는 흔쾌하게 새로운 전쟁을 수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헬라스의 해방자로서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의 도시를 아테나이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이었습니다. 이런 스파르테의 결심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사나워진 아테나이의 탐욕과 오만은, 스파르테의 다음 행동에는 조그만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니키아스를 원정군의 장군으로 재신임하면서 그에게 많은 돈과 대군을 보내 쉬라쿠사이 함락 소식이나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시켈리아 원정군의 새로운 두 장군으로 전에 이미 3년이나 시켈리아에 가 있었던 에우뤼메돈과 퓔로스에 요새를 지어 스파르테를 괴롭혔던 데모스테네스가 결정되었고, 선발대로 에우뤼메돈이 군자금 100탈란톤을380 가지고 10척의 함선으로 그해 겨울 동지 무렵 시켈리아로 출발했고, 데모스테네스는 이듬해 새봄에 출발하기로 하고 그에게 함선과 군대 징집을 맡겼고, 펠로폰네소스의 지원군이 시켈리아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따로 함선 20척을 펠로폰네소스 해안으로 보내 감시케 하는 가운데 겨울을 보낼 것이었습니다. 한편 쉬라쿠사이로부터 사절단을 맞은 코린토스와 스파르테는 각자 중무장보병을 화물선 편으로 증파하기로 하고, 코린토스 함선 25척으로 아테나이의 감시선단을 막아 증원군이 무사히 시켈리아로 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새봄에 아테나이가 대규모의 증원군을 시켈리아로 보낸다는 소식에 코린토스와 쉬라쿠사이가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증원군 규모를 견제할 수있도록 앗티케로 나아가 달라 요청하자, 스파르테는 드디어 움직일 때가 왔다고 보고, 동맹국들로부터 쇠연장들을381 모아 요새의 축성 장비들을 마련하면서 전쟁 열여덟 번째 해 겨울을 보냈습니다.
11.16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헬라스 내전 첫 해 여름, 대를 이어 벌일지도 모르는 전쟁에 나서는 스파르테 왕 아르키다모스는 찜찜한 마음을 달래고 싶은 듯 이스트모스에 집결한 펠로폰네소스 군을 이끌고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기 저기 둘러 둘러 앗티케로 들어갔지만, 그로부터 열여덟 해가 지난 전쟁 열아홉 번째 해 새봄, 그 아버지의 예감대로 대를 이어 전쟁을 물려받은 스파르테 왕 아기스는 기꺼이 따라 나선 동맹들의 군대와 함께 이른 봄의 상큼한 바람만큼 개운한 심정으로 앗티케의 농지들을 유린하며 곧바로 데켈레이아로 나아갔고,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각 도시들이 분담한 대로 요새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헬라스 세상의 내전이 다시 일어났음을 온 헬라스 세상에 알렸습니다.382 아기스가 데켈레이아에 안착하자,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쉬라쿠사이 지원 병력도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증원군보다 먼저 출발했는데, 네오다모데이스와 헤일로타이에서 뽑힌383 스파르테의 600명, 보이오티아의 300명, 이들 900명의 중무장보병은 라코니케의 타이나론 곶에서 화물선을 타고 떠났고, 아르카디아 용병을 포함한 코린토스의 500명, 시퀴온의 200명, 이들 700명의 중무장보병은 코린토스에서 화물선을 타고 코린토스 함대의 엄호 속에 나우팍토스의 아테나이 함대를 피해 무사히 만을 빠져나와, 모두 1,600명의 중무장보병이 이오니아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한편 쉬라쿠사이에서는 겨우내 시켈리아의 도시들을 설득하며 돌던 귈립포스가 많은 군사들을 모아 돌아와서, 강력한 아테나이 해군을 상대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되도록 많은 인원을 해군에 배치할 것을 주장하고384, 쉬라쿠사이의 헤르모크라테스 역시 담대한 무경험자들의 도전이 희생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주눅들지 말고 바다에서도 맞서자고 강력히 동조하고 나서자, 쉬라쿠사이는 바다에서도 맞서기로 하고 배에 선원들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봄부터 쉬라쿠사이의 군세가 늘고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것을 본 에우뤼메돈은 증원군을 독촉하기 위해 급히 헬라스로 다시 갔는데, 마침 아기스가 앗티케를 유린하고 데칼리아에 요새를 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아테나이는 이에 대한 응징으로 아르고스의 도움을 받아385 라코니케에 퓔로스와 같은 요새를 세울 작정으로 시켈리아 원정 증원군이 출발하기도 전에 따로 카리클레스에게 30척의 함선을 주어 아르고스로 보냈고, 데모스테네스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뒤에 오는 인원이나 선박은 따로 아이기나에서 만나도록 하고, 아테나이에서 징집한 1,200명의 중무장보병과 각 섬에서 보낸 인원들과 전쟁물자들을 아테나이 함선 60척과 키오스 함선 5척에 태우고 출발했는데, 아아이가니에서 후진과 합류하고 아르고스를 다녀온 카리클레스도 펠로폰네소스 해안에서 만나 함께 라코니케 해안으로 갔고, 에피다우로스 리메라를 유린한 다음 퀴테라 섬 맞은 편 아폴론 신전이 있는 라코니케의 한 작은 반도에 상륙해 주위를 약탈한 다음 퓔로스 같은 역활을386 할 요새를 세우는 걸 보고 데모스테네스는 가는 길 중간 중간 동맹들의 지원군을 태우기 위해 케르퀴라로 향했고, 카리클레스는 요새가 완성되자387 수비대를 남기고 아테나이로 돌아갔고, 아르고스 군도 아르고스로 돌아갔습니다.
11.165. 에우뤼메돈은 증원 독촉차 헬라스로 가고 없고, 새봄에 출발한다던 데모스테네스는 군사와 장비 모으랴 장기인 적국에 요새 세우랴 부산을 떨며 아직 헬라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또 다시 니키아스 혼자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군을 지휘하고 있고, 펠로폰네소스 지원군 역시 아직 쉬라쿠사이에 도착하지 않은 전쟁 열아홉 번째 이른 봄, 설득 끝에 쉬라쿠사이가 해전을 감행할 결의를 보이자, 스파르테의 귈립포스는 밤중에 자신의 중무장보병들을 데리고 아테나이 함대의 기지인 플렘뮈리온 보루들 기습에 나섰고, 먼 동이 트는 신호에 맞춰 쉬라쿠사이 함대도 35척은 큰 항구에서 45척은 작은 항구에서 나와 모두 80척으로 플렘뮈리온 공격에 나섰고, 이를 본 아테나이 함대 60척 역시 25척과 35척으로 나누어 대응하면서 양군 간에 첫 번째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쉬라쿠사이 해군은 처음부터 용감하게 돌진해 해전을 대등하게 이끌었고, 이를 구경하느라 플렘뮈리온 보루의 수비대가 한눈 파는 사이 귈립포스가 기습해 보루 셋 모두 점령했고, 보루의 아테나이군 대부분은 전투를 포기하고 화물선이나 작은 배들에 올라 도망치면서 귈립포스가 많은 노획물을388 얻으며 기습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사이, 해전에서는 우세하게 맞서던 쉬라쿠사이 해군이 보루에서 도망치는 배들을 보고 이를 쫓느라 쾌속선 하나를 보내기도 하고, 아테나이 함선들을 돌파해 큰 항구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지만, 이런 와중에 질서가 무너지고 자기들끼리 뒤죽박죽 되는 바람에, 귈립포스의 기습이 끝날 무렵에는 11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3척이 나포되는 등389 스스로 아테나이 함대에 승리를 바치고 작은 항구 앞의 오르튀기아 섬까지 쫓겨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날 전투로 쉬라쿠사이 해군은 패전에서의 교훈으로 함선을 개량하고 전술을 개발하며390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고, 그래서 아테나이군의 보급 차단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게 된 반면, 아테나이군은, 비록 그날의 해전에서 승리했다 하나, 플렘뮈리온 기지와 함께 그곳에 저장했던 많은 보급품을 잃은 데다 그 다음부터는 보급마져 일일이 싸워서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리면서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11.166. 플렘뮈리온 전투가 있은 뒤 양측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쉬라쿠사이 해군은 먼저 아테나이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12척의 함선을 이탈리아로 보냈는데, 그 중 1척은 사절단을 태우고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지원 도시들로 가서, 플렘뮈리온 점령으로 나아진 전황을 알리면서 해전의 패배를 자신들의 무질서로 설명하고,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테나이군을 물리치는 것이 최선이므로 쉬라쿠사이를 도와달라는 한편, 아테나이를 위축시키기 위해 펠로폰네소스군도 아테나이를 더욱 압박해줄 것을 요청하고 다녔고, 나머지 11척은 아테나이의 보급선단의 뱃길에서 기다리다 공격해 대부분을 파괴했고, 카울로니아로 가서는 그곳에 보관된 아테나이 해군의 선박 목재들을 불태운 다음, 로크리스로 가서 정박하려다, 마침 테스피아이의 중무장보병들을 태운 화물선이 도착하는 통에 이들을 옮겨 태우고 해안을 따라 쉬라쿠사이로 돌아오던 중, 메가라 앞바다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아테나이 함선 20척의 저지를 받았으나 1척만 나포되고 나머지는 모두 무사히 쉬라쿠사이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전투 공방 사이로 서로의 전술 공방도 이어졌는데, 아테나이는 쉬라쿠사이의 옛 조선소 앞에 박힌 공격 함선의 접근을 방지하는 목책들 제거하기 위해 400톤을 실을 수 있는 아주 큰 화물선을 가져와 그 배에 묶인 밧줄을 작은 선박들이 말뚝으로 가 묶으면 화물선을 움직여 뽑거나 부러뜨렸고, 암초처럼 물속에 잠긴 목책들은 잠수부를 동원해 톱으로 잘라내었는데, 이렇게 없애고 돌아서면 쉬라쿠사이는 이내 새로운 말뚝을 박아 두는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11.16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마침 쉬라쿠사이에서의 전쟁이 말뚝이나 뽑고 박는 아주 잠간의 소강 상태를 보이던 때,391 헬라스에서 일어난 한 야만적 살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전쟁이 도대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데 무슨 역활을 하는지 여러분과 함께 깊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아테나이가 이 끔찍한 살륙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그 원인이 앗티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해 새봄부터 데켈리아 요새를 거점으로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에 순번을 주어 번갈아 지속적으로 앗티케를 유린케 하는 아기스의 전략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예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심각한 타격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테나이가 정말로 요새섬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전 전에 이미 페리클레스가 요새섬 전략을 말하면서 앗티케를 버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때 아르키다모스는, 데칼레이아를 지키고 있는 그의 아들 아기스와는 달리, 앗티케로 나올 때마다 길어야 한 달, 보통 보름 정도 있다가 돌아갔기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들은 굳이 앗티케를 버리지 않아도 요새섬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며 편하게 앗티케와 더불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아기스 때문에 사시장철 아테나이 성벽 안에 갇혀 지내게 생긴 때문이었습니다. 바다가 있으니 문제 없다 했었지만, 가축도 가구도 먹을 것도 다 챙기지 못하고 성 안으로 피난했으니 막상 자급자족하던 것들을 사야 했는데 그것이 배삯에392 세금도393 붙어 있어 비싸기까지 하니 저절로 약이 오르는 판에, 성 밖에는 테바이군이 그들이 두고온 나귀를 잡아 그들의 수레에 그들의 가구며 문짝이며 곡식들을 싣고 머뭇거리다 잡힌 앗티케 농부들을 양과 염소와 함께 줄에 매어 끌고가는 것을394 보면서도 나가서 싸울 수 없으니 분통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전 초에는 아테나이가 돈도 있고 피난 기간도 길지 않아 그들의 분노를 주저앉힐 수 있었는데, 이제 언제 돌아가냐고 낙담하고 분노한 그들에게 형편이 어려워진 아테나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병대를 출동시켜 약탈자를 쫓아내는 일이 고작이어서, 니키아스가 그렇게도 안타까워한 기병의 부족을 채워줄 수도 없었는데, 그나마 출동이 잦아지니 말들이 다쳐 절름발이가 되기 일쑤여서 더 손을 쓰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이웃 보이오티아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쌓여가는데, 늦게 도착해395 시켈리아로 가지 못한 비싼396 트라케 용병들을 돌려보내는 김에 그들을 앞세워 보이오티아 마을들을 본보기로 보복할 생각을 한 것이었습니다. 지시를 받은 귀환 인솔자 디에이트레페스는 배로 에우리포스 해협으로 올라갔고,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 인근에 상륙해 해변 마을들을 재빨리 약탈한 다음, 밤에 해협을 지나 보이오티아 해안에 올라 내륙 쪽의 뮈칼렛소스397 마을에서 좀 떨어진 한 신전에서 몰래 자고, 아침에 경비도 없고 성벽은 있었지만 허물어졌고 성문도 열린 그리 크지도 않은 마을 뮈칼렛소스를 덮쳤습니다. 단검을 쓰는, 다른 야만인들처럼 극도로 피에 굶주린398 이들 트라케 용병들은 두려움 없이 하루 종일 신전과 집들을 부수고, 주민들이 보이는 족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심지어 방금 등교해 아침 수업을 준비 중인 아이들까지, 갖가지 방법을 죽이고, 가축까지도 산 것이면 모조리 죽였습니다.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는 참혹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그들이 도대체 우리 아테나이에 대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 그런 마을이 헬라스 세상에 있는지도 모르는 보이오티아의 한 한적한 마을에 성벽이 허물어져도 그냥 둔 채 성문도 열어둔 채 마을과 그들의 안전과 자유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함이 없이 그저 평화롭게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었고, 이런 극악한 짓을 저지런 자들은 전장에서 같이 칼을 들고 나선 적들과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도록 아테나이가 고용한 트라케 용병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돈만 주면 싸우는 야만족 용병들을 사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한적한 마을로 데리고 가서 아무 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애어른 가리지 말고 심지어 산 짐승까지 모두 죽여 돈값을 하라고399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지시한 사람은 바로 우리 아테나이였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는 아테나이의 델리온과 함께 두 나라 사이의 전투가 자주 벌어졌던 곳입니다. 그곳을 약탈하러 올랐을 때 트라케 용병들은 재빨리 돌아나와야 했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입고 산 그곳 주민들은 전쟁이 무슨 짓을 벌일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언제나 스스로 그들 마을과 주민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타나그라에서의 첫 보복에 실패한 디에이트레페스가 어째서 어떻게 그런 곳이 있는지 알고 갔는지 모르지만, 단지 그 마을이 보이오티아에 있고 스스로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준비가 되지 않아 손쉽다는 이유로 뮈칼렛소스라는 마을로 가서 하루 종일 같은 신을 믿는 사람들의 신전을 부수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장 참혹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으로 죽였던 것이었습니다.
11.16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런 참혹함을 보고도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소리치실 분이 계시면 앞으로 나와 크게 소리치십시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리스토파네스! 이 칼도 못 드는 겁쟁이야!400
그것이 바로 전쟁이야! 전쟁!
전쟁이 너희 웃기는 광대들처럼 욕이나 해대며 노는 건 줄 알았어?"
11.16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다행히 이 자리에는 그것이 바로 전쟁이라며 고함치고 나오시는 분이 없으시니, 우리 모두 우리가 좋아하는 팔백만이 넘는 신들에게 그때 부서진 뮈칼렛소스와 뮈칼렛소스 사람들 영혼에겐 천상 최고의 안식을, 전쟁에 나가 돈을 벌지 못하게 된 앙갚음으로 더욱 잔혹했던 트라케 용병들에게는 지상 최고의 죄값을401 매겨주십사 다같이 기원하면서, 다시 시켈리아 원정 증원군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학살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데모스테네스는 케르퀴라로 가면서 펠로폰네소스의 시켈리아 지원군을 태우고 엘리스의 페이아 항에 정박해 있는 화물선 하나를 부셔버렸고402, 자퀸토스와 케팔레니아 섬에서 중무장보병 약간을 태웠고, 나우팍토스도 멧세니아 중무장보병을 차출해 보내라 연락한 다음, 아카르나니아의 아테나이 관할지인 아낙토리온 곶에서 기다렸는데, 거기서 증원군을 독촉하러 아테나이로 가던 에우뤼메돈을 만났고, 플렘뮈리온을 빼앗긴 소식도 들었고, 코린토스의 시켈리아 지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나우팍토스에 와 있던 코논이403 찾아와 자기의 18척으로는 나우팍토스 항을 가로막고 선 25척의 코린토스 함대를 상대할 수 없으니 지원해달라는 요청도 받았습니다. 에우뤼메돈과 데모스테네스는 휘하 함선 10척에 최고의 선원들을 붙여준 다음, 시켈리아로 가는 데모스테네스를 만나 아테나이로 갈 필요가 없어진 에우뤼메돈은 15척의 함선에 태울 선원들과 중무장보병들을 모집하기 위해 케르퀴라로 갔고, 데모스테네스 아카르나니아에서 투석병과 투창병을 모집하며 계속 남아 있어, 아테나이의 시켈리리아 원정 증원군은 여전히 헬라스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필요한 병력과 선원들을 쉽게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니키아스가 토로한 시켈리아 원정군의 선원이나 용병이나 노예들 이탈과 도망의 문제와 그 빈 자리 충원의 어려움은 그대로 헬라스의 아테나이군에게도 다를 바 없었는데, 예를 들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떠난 외지인 최고 기량의 노꾼들과 선원들의 자리를 채우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기스가 데칼레이아에 주둔한 뒤에는 도시와 라우레이온 은광에서 대부분이 기술자들인 20,000명의 노예들이404 데켈레이아 요새로 도망쳤고, 도망 간 노예를 채울 수 없어 아테나이는 더 이상 은을 생산할 수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형편에도 아테나이는 쉬라쿠사이에서 나올 어머어마한 재물에 대한 탐욕도, 싸우면 이긴다는 오만도 버리지 못하고, 시켈리아와 헬라스에서 두 곳에서 계속 전쟁을 수행해 나가기로 결의하는 놀랄 만한405 집착을406 내보이고 있었습니다.
11.170. 에우뤼메돈과 데모스테네스가 헬라스에서 지원군을 모으고 있는 동안, 쉬라쿠사이의 사절단은 플렘뮈리온 함락을 내세우며 시켈리아의 헬라스 도시들을 돌아 지지를 이끌어내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사절단은 헬라스 사람들 상대로 직접 2,300명을 모집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를 안 니키아스가 그들이 통과할 길목의 시켈로이 사람들에 손을 써 준비한 매복에 걸려 사절단과 헬라스 사람 지원자들 800여명이 죽는 대참사를 당하긴 했지만, 그래서 직접 아테나이군을 공격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하긴 했지만, 사절 한 사람과 1,500여명은 살아서 힘들게 쉬라쿠사이에 도착했고, 계속 카마리아가 보낸 중무장보병 500명, 궁수 300명과, 겔라에서 보낸 5척의 선단과 투창병 400명, 기병 200명도 도착하는 등, 중립을 표방한 아크라가스를 빼고는407, 사태를 지켜보던 시켈리아의 도시들 모두가 쉬라쿠사이를 편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쉬라쿠사이 지원군들이 늘어나고 있을 때, 드디어 목표한 군세를 이룬 아테나이 증원군은 이오니아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의 이아퓌기아 곶에 도착했고, 엄청난 수의 함선들과 군대로 시위하며 이곳에서부터 다시 새로운 아테나이 동맹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곳 섬들에 사는 멧사피아 사람들이 뽑은 150명 정도의 투창병을 태웠고, 이탈리아의 메타폰티온에서도 함선 두 척과 투창병 300명을 지원받아 태운 뒤, 정변으로 아테나이에 우호적으로 된 트리오이로 가서 한동안 머무르며 트리오이와 공수동맹도 맺고 중무장보병 700명, 투창병 300명을 지원받았고, 이때까지 모은 보병 모두를 사열하며 육로로 행군하다가 통과를 거부하는 크로톤 사람들 때문에 휠리아스 강 어귀 해안에서 야영하고 이튿날 함대와 만나 배로 로크리스를 뺀 모든 해안 도시들을 돌아 페트라 곶까지 갔고, 거기서 바다 건너 쉬라쿠사이에 도착했습니다. 데모스테네스와 에우뤼메돈이 모두 73척의408 함선들과 5,000명의 중무장보병 그리고 다수의 투창병, 투석병, 궁수 같은 경무장보병과409 각종 장비들을 모아 쉬라쿠사이로 오는 동안, 헬라스와 쉬라쿠사이에서 해전이 있었는데, 아테나이 해군이 33척의 함선으로410 에리네오스 항구에411 정박하고 있던 25척의 코린토스 해군을 공격하면서 벌어진 이 해전에서, 뤼안테스가 지휘한 코린토스 함대는 함선 3척이 침몰했지만 개량된 닻걸이로 공격에 성공해 디필로스가 지휘한 아테나이 함선 7척을 운행 불능으로 만들면서 서로 비겼고, 쉬라쿠사이는 아테나이 증원 군 도착 전에 일격을 가하려고 나서, 먼저 귈립포스가 쉬라쿠사이 시내에 있던 보병들을 데리고 쉬라쿠사이 도시 성벽과 마주한 아테나이 군의 방벽을 공격하고, 올륌피에이온에 있던 기병들과 중무장보병 그리고 경무장보병들은 다른 쪽에서 공격에 들어갔고, 이때 쉬라쿠사이 해군이 코린토스 식으로 개량한 함선 80척을 동원해 큰 항구의 아테나이 해군 앞에 나타나자, 처음 방벽 공격에만 대비하던 아테나이군은 허겁지겁 배에 올라 75척으로 출동하여 전투를 벌였고, 방벽과 바다에서 해가 질 때까지 싸웠으나 아테나이 함선 2척이 침몰된 것이 이외에는 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이튿날 쉬라쿠사이 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니키아스는 공격에 대비해 함선들 정비에 나서는 한편 목책 앞에 화물선들을 배치해 그 사이로412 공격받는 함선들이 후퇴했다 다시 나갈 수 있도록 온종일 바삐 움직였고, 사흘 째 되는 날 쉬라쿠사이가 다시 첫 날과 똑같이 공격해왔으나 마찬가지로 일진일퇴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코린토스 최고 키잡이 아리스톤이 꾀를 내어 해안에 배를 정박시키고 하선한 노꾼들이 급히 열린 음식 시장에서 점심을 먹도록 했고, 이를 지켜보던 아테나이 해군들도 그것으로 그날의 전투가 끝난 것으로 알고 하선하여 식사 준비도 하며 이런 저런 일들을 보기 시작하자, 쉬라쿠사이군이 갑자기 승선해 다시 공격해왔고, 혼란에 빠진 아테나이군이 겨우 출동해 전투에 나섰고, 드디어 쉬라쿠사이 함선들이 개조한 돛걸이와 충각으로 이물 공격을 감행하며 아테나이 함선들의 노걸이 횡목들을 부수며 갑판의 투창병이 창으로 피해를 입혔고, 그 사이로 작은 배들에 탄 쉬라쿠사이 투창병들이 함선들 사이로 다니며 창으로 노꾼들을 해치자, 견디지 못한 아테나이 해군이 화물선 뒤로 퇴각했고, 승리감에 도취해 추격하던 쉬라쿠사이 함선 2척이 화물선에 매달아 놓은 납덩이413 밑으로 가다 떨어진 납덩이에 부셔지며 나포당하자, 그때서야 7척을 침몰시키며 여러 척을 운행 불능으로 만들고 물러선 쉬라쿠사이 해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날의 승리로 자신감이 붙은 쉬라쿠사이군이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 증원군이 그 위세를 떨며 쉬라쿠사이에 나타났습니다.
11.171. 쉬라쿠사이 사정을 파악한 데모스테네스는 니키아스가 도착 첫 해 원정군의 위세로 겁먹은 쉬라쿠사이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카타네에서 겨울을 보내며 한 해를 그냥 까먹은 잘못을 자기가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증원군의 위세에 눌려 있을 쉬라쿠사이를 당장에 공격하러 나섰습니다. 그는 에피폴라이의 쉬라쿠사이가 쌓은 대응 방벽이 한 겹이라 단번에 무너트리고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다음 계속해서 쉬라쿠사이를 공격해 함락시키거나, 바로 아테나이로 철수해 그런 과정의 희생을 피할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테나이군은 우선 아나포스 강 주변을 유린했는데, 쉬라쿠사이에서는 올륌피에이온의 기병과 투창병이 나선 것 말고는 대응이 없어 간단히 물뭍에서의 우위를 다시 찾았고, 데모스테네스는 에피폴라이로 오르는 길을 확보하며 공성 장비들을 가지고 갔지만, 오히려 방벽을 지키던 쉬라쿠사이군이 공성 장비들을 불태우며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아테나이군의 공격을 막아내자, 이에 니키아스와 에우뤼메돈의 동의를 얻어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니키아스만 방벽에 남겨둔 채, 닷새 치 식량, 화살, 석공, 목수, 축성 장비들과 함께 전군을414 동원해 첫 원정군이 이미 올랐던 에우뤼엘로스 길로415 밤을 도와 에피폴라이로 갔습니다. 초소의 쉬라쿠사이 병사 몇을 죽였지만, 나머지는 전초기지로 도망쳤고, 이들은 쉬라쿠사 군대의 요새, 시켈리아의 헬라스 사람들 군대의 요새, 동맹군의 요새, 세 곳으로 적침을 알리면서 에피폴라이 통로 경비대 600명에게도416 알렸고, 경비대 600명이 아테나이군에 맹렬히 맞섰으나 패주했고, 세 곳 요새는 여세를 몰아 밀어부치는 아테나이군 앞에 나서지 못해, 아테나이군은 쉽사리 쉬라쿠사이의 방벽을 점령하고 방벽을 허물기 시작했고, 적침을 알고 출동한 귈립포스와 그의 부대가 막아보려 나섰지만 한밤중에 당하는 공격 앞에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쉬라쿠사이군이 대오를 갖추기 전에 돌파하기 위해 신을 내며 마구 덤비던 아테나이군을 보이오티아군이 가로막았고, 아테나이군이 물러서자 뒤따르던 아테나이군이 혼란에 빠졌고, 한밤중에 벌이는 전투라 달은 밝았지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몰라 좁은 방벽 안에서 양군의 수많은 중무장보병들이 서로 뒤섞여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 아테나이군 일부가 물러서고 있는 판에 일부는 계속 공격하고 있었고, 그 뒤로는 이제 막 에피폴라이에 오른 군대도 있었고, 아직도 오르는 군대도 있어 이들 모두가 혼란에 빠져 서로 고함만 치고 있었고, 쉬라쿠사이군은 그들대로 다른 소통 방법이 없어 서로 고함을 질러 자신들이 우세함을 알리며 흩어지지 않고 서로 밀착하여 공격에 맞서고 있었습니다. 고함만 지르는 혼란 속에 아테나이군은 패주하는 아군도 적군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어 고함으로 암호를 물어 대는 바람에 암호가 노출된 반면, 뭉쳐 있던 쉬라쿠사이군은 서로 암호를 묻고 댈 필요가 없어 노출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쉬라쿠사이는 이동 중에 아테나이 암호를 대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아테나이군은 쉬라쿠사이 암호를 대지 못해 곧바로 공격받는 피해를 입었고, 이런 고함 속에 서로 기세를 올리는 파이안을 불렀는데, 아테나이군에서 나오는 이오네스 파이안 소리는 작고, 아르고스나 케르퀴라 병사들이 부르는 도리에이스 파이안이 쉬라쿠사이 진영이 부르는 도리에이스 파이안과 합쳐지면서 크게 울려 아테나이 사람들의 군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아테나이군은 자기들끼리 부딪치고 겁주고 갈라서다가 밀리기 시작했고, 좁은 길에서 밀리자 무구를 버리고 낭떠러지에 뛰어내리면서 많은 희생자를417 내고 혼자 남은 니키아스에게로418 돌아갔고, 길을 몰라 헤매던 증원군 중에는 이튿날 수색에 나선 쉬라쿠사이 기병들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1.172. 휴전을 하고, 전사자들을 교환하고, 보이오티아군이 반격을 시작한 곳과 에피폴라이로 올라가는 길에 승전비를 세운 다음, 쉬라쿠사이는 시켈리에서의 안전한 통행과 동맹의 확대를 위해 내전 상태에 있는 아크라가스에 15척의 함선과 함께 시카노스를 사절로 보내는 한편, 이번 전투로 아테나이 방벽을 뚫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귈립포스는 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에 돌지 못했던 시켈리아 도시들 방문 길에 나섰고, 참패당한 아테나이 장군들은 작전의 실패와 아테나이군의 무기력을 원인으로 보고, 이제 여러 병들이 번질 계절이라419 병사들이 싫어하는 습지에 차린 진영을 옮겨야 하는 처지와 결코 밝지 않은 앞으로의 전투 전망 때문에 철군을 고려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데모스테네스가 작전에 실패한 마당에 더 이상 포위 공격에 돈을 쓰며 시켈리아에 머물 이유가 없고, 아직 해군이 우위에 있어 이오니아 바다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으니 바로 철수해서 쉬라쿠사이보다는 데칼레이아에 요새를 쌓고 주둔하고 있는 스파르테와 싸우는 것이 아테나이에 득이 된다며 당면한 문제를 오로지 장군으로서 군사적으로만 판단해 주장했고, 니키아스 역시 장군으로서 군사적으로 보아도 아테나이군의 사정이 밝지 않다는 점은 동의했지만, 마찬가지로 군사적으로도 여럿이 투표를 해서 공개적으로 철수를 공표하는것도420, 또 그렇게 해서 자기들 약점을 드러내는 것도, 그런 사실을 적이 알게 하는 것도, 언제라도 떠난다는 마음만 먹으면 비밀 리에 철수할 수 있을 가능성을 떨어트릴 것이기 때문에, 이 모두가 마뜩잖았습니다. 그렇다고 소득도 없이 명분도 없는 철군이 가져다줄 자신의 정치 권력에 대한 절대적 타격을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데다가, 쉬라쿠사이 쪽 상황을 다른 두 장군들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었던 니키아스는, 아테나이가 제해권을 쥐고 포위 공격을 지속해 나간다면, 아테나이보다는 쉬라쿠사이가 먼저 돈이 없어421 나가떨어진다는 희망이 있었고, 자기에게 쉬라쿠사이를 넘겨주겠으니 철군하지 말라고 사람을 보내고 있는 쉬라쿠사이의 한 정파도422 있었습니다. 이런 희망과 제안을 손에 쥐고 기다리는 니키아스로서는 정치가로서 당장의 철군은 불가하다는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온 사람들이 다 듣도록 철군은 안 된다며 나섰고, 철군은 아테나이가 결정할 일이라, 아테나이의 재가 없이 철군하면 비방자들의 공격으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지금 여기 병사들도 거의 대부분이 지금은 이게 무슨 생고생이냐며 돌아가자 난리지만, 일단 돌아가면 장군들이 적의 뇌물을 먹고 철군했다고 떠들어댈 테니, 이런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가서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죽느니 차라리 여기서 적들과 맹렬히 싸우다 죽겠다면서423, 아테나이가 계속 제해권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쉬라쿠사이 한 정파의 제안에 대해서는 모두가 모르는 일이므로 둘 다 언급하지 않고, 당장의 철군이 안 되는 이유 한 가지만 꼽았는데, 바로 이미 2,000탈란톤을 썼고 또 계속 큰 돈을 빚내고 있는 쉬라쿠사이가 이제는 용병들에 줄 돈도 없어 더 버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는 당장의 철군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정히 그렇다면 아테나이가 철군을 결의할 때까지 주둔지를 에피폴라이에 올라 방벽을 세우기 전에 해군이 머물렀던 탑소스나 그 전에 진영을 짓고 머물렀던 카타네로 옮기자고 주장했는데, 거기서라면 지상군과 해군이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고 그래서 넓은 지역을 다니며 주둔 비용도 마련할 수 있다고 했지만, 한 정파와의 접촉이 끊어지는 걸 우려했는지 그리고 이동으로 포위가 풀리면 적이 좀 더 버틸 것도 우려했는지424 좌우지간, 니키아스가 완강히 그곳 주둔을 주장하며 버티자, 다른 두 장군도 니키아스에게 무슨 다른 수가 있나보다 하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무렵 니키아스의 판단력은, 그것이 군사적 사안에 대해서든 정무적 사안에 대해서든, 심각하게 흐려져 있었는데, 그는 월등한 함선 수가425 아테나이의 제해권을 보장할 것이라고 당연한 판단을 했지만, 그 함선들을 움직일 선원들과 적과 싸울 해군의 기능과 사기가 모두 떨어져 있고, 더군다나 난바다가 아니라 좁은 만에 적의 함선들까지 들어차서 벌어질 전투에 대한 판단은 늦추면서, 정작 그 판단에 중요한 참고가 될 큰 항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모스테네스와 에우뤼메돈의 주장과 함수를 개조한 쉬라쿠사이 함선들의 큰 항구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의 활약을 무시했고, 쉬라쿠사이가 아테나이군보다 돈이 더 빨리 없어질 것이라고는 정확히 판단했으나, 연달아 이긴 쉬라쿠사이에 많은 시켈리아 도시들이 지원하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부담하고 나설 것이라고, 그래서 아테나이의 돈이 먼저 마르면, 다시 말해 더 이상 노꾼들을 고용할 수 없어지면, 월등한 수의 함선을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판단도 미루면서, 그동안 조심스럽게 조금씩 늘려가고 있었던 시켈리아 도시들의 쉬라쿠사이 지원 성향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무렵의 니키아스는 마땅히 자신이 내려야 했을 판단들을 지금까지 그에게 승리만 안겨주었던 신들에게 맡기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11.17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크라가스에서의 정변은 쉬라쿠사이를 편들던 정파들이 쫓겨나면서 끝나 시카노스는 겔라에서 돌아와야 했지만, 귈립포스의 모병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더욱 좋은 일은 봄에 출발했으나 오지 않았던 스파르테의 중무장보병들이426 뤼뷔에까지 흘러갔다가 늦게나마 합류한 것이었는데, 귈립포스는 자신의 직할부대를 보강할 수 있었습니다. 나날이 기세가 오른 쉬라쿠사이군은 다시 지상전과 해전을 준비했고, 버틸수록 환자만 늘어나는 아테나이군은 결국 습지를 낀 진영을 포기하기로 하고 은밀히 이동 준비에 들어갔는데, 보름달의 도움으로 모두 배에 올라탄 것까지는 좋았으나 막상 출항하려고 하니 보름달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는427 것이었습니다. 월식을 본 대부분이 이동을 연기하자고 나섰고, 평소 신의 뜻을 찾아 그에 따르려 했던 독실하고 경건한 니키아스가 점쟁이들의 말을 듣고는 숫제 다음 번 달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제물을 올리고 제사나 지내며 움직이지 않자428, 월식 때문에 아테나이군은 속절없이 또 그곳에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잖아도 육해군 총공격을 준비하던 쉬라쿠사이군은 아테나이가 밤중에 몰래 방벽과 큰 항구에서 떠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이 공격하기 힘든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결판을 지으려 나섰는데, 먼저 지상군이 아테나이 방벽을 공격했고, 아테나이가 소규모 보병과 기병을 방벽 밖으로 내보내 막았으나 협공을 받고 방벽 안으로 다시 들어가며 70필의 말과 약간의 중무장보병을 잃었고, 다음날 다시 방벽 공격에 나선 지상군에 맞추어 해군도 훈련을 마친 76척의 함선을 이끌고 큰 항구로 나아갔고, 아테나이군도 86척이429 출동해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430, 우익을 맡은 에우뤼메돈이 적선들을 둘러싸기 위해 너무 옆으로 빠진 사이, 쉬라쿠사이 함선들이 중앙을 격파하고 우익의 퇴로를 차단하며 오히려 아테나이 함대의 우익을 애워싸 쉬라쿠사이가 장악하고 있던 좁은 다스콘 만으로 몰았고 어쩔 수 없이 해안으로 쫓긴 7척을 부수고 에우뤼메돈과 다수의 아테나이 해군들을 죽인 다음,431 나머지 아테나이 함선들에게로 달려가 목책이 있는 아테나이 함선들 정박지쪽으로 몰아가자, 이를 지켜보던 귈립포스가 도망쳐 상륙하는 해군이나 선원들을 공격하면서 몰린 적선들을 쉬라쿠사이 함선들이 끌고 가기 좋도록 돕기 위해 방벽을 공격하던 일부 병력을 데리고 정박지의 부두로 달려갔는데,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이들을 본 튀르레니아432 경비병들이 막아서서 뒤죽박죽인 선두를 격파하여 정박지 옆 늪으로433 달아나게 하자, 쉬라쿠사이 구원군이 달려오고 아테나이군도 경비병들도 지원하고 함선들도 구하기 위해 모여와 격돌 끝에 아테나이군이 쉬라쿠사이군을 물리치고 낡은 상선에 불을 붙여 보내는 화공까지 시도하는 쉬라쿠사이 해군의 공격으로부터 후퇴한 함선들도 구하면서 이날의 지상전과 해전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날 해전에서 쉬라쿠사이는 자그마치 18척의 아테나이 함선을 사로잡는 등 많은 전과를 올리며434 승리했고, 이 전투 후 쉬라쿠사이군은 여기저기 활개를 치며 다녔는데, 해전에서마져 패배해 기세에 눌 아테나이군은 정박지에 박혀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11.17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쉬라쿠사이를 지원하는 도시들의 동맹군은 참가한 도시들이나 모인 병력의 숫자에서 아테나이의 그것들에 견줄 정도로 늘어나 있었는데,435 그만큼 쉬라쿠사이의 자신감도 불어났고, 따라서 자기들이 아테나이군에 완승하면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에 버금가는 도시로 헬라스 세상에 우뚝 솟을 것이라는 기대도 부풀었고, 그래서 아테나이의 침공으로부터 자기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와 노력을 뛰어넘어 그 침략군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응징을 결의했고, 곧바로 쉬라쿠사이 해군은 오르튀기아 섬과 플렘뮈리온 곶 사이의 큰 항구 입구에436 삼단노선들은 물론 크고 작은 배들을 모두 늘어놓고 닻을 내려 항구 밖으로 도망칠 수 없도록 막았습니다.437 의도를 모를 리 없는 아테나이군도 제해권을 다시 가지기까지 겪을 식량 보급의 문제 때문에 이동 가능한 모든 인원과 선박들을 데리고 한번 봉쇄를 뚫고 카타네로 가는 것을 시도해보고, 아니면 전열을 갖추고 육로로 인근의 우호적인 도시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 먼저 배를 탈 수 없는 환자들과 장비들을 지킬 작은 보루를 정박지에 세우고 그들을 지킬 수비대를 뽑아 배치했고, 다음은 가급적 많은 배에 선원들을 할당해 앞선 두 번의 해전에서 경험한 적의 공격에 대비해 선체 일부를 개조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한 다음, 출동해도 좋은 함선 110척을438 골라 대기시켰고, 끝으로 방벽을 지키던 군대를 철수시켜 투창병이나 궁수들은 주로 갑판에 배치하고 누구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나머지 공간에 태우기로 하고 정박지 해안에 집결시켰습니다.439 병사들이 결과야 어떻게 되든 한번 붙어 결판을 내고 전쟁을 끝내고 싶어진 것은 오랜 진지 생활과 요사이 계속 지기만 하는 데다 보급마져 부실해 지치고 늘어진 탓이어서, 니키아스로서는 그냥 빨리 배에 태워 전투에 돌입하기보다 그전에 그들 기운을 북돋우는 말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일전을 맞이해 신병들처럼 주눅들지 말고 노련한 병사답게 당당하게 싸우라며, 승선 보병들에게는 비록 해전이긴 하나 전투는 갑판에서 벌이는 지상전과 같을 것인데 이에 대비해 함선 개조도 마쳤으니 충돌하면 갑판 위의 적을 완전히 없애기 전에 흩으지지 말라 당부했고, 주로 동맹도시 사람들인 노꾼들에게는 아테나이와 함께해서 누렸던 온갖 은덕을 상기하며 늘 이겼던 기량을 발휘하라 격려하고, 마지막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이 일전으로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의 운명이, 우리 모두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느냐 잃느냐가 결정될 것이니 반드시 이겨 아테나이군의 위대한 명성을 이어나가자며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이러는 사이 쉬라쿠사이군은 이들이 해전을 준비한다는 것, 그리고 배들끼리 부딪쳐 갈고리로 걸고 갑판에서의 보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걸 알고, 이물과 뱃전에 가죽을 덮어 갈고리가 흘러내리도록 한 다음, 출전에 앞서 쉬라쿠사이군에서 귈립포스와 쉬라쿠사이 장군들이 독전에 나섰는데, 좁은 바다에서 퇴로를 열기 위해 작전도 없이 그저 어떻게 되겠지 하며 많은 함선들에 투창병이며 궁수며 중무장보병 등을 닥치는 대로 갑판에 배치한 궁지에 몰린 적들이 배들을 붙여놓고 마치 지상전을 하듯 갑판에서의 어지러운 전투를 감행해보겠지만, 미숙했던 우리는 용기가 등등한 반면 운도 기도 다 빠진 적들은 흔들리는 뱃전에서 창을 던지기는커녕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어 혼란에 빠질 것이니 더 많은 숫자와 싸운다는 것 때문에 두려워 말고 분연히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 쳐들어온 저들을 악착같이 무찔러 우리와 우리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자고 격려했습니다.
11.175. 쉬라쿠사이와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이 앞선 전투에 출전했던 연합함대 함선들로 중앙 본진은 퓌텐이 지휘하는 코린토스 함대가, 그 좌우는 시카노스와 아가타르코스가 각각 지휘하는 쉬라쿠사이 함대가 큰 항구 어귀를 완전히 에워싸 사방 어디에서든 공격할 수 있도록 포진하는 한편, 배를 댈 수 있는 해안에는 빠짐없이 지상군을 배치해 도주로도 차단하며 적을 기다리는 사이, 데모스테네스, 메난드로스, 에우뤼데모스가 지휘하는 아테나이와 그 동맹들의 함대는 니키아스가 해안가에 도열시킨 지상군의 응원을 받으며 출구를 확보하기 위해 적의 봉쇄망이 느슨한 곳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이름은 큰 항구라 하나 200척 가까운 삼단노선이 활개치며 기량을 펼치기엔 너무 좁아 충돌한 함선들이 서너 척씩 엉겨붙어 자연히 싸움은 갑판 위 백병전이 되었고, 쌍방이 지르는 고함이 지휘관의 명령도 삼켜버리자 함선의 갑판장들이 다구치며 나섰고, 이 와중에 물러서는 함선이라도 보이면 가면 어디로 갈 거냐며 돌아와 싸우라 독전하는 등,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해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큰 항구 해안 곳곳에서 갑판 위 백병전으로 엉겨붙은 함선들의 격전을 지켜보는 쌍방의 지상군들 역시 각자가 보는 위치에 따라 우열이 달리 드러나는 대로 여기저기서 격려와 환호의 고함을 지르며 열성적으로 응원했지요, 아침부터 해가 중천을 넘어가도록 긴 시간을 그렇게 엉겨붙어 백중의 접전을 벌이던 함선들이 서로 흩어지더니 아테나이 함선들이 뱃머리를 돌려 해안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쉬라쿠사이 함선들이 추격하자 아테나이 함선들은 가까운 육지 아무 데서나 배를 대고 뭍에 올라 아테나이 지상군 진지로 몰려갔고, 이를 지켜보던 지상군들 다수가 망연자실하여 맥을 놓고 있자, 그래도 일부는 배를 구해야지 방책을 지켜야지 하고 배로 방책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결국 허망하게도 아테나이는 해상 출구를 뚫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습니다. 50척에440 가까운 함선과 병력을 잃고 넋이 나간 아테나이가 부서진 함선과 사상자를 구하러 나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남은 방벽 안에 몰려들어 어떻게 하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탈출에만 매달리는 사이, 역시 30척에441 가까운 함선과 병력을 잃어 받은 타격이 컸던 쉬라쿠사이는 추격을 끝내고 부서진 배들과 사상자들을 수습한 뒤 돌아가 쉬라쿠사이 시민들에게 그들의 승리를 알렸습니다.442 아테나이군 대부분이 함선들과 방벽을 버리고 그날 밤으로 쉬라쿠사이에서 벗어나 일단 카타네로 가서 다음 일을 도모할 요량으로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도저히 함선을 두고 갈 엄두가 나지 않는 데모스테네스가 나서 니키아스에게 아직도 아테나이군이 쓸 수 있는 60척의 함선과, 아무리 모아도 50척밖에 되지 않을 쉬라쿠사이의 함선과, 오늘 200여척이 뒤엉켰던 전투와는 양상이 다른 100여척의 붙는 해전이라 갑판 위의 백병전을 피할 수 있어 높아질 승산과, 오늘 전투로 많이 허물어진 쉬라쿠사이의 봉쇄망, 등을 상기시키며 다음날 새벽 다시 한번 출구를 열어보자고 진언했고443, 니키아스도 동조하고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다음날 새벽의 기습 돌파를 준비시켰는데, 얼마 되지 않아 작전을 전해 들은 병사들이 지휘부로 몰려와 함선들을 구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달라며 배에 오르지 않겠다 버티고 나오자, 결국 아테나이군은 육로로 철수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1.17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얼마나 혼이 빠졌기에 장군이나 지휘관은 쉬라쿠사이에 사람을 보내 휴전을 요청하여 전사자와 함선의 잔해가 흩으진 전장을 뒷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멍하니 있더니, 전장에서 도망쳐온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그들의 함선을 챙겨 전우들의 시체를 거두려 나서기커녕 그저 제 목숨만 챙겨 밤을 도와 도망칠 궁리만하더니, 그래도 정신차린 장군이 하나 있어 바다에서는 여전히 우세한 전력 상황을 냉정히 보고, 그래도 탈출의 길은 바다에 있음을 알고, 바다로 나가야 군대도 함대도 함께 구할 수 있다며 살길을 제시하고, 장군들과 지휘관들도 동의해 하나의 돌파 계획을 수립했건만, 어처구니 없게도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병사들이 장군들이나 지휘관들의 작전계획을 거부하고, 배를 버리고 육로로 탈출하여 그들의 목숨을 구하겠다고 우겼고, 정신나간 장군들과 지휘관들은 지휘를 거부하는 병사들 몇몇을 본보기로 처벌하여 군기의 엄중함을 세우는 대신 그들의 항명을 받아들이고 육로 탈출을 결정했으니, 그 탈출이 어떻게 군기가 확립된 군사작전으로 이행될 수 있었겠습니까? 전군이 육로로 철수한다면 함선을 지고 갈 수는 없는 법, 그렇다고 그냥두어 적의 병기가 되도록 할 수도 없는 법, 성한 함선들은 태워버리기로 결정하자 혹시 또 장군들의 생각이 바뀔까 득달같이 달려가 배에 불을 지르니 야반의 철수를 적에게 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그때까지도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버리지 않으셨는지, 쉬라쿠사이 병사들도 스스로 믿어지지 않는 승리에 대한 기쁨에 더해 그날이 바로 헤라클레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날이라 그 행사로 흥청거리는 도시의 분위기에 빠져, 누가 도시를 공격해온다고 하지 않는 한 아테나이 군대의 야간 도주를 막아야 한다는 정도의 소집에는 아무도 응하지 않을 만큼 해도 지기 전에 이미 너나없이 대부분이 술에 취해 있을 만큼 군기가 빠져 있었는데, 그래도 쉬라쿠사이에 데모스테네스 같은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정신차리고 있는 장군 헤르모크라테스가 있어 밤이 되자 아테나이 진영 쪽 하늘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챘고, 저들의 철수를 막을 병력을 도저히 배치할 수 없는 형편임도 알고, 기병의 호위 아래 수하 몇을 아테나이 진영 가까이 보내 마치 쉬라쿠사이의 내통자가 은밀히 니키아스에게 전갈을 보내는 척 아테나이 병사 몇을 불러 쉬라쿠사이군이 길목들을 지키고 있으니 철수는 준비를 충분히 갖춘 뒤 내일 낮이 좋겠다 하고 돌아오라 했습니다. 물론 이 전갈은 니키아스에게 전해졌고, 이를 들은 아테나군은 척후를 보내어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밤중 철수를 다음날 새벽으로 늦추었고, 이튿날 새벽에는 짐이 많아 무질서해진 행렬을 보고 철수를 하루 더 연기하여 짐들을 정리한 뒤 떠나기로 했고, 덕분에 쉬라쿠사이군은 아테나이군의 탈출 저지를 위한 배치를 끝내고, 큰 항구 바다에 아테나이군이 남긴 함선들을444 유유히 끌고 갔습니다.445
11.17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구월 아침의 햇살은 더할 나위없이 밝고 상큼했지만, 카타네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한 철군 첫날446, 4만의447 아테나이군 행렬은 참으로 무겁고 더뎠습니다. 함대도 버리고, 전우의 시체도 버리고, 부상당한 전우도 버리고,448 쉬라쿠사이를 점령하면 큰 돈이 된다며 끝까지 지녔던 온갖 물건들도 버리고, 겨우 연명할 식량과 그래도 버리기 아까운 재물과 무기를 직접 지고 들고449, 앞으로 또 어떤 고난이 닥칠지 알 수 없는 패주의 길에 나선 아테나이군의 모습은 헬라스 내전 이태, 열여섯 해 전,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시를 비우고 떠나던 포테이다이아 사람들의 행렬보다 더 비참했으면 비참했지 나을 바 하나 없었습니다.450 2만에451 가까운 군대를 나누어 두 개의 속이 빈 방진을452 만들고 그 안에 또 2만에453 가까운 선원들이나 노예나 나머지 비전투 인원이 들어가 방진의 일원인 양 함께 움직이도록 철수 행렬을 짜서 기병들로 하여금 앞뒤로 움직이며 대열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면서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보무당당은 애저녁에 쑨 죽이고 적국에 세운 고통뿐이던 진지를 떠나면서도 굴욕감과 두려움으로 걸음이 흐트러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선두를 맡은 병든 몸의 니키아스도 후진을 맡은 데모스테네스도 모두 이들과 함께 걸으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희망을 말했고, 대열이 무너지면 곧바로 가서 이들을 다잡으며 아나포스 강쪽으로 나아갔습니다.454 아테나이군은 아나포스 강 여울에 도착하여 그곳을 방비하던 쉬라사이군을 간단히 제압하고 강을 건너 계속 행군했는데, 쉬라쿠사이와 첫 대전 승리의 기억도 생생한 올륌피에이온455 인근에서부터 쉬라쿠사이 기병대가 행렬의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경무장보병들도 나타나 창을 던지며 행렬을 괴롭혔지만 숙영할 수 있는 언덕을 찾아 7km의456 행군을 끝내고 첫날을 보냈습니다. 철군 이튿날은 아침 일찍 출발했으나 식수와 식품을 구하기 쉬운 곳으로 숙영지를 잡느라 4km 쯤 가서 평지에 진을 쳤는데, 이는 먹을 것이 모자라서 밤낮없이 서둘러 일단 우호적인 시켈로이 도시에 도착하겠다던 니키아스의 행군 초 담화와457 배치되는 느림보 행군이었습니다. 철군 사흘날 아침 아테나이군이 다시 행군을 시작했을 때 쉬라쿠사이군의 대응이 확연히 달라져 기병대와 투창병, 그리고 무수한 보병들이 동원되어 행렬 양측에서 공격했는데, 이를 저지하느라 시간과 힘을 소진한 아테나이군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전날의 진지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고, 이렇게 아테나이군의 행군을 묶어둔 쉬라쿠사이군은 그 사이 여유가 생겨 적들이 지나갈 양쪽으로 협곡을 낀 가파른 언덕458 고개 마루에 방벽을 쌓아 길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쉬라쿠사이 기병 때문에 식품 구입 나들이도 할 수 없었던 아테나이군은 그곳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 철군 나흗날 아침 일찍부터 방벽으로 막힌 고개 언덕으로 나아갔고, 고개마루에서 방벽을 지키려 겹겹이 둘러선 쉬라쿠사이군을 향해 언덕 위로 돌진했으나 높은 곳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무기들에 밀려나고 말았고, 물러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가을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이를 불길한 징조로 본 아테나이군은 더 이상 돌파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이들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귈립포스와 쉬라쿠사이군이 아테나이군의 후퇴를 막기 위해 후미에 또 다른 방벽을 쌓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아테나이군은 이를 저지하러 나섰고, 적들을 쫓아낸 김에 아예 행렬을 더 후진시켜 숙영할 진지를 세우고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뒷걸음만 친 철군 나흗날을 보냈습니다. 닷샛날 아침 아테나이군이 다시 행군을 시작했을 때는 쉬라쿠사이군이 더 이상 길목에서 기다리지 않고 사방에서 행렬을 둘러싸고 공격을 시도했는데, 반격하면 물러섰다가 행렬로 돌아가면 다시와서 공격하면서 주로 행렬의 후미를 괴롭혀대자 결국 1km 남짓밖에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서야 했고, 그제서야 쉬라쿠사이군도 그들의 군영으로 물러났습니다. 부상자도 속출했고 생필품 채우기도 여의치 않아지자, 쉬라쿠사이군이 지키고 있어 길이 막힌 카타네로 가기보다 우선 가까운 시켈로이 도시로 가보기로 했고, 횃불로 밤길을 밝히며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행렬이 움직이는 밤길은 시간이 갈수록 뒤에서부터 혼란스러워졌는데, 앞서간 니키아스의 부대는 앞에서 재빨리 움직이고 뒷줄도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따라붙어 많이 뒤엉키지 않고 밤길을 나아갔지만, 데모스테네스의 부대는 앞서간 부대의 흔적을 조심스레 따르는 앞줄보다 무리에서 떨어질까 추격자의 공격을 받을까 조바심 난 걸음의 뒷줄 때문에 행렬이 심하게 뒤엉킨 채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군은 철군 엿샛날 아침 섬의 남쪽 바닷가에 이르러 헬로로스로 가는 길을459 만났고, 카퀴파리스 강을 따라 상류 내륙의 시켈로이 도시로 갈 계획대로 헬로로스 길을 따라 카퀴파리스 강어귀에 닿았고, 방벽과 목책으로 통행로를 막으려는 수비대를460 제압한 뒤 강을 건넜는데, 거기서 계획했던 강 상류로 가지 않고 길라잡이들 말을 듣고 에리네오스 강을 향해 그 길 남쪽으로 더 내려갔습니다. 이날 아침 아테나이군의 야반 이동을 알게 된 쉬라쿠사이군은 귈립포스가 의도적으로 야반 도주를 허용했다고 비난하며 추격에 나섰는데, 남긴 흔적으로 추적이 어렵지 않아 점심 때쯤에 간밤의 무질서한 행군으로 지쳐서 본대와 떨어져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데모스테네스 부대의 후미를 따라잡을 수 있었고, 쉬라쿠사이 기병대는 이들을 공격했고 쉽사리 그들을 몰아 한 구석에 가둔 다음, 다시 데모스테네스의 본진을 향해 달려갔고, 이미 여러 차례 같은 공격을 받아온 터라 데모스테네스 역시 행군을 멈추고 전투 대형을 갖추고 마주하였으나 양쪽으로 담장이 쳐진 올리브 나무 밭 속에461 갇혀 그대로 포위되고 말았고, 창이고 돌이고 마구 날리는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가 결국 부대원 6,000여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그 누구도 폭행당하거나 옥에 갇히지 않으며 생필품 부족으로 죽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조건으로 돈과 무기를 넘겼는데, 이 와중에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462 데모스테네스와 그의 부대원들은 바로 쉬라쿠사이로 이송되었습니다. 이때 니키아스는 어쩔 수 없는 전투가 아니면 가급적 전투를 피해 퇴각에만 집중한 덕에 데모스테네스 부대에 9km나 앞서 에리네오스 강을 건너고 나서야 철군 엿샛날의 숙영을 위해 고지에 진을 차리고 밤을 지냈는데, 데모스테네스 부대의 항복을 받은 쉬라쿠사이군이 계속 따라붙어 철군 이렛날 아침에 데모스테네스의 항복 사실을 알리고 니키아스도 그렇게 하라는 전령을 보냈습니다. 사실을 확인한 니키아스가 전쟁 비용 보상을 항복 조건으로 제시했고, 쉬라쿠사이는 니키아스의 부대를 포위 공격하는 것으로 조건을 거부했고, 날이 저물도록 창과 돌을 던져댔고, 밤이 되어 아테나이군이 행군을 시작할 기미를 보이자 승리의 노래로 파이안을 불렀고, 몰래 나가기가 글렀다고 본 아테나이군이 진지에 그대로 주저 앉아 철군 이렛날 밤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300명 정도는 야음을 틈타 적의 수비대를 뚫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철군 여드렛날 이른 아침부터 니키아스는 앗나로스 강만 건너면 물도 충분히 마시고 대오를 어느 정도 정비할 수 있을 거라 보고 쉬라쿠사이군의 공격을 받아가면서 행군을 강행해 강변에 도착했지만, 모두가 물을 마시려고 허겁지겁 강물에 들어가는 바람에 행렬이 무너져 강물 속에 허우적거리면서 이들은 강 건너에 포진한 적들과 쫓아오는 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도륙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물을 마시거나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이 계속 강물로 밀려들면서 적에게 죽어나는 숫자가 늘어만 가자, 니키아스는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볼모로 귈립포스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의 군사들을 죽이지 말 것을 요청했고, 귈립포스는 니키아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를 죽이는 대신 포로로 잡도록 조치하여 쉬라쿠사이군의 도륙도 아테나이군의 철군도 이것으로 모두 끝이 났습니다.463
11.179. 니키아스의 항복으로 쉬라쿠사이군의 포로가 된 아테나이군은 전날 밤 도망쳤으나 잡히고만 300명을 포함해 모두 1,000여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들 이외에 산 사람들은 모두 카타네나 시켈리아 도시 어디로 도망치고 있거나, 아니면 노예로 팔기 위해 혹은 가족들로부터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숨겨져 있었는데 시켈리아 섬 전체가 이런 사람들로 가득했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습니다.464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그들을 살려주어 명예로운 승리자가 되자는 헤르모크라테스의 반대와, 그들을 스파르테로 데리고 가 전과물로 제시하고 싶은 귈립포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살려두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나타날까, 혹은 내통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한 코린토스와 쉬라쿠사이와 사람들의 반대로 처형당해야 했습니다. 7,000여명의 포로들은 에피폴라이 북쪽 채석장 구덩이에 갇혀 하루 잡곡 2코튈레, 마실 물 1코튈레로465 연명해야 하는 가혹한 취급을 받았는데,466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자 일부가 노예로 팔려나갔으나 아테나이사람들과 아테나이를 위해 싸운 시켈리아 사람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채석장 일로 혹사당한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여덟 달이나 더 버텨야 했습니다. ('11. 도시의 자유 (2)' 끝)
('11. 도시의 자유(3)에서 계속됩니다.)
- BC431 여름부터 BC404 겨울까지 이어진 이 전쟁을,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의 전쟁ho Polemos ton Peloponnesion kai Athenaion,The War between Peloponnesian and Athenian'이란 긴 이름으로 부르고(그의 책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원제이다), 디오도로스는 오늘날 사람들처럼 간단히 '펠로폰네소스 전쟁Polemos Peloponnes,the Peloponnesian War'이라 불렀고(('역사전서歷史全書',XII.38.1,아테나이 사람들과 펠로폰네소스 사람들 간에 벌어진 (디오도로스 시대까지) 역사에 기록된 가장 긴 전쟁이라 했다)), 이 글에서는 '헬라스 내전Hellenes Civil War'으로 부른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테 동맹군에 농장을 유린당한 앗티케 사람들에게 보상 차원에서 보조금 지급 이외에 아이기나를 점령하여 거기 사람들을 추방한 뒤 그 땅을 나누어주었다.(플.페.34.1)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제국을 해체하라는 스파르테의 최후통첩에 대해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전쟁을 결의할 것을 촉구하는 민회에서, 아테나이의 방어개념을 이렇게 설명하고, '...제해권the rule of the sea은 정말 중대한 것입니다. 잠시 생각해보십시다. 우리가 섬사람들islanders이라고 말입니다. 이보다 더한 난공불락impregnable의 요새position를 떠올릴conceive 수 있나요? 앞으로 가능한 한 이것이 우리의 요새 개념conception of position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투.펠.I.143.5), 그러니 설득할 수 있다면 우리가 앗티케 전부를 파괴하여, 앗티케 때문에 스파르테에 복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다면서, 그의 요새섬 방어전략을 강조한다.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있어 앗티케의 중요성은 앞의 글 '11.도시의 자유(1)'의 주611 참조. [본문으로]
- 앗티케 전원의 전통적인 일상을 버리고, 가축은 배편에 에우보이아로 보내고, 가재도구는 물론 집채의 목재도 뜯어온 피난민들은 극소수만 아테나이에 사는 친지의 집에 얹혀 살고, 나머지는 공공장소나 출입이 허용된 신과 영웅들의 사당 같은 곳에 자리 잡았는데, 이마저 모자라 성탑이나 페이아이에우스 항으로 가는 길가는 물론, 심지어 출입에 저주가 걸린 펠라르키콘 같은 곳에도 들어가야 했다.(같은 책.14.1-17.3) [본문으로]
- 아르키다모스는 그의 앗티케 진격이 아테나이의 심경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려 아테나이로 사람을 보냈으나, 아테나이는 이미 스파르테가 그들의 국경 밖으로 나오면 일체 사절을 받지 않는다는 결의를 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아테나이에 들이지 않고 바로 돌려보냈는데, 그럼에도 아르키다모스는 소극적으로 진군했다.(투.헬.II.12.1-4) [본문으로]
- 보이오티아와 앗티케 경계에 있는 아테나이 요새 오이노에에서는 아르키다모스의 늑장 진군 탓에 약탈과 함락에 실패하여 실망한 동맹들의 원망을 샀는데, 이 때문인지 돌아가는 길에는 아테나이에 종속되어 있던 보이오티아의 오로포스 지역을 훑도록 해주었다. 이때였는지 한 달전 오이노에로 갔을 때였는지 불분명하나, 봄에 플라타이에 잠입하여 사달을 냈던 테바이도 출동하여 플라타이아의 외곽 농장들을 유린했다.(같은책,12.5)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의 입을 빌려 분석한 아테나이라는 도시의 영혼은, 1)조상 대대로 이어온 용기인데, 그래서 외적이 아테나이를 지배한 적이 없고, 특히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제국을 건설하여 오늘날 전시나 평화시나 자족하는 아테나이가 되었고, 2)아테나이가 독창적으로 수립한 민주정의 평등인데, 그래서 만인의 분쟁이 법 앞에 평등하게 해결되고, 공직은 오직 능력 위주로 담임케 하며, 3) 공사 간의 준법으로, 그래서, 자유롭고 개방적이나 남을 상하지 않게 배려하고, 법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특히 약자를 위한 법을 어기는 것을 치욕으로 받아들이며, 4)개방적인 자율성인데, 이는 특히 군사적 우월성으로 나타나서, 기백을 믿기 때문에 군사 비밀이라며 굳이 숨기는 법이 없고, (스파르테 처럼 혹독한 훈련 없이) 얽매임 없이 살아도 언제든 적에 맞설 각오가 되어 있으며, (스파르테처럼 동맹을 데려오지 않고) 아테나이 단독 작전을 수행하며, 여러 곳에서의 전선을 감당하는 능력이 있고, 5)삶에서의 여유인데, 그래서 가정은 휴식으로 안락하며, 도시의 물자는 풍요롭고, 도시민으 사시절 축제와 경연으로 즐기며, 6)삶에서의 고상함인데, 그래서 부富는 행동을 위한 수단이지 자랑이 아니고,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고, 매사 절약하고, 지혜를 사랑하나 문약하지 않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강한 모험심에도 심사숙고하며, 자유를 믿기에 두려움을 없이 손익을 따지지 않고 선행을 베풀어 친구를 사귀는 것, 등 여섯이다. 그리고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가 헬라스의 교실이라 결론 내린다.(펠.II.36.1-41.1) 이 글 '11.도시의 자유(1)',11.6,7에 제시된 스파르테라는 도시의 영혼과 비교해보라. [본문으로]
- 투.펠.I.144.1페리클레스가 스파르테가 보낸 최후통첩의 요구들이 사소한 것이니 들어주고 전쟁을 피하자고 해서는 안 된다며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전쟁의 불가피성을 설득할 때, 스스로의 실수만 없다면 아테나이의 승리가 당연하다면서, 그 실수 두 가지를 꼽는데, 전쟁 중에 제국의 판도를 확장하려는 것과 새로운 위험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런데 천병희가 '...제국의 판도 확장...'이라 번역한 부분에 대해, T.Hobbes는 '...strive to enlarge your dominion...'로, B.Jowett은 '...expanding your empire...'로, J.M.Dent는 '...combine schemes of fresh conquest...'로,C.D.Morris는 '...undertake conquests...'로 각각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 테세우스는 아테나이를 열면서,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테나이 시민이 되길 원하면 시민으로 받았고, 그후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 아테나이 시민이면 그 자녀는 자연히 아테나이 시민이 되었고, 그후 아버지가 아테나이 시민이어야 그 자녀가 아테나이시민이 될 수 있도록 바뀌었는데, 페리클레스는 부모가 모두 아테나이 시민이어야 그 자녀도 아테나이 시민이 되도록 엄격히 제한하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아이귑토스가 보내준 40,000부셀의 밀을 시민들에게 나눌 때, 5,000명에 가까운 반쪽 시민을 가려 노예로 팔았다며, 시민권 제한 이유 중 하나가 시민권 수혜자를 줄이기 위함이었으며, 그로 인해 실제 전력 감소가 있었음을 보여준다.(페.37.3) [본문으로]
- 이 글 '11.도시의 자유(1),11.96 참조. [본문으로]
- 동맹들 모두 그들이 보유한 자원의 3분의 2를 출동시켰는데(투.펠.II.10.2,47.2), 모두 60,000명이었다.(플.페.33.4)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라코니케 해안의 작은 도시 프라시아이까지 가서 도시를 파괴하고 돌아와보니 스파르테 동맹군이 철수하고 없었다고 하며, 돌아와서 역병 창궐을 알았던 것으로 보고하고(펠.II.56.6), 디오도로스는 아테나이에 역병이 퍼졌는데도 앗티케의 스파르테 연맹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페리클레스가 함대를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연안 도시들 공격에 나섰었다고 하고('역사전서',XII.45.3), 플루타르코스는 역병이 돌자 페리클레스가 시민들의 고통을 덜고 새 희망을 주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에페다우로스로 갔으나, 공격을 앞두고 군대 안에 역병이 퍼지기 시작해 돌아가야 했다고 한다.('페리클레스전',35.1-3) [본문으로]
- 아테나이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아테나이가 아테나이와 동맹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테나이의 번영을 위해 동맹들의 안전과 자유를 담보로 분담금을 거두는 것이 고상한 행동이라고 여기지는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귀족을 대변하는 투퀴디데스의 세력도 페리클레스의 그것과 비등比等했다.(플.페.11.2)) [본문으로]
- 페리쿨레스는 역병의 재앙을 신의 섭리로 돌린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벌금을 매겼다는 언급만 했을 뿐인데(펠.II.65.4), 아리스토파네스는 벌금이나 횡령에 대한 작접적인 언급 없이, 페리클레스가 '돈들을 필요한 곳에서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하고('"구름"',859행), 플라톤은 그의 책 '고르기아스'에서 페리클레스가 횡령죄를 지었다고 판결받았으며, 사형선고까지 받을 뻔 했다고 하고(516a), 디오도로스는 페리클레스의 장군직을 박탈하고 벌금 80탈란톤을 부과했다고 하고(역.XII.45.4),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가 지휘권을 빼앗기고 벌금을 부과받았다며, 벌금 부과를 주도한 인물로, 클레온, 심미아스, 라크라티데스의 이름을 들면서 그 액수가 최저 15탈란톤, 최고 50탈란톤이었다 하는데(페.35.4), 이 사건이 페리클레스 생애의 마지막을 뜻하는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가졌던 듯하다. [본문으로]
- BC429 가을 포테이다이아에서 싸우던 코린토스의 아리스테우스를 위시하여, 스파르테 3명, 테게아 1명, 그리고 개인 자격으로 함께한 아르고스 1명(아르고스는 비동맹을 고수했다), 등 모두 6명의 펠로폰네소스 사절은 페르시아 왕을 만나 그들에게 전비를 지원해주고 그들의 편에 서서 싸워주길 요청하기 위해 아시아로 가는 길에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고 있는 트라케의 시탈케스를 만나, 그에게 동맹을 깨고 포테이다이아를 지원해달라고 부탁도 하고, 그들이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사르데이스로 가는 걸 도와달라고 했는데, 마침 트라케에 머물던 아테나이 사절이 그들을 넘겨달라고 하자 시탈케스가 넘겨주는 바람에 아테나이로 잡혀가서 재판도 없이 바로 처형되었다.(투.펠.II.67.1-4) 이렇게 아리스테우스를 잃은 것이 그해 겨울 포테이다이아가 아테나이와 협상을 제의한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의 크네모스가 이끄는 100척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스파르테의 중무장보병 1,000명을 태우고, 아카이아 사람들이면서도 아테나이와 동맹인 엘리스 앞바다의 자킨토스 섬을 공격했으나 함락에는 실패했다.(투.펠.II.66.1-2) [본문으로]
- 이들은 해적 퇴치에 나섰다가 지휘관 멜레산드로스와 부하 일부가 죽었다.(투.펠.II.69.1-2) [본문으로]
- 포위공격에 나섰던 지난 3년 동안 그들은 2,000탈란톤이나 썼다.(투.펠.II.70.2) [본문으로]
- 협상에 응한 세 장군들은 무조건 항복을 받지 않고, 본국 결정도 없이 텅 빈 도시를 넘겨받았다는 죄로, 다시 말해 약탈이나 노예 판매 등으로 포위공격에 들인 돈을 회수하지 못한 죄로 재판에 넘겨졌고, 나중에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아테나이는 포테이다이에도 아테나이 사람 이주민을 뽑아 보냈다.(같은 책,70.1-4) [본문으로]
- 아라로스는 현존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마지막 작품 '"플루토스ploutos富神,BC388"'가 발표된 이듬해 BC387 '"아이오로시콘Aeorosikon"', '"코칼로스Cocalos"', 두 편을(단절되고 없어 내용이나 형식도 그 당시 시작된 '중희극Middle Comedy中喜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리스토파네스의 대필이라는 의혹을 받는 걸 보아, '"플루토스"'와 비슷한 형식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처음 무대에 올렸고, 아리스토파네스 사후 BC375 사랑을 주제로 한 중희극 '"아도니스Adonis"'를 무대에 올리면서 다수의 작품을 남겼으나('"카이네오스Caeroneos"','"캄퓔리온Kampylion"','"판의 탄생Panos Gonai,Birth of Pan"','"작은 처녀Parthenidion,Small Virgin"','"결혼 축가Hymennaios"', 등이 이름만 전해지는데 모두 '사랑을 주제로 한 것erotic subject'으로 보인다.) 모두 단절되고 없다. 그의 동생 필립포스Philppos와 니코스트라토스Nicostratos 역시 희극작가였다 하나 알려진 작품은 없다. [본문으로]
-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나오는 대화자들, 대화 장소들, 대화 내용들을 떠올려보라.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현존하는 4개의 작품 5행에서 직접 그의 이름을 들면서 모두 120행이 넘는 그에 대한 평가를 담아놓고 있다. [본문으로]
- 아르키다모스가 펠로폰네소스 동맹들 전체 가용 자원의 3분의 2를 데리고 앗티케로 왔을 때 모두 60,000명이었는데, 아이귑토스에서 죽은 아테나이와 동맹들의 숫자는 모두 50,000명이 넘었을 뿐만 아니라 함선 250척도 잃었음을 비교해보라. [본문으로]
- BC461에 도편추방된 키몬은 BC451 퀴프로스 출정 전에 이미 추방 기간 10년이 지나 아테나이로 돌아와 있었는데, 페르시아 함선의 준동을 참을 수 없는 아테나이와 동맹도시들 사람들이 키몬의 이름과 옛 전과들을 들먹이고 있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VII.4. 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9.2) [본문으로]
- 플.페.4.1-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BC443, 다몬은 이듬해인 BC442에 차례로 도편추방되었다. 이 당시 사기그릇은 거의 없어 그 조각인 사금파리도 없었는데, 있었다 해도 사금파리를 긁어 이름을 쓸 순 없으므로, 흔하게 쓰던 질그릇 조각인 이징가미에 추방 해당자의 이름을 써 투표했다. 도편추방의 경우에만 이름을 쓰게 했고(연초에 여는 민회에서 그해 도편추방 투표를 할 것이가를 정하고, 한다고 하면 대상자 선정 없이 참석자가 추방시켜야 한다고 보는 사람을 골라 투표했으므로 반드시 이름을 써야 했고, 한 이름의 투표가 6,000표 이상이면 도편추방했다.), 투표자의 가부 의사가 드러나는 것을 피해야 하는 안건의 경우, 가림막 안에 가와 부의 통을 따로 두고 그 속에 조약돌을 넣도록 했고, 나머지는 일반적으로 거수로 표결했다. [본문으로]
- 첫 도편추방인 BC488 힙파르코스 추방 이전의 아테나이 왕정이나 과두정이나 참주정에서, 재판이 정적 제거의 수단이 되었었는지를 알아볼 기록은 없으나, 적어도 민주정 아래서 재판으로 정적 제거를 시도한 것은 키몬을 횡령죄로 재판에 넘긴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처음이었는데, 그 재판은 귀족들이 차지한 아레오파고스에서 열렸으므로 좀처럼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키몬이 도편추방된 후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는 아레오파고스의 재판권을 민회 아래의 시민 배심 재판으로 돌렸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의 위상을 가리키는 말은 주로 '제일시민the greatest citizen' 그리고 '제일인자the first man'였다. [본문으로]
- 클레온, 심미아스, 라크라티데스 등의 이름이 보인다.(플.페.35.4) 이 글 주13 참조. [본문으로]
-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아테나이의 제국의 팽창에 대한 스파르테와 그 동맹들의 두려움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아테나이 사람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위상 저하 역시 전쟁의 한 요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할 만한 어떤 에피소드도 기록하지 않았는데, 같은 아테나이 사람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아스파시아의 창녀 때문에 페리클레스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할 정도로 전쟁 발발의 책임을 강하게 페리클레스에게 묻고 있고('"아카르나이 사람들"'509-556행), 시켈리아 사람 디오도로스는 페이디아스와 아낙사고라스의 경우를 들어 민중들은 전쟁 때는 지도자를 잘 따르다가 평화 시절에는 그 사람에 대해 질투밖에 할 일이 없어 헛된 고발이나 한다며 도시를 전쟁에 끌어들여 장군인 자신의 능력이 필요하도록 만들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으로 기록했고('역사전서',XII.39.1-3), 보이오티아의 카이로네아 사람인 플루타르코스는(아테나이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했다고 헤로도토스의 도덕성을 따지는 플루타르코스를 생각하라) 페이디아스와 아낙사고라스와 아스파시아의 경우를 들어, 정치적 위상 저하를 만회하기 위한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결단도 전쟁의 한 요인이 되었다고 말하는데(페.32.3), 이 글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변명이므로 그의 시각에 따랐고, 그래서 프로타고라스의 경우도 더했다.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페이디아스의 조수가 신전 제단 앞에서 페이디아스의 황금 횡령을 고발하며, 페이디아스가 페리클레스의 묵인connivance과 도움assistance으로 횡령했다고 한다.('역사전서'VII.39.1)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횡령만 말할 뿐 불경不敬 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플루타르코스는 둘 다 언급하면서(페.31.2-4), 페리클레스가 페이디아스 건으로(횡령보다는 방패에 자신의 모습을 새긴 불경 때문에) 시민들의 신뢰를 잃은 걸 알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할 정도로(페.32.3), 페리클레스 스스로도 방패 건은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디오페이테스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를 지렛대로 페리클레스에 혐의를 두고, 신을 믿지 않거나,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한 학설을 가르치는 사람을 고발하는 법을 내놓았다Diopeithes brought in a bill providing for the public impeachment of such as did not believe in the gods, or who taught doctrines regarding the heavens.'고 한다.(페.31.1) 이 법에 따라 프로타고라스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며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은 불타는 돌이다'라며 하늘에 있는 것에 대해 학설을 세우고, 또 (페리클레스 등 제자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각각 재판에 회부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프로타고라스에 대해서는 이 글 '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3.희극시인의 세계,3.32-39' 참조. [본문으로]
- 아낙사고라스에 대해서는 '같은 글,3.32-34,3.40-43' 참조. [본문으로]
- 아스파시아가 불경죄로 고발된 사연은 플루타르코스만 전하는데, 법을 위반한 구체적인 고발 내용은 (프로타고라스처럼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았다는 것인지, 소크라테스처럼 아테나이 사람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인지 분명히하지 않고 그저)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페.32.1)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민회나 재판은 하루해 안에 끝내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케르퀴라와 코린토스 문제로 열린 민회가 이틀 동안 열린 걸 보면, 첫날 코린토스 지지가 높자 페리클레스가 의결을 하루 늦추어 이튿날 민회 분위기를 케르퀴라로 바꾼 다음, 케르퀴라와의 방위조약과 10척의 함선 지원을 의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이 글 주13 참조 [본문으로]
- 뮈틸레네Mytilene(R.Crawley는 미튈레네Mitylene라 한다)의 지도자들은, 마치 테세우스가 앗티케의 모든 도시들을 아테나이와 연합하여 '아테나이'로 만들었듯이, '레스보스 섬의 모든 도시들을 연합하여'(Union of the island,Sunoikismos) 하나의 도시 뮈틸레네로 만들고자 했다. [본문으로]
- 프록세니Proxeni(현지인 아테나이 영사)와 아테나이에 이권이 걸린 사람들이었고, 비록 뮈틸레네에 과두정파와 민주정파가 정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지만 레스보스 섬이 뮈틸레네를 중심으로 연합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기 때문에(나중 클레온은 반란을 주도는 과두정이 했지만 민주정파도 반란에 가담했으므로 똑같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투.펠.iii.39.6)) 뮈틸레네의 민주정파가 아테나이에 경고를 주는 일에 가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BC428 8월에 열린 제88회 고대 올림픽 경기였다. [본문으로]
- 코린토스 만을 나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도는 먼 뱃길을 줄이기 위해 이스트모스의 최단 '연수육로diolkos連水陸路'를 이용 견인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200탈란톤의 돈을 거두었는데(투.펠.III.19.1), '세금tax/duty'으로 징수한 것인지 '기부금contribution'을 거둔 것인지 불분명하다. [본문으로]
- BC428 여름 아테나이는 동맹들의 분담금을 인상하였고, 징수가 부진하자 뤼시클레스와 4명의 장군을 보내 직접 징수하였는데. 뤼시클레스가 카리아 지역 내륙까지 들어갔다가 현지인들의 습격을 받아 호송부대와 함께 죽임을 당할 정도로 분담금 납부 반발이 거세었다.(투.펠.III.19.1-2) [본문으로]
- BC431 여름 개전 당시 아테나이는 총 250척 정도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아테나이 방어를 위해 앗티케 해안과 살라미스 그리고 에우보이아 해역에 100척을 배치했었고, 공격을 위해서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역에 100척, 그리고 포테이다이에 포위에 50척을 배치하고 있었다. 3년 뒤인 BC428 가을 뮈틸레네 문제를 두고 스파르테와 대치할 때도 250척 정도의 비슷한 해군력이었는데, 뮈틸레네 포위에 40척, 펠로폰네소스 반도 순회 공격에 30척, 이스트모스 해역에 100척, 아테나이와 에우보이아 해역에 80척이 배치되었었다. [본문으로]
- '영주자metoikos,metic,residence alien永住者'는 다른 도시 사람으로 아테네에 장기 거주하던 사람들로 아테나이 시민의 권리는 없었으나 의무는 동일하게 졌다. 재류외인在留外人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 뮈틸레네 해상 포위에 필요한 함선 수는 부족함이 없었고, 단지 방벽을 쌓아 육지에서 포위하는 전력을 보강하는 중무장보병 수송이었으므로, 직접 노를 젓게하여 수송 함선 수를 10분의 1로 줄이고, 그만큼의 비용도 줄였을 것이다.(투.펠.III.18.4) [본문으로]
- 스파르테의 알키다스가 지휘한 42척(본디 40척, 디오도로스는 45척)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이스트모스의 연수육로를 통한 사르니코스 만 진출을 포기하고 코린토스 만을 나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고 아테나이 함대의 감시를 피해 멜로스 섬과 퀴킬라데스 제도의 남단을 통과해 델로스로 가는 해로를 택해야 했다. [본문으로]
- 개전 당시 스파르테는 에우뤼폰 왕가의 아르키다모스가 연장자로서 전쟁을 이끌었기 때문에 후대 사가들은 개전부터 니키아스의 평화 사이 10년을 '아르키다모스의 전쟁'이라 부른다. [본문으로]
- BC427 전쟁 다섯 번째 해 여름 앗티케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투.펠.III.26.3-4) [본문으로]
- 테바이가 플라타이아 잠입군 가운데 붙잡힌 180명을 구하기 위해 플라타이아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자, 플라타이아는 포로들을 풀어줄 테니 곱게 물러나라 했고, 테바이군이 곱게 물러나자 포로들 모두를 죽여버렸는데, 이 일로 테바이에게는 원한을, 아테나이에게는 수비에 도움이 될 인질을 없앴다는 원망을 들었다.(투.펠.II.5.4-6.3)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테의 이런 결정이 테바이의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같은 책,68.4) [본문으로]
- 이 한 해는 친테바이 플라타이아 사람들과 친스파르테 사람들이 인근에 정착할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투.펠.III.68.3) [본문으로]
- 겨울에 농성군 일부가 탈출하였기 때문에 항복 후 처형된 플라타이아군은 200명이 넘었던 반면, 아테나이 지원군은 25명에 불과했다.(투.펠.III.68.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플라타이아의 끝End of Platea'이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은지 93년만이었다 한다.(같은 책,68.5) [본문으로]
- 뮈켈레네 지원을 위해 출격한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개전 후 처음 아이가이온 바다를 지나 아나톨리아의 이오니아까지 진출했지만 아테나이 함대 상대의 해전에 대한 자신이 없어 귀국을 결정했다.(같은 책,33.1) [본문으로]
- 이것으로(투.펠.III.36.1) 아테나이가 플라타이아 보호를 포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요새섬 개념의 아테나이 방어전략에 따라 앗티케 수비를 포기한 것과 같은 연장선에 플라타이아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뮈틸레네는 스파르테 사람들에게 비록 그들이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조만간 다른 동맹들처럼 예속되고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투.펠.III.10.1-12.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 대목에서 클레온을 그의 역사에 처음 등장시키면서, '뮈틸레네 사람들을 죽이자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장본인으로, 아테나이에서 가장 흉포하고, 당시 대중들에게 가장 유력했다the same who had carried the motion of putting the Mytylenians to death, the most violent man at Athens, and at that time by far the most powerful with commons'고 소개하고(펠.III.36.6), 아리스토파네스는 두 편의 희극, '"바빌로니아 사람들"'과 '"기사들"'을 통해, 그리고 다섯 편의 희극에서 22번이나 직접 클레온이란 이름을 거명하거나 그를 괴물이라 칭하면서, 클레온이 권력을 과시하며 뇌물을 먹고('"바빌로니아 사람들"'), 권력을 위해 민중에게 아부하며 계략과 음모로 민중을 속이고('"기사"'), 가죽장사꾼으로 겁쟁이에 비역꾼 그리고 도둑에 싸움꾼이며, 목소리가 끓는 물에 빠진 돼지 새끼 같다고 소개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클레온이 감정으로 민중을 오도했으며(또는 공격적 언행으로 시민을 타락시켰으며, 또는 거친 일처리로 민주정을 부패시켰으며), 처음으로 연단에서 소리지르고 욕설을 하고 허리띠로 옷을 졸라맨 채(또는 옷을 걷어 올린 채 돌아다니며, 또는 겉옷을 짧게 걷어맨 채) 연설했다고 소개하고('아테나이 정치제도사',XXVIII.3), 디오도로스는 투퀴디데스와 같이 뮈틸레네 처벌 문제를 두고 같은 어조로 클레온이 민중파를 이끌었으며, 잔인하고 흉포한 성격의 소유자로 소개하고('역사전서',XII.55.8,'...Cleon, the leader of populace and a man of crual and violent nature...'), 플루타르코스는 뮈틸레네 일이 페리클레스 사후의 일이라 언급이 없지만, 클레온에 대해서는 페리클레스의 앗티케를 포기하는 아테나이 방어전략에 비난을 퍼붓는 정적으로(페.33.6-7), 또 역병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이 페리클레스에 대한 반감에 차 있을 때, 그를 장군직에서 해임하고 15-50탈란톤의 벌금을 매기게 한 고발자로(페.35.4), 페리클레스 사후 민중을 선동하여 횡포를 부린 자로(또는 혐오스런 뻔뻔함을 보인 자로)('니키아스전'2.2), 민중들에게 빈번한 일거리로 돈을 주어 환심을 사는 자로(같은 책,2.3), 능란한 웅변술과 민첩한 재치와 대담한 익살로 민중을 웃기고 조종한 자로(같은 책,3.2), 장광설에 고함과 옷을 뒤로 젖히고 허벅다리를 툭툭 치고 연단 앞을 이리저리 날뛰는 연설자로(같은 책,8.3), 권력을 쥐기 위해 평화를 교란하고 전쟁을 벌인 자로(같은 책,7.2,9.2) 소개한다. [본문으로]
- ...a democracy is incapable of empire...(투.펠.III.37.1) [본문으로]
- ...empire is a despotism...(같은 책,37.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그의 책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간의 전쟁'에서 모두 44건의 연설문을 전재轉載했는데(물론 그가 재구성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유독 뮈틸레네 처리 문제로 다투는 이 클레온의 연설과(펠.III.37.1-40.7) 다음에 나오는 디오도토스의 연설에서(펠.III.42.1-48.2) 주제인 뮈틸레네 처리 문제 이외에 먼저 연설자에 따른 연설의 효용성에 대해 제법 긴 두 사람 간의 논쟁을 소개하고 있는데(37.3-38.6,42.1-44.4), 이로써 투퀴디데스가 클레온을 얼머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었는지와, 아울러 아테나이 민주정 작동 원리에 대한 귀족 출신인 그의 이해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의도적으로 클레온이 행한 이튿날 연설의 구조와 내용을(펠.III.37.1-40.7) 개전 다음해 역병의 재앙으로 분개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행한 페리클레스 연설의 그것들과(펠.II.60.1-64.6) 동치시켜 놓았는데, 페리클레스의 주장이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뮈틸레네 처리 문제로 수적으로나 영향력에서 비등한 사람들이 치열하게 다툰 이틀 간의 논의를 다루면서, 단 두 사람의 연설을 실었는데, 도시 전체를 벌주자는 안에 대해서는 당시의 실권자 클레온을 내세운 반면, 반란자들만 벌주자는 안에 대해서는 평범한 한 아테나이 시민 디오도토스를 내세워(펠.III.41), 비록 근소한 차이였긴 하나(같은 책,49.1), 결국 아테나이 사람들이 클레온에 반대하는 결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클레온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시각을 또 한번 드러내고 있다. [본문으로]
- '...haste usually goes hand in hand with folly, passion with coarseness and narrowness of mind...'(투.펠.III.41.1) [본문으로]
- 포테이다이아에서의 포위 비용은 전쟁도 시작하기 전에 아테나이의 재정을 고갈시킨 가장 큰 요인이었음을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 잘 알고 있었으므로, 디오도토스의 이 말은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레스보스 섬의 원이주민은 텟살리아 사람들인데, 메튐나만 처음부터 뮈틸레네의 연합에 반대하고 나섰고, 따로 벌칙을 받지 않았던 것을 보면, 메튐나에는 이오니아계 주민이 다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메튐나를 제외한 레스보스 섬을 3,000필지로 분할하여, 그중 300필지는 신전에 나머지는 추첨으로 뽑힌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배당하였고, 그 필지들은 옛 경작자들이 그대로 이어 경작하되 한 필지에 2므나의 소작료를 내게 했는데, 이로써 아테나이는 레스보스 섬에서 매년 5,400므나, 즉 90탈란톤의(1탈란톤=60므나)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투.펠.III.50.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디오도토스의 입을 빌려 말하는 희망은 어차피 나빠질 것을 뻔히 보는 뮈틸레네 사람들의 그래도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시도로서의 희망이 아니라, 탐욕의 범죄자가 범죄의 성공을 바라는 희망을 가리킨다.(펠.III.45.5)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들이 풀려난 것이 몸값으로 코린토스의 케르퀴라 영사가 800탈란톤을 지불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만, 케르퀴라를 코린토스 편으로 만들겠다는 약속 때문이라고 본다.(펠.III.70.1,디오도로스도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역사전서'XII.57.1-2)) [본문으로]
- 무죄방면된 페이티아스가 보복을 위해 고발한 사건으로, 제우스와 그 옛날 트로이아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오딧세우스를 환대했다 하여 유명한 케르퀴라 왕 알키오노스의 성역에 있는 포도남무 받침대를 잘랐다는 불경죄가 인정된 다섯 명의 부자들에게 받침대 하나에 1스타테르의 벌금이 부과되었다.(투.펠.III.70.4) [본문으로]
- 과두정파도 같은 조건으로 노예들을 포섭했으나 대부분 민주정파에 가담했다.(투.펠.III.73.1) [본문으로]
- 이들은 스파르테에 반기를 들었다 이토메 산성에서 농성 중 축출된 멧세니아 사람들을 아테나이가 받아들여 나우팍토스에 정착시킨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천병희는 300명, 크롤리는 500명으로 번역했다. [본문으로]
- 퀼레네Kylene는 펠로폰네소스 북동쪽 엘리스 지역 항구. [본문으로]
- 이때는 과두정파를 태우지 않았으므로, 정파 간의 대립이 아니라, 작전에 대한 대립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케르퀴라는 펠로폰네소스 함대와의 해전에 60척의 함선을 동원했는데, 해전이 끝나 다시 전투에 대비했을 때는 노꾼이 없어 30척의 함선에 탄원 중이던 과두정 사람들까지 설득해 태울 수 있었다.(투.펠.III.80.1) [본문으로]
- 만일 알키다스가 35척으로 케르퀴라 점령을 시도했다면, 일차로 니코스트라토스의 함선 12척과 케르퀴라의 함선 30척을 상대하고, 이차로 60척의 에우뤼메돈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섬 건너 본토의 케르퀴라 농지에 결집한 망명자는 모두 500명 정도였는데, 이들은 스파르테와 코린토스가 그들의 복권을 민주정파와 교섭해주길 원했으나 여의치 않자, 100명 정도의 용병을 보강해 섬으로 건너간 다음, 타고간 배들을 불태우며 불퇴전의 각오를 다졌다 한다.(투.펠.III.85.3) [본문으로]
- '투.펠.III.85.3'의 마지막 한 구절에 대해 천병희는, '...시내에 있는 자들을 죽이고 농촌 지역을 장악하려 했다.'고 번역한 반면, 크롤리는, '...began to annoy those in the city and obtained command of the country.'로 번역했는데, 이 글에서는 크롤리의 번역을 따랐다. [본문으로]
- 사실 아테나이는 플라타이아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은 아니었지만 [본문으로]
- 클레온은 뮈틸레네 남자들 모두를 죽이고 아녀자는 노예로 팔아야 하는 이유를 모반자는 모두 죽음뿐이라는 걸 동맹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데서 찾았고, 그 때문에 반란에 가담한 뮈틸레네의 민주정파까지, 즉 반란에 가담한 도시민 전체를 죽여야 하는 이유로 꼽고 있다.(투.펠.III.39.6)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25.1 [본문으로]
- 이 글 11.3, 11.9, 11.10, 11.11, 11.13, [본문으로]
- 파케스가 잡아보냈고, 클레온이 일괄 재판으로 처형해버린 1,000명이 넘는 반란 주동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민주정파도 있었겠지만, 반란이 과두정파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대부분이 과두정파였을 것인데, 처형 이후 뮈틸레네에 정파 간의 대립과 분열이 극심했었다면 또 다른 비극을 맞을 수 있었지만 레스보스에서 정쟁으로 인한 분열은 없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의 무명 디오도토스의 입을 빌려, 아테나이가 종속을 자처하는 레스보스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테나이에 이익이 된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 이 문제 역시 정권을 두고 벌어진 평민 민주정파와 귀족 과두정파 간의 내분에 케르퀴라와 코린토스는 물론 귀족들이 동원한 이어족까지 개입하여 내분이 커졌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케르퀴라의 포로가 잡힌 시기를 첫 번째 해전인 에피담노스 근해의 해전으로 착각하고 있으나(펠.III.70.1), 원래 그는 이 포로들이 두 번째 해전인 쉬보타 해전에서 잡혔다고 말하고 있다.(펠.I.55.1)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에피담노스 근해 해전에서 잡은 포로들이라고 하나(펠.III.70.1) 이 글에서는 투퀴디데스가 전하는 쉬보타 해전에서 잡은 250명의 케르퀴라 유력자들로(펠.III.55.1) 보았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케르퀴라의 내전이 권력에 대한 탐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면서(펠.III.82.8.'The cause of all this is desire of rule out of avarice and ambition, and zeal of contention those two proceedings.'), 그 폐해를 역병의 재앙 때문에 무너진 아테나이의 전통에 대한 신랄한 비판만큼 치열하게 비판하는데, [본문으로]
- 천병희는 이 케르퀴라 도시민 간의 무력충돌을 '내전'으로 번역하였으나, 크롤리는 '혁명revolution'으로, 홉스는 '혁명적 격동revolutionary passion'으로 번역하고 있다. [본문으로]
- 쉬라쿠사이가 레온티노이와 전쟁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는 투퀴디데스도, 디오도로스도 침묵하고 있다.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아테나이의 지원을 요청하러온 레온티노이의 사절 대표가 당대 최고 변설가인 '수사학자 고르기아스Gorgias the rhetorician'로, '수사 법칙의 시조始祖the first man to devise rules of rhetoric'이며, 학생들에게 변설을 가르치고 받는 수업료가 100미나(mina,mna,1므나=100드라크메,1드라크메는 노꾼의 하루 품삯)로 모든 소피스테스 가운데 최고봉excelled이었다고 소개하면서('역사전서',XII.53.2-3), 그가 아테나이 민회에서 행했던 동맹에 대한 연설에 대해, 지금 같으면 너무 자주 그리고 지루하게 써서 우스꽝스럽고 난삽하다고 여겨질 수사기법들(대조, 대칭, 나열, 각운 등)을 처음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선보였다고 전한다.(같은 책,53.4-5) [본문으로]
- 지진에 대해서는 투퀴디데스가(펠.III.87), 도시 저지대의 침수에 대해서는 디오도로스가('역사전서',XII.48) 증언하고 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 사람들은 공평하게 배분된 시간 안에 자유롭게 주장할 권리를 '이세고리아Isegoria,Equality of all in freedom of speech,同等發言權'라 불렀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아리스토파네스만큼 클레온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는데 특히 그는 클레온의 '민주주의 타락 행위cause of corruption of democracy'를 크게 '거침없는 뇌물수wild undertakings'와 전통적인 '품위 있고 정돈된decent and in order'에서 벗어난 연설 태도에 대해 주목하고 따로 다음과 같이 기록해두었다.'...그는 처음으로 연단에서 흉칙하게도 고함과 거친 욕설을 썼고, 사람들 앞에서 겉옷을 짧게 걷어 묶은 채 자신에 대한 장광설를 풀곤 했다....he was the first man to use unseemly shoyting and coarse abuse on Bema, and to harangue the people with his cloak girt up and short about him...'('아테나이 정치제도사'28.3) [본문으로]
- 후세 사람들 가운데는 오늘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알려진 이 글에서 말하는 헬라스 내전을 '아르키다모스의 전쟁'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전쟁의 발발이 아르키다모스의 앗티케 침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붙인 이름이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주역들 가운데 아테나이의 페리클레스나(I.111.2,아이귑토스 원정군이 전멸당하던 때 시퀴온 원정에서 돌아오는 페리클레스를 처음 등장시킨 이때는 페리클레스가 제일시민이 된 10년 후의 일이다) 클레온은(III.36.6,모반을 진압한 뒤 뮈틸레네 처분을 놓고 클레온을 처음 등장시킨 이때는 클레온이 페리클레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역사에 최대한으로 늦추어 등장시킨 데 반해, 스파르테의 브라시다스나(II.25.2,헬라스 내전 첫해 아테나이 해군이 라코니케 남부 해안의 메토네를 공격했을 때 근처에 있던 백인장 정도의 브라시다스가 도시를 구했다고 소개한다) 아기스는(III.89.1,왕이 되자마자 출격한 아기스를 곧바로 소개하는데, 참고로 디오도로스는 이 사건보다 10년 뒤의 일로 처음 아기스를 펠로폰네소스스 전쟁 참여를 소개하는 것과 비교해보라!) 최대한으로 일찍 소개한다. [본문으로]
- 고대 그리스 연대기들은 재임 기간에 대해서는 거의 정확한 연대를 제시하고 있으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어 이 당시 아기스의 나이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본문으로]
- 투.펠.III.89.1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느 이 올파이 전투의 승리를 데모스테네스의 아테나이 군이 아니라 나우팍토스의 멧세니아 사람들의 공으로 기록한다.(펠.III.108.1)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가 되고 나서 아폴론을 위해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에서 보이는 지역의 무덤을 모두 제거하고 성역을 정화한 바 있었는데, 전쟁 여섯 해째 아테나이는 신탁에 따라 섬 전체의 모든 무덤들을 제거하여 섬 전체를 정화한 다음, 섬 주민들에게 델로스 섬에서의 출생과 사망을 금지하면서, 바로 이웃의 레네이아 섬으로 가서 낳고 죽도록 완전히 정화했다. 이에 더해 아테나이는 델로스 축제를 새로 시작하고 4년마다 열기로 했다.(투.펠.III.104.1-6) [본문으로]
- 아테나이 해군의 삼단노선에는 150여명의 노꾼들 그리고 조타와 돛 갑판원 등의 승무원 20여명의 항해 인원과 20-40명의 중무장보병과 5-15명의 궁수들을 전체 40여명 수준으로 병력이 승선했는데, 해전에서도 일부 승무원으들이 경무장으로 전투에 참여했지만, 육상전에서는 나머지 노꾼들까지도 경무장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므로 심단노선 1척의 군사력은 중무장 40명, 경무장 160명, 전체 200명으로 봄ㄹ 수 있어, 데모스테네스의 멧세니아 퓔로스 요새 병력은 최대 1,200명 정도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 그전 해 지진으로 이스트모스에서 철군을 결정했던 아기스는 이 해에 아티케에 들어간 지 보름만에 또 철군을 결정하였는데, 사실 아기스의 아티케 출병 시기가 빨라 아직 밀과 보리가 익지 않아 현지에서 곡식을 약탈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했고 이 해에는 계절에 맞지 않게 날씨까지 궂어 여러가지로 어려웠던 차에 퓔로스가 점령당하자 급거 귀로에 올랐던 것이다.(투.펠.IV.6) 그동안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이 아테케에서 머문 가장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는 전쟁을 대하는 아기스의 실전적이고 빠른 판단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본문으로]
- 멧세니아 인근 해역에서 해적질하던 30노선 1척과 쾌속선 그리고 40명의 중무장보병이었다.(투.펠.IV.9.1) [본문으로]
- 아테나이 해군의 삼단노선 1척에는 5-15명의 궁수가 배치되었으므로 해안으로 올린 함선 3척에 탔던 궁수 20여명 가운데 일부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보내 케르퀴라 내분에 적극 개입하고,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암필로키아로 원정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평화"',219행,'우리가 필로스를 점유하고 있으면 (평화를 애걸하러) 그들은(스파르테 사람들) 또 올거요' 데모스테네스는 퓔로스를 기습 점거하고 요새를 세워 주둔했고, 이를 저지하러 출동한 스파르테군의 일부를 클레온이 스팍테리아 섬에서 포로로 잡아 아테나이로 데려간 후, 스파르테는 포로송환을 위해 평화를 애걸복걸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 브라시다스도 우연히 아테나이 함대의 상륙 지점에 있다가 상륙군을 패퇴시켰을 뿐이었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 삼단노선의 지휘관이던 브라시다스는 다른 펠로폰네소스 함선들이 배가 파손될까 우려하여 해안에 접근을 꺼리자 함선이 부수어지더라도 무리해서 상륙하도록 독려하며 제일 먼저 상륙을 시도했으나 아테나이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상을 입고 졸도하여 방패도 잃었는데, 이 방패를 주운 아테나이군이 나중 이 방패를 승전비로 썼다 한다.(투.펠.IV.11.4-12.2) [본문으로]
- 투.펠.IV.14.3 [본문으로]
- '... 우리가 말을 좀 길게 해도 우리의(스파르테의) 관습에 어긋난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투.펠.IV.17.2) [본문으로]
- 투.펠.IV.17.1-20.3 [본문으로]
- 투.펠.IV.18.5 [본문으로]
- 이때 니키아스는 아테나이에 머물며 퓔로스 요새 작전을 총지휘했고, 그의 지휘 아래 퓔로스 요새는 데모스테네스가, 아테나이 함대는 에우뤼메돈과 소포클레스가, 그리고 시켈리아의 아테나이 함대는 라케스가 지휘를 맡았다. 모든 지휘관들은 장군이었으나 데모스테네스는 지난해의 패전 때문에 아테나이로 돌아가지 않은 탓인지 이때 장군에 선임되지 못했었다. [본문으로]
- 초소 군인들은 몇몇의 보초를 빼고 모두 잠들어 있었는데, 그들은 아테나이 함선들이 그때까지 하던 대로 잠자기 위해 본토의 해안으로 가는 것으로 알았다.(투.펠.IV.32.1) [본문으로]
- 무인도 스탁테리아라는 작은 섬에 10,000명에 가까운 아테나이 와 멧세니아 군대가 상륙했다. [본문으로]
- 200명의 소부대 50개가 섬을 포위하고 진격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연합군의 경무장보병들이 스파르테 군대가 소수임을 알고 더 분전했고(펠.IV.34.1-35.2), 반면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은 대열도 없이 막무가내로 돌과 화살과 투창으로 공격하는 전투에 익숙치 않아 당황했을 뿐만 아니라 무구도 그런 식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에 적합치 않았기 때문에 후퇴했다고 설명한다.(펠.IV.34.2,3)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때의 스파르테군 상황을 크세르크세스군을 테르모퓔라이에서 맞이한 레오니다스의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의 처지에 견주었는데(펠.IV.36.3), 레오니다스의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은 전원 옥쇄했고, 스튀폰의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은 전원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본문으로]
- 이 글의 '가락'에 대해 천병희는 '물레(화살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번역했고, T.홉스는 'spindle(meaning an arrow)'로 번역했는데, 물레도 실을 뽑는 기구이기는 하나 화살과는 연관이 없는 '바퀴spinning wheel'라서, 이 글에서는 '방추spindle紡錘가락바퀴'의 막대인 '가락'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모욕을 받은 스파르테의 전사가 굳이 화살이라고 말하지 않고 '가락'이라고 말한 것은 '가락'이 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물건이라 화살을 쏜 사람은 전사가 아니라 여자이며 활은 숨어서 공격하는 비겁한 무기임을 비꼬아 말하면서, 그것이 전사의 용기를 가르는 잣대라면 얼마든지 그 가치를 높이보라고 되받아쳤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테 전사의 이 말이 돌과 화살을 맞으면 누구나 죽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설명한다.(투.펠.IV.40.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퓔로스의 전투를 아테나이와 펠로폰네소스스 사람들 사이의 전쟁에 하나의 전환점이라거나 변곡점이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나, 개전 후 일곱 해 동안 벌어진 여러 전투들보다 크지도 비장하지도 격렬하지도 않았던 작은 전투에 대해 무려 35절(3.1-23.2, 26.1-41.3)의 분량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비슷하다고 말한 테르모퓔라이 전투(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빌리면 펠로폰네소스 연합군 18,000명이 페르시아군 300만을 맞아 일주일을 싸워 4000명이 죽은 전투였다)를 기록한 헤로도토스의 47절(173-178,184-187,197-233)에 육박하고, 그 스스로 심혈을 기울여 기록한 3년에 걸친 시켈리아 원정 기록 169절(투.펠.VI.6-26,30-52,62-104,VII.1-87)의 반의 반 분량일 만큼 중요한 전투로 본 듯하다. [본문으로]
- 오늘날 메시나Messina 해협의 북단. 해협의 시켈리아 섬쪽에 쉬라쿠사이의 동맹 도시 멧세네Messne,Messina의 앞바다. 메시나 해협의 남단은 스퀼라Scylla 해협인데 해협 입구의 이태리 반도쪽 항구가 레기온Region으로 아테나이 함대의 기항지이다. 카륍디스Charybdis와 카륍디스 해협, 스퀼라와 스퀼라 해협에 대한 설명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12권,세이렌 자매, 스퀼라, 카륍디스, 헬리오스의 소들' 참조.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중늙은이들까지 자발적으로 방어 전투에 참여한 사례를 기록한 것은 특별한 경우인데(펠.IV.44.4), 그곳 주민들 스스로 그들과 그들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테나이 도시 건설자 테세우스가 이스트모스 지역에서 이오니아 여행자를 괴롭히던 여러 산적 무리들을 소탕한 공적으로 이오니아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아테나이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을 보아, 펠레폰네소스와 이오니아 지역을 나누는 이곳은 전통적으로 이오니아 사람들, 즉 아테네 사람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고, 그런 전통이 중늙은이들조차도 도시에서부터 전장으로 뛰어나오도록 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본문으로]
- 11.101. 참조 [본문으로]
- 케르퀴라 과두파에 대한 민중파들의 원한을 잘 아는 아테나이 장군들은(에우뤼메돈과 소포클레스) 시켈리아로 가야하지만 잡은 포로를 호송하는 명예를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싫다고 말하며, 민중파가 음모를 꾸며 포로들을 인수받아 가라고 넌지시 그들의 의도를 흘렸고, 민중파는 포로들의 친구들을 중간에 넣어 그들이 아테나이로 가면 모두 죽게 되니 탈출을 돕겠다고 나서 들키게 하였는데, 아테나이 장군들은 이를 빌미로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했으니 아테나이로 가서 재판을 받게 한다는 약속이 파기되었다며 포로를 민중파에게 인수해주었다.(투.펠.IV.46.2-47.2) [본문으로]
- 처음 민중파들은 포로들을 이감한다는 이유로 20명씩 한데 묶어 두 줄로 채찍을 치며 원한이 가득찬 중무장보병들이 늘어선 사이로 지나게 하여 죽이기 시작했고, 60명이 나가고 나서야 사태를 알아챈 포로들이 아테나이군더러 차라리 아테나이군이 죽여달라며 나가지 않고 버티며 민중파가 들어오는 것을 막자, 민중파들은 지붕을 헐고 기와를 던지고 화살을 쏘아 죽이기 시작했고, 이리저리 막아보던 포로들은방어해보았자 소용도 없고 고통만 심해지자 자기에게 쏜 화살을 목구멍에 박거나 침대보나 옷을 뜯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등 온갖 고통과 죽음으로 밤을 새고 나서야 모두 죽었고, 민중파들은 아침에 시신들을 짐마차에 싣고 나갔다.(같은 책,47.3-48.4) [본문으로]
- 같은 책,48.4 [본문으로]
- 이 이후 케르퀴라는 오늘날 코르푸로 불리는 관광지로 알려지기 전까지 역사나 사람들에게 주목받은 적이 없었다. [본문으로]
- 에이온Eion은 트라케의 스트뤼몬 강 하류의 암피폴리스와 함께 교역뿐만 아니라 해군기지로서도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에이온의 건설은 다레이오스가 흑해 서안의 스퀴타이 정벌에 나서기 전에 이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시작되어 마르도니오스의 트라케 원정 거점 도시가 되었고,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원정 실패 후 키몬이 페르시아 군대를 쫓아내고 아테나이의 식민도시로 만들었다. [본문으로]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재위 BC465-424. 즉위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 글 '도시의 자유(1),11.83', 그리고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같은 글 '11.85,87' 참조. [본문으로]
-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죽은 뒤 페르시아 궁정은 또 다시 왕위를 두고 형제 다툼이 이어졌는데, 처음은 세자였던 첫째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45일(디오도로스는 1년) 뒤 둘째인 이복동생 소그디아노스가 크세르크세스 2세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3개월(크테시아스는6개원15일) 뒤 셋째인 또 다른 이복동생 다레이오스 2세가 소그디아노스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가 BC423 정월이었다.(투퀴디데스, 크테시아스, 디오도로스의 기록을 종합하여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보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BC424 정월에 죽었는데, 왕세자인 크세르크세스 2세가 페르시스에서 왕위를 계승했고, 이때 엘람의 총독이던 소그디아누스도 독자적으로 왕권을 주장하며 왕위에 올랐고, 왕위 문제가 제국이 분열하자 휘르카니아 총독이던 오쿠스가 제국의 변방부터 평정하여 1년 뒤인 BC423 정월에 제국을 통합하고 다레이오스 2세로 즉위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가설은 설형문자판cuneiform tablet 기록에 다레이오스라는 이름 첫 출현이 BC423 정월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어보이나, 설형문자판에서 크세르크세스 2세나 소그디아누스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 점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이름의 마지막 출현이 BC424 섣달이라는 점 때문에 크세르크세스 2세나 소그다이누스에 대한 기록을 모두 부정하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BC424 섣달에 죽자 한 달 뒤 휘르카니아 총독이던 셋째 아들 오쿠스가 승계하여 다레이오스 2세가 되었다고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약점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이렇게 꼬이는 가장 큰 이유는 승계가 원만하지 못했을 경우 후세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기록을 없애거나 조작하였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 이 다레이오스 2세의 등장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는 까닭은 나중 그가 준 자금으로 스파르테가 해군을 증강하고 아테나이와의 전쟁을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다레이오스 2세는 BC404 정월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고 죽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이기나 사람들도 중과부적을 느끼고 내륙의 성벽 도시로 피난을 부탁하였으나 스파르테 수비대가 이를 거절하고 그들을 방치했다고 기록한다.(펠.IV.57.1,2) [본문으로]
- 천병희는 총독, 홉스는 captain, 조웨트는 governor로 번역했다. [본문으로]
- 천병희는 400탈란톤이라 했으나 이는 퀴테라 섬의 능력 밖이라, 홉스나 조웨트처럼 4탈란톤으로 했다. 아테나이가 삼단노선 4척의 1개월 운용비에 지나지 않는 4탈란톤의 공물로 협상을 타결한 것을 보면 재물보다는 해상 요충지 확보가 목적이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들을 아테나이로 보냈다고 했는데(펠.IV.57.3), 퀴테라 섬의 뒷처리 와 함께 이들에 대한 처형을 기록하여(57.4) 처형이 퀴테라 섬에서 이루어 졌는지 아테나이에서 이루어졌는지 헷갈리게 한다. 뮈틸레네 경우를 보아(아테나이는 뮈틸레네의 반란군 2000명을 아테나이로 데려와 죽였다. 이 글 11.100. 참조) 이들은 아테나이로 보내졌고, 원한에 찬(out of former inveterate hatred) 아테나이 사람들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보았다. [본문으로]
- 에우보이아의 칼키스 사람들이 세운 도시 레온티노이나 레기온은 아테나이와 같은 이오네스족이고, 쉬라쿠사이와 멧세네는 도리에이스족 도시이다. 그런데 아테나이가 레온티노이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시켈리아로 원정군을 보낸 것은 동족의 구원을 명분으로 시켈리아의 부를 거머지기 위함이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헤르모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전쟁을 수행하는 아테나이의 목표가 제국 확장을 통해 힘의 우위에 의한 평화 유지, 그리고 그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 징수를 통해 아테나이의 부강을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펠.IV.60.1-61.7) [본문으로]
- 쉬라쿠사이는 카마리나가 차지한 모르간티네를 일정금의 보상을 받고 넘겨주었다.(투.펠.VI.65.1) [본문으로]
- 투.펠.II.70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두 명의 동료 장군들과 함께 중무장보병 2,000명과 기병 200명의 원정대를 꾸려 트라케의 칼키디케와 봇티아를 공격했으나, 그와 장군들 모두를 포함한 43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전했다. 남은 원정대는 일단 포테이다이아로 철수한 뒤, 휴전조약을 맺고 시신을 챙겨 아테나이로 돌아갔다.(투.펠.II.79) [본문으로]
- 클레온이 싫었던 투퀴디데스는 이 당시의 아테나이 사람들은 클레온처럼 그들이 매사에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자 그들의 행운을 믿고, 가능한 일이든 불가능한 일이든 대군이나 소수병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능력과 희망을 혼동했기 때문이라고 꼬집고 있다.(펠.IV.65.4) [본문으로]
- 전쟁 여섯 해째 BC426 아테나이 함대 30척의 연례적 펠로폰네소스 해안 순항에 지휘관 둘 중 하나로(디오도로스는 그가 장군으로 출전했다고 기록했다.'역사전서,xii.60.1) 처음 등장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투.펠.III.91.1) 아테나이의 군인으로 혹은 개인자격으로 참전하다가 전쟁 열아홉 해째 BC413 쉬라쿠사이 군에 예하 부대원 6,000명과 함께 항복하였으나, 나중 스파르테 군에 항복한 니키아스와 함께 쉬라쿠사이 군에 의해 효수되었다.(투.펠.VII.86.2)100년 뒤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와 알렉산드로스의 패권 추구에 전체 헬라스 도시들의 공동궐기로 대항할 것을 주장하면서 항전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에게 아테나이가 패망하게 되자 자살한 아테나이의 연설가이자 정치가였던 데모스테네스(384-322BC)와는 동명이인이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BC415 스파르테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가 권고했고, 스파르테가 이를 받아들였다고 하고(펠.VI.91.6,93.2), 디오도로스는 BC415 스파르테 왕 아기스가 알키비아데스를 대동하고 앗티케를 침공하여 데켈레이아에 스파르테의 요새를 세웠고, 요새가 세워진 이후 사람들이 이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데켈레이아 전쟁Decaleian War'이라 불렀다고 하고(역사전서,XIII.9.2), 플루타르코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데켈레이아를 요새화하도록 스파르테를 설득induce했는데, 이것이 그가 그의 조국을 망치고 파괴한 짓들 가운데 가장 심한 짓이었다고 한다.(알키비아데스전,23.2) [본문으로]
- 페르시아의 침공,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고 이 글이 헬라스 내전이라 부르는 소위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테의 일반적 군대 편성은 동등인 중무장보병 1명에 페리오이코이 중무장보병 3명과 헤일로타이 경무장보병 3명 보좌가 기본이었는데, 이런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브라시다스는 동등인 중무장보병 100명과 페리오이코이 중무장보병 300명과 헤일로타이 경무장보병 300명 대신 700명의 헤일로타이 중무장보병으로 편성된 부대를 받았던 것이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퓔로스의) 불운이 스파르테로 하여금 칼키디케와 트라키아 원정을 결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펠.IV.79.3) [본문으로]
- 스파르테에 지원을 요청한 도시들은 전쟁비용을 부담했다.(투.펠.IV.80.1) [본문으로]
- 브라시다스의 장거리 장기 원정은 일반적인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군사행동은 아니었으므로, 동맹도시들의 참전을 요구할 수는 없었으므로 스파르테는 브라시다스의 원정은 인정하되 헤일로타이 700명과 나머지 자원 1,000명은 용병으로 꾸리도록 했다.(투.펠.IV.80.5) [본문으로]
- 메가라와 코린토스 사이에 있는 게라네이아Geraneia 산의 한 기슭에 있는 메가라 마을트리포디스코스Tripodiskos이다.앗티케가 원정 목표였을 때는 주로 이스트모스에서 집결하였으나, 보이오티아와 텟살리아를 지나 칼키디케와 트라키아로 가는 북쪽 원정에서는 이곳에서 집결하였다. [본문으로]
- 메가라가 아테나이에 가장 인접한 펠로폰네소스 동맹도시이나 아테나이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을 가진 도시는 아니었고(테세우스가 아테나이를 세우기 전에는 앗티케의 네 지역 중 하나였다), 개전 초 사르니코스만의 눈엣가시 아이기나를 점령하여 주민을 내쫓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식민했듯이 단박에 메가라를 결딴내었어야 할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했으나, 이는 명백한 30년 평화조약을 위반으로 그렇지 않아도 전쟁의 책임이 제국을 넓혀 조약을 위반한 아테나이에게 있다는 비난을 추인하는 꼴이라 직접적으로 점령하지 않고, 다만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메가라 스스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서 벗어나 아테나이로 귀속되도록 치고 빠지기를 지속했던 것인데, 아테나이로서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도 그랬듯이(메가라는 스파르테가 10년에 걸친 이토메 산성의 헤일로타이 반군을 방면고, 아테나이가 이 반군을 받아 나우팍토스에 안주시키며 코린토스 만까지 세력을 넓히는 것을 보고, 마침 국경 문제로 코린토스와 불화가 생기자 스스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서 나와 아테나이 동맹이 되었고, 이로써 메가라의 니시아이항과 페가이 항을 아테나이가 함대의 기지로 쓸 수 있게 되었다.투.펠.I.103.4)) 메가라를 종속시켜 메가라가 소유한 이스트모스 남북안의 두 항구, 사르니코스 만의 니사이아 항과 코린토스 만의 페가이 항을 사용하여 제해권은 물론 함대의 기동성을 올리려는 의도가 더 컸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디카이오폴리스는 스파르테 군대가 자기 농장의 포도덩굴까지 베어버렸기 때문에 스파르테가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서 포세이돈이 지진을 일으켜 그들 집을 모두 엎어버리기를 바라지만, 왜 이 모든 고통을 스파르테의 탓으로만 돌리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전쟁에 대한 아테나이의 책임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신랄하게 비난한다. (아리스토파네스,'"아카르나이 사람들"',509-556)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아카르나이 사람들"',775-776행. 'When I left for the marcket, the authorities were taking steps to let us die in the quickest manner.'('"The Acharnians"', produced by Davis & Widger) '내가 장사를 하려고 그곳을 떠나올 때, 도시를 위해 일하는 시 당국자들은 우리가 가장 빨리 가장 비참하게 망할 조치를 취하고 있더군요.'(천병희 번역, '"아카르나이 사람들"') [본문으로]
- 디카이오폴리스가 개인적인 시장을 개설한 해는 전쟁 여섯 번째 해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전쟁 일곱 번째 해인 BC425 봄 레나이아 축제의 희극 경연에서 일등한 작품이다. 세 해 연거푸 경연에 참가하고 있었으므로 전체 구상은 미리 해두었다 해도 구체적인 에피소드와 전달할 메시지는 지난해에 완성하였을 것이므로, 아리스토파네스는 그가 가장 최근에 파악한 메가라 정세, 즉 전쟁 여섯 번째 해의 사정을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정이 바로 지지난해에 있었던 메가라 민중파의 폭력적인 정변과 반대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 후유증이었고, 이를 모르는 아테나이 사람은 없었으므로 간단히 '위정자들이 더 빨리 죽게 하고 있다'고 말하게 한 것이다. [본문으로]
- 헬라스 내전 기간 동안 많은 도시에서 귀족 대 민중이라는 대결구도를 보여왔지만, 메가라의 경우 친스파르테 정파와 친아테나이 정파로 나누어 보는 것이 정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투퀴디데스도 디오도로스도 폭력적인 정변으로 민중파가 집권한 사실을 전하면서 실각한 정파가 굳이 귀족들이었다고 말하지 않은 점에 주목하라. [본문으로]
- 결국 이 다른 방도는 메가라를 아테나이에 넘겨주는 것으로 귀착되었다.(투.펠.IV.66.3,디.역.XII.66.1)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 '정변政變coup(천병희는 '내전', 홉스는 '폭동sedition', 조웨트와 덴트/pub.는 '혁명revolution'으로 번역한다)'에 대해 시기와 경과를 언급하지 않고, 다만 이 정변의 결과 추방자들이exiles 생겨 그들이 페가이를 거점으로 파괴적인 반정부 활동을 한 것과 그 파급 효과만 기록한다.(펠.IV.66.1., 전쟁 여덟 번째 해인 BC424의 일이다) 그런데 투퀴디데스가 메가라의 망명자들 존재를 처음 밝힌 것은 스파르테가 플라타이아를 점령하고 도시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기까지 일년 동안 친스파르테 플라타이아 사람들과 당쟁으로 추방당한 메가라 망명자들을 머물게 했다는 기록에서였는데(펠.III.68.3., 전쟁 다섯 번째 해로 BC427의 일이다), 이런 스파르테의 조치가 정변으로 쫓겨난 메가라 사람들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어 베푼 호의로 본다면, 그 정변은 (메가라 망명자가 언급된 3년 사이에 또 다른 정변으로 엎치락뒤치락한 기록도 없고, 그렇게 한 것 같지도 않다) 전쟁 다섯 번째 해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앞의 각주 153과 연관해 생각하라.) [본문으로]
- 이 감성적 표현은 토마스 홉스에게 빌린 것이다. 아래에 인용한 투퀴디데스나 디오도로스에 의하면, 이 당시 메가라 사람들은 그들이 겪는 고통들, 외침의 고통과 내부 분열의 고통에 대해 둘 다 똑같이 힘들어 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여름 메가라 시내의 메가라인들은 양면으로 압박을 받았으니, 전쟁에서는 전군을 동원해 매년 두 번씩 영토를 침범하는 아테나이인들에게 시달리는가 하면, 내전 중에 민중파에게 쫓겨난 뒤 페가이를 거점 삼아 약탈 행위를 일삼는 자신들의 망명파들에게도 시달렸다.'(천병희 번역), 'The same summer the Megarians in the city of Megara, pinced both by the war of Athenians, who invaded their territory with their whole forces every year twice, and by their own outlaws from Pegae, who in a sedition driven out by the commons grievously afflicted them with robberies, began to talk...'(trans. T.Hobbes), 'During the same summer the citizens of Megara were hard pressed by the Athenians, who twice every year invaded the country with their whole army, as well as by their own exiles in Pegae, who had been driven out by the people in a revolution, and were continually harassing and plundering them.'(Trans. B.Jowett), 'The same summer the Megarians in the city, pressed by the Athenians ,Who invaded their country twice every year with all their forces, and harassed by the incursions of their own exiles at Pegae, who had been expelled in a revolution by the popular party, began to ask...'(Trans. C.E.Graves)(이상 투.펠.IV.66.1) 'While these events were taking place the Megarians were finding themselves in distress because of the war with the Athenians on the one hand and with their exiles on the other hand.'(Diodorus Siculus,'Library of History'XII.66.1.)그런데 이 짧은 문장의 다섯 번역들을 보면, 왜 유독 홉스만 원문에는 없었을 '슬프게grievously'라는 표현을 넣어 '받은 고통 afflicted'을 수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이 의문은 이어진 기록들이 밝힌 메가라 사람들의 행동들이, 처음은 망명자들이 주는 (슬픈) 고통을 덜기 위해 그들을 메가라로 다시 불러들이자고 논의하는 것이, 다음은 메가라를 아테나이에 넘기려는 반역자들이 그들이 아테나이 편임을 알리는 몸에 올리브 기름을 바르고 메가라 본성의 성문을 열려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그들의 반역 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하며 그들이 성문 여는 것을 막고 나선 것이 풀어준다. 메가라 사람에게 전쟁의 고통은 아무리 힘들어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고통이었지만, 내분의 고통은 같은 메가라 사람들끼리 도저히 주고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고, 더구나 외침의 고통으로 서로가 힘든 상황에서 내분의 고통까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비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앞의 두 행동이 알게 한다. 그래서 홉스는 내분의 고통을 메가라 사람들이 슬프게 받아들인 고통이라 번역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이 글에 빌려 쓴 것이다. [본문으로]
- 전쟁의 신 에뉘알리오스. [본문으로]
- 수비대 지휘관은 아테나이의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무구를 건네주고 몸값을 치른 뒤 방면되었다.(투.펠.IV.69.3) [본문으로]
- 이 장성은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국경 문제로 펠로폰네소스 동맹끼리인 코린토스가 메가라를 침공하자 메가라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이탈하여 아테나이 동맹에 가입했고(BC455), 아테나이는 메가라와 니사이아 항을 지키기 위해 두 곳을 잇는 장성을 쌓고 니사이아에 아테나이 수비대를 주둔시켰다.(투.펠.I.103.4) [본문으로]
- 친아테나이 정파는 브라시다스가 망명자들을 데리고와 그들을 쳐낼까 두려웠고, 친스파르테 정파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민중들이 들고일어나 그들을 치지 않을까 두려웠고, 무엇보다 그들 둘은 적전에서 내전으로 번지지 않을까 두려웠다.(투.펠.IV.71.1) [본문으로]
- 보이오티아 사람들은 메가라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브라시다스의 요청이 있기 전부터 지원군을 플라타이아에 집결시켜 메가라로 진군하고 있었고, 브라시다스를 만나 출동한 부대 가운데 반 정도를 브라시다스에게 배속시킨 다음 메가라 일을 브라시다스에게 맡기고 귀국했던 것이다.(투.펠.IV.72.1)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 '논의(천병희와 조웨트는 '협상negotiation', 홉스는 '회의go to council', 덴트/pub.는 '논의discuss matters'로 번역한다)'의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귀국 길에 오른 아테나이군이 니사이아에 별도의 수비대를 두었는지 모두 철수했는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지만(펠.IV.74.2), 이어진 메가라 관련 기록들을 보아 메가라와 니사이아를 잇는 장성에만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니사이아에서는 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메가라 대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아테나이와 보이오티아 사이의 델리온 전투(소크라테스가 참전했다)에 코린토스가 지원군을 보낼 때 '니사이아의 수비대와 메가라 사람들이 보강되었다'(펠.IV.100.1)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아테나이가 메가라에서 귀국할 당시 니사이아에서도 철수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런 사실은 '브라시다스가 니사이아에서 아테나이군을 축출하고 메가라를 해방했다'는 디오도로스의 기록에서(역사전서,XII.67.1) 확인되며, 장성 수비대에 대해서는 그해 겨울 메가라가 장성에 남아 있던 아테나이의 수비대를 내쫓고 장성을 헐어버렸다고(투.펠.IV.109.1) 기록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망명자들과 그 동조자들은 친아테나이 정파 가운데 100명을 반역행위자로 골라 공개투표로 재판하고 처형하는 폭력적 정변으로 과두정을 수립하였으나, 메가라 시민들이 이 정변과 그들의 펠로폰네소스 연맹 잔류 정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과두정 체제는 메가라에서 이 이후 오래 동안 계속되었다. [본문으로]
- 이 글 11.113. 참조. [본문으로]
- 타나그라(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소위 '타나그라 전투BC457'로 불리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의 대접전이 있었고, 전쟁 여섯 번째 해(BC426)에도 아테나이와 테바이 타나그라 연합군과의 작은 접전이 있었던 보이오티아의 도시)에 있는 아폴론 신의 성역이다. [본문으로]
- 주동자는 테바이에서 쫓겨난 프토이오도로스였다.(투.펠.IV.76.2) [본문으로]
- 브라시다스는 누가(텟살리아의 친아테나이 관료나 군인) 그를 막을 준비가 되기 전에 텟살리아를 달려서 지나(천병희와 덴트/pub.는 '재빨리 통과hurried through...', 홉스와 조웨트는 '달려서 지나run through...'로 번역했다) 올륌포스 산 텟살리아 쪽 기슭의 마케도니아 마을 디온에 도착했고, 거기서부터는 페르딕카스 왕과 칼키디케 도시들이 보낸 사절들의 안내로 마케도니아와 칼키디케 접경까지 이동하여 진을 차렸던 것으로 보인다.(투.펠.IV.78.6.,79.1.,디.역.XII.67.1.)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치라며 마케도니아를 찾은 페르시아의 사신이 아뮌타스(Amyntas I,페르딕카스Perdikkas I의 조부祖父)에 대해 '마케도니아의 왕'이라 호칭하는 장면을 소개하며(역사,V.18.), 아뮌타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I,Alexandros Philhellene - 헬라스를 사랑한 알레산더Alexander The Lover of Greeks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페르딕카스Perdikkas II의 부父이며, 알레산더 대왕 Alexandros III,Alexandros ho Megas,Alexander the Great의 6대조)가 자신의 왕가를 모욕하는 페르시아의 사신들을 죽인 이야기부터(역사,V.18-21.)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당시 비록 페르시아에 물과 불을 바친 신세지만 헬라스 사람들을 위해 펼친 노력들을 소개하며, 그의 7대조인 '페르딕카스Perdikkas I'가 아르고스로부터 마케도니아로 와서 마케도니아 왕이 된 경위를 밝혔고(역사,VIII.137-139), 이 때문에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스스로를 헬라스 사람이라 한다고 기록했는데(역사,V.22), 투퀴디데스는 브라시다스가 텟살리아 지역을 벗어나 처음 도착한 안전 지역이라 할 디온을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마을이라 하면서도 굳이 '페르딕카스의 영토에 있는 디온Dion in the dominion of Perdiccas'이라거나(펠.IV.78.6), 페르딕카스를 칼키디케처럼 지명이나 나라 이름으로 쓰며, '...브라시다스가 페르딕카스와 칼키디케에 도착했다came into the territory of Chalcidians and to Perdiccas.(홉스),reached Perdiccas and Chalcidice.(조웨트와 덴트/pub.),페르딕카스의 왕국과 칼키디케에 도착했다.(천병희)'라며 마케도니아라는 지명 대신 페르딕카스라고 기록하거나(펠.IV.79.1.), 페르딕카스가 브라시다스와 함께 두 번째 마케도니아의 아르라바이오스 지역을 원정할 때 그의 군사들이 그가 다스리는 곳의 마케도니아 사람들과 마케도니아에 거주하는 헬라스 사람 중무장보병으로 애써 구분해 보이고 있다.(펠.IV.124.1) 이 두 사람이 마케도니아 지역과 마케도니아 사람과 헬라스 사람을 구별하는 역사 기술 차이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 나라의 한 지방 마케도니아와 인근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마케도니아를 확연히 구분하고 싶어 한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르라바이오스와 브라시다스 간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지만(펠.IV.83.6.), 그 대화가 단순한 평화 협상을 넘어(천병희는 그저 협상이라 번역했고, 홉스,조웨트,덴트/pub. 모두는 '평화협상parley'라 번역했다), 페르딕카스의 패권추구에 대한 저항 때문에 사이가 나빠진 저간의 사정을 전하며 륑코스가 페르딕카스를 먼저 공격하는 일은 전에도 앞으로도 없다는 아르라바이오스의 말을 납득하고was induced 믿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투.펠.IV.85-87.사실 투퀴디데스는 브라시다스의 칼키디케와 트라케 원정으로 그의 경력이 끝장난 불운의 아테나이 군인이었으므로, 브라시다스의 행적을 긍정적으로 기록하는 일이 결코 즐겁지는 않았을 텐데, 브라시다스의 입을 빌려 당시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전쟁을 해야 하는 당위성의 차이,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의 정당성 차이에 대해 그것들의 시비를 따지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데모스테네스가 계획보다 일찍 시파이에 도착하게 된 연유를 실수로 날짜를 잘못 꼽았다고 말한다.(펠.IV.89.1.) [본문으로]
- 투.펠.IV.92. [본문으로]
-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막바지였던 BC456, 타나그라에서 패한 아테나이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모두 귀국하여 해산되자, 패전 62일 뒤 뮈로니데스 지휘 하의 아테나이군이 다시 보이오티아를 침공했고, 타나그라의 오이노퓌타Oenophyta에서 보이오티아군과 격전 끝에 승리하고 보이오티아와 포키스를 완전히 장악했다.(투.펠.I.108.2.) 그러나 디오도로스는 뮈로니데스가 보이오티아의 종주도시 테바이는 점령치 못했다고 한다.(역.XI.83.1.'...Myronidas became master of all the cities of Boeotia with the exception of Thebes.) [본문으로]
- 투.펠.IV.95. [본문으로]
- 일반적으로 전투가 끝나면 전장 정리를 위해 휴전을 하고, 전장을 점령한 쪽이 먼저 아군의 사상자와 전리품을 정리하고 이어서 적군의 사상자를 정리하여 일정한 보상을 받고(받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적군에 넘겨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본문으로]
- 요새 방벽 위에서의 수비 때문에 고전하던 보이오티아군은 화염 굴뚝을 만들어 방벽 아래 솥에서 태우는 숯과 유황과 역청의 화염과 연기를 방벽 위로 보냈고(오늘날의 화염방사기를 세로로 세운 셈이다), 견디지 못한 방벽 수비대가 물러나면서 요새가 함락되었다.(투.펠.IV.100.2-4.) [본문으로]
- 보이오티아군이 수습한 아군 시신이 500구였음을(투.펠.IV.101.2) 감안하면 저녁나절에 벌인 짧은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었는지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전쟁 세 번째 해 시탈케스가 칼키디케 정벌에 나섰다가 마케도니아의 페르딕카스와 부딪쳐 어려워지자 출정 한 달만에 귀국을 조언해 원정을 끝냈었다.(푸.펠.II.101.5-6) [본문으로]
- 주동자들은 아르길로스 사람으로 암피폴리스에 정착한 사람들, 페르딕카스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 그리고 칼키디케 도시들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로(투.펠.IV.103.3), 아테나이가 주로 권력을 잡고 싶어 하는 민중들이나 민주정파를 권력 다툼에 내세워 내부 반역을 이용했다면, 브라시다스는('스파르테는'이라 하지 못하는 까닭은 스파르테가 내부 반역을 부추겨 도시를 공략한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출신지가 달라 소외된 사람들의 내부 반역을 이용한 것이다. [본문으로]
- 파우사니아스는 플라타이아 전투 후 [본문으로]
- 스키오네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헬라스의 해방자로 금관을 씌워주고, 개인적으로 경기의 우승자로 화환을 걸어주며 브라시다스를 환영하였다.(투.펠.IV.121.1) [본문으로]
- 50척의 아테나이 함대는 아테나이 중무장보병 1,000명, 궁수 600명, 트라케 용병 1,000명, 그리고 동맹도시에서 온 약간의 경무장보병과 방패병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에서 니키아스는 경무장보병 120명, 아테나이 중무장보병 60명 그리고 궁수600명을 데리고 오솔길로 접근했으나 부상자들의 속출로 실패했고, 니코스트라토스는 나머지 대군을 이끌고 다른 곳의 언덕을 올라 공격하려 했으나 언덕 오르기가 어려워 오히려 낭패를 보고 물러났다.(투.펠.IV.129.4)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함대의 중무장보병과 궁수 2,600명과 경무장보병을 합해 거의 3,000명을 상대한 이들이 모두 700명의 중무장보병이라 했는데, 이 가운데 스키오네의 지원병이 300명이었으니 나머지 400명은 멘데와 폴뤼다미다스의 중무장보병이었을 것이다.(펠.IV.129.3)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런 민중파의 행동을 당파적(당파심,faction in sedition,in the heat of party,factiously)이라 말한다.(펠.IV.130.4)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로스 섬 정화에 관한 기사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세 번째 군사반정으로 참주가 되던 해(BC546) 아폴론 신전 전면에서 보이는 무덤들을 전부 신전 뒤로 이장하여 처음 섬을 정화했고(헤.역.I.64.,투.펠.III.104.1.), 다음은 전쟁 여섯 번째 해에 신탁에 따라 섬 전체의 무덤을 섬 바깥으로 이장하면서, 앞으로는 섬에서 죽거나 태어날 수 없도록(이웃 레네이아 섬으로 가서 죽거나 태어나도록) 정화했는데, 이때부터 4년 주기의 델로스 축제를 개최하기 시작했고(IV.104.2.), 이번 전쟁 열 번째 해에는 델로스 섬 주민들 모두를 이주시켜 정화한 것이다(V.1.). 주민 일부는 페르시아의 헬레스폰토스 지역 태수 파르나케스가 제공한 소아시아의 아트라뮛티온으로 이주했다. [본문으로]
- Pythion,Pythian Games. 고대 그리스 경기대회Panhellenic Games 넷(Olympia, Isthmia, Nemeia, Pythion) 가운데 하나. 델포이에서 올륌피아 경기 2년 후 (4년마다) 여름(7-8월경)에 개최되었다. [본문으로]
- 아녀자들은 노예로 포로로 잡은 700명은 아테나이로 보냈는데, 평화협정으로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은 방면, 나머지 토로네 사람들과 칼키디케 사람들은 올륀토스 사람들이 포로교환으로 고향으로 보냈다.(투.펠V.2.4.)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클레온의 어이없는 전사에 대해 '어느 방패병a targeteer에 막혀intercepted(따라잡혀overtaken) 죽임을 당했다slain'며 전장에서 늘 있는 무명 병사의 죽음을 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당시 아테나이에서 가장 권력이 세던 정치가이자 기고만장하던 장군의 죽음을 전하는데(펠.V.10.9.), 그래도 디오도로스는 브라시다스의 영웅적인 죽음과(Brasidas, after fighting with the greatest distinction...,ended his life heroically.) 같이 놓으면서, 클레온도 용맹을 떨친 끝에 전사했다고(Cleon also, after displaying like valour, fell in the battle.) 말한다.(역.XII.74.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스키오네 사람들이 금관을 씌워주며 해방자로서, 화환을 걸어주며 경기의 우승자로서 그들의 도시로 맞이했던(펠.IV.121.1.)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하자, 암피폴리스 사람들은 그의 무덤에 담을 쌓고 제물을 바쳐 영웅으로서, 매년 경기대회를 열어 받들어지는 명예로서, 그리고 도시의 창설자라던 아테나이의 하그논 사당을 헐고 흔적을 지워 도시의 구원자로서 기렸다고 기록했고,(펠.V.11.1.,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아테나이 사람들이 재산을 가지고 에이온 등 인근 아테나이 사람들의 도시로 떠나고 없었고, 도시는 칼키디케와 트라케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라.), 디오도로스는 브라시다스가 가장 돋보이는 전투를 벌인 끝에 '아주 많은 적을 죽이고slaying a verylarge number' 영웅적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하면서 , 아울러 그의 어머니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도 함께 소개하는데, 스파르테로 돌아온 참전자 한 명이 브라시다스가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소식과 함께 전투 내용을 알게 된 브라시다스의 어머니가 그녀 아들이 '교전에 임해to be in the conflict'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물었고, 모든 스파르테 사람들 가운데 최고였다는 말을 듣고는, '내 아들 브라시다스가 용감하긴 했으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뒤떨어졌군요My son Brasidas was a brave man, and yet he was inferior to many others.'라고 한 말이 스파르테 전역에 퍼졌고, 이에 집정관ephoros,ephor들이 그녀가 아들의 명성 위에 조국의 명성fair name를 올려놓았다며 그녀에게 '공적 명예를 부여했다accorded public honours'고 전한다.(역.XII.74.2-4.)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들의 소극적인 귀국이 스파르테 지도층의 평화 추구를 출발 당시부터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펠.V.13.2) 한편 디오도로스는 암피폴리스 전투 후, 아테네가 먼저 스파르테와 50년 휴전조약을 맺기로 결심했다고 전한다.(역.XII.74.5.)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니키아스가 지난 10년의 전쟁(소위 아르키다모스의 전쟁) 동안 겪은 도시민과 자신의 노고를 끝내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자신이 많은 전투를 수행하며 아테나이에 실패를 안기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명예가 계속되는 전쟁으로 손상받게 될까 염려스러워 평화로 이를 피하려 했다고 말한다.(펠.V.16.1.) [본문으로]
-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레오니다스 왕이 전사해 그의 아들 플레이스타르코스가 미성년으로 왕위를 승계하자 레오니다스의 동생 파우사니아스가 왕의 섭정 자격으로 페르시아 항전을 지휘했고, 플레이스타르코스가 후사 없이 죽자 그의 아들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왕위를 승계했는데(BC458), 이집트 원정 함대의 전멸로 헬라스에서의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기 힘들었던 페리클레스와 협상하여 30년 평화조약을 체결했다.(BC446) 그러나 그가 앗티케를 침공했을 때 페리클레스로부터 뇌물을 받고 철수했다는 혐의로 추방당했다가(정확한 시점을 추정할 기록은 없으나 30년 평화협정 직후거나 2-3년 지난 뒤였을 것이다. BC446?-444?) 델포이의 퓌티아女司祭까지 매수 동원한 동생 아리스토클레스의 노력으로 복권되어 귀국했으나(BC428) 스파르테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의 복권이 불법적이어서 생긴 액화厄禍라며 공격받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왕으로 있었다. 투퀴디데스는 이런 상태의 플레이스토아낙스가 평화조약을 계기로 신뢰를 회복하고 정치적 안정을 얻고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펠.V.16-17.1.)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기스가 앗티케의 데켈레이아를 점령하고 요새를 쌓아 주둔한 것이 망명한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른 것으로 보았지만(펠.IV.91.6-7,93.2,VII.19.1), 데모스테네스가 보여준 퓔로스 점령과 주둔의 성과를 보면서도 알키비아데스 이전 스파르테가 앗티케에 점령과 주둔의 전략을 구상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이상하다. 스파르테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바로 잇티케의 요새 건설 협박이었다.(펠.V.17.2) [본문으로]
- 니사이아 항을 메가라에 돌려주라는 요구에 아테나이는 그렇다면 플라타이아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테바이가 플라타이아가 무력이나 속임수로 점령당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넘어온 것이라고 주장하자 아테나이가 니사이아 항도 같은 경우라고 주장하여 스파르테가 인정한 것이다.(투.펠.V.17.2.) [본문으로]
- 땅(도시에 대한 종주권)과 사람(포로), 그리고 통행이나 조세에 관한 권리였다. [본문으로]
- 비록 평화가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공식적으로 BC414에 파기되었다), BC421 아테나이 디오뉘소스 축제가 끝나고(3월-4월) 스파르테에서 체결된(투퀴디데스는 협정이 서명된 날이 아르키다모스가 처음 앗티케를 침입하여 전쟁이 시작된지 꼭 10년 하고 며칠이 더 지났을 때였다고 한다(펠.V.20.1)) 이 '50년 평화Fifty-Year Peace'를 사람들은 니키아스의 평화Peace of Nicias'라 불렀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와 스파르테가 처음 동맹을 맺은 것은 크세르크세스의 헬라스 침공을 막기 위해 페르시아에 물과 흙을 바치지 않은 헬라스 도시들의 동맹체(헬라스 동맹,스파르테가 주도했다)에 서로 가입하면서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페르시아 항전 후 흐지부지되었는데, 스파르테가 이토메 산성으로 들어간 반란 노예들을 진압키 위해 동맹도시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을 때 헬라스동맹을 기억한 키몬의 주도로 아테나이가 보낸 지원군을 국경에서 거절하면서 동맹이 실질적으로 깨어진 이후 두 번째로 맺은 동맹조약이다. 그런데 이 상호동맹조약의 첫 문장을 보면(투.펠.V.23.1.), 비록 천병희가 '라케다이몬인들과 아테나이인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50년간 서로 동맹을 맺는다'라고 번역했지만, 홉스나(The Lacedaemonians shall be confederates with the Athenians for fifty years.) 덴트/pub.나(The Lacedaemonians shall be allies of the Athenians for fifty years.) 조웨트의(The Lacedaemonians shall be allies of the Athenians for fifty years, on the following conditions:-) 번역은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와)의 동맹이 된다'고 한 조약이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상호동맹조약이 스파르테의 일방적 요청으로 체결되었음을 알게 한다. 사실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의 동맹이 된다' 식의 조약문이 문제없이 받아들여진 데는 일찌기 브라시다스가 보여준 '스파르테는 동맹이 되어주기 위해 왔다'라는 동맹에 대한 스파르테의 인식과, 일찌기 니키아스가 멜로스 섬에 대해 '아테나이의 동맹이 되라'라고 한 동맹에 대한 아테나이의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문구여 그랬겠지만, 어쨌든 스파르테가 이 상호조약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도시들의 비협조로 선행조건을 이행치 못해 계속 묶였던 동등인을 돌려받고, 아르고스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구가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헬라스 내전'은 BC431 여름부터 BC404 초봄까지 햇수로는 28년에 걸쳐 27년 동안, 좀 더 정확히는 26년 6개월 동안 치루어졌는데, 이 당시 사람들은 이 27년을 처음 전쟁 9년과 다음의 휴지 9년, 그리고 다시 전쟁 9년으로 나누어 본 듯하다.(투.펠.V.26.3) 이런 구분은 전쟁 열 번째 해의 1년짜리 휴전도 다음해에 이어진 50년 평화조약의 일부로 보아, 바꾸어 말해 그 해에 있었던 암피폴리스 전투를 50년 평화조약 발효 후에도 계속된 전투들처럼 본격적인 전쟁 행위가 아니었다고 보아 처음 9년의 전쟁이라 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다음 9년의 휴지기 또한 전쟁 열 번째 해부터 아기스가 다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이끌고 앗티케로 진격한 전쟁 열아홉 번째 해 초봄 이전, 다시 말해 전쟁 열여덟 번째 해 겨울까지를 꼽은 것이며(투퀴디데스는 '의심스러운 휴전기간doubtful cessation/truce,treacherous armistice'으로 본다.펠.V.26.3), 다시 전쟁 9년은 전쟁 아기스의 앗티케 진격부터 스무여덟 번째 해 초봄의 아테나이 항복까지를 꼽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글에서는 암피폴리스 전투가 그간의 중요했던 전투들 가운데 하나이므로 투퀴디데스와 같이(펠.V.26.3) 처음의 전쟁을 10년으로 보고, '헬라스 내전 처음 10년 전쟁', 또는 '처음 10년 전쟁', 또는 '10년 전쟁'으로 부른다. [본문으로]
-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의 도리에이스 정착 과 헤라클레스 후손들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생긴 역사적 앙금, [본문으로]
- 펠로폰네소스 반도 인접 지역, 즉 코린토스 만, 이오니오스 만, 아르골리스 만, 사로니코스 만을 낀 지역 간의 산업 경제 구조의 차이와 외부 의존도의 차이. [본문으로]
- 주로 과두정과 민주정으로 나뉘는 정치체제 [본문으로]
- 자주적 군사 행동의 가부, 해군 또는 지상군 등 군사 주력의 형태, [본문으로]
- hegemony, principality, supremacy, leader [본문으로]
- '헬라스 내전의 처음 10년 전쟁'을 투퀴디데스가 '앗티케 전쟁Attikou Polemou,Attic war'이라 언급했음에도(펠.V.28.2,31.3/25.1에서는 '10년 전쟁the ten years' war'이라고도 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 기원도 모른 채 그냥 '아르키다모스 전쟁Archidamian war'이라 관습적으로 부른다.(도날드 케이건,'펠로폰네소스 전쟁사'2.1) 투퀴디데스가 '앗티케 전쟁'이라 부르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 부르는 것은 다분히 아테나이가 정통일 수밖에 없는 아카데미의 영향일 것인데, 실제 투퀴디데스의 '앗티케 전쟁Attikou Polemou'란 기록을 그냥 '앗티케 전쟁Attic war'라 옮기지 않고, 굳이 '아테나이 전쟁Athenian war'(홉스, 한 번은 'Attic war'라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ain war'(조웨트), '아테나이와의 전쟁war with Athens'(조웨트,덴트/pub.(한 번은 'Attic war'라 했다.) 등으로 옮긴 것도 이런 경향 때문일 것이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헬라스 내전의 초기 10년 전쟁에 빠져 있었던 아르고스의 형편에 대해, '큰 재미를 보았고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천병희), '...in all points were in good estate and gotten in their revenue.'(홉스), '...the resources of Argos were unimpaired.'(조웨트), '...the Argives were in a most flourishing condition...profited largely by their neutrality...'(덴트/pub.)라고 번역되는 대로 좋았다고 말하고(펠.V.28.2), 디오도로스는 이 당시 아르고스의 형편에 대해, 오랜(적어도 헬라스 내전의 초기 10년을 포함한 스파르테와의 30년 동안) 평화를 누리며 비단 금전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에서도 대단한 증가가 있었다며, 그래서 아르고스 사람들은 세상의 지배권이 넘어올 것을 믿고 청년들 부잣집의 건장한 1,000명을 뽑아 모든 국역에서 제외하고 국비로 신체단련과 전쟁에 대비한 훈련에만 몰두케 했다고 한다.(역.XII.75.6-7)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 당시 스파르테가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거듭된 불운으로 멸시를 받았다'고 말한다.(펠.v.28.2.) [본문으로]
- 레프레온Lepreon 사람들은 그들이 일부 아르카디아 사람들에게 공격당했을 때, 그들 땅 반을 내놓으며 엘리스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해 전쟁을 끝낸 엘리스는 그들에게 모든 땅을 경작하되 매년 올륌피아의 제우스에게 1탈란톤의 소작료를 내도록 해 받아왔는데, 앗티케 전쟁이 터지자 이를 빌미로 레프레온이 소작료 지불을 중단했고, 엘리스가 압력을 가하자 스파르테에 중재를 요청했고, 엘리스가 중재를 거부하고 그들을 약탈하자 스파르테가 중무장 수비대를 보내 보호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스가 평화협정으로 전쟁 전의 상태로 레프레온을 돌려받아야 함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며 스파르테를 이탈하고 아르고스로 간 것이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들의 관망을 스파르테의 감시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의 과두정 체제 유지에 백해무익한 아르고스의 민주정 체제 때문으로 해석했다.(펠.V.31.6)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50년 평화조약 직후 열흘마다 갱신되는 열흘짜리 휴전이 아테나이와 보이오티아 사이에 맺어졌다고 했지만, 그 계기나 경과에 대해서는 침묵해 알 수 없다.(펠.V.26.2,32.5) [본문으로]
- 중무장 군역을 마치고 해방된 헤일로타이들은 일찌기 스파르테에 없었던 새로운 사회계층이 되어 '네오다모데이스Neodamodeis,Neodamodes,New Commons,新住民'라 불렸지만, 그들에게는 페리오이코이들이 가졌던 제한적 시민권limited citizenship(full citizenship은 동등인Equals들만 가졌다)조차도 받지 못했고, 거주지도 지정된 곳이어야 했다. [본문으로]
- 아기스 왕가의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스파르테서 추방되자 그의 아들 파우사니아스가 왕위를 승계하였으나(BC445) 미성년이서 숙부인 플레이스토아낙스의 동생 아리스토클레스가 섭정에 있으면서 도모한(델포이의 퓌티아를 매수해 스파르테의 고관들이 올 때마다 선왕의 귀국과 복권을 뜻하는 신탁을 거론해 여론을 바꾸었다.투.펠.V.16.2,3) 선왕의 귀국과 복권이 성공해 다시 왕위에 올라(BC426) 있었다. 따라서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재임 기간이 BC458-446,425-409이고, 파우사니아스는 BC445-426,408-395이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군역을 마쳐 자유민이 된 헤일로타이 2,000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스파르테에서 사라진 일이 있었다고 했는데(펠.IV.80.2-4), 스파르테는 브라시다스의 원정 참여로 군역을 마친 헤일로타이들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계속 스파르테의 군사 자원으로는 인정해 줄 수 없었다(오히려 반란군이 될까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스파르테 사람들로서는 자유민이 되었음에도 어제까지 헤일로타이였던 그들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난감하였을 것이고, 이는 자유를 얻은 헤일로타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스파르테가 권한 레프레온 정착이 오히려 홀가분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로 돌아온 스팍테리아 포로들은 원래 가졌던 사회적 지위와 중요한 역활은 물론 시민권까지도 박탈당해 공직에 나서지도 재산을 처분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항복한 포로였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것이란 우려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어서, 얼마 뒤 그들이 안정되자 시민권을 회복시켰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5명의 에포로스ephoros,(복,ephoroi)監督官 가운데 일부가 평화조약에 반대했는데, 그 가운데 클레불로스와 크세나레스, 이 둘이 가장 파기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펠.V.36.1) [본문으로]
- 보이오티아는 전쟁 아홉 번째 해 늦여름 클레온이 토로네를 공격하고 있을 무렵, 파낙톤Panakton(보이오티아 접경의 아테나이 변경 요새라는 것 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을 술책(계략의 내용도 알 수 없다)을 써서 점령했다.(투.펠.V.3.5) [본문으로]
- 전쟁 여덟 번째 해 겨울 보이오티아의 여러 도시들에서 군대를 이끌고 타나그라로 모인 '11명의 보이오타르콘Boeotarchon, oi eisin endeka'(투.펠.IV.91., '보이오티아의 지휘관 11명'(천병희), 'Boeotian commanders,which were eleven'(홉스), 'Boeotarchs who are in number eleven'(조웨트), 'the eleven Boeotarchs'(덴트/pub.))과, 전쟁 열한 번째 해 겨울 스파르테와 아르고스의 동맹 요청을 다루기 위해 모인(언급이 없지만 테바이의 아크로폴리스인 카드메이아Cadmeia였을 것이다) '보이오타르카이(스) Boeotarchai(s)'(투.펠.V.37.4,5,38.,'보이오티아 연맹 장관들'(천병희), 'the governors of Boeotia'(홉스), 'the Boeotarchs'(조웨트,덴트/pub.))를 보면, 이들이 보이오티아 지역의 독립된 각 도시들을 대표하는 장군들이거나 행정관들이거나 둘을 겸임하는 다른 직명의 같은 관리인지, 아니면 아테나이처럼 보이오티아의 여러 지역에서 뽑힌 여러 명의 보이오티아 장군들이거나 행정관들이거나 둘을 겸임하는 다른 직명의 같은 관리인지 알 수 없는데, 이는 당시 보이오티아의 국가체제, 즉 보이오티아가 '보이오티아 지역 여러 도시들의 연합체united cities of Boeotia'였는지,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진 '단일 도시 보이오티아The City of Boeotia'였는지, 또 다른 국가체제였는지 모르고, 정치체제 또한 민주정 체제였는지 과두정 체제였는지 또 다른 정치체제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을 풀 실마리로써 극히 단편적인 기록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이집트의 옥시린쿠스Oxyrhynchus에서 출토된(크세노폰의 헬레니카 일부분도 함께 출토되었다) 작자미상의 '헬레니카 옥시린키아Hellenica Oxyrhynkia'라 불리는 파파루스 두루마리 조각이 전하는 내용이다. 그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체제와 정치 군사 체제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부분을 옮기면, 'XI. 1. 2. ...3. ..보이오티아의 전체 사무는 다음과 같이 처리된다. 나라chora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11개 부분meros으로 나뉘어진다. 각 구는 11명의 보이오타르코스[관리]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낸다. 테바이는 4명으로 두 명은 도시에서, 두 명은 플라타이아이, 스콜로스,에리트라이,스카르페이아, 그리고 그 전에는 테바이와 연맹 관계에 있었으나 당시에는 테바이에 납세의무를 같이하는 또 다른 지역으로부터 나온다. 오르코메노스와 히시아이에서 두명, 테스피아이가 에우트레시스와 티스바이와 함께 두 명, 타나그라가 한 명, 할리아르토스와레바데이아와 코로네이아가 한 명을 내는데 이들 세 도시가 보이오타르코스를 번갈아가면서 낸다. 마지막 한 명은 아크라이프니온, 코파이, 카이로네이아에서 나오는데 바로 앞의 도시들과 같은 방버으로 나온다. 각 부분은 이렇게 관리를 낸다. 보이오타르코스 1명마다 60명의 의회의원들이 딸려 있으며 이들은 비용을 자체 부담한다. 각 부분은 중무장보병 1,000명과 기병 100기를 제공할 의무를 지닌다. 관리의 수에 비례하여 공공기금을 쓰고, 공세를 내며, 재판관을 내고, 길흉에 관계없이 국가의 모든 일에 동참한다. 이 같은 것이 전체 민족ethnos의 정치조직이었다. .... XII....' 이로써 보이오티아에는 대개 18개 정도의 대소 도시들이 흩으져 있었는데, 이들을 군사력 차출 능력 기준으로 11개 부분meros으로 나누어 묶고, 이들을 행정 단위로 삼은 연합 국가체제League/Confederacy였고, 각 행정 단위마다 재산 능력으로 자격을 부여하는 제한된 공무담임권 아래 선출된(임기나 임면 방법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한 지역에서 두 명이 나오거나 여러 지역에서 번갈아 한 명이 나오는 걸로 보아) 행정관(Boeotarchos,평시에는 행정관governor으로 전시에는 군지휘관military commander이었을 것이다) 11명이 다스리는 과두정 체제(이 11명의 협의체에 대한 언급도 없지만, 앞의 투퀴디데스의 기록을 볼 때 국가 대소사에 그들이 수시로 모여 의논했음을 알 수 있다)와 의회와 민회가 의결하는 민주정 형태도 가미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당시 보이오티아의 국가체제와 정치체제에 대한 브리타니커 백과사전의 설명을 인용한다. 'About this time the Boeotian league comprised eleven groups of sovereign cities and associated townships, each of which elected one Boeotarch or minister of war and foreign affairs, contributed sixty delegates to the federal council at Thebes, and supplied a contingent of about a thousand foot and a hundred horse to the federal army. A safeguard against undue encroachment on the part of the central government was provided in the councils of the individual cities, to which all important questions of policy had to be submitted for ratification. These local councils, to which the propertied classes alone were eligible, were subdivided into four sections, resembling the 'prytaneis' of the Athenian council, which took it in turns to take previous cognizance of all new measures.' 그리고 사전은, 아마도 집필자가 참고한 W.Rhys Roberts의 'Ancient Boeotia'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 각주 하나를 달았는데, 내용은 투퀴디데스의 'four councils of Boeotia'(V.38)에 대한 해석으로 'Thuchydides(v.38), in speaking of the "four councils of the Boeotians", is in referring to the plenary bodies in the various states.'라며 보이오티아 11개 부분 대표자 전체가 모이는 의결 기구에 대한 가능성을 배제한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tais tessaroi boulais'(보이오티아 네 위원회, the four Boeotian councils, the four councils of Boeotia, The Four Councils of Boeotia)를 이 대목에서만 한번 언급하고 더 이상 어떤 설명도 없는데, '헬레니카 옥시린키아Hellenica Oxyrhynkia' 단편이 전하는 보이오티아 단위 도시들의 의결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전체 보이오티아의 최고 의결기구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XI.1....2. 당시 보이오티아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의회는 각 도시마다 4개가 있었다. 모든 시민이 아니고 재산이 많은 사람만 위원이 될 수 있었다. 각 의회는 차레로 하나씩 회합을 가지며 예심을 거쳐 다른 3개의 의회에 제출한다. 전체가 찬성한 것만이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행정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것을 시행하게 된다....4....보이오티아인들의 의회와 민회는 카드메이아(테바이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렸다.'(최자영,최혜영역,'보이오티아 정치제도') 특히 마지막 구절은, 앞의 각주 브라타니커 백과사전이 설명한 도시 네 위원회의 역활과는 달리, 각 단위 도시들의 의결기구처럼 보이오티아 전체의 최고 의결기구로 의회와 민회가 따로 테바이의 카드메이아에서 열렸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본문으로]
- 헬라스 내전 열두 번째 해이자 니키아스의 평화 두 번째 해인 BC420이다. [본문으로]
- 양쪽이 역병이나 다른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어느 한쪽의 도전으로 전투를 벌여 이기는 쪽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는데(대개는 서로가 이겼다고 주장해서 분쟁은 그대로 살아 있게 된다), 이겼다고 해서 결코 국경을 침범하여 확전해서는 안 된다. [본문으로]
- 지난 10년의 헬라스 내전 동안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보다 자신의 권력이나 도시의 패권을 위해 전쟁이 필요한 쪽은 언제나 아테나이였고, 아테나이의 페리클레스였고, 아테나이의 클레온이었는데, 페리클레스가 역병으로 죽어 자신의 전쟁을 끝냈을 때, 클레온은 전장에서 죽어 자신의 전쟁을 끝냈다. 니키아스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야 자신의 권력을 지킬 수 있었으므로 평화를 택했는데, 다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전쟁이 필요한 알키비아데스의 등장은 그가 무모할 정도로 오만하고 영달에 집착하는 젊은이였다는 점에서 니키아스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었고, 그의 전쟁은 아주 길 것이었다. 알키비아데스의 전쟁은 그가 역사에 등장한 BC420부터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에 항복하고 그도 죽은 BC404까지 17년에 걸쳐 이어졌는데, 이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이 역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희극이나 철학자들의 저술에 남아 있다. 동시대 사람으로 알키비아데스의 이름과 특성을 가장 먼저 기록한 사람은 아리스토파네스일 텐데(알키비아데스보다 너댓 살 아래다), 그는 그의 연극 ""말벌들"'(BC423 희곡, BC422 상연)에 갓 서른이 되어 장군에 뽑히려 분주했을 알키비아데스를 혀짤배기로 조롱하고(42-46행), 또 '"개구리들"'(BC406 희곡,BC405 상연)에 아테나이에서 연극을 계속 이어가게 할 시인을 한 명 데려오기 위해 지옥에 간 디오뉘소스가 에우리피데스와 아이스퀼로스 중 하나를 고르기 위한 면접 시험 첫 질문으로 '알키바이데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도시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에우리피데스의 되물음에 '도시는 그를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다시 갖고 싶어한다'는 디오뉘소스의 말을 들은 에우리피데스가 '조국을 이롭게 하는 데는 느리지만 큰 해악을 끼치는 데는 빠르고, 자신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강구하지만 도시를 위해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하는 것으로, 아이스퀼로스는 '도시에서는 사자 새끼를 기르지 말라'며, '일단 기르고 나면 사자에게 순종해야 되기 때문'이라고 그를 사자에 비유하는 것으로(1418-1435행) 소개한다. 그 다음으로 투퀴디데스는(알키비아데스보다 열 살쯤 위다)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와의 평화에 처음 회의를 품는 장면에 알키비아데스를 등장시키면서, 그가 물론 스파르테보다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대대로 스파르테의 아테나이 현지 영사를 맡아 명망 있는 집안이고, 비록 조부 때 사임했지만 자기가 다시 가지기를 원해 스팍테리아의 포로들을 각별히 보살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다고 무시하여 자신에게 먼저 아테나이와의 평화를 상의하지 않은 스파르테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처음부터 스파르테와의 평화를 반대했고, 맺어지자 깨트리는 데 앞장선 것으로 알키비아데스의 됨됨이를 소개한(펠.V.43.1-3) 다음, 전쟁 스무한 번째 해까지 기록에서 그의 행적을 놓치지 않았다(펠.VIII.108.1,2) 그리고 투퀴디데스의 절필 부분(전쟁 스무한 번째 해 여름까지,BC411)에 이어서 '헬레니카Hellenica,그리스역사'를 쓴 크세노폰은(알키비아데스보다 스무 살 넘게 아래다) 전쟁 스무한 번째 해 겨울 아비도스 해전에 증원군으로 온 알키비아데스가 헬레스폰토스로 온 페르시아 총독 팃사페르네스를 만나러 배 한 척에 선물을 싣고 갔다 체포되어 사르데이스에 연금되는 사정부터(I.1.6,9) 전쟁 스무다섯 번째 해(BC407) 자리를 비운 사이 노티온에 두고온 함선 15척을 잃은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나이 해군에서 쫓겨나 케르소네소스의 자기 성채에서 은거하고 지내던 중, 전쟁 스무일곱 번째 해(BC405) 위험에 노출된 아테나이 함대의 정박을 보고 세스토스로 옮기라고 조언했다 면박당하고 물러난 것까지만(II.1.25,26,알키비아데스의 조언을 무시한 아테나이 해군은 세스토스 해전에서 대패해 선원들은 팔이 잘리고지휘관들은 사형당하는 참사에 이어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연패해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다.) 기록하고, 이듬해 아테나이가 항복한 뒤 맞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철학자 플라톤인데(알키비아데스보다 스무너댓 살 아래다), 그는 사랑을 주제나 도입으로 삼는 대화편들에서 알키비아데스를 등장시키거나('프로타고라스',309a,b, '향연'215a-222b), 훌륭한 젊은이를 만들고 싶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는 젊은이로 알키비아데스를 택했다('알키비아데스 I,II;둘 다 위작으로 간주되기도 하나, 위작이라 해도 그 위작자는 젊은이를 가르쳐 훌륭하게 만들고자 하는 소크라테스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종종 그렇듯이 플라톤의(혹은 위작자들의) 알키비아데스는 '향연'에서의 그를 빼면 결코 현실의 그와 같아 보이지 않는데, 이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이끈 '젊은이를 타락시킨' 전형으로 알키비아데스를 꼽는 시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대 사람으로 시켈리아의 디오도로스는(알키비아데스의 3세기 이상 후대이다) 투퀴디데스와 크세노폰처럼 역사 기록자로서 '역사전서'에 알키비아데스의 행적을 기록했는데, 스파르테의 동맹 에피다우로스가 아르골리아 목초지를 쓰는 대가인 아폴론 신전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르고스가 전쟁을 벌이자 알키비아데스가 지원군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로 들어오는 장면에서 시작하여(BC419,역.XII.78.1), 스파르테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종식시키고, 모두로부터 땅과 바다의 패권을 쥐던 해(BC404,역.XIV.10.1)에,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 총독 파르나바조스에게 잡혀가 죽임을 당했다는 기사까지 기록했다.(역.XIV.11.1,디오도로스 자신은 알키비아데스의 죽음을 한 문장으로Pharnabazus, the satrap of King Darius, seized Alcibiades the Athenian and put him to death 간결히 전했지만, 이어서 에포로스Ephoros ho Kymaios,Ephorus of Cyme의 '세계사Universal History'(29권에 아들 데모필로스가 더한 1권으로 전30권으로 BC11세기의 헤라클레스 자손들Heracleidae,Heraclids 이야기에서 출발해 마케도니아 필립포스의 페린토스 점령BC340에 이르기까지 7세기에 걸친 역사서로 지금은 산일되어 없고, 다른 저술에 인용된 단편들만 전해진다) 17권의 내용을 인용하여 알키비아데스의 죽음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해BC404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II가 죽고 장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II가 왕이 되자) 스파르테를 끼고 다레이오스II의 둘째 왕자 퀴루스가 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 모반을 일으킬 비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알키비아데스가 파르나바조스에게 모반을 알리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가서 고발할 테니 안내자를 붙여달라 했고, 파르바나조스가 그 역활을 맡은 전령을 따로 보내고는 안내자를 주지 않자, 파프라고니아 총독에게 같은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에 프뤼기아의 마을 집에서 잠자는 그를 파르나바조스가 보낸 자객이 밤에 불을 지르고 창으로 죽였다는 것이다.역.XIV.11.2-4) 그리고 동시대와 후대를 통해 떠다니던 알키비아데스에 관한 기록들과 이야기들을 모아 그의 전기를 남긴 플루타르코스는(알키비아데스의 4세기 후대이다), 그의 전기만으로 그의 행적을 부각시키기에 부족했던지, 그가 쓴 아리스테이데스전, 페리클레스전, 니키아스전, 뤼산드로스전, 아게쉴라오스전, 등에도 알키비아데스를 등장시켜 다른 주인공들을 부각시키게 했다. 그리고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들의 생애들(과 주장들)The 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을 저술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os는(알키비아데스의 6세기쯤 후대이다), 앞에 말한 플라톤 이외에도 , 안티스테네스, 에우크레이데스, 아이스키네스, 크세노폰(소크라테스 제자와는 동명이인), 등이 '알키비아데스'라는 제목의 저술을 남겼다고 했고(이들이 모두 플라톤과 같이 알키비아데와 동시대 철학자였고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그의 이름을 건 책을 썼음을 감안하면 그가 당시 사회현상에 끼쳤을 영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소크라테스가 파이돈을 노예에서 풀어줄 때 돈을 댄 사람이었다거나, 소크라테스가 먹고살도록 땅을 [본문으로]
- 플라톤,'향연'220d-e플루타르코스,'알키비아데스전'7.2-3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모랄리아Moralia-소크라테스의 신호에 대하여On the Sign of Socrates',11.1에서 델리온에서 후퇴할 때 소크라테스의 신호를 따른 사람들은 무사히 귀국했다는 한 포로의 증언을 인용한다.그러나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는 델리온 후퇴에서 보여준 소크라테스의 의연함에 대해서는 장군인 라케스와 견주어 칭송하면서도(플라톤,'향연'221a-c) 소크라테스의 신호 덕분으로 안전한 후퇴 길을 택할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았고, 플루타르코스 그 자신도 '알키비아데스전,7.4'에서 소크라테스의 신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었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의 리카스는 출전 금지를 어기고 자신의 하인을 전차 경주에 출전시켜 우승했는데, 심판들이 이를 알고 우승을 보이오티아에게 넘기자 반발하며 자신의 하인에게 화관을 씌워주었고, 이를 본 심판들이 리카스를 구타했다.(투.펠.V.50.4)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처음으로 알키비아데스를 장군으로 소개한 이 장면 때문에, 바꾸어 말해 그가 30세가 되던 해인 BC420 평화를 반대하고 나선(투퀴디데스는 아직 그를 장군으로 칭하지 않았다) 다음 장군으로 뽑혔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개 그의 생년을 BC450으로 보는 듯하다. 아테나이 남자는 거주지demos에 18세가 되었다고 신고해야 하고, 나이가 맞는지 시민권자가 맞는지 심사 받아, 훈련병ephebos으로 등록되고, 2년간 군사훈련과 예비복무를 마친 다음, 20살에 성년 시민이 되고 병역 의무를 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확인되는 아테나이 남자의 생년이 후대에까지 정확히 알려진 경우는 거의 없었고, 숱한 신상정보가 알려진 알키비아데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의 생년 역시 이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 이를테면 포테이다이아 전투 참전(BC432-430,각주225), 기병으로 델리온 전투 참전(BC424,각주226,이때 그는 장군이 아니었으므로 생년이 BC454 이전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두 번에 걸친 스파르테와의 조약 서명 대표자로 이름이 없다는 점(BC421,투.펠.V.19.2,24.1,아직 상당한 직책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인데, 나이가 덜 찼거나 선출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장군으로 소개하는 이 장면(BC419,투.펠.V.52.2)) 등으로 판단하게 되는데, 이 이력들을 모두 그 자신의 최연소 기록이라 치면 그의 생년은 BC450이 되고, 그의 생년을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를 인용해 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의 생년을 BC452 정도로 보는데, 이유는 포테이다이아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부상을 입고 전공을 세울 만한 전투가 벌어진 것은 BC432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BC430에는 포테이다이아 사람들 모두가 기진맥진해 전투는 엄두도 못 내고 항복만 생각하고 있었고, 아테나이는 병영에 역병이 돌아 공성은 엄두도 못낼 지경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그가 BC422 두 조약 체결 당시 30세의 나이로 장군이 되어 서명 대표자였어야 했음에도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것은 투퀴디데스가 지적했던 대로 그의 집안이 대대로 스파르테의 현지 영사였고, 그 또한 영사가 되기 위해 스팍테리아 포로들을 극진히 돌보던 터라 이를 잘 아는 사람들이 그를 장군으로 뽑을 리 만무했기(스파르테를 끼고돌던 키몬이 도편추방당했음을 상기하라) 때문이고, 그렇게 두 해에 걸쳐 장군에 뽑히지 못한 알키비아데스가 마침 불어온 스파르테에 대한 분노와 스파르테와의 평화에 대한 반대 기세의 선두에 선 것도, 역시 투퀴디데스스가 지적한 대로 평화를 협상하며 자기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스파르테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스파르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니키아스의 평화가 아니라 응징과 전쟁 불사임을 밝혀, 친스파르테라는 족쇄를 풀고 반스파르테의 기치로 장군에 뽑히고 싶은 조바심의 발로였을 것이고, 그 같은 극적인 변신이(이런 변신이 그의 전생애에 걸쳐 수시로 나타나는 것에 주목하라) BC420 그를 아테나이의 장군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알키비아데스는 호위병력만 대동하고 아르고스와 펠로폰네소스의 동맹들에 대한 군사 동원 능력과 방어 태세 점검에 나섰던 듯하다. [본문으로]
- 아르고스는 에피다우로스에게 그들의 목초지를 쓰게 해주고 대신 그들이 관리하는 아폴론 퓌타에우스Apollon Pythaeus(이 사당sanctuary은 아르골리스의 아시네Asines에 있는데, 아시네 사람들이 아르고스의 침공을 막는 과정에서 뤼시스트라토스를 포함한 다수의 아르고스 사람들을 죽였지만, 성벽이 무너지자 아녀자들을 싣고 달아나 도시를 버렸고, 아르고스는 도시를 허물어 그들의 영토로 편입한 다음 뤼시스트라토스의 무덤 곁에 아폴론 퓌타에우스 사당을 세운 것이다. 파우사니아스,'그리스 서술',2.36.5)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했는데, 이를 이행치 않았다고 침공한 것이다.(투.펠.V.53) [본문으로]
- 다음 한 달은 도리에이스족들에게는 신성한 카르네이오스(8월) 달이었다.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스파르테라고 기록했지만, 스파르테의 동맹국이란 뜻으로 썼을 것이다.(역.XII.78.1) [본문으로]
- 헬라스 내전 열네 번째 해이자 니키아스의 평화 네 번째 해인 BC418 [본문으로]
- 플레이우스Phleious,Phlius는 아르골리스 지역과 코린토스의 네메아 서북쪽의 작은 도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주로 코린토스의 이스트모스에서 집결하였으나, 이 경우는 목표가 아르고스를 였으므로 펠로폰네소스 안의 플레이우스에 집결한 것이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테가 전군을, 보이오티아가 중무장보병 5,000명, 경무장보병 5,000명, 기병 500명, 기병보좌보병 500명 등 총 11,000명을, 코린토스가 중무장보병 2,000명을, 플레이우스가 전군, 그밖에 테게아와 아르카디아 그리고 메가라 같은 펠로폰네소스 바깥의 동맹이 각자 능력에 맞는 군대를 보냈다며(펠.V.57.2), 스파르테 동맹의 군세가 헬라스 최강이었다고 했다.(펠.V.60.3)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르고스가 숫자 미상의 만티네이아와 동맹들의 군대 외에 엘리스의 중무장보병 3,000명의 지원을 받았다고 했다.(펠.V.58.1) [본문으로]
- 트라쉴로스는 아르고스 도착 전에 평소 군사재판이 열리던 카라드로스 강 바닥에서 돌세례를 맞고 제단으로 피해 목숨은 건졌으나 나중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한다. 그와 함께 아기스에게로 간 또 다른 한 명, 스파르테의 아르고스 현지인 영사 알키프론에 대한 처벌 기록은 없다.(투.펠V.59.5,60.5) [본문으로]
- 이때 아테나이 군대는 라케스와 니코스트라토스가 지휘했고, 알키비아데스는 사절로 와 있었는데, 아기스가 끈 전쟁의 불씨를 아르고스 민회에서의 연설로 되살려놓았다.(투.펠.61.1,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테의 '노병 하나가one of ancient men of the army,one of the older men,one of the elder Spartans' 아기스에게, '실수를 또 다른 실수로 만회하려느냐?to amend one fault to another,to cure one evil with another,to mend one error by another?'고 고함쳤는데, 이는 아기스가 대군을 모으고도 그대로 철수한 실수를 지금 언덕을 올라 '무리하게 공격하는unseasonable forwardness,untimely precipitation,mistaken forwardness'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느냐는 질타였고, 아기스가 이 '질타increpation,halloo,exclamation'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갑작스런 느낌sudden apprehension,sudden new idea of his own,some new thought'이 왔었는지 철수를 결정했다고 했다.(펠.V.65.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테 사람들의 기억으로 이때처럼 놀란 적이 일찌기 없었다고 한다(펠.v.66.2) [본문으로]
- '스키리티스Skiritai,Sciritae'는 라코니케와 아르카이아 경계의 산악 지역으로 스파르테에 종속되어 주민들은 스파르테의 페리오이코이들과 같은 계급으로 취급되었는데, 투퀴디데스는 이들이 스파르테의 전투에 매번 좌익을 맡아 포진 했고, 이번에도 600명 정도의 병력이 참전했다면서, 이번 만티네이아 전투에서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에 대해 언급했다.(펠.V.67.1) [본문으로]
- neodamodeis, 각주214 [본문으로]
- 스파르테 왕의 출전은 보통 스파르테 동등인 전사들로 구성된 6개 부대mora,morai(왕의 근위대hippeus,hippeis가 속한 본부 부대에 5개 부족obai이 한 부대씩 출진시킨 5개 부대를 합쳐서)에 따로 좌익을 맡을 스키리티스 부대로 편성되었는데, 이번 아기스 왕의 만티네이아 출정은 코린토스나 보이오티아의 합류가 늦어질 것으로 보았는지, 1개의 스파르테 평등인 부대를 증강했는데, 이 부대가 최우익에서 최좌익의 스키리티스 역활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각주209 디오도로스가 언급했던 부대인데, 투퀴디데스는 전투 대열을 설명하며 국비로 장기간 훈련시킨 1,000명의 정예부대로 소개한다.(펠.V.67.2) [본문으로]
- 훈련받은 대로 하라는 말이다 [본문으로]
- 전투 대형 안에서 전사들은 왼손에 방패 오른손에 무기를 들어 자연히 노출되는 오른손을 오른쪽 옆 전사 방패로 가리려 움직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전투 대형이 오른쪽으로 밀리는 것이다.(투.펠.V.71.1) [본문으로]
- 아리스토클레스와 힙포노이다스는 아기스의 명령이 공격 도중에 내려져 이행을 거부했다는데, 이들은 나중에 비겁한 행동을 한 자들로 찍혀 스파르테에서 추방되었다.(투.펠.V.71.3,72.1)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르고스의 정예 중무장보병 1,000명의 퇴각에 대해, '...아르고스인 정예부대는 대부분 목숨을 건졌다. 그들은 심하게 추격당하지도 않았고, 오랫동안 후퇴하지도 않았다by reason the flight and going off was neither hasty nor long. '며,(펠.V.73.4) 본디 스파르테는 달아는 적을 멀리 오래 추격하지 않기 때문이라 했는데, 디오도로스는 이 장면에서, 스파르테가 붙인 10명의 감독관 가운데 파락스Pharax가 나서 아르고스의 정예부대를 박살내어 저번의 철수로 잃은 스파르테 사람들의 신뢰를 일거에 되찾고자 하는 아기스를 말리며, 궁지에 몰린 그들의 목숨을 건 반격으로 다칠 아군을 생각해서 오히려 도주로를 열어주도록 했다고 기록했다.(역.XII.79.6,7)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나 투퀴디데스 공히 중요한 전투에 참전한 쌍방의 군세나 전투 대형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 기록이 군의 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것에 반해, [본문으로]
- 축제 기간에는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본문으로]
- 아르고스의 스파르테 현지 영사 리카스가 스파르테의 전쟁이냐 평화냐, 평화라면, 서로 인질을 풀고, 방벽을 허물고 아테나이와 아르고스가 에피다우로스에서 철수하며, 펠로폰네소스의 모든 대소 도시들은 주권을 행사하며, 펠로폰네소스 외부의 침공은 모두 모여 상책을 결정하여 처리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마침 아르고스에 있던 아테나이의 알키비아데스도 참석한 토론 끝에 아르고스는 평화를 택하고 협상에 나서기로 했다.(투.펠.V.76.1-77.6) [본문으로]
- 투.펠.V.76.2,3,78 [본문으로]
- 아르고스의 철수 요청을 받은 아테나이는 데모스테네스를 보내 요새를 수비하는 동맹군들 속의 아테나이군을 철수시키도록 했는데, 상대적으로 소수인 아테나이군을 빼내기 위해 데모스테네스가 요새 성벽 밖에서 경기를 열고, 모두 성벽 밖으로 나오자 성문을 닫아, 각자 자기네 나라로 흩으지게 하여 아테나이군을 귀국시켰고, 요새는 나중 에피다우로스와 조약을 바꾸어 정식으로 돌려주었다.(투.펠.V.80.3) [본문으로]
- 페르딕카스 집안은 아르고스 출신이다. [본문으로]
- 전쟁 열다섯 번째 해,니키아스의 평화 다섯 번째 해, BC417 [본문으로]
- '귐노파이디아Gymnopaedia,Gymnopaedic Festival'는 스파르테에서 매년 7월에 열리는 '젊은이들의 나체 운동회Exercises of the naked youth'이다. [본문으로]
- 투.펠.V.82.1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겨울을 지내는 동안 민주정파가 '조금씩 조금씩 다시 집결하여 의기를 되찾았다/by little and litle assembled themselves and recovered heart/little by little gathered new consistency and courage,reconstituting themselves by degrees, plucked up courage'고 말한다.(펠.V.82.2)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뤼시스트라테"'의 주인공.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의 여주인공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 기사를(펠.V.35.1) 스키오네 학살(V.32.1) 이후로 놓았지만, 사건의 시간적 전후 관계가 아니라 중요도로 보아 나중에 적어넣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테나이는 스키오네 학살과 플라타이나 사람들의 이주를 한동안 지켰을 것이므로 디온이 스키오네를 결딴내고 주둔한 아테나이군을 가깝게 두고 아테나이 동맹 도시를 침공하여 점령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사건의 전후를 바꾸었다.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역.XII.76.3 [본문으로]
- 투.펠.IV.122.6전쟁 아홉 번째 해(BC423), 1년짜리 휴전이 발효된 후(물론 스파르테의 브라시다스와 스키오네는 발효 전이라 주장했다) 스키오네가 아테나이 동맹에서 탈퇴한 것에 대한 응징을 결의한 것이다. [본문으로]
- 플라타이아의 멸망에 대해서는 이 글 11.95,98,99,102 참조. [본문으로]
- 멜로스Melos,Milos 섬은 퀴클라데스 제도의 서남단에 위치한 화산섬으로, 기원전 2세기 무렵 안티오크의 알렉산드로스가 조각했다고 알려진 '아프로디테의 대리석상statue of Aphrodite('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루브르 소장)'을 섬의 니케 신전 터에서 19세기 한 농부가 발굴하면서 그 대리석상과 함께 섬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 [본문으로]
- 오늘날의 산토리니. [본문으로]
- 전쟁 여섯 번째 해인 BC426 여름의 일이다.(투.펠.III.1-3)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스키오네 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판 아테나이 장군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멜로스를 같은 방법으로 처분한 장군들이 클레오메데스와 테이시아스라고 밝히는데(펠.V.84.3), 이에 반해 디오도로스는 니키아스를 지명하면서, 그가 먼저 퀴테라와 니사이아를 점령한 뒤 멜로스 가서 섬을 점령하고 도륙했다고 기록했다.(역.XII.80.5)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와 멜로스의 협상 내용을 대화체로 자세히 기록하면서(펠.V.85-113), 그 결론으로, 협상에 참가한 한 멜로스 사람의 자유에 대한 자긍심과 신과 스파르테의 도움에 대한 기대와 아테나이의 중립 인정 희망을 이렇게 기록했다.(펠.V.112.2,3) '아테나이인들이여, 우리의 결정은 처음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7백 년을 살아온 이 도시의 자유를 이토록 짧은 시간에 박탈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태껏 우리 도시를 지켜주신 신들의 호의와 인간, 즉 라케다이몬인들의 도움을 믿고 우리는 이 도시를 구원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친구로, 중립국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양국의 이해에 가장 부합하는 조약을 맺은 다음 우리나라를 떠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천병희), 'Men of Athens, our resolution is no other than what you have heard before; nor will we, in a small portion of time, overthrow that liberty in which our city hath remained for the space of seven hundred years since it was first founded. But trusting to the fortune by which the Gods have preserved it hitherto and unto the help of men, that is, of the Lachedaemonians, we will do our best to maintain the same.' 'But this we offer, to be your friends, enemies to neither side, and you to depart out of our land, after agreement such as we shall both think fit.'(T.홉스), 'Men of Athens, our resolution is unchanged; and we will not in a moment surrender that liberty which our city, founded seven hundred years ago, still enjoys; we will trust to the good fortune which, by the favour of the Gods, has hitherto preserved us, and for human help to Lachedaemonians, and endeavour to save ourselves.' 'We are ready however to be your friends, and the enemies neither of you nor the Lachedaemonians, and we ask you to leave our country when you have made such a peace as may appear to be in the interest of both parties.'(B.조웨트), 'Our resolution, Athenians, is the same as it was at first. We will not in a moment deprive of freedom a city that has been inhabited these seven hundred years: but we put our trust in the fortune by which the gods have preserved it until now, and in the help of men, that is, of the Lachedaemonians: and so we will try and save ourselves.' 'Meanwhile we invite you to allow us to be friends to you and foes to neither party, and retire from our country after making such a treaty as shall seem fit to us both.'(덴트/pub.) [본문으로]
- 헬레스폰토스와 아나톨리아로 가는 항로와 트라케 지역 전략 요충지이자 지역 산물, 특히 선재船材의 집산지였다. [본문으로]
- 이탈리아로 가는 항로의 요충지였다. [본문으로]
- Sikelia,Sicilia,sicily, 오늘날의 이탈리아 시실리아 섬으로 활화산 에트나etna(이넷사Inessa, 몽지벨로Mongibello)로 유명하다. BC120세기부터 거주한 흔적이 있고, BC13세기, BC8세기에 대단위 이주가 있은 이후 섬에서의 거주가 활발해졌다. 투퀴디데스는 그의 책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간의 전쟁'의 여덟 권 가운데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두 권을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 기록에 할애했는데, 그 여섯 번째 권을 시켈리아에 대한 헤로도토식 '탐구 보고Histoies Apodexis' 형태로 시작한다. '그해 겨울 아테나이는, 가능하면 시켈리아를 정복할 목적으로, 그 전의 라케스와 에우뤼메돈의 것보다 더 큰 원정대를 그곳에 다시 보내기로 결의 했는데, 아테나이 사람들 대부분은 그 섬의 크기나 헬라스 인과 이어족을 포함한 인구를 모르고 있었으며, 그들이 거의 펠로폰네소스와의 전쟁만큼이나 힘겨운 싸움에 말려든다는entering on a struggle almost as arduous as the Peloponnesian War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never reflected 있었다. 상선을 타고 시켈라이 섬을 한바퀴 도는 데에도 거의 여드레가 걸리는 그 큰 섬이 본토에서 겨우 2마일 정도 떨어져 있어 거의 본토라 해도 무방하다.(펠.VI.1.1,2)...(이어서 투퀴디데스는 시켈리아 원주민들의 교체 과정, 그리고 여러 도시들과 그들의 정착과정이나 연혁들을 소개하는데, 이 글에서는 지명이나 부족의 이름이 언급될 때 따로 각주로 소개한다.) ...이들이 시켈리아에 자리잡은 헬라스인과 이어족들인데, 아테나이는 이토록 큰 섬을 정복하려 했다bent upon invading. 아테나이는 동족과 새로운 동맹을 돕는다며 고상한 척했지만virtuously professed, 본심은 시켈리아 제국을 갈망했다the simple truth was that they aspired to the empire of Sicily.(VI.6.1)' [본문으로]
- Syrakousai,Syrekousai(헤로도토스),Siracusa(이탈리아, 라틴어는 Syracusae, 시실리에서는 sarausa/Saragusa),Syracuse, 본디 시켈로이들이 BC13세기 경 원원주민들을 쫓아내고 세웠던 도시 판탈리카(Pantalica, BC13세기 이후부터 BC7세기까지 석회암을 정방형으로 벌비처럼 뚫어내고 쓴 '판탈리아 공동묘지Necropolis of Pantalia'으로 유명한 쉬라쿠사이 인근의 지명이다) 인근에 BC8세기 코린토스 사람들이 이주해와(투퀴디데스는 칼키스의 투클레스가 맨 처음 시켈리아에 헬라스 도시 낙소스를 창건한 이듬해, 코린토스의 아르키아스가 쉬라쿠사이를 세웠다 한다.) 세운 도시로, 이주 후 급속한 발전을 가져와 BC7세기에는 인근 시켈로이의 판탈리아까지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근에 카마리나 같은 그들의 식민도시들을 건설했고, 겔라, 메가라 등과 협력하며 시켈리아 최강 도시가 되었다 [본문으로]
- Selinous, 오늘날의 셀리눈테Selinunte. 시켈리아 섬에 헬라스계 이주민이 세운 가장 서쪽 끝의 도시로, 인근에 포이니케계의 이주민 도시(대표적으로 오늘날의 시실리 섬 수도인 팔레르모, 당시 헬라스 말로 파노르모스Panormos)와 원주민 격인 엘뤼모이계의 도시들 에게스타와 에뤽스가 있어, 이들 간에 마찰이 계속되었다. [본문으로]
- Egesta, 오늘날의 세게스타Segesta로, 투퀴디데스에 따르면, 일리온Ilion,Troy 멸망 후 이주해 스카니아 사람들 동쪽에 정착한 트로이 사람들인 엘뤼모이Elymoi,Elymian 사람들이 세운 도시.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에게스타Egesta,Segesta의 사연과 간청에 대해, '혼사와 땅을 두고 생긴 분쟁으로 싸움이 붙었는데, 얼마 전에 레온티노이를 도와줬듯이(이 글 11.115) 자기들도 도와달라'는 것으로 간단히 설명하고(펠.VI.6.2), 대신 이 간청을 두고 벌이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와 결의 과정에 대해서는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를 앞세워 장황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펠.VI.6.3,8.1-26.2,시켈리아 원정을 두고 벌인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논쟁은 이어지는 11.146 참조) 그런데 후대의 시켈리아 사람 디오도로스는 그들의 사연과 간청에 대해, 혼사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영토 분쟁에 대해서 케르케돈Kerkedon,Cartago과 레온티노이를 거명하는 등 눈여겨볼 만한 언급도 더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역사 전서,XII.82.3-83.3,'두 도시 사이를 흐르는 강을 낀 땅을 두고 영토에 대한 이견이 있었는데, 먼저 셀리누스Selinous,selinunte가 강을 건너와 강변 땅을 빼앗은 다음, 피해 입은 사람들을 완전 무시한 채 셀리누스 영토에 인접한 강변 땅들을 헐어 없애버렸고, 이에 에게스타가 먼저 대화로 풀 것을 제안했으나 무시당하자 군대를 동원해 땅을 되찾았다. 이후 양국은 분쟁을 무력 대결로 해결키로 하고 전투를 벌였고, 셀리누스가 에게스타의 전사들 다수를 죽이고 승리했고, 무력의 약세를 보강키 위해 아크라가스Acragas와 쉬라쿠사이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고, 다음으로 손을 내민 카르케돈karchedon,Carthago,Cartage도 흥미를 보이지 않자, 쉬라쿠사이에 의해 레온티노이에서 쫓겨났던 레온티노이 사람들의 동족kinsmen인 아테나이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레온티노이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사절단을 보낸 것으로 기록한다.), 대신 이 간청을 다루는 아테나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결의 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나 언급 없이 아테나이의 원정 결의와 준비에 대해 투퀴디데스와 같은 내용의 주요사항들만 기록한다.(같은 책,XII.83.4-84.3,XIII.2.1,2) [본문으로]
- 전쟁 열일곱 번째 해 BC415 [본문으로]
- Leontinoi, BC8세기 경 낙소스 섬 사람들이 이주해 세운 도시로(투퀴디데스는 낙소스를 세운 투클레스와 칼키스 사람들이 쉬라쿠사이가 생긴지 5년 뒤 그 인근의 시켈로이 사람들을 내쫓고 세웠다 한다(펠.VI.3.3)), 지금의 레온티니Leontini. BC427 아테나이의 첫 시켈리아 원정 후(이 글 11.103,106,115 참조), BC422 쉬라쿠사이가 과두정을 세우고 병합했는데, 이를 다시 복원하려한 것이다. [본문으로]
- 투.펠.VI.9.1,'....whether it be not better not to send it at all than,....'(T.홉스) [본문으로]
- 알키비아데스와 동조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원정하려는 것이라(투.펠.VI.12.2) 한자락 깔고 있다. [본문으로]
- BC415 봄 민회에서의 도편추방 투표는 아고라의 램프 장수 휘페르볼로스가 알키비아데스를 노리고 벌인 일이었는데,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 놀란 니키아스가 알키비아데스와 공모하여, 도리어 휘페르볼로스가 도편추방되는 일로 변질시켰다. 이 공모의 결과, 뜻밖에도 본디 도편추방의 대상자가(참주가 될까 두려울 정도의 정치적 강자나, 도시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막강한 두 정치적 강자 중 하나) 되어야 할 알키비아데스나 니키아스는 빠지고, 전혀 감도 되지 않는 휘페르볼로스를 추방하게 되자, 부끄러워진 아테나이 사람들이 이 이후 두 번 다시 도편추방 투표를 하지 않았다.(플.니키아스전,11.1-7,알키비아데스전,13.3-5) [본문으로]
- 투.펠.VI.15.4 [본문으로]
- 스팍테리아에서 스파르테 포로를 잡아온 후 아테나이 군사적 자신감이 얼마나 고조되었었는지, 그 당시 아테나이 시중에는 시켈리아나 카르케돈 원정에 대해 오가는 말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전쟁 여덟 번째해 BC424 새봄에 상연된 클레온 축출 연극, '"기사들"'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에서(1300-1315행), 휘페르볼로스가 카르케돈으로 100척의 함대를 보내려 한다며, 그를 못된 시민이자 불한당이라 비난했을 정도였는데, 여섯 해의 평화로 전쟁 피로를 회복한 아테나이에 다시 시켈리아와 카르케돈 원정을 말할 만큼 군사적 자신감이 고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알키비아데스가 '공인으로서 전쟁을 탁월하게 수행했으나excellently managed the war, 모든 사람들이everyone 그의 생활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아 그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전쟁 임무를 맡기면서gave the charge of the wars to others, 오래지 않아 도시를 몰락시켰다not long after overthrew the state'고 기록한다.(펠.VI.15.4,번역T.홉스) [본문으로]
- 제 91차 올륌픽(전쟁 열여섯 번째 해 BC416) 전차 경주대회에 7대를 출전시켜 1, 2, 4등을 차지했다. [본문으로]
- E.C.마르샹Marchant은 플루타르코스가 이들 석상에 대해 언급했다며,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힙파르코스가 처음 여닐곱 석상을 세웠었는데, 그후 부족들이나 행정관들이나 개인들까지 나서 아고라에서부터 헤르메스 거리에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음모자 가운데, 휘페르볼로스가 도편추방당한 뒤 그 다음으로 민중파의 지도자로 권력을 잡은, 클레오폰이 있었을 가능성을 조금도 제시하지 않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클레온이 권력을 쥐고 있었을 당시에 이미 아고라에서 재판 걸기 좋아하는('"아카르나이 사람들"',846행) 민중파의 새로운 권력지향자 휘페르볼로스의 대두를 알리면서(투퀴디데스도 그의 대두를 알았을 것이다), 그의 사행('"구름"',1065,청동에 납을 섞어 만들 램프를 팔아 돈을 벌었다), 시민을 무시하는 태도('"벌들"',1007행)와 호전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있었듯이(1300-1314행), 알키비아데스가 몰락하는 이 시점에 이미 클레오폰을 창녀 살라박코보다 못한 정치 실력자로 알아보면서('"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805행), 나아가 명예를 존중치 않으면서 전쟁을 좋아하는 권력자로 치부하고('"개구리들"',1504,1532행) 있어, 이 글에서는 클레오폰을 알키비아데스 몰락 음모의 주모자로 지적한다.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가 시사 비평을 위해 그의 연극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그 방면에서 유수한 인사들을 우스개로 삼거나 낮추어 조롱하는 일을 피하지 않았지만, 유독 아고라 출신의 민중파 권력자들 셋, 클레온, 휘페르볼로스, 클레오폰에 대해서는 저급하다고 희화화하여 공격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한결같이 평화를 구축할 수 있을 때 평화 대신 전쟁을 택해 권력을 추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는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해서는 페르시아 침공을 막은 공을 상찬하면서('"기사들"',810-819행) 다만 말년의 파행에 대해 비판하고(같은 극,80-84행), 에피알테스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유수한 정치 명문 알크마이온 집안의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중들을 이끌어 참주를 내쫓고 아테나이에 민주정 체제를 세우면서 민중파라는 정치집단이 생겨났다. 그 뒤 그의 조카사위 크산팁포스가 민중파를 이끌었지만, 케르소네소스에서 귀국한 밀티아데스 가문의 밀티아데스가 귀족과 부자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그에게 도전했고, 민중파 안에서도 처음으로 도시 빈민 출신 테미스토클레스가 새로운 지도자로 도전하면서, 그는 이중의 세력 다툼 속에 도편추방당했고, 그 자리를 테미스토클레스가 차지해 민중파를 이끌면서 페르시아 침공을 막아냈다. 그리고 전쟁 뒷설거지와 제국의 초기 건설은 귀족과 부자를 대표하는 아리스테이데스와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이 주도하였고, 민중파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파행으로 후계자를 내세우지 못하고 움츠려야 했다. 얼마 뒤 도시 평민 출신의 에피알테스가 민중파를 이끌며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과 정권을 다투면서 민중파가 다시 부상하였고, 이때 크산팁포스의 아들 페리클레스가 서른일곱의 늦은 나이에 에피알테스의 보좌역으로 처음 정치에 입문했다. 페리클레스는 어렸을 때부터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닮았다는 주위의 평판과 아버지 크산팁포스의 도편추방 경우를 교훈 삼아 명문 귀족 출신임에도 아들 크산팁포스로부터 구두쇠라 욕을 들을 만큼 근검절약하며 민중에게 철저히 다가가는 생활 태도를 견지하였고, 오래 그를 지켜본 민중파의 심정적 지지를 받고 나서야 민중파로 활동했기 때문에, 졸지에 에피알테스를 암살로 잃은 민중파를 고스란히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여 최장기 민중파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년의 페리클레스 역시 아고라 출신 클레온의 도전으로 고전하다 전쟁 중에 열병으로 죽은 다음에야 클레온이 민중파를 이끌 수 있었을 정도로 알키비아데스 정계 입문 당시 아테나이 민중파는 민중 출신이냐 귀족 명문 출신이냐를 두고 내부 투쟁이 상례화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키비아데스는 어릴 때부터 왕래하며 보살핌을 받았던 이모부 뻘의 페리클레스가 실천한 이런 정치적 도광양회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으며, 오히려 최악의 귀족 명문가 자제들이 보이는 생활 태도로 일관했고, 그의 정계 입문도 귀족과 부자들의 정파를 틀어쥔 니키아스를 피해 민중파로 길을 돌렸을 뿐으로 비칠 만큼 민중파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했는데, 마침 벌어진 휘페르볼로스의 도편추방이 결정적으로 민중파를 그의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 돌아서게 만든 것이었다. [본문으로]
- 투.펠.VI.28.2 ('....알키비아데스가 연루되어 있다고 아우성치며, 그의 생활 방식이 대체로 비민주적이고 방종하다는 점을 증거로 내세웠다.'(천병희) '...nothing there in was done without him, alleging for argument his other excess in the ordinary course of his life, not convenient in a popular estate.'(T.홉스) '...nothing of all this had been done without Alcibiades; the proofs alleged being the general and undemocratic license of his life and habits.'(덴트/pub.) '...he was at the bottom of the whole affair. In proof they alleged the excesses of his ordinary life, which were unbecoming in the citizenof a free state.'(B.조웨트))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원정 준비라기보다 과시epideikse,display,ostentation라 헀다.(펠.VI.31.4)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원정을 결의하는 아테나이 민회를 소개한 것처럼, 침공에 대비하는 쉬라쿠사이 민회도 소개한다.(펠.VI.32.3-41.3) [본문으로]
- 쉬라쿠사이의 장군 헤르모크라테스Hermocrates는 전쟁 다섯 번째 해, 레온티노이를 지원하러 온 아테나이 함대가 이를 빌미로 이태나 시켈리아에서 주둔하며 도시들 간의 분쟁을 부추기고 있을 때, 시켈리아 도시들 회의를 열고, 먼저 쉬라쿠사이가 양보하여 나머지 도시들이 서로 화해하도록 했고, 아테나이 함대의 철수까지 이끌어냈었다.(이 글 11.115 참조) [본문으로]
- 시켈로이 사람들은 본디 이탈리아에 살았으나 BC13세기에 오피코이 사람들에게 밀려 대규모로 시켈리아로 이주했고(투.펠.VI.1.4), 먼저 이주해 있던 시카노이 사람들을 서쪽으로 밀어내고 섬의 동부와 중앙을 차지했다. 이들이 강성해진 다음, 이들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시켈리아' 섬 동쪽 절반에 널리 퍼져 살던 시켈로이Sikeloi,Sicels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Odysseia'인데(나그네로 신분을 감춘 오딧세우스를 아내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아들 텔레마코스 앞에서 조롱하는 장면에서(20.376-384행) 그들을 오뒷세우스를 배에 태워 시켈리아로 보내자 하고, 오딧세우스가 어버지 라에르테스를 만나는 장면에(24.211,366,390행) 나오는 라에르테스의 시녀나 집사 돌리오스의 아내의 간병부 모두 시켈로이이다.(천병희는 시켈리아라는 지명으로 그 출신을 구별했고, S.버틀러는 시켈스라는 부족명으로 번역했는데, 호메로스가 오뒷세이아에서 시카니아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시켈리아는 여전히 시카노이 사람들의 땅 시카니아였으며 시켈로이 사람들은 아직 시카노이 사람들을 누를 만큼 강성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 발굴물들 역시 가장 오래된 것이 이 무렵의 것들이서, 이들은 BC13 이전에 이미 이주해 있었던 인도 아리안계로 보인다. 이 밖의 시켈리아 원주민 격으로는 각주277에 언급된 시켈리아 섬 서쪽에 거주하던 엘뤼모이와 섬 중앙의 시카노이Sikanoi,Sicani(이들에 대해서도 호메로스가 '오뒷세이아' 에서 오뒷세우스가 아버지 라에르테스를 다시 만나 자기를 못 알아보는 아버지께 방랑의 사연을 말하는 가운데(24.304-307행) 한 지명으로 시카니아를 언급한다)가 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시켈로이 사람들이 오피코이 사람들에게 쫓겨 시켈리아로 이주하기 전 그들이 살던 곳을 그들의 왕 이탈로스의 이름을 따 이탈리아라 불렀다고 하고(펠.VI.2.4), 아리스토텔레스는 군인 계급의 공동식사 제도에 대해 설명하는 가운데, 이탈리아의 이탈로스가 크레테의 미노스보다 더 먼저 시행했다며, 지금의 이탈리아 반도 서남부에 정착한 '오이노트리아 사람들Oenotrians' 가운데 이탈로스라는 사람이 왕이 되고나서one of the settleres there, a certain Italos, became king of Oenotria, 원래 유목하던 오이노트리아 사람들을 농사짓게 하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 시행했고, 공동식사도 도입했는데, 이 이후 이들을 '이탈리안(이탈로스 사람들)Italians', 이들이 사는 지역을 '이탈리아Italia'로 불렀다는 것이다.('정치학',VII.1329b5-23)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노트리아 사람들 가운데, 스켈로이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투퀴디데스가 언급한 오피코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우소네스라 불리기도 했다며 오래 서쪽의 튀르레니아 지방에 살았다고 한 점, 그리고 같은 오이노트리아 사람들 가운데는 동쪽 이아퓌기아의 시리티스에 사는 코네스 사람들도 있다고 한 점, 등을 감안하면 투퀴디데스가 말한 오피코이 사람들에게 쫓겨 시켈리아로 간 시켈로이 사람들도 오이노트리아 사람들 가운데 한(또 다른 이름의) 부족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 Iapygia, 이탈리아 반도의 동남 해안 지방. 이 지역은 BC9세기부터 아드리아 해 건너편 일뤼리아에서 일뤼리아 사람들에 쫓겨 이주한 인도-유럽인들이Iapyginians 주로 거주해 그들 이름을 따eponymous 이아퓌기아라 불렀는데, 장화 모양 이탈리아 반도의 뒤축인 이곳의 맨 아래에 있는 곶이다. [본문으로]
- Taras, BC8세기 말부터 이주한 스파르테 사람들이 세운 도시로, 지금의 타란토Taranto. 이탈리아 해군기지가 있는 주요 물류 거점. [본문으로]
- 아테나고라스에 대해서는 투퀴디데스가 쉬라쿠사이 민회에서 행한 그의 연설을 소개한 것 이외에, 디오도로스처럼 그의 이름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아, 더 이상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의 연설 내용으로 보아, BC415 당시 쉬라쿠사이는 과두정파의 공격 앞에 허약한 민주정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는 이런 쉬라쿠사이와 도시의 민주정을 대내외 적들로부터 지키려 애를 쓴 민중파 정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dikaion이란 단어를 썼는데, 홉스는 정의justice라 옮겼다(...what justice is it, that the same men should not have the same privileges? ...같은 사람들이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정의요?). 물론 평등도 정의이지만, 아테나이 민주정에서라면 좀더 구체적으로 동등참정권isopoliteiadlsk 동등법적용isonomia 같은 평등isoteta,equality의 문제로 언급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실제 당시 쉬라쿠사이에는 아테나고라스가 지적한 과두정이나 참주가 되려는 정치 전복 시도가 암암리에 펴져 있었던 모양인지, 결국 쉬라쿠사이에서 디오뉘시오스Dionysios I,Dionysius Elder가 민주정을 뒤엎고 정권을 잡아 참주가 된 것은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벌어진 BC409부터 전쟁에 참여하면서 지위가 올라간 다음, BC407 헤르모크라테스가 쿠데타를 시도하다 거리에서 죽은 뒤인 BC406에 최고 사령관이 되었고, 그 권력으로 참주가 되었다. [본문으로]
- 쉬라쿠사이에는 장군들이 15명 있었고(투.펠.VI.72.4), 투퀴디데스는 그 가운데 한 명인 이 장군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 이때 출발한 원정군은 1차 부대로, 함선 136척(삼단노선 134척, 로도스 섬의 50노선 2척, 삼단노선은 아테나이 전함 60척, 수송선 40척의 100척, 나머지 34척은 키오스 섬과 다른 동맹의 함선, 그런데 전투에 참여 불가능한 마필수송선 1척, 군량운반선 30척, 소형선 1척까지 더하면 168척의 대함대이다), 중무장보병 5,100명(아테나이 신규 징집병 1,500명, 테테스 출신 해군 소속 700명, 아르고스 500명, 만티네이아 250명, 나머지는 용병들과 다른 동맹도시 중무장보병들), 궁수 480명(아테나이 400명, 크레테 80명), 로도스 섬의 투석병 700명, 메가라 망명 경무장보병 120명, 그리고 아테나이 기병 30명과 마필 수송선 1척, 군량선 30척과 소형 연락선 1척에 공성과 요새 건설 장비, 기술자들, 보급 및 조리 등 전투보조원이 탔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 장사에 나선 소형 선박들과 화물선들이 자진하여 원정에 동행했다.(투.펠.VI.43,44.1) [본문으로]
- 헬라스 본토의 도시 이름과 같은 이탈리아(광역 그리스Magna Graecia)나 시켈리아의 도시들, 이를테면 멧세네나 메가라나 낙소스나 로크리스 등은 헬라스의 그곳 사람들이 이주해와 세운 도시로 보면 된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 사람들이 시켈리아 원정을 결의했던 것은 봄에 에게스타의 전비 부담 능력을 확인하러 갔던 사절들의 금은이 굉장히 많았다는 보고 때문이었는데, 에게스타는 우선 사절들을 에뤽스Eryx의 아프로디테 사원에 데려가 은제품이기는 하나 값은 높지 않은 다수의 보물들을 보여준 다음, 개인집들에 초청해, 에게스타 사람들이 가진 것들이나 이웃 포이니케나 헬라스 도시에서 빌려온 금은 식기와 집기로 대접하면서, 사절들이 에게스타에 금은보화가 많은 것으로 오인토록 속였던 것이다.(투.펠.VI.46.3,4) [본문으로]
- 다수가 전령herald로 번역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일반적인 통고가 아니라, 외교적인 탐색과 교섭을 위해 보내자고 하고 있어, 조웨트의 예에 따라 사절envoy로 보았다.(투.펠.VI.48) [본문으로]
- Messene, 오늘날의 메시나Messina로, BC8세기 에우보이아 칼키스 사람들이 원주민 격인 시켈로이 사람들의 도시에 거주하면서 장클레Zancle라 부르다가(장클루스Zanclus 왕의 이름을 땄다는 설과 이곳의 천연 항구 모양이 풀 베는 '큰낫Zanclos,scythe,서서 베는 낫'과 닮아서 붙인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BC5세기 초 레기온의 아낙실라스Anaxilas가 헬라스의 멧세네를 기념하여 멧세네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스칼렛타 장클레아Scaletta Zanclea'라 불리는 구역이 있다. [본문으로]
- ta Megara, Megara Hyblaea, Hybla Major, BC8세기 헬라스의 메가라 사람들이 세운 도시로 BC5세기부터 버려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시실리 오구스타Augusta 지역에 유허로 있다. [본문으로]
- Naxos, 시켈리아 동안 카타네와 멧세네 중간 지점에 위치한 BC8세기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 사람들이 세운 고대 도시로, BC4세기 인근에 오늘날의 타오르미나Taormina가 건설된 후 점차 버려졌다. [본문으로]
- Katane, 레온티노이와 레기온Rhegion(지금의 Reggio di Calabria(줄여서 Reggio))과 같이 에우보이아 칼키스 사람들이 세운 도시로(투퀴디데스는 낙소스를 세운 투클레스가 세웠다지만, 정작 카타네 사람들은 에우아르코스를 도시 창건자로 꼽는다 한다(펠.VI.3.3)), 지금의 카타니아Catania임. 지진과 화산 활동으로 도시가 여러 차례 파괴되었으나, 지금은 시켈리아 섬에서 팔레르모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본문으로]
- 시켈리아 도시들의 허술한 방어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어서 주목하게 되는데, 헬라스였다면 아무리 작은 도시도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무너지는 방어벽을 그냥 두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실제 이렇게 허술하게 성문이 뚫린 기록을 찾기 어렵다) 이 대목을 천병희는 '허술한 출입문', 홉스는 'a little gate...weakly built', 조웨트는 'a postern gate...badly walled up', 덴트/pub.는 'an ill-walled-up postern-gate' 라 번역했다.(투.펠.VI.51.1) [본문으로]
- Kamarina, BC6세기 초 쉬라쿠사이가 식민도시로 건설했다가 50년 뒤쯤 버렸는데, BC5세기 겔라 사람들이 도시를 재건하였고, 이 이후 카르타고와 전쟁 때 도시가 파괴되고 그후 재건되는 등 흥망을 계속하다가 AD9세기에 완전 파괴된 후 지금의 도시 라구사Ragusa에 유허로 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가 파랄노스Paralos와 함께 '두 척의 신성한 삼단노선the Two Sacred Triremes'으로 불렸는데, 주로 관용 연락선으로, 간혹 고위 정치가가 이동할 때나 제관이 신탁을 받으러 갈 때도, 사용하였기 때문에 승무원을 모두 아테나이 사람들로 하고 청결을 유지하였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헤르메스 석상 훼손 사건에서 알키비아데스의 데메테르 비의 모독 사건으로 비화해서 민주정 전복 음모로 진전하는 과정에서, 아테나이 민중들이 보이는 태도를 기록하는 가운데, 느닷없이 두 번째 참주 힙피아스와 동생 힙파르코스가 어떻게 몰락해갔는가를 장황하게 설명하면서(펠.VI.54-59), 아테나이 민중들이 이런 참주의 만행을 명심하고 있던 터라, 고발당한 자들을 과두정이나 참주를 세우려는 자들로 몹시 의심했다고 말한다.(펠.VI.60.1)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전하는 허위자백의 정당성은, 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는 것보다 혐의를 시인하고 기소를 면제받는 것이 살아남을 가망이 더 큰 상황에서, 허위 자백으로 구금과 소추를 면하니 개인적으로 좋고, 실상을 몰라 도시민 전체에 혐의를 둘 판인데, 허위 자백으로 범인을 잡는 소동이 끝나서 도시가 안도하여 일상으로 돌아가니 도시에게도 좋다는 것이다.(펠.VI.61.3)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들에 대한 처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펠.VI.60.5, '...희생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았는지 확실치 않지만...'천병희, '...uncertain whether they suffered justly or unjustly.'홉스, 'No one could say whether the sufferers were justly punished:..'조웨트, '...not clear whether sufferers had been punished unjustly...'덴트/pub.)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원정군의 사기 저하와 알키비아데스의 영향력으로 참전한 아르고스와 만티네이아 군대의 철수를 우려해, 그를 붙잡아오지 말고, 법정에서 해명하라며 데려오도록 했다.(투.펠.VI.61.5) [본문으로]
- Sicanoi,Sicani,Sicanians 투퀴디데스는 시켈리아에 연원을 알 수 없는 '퀴클로페스Cyclopes외눈박이' 사람들과 라이스트뤼고네스Laestrygones식인거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 당시 섬을 '트리나크리아Trinacria세모별'라 불렀다고 전한 다음, 시카노이 사람들이 연원이 알려진 첫 번쩨 시켈리아 섬 이주자로, 이들은 스페인 동부 이베리아 지방의 시카노스 강 유역에 살다가 리귀에스 사람들에 쫓겨나 이주했는데, 이들이 강성해지자 섬을 시카니아Sikania,Sicania라 불렀다 한다.(펠.VI.2.2., 시켈리아 섬의 옛 이름 시카니아는 호메로스가 '오뒷세이아'에서 언급한 적이 있고(24.306행), 헤로도토스 역시 '역사'에서 다이달로스를 찾아나선 미노스가 시카니아에서 비명횡사했다며 언급했다(VII.170) [본문으로]
- Hykkara, Hyccara,지금은 팔레르모의 한 행정구역인 카리니Carini.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선택한 단어 '팔아서apedosan,sold'는 그의 기록을 '아테나이가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 120탈란톤을 만들었다'로 번역하게(천병희,조웨트,덴트/pub.) 하지만, 이 글에서는 마르샹과 C.F.스미스의 주석과 홉스의 번역 예에 따라 '포로들의 몸값으로 120탈란톤을 받았다'로 보았다. 그러나 디오도로스는 '원정군이 시켈로이 사람들의 작은 마을 휙카라를 점령하고 약탈품으로 100탈란톤을 챙겼다(역.XIII.6.1,...captured Hyccara, a small town of the Siceli, from the booty of which they realized one hundred talents;...)'고 하는데, 실제 에게스타의 전비 부담 능력이 30탈란톤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휙카라라는 작은 도시 하나에서 몸값이든 약탈로든 100탈란톤 또는 그 이상의 돈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본문으로]
- Gela, BC7세기 로도스와 크레테 이주민들이 건설한 도시로, 지금의 시실리 섬 남안 최대 도시 젤라Gela이다. 아테나이의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는 은퇴 후 이곳에 와서 살다 죽었다. [본문으로]
- Olympieion, '올륌피아 제우스 신전Naos tou Olympiou Dios,Temple of Olympian Zeus' [본문으로]
- 아테나이 시민으로서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나이에 행한 마지막 해악이 시켈리아 원정이었다면, 이 작은 누설은 떠돌이 망명자 알키비아데스가 앞으로 아테나이에 행할 해악들 가운데 맨 처음의 것이다. [본문으로]
- 공동묘지neapolis 안의 아폴론 신사 성역the temple of Apollo Temenites. temenites=temenos=sacred precinct=성역 [본문으로]
- Epipolae, 쉬라쿠사이 서북 7km 거리에 있는 해발 120m의 가파른 언덕.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여름 동안 카타네에 칩거하며 쉬라쿠사이에 나태해진 아테나이 군에 대한 정보를 흘렸고, 쉬라쿠사이 군이 대거 출동하여 카타네 공격에 나서자 빈 쉬라쿠사이를 기습하고 아나포스 강의 다리들을 모두 끊은 다음 낙소스로 진지로 돌아갔고, 이 사이 쉬라쿠사이 군은 텅빈 카타네의 아테나이 군 진지를 태우고 카타네 일부를 약탈한 뒤 돌아갔다 한다.(니키아스전,16.4) [본문으로]
- 투.펠.VI.76-80 헤르모크라테스는 열두 해 전 겔라에서 열린 시켈리아 도시들 회의에서는 '양보와 단결'이란 두 가지 행동을 제시하면서, 먼저 쉬라쿠사이가 얻었던 것을 돌려주는 양보를 통해 시켈리아 도시들의 단결을 이루어 아테나이를 돌려보낼 수 있었는데, 이 해에는, 쉬라쿠사이 도시민에게도, 시켈리아의 도시들과 카마리아에게도, 두 번 모두 '단결' 하나민 주문하면서, 아테나이의 의도가 쉬라쿠사이의 정복을 통해 시켈리아 전체에 아테나이 제국을 세우려는 것이므로, 쉬라쿠사이도 내분을 멀리하고 단결해야 하며, 시켈리아의 도시들과 카마리아도 한데 뭉쳐 아테나이의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 페르시아는 절대적 우위의 힘을 바탕으로 물과 흙을 바치라고 압박해 스스로 무너지게 했던 반면, 아테나이는 상대적 우위의 힘을 바탕으로 설득하다 실패하면 내부 교란(정쟁)과 외부 단절(포위)로 무너지게 했다. [본문으로]
- 투.펠.VI.80.5 '...아테나이에 예속되는 수모와 금새 사그라지지는 않을 우리의 원한을 사는 일을 피할 것..."(천병희) '...both avoid the dishonor of having master and escape our enmity...to be lasting.'(홉스), '...escaping disgraceful submission to Athenian master and avoiding lasting enmity of syracuse.'(덴트/pub.), '...escaping the dishonor of submitting to the Athenian yoke, and the danger of our enmity...not to be short-lived.'(조웨트) [본문으로]
- 에우페모스Euphemos에 대한 자료는 없다. 다만 투퀴디데스가 구성한 그의 연설이 장사꾼이 장사를 이문 남기자고 하지만, 장사를 하다보면 때로 밑지고 판다고 말하는 것과 닮았기에 그를 아고라의 장사꾼에 견주어 본 것이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사절은 스파르테에게 전쟁을 결심하라 요구하는 코린토스와 메가라를 위시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도시들의 사절들 앞에서 아테나이가 제국을 이루고 유지하는 이유가 주로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고, 다음은 (스스로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능력이 있다는) 체면 때문이고, 그 다음은 (조공을 받아 생기는) 이익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펠.I.75.3)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무명의 에우페모스 입을 빌려, 아테나이가 제국에 속한 도시들을 운용하는 세 가지 방법을 설명하는데, 첫 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인근의 섬들로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여 쉽게 정복할 수 있음에도 자유롭게 버려두는 방법, 둘째는 키로스나 메튐나처럼 함선 운영 능력이 있는 도시는 함선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인정해주는 방법, 나머지 셋째는 눈치를 보아 돌아설 도시들에 대해 더 많은 조공을 바치도록 가혹하게 다루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대하다'라고 쓴 말에 대해, '조종한다'(천병희), '지휘한다command'(홉스), '운용한다manage'(조웨트), '다룬다treat'(덴트/pub.), 등으로 번역되었다. [본문으로]
- 당시 아테나이는 사형을 선고받은 자가 몰래 도망치는 것을 묵인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감옥의 소크라테스에게 친구 크리톤은 텟살리아로 갈 준비가 되었다며 도망을 권한다.(플라톤,'크리톤',45c)), 투퀴디데스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알키비아데스를 추방된 것으로 말한 것이다. [본문으로]
- 삼단노선은 보통 돛을 세워 순항하고, 삼단의 노는 입출항 때나 역풍 때를 제외하면 주로 해전에서의 민첩한 기동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아테나이 해군은 삼단노선 노꾼들의 우월한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해전 전력의 우위를 누릴 수 있었고, 정작 승선한 전투 병력은 중무장보병 25명, 궁수 5명 정도로, 함선 충돌 후 갑판에서의 백병전이나 상륙 후 지상전에 투입되었다. 이런 삼단노선에 노꾼이 중무장보병이라면 한 척에 200명의 중무장보병이 (상갑판 양현 연장판에 각 31명씩 62명, 상갑판 양현에 각 27명씩 54명, 하갑판 양현에 각 27명씩 54명, 최대 170명과 노를 젓지 않는 30명) 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지상전을 벌일 수 있게 되는데, 이는 70척 함대가 동원되어야 할 작전을 10척의 함선으로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해전을 피할 수 있다면 함선 동원 능력이 떨어지는 스파르테로서는 충분히 받아들일 제언인 것이다. [본문으로]
- Dekelea,Decelea,Dekeleia,Dekelia,Deceleia,Decelia,Tatoi, 아테나이 북쪽 아카르나이 구역 너머에 보이오티아와 국경을 이루며, 델리온, 타나그라, 오포로스, 칼키스 등으로 통하는 교통 요충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와의 플라타이아 전투 당시 아테나이의 수훈갑으로 데켈레이아 출신 소파네스의 전공을 소개하며, 동시에 데켈레이아와 스파르테와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테세우스가 스파르테 왕 튄다레오스의 딸 헬레네를 납치해 데켈레이아 구역의 아피드나이에 숨겨두자, 튄다레오스는 헬레네의 오빠 쌍둥이dioskuroi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와 함께 대군을 이끌고 앗티케로 와서 수색에 나섰고, 테세우스의 오만함이 아테나이를 위험에 빠트린다 생각한 데켈레이아 주민들이(창건자 데켈로스라고도 한다) 쌍둥이에게 이실직고하고 아피드나이로 이끌자 아피드나이 토박이 티타코스가 그 지역을 넘겨주어 헬레네를 찾게 한 공으로, 스파르테는 데켈레이아 주민들을 특별 대우하고, 아테나이와의 전쟁 통에도 이 지역만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왔다는 것이다.('역사',IX.73)) [본문으로]
- 이런 알키비아데스의 설득이나 주장을 투퀴디데스는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도합 열세 번 소개하면서, 열한 번은 이렇게 설득 또는 주장했다고 설명했고 나머지 두 번만 연설 내용을 그대로 옮겼는데, 시켈리아 원정을 반대하는 니키아스의 주장을 반박하며 시켈리아 원정의 당위를 설명하는 첫 번째 연설과는 달리, 스파르테의 시켈리아 지원의 당위를 설명하는 이 연설은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의 헬라스 내전 개입을 유도한 부분을 제외하면) 투퀴디데스의 알키비아데스 평전 또는 플루타르코스의 알키비아데스전 요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알키비아데스의 됨됨이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가 공들여 소개한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을 디오도로스는 다섯 낱말로 요약했다.(역사전서,XIII.7.2, '... 쉬라쿠사이는 ...스파르테에...사절을 보냈고..., "알키비아데스도 그들의 요청을 지지했으므로Since Alchibiades supported their request", 스파르테는 지원키로...'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때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군이 자체 기병 250명, 에게스타가 보낸 기병 300명, 시켈로이족과 낙소스가 보낸 100명, 등 모두 650명이라 했는데(펠.VI.98.1), 출정 당시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군의 기병은 300명이었으므로(펠.VI.31.2, 그러나 말 운반선은 망 대신 기병 30명만 태운 1척뿐이었음을(VI.43) 감안하면, 30명의 기병이 추가로 도착해 모두 330명의 기병이 있었음에도 현지에서 사거나 에게스타와 카타네가 보내주어 확보한 말의 수만큼인 250명 수준의 기병부대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VI.98.1). 그러나 디오도로스는 이 해 봄에 니키아스와 라마코스는 아테나이가 보낸 (말을 포함한) 기병 250명과 은 300탈라톤을 받았고, 아테나이군의 에피폴라이 점령 후 에게스타가 기병 300명, 시켈리 도시들이 기병 250명을 보내와 전체 800명의 기병을 보유했다고 한다.('역사전서',XIII.7.3,4) [본문으로]
- Epipolai/Epipolas,Epipolae 쉬라쿠사이 북쪽에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고원이다. 쉬라쿠사이는 이곳을 탈환한 뒤 간이 성벽을 쌓아 방어에 나섰고, 19km나 되는 본격적인 성벽은 BC409부터 시작된 카르케돈의 침공을 막기 위해 디오뉘시오스에 의해 축조되었는데(그는 성공적으로 카르케돈을 물리치고 BC406 참주가 되었다), 몇 차례의 재건을 거쳐 현재 남쪽 성벽들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아테나 함대가 밤에 도착해, 들키지 않고 에피폴라이를 점령했다 하고(역.XIII.7.3), 투퀴디데스는 함대가 레온에 지상군을 내려놓고 탑소스 반도로 가서 지협을 가로질러 목책pallisade,pallisado을 설치하고 정박했다 하는데(펠.VI.97.1,2), 둘을 종합해보면 아테나이 함대는 오후에 레온에 도착해 지상군을 내려놓고 탑소스로 가 해가 지기 전까지 목책을 두르는 등 정박 준비를 했고, 레온에 상륙한 지상군은 무구를 정비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밤에 에피폴라이로 진군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출정한 군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전사자 수는 투퀴디데스와 같이 300명으로 기록한다. 그런데 쌍방 전군을 동원하여 올륌피에이온 근처에서 벌인 첫 번째 회전의 쉬라쿠사이 전사자가 260명이었음을 감안하면(투.펠.VI.71.1), 투퀴디데스가 말한 쉬라쿠사이 중무장보병 600명이 벌인 에피폴라이에서의 두 번째 회전에서 300명의 전사자가 났다는 것은 전투의 치열했음과 에피폴라이라는 요충지를 쉬라쿠사이가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Syke,Syca [본문으로]
- 이 정교한elaborate 지하 용수로aqueduct는 지금도 파여진 채로 또는 묻힌 채로 보존되고 있다. [본문으로]
- 라마코스와 니키아스는 정예 중무장보병 300명과 빨리 뛸 수 있는 경무장보병들로 기동부태를 편성해 상대의 방어벽을 기습했고, 이어서 한 부대는 도시로, 다른 한 부대는 나머지 목책을 공격했는데, 이는 아테나이군의 쉬라쿠사이에 대한 세 번째 전군 공격이었다.(투.펠.VI.100)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di astheneias무기력,쇠약'이라 기록한 니키아스의 지병에 대해 천병희는 '마침 병이 나서', 홉스는 'infirmity', 조웨트는 'was ill', 덴트/p는 'illness'로 번역했는데, 그 다음 니키아스의 사직서에서 천병희, 조웨트, 덴트/p는 '콩밭의 병,a disease in kidneys', 홉스는 'the stone (in in the kidneys)(신장)결석'으로 번역했고, 주석가 C.F.스미스는 'nephritis,Bright's desease,신장염'이라고 주석했다.(투.펠.VII.15.1) 그런데 스미스가 말한 신장염이라면 장기적으로 계속 나빠지고 있을 것이어서 니키아스가 애초부터 장기 원정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므로, 니키아스가 신장이 좋지 않다며 사직서를 내고도 원정을 계속한 것을 보면 홉스처럼 병이 도졌다가 나았다가 하는 신장결석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본문으로]
- 전군을 라마코스에게 준 걸 보면, 이 날의 전투는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이며, 니키아스가 칭병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요새 수비대의 역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다만 '부대원이 부족해서(천병희), want of men(홉스,덴트/p, without troops(조웨트)'라고 기록한(펠.VI.102.2) 것을 보면 라마코스는 별도의 요새 수비대도 남기지 않고 전군을 출동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본디 3명의 장군이 나누어 지휘하던 전군을 동원한 전투에 니키아스의 병환을 보고도 라마코스가 혼자 나선 것은 자부심과 그 앞의 전투에서 보인 쉬라쿠사이 군의 지리멸렬함에서 얻은 자신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 라마코스는 이 전투에서의 죽음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숱한 조롱에서 벗어나 단 한 번 아테네의 장군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출생 연도도 미상인 라마코스에 대한 여러 자료들(투퀴디데스, 아리스토파네스, 플루타르코스, 디오도로스)로 구성한 간단한 평전은 아래와 같다. ' [본문으로]
- 원문은 10플레트론plethron(1plethron=29.6meter). [본문으로]
- 아테나이군의 장군 라마코스가 전사한 이 네 번째의 전면전에 대한 디오도로스의 '역사전서' 기록은 이 글이 참고하는 투퀴디데스의 것과 완전히 달라 그 내용을 인용한다. '.... [본문으로]
- 천병희는 이들이 '...되도록 신속히 도와주려고 벌써 레우카스 섬 부근에 가 있었다...' 하고, 홉스와 조웨트는 이들이 '레우카스 섬에 가 있었다(...were already at Leucas, purposing with all speed to go over..., were already at Leucas hastening to ...)' 하고, 덴트/p는 이들이 '레우카스 섬에서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were now off Leucas, intend upon going with all haste...),고 하는데(투.펠.VI.104.1), 아마 차출된 함선들이 아직 다 모이지 않았엇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귈립포스의 아버지 클레안드리다스Kleandridas,Cleandridas는 감독관ephoros,ephors으로서 어린 스파르테 왕 플레이토아낙스의 고문이 되어 전권을 행사했는데, 페리클레스의 뇌물을 받고 앗티케를 침공했다 그냥 돌아온 혐의로 어린 왕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추방했을 때(BC445c) 클레안드리다스는 사형 선고를 받고 투리오이로 망명하여 그곳 시민권자가 되었는데, 추후 플레이토아낙스는 귀국하여 다시 왕으로 복위했지만 클레안드리다스는 스파르테로 돌아오지 못했다.(플루타르코스,'펠리클레스전',22.2,3) [본문으로]
- 귈립포스가 투리오이를 직접 방문했는지, 방문했디면 배로 갔는지(홉스,덴트/P) 배는 타라스에 두고 갔다가 돌아왔는지(조웨트), 아니면 귈립포스가 타라스에 있으면서 대리인을 보냈는지(천병희, 주석가 마르샹과 스미스)에 대해 번역과 주석이 분분하지만, 이 글에서는 귈립포스가 4척의 함선으로 사절로서 직접 투리오이를 갔다고 보는데, 귈립포스의 움직임이 투지에 넘치고 적극적이라는 것과 투리오이가 귈립포스의 달랑 함선4척을 보고 경멸하였다contemed는 기록(투.펠.VI.104.3) 때문이다. 참고로 각 경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귈립포스는 타라스에서 먼저 투리오이 시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그곳 시민권을 갱신했지만, 투리오이의 지지를 얻어 내는 데 실패하자 다시 바다로 나가.....'(천병희) '...Gylippus went first from Tartentum to Thurii, as an ambassador, by his father's right, who was the free of the city of Tarentum; but not winning them to his side, he put out again, and sailed along the coast of Italy.'(홉스)(스미스의 주석, sending ambassadors hardly "goding as ambassador," assume explain. If Gylippus had gone as ambassador to Thurii, there could hardly have been, after speaking of embassy, a mere mention of the departure from Tarentum.) 'Gylippus on his arrival at Tarentum went on a mission to Thurii, of which his father had formerly been a citizen; he had hoped to gain over the Thurians, but failed; he then continued his voyage fron Tarentum along the coast of Italy.'(조웨트)(마르샹의 주석, not 'went on a mission' but 'sent an embassy') 'From the Tarentum Gylippus went on an Embassy to Thurii, and claimed anew the rights of citizenship which his father had enjoyed; failing to bring over the townspeople, he weighed anchor and coasted along Italy.'(덴트/p)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니키아스가 4척의 배로 타라스에 도착한 귈립포스에 대한 보고를 받고 그래서야 어디 해적질밖에 더 하겠냐며 감시도 붙이지 않았는데(펠.VI.104.3), 그가 로크리스에 왔다는 보고를 받고는 마음을 바꾸어 4척의 함선을 붙여 카륍디스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게 막으라 했다 한다.(펠.VII.1.2) [본문으로]
-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이 먹힌 것으로 보인다.(이 글 11.155.아래) 무구들은 히메라 사람들이 마련했다.(투.펠.VII.1.3,'...Himeraeans... also furnished with armour...as wanted.'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기록한 귈립포스의 군대는 보병 2,700명과 기병 100명인데(펠.VII.1.5), 디오도로스는 보병 3,000명과 기병 300명이라 말한다.(역.XIII.7.7)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그를 도착 장면에서만 소개하고 끝인데(펠.VII.2.1),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에피폴라이에서 귈립포스와 만나 가진 아테나이군과의 첫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니키아스전,19.5) [본문으로]
- 먼저 아테나이 군이 이 길로 에피폴라이에 올랐었다. [본문으로]
- 플렘뮈리온 곶의 약점은 물과 땔감 공급이 원활치 못한 것이었는데, 이 때문에 인근에 나가 약탈하다 쉬라쿠사이 기병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서 선원들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한다.(펠.VII.4.5,13.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처음부터 쉬라쿠사이를 지원하는 펠로폰네소스의 함선 수를 스파르테 2척, 코린토스 10척, 레우카스 2척, 암프라키아 3척, 모두 17척이라 꼽지 않고, 귈립포스의 스파르테 함선 2척과 퓌텐의 코린토스 함선 2척이 먼저 출발하고, 이어서 코린토스 함선 10척과 레우카스 함선 2척 그리고 암프라키아 함선 3척 등 15척이 뒤따라 가서, 마치 코린토스 함대가 모두 19척인 듯이 설명했기 때문에(펠.VI.104.1), 마지막 도착한 함선 수가 12척뿐인 것에(펠.VII.7.1) 대해 의아해 할 수 있는데, 애초부터 코린토스는 10척을 지원키로 했고, 그 10척 가운데 퓌텐이 2척을 가지고 귈립포스와 함께 제일 먼저 출발했고, 다음으로 에라시니데스가 7척의 코린토스 함선과 2척의 레우카스 함선, 3척의 암프라키아 함선과 함께 12척으로 출발했고, 맨 마지막에 공귈로스가 코린토스 함선 1척으로 레우카스를 떠나 쉬라쿠사이에는 에라시니데스의 본대보다 먼저 도착했던 것이어서, 쉬라쿠사이 지원 코린토스(펠로폰네소스 연합) 함대는 모두 17척인 것이다. [본문으로]
- 굳이 전함이 아니라 화물선이나 상선 편으로라도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키로 했다.(투.펠.VII.7.3) [본문으로]
- 투.펠.VII.11-15i)스파르테 귈립포스의 쉬라쿠사이 봉쇄 방벽 차단을 막지 못해 적에게 포위당하는 형세가 되었다. ii)적은 펠로폰네소스 증원군 파병을 요청면서, 시켈리아 도시들로부터도 지상군과 해군을 차출해 군세를 증강시킨 다음, 지상전과 해전을 동시에 수행하려 준비하고 있다. iii)반면 아군의 이탈자는 증가하고 있어 이대로라면 가만히 앉아서 항복할 형편이다. iv)당장 철군하거나, 첫 원정군 규모의 증원군과 충분한 군자금을 새봄까지 보내달라 [본문으로]
- the clerk of the city, the registrar of the city [본문으로]
- 니키아스는 전령의 보고가 언변이 모자거나 기억이 나지 않어서거나 듣는 사람을 위해 사실이 왜곡하거나 해서 사실과 달리 보고되는 것을 우려해 전령을 보낼 때마다 자신의 편지를 함께 보냈다.(펠.VII.8.2) 그리고 아테나이는 전령으로부터 먼저 전달 내용을 구두로 보고받고, 빠트렸거나 모자라거나 미심쩍은 부분을 물어 내용을 확인한 다음, 편지를 받아 읽었다.(펠.VII.10) [본문으로]
- 쉬라쿠사이는 아테나이를 상대로 두 번 협상을 시도했는데, 처음은 라마코스가 전사한 네 번째 전면전 뒤, 아테나이 원정군의 유일한 장군이 된 니키아스를 상대로 (헤르모크라테스를 위시한 쉬라쿠사이의 두 장군들이 주도하여) '항복을 조건으로(천병희와 덴트/p는 각각 '항복', 'capitulation'이란 단어를 썼지만, 홉스는 그저 'confered', 조웨트는 'talking peace'라며 논의 내용을 항복과 거리를 두었다)' 논의하기 시작한 것으로, (종속을 의미하는 항복 조건 때문에) 쉬라쿠사이 내부가 격렬한 논쟁과 음모론에 휩싸여, 결국 장군 셋을 갈아치며 협상을 접었던 것이고(펠.VI.103.3), 다음은 쉬라쿠사이의 새로운 전쟁 지휘부인 신임 장군 셋, 헤라클레이데스, 에우클레스, 텔리아스가 주도하여 '종전에 대해(천병희는 '전쟁의 종결에 관해', 덴트/p는 'an end to the war', 홉스는 'an end of thewar', 조웨트는 'the question of peace'라 했는데, 앞의 '항복'에서는 다른 견해를 보인 번역가 넷이 '종전'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논의하기 위해 민회를 소집하려던 중 공귈로스의 도착과 지원군 소식으로 논의를 접은 것이다(펠.VII.2.1). [본문으로]
-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바다를 장악하고 전세가 역전될 무렵부터 테미스토클레스는 돈을 밝히기 시작하여, 페르시아에 부역한 섬들에게서 돈을 많이 뜯었는데, 그에게 돈을 요구받은 안드로스 섬이 주기를 거부하자 테미스토클레스가 자신은 설득peitho의 신(순순히 말을 듣는 것)과 필연ananke(말을 듣지 않아 필연적으로 강제당하는 것)의 신을 모시고 온 만큼 들어주는 게 좋을 것이라 협박했고, 이에 안드로스 섬이 그들에게는 가난penia의 신과 무능amechania의 신뿐이어서 돈을 줄 수가 없다고 해, 테미스토클레스가 필연의 신을 동원해 섬을 결딴내버렸다.(헤.역.VIII.111, 이 글, '도시의 자유 1',11.62,63) [본문으로]
- 카마리나에 사절을 한번 보내보았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의 경우 동등인 전사 1명에 페리오이코이 3명, 헤일로타이 3명이 종군했는데, 여타 헬라스 도시들의 중무장보병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개인 노예를 데리고 참전했다. [본문으로]
- 거액의 군자금(천병희), money not a little(Hobbes), plenty of money(Jowett), a large sum of money(Dent/p) [본문으로]
- 쉬라쿠사이 원정군을 지휘하는 장군들 셋은 원정에 관한 전권을 받았었는데, 이 당시 전권은 당연히 니키아스 혼자 충분히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철군이 최선이라고 판단되면 철수하면 될 일이었다. [본문으로]
- 정치가 니카이스에 대해, 그와 동시대 사람 아리스토파네스의 평가는(셋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정치가 니키아스, 다른 둘은 장군 니키아스에 대한 평가이다) 거칠고 상스러운 행동에 반격하기 보다는 피하는 사람으로('"기사"',356-8,' 클레온의 극중 대치 인물인 '파플라고니아 사람'에게 주눅든 극중 니키아스 장군이 데모스테네스 장군과 함께 대항마로 내세운 아고라의 '순대장수' 아고라크리토스Agorakritos가 파플라고니아 사람을 공격하며; 순대장수: 나로 말하자면 소 내장과 돼지 내장을 꿀꺽 삼키고/고깃국을 마시고 손도 씻기 전에 경찰관들의/목을 조르고 니키아스를 겁줄 수 있는 사람이요.'; 즉 니키아스는 거칠고 상스런 행동으로 나오는 클레온에 주눅든 겁쟁이란 조롱이다.), 후대의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소심하고 소극적인 정치적 태도 때문에 그의 정치적 후원자들인 부자나 귀족들보다 그의 이런 태도를 그가 민중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믿는 민중들에게서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니키아스전,2.2,3,4) [본문으로]
- 장군으로서의 니키아스에 대해, 동시대 사람 아리스토파네스의 평가는, '수가 많아 꿍꿍이셈 하느라('"새들"',362-3행,' 새들로 분한 코로스들이 페이세타이로스와 에우엘피데스가 그들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일제히 그 둘을 공격하려 할 때, 페이세타이로스는 겁 먹고 도망치려는 에우엘피데스에게 온갖 도구, 이를테면 항아리, 꼬챙이,식초병, 접시 등으로 새들의 공격을 막는 방법들을 대뜸대뜸 내놓으며 도망치지 말고 싸우자 하자, 에우엘피데스는 니키아스를 빗대며 페이세타이로스를 칭찬하는데; 에우엘 피데스: 자네는 천재일세./기발한 발상이자 뛰어난 작전일세./전투용 기계에서는 니키아스도 자네를 못당할 걸.'(천병희), 'Euelpides: Oh! what cleverness! what inventive genius!/You are a great general, even greater than Nicias, where strategem is concerned.'(trans. W.J.Hickie); 아리스토파네스가 '"새"'를 쓰고 있을 때 아테나이는 시켈리아 원정을 결의했고, 원정군이 출항할 무렵에는 이듬해 봄 경연에 나간다는 것을 알고 연출 준비에 들어갔을 것인데, 출항 때 본 어마어마한 축성과 공성 장비들에 대해 느꼈을 아리스토파네스의 놀라움을 생각하고, 페이세타이로스가 새들의 공격을 막는 데 쓸 도구들과 니키아스가 싣고 가는 여러 장비들을 연관지어 생각하면, ''전투용 기계'에서는 니키아스도 자네를 못당할 걸'이라는 번역도 가능하겠으나, 기왕에 그 앞 행에서 '기발한 발상에 뛰어난 작전'이라 했으니 힉스의 번역처럼 ''수stragem'로 보면 니키아스보다 훨씬 나아'라 할 수도 있어 보인다.) 미적거리기만 하다 일을 그르치는('"새들"',639-640행, 새들과 화해한 페이세타이로스와 에우엘피데스에게 초대받은 새들의 토굴로 빨리 들어갈 것을 종용하며 후투티가 된 테레우스가 니키아스를 빗대 한 말씀하는데; '후투티: 정말이지 이제는 더 이상 꾸벅꾸벅 졸거나/니키아스처럼 꾸물댈 때가 아니오.'(천병희), 'Epops: By Zeus! 'tis no longer the time to delay/and loiter like Nicias....'(Hickie); 재판이나 벌이는 아테나이 생활이 싫어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서, 새로운 세상이 어딘지 알려줄 후투티가된 테레우스를 찾았는데, 막상 후투티가 새들의 세상으로 들어가라 하니 뭔가 꺼림칙해 선뜻 들어서지 못하는 둘의 망설임을 아리스토파네스는 관객들에게 아테나이 사람이면 모두 다 아는니키아스의 그것으로 간단히 설명해버린다. 니키아스의 망설임 굴레는 퓔로스 전투를 오래 끌다 클레온이 나서 스팍테리아에서 스파르테 동등인들을 포로로 잡아오는 눈부신 일격과 너무나 선명히 비교되어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설사 이것 때문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시켈리아 원정에서의 니키아스의 망설임이 아리스토파네스가 '"새들"'에서 조롱하는 대상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그 연극이 상연되고 아홉 달이 지나 니키아스를 편지를 받은 아테나이 사람 누구도 그의 망설임을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퇴임하려는 그를 주저앉히면서 증원군을 보내기 때문이다.) 장군'이고, 후대의 플루타르코스는 니키아스에 대한 세간(병사들)의 평을 이렇게 요약했다. '...심하게 재고, 망설이고, 조심하는 동안 꼭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 한없이 흘렀다. 그가 한번 움직이면 아무도 그에게서 결점을 찾을 수 없었는데, 일을 시작한 뒤로는 그가 적극적이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무릅쓰고 해 나가야 할 일 앞에 그는 머뭇거리며 소심했다....by his excessive calculation and hesitation and caution he let the proper time for action go by for ever. When he was once in action no one could find fault with the man, for after he set out to do a thing he was vigorous and effective; but in venturing out to do it he was hesitating and timid.(Plutarch,'Nicias',16.8,trans. Bernadotte Perrin) [본문으로]
- 테레우스Tereus는 트라케의 왕으로 아테나이 왕 판디온(Pandion I,BC15세기말)의 딸 프로크네Procne와 결혼해 아들 이튀스Itys를 두었는데, 동생 필로멜라Philomela가 보고 싶어 테레우스더러 가서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고, 판디온이 믿고 보낸 필로멜라를 도중에서 강간한 뒤 이르지 못하게 혀를 짤라버렸지만, 필로멜라는 그간의 일을 벽걸이tapistry로 짜 프로크네에게 보냈고, 사정을 안 프로크네는 이튀스를 죽여 테레우스가 먹게하는 복수를 했고, 이에 신은 테레우스를 후투티로, 프로크네와 필로멜라를 꾀꼬리(프로크네는 꾀꼬리 필로멜라는 제비)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포클레스가 비극 '"테레우스"'를 만들었는데, 단편만 전하고 희곡은 산일되고 없고, 유사한 이야기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야"'(3부작으로 추정되나 2부작만 현존)이 있어, 상호 영향에 대한 추측이 분분하다. [본문으로]
- Nikias는 '승리의 여신 Nike'에서 따온 남자 이름이다. Nick, Nicholas 등이 같은 이름이다. [본문으로]
- 그의 생년을 cBC470으로 보면, 투퀴디데스가 도편추방당했던 BC443에는 그의 나이 스무여덟으로 아직 장군직을 맡을 수 없었고, 페리클레스 생시에 이미 동료 장군으로서 함께 출정하거나 자주 독자적인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플.'니키아스전',2.2) 페리클레스가 죽은 BC429, 그의 나이 마흔둘 훨씬 이전에, 늦어도 케르퀴라와 코린토스 사이의 분쟁에 아테나이가 개입하던 BC433, 그의 나이 서른여덟에는 장군이 되어 있었을것인데, 플루타르코스가 그의 능력이 페리클레스에는 말할 것도 없고 클레온보다 떨어졌다면서, '지위를 단지 돈으로 샀다,owed his position to his wealth'('니키아스전'3.1)고 하는 점을 감안하면 장군이 될 수 있는 서른을 넘기고 얼마 되지 않은 서른한둘에 이미 장군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글에서는 BC433, 그의 나이 서른여덟에 장군이 되었다 보고 편지를 보낸 BC414, 그의 나이 쉰일곱까지 무려 스무 해 동안이나 -페리클레스는 열여덟 해 동안 장군직을 지켰었다- 장군직 지키고 있었을 만큼 본디 있던 재물에 권력에 대한 탐욕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특히 투퀴디데스가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군 지휘관 니키아스의 행적을 유난히 자세히 다루는 예사롭지 않은 시선이 니키아스의 실패를 탐욕과 오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그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전체 8권의 기록 가운데 첫 두 권에 전쟁에 이르게 된 경위를 할애했고(물론 제2권 끝에 작은 분량의 개전 초기 2년의 기록도 있다), 다음 여섯 권에 28년의 전쟁 중 21년 동안의 전쟁 과정을 기록하면서, 그 가운데 두 권인 제6권과 제7권에 3년에 걸친 시켈리아 원정 기록을 할애했는데, 이는 1/7기간의 기록을 1/3권수,페이지수에 할애한 만큼 내용이 자세하고 선명하며, 기록 대상을 거명하는 회수도 페리클레스의 경우 클레온의 경우32회보다 적은 27회인 반면 니키아스는 96회나(제3,4권19회,제5권9회,제6권23회,제7권45회) 되어 주된 기록의 대상, 다시 말해 그가 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역사의 주역이 바로 니키아스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키아스를 보는 투퀴디데스의 초기 시선은 혼란스러운 데가 있다. 니키아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전쟁 다섯 번째 해 여름(BC427, 그의 나이 마흔넷이 된 해), 메가라의 미노아 섬을 공략하여 그곳에 니사이아 항 출입을 감시하는 기지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주둔시키는 임무를 맡아 공성 장비와 축성장비를 이용해 훌륭하게 완수하는 장면에서이고(펠.III.51), 이때 이미 그는 여덟 번째로 장군에 뽑혀 있었을 텐데도 지휘관(장군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 임무를 독자적으로 맡는다면 장군이었을 것이다.)으로 대수롭지 않게 소개하더니, 그 뒤 니키아스가 멜로스 섬을 결딴낼 때는 그의 이름을 슬쩍 지워서 그 살륙의 책임자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해 니키아스를 감싸주는 듯 보이더니, 니키아스가 주도해 이룬 평화조약 체결의 장면에서는 구체적인 협상 과정을 뭉텅 잘라내어 한 해가 더 걸린 협상 과정에서의 니키아스 역활이 가려져버렸고, 그래서 과연 그것을 니키아스의 평화라고 해도 좋을지 알 수 없도록 해놓더니, 시켈리아 원정 장면이 되어서야 마치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알리기 위해 일리아스를 노래했듯이, 니키아스의 탐욕과 오만을 말해주기 위해 따로 한 편의 '시켈리아 원정기'를 쓰는 양 나락으로 빠져드는 니키아스를 보여준다. [본문으로]
-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의 전통을 따른after of those early times 정치가들 중 최고the best로 니키아스, 투퀴디데스, 그리고 테라메네스를 꼽으면서(투퀴디데스가 니키아스보다 한 세대 앞임을 말면서도 니키아스를 먼저 꼽았다), 니키아스와 투퀴디데스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둘은 훌륭한 사람이었으며honorable gentlemen, 정치력 있고 애국적인 공직자statesmanlike and patriotic servants였음을 인정한다고 덧붙였다.('아테네정치제도사',28.5) [본문으로]
- 자세한 전개와 결말은 '도시의 자유(!), 11.28-33) 참조. [본문으로]
- 페르시아에 복속되어 있던 이오니아의 헬라스 도시들의 반란 배경과 전개 결말에 대해서는 '도시의 자유(1),35-46' 참조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새들"'의 두 주인공 페이세타이로스와 에우엘피데스는 재판에 매달린 아테나이 사람들이 보기 싫어 아테나이를 떠난다.(38-42행,'에우엘피데스: (관객들에게)..../그 도시는 역시 위대하고 번창하고, 송사로/재산을 날리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으니까요./매미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노래하는 것은/고작 한두 달인데, 아테나이인들은/ 평생 동안 법정에서 노래를 해대니 말이요./...'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앗티케 사람들이 그 재산에 연연하여 굴종하는 일이 생길까 염려되어, 앗티케 사람들 스스로 그 재산들을 파괴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했다.(투.펠.I.143.5) [본문으로]
- 투.펠.VII.18.2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은 140탈란톤이라 한다.(역,XIII.8.7) [본문으로]
- 주로 돌 깨는 정과 망치 그리고 지렛대로, 못 쓰게 된 것들도 모아 다시 만들었을 것이다. 주석가 마르샹과 스미스 모두 'sideros'를 쇠가 아니라 (축성이나 공성에 쓰는necessary in wall-building and in sieges) 쇠연장(정chisel, 망치hammer, 쇠메about-sledge, 등 iron tools철제공도구)으로 보고 있지만, 번역가들은 모두 무쇠 또는 iron으로 번역했다.(투.펠.VII.18.4)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펠로폰네소스 군이 데켈레이아 피난진지(올드파더 교수는 stronghold로 번역했는데, 작은 마을의 citadel로 보았다)를 점령해 요새로 보강하고 앗티케 공격의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때부터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데켈레이아 전쟁Deceleian War'라 불렸다 했다.(역사전서,XIII.92.'...And seizing the stronghold of Deceleia they made it into a fortress for attacks upon Attica, and this, as it turned out, was why this war came to be called the Deceleian War.'...)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들을 '가려 뽑았다,out of the best,selected the best, a picked force'고 했는데, 이 당시 스파르테는 '네오다모데이스seodamodeis,freedmen,men made newly free,해방노예,헤일로타이로 참전한 공로로 해방된 헤일로타이'와 헤일로타이heilotai,helot(e)s,국가노예,국가소작민'의 참전이 일상화되었으며, 실제 많은 헤일로타이들이 참전 경력으로 네오다모데이스가 되어 제도로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펠.VII.19.3) [본문으로]
- 귈립포스는 해전에 주력하려는 니키아스의 작전을 내다보고, 육해 양동작전으로 대응해 아테나이 해군의 기지를 공격하면, 결국 정박을 위해 지상에 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이때 결정적 전투를 벌일 생각이었던 듯하다. [본문으로]
- 시켈리아 증원군 때문에 아테나이는 당장에 투입할 중무장보병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데모스테네스가 세운 멧세니아의 퓔로스 요새는 인근 지역의 스파르테 사람들을 대상으로 작전을 펼칠 아테나이군의 주둔지였고, 무엇보다 탈출한 멧세니아의 헤일로타이들의 은신처였다.(투.펠.VII.26.2) [본문으로]
- 그러나 이 요새는 헤일로타이가 많은 멧세니아와 너무 멀었고, 주위도 한적한 곳이어서 작전을 펼치기 마땅치 않아 퓔로스와 같은 역활을 못하자 한 해 뒤 버려졌다. [본문으로]
- 뭍에 올려진 삼단노선 3척과 6,000개에 달하는 삼단노선 40척 분의 노를 위시하여, 군량, 선장들 물품, 종군 상인들의 상품 등이었다.(투펠.VII.24.2)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피해는 함선 3척 뿐이었다.(투.펠.VII.23.4)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해군을 이끌었던 아테나이의 장군답게 쉬라쿠사이 해군의 (코린토스가 아테나이와의 나우팍토스 해전에 대비해 적용했던) 함선의 전투 구조 개량과 갇힌 바다에서 밀집한 해전에서의 전술 개발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펠.VII.36), 충각으로 배 옆구리를 들이받는 아테나이의 전술에 대비해 이물끼리 들이받기로 작정하고, (용골 충각이 서로 받힐 때) 다치지 않도록 이물을 짤라 안으로 들이고 이물 갑판에서 양쪽 뱃전 밖으로 나온 닻걸이도 이물 갑판 밑에서 양쪽 뱃전을 뚫고 나오게 하면서 길이도 늘였고, 이런 개조로 (키잡이의 조정 미숙 탓으로 생각되어 기피되었던) 이물끼리 충돌하면 플렘뮈리온 기지를 잃고 큰 항구 한켠의 해안에 정박하다 나올 아테나이 함선들을 해안 쪽으로 밀어낼 수 있어 접전을 유리하게 끌고갈 수 있다는 전술이다. 디오도로스도 이 부분에 대해 유사한 기술을 했는데, 코린토스의 키잡이pilot 아리스톤의 조언대로, 쉬라쿠사이 해군은 함선의 이물을 더 짧고 낮게 개조하여, (이물로 충돌하여 수면 위의 선체만 부수는 아테나이 함선들과는 달리) 충돌시 용골의 충각만으로 함선의 수면 아래를 부수고 일격에 침몰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한다.(역.XIII.10.2,3) [본문으로]
- 이 짧은 기간은 전쟁 열아홉 번째 해의 이른 봄과 새봄 사이일 것인데, 이 기간 동안 일어난 일을 기록한 투퀴디데스의 시간 언급은 너무 넓어 선후는 분명하지만 그 폭은 짐작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투퀴디데스 자신이 이 무렵의 기사에서 '이듬해 봄'(19.1), '이른 봄'(20.1), 이 해 봄"(21.1), '같은 해 여름'(27.1;홉스가 'the same winter'라 한 건 오류로 보인다), '그(앞의 같은 해 여름) 무렵'(31.1), '이 무렵'(32.1),(33.1),(34.1), 등으로 혼란 스럽게 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곡식과 육류를 에우보이아 섬에서 오로포스로 바다를 건너고, 데칼레이아를 통하는 육로로 공급받았는데, 데칼레이아 이후 에우보이아에서 수리온 곶을 도는 해상 운송에 의존하면서 운반비가 증가되었다.(투.펠.VII.28.1) [본문으로]
- 이 무렵 아테나이는 누적된 전비 지출과 데켈레이아의 일로 입는 손해를 만회할 요량으로 동맹들로부터 받던 분담금 대신 아테나이와 동맹국의 모든 해상 수출입 물품들에 대해 1/20(5%)의 세금(관세,duty,tribute)을 부과했다.(투.펠.VII.28.4) [본문으로]
- 이집트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들에서 BC5-4세기 그리스 역사를 기록한 단편들을 따로 모아 '헬레니카 옥시린키아Hellenica Oxyrhinchia'라 부르는데(저자를 에포로스Ephoros나 테오폼포스Theopompos로 보기도 하나 근래에는 크라팁포스Cratippos로 보는 쪽이다), 그 가운데 테바이가 보이오티아에서 다른 도시들보다 두 배 넘게 강성하게 된 연유들 꼽으며 이런 광경을 보여준다. 'But it nevertheless came to prosper in a much higher degree when the Thebans in conjunction with the lacedaemonians fortified Decelea against the Athenians; for they took over the prisoners and all the other spoils of the war at a small price, and, as they inhabited the neibouring country, carried off to their homes all the furnishing materials in Attica, beginning with wood and tiles of houses. The country of the Athenians at that time had been the most lavishly furnished in Greece, for it had suffered but slight injury from the Lacedaemonians in the former invasions, and had been adorned and elaborated with so much extravagance that ... Such was the condition of Thebes and Boeotia.'(P.Oxy.XII.33,'The Oxyrhynchus Papyri, Part 5',Grenfell and Hunt,pp605)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전 기사에서 이른 봄, 새붐, 봄, 등으로 언급하다가, 이때 처음 여름이라고 언급하는데, 증원군의 출발이나 트라케 용병의 도착이나 모두 밀의 수확이 끝난 유월 중순 전후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 시민인 중무장보병은 (그들이 데리고 가는 노예에 대한 비용을 포함하여) 하루 3드라크메를 받았는데, 보통(트라케도 포함해서) 용병들은 노삯과 맞먹는, 수련공의 하루 품삯 3오볼로스의 두 배인 하루 1드라크메를 받았다. [본문으로]
- Mykalessos,Mycalessus 지금은 에우보이아 구의 바튀 시 리트소나 근처로 알려져 있다. 뮈칼렛소스는 투퀴디데스가 참상을 기록한 이외에도, 제일 먼저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의 '함선목록'에서 보이오티아가 함선 50척과 1척에 보병 120명을 태워 모두 6,000명의 병력이 참전했다고 제일 먼저 소개하면서(2권494행), 아울러 이들의 출신지인 보이오티아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뮈칼렛소스를 거명했고(2권498행), 파우사니아스도 '그리스 서술'에서 두 번, 학살당한 사실과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마을을 일으켜 기록 당시에더 살고 있다고 기록했고(1.23.3), 보이오이아의 글리사스를 설명하며 글리사스에서 칼키스로 가는 길 근처에 있는 뮈칼레소스를 언급했다(1.19.3,4). [본문으로]
- '가장 피에 굶주린', 'extreme bloody', 'the bloodiest', 'as bloody as the worst' [본문으로]
- 보통 용병은 고용하는 도시에서 각지에서 모여든 지원저 가운데 뽑지만, 특수한 자질의 용병이 필요할 경우 그런 자원이 많은 지역으로 가서 뽑는데, 이 경우 임금은 집합해서 출발하는 날부터 다시 출발지에 도착하여 해산하는 날까지 지급되어, 귀환 중의 트라케 용병들도 고용된 상태였다. [본문으로]
-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는 비극작가였으나 장군으로 참전했고, 희극작가 에우폴리스는 희극작가여서 징집을 면할 수 있었는데도 중무장보병으로 참전하여 세스토스 해전에서 전사했는데, 에우리피데스와 아리스토파네스는 극작가, 연출가로 징집 면제를 받아 참전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 뒤늦게 출동해 추격에 나선 테바이군에게 쫓긴 트라케 용병들은 약탈에 열중하던 다수가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는 도망치느라 얼마 가지 못해 약탈품들을 버려야 했고, 겨우 배가 기다리는 에우리포스 해협에 도착했을 때는, 화살을 피해 해안에서 떨어져 있던 배로 가다가 수영을 못해 다수가 물에 빠져 죽기도 했지만, 이내 질서를 회복해 추격해온 기병들에 밀집대형으로 대치하며 적은 희생으로 배에 올라, 1,300명 가운데 250명이 죽고 나머지가 귀환했다.(투.펠.VII.1,2) [본문으로]
- 배에 타고 있던 지원군들은 모두 도망쳐서 다른 배를 타고 시켈리아로 갔다.(투.펠.VII.35.1) [본문으로]
- 이 장면에서 처음 소개되는 코논konon,conon은 이후 계속 역사에 거명되는데, 아테나이의 패전 과정에서, 패전 후 페르시아 해군 용병 생활을 통한 아테나이 해군 재건 과정에서, 그리고 코린토스 전쟁 참전 과정 등에서이다.(생몰연대 미상이나, 이 장면에서, BC414에 나우팍토스 장군으로 소개되므로 이때 서른 살로 보아도 BC444 이전 출생이고, BC394 이후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보아 그 뒤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주석가 스미스는 아테나이 최고 번성 시절의 노예 숫자가 365,000명 정도였으므로 도망 노예 수가 믿을 수 없진 않지만not seem uncredible, 당시 노예의 수요가 주로 집안 일household service이었으므로 대부분이 기술자였을 수 없다고hardly have been handicraftmen 말한다. 그러나 집안 일 수요는 주로 여자에게 힘과 기술 수요는 주로 남자에게 있었다고 가정하면, 도망자의 대부분이 힘과 기술을 쓰는, 그래서 어느 정도 감시가 심해도 탈출을 시도 할 수 있던 남자였을 것이라, 특히 기술자와 숙련공들을 많이 가졌을 라우레이온 광산을 집어말하는 투퀴디데스의 기록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가 오랜 전쟁과 아기스의 데칼레이아 주둔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새로 쉬라쿠사이와 헬라스에서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벌이며 버티는 힘과 용기에 놀라지만(VII.28.3), 그보다 전쟁의 양상이 개전 초 스파르테의 왕 아르키다모스와 아테나이의 제일 시민 페리클레스가 예측하고 세운 전략과 우려대로 흘러와, 스파르테의 아기스가 앗티케의 데칼레이아에 요새를 세워 주둔하고, 아테나이는 앗티케를 버리고 요새섬처럼 되었는데다, 제국을 확장하려 시켈리아로 가서 새로운 전쟁을 벌이는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이 글이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헬라스가 얼마나 끈질기게 서로를 물고늘어지며 스스로를 피폐시켜 결국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해쳐왔는지 살펴볼 것이지만,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아르키다모스와 페리클레스의 예측, 전략, 그리고 우려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해본다. 스파르테 왕 아르키다모스는 헬라스 내전이 임박했을 때 그가 지혜롭고 현명하다 소문 난 대로(투.펠.I.79.2) 전쟁을 시작하면 대전으로 번질 것이고(I.80.2), 전쟁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게 될으로 내다보고(I.81.6) 전쟁을 피하려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헬라스의 여론이 헬라스 해방자로 자임하고 나선 스파르테를 지지하고 있는데도(II.8.4) 전쟁이 결의되어 출진하고서까지 마지막 사절을 보내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을 보였는데 반해(II.12.1-4), 막상 아테나이 제일 시민 페리클레스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I.144.3), 오히려 아르키다모스가 자기와의 개인적인 우의의 표시로든, 아니면 그 때문에 자기를 내통자로 의심받도록 할 반간계로든, 혹시 앗티케 공격에 소극적으로 나오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II.13.1), 헬라스 일부의 여론이 앗티케가 공격받으면 아테나이가 1년, 잘 하면 2년, 그래도 3년은 절대 못 버틴다는 것임에도( VII.28.3) 앗티케 전체가 파괴되어도 펠로폰네소스 일부가 파괴되는 것이 더 손해일 것이고(I.143.4), 앗티케에 와서 요새를 쌓으면 우리도 배를 타고 가서 라코니케에 요세를 세우고(I.142.2-4), 그래도 재산 때문에 굴종을 택할 양이면 스스로 앗티케를 버리는(I.143.5) 요새섬 방어에 자신감을 보이면서(I.143.5), 단지 전쟁 중에 제국을 확장하려거나 스스로 위험한 일을 자초하는 모험만 하지 않는다면(I.144.1),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아테나이보다 더 나은 아테나이를 물려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I.144.4) [본문으로]
- '힘과 대담성'(천병희), 'power and courage'(ghqtm), 'strong and bold'(조웨트), "strength and audacity'(덴트/p)로 번역된 투퀴디데스의 두 단어는(VII.28.3) 탐욕과 오만이란 단어의 순화어임에 틀림없을 것인데, 어느 말이든 이 두 단어를 하나로 합치면 집착이다. [본문으로]
- Akragas,Agrigentum/Acragas; 시실리 섬 남중부 해안 도시로 오늘날의 아그리젠토Agrigento. 아크라가스는 쉬라쿠사이 사절단과 모병한 2,300명의 영토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고, 우회하던 이들이 인근 켄토리파와 알리퀴아이 등, 아테나이의 동맹이 된 도시들의 매복에 걸려 참사당한 것이었다.(투.펠.VII.32)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아테나이가 삼단노선 80척과 중무장보병 5,000명을 시켈리리아 원정 증원군으로 보내기로 결의했는데(역,XIII.9.2), 쉬라쿠사이에 도착한 이들의 규모는 80척 이상의 삼단노선, 선원들을 제외하고도 5,000명 이상의 중무장보병, 화물선들에 실린 무기, 돈, 각종 장비들과 기계들이라 기록한다.(역,XIII.11.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밝힌 숫자는 아테나이 함선 60척, 키오스 5척, 메타폰티온 2척, 에우뤼메돈의 15척, 모두 82척에서, 나우팍토스의 코논에게 준 10척을 빼면 72척이고, 중무장보병은 아테나이가 자체 징집한 1,200명, 투리오이 700명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해서는 숫자 언급이 없었고, 헬라스 사람이 아닌 경무장보병은, 투창병으로 아카르나니아 150명, 멧사피아 150여명, 메타폰티온 300명, 투리오이 300명, 900여명 이외에는 숫자 언급이 없다. [본문으로]
- 이 당시 아테나이가 코린토스 만과 펠로폰네소스 해안에 배치하고 있던 함선 수는 펠로폰네소스 중무장보병의 수송을 막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해안을 순찰하던 20척, 코논이 나우팍토스에 주둔하며 본디 가졌던 18척, 시켈리아 증원 함대에서 받은 10척 등 모두 48척이었는데, 이 가운데 15척은 나우팍토스 수비로 남겨두고,나머지 33척이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코린토스 만에서 이오니아 해로 나가는 해협의 북쪽에 나우팍토스가 있고, 남쪽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뤼페스 사람들의 에리네오스 항이 있다. [본문으로]
- 두 척의 화물선을 한데 묶어(마르샹의 주석) 2플레트론(2plethrone=60meter) 간격으로 배치했다.(투.펠.VII.38.3) [본문으로]
- 두 화물선 돛대에 횡목을 대고 그 사이의 바다 위에 '돌고래 모양의 납덩이leaden dolphine'를 매달았다가 밑으로 배가 들어오면 떨어트려 배를 부수었다.(투.펠.VII.41.2,마르샹의 주석)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그냥 전군이라 하고 숫자를 밝히지 않았는데(펠.VII.43.2), 디오도로스는 중무장보병 10,000명, 그리고 그 이상의의 경무장보병이라 했다(역,XIII.11.3). [본문으로]
- 에우뤼엘로스 길은 에피폴라이를 북쪽에서 오르는 길인데, 첫 원정군이 원정 다음해 레온에 상륙해 에피폴라이를 점령했을 당시 올랐던 길이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군이 레온에 상륙해 처음 에피폴라이에 올랐을 때, 쉬라쿠사이는 에우뤼엘로스 길의 에피폴라이 쪽 입구를 경비할 600명의 정예 중무장보병을 보냈으나 지휘관 디오밀로스를 포함해 300명이 죽은 적이 있었는데(투.펠.VI.96.3,97.3, 이 글 각주338), 쉬라쿠사이는 이 이후에도 에우뤼엘로스 길 에피폴라이 쪽 입구 경비를 위해 600명의 경비대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전사자 2,500명과 적지 않은 부상자wounded not a few로 기록했는데(역,XIII.11.5), 그에 따르면, 20,000명이 이상이 공격해 참가해 적어도 15%가 죽거나 다쳤다는 것이어서, 그 앞의 수 차례 전투에서의 전사자들 수, 300명이나 600명들에 비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니키아스의 본진은 정박하는 함선 보호와 쌓아놓은 방벽 방어를 동시에 수행하기 일맞게 함선들의 정박지와 아테나이가 쌓은 방어벽의 큰 항구 해안 쪽 끝 사이에 있었는데, 이 지역은 대부분이 습지여서 병사들에게 많은 불편을 주었고, 심지어 질환까지 일으키도록 했다. [본문으로]
- 유월 중순 전후에 아테나이를 떠난 이들은 칠월 중순이 되어서야 쉬라쿠사이에 도착했을 것이고, 습지를 낀 그들의 본진은 모기며 파리로 학질이나 이질 같은 전염병의 온상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이미 여러 동맹들로부터 증원군까지 받아 판을 키운 전쟁을 아무 소득도 명분도 없이 아테나이의 장군 셋이 철군을 결정할 수는 없고, 참전한 모든 동맹의 지휘관과 함께 모여 결정할 사안이 되었다. [본문으로]
- 투.펠.VII.48.2 : 니키아스의 판단 근거를 천병희는 '군자금이 바닥나서', 덴트/p는 'by want of money', 조웨트는 'by exhaustion of resources'로 번역하고, 홉스는 이 부분을 생략하는데, 주석가 스미스는 'chrematos/chremata' here means 'supplies', not 'money'.라 단언한다. 그러나 이 다음(투.펠.VII.48.5) 니키아스가 제시하는 근거는 분명히 '돈'이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제국 확장 때나 헬라스 내전 중에도 예속이나 함락을 위해 대상 도시 안의 민주정파를 앞세워 정변을 유도하고 그들이 집권하여 예속되게 하거나 도시를 넘기도록 하고 있었는데(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은 예가 있어 일일이 꼽지 않는다), 이 당시 쉬라쿠사이는 민주정파가 집권하여 그들이 주축이 되어 아테나이를 상대하고 있었으므로(투퀴디데스도 아테나이가 쉬라쿠사이에게 민주정체로 변경을 약속해 '내부 이반('뾰죽한 수'(천병희),dissension(홉스),divide(덴트/p),discord(조웨트)'을 꾀할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펠.VII.55.2)), 실제 도시를 넘기겠다는 정파가 있었다면 과두정파나 참주가 되려는 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다른 기록이나 주석은 찾아볼 수 없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니키아스의 이 말에 대비해 '뷔잔티온의 레오Leo Byzantiones,Leon of Byzantium'가 한 말, '나는 적에게 죽느니 차라리 여러분의 손에 죽겠소'를 인용하면서, 솔직히 니키아스가 쉬라쿠사이군이 아니라 싸움에 져서 패전한 장군으로 아테나이에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다. 뷔잔티온의 레오에 관련된 정보는 그가 BC380 알렉산드로스가 비잔티온을 함락시켰을 당시, 그곳 정치가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로 수사학과 역사에 밝은 철학자였다는 정도이다(플.니키아스전,22.3, 타일러의 주석57).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굳이 이 말의 배경을 추측해본다면, 포위당한 뷔잔티온에서 항복이냐 항전이냐를 놓고 다툴 때, 그가 항복을 주장하며(그는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출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다!) 항복을 주장하기 때문에 죽이려 드는 항전파들에게 적에게 죽기보다 여러분에게 죽겠다며 목숨을 두고 항복을 주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본문으로]
- 알려진 기록들은 니키아스의 완강한 이동 거부 이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 시켈리아 원정군의 해군 삼단노선은, 처음 134척이 출발했고, 에우뤼메돈이 10척을 가지고와서 15척을 가지고 갔고, 해전에서 9척을 잃었으므로(운행 불능이 되었던 함선들은 전투 후 모두 복구되었다고 보았다), 증원군이 오기 전에 120척이 있었는데, 증원군의 73척을 더하면 모두 193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수리 중이거나 선원 결원 등으로 운행에서 제외되는 함선들을 감안하더라도, 즉시 투입 가능한 삼단노선 수는 최소 150척, 최대 180척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들이 펠로폰네소스에서 출발했던 중무장보병들로, 항해 중 표류하여 리뷔에까지 갔고, 퀴레네(Cyrene,오늘날의 리비아 샤하트Shahhat,지금의 수사Susah는 퀴레네의 외항)로부터 삼단노선 두 척과 수로안내자pilot의 도움을 받아 시켈리아와 가장 가까운(1박2일의 뱃길이다) 카르케돈 사람들의 무역항 네아폴리스(Neapolis,로마 때 렙티스Leptis,오늘날의 리비아 미수라타Misurata,Misrata)로 갔고(연안 항해 중, 에우에스페리데스(Euesperides,리비아의 시르테Sirte,Sirt 인근)를 포위 공격하던 뤼뷔에를 격퇴시켰다), 지중해 건너 시켈리아의 셀레누스에 도착해 귈립포스를 만난 것이었다.(펠.VII.50.2) 투퀴디데스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들을 스파르테가 보낸 네오다모데이스와 헤일로타이 중무장보병 600명으로 본 것은 이들에 대한 도착 기사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BC413 8월 27일 밤, 9시 40분이 조금 지나 시작된 개기월식은 10시 30분 쯤에서야 다시 돌아왔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복수의 점쟁이들이(마르샹은 'exegousto'가 '사제들의 해석 전문 용어technical word word for interpretation by priests'라 하고, 스미스는 통칭 점쟁이나 사제라 한다는데; 번역은 예언자(천병희), soothsayers(홉스,조웨트,덴트/p)로 했다) '세 번의 아흐레thrice nine days'(보통 달의 주기에 대해서는 '삭망syzygy'으로 나누지만, 이 경우 아흐레로 세 번 나누어 말했는데, 당시 이런 나눔이 통용되었었는지, 이를테면 '초승때new moon period', '보름때full moon period', '그믐때old moon period'와 같이, 단지 점쟁이들의 참언적 나눔인지 알 수 없다)가 지나기 전에 이동해서는 안 된다 했다 하고(펠.VII.50.4), 플루타르코스는 당시에 평소 니키아스를 미신에서 벗어나게set free 해주던 동료associate 스틸비데스Stilbides도 죽고 없었고, 데리고 있던 점쟁이도 신통치 않아서, 아우토클레이데스Autocleides가 '훈고학Exegetics'에서 말한 대로 , 이 시절 사람들은 보통 일월식이 있으면 사흘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게 관습이었지만, 니키아스가 다음 달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린다고 정한 다음, 자신은 그동안 제물을 올리며 제사만 지냈다 한다.(니키아스전,23.5,24.1)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데모스테네스와 에우뤼메돈이 가져온 함선 수를 73척이라 했고(펠.VII.42.1; 그런데 딱 부러지는 73척이 아니라 대략about 73척이라 했고, 디오도로스는 80척 이상more than이라 했다(역,XIII.11.2)), 또 이들이 쉬라쿠사이에 도착하기 전에 큰 항구에서 벌어졌던 해전에 출동한 아테나이 해군의 함선 수를 75척이라 했는데(펠.VII.37.3), 이 둘 모두가 가동 가능한 함선들이었으므로, 이날의 해전에 140척은 아니라도(앞의 해전에서 7척을 잃었고,펠.VII.41.4) 적어도 120척은(다수가 운행불능이 되었다,펠.VII.41.4) 출동했어야 하지만 86척만 출동했다. 아테나이군은 이것으로 적 함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오만한 판단을 했을 것이고, 또 더 많은 함선 투입으로 지급해야하는 노꾼들 노삯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실제 여기서 18척과 그 선원들 모두를 잃은 아테나이 해군이 이후 벌어진 마지막 해전에서 115여척을 동원하는 것을 보면 이때 130척 이상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투.펠.VII.52.1. 디오도로스는 양군이 진용을 갖추고(아테나이 함대는 중앙 본진에 메난드로스(Menandros, 니키아스의 증원군 요청 편지를 받은 아테나이가 에우튀데모스와 함께 니키아스 보좌역으로 지명했었다,투.펠.VII.16.1), 오르튀기아 섬 쪽 좌익에 에우튀데모스Euthydemos, 우익에 에우뤼메돈이 포진했고, 쉬라쿠사이 함대는 중앙 본진에 코린토스의 퓌텐Pythen, 플렘뮈리온 곶 쪽 좌익에 아가타르코스Agatharchos, 우익에 시카노스Sikanos가 포진했다.) 전투를 시작했다 하고(역.XIII.13.2), 플루타르코스는 니키아스가 제사나 지내고 있는 동안, 쉬라쿠사이 아이들이 고깃배를 타고 아무런 전의 없이 세 번의 아흐레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는 아테나이 함선들 가까이 가서 싸움을 걸며 놀려대었는데, 그 가운데 쉬라쿠사이 유력자 아들 헤라클리데스가 탄 배가 아테나이 함선에 붙잡히자, 아이의 삼촌 폴리코스가 함선 10척을 이끌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출동했고, 이를 본 쉬라쿠사이 함선들이 모두 뒤따라 나서면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아테나이 함선들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니키아스전,24.1-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에우뤼메돈이 항만에 갇히어 그의 함선들을 잃고 전사했다고 기록했고(펠.VII.52.2), 디오도로스는 전사한 위치와 잃은 함선 수까지 그 상황과 함께 기록했다.(역,XIII.13.3-4) [본문으로]
- Tyrrhenia,Tyrsenia,Tuscans 오늘날의 토스카나Toscana,Tuscany 지방을 중심으로 한 옛 에트루리아Etruria의 그리스 이름. 이 지역에는 아에네이스를 비롯한 패망한 트로이 유민들이 이민해 정착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 뤼시멜레이아Lysimeleia 늪(투.펠.VII.53.2) [본문으로]
- 쉬라쿠사이는 나포한 18척의 승선 인원들 모두를(보통 삼단노선 1척의 승선 인원은 선원 170명 내외, 중무장보병과 궁수 등 전투 인원 30명 내외로 모두 200명이고, 따라서 18척에는 3,600명이 있었을 것이다) 죽였는데(투.펠.VII.53.3), 이는 이어지는 항복한 아테나이군에 대한 대학살의 전조였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헬라스 내전이 발발했을 당시 펠로폰네소스 동맹국과(펠.II.9.2-3) 아테나이 동맹국들을(펠.II.9.4) 일일이 거명한 적이 있었는데, 쉬라쿠사이군이(펠.VII.58) 아테나이군을(펠.VII.57.2-11) 봉쇄하여 괴멸시키기로 결의한 때에 양군에 가담한 도시들을 또 다시 일일이 거명한다. [본문으로]
- 어림으로 8스타디온(투.펠.VII.559.3; 1.4km 정도, 가장 짧은 곳은 1km 정도이다.)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시라쿠사이군이 사흘에 걸쳐, 삼단노선은 물론 화물선, 작은 배들까지 동원해 닻을 내리고 쇠사슬로 서로 엮고, 필요한 곳은 갑판끼리 다리로 연결해 봉쇄했다고 한다.(역.XIII.14.2) [본문으로]
- 홉스는 110척number of one hundred and ten, 천병희, 조웨트, 덴트/p는 110여척about one hundred and ten로 번역했고(투.펠.VII.60.4), 디오도로스는 115척이라 한다(역.XIII.14.4)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이런 아테나이군의 조치를 이렇게 표현했다.(펠.VII.60.4.'....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작전에 필요한 조치...'(천병희), '...all things provided according to their means and purpose...'(홉스), 'made such preparations for action as their difficult situation and nature of their plan allowed...'(조웨트), '...making all provision allowed by the nature their plan and by the necessities which imposed it...'(덴트/p))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아테나이 함선 60척을 잃었다Attic ships sixty were lost'고 한다.(역.XIII.17.5)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쉬라쿠사이 함선 8척이 완파되고 16척은 심한 파손을 입었다Syracusan eight were completely destroyed and sixteen dadly damaged' 한다.(역.XIII.17.5) [본문으로]
- 투.펠.VII.72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의 데모스테네스는 60척과 50척의 대비만 했고(펠.VII.72.3), 디오도로스의 데모스테네스는 쉬라쿠사이의 봉쇄망이 많이 허물어졌으므로 기습으로 돌파할 수 있다고만 했다(역.XIII.18.1; 그러나 이 제안을 거부한 니키아스가 육로 철수를 결정했다한다.18.2). [본문으로]
- 디오도로스는 50척이었다 한다.(역.XIII.19.1) [본문으로]
- 큰 항구 해전이 끝난 뒤의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아테나이군과 쉬라쿠사이군의 진영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일탈한 양측 병사들의 모습과, 이에 따른 양측 지휘부의 대응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했고(펠.VII.72-74:이 글은 주로 투퀴디데스의 기술에 따랐다 ), 디오도로스는 아테나이의 데모스테네스가 봉쇄망이 파괴되었으므로 당장 인원을 뽑아 태우고 기습에 나서면 (배도 구해) 바닷길로 철수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병사들이 배보다는 그들의 목숨을 구해달라며 지휘부로 몰려왔고,니키아스가 함선들을 버리고 육로로 동맹도시로 이동한다고 결정하자 모두가 동의해 (쓸 만한) 배들을 불태우고 철수를 준비했고, 이를 알게 된 헤르모크라테스가 쉬라쿠사이 지휘부에 병력을 풀어 길목을 지키자고 했는데, 다수가 지쳐 있고 부상도 많아(투퀴디데스와는 달리 축제나 만취 같은 병사들의 일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당장 병력 배치가 어렵다고 하자, 헤르모크라테스가 기병 몇을 아테나이 진영으로 보내 첩자인 양 주요한 길목이 이미 장악되었다는 전갈을 보냈고, 이에 아테나이군이 약간 동요했지만 이미 밤이 된 때라 그가 레온티니 사람으로 믿고 그의 선의를 받아들여 철군을 미루었고, 쉬라쿠사이군은 이튿날 아침에야 병력을 배치하고 길목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하고(역.XIII.18), 플루타르코스는 큰 항구 해전에서 패한 아테나이군은 망영자실하여 떠도는 함선들을 끌고오려 하거나 휴전을 맺고 전사자들을 수습하려고도 않고 그저 쉬라쿠사이에서 벗어날 생각만 했고, 이런 아테나이의 움직임을 파악한 귈립포스와 쉬라쿠사이 장군들은 병력을 동원해 길목을 차단하려 했으나 축제와 승전에 취해 동원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차단 계획을 포기했는데, 헤르모크라테스만이 속임수로 니키아스의 야반 철군을 막아보기로 하고, 수하 몇을 니키아스의 정보원처럼 꾸며 길목이 차단당했으니 야반 철수를 중단하라는 정보를 흘렸고, 이에 니키아스가 철군을 이튿날로 늦추자 이튿날 새벽 쉬라쿠사이군이 철수로를 차단했고, 결국 아테나이군은 전투를 통한 철수로 확보를 위해 행군 준비하느라 또 하루를 지체하게 되었다 한다.(니키아스전,25.3-26.3) [본문으로]
- 큰 항구 해전에서 패하고 이틀 뒤인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본문으로]
- 투.펠.VII.75.5 아테나이 시켈리아 원정군 규모는 시켈리아 섬의 동맹도시들 인원을 제외하고 총 70,000명을 상회했을 것인데, 삼단노선 200여척(1차 134척+2차 73척)의 선원 36,000여명, 중무장보병11,000여명(1차 5,850명+2차 5,000명), 경무장보병 10,000여명(1차 1,300명+2차 9,000여명), 다수의 장사꾼, 중무장보병 지원 노예 15,000여명(중무장보병 1명당 0-3명으로 평균1.5명) 등이다. 이들 가운데 선원들과 노예의 이탈이 가장 많아 25,000여명이 죽거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노예는 5,000여명이 달아나고 없었음에도 철군 행렬에 남은 인원은 40,000여명이나 되었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와 플루타르코스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버리고 갔다 했지만(펠.VII.75.3-4,니키아스전.26.3) 디오도로스는 아테나이군이 병자와 부상자들을 앞뒤로 호위하며 진군한 것으로 기록한다.(역.XIII.18.6) [본문으로]
- 노예들은 계속 달아나고 있었는데, 이들이 들고 도망갈까봐 맡길 수 없었다.(투.펠.VII.75.5)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포위군에게 항복하고 도시에서 도망치는 피난 행렬로(펠.VII.75.5), 플루타르코스는 적의 도시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도시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울며 불며 떠났다고(니키아스전.26.3) 한다. [본문으로]
- 시켈리아 원정군의 중무장보병은 1차에 6,000명에 가까운 숫자였고, 2차는 5,000명 수준이어서 전체 11,000명 정도였고, 경무장보병은 1차에 1,300명 정도였고, 2차에는 각지에서(주로 이탈리아와 시켈리아 섬에서) 차출된 10,000명 가까운 숫자로 총 22,000명을 상회했으나, 돌아가거나 달아난 용병, 질환이나 부상당했거나 전사로 감소한 인원을 감안하여 20,000여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본문으로]
- 고대 그리스 중무장보병hoplites들의 전통적인 '방진phalanx方陣'은 횡렬front 8명, 종렬depth 8명, 즉 8x8을 기본으로 종횡을 증감한 전투 대형을 민들었는데, 이런 방진의 가운데 부분, 즉 초기 전투에 노출되지 않는 '중앙 부분을 비워두는 방진hollow square'을 짜고 속을 비전투 인원으로 채운 것이다. [본문으로]
- 비전투 인원은 주로 선원, 장사꾼 그리고 노예들이었는데, 장사꾼은 이미 대부분이 돌아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고, 선원들은 데모스테네스가 마지막까지 60척의 함선을 움직일 수 있다 했으므로 척당 180명으로 잡으면 10,000명 정도이고, 중무장보병의 수행 노예가 많게는 일인당 3명, 적어도 1명은 붙어 있는데 많은 노예들이 도망친 것으로 보아도 중무장보병 1명에 1명의 노예는 남아 있다고 보아 10,000명 정도, 도합 20,0000여명으로 추산하였다.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군의 철수 장면을 비장한 어조로 상세히 설명하고, 니키아스의 행군 중 연설까지도 길게 인용하지만(펠.VII.75.1-78.2), 디오도로스는 단 한 문장으로, 그러나 놀랍게도 투퀴디데스와는 다른 내용도 포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아테나이 장군들은 병사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노새나 당나귀와 병자와 부상자들을 가운데 두고, 그 앞과 뒤에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을 배치하여, 카타네로 출발했는데,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가 각각의 지휘를 맡았다...the Athenian Generals, dividing the soldiers into two bodies, put the pack-animals and the sick and injured in the centre and stationed those who were in condition to fight in the van and in the rear, and then set out for Catatne, Demosthenes commanding one group and Nicias the other."(역.XIII.18.6) 즉, 디오도로스는 선원이나 노예 같은 아테나이의 비전투요원들의 행군 포함 여부는 언급하지 않는 대신, 병자와 부상자를 버려두지 않고 대동하여 철수했으며, 행렬도 방진이 아니라 전투 가능한 병사들를 전후 배치하고 각각을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가 지휘했다고 기술한 것이다. [본문으로]
- 쉬라쿠사이군은 니키아스가 클렘뮈리온 언덕에 보루를 세운 뒤부터 이를 견제할 기병을 포함한 병력을 울륌피에이온 인근에 주둔시켰었는데, 클램뮈리온 함락 이후에도 큰 항구와 방벽에서 출몰하는 아테나이군을 견제하고 이들이 아나포스 강을 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계속 주둔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 전투부대만의 행군이었다면 20km 정도 나아갔을 것이다. [본문으로]
- 투.펠.VII.77.6 [본문으로]
- 아크라이온 절벽,Akraion Lepas, Acraean Cliff [본문으로]
- 쉬라쿠사이와 그 종속도시dependent city 헬로로스Heloros(같은 이름의 강 하구 도시로 오늘날 노토Noto)를 잇는 40km 정도의 해안도로 [본문으로]
- 이곳 쉬라쿠사이군 수비대가 아테나이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이 무렵에 왔는지, 쉬라쿠사이와 헬로로스 사이의 도로 안전을 위해 예전부터 파견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폴뤼젤로스의 사유지homestead of Polyzelus였다 한다.(니키아스전,27.1) [본문으로]
- Demosthenes himself drew his sword and gave himself a thrust; he did not, however, succeed in killing himself, since the enemy quickly closed in upon him and seized him.(플.니키나스전.27.2)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군 철군 여드레에 대해 이 글은 전적으로 투퀴디데스의 자세한 기술에(펠.VII.75-85) 의존했는데, 니키아스에 대한 그의 동정적인 시각에 불구하고 적어도 이 여드레 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술했고, 달리 이 여드레에 대한 자료로 디오도로스의 '역사전서'와 플루타르코스의 '니키아스전'이 있지만, 디오도로스가 쉬라쿠사이군의 입장에서 쓴 단 두 문장의 기술은(역.XIII.19.2; For three days following close on their heels and encompassing them on all sides they prevented them from taking a direct road toward Catane, their ally; instead they compelled them to retrace their steps through the plain of Elorium, and surrounding them at the Ainarus River, slew eighteen thousand and took captive seven thousand, among whom were also the generals Demosrhenes and Nicias. The remainder were seized as their plunder by the soldiers; for the Athenians, since their escape was blocked in every direction, were obliged to surrender their waepons and their persons the the enemy.) 철군 중 아테나이군 전사자가 18,000여명이었다는 검증할 수 없는 기술 외에는 경과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플루타르코스는 철군 행렬의 비참함에 대비 한 니키아스의 최후 모습을 전하는 데 주안점을 둔 제법 긴 철군 여드레 동안의 감상感傷을 기술했음에도(니키아스전,26.3-27.5), 이 글에서는 투퀴디데스가 침묵한 데모스테네스의 자살 시도 장면만 인용하고 귈립포스와 니키아스의 대화 장면은 너무 작위적이라 언급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 투.펠.VII.85.2-4. [본문으로]
- 1코튈레kotyle=약270cc [본문으로]
- 투.펠.VII.87.5. 주석가 마르샹은 포로들이 받은 식량 1코튈레이 노예들 통상 배급량의 반이었다 하고, 디오도로스는 1코이닉스choinix(약 1,000cc)로 두 배였다고 해(역.XIII.19.5), 투퀴디데스와 디오도로스 간의 배급량 차이가 거의 네 배나 된다.(디오도로스가 시칠리 사람임을 감안하라) 플루타르코스는 투퀴디데스와 같은 1코튈레라 한다.(니키아스전.29.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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