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草)

12. 종속이 익숙한 도시들

병든소 2022. 9. 4. 13:55

<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 

 

 

12. 종속이 익숙한 도시들

 

 

12.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지금까지 저는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우리 헬라스 세상의 400개가 넘는 많은 도시들 가운데 아테나이라는 우리가 사는 도시 하나가 이웃 도시들 여럿을 예속시켜 잠시 번성을 이루는 사이[각주:1], 그리고 아테나이로 인해 도시의 안전과 자유가 불안해진 다른 도시들과 서로 다투고 서로를 해쳐 헬라스 세상의 도시들이 도시의 안전과 도시민의 자유를 지킬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가는 사이[각주:2], 헬리스 바깥의 다른 세상 다른 도시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혹 우리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그 도시들이 어떤 모습으로 헬라스 세상에 다가왔었는지를 차근히 알아보고 제가 이제껏 말씀드려온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가 정녕 무엇인지 떻게 잃게 되는지 깨달으시는 하나의 실마리로 마련해 드리고자 합니다. 따라서 저의 이야기는 우리 아테나이가 겪었던 도시의 종속과 자유를 말씀드리면서 자연스레 우리에게 물과 흙을 바치라며 종속을 강요했던 페르시아와 우리와는 달리 그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인 도시들에 관해 이어질 것입니다.

 

12.2  그렇습니다. 크세르크세스를 물리친 헬라스 세상에 페르시아가 보여준 제국이란 국가체계의 강점을[각주:3] 이해한 아테나이가 해군력을 바탕으로 펼치기 시작한 초창기 아테나이 제국의 틀 안에 묶여 있긴 했으나, 이오니아의 큰 섬 셋, 사모스와 레스보스와 키오스는 델로스동맹 시절부터 독자적인 해군을 운용하면서 필요에 따라 아테나이 함대의 일부가 되는 조력자로 지냈습니다. 이 가운데 먼저 사모스가 스스로 이오니아에서 아나톨리아로 자유롭게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려 나서면서 불가피하게 아나톨리아 헬라스 도시들의 중심인 밀레토스와 이해가 맞부딪치게 되었고, 밀레토스의 요청으로 중재에 나선 아테나이의 개입에 반발하다가 급기야 두 번에 걸친 무력 충돌 끝에 결딴이 나서 함대와 독립적인 시민들을[각주:4] 모두 잃고 친아테나이 시민들만 남은 사모스가 아테나이의 종속도시가 아니라 아예 부속도시로 전락하자, 이를 본 작은 동맹도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레스보스와 키오스까지 혼비백산하여 독립이니 도시의 자유니 하는 달콤한 유혹을 접고 충실한 아테나이의 동맹도시로 남을 태도를 보인 덕분에 이들은 독립적인 함대를 계속 보유할 수 있는 은전을 입을 수 있었고, 아테나이는 아테나이대로 이들의 함선들로 큰 싸움에서 아테나이 함대를 이루는 예비전력으로 보유함과 동시에 이오니아와 아나톨리아 심지어 헬레스폰토스 인근에서 일어나는 작은 군사활동을 이들에게 맡겨 해결하는 편리함을 얻어 좋았습니다. 사모스의 궐기와 몰락은 아테나이 동맹을 주종으로 결집시켰고 아테나이는 거대한 제국의 종주국으로 눈부신 번영을 이루게 되었었지요. 물론 번영의 근원은 제국의 도시들이 내는 제국의 안전 유지 비용 분담금이 주수입이었지만, 아테나이가 확보한 안전한 항로를 통해 아이귑토스와 스퀴타이 지역으로부터 수입할 수 있었던 곡물을 제국의 도시들은 물론 나머지 헬라스 도시들과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 도시들에게까지 팔아 챙기는 이문도 대단했습니다. 곡물 유통에서 얻는 수입으로 해운과 도시 건설에 필요한 목재들을 모두 얻고도 남아 아테나이 시민들에게는 곡물을 무상으로 나누어 줄 정도였지요. 여러분이 떠올리신 페이라이에우스 항 부두의 거대한 곡물창고가 바로 이런 아테나이 번영의 상징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풍요로운 이 도시에 온 세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다방면에 걸친 그들의 남다른 생각과 재주를 가지고 이 도시에 와서 먹고 마시며 아테나이를 생각과 재주에서도 풍요롭게 했습니다. 심지어  저 멀리 인도에서조차 벌거벗고 지내는 사람들이 그들의 신들과 함께 찾아올 정도여서[각주:5] 새로운 신들까지 이 도시에서 번영을 누렸지요. 시민을 위해 돌과 나무로 지은 곡물창고처럼 신을 위해서는 아크로폴리스에 색갈과 금을 입힌 신전도 세웠습니다. 도시를 넓히고 집을 짓고 성벽을 쌓으면서 도시 일이 늘어나자 도시민의 봉사로 이루어지던 도시 일에 돈이 지급되었고, 공무봉사에 돈이 나가자 군인에게도 사절들에게도 하다 못해 민회에만 나와도 돈을 주었습니다. 아테나이 시민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 늘어나자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될 수 있었던 테세우스의 아테나이 시민이 되기 위해 한번은 '아버지 어머니 중 하나가 아테나이 시민이면'에서 끝으로 '아버지가 시민이면'을 거쳐 끝내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시민이어야'로 정해질 무렵에는 아테나이 제국이 더 크고 넓어지는 만큼 아테나이 시민은 더 적고 좁아져갔고, 파르테논 신전의 여신은 그 무거운 금조각으로 지은 외투를 걸치고 서서 벌을 받아야 하는 만큼 아테나이는 점점 더 부유해져갔습니다.

 

12.3  이 풍요로운 시절 아테나이 시민의 정점에 페리클레스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그를 아테나이 제일시민이라 부르고 있었지요. 아버지 크산팁포스가 도편추방된 까닭을[각주:6] 누구보다 잘 알고 자신도 나이 든 사람들로부터 모습은 물론 목소리까지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닮았다는 소리를 심심찮게 듣고 있던 터라, 애써 정치 쪽을 멀리하고 솔론의 젊은 날처럼 돈벌이에 열중하며 지내다 마흔이 넘어서야 사람들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뜸해져가는 걸 보고 귀족임에도 서민인 민중파 지도자 에피알테스 뒤에 서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정치에 들어선 페리클레스는 테미스토클레스 이후 아테나이를 이끌고 있던 키몬을 제거하고 에피알테스와 함께 정치 주도권을 쥐려 했으나 여의치 않던 판에, 스파르테에서 헤일로타이 반란이 일어났고, 아테나이가 이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보여진 스파르테의 태도 때문에 민심을 잃은 키몬이 도편추방당하면서 키논과 같은 정파의 투퀴디데스가 권력을 잇지 못했고, 자연히 아테나이를 이끌 에피알테스는 거리에서 암살당해 졸지에 페리클레스만 남게 되었지요. 키몬의 몰락은 페르시아 전쟁 세대의 몰락을 의미했고, 스파르테는 내란에 묶여 페르시아 전쟁으로 얻은 헬라스 세상에 대한 지도력을 발휘할 여력이 없었고, 오로지 아테나이의 페르시아 전후 세대인 페리클레스만이 여전히 헬라스 세상을 엮어매고 있는 델로스 동맹이란 끈으로 아테나이와 헬라스 세상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아이귑토스 원정 실패마져 헬라스를 새로운 세상으로 개편하는 기회로 삼아 델로스 동맹 체제를 허물고 명실상부한 아테나이 제국 체제로[각주:7] 전광석화처럼 바꾸어놓았습니다. 제국을 다스리며 아테나이는 번영을 누렸고 아테나이제국 건설의 주역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제일시민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122.4  그러나 이러한 페리클레스의 영광은 아고라 상인들을 자극해 그들이 페리클레스의 권력을 갖고 싶도록 만들었는데, 그들이 보기에 페리클레스가 커다란 전공을 세우는 것 같지도 않고, 페리클레스 때문에 제국의 도시들이 아테나이에 돈을 내는 것 같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기들이라면 그 돈을 더 많이 잘 받아낼 것 같고, 쓰는 것도 더 효율적으로 잘 쓸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고라의 상인들은 장사치답게 페리클레스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았지요. 방법은 예전에 페리클레스가 키몬을 잡으려고 보여준 재판 초식이었고, 비록 이 초식은 아레오파고스의 판결로 실패했지만 페리클레스가 정권을 잡은 뒤 모든 재판을 높은 아크로폴리스 근처에서 높은 신분의 전직 아르콘들이 하는 아레오파고스 재판 대신 낮은 아고라 근처에서 낮은 민중들이 하는 디카스테리온[각주:8] 재판으로 바꾸어 놓은 터라, 민중들이 말만 들어도 싫어할 횡령이라든지 불경이라든지 반역 등의 죄목을 건다면 재판에 질래야 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페리클레스의 주변을 들락거리는 다른 도시 사람들을 노렸습니다. 먼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을 맡았던 페이디아스를 신상에 입힌 황금을 횡령한 혐의로 고발했는데, 조사과정에서 여신 방패에 새겨진 페이디다스와 페리클레스 얼굴이 드러나 불경죄로 페이디다스는 쫓겨나고 페리클레스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 적극 해명해야 했지요. 페리클래스도 많이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이에 힘이 붙은 그들이 눈을 돌린 쪽은 소피스테스들이었습니다. 소피스테스라 불리는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금껏 그들이 믿어온 신들이 주재하는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것들에서 그들의 신을 몰아내는 허튼소리들을 새로운 지식이라 말하며 아이들에게 비싼 돈을 받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페리클레스와도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귀신 씨나락 까는 소리를 페리클레스도 받아들이는 그래서 마치 페리클레스만큼 권위가 있는 말인 양 펼치고 있어, 이들에 대한 보통 아테나이 사람들의 눈꼴이 사나워져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아고라의 장삿군들은 아테나이에서 신들에 대해 불경한 언행을 금지하는 법을 먼저 민회에 올려 통과시켜놓았습니다. 반대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프로타고라스를 불경죄로 고발해 그의 책을 태우고 추방했고, 얼마 뒤 아낙사고라스를 또 불경죄로 고발해 사형을 선고하자 프로타고라스 때만 해도 지켜보던 페리클레스가 나서 눈물로 구명했고, 결국 아낙사고라스도 추방당했습니다. 두 번이나 아테나이 제일시민을 법정에서 조아리게 만든 아고라 장삿군들은 자신이 붙었는지 이번에는 아예 페리클레스의 동거녀 아스파시아를 밀레토스를 위해 아테나이를 판 반역 혐의로 고발했는데,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아들 페리클레스까지 낳아 키우고 있는 아스파시아를 구하기 위해 세 번째 501명의 재판관들 앞에서 온갖 구차한 변명과 애절한 간청을 다 늘어놓아야 했었지요. 결국 아스파시아는 혐의를 벗었지만 아테나이 제일시민 페리클레스의 위엄과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그제서야 페이디다스부터 아스파시아까지의 일련의 재판 모두가 아고라 상인들이 자기를 겨냥해 벌였던 걸 알아챘었지요. 페리클레스는 반격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상대가 아고라의 장삿군들이라면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설 수 없는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생각하지도 않았던 먼 곳, 그래서 누구도 페리클레스가 만든 전쟁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전쟁 건수가 나타났습니다. 모든 헬라스 사람들이 아탈리아로 가기 위해 들리는 바닷길 길목의 섬 케르퀴라에서 그들과 코린토스와의 전쟁에 아테나이를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전쟁에서의 승리는 케르퀴라의 제국 편입과 펠로폰네소스 견제를 보장하여 아테나이 사람들은 물론 제국의 어느 도시도 흔쾌히 참전하지 않을 수 없는 전쟁 초대였습니다. 이제 페리클레스는 이 전쟁을 통해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자기가 여전히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영원한 아테나이 제일 시민임을 기억하게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판이 커지면 커질수록 페리클레스에게 더욱 좋을 것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번영을 이룬 도시라 도시 권력을 위해서도 전쟁은 필요한 것이었지요.[각주:9]

 

12.5  케르퀴라 함대가 워낙 튼튼해 아테나이 함대가 별로 힘들일 것 없이 스파르테는 빠지고 메가라가 끼인 코린토스 함대를 격파한 뒤, 페리클레스는 전쟁의 판을 더 키우기로 작정했습니다. 먼저 메가라 사람들이 아테나이 성역의 포도나무 받침대를 뽑았다는, 혹은 메가라 청년들이 아스파시아의 홍등집을 덮쳐 창녀들 몇을 데리고 갔다는 핑계로 메가라 사람들과 배들이나 물산들의 아테나이 출입을 막는 소위 메가라 봉쇄령을 내리고, 아테나이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이유로 함대를 보내 칼키디케의 코린토스 식민도시 포테이다이아를 포위하고 공격토록 함으로써 격분한 이들이 모두 스파르테로 달려가게 만들었습니다. 30년 평화조약을 지키고 싶은 스파르테는 좋은 말로 해결해보려 사절을 보내 메가라와 포테이다이아에 대한 조치를 철화토록 종용했고, 펠로폰네소스와의 전쟁으로 페리클레스의 위상이 다시 올라갈 것을 염려한 아고라 상인들이 스파르테의 요구에 솔깃해 하자, 페리클레스가 전쟁을 역설하며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물었지요. 전쟁을 피하려 작은 것이라며 적의 요구를 들어주면 더 큰 양보를 요구할 텐데 그땐 어쩔 거냐? 지금 전쟁을 하면 비축이 많은 아테나이가 반드시 이긴다! 기선을 제압하고 나면 아테나이가 마음먹기에 따라 필요할 때 언제든지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이기는 전쟁을 피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각주:10] 누가 봐도 이길 것 같아 아테나이는 전쟁을 결의했고, 전쟁을 총지휘하게 된 페리클레스는 다시 아테나이 권력의 중심 제일시민이 되었고, 별수 없이 아고라의 장삿군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야 다시 페리클레스를 상대할 것이었습니다.

 

12.6  그리고 또 하나, 이러한 아테나이의 번영은 아테나이 제국의 도시들을 자극해 헬라스 세상의 해묵은 문제를 다시 불러내었는데, 특히 따로 특별히 아테나이 덕분에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을 얻었다고 여기지 않는, 그래서 아테나이에 주기만 하고 받은 것은 별로 없다고 느끼는 변방의 도시들이 혼자 잘나가는 아테나이처럼 그들도 뭔가 그만한 이득을 찾아내어 잘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래 묵은 원한을 꼬투리로 혹은 새로운 시빗거리를 만들어 이웃 마을이나 도시들을 집적거리기 시작했고, 시비를 당한 도시들은 그들의 모도시거나 가깝게 지내는 도시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래서 역공을 당한 아테나이 동맹도시는 아테나이를 불러들이고, 못이기는 척 아테나이가 나서 제압하고 새로운 동맹으로 묶어 제국을 넓혀나가자, 이렇게 해서 마을을 잃고 도시를 잃은 사람들이 테바이에 그리고 또 코린토스에 하소연하기 시작했고, 테바이도 코린토스도 아테나이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라 결국 이 모든 하소연이 스파르테로 모여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의 대결이라는 해묵은 헬라스 세상의 문제가 다시 불거져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늙은 세대가 겪은 첫 번째 헬라스 내전은, 다시 말해 펠로폰네소스 도시들과 아테나이 도시들 사이의 전쟁은, 전쟁을 하면 할수록 도시가 번영을 이룬다는 지난 백년의 전쟁 경험으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쌓인 오만과 탐욕이 철철 흘러넘친 나머지 작은 것이라며 한번 양보하면 점점 더 많은 것을 내놓게 될 것이므로 전쟁을 피해서는 안된다는 펠리클레스의 전쟁 선언으로 이어지자, 아테나이의 이 전쟁 선언을 듣고서야 천년을 거쳐 숱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전쟁이 단 한번도 스파르테를 부유하게 해준 적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끝까지 전쟁을 피해보려 열화 같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전쟁 개시 요구를 누르고 참고 기다렸던 스파르테에게 페리클레스의 아테나이가 딴청을 피우는 사이, 몸이 근질거리던 테바이가 플라타이아이를 건드려 아테나이를 움직이게 하고, 이윽고 아테나이가 전쟁 감행을 결의하자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아르키다모스가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앗티게로 쳐들어오면서 시작되었지요. 혹시나 하며 페리클레스의 연락이 있을까 기대하며 앗티케를 한바퀴 돌았으나 아테나이로부터는 연락은커녕 군대의 출동조차 없어 속절없이 아르키다모스가 펠로폰네소스로 돌아가자, 전쟁을 피하고 싶은 스파르테의 형편을 모를 리 없는 페리클레스는 제국의 확장을 견제하는 코린토스와 테바이를 적당히 누르고 난 뒤엔 언제든지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어서 그저 느긋한 마음으로 전쟁을 치를 돈도 많겠다 아테나이 함대의 위세나 보이기 위해 아르키다모스가 앗티케를 떠나자마자 아테나이 함대를 이끌고 직접 출동해 메가라를 거쳐 라코니케 남동 해안을 유린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우리 늙은이들의 반평생을 덮은 이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2.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호메로스는 옛사람들이 뮈케나이Mycenae가 이끄는 헬라스 도시들과 일리오스Ilios,Ilion,Troia,Troy가 이끄는 아나톨리아 도시들과의 전쟁이 세상에 불어난 사람들 때문에 그들을 부양하느라 힘들어하는 가이아를 위해 제우스가 사람들을 줄이려 꾸민 짓이라 말해왔지만 정작 첫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분배 문제로 벌어진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반목이 전쟁을 어떻게 끌고갔는지 보여주면서, 그 전쟁이 뮈케나이가 일리오스의 부와 그 부의 원천을 탈취하려는 것이었음을 노래했고, 헤로도토스는 헬라스 도시들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이 힘을 앞세워 상대를 예속시키려는 세력과 탁월한 의지로 자유를 지키려는 세력 사이의 충돌이었다며, 구전된 신화시대에서부터 크세르크세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상 방방곡곡 크고 작은 도시들의 흥망성쇠에 대해 자신의 답사와 전문을 통한 연구 과정을 상세히 보고했고, 시켈리아 원정에 실패한 아테나이가 민주정을 버리고 400인 과두정을 세울 만큼 쪼들리다가 뽀죽한 돌파구가 생기지 않자 이를 혁파하고 민주정으로 복고한 이듬해부터 홀연 아테나이에서 사라져버린 투퀴디데스는 그때까지 헬라스와 시켈리아와 이탈리아와 아나톨리아에서 벌어진 스무 해가 넘게 이어진 전쟁으로 인한 크고 작은 도시들의 흥망과 이합집산을 기록하면서 처음부터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의 전쟁이 불어나는 아테나이 세력에 스파르테가 겁을 먹어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 말했습니다. 제법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이 세 번의 전쟁이 모두 그런 이유로 일어난 듯합니다.

 

12.8  그렇지만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제게는 호메로스나 헤로도토스나 투퀴디데스가 말하는 전쟁의 이유가 그 전쟁들의 크기나 그 전쟁들이 가져온 엄청난 후과에 비해 너무나 가볍게 건성으로 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오히려 제가 디오뉘소스 극장 무대에서 여러분께 소개해 올렸던 앗티케의 농부 다카이오폴리스와 트뤼가이오스, 아테나이의 아낙네 뤼시스트라테가 말하는 전쟁의 이유, 싸우면 이긴다는 오만함이 이겨서 빼앗는다는 탐욕을 불러일으켜 사소한 일로 트집 잡아 전쟁을 벌인다는 말이 더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들 셋은 한결같이 그렇게 일어난 전쟁이 얼마나 심하게 그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하소연하며 전쟁을 끝내고 모두들 평화롭게 살자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쟁을 일으킨 도시의 도시민의 삶이 엉망이 되는 판에 전쟁에 몰린 상대도 그냥 가만히 앉아서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는 물론 재물마져 빼앗길 리 없으니 그들의 삶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결국에 전쟁은 전쟁을 일으킨 도시와 도시민들도 그만큼의 고통과 희생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결국 서로가 다 망하는 폐해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호메로스도 헤로도토스도 투퀴디데스도 모두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이유들을 찾았지만 그 전쟁의 후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앞선 두 전쟁의 원인은 원인대로 후과는 후과대로 여러분과 함께 짚어보면서 우리가 겪었던 그 전쟁의 후과가 과연 어떻게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12.9  먼저 트로이아 전쟁의 경우, 아가멤논이 바람나 달아난 제수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면서 전쟁에 나섰다고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듯 천금을 기대하며 아가멤논을 따라나선 헬라스 도시들의 원정군 역시 그들의 전쟁이 10년을 끌 것이라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형제가 막강한 뮈케나이와 스파르테의 정예를 앞세우고 헬라스 제일의 싸움꾼 아킬레우스까지 출전한 전체 헬라스 원정군이 이방인의 땅에서 번영을 누리는 트로이아라는 같은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 하나를 무너트리고 그 도시 재산을 빼앗아 돌아오는 일은 정말 일도 아니어서 너도 나도 배를 내고 군대를 태워 아이가이온 바다를 건너 헬레스폰토스로 향했지요. 군세를 보아 전쟁에서 질 리가 없다는 오만함과 이겨서 천금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탐욕은 그들에게 닥칠 10년의 고초를 가렸고, 도착해서 벌어진 첫 전투로 뮈케나이 연합군은 트로이아를 돕기 위해 인근의 헬라스 도시들과 아나톨리아 사람들 도시들의 지원군까지 모인 트로이아 연합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아폴론 신전도 약탈하며 원정의 성공을 약속받는 듯했지만, 이 약탈을 시작으로 뮈케나이와 트로이아는 서로의 진을 빼는 공성과 농성으로 10년을 지새운 다음, 더 이상은 서로가 서로를 칠 수 없게 피폐해지자 그제서야 겨우 말도 안되는 목마로 전쟁을 끝내기로 했고, 돌아가는 뮈케나이 연합군의 소식은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와 오딧세우스 셋 뿐이었으며, 트로이아 연합군의 소식은 남은 트로이아 사람들을 데리고 트로이아를 버리고 이탈리아로 떠난 아이네이아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10년에 걸친 트로이아 전쟁 뒤 트로이아가 폐허로 모두에게 잊혀졌듯이 헬라스 세상에는 돌아온 아가멤논 집안의 비극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허무한 몰락처럼 아카이오이 사람들의 자취가 사라지고 도리에이스 사람들이 들어와 그들의 행적이 새로운 이야기로 되기까지 500년이 지나는 동안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가 도무지 깜깜한 암흑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실제 트로이아 전쟁의 이유도 후과도 말하지 않는 개전 초 나흘 동안에 분출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하나의 삽화일 뿐이지만 그 이야기 속엔 높은 사람들은 높은 대로 낮은 사람들은 낮은 대로 제각기 그들의 오만과 탐욕이 야기한 역병과 전투와 불화로 인한 파멸이 곳곳에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서사연화[각주:11]라며 구전으로 듣는 가이아를 위한 제우스의 트로이아 전쟁 결심 이야기가 바로 트로이아 10년 전쟁의 이유이자 후과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아카이오이 사람들은 그들의 싸우면 이긴다는 오만과 이겨서 남의 재물을 얻는다는 탐욕이 그들 자신과 헬라스 세상을 어떻게 패망시켰는지를 500년 넘게 암흑천지 속에 살며 후손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하게 했던 것이었고, 500년이 지나서 사람들이 암흑을 벗어날 무렵 호메로스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쟁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며 헬라스 세상에서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를 노래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호메로스는 장님이라 세상을 밝은 빛으로 볼 수 없었지만 트로이 전쟁에 대한 구전으로부터 전쟁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밝게 비추어 볼 수 있었기에 전쟁의 처음과 끝인 오만과 탐욕의 전말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라는 두 노래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쟁을 경계토록, 오만과 탐욕을 경계토록 일깨웠던 것이었습니다.

 

12.10  다음으로, 헬라스 세상을 뒤집어놓았던 페르시아 전쟁의 경우 역시 또 다른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헬라스의 하룻강아지 아테나이의 오만과 탐욕에서 비롯되었지요. 물론 흙과 물을 바치라며 엄청난 군대를 동원해 헬라스 세상을 침공한 페르시아의 오만과 탐욕이 일으킨 페르시아의 헬라스 원정 전쟁에 대해 조사해 보고서를 낸 헤로도토스가 온 세상의 한 작은 도시 아테나이에게 그 엄청난 전쟁의 책임을 모두 전가시키지는 않았지만, 아테나이의 작은 오만과 탐욕이 페르시아의 큰 오만과 탐욕을 건드렸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 책임을 굳이 가리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조사보고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말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이면서, 그 힘을 가늠해볼 수조차 없었던 아테나이의 헬라스 바깥 세상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쉽게 사르데이스Sardeis에 쌓인 금은보화에 대한 뻥튀기와 그것들을 지키는 얼마 되지 않는 군대의 창은 짧고 방패는 무르다는 꼬드김 앞에 싸우면 이기고 이기면 빼앗는다는 자신감으로 바뀌어 갔는지를 같은 유혹을 물리친 스파르테와 견주며 지나가는 말처럼 적어놓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그 다음은 여러분 모두 잘 아시다시피 그 자신감이 결국 아테나이를 사르데이스로 출동시켰고, 어수룩한 야반 기습으로 약탈은커녕 사르데이스를 불태우는 바람에 혼비백산 달아났고, 이 일이 헬라스 세상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수사의 다레이오스에게 별 것 없는 헬라스 세상과 그 세상의 하룻강아지 아테나이를 혼내야겠다고 벼르게 했고, 결국 페르시아 군대를 세 번이나 헬라스 세상에 불러들였고, 천신만고 끝에 이방인들을 물러나게 할 수 있었던 사연을 적었습니다. 도리에이스 사람들이 아나톨리아의 카리아 지방에 세운 작은 도시 할리카르낫소스 출신의 한 여행자 헤로도토스가 주저리 주저리 적을 수 있었던 헬라스 바깥 세상의 물정을 아무리 참주가 반백년 아테나이 사람들을 옭아매었었다 쳐도 어떻게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렇게 모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테나이와 같은 이오네스 사람들이 세운 도시 밀레토스의 참주를 수사에 인질로 보내고 있던 참주대리 아리스타고라스가 어찌 헤로도토스보다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스파르테의 왕에게 아나톨리아의 헬라스 사람들을 노예에서 자유민이 되도록 도와달라면서 천연덕스레 이방인들은 용맹하지 않고 창은 짧고 방패는 무른데도 돈은 많으니 이겨서 다 가질 수 있다고 꼬득였습니다. 물론 지도를 놓고 아나톨리아에서 페르시아 수사에 이르는 각지의 사정을 간략히 설명하기도 했지요. 자기들은 힘이 없어 노예가 되었지만 스파르테의 힘이라면 쉽게 자기들을 구해줄 수 있다고요. 그러나 스파르테를 아나톨리아로 끌어들이려던 아리스타고라스의 간교함은 이틀 간의 숙고 끝에 나온 클레오메네스와의 문답 한 번에 무너지고 말았지요. 클레오메네스는 이오니아에서 수사까지 얼마나 걸리느냐 묻고 아리스타고라스는 무심코 사실대로 석 달 걸린다고 답하니 클레오메네스는 석 달이나 걸리는 내륙으로 스파르테 사람들은 가길 원치 않을 거라며 원정을 거절합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아나톨리아의 헬라스 도시들 자유를 위해 아나톨리아로 출병하면 해방자가 되면서 동시에 많은 부를 얻을 것이라 했지만, 스파르테는 그들이 아나톨리아 사람들이 아닌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예속된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해방은 그들 역시 페르시아에 예속된 아나톨리아 사람들이 아니라 페르시아를 쳐부수어야 얻어지며 부의 획득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까지 꽤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차 싶은 아리스타고라스가 탄원자 신분으로 수사로 가는 석 달의 길이 그저 먹기라며 뇌물까지 제시하지만 이번에는 뒷날의 테르모퓔라이의 전사, 아버지의 배 다른 동생 레오니다스의 아내가 될 클레오메네스의 여덟 살 난 외동딸 고르고에게까지 못된 사람으로 찍혀 쫓겨나는 치욕을 당했지요. 그런데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 아리스타고라스가 3만명이 모인 아테나이 민회에서 똑같은 말로, 물론 3만명에게 모두 클레오메네스에게 제시했던 50탈란톤을 준다고 할 순 없어 그 말만 빼고, 밀레토스는 아테나이의 식민도시가 아니냐, 해방시켜달라, 페르시아의 창은 짧고 방패는 무르다, 온갖 재물이 도처에 널려 있다, 등등 여러 약속들로 사정했는데, 아테나이 민회는 물어볼 것도 따질 것도 없이 덜컥 그 자리에서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과연 아나카르시스가 한 말 그대로입니다. 아테나이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은 토론하고 결정은 바보들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우리 아테나이 사람들이 언제 한번 바보였던 적이 있었나요? 수사가 어디 붙었는지 몇 달 걸려 가는지 알 필요가 없었어요. 우선 사르데이스로 가서 약탈하고 돈이 생기면 그 다음 밀레토스고 해방이고 뭐고 돈이 더 생길 곳부터 달려가면 되는 문제였지요. 그래서 곧장 가서 에페소스에 배를 남겨두고 사르데이스로 가서 야습하다 불을 내고 놀라서 도망쳐왔고, 소식을 들은 수사의 다레이오스가 제국의 변방에 헬라스라는 지역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가운데 아테나이라는 맹랑한 도시 하나가 제국에 예속된 밀레토스라는 도시 하나와 짜고 반기를 들 정도의 세력을 가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다레이오스가 시종들에게 아테나이 응징을 잊지 못하게 매일 외치도록 했으니 페르시아의 콧털을 불로 지진 것이었지요. 헤로도토스는 그의 조사보고서에서 직접적으로 "오만"이란 말이나 "탐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이 말이 나오면 제가 붙인 말이라 아시면 되겠습니다. 그는 그의 이야기 실마리를 뤼디아Lydia의 도시 사르데이스에서 풀어갑니다.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Kroisos가 부와 영광을 누리는 가운데 지혜를 찾는 여행자이던 아테나이의 솔론을 접견하고 나누는 대화를 소개하면서 솔론이 꼽는 행복한 삶, 즉 건강하고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헬라스 사람들의 삶과 뤼디아라는 왕국을 가진 크로이소스가 누리는 부와 영광, 바꾸어 말해 오만과 탐욕의 삶을 대비해 보여주지요. 그리고 헤로도토스는 크로이소스의 아들이 죽는 개인적 불행과 페르시아를 치다 퀴로스가 이끄는 메디아 군대에 패해 크로이소스와 뤼디아 왕국이 망하고 아나톨리아가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되는 과정을 소개한 뒤, 본격적으로 페르시아가 퀴로스, 캄비세스, 다레이오스에 이르는 3대에 걸쳐 바뷜로니아, 아이귑토스 등을 정벌해 페르시아 제국을 완성시킨 이력을 펼쳐보이는데, 이는 순전히 페르시아 제국이 얼마나 넓고 강력하며 그 왕 다레이오스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헬라스 사람들 모두가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였지요. 그리고 다레이오스가 직접 흑해 서부 연안에 흩으져 사는 스퀴타이 사람들에 대한 원정에 나서고, 이 원정의 여파로 헬라스 인근 지역 트라케와 마케도니아를 아나톨리아의 군대가 아니라 메가바조스가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로 정벌하고 그들의 기지와 도시들을 건설하기에 이르자, 이 일련의 페르시아 군사활동에 따라나서 낙과를 주우려 원정을 지원하고 나섰던 아나톨리아의 헬라스 사람 도시들이 반발하게 되었지요. 이런 반발을 예상한 다레이오스는 밀레토스의 참주 히스티아이오스를 왕의 조언자라며 수사로 데려가 인질로 잡아두기까지 했습니다. 밀레토스의 참주대리가 된 히스티아이오스의 사위 아리스타고라스가 아나톨리아의 다레이오스 대리인들을 끼고 히스티아이오스가 꿈꾼 아나톨리아 헬라스 도시들의 지위 향상과 트라케 진출을 위해 보인 여러 방법들이 무산되자 결국 반기를 들기 위해 헬라스의 스파르테를 찾았다 일이 틀어져 아테나이로 가는 동안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퀴로스로부터 캄비세스에서 다레이오스까지가 엄청난 정복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는 시기에 헬라스 세상은 무슨 일들이 일어나 어떻게 바뀌고 있었는지 참주에서 벗어나 민주정을 택한 이후 아테나이의 변화를 중심으로 설명하는데, 그의 요점은 아테나이가 어떻게 전쟁을 하면 이길 수 있고 이기면  돈이 생긴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12.1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헤로도토스가 조사보고자답게 아테나이의 변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므로 잠시 헤로도토스의 조사보고서를 접어두고, 저는 그의 조사보고 내용을 바탕으로 그가 말하는 아테나이의 변화가 종래에 지금 우리가 사는 아테나이의 모습, 전쟁 아니면 도시가 멸망할 것 같아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다 이제는 진이 다 빠져버려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엄두도 낼 수 없는 도시의 모습으로 결정지었다는 저의 견해를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만 저는 헤로도토스와는 달리 기왕에 그가 크로이소스를 만나는 솔론을 소개했던 만큼 솔론의 시대부터, 그리고 그는 연대를 따로 비교하지 않았지만, 이를테면 헤로도토스가 그의 보고서 서두를 뤼디아에서 시작하면서 크로이소스가 35살의 나이로 아버지 알뤼앗테스의 뒤를 이어 뤼디아의 왕이 되었다고만 했지 그해에 48살의 나이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테나이의 첫 참주가 된 사실과 비교하지 않았지만, 저는 페르시아와 아테나이의 중대한 변화 시점들에 대한 연대도 비교해 말씀드리고자 하니 여러분 스스로 그 변화들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저의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12.12  솔론이 성장할 즈음 주위에 사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고, 아버지가 너그러워 남을 돕기 좋아하여 재산이 남아 있질 못했는데, 성인이 된 솔론은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다른 도시들과 해외를 돌며 장사를 하면서 돈도 벌고 세상 물정도 많이 배웠지요. 그러나 그의 도시 아테나이는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빚진 사람이 늘어나 자유 농민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 되거나 심지어 아테나이에서 버티지 못하고 다른 도시로 가 노예가 되는 등 도시를 지탱하던 중산계층이 붕괴하자 도시가 그 기능을 제대로 해나갈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한 세대 앞서 헬라스 세상에 불어닥친 참주정 유행 탓으로 아테나이의 두 명문가 출신 퀼론과 메가클레스가 격돌해 참주가 되려던 퀼론가는 패망하고, 이를 막던 메가클레스는 복수의 신 성역에서 륄론 형제와 그 수하들을 죽이는 피바람을 불러일으켜 도시가 저주받았다며 그 자신과 가족과 선조들까지 파묘 축출되었는데, 이 일로 도시의 두 지도층이 일시에 사라지면서 부자들의 탐욕과 빈자들의 무력함만 남아 도시를 황폐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드라콘이 피를 부르는 강력한 처벌법으로 막아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을 정도로 테세우스가 확립한 아테나이의 직업별 사회계층 구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이지요. 어느 정도 재물이 모이자 아테나이로 돌아온 솔론은 아테나이가 메가라의 압력에 시달려 그의 고향 살라미스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무력해진 것을 보고 직접 의병을 일으켜 섬을 지킬 정도로 도시의 일에 정성이 깊었고, 사람들은 이런 솔론을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가 더 이상 그대로 두다간 도시가 그냥 무너져내릴 것 같자 결국 아테나이 사람들은 솔론에게 왕이 되어도 좋으니 도시를 새로 일으켜세우라고 아테나이를 맡겼습니다. 솔론은 그냥 아르콘으로서 도시의 재건에 나섰는데, 이웃 도시에서 아테나이를 기웃거리며 살던 알크마이온 사람들을 포함해 다른 도시에서 노예로 살던 사람들까지 모두 돌아오게 하는 한편, 크레테의 현인 에피메니데스를[각주:12] 초청해 도시가 저주받은 일을 정화한 다음, 허물어진 역활별 계층 구분 대신 각자가 가진 재산의 정도에 따라 사회 계층을 구분하여, 계층에 따라, 다시 말해 가진 재산의 다소에 따라 도시 일을 맡는 범위를 정했고, 다만 그날 벌어 그날 먹는 계층인 테티스들에게는 민회의 참석을 통해 도시의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면서, 아테나이 시민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무기를 가지듯 자기 생계를 이을 기술 하나씩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의  도시 일에 자기의 소견을 가지고 찬반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며 동참할 것을 주문해, 도시가 도시민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도시민이 스스로 도시 일을 수행하도록 바꾸어 나갔고, 아울러 채무자의 빚을 경감해 더 많은 자유민이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명목가치를 절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개혁을 마쳤고, 향후 10년 동안 자신의 법을 지켜나가라는 당부를 남기고 아테나이를 떠나 새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화폐개혁을 미리 안 사람들이 그전에 미리 큰 돈을 빌려 많은 땅을 사서는 화폐개혁으로 액수가 줄어든 빚을 한두 해 농사 수입으로 갚는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애저녁에 쑤어놓은 죽처럼 삭고 말았고, 정치는 정치대로 돌아온 알크미이온 집안과 그 적대 세력 그리고 신진 세력을 대표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 등이 각각 해안당이니 산록당이니 하며  사사건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통에 몇 해 지나지 않아 순번제로 나오는 아르콘조차 뽑을 수 없어 그 숫자를 늘이기도 줄이기도 하는 등 혼란을 멈출 줄 몰랐고, 솔론은 생계를 이어갈 기술이라도 하나 익혀 혼자 독립적으로 가정을 영위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민이 될 수 있다고 각자 도생을 권유했지만 그 기술이 하루 아침에 생길 리도 만무하고 설사 어찌어찌 기술을 하나 익혔다 한들 써먹을 데가 없는 도시 속에 그냥 버려진 체 살 수밖에 없는 상태로 되어, 아테나이는 솔론의 개혁 후에도 한 세대 동안이나 그렇게 혼돈 속에 살아야 했었습니다. 이런 혼돈은 그전에 한번 권력을 잡았으나 알크마이온 집안에 의해 쫓겨나 에우보이아며 텟살리아로 전전하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그곳 사람들이 지원해주는 병력으로 아테나이로 돌아와 아테나이의 첫 번째 참주가 되면서 끝이나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늙은 솔론이 아테나이 시민 모두들에게 각자 집에 있는 무기를 들고나와 이를 막자고 했으나 누구도 듣지 않았고, 심지어 퀼론이 데려온 메가라 군인들이 왔을 때에는 들판에서 농기구를 들고와 그들을 몰아냈던 농부들조차 움직이지 않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야말로 무혈입성하고 아테나이의 참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12.13  아테나이 사람들이 다른 도시 군대가 들어와 아테나이 아고라에 도열하고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길을 막아섰는데도 그냥 쳐다보기만 할 뿐 쫓아낼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제일 먼저 놀라 급한 대로 손에 잡히는 재물만 챙겨 아테나이에서 달아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알크마이온 집안의 메가클레스를 위시한 아테나이의 전통적 지주들이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적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다른 도시 군대를 동원해 아테나이를 차지하려는 사실보다 오히려 많은 그들의 소작농들조차 그 군대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렇다면 혹시 그들이  페이시스트라토스보다 먼저 그들에게 분노에 차서 농기구를 들어내밀 것 아닌가 두려워서 달아났던 것이지요. 그리고 얼마 길지 시간이 지나 도시가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참주로 받아들이면서 평온을 되찾아가자 또 다시 아테나이를 떠나는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나이 일흔을 넘긴 노구의 솔론이었습니다. 다시 돌아와 30년 이상을 지켜본 아테나이는 그에게 많은 실망과 좌절감을 안겨주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자유민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아테나이 사람들이 어느날 하루 아침 각자 무기를 들고 나서자며 일흔의 몸으로 무기를 들고선 그의 눈 앞에서 스스로 참주의 노예가 되기로 작정하고 돌아서는 것을 보게 되자 절망하여 자기가 아테나이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12.14  참주가 혹시 암살자라도 보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망명자들이 남긴 제법 되는 땅과 재산에다 30년 이상 도외시했으나 뜯어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합당한 솔론이 남긴 개혁법까지 수중에 넣은 참주가 스스로 노예가 될 테니 그저 잘 먹고 잘 살게만 해달라는 사람들을 위해 산간을 개척하고 물산을 장려하며 대외로 교역을 넓혀 가기 시작할 때, 배를 타고 아테나이를 떠난 솔론이 방문한 아이귑토스는 젊은 그에게 아틀란티스를 이야기해주던 사제도 죽고 없어 파라오 아마시스Amasis를 만나보긴 했으나, 나라 자체가 그저 오랜 평화와 그 덕분에 쌓인 부를 즐기며 사는 늙은이처럼 고요했고, 다시 들린 사르데이스에는 얼마 전 왕이 된 크로이소스가 그에게 닥쳐올 환난을 모른 채 오만과 탐욕을 번득이며 그의 영화를 자랑하면서 헬라스 사람들을 조롱하듯 늙은 시인을 향해 헬라스 사람들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 묻고 있었는데 반해, 놀랍게도 그가 만난 아나톨리아의 헬라스 사람들은 할뤼스Halys 강 서쪽의 모든 아나톨리아를 장악한 그곳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씌어놓은 종속의 끈에 힘들어하고 있었고, 그보다 동쪽 고원에 자리한 메디아의 왕 퀴악사레스Kyaxares의 뒤를 이은 아스튀아게스Astyages의 호전적 국세 확장과 그의 아버지 퀴악사레스와 함께 앗쉬리아Assyria를[각주:13] 도모한 새 바뷜로니아 왕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의 움직임에 더 주목하며, 비록 메디아와 뤼디아가 5년이나 전쟁을 하다 메디아의 퀴악사레스의 죽음을 앞두고 휴전했지만 그 뒤를 이은 메디아의 왕 아스튀아게스와 뤼디아의 크로이소스가 서로 별다른 적대적 기세를 보이고 있지 않는데도, 바뷜로니아가 펼치는 압박으로 입는 포이니케와 아람의 유대 사람들이 두 번이나 바뷜론으로 잡혀 가는 어려움이[각주:14] 아나톨리아의 주로 바다를 끼고 사는 헬라스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때문인지 새로운 세력이 세우는 새로운 질서가 세상을 뒤덮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아무도 몰랐지만, 나중에 커서 세상을 뒤엎는 아이를 낳는다는 어머니 만다네Mandane,Mandana의 꿈 때문에 외할아버지 메디아 왕 아스튀아게스가 그래도 위협이 되지 않는 안산Anshan의 왕 캄뷔세스Kambyses에게 만다네를 시집 보내고, 만다네가 아들 퀴로스Kyros를 낳자 인질로 메디아로 데려와 온갖 핍박을 가하며 키우다 열 살이 넘어서야 그런 기상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고 아버지 캄뷔세스의 궁전 엘람의 안산으로 돌려보낸 일이 있었는데, 크로이소스가 뤼디아의 새로운 왕이 되고 헬라스의 아테나이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가 된 이듬해 만다네가 낳은 그 퀴로스가 조용히 저 멀리 엘람의 안산에서 아버지 캄뷔세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12.15  아테나이도 도시 도시민의 자유와 안전을 위협받았던 적이 이온이나 테세우스 시절에 몇 차례 있긴 했었지만, 비교적 오래 동안 도시와 도시민의 자유와 안전을 별 어려움 없이 지키며 살아왔었는데 이는 참주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주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자신이나 도시의 경호와 치안을 맡기지 않고 돈을 주고 텟살리아의 기병, 에우보이아의 중무장보병, 스퀴타이 궁수를 사서 썼습니다. 아마도 경호나 치안을 맡는 아테나이 사람들이라면 자신을 쳐서 꺼꾸러트릴 수 있다고 본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참주의 태도는 보이오티아와 에우보이아 심지어 메가라에게도 우호적이어서 참주 때문에 주위 도시들로부터 공격당할 일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도시와 도시민의 자유와 안전을 지키는 수단이 군대 말고도 또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지요. 그리고 아테나이 내부에서 일어날 정치적 도전은 우선 평소의 정적들이 달아나 그들이 알아서 미리 차단해 주었고, 밀티아데스처럼 당장은 고분고분하지만 언제든 고개를 쳐들 세력은 서로 좋은 게 좋은 방법으로 케르소네소스 같은 곳으로 이주시키기도 하고, 달아난 정적들 대부분은 죽거나 병약해졌지만 알크마이온 집안 메가클레스의 아들 클레이스테네스처럼 망명지에서 지속적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일을 꾸미는 경우 특별히 불러 아르콘 직을 맡겨 회유해 보기도 하면서, 아테나이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태평한 가운데 잘 먹고 잘 살도록 해주자 자연히 사람 수도 늘고 도시가 커졌습니다.

 

12.16  이렇게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테나이의 참주가 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30여년을 성공적으로 아테나이를 키워나가는 동안, 마흔을 갓 넘긴 안산의 왕 퀴로스 역시 열 살에 돌아와 30여년 동안 많은 페르시아 사람들과 지내다가 온순하기만 한 아버지 캄뷔세스가 죽어 안산의 왕이 되자 발 빠르게 자기의 힘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먼저 자신의 부족인 페르시아 사람들을 결집시켜 10년을 두고 외할아버지 아스튀아게스의 눈을 피해 조금씩 안산에서 수사로 자신의 세력을 엘람 전체에 펼쳐나갔지요. 그러나 아무리 눌러도 끊는 물이 뿜는 뜨거운 김을 감출 수는 없는 법, 눈치를 챈 아스튀아게스가 소환장을 보냈고, 퀴로스의 소환일자보다 빨리 가겠다는 답이 무슨 말인지 모를 리 없으니 메디아의 전군을 소집하여 출동시켰는데, 하필이면 그 사령관이 갓난아이 퀴로스의 목숨을 구해 키우고 퀴로스가 안산에 와서도 서로 연락하고 지내던 하르파고스라 그 둘의 싸움은 싸움이 될 수 없었지요. 결국 메디아의 모든 남자들을 노소 구분 없이 무장시켜 출동한 아스튀아게스가 대군을 잃고 포로로 붙잡혀 싸움이 끝났고, 퀴로스는 안산 왕이 된지 10년이 채 되지 않아 메디아 왕을 더하면서 페르시아 사람들을 메디아의 종속에서 벗어난 자유인으로 풀고, 메디아 사람들을 페르시아에 종속시키는 일을 해냈습니다. 아스튀아게스를 외할아버지로 부양하며 메디아 왕으로 4년여를 엑바타나에서 지내며 메디아의 안정을 지켜보고 있는 퀴로스에게 메디아와 앙숙인 뤼디아의 크로이소스가 먼저 전쟁을 걸어왔는데, 엎드려 있어도 봐줄까 말까 한 판에 벌써부터 크로이소스가 메디아를 평정한 퀴로스를 겨냥해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가 사방에서 들려오더니 설마 하는 사이 기어코 할뤼스 강을 건너 캅파도키아를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아나톨리아에는 서쪽 해안에 많은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가 뤼디아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퀴로스는 이들 도시에 사람을 보내 뤼디아에 가담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한편 즉각 점령지에서 차출한 군대로 캅파도키아로 나아갔고, 프테리아에서 크로이소스 군대를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월등한 병력을 가지고도 기병과 전투력이 뛰어난 용병들이 주축을 이룬 크로이소스 군대를 누르지 못했고, 뛰어난 기병과 용병의 전투력으로 선전했으나 숫자가 적어 이길 수는 없다고 판단한 크로이소스는 이미 엮어둔 아이귑토스, 바뷜로니나, 그리고 제일 먼저 합류할 헬라스의 스파르테에까지 동맹군을 받아 전투력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우세를 갖춘 뒤 다시 붙을 작정으로 퀴로스 군대가 공격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사이 철군해 사르데이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퀴로스는 다시 군대를 소집해 돌아올 생각이 없었지요. 며칠 간 아나톨리아 원정에 필요한 보급품들과 지난 전투로 잃은 병력을 보충한 뒤 지체없이 사르데이스로 진군했는데, 보급품을 나르는 부대에 낙타부대를 포함시킨 것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이제 곧 겨울이 닥쳐올 것이고 지원군은 넉 달 뒤 초봄에 도착시켜달라 연락을 보내면서 용병들도 그때를 기약하고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는데, 득달같이 달려온 퀴로스 군대를 본 크로이소스는 동맹들에게 지원군을 한 달 안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사절들을 띄우면서 우선 손에 닿는 모든 병력을 대동하고 기병을 앞세워 전투에 나섰지만, 뤼디아의 말들이 메디아 군대가 앞세운 낙타 냄세에 질려 물러서는 바람에 나머지 보병들이 열심히 싸웠는데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사르데이스 성벽 안으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한 달은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보고 한 달 안에 지원군을 보내달라 했지만 한 번의 전투로 성 안으로 쫓겨 들어온 크로이소스는 가장 가까이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헬라스의 스파르테에 당장의 지원을 요청했고, 작은 땅을 두고 아르고스와의 분쟁을 마침 끝낸 스파르테가 막 사르데이스로 출정하려는데 사르데이스가 함락되고 크로이소스가 퀴로스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12.1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결국 크로이소스가 자신의 오만과 탐욕보다는 애매한 내용의 델포이의 신탁을 탓하긴 했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말했지요. 바로 평화보다 전쟁을 택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평화 때는 아들이 아버지 장사를 치르지만 전쟁 때는 아버지가 아들 장사를 치른다고요. 어떻게 보면 보름이나 꺼떡없던 사르데이스가 퀴로스 군대의 휘로이아데스라는 마르도이 병사가 우연히 목격한 성벽을 오르는 길, 뤼디아 병사 하나가 성벽에서 내려오더니 떨어트린 투구를 주워서 다시 올라가는 걸 본 길, 그 길로 올라간 퀴로스 군대에 단숨에 무너진 일에 대해 제가 말하는 크로이소스의 오만과 탐욕 때문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보다 델포이의 퓌티아가 말하는 헤라클레스 왕가의 친위대원이었던 크로이소스 5대조 귀게스가 저질렀던 헤라클레스 왕가에 반역과 찬탈의 대가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구체적이고 인과가 분명하겠지만, 크로이소스로 하여금 평화보다 전쟁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택하도록 한 것은 귀게스의 악행보다는 열혈 청년 시절에 벌어졌던 메디아와의 5년 전쟁 그리고 아버지가 죽고 왕이 된 뒤 할뤼스 강 서쪽의 모든 아나톨리아를 평정하고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까지 종속시킨 자신감에서 생긴 전쟁을 하면 이긴다는 그의 오만으로 먼저 가만히 있는 메디아를 치고, 이기면 어디에서든 재물이 생긴 다는 탐욕이 메디아의 부도 자기 것으로 하고자 스스로 전쟁을 택하게 만든 때문인 것입니다.

 

12.18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뤼디아 왕국을 없앤 전화가 퀴로스와 내통한 밀레토스만 빼고 퀴로스 편에 서기를 거절했던 아나톨리아의 헬라스 도시들에만 덮치고, 사르데이스로 가지 않았던 스파르테 덕분에 헬라스 세상까지는 번지지 않았는데, 아나톨리아를 손에 넣은 퀴로스가 자기 편에 서는 걸 거부한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들에 대한 엄하게 다스리고 나오자 이들은 판이오니온에 한데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크로이소스처럼 사람을 보내 스파르테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스파르테는 원군을 보내는 대신 정탐을 목적으로 사람을 보내 사르데이스의 퀴로스에게 헬라스 도시들을 핍박하지 말 것을 요구토록 조치했지만, 스파르테와 그 도시들의 본거지 헬라스 세상에 대해 알아보곤 평소 바다를 건너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퀴로스가 간단히 자기 걱정이나 하라며 튕기는 정도로 끝내고 헬라스 도시를 처벌할 군대는 따로 보낼 생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르데이스에서 뤼디아 왕이 되는 대신 아나톨리아를 다스릴 왕의 대리인 격으로 페르시아 사람 타발로스를 총독으로 두고, 뤼디아 사람 팍튀에스에게는 크로이소스의 것과 그 밖의 황금을 모아 운반해올 일을 맡긴 뒤 퀴오스가 크로이소스를 데리고 메디아 엑바타나로 돌아가자, 팍튀에스가 황금을 미끼로 뤼디아 사람들의 반란을 부추겨 사르데이스의 타발로스를 공격했고, 도중에 소식을 들은 퀴로스가 크로이소스에게 뤼디아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묻자 크로이소스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퀴로스가 뤼디아 사람 전부를 죽이자고 나올까봐 아예 반역이 불가능하도록 반역 가담자들은 처단하거나 노예로 처분하고 나머지 뤼디아 사람들은 무구를 소지 못하게 하고 바지도 못 입게 하고 악기를 다루거나 장사나 해서 먹고살도록 하면 좋겠다고 했고, 퀴로스는 메디아의 마자레스에게 팍튀에스는 생포해오라며 이 일을 맡기고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마자레스가 퀴로스 군을 데리고 나타나자 반역자들은 흩으졌고, 팍튀에스는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 퀴메로 달아났지요. 마자레스는 사르데이스를 공격한 반역자들을 잡아 노예로 팔라고 하고, 포고령을 내려 뤼디아 사람들에게 크로이소스가 말한 대로 살도록 당장 조치한 뒤, 팍튀에스를 잡으러 퀴메로 갔습니다. 퀴메에서는 탄원자 신분인 팍튀에스의 보호와 인도를 놓고 신탁을 묻는 등 설왕설래하다 레스보스 섬의 미튈레네로 보냈고, 미튈레네가 돈 받고 팔려고 하자 퀴메 사람들은 키오스로 데려갔고, 키오스는 단박에 마자레스에 넘겨버렸고, 대가로 레스보스 섬 건너의 땅을 한 조각 받았습니다. 팍튀에스를 엑바타나로 호송한 뒤 마자레스는 반역자들을 노예를 팔고 그들의 출신 지역에 군대를 풀어 약탈토록 했습니다. 소동이 끝난 뒤 병으로 죽은 마자레스 뒤를 이어 어린 퀴로스를 살란 메디아의 하르파고스가 왔고, 헬라스 사람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했는데, 더러는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가 하면 더러는 버티다 종속되기도 했지만 밀레토스는 일찌기 퀴로스에 가담했으므로 화를 피했습니다.

 

12.19  아나톨리아는 새로운 통치체제에 적응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아이가이온 바다 너머 헬라스 세상은 무슨 일이 있었냐 싶게 조용했습니다. 열다섯 해나 된 참주체제에 익숙해진 참주와 아테나이 사람들은 개간한 땅에서 나는 올리브와 포도로 기름 짜고 술 담궈 붉은 흙으로 빚은 토기에 담아 파는 쫀쫀한 수입에 재미를 붙여 스파르테가 메넬라오스 이후 800년만에 아나톨리아 원정에 나설 뻔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아테나이 안에서 자기들끼리 오손도손 지내고 있었습니다.

 

12.20  헬라스 세상이 그들만의 작은 평화를 즐기는 동안,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메디아로 돌아온 퀴로스는 넓고 커진 통치지역을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해 남쪽의 안산을 떠나 니네베 앗쉬리아의 침공을 받아 파괴된지 근 10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버려진 메디아의 엑바타나와 가까운 북쪽 엘람의 수사로 근거지를 옮겼고, 수사를 다시 건설하고 자리를 잡자 5년에 걸쳐 수시로 메디아와 엘람의 동쪽 지역 순무에 나섰는데 박트리아를 지나 인도의 간다라까지 다니며 동쪽 지역을 평정하여 메디아와 엘람과 페르시아를 축으로 파티아와 박트리아를 아우르는 자신의 본거지를 구축한 뒤 이곳을 페르시아 제국[각주:15]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안산의 왕이 된 지 스무 해가 지난 쉰여섯의 퀴로스가 드디어 바뷜로니아로 나아갔습니다. 페르시아 왕이라는 새로운 기치를 앞세우고 말입니다. 퀴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세우면서 서쪽에 치우친 수사에 머문 것도 동쪽의 나보폴랏사르가 바뷜론으로 가서 세운 그리고 당시 라뷔네토스가 다스리는 새로운 바뷜로니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지역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된다면 수사야 말로 그 제국의 중심지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 스무해 동안 퀴로스는 자신의 조상의 땅 페르시아와 엘람과 메디아와 뤼디아와 나머지 곁에 붙은 지역들을 합해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고, 이제 새롭게 페르시아의 이름으로 이 새로운 제국의 확장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12.2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헤로도토스는 이때 퀴로스가 앗쉬리아 정벌에 나섰다고 했으나 퀴로스가 바뷜론을 치려고 귄데스 강을 건널 때는 이 세상에 거대한 제국으로 처음으로 나타났던 앗쉬리아는 이미 퀴로스의 두 세대 전 사람들이었던 메디아의 키악사레스와 칼다이오이 사람들이 바뷜론에 새로 세운 바뷜로니아의 나보폴랏사르 연합군에게 니노스를 잃고 사라지고 없었고, 그 앗쉬리아 제국이 남긴 나라들을 다시 차지하고 흥청거리던 새로운 제국 바뷜로니아였어요. 잠시 여러분께 그 앗쉬리아 제국에 대해 설명드리고 가는 것은 이 첫 거대한 제국이 어떻게 이를 이은 그 다음 제국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유산이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종속의 굴레가 씌워진 나라나 도시 가운데 어떤 나라나 도시는 떨치고 일어나 제국의 계승자가 되며 어떤 나라나 도시가 또 다시 숙명처럼 종속의 굴레를 받아들이는지 한번 생각해보고 다시 한 도시가 어떻게 종속에 익숙해지는지에 대한 이이야기를 이어가자고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12.22  사실 헬라스에 흩으져 살며 혹독한 암흑기를 헤쳐온 이온의 자손들이 다시 여기 저기 모여 도시를 열기 시작할 즈음에 메소포타미아 북동쪽 티그레스 중상류에[각주:16] 푸주르 아슈르Puzur Ashur라는 사람이 도시를 세우고 아슈르Ashur라 불렀는데,[각주:17] 서쪽으로 에우프라테스에도 여러 도시가 생길 정도로 세력이 커지자 앗쉬리아[각주:18]라는 나라가 되었지요. 헬라스 사람들이 이탈리아 남쪽에 이주하여 여러 도시들을 세울 무렵에는 농사가 아니라 오히려 이웃보다도 아주 먼 도시들 간의 중계무역에 열중하여 바뷜로니아가 버려둔 인근 지역을 병합하며 세력을 키울 수 있었으나, 하류의 맡 악카디를 장악한 아몰라이오이의 침입으로 앗쉬리아의 첫 번째 왕조인 푸주르 아슈르 왕조가 끝나버렸고[각주:19], 당시 지휘관이던 함무라비의 부왕 신 무발리트Sin-Muballit 때 아슈르 인근 에칼라툼Ekallatum의 행정관 샴시 아다드Shamsi-Adad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정복하고 지배하며[각주:20] 아슈르에 앗쉬리아 두 번째 왕조 샴시 아다드 왕조Shamsi-Adad Dynasty(상 메소포타미아 왕국Kingdom of Upper Mesopotamia이라 칭한 사람도 있었다)열었는데, 그의 죽음 이후(1776BC) 다른 북부의 많은 지역은 원상으로 회복되었으나 아슈르에는 샴시 아다드 후계자들이 왕권을 잇기도 하면서 인근 세력들의 침입으로 혼돈을 거듭하여 3대를 넘기지 못하고 40년도 안 되는 동안 10명의 찬탈자가 나와 설치다가 드디어 마지막 열 번째 찬탈자 아다시Adasi의 아들 벨 바니Bel-Bani가 아슈르와 인근 지역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확립하여 앗쉬리아 세 번째 왕조이자 천 년을 이어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장수 왕조, 발틸 왕조를 열었습니다.[각주:21] 발틸 왕조는 천 년을 이어 오면서 때로는 세계 제일의 제국으로 때로는 잊혀진 은둔의 왕국으로 지냈었는데, 그 긴 세월 가운데 다만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에 관해 특별히 언급할 몇 장면만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동남쪽의 아람을 종속시키고 드디어 바뷜로니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바뷜로니아를 정복했고, 왕이 머물 새로운 도시를 니노스에 건설한 다음에도 제국의 확장을 멈추지 않아 다음의 목표인 아이귑토스를 정복하기 위해 계속 서쪽으로 나아가 포이니케를 점령하고는 바로 아이큅토스로 가서 결국 테바이를 점령하면서 마침내 온세상에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아이귑토스를 연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것이었습니다. 근 백 년 동안 앗쉬리아 사람들은 아람 다마스쿠스, 이스라엘 사마리아, 아나톨리아 프뤼기아, 아라라트 우라르투, 바뷜로니아 바뷜론, 포이니케, 아이귑토스 멤피스와 테바이를 정복하고 종속시켰습니다. 더러는 한 번의 공격으로 더러는 수십 년에 걸친 공략 끝에 종속시켰지요. 제국을 이루는 근본은 정복으로 인질 같은 병력과 종속의 증표 세금 납부였습니다. 병력을 보내고 세금을 바치는 한 그들의 일상을 허물지 않았지요. 그러나 앗쉬리아 사람들은 제국의 확장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제국을 지키는 힘이 약해져 갔는데, 아이귑토스에서 테바이를 점령할 때 엘람은 바뷜로니아 지역에 침입하고 있었고, 테바이 점령 열두 해를 넘기면서는 아이귑토스에서 물러서야 했고, 돌아와서도 바로 엘람을 응징하지 못하고 십 년이 가까워져서야 엘람을 쳐서 수사를 폐허로 만들 수 있었고, 그리고 열다섯 해 뒤에는 포이니케가 슬며시 뤼비에로 가서 퀴레네를 치는가 하면 그 다섯 해 뒤, 앗쉬리아가 아이귑토스에 물러나 제국의 큰 덩어리가 쪼개진 뒤 서른두 해를 겨우 넘긴 때에는 제국 안의 바뷜로니아 지역에서 칼다이오이 사람들을 이끌고 나보폴랏사르가 바뷜론을 차지하고 바뷜로니아라는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이 벌어졌고, 제국의 도시 니노스 가까운 서북쪽의 메디아에는 키악사레스가 나타나 왕국을 세우고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지요. 이 무렵 헬라스 세상에서도 큰 도시들의 안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스파르테는 멧세니아의 반란으로, 아테나이는 퀼론과 알크마이온 집안의 싸움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상의 기운이라는 게 도시나 집안이나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흥망성쇠로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강력하던 앗쉬리아 왕 에사르핫돈이 그의 아이귑토스 첫 원정에서 파라오 타하르카가 그의 본거지였던 남쪽 누비아로 달아나 텅빈 멤피스를 정복하여, 사이스의 넥코스를 새로운 파라오로 세우고 총독과 지방관 군지휘관 등 앗쉬리아 지휘체제를 갖춘 뒤, 쿠쉬 왕조의 왕족들을 인질로 삼아 많은 전리품과 함께 돌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친 타하르카가 돌아와 분란을 일으키고 현지에 자신이 심은 관리들조차 조공을 기피하며 타하르카에 가담하는 판이라 이태 뒤 재차 원정에 나섰다가 아이귑토스 도착 전 팔라이스티네에서 마흔넷의 나이로 병사하자 두 번째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습니다. 서른둘에 왕이 되고도 형제들 간에 내전까지 벌여야 했던 에사르핫돈은 승계 때문에 생기는 왕가의 내전을 막기 위해 일찌기 큰 아들이 죽자 둘째 샤마쉬 숨 우킨은 바뷜로니아 왕으로, 병약한 셋째 대신 넷째 아쉬르바니팔을 앗쉬리아 왕으로 정해두고 훈련시킨 덕분에 바로 왕을 승계한 나이 열다섯의 아쉬르바니팔이 이태 뒤 아버지 에사르핫돈에 이어 세 번째 아이귑토스 원정군을 이끌고 멤피스를 재차 점령한 뒤 넥코스와 그의  아들, 아버지 에사르핫돈 시절 니노스에 와서 유학한, 프삼메티코스를 총독으로 삼아 아이귑토스를 맡기고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타하르카의 조카이자 후계자였던 탄타마니가 반군을 이끌고 멤피스로 쳐들어오는 걸 넥코스가 분쇄하다 전사하는 바람에 아이귑토스 사람들이 탄타마니 쪽으로 기울었고, 어쩔 수 없이 프삼메티코스가 몰래 멤피스를 탈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이태 뒤 또 다시 출정해야 했고, 이번에는 탄타마니의 반란군을 테바이에서 진압하고 프삼메티코스를 총독으로 삼아 각 지방에 배치한 앗쉬리아 군대의 지휘까지 맡기면서 아이귑토스 정벌을 마무리했습니다. 세상에 처음으로 철제 무기를 들고 나타나 바뷜로니아, 엘람, 아람, 아이귑토스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완성했으니 이는 곧 앗쉬리아나 사르곤 왕가나 에사르핫돈이나 아쉬르바니팔의 흥성이라고 아니할 수 없겠지요.

 

12.2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렇다면 네일로스 강 남쪽 골짜기서부터 북쪽의 델타에 이르기까지 네일로스 강을 끼고 대대로 살아온 아이귑토스 사람들은 아이귑토스나 쿠쉬 왕가나 타하르카나 탄타마니의 쇠망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새로운 왕조가 나타날 때마다 네일로스 강변을 따라 여기저기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왕조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새로 성벽을 쌓고 그 안에 들어앉아 신과 함께 아이귑토스 사람들을 다스려왔는데, 이래저래 돌에 새겨지고 파피로스에 적혀진 대로라면 거의 백 년에 한번 꼴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바뀌어온 왕조의 흥망성쇠를, 한 왕조에 고작 서너 대에 걸쳐 대여섯 명을 바꾸어가며 거듭해온 왕들의 흥망성쇠를 아이귑토스 사람들은 네일로스 강처럼 그저 멀거니 지켜보았을 뿐이었지요. 아이귑토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네일로스의 범람이었습니다. 네일로스 범람의 물높이에 비하면 왕들이나 왕들의 군사들이 그들에게 하는 일이란 강이 바닥을 드러내는 일 만큼 참으로 매마른 것이었지요. 그들은 도시의 안전과 자유를 말하며 아이귑토스 사람들이 네일로스로부터 얻은 것을 되도록 많이 가져가려 할 뿐이지만, 네일로스는 아이귑토스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전과 자유의 원천인 생명을 주는데 어찌 이 둘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이귑토스 사람들이 왕조의 교체를 남의 일인양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은 그것에 휘말려 네일로스가 준 생명이 다쳐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조의 교체 때문에 유혈사태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왕조가 아이귑토스 사람들이 아니어도 멀거니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쿠쉬 왕가도 아이귑토스가 아니라 누비아 사람들이었음에도 멀거니 보았던 아이귑토스 사람들이 그들 대신 앗쉬리아의 사르곤 왕가라고 부라리며 지켜볼 이유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실제 그 숱한 새로운 왕조에 대해 새기고 적은 돌과 파피로스에 교체로 인한 유혈사태 이야기는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쉬르바니팔이 다시 니노스로 돌아간 이태 뒤 멤피스에 머물던 프삼메티코스는 그의 본거지 사이스로 옮겨가며 스스로 파라오에 올랐는데, 십 년 전에 에사르핫돈이 처음 멤피스를 점령하고 프삼메티스의 아버지 넥코스를 파라오로 정하기도 했었지만, 이미 자기 아래 자신의 친형인 바뷜로니아의 왕이 따로 있는 판에 프삼메티스가 아이귑토스의 새로운 왕조를 열고 그것으로 아이귑토스가 안정되어 조공이 더 수월하게 들어온다면 굳이 아니 될 까닭이 없었겠지요. 앗쉬리아 제국의 왕 아쉬르바니팔은 이미 이 같은 왕들 중의 왕이니까요. 아이귑토스 사람들은 한동안 그렇게 앗쉬리아 주둔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삼메티고스 왕가와 앗쉬리아에 조공을 바치겠지만, 네일로스 강이 아이귑토스 사람들에게 앗쉬리아를 위해 따로 수확을 더 많이 주지 않는 한 언제까지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 것은 불문가지, 이들은 차차 아이귑토스 안팎의 또 다른 흥망성쇠를 멀거니 지켜볼 것이었습니다.

 

12.2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번에는 앗쉬리아보다 오히려 여러분이 더 익히 들어오신 바뷜로니아는 어땠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그래도 네일로스는 아아귑토스로 들어오면서 한 줄기로 내려와 멤피스에서 이르러서야 여러 갈래로 흩어져 이룬 드넓은 델타에 생명의 밭을 갈며 흩어지지 않고 대대로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살아왔는데, 양옆으로 강을 둘이나 가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여러 갈래의 사람들이 서로를 몰아내면서 흩어지기도 없어지기도 다시 일어서기도 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요. 특히 이 두 강 에우프라테스와 티그레스Tigres,Tigris가 서로 가까이 흐르는 메소포타미아의 남쪽은 네일로스의 델타만큼이나 비옥한 흙이 쌓여 아득한 옛적부터 사람들이 강변을 따라 바다에 이르기까지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모여살다 이윽고 많은 도시를 이루었고, 그 도시들 가운데 흥망에 따라 한 도시가 다른 도시들을 이끌며 나라라기 보다는 도시들의 연합체 같은 모습으로 갖추어 나갔습니다. 어쩌면 페르시아가 헬라스를 어지럽힌 시기 이전의 헬라스와 같은 도시들의 공동체였지요. 헬라스가 그랬듯 지역적으로 사투리 같은 다른 말, 같이 믿는 여러 신들 가운데 주로 섬기는 다른 신 정도의 차이를 지키며 살았었지요. 그런데 이들이 굳게 의지하고 살던 강물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두 강 하류 지역 도시들이 번성하며 농지를 넓히고 강물을 돌려 수확을 늘려나가자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이 줄어들었고, 드러낸 강바닥으로 바닷물이 들락거리자 강변의 농지부터 소금기에 젖어들었고, 소금기로 수확이 줄어들자 바닷가 도시들부터 점차 쇠퇴해져 사람들은 하류의 델타를 버리고 두 강의 중류쪽으로 옮겨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중류로 옮겨간 사람들이 강변과 산지를 개간하고 살아가자 홍수 때마다 불어난 강물이 흙과 모래를 실어가 바다를 메워나갔고, 제법 떨어져 바다로 들어가던 두 강의 하구가 조금씩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홍수가 지나간 자리에 예전의 델타는 사라지고 늪지가 되어버리자 늪에서 만난 두 강물이 하나가 되어 새 물길을 내며 멀어진 바다로 흘러들었습니다. 델타의 옛 영화가 강물에 실려온 흙탕으로 묻히고 스러져갔듯 이들에 대한 기억도 잊혀져 옛 이야기로만 전해질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세운 나라의 이름도, 그들이 믿었던 신들의 이름도, 그들이 썼던 말도 글도 묻혀져 갔지요. 북쪽 메소포타미아를 차지한 앗쉬리아의 안정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훨씬 풍족했던 남쪽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은 이렇게 황폐해지면 도시를 버리고 북상하여 새로운 도시를 만들며 번성을 지켜나갔고 그들 가운데는 악카드Akkad란 도시를 중심으로 사루기Sarugi,Sargon가 강력한 세력을 확장해 메소포타미아는 물론 멀리 서쪽으로 지중해애 이르기까지 위세를 떨쳐 어쩌면 세계 최초로 '사계Four Corners of World,Universe의 왕'이란 이름으로 악카드 제국Akkadian Empire을 건설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에우프라테스와 티그레스가 가져다준 풍요의 한 장면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로 이런 세력들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어렵지 않게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헬라스 세상에 이온의 자손들이 여기저기 도시를 만들고 정착하기 이전부터 하류를 버리고 조금씩 중류쪽으로 올라갔던 이들은 헬라스에 아카이오이Achaioi,Achaeans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할 즈음에는 에우프라테스 강변의 바뷜론Babylon이란 크지 않은 도시에 행정사무처를 두고 몇 세대 전에 이미 에우프라테스 서쪽 건너에서 이주해와 이미 동화되어 자리잡고 살던 아몰라이오이Amorraioi,Amorites 출신 수무 아붐Sumu-Abum을 바뷜론의 왕으로 삼아 행정책임자로 두고 인근 여러 도시들의 새로운 번영이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악카드 말을 쓰는 사람들의 땅,Akkadian-speaking State'이란 이름으로 '맡-악카디Mat-Akkadi,Akkadian Empire'로 부르다가, 헬라스의 크레타 섬에 미노스 사람들이 크놋소스 궁전을 세울 무렵 바뷜론에서 수무 아붐의 6대 손 함무라비Hammurabi가 나타나 전 도시를 아우르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전체 도시를 묶어 한 나라로 통합을 이루자 그 세력은 사루기 때처럼 지중해에까지 미치며 마침내 주변 사람들은 맡-악카디를 바뷜로니아Babylonia,Babylonian Empire라 부르기 시작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무라비 이후 바뷜로니아는 언제 그런 제국이 있었나 싶게 빠르게 잊혀져갔고, 맡-악카드는 앗쉬리아만큼 번성해 나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에우프라테스와 티그레스 사이 비옥한 땅에 자리잡은 도시들끼리 이룰 수 있는 정도의 풍요는 지킬 수 있었는데, 그 까닭은 바로 함무라비로 대표되는 아몰라이오이는 힛타이트Haattusa,Hittite가 융성하면서 밀려나 당시의 문명 번성지였던 악카드 말을 쓰는 사람들의 땅으로 이주해 그 땅 주인들의 재산이나 세금 등을 관리하면서 자리를 잡았고, 일단 동화된 뒤 함무라비의 6대 선조부터 바뷜론의 맡-악카디 행정사무 책임자가 된 뒤 함무라비 때에 와서는 악카드 사람들에 군림하는 왕으로 권력을 잡게 되었지만, 고용된 도집사가 왕으로 나서는 순간 경악한 고용자들이 사태를 조용히 수습하고 본디 자리로 돌린 다음 그들 역시 본디 악카디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시 맡-악카디 도시들 가운데 하나가 강성해 진다 해도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다른 도시들을 종속시켜  도시 연합체를 버리고 제국으로 나설 일은 없을 것이었고, 북쪽의 앗시쉬리아와는 언제나처럼 자주 작은 마찰을 벌일 것이지만 에우프라테스 강 저 멀리의 힛타이트도 동쪽의 엘람도 한결같이 스스로 힘 키우기에 들어가 있어 한참 동안 맡-악카디역시 평화와 작은 번성을 즐길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12.25  헬라스에서 펠로폰네소스의 뮈케나이가 그들의 새로운 문명을 펼쳐보이기 시작할 무렵 티그레스 동쪽 자그로스 산들 너머 여러 곳에서 번진 침략과 약탈로 주거지를 잃거나 버린 대규모 집단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거친 싸움도 벌이곤 하다가, 그 와중에 자그로스 남서쪽 산록의 맡-악카디에서 엘람 가는 길 근처에 살던 캇시,Kassi,Kashi,Kassites 사람들이 엘람Elam의 핍박을 견디느라 제법 단련된 군대를 이끌고 함무라비가 죽고 급격히 그 세력이 줄어드는 바뷜론이 무방비 일 걸로 알고는 바로 쳐들어갔으나 의외로 함무라비의 아들 삼수 일루나Samsu iluna의 방어와 반격에 쫓겨 되돌아왔던 적이 있었지요. 캇시 사람들의 첫 바뷜론 공격은 이를 막는 과정에서 맡-악카디의 지배 세력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일룸-마-일리Ilum ma Ili가 이끄는 일부가 에우프라테스 강의 하구 쪽 옛 우루Uru 근처 우루쿡Urukug에 자리잡고 맡-악카디에서 새로 독립하여 에우프라테스와 티그레스의 기수 지역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바다쪽 땅을 다스리는 맡-악카디의 또 다른 왕조이자 두 번째인 우루쿠그 왕조Palu Urukug,Sealand Dynasty를 에우프라테스 강변 우룩Uruk에 세웠고, 이후 몇 세대가 지나면서 아몰라이오이 왕권이 점점 쇠락해가자, 캇시 사람들은 점점 더 심해지는 엘람의 핍박을 피해 다시 한번 새로운 정착지로 전에 실패했던 바뷜론을 겨누고 있던 차에 놀랍게도 바뷜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저 멀리 힛타이트의 무르실리스Mursili I,Mursilis가 우리 헬라스에서 테레 There,Thera섬이 날아가는 대분화로 화산재 구름이 아나톨리아를 덮어 농사를 망치는 바람에 메소포타미아의 맡-악카디까지 가서 약탈로 전 지역을 폐허로 만들면서 함무라비 이후 겨우겨우 이어가던 아몰라이오이 왕조를 끝장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 혼란의 틈에 캇시 사람들이 잽싸게 들어와 악카드 사람들과 어울리며 옛날 아몰라이오이들이 그랬듯 바뷜론에 주로 모여 살며 조금씩 영향력을 키우다가, 마침내 무르실리스가 빼앗아 갔던 악카드 사람들의 신 마르둑Marduk의 신상을 캇시 사람들의 지도자 아굼 카크리메Agum Kakrime,Agum II가 군대를 이끌고 힛타이트로 가 25년만에 되찾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마르둑을 자기들의 최고 신 슈카무나Shuqamuna와 동격으로 모심으로써 악카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맡-악카디에 카시트 왕조를 열고 악카드 말을 하는 사람들의 땅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12.26  사실 이런 일은 헬라스 아이가이온 바다 테레 섬의 화산이 터지기 전에 뮈케나이가 새로운 도시로 점점 자리를 잡아나가는 가운데 퀴클라데스 섬들로부터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제 그들도 미노아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꿀 즈음에 아이귑토스에서 먼저 일어났었지요. 그 즈음에는 에우프라테스 서쪽에서는 북쪽의 힛타이트가 안정적으로 국력을 키우며 앗쉬리아나 맡-악카디와 함께 소강을 즐기고 있었음에도, 힛타이트 아래에서부터 아이귑토스의 시나이 산 윗쪽에 사는 여러 부족들은 본업인 농경이나 목축을 버리고 약탈로 재물을 얻으려 끼리끼리 뭉치고 따로따로 헤어져 비적이 되어 서로를 겨누고 해치고 지냈는데, 그들 가운데 어딜 가나 환영 받지 못하는 유목민들Canaanites의 비적 한 무리와 이주민으로 가서 바뷜론의 왕까지 된 함무라비를 보고 자신이 생긴 함무라비의 동족들Aromites 비적 한 무리가 의기투합해 아이귑토스로 갔고, 오랜 소강에 취해 늘어진 네일로스 델타를 단숨에 휩쓸어 파라오를 끌어내리고 곧바로 그들이 파라오가 되어 아이귑토스를 차지해버렸었지요. 그런데 재미난 것은 평생에 적어도 한두 번의 왕조가 바뀌는 걸 보아온 탓인지 누구 하나 그들이 누구인조차 몰라 그저 어느 특정한 나라 사람이 아니고 멀리 시나이 산 너머 아아무Aamu에서 온 사람들이라 힉소스Hyksos,Heqa-kaut라 부르며, 내던 세금 그대로 내면 굳이 해치지 않을 그들을 향해 목슴을 걸고 거부하거나 반항할 필요 없이 그냥 하던 대로 내던 세금 내었으며, 파라오가 된 그들 역시 세금 내는 사람 해쳐봐야 세금만 축나는 걸 모를 바보도 아니어서 내던 던 만큼의 세금만 받고 성가시지 않게 그들 하던 대로 버려두면서, 왕조까지 한 번 교대해가며 헬라스에서 뮈케나이가 드디어 그들만의 새로운 문명을 처음 펼쳐보일 무렵까지, 테바이에서 일어난 군대가 드디어 이미 아이귑토스에 동화된 이들을 몰아낼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었지요. 이 같은 일이 메소포타미아의 맡-악카디에서 똑같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12.2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들을 아는 다른 사람들이 사람들이 캇시 사람들을 갈주Galzu라고도 부르는 이들은 고향을 떠나오기 전부터 이미 고향을 지키기 위해 주변으로부터의 침략과 약탈을 막느라 억세게 단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방어와 역공의 실전을 통해 조직화되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처음보는 말horse과 전차chariot를 운용하여 비록 그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정예 군인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힛타이트가 그러지 않아도 이미 쇠락할 대로 쇠락한 맡-악카디를 뒤집어놓아 도시가 제대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때문이긴 했었지만 그래도 장님 문고리 잡듯 바뷜론을 장악한 그들은 먼저 그들이 도시의 경비에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을 바뷜론 사람들이 충분히 느끼도록 해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맡-악카디의 다른 여러 도시 사람들에게 역시 그들이 도시 경비뿐만 아니라 아몰라오이 대신 행정 사무를 맡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면서 맡-악카드를 여러 도시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그 전체가 하나의 땅 하나의 나라로써 관리하고 지켜나가 악카드 사람들의 큰 반발 없이 맡-악카디에서 함무라비 자손들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는데,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이 보장되고 내던 세금과 지금껏 누린 일상이 크게 바뀌지 않는 한 누가 와서 왕이 되든 별 문제가 되지 않다고 생각하는 악카드 사람들 덕분에, 핍박하는 엘람에 못 이겨 더 이상 지킬 수 없어 고향을 두고 삶의 새 터를 찾아나서면서 한번도 꿈꾸어 본 적 없었던 망외의 소득을 올린 이들 캇시 사람들은 맡-악카디 도시들을 새롭게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고향 캇시에서 함무라비 때 처음 그들을 모아 왕이 되었던 간다쉬Gandash의 후손으로 당시 그들의 왕이었던 아굼 카크리메Agum Kakrime,Agum II가 새롭게 맡-악카디의 왕이 되면서 맡-악카디의 세 번째 왕조를 열었고, 맡-아카디를 바뷜로니아로 부를 만큼 아몰라이오이의 도시라는 인상을 주는 바뷜론이란 도시 이름을 카란두니아쉬Karanduniash로 바꾸고 행정사무 도시에서 맡-악카디에서의 정치 군사의 도시로 탈바꿈시켰으며, 바뷜론 주변이 평정되자 울람부리아쉬Ulamburiash는 우룩을 점령하고 에아-가밀Ea-Gamil을 끌어내려 우루쿠그 왕조를 폐지하고 남부 메소포타미아까지 포함하여 다시 한번 함무라비 시절의 도시들을 모두 캇시 왕조의 지배 아래 두었습니다. 아몰라이오이가 메소포타미아에 이주하면서 현지 악카드 말을 쓰는 사람들처럼 살았던 데 반해 캇시 사람들은 그들끼리 뭉쳐 지내며 예전 아몰라이오이나 악카드 사람들보다는 가까운 앗쉬리아나 엘람 또 멀리는 힛타이트나 아이귑토스의 왕실 사람들과 서로 결혼하거나 사귀면서, 자연스레 협상이나 조약 체결을 통해 캇시 왕조와 맡-악카디의 위상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교역을 늘여 캇시 은전이 우리 헬라스에까지 들어와 쓰일 만큼 재화를 쌓고 새로운 문화를 발흥시키면서 점점 맡-악카디 도시들이 번성을 누리도록 했습니다. 헬라스의 아카이아 사람들이 크레타를 점령하여 미노아 문명을 끝장내면서 뮈케나이가 전체 헬라스 도시들의 맹주가 될 무렵에는 캇시 사람들 역시 카란두니아쉬 북쪽의 티그레스 강변에 새로 도시를 건설하고 당시의 왕 '쿠리갈주Kurigalzu,Shepherd of Galzu I'의 이름을 따 '두르 쿠리갈주Dur Kurigalzu'라 부르며 왕도를 그리로 옮겼습니다. 이러던 캇시 사람들도 뮈케나이가 온 헬라스 도시들의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의 일리오스과 오랜 전쟁을 치르고 일리오스을 멸망시키는 동안 뮈케나이 스스로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멸망할 즈음 와서는 강성해진 앗쉬리아에 점령되기도 하고, 에우프라테스의 물줄기가 바뀌는 일이 생긴 다음부터 에우프라테스 강 유역 도시들에 사는 악카드 사람들의 이반도 뚜렷해져 먼저 망해간 힛타이트를 뛰따라 결국 왕조가 무너지고 말았지요. 그럼에도 캇시 사람들의 왕조는 근 400년을 이어온 맡-악카디에서 일어나고 스러진 여러 왕조들 가운데 가장 오래 다스린 왕조였습니다. 캇시의 마지막 두 왕은 왕조의 끝을 재촉이라도 하는 듯 승계가 아니라 찬탈로 왕위를 차지했고, 그것도 3년 사이에 벌어져 결국 에우프라테스 유역 악카드 사람들의 도시 이신Isin,Ishan 사람들이 티그레스 강변의 두르-쿠리갈주로 들이닥치자, 엔릴-나딘-아히Enlil Nadin Ahi를 끝으로 맡-악카디의 세 번째 왕조 캇시 왕조는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12.2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메소포타미아의 동쪽 티그레스 강은 메소포타미아로 들어오는 중상류부터 하류에 이르기까지 동쪽의 높은 산들로부터  유입되는 지류가 큰 것만 해도 너댓이 될 정도로 일정한 수량을 유지해 흘렀기 때문에 티그레스 강변 도시들은 큰물이나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적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어졌으나, 메소포타미아의 서쪽 에우프라테스 강은 북쪽 초입의 도시 마리Mari부터는 유입되는 지류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중하류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드넓은 낮은 벌들로 큰물이나 가뭄에 사람들이 물길을 바꾸기 때문에 낮은 벌이 나타나는 십파르Sippar부터 바뷜론과 우룩 사이의 이신에 이르기까지 갈라지는 제법 큰 물길의 수만 해도 네일로스 델타의 물길만큼 많아 그 사이에 자리잡은 바뷜론이나 키쉬Kish나 닙푸르Nippur 같은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는 강의 발원지 아나톨리아 고원의 큰물과 가뭄에 걸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큰물이나 가뭄에 새 물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삽질에도 매달려야 했습니다. 마루독을 믿지 않는 아나톨리아 고원의 구름을 악카드 사람들의 마루독이 어떻게 다스릴지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삽질을 다스릴 힘이 있는 캇시 왕들은 더 나은 수익을 가져다 주지도 않는 물길 삽질에 질려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삽질로 티그레스 강가로 옮겨 가버렸고, 덩그러니 남겨져 삽질할 힘도 없어진 옛 바뷜론 카란두니나쉬와 나머지 도시들 사람들은 별 수 없이 캇시들과의 친소에 따라 티그레스의 두르-쿠리갈주로 가거나 아니면 십푸르에서 흩으졌던 에우프라테스의 물길들이 다시 만나는 가장 가까운 곳 이신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지요. 이렇게 모여 두 백년century에 걸쳐 힘을 모은 이신 사람들은 악카드 사람들의 신 마르둑을 섬기는 마르둑-카빗-앗헤슈Marduk-Kabit-Ahheshu를 앞세워 캇시 왕조를 지우고 두 천년millennium 전에 있었던 이신 왕조Palu Ishin를 그들의 이신 사람들의 두 번째 왕조이자 맡-악카디에서의 네 번째 왕조로 이제는 본디 이름을 되찾은 바뷜론에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헬라스 세상에 도리에이스 사람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할 무렵 이신 왕조의 네 번째 왕 네부카드넷자르Nebuchadnezzar I 시절에 나름대로 함무라비에 견줄 전성기를 이루어 주변 나라들이 맡-악카디를 다시 바뷜로니아로 부르게 되었는데, 사실 네부카드넷자르의 이름이 도드라진 까닭은 부왕 때부터 그에게 엄청난 시련으로 닥쳤던 오랜 세월 계속된 엘람의 침입을 결국 울라야Ulaya 강변에서 캇시 출신의 지휘관 싯티 마르둑Sitti-Marduk으로 하여금 엘람 왕 훌텔루디스 인수시낙Hulteludis-Insusinak의 본진을 짓밟게 한 다음 수사까지 쳐들어가 도시를 쓸어버린 뒤, 엘람이 가져간 마르둑 신상을 되찾아 비뷜론의 에사길라Esagila 신전에 다시 모시게 되면서 그의 도시와 도심에게 안전과 평화를 가져다준 것 때문이었습니다. 네부카드넷자르가 다행스럽게도 부왕 니누르타 나딘 슈미Ninurta-Nadin-Shumi 때부터 쳐들어오기 시작한 엘람과의 오랜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바뷜론과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들에게 안전과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이어진 앗쉬리아와의 두 차례 전쟁으로 도시와 도시민을 피폐해지자 왕조의 권위나 세력도 허약해져 그가 죽은 뒤 승계한 그의 아들 엔릴 나딘 아플리Enlil-Nadin-Apli은 3년도 지나지 않아 숙부 마르둑 나딘 아헤Marduk-Nadin-Ahe에게 양위해야 했고, 그 뒤를 이은 아헤의 아들 마르둑 샤피 제리Marduk-Shapi-Zeri가 근본을 알 수 없는 찬탈자 아다드 아플라 잇디나Adad-Apla-Iddina에게 쫓겨날 때까지 4대 80여년을 끝으로 바뷜로니아의 이름을 다시 세운 이신왕조도 끝이났고, 이후 네 번에 걸친 왕위 찬탈자들이 새로운 왕조를 내세우지 않아 이신왕조는 30여년이 더 이어진 셈이라 초기 3대 30여년을 더해 맡 악카디의 네 번째 왕조이자 두 번째 이신왕조는 모두 11대에 걸쳐 130여년 이어갔습니다.

 

12.2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 이야기의 원점인 퀴로스의 바뷜로니아 점령과 아카이메니드 왕조 개창 이야기로 돌아가기 전에 간과하지 못할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감격했던 역사적 사건인 수사 함락에  대해 따로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제가 메소포타미아의 맡 악카디, 우리가 바뷜로니아라고 부르는 지역을 다스린 왕조들 가운데 특히 이 두 번째 이신왕조를 주목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곳 사람들이 마치 우리가 호메로스 덕분에 트로이아Troia,Troy로 일리온Ilion으로 혹은 일리오스Ilios로 부르는 도시의 함락에 대해 늘 입에 올리고 살 듯 네부카드넷자르의 엘람의 수도 수사 함락을 입에 올리고 산다는 것 때문입니다. 헤로도토스는 침묵했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악카드 사람들에겐 헬라스에 일리오스 함락의 이야기가 입으로 전해져 왔듯이 수사 함락의 이야기가 입으로 전해져오고 있었습니다. 바뷜로니아 역시 메소포타미아를 너머 서쪽으로 지중해까지 진출해 북쪽으로 포이니케 남쪽으로 시나이에 이르렀고, 동쪽으로 자그로스zagros 산맥을 너머 엘람에 이르기까지 제국을 넓혔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해온 아몰라이오이들의 후손 함무라비가 이룬 것이라 악카드 사람들의 자랑이 아니어서 악카드 사람들에 전해져 내려오는 영광스런 이야기가 될 수 없었는데, 드디어 악카드 사람의 이신 왕조에서 네부카드넷자르가 오랫동안 기회만 있으면 소파리처럼 달겨붙으며 그들을 괴롭히던 엘람을 쳐부수고 수사를 함락해 마르둑 신상까지 되찾아 왔으니 감격하여 칭송의 노래로 그 영광을 후대로 이어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두 도시들 함락 이야기는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라는 저의 이 긴 이야기로 봤을 때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12.3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살면서 일리오스 함락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오고, 또 얼마나 많은 비극 무들을 봐오셨을까요? 왜 같은 이야기에 물리지도 질리지도 않고 새로운 비극작가가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주인공을 보여줄 때마다 감동하여 울고불고 감격하여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며 지내오셨을까요? 그리고 왜 모든 헬라스 사람들은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 사람들의 도시 뮈케나이가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헬라스 사람들이 저 멀리 헬레스폰토스 바다 가까운 아나톨리아 땅에 이주해 일군 인근에서 가장 융성한 도시로 위세를 떨치던 일리오스에 쳐들어가 10년을 버티는 도시 하나를 겨우겨우 함락시켜 일리오스을 없애버린 것을 잘했다고 상찬하지도 않으며 그렇게까지 할 게 뭐 있었냐며 잘못했다고 비난하지도 않으면서 일리오스의 함락 이야기만은 입에 담고 사는 걸까요? 게다가 왜 한결같이 그 일을 슬픈 이야기로 읊거나 슬픈 무대로 보여주는 걸까요? 왜 늘상 파이안을[각주:22] 외치는 찬양과 승리의 영광과 환희를 고취하는 저 같은 희극작가들이 단 한 번도 일리오스 함락의 영광을 드높은 파이안 송가와 함께 여러분 앞에 축제의 무대 위로 올린 적이 없었을까요? 왜 단 한 번의 출전으로 그동안 줄곧 이기만 했던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의 영광스런 승리는 그 숱한 희극작가들과 심지어 이 아리스토파네스에게조차 외면 받은 대신[각주:23]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진 일리오스 최고의 전사 헥토르의 주검은 에우리피데스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의 비통과 그의 어머니 헤카베와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와 그의 여동생 캇산드라와 그와 아가멤논의 제수 문제의 헬레네까지의 애절로 감싸도록[각주:24] 만들었던 걸까요? 그런데 정작 10여년에 걸친 전쟁이 숱한 비통하고 애절한 사연들을, 하다 못해 배를 띄워 출전하는 아울리스 항구에서조차 헬라스도시 연합총사령관 아가멤논이 그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출전제의 희생물로 올리는 참혹함부터[각주:25] 일리오스을 함락하고 돌아온 아가멤논 집안의 처참한 풍비박산은[각주:26] 말할 것도 없고, 전쟁 내내 잔꾀로 일관하다 또 다시 10년 동안이나 헬라스 천지를 헤메이다 그때그때 잔꾀를 부려 겨우 집으로 돌아가는 오딧세우스의 역정에 이르기까지 주저리 주저리 끝 모를 이야기들을 짧은 양털을 모아 실 잣듯이 길게 길게 뽑아내면서도, 정작 목마를 만들고 자신과 스스로 선발한 29명의 정예들과 함께 목마에 숨어 들어 10년의 전쟁을 끝장내고 일리오스 함락의 날을 가져온 장본인 포키스의 에페이오스의[각주:27] 존재 자체를 철저히 묵살하는 처사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사실 희극작가인 제게 에페이오스가 만든 목마나 그런 계략을 꾸민 오딧세우스나 그런 잔꾀에 속아넘어갔다며 웃음 사는 이데 산록의 다르다니에 사람들을 지휘한 아이네이아스가[각주:28] 벌인 함락 전후의 그들 행각을 보면 웃겨도 그렇게 웃길 수 없을 만큼 비장하기는커녕 너무나 희극적이어서 10년 전쟁을 끝내기 위한 양쪽의 거래를 희극으로 만들어 올려도 좋겠지만, 저 역시 결코 그리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런 방법으로라도 전쟁을 끝내고 안전하게 약간의 재물들을 수습하여 남은 식솔들과 부대를 이끌고 새로운 땅으로 가서 새로운 일리오스을 일구겠다고 결심한 아이네이아스의 절절한 심정을 이해하여 감히 그들을 전쟁에서 패망해 도망치는 우스개거리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희극작가인 저의 눈에 보인 절절한 아이네이아스의 결심은 모두의 눈에 진정으로 보였던지 헬라스의 비극작가 그 누구도 아이네이아스라는 이름 자체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10년의 고난에 찌든 일리오스 사람들과 아이네이아스에 대한 가엽고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함락의 후과로 찾아온 헬라스 도시들의 엄청난 몰락을 미리 예견이라도 했던 때문이었는지 당시에는 물론 그 뒤로도 일리오스 함락에 대해 파이안을 외치는 사람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헬라스 도시 연합군이 아나톨리아에 도착해 우선 진지 인근 마을들을 공격하고 약탈해 나갈 때 얻은 약탈물의 분배에서 야기된 문제로 포에보스[각주:29] 아폴론의 분노가 신전 사제 퀴세스의 딸을 방면치 않아 불거진 퀴세스의 탄원으로 야기되었기 때문에 아폴론 송가 파이안을 외칠 수 없었다라는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 파이안을 부르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12.3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제우스가 여동생 가이아가 주관하는 땅 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 먹여살리느라 힘들어하는 것을 딱하게 여겨 사람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 뮈케나이가 이끄는 헬라스 도시연합과 일리오스을 지원하는 아나톨리아 도시연합과의 전쟁, 소위 트로이 전쟁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을 모를 리 없는 호메로스가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 형제를 위해 트로이아 사람들을 응징하기 위해 기꺼이 참전했다는 아킬레우스의 입을 빌려[각주:30] 태연히 아가멤논 형제가 헬레네의 도주로 잃은 명예를 되찾는다는 핑계로 일리오스의 번성을 시기해 끓어오른 탐욕과 오만으로 그 도시와 도시민의 자유와 재물을 빼앗고 그 도시를 뮈케나이에 종속시키려 일으킨 전쟁이라 규정하고 있었지요. 자신이 더 쎄다는 그래서 싸우면 이긴다는 오만으로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이웃 도시들을 회유나 강압 심지어 무력으로 종속시키고, 그 종속도시와 그 도시민의 자유와 안전을 미끼로 그 재물을 탐하는 것을 더 쎈 그 도시 사람들 빼고 이를 칭송하고 자랑하고 부러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선은 그 쎈 도시의 위세 앞에 숨을 죽이고 있지만 속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힘이 빠져나갈 때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응보는 어떤 것일까 지켜보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비극작가들이 이걸 놓칠 리 만무하지요. 그렇지만 우리 아테나이에서 테스피스의[각주:31] 주도로 도시 디오뉘소스 축제에 처음 비극이 무대에 올라갈 때는[각주:32] 참주 페이시스트라토가 죽고 아들 힙피아스가 새 참주가 되어 동생 힙파르코스와 아테나이를 다스리면서 이에 대한 응보가 비극이라는 무대를 통해 전체 헬라스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좀 있다 앞선 이야기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이야기를 계속한 다음 페르시아가 아나톨리아를 장악한 뒤 우리 헬라스 도시들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나 보여드리면서 이어갈까 합니다.

 

12.3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도시들끼리 10년을 싸운 끝에 일리오스를 함락하여 전쟁에 이기고 돌아왔지만, 그들은 뮈케나이며 스파르테며 아테나이며 하다 못해 작은 섬 이타케의 그 누구도 그들 승리의 파이안을 외칠 수 없을 만큼 오만과 탐욕은커녕 삶의 기운마져 다 빠져나간 분열과 증오만 가득한 아카이오이 사람들밖에 볼 수 없었지요. 돌아온 고향에서 배신과 음모로 하릴없이 죽어간 그들처럼 헬라스 도시 모두가 속절없이 시들어 가버려 다시 그 땅에 헤라클레스의 자손이라 자부하며 나타난 도리에이스dorieis 사람들이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키기까지 두 세기에 걸쳐 빈곤과 유랑의 암흑시대를 보내야 했던 동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앞서 말했던 맡 악카디를 다스리던 이신 왕조의 네부카드넷자르가 이룬 다른 신을 믿고 다른 말을 하는 엘람의 수사 함락은 같은 신 마르둑을 믿고 같은 말 악카디를 쓰는 메소포타미아의 악카드 사람 모두에게 속 시원한 승전이었습니다. 그저 힘이 좀 생겼다 싶으면 쳐들어와 분탕질이나 하고 있는 것 없는 것 신전의 신상까지 털어가는 엘람의 약탈몰이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물리치는 정도가 아니라 악카드 사람들로서는 처음으로 그들의 소굴인 수사를 완전히 뒤엎고 신상까지 찾아왔으니 왕인 네부카드넷자르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캇시 사람이긴 했지만 군대를 지휘한 싯티 마르둑에게도 열광의 승전가를 불러주고 업적을 비석kudurru에[각주:33] 새겨 후세에도 그 이름을 떨치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소포타미아 악카드 사람들의 위세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빈번히 침입하는 외적들을 감당할 수 없어 엘람 다음으로 두 번이나 침략해온 앗쉬리아를 막느라 국력을 소진하면서 점차 왕조의 기틀이 무너져갔습니다

 

12.33  헬라스 사람들이 도시를 버리고 이곳 저곳 유랑하며 암흑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듯, 에우프라테스 강과 티그레스 강이 있어 헬라스보다는 단연코 안정된 곡물을 수확할 수 있있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두 번에 걸친 앗쉬리아의 침략을 막느라 나라의 모든 진이 다 빠졌을 정도로 쇠약해져서 맡 악카디 도시들이 혼돈 속에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를 맞았는데, 수시로 왕조가 바뀌고 그 왕조 안에서도 수시로 왕이 바뀌며서 혼돈 속에 암흑의 시간이 근 백 년이나 계속 되고 있었지요.[각주:34] 그런 시대에 맡 악카디의 다섯 번째 왕조로 다시 하류의 기수지역Sealand의 캇시 사람 심바르 쉬팍Simbar-shipak이 탐티왕조Palu Tamti,2nd Sealand Dynasty를 세웠으나 마지막 4년은 찬탈자와 전왕의 아들이 다투다 20년으로 끝이 났고,  그 뒤를 바즈Buz 지역에 정주했던 캇시 사람 일족인 비트 바지Bit-Bazi의 에울마쉬 샤킨 슈미Eulmash-shakin-shumi가 여섯 번째 왕조인 빗 바지왕조Palu Bit-Bazi,Dynasty of Bit-Bazi를 세웠으나 이 역시 마지막 3년은 찬탈자와 전왕의 동생이 다투다 20년도 못다 채우고 끝이나자, 언제나 바뷜론을 잊을 수 없었던 엘람의 마르 비티 아플라 우수르Mar-biti-apla-usur가 쳐들어와 이번에는 그냥 약탈로 끝내지 않고 그대로 5년 넘게 바뷜론에 주저앉아 바뷜론의 왕 노릇하며 맡 악카디를 다스렸기는데 사람들이 이를 엘람왕조Palu Elamtu,Dynasty of Elam라 불러 맡 악카디의 일곱 번째 왕조가 되었습니다.

 

12.34  네부카드넷자르가 엘람의 수사를 함락시키고 마르둑 신상을 되찾아 왔을 때 열광했던 바뷜로니아의 악카드 사람들의 후손들은 다섯 해가 넘게 엘람의 마르 비티 아플라 우수르가 바뷜론의 왕이라며 거들먹거리는 것을 더 이상 참고 봐줄 수가 없었고, 드디어 바뷜론 사람들을 이끌고 봉기에 나선 나부 무킨 아플리Nabu-mukin-apli가 엘람을 쫓아내고 맡 악카디의 여덟 번째이자 첫 바뷜론 왕조Dynasty of Babylon인 이 왕조Palu E,Dynasty of E를[각주:35] 열었습니다. 나부 무킨 아플리의 첫 출발은 나쁘지 않았으나 왕조를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전혀 뜻밖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바뷜론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바로 저 멀리 코카서스와 아라라트 사이의 산록에 사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향에서 얼마나 살기 힘들었으면 강물 줄기를 따라 메소포타미아까지 와서 분탕질로 연명하려 했겠습니까마는 이들은 아카이아 삶들이 비워둔 펠로폰네소스로 들어와 별 어려움 없이 자리를 잡았던, 그래서 오히려 그들끼리 피 터지는 싸움을 백 년이상 벌여야 했던 도리에이스 사람들 같은 운은 없었는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멀리 왔으나 아몰라이오이들이나 캇시들처럼 맡 악카디에 정착하지는 못하고 분탕질만 치다가 흩으져 돌아가야 했고, 고통만 받은 악카드 사람들은 스파르테에 정착한 도리에이스 사람들이 뤼쿠르고스의 도움으로 새로운 법을 만들어 새로운 스파르테와 라케다이몬 땅을 건설하는 시기에도 혼돈과 암흑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2.3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헬라스에 도리에이스 사람들이 들어와 암흑기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앗쉬리아에서 제일 먼저 혼돈과 암흑을 걷고 새 시대를 열었는데, 앞서 뤼디아와 메디아 그리고 앗쉬리아 간의 분쟁을 말씀 드릴 때 소개해 올린 앗쉬리아의 

 

 

 

 

 

 

 

 

 

 

 

  1. 아테나이의 번성기는 페리클레스가 델로스 섬 아폴론 신전의 델로스 동맹 금고를 아테나이 파르테논 신전으로 옮긴 BC454부터 페리클레스가 작은 것 하나 양보하면 모든 걸 양보해야 하게 된다며 헬라스 세상 최장 최대의  헬라스 내전을 일으킨 BC431까지 25년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이온이 도시를 연 BC15세기부터 아리스토파네스가 재판에 나서 변론하는 것으로 설정된 BC4세기까지 근 10세기 이상의 세월과 비교하면 정말 짧디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2. 아테나이가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 수립 이후 참주정 복고를 꿈꾸는 이사고라스와 그를 앞세워 민주정을 붕괴시키려는 스파르테와의 다툼에 이기면서 생긴 오만과 아테나이 참주들로부터 수혜를 받아왔던 테바이와 에우보이아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얻은 막대한 재물과 땅에 대한 탐욕으로, 멀리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가 다스리는 아나톨리아의 사르데이스를 약탈하기 위해 BC498dp 감행한 원정 야습이 실패로 끝나면서 불러온 세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헬라스 침공에서 비롯된 아테나이의 헬라스 도시들을 대상으로 벌인 제국주의적 확장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그저 헬라스 도시 전체를 피폐하게 만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쳐 이어진 코린토스 전쟁이 BC387에 끝날 때까지의 100여 년 [본문으로]
  3. 페르시아는 인접한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가 메소포타미아에 흩으진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여러 도시들을 하나로 묶어 통치하던 것에서 가까이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은 물론 더 나아가 멀리 아이귑토스에까지 진출해 다른 신들을 믿고 다른 말들을 하는 도시들을 통치하에 두고 세금을 거두어 점점 강성해지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는데, 이는 그들 스스로가 강력한 메디아 왕조의 종속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본문으로]
  4. 사모스 섬의 경우 모두가 이오니아 사람들이었고 일찌기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받아들여 내부에서 사회 계급이나 정치체제나 출신 도시 문제로 심각한 분열은 보이지 않았고, 단지 아나톨리아와 이오니아 지역에서 아테나이의 영향력을 배제한 사모스의 독자적인 아테나이식 도시 패권을 쥐기 위해 실력 행사를 주장했던 정파 [본문으로]
  5. jaina,jainism [본문으로]
  6.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화 개혁의 마무리로 민회의 추방 투표결의와 시민들의 임의 기명 투표로 6,000명 이상의 기명자를 10년 동안 아테나이 밖으로 추방토록 제도화했다. 기명은 질그릇 조각인 이징가미ostracon,pottery shard(사금파리는 사기그릇 조각이라 파서 적을 수도 없고 이름을 필기구로 적어도 지워진다)에 뾰죽한 끝으로 이름을 긁어써 투표했고, 여기에서 도편투표, 즉 ostrakismos, ostracism이란 말이 유래했다 [본문으로]
  7. 델로스동맹의 자금 운용 체제는 동맹도시 분담금을 모아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 금고에 보관하여 물론 아테나이가 주도했지만 도시들 사이 협의에 따라 지출히는 형태였으나, 400척의 아테나이의 아이귑토스 원정 함대가 전멸하자 반격을 우려한 아테나이가 독단으로 동맹의 자금을 아테나이 파르테논 신전 금고로 옮기면서 동맹도시들을 지켜주는 건 아테나이니 아테나이가 독단적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며 동맹 분담금을 아테나이의 자금으로 바꾸어버리자, 델로스 동맹도시들의 분담금은 아테나이에 바치는 조공으로 델로스 동맹도시들은 아테나이 제국의 종속도시로 바뀌어버렸다. [본문으로]
  8. dikasterion,dicastery 일반 시민들이 추첨으로 배심원으로 뽑혀 진행하는 재판 절차, 중요한 재판은 500명의 배심원들이 투표로 판결했다 [본문으로]
  9. 장군strategos은 매년 새봄에 부락 단위로 30세 기사계급 이상의 남자를 투표로 1명씩 모두 10명을 뽑았고, 이들 가운데 연장자나 최다 참전자를 플레모스plemos로 위촉해 전시 최고 지휘자와 전체 장군들이 모여 협의하는 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겸임토록 하면서 전시에 대비했다. 평상시에는 아르콘이 주도하는 일반 행정부서가 도시를 이끌었으나 전시에는 이들 장군들이 일반 행정에도 개입게 되자 이들은 도시의 막강한 영향력자 내지는 권력자로 변했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도시 사이의 웬만한 갈등에도 먼저 전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본문으로]
  10.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140-144 [본문으로]
  11. Epikos Kyklos,敍事連話 [본문으로]
  12. Epimenides, 논리에서 자기언급의 딜렘마 예문으로 자주 제시하는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를 낳은 크레타 출신의 현인 중 한 명 [본문으로]
  13. 헬라스 세상에 앗쉬리아의 존재나 영향이 알려진 것은 포이니케의 카드모스 형제가 헬라스의 테바이 정착할 당시부터였을 것이나, 문헌을 통해 소개한 것은 헤로도토스가 처음일 텐데, 그가 그의 연구보고서 첫 대목에서 페르시아 학자들의 견해라며 헬라스와 헬라스 바깥과의 반목이 아이귑토스와 앗쉬리아의 문물을 세상 여러 곳에 나르며 살던 포이니케가 헬라스의 아르고스와 부딪치면서 일어난 것이라 말할 때였다.(역사,1권1) 포이니케의 이오 납치를 실마리로 헤로도토스는 아나톨리아에서의 뤼디아 메디아 앗쉬리아의 충돌이나 바뷜로니아와의 다툼이나 페르시아의 제국 완성 과정이나 페르시아의 헬라스 침공에 참여하는 앗쉬리아의 모습을 보여주다 마지막으로 헬라스 사람들만 앗쉬리아를 쉬리아라 부른다며(역사,7권63) 소개를 끝낸다. [본문으로]
  14. 네부카드넷자르 II에 의한 유대인 바뷜론 유수 [본문으로]
  15. persis,parsa,pars 퀴로스가 연 아카이메니드Achaemenid왕조가 페르시아라는 국호를 선택힌 이후  [본문으로]
  16. 니네베 주변에는 핫수나 문명Hassuna Culture으로 일컫는 신석기 시대6300-5800BC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고, 여러 마을들로 나라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2600-2025BC 이며, 이 사이는 하류의 슈메르나 악카드 사람들의 지배를 받았다. [본문으로]
  17. 하류의 우르Ur 제3왕조가 무너질 때(2025BC) 독립했다. [본문으로]
  18. 앗쉬리아 사람들 스스로는 자기네 나라를 "Mat-Ashur, 아슈르 사람들의 땅"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19. 1808BC [본문으로]
  20. 그의 앗쉬리아 정벌이 바뷜로니아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설사 지시가 있었다 해도 정벌 후 보인 그의 칭왕 행동은 철저히 자신의 권력 확보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남는 의문은 바뷜론의 아몰라이오이 왕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함무라비가(에게) 그에게(가) 어떤 응징을 한(받은) 적 없이 어떻게 그가 독자적 왕권을 세울 수 있었냐는 점이다. [본문으로]
  21. Baltil Dynasty, 그러나 통칭 그의 아버지 이름을 딴 Adasi Dynasty, Adaside Dynasty라 한다. [본문으로]
  22. paean,paeon, 승리의 찬가, 아폴론 찬가, 아폴론의 별칭 가운데 하나epithet apollon, byname of Apollo [본문으로]
  23.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가 전사들에게 헥토르를 죽인 승전가를 부르게 하는 장면을 집어넣었다(일리아스,22권391) [본문으로]
  24. 에우리피데스,"트로이아의 여인들" [본문으로]
  25. 에우리피데스는 이피게네이아를 주제로 두 편의 비극을 올렸는데 하나는 아울리스 항구에서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물로 올라온 이피게네이아를 본 순풍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이피게네이아 대신 사슴으로 바꿔치고 그녀를 크리미아의 타우로이족에게 데려가서 그곳 자신의 신전에 여사제로 지내도록 주선했는데 나중 여신상을 가지러온 오빠 오레스테스를 만나고 우여곡절 끝에 둘이 함께 헬라스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본문으로]
  26.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과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 "오레스테스" 등이 아가멤논 집안의 비극을 다룬 것들이다 [본문으로]
  27. Epeios, 호메로스는 그의 운동 실력(일리아스,23권665-694,격투기,838,839,투원반) 이외 정작 그가 밖에서는 절대로 열 수 없는 문이 달린 목마를 만들어 그 속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 큰 공을 세우는 목공과 문짝 개폐 기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본문으로]
  28. Aineias, Aineas, Aeneias,Aeneas 호메로스는 헬라스 도시 연합군의 전력 소개에 이어 아나톨리아 도시 연합군을 소개할 때 일리오스 군대를 지휘하는 헥토르에 이어 두 번째로 이데 사록에 거주하는 다르다니에 사람들을 지휘한다며 아이네이아스를 소개하고 있다.(일리아스,2권819-823) 또한 프리아모스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나눈 대화 속에 아카이오이 사람들의 침략을 받기 이전 자신에게 19명의 적자와 31명의 여러 이복 서자들이 있었으나 지난 나흘의 전투에서 모두 죽었고 마지막 남은 헥토르마져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술회했듯이(일리아스,24권495-500) 프리아모스를 포함한 왕가 직계가 모두 죽고 난 이후에도 10년을 버텨 함락의 시점에까지 그의 재종질인 아이네이아스가 끝까지 성을 지키며 버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9. Phoebos,Bright 아폴론 별칭 중 하나 [본문으로]
  30. 일리아스,1권149-171 [본문으로]
  31. Thespis, 솔론 시대의 구전자 아리온이 자신의 낭송 공연과 이기만 하면 나오는 아폴론을 위한 합창 파이안 송가를 참조하여(본디 디튀람보스는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로스 섬의 여사제들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축제라면 빠질 수 없는 포도주, 마시면 부르는 노래, 부르면 흔드는 춤, 이 모두를 인간에게 안겨준 디오뉘소스를 찬양하기 위해 춤과 노래 그리고 낭송이 어우러진 디튀람보스dithyrambos,dithyramb를 아테나이에 소개하고 퍼트린 뒤, 춤 노래 낭송 모두가 펼쳐지는 무대가 좀 더 푸짐하도록 코로스를 구성해 무대에 올려 합창과 춤을 맡기고, 구전자는 노래를 부르거나 등장 인물에 따라 가면을 바꾸어가며 연기를 곁들이는 낭송자가 되며 관객의 즐길거리를 키워갔는데, 이런 디튀람보스를 대체하는 새로운 무대의 막을 당대 최고 디튀람보스 구전자 테스피스가 열었다. 디튀람보스 무대에서 이야기 속 모든 역활을 혼자 맡아 열심히 가면을 바꾸어가며 바삐 노래하고 낭송하는 대신 이야기에 나오는 주요 인물 모두가 독자적인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라 서로를 상대로 춤추고 노래하고 대화하고 연기하는 대혁신의 무대로 바꾸었고, 이 새로운 무대를 트라고이디아tragoidia,tragedy라는 이름으로 디오뉘소스 축제 무대 경연을 통해 세상에 알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너무나 당연하게 첫 해 경연에서 우승하였다. [본문으로]
  32. BC524 [본문으로]
  33. 쿠두루는 처음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석naru,asumittu,abnu으로 쓰이다 점차 중요한 사실 기록이나 기념물kudurru로 바뀌면서 주로 신전에 봉안되었다. 지금껏 발견된 쿠두루는 160개 정도인데 10센티 정도의 작은 것부터 1미터 정도의 크기까지 전체 39 - 390줄의 쐐기문자cuneiform楔形文字로 적혔고,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전 7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기록들이다. 재미 있는 사실은 160개 가운데 50여개가 수사에서 발견되었는데 모두가 약탈품이어서 엘람의 메소포타미아 침략의 정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4.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암흑기 역시 이 시기 전 세계적으로 닥친 암흑기와 겹치는데 헬라스나 아나톨리아에서는 권력의 중심 자체가 와해되어 통치라는 역활을 수행한 한 도시나 부족이나 지역이 없었는데 반해, 메소포타미아는 수시로 권력이 교체되거나 인근의 앗쉬리아나 엘람, 심지어 에우프라테스와 티그레스의 발원지인 아라라트 산록의 아르메니아 침략에도 시달려야 했었다. [본문으로]
  35. 왕조 이름으로 제시된 "E"의 뜻이나 유래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 왕조의 통치기간인 BC974 - BC732 사이 근 2세기 동안 적어도 서로 다른 10개 이상의 가문에서 22명 이상이(기록이 없는 햇수만 4년이 넘고, 그나마 남은 기록 상으로는 17명만 남아 있고, 그 가운데 적어도 8개 가문의 왕은 찬탈자이자 찬탈당한 자로 단임으로 끝났다) 왕위에 올랐을 만큼, 그리고 아무도 왕조의 이름을 바꿀 엄두를 낼 수 없었을 만큼 왕권은 불안정했고 사회는 혼돈과 암흑이 계속된 걸 알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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