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단락)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2.플루토스-3)

병든소 2011. 2. 6. 21:09

12. "플루토스", ("부富의 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2-2)에서 계속)    플루토스에게 온 첫 번째 방문자는 정의로운 사람인데, 신의 덕으로 부자가 된 그는 신에게 기도하고 싶어 한다. 그가 카리온에게 말하는데, 그는 아버지로부터 충분한 재물을 상속받았고, 우정 어린 행동은 인생에 유용한 것이 된다는 생각으로 궁핍한 친구들을 돕는 데 써 없앴다. 그런 다음 일들은 그가 가난하게 되었고, 버림받았으며, 그가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들에 의해 경멸당했다는 것이다. 크레뮐로스와 같이 그는 분명히 불의가 인생에 있어 정의보다 더 유용하지 않은 것인지 아닌지 의문을 품기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13년을 대단한 가난 속에서 그의 운명에 반항하지 않고 살았다. 확실히 첫 번째 방문자가 실행했던 혹은 기대했던 정의 종류는- 친구들을 돕는 것 아니면 은혜를 베푸는 것- 불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새로운 질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카리온과 첫 번째 방문자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번째 방문자가 도착한다. 플루토스의 덕분으로 그는 고발꾼인데 망했었다. 그는 분개하고 있는데, 만일에 그의 시력이 회복된다면 그 즉시 "우리들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모든 정의로운 사람들 중에 그만 홀로 망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고발꾼은 자신을 정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그의 재산은 정의로운 사람들과 카리온에 의해 불의한 방법으로 나누어졌었고, 평소에 그가 하던 대로 그는 그들을 범죄 행위자로 처리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들은 단지 그를 비웃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정의롭다 여기는데, 왜냐하면 누구나 원하면 고발자로서 행동해도 좋았기에, 그는 범법자들을 고발하여 법치의 확립에 조력하는데 헌신하였기 때문이고; 그는 또 전적으로 도시를 위해 살았다고 주장한다. 옛날 질서에서 그는 잘살았었기 때문에, 옛날 질서에서는 정의가, 즉 공공심이 법에 의해 보상받았었다는 것을 그가 암시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그들의 생계를 위해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농사나, 장사나, 기술을 통해 번다는 것을 견지하는데; 그들은 소문들을 옮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 고발꾼은 그에게 양들의 생활을 연상시키는 개인적인 삶에 대해 오로지 경멸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그에게 플루토스 그 자신이 주어진다 해도, 그가 고발에 헌신하는 그의 생활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페니아는 별개로 하고, 그는 연극에서 유일하게 새로운 질서를 혹은 이상적인 삶을(921-23) 간단하게 거부하는 사람이다. 플루토스의 치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고, 즉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고, 아니면 그들 자신의 일을 신경 쓸 것이라서, 더 이상 법정 같은 것은 없을 것이고, 그래서 고발꾼들도 없고; 고발꾼들은 전적으로 제우스의 시대에 속한다. 전환의 시대에는 그들과  또 다른 불의한 사람들은 여전히 처벌당한다. 어떤 면에서 고발자들을 플루토스 그 자신으로부터 그의 재산을 빼앗기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비공식적인 행동은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그는 카리온으로부터 공식적인 처벌을 받는데, 카리온은 이제 옛날 질서에서 고발꾼들이 담당했던 역활을 빼앗아서(928-29; cf. 918-19); 그 정의로운 사람의 전적인 승인을 얻어, 고발꾼의 좋은 외투와 신발을 벗겨 내고, 그 정의로운 사람이 입었던 날고 닳은 것들을 강제로 입힌다. 고발꾼은 저항하기에는 너무 허약하지만 순순히 굴복하지는 않는데; 카리온이 단지 플루토스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도움을 받을 사람을 찾는다면, "그 강력한 신"은 혼자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해체한 죄로 오늘 당장에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한다. 요점은 잘 알았고; 만일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다면, 더 이상 법이 필요할 일은 없고, 따라서 법과 관련된 기관도 없을 것이다. 물론 고발꾼의 협박은 전적으로 쓸데없다. 플루토스의 혁명으로 고발꾼의 자리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바뀔 것이고, "기사들"에서 클레온이 소시지장수와 자리 바꿈을 했듯이, 플루토스의 존재 덕분이라고 알고 있는 대로 더 이상 인간인 지배자에 대한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가 또 다른 고발꾼을 처벌하는 것과 카리온이 그 고발꾼을 처벌하는 것을 비교하면, 새로운 질서가 얼마나 관대한 것인지 안다(716-26). 그 고발자가 달아난 다음, 그 정의로운 사람이 플루토스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카리온은 그와 함께 집으로 들어간다.

 

세 번째 방문자는 늙은 여자인데 고양이 새끼처럼 젊은 소녀와 같은 행동을 한다. 그녀는 어서 오라고 하는 크레뮐로스에게 플루토스가 보기 시작한 이래로 그녀는 견딜 수 없는 끔찍한 불의에 시달려 왔다고 말한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잘생기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 주던 남자 친구가 있었고, 그녀는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돌보고 왔었다. 그는 그 자신과 그의 여동생 그리고 그의 어머니를 위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적은 액수의 돈이 필요했다. 틀림없이 그는 그 집안에서 유일한 남자였고, 그의 나이 든 여자 친구는 그를 간직하기 위해 그의 전가족을 "간직"해야만 했다. 그는 확실하게 그의 헌신적이고 끊이지 않는 그녀에 대한 사랑을 그녀에게 각인시켰다. 지금 그는 완전히 변했다. 사악해진 것도 아니고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그는 그녀의 사탕 선물을 그녀의 나이에 대한 무례한 주석을 달아 돌려보냈다. 전에 그가 그녀를 대했던 방식과 지금 그가 그녀를 대하는 방식의 대조는 충격적이고, 그리고 과연 그에게 플루토스가 그를 부자로 만들어 줄 자격이 있는지 의아스럽게 만든다. 그 노파는 그에게는 없다고 확신한다. 크레뮐로스는 신에게서의 연유를 옹호하며, 그녀의 정당한 불만은 시정될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그녀는 전 애인이 그의 빚을 그녀에게 갚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크레뮐로스는 그 젊은 남자가 그녀와 지금까지 같이 산 것으로 그 빚을 갚았다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가 살아 있는 한 그녀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었다. 크레물로스가 이 어려움을 풀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당사자인 남자 친구가 등장한다. 그는 그가 그의 전 애인에게 입혔던 상처 위에 모욕까지 더하는데, 크레뮐로스는 이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합세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가 그 우스꽝스러운 노파에게서 얼마나 즐거움을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정의에 대한 분별은 그에게 그 노파의 정당한 요구들을 잊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 젊은이가 포도주를 마셨으므로 그는 그 나머지도 마셔야만 한다. 젊은이는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리고, 그러나 크레뮐로스의 나이를 존중하여, 그를 때렸었을 것이다. 플루토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와 있는 그 젊은이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부탁한다. 그 노파 역시 신에게 말하고 싶다고 하자, 젊은이는 떠나가고 싶어 하는데, 크레뮐로스는 그에게 반해 어떤 강제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그는 그가 약속을 위반한 보상을 그 노파에게 해야 할지 모르나, 그 보상 역시 그에게는 그다지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그의 경우는 명백하게 고발꾼의 경우보다 복잡한데; 그래서 그것은 전환기를 이해하는 데 후자보다 더욱 도움이 된다. 그의 노파에 대한 의무는 그전의 가난의 결과이지만, 그가 지금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돈으로 그 의무를 없앨 수 없다.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궁핍 가운데 있지 않는 한 남자의 인내의 한계를 넘는 것이어서, 크레뮐로스와 같은 사람에 의한 중재가 필요하다. 젊은이와 노파의 장면은 "여자들의 의회"에 있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데, 거기서는 노파들이 사랑에 빠진 소녀가 있는 젊은이에게 손을 대고 있다. 만일 "여자들의 의회"에 나오는 노파들의 승리를 "플루토스"에서 나오는 위축된 노파의 불쌍한 상황과 대비해 보면, 프락사고라의 전체 구도가 크레뮐로스나 플루토스의 전체 구도에 비해 얼마나 열등한지 안다. 프락사고라가 가차없이 본성의 부등성을 법적 동등성으로 (아니면 본성의 우월성을 본성적인 열등함의 법적 우월성으로) 희생시킨 반면, 플루토스는 전통적인 부등성을 폐기시키고, 그래서 본성의 부등성을 마음껏 펼치게 회복시키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남자 친구가 약속을 파기한 데 대해 그 무슨 보상이 노파에게 주어지더라도, 지금부터는 어느 젊은이도 가난에 의해 그가 했던 일을 하도록 몰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락사고라와 플루토스는 모두 에로스를 노예상태에서 부까지로 자유롭게 하지만; 프락사고라는 이것을 부가 했던 것보다 에로스에 더 큰 폭동을 일으켜서 이루고, 플루토스는 에로스를 다른 어떤 노예 상태로 그것을 제한하지 않고, 노예 상태에서 부까지로 자유롭게 한다. 부나 법을 통해 도착된 에로스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마치 그가 부가 더 이상 타락의 절정으로 되지 않아야 하도록 하려 하는 것처럼, 그는 에로스가 그 본래 속으로 들어오게 하려 한다. 이것이 플루토스가 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노파들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페니아에게 한 대답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람들 가운데 부나 가난에 대한 부등성은 본성적인 질서를 혼란시킨다. 페니아의 모습을 통해 본성에 던져졌을지도 모르는 의심이 플루토스에 의해 지워진다: 페니아는 필요이고- 아니면 필요에 관련되고-, 그러나 에로스는 간단히 필요가 아닌데; 기술들이 페니아의 자식일지 모르지만, 에로스는 아니다. 디오티마의 말 가운데서 '사랑의 신Eros,Love'은 '가난의신Penia,Poverty'과 '부의 신Plutos,Wealth'의 결합으로부터 뻗어 나온다는 말이 있다.

 

다섯 번째 방문자는 헤르메스이다. 그는 플루토스가 아닌 크레뮐로스와 그의 가족 전체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는 결코 플루토스를 신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크레뮐로스와(그리고 그의 가족과) 이야기하는 데 실패하는데, 그는 문간에서 카리온을 만났고, 그리고 그의 카리온과의 대화로 그가 크레뮐로스와 대화하는 것이 불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의도는 크레뮐로스에게 제우스가 그와 그의 가족들을(모든 정의로운 사람은 아닌 그의 친구들도) 불경죄로 다스리고자 한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인데, 왜냐하면 플루토스의 시력이 회복되었는데도 누구 하나 신들에게 제물을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카리온이 대답하기를 제물을 중단은 최종적이며 더군다나 정당한데, 신들이 인간들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정의로운 사람의 친구들만큼 불의한데, 즉 그들은 연극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 더 불의하다. 헤르메스는 그를 반박하지 않는데; 제우스의 위협조차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카리온이 보기에 그는 그 불의함으로 그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얼마간의 도벽이 있는 노예는 한번 이상 카리온의 친구로 행세하였던 도둑질의 신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어려움 속에서도 힘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여 그 신을 도울 생각을 한다. 헤르메스는 사람들과 살고 싶고, 특히 크레뮐로스 가정의 구성원이 되고 싶다. 얼굴도 붉히지 않고 인정하듯이 그는 그의 동료 존재들을, 말하자면 그의 조상의 땅을 버리려고 하는데, 진짜 조상의 땅은 누구가 아주 잘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의가 다른 것들은 없고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는 것이라면, 헤르메스는 정의롭다. 플루토스의 치세 아래서의 그의 운명이 보여 주듯이 그는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진짜로 정의롭지 않다. 그래서 그는 지금부터 정의로운 사람들을 위해 남겨둔 부를 나누어 가질 수 없고; 그는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여러가지 종류들의 직업을 제의해 보지만 그 모두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일로 판명이 난다. 마침내 그는 음악과 체육의 경기들을 관장하는 책임자가 되겠다고 제의한다: 플루토스 치세가 가져온 세계적인 여가에 힘 입어 그런 경기의 수요가 그전 어느 때보다 더 대단하다. 카리온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헤르메스가 인간의 하인으로서 행동하여 생계비를 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남기지 않는다. 한 노예가 제우스의 위협과 헤르메스의 불평 혹은 요청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 플루토스의 치세가 얼마나 인간의 치세인가를 충분히 보여 준다. "플루토스"의 새로운 질서에서는 플루토스가 "새들"의 새로운 질서에서 '새들'이 차지했던 지위를 차지한다. 

 

마지막 방문자는 구세주 제우스의 사제이다. 그 역시 플루토스가 아닌 크레뮐로스를 찾는다. 역시 플루토스를 결코 신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된 이후 더 이상 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아 그 역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신전들은 버려졌으며 또 경멸로 채워졌다. 그 역시 신들을 버리고 크레뮐로스와 머물고 싶어 안달한다. 크레뮐로스는 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가 받아들이는 대로 구세주 제우스가 솔선하여 여기에 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구세주 제우스는 플루토스이다. 새로운 질서에서 사제는 필요할 것이고, 경기 운영자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플루토스를 그전에 좋았던 옛 시절에 그를 소위 아테나 신전의 후실opisthodomos 수호신 격으로 옹립하였던 곳, 바로 아테네의 보물들을 간직하던 곳에 옹립할 때가 왔다. 크레뮐로스는 그 행렬을 준비한다. 그는 그 행렬에서 역활을 사제와 노파에게 맡긴다. 그 노파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날 저녁 그녀에게 올 것이라고 크레뮐로스로부터 듣고 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방문이길 희망한다. 플루토스는 어떤 의미에서 그행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데 침묵하고 있다.

 

젊은이와 그의 혐오스런 여자친구의 관계는 클레뮐로스와 페니아의 관계와 또 덧붙여서 제우스의 시대를 연상시킨다. 이에 따라 플루토스를 방문한 여섯 가운데 오직 노파와 제우스의 사제만이 마지막 행렬에 관련하여 언급된다. 크레뮐로스가 주도한 덕분에 오직 충동이나 쾌락 한쪽에만 바탕을 둔 한 불명예스런 종속자가 전적으로 친절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플루토스의 종속자- 사실은 플루토스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그를 조정하고 있는 종속자에게 굴복한다. 젊은이가 노파를 버리는 것이나, 사제가 제우스를 버리는 것의 유사성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플루토스"는 지금의 쇠퇴로부터 바라던 아테네의 복구와, 바라던 옛날의 부유함에로의 회복을(1191-93) 기적적이고 불가능하고 웃기는 방법으로 회복하게 되는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경축한다. "플루토스"에 담긴 진실은 "여자들의 의회"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희극에 담긴 진실이다: 그것들 모두는 아테네에 대해, 아니면 어떤 아테네 사람에 대해 바라던 축복을 기적적이고 불가능하고 웃기는 방법으로 그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경축하는데; 소크라테스의 "꾀 주머니"가 불에 타 내려 앉는 것이 아테네에 대한 축복을 의미한다. "플루토스"가 시작되는 현재는 아테네가 절정에 있던 지난 시절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기 전에 혹은 그 전쟁 이전에- 비교해서 뿐만 아니라,  크로노스 때와 비교한 제우스의 시절을 통해서 보더라도, 아니면 차라리 플루토스가 아직은 젊고 눈으로 볼 때(88-89, 95, 221, 581)와 비교해서도 그 수준이 낮다. "플루토스"는 제우스의 폐위가 부로써 보상되는 정의를 위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소개한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크레뮐로스의 전체 구도를 인정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정의를 잘 나타낸다. 제우스의 지배의 종말이 신성의 지배의 종말은 아닌데, 플루토스가 제우스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두 가지 도시의 근본적인 요구들은- 아버지 폭행과 근친상간의 금지는- 최소한으로 말해서 제우스의 지배에서 플루토스의 지배로의 전환에 의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이 없다.

 

제우스의 퇴위는 도시의 세 가지 근본적인 요구들이 똑같이 존중되는 "새들"에서도 역시 경축된다. 그렇지만 "새들'에서는 전체 구도에 책임을 지는 그 사람이 제우스의 후계자가 되는 반면, "플루토스"에서는 전체 구도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니라, 신인 플루토스가 제우스의 후계자가 된다. "새들"에서는 페이세타이로스가 전적인 주도권을 쥐고; "플루토스"에서 주도권은 경건한 크레뮐로스가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그리고 문자 그대로 따른 아폴론의 신탁과 함께 크레뮐로스에게 있다. "플루토스"에서 올림포스 신들의 몰락은 이들 신들 자신에 의해 한 인간으로서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에서라기보다 신들의 부조리한 행동에 의해 연유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연극의 결과에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결정적이고 의도하지 않았던 기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플루토스가 맹인이었던 수 세기 동안 플루토스의 시력 회복에 대해 결코 꿈꾸지 않았고, 그리고 그가 치료한 그 맹인이 플루토스라는 것을 그가 알았을까 하는 것은 더욱 의문스럽다. 그 초-알키비아데스인 페이세타이로스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한 농부인 크레뮐로스는 그의 정의와 그 또래 닮은 사람들의 정의가 부로써 보상받는 것에 관심이 있다. 크레뮐로스가 실행한 변화는 아테네에서 일어나고; 페이세타이로스에 의한 변화는 명백히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크레뮐로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창조한 가장 평범한 주인공이다. 이것에 따르면, "플루토스"는 그의 가장 평범한 연극이다. 그것에는 다른 연극들에는 있는 다른 차원에서 비교해서 그들의 존재가 고마운 남성이나 혹은 여성의 본성적인 지배자들, 소크라테스,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작가 자신과 같은 광택이 나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늙은 사람들의 연극이다: 크레뮐로스의 아들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젊은이는 겨우 노파를 위해 필요한 존재일 뿐이며; 아름다운 여자는 아무도 무대 위에 서지 않고, 이것으로 연극을 꾸민다. 플루토스가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은 자주 듣는데; 그가 다시 젊고 아름답게 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한다. "플루토스"는 "새들"과 같이 결혼식으로 끝나는 결말이 아니다. 크레뮐로스와 플루토스의 진실은 그들이 가져온 새로운 질서의 진실이다. 새로운 질서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부유하고 그래서 정의로울 것이다: 그 속에 정의나 신사정신을 가르칠 장소는 없다. 이것이 크레뮐로스의 아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것은 크레뮐로스를 델포이의 신탁에 물어보게 한 그의 양육과 관계가 있었다. 새로운 질서에는 기술과 공예를 위한 장소는 없다. 늙음, 죽음, 질병은 남을 것이고; 더 이상 의사들이 없어 사람들은 착한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도움이 그전보다 훨씬 더 필요할 것이다. 인간의 정부는 더 이상 없고, 그래서 지배에 대한 욕구는 시들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범죄는 부나 지배에 대한 욕구에서가 아니라도 일어난다. 그 범죄는 역시 에로스로부터 생길 것이다. 근친상간이 그런 범죄이다. 누가 새로운 질서에서 근친상간이 범죄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인가? 노예제도가 존속된다는 사실은 가족제도 역시 존속한다는 것을 가르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플루토스"에서 에로스는 무시되고 있고, 그리고 고작해야 겨우 아프로디테에 걸고 맹세한(1069-70) 이 연극에서 유일한 배역인 노파의 존재로 암시할 뿐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새로운 질서에서는 누구도 에로스나 다른 동기로 어떤 범죄도 짓지 않을 것인데, 모든 범죄는 즉각 가난으로 처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새로운 질서에서 에로스가 더 이상 재물을 통해 변용되자 않을 것이라는 것과, 그러나 이것이 단지 가난을 없애면서 생긴 피할 수도 없고 의도되지도 않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에로스와 음악 혹은 일반적인 지혜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새로운 질서에는 천박한 공예품들이나 정부를 위한 장소도 없지만, 그런 만큼 더욱 에로스나 지혜를 위한 장소가 없는 곳이라고 진정으로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즉시 이런 근거로 "플루토스"가 새로운 질서를 경축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해야만 할 것이다: 늙음(또한 죽음)과 단순성의 생존이 에로스나 지혜의 생존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보인다. 플루토스는 작가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데(796-99), 연극이 아프로디테의 지배와는 다르게 부의 지배는 경축하기 때문이다. "플루토스"의 평범한 배역은 제우스의 폐위에까지 따져 보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은 "새들"에서 충분히 판명되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마치 그가 페이세타이로스가 공개적으로 지배할 때 '새들'보다 훨씬 더 힘이 없었듯이, 크레뮐로스가 인도하자 플루토스보다 훨씬 힘이 없다. 플로토스를 대신한 크레뮐로스의 행동은 '새들'을 대신한 페이스테타이로스의 행동 뿐만 아니라, 에이레네를 대신한 트뤼가오스의 행동까지도 연상시킨다. 플루토스는 에이레네가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의 승리에 대해 조금도 혹은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플루토스가 살아 있고, 그리고 걷고 말할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그는 에니레네의 아름다움은 없다. 여러 다른 점으로 플루토스와 에이레네는 서로 각각 신성 그 자체이다. 플루토스의 시력이 회복되자, 지금까지 기술, 법nomos, 그리고 기회가 차지했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아니면 그 자체로 기술, 법nomos, 그리고 기회를 통합하는 존재가 되는 것으로, 그는 필수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용한 것이 된다<주13>. 그렇지만 이것은 플루토스가 신성의 내용물이 오직 하나라는 것을 뜻한다. 마치 에이레네의 해방이 폴레모스에 대한 거역이듯이, 플루토스의 해방은 페니아에 대한 거역이다. 폴레모스와 페니아는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제우스를 대신하여, 혹은 제우스의 뜻에 따라서 행동한다. 에이레네나 플루토스가 매력적이거나 우아한 반면, 폴레모스나 페니아는 공포를 유발한다(438, 575). 폴레모스와 페니아는 쉽게 방해받는다. 신성의 그런 내용물에 대한 불패의 적수는 그것의 희극적 등치물이 에이레네라기보다는 차라리 플루토스이고, 폴레모스라기보다는 "뤼시스트라테"의 마지막 부분에서 경축받는 팜마코스의 아테나이다. 페니아와 폴레모스 간의 상응점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전쟁 따위를 공개적으로 칭송하는 것으로, 가난 따위를 공개적으로 칭송하는 것이 연극의 어느 데에서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플루토스"는 제우스의 지배를 대체한 플루토스의 지배를 경축한다: 제우스의 지배가 멈추자 사람들 가운데 불의가 멈춘다. 헤르메스의 예가 새로운 질서에서는 신들 역시 정의롭지 않으면 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인다. 연극의 초입에서 플루토스는 그의 눈을 멀도록 한 제우스의 지혜에 대해 반 넘게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는 부가 절대적으로 타락시킨다고 확신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아울러 제우스가 불의하다는 것도 믿었는데, 그는 제우스가 그를 눈 멀게 한 것이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시샘이라는 것을 따져 보았었기 때문이다. 페니아는 제우스의 정의를 타락하게 만드는 부의 성격을 추론하면서, 제우스는 가난하고 그래서 정의롭다고 옹호한다. 무엇보다 만일 부가 절대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것이라면, 플루토스 그 자신은 절대적으로 불의하다. 확실히 부가 절대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을 나쁘다. 그렇지만 연극은 이런 사람들의 (그리고 플루토스의) 슬픈 견해를 진실이 아니라고 보여 준다: 만일 정의가 명백하게 보상받는다면, 혹은 만일 불의를 저지를 기회가 없다면- 달리 말해서, 만일 정의가 부의 필요충분 조건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정의롭게 될 것이다. 플루토스의 정의는 그의 승리가 정의로운 사람들의 승리이며, 그리고 불의한 사람들의 패배라는 사실로 증명된다. 플루토스의 지배는 완벽히 정의로운 질서이고; 그것은 법이 이루기를 소망하는 것, 소위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보상과 불의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완전하게 이루며; 그래서 그것은 법을 불필요한 잉여물로 만든다. 또한 "플루토스"는 법의 정신의 승리라고 말해질지도 모르겠다. 법은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사람들이 옳은 것을 한다고, 그리고 단지 그것이 그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르게 행동하는 것을 피한다고, 기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법은 보상과 처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루토스나 혹은 크레뮐로스가 확립한 질서는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찾는 것은 법의 준수나 정의가 아니라, 부라는 전제 위에, 그리고, 그래서 부에 대한 욕구가 소득을 사랑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전제 위에 근거를 둔 것이다. "플루토스"는 제우스의 폐위를 정의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에 대한 사랑의 옹호를 통해 옹호한다. 플루토스의 치세에서 정의는 보장되는데, 정의가 명백하게 필요하기 때문이고; 정의는 그전 어느 때보다 훨씬 더 "필수적"인데,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서 오만hybris의 위험이 그전보다 훨씬 더 대단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불의는 그 즉시 가난으로 처벌된다. 정의는 필수적인데, 즉 그 자체를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아; 사람들의 생활의 즐거움은 에로스나 음악 등의 것에서보다 그들이 정의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서는 적게 나온다. "플루토스"는 이런 정의에 대한 견해의 희극적 등치물을 늙고 가난한 농부의 정제되지 않은 정의에 대하여 원근법적 시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소개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은 이런 정의에 대한 시각이 모든 중대한 것들 가운데서 올바른 것들에 대해 가르치려는 가장 진지한 욕구에 완벽하게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플루토스" 끝.)

 

 

<주13>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2-2) "플루토스" 아홉 번째 단락을 보라.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3) "결론"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