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단락)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2.플루토스-2)

병든소 2011. 2. 5. 16:32

12. "플루토스", ("부富의 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2-1)에서 계속)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그럭저럭 잘 되어 왔다. 크레뮐로스는 블렙시데모스의 재촉으로 플루토스를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으로 데려가는 것을 서두르고자 한다. 이런 순간에 두 친구는 크레뮐로스가 줄곧 알고 있었고 두려워 해 왔었던 그들의 일에 눈에 띄는 인간 이상의 장애를 만난다. 이제 그의 주된 동조자는 그의 눈으로 직접 크레뮐로스의 우려가 어떻게 정당화되었는지를 본다. 정말 그들은 제우스나 혹은 그의 벼락에 의해서가 아니라, 플루토스의 여성 상대방인 페니아(가난의 신)에 의해 대항하게 된 것이다. 그 둘은 가난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해서 페니아를 알지 못한다. 그녀의 등장은 맹인 플루토스 때처럼 혐오스럽다. 그녀는 블렙시데모스에게 막연하게 끔찍한 여신 에리뉘에스를 연상케 한다. 역겨운 목소리로 그녀는 두 친구의 불경스럽고 불법적인 구도를 비난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어느 신이나 인간도 감히 하지 못했던 것을 감히 하는데- 그들의 과감함이 페이세타이로스의 그것을 능가하는지 궁금하다-,  따라서 그녀는 바로 그날로 그들을 파멸시키겠다고 위협한다. 제우스가 그녀를 보냈다고 추정할 이유는 없지만, 그러나 확실히 그녀는 제우스를 대신해 행동한다. 마치 플루토스가 제우스를 고발하듯이 페니아는 그를 옹호한다. 그렇지만 플루토스와는 다르게 페니아는 제우스의 손에 달렸다고 기대되는 어떤 처벌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따라서 그 둘이 그녀에 대한 것을 더 많이 알고 그리고 그녀가 더 많은 말을 할수록 더 많은 용기가 그들에게 되살아난다. 그들은 그녀를 그녀에게 조금도 잘못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고함치는 앙심이 가득하고 천한 여자로 간주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그녀가 가난의 신이어서 사람들과 오랫 동안 같이 살아 왔었는데, 특히 아테네에서 그녀가 있을 만한 곳 모든 데서 그녀를 쫓아내려 하면서, 비통스럽게도 그녀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고 대답한다. 블렙시데모스는 그녀가 누구인지 듣고 나자 달아나고 싶어진다. 크레뮐로스는 그렇지만 이제 용기에 있어서도, 정의로움에 있어서 이미 그의 친구를 능가하는 것을 보여 주었듯이, 그의 친구를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 두 사람은 플루토스를 단 한 여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생긴 곤경에 버려둘 수가 없다. 블렙시데모스에게 공정하도록 말하면, 크레뮐로스가 플루토스에게 마주 서는 데 성공한 까닭에 그 친구보다 페니아에게 마주 서는 데 더욱 잘 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인데; 그밖에 그는 만일 어떤 위험이 그들을 조금이라도 위협한다면, 그것은 페니아로부터가 아니라 제우스로부터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크레뮐로스는 블렙시데모스에게 플루토스의 힘을 상기시켜 주어 그의 용기를 되살린다. 페니아는, 크레뮐로스가 그의 협조자의 두려움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 즉 그 두려움을 증가시키려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것을 말없이 듣기만 하다가, 그 두 사람이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목을 반복해서 든다. 크레뮐로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줄 축복을 구하는 것이 어떻게 잘못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범세계적 행복의 길을 막고 선 한 존재는, 만일 그것이 제일 먼저 그리스로부터 그 다음은 세상으로부터 쫓겨났다면, 오로지 그것이 받아들일 만한 것만 가진다. 다른 말로, 그녀가 인간이든 초인간이든 상관없이, 페니아는 불의한 행동을 하고; 모든 인간들에게(혹은 한 사람만 뺀 모두) 이익이 되는, 그러나 신들에게는 해로운, 행동은 정의롭다. 만일 어떤 신이 인류의 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신은 정당하게 적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리하여 페니아는 그녀 혼자서만 사람들이 가진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 즉 크레뮐로스가 그녀에게 잘못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그녀에게서부터 혜택을 받아 왔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다툰다. 그녀는 가난이 없어서는 안 되는 부가 있음의 조건이라고 다투는 플루토스의 주장보다 훨씬 멀리 가는데; 플루토스가 다투는 주장이 오직 부가 있는 사람들에만 매력적인 반면, 페니아가 다투는 주장은 부가 없는 사람들에도 마찬가지로 매력적이거나 혹은 매력적인 것으로 될 수 있다. 그 밖에 그녀의 견해는 플루토스의 것보다 더 합리적인데, 정의로운 사람들이 부를 이루도록 바라기도 또한 바라지 않기도 하였고; 그래서 그녀는 플루토스보다 더 무섭게 생각될 수 있었다. 페니아는 또 부나 혹은 부에 대한 욕구가 전적으로 모든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의 원인이라는 크레뮐로스가 다투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182-83). 부에 대한 욕구는 우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지만, 그러나 더 많은 부를 쫒는 부자들에게도 역시 활기를 불어 넣어 그들은 스스로를 충분한 부자가 아니라고, 즉 어떤 면에서 가난하다고 여기는데; 그래서 크레뮐로스는 그의 주장을 가난만이 오로지 모든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의 원인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페니아가 다투는 주장이 크레뮐로스의 것보다 역시 더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녀의 주장이 매력적이라 해도 그녀 자신은 혐오스럽다. 그녀는 그녀의 주장을 증명하는데 성공하기 위하여 그녀의 운명을 기꺼이 위험 속에 내놓는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려는 욕구나, 정의로운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려는 욕구나, 모두 똑같다고 취급하는데, 정의가 눈에 보이도록 보상받는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사람이 정의로워질 것이라는 말로 넌지시 뒷받침한다. 그 둘을 가르쳐 놓겠다는 그녀의 약속과 그녀의 합리적인 논변을 그 둘은 경멸하며 듣는다. 그래도 그 두 편은 어느 편이든 지는 한 편이 그냥 한 사람의 죽음보다 더한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서로 동의한다. 그 토론의 결과가 무엇이든지 간에 힘이 아닌 논쟁으로 이 문제를 풀자고 페니아가 제안했다는 것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것이 그녀의 저주가 크레뮐로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그녀가 논쟁으로 돌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신들이나 사람들에 의해 한번도 이행된 적이 없는 가장 과감한 행동의 결과가 힘이 아닌(그리고 특히 제우스가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닌) 논쟁에 의존한다.

 

코러스는 토론에서 페니아에게 이기라며 그들의 두 친구를 짧게 격려한다. 크레뮐로스는 그와 그의 친구의 대담한 행동에 대해 그가 알기에는나쁘거나 착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잘못할 때 정직한 사람들이 잘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는 근거로 정당화하면서 토론을 시작하는데; 만일 플루토스가 다시 눈을 뜬다면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정직해지고, 신성한 것을 숭배하게 되니 이것이 인류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현상을 보면 광기나 오히려 나쁜 악마의 지배가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악한 사람들이 부자이고, 그리고 많은 정직한 사람들은 가난하다. 크레뮐로스는 그 자신을 특출하게 대담하지는 않다고 소개하고; 그는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킨다는 구도가 "우리", 즉 최소한 블렙시데모스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밝힌다. 그의 경건심에 대한 칭송 때문에 그가 위장하고 있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데,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그가 바라는 높은 행복이 플루토스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페니아는 잠시라도 크레뮐로스와 그의 협력자가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부자로 만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 크레뮐로스의 전제에 이어진 화제를 택하지 않는데, 그것에 따르면 정의로운 사람들은 잘 살아 가야 하고, 불의한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 크레뮐로스가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려는 시도에 관한 것만 빼고, 무엇보다 그녀는 크레뮐로스의 정의에 대해서는 플루토스에 대해서 만큼이나 거의 묻지 않는다.

 

페니아는 그녀의 적수가 바라는 상태가 그들에게 좋을 것이라는 것을 힘주어 부정하는 것으로 그녀의 반격을 개시한다: 만일 플루토스가 다시 볼 수 있다면, 즉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면, 아무도 어떤 기술이나 여러가지의 지혜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크레뮐로스가 노예들이 기술들을 발휘할 것이라고 반박하자, 페니아는 그에게 만일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면 더 이상 노예상도 없을 것이며, 그것에 더하여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더 이상 없어져, 노예들이 했던 일들 모두를 이제는 크레뮐로스가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밖에 기술자들의 휴업은 물론 기술자들의 제품이, 즉 모든 오락물들이 사라진다는 뜻인데, 페니아가 공예 기술자들에게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만들도록 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여전히 오락물들도 풍부하게 있다. 크레뮐로스가 플루토스와 말다툼을 벌릴 때, 그 자신이 모든 기술과 훌륭한 발명품도 모두 플루토스로부터 나온다고, 즉 부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부에 대한 욕구로부터 나온다고 언급했던 적이 있다(160 ff.). 그는 부는 인간이 일을 해서 생기고, 일은 다시 돌아 인간의 필요나 궁핍으로부터 생긴다는 페니아의 주장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에 쫓겨 만든 오락물들을 가난한 사람들이 줄긴다는 것은 부정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역겹고, 힘들고, 그리고 불결하다. 페니아는 그가 가난을 거지짓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거지 생활을 끌어간다는 것은 가진 것 없이 생활을 끌어간다는 의미이고, 가난하게 살아 간다는 것은 부자로 되지도 않고 더 빈곤해지지 않고, 그저 일하며 검소하게 살아 간다는 의미이다. 크레뮐로스는 이런 구분이 아무 소용이 없고; 그는 그것을 마치 희극 소재로 알맞는 것 정도로 취급한다. 여전히 페니아의 논점은 분명한  결점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거지 노릇보다 가난이 더욱 낫다고 증명하는 것은 부유한 것보다 가난이 더 낫다는 증명이 되지 못한다. 페니아가 흙을 가는 것을 기술들 속에 포함시키지만 농사 일보다 다른 기술들을 더 강조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cf. 617-18);  농부들과는 구분하여, 탁월한 가난뱅이가 공예 장인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라기보다 남들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 아주 명확해진다.

 

페니아는 전체 토론의 중간 부분이기도 한 그녀의 첫 번째 논점의 결점을 보정하려 노력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잘 산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 이제 그녀는 그녀가 플루토스보다 사람들을 더 낫게- 마음과 외양이 더 낫게- 만든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논점은 그와 그의 친구의 정의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는 크레뮐로스에게 호소력이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다. 페니아는 그녀가 사람들을 말벌과 같게, 즉 도시를 위한 전사로 그리고 온건하고 엄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반면에 부는 성질이 그와 반대되는 것들을 가져 온다. 그녀는 모든 부자들은 나쁘다고 하는 플루토스의 확언을 반복해 말한다. 그녀는 처음 그녀의 논지들 중에 정의를 언급하지 않는다. 크레뮐로스는 그녀에게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범한다고 보여지는 어떤 범죄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블렙시데모스가 그의 친구 크레뮐로스에게 품었던 의심을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페니아는 웅변가들이 아직 그들이 가난한 동안은 데모스와 도시에 대하여 정의롭지만; 그러나 공공의 수입으로 그들 자신을 부자로 만들고 나서는 불의한 행동을 하고, 다수의 사람들에 반하는 음모를 꾸미고, 데모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고 대답한다. 이것이 크레뮐로스도 동의를 하여 페니아가 앞서 나가는 유일한 논점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분명히 아니다: 불의로 돌아선 웅변가들은 그들이 가난한 동안은 여전히 수입을 올린다. 페니아는 그녀가 칭송했던 덕목이 마치 기술들이나 아니면 그들의 훈련이 그러하듯 필요에서 나온 결과물인지 분명하게 단언하지 못하는데(534); 예를 들어 기사들의 덕목처럼 좋은 양육의 결과가 일반 덕목과 같은 종류가 아닌 것은 틀림없다. 달리 말해, 크레뮐로스와 마찬가지로 페니아는 전적으로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은, 중간층인, 그런 계층으로부터 추론하는데, 그들이 부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보다 덕목을 말하는 데 더 알맞다고 생각될 수 있다<주4>. 크레뮐로스는 만일 페니아가 옳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달아나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녀에 의하면, 바로 이런 사실이 그녀가 시람들을 더 낫게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그 아버지로부터 달아나듯이 그녀에게서 달아난다. 크레뮐로스는 그녀의 이런 논점에 대해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그것이 페니아가 덕목에 관해서는 플루토스에 비해 더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도 조용히 있지 않는다. 그는 제우스가 필요나 가난에 의해 정의롭도록 강요받지 않고도 정의롭다는 것을 익숙하게 물고 늘어진다. 플루토스에 의해 알게 된 것을 통해 그는 제우스의 정의로움에 대해 믿는 것을 그만두었는데, 그러나 그는 제우스가 부를 가진 존재라는 것, 혹은 여전히 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믿는다(130-31, 140-41). 그래서 그는 페니아의 가난함이 부유함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단언에 대해, 만일 그녀가 옳다면 제우스는 부유하기 때문에 판단력이 모자랄 것이라며 반격한다. 페니아는 이런 낡은 형태의 견해를 경멸할 뿐이다: 제우스는 가난하다. 제우스의 지혜나 혹은 정의에 대한 옹호가 신학에 있어 광범위한 영향을 끼칠 혁신을 가져오는 지점에 도달했다: 제우스는 가난한 사람들 부류에 속해 있지 부자들에게가 아니다<주5>. 그럼에도 페니아는 제우스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고, 그것은 제우스를 정의롭고, 인정적이며, 그리고 현명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는데; 의문이 들지는 모르나, 그녀가 의미하는 것은 그가 정의롭고 현명하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서, 이 말은 결국 그가 가난하지 않다는 의미이다<주6>. 그렇지만 페니아가 다투며 주장하는 대로, 만일 그가 가난하다면 그는 아주 힘이 세어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이 결론은, 그럴 경우, 단지 페니아의 변론만으로 플로토스를 치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물론 페니아는 제우스가 힘이 없다는 것으로 그의 가난을 증명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그녀는 그것을 올림픽 경기에서 주는 상이 제우스의 법령에 따라 대단히 싼 것이라는 사실로 증명한다. 크레뮐로스는 정의를 염두에 두고, 이 사실 자체가 제우스는 가난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지만 제우스의 인색함의 결과일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페니아는 단지 제우스를 인색하다고 하는 것이 그를 가난하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큰 모욕이거나 신성모독이라 대답할 뿐이다. 그것이 신성모독이라는 것을 증명하며 내세우는 가설을 아무도 논박하지 못해, 제우스에 관한 말싸움은 비긴 것으로 끝난다. 첫 두 부분의 논쟁에서 그녀의 명백한 성공을 기억하면서, 페니아는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들을 가난에 빚지고 있다고 다툼의 주장을 반복한다. 이제 크레뮐로스는 또 다른 신(헤카테)의 말이나 행동을 참고로 언급하여 그녀를 간단히 논박한다. 페니아가 되받을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그는 엄청난 모욕을 가해 그녀를 쫓아 버린다. 그녀가 졌다고 시인할 이유가 없는 페니아는 그럼에도 크레뮐로스가 오늘 안에 처벌을 당할 것이라고는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433). 단지 이제 그녀는 언젠가는 그가 그녀를 다시 찾을 것이라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연극의 나머지 행동들은 그녀의 저주들이나 공포들이 "개구리들"에서 하데스의 공포들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보통의 사람들도 자신있게 판단할 수 있는 그 부분만의 논쟁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약간의 타당성을 가지고 페니아가 행동에 의해서는 졌지만 변론으로는 크레뮐로스에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의 논쟁이 합리적 논쟁의 희극적 등치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곤궁으로 촉발되어 나타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들이 부를 얻을 수 없다는 것에 누가 의문을 가지겠는가? 더욱이나 놀라운 것은 크레뮐로스의 말도 안 되는 구도가 끝에 가서는 전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판명 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플루토스"는 전체 구도가 그것보다 더 합리적인 단단한 적수를 만나서, 변론으로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데도, 모호하게 승리하는 유일한 연극이다. 페니아가 정직한 일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녀의 가설을 '정의의 변론'과 비교하는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인데; "정의의 변론" 역시 변론에 의해 패배하지만, 그의 패배를 "구름"의 결말이 보복하는 반면, 페니아의 패배는 "플루토스"의 결말에 의해 인정된다. "새들"의 경우에는 페이세타이로스의 전체 구도가 아무런 합리적인 적수를 만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괜찮다. "플루토스"를 뺀 모든 다른 희극에서 승리의 연유들은 승리할 만한 연유들인데; "여자들의 의회"에서처럼,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말벌들"에서처럼, 그것들이 간단하게 혹은 분명하게 승리하지 못한다. 스스로 택한 페니아의 패배는 "여자들의 의회"에서 노파들이 젊은 연인들을 이기는 것만큼 충격적이다. 그래서 "플루토스"는 그런 점에서 "여자들의 의회"만큼 추하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아무리 페니아가 합리적이라 해도 그녀는 혐오스럽다. 그녀는 왜 역거운가? 분명하게 하기 위해 조금 과장한다면, 어째서 '분별'이 혐오스러운가? 어째서 그녀는 변론에서 이겼는데도 행동으로 패배하는가? '합리'를 '불합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크레뮐로스가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던 가장 강력한 그녀의 논거는 부가 인간이 일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진실은 연극의 근본적인 전제에 모순되는 것인데, 그것에 의하면 부는 어떤 신이 단지 어떤 사람과 함께 머무는 것으로 그 사람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고, 아니면 페니아를 그의 한 바탕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플루토스라는 신이 있어, 페니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가 그의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일어나도록 한다. 그녀의 합리적인 가설은 단지 플루토스의 존재로 인해 명백하게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녀는 플로토스에 비춰 보면 혐오스럽다. 다른 말로 가난이 뷰유 한 것보다 낫다는 그녀의 단언으로 사실 페니아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좋다고 말하고; 크레뮐로스의 전체 구도는 지금 있는 그대로 인간의 삶은 아주 불완전하고, 그래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데; 이 불완전함은 신들이 있다는 사실로 명백하게 된다.

 

플루토스는 다른 모든 신들과는 같지 않은 신이다. 제우스가 정의로운 사람들을 시샘하는 반면, 플루토스는 그들을 사랑한다. 플루토스가 그의 시력이 회복되는 것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게 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그리고 더군다나 그가 많은 좋은 협력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제우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다. 다른 신들 역시 사람들이 일을 해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이나 욕구를 성취한다. 그러나 다른 신들이 때때로 하는 것을 플루토스는(그의 시력이 회복된 다음이라면) 언제나 한다: 그는 인간의 일을 전적으로 남아서 필요가 없도록 만들고, 그리고 바로 이 사실로 모든 사람들을 정의롭게 만든다. 지금 하는 그대로는 부의 창출이 기술들의 실행을 요구하지만, 기술의 실행은 부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인간의 좋은 삶은 인간의 일에 더해 행운을 필요로 해서; 그것은 기술에다, 선견지명, 희생, 또 기도를 요구한다<주7>. 다른 신들의 유용성은 기회의 대중없는 성격을 상기시키는데, 플루토스의 유용성은 세계적이고 또 필수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플루토스를 독점적인 신으로, 아니면 그들이 그의 힘을 알았던 적이 있는 최소한 가장 높은 신으로 경배하는 것으로 비난받을 수는 없다. 플루토스는 모든 다른 신들과 다르다고 말해도 좋은데, 그 홀로 유용성 그 자체이고, 그 자신이 세계와 통하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는 착함이기 때문이다. 다른 신들과 비교하여 볼 때, 이것이 그가 그 자신에게 돌아가기 위해 아니면 그 자신이기 위해,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그는 신성- 신을 신으로 만드는- 그 지체이다. 만일 이것이 그렇다면 제우스 옹호자인 페니아는 플루토스가- 아직도 크레뮐로스가 경배하는 유일한 신이다- 신이 아니라는 것을, 즉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그녀는 플루토스의 시력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조차 않는다.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려는 그녀의 시도조차 불명예스럽게 실패한 것이 그녀의 혐오스러움에 대한 비밀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아주 명확해 보인다: 만일 플루토스가 없다면, 페니아는 혐오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말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 페니아는 그녀가 사람들이 가진 모든 좋은 것의 전적인 연유라고 주장한다(470-72). 이것이 사람들이 좋은 것에 대해 신들에게 신세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그들은 제우스가 지금 플루토스를 맹인이게 한 것, 혹은 페니아의 효능의 덕을 보고 있다. 페니아는 기술들의 근원이 되는, 혹은 기술들을 요구하는 필요이다. 이것은 기술이 없는 필요 그 자체가 나쁘다거나, 아니면 빈곤하게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즉 혐오스럽다. 페니아가 기술이 없는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러나 기술을 지향한다고 임시로 한번 말해 보자.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로 나쁘지만 그러나 예술이나 법을 통해 좋아지거나 혹은 구제된다<주8>. 만일 법이 짐이라면<주9>, 본성도 역시 짐이다. 그렇지만 신들은 모든 짐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신들의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플루토스는 기술들을 필요 없는 잉여물로 만드는데; 그가 기술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전적으로 인자한 지배 아래서 사실로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게 되도록 필요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도 채워질 것이다. 본성에 어떤 왜곡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플루토스 덕분으로 본성은 적이 아닐 것이며, 정복된 적은 더욱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행복한 완성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플루토스는 아직 맹인이다. 크레뮐로스의 구도의 성공은 그의 페니아에 대한 변론의 승리 위에 그로서는 실행할 수 없는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 그는 여전히 의약의 기술이라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상하게 우연의 일치로 그 시점에서 그런 기술을 구사하는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406-9). 그래서 플루토스의 시력 회복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에 의해 기적적으로 치유될 수 밖에 없다: 신들이 기술들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카리온의 도움으로 크레뮐로스와 블렙시데모스는 플루토스를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으로 서둘러 데려가서 온밤을 거기서 새우는데; 이 일에서 그들은 법nomos을 따르는 수 밖에 없다. 블렙시데모스는 여전히 "어떤 사람"이- 페니아는 아닌 어떤 사람이- 그들의 행동을 방해할 것 같아 겁이 난다. 제우스에 대한 그의 두려움은 완전한 사실무근으로 판명된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서 일어나는 일은 크레뮐로스의 구도가 성공이냐 실패냐에 결정적이다. 이 진행에 대해서는 눈으로 볼 수 없고; 다음날 아침 신전에서 맨 처음 돌아온 카리온이 전하는 보고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지금까지 가난했던 진짜 농부들과 그들에게 견줄 만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복이 많다고 치하한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치료 덕분으로 플로토스의 시력이 회복되었다. 코러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고함치며 칭송한다. 실내에서 결과를 기다려 왔던 크레뮐로스의 아내가 고함 소리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는데; 그녀는 노예로부터 먼저 좋은 소식을 대충 듣고, 그 다음 신전에서의 진행들에 대해 자세히 듣는다. 아마 그들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성에 의해 깊이 감명을 받은 탓이지만, 그러나 또한 확실히 플루토스의 모습이나 몸가짐이 거의 신과 같지 않아(cf. 78,118), 카리온과 그 여주인은 단지 플루토스가 한 인간인 것처럼 그에 대하여 말한다. 카리온이 보고하는 대로 신전에서의 절차들은 가능한 한 최대의 어둠과 침묵 속에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더 나은 조건 아래서 실시되었다. 모든 환자들과 그들과 같이 온 사람들은 누워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잠이 들어 있었다. 카리온은 배가 고파서 깨어 있었다. 그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제가 몸소 성소의 탁자에 신에게 바치는 먹을 것들인 제물들을 차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전에 한 늙은 여자의 머리 근처에 죽 단지가 서 있는 것을 본 터라, 카리온은 사제가 스스로 단지의 내용물을 골고루 다루는 행동을 당연하게 느꼈다. 그는 사제보다 신이 먼저 단지에 손을 대지는 않을까 두려웠는데; 그는 그가 아스클레피오스의 독사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그 여자가 믿게 만드는 것으로 보고를 이어갔다. 아스클레피오스가 몸소 나타나자 그는 숨어서 그가 하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그 신은 먼저 대략 맹인이자 고발꾼인 도둑부터 처치하였는데; 그의 사악함을 처벌하기 위해 지독한 고통을 가하면서 더욱 더한 맹인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그는 플루토스에게 돌아와서, 그의 딸들과 거대한 두 독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를 처치하였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 아스클레피오스 신은 플루토스 신을 치료하고 나서,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와 그의 독사들은 시야에서 곧 바로 사라졌고, 그리고 카리온은 크레뮐로스를 깨웠다. 분명히 아스클레피오스는 그가 누구를 치료하는지도 모르고 플루토스를 치료하였고; 신들의 행동들은 조율된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플루토스와 아스클레피오스는 서로 짝인데; 아스클레피오스의 고발꾼에게 대한 태도는 플루토스 말고도 어떤 신이 정의로우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어쩌면 플루토스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해질지 모른다. 건강이 부보다는 대단히 더 좋을 뿐만 아니라(633-36); 플루토스와는 구별하여, 아폴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11), 아스클레피오스는 현명하다. "플루토스"에서는 아스클레피오스와 아폴론 간의 관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플루토스를 이른 저녁에 치료하였다. 플루토스의 근처에 누워 있던 사람들은 깨어 있었고, 치료를 받을 기쁨에 차 있었으며, 그 밤을 온통 깨어 지냈다. 플루토스는 카리온처럼 아침 일찌기 떠날 수 없었는데, 지금까지 가난하고 정의로운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군중이 기쁨에 차서 그를 뒤쳐지게 붙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불의로 부자들이 된 사람들은 물론 대단히 걱정하였다. 불의가 아닌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플루토스의 치료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는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암시는 있다(cf. 110). 이 시점에 플루토스와 그가 행복하게 만든 사람들이 크레뮐로스의 집으로 가고 있다. 플루토스가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먼저 태양에게, 그 다음에 아테나가 아닌<주10>, 그녀의 땅에 경건하게 절한다. 여기서 다른 모든 연극들에서 나오는 것들보다 "플루토스"에서 "하늘에 걸고"라는 말로 서약하는 것이 훨씬 자주 나오는 것을 주목한다<주11>. 플루토스는 그의 이전의 불운이나 실수들이, 즉 가치 있는 것을 피하고 가치 없는 것들과 함께 살아온 것이 부끄러운데; 이제 그의 무지가 치료되었고; 그는 그의 생활을 위에서부터 아래에까지 바꿀 것이다. 크레뮐로스는 약간 늦게 도착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이 되어 그는 플로토스에 비해 더 많은 군중에게 붙들려 있었다. 크레뮐로스의 아내는 마치 새로 산 노예를 환영하듯이 무화과와 그 밖의 디저트들을 가지고 플루토스를 환영하고자 하는데, 그러나 플루토스가 생각하기에, 그가 선물들을 주기보다 선물을 받는 것은 꼴사나운 일이다. 특히 실외에서, 즉 그가 실지로 구경꾼들에게 그것들을 던져야만 하고, 그래서 그들을 웃게 만들어야 하는 무대에서, 선물들을 받는다는 것은 꼴사나운 일일 것이다. 그의 견해로서는 이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가치 없는 행동일 것이다: 눈을 뜬 플루토스가 작가의 대변인 노릇을 한다. 작가처럼 플루토스는 사람들을 더 낫게 하거나 혹은 정의롭게 하고<주12>, 또한 작가처럼 그는 그가 즐기면서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나누거나, 아니면 그가 만나게 되는 그런대로 정의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웃게 하지 않을 수 없다(758).

 

플루토스가 작가를 대신하여 말하는 네 단락의 운률이 이 연극의 파라바시스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들은 확실하게 다른 연극들에서 파라바시스가 나타난 상황에서, 즉 주인공이 완전히 승리를 거두고 난 후, 그리고 그 승리의 열매가 소개되기 전에 나타난다. 다른 배역들이 크레뮐로스의 집으로 들어간 후에, 카리온이 밖으로 나와 그가 속한 가정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기쁨을 나타낸다: 어느 것에 투자하지 않았고, 어떤 불의의 행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부자가 되었고; 이런 방식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카리온조차 정의롭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대로 집 안은 탁월한 음식과 마실 것들 뿐 아니라, 금과 은 그리고 상아 같은 것들로도 채워졌다. 재물들은 노예들에게도 충분히 나누어졌다. 분명 그들의 법적 지위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최소한 그들의 주인들이 가진 만큼 잘살게 되었다: 크레뮐로스가 아주 통이 크게 제물로 쓸 동물들을 잡고, 그의 아내와 함께 멋진 음식들을 준비하는 동안에, 예민한 카리온은 그의 주인과 안주인이 참을성 있게 견디는 연기를 피해 집을 떠난다.(계속)

 

 

<주4> Cf.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95b1-34.

<주5> Cf. "아카르나이 사람들" 53; cf.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1391b1-3.

<주6> Cf. 크세노폰, '회상' I 6.10.

<주7> Cf. 크세노폰, '회상' I 1.6-9

<주8> Cf. '도시와 사람' 42 그리고 86. 

<주9>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6-1), "평화"에서 여섯 번째 단락을 보라.

<주10>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8-3) "뤼시스트라테"에서 끝에서 두 번째 단락의 후반부를 보라. 

<주11> "플루토스" 129, 267, 366, 403, 1043. Cf. "기사들" 705.

<주12> "아카르나이 사람들" 649-51; "개구리들" 1008-10.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2-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