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단락)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1.여자들의 의회-1)

병든소 2011. 1. 23. 16:28

11. "여자들의 의회"

 

이 연극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나 "구름"과 같이 연극의 사건을 보여주는 전체 구도를 책임지는 배역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렇지만 프락사고라는 디카이오폴리스와 스트렙시아데스보다 훨씬 모호하지 않은 주도권자인데, 디카이오폴리스의 전체 구도는 암피테오스의 개입을 전제로 하고, 그리고 스트렙시아데스의 전체 구도는 '구름'이 개입하지 않으면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락사고라는 뤼시스트라테를 연상케 하는데, 그녀가 여주인공인 그 연극은 그녀의 독백으로 열리지만, 그러나 뤼시스트라테의 독백은 유별나게 짧다. 뤼시스트라테와 같이 프락사고라도 동료 여자들을 기다리는데, 그러나 그녀의 개막 발언은 다른 어떤 배역들의 개막 발언들보다 그녀가 처한 상황에 더욱 강인함을 보인다. 그녀는 가지고 온 등불을 드는데, 그녀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신호이다: 그 등의 불빛은 여자들의 비밀들, 백일 하에서는 반드시 감추어져야만 하는 비밀들에 대한 그들의 비밀스런 즐거움들을- 그들의 절친한 사람들과 그들의 도둑질들을- 반짝이게 하는 유일한 불빛이고; 그 인공의 등불이 태양도 달도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이를테면 프락사고라는 법을 고치는 기술을 요청한다. 등불 역시 여자들이 얼마 전에 결정했었던 계획들의 집행을 지켜볼 것이다. 여자들은 새벽이 오기 전에 의회의 좌석을 차지하기 위하여 남자로 변장하고 밤중에 모이기로 결정했다. 프락사고라는 동료들을 기다려 왔었고, 뤼시스트라테와는 달리 그녀는 그들이 기다리게 하는 것에 화를 내지 않는데, 한밤중에 남편 몰래 집을 나오는 것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며; 이제 평화가 와서 그들 남편들은 군복무로 집을 떠나 있지 않다. 다른 여자들이 하나 둘씩 혹은 여러 명이 모여 등장한다(모두 결혼했으며 성내에 산다). 그들이 전부 모였을 때, 프락사고라는 지난 번 회의에서 결의한 대로 오늘 회의에서 완전히 남자들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도록 모두 앉아 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은 아직 완전히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예를 들면 그들이 가지고 온 턱소염을 아직 붙이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들은 만족스레 점검을 끝낸 뒤, 날이 밝아 의회가 열리기 전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화제를 바꾼다. 그들은 오늘 이행하기로 결의했던 행동의 중차대함을 직면해야 한다: 도시의 이익을 위해 도시에 관한 일들을 인수한다. 성공하려면 그들은 의회에서 무엇을 말하고 행동할 것인지 예행 연습을 해야 한다. 예행 연습이 꼭 필요한 것이 프락사고라는 예외지만 여자들이 의회에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242-44). 여자들은 특히 여자들만이 걸고 맹세하는 여신들로 실수들을 하여 여자라는 것을 드러내곤 해서, 프락사고라는 한 사람이 의회에서 여자들을 대신하여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보기를 하나 들어 준다. 의회의 결정이 잘 이루어지도록 신들에게 기도한 다음, 그녀는 도시의 지배자의 빈약한 자질과 데모스의 빈약한 자질로 인한 결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시는 의회가 없었던 시절 동안 더 좋았었다. 모두가 오직 자기의 이익만 챙기고, 아무도 공동의 선은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의회가 집안 일들의 아주 좋은 관리자인 여자들에게 도시를 넘겨주면 도시는 아직 구제될 수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좋은 특성이 있다: 그들은 옛날 법과 옛날 관행을 모든 면에서 그대로 따르는 반면, 남자들은- 적어도 아테네 남자들은- 무엇이든 바꾸고 싶어 해서 지금의 완벽하게 건전한 관행도 바꾸고자 한다. 따라서 프락사고라는 여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묻지 말고 도시를 여자들에게 넘기라고 아테네 남자에게 촉구한다. 그들의 어머니로서 또한 집안 일의 관리자로서의 자질이 충분하게 보증한다. 특히 그들은 속임을 당하지 않을 만큼 속임수에도 뛰어나다.(속임수에서도 얼마나 그들이 뛰어난가는 현재 그들의 행동으로 보여 준다.) 프락사고라의 그들에 대한 생각처럼 좋은 지배자란 예전의 법을 따르고 또 남을 속이는 사람들에게도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녀와 다른 몇 사람의 의회에서의 행동에 대해 질의응답을 마친 후, 프락사고라는 그들에게 모두 남자 옷들을 입고 서둘러 남자들처럼 의회로 행진하라고 지시한다: 만일 그들이 정시에 도착하지 못할 경우, 회의 수당을 받지 못할 것이다. 여자들이 모두 남자들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남자들처럼 개인의 수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cf. 205-7).

 

프락사고라의 제안과 뤼시스트라테의 제안("뤼시스트라테" 493-95)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지만, 그러나 뤼시스트라테가 힘으로 얻으려 한 것을 프락사고라는, 그녀의 이름에 걸맞게, 대화나 아니면 속임수로 얻으려 한다. 무엇보다 뤼시스트라테의 목표는 프락사고라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다. 뤼시스트라테는 평화를 가져 오게 하고 싶고; 프락사고라는 아직은 듣지 못한 정치 체제의 변화를 가져 오고 싶다. 뤼시스트라테가 가진 연극의 전체 구도의 진실이란 것은, "새들"만 빼고, 지금까지 논의해 온 모든 다른 연극의 사건들에 생명을 불어 넣는 전체 구도들의 진실인데; 모든 그들의 전체 구도는 프락사고라의 전체 구도에 비해 그 폭이 모자란다. 프락사고라의 전체 구도가 가지는 폭은 그녀가 연극을 개막하는 것을 지켜보는 관찰의 폭에 반영된다.

 

프락사고라와 다른 두 명을 제외하고, 마치 "새들"에서 '새들'이 무대에서 그들끼리 코러스를 만들었듯이,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코러스를 형성한다. 그들이 들킬 경우 당할 위험을 상기시킨 다음, 절반의 코러스가 마치 회의 수당을 받길 갈망하며 의회로 행진하는 남자들로 구성된 것처럼 노래한다. 여자들은 한번 여자들이란 것을 드러내는 위험에 빠진다. 나머지 절반의 코러스는 교외에서 온 남자들처럼 행세하며, 수당이 적어 시민들이 수당 때문에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던 좋았던 옛 시절을 칭송한다. 어느쪽 절반의 코러스도 늙은 나이를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이 남자 역활을 하는 데는 성공적인지는 몰라도, 늙은 남자 역활을 하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떠난 뒤 여자들이 모였던 프락사고라의 집 앞에 프락사고라의 남편인 블레퓌로스가 등장한다. 그는 날이 밝았는데도 아내가 없자 매우 어리둥절해 있다. 그는 그의 구두와 외투가 필요했기 때문에 아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그것들이 필요했던 것은 그 스스로를 급작스런 압박감으로부터 편하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의 옷을 걸치고 아내의 신을 신을 수 밖에 없다. 그의 아내의 자발적인 변장이 그를 어쩔 수 없이 변장하게 한다. 아직은 어두워서 그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는데; 그래서 그는 어디든지 앉을 수 있다. 스트렙시아데스가 그의 불안의 뿌리에 대해 회상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반성하면서, 그는 이미 늙은 몸으로 아내를 얻은 자신에게 욕하는데; 그녀는 사랑에 대한 모험으로 집을 나간 것 같다. 그의 신음 소리가 이웃을 깨운다. 그리하여 그의 망신스런 불안은 비밀로 남지도 못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웃은 똑같은 불안으로 고통 받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아내 역시 그의 신과 외투를 가지고 사라졌다. 그 이웃은 그의 아내가 다른 여자 친구의 아침 식사 초대를 받았었을지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아니면 블레퓌로스를 위로한다. 두 사람은 의회에 가고 싶은데도 둘 다 그러지 못하는데; 그 이웃은 외투가 하나 밖에 없고, 블레퓌로스는 그가 편해지는 것을 지체시키는 변비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도움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서, 그는 여자들이 아이를 낳을 때에 도움을 주는 여신들에게 그가 희극의 부류에 드는 요강이 되는 것을 막아 달라고 기도한다. 그의 주위 사정들이 그의 아내보다는 소화작용에 더욱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다. 그는 끝없는 혼란 속에 간신히 그의 불편을 없애는데 성공하고, 그리고 끝이 난 의회로부터 돌아와서 크레메스가 나타나자 다시 생기려 한다. 블레퓌로스의 주기는 의회의 회기만큼 길게 지속된다. 이제 곧 보게 될 것이지만, 프락사고라는 도시에 있는 인간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높이에 오른 반면, 그 남편은 최저로 낮은 곳에 도달했다. 쇠똥구리에서 뭉쳤던 것이 프락사고라스가 최고로 높은 염원의 목표에 간 것에 비해 블레퓌로스가 최저로 낮은 염원의 목표에 더 가까이 가는 방법으로 프락사고라와 블레퓌로스 사이를 갈라 놓았다. 반드시 그래야 되지만, 그의 아내가 그와 동시에 처해 있는 상황의 시각으로 들여다볼 때, 완벽한 명쾌함이 나타나는 어떤 아리스토파네스적인 성격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블레퓌토스는 처해 있다. 우스꽝스러움 자체의 탁월함은 겉치레이거나 과시로 보여졌다. 블레퓌로스는 그가 젊은 아내와 결혼해 있었던 것이 과시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과시와는 아무 상관 없는 우스꽝스러움이라는 종류가 있다는 것을 가장 격렬한 방법으로 상기시켜 준다. 이 다른 종류의 우스꽝스러움은 모든 희극들 안에, 전부가 아니라면, 특히 대부분의 주인공들과 여주인공들 안에 존재한다. 확실히 디카이오폴리스나, 소시지장수도, 에우엘피데스도, 뤼시스트라테도 과시자가 아니다. 블레퓌로스는- 그의 젊은 아내가 도시의 지배자, 그래서 역시 그 자신의 지배자가 되는 동안, 변기 앉아 시간을 보내는 늙은 남자는- 우스꽝스러운데, 그는 아무런 동정심도 일으키지 않는 무기력함과 혹은 어리석음 같은 것에 고통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상황의 우스꽝스러운 성격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는 희극 부류의 한 소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 두렵다(371). 그가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트뤼가이오스처럼 그는 그 자신에게 농담하지 않는다. 그는 이 연극에서 "디오뉘소스에 걸고" 맹세하는 유일한 배역이다(344, 357, 422). 블레퓌로스와 특히 프락사고라와 대비하여 볼 때, 희극작가를 연결하는 것은 희극작가 역시 하나의 웃음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연극들을 읽으면서 아리스토파네스나 그의 대리인에 대해 껄껄 웃을 뿐만 아니라, 그를 조롱하기도 하는데; 스트렙시아데스의 미친 구상을 만든 사람과 나머지 모두 다 함께 어떤 면에서 그들의 광기를 나누어 가져야 한다. 이런 피할 수 없는  희극의 부수물이,그것의 작가에게 무슨 보호의 역활을 하는지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크레메스는 블레퓌로스가 그의 아내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웃이 놀랐던 것만큼 놀라고; 블레퓌로스는 그에게 어두워서 어쩌다가 그 옷을 입게 되었노라고 말하는데; 그는 분명히 조롱당하고 싶지 않다. 그는 크레메스에게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으면서 그가 당혹스런 질문을 더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는 그가 의회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레메스는 그에게 오늘 의회에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말한다. 모였던 시민들은 얼굴들이 창백해서 구두장이들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나중에 온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도록 이른 시각에 의회를 열었다. 크레메스는 심의한 안건이 도시의 구제였다는 사실까지 말하며 오늘의 의회의 모습을 전한다. 두 번째의 변론자는-  닳아서 올이 드러난 외투를 입은 가난뱅이였다- 옷감 다루는 사람들과 가죽 다루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겉옷과 따뜻한 잠 잘 곳을 제공하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민주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블레퓌로스는 비슷한 의무를 씨멘트 공급자들에게 부과하여 효력이 있게 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서 사람들이 가장 긴급히 필요로 하는 것들의 공급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게 하는 것은 공정하다. 도시의 구원을 위한 두 번째 변론가의 제안은 그 자신을 구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세 번째이자 마지막 변론자는 완전히 다른 경우였는데, 창백한 안색의 잘 생긴 젊은이였다. 그는 누구라도 도시를 여자들에게 넘겨 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구두장수들 대부분의 박수를 받았고, 시골 사람들은 야유하였지만; 구두장수들이 다수였다. 블레퓌로스는 시골 사람들의 반대에 동의한다. 프락사고라는 완전히 성공한다.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실패는 햇살에 그을린 것처럼 되려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창백해 보였다는 것이다(59-64). 세 번째 변론가는 그의 주장을 여자들의 덕행과 남자들의 악행에 대해 이야기하여 정당화한다. 그는 오늘 그리도 놀랍게 시범을 보여 준 여자들의 비밀을 지키는 능력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끼리 서로에 대한 정직성과 신뢰성에 대해 칭찬한다. 프락사고라는 그런 여자들의 덕행에 대해서는 침묵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바꿔 말해, 그들의 옛날 것의 고수, 혹은 그들의 보수주의에 대해서는, 예행연습 변론에서 단단히 강조하여 두었었다. 사실 왜 그녀의 제안이 의회에서 채택되었는가 하는 주된 이유는 여자들의 지배라는 것이 도시에서 한번도 없었던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행연습의 변론과 의회에서의 변론 사이의 그런 모순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융화될 수 있다. 프락사고라는 그녀의 제안이 압도적 다수에 의해 채택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론이 그녀의 특히 예행연습에 든 전제 조건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밖에 가장 합리적인 질서로서 완전히 새로운 질서는 본성에 따른 질서인데, 그러나 본성은 인간의 어떤 고안품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옛날 법과 옛날 관행의 고수가 가장 대단한 덕목이라면, 그리고 이 점에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뛰어나다면, 그 옛날 법은 여자들을 남자들에게 종속시키는 것으로 스스로 모순된다. 크레메스는 새로운 질서에 아주 만족한다. 블레퓌로스는 그를 더욱 편안하게 하는 이 모든 혁신을 받아들이나 단지 하나의 반대만 가지고 있다: 여자들이 지배한다면 그들은 그들 남편들이 혼인의 의무를 다하는 것과, 그리고 가장 끔직한 것들에 속하는 동거의 의무도 다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크레메스는 그런 동거가 도시에 유용할 경우 모든 남자가 반드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감시하는 일을 블레퓌로스에게 맡긴다. 아마 크레메스는 블레퓌로스처럼 아주 늙고 쇠약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코러스, 즉 여자들이 의회에서 돌아온다. 그들은 여전히 남자로 변장하고 있고, 남자처럼 행진하려 애를 쓰고 있는데; 이 아침의 행동의 성공은 남성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여자주의가 선출된다는 것을 그들이 믿고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 코러스는 여자 대장 프락사고라의 집 앞에 멈추어 선다. 자발적이기도 하고, 그들보다 잠시 뒤에 집으로 온 프락사고라의 요청도 있어, 그들은 최대한 가능한 대로 변장을 벗으려 한다. 프락사고라는 남편이 그의 것들을 보기 전에 돌려 놓으려고 집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여자들은 완전히 그들 스스로를 지금까지 그들이 본 여자들 중에 가장 영리한 프락사고라의 종속물로 여긴다. 프락사고라는 그 보답으로 그들 모두를 그녀의 자문위원으로 삼겠다고 보장해 준다.

 

그녀가 집으로 들어갈 즈음 프락사고라는 남편과 마주치고, 그는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묻는다. 이어지는 대화 동안 프락사고라는 여전히 남자 차림이고, 그녀의 남편은 여자 차림이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어디 갔다 오든 당신에게 뭐 다를 게 있나요?", 즉 그녀는 바보처럼 대답하는데, 블레퓌로스가 그녀에게 말한 것도 그렇다. 왜냐하면 새로운 그녀의 지위로 볼 때, 더 이상 어디로 가든 어디서 오든 그에게 말할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은 당연한데, 그녀가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직도 새로눈 지위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고,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그랬다고 인정할 수 도 없을 것이다. 물론 블레퓌로스는 그녀가 애인과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프락사고라는 이런 의심을 블레퓌로스가 그녀의 성적 습관에 대해 너무 생소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며 반박한다. 그녀는 그의 옷가지들을 가지고 살짝 사라진 일에 대해 금방 들통날 뻔뻔한 거짓말로 설명하는데, 그는 오늘의 의회에 온 대부분의 시민들이 눈에 띄게 창백한 얼굴이었다는 것을 크레메스에게 들어 알고 있다. 그건 그렇다 해도, 그는 마치 아내의 비밀을 너무 깊이 캐는 것이 이득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한다. 그는 그녀에게 그녀의 잘못으로 의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고 지적하며, 의회가 도시를 여자들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프락사고라는 단지 조금 놀랄 뿐이다. 경이로운 뉴스에 대해 그녀는 "아프로디테에 의해" 도시는 지금부터 축복받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블레퓌로스는 이유를 묻자, 새롭게 얻은 권력을 여자들은 오히려 그녀 자신은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말할 기회를 그녀에게 준다.

 

프락사고라는 여자들이 착한 것에서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더 이상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착함에 대한 부인, 혹은  최소한 남자에 비해 여자들이 열등하다는 단언이 에우리피데스와  옛날의 법 사이를 잇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주1>. 여자들이 월등하다고 단언하면서 프락사고라는 암묵적으로 옛날의 법 뿐만 아니라 에우리피데스에게도 반대로 돌아선다. 여자들의 우월함이 그들에게 지배하는 권리를 주었다. 지금 무엇이 중요하냐는 착함의 덕으로 모든 사람이 착해질 어떤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더 이상 아첨꾼들은 없다. 블레퓌로스는 지금까지 아첨으로 살았는데 이제 이것을 재난으로 간주한다. 무엇보다 새로운 질서에서는 누구도 가난하지 않을 것이므로, 누구도 이웃에 대해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크레메스는 전적으로 프락사고라의 목표를 찬성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지는 의문이다. 프락사고라는 그것이 가능한 일임을 보여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데, 크레메스는 만족할 것이고, 그녀의 남편은 입을 다물 것이다. 코러스는 프락사고라에게 행동 뿐 아니라 변론으로도 새로운, 전적으로 새로운 구도의 혜택을 증명해 보여 주는 것으로 권력을 사용하여 여자들을 옹호하라고 격려한다. 그것이 그녀에게 구경꾼들은 새 것과 빠른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데; 그들은 오래된 것과 느린 것을 싫어하고, 즉 그들은 중용을 싫어한다. 그리하여 프락사고라는 정확하게 이것이 가장 크게 두려운 것이라고 고백한다: 구경꾼들은 옛날을 너무 강력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그녀의 구도를 뒤집을지도 모른다. (이 두려움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옛날에 집착한다는 것을 근거로 그녀에게 그전에 여자들의 지배를 권고하도록 유도하였었다.) 블레퓌로스는 그런 것으로 낙담할 이유가 없다며 그녀를 안심하게 한다: 정확하게 말해 옛날에 대한 경멸은 오직 하나 아테네 고민들의 시발점이다. 새로운 질서의 시발점은 좋은 것과 옛날이 같다는 등식을 간단히 거부하는 것이다. 프락사고라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질서를 회복시키려 하였고, 그리고 그 밖에 아테네에서는 그의 과격한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던 페이세타이로스에 비해 훨씬 더 멀리 간다. 그녀의 방법으로는 그녀가 '불의의 변론'보다 더 과격한데, 그러나 그녀는 도시에 이득이 되는 변화, 즉 정치적인 변화를 구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정의의 영감을 받고 있다.

 

그녀가 블레퓌로스나 크레메스와 대화를 나누며 소개한 새로운 구도는 모두 그녀 자신의 것이고; 그것은,다른 여자들과의 상의해서 나온 것이 없는 그녀 자신의 생각이다. 프락사고라는 마치 그녀가 아테네의 독점적인 지배자거나 혹은 입법자인 것처럼 이야기하고(594, 597, 673 ff.), 그리고 그녀는 사실 그대로이다. 장군이라는 그녀의 공식적인 지위는 페리클레스의 경우에 그가 지녔던 그 지위보다 그녀의 지위가 덜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녀의 새로운 구도는 남자들만으로 합법적으로 구성되고 합법적으로 개의한 의회가 여자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리고 프락사고라를 장군으로 뽑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합법적이고; 그리고 여자들은 그들 차례가 오자 이를 묵인하고, 프락사고라의 지배권에 동의한다. 프락사고라에 의하면, 여자들의 천성적 선함이 남자들을 착하게 만들 것인데, 솔선수범이 아니라 나쁜 것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모든 재산은 시민들 모두의 공용이다: 더 이상 가난뱅이도 부자도 없고; 모두가 한가지 방법으로 살아 갈 것이다. 이런 공용으로부터 집안 일의 관리나 절약으로 이름난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음식이나 다른 모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할 것이다: 훔치거나 속이는 기회나 동기가 없을 것이다. 이런 변화는 정말 필수적으로 여자주의를 따른 것이다: 앞으로는 여자들이 도시를 돌보게 되어, 더 이상 개인의 집안 일들을 돌볼 수 가 없다. 그들은 즉각적인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이는 전에 여자들이 해 왔던 의무들을 남자들에게 부과할 수 없는데; 도시를 하나의 살림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방법도 없다. 재화들의 공동체나 아니면 개인 살림의 폐지는 성적인 관계에서의 깊숙한 변화를 적지 않게 요구한다. 여자들의 공동체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런 세상에서는 그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재산에 관련된 어려움이 일어난다: 남자의 욕구의 대상으로서 여자들끼리의 동등함은 여자들의 아름다움이 동등하지 않기에 가능하지 않다. 이런 이유와 또 거기에 관련해서 여자들의 공동체에서의 토론은 재산의 공동체에 대한 토론보다 대충 두 배가 더 된다. 프락사고라는 여자들의 타고난 부동등성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못생긴 여자들부터 우선권을 주어 모든 여자들을 동등하게 만드는 법으로 극복한다. 어느 남자도 못생긴 여자와 같이 잠을 자기 전에는 아름다운 여자와 즐길 수 없다. 프락사고라가 본성적인 부동등성을 법의 동등성으로 대치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주2>. 그렇지만 블레퓌로스는 반대하는데, 못생겼거나 혹은 늙은 여자들에게는 그리도 공평한 이런 조치가 소녀들의 환심을 살 돈도 가지지 못할 새로운 질서 아래서 어쨌든 더 나빠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의 늙은 남자들에게는 공평하지 않다. 프락사고라는 여자들이 못생긴(그리고 늙은) 남자들을 만족시켜 놓기 전에는 잘생긴(그리고 젊은) 남자들과 같이 자서는 안 된다는 법을 준수해야 한다며 그 남편을 침묵시킨다. 그녀는 이런 조치가 민주적이라고 지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당당한 척하거나 점잖은 척하는 것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주석이 그녀의 전체 구도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자주의 그 자체는 두 성별이 같지 않다는 전제를 인정할 때, 민주적이라는 전제의 결과물이고; 이들 두 전제는 어느 성별이 최고의 평등주의자이며, 그래서 지배자가 될 만한가라는 질문에 봉착하는데, 결국 그 질문에는 여성에게 호의적인 답을 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여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여자들과 경쟁하지만, 그러나 모든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과 경쟁하지는 않는다. 블레퓌로스는 그렇지만 또 다른 어려움을 안다: 새로운 질서 아래서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알아 보는가? (블레퓌로스와 프락사고라가 아이들을 가지고 있나에 대해 아무 언급도 없다.) 프락사고라는 여자들의 공동체는 아이들의 공동체를 요구한다며 의문을 불식시킨다: 젊은 세대는 늙은 세대의 모든 남자들을 그들의 아버지들로 여길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 폭행이나 아버지 살해로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다: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에게 얻어 맞으면, 그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모두들 얻어 맞는 그 늙은이를 구하러 나설 것이다. 이래서 프락사고라는 아버지 폭행에 대한 충분한 방지책을 마련하나; 새로운 질서 아래서 그녀는 근친상간이 일상화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방지책은 마련하지 못한다. 그와는 반대로, 새로운 질서에서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늙은 사람들과 동침하도록 법으로 되어 있어, 근친상간이 드러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된다(cf. 1041-42). 도시의 근본적인 요구사항 중의 하나인 근친상간의 금지는 페이스테타이로스의 변화가 가져온 효과보다 훨씬 과격한 변화의 효과이다. 블레퓌로스와 크레메스가 근친상간의 문제에 관심이 없어 하는 사실이 "구름"의 작가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프락사고라가 구축한 질서는 가정들이나 식구들이 없는 도시이다. 블레퓌로스는 알고 있는 대로 아이들이 없어서 근친상간에는 관심이 없고, 시민들이 공동으로 즐길 부의 생산이나 재생산에 대하여 관심이 있고; 결국, 부자들보다는 그 숫자가 훨씬 더 많은 옛 질서에서의 가난뱅이들은 그들의 생계를 위해 더 많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런 경향은 빈곤이 제거된 관계로 이제 사라지려 한다. 이 의문은 프락사고라와 블레퓌로스 간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대화 속에 중간의 짧은 부분에서(네 단락의 운률로) 논의된다. 프락사고라는 경작은 노예들이 하고 베는 여자들이 짠다는 결정을 내리는데; 남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노예들과 여자들이 하는 노동의 열매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블레퓌로스는 질문을 하나 더 한다: 아무도 자신의 돈이 없을 텐데 치안관에게 벌금을 맞으면 어떻게 내느냐? 프락사고라는 더 이상 송사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청중에게 더 이상 재산에 관한 송사는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폭행으로 일어나는 송사는 처벌로 음식을 주지 않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개인 재산의 폐지로 더 이상은 도박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여주자, 블레퓌로스는 아직도 또 다른 화제를 가져 오고 싶은데, 대화의 마지막 화제이다: 총체적으로 새로운 생활 방식이다. 프락사고라는 모든 개인적인 것들을 폐지하고 단일의 가정으로 마을을 바꿀 것과, 그리고 재판정을 식당으로, 유치장은 포도주 항아리와 물병들을 놓는 곳으로 바꿀 것이라 선언하는데; 지금까지 배심원을 추첨으로 할당하던 시민들의 명부는 식당의 좌석을 할당하는 데에 사용될 것이다. 말하자면, 특히 민주주의와 관련된 기관은 폐지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폐지될 것이다(cf. 229-32). 모든 사람이 풍부한 음식을 먹을 것이고, 또 저녁 식사 후에는 늙은 남자들이 가장 매혹적인 소녀들과 즐길 것이다. 블레퓌로스는 이제 완전히 만족하고; 크레메스는 아무 말이 없다. 프락사고라는 시민들이 도시에 내어 놓는 동산들을 접수하고, 바로 이날 실시되는 공동급식을 돌보기 위해 시장터로 가야만 한다. 그녀는 매춘도 역시 끝장을 낼 것인데, 코러스를 이루는 여자들처럼 존경받는 그들을 젊은이들이 만족시킬 것이고; 그리하여 그녀는 새로운 질서 아래서는 더 이상 간통의 금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같은 이유로 그녀는 자유민과 노예 소녀들과의 동침도 금지해야 한다. 블레퓌로스는 그 여자 장군의 남편으로서 존경받기 위해 그녀를 따른다.

 

프락사고라는 지배하는 것이나 도시에 관심을 가진 아리스토파네스의 다른 어떤 배역보다 더 과격하고 개방적으로 옛 것들을 부순다. 그녀의 새로운 질서와 그 앞의 것 사이에는 하나의 연계가 있다: 평등주의이다. "구름"에서 배웠듯이 그녀의 가장 중대한 혁신은 부모들과 자식들 간의 근친상간에 대한 그녀의 암묵적인 합법화이다. 이런 혁신은 두 전제들의 협조로부터 나온다: 도시의 단일 가정에로 전환과, 나이와 아름다움에 관한 본성적 부등함을 제도적인 동등함으로의 대체인데; 그 동등함은 사실 늙고 못생긴 것에 더 높은 권리를 주는 부등함이다. 규칙으로 늙은이들은 젊은이들보다 옛날을 더 높은 수즌으로 아낀다. 프락사고라가 새로이 출발하는 평등주의자라는 전제는 어떤 면에서 옛날을 제척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라도 가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과 반대로 작용한다. 이제 프락사고라의 전체 구도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생각이 무엇인지 꼭 짚어 보아야만 한다.

 

프락사고라는 새로운 질서에 대해 미래 시제로 말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이 법이고 그녀의 말에 대한 저항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는 이제 실시되어 있거나, 혹은 그녀의 전체 구도가 실현되어 있다. 따라서 파라바시스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여자들의 의회"에서는 파라바시스가 없다. 단 하나의 다음 작품인 "플루토스"에서도 파라바시스는 없다. 아테네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당한 이후에 나온 단지 두 편의 연극에서만 파라바시스가 빠져 있다는 것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파네스의 의도를 벗어난 외부의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의문을 생각하며 "아카르나이 사람들"로부터 "개구리들"에 이르기까지 겪어 온 파라바시스의 변화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처음의 다섯 연극에서 아리스토파네스 자신은 파라바시스의 중요한 주제이었다. 그 다음에 이어진 네 연극의 파라바시스에서는 작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만일 파라바시스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작가로 하여금 그 자신이나 그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후반의 연극들의 파라바시스가 그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파라바시스의 위축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의 위축이 자연스레 그것을 사라지게 했을 것이다. "새들"에서 작가가 어떻게 자신에 대해 침묵하는지, 그리고 "뤼시스트라테"에서는 이들 연극들의 주제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지적하였고<주3>;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과 "개구리들"의 경우는 이 연극들이 명백히 단지 작가들의 운명을 다룬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어쨌든 간에, "여자들의 의회"는 앞서 나온 다른 모든 연극들과 파라바시스가 사라졌다는 것 말고도 서로 다른데; 그것은 앞서 나온 다른 모든 연극들과, 전체 구도를 책임지는 배역이 연극의 중간에서 약간 과장이라 부를 만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프락사고라의 퇴장을 그녀의 전체 구도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디카이오폴리스도 역시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연극의 중간에서 그 구도를 실현하고도 그 연극의 끝까지 남아 있는다. 디카이오폴리스가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반드시 끝까지 있어야 하는 이유로 그렇지 않으면 디카이오폴리스가 개인적인 평화를 무엇에다 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프락사고라의 부적당한 공공심을 생각할 때, 유일한 의문은 그녀의 새로운 질서를 도시가 무엇에다 쓸까 하는 것이다.(계속)

 

 

<주1>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9-2)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에서 마지막 단락 끝부분을 보라

<주2> 루쏘, '사회 계약론' I 9끝; cf. "아카르나이 사람들" 718과 본문

<주3>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7-2 )"새들"의 두 번째 단락과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8-2)"뤼시스트라테"의 첫 번째 단락을 보라.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1-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