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단락)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2.플루토스-1)

병든소 2011. 2. 2. 17:26

12. "플루토스", ("부富의 신")

 

 이 연극은 한 노예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유일한 것이다. 노예 카리온의 독백은 주인인 크레뮐로스가 있는 데서 이루어지는데 그 주인은 듣지도 않고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평화"에서의 한 노예를 연상시키면서 카리온은 주인의 어리석음을 불평하고, 또 자기 몫에 대해 불평하는데; 노예의, 즉 한 육체가 그것의 본성적인 지배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산 사람이나 그의 노예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의 몫은 그 주인이 분별 있는 사람일 때 받아들일 만하다. 만일 이 연극의 제목이 "플루토스"(부의 신)이 아니라면 노예가 그 주인의 재물의 일부분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카리온의 독백에서 알 수 있듯이 크레뮐로스의 어리석음 혹은 광기는 아폴론의 신탁(필로클레온의 광기처럼)에 기인한 것이다. 크레뮐로스는 신에게 물어보기 위해 델포이로 갔었고, 그리고 신의 답을 받았었는데, 왜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느냐는 카리온의 질문에는 대답도 없이 맹인의 뒤만 쫓았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신탁의 영향으로 볼 때, 카리온은 아폴론이 사람들의 말대로 진짜로 신성하며 그리고 치료사인지 의문이 들게 된다. 주인에 대한 그의 인내가 바닥이 난 것이 틀림없다: 크레뮐로스는 이제 여기서 왜 그가 맹인의 뒤를 쫓으며, 카리온도 역시 그를 쫓도록 하는지 말해야만 하고; 그는 그에게 그 맹인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주인이라는 것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크레뮐로스는 카리온에게 미친 듯이 보이는 그의 행동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경건하고 정의롭지만 가난한 반면에, 불경스럽고 불의한 사람들은 부자이다. 그래서 그는 불경스럽고 불의한 것이 영화를 얻는 방법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중대한 일에 대해 그는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다 살아 버린 그 자신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하나 아들을 위해 아폴론에게 갔다: 그의 아들이 영화를 위해 생활 태도를 바꾸고 불의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신은 분명하게 대답하기를 크레뮐로스는 신전을 떠나 만난 첫 번째 사람에게 매달려야 하며, 그리고 그를 설득해서 그와 함께 집에 오도록 해야 한다: 그가 델포이로부터 아테네까지 좇아온 그 맹인은 그가 신전을 떠나서 처음 만났던 사람이다. 크레뮐로스는 스트렙시아데스와 같이<주1> 아들이 하나인데; 그러나 불의한 스트렙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갔고, 정의로운 크레뮐로스는 아폴론에게로 간다.

 

 카리온은 신탁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주인이 바보 같아서 어안이 벙벙하다. 신은 가장 명확한 방법으로 말했는데, 크레뮐로스는 그의 아들의 행실을 그가 처음 만난 사람, 즉 지금 나라에서 공통으로 실행되고 있는 것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이 대답은 아주 생생하게 분간이 서서,  신이 다른 어떤 것을 의미했을 수가 없고; 아폴론은 결국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현명하다. 달리 말해 아폴론은 그의 아들이 전통과 법nomos, 즉 옛 관습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러나 닳아빠진 노예는 옛 관습을 따르는 것이 유익하다는 의미에 대해, 또 그것이 타락한 시대에서는 분명하게 유익하지는 않다며 시비를 걸고; 그래서 신은 그 아들이 그 시대의 타락한 행위들을 따라야 한다고 의미해야 한다. 신이 크레뮐로스에게 분명하게 분간이 서게 정의로운 태도를 계속하라고 충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소크라테스의 교습에 대한 스트렙시아데스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알게 되었듯이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언제나 바보스러운 것은 아니다. 크레뮐로스는 카리온이 한 신탁 해석을 믿지 않는다. 아폴론이 불의의 행위를 추천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맹인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크레뮐로스가 신전을 떠나 처음 만난 사람이라는 사실로 그를 아테네까지 크레뮐로스의 집 앞에까지 따라갔다는 것이 신탁은 반드시 글자 그대로 이해되어야만 하고, 카리온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높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의미를 찾기 위해 그 맹인이 누구이며, 그리고 왜 크레뮐로스와 카리온을 신탁에 적힌 대로 복종하지 않았어도 왔을 집으로 끌고 왔는지 알아야만 한다. 카리온이 무례하게 그가 누구인지 맹인에게 묻고, 그는 무례하게 대답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크레뮐로스가 점잖게 묻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없다. 오직 주인과 노예가 그를 죽이겠다면서, 그가 누구인지 알고 났을 때에도 그에게 해를 입히고 보내 주지 않겠다는 협박만이 그가 말하게 한다. 그래서 최소한 그에게 손은 대지 말아 달라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자, 겨우 그는 그들에게 그가 플루토스라고 말한다.

 

크레뮐로스에게는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는데, 특히 플루토스가 전적으로 플루토스처럼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불쌍한 행색에 몹시 더럽기 때문이다. 플루토스는 그의 상태에 대해 제우스가 사람들을 시샘하는 것에서 찾는다. 플루토스가 아직 어렸을 때, 그는 오직 정의롭고, 현명하며, 엄전한 길로 가야 한다고 위협했는데; 그가 그렇게 할까 봐, 그가 가치에 대해 분별할 수 없도록 제우스는 그의 눈을 멀게 했다. 이런 제우스의 행동을 크레뮐로스는 이상하게 보는데, 제우스는 오로지 가치를 생각하여 명예를 누리기 때문이고, 그것은 아마 인간의 덕목에 대한 경험이 신성을 경배하는 근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우스가 부나 권력이 아니라, 정의로움, 현명함, 그리고 엄전함, 즉 사람들이 진정으로 명예를 부여하는 것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플루토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다. 플루토스는 크레뮐로스에게 그가 만일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는 나쁜 사람들을 피해 올바른 사람들에게 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그의 신분에 관한 크레뮐로스와 카리온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데; 그들의 놀라움은 너무나 대단해서, 어쨌든 크레뮐로스가 아폴론의 신탁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가 왜 델포이로부터 아테네로 왔는지 묻는 것도 잊는다(53-55).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준 대가로 플루토스는 그 두 사람에게 놓아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는 그 맹인이 누구인지 알고 나자 그전보다 더 풀어 주기가 싫은데, 단지 신전을 떠나 처음 만난 사람을 그의 집까지 데려가야 한다는 문자 그대로 해석한 신탁 때문에 그는 플루토스가 그와 함께 머물기를 원했다. 그는 착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라는 플루토스에게 그가 그런 가장 착한 사람들 속에 속한다며 함께 머물기를 간청한다. 플루토스는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는데; 그가 크레뮐로스의 정의에 대해서 묻지 않지만, 그는 어떤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가를 통하여 결과적으로 그가 있는 것이 그들을 너무나도 나쁘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고, 또 그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는지 모르고 제우스가 그에게 한 행위를 옹호한다: 만일 부가 절대적인 타락이라면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플루토스는 그의 착한 동료들로부터 격리되어야 하고; 제우스는 그의 부유나 불의함을 시샘해서가 아니라, 가치와 정의에 대한 사랑으로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의- 제우스의- 전제를 부인한다: 재산에 관한 모든 것이 나쁜 것은 아닌데; 그러나 이런 부정이 플루토스에게 어떤 감명도 주지 않는다. 다음으로 크레뮐로스는 정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의 이익 때문이라며 같이 머물라고 설득하는데; 신들의 의지로 그가 플루토스의 눈을 치료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그렇지만 플루토스는 치료를 받아서 그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낫고 싶지도 않다. 그리하여 카리온은 그를 본성적으로 비참한 사람이라 부른다: 본성적으로 플루토스는 좋은 것들에 비해 나쁜 것들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고, 혹은 본성이 그의 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이유로 그는 부가 절대적으로 타락한다거나,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사람들은 나쁘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카리온은 두 번 실수한다. 플루토스의 적은 제우스이다: 만일 그가 플루토스의 눈을 회복시키려 하는 크레뮐로스의 의도를 안다면 제우스는 그를 파멸시킬 것이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가 지적하듯이 제우스는 이미 그의 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플루토스는 감히 이것을 수긍하지 못한다: 제우스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너무 크다. 크레뮐로스 자신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없다. 그는 경건하게 델포이로 갔던 경건한 사람이고, 그리고 신탁을 가장 경건하게 이해했다. 그가 변한 것은 단지 신인 플루토스로부터 제우스에 대해 알게 된 것에 기인한다: 그는 제우스를 경배했는데 제우스의 정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플루토스를 신성들 가운데서 가장 비겁하다고 비난한다: 제우스에게 정의로부터 나온 힘이 없기 때문에 그는 오직 플루토스에게서 나온 힘만을 가지고 있는데; 플루토스가 다시 보기만 한다면 그는 그 힘을 잃을 것이고, 정의도 그리고 정의만이 부로 이끌 것이다. 제우스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플루토스는 크레뮐로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는 카리온을 증인으로 세우며 "하늘에 걸고" 맹세하면서 힘에 있어 플루토스가 제우스를 능가한다고 시범을 보인다: 사람들이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지만 오직 플루토스를 위해서이고, 또 그들은 오직 플루토스를 통해서만 제우스에게 제물을 올리는데; 재물을 통해 혹은 재물을 위해서이든, 빛나는 것이든, 좋은 것이든, 고마운 것이든 간에 사람들에게서 생긴 것이다. 사실 부 자체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들의 이유이며,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방법이다. 다른 모든 것들을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가질 수 있지만 부는 결코 그렇지 않다. 플루토스는 그의 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사람들이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슬퍼지기 시작하는데, 부가 그런 나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 말고도 사람들이 단순히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하나의 두려움만 가지고 있다: 그는 크레뮐로스와 카리온이 말하는 그가 가진 힘의 주재자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지 못한다. 부가 모든 사람을 타락시키지는 못하므로, 그는 그가 바라는 대로 올바른 사람들과 지내고 싶은 것을 이룰 수 있는데; 그는 제우스가 정의를 위한다는 일치된 생각으로, 그의 눈을 멀게 하여 올바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있도록 했다는 믿음을 고쳤다. 그렇지만 그는 제우스에게 아직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최소한 제우스의 의지에 대항하는 행동이 성공할까 하며 실망하고 있다. 크레뮐로스의 눈에 이것은 단지 모든 사람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뿐인데, 다른 말로, 부는 즉 부유하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겁이 많다는 것이다. "플루토스"가 기초로 삼는 불가능성은 플루토스가 부의 순수와 단순함, 인간의 자질 혹은 부속성과,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로서 혹은 문자로 말하는 존재로서, 신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주2>.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가 바라는 것이 있고 기꺼이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기만 하다면, 그의 시력은 그가 회복시킬 수 있다고 장담한다. 고작 인간인 크레뮐로스가 그런 위업을 성취할 수 있을까 하는 플루토스의 의문은 아폴론이 그 계획을 승인한다는 크레뮐로스의 단언으로 사라진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는 제우스의 의지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하는 다수 인간들끼리의 동맹 역시 자발적으로 언급한다: 가난한 많은 올바른 사람들이 부자가 되거나 혹은 부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플루토스의 동의도 기다리지 않고, 그의 노예에게 아마 지금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의 동료 농부들을- 그들이 지금 가난한 많은 올바른 사람들이다-  플루토스와 함께하는 데 합류하도록 부르라고 지시한다. 그는 이제 플루토스를 최고의 신성으로 대하는데, 그를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요청하고, 플루토스는 오늘 제대로 된 방법이거나 아니면 사술로거나 그 집을 부자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는 플루토스의 옛 믿음을 이해가 되도록 일깨워 준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는 그의 신성한 손님에게 자신을 극단적인 것들에 몰입하지 않는 사람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플루토스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그에게 확실하게 하여 주는 것으로 그의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가 있는 것으로 사람들을 간단히 불의하게 만드는 것을 벗어나, 플루토스는 어떤 면에서 그들을 최소한 정의롭게 만든다: 모두가 세상에 그 무엇보다 더 플루토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에게 진지하게 말한다. 제우스조차 플루토스에게 왜 그가 그의 눈을 멀게 했는지 그 진실한 이유를 말한다. 크레뮐로스로 말하면 그는 모두에게 진실을 말하는 극단으로는 흐르지 않는데; 그는 중간적이거나 평균적으로 정의롭다.

 

크레뮐로스는 아폴론이 그에게 하라고 말한 것을 글자 그대로 이행했다. 그는 신탁을 영리하게 이해하기를 거부했고; 그 영리한 이해는 불의한 위치에 곧 바른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이해를 통해 그는 결국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려 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다시 말해 정의의 실천이 그전에는 결코 없었던 보상을 받는 일로 되었고; 가장 어리석고 터무니없어 보이던 신탁의 해석이 맞는 해석으로 밝혀진다. 플루토스를 쫓아가도록 크레뮐로스를 유도하여, 아폴론은 그가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일을 도울 것이라는 보장을 그에게 해 준 것으로 보인다(210-14). 크레뮐로스가 이해하는 것처럼 신탁은 카리온이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의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만 플루토스의 시력 회복은 제우스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으며- 마치 "평화"에서 평화가 제우스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듯이-, 그리고 그 결과가 보여 주듯이 플루토스를 제외한 모든 신들의 힘을 빼앗지 않고서는 될 수가 없다. 이런 결과는 확실히 아폴론에 의해 의도되었을 리가 없다. 크레뮐로스가 아폴론의 신전을 떠나 처음 만났던 사람이 플루토스였다는 것도, 그리고 플루토스가 무작정 델포이에서 아테네까지 어슬렁 걷는 일이 생겼던 것도, 아폴론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cf. 121). 플루토스가 맹인인 것은 카이로스가 맹인인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크레뮐로스가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의 기회를 없애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플루토스가 델포이에서 아테네까지 걷는 것이 그 자체로 신탁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카리온의 신탁 해석이 맞았다는 뜻은 아니고; 아폴론이 시대의 타락성을 몰랐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시대가 카리온이 생각하는 만큼 타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폴론이 크레뮐로스의 어리석음이나 아니면 신탁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 그리고 그의 단순성이나 아니면 그의 단순한 경건심을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새들"에서 신들의 몰락과 구별하여, "플루토스"에서의 신들의 몰락은 신들 중의 하나가 선경지명이 없이 행동했던 것에 기인한다. 그렇지만 아폴론의 행동은 헤라클레스의 옷차림으로 하데스로 내려간 디오뉘소스의 행동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카리온의 경박한 신탁 해석은 사소한 결과를 가져올 뿐이지만, 크레뮐로스의 경건한 해석은 경건심을 파괴시키는 형태로 끌고 간다.

 

분별력을 동원해 다시 보자. 아폴론이 크레뮐로스가 신전을 떠나 처음 만나게 될 사람이 플루토스일 것이라는 것과, 플루토스가 아테네까지 갈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므로; 이 경우에 신의 신탁은 정의로움이 부라는 생각을 지키기 위해 크레뮐로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이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크레뮐로스의 강요로 플루토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말 것이라는 점과, 또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효과를 드러낼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신의 크레뮐로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크레뮐로스가 그 자신이나 동료 시골 사람들에 관해서 정의롭다고 보는 것은 틀리지 않다. 농부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정의롭다고 여겨져 존경받고 사랑받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신들의 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주3>.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일련의 연극들에서 보는 이런 추측을 얼마나 많이 따를 것인가? 농부들의 정의는 플라톤이 천한 정의, 정제되지 않은 종류의 정의라고 부를 만한 그런 것인데, 어떤 방법으로도 대단한 유혹들에 빠져드는 것을 막지 못한다. 만일 크레뮐로스가 그의 아들을 정의로운 방법으로 키우는 것이 현명한가, 신들은 불의스런 행위에 대해 단단히 반대하는가 하는 등의 의문을 가지게 되지 않았었다면, 그는 델포이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플루토스는 정의에 대해 더 엄격한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따라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는, 혹은 본성은 정의에게 해로우며 그래서 정의의 애호자인 플루토스에게 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크레뮐로스는 암묵적으로 사람들에게 엄격한 요구 조건을 만드는 것을 부인한다.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로부터 제우스가 정의로운 사람들을 시샘하며 그래서 그들에게 적대적이고, 그리하여 보통의 정의로운 사람조차도 부자가 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우스조차 보통의 정의에 못 미친다. 제우스는 정의로운 사람들을 시샘하는데, 그는 정의롭고 싶지만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플로토스가 제우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가 모든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더 믿을 만한데, 그가 제우스의 시샘을 관찰할 때 그는 아직 보고 있었고, 반면에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는 견해가 생길 때에 그는 이미 맹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크레뮐로스는 그가 혹은 그의 아들이 철저하게 불의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제우스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 충분히 정의롭다. 그에게 남은 오직 한가지 대안은 더 이상 제우스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의 규칙들을 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는 정의롭고 또한 부자가 되고 싶은데; 그는이러한 소원이 플루토스의 원래의 의도와 일치한다는 것을 플루토스로부터 알게 되고; 그가 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원래의 의도대로 돌려 놓기 위해 그 신의 시력을 원래대로 돌려 놓는 것이다.

 

카리온이 농부들로 구성된 코러스와 함께 돌아오는데, 그들은 제우스의 분노로부터 그 신과 사람들을 보호하도록 되어 있다. 카리온은 굉장히 바쁜데, 그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의 주인에게 오라고 말했을 뿐이어서; 마치 그들이 도망치는 노예를 추적하는 것처럼 그의 뒤를 따라 헐떡거리고 있다. 이제 왜 그들을 불렀는지 알고 싶다. 카리온은 그들이 근면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곤궁으로부터 벗어나 즐겁게 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이런 이야기가 듣기 거북한 늙은 사람들은 한참 후에서야 기쁨에 넘쳐 그들을 놀리면서 즐거워하는 노예로부터 크레뮐로스가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해 플루토스를 데리고 집에 왔다는 말을 듣는다. 잠시 동안 그들은 그 좋은 소식이 진짜인지 의심하는데, 노예의 단순한 서약이 그들을 거의 믿게 만든다. 원기왕성하게도 카리온과 코러스는 명쾌하고 조롱스런 성격의 서정적인 대화를 나눈다: 카리온은 명쾌하게 양들과 염소들을 불러 모으는 퀴클롭스와, 그녀를 추종하는 자들을 산돼지로 바꾸는 키르케를 흉내질 하는 역을 맡는데, 그래서 실제의 양들과 염소들 그리고 잠재적인 산돼지로 취급당한 코러스는 명쾌하게 오뒷세우스를 흉내 내겠다고 알린다. 이런 종류의 파로드는 다른 어떤 연극의 파로드들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예를 들어 "여자들의 의회"의 파로드는 여자들이 암묵적으로 남자들인 척할 뿐이다. 퀴클롭스를 눈 멀게 하는 오뒷세우스를 참고로 한 코러스의 암시는 제우스가 플루토스를 눈 멀게 한 것에 대한 절박한 배상을 예측하는 한 종류로 읽히는데, 마치 헤르메스를 통해 키르케로 부터 구원받는 오뒷세우스를 참고로 삼는 암시가 그 연극에서 헤르메스의 행동이 선견지명의 한 종류처럼 읽히는 것과 같다. 농부들과 오뒷세우스는 초인간들을 초인간들의 도움으로 물리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밖에 "말벌들"에서 필로클레온이 퀴클롭스의 동글을 탈출하는 오뒷세우스를 흉내 내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필로클레온이 그랬던 것처럼 "플루토스"의 코러스가 비록 모르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신탁에 순응하여 행동한다.

 

카리온은 약간의 음식을 훔쳐 먹기 위해 주인의 집으로 들어간다. 크레뮐로스가 밖으로 나와서 그의 동료들에게 그들의 새로운 상황에 걸맞는 새로운 표현으로 인사한다: 그들은 이제 그 신의 구원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누군지도 모르는 그 신의 적에 대해 전쟁하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들은 크레뮐로스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그와 논쟁을 한다거나, 아니면 그런 일들로 연극에 부수되는 행동에 군소리를 할 필요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 블렙시데모스가 도착하지 상황이 달라진다. 그 역시 허겁지겁 도착하는데; 그가 무언가 큰 일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크레뮐로스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에게는 더욱 대단히 놀라운 것이 크레뮐로스가 그의 친구들을 부르고 있다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할 때 친구들을 찾는다. 크레뮐로스는 자신이 친구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블렙시데모스는 그의 친구가 아폴론의 신전에서 금이나 은을 훔쳤거나, 혹은 살인과 같은 돈벌이가 되는 범죄를 저질러 이제 들킬까봐 겁을 내고 있다고 의심한다. 크레뮐로스가 많은 맹세들로 반박하자 블렙시데모스의 의심은 더 굳혀져 간다. 그는 크레뮐로스가 전에는 정직했었는데, 이제는 부정직하게 되었다고 확신하고; 그는 이제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고, 즉 그들이 소득에 굴복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크레뮐로스는 블렙시데모스가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에 한몫 끼이려 안달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의 의심은 블렙시데모스가 그에게 일부 떼어 줄 경우 고발자를 매수해서 크레뮐로스가 처벌받는 것을 막아 주겠다고 공표하자 굳어진다. 크레뮐로스는 엄전한 사람들만 부자로 만들 것이라는 말로 블렙시데모스에게 그의 정직성을 믿게 할 수 있다고 믿는데, 그러나 이것은 블렙시데모스에게 그의 친구가 아주 많이 훔쳤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대답이 보여 주듯이 크레뮐로스의 논쟁이 아주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대답으로 블렙시데모스는 엄전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은근히 인정하는데, 즉 그는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고 한 앞서의 추정을 은근 슬쩍 철회한다. 이 추정의 철회로 블렙시데모스는 그 역시 정의로운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 편하게 해 준다. 달리 말해 크레뮐로스는 그의 친구들을 그리고 엄전한 사람들 양쪽 모두를 부자로 만들고 싶어서, 그는 그의 친구들이 모두 엄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하려는 모양이다. 어쨌든 처음으로 블렙시데모스는 그의 친구에게 플루토스가 그의 집에 와 있으며, 그로부터 혜택을 얻기 위해 친구 둘이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할 기회를 준다. 블렙시데모스가 가진 크레뮐로스의 정직성에 대한 믿음은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 플루토스를 보지 않았는데도 블렙시데모스는 그가 플루토스가 그의 집에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 신들에 대한 언급들은 그 말의 신빙성을 위해 말하는 사람의 정직성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좋은데, 왜냐하면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의 신성을 플루토스가 확연히 정의롭다는 것을 근거로 시험해 보지도 않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 비록 그가 제우스가 정의롭다는 믿음을 버려 버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제우스의 신성은 믿는다. 블렙시데모스는 의사를 한 명 부르자고 하는데, 아직 그는 아테네에서 현 시점에 데려올 만한 의사가 누구인지는 한 사람도 모른다. 크레뮐로스는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대로 플루토스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 가서 드러눕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앞에서 그는 블렙시데모스에게 신들이 바란다면 플루토스가 시력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는 그에게 플루토스의 시력 회복이 제우스의 뜻에는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크레뮐로스의 정의로움에 대한 블렙시데모스의 불신은 그다지 깊지도 넓지도 않았다. 그는 그 이름이 지적하는 대로 데모스demos를 지향한다.(계속)

 

 

<주1> 다섯 번째 '가설hypothesis'(Hall-Geldart)에 따르면, 크레뮐로스의 이름은 "빚debt"과 "속임수deceiving"에서 나왔는데: "가난 때문에 그

         채권자를 속이는 사람"이다.

<주2> 플루토스와 돈과는 특별히 긴밀한 관계에 있는데(131, 141, 147, 154, 194-96), 즉 전통적으로 뛰어난 것들이다.

<주3>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1381a19-23.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2-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