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단락)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7.새-4)

병든소 2010. 12. 9. 21:27

7. "새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7-3)에서 계속)               또 다른 방문자가 도착하여 페이세타이로스와 이야기하기를 간청한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고, 위에서 신들이 볼까 두려워서 우산을 쓰고 있다. 페이세타이로스로부터 제우스가 구름을 모으고 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제우스가 벼락을 칠 것을 겁내기보다 오히려 안심한다: 제우스는 구름을 뚫고 그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cf.1608-9). 그래서 그는 얼굴을 드러내고; 페이세타이로스는 즉시 그가 인간들은 사랑하고, 신들은 미워하는 프로메테우스임을 알아 본다. 프로메테우스는 소리지르거나 그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 간청하는데, 그는 여전히 제우스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친구에게 말하듯이 제우스는 망했는데; 공중 도시의 기본 원칙에 따라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아 굶고 있다. 올림포스 신들 위에 살고 있는 야만인들의 신들은 제우스에게 만일 그가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전쟁을 하겠다며 협박한다. 페이세타이로스의 이득을 위하여 올림포스의 신들을 위협한 야만인들의 신들은 물론 야만인들에 의해 숭배되는 신들, 즉 트뤼가이오스가 이들을 가지고 올림포스의 신들을 위협했던 해와 달은 아닌데("평화" 406-13), '새들'의 그리고 오직 '새들' 밖에 없는 이 신성에는 해와 달과 그리고 야만인들의 신들과 올림포스의 신들 역시 마찬가지로 제외된다. 여기에 페이세타이로스가 메톤을 쫓아내는 것과, 그가 올림포스의 신들 대신에 해와 달에 매달리는 것에 실패한 것과 연관될 수 있었는가? 야만인들의 신들은 마치 올림포스의 신들이 하늘에 있는 그리스 사람들이듯이, 하늘에 있는 트리발로이(트라키아 사람들의 나라) 사람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제우스와 위에 있는 트리발로이 신들이 '새들'과 신들 사이의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려 한다고 말하고, 그는 그에게 제우스가 '새들'에게 왕홀을 회복시켜 주고, 바실레이아(왕권Kingship)를 아내로서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주도록 요구하라고 충동한다. 본래 '새들'이 그들 스스로 그들 자신을 위한 왕권을 찾으려 했는데(549-50); 프로메테우스가 이러한 의중을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좋도록 바꾼다. 바실레이아는 가장 아름다운 소녀로 제우스의 벼락과 다른 모든 힘의 원천이나 수단을 맡아 있는데; 바실레이아를 소유하는 것을 통해 페이세타이로스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그가 인간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조언한다: 그는 제우스의 힘을 '새들'에게 넘겨 주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 자신이 신인 프로메테우스는 모든 신들을 싫어하는데, 그래서 그 자신 역시 싫어하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을 못하도록 막는다. 만일 그가 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경건한 니키아스를 닮아 있을 것이었다. 그는 암묵적으로 인간 페이세타이로스가 모든 신들보다 낫다고 수긍한다.

 

프로메테우스와 페이세타이로스 사이의 대화는 '새들'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악화시킬 뿐이다. 본성적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신들을 미워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새들'에게 그들이 본성적으로 신들이 아닌 인간을 미워한다고, 그래서 신들에 대항한 페이세타이로스와 그들의 동맹은- 그들이 그로부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동맹은- 비본능적인 성격이라고 상기시켜 주었어야 했다. 그 밖에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모든 기술의 창안자로서 프로메테우스는 새들을 잡아서 죽이고, 그리고 요리하는 기술의 창안자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인정하듯 모든 신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는 '새들'에게 신들로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그가 떠난 뒤, '새들'이 프로메테우스 장면에 앞서 그들이 노래 속에 다루었던 불의의 두 사람보다 훨씬 더 깊이 불의스런 두 사람에게 노래를 헌정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연설가 페이산드로스를 둘러싼 멜로스 사람 소크라테스와 그 동료 카이레폰에게 말이다. 그 이름이 페이세타이로스를 연상시키는 페이산드로스는 '새들'에게 어쩐지 오뒷세우스를 상기시켜 준다. 이 노래가 끝나자마자 하늘에서 사절단이 도착하는데; 그들과 페이세타이로스와의 대화는 '새들'을 조금도 진정시키지 못한다. 사절단이 떠난 뒤에, '새들'은 그들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노래를 내뱉는데, 그것은 분명 연극의 사건이나, 혹은 합창단으로서의 코로스와 연관이 없다. 그 노래는 비틀어진 고르기아스와 그의 아테네 학생인 필립포스를 풍자하고; 필립포스는 '말벌들'의 올바른 분노에 희생당했었다("말벌들" 421). 서로 친척 간인 노래 셋을 분석해 보면, 그 노래에 표현된 일곱 불의스런 사람 중 최소 세 사람(소크라테스, 카이레폰, 또한 고르기아스)은 수사학retoric과 생리학physiologia을 합쳐 엮는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새들'의 자세는(그래서 카이레폰에게 역시 같다)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닌데; '새들'의 기원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프로디코스가 가르치는 것을 몰아내자는 뜻이다.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그것으로써 이제까지 옛 신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들에게 대항하도록 지시를 받았다는 것과, 그리고 한 인간이 신성시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자연스레 '새들'이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왜냐하면 어떻게 '새들'이 소크라테스가 지닌 정치적이지 않은 성격의 의중을 이해하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의문시되는 일곱 사람 중에, 시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새들'은 노래하는 존재로서 시인들에 대해서는 반감이 없다. 어쨌든 이러한 관점에서 '새들'은 페이세타이로스와 같다: 도시는, 그리고 더 한층 강력한 이유로 본성을 따르는 도시는, 시와 어우러지고 그리고 시를 찾기까지 하는 반면에, 그런 도시는 천문학이나 생리학은 용납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지금 논의하고 있는 노래들 종류는,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연극들과는 달리, "새들"에서는 적합한 것인데, 왜냐하면 "새들"에서만 주인공이 지배에 관련해서("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의 대응되는 불화는 지배에 대한 것이 없다), 그리고 또 주인공이 코러스를 속이고 있다는 것으로(소시지장수는 '기사들'과 데모스테네스를 속이지 않았다) 야기된 결정적인 싸움을 이기고 난 후, 유독 주인공과 코러스 사이에 그런 불화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온 세 사신은 포세이돈, 헤라클레스, 그리고 트리발로이 사람들의 신 트리발로스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적인 포세이돈의 설명과 같이, 지금 신들이 민주적으로 살지 않았다면 모든 신들 중에 가장 야만적인 트리발로스가 사신으로 보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벽에 신들을 가두어 버린 인간에 대한 노여움에 가득 차서, 그를 목졸라 죽이고 싶어 하는데; 포세이돈은 그에게 그들은 그와 협상하러 온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고; '새들'이 그 사이에서 어떤 역활을 하리라 기대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헤라클레스는 그의 집착 탓으로 신들 셋 가운데 가장 사태를 잘 받아들이는 것으로 판명이 나는데; 그는 마치 그가 트뤼가이오스에게 그랬듯이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수그리고 든다(키네시아스는 오직 헤라클레스에게만 걸고 맹세했다,1391.). 그래서 헤라클레스는 페이세타이로스가 처음서부터 유독 그에게 주목하는 신이다. 신들이 도착헤 올 때 그는 분주히 그의 음식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고기는 새들이다: 어떤 귀족적인(그래서 육질이 좋고, 기름지고, 그리고 육즙도 많은) 새들이 민주적인 새들의 비난으로 죽임을 당했다. 마치 올림포스의 신들이 언제나 그리스식이어서 그리스 사람들이 민주적일 때 민주적으로 되었듯이, 새로운 신들인 '새들'도 그리스식은 아니라도 역시 최소한 민주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새들'의 정치 체제는 오로지 이름만의 민주체제여서; 사실 그것은 제일 처음 사람의, 혹은 '새들' 가운데 한 사람만의 지배체제이고, 그는 말안장 위에 아주 단단하게 있어서, 만일 '새들'이 좋은 재판으로 선고를 받아 잘 처형되었다면, 좋은 양념으로 잘 요리된 그것들을 먹는 걸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아주 엄격하게 본다면, 이제 '새들'이 그의 신들이기 때문에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이 동족을 먹는 풍습보다 더 나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포세이돈은 신들과 '새들' 사이의 평화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로 협상을 시작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동의한다: 우리(우리 '새들')는 정당한 평화를 구축하고 싶고, 그리고 정의는 제우스가 왕홀을 '새들'에게로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얼마 동안에 그는 자신이 '새들'에게 제기하라고 충고했던 요구를 넘어서지 않는데(554); 그는 아직까지 프로메테우스가 조언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그는 원래의 요구사항을 단지 그 신성의 사절단이 자기 요구를 들어줄 경우 음식을 한끼 대접하겠다는 약속으로 넘어설 뿐이다. 포세이돈은 역겹지만, 헤라클레스는 즉각 그 요구들을 받아들이는데; 포세이돈이 그에게 말하듯이 그는 한끼를 위해 그의 아버지 제우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참이다. 이 같은 논쟁이 제법 묵직하여, 페이세타이로스는 평화의 정착이 제우스와 그 혈족들을 위한 영속적인 이점이라는 것을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일에 '새들'이 그 아래를 지배하면, 혹은 신들이 '새들'을 동맹자로 가진다면, 신들의 힘은 늘어날 것이고; 신들이 구름 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위증하는 것을 관찰할 수 없는 반면, '새들'은 그들을 지켜볼 수 있어서 벌을 줄 수도 있다. 신들은 위증자들에게 벌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새들'은 그럴 수는 있지만 이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페이세타이로스는 신들이 위증자들을 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일치하지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런 사실로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까지 올라가지만, 페이세타이로스는 그들의 능력이 모자라는 부분에까지 연역한다. 포세이돈은 페이세타이로스의 지적을 즉각 알아 듣는다: '새들'이 신들의 능력을 확장시켜 주기 위해 본성적으로나 나중에 얻은 것이거나 간에 그들의 능력을 모두 사용할 경우에만, 신들은 그것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새들'은 신들과의 동맹이 필요하지 않고, 신들은 '새들'과의 동맹이 필요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신들은 인간들을 벌 주기를 갈망하고, '새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새들'이 그 동맹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지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페이세타이로스의 이 제안은 신들이 '새들'에게 왕홀을 넘겨주는 것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페이세타이로스가 한 수 앞서 가고, 그리고 헤라클레스가 추인하여, 다른 두 신성의 사절들도 그의 요구를 수락한다. 그는 이 승리를 얻고 난 다음에야 프로메테우스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는데; 그는 역시 프로메테우스보다 한 수 위다. 평화 협약이 전쟁 당사자 간의 주고 받기라는 인상을 주어야 하기에, 그는 헤라는 제우스에게 남겨 두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러나 바실레이아는 그가 갖겠다고 요구한다. 포세이돈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요구를 거절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평화 협약에는 관심이 없는 척하거나, 혹은 진짜로 관심이 없는지 그가 하던 음식 장만으로 돌아가는데, 물론 그 음식은 신성의 사절단에게는 나누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헤라클레스에게 너무 심한 것이다. 신성의 모든 가식을 던지고, 또 포세이돈을 사람으로까지 표현하면서, 그는 한 여자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저지런 실수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 사람들이 저지런 실수를(cf. "아카르나이 사람들" 524-27) 또 하지 않을 것이다. 포세이돈은 헤라클레스의 어리석음이 놀랍다. 그가 이미 페이세타이로스에게 말해 준 보장은 잊어버리고, 그는 헤라클레스에게 만일 왕으로서의 지배가 '새들'에게 넘어가면, 헤라클레스는 제우스가 죽은 다음 힘없는 가난뱅이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신들의 불멸성은 그전에 페이세타이로스가 의문을 던진 바 있지만(1224), 이제 신들이 스스로 부인한다: 신들은 가장 인간스럽다. 페이세타이로스는 포세이돈의 논거를 논박하는데, 헤라클레스에게 법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적자가 아니라서, 어떠한 방법으로도 제우스의 소유물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신들은 그리스식 존재이기에 그리스 법을 따라야 하는데; 아마 제우스의 결혼이 근친상간적 성격이라서, 유일한 제우스의 적법한 상속자는 아테나이다. 하여 헤라클레스는 바실레이아를 달라는 페이세타이로스의 요구를 보장하는 수밖에 없고, 더 잃을 것도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페이세타이로스가 그에게 말한 것처럼 그가 '새들'에게 합류할 경우, 페세타이로스는 그를 왕으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헤라클레스는 바실레이아를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주는 쪽으로 투표하고, 포세이돈은 여전히 반대에 투표한다. 도대체가 지적이지 않은 트리발로스의 결정이 페이세타이로스의 도움으로 헤라클레스의 결정에 동의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포세이돈은 다수의 뜻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헤라클레스는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우리"와 함께 하늘로 가서, 거기에서 바실레이아와 "그리고 모든 것"을 받자고 제의한다. 그리고 그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페이세타이로스가 쇠똥구리 없이도 트뤼가이오스처럼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데; 그는 확실하게 '새들'보다 높이 올라간다. 그렇지만 트뤼가이오스가 하늘에 있는 것은 보게 되었지만, 페이세타이로스가 하늘에 있는 것은 보게 되지 못한다. 적절한 것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감각 때문으로, 페이세타이로스가 그의 선임자인 제우스를 만났다거나, 아니면 제우스가 어떻게 그의 퇴위를 받아들였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한다. 헤라클레스는 약속된 음식을 혼자 독차지하기 위해 그 제의를 내놓았고; 그는 하늘로 돌아갈 의사가 없다. 그러나 페이세타이로스는 엄격하게 그를 그 제안의 문구대로 붙잡아 두는데: 너는 "우리"와 함께 하늘로 갈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그 전이나 그 후로 그 누구도 결코 동등한 크기의 양보를 내놓지 못한 그런 양보의 덕으로 챙긴 음식을 가지지조차 못한다.

 

전령 하나가 세 배나 축복을 받은 종족 '새들'에게 새로운 지배자가 오고 있다고 알려 준다: 어느 별도 페이세타이로스처럼 밝게 비추어진 적이 없었는데, 그는 한 손에 그의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신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우스의 번개를 내리치면서 온다. 페이세타이로스는 황홀함에 있어 올림포스의 신들과 우주의 신들 모두보다 월등하다. 전령은 '새들'에게 신성한 무우사에게 영감을 얻은 숭배의 노래를 읊으라고 요청한다. '새들'이 페이세타이로스가 그들을 몰아서 거래를 성사시킨 데에 대하여 실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페이세타이로스와 바실레이아의 처분에 따라 그들이 그 부부의 황홀함을 함께 나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고 '새들'의 변덕스러움에 대해서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숨막히는 그들 감각의 느낌에 특히 그들이 보고 냄세를 맡는 느낌에 견딜 수가 없다. 결국 페이세타이로스와 바실레이아의 결혼에 있는 승리는 '새들'의 도시의 것이고; 또한 그들이 잠시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들 도시의 승리는 바로 "그 사람"으로 인한 것이다. 특이함은 집에서 잃는 자유를 보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외래의 정책을 성공시킨다. 따라서 그들은 전령의 요청대로 따른다. 그들은 페이세타이로스와 바실레이아의 결혼을 제우스와 헤라의 그것에 비교한다. 여러 관점에서 이런 비교가 적합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을 허풍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페이세타이로스는 대단한 위엄으로 '새들'의 고상한 노래를 즐기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이 지금까지 제우스에게 있던 힘을 이제는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서도 역시 노래로 불러야 한다고 느낀다. 그가 고귀하게 바라는 것을 말하자, 바실레이아가 디케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을 절차대로 분명히 하면서, '새들'도 고상하게 순응한다. 그가 바실레이아를 하늘에서 데리고 왔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이제 그는 그녀와 함께 그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새들'의 마지막 말은- 연극의 마지막 말은- 페이세타이로스를 가장 높은 신으로 인사 올리는 말이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모든 연극들 중에 "새들"이 가장 충격적이다. 만일 변론이나 행동이 권위적인 의견이나, 혹은 더욱 특별하게 신들에 대하여이거나, 연설자들이나 비극작가들에 대해서거나, 그리고 대중들에 대하여 반대되는 경우, 그 변론이나 행동은 충격적이다<주16>. "새들"은 어떤 아테네 시민이 그의 모국을 등지고 떠난 후(35) 제우스와 다른 신들의 권력을 빼앗고, 그리고는 스스로 가장 높은 신 제우스의 후계자로 만드는 것의 성공을 축하한다.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상기시키고; 소크라테스처럼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의 모국에 대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고, 신들에 대항하는 행동을 한다. 어떤 면에서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이 소크라테스보다 더욱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행동은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가정에서 나아가고, 그래서 전체가 실패하는 비극적인 것인데 반해,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그 반대되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뽑아내기 때문이다. "평화"에서의 행동은 "새들"에 비교하면 훨씬 덜 충격적이다: 트뤼가이오스가 제우스의 암묵적인 금지를 위반하는 것은 그의 목표가 공공의 평화라는 사실로 재판원들의 의견 앞에서 정당화되는 반면,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공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새들"의 충격적인 성격은 페이세타이로스가 소크라테스에게보다 작가 그 자신에게 더 가깝다는 사실로 강조된다: 페이스테타이로스는 아버지 폭행과 천문학 이러한 모두를 거부하고; 오르페우스의 신들에 대한 기원을 발전시킨 그의 무우사 같은 '새들'은 비무우사적인 소크라테스의 깃대 반대 편에 서 있다. 이러한 것들의 상태는 분명히 이 연극의 두 파라바시스에서 작가가 그 자신에 관하여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

 

페이세타이로스로 하여금 이런 혁명을 수행토록 한 이유를 따져 보고, 한편으로 지금까지 보여져 왔었던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참고 자료들을 정리해 보자. 페이세타이로스의 원래 구도는 아테네에서 그를 성가시게 하였던, 특히 재판이나 비난의 형태로 끌어가고 싶어하는 온갖 간섭의 분주함으로부터 벗어난 곳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구도가 비난하고자 하는 열정과 신들의 권력 사이에 상관이 있다고 추정하지 않는다면 그의 혁명적인 행동은 설명이 안 된다. 그런 상관은 "말벌들"에서 제시되었다: 필로클레온은 만일 그가 치죄하는 것을 멈춘다면 신들에게 벌을 받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치죄하는 일에 열심이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왜 그가 신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구도를 위하여 원래 구도를 포기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두 구도 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상관이 있을 것이다: 한 도시는 그들 이웃에 의해 편안하도록 그냥 두어지지 않는 한, 편할 수 없고; 오로지 이웃들이 없는 도시만이 그 도시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도,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도시는 신들을 그것의 지배자로 반드시 가져야 하는데; 올림포스의 신들은 결코 그런 도시를 구축하려 노력한 적이 없었고; "평화"에서 본 바와 같이,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리스 내부의 평화를 만드는 데조차도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 신들은 스스로 야만인들이 숭배하는 신들이나, 야만적인 신들과 평화스럽지 않고; 올림포스의 신들과 야만적인 신들을 함께 불러 오는 것은 페이스테타이로스의 행동이라; 신들이 인간들의 지배 속에 있지 않는다면 그 도시는 편안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페이세타이로스는 신들이 없이는 도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신들이 필요하다. 그가 새들을 선택한 것이 우연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이것이 그 우연을 선택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선택이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는다. 신들은 인종과는 다른 것의 종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신들은 사람들과 충분하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인간들과 성교를 하고, 그것을 통해 자손을 퍼트리지만(cf. 557-60), 새들은 인간들과 성교를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신들은 사람들이 치어다보는 존재이고; 그들은 높은 곳에 살며; 그리고 오래된 신은 너무 높은 곳에 사는데; 새들은 오래된 신들을 제외하면 다른 어떤 것보다 높이 날아서, 결코 인간과 가까이하지 않는다(726-29). 새들은 인간들을 싫어하지만, 그러나 니키아스가 "기사들"에서 신들이 존재하는 것을 시범을 통해 보여 주었듯이 그리고 "새들"에서 유일하게 인간을 좋아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존재가 있긴 하지만, 오래된 신들도 인간을 싫어하는데; 그렇지만 새들은 역시 인간들을 두려워한다. 새들의 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페이세타이로스가 스스로를 새들의 지배자가 되게 한다거나, 또 그렇게 할 수가 있었고, 그래서 가장 높은 신이 되고, 또 모든 신들과 모든 사람들의 지배자가 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그는 날개를 달고 있다.

 

"새들"의 충격적인 성격은 이 연극에서 축하하는 행동을- 순전한 위대함에 있어, 그 전후에 일어난 모든 행동들을 뛰어넘는 하나의 행동을- 한 아테네 사람이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 아테네 대중들의 눈에 충분한 반작용을 일으켰을 것이라 이야기되겠지만; 그래서 이 연극은 아테네의 영광에 "평화"에서 아테네 사람 트뤼가이오스가 행동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바지한다<주17>. 이런 경우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이 아테네 사람들의 악덕들을 비춰 주는 거울을 들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도록 사용할 수도 있고, 사실 신들이 아테네에 대해 해 준 것과 달리, 신들에게조차 훌륭한 일들을 아테네 사람들이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아테네를 칭송하는 것도 된다. 그런 일들은 아테네의 개개인들 스스로가 법이나 혹은 도시에 의해 권한을 받았다거나 위임받은 것이 아니면서 이루어 낸 것들인데; 그 시민들 덕분에 아테네는 도시가 고통받는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나쁜 점들을 내부적으로 고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관련 있는 모든 정치적 감각의 관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위협하는가? 스트렙시아데스는 이런 위협을 법이나 치안 판사들의 도움없이 한 손으로 떨쳐 버린다. 스트렙시아데스는 단지 그가 다른 모든 아테네의 사람들이 자격도 없이 속해 있는 두 계층 사이의 사람이기 때문에 진짜로 두드러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페이세타이로스는 알키비아데스조차 뛰어넘는 사람으로 표현될지도 모르는데; 그는 극단적인 불경함을 세상의 지배를 위해 분투하는 것과 성공적으로 혼합하는데 반해, 알키비아데스는 이 둘을 혼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알키비아데스의 의도는 실패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을 클레온의 실패와 견줄 수는 없는데; 그것이 성공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가 아테네를 그의 기반으로 사용했어야 했기 때문이었던 반면에, 페이세타이로스는 다른 기반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희극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연출한다. 그래서 "새들"은 아테네가 실제적으로 추구한 정책이- 서쪽으로 확장하는 것과<주18>, 알키비아데스를 불경죄로 처형하는 것- 불가능한 것이며, 그리고 동시에 위대함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아테네에게 거울을 비쳐 준다(415).

 

우스꽝스럽다는 것이 충격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새들"이 충격적이지 않다고, 그리고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명백하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스꽝스럽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페이세타이로스의 허풍을 비웃는 것은 올림포스의 제우스 뿐만은 아니며; 모두가 공중에 도시를 세울 수가 없다는 것과 신들을 굶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화"에서 지금의 평화가 조만간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듯이, "새들"은 지금 제우스의 퇴위는 늦어지기보다 더 가까운 장래에 그의 재등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만일 왕권이 원래 새들로부터 사람들을 거쳐 신들에게로, 그리고 연극 안에서 신들로부터 새들을 거쳐 사람에게로 옮겨 갔다면, 그것은 연극이 끝난 후에는 사람으로부터 신들에게 옮겨 갈 것이라는 것은 합리적이다. 제우스가 퇴위당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여전히 제우스 혼자서 그가 퇴위당할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하였다<주19>. 더군다나 "모두"가 제우스가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몰랐고, 그리고 그가 제우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단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닌 충격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의 행동은 스트렙시아데스가 책임져야 하는 더 커다란 전체를 이루고 있고; 그렇지만 스트렙시아데스의 행동은 충격적이지 않은데, 그는 말도 안 되는 솜씨로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트렙시아데스 행동의 진실은 여전히 페이세타이로스가 하는 행동보다 더욱 진실하다. 만일 한 작가가 한 사회에 모든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아버지 폭행과 근친상간을 허가하고, 그러고도 또 행복하다는 것을 소개하려 한다면, 그는 모든 사람에게 충격을 줄 것이지만; 그러나 그가 만일 동시에 그 사회 역시 불가능한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요구한다면(말하자면 가난, 전쟁, 질병 등을 없애거나, 혹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매우 아름답고 지성적이어야 한다는 것 등), 그는 훨씬 적은 충격을 줄 것이다. 그가 연극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모호할지도 몰라서 그런 면에서 충격을 줄 것이다. 그는 진실로 가난과 같은 것을 없애지 못하는 것처럼 신들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인데; 그러나 그는 역시 신을 없애는 것이 가난을 없애는 것만큼 바람직하다는, 아니면 다른 말로 해서 신들은 비록 그것이 필요하더라도 하나의 악덕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것으로써 신성한 것을 품는것"에 대한 경건심을 줄일 것인데; 그것은 신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주20>.

 

아리스토파네스가 성공이라고 소개하는 전체 구도들은 그가 인정하는 것인지, 반면 그 자신이 실패라고 소개하는 그것들은 그가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혹시 페이세타이로스의 승리가 단지 놀라운 것일 뿐이라면, 소크라테스의 폐망도 역시 놀라운 것일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승리는 그의 폐망만큼이나 놀라운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폐망을,  페이세타이로스의 경우에는 승리를 선택하였는가? 작가가 그의 작품이 단순히 놀랍도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것을 가르치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다시 점검해 보지 않고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이것이 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단순히 충격적인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고, 그래서 왜 소크라테스의 폐망과 또한 페이세타이로스의 승리가 모두 의식을 고양시키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소크라테스의 폐망은 교화적인데, 왜냐하면 그의 행동이 그저 충격적이고 견딜 수 없는 것이라 특히 아리스토파네스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행동과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 사이의 차이는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어 보일 것이다.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공중에다 도시를 세우는 등 그와 같은 명백한 불가능성 때문에 단순히 충격적이지만은 않은데; 소크라테스의 신들 존재에 대한 부인은 그 부인이 명백히 가능하기 때문에 단순히 충격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페이세타이로스의 행동은 올림포스 신들의 존재 뿐만 아니라, 도시가 신들을 우러러볼 필요가 있다는 것까지도 예상한다. 그가 기존의 범신전pantheon을 넓히는 것을 넘어 그 기존의 판테온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사실인데;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아버지 폭행을 반대하면서, 천문학자를 쫓아내며; 실질적으로 소크라테스와는 다르게, 페이세타이로스는 도시의 근본적인 요구에 따라 행동한다. 이것이 아리스토파네스가 정의로운 것들을 그런 주인공들의 승리를 통해 가르치는 이유이다. 달리 말하서,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파네스가 존중하는 그 불가능성은 도시의 근본적인 요구를 성공적으로 부인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연극의 행복하거나 불행한 결과물이 작가가 연극의 행동을 촉발한 전체 구도에 대한 판단을 드러낸다고 단언해도 좋을까? 그 단언은 그것이 제대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맞는 것이다. "구름"의 불행한 결과물은 작가가 스트렙시아데스의 의도 뿐 아니라,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행위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기사들"에서의 해피엔딩은 데모스테네스의 의도가 소시지장수의 권력에로의 접근을 이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데모스테네스 자신에 대한 중요한 비평을 시사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작가가 데모스테네스의 의도를 인정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말벌들"에서는 브델뤼클레온의 의도가 그 결과물과 간단히 일치하지 않는데, 그는 그의 아버지가 재판정에 앉기를 원하는 것을 진짜로 고치는 것에는 성공하는 만큼, 그를 신사로 만드는 것에는 실패하는데; 그렇지만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브델뤼클레온의 이 실패는 그냥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새들"에서 그 결과물은 페이세타이로스와 에우엘피데스 사이의 차이를 숙고하지 않고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에우엘피데스는 페이세타이로스가 그런 것들보다 더 더욱 올림포스의 신들에 매달려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올림포스의 신들 대신에 '새들'이 지배하는 것으로 바꾼다는 페이세타이로스의 의도에 더욱 매료되고 놀라워한다. 그렇지만 그의 영광스러운 동무와 비교하여 보면, 그는 한 안식자apragmon로 태평스럽고, 조용한 것을 사랑하고, 한 개인 장소에 은퇴한 사람으로 남는다. 그는 결코 과시자가 아닌데; 그는 주저하지 않고, 새들과 함께 새들처럼 사는 것이 새들이 그리고 새들을 거쳐 신들과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좋아서; 그는 시골뜨기이며<주21>; 한 마디로 그는 페이세타이로스에게보다는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더욱 가깝다. 에우엘피데스가 연극의 중간에서 퇴장하는 사실을 통해서 작가는 그가 페이세타이로스와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정의에 대한 고려를 근거로 하지 않은 의견의 불일치를- 요란하지 않게 표현한다. 그렇지만 "새들"에서 페이세타이로스의 의도에 대한 타당성은 보여 주면서도, 에우엘피데스의 의도에 대한 타당성은 소개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에우엘피데스는 그의 방식대로 소크라테스처럼 정치적 생활의 필요성에 눈을 감고 있다. "새들"에서의 두 주인공 사이의 차이는 작가와 그의 한 시민으로서의 역활 사이, 도시와 현명함 사이의 차이와 서로 대응한다.("새들" 끝)

 

 

<주16> "구름"의 '변론'들 장면을 보라

<주17> '미노스'(318e6-319b2, 320e2-321a1)에 나타난 경건심과 애국심(시) 사이의 마찰을 비교해 보라

<주18> "기사들"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 장면을 보라.

<주19> 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170-172. '프로메테우스' 755 ff.

<주20> Cf. 투키디데스 II 64.2 와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1391b1-3.

<주21> 585; cf. 494-96 그리고 110-11.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8-1) 8. "뤼시스트라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