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단락)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7.새-2)

병든소 2010. 11. 29. 13:54

7. "새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7-1)에서 계속)             페이세타이로스의 제안을 전적으로 수락한 다음에 의회는 끝이 났다. 에우엘피데스의 의견에 따라 이제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행동해야 한다. 그는 그 두 사람에게 자기의 둥지로 가자고 요청하며 그들의 이름을 묻는다. 에우엘피데스가 같은 지역deme 출신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처럼 같은 종족phyle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주6>. 들어가기 전에 페이세타이로스는 테레우스에게 그와 에우엘피데스가 날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새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묻는다. 테레우스는 어떤 뿌리를 먹고 나면 날개가 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비록 그가 그의 인간 손님에 대한 새들의 적의를 알고 있었지만, 그 뿌리에 대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었다. 코로스의 대장이 테레우스에게 그의 아내 꾀꼬리더러 밖에서 다른 '새들'과 놀라고 하라고 부탁한 사실로 보아, 그 둥지가 손님들로 인해 약간 넘쳐났을지 모른다. 그 두 아테네 사람도 그렇게 바라는데, 페이세타이로스는 새들의 호의를 간직하고 싶고, 에우엘피데스는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다. 둘 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였지만, 오직 에우엘피데스만 그녀를 안고 싶어 한다. 

 

테레우스가 손님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고, 그리고 대부분의 '새들'이 꾀꼬리와 같이 즐기고, 그리고 벽을 쌓는 일이 시작하는 동안,  파라바시스가 진행된다. 파라바시스의 유일한 화두는 새들이다- 그들이 가장 오래된 신들이라는 것, 그리고 새들과 함께 혹은 새들처럼 산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인지이다. '새들'은 아테네 사람들에 대해 칭찬도 비난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가에 대해서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새들"의 파라바시스는 작가 자신을 그 주제로 독점한 "평화"의 파라바시스와는 정반대의 깃대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평화"와 "새들"만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 가운데 유일하게 제우스에 대항하는 행동들을 연출한다. 그러나 "평화"의 행동은 단지 '즉흥적인ad hoc' 반란인데 비해, "새들"의 행동은 세상을 다스리는 기구를 완전히 영구적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평화"에서 연출된 반란은 희극작가의 작품이다: "새들"에서 연출된 반란은 희극작가의 작품이 아닌데; 페이스테타이로스는 희극작가가 아니다. "구름"으로 알고 있듯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혁신적 발상은 전통적인 판테온을 넓히는 것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새들'의 (첫 번째) 파라바시스에서는 작가에 대해 전혀 말이 없기 때문에 이전에 논의해 왔던 연극들의 (첫 번째) 파라바시스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연극 행동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주7>. 파라바시스에서 새들은 그들의 이유로 인종들을 이기려 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코로스로서 그들이 전체 인종에까지는 못 미치고, 겨우 아테네 사람들에게만 미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구름'의 경우는 다르고; 그들의 파라바시스에서 그들은 오직 아테네 사람들에게만 말을 건네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특히 아테네 도시로부터 여신들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들은 '새들'보다 덜 의욕적이다. 똑똑하다는 점에서 '새들'을 '구름'에 비교할 수 없는데, 새들은 간교한 술수 없이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인종에게 엄숙한 의사를 전달하는데, 그들은 고작 신들에 대항하는 반란이 임박해 있고, 사람들도 거기에 합세한다는 것을 넌지시 언급할 뿐이다.

 

파라바시스에서 좁은 의미로 '새들'은 오르페우스를 닮은 페이세타이로스가 테레우스와 나눈 사적인 대화와는 다르게, '새들'에게는 그의 변론을 발전시켜서 했던 그 주제를 완전히 발전시킨다: 대지와 신들보다 더 오래 된 존재인 새들은 최고로 오래인 존재이다. 그들은 페이세타이로스가 말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말한다. 그들의 신학체계를 적절하게 음미하기 위하여, 그들과 페이세타이로스의 다른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구원자보다 덜 지능적이지만 그 구원자보다 더 나은 가수들이며; 그들의 기원에 대한 생각은 헤시오도스의 생각을 상기시킨다. 이제 그들은 전적으로 스스로를 신들이라 여기고; 그들은 그들을 죽지 않고 언제나 존재하고, 천상에 있는, 늙지 않는 그리고 불후하다고 묘사한다. 그들은 새들의 출생에 대해서, 그리고 신들, 강, 구천Erebos, 또 카오스chaos 등을 물려받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둠 속에 사는 하루살이 인간들에게 높이 떠 있는 것들에 대하여 가르친다. 그들의 교습은 프로디코스를 능가한다. 프로디코스는'구름'이 소크라테스와 함께 그들이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언급된 바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멜로스" 사람이었다<주8>. 스트렙시아데스와 같이, '새들'과 페이세타이로스는 신들의 존재는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왕권이나 힘을 잃을 것이라는 것만은 단언한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번개를 치는 존재로서의 제우스를 부정하는 것은 페이세타이로스에 의해 묵시적으로 거부된다(576. ff.).

 

'새들'에 따르면 애초에 네 가지 것들이 있었는데, 물론 네 가지의 구성인자라는 말은 아니고, 즉 카오스, 닠스, 에레보스, 또한 타르타로스이고; 땅과, 공기와, 그리고 하늘이며, 신들은 말할 것 없이, 강이 그 다음에 왔다. 잉태하지도 않고 검은 날개를 단 닠스가 에레보스의 무한한 자궁에다 알을 하나 낳았고; 그 알에서부터 바람처럼 재빠른 회오리를 닮은 황금의 날개를 가진 에로스가 나왔다. 광대한 타르타로스 속에 날개를 가진 카오스와 짝짓기를 해서 에로스가 새들을 생성하였고; 새들은 빛으로 나온- 에로스거나 어떤 것에 의해- 첫 번째 것들이다. 에로스가 모든 것을 다른 모든 것과 섞어 버렸을 때- 추측컨데 카오스, 닠스, 에레보스, 그리고 타르타로스-, 하늘과, 바다와, 땅과, 그리고 불멸의 신들이 있게 되었다. '새들'은 여기서 대기의 창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페이세타이로스에게 교습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땅이 없었더라도 새들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반면(469-74), 공기나 에테르에 앞서 새들이- 에테르같은 존재(689)-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를 아는 것은 힘들다. 기원에 대한 새들의 어두운 생각들 가운데 가장 어두운 점 하나는 틀림없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따른 탁월함, 그 자체의 기본 바탕인 공기의 신분이다<주9>. 에로스의 신분도 마찬가지로 어둡다: 새들과 그리고 여전히 모든 다른 신들을 앞서가는 에로스는 그 자신이 신인가? 마치 어떤 아테네 사람이 아테네 사람 아버지와 아테네 사람 어머니의 아들이기에 첫 번째 아테네 사람은 아테네 사람일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신은 반드시 신들의 자손이기에 그래서 첫 번째 신들의 창조자는 신이 아닌 것인가<주10>? 에로스에 관한 어두움은 새들에 관한 어두움에 연결되어 있다: 에로스에 의한 새들의 창조는 에로스가 모든 것을 다른 모든 것들과 섞는 것에 선행하는가, 즉 새들의 구성 인자들은(만일 그들의 경우에 그 재료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새들'의 생각에는 두 개의 촛점이 있는데 공기와 에로스이다. '새들'은 소크라테스적인 원칙인 공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에로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는 아니지만 매우 강조해서 말한다: 그들은 공기를(혹은 에테르를) 에로스로 바꾸어 놓는다(cf. 574-75). 그들의 생각으로 틀림없이 에로스가 태초의 밝고 빛나는 존재로 다른 모든 것의 시초이며, 그리고 새들은 에로스가 처음 낳은 것이고, 그래서 애인들과, 특히 동성애자들과 같이 사는 신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들은 가장 오래된 신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혜택을 주는 것들이다. 그들이 계절에 따라서 오고 가는 것으로 그들은 인간에게 계절을 가르켜 주고, 그래서 정의로운 사람들이나 불의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다른 여러 일들이 다른 계절에 따라 일어나도록 가르켜 준다. 그들이 하는 일은 예상할 수 없어서, 그렇게도 많은 징조들을 풀기 위해 새를 부를 만큼 사람들을 신탁처럼 이끌어 가는데; 그들은 아폴론이나 점치는 무우사에게 불필요하게 의지한다. 그들은 인간들을 위해 모든 종류의 행복을 가져다 주니 부유함은 최소의 것이라 말할 것 없고, 그들은 그들에게 그들을 신들로 모시라고 충고한다. 그들은 그들이 얼마나 인간들과 가까이 있는가를 제우스가 구름 위에 살면서 위엄을 떨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비교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제우스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숲이 우거진 무우사의 땅을 찾아가는 파라바시스의 스트로페는 '말벌들'이 좋아하는 옛 비극작가 프뤼니코스를 칭송하는 것으로 끝나고; 안티스트로페는 백조가 아폴론과 올림포스 전체와 그곳에 사는 신들을 칭송하는 것의 효과를 칭찬한다. '새들'은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구름'만큼 경건해 보인다<주11>.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우스가 꾀꼬리에게 아폴론과 신들의 합창들의 반향을 불러 올 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라고 부탁하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하는데(209-22); 파라바시스에는 더 이상 그런 반향에 대한 참고사항이 나오지 않는다.

 

'새들'은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약속보다 더한 것을 해 나간다. 에피레마에서 그들은 관객들 가운데 즐거운 생활을 바라는 사람은 그들과 함께 하자며 그 관객들이 그들을 신들로 여겨야만 한다는 조건도 달지 않고 촉구한다. 그들은 그들의 방법으로 에우엘피데스를 페이세타이로스와 구별하여 응대한다. 그들은 이런 이유를 든다: 무엇이든 "여기서"는 "법에 의하여" 격하되는 것이 '새들'에게는 "거기서" 더 좋게 하거나 고상하게 하는 것이며; '새들'의 생활이나, 아니면 '새들'과의 생활은 본성에 따른 생활이다. 무엇보다 아버지 폭행이 법에 의한 처벌 근거이지만, 그러나 '새들'과에서는 아니다. 그 밖에 '새들' 가운데서 시민과 외래인의 구별이 없고, 그리고 자유민과 노예 사이에도 없고; '새들'의 사회는 평등주의, 그리고 세계적인 사회이다. 안티에피레마에서 그들은 관객들에게 날개가 달린 것에서 오는 이점과 즐거움에 대해 칭송한다. 만일 지겨운 비극의 합창을 듣고 있다가 날개가 달렸다면,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지겹게 하지 않는 희극의 합창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간통은 날개가 없는 사람들보다 날개가 달린 사람에게 훨씬 쉽다. '새들'의 기원에 대한 신조는 마치 거부된 소크라테스식 신조가 극단적인 자제심과 극기심으로 이끌듯, '불의의 변론'이 추천을 시작해 나가는 대로 이끌어 간다. 소크라테스는 공기 혹은 에테르가 최상위임을 단언하고; '새들'은 모든 실질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에로스가 최상위라고 단언한다. 소크라테스는 높이 떠 있는 것들을 밝혀 보여야 하도록 되었고;  만일 그가 한 '구름'에 대한 예비수업과 야외교습을 깡그리 무시하여도, 그가 본성에 의한 아름다움이나 고상함을 위해 그 방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새들'은 에로스가 최상위라는 주장으로 자연스레 축제 분위기의 특출한 난공불락의 장소를 할당 받는다. 이 결과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가 그런 것보다 훨씬 제우스와 다른 신들에 대해 관대하다. 소크라테스의 신조는 철저히 반무우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에로스를 위해 아무 할 것이 없기 때문이고; 그가 에로스적이지 못한 것이 그의 신조가 에로스에 대해 말이 없다는 사실을 반영하거나 아니면 말해 준다. 그러나 '새들'의 신조는 에로스적이고, 그러므로 무우사적이다. 만일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적 신조와 '새들'의 신조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는 '새들'의 신조를 택했을 것이고, 그 신조는 파르메니데스와 엠페도클레스의 도움으로 쉽게 철학적인 용어들로써 언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 아리스토파네스가 단순히 철학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에로스와는 관계없이 단지 시詩와는 연결되어 있지 않는 철학에 대해서만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것은 또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이 적합한 것이라고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대화편들 가운데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주역으로, 혹은 그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작가와 대화하는 것이 소개되는 것은 유일하게도 에로스에게 바쳐진 것이고, 거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신조는 아리스토파네스나 다른 어떤 작가의 것보다 훨씬 깊숙히 에로스적으로 보여진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신조를 디오티마에게 돌리는 것은 일생의 초기에 그가 에로스에 대해 적절히 평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신조와 '새들'의 신조 사이의 반대점을 강조하여, 그 두 신조 사이의 중요한 일치점을 감추려 하거나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두 신조는 '법이 다스리는 지역nomos'의, 도시의, 혹은 정의의, 경계를 초월해 있는데; 그 두 신조는 아버지 폭행을 허락한다. 

 

페이세타이로스와 에우엘피데스가 다시금 등장하는데; 그 사이에 그들의 날개가 자라났다. 에우엘피데스는 그 동무보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더 민감하다. 페이세타이로스가 보기에는 그 다음에 해야 할 두 가지 것들이 '새들'의 도시의 이름을 찾는 것과, 그리고 신들에게 희생물을 올리는 것이다. 에우엘피데스의 제안에 따라서, 페이세타이로스에게 '네펠로코큐기아(구름뻐꾸기마을)'라는 이름이 문득 떠오른다. 그 이름은 인간과 신성을 과시하는 것을 내비치는 의미인데; 페이세타이로스는 허풍쟁이이다. 새로운 도시에서는 새들이 오래된 신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명쾌하게 한 다음, 페이세타이로스는 에우엘피데스에게 벽을 쌓는 일에 새들을 도우고, 그리고 위에 있는 신들에게 전령 하나를, 그리고 아래 쪽에 있는 인간들에게 다른 전령을 보내라고 지시한다. 그런 다음 그는 새로운 신들을 위한 희생제로 접어든다. 에우엘피데스는 심하지는 않게 페이세타이로스를 욕하며 떠난 뒤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사라지는 것으로 처음으로 진실된 행동을 한다. 그는 조용한 도시에서 조용하게 살고자 바랬었는데; 가능한 한 '새들'처럼, 즉 파라바시스에서 '새들'이 관갣들에게 말을 건네어 촉구한 대로 그에 따라서 '새들'과 함께 살아 가는 것은 그에게 아주 알맞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의 어쩌지 못하는 동무가 가져다 놓은 새들 생활의 완전한 혁명이 그의 희망을 부셔 버렸다. 페이세타이로스의 거대한 전체 구도는 비록 그가 그것에 대항하는 일을 하기에 너무나 안이한 사람이지만, 그의 취향에 맞지가 않는다. 페이세타이로스가 그의 전체 구도를 테레우스에게 제시했을 때에는 에우엘피데스는 침묵으로 대하였고; 페이세타이로스가 '새들'에게 제시했을 때에는 에우엘피데스는 그것에 반대하지 않았는데, '새들'이 그것을 받아 들이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들'에게 페이세타이로스가 한 연설에다 갖다 붙인 그의 촌평들은 관객들을 재미있게는 했더라도 '새들'을 설득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에우엘피데스가 "새들"의 후반부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데모스테네스가 "기사들"의 후반부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중요성에 비해, 이 연극이 가진 의미의 중요성에 덜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 두 경우의 유사성에도 다른 점이 있다: 데모스테네스와 소시지장수가 정치적 사람들인 반면, 에우엘피데스는 정치적인 페이세타이로스와는 달리 비정치적인 사람이다.

 

새로운 신들에 대한 희생제는 약간의 어려움을 일으키는데(846,862), 왜냐하면 그 행동은 '새들'이 '새들'에게 희생물을 올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cf. 853-54). 아니면 새로운 신들을 올림포스의 신들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잠시 동안에 그런 어려움은 페이세타이로스가 인간인 사제를 불러들여 해결되는데, 그 사제는 올림포스의 새들이 네펠로코큐기아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릴 것을 기도한다. 그렇지만 페이세타이로스 눈에 사제가 하는 기원은 너무 광범위해서, 그 사제는 맹금류 같은 새들에게 특히 제물의 고기가 모자라게 주어졌을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그는 사제를 가 버리라고 말하고, 그 스스로 제물을 가져올 채비를 한다. 바로 이때 네펠로코큐기아를 위해 여러가지 종류의 시를 지어 왔던 한 불쌍한 시인이 떨면서 도착하여, 그것의 설립자에게 운문으로 부끄럼없이 기부를 구걸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사제에게서 벗겨내었던 약간의 따뜻한 옷을 준다. 그 시인은 새로운 도시에 대한 또 다른 시의 시작 부분을 읊으며 떠나간다. 페이세타이로스는 시인의 방문이 그렇게 기쁘지 않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그의 주된 반응은 새로운 도시의 설립에 대한 뉴스가 그 시인에게까지 닿았던 빠른 속도에 대한 놀라움이다. 비록 이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는 여전히 무엇이 쉬운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간의 차이를 구별하는 감각은 보유하고 있었고; 이런 시인과의 처치에서 그는 누구라도 시인을 도와야 한다는 속담에 따라 행동한다. 그가 다시 희생제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또 다시 방해를 받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도시에 대한 바키스의 신탁을 가지고 온 점쟁이이다. 그는 신탁에 따라 페이세타이로스가 그에게 상당히 많은 선물을 주지 않을 경우, 구름 속에서 독수리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페이세타이로스는 그에게 점쟁이는 허풍쟁이이니 엉덩이를 맞아야 한다는 아폴론의 신탁을 암송하며 대답하고; 그 방문자는 단지 도망칠 뿐인데, 도망가면서도 볼기를 얻어 맞는다. 페이세타이로스가 희생제를 지내러 가야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세 번째 방문자로- 중간에 있는 방문자인데, 모두 다섯의 방문자가 있으며 사제는 방문자가 아니다-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에게 붙잡힌다: 그는 메톤으로 유명한 기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그는 공중을 콤파스로 재어 가지고 새로운 도시의 평면도를 그려 보기 위해 왔다. 그에 의하면, 공중은 전체가 난로와 대단히 비슷하다. 그는 새로운 도시의 시장터가 별과 같기를 바란다. 페이세타이로스가 이런 이야기를 듣자, 그는 메톤을 마치 스트렙시아데스가 한 학생으로부터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콤파스를 가지고서 그의 무리들을 위해 저녁식사를 마련하였는가를 들었을 때 그를 존경하였던 것과("구름" 175-80, 95-96) 거의 똑같은 태도로 존경한다. 메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다른 어떤 배역보다 소크라테스(그리고 그의 학생)에 가깝게 가 있다. 그 앞에 거쳐 간 시인과 점쟁이를 비교해 보면, 절대로 그는 어떤 신성한 것들에 대하여 무우사조차도 언급하지 않으며; 그는 어떤 선물도 요구하지 않는다. 페이세타이로스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러나 스트렙시아데스의 경우와는 현저하게 다르게 그를 쓸 필요가 없는데; 시민의 한 부분에 대한 반대는 모든 허풍쟁이들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해 온 그에게는 너무 강한 것일 것이다. 페이세타이로스가 시인과 점쟁이를 다룰 때에는 그러한 반대를 참고하지 않았다. 메톤은 그에게 가해지는 위협의 소리에 떠나고 싶어하는데; 그전에 페이세타이로스가 그를 때린다. 그가 메톤을 매우 사랑했건 존경했건 간에 그는 도시의 설립자이고; 도시는 오묘한 것들이- 시인과 점쟁이가 내놓은 오묘한 것들과는 다르게, 최소한 메톤이 제안해야 하던 종류의 오묘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주12>. "기사들"에서 보아 온 것들, 이름하여, 본성에 따르는 지배자는 교육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에우엘피데스였다면 메톤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어쩔 수 없다. 아낙사고라스와의 연관에 대한 생각으로, 페리클레스에게 일어났던 일은 페이세타이로스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 페이세타이로스의 암묵적인 "소크라테스" 거부에 깔린 원칙이 '새들'의 암묵적인 "소크라테스" 거부에 깔린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명백하다: '새들'은 무엇이 도시에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메톤에 이어 나타나는 방문자들 둘은 메톤이 방문자들의 장면에서 그 복판에 놓이게 하기 위해 필요한데; 물론 이것이 그들이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 둘 가운데 첫 번째는 아테네가 보낸 감독인데, 아테네는 네펠로코큐기아를 아테네에 의존하는 다른 어떤 도시들과 같이 취급하려 한다. 두 번째는 법령을 파는 장사꾼인데, 페이세타이로스에게 새로운 법들을-  민주정은 법law과 법령decree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명확한 구별을 해 두지 않는다- 팔고 싶어 하고; 그 법들은 물론 아테네 법이다. 그 두 사람은 모두 아테네의 제국주의를 대표하는데, 몸을 가지고 나타난 훨씬 더 높은 것에 의해 또 총체적인 제국주의에 의해 자연스레 쫓겨나고, 그리고 그는 그의 엉덩이를 때린다. 그가 아테네 도시의 통치권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었던 것은 오래된 일이다.

 

다섯 방문자 장면은 바로 두 번째 파라바시스로 이어진다. "평화"에서는 첫 번째 파라바시스가 전적으로 작가에게 주어졌고, 두 번째는 농부들에게 전적으로 주어졌었다. "새들"에서 첫 번째 파라바시스가 전적으로 '새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한번쯤 "새들 지상주의"라고 부를 수 있었는데, 한편으로 아테네에, 다른 한편으로 작가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파라바시스의 필요성은 명백해 보인다. 첫 번째 파라바시스가 끝난 다음, 페이세타이로스는 다음으로 해야 할 일 두 가지를 말했던 적이 있었는데, 새로운 도시의 이름을 짓는 것과 신들에 희생물들을 올리는 것이었다. 비록 좋은 도시란 아주 우수하고, 본성을 따르는 도시지만, 관습적인 것들도 필요하다. 그 도시에 이름은 지어 주었지만, 그러나 희생물은 아직 올리지 못했고; 기대했던 희생제 장면은 다섯 방문자의 장면으로 대치되었다. 메톤의 일이 가운데에 놓여서 메톤을 축출하는 것이 희생제의 자리를 차지했다거나, 혹은 그것이 희생제와 서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희생제는 그냥 포기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의 파라바시스 동안 "실내"에서 올려졌다. "구름"에서 두 번째 파라바시스로 페이딥피데스에 대한 실내교습을 가린 것이 기억난다.

 

두 번째 파라바시스의 스트로페에서 '새들'은 그들을 제우스의 후계자들로 소개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지배하며, 그리고 모든 인간들이 그들에게 제물과 기도를 드린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만을 볼 뿐, 모든 것은 보지 못한다고 인정한다: 그들은 희극작가의 쇠똥구리만큼 높이 오르지 못한다. 이와 비슷하게 그들이 인간들에게 갖게 해 주었다고 주장하는 혜택은 그들이 곤충들과 그 밖의 나쁜 병원체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첫 번째 파라바시스에서 제기했던 주장들을 제기하지 못하는데; 어쨌든 그들은 그들의 한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피레마에서 아테네 사람들이 멜로스의 무신론자 디아고라스와 참주들을 처벌한 것을 본보기로, 그들은 새잡이들과 그와 유사한 것들에게는 중대한 벌칙이 있다고 알리는데; 그들이 아테네 사람들보다 더 가혹한 이유가 아마 인간들에게 참주나 무신론자가 위험한 것보다 새들에게는 새잡이들이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메톤의 장면에서 부분적으로 알고 있듯이, 불경함과 반역은 오래된 도시에서도 그렇지만 새로운 도시에서도 범죄이다. 안티스트로페에서 '새들'은 그들이 어떻게 다른 계절들을 지내는지 보여 주며, 그들의 행복을 칭송하고; '새들'이 카리스여신들과 님프들에게 거부감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안티에피레마에서는 "구름"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를 상기시키는데, 그들은 더 이상 단순히 '새들'로서가 아니라, "새들"의 코로스로서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두 스트로페와 에피레마가 서로가 어울려 한데 뭉쳐 전체를 형성하면서 물론 그것이 에피레마의 중심이 된다. 그 전체는 첫 번째 파라바시스 전체로서, 연극의 행동들의 한 부분 이상이다. 안티에피레마에서 '새들'은 심사원들에게 정당하게 혹은 부당하게 그들이 코로스에게 상을 줄 경우 그들 각자가 받을 혜택과, 그렇지 못할 경우 그들이 받을 벌칙에 대해서 말한다.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아테네와 특히 작가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안티에피레마가 특히 "새들"의 공로에 대하여 한마디도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어쩐지 그래서 실망스럽게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새들"의 두 파라바시스에서 자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런 침묵은 도시가 경배하는 모든 신들에 대한 혹은 모든 오래된 신들에 대한 성공적인 반란이거나, 아니면 그와 동시에 아테네 도시와 신들에게서 등을 돌린 한 아테네 사람의 성공에 대해 연극이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면 가장 합당한 것이다. 작가의 이 침묵은 에우엘피데스의 퇴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새들'과 살라거나, 아니면 '새들'처럼 살라고 촉구하는 것을 내비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조차 없어진다.(계속)

 

 

<주6>  Schol. 645;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32b2.

<주7>  "새들"에서 이 파라바시스의 성격은, 코러스가 연극의 공연에 대한 수상을 주장하는 것이 파라바시스 안에 있지 않고,

          훨씬 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것이다(445-47).

<주8>  "구름" 361; cf. 키케로 N.D. I 118.

<주9>  Cf. schol. 1218: 여기서 "카오스"는 공중을 가르킨다.

<주10> Cf.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75b22-34.

<주11> "말벌들"의 파라바시스 장면을 보라.

<주12> Cf.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77a18-22.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7-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