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단락)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6.평화-2)

병든소 2010. 11. 10. 09:19

6. "평화"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6-1)에서 계속)       트뤼가이오스는 해와 달로부터 오는 위험으로 헤르메스와 간접적으로는 모든 신들을 위협하여, 제우스가 금지한 것을 벌 받지 않고 거역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마치 "모든 신들"에 대항하는 해와 달의 특별 동맹자의 외교관인 것처럼 군다. 해와 달도 역시 신들이지만, 그리스 사람들에게 특별하거나 그리스 사람들이 따르는 신들과는 다른 종류이다. "구름"에서 천문학자 소크라테스가 해와 달을 다른 신들보다 훨씬 진지하게 대하는 것과, 그의 유사-여신quasi-goddess인 '구름'은 아테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다른 신들보다 해와 달에 더 가깝다는 것을 기억한다. '구름'은 자연적인 무우사들이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해와 달을 제우스와 다른 신들과 그리스 신들로부터 자연적인 신들로 구별하여야 한다. 그들을 자연적인 신들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야만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신들이라 여기기 때문인데, 한편으로 야만인들의 신들은 해와 달을 빼고는 그저 단순한 존재들이다<주9>.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지만, 예를 들어 대지 역시 자연적인 신이라 해도 별 탈 없을 것이다<주10>. '구름'은 그들의 아버지 에테르가 세계에 혜택을 주는 것으로 칭송하지만, 해와 달이 제우스와 그 동료들보다 세계에 혜택을 주는 존재로 더 가깝다. 트뤼가이오스는 같은 감정을 가진 그리스 사람이면서 아테네 사람이지만, 아리스토파네스가 만든 그리스 뿐 아니라 세계를 떠난 첫 번째 작품이다. 그는 그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263).  헤르메스는 일차적으로 그를 특히 그리스 사람으로보다 인간으로 감지하고(180;cf. 263); 신들에게보다 해와 달에 관련된 인간일 뿐으로 감지한다.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기 전에 야만인들이 있었듯이, 해와 달이 그리스의 다른 신들보다 오래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밖에 해와 달은 모든 사람들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볼 수 있고, 그들이 땅에 내려오거나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드러내며, 스스로 움직이는(그러므로 살아있는) 참으로 황홀한 존재들로서 눈 안에 들어온다. 트뤼가이오스에게 돌아가서, 그가 그에게는 아주 도움이 되는 해와 달이 다른 신들에 대항하는 음모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 없이, 제우스가 그리스 사람들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믿지 않는데; 그는 니키아스가 가진 신들의 미움을 받는다는 생각과, 필로클레온이 가진 신탁과 '구름'이 그냥 사악한 존재라는 것, 또 "기사들"에서 사용된 신탁을 누구보다 잘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는 확실하게 제우스의 뜻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다. 제우스의 뜻과 허락 사이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폴레모스가 그리스 사람들에게 자기 마음대로 하게 허락함으로써 제우스는 '평화'를 파내는 행동을 사형으로 금지해 놓았다. 디카이오폴리스가 신들의 지원으로 도시에 반대되게 행동했던 반면, 트뤼가이오스는 비록 모든 그리스 사람들의 지원을 받았지만 신들에게 반대되는 행동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데; 따라서 디카이오폴리스는 오직 개인적 평화만 이루고, 트뤼가이오스는 공공의 평화를 이룬다. 브델리클레온과 비교해 볼 때, 트뤼가이오스는 신성한 금지를 단순히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들이박는다. 그가 완전히 미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제우스의 처벌을 면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의 관점에서 헤르메스를 보면 그는 신이 없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관점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대단하게 겁나지 않고, 혹은 아주 힘이 세지 않다는 관점에서 행동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제우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제우스가 왕의 지위나 힘을 잃어 버린 것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스트렙시아데스와 마치 뜻이 맞는 것처럼 행동한다. 어떻게 좀 과장하면 트뤼가이오스를 스트렙시아데스화 한다. 스트렙시아데스와 트뤼가이오스 사이의 차이에 골몰할 필요는 없다:  트뤼가이오스는 그가  그것에 맞추어 행동하는 관점에 도달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늘에 올라갔었으므로 그는 신들에 대한 지식에서 소크라테스를 뛰어 넘는다.

 

트뤼가이오스가 경비를 공범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더 이상 에이레네를 훔치지 않아도 되게 된다. 애초부터 그들을 트뤼가이오스의 지휘 아래 두었던 코러스가 이제는 트뤼가이오스에게 묻지 않고 그들을 헤르메스의 지휘 아래 두고; 경건한 사람들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신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신이 그들을 수공예장인의 능력을 가지고 일하도록 지시해 달라고 부탁한다(426-39; cf. 357-60): 트뤼가이오스는 수공예장인이 아니다. 헤르메스는 기술적인 활동을 맡아  보고 있어; 트뤼가이오스는 전체를 넘겨 준다. 트뤼가이오스가 제안하자 모두들 신들에게 기도한다. 그는 여행 전에 기도하지 않았었는데; 헤르메스를 이기고 나자 신들에 대한 그의 자세가 자연스레 달라졌다. 그와 코러스는 평화 애호가들에게는 최선의 것을 전쟁 애호가들에게는 최악의 것을 바란다. 트뤼가이오스는 헤르메스, 카리스여신들, 호라이(에이레네의 여동생),  아프로디테, 그리고 데지르(아프로디테의 아들)에게 제주를 붓는다. 헤르메스의 지도로 구덩이에서 에이레네를 꺼내는 일이 진행되지만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다. 코러스는 트뤼가이오스와 헤르메스에게 와서 도우라고 요청하나; 그러나 트뤼가이오스는 그 일을 혼자서 해 왔다고 주장한다. 어떤 그리스 사람들이 적절히 힘쓰지 않고 심지어 방해를 하기 때문에 일은 충분히 진척되지 않는다. 헤르메스는 특히 아테네 사람들과 메가라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발견한다. 코러스의 대장이 제안하여, 농부 혼자서 일을 하자 일이 훨씬 진척되고, 그들 모두가 조금 더 노력하자 에이레네가 동료들인 오포라('풍요')와 테오리아('축제')와 함께 지상으로 나온다. 

 

에이레네를 풀어주는 것에 대해 약간의 저항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러나 그 저항은 평화 애호가 쪽에서 더욱 열심히 일하여 해결하였다: 그것은 변론으로, 확실히 논쟁으로 극복된 것이 아니다. "평화"에서 앞에서 본 네 편의 희극보다 훨씬 더 많이 전체 구도의 성공이 변론들보다 행동들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풍뎅이 등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 두 절굿대의 분실, 폴레모스의 새 절굿대의 제작 실패, 그리고 에이레네 파내기 등이다.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유일한 변론은 트뤼가이오스의 헤르메스 설득인데- 실제 20행의 운문이다. 트뤼가이오스는 제우스와 논쟁을 시도하였고, 그리고 작가에게는 제우스와 트뤼가이오스 간의 논쟁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을 것이었지만; 그 시도는 폐기되었다. 약간의 그리스 사람들 쪽에서 나온 평화에 대한 저항은 대다수가 굳세게 평화를 좋아하여, 변론 없이 극복되었고, 그리고 그 대다수는 트뤼가이오스와 헤르메스가 이끌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트뤼가이오스와 디카이오폴리스 사이의 대비인데; 디카이오폴리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논쟁을 벌렸었고,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를 빌리자 않았으면 그 논쟁에서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변론에 대해 반대되는 것 하나는 행동이고, 다른 반대는 침묵이다. 트뤼가이오스가 취한 행동의 중요한 의미가 그가 헤르메스를 설득한 짧은 변론에 의해 가려진다.

 

전쟁 때문에 궁핍해져서 트뤼가이오스는 에이레네에게 적절하게 말을 건넬 소재가 부족하다. 그는 테오리아를 칭송하는 말을 찾는다(523-26;cf. 342와 그 내용). 그녀 때문에 생긴 기쁨 가운데 그는 소포클레스의 노래들과 에우리피데스의 "작은 운문"들을 열거하고; 헤르메스는 후자를 용인하지 않는다. 디카이오폴리스와 에우리피데스의 관련이 기억난다. 그 이외에는 헤르메스도 트뤼가이오스, 코러스, 일반적인 그리스 사람들과 함께 평화가 다시 찾아온 기쁨을 나눈다. 관객 가운데서 약간 다른 느낌이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모든 농부들은 모두 평화에 대해 행복해 하지만 모든 수공예장인들은 아닌데; 무기 제조업자들은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한다. 기술로만 볼 때, 농사는 별로 칭송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헤르메스가 제안해서, 트뤼가이오스는 농부들- '평화'를 파낸 바로 그 사람들(550 ff., 508,511)-에게 전쟁의 기구들을 농사 기구들로 바꾸어 가진 뒤에 경작지로 돌아가라고, 아니면 '평화'를 파내는 일과 같은 전쟁의 일에서 돌아서서 평화 그 자체의 일로 돌아가라고 격려한다. 어쨌든 그들의 관점에서 농부들은 그들 그대로 평화 애호가들이어서 그러므로 그들은 그대로 정의롭다. 정의와 경건의 연결 고리를 상기하게 한다. 포도나무 재배자인 트뤼가이오스는 물론 그 자신이 전쟁으로 인해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경작지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시골 사람이다. 그는 농기구들의 모습과, 그리고 에이레네 여신이 마련해 준 옛날 방식의 생활 두 가지 모두를 칭송한다. 코러스의 단원들도 차례로 돌아가며 혼자서만이 시골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왔었던 에이레네를 칭송한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데메테르나, 다른 어떤 여신들에게나, 아니면 신들에게 한번도 신세진 적이 없는 것처럼 노래한다. 그들은 이미 에이레네가 모든 여신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여신이라 부르고 (308), 가장 인정이 많고 인심이 후한 신성이라고 부른다(392-94).

 

에이레네가 만들어 낸 압도적인 인상과 과거 그녀의 시혜에 대한 회상이 헤르메스로 하여금 트뤼가이오스가 약속하였던 새로운 최고의 명예를 누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편 에이레네가 다른 모든 신들을 완전히 사그러지게 하였을지도 모르는 동안에, 아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고, 눈에 보이는 헤르메스를 잊어버릴 수 없다. 그의 도움이 없이는 여신이 결코 햇빛 속으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농부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지만, 에이레네는 그녀 자신의 힘으로는 지상으로 나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인데; 풀려난 이후에조차도 그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표시를 전혀 내지 않았다. 농부들이 구덩이에서 그녀를 찾았지만, 그러나 그녀가 그리스에 없었던 전 기간 동안에, 그녀가 그 구덩이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장 인자한 신인 헤르메스에게 그 긴 시간 동안에 그녀가 어디에 있었는지 묻는데, 아마도 그 다음에는 그 구덩이 속에 있기 전에 그녀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그녀가 있었던 그곳- 어느 곳이든지 간에-으로부터 옮겨졌었는지 물어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헤르메스는 농부들이 몸짓을 한 것처럼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러나 그는 에이레네가 어떻게 그리스를 떠났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그 답으로 간단하게 한동안 그녀가 신들과 있었다고 대답할 수 있었지만, 이것이 쉽게 곤란하게 만들었을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라고 할 수 있었다. '불의의 변론'이 올바름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올바름은 신들과 함께 있다고 대답했다가, '정의의 변론'이 말려들었던 어려움을 기억한다("구름" 903-4). 농부들은 헤르메스로부터 제우스가 에이레네를 파내는 것을 중대한 범죄로 정했다는 것을 들었다. 트뤼가이오스가 애초에 제우스가 그리스를 파멸시킨다고, 즉 에이레네를 그리스에서 멀리 둔다고 비난한 것을 기억한다. 농부에게 하는 대답에서 헤르메스는 어떤 신의 어떤 잘못도 암묵적으로 부인한다: 신들이 아닌 아티카의 농부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고; 신들 어쨌든 헤르메스가 평화의 회복에 책임이 있다. 헤르메스는 그 단순한 질문자들에 대해 우위를 점한다. 그는 이전에 지나간 모든 것들과, 또한 어쩌면 다른 어느 계층보다도 농부들이 더 평화에 헌신한다는 것에 따라서 암시되어 있던, 그리고 단지 암시되어 있던 것만도 아닌, 농부들에 대한 판단을 전적으로 뒤바꾼다.

 

앞서 논의하였던 네 연극들의 제목을 대비할 때, 지금에 논의하고 있는 연극의 제목은 코러스를 가르키지 않는다. 이 이유는 "평화"의 코로스의 성격이나 구성이 모호하거나 아니면 모호하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이다. 트뤼가이오스가 그의 조력자들을 부르는 것으로부터(292-98) 코로스가 농부들, 수공예장인들, 장사꾼들로 전체 그리스의 도시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예상할 것이다. 이 예상은 어떤 면에서 그들이 에이레네를 그 구덩이에서 끌어내면서 표명한 칭송과 비난으로 확인된다(464-508). 이것으로 작가가 그의 습관대로 극적인 환상을 깨는 것과, 코로스를 오직 아테네 시민들로만 구성된 것인 양 다루는 것을 막지 못한다(347-56). 그렇지만 끝으로 코로스가 오로지 아티카의 농부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명백해진다(603 ff.). 이 모호함이 농부들과 수공예장인들과의 혹은 어떤 종류의 수공예장인들과의 차이점을 한편으로는 감추면서 드러낸다. "평화"에서의 코로스는 연극 전체를 통해서 "기사들"에서의 코로스보다 훨씬 더 굴곡이 없는 엄격하게 관료적인 모습으로 행동한다. 말하자면 "평화"에서 코로스가 유일하게 기여한 것은 기술적인 수고가 아니라 순전히 신체적인 것이다.

 

헤르메스에 따르면 여신의 실종은 애초 페이디아스가 겪었던 불운 때문이었다. (페이디아스는 아테나를 조각할 재료로 그가 받아 가지고 있던 금을 훔쳤던 죄로 추방당했다.) 페이디아스의 친구 페리클레스는 농부들의 본성을 알고 있어서, 잘못되면 페이디아스의 운명에 연루될까 봐 그들의 주의를 돌려 놓으려고 메가라의 포고령을 통과시킨다고 정했는데,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졌고; 한번 전쟁이 일어나자 멈출 수가 없었고, 그리고는 에이레네가 사라졌다. 헤르메스는 디카이오폴리스가 했었듯이 전쟁을 쉽사리 페리클레스 (혹은 그의 아스파시아)에까지 추적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그에 따르면, 그는 농부들의 본성이 초래한 것을 강제로 떠밀려서 행동했던<주11> 페리클레스를 무죄방면하였다. 페리클레스와 페이디아스 간의 관계로 보아, 헤르메스는 페이디아스 역시 무죄방면하는 것을 생각하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농부들의 본성이 이미 페이디아스의 처벌에 효력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트뤼가이오스는 결코 에이레네와 페이디아스 간의 관련을 들어 본적이 없다. 그렇지만 코로스는 관련을 안다: 에이레네는 보기 아름답고, 그리고 페이디아스는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드는 것으로 저명했다. 지금까지 관찰할 수 있었던 것에 관한 한, 에이레네는 다른 모든 신들보다 더 빛나는 하나의 조각상일 뿐이다<주12>. 지금까지 관찰할 수 있었던 것에 관한 한,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은 결코 말하거나 움직이지 않고, 반면에 그들의 다른 한편인 폴레모스와 그의 동료는 말을 하고 움직인다. 즉 명백히 살아 있다. 헤르메스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마치 유독 인정없고 혐오스런 신들은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보이고, 반면 아름답고 인정 많은 것들은 수공예장인의- 농부들과 구별되는 기술자들- 작품들로 보일 수 있다. 달리 말해서 헤르메스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마치 유독 여성의 신성들만 아름답고 인정 많은 것처럼 보일 것인데; 한편으로 에이레네와,  다른 한편으로 아프로디테와 카리스여신들 사이의 가까운 관계를 기억하는데(456; cf. "아카르나이 사람들" 989); 트뤼가이오스가 여자 자식들만있다는 것도 또한 기억한다. (폴레모스가 전쟁 자체보다 덜 끔직한 것이나, 에이레네가 평화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과 꼭 같이.) 그리고 헤르메스로 말하면, 그가 인정이 많아지게 된 것은 트뤼가이오스의 변론과 선물 때문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헤르메스는 농부들의 비난을 페이디아스에 대한 칭송과 연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으로 헤르메스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에게서 아티카 농부가, 그리고 아테네 사람들에게서 펠로폰네소스 농부가 입은 손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트뤼가이오스와 코러스는 아테네 사람들이 적들의 농부들에게 한 것에 대해 충분히 용인하는데; 그들은 아직 같은 이름의 연극에 나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호전적인 열의와 같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에, 디카이오폴리스가 행동을 진행함에 따라 더욱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반면, 트뤼가이오스는 제우스의 뜻에 거슬러서 성공적으로 행동하였었고, 행동이 진행됨에 따라 더욱 평범한 농부가 된다는 것을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만 한다. 이것에 따라서 디카이오폴리스와 대비해서 볼 때, 트뤼가이오스는 아테네에게 전쟁 발발의 책임이있다고 단언하지 않고, 그리고 헤르메스가 그것을 단언하자, 에이레네와 페이디아스 간의 관련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면서까지 자신을 제어하여 그 화제를 피한다. 마지막으로 헤르메스는 아테네에서 피난민으로 알려졌던 시골 사람들이 에이레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호소하려 할 때마다 그녀를 쫓아버렸던 그 연설가들을 찾아가고자 어떻게 그 길을 알고자 했었는지 보여 준다. 연설자들이 미개한 것은 농부들의 지지를 제외하면 아무런 영향이 없었을 것이었고; 최악의 연설자는 물론 클레온이었다. 트뤼가이오스는 클레온이 이미 죽어서 더 이상 아테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침묵하라고 조언하고; 그는 헤르메스가 가진 클레온에 대한 죄목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충분히 애국적이어서 주제를 바꾸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연극의 초기에 모든 종류의 것들에게 말을 걸었었던 그는 에이레네에게 왜 침묵하고 있느냐고 말을 건넨다. 그래서 그는 이 모범적인 신성의 태도에 대한 질문을 효과적으로 제기한다. 에이레네는 대답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 더해, 그리고 말도 없는 것인가? 헤르메스는 관객들이 그녀에게 한 짓에 대하여 그녀가 화가 나 있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이 있는 앞에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신들이 말을 하지 않을 경우에 그것은 신들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들의 실수 탓이다. 헤르메스는 확실히 일반적으로 신들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에이레네가 가진 아테네 사람들에 대한 감정에게로 돌린다(203-9). 이것은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다른 신들처럼 그리스 사람들에게 화가 났었다면, 왜 폴레모스가 그녀를 땅에 묻을 필요가 있었을까? 폴레모스의 행동은 어쩐지 마치 에이레네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에이레네는 화를 낼 수가 없다는 증명할 필요가 거의 없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트뤼가이오스는 관객이 아니므로, 그는 헤르메스에게 헤르메스가 스트렙시아데스에게 속삭이었듯이("구름"1478-85), 에이레네도 트뤼가이오스에게 속삭이게 하라고 부탁했어야 좋았다. 그는 그녀가 동료 신인 헤르메스에게 속삭이게 하여 난처함을 피한다. 헤르메스는 에이레네에게 아테네 사람들에 대해 그녀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자기에게 말하라고 부탁한다. 그에 따르면, 에이레네는 퓔로스에서 휴전 협정들이 성공한 다음, 많은 휴전 협정들을 가지고 갔을 때마다 의회에서 세 번이나 좌절하게 했던 그들을 비난한다고 그에게 속삭인다 한다. 이것은 트뤼가이오스가 수긍하듯이 실수였고 그는 그녀에게 용서를 바란다. 에이레네가 말하기 시작한 뒤에, 아니면 인간들은 들을 수 없는 방법으로 속삭이기를 시작한 뒤에, 비록 누가 그녀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해도 그녀는 멈출 수가 없다: 그녀는 오로지 질문들만 내뱉는다. 헤르메스에 따르면 에이레네는 아테네에서 누구가 최고로 그녀에게 악의를 가졌으며, 누가 그녀의 친구이었는지를 그에게 물었고; 트뤼가이오스는 겨우 그녀에게 아니면 헤르메스에게 누구가 최고로 그녀에게 선의를 가졌는지를 말할 뿐이다: 만일 들을 귀가 있다면, 이제는 그녀가 아테네에서 누가 평화의 가장 큰 적이었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 헤르메스에 따르면, 에이레네는 더 나아가서 누구가 이 시점에 사람들의 지도자인지 물었다 한다. 트뤼가이오스가 그 질문에 대하여 그의 개인의 이름(휘페르볼로스)을 언급하자; 기적이 일어난다: 에이레네가 그녀의 머리를 돌려 버린다. 조각상들조차 그들의 머리를 돌리게 만드는 그런 충격적인 일들이 있다. 다른 말로, 이제 에이레네가 어떤 조각상 이상이라는 것이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 명백하다. 헤르메스는 그녀의 움직임에 대하여 에이레네가 그에게 설명해 준 척하지 않고 곧 설명한다. 트뤼가이오스는 에이레네에게 사람들과 자기가 할 수 있는 선택에 대하여 다시 안심시킨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에이레네의 요청은 많은 다른 것들에 대한 정보인데, 특히 그녀가 아테네에서 떠나기에 앞선 옛날 것들에 대한 것과, 최우선적으로 소포클레스에 대한 정보이다. 트뤼가이오스는 그녀에게 소포클레스가 시모니데스, 즉 욕심이 많은 시모니데스가 되어 버렸다고,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진실이라는 것은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mutatis mutandis'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떠난 뒤로 모든 것이 더욱 나빠졌다. 소포클레스에 대한 주석이 진정 놀랄 것은 아니다: 헤르메스는 트뤼가이오스가 에우리피데스와 구별하여소포클레스를 칭찬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고, 헤르메스가 좋아하였던 작가는 소득 애호가인 것으로 보인다. 에이레네가 조각상 이상이라는 것을 보고 들은 이후에, 헤르메스는 트뤼가이오스에게 오포라를 아내로 맞이할 것과, 테오리아를 평의회에 되돌려 주라고 부탁한다. 트뤼가이오스에 관한 한, 평화는 원상복구restitutio in integrum 이상이어서; 그는 새 아내를 받아들인다. 헤르메스와 기쁨에 넘치는 트뤼가이오스는 서로가 떠날 채비를 한다. 그 신이 그 인간에게 그를 즉 그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라고 부탁하는데; 트뤼가이오스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쇠똥구리가 사라져서- 그것은 하늘에 있을 것이다- 트뤼가이오스는 어떻게 땅 위로 내려가는지 모른다. 헤르메스가 말하여 주는 대로 그는 에이레네의 곁에 붙어서 내려가고; 오포라와 테오리아도 그를 따라간다. 아름다운 여신들이 추한 쇠똥구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에이레네가 빛 속으로 나와 있는 것, 그리고 적절히 환영 받고 있다는 것, 아니면 혹시 그녀가 살아 있는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면, 적절히 환영 받고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고 나자마자 바로 뒤에 파라바시스가 따라온다. 트뤼가이오스의 하강을 가리기만 할 뿐인 "평화"의 파라바시스는 앞에서 다룬 네 연극들의 파라바시스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첫 째로, 에피레마epirrhema와 안티에피레마antepirrhema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아티카의 농부들은 자신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코로스의 구성이나, 성격에 관한 이 연극의 제목이 가르키는 불분명함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파라바시스는 그의 기술을 칭찬하고, 그의 경쟁자와 약간명의 비극작가와 합창대로서의 코로스를 비난하면서, 유일하게 작가 자신만을 다룬다. 관객이나 도시들에 대해서 칭찬하지도 비난도 하지 않는다. 앞에서 본 연극들에서는 "평화"에서처럼 신들이 배우들만큼 중요한 적이 없었다. 더욱 더 현저한 것은 무우사(혹은 제우스의 딸로)가 세 번, 그리고 카리스여신들 한번을 제외한 어떤 신성도- 에이레네조차도- 파라바시스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인데; 에이레네가 무우사와 카리스여신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 즉 작가는 파라바시스의 독점적인 주제이다. 그는 정치적 장점보다도 그의 탁월한 기술을 강조한다: 정의(혹은 그 반대)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파라바시스는 작가가 클레온과 싸운 것을 "말벌들"에서 한 것과 같은 내용과 맥락으로 이야기하는데; 실제 이 주제를 다루는 거의 대부분의 운문은 "말벌들"에서 글자 그대로 따 온 것이다. 이런 일치는 "말벌들"과 "평화"가 그들의 주인이 연극의 전체 구도를 실행하는데도 두 하인들의 대화로 시작하는 유일한 연극들이란 점과 상응한다. 더 더욱 현저한 것은 두 파라바시스 사이의 차이점들인데; 그 차이점들이 융통성 없는 브델뤼클레온과, 작가 자신인 트뤼가이오스의 차이점에 관해 떠올렸던 생각을 확인해 준다. 이런 차이점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의 파라바시스가 "구름"을 내비치도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이 "평화"에서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말벌들"의 파라바시스에서 작가는 첫 번째 사람으로 결코 그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데, 반면 "평화"에서는 그가 아주 정밀하게 운문으로 먼저 번 연극에서 글자 그대로 받아 온 대로 하고; 이러한 태도로 행동하는 것으로, 즉 침묵으로 작가는 "아카르나이 사람들", "기사들" 그리고 "말벌들"에서보다 "평화"에서 "구름"에 더 가까이 간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는 "평화"의 파라바시스처럼 강조하여, 자신의 모습(그의 꾸미지 않는 성격)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희극작가 자신이 "평화"에서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단언하기 위한 이유들이 이것보다 더 많이 있다.(계속)

 

 

<주9>  "구름" 225-26, 584-86, 1506-7; "새들" 1572-73 (cf. '신명기' 4:19).

<주10> Cf. 188; "기사들" 156.

<주11> Cf. 투키디데스 VII 14와 48.4 (cf. '도시와 사람' 197-200).

<주12> Cf. 플루타르코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22 그리고 투키디데스 II 13.5 (도시와 사람 161)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6-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