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말벌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5-2)에서 계속) 필로클레온이 그의 아들을 데리고 다시 등장하는데, 그는 습관적인 심술을 잃지 않았지만, 그러나 신들의 명령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께름직한 마음은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늙은이 기질은 알려진 것처럼 그가 잘 대접 받아야 한다거나, 아니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좋은 것들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는 남을 나쁘게 다루면(168,322,340), 그것으로 자기가 잘 대접받는다는 것을 여전히 선호할 수 있었을까? 그는 확실히 그의 아들이 강제로 입으라고 하는 에크바타나에서 털실로 짠 망토와 강제로 신으라는 라코니아식 구두를 혐오한다. 그의 아들과 대비해 볼 때, 그는 모든 외제와 그리고 특히 스파르타를 연상케 하는 모든 것들을 싫어하는데; 그의 아들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브델뤼클레온이 수긍하듯이, 그는 어쩐지 부자 남자가 여자처럼 보이게 입은 패션 같은 그의 새옷들 들여다보고 그리고 걸칠 수가 없다. 그 아들이 페르시아제 망토를 강제로 입히는 동안, 필로클레온은 보통 때보다 더 자주 맹세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것에 대한 그의 불쾌함을 나타내고; 그가 그의 아들을 죽이고자 한 것을(653-54) 기억하며; 이제 곧 그가 그의 아들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을(1352-5) 보게 될 것인데; '말벌들'과 대비해 보면 그는 가장 본성적이지 않은 아버지이다. 그는 전적으로 그의 아들이 그에게 가르치려 애쓰는 세련된 즐거움의 생활과는 맞지 않는다. 브델뤼클레온이 그의 아버지가 적절한 옷을 입는 것을 주선한 뒤에, 이 오만하고 위풍당당한 태도의 사나이는 이 장면의 중간 부분에서 학식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위풍당당한 연설을하기 위해 그 늙은이가 준비하도록 방향을 바꾼다. 필로클레온은 신화나 혹은, 예를 들어, 어머니 폭행 같은 우화를 이야기할 것이고, 브델뤼클레온에 따르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에 관한 것들의 경우에 대하여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데; 말하자면 대화는 아이스퀼로스식보다 반드시 에우리피데스식이어야 한다(cf. "개구리들" 959-60). 필로클레온은 가축들에 대한 우화라면 쉽게 이야기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물론 이것은 그의 아들이 그가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중요한 사람들 속에서 경기를 관람했다거나, 혹은 더욱 특별히 육상경기를 관람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하듯이 경쟁자들의 신체의 단련과 기량에 대한 적절한 판단들을 수반해야 하는 관전평을 하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이 경험했던 웅장한 것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 필로클레온은 이런 종류의 것들에는 뛰어나지 않다. 그렇지만 그가 심술궂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쩐지 점점 더 까다로운 그 자신을 드러내는 죄짓지 않고 착하기도 한 그의 아들에 비해 단순히 열등하지 않다는 것이 의심되기 시작한다. 그 다음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다른 도시에서 온 저명한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즉 실제로 약간의 과시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야기할 만한 그의 젊은 시절에 거둔 어떤 종류의 남자다운 위업에 대해 묻는다. 브델뤼클레온은 그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가 사냥에 나서 세운 무용담과 같은 것을 말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필로클레온은 이런 종류의 것은 이야기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필로클레온이 사회적인 우아함이 부족한 것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었었다는 것의 결과가 아닌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되기 시작하는데; 브델뤼클레온은 오래된 부자 집안에서 이어 나온 것으로 믿고 싶어하는 신흥 부자nouveau riche가 아닌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되기 시작한다. 브델뤼클레온이 아버지를 고매한 모임에 소개하는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은 어떻게 하면 그가 연회 인사가 되는지를 그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짜여 있다. 이 단계에서 그가 그의 아버지를 다루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스트렙시아데를 다루는 그것을 어렴풋이 연상시키는데(cf. 1208-9와 함께 "구름" 649, 694), 그러나 이 두 짝 사이의 차이점은 너무나 명백해서 이 주제에 대해 말을 더할 것이 없다. 필로크레온은 다른 여러 것들 중에 드러눕는 것에도 온전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 연회 장면을 예행 연습하면서, 브델뤼클레온은 동료 연회 참석자 중 하나를 그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연기하는 클레온으로 간주하는데; 비록 브델뤼클레온이 (더 이상) 장사꾼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브델뤼클레온과 클레온이 같은 사회적 계층에 속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필로클레온은 아마도 그가 클레온에 대해 부적절하게 공격적이지 않나 하는 것을 제외하면, 술을 마시는 노래에 관하여서는 브델뤼클레온의 수준에 올라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술 마시는 것과 관계되는 어떤 것도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다(cf.78-80): "음주는 나쁜 짓이다", 왜냐하면 음주가 주먹질로, 몽둥이질로, 그리하여 결국에 가서 벌금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브델뤼클레온은 신사다운 모임에서 술을 마실 때,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데; 벌금을 내는 곳은 우아하고 환심을 사는 농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차지한다. 필로클레온은 나쁜 짓을 하고도, 즉 다른 사람들을 다쳐 놓고도, 그로 인한 벌금을 내지 않아도 좋을지 모른다는 전망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는 그 자신이 사법적으로 비난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없이, 어떤 비사법적 역활 속에서 남들을 해치는 그들을 비난하므로써 남들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브델뤼클레온과 그의 아버지가 포도주를 마시며 저녁을 먹는 동안, 바라바시스 이후부터 말이 없었던 '말벌들'은 초보적인 종류의 두 번째의 파라바시스를 소개한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말벌들'로서 더 이상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연극의 주인공들이 나누는 저녁식사가 클레온과 엮여 있는 아테네의 어떤 굶주린 사람들의 저녁식사에 대비되어 그들로 하여금 연상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그 다음으로, 대단히 무우사적인 세 아들을 둔 한 아버지를 칭송하는데, 그들 중 가장 재주가 좋은 아리프라데스는 "기사들"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에서 묘사되었던 대로 사악한 자 클레온과 마찬가지로 음악과 시를 음란하게 타락시킨 자인데; 그는 이제 그가 거둔 모든 성과가 교육과는 아무 관계없으며, 본성에 기인한다고 한 것으로 그려진다. 비록 브델뤼클레온과 아리프라데스가 어떤 두 인간이 서로 반대될 수 있는 만큼 서로에게 반대되고, 말하자면 중용적인 브델뤼클레온의 장점들이 전적으로 그의 교육에 기인한다 하더라도, 그 아버지가 위풍당당한 것을 열망하는 한 아들의 아버지인 필로클레온으로 그들에게 연상되었을까? '말벌들'은 마지막으로, 마치 스스로 작가인 것처럼 그들의 첫 번째 사람을 단수로 표시하면서, 클레온이 잠시 동안 그를 입 닫게 할 수 있겠지만, 그는 무력해져서 자기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작가가 가진 힘의 한계들은 그 밖의 곳에 놓여 있다.
연회에 대한 이야기는 전 배심원 필로클레온에게 얻어 맞는 고통을 당한 연회에서 돌아온 브델뤼클레온의 하인에게 듣는다. 필로클레온은 그의 동료들 누구보다도 포도주에 취했었고, 그리고 가장 불손한 사람 모두들보다 훨씬 더 심했다. 지금까지 모든 좋은 것들과, 그리고 특히 포도주를 혐오하던 그는 많은 좋은 것들로 그 자신을 채우자마자, 춤추고, 뛰어 오르고, 놀리고, 또 다른 방법들로 못된 짓들을, 즉 '불의의 변론'이 권하는 것에 따른 짓들을('구름" 1078) 하기 시작했다. 그 동료들 중 하나가 여러 종류의 치사한 사람들에게 하는 그의 행실 때문에 그를 무어라 비유하자, 그는 앙갚음으로 크게 고함치면서 그에게 더 심하게 했다. 그것이 취향에 거슬리는 한 사람을 제어하고, 그 동료들은 이 광경에 매료되었는데; 필로클레온이 그를 특별히 목표로 삼아 그를 스스로 으시대는 사람으로 비난하였다. 그는 번갈아 가며 천한 태도로 요점 없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말하면서 한 사람씩 모두 욕하였다. 한 마디로 그는 가장 천박한 희극에 나오는 배우처럼 행동했다. 그가 그의 아들에게 어떻게 행동했으며, 그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짓거리에 대해 어떻게 행동했는지 듣지 못하는데; 아마 브델뤼클레온은 당혹감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필로클레온은 술에 완전히 골아 떨어지자,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때리면서 집으로 간다. 그가 얼레에 가까이 가는 것을 본 하인이 얻어 맞을까 겁이 나서 다시 도망가 버린다. 필로클레온의 뒤를 그가 욕했던 사람들과, 또 그를 법정으로 끌고 가겠다고 위협하는 사람들이 쫓아 간다. 그는 더 이상 재판이란 말을 들을 수조차 없다고 선언하면서 그들을 쫓아 버린다. 최소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진 이후와 마찬가지 그대로 그는 악랄하고 악의적이다. 그러나 그 악의의 형성은 급격하게 변화했는데; 그것은 더 이상 신탁에 의해서가 아니라 포도주에 의해 좌우된다. 그가 신성한 명령을 위반했으나 그에게 나쁜 결과가 초래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그의 의식이 이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았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더 이상 남들을 사법적으로 비난하는 일에서 본성에 의해 내몰리지 않지만,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사법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가 상냥하고 환심을 사는 변론들로 범죄의 처벌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그의 아들의 희망은 그 늙은이가 그의 본성의 즉각적인 반응에 무모하게 따르면서 실망스럽게 보인다. 이제 그의 모든 관심은 그가 같이 술 마시던 동료들로부터 빼앗아 와서, 그리고 그 여자도 그처럼 그와 즐기기를 바라는 어떤 기대도 없이 그가 즐기기를 열망하는 벌거벗은 피리 부는 여자에게 있다. 보상으로 그는 아들이 죽자 말자 첩으로 삼겠다고 제의하는데; 그 동안에는 아직 그 나이에 이르지 않아, 그의 재산을 처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술궂고 극단적으로 예민해진 그 아들은 그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 보는데, 그의 유일한 아버지가 타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필로클레온은 치죄하는 열망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역활을 그의 아들과 맞바꾸었는데; 그 아들의 아버지로 남는 반면에, 그는 늙는 것을 멈추었고; 그가 회춘하게 되었던 반면에, 그의 까다로운 아들은 이제 회춘이 불가능한 한 늙은 사람으로 드러나 있다. 그의 아들에게 얻어 맞은 덕분으로, 브델뤼클레온의 아버지로서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그 자신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한 젊은 아들로 되었고(cf. 1297-98); 아버지- 아들 관계는 뒤바뀐다: 정의로운 아들이 그의 버릇없는 아버지가 타락할까 염려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제 필로클레온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1363). 그가 법정으로부터 포도주로 그리고 여자들에게로 돌아서 버리는 것은 디카이오폴리스가 전쟁으로부터 돌아서 버리는 것과 상응해서 연상하게 한다.
브델뤼클레온은 그가 한 재교육이 완전히 성공한다는 것을 다음 장면에서 알게 되는데, 그 장면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부분에서 그는 피리 부는 소녀를 필로클레온의 아주 많은 늙은 나이를 핑계로 아버지로부터 떼어내고; 이리하여 그는 전에 했던 약속을 어긴다(739-40). 그렇지만 그 늙은이는 더 이상 그의 권리를 고집할 기분도 혹은 처지도 아니다. 그는 그 아들이 그에게 조언한 것과 같은 선상에 있는 이야기 하나를- 그가 육상 경기를 관람할 때 본 적이 있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는 것으로 복수하는데; 그는 이름들도 빠트리지 않고, 그 이야기는 그 상황에 적절한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빵 굽는 여자 하나가 필로클레온이 자기를 때렸다고 비난하며, 자기 물건을 망쳐 입힌 손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한다. 그의 행실과 그리고 그들 서로가 부담이 되는 송사를 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경고를 브델뤼클레온이 용납하지 않자, 그는 그의 아들이 그에게 한 지시와 같은 선상에 있는 대답을 하는데, 즉 그가 그 여자에게 똑똑하고 상냥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어 화해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가 그 여자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는 그 여자를 모욕할 뿐인데, 그래서 그 여자는 담당 관청이 그를 소환하도록 한다. 카이레폰이 그 여자와 함께 와서 그 여자를 위한 증인 역활을 한다. 필로클레온은 그 여자와 카이레폰 둘을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도 덤으로 조롱한다. 그는 그가 만인에게 그리고 만인이 그에게 대항하는 상황으로 접근하는데; 제일 가는 불복종주의자 소크라테스의 변함없는 동료인 카이레폰조차도 그의 불복종주의에 부딪쳐서 법과 질서의 편에 서 있다. 브델뤼클레온도 기가 죽어 침묵한다. 그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서 필로클레온은 순수하고 단순한 분개 때문에 역시 증인을 대동한 한 사람으로부터 소환된다. 브델뤼클레온은 고발자에게 법적 행동을 단념하라고 권고한다: 그는 그가 요구하는 어떤 보상도 그에게 지불할 것이다. 그를 때리고 그에게 돌을 던졌다고 흥겨운 마음으로 고백하고 나서, 필로클레온은 이 피해자에게 역시 브델뤼클레온과 같은 선상에 있는 이야기 하나를- 모욕으로 상처를 더해 주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면서 끼어 든다. 브델뤼클레온과 피해자 둘 모두 역겨워하는데; 반면에 필로클레온은 같은 영향을 미치는 같은 종류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다시 완력을 쓰면서 집안으로 끌고 갈 때조차 그는 같은 종류의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제껏 요약해 본 장면들은 그의 아버지를 재교육해 보려는 브델뤼클레온의 시도가 완전히 실패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전체 장면은 그의 버릇없는 아버지에 의한 엄숙한 브델뤼클레온에 대한 한 가지의 패러디이다. 순전한 오만hybris으로 필로클레온은 술 취했을 때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행패도 상냥하고 환심을 사는 변론들로 범죄로 처벌되는 것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브델뤼클레온의 약속을 무효화시켜 버렸다. 브델뤼클레온의 실패를 그의 아버지 폭행에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 행동은 완전하게 성공하였기 때문이며,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지원없이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금욕주의와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정신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브델뤼클레온은 그의 아버지가 좋은 생활을 즐기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아버지에게 완력을 사용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재교육의 실패는 정녕 소크라테스의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재교육의 실패를 떠올리게 한다. ( "구름"의 마지막에서의 스트렙시아데스와 같이, 필로클레온은 카이레폰으로부터 반대가 되는 진영에 있고;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를 그가 희극배우처럼 농담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힐책해야 한다.)("구름" 296.) 소크라테스와 브델뤼클레온 둘은 교육의 힘을 과대 평가하거나, 아니면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늙은이들의 본성을 잘못 판단하는데; 그렇지만 브델뤼클레온은 그의 학생을 오랜동안 알고 있었고, 그는 그가 하루살이 같은 것들을 경멸한다는 변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마치 그가 그의 아버지를 위한 신탁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지 않는듯이(위의, p. 125), 오만하고 젠 체하는 태도의 이 사람은 교육과 신사정신의 관념에 너무 고양되어 있다(위의 pp.107-108). "말벌들"의 행동 속에 암시되어 있는 신사정신에 대한 의문은 "기사들"의 사건 속에 다른 방법으로 암시되어 있듯이, 그의 아들은 좋은 모임이라고 여기는 무미건조한 즐거움에 대한 필로클레온의 섬뜩함 속에, 그리고 그가 그의 아들을 패러디하는 속에 표면화된다.
만일 브델뤼클레온이 실패하였다면, 그것은 작가가 승인한 그의 설계를 뒤따르는 것이다: 어떤 악의적인 배심원이 피고들에게 그의 악의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명백하게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브델뤼클레온의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브델뤼클레온이 실패하였다면, '말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부드러운 생활의 여생을 가진 필로클레온의 운명을 부러워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들은 진짜로 사람이 본성이나 습관을 걷어 없애는 것이 어려우므로, 그가 그것을 가질 것인지 아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남들의 생각들 속을 잘 알고 있을 때도 아무도 '말벌들'보다 잘 알고 있지 않지만, 사람의 습관들을 바꾸는 것이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아직 필로크레온을 판단할 수 없는 동안(그들은 단지 그의 난폭한 행실을 보았을 뿐이다), 그들은 그가 자기 아버지와 그의 지혜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저없이 그의 아들을 아주 많이 칭송하고; 그들은 브델뤼클레온처럼 친절하고 온화한 사람을 결코 본적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그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그 행동을 칭송하는 것으로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그의 아버지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그의 온화함을 증명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들은 브델뤼클레온의 온화함을, 그가 그의 아버지를 더욱 위풍당당한 것들을 비난하는 그의 편견으로부터 데리고 나오고자는 소망을 말했던, 그 변론으로 증명한다. 상충하는 경우에- 이제 그 경우가 발생했다- '말벌들'은 필로클레온에 반대해서 브델뤼클레온을 편든다. 필로클레온은 완전히 고립된다.
하인 하나가- 연극의 초입에 작가의 대변인으로 행동했던 아마 크산티아스로 보이는- 격에 맞게 디오뉘소스에 맹세하면서, 코러스에게 혹은 관객에게 어떤 신이 집안으로 몰고 온 난리들에 대해 말한다. 포도주와 피리의 영향으로 필로클레온은 기쁨이 넘쳐; 현대 비극작가를 시대에 뒤떨어진 늙은이라고 비난하면서, 고대의 방식으로 멈추지 않고 춤춘다. 회춘이 되어 있어서, 그는 "기사들"에서의 '데모스'처럼 좋았던 옛날 시절로 돌아왔다. 아마도 폴뤼페모스를 연기하는듯 그는 고독한 식인종 차림으로 등장한다. 그는 확실히 사람들을 해치기 위해 그가 배심원이었던 동안 그가 필요했던 연합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연극 먼저 부분에서 그는 오뒤세우스를 흉내내었고, 그리하여 그의 아들로 하여금 억지로 폴뤼페모스 역활을 하도록 했지만; 이제는 그가 폴뤼페모스가 되었는데(1502, 15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통성이 훨씬 덜한 브델뤼클레온이 오뒷세우스로 변신하는 일은 없다. 다음으로 그는 한 비극적 춤꾼을 패러디한다. 그 하인은 그 늙은이의 미친 짓에 대해 불평하는 것에 지치지도 않는다. 필로클레온은 마지막으로 춤을 잘 춘다고 주장하는 현대 비극작가들에게 도전한다. 자그만한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삼인조 형제들이다(cf. 1275-83). 필로클레온은 그들을 잘 모르지만, 하인이 그에게 누구라고 알려 준다. 그들은 모두 다 불쌍한 춤꾼들인데; 그들 가운데 하나는 불쌍한 비극작가이고, 그리고 필로클레온은 그들과 미친듯이 현대의 춤에 뒤섞이면서 그들을 차례로 우스개로 만든다. 코로스는 그 장면에 갈채를 보내면서 춤에 합류하는데; 빠르게 그리고 미친듯이 춤추면서 그들 모두 무대를 떠난다. 이전에는 아무도 춤추는 가운데 희극의 코로스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었다. 필로클레온은 그의 고발자들로부터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는데; 그는 희극작가 스스로가 즐기는 면책을 즐긴다. 브델뤼클레온이 그를 '더 나은 사람들'로 만드는 것에 실패하는 반면, 필로클레온은 그의 본성의 덕택으로 브델뤼클레온이 그를위해 열망하던 것에 비해 훨씬 월등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한 재료의 의인화는, 오직 그것의 가장 낮은 재료로서만 있게 한다.
두 주인공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말발들"의 화제는 클레온이나 아테네의 배심원heliast 제도에 대한 것이 브델뤼클레온이 전적으로 전형적 배심원이 아닌 그의 아버지를 악을 벌하고자 갈망하는 만큼 좋은 것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한 사람에서(1125, 340-41), 좋은 것을 즐기기를 갈망하고 악을 벌주는 것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에 대한 것보다 더 적다. 이 시도는 부분적으로는 성공적이다. 필로클레온이 좋은 것들을 즐기도록 유도할 수 있지만, 그가 악을 벌주는 것을 포기하도록 가르칠 수는 없다. 그는 그의 재판에 대한 갈망을, 혹은 엄격하게 말하여 비난하는 것을, 혹은 그가 가장 대단한 위풍당당함이나 제우스다운 웅장함을, 그리워하는 것을 치료할 수 있다. 그는 그의 본성적인 악의나 악행을 지향하는 성향과, 그리고 본성적인 심술궂음이나 혹은 씁스레함을 끝까지 지니고 간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에서 악의가 필수불가결한 재료라는 것은 분명하다. 소시지장수의 예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이 정말 최고도의 부정한 독설과 그리고 비양심적인 중상을 구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고,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런 악의를 가지지 않고도 구사하는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소시지장수는 그의 '더 나은 사람들'의 명령으로 행동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그 스스로에 대해 헤라클레스의 분노와 같은 종류라고 주장한다(1030). 고발자들과 비난자들과 싸우기 위해, 고발자들을 고발하고 비난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그의 배역들 안에서 그것을 재생해낼 수 있기 전에 그는 그 자신 안에서 고발과 비난의 정신을 재생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벌다움'의 부산물과 싸우기 위해, 그는 그 부산물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데; "말벌들"은 이런 수정을 위하여 맨 처음 필로클레온에게 특이하던 '말벌다움'의 부산물을 희극에게 특이한 '말벌다움'의 부산물로 변환시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말벌들"이 결점이 있는 양쪽 극단 모두를 피하려는 희극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천박하지도 탁월하지도 않은데; 그것은 정확히 형평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으로 두 주인공들의 바로 그 이름들이 지적하듯이, 그것은 올바른 것들을 가르치고, 그리고 특히 불의한 클레온을 공격한다. 희극이 형평을 유지한다는 것은 마라톤 시절의 중용적인 체제에-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설 곳이 없는 체제에-, 형평을 유지하는 체제에, 봉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벌들"을 대신하여 제기된 주장과 그리고 그런 주장의 암시들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사실 그것 자체로 제기되는 주장의 희극적 등치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한편으로 천박함을, 다른 한편으로 탁월한 지혜를 피해 가서가 아니라, 천박함과 탁월한 지혜를 다른 것들 가운데서 중용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전체인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정확한 형평을 이루어낸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천박함과 탁월한 지혜 사이에 있는 형평을 맴도는데, 즉 그것은 그것으로부터 피하고, 반면에 그것을 향해 가르킨다. 그것은 양 방향에서 극단적이다: 그것은 '더 나은 사람들'에게 너무 낮고 또 너무 높다. 그것의 가장 낮은 재료, 아니면 예를 들어 신분이 디카이오폴리스와 구별되듯이, 필로클레온 속에서- '그'라고 '된' 것과 '그''인' 것 속에- 소개되는데; 필로클레온은 전적으로 동정심이 부족하고, 반면에 디카이오폴리스는 최소한 사랑에 굶주린 여자들에게 동정심이 있다. ("말벌들" 끝.)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6-1) "평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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