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사라진 우리말

대청大廳

병든소 2012. 5. 6. 07:56

15. 대청大廳

 

지금까지 집에서 사라진 우리말들을 찾아 오면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쓰지 않는 우리만의 한자말을 제법 많이 보았습니다만, 집채의 방과 방 사이에 놓인 마루를 "대청大廳"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 뿐인 모양입니다. 추운 겨울이 아니면 전면을 틔워 놓고 지내는 우리와는 다르지만, 나무 판자로 바닥을 깔아 우리의 대청과 같은 역활을 하는 공간을 중국에서는 客廳keting이라 부르고, 일본에는 실내 공간의 바닥을 주로 疊tatami를 까는데, 특별히 널빤지를 깐 방이라면 그곳을 板間ita(no)ma, 또는 板疊itadatami, 또는 板ita를 깐敷siki 방部屋heya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廳'을 그 대소에 상관없이 '마루'라는 뜻으로는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마루바닥을 가리키는 뜻으로 '廳ting'이란 말 대신 대개 地板diban이란 말을 주로 쓰고, 굳이 나무를 깐 마루나 아니면 방바닥에 나무를 깔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으면 앞에 木mu을 붙여 木地板mudiban이라 부르며, 일본은 그냥 板敷itaziki라 부릅니다. '廳'을 우리나 일본에선 정부기관이나, 그에 준하는 정부기구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고,  중국은 이 밖에도 건물이나 건물에 딸린 공간의 이름으로 붙여 쓰기도 합니다. 중국에서의 '大廳dating'은 우리처럼 마루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큰 홀hall이나 넓은 로비loby를 가리킵니다.

 

우리만 쓰는 한자말 "대청"이 방과 방 사이의 마루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우리말 마루는(차자로 抹樓라 적었습니다) 사실 그 뜻이 좀 다릅니다. 사실 마루는 방과 방 사이 같이 구체적인 집채의 어떤 공간을 가리키기 보다는, 집채 안에서, 주로 땅바닥이지만, 바닥으로부터 사이를 띄우고 깐 널빤지를 말하거나, 그런 널빤지가 깔린 곳을 가리킵니다. 즉 요즘 쓰는 대청이란 말은 마루를 깐 공간의 한 종류일 뿐이지요.

 

그리고 대청이 아니라도  방과 방 사이에 놓인 마루를 이르는 말이 또 있습니다. 바로 "어간마루"입니다. "어간於間"을 시간이나 공간의 사이를 가리키는 말이라며 한자로 "於間"이라 붙여 써 두었습니다. 한자말인가요? 집채에서 "어간"을 넣고 쓰는 말은 어간문, 어간벽, 어간마루, "어간 대청" 등인데 어간이란 말은 어떤 공간이 아니라 어떤 공간의 사이를 가리키는 말인 모양입니다. 사전의 풀이는 "방과 방 사이에 있는 큰 마루"입니다. 이때 "어간"은 "방과 방 사이"이고, "대청"은 "큰 마루"이니, 결국 "청廳"이 "마루"입니다. 즉, "대청大廳"도 마루의 한 종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루에는 붙은 이름이 많습니다. 마루가 놓인 곳에 따라서,  앞마루, 대청마루, 어간마루, 툇마루, 마루방, 골마루, 눈썹마루, 단골마루, 다락마루, 사랑마루, 부섭마루, 한뎃마루(보통 평상平床이라 부르는 것입니다)...그리고 마루를 깐 모양에 따라 귀틀마루, 우물마루, 바둑마루, 쪽매널마루, 장마루(아무래도 일본말 냄세가 좀 납니다만)... 또한 생긴 모양에 따라, 쪽마루, 난간마루, 납작마루, 들마루..., 하다 못해 마루의 상태가 나빠 디딜 때 소리라도 나면 덜걱마루, 떨꺽마루... 이 많은 마루들 중에는 놀랍게도 "흙마루"도 있습니다.

 

마루는 바닥에서 뜬 널빤지거나, 그런 널빤지가 놓인 곳인데, 나무가 아닌 흙으로 만들어도 마루라고 불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집채에서는 나무로 야물게 짠 마루를 두는 게 쉽지 않았겠지요.  흙으로 마루를 놓을 높이만큼 쌓아 마루로 삼았습니다. 그래도 곧 죽어도 대청에 지지 않으려고 흙마루를 "토방土房"이라 부르거나, 진짜 방과 방 사이인 대청의 자리에다 흙마루를 놓아 "봉당封堂"이라 부르고, 그것을 아예 "봉당마루"라고도 했지요. 흙이 그냥 드러난 "날봉당"보다는 그 위를 거적이나 자리로 깔거나, 때로는 "들마루" 등을 놓아 봉당을 대청처럼 썼습니다. 그냥 방이 아니라 토방이나 봉당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구들이 없다는 표시입니다.

 

같은 위치에서 같은 일을 하는 마루에 널빤지나 널조각을 깐 것일 경우에는 대'청'이나 '청'마루처럼 마루를 '청廳'이라 부르고, 돈이 없어 대청 놓을 자리에 흙을 채우고 그 위를 거적이나 자리로 덮어 쓰면 봉'당'이나 봉'당'마루라며 '당堂'으로 불렀다는 것이네요. 그렇지만, 사실 이렇게 부른 마루라는 뜻의 '廳'과 '堂'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봉당의 '堂tang'은 주로 '집 당'이라고 하지만, '마루'를 가리키는 중요한 한자어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당堂'자와는 반대로 '廳ting'이 집이나 정부조직이나 기관의부서나 큰 홀이나 넓은 로비는 가리키기만 하고, 정작 마루를 가리키지는 않는데도, 한자를 빌려다 제 나라 말처럼 쓰던 우리 조상들이 이런 기본적인 어휘를 모를 까닭이 없는데도, 마루를 '당堂'이란 말 대신에 굳이 '청廳'이라 쓴 데에는 분명 숨겨진 사연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정말 이상합니다. 정작 제대로 된 마루에는 마루를 뜻하는 '당堂'이란 한자어를 쓰지 않고, 설사 '청廳'에 마루라는 뜻이 있다고 한들 그 마루가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그 큰 홀이나 로비를 가리키는 청廳에 또 '클 大'자를 붙여 대청이라 해야 했을까요? 그러고는, 정말 얼토당토 않게 흙을 채워 만든 흙마루에는 시치미 뚝 떼고 봉당이라고 '마루 당堂'을 붙이고요? 이상하지요?

 

지금부터 "대청"이란 무슨 말인지, 왜 "대청"이란 말을 쓰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찾아 나섭니다.

 

 

마루는 바닥에서 띄워 올린 자리에 깐 널빤지거나 널빤지를 깐 곳을 가리키는 말이니 무엇보다 바닥에서 띄워 올려야 하겠습니다. 대청을 기준으로 보면 아궁이 바닥에서 방바닥 정도 높이로 띄워 올리는 것인 만큼 기둥을 세운다 해도 그다지 길지 않아도 좋습니다. 물론 이 짧은 기둥도 흙바닥 위에 세우니까 밑받침돌을 괴어, 주저 앉거나 밑으로 꺼지지 않도록 해야 겠지요.  우리는 이 짧은 기둥을 "동바리"라 부릅니다. 그리고, 짧은 이 기둥, 즉 "동바리"를 괴어 주는 주춧돌을 사람들은 "밑돌' 또는 "동바리돌"이라 부릅니다. 동바리의 밑받침돌을 동바리돌이라 부른다면, 기둥의 밑받침돌은 "기둥돌"이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주추柱礎가 바로 "기둥돌"이지요.

 

"동바리童發伊,童發里,同發伊"가 들보 위에 올라 앉으면 또 다른 이름 "동자주童子柱" 또는 "동자기둥"(동자주나 동자기둥을 아기기둥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데, 그 이유는 동자가 아이를 가리키는 한자말이 아니라, "물건과 물건의 사이를 잇는 마디"를 가리키는 우리말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쪼구미" 또는 "대공"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앞서 창방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만, 결국 동바리라는 말은 마루를 들어올리는 짧은 기둥이나, 광산에서 굴을 팔 때나, 땅 위에 세워 위의 것을 괴고 있는 버팀대나 기둥을 가리키는 말로 구별되어 굳어졌습니다.

 

특히 버팀대로 쓰는 동바리는 주로 "동발'이라고 줄여 말하는데, 한자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주목支柱木"이라고도 하고, "지보공支保工"이라부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이 "지보공"이란 말은 주로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말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이 "지보공"이란 말이 아무리 보아도 일본 사람들이 만든 한자말 같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정말 지보공이 동발을 가리키는 우리가 만든 한자말이라면 지보공의 '공工'에 대해 곰곰히 따져 볼 일이 생깁니다.

 

'工gong'은 상형자로 본디 사람들이 일할 때 쓰던 연장을 가리켰습니다. 지금은 거의 어떤 기술이나, 그런 기술을 쓰는 일, 또는 기술을 부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이지, 지보공의 공처럼 그런 기술적인 일을 하는 재료나 도구를 나타내는 말로 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 말은 특히 일본의 광산에서, 상부의 하중을 지지支持하는 일을 나타내거나, 그 때 쓰이는 지지대를 가리키거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주로 쓰는 말이지, 동발처럼 그런 일을 하는 부재를 '공工'이란 단어를 붙여 쓰는 예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집에서 사라진 우리말"을 찾을 때, "인방"으로 대표되는 '방方,防,枋'은 집채의 뼈대 나무 중에 가로로 깔린 부재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며, "대공"으로 대표되는 '공工,共,木+共'은 집채의 뼈대 나무 중에서 세로로 세운 부재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라고 밝혀 보았습니다만, 그 가운데에 '방'은 인방에서 심방에 이르기까지 제법 되는 용례가 있었는데 반해, '공'은 대공, 행공이나 익공 정도였는데, 이 지보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보공의 공을 대공의 공과 같은 공으로 보기에는 주저되는 점이 하나 있는데,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평방 때문에 전부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방이나 공의 앞에 달린 말들이 한자말이 아닌데 반하여, 지보공의 지보支保는 분명한 한자말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일단 동바리를 세우면, 집채를 엮는 얼개처럼 동바리의 머리를 붙잡아 두면서, 마지막으로 깔릴 마루 널빤지를 받을 수 있도록 가로로 놓이는 나무가 있어야겠지요. 집채의 들보와 도리의 역활이라 할까, 도리와 서까래의 역활이라 할까, 기와를 덮어서 지붕을 이루듯이 널빤지를 깔아 마루를 이룰 얼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얼개 나무 가운데 동바리의 머리를 붙잡는 것을 "멍에"라고 하는데, 이 멍에 위에 또 다시 나무를 깔아 멍에가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멍에가 흔들리지 않게 하는 나무를 "장선"이라 부르기 때문에 멍에를 '장선을 받는 나무', 즉 "장선받이"라고도 부릅니다. 다시 말해, 멍에/장선받이 위에 걸쳐 놓아 마지막으로 마루 널빤지를 받는 나무를 "장선長散伊,長散里,長線, 長山"이라 부르는데, 그 장선 위에 널빤지를 깔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마루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밑돌, 동바리, 멍에, 장선, 그리고 마루(널빤지)로 쌓인 켜가 마루 얼개의 기본입니다. 마루를 바닥에서 띄워 올리는 데 있어, 그 높이를 정하는 단계가 모두 다섯 켜나 됩니다. 먼저 동바리돌이 땅바닥에서 올라 나와 있을 것이고, 다음은 동바리가 들어 올릴 것이고, 동바리의 머리에 앉은 멍에의 춤, 멍에 위에 앉은 장선의 춤, 마지막으로 마루널의 두께까지 마루의 전체 높이를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멍에가 동바리의 머리에 앉을 때 장선이 멍에 위에 앉을 때 홈을 파서 끼우면 얼개가 아주 튼튼해지기 때문에 조금씩 파서 켜를 쌓습니다만, 물론 그만큼 마루의 높이가 낮아지니까 동바리의 키를 키워야겠지요.

 

가장 간단하고 바닥에 붙은 낮은 마루는 동바리 없이 동바리돌 위에 바로 멍에를 놓고, 장선도 없이 바로 널빤지를 까는 것입니다. 나무 토대를 깔고 짓는 저장소나 광 같은 데 이런 마루를 깔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마루라기보다는 그냥 바닥 마감의 일종인 셈이지요.

 

 

마루는 대개 바깥으로 노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비나 눈에 노출된 경우도 많이 봅니다. 그리고 마루는 주로 사람들이 많이 돌아 다니는 곳 즉 통로의 역활을 하는 곳에 놓입니다. 이 때문에 집채에 쓰이는 나무들 가운데 마루에 쓴 나무들이 가장 빠르게 변형이 오거나 삭습니다.  장선 위에 널빤지를 깔 때, 못을 박으면 나무의 변형이 못대가리를 움직이고, 이윽고 그 못대가리가 튀어올라 사람을 상하게 하고, 널빤지가 덜걱거리는 덜걱마루가 되고 맙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는 못을 박지 않는 마루가 바로 "귀틀마루"입니다. 귀틀마루를 우물(井)마루, 바둑(#)마루, 쪽매널마루, 등으로 부릅니다만, 마루를 짜는 얼개의 이름에서 딴 "귀틀마루"가 겉모양을 보고 지은 다른 이름들보다 훨씬 이 마루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보통 마루가 멍에를 놓고 그 위에 장선을 걸고 그 위에 마루를 까는 것이라면 귀틀마루는 그런 나무들을 겹쳐 쌓는 것이 아니라, 마루의 겉면에 높이를 맞춰 같은 한 평면에서 서로 맞물리게 틀을 짜고 그 맞물린 네모 틀에 홈을 파고, 널빤지 대신 널조각을 끼어 깐 것입니다.

 

마루의 얼개를 이루는 멍에나 장선이라는 이름 대신에 마루틀을 짜는 얼개나무들을 "귀틀"이라 부릅니다. 귀틀은 마루 바닥의 생김새나 크기에 따라 짜여진 모양이 모두 다릅니다만, 귀틀을 짜는 방법은 "매한가지"(매일반이란 말을 옮긴 냄세가 많이 납니다. 우리말은 "마찬가지")입니다. 마루의 전체적인 뼈대로 기둥이나 동바리에 마지막으로 힘을 전하는 귀틀은 간격이 넓어 개수는 적지만 길이도 길고 나무도 큽니다. 이 귀틀이 움직이지 않도록 귀틀과 귀틀 사이를 잡으면서 마루 널쪽을 받는 귀틀에 수직으로 걸린 귀틀을 "동귀틀"이라 부릅니다.

 

대청으로 보면 집채의 앞뒤로, 즉 들보 쪽과 같게 놓이는 것이 "귀틀"이고, 집채의 양옆, 즉 도리 쪽으로 놓이는 것이 "동귀틀"입니다.  동귀틀의 길이나 크기는 귀틀과 같거나 조금 작은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니까, 어느 귀틀에 널조각이 끼어져 있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됩니다. 그것이 동귀틀이니까요. 동귀틀의 간격은 널쪽의 두께에 따라 마루가 꿀렁거리지 않도록 정하는데, 귀틀 개수 너댓 배는 되지요.

 

보통 마루에서 "멍에"와 "장선"이라 부르는 나무 이름이 귀틀마루에 오면 "귀틀"과 "동귀틀"로 바뀌고, 보통 마루에서 장선 위에 깔린, 길고 폭이 좁은 "널빤지"가 귀틀마루에선 동귀틀에 파인 홈에 낀 "널조각"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바리도 그렇지만, 멍에나 장선, "귀틀歸機,耳機"과 "동귀틀童耳機,同耳機"이 모두 한결같은 우리말입니다. 귀틀이나 동귀틀 앞에 길이의 길고 짧음을 나타내는 장단長短, 한칸間, 반칸半間,  위치나 모양을 나타내는 가퇴假退, 난간欄干, 등의 한자말을 붙이기는 하였어도, 옛사람들 모두 귀틀이나 동귀틀이 우리말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근대에 와서 "귀틀"이라는 나무는 사라지고 새로운 이름 "선귀틀立耳機"이 등장하는데, 이때에 사용되었던 동귀틀이나 선귀틀의 길이나 나무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컨데, 귀틀이란 이름이 없어지면서 동귀틀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그래서 자연스레, 동귀틀을 "선귀틀立耳機"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귀틀이란 말은 동귀틀과 선귀틀로 짜여진 마루의 얼개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 갔겠씁니다. 아뭏든 귀틀이란 이름이 사라져 동귀틀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선귀틀이 새로 나온 까닭이 무엇인지는 한번 따져 보고 가겠습니다.

 

그저 벽선의 선처럼 선귀틀도 널쪽의 끝에 댄 "선木+宣"으로 보고 선귀틀이라 부르기 시작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사실 귀틀에 따른 동귀틀의 우리말 "동"이란 말도 그 뜻이 '물건 사이를 잇는 마디'나, '어떤 시간이나 장소의 사이'나, '옷깃의 한 종류로 주로 소매 끝에 달린 천조각' 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동귀틀의 경우는 처음 널쪽 끝에 달린 "동"으로 "선"이나 "단"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가 사람들이 나중에는 기둥과 기둥을 잇는 "동"으로 바꾸어 인식하자, 동귀틀이 자연히 귀틀로 가고, 따라서 '널쪽 끝의 단'이던 "동"을 "선"으로 바꿔 "선귀틀"이 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잘 짜여진 귀틀에 마루를 까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널빤지의 조각인 "널쪽"(널조각과 같은 말입니다)의 양 끝에 장부를 만들어 그 장부를 동귀틀에 파 둔 홈에다 끼워서 까는 작업입니다. 여기가 "대청大廳"이란 말의 근원을 찾는 하이라이트입니다.

 

"집에서 사라진 우리말들"의 마지막 회를 옛날 사람들이 집을 짓는 데 썼던 최고의 재료인 나무에 대해, 그리고 그 나무를 어떻게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다룰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톱에 대한 이야기로 다룰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그때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긴 이야기 짧게 해서, 나무는 내부의 조건인 나무의 나이테 중심부를 켠 것인지 나이테 바깥을 켠 것인지와, 또 외부의 조건인 온도와 특히 습도의 변화에 따라서, 너무 쉽게 휘거나, 틀리거나, 오그라들거나, 늘어나기 때문에, 나무를 쓰는 목수는 습도나 응력의 변화에 나무가 어떻게 변형할 것인지 충분히 예측한 다음, 거기에 맞추어 쓰기 위하여 자기가 다듬는 나무의 위 아래나 그 결을 잘 보고 골라서 씁니다.

 

옛날 골마루 청소 당번이 되면, 못으로 널빤지와 널빤지 사이에 끼인 먼지나 흙을 긁어 내던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골마루의 널빤지가 어린 손으로도 반 뼘이 조금 더 되는 좁은 폭의 나무였다는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좁은 폭의 널빤지도 세월이 가면 양끝 접합부 쪽으로 동그랗게 오그라들어 널빤지를 이은 접합부의 간격이 벌어지고 그 사이에 먼지나 흙이 들어가  있어 청소할 때 못이나 젓가락으로 긁어냈던 것입니다. 좁은 폭의 널빤지 마루가 사정이 이러하니 폭이 넓은 널빤지로 마루를 깔 엄두가 나지 않았겠지요.

 

이런 널빤지의 성질과 일기의 변화가 가져오는 널빤지의 변형을 감안하고, 아울러 긴 널빤지를 사용하는 비용 등을 고려하여, 목수들이 기발한 마루를 만들어 냈습니다. 마루의 틀을 최대한으로 튼튼하게 귀틀과 동귀틀로 짜고, 긴 널빤지를 장선 위에 올려 놓고 못을 박는 대신, 널빤지의 조각의 마구리 쪽을, 즉 널쪽에서 변형이 오는 쪽의 모서리에 장부를 두어 동귀틀에 미리 파 둔 홈 속에 끼워 넣는 방식은, 홈 속에 끼인 널쪽의 장부가 옴싹달싹하지 못해 널쪽의 변형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홈에 끼인 장부가 움쩍도 못하니까 널쪽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결과는 널쪽의 폭과 길이를 자유롭게 하여, 쓰고 버리던 나무들까지 널쪽으로 만들어 쓸 수 있게 했습니다. 널쪽의 크기나 두께나 나무 종류나, 심지어 변형이 극심한 변재 중의 변재인 거죽이 붙은 나무도 널쪽으로 만들어 쓸 수 있게 해 줍니다. 동귀틀 사이의 간격을 조절하면 널쪽의 길이가 길지 않아도 좋으므로, 기둥이나 대들보로 쓸 나무를 자르고 남은 나무도 얼마든지 널쪽으로 만들어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까래나 도리를 자르고 남은 나무도 물론 쓸 수 있지요.

 

일부러 널빤지를 만들기 위해 긴 나무를 공들여 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나무가 동그랗게 오그라들까봐 널쪽의 폭을 작게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고 남은 나무의 널쪽은 폭이 아주 넓어졌습니다. 폭이 큰 널쪽이 마루를 까는 데 쓰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서까래나 도리로 쓰고 남은 나무로 만든 널쪽은 기둥이나 들보보다 그 폭이 상대적으로 좁겠지만 마루 널빤지의 폭보다는 넓어졌지요.

 

 

이런 "널조각", 즉 "널쪽"을 옛날 사람들은 "청靑,廳"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마루를 까는 널쪽인 "청"을 "마루청", "청널"이라 불렀지요. "마루청'을 깔아 만든 마루를 "청마루"라고 했습니다. 줄여서 그냥 "청"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창호에서도 분합의 아래 부분에 "청판靑板,廳板"(우리말 "청널"의 차자 표기)을 끼웠다는 이야기가 있었지요. 같은 말입니다.

 

널쪽을 가리키던 우리말 "청"은 지금에 와서 한자말 "廳"처럼 취급되어 마루를 가리키기만 할 뿐 마루를 만드는 널쪽으로는 인식되지 않습니다. 우리말사전에는 '물건에 붙은 얇은 막'을 가리킨다며, 귀청(목청의 청은 무엇을 가리키는지요?), 대청(대나무 속의 얇은 막), 피리청만 말하고, "청廳"은 당연히 한자말인 것처럼 생각하여 정부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란 해석과 함께 "마루"라고 풀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청마루나 대청마루를 가리키며, "청"이나 "대청"이 바로 "마루"인데 거기에 또 "마루"를 붙여 쓰면 역전앞과 같아진다고 점잖게 한 말씀 하기도 합니다.

 

"널쪽"을 가리키는 말로 옛날 사람들은 "청"이나 "청널"이라 부르면서도, "청널"의 우리말 "청" 뒤에 "널"을 뜻하는 한자말 "판板"을 붙여서 "청판" 이라고도 불렀던 모양입니다. "청판"이라 부르긴 했지만, 그때 사람들은 "청"이 우리말이고 "板"은 한자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청판을 한자로 적을 때, "청"은 처음 "靑"으로 빌려 적었고, 나중에 "廳"으로 바꾸어 적었습니다.  우리말 "널조각', "널쪽", "청널"이 "靑板"으로 불리다가 결국은 제법 한자말 같은 느낌이 드는 "廳板"이 된 것이지요. 집에서 사라진 우리말들을 찾으면서 너무나도 많이 본 유식한 사람들이 행한 우리말을 한자말처럼 보이게 적으려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꼭 옛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노력들이 한자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한자를 상형문자라 알지만, 그야말로 생긴 모습이나, 눈에 보이지 않고 생각 속의 위치나 개념을 그려낸 글자, 즉 象形文, 指事文은 몇 되지 않습니다.

 

이미 쓰고 있던 말들 가운데 상형이나 지사 같이 그림文으로 일일이 만들기 보다, 그 뜻을 살펴 이미 쓰는 그림文을 이용하여 새 글자를 만들어쓰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아울러 문물이 발달하여 생겨난, 새로운 물건이나 일이나 개념에 대해서도 기존의 글자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것들이 가진 특성을 표현하는 글자들을  그에 상응하여 새로 만드는 것이 훨씬 쉽고 합리적이었습니다.

 

이런 대상의 특성이나 모양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둘 이상의 글자를 붙여 만든 것이 바로 會意字이고,  또 이런 대상을 부르는 소리에 맞춰 어느 정도 그것들이 어떤 범주의 것들인지도 나타내면서 그 특성을 표현하도록 둘 이상의 글자를 붙이고, 그 가운데서 같은 소리를 내는 한 글자의 소리로 따라 읽게 만든 것은 形聲字인데, 이런 글자들이 한자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경에 나오는 한자들의 쓰임새가 두보나 이백의 시에 나오는 한자들보다 훨씬 다양한 까닭은 바로 같은 발음의 문자가 어떻게 다른 글자들로 분화해 가며 그 뜻을 분명하게 서로 다른 말로 발전시켰는지 알게 해 줍니다.

 

허신이 설문해자를 펼 당시의 문자(文은 상형, 지사의 글자를, 字는 회의, 형성의 글자를 뜻합니다. 둘이 합해 문자이지요. 그 밖에 전주轉注나 가차假借를 위한 글자들이 있지만 새로 만든 글자라기보다는 있던 글자를 그렇게 이용한다는 이야기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의 개수보다 강희자전에 실린 문자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를 비교해 보면 문물의 발전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간체로의 발전은 빼고서도 말이지요.

 

한자를 우리의 글자로 쓰던 우리 옛사람들도 중국과 다른 우리가 가진 문물에 대해 우리만의 표현을 개발하려 했다는 점에서, 우리말을 한자로 적는 방법을 합리적으로 찾으려 노력했다는 사실에 대해 충분한 대접을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이두자를 포함해서,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은 글자에 대해 본디 한자의 뜻을 보고 선택한 훈차자나, 어떤 한자의 뜻을 살려 새로 모양을 만든 이두자는 우리가 만든 회의會意자라 해도 좋고, 한자의 읽는 소리를 보고 선택한 음차자이거나, 그 한자의 소리를 살려 변형하여 만든 이두자는 우리가 만든 형성形聲자라고 불러도 좋겠지요.

 

다만 그것을 만든 일정한 법칙이나 공통된 변환자라는 표시가 없어, 그것이 한자인지 우리가 만든 이두자인지 차자인지 구별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그런 우리말을 한자말로 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별없는 변환 때문에 우리말이 사라져 갔다는 데 대해 아쉬움을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한한漢韓사전을 찾으면 그 훈과 그 음이 같은 글자가 너무 많은 것에 놀랍니다. 문 門, 동녘 東, 등 이루 말을 다 할 수 없습니다.  텔레비젼처럼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따라 들어와 생긴 자연스런 새 말이 아니었을 텐데도, 우리말의 문門, 동東, 책冊, 벽壁...등 너무나 많은 우리말들이 사라져 간 것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지요. 아니 그보다, 우리말끼리 엮어 새로운 문물에 맞춰 우리말 회의자, 우리말 형성자를 만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요즘 사람들이 만들어 쓰는 새내기라든가 얼차려 같은 말들을 옛날부터 만들어 썼다면, 우리말이 열 배는 더 되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 말입니다. 또 다른 안타까움은 "대청"의 우리말 "청"이 한자 "廳"으로 잘못 인식되는 일이 생기는 현실입니다.

 

다행히 한글이 우리의 문자로 완전히 자리 잡은 지금이니까, 조금씩 우리말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해보는 노력이고요. 솔직히 "우리말 찾기-집에서 사라진 우리말들"을 쓰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우리말로 나타내려 "과학 술어"(이 말의 우리말을 찾아보거나 만들어 보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요?)를 쓰면 쉬운 설명을 힘들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만(조금 앞의 "될 수 있는 대로"를 한자말로 바꾸어 쓰면 "가급적"으로 충분합니다), 지금까지도 버텨 오고 있습니다. 다시 "청마루"라는 우리말로 돌아가겠습니다.]

 

 

"청마루"는 "널쪽"인 "청"을 끼워 만든 마루를 가리키는 우리말인데, 집에서 사라진 우리말들 중에 하나 입니다. "귀틀"을 중시해서 말하면 "귀틀마루"입니다. 마루의 겉모양이나 문양을 중시해서 말하면 우물마루, 바둑마루, 쪽매널마루라 합니다. 귀틀마루의 귀틀보다 널쪽인 청널을 강조해서 부른 것이 "청마루"입니다.  따라서, "청널"을 강조해서 귀틀마루를 부를 때는 반드시 마루를 붙여 "청마루"라고 말해야 합니다. "청마루"는 역전앞이 절대 아닙니다. (모르지요. 국어사전이 "청"을 "마루"처럼, 마루를 만드는 재료나 그것으로 만든 마루라고 푼다면 역전앞이 될지도.)

 

"청마루"는 그것이 앞마루든 쪽마루든 눈썹마루든 다락마루든 납작마루든 들마루든 간에, 그것 만드는 방법이 귀틀을 짜고 동귀틀에 홈을 파서 청널을 그 홈에 끼워 만든 마루를 가리켰었는데, 오늘날에는 이미 "청마루"란 말이 완전히 사라져 우리말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청靑,廳"을 한자말로 인식한 사람들이 "대청大廳"이라 부르는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마루"는 버젓이 살아 사전에 실려 있고요.

 

옛날 사람들의 의괘에, 집 짓는 데 소요되는 청널靑板,廳板의 종류를 적었는데, 그 크기와 용처에 따라 구분하였습니다.  우선 크기를 장단長短으로 나눈 것을 보아 폭보다는 길이를 위주로 나눈 것 같고,  용처로는 마루, 퇴, 가퇴, 다락, 등으로 구분한 것을 보아 퇴나 가퇴 같은 툇마루에 까는 청판과 전각의 바닥이나 마루방에 까는 청판을 서로 다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마루청판抹樓靑板,抹樓,廳板이라고 일반화 한 것을 보면 마루라고 부르는 바닥 마감이 이미 표준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의괘에 하나 특이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장횡청판長橫廳板"입니다. "장청판長廳板"을 따로 소요로 한 것을 보면 둘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아마 장횡청판은 길이도 길고 폭도 넓은 청판을 가리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청판을 길이로 장단을 구별하였다지만 "단청판短廳板"은 근대에 와서 한번 사용된 말일 뿐 주로 기본이 되는 것은 그냥 청판廳板이고, 필요에 따라 기본 청판보다 좀 긴(혹은 폭이 넓은) 청판을 장청판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기본이 되는 청판보다 큰 것이 있었다는 자료에서 자연스레 "대청"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대청"이란 말은 우선 "청널"이 "큰"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수 있습니다. 이때 "크다"라는 말은 '길이도 길고 폭도 넓다'라는 말이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청널 모서리를 잡을 수 있게 되자, 널조각의 폭이 좁지 않아도 변형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되어, 널쪽의 폭이 넓어도 별 문제 없이 쓸 수 있었겠지요. 더우기 집채의 중요한 공간으로 제례를 위시한 각종 행사의 중심인 공간의 바닥에 까는 마루는 무엇보다 튼튼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싶었겠지요. 좁은 널쪽을 촘촘히 깔아 무늬가 번잡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탐탁치 않았을 것입니다. 응당 '폭이 넓은' 청널을 쓰게 되었을 것입니다. 큰청널(대청판大靑板,大廳板)을 깐 마루를 "대청마루"라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입니다.

 

집채의 다른 마루들, 이를테면, 툇마루나 쪽마루에도 대청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마루의 크기와 귀틀과 청널 크기 간의 전체적인 조화를 생각해서 폭이 좁은 보통의 널쪽을 깔았을 것입니다. "툇마루"나 "쪽마루"는 특별핳 것이 없는 "청마루"였지요.  거기에 비하면, 대청마루는 이미 그 자체가 집채의 특이한 공간이 되어 버렸지요. 대청(큰청널)을 깐 청마루를 가리킬 수도 있고, 아니면 넓은(大) 청마루를 가리킬 수도 있는 대청마루가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대청마루는 마루의 이름에서 집채에 딸린 공간의 이름으로 승격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정으로 대청마루의 자리에 봉당마루를 아무리 넓고 크게 만들어도 청마루로 불릴 수 없는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봉당마루는 날봉당이 아니어도 청널을 깔지 않는 한 청마루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넓어도 봉당은 봉당마루일 뿐입니다. 따라서, 방과 방사이에 있는 마루를 대청이나 대청마루라고 부른다고 사전에 실은 것은 어디까지나 요즘 현대어 풀이일 뿐,  집채에서 사라진 우리말들 가운데 하나인 대청은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마루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청널을 깐 마루 중에, 특히 큰청널을 깐 마루를 일컫다가, 그것 이 주로 집채의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마루에 깔리면서 그런 마루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대청이 옛날에도 지금의 사전이 말하는 집채에 자리잡은 어떤 공간, 즉 방과 방 사이의 무라가 놓인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면, 흙마루인 봉당도 그것이 날봉당이든 거적이나 자리를 깐 봉당마루든, 최대한으로 양보해서 들마루를 올려 놓았든 간에,  방과 방 사이에 놓인 마루인 한, 그것은 대청이나 대청마루로 불렸어야 할 판입니다.  봉당마루나 대청마루는 그것들이 놓인 집채의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마루를 만든 재료를 가리키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방과 방 사이에 놓은 마루"를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지요. 바로 "어간마루"입니다. 대청과 봉당이, 대청마루나 봉당마루가 모두 어간마루이니 같은 것이라고 하면 옛사람들이 기겁을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은 사전에도 실리지 않는 말, 장선 위에 널빤지를 깐 일반적인 마루와 구별하여, 멍에와 장선을 한 평면에 가로와 세로로 놓고, "귀틀"이라 부르는 네모 나무틀을 짠 뒤, 그 틀 안에 널빤지 대신 청널이라 부르는 널조각(널쪽)을 끼워 넣어 만든 마루를, 특별히 "청마루"라고 불렀고, 이런 귀틀이 마루의 변형을 최소화하므로, 청널의 크기를 키워도 변형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청널을 넓게 짤라서 쓰게 되면서 "청마루"가 "대大청마루"로 불리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루에 관련된 나무 가운데 우리말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있는데, 위에서 여러 종류의 마루를 나열할 때 나왔던 바로 그 난간마루의 "난간欄干,欄杆"이란 말입니다. 난간은 층계나 다리나 마루 따위의 가장자리에 안전이나 장식을 위해 일정 높이로 세워 막은 것을 가리키니, "난간마루"는 마루의 가장자리에 난간을 세운 것이지요. 계단이나 다리의 가장자리에 웬만하면 난간을 세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단이나 다리에 난간을 세웠다고 난간층계나 난간다리라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유독 마루는 난간마루가 있는 걸 보면, 보통의 마루는 난간이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계단", "층계" 이 말 때문에 갑자기 생각나서 묻는데요, 계단이나 층계의 우리말은 무엇인가요?  다리橋는 주로 같은 평면에서 가로로 떨어져 있는 두 지점을 잇는 구조물이고, 사다리梯는 주로 세로로 떨어져 있는 두 지점을 잇는 구조물이며,  사다리와 다리 사이의 어느 각도로 눕혀 두 지점을 잇는 구조물이 바로 층계요 계단이라면, 이것을 우리말로 무어라 부르는지요? 집채에서 사라진 우리말들이 또 있네요.

 

한자말 가운데는 글자의 순서를 뒤집어도 그 뜻이 그대로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광명정대나 정대광명이나 같은 말이지요. 그런데 이 계단 같은 한자말 조합은 뒤집었을 때 완전히 다른 뉴앙스의 말로 바뀌고 맙니다. 계단과 단계는 사실 같은 말이면서, 실제 사용할 때 서로 다른 뉴앙스의 말로 씁니다. 층계나 계층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한자말 계단의 우리말은 집에서 사라져 죽은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계단"의 가장 초보적인 것이 "댓돌"입니다. "섬돌"이라고도 하지요. 보통 돌 하나나 나무 토막 하나로 높이의 차이를 해소합니다.  사실 섬돌은 섬을 돌로 놓았다는 말이므로 계단의 우리말은 "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섬"을 한자로는 "階"로 나타냅니다. 훈몽자회나 신증유합 모두 "階"를 뜻은 "섬" 소리는 "계"라 했습니다만, 친절한 최시진은 이런 설명을 더했습니다. "俗呼階級'서흐레'"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級"을 찾았습니다. 최시진은 '서흐레 급, 용례는 階級', 류희춘은 '층계 급'이라 했네요. 그 50년 사이에 "서흐레"라는 말은 층계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이런 "階"가 더 높은 곳을 오르내리게 만들어진 것이 "陛"인데,  요즘 한한사전에는 섬돌로 階와 같이 설명합니다만, 최시진은 이것도 친절하게 뜻은 "버텅" 소리는 "폐"라고 하며, 尊者升堂之階, 즉 높은 사람이 집에 오르는 계단이라며 따로 구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陛"를 최시진보다 80년 가까이 앞서 황수신은 "서흐레"라고 '법화경언해'에 적어 두었습니다. 최진의 "버텅"은 류희춘이 외면하는 바람에, 다시 돌아볼 자료 없이 그대로 죽은 말이 되었고, 아울러 세조 때도 중종 때도 쓰던 "서흐레"란 말은 류희춘이 살려 놓지 못하자, 집에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살아 있을 당시 "서흐레"라는 말은 계단이라는 말로도 계급 즉 단계라는 말로도 같이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사다리라는 말이 언제부터 통용된 말인지 알 수 없으나, 최시진이 橋나 梯를 모두 "다리"라는 우리말로 풀면서, "제梯"라는 이 다리를 "집채에 있는 것인데, 제자梯子라 불리는 이것은 나무 계단이며 이를 통해 높은 곳에 오른다. 在家者俗呼梯子卽木階所以登高"라고 정말 친절하게 설명해 두었습니다. 뜰의 계단은 "섬"이나 "버텅" 또는 "서흐레"라 부르고, 집 안에 있는 계단은 "다리"라 불렀다는 것이지요.

 

50년 뒤 류희춘은 접두사 하나를 그 앞에 붙였습니다. 梯는 "층다리"인데, 제라고 읽는다고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아마도 층다리의 층은 "層"을 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류희춘이 다리라는 집채 안의 계단을 물을 건너는 다리와 구별하고자 "층다리"라 "층"을 붙인 것 까지는 알겠는데, "서흐레"라는 계단을 가리키는 말을 몰랐을 리 없는데, "서흐레다리"로 불렀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아쉬운 대목이지요.

 

앞에서 말한 우리말 회의자 우리말 형성자를 만들어 가는 기회가 사라진 것이지요. '서흐레'다리로 만들었다면 '써레'다리로 되었다가, 이제는 '사'다리가 집채 안의 계단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 대신 한자 "層"이 붙어 "층다리"가 나오면서, 사다리는 계단이란 의미를 잃게 된 모양입니다. 대신 요즘도 간혹 쓰는 말 "층다리", "층층다리", "층층대層層臺"가 흥하자 "다리"가 가졌던 계단의 뜻도 사라졌습니다.

 

짧지만 그래도 계단을 가리키던 우리말이 500년 전까지는 분명히 있었고,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종류에 따라 여러 말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섬"이 섬돌로 살아 있듯이, "버텅'도 "서흐레"도 "다리"도 모두 계단 대신에 다시 쓰이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 가운데 "서흐레"는 옛날부터 농기구의 이름으로, 계단이나 계급을 나타내는 서흐레와 같이 쓰였었는데, 계단이나 계급을 가리키는 서흐레는 주로 유식한(집에 "계단"을 둔 사람이나 "계급"을 자주 따질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사람들이 그 유식을 드러내려 한자말을 썼기 때문에 한자말 계단, 층계에 눌려 집에서 사라졌고, 논 갈고 물 채워 흙덩이를 으깨는 데 쓴 "서흐레"는 무식한 농투성이의 말이라 지금도 "써레"라 불립니다.

 

난간 이야기 중에 계단이 불쑥 끼여 혼란을 주었다면 이해해 주십시요. 간혹 그냥 가다가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서요. "난간"이라는 말도 마루를 알아보다 마루에 친 난간에서 출발한 것이고, 그런 난간이 마루와 함께 계단이나 다리에 주로 놓인 구조물이기 때문에 불쑥 계단이란 한자말의 우리말이 무언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옛날에는 다리梯,橋난간이 계단(층다리,사다리梯)난간과 다리橋난간을 모두 가리켰네요.)

 

 

"난간"이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막은 것이므로, 난간이란 기둥과 가로막는 막대로 만든 구조물입니다. 이때 난간을 세우는 기둥을 "난간동자"라 하고, 가로막는 막대를 "난간두겁대"라고 부릅니다. 그냥 "두겁대"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난간은 한자말인데 그 난간을 이루는 나무들의 이름은 모두 우리말이네요. 동자가 그렇고 두겁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동자와 두겁대가 이루는 구조물의 이름은 왜 우리말이 없을까요?

 

전에 벽을 공부할 때 머름이라는 창이나 문 아래 놓인 나무로 된 벽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머름은 비록 꽉 막힌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보는 난간과 많이 닮았습니다. 머름동자, 어미동자, 머름청판, 문지방,...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머름이란 구조물의 이름도, 그것을 이루는 나무들의 이름도 모두 우리말로 되어 있는데, 난간은 왜 우리말이 없어 동자, 청판, 두겁대, 등의 앞에 모두 난간이란 한자말이 붙어 있나 하는 것입니다.

 

계단이나 다리의 난간은 출입을 막는 것이니 열린 곳이 없지만, 마루의 난간은 사람이 들락거릴 열린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열린 곳의 양쪽 끝에 놓인 난간동자를 "난간엄지기둥"이라 부릅니다. 난간은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장식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엄지기둥"의 머리(난간 법수法首)를 봉긋한 꽃봉오리로 깎는다거나, 난간동자를 개다리나 닭다리 모양으로 깎아 세우고, 난간두겁대를 두 겹으로 보내고 그 사이에다 연잎이나 다른 꽃잎의 모양을 따서 깎은 접시받이 같은 걸 끼워 놓기도 했지요.

 

게다가 난간동자 사이 사이의 아랫도리에 살箭대로 여러가지 문양을 만들어 끼워 놓기도 하고, "난간궁창"이라는 "청널"을 끼우기도 했습니다. 이런 장식을 가진 난간을 "꾸민난간"이라고 불렀는데, "장식난간"이 아니라 꾸민난간으로 불렀다니 "큰 청"을 "대청"으로 부른 것과 거꾸로네요. 이런 난간을 집채의 안팎에서 때로는 돌로, 심한 곳은 옥으로도 난간을 만들었다니 정말 대단한 집채의 장식물이었습니다.

 

집에서 사라진 우리말들을 찾는데 도움을 주던 훈몽자회나 신증유합도 이 난간 앞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하네요.  훈몽자회는 欄을 간단하게 "난간 난"이라 풀어 놓았고, 신증유합에는 그나마 실리지도 않았고, 杆은 양쪽 모두 싣지 않았는데, 杆과 같이 쓰는 干이 있어 찾았더니 양쪽 다 방패의 뜻을 주로 적었고 다만 훈몽자회에 "난간의 간"이라고 풀었을 뿐입니다. 우리말을 찾을 수있는 힌트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실망 끝에 이 난간이란 말로 생각나는 단어 하나가 있어, 혹시나 난간의 우리말 찾는데 도움이 되나 했지만 역시나였습니다. 난간을 뒤집어 쓴 "간난'이란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난간이나 간난은 모두 欄과 杆으로 이루어져 欄杆과 杆欄입니다. 위에서 말한 계층이나 층계, 계단이나 단계가 모두 각기 살아 있는 말인 것과는 달리, 난간은 한국 일본 중국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같은 말이지만, 간난은 죽고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간난"은 1200년 전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한 단어장에 실린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장에서 간난이란 말을 본 후 간난은 난간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떠올랐습니다. 당대唐代의 신라 출신 밀교승 혜초와, 돈황에서 발견된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때문이지요.

 

돈황의 장경동藏經洞에서 꺼낸 문서들을 감추어 놓고, 조금씩 외국인들에게 헐값으로 팔던 돈황 석굴의 주지 왕원록에게서,  삭아서 산일된 것으로 보이는 한 두루마리 문서를 다른 문서더미와 함께 프랑스인 펠리오가 몇 푼 되지 않는 프랑스정부 돈을 내고 샀을 때, 그는 이미 소실되었다고 여겨졌던 "혜초惠超,慧超"의 "왕오천축국전"이 그 안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카슈가르사람(소륵疏勒인)'혜림'이 쓴 전적들의 주석집인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는 천삼백이나 되는 불전들 가운데서 어려운 자구들을 뽑고, 그 말들의 읽는 소리와 뜻을 풀어 놓은 책인데, 이 단어장의 마지막 장에 혜림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상중하 세 권에서 뽑은 단어들 85개를 풀어 놓았습니다. 펠리오는 이 책을 통해 혜초의 여행기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으며, 혜림이 그 여행기 속에서 뽑아 놓은 단어들과 나열 순서를 통해 여행의 노정과 내용 등도 간략하게나마 이미 알고 있었고, 혜초의 그 여행기는 소실되었다고 생각하고 안타까워했었는데,  왕원록에게 산 한 두루마리의 내용을 보고는 바로 그것이 비록 일부가 산일되긴 하였으나 '혜초'의 '왕오천축구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마치 엘렉트라가 아버지 아가멤논의 묘에 바쳐진 머리칼을 보고 동생 오레스테스의 것임을 알아차린 것처럼, 펠리오는 그 두루마리 속의 여러 글자 중 여남은 개가 혜림의 단어장 속의 여러 단어들의 출현과 순서와 일치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임을 알아차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간난杆欄이란 단어가 펠리오에게는 엘렉트라가 본 오레스테스의 머리칼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혜림의 단어장 속에 있던 "杆欄ganlan"을 펠리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도 간난을 보며 난간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이 단어 "간난"은 산일되어 없어진 구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두루마리가 절약본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펠리오가 얻은 여행기 안에는 적혀 있지 않아, 혜초가 어떤 것을 설명하며 이 "간난"이란 단어를 썼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혜림이 그의 단어장에서 이 간난을 어떻게 풀었는지 알면, 산일된 혜초의 여행기를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동안 너무 사전에만 풀이를 의존해 온 대신, 이왕 말이 난 김에 이 단어장 "일체경음의"에서 간난에 대한 혜림의 풀이도 한번 보겠습니다.

 

[一切經音義券第一百 惠超往五天竺國傳 第十張 洞, "일체경음의"의 백 번째권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항목의) 열 번째 페이지.]

"杆欄" 上音干下音란(欄에서木이 없는字)以木橫圍住處防禽獸等名曰杆欄(세로로 편집된 책이어서) "간난" 위는 '干gan'으로 읽고, 아래는 '란(木이 없는 欄)lan'이라 읽는다. 집채에 나무로 가로로 둘러 대어 새나 짐승 등을 막는데, 그 이름을 간란杆欄ganlan이라 한다.

 

지금 우리는 밖으로 떨어지거나 넘어질까봐 층계나 다리나 마루의 가장자리에 "난간"을 세우는데, 1200년 전에 혜초가 본 것은 키우던 닭이나 오리나 거위나 소나 염소나 개가 집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간난"을 세운 것이었군요. 이상하네요. 보통 가금이나 가축을 키우는 사람들은 사람이 사는 집채와는 좀 떨어진 곳에 "우리圈"를 쳐서 가두어 두지 않나요?

 

이런 우리圈는 못 본 모양인지 혜초는 간난 앞에 "목책木柵muzha"을 먼저 설명했는데, 혜림에 따르면 야산 등지에서 집 둘레에 나무를 세워 친 담檣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이제 보니 간난을 설명하며 언급한 금수는 가금이나 가축이 아닌 야생의 위험한 금수를 가리킨 모양입니다. 집채 바깥에 목책을 둘러 야수들의 출입을 막고, 목책을 두르지 못하면 집채에 취약한 부분을 나무를 가로 대어 야수의 침입을 막았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목책도 두르고 간난도 두었다는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혜초가 본 이곳은 지금 세상의 어디 쯤일까요?

 

 

그런데 혜림이 이 "간난"을 뽑아 단어장에 넣고 읽는 법과 뜻을 적었다는 것은, 간난이 그 당시의 당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구조물이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 당시 당나라에는 집채의 층계나 마루에 난간을 세우지 않았을까요? 다리에도 난간이 없었을까요?  집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것과 집채의 한 공간에서 떨어지거나 넘어지지 않게 막은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난간"과 "간난"처럼 뒤집어 놓았을 뿐 결국은 같은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혜림은 왜 "간난"이 "난간" 같은 것이라고 쉽게 풀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혜림은 혜초의 여행기에 적힌 "간난"이 그 당시의 집채에서 보던 "난간"과는 다른 구조물이라고 파악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혜초는 어떤 지방을 여행했을 때 그 지방의 집채에 딸린 간난이란 구조물을 신기하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혜초는 여행하던 그 지방에서 부르는 그 구조물의 이름인 "ganlan"을 음사하여 한자로 "杆欄"이라 적었겠지요. 난간과 약간 비슷하다고 느껴 한자로 杆欄이라 옮겨 적었을 것입니다.

 

열 여섯의 나이에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서 밀교를 배우기 시작한 혜초가 여행 길에 나선 때는 그의 나이 스물 즈음이었는데, 그리고 네 해 동안 인도와 인근 나라들을 여행하고 돌아와 쓴 여행기가 왕오천축국전입니다. 신라나 당나라에 난간이 있었다면 그가 난간을 몰랐을 리 없고, 그가 난간을 알고 있었다면 여행기를 적을 때, 우리의 난간 같은 것을 그 곳에는 간난이라 한다고 적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혜림이 단어장에 뽑아 둘 필요도 없었을 것 같은데, 혜초는 신기하게 보고 여행기에 적고, 혜림은 사람들이 간난이 무언지 가르쳐 주려 단어장에 실어 풀이를 했습니다.

 

 

혜초가 살았을 당시 마루나 다리에 난간을 두르지 않았을까요?  둘렀다면, 신라 사람들은 난간을 무엇이라 불렀을까요? 그때 당나라 사람들은 마루나 다리에 난간을 둘렀을까요? 그리고 지금의 중국 사람들처럼 난간을 "欄杆langan"이라 불렀을까요? 그때도 신라 사람들은 "난간"을 가리키는 자기네 말이 없어 당나라 사람들과 같이 "란간"이라 부르고 있었을까요? 그때에도 난간을 가리키는 우리말이 없었을까요? 우리는 난간을 중국에서 배워 와서 처음 난간을 세울 때부터 말도 중국말을 빌려 난간이라 부른 것일까요?

 

 

다음, "우리말 찾기-집에서 사라진 우리말들(목재)"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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