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찾기-동서남북(1)에서 계속)
2. 지명에서 동서남북 찾기
우리말 사전에서, '앏'과 '뒤'가 각각 '남'과 '북'의 옛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대신 '남'과 '북'에는 '앏前'과 '뒤後'의 뜻이 전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앞'과 '뒤'는 '전'과 '후'의 뜻으로는 살아 있으나 '남'과 '북'의 뜻으로는 이미 죽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앞'과 '뒤'가 '남'과 '북'이었다면 양쪽 '옆' 즉 "왼'과 '오른/바른'도 '동'과 '서'였을 개연성을 무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사전에서도 일상에서 쓰는 말들 가운데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강길운이 그의 책 '국어사 정설'에서 제시한 후한서 동이전에 적힌 고구려의 다섯 부분 이름 풀이에서 '동서남북'을 '좌우전후', '왼, 오른, 앞, 뒤'로 푼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강길운의 풀이 결과만 옆에 별도로 적어 두었습니다.
"一曰內部一名黃部卽桂婁部也 하나는 '내부' 달리 '황부' 곧 '계루'이고, ('桂婁'='kuelu'='안中央')
二曰北部一名後部卽絶奴部也 둘은 '북부' 달리 '후부' 곧 '절노'이고, ('絶奴'='cuel+d∂奴'='앞南+쪽','灌奴'와 잘못 바꿔 쓴 것으로 봄.)
三曰東部一名左部卽順奴部也 셋은 '동부' 달리 '좌부' 곧 '순노'이고, ('順奴'='ciu∂n+d∂'='왼東+쪽')
四曰南部一名前部卽灌奴部也 넷은 '남부' 달리 '전부' 곧 '관노'이고, ('灌奴'='kuen+d∂'='뒤北+쪽','絶奴'와 잘못 바꿔 쓴 것으로 봄.)
五曰西部一名右部卽涓奴部也" 다섯은 '서부' 달리 '우부' 곧 '연노'이다. ('涓奴'='ywen+d∂='오른西+쪽')
-後漢書 東夷傳 高句麗條-
중국어의 경우 '東'인 해가 뜨고 '西'인 해가 지는 쪽'을 기준으로 남북을 양쪽 옆 즉 오른쪽과 왼쪽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혹시 우리말 '안'과 '속', '겉'과 '바깥', '가운데'와 '복판', '아래'와 '밑'이 같은 뜻으로 겹으로 쓰인 것과 같이 동서남북을 가리키던 '어떤 우리말' 역시 '왼, 오른/ 바른, 앞, 뒤'가 지금은 잃어버린 또 다른 '어떤 우리말'과 함께 겹으로 쓰이다가 둘 다 함께 사라졌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사전을 뒤져서 지금은 쓰지 않는 말들을 찾아보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사전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말을 찾는다는 것은 절대 무망한 일입니다. 사라져 버린 말들은 사투리로 남아 있거나, 그리고 그런 유력한 사투리는 사전에 실리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무슨 말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고 무심코 쓰는 말들 속에 오히려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동서남북'의 경우 지명을 이르는 사투리나 무심코 무슨 말인지 모르고 쓰는 어떤 곳의 이름 가운데서 그 흔적을 찾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대처나 명소는 이미 한자말로 이름을 바꾼지가 너무 오래라 본디 우리말 이름이 남아 있지 않고, 중국식에 가깝도록 짓느라 왠만하면 그 끝말을 '산山', '주州'로 하는 통에, 남은 한자 이름으로 옛 이름을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는 작업을 일군의 학자들이 지금도 연구하고 있지만 정말 미로찾기처럼 어렵습니다. 하지만 굳이 한자로 바꾸지 않아도 되었던 작은 마을, 골짜기, 시내, 언덕의 이름들은 아직 곳곳에서 우리말로 남아 있고, 또 그곳의 주민들이 아직도 쓰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들에서 더 밝은 희망을 보는데, 동서남북은 주로 어떤 큰 곳을 기준으로 붙이는 방위어사이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사시던 작은 동네는 '자가'라고 불렸었는데, 호적에만 적혀 있던 한자 '尺果'가 도로표지판에 한글로 '척과'라 적히고 나서는 '자가' 사람들마저 이제는 외지 사람들이나 치술령으로 가는 나그네들처럼 모두 '척과'라고 부릅니다. 공문서나 호적에 단지 그 동네 이름을 적을 수 있게 '尺果'를 골랐었다면, 그 많은 한자들 가운데 왜 하필 '자'가 '척尺'으로, '가'가 '과果'로 되었는지 알 수 있어야 할 텐데 아무도 모르고, 더 이상한 것은 이제는 도로표지판에 한글로 적는데도, 왜 하필 우리말 이름 '자가'를 두고 한자를 빌려 적은 '尺果'를 한자음으로 읽어 '척과'라고 고쳐 적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척과尺果'가 본디 '자가'라는 이름이라는 사실조차 자가 사람들에게 잊혀져 간다는 것입니다. 적기 위해 '자가'를 '尺果'로 바꾸어 놓고는, 버스가 다니는 노선의 지도 위에 그리고 도로표지판 위에 '尺果'라는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척과'라고 적은 뒤로 10년이 채 걸리지 않아 '자가'는 잊혀져 버리고 '척과'가 그 동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한글로 적을 것이면 한글 이름 '자가'로 적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간혹 보이는 우리말 이름으로 적힌 작은 마을의 표지판을 보면 왠지 정겨운 마음이 일어 다시 한번 더 그 마을의 이름을 되새겨 보는 즐거움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옛날 우리말 이름을 아는 곳부터 하나씩 도로표지판의 이름을 바꾸어 나가고 싶습니다. 옛날에는 군대 갔다 왔다는 증명서를 떼려면 반드시 본적지로 꼭 가야 했는데, 그런 일로 면사무소에 갈 때만 해도 면서기에게 '자가'라고 하면 잘 알아 듣고는 다음 일이 척척이던 것이, 이제 면서기 중에도 '자가'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몇 없습니다.
어머니가 괘능에서 '자가'로 시집 올 때 '달내'라는 제법 큰 시내를 건너야 했었는데 지금은 '달천達川'이라 부릅니다. '월천月川'이라고 바꾸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것이, 웅촌의 '돌내'는 '돌'을 아주 짧게 소리내는 말이라, 길게 발음하는 돌乭의 '석천石川'이 될 까닭이
절대로 없는데도 '석천石川'으로 되어 버렸거든요. 한자로 이렇게 바꾸어 적어 놓으면, 나중 본디 우리말 이름을 찾기가 정말 어려워집니다. 이런 식의 한자 이름으로 바뀌지 않고, 아직 우리말로 살아 남은 지명에 대해 신경 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가'도 요즈음 무슨 신도시를 만든다며 그 땅들이 수용당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에 있는 '오덕골'과 '가장골'은 아직까지 한자로 바꾸어야 할 이유가 없어 그대로 살아 있고, 몇몇 고향 분들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남아 있지만, 큰 길이 놓이고 새로 아파트들이 들어서면 그곳을 무엇이라고 부를지 궁금해집니다. '오덕골'이나 '가장골'이란 작은 골짜기 이름까지도 수용당해 없어지지는 않을런지요.
할아버지 사시던 동네 이야기로 잠시 둘러오기는 했습니다만, 옛날 우리말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우선 지명의 옛 우리말 이름들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이런 정보를 가진 것들 가운데서 옛날 중국 역사 책들이 가장 오래된 우리말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옛날 우리나라의 이름들이 우리말이었고, 그때 우리나라에 살던 사람들 이름이나 직책이 우리말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우리나라의 산과 물과 사람 살던 곳의 이름이 모두 우리말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것들이 한자로 적혀 있다 하여도 그것들은 우리말인 것입니다. 단지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런 역사서들에 적혀져 있는 이름들이 우리가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던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었는지,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부르고 적던 것을 그대로 쓴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우리끼리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소리로 옮겨 적은 것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옛날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한자 하나에 대해 중국 사람들이 읽던 소리나 그때 빌려 쓰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읽던 소리나 비슷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 본다면, 그런 궁금증 쯤은 풀릴 때까지 덮어 두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여기저기 우리나라의 강산에 있는, 한자를 빌려 돌에 새긴 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록의 양이 중국 역사 책에 적힌 것만큼이나 많지 않아, 그것으로 한자를 빌려 쓴 우리말 표기법의 흔적을 알아내기는 좀 힘듭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거기(三國史記, 地理志)에는 여러 군데 우리나라 행정구역의 이름들이 어떻게 바뀌어 왔었는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어느 정도 보완도 하면서 서로 견주어 볼 수도 있는 삼국유사라는 책도 있습니다. 학자들이 이것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여러가지 부수되는 자료들을 검토하여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였던 옛 사람들의 어떤 규칙이나 틀을 찾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은 그런 한자나 표기법을 이두라거나 그와 비슷한 이름의 말로 연구를 하다가, 요즈음은 그런 한자나 표기법을 사용했던 지역이나 그 지역을 다스리던 나라의 이름을 붙여, 제법 거창하게 '삼한어', '고구려어', '백제어'라는 이름으로 연구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따로 '신라어'라 이름 붙여 연구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이 '신라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그런 자료들과 그것들을 연구한 성과들 가운데는 '우리말 동서남북'을 찾아볼 수가 있는 용례가 제법 나오게 되었고, 따라서 몇몇 학자들이 내친 김에 옛날 우리말 방위어사를 찾으려 연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우리말 동서남북을 다시 얽어 보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금은 죽었지만 어떤 자료들을 통해 아직 살아 있는 말들이 어떻게 바뀌어져 왔는지를 통해 다시 살려내는 일련의 작업을 그들은 "재구再構"라고 합니다. 즉 옛사람들이 옛 우리말 이름을 한자말로 바꾸거나 한자를 빌려 적을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찾아내어서 종래에는 본디 우리말이 "이것"이었다고 "다시 얽어내는 과정"을 "재구"라 합니다. 이러한 "재구 작업"은 그나마 유추해서 비정할 만한 용례들이 충분하지 않아 힘들기만합니다만, 용케도 몇몇 학자들이 한자말 동서남북에 대한 우리말 동서남북을 재구해 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그 재구해 나간 과정을 옮길 필요는 없겠고, 결론만 옮겨 본다면 아래에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동 서 남 북 비고
(이익) (동풍은 사 즉 명서풍) (서풍은 한의 즉 여합풍) (남풍은 마 즉 경풍) (북풍은 후명 즉 광한풍) (바람 이름 기록)
방종현 새 하늬 마 높 바람 이름에서 추정
양주동 새(아는 아래아) 처용가 이두 해석
류렬 사/서, 새, 가디/가리 가라, 갈 가라, 미라, 물 삼국시대 이두 연구
머두/머루/무루/미두
맞, 물
도수희 새(아는 아래아) 가라 마(<니마 - 니말) 곰(<고마<고마리) 백제어 연구
민긍기 살 - 사라 발 - 바라 갈 - 가라 달 - 다라 민속학 측면에서
(아는 모두 아래아) 지명 연구
이정룡 사라 - 살 - 새 바라 - 발 가라 - 갈 다라 - 달 지명에서의 차자
(아는 모두 아래아) 연구
강길운 디가tiga得安 갈kar刀 구디kudi久知 고마koma熊 백제어
치우언ciuen順,왼 이우엔ywen涓,오른 추엘cuel絶,앞 구언kuen灌,뒤 고구려어
살sar東,다사tasa 파디pati西 구두리kuduri南 아발abar北 신라어
살,다사 갈,가라,바드 마,구부레,사느브/사비 아발,고든 계림유사 신해독
구덜/구둘 연구에서 정리
(다른 학자들의 추정이나 재구나 주장도 정리해서 시간 나는 대로 채워 넣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표를 보시니 "아! 이제 우리말 동서남북이 무언지 알겠다" 싶습니까? 아니면, "도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말 동서남북이 뭐라는 거야"입니까? 사실 위의 표에 나타난 글에서 (아는 아래아)라는 설명 대신 진짜 아래아를 넣은 옛글을 보여 드렸더라면 더더욱 이게 무엇이야 했을 것입니다. 이익이 정리해 둔 바람 이름을 보고서 간단히 결론을 낸 듯한 방종현의 '새', '하늬', '마', '높'이 바로 동서남북을 가르키는 우리말이란 추정이 더 쉽고 그럴싸해 보이지 않습니까? 북동풍을 높새(바람)이라고 부르니 더욱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이리 간단히 드러난 우리말 '동서남북'을 두고 왜 사람들은 한자말 '동서남북'만 써 오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럼에도 왜 '새', '하늬', '마', '높'을 방위어사로 쓴 용례를 찾을 수가 없을까요? '전前', '후後', '좌左', '우右'나, '표表', '리裏', '내內', '외外'라는 한자말은 우리말인 '앞', '뒤', '왼', '오른/바른'과 '겉', '속', '안', '바깥'을 '동서남북'처럼 우리말 그 무엇을 완전히 콱 누르지 못하고, 오손도손 별 무리없이 아직도 같이 쓰이고 있는데 말입니다.
양주동은 방위어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향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처용가의 한 구절에서 한자로 빌려 쓴 '東京'을 '새벌'로 읽으면서 차자借字 '東'을 '새'라고 읽고, 차자 '京'은 '벌' 즉 '城' 아니면 '큰 마을'로 읽었습니다. 여기서 '새벌'이 그 당시의 경주 '사라-벌 즉 서라벌'을 말하는지, 아니면 처용이 살던 울산 해변 처용리의 인근에 '새로 생긴 마을' 즉 새벌新村을 말하는지, 아니면 어느 한 가을 저녁에 '억새풀이 우거진 벌판' 즉 '새벌草原'을 말하는지, 따질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만, 우리말 "새(아래아 새를 포함하여)"를 한자 '東'으로 빌려 쓴 것은 틀림없고, 이 말은 "東"이 우리말 "새"의 대표적인 뜻이었거나,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한 "새"를 적는 글자였거나, 옛날 사람들이 우리말 "새"의 글자로 '東'으로 정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 칸들의 다른 학자들 연구 결과를 보면, 양주동 이후의 우리말 방위어사를 찾는 학자들도 대체로 "새"를 '東'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새'가 아닌 다른 말도 '東'을 나타낸다고 보았지만요.)
그런데 우리말 "새"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뜻이 있을까요? 위에서 '新'과 '草'의 뜻을 은근히 보여 드렸으니, 이번에는 '鳥'를 한번 볼까요? 서울과 영남을 잇는 길 가운데 대표적인 길로 충주와 상주를 잇는 길이 있습니다. 특히 이 길은 낙동강과 남한강을 이용한 수운이 수월하여 세곡 운반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로 벌써 문경 '새재'를 떠올렸다면 그 '새재'를 한자로 옮길 때 '鳥嶺'으로 옮긴 것이 옳았겠는지'新嶺'으로 옮긴 것이 옳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영남의 세곡의 양이 늘어나자 옛 '새재(鳥嶺?)'보다 육운에 편한 '새재(新嶺?)'를 그 옆에 '새新'로 닦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럴 경우 앞의 '헌古 재'는 '새鳥재'고 나중의 '새 재'는 '새鳥재'가 아니라 '새新재'였겠지요?)
적기 쉽고 글공부가 얕아도 어떤 뜻인지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한자를 골라 그 뜻으로 빌려 쓰던 훈차訓借는 '새'의 경우에 '東', '鳥', '新', '草', '間' 등 한자의 사용 폭과 글공부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점점 다양해지고, '새'의 다양한 우리말 뜻만큼 상응하는 한자로 대체하여 나가면서, 점점 구태여 한자로 적고 우리말로 읽는 것보다 한자 그대로 읽는 것이 의미 전달이 명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 '새'를 훈차로만 적은 것이 아니라 음차音借로도 적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새'의 음차 표기 한자인 '沙'의 경우를 한번 보겠습니다. 박경리의 '토지'에 하동 악양의 평사가 나옵니다. 그 소설이 나온 뒤 평사리에는 제법 그럴 듯하게 최참판댁이라며 기왓집도 지어 놓고 길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하동河東'은 옛 이름이 '한다사韓多沙'이고, '악양嶽陽'은 '소다사小/少多沙'였던 반면, '평사平沙'는 하동이 '한다사', 악양이 '소다사'였을 때부터 '평사'였었는데 바뀌지 않고 그냥 있는지, 아니면 다른 우리말 이름이 있었는데 '尺果'처럼 한자 '平沙'로 고쳐 적기 시작하여 바꾸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한다사'가 '한-다사', '한다-사', '한-다-사'였는지 잘모르지만(학자들은 대개 한-다사로 읽는 것 같습니다만), '소다사'와는 한 글자가 다를 뿐인데 한자로 옮기니 완전히 다른 두 말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물(河), 또 하나는 산(岳/嶽), 하나는 해가 뜨는 곳(東), 또 하나는 햇볕(陽)이 되었습니다. 왜, 어째서 이리 되었는지 학자들은 설명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설사 어찌 설명이 된다 해도, 하동(읍)이 악양보다는 더 동쪽이며, 햇볕은 동쪽에서 해가 솟아야 든다는 법칙을 생각하면 순서가 제대로 된 것 같긴 합니다만, 바꾸어서 말해 하동河東의 동을 양으로 바꾸어 하양河陽으로, 악양岳陽의 양은 동으로 바꾸어 악동岳東/산동山東이라 부른들 '다사'하는 우리말을 한자로 옮긴 마찬가지 지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 속에 있는 평사平沙가 우리말 借字인데 한자음으로 읽고 있는지, 한자로 옮긴 것이라 한다면 본래 우리말이 무엇인지 궁금해 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면 하동의 섬진강 역시 그 옛 이름이 '다사多沙'내였는데 이 다사는 어떤 연유로 섬진(蟾津두껍나루)가 되었는지도 함께 알아볼 수 있겠지요.
이런 평사(한국에는 평사라는 이름의 지명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와 같은 경우는 서울의 우이동에서도 나타납니다. 북한산은 삼각산三角인데 주봉 백운대 옆에 인수봉과 만경대가 있어 '세三 귀角', 즉 삼각산입니다. 그런데 이 '세 귀'는 우이동 쪽인 북쪽에서가 아니면 실제로는 두 귀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동쪽에서도 세 귀가 다 보이긴 하지만 이때 만경대는 백운대의 높이와 크기에 눌려 귀 행세를 못해, 북한산은 우이동 쪽이 아니면 세 귀가 아니지요. 그런데 이 '우이牛耳'는 '소 귀'입니다. 옛날에는 '쇠 귀'였겠지요. 우이동 쪽에서 가장 잘 보이는 인수봉이 '소귀'를 닮았나요? 그래서인지 그 동네 이름이 '소귀골'이 되었습니다. '소귀'가 '쇠 귀', '세 귀'로 이어지는 것인지 그 반대로 되었는지 몰라도 이러나 저러나 큰 일은 없겠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신경 좀 쓰야 합니다. 그 우이동을 질러 흐르는 시내를 안내 지도판에 '소귀천'이라 적어 놓았습니다. '46'을 '사십육' 또는 '마흔여섯'이 아니고 더군다나 '사십여섯'도 아닌, 꼭 '마흔육'으로 읽도록 배운 사람이 써 놓은 모양입니다. '소귀내'라면 왠만해선 한자말이라 생각하지 않겠지만, '소귀천'이라 하면 우이동을 벗어난 타지 사람들은 아마 그것이 한자말인 줄로 알고 한자로 어떻게 쓰나 궁금해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자 쓰기 좋아하는 한 유식자가 있어, '소귀천沼鬼川'이라 쓰기라도 하면 '세三 귀角'에서 '소牛 귀耳'로 갔다가 '못沼 도깨비鬼'까지 가는 꼴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표에서 여러 학자들이 거의 모두가 합의한 것처럼 보이는 "새"="동東"도 이렇게 헷갈리는데, 나머지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 분간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이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들이 모여 동서남북의 옛 우리말은 저러 했는데, 그 말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이러 할 것이니 이 말로 새 '우리말 동서남북'으로 삼자고 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바꾼지 오래 되지도 않는데도 '자가'를 '尺果'로 쓴 이유를 모르고, '돌내'를 '石川'이라 쓴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달내'를 '達川'이라 쓴 경우들을 모아 둔 것도 없어 헤매는데, 무슨 수로 옛날 우리말과 한자말을 알아 예전에 바꾼 내역들을 단박에 찾아내어, 이것이 우리말이었으니 이 말을 새롭게 쓰자고 주장하겠습니까? (사실 그들의 연구가 새로운 우리말을 만들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까지 역사 시간에 '박혁거세거서간'이라 말하고 듣고 익히고 있지만, 정작 그는 그가 살아 있을 때 단 한번도 그렇게 불린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김부식의 뒤로 제법 시간이 지나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만 해도, 비록 한자로 적고 있었지만 그의 이름을 본래 뜻대로 '세상에 광명을 비추는 지도자'란 뜻을 가진 우리말로 부르고 있었던 듯한 흔적이 있는데, 한자로 빌려 적되, 꼭 우리말로 읽어 우리말을 기본으로 하던 정신을 지우고, 어느 시점에서부터 빌려 쓴 한자를 그대로 우리식 한자음으로 읽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그는 엉뚱하게 본디 이름과 지위를 잃고, '박혁거세거서간朴赫巨世居西干'이란 새 이름과 지위를, 그날 이후, 죽고서 천년이 훨씬 지나 새로이 얻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아직도 한자로 적고 일본말로 읽는 일본은 한자로 적는 것과 일본말로 읽는 기준이 대체로 남아 있고, 그 매체로 사용하던 축약 글자가 발전하여 오늘날에 그들의 문자인 '가나(假名)'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 쓰는 한자는 이미 빌려 쓰는 글의 수준을 넘어선 '가나'와 병행해서 사용하는 일본의 문자로 되었습니다. 다만 처음 한자로 적고 일본말로 읽었을 때, 그 근원에 따라 자기식 한자 읽기를 고집하여 그 기준이 제각각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일본으로 유입된 일군의 사람들이 일본에 오면서 가져 온 그들의 표기법이나, 독음법을 다른 일군의 사람들과 구별하는 방법으로 끝까지 고집한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명이나 인명 그리고 옛날의 관직 이름을 어떤 한자로 적었으며, 일본말로는 어떻게 읽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흩어져서 사라진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고구려에서 간 사람들은 고구려에서 쓰고 읽던 표기법을 고집했을 것이고, 백제며 신라 가야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만주의 부여나 말갈 여진도 더 말할 나위 없이 그들의 방법을 고집했을 테지요. 일본의 통일과 국가로서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중국과 직접 교류를 통한 중국식 표현법이 쓰기와 읽기에 영향을 주어 이전의 지명, 인명, 관직명의 읽기와 쓰기가 많이 통일되고 간추려졌지만 무엇보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단어 자체가 한자말이 아닌 경우에는 한결같이 한자로 적고 일본말로 읽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한자로 적고 바로 우리식 한자음으로 읽는 것으로 바꾸어 버려 우리말로 부르던 이름을 잃어버린 우리의 경우와는 달리, 훨씬 그 규칙이나 내역을 알기가 쉽지요.
그래서 일군의 학자들이 일본의 고대 지명을 찾아 연구하고, 그것들과 우리의 옛 지명을 비교해 보는 연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 연구는 아직 대처나 명소만 다루고 있어 그 속에서 일본 지명에 남아 있는 동서남북으로 우리말 동서남북을 또는 우리말 동서남북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히가시, 니시, 미나미, 키타라는 일본말 방위어사方位語辭를 사용하는 지명은 대처나 명소보다는 대처나 명소를 중심으로 나누어진 작은 지명에 많이 남아 살아 있을 것인데, 거기까지는 연구가 되고 있지 않다는 것만 알아냈습니다. 당분간은 일본에 남아 있는 우리말의 흔적으로부터 우리말 동서남북을 찾으려는 기대는 접고, 새로운 연구가 나올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대처나 명소가 아닌 전국 각지의 이름들에 대한 한자와 우리말 읽기가 모아 제법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더구나 앞에서 말한 할아버지 산소로 가는 길에 있는 '오덕골'이나 '가장골'처럼 아직 한자로 바뀌지 않고 살아 남은 우리말 지명을 모두 모으고, 그 다음 도로표지판에 적는 지명들을 우리말로 바꾸어 간다면 제법 괜찮은 자료들이 되어, 거꾸로 이번에는 이미 한자말로 바뀌고 한자말로 읽혀져 우리말이 사라진 곳의 이름도 되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여기저기서 한자 공부하는 사람이 늘어나서 영어와 함께 한자도 유치원에서 배워야 하는 요즘 세상이지만, 실제로 이제는 거의 완전히 모든 말을 한글로만 적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옛날 우리말 이름을 이두나 그와 유사한 차자로 쓰고, 그래서 두 벌 일의 번거러움을 덜기 위해 "모든 글자는(물론 그때는 글자가 한자 밖에 없었지만) 이두든 차자든 한자말이든 한결같이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읽는다"라는 식자들끼리의 암묵적으로 이어 온 관행을 깨고, 조금씩 여기 저기 우리말 이름을 찾아 새로운 동네 이름을 지어 나간다면, '자가'와 같이 옛 이름을 알고 있는 곳은 당장 옛 이름으로 돌려 놓아 간다면, 한 백 년 쯤 뒤에는, 우리도 미쳐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말 동서남북이 돌아와 있는 것을 기대해 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병든소의 기대와는 달리 요새 생기는 새로운 아파트 단지들 이름은 온통 영어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심지어 라틴어로도 붙였더군요!!
그래야 단지가 더 비싸 보이나 봅니다. 천박하다 말하면 쌍심지에 걸쭉한 말씀들이 몰려들겠지요. 그래도 간혹 그 사이사이에 보이는 우리말 이름들을 보면 좋아서 짓는 빙그레 웃음으로 보상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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