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와 손녀
병든소가 해외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 세상을 하직한 분이 계셔, 해외에서 돌아온 후 시간을 내어 그 분 산소를 찾았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배우자의 자리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습니다. 부모를 위해 늘 지극 정성이던 그의 아들이 미리 준비해두었던지 비석이며 상석도 잘 갖추어놓았더군요. 절을 올리고 산소를 나서다 아참 그렇지 하고 비석을 둘러보았습니다. 나중 제사 때 그 아들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 올리자 하고 비석을 찬찬히 읽어 측면의 기일을 메모지에 적어둔 후 가족들 가운데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 이름도 알아놓자 싶어 뒷면으로 돌았습니다.
누구 제법 글씨 좋다는 사람에게 받아 새긴 앞면의 한자 비명碑銘과는 달리 뒷면의 가족 소개는 우리말로 "아들"" 누구 누구 "며느리" 누구 누구 "딸" 누구 누구 "사위" 누구 누구라고 이름을 달아놓았고 아랫대로 가서는 "손자" 누구 누구 "손녀" 누구 누구라고 적어두고 있었습니다. "오십일곱" "쉰칠"은 아닌데 하면서 나오는 자연스런 웃음과 함께 한마디 했습니다. 한자말로 하면 한자말로 하고 우리말로 하면 우리말로 하지 "아들" "딸" 하다가 갑자기 "손자" "손녀"가 뭐야?
어 그런데 손자 손녀를 우리말로 뭐라 하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언니 아우 오빠 누나 아저씨 아주머니 다 있는데 손자 손녀는?
산을 내려오면서부터 찾기 시작한 우리말로 쓰는 손자 손녀를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할아들" "할딸"일까요?
손자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르고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부를 손자 손녀의 우리말이 없을 리 없잖아요. 옛날 할아버지들 하시 던 말씀 중에 "그 집은 '손'이 귀해"라든지 "이 놈의 '손' 왜 이리 성가시게 구나" 등에서 쓴 "손"이란 말은 우리말로 쓴 건가요 아니면 한자말로 쓴 것인가요? 만일 우리말로 쓴 것이라면 우연히 한자말이 우리말과 같아 우리말 위에 한자말이 덮히면서 우리말이 가려져 버린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손아들" "손딸" 일까요? "아들손"" 딸손"보다는 더 자연스레 느껴지는데요.
정말 우리말로는 손자 손녀를 무어라 부르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하면서 "손자" "손녀"는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렇다고 "조부" "조모"라 하나요?
('손자 손녀'의 우리말을 찾는 일에서 시작한 우리말 찾기가 '동서남북'을 거쳐 '집에서 사라진 우리말들'을 찾는 동안 제법 공부가 늘어이제는 손자 손녀의 옛말을 찾게 되었습니다.)
12세기초 손목이 송의 서장관으로 고려의 개경에 와서 역관들에게 적어달라고 부탁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고려말 단어장인 계림유사에는 지금까지 남은 단어가 350여개 있는데 그 가운데 친족의 호칭을 다룬 낱말이 스물戌沒이나 있습니다. 물론 친족은 아니지만 남녀노소를 부르는 호칭도 같이 여닐곱逸戌一急 개를 골라 고려말로 풀어 두었습니다.
역관들이 대충 적어주었는지 성의가 없는 고려말 표기도 제법 되고, 충분히 그때 쓰던 고려말을 찾아 적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동서남북의 경우처럼 손쉽게 그 당시 이미 한자말과 병행해서 쓰던 말은 그저 한자말로 다시 적어준 것도 쉰 개가 넘어 아쉽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의 화두인 손자 손녀의 우리말을 찾는 노력에는 그 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고마운 일입니다. 즉 "祖曰漢了秘"로 시작하는 친인척 호칭 가운데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孫曰了寸了달女+旦"이라고 손자를 가리키는 고려말을 적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말 "아"를 적었다고 보여지는 한자 "了"를 오기誤記로 보고 전부 한자 "Y"로 고친다면, '漢Y秘'는 고려 때는 '한아비/하나비'로 읽었을 것 같아 요즘 쓰는 말 "할아비/할아버지"를 가리키는 말로 보이고, 'Y寸Y女+旦'은 '아촌아달'과 비슷하게 읽었을 터인데, 적어도 고려 때는 손자를 가르키는 고려말이 따로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아! 고려사람들은 "할아버지"를 "한아비/한아버지?"라, 또 그 손자를 "아촌아달/아손아들?"이라 불렀네요!
그런데 이 말이 왜 지금은 죽어 있는 것일까요? 지금 살려내는 일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일까요?
그런데, 손목의 단어장에는 "漢了秘"라고 부르는 또 다른 친척이 적혀 있는데 바로 "舅"("舅曰漢了秘")입니다. '祖zu'와는 달리 '舅jiu'에는 여러 범주의 친척을 호칭하는 말로 쓰이기 때문에 약간의 혼란을 부릅니다. 祖zu는 아버지의 아버지 즉 두 세대 위 어른을 부르는 말인데 반해, 舅jiu는 비록 장인, 시아버지, 외삼촌 등을 부를 때 두루 쓴 말이긴 하지만, 한결같이 한 세대 위 어른을 부르는 말이라는 차이가 있어, 그 당시 고려사람들이 '한아비/하나비'란 말을 '祖'와 '舅'를 구별하지 않고 두루 썼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따르지 않나 여겨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 비록 계림유사에는 손자를 가리키는 말 이외에 다른 친족의 호칭으로 '了寸了女+旦'을 적은 것이 없지만, 그로부터 5세기가 지난 뒤의 훈몽자회나 신증유합에 '아찬아달(아는 모두 아래아)'을 '甥sheng'과 '姪zhi'라고 한 것을 보면, 만일 손목의 고려말 단어장에 "甥"이나 "姪"이 있었다면 앞의 "漢了秘"의 경우처럼 손자와 같은 "了寸了女+旦"으로 적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책들의 '孫sun'은 계림유사에서 풀었던 '아촌아달/아츤아들'은 사라지고 그 대신 '"손자" 손'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해 그 5세기 동안 두 세대 낮은 손자를 가리키던 말이 한 세대 낮은 조카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져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짚고 싶은 것은 최시진이나 류희춘의 시대에는 조카라는 말이 없었느냐 아니면 또 다른 친척의 호칭이었느냐 입니다. (누가 '甥sheng'이 외손자를 가리키기도 하니까 두 세대 아니냐고 하신다면 외손자가 그 말의 대세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러다 보니 처음 한자말 "孫"과 손자를 가리키는 우리말 "손"이 겹치면서 우리말 "손"이 죽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던 것이 손자를 가리키는 고려말 "了寸了女+旦아촌아달"의 "寸촌"을 보는 순간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손목의 고려말 단어장에는 "寸"을 적은 다른 단어들이 없어 고려사람들이 "寸"을 어떻게 읽었는지 비교해 볼수 없지만, 손님("客曰孫念")의 "손"은 "孫"으로 적고, 몸의 손("手曰遜")은 "遜"으로 달리 적으며 "손"이란 소리를 적었으므로 그 당시 고려사람들이 "寸"을 "손"이라 읽었을 수는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다만, "寸"을 중국사람들은 "cun", 우리는 "chon", 일본사람들은 "sn/sun"이라 읽는 것으로 보아, "了寸了女+旦"이라 적었지만 손자를 가리킬 경우와 조카를 가리킬 경우에 그 소리가 서로 달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손자의 경우는 "아손아달"에 가까운 소리로 조카의 경우는 "아촌아달"에 가까운 소리로 불렀지 않았을까, 그 뒤, 조선사람들은 "아손아들-손아들-손자"로 바꾸어 불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조카를 가리키던 "아찬아달(아는 모두 아래아)"의 자리는 자연스레 나중에 온 말 "조카"가 차지했고요.
또 하나, 고려 아이들이 할아버지와 외삼촌을 같은 말 '한아비/하나비'로 불렀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랬을 리가 없지요. 고려의 어른들이 손자나 조카를 같이 '아촌아달/아츤아들'로 불렀다고 믿어지지 않듯이 말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려 역관들의 무성의가 만들어 낸 혼란이거나, 옮겨 적는 동안에 일어난 오기誤記의 결과일지 모르지요.
손목이 송의 개봉을 출발하여 흑산도를 거쳐 개경에 도착하여 다시 개봉으로 돌아가기까지의 한 달여 동안 겪었을 사투리로 인한 혼란에다가 곳곳의 역관에 따라 달라지는 표현들을 겪다보니 서장관 손목은 스스로 분간을 위해 고려말 단어장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런 손목의 성의에 비하면 역관들의 무성의와 서툰 글씨가 더해져 만들어진 계림유사의 고려말을 본디 고려말과 근접하게 찾으려면 요즘 말, 그리고 조선말, 그 앞의 신라말을 통털어 우리말의 변천을 전체로 놓고, 그 사이 12세기초의 고려말은 어땠을까를 재구하는 노력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재구는 학자들에 맡기고,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요즘 우리가 쓰는 '아버지'가 들어간 친척의 호칭을 하나 예로 들어 볼까요? '아버지父'를 중심으로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祖父'가 있고, '아버지의 형(兄,만(아는 아래아), 맏,맏이)'인 '큰아버지伯父'가 있고, '아버지의 동생(弟,아우)'인 '작은아버지叔父'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버지의 친형제가 아닌 아버지 뻘의 친척을 '아저씨'라 부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형제 세대는 아버지거나 아저씨지요. 그런데 이 '아저씨'의 낮춤말 또는 사투리로 보는 '아재비'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 '아재비'는 어쩐지 아츤아버지, 아즌아비, 아자비, 아재비로 바뀌어 온 말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아주머니'는 아츤어머니, 아즌어미, 아즈머니, 아주머니로 바뀌어 왔고요. 그렇다면 아츤아들, 아츤딸, 아츤아버지, 아츤어머니의 '아츤'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세대 위 아래의 반계 친척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점점 쓰임새가 넓어져서 그런 또래의 위 아래 사람을 부르는 말로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고려 때 두 세대 아래를 가르키던 '아슨'과 한 세대 위아래를 가리키던 '아츤'이 조선 때는 '아슨'이 이미 발음이 비슷한 한자말 '손孫'에게 눌려 죽은 말이 되었고, 아츤은 윗대의 경우 아재비 아주머니로 바뀌어 살아남았고, 아랫대는 조카라는 우리말에 눌려 죽은 말이 된 것으로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상한 것은 요즘에 와서는 '아내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에 '아버지'가 들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우리말이 없어졌습니다. '아내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로는 장인丈人이니 빙부聘父니 하는 한자말 뿐입니다. 희한하게도 그 반대의 경우인 '아버지의 아내'가 '지아비의 아버지'를 부르는 말은 '시아버지'라고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사람들은 '아내의 아버지'거나 '지아비의 아버지'거나 모두 같은 호칭인 '舅jiu'로 부릅니다.
손목의 고려말 단어장에 따르면, 고려사람들은 시아버지라는 말을 쓰는 대신 "漢了秘"란 말로 시아버지나 장인을 불렀습니다. 조선사람들은 시아버지란 말과 장인/빙부라는 말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그 대신 조선사람들은 할아버지를 하나비라 부르고 있었지요. 할아버지를 가리키는 한아비/하나비와의 혼돈을 피하기 위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시아버지와 장인을 부르던 "漢了秘"를 죽게 만든 것일까요?
이야기를 조금 넓혀 가면 손목의 고려말 단어장에는 "漢了秘" 말고도 한자 "漢"으로 적은 단어들이 여럿 들어 있습니다. 친척의 호칭으로는 "嫂曰長漢吟", "女子曰漢吟", "妻亦曰漢吟" 등으로 적은 "漢"이 있고, "姑曰漢了彌"의 "漢"도 있으며, "天曰漢捺"의 "漢"과 "三十曰實漢"의 "漢"과 "鷺曰漢賽", "白米曰漢菩薩", "銀曰漢歲", "白曰漢" 등으로 적은 "漢"도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漢"이라 적었지만 고려사람들에게 그것의 소리는 서로 달랐습니다. "하늘"이나 "하님"을 적은 "漢"은 그 소리가 "하"였고, "한아비"와 "한아미"를 적은 "漢"은 "한"이었으며, "설흔"의 "漢"은 "흔"이었고, "흰새"나 "흰쌀"이나 "흰쇠"나 "흰색"의 '漢'은 "흰", "해", "핸" 등의 소리를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왜가리鷺를 큰 새로 보고 "한새"로 불렀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부르기에는 왜가리보다 큰 새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한자로 적은 "漢了秘"이지만 "祖zu"의 경우는 "한아비/하나비"가 고려말이었고, "舅jiu"의 경우는 "하아비"가 고려말이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하겠습니다. 적어도 친척들의 호칭에 관한 한, "漢"이 윗대를 가리킬 때는 큰, 높은, 등의 뜻을 가진 말로 "한"이었고, "漢"이 외가나 처가나 시집을 가리킬 때는 "여자"를 가리키는 고려말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고려사람들은 할아버지祖父와 할머니祖母는 "한아비/하나비"와 "한아미/하나미"라 불렀고, 시아버지와 장인을 부를 때는 "하아비"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사람들의 경우는 기록에서 찾을 수 없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친족인 한아비, 한어미와 구별하여. 나이 많은 어른들을 부르는 말로 따로 할아비, 할미라 했는데,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 말들이 두루 섞인 결과인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아내의 아버지를 옛날 사람들처럼 장인어른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어쩐지 그 말이 아내의 아버지를 낮추어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장인을 그냥 아버님이라 부르고 있는데, 지금부터 "하아버지,하아버님"로 부르면 어떨지요? '"하아버지"!, "아버지"께서 주말에 같이 등산 가자시는데 어떠신지요?'라는 말이 '"아버님!", "집의 아버지"께서 주말에 같이 등산 가자시는데 어떠신지요?'라는 말보다 훨씬 더 나아 보이지 않나요?
마찬가지로 손자 손녀보다 아슨아들/손아들 아슨딸/손딸이
조부 조모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더 나은 것처럼 더 나아 보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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