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대하여

영혼에 대하여(9)-이색의 눈물

병든소 2009. 4. 14. 17:05

9.이색의 눈물

 

가. 군자의 길  

 

자네가 먼 길을 마다 아니하고 찾아주시니 고맙고 또 반갑네. 오랫만에 자네를 보니 예전 성균관에서 자네와 같이 어울려 다니던 자네 동무들도 눈에 선하구만. 여기저기 부처付處를 바꾸어 다니다가 올봄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네. 그래 막내아들 종선이가 이 농막에서 지낼 만하게 손도 보고, 아래 마을에다는 제 거처를 마련해 두고 돌보아 주고 있어 목숨 부지는 하고 있는 게지. 그러다 보니 모두들 뿔뿔이 헤어져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적적하지만 어쩌겠나 그들 모두도 나와 같이 부처를 떠돌고 있을 텐데. 자네나마 다행히 일찍 관직을 버리고 향촌에 애들 가르치러 내려간 덕에 이 난리를 벗어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이야. 자네야 말로 군자 중에 군자 아니신가? 나?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아니야. 내가 어떻게 군자라 불릴 수 있겠는가?

 

다섯살 전에 글자를 구별하고 여섯살에 글을 깨치기 시작한 이래, 글을 읽고 좋아했던 것이 누가 이끌어서도 아니고 마치 연못에 물 흘러들듯 천성으로 조석 간에 이루어진 것 같았지. 책을 얻어 글을 읽고 아버지께서 그 뜻을 물으시면 생각대로 말씀 드리곤 했었는데, 아버지께서 말없이 웃으시면 내 생각이 성현의 말씀과 과히 멀지는 않은 모양이라 좋아서 더 분발하고 했었다네. 집에서 얻어 보는 책도 선생이 없으면 어려워 질 무렵, 여덟살 쯤 되었을 무렵부터 동네 학당을 다니기 시작했고, 얼마 있지 않아 한산 숭정산의 한 절에 다니며 책을 읽고 지냈다네. 책이라 한들 보통 아이들이 배우던 천자문은 글자 구별할 때 다 끝냈고, 명심보감이나 소학 같은 것도 선생 없이 아버지께 여쭙고 스스로 배웠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어. 거기다가 앞 뒤 문맥이 통하니 별 어려움 없이 자연히 몇 번 읽어 대강이 잡히면 그냥 외워지졌고, 그대로 외워지니 따로 또 같은 걸 공부할 일도 남보다 훨씬 적었지 않았겠나. 그 즈음 아버지께서 연경에 벼슬하러 가시어서 집안 살림이나 나의 공부도 모두 어머니께서 맡으셔야 했었지만, 한산이 아버지 고향이고 어머니의 살림살이가 워낙 살뜰하시어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어도 사는 데에 별 걱정 없어, 어머니께서도 나의 책읽기를 무척 대견해 하시면서 동네 서당에나 절에 공부시키러 보내시길 좋아 하셨지.

 

나도 어머니도 나의 공부가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절에서 하는 공부라 비록 유학 책을 읽고 익혔지만 알게 모르게 석씨 경전도 제법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네. 어린 나이에 이것 저것 너무 많은 책을 읽은 것 같기도 하네마는 그 덕분인지 나는 이미 그 나이에 성현들이 얼마나 깊이 사람들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지극한 관심으로 관찰하고 생각하고 이해하려 하였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지. 그리고 말이지 그러다 보니 그 어린 나이에 정말 궁금한 것이 있었다네. 글을 모르고 성현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은 미쳐 배우지 않아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은 사람도 성현의 가르침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 가지 않나 하는 궁금증이었지. 나중에 내가 자주 말하여 자네도 한번 들은 적이 있나 모르겠네마는 공부는 부모 자식 간에도 나눌 수 없는 혼자 만의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자연스레 고명하신 선생님들을 만나 그들의 공부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고 배우고 싶어졌다네. 이제는 이름 난 선생을 모시고 이러한 생각들에 대하여 지도를 받아야 좋겠다고 어머니께 말씀 올렸지.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집을 떠나서 강화도 교동의 화개산으로 유학을 갔다네. 이름 난 선생을 찾아 간 셈이지.

 

거기서 여러 사람을 만나 보니 그동안 내가 익혔던 유교경전들의 뜻을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렇다고 해서 누구의 설명은 맞고 어느 선생의 이해는 틀리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사안들이 한 둘이 아니었었다네.  그리고 그렇지 않나 사람마다 설사 그 뜻을 같이 이해하고 있다 하여도 그것들을 내게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을 더 소중하게 지니고 행해야 하는지 또 다르게 말하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경전의 깊고 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던 것도 큰 공부가 되었다네. 이런 때에 절에서도 제법 유학에 조예가 깊다고 이름난 성총을 만난 것은 내게는 축복이었어. 그로 인해 나는 시를 짓게 되었으며 그의 시작법에 대한 가르침은 그냥 보기만 하고 가타부타 말없이 돌려주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때 시 짓는 것이 참 즐거웠다네. 시가 좋은 것은 그냥 스쳐 지나던 일이나 것들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으로 내게 다가와서는 내게 말을 해 주는 거야. 날 이렇게 표현해 주세요 날 이렇게 불러 주세요 하고 말이지. 시를 생각하는 순간 세상만사와 세상만물이 최고로 선한 얼굴을 하고 웃으며 내게 손짓하는 것이었지. 나쁘고 악한 것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고 좋았다네. 자꾸 자꾸 쓰고 싶어 많은 습작을 만들었었지. 

 

어느날 성총이 내게 성균관의 시과 시험을 보라 한 것은 참 운명적이라 할만 했지. 시험을 보라 한다고 어머니께 말씀 올리니 어머니께서는 선생들이 왕왕 벌리는 학습 자랑인 줄 알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며 시험 값도 주시지 않았는데 성총이 혼자 나서 종이까지 사주며 시험을 꼭 보라고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통에 얼떨결에 마지 못해 시험을 보았는데 우연히 합격하였지 않은가? 정말 요행이었어. 내가 진정 겉으로 겸손 떤 것이 아니라 그날의 요행이 내게 일생의 목표를 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 뒤로도 내가 많이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고 그래서 요행이었다고 말했던 것이었지. 아직 공부가 무언지도 모를 나이에 그 자리에 앉아 일백 글자로 시를 지어 진사 급제라니  어찌 요행이 아니라 할 수 있겠나? 시험 보러 갔을 때는 성총이 하도 극성이라 경험이나 한번 해보자 나갔는데 덜렁 붙으니 얼마나 부끄러웠겠나? 어린 나이에도 나는 나를 부끄럽게 느끼지 않도록 공부에 매진해야 하겠다 결심하게 되더군. 앞으로 나는 군자로 살아야겠다고 결심이 되더군. 성총이 성균시에 날 내보내어 나 스스로 군자가 될 결심을 하게 해 준 것이지. 그때가 내 나이 겨우 열네 살, 참 어리고 여린 때였어. 자네가 날더러 군자라 말씀하시니 군자가 되기로 한 어린시절이 떠올라 내놓은 넋두리가 사뭇 길었구만.

 

 

나. 정치의 길

 

자네가 이렇게 나를 찾아준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야. 보시게 우리 주위에 같이 공부하던 선후학들이 다들 어디에 있는지. 포은은 죽었고 야은은 날 거들떠 보지도 않아 어디 있는지도 몰라. 사람들은 포은과 야은 만이 충절 있는 양 말하지만 나는 지금 어떤가? 열네살에 이미 나 스스로 군자가 되어 군자의 삶을 살겠다 한 사람이 예순여덟이 된 지금 종덕이 먼저 죽고 종학이 귀양살이 가는 길에서 횡사를 당하도록 살았으니 이게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인가? 자네가 찾아준 이 산 아래 그 농막만 해도 이 눈치 저 눈치 받아 가며 막내가 얻은 것이라네. 내가 자네를 이 산속 깊이 데려온 것도 인기척이라도 난다 싶으면 삐죽이 내 안부 묻는 것처럼 들락거리는 감시꾼 때문이야. 자네와 나눌 이야기 때문에 자네가 겪을지도 모를 겁난을 피하고자 이리로 오자 한 것이라네. 이런 지경이니 내가 왜 이리 남의 미움을 사게 되었는지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아닌가.

 

역성혁명이 일어났을 때 사정이야 자네가 더 잘 알 것이니 차치하고라도 창왕의 옹립에 대해서도 나에게 그 책임을 물어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나 공민왕이 시해되고 후계로 우왕을 세울 때도 신돈의 아들이라 수근거리기는 했어도 나를 위시해 당시의 고관대작들이 왕우가 아니라 신우라 믿은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 모두들 별 탈 없이 받들어 우왕이 14년이나 제위에 있었으니 그 간에 나라에 나와 우왕을 모시고 나라에 봉사한 이성계 조준 정도전 등도 우왕의 왕통을 가지고 시비한 일이 없었지 않았는가?  명나라를 치는 문제로 비록 조민수 이성계 등이 우왕을 폐위시켰으나 후사를 우왕의 아들 창으로 세우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 좋다고 한 것인데 내가 오백년 왕씨의 나라에서 벼슬해 놓고 십수년 신씨에게 충성했다고 힐난하니 이것이 과연 군자가 받을 욕인가? 백번 양보하여 정몽주가 한 말대로 비록 조민수의 위세에 눌려 그것이 좋겠다 동의한 것이 절조는 없는 일이었다 하나 이성계가 만일 창은 아니라 했다면 창왕이 등극할 수 있었겠는가?

 

창왕이 재위 일년 반만에 폐위되었던 사연도 왕씨의 혈통이 문제가 아니라 조준 정도전을 앞세운 이성계 무리의 경제적 안정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에 대한 찬반이 문제가 된 것 아니었겠나. 정도전은 내가 처음 관직에 나오기도 전에 주장한 토지제도 개혁을 알고서 정몽주나 우현보와는 달리 이성계와의 친분을 보더라도 나는 동의할 것으로 여겼던 것 같아. 그런 내가 반대하니 방법을 바꾼 것 뿐이지. 우리 모두 한마음이 되어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가르친 것이 기억에 생생하였던 것인데 어찌하여 같은 일을 놓고 서로 다른 길로 걸어 간단 말인가? 성현의 가르침이 하나인데 성현을 받드는 동도의 행동은 왜 서로 다르다는 것인가? 군자의 길은 과연 어느 길에 있었던 것인가? 내가 걸었던 길은 과연 군자의 길이었었던가? 나는 이렇게 달라진 우리들의 모습을 모두 다 함께 정주의 진정한 뜻을 공부하던 군자의 모습으로 다시 모이게 하고 싶었다네. 그래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워도 순순히 따랐지. 

 

 

다. 생계의 길

 

성총이 내게 베푼 또 하나의 은혜는 성균관에서의 공부였다네. 어린 나이에 군자의 길을 내 일생의 길로 세우고도 만일 내가 성균관에서 세상의 수재들과 익제 같은 세상의 현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비록 군자가 되었어도 초부의 군자가 되었을 것이요 산중의 처사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네. 군자의 길은 공부에 있다고 믿은 나는 성균관 입학시험을 준비하였지. 성균관에 들어간 열다섯에 초은을 만난 것은 성총에 이어 두 번째 내게 온 선생 복이었다네. 선생은 나에게 막연하기만 하던 군자의 일상 생활의 모습을 몸소 보여 주신 분이었지. 성균관에서 사서오경을 배우고 구제의 학생이 모여 시회도 하며 지냈지.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어. 열일곱에 동당시에 나가 화씨벽이라는 부를 짓기도 하는 등  한번 문과에 시험도 쳐 합격하기도 하였지만 나의 뜻은 벼슬보다 군자의 길에 있어 구제의 동무들이 조금씩 벼슬에 뜻을 보이기 시작하고 수업도 그쪽으로 흘러가자 나는 성균관을 나와 새로운 공부의 길을 찾아 나섰다네. 삼각산 감악산 청룡산 등지를 떠돌며 책읽기를 계속하였지. 내 인생에 있어 제법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 셈이었는데,이제 벼슬 길로 나가 부모를 영화롭게 봉양할 계제가 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군자의 길을 걷기 위해 끝 모르는 공부의 길로 들어갈 것인가 하는 정신적 방황을 한 것이었다네. 그 뒤에도 산중의 유람과 산중에서의 책읽기는 계속 되어 대둔산에 들어서는 정말 세상에 나올 것 없이 그곳에 머물며 살고 싶었다네.

 

원나라에서 궁궐 벼슬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내게 편지를 보내 온 것이 내 나이 열여덟, 그때는 이미 나의 산사 방황도 끝나 벼슬 길 보다는 공부의 길로 군자가 되기로 작정한 뒤라 아버지의 뜻대로 원나라로 유학하여 새로운 공부를 모색해 볼 욕심도 생기더군. 한번 마음이 정해지자 그 다음은 어려울 게 없었지. 어머니께서 성혼한 뒤에 가라 말씀하시기에 그렇게 하겠다 말씀 드리고는 바로 열아홉살 난 해 평주의 목단산에 들어가 유학 공부를 시작했다네. 주로 중국말과 몽골말을 공부 하였지. 한 일년 공부하니 어느 정도 말문은 트이는구나 싶어 이듬해 스무 살 나던 해에 원나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고 목단산에 들어가 익힌 중국어와 몽골말을 현지에서 일년 더 익히니 제법 말이 통하게 되었지 않았는가. 말이 통하니 자신도 붙고 마침 궁궐에 나가는 관리의 아들이라 특혜도 있어 국자감 생원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네. 우리 집안의 학문이던 주역 공부를  아버지의 동년인 우문공량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는 것과 오당선생을 만나 경전은 물론이고 역사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일생의 또 하나의 큰 선생 복이었고 영광이었지. 나의 공부가 날로 나아지고 깨침이 깊어질수록 어릴 때부터 읽어 놓은 책들이 그 역활을 다하기 시작했다네. 그래서인지 나는 공부에 빠져 공부하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네. 정말 행복했네.

 

아버지께서 오랜 객지 생활로 건강이 점점 나빠지시고 나도 아버지께서 집으로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버지를 집에 모셔다 드리려 스무셋 되던 해 가을에 잠시 귀국하였다가 겨울에 다시 원나라로 가 국자감에 또 들어 갔는데 이듬해 정월 말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 3년상을 모셨지. 상중에 공민왕이 즉위하여 아직 기틀을 잡지 못한 와중에 왜구가 자주 침략하여 나라가 위태로울 지경에까지 처하게 되었지. 비록 상중이나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당장 실시해야 할 다섯 가지 개혁안을 제시하였지. 그 다섯 가지 중에도 사실은 무반을 일으켜 세워 무력을 증강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자는 것이 제일의 개혁안이었다네. 그러자니 경비가 소요되고, 돈 나올 곳은 전국의 절집들과 고관들이 소유한 전답이라 이것을 다루는 토지제도를 바로 잡을 수 밖에 없었고 아울러 나라의 통치 철학을 굳건히 할 학문을 학교를 통해 가르치고 혹시 있을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이단을 눌러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 결국 다섯이라 하나 사실은 하나, 문무의 기운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에 보테어 비용 염출은 토지제도의 정비로 하자는 것이었다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사를 돌볼 수입이 없어지자 그것도 문제가 되었고 상중에 범문정을 흉내내어 상소를 올려야 할 정도로 나라도 피폐해져 공부한 사람이 제 한몸 좋다고 공부나 하고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 3년상을 마치고 난 스무여섯 살 후였다네. 어려서부터 드나들던 절에서 보고 들은 석씨 가문의 수양이나 득도의 길도 반드시 출가에만 있지 않음을 이미 잘 터득하고 있었던 차이라, 군자의 길이 홀로 진리를 탐구하고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며 성의를 다해 공부함에만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 세상에 나가 세상의 어려운 일을 풀고 더 많은 백성이 편안해 지고 잘살 수 있게 된다면 이것도 군자의 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지. 마침 익제선생께서 시험 감독관으로 나오셔 주관하셨던 5월 과거에 나가 을과 장원을 하고  9월의 향시에도 나가 장원하였지. 그 길로 시험이 있으면 다 보았는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거기서도 전시 제2갑 시험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그 전시를 주관한 원의 한림승지 구양현은 내가 아버지와는 달리 원나라서 벼슬할 뜻이 없음을 알자 나더러 공자의 학통이 해외로 나가 내게 전수될 것이라 칭찬해 주며 위로의 말을 해 주기도 하였다네. 

 

바로 귀국하여 한산의 어머니께 인사 올리고 이제 나이도 설흔에 가까우니 공부도 공부지만 벼슬길로 나가 집안의 생활도 도우고 그 동안 배운대로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말씀 올렸지. 그때도 어머니의 걱정은 원나라를 자주 드나들어 몸 다칠까 그것만 걱정하여 주셨다네. 어머니의 원행 걱정은 정말 내가 지난번 환갑이 지나 명태조를 만나러 몸소 집정대신의 자격으로 다녀올 때까지 이어진 것이 아니었겠나? 그 길로 들어선 벼슬길이 이런 험한 말로를 가져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벼슬길도 군자의 길이라 생각한 길이 언제부터 왜 어긋나기 시작했는지 참으로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네. 벼슬길에서 내가 남을 해한 적이 있었던가? 설흔살에 얻은 왕의 비서 생활이 오가는 문서를 보게 했고, 나라 살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으며, 나중에 간관이 되었을 때도 나라 살림을 나아지게 할 방도로 그 중에 눈에 띄는 소금과 쇠 거래의 폐단을 막고자 하였으나 염철별감을 낀 권신들 때문에 오히려 간관 모두가 좌천되어 나는 상주로 내려가게 되기도 하였지.

 

 

라. 또 다른 군자의 길 

 

설흔 넷의 나이에 겨울이 들며 쳐들어온 홍건적의 난리로 개경을 비울 때 왕을 모시고 안동으로 피난 가고 해를 넘겨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을 죄주는 교서를 쓴 일이 있었는데 그들은 홍건적을 한번 이긴 공을 다투기 위해 왕명이라 사칭하며 총병관 상장군 정세운을 죽인 자들이라 그들의 죄를 묻는 글을 내가 썼지. 이방실은 그 후 최영 이성계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결국 간자 김용의 흉계로 죽고 말았지. 안동에서 상주로, 상주에서 청주로 조금씩 개경 가까이 올라오던 가을에 청주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사직을 결심하기도 했지. 왕이 불호사 절에 밭을 주겠다며 어보를 받들고 시방에 도장 찍던 나 몰래 환관을 시켜 승패를 주려 한 일이 있어 내가 왕께 이런 일은 반드시 대신들과 논의한 뒤에 처리해야 한다니까 나의 도장 찍는 일을 직위해제하고 끝내 도장을 찍어 시행해 버렸지 않았는가. 시시한 것들이나 단속하고 정작 단속해야 할 것은 단속할 수 없는 처지라면 그런 일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사직서를 올렸던 것이었다네. 그 뒤에도 공민왕은 양촌이 말했듯이 나를 옆에 두는 것은 좋아하였으나 나의 말을 잘 듣지는 않았지.

 

그런 일 몇 가지를 빼면 나는 언제나 천성적으로 남이 잘 되는 것이 보기 좋아 그들이 잘 되도록 좋은 일 한것이 더 많았어. 왕의 미움을 받거나 신하들끼리의 다툼에 끼어 곤경에 처한 많은 사람을 구한 적은 많아도 남의 원성 살 일은 없이 살았는데 싶은데 말이야. 비교적 순탄하게 여러 관직을 돌며 열심히 일했지. 보람도 있었고.  나라에는 여러 가지 험한 일들이 일어났으나 한번도 내 일신의 평안과 가족의 안녕을 기화로 어렵다고 물러나 본 적 없었고 뒤로 숨어 동료가 먼저 나서주지 않나 기대해 본 적도 없었다네. 자네도 아시다시피 원의 세력이 약화되고 충정왕 이래 왜구가 범접하지 않은 해가 있었던가? 처음 삼남에서 출몰하더니 강화도까지 올라와서 노략질하였고 어디 그 뿐인가 두 번에 걸친 홍건적의 난으로 나라가 얼마나 피폐해졌으며, 최유가 원의 군사 일만을 빌려 덕흥군을 세우겠다고 의주를 덮친 일이며, 그 해 여진의 삼선과 삼개 등이 이런 혼란을 틈타 화주와 함주를 함락시키지 않았었나? 북쪽으로 간 원을 버리고 명을 택했을 때 명이 요구한 조공이 얼마나 무리한 것이었던지 민심이 들끊고 나리가 나지 않았는가? 결국 말 조공으로 제주도에서 민란이 나고 몇 년을 이어 이를 바로 잡아야 하는 일도 생겼지. 그러니 나라의 정치가 저절로 무인들에게로 옮겨갔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었겠나?

 

이 같은 일들 중에 아직도 참 잘한 일로 생각되는 것은 내가 학문에 대하여 한번도 관심을 놓아 본 일이 없었다는 것이라네. 홍건적이 휩쓸고 지나 가자 개경이 황폐해졌고 무엇보다 먼저 학교가 피폐해졌지. 게다가 아이들 가르치는 근본이 해이해져서 학문이 곤란을 겪게 되는 이치는 자네도 겪어서 잘 알고 있는 일 아닌가. 학문을 다시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생각했지. 왕을 앞장 세워 숭문관 옛터에 새로 성균관을 짓고 생원을 늘리고 내가 교육 책임자가 되어 정몽주 이숭인 등의 도움을 받아 현직에 있으면서 가르치기 시작했지. 나선 김에 아예 수업방법도 바꾸기로 하고 매일 번갈아 명륜당에 나가 경전을 가르치기로 했는데, 가르치다 혹 의심 나는 대목이 있으면 서로 의논하고 또는 따로 혼자 서로들 자기의 생각을 정리해서 서로 모자라는 부분이나 간과한 것들을 채워 반드시 정주의 뜻에 맞도록 우리도 같이 공부하며 가르쳤었다네. 이렇게 하니 소문이 났는지 정주학을 배우러 오는 학생이 떼를 짓지 않았나. 이로서 학자들이 사장을 외우는데 그치는 버릇에서 벗어나 심과 성의 이치를 연구하는데 더욱 힘써 공자의 도를 높이며 이단에 현혹되지 않게 되었으며 공명이나 이익되는 일에 매달려 사악한 일을 꾀하지 않게 되었으며 인의를 숭상하고 유풍과 학술이 빛나게 되었던 것이었다네.

 

 

마. 또 다른 정치의 길

 

이성계는 정말 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이라네. 한번은 공민왕이 이성계에 대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 대단한 인재를 얻었다 칭송했더니 왕이 나까지 끼워 문무에 인재를 얻어 기쁘다 하였지만 실제로 이성계는 왜구면 왜구, 여진이면 여진, 홍건적이면 홍건적 모두 싸워 이기지 않았는가?  나는 생각해 보았다네. 이성계 같은 무인이 있어 나라의 위태로움과 백성의 안위를 보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군자의 길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지. 그 사람이 그런 일을 할 때마다 그때마다 잊지 않고 치하의 글이나 시를 지어 칭송하였지. 이성계 역시 나를 보아 한번도 예를 잃은 적이 없을 만큼 각별히 나를 대하곤 하였지. 그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한번도 나쁘게 보지 않았고 나 역시 그의 일에 어긋나거나 방해한 적이 없었다네. 그런데 그의 수하들의 생각은 달랐어. 이성계가 정치적인 자리에 가고 정치적인 일을 할 즈음에 그에게 몰려 간 자들의 생각은 이성계보다 훨씬 더 정치적으로 과격하였다네. 한때 내게 배운 정도전이 그 부류의 최선봉에 있더군.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린 사람은 이성계 뿐만은 아니지 않은가? 좌군도통사 조민수도 같이 말머리를 돌려 왔지 않은가? 그들이 내게 우왕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운다며 누가 합당한지 물었는데 특히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 창으로 새로운 왕을 세우면 어떻겠느냐고 물어 그것이 좋겠다고 하였었지. 그래서 창왕이 들어서고 조민수가 정치 일선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마침 명에서 공민왕이 죽고부터 고려의 집정 대신이 입조할 것을 벌써부터 요구해 온 터라 차제에 내가 다녀 오겠다고 나서게 되었지. 모두들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다며 말렸지만 내가 할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여 이숭인과 김사안은 물론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도 끼워 명나라로 갔었다네. 명 태조의 후대를 받고 이듬해에 돌아와 보니 정치의 판도가 조민수로부터 실세인 이성계에게로 돌아가고 있슴을 알겠더구만. 내가 명나라에 있던 동안 큰아들 종덕이 아비보다 먼저 죽어 가슴 아픈 일도 잠시 내가 명나라에 가 있을 동안 조준과 정도전 등이 발의해 둔 전제의 개혁 즉 개인이 소유한 토지에 대한 개혁안이 논위가 되었는데 내가 이를 반대했지. 내가 왜 반대 했겠나? 토지제도는 반드시 바꾸어야 하였지만 한 정파의 이익을 위해 도모되어서는 안된다는 신조 때문이었지. 나라의 재정을 키우고 나라가 부유해지는 개혁이 아니라 이성계의 사병을 유지하고 수하의 공을 갚기 위해 하는 개혁이라고 본 것이지. 그 때문에 이성계를 등에 업고 정치적 실세를 구축하던 그들의 눈에 벗어난 것 같아.

 

왕이 바뀌고 새롭게 나타난 신진 정치세력의 전횡을 막지도 못하면서 높은 관직에 있는 것이 구차스러웠다네. 그것도 참으로 별일 아닌 것이었는데 나와 명나라에 같이 간 이숭인이 명나라에서 상인들의 물건을 많이 가져가 매매하는 등 고려 사대부의 면목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탄핵되었는데 아마 그가 나의 문하라 생각하고 그를 잘라 내어 나의 정치적 힘을 줄일 생각이었겠지. 이숭인은 홍삼 한 바구니로 그가 읽고 싶었던 책 한 짐으로 바꾼 것 밖에 없는데. 나는 이방원이 한 일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으로 이숭인과 바꾸자 할 수도 없고 해서 이숭인이 한 일을 설명하고 그가 고려 선비의 얼굴을 훼한 일이 없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앞앞이 나서 해명했으나 나는 그를 구할 수 없어 두 번의 사표 끝에 나와 버렸지. 그리고는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것이 내 나이 환갑을 넘긴 예순두 살 기사년 동짓달의 일이었지. 그때 나는 장단으로 내려가 있었다네. 어쨌거나 공양왕이 새로 등극하였으니 하례 인사 드리는 것은 당연지사, 입궐하여 인사 올렸더니 공양왕이 도와 주어야 하겠다며 벼슬을 주어 나가게 되었지.나라는 사람이 어찌나 벼슬 욕심이 많았는지 뿌리치지 못하고 일을 보았는데 유사 하나가 종묘에 있는 우왕의 대비 신주를 철폐하는 일로 나에게 물어 와 내가 아직은 당장 하기 그러니 천천히 하자 하였는데 오사충이 이 일로 나를 탄핵하며 전번에 사직한 뒤 여주에 유배간 우왕을 만난 일까지 얹어 죄를 물었다네. 나와 아들들이 모두 파직되었지. 벼슬을 받은지 열흘이 안되어 파직되어 다시 장단으로 갔다네. 그 뒤에 바로 우왕과 창왕을 시해해 버리더군.

 

 

사. 마지막 정치의 길 

 

그리고는 이듬해부터 창왕을 세운 일로 사월까지 탄핵을 받다가 결국에는 내가 함창으로 종학은 순천으로 유배 가라 명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만족할 수 없었는지 오사충과 전시가 장단으로 내려가 국문하라는 명을 받아 내었더군. 내가 심문에 불복한다고 고문을 가한다는 협박을 하면서 자백을 받으려 해 조민수가 내게 와서 왕실의 종친과 우왕의 아들 창 가운데 누가 더 적당한가를 물었다고 대답하였다네. 조민수는 회군한 실세인데다가 창왕의 외조부 이림과는 족친이 되기 때문에 조민수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창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그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고 대답하였다네. 그래서 함창으로 갔는데 오월에 다시 심문을 받느라 함창에서 청주 감옥으로 가고 조사가 없다 해서 다시 또 함창으로 갔다네. 내용은 자네도 잘 알 것이니 길게 말할 것 없지만 명나라에 간 왕방과 조간 등이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을 치려는 것을 내가 반대하자 나를 비롯해 열명을 쳐죽이고 우현보 등 아홉을 귀양 보냈는데 귀양간 재상들이 우리들을 보내 명조에 고하라 하여 왔다고 했다는 것이야. 이 이야기를 듣고 대간들이 나서 나와 아들 종학이 그리고 문하의 자네 친구들 이숭인, 권근, 우현보 등은 말할 곳도 없고 그 주위의 사람들 모두 하여 열명을 청주 감옥에 가두고 혹독한 심문을 하였지. 마침 물난리가 나서 청주성 남문이 무너지고 물길이 북문으로 나갔는데 청주성 안이 한길이나 되는 물 높이에 휩쓸려 관사가 물에 잠기고 옥관리는 나무위로 올라가 겨우 목숨을 구하는 등의 수재가 나서 민심이 들끊어 오르니 결국 공양왕은 열명을 석방하여 함창에 유배시켰다가 나와 아들 종학의 죄를 사하여 개경 밖이라면 우리들 편의에 따라 살아도 좋다 하였지. 그 해 동짓달, 예순세 살의 나이에 사면을 받은 것이라네.

 

이런 일은 계속되어 예순넷 되던 해 오월 또 다시 정도전이 년전의 오사충이 했던 것과 같은 내용의 탄핵을 하여 나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고 유월에는 사헌부까지 가세하자 결국 함창으로 유배를 가야 했고 그 동안 정몽주가 열심히 변호해 주어 9월에 석방되었지만 개경으로 올라 오는 길에 병을 얻어 중간에서 들어 눕는 통에 공양왕께 사은의 인사도 올리지 못하게 되어 죄송한 마음에 감사의 표문을 우선 올렸는데 왕이 나와 종학이 그리고 같이 연루되어 고생한 이숭인까지 역에다가 명하여 편히 모셔오라 하였다네. 이 번에는 내가 생각했던 바가 있어 개경에 도착하자말자 이성계의 집부터 찾았지. 이성계가 놀라 나와 자리로 끌며 술을 한잔 권하기에 선 채로 마시면서 서로 치하하고 덕담을 나누며 있다 왔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공양왕이 우리 두 사람의 다정함에 마음이 편했는지 공민왕도 명태조도 모두 잘 대접한 나를 자기가 어찌 해를 줄 수 이있겠냐고 했다 하더군. 이즈음 개경 사람들이 나에게 자주 개경을 드나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탈이라 꾸중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위태로움을 알아 병을 칭하고 나다니지 말것을 권유하는 자도 있었지만 그리고 자네 친구 양촌은 직접 이 소문들을 내게 전하며 그렇게 하길 바랬지만 나는 양촌에게 내 생각을 이렇게 대답하여 주었다네. 내가 만일 남들이 말하는대로 한다면 내가 거짓으로 왕을 그리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임금의 신하된 도리는 오직 왕이 부르면 와야 하고 가라면 가야 하며 죽는 한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 왕래를 가지고 근심하겠느냐고 말해 주었지. 자네도 아시다시피 양촌은 내가 어떻게 벼슬 살아 왔는지 잘 아니까 더는 말씀하지 않더군.

 

그리고 일은 이듬해 4월부터 터졌다네. 사헌부와 사간원이 나를 다시 탄핵하였고 나는 고향 한산으로 추방되고 두 아들 종학, 종선이 관직에서 폐지 당하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금주로 유배가게 된 사정이 생긴 것인데, 이 일은 결국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이루는 건곤일척의 판이 되고 말았지. 자네도 잘 아시다시피 사월에 간관 김진양이 조준과 정도전 남은 등의 죄를 논박하며 정도전은 광주로 조준은 이산으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남은 등은 수원으로 모이라 왕명으로 치죄하였는데 이들이 부처로 출발하기 전에 이성계가 해주로 사냥하러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다고 소문이 났지. 그 사이 나와 포은 우현보가 대간들을 내세워 조준 남은 정도전을 극형에 처하도록 상소를 올리게 하였는데 이 때 이성계가 가마를 타고 해주에서 부터 급히 개경으로 돌아오자 정몽주가 이성계의 집에 병 문안하러 가는데 조영규 등 너댓 명이 숨어 있다가 정몽주를 격살하고 말았지 않았는가? 그리고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앞서 정몽주가 조준 정도전 남은등을 죽일 것을 청한 일로 정몽주의 문하를 국문하게 되었는데 결국 김진양이 서로 모여 의논한 사실을 모두 자백하니 이숭인과 나의 두 아들 종학, 종선이 그리고 정몽주의 동생 정과도 모두 국문 끝에 시인하게 되었지. 모두 죽게 생겼는데 이성계가 자기는 이제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이 오래 되었다라고 해서 김진양과 아이들이 다시는 같은 일이 없을 것이라 종묘에 나가 고하는 것으로 하고 신분을 박탈하였으나, 대간들이 계속해서 죄 주기를 청하자 혹은 귀양 보내고 혹은 사형을 시키게 되고 말았지.사월에 벌어진 일로 정몽주가 죽고 연루된 나의 두 아들은 원지로 유배되었고 나는 양강 밖으로 가라 하여 금천에 유배되어 갔다가 6월에 여흥으로 오게 되었다네. 우리는 법으로 다투던 정치를 그들은 철퇴로 다투었다네. 정몽주가 죽고 나니 입 밖에 없던 사람들은 모두 지리멸렬 일패도지 하고 말았지 뭔가.

 

이렇게 해서 내가 유배지에 있을 때인 7월에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가 스스로 왕이 되어 즉위교서를 발표하였지 않았는가? 그때  나의 직첩이 모두 회수되고 나는 서인이 되어 바다 먼 곳의 섬으로 유배시켜 종신토록 같은 계급에 끼이지 못하게 하고 아들 종학도 같은 벌을 주면서 매를 백대나 맞게 하는 등 온갖 죄를 꾸며 나를 극형에 처하려 했지만 나는 거짓으로 꾸며낸 죄에 복종할 수 없다 하고 비록 죽어서라도 올바른 귀신이 되어야 하겠다고 항변했더니 이성계가 이 말을 들었는지 유배지를 장흥으로 옮겨 주었다 하더구만.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다시는 붓을 잡지 않았다네. 그리고 이내 8월이 되어 나는 아들 종학이 유배지를 옮겨 장사로 가던 중에 거창에 있는 무촌역에서 채복사 손흥종의 손에 목졸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네. 자네도 보아 알겠지만 그 아이도 열네 살에 성균시에 합격할 정도로 참한 아이였는데 설흔두 살의 나이로 아비의 이름 때문에 비참하게 죽으니 내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종덕이 죽었을 때에는 옆에서들 수군거리기도 하였지만 그럴 리 없다 내가 말려 잠잠하였는데 이제 다시 종학의 죽음을 듣게 되니 기가 막혀 눈물도 말라 버리더라. 장흥에 와서 아비의 유배살이 시중에 매달린 종선에게 눈물을 가리고 종학이 죽은 연유와 의미를 풀어 말해 주고는 앞으로 자손들 누구도 과거에 나서지 말라 당부했다네. 벼슬길이 군자의 길이 아니었슴을 깨닫게 된 것이지. 그러니 이제 자네가 나를 군자라 부를 이유가 없네. 내가 군자라니. 내가 군자라니. 말이 되는가? 자네를 만나 오늘 이 산중에서 이 기막힌 이야기를 하니 막힌 눈물이 터져 그치지 않는구만. 그저 울음만 나오니 이런 소인이 어디 있겠나? 어허 군자라니.

 

 

 

등록후기

목은의 시 한 편이 이 글을 쓰게 하였다. 목은이 자신의 일생을 군자로 살기로 작정하였으나 과연 그랬는지 회의하는 마음을 쓴 글이었다. "(살아가는)중에 (군자의 뜻이)명리에 갉히어 세상(사람들이 사는 것)과 크게 다른 게 없다" [中爲名利蝕 與世無大異]라고 한 구절을 보고 그의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목은은 역성혁명 이후 정치적 핍박 속에서도 이성계에게서 만은 그의 우정 어린 관심을 받았으나 결국 예순아홉 되던 해 피서하러 개경의 벽란도 포구에서 배를 타고 여주로 가던 중 뱃길 여행 나흘 째 여주 근처의 제비여울목에서 이르러 막내 아들 종선이 임종하는 가운데 운명하였다. 목은의 갑작스런 죽음을 목도한 한 배에 탔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정도전 조준 등의 술책이라 수근거리었다 한다.  

 

이 글은 성리학이 정치 이념으로 바뀌는 장면에 등장하였던 려말선초의 성리학자들 간의 이념과 정치 투쟁에서 보여준 그들 영혼의 모습을 그려 보기 위해 우선 그 중심에 있었던 목은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고, 나머지 성리학자들의 모습들은 차차 끼워 넣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