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베르히마이어 부인의 정조
가.전쟁으로 흩어진 가족
베르히마이어 부인은 한스와 파울이라는 두 아들과 일제라는 이름의 딸을 둔 세 자녀의 어머니였다. 전쟁은 이미 패색이 짙어 비록 그들이 살던 베를린까지는 아직 연합군이 진출하지 않았으나, 이미 러시아군은 폴란드 접경을 넘어 국경에 가까운 엘베 강변의 작은 마을들에 진출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진출지의 인근에서 독일군을 찾아 보기 어려웠을 정도였다. 러시아군은 미국군과 영국군에 뒤지지 않기 위해 베를린 교외에까지 측후병을 보내고 있었다. 베르히마이어 부인도 베를린의 교외에까지 나가 자신과 세 자녀를 위한 식량을 구하러 다녔다. 남편 베르히마이어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웨일스의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던 부인은 살아 견디면 다시 온 가족이 한데 모여 함께 살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베르히마이어 부인은 베를린의 교외에까지 수색 나온 러시아 측후병에게 붙들려 가게 되었다. 그날도 부인은 식량을 구하러 나온 길이었는데, 아이들에게 한마디도 못한 채 아무 이유도 없이 잡혀가, 결국 우크라이나쪽 볼가강 인근에 있던 러시아의 독일인 수용소에까지 끌려가게 되었다.
한편 베르히마이어는 전쟁이 끝나자 웨일스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그가 제일 처음 해야 했던 일은 흩어진 가족을 찾는 일이었다. 어느날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버려진 아이들은 이제 큰 아들 한스가 두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결국 그들은 부랑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 베르히마이어가 그들을 다시 찾았을 때, 열 살 난 막내 파울과 열두 살의 딸 일제는 빈 학교를 수용소로 개조해 부랑아를 보호하던 곳에 있었고, 열다섯 살 난 큰 아들 한스는 알렉산더 플라츠의 지하실에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찾았지만 아내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기아와 혼돈으로 도시 전체가 공포로 덮여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베르히마이어는 아이들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헤매고 다녔다. 그로서는 그의 아내를 찾지 않고는 가정을 다시 재건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였다.
나. 상황윤리狀況倫理
우크라이나의 독일인 수용소에 있던 베르히마이어 부인은 수용소 소장의 배려로 자기 남편이 전쟁에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자기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친절한 소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수용된 사람이 몸이 몹시 아파 병을 치료하기 위해 후송이 필요한 경우이거나, 아니면 임신을 하여 출산을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자기가 석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인은 며칠의 고민 끝에 결심하였다. 결심이 서자 베르히마이어 부인은 수용소의 보초에게 자기가 처한 사정을 말한 뒤 임신시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드디어 임신한 사실이 확인되고, 석방된 베르히마이어 부인은 베를린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남편 베르히마이어는 물론 모든 가족들이 아내가 어머니가 어떻게 해서 가족들에게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진심으로 그의 아내의 귀가를, 그들의 어머니의 귀가를 환영하였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자 모든 식구들은 그 아기 때문에 가족이 따뜻한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 아기를 기쁜 마음으로 귀하게 아껴 주었다. 아기의 이름을 짓는 때가 되어 가족 모두가 교회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식이 끝나자 아이들을 모두 돌려 보내고 난 뒤, 그들 부부는 따로 목사를 만나 보기를 청하여, 아내가 방금 이름을 얻은 디히트리히를 가지게 된 연유를 설명하고, 이러한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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