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단락)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9.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1)

병든소 2010. 12. 29. 23:47

9.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 Thesmophoriazusai("테스모포리아 축제를 경축하는 여자들", 극작가와 여자들)

 

이 연극은 "새들"처럼 두 아테네 시민 간의 대화로 시작하는데 이들 둘 중 하나는 에우리피데스이다. 따라서 "새들"에서는 둘 중 누가 그 연극의 사건을 주로 전체 구도에 따라 이끌어 가는 책임이 있는지 약간 의문이 생길 수 있었지만, 이 연극에서는 전체 구도의 줄기가 영리한 작가에게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도입부에 에우리피데스의 처가 친척인 므네실로코스는 작가에게 아침부터 어디로 가는지도 알리지 않고 여기저기 끌고 다닌다고 불평한다. 연극의 첫 마디가 "구름"의 도입부를 연상시키는데, 그러나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에는 유일하게 문자 그대로 "오 제우스"로 시작한다. 에우리피데스는 그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말하기를 거부한다: 그가 이제 무엇을 보게 될 것인지 들을 필요가 없다. 그 친척 남자는 에우리피데스가 그가 어떤 것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받아들이고; 그는 절대 그럴 만한 것을 그런다고 이해한다. 그 현명한 사람은 한 사람이 그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어디까지나 최상이며, 그리고 전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소 간 제자리를 벗어나는 그런 세상과, 그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통에 귀 기울이는 것이 정당한 세상과의 자연스런 차이에- 그냥 단순히 듣는 것과 단순히 보는 것의 자연스런 차이에- 근거한 구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비록)그 친척은 에우리피데스가 영리하게 말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알고 있지만), 그는 듣지 않으려는 본능이 보지 않으려는 본능과 다르다는 근거로 그는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가 뜻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에우리피데스는 그 친척의 결론에 대해 반박하려 시도초차 하지 않는데- 아마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혹은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에테르가 고안한 차이까지 들먹이며, 듣지 않으려는 본능과 보지 않으려는 본능이 어떻게 다른가를 가지고 그의 질문에 답한다. 그 친척은 다시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해서 그가 에우리피데스의 현명함에 대해 존경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데; 그래서 그는 그 현명한 사람이 여기저기 끌고 다닌 통에 그가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것도 잠시 잊어 버린다. 다행히 몇 발자욱 더 가서 그 둘은 목적지에 도착한다. 에우리피데스는 그 친척이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도록, 그렇지만 조용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그에게 작은 문을 보여 준다. 그러니 작은 문의 의미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들을 필요가 있고; 그래서 그는 반드시 조용히 해서 들어야 하는데, 즉 그는 보고 들어야 한다. 그는 에우리피데스로부터 그 문이 비극작가 아가톤의 집에 딸린 문이라 듣는다. 그 친척이 기억하는 한 아가톤을 본 적이 결코 없는데, 에우리피데스는 그 친척이 악명 높은 여자 행세의 동성애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고 확신한다. 아가톤의 하인 하나가 에우리피데스의 추측대로 아가톤의 시쓰기 활동의 성공을 위해 제사에 바칠 불과 매화나무 가지를 들고 나타난다. 에우리피데스와 그 친척은 하인이 하는 짓을 지켜보기 위해 몸을 숨기고, 그 하인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에테르, 바다, 새들 그리고 야성의 짐승들까지 존경심으로 조용히 하라고 엄숙히 요청하는데, 아가톤이 이제 드라마를 하나 쓸 참이기 때문이며; 아가톤의 시의 크게 기교적이고 인위적인 것이 존경심의 침묵을 대단히 엄숙하게 요청한다. 그 친척은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하면서, 과시와 허풍의 역거움에 죽으려 한다. 하인이 같은 회원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알게 되자, 그 친척이 먼저 그 다음에 에우리피데스가 몸을 드러낸다. 하인과 친척 간에 오고 가는 적대감은 에우리피데스가 권위를 가지고 중단시키고, 그는 하인에게 아가톤을 부르라고 지시한다. 자기와 자기 주인의 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하인은 그의 지시를 간청 정도로 간주하고, 지금은 겨울이라서 그의 시를 적당히 부드럽게 하기 위해 시인은 따뜻한 햇살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르지 않아도 이제 곧 아가톤이 밖으로 나올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래서 생긴 약간의 지체로 에우리피데스는 신경질이 난다. 그 친척은 그런 참을성 없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데, 왜 에우리피데스가 아가톤을 만나고 싶어 안달하는지, 즉 왜 작가가 이른 아침부터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대단한 사람은 아무 설명을 하지 않고 지시하는 버릇이 있고; 그는 그의 의도를 감추는 버릇이 있다. 이제 그는 그의 친척에게 바로 그날에 그의 인생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하는데; 테스모포리아 축제를 위해 모인 여자들이 그들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또한 그들을 비극적으로 다룬 그의 범죄 행위에 대한 판결을 통과시킬 것이다. 그는 비극작가 아가톤이 필요하다면서, 여자로 변장하여 여자들의 모임에 가서, 자기를 변호하여 달라고 설득하려 한다. 그 친척은 에우리피데스의 영리한 꾀가 인상적이다: 여자 행세로 악명 높은 여자처럼 생긴 아가톤과는 달리, 에우리피데스가 여자 역활을 하기에는 에우리피데스는 너무 남성적이다.

 

이 연극의 주제는 그래서 한 작가를 성토하는 것이다. "아카르디아 사람들"에서 한 작가를 성토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러나 그 연극에서 성토 받은 사람은 한 작가이기에 성토당한 것은 아니다. 그는 희극작가였고; 재판을 받아 보는 은전도 없이 곧 바로 처형될 위험에 처해 있었으며; 그리고 그는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에게 약간의 신세를 진 다음 달아났다. 이제 에우리피데스 자신이 그의 작품으로 인해 성토당하는데; 그 스스로가 조치하는 방법으로는 구박을 피할 수 없어, 다른 비극작가의 도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에우리피데스는 소크라테스와 공통점이 많다. "구름"에서 소크라테스가 구박 받는 것을 보았는데, 그러나 겨우 한 사람에게 해를 끼쳤을 뿐인데다가 그의 변론술로 재판으로 벌 받는 것을 면하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정치적으로나 재판에 의해 구박당한 것은 아니었고; 그렇지만 에우리피데스는 (아테네의) 모든 여성들을 공격하였고, 그가 합법적으로 나타날 수 없는 모임에서 그의 경우가 결정될 것이어서, 그의 변론술은 아무 소용이 없다. "구름"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저질렀던 잘못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범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잘못을 지켜볼 수 있었지만; 그의 비극 작품으로 저질러 버린 에우리피데스의 잘못은 일반에게 잘 알려진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와 그 친척 간에 나누는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 간에 나누는 이야기를 연상시키고; 그 모든 것들 중에 눈에 띄는 것은 그들 두 짝들 간의 차이점이다. 소크라테스는 "구름"을 이끌어 가는 전체 구도에 대해 책임이 없고, 또 스트렙시아데스가 그에게 가하는 행동에 대해 표면적으로 아주 무기력한데;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을 이끌어 가는 사건에 대한 전체 구도를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가 "구름"의 주인공들인지 아닌지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의 주인공이 에우리피데스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우리피데스는 여자들을 비극적으로 다루고, 그들을 나쁘게 말하기 때문에 성토당한다. 물론 어떤 사람을 비극적으로 다루는 것이 죄가 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을 희극적으로 다루는 것은 거의 그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과 같아서;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적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특히 도시와 데모스를 희극적으로 다룬 것으로 클레온에 의해 비난 받는데<주1>; 여기서는 소크라테스가 받은 구박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아리스토파네스가 받는 구박의 근거에 비해 에우리피데스가 구박을 받는 근거는 훨씬 더 약하거나, 아니면 희극에 더 알맞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가톤이 놀라운 방법으로 등장한다. 그가 밖으로 나올 것이란 알림은 두 번 있었다(66,70). 사실 그는 극장의 기계 장치에 의해 수레를 타고서 나온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408-9) 에우리피데스 그 자신을 보이게 했던 그 방법대로 그도 보이게 되는데, 그렇지만 소크라테스의 문을 두드리거나 에우리피데스의 문을 두드리던 것과 같은 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필요하지 않으며;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와는 대조적으로 아가톤은 부르지 않아도 나타난다. 그는 거의 완전히 타락하고 음란한 여자처럼 보인다. 비극을 생각하며 그는 부분적으로 신들을 칭송하라고 쉽게 설득할 수 있지만, 어떤 신들을 칭송해야 하는지 모르는 처녀들의 코러스 자격으로 송가를 노래하며; 그는 그들에게, 아폴론, 아르테미스 또한 레토를, 테스모포리아 축제에서 기리는 두 여신(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영광으로 칭송하라 말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송가에 대해 말이 없다. 그 친척이 아가톤에게 그 노래가 여성스럽고 음란한 달콤함이 있어서 그것에는 아가톤이 유명한 그런 성적 욕구가 일어난다고 말하는데, 비록 그가 아주 늙었지만 그에게 그 작가가 완전한 수수께끼이다: 그가 젊은 남자라는 분명한 표시가 있고, 반면 그가 여자라는 똑같이 분명한 표시가 있는데; 그의 노래를 근거로 하여 그의 성별을 구별하는 사람이 있을까? 질문을 아가톤에게 던지면서, 그는 은연 중에 아이스퀼로스의 운률들을 사용하는데, 그 운률들은 아이스퀼로스의 드라마 가운데서 디오뉘소스에게 건네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아가톤을 거슬리지 않는다. 작가란 언제나 그 자신을 주제에 따라 적응토록 하기 때문에 그의 성별이 그의 노래를 가지고 분별될 수 없다고 그는 대답한다. 그가 여자들의 드라마를 만들 때 그의 옷차림이나 태도는 여성적이고, 즉 여자들을 모방하고; 그가 남자들의 드라마를 만들고자 할 경우에 그의 육체는 그에게 근본적인 성격을 제공할 것이었다. 그가 버릇없고 거친 것 모두 싫어하기 때문에, 그는 사티로스와 같은 드라마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작가에게 중요한가는 그가 남성스러운가가 아니라 그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가이다: 아름다운 작가는 옷차림이나 태도로 그 자신을 적절하게 치장하는 것으로 그의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한, 주제가 남자냐 여자냐에 관계없이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들 것이다. 아가톤은 그가 쓴 작품들이 극단적으로 인위적인 성격인 것을 그것이 그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연역하는 것으로 정당화하는데; 다른 작가들과도 같이 그도 아름다운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본성이 어지자지라 할 것까지는 없겠으나 아주 남성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는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고; 그렇지만 이 사실이 그를 극장의 신에게 연결시켜 준다.

 

 에우리피데스는 그 친척과 아가톤이 나누는 대화를 조용히 듣는다.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그의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무리 해도 칭찬이 꾸어 온 것처럼 보일 것 같지는 않은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그가 아가톤이 행한 일들을 칭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그가 아가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친척이 아가톤에 대해 내놓는 비난이 전적으로 에우리피데스가 좋아하는 대로였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친척을 다루는 아가톤의 능란한 솜씨는 그가 바라고 기다리던 여자들 다루기를 위해 좋은 논쟁이 되었고; 그의 자기 정당화는 결국 최고로 가능한 수준이, 그리고 가장 높은 자화자찬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친척과 아가톤 간의 대화는 에우리피데스의 관점에서 보면, 에우리피데스가 아가톤이 행한 일들을 칭찬했을 때보다 훨씬 더 낫다. 그렇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그는 그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아가톤의 태도가 그가 작가로서 초년이었을 때의 그것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는 말로 끊어 놓는다: 그는 아가톤의 노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솔직히 그가 여자들에 대해 나쁘게 말했다고 그들이 그를 망치려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청원자로서 아가톤에게 왔다고 말하는데; 아가톤 혼자만이 여자로 변장하고 여자들 모임에 참석하여, 그 대신에 변론하는 것으로 그를 구할 수 있다: 아가톤만이 에우리피데스의 가치에 대해 좋은 태도로 변론할 것이다. 왜 그 스스로 여자들 모임에 가서 변호하지 않느냐는 아가톤의 질문에, 그는 첫 째로 잘 알려져 있고, 두 번째로 늙고 수염이 나 있어, 그는 아가톤이 가진 그런 모습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답한다. 아가톤은 단지 그에게 닥칠 위험을 핑계로 에우리피데스의 요청을 들어주기를 거절하고; 그는 그 거절을 에우리피데스 자신의 신중함이나, 혹은 생명 구조의 가르침에다 근거를 두는데; 에우리피데스는 그 자신이 잠입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 그 친척은 여자 역활을 하는 아가톤의 거절에 분노하고,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아가톤에 대항하는 것을 막고; 그는 단지 절망적 상태에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그 친척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그 친척은 그 현명한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아마도 결코 없었고, 그래서 그가 좋아하는 대로 그를 아무렇게나 사용해 달라고 그에게 요청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민첩하게 그 제안을 수락한다: 그 친척이 원래는 아가톤에게 맡겼을 여자들의 모임에서의 역활을 맡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척은 아마 에우리피데스보다 더 여자 같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에우리피데스로 하여금 잠시라도 그 자신이 여자로 변장을 하고 여자들의 모임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도록 이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아가톤에게 그 친척이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고, 구비물도 빌려 달라고 부탁한다. 아가톤은 에우리피데스 그 자신이 디카이오폴리스에게 그랬듯이, 에우리피데스의 부탁을 들어준다. 에우리피데스는 아가톤의 면도기와 횃불로 그 친척을 면도하고 털을 그을린다. 그 불쌍한 늙은이는 상당한 불편함으로 고통 받지만 아주 잘 견뎌 낸다. 그런 다음 에우리피데스는 아가톤에게 여러가지 여자들의 옷가지들을 부탁하는데, "어쨌든 그것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 아니지만"이란 말을 더한다(251). 그 자신을 경건한 처녀들과 비슷하게 만들면서, 어떤 신들에 대하여 송가를 짓는 것을 보여 주고 듣게 해 준 적이 있는 아가톤이나,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상응하는 장면에서 에우리피데스처럼 결코 어떤 신들에 걸고 맹세하지 않는다. 아가톤은 물론 에우리피데스의 부탁을 들어 그 친척이 여자처럼 보이게 정성을 다해 옷을 입히고; 옷을 입히는 동안 그 친척은 그 모습에 대해 여자다운 관심을 키운다. 아가톤이 마지막으로 필요한 옷가지를 에우리피데스에게 건네자마자 그는 스스로 수레를 타고서 들어간다. 에우리피데스가 해야 할 마지막 남은 유일한 일은 그 친척에게 여자들의 목소리를 흉내내도록 주의를 주는 것이고, 그리고 그 친척의 요청으로 만일 어떤 나쁜 일이 그에게 발생할 경우,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를 구할 것이라고 맹세하는 것이다. 맨 처음에 그는 제우스가 아닌 제우스의 거주지인 에테르에 걸고 맹세하는데, 그 친척이 단순히 거주지로는 걸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는 모든 신들에 걸고 맹세한다. 에우리피데스가 그의 "힙폴뤼토스Hipploytos"에서 위증하였다는 잘 알려진 사실 때문에 그 친척은 완전히 안심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명령에 따라 여자들의 모임에 가기 위해 서두른다. 에우리피데스 그 자신은 집으로 간다.

 

아가톤이 그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희망이 내던져졌을 때, 에우리피데스가 그 친척과 함께 있었던 것은 한 조각의 그의 행운이었다. 다른 말로, 에우리피데스 스스로는 마련하지 못했었는데 아리스토파네스가 출구를 마련해 주었었다는 것, 혹은 에우리피데스가 영리한 것보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더욱 더 영리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일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이것이 정확하게 아리스토파네스의 주장인데, "개구리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가 에우리피데스의 영리함에 대해 존경하는 것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아가톤이 그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기 때문에, 그가 그 친척을 데리고 갔을 가능성을 무시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명백히 여자들의 구박의 대상이 아니었던, 여자 같고 영리한 아가톤이 에우리피데스의 가장 바람직한 변호인이었을 것인데; 그러나 아가톤에게 그의 힘이 넘치는 경쟁상대를 위하여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릴 우정이라는 강력한 동기를 충분하게 기대할 수는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친척은 그가 이중의 결함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에우리피데스를 도우려 나서는 친척이라는- 단지 처가쪽 친척임에 불과하지만-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210). 눈에 띄게 거절하는 아가톤의 시위는 에우리피데스가 부탁을 하거나, 혹은 그 친척에게 그의 도움이 되라고 지시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인데; 그 친척은 만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에우리피데스가 결코 그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며, 혹은 그 자신을 위험 속에 노출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그 자신의 눈으로 본다. 이것이 여자들 모임에 남자가 있다는 것을 어느 여자도 모르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에우리피데스가 어떤 경우에도 남자가 가지고 있는 여성용 화장 용품을 획득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아가톤의 집이 그 친척을 여자처럼 옷을 입힐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에우리피데스가 그를 구박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그를 돕겠다고 제안하는 한 친척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항시 동료인 카이레폰은 그가 그의 존경하는 주인과 같이 비난을 받는 신세여서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도움도 될 수 없었다("구름" 1505-7). 에우리피데스의 죄는 소크라테스의 죄보다 더욱 악명이 높을 수도 있고, 그래서 작가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큰 위험에 처했을 수 있는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작가는 그의 주된 관심이 높이 떠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이거나 걱정인 사람만큼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계속)

 

 

<주1> 85 그리고 181-82; cf. "아르카나이 사람들" 630-31 그리고 "말벌들" 1284-91.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9-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