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추기경이 최근에 그의 집무실에서 가진 기자들과의 간담회는 그가 이번에 새로 내놓은 책 '하느님의 길 인간의 길'이 나오게 된 배경도 설명하면서 몇 가지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도 하는 그런 것이었답니다. 어떤 기자는 추기경이 가장 말을 많이 한 것이라 했는데 이상하게도 기자들이 전하는 정진석 추기경의 말은 도무지가 요령부득이어서 도대체 왜 그런 정리가 되지 않은 소식을 전하나 싶어 그날 간담회와 관련된 인터넷의 여러 뉴스들을 모두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그랬는데도 기자들이 전하는 기사들 가운데서 감기와 같은 것이라는 동성애에 대한 말이나 국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빼면 정작 정진석 추기경이 하고 싶어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그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고령이나 50권에 가까운 책을 내었고, 아직도 자기 생각을 (혹은 그가 믿는 신의 뜻을) 정리하여 신자들 앞에 전하는 그가 그렇게 요령부득한 말을 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 기사 내용을 오히려 의심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일군의 사제들이 정진석 추기경의 말을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또 다른 사제가 나와 추기경이 4대강사업을 찬성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자, 드디어 추기경의 그 요령부득한 말이 무슨 말인지 그리고 왜 요령부득하게 말해야 했는지 왜 기자들조차 요령부득의 기사를 썼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해가 진짜로 정진석 추기경이 4대강사업을 찬성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인지 하는 새로운 의문을 불러왔고, 그런 의문을 풀기 위해 다시 한번 인터넷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그날 간담회와 관련된 뉴스들을 정리해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들은 결국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뭉쳐졌습니다.
첫째, 추기경이 새로 낸 그 책은, "구약의 왕과 예언자들의 대결 상황을 정리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언자를 찾고자 한 것"이고, "추기경도 지도자인데, 지도자는 백성을 위한 자리라, 예언자가 필요해서, 스스로 깨우치고 경고하기 위해 쓴 것"이다.
둘째, "주교회의는 4대강 사업에 대해 자연을 파괴할 위험과 난개발의 위험이 보인다고 했지, 4대강사업을 반대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전한 것도 된다."
셋째, "4대강사업은 자연과학자나 토목공사 전문인들의 일이지, 종교인들의 영역은 아니다. 따라서 4대강사업은 결과를 보고나서 판단할 일이다."
(다른 내용이라 해야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는 두 말하면 잔소리 정도의 이야기여서, 굳이 다음 순번으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만, 동성애에 대한 추기경의 한마디는 그의 4대강을 보는 시각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라 끝에서 4대강과 관련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요점으로 정리하고 나니 자연스레 추기경의 발언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먼저 지도자와 예언자에 대한 추기경의 생각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의문을 풀어보려 합니다.
"예언을 하는 것이 지도자의 최고 덕목"이라고 평소 병든소가 생각하고 있었기에 따로 토를 달 필요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어떤 지도자가 하는 예언이 "무엇에 대한 예언이냐"와 "언제 하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해서,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가 진짜로 한 지도자로서 예언하는 것인지, 또는 지도자가 아닌 권력자로서 혹세무민하는 것인지, 혹은 권력자에 붙어 아부를 하는 것인지를 분간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추기경 자신도 스스로를 지도자라고 자부하였듯 세상에는 세속에서의 지도자들 숫자만큼이나 경건심을 이끄는 지도자들도 많이 있어 왕왕 서로가 서로의 진부를 구별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정진석 추기경이 예언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축복할 때에도 그리고 나중 그 지도자가 권력자가 되어 세상을 황폐하게 하여 그의 왕홀을 거둘 때에도 모두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진석 추기경의 눈에 예언자가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스라엘의 경우와 같은 "축복 받은 지도자가 나중 권력자로 바뀌는 일"은 없고 오로지 초지일관 진짜 지도자로 남아 있기 때문인가요?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로 지도자 따위는 없었고 처음부터 권력자만 있었으며, 그래서 그를 지도자가 아니라 권력자로 축복했기 때문에 예언자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었던 때문은 아닌가요?
처음부터 권력자가 지도자인 것처럼 나설 수 있었던 이유를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지도자라고 자임하거나, 혹은 선거나 법에 의해 지도자라고 임명받거나,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끼리 그 안에서 지도자로 추앙 받거나 해서 지도자라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런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쌓을 수 있을 만큼의 많은 반대자를 쌓아 두기 마련이고, 그리하여 그를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그 반대자들을 자기의 또 다른 한편으로 보기는 커녕 반대자이기에 없애야 하는 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말로는 스스로를 지도자라 하지만, 하는 짓은 피할 수 없이 권력자가 되고 말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달랐습니다. 처음은 기름 부어 축복할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지도자가 지도해야 할 사람들의 뜻을 가려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지도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가 권력자로 바뀌는 장면인데, 이런 장면에서 이스라엘에서는 예언자들이 반드시 나타나 그 권력자의 왕홀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는 그런 예언자가 없습니다. 추기경의 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진정한 지도자만 있고, 그 지도자가 권력자로 바뀐 경우가 없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는 않겠지요?
새들은 남을 탓하는 버릇이 없습니다. 그들은 공기의 저항이 없다면 더욱 잘 날 수 있다며 공기를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기 덕분에 양력을 얻어 오늘도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날개가 하나였으면 좋았을 텐데 둘이 있어 퍼득거리기가 힘들다고 두 날개를 탓하지 않아 그 두 날개 덕분에 어떤 경우에도 균형을 이루면서 여기저기 원하는 곳을 찾아 다닙니다.
이것이 그들 스스로 진화하고 또 자연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인지 혹은 창조자가 있어 그 설계에 따른 것이든지 간에, 사람들이 새들로부터 서로 상충되고 서로 다른 것의 조화를 배우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아직도 진화가 덜 된 때문이거나 아니면 설계 자체가 그렇게 된 때문이겠지만, 어떻든지 간에,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새들과 달리 아주 영악하여 쉽게 남을 탓하는 버릇이 있는 인간은 자기가 자신을 위하기보다 오로지 남을 위해 사심이 없이 지도하는데도 사람들이 자기가 하자는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남들을 비난합니다. 바로 지도자가 권력자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심지어 신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할 또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법들을 꺼내 들어, 무뢰한 권력자는 그들을 죽이고, 소심한 권력자는 그들을 가두고, 교활한 권력자는 겉으로는 죽이지도 가두지도 않는 척하며 그들이 생업을 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괴롭히는 방법으로 못살게 굽니다.
자연히 지도자는 없어지고 저항만 받고 필요도 없는 날개 한 쪽을 더 달고 있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불평만 남은 권력자가 있을 뿐입니다. (같은 신을 믿는 것으로 보이는, 한 작은 정치단체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일군의 사제들에 대해 북한을 찬양하는 사람들이라 비난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이런 권력자가 예언자들이 입을 다무는 동안 직접 예언을 합니다. 사실 그의 입에는 예언의 말보다는 저주의 말들이 더 가득하지만 말입니다. 축복과 감사하다는 말보다는(입으로는 그리 말하면서) 복종과 기다림을 요구하며 두고보면 좋아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자기는 미리 결과를 잘 알아서 나아감에도 불구하고 우매하기 짝이 없는 자들은 어떤 중요한 일의 결과를 눈으로 보지 않고는 잘 모르기 때문에 이래 저래 말들이 많지만, 일단 해 놓고 나면, 그 결과물을 보고 나면, 좋아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종하고, 또한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신도 먼저 해놓고 나중에 "보기에 좋았더라"하지 않았나요? 해놓고 나중에 보면 좋아할 것이라는 이런 예언자는 바로 신적인 존재지요. 뉘라서 그 앞에서 그 예언을 참언이라 하겠습니까?)
여기서 추기경이 한 말을 만나게 됩니다. 결과를 보아 판단할 일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지도자임을 자부하던 추기경이 갑자기 예언하는 것을 포기하고 결과를 보아 판단하자고 말합니다. 신을 포기하고 세속의 권력자가 한 신적 예언을 그대로 외워서 말합니다. 신적 예언이란 말이 너무 무거워 버거우니 말을 좀 가벼이 바꾸면 그러니까 "나도 물라 잠자코 있으니, 너희들도 잘 모르면 아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잠자코 있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라면 이미 같은 경건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가타부타하고 있으니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빠져 있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세속의 권력자만은, 추기경이 권력자의 예언을 그대로 외워서 말하는 그런 과정에 관여되었든 아니든 간에, 나중에 보면 좋아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을 추기경의 추인까지 받으며 진짜 신적 예언으로 성공시켜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속의 권력자와 다른 지도자나 예언자의 역활이 서로 뒤바뀐 유사한 경우가, 즉 권력자가 예언을 하고 예언자는 그것을 추인하는, 서로 예언의 역활을 뒤바꾸었던 장면이 추기경이 책으로 낸 그 구약 속에도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의 눈에 예언자가 아니 보이는 까닭은, 바로 예언을 해야 할 사람이 신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게다가 전문가도 아니어서 예언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전문가인 (척하는) 권력자가 예언하는 것을 따르라고 하기 때문은 아닌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신의 영역"과(백번 양보하여 "경건심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말 그대로 "전문가의 영역")에 대해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의 말에 불경스럽게도 의문스러운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과학의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누구 한 사람이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인간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말해도, "신의 영역"을 늘 지키고 있어야 할 추기경이라면 그것이 본성적(선험적)으로 얻어진 영역인지 양육(후천적인 경험)에 의한 것인지를 따져, 그것이 어느 경우에도 신의 설계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어야 할 판인데, "신의 영역"에 있어서, 그것이 여러 신들끼리의 영역 분활이라면 또 모를까, 전지전능하다는 유일신의 영역에 있어서, 그 유일신의 세 위상에 따라 영역을 나누는 것이라면 또 모를까, 신을 따르는 고위의 사람이, "과학의 영역"과 "신의 영역"을 나누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어떤 것을 "과학의 영역이라 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닿지 않는 곳이 없다고 믿는 신의 영역"에 대하여 경건심을 가지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대단히 당혹스럽고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중세의 교회라면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던 사안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경우가 비단 마녀사냥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정말 많았습니다. 신을 이성으로 이해하여도 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물론, '잘은 모르기 때문에'라는 안전판(?)을 두기는 했지만, 이것마저 위험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사제들이 각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라서 세상 일에 대해 말 할 수 없다면, 세상에 사제들이 왜 말을 하는 것인지요? 그래도 사제가 신에 대해서는 전문가니까 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한다 한들, 만일 그 신이 과학을 위시한 인간의 생활과 영역을 나누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그 신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 신에 대해 전문가라는 사제의 말을 듣겠습니까?
나중 추기경의 대변자가 설명한 대로 4대강사업을 찬성하거나 혹은 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건심들이 4대강사업을 반대하는 주교회의의 결정에 난감해 하므로 그들의 경건심의 자유를 위해, 4대강사업에 대한 찬반이 개인의 소신의 문제이자 "신의 영역"이 아닌 과학과 토목 전문가들의 일일 뿐, 신에 대하여 경건심을 가지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태도를 요구할 사안이 아니라는 뜻으로 말을 한 것이며, 더우기 추기경이 4대강사업을 찬성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왜 애시당초에 사제들이 모여 그렇게 말하지 않고, 왜 뒤늦게 추기경이 요령부득하게 말하고, 그 추기경의 말을 대변인이 다시 풀어서 말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는지,
즉 왜 추기경이 "결과를 보면 안다"는 권력자의 예언을 따르라며, 주교회의의 예언을 부정하고, (정확하게 말해서 새로이 해석하고,)또, 과학이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들리는 위험스런 말을 했어야만 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왜 로마 교회는 과학의 문제를 과학자에게 맡기지 않고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였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이상한 재판이었다고 말할 뿐 잘못된 재판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왜 "과학의 영역"에 있는 진화론을 "신의 영역"에 있는 창조론의 훼손자라며, 여태 시비를 걸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 말입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황모의 가짜 연구에 대해서 배아의 생명성 여부를 문제 삼아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만일 생명이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서 반대하였었다면, 4대강사업이 추기경이 말하는 과학이나 토목 건설자의 영역이 아니라 진짜 "생명의 영역"이라는 것을 정말로 몰라서 모른다고 말하며, 잘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4대강사업은 그 결과가 어떤 문제를 일으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제일 나중의 문제일 뿐이고, 정작은 제일 먼저 그것이 필요하느냐의 문제이며, 필요하다 해도 시간의 문제이며, 범위의 문제라는 것을 모두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천문학적인 돈을(그들은 전체 예산의 몇 퍼센트 밖에 되지 않으며, 강 유역에서 땅장사로 다시 벌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지금 거기에다 써야 하느냐라는 문제와, 내일 밤이면 필리핀으로 야반 도주하는 사람처럼 (임기가 5년 밖에 없어 몰아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위성이라는 면에서 자신 없어, 해 놓으면 좋아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며) 한꺼번에 벼락치기로 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 문제를 따져 본 다음 그래도 해야 한다면, 모르지요, 자연과학과 생명이 나오고, 토목 전문가가 나와야 할 것인지 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오직 권력자의 '해 놓으면 좋아한다'는 예언이 세상을 지배하고, 한술 더 떠서, 알 수 없는 오묘한 신의 조화인지 아니면 세속 권력자의 노회한 조화인지, 경건심들의 지도자인 추기경은 주교회의의 예언을 부정하고, "결과를 보아 알 일"이라며 사제들 예언의 가치마져도 부정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을 받들어 모시는 추기경이 "신의 영역"으로부터 떼어내어 "과학의 영역"이라 이름하여 과학을 신으로부터 독립시키면서 제법 세련되게 속세 권력의 입김에서 눈치보는 경겅심들을 구해 준 것 같지만, 그는 가이사의 것을 신의 것 안에 두어, 훌륭히 속세 권력의 핍박을 피하면서도 신의 것을 끝까지 지킨 예수를 본받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세상에 과학이 아닌 것이 어디 있다고 과학이라며 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다니 원 참. 그리고는 이 시대에 예언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사뭇 걱정스럽게 말하니 정말 그 속내가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참으로 같잖지만, 동성애를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반대하고, 감기에 비유한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신과 늘 같이 있어 신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 이게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판정 또한 맞다고 인정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암수가 있는 이유 중에 생식이 최우선일 것 같아 구차하게 무성생식이나 복사라는 과학 기술을 가지고, 그 이유를 생식에 한정하는 것을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동성애를 암수를 둔 신의 뜻에 어긋나서 반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암수가 있는 것들 중, 특히 현대의 인간은 암수가 생식을 위해 암수로 있는 시간보다는 생식을 회피하며 암수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으며, 이런 성적인 것을 떠나, 기질이나 능력이 서로 달라 대부분 생활의 반려로서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보완하면서 암수로 같이 사는 시간이 거의 전부일 만큼 많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생식을 회피하면서 암수로 지내지만 암수인 것이 서로 맞지 않아서거나, 그런 성적인 것을 떠나, 기질이나 능력이 서로 다른 것이 반려로서 서로에게 의지가 되거나 보완이 되지 않아서, 같이 살아도 행복하지 못하고 심지어 서로 헤어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경우, 암수가 반드시 생식만 위해 존재하지도 않으며 생식만을 위해 그렇게 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성애자가 단순히 생식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신의 뜻을 어긴 것이므로 동성애를 반대한다면, 생식을 하지 않는(못하는 경우는 제외하고라도) 이성애자가 훨신 더 많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다시 말해 생식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현실적 관점에서 그들을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왜 그렇게는 볼 수 없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암수 간에 생식을 위해서가 아닌데 성행위를 하는 것은 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피임과 낙태에 대한 태도를 보라), 또 암수 간에 그런 성행위를 서로가 즐길 수 없어서이든, 혹은, 같이 사는 것이 서로에게 의지가 되거나 보완이 되지 않아서이든, 서로가 헤어지는 것을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비난하면서도(이혼에 대한 태도를 보라), 암암과 수수 간에, 암수 간에 하는 성행위와 비슷한 행위를 하고 기질이나 능력이 비슷한 암암과 수수가 생활의 반려로서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 보완하며 같이 사는 것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비난하게 하는 신의 뜻이 반드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로버트 케네디처럼 주는 대로 받아 열 명이 넘는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미성년이나 성년이라도 시도 때도 없이 원치 않는 아이를 낳는 것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 것 같지도 않으며, 서로가 맞지 않아 서로에게 고통을 주면서 같이 사는 것이 헤어져 새로운 상대를 찾거나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좋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생식을 하지 않는다고 암암 수수끼리 행복하게 산다고 신의 뜻으로 비난하는 것에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직 동성애를 하는 이유가 본성 때문인지 아니면 양육(환경) 때문인지도 모르고, 치유해야 하는 것인지(아직은 추기경처럼 비정상적인 것으로 대부분 인식하므로) 또한 어떻게 치료하는지도 모르면서,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정진석 추기경이 4대강 사업을 모르는 것과는 다르게, 동성애를 단지 암수를 둔 신의 뜻에 어긋난다며 반대하고 또 그것을 감기에 비유하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동성애는, 그것이 은밀하게 이루어져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거의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병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 해도 전염성이 강한 감기와는 아주 다르고, 동성애가 혹 본성이나 양육(환경)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 해도, 병원에 가면 2주만에 약국에 가면 보름만에 그냥 집에서 버티면 반 달만에 낫는 감기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감기에 비유한 까닭이 아주 궁금합니다.
더군다나 감기 환자는 쉽게 알아볼 수 있지만 동성애자들은 당사자거나 그런 관계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실제 별로 관심이 없어서인지 오히려 피부색이 다르고 모습이 다른 짝들보다 더 눈에 띄지 않아 잘 알 수 없는 판에 과연 무슨 뜻으로 무슨 연유로 무슨 근거로 감기에다 비유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크리스마스 덕담을 하면서 모든 국민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만 왠지 공허하기만 합니다. 4대강이 완성되어서 권력자나 추기경의 예언에 따라 정말 그것이 보기에 좋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금의 한강과 같아서 한강을 끼고 있는 아파트 사람만 경관이 좋다며 집값이 올라 좋은 것처럼 4대강 사업 역시 집이 있고 특히 강변을 끼고 있는 집을 살 수 있는 사람만 좋을 뿐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귀신 씨나락 까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만 합니다.
대통령에 출마할 것도 아니면서 모든 국민들의 행복을 비는 공허함보다는 가지고 채우지 못해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텅빈 마음을 신이 채워 주기를 빌고 그들의 텅빈 손은 그래도 돈이 제일 많은 정부가 4대강사업하는 돈으로 가지도록 한마디 하는 것이 바로 정진석 추기경이 찾는 예언자의 일일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뜻도 있다고 정진석 추기경이 말했답니다.
이런 말은 제법 신의 뜻을 헤아린 예언 같습니다.
그래서 정말 언제 이런 구세주가 다시 이 세상에 올지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집니다.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주 작은 비석"을 위하여 (0) | 2009.07.0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