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

"아주 작은 비석"을 위하여

병든소 2009. 7. 3. 18:46

 

노무현의 '아주 작은 비석'을 세우는 일로 모이신 분들께,

 

노무현의 "아주 작은 비석"을 세우기 위하여 몇몇 분들이 모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평소에 잘 알고 지내거나 한 적도 없고 간접적으로라도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마는, 노무현의 '아주 작은 비석'을 위해 모이신 여러분들의 이름과 활동 영역 정도는 평소에 잘 들어 알고 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세상의 많은 분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가족들의 의견도 듣고 하면서 비석의 모양이나 크기, 비명의 문안이나 새겨 넣을 글꼴도 이것 저것 공을 들여 정해나가시겠지요. 제가 아는 것은 노무현이 "아주 작은 비석'을 세우라고 가족들에게 주문하였다 하는 유언 내용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평소에 노무현과 얼마나 가깝게 지내셨는지 알 수 없으나, 설마 노무현의 유언 그 속에 다빈치 코드같은 암호가 들어 있다고는 믿지 않으시겠지요? 그러시다면 "아주 작은 비석에"에 대한 각별한 느낌이 있는지라 해인사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까 합니다.

 

 

 

혼자서라도 여행을 하겠다고 여기저기로 길떠나기 시작했던 어린 시절부터 해인사를 자주 다녔었습니다.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이 있었기 때문이거나 백련암에 성철이 있었기 때문이거나 해서가 아니라 굳이 이유를 말씀드린다면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이 거기 있었고, 그 길의 끝에 하루 저녁 묵고 갈 절 아래 마을이 있었으며, 그리고 마을을 지나 해인사가 있었고, 해인사를 지나 오르는 가야산 가는 길목에 백련암이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보살과 같이 포근한 가야산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주 가다 보니 고등학교 다닐 때에 한번  거기 가서 정말 반가운 학교 친구 찬근이를 우연히 만난 적도 있었는데, 찬근이 아버지께서 절 아래 마을 학교 교장으로 와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어느 여름 날 복학한 뒤라 방학 때가 제일 심심했는데, 인호가 해인사를 구경시켜 달라고해서 같이 갔다가, 거기서 육영수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성철이 절집에 왔으면 절이나 많이 하고 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절집 밖으로 세상에 알려질 때에도 해인사를 다녀오곤 하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근처까지 갔는데도 그냥 올 수밖에 없을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자꾸만 해인사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서 서운한 마음을안고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합천에 상홍이의 외가가 있어 방학 때에 놀러 간 적이 한번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를 둘러보고오지 못한 섭섭한 기억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냥 지나칠 때라도 늘 마음 속으로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해인사가 있다는 걸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게지요.

 

오랜 해외 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성철의 이야기가 신문에 나오면 해인사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철이 입적했다 들었고, 다비를 하고 사리를 수습하였다며, 사리를 안치할 부도의 모양을 공모한다는 소식도 들었고, 얼마 뒤 선택된 부도의 모양이 신문에 실린 것도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해인사가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성철 부도의 당선작은 현대적인 조형감이 괜찮다는 느낌을 갖게 하였지만, 아무래도 같이 지낼 부도 숲의 다른 동료들에 비해 너무 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었습니다. 무엇보다 신문에 난 사진으로는 크기를 짐작할 수 없었고요.

 

해외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고 난 뒤는 한동안 서울 생활의 자리를 잡느라 조금 분주하게 지낸 탓에 바로 해인사로 가지 못하고, 이듬해 여름에서야 해인사를 갈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부모와 여행하는 것이 좋기는커녕 귀찮기만 할 때였습니다. 해인사에 대한 옛 기억이 찾아가는 길과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즈음, 아내보다 아이들이 더욱 놀라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내는 이미 수 차례 같이 해인사를 다녀 온 터라 비록 절 아래 마을의 모습이 달라지고 절로 가는 길도 낯설기는 하였지만, 분위기는 그대로 해인사일 줄 알았다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해인사가 아닌 것 같다고 느낀 것이었고, 아이들은 그 사이 부모에게 들었던 곳과 완전히 다르다고 느낀 것 같았습니다.

 

해인사의 정취라고는 개미 허리만큼도 없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해인사를 찾아 접어들었을 때 결정적으로 놀랍게 바뀐 것은 푸른 유리로 막힌 건물이었습니다. 저것이 무엇일까 아내와 아이들의 내기가 시작되었고, 이윽고 푸른 유리벽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내도 아이도 내기를 이길 수 없었지요. 왜냐하면 그 푸른 유리벽이 승보박물관이었거든요. 하하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해인사를 거쳐 백련암까지 다녀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그 푸른 유리벽을 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먹었습니다. 아이들과 아내는 이미 새로운 내기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푸른 유리벽 건물 안의 보물은 보물일까 아닐까?  모두들 웃으며 낄낄거리기만 했지 아내도 아이들도 아무도 들어가보지 않아 , 그 내기도 앞의 내기처럼 아내도 아이들도 이긴 사람이 없었습니다.

 

놀라움은 절 아래 마을로 가는 길 옆에 마련된 성철의 부도를 보자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하! 성철의 열반의 심연은 이렇게 깊이를 들어내는구나! 숲을 엎고 갈고 펼쳐 마련한 왕들의 무덤만큼 넓은 터에,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커다란 부도에, 수도꼭지만 달면 지금이라도 당장 물을 뿜어 올릴 것같은 모양의 성철 부도는 성철의 돈오돈수가 무엇인지 단박에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어디에선가 읽은 듯한 성철인가 탄허가 했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다비를 하되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

 

아난도 한 때 싣다르타가 죽기 전에 조용히 주먹 쥔 손으로 비밀의 교의를 전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지만, 성철이 시봉하던 제자에게 무슨 밀지를 전했는지 모르겠으나, 보우든 보조든 그 누구도 아무 상관없는 희한한 성철이 거기에 있었지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해인사가 달라진 이유를. 푸른 유리벽의 성보 박물관을 짓고, 성철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 넓은 주차장을 마련하느라 사람들이 사는 절 아래 마을에서부터 부처를 모시는 중들이 사는 절까지 가는 길 그 언저리를 모두 베어 버려 천둥 벌거숭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원효의 무애행은 잠시 사라지고 만 일이었는데, 성철의 부도는 적어도 100년 이상 갈 오흔을 보이고 있음에도 그 제자들이 해인사에 남아 있는 한 이제 지울 수도 없어, 그렇게 속절없이 성철이 했다는 해탈의 증표로 그 우스운 심연을 대중에게 들어내며 서 있겠지요. 성철의 수십 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 것이지요. 그리고 그 후로 저는 아직 해인사를 찾은 적이 없습니다.

 

 

다시 노무현의 아주 작은 비석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노무현이 살겠다고 지은 집은 그의 기념관으로 하기 참 좋아 보였습니다. 밖으로 난 높고 푸른 유리벽도 없고, 벽들이 안으로 모여 그 안에서 유난 떨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장소로 보였습니다. 당장은 미망인이 살고 아들이 살아도 좋겠지요. 때가 되면 노무현 기념관으로 더 할 나위 없어 보이는 집입니다. 노무현 기념관을 짓기보다는 있는 집을 쓰고 가족들이 새집으로 비켜주는 것이 옪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석지관의 글도 받고, 크기가 사방이 여섯 자가 넘고 두께가 한 자 반 가까운 비석을 준비했다더군요. 바닥에 눕힌다고 큰 돌이 작은 돌이 되고, 큰 비석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돌로 만든  비석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아주 큰 비석입니다. 모르지요. 호태왕의 비석에 비하면 아주 작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런지요. 노무현이 주먹 쥔 손으로 남긴 밀지를 받지 않았다면, 노무현의 부탁대로 '아주 작은 비석' 하나를 그에게 주십시요. 노무현은 그의 그 간결한 유서에 무슨 할 말이 없어 일부러 "아주 작은 비석"을 주문했겠습니까?  '아주 작은'이라 말하면, 여러분이 나서서 작은 것처럼 보이는 아주 큰 것으로 해줄 것이라 믿었을까요?  

 

노무현의 '아주 작은 비석'을 세우기 위하여 모이신 여러분,

 

아무래도 지금 준비한 것은 나중에 마련될 노무현 기념관의 입구석이나 표지석으로 쓰시는 것이 좋을 듯 생각됩니다. 노무현의 죽음을 알리는 표지는 그의 뜻대로 " 아주 작은" 비석으로 새로 만들어 집 가까운 곳에 세워주십시요. 훝날 사람들이 "망자의 염원과는 달리 각자 자기 좋은 대로 자기 마음 편하도록 비석을 이리 크게 했다"라는 소리 듣는 것보다는 "아무리 유서에다가 써놓았다 해도 그렇지 저리 작은 비석을 세울 수 있나"라는 소리 듣는 것이 훨씬 망자를 높이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가 미덥지 않으시면 지금이라도 해인사 입구의 성철 부도를 한번 보고오셔도 좋습니다. 더운 날에 소나기가 왜 이리 들락거리는지 부산스럽기만한데 이런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여러분이 만든 비석이 벌써 법에 맞느니 마느니 소리가 들리기에 참지 못하고 한 자 글로 올립니다. 부디 망자의 뜻대로 정말로 "아주 작은 비석"을 하나 세워주시길 재삼 간청 올립니다.

 

2009. 7. 3.

병든소 올림

 

등록후기 :

노무현의 "아주 작은 비석"은 결국 노무현의 주먹 쥔 손이 전한 다빈치 코드를 읽은 명석한 사람들에 의하여 "검소하지만 어쩌고 저쩌고"에다가, "화려하지만 우짜고 저짜고" 하는 비석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세상 참 무섭습니다. 단말마의 짧은 말로 부탁한 "아주 작은 비석"이 이렇게 윤택한 해석을 낳을 줄 유서 쓰던 노무현이 상상이라도 했을까요? 나중에 생길 노무현의 기념물들은 어떤 색으로 덮힐 것인지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노무현의 한계인가 봅니다. "아주 작은"이라는 뜻을 유서에 남겨도 유가족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그리고 노무현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사람들은 노무현의 또 무엇을 골라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며 설치고 나댈지.

 

결국 노무현의 가족은 "아주 작은 비석" 하나를 "세운" 것이 아니라,

"아주 넓적하고 두툼한 비석" 하나를 "눕혀" 놓았네요.

어깃장 놓는 데 이력이 난 사람들 같습니다.

하기야, 살아 생전의 노무현도 어깃장의 대가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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