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카르나이 사람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3-2)에서 계속) 연극의 후반부(719-끝)는 디카이오폴리스가 그의 승리나 평화를 어떻게 써 먹느냐를 보여 주는데; 그것을 위해 평화를 추구하였던 결말이 드러난다. 그의 첫 번째 행동은 그의 시골 집 앞에서 적들인 도시들과 장사를 하기 위해 시장을 여는 것이다. 그의 휴전의 불명료함에 의해서 그 시장은 그의 개인 시장이기도 하고, 시장터agora이기도 하다. 그는 확실히 그곳의 소유자처럼 행동한다. 맨 처음 그 시장에 오는 사람은 그의 어린 두 딸을 팔려고 안달하는 메가라 사람인데; 전쟁과 페리클레스의 포고령으로 인하여 그와 그의 두 딸은 굶주려 있다. 아무도 불쌍한 두 딸을 사려고 하지 않아, 그 아버지는 비의에 제물로 쓰일 작은 돼지인 것처럼 팔아 보려 하고; 팔려서 살아 남기 위해 딸들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어린 돼지처럼 행동한다. 그렇지만 디카이오폴리스는 의심이 가는데; 장사꾼이 자루에 넣은 것이 돼지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두 딸이 어린 돼지 소리를 내고, 그리고 어린 돼지라는 그리스 말이 외설적인 중의성을 가지고 있어, 디카이오폴리스는 두 딸을 어린 돼지로 간주하여, 약간의 마늘과 소금을, 즉 평화 시에는 메가라 사람들이 주로 내다 팔던 것들을 주고 바꾸어,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사들인다. 전쟁이 메가라 사람들에게 아내와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어린 딸들조차 약간의 소금과 마늘보다 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그래도 그 두 딸은 어린 돼지로 디카이오폴리스에게 팔리지만, 그냥 메가라에서 아버지와 지낸다면 틀림없이 굶어 죽을 것인 반면에, 그는 그들을 사육하거나 아니면 불쌍한 딸들처럼 데리고 있을 것이다. 이 거래는 첫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그렇게 야만적인 것이 아니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이 명확히 뜻하는 대로, 정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정의는 불명료함에서 벗아나지는 못한다. 메가라 사람은 그의 자식들, 그의 아내, 그의 도시에 대해서 말하는데;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자식들, 그의 아내, 그의 도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는 메가라 사람의 어린 돼지들을 그 자신만을 위해서 사들이고; 그는 그의 사설 시장을 가장 사적인 결말을 위하여 사용한다. 듣는 것과 말이 서로 구별되듯이, 보는 것과 만지는 것으로 들어나는 추상적인 개념에 고마워 하며 거래는 성사된다. 이것은 디카이오폴리스의 맛을 보고 냄세를 맡는 spondai의 중의를 훨씬 더 넘는 것이다. 개인적이면서 어떻게 보면 공공적이기도 해서, 공공에서나 혹 건전하게 말하면 어린 돼지를 뜻하고, 또 외설적으로는 여자의 신체 부위를 의미하는 단어의 중의에 대해, 디카이오폴리스의 개인 휴전의 중의성에 대한 관계를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이 거래는 이방의 적으로부터 들여온 물건들을 몰수하려 하는 감시원이 나타나자 곧 바로 결론이 나는데;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테네는 여전히 메가라와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카이오폴리스는 시장 감독이 쫓아내는 대로 거역하지 않고 쫒겨나면서, 그는 그와 그리고 그의 농장은 더 이상 전쟁 중이 아니라고 그에게 설명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지친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이제 단순한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시장에 앉아서 그가 평화의 열매를 수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그들은 디카이오폴리스의 축복을 외친다. 전쟁의 악덕들로부터 벗어나서 그는 그의 시장에서, 아고라에서, '불의의 변론'이 칭송하고 '정의의 변론'이 비난하는 신식 교습을 받고 나온 학생처럼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의 사설 시장으로써 그가 앉아 있는 그 시장은 합법적인 시장터보다 훨씬 우월한데; 아고라를 더럽히는 불쾌하고 미움받는 패들은 디카이오폴리스의 시장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제 디카이오폴리스의 시장에서 퇴출된 도심<주6>형의 사람들은 나쁜 시인들과 음악가들이다.
디카이오폴리스의 시장을 찾는 두 번째 방문자는 하인 하나와 디카이오폴리스에게는 말벌들이 내는 소음을 연상시키는 그런 음악을 하는 조금 질이 떨어지는 피리 연주자들을 함께 데리고 온 테베 사람이다. 테베 사람들은 굶주리지 않는다. 그 테베 사람은 새와 그리고 많은 다른 종류의 짐승들을 팔려고 왔다. 메가라 사람과는 다르게, 그는 결코 디카이오폴리스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823, cf.959). 디카이오폴리스는 희극의 코로스들에게 특히 환영받는다는 어떤 한 종류의 물고기를 보고 특별한 짜릿함을 느끼는데; 그는 그 맛있는 것이 코로스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디카이오폴리스와 그 이방인은 그들의 가족과 도시에 대해 서로 말이 없는데; 이렇게 늘어난 "개인적인 비밀"은 어린 딸들로부터 먹을거리로 옮겨가는 하나의 기능이다. 테베 사람의 물건과 바꾸기 위해 디카이오폴리스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나머지 모두 테베에서는 넘쳐나는 것들이어서 결국은 감시원들 밖에 없다. 따라서 이방의 적들의 물건을 압수하려 하는 감시원 하나가 디카이오폴리스에게 잡혀서 잘 포장된 채 테베 사람에게 넘겨진다. 테베 사람이 가져온 물건들이 메가라 사람이 가져온 것보다 디카이오폴리스에게는 훨씬 더 값진 것들이어서, 테베 사람은 단순한 소금과 마늘이 아니라, 감시원을 산 채로, 뛰어난 감시원을, 아니면 승리와 지휘라는 드높은 이름으로 장식된 것과 똑같은 감시원을, 그것의 매우 높은 대가로 받는다. 아니면 소크라테스가 그와 그의 동료들을 위해 초라한 저녁을 좀도둑질로 마련하였듯, 디카이오폴리스는 속임수로 사치스런 저녁을 그 자신을 위해 마련한 것이라 말해야 하는가? 코로스는 디카이오폴리스의 감시원의 뜻에 반한 행동에 대해 마음으로 용인하면서 따라가는데, 이것이 코로스와 디카이오폴리스 사이의 대화로 이어진다. 대화는 전적으로 포장하는 것, 운반, 그리고 감시원의 용도(그는 더 이상 공공용이 아니어서 특히 개인적인 용도)에 대해서만 다루는데; 대화에서 디카이오폴리스가 테베 사람으로부터 받은 맛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조용하다: 그것들은 코로스용이 아니라 디카이오폴리스용이다. 디카이오폴리스의 결말을 드러내는 진행은 코로스가 메가라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지만, 테베 사람에게는 연설하는 사실로써 밑줄이 그어진다. 이 테베 사람과 메가라 사람은 디카이오폴리스의 시장에 오는 유일한 사람들인데(스파르타 사람들은 오지 않는다); 마치 페르시아와 트라키아 사람들이 아테네 의회를 둘러싸듯 그들이 디카이오폴리스를 둘러싼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극은 과시와 야만적인 이방인들(그리고 그와 같은 종류의 아테네 사람들) 세상에서 평화로운 그리스의 맛있는 먹을거리 장사꾼들(그리고 그들의 아테네 손님들) 세상으로 옮겨 간다.
이제 디카이오폴리스의 승리가 정점에 이른다. 그의 주된 적수인 전쟁 애호자 라마코스가 디카이오폴리스에게 그의 하인을 보내 이방의 적이 만든 약간의 맛있는 것을 사고자 한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 요구에 따르는 것을 절대 거절한다: 라마코스는 절대 그 평화에 지분을 가져서는 아니 되는데; 디카이오폴리스는 그 맛있는 것을 자신을 위하여 구입했기 때문이다. 이런 디카이오폴리스의 행동이 아카르나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체 도시에게 디카이오폴리스의 월등한 지혜에 대하여 주목하도록 유도한다: 그의 평화에 감사하, 그는 엄청나게 많은 모든 종류의 좋은 물건들을 팔려고 가지고 있는데; 그런 좋은 물건들은 스스로 온 것들이다. 이것이 한 사람이 기대하는 것이다: 평화는 온갖 좋은 것들을 가져오고, 전쟁은 나쁜 것들을 가져온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말을 건넬 수 있는 모두에게 전쟁의 정당함이나 유용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전쟁에 대해 거짓으로 맹세한다. 그들은 약간의 에로스가 아포로디테와 그라이케 사이의 중매장이로서,아름다운 여인의 화해자로서, 그들을 뭉치게 하리라 바란다. 여전히 그들의 늙은 나이를 의식하면서도 그들은 다시금 젊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들의 전쟁에 대한 열정의 마지막 깜박거림은 그들로 하여금 디카이오폴리스를 처형하자고 이끌었고; 그들의 디카이오폴리스와의 화해를 감사해 하며, 이제 그들은 사랑에 대한 열정의 마지막 깜박거림을 경험하는데; 그럼에도 그들이 그리워하는 그 에로스는 그림으로 그려진 에로스와 닮아 있다.
다음은 술마시기 대회에 참가하는 조상들의 관습에 따라 술통 축제를 즐기라고 떠드는 홍보자 하나가 나타난다. 비록 그 혼자만이 아테네에서 축제를 즐길 수 있는 한 사람이긴 하지만, 이것은 더 이상 디카이오폴리스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는 그의 순서가 되자,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하여 그가 테베 사람으로부터 구입한 물건들과, 그리고 넘겨받은 도구들로, 더 빨리 요리하고 구우라고 그의 사람들을 소리쳐 부른다. 거기에는 또 다시 코로스와 디카이오폴리스 사이의 대화가 따른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그들은 참여하지 않는 지금 그의 잔치보다 더 앞서서, 이제 디카이오폴리스의 지혜 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신기한 요리 기술과 식도락에 대해서 칭찬과 부러움을 표시한다. 그는 그의 기묘한 솜씨를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할 뿐 아니라(326 ff.), 이러한 즐거움으로 도시를 더 선호하게 된다. 그것에 대한 대응으로 디카이오폴리스는 그들이 그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들을 구경하는 이외에 더 나은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의 방문자는 보이오티아 사람들이(그들 중의 한 명에게 디카이오폴리스는 맛있는 음식거리를 샀었다) 그의 주된 생계 수단인 황소를 빼앗아 가 버려 비참한 지경에 있는 농부이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개인적인 평화의 한 방울을 그에게 주는 것으로써 그의 고통을 구제하는 수단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농부임이 분명한 디카이오폴리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나눌 것이 거의 없듯이, 이 진짜 농부에 대해 한 푼의 동정심도 없는데; 그는 거의 라마코스를 다루듯이 그를 나쁘게 다룬다: 그는 "정의가 공공에 봉사하지 않고 있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가 개인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는 모든 점에서 개인으로의 한 명인 그 자신을 위해 그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고; 그는 오직 그 자신만을 구제하며; 그는 그의 평화와 그것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 조각도 주지 않는다. 이제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그에 대해 하는 말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그 혼자서만 즐길 저녁을 마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디카이오폴리스의 되지 않은 이기심에 대해 알게 된다. 그들은 그의 면전에서 그가 그들을 굶겨 죽일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는 대꾸하는 수고조차도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디카이오폴리스의 평화의 작은 조각과 바꾸어 얻기 위하여 결혼식에서 쓸 고기를 가지고 신랑이 보낸 사람이 오는데, 신랑은 군대로 나가는 대신 사랑의 기쁨을 즐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디카이오폴리스는 또 다시 도우기를 거절한다: 그는 그의 평화를 어떤 대등한 것들과도 바꾸거나 팔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는 대등한 것이 아니면 어느 누구에게도 그의 평화의 한 조각도 양도하지 않으려 한다고, 혹 아니면 라마코스와 같은 그런 전쟁 애호가에게는 그의 평화의 어떤 조각도 팔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 그가 그의 평화의 독점을 유지하는 것으로(이것은 어쩐지 "독점의 폭력"이라기보다 문자 그대로 "독점"이다.) 무자비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신랑의 친구와 같이 온 신부의 들러리가 신부의 이름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그 신부가 전쟁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도록 신부에게 평화의 작은 조각을 보내는데, 왜냐하면 여자이므로 전쟁 탓으로 고통받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디카이오폴리스의 이기심은 사랑병에 걸린 여자들에 대한 동정심에 의해서만 괜찮은 것이 된다. 이것은 더 비교할 만한 일이 없어 말없이 있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는 차거운 위안이다.
마지막 장면은 두 전령이 무사히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 중 하나는 장군들이 라마코스에게 그가 반드시 보이오티아가 아티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전선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전하도록 보내어졌고, 다른 하나는 디오뉘소스의 사제로부터 디카이오폴리스에게 그가 반드시 축제일을 축하하기 위해 공공의 향연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전하도록 보내어졌다: 모든 것이, 무희를 포함한 다른 소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고; 나열된 매혹적인 것들 가운데 빠져 있는 하나는 포도주 뿐이다. 전쟁 애호가 라마코스는 그가 축제를 즐길 수 없어서 가장 불행한 반면에 디카이오폴리스는 가장 행복하다: 모든 것이 그에게 너무 좋게 되어 갔다. 이 두 적대자들 각각이 경합을 위하여 준비하는데, 한 쪽은 아테네의 적들과의 경합을 위해서, 다른 한 쪽은 술마시기 경합을 위해서이다. 각각은 그들의 하인들에게 필요한 지시들를 내리는데; 디카이오폴리스의 지시는 라마코스의 지시의 패러디이고; 라마코스는 디카이오폴리스의 건방진 조롱에 대해 세 번이나 항의하고; 그는 디카이오폴리스에게 비겁하다며 탈주한 범죄로 다스리겠다고 위협을 하기까지 한다. 디카이오폴리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코로스의 대장이 늙은(1129-30) 아버지 디카이오폴리스가 술마시고 가장 매력적인 소녀와 잠자리에 들려고 떠나가려 하는 것에는 말이 없는 반면에, 라마코스가 적들을 꼼작 못하도록 하고 수비에 임하러 떠나가라는 견지로 라마코스에게만 연설하는 것으로 마라톤 전사들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데; 이리하여 그는 역시 연극의 결말을 향해 자리 잡아 가는 음식의 즐거움에서 마시는 것과 성적인 즐거움으로<주7>,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과는 아무 관계가 필요하지 않는 즐거움에서 다른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관계를 맺는 즐거움으로 뒤바뀌는 것에 더욱 신경을 쓴다. 디카이오폴리스가 절대로 확약을 하지 않는 행실에 관하여 주의를 기울여 본다면, 코로스들이 이제 한 덩어리가 되어 제우스에게, 이 앞의 경우에서 코로스들에게, 저녁을 대접하지 않았던 작가를 망쳐 놓으라고 부탁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코로스가 하는 비방의 내용으로부터 사악한 작가 안티마코스 (그의 이름은 디카이오폴리스에게도 꼭 맞다)가 승마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약간 건전한 예감에 바탕을 둔 코로스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디카이오폴리스에게는 앞으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데; 이제 비극의 전령 하나가 알맞은 때에 알리는 대로 사실 괴롭힘을 당한 쪽은 라마코스이다. 왜냐하면 코로스가 노래하는 동안 라마코스는 적들과 싸웠고, 그리고 디카이오폴리스는 술마시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라마코스는 부상을 당해 돌아왔으며, 아니면 어쨌던 불구자가 되었고, 또한 확실하게 그는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반면에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욕망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기 위해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젊은 소녀와 서로 껴안은 채 돌아온다: 거의 문자 그대로, 전쟁의 영웅과 평화의 영웅으로서, 죽음과 삶이 서로 반대이듯이 서로 반대인 그들을 보여 준다. 코로스는 디카이오폴리스의 승리를 축하하며, 그를 희극들의 심판들에게 데려 가는데, 그는 계속해서 그가 술마시기 대회에서 이겼으며, 그러므로 그는 희극들에 관한 경합에서도 역시 반드시 상을 받아야 한다고 모두들에게 상기시키고; 그는 다시 한번 그가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위대한 희극작가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코로스는 그로부터, 정의로운 한 사람으로부터, 그가 한번도 약속한 적이 없는 저녁 식사에 대한 말은 결국 한마디도 듣지 못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전하려는 뜻은 디카이오폴리스의 이름으로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정의로운 시민이며, 바로 정의로운 도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장 애국적인 시민들인 마라톤의 전사들이 그를 클레온보다 더욱 못된 가장 불의로운 시민이라고 고발한다. 디카이오폴리스가 그의 고발자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올바른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써 그의 정당성을, 정당함에 있어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증명하리라는 생각을 아무도 진지하게 가질 수 없는데; 그가 아카르나이 사람들을 바꾸어 놓아 버린 논점들은 올바른 것들에 대한 희극적 등치물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단지 정치소인배demagog들의 연설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의 불의함은 그가 만든 수사학적인 승리의 용도를 보아도 잘 알게 된다: 바로 그 승리로써 엄격히 오직 자신만을 위해 그것을 즐기기 위해 그는 그의 개인적인 평화를 안전하게 하는데; 그는 도시 뿐만 아니라, 즐거움의 감각들까지도 혼자 즐기기 위하여 그의 가족들까지 배반한다. 연극의 후반부에서 그를 칭송할 때,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도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어떠한 봉사들과도 구별하여, 오로지 엄격하게 그의 개인적인 기쁨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는 '불의의 변론'과 괘를 같이하여 행동한다. 그는 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본성을 활용한다". 그의 "본성으로 돌아감"은 반드시 적절히 이해되어야 한다. 그가 평화에 연연하는 알려진 동기가 성내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화 시에는 그의 땅만으로도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져다 주었던 그런 물건들을 구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동기는 전시에 그가 바라는 이방의 적들에게서 생산된 맛있는 먹을거리들의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어서(36,967); 그래서 그는 그의 즐거움을 높혀 주는 모든 기술들을 전부 활용한다(1015-17). 그의 기술 활용과 식품의 수입은 '불의의 변론'의 추종자로서 그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 그의 불의한 면을 가지고 그가 어떻게 이런 가장 불의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하여, 사람들 중에 가장 정의로운 사람, 그 한 사람은 그가 그의 반대자들에게, 즉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하는 짓을 반드시 심사숙고하여야만 한다. 그가 그의 개인적인 평화를 안전하게 하는 것에 그들이 그를 돕도록 만들던 동안 그는 그 속에 든 어떤 부분도, 그 열매의 어떤 부분도 그들에게 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반역을 처벌하는 것으로 어떠한 이익도 얻어내지 못하였듯이, 그의 행동으로부터도 어떤 이익도 얻어내지 못하는데; 그들이 그를 처벌하는 것으로 스파르타에 대한 복수를 갈망하는 무력함을 만족시키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좋은 시민답게 행동했다고 믿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그를 편들고, 아니면 그의 보호자가 되는 것으로 좋은 시민답게 행동했다고 믿는다. 여전히 그들이 바뀌기 전에는 그들은 증오와 공포에 꽉 차 있었던 반면에, 그후로 그들은 동정심의 대상이다: 디카이오폴리스의 행동을 통하여 그들은 과시하는 것을 멈추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가난과 또한 노쇠함에 대해 정직하게 수긍한다. 그러한 행동을 통해 디카이오폴리스는 더욱 좋아지는 반면에,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정작 그것을 통해서는 더욱 좋아지지는 않지만, 그러나 더욱 착하고(650) 더욱 신사답고 더욱 정의롭다. 이것이 잠시라도 그가 그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을 길들인다는 사실과, 또는, 그들에 따르면, 그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젊은 연설가들이 그들을 다루듯이 그가 그들을 다룬다는(679-80) 사실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아니 되는데; 비록 그의 경우에 그 늙은이들이 그들 스스로가 우스꽝스럽게 되어 가는 것을(442-44) 깨닫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만일 최고의 도리들 속에 정의가 한 사람의 동료 시민을 더욱 착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포함된다면, 그리고 만일 과시가 모든 죄악의 뿌리라 한다면,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이름을 가질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정의로운데, 왜냐하면 도시가 그 구성원들에게 행하라고 하는 것과는 구별하여 정의로운 도시가 행하는 것을- 정의로운 도시 역시 오로지 그 자신만을 돌보며, 혹은 다른 도시들에게 참견하지 않는것을- 그도 행하기 때문이며; 그는 단지 한 부분이 아닌 전체이고; 그는 더 이상 한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도시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도시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대비하여, 그 스스로를 돌볼 수 있고, 그리고 그 자신만을 돌보는 디카이오폴리스가 그 자신만을 돌보는 그 방법으로- 즉 단지 최고의 경지에까지 그 자신을 즐기는 것으로써, 그의 본성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으로- 도시의 가장 커다란 수혜자가 되는데; 이 이유로 그의 희극을 구상하고 그리고 그것을 공들여 만드는 것으로써 희극작가가 최고의 경지에까지 그 자신을 즐겼다는 것을 그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러한 즐김은 반드시 그것 스스로와 교감한다. 희극은 그 어머니가 웃음인데도 웃음을 낳는다. 비록 단순히 정치적이지는 않으나, 희극작가가 즐기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것이고; 그것은 비록 맛있는 것이라해도 음식으로부터 얻어 즐기는 것보다는 성적인 것이나 포도주로부터 얻어 즐기는 것과 방법은 다르나 똑같은 종류의 것이다. 결국 디카이오폴리스가 궁극적으로 돌아가는 즐거움들이란 그것들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과는 달리, 희극로부터 얻는 즐거움의 등치물이다. 이러한 감각의 즐거움들을 갈망하는 흥분으로 그는 그의 동료 시민들을 명랑하게 하고, 살고 싶게 하고, 그래서 평화를 갈망하게 하고(하나의 공동선으로), 정의롭게 한다. (평화가 지금 쓸모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만일의 경우 이것이 그 자신이 정의롭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것은 그의 정의가 그의 인생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cf.357). 이것을 원색적으로 말하자면, "비극은 인생을 녹이지만, 그러나 희극은 인생을 굳세게 만든다."<주8>
디카이오폴리스나 소크라테스 이 둘의 생활방식은 '정의의 변론'이나 '불의의 변론' 이 둘이 추천했던 생활방식과 서로 다르다. 겉으로는 앞의 둘은 뒤의 둘 사이에 놓이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은 앞의 둘은 다른 하나의 평면에, 뒤의 둘에 비해 한층 높은 평면에 속한다. 소크라테스식 생활 방식은 단순히 비정치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도시를 능가하는 디카이오폴리스의 것은 도시에 이롭다. 소크라테스는 도시에 반하여 시골뜨기를 도우는데 실패하고; 그는 시골뜨기의 겉옷을 입을 수 없으며; 그는 시골뜨기들과 그 자신 사이에 있는 물을 다리로 이을 수 없고; 그의 자만심은 겸손함으로 변장을 못하게 방해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제력의 화신이고; 디카이오폴리스는 그 반대이다. 그럼에도 디카이오폴리스의 무자제는 보통 사람의 범위 안에 들어 있고<주9>; 그는 아버지 폭행이나 근친상간의 논점을 키우지도 않는다.
누구도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동시대의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하는 단순한 의미를 들어 넘겨 버릴 수 없다: 그것이 유용할 때 평화를 이루라!; 무분별한 살륙자들을 끝장 내고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에 박살내라!; 이것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메시지가 연극의 의미의 단지 작은 한 부분이라는 것을 즉시 더 보태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이 그것의 단순한 의미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면, 한 사람이 요구해야 할 최소한의 것은 이러한 의미들이 작가 자신의 말로써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가 무엇이 도시를 위해 최선인가와, 그리고 특별히 올바른 것들 이 두 가지 모두를 가르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리고 그는 관객들을 웃게 만든다. 진지한 것과 우스꽝스러운 것이 단순히 병립하여 존재하느냐와, 또는 그것들이 함께 종횡으로 짜여져 있느냐와,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 두 가지 요소들 가운데 어느 것이 두드러진 것이냐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특출한 위대함은 그것이 총체적 희극total comedy이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인데; 우스꽝스러운 것은 전편에 걸쳐 있고; 진지한 것은 오로지 우스꽝스러운 것의 옷을 입고 나타나며; 진지한 것들은 우스꽝스러운 것들에 통합되어 있다. 그는 자주 극적인 환상을 망쳐 놓는데, 왜냐하면 극적인 환상을 파괴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희극적 효과를 높히기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희극적 환상만은 파괴는 커녕 손상조차 시키지 않는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그는 특히 라마코스를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패배하는 사람으로 소개하여, 전쟁의 불의함과 어리석음을 징벌한다. 그렇지만 정의로운 사람의 승리와, 그리고 승리한 정의로운 사람인 그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지 않고서, 어떻게 불의의 패배를 우스꽝스러운 방법으로 소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정의로운 사람을 희극의 희극적인 배역으로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고 소개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어려움을 정의로운 사람의 승리를, 혹은 불의의 우스꽝스러움으로부터 다른 종류의 우스꽝스러움에로의 이동으로써 정의에게로의 이동을, 소개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승리한 정의로운 사람은 모든 성적인 즐거움을 즐기는데; 그는 그것들을 솔직하게 즐기고; 그는 그의 즐거움을 솔직하고, 전적으로 억제되지 않은 표현으로 나타내는데; 그는 공공에서 적절하게 (말)할 수 없는 공공의 것들에 대해 (말)하며; 그는 우스꽝스럽게 행동한다. 그는 불의를(클레온, 페리클레스, 등등) 뜬소문이나 중상을 이용하여 징벌하고; 그는 정의를 상스런 말로 칭송하며; 그는 다른 두 가지 종류로, 비극을 패러디하는 것과 신성모독으로, 이러한 종류들의 '의식에서의 불경alschrologia'을 거스르는 거대한 권력들을 패배시킨다. 그는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아 그 자체로 우스꽝스러운 이 네 가지의 '의식에서의 불경alschrologia'을 줄거리의 요구에 따라 적절히 구사한다. 예를 들면 "구름"의 줄거리는 신성모독을 비극을 패러디하거나, 상소리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요구하는 데 반해, 그 반대는 분명히 진짜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다. 단순하면서 진지한 의미로 그것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병행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리고 복잡한 의미는 우스꽝스러운 것을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즉 희극작가를 따라서 모방할 때 들려 온다.("아카르나이 사람들" 끝)
<주6> 아고라agora에 대한 세 가지 언급과 836-59에 있는 세 가지의 적절한 이름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주7> 1000-2 그리고 1003-17 사이의 대비를 계속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라. "개구리" 739-40을 반대 편, 그 연극에서 결정타, 디오뉘소스와
헤라클레스 사이, 등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라.
<주8> Cf. 카이벨Kaibel, '그리스 희극배우들에 대한 단편들' p.141b 1.48-50; ibid.,p.66 1.13
<주9> Cf. "구름" 1089-94에서 희극작가에 대한 묵언. 괴테도 '작가와 예언자"로 적절하게 해설한 적이 있다.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4-1) (4."기사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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