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평화
6. "평화"
이 연극은 즉각적으로 "아카르나이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두 연극들 각각에서 그 주인공들의 직접적인 목표물이 평화이기 때문이다.그 다음 "평화"는 "말벌들"을 연상케 하는데; 이 두 연극들만 오로지 연극의 전체 구도를 진행해 가는 데 아무 책임도 없는 두 하인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 두 연극들에서 전체 구도는 이 하인들의 주인에 의하여 짜여졌다. "구름"과 "말벌들" 그리고 "평화"에서-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기사들"과 구별하여- 전체 구도는 순전히 '인간의 출신 성분human origin'에 관한 것이다.
하인들은 쇠똥구리에 먹이를 주느라 바쁘다. 하인1이 나쁜 냄세를 풍기는 게걸스러운 벌레에게 먹이를 주고, 하인2는 당나귀 똥과 비슷한 역거운 것들로부터 먹이를 준비하고 있어 악취를 더 많이 맡으며; 그래서 하인2는 대부분 신에 맹세하고 불평하는데; 그래서 하인2가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가 먹이를 준비하고 있는 그 특별한 풍뎅이는 그가 보기에 개나 돼지보다 더 더러운 반면에( 왜냐하면 그것이 배설물밖에 먹지 않기 때문에), 자부심이 강한 데다 거만까지 더해서, 혐오스런 것들을 그것들이 먹을 먹이로 조심스레 맛있게 만들어 달라고 한다. 어떤 신이 그 벌레를 보냈는지 모르겠으나, 아프로디테가 보낸 것은 확실히 아니지만, 혹시 진짜로는 그라이아이들이 보낸 것이 아닌가 싶다. 하인1이 관객 중에 있는 어떤 똑똑해 보이는 모르는 청년 하나가 이 풍뎅이의 목적이나 의미가 무엇인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며, 그리고 어떤 이방인이 그에게 가죽 냄세 풍기는 가죽장수 클레온의 후안무치를 슬쩍 나타내는 것이라고 답할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의문스러워 한다. 그는 이 추측에 대해 그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똑똑해 보이는 젊은이의 의문이 그 이방인의 대답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한다면 좀 그럴듯해 보인다: 그 풍뎅이는 필로클레온과 브델뤼클레온 사이의 불화보다 클레온과의 불화 관계가 덜하다.
관객과 직접 말을 건네는 하인2는 풍뎅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즉 무슨 힌트인가 하는 의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는 성격이 다른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관객들 전체에게 이 연극의 로고스logos를 설명한다<주1>; 그는 단 한 번의 설명으로 그들이 서로 다르지만 모든 부류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가 말하기를, 그의 주인은 보통 아테네 사람들이 미치는 종류와는 다른 새로운 종류로 미쳐 있다. 하루 종일 그는 하늘을 향해 쳐다보고, 그리고 제우스를 부르며, 그 신이 그리스에 해악를 끼치는 것을 꾸짖는다. 그가 이 말을 하고 있을 바로 그때, 그와 관객 모두가 그 주인이 여전히 집안에 있으면서 제우스에게 불평하고, 제우스가 그리스에 하려는 것에 대해 말을 건네는 것을 듣는데; 그렇지만 그는 제우스가 단지 잘 모르고 그리스에 해악를 끼친다고 확신한다. 관객들에게 계속 말을 건네면서, 그 하인은 방금 그들이 들은 것이 그가 말했던 그가 하는 바로 그 나쁜 짓이라고 말한다: 그 주인의 미친 짓은 주로 제우스에게 말을 건네면서 제우스를 꾸짖는 데 있다. 그의 주인이 내는 감탄의 말이 하인의 보고를 짧게 중단시켜, 주인의 주장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 제우스가 그리스를 상하게 하거나, 폐망시키려는 의도가 없다는 가능성을 그는 믿어 왔었다. 주인의 미친 짓에 변화가 있었다든지 오히려 더 발전했다는 것은 하인이 그 다음 하는 말에 나타난다. 처음에 주인은 스스로에게 말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곧 바로 제우스에게 갈 수 있을까?" 이런 단계에서조차 제우스에게 말하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가 땅에 있고, 제우스는 하늘에 있어서, 제우스와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생각했고, 그 목적으로 사다리를 만들었지만 떨어져서 머리를 다쳤다. 결국에는 어제 그는 굉장히 큰 소똥구리의 등에 올라타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 마치 벨레로폰이 페가소스의 등을 타고 하늘로 오르려 한 것처럼- 그것을 집에 가져 왔다. 주인은 이제 막 타고 오르려는듯이 그 풍뎅이의 등에 올라 앉아서 등장하는데; 그가 날아가는 동안 풍뎅이의 호흡에서 나는 악취를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특이한 여행에 별 어려움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그 하인은 주인의 미친 짓에 대해 그전보다 더 희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그것 때문에 위압감마져 느낀다. 미친 것이 분명 발전해 가고 있다. 하인의 눈에는 주인이 제우스에게 기도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를 꾸짖거나 혹은 제우스에게 대화의 말을 하는 것이 그가 미쳤다는 표시라는 사실을 눈 감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러한 대화가 허사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하인의 상식이 완전히 논박당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확실하게 쇠똥구리의 등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미친 시도는 가장 행복한 하나의 화제로 이어진다. 다른 연극들의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평화"는 '미친 짓'의 승리를 명백하게 연출한다.
그가 전체 그리스의 이익을 위해 새롭고 대담한 비행을 감당하고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 하인은 그의 주인이 정신 성하다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도 믿을 수 없다. 다시 그의 주인에게 후자의 미친 짓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는 그가 말은 경건하게 하고 기도는 고함치며 하라는 말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배설믈들의 악취도 풍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데; 소음은 주인의 정신은 산란하게 할지 모르고, 냄세는 풍뎅이를 유인할지 모른다. 하인은 이 지시를 그냥 흘려 버리는데; 그가 입 다물라는 지시를 받은 것처럼, 또 그가 그 주인의 의도를 결코 모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주인이 어디로 날아가려고 하는지를 말하지 않을 경우, 그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주인은 제우스에게 그리스에 대해 그가 무엇을 할 계획인지 물어 보기 위해 하늘을 향해 제우스에게 날아가려고 한다고 대답한다. 하인이 제우스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의 주의를 환기시키자, 주인은 그 경우에는 신이 페르시아를 편들어 그리스를 배반한 것으로, 즉 제우스의 행동으로부터 그가 고의로 그리스를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고 추정해서 고발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확실히 제우스에 반대하는 행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고, 그리고 제우스가 그리스에게 의무가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작가의 대변인이 디오뉘소스에 맹세하며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라며 고함친다. 그가 제지해도 아무 소용이 없자, 그는 주인의 작은 두 딸들을 불러서, 아버지가 하늘에 올라가기 위해 그들 모르게 집을 떠나 가려고 하니 그러지 말라고 간청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그가 반드시 여행을 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집에 남은 돈이 없어서 그들이 굶어야 하는 위험한 처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그의 공공 애호적 행동은 근본적으로 그와 그의 가족의 극단적인 궁핍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들에게 풍뎅이를 기구로 택한 것은 그가 아이소포스로부터 배운 것처럼 풍뎅이가 신에게까지 올라 간(그는 '신의 의지가 없이'를 뜻한다) 유일한 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언니가 그런 나쁜 냄세를 피우는 벌레가 신에게로 가야 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눈치 채자, 독수리에 대한 미움이 그렇게 하도록 유인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 밖에도 그것은 여행 중에서도 그의 배설물로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들보다 풍뎅이를 선호할 만하다. 딸들의 반대를 똑같은 방식으로 설득한 뒤 두 딸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그가 그들을 위해 여행을 감행한다고 주장하는 그 관객들에게, 풍뎅이가 아래로 달려 들어 그가 떨어지지 않도록 배설하는 것을 삼가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관객에게 한번 이상 그 추이를 알려 줄 것이다.) 그러자 그는 지상에서의 인간의 음식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풍뎅이가 제우스의 신전으로 곧 바로 날아오르도록 타이르고, 그리고 피라이우스에서 배설하고 있는 한 사람에게, 그 악취가 풍뎅이에게까지 닿지 않도록 막아 달라고 타이른다. 후자의 타이름은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타고 가는 그 자신이 지적하듯이 그 스스로 농담으로 말하다가; 풍뎅이가 날아오르고 그가 두려움을 느끼자 농담을 멈춘다. 그에 대한 작가의 설계로 그는 미쳐 있거나 강박관념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의 농담은 어쩐지 놀랍다. 보통의 경우에 아리스토파네스의 주인공은 매우 정직하다. 스트렙시아데스와 필로클레온도 농담했지만 그들은 그들이 그랬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밖에 필로클레온은 "말벌들"에서 오직 끝에 가서야 농담도 하고 미친 짓도 하지만, "평화"에서의 주인공은 이미 연극의 초장에 농담도 하고 미친 짓도 한다.
그 주인이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것보다 농담하는 것이 더 극적인 환상을 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계속하면, 그는 풍뎅이가 상상 속에서 날아오르게 보이도록 하는 책임자인 극장의 기계공에게 지시를 한다. 기계공에게 말을 건네기 전에 그는 그 자신에게, 제우스, 하인, 풍뎅이, 그의 딸들, 관객들, 그리고 피라이우스에 있는 한 개인에게 말을 건네는데; 그는 그 자신, 하인, 그리고 그의 딸 중의 하나로부터서만 대답을 듣는다. 하인1에 따르면 풍뎅이는 말을 한다(12). "평화"에서는 주인공이 확실히 유별나게 큰 여러가지의 존재들과 말을 섞는다. "말벌들"에서는 주인의 전체 구도에 대해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하인이 대화로 연극의 막을 여는 그들의 이름들과, 그 주인의 이름과 주인 아버지의 이름을 브델뤼클레온과 필로클레온이라고- 이들 이름들은 너무 오해하게 만든다-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렇지만 "평화"에서는 연극의 막을 여는 대화를 나누는 하인들의 이름도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인의 전체 구도에 대해 설명하는 하인이 주인의 이름을 말하는 것도 듣지 못한다. 이것으로 "평화"에서 주인의 이름은 오해하게 하는 것과는 정반대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그는 아내가 없는데, 그가 하나 가지고 있었을 경우, 그가 하늘에서 데려온 에이레네('평화')의 동료 둘 중의 하나와 결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자식은 둘 다 여성이다. 이런 사실은 작가가 에우리피데스의 "아이오로스"에서 따와 패러디한 운문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때마다 충분히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주2>. 그러나 "뤼시스트라테"는 말하지 않더라도, 아리스토파네스의 다른 남성 평화 협상가인 디카이오폴리스에 대해서 말하면, 그는 오직 여성인 자식들만 있어서, 즉 그는 전사들을 낳지 않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아카르나이 사람들" 132, 244 ff.,1061-62).
그 주인의 이름은 트뤼가이오스이다. 그는 포도나무 재배자이다. 그 이름은 포도 수확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아리스토파네스가 "반비극trygedy"이라 부르기 좋아하는 희극을 연상케 한다. 그를 디카이오폴리스와 같이 하층민으로 변장한 작가로 생각하게 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표상으로서, 가볍게 변장한 작가가 쇠똥구리의 등에 올라 하늘을 비행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아무 것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희극은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을 결합한다. "말벌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목 받았던 필로클레온스런 요소는 쇠똥구리로- 그 역거운 벌레, 돼지보다 더 더럽고, 겁이 나거나 신기하다는 생각은 나게 하지 않지만, 본능적인 혐오를 불러 일으키는, 또 아프로디테나 그라이아이들을 쫓아낼 만한 벌레로- 표시되는 것만큼 낮은 것이 아니다. 풍뎅이가 일차적으로는 배설물에 관해 내비치지만, 이차적으로는 무엇보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모든 낮은 재료들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본성이 그것들에게 혹은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에 끌리지 않을 경우, 희극의 요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본능적으로, 습관적으로, 그리고 관례적으로 혐오스럽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본능에 의해, 또 부분적으로 관례에 의해 혐오스럽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관례의 짐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필수불가결하고, 유익하기도 하며, 관례를 고귀하게도 만들고, 그리고 그것으로써 본성에 돌아간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그 구원을 그것의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높은 것 둘에 의해 이루어 내는데; 희극이 그것의 가장 낮은 것으로 이루어 내는 구원은 희극이 관례의 짐으로부터 사람 속에 있는 가장 높은 것을 구원하는 것을 매개한다. 관례가 본성의 관점에서 볼 때 웃음꺼리인 반면에- 한 사람이(말하자면 그리스인들) 가진 관례들은 다른 사람의(cf. 289-91) 관례들의 관점에서 웃음꺼리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본성은 법이나 관례의 관점에서 웃음꺼리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정의의 변론'과 '불의의 변론 사이'를 오가며 움직인다. 불법적인 것의 패배나 아니면 합법적인 것의 원상 복구restitutio in integrum와, 그리고 불법적인 것의 승리나 혹은 본능적인 것의 원상복구, 이 둘은 한편으로는 "구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카르나이 사람들", "기사들", 그리고 "말벌들"에서 보여 준 것처럼 기분을 돋구거나 웃도록 할 수 있다. 본성과 관례 간에 있는 차이의 모든 포괄적인 성질을 보아,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정말 인간의 인생을 하나의 전체로 연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희극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비극을 만드는 것을 이용하여 패러디하므로써 가장 간단하게 보여진 것처럼, 희극은 단지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써 비극을 뛰어 넘기 때문이다. 쇠똥구리는 트뤼가이오스로 하여금 신들의 의지에 대항해서 하늘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가장 높은 곳으로 날아 가는 기구로, 혹은 고공 기술의 재료로, 쇠똥구리가 설계되어 있고 그리고 아주 필요하다.: 그것은 그것이 먹을 혐오스런 먹이를 주의해서 마련하라고 요구한다. 그 옛날에(133) 독수리가 제우스의 새라는 것이 싫었고, 또 많은 다른 것들 중에서도 '데모스'의 제국에 대한 염원을 상징하기 때문에 풍뎅이가 맨 처음 하늘로 들어갔다<주3>. 그래서 그것은, 거대하고, 엄숙하며, 위풍당당한 희극과, 그리고 오만하고, 탁월하거나, 혹은 과시하는 듯이 높은 모든 것의 희극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가르킨다. 희극은 높이 있는 것을 가지고 내려오기 위해 높이 올라간다. 만약 본성에 의해 높은 진짜로 높이 있는 것과, 단지 관례에 의해 높이 있는 것 간의 차이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희극은 단지 관례에 의해서만 높이 있는 것을 낮추기 위하여 본성으로 가장 높이 있는 것에게 올라간다.
아무 사고 없이 트뤼가이오스는 풍뎅이의 등에 올라 제우스의 집에 도착한다. 그는 문을 두드린다. 아마 풍뎅이의 냄세 탓인지 인간이 있다는 냄세를 맡은 헤르메스가 문을 열고, 그의 귀에다 대고 그 인간의 불경스러운 무모함에 대해 한 줄기 욕설을 퍼붓는다. 트뤼가이오스는 침착함을 잃지 않는데; 그는 모욕적인 조롱으로 그 신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고기를 조금 주기 위해 하늘로 올라왔다고 부드럽게 한 다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문쪽으로 제우스를 불러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신들은 그 전날에(트뤼가이오스가 풍뎅이를 집에 가져왔던 바로 그날),그리스인들에게 화가나서(마치 트뤼가이오스가 제우스에 대해 화가 나서 행동했듯이),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떠나 버렸다. 신들은 더 이상 그리스 사람들끼리 서로 간에 싸우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들의 그리스 적들에 대한 승리의 간구를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신들이 그들 간에 휴전을 성사시키려 노력해 왔는데도 그리스 사람들은, 특히 아테네 사람들은, 서로 간에 싸우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암피테오스의 임무가 기억난다.) 그리스 사람들을 벌주기 위해 신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며, 폴레모스('전쟁')에게 그들을 넘겨 주었다. 폴레모스는 에이레네('평화')를 지하 깊은 구멍에 던져 넣었는데; 그래서 그녀는 그리스 사람들이 쉽게 닿는 거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녀를 끄집어 낼 수 없도록 그는 많은 돌로 덮어 두었다. 게다가 그는 도시들을 그 속에 넣고 빻아 버리려고 거대한 절구통을 확보했다. 이리하여, 트뤼가이오스는 하늘에 도착한 뒤 곧 바로 그 신으로부터 그가 그렇게나 알아내고 싶은 것을, 즉 제우스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려는가를 들어서 알게 된다: 제우스는 의도적으로 그리스를 파멸시키는데; 트뤼가이오스가 이제 제우스에 대항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가 헤르메스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그가 제우스를(제우스가 아닌, 그리스 사람들이 그리스를 망치는 책임을 져야 한다) 비난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것과, 그리고 제우스는 트뤼가이오스의 '유사-탄원들quasi-supplications'을 틀림없이 들었어야 했지만, 아마도 그것들이 단지 자기 일에 신경 쓰는 힘없는 시민의 탄원들이기 때문에 그 탄원들에 주의를 주지 않았고,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듣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191). 어느 쪽 해석을 더 선호하느냐는 영원한 전쟁이나, 혹은 전쟁 당사자들의 완전한 파멸을 전쟁을 할 의지를 가지고 전쟁을 계속해 나가는 것에 대한 적당한 벌이라고 간주하느냐에 달려 있다.
헤르메스도, 트뤼가이오스도, 제우스가 그리스를 벌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만일 "구름"의 소크라테스가 하루살이 같은 것들을 내려다 보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었다면, 그는 그리스가 폐망하는 것은 동족상잔 전쟁의 그럴 수밖에 없는 결과라고 말했었런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 폐망을 제우스에까지 추적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그는 트뤼가이오스로 하여금 그 위험을 제우스에까지 추적하게 하면서, 폴레모스의 일인 바로 그 파멸과, 제우스가 단지 폴레모스에게 준 허락 사이의 차이점을 만들어 낼 수 있거나, 혹은 강제로 만들게 된다.
헤르메스는 공포를 조장하는 폴레모스가 제우스의 집에서부터 나타나려 하자 떠나는데; 트뤼가이오스 역시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숨긴다. 사람의 끔직한 적이 거대한 절구통을 손에 들고 나타난다. 그는 라마코스처럼 끔직하게 보인다<주4>: 그는 순전한 전쟁으로 보이지 않는데; 어쨌든 이 경우에 의인화한 것이 끔직함을 약하게 한다. 그렇지만 트뤼가이오스는 최고로 겁을 먹고 있다. 폴레모스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에게 무서운 위협의- 트뤼가이오스가 관객에게 말을 건넸을 때 부분적으로 언급한 것과 같은 위협의- 소리를 내뱉는다. 전체 그리스를 구원하겠다는 그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켈리아나 아테네에 대한 위협과는 구별하여, 폴레모스가 스파르타와 메가라에게 하는 위협에 괘념치 않으려고 그 스스로에게 충분히 매달리고<주5>; 어떤 이유가 있는지 폴레모스의 아테네에 대한 위협은 다른 도시들에 대한 것처럼 명백한 것은 아니다. 늘 그런 잔혹함으로 폴레모스는 그의 조수 퀴도이모스('소란')에게 절굿대를 가져 오라고 명령하는데; 두 사람 모두 겨우 어제 이사했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자; 그는 그의 조수에게 아테네에 가서 절굿대를 하나 들고 오라고 보낸다. 트뤼가이오스는 불쌍한 인간들이 위험을 모면할 수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디오뉘소스를 부르면서 퀴도이모스가 가는 길에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퀴도이모스는 다행스럽게도 아테네의 절굿대, 즉 죽은 클레온 없이 돌아온다. 트뤼가이오스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아테나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는 아테네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뉴스를 듣기 위해 하늘로 올라왔어야만 했다. 폴레모스는 퀴도이모스를 스파르타로 절굿대 가지러 보낸다. 트뤼가이오스는 다시 겁을 잔뜩 집어 먹고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들 중에 누가 사모트라케의 신비술을 접해 보았다면, 이제 그는 반드시 퀴도이모스가 안전하게 온전히 돌아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치 엘레우시니아의 의식을 접해 보지 않았던 것처럼 트뤼가이오스 그 자신은 명백히 접해 보지 않았다(375). 그러나 퀴도이모스는 안전하게 온전히,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스파르타의 절굿대, 즉 역시 죽은 브라시다스 없이 돌아온다. 두 주요 도시들에서 동시에 같은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나는 이상한 사실에, 폴레모스는 퀴도이모스에게 브라시다스가 어쩌다가 죽었는지 묻는데; 그는 브라시다스의 북쪽 정벌이 진정한 스파르타식의 진취적 모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주6>. 트뤼가이오스가 클레온의 죽음에 대해 아테나를 칭송했듯이, 이제 그는 브라시다스의 죽음에 대해 디오스쿠로이를 칭송하는데; 그는 아테나거나 디오스쿠로이거나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주7>. 이제 그는 폴레모스가 도시들을 갈아 산산조각을 내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펠로모스는 그의 조수와 절굿대를 만들려고 실내로 가는데, 그러나 그가 결코 돌아오지 않는 사실로 보아 그는 성공하지 못한다. 폴레모스가 떠나자 트뤼가이오스는 그의 기쁨을 표현하는데, 그 말은 디카이오폴리스를 연상케 한다(cf. 293.과 함께 "아카르나이 사람들" 269-70). 그에게 남은 할 일이란 에이레네를 파내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의 모든 농부들, 상인들, 목수들, 공예공들, 이주자들, 이방인들, 그리고 섬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클레온과 브라시다스의 죽음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평화가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 평화, 즉 니키아스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한 단계의 진전이 필요했다. 절굿대의 분실이 두 전쟁 지도자의 죽음에 대한 희극적 등치물이라면, 에이레네를 파내는 것은 평화 협정이 결론 나는 것 혹은 어쩌면 평화 협상의 희극적 등치물이다. 트뤼가이오스가 그리스의 폐망에 대해 그 근원을 제우스에까지- 그의 행동이나 그의 허락에 까지- 추적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의 폐망에 대해 전쟁 자체 외에는 아무 데도 추적하지 않는 것의 희극적 등치물이다. 어떤 것에 대한 희극적 등치물이 그것의 낮은 다른 한편이라는 것을 이미 보아 알고 있는데,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쉽게 벼룩이 무는 것을 참아 내는 것이, 그가 덥고 추운 것이나 노고와 포도주에 대해 쉽게 참아 내는 것의 희극적 등치물이다. 벼룩이 무는 것을 쉽게 참는 것은 그런그런 그의 인내력을 포함한 당연한 일이지만, 비희극적 변론에서는 적절하게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제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자연스런 설명으로, 불경한 용어로 된 설명으로, 그래서 이론적 설명의 희극적 등치물이 되는 낮은( 벼락과 번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처럼) 것일지도 모른다. 웃음이란 관점에서 볼 때, 본성과 관례는 서로 호환성이 있으므로, 이것은 역시 이론적인 설명은 자연적인 설명의 희극적 등치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탁월하거나, 혹은 가장 엄격한 감각의 희극적 등치물들이 과연 신학과 생리학이 나뉘는 영역 바깥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가 지닌 관점에서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우스꽝스러움은 어떤 종류의 결함이다. 결점들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어, 실제로는 단지 그 정도의 결점만 가지고 있으면서 탁월한 것을 가지고 있는 척한다면, 즉 스스로가 인정한 수준으로 보아서 스스로가 우스꽝스럽다면, 사람이 가장 명백한 웃음꺼리이다. 그래서, 겉치레, 가장, 또는 과시를 희극에서 주제로 선호하게 된다. 이제 만일 제우스가, 혹은 그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그가 신들이나 사람들의 아버지이고, 그는 가장 힘세고 현명하며, 그는 최고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고, 전년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가 그렇다고 단언하듯이 존재하지조차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상상이 가능한 과시에 대한 가장 대단한 보기이다. 그의 경우가,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있는 것 사이의 대비가, 가장 완벽한 경우인데; 그는 절대적인 희극 소재이고; 탁월한 희극은 신들에 대한 희극이다. 어쨌든 이제 아리스토파네스 그에게 돌아가 보자.
코러스가 트뤼가이오스의 요청을 들어 도착한다. 그 단원들은 그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스스로 말하는데; 그들은 그들이 평화를, 무엇보다 위대한 여신들을 지상으로 데려오는 그날까지 그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그들은 처음부터 주인공 편이다. 그들이 트뤼가이오스에게 주는 유일한 어려움은 그들이 늙은 나이보다 전쟁을 더 싫어하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가려 한다는 기쁨으로 고함지르고 춤추는 것을 거의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함 소리로 그들이 폴레모스를 실내로 다시 불러 들이거나, 지하의 클레온을 되살려서 데려와, 그래서 그 여신들을 파내는 일을 방해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편으로 폴레모스가, 다른 한편으로 클레온(브라시다스와 구별되는)이 주는 위협의 위험들을 구별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주8>. 코러스는 앞으로 그들이 더 이상 심술궂고 가혹한 배심원 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더해서 물러난다. 코러스는 이번 경우에 우호적인 카이로스가 전권을 가진 지휘자로 뽑아 준 트뤼가이오스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가 에이레네를 덮고 있는 돌들을 어떻게 치울까 궁리하는 중에 헤르메스가 등장한다. 그는 다시 트뤼가이오스를 불경스럽고 무모하다고 욕하고 그래서 파멸시킬 것이라며 위협하는데; 트뤼가이오스는 다시 아무런 흔들림이 없다. 헤르메스는 그에게 에이레네를 파내는 것이 발각되면 제우스가 극형으로 다스린다고 말한다. 트뤼가이오스는 그가 금지된 것을 하려는 중이며, 그 벌을 완전히 침착하게 받아들인다고 인정한다. 그는 단지 죽어서도 행복하도록, 즉 나쁜 것이라 생각되었던 것이 좋은 것이 되도록 시작이라도 되길 바랄 뿐인데; 그러나 그는 이 '유사-자살 주제quasi-suicidal theme'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신에게 줄 고기를 가져왔으므로 고발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헤르메스는 그가 본 것에 대해 고함치지 않으면(제우스는 하늘의 가장 높은 곳으로 가 버렸다) 제우스가 그를 파멸시킬 것이라 선언한다. 트뤼가이오스는 그가 본 것에 대해 고함치지 말아 달라고 그에게 기도하는데; 그의 요청에 따라, 코러스가 예전에 바쳤던 그리고 앞으로도 바칠 희생제물을 상기시키면서, 가장 인정스럽고 인심이 후한 그 신의 은덕을 간청한다. 트뤼가이오스의 모험은 만일 가능한 가장 대단한 침묵이 없었더라면 성공할 수 없었다. 여기에 트뤼가이오스와 도둑질의 신이며 모든 것을 남 모르게 했던 헤르메스 사이의 합의가 가능한 바탕이 있다. 헤르메스를 흔들기 위해 트뤼가이오스는 그에게 모든 신들에 대항하는 끔직하고 위험한 음모- 디카이오폴리스가 암피테오스를 이용한 것에 비교할 만한 모험(403; cf. "아카르나이 사람들" 128)-에 대해 털어 놓는다. 오랜동안 그리스는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야만인들은 달과 해에게 제물을 바치기 때문에, 달과 똑똑하고 못된 해가 신들을 배반해서, 그리스를 야만인들에게 넘기려고 신들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달과 해는 야만인들에게 점령당할 그리스 땅에서 나는 것으로 헌납받으려고, 그래서 모든 곳의 독점적인 신들이 되고자, 모든 신과 모든 그리스를 파멸시키려고 작정하고 있다. 헤르메스는 그 자신이 이제 이 음모의 신호로 인식되는 것을 관찰한다. 이에 따라 트뤼가이오스는 에니레네를 지상으로 데려오도록 그와 그의 코러스를 도와 달라고 신들에게 간청한다. 신들은 그리스 사람들에게 의존하므로, 그리고 즉시 '평화'가 지상으로 나오지 않으면 그리스 사람들이 파멸당할 것이므로, 헤르메스가 비록 제우스의 특급 금지는 거역하지만 제우스의 이익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다면, 달과 해가 그들의 모험을 성공시킬 것이다. 헤르메스는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트뤼가이오스는 모두에게 좋은 것과 개인에게 좋은 것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결국 그의 불복종은 위험을 피한 뒤에 제우스에게 헤르메스가 직접 해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부터 내내 아테네가 모든 축제에서 헤르메스에 경의를 표하며 축하할 것이고, 모든 곳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그전 어느 때보다 더 높은 지위로 경배할 것이라 헤르메스에게 약속하며; 그는 특별히 그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스 사람들에게서 그가 유일한 신인 것처럼 대접받을 것이라고 헤르메스에게 약속한다. 그는 그 신에게 즉시 황금 잔을 준다. 그래서 그 신은 동정심이 발동하여, 그리스 사람들의 제우스에 대한 반역을 막는 것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에이레네를 파내는 일을 도와주기까지 하는데; 트뤼가이오스의 성공은 이제 확실하다.
트뤼가이오스는 해와 달로부터 오는 위험으로 헤르메스와 간접적으로는 모든 신들을 위협하여, 제우스가 금지한 것을 벌 받지 않고 거역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마치 "모든 신들"에 대항하는 해와 달의 특별 동맹자의 외교관인 것처럼 군다. 해와 달도 역시 신들이지만, 그리스 사람들에게 특별하거나 그리스 사람들이 따르는 신들과는 다른 종류이다. "구름"에서 천문학자 소크라테스가 해와 달을 다른 신들보다 훨씬 진지하게 대하는 것과, 그의 유사-여신quasi-goddess인 '구름'은 아테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다른 신들보다 해와 달에 더 가깝다는 것을 기억한다. '구름'은 자연적인 무우사들이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해와 달을 제우스와 다른 신들과 그리스 신들로부터 자연적인 신들로 구별하여야 한다. 그들을 자연적인 신들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야만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신들이라 여기기 때문인데, 한편으로 야만인들의 신들은 해와 달을 빼고는 그저 단순한 존재들이다<주9>.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지만, 예를 들어 대지 역시 자연적인 신이라 해도 별 탈 없을 것이다<주10>. '구름'은 그들의 아버지 에테르가 세계에 혜택을 주는 것으로 칭송하지만, 해와 달이 제우스와 그 동료들보다 세계에 혜택을 주는 존재로 더 가깝다. 트뤼가이오스는 같은 감정을 가진 그리스 사람이면서 아테네 사람이지만, 아리스토파네스가 만든 그리스 뿐 아니라 세계를 떠난 첫 번째 작품이다. 그는 그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263). 헤르메스는 일차적으로 그를 특히 그리스 사람으로보다 인간으로 감지하고(180;cf. 263); 신들에게보다 해와 달에 관련된 인간일 뿐으로 감지한다.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기 전에 야만인들이 있었듯이, 해와 달이 그리스의 다른 신들보다 오래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밖에 해와 달은 모든 사람들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볼 수 있고, 그들이 땅에 내려오거나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드러내며, 스스로 움직이는(그러므로 살아있는) 참으로 황홀한 존재들로서 눈 안에 들어온다. 트뤼가이오스에게 돌아가서, 그가 그에게는 아주 도움이 되는 해와 달이 다른 신들에 대항하는 음모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 없이, 제우스가 그리스 사람들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믿지 않는데; 그는 니키아스가 가진 신들의 미움을 받는다는 생각과, 필로클레온이 가진 신탁과 '구름'이 그냥 사악한 존재라는 것, 또 "기사들"에서 사용된 신탁을 누구보다 잘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는 확실하게 제우스의 뜻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다. 제우스의 뜻과 허락 사이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폴레모스가 그리스 사람들에게 자기 마음대로 하게 허락함으로써 제우스는 '평화'를 파내는 행동을 사형으로 금지해 놓았다. 디카이오폴리스가 신들의 지원으로 도시에 반대되게 행동했던 반면, 트뤼가이오스는 비록 모든 그리스 사람들의 지원을 받았지만 신들에게 반대되는 행동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데; 따라서 디카이오폴리스는 오직 개인적 평화만 이루고, 트뤼가이오스는 공공의 평화를 이룬다. 브델리클레온과 비교해 볼 때, 트뤼가이오스는 신성한 금지를 단순히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들이박는다. 그가 완전히 미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제우스의 처벌을 면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의 관점에서 헤르메스를 보면 그는 신이 없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관점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대단하게 겁나지 않고, 혹은 아주 힘이 세지 않다는 관점에서 행동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제우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제우스가 왕의 지위나 힘을 잃어 버린 것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스트렙시아데스와 마치 뜻이 맞는 것처럼 행동한다. 어떻게 좀 과장하면 트뤼가이오스를 스트렙시아데스화 한다. 스트렙시아데스와 트뤼가이오스 사이의 차이에 골몰할 필요는 없다: 트뤼가이오스는 그가 그것에 맞추어 행동하는 관점에 도달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늘에 올라갔었으므로 그는 신들에 대한 지식에서 소크라테스를 뛰어 넘는다.
트뤼가이오스가 경비를 공범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더 이상 에이레네를 훔치지 않아도 되게 된다. 애초부터 그들을 트뤼가이오스의 지휘 아래 두었던 코러스가 이제는 트뤼가이오스에게 묻지 않고 그들을 헤르메스의 지휘 아래 두고; 경건한 사람들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신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신이 그들을 수공예장인의 능력을 가지고 일하도록 지시해 달라고 부탁한다(426-39; cf. 357-60): 트뤼가이오스는 수공예장인이 아니다. 헤르메스는 기술적인 활동을 맡아 보고 있어; 트뤼가이오스는 전체를 넘겨 준다. 트뤼가이오스가 제안하자 모두들 신들에게 기도한다. 그는 여행 전에 기도하지 않았었는데; 헤르메스를 이기고 나자 신들에 대한 그의 자세가 자연스레 달라졌다. 그와 코러스는 평화 애호가들에게는 최선의 것을 전쟁 애호가들에게는 최악의 것을 바란다. 트뤼가이오스는 헤르메스, 카리스여신들, 호라이(에이레네의 여동생), 아프로디테, 그리고 데지르(아프로디테의 아들)에게 제주를 붓는다. 헤르메스의 지도로 구덩이에서 에이레네를 꺼내는 일이 진행되지만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다. 코러스는 트뤼가이오스와 헤르메스에게 와서 도우라고 요청하나; 그러나 트뤼가이오스는 그 일을 혼자서 해 왔다고 주장한다. 어떤 그리스 사람들이 적절히 힘쓰지 않고 심지어 방해를 하기 때문에 일은 충분히 진척되지 않는다. 헤르메스는 특히 아테네 사람들과 메가라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발견한다. 코러스의 대장이 제안하여, 농부 혼자서 일을 하자 일이 훨씬 진척되고, 그들 모두가 조금 더 노력하자 에이레네가 동료들인 오포라('풍요')와 테오리아('축제')와 함께 지상으로 나온다.
에이레네를 풀어주는 것에 대해 약간의 저항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러나 그 저항은 평화 애호가 쪽에서 더욱 열심히 일하여 해결하였다: 그것은 변론으로, 확실히 논쟁으로 극복된 것이 아니다. "평화"에서 앞에서 본 네 편의 희극보다 훨씬 더 많이 전체 구도의 성공이 변론들보다 행동들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풍뎅이 등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 두 절굿대의 분실, 폴레모스의 새 절굿대의 제작 실패, 그리고 에이레네 파내기 등이다.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유일한 변론은 트뤼가이오스의 헤르메스 설득인데- 실제 20행의 운문이다. 트뤼가이오스는 제우스와 논쟁을 시도하였고, 그리고 작가에게는 제우스와 트뤼가이오스 간의 논쟁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을 것이었지만; 그 시도는 폐기되었다. 약간의 그리스 사람들 쪽에서 나온 평화에 대한 저항은 대다수가 굳세게 평화를 좋아하여, 변론 없이 극복되었고, 그리고 그 대다수는 트뤼가이오스와 헤르메스가 이끌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트뤼가이오스와 디카이오폴리스 사이의 대비인데; 디카이오폴리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논쟁을 벌렸었고,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를 빌리자 않았으면 그 논쟁에서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변론에 대해 반대되는 것 하나는 행동이고, 다른 반대는 침묵이다. 트뤼가이오스가 취한 행동의 중요한 의미가 그가 헤르메스를 설득한 짧은 변론에 의해 가려진다.
전쟁 때문에 궁핍해져서 트뤼가이오스는 에이레네에게 적절하게 말을 건넬 소재가 부족하다. 그는 테오리아를 칭송하는 말을 찾는다(523-26;cf. 342와 그 내용). 그녀 때문에 생긴 기쁨 가운데 그는 소포클레스의 노래들과 에우리피데스의 "작은 운문"들을 열거하고; 헤르메스는 후자를 용인하지 않는다. 디카이오폴리스와 에우리피데스의 관련이 기억난다. 그 이외에는 헤르메스도 트뤼가이오스, 코러스, 일반적인 그리스 사람들과 함께 평화가 다시 찾아온 기쁨을 나눈다. 관객 가운데서 약간 다른 느낌이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모든 농부들은 모두 평화에 대해 행복해 하지만 모든 수공예장인들은 아닌데; 무기 제조업자들은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한다. 기술로만 볼 때, 농사는 별로 칭송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헤르메스가 제안해서, 트뤼가이오스는 농부들- '평화'를 파낸 바로 그 사람들(550 ff., 508,511)-에게 전쟁의 기구들을 농사 기구들로 바꾸어 가진 뒤에 경작지로 돌아가라고, 아니면 '평화'를 파내는 일과 같은 전쟁의 일에서 돌아서서 평화 그 자체의 일로 돌아가라고 격려한다. 어쨌든 그들의 관점에서 농부들은 그들 그대로 평화 애호가들이어서 그러므로 그들은 그대로 정의롭다. 정의와 경건의 연결 고리를 상기하게 한다. 포도나무 재배자인 트뤼가이오스는 물론 그 자신이 전쟁으로 인해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경작지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시골 사람이다. 그는 농기구들의 모습과, 그리고 에이레네 여신이 마련해 준 옛날 방식의 생활 두 가지 모두를 칭송한다. 코러스의 단원들도 차례로 돌아가며 혼자서만이 시골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왔었던 에이레네를 칭송한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데메테르나, 다른 어떤 여신들에게나, 아니면 신들에게 한번도 신세진 적이 없는 것처럼 노래한다. 그들은 이미 에이레네가 모든 여신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여신이라 부르고 (308), 가장 인정이 많고 인심이 후한 신성이라고 부른다(392-94).
에이레네가 만들어 낸 압도적인 인상과 과거 그녀의 시혜에 대한 회상이 헤르메스로 하여금 트뤼가이오스가 약속하였던 새로운 최고의 명예를 누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편 에이레네가 다른 모든 신들을 완전히 사그러지게 하였을지도 모르는 동안에, 아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고, 눈에 보이는 헤르메스를 잊어버릴 수 없다. 그의 도움이 없이는 여신이 결코 햇빛 속으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농부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지만, 에이레네는 그녀 자신의 힘으로는 지상으로 나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인데; 풀려난 이후에조차도 그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표시를 전혀 내지 않았다. 농부들이 구덩이에서 그녀를 찾았지만, 그러나 그녀가 그리스에 없었던 전 기간 동안에, 그녀가 그 구덩이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장 인자한 신인 헤르메스에게 그 긴 시간 동안에 그녀가 어디에 있었는지 묻는데, 아마도 그 다음에는 그 구덩이 속에 있기 전에 그녀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그녀가 있었던 그곳- 어느 곳이든지 간에-으로부터 옮겨졌었는지 물어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헤르메스는 농부들이 몸짓을 한 것처럼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러나 그는 에이레네가 어떻게 그리스를 떠났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그 답으로 간단하게 한동안 그녀가 신들과 있었다고 대답할 수 있었지만, 이것이 쉽게 곤란하게 만들었을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라고 할 수 있었다. '불의의 변론'이 올바름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올바름은 신들과 함께 있다고 대답했다가, '정의의 변론'이 말려들었던 어려움을 기억한다("구름" 903-4). 농부들은 헤르메스로부터 제우스가 에이레네를 파내는 것을 중대한 범죄로 정했다는 것을 들었다. 트뤼가이오스가 애초에 제우스가 그리스를 파멸시킨다고, 즉 에이레네를 그리스에서 멀리 둔다고 비난한 것을 기억한다. 농부에게 하는 대답에서 헤르메스는 어떤 신의 어떤 잘못도 암묵적으로 부인한다: 신들이 아닌 아티카의 농부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고; 신들 어쨌든 헤르메스가 평화의 회복에 책임이 있다. 헤르메스는 그 단순한 질문자들에 대해 우위를 점한다. 그는 이전에 지나간 모든 것들과, 또한 어쩌면 다른 어느 계층보다도 농부들이 더 평화에 헌신한다는 것에 따라서 암시되어 있던, 그리고 단지 암시되어 있던 것만도 아닌, 농부들에 대한 판단을 전적으로 뒤바꾼다.
앞서 논의하였던 네 연극들의 제목을 대비할 때, 지금에 논의하고 있는 연극의 제목은 코러스를 가르키지 않는다. 이 이유는 "평화"의 코로스의 성격이나 구성이 모호하거나 아니면 모호하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이다. 트뤼가이오스가 그의 조력자들을 부르는 것으로부터(292-98) 코로스가 농부들, 수공예장인들, 장사꾼들로 전체 그리스의 도시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예상할 것이다. 이 예상은 어떤 면에서 그들이 에이레네를 그 구덩이에서 끌어내면서 표명한 칭송과 비난으로 확인된다(464-508). 이것으로 작가가 그의 습관대로 극적인 환상을 깨는 것과, 코로스를 오직 아테네 시민들로만 구성된 것인 양 다루는 것을 막지 못한다(347-56). 그렇지만 끝으로 코로스가 오로지 아티카의 농부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명백해진다(603 ff.). 이 모호함이 농부들과 수공예장인들과의 혹은 어떤 종류의 수공예장인들과의 차이점을 한편으로는 감추면서 드러낸다. "평화"에서의 코로스는 연극 전체를 통해서 "기사들"에서의 코로스보다 훨씬 더 굴곡이 없는 엄격하게 관료적인 모습으로 행동한다. 말하자면 "평화"에서 코로스가 유일하게 기여한 것은 기술적인 수고가 아니라 순전히 신체적인 것이다.
헤르메스에 따르면 여신의 실종은 애초 페이디아스가 겪었던 불운 때문이었다. (페이디아스는 아테나를 조각할 재료로 그가 받아 가지고 있던 금을 훔쳤던 죄로 추방당했다.) 페이디아스의 친구 페리클레스는 농부들의 본성을 알고 있어서, 잘못되면 페이디아스의 운명에 연루될까 봐 그들의 주의를 돌려 놓으려고 메가라의 포고령을 통과시킨다고 정했는데,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졌고; 한번 전쟁이 일어나자 멈출 수가 없었고, 그리고는 에이레네가 사라졌다. 헤르메스는 디카이오폴리스가 했었듯이 전쟁을 쉽사리 페리클레스 (혹은 그의 아스파시아)에까지 추적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그에 따르면, 그는 농부들의 본성이 초래한 것을 강제로 떠밀려서 행동했던<주11> 페리클레스를 무죄방면하였다. 페리클레스와 페이디아스 간의 관계로 보아, 헤르메스는 페이디아스 역시 무죄방면하는 것을 생각하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농부들의 본성이 이미 페이디아스의 처벌에 효력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트뤼가이오스는 결코 에이레네와 페이디아스 간의 관련을 들어 본적이 없다. 그렇지만 코로스는 관련을 안다: 에이레네는 보기 아름답고, 그리고 페이디아스는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드는 것으로 저명했다. 지금까지 관찰할 수 있었던 것에 관한 한, 에이레네는 다른 모든 신들보다 더 빛나는 하나의 조각상일 뿐이다<주12>. 지금까지 관찰할 수 있었던 것에 관한 한,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은 결코 말하거나 움직이지 않고, 반면에 그들의 다른 한편인 폴레모스와 그의 동료는 말을 하고 움직인다. 즉 명백히 살아 있다. 헤르메스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마치 유독 인정없고 혐오스런 신들은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보이고, 반면 아름답고 인정 많은 것들은 수공예장인의- 농부들과 구별되는 기술자들- 작품들로 보일 수 있다. 달리 말해서 헤르메스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마치 유독 여성의 신성들만 아름답고 인정 많은 것처럼 보일 것인데; 한편으로 에이레네와, 다른 한편으로 아프로디테와 카리스여신들 사이의 가까운 관계를 기억하는데(456; cf. "아카르나이 사람들" 989); 트뤼가이오스가 여자 자식들만있다는 것도 또한 기억한다. (폴레모스가 전쟁 자체보다 덜 끔직한 것이나, 에이레네가 평화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과 꼭 같이.) 그리고 헤르메스로 말하면, 그가 인정이 많아지게 된 것은 트뤼가이오스의 변론과 선물 때문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헤르메스는 농부들의 비난을 페이디아스에 대한 칭송과 연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으로 헤르메스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에게서 아티카 농부가, 그리고 아테네 사람들에게서 펠로폰네소스 농부가 입은 손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트뤼가이오스와 코러스는 아테네 사람들이 적들의 농부들에게 한 것에 대해 충분히 용인하는데; 그들은 아직 같은 이름의 연극에 나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호전적인 열의와 같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에, 디카이오폴리스가 행동을 진행함에 따라 더욱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반면, 트뤼가이오스는 제우스의 뜻에 거슬러서 성공적으로 행동하였었고, 행동이 진행됨에 따라 더욱 평범한 농부가 된다는 것을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만 한다. 이것에 따라서 디카이오폴리스와 대비해서 볼 때, 트뤼가이오스는 아테네에게 전쟁 발발의 책임이있다고 단언하지 않고, 그리고 헤르메스가 그것을 단언하자, 에이레네와 페이디아스 간의 관련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면서까지 자신을 제어하여 그 화제를 피한다. 마지막으로 헤르메스는 아테네에서 피난민으로 알려졌던 시골 사람들이 에이레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호소하려 할 때마다 그녀를 쫓아버렸던 그 연설가들을 찾아가고자 어떻게 그 길을 알고자 했었는지 보여 준다. 연설자들이 미개한 것은 농부들의 지지를 제외하면 아무런 영향이 없었을 것이었고; 최악의 연설자는 물론 클레온이었다. 트뤼가이오스는 클레온이 이미 죽어서 더 이상 아테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침묵하라고 조언하고; 그는 헤르메스가 가진 클레온에 대한 죄목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충분히 애국적이어서 주제를 바꾸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연극의 초기에 모든 종류의 것들에게 말을 걸었었던 그는 에이레네에게 왜 침묵하고 있느냐고 말을 건넨다. 그래서 그는 이 모범적인 신성의 태도에 대한 질문을 효과적으로 제기한다. 에이레네는 대답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 더해, 그리고 말도 없는 것인가? 헤르메스는 관객들이 그녀에게 한 짓에 대하여 그녀가 화가 나 있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이 있는 앞에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신들이 말을 하지 않을 경우에 그것은 신들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들의 실수 탓이다. 헤르메스는 확실히 일반적으로 신들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에이레네가 가진 아테네 사람들에 대한 감정에게로 돌린다(203-9). 이것은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다른 신들처럼 그리스 사람들에게 화가 났었다면, 왜 폴레모스가 그녀를 땅에 묻을 필요가 있었을까? 폴레모스의 행동은 어쩐지 마치 에이레네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에이레네는 화를 낼 수가 없다는 증명할 필요가 거의 없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트뤼가이오스는 관객이 아니므로, 그는 헤르메스에게 헤르메스가 스트렙시아데스에게 속삭이었듯이("구름"1478-85), 에이레네도 트뤼가이오스에게 속삭이게 하라고 부탁했어야 좋았다. 그는 그녀가 동료 신인 헤르메스에게 속삭이게 하여 난처함을 피한다. 헤르메스는 에이레네에게 아테네 사람들에 대해 그녀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자기에게 말하라고 부탁한다. 그에 따르면, 에이레네는 퓔로스에서 휴전 협정들이 성공한 다음, 많은 휴전 협정들을 가지고 갔을 때마다 의회에서 세 번이나 좌절하게 했던 그들을 비난한다고 그에게 속삭인다 한다. 이것은 트뤼가이오스가 수긍하듯이 실수였고 그는 그녀에게 용서를 바란다. 에이레네가 말하기 시작한 뒤에, 아니면 인간들은 들을 수 없는 방법으로 속삭이기를 시작한 뒤에, 비록 누가 그녀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해도 그녀는 멈출 수가 없다: 그녀는 오로지 질문들만 내뱉는다. 헤르메스에 따르면 에이레네는 아테네에서 누구가 최고로 그녀에게 악의를 가졌으며, 누가 그녀의 친구이었는지를 그에게 물었고; 트뤼가이오스는 겨우 그녀에게 아니면 헤르메스에게 누구가 최고로 그녀에게 선의를 가졌는지를 말할 뿐이다: 만일 들을 귀가 있다면, 이제는 그녀가 아테네에서 누가 평화의 가장 큰 적이었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 헤르메스에 따르면, 에이레네는 더 나아가서 누구가 이 시점에 사람들의 지도자인지 물었다 한다. 트뤼가이오스가 그 질문에 대하여 그의 개인의 이름(휘페르볼로스)을 언급하자; 기적이 일어난다: 에이레네가 그녀의 머리를 돌려 버린다. 조각상들조차 그들의 머리를 돌리게 만드는 그런 충격적인 일들이 있다. 다른 말로, 이제 에이레네가 어떤 조각상 이상이라는 것이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 명백하다. 헤르메스는 그녀의 움직임에 대하여 에이레네가 그에게 설명해 준 척하지 않고 곧 설명한다. 트뤼가이오스는 에이레네에게 사람들과 자기가 할 수 있는 선택에 대하여 다시 안심시킨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에이레네의 요청은 많은 다른 것들에 대한 정보인데, 특히 그녀가 아테네에서 떠나기에 앞선 옛날 것들에 대한 것과, 최우선적으로 소포클레스에 대한 정보이다. 트뤼가이오스는 그녀에게 소포클레스가 시모니데스, 즉 욕심이 많은 시모니데스가 되어 버렸다고,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진실이라는 것은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mutatis mutandis'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떠난 뒤로 모든 것이 더욱 나빠졌다. 소포클레스에 대한 주석이 진정 놀랄 것은 아니다: 헤르메스는 트뤼가이오스가 에우리피데스와 구별하여소포클레스를 칭찬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고, 헤르메스가 좋아하였던 작가는 소득 애호가인 것으로 보인다. 에이레네가 조각상 이상이라는 것을 보고 들은 이후에, 헤르메스는 트뤼가이오스에게 오포라를 아내로 맞이할 것과, 테오리아를 평의회에 되돌려 주라고 부탁한다. 트뤼가이오스에 관한 한, 평화는 원상복구restitutio in integrum 이상이어서; 그는 새 아내를 받아들인다. 헤르메스와 기쁨에 넘치는 트뤼가이오스는 서로가 떠날 채비를 한다. 그 신이 그 인간에게 그를 즉 그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라고 부탁하는데; 트뤼가이오스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쇠똥구리가 사라져서- 그것은 하늘에 있을 것이다- 트뤼가이오스는 어떻게 땅 위로 내려가는지 모른다. 헤르메스가 말하여 주는 대로 그는 에이레네의 곁에 붙어서 내려가고; 오포라와 테오리아도 그를 따라간다. 아름다운 여신들이 추한 쇠똥구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에이레네가 빛 속으로 나와 있는 것, 그리고 적절히 환영 받고 있다는 것, 아니면 혹시 그녀가 살아 있는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면, 적절히 환영 받고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고 나자마자 바로 뒤에 파라바시스가 따라온다. 트뤼가이오스의 하강을 가리기만 할 뿐인 "평화"의 파라바시스는 앞에서 다룬 네 연극들의 파라바시스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첫 째로, 에피레마epirrhema와 안티에피레마antepirrhema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아티카의 농부들은 자신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코로스의 구성이나, 성격에 관한 이 연극의 제목이 가르키는 불분명함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파라바시스는 그의 기술을 칭찬하고, 그의 경쟁자와 약간명의 비극작가와 합창대로서의 코로스를 비난하면서, 유일하게 작가 자신만을 다룬다. 관객이나 도시들에 대해서 칭찬하지도 비난도 하지 않는다. 앞에서 본 연극들에서는 "평화"에서처럼 신들이 배우들만큼 중요한 적이 없었다. 더욱 더 현저한 것은 무우사(혹은 제우스의 딸로)가 세 번, 그리고 카리스여신들 한번을 제외한 어떤 신성도- 에이레네조차도- 파라바시스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인데; 에이레네가 무우사와 카리스여신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 즉 작가는 파라바시스의 독점적인 주제이다. 그는 정치적 장점보다도 그의 탁월한 기술을 강조한다: 정의(혹은 그 반대)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파라바시스는 작가가 클레온과 싸운 것을 "말벌들"에서 한 것과 같은 내용과 맥락으로 이야기하는데; 실제 이 주제를 다루는 거의 대부분의 운문은 "말벌들"에서 글자 그대로 따 온 것이다. 이런 일치는 "말벌들"과 "평화"가 그들의 주인이 연극의 전체 구도를 실행하는데도 두 하인들의 대화로 시작하는 유일한 연극들이란 점과 상응한다. 더 더욱 현저한 것은 두 파라바시스 사이의 차이점들인데; 그 차이점들이 융통성 없는 브델뤼클레온과, 작가 자신인 트뤼가이오스의 차이점에 관해 떠올렸던 생각을 확인해 준다. 이런 차이점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의 파라바시스가 "구름"을 내비치도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이 "평화"에서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말벌들"의 파라바시스에서 작가는 첫 번째 사람으로 결코 그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데, 반면 "평화"에서는 그가 아주 정밀하게 운문으로 먼저 번 연극에서 글자 그대로 받아 온 대로 하고; 이러한 태도로 행동하는 것으로, 즉 침묵으로 작가는 "아카르나이 사람들", "기사들" 그리고 "말벌들"에서보다 "평화"에서 "구름"에 더 가까이 간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는 "평화"의 파라바시스처럼 강조하여, 자신의 모습(그의 꾸미지 않는 성격)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희극작가 자신이 "평화"에서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단언하기 위한 이유들이 이것보다 더 많이 있다.
트뤼가이오스는 관객에게 신들에게 다녀온 뒤 무엇이 가장 먼저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다리가 아파 고통받고 있고, 그리고 높은 곳에서 보면 땅에서 보는 것보다 사람들이 작아 보이고 덜 나쁘게 보인다. 한번 추정해 본다면 신들이 사람들보다 분개하거나 벌을 받을 이유가 더 적다. 그리스 사람들이 전쟁을 벌리고 또 그 전쟁을 계속 이어가려는 것에 대해 제우스가 벌주는 것의 여려움을 알고 있다. 그의 하인 하나가 집 밖으로 나오다 그의 주인이 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그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묻자, 그는 단지 다리가 아픈 것만 이야기한다.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그 하인은 공중에서 배회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았었는지 계속 물어 간다. 트뤼가이오스는 단지 노래의 전주 부분을 수집하느라 날아 다니던 술의 신에게 바치는 찬양시들을 쓰는 시인의 영혼들을 서넛 보았을 뿐이다. 이것은 하인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 같지 않는데, 그는 사람들이 죽으면 공중에 있는 별이 된다고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뤼가이오스는 그 말이 사실이라며, 예를 들어 키로스의 시인 이온<주13>은 이제 샛별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이 공중에는 시인들만 있다거나- 트뤼가이오스가 시인들만 만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다- 아니면 모든 별들이 시인들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 별들은 사람들이 사는 것과 같이 산다(예를 들면 부자인 별들도 있어서 바깥으로 저녁 먹으러 나간다.). 트뤼가이오스는 별을 생각하며 작가를 패러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지어낸 해와 달의 음모 이야기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오포라의 이름도 하인에게 말하지 않고, 그에게 그녀를 데리고 가서, 그녀에게 신방을 차려주라 넘겨 주고, 그 동안 그는 테오리아를 평의회에다 복원시켜 놓으려 한다. 그 두 여자는 잘 알려진 창녀들인데- 그리고 그들이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창녀촌을 둔 신들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인의 눈에는 신들의 신분에 대하여 적대적인 영향을 주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오포라와 테오리아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신들의 음식이라면 그들도 그 음식이 필요하다. 코로스는 트뤼가이오스의 행복과 회춘에 대하여 늙은이인 그를 부러워한다. 모든 늙은이들이 평화가 오는 것을 통해 회춘하지는 않는데, 그리고 특히 코로스를 구성하는 농부들은 이를 희망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350-52). 평화가 모든 사람을 아름답게 하지는 않는데; 평화는 미화 작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여신이다. 트뤼가이오스의 관점에서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접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풍뎅이의 등에 올라 한 여행을 통해 그리스 사람들을 구했다. 오로지 아름답게 하는 사람만이 미화가 될 자격이 있다. 트뤼가이오스와 코로스 간의 대화가 그를 지체하게 하여 하인이 오포라에 관한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한다. 그가 돌아오자 그 주인은 평의회에 테오리아를 복원시키는 임무가 생각나고, 평의회가 극장에 와 있기 때문에 그는 쉽게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녀는 평의회의 공통의 즐거움이나 혹은 어쩌면 그 의원들 각각의 즐거움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 트뤼가이오스가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매력을 가르킨다 해서 무례하고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총체적으로 외설적인 이 장면은 트뤼가이오스가 더 이상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를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잊어버리게 한다. 외설은 변론이 짧은 것만큼이나 짧게 감추어져 있다. 그의 신부는 버려두고(그는 그녀의 이름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테오리아에 관한 그의 임무를 다한 뒤에 코로스는 그를 착한 시민이라며 칭찬한다- 디카이오폴리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로부터 착한 시민이라는 칭송을 결코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코로스가 그를 모든 인간의 구원자라고 칭송하자 만족한다. 그러나 코로스가 신들 다음 두 번째이지만 그를 언제나 첫 번째로 여길 것이라는 말을 계속하자, 그는 그 자신이 모든 인간의 구원자이기에는 조금 덜하다면서 그 주장을 내려 놓는다. 코로스가 그의 공적들을 두고 정당하게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다음 단계는 에이레네에게 기도와 제물로 경배하는 것이다. 어쨌든 트뤼가이오스와 그의 하인이 보는 에이레네는 조각상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녀는 그런 것에 대해 말로만 언급되었다(923). 주인은 아테네 사람들이 서로에게 또한 동맹자들에게 양과 같아지도록 제물을 양으로 쓰자고 하인이 말하자 이를 받아 들인다: 누가 모든 그리스 사람들에게,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양 같이 되어야 한다고 소원할 만큼 어리석을 수 있겠는가? 코로스는 경건한 분위기로 반응을 보이고; 지금과 같은 경건함은 이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한 신의 뜻과, 뤼가이오스거나 혹은 그 자리에 있는 신성의 뜻과 일치하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939-46). 희생 제물의 준비가 끝났을 때, 트뤼가이오스와 하인은 여신에게 기도한다. 트뤼가이오스는 간단하고 고결하게 에이레네에게 기도하고, 결혼과 코로스의 여주인으로서 그녀는 그들의 제물을 받아 들인다. 하인은 그녀에게 더 이상 한 남자의 주의를 끌다가 그녀 자신을 숨기는 바람난 여자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기도한다: 에이레네는 전에 평화 애호자들의 소원을 가지고 놀았는데; 하인의 눈에 그녀는 그렇게 생각되는 것만큼 인정스럽지 않다. 트뤼가이오스는 하인의 기도와 연합하여 에이레네에게 특히 그리스 사람들을 어째 좀 신사답게 만들어 주고, 아테네의 시장을- 겨우 디카이오폴리스의 개인 시장 같은 것이 아니라(cf. 999-1005, "아카르나이 사람들" 729 ff.과 860 ff.)- 메가라나 보이티아의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 채우는 것으로 그들을 축복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트뤼가이오스는 위안자의 기술로 진행하고, 그의 하인은 요리 기술의 요구에 맞추어- 에이레네가 도살을 싫어하니까 그녀의 신당이 아닌 곳에서- 양이 희생된다. 코로스는 트뤼가이오스의 완성된 지혜와 기량을 갖춘 대담함과, 성스러운 도시가 파멸되기 이전에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 오뒤세우스와 같은 고통을 받은 것에 대해 칭송한다. 트뤼가이오스는 여신 에이레네의 완벽한 신자이다.
트뤼가이오스와 하인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히에로클레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신탁을 전하는 사람이며, 허풍쟁이처럼 보이고, 실제 허풍쟁이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트뤼가이오스는 그가 평화를 반대한다는 것을 아는 반면, 하인은 그가 고기 냄세를 맡고 온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처음 히에로클레스는 제물은 무엇이며 누구에게 바쳤느냐고 묻고, 이어서 첫 조각을 요구하자 주인과 하인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척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데; 그러나 결국 트뤼가이오스는 에이레네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대답하게 된다. 히에로클레스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신들의 뜻에 무지함에 충격을 받는데; 트뤼가이오스는 단지 히에로클레스가 쓰는 부지불식간의 어이없는 언사가 놀라울 따름이다. 히에로클레스에 따르면, 에이레네가 이제 풀려났던 것은 신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는데; 그 전쟁은 이리가 양과 결혼하기 전에는 끝나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다. 아무도 히에로클레스가 신들의 뜻에 대하여 진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트뤼가이오스보다 잘 알지 못하는데(cf.371-72), 그러나 그 뜻 뒤에 숨은 힘을 재어 놓고 있는 그는 어떻게 해도 흔들리지 않고; 그는 이리가 양과 결혼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만 지적하며 스스로 자제하고 있다. 여러가지 인간들이 그들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한- 그리고 특히, 아테네 사람들이 아테네 사람들로 스파르타 사람들이 스파르타 사람들로 남아 있는 한-, 평화는 없을 것이라는 의미의 신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트뤼가이오스의 조롱으로부터 히에로클레스를 옹호할 수 있을 것이나; 에이레네를 풀어 주는 것은 오로지 신들만이 바꿀 수 있고, 그리고 신들은 사람들이 그들만의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을 위하여 바꾸려 할 어떤 것들의 본성을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인데; 왜냐하면 신들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란 작은 존재이고, 그리하여 사람들끼리의 전쟁은 신들에게는 그것이 인간들 스스로에게 그런 만큼 끔직하게 보이지 않는다. 트뤼가이오스는 신들이 생활을 아름답게 만들고, 그리고 생활의 공포를 줄이는 반면에- 전쟁의 신으로서 보여진 폴레모스조차도 전쟁 그 자체보다는 덜 끔직하다-, 이러한 사실로 그들은 생활의 공포를 늘이거나, 혹은 사람들을 본디 가진 품성보다 더 나쁘게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면 더 간단하게, 어떤 것들이 본성을 지니고 있는 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전쟁의 가능성은 전쟁 사이의 오랜 평화의 시간이 요구된다거나, 혹은 영구불변의 전쟁이 지금 벌어지는 전쟁의 영구불변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 모두 진실이고; 사실은 트뤼가이오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합쳐서 그리스를 다스린다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고 보는데, 그 연합적 지배는 야만인들에 대항해서 연합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도 포함한다. 계속해서 한동안 평화가 아직 이르다고 주술적인 말투로 주장하고 난 후, 히에로클레스는 트뤼가이오스에게 희생물을 바치는 일에 무슨 종류의 신탁에 따랐느냐고 묻는다. 트리가이오스는 평화 애호가 호메로스를 따랐다. 히에로클레스는 호메로스의 권위를 거부하고, 쉬빌라와 바키스의 권위를 옹호한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제물의 고기를 먹자고 요구- 트뤼가이오스에게는 고기가 아직 익지 않았거나, 신으로부터 아직은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요구-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지만; 히에로클레스는 늑대가 양과 결혼하고 나면 바로 그 고기들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허풍쟁이는 곧 이어 도둑으로도 밝혀지는데, 주인과 하인에게 얻어 맞고 쫒겨난다.
평화의 적이 마지막으로 공격한 것을 이긴 것이 특별한 축하를 불러 왔다. 히에로클레스가 억지로 물러난 후 바로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이어진다. "평화"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는 첫 번째가 가진 결함 같은 것을 벌충해 주는데; 그것은 스트로페 하나와 안티스트로페 하나, 마찬가지로 에피레마 하나와 안티에피레마 하나로 구성되며; 그것은 완전히 작가나 합창단으로서의 코로스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 없고; 그것은 평화와 시골생활을 칭송하지만, 그것은 에이레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에이레네는 첫 번째 파라바시스에서도 언급이 되지 않는데; 그러나 이것이 이상 하지 않은 것이 두 번째의 것이 연극의 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반면, 첫 번째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아직 평화가 올 때가 멀었다는 히에로클레스의 관점에는 거칠게 동의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무용을 자랑스러워 하며, 그리고 집에서는 사자처럼 행세하다가 신들에 대해서나 혹은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전투에서는 도망치는 아테네 사람들을 경멸한다(cf. "말벌들" 18-19). 여기서 네 번씩이나 신을 언급하는 이들 평범하게 경건한 사람들은 전쟁 애호가가 아닐 뿐 아니라- 헤르메스는 그들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떠넘겼었다-, 추측하건데 신들의 뜻과 카이로스의 뜻이 일치하지 않을 때나, 혹은 카이로스가 그들의 편에 서 있을 때는 신들에 대해서도 전투를 벌릴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다: 신들은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였고, 카이로스는 브라시다스와 클레온이 동시에 죽는 것을 원하였다.
농부들이 그들의 말을 마친 다음으로 수공예 장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두 집단으로 등장한다. 첫 번째 무리는 낫을 만드는 사람과 물병을 만드는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평화와 또한 그것으로 그들의 사업이 번창하게 된 것에 대해 행복해 하며, 그리하여 트뤼가이오스에게 고마워하고; 그들은 그에게 그가 원하는 만큼 그들의 제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트뤼가이오스는 이 무리의 대변자가 세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는 가운데- 히에로클레스는 결코 이름으로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을 결혼 만찬을 같이 들자며 초대한다. 두 번째 무리는 갑옷 장사꾼과, 투구 제작자, 창 만드는 사람, 그리고 장식품 만드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행복하지 않은데, 평화가 그들의 사업을 망쳤기 때문이고; 그들의 제품은 더 이상 어디 쓸 곳도 없고, 그래서 아무 가치도 없으며; 트뤼가이오스는 그저 그들을 조롱할 뿐이다. 그가 전쟁 애호가인 수공예 장인들과 나눈 대화는 그가 평화 애호자 수공예 장인들과 나눈 대화의 다섯 배는 된다. 히에로클레스 역시 기술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 수공예 장인들은 전쟁에 대해 좋아하는 편이다. 히에로클레스의 장면과 수공예 장인들 장면 사이에서 말을 했던 농부들은 이제는 평화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평화 애호자들로 간주할 수 없다. 평화 애호가인 수공예 장인들의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그들은 평화가 아닌 그들의 수입을 사랑한다. 도시는 전쟁을 위한 연합체이다. 전쟁이나 평화에 대해 실제적인 시민들의 자세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트뤼가이오스가 초대한 두 손님의 두 아들들이 소개하는 미래의 시민들의 자세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두 어린 아들들은 트뤼가이오스의 두 어린 딸을 연상시킨다.). 라마코스의 아들인 아들1은 주로 호메로스로부터 따온 전쟁 애호 운문들을 읊으려 시도한다. 트뤼가이오스는 디오뉘소스에 맹세하고 그를 제지하는데; 그는 그가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 것을 칭송한 시를 읊기를 바라는데; 그러나 트뤼가이오스가 바라는 대로 따르려 노력하였지만, 그는 전쟁을 사랑하는 습관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트뤼가이오스는 그를 쫓아 버리고, 약삭빠른 즉 비겁함으로 악명 높은 클레오뉘모스의 아들인 아들2에게 약간 다른 노래를 부르도록 부탁하여, 그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다. 라마코스의 아들을 쫓아낸 반면, 그는 클레오뉘모스의 아들을 집안으로 가자고 환영한다. 라마코스의 아들과 바꾼 것이 클레오뉘모스의 아들과 바꾼 것보다 그 의미가 꽤나 더 넓다. 그것은 오직 비겁자의 아들에게만 전쟁을 비난하는 횃불을 다음 세대에 전하도록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도시의 관점에서 보면 에이레네에게 헌신하는 것은- 단지 전쟁에 의한 피로와는 구별하여- 비겁하다. 희극작가이며, 에이레네의 완벽한 신자인 트뤼가이오스는 평화주의자의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히에로클레스와 구별하여, 라마코스는 그의 손님 가운데 한 사람이고; 트뤼가이오스는 히에로클레스에게보다는 라마코스(그리고 클레오뉘모스)에게 더 가깝다. 에이레네가 그녀의 목을 돌린 후, 아무도 그녀가 여신이라는 데 의심을 가질 수 없지만, 그러나 확실히 그녀는 모든 신들과 사람들을 다스리는 최고의 여신은 아니다. 그리고 아무도 미래에 다시, 특히 전쟁을 좋아하는 여신 팔라스 아테나의 도시에서, 그녀가 스스로를 눈에 보이지 않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주14>.
에이레네가 공공의 평화가 돌아와 있는 덕분으로 연극은 작가와 코러스간의 완벽한 조화 속에 끝난다. 디카이오폴리스의 개인적인 평화가 그런 조화를 방해하였고, 그리하여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만찬을 연극의 다음에서 빼앗아 버리도록 요구하였던 반면, "평화"의 코로스는 당연한 결과로 만찬을 함께 들게 될 것이다: 트뤼가이오스는 코로스가 마음껏 먹도록 권하고, 또한 코로스는 그 권고를 마음으로 받아 들인다. 그 뒤에 오포라가 신부의 예식을 위해 들여진다.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화"에서 연극에 책임이 있는 사람의 전체 구도가 그가 마음으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데; 데모스테네스나, 스트렙시아데스나, 브델뤼클레온은 그 누구도 그들의 전체 구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누리지 못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작가의 최고봉임을 눈으로 보여 주며 시위한다. 결혼 후에 늙은 트뤼가이오스는 다른 농부나 포도나무 재배자들과 다름없이, 하늘에서 왔는지 혹은 어쨌든 보통이 아닌 출신 혹은 배경을 가진 그의 새 아내와 함께 시골에서 포도나무 재배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 멀리서라도 어떤 수공예 장인들이나, 페이디아스는 말할 것도 없이 또 다른 신들의 조각상을 만드는 사람이나, 혹은 신들을 연상케 하지 않을 것이고; 그는 그저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 경배하는 신들을 경배할 것이다. 확실히 이 점에서 그는 소크라테스의 반대이다. 개인적인 평화를 가진 그 자신만이 그 수혜자인 디카이오폴리스는 트뤼가이오스와 소크라테스의 사이에 서 있는데, 최소한 디카이오폴리스는 그가 전쟁이나 평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전적으로 정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관점에서 트뤼가이오스는 디카이오폴리스와 소크라테스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데; 디카이오폴리스가 가져온 평화와는 다르게, 트뤼가이오스가 가져온 평화는 신들에게 대항하는 최소한 신들에게 대항하는 소크라테스의 행동 혹은 변론과 흐릿하게 흡사한 행동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가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도시에 대해 그의 등을 돌리는 반면에,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희극작가는 도시에는 그의 등을 돌리지만 신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고 "평화"의 희극작가는 도시와는 조화를 이루면서 신들과는 그렇지 않다. 트뤼가이오스의 행동들은 디카이오폴리스나 소크라테스의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행동들을 도시가 받아 들이지 않듯이 비정치적이다. 개개인은 신들이 단순히 도시의 신들이 아니듯이, 단순히 도시의 일부분이 아니다. 개개인은 도시보다 하위이고, 그리고 신들은 도시보다 상위이며; 도시는 개개인과 신들의 사이에 있다. 그러나 신들과 개개인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모든 희생제들이나 기도들이 공공의 것은 아니다<주15>.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최상위와 최하위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그리하여 그 사이에 있는 임무를 이루어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보통 사람들의 곤궁함에서 대부분 출발하는 만큼 인생의 복사판이거나 혹은 거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 곤궁을, 웃는, 어리숙한, 멋진 태도로 극복하는지 혹은 극복하려는지 보여 준다. 그것은 통상적이고 낯익은 것에서 출발하여, 불가능한 것을 통하여, 혹은 불가능한 것으로 움직인다. 지금까지 논의하였던 연극들 중에,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이야기거리로 가장 빛나는 것이 "평화"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평화"는 "말벌들"의 깃대와는 반대 편에 서 있다. 이것은 두 연극 자체로 일치하고 있다. "말벌들"은 가장 통상적인 것, 다시 말해 가장 낮은 희극의 재료를, 본성적으로 악의를 가진 한 사람의 경우에 델파이에서 영감을 얻은 악의가 희극에서 얼마나 특별한 악의로 바뀌어 가는 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예를 들어 보여 주고 있다.
<주1> 50 (cf. 44); cf. "말벌들"의 <주>
<주2> 고전주 119. '아이오로스'는 페이딥피데스가 근친상간에 대한 한 구절을 인용한( 고전주 "구름" 1371) 연극이다.
<주3> "기사들" 1013, 1087; "새들" 514-15
<주4> 240-41; cf. "아카르나이 사람들" 978-87, 964.
<주5> Cf. "말벌들" 57.
<주6> Cf. 투키디데스 V 75.3 ('도시와 사람' 222를 보라)
<주7> Cf. 267을 271과 함께 그리고 276-78을 285와 함께; cf. 214와 218
<주8> 269-73, 280-84, 320; cf. "기사들" 1390-93.
<주9> "구름" 225-26, 584-86, 1506-7; "새들" 1572-73 (cf. '신명기' 4:19).
<주10> Cf. 188; "기사들" 156.
<주11> Cf. 투키디데스 VII 14와 48.4 (cf. '도시와 사람' 197-200).
<주12> Cf. 플루타르코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22 그리고 투키디데스 II 13.5 (도시와 사람 161)
<주13> cf. 디엘스Diels,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Vorsokratiker' 7th ed.,no.36.
<주14> "뤼시스트라테"의 마지막 말을 보라
<주15>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에 대한 회상' I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