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사들
4. "기사들"
이 연극은 불평들을 쏟아내는 두 하인들 사이의 대화로 막이 열린다. "구름"과 "아카르나이 사람들"에는 이 연극들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독백으로 시작한다. 이것으로 "기사들"에서의 사건이 처음부터 나오는 두 하인들의 협력으로 주도된다고 유추할 수 있을까? 그 하인들은 사실 데모스테네스 장군과 니키아스 장군이고, 그들의 주인은 '데모스'이다. '데모스'는 최근에 또 다른 노예로 파플라고니아의 사람을 하나 샀는데, 사실 그는 클레온이고, 그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다른 노예들에 대한, 실제로 데모스의 전 재산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이 틈입자이자 벼락 출세자는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들은 그를 저주하면서 그들의 운명을 한탄한다. 그러나 활동적이고 사내다운 데모스테네스는 곧 바로 울고 탄식하는 것이 피곤해져서, 그들의 고난을 끝장내게 할 무언가를 찾아 나서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담아 둘 만한 생각이 둘 모두에게 떠오르지 않는데; 니키아스는 과감함이 부족하고, 그리고 데모스테네스는 여전히 영감이 부족하다. 비록 잠시 동안에 그가 무기력하지만, 데모스테네스가 니키아스로 하여금 제안을 하나 만들어 내도록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기력하지는 않다. 니키아스는 겁이 나지만, 그래도 그들이 적에게서부터 탈주하려 하는 니키아스의 위험한 제안을 발표하는 사람이 데모스테네스가 되도록 하는 생각을 준비한다(왜냐하면 모두가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니키아스가 비겁하고, 복잡하며, 에우리피데스적인 방법인 그들이 탈주해야 한다는 제안을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데모스테네스는 이것을 거부하는데, 그것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좋아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 제안이 그들의 피부색으로 보아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니키아스는 그들이 잘 알려진 신의 신상 앞에 엎드려 굴복하자고 제안한다. 데모스테네스는 니키아스가 진정으로 신을 믿는 것을 보고 신기해서, 그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보이라 요구한다. 니키아스는 그가 신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로 신의 존재를 믿고 있다. 데모스테네스는 니키아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그러나 그가 행동으로 보이듯이, 어떤 신상 앞에서 엎드려 굴복하는 것이 그들에게 좋은 것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신들이 니키아스를 미워한다면, 니키아스와 그의 전우들은 신들의 도움을 받으리라고 합리적으로 바랄 수 없는데; 그들은 반드시 다른 데에서 도움을 찾아야 한다. 데모스테네스는 그들의 곤경을 관객들에게 설명해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관객들에 관한 한, 그들이 그 둘 동료 노예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희망이 약간 있다. 니키아스는 신들보다는 관객들이 자신과 데모스테네스의 어려움에 대하여 덜 즐거워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이에 동의한다. 연극의 사건들 이전에 존재하는 상황을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것으로 데모스테네스는 작가의 대변인 역활을 효과 있게 수행한다.(cf.228, 233); 데모스테네스는 연설가 이상이며, 똑똑하다는 자부심에 있어 니키아스보다 더 세다.
데모스테네스에 따르면, 그들의 주인 '데모스'는 더러운 성격의 반 귀머거리 늙은이이고, 그리고 최근에 사들인 파플라고니아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관하여 독보적으로 가장 똑똑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그의 주인에게 아첨하고 뇌물을 주는, 악의를 가진 나쁜 놈이다. 그는 다른 노예들이 주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는 그의 동료 노예들이 받을 보상들을 사취할 수 있다: 그는 퓔로스에서 스파르타에게 이긴 데모스테네스의 위대한 승리를 빼았았고; 그는 그의 명령으로 심각하고 급수가 떨어지는 벌을 받았던 그의 동료 노예들의 명단을 주인에게 만들어 준다. 클레온이 '데모스'를 가지고 노는 도구 중의 하나는 신탁인데, 그것이 주인을 미치게 하고 또 바보로 만든다. 데모스테네스는 '데모스'를 즐겁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는 클레온을 증오한다: '데모스'가 가하는 벌은 클레온이 가하겠다고 겁을 주는 벌에 비하면 상당히 가볍다.
관객들에게 연설하면서 데모스테네스는 그들 동정심을 얻는데 성공했을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작은 성공이 아니지만; 그는 관객들로부터로는 조언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어느 길로 누구에게로 돌아설런지 신중하게 정하자는 간곡한 권고를 니키아스에게 되풀이한다. 니키아스는 그들이 탈주한다는 제안을 되풀이하는 것 밖에 더 나은 안을 낼 수 없다. 데모스테네스는 상세한 설명으로 이 제안에 대한 그의 거부를 되풀이한다: 제우스와 같이, 예를 들면(cf. 말벌 620), 클레온은 모든 것을 내려다 보고 감시하는데; 그들은 그와 그의 처벌로 부터 달아날 수가 없었다. 니키아스는 그의 두 번째 제안, 즉 그들이 신들에게 돌아가자는 제안을 반복하지 않는데; 이제 그는 그들이 죽어 버리자고 제안한다. 데모스테네스는 그들이 가장 남자답게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 죽으려 한다. 니키아스는 황소의 피를 마시고 자결한 가장 남자다운 테미스토클레스를 본보기로 하자고 제안한다. 마신다는 말을 듣자 데모스테네스는 희망을 가지고; 기꺼이 마시려고 하는데; 황소의 피가 아니고; 물을 타지 않은 포도주이다: 그는 죽는 수단을 사는 수단으로 바꾸는데; 그가 포도주를 마셔서 영감을 얻을지도 모르고, 그것 덕분에 출구를 찾을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지 않는 니키아스는 술에 취하는 것이 온전한 숙고로 이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데모스테네스에게는 니키아스더러 파플라고니아 사람이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동안에 그가 마실 포도주를 약간 훔쳐 오라고 설득하는 것보다는 포도주 마시는 것의 이점들을 니키아스에게 확신시키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좋은 포도주를 한 잔 가득 받아 마신 다음, 데모스테네스는 그의 영감을 얻는데; 그에게 떠오른 계획은 그의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의 것인데; 포도주가 그에게 클레온이 데모스를 매혹으로 사로잡았던 바로 그 신탁들과 상의하라는 영감을 준다. 그의 지시로 니키아스는 잠자고 있는 클레온으로부터 그들에 대한 신탁들을 훔치고; 데모스테네스의 지시에 더욱 나아가서, 그는 대단한 보살핌으로 클레온을 보호하는 클레온의 성스러운 신탁도 함께 가져온다. 데모스테네스는 포도주를 계속 마시면서 그 신탁을 읽는다. 곧 이어서 그는 그 신탁이 클레온을 부수어 버리는 방법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신탁이 전해 주는 조언대로의 행동으로 데모스테네스는 클레온의 권력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하여 데모스테네스나 니키아스의 협조 없었다면 "기사들"의 사건이 시작될 수 없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최소한으로 니키아스가 경건심을(그의 신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암시가 없었다면, 데모스테네스가 아테네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 신탁들에 대한 믿음을 더 개척해 나갈 생각을 영감으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데모스테네스가 술에 취하는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탁들의 용도에 관해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 사이의 합의가(그렇게 되어 있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정신 말짱한 데모스테네스는 정신이 말짱한 니키아스와 합의를 이룰 수는 없었다<주10>. 데모스테네스의 술을 마시겠다는 결정으로 인하여 결국 그의 생각과 그의 인생을 최고조로 가져 와서, 그들의 인생을 없애버리자는 니키아스의 제안을 대신하는데; 결국 이 제안은 그들이 신들에게 돌아가자는- 데모스테네스가 신들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져 거절한- 니키아스의 먼저 번 제안을 대신한다. 이는 분명히 아무 희망이 없는 상황에의 탈출구로서 자살을 제안하는, 그리고 신들이 그를 미워한다는 것을 근거로 신들의 존재를 믿는, 바로 그 니키아스와 똑같고; 신들이 그를 미워하기 때문에, 디카이오폴리스처럼 그는 그의 인생을 그의 영혼을 사랑할 수 없다( "아카르나이 사람들" 357). 이 두 가지 니키아스의 제안들 간의 관련성이 "구름"에서의 가장 어두운 사건에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빛을 던진다. 분명히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의 탈출구로써 그의 학생이 자살하는 것을 한 방법으로 바로 제안했을 때, 소크라테스가 스트렙시아데스에 대한 교습을 갑자기 그리고 아무런 설명없이 중단하였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구름" pp.26-27). 자살이 인간들에게 불가피하게 해로운 존재로서의 신들을 믿는 것의 결과물이 될 수 있겠는가? 혹은 신들이 인간의 공포나 아니면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서- 나이 들지 않는 것에의 갈망에서, 그리고 결코 죽지 않는 것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스러운 존재들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든지 간에 그들은 인간의 자부심에 손상을 입힌다. 데모스테네스가 관객들 앞에서 연설하기에 앞서, 니키아스가 먼저 그들이 탈주하고 그리고 신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제안하다가, 그 연설 후에는 먼저 그들이 탈주를 하고, 그러고 나서 자살을 결행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신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자살로 대치하거나, 혹은 신들에게로 돌아가는 것과 자살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니 이제 클레온의 신탁으로 돌아가 보자.
만약 데모스테네스를 믿을 수 있다면- 신탁의 전체 내용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네 사람이 계속해서 돌아가며 아테네를 다스린다고 신탁이 말한다고 한다. 네 사람들 모두는 무엇인가를 판매하는 사람들이다. 그 순서는 다음으로 내려가는 순이거나, 품격이 떨어지는 순으로 보인다. 가죽장수 클레온은 세 번째이다. 그는 소시지장수에 의하여 쫓겨나거나 대체될 것이다. 그 소시지장수가 아테네를 다스릴 마지막 장사꾼일 것이다: 클레온의 축출과 그리고 소시지장수의 짧은 생애의 지배로, 장사꾼이 아닌, 즉 신사들이 다시 아테네를 다스릴 것이라는 것을, 즉 장사꾼들이 지배하던 시절에 앞서 있었던 황금의 시대가 또 돌아올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는가? 그렇게 되는 것이라면 그렇게 되겠지만, 제우스의 형벌처럼 클레온은 지배자들의 순서에 세 번째이고, 그리고 제우스처럼 그는 그의 가능한 후계자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아야 한다(아이스퀼로스, 프로메테우스 957-59). 아니면 엄격한 투퀴디데스조차 힌트를 주었던 것으로 보이듯이, 클레온은 페리클레스의 희극적 등치물이다. 경건하고 소극적인 니키아스는 즉시로 이 의기소침한 결론을 도출해 낸다: 어디서 신탁이 말하는 소시지장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데모스테네스는 대답한다: 우리가 반드시 그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 믿지 않는 사람은 신탁이 그들로 하여금 찾으려고 하는 어떤 행동도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것을 모른다: 소시지장수 하나가 성직을 수임이라도 하는듯이 금방 지나간다. 그리고 더욱 더 신기한 것은 꼭 알맞는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이 소시지장수가 클레온을 축출하는 데에 성공하는 바로 그 소시지장수로 밝혀진다는 것이다. 이 두 장군들은 그를 위해 모아둔 행복에 대해 들을 수 있도록 그를 그들에게로 부른다. 클레온의 때 이른 출현으로 신탁이 이루어지는 것이 망쳐질지도 모르기에, 누군가가 클레온을 감시하러 집 안으로 반드시 가야 해서, 그리고 니키아스가 데모스테네스를 위해 그러한 심부름을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그는 데모스테네스더러 소시지장수에게 신의 신탁에 대해서 알려주라고 부탁한다. 데모스테네스는 이 임무를 적절한 근엄으로 수행한다. 이 불쌍한 작자는 데모스테네스가 그를 데모스테네스의 손에 든 신탁이 말하는 대로 아테네의, 아테네 제국의, 그리고 절박한 미래의 아테네의, 더더욱 위대한 제국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거의 다 된 사람으로 대하고 인사를 건넬 때, 그가 우스개 감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믿을 만큼 충분히 예민하다. 그는 민감하게 어떻게 그가, 한 소시지장수가, 세상에 있는 한 지배자는 그냥 두고도, 단순히 신분이 있는 한 남자hombre가 될 수있는지 의아해 한다. 데모스테네스는 비록 그가 하층민 계급 출신이지만 그가 아테네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한다. 소시지장수는 겸손하게 그가 거대한 권력에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데모스테네스는 그의 이런 참한 척하는 표현에 말문이 막힌다: "당신이 신사계층에서 가지를 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뜻이 아니다", "신들에 맹세컨데, 나는 하층 계급의 사람들로부터 가지친 사람이다."라고 데모스테네스는 재차 주장한다: 만일 소시지장수가 정말 조금이라도 참하다면, 그가 클레온을 걸고 넘어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 소시지장수는 명백하게 오늘날의 아테네에서 얼마나 적은 교육이 시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마저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데모스테네스에게 그의 교육에 대단히 결함이 많음을 알게 해 준다: 그는 무우사의 것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는 "구름"에서의 '정의의 변론'이나 '불의의 변론' 어느 쪽이든지간에 그에 속하는 교육이 부족하다. 데모스테네스는 그가 적게 알면 적게 알수록 더욱 더 좋은 것이라며 그를 안심시킨다: 데모스를 이끄는 것은 음악교육이거나 명예로운 품성을 요구하는 것과는 아주 멀어서 무지와 불량끼가 요구된다. 소시지장수가 이제 신탁에 대해서 듣는 것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데모스테네스가 소개하는 말과 그리고 그가 이제 한 부분을 인용하는 신탁의 내용, 이 둘 모두로부터 신탁이 데모스테네스가 믿도록 유도해 온 만큼 간단하고 명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예를 들어, 신탁이 말하는 피를 마시는 독사가 바로 소시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데모스테네스의 대단한 재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앞서 언급된 신탁은 불량한 클레온을 극복하기 위하여 소시지장수의 불량끼가 요구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소시지장수가 데모스테네스에 의해 해석된 신탁이 그에게 알랑거리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때, 그는 데모스를 보살필 능력이 그에게 있나 없나 하는 의심을 나타낸다. 데모스테네스는 신탁과 상당히 떨어져 있는 정치 선동가demagogue가 필요로 하는 기술과 야비함이 이미 소시지장수가 가득히 가지고 있는 기술과 야비함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그를 침묵시킨다. 이제 소시지장수는 최소한 클레온과의 싸움을 기꺼이 감당하려 하는데, 그는 그 싸움에 동맹자들이 필요하다. 이 동맹자들은 데모스테네스가 그에게 보장하기를 '기사들'과 그리고 일반적으로 '더 나은 사람들'로, 데모스테네스 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또 신이다. 소시지장수가 닥쳐오는 싸움을 분명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데모스테네스는 클레온이 평소처럼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며 한층 더 안심시켜 준다. 클레온에 대한 공포 때문에 어느 공예가도 감히 그와 닮은 얼굴 모습을 만들지 않지만, 관객들은 똑똑해서 그들은 클레온을 알아볼 것이다. (데모스테네스는 한번 더 자신이 작가의 대변인임을 증명한다.) 이 순간에- 꼭 알맞는 순간에- 니키아스가 무서운 파플라고니아 사람의 접근을 알린다.
사건을 적절히 돌려 놓기 전에, 니키아스의 도움도 빼지 말고, 데모스테네스에 의해 주도된 계획에 대해 생각해 보자. 클레온은 아테네에서 유사 독재자 통치를 시행한다. 그는 그 권력을 그의 장점으로부터가 아니라 그의 후안무치한 민중 선동과 잔인함으로부터 빌린다. 그는 모두에게 공포를 주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더 나은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그에게서 그의 권력을 빼앗을 능력이 없다. 그들은 클레온보다 훨씬 더 야무지고 더 낮아서, 클레온을 끌어내릴 수 있는 정치 선동가가 필요하다(cf.328-32). 데모스테네스가 클레온의 신탁을 해석하고, 그것을 클레온에 불리하게 사용하는 것은 '기사들'과 그의 전우들에 의해 이런 관점에서 느껴진 필요 때문이다. '더 나은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을 수용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천민층 중에 최천민층이나- '더 나은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똑같다- 하층 중에 최하층은 언제나 '더 나은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남을 것이고; 그는 그들의 유능한 손에 하나의 안전한 도구이다<주2>. 이 자부심은 스피노자의 언어로 하나의 영원한 진리로 묘사될런지도 모른다. 지금 시대에 얼마나 프루시아의 기사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선동가들을- "11월의 범죄자들"의 통치- 히틀러를 이용하여 제거하려 시도했는지 관찰했었으며; 그들 가운데 가장 똑똑한 사람이 데모스테네스가 소시지장수를 바라보듯이 히틀러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시도는 신탁에 의해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면, 좀더 정확하게, "기사들"에서는 주도권이 전적으로 '더 나은 사람들' 쪽에 있다: 데모스테네스는 소시지장수를 그의 겸손에 호소하여, 그의 겸손에서 해방시켜야 하고; 소시지장수는 그의 '더 나은 사람들'과 그리고 신으로부터 그가 그 자신에게 좋은 것을 위해, 마찬가지로 도시에게 좋은 것을 위해, 하층 계급의 태도로 뻔뻔스럽게 행동해야 한다고 듣는데; 클레온은 그렇게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충동에 따르지 않는다. 그의 겸손한 태도로 그는 정의롭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디카이오폴리스의 그것과 비교할 경우 명백히 나타나는 대로 데모스테네스도 그렇다. 신탁이 그의 행동을, 즉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디카이오폴리스에 관련되는 어떤 것도 포함하는, 즉 암피테오스의 스파르타 여행 경비를 댄 것도 포함한 암피테오스의 신성한 임무만큼이나 적은, 그의 신탁을 이용하는 행동을 예견한다(그래서 금지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여행과 그 결과를 그 개인적인 이익으로 혼자서 사용한다. 데모스테네스의 행동은 역시 같은 이유로 디카이오폴리스의 행동보다 더 정의롭다: 암피테오스의 빠른 스파르타 왕복 여행이나,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디카이오폴리스의 개인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신탁이라고 주장하는 적힌 것들의 유용성같은 것들은 다른 정치 선동가에 의한 한 정치 선동가의 축출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믿을 수 없다.
클레온이 나타난다. 그는 음모가, 데모스를 해치는 음모가, 일어나는 것을 냄세 맡는데; 왜냐하면 그의 시각으로는 그의 권력에 대항하는 어떤음모도 바로 데모스에 대항하는 음모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얼마나 비열한지 몰라도, 그가 약간의 정치적인 판단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데; 장사꾼들의 지배에 대한 그의 적들의 불만은 데모스에 속하는 사람들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다. 소시지장수가 그에게는 가장 무시무시한 클레온에게서 뒷걸음질 친다. 데모스테네스는 '기사들'에게 나와서 소시지장수를 구출하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의 코로스를 이루고 있는 이들 젊은 사람들이 즉각 도착하고, 클레온과 싸워서 그를 부셔버리기를 바란다. 결국 클레온은 법정에서의 주심들로 구성된 늙은 사람들을 부르면서, 그가 그들에게 공정하게나 아니면 반칙적인 방법으로 부여한 금전적인 혜택을 상기시키는데, 그렇지만 아무도 그의 도움이 되려고 오지 않는다. 그가 부르는 그 사람들은 아마 극장 안에서 "기사들"을 즐기고 있을 것인데; 돌이켜 보면 데모스테네스는 관객들의 선의를 확인해 놓고 있었다. '기사들'이 볼 때 클레온은 그의 불의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 의해 정당하게 버려졌다. 절망 속에 클레온은 그들에게 주려고 했던 혜택 때문에 그가 공격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가장 쓰라린 적들인 바로 그 '기사들'을 이겨 보려고 애쓰지만; 그들은 그저 이 염치없고 불쌍한 클레온이 마지막 일순간에 그들을 달래려 하는 시도를 비웃는다. 그는 주먹질 시합이 고함치기 시합으로 대체되지 않았다면 졌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모든 너그러운 감정들을 빼앗기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면 그가 볼 때 '데모스'를 조정하는 힘이 '데모스' 그 자신은 끼어들지 않은 난투극의 승리자에게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재차 드러내는 소시지장수의 제안으로 이루어진다. 그럴 것이라고 예상한대로 클레온이 기쁨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는 즉각적으로 그의 적이- 그가 하층 계급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그와 전쟁을 하는 적들을 위해 도시를 반역하고 있다고 고발하는 것으로 새로운 시합을 시작한다. 소시지장수는 데모스테네스의 도움을 받아, 클레온이 공공의 자금을 횡령하고 착복했다는 혐의로 반격을 가한다. 협박이 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쪽의 고발과, 도적질의 과시와, 위증과 다른 불법적인 행동들을 추적하는 등 클레온은 소시지장수에 대해 작은 우세를 보이는데- 이는 그에 대한 코로스의 시각이 맞았음을 확인하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그들의 공포를 재점화하고, 그리하여 그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더 키운다. 최소한으로 말해서 그들이 그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것은 지금까지 비열한 소시지장수가 쌓아온 어떤 것에 대해서도 열등하지 않다. 그러나 소시지장수가 클레온이 가죽 거래를 부정직하게 했다고 욕하고 나오자, 클레온은 소시지장수나 그의 장사에 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 똑같은 반격을 할 수 없다. 여기가 소시지장수의 분명한 첫 째번 승리이다. '기사들'은 소시지장수가 몰염치함이나 교활함에서 클레온을 능가하며, 그래서 그가 클레온을 쫓아낼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되어 대단히 만족한다. 그들은 정치적인 증오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으로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분노로 그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공공의 체통의 근본에 대한 모독을 거부하면서, 그들은 소시지장수가 뻔뻔함과 야비함 그리고 교활함의 왕관을 다투는 시합에서 클레온을 물리쳐서, 교양이나 온화함 등은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라고 격려한다. 그들 스스로도 온화함의 흔적을 보여 주지 않는다. (소시지장수가 악랄한 반박의 기회를 놓치자, 그들이 그것을 보완한다.) 그들은 만일 그들의 소시지장수에 대한 평가가 맞을 경우, 그의 지배가 클레온의 지배보다 아테네에게나 그들에게 더 나쁠 것이라는 것을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들의 무모함은 신탁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가진 데모스테네스의 꾀에 대한 믿음으로 정당화될런지 모른다.
'기사들'의 인정으로 위치가 전보다 더 확실해지자 소시지장수는 이제 주도권을 쥔다. 그는 클레온이 먼저 말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의 말하려는 욕구는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상류 계층의 지지자들에게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데; 그는 그의 연설 능력에 대한 약간의 신뢰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을 타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고서 얻는 영감으로 나오는 그의 연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클레온은 그가 최대한의 분발과 자제력으로 한 무기력자에 대한 하층 계급의 고발자로서 가지고 있는 그의 적의 어떤 성공에 대한 자신감에 대해 추적해 나간다. 소시지장수는 포도주의 도움없이도 연설가로서의 능력을 진정으로 믿게 된다. 니키아스가 겁에 질리고, 연설가들이 고함치는 중에, 그는 그가 클레온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정성을 들인 국을 포함한 한 끼의 밥이 필요하다고 떠벌린다. 소시지장수와 니키아스에 비교해 볼 때(cf.87-88),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는 물에 타지 않은 포도주를 즐기고; 그러나 소시지장수가 절제에 관해서는 니키아스와 의견이 일치하는 반면, 그는 그의 무모함이나 남자다움에서 그와 다르다. 그는 그 자신의 이익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에, 그의 떠벌림이 그의 상층 계급의 협력자들로 하여금 하층 계급 사람들의 하층 계급의 솟는 샘물인 그가 그들의 신뢰를 받을 만 한가에 대해 의아한 생각을 가지도록 만든다(358-60). 그러나 이런 의심은 한 순간의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주의를 클레온과 소시지장수 간에 벌어지는 욕을 주고 받다가 이제는 소시지장수가 클레온에 대해 우위를 보이는 반칙적인 욕설 시합에 둔다. 그들은 진짜로 이런 대단한 후안무치의 전시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소기지장수더러 그들이 보기에 비겁함의 바닥에까지 가 있어 보이는 클레온에게 결정타를 날리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클레온은 항복하지 않는데; 그는 평의회나 데모스의 지지를 확신하고 있다. 코로스는 클레온의 흔들림 없는 태도를 단지 그것으로 그가 그 자신을 과시하는 또 다른 형태의 후안무치함으로 볼 뿐이다.
이제 소시지장수는 대중의 지꺼기에서 그가 자라났다고 과시하는 것으로 후안무치함에서 그가 더 월등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소년 시절에 그는 이미 완전한 도둑이, 그리고 거짓말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똑똑함을 눈여겨 보았던 한 연설가가 그가 데모스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이 예언은 소시지장수의 본성을 관찰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테네의 정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모든 불명료함을 떠나서, 특별히 소시지장수라고 지적하지 않았던 신탁보다 그가 후임자임을 훨씬 잘 보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두 예언들에 간의 또 다른 차이점이 어쩌면 더욱 중요할지도 모른다. 이 소시지장수는 겨우 이제서야 데모스테네스로부터 신탁에 대해 듣게 되지만, 반면에 그는 그 연설가의 예언을 그의 어린 시절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예언이 조그만치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그것은 이 똑똑하고 비양심적인 악한이 그의 대충대충 그리고 하층 계급적으로 사는 것을 흔들지 않았으며; 그것은 그에게 야망을 키우지 않았다. 그는 그의 생활을 감수했으며 오히려 즐겼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그 예언을 믿지 않았고(cf.426,212); 그가 그것을 믿기에는 너무 겸손했다. 아니면 그는 작은 악한에 야비한 족속이라 불리고; 이것을 아는 그는, 그가 설 자리를 알며; 그가 사는 시궁창에 속하는 것이 알맞다는 것을 알아서; 그리하여 그는 자기와 '더 나은 사람들'과 구별한다. 유독 그 혼자만이 클레온에 대해 사나운 증오심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는 그의 '더 나은 사람들'을 위해 클레온을 존경하는 것을 공격한다. 그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어째서 소시지장수에 관한 신탁을 알고 있는 클레온이 소시지장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았는지를 설명해 준다. 클레온은 성장과정의 비열함을 가지고 그와 겨룰 수가 없고; 클레온에서부터 소시지장수에게로의 교대는 명백히 극단적인 아테네의 품격의 저하를 가져 올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포세이돈처럼 바다와 땅을 뒤흔들 것이라며 겁만 줄 수 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431; cf.409) 소시지장수에게 이긴다. 그는 거래된 정확한 액수나 장소 그리고 어떤 다른 범죄의 정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고, 그냥 굉장한 액수의 돈을 도시로부터 훔쳐서 가지고 있다며, 이 불쌍한 작자를 고발하는 것으로 그가 곤경에 처해 쫄아 있음을 보여준다(435-36; cf.280-281). 소시지장수의 불투명함 내지는 무명성이 자산임을 증명한다. 그는 클레온의 그와 같은 범죄를 거래된 액수와 장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고발한다. 그것은 어둠 속의 단검이었는데; 그러나 그가 잡은 작은 행운인지 클레온은 즉시 그가 조용히 할 것을 조건으로 소시지장수에게 한 조각 짤라 주겠다고 제의하여 마음을 누그럽게 한다. '기사들'은 그 시궁창 출신이 기꺼이 뇌물을 받을 것이라 의심하지만,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대꾸하지 않는다. 그는 전적으로 이 모욕 아니면 고발 시합에서 이겨 그의 '더 나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데; 그의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비열한 태도들에도 돈에 관한 한 페리클레스만큼 뛰어나다(cf. 472-74). 시합은 비기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클레온을 모략중상으로 상대한 것은 그가 영광스런 승리를 이룩하였다고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은 확실히 전에는 소시지 장수를 클레온보다 훨씬 더 악당이라고 열성을 다해 묘사하였으나, 이제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에 차서 육체와 영혼이 가장 우수한 그들과 도시의 구세주로 도시의 자양분이라는 것이 그를 칭송하고 있는 코로스의 생각이다. 그러고 나서 곧 바로 소시지장수는 클레온이 그의 개인적 이익의 관점에서 퓔로스의 전쟁 포로에 대한 스파르타와의 비밀 협상에 개입했었다는 고발로 모든 기록들을 부셔버린다. 그의 적들이 하나가 아닌 많은 음모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들 중에 페르시아 왕과 그리고 보이오티아와의 음모도 있다는 클레온의 반격은 소시지장수의 거장적인 한방에 비해 매우 빈약한 차하의 수준이다. 그렇지만 클레온은 평의회에 그가 쥐고 있는 혐의들을 들이밀 것이고, 그것에 대해 그는 대단한 분노와 가장 재빠른 속도로 처리한다. 소시지장수는 거기로 그를 따라 가도록 그의 '더 나은 사람들'의 격려를 받는다. 그는, 물론 그의 남루한 옷차림은 빼고, 그의 거래 도구들을 그들과 함께 둔 다음 평의회 행을 이행한다. 그들은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일상의 활동 영역 안에서 도둑으로서, 거짓말쟁이로서, 이룩하였던 위업들을 그에게 상기시킨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따라, 그가 평의회가 하는 것에 앞서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평의회에서의 절차들은 파라바시스 동안에 진행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직접 접하도록 되어 있지 않고; 연극의 행동들을 연극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서 완결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그것은 파라바시스 동안에 반드시 진행되어야 한다. "기사들"에서의 파라바시스는 눈에 띄게 평화스럽다. 작가도, 코로스로 나오는 '기사들'도, 아테네 도시를 비난하지 않으며, 둘 모두 그들의 공적을 과시하지 않으며, 도시에 대해 요구 사항을 만들지 않는다: 괴물 같은 클레온과의 삶과 죽음을 건 투쟁에 임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선의가 필요하다. 파라바시스에서 '기사들'은 작가를 대신하여 적절한 연설하는데; 이것은 연극의 시작 부분에서 데모스테네스가 작가의 대변인 역활을 수행했었던 것과 분명히 일치하는 것이다. 별 다른 말이 없이 진행되나, '기사들'과 작가가 같은 편인 것은 그들이 소시지장수와 같은 편으로 하는 것과는 깊은 차이가 있는데; 작가의 독설을 구사하는 능력이 소시지장수에 대해 뒤떨어지지 않는 데 반해, 소시지장수는 클레온에게 증오의 말을 하지 않는다. '기사들'이 왜 아리스토파네스가 예전의 희극작가와 비교해 볼 때 극장에서 '기사들'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여 연설하도록 만드는 데에 일등인가를 설명하는데; 그는 그들이 미워하는 사람들, 특히 클레온을 같이 미워하고, 그리고 정의로운 것들에 대하여 과감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신작 희극은 옛 정치 형태에 의존하는데, 그런 정치 형태는 네 사람의 장사꾼이 지배하는 시절에 앞서 있었던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기사들'이- 이것은 작가의 요청에 의하여- 이러한 일들에 흥미를 보이는 관객들의 일부에게 왜 그 자신의 이름으로 희극들을 보여 주는 것을 그리 오래 미루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작가에 따르면, 희극들을 만들어 내는 일은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고, 그 밖에 아테네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이상하게 변화를 사랑하여서; 공공의 눈에 그가 너무 일찍 너무 늙어가지 않는다고 알려지도록 그의 작품을 내는 것을 보류하였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처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코로스는 작가처럼 현명하게 처신하지 않은 다른 세 사람의 희극작가에 대해 말하면서, 암시적으로 그들에 비해 희극작가로서 그가 월등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 희극작가들 중에 둘은 그들의 운명으로 한 희극작가가 한 늙은 희극작가로 되는 것이 얼마나 나쁜지를 보여 준다. '기사들'의 작가는 그들 두 희극작가 뿐만 아니라, 디카이오폴리스로 나타난 그의 화신에 비교해 볼 때 아직도 젊다: 새로운 종류의 희극의 젊은 작가는 가능한 한 오래 동안 젊게 남아 있고 싶은데, 그는 회춘이라 할 수 있는 옛 것의 복구로 통하는 길을 보여 주고 싶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젊다(731).
그 자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기사들'은 어디에서든지 승리하였고, 도시를 장식하였으며, 그리고- 지금 아테네에서 벌써 유명해진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들의 의무를 다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특별한 영예를 요구하지 않았던 그들의 아버지들 칭송한다. '기사들'은 점잖게 그들 자신의 공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삼가하는데; 그들은 아무런 보상에 대한 생각없이 그들 땅의 신들과 도시를 위해 싸운다. 그들은 평화시에 그들의 기사다운 모습이 부러움을 사지 않도록 부탁할 뿐이다. 그들은 그것이 그들의 신들인 것처럼 그들의 말들을 칭찬하고, 그리고 특히 아주 젊은이들은 최근의 코린토스 부근에서 말들이 이룬 업적에 대해서 칭송하는데; 이것은 자기 혼자 그의 지지자인 클레온이 말한 대로 코린토스의 적들이, 말들 뿐 아니라 기사들까지 포함하여, 말들의 위업을 묘사하였으니 '기사들'의 실수가 아니다. 파라바시스를 이루는 운률 가운데 첫 단락에서, 젊은 기사들은- 그들 중의 몇몇은 페이딥피데스의 동료였을지도 모른다고 알고 있는- 크로노스의 아들이며, 현 시점에서(최근의 기병과 해군의 승리로 인해) 아테네 사람들에게 그 어느 신보다 더욱 사랑을 받는 포세이돈에게 기도한다. 그들은 그에게 그들의 코로스로 오라고 간청한다. 두 번째 단락에서, 그들은 전쟁에서나, 시나, 힘에 있어, 그 모두를 뛰어 넘는 그들 땅의 가장 성스러운 수호 여신인 아테나이에게 기도한다. 그들은 그 여신에게 희극작가의 경쟁자들과 클레온, 둘 모두 다 이기도록 그들의 도우미인 나이키와 함께 그들에게 오라고 간청한다. 포세이돈과 아테나이 간의 차이점이 '기사들'과 작가 사이의 차이점을 상기시킨다.
"구름"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실내교습과 같이 파라바시스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 왜 직접 들을 수 없는가에 대한 강력한 이유가 있다. "기사들"에서는 평의회의 회의에서 이기고 돌아온 소시지장수가 파라바시스 동안에 일어났던 중요한 일들에 관한 정확한 보고를 해 준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적과의 전투에 보내고 그들를 걱정하는 여자들처럼 그에 대해 걱정을 해 준, 그리고 이제는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안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승리에 대해 고상하게 기쁨이 넘쳐나는 '기사들'에게 보고를 해 준다. 그들의 고상한 환영은 그의 요령없고 거친 보고와 게다가 그들이 했던 종전의 발언과도 비교된다. '기사들'에 의해 도출된 이런 변화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가 헤아려진다. 처음에 그들은 그저 작가의 대변인 노릇을 했었고, 그리고 작가의 이유와 '기사들'의 이유는 단순히 똑같지 아니하다. 무엇보다도 클레온이 절대로 이긴다는 전망이 그의 잘 양육된 적들을 부드럽게 만들고; '기사들'은 확실하게 그들이 처음에 그랬던 것보다 연극의 후반부에서는 덜 야만적이다. 소시지장수가 보고하듯이, 클레온은 평의회에서 '기사들'의 음모들에 대한 분노를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그는 소시지장수가 완전히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소시지장수는 무안무치에 대한 그의 예전 교육이 그의 '더 나은 사람들'이 그에게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깨달았고; 그는 도움을 받기 위해 후안무치의 신성들을 불렀다. 그는 클레온이 씌운 혐의에 대해 반박을 시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알고 있었다. 클레온은 여전히 그런 척하였지만, 그는 평의회의 구성원들이 도시가 잘 사는 것에, 아니 최소한 기왕의 통치권을 유지하는 데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고 믿는 척하지 않았다. 그는 평의회 의원 각각의 이익에 호소하였다. 그는 평의회에 나서 전쟁의 초기부터 공급이 달리어 왔던 청어가 들어보지 못한 저렴한 가격으로 팔릴 수 있게 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큰 소리로 알렸다. 평의회 의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런 가장 돈벌이가 좋은 건수를 아직 알고 있지 않아서; 그들은 그들이 구매를 할 때까지 비밀로 지켜야 하고, 그리고 재빨리 행동해야 하는데; 먼저 사는 자가 임자이다. 그들은 즉시로 모든 공공의 위험들을 잊는다. 클레온은 소시지장수의 발표가 사실인지 감히 물어볼 수도 없었으므로, 공공의 위험이 그대로 완전히 비대중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평의회가 공공의 위험에 대해 상기하라면서 내버려 둔다. 그는 행복한 행사로 황소 백 마리를 아테나이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자고 발의한다. 평의회는 이 동의를 승인한다. 소시지장수는 아테나이에게 이 백 마리의 황소를 희생 제물로 할 것과 추가로 아르테미스에게 천 마리의 양들을 바친다고 서약하자고 발의하여, 클레온이 클레온을 쫓아내도록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선택할 것이 없다. 이런 지난한 당혹 속에서, 클레온은 이제 정치인 중에서는 보다 뛰어난 것이 전무후무한 극단적인 안면 바꾸기를 실행한다. 한 사람의 권력을 포기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정책을 포기한 것이 더 낫다는 금언과 같이, 그는 갑자기 스파르타와의 평화 협상을 맹렬하게 반대하던 것에서 스파르타와 그런 협상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으로 바꾼다: 스파르타와의 평화를 만들어 내자. 그러면 내일부터 그 이후로 늘 아주 싼 값의 청어를 쭉 가질 것이다. 그러나 평의회의 의원들은 평화 속에서 여전히 싼 내일의 청어보다 비싸지 않은 오늘의 청어에 더 많은 흥미가 있다. 평의회 회의는 서둘러 끝난다. 소시지장수는 실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청어에 필요한 모든 유용한 양념거리들을 사러 시장으로 달려가고, 그것들을 평의회의 의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버리는데, 물론 그들은 즉시로 그들에게 싼 값의 청어라는 좋은 소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양념을 인정으로 주는 이 사람에게 고마워한다.
'기사들'은 그들이 보기에 무뢰함에 있어 그 무뢰한 클레온을 능가하는것을- 그들은 더 이상 소시지장수가 무뢰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다시 보여 주는 그들의 동맹자를 칭찬할 시간을 간신히 가지면서, 클레온과의 싸움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주의를 준다: 소시지장수는 두 가지작은 접전에서 이겼는데; 결정적인 전투는 아직 오지 않는다. 클레온이 스스로 다시 나타난다. 그는 그의 몸에 베인 대로 분노에 가득차서 아주 무서운 협박을 내뱉는데, 그러나 이제 그는 평소와 달리 자주 맹세한다. 그의 분노는 이제 오직 직접 소시지장수를 겨냥할 뿐인데; 그는 '기사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가 '기사들'이나 데모스테네스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그 소시지장수에게서 위협당한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안다. 소시지장수는 의도하지 않고, 그의 적수의 협박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그의 클레온에 대한 우월함을- 어떤 사람들은 천성적인 우월함이라 말하고자 한다- 나타낸다. 그는 정녕 협박에 있어 클레온과 같거나 더 낫지만; 그러나 클레온이 진짜로 야비하고 증오로 가득찬('기사들'도 그렇다) 반면에, 소시지장수는 오직 야비하게 연기하고; 가장 무시무시한 것을 외칠 때에도 그는 편하고 좋은 본성을 잃지 않는다. 협박 주고 받기는 결국 그의 적이 클레온에게 저질렀던 것들에 대해 그를 처벌하도록 데모스 앞으로 끌어내겠다는 협박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클레온의 최종적이고 가장 강력한 협박조차도, 그가 거리의 주먹질에서나 평의회에서 그를 이겼듯이, 그가 장악하고 있었던 의회에서도 그를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소시지장수를 겁먹게 하지 않는다. 클레온은 데모스가 그의 주머니 속에 있다고 과시한다. 이런 과시에 대해 소시지장수는 처음부터 그런 종류로 대응하지 않고; 처음에는 단순히 되묻는다: "얼마나 강하게 데모스가 당신에게 속해 있다고 믿는가?" 그는 데모스에 관해서는 클레온만큼의 자만심hybris이 없는데, 그는 단순히 데모스에 속하거나, 단순히 데모스의 자식이기 때문일 뿐이어서; 클레온은 데모스를 얕보는 반면에, 소시지장수는 그에 대한 아들로서의 존경을 가지고 있다(cf.725). 데모스테네스나 '기사들'을 공경하는 소시지장수는 데모스를 더욱 더 공경한다. 클레온은 똑똑함으로 데모스를 조종한다고 과시하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그를 경멸하고; 그는 이런 과시에 대해 클레온의 뒤에는 데모스를 구슬리고 바보 취급하는 모든 클레온과 같은 것들이 있지만, 그러나 데모스를 "모든 시간에 걸쳐" 바보 취급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다는 말로 대답한다(cf.1121-30). 여전히 만일 소시지장수가 대단한 자신감으로 데모스에 의해 시합이 결정난다고 기대하고 있다면 이것은 떨리는 일이다. 그는 그의 우월성을 비속한 말을 구사하는 것에서나 비방하는 것 그리고 마찬가지로 평의회에서 그 의원들을 개인적인 이익에 호소하는 것으로 증명했었다. 그러나 그가 공공의 이익을 돌보는 데에도, 데모스가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이, 어떤 한 주어진 시간에 그것을 공공의 이익이 되도록 하는 데에도, 클레온보다 뛰어날 것인가? 결국 그는 정치적인 경험이 절대로 부족하다. 그 밖에도 '데모스'가 인지하는 클레온이 그것의 대변인이 아닐 것인가? 이 두 어려움은 소시지장수가 아닌, 집안의 주인이며, 한 개인으로서 대변인이 필요 없고, 그의 개인적인 이익이 바로 공공의 이익으로 대치되는, 그러한 '데모스'의 모습으로 데모스가 자리잡도록 잘 짜놓은 작가에 의해 극복된다. 데모스를 의인화해 놓은 결과로 클레온은 데모스테네스와 같이 '데모스'의 노예인데 반해, 소시지장수는 집안의 한 아들이고, 아니면 아들로 판명되고, '기사들'은 단순히 "속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보아 왔던 모든 사건들은 '데모스'의 집 앞에서 진행되었다. '데모스'는 집 안에 있어 연극의 사건들을 알지 못한다. 그는 경쟁자들이 밖으로 나오라고 고함치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는 '데모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로 소시지장수와 '기사들'에게 얻어 맞았다고 불평한다. '데모스'는 '기사들'에게는 주목하지 않지만 그러나 소시지장수에게는 그가 누구인지 묻는다. 시작부터 그는 클레온과 '기사들'이 아니라, 클레온과 또 다른 상놈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소시지장수는 그 역시 '데모스'를 사랑하고 있고, 그에게 잘하고 싶다고, 그리고 많은 '더 나은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느낌을 나누고 있다고 대답하면서, 그렇지만 그와 그들은 클레온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비록 늙은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애인들- 장사꾼들과 소공업자들-을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보다 더 좋아하는 전형적인 소년 애인들처럼 심술궂은 행동을 하는 '데모스' 그 자신에 의해 '데모스'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방해 받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는 마치 그가 하층 계급이라는 그의 근본 출신이나, 그의 직업을 잊어버리게 된 것처럼 이야기한다. '데모스'의 저급한 추구에 대한 그의 맹비난은 데모스에게 그다지 탐탁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데; '데모스'가 벌이는 애인들과의 행실에 대한 힐책 가지고는 그의 그런 짓을 여전히 줄일 수 없을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클레온이 그 자신을 '데모스'의 애인이라고 불렀을 때는, 그는 그가 '데모스'에게 있는 그대로, 또는 행동들에서, 또는 '데모스'가 조금이라도 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데에, 완전하게 만족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클레온은 이것보다 더 넘어 간다. 클레온은 묵시적으로 그와 그리고 소위 말하는 존경 받는 애인들이 아닌 사람들이 '데모스'로부터의 수혜자라고 말하면서, '데모스'의 호색적인 기호를 옹호한다: 퓔로스에서 스파르타 사람들을 잡아들였던 사람이 바로 클레온이었다. 소시지장수는 클레온의 업적이 소시지장수가 그의 가게에 들러 오며 저질렀던 도둑질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대답은 '데모스'에게 클레온의 적이 하층 출신임을 나타낸다는 것으로 보아 좋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최소한으로 '데모스'의 눈에 클레온의 주장을 깍아내리기에는 매우 불충분한 것이다. 그리하여 클레온이 '데모스'에게 의회를 즉시 열어 그의 두 애인 간의 시합을 결정 짓자고 요청하자, 소시지장수는 그 결정이 프닠스에서 내려지지 않도록 요구하면서 클레온의 요청을 반대하고, '데모스'는 클레온의 제안에 편들어 결정한다. 소시지장수는 그의 이유가 졌다고 여긴다: '데모스'는 오직 그가 집 안에 있을 때만 이성에 따르는데, 즉 그 자신의 관계들을 다루는 것에 있어 한 개인의 신중함으로 행동할 때만이다. '기사들'은 소시지장수의 의기소침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은 클레온이 의회에서 가장 겁나는 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시지장수에게 클레온의 프로메테우스적인 풍부한 기량에 대해 주의를 주고; 그들은 더 이상 최대한의 후안무치와 야비함를 구사하라고 부추기지 않는다. 이제 '데모스' 앞에서의 시합은, 만일 더 대단한 품격의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먼저 번의 두 시합보다는 더 대단한 진지함의 시합이다.
클레온은 이 결정적인 시합을 그가 아테네 데모스와 관련된 공적이나 해악에 따라서 보상을 받거나 벌을 받게 되는 아테나이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연다. 소시지장수는 기도하지 않고, 보상도 요구하지 않지만, 만일 그가 '데모스'를 사랑하지 않고, 또 그를 소중히 하지 않는다면, 가장 무시무시하고 모멸적인 인간에 대한 벌도 기꺼히 감수할 것임을 표시한다. 클레온은 '데모스'에 대한 그의 사랑을 그가 의회의 의원으로서 어느 개개 시민의 훌륭한 삶well-being도 완전히 무시하고, '데모스'에게만 부여했던 혜택을 말하는 것으로 증명하기 시작한다: 클레온은 일생 동안 '데모스'를 한 인간 개인으로 한 시민으로 볼 수가 없다. 그 정반대가 진짜 소시지장수인데; 그에게는 클레온이 개개의 시민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단지 '데모스' 그 사람과 같지만 다른 사람인 개인들일 뿐이고; 그가 주장하듯이, '데모스'의 이익을 위해 다른 개인들에게 훔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당장 "데모스'에게 그가 그를 한 인간의 존재로서 돌보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그는 그가 프닠스의 딱딱한 돌바닥 위에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방석을 하나 준다. '데모스'는 소시지장수의 친절한 행동에 대단히 기뻐하고, 그에게 혜택을 주는 사람이, 그에 대한 기억이 데모스에게는 그렇게 극진한, 하르모니디오스의 폭군 시해자의 후손이 아닐까, 즉 그가 존경할 만한 사람의 후손이 아닐까 의아스럽게 여긴다: 늙은 사람에 대한 예절은 악한이라는 표시가 아니라서; 그는 그가 누구인지 그에게 묻는다. 그의 물음에 소시지장수가 대답할 수 있기 전에, 클레온은 소시지장수의 착한 짓을 깍아내리는 것으로 그의 반격을 개시하지만, 그는 그의 '데모스'에 관련된 그 자신의 공적을 계속해서 열거하는 것을 잊어 버린다. 소시지장수가 '데모스'에게 친절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어서, 그는 자신이 데모스를 위한 아주 좋은 전사라고 과시한다. 소시지장수의 견해로는 클레온의 친절이라는 작은 행동에 대한 무시와, 데모스를 위한 전사라는 과시가 그 자체로 명백히 그가 스파르타와의 평화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하여 평화 속에서 편안하게 시골에서 사는 '데모스'가 고난으로 성내에서 지내는 것을 불필요하게 오래 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그가 동정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달리 말하면, 클레온은 다른 정치인들이나 "과시하는 사람들"처럼 어떤 면에서는 초인간적인 오직 도시polis만을 볼 뿐, 도시polis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단순하고 난 체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지 않는다. 물론 클레온은 '데모스'의 제국과 지출을 위하여 '데모스'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주장하고; 클레온이 '데모스'에게 정치적인 물건들(제국과 돈)을 제공하는 반면에, 소시지장수는 사람들이 자연적인 물건들이라 부를 것들을 그에게 제공한다(783-85, 805-7, 868-74, 881-86). 소시지장수가 클레온의 전쟁 지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정책은 오로지 클레온을 권좌에 두는 것 이외에는 하는 것이 없는 사기극일 뿐이라고 단언하자, 이 정치 선동가demadogue는 그의 공적이 아테네 제국의 기초자인 테미스토클레스를 뛰어 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클레온이 그러한 데에까지 가도록 자극해 놓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옛 것들을 보존하면서 새 것들을 더했다고 특별히 대답하여, 즉 클레온의 과거 파괴를 내비치어, 소시지장수는 '데모스'의 클레온에 대한 불만의 첫 번째 표시를 이끌어 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그는 이 기회를 '데모스'에게 그가 클레온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용한다. 그리하여 클레온은 소시지장수의 공공 자금 도둑질에 대해 고발하려 시도하고; 소시지장수는 아주 쉽게 이런 시도를 같은 종류의 대답 하나로 이긴다. '기사들'은 '데모스' 그 자신의 앞에서 이룬 소시지장수의 첫 번째 승리에 대해 넘치는 기쁨을 참을 수 없는데; 그들은 소시지장수에게 그가 지금까지 밟아 왔던 길을 계속 따라 간다면, 그는 그리스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아테네와 그 제국의 유일한 지배자, 포세이돈과 비교될 수 있는(840; cf.431) '기사들'의 신, 그리고 이익을 내기에 충분한 대단한 부자가- 될 것이라 예언한다. 클레온에 대한 최후의 승리를 기대하는 기쁨으로 그들은 소시지장수가 클레온보다 더 낮은 것을 의미했으며, 단지 클레온을 쫓아내기 위해 '더 나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는 도구로서만 용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클레온은 '기사들에게 말하기를 그리고 포세이돈에 맹세하기를 그들의 기쁨을 설익은 것이라고 부른다: 그의 권력은 어떤 것이든 퓔로스에서 빼앗은 방패들이 남아 있는 한 안전하다. 그 방패들은 소시지장수가 '데모스'에게 클레온을 고발하듯이, '데모스'에 반하는 음모를 꾸미는 가죽장수 젊은이들에 의해 쓰여질 것인데; 음모자들은 클레온이 단언하기에 지치지 않듯이 신사다운 젊은이들이 아니다. 클레온에 의하여 음모를 믿도록 잘 훈련된 '데모스'는 즉시 소시지장수의 이야기를 믿고, 그리고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클레온에 반대하여 돌아선다. 클레온이 좋아하는 근거로 그를 이기고 난 후, 소시지장수는 그 가죽장수에게 '데모스'의 구두를 만들 가죽을 그에게 갖다 줘 본 적이 있는지 물으면서, 그가 좋아하는 근거로 다음 번의 화제를 만든다. 클레온은 침묵으로 쫄아든다. '데모스'는 그 질문에 강조해서 아니라고 맹세를 붙여 대답한다. 그리하여 소시지장수는 돈을 주고 사야 했던 그 자신이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을 '데모스'에게 준다. '데모스'는 이제 자기가 알기에 그가 데모스를 위해 가장 큰 공적을 얻었던 사람이라고, 그리고 어떤 사람보다 더 도시에 그리고 발가락들에 인정이 많다고 선언한다: '데모스'는 도시에 이익을 주는 것이란 결국 분석해 보면 시민들의 몸에 이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소시지장수와 견해를 함께한다. 클레온은 이런 정치에 대한 저급한 이해에 경악하고; 그는 남색 대상 소년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도시의 도덕적 단계를 올리기 위해 단행했던 것들을 지적한다. 소시지장수는 클레온이 이런 행동을 단지 시샘 때문에 했다고 대답한다: 남색 대상 소년들은 잠재적 연설가들이다<주3>. 아리스토파네스의 클레온은 투퀴디데스의 클레온과 같이 연설들의 적이다. 소시지장수가 단지 고전과 현대의 교육 둘이 부족할 뿐인 반면에, 클레온은 이들 둘 모두에 반대된다. 그러나 소시지장수와 함께 주된 화제로 돌아가면, 그는 이제 클레온이 '데모스'에게 늙은이용 겨울 옷(지금이 겨울의 한 복판이다) 결코 제공하지 않았었다며, 즉시로 그가 가지고 있던 겉옷을 '데모스'에게 벗어 준다. 그러자 '데모스'는 소시지장수가 진짜로 테미스토클레스를 뛰어 넘지는 않지만, 지혜나 창조성에 있어서는 그와 동등하다고 선언한다. 클레온이 원숭이 꼼수로 소시지장수가 그를 황당하게 한다고 씁스레하게 불평하자, 그의 적수는 클레온 그 자신이 그것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했던 바로 그 꼼수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데; 그는 단지 길의 끝까지 갈 뿐이며, 그래서 그 자신의 게임에서 클레온을 이긴다(cf. 50-4). 클레온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데모스'에게 주는 것 이외에는 선택할 것이 없다. 그렇지만 '데모스'는 가죽장수의 겉옷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죽의 악취 때문에 던져 버린다. 소시지장수는 '데모스'에게- 이 경우 진짜 데모스, 즉 관객들에게- 클레온에게 책임이 있었던 공공의 건강에 대한 더욱 중대한 결함을 상기시킨다. '데모스'는 전적으로 소시지장수에 동의한다. 클레온이 소시지장수를 자기를 익살로 곤란하게 하는 악한이라고 부르자, 그의 적수는 여신이 거짓 핑계들이나 과시들로 클레온은 이기라고 시켰기 때문에, 그가 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겸손한 소시지장수가 겸손으로부터 그의 '더 나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최상으로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부터 과시를 연기한다. 클레온은 소시지장수가 신탁을 인용하는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까지 '데모스'에게 건넨 지난 시절의 혜택들이 모두 소용없게 된 것을 보고 난 후, 그는 '데모스'에게 미래의 혜택을 약속하는데; 그는 그의 흰 머리칼을 뽑아내어 젊은이로 만들어 주겠다고까지 약속한다. 다른 것 모두 제쳐두고, 무엇이 진짜 회춘인지 클레온보다 더 잘 아는 소시지장수는 클레온의 미래에 얻는 이익에 대해 현재의 선물로 받아 친다(904-10). 클레온은 이제 완전히 무기력해서; 그는 불쌍한 소시지장수를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을 망하게 할 벌금과 금전적 부담으로 위협한다. 이에 소시지장수는 클레온을 어떤 것으로도 위협하지 않고; 그는 단지 그의 최악의 상태를 바랄 뿐이다. 그는 모든 것이 스스로 잘 풀려 갈 것을 확신한다. 그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그가 데모스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그가 지켜 나가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425-26). 문자 그대로는 아니지만, 그의 클레온에 대한 소망이 금방 이루어진다. '데모스'는 소시지장수의 소망에 문자 그대로 동의하며, 그가 남다른 선행의 한 시민이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고, 클레온으로부터 그의 권력을 빼앗는다. 클레온은, 아마 신탁을 기억하면서, '데모스'에게 그의 후임이 그 자신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는 소시지장수가 그의 후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조차 꾸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시지장수의 도움으로, 클레온의 "데모스'에 대한 또 다른 사기 범죄가 발견되자, 이는 주인으로 하여금 소시지장수를 시종으로 임명하도록 하기에, 즉 소지지장수를 클레온의 후임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여; 그는 클레온의 직위 반지를 빼앗아 소시지장수에게 준다.
그가 어떤 한 소시지장수에게 그의 권력을 빼앗기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의 지금의 적수가 소시지장수라는 것을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클레온은 '데모스'의 결정이 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렇지만 그는 겁이 났고; 그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강하게 그의 '데모스'에의 의존을 느낀다: 그는 이제 그를 주인이라고 호칭한다. 결국 이제 반지는 소시지장수의 손가락에 있다. 그의 지나간 혜택이나 미래의 혜택에 대한 약속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을 보았으므로, 그는 그의 손 안에 있는 신탁에게 신성한 약속에 눈을 돌린다. 소시지장수 또한 그런 근거로 그를 대적할 수 없다면 그는 클레온을 이길 수 없을 것이지만; 그도 또한 신탁을 손에 쥐고 있다. 이것은 클레온이 이제 주도권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제쳐 놓게 하지 않아서; 소시지장수는 클레온의 발놀림에 이전보다 더욱 노예처럼 아니 문자 그대로 따라 가는데; 그는 클레온이 처음 사용했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960-72; cf.996-97). 무엇보다도 소시지장수는 클레온의 신탁에 따르면, '데모스'는- 클레온의 정책에 따라- 모든 그리스 뿐 아니라(797), 아마- 소시지장수에게 한 데모스테네스의 약속과 동일 선상에서(169-74)- 모든 땅까지도 다스릴 것이라는 클레온의 주장과 다툴 수가 없다. 두 경쟁자가 그들의 신탁을 가지러 자리를 비우는 사이, '기사들'은 아테네가 약간 불투명한 축복들- 그에게 특별한 교육을 하는 것에서나, 아니면 음악에 있어 그의 호색적인 취향과 일치하는 축복들-에 대해 빚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클레온이 사라져 버릴 그날을 환영한다. 비록 저급이지만 클레온의 교육이 소시지장수의 것보다는 우월했던 것으로 나타날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 이 사람들이 해석한 신탁의 정신 속에 들어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cf. 986-87, 1235-36).
클레온이 그의 손에 있는 신탁은 바키스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반면에 소시지장수는 그의 손에 있는 신탁은 바키스의 형(그래서 더 낫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바키스는 퓔로스에 대하여 언급하고, 바키스의 형은 퓔로스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을 거의 짚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다. 아마도 소시지장수가, 클레온에 비교해 볼 때, 비속한 언어를 쓴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주4>. 이 두 종류의 신탁들이 아테네와 '데모스'를 구별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확실히 매우 중요한데; 그렇지만 클레온이 그의 신탁의 주제들 가운데 그 중심을 '데모스'에게 두는 반면 소시지장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클레온이 그의 신탁이 '데모스'의 세계적인 지배를 약속했다고 단언했으므로, '데모스'는 두 경쟁자 모두에게서 신탁들이 그가 구름 속의 한마리 독수리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는 것이 듣고 싶다. 그렇지만 클레온은 '데모스'의 전체 땅 위에 대한 지배보다 그 자신의 아테네 지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해석에 따르면, 그에게 한 아폴론의 신탁이 '데모스'에게 클레온의 지배를 유지할 것을 격려한다고 인용한다. '데모스'는 클레온이 인용한 신탁을 이해하지 않고, 그리고 소시지장수는 그 신탁은 사실 '데모스'에게 클레온에 반대하여 경고를 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신탁들 중에 하나를 인용하는데, 그의 해석에 따라 그것이 클레온에 반대하여 '데모스'에게 보내는 또 다른 경고라고 하자, 그것이 즉시 '데모스'를 움직인다. 클레온은 그 해석을 반박할 만큼 충분히 민첩하지 못하다. 그리하여 그의 해석에 따르면, 그는 해군을 암시하면서 그를 '데모스'에게 추천하는 또 다른 신탁을 인용하는데; '데모스'는 이번에도 신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시지장수는 이번에도 그 신탁을 클레온의 지배에 반대하는 지시인 것으로 해석한다. 둘 중 아무도 지금까지 '데모스'의 황홀한 미래를 예언하는 신탁을 그에게 읊어 주는 그의 소원을 성취시키지 못했는데; 이런 실수는 근본적으로 클레온의 그의 운명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이제 소시지장수는 신탁의 어투로 '데모스'에게 조언자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데까지 간다. 이것이 클레온으로 하여금 퓔로스를 다루는 한 신탁을 인용하도록 유도한다: 퓔로스의 경우가 클레온의 조언을 따른 것으로, '데모스'가 탁월하게 조언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신탁도 그의 앞선 두 신탁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자 소시지장수는 해군에 대한 한 신탁으로 방향을 바꾸는데(해군이 없으면 퓔로스도 없다), 그 신탁은 '데모스'가 그의 선원들이 어떻게 그들의 급료를 받게 될런지에 대해 그가 염려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열의를 가지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그 신탁 역시 무엇보다 클레온에 대한 그리고 더욱 특별히 아테네의 동맹자들에 대한 그의 불의한 정책에 대한 경고임이 밝혀진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반면에, 신탁은 어떻게 하면 불의에 이르게 하는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는가는 보여 주지 않는데; 소시지장수는 그것을 극복한다고 약속한다. 이번에는 '데모스'가 소시지장수의 신탁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러나 클레온은 소시지장수의 신탁에 대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여 이 기회를 이용할 능력이 없었다. 소시지장수는 또 다른 신탁을 인용하여 클레온의 무기력함을 활용하지만; 이번에도 클레온은 소시지장수의 해석에 반박을 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은 겨우 소시지장수가 클레온이 좋아하는 근거에서도 우월하다는 것에 밑줄을 그을 뿐이다: 비록 신탁을 이용하는 것에는 클레온보다 훨씬 덜 익숙하지만, 그는 신탁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데모스'를 만족시키는지는 클레온보다 훨씬 바르고 더욱 잘 배웠다. 그는 곧 신탁을 만드는 일에도 클레온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클레온의 지배를 지지하는 그의 신탁들이 완전히 믿을 수 없게 된 후에, 그는 '데모스'의 황홀한 미래를 예언하는 신탁이 듣고 싶은 소망을 이루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데모스'는 한 마리의 독수리가 되고, 그리고 전체 땅 위의 왕이 될 것이다. 소시지장수의 한 신탁은 전체 땅 위의 지배에다가 홍해 위의 지배와 에크바타나에서의 재판권을 더한다. 그는 이를테면 만일 아테네를 확장해야 한다면, 서쪽으로보다는 동쪽으로 확장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cf.174). 이 세계의 지배를 다루는 신탁들은 인용되는 척조차 하지 않는데, 그러나 명백히 두 적수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 신탁들은 클레온의 지배를 지지하는 그의 신탁들보다 덜 권위를 가지고 있다. 클레온은 마지막으로 아테나이가 그에게 데모스에게 건강과 재산을 부어 주라고 한 것 같은 꿈에 대해 이야기하자; 소시지장수는 그의 차례에 아테나이가 그에게 '데모스'의 머리 위로 미주가효를 붓고, 클레온에게는 그와 반대되는 성질의 액체를 부어 주라고 한 것 같은 꿈을 꾸었다. 소시지장수의 꿈이 '데모스' 앞에다 그를 주제 쪽으로 도로 데려 놓는다: 그는 소시지장수에게- 어떤 교육도 받지 않은 사람에게- 교육자로서 자신의 재교육을 위해 그 자신을 넘긴다. '데모스'는 더 이상 세계적 제국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의 세계적 제국의 꿈은 신탁들에 의해 뒷받침이 되었다. 오랜동안 클레온은 그의 손에 든 신탁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데모스'가 다른 신탁들에 대해, 아니면 자신이 가진 신탁들을 다른 사람이 해석한 것에 대해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데모스'를 조종하는 데에 성공해 왔었다(cf.58-60). 이러한 '데모스' 교육의 결점은 모든 신탁들이- 바키스에게서든 아폴론에게서든 또는 어떤 다른 사람에게서든- 반대되는 신탁인 것처럼 보이는 신탁들에 의해서거나, 또는 같은 신탁이지만 아주 쉽게 그 반대되는 것들을 예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에 의해 다투어질 수있다는 신탁들의 장면에서 치료된다. 이것이 '데모스'가, 비록 그 신탁들만으로만 된 것은 아니나, 소시지장수가 해석한 신탁들에 의해 클레온을 거부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데모스'가 소시지장수가 끌고 가는 대로 순응하고, 그에게 새로운 재교육에 대하여 욕구가 일어나는 것은 확실히 신탁적인 지지나 다른 어떤 것 때문이 아니다. '데모스'가 자발적으로 정보를 원했던- 어떻게 그의 선원들과 병사들이 그들의 급료를 받을 것인지 하는(1065-79)- 유일한 과제에 관해서는 신탁이 침묵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기사들"의 전체 행동이 한 신탁에 의해 아니면, 신탁에 대한 어떤 해석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신탁들의 장면을 적절히 감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탁이나 해석은, 행동의 결과가 나와서 알아 내기 전에는 적절히 감상될 수 없는 것이다.
클레온은 그의 일상 생활용품을 챙겨 준다는 제안에 제국에의 꿈을 접은 '데모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마지막 노력을 시도한다. 그는 이제 애시당초에 소시지장수가 알고 있었던 것을, 이름하여 '데모스'를 한 개인으로, 한 인간의 존재로 대접하는 것을 완전하게 배웠다. 그래서 두 경쟁자는 이제 '데모스'를 가장 즐겁게 할 것인 음식에 관한 시합에 돌입한다. '데모스'의 눈에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의 결정이 두 경쟁자 중 누구가 자기를 가장 잘 대접하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그가 묵시적으로 소시지장수의 손을 들어 준 결정을 취소한 사실로 보고 알 수 있다. 세 번째이면서 마지막 인기 경쟁이 '데모스'의 배꼽 하나에 의해 결정될 것인데; 정치적으로 그리고 신성한 배려로 좋은 일 하는 것이다. 두 경쟁자가 실내에서 '데모스'에게 그들이 대접할 것들을 준비하는 동안, 신탁의 장면에서 완전한 침묵 속에 있었던 '기사들'이 '데모스'에게 말을 건넨다. 소시지장수에게는 고맙게도 그들은 완전하게 '데모스'와 화해하였고, 그들은 소시지장수가 최종전에서도 이전의 시합에서 모두 이겼듯이 이길 것을 확신한다. 그들은 '데모스'에게 모든 사람들의 독재 지배자로 칭송하며 알랑거리는 한편, 그가 모든 아첨꾼들의 쉬운 먹이감이라고 개탄한다. '데모스'는 만일 그들이 자기를 바보로 여긴다면 그들이 바보들이며; 그는 그의 시종들에 의해 바보가 되어 보이는 것에 괘념치 않는다고 대답하고; 그는 저 도둑들을 그가 심사숙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그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준다. 내내 그는 대단히 짜증이 나는데, 왜냐하면 그가 오랜동안 클레온과 소시지장수가 그의 입맛을 당기게 했던 주방의 즐거움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짜증은 그의 환심을 사려고 이제 돌아와 있는 그의 두 애인들 간의 경쟁을 지켜 보는 것에서 생기는 즐거움으로 상쇄된다. 그들이 그를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경쟁하는 동안, 클레온은 그에게 그가 그를 위해 퓔로스에서 했던 것을, 또 소시지장수는 그에게 아테나이가 그를 위해 했던 것과 하고 있는 것을 상기시킨다. 클레온은 소시지장수를 따라서 여신을 칭송하는 것 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겸손한 소시지장수는 무어랄까 덜 교육 받지는 않았으나 자만심hybris로 꽉 찬 클레온에게 경건에 대해 말 그대로 교육한다. 아니면 만일 클레온이 경건심을 전시하는 것을 시작하는 약간의 머리를 가진 것이었다면(cf. 763, 1091-92) 소시지장수는 이제 그를 추월했다. 그러나 시합은 경건심을 근거로 결정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절정은 소시지장수가 클레온이 퓔로스에서 스파르타 사람들의 수를 줄였던 데모스테네스의 공적을 속이던 수법과 가능한 한 똑같은 모방으로, '데모스'가 즐기도록 만든 가장 맛있는 요리를 마련하였던 클레온의 공적에 대해 클레온을 속일 때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데모스'가 소시지장수의 위업에 대한 찬사를 아주 가득 보내고 어떻게 그것을 생각했었냐고 그에게 묻자, 비록 클레온에 대해 그가 사용한 꼼수가 겨우 소년이었을 때 시장에서 사용했었던 꼼수를 재연한 것 뿐이지만, 그는 경건하게 아테나이에게서 위업의 흔적을 찾는다(cf.1193-98과 417-20). 그리하여 그는 그의 우월함을 지금 이전까지 퓔로스에서의 승리의 전체 공적이 자기 것이라고 늘 주장하였던 클레온에게 뿐 아니라, 포도주 술기운에게 조언을 얻어 클레온의 신탁으로 그를 망치려는 구상을 따라왔던 데모스테네스에게도 보여 준다(1203,108; cf.903). '데모스'는 이제 퓔로스 이후에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는 그의 만족감에 대한 모든 신뢰를 요리사인 클레온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요리를 대령했던 소시지장수에게 준다. 클레온은 처음으로 그의 경쟁자에 의해 뻔뻔스러움에서 추월당하는 위험에 빠졌다고 인정한다(1206; cf. 409). 이것이 시합에서 소시지장수가 마지막으로 발의하는 무대로 정해진다. 그는 이제, '데모스'에게 '데모스'와 특히 그의 배꼽에 관해서 둘의 바구니에 든 내용물을 비교하는 것으로 둘 중에 누가 더 나은 사람인지 결정하라고 요청한다. 소시지장수의 바구니는 텅빈 것으로, 그리고 클레온의 것은 좋은 것들로 가득찬 것으로 판명난다. 소시지장수의 도움으로 '데모스'는 이리하여 소지장수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그의 몸집 작은 아버지에게 주었던 반면, 정녕 재찍을 맞아야 마땅할 저 노예 클레온은 가장 큰 부분에서 그의 주인을 속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클레온은 그가 도시의 이익을 위해 훔쳤던 것이라고 반박하는데, 즉 그는 도시와 데모스의 동질성을 부정한다. 데모스는 이런 구별을 허락할 수가 없다. 그는 소시지장수에게 씌울 수 있도록 클레온에게 그가 그에게 공식적으로 수여했던 화관을 반납하라고 명령한다.
클레온은 그의 신탁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운명이 조만간 그를 따라와 잡는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탁들 중에 하나가 그로 하여금 아직 운명적인 순간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그의 경쟁자는 신탁이 그의 정복자로 또는 후임자로 지정한 바로 그 개인일 수 없다. 이것은 그의 관점에서 그가 경쟁자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신탁이 그의 후임자를 이름으로 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시지장수가 그의 후임자가 아니라는 그의 확신은 그 신탁이 그의 후임자로 바로 그 종류의 사람이 아닌 어떤 한 종류의 사람이라고 지정한다는 그의 확신을 그 근거로 한다. 덜 신탁적으로, 그는 그의 후임자가 어떤 한 종류의 소시지장수에 속하겠지만, 그러나 그의 경쟁자는 그에게 어느 소시지장수보다 더 높은 유형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cf.1235-44): 그는 그의 후임자가 그 자신보다 훨씬 대단한 불한당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949-50), 그는 그의 경쟁자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와 함께 감지했다(cf.1252). 소시지장수는 그에 관한 한 신탁이 그의 이름으로 아주 명백하게 지명하고 있다고 다툰다. 이러한 다툼은 신탁의 내용에 의해서거나 아니면 알려진 것과 같은 신탁의 해석에 의해 태어나지 않는다(197-210). 클레온은 그 자신에게 또 무엇보다 '데모스'에게 이 작자가 신탁에 의해 내려진 요구 사항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의 경쟁자에 대한 반대심문을 진행한다. 오싹하게도 클레온은 그의 경쟁자가 어린 시절에 야비함과 뻔뻔스러움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소시지장수는 이제 그가 문자를 약간 안다는 것을 감추는데(189)- 교육 따위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는 것과, 그리고 성장하고서는 소시지장수로 거래를 이행하였고, 때때로 동성애 관계에서 소극적인 역활을 취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1242; cf. schol. on 428). 클레온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엷은 희망이 남아 있다. 신탁은 그의 후임으로 시장터가 아닌 도시의 성문 앞에서 소시지를 파는 사람을 지정한다. 클레온이 그의 경쟁자가 성문 앞에서 소시지를 판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그의 종말이 왔다는 것을 아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의 신탁을, 즉 신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신탁이 시장과 구별된 도시의 성문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만일 시장터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보다 성문 앞에서 부지런히 장사하는 한 소시지장수가 아직은 덜 존경할 만할 경우에는- 신탁에 따르면 그의 후임자가 자기보다 덜 존경할 만하다는 사실이 주어져 있어서- 클레온의 해석은 합리적이다: 신교육을 뿜어내는 턱수염도 없는 괘변론자들이 시장터에서 시간을 보내는데(1373-81), 이런 관점에서는 신교육이 무교육보다 조금도 더 나은 것이 없다? 그렇지만 그래서 클레온이 괜찮은 신탁 해석가일런지는 몰라도, 신탁의 이용자로서는 소시지장수에게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그는 신탁이 그의 이름을 지명한다고 주장했다. 클레온이 고쳐 잡을 희망을 넘어 망한 뒤에야 그는 그의 이름이 아고라크리토스이며; 그의 이름은 도시의 성문이 아닌 시장터를 가르킨다고 털어 놓는다. 즉, 다시 말하자면 클레온이 해석한 대로 신탁이 소시지장수를 제척하든지, 아니면 클레온이 다투었듯이 신탁은 클레온이 한동안 집무를 계속하는 것을 지지한다. 클레온은 그저 그의 신탁에 대한 믿음이나 혹은 그의 신탁에 대한 그 자신의 해석의 희생자가 아니라, 좀 더 즉각적으로 소시지장수의 신분에 대해 그가 한 거짓말의 희생자이다: 경이로운 똑똑함으로 그는 클레온의 신탁 해석을 신성시했고 그것에 따라 거짓말을 했다. 올바른 종류의 똑똑한 거짓말들은 신탁이 똑똑하게 해석되었어도 신탁보다 낫다. 소시지장수의 거짓말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거짓말 탐지가 그를 다치게 할지도 모르는 때까지는 탐지될 수 없는데; 그는 그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으로부터 가장 큰 이점을 뽑아낸다. 그는 도박을 했다. 그가 승리의 상을 제우스에게 바친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소시지장수가 클레온의 신탁을 이용한 것은 이제 그가 클레온의 지위를 차지하는것을 갈망한다는 것에 대한 마지막 의심을 거두어 버린다. 이것은 인정미가 아닌 그의 겸손과 모순되어 보인다. 이러한 난점은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데모스테네스가 다시 나타나는 짧은 장면에 의해 도드라진다. 그는 소시지장수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느낌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그의 덕택으로 신분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며, 그리고 그에게 돈이 되는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며 그에게 다가온다. 소시지장수는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데모스테네스가 그의 스파르타에 대한 승리를 클레온에게 사기당했듯이, 그의 클레온에 대한 승리를 소시지장수에게 사기당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껏 보았듯이 클레온에 대한 승리가 전적으로 소시지장수 혼자 작업한 것이기에 잘못된 것일 것이다. 마치 믿음이 없는 소크라테스가 스트렙시아데스에게 지는 것처럼, 믿음이 없는 데모스테네스는 소시지장수에게 진다. 더 정확히 말해서, 곧 명백해지겠지만, 마치 믿음이 없는 소크라테스가 행한 그의 신들에 대한 교습으로부터 나온 근친상간에 관한 결론이 스트렙시아데스에게 끼친 예측할 수 없는 효과에 의해 지는 것과 같이, 믿음이 없는 데모스테네스는 예측할 수 없는 기회에게 진 것이다. 데모스테네스의, '기사들'의, 혹은 일반적으로 더 나은 사람들'의 도구로서는 아주 멀어져서, 소시지장수가 '데모스'의 사랑하는 아들임이 증명된다: 이제 그는 지배하는 것을 갈망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가 그의 늙은 아버지를 돌보는 데에 지금까지 '데모스'가 의지해 온 돈을 주고 데려온 그 어느 노예(클레온, 데모스테네스, 니키아스 등등)보다 더 꼭 알맞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아로 내던져졌다가 이제야 그의 실수를 탄식하는 아버지를 알아 본 것처럼 행동한다.
소시지장수가 실내에서 '데모스'를 돌보는 것을 시작하는 동안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흥겨움을 펼친다. 두 번째 파라바시스는 확실히 처음의 그것만큼 평화스럽지 않은데; 첫 번째 파라바시스에서 왜 '기사들'이 평화스러웠던가 하는 이유가 클레온이 망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다른 한편으로 두 번째 파라바시스는 첫 번째보다 '기사들'이나 작가를 칭송하거나, 혹은 그들에게 간청하는 것을 더 많이 축소하는데; 그러나 이런 축소는 이 두 경우에서 다른 이유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극의 사건과 파라바시스의 주제 사이에 강력한 연계는 없다. '데모스'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시합의 마지막 회전과, 게걸스럽거나 굶주려 있는 것으로 악명 높은 사람들을 풍자하는 두 단락 사이의 엷은 연계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파바시스의 비운률 부분antepirrhema에서는 등불장수 휘페르볼로스에 의해 주창된 서쪽을 지향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삼단노배에서의 반란을 묘사한다.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그것이 말하는 것보다 그것이 말하지 않는 것으로 더 많은 것을 드러내어 보인다고 말해야 할까? 짧고 불길한 데모스테네스의 재등장에 대해 이해하고 나서, 왜 '기사들'이 이제 그들 자신에 대해 거의 완전히 침묵해야만 하며- 오로지 시작 부분에서(1266) 그들은 승마꾼들이라 내비친다-, 그리고 연극의 사건에 대해 단순히 입을 다무는지를 이해한다고 믿는다. 파라바시스의 운률부분epirrhema에서 그들은 사악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단언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비난하는 사람은 그가 사악해서가아니라- 비록 그가 이래도 저래도 사악하지만- 다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비난당한다: 지독한 사악함- 클레온을 능가하는 사악함-조차 말할수 없을 만큼 외설적이지만 시와 음악을 부패시킨 사람인 아리프라데스의 질만큼은 나쁘지 않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가 얼마나 외설적인가를 말해 낸다.) '기사들'은 무엇이 가장 나쁜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바꾸었나? 두 번째의 파라바시스에서나 그 뒤에도 그들은 클레온이나 그래서 그에 대해 반대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두 번째 파라바시스 동안 소시지장수는 '데모스'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늙고 추한 그를 젊고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는데<주5>; 그는 그를 장사꾼들의 지배시대를 앞서는 것은 물론이고, 페리클레스 아니 테미스토클레스 시대조차 앞서는 옛 시절의 상태로 복구해 놓았고; 그는 그를 아테네의 민주정 이전의 상태로 복구해 놓았다: 복구 후에 그는 옛 시절의 한 아테네 귀족처럼 보이는데<주6>; 그는 그를 야만인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그의 신성한 땅을 방어하던, 아직은 제국의 꿈을 꾸기 시작하지 않았을 때인, 그가 마라톤에서 가지고 있었던 모습으로 복구해 놓았다. '기사들'은 그리스의 왕으로 그를 환호하지만, 더 좋은 것을 알고 있는 소시지장수는 그렇게 하는 것을 삼가한다. 아테네는 퇴락하고 또 퇴락하여 왔고; 나이를 먹고 또 먹어 왔으며; 형편이 좋은 시민들은 늘어가기만 하는 실망과 분노로 좋았던 옛 시절을, 고대의 도시를, 즉 아테네의 회춘을 그리워해 왔다. 아테네의 회춘은 데모스가 회춘이 되는 것, 즉 '더 나은 사람들'에 대한 고대의 존경을 도로 가져오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가<주7>? 만일 아테네의 퇴락이 단순히 실수 때문이 아니고, 데모스가 나이 들어가는 때문이라면, 그 데모스는 문자 그대로 회춘해야만 한다. 데모스는 강물과 같이 그것의 더 늙은 구성원들은 죽어서 떠나게 하고, 그리고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그 자신을 회춘시킨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워하던 회춘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의 회춘은 데모스가 의인화되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데모스' 같은 한 존재는 메데아의 위업으로 증명되었듯이 문자 그대로 회춘할 수 있는데; 한 인간의 존재는(여러 인간 존재들의 한 융합체로서의 한 인간과 구별하여) 마술이나, 아니면 차라리 지금 소시지장수가 연출했던 한 사람 같이 하나의 신과 같은 행동으로 회춘할 수 있다. '데모스'의 회춘은 그의 나이에도 애인들로부터 구애를 받는 소년처럼 행동했던 사실에 의해 마련되는데(737); 그는 마치 그가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것처럼 행동했다. '데모스'는 결코 자라지 않았고; 그는 후견인이 필요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것은 매우 명백하다: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정치적 행동으로 만족될 수 없다. 소위 비정치적 행동은 경이로운 개념들의- 즉 전부 새로운 개념들의- 창조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1322). 이러한 방법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완전하게 도시와 화해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건강한 것은 늙거나 고대의 것이고, 반면에 희극의 과시는 그리고 특히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서는 그러한 개념의 신식이기 때문에 그러한 화해는 필요하고<주8>; 달리 말하면, 소시지장수가 분명하게 이루어 냈던 마라톤 시절의 아테네를 도로 가져 오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그가 한 모든 작업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 있어서도 역시 불가능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제 고대 체제의 복구를 열망하는 젊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새로운 희극과, 한 사람의 아버지를 폭행하는 것보다 더 한 행동이 요구되는 젊은 소시지장수의 회춘하게 하는 행동 사이에는 비밀스런 고리가 있다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그가 요리되는 것을 요구한다.
젊고 아름답고 그리고 회춘의 고마움에 넘쳐서 '데모스'가 다시 등장한다. 두 사람이 나와서 대화하는데 연극의 끝까지 이어 간다. 모든 다른 연극에서, 마지막이거나 거의 마지막에 하는 말을 가지고 있는 코로스가 "기사들"의 마지막 47행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기사들'은 데모스테네스 만큼이나 엉뚱하고; 도시는 전적으로 '데모스'와, 이제 그가 그의 어린아이였던 만큼 '데모스'의 아버지가 된, 그를 회춘시킨 사람의 손 안에 있다<주9>. 언제나 후견인 안에 있었던 '데모스'는 후견인 안에 남을 것이다. 소시지장수는 고마워하는 '데모스'에게 그가 만일 그가 겪었던 변화의 끝을 알았더라면, 회춘에 감사하며 그는 그를 신으로 여겼을 것이라 말한다. 거기서 그가 그에게 변화의 끝을 알게 해 주기 때문에, '데모스'가 소시지장수를 신으로 여기고, 그렇게 대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소시지 장수는 '데모스'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는 '데모스'에게 그에게 그가 자주 저지르던 수 많은 실수들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미래의 행실을 주요 줄거리로 언급하도록 유도하고, 그가 겪었던 변화의 끝을 알게 한다. 비록 제국이나 범헬레네적 지배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지만, 해군이 허겁지겁 달아난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문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데모스' 역시 지금부터는 턱수염이 없는 젊은이들이 시장터에서 괘변이나 늘어 놓고 정치 놀음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기에 대해서 전적으로 '정의의변론'과 동의하면서 선언한다: '데모스'는 그들에게 사냥하러 가도록 강제할 것이다. 그의 선의에 대한 보답으로, 소시지장수는 '데모스'가 고대의 시절로 복구된 것을 확인하면서, 그가 사용할 건강한 소년들을 제공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30년의 휴전과 젊은 여지를 제공하면서, 그의 즐거움을 위해 젊은 여자를 데리고 들판으로 가라고 요청한다: 평화가 돌아와 '데모스'라 불리던 한 개인이 그가 그리워했던 시골에서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데모스'의 운명의 끝은 디카이오폴리스의 운명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소시지장수는 이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데모스의 회춘은 일정한 상태의 정치적인 흥분 속에 있는 두드러지게 타락한 도심의 데모스를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정부는 '더 나은 사람들'의 손에 버려 두고, 서로 자기의 일에만 신경쓰던 옛 시절의 시골 데모스로 두드러지게 바꾸는 것이다<주10>. 만일 소시지장수가 저명한 데모스테네스가 다시 등장했을 때 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기억한다면, 먼저 권력을 장악하고 난 뒤에 플라톤의 완벽한 지배자가 행사하는 첫 번째 행동의 관점으로, 소시지 장수의 행동을 더 멀리 가서 보는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플라톤의 완벽한 지배자 역시 데모스를 "들판 속으로" 보내는 것으로 그의 지배를 시작한다. 소시지장수 속에서 하나의 초-페이시스트라토스를 확실히 인지하게 될 것이다<주11>. 주인공의 마지막 세 가지 행동은 클레온에게 적절한 처벌을 할당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기대한 그대로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클레온이 성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거래하는 매춘부들과 서로 쌍소리를 하면서, 소시지를- 개나 당나귀의 고기 뿐만 아니라 나머지 부분도 넣어 만든 소시지를 팔도록 욕보인다.
첫 눈에 이 연극의 해피 엔딩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궁극적으로 신성한 암피테오스의 행동에 의한 것으로 보이듯이, 신탁의 완성으로 보인다.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진짜로 데모스테네스가 본 클레온의 신탁의 최종 결과물인 연극의 결말은 그 신탁에 담긴 정신의, 즉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 두 사람에 의해 해석된 신탁의 정신의 다른 변화라는 것을 보여 준다<주12>. 신탁에서 클레온이 지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 자신보다는 여전히 더 비루한 한 사람으로 승계된다는 것을 기대하도록 끌고갔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신탁은 아테네의 지속적 퇴락을 예언하는 것으로 보였다. 문자 그대로 인용된 신탁의 작은 부분만 들었고, 그 부분이 사람을 싫어한다는 해석은 품고 있지 않기에, 그 신탁이 실제로 이러한 사람을 싫어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는지 말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과 같이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가 그렇게나 다른데, 신탁의 해석에 관한 의견 일치는 그 해석에 대한 어떤 의심도 없게 하는지 모른다. 이것과는 다르게 어떤 면에서 연극의 모든 행동을 주재하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신탁의 해석이 극중에서 윤곽이 드러난, 이름하여 니키아스가 그 존재를 증명한, 오로지 신들에 관한 교육에서만 의견이 일치한다. 이것이 신탁들 중에 사람을 좋아하는 신탁들도 물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사들"에서 인용된 신탁들은 단순히 '데모스'의 영광스런 미래를 예언하는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신이나 신탁이 무엇을 의도했던지 간에, 태평스럽고 적극적이며 신을 믿지 않는 데모스테네스가 운명을 정책으로 바꾼다. 그는 이것을 처음 그 자리에서 신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므로써 처리한다: 클레온이 그의 뻔뻔스러움으로 데모스를 재미있게 하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자기보다 뻔뻔함에서 더욱 우월한 사람에게만 질 수 있다. 그밖에 그는 신탁을 믿는 '데모스'와 클레온에게 명백히 신탁이 이루어지는 효과를 예견한다. 신탁이 아닌, 한 인간의 약속이 지켜진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의 희망조차도 그 결과물에는 많이 모자란다. 데모스테네스나 다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예견하지 못한 이것은 데모스테네스가 한 소시지장수를 찾고 있었을 때, 우연히 지나쳤던 그 특별한 소시지장수가 대단히 특출한 사람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 소시지장수는 그가 클레온보더 더 나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그 이전의 정치꾼들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는 그가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증명한다. 이러한 결말이 신탁이나 데모스테네스의 계획의 다른 변화인 반면에, 그럼에도 그것이 전적으로 예상 밖은 아니다. 행동이 진행되면서 소시지장수의 성격이 그 자신과 그렇다고 믿도록 이끌어져 왔던 것과는 총체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낮은 중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 타고난 지배자로, 용어에 대한 가장 정확한 감각을 가진 '본성적인 지배자natural ruler'로 판명된다. 처음에 그는 열 자짜리 막대로도 건드리지 않을, 그리고 그것을 오직 필사적인 상황에서만 사용할 온전한 작자로 보이지만; 결국은 악취나는 수단들로 데모스테네스를 내려다 보는 것까지도 정당화되는 사람으로 되는 번쩍번쩍 빛나는 결말로 귀결된다. 행동이 진행되면서, 그가 완전히 양육이 부족한 반면에 혹은 그의 태도가 뻔뻔스러움이나 비열함에 있어 클레온을 능가하는 반면에, 그는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 이 둘의 나쁜 점을 벗어나, 이들 모두의 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만약 비극적 상황으로써 순수하게 희극적인 상황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예시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세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보다 월등한 것과 같은 소이로, 소시지장수는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보다 월등하다. 이것보다 한층 위다: 진정 지배하는 것이 마땅한 한 사람으로서 그는 지배를 갈망하지 않는데; 그는 연극에서의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덜한 참견꾼이고, 그리고 어쨌든 이런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정당하다. 그는 클레온이 이런 자질들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인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를 뛰어넘은 부러워할 수 없는 자질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이런 자질을 처음에는 그의 '더 나은 사람들'의 재판을 옹호하는 것으로, 그리고 나서 그 자신의 이해에 의해 이끌리는대로 전적으로 온전한 목적에만 사용한다(Cf. 뤼시스트라테 1109). 다른 말로, 가능한 최하의 양육이 민주정에서 권력에 가까워지는 데에 적절하거나 또는 그 이상이다. 소시지장수는 '데모스'의 변덕스런 욕구들을 만족시키는 것에 누구보다 더 능력이 있지만,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좋은 것을 잘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만 그것들을 만족시킨다. 그는 데모스테네스, 니키아스, 그리고 클레온을 능가할 수 있게 되는데, 이 특이한 최하층의 아들인 그는 혼자서 "본능적으로 데모스를 사랑하기" 때문이고(cf. "구름" 1187); 그는 데모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소년시절에나 그가 성장한 뒤에, 연극에 앞서서 이거나 연극 중에, 불온하게 놀았었을런지도 모르지만, 그는 데모스에 대해서는 결코 부적절하게나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데모스 중에 특이한 도시의 본성적인 지배자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 앞서 데모스의 애인이나 친구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 사랑은 거의 틀림없이 데모스의 자식으로부터 나온다. 소시지장수는 그가 유래한 데모스를 위하여 사랑으로 민주정을 폐지한다: 데모스를 위한 모든 것 그리고 데모스에 의한 권위, 그러나 데모스를 통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리하여 최선의 체제는 데모스와 그것의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그것의 가장 나은 자식으로 구성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최선의 체제는 상류층과 '더 나은 계층'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도록 이끌려진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실험은 최선의 체제에 데모스는 제외되고 '더 나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치학'의 마지막 두 권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험과 극적으로 반대이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 플라톤의 돼지들의 도시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소시지장수가 바람직한 지배자라면, 교육과 신사정신이 온전한 지배자정신rulership의 필수 선행조건이라는 관념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듭 말하면, 소시지장수는 '정의의 변론'이 칭송했던 고대의 교육도, 그리고 '불의의 변론'이 칭송했던 신식의 교육도 모두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는 잘 다스리기 위한 모든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의 장점이 전체적으로 본성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주13>. 그는 그 자신 속에 사물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만큼, 특히 '더 나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만큼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교육과 신사정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뒤따른다<주14>. 데모스테네스에게는 신분과 출신과 양육이 하류인사람은 성분이 낮을 수 밖에 없다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온전함은 상류층에서나 어쩌면 시골에서의 온전한 양육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도심 대중의 지꺼기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데모스테네스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지만 연극의 사건에 의해 반박당하는데; 그는 성격과장점과 단점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 충분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정치적 맹점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혹시 소시지장수가, 그가 그럴 것이라고 믿은 만큼 완전히 썩어 있다면, 소시지장수가 그와 그와 같은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하는 말에 작은 믿음이라도 가질 수 있는가? 그렇지만 그는 그 자신이 (데모스의)노예라는 단순한 사실로 그를 깨우치기에 충분해야만 한다. 시작할 때 소시지장수는 그 자신을 불한당으로, 가장 비열한 작자로 여기고, 그러므로 그가 그런 대로 시궁창에서 산다고 믿는데; 말하자면, '더 나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는 '더 나은 사람들'이 자각을 가지고 있듯이 그도 자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소시지장수와 '더 나은 사람들' 모두 자각이 부족한데; 연극의 마지막에서 소시지장수는 자각을 얻었고; 데모스테네스가 자각을 얻었는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더 나은 사람들'이 소시지장수의 부정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그가 스스로 그들에게 천진난만한 짓거리를 하였다는 것이다(cf. 483-84).
"기사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가장 정치적인 연극이라 부를 수 있고; 이것은 신들, 시인들, 그리고 여자들(어린이들)이 없는 유일한 연극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도시의 본성적인 지배자를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저 지배자가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도시와 교육 사이의 관계나, 또는 뮤즈들의 영역으로부터 도시를 갈라 놓는 바닷골을 드러낸다. 그 바닷골은 다른 어떤 것들과 같이 다리로 연결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리는 바닷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안에서 작가 자신이 얇게 변장한 주인공인 '기사들'과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행동을 비교해 보자. 디카이오폴리스는 데모스를 흔드는데 성공하지만( "아카르나이 사람들" 626), 그러나 거기에서의 데모스는 사실 단지 데모스의 한 부분이다: '늙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전체 행실들을 통해, 그가 데모스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가 즐기고 요술처럼 펼치는 기쁨들은 소크라테스의 즐거움과 비교할 때, 정말 모두는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러나 그는 애시당초부터 그들과 나누어 가지는 데는 관심이 없다<주15>. 다른 말로 디카이오폴리스의행동은 정의라는 면에서는 의문스럽지만, 반면에 소시지장수는 그렇지 않다. 이것에 따르면, 소시지장수가 아닌 데모스테네스와 '기사들'이 "기사들"에서 처음부터 작가의 대변인들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면 "기사들"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완전히 도시와 화해하였다는 낙관적 견해는 다시 거두어 들여 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좋은 도시 안에서는, 본성적인 지배자에 의해 회춘한 도시에서는, 비단 소크라테스 뿐 아니라아리스토파네스도 어찌 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은 간혹 동화들과 비교된다. 동화라는 것은 아마도 알맞을 때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소원성취- 불가능하나 이루진 것으로 연출되고, 통쾌하나 우스꽝스럽지 않은 소원성취-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기사들"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보다 동화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다른 배우들이나 코로스는 제쳐 놓고, 소시지장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다른 어떤 희극의 주인공만큼 우스운 것들을 많이 행동하거나 말하지만, 전부 또는 거의 대부분이 클레온의 행동이나 대사들을 의도적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그는 목적을 가지고 우스꽝스럽게 행동한다. 그 자신은 우스꽝스럽지 않다. 이것은 특히 연극의 끝 부분에 가서 명백해진다. 소시지장수가 얼마나 넝마 옷을 우스꽝스럽게 걸치고, 비속한 말들을 쓰고, 원숭이 꼼수를 쓰든지 상관없이, 한번 그 자신이 본성적인 지배자임을 완전히 드러내자, 넝마나 그것들에 딸렸던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젊고 아름다워져 있는 '데모스'보다 더욱 대단히 황홀한 의상을 걸친다. 모든 불명예스러운 것들을 묻어서 감추고 부인하는 거기에서 "본성의 올바름이 비춰서 나온다"(cf. 고르기아스 484a 6-b1). 데모스테네스를 한 마디 말없이 내보내는 것만큼 그를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결말의 관점에서 보는 소시지장수였던 본성적인 지배자는 변장한 동화 속의 왕자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진짜 동화의 왕자처럼 "기사들"의 본성적인 지배자는 그가 무언가 더 낫다는 것을 몰랐고, 무언가 더 나은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무언가 더 나은 것이 되겠다고 바라지도 않았던 진짜 한 소시지장수였다. 한 마디로 그는 어떤 의미로서도 과시자가 아니다. 아주 다듬지 않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최소한 아리스토파네스는 그들의 관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적이 결코 없다- 남다르다거나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과시자여서 우스꽝스럽다. 그러한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는 물론 과시자들이다. 소시지장수가 "무언가 특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것은 그의 매력 중에 중요한 한 부분이다. 아마도 진정한 지배자는 희극의 둥근 테두리 안에서- 군중들에게 기본적으로 전해진 작업 같은 것 안에서- 작가와 철학자보다는 우스꽝스러움에 덜 노출된다는 것 역시 생각해 두어야 할지 모른다.
"기사들"의 행동을 촉발하는 계획은- 클레온을 망치려고 그의 신탁을 이용하는 데모스테네스의 구상은- 더욱 더 합리적이어서, 소크라테스의 변론 수사법을 가지고 자기의 빚을 없애려는 스트렙시아데스의 계획보다, 그리고 암피테오스의 스파르타 왕복 여비를 부담하여 평화 속에서 살려고 하는 디카이오폴리스의 계획보다 덜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기사들"의 해피엔딩은 데모스테네스의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다. 스트렙시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가는 것이나, 디카이오폴리스가 스스로 암피테오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소시지장수가, 이 특이한 소시지장수가, 데모스테네스가 클레온의 신탁을 읽고 있을 때 때 맞추어 나타나는 우연에 비교하면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본성적인 지배자는 예측 불가능한 우연의 행동보다 더 나은 것을 통해 권력에 다가간다: 오로지 그러한 우연의 행동만이 본성적인 지배자에게 권력을 가져다 줄 수 있는데, 정확하게 본성적인 지배자는 반드시 최하층 데모스의 자식이어야 하면서, 그래서 반드시 최고의 익명성 속에 살아야 하고, 그리고 반드시 완벽하게 야망에서 자유스러워야 하거나, 혹은 지도자가 되도록 강요당하는 것만으로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소시지장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희극적 등치물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기사들"의 해피엔딩을 위해 '데모스'의 회춘과 그래서 데모스의 의인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더 할 말이 없게 한다. "기사들"의 행동은 다른 연극들의 말도 안 되게 우스꽝스러운 배역들의 행동과 별로 그 괘를 달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잘 양육된 사람이나 '더 나은 사람들'에 의해 도시가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합리적인 소망 밖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주16>.
데모스의 의인화는 구름이나 두 변론의 의인화와 다른데, '구름'과 두 '변론'은 사람의 부분들을 대신하지만, 반면에 '데모스'는 많은 인간들을 한 인간 속에 넣은 많은 인간들의 융합체이기 때문이고; '구름'과 두 '변론'은 말만 하는 반면, '데모스'는 말도 하고 또 먹고 잔다. 두 '변론'은 '구름'과 '데모스'의 사이에 있는데, 왜냐하면 오직 '구름'은 여신들이고; 사람들 모두 독재자라고 두려워하고, 아첨과 시중 받기를 갈망하며, 그들을 먹이기 위해 하인들을 살찌우는 '데모스'는(1111-20, 1131-40), 두 '변론'보다 오히려 덜 신적이다. 그렇지만 제우스처럼 보이려 노력하는 클레온은 절대적으로 '데모스'에 의존한다. 데모스의 의인화를 통해 도시는 한 가정이 된다. 도시가 가정으로 축소되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남자 친목회fraternity"로 지적된다: 모든 동료 시민들은 형제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밖에 '데모스'가 시골로 귀환하는것은 디카이오폴리스의 행동과 비교할 수 있는 과시의 세계로부터 자연적인 산물을 즐기는(그리고 구입하는) 세계로, "경제적인" 생활(805-9)로의 귀환이다. 소시지장수의 행동은 경제적인 활동들보다는 정치적인 활동들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짜여진 클레온의 행동에 의해 준비되거나 패러디된다. 데모스는 의회나 재판에 참석하여 받는 돈으로 살았다. 그러나 마치 디카이오폴리스 개인적인 평화가 공공의 평화가 아닌 것처럼, 즉 순수한 단순한 평화 시에 소시지장수는 시골로 돌아가지 않고; 경제적인 생활은 정치적인 생활 없이는 불가능하며; 데모스는 도시와 똑같지 않다(273-74, 811-12, 1005-10). "가사들"에서의 근본적인 정치적 곤경은 "기사들"에서 개개인들을 '데모스'로 불리는 개인에게로 흡수하는 것에서나, 마찬가지로 여자들(그리고 어린이들)이 불참하는 것에서 노정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 반대되는 해법으로 "여자들의 의회"에서 극적으로 실험하게 될 것이다.
<주1> 플라톤의 '법'의 첫 두 권에 나오는 포도주에 관 대화의 함축적인 의미를 비교해 보라.
<주2> Cf. 레오 스트라우스Strauss, '마키아벨리에 대한 생각들'(Glencoe, III.: The Free Press,1958), 342 n. 181.
<주3> 875-80; cf. "구름" 1089 ff.
<주4> 1010; cf. 364-65, 962-64, 998, 1056-57, 1242, 1385. Cf. 877-80, 그리고 투키디데스 III 37.3.
<주5> 1321; cf. 플라톤, '서신집, 두 번째 편지' 314c4.
<주6> Cf. 1331과 투키디데스 I 6.3.
<주7> Cf. 플라톤, '서신집, 다섯 번째 편지' 322a8-b1.
<주8> Cf. e.g. "구름" 547-58, "말벌들" 1044,1053.
<주9> 클레온은 데모스의 아버지라고 주장하지만(1037-39), 결코 그 자식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주10> Cf.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91b15 ff. 그리고 1318b6 ff.
<주11> Cf. 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의 정치체제' 16.
<주12> 134, 948-50, 1229-43.
<주13> 투키디데스 I 138.3 그리고, 무엇보다, 크세노폰의 '키로스의 교육'을 생각해 보라
<주14> 플라톤의 '라케스' 179b6-d5를 생각해 보라
<주15> 디카이오폴리스와 소시지장수 둘은 모두 요리 기술의 장인이다("아카르나이 사람들" 1015-16과 "기사들"에서 여기저기 나오는 학자; cf. 플라톤의 '고르기아스'; 디카이오폴리스와 구별하여, 소시지장수는 그 기술을 자기보다는 '데모스'를 위해 사용하는데; 그가 '데모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애 대해서 강조하는 것은 없다(1187).
<주16> Cf. "개구리들" 727-36 을 "기사들" 181, 185-86, 336-37과 함께. 세스 베나르데트가 지적해 주듯이, 신탁 내용에 있는 제안은 두 번째 파라바시스의 끝 부분을 비추어 주는지도 모른다(1300-15): 무엇이 일어나든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세상에서, 클레온은 마치 등불장수 휘페르볼로스가 대치되어 있는것처럼 보이는데; 클레온이 의인회 되어 있었던 '데모스'의 기적들과, 데모스테네스와 딱 그 순간에 만나는 알아볼 수 없는 본성의 지배자에 의해 제지되는 것처럼, 휘페르볼로스는 말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되는 삼단노 배들의 기적에 의해서만 제지되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