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소 2017. 10. 8. 02:38

 

8. "뤼시스트라테"

 

이것은 한 개인의 이름으로 제목을 정한 유일한 아리스토파네스 연극이다. 이는 주요한 배역, 혹은 연극에서 수행되는 전체 구도에 책임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제목으로 정한 유일한 연극이다. 제목은 "평화(에이레네Eirene)"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데; 이 두 연극이 추구하는 결말은 공공의 평화이다. 그렇지만 여신인 에이레네를 하나의 조각상과 구별하기 힘들지만, 뤼시스트라테는 한 사람의 여자이고; "뤼시스트라테"는 전적으로 하나의 인간극이다.

 

연극의 막을 여는 불평은 여주인공에 의해 행해진다. 뤼시스트라테는 그녀가 부른 다른 여자들을 기다리면서 짜증이 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디카이오폴리스나 스트렙시아데스만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데; 칼로니케가 거의 그 즉시에 도착한다. "뤼시스트라테"는 아주 짧은 독백으로 시작하는 유일한 연극이다. 칼로니케의 도착이 눈에 띄게 뤼시스트라테의 기분을 좋게하지 않는다. 그녀가 아직 다른 여자들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떠나, 이제 그녀는 그 짜증을 그녀의 점잖은 친구에게 풀 수 있다: 그녀를 기다리게 만드는 그 여자들은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나쁜 관념을 확인시키는데; 약간 중요한 문제에 성실히 나타나는 대신, 그들은 집에서 침대 속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칼로니케는 여자들의 평판이 나쁠 만하다고 수긍하면서, 그렇지만 뤼시스트라테의 특별한 불평에 대해서는 동성의 구성원들을 옹호한다: 여자들이 집에서 나오기가 그리 쉽지 않은 까닭이 여자들은 남편, 하인들, 무엇보다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뤼시스트라테에게 자식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녀는 지금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가장 시급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그 여자들은 남자와 성교를 하기 위해서라면 아이들을 팽개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한 여자가 머물 곳이 집이라면 그집이 이제 도시에 의해 위협 받고 있어; 여자들이 무엇보다 앞서 도시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뤼시스트라테는 다른 여자들에게 그들의 진지함을 나타낼 사업에 대한 계획을 말하지 않았었다. 지금 칼로니케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그녀에게 전체 그리스의 구원이 이제 여자들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고; 그러므로 그녀는 아테네의 여인들 뿐만 아니라, 스파르타나 보이오티아의 여자들까지 마찬가지로 전부 불렀다: 지금의 전쟁을 끝낼 희망으로 유일한 수단이 바로 그들의 경솔함이어서, 악명 높은 여자들의 경솔함이 그리스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다. 

 

 뮈르리네와 다른 아테네 여자들이 도착하고; 뤼시스트라테가 그들을 응대하는 태도는 그렇게 우호적이지 못하다. 그 뒤를 이어서 적들의 진영으로부터 대표 자격으로 도착하는 스파르타의 람피토에 대한 그녀의 응대는 아주 다르다. 아테네 여자들은 적들의 도시들로부터 온 다른 여자 들과 람피토의 아름다움에-그들의 영혼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들 몸매의, 그리고 머리보다는 오히려 머리 이외 부위의 아름다움에- 깊은 인상을 받는데; 그들은 아름다움을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식 투시도법으로 아래에서부터 본다. 다른 여자들이 재촉하여서, 뤼시스트라테는 그들에게 그들의 남편들이 모두 군복무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혹 아이들의 아버지가 그립지 않느냐고 묻는 것으로 그녀의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어머니인 그들에게 호소한다. 그들은 몇 달이나 남편들이 군복무로 멀리 떨여져 있거나, 혹은 고작 아주 짧은 동안만 집에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만일 그녀가 전쟁의 종식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경우 그들이 기꺼이 이 전쟁을 끝내는 데에 그녀와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흔쾌하게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여자들을 즉각 반응하게 하는 원초적인 동기는 어머니의 보살핌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뤼시스트라테는 전쟁의 결과로 그들의 남편들 뿐만 아니라, 성적 만족의 다른 수급처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여기서 그녀는 "우리 여자들"이라 말하며; 그들에게 최소한 그들이 어머니로서 보살핌에 대해 호소한 만큼 그들의 성적 욕구에 호소한다. 이것이 뤼시스트라테의 간단한 의도이다: 만일 여자들이 그들 남편의 사랑을 즐기고자 바란다면 그들에게 평화를 이루도록 해야 하며,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의무처럼 애쓰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그들과의 성교를 거절하는 것인데; 단지 지금 한번 좋은 것의 즐거움을 삼가하는 것으로 미래에 같은 좋은 것을 안전하게 언제나 즐길 수 있다. 이런 의도에 여자들은 전적인 반대로 시작한다: 성적 포기보다는 모든 다른 악덕이 더 좋다. 그들은 더 이상 어머니로서의 관심사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뤼시스트라테는 그들에게 관심사를 상기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오직 하나의 수단만 남았다: "예를 드는 것"이다. 그녀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던 유일한 여자는 람피토였는데; 뤼시스트라테가 그녀 혼자에게만 말을 건네자 람피토는 약간은 주저하면서 그 제안에 동의한다. 그래서 칼로니케는 다른 여자들을 대변하여, 뤼시스트라테가 그들에게 요구되는 성적 포기가 진짜로 평화로 이끌 수 있는지 보여 줄 수 있다는 조건으로 그녀의 거부를 재고해 보겠다고 한다. 뤼시스트라테는 이 임무를 쉽게 수행한다: 남편들은 그들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킬 충분하고 필요한 조건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 알게 되면 평화를 이룰 것이고; 여자 각자는 그녀 남편의 욕구를 가장 높은 단계에까지 끌어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반면, 여자 자신은 욕구에 면역된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 칼로니케는 여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능력 밖의 일일지도 몰라서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들이 아내로부터 등을 돌릴 것이라고, 즉 남편들이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대답하는데; 그렇지만 그녀는 그 차선책이 남편들에게 덜 매력적이라는 뤼시스트라테의 말에 수긍하고 만다. 거기에는 여전히 명백한 어려움이 남아 있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더 더 대단한 자제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혹은 이런 관점에서 그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우월하고, 그래서 그들을 눌릴 힘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추정에는 근거가 없다. 스파르타에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람피토는 아테네에서도 진짜 같은지 궁금하다. 아테네 남자들은 아테네 여자들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해군과 전쟁을 할 재물들 때문에 전쟁을 끌고 갈 수 있다. 뤼시스트라테는 젊은 여자들이 모여 숙의하는 동안 아테네의 늙은 여자들이 그 재물이 보관되어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도록 보내졌다는 말로 그녀들을 안심시키고; 그녀는 재물이 없으면 해군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그녀의 의도에 대한 모든반대를 물리치고 뤼시스트라테는 여자들에게 즉시 그들의 의견 일치를 굳센 맹세로 확인하자고 설득한다. 뤼시스트라테의 제안에 따라 그들은 아레스에 걸고 맹세를 하려 하는데<주1>; 그들의 목표가 평화이고, 그들은 평화의 적인 남자들과 전쟁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화를 이룩하는 수단이 전쟁이다. 어쩐지 전쟁 분위기의 맹세가 그 상황에서는 부적절한 것 같아; 따라서 여자들은 맹세의 굳셈을 나타내는 데 피가 아닌, 섞지 않은 포도주를 쓰기로 결의한다: 극단적인 절제에 대한 약속이 무절제한 행동으로 굳게 만들어졌다. 뤼시스트라테는 설득의 여신을 불러; 그녀거나, 다른 여자가 아프로디테에 걸고 맹세한다. 뤼시스트라테가 명확히 만든 엄숙한 서약은 여자들이 남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인까지 모든 남자들에게 그들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시작되는데; 만일 남자들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들에게로 우회할 수 있을 경우에, 그들을 굶겨서 항복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서약에서 남편들만 이야기한다: 연인들은 최후의 경우이고, 무시할 수 있다.

 

"뤼시스트라테"에서도 전체 구도가 "말벌들"이나 "평화"에서처럼 연극을(26-27) 실제보다 앞서게 하는데; 그렇지만 이들 두 연극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전체 구도와는 다르게, 전자의 전체 구도는 노예와 구별되는 자유인들끼리의 협조를 수행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래서 전체의 구도를 이끌었던 개인의 궁리가 그 후속 조치로 같은 구도를 공동으로 채택하는 공동의 궁리로(14) 되어야 하는데; 원래의 궁리가 연극을 앞서는 동안 연극은 그 궁리의 반복으로 시작한다. 그 결과물로 어느 누구도 관객에게 전체 구도에 대해 말을 건넬 필요가 없으며, 그래서 특히 어느 누구도 작가를 위해 대변인 노릇을 할 여유가 없다. 같은 이유로 "뤼시스트라테"에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나 "구름"에서의 개막 독백과 같은 그러한 개막 독백의 여유가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논의해 온 연극들과는 달리 "뤼시스트라테"에서는 에우리피데스식 서막prologue을 위한 여유가 없다. 뤼시스트라테의 개인적인 이유가 그녀가 공공으로 언급한 이유와 똑같은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

 

뤼시스트라테의 의도에 의하면 여자들은 남자들의 성적 욕구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 흥분시킬 것이고 그런 다음 그것을 좌절시킨다. 이 결과로, "뤼시스트라테"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가장 불순한 연극이다. 그렇지만 이런 불순한 수단으로 추구하였던 결말은 가장 순전하고 가장 정의롭다. 그 밖에도, 일련의 행동들은 법적으로 결혼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해된다. "뤼시스트라테"가 엄격하게 개인적인 것들을 공공에게 내보이면서 순전함에 충격을 주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정의나 경건심에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기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평화"에서 평화에 헌신하는 두 주인공들의 전체 구도를 기억나게 할 것이다. "뤼시스트라테"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들 중에서 가장 불순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도덕적(가장 무해하거나 최소한 가장 혁명적)이다. 아마 이러한 사실은 그것의 둘도 없는 인기의 연유일 것이다.

 

엄숙한 서약의 행사가 온전히 끝나기 전에, 즉 대다수 여지들이 포도주를 나누어 마실 수 있었기 전에 그들은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한 늙은 여자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주의를 빼앗긴다. 뤼시스트라테는 람피토를 스파르타에서 같은 사명을 수행하도록 그곳으로 보내고, 다른 적들의 도시로부터 온 여자들은 인질로서 아테네에 붙들어 둔다. 뤼시스트라테가 이끄는 아테네의 젊은 여자들은 아테네 남자들, 즉 한창인 나이의 남자들이 아테네를 떠나 있기 때문에 늙은 남자들이 감행할지 모르는 반격에 대비하여 늙은 여자들과 합류할 것이다. 늙은 남자들의 코러스가 입장한다. 그들은 여자들로부터 아크로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급히 서두른다. 그들은 통상의 전투를 준비하는데; 여자들이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한 것이 그들의 눈에는 마치 외래의 적이 그런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인다. 뤼시스트라테가 가진 무기로는 닿을 수 없어 보이는 늙은 남자들은 정확하게 그녀의 전체 구도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필요하면 여자들을 다 태워 죽일 태세이다. 그들은 특히 한 여자 뤼콘의 아내를 미워한다(270). 그 여자가 늙은 여자들의 대장인지, 혹은 이 모든 여자들 음모의 대장(즉, 뤼시스트라테)인지, 아니면 다른 근거로 미움을 받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데; 단지 바로 이러한 질문이 뤼시스트라테에 대해, 그녀의 남편이나 아이들, 그녀의 생활 방식, 사회에서의 그녀의 지위 등에 대하여,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 보여 준다: 뤼시스트라테가 주도하는 연극의 전체 사건들이 남편들과 아내들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지만, 정작 뤼시스트라테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어쩌다가 그녀의 남편이 늙고 발기부전인가? 그리고 그녀의 애인이나 애인들이 군복무에 나가고 없어, 평화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또 다시 그들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그녀가 비상한 행동을 하도록 몰아 간 것인가? 그리고 또한 한창 나이의 모든 다른 여자들이 한창 나이의 그들 남편에게 그들을 주지 않도록 꼬이는 것이 평화를 또 다시 돌이켜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그 경우에 여자들에게 요구된 최고 자제력의 행동은 어떤 다른 여자보다 뤼시스트라테를 위한 희생으로 덜할 것이다. 희극들에서 뤼시스트라테에 대해서 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주역은 페이스테타이로스 밖에 없다. 뤼시스트라테는 페이스테타이로스라고 불릴 만하다. 뤼시스트라테는 페이스테타이로스의 여성 상대자라는 의미인가? 페이스테타이로스는 신들을 굶겨 항복하게 하는데, 뤼시스트라테는 남자들을 굶겨서 항복하게 만든다. 페이스테타이로스가 수퍼맨이듯이 뤼시스트라테는 수퍼우먼인가? 페이스테타이로스는 제우스의 후계자가 되는데, 뤼시스트라테는 신들에 대항하는 행동을 할 꿈도 꾸지 않는다. 뤼시스트라테가 아이스퀼로스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그녀의 남성 반대자들은(그들의 동시대적인 스트렙시아데스와는 전혀 다른) 에우리피데스의 편에 선다(188-89, 283, 368).

 

여자들의 코러스가 입장한다. 그들은 늙은 남자들이 들고 온 불에 대항하기 위해, 아니 더 정확하게 늙은 남자들이 신성한 곳을 점령하고 있는 늙은 여자들을 연기로 질식하게 하거나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그 불을 끄기 위해, 물을 준비해 가지고 있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에우리피데스와 신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고함치고, 그리고 아테나에게 도움을 받으려 하고 있는 반면, 여자들은 아테나에게 도움을 부탁하면서, 남자들이 불경스럽다고 고함치는데; 남자들에 비교하여 볼 때 그들은 아테나에게만 부탁한다. 두 코러스가 서로에 대해 알게 되자 서로에 대해 위협하고, 욕하고, 도발하면서 으르릉거린다. 그러나 여자들과 그들의 물이 남자들과 그들의 불보다 월등한 것으로 판명되는데; 남자들은 물에 흠뻑 젖어 패퇴한다. 이 시점에 한 프로불로스proboulos(치안판사보다 높은 관직)가 경찰 한 분대를 데리고 등장한다. 그는 재물들에서 해군의 비용을 가지러 왔는데, 여자들에 의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부되었고; 그래서 그는 물에 흠뻑 젖은 늙은 사람들만큼 분노한다. 그는 일어나고 있는 일을 특히 여자들이 좋아하는 이상한 종파들 가운데서 스스로 보여 주는 여성 특권의 또 다른 징표로 인정하는데; 그가 보기에 남자들이 알지도 못한 사이에 그들 아내들의 간통을 부추기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자들의 특권에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지금 상황이 그에게 아테네 사람들이 시켈리아 원정을 감행하는 끔직한 결정을 내렸던 때 당시에 일어났던 일을 상기시켜 주는데; 그때  당시에 한 여자가 아도니스에 대해 비탄한 것은 원정의 불길한 징조였다<주2>. 이러한 사실은 아테네 사람들이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현명함이 있었어야 했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여자들의 지금의 행동을 정당화할 것이기 때문에, 그 고관은 그의 성별gender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여자들의 특권이 생긴 것을 시켈리아의 참사에 그 책임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아테네 여자들의 입장에 비해 아테네 남자들의 입장이 약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또한 그것으로 자기도 모르게 여자들의 승리를 예언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는 그의 지시를 따르는 궁수들에게 힘으로 대문을 열라고 명령한다.

 

그들이 그의 말에 따르기 전에 뤼시스트라테가 밖으로 나온다: 뤼시스트라테처럼 분별 있는 인간과 무슨 일을 할 경우에, 힘을 쓰는 것은 현명하지도 않거니와 필요하지도 않은데; 분별이나, 설득이나, 그리고 우려를 사용해야 한다. 그녀는 싸우지 않고 이기기를 희망한다. 고관은 힘이 아니라, 분별이 필요한 것이라는 그녀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고; 그는 그녀를 체포하라고 지시한다. 뤼시스트라테는 힘에 대해서는 힘을 쓸 것이라고 위협하게 된다. 궁수가 움츠러든다. 고관이 두 궁수에게 그녀에게 족괘를 채우라고 지시하자, 다른 여자들이 그녀를 도우러 나오고; 여자들이 여성 신들에 걸고 맹세하며 위협하기도 전에 궁수들은 움츠리고 만다. 고관은 대형을 갖추고 공격할 준비를 한다. 뤼시스트라테는 그에게 수많은 중무장의 여자 전사들이 문 안에서 대기 중이라고 경고한다. 그가 마음을 고쳐 먹지 않자 그녀는 동료 전사들을 불러 내고, 그들은 쉽게 궁수들을 제압한다. 여자들이 평화를 갈망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쟁에 대비하여야 하며 심지어 전쟁을 수행하는데; 그들은 말벌이 되어야 하고; 그들이 전투를 벌여야 하는 남자들이 단지 허약한 시민들이거나 몽매한 노예들이라는 것은 그들의 행운이다. 여자들은 오직 방어적인 행동만 했다고 주장하는데; 결국 그들은 그들이 정복한 것만 지켰다. 고관과 그 분대의 패배는 그 앞에 패배하였던 늙은 남자들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는데, 그들의 권위가 훨씬 덜 상한다. 그들은 고관의 패배를 짐승들과 논쟁하는 잘못된 시도로 우아하게 묘사한다. 따라서 그들은  여자들이 왜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는지를 여자들로부터 알아보는 데 동참하라고 그에게 충고한다: 그가 만일 검찰관으로 행동한다면 그의 권위가 보존될 것이다. 그는 이 충고에 따라 행동할 만큼 충분히 눈치가 빠르다. 그는 뤼시스트라테- 분별과 침착함의 화신이다-로부터 그 재물이 더 이상 전쟁에 사용되지 않도록 그 돈을 수중에 두기 위해 여자들이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남자들을 위해 집안 살림에 관한 것들을 충분히 잘 맡아보던 여자들이 지금부터는 공공의 재물 역시 관리할 것이다. 공공의 재물이 전쟁을 위해 사용되는데 그것 없이는 아테네가 구원될 수 없는가? 여자들이 전쟁이 아니라 아테네를 구원할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여자들의 일이 아닌가? 남자들이 만들었던 전쟁의 혼란을 보라. 처음 여자들은 그들의 통상적인 겸손함으로 남자들이 저지런 실수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 속에서 괴로워하며, 남편에게 데모스의 결정에 대해 웃으며 물었고; 뤼시스트라테의 남편은 그녀에게 이것은 그녀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고, 그리고 그녀가 침묵하도록 했으며; 다른 여자들이 그러는 것보다 더욱 그녀의 남편을 존중하거나 두려워하며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남성적 우둔함은 전쟁이 진행될수록 늘어갔다. 여자들은 그들의 불만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그들의 남편은 오로지 힘으로 침묵하게 하겠다는 협박과, 그리고 그들에게 불리한 호메로스와 헥토르를 인용하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전쟁을 남자들 일로 하라." 그렇지만 남자들 스스로 나라에 남자가 하나도 없다고 인정하게 되었었다. 여자들은 이 말을 듣자 즉시에 모여서 그들이 그리스를 구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제 남자들이 듣고 입을 다무는 때가 왔다. 행동하는 능력, 즉 재빠르게 행동하는 능력을 가진 성별은 행동하는 것이 무능력함을 증명했던 성별을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낡은 방식의 사람들이 말할 이런 자연의 질서의 뒤바꿈은- 물론 고관에게 전적으로 먹혀들지 않는다. "전쟁을 남자들의 일이게 하라"는 호메로스의 말만큼 그리스 말의 운률로도 완벽한 "전쟁을 여자들의 일이게 하라"라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조차도 그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운률적인 형평은 새로운 것이 귀에 듣기에 옛 것보다 아름답지 못하지만, 그것은 극단적인 성격의 변화를 초래한다: 뤼시스트라테의 의도는 당분간 집안 살림에 있어 뿐 아니라, 도시에 있어 역시 격변을 요구하고; 그것은 남자들에게서 성적인 즐거움을 빼앗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남자들은 정치적으로도 포기하여야 한다. 이제 정치적 변화 그것에 모든 촛점이 맞추어진다. 여자들에게 말하면서 뤼시스트라테는 여자들의 필요성에 대해 호소하였지만, 남자들에게 말하면서는 전체로서 도시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자들의 코러스는 지배를 위한 명목으로 꼽을 수 있는 모든 여자들의 덕목들을 주장하는 것으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여성적인 겸손함이나 자제력은 그 속에 들어 있지 않다. 그들은 임시적인 그들의 권력 장악이 그들이 주로 대답해야 하는 것을 달성하는 것과,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의 수단을 의미한다는 목표를 잊어버리는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성적인 욕구는 먼저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그 다음에 남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553). 뤼시스트라테는, 고관에게는 아니지만, 이런 것들에 대하여 그들에게는 이해가 되도록 상기시킨다. 그녀는 그 대단한 그녀의 의도가 너무 일찍 알려진다면 그것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만일 군복무로 멀리 떨어진 남편들이 아내들의 봉기를 알게 된다면 그들이 집으로 오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이해하고 있고, 혹은 그녀는 아내들의 자제가 남편들에게 놀라움으로 되도록 완벽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고관은 여자들이 전쟁을 끝내려 한다는 것만 이해할 뿐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수행할지는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여자들이 시장에서 늙은 여자들로부터 올리브나 무화가를 사는 무장한 남자들의 우스꽝스런 행위를 중단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이 도시가 그 바람에 고통을 겪는 수많은 거대한 무질서들을 중단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부인한다. 뤼시스트라테는 플라톤의 엘레아의 이방인을 기대하면서, 여자들의 일들 가운데서 털실을 다루는 일이 아테네의 정치적 위대함과 평화의 회복을 위해 도시의 무질서한 사안들을 질서를 갖추게 하는 완벽한 모델이라고 그에게 말하고; 그것은 다른 어떤 것들 중 외래인들에 대한 자유 정책의 지혜를 가르친다. 고관은 뤼시스트라테가 정치 기술과  털을 빗질해서 꼬는 기술을 비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는데; 그는 그들이 전쟁에 대해 하나도 이해하고 있지 않고, 또는 그들이 전쟁에 대해 하나도 기여하는 것이 없다는 단순한 근거로 여자들의 주장을 밀어낸다. 이런 커다란 우매함이 곧바로 그의 패배를 불러온다. 뤼시스트라테가 그에게 말하듯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전쟁으로 더 많이 고통당한다: 어머니들은 아들들을 전투에 내보내야 하고; 젊은 여자들은 혼자 자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의 한창 때를 즐길 수 없고; 어린 소녀들은 결혼을 하지 못해서 늙은 미혼녀들이 된다. 고관은 뤼시스트라테가 말하는 어머니들과 젊은 아내들에 대한 것들을 이겨낼 수가 없어; 그는 단지 남자들도 전쟁하는 동안 늙어 간다고 단언할 뿐이다. 그렇지만 뤼시스트라테가 대답하듯 여자들의 한창인 때는 남자들의 한창 때보다 짧아서; 늙어 버린 남자들은 군대에서 집으로 돌아와 여전히 젊은 여자들과 결혼할 수 있지만, 반면 젊은 남자들은 늙어 버린 소녀들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고관은 늙은 미혼녀들도 여전히 더 나이 많은 남자들과 결혼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설득력있는 논리에 대항하여 두 성별이 모두 동등하게 고통을 입는다는 논점을 유지하려 노력하는데; 그러나 그가 이제 무덤으로 가야 할 뿐 더 이상 결혼은 어울리지 않다고 뤼시스트라테가 실질적으로 말하자 말문이 막히고 만다. 따라서 그녀와 여자들은 그를 이미 시체인 것처럼 취급하고, 그리고 심한 경멸의 말로 쫓아내 버린다.

 

뤼시스트라테가 전쟁의 결과로 여자들이 겪는 그런 고통들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희극에서 적절하게 언급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접근해 있다. 그녀는 틀림없이 전투에서 아들이나 아들들을 잃은 어머니(혹은 아버지)의 비참함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혹은 고관으로부터 말하지 말라고 금지당한다(590). 그러나 희극으로 전환될 수 있는 주제의 성격은 어째서 뤼시스트라테와 고관 사이의 최고 경지의 말대꾸들이 그렇게 생략될 수 없는가 하는 것의 유일한 이유가 아니다. 뤼시스트라테는 여자들을 세 부류로 구별하는데; 오직 두 번째 부류만 전쟁 중에도 남편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그녀의 의도가 성공하도록 오직 거기에 기대어야 한다: 그들은 여자로서 한창 때에 있고 한 기준으로 어린 자식들을 가지고 있고(18-19, 99-100), 반면에 첫 번째 부류의 여자들은 이미 군에 갈 나이의 아들들을 가지고 있다. 뤼시스트라테가 그 첫 뷰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는 그들의 죽은 아들들을 넌저시 건드리고; 그녀가 중간 부류에 대해 말할 때는 그들의 죽은 남편에 대해 암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그 의도의 기초적인 결점을, 혹은 그녀의 의도가 기초한 것의 불가능을 나타낸다. 그녀는 죽은 병사들의 아내, 즉 전쟁 미망인들을 따로 떼어낸다. 그 과부들은 그들 쪽에게서의 성적 거부가 그들의 남편을 다시 데려오거나 데려오는 데 기여하지도 않아, 뤼시스트라테에게 협조적일 수 없다. 그 밖에 아내들이 돌려세운 남편들이라 해서 역시 한창 나이에 있어 여자들의 봉기를 깨트리는 것으로 애국을 한다고 아주 잘 믿을지도 모르는 과부들이 반드시 돌려세울 것도 아니다. 뤼시스트라테의 의도는 모든 전쟁에서 생기는 예비 군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전쟁 미망인들로부터 떼어낼 수 있는 경우에만 하나의 탈출구로 상상될 수 있다. "뤼시스트라테"는 전쟁이 남자들의 공급을 줄이기 때문에, 전쟁이 남자들을 위해서 여자들에게 대한 요구를 늘인다는 사실을 터무니없이 무시하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전쟁 미망인들로부터의 격리는, 즉 죽은 남편들에 대한, 혹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죽음에 대한 격리는 여자들이 고관을 시체로 취급하는 것에 의해 희극에 꼭 알맞는 방법으로 자리 잡는다. 고관을 말도 못하게 하고, 그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장면 다음, 곧 파라바시스가 이어진다. 뤼시스트라테의 목표가 평화이고-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평화도- ,그리고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갈등도 여전히 최고조이기 때문에, 아니면 연극의 구조가 반목하는 두 개의 코러스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연극의 파라바시스는 지금까지 논의된 모든 연극의 파라바시스들과 다르다: 한 파라바시스에서 코러스 하나가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데; 이 사실만으로 "뤼시스트라테"의 파라바시스에서는 왜 작가에 대한 말이 없는지가 설명될 것이다. 연극의 구조가 코러스 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연극의 제목을 코러스에서 딸 수 없었을 것이다. "뤼시스트라테"의 파라바시스는 "새들"의 파라바시스에서도 작가에 대해 말이 없는 것처럼 전적으로 연극의 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잘 알고 있듯이 지금까지 논의해 온 연극들과는 다르게 "뤼시스트라테"에는 에우리피데스식의 서막이 없고, 아울러 특히 작가의 대변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다른 연극들에서보다 "뤼시스트라테"에 더 빠져 있다. "새들"과 "뤼시스트라테"는 또한 각각이 아주 다른 두 가지의 행동들을 가르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새들'에는 신들로서 '새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혹은 페이스테타이로스가 제우스의 후계자로 되게 하는, 제우스의 퇴위를 목표로 하는 행동과, 그리고 사람들이 새들처럼 살거나 새들과 함께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 사이의 상이점이 있고; (비록) 그 둘 중의 하나가 나머지 다른 하나보다 작가의 정신에 더 가깝기 때문에(가깝지만), 파라바시스에서는 이 두 행동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뤼시스트라테"에는 최소한 여자들의 가정사에 대한 행동과(아내들의 봉기), 그들의 정치적 행동(남자들의 지배에서 여자들의 지배로 바꾸는) 간에 차이가 있고; 파라바시스는 전자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이 두 행동들 중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작가의 정신에 더 가깝다고 추정해 볼 이유가 없어 보인다. 여자들이 그들을 쇠똥구리에 비교하자(695), 평화를 얻는 데 벌레들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고("평화"에서); 이때 구태여 희극작가의 기교를 떠올릴 까닭은 없을 것이다.

 

파라바시스는 여자들이 오직 행동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그들이 이겼다는 점에서- 것을 보여 주는데; 남자들은 절대 납득할 수 없다. 늙은 남자들의 코러스는 여자들의 비밀 모임에 들지 않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여자들의 행위를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은 여자들이 정치적인 변화를 통해 전제적으로 되려 작정한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여자들이 스파르타 사람들과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스파르타와 평화를 원하는 그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늙은이들은 전제자에게 굽히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아테네 사람들이 전제자를 죽인 전례를 따라 여자들을 거세게 몰아칠 것이다. 여자들은 이 위협에 대해 그들 역시 위협으로 응대한다. 관객에게 말을 건네 그들이 자격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테나와 아르테미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테네 소녀들로서 명예직의 연속cursus honorum을 완수하였고; 성숙한 여자들로서 그들은 전사들을 낳아 도시에 바쳤다. 비록 그들이 여자들이지만 특히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을 경우 도시에게 좋은 조언을 해 줄 권리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도시에게 좋은 것이든 혹은 나쁜 것이든 조언을 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그들의 변론을 듣지 않고 그들의 행동만 들을 것이다. 그 밖에 "뤼시스트라테"에 생명을 불어넣는 구도는 광범위하여; 그래서 연극 그 자체의 진행에 따라 여자들이 아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도시에게 줄 만한 조언이 없다. 여자들은 그들이 전제적으로 꾸려 나가려 한다는 의도를 부인하지 않는다. 아마조네스를 기억하고 있고 스스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늙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정치적 또한 군사적 행동에 대해 중대한 위험을 느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그들은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한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이제 그들이 적과 협상하는 것과 그리고 민주정에 종말을 고하려고 결의하는 것과 그리고 법령으로 다스릴 것 등을 거의 다 내비친다.

 

위협하던 싸움을 벌어지지 않는데 다른 곳에서 위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주의가 노쇠한 남자 반대자로부터 원기왕성한 그들 여자 지도자에게로 옮겨진다. 뤼시스트라테가 다시 등장하고 이번에는 완전히 낙담하여 있다. 여자들이 그녀를 버렸는데; 욕망이 그들을 가득 채워; 그녀는 그들을 그들 남자들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고; 그들은 집에 가고 싶어 한다. 그녀는 그동안에 발견한 네 가지 경우의 탈출 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대에는 다섯 가지가 넘는 경우가 나온다. 그것은 뤼시스트라테가 처음에 아프로디테에 걸고 맹세한 그 내용이다. 그녀의 의도가 성공한다고 생각한 바로 그 여신의 힘이 그녀의 의도를 위협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 남편들도 그들이 겪는 것보다 덜하지 않는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집에 가지 않고 아크로폴리스에 남는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것이라는 신탁을 그들에게 인용하여, 여자들이 힘든 역활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한다. 최소한 그녀의 공공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데는 신탁이 필요가 없었던 반면, 완수하는 데는 그것이 필요하다. 처음 아내들은 집에 있었고, 그들 남편들이 군복무를 위해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 그 남편들이 집에 있는 대신, 그들 아내들이 집을 떠나 아크로폴리스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는 것을 그것이 인간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관점으로 주목해 보는 것이 아마 더 중요할지 모른다. 암피테오스의 스파르타 왕복 여행만큼 놀라워 보이는 이런 뒤바뀜이 없었다면, 뤼시스트라테의 의도는 실패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처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내들의 절제가 쉬웠을 것인데, 그러나 그 때문에 전체적으로 효과적이지는 못하다. 오직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만이 아내들의 절제가 효과적일 수 있으나; 그러나 그것 역시 지금은 많이 어려운데, 특히 그들 남편들을 집으로 데려오려 하는 일차적 동기가 지금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뤼시스트라테의 원기왕성한 지도력에 힘입어 여자들이 그들 남편보다 더 자제한다면 그녀의 의도는 아주 성공적일 것이다. 아내들의 결의를 위험하게 할 남편들의 귀환은 그 결의를 강화시킬지도 모른다.

 

뤼시스트라테는 그녀의 군대가 와해되는 것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정치- 군사적인 상황은 파라바시스의 마지막에 나온 상황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늙은 남자들의 코러스와 늙은 여자들의 코러스가 서로 대치한다. 그러나 중간에 끼인 장면이 미묘한 효과를 나타냈는데; 그들 두 성별은 더 이상 서로 싸우려고 않는다. 늙은 남자들은 여자를 싫어해서 산 속에서 살며 집에는 결코 가지 않았던 옛날의 한 총각을 칭송한다: 만일 최소한 약간의 아테네의 전사들처럼 남자들이 결혼해서 집에 있다면 모든 것을 잃는데; 늙은 남자들은 한창 때인 남자들로부터 여자들에 대항하는 도움을 받으려 희망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모든 인간이나 남자들은 아니나, 모든 사악한 남자들을 미워하고 여자들을 사랑한 티몬을 칭송하는데; 여자들의 코러스는 남자들의 코러스보다 상대 성별에 대해 덜 적대적이다: 여자들은 남자들 중에 그들의 동맹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수긍한다. 남자들 역시 어쩐지 처음보다 여자들에 대해 친화적이다. 지금 주고 받는 내용은 파라바시스 안에 있었던 것보다 더욱 외설적이다. 외설성의 증가는 정치적 열정의 감소와 부합한다: 어떤 남자도 더 이상 전제적으로 되는 위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아내들의 봉기의 성공은 정치체계의 변경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이리하여 늙은 남자들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한다.

 

아내들 봉기의 성공은 그들이 남자들보다 더 절제적이라는 것에 의존한다. 그 다음 장면에서 보기가 되는 시험들이 보여진다. 뤼시스트라테는 여자들을 불러 모으는데; 그녀는 성적 흥분이 최고조에 올라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한 남자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다. 아프로디테가 자기의 일을 그 남자에게 한 것이다. 뤼시스트라테는 아내들이 집에 돌아가는 것을 막았었는데; 이제 남편들이 아크로폴리스로 온다. 그 어떤 남자는 뮈르리네의 남편인 키네시아스이다. 뤼시스트라테는 뮈르리네에게 서약한 사실을 상기시킨 다음 그녀와 다른 여자에게 자리를 비워 달라 부탁한다. 키네시아스가 등장하고, 그 주인의 두 아들과 함께 한 노예가 그 뒤를 따른다. (트뤼가이오스의 두 딸을 기억하라!) 왜 여자들이 남자들을 이기게 되어 있는지 곧 바로 알아차린다: 성적 흥분이 육체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여자들의 경우보다 남자들의 경우가 훨씬 더 참기 힘들거나, 혹은 훨씬 더 눈에 띄는 장애인데; 그 밖의 모든 것을 무시하며, 작가는 자제한다는 것이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에게 더 힘들다는 것을 증명한다. 뤼시스트라테는 적절한 범위 내에서 키네시아스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한다. 그녀는 그 아내가 그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 말해 준다. 키네시아스에게 이것은 그가 그 아내와 다시 합쳐야하는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할 뿐이고; 그녀는 뮈르리네를 그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한다. 키네시아스가 집을 떠나 멀리 있었던 적이 있는지에 대해 시사하는 점은 없다. 뮈르리네는 높은 곳에 나타나, 그가 그 아이들을 시켜 그녀를 부를 때조차 키네시아스에게로 내려오는 것을 거절하고; 그녀는 뤼시스트라테와 같이 있었던 엿새 동안 그 아이가 목욕도 못하고 젖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자 겨우 마음을 돌린다. 그녀는 최소한 아이들이 단지 짐이 될 뿐이라고 여기는 척하며, 그리고 집안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한 척한다. 그녀가 아이에게 입맞추는 동안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만지는 것을 그냥 둔다. 이제 처음으로 그는 그의 아내가 하는 이상한 태도의 연유를 알게 되는데; 뮈르리네는 그에게 남자들이 전쟁을 끝낼 때까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그는 조금도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 조건 속에서 그 자신을 볼 때 그는 그가 그녀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요구가 무엇이든 그것을 들어주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어떤 다른 것들 가운데서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도 약속하고; 그녀는 그와 함께 누워야 한다. 뮈르리네는 거부하는 이유를 연달아 만들어 내고, 그래서 그녀가 응하겠다는 약속을, 그리고 약속의 이행을 늦추는것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자; 그에게 한 약속의 이행을 영원히 유예한다고 한 다음 마지막으로 그녀는 달아나고 만다. 그전의 장면에서 그녀는 평화에 대해 그로부터 또 다른 약속을 얻어 내는데; 그가 평화를 얻기 위해 숙고하겠다는 약속 정도이다: 아내들이 거부하는 것이 여전히 빗나가는지도 모르는데; 다른 모든 여자들보다 그의 아내를 더 좋아하는 키네시아스조차도 스스로에게 차선의 해결책을 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묻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아내들이 봉기한 것이 성공하는지 여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것은 여자들이 아테네에서 정체를 바꾸어 전쟁을 끝내는 것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또 다시 만들어 낸다. 늙은 남자들 코러스는 뮈르리네가 키네시아스를 갖고 노는 것과 그에 대한 동정심으로 분노에 찬다. 그들이 미워하는 여자들은 그들 남편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약해져 있었는데, 뮈르리네의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그전과 같은 힘을 다시 얻는다. 그리고 최소한으로 중요한 것은 늙은 남자들이 뤼시스트라테의 거대한 의도를 알아채리고 있다는 표시를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불확실성은 스파르타로부터 한 전령이 도착하자 사라진다. 스파르타의 관청이 아테네의 관청으로부터 그들이 평화에 대해 협의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 보도록 그를 보낸 것이다. 아테네에는 평화파(여자들)와 전쟁파(남자들) 사이의 갈등이 아직은 전자를 지지하는 쪽으로 수습되지 않고 있는데 반해, 스파르타 아내들의 봉기는 람피토가 이끌어 전적으로 성공하고 있었다. 처음에 람피토가 지적하였듯이(168-71), 그들 남편에 대한 스파르타 아내들의 힘이 아테네 여자들의 아테네 데모스에 대한 힘보다 훨씬 더 컸고<주3>; 스파르타에서는 평화파가 승리하는 데에 정치체계를 바꾼다는 협박과 같은 모양새도 필요하지 않았다. 혹은 스파르타는 이미 부인주의gynaecocracy가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스파르타 사람들의 사고의 전환이고, 또한 평화를 사랑하는 대범함에 던지는 작은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아테네에서는 일들이 어쩐지 잘 돌아가지 않고 있었기에 스파르타에서는 잘 돌아갔고; 그 상황에서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위해 주도적인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 가장 비정치적으로 될 것이었다. 평화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스파르타가 그것에 대한 주도권을 쥐는 것에 있었다. 뤼시스트라테의 대가다운 일격은 스파르타 사람들이 기꺼이 평화를 이루려 하도록 하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게 할 수 있도록 가격하는 것에 있었다. 아테네의 남자들은 뤼시스트라테의 의도가 성공을 거두는 순간에, 그것도 겨우 부분적으로 그 의도를 이해하는데; 스파르타 전령의 도착이 발 아래에서 진행되는 음모가 전제주의를 구축하려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그들에게 깨닫게 해 준다(1008). 상황은 이제 명백하고 또 간단해서, 스파르타 전령과 대화하던 아테네의 치안관리는 평의회의 인준도 받지 않고, 스파르타는 지금 즉시 평화를 논의하기 위한 전권을 가진 사절을 아테네로 보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고, 아울러 그는 같은 목적을 가진 사절을 뽑기 위해 아테네 평의회에 말할 것이다: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스파르타가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에 아테네가 평화를 이루리라는 데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령이 스파르타로 떠나고 난 후, 즉 아테네 여자들이 정치체제를 바꾸도록 애쓰지 않고도 평화를 위한 싸움에서 이기고 난 후, 두 코러스 간에 화해의 때가 왔다. 싸움에서 진 늙은 남자들은 에우리피데스의 힙포뤼토스에 생명을 불어 넣는 그런 여자 혐오증 같은 감정을 아직 발산한다. 그렇지만 몇 명의 능수능란한 사람들이 늙은 남자들의 혐오의 잔재를 충분히 부수어 들어가는 여자들에게 마음이 움직인다. 여자들이 그들에 베푸는 약간의 봉사가 전적으로 거부할 것은 아니어서, 그들은 눈물을 보이면서, 투덜거리면서, 당연히 받아들인다. 두 코러스가 처음으로 합동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은 좋은 감정의 정신과 도시에 이득이 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어떤 사람의 한 나쁜 점에 대하여 말은 않지만 암묵적으로 전체로서 언급하는 것으로, 그리고 모두에게 풍성한 저녁과 돈을 주겠다는 공수표를 날리는 것으로 대화를 나눈다. 만일 연극에서 두 번째의 파라바시스가 마련되었었다면, 여기가 바로 그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나올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들 아내들의 봉기가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평화를 이루고 말겠다는 열망으로 가득찬 스파르타의 사절이 도착한다. 아테네 사람들도 스파르타 사람들처럼 여자들의 봉기로 마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양쪽 진영 모두 남자들에게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뤼시스트라테에게 부탁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뤼시스트라테가 부르지 않았는데 등장한다. 그녀는 맨 처음 그리스 사람들이 그녀를 그들의 중재인으로 정했기 때문에- 그녀는 지배자도 아니고 그리스 사람도 아니다-, 이제 서로 조화롭다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합쳐야 하는데, 한마디로 선과 악 양쪽 모두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주4>. 그녀는 아프로디테와 그라이아들의 동료이며 비록 침묵하고 있으나 조각상은 아닌 디알라게(화해)에게, 먼저 스파르타 사람들을, 그 다음은 아테네 사람들을 데려 달라 요청하고; 그녀는 디알라게에게 지시를 내리며, 평화는 순전히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녀는 스파르타 사람들을 특별히 대한다. 그녀의 적격성은 그녀의 타고난 재치와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나 그 또래의 남자들로부터 들은 많은 이야기들로 나타나는데(남편으로부터 그런 지혜를 얻은 것이 없다); 그녀는 여자들이 열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스파르타 사람들과 아테네 사람들 모두를 비난하는데, 그들은 서로 같은 종족이고 야만인이라는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양쪽 모두 비난하는데, 다른 한 쪽이 도움을 주어 명예를 지킨 혜택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평화를 위한 첫 걸음을 뗀 것에 따라서 스파르타사람들은 그들의 잘못을 수긍한다. 지금까지 전쟁 중인 두 도시 간의 합의는 스파르타 사람들이나 아테네 사람들이나 모두 뤼시스트라테거나 혹은 아름다운 소녀 디알라게의 여성적 매력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지금의 그들 상태로 그 욕망과 여전히 상대방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전략적으로 가치 있는 지점을 취하려는 욕망과 구별되지 않는다-  푹 빠져 있다는 사실로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다행스럽게 현재는 그들의 육체적 필요가 모든 정치적인 고려보다 더욱 강하다. 뤼시스트라테의 제안대로 여자들이 두 도시에서 온 남자들에게 아크로폴리스에서 저녁 식사를 베풀 것이고, 거기에서 평화에의 굳센 결론이 내려질 것이고; 그 다음 모든사람들이 그들 아내를 데리고 떠날 것이다. 뤼시스트라테의 남편도 여자들이 베푸는 저녁 식사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코러스는 모두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공수표를 날리며 화해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하고; 그들은 평화를 염려하여 그 어느 시민의 나쁜 점도 말하지 않지만, 전쟁으로 가난해져서 그들은 제대로 된 약속을 할 수 없다. 그 다음으로 애매한 장면이 하나 이어지는데; 스파르타 사람들이 저녁 식사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사람들에 대항해 폭력의 위협이 가해진다. 막고 선 그들은 재건되지 않은 전쟁파들인가? 관객은 난투극이 나오면 보기 좋아하겠지만 실제 일어나지는 않는다: 여기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암묵적으로 천한 희극 장치의 채택을 거부하고; "뤼시스트라테" 속에서, 작가는 자신에 대해 들리지 않는 소리로 이야기한다. 평화의 연회는 아주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나고; 양쪽 스파르타 사람들과 아테네 사람 모두는 기분이 최고조인데; 아테네 사람에 따르면, 스파르타 사람들은 멋졌고, 포도주를 마신 아테네 사람들은 가장 현명한 연회 참석자였다. 코러스는 이제부터 모든 아테네 사절단들은 스파르타에 가서 술에 취한 상태로, 즉 자비롭게 그들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아프로디테에 의해 시작된 일이 디오뉘소스에 의해 아테네식 방법으로 완성되어야 한다<주5>. 한 스파르타 사람이 스파르타 사람들과 아테네 사람들 양쪽 모두가 즐겁도록 춤추고 노래하자고 제안하고; 물론 그 제안을 기뻐하며 받아들인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아르테미시아에서 세운 공적과, 스파르타 사람들이 테르모퓔라이에서 세운 공훈에 대하여 칭송한다. 그는 그들이 공동으로 세운 플라타이아이에서의 공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리고 그는 신성한 처녀 사냥꾼 아르테미스에게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평화가 영원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두 도시 간의 영원한 평화에 대한 전망이 없다. 그 다음으로 뤼시스트라테는 인질로 잡고 있던 스파르타 아내들을 그들 남편들과 결합시켜 주고; 그들 남편들과 아내들의- 전쟁파의 구성원들과 평화파의 구성원들- 재결합이 스파르타와 그리스 간의 재결합으로부터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녀는 남편들은 그들의 아내과 그리고 아내들은 그들의 남편과 같이 지내라고 조언하는데; 연극에서 그녀의 마지막 말은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주의하자"이다. 물론 그녀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실수를 의미하지만, 그러나 본문에는 또한 아내들과 남편들의 실수도 의미한다. 아테네 사람들의 코러스는 아르테미스, 아폴론, 디오뉘소스, 제우스, 또한 헤라, 그리고 아프로디테의 작품인 그 꿀같은 휴식에 관여하는 모든 신성에 대하여 그 이름을 부르고; 아테네 도시나, 아테나 여신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한 아테네 사람의 요청으로 스파르타 사람 하나가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로 연극의 결론을 말하는데, 그 스파르타 사람은 아폴론, 아테나, 그리고 디오스쿠로이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또 청순한 헬렌이 이끄는 스파르타 처녀들의 코러스를 특히 칭송하면서 스파르타에 대해 축하한다: 스파르타 처녀들은 완전히 전쟁파인 아테나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다. 평화를 축복하는 연극은 전사들의 여신에 대한 칭송으로 끝난다(cf. "구름" 967). "평화"에서 보아 알듯이 조만간에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없어, 그것이 야만인들과 전쟁이기를 바라면서 전쟁에 대한 위협이 없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뤼시스트라테"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람들의 제창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스파르타 사람들의 노래나 아테네 사람들의 노래에서 지적되었듯이, 두 도시 사이의 화해는 그들 사이의 차이가 지워지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평화는 아테네 사람 뤼시스트라테가 맨처음 이끌었고, 그녀는 스파르타에서의 아프로디테의 힘을 믿었으며, 그녀의 전체 구도는 디오뉘소스가 길러 낸 아리스토파네스 속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오직 스파르타 사람들만 마지막 노래에서 아테나를 칭송한다.

 

첫 눈에 "뤼시스트라테"는 다른 두 편의 평화에 대한 연극들과는 확실히 다른데,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나 "평화"에서는 평화가 신들의 방해나 도움을 입으면서 희극작가의 행동에 의해 이룩되지만, "뤼시스트라테"에서는 신들의 방해나 도움을 입지 않고 여자들의 행동에 의해 이룩된다는 사실로 다르다: 디알라게는 뤼시스트라테의 지시에 따라 결정적인 행동이 이미 이루어진 다음에 행동한다. 그렇지만 디알라게와는 사뭇 다르게 신들이 그냥 "뤼시스트라테"에서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아프로디테의 작품이다(1289-90). 작가가 빠져 있는 것에 대해서 디카이오폴리스가 그의 개인적인 평화를 그녀가 불쌍해서 상사병에 걸린 여자에게만 나누어 주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인데; 그 동정심이 "뤼시스트라테"에 생명을 불어 넣고, 그 연극에서 여자들은 평화를 좋아하지만 남자들은- 작가는 살짝 예외로 빠져서 있지만- 전쟁을 좋아한다: 여자들이 작가의 자리를 차지한다. 작가로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지금까지 논의해 온 다른 어떤 연극들에 비해 "뤼시스트라테"에서 덜 나타난다: 연극의 배역들 중 아무도 작가를 대표하지 않고, 혹은 디오뉘소스에 걸고 맹세하지 않으며, 혹은 작가의 대변인처럼 행동하지 않고, 그리고 도시의 근본적인 요구 사항들에 대한 의문도 일으키지 않는다(뤼시스트라테는 여자의 어쩔 수 없는 열등성에 대한 의문도 가지지 않는다). 만일 전쟁이 남자들의 일이라면 평화는 여자들의 일이라는 것과,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작가는 반드시 여자들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 따라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성별 의 차이는 "평화"의 신학 속에 에이레네와(그리고 그녀의 여성 동료들) 그리고 폴레모스(그리고 그의 남성 동료) 속에 투영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말해, "평화"에서 폴레모스가 살아 있는 것은 에이레네가 살아 있는 것에 비해 더 명쾌하다. 같은 애매함이 "뤼시스트라테"에서 보일지 모른다. 평화가 아프로디테의 작품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아프로디테는 평화의 여신이 아니다. "뤼시스트라테"에서 작가는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들이 행동해야 하는데; 그들은 남자들처럼 행동해야 한다(전쟁이 여자들의 일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아마조네스처럼 싸워야 하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그들 남편들에게 거부해야 하며, 또한 그들 자식들을 돌보는 것도 중단해야 한다: 그들은 생활을 영속시키기보다는 그것을 파괴해야 한다. 그들은 아프로디테의 "황금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처녀 여신 아르테미스나 아테나를 모방하는 것으로써 평화를 성취하고; 이 두 여신들은 "뤼시스트라테"에서 다른 어떤 연극에서보다 더 힘이 있는 것으로 소개된다(또한 맹세나 기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나 완전히 전쟁애호자인 아테나조차도 평화에 대해서는 아프로디테보다 덜 여신적이다. 연극의 결말은 아이를 낳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녀 자신 태어나지도 않았고, 아버지 어머니에 의해 생성된 것도 아닌 생명을 부정하는 현신체이기도 한 아테나를 총체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주어진다. 페이스테타이로스가 믿을 만하다면, 그녀는 유일하게 제우스의 정당한 상속자이며("새들" 1652-54), 페이스테타이로스가 제우스의 후계자가 된 것을 제외하면, 제우스의 가장 합법적인 후계자일 것이기도 하다.

 

평화는 아프로디테에 의해서가 아니라 뤼시스트라테에 의하여, 뤼시스트라테가 주동한 남편들에 대한 여자들의 봉기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남편들이 만일 집에 없었다면 봉기는 효력을 볼 수 없었겠지만, 그러나 아내들은 남편들이 집에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 뤼시스트라테의 전체 구도를 채택하였다. 이것과 달리 아내들이 만일 남편들보다 더 대단한 자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봉기는 효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여자들에게서 기대되는 것과, 그리고 아르테미스나 아테나 같은 여성 신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또한 무엇보다 만일 전쟁 미망인들의 예비 군대가 없다면, 즉  만일 자연에 반하여 군대에 있는 남편들이 죽음을 당할 수 없고, 혹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만일 법적으로 결혼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성교를 제외하고는 성적인 만족을 얻을 가능성이 없다면, 혹은 만일 성적 만족의 즐거움이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나 결혼 생활 속에서만 가능하다면, 봉기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남편들이(아내들이) 그들 아내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는(그들 남편들이 밭에 나가 있을 때는) 그런 만족을 얻을 기회가 없어야만 한다<주6>. 뤼시스트라테의 의도는 전쟁이 남녀가 성적으로 굶주리도록 하거나 혹은 세대가 이어지는 것을 막는 반면에,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적은 수의 남자들이 많은 수의 여자들에게 수태하게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전쟁은 본성을 거슬리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성적인 것physis과 법적인 것nomos 간의 부자연스런 일치를 예측하고 있다: 전쟁과 본성 간에 혹은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간에 근본적인 부조화는 없다. 뤼시스트라테는 그녀 자신과 다른 아내들을 처녀 여신들과 동화시키는 것으로 이런 근본적인 조화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따라서 그 여신들이 본성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의 우연스런 일치를 가져다 줄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뤼시스트라테가 규범적인 것의 승리를 연출한다고, 그리고 규범적인 것의 패배를 축하하던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다른 모든 연극들과 다르게 이런 관점에서 "구름"을 닮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고; 두 연극은 에우리피데스(혹은 소크라테스)가 싫어하는 존재들의 승리를 축하한다. 이 두 연극에서 그 승리의 연유가 변론이 아니라 행동의 승리에 기인한다. 이런 모든 것으로 볼 때, "뤼시스트라테"는 시적으로 아테나를 지적하면서 신들의 신성에 대한 의문에 답한다.

 

평화는 스파르타 남편들에 대한 아내들의 봉기가 가져온 효과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테네에서 성적 봉기는 아테네 여자들의 아테네 데모스에 대한 미미한 힘을 생각할 때 그리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능동적인 데모스가 집 안에 있어서, 즉 늙은 남자들이라 성적인 굶주림으로는 굽히고 들게 할 수 없어서; 늙은 남자들은 재물들을 손에 넣은 늙은 여자들과 단박에 싸우려 한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은 단지 여자들이 정치적인 힘을 쥐는 데 일차적인 것일 뿐이다. 뤼시스트라테의 전체 구도는 성적 봉기의 위에 정치체제의 변화를 요구한다. 성적 봉기는 젊은 여자들의(아내들의) 젊은 남자들에(남편들에) 대한 행동이고, 정치적인 행동은 일차적으로 늙은 여자들의 늙은 남자들에 대한 것이라 말해도 좋은데; 정치적 행동이 그들 남편들에 대한 여자들의 행동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스파르타로부터 전령이 도착하기 앞서, 최소한 아테네 여자들이 아테네의 남자들로 하여금 평화를 이루도록 이끌 수 있었을까 하는, 즉 먼저 정치체제 변경이 없었어도 아테네 남자들이 평화를 이루었을까 하는 확신이 없다. 여자들의 봉기나 권력을 잡는것 둘 다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뤼시스트라테"에서 여자들이 평화파이고 남자들은 전쟁파이다. 여자들이 평화를 좋아하는 남자들을 편들고 남자들은 전쟁을 좋아하는 남자들을 편든다고 가정해 보면, 이 경우 연극은 그 상황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아테네에서 정치 체제를 바꾸는 것을, 즉 데모스를 조정하기 위해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을, 이런 이유로 뤼시스트라테가 행한 그대로 이미 스파르타와 접촉했을, 그런 사람들이 권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러한 정책은 최고의 기밀성과 그러므로 정치 체제를 바꾸려는 준비를 감추기 위한 표면 상의 정책을 필요로 할 것이다. "뤼시스트라테" 속의 행동은 평화파들이 성적 봉기를 엄격히 비밀로 할 정도로 그런 일들의 상태를 우습도록 하는 방식으로 반영하지만, 반면에 그것은 "전제주의"를 구축하는 정치적 전복을 목표로 한다는 인상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다. 이 연극의 우스꽝스러운 배역의 행동은 전적으로 성적 봉기에만 국한된다. 혹 정치체제의 변경이- 페이스테타이로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정치체제의 변경과는 다르게- 작가의 진지한 제안이 아닐 것이라고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그 경우에 "뤼시스트라테"는 다른 어떤 연극보다 진지하게 정치적 제안을 하는 것에 가깝게 다가갈 것이다. 가장 정치적인 연극으로 유일한 "기사들"에서 작가는 클레온의 축출을 진지하게 제안했다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작가는 어떻게 그런 축출을 이루어 낼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보여 주지 않는다. 그렇다 한들 진지한 제안 하나가 희극의 전체성과 양립할 수 있을까? 스파르타의 지지에 의존하는 정치체제로 알려진 아테네는 그의 남성성을 빼앗겨 버린 그런 아테네가 아닐 것인가? 여자들의 행동을 통하여 아리스토파네스는 더 높은 혹은 더 많이 위험한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암묵적으로 그가 단지 "인간"일 뿐인 존재를 그리고 특히 여자들을 희극적으로 다루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주7>. 또 다른 두 편의 여자들에 관한 연극에서는 무엇이 진실이든지 간에, 그 주장은 "뤼시스트라테"에서는 확실히 모순되지 않는다.

 

 <주1> 188-90; cf. 아이퀼로스, '테베에 항거하는 일곱 사람' 43-45.

<주2> Cf. 플루타르코스, '니키아스' 13.7.

<주3> Cf.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69b12-1270a8.

<주4> 1109. 그 해석을 위해서는 크세노폰의 '회상' II 2.2와 III 1.6 그리고 '키로스의 교육'        6.27을 보라   

<주5> 플라톤, '법률' 637a-b.

<주6> 954-58, 1091-92; "극작가와 여자들thesmophoriazusai,(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 491-96.

<주7> "말벌들" 1029-30, "평화" 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