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草)

11. 도시의 자유 (3)

병든소 2019. 4. 24. 15:15

 

11. 도시의 자유自由 (3)

 

11.18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기이하게도 그해 구월이 다 가도록 아테나이 사람들은 아테나이와 동맹도시들의 시켈리아 원정군이 괴멸했다는 사실을 서로의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기도 했거니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많은 돈과 장군들과 병사들과 함선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하는 이 갈리는 분노와, 이것으로 아테나이도 아테나이 사람도 이제 끝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원정군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너무나 잘 알아, 그 정도의 군사력이 사라진 아테나이가 얼마나 허약해진 것인지, 그래서 제국의 종속 도시들이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스스로 지키겠다며 들고나서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 그렇게 제국의 틀이 무너져 갈 때 과연 우리가 우리들 도시와 우리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 제국은커녕 우리의 도시와 우리의 안전과 자유조차 지킬 수 없게 된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온 도시를 어둡고 무거운 침묵 속으로 가라앉혔습니다. 해상 탈출 시도에 실패한 쉬라쿠사이 원정군은 무너진 자존심과 앞날의 두려움으로 공황에 빠져 함선을 전사자를 부상자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만한 군세를 가지고도 괴멸당했다는 원정군에 대한 분노와 앞날의 두려움으로 침묵에 빠진 아테나이는 쉬라쿠사이에 남은 함선도 전사자도 부상자도 포로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쉬라쿠사이 채석장에 갇혀 노역하는 포로들을 팽개칠 정도로1 너무나도 깊었던 쉬라쿠사이 원정군에 대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분노는 스팍테리아 섬의 포로들을2 구하기 위해 굴욕적인 왕래와 위협들을 감수하던 스파르테 사람들의 애절함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도시를 짓누르던 분노와 두려움의 침묵을 깬 것은 페이라이에우스 항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몇몇의 원정군과 여러가지 일로 드나드는 다른 도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침묵하지 않았으며, 아테나이의 참혹한 원정 실패를 생생히 말했고, 이미 온 헬라스 세상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제 제국의 동요는 말할 것도 없고, 코린토스가 스파르테가 쉬라쿠사이 군을 앞세워 아테나이로 달려올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테나이는 침묵을 깨고 민회에 몰려들었고, 전쟁하면 이기고 이겨서 재물을 얻는다는 그들 모두의 오만과 탐욕이 불러온 재앙이었음에도 마치 그들 모두 전쟁 결의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정복과 전리품의 희망을 말하며 원정을 주장하던 클레오폰 같은 사람들과 승리를 장담하던 점쟁이들을 향해 온갖 비난을 퍼부었고, 그러다 지쳐  원정의 실패를 인정하고 우선 도시의 안전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고3, 민회에 참석한 많은 시민들은 오만과 탐욕으로 벌인 전쟁이 도시와 도시민에게 던지는 불의의 재난을 이미 겪을 만큼 겪어본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나이 예순이 넘은 노년의 시민들은 그들이 청년이었을 때 이미 쉬라쿠사이 원정 실패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던 아이귑토스 원정군의 전멸을4 극복했었고, 그들이 장년이었을 때는 이 둘 모두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 할 만한, 도시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셋 중 하나가 죽어나간 역병의 재앙도 견뎌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도시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결코 재앙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어서 아테나이 민회는 적의 침입이 있더라도 자원이 남아 있는 한 항복하지 않고 싸우기로 했고, 아기스가 데켈레이아에 진을 치고 있는 판이라 요새섬 방어 전략을 더욱 철저히 지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우선 함선들을 수리해 바다에 띄우기로 하고, 전에는 부자 한 명이 함선 한 척을 운용했지만 힘에 부치는 부자들을 위해 부자 둘이 한 척을 운용토록 힘을 덜어주기로5 했습니다. 함대 복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동맹도시들의 이탈을 막는 것이었는데, 그 어느 도시보다 식량 보급과 데켈레이아의 아기스를 견제하는 데 꼭 필요한 에우보이아 섬이 이탈하지 않도록 묶어두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쉬라쿠사이 원정의 실패로 아테나이는 열 명의 장군들 가운데 경험이 제일 많은 순서대로 네 명을 잃었고, 촉망 받던 알키비아데스는 원정 초기부터 도시를 등지고 적의 편이 되어버려, 남은 장군들이나 아르콘들이 앞의 두 재앙을 이겨낸 페리클레스만큼 잘 하리란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6 이들과 불레로이가 도시의 일들을 사전 협의할 수 있도록 새로 원로회를7 구성해 도시 일의 의사 결정구조를 바꾸었습니다. 이제 아테나이 사람들은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제약과 규율을 받아들일 것이었습니다.

 

11.18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모처럼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가 합심하여 도시를 지킬 일들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있는데, 겨울이 되자 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반란을 꾀하는 동맹도시들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테나이가 잃은 것만 보았고,8 아직도 아테나이에게 남아 있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9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아테나이가 여름까지 보여주던 오만과 탐욕을 가을이 되면서부터 버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들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자유에 대한 우려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아테나이가 위태롭다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도시의 체제까지 바꾸며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고자 온갖 재화와 노력을 동원해 대비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아직도 아테나이가 운용할 함선이 100척이 넘으며, 아직은 아이가이온 바다에서 아테나이 함대와 겨룰 도시가 없다는10 사실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 걸 따져보기보다는 우선 굴레를 벗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중립을 표방하여 종속은 면하고 있었지만 언제 종속될지 몰라 늘 두려움 속에 아테나이를 지켜보던 도시들이 이제는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며 스스로 나서 제일 먼저 스파르테 편에 서려 했습니다. 물론 오랜 전쟁으로 고통받던 펠로폰네소스 동맹도시들도 이젠 전쟁을 끝낼 때라며 열성적으로 나섰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고조된 일부 아테나이의 동맹도시도 아테나이가 한 해를 버티지 못할 것이라며 반기를 들고 나섰는데,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나 그후 아테나이가 제국 건설할 때나 아테나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쓴 여러 도시들이 스파르테와 손을 잡고 반기를 들어보았지만, 바다를 건너올 함대가 없는 스파르테와의 협력이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일에 얼마나 허망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지11 충분한 학습을 했음에도, 이번에도 그들은 아니나 다를까 헬라스의 해방자로 자임하고 나선 스파르테를  뒷배 삼아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11.18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 헬라스 도시들의 이런 움직임이 모두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너무나 잘 아는 데켈리아의 아기스는 자기가12 적극적으로 나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헬라스를 자유로운 세상으로 이끌기로 마음 먹었습니다.13 그곳으로 나올 때 이미 스파르테로부터 아테나이를 상대하는 모든 전쟁 행위의 결정권을 위임받았으므로, 망설임 없이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창설해 아이가이온 바다에서 아테나이를 제압한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바다에서 아테나이를 제압하지 못하면 지금 일어나는 여러 헬라스 도시들의 반아테나이 움직임을 이끌어 성공시킬 수 없고, 이들의 실패는 스파르테의 실패로 전쟁 종식과 자유로운 헬라스 건설은커녕 스파르테가 또 다시 펠로폰네소스 반도 속으로 들어가 라코니케에 틀어박힐 것이며, 결국 헬라스는 아테나이의 제국으로 굳어지고 말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바다에서의 아테나이 제압은 전쟁 종식의 유일한 길이었고, 함대의 창설은 바다 제압의 필수이며 첫걸음이었습니다. 바다를 잃은 아테나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쉬라쿠사이가 밝혀주었으므로,14 아기스는 스스로 결정한 스파르테가 바다로 나간다는 이 중차대한 전략의 변경을 이루기 위해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코린토스가 함대 창설과 운용에 도움이 되겠지만, 아기스는 그가 만들 새로운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명목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스파르테가 지휘토록 할 것이었습니다. 결심이 서자 아기스는 지체없이 약간의 호위병사를 대동하고 펠로폰네소스 동맹도시들 순방에 나섰습니다. 동맹도시들로부터 지상군을 모으듯 함선을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까지 펠로폰네소스동맹은 비록 스파르테가 맹주로서 이끌긴 했지만, 모든 것을 논의와 투표로 결정하고, 결정한 일을 동맹원 각자가 그때 그때의 결의에 따라 부담해 지상군을 편성했고, 임무를 마치면 각자의 도시로 돌아가는 방식이어서, 함선을 모으는 것까지는 그렇게 한다 해도 함대를 유지하는 것에까지 적용하기 위해서는 아테나이처럼 동맹들에게 돈을 갹출해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펠로폰네소스동맹의 전통에 벗어난 일이라 자연스레 아기스는 스파르테가 함대의 운용비를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파르테의 운용비 마련이라는 새로운 숙제도 풀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아기스는 먼저 텟살리아의 반발에도 그 변경의 여러 지역들을15 돌아 강압적으로 돈을 거두고 동맹에 편입시킨 것은 바로 그런 돈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로 가서 동맹도시들에게 함선을 할당했는데, 스파르테와 보이오티아가 각 25척, 코린토스 15척, 포키스와 로크리스가 15척, 아르카디아와 펠레네와 시퀴온이 10척, 메가라와 트로이젠과 에피다우로스와 헤르미오네가 10척, 도합 100척의 함선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겨울 동안 100척의 함선을 모아 봄이 오면 100척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아이가이온 바다에 띄워보이고, 아테나이로부터 벗어나려는 헬라스 도시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었습니다.

 

11.183. 용기와 희망을 걸고 에우보이아의 사절이 맨 처음 데칼레이아로 아기스를 찾아왔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오랫동안 에우보이아는 아테나이의 동맹이되어, 아테나이의 식량 기지로, 앗티케의 해안을 막는 방벽으로, 때때로 아테나이에 지원군을 보내는 우군으로 지냈는데,16 쉬라쿠사이 원정 실패로 아테나이가 자기들을 어찌해볼 엄두를 내지 못할 때 종속에서 벗어나고, 또 스파르테의 도움으로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튼튼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기스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갖추도록 지원하고, 혹시 아테나이의 공격이 있을 경우, 그들의 군대를 지휘하도록 스파르테에서 알카메네스와 멜란토스를 차출했고, 두 지휘관은 에우보이아로 가기 위해 300명의 스파르테 신시민17 부대를 데리고 아기스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이때 레스보스 섬에서도 아기스에게 사절을 보내 그들의 아테나이 이반에 대해 논의했고, 아기스는 보이오티아의 조언대로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아이가이온 바다 활동 거점이 될 레스보스 섬의 이탈을 돕기로 했고, 스파르테와 보이오티아가 각각 함선 10척씩을 그들에게 지원하겠다면서 에우보이아에 대한 개입은 뒤로 미루었고, 에우보이아로 보내려던  알카메네스를 레스보스 총독으로 삼아 신시민군 300명과 함선 20척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11.18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기스가 데켈리이아에서 에우보이아와 레스보스 사절들과 그들에 대한 지원을 임의로 결정하며 그의 위세를18 떨치고 있는 동안, 스파르테에도 모반을 꾀하는 아이가이온 바다의 섬들이나 아나톨리아 해안도시들에서 사절들이 찾아왔는데,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사절이 바로 이오니아 도시들19 가운데 키오스 섬과 바다 바로 건너 에뤼트라이의 사절들과 함께 서로 손을 잡고 찾아온20 페르시아의 뤼디아21 총독 팃사페르네스의 사절이었습니다. 칼리아스의 평화 이후 아이가이온 바다가 아테나이의 바다로 바뀌면서 아나톨리아 해안 헬라스 도시들에게서 세금 거두기가 어려워지자 페르시아의 총독들이 몇 차례 스파르테의 협력 요청에 응하여22, 혹은 아테나이와 직접 협상하여23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으나, 결과는 흐리멍덩해 거둘 게 없었는데, 아테나이의 쉬라쿠사이 원정 실패 소식에 이어 아이가이온 바다로 나오려는 스파르테의 움직임이 페르시아의 총독에게도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준 것 같았습니다. 사절을 통해 팃사페르네스는 아나톨리아 해안의 헬라스 도시들과 키오스 같은 인근 섬들의 아테나이 제국 이탈 반란에 펠로폰네소스의 개입을 촉구하고, 군량은 페르시아가 대겠다고 나섰는데, 이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사이, 페르시아의 폰토스 지역 총독 파르나바조스가 똑 같은 목적으로 그에게 의탁하고 있던 헬라스인 둘을 사절로 스파르테로 보내 헬레스폰토스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두 곳 사절들과는 각각 따로 논의하면서 스파르테 내부에서는 어느 쪽을 먼저 지원할 것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이다 알키비아데스까지24 낀 다수가 키오스 쪽으로 기울었고, 우선 키오스가 보유하고 있다는 함선 60척을 확인하여25 이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키오스, 그리고 에뤼트라이와 동맹을 맺고, 40척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파견키로 결의했습니다. 스파르테는 멜랑크리다스에게 자기들 함선 10척을 주어 파견하려 했으나 지진 등으로 늦어지자, 우선 칼키데우스를 파견하고 함선도 겨우 5척 꾸리는 동안 겨울이 깊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우리의 노련한 장군 넷, 그리고 그들과 함께 패배를 모르던 중무장보병들, 이들만큼 숙련된 배꾼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패배를 모르던 노꾼들과, 이 모두들 우리와 함께 아끼고 뻐기던 160척의 함선을 잃고, 그래서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꿔진 전쟁 열아홉 번째 해도26 모두가 입다물어 버려진 채석장의 수 천 아테나이군 포로들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억지로 가라앉았습니다.27 

 

11.18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겨우내 데켈레이아와 스파르테를 분주하게 드나들고 받아들이던 속사정이 봄이 되자 싹을 틔우고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스무 번째 해 봄, 아테나이에서는 이미 지난 가을 부터 민주정의 틀 위에 올라탄 10명의 원로회가 과두정의 과두 역활을 하며, 라코니케의 요새 같은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수송 안전을 위한 수리온 곶의 요새처럼 지킬 것은 반드시 지키면서, 도시의 당면한 재정 위기를 효율적으로 해결해 갔고, 선재를 구해 배를 고치고 새로 지어 해군의 활동을 정상화시키면서, 무엇보다 동맹도시들의 이탈에 대비하고 있었고,28 이에 반해 아테나이에 예속되면서 정체를 민주정으로 바꾸었던 도시들에서는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정권을 잡기 위해 반기를 들었던 여러 도시의 반민주정파가 다시 스파르테의 도움을 바라며 반아테나이 반민주정의 정변 계획을 은밀히 감추고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의지하는 스파르테에서는 군사 행위에 전권을 가진 데켈레이아의 아기스와 그가 없는 스파르테 지도자들 사이에 서로를 견제하는 암투의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스파르테 두 왕가의 시샘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스파르테 동등인이라는 절대적인 세력이 오랜 전쟁과 생활 관습으로29 줄어들자 권력 주도 세력과 전사들의 구성에 모타케스와30 네오다모데이스라는31 새로운 신분이 대두했고, 이들 없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들이 약진하자 동등인이 도태되면서 휘포메이오네스로32 전락하는 등, 스파르테는 전통적인 스파르테 시민, 페리오이코이, 헤일로타이라는 3가지 직분 구성에서 모타케스, 네오다모데스, 휘포메이오네스가 새로 분화되어 6가지 직분으로 바뀌어갔고, 불가능했던 신분의 이동이 전쟁 수행을 통해 얻은 역할과 부로 바뀔 수 있게 됨에 따라 신분을 달리 하려는 역동성에 못지 않게 달라진 신분들끼리 보이지 않는 긴장이 스파르테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어느새 헬라스의 자유를 외치던 스파르테를 전쟁을 통해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도록 바꾸어 놓고 있었고, 전쟁 속에 나타나는 이들끼리의 암투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이런 각 도시들의 변화 속에 헬라스 세상 전체를 말한다면, 그래서 아테나이 제국의 동맹도시들이 반란이라는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반면, 펠로폰네소스 동맹도시들 사이에는 허약해진 아테나이의 지상 영역을 차지하려는 보이오티아의 야망과, 마찬가지로 바다에서의 아테나이 역할을 대신하려는 코린토스의 야망이 내부 분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맹주 스파르테의 지위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헬라스 세상의 혼란스런 움직임을 더욱 뒤흔드는 틈입자가 있었는데 바로 페르시아였습니다. 수사의 페르시아 왕 다레이오스II가33 아나톨리아의 뤼디아 총독 핏수트네스가 헬라스 용병을 동원해 일으킨 반란34 진압과 처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나톨리아에서의 불안정한 왕권을 확립할 자금을 확보하려 관할지 조공 미납 문제를 해결하라 아나톨리아에 새로운 총독들을 뽑아 보내면서 다그치자, 조약을 핑계로 관할지에 쌓여 있던 미납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새로 부임한 총독들로서는 관할지의 헬라스 도시들 문제에 뛰어들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관할지의 헬라스 도시들에게서 페르시아가 받아야할 조공을 가로채던 아테나이의 위세가 꺾이는 놀라운 일이 생겼고, 그 바람에 관할지의 헬라스 도시들 안에 오랫동안 권력에서 소외되어 울분 속에 지내던 반민주정 반아테나이 세력들이 은밀하게 페르시아 총독들에게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조공의 대상이 바뀔 수 있으며, 그 열쇠를 스파르테가 쥐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고, 그래서 이들과 짬짜미해 함께 손잡고 지난 겨울 스파르테를 다녀왔고, 봄이 오자 이제 그들은 스파르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테나이가 어떻게 맞붙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켜보다 그들이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기초가 허물어진 아테나이의 해군력을 스파르테로 하여금 더욱 약화시키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 둘이 피 터지게 싸워 서로가 무너지게 하는 것, 그리고 덤으로 그 사이 사이에 정권을 잡으면 조공 미납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모반자들을 관할 헬라스 도시에서 집권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그림처럼 몰아가는 데 돈이 제법 들겠지만, 그래도 더 큰 돈을 위해 페르시아의 아나톨리아 총독들이 할 일은 오로지 스파르테를 움직이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총독들은 왕에 대한 충성을 놓고 서로 겨루면서 헬라스 세상을 더욱 갈갈이 찢어놓을 것이었습니다. 

 

11.186. 봄이 되어도 스파르테의 함선이 나타나지 않아 키오스의 음모자들은 일이 들통날까 독촉했고, 스파르테는 코린토스에게 빨리 배를 보내라 조르고, 아기스가 레스보스로 보낼 배도 붙들고, 다른 동맹들이 보낸 배까지 모두 39척을 봄이 한창이 되어서야 코린토스 만쪽 이스트모스에 모았으나,35 누가 보아도 레스보스와 키오스와 헬레스폰토스로 쪼개어 보내기엔 턱없이 부족하여 파견 순서를 조정하여 먼저 보내고, 다시 배가 모이면 이어서 보낼 수밖에 없어, 아기스 뜻을 감안하여36 동맹국들이 코린토스에 모여 순서와 규모와 지휘관을 정했습니다. 제일 먼저는 키오스로 칼키데우스를 지휘관으로 그가 직접 나서 이미 출항 준비를 마친 5척을 보내고, 다음은 레스보스로 아기스가 정한 알카메네스를 지휘관으로 21척을 보내고, 마지막은 헬레스폰토스인데 클레아르코스를 지휘관으로 필요한 함선이 모이는 대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끝 순번이 되자 파르나바조스의 사절들은 기다렸다 헬레스폰토스 지원 함대 편에 가기로 하면서, 준비해온 25탈란톤의 전비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지난 가을 이후 아테나이 해군의 움직임이 없었던 터라37 펠로폰네소스 지휘관들은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드러나게 출항 준비에 나섰는데, 그럼에도 아테나이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함선들을 두 번 나누어 옮기기로 하고, 먼저 21척을 지협 너머 켕크레이아 항으로38 옮겼습니다. 이러는 사이 이스트모스 경기 대회가 시작되었고,39 당연히 코린토스가 대회를 버려두고40 출항할 수 없다고 버티자, 아기스가 나서 대회는 대회대로 휴전 파기 없이 코린토스가 맡아 치르고, 함대는 자신이 맡아 출항하겠다 했으나, 코린토스는 말할 것도 없고 디른 동맹도시들까지 반대해 결국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전쟁 스무 번째 해 첫 출항이 이스트모스 경기 대회 뒤로 늦추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 키오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아테나이에 포착되었고, 이 모반 정보를 가지고 아테나이 장군 아리스토크라테스가 키오스로 가서 닥달했고, 부인하는 키오스에게 성실 증명으로41 동맹의 지원 할당에 맞춰 키오스 함선을 아테나이 함대에 합류시키라 했고, 대부분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42 누구는43 기대할 수 없는 스파르테 지원 때문에 음모를 감추느라 순순히 7척을 내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이스트모스 경기 대회에 참가한 선수단을 통해 키오스의 음모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된 아테나이는 켕크레이아 항의 함선들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대회가 끝나고 초여름이 되어서야 이들이 출항하자 아테나이도 쉬라쿠사이 원정 실패 후 근 열 달만에 그동안 정비한 함선들 가운데 14척, 그리고 키오스에서 볼모로 징발한 7척, 모두 21척으로 펠로폰네소스 함대와 같은 숫자의 함선을 동원해 모처럼 다시 전쟁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보자 바로 맞붙으며 난바다로 끌어내려 했으나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더는 멀리 나가지 않고 돌아서자 아테나이도 같이 출동한 키오스 함선 7척이 미심쩍어 그냥 물러섰습니다. 아테나이는 키오스를 빼고 다른 함선을 추가해 37척으로 다시 추적에 나섰고, 펠로폰네소스 함대 20척은 해안을 따라 항해하다 아테나이 함대에 막혀 함선 1척을 잃고 에페다우로스 접경의 코린토스 소유 스페이라이온44 항으로 달아나서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따라온 아테나이 함대는 마침 그곳이 외딴 항구라45 해안에 배를 대고 뭍에 올라 바다에서의 공격과 함께 물뭍에서 다부지게 싸웠고, 얼마 되지 않는 사상자만 내고도 스파르테의 알카메네스를 죽이고 대부분의 함선을 항해할 수 없도록 파괴하였습니다. 쉬라쿠사이 원정 실패 후 처음 거둔 이 첫 승리로46 아테나이는 바다에서 다시 이기기 시작했습니다. 

 

11.187. 소식을 들은 이웃 지역과 코린토스에서 증원군이 모여들자 아테나이는 항구를 봉쇄하기 충분한 함선만 남기고 나머지를 데리고 인근 섬에 정박하며 증원을 요청했고, 항구에 갇힌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당장 벗어날 방법이 없어 함선들을 불태워 없앨까 하다가 일단 뭍으로 올려놓고 지상군이 지키며 탈출의 기회를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아기스는 테르몬을47 보냈지만, 기병의 전갈로 알카메네스의 출발을 보고받고 칼키데우스와 함선 5척도 알키비아데스를 딸려 키오스로 보내려던 차에, 이어서 먼저 떠난 함대가 스페이라이온 항에 갇혔다는 사실을 들은 스파르테의 감독관들은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이오니아 첫 출동이 실패한 것에 기가 꺾여 스파르테 함선들을 보낼 생각을 접고, 이미 출항한 함선들도 철수토록 결정했습니다.

 

11.18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또 알키비아데스가 끼어들었습니다. 데켈레이아의 아기스가 비워놓은 왕비 티미이아의 침실을 알키비아데스가 차지해 아이까지 낳고 지냈는데,48 소문이 나자 아기스의 보복을 피해 달아나야 할 신세가 된 알키비아데스에게49 도망칠 곳은 이제 페르시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엔디오스의 힘을 빌려 스파르테와 이오니아와 페르시아의 협력을 주선한다는 역할을 내세워 칼키데우스의 키오스 행 함선 편으로 스파르테를 벗어나 이오니아로, 거기서 또 페르시아로 갈 예정이었는데 이 탈출 계획이 어긋나버린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테의 결정을 들은 알키비아데스는 엔디오스와 다른 에포로스들을 만나 스파르테는 키오스로 가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자기는 이오니아에서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키오스가 알카메네스와 그 함대 소식을 듣기 전에 가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들이 아테나이에 반기를 들도록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고, 엔디오스에게는 따로 이오니아의 아테나이 이탈과 페르시아와의 협력이라는 스파르테의 성공을 아기스에게 넘겨줄 거냐며 대놓고 아기스에 대한 견제와 경쟁심을 부추겼고, 엔디오스는 다른 에포로스들의 동의를 받아 칼키데우스의 키오스 출항을 결정했고, 알키비아데스는 아기스를 피해 마지막 남은 도피처로의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11.189. 라코니케에서 출발한 이들은 최대한 빨리 항해하며, 말이 새는 걸 막기 위해 정박지에서 만난 사람은 모두 잡아 배에 태워 같이 항해하다 이오니아의 코뤼코스 곶에 내려주었고, 그리고 키오스 모반자들을 따로 만남 다음 느닷없이 키오스에 나타났고, 모두가 놀란 가운데 과두정 지지자들이 회의를 소집했고, 칼키데우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스페이라이온 항에 갇힌 사실은 감춘 채, 더 많은 함선들이 오고 있다고 알렸습니다. 그러자 키오스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아테나이 동맹 이탈을 결의했고, 뒤이어 에뤼트라이가 따랐고, 그들 둘은 배 3척을 가지고 클라조메나이로 가서 그들도 동맹을 이탈토록 했습니다. 이들이 아테나이의 반격에 대비해 요새를 구축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이내 아테나이도 최대 동맹인 키오스가 이탈했으니 에뤼트라이와 클라조메나이 말고도 다른 동맹들이 계속 이탈할 것이 뻔한 이오니아 사정에 대비해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1천 탈란톤의 비상금까지 털어50 띄울 수 있는 함선들 모두 동원키로 결의하고, 우선 스페이라이온 항을 막고 있던 함선들 가운데 8척을 빼서 칼키데우스 추적에 실패하고 돌아와 있는 스트롬비키데스에게 주어 키오스로 보냈고, 이어서 이들의 지원군으로 12척을 더 빼내어 트라쉬클레스에게 주어키오스로 보낼 준비를 하면서, 볼모로 잡은 키오스 7척에 있던 노예들은 자유민으로 풀어주고 키오스 자유민은 모두 가두었고, 따로 10척에 선원들을 태워 지금까지 빼낸 함선들 대신 봉쇄를 맡게 하는 등, 키오스를 다시 동맹으로 돌릴 일에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1.190. 키오스로 가기 전에 먼저 사모스 섬으로 간 스트롬비키데스는 그곳 함선 1척을 합류시켜 테오스로 갔고, 테오스 사람들에게 이탈 말라 경고하고 있다가, 칼키데우스가 키오스 함대와 연합해 27척의 함선과 해안을 따라 행군하는 에뤼트라이와 클라조메네스 보병부대 그리고 팃사페르네스가 보낸 스타게스 휘하의 보병을 이끌고 테오스로 오고 있는 걸 알고 난바다로 달아나다 추격을 받으며 사모스로 갔습니다. 아테나이가 달아나자 그제서야 테오스 사람들이 보병부대를 도시로 받아들였고, 추격에 나선 칼키데우스를 기다리다 육지로 향해 세운 방벽들을 허물었는데,51 스타게스의 보병들도 힘을 보탰습니다. 한편 스트롬비키데스를 사모스 섬에 묶어둔 칼키데우스와 알키비아데스는 그들과 함께온 선원들을 무장시켜 키오스에 남겨두고, 대신 키오스 사람들에게 배를 맡기면서 이들과 함께 키오스 함선 20척을 더해 밀레토스를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담 시키려 그곳으로 갔습니다. 스트롬비키데스 역시 밀레토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자신 휘하의 7척과 방금 도착한 트라쉬클레스의 12척을 이끌고 밀레토스로 갔으나 한발 늦었고, 이미 이탈을 결정한 밀레토스가 입항을 거부하자 마주보는 섬 라데에52 머무르며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밀레토스를 이탈시킨 칼키데우스는 팃사페르네스를 만나 스파르테와 페르시아 간의 첫 번째 동맹조약을 맺었는데, 아나톨리아에 대한 페르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페르시아와 스파르테 및 그 동맹들은 공동으로, 이 지역에서 아테나이가 돈과 재물을 거두지 못하도록 막고, 모두가 찬성하지 않는 한 종전 없이 아테나이와의 전쟁을 수행하며, 서로의 관할에서 이탈하는 도시들을 서로의 적으로 간주한다는 조건들이었습니다.53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 동맹 와해와 페르시아와의 동맹 체결로 스파르테와 페르시아 모두에게 자신의 가치를 각인시켜갔습니다. 밀레토스 소식을 듣고 키오스가 10척의 함선을 이끌고 아나이아와 그 인근 도시들의 이탈을 독려하기 위해 나섰고, 카리아의 반군 아모르게스 군대가 움직였으니 돌아가라는 칼키데우스의 전갈을 받고 디오스 히에론으로 이동하던 중 아테나이의 트라쉬클레스 함선들과 동맹 이탈의 불길을 잡기 위해 새로 합류하는 디오메돈의 16척과 마주쳐 1척은 에페소스로 나머지는 도망치다 4척의 함선을 버리고 테오스로 갔고,54 아테나이 함선들이 사모스로 돌아가자, 다시 모여 레베도스와 하이라이를 이탈토록 한 뒤 키오스로 돌아갔습니다. 모두가 테오스를 떠난 뒤 페르시아의 팃사페르네스가 직접 테오스로 가서 스타게스가 허물다 만 요새들을 완전히 허문 다음 돌아갔고, 이들이 돌아간 뒤 이번에는 아테나이의 디오메돈이 10척의 함선으로 찾아와 테오스가 펠로폰네소스와 같은 조건으로 아테나이도 받아들이도록 협정을 맺었고, 해안을 따라 하이라이로 갔으나 함락에 실패하고 돌아갔습니다. 이오니아의 많은 도시들이 스스로 아테나이의 굴레를 벗어버리는 동안, 아테나이 함대가 마치 그들의 기지나 되는 것처럼 드나드는 사모스 섬에서는 아테나이의 도움을 받으며55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정변을 일으켰는데, 민중들이 섬의 지배층 200여명을 죽이고 400여명을 추방 한 뒤 그들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는 일을 벌이자, 아테나이는 이들을 믿음직하게 여겨 독립을 보장하겠다며 정치 개혁을 계속하도록 부추겼고, 이 이후 이들이 도시 일을 도맡아보면서, 그 이전 지주들을 도시 일과 단절시키고,56 민중들이 그들 집안과 혼인하는 것까지 금지시켰습니다. 이렇게 민중들이 내부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자발적으로 굳건한 동맹이 된 사모스는 아테나이에게 제국 복구의 희망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모스가 이어주는 아테나이의 제국 수호 희망을 꺾어버리려는 스파르테와, 이미 아테나이에서 벗어난 이오니아 도시들, 특히 아테나이의 반격을 막기 위해 더 많은 이탈자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뭉쳐 막으려는 키오스의 열정적인 움직임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펠로폰네소스에서는 칼키데우스가 키오스에 도착할 즈음 시켈리아에서 귈립포스를 돕던 펠로폰네소스 함대 16척이 귀로에 올랐고, 레우카스 앞바다에서 아테나이의 힙포클레스가 이끄는 27척에게 기습당해 1척만 잃고 나머지는 코린토스에 무사히 도착한 일이 있었고, 칼키데우스가 페르시아와 동맹조약을 체결했을 즈음에는 스페리라이온 항에 갇혀지내던 펠로폰네소스 함선 20척이 갑작스레 항구 밖으로 나와 감시하던 아테나이 함선들과 해전을 벌여 물리치고, 아테나이 함선 4척을 나포해 켕크레이아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는데, 이제 다시 모이게 된 그들은 그곳에서 기다리는 새로운 해군 지휘관 아스튀오코스와 함께 키오스와 이오니아로 갈 것이었습니다.

 

11.19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펠레폰네소스야 그렇다 쳐도 키오스의 반反 아테나이 움직임은 정말 열정적이었습니다.57 물론 아테나이의 앙갚음이 두려웠기 때문이었겠지요. 두 쪽 해군의 나서 붙은 몇 번의 싸움으로 키오스는 아테나이 해군이 아직도 펠로폰네소스를 쉽게 누를 만큼 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파르테가 맺은 페르시아와의 동맹이 그저 새로운 굴레일 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아테나이로부터의 반격으로부터 그들만으로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키오스는 그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이오니아는 물론 헬레스폰토스에 이르기까지 아나톨리아의 헬라스 도시들더 많은 이탈자가 나오고, 이탈자들끼리 뭉치고, 뭉친 그들이 스파르테와 페르시아를 도와 아테나이를 꺾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파르테와 페르시아의 굴레는 그 다음 생각할 문제였겠고요. 그런데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우리가 아는 키오스가, 아테나이에 대한 의심없는 충성으로 독립된 함대를 가지고 자주권을 행사하던 키오스가, 무엇 때문에 우리로부터 떨어져나간다 결심했을까요? 단지 우리가 쉬라쿠사이 원정에 실패해서 곧 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냥 망하길 기다리기만하면 자연스레 떨어져나가게 될 텐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탈을 감행하고, 나가서도 반 아테나이 행동에 왜 그리 적극적이었을까요?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아테나이가 키오스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58 우리는 사모스의 반란을 겪고나서 키오스 너만은 하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할 때 반드시 키오스를 위해서도 신께 기도드렸습니다.59 물론 키오스도 다른 도시들처럼 아테나이 사람을 죽인 일 때문에 벌금을 내기도 했지만,60 그들이 보여온 아테나이에 대한 충성은 우리의 특별한 대접을 받을 만했지요. 키오스가 아테나이의 충성스런 동맹으로서 기여한 바를 어찌 다 꼽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쉬라쿠사이 원정에서 그들이 보인 정성은 다른 도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지요. 아테나이가 시켈리아에 165척의61 함선을 보낼 때 키오스는 레스보스와 함께 50척을62 보냈습니다. 물론 레스보스는 소극적이었지만 키오스는 적극적이었고, 도시의 크기로 볼 때, 50척을 보낸 키오스와 레스보스는 아테나이보다 더 많은 함선과 군대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습니다. 그런 키오스와 레스보스가 시켈리아 원정 실패로 겪어야 했던 고통 역시 아테나이보다 더 컸을 것이지만 우리 아테나이는 그들의 고통에 대해 작은 보상이라도 보내기는커녕 어떤 위로도 전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이탈을 염려하여 불쾌한 감시의 눈길만 보냈을 뿐이었습니다. 살아서 돌아온 원정군들의 아테나이에 대한 비판은 원정 내내 아테나이가 보였던 승리에 대한 근거 없는 오만과 그 오만이 낳은 해이와 나태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런 비판과 울분이 키오스와 레스보스 섬 전체를 움직여 더 이상 아테나이를 동맹의 맹주로 믿을 수 없고, 따라서 아테나이의 동맹이 되어 함께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우리 아테나이는 원정 실패로 함선과 군대와 돈만 잃은 것이 아니라, 아테나이의 가장 충실했던 두 동맹 도시들의 믿음도 잃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키오스는 아직 반 아테나이 행동에 소극적인 레스보스를 움직이기 위해 레스보스로 갔고, 아테나이는 이제 페르시아를 낀 펠로폰네소스에 더해 이오니아의 두 강자 키오스와 레스보스도 적으로 상대해야 할 것이었고, 이제 헬라스의 내전은 아이가이온 바다 저쪽 이오니아에서의 내전으로63 바뀌어 갈 것이었습니다.

 

11.19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해 여름 키오스가 13척의 그들 함선을 내놓으며 뮈틸레네와 메튐나의 아테나이 동맹 이탈을 독려하기 위해 레스보스로 간 것은 그들이 이미 스파르테의 전략, 즉 이오니아를 우군으로 끌어온 다음 레스보스를 거쳐 헬레스폰토스 도시들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인다는 계획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키오스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테오스에서 돌아와 머물던 펠로폰네소스 군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스파르테의 에우알라스는 펠로폰네소스와 인근 도시들 보병부대를 이끌고 해안을 따라 클라조메니아를 거쳐 퀴메를 향해 북상했고, 스파르테의 페리오이코스 출신 데이니아다스는 13척의 키오스 함대를 지휘해 곧장 레스보스의 메튐나로 가서 도시를 아테나이로부터 떼어낸 후, 함선 4척을 남겨두고 뮈틸레네로 가서 그곳 역시 아테나이로부터 이탈토록 했습니다. 이렇게 키오스의 주도로 스파르테의 선발대가 활동 범위를 넓혀가는 동안 스파르테의 제독 아스튀오코스도 4척의 함선으로 라코니케의 켕크레이아 항을 떠나 키오스에 도착해 선발대 지원에 나설 참이었지요. 레스보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테나이는  25척의 함선을 주어 디오메돈과 레온을 보냈고, 이들은 아스튀오코스가 키오스에 도착한 사흘 뒤에 바로 레스보스로 가서 경고도 없이 항구로 바로 들어가 단숨에 뮈틸레네를 점거해 버렸고, 스파르테가 뮈틸레네를 돕기 위해 남겼던 4척 가운데 3척만 탈출해 섬 서쪽 에레소스로 도망했는데, 마침 거기에는 전날 저녁에 키오스 함선 1척을 보태 5척을 이끌고 레스보스로 가다 퓌르라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에레소스에 도착해 있던 아스튀오코스를 만났고, 이들은 우선 에레소스를 아테나이로부터 떼어낸 다음 메튐나가 아테나이에 반기를 든 걸 후회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도록 자신이 데려온 군대를 에테오니코스에 맡겨 해안을 따라 안팃사를 거쳐 메튐나로 진군시키는 한편, 자신은 도망친 키오스 함선 3척까지 더해 모두 8척으로 바닷길로 메튐나로 갔습니다. 그러나 얼마 움직이지 않아 레스보스의 아테나이 군세를 자신의 군세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아스튀오코스는 에테오니코스의 지상군을 다시 배에 태우고 키오스로 돌아가면서 거기서 헬레스폰토스로 가려고 소집했던 인근의 동맹들 군대도 모두 귀향시켰습니다. 뒤따라 켕크레이아 항을 출발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함선 6척도 키오스에 도착해 합류했지만 아스튀오코스로서는 아테나이 함대의 움직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요. 맥을 놓고 아무 저항 없이 아테나이를 받아들이는 레스보스의 도시들을 보면 정녕 그들이 아테나이로부터 해방되어 도시의 자유를 찾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반기를 들었는지, 그보다는 쉬라쿠사이 전멸 이후의 아테나이가 과연 예전처럼 종속의 대가로 그들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와 때 맞춰 나타난 키오스의 부추김과 헬레스폰토스 진출 이득에 관한 감언에 넘어간 것 아닌지 회의가 들자, 전체 이오니아에서의 군세도 아테나이에 비해 턱없이 약세인데다 키오스 이외에는 뚜렷이 도움을 받을 곳 없는 그의 처지가 보였고, 따라서 그의 군사행동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더구나 스파르테는 여전히 해전에 조금도 익숙하지 않았지요. 아테나이가 없다 해도 스파르테가 아이가이온 바다 동쪽에서 위세를 보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이는데, 죽은 것 아닌가 싶던 아테나이가 25척의 함선으로 나타나자마자 레스보스 섬 전체가 한 순간에 넘어가는 걸 본 아스튀오코스는 언제건 레스보스 꼴이 날 키오스보다 급할 때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활로를 열 수 있는 에뤼트라이에서64 여름 날 생각을 굳혔습니다.

 

11.193. 전쟁 스무 해째 여름이 되자, 라데 섬을 거점으로 밀레토스를 봉쇄하고 있던 20척의 아테나이 함선들이 밀레토스의 파노르모스 항에 상륙해 저지에 나선 스파르테의 칼키데우스를 죽이고 사흘이나 분탕질한 일이 있었는데, 정작 아테나이군의 본격적인 공격과 약탈은 키오스 섬에서 벌어졌습니다. 레스보스에서는 잠시 클라조메나이로 가 그곳을 회복하고 돌아온 레온과 디오메돈도 여름이 되자 레스보스를 본거지로 삼고, 키오스 인근의 섬들과65 아테나이가 에뤼트라이 땅에 가지고 있던 요새들을66 전진기지로 삼아 본격적인 키오스 공략에 나섰습니다. 키오스 섬 북서 해안에 상륙한 아테나이군은 출동한 키오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격퇴한 뒤 인근을 유린했고, 다음은 섬 남단 파나이Phanai로 들어갔을 때도, 그 다음 레우코니온에서도 아테나이군은 저지하려는 키오스군을 크게 제압하고 지역을 약탈했는데, 세 번 모두 패한 키오스군이 더 이상 아테나이군의 침공에 대응하지 않자 약탈과 유린은 섬 전체에 넓게 자행되었고, 험악스런 페르시아로부터도 약탈당한 경험이 없었던 그리고 번영 속에 절제를 잃지 않고 안정된 체제를 유지해 이오니아의 스파르테라 불리던67, 키오스 사람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습니다.키오스를 다시 아테나이로 넘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집권 세력은 아스튀오코스와 그의 배 4척을 불러들여 복고 음모를 막아보려 했습니다. 이렇듯 스파르테의 무능이 이탈한 도시 안에서 복고의 움직임을 방치하는 사이, 아테나이는 여름 동안 지속된 공세를 굳히기 위해 여름이 끝날 무렵 아테나이 중무장보병 1,000명에 아테나이가 무구를 지급해 중무장 보병이 된 아르고스군 500명과 동맹도시들에서 차출한 1,000명을 더한 증원군 2,500명을 수송선을 포함한 48척의 함선에 태워 프뤼니코스, 오노마클레스, 스키로니데스의 지휘 아래 이오니아로 보냈는데, 이들이 사모스를 거쳐 밀레토스로 가서 진을 치자, 밀레토스는 그들의 중무장보병 800명과 칼키데우스와 함께 온 펠로폰네소스군 그리고 페르시아의 팃사페르네스가 직접 이끈 기병과 용병을 연합해 이미 칼키데우스와 떨어져 페르시아에 붙은 알키비아데스를 앞세워68 전투를 벌였고, 밀레토스군을 상대한 아르고스는 패하고 펠로폰네소스군을 상대한 아테나이군이 이겨69 일진일퇴 끝에 밀레토스 연합군이 성벽 안으로 물러갔고, 아테나이는 밀레토스의 이탈을 무산시키고 나머지 반란 도시들까지 돌아서게 할 참으로 성벽까지 진출하여 방벽을 쌓으려 나섰습니다. 그런데 오후 늦게 이들에게  들린 소식은, 아테나이를 끝장내겠다며 시켈리아 함선 20척과 셀리누스의 2척을 더해 22척으로 펠로폰네소스동맹 지원에 나선 시켈리아의 헤르모크라테스 선단과 드디어 의장을 마친 펠로폰네소스 함선 33척을 아스튀오코스에게 넘겨주기 위해 스파르테의 테리메네스가 이끈 선단, 두 선단의 함선 55척이 밀레토스에 당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두 선단은 밀레토스 앞바다의 레로스 섬에서 아테나이군이 밀레토스 성벽에 있음을 알고, 상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아소스 만으로 가서 밀레토스 관할의 테이키웃사에 상륙해 진을 쳤고, 찾아온 알키비아데스로부터 전황을 파악한 뒤 알키비아데스 조언대로 아테나이군의 밀레토스 봉쇄를 막기 위해 이튿날 아침 출정하기로 했습니다. 한편 레로스 섬에 도착한 두 선단의 규모를 확인한 아테나이군에서는 바다에서의 일전을 고집하는 장군들을 프뤼니코스가 애써 설득하고 있었는데, 프뤼니코스로서는 시켈리아 원정 실패로 도시가 재앙에 눌리어 정녕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공세를 자제해야 마땅한데, 지금은 시켈리아와 펠로폰네소스 연합 함대의 전투 수행 능력을 파악하지 못한 데다 만의 하나 섯부른 일전의 패전이 가져올 감당하기 어려울 도시의 위기를 감안하면 그냥 조용히 물러서서 충분한 군세를 갖춘 다음 유리한 장소와 시간을 택해 일전을 벌여 이기면 된다고 결론 내고, 약탈품은 버리고 장비와 부상자들을 모두 태워 해가 지자마자 밀레토스를 떠나 곧바로 사모스로 갔고,70 대원 300여명을 잃고도 변변한 복수전 한번 치르지 못해 분한 아르고스는 그대로 사모스에서 귀국했습니다. 프뤼니코스는 소신대로 펠로폰네소스와 시켈리아의 연합함대와의 일전을 미루고 사모스로 돌아와 함선을 정비하며 늦어도 겨울까지는 도착할 증원군을 기다릴 것이었습니다.71

 

11.194. 한편, 테리메네스와 헤르모크라테스의 선단들은 이튿날 새벽 테이키웃사를 떠나 간밤에 철수해 아테나이 함대가 없는 밀레토스에 도착해 하루를 지내며 밀레토스 항에 피해 있던 칼키데스와 그의 군대, 그리고 키오스 함선들과 합류한 다음, 두고온 장비를 챙기기 위해 다시 테이키웃사로 돌아갔는데, 이때 팃사페르나스가 보병부대를 대동하고 찾아와 모반자 아모르게스가 차지한 이아소스를 점령할 것을 요청하자 밀레토스로 가는 김에 곧바로 기습에 나섰고, 아테나이 함대라 착각한 이아소스를 단숨에 점령한 뒤 아모르게스를 잡아 팃사페르네스에게 처분을 넘기면서 그의 용병들에 대해서는 주로 펠로폰네소스 출신들이라 해치지 않고 모두 펠로폰네소스군으로 편입시켰고, 이아소스에 대해서는 재물은 약탈하여 가지면서 주민은 포로 시민 노예 구분 없이 한 사람에 금화 1다레이코스 스타테르72를 받고 팃사페르네스에게 넘겨준 후 밀레토스로 돌아갔습니다. 여름이 다 가도록 스파르테는 페다리토스를 키오스 총독으로 삼아 아모르게스의 용병 출신 펠로폰네소스군을 붙여 육로로 부임케 주선했고, 밀레토스에는 필립포스를 총독으로 앉히는 등 이오니아를 안정시켜갔고, 팃사페르네스 역시 이아소스에 수비대를 배치하며 도시를 확실히 제압한 뒤, 겨울이 되어 밀레토스로 가서 펠로폰네소스와 시켈리아 선단에 대한 비용을 정산했는데, 스파르테에 갔을 때 자신이 약속한 대로 한 달치로 노꾼 1명 1드라크메로 차후 비용은 페르시아 왕의 허락이 있기까지 1명 1/2드라크메를 지급하겠다고 하자, 스파르테는 제독 아스튀오코스가 없어 테리메네스가 엉거주춤하는 사이 헤르모크라테스가 강력히 항의해 60척 분으로 간주 30탈란톤을 지급하고73 나머지는 왕의 허락을 받아 지급하며 함선이 늘 경우 같은 비율로 정산키로 결론내어 당장의 두 선단 운용 비용 문제를 매듭지었습니다. 틀림없이 팃사페르네스는 헬라스 사람들의 이아소스 점령과 약탈로 얻은 소득이 적지 않아 배가 좀 아파서 왕 핑계를 대고 비용을 깎으려 했겠지요. 스파르테를 돈으로 묶어두려는 팃사페르네스의 인색한 전비 부담 태도는 스파르테가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아테나이를 능가하는 해군력을 갖추는 데 큰 장애가 될 것이었지만 페르시아의 아나톨리아 지방 총독들은 아테나이와 스파르테가 서로 싸워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약한 쪽을 지원하며 느긋하게 기다릴 것이었습니다.

 

11.19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놀랍게도 우리 아테나이는 시켈리아 원정 실패 후 단 두 해만에 아이가이온 바다의 함대를 복원시켰는데, 전쟁 스무 번째 해 겨울 밀레토스 점령을 포기하고 사모스에서 은인자중하던 프뤼니코스에게 35척의 함선과 장군 카르미노스, 스트롬비키데스, 에우크테몬을 증원하면서 아이가이온에서의 아테나이 함대는 여섯 명의 장군이 109척의 삼단노선으로 이오니아에서의 반란 진압과 스파르테와 페르시아 연합군의 도발을 응징해 나갈 것이었습니다. 필요한 전력을 갖춘 프뤼니코스는 계속 사모스에 주둔하며 바다에서 밀레토스를 봉쇄하고, 스트롬비키데스와 2명의 장군들에게 35척과 중무장보병 1,000명 가운데 일부를 태운 수송선을 주어 키오스에 보냈습니다. 한편 심상찮은 키오스 내부 움직임을 인질로 막으려 키오스로 돌아간 스파르테의 아스튀오코스는 테리메네스의 도착과 밀레토스 확보 소식에 자신의 배 10척과 키오스의 10척으로 프텔레온과 클라조메나이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는데, 성벽 없는 클라조메나이를 공격하다 강풍으로 표류해 포카이아와 퀴메로 갔고, 다시 반기를 들겠다며 거기로 온 레스보스 사절의 제안을 코린토스 등이 반대해 레스보스로 가지 않고 강풍에 흩어졌던 함대가 다시 모이는 대로 키오스로 돌아갔으나 레스보스가 키오스에까지 사람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자, 마침 밀레토스에서 해안 육로로 움직여 에뤼트라이를 거쳐 키오스로 넘어와 있던 페다리토스에게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테나이에 해를 입힐 것이라며 레스보스로 가서 도우라고 했지만 페다리토스의 거친 반대에74 부딪쳐 별수 없이75 자신의 함대를76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함대 사령관에 부임하기 위해 쉬라쿠사이 함대와 펠로폰네스 함대가 모여 있는 밀레토스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는 길에 아스튀오코스는 코뤼코스 곶에 상륙해 야영했는데, 마침 키오스를 치러 가는 아테나이 함대와 보병들도 언덕 반대 편에 올라 야영했고, 다행히 야영 중에 페다리토스로부터 에뤼트라이의 모반 음모77 서찰을 받은 아스튀오코스가 급히 에뤼트라이로 회항하는 바람에 아테나이 함대와의 조우를 피해 무사히 밀레토스로 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쿠뤼코스 곶을 출발한 아테나이 함대는 아르기노스에서 키오스 전함 3척을 보고 뒤쫓다 강풍을 만나 3척이 난파되어 키오스 섬으로 밀려가 선원들이 생포되거나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는 인근 포이니쿠스에 피항했습니다. 이렇게 좁은 이오니아 해안에서 아스튀오코스와 프뤼니코스의 함선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스파르테는 힙포크라테스가 장군 3명과 함께 투리오이의 10척과 라코니케의 1척 그리고 쉬라쿠사이의 1척 등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크니도스에 도착했고, 밀레토스의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지휘에 따라 6척은 크니도스 방어 투입하고 나머지 6척은 크니도스 반도 끝의 트리오피온 곶에서 아이귑토스에서 오는 상선들을 나포토록 배치했는데, 이를 본 사모스의 아테나이 함대가 출동해 먼저 트리오피온 곶을 덮쳐 선원들이 도망친 6척을 나포한 다음 크니도스로 쳐들어가 성벽이 없는 도시를 함락 직전까지 공격했고, 이튿날 다시 공격했으나 밤사이 방비를 튼튼히한 주민들과 트리오피온 곶에서 도망친 선원들이 합류하여 막고 나서자 도시 외곽 약탈로 만족하고 사모스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동안 밀레토스에 도착한 아스튀오코스는 페르시아의 펠로폰네소스 함대에 대한 보급이나 지원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팃사페르네스와 칼키데우스 사이의 협정이 페르시아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는 이유로 내용을 고쳐야 한다고 나서 테리메네스의 귀국 전에 두 번째 협정을 맺었지만, 그 내용은 앞선 협정에 비해 사실 큰 진전이 없었는데, 이는 틀림없이 칼키데우스가 뜻밖의 기습으로 전사한 다음 더 이상 스파르테에 기댈 수 없어 팃사페르나스에게 의탁하고 있는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를 위해 보인 실력 탓이 컸을 것입니다.78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테의 지휘관들은 아나톨리아에 있는 페르시아 왕의 대리인들이 언제든지 왕을 핑계로 보급과 지원을 지렛대 삼아 그들을 옭아맬 것에 대한 염려를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테리메네스는 또 한번의 협정 개정을 뒤로 미루고 자신이 끌고온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아스튀오코스에게 넘기고 귀국 길에 올랐습니다79 

 

11.196. 이테나이 시민 여러분, 레스보스의 이반을 잠 재운 스트롬비키데스의 아테나이군은 키오스마져 진압하기 위해 키오스로 집결하여 곧바로 키오스 섬 주변 바다에서의 우위를 확보한 다음, 섬에 올라 키오스에서 멀지 않아 동정을 살피며 무력시위도 하기 쉽고 출입하기도 좋은 항구로 쓸 수 있는 델피니온Delphinion에 요새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키오스는 아테나이군에 대응하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쉽게 무너진 레스보스섬의 도시들이 보인 굴욕과, 그 과정에 참전하여 벌어진 수차례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전의를 잃은 데다가, 이에 더해 일어난 키오스 내부의 반목을 스파르테의 페다리토스가 키오스 총독 자격으로 데려온 이아소스 점령 당시 아모르게스의 용병들을 동원해 반목의 근원인 친아테나이 정파 지도자 튀데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처형하고, 키오스 과두정 정파들은 그들대로 주민을 심하게 억압하며 단속하느라 아테나이군의 움직임에 대해 대응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가진 아모르게스의 용병으로는 도저히 아테나이군을 막을 수 없는 페다리토스로서는 밀레토스의 아스튀오코스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지원을 한답시고 아무런 대책 없이 밀레토스를 텅텅 비워둔 채 자신이 가진 90척의 함선으로 74척의 함선을 사모스에 대기시키면서 27척으로 키오스를 포위하고 있는 100여척의 아테나이 함대에게 대어들 엄두를 낼 수 없는 아스튀오코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지원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급한 페다리토스는 스파르테에 아스튀오코스를 탄핵했고, 사모스의 프뤼니코스는 펠레폰네소스 함대를 견제하기 위해 몇 번 밀레토스로 출동했으나 응전해오지 않자 사모스에서 관망하기로 했지요. 이렇게 아스튀오코스와 프뤼니코스가 서로 움직이지 않는 동안에, 아테나이의 스트롬비키데스는 델피니온 요새를 마치 아테나이를 괴롭히는 아기스의 데켈레아 요새처럼 운용하면서 키오스를 옭죄어 점령의 때를 기다릴 것이었고, 아테나이 제국을 허물 헬라스의 해방자로 자임하는 스파르테의 도움으로 아테나이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주적이고 독립된 도시가 가지는 자유로 스스로 번영을 이루고 싶었던 키오스는 바다에선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끝까지 함께하지 않을 수 없는 스파르테의 구원을 기대하며 봉쇄된 도시의 배고픈 겨울을 견뎌가야 할 것이었습니다.

 

11.19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의 각축 속에 오래 아테나이의 동맹이 되어 때로는 전리품을 챙기기도 하고 때로는 함선과 선원과 병사들을 잃기도 하면서 점점 동맹이 아니라 아테나이에 예속된 도시로 전락해갔던 키오스는[각주:1], 시켈리아 원정 이후 급격한 아테나이의 국력 쇠퇴를 틈타 헬라스 해방을 들고 나선 스파르테의 지원을 기대하며 아테나이에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테나이와의 동맹에서 탈퇴하고 도시의 자유를 되찾으려 분투했지만, 망했다 생각했던 아테나이의 분전은 의외로 강력했던 반면 믿었던 스파르테는 바다에서 또 의외로 속빈 보릿대 같아 함께 도시의 자유를 위해 이탈했던 레스보스의 도시들이 키오스와 스파르테의 도움에도 속절없이 무너지며 도로 아테나이에 예속되는 걸 지켜보아야 했던 데다가, 레스보스의 도시들에서 그랬듯 키오스 내부에서마져 도시의 자유를 버리고 차라리 아테나이로 예속되는 것이 도시와 도시민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할 것이라며 아테나이에 투항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까지 지켜보아야 하면서, 점점 암울해지는 도시의 자유와 점점 더해지는 추위와 배고픔과 점점 더 길어지는 겨울로[각주:2] 점점 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겨울은 비단 키오스 사람들뿐만 아니라 밀레토스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나 사모스의 아테나이 함대에게도 춥고 배 고프고 길었는데, 그들 모두 오랜 전쟁으로 서로를 때로는 스스로를 해치고 망가뜨려 모두가 지칠 대로 지치고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그 겨울이 가고 새봄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에게 그 봄은 도시와 도시민의 자유라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아주 잔인한 계절이 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1. 에피폴라이 채석장에 갇혀 노역하던 7,000여명의 아테나이 동맹군 포로들은 열악한 환경과 급식으로 계속 죽어나갔는데(투.펠.VII.87.2), 70일 뒤부터 산 사람 중에 쉬라쿠사이에 덜 위험하다고 판단된 사람부터 우선 노예로 팔기 시작했고(투.펠.VII.87.3), 나머지 가장 위험한 아테나이 병사들은 8개월이나 갇혀 지내면서 병들어 죽거나 노예로 팔렸는데(투.펠.VII.투.펠.87.2), 이들은 이마에 말horse 낙인이 찍혀 팔렸다(플.니키아스.29.1). 노예로 팔린 아테나이 병사들 가운데 더러는 품행이 방정하다는 이유로, 또는 단지 에우리피데스의 시가poetry를 옮겨 쓸 수 있다는 이유로 주인이 방면해 주기도 했다(플.니키아스.29.2). [본문으로]
  2. 아테나이로 이송되어 포로라기보다 인질로 잡혀 있던 스팍테리아 섬의 스파르테 포로는 스파르테 동등인 120명, 다른 펠로폰네소스 도시 병사 172명 도합 292명이었다.(투.펠.IV.38.4) 이들은 스파르테와 알키비아데스 같은 현지 스파르테 영사의 관심 속에 갇혀지내다 평화조약 체결 후 풀려났는데, 이들의 석방이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와 30년 평화조약을 맺는 이유 중에 중요한 하나였다. [본문으로]
  3. 투퀴디데스는 전쟁을 치르는 아테나이의 민주정 정체의 비효율성에 부정적이었으나(펠.VIII.1.4),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희극 전편을 통해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본문으로]
  4. 카리티미데스Charitimides 휘하의 250척의 함선과 40,000명 이상이 이집트 나일 강변의 멘데사에서 페르시아의 메가바조스의 포위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상세한 내용은 이 글 '도시의 자유(1)',11.85 ' 참조. [본문으로]
  5. 아테나이로부터 '함선을 할당받은 부자trierarchia'들은 선장을 따로 두거나 직접 선장으로 함선을 운용했는데, 운용비는 주로 전리품이나 상업적 운용으로 충당해 왔으나, 벌이가 수월치 않아 함선 맡기를 꺼려하자 '함선을 부자 둘에게 맡겨syntrierarchia' 모자라는 운용비를 충당케한 것이다. [본문으로]
  6. 본디 아르콘은 각 부족에서 돌아가며 한 번씩 추첨으로 뽑히는 임기 일년 단임이어서 능력이나 경력 자체가 크게 중시되지 않았지만, 장군은 부족에 1명씩 뽑는 임기 일년의 선출직이고, 연임의 제한이 없고, 전시에 행정권까지 가지는 막중한 위치여서, 능력과 경력 그리고 민중의 신임도가 매우 중요했음에도, 원정 실패 당시 남은 6명의 장군들 중 4명이 전투 경험이 없었다. [본문으로]
  7. probouloi, 각 부족에서 40세 이상 남자 가운데 1명씩 뽑아 10명으로 구성했는데, 원로회는 임기나 권한과 임무가 정해져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장군이나 아르콘들보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8. 아테나이의 쉬라쿠사이 원정군이 잃은 216척의 함선 가운데 160척이 아테나이 함선이고, 나머지는 키로스 등 동맹도시에서 차출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아테나이가 잃은 자원을 추정하면, 먼저 비용으로 척당 1개월 1탈란톤 160척 36개월 5,000여탈란톤이 들었고, 인원은 중무장보병 척당 20명 3,000여명, 선원 척당 20명 3,000여명, 노꾼 척당 150명 24,000여명(1/3은 아테나이의 테테스, 1/3 아테나이 거주 재외인, 1/3은 용역꾼으로 볼 수 있다), 총 30,000여명이고, 그밖에 용병 비용, 용역 비용, 각종 장비, 선구들이었다. [본문으로]
  9. 쉬라쿠사이 원정 실패 후의 투퀴디데스 기록(펠.VIII.1-109;전쟁 열아홉 번째 해 BC423 가을부터 (그의 기록 마지막인) 전쟁 스무한 번째 해BC411 겨울까지)을 종합하면, 가용 자금으로 비상금 1,000탈란톤, 가용 현금 500탈란톤 정도에, 아테나이와 동맹도시들에 드나드는 교역품에 매긴 5%의 관세 수입이 있었고, 가용 함선은 수리가 필요한 함선을 포함하여 100여척이 있었으며, 가용 인원은 중무장보병이 전체 징집 연령(20세-50세, 그 상하는 예비역으로 자체방어 병력)에 걸쳐 9,000명 남짓, 선원이나 노꾼으로는 테테스 10,000여명과 거류외인 3,000여명 정도였다 [본문으로]
  10. 그나마 꼽을 수 있다면 아테나이의 동맹인 아르고스, 펠로폰네소스 동맹인 코린토스와 보이오티아 정도인데, 이들의 전력은 각자 30척을 넘지 않았다. [본문으로]
  11. 타소스, 뮈틸레네, 스키오네, 멘데, .... [본문으로]
  12. 투퀴디데스는 '아기스'가 아니라 '라케다이몬인들'로 지칭했다.(펠.VIII.2.4) [본문으로]
  13. 아테나이를 물리친 후의 스파르테의 위상에 대한 투퀴디데스의 언급은(펠.VIII.2.4), '헬라스 전체의 패권'(천병희), 'the principality of all Greece'(홉스), 'the supremacy over all Hellas'(덴트/p), 'the undisputed leadership of all Hellas'(조웨트), 등으로 번역되었다. [본문으로]
  14. 데켈리아의 아기스가 쉬라쿠사이 원정 3년 동안 한 일은 아테나이가 갇혔다는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것, 그리고 앗티케로부터의 아테나이 식량공급을 차단하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본문으로]
  15. 숙적인(스파르테는 전쟁 중에 텟살리아와 보이오티아 사이 멜리스 만의 오이테 지역 트라키스 인근에 식민도시 헤라클레이아를 건설했는데(BC426,투.펠.III.92), 그후 성채가 위협적이라며 텟살리아 오이테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자(V.51.,BC420) 보이오티아가 아테나이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차지고(V.52.1,BC419) 있는 것을 되돌릴 겸) 오이테로 가서 그들을 친 다음, 군자금을 내도록 하고 그들 가축들을 몰고 갔고, 프티오티스 지역의 아카이오이와 텟살리아 예속민들에게서도 군자금을 거두고 인질을 잡아 코린토스에 맡겼다.(투.펠.VIII.3.1) [본문으로]
  16. 에우보이아 섬의 여러 도시들은 아테나이에 예속되어 조공하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보이오티아와 마주한 섬 중부 서안의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그리고 서남단의 스튀라와 카뤼스토스는 지난 번 아테나이의 쉬라쿠사이 원정에도 참여했고(투.펠.VII.57.3), 아테나이도 에우보이아를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해 이들만은 계속 동맹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VIII.1.3) [본문으로]
  17. 네오다모데스新市民Neodamodeis,neodamodes,new citizen,freedman,병역에 종사한 공으로 해방된 헤일로타이(국가노예)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18. 투퀴디데스는 데켈레이아의 아기스에 대해, '...동맹국이 라케다이몬인들의 본국 정부보다 그에게 더 복종했다...그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당장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천병희), '...the confederates of him(as I may call them) did better obey him than the the confederates of Lachedaemonians did them at home...for having the power.. he was terrible whatsoever he came...'(홉스) [본문으로]
  19. BC13세기 이후 암흑기를 거치며 이주하기 시작한 헬라스 사람들이 아나톨리아 반도 서해안과 가까운 섬들에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북부 트로이 인근은 주로 아이올리스 사람들이 거주해 그 지역을 아이올리아, 중부 스뮈르나 인근은 이오네스 사람들이 주로 거주해 이오니아, 남부 카리아의 밀레토스 인근은 도레이오스 사람들이 주로 거주해 그 지역을 도리스라 불렀는데, 헤로도토스는 특히 이들 거주지 중 BC 7세기 이후 크게 발전한 이오니아 사람들의 도시들을 그들이 쓰는 방언 별로 도리스 지역의 밀레토스Milletos, 뮈우스myus, 프리에네Priene, 이오니아 지역의 에페소스Ephesos, 콜로폰Colophon, 레베도스Lebedos, 테오스Teos, 클라조메나이Clazomenae, 포카이아Pocaea, 그리고 키오스Chios 섬과 에뤼트라이Erythrae, 따로 그들만의 방언을 쓰는 밀레토스 맞은 편의 사모스Samos 섬, 등 모두 12개의 이오니아 도시들을 꼽았다. [본문으로]
  20. 투.펠.VIII.6.1. 홉스는 VIII.5.5 [본문으로]
  21. 페르시아의 Lydia로,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크로이소스 왕의 뤼디아가 아나톨리아 반도 거의 전부였음에 반해 아나톨리아 반도의 사르데이스Sardeis를 중심으로 한 서부 해안지방을 가르킨다. [본문으로]
  22. 아테나이를 견제하고 또 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나 하고 스파르테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여러 차례 페르시아에 사절을 보낸 것으로 보이는데, 그 가운 데 두 차례, 포테이다이아가 아테나이의 포위 공격을 받을 때( 투.펠.II.67.1.4,도시의 자유(2)각주16), 그리고 아테나이의 퓔로스 요새 건설로 곤궁에 빠졌을 때(투.펠.IV.50,도시의 자유(2),11.112) 사절들이 아테나이에게 잡히면서 양측의 왕래가 밝혀졌다. 잡히지 않았을 사절들의 왕래를 감안하면 전쟁 중 스파르테와 페르시아는 다양한 접촉을 펼쳤으리라 짐작된다. [본문으로]
  23. 아테나이의 연설문작가logographer 안도키데스Andokides,Andocides,BC440-390)는 그의 연설문 '스파르테와의 평화에 대하여On the peace with Sparta',29 '에서, 그의 '...외삼촌 에필뤼코스Epilykos,Epilycus(그에 대한 자료는 없다)의 외교 덕분에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II와 평화협정을 맺고 영원한 우의를 다졌다...by making a truce with the Great King and establishing a permanent accord with him, thanks to the diplomacy of mother's brother, Epilycus,...'고 말한다. 안도키데스의 다른 연설문으로 '비밀 의식에 대하여On the Mysteries', '귀환On his Return', '알키비아데스 논박Against Alcibiades'가 있다. 안도키데스가 말하는 '에필뤼코스의 평화'에 대한 역사 자료는 없고, 이따금 페르시아로 갔던 사절들 가운데 한 명이었지 않나 싶다. [본문으로]
  24. 이 당시 알키비아데스는 대대로 두 집안이 서로 손님과 주인 사이로 지내온 스파르테의 감독관ephoros 엔디오스Endios 집에 머물고 있었다.(투.펠.V.44.3,VIII.6.3) [본문으로]
  25. 아테나이는 아나톨리아 해안과 인근 섬들의 도시들을 동맹에 편입시킬 때 레스보스, 키오스, 사모스, 등은 독자적인 함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는데, 사모스 함대는 BC440 밀레토스 문제로 아테나이와 반목하면서 공격을 받아 항복하고 보상금을 내면서 폐지되었고, 나머지는 쉬라쿠사이 원정군에도 참가했을 정도로 독자 함대를 유지했다.이 함대를 보고 스파르테의 페리오이코스 프뤼니스가 키오스를 다녀와 함선도 있고 강력하다고 보고했다.(투.펠.VIII.6.4) [본문으로]
  26. BC413. 헬라스 내전 동안, 이 해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고 또 죽었다. [본문으로]
  27. 언제인지는 모르나 후대 어느 시점에 아테나이는 이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공동묘지에 이들을 위한 비석을 세웠지만, 유독 니키아스의 경우, 당대의 투퀴디데스와 후대의 플루타르코스가 그를 두둔했음에도,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빼서 억지로 그를 그들 기억에서 지워버렸는데, 이를테면 파우사니아스가 이 비석을 찾았을 때 니키아스의 이름이 빠진 것을 보고, 그 까닭이 '데모스테네스는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강화한 다음 자결하려다 잡혔지만, 니키아스는 스스로 항복해 잡힌 쓸모없는 군인이었으므로 이름을 지웠다는 필리스토스Phillistos의 말while Demosthenes made a truce for the others and excluded himself, attempting to commit suicide when taken prisoner, Nicias voluntarily submitted to the surrender. For this reason Nicias had not his name inscribed on the slab, being condemned as a voluntary prisoner and an unworthy soldier.'에 파우사니아스도 공감한(파우사니아스,'그리스 서술',1.29.12) 것으로 쉬라쿠사이 원정군에 대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심사를 헤아릴 수 있다. 필리스토스(BC432-356,Phillistos of syracuse)는 쉬라쿠사이 군인 출신 역사가로, 지금은 산일 되고 없는 쉬라쿠사이 역사서 11권을 썼는데, 알렉산드리아 시대를 통해 호평을 받은 이 역사서를 보고, 키케로는 그를 '작은 투퀴디데스pusillus Thucydides'라 불렀다. 그가 아테나이 사람들이 쉬라쿠사이 원정군 비석에 니키아스의 이름을 뺀 사유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은 그 비석이 늦어도 그가 죽은 BC356 이전에 세워졌음을 말한다. [본문으로]
  28. 투.펠.VIII.4 [본문으로]
  29. 군사훈련과 공동생활로 젊은 부부의 과도한 격리, 만연한 동성애, 그리고 유산 분할로 인한 재산 감소를 막기 위한 출산 기피 [본문으로]
  30. 귈립포스의 예에서 보듯, 모타케스, 즉 동등인의 서자나 얼자들이 쉬라쿠사이 지원군의 지휘자로 발탁되어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본문으로]
  31. 스파르테가 보낸 레스보스 지원군은 300명의 네오다모데스(해방노예) 군대였다. [본문으로]
  32. 스파르테 시민권자spartiates,peers 중에 가난하여 공동식사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동등시민homoioi,equals을 가리켜 시민권은 가졌으나 시민으로서 열등한 '열등시민hypomeiones,inferiors'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33. 다레이오스 2세에 대해서는 이 글 '도시의 자유(2)',11.112. 각주134 참조. [본문으로]
  34. 투.펠.VIII.5.5. BC420 페르시아의 아나톨리아 뤼디아 총독 핏수트네스가 헬라스 사람 뤼콘이 지휘하는 용병들을 고용하여 반란을 일으키자(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BC423 다레이오스II의 등극 과정에서 빚어진 권력 이동으로 아버지 휘스타스페스Hystaspes 이래 맡아온 뤼디아 총독 직이 위태해지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다레이오스II는 팃사페르네스를 보내 평정토록 했고, BC415 그는 뤼콘을 매수하는 방법으로(이때 그는 뤼콘의 뒤에 아테나이가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핏수트네스를 잡아 수사로 보냈고, 이후 뤼디아 총독이 되었는데, 수사에서 처형된 핏수트네스의 아들 아모르게스Amorges가 카리아로 가서 반란을 이어가고 있었다. [본문으로]
  35. 메가라, 스파르테처럼 코린토스 만을 접하지 않는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은 별도로 코린토스 만에 그들의 배와 항구 또는 뱃머리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 [본문으로]
  36. 아기스는 스파르테가 먼저 키오스로 가겠다고 나서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는데(투.펠.VIII.82), 그 역시 키오스의 자체 함대와 운용 능력이 원정 실패 이후에도 계속 아테나이의 것이 되도록 버려둘 수 없었고, 오히려 이제부터는 키오스가 스파르테의 전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37. 이렇다 할 아테나이 해군의 움직임이 없어not any navy of importance yet appering 그들이 무력하다 얕잡아contemning the weakness 보았다.(투.펠.VIII.8.4) [본문으로]
  38. 메가라와 스파르테가 코린토스 만에 항구를 가졌듯이 사르니코스만 쪽 이스모스에 코린토스가 운영하던 항구.(당시에는 지협을 가로지르는 오늘날의 코린토스 운하가 없었다.) 코린토스는 이 밖에도 에피다우로스 접경 인근에 스페이라이온 항을 가지고 있었다. [본문으로]
  39. '올륌픽 경기 대회Olympiad'는 매 4년마다 여름(7/8월)에 열렸고, '이스트모스 경기 대회Isthmia'는 제49차 올륌피아드 다음해부터 격년으로 봄(4/5월)에 열렸다. [본문으로]
  40. 코린토스로서는 포세이돈을 기리는 범헬라스PanHellenic 축제인 이 대회 기간 중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교류와 이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41. 하나의 볼모인데, '성실의 담보'(천병희), 'for better credit'(홉스), 'a pledge of fidelity to the alliance'(조웨트), 'as faithful confederates'(덴트/p) [본문으로]
  42. 왜 배를 보내야 하는지 모르는 많은 키오스 사람들은 모반의 의심을 받을 때 볼모로 함선을 내는 관행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본문으로]
  43. 투퀴디데스가 이 장면에서 이들을 꼭 과두정파라 지목한 것 같지는 않은데, 번역은 두 가지 나뉘어, 천병희와 조웨트는 '음모에 가담한 과두제 지지자', 'oligarchs who were in the plot', 홉스와 덴트/p는 'the few and conscious (of the practice why they send galleys)', 'the few who were in the secrest'로 번역했다.(펠.VIII.9.3) [본문으로]
  44. 투.펠.VIII.10.3. 홉스는 페이라이우스Piraeus,Peiraeos, 조웨트는 피라이움Piraeum,Piraeon이라 했는데, 주석가 터크T.G.Tucker는 프톨레미 지도에 인근 곶을 '스페이라이온'으로 표기했고, 해안의 만과 곶 목록에도 '스페이라이온'이 기재되어 있다면서, 아테나이의 '페이라이에우스peiraieus' 때문에 혼동한 것으로 보았다. 크세노폰이 언급한(헬.IV.5.3) '페이라이온Peiraion'은 코린토스 만에 있다. [본문으로]
  45. 투.펠.VIII.10.3. '사람이 살지 않는 항구'(천병희), 'a desert haven'(홉스), 'a desert Corinthian port'(덴트/p)', 'a lonely harbour'(조웨트) 이때 홉스나 덴트/p의 'desert'는 '버린abandon'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46. 투퀴디데스는 30척 정도의 함대 지휘관들 이름을 거의 모두 기록했는데, 37척으로 거둔 이 승리의 지휘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본문으로]
  47. 투퀴디데스의 언급은 없으나 알카데모스의 후임으로 보인다.(펠.VIII.11.2) [본문으로]
  48. 아기스의 왕비 티마이아Timaea,Timaia는 아기스가 데켈레이아에 있을 때 아들을 낳아 공식적으로 레오튀키데스Leotychides라 이름지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아기의 이름이 알키비아데스라 귀뜀했는데, 소문도 나고 아기스에게 일러바치는 사람도 있어, 아기스가 날을 꼽아 보니, 대지진 때(BC412 2월 말) 티마이아의 침실에서 뛰쳐나온 뒤 열 달이나 동침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오튀키데스가 자기 아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티마이아의 방에서 뛰쳐 나온 사람이 알키비아데스라는 이야기도 있다) 따라서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던 레오튀키데스가 읍소로 간청하는 것을 뿌리칠 수 없어 아기스는 죽기 전에 유언으로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왕위 계승자 신분이 아니어서 아고게를 거치고, 계속된 병영 생활에서 얻은 동료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또 같은 아고게 동료이자 같은 서자 출신인 뤼산드로스의 영향력에 힘 입어, 아기스의 배다른 동생 아게실라오스가 신탁까지 동원한 레오튀키데스 옹립론자들을 물리치고 아기스를 승계했다.(플.알키비아데스전,23.7-8, 아게실라오스전,3.1-4.1,뤼산드로스전,22.3-6) [본문으로]
  49. 투퀴디데스는 대단히 짧게 '알키비아데스는 아기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천병희,펠.VIII.12.2), 'for he/Alcibiades was at difference with Agis.'(홉스,VIII.12.3), 'Agis, it must be remembered, was the enemy of Alcibiades.'(덴트/p,VIII.12.3), 'now Agis was a personal enemy of Alcibiades.'(조웨트,VIII.12.2)고 언급했다. [본문으로]
  50. 아테나이는 100척 정도의 함선을 가지고 있었으나, 충분치 않은 자체 인력(주로 테테스와 거류외인) 때문에, 이 1천 탈란톤의 비상금을 쓰자거나 투표로 쓰는 것에 동조하면 벌금을 매기는 법을 풀고, 다른 도시 사람들까지 고용해 태워야 했다. [본문으로]
  51. 테오스는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52. Lade, BC494 레스보스와 연합한 이오니아 함대는 이 섬 앞바다에서 페니키아가 주축인 페르시아 연합함대에게 격멸당했고, 이 '라데 해전Battle of Lade'의 패배로 밀레토스가 함락되어 이오니아의 페르시아 이탈revolt은 실패로 돌아갔다. [본문으로]
  53. 투.펠.VIII.18 [본문으로]
  54. 보병부대를 데리고 테오스 시내에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테오스 근처 어느 해안에 보병부대를 상륙시킨 다음, 4척을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4척은 아테나이가 끌고갔다.(투.펠.VIII.19.3) [본문으로]
  55. 이때 아테나이 함선 3척이 머물고 있었고, 이들이 정변을 도왔다.(투.펠.VIII.21) [본문으로]
  56. '...전前(정변 후 이미 지주들의 집과 땅을 빼앗아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지주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하고...'(천병희), '...no more communicating with the Geomori...'(홉스), '...denied to the former landed proprietors all the privileges of citizenship...'(조웨트), '...excluding the landholders from all share in affairs...'(덴트/p) [본문으로]
  57. 투.펠.VIII.22.1,'...다른 도시들이 아테나이 동맹을 이탈하도록 부추기는 일에 ...열성을...(천병희)....earnestness to bring the cities to revolt...(홉스)...the zeal of Chians did not abate...(조웨트)...zeal continued as active as ever...(덴트/p)' [본문으로]
  58. 아리스토파네스는 페이세타이로스의 입을 빌려, 모든 방면에서 키오스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라고 말한다.('"새들"'880행,'키오스 주민들이라The dwellers in Chios! 좋지Ah! 난 사람들이 그렇게 온갖 것에 키오스 사람들 갖다붙이면 즐거워I am delighted they should be thus mentioned on all occasions.' [본문으로]
  59. 아리스토파네스,'"새들"'880행'(페이세타이로스의 구름뻐꾸기나라로 찾아온 사제priest가 축원을 올리는데)...구름뻐꾸기나라 사람들에게 건강과 안전을 내리소서 키오스 주민들dwellers in CHIOS에게도...' (천병희는 '건강과 행복'으로, 오닐(Eugene O'neal Jr. Ed, 극작가 유진 오닐의 아들로 그리스 문학자, 그리스 연극)은 '건강과 안전health and safety'으로 번역했다.) [본문으로]
  60. 아리스토파네스,'"평화"'170행,(쇠똥구리를 타고 신에게로 날아가던 트뤼가이오스가 키오스 섬 위를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리기 위해)'...내게 액운이라도 들면misfortune happen to me, 내 죽음 때문에 키오스town of Chios가 5탈란톤의 벌금을 물게 될 텐데...' [본문으로]
  61. 1차 100척, 2차 60척(투.펠.VI.43, [본문으로]
  62. 1차 원정에 32척, 2차 지원에 18척이 출전했다. 투퀴디데스는 키오스와 레스보스의 메튐나의 함선 참전했다고 기록했으나 각각의 함선 수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다.(펠.VII.57.4,5) [본문으로]
  63. 크롤리Richard Crawley는 'The War in Ionia'라 부른다.(The History of Peloponnesian War,VIII.chapter24) 한편 현대의 도날드 케이컨은 BC412-411 동안 벌어진 이탈과 진압의 전쟁을 '에게 해의 전쟁'이라 부른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27장,까치) [본문으로]
  64. 투.펠.VIII.24.6. 다시 아테나이로 돌아가려는 키오스 음모자들이 아스튀오코스의 주둔지를 알리고 있다. [본문으로]
  65. 오이눗사Oinoussa 섬들(큰 섬 1, 작은 섬 8)로 키오스 동북 해안에서 2km,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8km 떨어져 있어 키오스 섬 감시 기지. [본문으로]
  66. 시둣사Sidussa와 프텔레온Pteleon. 에뤼트라이 반도 북서쪽의 보급과 정비 기지. [본문으로]
  67. 투.펠.VIII.24.4 [본문으로]
  68. 투퀴디데스는 굳이 알키비아데스가, 칼키데우스의 펠로폰네소스군이 아닌, 밀레토스와 팃사페르네스 편에서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고 밝힌다.(펠.VIII.26.3) [본문으로]
  69. 투키디데스는 이 전투에서 "양쪽의 이오네스족(밀레토스와 아테나이)이 도리에이스족(아르고스와 펠로폰네소스동맹)을 이겼다.on both sides the Ionics had the better of the Dorics."고 썼다.(펠.VIII.25.5) [본문으로]
  70. 투퀴디데스는 프뤼니코스의 밀레토스 철군 결정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며(펠. VIII.27), '이때나 나중에도 그가 내린 결정들로 프뤼니코스는 현명한 사람으로 여겨졌다Phrynicus was esteemed a wise man(a man of sense/덴트p, a man of great sagacity/조웨트,통찰력/천병희), not then only, but afterwards, nor in this only, but in whatsoever else he had the ordering of.(펠.VIII.27.5.홉스)'고 말한다. [본문으로]
  71. 투퀴디데스는 프뤼니코스의 이런 소극적 태도에 대해, "...통찰력 있는 사람(천병희)a wise man(홉스)a man of sense(덴트/p)a man of great sagacity(조웨트)..."의 행동으로 평했지만(펠.VIII.27.5), 오늘날의 케이건은 프뤼니코스가 적극적으로 밀레토스 공략에 나서 테리메네스와 일전을 벌였어야 했다고 비난한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27,pp406-7,허승욱,까치). [본문으로]
  72. 한 면에 궁수의 모습이 새겨진 페르시아 금화로 아테나이 화폐로는 20드라크메에 해당. 노꾼의 하루 일당이 1드라크메 정도였다. [본문으로]
  73. 이 당시 아이가이온 해를 운항하는 삼단노선 한 척의 한 달 운용비용은 1탈란톤 정도였다. [본문으로]
  74. 페다리코스와 키오스 사람들에게 지원을 지시했으나 모두 이에 반대했는데, 특히 페다리코스는 키오스의 함선들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이때 페다리코스는 키오스 총독으로 임명되어 부임차 밀레토스를 떠나 키오스로 온 것이어서 비록 아스튀오코스가 사령관으로 지명 받은 상황이었지만 총독으로서 키오스를 지킬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투.펠.VIII.28.5,32.3) [본문으로]
  75. 명령을 뿌리친 키오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VIII.33.1) [본문으로]
  76. 투퀴디데스는 아스튀오코스 자신의 함선 수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나, 애초 총사령관으로 스피라이온에서 출발할 때 20척이었고(VIII.20.1), 켕크레이아에서 키오스로 출발할 때는 4척이었을 뿐인데(23.1), 그후 코린토스의 5척, 메가라의 1척, 헤르미오네의 1척이 합류해 전체 11척의 함선으로 펠로폰네소스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위해 밀레토스로 출발했던 것이다.(VIII.33.1) [본문으로]
  77. 사모스에 잡혀 있던 에뤼트라이 포로들이 에뤼트라이를 아테나이로 돌려놓는 조건으로 방면되어 에뤼트라이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키오스의 페다리토스는 급히 아스튀오코스에게 알렸고, 아스튀오코스는 황급히 에뤼트라이로 회항해 모반에 대비했고, 페다리토스도 건너와 함께 방면된 포로들을 심문한 결과 탈출 목적의 위장 모반으로 밝혀졌다.(투.펠.VIII.33.3,4) [본문으로]
  78. 투퀴디데스는 이 두번째 협정에 대해 그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면서도 알키비아데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펠.VIII.37.1-5) [본문으로]
  79. 투키디데스는 그가 귀국 길에 "소형 선박을 타고 출항했다 실종되었다is no more seen,was lost,was no more heard of'고 전한다.(펠.VIII.38.1) [본문으로]
  1. 아테나이가 델로스동맹을 결속할 당시 모든 동맹도시들은 스파르테 주도의 펠로폰네소스동맹처럼 도시 인구수에 따라 각자 인원과 물자를 동원하는 방법으로 운영했으나 세력이 약한 도시들이 그에 준하는 갹출금으로 대체하는 것을 선호하고 아테나이 역시 출진 준비와 출진 시기 및 군대의 지휘통솔 편의를 위해 함대를 유지하길 바라는 레스보스, 사모스, 키오스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들에게는 동원될 인원과 장비 물자 등을 모두 돈으로 받아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 금고에 보관하며 사용했다. 그러다가 아테나이의 아이귑토스 원정 실패 후 금고를 델로스 신전에서 파르테논 신전으로 옮기고, 모금 성격도 전비 갹출에서 전비 징수로, 사용도 동맹 협의에서 아테나이 독단으로 바꾸어버리자 델로스동맹 도시들은 아테나이의 식민도시보다 못한(식민도시 시민들은 아테나이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다) 종속도시가 되고 말았다. [본문으로]
  2.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라 하나 바닷바람 부는 겨울은 역시 춥다. 그래서 겨울에는 가급적 배를 띄우지 않았으며 전쟁도 멈추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