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도시의 정의
10. 도시의 정의正義
10.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오래 전에 아뉘토스가 고발한 소크라테스를 처형했고, 그 뒤로 아뉘토스와 십 년이 넘도록 잘 지내왔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그것이 잘못된 재판이었다며 이번에는 아뉘토스와 멜레토스와 뤼콘에게 소크라테스를 잘못 고발했던 죄를 묻는 재판을 벌이면서,1 이 아리스토파스 역시 "구름"으로 소크라테스를 무고했다고 오늘 이 재판정에 불러내었습니다. 전에 소크라테스가 이 재판정에 섰을 때,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가 자신을 재판정에 불러 세운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앙앙불락한 데다가, 고발자들의 너무나 허무맹랑한 고발 내용이 얼마나 한심하고 기가 찼던지, 오히려 이 아리스토파네스를 아뉘토스보다 더 무서운 고발자로 지목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계속된 그의 변론은, 여러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자기가 무고함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짜증스럽고 약이 잔뜩 오른 한 늙은이의 큰소리와 비아냥과 독설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말았었지요. 그 결과2 그의 변론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그전에 철학자들을 쫓아낸 것도 모자라 철학자를 처형까지 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3, 소크라테스 그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자신의 재판에 대한 그의 무책임한 태도는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로 하여금 그의 목숨을 빼앗게 했고, 결국 그로 인해 오늘 이 재판으로 또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게 하고 말 것이지만, 저는 이 재판정에서 처음부터 그런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시각으로 여러분께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처음 제 자신을 위한 이 변론을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대로, 지금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재판정에 서서4, 도대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길래, 재판으로 죽은 장군들이나 정치인들은 일일이 다 말할 것도 없이, 도시가 재판으로 철학자들 내쫓고, 재판으로 철학자를 죽이고, 재판으로 시인을 죽이려 하게 되었는지, 아울러 또 무엇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드리려 했습니다. 신을 경배하고 전통을 숭상하며 명예를 중시했던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정적과 장군들을 재판에 세우더니 급기야 이렇게 철학자와 시인을 재판정에 세우는 일까지 벌이게 될 때까지는, 그렇게 되도록 도시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킨 숱한 굴곡들, 다시 말해 심각한 불복과 불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 숱한 도시의 굴곡들을 파헤치다 보면 틀림없이 평화가 아닌 굴곡진 불복과 불화들을 도시가 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무엇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패전의 충격과 독재의 살륙으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도시의 영혼을 민주정 복고와 대사면의 화합으로 달래어 조금씩 조금씩 도시가 평화를 이루어 가던 차에, 난데없는 소크라테스 재판으로 도시를 긴장케 하고 그를 따르던 나머지 철학자들을 아테나이에서 떠나게 했던 '아뉘토스식 불화'나, 코린토스 전쟁이 끝난 지금 이 마당에 아뉘토스 일파와 덤으로 저 아리스토파네스를 재판정에 세운 '네오클레이데스식 불화'가 저로 하여금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도시에 무슨 일이 있었나를 뒤돌아보게 했지만, 제가 도시의 굴곡들을 파헤쳐 그런 일들이 도시에 벌어지게 되었던 그 무엇을 찾을 수 있게 해 준 것은 아뉘토스와 네오클레스에 못지 않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보였던 불복과 불화의 행적들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보았던 그 무엇을 여러분도 제 이야기를 통해 함께 느끼고 과연 그렇다고 공감하게 해드리기 위해 먼 옛날의 일이라 잘 모르고 있을 일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는 너무나 생생한 얼마 전의 일조차도, 그것이 어떤 불복이고 불화였든 지금의 우리 도시를 망치게 했다 싶은 일들은 빠짐 없이 모두 여러분께 내놓아 여러분 스스로 파헤칠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가 장황하여 지루해질 것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도시의 영혼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의 영혼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저의 이야기가 길든 짧든 상관없이 지루할 것이라며 그들을 낮추어 볼 생각도 없었고, 도시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가꾸려는 사람이라면 이 긴 이야기를 신경을 곤두세워 가며 들을 것이라며 여러분을 압박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망친 크고 작은 그 숱한 불복과 불화들 모두를 일일이 보여드리지 않고도 아테나이가 재판으로 철학자를 죽이고 이제는 시인마져 재판정에 세울 만큼 타락하게 된 연원을 찾을 굵직한 일들 몇 개를, 제가 평소 저의 연극들에서 보여드렸던 걸쭉한 장면들처럼, 그 숱한 일들 가운데서 골라 낼 수도 있었지만, 혹은 우스꽝스럽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사건들은 실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 관객들에게 알아서 짐작케 하고 저의 연극들에서 과감히 뺐던 것처럼 그 숱한 일들 가운데서 여럿은 말 안 해도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 그냥 말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저의 이 변론에서는 그 좋은 저의 솜씨를 모두 다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도시를 망치게 한 숱한 일들 가운데 그것이 큰 불복으로 일어났다고 도시를 꼭 크게 망치지도, 작은 불화였다고 해서 도시를 꼭 작게 망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런 불복과 불화가 일어나도록 한 그 무엇의 차이가 크다고 큰 불화를, 작다고 작은 불복을 불러오지도 않았었다는 것과, 도시를 망쳤던 크고 작은 불복과 불화들이 벌어지게 만든 그 무엇은 오로지 한결같았다는 것을 함께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었던 그 무엇이, 우리의 도시에서 평화를 내치고 불복과 불화로 망치게 했던 그 무엇이, 바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과 우리 도시 아테나이를 갈라 놓은 도시민들 사이의 불평등이었고, 그 불평등은 그것이 크든 작든 한결같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것을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0.2. 그렇습니다.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도시의 평화를 깨고 들어와 도시를 망친 그 숱한 불복과 불화들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돈과 권력을 가졌다는 오만과, 자기에게는 없는, 혹은 이미 충분히 가졌음에도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가지려는 탐욕이었고, 그 오만과 탐욕이 도시민 사이에 판 돈과 권력의 불평등이라는 골짜기였습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오만과 탐욕이 도시민과 도시의 영혼에 평화가 둥지 틀 수 없도록 막았으며 그 대신 돈과 권력의 불평등이라는 깊은 골을 파서 그 골에 불복과 불화를 심었습니다. 불복과 불화는 필연적으로 도시 안에서의 정쟁과 도시들 간의 전쟁을 불러왔으며, 그 정쟁과 전쟁은 이긴 대가로 돈과 권력을 보장하였고, 진 대가로는 새로운 정쟁과 전쟁을 도모하도록 불복과 불화를 부추겼습니다. 오랜 시간 그렇게 반복된 정쟁과 전쟁은 이긴 자나 진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과 도시의 삶의 터전을 황폐하게 했고 그 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폐해진 도시와 피폐해진 도시민 때문에 정쟁과 전쟁에서 이겨도 거머쥐는 돈과 누리는 권력이 점점 초라해져 갔고, 얻은 돈과 권력이 초라해져 갈수록 오만과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다 않던 잔혹한 행동도 도를 넘게 되었고, 도를 넘은 잔혹함은 불복과 불화의 깊이를 더해 갔고, 그로 인한 고통과 짐 그 모두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도시민의 영혼이 견디지 못해 타락해 갔습니다. 바로 오만과 탐욕의 화신들이 던져 주는 작은 시혜들에 오염되어 갔고, 타락한 영혼들이 정쟁의 무기가 되어 민회에서 그리고 재판정에서 그곳들에 깃들었던 도시의 영혼을 훼손시켰습니다. 그렇게 오염되고 타락한 영혼들은 오만과 탐욕의 화신들끼리 벌이는 정쟁의 무기가 되었고, 재판정을 오만과 탐욕의 화신들이 그들끼리 벌이는 정쟁의 전장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기는커녕 방조하거나 동조하여 작은 전리품을 그 전장에서 주워 먹을 정도로까지 나락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타락한 영혼에 이력이 붙어 낯이 두꺼워지자, 이 오만과 탐욕의 화신들이 신의 지혜를 찾아 시들어진 도시민의 영혼들을 구제하려는 철학자를 상대로 불화를 일으켜 철학자를 재판정에 데려와도 여러분은 그 불화의 재판을 거부하기는커녕 부화뇌동하여 철학자의 영혼을 도시민의 영혼들로부터 따로 떼어내는 짓도 서슴지 않았던 적도 있었습니다.5 그것은 오래 전부터 훼손되어 왔던 도시의 영혼이 질식하는 순간이었지요. 이렇게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도시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 결국 도시민의 영혼들을 타락하게 만들고, 도시의 영혼마져 질식시키는 이 오만과 탐욕은 과연 무엇일까요? 나중 이승에서 모르면서 아는 체했다고 저승에서 소크라테스에게 혼이 나더라도 우선 이 자리에선 제가 생각하는 오만과 탐욕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을 말씀드려야 그 오만과 탐욕이 우리 도시와 도시민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지금까지의 긴 이야기를 이해하실 것이고, 그 오만과 탐욕이 지금 이 도시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똑바로 보실 것이며, 그 오만과 탐욕이 앞으로 우리 도시와 도시민에게 무슨 짓을 할지 분명히 내다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0.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만hybris은 힘을 가진 것에 대한 과시이며6, 탐욕aplestia은 힘을 더 가지려는 집착입니다. 여기서 힘이란 무엇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무엇을 멈추게도 하지요. 그러므로 신은 힘의 총화입니다. 우주를 그리고 그 우주 안의 세상 만물을 움직이고 멈추게 하니까요. 그런 신이 우리 같은 하루살이 인간에게도 힘을 가지게 해 주었습니다. 물론 세상 만물에게도 자기 몸 하나는 온전히 건사할 정도의 힘을 주었지만, 자신을 닮은7 인간에게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 이외에도 특별히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아마 그래서 만물 가운데 오로지 우리 인간만이 신을 경배하는지도 모르지요. 고마우니까요. 그러므로 앞으로는 무지막지한 신의 힘에 대해서나, 그 신의 힘이 부리는 염치없는 오만과 탐욕에 대해서는, 비록 하루살이 인간들이 그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해도, 호메로스부터 에우리피데스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인간사에는 눈을 감아 버린 너무나 많은 같은 비극 시인들이 주저리 주저리 읊어 대고 있었으니, 저는 여러분께 이 자리에서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신이 아니라, 하루살이 인간들이 부리는 무지막지한 힘이나 염치없는 오만과 탐욕에 대하여 지금부터 여기 여러분 앞에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천지의 조화에서 나오는 신의 힘과는 달리 인간 세상에서 인간이 부리는 힘은 주로 돈과 권력이 부리는 힘을 가리킵니다. 인간 세상에는 돈과 권력이 아니라도 남을 움직이거나 멈추게 하는 힘이 많이 있지요. 이를 테면 좋은 노래를 만드는 힘才能에서부터 좋은 목소리로 그것을 부르는 힘까지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힘들이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것을 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자리에서 힘이라 부르는 것은 돈財力과 권력을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말하는 '힘을 가진다' 함은 자신을 건사할 힘을 뛰어넘는 특별히 생각으로 '남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만은 힘을 가진 것에 대한 과시가 아니라 그 힘을 직접 쓰는 힘의 과시이며, 탐욕은 더 큰 힘에 대한 집착이라 바꾸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힘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그 무엇을 가지는 것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아주 좋은 것이지요.
10.4. 그렇지만, 과시나 집착은 사람들에게 도가 지나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좋지도 올바르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집니다. 그래서 오만과 탐욕이 좋은 것에 대한 좋지 않은 올바르지 않은, 훌륭하지 않은 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오만과 탐욕은 언제나 그 본색을 감추거나 숨기고 있다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될 때는 다른 것, 주로 좋고 올바르고 훌륭하디훌륭한 것으로 가장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오만하고 탐욕스럽다라고 말할 경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십중팔구, 자신이 오만한 것이 아니라, 제 능력의 뛰어남과 그래서 이룬 성취, 즉 권력과 돈 같은 가진 것에 대해 자긍과 명예를 지녔을 뿐이며, 탐욕스런 것이 아니라 더 뛰어난 능력과 더 큰 성취를 이루려는 도전과 열정을 지녔을 뿐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십중일이는, 아니 십중십 모두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뛰어남과 성취 같은 가진 것에 대한 자긍과 명예가 없다면, 그리고 또 사람들에게 뛰어남과 성취 같은 것을 더 가지려는 도전과 열정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좋고 올바르고 훌륭하디훌륭한 것이 과연 있을 수 있겠냐고요. 이 물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과연 그러하다고 수긍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아마 소크라테스가 이 질문을 받았다면 틀림없이 그의 대답은 과연 그럴까였을 것이고, 과연 그런지 이것 저것 캐묻고 긍정도 했다가 부정도 했다가 이래 저래 야단이 났을 것입니다만, 저는 두 말 않고 그 오만과 탐욕이 우리 아테나이를 어떻게 망쳐 놓았는지 여러분께 찬찬히 들추어 보여드렸듯, 조용히 그 뛰어남과 성취가 어떤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떻게 이루어져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리고 왜 어떻게 더 뛰어나려는지, 더 큰 성취가 어떤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이고, 왜 필요하며, 어떻게 이루어 가고 있는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가 말하는 뛰어남과 성취와 자긍과 명예와 도전과 열정이 남긴 흔적과 움직이는 행적들을 일일이 좇아가며 파헤쳐 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만과 탐욕을 드러내는 자들은, 누가 그것을 뛰어남이라고 하든 성취라고 하든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으로 설명하든, 자기의 힘을 남에게 뽐내고, 더 가지면 더 가질수록 더 뽐내고 싶은 자들은 결국, 공익이니, 헌신이니, 봉사니, 나눔이니, 자긍이니, 명예니, 도전이니, 열정이니, 하는 좋고 올바르고 훌륭하디훌륭한 덕성의 탈을 쓰기 마련이고, 그 탈을 벗길 유일한 도구가 바로 그들의 흔적과 행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만과 탐욕이 그런 덕성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은 그것들이 덕성이 아니기 때문이고, 덕성이 아닌 까닭은 그것들은 자기 혼자서 만든 것들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만든 것들을 혼자서 가지려 하기 때문이고, 그러기 위해 그 힘을 남을 억누르는 데 쓰기 때문이고, 남을 억눌러 남의 몫까지 차지하니 도시민 간에 불평등의 골짜기가 생기고, 이 불평등이 불복을 가져와 불화하게 되고, 그러므로 사람들은 오만과 탐욕을 꺼리고 싫어하게 되고, 남들이 꺼려하니 덕성의 탈이라야 사람들 가까이 갈 수 있고, 사람들 가까이 가야 오만도 탐욕도 부릴 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만과 탐욕 혼자서는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고, 혼자서는 오만과 탐욕이 힘쓸 데가 없거든요. 그렇습니다. 오만과 탐욕의 원천은 바로 그 힘, 남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능력의 뛰어남이든 그래서 이룬 성취든 가진 것이 내는 힘이 오만과 탐욕을 받쳐 줍니다. 사람들이 힘 없는 오만은 허풍으로, 힘 없는 탐욕은 한恨쯤으로 치부하고 마는 까닭은 그런 오만과 탐욕으로는 남을 억누를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힘이 보이지 않는 오만과 탐욕은 조롱하고 힘이 보이면 꺼려忌諱합니다. 사람이 참 간사하지요. 이래서 오만과 탐욕이 덕성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거지요. 그러나 그것이 뛰어남이든 성취든 그 무엇이든 가진 것이 많아져서 그 힘으로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억누를 수 있다는 자신이 붙으면, 다시 말해 더 이상 가진 힘을 숨길 수도 감출 필요도 없을 즈음이면, 덕성의 탈을 벗고 오만과 탐욕은 그의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이미 그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조아리고 있기 때문에 불복이나 불화가 문제가 되지 않지요. 쓸어 내면 되니까요. 그 나머지야 주변에 모여 조아리면 부스러기 좀 나누어 주면 감지덕지할 것이고요. 그렇지만 불복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오만과 탐욕이 덕성의 탈을 벗고 민낯으로 불화를 드러내는 편이 가면을 쓴 것보다 다루기 훨씬 수월하지요. 그냥 군소리 없이 따르거나 수틀리면 뒤엎어 버리면 되니까요.8 눈치보며 부스러기를 주어 먹느라 자존심 상한 영혼들도 힘을 보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덕성의 탈을 벗은 민낯의 오만과 탐욕은 그것을 뒤엎으려는 불복 때문에 가진 것들을 모두 잃고 말았었지요. 그것도 세월이 오래 지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필연이었지요. 오만과 탐욕이 이걸 모를 리가 없지요. 그래서 그것들은 언제나 진면목을 감추고 덕성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갑니다. 어디까지나 남을 위해서라며 공익과 나눔을 앞세워 겸손하게 헌신과 봉사를 말하고, 자신은 그저 긍지와, 명예를 얻는 것, 그리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도전과 열정을 펼칠 기회를 얻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하지요.9 이래서 제가 여러분께 흔적과 행적을 유심히 보라 말씀드리긴 했지만, 그들이 이렇게 말하고 나오는 데는 일단 말은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진짠지 가짠지 관심을 보이고 속든지 말든지 하기 때문 아닐까요? 왜 사람들은 남을 위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더 좋고 올바르고 훌륭한 덕성이라 받아들이는 걸까요? 혹시 그것이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도시의 정의이기 때문 아닐까요? 그렇다면 도시에 살면서 도시민을 위하기에 앞서 먼저, 아니 도시를 위하기보다 오로지 자기를 위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은 정말 불의한 악덕일까요? 오만과 탐욕이 쓰고 나타나는 도시와 도시민을 위해서라는 덕성의 가면을 한번 벗겨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이 가면을 벗겨 보는 일로부터 도시의 정의가 무엇인지 저와 함께 찾아 나서게 됩니다.
10.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예전에 한번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란 연극에서 아테나이 성내城內로 피난 왔던 아티케의 농사꾼 디카이오폴리스로 하여금 스파르테와의 평화를 거부하는 도시의 태도에 반기를 들고 엠피테오스를 혼자만의 사신으로 스파르테로 보내 강화를 맺고 혼자만의 평화를 즐기도록 해 보았고, 또 한번은 "평화Eirene"라는 연극에서 아티케의 포도밭 주인 트뤼가이오스를 신들에게 보내 도시에 '평화'를 모셔 오기도 했었습니다. 트뤼가이오스는 '평화'만 데려온 것이 아니라 '평화'가 데리고 다니는 '풍요'와 '축제'까지 함께 도시로 데리고 왔는데도,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은 혼자만의 평화를 이루고 즐기는 디카이오폴리스에게는 일등상을 주었지만, 도시에 평화는 물론 풍요와 축제까지 데려다 준 트뤼가이오스에게는 겨우 이등상을 주었을 뿐이었지요.10 여러분은 왜 자기만 위하는데도 디카이오폴리스에게는 일등상을 주고, 남들을 위해 그 먼 하늘을 역겨운 냄세를 마다않고 쇠똥구리를 타고, 게다가 없는 살림에 신들에게 줄 뇌물까지 준비해서 갔다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도시에 평화를 가지고 온 트리가이오스에게는 고작 이등상을 주는 판정을 내렸을까요? 힘이 없는 오만과 탐욕을 보는 눈이 그대로 적용되어 저의 희극이 그랬던 것처럼 희극적으로 판정을 내렸던 것일까요? 어차피 힘 없는 디카이오폴리스나 트뤼가이오스로부터는 혼자만의 평화든 도시의 평화든 기대할 것이 없는 차에 얼굴 두껍게 혼자만의 평화로 얻는 디카이오폴리스의 호사가 남보다 자기가 우선인 여러분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던가요, 아니면 혼자만의 평화로 제일 먼저 디오뉘소스를 경배하고, 다음 혼자만의 시장을 열어 전쟁에 시달린 헬라스 여러 도시 사람들과 함께 평화의 열매를 나누는 디카이오폴리스와는 달리, 도시를 위해 평화를 데려오더니 정작 끝에 가서 한 짓이 풍요와의 결혼으로 트뤼가이오스 혼자만이 평화의 결실을 독차지했기 때문이었던가요? 어쨌거나 그래 보았자 현명하신 관객들이 그들 둘이 이룩한 평화란 것이 한번 크게 웃자고 떠벌린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모를 리 없었지요. 그러니 그보다는 자신을 돌로 쳐죽이려는 성난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뮈시아 왕 텔레포스의 거지 행색으로 나타난 디카이오폴리스가 도마 위에 자신의 목을 올려 놓은 채, 희극도 정의dike正義와 무관하지 않으니 공공의 복리에 관해 충격적이지만 옳은 말11 한마디할 테니 화내지 말고 잘 들어 보라며 시작한 말이 먼저 도시가 일으킨 전쟁의 이유였습니다. 이 디카이오폴리스가 든 스무여덟 해에 걸쳤던 헬라스 내전의 단초는 두 가지였는데, 사소한 이유로는 메가라산 양털 외투의 밀수입을 핑계로 일으킨 메가라산 물품의 압수 소동을 들었고, 중대한 이유로는 메가라 청년의 아스파시아의 창녀 납치 사건을 들었지요. 그 다음 디카이오폴리스는 계속해서 이 이유들 때문에 화가 난 페리클레스가 메가라 사람들은 아테나이의 땅과 바다에 머물지 못하도록 보복했을 때, 스파르테가 어떻게 했어야 했느냐고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묻고, 만약 아테나이였다면 스파르테가 강아지 한 마리라도 붙잡아 팔아 먹었다면 당장에 300척의 함선을 띄우고 전쟁에 돌입했을 것 아니냐며, 스파르테12가 아테나이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면 아테나이의 생각이 모자란 것이었다고 질타했지요. 이런 질타에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찬반으로 나뉘고, 디카이오폴리스를 응징하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아테나이의 용맹 라마코스13의 도움을 청하지만, 위용을 뽐내는 화려한 무장 차림으로 그 위용을 떠받치는 병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장군 라마코스를 디카이오폴리스가 오히려 어르고 뺨까지 칩니다. 몰리던 라마코스가 반격한답시고 텔레포스 행색의 디카이오폴리스를 거지라고 멸시하고 나오자, 그런 라마코스에게 자기는 엽관 운동하는 자가 아니라 점잖은 시민이고 전쟁이 난 후로는 전사라고 밝히면서, 오히려 라마코스처럼 고액의 수당을 받는 재미로 전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데14, 전쟁이라면 기를 쓰고 나서는 라마코스의 아들이 왜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 나가지 않고 엑바타나 사절로 나가느냐며, 바로 병역 기피를 위한 공무 수행, 특히 전쟁터로 나가야 할 사람들이 엽관 활동과 아버지의 영향력을 이용해 수당까지 받으면서 다른 도시의 사절로 나가는 바람에 돈 없어 공무에 나서지도 못하는 백발이 성성한 무지렁이들이 전투 대형을 이루고 있다면서, 전쟁하는 도시의 사정이 이러니 어찌 혼자만의 평화를 얻으려 하지 않겠느냐고15 자기 변명까지 합니다. 도시에 부조리가 있다는 이유로 전쟁이라는 도시의 결정에 불복하고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만을 돌보기 위해 뻔뻔스럽게도 개인적인 평화를 도모한 디카이오폴리스로부터 이런 질타와 고발을 들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춤을 추며 디카이오폴리스의 평화를 인정하고16, 아울러 관객들이 일등상까지 준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디카이오폴리스가 그가 연 시장을 통해 혼자만의 평화를 이룬 것에 대한 오만과 그 평화를 혼자만 가지려는 탐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 때문에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관객들이 그 오만과 탐욕에 불복하고 불화하기보다 감싸안은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디카이오폴리스가 자기가 연 시장에 오는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사람들의 비극적 삶의 모습을 최대한 희극적으로 대치해 보듬어 줌으로써 도시가 전쟁을 할 것이 아니라 전쟁 때문에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삶을 돌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요. 왜 메가라의 한 농부가 입을 덜기 위해 어린 딸을 돼지라며 파는 천륜을 어기는 불의마져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왜 전쟁 불사를 외치며 수당을 챙기는 라마코스가 아들의 안전을 위해 도시의 돈으로 일당까지 주어 가며 그 아들을 엑바타나 사절로 보내는지를, 서로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 줌으로써, 스파르테라면 날카로운 갈대처럼 복수의 칼날을 그들의 심장에 깊숙히 꽂고 싶은17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올리브나무를 심고 싶은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은 아니었는지요. 아카르나이 사람들이 죽이고 싶어 했을 만큼 혼자만의 평화라는 반역적인 사익을 추구한 디카이오폴리스는 그 이익으로 비록 적이기는 하나 전쟁 때문에 소금을 만들어도 마늘 농사를 지어도 팔 곳이 없는 한 메가라 사람이 어린 딸 둘을 데리고 와서 돼지라며 팔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어린 두 딸을 사 주어, 그 메가라 사람에게는 먹여야 하는 입도 덜게 해 주고 그 딸들은 딸들대로 먹고 자랄 수 있도록 해 주는 반면, 도시를 대표하는 사절로 도시의 공익을 추구해야 하는 라마코스의 아들은 중무장을 하고 전장에 가는 수고 뿐만 아니라 전투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도 피하는 이익을 챙긴 데에 더해 아무도 그가 도시를 위해 무엇하고 지내는지 모르는 이방인의 도시 엑바타나로 가서 3드라크메의 일당까지 챙기며 얻는 이익을 오롯이 그 혼자만 차지하는, 이 둘의 모순을 보는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관객들이 디카이오폴리스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은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돌보는 도시민의 행동에 대해 도시가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겠지요. 도시에서 살며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돌보는 일이 잘 살아 보려는 노력으로 도시민들에게 용납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좋은 것은 자기가 다 가지려는 탐욕의 악덕으로 낙인 찍힐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공익을 위한다는 가면을 쓰고, 그래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돌볼 시간에 공익을 위해 일해 공익을 가져다 줄 것이므로 그에 대한 보상과 대가로 도시가 주는 수당까지 받으면서, 게다가 공익을 거두기 위해 필요할 것이라며 주는 권력까지 동원해, 도시가 바라는 공익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만을 돌본다면, 그것은 단순히 디카이오폴리스와 같은 한 시민이 가진 악덕의 발로 정도가 아니라, 도시민을 속여 도시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바꿈으로써 도시를 피폐하게 만드는 도시의 반역자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더구나 사실은 전쟁을 통해 용감한 자신을 과시하고 아울러 승리자에게 가는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쥐어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돌보면서도 마치 도시의 번영을 해치려는 다른 도시의 시도로부터 도시의 번영을 지키기 위한 다른 대안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걸핏하면 전쟁 불사를 외치고 나오는 라마코스와 같은 사람이, 다시 말해 디카이오폴리스의 눈에 그가 쓴 투구의 깃털과 그가 든 방패의 고르고가 바로 그의 과시와 탐욕으로 보이는18 라마코스와 같은 도시민이, 그 전쟁으로 도시민을 죽음으로 내몰고, 생산과 교역이 중단되어 도시의 번영은커녕 도시민과 도시의 살림이 피폐해지도록 한다면, 라마코스와 같은 한 시민이 가진 악덕의 발로 정도가 아니라, 도시민을 속여 도시의 번영을 자신의 번영으로 바꿈으로써 도시를 패망시키는 도시의 적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트리가이오스는 도시를 전쟁으로 몰고가는 라마코스 같은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자신이 쇠똥구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헤르메스의 도움으로 돌무더기에 묻혔던 평화와 축제와 풍요를 파내어 아테나이로 돌아온 다음, 헤르메스가 가르쳐 준 대로 먼저 축제를 민회로 보내는 한편, 디오뉘소스 극장의 무대 위에 평화를 모실 제단을 만들어 도시민이 모두 유순한 양을 닮아 온순해지고, 다른 도시들에 대해서도 상냥해지도록 양을 제물로 삼아 평화를 도시에 안치시키고, 도시가 평화롭고 민회가 축제를 열 수 있도록 하는 등, 그가 도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부터 모두 처리한 다음에야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돌보기 위해 헤르메스가 정해 준 신부 풍요와의 결혼식을 올리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앞둔 트뤼가이오스는, 도시가 염려스러워 관객들과 결혼식에 오는 하객들에게 평화를 다시 돌구덩이에 파묻으려는 라마코스와 같은 사람과, 정말 도시의 안전이 위협을 받을 때조차 그저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돌보려고 방패를 숲속에 던져 버리듯 평화를 돌구덩이 던져 버릴 클레오뉘모스와 같은 사람을 상기시키고, 그들과 같은 사람들의 출현을 경계토록 하기 위해, 결혼식을 알리는 서곡을 부를 두 소년으로, 하나는 전쟁을 하고 싶어 하다가 전쟁 뒤에는 눈물을 흘리는 전사 라마코스의 아들19을, 그리고 또 하나는 뚱뚱한 몸으로 전장에 끌려나가 숲속에 방패를 던지고 도망쳐 목숨을 구한 신중한 사람20 클레오뉘모스의 아들21을 골라,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아버지가 도시에 무슨 짓을 했는지 노래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트뤼가아오스가 비록 하늘에서 신들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신들의 심부름꾼 헤르메스라도 만나 얻은 내공 덕분으로, 신탁장수 히에로클레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완력을 더해 도시민이 도시에 대해 할 바를 신탁처럼 말한 것이지요. "네 하는 짓을 알라!".
10.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제 본격적인 화제로 옮겨가기 위해 드리는 부탁입니다만, 여러분 가운데 다른 도시에 아테나이를 대표하는 사절로 평생에 한 번이라도 다녀오신 분이 계시면 손을 한번 높이 들어 봐 주십시요. 아무도 없으시다고요? 디카이오폴리스도 자기 주변 사람들 가운데는 마릴라데스처럼 현명한 활동가임에도 백발이 성성하도록 한 번도 사절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사람들만 있다며22 왜 그러냐고 따졌지만, 놀랍습니다, 여기서도 한 분도 없으시다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며칠 전만 해도 나는 새도 떨어트리던 아뉘토스와, 어린 나이에도 클레온과 대적하던 저 아리스토파네스를 소크라테스를 죽게 했다고 오늘 이 재판정에 세우고 아뉘토스와 제게 죽음을 줄 수도 있는 어느 왕도 부럽지 않은 권세를 부리는 분들인데23, 고까짓 다른 도시의 사절 한 번 다녀오지 못했다니 믿어지지가 않네요. 정말 이상합니다. 여러분은 아테나이를 위해 아테나이의 최고 권력자였던 아뉘토스나 아테나이 최고의 희극시인인 저 아리스토파네스를 충분히 잘 다룰 수 있다고 인정받아 3오볼로스의 일당까지 받으며 재판관으로서 이 재판정에 나오신 분들인데, 왜 여러분에게는 라마코스의 아들처럼 지금 여러분이 받는 일당보다 여섯 배나 많은 3드라크메24의 수당을 받으며 덤으로 새로운 문물과 세상을 구경하면서 아테나이를 대표하는 사절로서 다른 도시로 가서 아테나이를 위해 다른 도시의 최고 지도자를 충분히 잘 다룰 기회가 없었을까요? 디카이오폴리스의 똑같은 질문에 라마코스의 대답은 장군이 된 그나 사절이 된 그들이 모두 선출, 곧 선거로 뽑혔다는 것이었습니다.25 물론 마릴라데스나 여러분은 한 번도 선거로 뽑히지 못했겠지요. 그렇다면 재판관으로 뽑힌 것이 처음인 분 손 한번 들어 봐 주세요. 오 제법 되네요. 그렇지만 손을 든 분들은 모두 젊은 분들이시군요. 백발이 성성하신 분들은 모두 여러 번 뽑혀 보셨단 말이군요. 그렇다면 재판관으로는 여러 번 뽑혔던 분들이 장군이나 사절로는 왜 한 번도 뽑히지 못했을까요? 아! 재판관은 추첨 기계가 뽑고, 장군이나 사절들은 사람들이 투표로 뽑는다고요?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요? 아! 기계에게 뽑힐려고 오만하게 기계를 욱박질러 겁을 주거나 교활하게 기계 앞에서 훌륭한 사람인 채 아양 떨 필요가 없는 것이, 기계는 기계한테 이익이 될 사람이나 그 일을 잘 할 사람을 뽑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 하나 골라 뽑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 필로클레온처럼 재판에 중독이 걸릴 만큼 여러 번 뽑히기도 하는 것이겠고, 사람들에게 뽑힐려고 오만하게 사람들을 욱박질러 겁을 주거나 교활하게 사람들 앞에서 훌륭한 사람인 채 아양 떨 필요가 있는 것은 사람은 그 일을 잘 할 사람보다는 자기에게 이익이 될 사람을 골라 뽑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 페리클레스처럼 내리닫이로 열여덟 번을 장군에 뽑히기도 하는군요. 아! 이제 알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기를 쓰고 그렇게 멸사봉공하는 훌륭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하는지 말입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게 좋으면 조용히 그렇게 살면 되지 일부러 사람들 앞에 나서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자신은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돌보기보다는 남들을 그리고 도시를 위하고 돌보며 살기를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니는지 말입니다. 앞에서 먼저 오만과 탐욕의 화신들이 어떤 가면을 쓰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지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들에게 뽑히고 싶은 사람들도 자기보다는 남들을 그리고 도시를 위한다고 나서는 점에서는 그들 오만과 탐욕의 화신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과연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남들을 위하고 도시를 위하는 것이 도시에 사는 도시민의 최고 덕목인지 궁금해집니다. 한결같이 모두 남들을 그리고 도시를 위한다고 나서니 말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며 도시를 이루는 것이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돌보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남들을 위하고 도시를 위해서는 아닐 텐데 어떻게 해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돌보는 것 대신 남들을 위하고 도시를 위하는 것이 도시민의 최고 덕목인 것처럼 되었을까요? 혹시 그것이 바로 도시의 정의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10.7. 테세우스가 아테나이라는 도시를 세우기 훨씬 이전에도 아티케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는 것은 알겠고, 누가 왜 맨 처음 사람들에게 아티케에 모여 살자고 했는지는 알 수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지만, 지금의 아테나이를 보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지요. 테세우스가 아테나이라는 도시를 처음 열었을 때,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아테나이로 오라고 했지26, 다른 아테나이 시민을 위하고 아테나이를 위해 살 사람들이면 아테나이로 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 시민의 조건을 부모가 모두 아테나이 시민인 경우로 엄격히 제한하며 테세우스가 연 도시를 닫아 버렸을 때도27, 다른 아테나이 시민을 위하고 아테나이를 위해 살 사람만 아테나이 시민이 될 수 있다고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클레오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이 아르기누사이 해전에 참전한 노예들에게 시민권을 주었을 때도28 그런 조건을 부과하지 않았던 걸 보면, 그들의 참전은 다른 도시민을 위하고 도시를 위한 도시민으로서 최고의 덕목을 보인 행동이었다기보다 도시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도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행동이었고, 도시는 자유 시민과 똑같은 의무를 다한 그들에게도 시민권을 줌으로써 보상한 것이었지요. 이렇게 보면 도시민의 최고의 덕목은 자기를 위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에 앞서 다른 도시민이나 도시의 이익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에 앞서 도시가 도시민에게 부과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클레오폰으로서야 몇 차례의 추가 참전 뒤로 시민권 부여 시점을 유예하는 것이 병력 확보를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한 번 약속한 것을 뒤집을 수 없었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의 시민권 부여 결의는, 도시민만 도시가 부과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역시 도시민에게 약속한 도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지적하고 있었지요. 다시 말해 도시민뿐만 아니라 도시도 도시와 도시민을 위한 의무가 있으며, 도시나 도시민 모두가 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나 도시민이 부과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다른 도시민이나 도시의 이익을 위한다는 덕목에 비해 그다지 높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은 대다수 도시민이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도시가 부과하는 의무를 이행하기 때문에 특별히 내세울 만한 덕목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고, 반면에 자신을 위하고 자기를 돌보는 것을 뒤로 하고 그보다 도시를 위하고 도시민을 돌보는 것을 앞세우는 행동은 도시가 그렇게 하라고 한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특출한 사람들만이, 그것도 도시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도시를 위하고 도시민을 돌보는 것이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아주 돋보이는 최고의 덕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겠지요.
10.8. 만일 테세우스가 자기보다 먼저 남을 위하고 도시를 위하는 것을 아테나이 시민이 되는 조건, 즉 아테나이 시민의 의무로 삼았었더라면, 지금 우리 아테나이는 솔론이 우리에게 그토록 말해 주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좋은 아틀란티스29가 되어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아테나이가 그 좋은 아틀란티스로 되기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먼저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고 돌보라는 소크라테스조차 무엇보다 먼저 도시를 위하고 남들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영혼이나 돌본다며 쫓겨나,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텅 빈 도시로 되어 있거나, 제우스의 노여움으로 바다 속으로 잠겨 없어지고 말았던 오만과 탐욕의 나쁜 아틀란티스30가 되어 아틀란티스처럼 사라지고 없을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해 도시민을 위하고 도시민을 돌보는 일은 같은 도시민이 아니라 모름지기 도시가 맡아 할 일이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도시에 모여 살도록 하는 존재 이유일 것이었습니다. 도시민을 돌보고 위하는 것이야말로 도시민이 도시를 이룰 때 도시에 부과했던 도시의 의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도시가 도시민을 돌보고 위한다는 말은, 일찌기 그 도시가 이루어진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짜여진 법과 제도를 도시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함과 동시에 도시 전체가 번영을 이루도록 운용한다는 말이고, 그런 법과 제도의 운용이 바로 도시가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뽑아 그 운용을 위임한 도시의 일을 맡은 사람들의 일이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위하고 자기를 돌보는 일을 팽개친 채 도시가 해야 할 일을 먼저 나서 하는 사람들을 최고의 덕목을 지닌 사람으로 칭송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골라 도시의 일을 맡겨야 할 것이고, 그리고 또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고 살찌우는 일에만 매달려 도시의 일에는 오관불언할 것이 아니라, 우리 시인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과연 도시가 도시민을 위하고 도시민을 잘 돌보고 있는지 지켜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테세우스 이래 솔론을 빼고는31 단 한 번도 자신을 돌보기보다 오로지 도시와 도시민을 위해 일한 사람을 가져 본 적이 없었거니와, 몇 마디 말과 몇 가지 행적으로 천 년을 기다려 하나 얻는 사람일 것이라 믿고 도시의 일을 맡겼다가 그런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속아 왔었기 때문이지요. 솔론의 예에서 보았듯이 설사 도시가 천 년을 기다려 솔론과 같은 사람을 만나 도시의 일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긴다 한들 솔론이 도시와 도시민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 전통과 관습의 범위 안에서 법과 제도를 고치거나 새로 만들어 지나치게 치우친 돈과 권력을 도시민 사이에 균형 있게 나누고, 나누어 받은 자들이나 나누어 낸 자들 모두에게 당장은 불만스럽더라도 우선 십 년 동안만이라도 고치지 말고 그대로 운용하면 새로운 질서가 잡힐 것이라 당부한 일 정도였음에도, 솔론이 아테나이를 떠나자마자 그 법과 제도는 힘을 잃기 시작하여, 솔론이 당부한 십 년의 반도 지나지 않은 네 해를 겨우 넘기고 나서는 아르곤을 선출할 수 없었을 정도로 도시가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지고 말지 않았습니까? 왜 사람들은 솔론이 진정 도시와 도시민을 위하여 일할 것을 믿고 그에게 도시의 개혁을 일임해 주었음에도, 그리고 실제 솔론이 왕이 될 수도 있는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만인의 기대대로 도시민을 위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만든 솔론의 법과 그의 당부를 따르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사람들이 솔론의 법과 제도가 공평하지 않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솔론의 법으로는 도시가 도시민 사이의 불평등, 아무래도 권력의 불평등보다는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한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솔론이 부채를 탕감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감지한 측근들이 빚을 내어 땅을 산 다음 그 빚의 대부분을 탕감 받고 남은 빚 정도야 몇 해의 수확으로 갚아 버리는 것을 본 사람들의 의혹이 솔론의 개혁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도록 촉발한 탓도 있었겠지만, 개혁의 수혜자들은 수혜자들대로 얻는 것이 미흡하다고, 기득권자들은 기득권자들대로 잃는 것이 과다하다고 보고, 솔론의 개혁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헬라스 최고의 현인 솔론이 스스로 공평하다고 믿고 처리한 개혁이 사람들에게 불공평하다고 여지없이 버려지다니요? 천 년에 한 번 오는 사람이 전권을 위임 받아 도시를 위해 한 일도 불공평하다고 버리니, 도대체 공평하다는 것이 무엇이며 솔론이 어떻게 했으면, 그리고 어떤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었으면 모두가 공평하다고 인정하고 솔론의 뜻에 따랐을까요?
10.9. 그런데 말입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참전 노예들에 대한 시민권 부여 문제로 도시가 왁자지끌했을 때, 제가 여러분께 도시민 간에 도시민으로서의 권리 행사에 대한 불평등의 문제를 상기시켜 드렸던 사실을 기억하시고 계신지요? 기억이 가물가물한 분들을 위해 잠시 그때 사정을 말씀드리면, 제가 참전 노예들에게 시민권을 주기로 한 민회의 결의32를 칭송하며, 아울러 예전 페이산드로스의 400인 과두정을 뒤엎고 다시 민주정을 회복했을 때 아테나이가 과두정 지도부를 처벌하면서 그들과 부화뇌동했던 사람들로부터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하여 계속 그들을 불명예 시민으로 남겨 놓고 있는 것에 대해, 그들에게도 시민권을 돌려주자고 하면서, 차제에 다시는 도시 안에서 누구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시민의 권리에 대한 불평등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제가 나섰던 일 말입니다.33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며 과오를 반성하고 복권의 날만 기다리고 지내는 여러분의 이웃이고 친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들의 조상 대대로 그리고 그들 역시 도시가 부를 때마다 여러분과 함께 수시로 전쟁에 나서 목숨을 걸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 참전한 노예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는 마당에, 그들의 간청을 외면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태도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특히 우리의 도시가 파도의 품속34에서 흔들리고 있는 지금, 노여움을 풀고 그들을 용서하고 복권시켜 누구나 다 같은 동포로 동등한 시민으로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지요. 우리가 시민권을 가지고 우쭐대고 뻐기기만 하고 그들을 포용하여 박탈한 권리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들이 불평등한 시민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노예에서 시민으로 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여러분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해 주지 않는다면, 후대 사람들도 우리가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하고 불공평했다고 생각할 것이라도 했습니다.35 지금이야 십 수 년 전의 일이니 아직 여러분이 후대 사람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30인 과두정에서 그들과 함께 아테나이 시민들을 해치는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부역했던 사실에 대해 반성하고 민주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사면하고 그들이 스파르테에 진 빚까지 갚아 주며 곧바로 그들이 동등한 시민으로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해 준 것에 대해 지금도 뿌듯하게 생각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 역시 아테나이에 더불어 같이 사는 이웃이고 친지들인데 아테나이 시민으로서의 의무만 이행하게 하고 권리를 빼앗아 노예처럼 살게 하는, 다시 말해 같은 도시 안에서 노예도 아니면서 불평등을 감수해야 하는 열등한 시민을 만드는 일을 막았다는 뿌듯함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니 누가 민주정 복고와 함께 과두정 정적들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전개할 경우 불러올 스파르테의 내정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 사면으로 내분을 불식하고 빚도 갚아 버렸던 것이라고 그 뿌듯함에 초를 친들, 전쟁에 져 승자의 간섭을 거부할 힘이 없는 도시가 승자의 간섭도 배제하고 내부의 결속도 다지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면, 그리고 그 결과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면, 그 자체로 한 도시가 자부심을 가지기 충분한 훌륭한 정치 행위 아니겠습니까? 도시가 도시민의 의무 이행으로 안전하고 원활한 공동체로 번영하면서, 도시민의 권리를 지키지 못해 도시민 사이에 불평등한 관계가 조성되고, 그 불평등이 도시의 불화를 조장한다면 도시가 과연 안전하고 원활한 공동체로 번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도시가 번성하고 그런 도시민이 행복할 수 없다면 이제 도시가 도시민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이후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더 이상 도시민 사이에 시민으로서의 권리에 대한 불평등까지도 사라져 의무에 이어 권리의 평등을 재확인할 수 있었지요.
10.10. 그렇다면 말입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솔론 시대36의 사람들에게는 왜 이런 대사면과 같은 평등의 대화합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솔론의 시대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테세우스의 민주적 귀족정이 오백 년 동안 세습적 과두정으로 변모하면서 소수의 도시민이 아테나이의 권력과 부를 과점하고 또 세습하면서 깊어진 부와 권력의 불평등 때문에 도시가 불복과 불화로 도시민 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해 보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불복과 불화로 도시민 사이의 충돌도 불사할 사람들은 도시가 권력의 불평등에 우선하여 부의 불평등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몰수와 재분배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소하기를 바랐었지요. 그리고 솔론 시대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솔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가진 게 없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한번 도시를 뒤엎고 죽겠다고 나서기 전에, 솔론으로 하여금 시민 상잔相殘을 막도록 도시 일 전부를 맡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도시민 사이의 피를 부를 충돌을 피했다는 사실은 아테나이 사람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바꾸어 말해 그들의 도시가 모든 도시민이 모두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솔론은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극단적 방법 대신 모두가 새로운 도시 구조 아래, 다시 말해 자신이 새로 만든 법과 제도 아래, 바꾸어 말해 도시에 제시된 새로운 질서 아래, 도시민이 어떻게 새롭게 적응하여 살도록 도시를 개혁했지만, 솔론이 어떻게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나에 정신이 팔렸던 가진 자나 없는 자 모두 새로운 세상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새로운 법과 제도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진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도 다스리기 힘든 판에 이에 더해 못 가진 사람들마져 어디에 그런 오만과 탐욕이 숨어 있었는지 가진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오만과 빚의 탕감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탐욕이 불거져 나와, 평등이니 불평등이니 법이니 제도니 따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가진 자나 없는 자 모두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도시를 도시답게 하는 일이라는 도시를 위한 생각, 즉 도시를 모든 도시민이 서로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가는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도시를 위한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하나같이 각자 자기의 이익과 억울함만 따지고 있었으니 어찌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탕평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부의 불평등이 일시적인 정치적 과오로 인한 것도 아니라면 부의 대탕평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솔론의 개혁은 어떤 부류의 아테나이 시민이 가진 권력이나 재산이 많다거나 신분이 높아 보인다고 해서 그것들을 빼앗거나, 그것들이 없거나 모자라게 보인다 해서 빼앗았던 것들을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도시민 간의 심각한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란 도시의 적폐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시의 질서 안에서 모든 시민이 함께 도시를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을 자유민이라는 평등한 신분으로 도시의 일에 참여하여 도시가 도시민의 도시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불평등하게 다루는 것을 막아 각자의 능력과 노력으로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고, 그 질서가 보장하는 도시민 사이의 평등을 지켜 가도록 한 것이었지만, 아테나이 사람들 대부분이 도시의 새로운 평등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오백 년이 넘는 동안의 적폐로 입었던 손상 때문에 노예로 전락하여 도시민으로서 그 새로운 질서의 구성원으로 포함될 수조차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최소한 도시의 자유민으로서 스스로를 돌보고 자기를 위해 능력과 노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빚을 탕감하고 신분을 되찾아 준 것을37 가지고 그것이 마치 개혁의 전부인 양 받아들여면서, 빚을 못 받게 된 사람들은 그 때문에 가난해졌다고 앙앙불락이고 빚 탕감 받은 사람들은 부자들의 넘치는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 주지 않는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불행하게도 솔론의 개혁은 새로운 법과 제도로 제시된 새로운 평등 질서로 자리 잡지 못하고, 누구에게나 불평등한 조치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솔론 시대의 사람들은 솔론이 만든 법과 제도가 주는 평등과 대화합을 도시의 새로운 질서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가진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에 못지 않은 못 가진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도 도시의 질서를 무너트린다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10.11. 그리고 솔론의 법과 제도로 아테나이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던 정치 지도자들 그 누구도 도시를 이끌지 못하게 되어, 아테나이는 결국 아테나이 청년들의 몽둥이와 테켈리아 용병들의 칼에 눌려 도시를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내어 주고 말았고, 도시민은 먹고 살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복에 겨워 반 백 년이 지나도록 평등이니, 자유니, 도시의 의무니, 도시민의 권리니, 뭐니 뭐니 따위의 말을 잃고 살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참주가 되려고 모반하거나 또 그런 사람에게 동조하면 그런 사람과 그 집안이 모두 불명예를 지도록 한 도시에 대한 의무, 그것을 명한 도시의 관습과 전통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아테나이 사람들이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38 솔론이 직접 거리로 나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쿠데타를 막아 보려 동참을 호소할 때도 모른 척했고, 마지막으로 솔론이 무력 진압을 위해 집 앞에 무기를 내 놓고 동조자를 모을 때도 본척만척했기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가 되려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고 변명할 건더기도 없었으므로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는 아테나이 관습과 전통에 따라 당연히 불명예 처분을 받아야 했었습니다. 실제로도 참주 아래의 아테나이 사람들은 불명에 처분을 받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도시에 대한 무슨 일이든 기술을 익혀 자립하라며 노예로 전락한 시민을 자유민으로 돌이켜 도시의 일까지 맡아 보게 해 준 솔론의 법과 제도는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나누어 주지 않는다고 도시가 도시민을 불평등하게 대한다며 미련없이 버렸던 사람들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말 한마디가 바로 도시의 법과 제도이며 도시의 질서가 되었을 때는, 참주가 몽둥이와 칼로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솔론이 예측한 대로 평등한 아테나이의 시민이 아니라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한낱 노예에 지나지 않는 참주의 마음에 들 자유만 가진 자유민으로 스스로의 손발로 황무지를 개척하고 찰흙으로 독을 지으며 불평 한마디 없이 참주 덕에 일용할 양식을 얻었다는 고마움으로 살아갔습니다. 아니 몽둥이와 칼로 이룬 참주의 법과 제도와 참주의 질서 아래 살며 크로노스의 시대39라거나 황금의 시대라며 참주를 칭송하고 살아갔습니다. 오백여 년의 질서가 그것을 지켜도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로 인해 폭력적으로 무너지려는 것을 막아 보려 한 솔론의 개혁이 가진 것의 과소가 바로 불평등이니 남의 재산을 빼앗는 폭력으로라도 도시에 평등을 가져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몽둥이와 칼이라는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폭력으로 제압했던 것이지요. 폭력으로 새로운 질서를, 다시 말해 새로운 법과 제도를 도시민들에게 지키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분명 놀라운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참주가 된 다음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그의 질서에 순순히 따르도록 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할 필요조차 없었을 만큼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은 퀼론 때의40 아테나이 사람들이 아니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솔론을 버렸고,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도시의 참주로 모셨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불명예 처분하고 참주의 자유 노예 시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아테나이는 참주의 도시가 되었고, 아테나이 시민은 참주의 시민이 되었으므로, 참주는 그의 시민을 다스리기 위해 손에 든 몽둥이와 칼을 잘 볼 수 있게 드러내기만 하고 대신 자상한 주인의 말로 그의 노예 시민들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솔론은 아테나이가 아테나이 사람들 모두의 도시이므로 아테나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테나이에 대해 져야 할 의무와 아테나이에 사는 사람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다할 수 있을 능력을 스스로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한 마디로 말해 도시가 아테나이 사람이라면 모두를 평등한 자유 시민이도록 해야지 절대로 도시나 같은 시민의 노예로 떨어지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아테나이 사람이면 누구나가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도시의 일에 참여하는 새로운 법과 제도로 아테나이가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도록 새 길을 열었던 것이라면, 반면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나이 사람들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 아테나이에 져야 할 의무와 아테나이에 사는 사람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데다가, 이들 소수는, 그들의 능력에 대한 오만과 그 능력으로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에 절어, 늘상 도시에 질 의무와 도시에 대한 권리를 다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을 억누르고 부려 더욱 더 자기를 위하고 돌보려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들 소수를 억누르고 다수를 북돋우는 일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마디로 말해 주인이 노예를 보살피듯 참주인 권력자가 도시민 모두를 보살피고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테나이 사람이면 누구나가 권력자인 참주가 보살피고 돌보아 주는 대로 살아가도록 해 줄 수 있는 참주에게41 법과 제도를 일임하는42 공동체가 되도록 새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솔론의 실패와는 달리 세 번만에 무력으로 도시를 장악하고 진정한 참주가 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도주한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걷지 않던 세금도 거두며 일임 받은 법과 제도로 스스로가 바로 도시가 되어 도시민을 보살피고 돌보아 주는 아테나이라는 공동체의 성공한 지도자가 되었고, 그 공로에 대한 보상이었는지 그가 죽고 아들들이 권력을 잡아 힙피아스가 새로운 참주가 되어도 누구 하나 아니라고 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도 아버지의 법과 제도를 그대로 따라 했지요.43 조심스레 아버지가 하던 대로 했던 처음 십여 년은 참주 노릇이 아버지에 버금갔지만, 힙피아스의 참주 노릇에 자신이 붙어 가자 참주의 주위가 모두 알랑쇠들로 채워졌고, 참주의 권력을 덩달아 누리던 참주의 동생들이 오만해지고 방탕해졌습니다. 도시의 재물과 권력을 모두 가진 마당에 더 욕심부릴 까닭이 없었으니 탐욕은 아니고,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오만과 모든 것을 다 즐기려는 방탕이 탐욕의 자리에 들어 앉았지요. 아버지의 성공을 보장했던 법과 제도는 그대로인데 그 법과 제도에 기대어 도시를 이끄는 권력자의 태도가 달라지니 아들들의 참주 노릇이 아버지의 참주 노릇과 달라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아들 하나가 이복 동생의 오만과 방탕 때문에 죽임을 당하자 복수를 바라는 참주는 포악해졌고, 모든 힘을 다 가진 참주의 포악은 도시를 공포로 몰아 넣었습니다.44 주인이 자기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는 노예처럼 도시민이 참주에게 공포를 느끼자, 지나간 세월이 모두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민을 보살피고 돌보는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참주의 선의善意 아래서 더없이 평등하게 집행되었었다고 느꼈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법 집행도 그것이 순종하는 노예에게 주인이 보이는 공정함에 지나지 않았고, 그렇게 순종하여 먹고 살았다며 크노소스의 시대니 황금 시대니 했던 것도 주인의 권세에 덩달아 촐랑거리는 노예처럼 참주의 화려함에 알랑거리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때에도 불복하면 혹독한 응징이 따랐지만 동료 노예의 처벌을 외면하는 노예처럼 짐짓 모른 체하고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는 사실이 폐부를 찌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참주의 아들이 보이는 불복하는 노예에 대한 응징은 조금 많이 화가 난 성질 고약한 주인의 처벌일 뿐 본질적으로는 노예의 불복을 응징하는 처벌의 혹독함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경우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도시민의 불복을 응징하여 복수하려는 참주가 포악해지니 법과 제도는 간 곳 없고 오로지 참주의 기분에 따라 좌충우돌 종잡을 수 없어 공포도 그런 공포가 따로 없었고, 그런 공포 속에서 아테나이 시민들은 자기들이 도시의 도시민이 아니라 참주라는 주인을 모신 도시의 노예라는 사실을 보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렇지만 떨기만 할 뿐 이미 아테나이 사람들은 참주에게 대들 기개를 잃고 산 지가 오래되어 봉기를 일으킬 용기가 없었고, 이런 아테나이의 분위기를 아는 망명 귀족들의 신탁神託 공작工作45으로 스파르테가 나서고 나서야 겨우 참주를 내칠 수 있었지요. 그리고 다시 그 망명 집단들의 고질적인 권력에 대한 집착이 귀족정 복고를 위해 스파르테의 내정 간섭까지 불러들였지만, 퀼론 때의 아테나이 사람들이 농기구를 들고 퀼론과 메가라 군사들을 아크로폴리스에서 내쳤듯이 드디어 퀼론 때의 아테나이 사람들처럼 봉기하여 이사고라스와 스파르테의 클레오메네스를 아크로폴리스에서 내쫓고 망명 중이던 클레이스테네스를 불러와, 얼마 전 솔론에게 아테나이의 개혁을 맡겼듯 클레이스테네스에게 새로운 아테나이를 만드는 일을 맡겼습니다.
10.1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다행히 클레이스테네스는 솔론의 개혁이 무엇이었는지도 왜 솔론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솔론의 점진적이고 중용적 개혁이 민주적인 참주46라는 극단적인 반동을 불러왔었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민주적이라는 핑계로 또 다른 극단적인 반동이 먹혀들지 않도록 아예 아테나이의 법과 제도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아테나이는 테세우스의 아테나이와 솔론의 아테나이에서 시민들을 그들이 맡는 일이나 그들이 가진 재산 정도로 구분하던 도시의 전통적 사회 구조를 허물어 없애고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이 같은 자유민인 아테나이 시민이라는 단일 구조로 바꾸었습니다. 또 하나 새로운 아테나이는 테세우스 이래 유지되어 왔던 네 개의 전통적인 혈연 부족 구조를 열 개의 지역 부족 구조로 바꿈으로써 혈연과 세습이라는 관습이 도시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분열과 불화의 촉매가 되어 도시민 각자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관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억누르는 것을 막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아테나이에서 더 이상 혈통이나 재산에 의해 권력이 세습되거나 주어지는 일은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새로운 제도가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자유민인 아테나이 시민이 되도록 하는 토대였다면, 아테나이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 대한 의무나 권리를 똑같이 지고 누리도록 한 새로운 제도들은 아테나이 사람들을 그런 도시민으로 우뚝 세운 뼈대였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제도가 바로 아테나이를 움직이는 열 명의 아르콘을 열 개의 지역 부족에서 한 명씩 모두 추첨으로 뽑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르콘을 이렇게 뽑았으니 나머지 관직이나 공무 담당자들은 어떻게 뽑았겠습니까? 모두 추첨이나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도시의 일을 맡아 보도록 했지요. 이것만으로도 모자라 그 관직의 임기를 모두 일 년으로 정했습니다. 이제 적어도 정치 권력에 관한 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권력의 불평등을 일으킬 권력의 오만과 권력에의 탐욕이 도시에서 자리 잡을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막은 것입니다. 그리고 참주가 자신의 권력의 안보를 위해 테살리아의 용병으로 자신의 호위대를 둔 것 이외에는 오랜 동안 도시의 안보를 위한 도시의 군사적 활동을 억제했던 까닭으로 허약해진 도시의 안보 능력을 키우고 도시의 위난에 도시의 역량을 집결하여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군사 제도도 새로 갖추었습니다. 군사적 능력을 갖춘 사람을 열 개의 지역 부락에서 한 명씩 주민들의 투표로 뽑아, 이 열 명을 장군strategos으로 삼아 군대를 조직하고 지휘하고 전쟁을 수행토록 했습니다. 투표를 한 것은 지역 주민들이 그들 가운데 군사적 능력을 갖춘 사람을 객관적으로 발굴하고 추대하여 전시에 그의 지휘를 믿고 따르도록 한 것이고, 임기를 일 년으로 정한 것도 군사적 능력을 검증한 결과를 수시로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무제한 중임을 허용한 것은 군사적 능력이 검증된 사람에게 도시의 안위를 맡긴다는 취지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장군들이 함께 전쟁을 수행해야 할 경우 최고 지휘관은 따로 민회에서 뽑았습니다. 이렇게 아테나이는 민주적인 정치 체제에 이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지키기 위한 국방에서도 이 같은 민주적인 토대와 뼈대가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제안한 이 전대미문의, 헬라스 최초의, 아니 이 세상 최초의 민주정 개혁은 반 세기를 끌어온 참주정이라는 반동의 결과로, 그제서야 솔론의 개혁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말해 도시민 사이의 평등이 무슨 의미인지, 바꾸어 말해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아테나이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시행되었습니다. 솔론이 그의 개혁 법과 제도를 손대지 말고 백 년만 시행해 보라47고 한 그 백 년이 다 되기도 전에 솔론의 개혁을 완성하는 민주정을 위한 법과 제도가48 아테나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참주로 모시면서 아테나이의 관습과 전통에 따라 스스로 불명예 시민이 되었던 아테나이 사람들이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 개혁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사면해 주었고, 그래서 아테나이 사람들은 민주정 체제 아래 새로운 아테나이의 새로운 시민이 되었습니다. 민주정이 아테나이 사람들을 명예로운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아테나이는 더 이상 불명예 시민이 없는 도시가 되었지요.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쓰면 모두 동등한 시민이 되는 테세우스 이래의 관습과 전통을 이어받은 민주정의 법과 제도49로 헬라스에서 아니 세계 최초로 아테나이라는 도시에서 아테나이 시민 사이에 도시에 대한 의무와 권리의 평등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모든 도시민이 평등한 자유민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관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도시의 정의 하나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정말 자랑스럽게도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도시민 모두가 도시나 다른 도시민에 대한 의무나 권리를 동등하게 지고 누리는 가장 기본적인 도시의 정의 하나를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세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는 더 이상 부모가 권력을 쥐고 나오는 아이를 낳을 수도, 오만과 탐욕이 권력의 불평등을 낳을 수도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10.13. 이렇게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 체제로 아테나이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기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세상에 처음 태어난 그 민주정이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 주지도 않았고, 그래서 전혀 가진 재산이 모두 평등하게 되지 않았는데도, 아테나이 사람들은 클레이스테네스가 내미는 권력 구조와 도시민의 의무와 권리에 대한 불평등의 해소에만 만족하고, 아무도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라고 대들지 않았습니다. 앞서 솔론의 시대, 극심한 부의 불평등이 자유민을 가진 자들에게 예속시키고, 심지어 자유를 잃어 노예로 전락시키던 때, 부의 불평등을 폭력으로 해소하려는 욕구가 도시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을 때, 부의 불평등만큼이나 불평등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부의 불평등을 더욱 더 가중시켰던 권력의 불평등과 도시민의 의무와 권리의 불평등을 솔론이 나서 조정했을 때, 바로 그때 아테나이 사람들은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나누어 주지 않는다고, 한마디로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는다고 솔론에게 대들면서, 권력 구조나 의무와 권리의 불평등 해소에 공을 들인 솔론의 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더니, 혹시나 해서 솔론을 버리고 받들어 모신 페이시스트라토스 역시 부자들 털어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는데도, 군소리 없이 그저 참주가 하라는 대로 할 뿐 한번 대들지도 못하더니, 참주를 내몰고 민주정을 세운 클레이스테네스에게는 아예 그 누구도 도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라고 대들지 않았습니다. 중용이나 좋아하는 솔론은 애시당초 글렀었고, 그렇다면 하고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참주로 받아들인 덕분에 참주가 돌무더기 산자락도 개척하라 하고, 농사 자금도 꾸어 주고, 도자기도 구워 포도주나 올리브 기름을 담아 팔라 하고, 그렇게 하라고 하는 대로 했더니 모두 부자가 되어 부의 불평등이 참주 때 이미 해소되어 있었기 때문이던가요? 그렇다면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민의 의무와 권리도 참주의 뜻에 맡긴 덕분에, 비록 사람들이 참주를 받아들인 암묵적인 기대대로 참주가 부자들의 부를 털고 그 부를 나누어준 건 아니었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도주한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또 없던 세금을 거두어 모두 도시를 위해 썼으니 털어서 나눈 거나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어찌 되었든, 부의 불평등이 해소되어 배 부르게 먹고 등 따스하게 자게 되었는데, 참주는 왜 내쫓고, 그리고 세운 민주정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좀 먹고 살만 해지니까 참주의 노예로 배 터지고 등 데어 죽는 것보다 얼고 굶어도 자유민으로 사는 게 더 낫겠다고 마음이 바뀌었던 건가요? 아니면 이번에도 참주 대신 민주정이 달아난 참주와 그 친구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또 새로 거둘 세금과 함께 도시를 위해 쓰면, 부의 불평등이 참주 때보다 더 많이 해소될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던가요? 아니면 이제 모든 아테나이의 도시민이 평등한 자유민으로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주관을 가지고 살 수 있고, 아울러 도시와 다른 도시민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동등하게 지고 누리는 기본적인 도시의 정의가 세워진 이상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이 도시에 불복과 불화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권력의 불평등이 자리 잡을 수 없게 된 이상 따라서 부의 불평등도 도시에서 더 이상 자리 잡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인가요?
10.1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 아시다시피 저는 희극 작가로서 한 평생을 도시의 평화를 위해 밖으로는 전쟁을 반대하고, 전통과 관습을 무시하는 교육으로 도시에 온갖 불화와 반목을 조장하는 것에 반대해 왔고, 도시민 사이의 평등을 위해 한편으로는 권력의 악용과 오남용으로 인한 권력의 불평등과, 위증과 간사한 말로 이루어지는 재판으로 권력이 도시민의 의무와 권리의 평등을 훼손하는 것에 반대했고, 다른 한편으로 도시민 사이의 부의 불평등과, 사악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이 재물을 얻을 평등한 기회를 빼앗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물론 희극적 처치 정도로 보였겠지만, 도시 사람들의 반이 넘는 여자들에게 남자들과 똑같은 도시민의 의무와 권리를 주지 않는 것에도 반대했습니다. 왜 그러고 살았을까요? 만일 우리의 도시에 평화가 가득하고, 권력이나 부의 불평등이 사라져 모든 도시민이 평등하게 살고, 도시민들이 부당한 재판으로 그들의 의무와 권리가 훼손당하는 고통이 없는 데도 제가 평생을 유령이 된 그런 것들에 대해 반대하며 살았겠습니까? 아테나이가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권력의 불평등이 도시라는 공동체의 구성원 간의 평등 가치를 해친다고 보고 권력을 독점하는 왕좌도 버린 테세우스 이후 칼로 권력을 독점한 참주 힙피아스에 이르기까지 쌓여온 적폐, 다시 말해 도시에서의 권력과 부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었기 때문일 텐데, 우리의 도시 아테네에 사는 제가 그런 불평등을 반대하는 연극을 만들어 여러분께 보여 드렸다는 것은, 그리고 그 연극들을 보고 여러분들이 박수치며 저와 함께 했다는 것은, 권력과 부의 불평등이 여전히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문제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모든 불평등을 해소할 것 같던 민주정이 아테나이를 그런 도시로 만들지 못했을까요?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저는 앞에서 이미 그것을 오만과 탐욕 때문이라고 제법 길게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만이 이유였다면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완전히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지만, 법과 제도로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을 막을 수 있다면, 소크라테스도 저도 오만과 탐욕을 버리라며 그렇게 어렵게 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이스테네스는 본색이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오로지 도시와 도시민만을 위한다는 가면을 쓰고 도시 일을 맡고, 그런 다음 귀찮기만한 그 가면을 내팽개치고 오만과 탐욕의 본색을 드러내어 본들 짧은 임기50가 차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권력의 평등을 깨는 일이 없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못 미더워서 재판을 제외한 도시 일의 대부분을 다수의 도시민이 직접 민회에 나가 투표로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법과 제도를 고치고 나서도 오만과 탐욕이 몽둥이와 칼을 들고 얼마나 쉽게 그 법과 제도를 훼손했는지, 그래서 불평등한 권력을 쥐고 도시가 공동체가 아니라 권력자의 소유로 바꾸었는지를 잘 아는 클레이스테네스는 참주에 빌붙어 잘 먹고 잘 살던 참주의 친구들이 다시 모여 정치 세력으로 나서자, 곧 바로 도편추방 제도를 만들어 그들을 도시에서 장시간 격리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서너 꺼풀의 보자기로 싸 놓았는데도 아테네에서 권력의 평등이 지켜지지 못했던 것은 무슨 까닭에서였을까요?
10.1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클레이스테네스의 새로운 아테나이가 세운 기본적인 도시의 정의, 다시 말해 도시민 간의 권력의 평등이 흔들린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어쩌면 클레이스테네스 자신이 파괴의 씨앗을 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본적인 도시의 정의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도시의 안전에서부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주는 군대를 양성하지 않았고, 도시의 안전을 지킬 자신이 없었던 아테나이 사람들은 민주정을 인정하지 않을 스파르테의 내정 간섭과 무력 시위가 두려워 페르시아의 도움을 청했고, 페르시아는 아테네의 조공을 원했고, 그 때문에 어긋난 동맹은 페르시아로 하여금 헬라스 전체의 조공을 원하게 했고, 이런 먼 사달을 제쳐 둔다 해도, 에우보이아 도망가 있던 전 참주 힙피아스의 반동에 줄을 대고 선 스파르테와의 전쟁이 먼저 터졌고, 전쟁이 터지자 아르콘보다 장군들strategos의 역활이 더 막중해졌고, 승전한 장군들이 도시민의 신임을 얻어 도시에 대한 발언권을 키워 나갔고,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팔아 겨우 도시민을 먹여 살리던 아테나이에 은광이 발견되어51 도시에 여유가 생기자 장군들은 더 큰 발언권과 영향력을 얻기 위해 계속 전쟁이 필요하던 차에 페르시아가 쳐들어왔고, 그리하여 세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치고 난 다음부터, 이제 전쟁은 더 이상 도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시의 부를 키우기 위한 제국주의적 팽창의 도구가 되어 헬라스의 다른 도시들을 위협하는 침략 전쟁으로 바뀌어 갔고, 침략 전쟁의 성공은 노획과 약탈과 보전금52의 수익으로 승전한 장군들의 권력과 재력을 키워 주었고, 그 수익을 도시민의 환심을 사는 데 쓰면서 도시민들의 견제가 아니라 호응을 받아 가며 권력과 부의 불평등을 확대시켜 나갔고, 잡고 있는 권력과 돈으로 민심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오만이 급기야 권력과 부를 독점하기 위해 아르콘들에게 남았던 마지막 권력인 재판권마져 빼앗아 시민들에게 나누어 준 뒤로는 재판으로 쉽사리 정적을 제거할 수 있어 전쟁이 있는 한 장군들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권력을 유지하는 한 부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권력과 부의 불평등의 극치인 독점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약삭빠른 장군들은 전쟁으로 번 돈을 도시와 도시민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고, 그런 돈들이 도시에 돌아 도시는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권력과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도시민 사이의 도시에 대한 의무와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한 헬라스 최초의 민주정이 도시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위해, 한마디로 말해 국방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장군들에게 열어 놓은 무제한 연임과 전쟁 수행에 필요한 권한 행사를 허용했는데53, 도시의 안전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그 전쟁을 도시민으로부터 승인 받기 위해 노획과 약탈과 보전금으로 돈을 벌어 도시민을 회유하고, 도시민은 도시민대로 돈이 생기니 전쟁을 용인하고, 그래서 아테나이에는 또 다시 권력과 부의 불평등이 도시민의 호응 속에 합법적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아이로니아를 아테나이가 몸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 사람들 그 누구도, 소크라테스조차도 예사롭게 중무장 보병으로 전장에 나갈 정도로 그런 전쟁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전리품의 부스러기를 주어 먹는 재미에 빠져 도시민 사이에 평등이 깨어지고 언제나처럼 권력과 부의 불평등이 도시의 외형은 호화롭게 치장했지만 공동체로서의 도시의 기반을 허물고 있는 것을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시에 시인이, 희극 작가가 왜 있겠습니까? 철학자들이 모두 체력 단련장 아니면 부자집 문간에서 서성이는 동안, 저만 혼자 열심히 디오뉘소스 극장을 찾는 여러분께 경종을 마구 울려 대었지만, 전리품으로 생긴 돈으로 공짜 구경을 하게 된 탓인지 여러분은 웃기만 했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아 아테나이에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의 영혼이 깃든 민주정을, 다시 말해 권력과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도시민 모두가 도시에 대한 의무와 권리가 평등한 공동체를 만드는 민주정을 제대로 수립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정은 추첨 기계와 투표에 맡기고, 전쟁은 오만과 탐욕에 가득찬 장군들에게 맡기고, 여러분은 전리품에 달린 부스러기를 받아 먹는 일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지요. 전쟁이, 아니 그 전쟁의 혼란 속에 권력과 부를 움켜지는 길을 찾은 오만과 탐욕이 클레이스테네스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세웠던 기본적인 도시의 정의가 자리 잡기도 전에 짓밟아 버렸던 것입니다.
10.16. 그렇지만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한두 해의 전쟁이 아니고54, 할아버지가 아직 어렸을 때 싸움에는 귀신 같다던 스파르테를 한번 물리쳐 본 이래, 페르시아가 쳐들어오고부터 시작한 전쟁을 상대를 바꾸어 가며 그의 장성한 손자가 아직도 전쟁을 치르고 있는 판에, 설사 그 전쟁에 이긴다 한들 그곳에 노획할 것들이며 약탈할 것들이며 보전금으로 받을 것들이 남아나 있었겠으며, 가진 권력에 더 보탤 권력이 또 있었겠습니까? 크세르크세스에게 두 번 유린 당했다고는 하나 사람들이 재물을 챙겨 달아난 텅빈 도시에 신전을 지키다 불에 탄 신들만 고생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55, 지금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보십시요. 누가 와서 무엇을 약탈해 가겠습니까? 아테나이가 이런 판인데 어느 도시를 털어 노획하고 약탈하고 보전금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수입 없는 전쟁이 길어지자 천년불패처럼 보이던 우리의 해군도 무너지기 시작했고, 싸움에 이겨도 수입이 없자 전쟁을 우리의 주머니를 털어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나마 우리의 주머니마져 털 것이 없자 이를 딱하게 여긴 처녀신이 자신의 황금 외투56를 벗어 줄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전쟁으로 부를 빼앗아 올 수는 있어도 전쟁이 부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왜 전쟁에 그토록 목을 매달고 살았을까요? 온 헬라스의 산들이 배를 만들 나무를 대느라 벌거벗었고57, 벌거벗은 산의 살이 파이고 쓸려58 나무는커녕 풀조차 살 수 없이 척박해져 가는 동안, 전쟁은 배를 만들 나무는커녕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을 태울 나무조차 키워 내지 못했습니다. 부를 탐하면서 그 부를 가져다 줄 나무를 키우지 않고 그 나무를 베어 노략질에 나서다니요?
10.1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우리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전쟁이 무엇이었는지, 왜 우리는 그렇게 전쟁에만 매달려 살게 되었는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만과 탐욕에 가득찬 알키비아데스가 갓 서른이 넘은 나이로 장군이 되어 저질렀던 짓거리들59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소크라테스와 지내며 쌓은 치기 어린 지식의 허영으로 자신이 묻어 놓았던 독신blasphemy瀆神60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든 일61까지 더한다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역병과 전란속에 자라 니키아스가 겨우 얻어 온 불안한 소강의 시절에 청년기를 보냈던 우리 아테나이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에다 그들의 미래를 걸었는지 잘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들이 훌륭한 젊은이로 잘 자라서 훌륭한 아테나이 시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나 할아버지로부터 배우는 이온과 테세우스의 가치가 담긴 시가만 외울 것이 아니라,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의 영혼이 담긴 민주정이란 새로운 가치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아무도 민주정의 가치에 대해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현란한 수사로 아테나이의 자랑이라며 민주정을 치켜세운 페리클레스조차 권력에 대한 오만과 탐욕으로 아테나이 시민들의 의무도 돈으로 보상하고 아테나이 시민의 권리도 돈으로 사들이며, 아테나이를 돈이 지배하는 공동체로 만들어, 권력과 부의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자신은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버금가는 민주 참주가 되어 버렸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몽둥이와 칼이라는 무력으로 참주가 되었지만, 다른 도시들과의 평화롭게 지내면서 아테나이 사람들의 자력갱생을 도모하고 도시 간의 교역으로 아테나이의 부를 키우려 했던 반면, 페리클레스는 함대와 칼로 다른 도시들을 억누르고, 다른 도시의 평화를 지켜 준다며 돈을 받아, 그 돈으로 도시를 치장하며 아테나이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의무로 하는 도시의 일에도, 권리로 하는 도시의 일에도 돈을 주어 도시민을 타락시키면서62 이런 불의가 아테나이에서 정의로 행세하도록 만들어 놓고도, 그들의 지지로 열여섯 번이나 장군에 뽑혀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버금가는 절대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페리클레스에게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가 펼친 민주정의 가치는 애시당초 관심에 둘 것이 아니었으며63, 도시민의 권리가 평등함을 보여 주는 투표조차 마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몽둥이와 칼처럼 자신이 권력을 쥐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보였을 뿐, 그것이 민주적 가치를 지키는 도시민의 기본적인 권리 행사라는 인식이 없었습니다. 정의가 그 스스로에게는 마치 품위를 보이는 부적 같아 그가 정의롭게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에게 도시의 정의는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음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아버지 크산팁포스가 도편추방당한 일이나,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닮았다는 자신의 용모에 대한 세평 때문에 젊어 한때 권력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척했을 때조차도 민중의 대표로 자처하는 에피알테스 뒤에 숨어 같이 민중을 위하는 귀족으로 비춰지는 것을 준비했던 것도 그들의 투표가 자신이 밟을 권력의 길로써 인식했을 뿐 그것이 민주정의 가치를 알게 하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페리클레스가 아직 그의 권력의 길에 돈을 뿌리고 다니기 전, 이제 막 도회64를 끝내고 권력의 길에 처음 들어서서 한 일을 되짚어 보면 페리클레스가 민중을 보는 눈, 바꾸어 말해 민주정을 보는 눈, 다시 말해 도시가 도시민 사이에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도시민의 도시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평등하도록 하려는 법과 제도를 보는 눈, 그런 눈을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10.1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페리클레스가 권력에의 길로 나서며 한 첫 번째의 그 일이란 바로 오늘 여러분을 이 재판정에 재판관으로 앉아 있도록 만든 일을 말합니다. 페리클레스는 권력에의 첫걸음을 당대의 최고 권력자 키몬을 공금 횡령으로 고발하는 일로 잡았습니다. 에피알테스와 공동으로 고발한 것이었지만 페리클레스의 작품이라는 것은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알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긴장하고 주목했지만 재판은 너무나 싱겁게 끝났지요. 키몬은 장군이자 아르콘이었고, 장군이나 아르콘의 재판은 아르콘들의 회의체인 아레오파고스의 관할이었고65, 아레오파고스의 전직 아르콘들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키몬의 무혐의를 선고했기 때문이었지요. 페리클레스로서는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에 두루두루 인기가 높은 키몬을 도편추방할 수가 없다고 보고 신종 정적 제거 방법을 아테나이에 선보인 것이었는데66, 재판관들이 일 없다고 판단해 버렸으니 화가 날 만도 했지만,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취한 조치는 너무나 놀라운 과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민중들의 결의로 민회가 아레오파고스의 재판권을 빼앗아 그 재판권을 민회에다 주어 버린 혁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재판이라는 도시의 법과 제도를 보는 그의 눈을 통해 도시라는 공동체의 가치, 다시 말해 도시민 간의 평등의 가치를 페리클레스가 어떻게 보는지를 정확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는데, 도시민이 자기가 속한 도시라는 공동체의 가치, 도시민 간의 평등을 지키기 위해 만든 법과 제도는 그것 자체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형식적인 선언에 불과하고, 오로지 그 법과 제도로 지켜 낼 수 있는 평등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는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 즉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지켜질 뿐이라는 믿음을 드러낸 사건이었지요. 물론 도시의 법과 제도의 지향점이 공동체 구성원들 모두가 평등하게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만,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도시민 역시 그 법과 제도를 잘 지켜 나가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도시민이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하는 잘못의 종류나, 그 잘못에 따라 내려지는 처벌의 무게를 정한 법이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제도를 달리하면, 다시 말해 아레오파고스가 아니라 민회가 재판하면, 한마디로 말해 재판관을 바꾸면, 한 도시민이 저지런 잘못의 종류와 벌의 무게를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특히 그것이 권력이나 부를 쥔 사람들에게 해당될 때에는 권력자나 부자가 저지런 죄의 종류를 구분하여, 유무죄를 결정 짓는 일, 그래서 만일 죄가 있다면 그 죄에 합당한 벌의 무게를 재는 일이 몇 사람의 재판관에게 맞겨질 경우, 보통 사람들이 같은 죄를 저질러 받는 판결과는 다른, 불평등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는 키몬의 무혐의를 결정한 아레오파고스의 판단이 바로 그런 재판의 전형적인 경우였다고 본 것입니다. 만일 아레오파고스가 정말 키몬의 횡령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혐의를 부인할 증거들을 채택해 키몬에 대해 무혐의라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라면, 그것은 법을 위반하여 평등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한 죄를 다스려야 할 재판관들이 오히려 평등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고, 권력과 부의 불평등을 옹호하는 불의를 저지르는 반도시적인 태도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정치가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고 도시민으로 하여금 공동체의 가치와 부합하는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일차적인 도시의 일이라면, 재판은 법과 제도를 지키지 않아 공동체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한 도시민을 교화하거나 응징하여 결국 도시민으로 하여금 공동체의 가치와 부합하는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이차적인 도시의 일일 텐데, 바로 그 재판이 불평등하고 불의하다면 도저히 공동체의 가치를 지켜갈 수 없다고 본 것이었지요.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는 시중의 크고 작은 잘잘못은 적은67 도시민을 뽑아 재판하게 하고, 도시의 영혼을 오염시키거나 도시의 가치를 훼손시킨 잘잘못에 대해서는 많은68 도시민을 뽑아 재판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보통의 도시민이 재판관으로 뽑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도시라는 평등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라는 것이 소크라테스 정도나 되어야 알 수 있는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디카이오폴리스나, 하다 못해 재판광 퓔로클레온 정도만 되어도 아는 것이기 때문이겠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똑똑하다는 사람 찾아다니며 열심히 캐묻지 않아도 보통 사람들 한 오백 명만 모아 놓으면 한 사람이 저지런 행동이 도시의 법을 위반했는지, 도시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짓을 했는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 것이겠지요. 설사 보통 사람들이 평소에 잘 접하지 않는 어려운 문제가 나온다손 쳐도, 고발자나 당사자가 전문가들을 동원해 재판관으로 앉은 보통 사람들이 잘 알아듣도록 설명하지 않으면 자기가 손해이니 얼마나 잘 설명하겠습니까? 게다가 재판정에 나오는 재판관이 많게는 오백 명이나 되니 그 가운데 일부가 좀 특이한 가치관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들 전체가 모여 발휘하는 집단 판단력에 대한 의구심이 없다면, 민회에서 하는 재판이 전직 아르콘들이 모여 하는 재판보다 공평할 것이란 생각도 들어갑니다. 이왕 키몬의 재판이 계기가 되었으니 말인데, 스파르테에 대한 반감 때문에 스파르테를 지원해야 해야 한다던 키몬을 결국 도편추방시키고 말았지만, 그가 만일 아레오파고스가 아니라 새로 바뀐 민회에서 공금 횡령 혐의에 대해 재판을 받았다면 어떤 판결이 나왔을까요? 만일 적은 수의 사람이 모인 재판정이 아니라 오백이 모인 재판정에서 키몬을 불러 세운다면, 재판하는 날 아침에 재판관 후보 육천 명 가운데 추첨으로 배당된 오백 명69의 반을 키몬이 돈으로 매수할 수는 없었겠지만, 키몬으로서는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 그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에서 키몬의 인기가 민중들을 위하는 정치인이라고 나서는 에피알테스나 페리클레스에 비해 더 나았으면 나았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그리고 키몬이 민중의 지지 없이 과연 장군직을 그렇게 오래 유지할 수 있었겠는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평소 그가 도시의 돈이 아니라 그의 호주머니에서 꺼낸 돈으로 도시나 도시민을 위한 일을 꾸준히 해 왔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에피알테스나 페리클레스를 지지하는 민중이 재판관이 되었다 해도 빗발치는 반대 증언과 증거들 앞에서 공금 횡령 같은 돈 문제로 키몬의 유죄 판결을 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에피알테스나 페리클레스가 아레오파고스의 재판이 그들과 같은 부류이며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권력과 부를 불평등하게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불평등한 판결을 내린다고 보고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승전 장군들 열 명 모두를 처형했던 예와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처형했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이 바꾼 민회에서의 재판 역시 재판관들 다수의 집단 판단보다는 집단 감성이 불평등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지는 못했지요.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보고 참고 있다가 키몬이 스파르테 때문에 인기가 떨어졌을 때라면 굳이 도편추방이 아니라도 떠오르는 별인 페리클레스가 고발해 온 키몬의 공금 횡령 혐의를 아레오파고스가 과연 빗발치는 증언들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무혐의 처분을 내릴 수 있었을지, 아니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10.1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도시민이 도시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발현시킬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도시민이 그런 가치를 누릴 수 있도록 이끄는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시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교화하고 응징하는 재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시의 일을 모든 도시민이 투표로 참여하여 결정할 수 있게 되었고,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권력자를 두지 않기로 하고 아르콘까지 추첨으로 뽑고, 그 자리마저 일 년에 한 번만 앉도록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까닭인지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은 그렇게 중요한 투표로 도시를 지킨다며 장군이라는 권력자를 만들었고, 장군이 권력을 행사하자니 전쟁이 있어야 했고, 전쟁에 나가 이기고 돈까지 벌어 오니한 장군을 오래오래 그 자리에 두게 되고, 한 사람이 오래 권력을 행사하니 다시 권력의 불평등을 불러왔습니다. 밀티아데스가 그랬고,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랬고, 키몬이 그랬고, 페리클레스가, 클레온이, 니키아스가, 알키비아데스가, 페이산드로스가, 아뉘토스 앞에는 하다 못해 클레오폰이며 크리아티스까지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마라톤의 놀라운 승자 밀티아데스는 승리의 도취로 망했고, 믿기지 않는 살라미스의 승자 테미스토테네스는 권력에다 돈까지 탐하다 망했고, 전쟁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가르친 키몬은 자기 도취로 적에게 인심 쓰다 망했고, 공금으로 시민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친 페리클레스는 전쟁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다 역병으로 망했고, 장군의 자질도 없는 장사꾼 클레온은 한 번 운이 좋았던 걸 능력으로 믿고 장군처럼 전장에 나갔다 망했고, 정작 늘 운이 좋았던 니키아스는 너무 늙어 전장에 나갔다가 망했고, 전쟁이 자기에게 페리클레스보다 더 큰 권력을 안겨 줄 것을 믿었던 알키비아데스는 전쟁만 찾아다니다 망했고, 더 이상 전쟁으로 돈을 벌 수 없었던 페이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돈이라도 얻어 보려다 망했고, 같은 장사꾼 클레온의 실패를 교훈 삼은 클레오폰은 장군이 되는 대신 장군들을 없애다 망했고, 전쟁에서 망해 적군을 죽일 수 없어진 크리티아스는 자기 도시민을 죽이다 망했고, 이제 저와 함께 이 재판정에 서 있는 저 아뉘토스는 아무 소득 없이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서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 끝에 민주정이란 놀랄 만한 제도를 만들었지만,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고, 힘들게 세운 기본적인 도시의 정의 하나를 지키는 데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0.2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이 저를 불러 세운 이 재판정에서 여러분은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그를 처형했었는데, 그 후로 십수 년이 지나 바뀐 것은 여기에 앉은 재판관 여러분과 저를 재판하라며 저를 여러분께 넘겨 준 권력자들 뿐, 아테네도, 법도, 제도도, 말도, 신들도, 그 어느 하나 바뀐 것이 없음에도, 어제는 소크라테스가 오늘은 이 아리스토파네스가 여러분 앞에 섰으니, 과연 아테네에 정의가 있기나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래도 아테나이에 정의가 있다고 대답하신다면, 지금 아테네에 있다는 그 정의가 도대체 무엇이고,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우리가 너무나 쉽게 말하는 정의라는 것이 정말 있기나 한 것입니까? 정말로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정의는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있다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아리스테이데스가 정의롭다고 말했는데, 그가 정의롭다고 하는 말이 지겨워 도편추방에 한 표 찍은 촌부村夫도 있었던 걸 보면, 그 촌부의 눈에는 정의는커녕 정의로운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촌부의 눈에 정의가 보이고, 정의로운 사람이 보여서, 정의와 정의로운 사람이 모두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을 본다면, 왜 그가 글자도 쓸 줄 모르면서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를 도시에서 쫓아내어야 한다고 꼭두새벽에 아티케의 한 촌 구석에서 아크로폴리스에까지 왔겠습니까? 클레이스테네스가 기본적인 도시의 정의 하나를 세운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촌부의 눈에 클레이스테네스가 세운 도시의 정의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촌부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원 이런! 반드시 정의로워야 할 도시가 이다지 불의하니, 아리스테이데스가 정의로운 것을 치켜들고 난리를 피우는군. 저 아리스테이데스를 쫓아내야 사람들이 아테나이가 얼마나 불의한 도시인지 알아챌 걸."
10.21. 그래도 그 촌부는 운이 좋아 정의로운 사람 아리스테이데스를 만났기 때문에 정의로운 사람 아리스테이데스는 정의로운 사람 아리스테이데스라는 자기의 이름을 듣는 것도 지겹고 짜증나기 때문에 쫓아내야 한다는 문맹의 촌부 뜻대로 그가 내민 이징가미에 순순히 자기 이름을 써 주었지만70 만약 그 촌부가 운수 사납게 소크라테스라도 만났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아마 그 촌부는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을 가르키는지, 정의로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지 아닌지, 정의로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면 훌륭한 사람을 왜 도시에 추방해야 하는지, 따위의 물음을 폭포수처럼 맞아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촌부가 소크라테스의 물음에는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을런지 몰라도 소크라테스에게 질리어 도편추방이고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고 나발이고 더러워서 투표도 아니하고 도로 아티케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테나이의 늙은 농부 크레뮐로스가 자기는 한평생 신을 두려워하고 착하고 정직하게 살았지만 늘 가난했고 성공하지 못했는데 신전의 재물을 훔치는 놈이나, 정치꾼이나, 밀고자나, 그밖에 다른 악당들은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는 것을 알았듯이71, 아리스테이데스를 추방해야겠다고 꼭두새벽에 아티케에서 나서 프뉙스로 온 그 촌부 역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고, 도시에 사람이야 아리스테이데스 같은 정의로운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도시는 도시민이 정의롭든 그렇지 않든 반드시 정의롭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신전의 재물을 훔치는 놈, 정치꾼, 밀고자, 그밖의 악당이나, 불의한 자나, 쓸모없는 인간이 아리스테이데스가 정의롭다며 치켜세우면서 마치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 때문에 도시가 정의로운 것처럼 그들의 온갖 못된 짓을 덮어버리며 성공하고 부자도 되고 권력도 잡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아리스테이데스라는 가림막을 걷어내어 사람들이 얼마나 불의한 도시에 살고 있는지 드러내어 보여야 한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가 불의한 사람들이 만드는 불의한 도시의 가림막 노릇이나 하고 있다면 아리스테이데스가 정의롭다는 말만 들어도 지겹고 짜증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불의를 구축하고 불의를 드러내어 도시 밖으로 내쫓는 정의가 아니라 자기만 정의로웠지 정작 불의의 가림막 노릇이나 하는 정의라면 그런 정의를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아티케의 촌부의 생각은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가 도시를 떠나야 도시가 얼마나 불의한지 사람들이 제대로 보게 될 것이고, 사람들이 도시가 얼마나 불의한지를 안다면 어떻게든지 다시 도시를 정의롭게 만들 것이고 도시가 정의로워졌다면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를 다시 불러 도시의 정의를 제대로 지키도록 하면 될 일이었겠지요. 이런 촌부의 생각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라면 도시민이 정의로워야 도시가 정의로울 수 있다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나 늘어 놓으며 도시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도시에 아리스테이데스 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했겠지요. 소크라테스 정도 되는 철학자가 단지 아리스테이데스가 자기와 같은 부락 출신72이라는 지역 감정 만으로 그를 편들어서 글자도 쓸 줄 모르는 아티케의 촌부를 붙들고 훌륭한 사람을 왜 도시에서 추방하려는가 따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도시민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아리스테이데스의 추방을 반대했을 것입니다만, 그렇다면 제가 찾는 정의로운 도시는 정의로운 도시민들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인지요?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정의로워져야 도시가 정의로워지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불의한 도시는 도시민이 모두 불의하기 때문입니까? 이 질문들의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어떤 때 어떻게 정의로웠으며 또 어떤 때 어떻게 불의로웠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불의로운 도시민은 상상할 수 있어도, 불의로운 도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되도록 많은 도시민이 정의로운 것은 참 좋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도시는 반드시 어떤 때 어떤 경우에도 그 도시민에게 정의롭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정의롭지 않으면 안 되는 도시가 불의하였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는 우리의 아테나이가 또 다시 불의한 도시로 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0.2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우리 아테나이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공금 횡령으로 고발한 키몬은 아레오파고스 재판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아 장군직을 계속 수행했었지만, 스파르테와의 평화를 얻어려던 사람들로부터 공금 횡령으로 고발당했던 페리클레스는 민회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장군직에서 해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테가 평화를 거부하자 이내 장군직에 돌아왔었던 일이 있었지요. 페리클레스의 재판에서 여러분은 정의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찾으셨다면 그것은 어떤 정의입니까? 페리클레스는 키몬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스파르테와의 평화를 구하려던 사람들은 전쟁을 고집하는 페리클레스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그 재판에 그것이 어떤 정의든 만일 정의가 있어 페리클레스의 불의한 행동을 응징했다면, 그래서 그가 권좌에서 물러났다면, 페리클레스는 불의한 사람으로 장군직에서 물러났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그가 사람들 몇이 스파르테에 다녀오는 동안, 그리고 그들이 평화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안 순간, 페리클레스의 불의가 외면되고 다시 장군직에 오른 것에 정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정의였을까요?
10.23. 이것에 대한 대답을 위해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과 실패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권력의 불평등에서 오는 분노보다는 부의 불평등에서 오는 분노 때문에 권력의 불평등을 무너뜨리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이 도시민의 안전을 지켜 주고 도시민이 부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한, 다시 말해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한, 그 권력의 불평등에 대해서 짐짓 무관심한 척하고 지내거나 심지어 그 불평등에 불만을 가진 그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까지 했지만, 일단 그 권력에 대해 도시민의 안전이나 부를 가져다 줄 것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 가차없이 권력자를 내쫓아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해 버렸지요. 이런 점에서 보면 민주정은 부의 불평등은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적어도 권력의 불평등은 확실히 해소할 수 있는 제도임이 틀림없었습니다.
10.2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권력의 불평등은 그렇게 해소할 수 있다고 치고, 그렇다면 권력의 불평등보다 더 끈질기고 간악한 부의 불평등은 어떻게 해소할 방도가 없을까요? 이것은 중용의 현인 솔론도, 몽둥이와 칼을 든 페이시스트라토스도, 아테나이에 민주정이란 새 세상을 연 클레이스테네스도, 마라톤에서 다레이오스의 대군을 물리친 밀티아데스도,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의 해군을 수장시킨 테미스토클레스도, 돈을 버는 대로 도시민과 도시를 위해 썼던 키몬도, 온 헬라스의 부를 아테나이로 모았던 페리클레스도, 그 누구도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는데요, 왜 그럴까요? 그 긴 세월 속에 그 많은 사람들이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 가는 걸 보고도, 그 긴 세월 속에 그 많은 훌륭하디 훌륭했던 사람들은 이것을 못 본체하거나 스쳐지나거나 아니면 그것을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치부하여 부자들을 옹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니 능력이 없느니 오히려 비난하기까지 했을까요? 진정 도시민 사이의 부의 불평등을 해소할 방도는 없기 때문에 아직 찾지 못한 건지요? 이제 아테나이에서 그 누구도 왕이나 참주가 되어 권력을 상속할 꿈을 꾸지 않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 왕홀을 쥐고 태어나는 사람은 이 아테나이에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왜 부의 상속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요? 자기도 물려줄 것이 있어서 그런가요? 태어날 때 왕홀은 안 되지만 포도밭이이나 올리브밭은 손에 쥐고 태어나도 괜찮다고요? 왜 그렇지요? 참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고요? 그렇습니다. 정말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설명하기 어렵다고 버려 두어도 좋을 정도로 가벼운 문제는 결코 아닌 것이 이 부의 불평등이 언제나 도시라는 공동체 안에서의 심각한 불복과 불화를 불러와 도시를 붕괴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왠지 모르게 도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이 중차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해답이 바로 도시의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저는 여러분을 모시고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는 부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이 중차대한 문제를 어떻게 풀려 했는지 옛날 일들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10.2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솔론 시대의 사람들조차 솔론에게 강제적 재분배로 부의 불평등을 해소해 주기를 바랐었지 그 부의 불평등의 가장 큰 이유인 부의 세습을 막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솔론도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이 물론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룬 부 때문에, 다시 말해 권력의 불평등이 부의 불평등을 조장했던 때문에 생긴 경우보다는 오히려 세습된 부로 부가 부를 낳아 생긴 경우가 더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겠지만, 그런 솔론의 해답은 부의 세습을 막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소유 재산을 기준으로 한 사회 구조의 재구성과 법과 제도의 개혁을 통한 권력의 재분배, 바꾸어 말해 더 많은 도시민이 더 많은 도시 일을 하도록 하면서, 부자들에게 도시의 일을 더 많이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만 빼고 나머지는 재산의 정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공직을 나누다 보니, 사람들이 더 높은 직의 공무를 맡기 위해 자기의 재산을 부풀려 말하기도 했다니, 돈의 가치를 부풀려 빚을 탐감해 주던 솔론의 실력은 도시민의 재산도 부풀리게 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솔론이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한마디로 말해 부의 강제적 재분배가 결코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고 본 것도 있었겠지만, 도시민은 도시라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되기 위한 자격을 스스로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 강해서 모든 시민은 부의 불평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자기의 경험에서 나왔을지도 모르지요. 인심 좋은 아버지가 남들 도우느라 가산을 소진해 버리자 성인이 된 그는 바로 도시들을 전전하는 무역업에 뛰어들었고, 공무를 담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즈음에는 먹고 사는 문제를 거뜬히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도시들에서 배운 지식과 견문으로 현자의 기품을 보이기 시작하는 가운데 이미 훌륭한 엘레이기아 시인이 되어 있었지요. 솔론을 보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최우수 모범 시민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도시가 믿는 신을 믿으며, 전통을 숭상하고, 명예를 존중하면서, 자유민으로서 자기의 일을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고,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어떠한 작용에 대해서도 그것을 반대하는 단호한 행동을 보이는 그런 시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솔론이 기대하는 정의로운 도시민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솔론이 보기에, 이런 도시민을 위해 도시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은 이런 도시민이 더 많은 도시의 일에 직접 나설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솔론이 보기에, 자립의 의지가 없는, 그래서 자기를 스스로 돌보지 않는 공동체의 구성원보다 더 공동체를 와해시킬 위험 요인은 없어 보였습니다. 자연히 솔론이 보기에, 부의 강제적 재분배 자체가 이미 도시라는 공동체의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와해를 막아 달라고 부탁 받은 솔론이 스스로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조치를 취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결국 솔론이 공동체의 부의 불평등에 대해 취할 수 있었던 조치는 아테나이에서나 다른 도시로 가서 노예로 전락했거나, 빚이나 생계를 위해 예속되었거나, 가난 때문에 자유를 잃은 사람들의 자유를 되찾아 주고, 그들이 다시 공동체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솔론의 당부대로 후생을 농사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장사나 기술을 배우도록 해서 교역이나 물산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었습니다.
10.26. 아테나이라는 우리의 도시에게 공동체 와해라는 실질적인 위험으로 다가온 심각한 부의 불평등이란 현상과 그것을 강제적 재분배로 해소하자는 극단적인 욕구는 솔론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법과 제도를 통한 합리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몽둥이와 칼에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주정을 겪은 후에도 아테나이는 여러 번 공동체의 정치 체제와 법과 제도가 바뀌는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때마다 도시에서의 부의 불평등이 여전히 공동체를 와해시킬 수 있다는 절박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의 불평등 해소가 아테나이에서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체의 중차대한 문제로 다시는 대두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문제가 가난을 해소하는 문제로 정치꾼들의 입에 늘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가난의 구제나 돈을 벌 기회의 제공이라는 정치적 약속이 언제 어디서나 정치꾼들의 출세의 발판이 되었고, 그들의 기대와 그들의 투표를 통해 권력을 쥐었고, 그들에게 돌아간 푼돈과 혜택은 권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는 것에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과는 저녁에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물 타지 않은 타소스 포도주를 마시며 산해진미를 놓고 서로의 미각을 자랑하며 나누는 이야기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우의를 다질 수 있었기 때문에 따로 그들을 정치 판의 화두로 끼워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없는 주목을 받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페이시스트라토스 이후 테미스토클레스에서부터 아뉘토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자들이나 권력을 쥐려 했던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 탈피 정책이라는 정치적 성공의 길을 찾아 헤매었는데, 그 정책 중에 성공한 것이 바로 식민도시의 건설과 제국주의와 그리고 전쟁이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강제적 재분배를 이행하는 대신, 가난한 사람이나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식민도시의 땅을 주고 거기서 살도록 하거나, 다른 공동체를 무력으로 억압하여 아테나이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강제하거나, 아예 무력으로 다른 공동체의 부를 강제적으로 우리의 공동체로 옮겨와, 부의 불평등 해소를 요구하는 구성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방법을 썼는데, 이 가운데서 가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행위가 바로 전쟁이어서, 전쟁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투표를 통해 권력을 쥐고 유지하는 정치적 성공의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처음부터 식민도시 건설이나 제국주의나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권력과 부의 창출 수단으로 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그 연원을 따지고 들면 솔론에게서 찾을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10.27. 솔론은 우리의 공동체가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곡물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 이유가 아티케의 땅이 좁고 척박하여 곡물 재배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73, 그래서 포도와 올리브를 키우는 것이 더 적합하고 가치도 더 높다는 것을, 그런 농사 지을 땅도 없는 사람은 기술을 배워 항아리든 램프든 악기든 구두든 무엇이든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모두를 아테나이에서보다 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는 곳에 팔아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생긴 돈으로 곡물처럼 아테나이에서 꼭 필요한 것을 싼 값으로 사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젊은 시절 자신이 직접 해 본 무역과 장사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아티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아테나이의 곡물 수요를 맞추기 위한 항구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테나이에서 도시민 간에 부의 불평등을 가장 예리하게 드러내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배고픔 아니겠습니까? 곡물의 부족은 부의 불평등의 골을 깊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골은 어떻게 기다리거나 참아서 메워질 수 없는 것이어서, 단숨에 아테나이라는 공동체를 와해시킬 것이었습니다.74 결국 가장 원초적이고 초보적인 부의 불평등 해소책은 도시민들이 배를 곯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자라는 곡물을 아테나이로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어떵 방법으로도 부의 불평등은 해소할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만큼 곡물을 확보하고 그 곡물을 싼 값에 사서 아테나이로 가져오는 일은 어제 오늘 만의 일이 아니라 항구적이어야 하고, 그렇다면 곡물이 나는 곳에 아테나이 사람들이 직접 가서 곡물을 사 모아 아테나이로 보내는 항구적인 기지가 반드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솔론이 아테나이 사람들을 헬레스폰토스로 보내, 아킬레우스의 무덤 근처 무인지경의 시게이온에 요새를 짓게 하고, 그곳에서 곡물 일을 보도록 한 것은 아테나이라는 도시의 후생을 위한 일이었지, 결코 다른 공동체의 것을 탐하여 아테나이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솔론의 이런 노력도 그의 개혁의 실패와 함께 시들어져 갔고, 시게이온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솔론과 똑같은 이유에서, 그리고 그의 서자 헤게시스트라토스에게 영지를 주려는 이유를 더해 아테나이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10.28. 어쨌든 솔론의 개혁 실패의 원인을 부의 불평등 해소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본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강력한 가난 구제 사업도 아티케의 토지를 끝없이 넓혀 주지는 못하며,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의 양을 늘리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부의 창출을 땅에다 의존할수록 아티케라는 한정된 땅 안에서 그 땅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 간에 부의 불평등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아는 데에도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부의 창출을 땅에 의존하는 한, 새로운 땅의 창출이 바로 새로운 부의 창출을 의미했고, 그런 점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개간 장려는,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새로운 땅으로부터 새로운 부를 만들어 내는 한 방법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느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택한 것은 솔론이 세운 시게이온을 재정비하여 우리의 공동체가 가진 문제, 곡식조차 자급자족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곡물이 많이 나는 헬레스폰토스 너머로 진출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뮈텔레네가 차지하고 있던 솔론의 시게이온을 뮈틸레네와의 전쟁을 통해 회복했고75, 이 진출이 주변 도시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 주었는지 케르소네소스 사람들이 외침에 시달리는 그들의 고통을 호소해 오자 잠재적인 정적 밀티아데스로 하여금 아테나이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밀티아데스 개인의 능력으로 도와주라며 케르소네소스로 보냈고76, 밀티아데스가 결국 케르소네소스의 참주가 되는 성공을 거둠으로써, 아테나이가 그 공동체의 영역을 아티케 밖으로, 즉 외연적으로도 넓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보였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테나이는 헬레스폰토스에 두 곳의 거점을 두어 우리 공동체의 터전을 아티케 바깥에서 넓힐 수 있는 길을 찾았지만,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은 이런 새로운 길이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힙피아스와 힙파르코스 형제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무장이 싫어 이복동생 헤게시스트라토스의 도시 시게이온이 뮈틸레네에게 시달리고 있는 것도 방치할 정도였습니다. 아테나이 사람들이 참주 힙피아스를 내치기로 결심한 것도, 물론 동생을 잃은 참주의 도시민에 대한 공격이 빌미가 되긴 했지만, 페이시스트라토스식 가난 구제의 한계를 아테나이 바깥에서 찾으려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진취적 기상을 억누른 참주의 보신 정책 탓도 컸을 것입니다. 아테나이 바깥으로의 진출은 무력이 필수였지만, 참주는 도시가 무력을 갖추는 것을 기피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77 언제 그 칼이 자기를 향할지 두려웠을 테니까요. 이렇게 아테나이는 참주를 받아들인 결과 아테나이 안에서의 노력으로 더 많은 부를 창출하여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란 사실을 확인하고도 도시의 외연적 발전으로 해소할 방법을 스스로 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10.2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리고 참주를 쫓아낸 우리의 아테나이는 땅을 가져 부를 이루고 그 부로 권력을 누리던 과두정의 법과 제도로 돌아가지 않고, 솔론의 개혁보다 훨씬 더 개혁적인 법과 제도를 만들어 민주정이라 이름을 달아 새로운 공동체로 시작했지만, 솔론 이래로 우리에게 남겨졌던 도시민 간에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는 민주정의 법과 제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도시민의 도시에 대한 의무와 권리가 평등해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정 이전의 법과 제도에 비교한 상대적 판단일 뿐, 재산의 정도로 정치적 사회적 신분을 나누고, 그 신분에 따라 도시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배분하는 전통적 구분78은 여전했으며, 세습이든 창출이든 재산의 정도는 어디까지나 도시민 개개인이 감당해야 할 개개인의 몫일 뿐, 도시가 어떻게 조정하거나 조절할수 있는 도시의 일이 아니라는 데에 대해 아무도 그렇지 않다고, 그것이 바로 도시의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 사람들은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나이에 열어 준 민주정이라는 새 세상을 군소리 하나 없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또 다시 누구가 참주가 될 기미를 보이거나 조그만한 가능성만 보여도 도시에서 추방해 버릴 정도로 민주정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참주를 위한 자유민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도시를 위한 자유민으로서 도시의 일에 누구나 똑같은 권리와 의무로 참여한다는 것이 그들을 설레이게 했을지도 모르지요. 이제 자기도 공무를 맡으면 남들처럼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민주정의 새 세상이 아테나이 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참주를 스파르테의 힘으로 내쫓았다는 겸연쩍음과, 그 스파르테의 강압이 두려워 자기들의 존재도 모르는 페르시아에 가서 안전을 위한 동맹을 요청했던 창피스러움이 아테나이 사람들로 하여금 도시를 스스로 지킬 힘을 기르도록 했고, 짧은 동안 기른 힘에 자신이 생겨 근질근질하던 차에 스파르테도 거절한 밀레토스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고 밀레토스로 가서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페르시아의 사르데이스를 야습하여 도심을 불태우고 돌아올 정도였습니다. 물론 사르데이스이 야습이 헬라스에 불러올 끔찍한 전쟁의 재앙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요. 그렇지만 클레이스테네스의 새 세상이 아테나이에게 권력의 불평등은 안에서 해소하고, 부의 불평등은 아테나이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해소할 가능성을 연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10.30. 그렇지만 이때까지 아무도 도시민이 아닌 도시가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 대가를 지불할 돈을 마련하는 대신 돈 많은 사람들에게 대가를 주지 않고 도시 일을 맡겼습니다. 길을 넓히거나 물길을 새로 내는 일도 부자들이 돈을 대고 했고, 그들이 도시를 위해 쓰는 돈이 많을수록 그들의 도시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고 권력도 세졌습니다. 그래서 권력까지 쥐게 된 부를 쥔 사람들에게 도시가 따로 돈을 번다는 것은 그들이 따로 돈을 벌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일어날 수도 없고 생각조차 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부자들의 고리채를 대신할 저리의 영농자금을 가난한 농부들에게 주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 들어오는 물품에 대해 세금79을 매겨서 한번 도시의 돈을 만들어 보았습니다만, 이것도 빈부를 가리지 않고 세금을 내고 들여온 곡물이나 물건들을 사서 쓰는 사람들이 내는 세금이고, 그 돈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반발이 없었지, 만약 가지고 번 것에 대해, 다시 말해 부의 소유에 대해서나 가치의 창출에 대해, 한 마디로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는 것이었다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몽둥이와 칼이 아무리 강했어도 두 해를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시가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나 그 돈을 부에 대한 세금으로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이 자기 돈으로 도시의 일을 하는 것이 도시민으로서의 명예요 존귀한 사람의 의무라고 떠벌리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졌지만, 사실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돈 안 되는 명예와 존경보다 더 많은 도시 일에 대한 영향력과 더 많은 독점적 부의 창출 기회였습니다. 나중에서야 밝혀질 사실이지만, 바로 식민도시나 제국에 편입된 다른 도시, 우리는 이런 도시들을 동맹도시라고 부릅니다만, 동맹도시에의 사업 진출이나, 해군의 함선을 운용하여 전쟁의 수확물을 직접 챙겼던 사실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10.31. 그렇던 아테나이가 마로네이아에서 은광을 찾은 것은80 우리 아테나이의 도시 운영 체계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행운이었습니다. 아무도 도시가 부를 창출할 수 있다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마로네이아 은광이 도시에게 적지 않은 부를 건네준 것이었습니다. 마로네이아의 은광이 곧바로 아테나이에게 100탈란톤이란 거금을 쥐어 주었지요.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아테나이가 이런 거금을 쥐어 본 적도 써 본 적도 없어서인지 이 돈을 쥔 아테나이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데다 그 돈을 써 버렸습니다. 아테나이의 부자들 100명에게 1탈란톤씩 나누어 준 것입니다.81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82는 이야기가 왜 없었겠습니까만, 입만 벌리면 민중을 위한다고 떠들어 그 덕으로 장군도 되고 권력도 쥔 아테나이의 빈민 네오클레스의 아들 테미스토클레스가 주도하여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했지요.83 부자들로하여금 그 돈으로 도시에 유용하게 쓰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도시가 직접 그 돈을 도시에 유용하도록 쓰는 게 아니라 100명의 아테나이 부자들에게 주어 그 부자들이 아테나이를 위해 유용하게 쓰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 돈을 돌려 받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는 부자들에게 그 돈으로 함선을 한 척씩 만들라고 사주했고, 그 부자들의 함선은 아테나이가 주축이 된 헬라스 연합함대가 살라미스에서 포이니케가 주축이 된 페르시아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아이가이온 바다와 이오니아 바다를 장악한 덕분에 프로폰티스와 폰토스 에욱세이노스는 물론 심지어 퀴프로스와 아이귑토스로 진출하며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테나이 도시의 돈인 마로네이아 은광의 수입으로 출발한 해운업으로 번 돈을 그 함선들의 주인들이며 테미스토클레스가 도시의 부의 불평등을 해소 하기 위해, 아니 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해 썼다거나, 그와 유사한 정책을 펼쳤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함선의 주인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 가난한 도시의 노동자들을 제쳐 두고 그들의 노예들을 노꾼으로 쓰면서, 함선이 함대에 차출이라도 되면 그 노예들의 노삯까지 받아 챙겼다는 이야기는84 들었지만 말입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부자들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 어떻게 돌려 받았는지, 그 돈으로 지은 함선들 덕분에 번 돈은 또 어떻게 셈했는지 알려지지 않아 잘 모릅니다만, 그가 재물을 엄청나게 탐하다가 도편추방당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컨데, 그는 마로네이아 은광에서 나온 도시의 돈을 적어도 가난한 도시민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쓰겠다는 생각은 애시당초부터 가지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봤자 떡고물을 먹기는커녕 많네 적네 불평과 욕만 얻어 먹을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가난한 사람 네오클레스의 아들이었으니까요.
10.3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는 가난한 사람 네오클레스의 아들 테미스토클레스와는 질적으로 다른 마라톤의 전사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이 있었습니다. 키몬의 아버지 밀티아데스는 숙부 밀티아데스가 상속해 준 케르소네소스의 참주로 있다가 페르시아의 준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아테나이로 돌아왔고, 마라톤의 전사로 다레이오스 군대와 싸워 명성을 얻었으나, 파로스 원정에 실패하고85 그 책임을 묻는 재판에 회부되어 벌금 50탈란톤을 부과받자 모든 재산을 털어 벌금을 물었지만86 파로스 원정에서 다친 허벅지가 썩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라톤의 전사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은 벌금을 무느라 가산이 거들났고, 가문의 명예도 손상을 입어 한때 부랑자 같은 생활을 하며 술에 절어 살기도 했지만87, 타고난 성품이 고상하고 선량했으며 담백했다는 평판대로88 지금까지 저나 여러분이 아는 아테나이의 정치 권력자 가운데 가장 가난에 대한 온정이 깊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젊어 한때 술에 절었던 키몬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분전하여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이를 눈여겨 본 아리스테이데스에게 발탁되어89 페르시아가 퇴각한 뒤에는 스파르테 왕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헬라스 연합함대에 아리스테이데스의 막료로 있으면서 군사적인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좋은 무기와 엄격한 규율로 아테나이 해군의 기틀을 세우고 아테나이 함대가 헬라스 연합함대에서 단연 돋보이는 함대로 두각을 드러내게 했습니다. 매사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와 고상하고 선량한 키몬은 계속되는 파우사니아스의 난행90에 질린 헬라스 연합함대의 다른 도시 지휘관들의 신망을 바탕으로 스파르테의 에포로스Eporos91에게 소환당한 파우사니아스의 지휘권을 인수하여 아리스테이데스가 헬라스 연합함대를 이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스파르테가 펠레폰네소스 해군의 주축이던 코린토스 함대를 데리고도 철수하고 난 뒤, 나머지 도시들은 델로스 섬에 모여 서로 동맹을 맺고 연합함대를 동맹함대 체제로 바꾸었고, 동맹함대 유지를 위한 비용도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답게 공평하게 부과하면서 갹출한 함대의 유지비를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 금고에 보관하자, 이제 그 동맹은 자연스럽게 아테나이 중심의 델로스동맹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델로스동맹은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를 제국으로 바꾸는 도구가 되기 전까지 헬라스는 물론 온 세상의 바다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주는 신의 선물이었고, 키몬은 이 신의 선물을 다른 어떤 도시보다 아테나이가 받아 누리도록 했습니다.
10.33. 이렇게 바다의 일이 안정되자 키몬은 트라케에 주둔하며 헬라스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던 페르시아의 패잔 장군 보게스92를 소탕하였고, 보게스가 차지 했던 곳이 아름답고 비옥하여 부근 지역까지 손에 넣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렇게 시작한 키몬의 식민 도시 건설의 결과가 바로 트라케의 에이온과 암피폴리스입니다. 이런 키몬에게 한번은 자중지란에 빠진 해적 섬 스키로스로부터 도움 요청이 왔고, 키몬은 기꺼히 해적들을 쫓아내고 스키로스 섬에 아테나이 사람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섬에는 테세우스의 무덤이 있었는데, 아테나이가 수없이 그 무덤을 찾아 테세우스를 아테나이로 모셔오려 했으나 섬 주민들이 무덤을 가르쳐 주지 않아 실패했었는데, 키몬이 드디어 테세우스의 무덤을 찾아 테세우스를 아크로폴리스의 테세우스 사당에 모시게 되었지요. 키몬은 페르시아 패잔병을 쫓아 세스토스와 비잔티온을 점령해서 얻은 전과를 늘 자랑했지만93, 키몬의 군사적 업적의 최고봉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역시 포이니케와 페르시아의 연합함대를 팜퓔리아 해안과 에우리메돈 강 하구에서 해전과 지상전까지 연이어 치르며 결딴내어 버린 일일 것입니다. 키몬은 이 전투에서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이타이아이 전투에서 거둔 전과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과를 올렸으니까요. 페르시아가 황급히 정말 페르시아로서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했어야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아테나이를 위한 이 모든 일이 키몬의 본성에 따른 것이었지,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이 받드는 테세우스의 시신을 아테나이로 모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야 되겠다든지,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도시가 피폐해지고 극심한 부의 불평등으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니 적극적인 이민정책으로 가난을 구제하고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여 테미스토클레스의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혼란해진 도시를 구하겠다든지 하는 정치적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 모든 일을 그저 도시를 위하는 일이고, 그 일로 도시민이 더 잘 살 수 있으니까 하고 이루었다는 것은 키몬이 본성적으로 뛰어난 정치적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아버지도 가산도 명예도 한꺼번에 잃은 청년이 술을 마시고 부랑자처럼 지냈고, 남들처럼 학문이나 교양을 쌓을 기회도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터라, 너무 단순해서 바보라는 별명을 가졌던 조부 키몬94처럼 그저 단순하게 그것이 아테나이에 도움이 되고 아테나이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했을 뿐이고, 아테나이 사람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아테나이에서 편안히 누릴 권력도 부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랜 동안 원정에, 그것도 일찌기 누구도 원정에 나서지 않았던 곳을 찾아나선 개척자였습니다.
10.34. 키몬은 명예롭게 재산을 모아95 부자가 되었고, 도시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헌신으로 신망을 얻은 장군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존귀한 사람들을 대변하였지만, 기회만 있으면 개인적으로든 도시의 일로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 했을 뿐96 입만 열면 민중을 위하니 어쩌니 하는 테미스토클레스처럼 자기의 부와 권력을 위해 정치적 술수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그런 술수는 부릴 줄도 몰랐습니다. 도시와 항구를 잇는 장성의 기초를 못해 애를 먹던 뻘판에서의 공사를 그의 돈으로 완성시켰으며, 도시의 가로와 공원을 조성하는 일에도 그의 재산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농장과 집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음식을 먹고, 곡식과 과일을 가져갈 수 있도록 언제나 열려 있었으며, 외출할 때는 젊은이 몇몇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주머니 가득 돈을 지니게 해 혹시 거리에서 남루한 차림의 늙은이나 가난한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좋은 옷으로 갈아 입히고 주머니의 돈을 나누어 주도록 했습니다. 키몬이 이런 일에 아테나이의 어느 지역을 특정하거나 아테나이 사람 다른 도시 사람 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키몬의 이런 일이 싫은 부자들이나 정적들은 지역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라느니, 사실 농장과 집은 키몬이 사는 라키아 지역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었다느니 입방아를 찧고 있었습니다만, 적어도 그 당시 사람들은 아테나이에 가난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은 모두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아테나이의 가난한 사람들이 키몬이 개척한 식민도시로 이주해 가서 잘 살게 되었기 때문이면 몰라도, 설마 키몬의 적선이 도시에 가난을 모두 구제했기 때문이었겠습니까만, 적어도 키몬의 적선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든 건 틀림없었던 모양입니다. 저의 선배 희극 시인 크라티우스는 키몬이 자기와 같은 술꾼이어서 더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키몬을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큰 목소리로 칭송했고97,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연설을 가르키고 먹고 살던 레온티니의 고르기아스도 그의 연설 가운데서 이런 키몬을 한마디로 평가했습니다. "키몬은 재물을 잘 쓰려고 모았으며, 모은 것을 제대로 써서 이름을 남겼다."
10.35.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아테나이에서 쫓아낸 스파르테 지원군 파견만 해도, 지원을 반대하는 민중들을 설득시킨 그의 말은 단 하나, '스파르테가 여전히 아테나이의 동맹국'98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스파르테는 나중 아테나이에게까지 노예들의 반란 문제로 지원을 요청했던 일이 창피했고99, 지원군으로 온 키몬이 헤일로타이 반군과 어울릴까 두려웠고, 아테나이는 성의를 모르는 스파르테에 대한 미움으로 키몬의 순진함을 책망했고, 페리클레스는 철벽 같던 정적을 무너뜨릴 천우신조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그의 시대가 끝났을 뿐이었습니다. 키몬이 도편추방당해 있는 동안 이토메 산성의 헤일로타이 반란을 해결한 스파르테가, 쫓겨난 이토메 산성의 헤일로타이를 거두어 나우팍토스에 정착시켜 코린토스만 어귀에 기지 아닌 아테나이의 기지를 세운 아테나이와, 그 헤일로타이 때문은 아니었지만, 다시 충돌하기 시작했고100, 스파르테에 밀리는 아테나이를 구원하기 위해 키몬은 백의종군을 자원하지만 키몬에 대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옛 정이 되살아날까 두려웠던 페리클레스가 키몬의 참전은 반대하고 그렇다고 스파르테에게 밀리는 전세를 그냥 둘 수 없어 그의 수하들의 참전만 허락했는데, 그들이 모두 장렬히 전사하며 전세를 뒤엎어 놓자101 페리클레스도 키몬의 소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런 와중에서도 페리클레스는 그의 정적을 아테나이로부터 떼어 놓을 궁리 끝에, 아이귑토스 앞바다에서 페르시아 해군에 궤멸당한 아테나이 함대의 일102을 다시 맡기기로 하였고, 아테나이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던 키몬답게 그는 군소리 없이 스파르테와의 전쟁은 페리클레스에게 맡기고, 페르시아와 엮인 그 일을 맡아 퀴프로스와 아이귑토스 바다를 페르시아로부터 지키러 나갔습니다. 한편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테의 공세를 막지 못해 우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강화를 맺었고, 그해 키몬은 퀴프로스 섬의 퀴티온을 공격하던 도중 죽었습니다.10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고르기아스가 키몬이 이름을 남겼다고 한 말은 틀렸습니다. 제가 죽은 키몬을 위해 고르기아스의 칭송을 고쳐 쓴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키몬은 재물을 잘 쓰려고 모았으며, 모은 것을 제대로 써서 사람들에게 재물의 용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키몬이 가르친 재물의 용도대로 재물을 쓴 부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세상 어느 부자도 키몬이 가르친 재물의 용도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키몬에 대한 저의 칭송은 틀렸고, 고르기아스의 말이 맞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다시 키몬에 대한 고르가이스의 칭송을 고쳐 쓴다면 이렇습니다. "오직 키몬만 재물을 잘 쓰려고 모았으며, 모은 것을 제대로 써서 이름을 남겼다."
10.3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그후에도 스파르테로 도망간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을 따른 스파르테의 아기스가 데켈레이아에 요새를 짓고 아테나이를 성벽 안으로 몰아 넣기 전까지 계속 은을 생산했지만104, 그 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가난을 구제했다거나 그 은으로 도시가 직접 부를 창출하려 시도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키몬보다 더 재물이 많은 그 어느 누구도 키몬이 가르쳐 준 재물의 용도대로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에 대한 끊임없는 탐욕에 사로잡힌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테미스토클레스의 그 함선들 덕분에 라우레이온 산의 은을 덮고 남을, 그리고 타소스의 금광은 어린이 장난감 정도로 보이는 대규모 금광을 아이가이온과 이오니아와 지중해 바다와 아시아와 헬레스폰토스에서 찾아내었습니다. 아리스테이데스에게는 아테나이를 지키는 또 다른 나무 성벽105에 다름 아니었던 델로스 동맹이 페리클레스에게는 마이다스의 손이 닿은 금광으로 바뀌어 보였던 것입니다. 아이귑토스 원정 함대의 궤멸을 본 페리클레스가 동맹도시들이 낸 동맹 유지비를 아테나이가 독단적으로 사용할 권리가 있다며, 동맹 유지비 금고를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에서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로 옮기면서 동맹 유지비의 성격을 조공으로 바꾸어 놓자, 아테나이의 제국주의가 헬라스를 덮었으며, 아테나이는 헬라스 최고의 부자 도시가 되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헬라스를 침략한 페르시아를 쫓아내며 그들로부터 얻은 명예로운 전리품으로 도시의 부를 창출한 키몬과는 달리, 같은 헬라스의 힘 약한 도시들을 억누르고 구슬러서 뜯은 조공으로 도시의 부를 창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테나이가 동맹도시들로부터 조공으로 거두어들인 돈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 뿐만 아니라, 우리 헬라스 전체 도시의 운영 체계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횡재였습니다. 아테나이가 한 해에 1000탈란톤106이나 되는 거금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제국의 도시들은 아테나이를 위해 열심히 돈을 마련할 것이고, 아테나이는 그런 제국을 억누르고 이탈을 막을 무력을 그들의 돈으로 유지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부의 불평등은 아테나이에서 더 이상 불복과 불화를 야기하지 않을 것인 바, 그것은 아테나이에서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돈을 쥔 페리클레스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데에다 그 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도시민이 아닌 신에게, 아테나 여신을 위해 신전을 짓는 데 그 돈을 썼습니다. 물론 자애로운 여신은 자기 집을 짓기 위해 돌을 나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주었지요. 도시는 온통 돌을 캐고 나르는 사람들과 배를 젓는 노꾼들로 가득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가난을 해소할 수 없었는지 존귀한 집안의 크산팁포스의 아들 페리클레스는 입만 벌리면 민중을 위하는 사람답게 신전이나 성곽의 보수나 도로의 포장 일 아니라도 핑계만 생기면 민중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찾은 가장 좋은 핑계는 노동의 대가보다 공무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도시를 위하는 일에 수당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페리클레스식 가난 해소는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의 불복과 불화 정도는 충분히 누그러뜨릴 수 있어 도시에 페리클레스식 부의 불평등 해소를 가져온 듯했고, 아크로폴리스에 자리잡은 파르테논이 보이는 위엄과 영광은 페리클레스의 아테나이를 역대 아테나이 가운데 최고의 번영을 누리는 아테나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도시가 부를 창출하고 도시가 그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은 도시의 자랑이었습니다.
10.37. 그러나 존귀한 사람들의 가치를 대변하는 또 다른 존귀한 사람 투퀴디데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우선 다른 도시의 안전을 볼모로 돈을 뜯어 아테나이의 일에 쓰는 것도 명예를 아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어서 반대했었는데, 이제는 자기 일을 제치고 도시의 일을 한다는 명예를 돈으로, 그것도 다른 도시에게서 뜯은 돈으로 떼워 준다는 것은 도시와 도시민의 명예를 먹칠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습니다. 페리클레스의 책사 다몬이 이 모든 천박한 행위의 조언자였음을 알자,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다몬을 도편추방했습니다. 그 천박한 자가 언제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닮은 페리클레스에게 참주가 되라고 할지 모른다고 염려했겠지요. 투퀴디데스의 불복이 불러일으킨 이 불화는 페리클레스의 불복을 불러와 페리클레스는 투퀴디데스를 도편추방하고 아테나이의 존귀한 집안 출신으로는 마지막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투퀴디데스가 없는 페리클레스는 도시의 일을 하면 주는 돈의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 추첨에 뽑혀 재판관이 되어도 생업 때문에 도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회의 재판관으로 뽑혀 재판정에 나간 사람들에게 일꾼들 하루 품삯의 두 배107를 수당으로 주는 것으로 재판관에게 수당을 주기 시작하자, 재판을 이끄는 검사에게도 수당을 주는 것이 너무나 평등해서 그에게는 수당으로 그가 평소에 벌었다고 생각되는 하루벌이의 두 배로 1드라크메를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평등하게 준다는 생각으로 준 것으로 평등했던 것은 누구에게도 똑같은 디오뉘소스 극장의 연극 구경 값 2오볼로스를 준 것뿐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젊은 나이에 아테나이의 성벽을 쌓던 알로페케의 소프로니스코스가 그의 아들 소크라테스와 함께 아크로폴리스를 단장하며 몸으로 돈을 버는 동안, 부자들은 해군 함선의 노꾼이나 은광의 광부로 그들의 노예를 쓰고, 그들의 품삯 명목으로 돈을 받아 챙겼고, 중무장 보병으로 전쟁에 나서는 것이 도시민의 영광이어서 평소에는 맨발로 다녀도 군화만은 언제나 수선해 두던 소크라테스가 출전하면 일당으로 1드라크메108를 주면서, 부자들에게는 무구를 나르고 밥 시중을 드는 노예 값으로 1드라크메를 더 주었습니다. 아르콘과 장군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동맹 도시의 사절로 나가도 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부자들이거나 존귀한 집안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전에 이미 도시의 전통으로 부자들과 존귀한 집안 사람들이 그들의 돈으로 도시의 일을 보는 것이 하나의 명예이자 의무여서 도시가 그들에게 그런 일을 맡을 신분을 주었고, 그래서 그들의 돈으로 그런 일들을 보아 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 받는 수당의 열 배 스무배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평등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하다 못해 중무장 무구라도 갖추어야 명예로운 시민이 될 수 있어 사람들은 자신의 수입을 실제보다 더 많은 것처럼 떠벌리고 다닐 정도였었는데, 이제 그런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시 사랑이 빛을 보게 된 셈이었지요. 평등한 그 대가를 받았습니다. 더 이상 부자들이 자기 돈으로 도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가로 돈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기 돈으로 도시 일을 보는 대가로 명예와 권력을 얻었고, 돈을 벌 기회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이 덤이었었는데, 이제는 도시의 돈으로 도시 일을 하는 대가를 받으니, 예전의 돈을 벌 기회는 물론이고 이제는 명예와 권력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10.38. 페리클레스는 부자들이 구태여 자기 돈으로 도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대가를 받도록 만들어 놓자, 그것이 아고라의 장사꾼들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돈은 제법 있었지만 실속 없는 명예나 듣지 않는 권력을 자기 돈으로 사고 싶지 않아 도시 일에 숨어 지내던 아고라의 장사꾼들에게 페리클레스가 보인 다른 도시에서 뜯은 돈으로 인기끌기 시범은 순진한 아이들의 소꼽놀이 같아 우스울 정도였습니다. 도시 일을 하면 자기 돈을 쓰는 게 부담스러워 대대로의 부잣집 아이들이 도시 일 한다고 나서는 걸 그냥 그러라고 내버려두고 살았었는데, 이제는 자기 돈 쓸 일 없으니, 권력을 쥐어 잘못 되어도 페리클레스처럼 자기 재산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청렴하다 소리 듣고, 잘 되면 권세도 부리고 돈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투퀴디데스가 쫒겨난 자리를 니키아스가 이어받기는 했지만109 아직 존귀한 사람들의 중심이 되지는 못하고 있어, 권력은 페리클레스가 혼자 쥐고 제일 시민이 되어 나머지 시민을, 민중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일한다며 설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의 관심이 도시의 돈에 쏠리자, 다른 것 어느 하나 페리클레스보다 나을 것 없는 그들이라도 돈에 대해서라면 페리클레스 정도는 그저 귀여운 존귀한 집안 도련님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도시의 돈을 쓰기 위해 페리클레스를 제일 시민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페리클레스의 영광도 끝장낼 것이었습니다. 아고라의 장사꾼들이 보기에, 그는 누구보다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고, 누구보다 고상한 것을 좋아하며, 누구보다 신들 앞에 경건한 척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아야 살맛이 나는, 그냥 척 보아도 존귀한 집안 출신임을 속이지 못하는, 겉보기 민중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속이나 안으로는 뼛속까지 존귀함에 젖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겉과 밖으로는 오로지 민중을 위한다며 돈으로 인심 쓰면서 그 인기로 권력을 놓지 않는 페리클레스를 무너트리지 않고는 아고라의 장사꾼들이 도시의 돈을 만질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속과 안만 존귀한 페리클레스와는 달리 겉과 속이 안과 밖이 모두 존귀하던 투퀴디데스로서는 결코 쓸 수 없었던, 그래서 고작 다몬이라는 페리클레스의 책사 하나 도편추방시키고 그 값으로 자기도 쫓겨나고 만 투퀴디데스로서는 그런 방법을 누가 일러줘도 결코 쓸 수 없었을, 그리고 아테나이에서는 페리클레스가 맨 처음 써 보았으나 실패하고만, 고발과 재판이라는 정적 제거의 수단을 아고라의 장사꾼들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쓸 수 있었습니다. 아고라의 장사꾼들에게 페리클레스 같은 종류의 영혼을 상처내어 스스로 무너지도록 하는 일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매일 같이 시궁창 속에서 지내다 목욕하고 나오는 아고라의 가죽장사 클레온에게 그랬습니다. 일찌기 페리클레스가 몸소 가르쳐 준 수단을 쓰되, 필승의 약점을 찾아 아테나이 사람 누구도 인정하는 페리클레스의 측근들 가운데 아테나이 사람이 아닌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클레온은 비록 가죽으로 돈 버는 방법 이외에는 배운 게 없었지만, 페리클레스의 강점을 건드려서는 오히려 투퀴디데스처럼 자기가 다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페리클레스의 강점이 아테나이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과 자기도 정권을 잡으면 그대로 해야 할 강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페리클레스가 돈이나 다른 일로 개인적인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모를 리 없었습니다. 특히 페리클레스의 돈에110 대해서는 그의 큰 아들 크산팁포스가 아버지가 집안 살림을 하인인 에반겔로스에게 맡기고 자기에게는 한 푼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한다며 방방곡곡에 페리클레스를 비난하고 다니는 바람에 문제 삼을 수조차 없었고, 밀레토스에서 온 여자 아스파시아 문제 역시 페리클레스가 본처111와 갈라서는 바람에 아스파시아와의 사이에 혼외자가 하나 있었음에도 더 이상 문제 삼을 수 없는 형편112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약점도 없고, 공무도 뛰어나게 잘 보아 거의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페리클레스를, 그것도 투퀴디데스나 니키아스도 아닌, 저자 거리의 클레온이 직접 공격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도 웃을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클레온은 페리클레스 주변 인물들 , 특히 헬라스의 다른 도시에서 아테나이로 와서 페리클레스로 인해 유명해지고, 페리클레스로 인해 돈도 벌고, 페리클레스로 인해 아테나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주목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희극 시인들이 페리클레스를 독재할 위험 인물로 보고 기회만 있으면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곤 했었는데, 페리클레스에 대한 공격이 아스파시아에 대한 인신 모독으로까지 번지자 더는 참지 못하고, 페리클레스가 민회로 하여금 희극에서 특정한 개인을 공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113을 만들도록 하는 것을 보고는 페리클레스에게 한 수 더 배웠습니다. 법으로 시인들의 시를 벌줄 수 있다면 법으로 소피스테스나 철학자 같은 사람들의 주장도 벌줄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먼저 뜬금없이 디오피데스가 나서 신을 우습게 보면 벌주자 했고 아테나이 사람들은 당연하게 그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자 거리의 민심을 이용했습니다. 프로타고라스 같은 소피스테스들이 페리클레스 주변을 맴돌면서 아테나이의 명문 자제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가르친다며 돈을 끌어 모으는 것114이 못마땅한 민심, 페이디아스 같은 예술가들이 페리클레스 주변을 맴돌면서 아테나이를 아름답게 한다며 아테나이의 황금을 녹여 여신의 옷을 만드느니 어쩌니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못마땅한 민심, 아스파시아 같은 재기 넘치는 여자가 집에 젊은 여자들을 두어 남의 색기까지 부리면서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아테나이의 명망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 못해 돌이나 쪼던 소크라테스까지 제 집에 들락거리게 해 마치 자기가 타르겔리아115인 듯하는 것도 꼴사납게 보는 민심, 아낙사고라스 같은 지성이 넘치는 철학자가 페리클레스를 제자로 두고는 민중들 앞에 나가 고상한 말과 점잖은 태도로 연설하도록 가르친 것만으로도 약이 오르는데, 태양이 불타는 바위라는 둥 마치 자기가 세상 이치를 다 아는 양 떠벌리는 것도 참을 수 없는 민심, 이런 민심을 이용해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은 디오피데스의 그 법을 한번 써 볼 생각을 했습니다. 아고라의 장사꾼들은 제일 먼저 증거가 너무나 확실한 프로타고라스를 신성모독으로 고발했고, 그를 추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음은 아낙사고라스를 똑같은 혐의로 고발하였고, 이번에는 처형까지 당할 수도 있었지만 페리클레스의 호소를 받아들여 추방으로 끝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아스파시아가 불경죄와 반역죄로 고발당했을 때서야 비로소 이런 일련의 신성모독 재판이 자기를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시아도 그렇지만 자기를 구하기 위해서도 아스파시아의 혐의를 벗겨야만 했습니다. 프로타고라스의 경우 그의 철학도 철학이지만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식민도시들을 돌며 그들의 법령을 아테나이식으로 정비해 아테나이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 그런 그가 아테나이를 떠난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다지 큰 아픔을 주지는 않았었는데, 최고의 스승 아낙사고라스가 처형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페리클레스가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구명 운동을 한 끝에 겨우 목숨을 구해 아테나이를 떠나게 했을 때는 정말 가슴이 아팠고, 철학자의 철학을 일반인의 경건심을 기준으로 재판하는 것이 야속하기까지 했었는데, 이제 아테나이 제일 시민인 자기의 아내116가 신성모독에 더해 아테나이를 반역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니, 이는 어떻게 보아도 틀림없이 자기를 노린 고발이라고 판단할 수밖에요. 페리클레스가 몸소 재판정에 나가 아스파시아와 자신을 한데 묶어 읍소로 변호한 덕분에 재판관들의 마음이 돌아 혐의를 벗을 수 있었습니다. 섭섭하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이 모두로 자신의 신상에 직접 해를 미치지는 못한다며 두고 볼 작정이었는데, 아스파시아에 이어 페이디아스가 신성모독과 횡령 혐의로 고발되자 사정이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천년 만년 페리클레스란 이름을 전해 줄 그 웅장하고 화려한 파르테논을 자기보다 더 큰 목소리로 자랑하던 사람들이 한때 페이디아스의 도제였던 메논을 앞장세워 페이디아스를 고발했을 때 직감적으로 자기도 걸려들었다고 느꼈습니다. 페이디아스가 파르테논의 니케가 든 방패에 자기 얼굴을 새긴 것은 조각가들이 새겨 넣는 일종의 자기 서명 같은 건데, 만일 그것을 두고 신성모독이라 한다면 그 옆에 새겨진 자기 얼굴은 두 말 할 것 없는 신성모독이니 자기가 걸려들 것은 불문가지, 페리클레스는 드디어 신상에 대한 경고음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페이디아스의 일에 아낙사고라스나 아스파시아의 일처럼 자기가 직접 나설 경우 판을 키울 수 있겠다 싶어 이번에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하고서 뒤로만 힘을 써서117 겨우 사형은 면하게 했지만 공사하며 번 돈 모두를 벌금으로 내고 아테나이에서 쫓겨난 페이디아스가 자살하는 일까지 생기자118, 이 일련의 고발 사건들 뒤에 누가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철벽 같던 키몬이 스파르테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 뒤 아테나이에서는 더 이상 상대가 없다고 자신만만했는데, 단 한 번도 자기의 자리를 노리리라 주목해 본 적이 없는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이119 그렇게 음흉하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기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감감해졌습니다. 아직은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어, 지금 당장 페이디아스와 연관지어 신성모독으로 고발해 오지는 않겠지만, 자기의 영향력이 조금이라도 약해졌다 싶으면,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이 페이디아스를 잡은 메논을 앞세워 얼마든지 자신을 재판정으로 끌고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앞에 있었던 네 번의 재판으로 페리클레스는 민중들이 모여 내리는 판결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지요. 그리고 민중의 편견을 거드는 일이 그 편견을 깨고 진실을 보게 하는 일보다 얼마나 더 쉽고 간단한 일인지도 몸소 겪어 알고 있었습니다. 아스파시아의 고발자는 희극 시인의 노래 한 소절만으로도 민중의 편견을 진실로 믿게 할 수 있었지만, 눈물로 호소하기 전까지는 정성을 다해 밝힌 자신의 진실한 변론만으로는 그들의 편견을 깰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희극 시인의 비아냥과 힐난을 비극 시인의 애소와 눈물로 겨우 막아 아스파시아를 구한 경험이 그를 충분히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권력이 약해졌을 때 닥쳐올 일의 두려움이 페리클레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더욱 튼튼하게 장악해야 하도록 몰았고,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에게는 물론 민중들에게도 다시는 자신에게 도전할 수 없는 특단의 조치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부추겼습니다.
10.3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네 번의 재판으로 클레온식 민중의 힘, 다시 말해 아고라 저자 거리 여론의 힘을 단단히 맛 본 페리클레스는 상처 입은 자신의 영혼을 달래고, 자신의 영혼에 상처 입힌 클레온과 아고라 장사꾼들에게 다시는 정치의 영역을 기웃거리지 않도록 할 방법으로 30년 평화 약속을 깨고 전쟁을 선택했습니다.120 페리클레스가 볼 때, 그들이 노리는 것이 아테나이를 좋은 도시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목적보다는 도시가 가진 6000탈라톤121이 넘는 여유 돈과 또 매년 들어오는 1000탈란톤이 넘는 돈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페리클레스가 심기일전하여 클레온식 민중의 힘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내 놓은 것은, 6000탈라톤에 달하는 도시의 돈을 어떻게 쓰면 도시와 도시민에게 좋을까를 놓고 토론하고 민회에서 결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경우 어떤 방법으로든 나누어 쓰자는 주장이 틀림없이 결의될 것이기 때문에, 그가 집권한 뒤 늘상 그랬듯이 가급적 민회를 소집하지 않고 자기에게 위임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도시의 안전에 관한 사항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민중들의 재판으로 그를 공격한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을, 아테나이의 재판정이나 민회가 아닌, 결국은 스파르테가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도시들과의 문제 앞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아테나이라는 도시가 가진 가난 구제 정도로 인기를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 아테나이와 델로스 동맹이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부딪치어 벌어지는 지배와 종속, 평화와 전쟁을 다루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국제 정치의 문제를 그들에게 던진 것이었습니다.
10.40. 전체 헬라스의 내전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여름에 페리클레스는 때마침 찾아온 케르퀴라 사절단의 지원 요청122을 다루도록 모처럼 민회를 열었습니다. 민회는 어중쩡한 지원을 결의했고, 아테나이는 케르퀴라와 코린토스 간에 벌어진 쉬보타 해전에 10척의 함대를 보내 어느 한 쪽도 완승을 거두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둘 사이에 전쟁의 판을 키울 여지를 남겨 두었지만, 그해 가을에 들면서 코린토스와 아테나이의 관계가 순식간에 적대적으로 바뀌었고, 아테나이는 코린토스의 식민 도시이지만 아이가이온 바다에 있어 델로스 동맹에 가입해 있던 칼키디케와 팔레네 반도의 병목인 포테이다이아에게 코린토스와의 관계를 끊고, 성벽을 허물고, 더 많은 인질을 보내라고 겨울이 오기도 전에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전에 이미 아테나이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돌아간 메가라가 케르퀴라와의 해전에 코린토스를 지원하는 함선을 보낸 것에 대해 그해 겨울 하찮은 핑계123로 메가라에게는 견딜 수 없는 메가라와의 통상과 왕래를 단절하는 보복을 결의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이 모두가 클레온이 페리클레스의 친구들을 법정에 세운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마치 몇 년을 두고 계획해 두기나 했던 것처럼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전광석화 같이 일어났습니다. 클레온이 페리클레스의 친구 넷의 불경죄 혐의에 대해 재판관들이 어떻게 판결할지 예상할 수 있었듯이, 페리클레스도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이 퀴르케라에 대해, 포테이다이아에 대해, 그리고 메가라에 대해 어떤 조치를 요구하고 나올지 너무나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예상 정도는 어린 나이의 저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124 마치 오직 페리클레스만이 법정에 출두하여 아스파시아와 아낙사고라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듯이, 오로지 페리클레스만이 민회에 나가 그 가을과 겨울 사이에 아테나이에서 아우성쳐진 전쟁의 목소리를 낮추고 한쪽 구석의 조심스런 평화의 목소리를 키울 수 있었지만 페리클레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내전이 발발하던 해 봄부터 시작된 포테이다이아의 반란을 여름까지 방치했고, 코린토스와 메가라가 스파르테를 앞장 세우고 나설 때까지 코린토스와 메가라의 움직임에 달래려 하지도 경고를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케르퀴라에서 사절단이 오고 난 후 꼭 일 년이 되는 여름에 스파르테의 사절단이 아테나이를 찾아왔을 때까지 그는 그가 잘 아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스스로 나아갈 길을 예측하고 그 길로 나아가도록, 아니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이 아테나이 사람들을 그 길로 이끌어 가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그 길의 선두에 페리클레스가 아닌 클레온이 섰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클레온을 헌 신짝처럼 버리고 자기를 찾을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을 장군으로 뽑아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다는 사실은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들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갈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은, 버리고 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들, 곧 아테나이의 권력자가 될 것이고, 도시의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될 것이란 기대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코린토스와 메가라의 아테나이 탄핵을 더 이상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에 힐난의 사절을 보내자, 아테나이 사람들은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페리클레스를 그들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아테나이의 권력자가 된 페리클레스는 클레온이 차려 낸 전쟁의 밥상에서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10.41. 전쟁의 분위기가 페리클레스를 다시 아테나이의 제일 시민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페리클레스는 그 전쟁으로 새로이 얻을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테나이가 새로이 더 얻을 것이 없다는 말은 아테나이는 지켜야 할 것만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그 전쟁으로 지금 아테나이가 가진 것에 바탕을 둔 헬라스의 새로운 30년의 질서125를 세우고, 그 질서를 스파르테와 그 동맹 도시들이 받아들이게 하도록 만들면 온 아테나이가 판아테나이 행렬에 자기를 무등 태워 나설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것으로 성공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언제라도 자기가 전쟁을 끝내고 싶으면 끝낼 수 있다고 자신했고, 그것도 길어야 3년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모든 헬라스 도시들로부터 최강자로 존경 받는 가운데 라코니케에서 헤일로타이를 데리고 평화롭게 농사나 지을 수 있으면 좋은 스파르테와는 달리, 30년 평화조약으로 나날이 번성하는 아테나이처럼 자기들도 또 다른 아테나이가 되고 싶은 테바이나 코린토스나 메가라가, 마치 자기의 친구들을 건드린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처럼, 아테나이의 친구들을 건드리고 싶어하는데, 이들 역시 전쟁이라는 국제 정치의 무대에 끌어내어 그들로서는 결코 또 다른 아테나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3년 동안 한번 가르쳐 놓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페리클레스에게 그 전쟁의 알파요 오메가가 바로 포테이다이아였습니다.
10.42. 페리클레스는 자기를 저주 받은 자126이니 쫓아내라며 아테나이를 힐난하기 위해 스파르테 사절들이 오기 전에, 다시 말해 스파르테의 최후통첩을 받기 전에,127 이미 그해 여름 함대와 중무장 보병을 포테이다이아로 보내, 성벽을 허물고, 코린토스의 관리들을 추방하고, 되도록 많은 인질들을 확보하도록 조치해 두었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한편으로 아테나이의 이런 행동이 30년 평화 체제 안에서의 군사 행동이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코린토스와 메가라가 아테나이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30년 평화 체제 안에 준비된 분쟁 조정 협상을 통하면 된다는 것이었지만, 코린토스가 포테이다이아를 버려두지도, 그런 코린토스를 스파르테가 버려두지도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포테이다이아가 틀림없이 반발하여 동맹을 이탈하고 아테나이에 반기를 들 것으로 예측하고, 포테이다이아에 대한 처리를 사모스의 경우와는 다른 본보기로 모든 헬라스의 도시들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본디 사모스는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을 때부터 키오스 등과 함께 독자적인 해군을 보유하는 자주국이었고128, 따라서 아테나이가 하는 대로 이오니아의 도시들을 그들에게 예속시키려 하다가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페리클레스에게 결딴이 나버려 오히려 아테나이에게 예속된 경우였지만, 본디 포테이다이아는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을 때부터 코린토스의 식민도시였지만, 코린토스와의 거리가 멀어 유사시에 코린토스 해군의 즉각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라, 코린토스와 아테나이의 관계가 좋았을 때 코린토스의 양해를 받아 아이가이온 바다를 지키는 아테나이 해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아테나이와 자발적으로 동맹을 맺었던 도시여서, 틀림없이 그렇겠지만, 만약 포테이다이아가 동맹을 이탈하고 옛 종주 도시로 돌아가는 반기를 든다면, 그래서 만약 포테이다이아를 사모스보다 더 험하게 결딴내지 않는다면, 본디 종주 도시가 있는 다른 동맹 도시들 전체가 이탈하지 않을 리 없고, 그것으로 제국의 틀이 무너지고 마는, 사모스보다 더 절박한 경우였습니다. 스파르테와의 전쟁을 아테나이가 끝내고 싶을 때 끝내기 위한 가장 큰 조건은 아테나이가 전쟁 중에도 제국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스파르테에게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스파르테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 아테나이라면 그전 해 겨울 30척에 1000명으로 포르미온도 아닌 아르케스트라토스와 다른 10명의 장군을 보낼 것129이 아니라 적어도 70척이 넘는 함대와 3500명의 중무장 보병130을 포르미온과 함께 페리클레스가 직접 이끌고 가서, 직접 최후통첩을 전하고 반기를 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성벽을 허물고 인질을 잡고 코린토스의 관리들을 내쫓았어야 했는데, 페리클레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스파르테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었던 아테나이라면 그 전전해 여름 쉬보타의 해전에서 케르퀴라 지원 함대의 수를 적어도 50척 이상, 아니 전투에 참여시킨 10척을 돌보라며 뒤따르게 했던 25척의 배를 한꺼번에 투입하고 전투를 치르는 태도도 방어적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수행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과 똑같은 맥락이었습니다.
10.43. 페리클레스는 사모스를 치고 아테나이가 얻은 댓가를 곰곰히 따져 보았을 것입니다. 세 차례의 해전과 아홉달에 걸친 방벽 안에 가두기의 결과로 얻은 것은 이탈을 꿈꾸는 동맹들에 대한 본보기였을 뿐, 잃은 것은 당장에 지출했던 전쟁 비용에다, 든든한 동맹 사모스와, 사모스 대신 아테나이가 늘여서 유지해야 하는 함대 비용이었습니다. 한 희극 시인131은 파르테논 신전은 짓는 시늉만 하다가 노느냐고 비꼬았지만 공사가 늦어진 것에는 사모스에 대한 응징에 든 돈이 주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페리클레스는 그 과도한 응징으로 게도 놓치고 구럭도 놓친 어부처럼 아테나이가 사모스의 함대도 잃고 그 함대로 동맹에 기여하는 사모스도 잃었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을 것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전쟁이 오래 가면 헬라스의 모든 도시들이 게도 잃고 구럭도 잃는 어부 신세가 되리라는 사실, 그래서 결국 아테나이도 게도 구럭도 놓친 어부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지금 전쟁을 말하는 헬라스 사람들 가운데 스파르테의 왕들을 빼면 과연 몇이나 알까, 그보다 지금 아테나이에서 전쟁을 부르짖는 사람들 가운데 몇이나 알까 생각하고는 반드시 그 전쟁을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자신의 위상에 흠집을 낸 성취감과 이제 곧 페리클레스의 권력을 쥔다는 자신감이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을 마침 불어오는 전쟁의 바람 앞에 어떻게 내던져 놓을지 불문가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30년 평화 체제의 혜택을 누리던 스파르테가 바로 그 30년 평화 체제 때문에 아테나이와 같은 번성을 추구할 기회조차 막혔다고 보는 동맹들의 불만이 불어내는 전쟁의 바람을 과연 누그러트려 놓을 수 있을지, 그럴 수 없다는 것도 불문가지였습니다. 평화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체제를 지키고 싶지 않은 당사자가 있다면 그 불만을 그들의 요구대로 들어주지 않는 한 전쟁은 더 이상 피할 수 없고, 그렇다면 전쟁을 통해 새로운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고, 그래서 전쟁을 벌인다면 헬라스의 어느 도시보다 아테나이의 준비가 월등한 지금이 가장 좋을 것이며, 그 전쟁은 아테나이가 반드시 이길 것이고, 따라서 새로운 평화 체제도 아테나이가 주도하여 구축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는 그 전쟁을 자신만이 시작하고 자신만이 끝낼 수 있는 자신만의 전쟁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132 따라서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민주정이라는 정치 체제 아래에서 어쩔 도리 없이 나타나는 민심의 변덕을 확실히 막아 두어야 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사람들이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어야 하는지, 언제 그 전쟁을 끝내어야 하는지, 그 전쟁에 관한 한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의 생각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같아야 했고, 자신이 전쟁을 끝낸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클레온 같은 아고라의 장사꾼들의 농간에 재판정에 나가 눈물까지 흘리며 얻은 영혼의 상처가 마침 불어닥친 전쟁 바람 덕분에 다시 확고해진 권력으로도 아물어지지 못한 때문인지, 전쟁을 앞에 둔 페리클레스의 권력에 대한 집착이 한층 더 예리해지고 강인해진 때문인지, 페리클레스는 민회로 하여금 자기가 전쟁을 끝낸다고 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전쟁을 그만두자는 말을 꺼낼 수 없도록 하는 법까지도 새로 장만했을 만큼 용의주도하게 자기만의 오만한 전쟁을 준비했지만, 끝내 신은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의 오만을 그냥 두고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가 완벽한 전쟁 계획을 준비해 두었다면, 신은 역병의 한 입김만으로도 훅하고 하루살이 인간들의 오만한 계획을 무너트릴 수 있었습니다. 전쟁 이듬해 아테나이에 들이닥친 전대미문의 역병은 먼저 페리클레스의 전쟁을 망쳐 놓았는데, 그래도 페리클레스가 다시 그의 전쟁을 수행하려 하자 곧바로 그를 망쳐버렸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그의 전쟁을 시작만 해 둔 채로 죽었고, 아무도 페리클레스의 전쟁의 다음 단계를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기에, 누구도 페리클레스의 전쟁을 끝낼 수도 없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시작한 전쟁은 우선 역병의 재앙을 벗어나야 새로운 양상으로 바뀔 것이었습니다.
10.4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제가 앞서 페리클레스에게 포테이다이아는 전쟁의 알파요 오메가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결국 포테이다이아는 페리클레스가 장군직에서 물러난 그해 겨울이 되어서야 아테나이에 항복하고, 옷 한 벌에 여비 몇 푼만 든 채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는 역병과 전투로 1500명 이상을 잃으며 70척의 함대와 3500명의 중무장 보병이 하릴없이 근 3년이나 성벽만 쳐다보느라 허송세월했고, 페리클레스가 자랑하던 전쟁 비용 가운데 4000탈란톤133이나 까먹었을 뿐만 아니라, 역병으로 줄어든 사람들 가운데 또 이주할 사람들을 뽑아 포테이다이아에 살며 그곳을 지켜야 하는 전력 분산의 짐이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코린토스의 식민도시를 아테나이의 식민도시로 만들어 버린 꼴이 되어, 아테나이는 30년 평화 체제의 제국 현상 유지 조항을 어긴 것이 되었고, 전쟁을 하면서 페리클레스가 말한 제국의 확장을 꾀하지 말라던 전쟁 수칙도 스스로 어기고 만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디 페리클레스의 전쟁은 포테이다이아를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페리클레스의 전쟁에서 포테이다이아는 자신이 전쟁을 끝내고 싶을 때 쓸 코린토스의 반발에 대한 인질이었습니다. 물론 마케도니아가 전쟁의 새로운 변수가 되는 것을 막는 방어벽이 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보이오티아와 테바이가 펠로폰네소스의 동맹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상 마케도니아나 테살리아나 트라케와의 관계가134 갑자기 틀어지지 않는 한 페리클레스의 전쟁에서 방어벽의 가치는 인질의 가치에 비해 무시해도 좋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페리클레스의 전쟁은 포테이다이아에 그 겨울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포테이다이아가 반기를 들고, 여름이 한창일 때 30척의 함대와 1000명의 중무장보병을 마케도니아에 진주시켰을 때 이미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렇게 포테이다이아는 페리클레스의 전쟁의 알파였습니다.
10.45.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페리클레의 전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단 포테이다이아를 인질로 잡는 것으로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일부 칼키디케 도시들의 반란을 평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북방으로부터의 변수에 대비토록 한 다음, 함대를 코린토스만으로 진출시켜 나우팍토스135를 거점으로 코린토스만을 봉쇄하고, 펠로폰네소스의 동쪽으로 진출하여 에피다우로스를 거점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남 해안을 감시하다 스파르테가 아티케로 나올 때마다 아테나이는 그 보복으로 라코니케를 유린하여 스파르테를 성가시게하고, 이따금 함대로스파르테의 직할지 멧세니아의 해안을 유린해 스파르테가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또 다시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염려하게 해 놓을 것이었습니다. 메가라 정도는 아이기아를 점령한 뒤 단 한 번의 유린으로 산 송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어서 안목에 둘 필요도 없을 것이고, 케르퀴라의 도움으로 펠로폰네소스의 서북단 엘리스와 아카이아를 괴롭혀 그들의 불만이 스파르테로 하여금 종전을 결심하게 만들고, 예전의 30년 평화 체제를 새롭게 복원시키는 것으로 페리클레스의 전쟁은 완전히 끝날 것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그의 전쟁을 3년으로 끝낼 수 있다고 믿었고, 아테나이가 보유한 6000탈란톤과 매년 600탈란톤씩 그 3년 동안 들어올 1800탈란톤을 더해 7800탈란톤으로 3년의 전쟁을 치를 것이었습니다.136 페리클레스의 전쟁은 한 3년 뒤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나야 할 것이었지만 제국은 더욱 튼튼하게 엮이어 갈 것이고, 아테나이의 번성은 전체 헬라스의 번성을 이끌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포테이다이아는 자발적으로 다시 아테나이의 품으로 돌아와 그들의 번성으로 아테나이를 번성케 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물론 번성하는 아테나이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불복과 불화가 자기의 권력과 도시의 평화를 흔들 까닭이 없을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도시의 번성 앞에서 권력의 불평등이나 부의 불평등이니 도시의 정의니 따위를 말할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의 전쟁의 오메가는 포테이다이아도 새로운 30년 평화 체제 아래서, 코린토스의 식민도시로서, 아이가이온 바다의 아테나이의 충직한 동맹으로서, 아테나이와 함께 번성하는 것이었습니다.
10.46. 그런데,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런 페리클레스의 전쟁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바이의 플라타이아이에 대한 불장난137은 페리클레스의 전쟁의 알파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 불장난은 포테이다이아를 인질로 잡기도 전에 그 전쟁을 께름칙해 하던 아르키다모스를 아티케로 불러들였고, 그들이 늦은 봄의 아티케를 한 보름 유린하자, 아테나이 성안으로 피난 온 아티케 사람들과 응전파들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고 닦아세우는 것을 진정시킬 겸, 스파르테에게 앞으로의 전쟁이 어떤 모습일지 각인시킬 겸,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의 함대와 케르퀴라의 함대와 연합하여 스파르테의 본거지 라코니케의 메토네에 상륙하여 공격하고138, 펠레폰네소스 해안 도시들을 약탈하도록 하는 한편, 스스로 메가라 유린에 나서는 등 스파르테의 움직임에 적극 대응은 했지만, 전쟁을 자기가 기획했던 대로 끌고 가기 위해 고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이 되자, 아르키다모스가 아티케로 와서 이번에는 제법 아테나이의 은광이 있는 라우레이온으로 진군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낡은 배를 수송선으로 개조한 뒤139 기병에 중무장보병을 태우고 키오스와 레스보스의 함대와 연합하여140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쪽과 라코니케의 해안도시들을 파괴하고 돌아왔는데, 이때 이미 아르키다모스가 아테나이의 역병 창궐을 감지하고 귀환한 뒤라, 페리클레스는 자기가 아테나이의 역병에 대처하고, 그 대신 그 부대를 하그논과 클레오폼포스에게 공성기까지 주어 포테이다이아로 보내 자기의 전쟁 알파를 완성시키려 했지만. 하그논에게 맡긴 그 부대가 포테이다이아에 도착하여 몇 번 제대로 공격도 하지 못하고 역병으로 먼저 무너져 버리자 페리클레스의 전쟁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보다 이 모든 페리클레스의 도로徒勞는 신이 보낸 역병 앞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성난 아테나이141는 페리클레스에게 그 책임을 따졌고, 가을의 신임 투표에서 불신임 당해 장군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급기야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 벌금을 물리지만, 강화를 거부하는 스파르테에 필적할 사람은 결국 페리클레스밖에 없어 이듬해 여름 다시 장군으로 뽑았습니다. 그렇지만 페리클레스는 두 달 뒤, 전쟁 세 번째 해의 가을, 자신의 전쟁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적들이 맥을 놓도록 만들어야 했을 때, 어긋난 그의 전쟁 알파를 바로잡을 여가도 없이 하루살이 인간들이 가진 필멸의 섭리만 순순히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142
10.4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페리클레스의 죽음은 그가 실권한 뒤 포테이다이아가 항복하고, 주민들을 모두 내쫓고, 그 포테이다이에 아테나이 사람들을 보내 새로운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보았을 때 이미 그에게 다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자리를 비우기를 기다리기나 한 듯143,벌써 동맹들의 분담금을 올리느라 정신 없는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은 무조건 항복을 받지 않았다고 포테이다이아에 나갔던 장군 셋을 모두 재판에 회부하면서144, 한편으로 아테나이의 포테이다이아를 새로 건설할 아테나이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전쟁의 알파가 무참히 그들에 의해 뭉게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죽음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펠로폰네소스의 동맹도시, 특히 코린토스와 메가라와 테바이가 스파르테에게 전쟁을 강요한 것이 바로 그 앞의 30년 평화 체제가 아테나이에게만 좋았다는 불만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이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펠레폰네소스에게도 좋은 새로운 30년 평화 체체가 가능할 것이었는데, 그래서 아테나이의 제국도 무력이 아닌 호혜평등의 새로운 협력 체제로 가능할 것이었는데, 그래서 신이 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분쟁 해결 기회를 스파르테가 아니라 아테나이로 넘겨준 것이었는데, 그래서 코린토스를 안고 새로운 30년 평화 체제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래서 코린토스의 포테이다이아가 진정한 아테나이의 동맹이 되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이 모두가 아테나이와 자신의 영광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권력의 오만과 집착이 이 모든 좋은 것들을 버리고 한낱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삿꾼을 맞갋기 위해 전쟁을 택하게 했으니, 신이 분노하여 보낸 재앙으로 순순히 죄값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장군직에 올랐지만 이미 몸 안에 역병의 병마가 자리 잡은 페리클레스에게 신은 그의 섭리대로 페리클레스의 영화와 함께 페리클레스가 이루었던 아테나이의 영화도 걷어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테나이의 영화가 걷히자, 우리 아테나이에서 권리니 부니 평등이니 불평등이니 하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10.4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래서 권력을 잡은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의 아테나이에는, 퀼론과 복수의 여신의 저주가 흐르는 핏줄의 페리클레스가 그 저주까지 남기고 간 때문인지, 전쟁만 남고 그들이 쓰고 싶은 돈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세 해의 전쟁으로 아테나이의 돈이 거들나 버린 것이었습니다. 별수없이 페리클레스가 남긴 전쟁을 니키아스와 젊은 장군들이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전쟁은 페리클레스의 전쟁보다 쉽고 편하고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에게 남겨진 전쟁의 끝은 오로지 그들이 그 전쟁을 이기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기는 것 이외의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목표도 전쟁의 폐해도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는 전쟁에 대해서나, 그 전쟁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도시가 부르는 대로 중무장 보병이 되어 며칠 밤낮을 명상이나 하고 있으면 되었습니다. 도시를 번영케하고 도시민을 더욱 잘 살게 하기 위해 사소한 일이 아니라며 시작한 전쟁이 도시의 번영을 무너뜨리고 도시민을 굶주리게 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전쟁이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이 하나 있다면, 전쟁으로 도시가 피폐해지고 도시민 모두가 가난해지면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이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히 해소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평화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가져다 준 온갖 재물과 선의는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했지만 전쟁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가져다 준 온갖 파괴와 폭력은 부의 불평등을 단숨에 해소해 버렸다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저 아리스토파네스를 빼고는 누구도 평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평화가 전쟁을 끝낸다는 것을 모르고, 평화는 그 전쟁에 이긴 끝에 오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모두가 생각하는 것이 전쟁에 이기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장에 나서 불패를 기록 중이던 니키아스 뿐만 아니라 입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아고라의 클레온도 이겨야 했습니다. 반목도 이견도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 돈만 문제가 되었습니다. 도시를 번성하게 하고 도시민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돈이 아니라 도시를 피폐하게 하고 도시민을 굶주리게 하고 도시민을 전장에서 다치고 죽게 하는 전쟁 비용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페리클레스가 생각했던 3년 동안의 7800탈란톤의 돈이 페이라이에우스 항과 아테나이의 수비를 위해 따로 떼어 둔 1000탈란톤을 제외하고는 바닥이 났던 것입니다. 부자들이 도시를 위해 돈을 쓰지 않아도 되도록 되었기 때문에 니키아스도 클레온도 모두 부자였지만, 그리고 그들 모두 부자이긴 해도 오랜 세습의 존귀한 집안 출신이 아니고, 겨우 당대나 전대에 은광 노예 공급과 무두질로 번 돈이라 도시를 위해 자기 돈을 쓴다는 것은 생각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권력을 쥔 부자도 도시를 위해 돈을 쓰지 않는데, 가진 게 땅밖에 없는 세습의 존귀한 집안 사람들도 전쟁이 나서 3년째 수입이 없는 터에 도시를 위해 자기 돈을 쓴다는 것은 생각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니키아스나 클레온이나 전쟁에서 이겨야 하겠는데 이기기 위해 함선을 움직이고 중무장 보병을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했지만, 도시는 돈이 없었습니다. 페리클레스 때부터 이미 도시를 위한 참전에도 수당을 지불해 왔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은을 캐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100척의 함선을 4개월 바다에 나가게 하는 데도 빠듯했습니다. 동맹 도시들에게 분담금을 더 내라 해도 정말 낼 돈이 없어 못내고, 심지어 수금 나간 아테나이의 장군을 죽이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다른 방법이 없어 아테나이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전쟁세를 거두어야 할 정도였으니 다른 도시들의 사정은 어땠겠습니까?
10.49. 페리클레스는 이때를 기다려 전쟁을 그만두고 새로운 30년 평화 체제를 갖추자고 호소할 작정이었지만, 그리고 역병의 고통이 아니고서도 돈 떨어진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겠지만, 페리클레스가 없는 헬라스에는 그 누구도 헬라스의 새로운 질서를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에우리메돈이나 데모스테네스 같은 모험심 강하고 확전을 모색하는 젊은 장군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니키아스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전장에 나가 질 줄을 몰랐기 때문에 전투에서 이기기만 하면 아테나이가 전쟁에서 이기고 옛날처럼 헬라스의 돈이 모두 아테나이로 들어올 줄 알았습니다. 스파르테의 사정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었지요. 아르키다모스도 죽어145 그가 우려했던 대로 그 전쟁을 그의 자식 아기스가 이었지만, 젊은 아기스는 전쟁의 경험이 많지 않았음에도 아버지 아르키다모스와 같이 전쟁에 열광하거나, 전쟁을 좋은 것이라고도 또 안전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지만146, 아티케로 나가서까지 강화의 기회를 기대하던 아버지 아르키다모스와는 달리 그 전쟁을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은 이제 스파르테에서 어엿한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브라시다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 모두가 죽고 나타난 알키비아데스도, 트라쉬불로스도, 리산드로스도, 아게실라오스도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길 것만 생각하니 남겨두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피아가 분명해야 하니 몰인정하고 무자비하지 않을 수 없어, 도시 안에서도 아테나이에 붙느냐 스파르테에 붙느냐로 내전이 일어났고, 플라이타이아이는 줄을 잘못 선 탓으로 도시가 황무지가 되었고147, 케르퀴라는 어느 줄에 설 것이가를 놓고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다 망했고148, 멜로스는 줄을 바꾸지 않아서149, 스키오네는 줄을 바꾸어서150, 도시의 남자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런 도시들이 없어질 때마다 약탈과 인신매매로 돈이 생기는가 싶었지만, 자기도 그렇게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더욱 잔혹하게 몰아갔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은 칼키디케를 거쳐 암피폴리스에서 잠시 멈추더니, 시켈리아로 이오니아로 헬레스폰토스로 옮겨 다니면서 페르시아에 빌붙어 그들의 도움을 받고서야 간신히 끝낼 수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 펠로폰네소스 동맹들끼리의 싸움에 아테나이가 끼어들어 또 전쟁을 하고, 전쟁할 사람이 없어 돈으로 용병을 사서 또 전쟁을 하고, 그렇게 전쟁으로 지새우다 페르시아가 돈을 더 줄 수 없으니 지금부터는 전쟁을 그만하라고 하니 그제서야 전쟁을 그만둔 것151이 페리클레스 이래로 50여 년, 다레이오스 이래로 100여 년이 지났습니다.
10.5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했던 아테나이의 노력들 가운데 제가 유독 페리클레스에 대해 장황하게 말씀드린 것은 페리클레스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무슨 짓을 했는지 여러분이 보다 정확히 알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이 위엄을 가지고 서 있는 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물론이고 모든 헬라스 사람들이 아테나이의 영광과 함께 그 영광을 페리클레스의 것으로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페리클레스가 남긴 전쟁이 어떻게 아테나이를 쇠망의 길로 이끌었는지 기억하지 않을 것이듯이, 누구도 페리클레스의 영광을 넘겨받은 나머지 사람들, 이를 테면, 클레온,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휘페르볼로스, 페이산드로스, 테라메네스, 클레오폰, 크리티아스, 트라쉬불로스, 아뉘토스, 등등은 그렇게도 만들고 싶었던152 페리클레스의 영광스런 아테나이를 다시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도시를 쇠망의 길로 이끌었는지 기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페리클레스 때문에 그랬다고 그리 억울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니키아스 정도를 빼면 페리클레스 이후의 사람들 모두는 제가 그렇게도 주장했던 평화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밀티아데스, 크산팁포스, 테미스토클레스, 아리스테이데스, 키몬의 전쟁과 페리클레스가 남긴 그들의 전쟁이 어떻게 다른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도시를 번성하게 하고 전쟁이 도시를 영광스럽게 하고, 전쟁이 도시민들을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기면 이길수록 평화를 거부했고, 도시가 피폐해져서 제대로 배 한 척 만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전쟁을 고집했습니다. 그들이 페리클레스에게 배운 것은 전쟁이라는 권력의 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찌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 해소에 대한 그들의 노력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직접 여러분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그들이 전쟁을 치루는 동안 여러분의 할아버지부터 손자들에 이르기까지 여러분 가족들 그리고 친지들 가운데 역병으로나 전쟁으로나 제대로 먹지 못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는지 여러분의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또, 그 전쟁의 와중에 새로 부자가 된 사람은 누구이며, 부자였다가 망한 사람은 누구인지도 한번 살펴보십시오. 트라쉬불로스는 키몬보다 더 많은 해전을 벌였고 더 많은 승전탑을 세웠지만, 키몬처럼 전승의 전리품으로 명예로운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까? 그렇다고 결국 그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고 말았지만, 전비를 구한다며 자행한 약탈과 노획이 아테나이를 그리고 트라쉬불로스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트라쉬불로스의 유족들이 아테나이 최고의 부자입니까? 이 자리에 나와 서 있는 저 아뉘토스는 지난 10여년의 권력으로 그 자신도 아테나이 최고의 부자가 되고 아테나이도 최고로 잘 살게 되었습니까? 페리클레스를 이어받은 니키아스는 클레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니키아스와 클레온의 유족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습니까? 페리클레스의 아들 페리클레스는 비록 처형을 당했지만, 그래도 그는 장군으로서 할 바를 다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도시로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두 페리클레스를 잃은 아스파시아153의 슬픔을 또 다른 페리클레스가 달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페리클레스 집안을 상속한 명예는 지킬 수 있었지요. 반면에 우리는 니키아스의 아들이, 클레온의 아들이, 클레오폰의 아들이, 아뉘토스의 아들이 아테나이를 위해 어느 해전에 나가 목숨을 걸었는지 알지 못합니다.154 어쩌면 전쟁광 라마코스의 아들처럼 전쟁 좋아하는 아버지는 전장에 보내고 자신은 6드라크메의 일당을 받으며 어디 테살리아나 보이오티아 도시에 사절로 나가, 종들을 앞세우고 말에 올라 산천경개山川景槪를 구경하며 좋은 음식에 잘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소크라테스가 아뉘토스에게 아들 교육 잘 시키라고 한 것이 빈 말은 아니었지만, 그 아들은 가죽장사마져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아뉘토스가 십수 년을 넘게 권력을 쥐었어도 혼자서 배 한 척 장만할 수 없었을 정도로 그 부가 미약했지요. 어찌 그 부의 미약함이 아뉘토스의 아들에게만 해당되었겠습니까? 니키아스의 아들도, 클레오폰의 아들도, 라마코스의 아들도, 또 다른 페리클레스도, 알크마이네 집안의 아들들도 모두 한결같이 미약해져서 그들이 모두 모여도 배 한척 장만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 전 키몬의 때에는 부자 하나가 혼자의 힘으로 너끈히 배를 만들어 운행했던 것이 전쟁 중에는 열명의 부자가 힘을 모아 배 한 척을 겨우 마련하더니, 이제는 백 명의 부자가 힘을 모아도 배 한 척 장만할 수 없으니155 우리 아테나이에 이제는 오만도 탐욕도 모두 사라진 때문입니까? 오만과 탐욕이 아니라, 도시와 도시민에게서 부자와 권력자가 좋아하는, 성취의 긍지와 성취의 열정이 사라진 때문입니까?
10.5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지금까지 이렇게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있었던 권력과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들을 더듬어 보았습니다만, 솔론 이후 페리클레스, 그리고 클레온 이후 아뉘토스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제법 길어지고 말아, 지금까지 나왔던 다양한 노력들을 간추려 보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까 합니다. 우리가 아는 맨 처음 노력은 솔론의 시대였습니다. 극심한 부의 불평등이 솔론의 개혁을 불러왔지만, 솔론의 개혁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도시의 일에 참여토록 하여 부자 귀족들에 의해 과점되었던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새로운 길과, 아울러 자유민인 도시민이 가난 때문에 노예가 되거나 노예처럼 부자에게 예속되는 것을 막고, 모든 시민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관을 가지고 살아 스스로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고,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 두 길을 거부하고 도시에 더 큰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도시의 혼란은 권력과 부의 불평등에서 나온 것었지만, 혼란이 솔론의 개혁만 무너뜨렸을 뿐 그 어느 것도 해소하지 못했고, 혼란에 지친 사람들은 오히려 몽둥이와 칼을 든 페리시스트라토스에게 도시를 맡겼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이 말만 하고 끝난 가난한 도시민을 구제하기 위해 물품세를 걷었습니다. 그리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기구 구입할 돈도 꾸어주고, 포도주와 올리브와 항아리 생산하여 수출도 하고, 이집트나 흑해에서 곡식도 수입하여 싸게 팔고,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 보았고, 그 덕분에 먹고 살기는 전보다 확실히 좋아졌고, 모두들 크로노스의 시대니 황금의 시대니 했습니다. 도시가 나서면 가난을 구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도시가 가난에서 벗어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울러 권력이 참주와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몰려 있자, 재물도 그들에게 몰려 부의 불평등은 오히려 더욱 심해졌을 뿐이었습니다. 참주라는 최악의 권력 불평등을 감수하면서 아테나이가 배운 것은 오로지 참주를 받들 자유만 있는 자유민으로서는 참주를 위하는 것을 빼고는 도시의 번영이나 개인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도시민에게 마구잡이 폭력까지 행사하니 더 참을 수 없어 참주의 세상을 뒤엎었습니다. 그렇게 권력의 독점까지 경험한 아테나이 사람들을 위해 클레이스테네스는 민주정이란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새로운 세상은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점에서는 틀림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 솔론에게 요구했던 부의 불평등 해소는 왜 빠졌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아마 참주의 모진 권력 독점이 그것만이라도 해소되는 세상에 감지덕지했을 것이고, 아울러 가난한 사람도 도시 일을 보는 관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도시의 권력을 나누어 가진다는 설레임과 자기도 그 권력으로 부자가 되어 부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겠다 싶었을런지도 모르지요. 과연 민주정이란 새로운 세상이 오래 잊고 살았던 아테나이 사람들의 진취적 기상을 되살려 놓았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아테나이는 매사에 자신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최강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군사적인 모험을 하고 싶어 근질근질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스파르테가 두려워 페르시아에 도움을 청했을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스파르테도 거절한 밀레토스의 도움 요청에 원군을 보내고 한 술 더 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사르데이스를 야습하여 불을 지르고 돌아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얻은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밀티아데스도, 아리스테이데스도, 테미스토클레스도, 크산팁포스도, 모두가 도시를 구하는 일에, 특별히 오직 한 사람 테미스토클레스만은 자기 재산 모으는 일도 겸해서, 온 정신을 팔고 있었습니다. 권력이니 부니 평등이니 불평등이니 하는 그 모두가 페르시아의 침공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가려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나 장군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 했습니다. 그 덕분이었는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도시를 지켜 내었고, 아리스테이데스, 크산팁포스, 키몬, 등은 다른 헬라스 도시들과 힘을 합쳐 페르시아의 패잔병들을 헬라스와 이오니아와 아시아 해안에서 완전히 몰아내었고, 아테나이는 물론 전체 헬라스에 안정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키몬은 아테나이 밖에서 새로운 아테나이 땅을 만들어 가난한 아테나이 사람들이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 새로운 아테나이를 건설하여 도시의 진취적 기상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도시를 외연적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은 명예로운 재물로 공공을 위한 도시 정비 사업을 하고, 자기의 집과 농장을 늙고 병약한 사람들에게 열어 늙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스럽게 먹고 곡식이나 과일들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여 개인의 부가 도시와 도시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부를 모으는 것이 쌓인 걸 보고 즐거워하면서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은 부를 잘 쓰기 위함임을 솔선하여 보였습니다. 키몬은 먼저 자신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적을 퇴치하는 데 쓰고, 그것을 인정받아 장군이 되었고, 그 장군직을 바탕으로 아테나이에서 권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 장군직으로 바다로 나가 아테나이 바깥에서 아테나이의 안전을 지키고 새로운 아테나이를 찾아 아테나이를 번성하게 하는 데 정성을 다했던 아테나이의 장군이었습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존귀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했지만, 키몬이 보기에 도시가 가난을 구제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도시민이라면 늙고 병들고 가난한 다른 도시민을 자신의 재물로 돕는 것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자기가 꼭 닮았다는 페이시스트라토스를 꿈꾸면서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닌 것처럼 정치를 시작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 이후 밀티아데스, 크산팁포스, 테미스토텔레스, 아리스테이데스, 키몬에 이르기까지의 장군들은 페르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아테나이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권력을 잡고 유지했지만, 그 장군들 덕분에 페르시아를 물리쳤고, 델로스 동맹이라는 신이 보장한 도시의 안전을 지킬 튼튼한 울타리가 생겼는데도, 아테나이의 최고 권력자여야 마땅한 아르콘을 제치고 장군이 되어 권력을 페리클레스가 페이시스트라토스처럼 행사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보기에, 외종조부인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이라는 새 세상은 도시를 항상 적당한 상태의 전쟁을 계속 수행하도록 해 놓고 투표자들을 잘 구슬리기만 하면 그 전쟁을 수행하는 장군이 되어 민주적으로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능가하는 독점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세상이었고, 도시가 아무리 도시민이 모두 함께 잘 먹고 잘 살아하는 공동체라 해도, 그래서 같은 공동체 속에서의 도시민 간의 권력과 부의 평등이니 불평등이니 말하는 것이라 해도, 신의 세계에서 신들 간에도 권능의 차이가 있는데, 도시민 역시 인간인 이상 인간 본성과 능력의 차이가 분명한데도 도시가 이를 전혀 무시하고 같은 시민이니까 권력이고 부고 모두 똑같도록 해야 한다면, 오히려 이야말로 도시가 도시민이 가진 인간의 본성과 능력의 차이를 불평등하게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동맹도시 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테나이의 능력으로 도시의 안전을 얻은 다른 도시들은 아테나이가 동맹 유지비를 어떻게 쓰든 상관해서는 안 될 일이었으며, 권리로든 의무로든 도시민이 도시의 일을 한 것에 대해 도시가 수당을 지급함에 있어서도 그 도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차등 지급해야 도시민 간의 불평등이 해소될 것이었습니다. 이런 페리클레스의 불평등 해소책은 아테나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그는 열여덟 번이나 장군으로 뽑혔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여덟 번의 장군직은 그의 권력에 대한 오만과 집착을 키웠고, 그 오만과 집착이 아테나이를 끝없는 전쟁과 쇠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이미 끝없는 전쟁과 쇠망의 길로 접어든 페리클레스 이후의 장군들 또한 전쟁을 해야 권력을 행사하고 유지할 수 있는 그 장군직에 대한 탐욕 때문에 여러 차례 평화가 코 앞에 다가왔을 때도 그 평화를 박차고 전쟁을 택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리고 여러분도 그런 그들을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기도 했지만,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전쟁을 하지 않으면 당장에 패망할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니키아스부터 아뉘토스에 이르기까지 숱한 장군들이 아테나이 사람들에 의해 뽑혀서 전쟁을 수행하고 도시를 이끌었지만 결국은 전쟁에서 졌고, 전쟁에 지고 나서도 전쟁 아니고는 잘 하는 것이 없어 결국 페르시아 해군의 용병이 되어 돈을 벌었고, 그 돈마져 생기는 대로 도시의 성벽을 재건하는 등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는 데 썼고, 드디어 스파르테가 그랬던 것처럼 페르시아의 돈으로 스파르테와 전쟁을 벌일 수는 있었지만, 그래서 이제는 다시 아테나이의 함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그 페르시아가 돈줄을 끊고 이제는 전쟁을 그만두라고 하니, 도시는 함대를 가질 형편도, 그 함대를 유지할 형편도 되지 않고, 또 다시 아무나를 붙들고 전쟁을 시작해 다른 도시들을 약탈할 것이 아니라면 특별히 그런 함대를 가지고 유지해야 할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돈이 없는 아테나이는 이제 더 나빠질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고, 그래서 구태여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10.5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과연 이렇게 더듬어 본 대로 지금 아테나이가 부의 불평등이란 말조차 입에 담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고 해서, 물론 영광스런 페리클레스의 아테나이 시절처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부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부가 예전만 못하다고 해서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은 아닐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 같은 부자들이 권력에도 잘 나서지 않고 부자 행세도 잘 하지 않네요. 그렇지만 아직도 그들은 부자로 살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 부를 바탕으로 성취에 대한 긍지를 넘어 더 큰 성취를 위한 열정을 보이며 도시를 위해 도시민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언제 프락사고라 같은 여장군156이 나타나 언제 재산을 도시 공공의 재산으로 돌리자고 나올지 몰라 잔뜩 겁을 먹은 것일까요? 아니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주인공들처럼 부자고 고귀한 사람들이 모두 거지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눈물을 짜고 동정을 받고 위안을 받던 것을 기억하고 그들도 이제는 거지처럼 보이고 싶은 것일까요? 아무리 사는 것이 어려워도 우리 아테나이 시민이 부자들에게 돈 달라고 달려들지는 않을 텐데, 그렇다면 아무 소득 없는 또 다른 전쟁으로 그나마 남은 재산을 노꾼들의 노삯으로 빼앗기는 것이 두려운 건가요? 만일 그렇다면, 이제 아무리 많은 장군을 뽑아도 전쟁을 벌여 돈을 벌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우리의 도시를 지키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전쟁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있는 돈 다 쓰고 나서야 알게 하다니, 그리고 정말 돈이 없어 도시를 지킬 수조차 없게 되어서야 평화를 생각하게 하다니, 정말 신들이 오만과 탐욕의 진이 빠지도록 벌을 주셔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과연 하루살이 인간의 오만과 탐욕이 신이 내리는 벌로 진이 빠져서 더 이상 오만하지도 탐욕스럽지도 않은 소크라테스식 영혼을 간직하게 되는 건가요? 이제 아테나이에는 더 이상 장군들이 사소한 일이라 하지 말라며 사소한 일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민회에 나와 아르콘을 제치고 도시의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사라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0.53. 그러고 보니 오늘 저를 재판하시는 여러분 가운데는 무슨 일인지 텔레포스 같은 차림으로 나온 부자 분들도 여러분 보이네요. 설마 이 분들이 일당 3오볼로스를 벌기 위해 추첨을 기다리어 이 재판정에 재판관으로 나오시지는 않았겠지요? 아마 저에 대한 재판이 이 분들에게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나 봅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음해했네,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파네를 어두운 고발자라 뭐라 했네, 따위에 그들이 귀 기울일 리도 없고, 40년도 넘은 저의 평화 주장에 어린 나이였지만 한 세대를 앞서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며 지금에 와서야 깊이 감명받아 저를 옹호해 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겠고, 틀림없이 여장군 프락스고라와 눈을 뜬 플루토스가 신경에 거슬려 여차직하면 아리스토파네스가 도시가 믿는 신을 경멸하고 신의 본성을 바꾸어 버린157 죄와, 모든 재산을 만인 공유하여 모두가 공유 재산으로 살아가서 도시에서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라158고 여자들을 선동한 죄를 지었다며 십수 년 전 소크라테스를 잡도리했던 대로 이 아리스토파네스를 잡도리하러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약관의 나이에 나는 새도 떨어트리던 클레온을 목숨을 내놓고 상대했던 제가 나이 예순이 넘어 이제 살만큼 산 마당에 눈썹 하나 까딱하겠습니까? 제가 우리의 신 제우스를 희극적 대치물로 삼아 농락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고, 반대로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제우스를 찾았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한번 그를 희극적 대치물로 삼아 소피스테스들 가지고 논 걸 가지고 소크라테스가 저더러 그림자 없는 고발자라고 비난했듯이, 여러분도 저더러 제우스를 능멸한 신성모독자로, 도시의 약자들을 꼬드겨 도시의 전복을 꾀했다고 몰아세운들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 모두가 도시와 도시민의 불의를 고발하는 희극 시인의 숙명이라 할 밖에요.
10.54. 그러므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지금부터는 제가 그동안 도시와 도시민의 불의를 고발하던 시인의 눈으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과연 정의로운 도시인지, 그리고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도시민을 정의롭게 살도록 하고 있는지 여러분과 함께 알아볼까 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저의 희극을 볼 수 없던 차에 이 희극 같은 재판이라도 보자 싶었던지 평소에는 이 재판정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던 부자들이 텔레포스 차림으로 변장까지 하고 왕림하셨으니, 고맙다는 뜻으로 제일 먼저 아테나이의 부자들이 과연 정의로운 도시에서 정의롭게 살고 있는지부터 알아보십시다. 그리고, 여러분, 아테나이의 부자들부터 알아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와 있는 텔레포스 차림의 부자들은 제외하고, 먼저 아테나이의 진짜 부자들 가운데 알몸으로 태어나 오늘의 부를 이룬 사람 누구 있는지부터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어, 그런데, 아직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이구동성 그런 사람 어딨냐고, 그런 사람 없다고 하시네요. 정말 그렇다면 그 참 아쉽습니다. 누구 누구라고 하시면 그 사람들 부자된 내력을 함께 알아보고, 여러분더러 꼭 그대로 해서 여러분도 그렇게 부자가 되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트라쉬불로스가 그렇지 않습니까? 트라쉬불로스 집안은 어떻습니까? 생전의 그는 키몬보다 더 오래 바다에서 싸웠고, 키몬보다 더 많은 승리를 거두었던 데다가, 약탈과 노략질까지 했는데도, 장성을 복구했을 때 키몬처럼 자기 돈으로 기초공사를 한 것도 아니고, 늙고 병약한 사람들을 위해 농장과 자기 집을 열어둔 사람도 아니니, 모은 재산이 여간 솔솔치 않았을 것 같은데, 사실 아닙니까? 아, 트라쉬불로스는 자기 배의 선장으로 전쟁에 나선 본디부터 부자였다고요? 그 집이 여전히 부자긴 해도 예전만 못하다고요? 그렇다면, 이왕 본디부터 부자라는 말이 났으니, 바꾸어 물어 봅시다. 알몸으로가 아니라, 선조의 땅과 재물을 가득 안고 태어나 그 긴 전쟁을 통해 부를 더 쌓은 사람은 누구 있습니까? 트라쉬불로스처럼 더 못해진 부자 말고요. 역시 그렇군요, 지금 아테나이의 최고 갑부 나누시키데스군요. 아테나이 사람들이 먹는 곡식을 수입해다 팔아 부를 곡식 더미보다 더 높게 쌓았지요. 그런데 아테나이의 최고 부자 나누시퀴데스는 오늘 이 자리에 보이지 않네요. 있었으면 직접 물어 볼 수 있어 좋았을 텐데요. 도시의 다른 부자들은 모두 예전만 못해졌는데 어째 그만 유독 더 나아졌는지, 그 비결을 말입니다. 어쩌겠습니까? 나누시퀴데스가 이 자리에 없으니 우리끼리라도 한번 알아볼밖에요. 어쩌면 한편에서는 도시민이 배를 곯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부를 곡식처럼 쌓아 올린 나누시퀴데스의 경우가, 전비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 전비를 구하기 위해 허약한 도시에게 약탈을 하지 않겠다며 돈을 뜯거나, 아예 처음부터 약탈과 노략질을 했던 트라쉬불로스의 경우보다, 도시가 정의롭고 도시민은 정의롭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기에 더 좋을 것 같네요. 혹시 트라쉬불로스의 전비 마련 방법을 예로 들어, 우리의 도시가 얼마나 불의했으며, 그 불의한 도시가 도시민을 또 얼마나 불의하게 살도록 했는지를 드러낼 경우, 그렇게라도 해서 전비를 마련하지 않으면 전쟁에 지는데 어쩔거냐는 막무가내 앞에 그 불의를 덮지 않으면 안 될 위험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혹시 곡식을 팔아 모은 나누시퀴데스의 축재 방법을 예로 들어, 우리의 도시가 얼마나 정의로우며, 그 정의로운 도시가 도시민을 또 얼마나 정의롭게 살게 하는지 드러낼 경우, 우리는 그가 정의롭게 돈을 모았다는 결론을 덮을 이유가 조금도 없고, 오히려 그는 앞으로도 자랑스럽게 그렇게 돈을 모으며 살면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 그런데 지금 고발자로 저기 나와 있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대로 그 반대로 드러나면 어쩔거냐고 묻는데, 그렇게 철학적으로 뭐 논박할 것 없나 하고 나오지 마시고, 제가 미리 시인의 눈으로 알아본다 했으니 제 희극의 아곤agon,debate논쟁論爭식으로 하십시다. 왜냐하면 저기 안티스테네스도 잘 알다시피 소크라테스식 논쟁은 생각이 많아 결론을 내지 못할 때가 많지만, 시인의 눈으로 보고 하는 아곤은 언제나 명료한 답을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를 고발한 안티스테네스가 물었으니 이번에 한해 그 반대로 드러나면 어떻게 할지 답을 해드리지요. 만약 트라쉬불로스의 경우로 도시가 얼마나 정의로웠으며, 그 정의로운 도시가 도시민 또한 얼마나 정의롭게 살게 했는지가 드러난다면, 여러 말 할 것 없이 저기 안티스테네스나 네오클레이데스더러 당장 자기 배를 타고 나가 약탈도 노략질도 해서 마련한 전비로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라고 하면 되고, 반면 만약 나누시퀴데스의 경우로 도시가 얼마나 불의하며, 그 불의한 도시가 도시민 또한 얼마나 불의하게 살아도록 하는지가 드러난다면, 글쎄요, 소크라테스라면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며 생각의 산파가 되어 야단나겠지만, 시인은 그냥 당장 그 불의함을 정의롭게 고치라고 하지요. 그냥 척 보아,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한편에서 적도 아닌 같은 도시민이 배를 곯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부를 곡식 더미처럼 쌓았다고 볼 수도, 그 반대로 배를 곯은 사람은 극소수이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배는 곯지 않고 지냈다고 볼 수도 있으니, 뭐 그리 깊숙히 들여다볼 것 없이 도시가, 나누시퀴데스가, 곡식을 그냥 나누어 주어 배 곯는 사람 없도록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간단한 일을 하지 않는 도시나 나누시퀴데스도 할 말은 있을 테니, 정의롭든 불의하든 역시 나누시퀴데스의 경우를 가지고 시인의 눈으로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0.5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오늘날 이 아테나이에서 자기 땅에서 나는 양식을 먹고 나누시키데스에게서 사서 먹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도시가 흥청망청하던 한때는 페이라우에우스 항구의 곡식 창고에서 없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누어 주던 곡식이었는데 지금은 돈을 받고 팔고, 돈을 주고 그 곡식을 사서 먹어야 하고, 그런 사람들은 거의가 곡식을 심고 거둘 땅 한 조각도 없는 사람들일진대, 아고라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무얼 만드는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노를 젓거나 날품을 팔아 양식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이귑토스나 흑해에서 곡식을 싣고 와 팔았더니 아테나이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면 이런 축재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아티케에서 나는 것보다 더 품질이 좋고 값이 싼 곡식을 멀고 험한 바닷길을 마다 않고 해적이나 풍랑의 위험을 감수하며 들여와 파는 것이 아테나이 사람들 특히 없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리고 또 장사라는 것이 이문을 남기기 위함이니 곡식 장사해서 돈 좀 벌었다고 부정축재니 불의한 장사꾼이니 하고 욕하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무게를 속이고 팔아 돈을 번 것도 아니고, 돈 없는 사람에게 몸을 담보로 장리 곡식 놀이로 돈을 번 것도 아니고, 들여온 곡식량을 속여 물품세 덜 내고 돈 번 것도 아니고, 한창 어려울 때를 골라 곡물을 조금만 팔면서 야금야금 값을 올려 돈을 번 것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나누시퀴데스가 이런 짓을 하여 돈을 벌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고발당해 재판관인 여러분들이 이미 그를 벌 주었을 것입니다. 그가 고발당해 재판정에 선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정직하게 자기 장사를 해 왔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두 수리해 주고는 사람이나 등잔 만들어 파는 사람이나 메가라 마늘 사다가 파는 사람이 이문 남기는 것과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은 것은 아테나이에 그렇게 크게 곡물을 거래하는 사람은 나누시퀴데스 뿐이어서 다른 곡물 장사꾼과 비교할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가 정의로운 장사꾼이라고 말하자니 그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슬며시 다가들지 않습니까? 나누시퀴데스가 돈 번 것 때문에 배가 아파서는 절대 아닌데 말입니다.
10.5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나누시퀴데스가 불의하다면 좀 심하고 그렇다고 정의롭다고 말하기엔 좀 그렇다고 느끼시는 분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 무죄 방면에 투표하신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정의가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 없었는데159 그 분들인들 어떻게 이것은 정의고 저것은 불의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정의가 무엇인가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정의가 없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불의가 정의로 둔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분들이 모를 리 없지요. 그 분들은 아테나이가 재판으로 자기 도시의 한 시민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벌주려 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도저히 정의라 할 수 없다는 느낌을 틀림없이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무죄방면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태어나면서부터 혼자서가 아니라 더불어 산다는 것,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자라면서 배우는 양육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지니도록 본능으로 바뀌어 있었고, 따라서 본능적으로 더불어 사는 데 도움이 되거나 더불어 잘 살게 하는 생각이나 언행이나 품성은 더불어 살기에 좋고 올바르고 훌륭한 덕목으로, 한마디로 말해 정의로, 그렇지 않고 더불어 사는 데 해가 되거나 더불어 살지 못하게 하는 생각이나 언행이나 품성은 더불어 살기에 나쁘고 비뚤어지고 못된 악덕으로, 한마디로 말해 불의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10.57.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를 무죄 방면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그 분들을 포함한 여러분 모두의 본능이 왜 나누시퀴데스의 부가 꼭 불의의 결과라 매도할 수는 없어도 그렇다고 정의로운 행동의 결과물이라 말하는 것도 좀 그렇다고 느끼는 이유를 한번 따져 보고 해야겠지만, 그래서 본능적으로 그 이유를 독점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왜 독점인가에 대해 몇 가지 그럴싸한 이유들, 이를 테면, 첫째 곡물 장사는 밑천이 많이 들어 아무나 할 수 없고, 둘째 무거운 데다가 장거리 항해로 사고의 위험이 크고, 셋째 계절이나 도시의 안보 상황에 대비한 비축 시설이 있어야 하고, 넷째 곡물의 변질이나 항해 중의 피습 같은 위험 요소가 너무 많고, 다섯째 아테나이에서 곡물을 수입하는 장사꾼이 여럿이면 그들끼리 경쟁하여 더 많은 곡물을 들기기 위해 곡물을 살 때 값을 더 올려 줄 수도 있고, 여섯째 일곱째...무슨 무슨... 이유 때문에 곡물장사를 하려는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독점이 되었을 뿐이라는 변명을 듣게 되겠지만, 이렇게 따지고 드는 것은 철학자들의 일이고, 그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소크라테스가 최고니 저승에서 소크라테스와 따지라 하고, 이 자리에서는 직관을 따르는 것이 시인들의 일이고, 시인들 가운데 이 아리스토파네스가 최고니, 여러분이 왜 시인처럼 그냥 척 보고도 본능적으로 나누시퀴데스가 정의롭다고는 느끼지 않는지 시인은 알지요.
10.5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미 여러분께 저의 연극 "여자들의 민회"의 주인공 프락사고라를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 연극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라는 주제로 프뉙스가 아니라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민회를 연 것이었습니다. 비록 전쟁이 끝나긴 했으나, 돌연 스파르테와 페르시아가 강화를 맺고160 평화를 받아들이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해 와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어진 아뉘토스에게 여러분은 지금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십수 년 전의 소크라테스 처형에 책임이 있다며 그를 치죄하고 덩달아 시인마져 불러 세우고 있는 지금의 우리 도시 아테나이도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될 위기의 도시이이지만, 페르시아를 등에 업고 스파르테와 싸우던 그 당시의 우리 도시 아테나이는 진정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의 도시였습니다. 도시는 적과 동지를 구별하지도 않고, 도시들 간의 은원을 따지지도 않는 불의의 도시가 되었고, 다른 것도 아닌 바로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핍박당하는 살기 어려운 사람들은 도시의 모든 사람이 도시 안에 있는 재산 모두를 공유한다는 수상스러운 새 세상을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입에 올리는 불순한 도시민이 되어 갔습니다.161 돈을 벌어 돌 성벽을 다시 쌓고 새로운 나무 성벽을 바다에 띄워야 한다며,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로 쳐들어와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우고 파괴했던 페르시아, 스파르테가 이길 때까지 스파르테에게 돈을 주어 단 한 번의 승리로 우리를 항복하게 만들었던 페르시아, 그 원수의 용병이 되어 아이가이온 바다를 나다니더니, 이제는 그 페르시아가 전쟁 비용을 댄다는데도, 그뿐만이 아니라, 자기들의 식민도시 케르퀴라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우리가 케르퀴라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스파르테에게 우리와의 전쟁을 강요하고, 포테이다이아를 선동하여 우리의 적으로 돌리던 그 코린토스, 그 뿐만이 아니라, 무단히 플라이타이아이를 전복하여 스파르테로 하여금 전쟁을 선포하도록 만든 테바이, 그리하여 결국은 항복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파괴하여 없애고 그 자리에 양과 염소를 키우는 목초지로 바꾸자던 바로 그 코린토스와 테바이와 동맹까지 맺으며, 스파르테와 또 다시 전쟁을162 벌이는 그런 도시를 어떻게 정의로운 도시라 할 수 있겠습니까? 피아 구별 않고 은원을 따지지 않고 그렇게라도 전쟁에 나서는 것이 외적들로부터 도시와 그 도시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돈을 벌어 도시와 도시민을 위한다는 말이니 이것이 어디 정의로운 도시가 할 짓입니까?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우리를 패망케 했던 코린토스와 테바이와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의 돈을 얻어 스파르테와 전쟁을 벌이다니, 전쟁으로 망해 겨우 일어선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또 다시 전쟁이란 패망의 길로 접어들다니,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전쟁의 악령이 깃든 불의한 도시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이렇듯 한 도시가 불의한 도시라는 말은 그 도시에 아리스테이데스나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파네스가 있다 한들 도시의 불의한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고, 오히려 키몬이, 페리클레스가, 니키아스가, 클레온이, 휘페르볼로스가, 알키비아데스가, 페이산드로스가, 클레오폰이, 크리티아스가, 아뉘토스가, 네오클레이데스가 정의의 사자가 되어 도시는 정의롭다고 외치고 있다는 말이고, 그러므로 그 모두가 아무리 불의한 아테나이의 권력자였다 해도 아테나이라는 도시가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불의한 자로 내칠 수가 없었으며, 불의한 도시의 불의한 권력자가 불의한 행동을 하는 것을 규탄하는 정의로운 사람들만 곤욕을 치르고 만다는 사실은 시인163을 고발하여 죽도록 고생시킨 클레온이, 그리고 철학자164를 고발하여 죽음으로 이끈 아뉘토스가 이미 여러분께 증명해 보인 바가 있습니다. 시인을 욱박지르고 철학자를 죽여 겁 먹은 도시민을 움츠려들게 할 수는 있겠지만, 더불어 함께 살 사람들의 터전인 도시가 정의롭지 않다면 더불어 함께 살 터전이 될 수가 없어 도시민은 더불어 함께 살 정의로운 도시라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도시를 향해 조용히 움직여 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피아를 구별 않고 은원을 따지지 않는 불의한 도시에서 가진 게 없고 허약한 이웃은 더불어 함께 살기에 성가시고 짐스러운 존재일 뿐,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고, 식사는 제대로 하는지 잠은 따뜻하게 자는지 물으며, 적지만 가진 것을 나누는 대신165, 소심하여 자기도 먹고 살기 힘들다며 빈 손바닥을 보이며 울상이나 짓거나, 오만하여 남들 일할 때 뭐했냐며 손사래치며 타박하는 가진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도시가 자기들을 위해 있는 자기들의 세상인 양 자기들만을 위해 산다면, 그래서 도시에서 부의 불평등이 더욱 커진다면, 그러는 동안 가진 것 없고 허약한 이웃은 부자들이 가진 쓰지도 않고 그냥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지는 쌓아둔 부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우리의 도시는 정의롭고, 이렇게 정의로운 도시에 사는 나 또한, 비록 가진 게 없어 맹물에 소금 타서 마시고 배를 채우고 살지만, 정의롭게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라며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더 더할 것도 더 고칠 것도 없는 정의로운 도시라 여기고, 밥을 굶고 찬 바닥에서 잠을 자도 부자들의 것 부러워하지도 않고, 넘겨 보지도 않고, 나누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담하게 그들은 부를 이룰 능력도 있고 운도 좋았던 반면 자기는 능력도 운도 없었다며, 정의로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태어나 정의롭게 사는 것에 행복해 할까요? 민회에 참석하여 3오볼로스를 받는 것에 하루의 기대를 걸고 사는 블레퓌로스는 그런지 몰라도, 그의 아내 프락사고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남편 블레퓌로스와는 달리 프락사고라는 아테나이에 대해 두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테나이를 바꾸지 않으면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과, 아테나이를 바꾸는 것은 권력자의 몽둥이와 칼, 부자의 돈이 아니라 아테나이에서 오로지 하나 남은 평등, 부자든 가난하든 권력자든 무지렁이든 누구든 무슨 일을 하든 아테나이 시민이라면 모두 한 표씩 찍어 결정하는 바로 민회의 결의를 통해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166 게다가 프락사고라는 아테나이 저자 거리에서 사람들 사이에 맴도는 그 새로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역시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167
10.59. 그런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시인만이 그것도 언제나 도시의 문제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천재적인 희극 시인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희한한 세상의 이야기가 시인이 만들지도 않았는데 저자거리에서 나돈다는 것은 도시민이 도시가 불의한 것을 쑥덕거리며 고발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도시가 돈이 없어 재판관들 일당을 주지 못 해 재판을 미루어야 할 지경에 이르자168 먹고 살 길이라며 그렇게 도시가 전쟁에 나서 있을 때169, 한편으로 부자들은 함대의 함선을 맡으라고 떠밀지 않을까 도시 일에 돈을 좀 대라고 권력을 쓰지 않을까 다 죽어가는 거지 행세를 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으로 저자 거리에서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솔론의 시대 사람들이 바라던 세상170과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조적으로 나누며 도시가 불의하다고 고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인이 재산을 공유한다는 그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저자 거리에서가 아니라 민회에서 공론화하지 않는지, 도시민은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데, 그래서 그 얼토당토않는 새 세상이라도 입에 올리며 허탈한 심사를 달래고 있는데, 아니 정말 누가 이 세상을 뒤집어 새 세상을 만들어 주지 않나 기대하며 사는데, 왜 도시는 그들에게 그건 아니다라고 단호히 말하면서, 도시는 전쟁이라도 해서 바깥으로부터 돈을 벌어 올 테니, 함대는 도시가 페르시아의 돈으로 움직이고 부자들에게 함선을 떠맡기지 않을 테니, 도시민이, 특히 나우시퀴데스 같은 부자가, 곧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좋은 세상이 온다고 그들을 달래며, 가진 것의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는 것이 이 도시에서 돈을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의 마땅히 해야 할 좋은 일이라고 권하지 않은 채, 왜 전장으로만 나돌고 있는지 화가 났습니다. 도시의 일에는 오관불언 눈을 감고 자기의 재산과 남의 재산만 탐욕에 가득찬 눈으로 부릅뜨고 지키고 있는 나우시퀴데스 같은 부자들이 바로 도시를 불의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이라는 것은 철학자는 잘 모르겠지만 시인이라면 그냥 척 보고 알지요. 비록 그들이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땅과 바다를, 길과 항구를 그저 쓰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아테나이 사람들에게서 돈을 벌었으면서, 자기들 탐욕과 곡물장사 같은 돈이 돈을 버는 장사 때문에 도시에서 부의 불균형을 더욱 극심하게 만들어 도시가 더 이상 모든 도시민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해 놓았으면서, 우리의 도시에서 도시민이 만인이 재산을 공유한다는 새로운 세상을 입에 올리고 있는데도, 한 마디로 먹고 살 방법이 없는 도시민이 이 도시에 넘쳐나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을 공공연히 웃고 떠들며 조소하고 있는데도, 모든 도시민이 더불어 함께 산다는 도시의 가치가 지금처럼 무너져 그들을 덮쳐 가려 하는데도, 오관불언 도시를 구원하는 일은 민회 참가비 3오볼로스를 받기 위해 새벽부터 프뉙스로 모여드는 사람들171에게 맡기고, 거지 행색으로 오관불언 하는 것이, 그래서 도시로 하여금 가난하고 병약한 도시민을 돌보지 않는 불의를 저지르도록 만드는 것이 불의한 것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는 어떤 것을 불의하다고 말하는지요? 여러분은 나누시퀴데스나 그와 같은 사람들을 정의롭다고는 말 못해도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불의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반면, 시인은 나누시퀴데스나 그와 같은 사람들을 법을 어기지는 않았으나 더불어 함께 산다는 도시의 가치를 지키지 않는 정의롭지 못한 불의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 한마디로 공공의 복리가 도시의 정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0.6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부자가 도시의 일에 돈을 쓰지 않는 탐욕은 필연적으로 도시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도시민의 자구책을 낳기 마련이고, 그 자구책은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도시의 가치보다 그들의 탐욕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는 불의한 도시의 질서를 해체하여 더불어 함께 산다는 도시의 가치를 지킬 새로운 질서를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인이 재산을 공유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조소 섞인 이야기는 이런 자구책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도시민에게 돌리는 사발통문이며,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는 욕구가 나올 만큼 도시가 불의하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시도 부자도 도시민도 누구 하나 이 사발통문을 받아 들고, 이 경고를 받아 들고, 도시를 구원하기 위한 민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소크라테스가 살아 있었다 해도 철학자가 민회를 열어 도시를 구원하는 문제를 논의해 보자고 말하는 법은 없었을 터, 오로지 본능에 충실한 시인이 나설 수밖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도시가 불의하고 그래서 가난하고 허약한 도시민을 돌보지 않는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 해도 재산을 공유한다는 수상한 새 세상에 대한 기대에 대해 그런 세상의 도시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과연 그런 세상의 도시가 정의로운 도시일지, 그래서 사람들은 과연 그런 세상의 도시에서 살기를 원할지, 그냥 한번 여러분과 함께 그저 웃고 넘기는 차원을 넘어, 희극을 쓰는 시인이 감당해야 할 의무로써,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정의로운 도시로 다시 태어나도록 도시와 도시민을 구원하는 차원에서, 이 참에 한번 그 새로운 세상을 공론화해 보자 싶었고, 그래서 저는 도시를 구원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민회를 디오뉘소스 극장172에서 열었었지요.
10.61. 그렇게 열린 디오뉘소스 극장에서의 민회는 아테나이를 구원하려는 열망에 불타는 사람들이 모여 아테나이에서 아직 한 번도 시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한 번 맡겨 보자며 여자들에게 도시를 넘기기로 하였고, 여장군이 된 프락사고라는 만민이 재산을 공유하는 새 세상을 만들어 산해진미와 온갖 미향주로 만찬 회식을 마련했다고 선전하지만, 법이 바뀔지 모른다며 눈치만 보고 재산 출연을 꺼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성을 무시한 남녀 관계로 소란을 피우는 등 새 세상의 새 질서가 정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173, 졸지에 여장군의 남편이 된 블레퓌로스가 맨 마지막으로 회식장에 가서 요란한 선전과는 달리 죽이나 한 그릇 먹고 가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을 끝냈습니다. 프락사고라의 여장군 취임을 축하하고, 새로 연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보여주는 첫 번째 공동식사라 온갖 종류의 음식과 술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양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준비했을 텐데, 맨 마지막에 간 여장군의 남편 블레퓌로스에게 고작 죽 한 그릇을 권하는 결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었는지요? 그냥 평소 제가 잘 하던 익살 정도로 여기시지는 않으셨겠지요?174 그렇다면 차린 음식을 먼저 사람들이 다 먹어 치운 것일까요? 여장군님의 지시라며 블레퓌로스를 식당으로 인도하던 하녀까지도 물 타지 않은 그 좋은 타소스산 포도주를 마시고 거나해 있었던 걸 보면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그런 날이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새 세상도 지금처럼 일은 노예들이 하고 도시민은 공동식사나 하면서 논다는데, 남자들을 모두 함선에 태워 다른 도시로 보내 약탈해 오라고 하든지 아니면 그 도시에서 품을 팔아 돈을 벌어 오게 하지 않고서는 아티케에서 나는 것만으로는 아테나이가 살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수 백년 전에 판명난 판에 부를 공유하든 말든 살림을 잘 살든 말든 도시민이 무얼 먹고 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야말로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은 애저녁에 쑤어 놓은 죽이니 결국 맨 먼저 공동식사장에 가도 죽밖에는 먹을 것이 없을 것이었지요. 맨 마지막의 불레퓌로스에게 죽을 먹게 한 것으로 여러분께 그 사실을 미리 좀 앞당겨 보여드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참에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이 애저녁에 쑤어 놓은 죽이고, 따라서 그 세상에서는 죽 먹을 일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두고 디오뉘소스 극장의 민회에서는 왜 그런지 미주알고주알 논쟁하지는 않았지만175, 여기 이 재판정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곳이니 왜 그런지 한번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래야 제가 여러분께 도시의 정의가 무엇인지 말씀드릴 수 있겠기에 말입니다.
10.62. 프락사고라의 만민이 재산을 공유하는 세상은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여 도시의 정의를 세우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것은 부의 불평등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도시민 누구도 부를 가질 수 없게 하고 오로지 도시만 부를 독점토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부는 살림 잘 산다는 여자들과 프락사고라가 그 부를 도시민을 위해 쓸 것이지요. 그런데 프락사고라가 적어도 쓴 만큼의 부를 다시 채우지 못 한다면 도시는 그대로 거덜나고 말겁니다. 별수없이 도시는 도시민을 개미나 꿀벌처럼 돈벌이로 내몰게 되고, 살림 잘 살듯이 돈도 잘 벌려면 효율적으로 도시민을 돈벌이로 몰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도시는 이제 더 이상 도시민이 더불어 함께 잘 살기 위한 곳이 아니라 도시를 위해 도시민이 일하는 곳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모든 도시민이 소크라테스라면, 아니 소크라테스까지는 못 되어도 모든 도시민이 블레퓌로스의 이웃처럼 도시가 결정하면 분별 있는 사람답게 지시받은 대로 자기 재산을 선뜻 도시에 바치는 사람이라면176, 그리고 앞으로도 그가 성실하게 벌 모든 것을 도시에 즐거운 마음으로 바칠 사람이라면, 저도 그렇게 쉽게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을 죽이나 먹게 되는 세상으로 몰아부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됐지만 프락사고라의 세상이 되기에는 아테나이에는 그녀의 이웃 같은 사람보다는 성실히 산다며 자기 것이아 챙기고 두고 보기 위해 더 많은 재산을 쌓는 것으로 행복해지는 나누시퀴데스 같은 사람이나, 재산을 바치는 이웃을 조롱하고 그 이웃이 기꺼이 복종하는 도시의 법을 조롱하는 남자가 훨씬 더 많으며177, 더욱 안됐지만, 프락사고라의 이웃 같은 사람이 가진 재산보다는 나누시퀴데스나 재산을 바치기 꺼려하는 남자가 가진 재산이 훨씬 더 많아서, 그들의 재산을 공납받고 그 다음 그들이 지금 까지 스스로를 위해 돈을 벌어 온 것 만큼 도시를 위해 돈을 벌지 않고는 프락사고라는 살림만 잘 살아서 새 세상을 지탱하기 힘들 것이며, 따라서 지금까지 그들이 해 오던 대로 그들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손쉬운 대로 도시는 법을 앞세운 엄청난 물리력으로 강제하며 감시해야 하겠지요. 개미나 꿀벌들은 모두 블레퓌로스의 이웃 같아서 강제할 일도 감시할 일도 없지만178 아테나이 사람들이라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바로 아테나이 사람들이니 한번 스스로 판단해 보시지요. 아테나이 사람들은 개미도 꿀벌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강제나 감시는 애초부터 거부하고 나설 것이라고요? 왜요? 도시에서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을 거부한다고요? 도시의 정의를 세우는 것에 반대하는 건가요? 그것이 아니라 아테나이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강압받는 것을 싫어한다고요? 그리고 그 부라는 것이 어디 강압한다고 이루어지는 거냐고요? 도시가 도시민을 강제하고 감시한다고 부가 만들어지고 부의 불평등이 해소될 것이라면 왜 진작에 솔론은 도시민은 반드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입법하지 않았으며, 몽둥이와 칼로 도시를 강제하고 감시하던 페이시스트라토스 부자의 참주 때 왜 아테나이에서 부의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았느냐는 말씀이시군요. 도시민에게는 이미 각자가 스스로 잘 살아야 한다고 강제했고, 따라서 도시민이 잘 살기 위해, 다시 말해, 스스로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가진 힘과 애를 다 썼는지 감시하고 도시가 독려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부자가 되지 못 한 사람들은 부의 평등을 이루려는 정의로운 도시를 불의하게 하는 불의한 사람들이므로, 강제로 시민권을 박탈하고 노예로 삼든지 아예 도시에서 추방하여 잘 사는 사람들만 도시민이 되게 하면 부의 불평등은 해소되고 도시의 정의가 세워지는 것인가 하고 되묻을 필요는 없습니다. 강제로 도시의 정의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은 구차스레 소크라테스식 문답을 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이나 저나 그저 척 봐서 아는 거니까요. 강제로도 안 되는 것이라면 프락사고라는 나누시퀴데스나 재산 공납을 꺼리는 남자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도시를 위해 돈 만드는 평소 실력을 발휘해 달라고 사정事情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들이 누구인데 그 사정이라는 것을 어디 맨입에 말만으로 들어주겠습니까? 그럴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이 먼저 나서 도시에 부의 불평등이 너무 심해 도시의 정의가 무너지고 있다며 프락사고라가 새 세상을 세우기 전에 벌써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며 가진 것을 나누어 그들이 정의로운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었겠지요. 그렇다고 그들에게만 따로 당근을 준다면, 그 당근은 그들의 사유 재산이 될 것이고, 프락사고라는 스스로 다시금 부의 불평등을 조장하고, 그래서 만민이 재산을 공유하는 새 세상에 대한 당위를 잃고 말겠지요. 이런 모순을 해결하면서 그들이 도시에 부를 가지고 오게 할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도시를 맡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살림을 잘 살 것이라고 여자들에게 도시를 넘겨 본 것이었는데, 이제는 도시를 살림을 잘 살 사람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벌어올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행히 프락사고라가 페이산드로스나 크리티아스와는 달리 그녀의 이웃이 순순히 재산을 도시에 받쳤듯이 도시를 그들에게 순순히 넘겨 준다 해도, 그들이 만들 아테나이는 테세우스의 아테나이가 600년 동안 변질 되어 솔론의 시대에 붕괴에 직면했었던 아테나이와 같은 아테나이가 아닙니까? 아니지요 그보다 더한 세상이지요. 온 도시의 재산을 공유한다고 모아 놓고 그 재산을 몽땅 운용해라고 갖다 바치는 것이니 어찌 세상에 이런 일이! 결국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은 도시의 부를 모두 부자들에게 바쳐야 부의 불평등이 해소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세상이라니! 이러니 어찌 제가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을 애저녁에 쑤어 놓은 죽이라 하지 않았겠습니까?
10.6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닙니까?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을 지키려면 돈 잘 벌어 도시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을 골라 도시를 맡겨야 한다니요!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돈도 잘 버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 역시 두 말 않고 저의 재산 모두는 말할 것도 없고 제 자신도 소크라테스에게 맡기겠는데, 그런데 이럴 어쩐답니까? 돈을 버는 것은 둘 째 치고 돈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만큼 관심 두지 않는 사람 본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또 소크라테스만큼 돈 벌 줄 모르는 사람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습니까? 친구 크리톤마져 돈을 불리는 재주가 없었다면179 아무리 검소한 소크라테스라 해도 수업료라도 받지 않고서는 밥 먹고 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가 어디 맡으라 한다고 얼씨구나 장군이 되어 도시를 맡을 사람이겠습니까? 이래 저래 소크라테스는 안 되겠고, 그렇다면 솔론이 좋겠네요. 솔론은 마음씨 좋은 아버지가 집안의 재산을 남 돕는 일에 탕진하는 바람에 젊어서부터 돈벌이에 나서 이 도시 저 도시 두루 다니며 무역하면서 견문도 넓히고 공부도 하고 돈도 번 헬라스 최고의 현인 중 한 분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어디 돈 잘 버는 솔론 같은 분 없을까요? 어! 그런데 왜 솔론이 있어도 안 된다고 하시나요? 왜 솔론이 실패했는지 따져보라고요? 극심한 가난으로 몸을 잡히고 빚을 얻어 쓰고 노예가 되고 만 사람들이 솔론에게 바란 것이 프락사고라와 같은 새 세상인데 솔론은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고요? 가난한 사람들은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길 바랐었는데, 솔론은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만 신경 썼고, 그 권력마져 가진 재산의 많고 적음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실제로 가난한 사람에게는 나누어 준 것이 없었다고요? 그리고 부의 불평등 해소에 대한 솔론의 해답은 그전에 쓰던 4드라크메짜리 돈을 새로 6드라크메짜리라고 올리는 수법으로 겨우 빚을 삼분의 일 깎아 준 것이었지만, 그 덕에 빚 갚은 사람 몇 명이나 되었겠냐고요? 듣고 보니 여러분 말씀 모두 맏는 말씀이네요. 그리고 사실 솔론의 친구들이 빚 탕감 계획을 알고 미리 빚을 잔뜩 안고 땅을 사 놓는 순간 솔론의 개혁은 야바위가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고. 몇 년 뒤 그 땅에서 나온 수확들로 그나마 그 빚의 삼분의 이만 갚고 그저 땅이 생기는 것을 본 사람들의 머리 뚜껑이 열리는 순간 솔론의 개혁은 키르베스라는 나무 화석180이 되고 말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아테나이는 솔론이 개혁하기 전보다 더 혼란에 빠져 버렸으니까요. 정말 소크라테스도 안 되고, 솔론도 안 되고, 그럼 누가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을 맡아 아테나이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도시의 정의니 도시의 구원이니 모두 잊어라고요? 누구를 데려와도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은 아테나이를 구원하는 세상이 못 된다고요? 사실 그렇긴 합니다. 아직도 아테나이에는 부에 대한 탐욕 때문에 솔론을 돕는 위치에서 도시를 구원하려는 솔론의 개혁을 망친 솔론의 친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그런 기회가 또 없나 노리며 줄을 서 있고, 이 시대에는 그나마 솔론 같은 사람마져 없으니 도시를 구원하는 일, 도시에 정의를 세우는 일 따위는 모두 잊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10.64. 그러고 보니 솔론 역시 도시를 구원한다든가 도시에 정의를 세운다든가 하기 위해 도시를 새 세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큰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 싶습니다. 물론 솔론이 한 백 년 그의 개혁 법에 따라 살아 보라고 다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개혁한 아테나이가 아테나이 사람들을 잘 돌보는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기가 개혁한 아테나이를 잘 돌보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더 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솔론이 보기에, 물론 도시는 반드시 정의로워야 하지만, 도시가 정의롭게 되는 것은 정의로운 몇 사람, 특히 지도자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도시민 모두가 정의로운 도시를 위해 스스로 정의로워져야 이루지는 세상일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솔론은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도시가 어떤 세상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모든 도시민이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두 가지 일이 있다고 생각했고,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그 두 가지에 대해 반드시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그 하나가 도시의 체제와 운영에 대해 도시민 각자가 자신의 확실한 주관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시가 모든 도시민이 더불어 함께 잘 살기 위한 공동체인 이상 그 공동체의 구성원은 그 도시를 있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기본 틀, 즉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부화뇌동해서는 안 되고, 모름지기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자유민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주관을 가져야 하며, 필요할 때 도시와 다른 도시민에게 그런 자신의 정치적 주관을 뚜렷이 밝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모든 도시민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도시민은 도시에 대해서나 다른 도시민에 대해 반드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자유민이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언제 어느 경우고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눈치봐야 하거나 포기하거나 얽매이거나 심지어 자유를 내놓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181 스스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먹고 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불의를 저질러도 좋다는 말은 아닐 테니, 이런 솔론의 말에 어디 버릴 만한 구절 하나 있습니까? 모든 도시민이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그냥 그대로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도시민이 사는 그 도시는 도시의 정의를 따로 말할 필요가 없는 도시겠지요. 그런 도시에서 소크라테스인들 구태여 거기에다 더해 사람마다 각자 자기의 영혼을 돌보고 살찌우라고 말할 필요를 느꼈겠습니까? 어느 도시 어느 세상인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테나이에 그런 도시민이 다수였다면 솔론이 그런 말 할 필요가 어디 있었겠으며, 개혁을 하고 빚을 탕감하고 노예로 전락한 시민을 구해 다시 아테나이의 자유민으로 살게 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도시민이 다수였다면 어째서 아테나이에서 한번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싶어182, 한번은 이방인의 돈을 얻어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싶어183, 한번은 승전자의 눈 밖에 날까 싶어184, 정치적인 주관을 지키지 못하고 프락사고라처럼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이 모든 정변이 꼭 권력의 불평등 때문만은 아니었고, 이 모든 정변을 통해 민주정을 만들고 복고시킨 것도 꼭 권력의 불평등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도, 페이산드로스도, 크리티아스도 아테나이가 무슨 정치 체제를 가지든 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산 역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도시민이기 위해 솔론이 가지라고 권장했던 부의 수십 수백 배가 넘을 정도로 가지고 있었으니 그들이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자며 세상을 뒤바꾸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에의 탐욕이 그들에게 정변을 부추긴 것이지만, 그들의 권력에의 탐욕을 용인하고 그들의 정변을 묵인한 장본인들은 혹시나 다른 세상이 그들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진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을 위시한, 정변의 혼란을 통해 이득 볼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기대를 가진 솔론의 친구들 같은 부류와,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에서 재산 공납을 미루며 우선 공짜 만찬부터 즐기고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눈치만 보는 한 남자 같이 그 정변에 붙는 것이 득이 될지 눈치만 보는 사람들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말입니다, 이런 정치적인 행동에 솔론이 바라던 도시민들이 왜 보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도시민이 나서 정변을 막기를 솔론은 바랐던 것이었는데, 그래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첫 정변에는 솔론이 몸소 나서 막으려 했지만 솔론이 바라던 도시민은 하나도 따라나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두 번째에 나온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그 유치한 눈속임에도 누구 하나 웃기고 있다며 거부하고 나선 사람 없었고, 마지막으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에우보이아와 테살리아의 용병을 데리고 아테나이를 장악할 때는 그들은커녕 개미조차 한 마리 보이지 않았지요. 페이산드로스 때도 크리티아스 때도 사정은 달랐지만 솔론이 바라던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결같이 그들이 흉포해져서 그들의 재산은 물론이고 일신의 안전까지 위협받아 더 이상 그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어지자 비로소 그들을 몰아내었는데, 그때도 딱히 꼬집어 그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누가 지금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다수가 솔론이 바라던 그런 도시민이라고 우긴다면, 왜 그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약하여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없는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고 가진 것을 나누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돕는 진정한 새 세상을 만들지 않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돕기는커녕, 그들이 진정 많이 있다면 왜 그들은 한술 더 떠, 솔론이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빚을 탕감하려는 순간, 솔론의 친구들이 솔론이 빚을 탕감한다는 걸 알고는 바로 큰 빚을 얻어 땅을 샀던 사람들처럼, 혹은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에서 재산 공납을 눈치보면서도 재산 공납한 사람들의 공짜 만찬에 나가 배를 불리는 한 남자처럼 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다수가 아니라도, 단 천 명만이라도, 아니 당 백 명만이라도 솔론이 바라던 그런 도시민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여러분 이웃 가운데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눈에는 보이는 그 사람들은 저의 눈을 피해 숨어버렸는지 왜 제게는 보이지가 않습니까?
10.6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저 아리스토파네스는, 아고라 한 켠의 이런 재판정이 아니라, 아크로폴리스 한 켠의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여러분과 함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문제에 대해 고발할 것은 고발하고, 함께 풀 것은 함께 풀어가던 시인입니다. 시인으로서 도시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기는 하지만, 전 결코 도시의 문제를 비관적으로 대하여 그것이 남의 일인 양 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저의 희극을 통해 언제나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면서 여러분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여전히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시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긍지를 느끼며 내일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뿌듯한 마음으로 디오뉘소스 극장을 떠나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해드렸던, 유쾌하고 낙관적인 시인입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여러분께 각자가 자기의 영혼을 돌보고 살찌우라며 돌아다녔다고 해서 우리의 도시에 영혼을 돌보고 살찌우던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었듯이, 솔론이 바라던 그런 도시민이 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고 제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는 그런 도시민이 없다고 단정지어 드리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아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여러분은 왜 이 시인의 눈에는 솔론이 바라던 그런 도시민이 보이지 않는지도 분명히 알아두셔야 합니다.
10.66. 지금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제일 먼저 여러분의 눈에 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재판정에서 이제 곧 죽음을 선고받을 저 아뉘토스나 밀레토스입니까? 이제 곧 아테나이의 권력이 제 것이 될 것이라 꿈꾸고 그 권력의 꿈에 눈이 멀어져 가는 네오클레이데스입니까? 아니면 네오클레이데스를 앞장세워 이 재판을 끌고가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185입니까? 아니면 얼마 전 아테나이로 돌아와 아카데메이아에 젊은이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플라톤입니까? 아니면 아뉘토스나 밀레토스나 네오클레이데스 같은 정치꾼들보다, 안티스테네스나 플리톤 같은 철학자들보다, 지금 아테나이에서 제일 말 잘하는 이소크라테스186입니까? 아니면 이런 재판정에서 말 잘하는 이소크라테스보다 더 돈 잘 버는 이사이오스187입니까? 아니면 아라로스와의 경쟁에 한창인 젊은 희극 시인 안티파네스188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묻고 있는 저는 왜 그 누구보다 먼저 아테나이 최고 갑부인 곡물 수입상 나누시퀴데스라고 말하고 싶을까요? 아! 여러분도 그러시군요. 희한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눈에 아테나이의 그 누구보다 먼저 나누시퀴데스가 눈에 띄는 사람이라니 말입니다. 그는 장군도, 아르콘도, 함선의 선장도, 중요한 협상을 위한 사절도, 하다못해 이 재판정의 재판관도 아닌데 말입니다. 구태여 권력까지 잡아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지 않으니 잘 살게 된다고 여러분에게 거짓 약속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훌륭해지는 것에 관심이 없으니 영혼을 돌보고 살찌울 필요가 없고, 구태여 불의를 저지르지 않아도 돈 잘 벌고 하고 싶은 돈벌이 다 할 수 있으니, 좋은 말재주로 따로 변명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왁자지끌 소란스럽기만하고 내용도 쌍소리에 허접하기만한 희극은 천성적으로 잘 맞지 않으니 코레고스 노릇 하느라 돈 낭비할 필요가 없는, 모름지기 솔론이 바라던 바로 그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도시민의 최우수 모범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나누시퀴데스를 최우수 모범 시민이라고 하면, 이소크라테스는 빙긋 웃고 말겠지만, 혹시 네오클레이데스가 눈병으로 뻘겋게 된 눈알을 휘번덕거리며 자기가 제일 시민인데 무슨 소리냐고 당장에 이곳으로 들이닥치지는 않을까요? 그때 왜 나누시퀴데스가 아니고 당신이냐고 물으면 네오클레이데스는 무어라 대답할까요?
10.67. "나누시퀴데스에게 아테나이는 자기 돈 벌기 좋으니 살기 좋은 곳일 뿐 아테나이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곳이란 생각이 없어요. 그러므로 그는 아테나이나 아테나이 사람을 위한다는 생각을 할 줄 모릅니다.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도시를 위한 일을 눈이 터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제일 시민이 되어야지요. 더불어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사람,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 돕는 일에 도시보다 먼저 나서는 사람, 정의롭고 착한 사람, 이런 사람이 부자인 사람 본 적 있습니까?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이 모두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부자인 사람은 한 손의 손가락으로도 다 꼽을 수 없을 겁니다. 부자들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니까 솔론이 바라던 도시민의 전형이고, 그 부자들 중에 나누시퀴데스가 최고 부자이니 최우수 모범 시민이라 한다면, 솔론의 뒷통수를 치며 부채 탕감을 악용해 부자가 된 솔론의 친구들도 모두 솔론이 바라던 도시민이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들이 솔론이 바라던 도시민 맞습니까? 솔론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관을 가진 도시민이라 했을 때 그 주관은 도시와 상관없이 남이야 어떻든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주관입니까? 솔론이 기대했던 도시민의 주관이 도시를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주관이 아니라면 그런 도시민의 주관은 도시에 대한 반역이 아니면 도시를 파괴하려는 주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태 부자들의 지지를 받으려고 부자들에게 알랑방귀 한 번 뀌어 본 적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리스토파네스나 여러분처럼 제 눈병 가지고 저를 놀리고 골리는 것이 즐거운 사람들, 도시를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주관을 가진 진짜 솔론이 바라던 도시민을 찾아 다니며 지지를 호소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부자가 되는 도시가 되어야만 합니다. 제가 우리 아테나이를 그런 도시로 만들고자 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특히 아리스토파네스 선생님, 저를 이제 그만 미워하시고 제발 저를 지지해 주십시요. 제가 바로 아테나이 제일 시민입니다."
10.68. 서글프게도 여러분이나 저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네오클레이데스에게 이런 대답을 기대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지요. 다만 아쉬운 것은 참으로 꿈도 야무지던 어린 시절의 제가 페리클레스로부터 이런 연설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랬었다면 정치가 얼마나 아름다웠을런지요. 그랬었다면 제가 시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정치를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말입니다.189 페리클레스라! 그 좋은 가문에, 명석하고 진취적인 자질에, 적당히 많은 개인 재산에, 아낙사고라를 위시한 다양한 학문의 교사들에, 에피알테스라는 상호보완의 좋은 정치 동반자에, 투퀴디데스라는 고귀한 사람들의 영혼을 지닌 훌륭한 정적政敵에,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신들과 사상을 받아들이는 아테나이가 헬라스 최고의 도시라는 도시민 모두의 자부심에, 이 모든 훌륭한 정치적 자산을 가지고 정치를 시작한 페리클레스가 이렇게 말하고, 또 이렇게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이끌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키몬을 공금 횡령으로 고발할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노략질 그리고 때로는 점령과 약탈 대신 작은 도시들로부터 받은 뇌물로190 키몬이 이룬 부의 불의함을 고발했었더라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얼마나 크고 작은 헬라스의 도시로부터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을까요? 그랬다면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테나이로 오라던 테세우스 이래로 아테나이는 도시들 간의 안전한 소통을 막는 산적이나 해적을 물리치고 도시들 모두와 더불어 함께 살기를 바라는 정의로운 도시라고 모든 도시들이 믿고 따랐을 텐데요.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공짜 돈이 생기지 않는 존경받는 맹주 대신 공짜 돈이 생기는 무서운 맹주를 택했고, 이것이 다른 도시들에게 통하는 것을 본 아테나이 사람들 역시 같은 도시민끼리 이 방법을 택했습니다. 동맹들로부터 뜯은 공짜 돈을 나누기 싫어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아테나이에서 나서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 간에도 시민과 거류민으로 나누는191 극단적인 이기심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테세우스가 열어 놓은 도시를 페리클레스가 닫아 버린 것입니다. 닫힌 도시 속에는 부든 권력이든 가진 자들이 혼자 더 가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싸움만 살아남았습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과 싸울 수 없는 착하고 정의롭지만 소심한 도시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쪼그라들었고, 불의를 못 보아 넘기는 도시민은 정적이 되어 추방당하거나 재판에 붙여졌습니다. 온순한 도시민은 민회에 나가거나 재판정에 나가 하루 일당을 벌도록 하면서 그들의 표를 긁어 모아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죽고, 전쟁의 와중에 역병의 재앙을 악착같이 견디는 동안 도시와 도시민은 더욱 더 정의로움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짧은 기간 동안 죽자 그들이 남긴 재산 때문에 위증이 난무하는 재판이 세상을 더욱 혼탁하게 했습니다. 위증이 통하는 재판은 필연적으로 재판관들을 매수하는 재판으로까지 타락해 갔습니다.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마져 이 도시에서 맥을 추지 못 할 만큼 도시는 불의를 넘어 힘있는 야수들의 도시가 되었고, 야수들은 그들의 본성대로 도시를 허구한 날 전쟁으로 내몰았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자기 돈을 쓰는 대신 도시의 돈을 쓰고 도시민의 인기를 얻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192을 선보인 이후, 훌륭한 것보다는 돈이 되는 것에 더 밝은 아고라의 장삿꾼들이 아테나이를 이끌어 갔고,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소크라테스를 빼고는 아무도 진실된 것, 착한 것, 아름다운 것, 정의로운 것, 배려하는 것, 등의 훌륭한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어졌고, 소크라테스가 죽고 그의 추종자들마져 아테나이를 버리고 떠나자 도시에서 착하다거나 정의롭다라고 하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말이 사라졌는데 어찌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찾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철학자가 없는 세상에서 시인은 더 이상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만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힘든 일상의 삶에 찌들어 그들이 착하고 정의롭다는 사실을 마치 신의 저주인 양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0.69.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은 아테나이를 구원할 수 없다고 일축해 버렸지만, 저는 아테나이의 구원을 바라는 여러분의 희망을 일축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아테나이와 이티케를 샅샅이 돌며 과연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그들이 우리 아테나이를 구원하는 주인공이 되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들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면 도시의 구원을 바라는 여러분의 희망도 함께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불의는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그래서 착하고 정의로운 도시민은 삶의 간난에 더하여 정의가 어리석음으로 치부되는 것을 겪는 영혼의 고통까지 감수해야 되기 때문에 자칫 도시의 정의에 대한 믿음을 잃고 심성이 왜곡되어 엉뚱하게 불의에 빠지고 싶어지거나 그것마져 무의미해 보이는 무기력에 빠져 있기 십상이지요. 저는 그런 도시민을 찾아 삶의 간난과 영혼의 고통에 대해 위로하고, 아울러 그들의 힘으로 우리의 도시에 도시의 정의를 복원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북돋우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의 한 마을에서 늙은 농부 크레뮐로스와 그 마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크레뮐로스는 동네 늙은이들이 있는 데서 말했습니다. 자기는 신을 두려워하고 정직한 사람임에도 늘 가난했고 성공하지 못했다고요. 어쨌거나 자기는 이미 늙어 비참한 인생도 끝나가니 어쩔 수 없지만, 하나 아들은 신을 두려워하고 정직해도 부자로 성공하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크레뮐로스의 이말을 들은 나머지 마을 사람들도 모두 동감을 표시했고요. 그러자 크레뮐로스가 씁쓸하게 말했지요. 노예들도 요즘 세상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삶을 사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말한다더군요. 그래서 자기도 하나 아들이 사는 방법을 바꿔 악당이나 불의한 자나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야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테나이의 늙은 농부 크레뮐로스가 이런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이 신의 뜻에 거슬릴 것이라며 신을 두려워하는 솔직한 심경을 드러냈을 때,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를 신들 앞으로,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저는 크레뮐로스의 바람을 위해, 아니 그를 위해, 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사는 사람들이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반드시 해야 하는 그 무엇을 찾아 내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그 무엇을 찾아낸다면, 저는 그것이 바로 도시의 정의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10.7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래서 크레뮐로스는 하나 아들이 인생의 성공을 위해 사는 법을 바꾸어 악당으로, 불의한 자로, 쓸모없는 인간으로 되어야 하는지 신에게 물어보기 위해 델포이로 갑니다. 하루살이 인간을 사랑하는 아폴론이 어떻게 신을 두려워하고 정직한, 다시 말해 착하고 정의로운 한 인간에게 인생의 성공을 위해 사는 방법을 바꾸고, 그래서 악당이, 불의한 자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 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대신 영험한 델포이의 아폴론은 크레뮐로스의 물음에는 가타부타 대답없이 신전 밖에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이 누구건 잘 설득하여 집으로 데려가라고 알아듣기 쉽게 말했고193, 신을 따르는 크레뮐로스는 신전 밖에서 맨 처음 본 거지 차림의 봉사를 만나 그를 따라가다, 신이 무슨 뜻으로 그를 만나게 했는지 알기 위해 그 봉사더러 그가 누구인지 말하더라도 해코지하지 않을 테니 누구인지 말하라며 다구치고, 그래서 결국 그 거지 차림의 봉사는 자기가 부의 신 플루토스라고 실토하는데, 그가 눈이 먼 데다가 행색까지 누추하여 믿지 못하자 플루토스는 자신이 눈이 멀게 된 사연을 아주 간략히 설명합니다. 플루토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그는 정직하고 현명하고 점잖은 사람들의 집만 방문하겠다고 서약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안 제우스는 인간에 대한 악의에서194, 특히 착한 사람들에 대한 악의에서, 플루토스가 착한 사람을 알아볼 수 없도록, 그래서 그가 착한 사람들 집을 찾아갈 수 없도록, 그의 눈을 멀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의 신 플루토스를 만나 그가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에게는 못 가고 사악한 사람들에게만 가는 사연을 알게 된 크레뮐로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플루토스에게 묻습니다. "자, 어때요? 당신이 예전처럼 다시 시력을 회복하신다면 앞으로는 사악한 자들을 멀리하실 건가요?" 그러겠다는 플루토스의 답에 크레뮐로스가 다시 묻습니다. "그리고 정직한 사람들에게 가실 건가요?"195 시력을 회복해서 소년 시절의 서약대로 하고 싶지만 제우스가 두려운 플루토스는 시력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크레뮐로스의 제안을 거절하는데, 크레뮐로스는 플루토스에게 그가 관장하는 부가 신과 인간들에게 제우스보다 더 중대한 역활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시켜, 그가 왜 시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설득하고, 하루살이인 크레뮐로스가 신인 자기의 시력을 회복시킨다는 것도 의심쩍어 용기를 못 내는 플루토스에게 델포이의 아폴론이 자기에게 전한 말이 있기 때문에 십중팔구 그렇게 될 것이라고 크레뮐로스는 자신 있게 말하지만, 오히려 플루토스가 제우스의 아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로 또 다시 움츠리자 크레뮐로스는 죽는 한이 있어도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켜 놓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이며, 같은 마을의 일용할 양식이 늘 달리는 정직한 사람들이 우군이 되어 줄 것이라고 플루토스를 안심시키며 그들을 불러냅니다.196 마을 사람들이 지키는 가운데 플루토스는 크레뮐로스의 집에 머물고, 밤새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블렙시데모스가 크레뮐로스의 집에 찾아와 무슨 나쁜 짓을 했냐고 따지자 크레뮐로스는 곧 부자가 되기는 하겠지만 플루토스가 자기 집에 와 있어서 그렇다고 실토하고, 부의 신을 친구와 나누지 않는다고 비난하던 블렙시데스는 플루토스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말을 듣고서는 그동안 그가 왜 자기에게 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곧 그것임을 바로 납득하여, 공의보다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크레뮐로스의 제안을 당장에 실행하려 할 때, 가난의 신 페니아Penia가 나타나 그 둘의 행동을 제지하고 나섭니다. 가난이라면 겁부터 나는 블렙시데모스를 겨우 진정시키고 크레뮐로스는 자기의 역할을 없애려 한다고 죽일 듯이 달려드는 페니아와 부와 가난의 역할에 대해 논쟁을 벌인 끝에 페니아를 축출한 뒤, 플루토스를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모셔 갑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서 하루 밤을 지내는 동안 시력을 회복한 플루토스는 신전을 나오면서부터 지체없이 사람들을 제대로 구별하기 시작했고,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모두 새로 부자들이 되고, 지녔던 부를 잃은 사람들은 죄다 사악한 짓을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 와중에 하나 특이한 것은 제우스 신의 사제가 졸지에 배를 굶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자 제우스도 자진하여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잘 살게 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있으니 잘 되었다며 크레뮐로스는 제우스 신의 사제를 앞장세워 부의 신을 아테나 여신의 보물창고 수호자로 안치시키기 위해 아크로폴리스로 향합니다.
10.7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안타깝지만 이제 저는 여러분을 크레뮐로스가 열어 보인 디오뉘소스 극장의 세상에서 세 해가 지난 지금197의 아테나이 현실 세계로 돌려세우지 않을 수 없네요. 플루토스가 눈을 떠 세상 사람들 가운데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알아보기 시작하자 트뤼가이오스가 쇠똥구리를 타고 하늘로 갔을 때는 인간들이 싫어 전쟁과 소란만 남겨 놓고 더 먼 하늘로 인간 세상과는 멀어져 가버렸던 구원자 제우스가 이제는 인간세상에 내려와 인간들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고 크레뮐로스는 말했지만 과연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구원자 제우스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고 믿습니까? 그렇습니까? 구원자 제우스가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인간들과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은 그 인간 세상이 제우스의 구원을 받았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적어도 구원자 제우스가 우리 하루살이들을 구원할 의지가 있다는 말이겠지요. 인간들이 미워 플루토스의 눈을 멀게 했던 제우스가 인간들 스스로 플루토스의 눈을 뜨게 만들어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는 말은 그 신이 기대했던 세상이 바로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이제 아테나이의 그 누구도 크레뮐로스처럼 그들의 자식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하게 살도록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모든 아테나이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살도록 잘 돌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 모두도 사악하고 불의하고 아무 쓸모없이 자라지 않도록 잘 돌보게 되었습니까?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말씀조차 없으신 것은 크레뮐로스가 열어 보인 세상도 프락사고라가 열어 보인 세상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세상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만,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프락사고라의 세상이나 크레뮐로스의 세상이 술집에서 헛헛한 마음이나 달래려는 불평분자들의 허무맹랑한 허사이자 시인이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열어 보인 희극일 뿐이라며 언제까지 마냥 웃어 넘기시겠습니까? 프락사고라의 세상이나 크레뮐로스의 세상이나 그저 한낱 우스개일 뿐이라고 가볍게만 여기신다면, 제가 공들여 말씀드린 바 있는 도시를 와해시키고 싶었던 솔론의 시대 사람들과, 제가 온 아테나이와 아티케를 돌며 찾아낸 바 있는 크레뮐로스와 같은 여러분의 이웃들의 허탈함을 여러분은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먼저 가난 때문에 노예로 전락했거나 노예와 다름없는 예속민이 된 솔론 시대의 사람들이 도시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는지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 그들의 인생을 놀랠 정도로 차분하게 받아들이며, 아직은 그들의 자식들이나마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물려줄 땅과 재산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들을 어떻게 키우는 것이 좋은지 고민하지만, 다시 말해 땅과 재산이 아니라 인생을 잘 살고 성공할 수 있는 올바른 태도를 구하기 위해 고민하지만, 만일 그들마져 그들 자식들의 인생의 성공을 위해 좀 더 사악하고 불의하고 아무 쓸모없이 자라도록 키워야겠다고 결심하는 날에 우리의 도시가 어떻게 될 것인지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10.7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도 아테나이에 사는 동안 아테나이의 이름 없는 한 촌부 크레뮐로스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 보신 일이 있으실 것입니다. 돈도 권력도 없이 그저 평생을 성실히 농사나 짓지만 일용할 양식은 늘 달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큰 욕심 없이 그저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지만 일용할 양식이 늘 달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으니 이제 자식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야 좋을지 고민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크레뮐로스와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그들의 자식들을 어떻게 키우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크레뮐로스의 노예 카리온이 말한 대로 아테나이식으로 기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왜입니까? 카리온의 설명대로 요즘 같은 세상에서 출세의 지름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자식들 인생의 성공을 위해 사악하고 불의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삶을 살도록 가르쳤고, 그랬더니 출세하여 성공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십수 년 전 아뉘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에게 사악하디사악한 사람이 되라 하지 않고 훌륭하디훌륭한 사람이 되라며 젊은이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그를 고발했고, 여러분은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사악하디사악한 사람이 아니라 훌륭하디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다니 저런 죽일 놈이 있나 하고 그를 처형하라고 선고했습니까? 그렇다면 왜 저 아뉘토스와 멜레토스와 뤼콘은 죽을 상을 하고 오늘 이 재판정에 서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왜 이 자리에 불려와 여러분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이 장광설을 풀고 있습니까? 스승의 명예회복을 바라는 안티스테네스가 한번 죽어 봐라 하고 기세등등한 것은 그렇다 치고, 어차피 아무짝에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정평이 난 저기 네오클레이데스는 이미 아테나이식으로 살고 있어 그것으로 출세 길이 보장되어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사단에 끼어 있는 것일까요? 쓸모없는 인간 정도로는 출세에 한계가 있으니까 사악하디사악한 인간임도 증명해 보이고 싶은 걸까요? 제가 모두에 이미 이 재판이 저의 어떤 희극보다 더 웃긴다고 말씀드렸었지만, 스승의 가르침대로 훌륭하디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옷도 일부러 낡은 옷만 입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가 어차피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사악하디사악한 사람이 되려는 네오클레이데스와 의기투합하여 아크로폴리스 한 구석의 디오뉘소스 극장도 아닌 아고라 한 구석의 이 재판정에서 이런 희극을 연출하다니, 세상에 이것이 무슨 조화입니까?
10.7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시인이 단언컨데 이런 요상한 조화는 도시가 불의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불의한 도시에 살면서 도시가 불의하다고 말하지 않고 자기만 잘 사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입니다. 시인의 눈에 아테나이 제일의 갑부 나누시퀴데스가 네오클레이데스만큼이나 불의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두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아테나이 시민으로 살면서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과 그 탐욕으로 얻은 돈과 권력의 힘으로 같은 시민을 딛고 올라서는 오만이 이 도시를 불의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을 두려워하며 성실하게 일하는 착하고 정직한 도시민이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면서 자신의 삶이 실패했다고 술회하는 도시,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실패한 까닭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사악하고 불의하게 살지 않은 때문이 아닐까 회의하는 도시, 이런 도시는 불의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크레뮐로스가 우리의 도시 아테아이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인 것이었습니다. 신을 두려워하며 성실하게 일하는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사악하고 불의하게 살면 인생이 실패하는 세상, 이런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의 도시가 바로 정의로운 도시입니다.
10.74. 그러므로 도시의 정의는 신을 두려워하며 성실하게 일하는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평화롭게 잘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사악하고 불의하게 사는 사람들이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막는다거나, 그런 일을 저지런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일은 아주 초보적이고 즉각적인 도시의 정의이겠지요. 그래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이런 일 정도는 스키타이의 궁수들에게 맡기고 있지요. 노예와 같은 신분의 용병들에게 아주 초보적이고 즉각적인 도시의 정의를 수행토록 맡김으로써 비록 그 도시의 정의가 불의의 오만하고 방자한 위세에 눌려, 혹은 돈이나 인정에 끌려, 그 불의를 못 본 체하거나 부화뇌동하는 또 다른 불의로 바뀔 수도 있겠지만198, 적어도 그들이 오만하고 방자한 위세가 되어 도시의 정의를,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억눌러 위축시키는, 혹은 돈이나 인정에 끌려 불의를 묵인하거나 방조하는, 불의로 바꾸어 놓지는 못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99. 도시민이 도시민을 해치는 것을 막는 아주 초보적이고 즉각적인 도시의 정의가 이렇듯 언제 어디서든지 오만하고 방자한 위세나 돈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에 의해 불의로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200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으로부터 도시의 정의가 훼손되고 불의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도시의 정의가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오만과 탐욕으로 도시민 사이에 돈과 권력의 불평등의 골을 깊게 파면서 도시를 불복과 불화에 빠져들게 하는 사람들을 불의하다고 고발하고, 그 오만과 탐욕을 거짓으로 감추어 명예니 자긍심이니 도전이니 열정이니 하며 그들이 도시를 위하고 도시민을 위한다며 나서는 것을 막아, 오만과 탐욕이 아닌 배려와 절제로 진정 도시와 도시민을 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시 일을 맡도록 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도시의 정의이겠지요.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테세우스 이래 솔론을 거쳐 클레이스테네스 시대에 이런 도시의 정의를 완성하고 도시민들 모두에게 이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도시의 정의를 수행토록 평등하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이 완성된 도시의 정의가 어떻게 도시의 불의로 바뀌었는지는 이미 도시가 겪은 전쟁의 기억을 되살려 드리며, 그리고 그 전쟁이 어떻게 우리 아테나이 시민을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을 위해 봉사했던 기억을 되살려 드리며, 그리고 그 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리의 도시와 도시민이 어떻게 황폐해지고 피폐해졌는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드리며, 여러분께 이제껏 누누히 말씀드렸으므로 더 이상 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결국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불의한 도시일 뿐만 아니라 영혼이 질식한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영혼이 질식한 것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 영혼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쫓겨났거나, 전쟁에 나가 죽었거나, 정쟁에 휘말려 재판으로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시에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없으므로201 도시는 오만과 탐욕이 때로는 배려의 가면을 쓰고 때로는 민낯을 드러내며 도시의 정의를 대신했습니다. 오만과 탐욕은 때로 승전의 영광이란 가면을 쓰고 여러분의 표를 모았으며, 때로는 민낯으로 패망의 위험으로 겁박하여 돈과 권력을 유지하고, 그렇게 얻은 돈과 권력이 부리는 힘으로 하여금 이 도시의 정의를 대신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정의는 바로 돈과 권력이 부리는 힘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서는 돈과 권력이 바로 도시의 정의가 되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부리는 힘이 바로 도시의 정의가 되니 돈과 권력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오늘 도시의 정의가 어제는 불의였다가 내일 다시 불의로 서로를 죽이면서 뒤바뀌었습니다. 도시의 정의가 오만과 탐욕의 돈과 권력이 부리는 힘 앞에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알게 해줍니다. 도시민이 도시민을 해치지 못하게 한다는 아주 기초적이고 즉각적인 도시의 정의나, 오만과 탐욕의 돈과 권력이 부리는 힘이 도시를 이끌지 못하게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도시의 정의는 각각 약한 도시민을 해치는 힘센 도시민에 의해 그리고 오만과 탐욕의 돈과 권력이 부리는 힘에 의해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그래서 도시가 불의하게 되는 까닭은 마땅히 그런 불의를 응징해야 하는 도시의 권능 자체가 도시의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응징받아야 마땅한 오만과 탐욕의 불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만이 명예나 성취감이나 자긍심의 탈을, 탐욕이 도전이나 진취나 열정의 가면을 쓰고 돈과 권력을 쥔 다음, 다른 도시민들에게 감언이설과 돈 몇 푼의 이익을 던지며, 그 명예와 열정이 이룬 돈과 권력 덕분에 도시가 번영하고 모두가 먹고 사는 것 아니냐며 그 오만과 탐욕 곁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옹호까지 받으며, 다른 도시민의 표를 갈취하는 것을 찯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허탈한 심정으로 지켜보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번 오만과 탐욕의 돈과 권력이 부리는 힘은 도시민 간의 돈과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려 노력하고 크레뮐로스 같은 사람들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할 지도 모른다며 기대해 보기도 했지만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의 그런 기대가 채워지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적지 않은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조차, 도시에 정의가 있을 까닭이 없다며, 먹고 살기 위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사악하고 불의한 짓을 저지르고 살았습니다.
10.7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우리 아테나이 사람들이 신을 두려워하며 전통을 숭상하고 명예를 소중히 하고 살았던 것은, 자식들에게 도시가 믿는 신에 대하여 도시의 영혼이 담긴 전통에 대하여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에 대하여 가르친 아버지들과202, 때로 그 자식들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악하고 불의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단한 삶에 지친 아버지들을 위로하고 허약해진 그들의 마음을 추스리어 다잡게 하던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우리 아버지들과 늘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여기 재판정에 나오신 모든 분들도 자식들에게 우리의 조상들처럼 똑같은 것을 가르쳤고, 우리에게도 한때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있어 우리를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우리 조상들과는 하나 다른 것이 더 있었는데 바로 오만과 탐욕이 일으킨 전쟁이라는 괴물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인들과 철학자의 위로와 인도를 막았고, 그래서 그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있었던 아이스퀼로스도 소포클레스도 에우리피데스도 하다 못해 아가톤까지도 오만과 탐욕으로 사악하고 불의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치르는 불행이라는 죄값의 비참함을 보여주면서 모두가 오만과 탐욕을 버리고 배려와 절제로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고, 소크라테스와 그를 따르던 여러 철학자들 역시 한결같이 사람들은 모름지기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고 모두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다수의 아테나이 사람들이 착하고 정직하게 살며 자신의 영혼을 살찌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아니 그렇게 살아서는 일용할 양식조차 얻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먹고 살기 위해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사악하고 불의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게 되자, 결국 그들 모두는 미련없이 아테나이를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203 그들은 도시민의 불의에 실망하여 도시를 버렸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정의를 세워 도시가 정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도시민이 정의로워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도시민이 정의롭기를 바랐지만 도시민은 정의로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불의를 따르고, 그래서 도시가 점점 더 불의해져 가자 아테나이 사람들을 버려두고 미련없이 아테나이를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도시의 불의에 실망하여 도시민을 버린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들은 페이세타이로스와 함께 아테나이를 떠나 후투티가 된 테레우스를 찾아나섰다가 새들의 도움으로 구름뻐꾸기나라204의 성벽 공사를 마친 뒤 사라져버린 에우엘피데스와 닮았습니다. 페이세타이로스가 구름뻐꾸기나라의 주인이 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성벽공사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보고를 받고도 친구 에우엘피데스를 찾지 않았듯이205 여러분을 위시한 아테나이 사람들 누구 하나도 아가톤이야 그렇다 하지만 아이스퀼로스를 소포클레스를 하다 못해 에우리피데스조차 찾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시한 아테나이 사람들 누구 하나도 그들이 남긴 슬픈 운명의 인간들을 담은 연극들을 디오뉘소스 극장에 다시 한 번 올리자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비극 시인도 아닌 희극 시인인 저 아리스토파네스만이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구원하기 위해 디오뉘소스 신에게 저승을 다녀오는 수고를 특별히 간청하여 희극 시인도 아닌 비극 시인 한 분을 다시 이 이승의 아테나이로 데려오도록 했고, 디오뉘소스 신께서는 말은 안 했지만 당신이 바라신 에우리피데스보다는 제가 바라던 아이스퀼로스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구원할 시인이라며 데려다 주었습니다. 제가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구원자로 디오뉘소스 신께서 비극 시인 아이스퀼로스를 저승에서 다시 아테나이로 데려온 사정을 보여드렸을 때, 여러분은 그런 좋은 생각을 다 했냐며 저의 연극 "개구리들"에게 일등상에 더해 재상연하라는 특전까지 주셨었지요.206 그러나 여러분의 시인에 대한 환대는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207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에게 항복했고, 시인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구원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혼자 남은 늙은 희극 시인이 아낙사고라의 새로운 세상을 보여드리며 경고를 해도, 크레뮐로스의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의 아테나이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구원의 길을 보여드려도, 여러분은 웃기만 했지 아무도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돈과 재물의 불평등에서, 다시 말해 생활의 불평등에서, 한마디로 말해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부조리에서 구원하기 위해 도시의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습니다.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마치 도시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이 소크라테스조차 그랬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재판관으로 나오신 여러분 가운데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으셨습니다.
10.76. 그러던 여러분이 저와 함께 오늘 갑자기 저승으로 간 소크라테스를 이 재판정에 불러낸 것입니다. 드디어 아테나이의 재판정에서 저승에서 온 소크라테스와 이승의 시인이 마주 서게 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승에서 벌어졌던 그의 재판에 대한 불복을 저승에서 올바른 재판관을 만나는 소망으로 죽어갔지만,208 이승의 늙은 시인은 아직도 오늘의 이 재판으로 어긋날지도 모르는 제 한 몸에 대한 정의보다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사는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에 대한 도시의 정의에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아뉘토스의 권좌를 차지하고 싶은 네오클레이데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의 앞세워 이런 희극 같은 송사를 벌이기 때문입니다만, 저로서는, 도시의 정의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기 위해서도 소크라테스가 저승에서 돌아와 이 자리에 같이 있는 것이 한결 도움이 되고 편하기에, 이런 기회를 만든 안티스테네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네요. 이왕에 이 자리에 소크라테스를 불렀다면 헌 옷 입기 좋아하는 소크라테스, 안티스테네스209 뿐만 아니라 영혼을 살찌우는 소크라테스, 플라톤도 함께 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만, 글쎄요 그 둘이 각각 하나는 헌 옷 입고 하나는 영혼을 살찌워서 이 자리에 나란히 서 있다 한들 저승에서 온 소크라테스 하나에 견줄 만하겠습니까? 안티스테테스는 물론이고 플라톤까지도 스승 소크라테스처럼 사람에만 관심이 있지 어디 도시의 일에 관심이나 가집니까?210 도시가 불의한 것을 보고도, 네오클레이데스가 왜 아뉘토스를 법정에 세우는지 잘 알면서도, 스승의 신원이라며 재판으로 정적을 제거하려는 교활한 정치꾼의 불의에 가담하여 늙은 시인을 재판정으로 불러들이고, 결국 저 아뉘토스와 멜레토스와 뤼콘을 죽여 소크라테스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할 수는 있을런지는 몰라도, 그것이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게 한 불의한 도시에 도시의 정의를 세워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정의롭게 하기는커녕 도시에 새로운 불화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고, 퀼론의 저주가 빚어낸 퀼론 집안과 알크마이네 집안과의 불화가 얼마나 오래까지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평화를 깨트려 왔는지를 생각하면, 오늘 이 재판의 결과가 두 정파 간에 새로운 정쟁을 벌이게 하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그렇게나 바라던 훌륭한 사람들이 할 짓인지 염려스럽지만, 이런 걱정이나 염려보다 더 우려가 되는 것은 헌 옷 입은 소크라테스, 안티스테네스가, 지금도 그렇듯, 언제까지나 도시의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211 스승의 신원伸寃이 걸린 이 굿판에 소크라테스의 백조 플라톤이 보이지 않는 까닭이야 안티스테네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이 늙은 시인 역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212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졌던 도시 일에 대한 스승 소크라테스의 생각이213 도시의 일이 아니라 오직 도시의 권력에만 관심이 있었던 알키비아데스에게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도시의 일을 도시민의 뜻대로가 아니라 소수 권력자의 뜻으로 이끌려고 했던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에게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패망하여 도시의 일을 꾸리기 어려워졌을 때 아테나이를 버리고 아테나이를 패망시킨 페르시아와 스파르테로 가서 그들의 일을 거들었던 크세오폰에게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오랜 시간 이들이 행적이 보여주는 도시의 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소크라테스의 추종자가 아닌 아테나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 모두를 소크라테스 추종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플라톤이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아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도시의 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해 따져서 드러내게 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214, 헌 옷 입은 소크라테스, 안티스테네스만 있어도 시인의 직관으로, 이 늙은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의 방식으로, 알려지지 않은 도시의 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안티스테네스가 소크라테스처럼 입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헌 옷이 바로 도시의 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10.7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의 가게들에서 팔리는 많은 물건들을 보고 자주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나에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은 것일까?"215 여러분도 소크라테스처럼 그 많은 물건들을 보고 여러분의 일상 생활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은 것인가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되려 여러분은 그 물건들을 보고 자주 이렇게 중얼거리지는 않으셨습니까? "나에겐 얼마나 많은 필요한 물건들이 없는 것일까?" 혹은, "나에겐 얼마나 많은 물건들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으셨습니까? "나에겐 얼마나 많은 필요한 물건들을 살 돈이 없는 것일까?"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냥 싱긋이 웃으시기만 하는 걸 보면 가게의 물건들을 보고 소크라테스처럼은 생각하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왜 소크라테스는 가게에서 팔리는 많은 물건들을 보고, 자기에게는 그런 물건들 자체가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여러분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그것도 자주 했을까요? 페리클레스가 온 헬라스에서 거둔 돈을 아크로폴리스의 공사장에다 풀고 있었던 소크라테스의 젊은 시절에, 아버지를 도와 돌을 쪼며 돈을 좀 모았었다 치더라도 소크라테스가 필요하다고 모조리 다 가질 수 있는 부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소크라테스가 마음은 사고 싶은데 살 수 없는 신세가 처량해 가게의 많은 물건들을 자기에게는 필요치 않은 물건들이라 중얼거리며 자주 자신을 달래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보다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망을 가장 적게 해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내게 없는 마실거리에 대한 기대를 가장 적게 해야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다"216고 말하던 소크라테스이니, "웬만히 필요한 것 정도는 나에겐 필요치 않도록 하고 살아야 진짜 필요한 것의 가치를 느끼고 살게 된다"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어떤 경우에도 결코 지독한 인색함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이런 초절정의 절제를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덕성으로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소크라테스가 "필요한 것이 최소한인 사람이야말로 신에게 가장 가깝다.217"며 이런 초절정의 절제력을 가진 사람을 신의 경지에까지 올려 놓는 것도 그것이 최고 경지에 이른 인간의 덕성이라 말한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오만과 탐욕이 도시의 불의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임을 누누히 지적해 왔던 저로서는 소크라테스식 초절정의 절제까지가 아니라도, 그저 즉각적으로 솟구치는 탐욕을 누를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절제라도, 그런 절제에 대해서는 인간의 덕성 가운데 최고라고 상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절제라는 인간의 덕성은 이 세상에 한 인간만이 혼자 남아 있을 때에도 그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도 소크라테스식 절제를 결코 인색함의 다른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색함은 지독한 탐욕의 산물이지 결코 절제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자체가 따로 욕망의 억제니 필요니 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으로 이끌어 올리려 부단히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상에서 헌 웃저고리와 맨발로218 도시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던 소크라테스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적어도 서른은 넘은 분들만 계시니 그런 소크라테스를 모르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가물가물하신 분들을 위하여 저기 헌 옷 입은 안티스테네스가 있습니다. 저기 있는 안티스테네스는 소크라테스처럼 헌 옷을 입고 있지만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수업료를 받고 젊은이들을 가르칩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수업료를 받지만,219 수업료를 받으면 돈을 주는 사람의 노예처럼 될 수 있다며 수업료를 받지 않던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그 제자들이나 수업료를 주는 그들 아버지의 노예가 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안티스테네스는, 소크라테스만큼이나 초절정의 절제를 보여, 필요한 것이 최소한인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최소한의 필요를 구할 최소한의 돈이 필요합니다.220 마치 신들에게도 최소한 고기 태운 냄세가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수업료를 받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 늦까지 돈벌이 없이 담소할 사람들을 찾아 아테나이를 돌아다니던 소크라테스에게도 최소한의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잠 잘 곳이 필요했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안티스테네스는 그렇게 최소한으로 충족된 필요를 최대한으로 즐기는 방법도 잘 알고 있어 무척 행복한 것 같습니다.221 행복한 안티스테네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의 행복을 심어주고 싶어합니다. 소크라테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안티스테네스를 빼고는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포함한 그 누구도 그런 어려운 행복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리스팁포스는 그렇게 힘든 행복 대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도 가지고 싶으면 가지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행복을 추구했고222, 아마도 플라톤은 있는 집안의 살림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저 일용할 양식 걱정없이 살았으면 하는 착하고 정직한 크레뮐로스에게, 있으면 있는 대로 즐기고 없으면 없는 대로 즐기는 아리스팁포스식 행복을 좋은 것이라며 안겨줄 수 없다고 해서, 또 대대로 물려받은 집안 살림으로 모자람 없이 평온하게 사는 플라톤식 행복을 좋은 것이라며 누리게 해줄 수 없다고 해서, 필요를 늘이려는 욕망을 가졌다고 나무라면서, 그런 욕망을 버리고, 그 대신 필요를 최소로 하는 안티스테네스식 행복을 배워 그렇게 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가르침일까요? 과연 그럴지 선뜻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팁포스의 무절제한 생활 태도를 고치기 위해 대화를 나누며 훈계했다거나, 또 안티스테네스의 헌 옷 차림에 대해 그것이 초절정의 절제가 아니라 허영이라며 한마디 토를 달았다거나 하는 말은 있어도, 그가 플라톤이나 나머지 추종자들에게 자기처럼 초절정 절제의 생활 태도를 가지라고 했다거나, 그 추종자들이 안티스테네스처럼 초절정의 절제를 실천하는 생활 태도를 보였다는 말이 없는 걸 보면, 소크라테스 역시 착하고 정직한 크레뮐로스에게 일용할 양식 걱정없이 살고 싶다는 것 자체가 필요를 늘이려는 욕망일 뿐이니 그런 욕망을 버리고 필요를 최소화하는 생활 태도를 가지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안티스테네스의 초절정 절제는 허영으로 보고, 플라톤에게는 초절정의 절제를 권하지도 않았지만,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초절정 절제를 지켜나갔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지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즐기겠다는 아리스팁포스의 생활 태도를 바꾸어 놓기 위한 가르침 가운데서223 여러분은 그가 초절정의 절제를 견지한 그만한 이유와, 또 그가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성이라고 여기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무절제한 아리스팁포스에게 제시한 통치자가 될 아이로 훈육하는 방법은, 통치자 따위는 전혀 되고 싶지 않은 아리스팁포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었지만,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통치자의 모습 정도는 충분히 그려 볼 수 있게 하는데, 소크라테스가 그린 통치자는 한마디로 바로 소크라테스 그 자신이었습니다. 극기와 인내와 절제와 지혜의 덩어리로 자신을 위해서는 밥도 물도 마시지 않을 정도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도시의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이지요. 도시민을 최고로 잘 위하고 도시의 일을 최고로 잘 처리하는 데 필요한 지혜와 덕성을 갖춘 훌륭하디훌륭한 사람이 도시의 통치자가 되어 자신과 자신의 일을 버리고 모름지기 도시민과 도시를 위해 일한다면 그런 도시가 솔론의 아틀란티스가 안 되면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그래서 옛날에 페리클레스가 죽고 도시를 클레온에게 맡기는 대신 소크라테스에게 맡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때는 소크라테스가 아직 이런 생각하기 전이니 나중 클레오폰이 승전 장군 열 명을 한꺼번에 해치우려 했을 때, 그때라도 일괄 재판을 반대하던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를 통치하게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승전 장군들이 아르기누사이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고 갈 곳 없는 뤼산드로스가 페르시아 도망치고, 망연자실 이제 더 이상 페르시아의 돈으로 함대를 구축할 수 없어진 스파르테가 평화를 애걸하고, 그래서 페리크레스가 바라던 새로운 30년 평화가 헬라스에 깃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크리티아스의 난행도 도시가 철학자를 죽이는 도시의 영혼의 타락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네요. 아테나이가 소크라테스를 계속 장군으로 뽑을 수 있다 해도 전쟁이 끝나서 장군인 소크라테스가 도시를 통치할 수 없고 추첨으로 뽑힌 아르콘 소크라테스가 도시를 이끌어야 되는데, 그동안 단 한 번도 아르콘으로 뽑혔던 적이 없었던 소크라테스를224 어떻게 도시의 통치자로 모실 수 있으며 운 좋게 한 번은 아르콘으로 뽑았다 해도 고작 한 해 동안의 집권으로 아르콘 소크라테스가 도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논의하고 결정은 바보들이 하는225 민주정 제도에 대해, 더 나아가 그 제도 덕분에 장군도 되고 아르콘도 되고 그밖의 관직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부덕함과 부실함에 대해 알게 모르게 추종자들에게 비판하면서,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덕성과 실력을 갖춘 그런 도시의 통치자가 나오길 기대했었겠지요.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이 정치를 하지 않지만 좋은 정치가를 키움으로써 도시의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수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진 현실 정치 참여자는 고작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 정도일 뿐이고226, 그들 모두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결코 덕성과 실력을 갖춘 정치가나 통치자가 되지 못했고, 오히려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와 소크라테스와 그 추종자들에 대한 도시의 불신을 그대로 드러내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문제이자 한계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가 정한 통치자로서의 덕성과 실력을 완벽하게 갖추고도 그런 자신이 자기의 조국을 위해 멸사봉공할 기회를 가지려 하지도 얻지도 못했으며, 그 때문에 그런 통치자를 키우는 것으로 그의 정치철학을 구현하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 정치철학의 문제이자 한계였습니다. 그런 소크라테스를 오늘 우리가 이 재판정에 불러왔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헌옷 입은 소크라테스, 안티스테네스밖에 없네요. 그러니 이제 여러분은 이 재판으로 아뉘토스를 징죄하고 소크라테스의 신원을 풀고 복권시키겠지요. 그런 다음 여러분은 무얼 하시겠습니까? 고작 권력에 눈 먼 네오클레이데스에게 정권을 넘기고, 조용히 곡물을 팔아 돈을 버는 나누시퀴데스에게 도시의 돈을 넘기겠지요.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네오클레이데스나 나누시퀴데스와 가까운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며 그들 덕분에 도시가 안정되고 도시민이 먹고 사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말하겠지요. 혹시 그 꼴이 보기 싫은 제가 반발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저기 헌옷 입은 안티스테네를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의 통치자로 모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안티스테네스를 도시의 통치자로 모신들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네오클레이데스가, 여러분에게 신에 가까운 안티스테네스를 장군으로 뽑아 도시 일을 맡기는 것이, 도시의 통치자로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손뼉치고 나올 것 같습니까? 이 자리에 없는 나누시퀴데스는 그렇게 할 것 같습니까? 헌옷 입은 안티스테네스의 동문 플라톤은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아무도 생전의 소크라테스를 도시의 통치자로 모시지 않았듯이 아무도 헌옷 입은 소크라테스 안티스테네스에게 네오클레스 대신 정권을 맡기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에게 소크라테스 대신 이 도시를 구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복권이, 아니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지금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와 단순한 철학자와의 화해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철학자와 도시의 화해를 위한 것이라면 저 아뉘토스와 새로이 쌓는 불화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아뉘토스보다 더 무서운 고발자로 찍힌 이 희극시인과 철학자 사이의 불화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단정해서 말씀드리지만, 도시가 철학자와 화해하는 덕분에 덩달아 오늘 제가 여러분들로부터 무죄방면된다고 해도 그것으로 시인과 철학자 사이의 불화가 해소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시당초 시인과227, 아니 희극 시인과 철학자 내지는 소피스테스들과 불화는,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저자 거리의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로 도시의 일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의 절제는 숭고한 것이지만 일차적으로 철학자 자신이나 그것을 실천하는 개개인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노래는 시인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도시민 전체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도시의 일 때문에 도시민인이 느끼는 고통을 도시가 해소해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철학자는 그 고통을 도시민 스스로가 최절정의 절제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와 안티스테네스의 헌옷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희극시인인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도시와 도시의 통치자에게 도시민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물었습니다. 도시민에게 고통 해소의 책임을 묻기보다, 도시민에게 고통을 주는 그런 도시의 통치자는 불의한 통치자이니 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정의이며 도시민이 해야 마땅한 도시의 일이라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헌옷 입은 소크라테스와 안티스테네스의 절제가 지금 아테나이의 권력을 쥔 네오클레이데스나 아테나이의 돈을 쥔 나누시퀴데스의 권력과 돈을 가졌다는 오만과 그 권력과 돈을 더 가지려는 탐욕을 버리게 하기는커녕, 그들의 오만과 탐욕을 오관불언하고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데만 정진하는 도시민들의 무관심 덕분에, 그 오만과 탐욕이 그렇지 않은 도시민을 상대로 돈과 권력의 힘을 마음껏 부릴 수 있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극시인인 저는 돈과 권력이 오만과 탐욕으로 부리는 힘을 고발하였고,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 시민에게 그들이 부리는 힘을 거부해야 한다고, 그 밑에 붙은 알랑쇠가 되어 그렇게 살지 말라고 노래했습니다. 도시민이라면 말벌들처럼 도시의 일에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도시의 일을 불의하게 보는 사람들을 찾아 벌침을 쏘아야 한다고, 클레온이 설칠 때부터 클레오폰이 여러분의 돌에 맞아 죽기 전까지 노래했습니다. 우리 아테나이의 최고 현인이자 시인인 솔론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솔론은 시인이었습니다. 시인 솔론은 철학자이기도 했지만, 도시민들에게 돈과 권력의 오만과 탐욕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자기 절제로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데에만 애쓰라고 말하는 대신, 그는 도시민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영혼만 돌보라고 말하는 대신, 그보다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속되지 말고 자유로운 도시민으로서 도시의 일에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돌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야만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고, 따라서 그런 도시민 도시를 반듯하게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론은 시인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인 제가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한 도시민이 도시에 대해 그들이 잘 살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바로 도시의 정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인 제가 신을 두려워하며 착하고 정직한 도시민이 잘 살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도시의 정의이며, 이 도시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정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인인 저의 정치철학이기 때문입니다.
0.7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러므로 도시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도시에서 착하고 정직한 도시민이 잘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시는 착하고 정직한 도시민이 잘 사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도시는 착하고 정직한 도시민이 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11. 도시의 자유'에서 계속>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적어도 13년은 지나서였다) 그들이 한 일을 후회하여 소크라테스를 복권하였고, 아울러 소크라테스를 재판에 회부했던 아뉘토스 멜레토스 뤼콘을 처벌했는데, 이 일을 안티스테네스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그리스 철학자 열전',제2권5)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는 재판이 하루 해에 끝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는데(플라톤,'소크라테스의 변론',37a-b), 아마도 아테나이 시민에게 그의 영혼을 보이고 그들을 설득시키기에 하루가 너무 모자란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짧은 시간이나마 설득을 위해 쓰지 못하고 오히려 아테나이 시민을 꾸짖고 비난하는 데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답답한 마음에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와 아테나이의 불화가 깊어져 전쟁이 피할 수 없어 보이자, 아테나이가 더 이상 철학자를 죽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한다며, 고향인 마케도니아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가 과연 이 글 전체를 하루에 다 말할 수 있었겠는지 의문스럽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을 줄이거나 일부러 말할 때 걸릴 시간을 잴 생각도 없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프로타고라스, 아낙사고라스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 셋의 철학자들을 신에 대한 불경죄로 재판에 회부하여 다른 도시 출신이었던 앞의 둘은 추방하였고, 아테나이 사람 소크라테스는 처형하였다. [본문으로]
- 헬라스어 'hybris'는 자주 오만으로 또는 과시로 번역된다. 그런데 이 오만과 과시가 언행으로 나타나는 양상은 가진 힘의 오용誤用misuse과 남용濫用overuse 그리고 악용惡用abuse이다. [본문으로]
-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 같은 시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철학자들도 신의 형상을 인간의 형상에 견주어서 보았다. 다만, 철학자들 가운데 크세노파네스가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했다. [본문으로]
- 테미스토클레스는 수틀린 시민들에게 빈손으로 쫓겨났고,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아들 힙피아스의 경우 시민들이 군소리 없이 따르다가 수틀려서 뒤엎은 것이 수 차례 반복되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공무 담당 권한을 소유 재산 정도에 따라 나누었으므로, 오만과 탐욕의 피폐를 알고 제도적으로 보완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있는데, 그런 제도가 실제로 도시의 정의에 부합되는 제도로 운영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본문으로]
-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클레온이 데모스테네스를 대동하고 첫 출진하여 스팍테리아 섬에서 스파르테 동등인 120 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려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고 아테나이의 새로운 권력자가 되던 BC425 봄의 레이나이 축제의 희극 경연에서 당시 최고의 희극작가 크라티노스의 '"폭풍우 속의 사람들"'을 제치고 우승하였고, '"평화"'는 기고만장의 클레온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스파르테의 브라시다스와 함께 전사하는 바람에 성립된 소위 '니키아스의 평화'가 체결된 BC421 봄의 디노뉘소스 축제의 희극 경연에서 에우폴리스의 '"추종자"'에게 밀려 2등 하였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아카르나이 사람들"'496-503행. 아리스토파네스는 여기서 도시의 정의dike,dikaiosyne가 다름아닌 도시의 공공의 복리를 위하는 것이며 희극도 공공의 복리를 위한 옳은 말을 함으로써 도시의 정의에 부응하는 것임을 지극히 간단하게 설명해 버린다. [본문으로]
- 같은 극,503-556행.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대목에서 디카이오폴리스가 에우리피데스의 도움으로 빙의한 거지 차림의 텔레포스의 이름을 대입하고 있는데, 관객들에게 자신이 아테나이의 자기 중심적인 행동을 비판하며 스파르테를 너무 옹호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555-6행,'여러분(아테나이)은 분명 그렇게(전쟁 불사) 했을 것이오. 그런데 '"텔레포스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시오?"'(에우리피데스 텔레포스에서의 인용구) 한마디로, 우리는 생각이 모자라요.'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가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 연극 대사의 1/4을 할애하여 라마코스를 아테나이의 대표적 허장성세의 주전파 장군으로 묘사할 때(전쟁을 외치지만 정작 아들은 선출을 핑계로 전쟁에서 빼돌린 장군이고(566-625행), 전쟁에 나가서는 전투도 하기 전에 참호를 뛰어 넘다 말뚝에 다친 부상을 적의 창에 맞아 얻은 것처럼 죽어 가는 시늉을 하며 동정을 사려는 장군이다.(1069-1234행)), 투퀴디데스는 아직 라마코스를 소개조차 하지 않고 있고, '"아카르나이 사람들"'이상연된 이듬해인 BC414 여름의 일에서 처음 아테나이의 장군 라마코스를 소개하고 있는데('펠레폰네소스 전쟁사'IV.75), 여기서도 라마코스는 함선 10척을 지휘하여 흑해 연안을 항해하다가 칼렉스 강변에 정박하던 중 상류의 호우로 함선을 모두 잃고 걸어서 칼케돈으로 간 장군이라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아리스토파네스가 '"평화"'에서 라마코스를 전쟁을 하고 싶어하다가 전쟁 뒤에는 눈물을 흘리는 어떤 전사로 묘사할 때(1291-2행), 투퀴디데스는 라마코스를 니키아스 평화의 체결자 중 한명으로 라마코스의 이름을 올렸다. 투퀴디데스는 BC415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군의 세 번째 장군으로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와 출전한 라마코스(펠,VI.8), 원정 전략에 있어 자신의 의견을 가졌으면서도 채택시키지 못하고 알키비아데스의 전략에 동조하는 라마코스(펠,VI.49,50), 그리고 원정 내내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다가 BC413 마지막 전사 장면(펠,VI.101)과 시신 회수에(103) 대해 한 줄 씩 기록했고, 그가 시켈리아 원정에서 제법 장군다운 모습으로 전사하고 나서야 아리스토파네스 역시 한 번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에서 사채놀이하는 휘페르볼로스의 어머니 곁에 있는 라마코스의 어머니를 언급했고(840-841행), 마지막으로 라마코스 전사 8년 뒤 '"개구리"'에서 아이스퀼로스의 입을 통해 라마코스를 영웅이라 부르는 것을 허용했다.(1039행)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가 아카르나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둘에 맞아 죽게 된 디카이오폴리스를 에우리피데스에게 보내 텔레포스의 거지 차림을 빌려 입게 한 뒤 성난 아카르나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 발명토록 한 데에는 전쟁과 재앙으로 달라진 아테나이 상류 사람들의 두 가지 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하나가 페리클레스 때부터 부자들의 공공 봉사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보수 공공봉사 때보다 더 도시의 일에 대한 의무감이 없다는 것과, 전쟁과 재앙으로 잃게 된 위상에 대해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하층민식 동정에 기대는 나약함을 보인다는 것이었는는데, 이런 상류들의 처신이 에우리피데스식 비극이 왕을 거지 차림으로 관객들 앞에 나가 동정을 구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생겼다고 간주하고 에우리피데스 비극에서 상류 계급의 주인공이 비천한 차림으로 나오는 장면들을 집중으로 페러디하며 조롱했다. [본문으로]
- '"아카르나이 사람들"'599-602,'나는 그게 싫어서 휴전조약을 체결했던 거예요. 백발이 성성한 이들은 전투대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대 또래의 신출내기들은 병역을 기피하려고 사방으로 흩으지는 것을 내가 봤으니까요. 더러는 3드라크메의 일당을 받고 트라케로 갔지요.' [본문으로]
- 같은 극,626-7행 '이(디카이오폴리스) 사람 말이 옳소. 그래서 민중은 생각을 바꾸어 그(디카이오폴리스)의 휴전조약을 추인하는 바요. 자, 우리 외투를 벗고 단단장격에 맞춰 춤춰요.' [본문으로]
- '"아카르나이 사람들"'233행 [본문으로]
- 디카이오폴리스와의 논쟁agon에서 찬반으로 나뉜 아카르나이 사람들은 라마코스의 지원을 요청하고(566-572), 라마코스는 군대를 대동하고 나타나 디카이오폴리스와의 논쟁을 이어 받는 장면에서, 디카이오폴리스는 라마코스가 든 방패의 고르고 때문에 현기증이 난다며 방패를 뒤집어 땅에 놓게 하고(581-3), 라마코스가 쓴 투구의 깃털 때문에 속이 뒤틀려 토할 것 같다며 깃털을 뽑아 달라고 해 깃털을 뽑게 한 다음(584-589), 자신도 점잖은 시민이고 전사라며 대등한 입장에서 본격적인 논쟁으로 들어간다. [본문으로]
- 트뤼가이오스가 결혼식 서곡을 부르도록 불러낸 열두어 살 먹었을 이 라마코스의 아들은('"평화"'1265-1294,BC421상연)) 디카이오폴리스가 징집을 피해 외국 사절로 나갔다고 비난하는 서른이 넘었을 라마코스 아들의('"아카르나이 사람들"'614,BC425상연) 막내 동생 정도였을 것이지만, 실제 라마코스에게 그 나이 정도의 아들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휘페르볼로스를 조롱하기 위해 아고라에서 장어를 팔고 사는 휘페르볼로스의 어머니를 끌어들였다고 동료 에우폴리스를 비난했던 아리스토파네스가 실제 라마코스에게 미성년의 아들이 있었다면 라마코스를 비난하기 위해 그 미성년의 아들을 무대에 올리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같은 극,1296-1302행. 아리스토파네스는 처음 라마코스의 호전성이 도시를 위하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용기를 과시하려는 허풍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에서 직접 무대에 올려 디카이오폴리스로 하여금 조롱하게 했지만, 그가 시켈리아 원정에서 아군의 열세를 지원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여섯 용사와 함께 이동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난 후에 나온 작품 두 곳에서는 전쟁을 통한 도시에 대한 그의 헌신을 대체로 인정하는 반면, 클레오뉘모스에 대해서는 대표적 부적격 도시민으로 보고, 식탐에 대식가라 뚱뚱하고 비역꾼이라며 인신공격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도시를 위한다며 정치가로 나서서는 밀고라는 모략과 위증으로 정적을 치기 위한 선동이나 하다가, 정치를 한다면서 전쟁에 안 나갈 수 없어 단 한 번 나선 트라케 원정에서 사이오이족의 숲 전투 중 방패를 버리고 도망쳐 살아 돌아온 비겁함을 희극적 소재로 삼아, 모두 일곱 작품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의 이름을 끌어 대어 조롱하고 있는데, 트뤼가이오스에게는 클레오뉘모스의 아들을 통해 그런 비겁함이 신중함이었다고 조롱하고 있다. [본문으로]
- 라마코스 아들의 경우처럼 이 연극이 상연될 당시 클레오뉘모스에게도 실제 미성년의 아들이 없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아카르나이 사람들"'609-614행.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벌들"'518,547-550,575행,...) [본문으로]
- 1드라크메 = 6오볼로스 [본문으로]
- 아테나이가 정치를 포함한 공무 담당자를 선거로 선출하기 시작한 것은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 개혁으로 국방의 문제를 전담하는 1년 임기로 연임 제한이 없는 장군직이었다. 아테나이는 전통적으로 테세우스 이래로 솔론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도시를 위한 공무 담당은 부자들의 의무로 무보수이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공공사업조차도 세금을 걷는 대신 부자들의 사비로 충당하였는데(대표적인 예가 테미스토클레스 당시의 함선 건조와 키몬 당시의 아테나이 성벽 축조이다.), 따라서 도시민들이 부자들의 권력까지 행사하는 돈과 권력의 집중, 다시 말해 돈과 권력의 불평등을 용납하였으며, 부자들은 사비가 들어가는 권력의 담당을 추첨이나 순번을 정해 번갈아 맡았다. 테세우스 당시에는 도시의 사회 계층을 직능별로 구분하여 정치를 담당하는 귀족들로 하여금 민주적 귀족정 체제였으나, 차차 귀족들의 과두정 형태로 바뀌어 갔고, 솔론 시대에 이르러 극심한 과두정의 폐해는 도시의 자유민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등 테세우스 이래의 아테나이의 도시 사회 계층 구조의 붕괴를 가져왔다. 개혁을 담당한 솔론은 도시민의 계층 구조를 새로 짜는 데에 중점을 두고 테세우스의 정치 담당 계층의 폭을 넓혀, 재산 정도에 따라 공무를 담당하는 수준을 4개층으로 나누어 권력을 하향 분산하였는데, 이는 도시의 공무 담당을 부자들의 의무로 보는 아테나이의 전통적인 부와 권력의 집중을 유지하면서도 도시가 일부 소수의 부자들 손에 전횡되지 않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실패했고, 참주제와 과두정 복고를 거친 다음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주정 체제로 개혁하였는데, 요체는 10개로 행정 구역 재편과 각 행정 구역의 구역 대표들이 모여 아테나이의 대표, 즉 아르콘이 되는 집행 체제와 6000명의 성인 남자들이 자발적으로 이루는 민회, 그리고 그 민회가 위임한 평의회가 의결 체제로 갖추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자발적 참여의 민회, 추첨이나 순번에 따라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그런데 클레이스테네스는 유독 국방을 위해서만 각 구역에서 따로 한 명씩 10명의 장군직을 구역 주민의 선거로 뽑게 하였는데, 구역별 장군의 징병과 통솔이 용이하도록 선출직으로 돌린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테나이는 키몬 이후로 장군들의 원정 전리품과 약탈물로 장군과 원정군의 부가 늘어나자 키논 같은 능력 있는 장군들의 장기 피선이 이어졌고 페리클레스가 그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스파르테와의 30년 평화 조약 체결 후의 헬라스는 더 이상 전쟁을 통한 전리품이나 약탈로 수입을 올리는 무대가 아니라 아테나이의 해군력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평화의 대가를 동맹도시들이나 식민도시들로부터 받는 조공으로 수입을 올리게 되었고, 페리클레스는 도시의 공공 복리에 아테나이의 전통대로 권력을 쥔 부자의 의무로써 자신의 개인 재산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조공으로 받은 돈을 쓰면서, 전통적으로 무보수 봉사를 원칙으로 하던 공공 업무 담당자에게 공공 업무 참여도를 높히기도 할 겸 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고, 특별히 수당이 높은 직책에 대해서는 추첨이나 순번 대신 선거로 임용하기 시작했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가 도시를 확장시키기 위해 평등을 조건으로 이주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테세우스전')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의 시민권 제한 조치는 조공의 수입을 나누어 받는 사람의 숫자를 줄이고 싶은 아테나이 사람들의 욕심도 작용했던 탓이었던지, 역병의 재앙으로 시민의 1/3을 잃고도, 무엇보다도 그 역병 때문에 페리클레스의 상속자들이 모두 죽어 결국 페리클레스가 밀레토스 출신의 아스파시아 사이에서 얻은 아들 페리클레스를 상속자로 삼기 위해 아테나이 시민권을 갖도록 해 달라고 민회에 나가 읍소해야 했을 정도로, 페리클레스가 잠근 도시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는데, 전쟁 말기에 함선의 노를 저을 시민도, 돈을 주고 살 용병도, 용병에게 줄 돈도 구할 수 없게 되어서야, 함선의 노를 젓는 조건으로 노예들에게 아테나이 시민이 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가 코논의 패전 소식에 놀라 지원 함대를 보낼 때 시민권을 주기로 하고 노예들을 징집하여 해전에 투입하였는데(크세노폰,'헬레니카'),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과정의 곡절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연극 '"개구리들"'의 파라바시스에서 말해 주고 있다. 클레오폰은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승리한 노예들에게 처음 노예들을 징집하여 투입할 때와는 말을 바꾸어(679-680행,'두 가지 말을 하는 클레오폰의 입'에 대한 비난), 한 번의 참전으로 시민권을 줄 수는 없다고 반대했지만(693-694행,'단 한 번의 해전에 참가했다고 당장 아테나이 시민이 되고 노예가 주인이 된다면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오'), 현명하고 명예스런 민중이(676-679행,'민중은 아는 것이 수없이 많거니와 클레오폰보다 더 명예를 존중하나이다.') 민회 표결이 찬반 동수였음에도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키로 결의했다(684-685행,'투표가 찬반 동수인데도 클레오폰이 망했기 때문이죠'). [본문으로]
-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크리티아스로 하여금 크리티아스의 증조부 드로피데스가 친족이자 친구인 솔론으로부터 들었던 아틀란티스라는 나라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이 아흔 살의 조부 크리티아스로부터 나이 열 살 무렵에 들었던 것을 바탕으로 아틀란티스라는 나라의 행적에 대해 소크라테스, 헤르모크라테스, 티마이오스에게 이야기하도록 하고, 소크라테스에게는 '솔론께서 들으신 대로 전해지지 않고는 있으나,'라는 말로 이 이야기가 허구임을 날카롭게 지적하게 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플라톤이 내심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듣어보기 위해서는 그렇게 전해진 이야기를 듣는 게 좋으므로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권유하게 한다. 이렇게 '티마이오스'에서 시작된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크리티아스'로 이어지지만 [본문으로]
-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이야기의 매듭을 짓지 못했는데, 아테나이가 아틀란티스의 침공을 물리치고 [본문으로]
- 테세우스는 아테나이의 개국자였고, 솔론은 새로운 아테나이를 제시한 개혁가였고 자기에게 주어진 왕위를 마다했을 정도로 진정 잣기를 돌보기보다 도시와 도시민을 위해 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아테나이에는 또 한 사람 클레이스테네스가 있었는데, 그는 민주정이란 유래 없는 정치 체제를 도입하고, 공무 담당자들에 대한 임기제 도입으로 권력의 불평등 소지를 없애고, 아테나이의 사회 지리적 구성을 재편하는 등, 아테나이를 완전히 다른 도시로 재탄생시킨 제2의 개국자였다. 그러나 클레이스테네스 개인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은 지극히 제한적이고(헤로도토스는 알크마니온 가문에 대한 내력에서, 투퀴디데스는 참주를 몰아내기 위한 스파르테를 개입시킨 내력에서, 아리스토클레스는 아테나이에 새로운 정치 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과 클레이스테네스의 역활에 대한 침묵에서,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그리스 로마 위인전에서 유독 클레이스테네스를 제외시킨 점에서 모두 클레이스테네스에게 적대적은 아니라 해도 결코 우호적이지는 않다.), 앞에서 말한 아테나이의 제2 개국의 자세한 과정이나 그 과정에서 클레이스테네스의 역활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여, 그가 과연 테세우스나 솔론처럼 왕위를 버릴 정도로 진정 자신을 돌보기보다 오로지 도시와 도시민을 위해 일했던 사람인지, 그래서 제2의 아테나이 개국이 과연 그런 그의 노력의 결과물이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테세우스와 솔론과 같이 세우지 않았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 해군의 포위로 코논이 지휘하는 아테나이 함대가 키오스 항구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테나이는 마지막 비상금 투입하여 지원 함대를 보낼 때, 노꾼과 해군 병사를 채우기 위해 참전하는 노예들을 차출하였는데, 이때 참전 노예들에게 시민권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스파르테 함대를 괴멸시키고 돌아온 참전 노예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것을 반대하는 클레온의 목소리가 높자, 시미들은 민회의 결의로 시민권 부여를 강행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개구리들"687-692행,697-699행. 아리스토파네스는 '"개구리들"'의 파라바시스에서 도시에 이로운 것을 조언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신성한 코로스들의(연극 ""개구리들"'의 코로스는 프롤로고스에서 디오뉘소스가 카론의 배를 얻어 타고 호수를 건너 하데스로 가는 장면에서는 그 호수에 사는 개구리들이었다가(209-267행), 호수를 건너 하데스에 도착한 다음의 파로도스에서는 코로스가 디오뉘소스를 또 다른 이름 이악코스로 숭배하는 엘레우시스 비의 전수자들로(316-319행) 바뀌어 엑소도스의 마지막까지 맡는데, 그들이 비의의 전수자들이므로 파라바시스에서 신성한 코로스라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뀐다.) 도리라며, (바꾸어 말해, 시인의 도리로,) 첫 째, 도시가 시민들을 불평등에서 해방하고 그런 우려를 불식시켜야 하며, 둘 째 도시가 도시 안에서 그 누구의 권리도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의 처지를 '파도의 품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도시로 표현할 만큼 도시의 장래를 불안하게 보고 있었고, 전승 분위기의 디오뉘소스 축제에 '"개구리"'를 올린 것도 당시의 권력자 클레오폰으로는 파도의 품속에서 흔들리는 아테나이를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테나이를 단결시킬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으며, 나선 김에 그는 그 연극을 통해 바람직한 새로운 지도자로, 사람들이 잘 아는 집안 좋고, 절도 있고, 올곧고, 씨름과 음악에 단련된 점잖은 신사들 가운데서 발탁해야 할 것이라며(파라바시스 끝 단락,717-737행), 구체적으로는 감성적이고 천재인 에우리피데스형보다 도덕적이고 우직한 아이스퀼로스형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으로]
- 같은 극,697-705행. 아리스토파네스의 조언대로(686행) 아테나이가 과두정 참여자들의 박탈된 권리를 돌려주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해 뒤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에 항복하고 수립된 30인 과두정을 무너뜨린 뒤 도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행한 30인 과두정 참여자들에 대한 대사면 역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런 주장과 맥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이 글에서 '솔론의 시대'는 단순히 솔론이 살았던 시대를 말한다. 흔히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라거나 '페리클레스 시대'라고 일컫는 그 이름의 주인공이 집권하던 시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솔론은 일 년 밖에 집권하지 않아 그렇게 이름 붙일 까닭도 없지만, 솔론이 나서 죽기(BC630-560) 전후, 즉 아테나이의 기원전 7-6세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솔론 시대는 아테나이라는 도시가 총체적으로 정치와 경제의 적폐에 눌려 도시 구성원 간의 반목과 불화로 원활한 도시 기능을 유지하기 하기 어려운 한계에 도달해 있던 때였다. 토지가 부의 원천인 세습 귀족들이eupatridai 담당한 오랜 귀족 정치는 자작농들geomoroi과 상공인들demiurgoi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생활 기반을 잠식하고 예속시켰으며, 심지어 아테나이에서 그리고 다름 도시에서 노예로 전락하기도 하던 시대였다. 도시는 반목과 불화로 내전이 언제 어디서 터져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 시대의 아테나이는 같은 도시에 사는 도시민끼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평등하였는데, 이런 불평들이 개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에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고착화한 기회의 불평등에 기인하였으므로 도시의 뼈대라 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도시 구조를, 즉 도시의 법과 제도를, 바꾸어 새로운 질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본문으로]
- 솔론은 아테나이 안에서 이미 농노로 전락한 자유민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에서 다른 도시로 팔려 나가 노예로 전락한 아테나이 시민들이 아테나이로 돌아와 자유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부채 탕감의 정도를 조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제도사'XVI.10. [본문으로]
- 크로노스의 시대를 포함한 크레타 섬의 문명에 대해서는 [본문으로]
- 아테나이에는 만일 누가 참주가 되려고 모반하거나 참주에 동조할 경우 자신과 그 가문이 불명예(대표적으로 시민권 박탈이다)에 처하는 전통과 관습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 제도사'XVI.10.), 아테나이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참주를 대하는 다섯 가지의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 첫 번째가 BC620 참주가 되려고 메가라 군대를 동원한 퀼론의 쿠데타를 아테나이 사람들이 농기구를 들고 나서 무산시킨 일이었는데, 그 당시 아테나이는 지역에 뿌리 내린 세습 귀족 집안이 정치 세력화하여 서로 권력을 나누거나 다투며 아테나이를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퀼론처럼 어느 한 집안이 폭력으로 권력을 독점하려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고, 따라서 알크마이온 집안 같은 다른 정치 세력들이 퀼론의 쿠데타를 반격하고 나서면서 그들의 영향 아래 있는 이 농민들도 농기구를 들고 아크로폴리스로 진격하여, 퀼론의 참주 쿠데타를 삼일천하로 끝나게 할 수 있었는데, 결국 이 진압은 참주가 되기 위한 모반 불용의 아테나이 전통과 관습법이 작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진압 과정에서 알크마이온 집안의 메가클레스가 복수의 여신 사당으로 피신한 퀼론 형제를 신전 경내에서 주살하였는데, 이 일로 아테나이가 복수의 여신의 저주에 걸렸다는 이유로 메가클레스를 위시한 알크마이온 집안이 아테나이에서 추방되었고, 퀼론의 쿠데타 실패는 퀼론과 알크마이온 두 집안의 세력 붕괴와 함께 아테나이에서의 오백 년 귀족정을 붕괴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이후 아테나이는 나머지 귀족 집안 간의 권력 다툼과 오백여 년 귀족정의 적폐가 드러나서 더해진 혼란으로 귀족정의 붕괴만이 아니라 도시를 붕괴시킬 지경에 빠졌고, 일찌기 드라콘이 남긴 강압도(피의 법이라 할 드라콘법을 말한다), 당대의 솔론이 남긴 화합도(솔론의 개혁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테러를 자행하는 퀼론 집안에 대한 처벌과 추방되었던 알크마이온 집안의 소환, 그리고 크레타로부터 에피메니데스를 초청하여 벌인 도시 정화 사업, 부채 탕감과 자유민 환속, 등을 말한다) 아테나이를 구할 수 없었을 때, 아테나이 사람들은 참주가 도시의 혼란을 끝내고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 주는 등 귀족들과는 다른 도시 운영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몽둥이를 든 경호원들을 동원하여 아크로폴리스를 차지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쿠데타를 용인하고 그를 참주로 인정하였는데, 이것이 첫 번째보다 두 세대 뒤인 BC560에 아테나이 사람들이 참주에 대해 보인 두 번째 태도였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가 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귀족 집안들이(메가클레스나 뤼쿠르고스 같은 좌장들은 모두 아테나이에서 도망치고 없었고, 남은 이들은 몽둥이를 든 청년들을 잘못 막았다가 민란으로 일이 크게 벌어질까 두려워 막지 못 했을 것이다) 뒤늦게(아리스토텔레스는 6년 뒤인 BC554의 일로 말한다.) 메가클레스와 뤼쿠르고스 집안이 합심하여 반정을 일으켜 참주를 추방하고 귀족정을 부활시켰지만 권력투쟁에 밀리게 된 메가클레스가 정권 유지를 위해 BC546 망명 중이던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소환했을 때, 분장한 아테나 여신의 인도로 입성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참주로 받아들인 것이 세 번째였는데, 이 즈음 아테나이 사람들은 오랜 혼란에 지쳐 도시에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면 하고 참주의 치졸한 입성 행렬도 용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메가클레스와 연대가 깨어져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도주했고(BC539), 망명 중 쌓은 인맥들의 주선으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들 힙피아스와 함께 BC534 테켈리아와 에우보이아 용병들을 동원해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하고 아테나이 사람들의 무장을 해제 한 뒤 아테나이의 참주가 되었을 때는 무력이라는 진정한 참주의 폭력 앞에 어떤 저한의 몸짓도 보일 수 없었는데, 이것이 네 번째 태도였다. 다섯 번째는 BC527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고 그의 아들 힙피아스가 이어서 참주가 되는 것에 대해 보인 태도인데, 힙피아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테켈리아와 에우보이아 용병들을 데리고 아테나이를 접수했을 때부터는 실력자로 행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들로서는 힙피아스가 새로운 참주가 되는 것에 대해 별 다른 저항이나 감흥을 보일 필요조차 없었다. 그 이후 아테나이에서 참주가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전쟁 중에 일어난 페이산드로스와 프뤼니코스의 400인 과두정 때에는 민회가 압박을 받기는 했으나 민회의 의결을 거쳐 과두정이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을 복고한 다음 과두정 지도자는 재판으로 처벌하고 과두정 부역자들은 불명예에(시민권 박탈,아리스토파네스,'"개구리"'689-705행) 처하는 엄격한 태도를 보였었고, 또 다른 태도 하나는 패전 후 수립된 소위 30인 참주정은 앞의 400인 과두정과는 다른, 과두정이라기보다는 (다수)참주정으로 보아도 무방할 '30인 체제'(아리스토텔레스가 '에나이 정치 제도사,XXXV.1'에서 붙인 이름이다.)에 대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태도인데, 스파르테와의 항복 조건 가운데 패전 아테나이의 정치 체제는 아테나이 조상의 것들 가운데서 정하도록 되어 있어, 아테나이로서는 얼마든지 민주정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주장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테의 후원 아래 크리티아스 일당들이 일찌기 조상들이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아테나이로서는 새로운 정치 체제일 뿐인 30인 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반대하거나 거부할 경우 스파르테가 계속 아테나이에 점령군으로 주둔하는 빌미가 될까 우려하여, 그들 정권의 수립을 지켜보다가 포악함이 도를 넘자 내전을 불사하며 민주정을 복고하였고, 30인 체제의 지도자들은 재판으로 처벌하고, 부역자들은 사면하였다.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이런 정치 행태에 대해서는 '주653' 참조.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대한 상세 기술은 '본문 자.12-17.' 참조.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몽둥이로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하고 참주가 된 동안은(BC560-556) 솔론의 법과 제도를 따르면서, 이전 그가 이끌던 산지당이 주장하던 대로 민중을 위한 정치를 구현하려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 제도사'XIII.5.,XIV.3) 이런 정치 행태 때문에 기득권자들, 즉 메가클레스와 뤼쿠르고스에게축출되었다가, 메가클레스의 정권 유지책의 일환으로 다시 참주가 되었으나, 이 두 번째 참주 기간에는(BC546-543/?539) 귀족정 복고 정치로 솔론의 법과 제도가 유명무실해졌을 뿐만 아니라, 페이시스트라토스 역시 실권이 없는 참주 신세여서 솔론의 법과 제도를 지킬 수도 없었다. 그 뒤 내전까지 일으키며 무력으로 아테나이를 장악하고 진정한 참주로 군림한 동안은(BC534-527) 이미 솔론의 법과 제도는 무너져 버렸고, 메가클레스가 복고시킨 귀족정은 무력으로 무너트려 버렸으므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법과 제도를 만들었고, 도시는 그에게 일임한 채 어떤 저항이나 반대도 보일 수 없었다.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자 그의 아들들이 권력을 잡고는 같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아리스토텔레스,'아테나이 정치 제도사'XVII.2.)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처 [본문으로]
- 퀼론의 쿠데타를 저지하는 과장에서 벌어진 복수의 여신 사당에서의 학살 이후 알크마이온 가문은 망명과 귀환을 되풀이하고 있었고, 퀼론 형제를 복수의 여신 사당에서 죽인 메가클레스의 증손자 클레이스테네스에게도 가문의 귀환과 권력에의 복귀를 막고 있는 참주의 제거는 필수였는데, 아테나이의 반 참주적 민심의 동요를 읽은 클레이스테네스와 알크마이온 가문 사람들은 델포이 사제들을 매수하여 스파르테가 아테나이 사태에 개입하여 아테나이의 참주를 내몰아야 한다는 신탁을 스파르테가 그렇게 움직일 때까지 계속 내도록 했고, 스파르테는 결국 아테나이의 참주를 몰아내는 결정을 하게 된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 정치 제도사'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으로 평하고 있는데, 그의 산악당은 가장 민주적이었으며(XIII.4), 그는 참주라기보다 합법적으로 공익을 추구하는 정치가(XIV.3,XVI.2.)였고, 그래서 명망 있는 사람들이나 만주주의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였다고(XVI.9.) 기록한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솔론전' [본문으로]
- 클레이스테네스 개혁의 요지, 즉 아테나이 민주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본문으로]
- BC508 클레이스테네스가 주도하여 수립한 민주정 체제의 요지는 먼저 혈연과 지역에 따른 파당 형성을 막기 위한 행정 구역 재편과 다음 재산의 정도에 따른 의무와 권리에 대한 과도한 불평등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 2년의 장군직 임기와 연임 허용을 제외하면 아르콘직을 포함한 대부분의 행적직 그리고 재판관은 임기가 1년에 연임을 허용치 않거나 추첨에 따랐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가 은광을 발견한 것이 [본문으로]
- 공격하여 약탈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군사를 움직이는 비용을 보전받았다. [본문으로]
- 적어도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있기 전까지 헬라스 도시들 간의 전쟁은 그야말로 국제정치에서 의사 전달의 한 방법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전쟁이라기 보다는 한낮에 중무장 보병들이 방패대형이나 어린진을 짜서 벌이는 한 번의 전투에 불과하여, 장군들의 역활 역시 극히 제한적이어서 도시의 내정에 크게 간여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이 모든 기존 전쟁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는데, 전쟁은 거의 무제한적인 시간(밤과 낮, 농번기와 농한기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과, 공간(산지와 평지, 유짖와 바다, 농성과 공성을 가리지 않았다.)과, 병력(신분과 나이를 가지지 않고 징집된 중무장 보병, 경무장 보병 기마병, 궁수, 그리고 해군과 누꾼들이 전투에 투입되었다.)을 다양하게 이용해야 하는 연속적인 전투의 양상으로 변했다. 딸서 장군들의 역활은 국제정치에서의 도시의 목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전략을 세울 수 있는 국제정치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를 단결시키고 도시의 자원을 전쟁에 효율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국내 정치 능력까지 갖추어야 했다. [본문으로]
- 살라미스를 두고 벌인 메가라와의 작은 전쟁들을 제외하고는 아테나이는 외적과 전쟁을 거의 벌이지 않고 있었는데, 이사고라스를 내치고 민주정을 세운 아테나이를 응징하기 위해 에우보이아 군대를 움직인 쫓겨난 참주 힙피아스와 연합한 스파르테와 전쟁을 벌인 이후 아테나이는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도시를 내어 줄 때까지 근 150년을 크고 작은 전쟁으로 지새웠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가 거절한 밀레토스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인 아테나이는 아테나이 사상 처음 아나톨리아에 군대를 파견했고,밀레토스 군대와 함께 페르시아의 뤼디아 수도 사르데이스를 공격하고 도시를 불살랐는데, 이 일은 페르시아의 헬라스 침공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 국 아테나이는 크세르크세스에게 한 번,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한 크세르크세르가 귀국하고 난 후 전쟁 총지휘관이 된 마르도니오스에 의해 또 한 번 유린당하고 아크로폴리스와 도심이 불태워졌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도시의 비상금으로 파르테논의 아테나이 여신상에 황금 조각을 붙여 놓았었다. [본문으로]
- 테미스토클레스가 은광에서 나온 수입 100 탈란톤을 아테나이의 명문 부자들에게 대여하여 처음 근해 항해용 선박을 짓도록 한 것이 아테나이가 해군 도시가 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테미스토클레스의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해군 도시의 면모를 과시했으며, 파시아니아스의 난행으로 스파르테와 펠로폰네소스의 해군 강국 코린토스와 아르고스가 철수함에 따라 아리스테이데스가 아테나이 주도의 델로스 동맹을 조직할 수 있었고, 키몬은 동맹을 확대하면서 아테나이 해군의 활동 영역을 아이가이온 해에서 이탈리아와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 지역까지 넓혔고, 페리클레스가 지중해 전체에 대한 해상 지배권을 장악한 이후, 명실 상부한 해양 강국이 되었다. 이런 고정을 통해 각 섬의 도시들이나 해안 도시들은 해양 진출을 [본문으로]
- 일군의 고고학자들이 문헌에는 있으나 위치를 찾을 수 없던 한 항구 도시의 폐허를 해안에서 30km 들어간 내륙에서 찾은 적이 있엇는데, 침식된 토사가 바다를 메운 탓이었다. [본문으로]
- 본문 [본문으로]
- 엘레우시스 비의의 사제 흉내로 신성 모독출입이 금지된 성소를 무단 출입하여 신성 모독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노회한 보수 정치가들은 니키아스를 시켈리아 원정에 포함시켜 알키비아데스가 주도하는 원정 성공이 가져올 권력의 재편을 견제하려 했으나, 막상 출전을 앞두고 민심이 온통 알키비아데스에게 쏠리고, 비록 총지휘 장군으로 임명했다 하나 늙은 니키아스로는 알키비아데스가 쥔 원정의 주도권을 빼앗아 쥐기 힘들다고 보고, 알키비아데스가 저질렀던 젊은 시절의 난행을 찾아 불경죄로 고발하고 원정 길에 나선 알키비아데스를 소환하였는데, 민회에서 자신을 옹호할 사람들은 모두 출전하고 없는 아테나이에서의 재판은 바로 죽음이라고 판단했는지 소환 도중 스파르테로 도주 망명한 것은 자신이 파 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져든 것이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개구리들"', 플라톤,'카르미데스', '국가'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가 기록한 페리클레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첫 해 전몰자 추도사는 비록 페리클레스가 당시 아테나이의 자랑스러움을 열거했지만, 사실 그것은 그의 업적 찬사이고, 그의 정치철학에 대한 스스로의 고백이자, 그것을 받아들인 아테나이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증언이어서, 페리클레스는 물론 그 시대의 아테나이라는 도시의 영혼을 엿보게 해 준다. 그는 자신의 집권 이전에 대해서 아테나이는 선조들의 용기 덕분에 정복되지 않은 자유도시였고(펠,II.36.1), 앞 세대의 노고 덕분에 선조들의 영역에 지금의 제국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다(II.36.2)로 간단히 정리해 버린 뒤, 그의 세대가 그 제국의 힘을 강화하고 도시를 정비하여 전쟁, 평화 간에 완전 자족하도록 만들었다(II.36.3)며, 그러므로 아테나이의 재산을 늘인 전공이나(침략 전쟁으로 재산을 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헬라스인 비헬라스인의 침략을 물리친 전투에(아테나이는 침략을 하지 않은 양 시치미 떼고 있다.) 대해서는 생략하고, 지금의 아테나이를 있게 한 정신 자세(영혼)와 아테나이를 위대하게 한 정치 체제(정체)와 생활 방식(가치관)에 대해 말하겠다며 아테나이의 자랑을 나열하기 시작한다(II.36.4.) 먼저 정신 자세가 아니라 정체부터 말하는데, 아테나이는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도시를 통치하는 정체를 독자적(모방이 아니다)으로 수립했는데 이를 민주정이라 부른다며, 구체적으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며, 주요 공직은 추첨도 아니고 빈부도 따지지 않는 능력 위주로 취임한다고(II.37.1) 말한 다음, 이어서 아테나이의 생활 방식으로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집안에 내려오는 두 가지 남다른 점, 퀼론의 저주를 받은 알크마이온 집안이 자기의 외가라는 점과, 아버지 크산팁포스도 그랬지만 자신의 외모가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닮아 사람들로 하여금 참주를 연상시킨다는 점에 대해 주목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하나는 [본문으로]
- 민주정 성립이후 아레오파고스의 역확을 많이 축소되었으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직 지도자들의 전쟁 지휘가 요청되었고, 특히 장군들조차 일전을 회피하려 했을 때 시민들에게 8드라크메를 지급하며 벌인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는 아레오파고스의 권능과 역활의 부활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테미스토클레스가 재산에 대한 탐욕 때문에 추방당하고 난 후, 에피알테스가 아레오파고스의 권능과 역활을 축소시켜 가는 과정에서 키몬의 재판이 있었고, [본문으로]
- 클레이스테네스가 도입한 도편추방 이전의 정적 제거 방법은 주로 쿠데타였고, 민회가 재판을 맡은 페리클레스 시대부터 6000명 이상이 투표행 하는 도편추방과 500명이 투표하는 재판이 병용되었으며, 휘페르볼로스 이후에는 도편추방이 사라지고 재판과 쿠데타가 병용되었다. [본문으로]
- 일반적인 민형사 재판의 재판관은 20-50명이었다.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 재판에 참여한 재판관은 500명이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매년 각 데모스에서 차출된 재판관 후보 6000명을 추첨으로 각 재판정에 배당하였는데,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아리스테이전'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플루토스(부의 신)"',28-31행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BC470-399)는 아리스테이데스(BC530-468)보다 두 세대나 늦어, 떠오르른 별이던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 아리스테이데스가 도편추방 되었던 BC485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이들 둘은 모두 아테나이의 알로페케 출신이다. 이들 둘 간의 인연이라면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테이데스의 손녀 뮈토르를 크산팁페에 이은 제2의 정처(전쟁 미망인 구제책으로 전쟁 미망인과의 중혼을 권장했던 때라, 뮈토르는 전쟁 미망인이었을 것이다.)로 받아들인 것인데, 이런 일도 같은 부락이라 알음 알음으로 부부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플라톤은 자기 시대보다 9000년 앞서의 비옥하고 쾌적한 아테나이의 모습을 설명하면서,그런 아테나이가 9000년 동안 일어난 여러차례의 큰 홍수 때문에 마치 병든 몸의 뼈 마냥 앙상한 땅덩이만 남게 되엇다고 설명하고 있지만('크리티아스',110d-111b), [본문으로]
- BC404 아테나이는 아르기누사이의 패배 이후에도 낙담은 했지만 바로 성벽을 허물고 항복하지 않았다. 아테나이는 보통 농성자들의 말로처럼 석달 후 도시에 곡물이 떨어지자 성벽을 허물고 항복했다.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역사'제5권94.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는 밀티아데스의 자발적 이주로 보고 있다.(역사6.35)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에 따르면('역사'제5장,힙피아스는 시민의 무기 소지를 금지했었던 것 같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 시민의 신분과 그에 따른 의무와 권리의 배분을 정치 제도의 변천에 따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테세우스 이전의 왕정시대 [본문으로]
- 물품세 1%를 입항할 때 항구에서 받았다. [본문으로]
- 아티케의 남부 수니온 곶에 가까운 라우레이온 산에서 BC483에 발견된 은광에서 생산된 은으로 아테나이는 당시 헬라스 도시들의 은본위 화폐 제도에서 다른 도시들에 비해 경제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은광의 이름에 대해서 헤로도토스와 투퀴디데스는 라우레이온 산의 이름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유독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로네이아로 특정 짓는 것으로 보아, 마로네이아가 라우레이온 산의 은광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개발된 곳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테미스토클레스전'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는 라우레이온 은광 수입액 규모를 밝히진 않았으나, 처음 아테나이 사람들이 10드라크메씩 나누어 가지자고 했으나, 테미스토클레스가 아이기나를 상대로 한 전쟁에 쓸 함선 200척을 건조하도록 설득했다고 하고('역사';VII144),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빌려 주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들을 설득해 부자들에게 빌려 주어 함선 100척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아테나이 정치 제도사',XXII.7)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를 '역사'에 처음 등장시키며 단순하지만 강렬한 두 개의 에피소드로 그를 소개하는데, 그 첫 장면은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에 대비하려 얻은 델피의 신탁이 가리키는 나무 성벽에 대해 함선과 해전으로 해석한 것과, 이어진 장면이 바로 라우레이온 은광의 수입을 10드라크메씩 나누지 말고, 아이기나와의 전쟁(BC488-486)을 위해 함선 200척을 건조하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에 등장한 테미스토클레스와 함선 200척이(비록 아이기나와의 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아테나이를 해양강국으로 발돋움시켰고, 헬라스를 구했다고헤로도토스는 기록하고 있다.('역사',VII.143-4) [본문으로]
- 크세노폰,'헬레니카','변명' [본문으로]
- BC490 마라톤의 전투로 명성을 얻은 밀티아데스는 이듬해 황금을 무더기로 가져오겠다며 느닷없이 파로스로 원정했는데, 그것은 밀티아데스가 가졌던 파로스에 대한 사사로운 원한을 갚고, 파로스의 재물을 약탈해 오겠다는 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밀티아데스는 파로스 섬을 짓밟기만 했을 뿐 파로스를 함락하지도, 재물을 약탈하지도 못한 채 자신은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몸으로 귀환했는데, 이 일에 대해 정적이던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팁포스는 밀티아데스가 시민들을 속였다며 처형하라고 고발했고, 재판에서 사형은 면했지만 50탈라톤의 벌금을 부과받았다.(헤로도토스,'역사',VI.132-136) [본문으로]
- 헤로도토스는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이 벌금을 물었다고 했고(같은 책,VI.136),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나이의 부호 칼리아스가 키몬의 누이 엘피니케와 결혼하기 위해 밀티아데스가 미납한 벌금을 대납한다는 조건으로 키몬의 허락을 받아 결혼했다며, 벌금을 칼리아스가 대납한 것이라 한다.(플루타르코스,'키몬전') 이 두 글의 내용과 전후 사정을 보아, 밀티아데스가 죽은 BC489에 키몬의 나이는 스무두 살 때쯤으로 가산이 있었다면 밀티아데스와 상의하여 가산을 처분하여 벌금을 물 것을 결정할 수 있었을 나이였고, 키몬의 아버지 밀티아데스는 아버지 키몬의 이복형인 밀티아데스가 지정한 그의 상속인이 되어 케르케네소스의 참주로 있다가 페르시아의 준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아테나이로 돌아왔기 때문에 50탈란톤 전액을 갚을 수 있는 정도의 가산이 있었는지는 몰라도(얼마 뒤 테미스토클레스는 부자들에게 1탈라톤씩 주면서 함선 1척씩을 건조케 했으니 50탈라톤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어느 정도의 벌금은 물 수 있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이때 전액을 물지 못했다면 키몬이 불명예시민으로 계속 묶여 있어 키몬이 술이나 마시고 지내는 걸 그냥볼 수 없는 키몬의 누이가 벌금 잔액 대납 조건으로 칼리아스와 결혼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 '그가 주책없는 술꾼이었으면서도 그토록 많은 도시들을 점령하고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만약 술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직무에만 충실했다면 그리스에서 그를 능가할 인물은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플루타르코스,'키몬전' [본문으로]
- 같은 책. [본문으로]
- 살라미스 해전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에 의해 도편추방되었던 아리스테이데스와 크산팁포스도 소환되어 참전하고 있었는데, 이때 키몬의 분전을 목격한 아리스테이데스는 이때부터 키몬을 교활함을 꺼리낌없이 구사하여 크산팁포스나 자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테미스토클레스를 정치적으로 대적할 수 있는 적임자로 보고 그를 아테나이의 새로운 지도자로 키우기로 했다.(같은 책.) [본문으로]
- 파우사니아스는 페르시아의 뇌물을 받았고, 비잔티온 명문가의 딸을 취하고 죽이는 등 난행을 일삼고, 성질 또한 교만하고 포악해 다른 도시의 지휘관들의 신망을 잃고 있었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의 최고 행정관으로서 민회의 결의는 물론, 스파르테의 왕들이나 파견된 전쟁 지휘관들의 지휘의 적정성이나, 개인 행동의 일탈, 등을 감독하기 위해 뽑은 5명의 감독관들이다. [본문으로]
- 크세르크세스는 헬라스 진군 중에 점령한 도시들에 태수를 두어 보급과 후방 방어를 맡겼는데, 에이온의 태수 보게스는 크세르크세스의 퇴각 이후에도 계속 에이온의 태수로 주둔하고 있다가 키몬의 공격을 받았는데, 키몬이 에이온을 포위하고 식량 보급로를 끊자 견디지 못하고 항복이나 귀환 협상 대신 도시의 금 은 등 귀중품을 강에다 버려 전리품이 되는 것을 막은 다음 불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 때문에 키몬은 에이온을 점령하고서도 제대로 전리품을 챙길 수 없었으며, 반면 보게스는 크세르크세스로부터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상찬되었다.(헤로도토스,'역사'VII.107) [본문으로]
- 헬라스 연합군이 이 두 도시를 점령하고 키몬에게 전리품을 분배를 맡겼을 때, 키몬은 다른 헬라스 도시들에게 우선권을 주고 자신은 제일 마지막에 남는 것을 택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키몬에게 돌아온 것은 일을 해 본 적이 없어 노예로도 팔 수 없는 포로들 뿐이었지만, 얼마 뒤 이 포로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거금의 몸값을 내고 포로들을 찾아갔다고 한다. [본문으로]
- 밀티아데스의 아버지 키몬은 케르소네소스의 참주 밀티아데스의(페이시스트라토스가 개인 능력으로 케르소네소스를 도우라며 보냈지만 정말 데리고 간 수하들과 자기의 실력으로 참주로 추대된 밀티아데스의 손자) 이복동생으로 올륌피아드 전차 경주에서 세 번이나 우승했고, 성격이 너무 단순해서 바보라는 뜻의 코알레모스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 그 당시에는 전쟁에 이겨 전리품을 갖는 것을 승자의 권리이며 명예로운 일로 여겼는데, 키몬의 부는 페르시아 패잔병들로부터 얻은 전리품에서 나왔다. 페르시아의 헬라스 원정군들은 크세르크세스를 수행하느라 고위직이 많았고, 그들이 여비와 전비로 고가의 귀중품을 가지고 다녔으므로 고가의 전리품들이 많았기 때문에 키몬은 어렵지 않게 부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키몬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키몬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 한 일들을 정치적인 계산에서가 아니라 그의 성품에 따른 것으로 본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를 테면, 키몬이 전쟁을 통해 얻은 부를 명예롭게 얻은 재산으로 평가하면서, 키몬이 그 돈을 아테나이 시민을 위해서 썼다고 했는데, 우선 자기 농장의 울타리를 허물어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곡식이나 과일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고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크라티노스의 희극 '"알키로코이(알키로코스 일가一家),BC448,단절"' 가운데 키몬을 칭송하는 6행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나, 가난하고 늙은 메트로비오스도/그리스의 가장 고귀한 분인/키몬이 베풀어주시는 음식을 먹으며/죽을 때까지 편히 지내려 했는데/아, 그분은 먼저 가시고/나만 홀로 남았구나.' [본문으로]
- 헤일로타이의 반란이 이토메 산성의 농성으로 변모해 진압에 어려움을 느낀 스파르테는 동맹국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동맹국이던 아테나이에도 페리클리다스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리다스를 보내 지원을 요청한 스파르테를 아리스토파네스가 이렇게 비웃었다고 전한다.('키몬전'16.7) '새파란 얼굴에 붉은 옷을 입고/제단에 엎드려 도와달라고 애걸하는구나.'(아리스토파네스,'"뤼시스트라테"'1137-1144행) [본문으로]
- 흔히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낀 스파르테와 델로스 동맹을 낀 아테나이와의 이 전쟁을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 부른다. 전쟁의 발단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처럼 아테나이에 대한 코린토스의 적대감에서 비롯되었는데, 키몬을 도편추방하고 페리클레스의 세상이 된 아테나이가 이듬해인 Bc460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자 아르고스와 적대적이던 코린토스가 아테나이를 적대시하면서 코린토스와 아테나이 간의 전쟁으로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 두 도시 간의 전쟁은 아테나이의 확실한 우세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테나이는 BC459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의미하는 아이귑토스를 지원에 나서는 등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 아테나이가 도리스 사람들의 도시인 아이기나를 점령한 것이 스파르테의 개입을 불러들였고, BC458 타나그라에서 두 도시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전쟁이 아테나이와 스파르테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간헐적인 전투로 전쟁은 아테나이의 초기 우세는 아테나이와 페이라이에우스를 잇는 장성을 쌓을 정도로 열세에 빠졌고, 아이귑토스 지원함대의 궤멸이 결정타가 되어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테와의 전쟁을, 키몬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나누어 맡았지만 키몬이 죽은 BC451 아테나이는 스파르테와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파르테 군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바깥에서 계속 아테나이를 압박하고 있었고, BC446 에우보이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테나이가 에우보이아로 건너간 사이 스파르테가 아티케 근처로 진군하자,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테 왕 플레이스토아낙스에게 협상을 제의하였고, 아테나이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철수하고 스파르테는 에우보이아에서 손을 떼는 선에서 평화협정을 맺고 헬라스의 모든 도시가 향후 30년을 그 협정의 체제를 지키기로 하면서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냈다. [본문으로]
- BC457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에서 벌어졌던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대회전이었는데, 열세의 아테나이는 백의종군한 키몬 수하들의 장렬한 분전으로 이길 수 있었지만, 타나그라 대회전의 결과로 서로의 우열을 가리지는 못했다. [본문으로]
- 아이귑토스Aigypyos이집트埃及Egypt는 BC525 페르시아의 캄비세스II에게 정복당한 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이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임하는(이집트의 제27왕조) 속국이 되어 페르시아 총독의 지배를 받았는데, 아크타크세르크세스 치하(BC464-424)의 페르시아가 쇄락한 기미를 보이자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아테나이에게도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다. 이에 아테나이가 아이귑토스의 독립을 지지하고 지원했을 개연성은 농후하나 직접적인 지원 증거는 찾기 힘든데, 아마 그 이유는 BC466 에우리메돈 하구의 대첩 이후 키몬이 맺은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에 따라 페르시아의 관할로 인정한 바다를 통한 직접적인 지원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테나이와 아이귑토스는 아테나이가 함대 보내 지원하되, 그 비용을 아이귑토스가 대는 용병함대로 운용하기로 하고 BC459 처음 함대를 파견했고, 이 함대는 BC454 페르시아 해군에 의해 아이귑토스 앞바다에서 궤멸潰滅당할 때까지 활동했다. 이 아테나이의 용병함대가 궤멸당하자 위험을 느낀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아폴론 신전 금고에 두었던 동맹함대 유지비를 페르시아 함대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다며 아크로폴리스로 옮겼고, 스파르테와의 전쟁에 이어 페르시아와의 전쟁까지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되게 몰리자, 마침 키몬의 소환을 바라는 민심을 읽고 먼저 자기가 소환을 발의하여 키몬에게 페르시아 방어를 맡겼다. [본문으로]
- 모두 BC451의 일이다. [본문으로]
- BC413 아기스가 데켈레이아에 장기 주둔한 이후 아테나이의 은 생산이 중단되었고, 아테나이는 은 대신 신전의 금을 녹여 금으로 화폐를 바꾸었지만, 수장 가치가 높아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자 BC406 은도금 구리 화폐로 대치했지만, 화폐에 대한 신용 추락 때문에 물가만 올리고 말아 결국 이태 뒤에 아테나이가 전쟁에서 지게 된다. [본문으로]
-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으로 아테나이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을 때, 델포이의 퓌티아 아리스토니케는,'가련한 자들이여, 왜 여기에 앉아 있는가? 그대들은 집과 그대들의 도시로 둘러싸인 높은 언덕들을 떠나 대지의 끝으로 도망쳐라. 머리도 몸도 굳건하게 버티지 못할 것이며, 아래쪽의 두 발과 두 손과 그 사이에 있는 어떤 것도 살아 남지 못하리라. 불과 쉬리아의 전차를 타고 질주하는 아레스가 모든 것을 끌어내리라. 그는 그대들의 성채뿐 아니라 다른 성채도 수없이 파괴하리라. 그는 수많은 신전을 파괴적인 불에 넘겨줄 것인즉, 신전들은 벌써 땀을 비오듯 흘리고 서서 두려움에 떨고, 지붕에서 검은 피를 쏟고 있으니,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예견했기 때문이니라. 자, 그대들은 이 신전에서 나가 마음 속으로 실컷 슬퍼하라!'라는 신탁을 내렸고, 이에 낙담한 아테나이 사람들이 델포이 사람 티몬의 탄원자로서 재차 신탁을 구하라는 조언에 따라 얻은 두 번째 신탁은, '팔라스(아테나 여신의 또 다른 이름)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교묘한 재치로 애원한다 해도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못하리라. 그래서 나는 재차 그대에게 강철처럼 단단한 말을 하리라. 케크롭스 언덕과 신성한 키타이론 산 고짜기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지만 트리토게네이아(아테나 여신의 또다른 이름)여. 멀리 보시는 제우스께서는 그대에게 나무 성벽teochos xylinon을 주실 것인즉, 이 나무 성벽만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도와주게 되리라. 그대는 대륙에서 기병과 보병의 대군이 다가오기를 가만히 기다리지 말고 등을 돌려 도망쳐라. 언젠가는 적군과 맞설 날이 다가오리라. 신성한 살라미스 섬이여, 데메테르가 씨를 뿌리거나 수확할 때, 너는 여인들의 자식들을 죽이게 되리라.'라는 것이었다.(헤로도토스,'역사',VII.140-141) 헤로도토스는 아테나이 사람들 사이에 이 신탁의 나무 성채를 두고 아크로폴리스를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 막으면 아크로폴리스는 구할 수 있다는 해석과 함선을 가라키니 다른 것은 모두 버리고 함선을 건조하라는 뜻이라 해석으로 의견이 분분했을 때, 테미스토클레스가 나무 성벽이 함선을 가리킨다는 쪽을 지지하도록 아테나이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탁은 크세르크세르의 침공과 아테나이 사람들의 대적 양상( 아테나이 소개, 크세르크세스의 아테나이 점령과 아크로폴리스 방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과 너무나 똑같아, 전후에 호사가들이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이다. [본문으로]
- 아리스테이데스가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에서 동맹회의를 처음 열고, 동맹 유지비로 모은 돈이 460탈란톤이었고(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I.96.(2)),은과 항구세 등을 포함한 아테나이 자체 수입 역시 그 정도여서, 페리클레스가 동맹 유지비를 조공인 양 아테나이의 수입으로 돌렸를 때는 아테나이 수입이 총 1000탈란톤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말벌들"657-660)가 아테나이의 총수입을 2000탈란톤으로 말하는 것은 퓔로스 사건 이후 위상이 높아진 클레온이 동맹들의 조공을 인상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나이 숙련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 1오볼로스 정도였고, 페리클레스는 재판관들에게 수당으로 2오볼로스를 지급했다. [본문으로]
- 1드라크메는 6오볼로스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는 투퀴디데스 다음으로 귀족들을 대변하는 정치가로 니키아스를 꼽고 잇다.('아테나이 정치 제도사',)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아버지 크산팁포스로부터 대단한 유산을 물려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처음 한 친척 여자(이 여자에 대해서는 플루타르코스조차 그녀의 이름을 전하지 않는다)와 결혼했는데, 그 여자는 이미 히포니코스와 결혼하여 아들 칼리아스를 두고 있었고, 두 번째 남편 페리클레스와의 사이에 크산팁포스와 파랄루스 두 아들을 두었으나, 부부 사이가 나빠져 페리클레스와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세 번째로 결혼하였고,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시아와 결혼하였다. [본문으로]
-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의 이름 모를 본처와 아스파시아라는 후처 이외에도 몇 가지 여자 문제를 지나가는 말투로 거론하고 있는데, 페리클레스가 파르테논공사 현장을 구경하러 나온 여자들을 만나는 것을 페이디아스가 눈 감아 주었었다거나, 페리클레스가 그의 친구이자 부관이었던 메니포스의 부인과 연인 사이라든가, 페리클레스가 여자들에게 줄 선물로 피릴람페스를 시켜 공작을 키우도록 했다는 등의 이야기에서 심지어는 트라키아 사람 스테심부루토스는 페리클레스의 아들 크산팁포스가 자기 아버자가 자기 아내와 내통한다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고 했다는 해괴망측한 거짓말을 지었다는 것들이다. [본문으로]
- 희극 시인들의 페리클레스와 그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공격 사례는 플루타르코스가 페리클레스전에서 당대 최고의 희극 시인 크라티노스의 5회를 비롯하여 헤르미포스, 에우폴리스, 아리스토파네스, 텔레크리데스, 이온, 등이 각각 2회, 플라톤(희극 시인)과 무명 시인이 각 1회, 모두 17회나 들고 있는데, 특히 아스파시아를 창녀라고 비난하는 크리티아스와 에우폴리스의 희극 대사 단편을 소개하면서, 헤르미포스의 경우 그가 아스파시아를 불경죄로 고발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가 페리클레스의 전기를 쓰면서 이렇게 페리클레스와 희극 시인들 사이의 불화를 숨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페리클레스가 자신에 대한 시인들의 공격을 막아 보기 위해 법을 만든 것은 사실인 듯하다. [본문으로]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가 최초로 강의료를 청구했는데, 그것이 100므나였다고 한다. 숙련 노동자의 일당이 1오볼로스, 재판관의 하루 수당이 2오볼로스, 고급 공무원의 하루 수당이 1드라크메였던 것을 생각하면, 100므나는 거의 2탈란톤이고 10,000드라크라는 거금이어서 아고라의 가죽장사 클레온에게는 돈을 끌어 담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플라톤도 그의 돈벌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본문으로]
- 이오니아의 타르겔리아는 자신의 재색으로 이오니아의 여러 권세가들을 사귀면서 그들로 하여금 페르시아 이익을 돌보도록 만들었다.(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처음 결혼했던 여자(가문도 출신지역도성명도 미상이다)와 일찌기 이혼하고 혼자 지내다가 아스파시아를 만나 동거하다가 아스파시아가 고발당했던 즈음에는 정식으로 혼인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는 이 네 번의 재판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처음 두 번 프로타고라스와 페이디아스를 위해서는 재판정 안팎에서 간접적으로 그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본문으로]
- 페이디아스의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여럿인데, 벌금을 물고 추방당해 자살했다는 설,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던 중 병사했다는 설, 공모 여부 때문에 페리클레스가 독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설, 그리고 가장 온건한 것이 추방되고 난후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설 등이다. [본문으로]
- 어느 기록도 클레온이 이 네 건의 재판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귿이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이 네 건의 재판 이후 아테나이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페리클레스와 그를 둘러싼 그의 정적들의 움직임을 검토하여 얻은 결론이기 때문이다. 검토한 것들은, 첫째 페리클레스가 전쟁을 결심하는 전후 사정인데, 페리클레스는 코린토스가 둘째 투퀴디데스 추방 후 부각된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의 동향인데, 니키아스가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셋째가 클레온에 대한 자료인데, 먼저 수수께끼 같은 클레온의 신분을 보면, 그리고 그의 정계 진출시기는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평화"',605-611행. '.../우리의 불운은 페이디아스가 불행해지면서 시작됐어./그러자 같은 운명을 당할까 겁이 난 페리클레스가/여차하면 물어뜯는 자네들의 기질이 두려워서/자신이 변을 당하기 전에 메가라 법령이라는/작은 불꽃을 던져 도시에 불을 질렀던 거지./그리고 그가 부채질로 큰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저쪽과 이쪽의 모든 헬라스인들이 연기에 눈물을 흘렸지/...' [본문으로]
-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와의 전쟁을 결의했을 때,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보유 액수는 밝히지 않고 막연히 돈이 많고, 반면에 스파르테를 위시한 펠로폰네소스는 가난하다고만 말했을 뿐이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4.도시의 불화.18.를 참조할 것. [본문으로]
- 투퀴디데스는 메가라가 아테나이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땅과 국경을 침범하여 경작하며 또 아테나이에서 도주한 노예들을 거둔다는 것을('펠레폰네소스 전쟁사',139(2)), 아리스토파네스는 술 취한 아테나이 청년 몇이 메가라로 가서 시마이타라는 창녀 하나를 납치해 왔는데, 이에 격분한 메가라 청년들이 아스파시아의 창녀 둘을 납치해 간 것을('"아카르나이 사람들"',524-540), 각기 그 핑계로 들고 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아카르나이 사람들'",541-555행. '...../여러분은 당장 300척의 함선을 바닷물에 띄웠을 것이고,/도시는 군사들의 소음으로 가득 찼을 것이며,/선장을 뽑느라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것이오./....' [본문으로]
- BC460 지진 복구와 반란 진압이 어느 정도 정돈이 된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은 아르고스를 힐난하기 위해 보낸 소규모 군대를 아테나이와 아르고스 연합군이 격파해버리는 것으로 벌어진 후세 사가들이 말하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이듬해 BC459 코린토스와의 전쟁에서 지고 있던 메가라가 스파르테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아테나이의 지원을 요청했고, 아티케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길목의 메가라와의 동맹이 자칫 코린토스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반발을 부를 것을 알면서도 아테나이는 메가라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아테나이 동맹과 펠러폰네소스 동맹 간의 전쟁으로 본격화하였는데, 이 전쟁은 BC446 겨울 '30년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끝났다. 이 조약은 아테나이가 전쟁으로 획득한 펠로폰네소스의 영토를 포기하는 대신 스파르테로부터는 나머지 지역에서의 아테나이 제국 관활을 인정 받는 조건 이외에, 제국의 현상 유지, 종주국 바꾸기 금지, 조정을 통한 분쟁 해결이 주요 골자였다. 이 30년 평화체제는 10년이 지나자 테바이, 코린토스, 메가라, 마케도니아, 트라케, 등의 외연적 발전은 가로막고, 상대적으로 아테나이의 성장만 촉진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체제의 파열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결국 BC431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의 외가가 알크마니온 집안이었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는 아테나이가 포테이다이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메가라 칙령을 발표하여(BC433 12월과 BC432 1월 사이였을 것이다. 이 두 조치의 선후는 알수 없지만, 투퀴디데스의 기록 선후를 따랐다.) 코린토스와 메가라가 동맹회의 소집을 요구했으나, 사태의 추이만 관망하다가 반 년이 지난 BC432 7월에서야 회의를 소집하고, 8월에 세 차례에 걸쳐 아테나이에 힐문 사절을 보내는데 아테나이의 반응이 없자, 그 세 차례의 마지막 방문에서 최후통첩을 하게 된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 동맹에서 독자적인 해군을 보유한 자주 도시는 사모스와 키오스 이외에도 레스보스와 케르퀴라가 있었다. 사모스는 밀레토스 문제로 아테나이의 응징을 받아 아테나이의 속주로 전락하면서, 아테나이의 이오나이 해군 기지가 되었고, 케르퀴라는 본디 델로스 동맹의 자주국이 아니었으나, 코린토스와의 분쟁 때문에 아테나이의 방어 동맹을 맺으면서 합류하였고, 레스보스는 페리클레스 사후 뮈틸레네의 반란 사건 이후 독자적인 함대를 보유할 수 없게 되었고, 키로스만 오래 독자적인 함대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알키비아데스가 이오니아로 건너와 스파르테와 페르시아를 위해 일할 때 아테나이를 이탈하여 스파르테에 가담하고 밀레토스와 함께 스파르테의 조력자및 해군 기지 제공자로 돌아섰었다. [본문으로]
- BC433 겨울 최후통첩을 받은 포테이다이아는 코린토스와 스파르테의 지원 약속을 받고, BC432 봄에 반기를 들었는데, 아테나이는 여름이 되어서야 아르케스트라토스와 10명의 장군들이 이끄는 30척의 함대와 중무장보병 1000명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포테이다이아를 공격하자 못하고 마케도니아의 공격을 염려하여 한동안 마케도니나의 안전지대에 주둔해야 했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는 포테이다이아의 항복을 받기 위해 평균 70척의 함대와 3500명의 중무장 보병으로 2년이나 포위하고 있어야 했다. [본문으로]
- 크라티누스,극명미상, '그 뒤 오랫동안 페리클레스는 말뿐이었으니/그의 말만 쌓일 뿐 땅 위에는 돌멩이 하나 쌓이지 않았네.' [본문으로]
-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반 10년을 '아르키다모스의 전쟁'이라고 습관적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분명 '페리클레스의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다만 페리클레스의 죽음으로 전쟁의 성격이나 양상이 클레온의 수준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클레온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방할 것이지만, 단지 스파르테의 아티케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아르키다모스의 전쟁'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은, 적어도 그 첫 10년에 스파르테가 개전의 기치였던 '헬라스 도시의 해방'에 걸맞는 전쟁 수행 의지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고, 착취와 약탈로 얻는 수입에만 전쟁의 목표를 둔 클레온을 저지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당시 삼단노선 한 척을 한 달 운용하는 비용이 1탈란톤 정도였으므로, 함대 유지비로 70척X12달X3년x1탈란톤=2520탈란톤이 들었고, 중무장보병 1인 1일 2드라크메(시종 몫 1드라크메 포함)을 지불하였으므로, 3500명x365일x3년x2드라크메/6000드라크메=1278탈란톤이 들었을 것이므로 기타 전쟁비용 포함하여 포테이다이아의 항복을 받는 데만 총 4000탈라톤, 즉 전체 전체 가용 전쟁비용 6000탈란톤의 3분의2를 지출했다. [본문으로]
- 이 당시 마케도니아는 궁중 분열이 일어나 아테나이가 페르딕카스 왕과의 좋던 관계를 버리고 반기를 든 동생 필립포스와 데르다스와 동맹을 맺는 바람에, 페르딕카스 왕이 코린토스에 접근하는 한편, 칼키디케의 도시들에게 반란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이었고, 텟살리아는 스파르테를 지원하러 간 키몬이 홀대를 받고 돌아와 스파르테와의 동맹을 깨고 알고스와 동맹을 맺을 당시에 텟살리아와도 맺은 동맹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트라케와는 특별한 은원이 없던 상황이었다. 다만 아테나이가 개전과 동시에 마케도니아 페르딕카스의 움직임을 제어하기 위해 트라케와 동맹 관계를 갖고자 트라케의 압데라 사람 뉨포도로스를 현지 아테나이 영사로 임명해 트라케의 시탈케스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하였고, 구후에도 뉨포도로스는 아들 사도코스를 아테나이 시민으로 만들고, 마케도니아의 페르딕카스 왕을 설득하여 아테나이가 점령했던 테르메를 돌려받고 아테나이와 화해하도록 했고, 아테나이의 포르미온은 페르딕카스와 함께 칼키디케 반군 평정에 나서기도 했다. [본문으로]
-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단의 코린토스만 건너 서로크리스의 서쪽 끝에 위치한 나우팍토스는 스파르테에 반란을 일으키고 이토메 산성에서 항전하던 헤일로타이를 펠로폰네소스 반도 밖으로 축출하는 조건으로 반란을 끝냈을 때, 아테나이가 그들을 받아들여 나우팍투스에 정착시겼다. 이로써 아테나이는 코린토스만 병목에 아테나이인들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아테나이의 기지를 가지게 된 셈이었다. [본문으로]
- 그러나 스파르테의 아르키다모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전력을 분석은(펠,I.3-4.) 간단했고 페리클레스의 그것은(I.141-143.) 장황했을 뿐 내용은 같았는데, 아르케다모스는 이 전쟁이 대전으로 확대되어(펠,I.80.2) 이 전쟁을 자식들에게 물려줄까 두려워했다(펠,I.81.6)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4. 도시의 불화,26 참조. [본문으로]
- 아테네의 메토네 점령을 막은 스파르테의 용사는 우연히 근처 있던 브라시다스였다. [본문으로]
- 소송선은 이때 처음 등장했다.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의 이 함대 구성은 BC415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이끌었던 시켈리아 원정군 규모와 맞먹는 대규모 함대였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의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아티케의 재산과 저택을 잃어, 민중들을 민중들대로 없는 살림에 그나마 가졌던 것을 잃었는데, 아티케 소개 작전이 역병의 재앙까지 불렀다고 믿어 도시 전체가 분개했다.(펠,II.65.2) [본문으로]
- 페리클레스가 분개한 아테나이를 달래려 한 연설 중의 한 대목이다.(펠,II.64.2) '신의 섭리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적군을 용삼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그것이 아테나이의 관습이었던 만큼 여러분 대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인지 페리클레스는 신의 섭리대로 역병에 걸려 제법 오랜 시간을 투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페리클레스전) '그의 병은 여러가지 증세를 보이면서 몸을 서서히 쇠약하게 만들었다. 그의 고결한 정신과 과학적인 지식도 병으로 인해 조금씩 둔해졌다.' [본문으로]
- 가을의 정무직 신임 투표에서 페리클레스가 해임된 데에는 물론 전쟁과 역병의 재앙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분노도 있었겠지만, 클레온과 아고라의 장사꾼들과 같은 전쟁 불사파들 역시 그들이 전쟁을 주도하기 위해 불신임에 가담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본문으로]
- 아테나이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들, 크세노폰(철학자 아님), 헤스티오도로스, 파노마코스, 세 장군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다. [본문으로]
- 스파르테 왕 아르키다모스 역시 페리클레스가 죽고 이태 뒤인 BC427에 (중태에 빠져 있었거나)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 전쟁 발발 6년차인 BC426 여름 스파르테의 아티케 침공을 아르키다모스의 아들 아기스가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기스의 첫 출전은 이스트모스에서 지진을 만나 취소되었었다. [본문으로]
- BC432 여름 아테나이의 포테이다이아 포위가 시작되자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회의를 소집하고 스파르테의 행동을 촉구하는데, 회의를 마치고 스파르테의 태도를 결정하기 위한 자체 회의에서 행한 아르키다모스 연설의 모두이다.(펠,I.80.1) [본문으로]
- 플라이타이아이는 테바이와 아테나이 사이의 보이오티아의 작은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마라톤 전투와 프라이타이아이 전투에 적극 참전하였고(살라미스 해전에는 크세르크세스가 아테나이에 입성하며 항복하지 않는 도중의 도시들을 불 태울 때 불에 탄 도시에 남은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참전하러 가다가 돌아섰다.), 이 때문인지 일찌감치 페르시아에 항복했던 테바이보다 아테나이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플라이타이아이의 이런 태도는 아테나이를 견제하려는 테바이의 눈엣가시여서,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변론',5.전쟁과 시인,10. 참조. [본문으로]
- 같은 글,5.49-50. 참조 [본문으로]
- 같은 글,5.36-37. 참조 [본문으로]
- 안탈키데스의 평화를 말한다. [본문으로]
- 클레온이나 클레오폰은 잠시 도시의 형편이 좋아지자 페리클레스가 미완으로 남겨 놓은 아크로폴리스며 도시 정비 사업을 계속하려 했었다. [본문으로]
- 아스파시아의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역병의 재앙을 피해 살아남았던 만큼 아들 페리클레스의 출전과 재판 그리고 처형에 이르는 과정을 비통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남장을 한 프락사고라의 모습을 안색이 창백한 것이 니키아스(니키아스의 손자를 가르킨 듯하다,'"여자들의 민회"'428행)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니키아스 집안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시각을 엿볼 수있는 대목이고, 반면에 플라톤은 니키아스의 아들 니케라토스(BC404 크리티아스 등의 30인 참주정에 희생되었다고 한다.)가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에 참석시켜('국가',1권327c)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중년의 신사로 긍정적으로 소개한다. [본문으로]
- 100명의 아테나이 부자가 테미스토클레스로부터 은광 수입 100탈란톤에서 1탈란톤씩 꾸어 배를 마련하고 운영했던 부의 수준은 살라미스 승전 이후 기세가 올라 키몬 이 아이가이온 해는 물론 남지중해로 진출할 무렵에는 부자들이 독자적으로 몇 척의 한선을 운용할 정도였고,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부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켈리아 원정 실패 이후에는 목재 수급 문제로 배 값이 오른 탓도 있었겠지만, 아테나이에 돈이 말라 비상금으로 간직했던 여신의 황금 옷을 벗겨야했을 때는 클레오폰이 나서 부자들이 십시일반으로 겨우 배를 장만하게 해서 열 명의 장군들을 아르기누사이로 내보낼 수 있었는데, 스파르테에 항복한 후 물류 운송을 위한 배 열두 척만을 허용벋은 아테나이는 페르시아의 용병 역활로 착실히 돈을 모아 먼저 성벽을 재건했고, 아테나이의 권토중래가 두려원진 페르시아가 더 이상 용병으로 쓰지 않자 아테나이의 부자들은 십시링반으로도 함선을 건조할 능력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프락사고라Praxagora民會女가 남장 여자들을 데리고 민회에 참석하여 도시를 여자들에게 넘긴다는 결의를 이끌어 내도록 한 다음 곧바로 프락사고라를 아르콘이 아니라 여장군으로 부르는데('"여자들의 민회"',492행), 오랜 전쟁으로 장군들이 도시 정치나 행정을 주관했던 탓으로 그 당시 이미 아테나이의 통치자는 아르콘이 아니라 장군으로 제도가 바뀌어져 있었음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플루토스Ploutos부富의 신神"',87-98행, '제우스께서 이렇게(장님으로) 만드셨어. 인간에 대한 악의에서. 소년시절 나는 정직하고 현명하고 점잖은 사람들의 집만 방문하기로 서약한 적이 있었지. 그러자 제우스께서 나를 장님으로 만드셨어. 내가 그런 사람들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말이야. 그만큼 그분께서는 착한 사람들에게 악의를 품고 계셔.'/'하지만 그분을 공경하는 것은 착한 사람들과 정직한 사람들뿐이오.'/'나도 동감이야.'/'자 어때요. 당신이 예전처럼 다시 시력을 회복하신다면 앞으로는 사악한 자들을 멀리하실 건가요?'/'그럴래.'/'그리고 정직한 사람들에게 가실 건가요?'/'그야 물론이지. 내가 그들을 못 본 지가 꽤 오래니까.'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여자들의 민회"',590-594행, '모든 재산을 만인이 공유하여, 모두가 공유재산으로 살아가고, 빈부 격차를 해소하자는 거예요. 그리하여 한 사람은 넓은 땅을 경작하는데 다른 사람은 묻힐 땅도 없다거나, 한 사람은 많은 노예를 거느리는데 다른 사람은 노예가 한 명도 없는 일이 없게 하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인이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본문으로]
-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특히 이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플라톤,'국가'354c) [본문으로]
- 안탈키데스의 평화라 불리는 BC386에 체결된 스파르테와 페르시아 간의 소아시아와 지중해에서의 종주권 분할한 강화조약을 말한다. 이 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코린토스나 테바이나 아테나이의 주장은 거부되거나 무시되었고, 스파르테와 페르시아는 그들 간의 강화 조약을 받아들일지 말지 임의에 부쳤지만, 코린토스도 테바이도 아테나이도 스파르테와 페르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어 강화를 추인할 수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 솔론의 시대에 새로운 세상을 바라던 사람들은 도시가 부자들의 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부의 평등을 이룬 다음 솔론의 개혁에 따라 새로운 도시를 열어 가는 것이었다면, 항복한 아테나이가 페르시아의 해군 용병 등으로 돈을 벌어 성벽을 복구하는 등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코린토스 전쟁을 시작할 무렵의 아테나이 사람들은 전쟁 비용 부담 때문에 전쟁을 기피하는 자작농과 부자들, 전쟁을 해야 노라도 젓고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자들, 이들 사이의 전쟁에 대한 이견('"여자들의 민회"',197-8행,'함대를 진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보시오./빈민은 찬성하고 부자들과 농민들은 반대하겠지요.') 속에 도시의 장래를 비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도시의 체제로써, 솔론의 시대 사람들이 바라던 사유 재산의 재분배와는 구별되는, 재산공유제를 입에 올리고 있었고, 이 새로운 제도에 대한 조롱으로 가족의 공유를 더하는 등, 이 새로운 제도에 대해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진 아테나이 사람이라면 모두 그 이야기를 한번 쯤은 이미 들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파네스는 관객들에게 재산 공유를 설명하는 데 어려워하지 않고 있고, 오히려 재산 공유의 모순을 드러낼 희극적 대치물로 이미 거리에서 사람들이 조롱 삼아 끼워 넣던 여자들의 공유를 특정하여, 이에 따른 에피소드들로 관객들로 하여금 재산 공유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환상에서 웃음으로 깨어나게 한다. 아울러 재산 공유 후의 첫 공동 식사에 갖은 술과 음식을 차렸다고 말해 놓고서는 하녀가 블레퓌로스에게 저녁식사로 죽을 좀 드시라고 실토하게 하여 재산 공유라는 새로운 세상이 말만 번드르할 뿐 실상은 겨우 죽이나 한 그릇 얻어 먹게 되는 세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 소위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2-404)으로 불리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테 사이의 전쟁은 헬라스 도시들에 대한 제국 주의적 지배를 강화하려는 아테나이의 의도에 대해 스파르테가 헬라스 도시들에게 자유를 찾아 주겠다고 나선 헬라스 도시들 간의 내전이었으나, 스파르테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얻고 나서야 겨우 끝낼 수 있었던 데에 반해,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10년이 지나 벌어진 소위 코린토스 전쟁은(BC395-386) 스파르테의 헬라스 도시들에 대한 느슨한 패권 행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지원한 퀴로스의 반란을 지원했으나 퀴로스의 실패 이후 아나톨리아와 헬레스폰토스의 도시들에 대한 페르시아에 주도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자 페르시아가 코린토스와 테바이의 헬라스 패권 추구 의지를 이용하고 지도자들을 매수하여 전쟁 비용을 페르시아가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스파르테에 도전하도록 교사하였고, 한편 아테나이는 페르시아 해군을 운영해 주고 번 돈으로 우선적으로 성곽을 재건한 뒤(페르시아는 아테나이가 스파르테를 견제할 수 있도록 성괃 재건 비용까지는 돈을 벌게 해 주었으나 성곽을 재건하자 아테나이가 독자적인 함대도 재건할 경우 페르시아에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아테나이를 페르시아 함대에서 배제하였는데, 스파르테가 아나톨리아와 헬레스폰토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자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와 전쟁을 벌이는 조건으로 아테나이에게 독자적인 함대를 재건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 독자적인 함대 재건을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 페르시아의 자금으로 함대를 재건할 수 있게 되자, 코린토스와 테바이가 내민 반스파르테 동맹을 받아들이고 참전을 결정했다. 아테나이의 정치 지도자들은 함대의 유지가 많은 도시민에게 손쉽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빈곤한 도시민은 함대에서의 노역으로 생계비 조달이 용이하였기 때문에 함대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전쟁도 마다 않을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아테나이가 아니라 페르시아가 함대 유지비를 제공한다고 라였기 때문에 자기 돈으로 함대 유지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부자들도 아테나이가 또 다시 전쟁을 벌이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희극 '"바빌론의 사람들"'(BC426,레나이아 희극 경연에서 우승,단절)에서 클레온을 실명으로 등장시켜 그가 다른 도시들의 사신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관중에게 보였는데, 희극에서 실명을 거론하여 풍자, 비방,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법을 위반했다며 클레온에게 고발당해 곤욕을 치렀다.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는 BC399 불경죄와 청소년을 타락시킨 죄로 아뉘토스, 멜레토스, 뤼콘으로부터 고발당해 처형되었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아주 영리한 연설가 에우아이온은 도시와 도시민을 구하는 가장 온건한 방법으로 '옷 만든 자들은 동지가 되면 외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외투를 기부하고, 침대와 담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몸을 깨끗이 한 다음 무두장이의 가게에서 잠자게 해 주는(415-421행) 부자들의 기부를 제시하는데, 이 안은 민회에서는 재청도 얻지 못하지만, 집에서 민회 소식을 듣는 블레퓌로스는 곡물장수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녁 끼니를 제공할 것을 덧붙이고 그랬다면 사람들이 나우시키데스의 덕을 좀 봤을 것이라고 말하며(423-426) 은근히 나누시키데스의 인색함을 꼬집으며, 이 제안의 운명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 제안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본문으로]
- 그리고 재산 출연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호응 여부를 살피는 남자도 민회의 결의를 통해 그 앞의 결의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당신은 그런 법령들이/수시로 통과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구려./...ㄱ동전을 사용하기로 결의했던 일도 생각나요?/생각나요. 그리고 나는/그놈의 동전 때문에 큰 손해를 보았소. 포도를 팔고 나서 나는 입안에 동전을 가득 집어넣고는/시장에 보릿가루를 사러 갔지요. 그런데 내가 가득/채워달라고 빈 바루를 내밀자마자 전령이/외치지 눠요. "동전을 암무도 받지 마시오....'(813-821행) [본문으로]
- '...이제 무엇이 차려져 있는지 들었으니 달려가/접시를 집어 드세요. 그러고 나서 어서 서둘러/저녁식사로 죽을 좀 드세요...'(1168-1178행) [본문으로]
- 당시 재판관에게 지급할 수당이 마련되지 않으면 사안의 완급이나 경중에 따라 재판을 연기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여자들의 민회"'982-984행) [본문으로]
- 항구를 이용하는 물품에 대해 1%를 거둔 물품세(항구 유지 보수를 위한 함만 사용료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전쟁 수행을 위해 한시적으로 거둔 전쟁세를 제외하고는 아테나이가 도시민에게 부과한 세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여자들의 민회"'가 상연되던 BC391 당시 헤우립피데스가 2.5% 세제를 제안했다가 세금의 감당 못 할 용도와(밑 빠진 독에 물 붓기,그러나 그 용도는 밝히지 않았다 ) 세원의 불확실성(구름 잡는 조치,그러나 그 세원을 밝히지 않았다) 때문에 거부되었었다고 전하는데('"여자들의 민회"'823-829행), 이는 아테나이가 도시를 운용하는 비용을 마련한 데 고심하고 있었고, 마땅한 수입원을 찾기 힘든 도시가 돈을 벌기 위해 전쟁에 나섰음을 알게 해준다. [본문으로]
- 솔론 시대 사람들이 바라던 것은 도시가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솔론의 생각은 그런 물리적인 부의 평등이 도시의 정의도 아니며 도시민 간의항시적인 부의 평등을 보장하지도 않는다고 보았다. 솔론은 사회 계층을 역활 분담으로 나눈 테세우스식 사회 구조가 먼저 권력의 불평등을 야기했고, 그것이 오랜 세월 속에 부의 불평등으로 심화되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 내지는 완화하기 위해 사회 구조를 직종에서 경제적인 자립도의 정도에 따라 나누고, 그것에 맞춰 권력을 분산하는 정치적 개혁과, 그 정치적 개혁을 받치는 법적 장치들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고, 가난한 민중의 관심인 부의 재분배를 통한 부의 불평등 해소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는 명목 가치 하락이라는 화폐개혁을 통한 부채 탕감 이외에는 각자가 자립 갱생해야 한다는 원칙만을 재확인 했를 뿐이었다. [본문으로]
- 일출과 동시에 시작하는 민회의 개회 정족수는 6,000명 이상이었는데, 참석자가 모자라 해가 떠올라도 회의를 못 여는 경우가 생기자 참석자에게 참석 수당을 주기로 했고, 수당은 처음 1오볼로스에서 나중에는 3오볼로스 올랐는데, 도자기 공장의 흙 나르는 일꾼 품삯이 하루 3오볼로스였으니까 참석비는 적지 않은 돈이었고, 그래서 선착순 6000명 안에 들기 위해 사람들이 새벽부터 모였다. [본문으로]
- '"여자들의 민회"'가 발표된 BC391에 이르기까지 아테나이의 레나이아 축제와 디오뉘소스 축제에서 연극의 경연이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여자들의 민회"'1141-2행,'...관객 가운데 우리를 성원 하는 이나,/심판 가운데 딴 데를 쳐다보지 않는 이는/...,1154-1162행...나는 먼저 심사원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 드리고 싶어요...) 다만 이 연극이 어는 축제의 경선에 나갔었는지, 몇 등을 했는지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연극은 BC405에 레나이아 축제의 경연에서 우승했던 '"개구리"'에 비해 코로스의 역활과 규모가 크게 축소되어 있고, 파라바시스도 없는 점으로 보아 아테나이 부자들의 전통적 역활이던 코레고스들이 줄고 그나마도 기여도가 충실치 않았던 결과로 보인다. 사실 '"개구리"'의 규모가 전쟁 막바지에 거둔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승리, 그리고 승전 장군들의 처형 등으로 일희일비하던 때의 것으로 보기에 이상스러울 정도이긴 하지만.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여자들의 민회"'에서 세 개의 에페소드를 보여 주는데, 첫 째가 재산 출연出捐을 꺼리는 한 남자의 입장을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극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의 전체 구도가 자신의 지지를 받을 만할 때, 다시 말해 도시와 도시민을 위해 좋고 마땅한 일이라고 보일 때, 그 결말이 성공적이고 엑소도스 역시 즐겁지만('"기사들"','"평화"','"새들"','"개구리들"',...), 그 반대로 자기가 그건 아니라고 거부할 때, 다시 말해 도시와 도시민을 해롭게 해서 마땅히 거부되어야 할 때, 그 결말은 불행하거나 흐지부지하고, 엑소도스 역시 무겁고 조용한데('"구름"','"벌들"','"여자들의 민회"'...), 특히 이 '"여자들의 민회"'의 엑소도스는 주인공의 남편 블레퓌로스와(1147-8행,'그들 모두에게 빠짐없이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는데/그들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코로스로(1176-1178행,먼저 코로스가 적어도 14가지 이상의 차려진 음식을 나열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모두 7행(1169-1175행)에 이르는 이 음식 모두를 한 단어로, 즉 하나의 음식으로 취급함으로써 사실은 그런 요리가 없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넌지시 알린 다.) 하여금 희극적인 엑소도스 분위기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저녁식사로 죽을 좀 드시라(1178행)'는 말로 주인공의 전체 구도를 김 빠지게 하는 익살을 구사하며, 프락사고라의 재산 공유제도가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다시 말해 도시의 정의를 세우는, 바꾸어 말해 도시를 구원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인식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 BC405(아테나이가 스파르테에 항복하기 한 해 전이고,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승리와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의 패배 사이의 새봄이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레나이아 축제 희극 경연에 '"개구리들"'을 발표하여 우승하고, 재상연을 할 수 있는 영예까지 얻었는데, 극장의 신 디오뉘소스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개구리들"'은 전통적인 희극 구조 위에 프롤로고스와 정식 파로도스(이때 입장하는 코로스는 비교에 입문한 남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이에 '서정적 대화'라는 이름의 약식 파로도스(이때 무대 뒤로 조용히 들어와 있는 코로스는 호수에 있는 개구리들로 구성되어 있다.)를 새롭게 삽입했을 정도로 '"새들"'에서의 희극 구조 키우기를 계속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구리"'로부터 13년이 지난 BC392의 '"여자들의 민회"'는 그 구조가 전통적인 희극 구조를 축소시킨 것인데,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코로스의 역활 축소이고, 그 다음이 파라바시스와 아곤(논쟁)을 생략한 연극 구조 축소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말년에 도시민 간의 부의 불평등 해소라는 도시의 정의의 문제를 주제로 삼고 발표한 두 편 가운데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도시의 역할에 대해 다룬 "여자들의 민회"'에서 재산 공유라는 방법은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아곤(논쟁)을 통해 밝히지 못하고, 남여 간의 문제로 대치하여 희극적으로 처리하고 만 것은 아쉽다. [본문으로]
- 프락사고라의 새 세상에 대해 아리스토파네스가 고른 재산 공유에 대한 에피소드는 '"구름"'의 정론과 사론의 논쟁을 닮았는데, 법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블레퓌로스의 이웃은 프락사고라의 성공을 보장한다.('"여자들의 민회"'758-9행) [본문으로]
- 법대로 재산을 도시에 바치는 이웃을 조롱하는 남자는 '"구름"'에서의 사론을 연상시킨다. 그는 남들이 어떻게 하나 보면서 재산을 내더라도 제일 마지막에 낼 것인데(그렇지만 공동식사는 반드시 챙겨 먹어야 하고), 늘 그랬지만 법은 언제나 생각보다 빨리 바뀌고, 도시에는 천재지변 같은 법보다 더 화급한 비상 사태가 벌어져서 법의 집행을 연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기처럼 눈치보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아야 자기의 재산 공납을 더 늦출 수 있기 때문에 프락사고라의 이웃 같은 사람이 한심하다.(같은 극,772,790,792,813-4행) [본문으로]
- 개미나 꿀벌의 집단 생활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강제와 감시가 없어서인지 농땡이 치는개미와 꿀벌들도 많다고 보고한다.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에 대해 언급한 삶들 가운데는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돈을 맡겨두고 이자쪼로 얼마 간의 돈을 얻어 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본문으로]
- 솔론의 개혁법은 세모통 나무에 새겨 프레타네온(도시만찬회장)에 두고 사람들이 돌려 볼 수 있게 해두었는데, 이 세모통 나무를 키르베스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 솔론은 그의 개혁에서 신체를 담보로 잡을 수 없도록 법으로 정했다. [본문으로]
-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참주로 받아들였다. [본문으로]
- 페이산드로스 일파의 과두정을 받아들였다. [본문으로]
- 크리티아스 일파의 30인 참주를 받아들였다.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 사후 다른 모든 제자들이 플라톤을 시작으로 하여 뿔뿔히 아테나이를 떠났지만 안티스테네스는 아테나이에 남았고(잠시 피신했가쏜 치더라도 가장 빨리 아테나이로 돌아와 있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를 신원하고 복권시키기 위한 때를 기다리면서 특유의 금욕 철학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이소크라테스(BC436-338) 수사학으로 출발하여 교육자 사상가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와중에서 아테나이에서 태어나 헬라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2세에게 패하고 아테나이와 나머지 헬라스가 곧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의 도시 아테나이와 헬라스의 쟁쟁한도시들이 어떻게 망해 가는지 지켜본 아테나이 패망의 증인이었다.(그는 물경 백 년이나 살았다.) 그는 제법 많은 양의 기록물을 남겼는데, [본문으로]
- 이사이오스(생물연대 미상)는 이소크라테스에게 변설을 배워 법정의 변론가로 활약했으며, 아테나이의 마지막 변설가이자 정치가였던 데모스테네스를 가르쳤다. 그가 작성한 법정 변론서가 다수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부의 상속에 관한 아테나이 사람들의 태도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본문으로]
- 안탈키다스의 평화로 아테나이는 사실 맥이 다 빠져버린 늙은 도시로 변했던 것 같다. 아리스토파네는 '"부의 신""(BC389)을, 그의 아들 아라로스는 '"아이오로시코"'(BC387,단절)와 '"코카로스"'(BC387,단절)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었지만, 코레고스가 없는 코로스를 운용할 수 없었던 연극은 코로스, 즉 시와 노래와 춤이 빠져고 없었다. 이런 연극의 격변기에 훗날 소위 그리스 중기 희극으로 불릴 새로운 희극을 아라로스와 경쟁하며 만들어 나갈 안티스파네스(BC388-331)가 그의 첫 작품(BC385,단절,제목 내용 미상)을 무대에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 플라톤은 시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소크라테스의 권유에 따라 철학자가 되었다.(디.라 그,권3.1) [본문으로]
- 키몬은 타소스 공략 과정에서, 그리고 타소스 다음 목표였던 마케도니아(이때의 마케도니아는 헬라스 말을 같이 쓴다는 것 이외에는 헬라스 도시라고 할 것도 없이 북방의 초라한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를 공격하지 않는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는 의심을 샀고(플,키몬전,), 아리스토파네스 역시 클레온이 동맹의 도시나 작은 도시들을 징벌하지 않는 조건으로 뇌물을 받았다고 고발하고 있다.(벌들, 기사들) [본문으로]
- 테세우스는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면 모두 아테나이 시민으로 받아들였는데, 페이시스트라토스 때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테나이 시민이라야 아테나이 시민이 될 수 있었고, 클레이스테네스 이후로는 아버지가 아테나이 시민이어야 했던 것을 페리클레스 시대에 와서 부모가 아테나이 시민이어야 아테나이 시민이 될 수 잇도록 시민권을 극도로 제한했다. [본문으로]
- 소위 포퓰리즘이다. [본문으로]
- 대개 신탁은 아테나이를 구하는 '나무 성벽'처럼 해석을 두고 의논이 분분하게 만들었는데,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를 함선으로 읽고 함대를 가져야 한다고 설득했는데, 훗날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 이후 그 신탁이 맞았다고 한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는 크레뮐로스가 즉시 알아듣도록 쉬운 신탁을 내려 신도 크레뮐로스를 도우려 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리고 있다.('"플루토스"'40행) [본문으로]
-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몰래 인간에게 불을 전한 것에 격노하여 프로메테우스를 재기불능이도록 처벌한 것도 모자라 그 불을 얻은 인간도 미워하여 판도라라는 아름다운 재앙을 인간들에게 보내 처벌하였는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제우스가 플루토스의 눈을 멀게 하므로써 플루토스가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구별하여 그들이 부를 갖지 못하도록 하는 제우스의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처벌을 추가한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플루토스"'94-98행.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는 '"플루토스"'의 코로스를 주인공 크레뮐로스와 같은 마을의 크레뮐로스처럼 착하고 정직하지만 하나같이 일용할 양식이 달릴 만큼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했지만, 무대에서 이 코로스의 역할은 아주 제한적인데, 막이 바뀔 때마다의 노래stasion幕間歌는 말할 것도 없고 코로스가 등장하며 부르는 파로도스, 퇴장하며 부르는 엑소도스는 물론, 오케스트라에서 벌이는 스트로페/안티스트로페도, 논쟁의 추임새 에피레마/안티에피레마도 없다.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 '"플루토스"'는 BC389에 상연되었고,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재판은 코린토스 전쟁이 끝난 BC386 이후로 잡았다. [본문으로]
- 솔론의 개혁법에는 아테나이 시민은 당사자가 아니라도 불의한 일을 고발하여 재판에 회부할 수 있게 하여, 도시의 독점적인 기소권의 불의한 불기소를 막을 수 있게 했고, 아울러 일반 시민의 기소가 재판 결과 참소였음이 드러나면 벌금을 물려 과도한 기소를 막았다. [본문으로]
-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가 되기 위해 아테나이를 무력으로 진압할 때, 몽둥이를 든 아테나이 청년, 창과 칼을 든 테켈리아와 에우보이아의 용병 이외에도 스키타이 궁수들을 동원했는데, 이 때를 제외하고 스키타이 궁수들이 오늘날의 경찰 순찰대 역활을 하는 과정에서 아테나이 시민에게 억압적인 태도를 보일 수 없었다. [본문으로]
- 솔론이 정치적 업무와 법률에 대한 책을 편찬하고 있는 걸 보고, 아나카르시스Anacharsis(트라테 북부 스퀴타이 지역 출신, 그리스 일곱 현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어느 날 그는 아테나이로 와서 솔론을 찾아가 자신을 소개한 뒤 솔론과 사귀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에 솔론이 그렇다면 고향에서 벗을 사귀는 게 좋을 것이라 대답하자, 당신은 지금 고향에 있으니 나와 사귀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고, 이에 솔론이 그를 자기 집의 빈객으로 모신 철학자다.)가, '법률은 거미줄과 같아서, 약한 놈이 거미줄에 걸리면 꼼짝못하지만, 힘이 세고 재물을 가진 놈이 걸리면 줄을 찟고 달아나는 것'이라며 비웃자, 솔론은 자신이 법률을 만드는 이유를, '법률을 위반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하여'라고 대답했는데, 이에 데해 플루타르코스는, '결과적으로 솔론보다는 아나카르시스의 말이 옳았다.'라고 쓰고 있다.('솔론전',V.) [본문으로]
-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의 영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병든소의 용례집, '영혼에 대하여'-'영혼의 용례(1),(2), 그리고 '영혼의 사전적 의미' 편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 아테나이 아버지들을 자녀가 여덟 살이 되면 도시가 믿는 신들에 대하여, 도시의 역사와 전통에 대하여, 그리고 도시민으로서 할 바에 대하여 가르칠 의무가 있었다. [본문으로]
- 아이스퀼로스는 이탈리아의 겔라,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가톤은 마케도니아로 가서 만년을 보냈고,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를 버리고 저승으로 가버리자, 그의 제자들 역시 아테나이를 버리고 뿔뿔히 흩어졌는데, 본디 아테나이 사람인 안티스테네스와 플라톤은 쉬라쿠사이로, 나머지는 모두 각자의 고향으로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 '"새들"'은 니키아스의 평화 이후에 아테나이의 안정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규모 시켈리아 원정단을 보냈던 BC415에 만들어 이듬해 BC414 봄 디오뉘소스 축제 희극 경연에서 준우승한 아리스토파네스 최대의 작품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들 중 1766행의 가장 길고, 비극의 에우리피데스가 이미 도입한 24인 코로스를 희극에서도 도입하면서 다양한 새들로 분장시켜 무대를 화려하게 채운 대작일 뿐만 아니라,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새들"'은 에우엘피데스의 대사로부터 시작되지만 전체 1766행에 이르는 이 연극을 주도하는 인물은 페이세타이로스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아테나이를 떠나온 사연과 그들이 어떤 곳에서 새로 살고 싶은지 [본문으로]
-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들"'은 BC406 아테나이가 아르기누사이 해전 승리의 장군들을 사형에 처하는 문제로 한창 시끄럽다가 결국 처형하고, 해전에 참전한 노예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문제로 왈가왈부하다가 결국 시민권을 주는 것으로 결론 짓는 와중에 만들어져, 이듬해인 BC497 여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나이가 스파르테 해군에 의해 괴멸되기 전의 BC497 초봄 레나이아 축제 희극 경연에서 우승하였고, 특별히 재상연이 허락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이 연극을 만들고 연습하던 BC406의 아테나이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도시가 단결하기는커녕 승전 장군들의 득세가 두려웠던 기득 권력자 클레오폰의 미래 정적 제거를 위한 재판에 테라메네스와 트라쉬불로스가 방관 내지는 소극적 변호로 일관하는 등 도시가 [본문으로]
- BC404 봄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에 항복하고 난 후 BC391 코로스의 역활이 줄어든 아리스토파네스의 '"여인들의 민회"'가 발표되기까지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상연된 희비극에 대한 기록은, BC401 디오뉘소스 축제에서 BC406에 죽은 소포클레스의 유작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상연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그 기간에도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공연은 있었으나 주로 디튀람보스 공연이었다는 것 뿐이다. [본문으로]
- 플라톤,'소크라테스의 변론', [본문으로]
- 외양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던 소크라테스는 절제하는 개개인의 덕성에 주안점을 둔 반면, 그의 제자 안티스테네스는 절제의 수준을 넘어 금욕하는 덕성에 주안점을 두어, 훗날 스토아학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본문으로]
- 금욕을 생활의 기초로 했던 스토아학파의 문을 연 안티스테네스에 대한 기록에는 그가 도시의 일에 보인 관심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노년의 플라톤은 솔론의 아틀란티스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국가', '법률'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일, 정치에 대한 그의 관심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으로]
- 안티스테네스에 대한 기록들로는 그가 정치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본문으로]
- 플라톤은 안티스테네스와는 달리 그 스스로 혈연적으로 도시의 일, 정치에 연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크세노폰이 왜 한결같이 스파르테와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까닭이 도시의 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승의 임종도 지켜보지 않았고, 다른 도시에서 온 동문들이 신변의 위험을 피해 서둘러 아테나이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플라톤은 고향 아테나이를 버리고 타향으로 떠났었다. [본문으로]
- 레오 스트라우스가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의 서두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치철학을 열었다고 말했을 때,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을 플라톤의 대화편들(이를 테면 '국가')과 크세노폰의 기록물들(이를 테면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소개된 소크라테스의 도시의 일에 대한 생각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다만,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통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정치철학의 근원이 크세노폰이 기록한 소크라테스의 정치 관련 담론 주제들과 일부 담론 내용(크세노폰,'소크라테스 회상'1.1.16.,'국가/정치공동체란 무엇인가what a state or political community', '정치인의 특성은 무엇인가what the character of a stateman or politician', '정부란 무엇인가what a government of men', '그런 정부의 통치자의 특성은 무엇인가'what the character of one equal to such govenment,)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때, 이 담론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이 플라톤을 비롯한 크세노폰 등의 추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여 소화하고 정립하는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수준은 천양지차를 보이고 있어, 레오 스트라우스가 말하는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은 주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트라쉬불로스의 전사 후 아뉘토스를 비롯한 당시 집권 세력이 몰락하기 시작한 BC386경 아테나이로 돌아와 아카데메이아에 학원을 연 플라톤은 아테나이의 정권 교체와 소크라테스에 대한 복권 과정을 지켜보며, 그 동안 숙고해 왔던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이끈 소크라테스의 도시의 일에 대한 생각, 즉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플라톤이 정치철학을 '올바름dike正義'에서 풀어 나가려 하였고, 이 대화편을 독립적인 대화편으로 발표하지 않고 오래 가지고 있다가 후일 소크라테스의 것이 아닌 자신의 정치철학을 본격적으로 나타낸 대화편 '국가'의 첫 권으로 넣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 사후에 나온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아리스토파네스나, 크세노폰이나, 디오게네스라에르티오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록만 가지고 소크라테스가 가졌던 도시의 일에 대한 생각,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의 단편을 드러내어 볼 것이다. [본문으로]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소크라테스가 이 말 뿐만 아니라, 이암보스 운률로 된, '은 접시도, 자주 빛 옷도,/비극작가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살아가는 데는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시구詩句도 끊임없이 읊었었다고 전한다.('그리스 철학자 열전',제2권5.25) 그렇지만, 이 시구에 대해서 주석가 힉스는 스토바이오스가 그의 '시화집,56.23'에서 신희극 시인 필레몬의 시라고 기록한 사실을 들어 소크라테스는 그 시구를 읊을 수 없었을 것이라 보았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말이나 행동이었다며 내놓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후대의 많은 기록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교육적 용도는 주로 소크라테스가 종조라고 주장하는 학파들이, 이를 테면 안티스테네스를 잇는 초기 스토아학파가, 생산한 것이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소크라테스의 것으로 소개한 것들이고, 비판적 용도는 주로 초기 기독교 철학자들이 생산한 것이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소크라테스의 것으로 소개한 것들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 모든 기록들은 병든소의 또 다른 카테고리, '소크라테스象'의 글들을 참고할 것. [본문으로]
- 같은 책,2.5.27 [본문으로]
- 같은 책,2.5.27 [본문으로]
-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들 가운데 파이돈과 안티스테네스를 제외하고는 큰 부자는 아니지만 플라톤이나 아이스퀴로스 처럼 생활의 여유가 있거나, 아고라에서 구두방 하던 시몬처럼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할 정도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이돈이야 크리톤이 시키는 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겠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전부타 페이라이에우스에서 교습으로 받은 수업료료 겨우 먹고 살던 안티스테네스는 다른 제자들의 따가운 눈총과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매일 같이 아테나이와 페이라이에우스를 왕래하면서도 수업료를 받는 교습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문으로]
- 많은 수의 소크라테스 추종자들은 안티스테네스가수업료를 받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보았다. 크세노폰의 이런 말, '나는 소크라테스가 필요로 하는 비용만큼 못 버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을지 의심스럽다.'(크.회.1.3.)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본문으로]
- 안티스테네스가 필요한 것을 최소화해 살기로 작정하고 해어진 웃저고리를 입고 다니자 소크라테스가 과시라며 핀잔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스테네스는 자기보다 더 금욕적인 제자 제논과 디오게네스를 두어 견유학파를 창설했을 정도로 초절정의 절제를 [본문으로]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아리스팁포스가 현재 지니고 있는 것으로 쾌락을 만끽하고, 현재 지니지 않은 것의 기쁨을 힘들여 찾지 않았다'고 전하면서('그리스 철학자 열전'2.8.66), 아울러 사치스런 생활을 한다는 비난을 받은 아리스팁포스의 응수도 하나 보여주는데 바로, '만일 그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면 신들의 축제도 그렇게 사치스럽지는 않을 텐데.'(같은 책,2.8.68.)이다. 아리스팁포스의 이런 생활 태도는 동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게 보였던지, 크세오폰은 아리스팁포스에게 준 소크라테스의 훈계를 따로 적어 두었다.('회상'.2.1) 그러나 크세노폰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훈계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 사후 쉬라쿠사이의 참주 디오뉘시오스에게 의탁하고 지낼 때의 행적이나, 고향 퀴레네로 돌아가 딸 아레테를 가르칠 때의 행적을 보면, 아리스팁포스의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쾌락을 찾는 생활 태도는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이런 아리스팁포스의 쾌락에 대한 철학은 딸 아레테의 아들 아리스팁포스로 하여금 퀴레네학파를 열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 크세노폰,'소크라테스 회상',2.1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의 몇 번 되지 않은 공직 담임 경력은 모두가 선출이 아니라, 추첨이나 순번에 의한 것이었는데, 전쟁의 와중에 장군들이 도시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바람에 비록 순번이나 추첨에 의해 아르콘이 되었었더라도, 소크라테스가 [본문으로]
- 아테나이를 방문한 아나카르시스가 어는 날 회의에 참석해, 정치에 대한 논의는 현명한 사람이 담당하는 데 반해 그 결정은 무식한 사람들이 담당하는 점에 놀랐다고 한다.(플루타르코스,'솔론전',V.) [본문으로]
- 플라톤의 많은 후기 대화록들은 소크라테스가 그 단초를 열어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 정치철학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정작 '알키비아데스','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의 이름을 딴 대화록은 그들의 정치적 행각과는 관계없는 논의일 뿐,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리스 철학자 열전'2.5.29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치가 성향에 맞는다며 정치를 하라고 권유했다 한다.) 등의 난행과 실정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반면, 크세노폰은 이들의 난행과 실정을 비난하면서, 그들의 난행이나 실정의 이유가 그들이 오만하고 겉멋에 빠져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소크라테스를 옹호하고 있다.('회상'1.2) [본문으로]
- 소크라테스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옹호했다거나(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2.5.18), 잃어버린 덕을 찾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대사 하나에 반발하여 상연 도중 나와버렸다거나(2.5.33), 에우리피데스가 헤라클레이토스의 책을 읽어 보라며 권했다거나(2.5.22) 하는 기록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는 교유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