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소 2015. 8. 6. 18:08

4. 도시의 불화

 

4.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제 이야기를 다시 헬라스의 내전으로 이어놓아야겠습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페르시아와의 전쟁 뒤부터 전 헬라스에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에서 우리 도시 아테나이의 덕목이던 공정이라든가 배려라든가 겸양이라든가 하는 도시들끼리거나, 혹은 사람들끼리거나에 같이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가치들이 어떻게 우리들 곁을 떠났는지를 알아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그와 동시에 우리들 속에 다가왔던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가치들을 보는 새로운 눈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생각이나 가치나 눈을 가졌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만, 지금부터는 같이 살아 가는 데 필요한 그런 가치들이 떠난 자리를 차지하여 결국은 헬라스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간 아테나이의 패권과 탐욕이 전 헬라스가 내전을 겪는 동안 우리 아테나이가 지켰어야 했던 덕목들을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또 아테나이의 시민의 마음조차도 얼마나 갈래갈래 흩어놓았는지를 알아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 속에 새로 다가왔던 새로운 생각이나 가치나 눈들이나, 마찬가지로 그런 새로운 생각이나 가치나 눈을 가졌던 사람들 또한 전쟁 동안 어떤 모습으로 변해갔는지도 아울러 함께 짚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헬라스 내전의 초반이 끝날 무렵이 되면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게 되어 저에 대한 변론도 점점 구체화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진지한 연극 한편 보신다 여기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시길 바랍니다.

 

 

4.2.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는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와의 전쟁을 결의해야 한다고 여러분에게 요구하던 페리클레스의 연설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 분들도 많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때 페리클레스가 한 연설의 몇 대목을 전쟁이 끝나고도 열다섯 해가 다 지난 지금 다시 들어보면 어떨까요? 아직도 사소하다고 말하는 것을 거부하고 전쟁에 나서시겠습니까? 하기야 여러분께서는 여전히 사소하다고 말하는 것을 거부하여, 헬라스 내전이 끝나고 채 열 해가 되지 않아 코린토스와 새로운 전쟁을 시작했고, 그 전쟁이 이제 겨우 마무리 되었으니, 역시 전쟁으로 돈을 버는 정치가들의 농간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테나이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밀레토스가 맨처음 페르시아에 함락되면서 디오뉘소스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바로 그 비극이 시작된 이방인들과의 전쟁이 마라톤과 살라미스 그리고 마칼레의 전투로 모두 끝나는가 싶었는데, 아테나이는 그 뒤에도 끊임없이 타소스에서, 메가라에서, 심지어는 아이귑토스와 시켈리아에서 제국의 팽창과 전체 헬라스에서의 패권을 위해 열다섯 해에 걸쳐 전쟁을 벌이다가, 앞으로 삼십 년 동안은 세력의 팽창이나 세력 간의 패권 때문에 다투지 않고, 서로 현상만 유지하기로 평화조약을 힘들게 맺어 놓고는, 혼자 머리 좋은 척하며 조약의 문구에는 걸리지 않는다며 그 조약의 정신을 무시하는 행동들을 자행한 때문에, 근 서른 해 동안이나 스파르테와 전쟁을 치루어 놓고도, 결국 항복으로 그 전쟁을 끝낸 뒤에 절치부심하여 이제 겨우 먹고 살 만하니까 이번에는 상대를 스파르테에서 코린토스로 바꿔가며 또 새로운 전쟁을 벌였으니, 그 백년이 넘는 세월을 전쟁으로 지새우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도시 아테나이는 세상에 있는 온갖 전쟁의 기술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게 된 반면, 도시의 번영을 약속하고 도시민의 행복을 보장하는 평화의 기술은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4.3. 아테나이가 백 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전쟁의 기술은 원없이 키워 여러 도시들과 싸워왔지만, 그러는 동안 평화를 이루어 낸 경험은 겨우 두 번밖에 없었다는 것이1 그 증거가 되겠지요. 그 두 번 가운데 첫째는 칼리아스가 사절로 가서 페르시아와 맺은 협정이고, 두 번째는 평화의 상징인 제가 태어나던 해 스파르테와 맺은 헬레내에서의 삼십 년간 세력 확장 금지를 합의한 헬레네에서의 평화유지조약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테가 협정대로 쌍방분쟁을 법적인 조정에 맡기지 않고, 포테이다이아의 철병, 아이기나의 주권 반환, 메가라에 대한 경제봉쇄 법령 철회, 이 셋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며 최후통첩을 했다고 책임을 떠넘겼지만, 조약의 정신대로라면 아테나이가 포테이다이아를 포위하여 위협해서도 안 되었고, 아이기나의 자주권을 훼손해서도 안 되었으며, 메가라에 대한 포고령도 메가라와의 협상을 통해서 해결했었어야 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조약에 적힌 금지 행동 어느 것에도 저촉되지 않은 행동들이라고 아테나이는 강변했었지만, 스파르테는 그 행동들의 원인은 모두 조약의 정신을 위배하여 세력 확장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페리클레스는 하나 양보하면 겁쟁이로 본다며 전쟁을 요구했고, 그 이후 이제 아테나이는 다른 도시나 다른 나라와 싸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도시가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오늘 이런 재판을 벌이고 있는 아뉘토스 부류의 에우클레스는 이 재판으로  아뉘토스를 죽이거나 쫓아내자 말자 또 다른 전쟁의 구실을 만들어 나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이렇게 도시끼리 싸우는 전쟁으로 정말 아테네가 번창해왔는지 아닌지 하데스로 간 페리클레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제 짧은 소견에도 페리클레스 이후 아테나이는 점점 더 각박해지고 쪼그라들어 아크로폴리스를 지키는 파르테논 신전 안의 겉옷 벗은2 아테나 파르테노스만 있을 뿐, 이제는 테바이보다 더 못한 도시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4.4. 어쨌거나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여러분이 전쟁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이제 그 유명한 페리클레스의 연설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호전적이고, 낙관적이고, 경솔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전쟁을 불사한 이유가 든 몇 대목을 읊어보려 합니다.  "...... 메가라 포고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사소한 일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것을 고집하지 않으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찮은 일로 전쟁을 시작했다면서 뒷날 자신들을 나무랄 필요도 없습니다. .....  그리고 한걸음 양보하면 그것을 공포심의 증거로 보고, 그들은 곧 좀더 큰 요구를 해오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피해를 입기 전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제가 주장하듯이 적의 크고 작은 트집에 아랑곳하지 않고,....개전을 결의할 것인지 말 것인지 이 자리에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은 농민이기 때문에 개인도 도시도 재산이 없습니다. ...농사 일을 희생시킬 수 없고, 또 집을 비우는 동안 생계를 유지 할 수 있는 개인 재산도 없는 데다가 배마져 없기 때문에, ...농민들은 언제나 돈을 대기보다는 몸으로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3...아마도 이번 전쟁은 오래 지속될 것인데, 그들의 예상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면 특히 더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펠로폰네소스와 그 동맹군은 한차례 전투라면 전체 헬라스를 상대할 수 있겠지만,...그들에겐 신속하고 단순한 행동을 하는 데 필요한 단일  결정기구가 없는 데다, 동맹도시 모두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져 있어,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각 도시들은......즉시 결정해 행동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는 한, 무엇 하나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의 전투 조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적이 우리의 영토를 지상군으로 침략해 오면, 우리는 그들의 영토로 군선을 타고 건너 가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아티케 전역을 잃더라도 그들이 펠로폰네소스 일부를 잃는 것보다 그 손해가 훨씬 더 가벼울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은 그 손실을 되찾으려고 싸워야 하지만 우리는 광대한 영토가 대륙과 해양 곳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강점은 바다의 지배에 있습니다....  되도록 섬에 있는 도시들의 정책에 가까운 정책을 채택해 토지나 집을 돌아보지 않고 해안방어와 도시방어에 유의해야 합니다.."   " ... 어찌 되었든 여러분이 전쟁 중에 제국의 판도 확대를 기도하고 스스로 위험을 불러일으키려 하지 않는 한, 다른 많은 이유로도 승리의 희망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여러 도시들의 자주권에 관해서는 스파르테가 그 산하의 도시에 정치체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함께 자주권을 준다면 우리도 아테나이 동맹 참가 이전에 자주권을 보유하고 있던 도시들에 한해 그 자주권을 인정하겠다고 전해야 합니다..."4   이제 여러분은 이 페리클레스의 연설 구절들로 스무일곱 해나 끈 헬라스 내전의 단초가 제대로 잡히십니까? 그보다 좀 더 자세한 경과를 들려 드릴 겸 저의 희극 작품들이 만들어진 배경도 말씀 드린다면 여러분들의 이해를 확실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좋으시다고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제가 거의 매년 한 편씩 경연 때마다 만들어 여러분들게 보여 드렸던 저의 작품들과 함께 그때 그때의 전쟁 상황을 짚어 가면서, 아울러 그런 전쟁의 와중에 우리 도시 아테나이와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은 또 어떻게 변해 갔는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4.5.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제가 사춘기를 지나 청년이 되어 가는 동안 저의 가슴 속에는 돌처럼 박힌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쟁이라는 우리 사는 세상의 온갖 싸움에 대한 의문 말입니다.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 그것도 목숨을 걸고. 그래서 얻을 것이 무엇이며, 이기면 정말 그것을 얻게 되는가, 싸우지 않고 얻을 수는 없는가, 이기거나 지거나 간에 싸움에 나서면 얻는 것만 있고 잃는 것은 없는가, 하는 의문들 말입니다.

 

4.6. 큰 부자는 아니지만 아티케와 아이기나에 농장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5 어려운 줄 모르고 유년을 보내던 제가 제법 혼자서 집 바깥으로 나다니게 되면서 아고라로 가는 길에서나, 시장에서나, 도시의 거리에서 이따금 화난 사람들이 다투거나 심하게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담장 안에서 하는 부부간의 싸움이나 형제간의 싸움 같은 가족끼리의 싸움이나, 아니면 이웃 간의 싸움이나 친구 간의 싸움 같이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이끼리가 하는 싸움이나, 아니면 함께 일을 하는 사람 간의 싸움이나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 간의 싸움 같이 어떤 일을 매개로 거래를 하는 사람끼리의 싸움이나, 하다못해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인상을 썼다거나 어깨가 부딪쳤다고 시비가 걸린 싸움들 말입니다. 이런 싸움 정도는 누구나 그냥 지나가거나, 가볍게 말리며 '아이구!  좀 좋게 지내지 왜들 싸우실까' 하고 맙니다. 비록 '왜들 싸우실까'라고 묻지만 사실은 그 이유도 알만하고 이해도 되어 건성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요 대개 힘이있거나 우월적인 조건을 가진 쪽의 과도하고 지속적인 헤게모니 행사에 참지 못하고 눌리거나 지지 않으려는 작은 반발이 이런 싸움을 일으키지만, 그들은 어차피 한 울타리 안에서 살 사람들이라 곧 평상으로 돌아가서 조용해집니다. 그러나, 그 집안의 다툼이나 골목길 싸움에서 '죽이겠다'라든지 '사람 살려'라든지 하는 실제로 폭력까지 동원되는 상황으로 치달으면 이제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이래서 앞서 말씀 드렸던 싸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특히 꼭 그렇게 폭력까지 동원했어야만 했느냐 하는 의문 말입니다.

 

4.7. 그러나 그런 싸움이 누항이 아니라 민회에서 벌어지는 것이면 그 싸움은 이유도 다르고 방법도 달라집니다. 저자나 거리에서는 가끔 영 기분이 나빠진 사람이 상대에게 힘자랑 삼아, 사람의 이름이 왜 그러냐, 얼굴이 왜 그렇게 생겼냐, 왜 다리를 저냐, 머리칼이 왜 없느냐, 왜 버버리냐 따위로 시비를 걸기도 하지만, 그래서 간혹 도리어 얻어 터지기도 하지만, 거기서는 이런 이유들로는 좀처럼 시비가 생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이 세어도 아마 인간의 생김새에 대해 그 책임을 한 사람에게 물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좀 관대해지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거기서라도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는 절대 관대하지 않습니다. 특히 지금까지 도시가 그렇다고 믿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나, 도시가 좋다고 따르고 있는 전통이나 관습에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드러내면 정말 큰일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특히 도시가 적대적으로 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거나, 동조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언행을 보이지 않아도, 정말 큰일날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스파르테와 같은 정치체제가 더 좋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테나이에서 함께 살기를 포기한 사람으로 간주해서, 스파르테에 가서 살라며 당장 쫓겨나는 수가 생깁니다. 거리의 장삼이사가 그런 생각을 해도 큰일날 텐데, 민회에서 그런 생각을 말하면 스파르테를 도우려다 망신당한 키몬처럼 정말 도편추방당합니다. 다시 말해 신들이나 법이나 정치체제처럼 도시가 지키려는 가치나 전통이나 관습은 결국 대다수 도시민이 지키려고하는 '모든 것'이자, 바로 도시민을 한데 모을 수 있는 힘 그 자체이므로, 한 도시에서 대다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펼치고자 할 때는 그 대다수를 거슬리지 않도록 신중히 다가가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생김새가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것으로 세력을 만들 만큼 사람들을 모을 수 없지만, 세상에는 생각이 서로 같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고, 그래서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사람들, 다시 말해 같은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큰 세력이 되어, 그들에게 거슬리는 생각이나 가치 판단을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냥 두었다가는 자기들보다 더 많이 모일까봐 두려운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4.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신이나 해나 달에 대해서도, 도시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생각을 하고 그것을 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볼까요? 사람들은 해와 달에 의지하여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가는 것을 이해하고, 또 새로이 오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 해와 달은 하나씩이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움직이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같은 해와 달을 보면서도, 사르데이스나 수사나 포이니케에서는 같은 날짜에 같은 달수에 같은 햇수를 쓰는데6, 헬라스에서는 도시마다 서로 날짜가 다르고, 달수가 다르고 햇수도 다르지만, 그것 때문에 전쟁이 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스파르테와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아테나이에서 만이라도 달력이 달수와 햇수가 서로 맞아 들어갔으면 좋았겠는데7, 헤시오도스가 달력이 아니라 별을 가지고 농사 일을 말했을 정도로8 해가 갈수롤 달수와 햇수는 달라져 갔지요. 달수와 햇수를 맞추어 보려고 솔론이9, 그 다음 클레오스트라토스가 달력을 바꾸어 보았지만10, 틀어지는 간격만 길게 했을 뿐, 맞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요11. 메톤이 나서서 새로운 달력으로 바꾸어 쓰자 했지만12, 그가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아서였는지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에게 참 잘했다고 월계관만 씌어주었을 뿐 그가 말하는 달력으로 고쳐쓰지는 않았습니다. 달력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래서 맞는 달력이 나오면 좋겠기에 월계관은 주었지만, 또 다시 바꾸어 몇 십 년을 지낸 뒤에야 또 틀린 것을 알고, 그때가서 또 바꾸어야 할 일이 귀찮고, 자기 죽을 때까지는 그냥 써도 큰 불편 없었거든요. 물론 신들만 제때 제물을 못 받아 배를 곯아야 했지만 말입니다13. 틀린 달력을 쓰자고 했다고 아테나이 사람들이 솔론은 물론이고, 클레오스트라토스를 벌주자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메톤에게는 상까지 주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생활에 깊숙히 들어와 있고, 매일 같이 보는 해와 달인데도 그 둘을 딱 맞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자연스레 해와 달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궁금해 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러한 자연에 대한 궁금증에 대답하기 위해 탈레스로부터 젊었을 때의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는 철학자대로, 소피스테스는 소피스테스대로 모두 자기의 생각을 한마디씩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생각이 서로 달라도 서로 죽일듯이 싸우지 않았습니다. 탈레스가 모든 것이 물이라 해도 그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모든 것의 '근원 혹은 원리arke'는 '무한하고 비한정적인 것apeiron'이라 했고, 그의 제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해도 그의 제자 아낙사고라스는 무한한 숫자의 '같은 부분으로 된 것homoiomere'들이라 했는데도, 서로 싸우지 않았던 것은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싸우는 대신 더 많은 생각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숫자라는 피타고라스, 불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 ...그들의 생각은 그들과 생각이 다른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을 만들어냈지만, 그 많은 대답들 가운데 유독 프로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의 대답은 아테나이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왜 아테나이가 이 두 사람의 대답에 대해서는 유난히 표독스런 태도로 받아들였을까요? 

 

4.9. 사실은 이 두 사람의 자연이나 신에 대한 대답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인 처신이 위태롭다고 본 정치적으로 다수인 사람들의 생각 때문이었지요. 다시 말해 비록 한 사람의 생각이 오직 철학에 기초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종교나 정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서 그 생각을 종교나 정치적으로 인식해 그것으로 재단하고, 그 생각에 싸움을 걸어 넘어뜨린다는 것입니다. 덧붙인다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올바른 것을 아직 못 찾은 사람들에게 새 것을 가져다 준 메톤은 기성의 체제를 착한 마음으로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간 데 반해, 대다수가 올바르고 좋은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말하고 또 그것을 펼치는 프로타고라스나 아낙사고라스는 나쁜 마음으로 기존의 체제를 허물려고 한다고 보였기 때문에, 기존의 체제를 지키려는 다수에 의해 극단적인 방법으로 배척되었던 것입니다. 이 경우는 비록 정적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것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생각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런지도 모르지요. 특히 이들 둘은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페리클레스와 가까웠거든요.14

 

4.10.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 시절에 이미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제한하는, 다시 말해 이런 저런 생각은 하지도 펴지도 말아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 소피스테스인 프로타고라스와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에게, 그리고 비극작가인 프뤼니코스와 희극작가 크라티노스에게도 써 먹었습니다. 철학의 한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은 페리클레스의 적들이 만들어, 페리클레스를 주축으로 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신들과 자연에 대해 새로운 생각으로 아테나이를 이끌어 가는 것을 잡는 데 썼고, "밀레토스의 점령"과 같이 전쟁으로 민생이 처참해지는 것으로 비극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비극의 소재를 제한하는 법은 비극으로 전의를 떨어뜨리는 것을 막는 데 썼고, 희극의 한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은 페리클레스가 직접 나서서, 그 자신과 자신의 애인인 동반자 아스파시아스를 우스개거리로 만든 희극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막는 데 썼습니다. 정말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인 것이, 만일 여러분이 권력을 쥐기 위해 테미스토클레스처럼 하층에서 나서 상층을 위해 생각하거나, 페리클레스처럼 상층에서 나서 하층을 위해 생각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면, 여러분들은 페르시아를 헬라스에서 몰아내었고, 아테나이를 헬라스의 최고 도시로 만든, 이들 두 장군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좀 쉽게 말해서, 만일 민회나 배심원들의 검증을 받지 않고서는 도시의 전통적 가치와는 다른 생각을 아무나 함부로 품거나, 그것을 사람들에게 펼치거나, 한발 더 나가서 동조자들을 모으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민회가 만들었다면, 우리 아테나이는 결코 지금의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갖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과두정의 스파르테에서조차 이런 법을 만든 적이 없었지만 말입니다.

 

 

4.1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사람들의 얼굴이 서로 다른 것은 싸움거리가 되지 못하는데, 왜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은 싸움거리가 되어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싸우는 걸까요? 심한 경우 어떤 사람은 자기 아들의 얼굴이 자기와 똑같지 않은 것으로는 너는 내 아들이 아니라며 의절을 선언하지 않지만, 그 아들의 생각이 자기와 달라서 아버지인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너는 나의 아들이 아니라며 의절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부자지간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그냥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겪는 싸움은 어떻겠습니까? 서로가 얼굴이 다른데도 시비 없이 거리를 활보하면서, 왜 서로의 생각이 다르면 상대의 생각을 마음대로 펼치지 못하게 하거나, 그 상대에게 반드시 시비를 걸어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싫으니 서로 싸워야만 하는지요? 게다가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도 큰 마을 작은 마을 옹기종기 모여 잘도 살면서, 왜 생각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무리를 지어 큰 힘을 만드니 괜찮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거나 혼자면 무리를 지을 수도 없고 따라서 힘도 생기지 않는데도 그런 생각은 없어져야 한다고 핍박을 받아야 하고, 그 핍박을 무릅쓰고 다수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자기의 생각을 펼 수가 없게 되는지요? 만일 새로운 생각에 사람들이 호응해 자기가 가진 힘을 잃게 될까 두려워서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 얼른 그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모아 다시 힘을 만들면 될 텐데요. 다시 한번 말씀 드리면, 왜 서로의 다른 얼굴은 별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서로가 받아들이면서, 왜 서로의 다른 생각은 서로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을 만들어 서로 싸우는지요? 이래서 앞서 말씀드렸던 싸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특히 꼭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4.12. 특히 이렇게 생각이 달라서 생기는 불화 가운데 최악은 한 도시 안에서 그 도시를 이끄는 문제로 정치꾼들이 벌이는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서로가 도시와 도시민을 위한다는, 바꾸어 말해 도시와 도시민의 이익을 위한다는 같은 목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를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가 생각이 다르므로, 그 목표를 구현할 수 있는 권력을 나누는 데 서로가 인색하기 때문에, 건곤일척으로 붙기 때문입니다. 처음은 서로 호소하고, 다투고, 지지자들을 모아 시위도 하고, 법을 이용해 핍박하거나 제거하다가, 암살까지도 포함해 폭력을 쓰다가, 마침내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바로 도시에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한 도시에 전통이나 뿌리가 다른 사람들이 섞여 있어, 그 때문에 생기는 여러 생각의 마찰은 도시를 쪼개거나, 어느 한쪽의 생각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싸우는 그 도시의 내전을 볼 때나, 한 도시의 전통이나 뿌리가 같은데도 정치체제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 때문에 마치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처럼 다른 한쪽 생각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싸우는 그 도시의 내전을 볼 때15, 그런 싸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내전이 그 도시에 번영과 도시민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면, 한 도시를 번영케하고 그 도시민을 행복하게 한다면서 왜 그러는가, 꼭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 말이지요.

 

4.13.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싸움에 대한 의문을 하찮게 만드는 것이 도시 간의 싸움에 대한 의문입니다. 앞에서 본 많은 싸움들과는 달리, 도시 간의 싸움은 그것이 집단적인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판단의 행동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도시의 이익이 생기고 빼앗기는 문제라든지, 그리고 도시의 위신이나 영예가 서고 실추되는 문제라든지, 혹은 상대가 더 강대해질 것이라든지, 그래서 더 나쁘게 되면 우리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따위의 두려움이 맹목적인 치열함을 불러와, 그 싸움의 규모를 엄청나게 키우기도 하기 때문에, 냉철한 척하며, 왜 싸우냐, 그 무슨 소득이 있느냐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고, 특히 이 싸움은 저나 여러분이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도 아니어서,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야, 다시 말해 그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서 홀어머니에 매달린 아이들이나, 남편이 전쟁터에 가서 노심초사하는 아이 가진 젊은 아내들이나,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고 그 손자 하나 돌보며 힘들게 사는 늙은 할머니나, 남은 것은 꼬챙이와 같은 정신밖에 없는 늙은 상이용사들 같은 전쟁이 남긴 흔적들이 눈앞에 나타나고서야, 비로소 전쟁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흔적을 보고 갖는 의문도 전쟁에 나선 병사가 전쟁을 직접 겪어 본 뒤 가지는 의문과는 얼마나 또 다를 것인지는 어린 그때의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포테이다이아를 포위하고 있었던 전장에서, 무슨 깊은 생각에 사로잡혔는지 어느 날 이른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한곳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는 소크라테스가16 혹시 저의 이 의문을 풀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쟁에 대한 저의 의문은 깊어만 갔습니다.

 

4.14. 페리클레스의 전쟁 동기만 보면, 사실 도시들 간의 전쟁도 저자의 건달들이 자기네들 구역을 정해 놓고서 거리의 가게들이나 난전의 가게들에 대한 관활권을 두고 싸우는 것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건달이 설치는 거리에 같은 건달패 안의 건달끼리나, 건달과 가게 주인과나, 아니면 가게주인들끼리 싸우는 경우는 대개 이익이 나누어지면 끝이나 잠시의 싸움으로 정리가 되지만, 다른 건달패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특히 관할권 경계가 겹치거나 시황에 따라 장사의 업역이 흔들려, 가게주인의 건달에 대한 신뢰 때문에 야기되는 건달패끼리의 싸움이라면, 이익은 뒷전이고 헤게모니도 그렇고 오직 위신과 명성에 매달리기 때문에, 이것은 정말 페리클레스가 말하는 도시들 사이에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와 같아집니다. 거기다가 건달패나 가게주인과는 달리 도시에는 서로 도시와 도시민을 위한다고 주장하는 정치패들이 있어, 겉으로는 도시나 도시민을 위해 지향하는 가치가 달라, 한마디로 생각이 달라서 싸운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들 정치패가 권력을 잡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여, 도시 안에서 정치패들끼리 싸우느라 자기 도시를 황폐하게 만들기가 예사이고, 심하면 권력을 잃은 정치패들이 다시 권력을 잡기 위해, 자기들과 생각이 비슷하다고 믿어지는 다른 도시의 힘을 자기들의 도시에 끌어들이기도 하고, 이에 맞서 다른 정치패는 그들의 성향과 같다고 보이는 또 다른 도시의 힘을 빌려, 그 권력을 지키려고 다른 도시의 힘을 자기 도시에 끌어들여 벌이는 전쟁도 일어납니다. 또 어떤 도시는 이런 내부의 불화가 없어도, 이번에는 한 힘 있는 도시가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도시들에게 별 다른 피해도 주지 않고 줄 것 같지도 않아서 만만해 보이는 그 도시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고 부당한 것을 요구하며 복속을 강요할 경우, 하는 수 없이 그 도시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을 결심하거나, 아니면 그 힘 센 도시를 견제해 줄 다른 힘 센 도시를 끌어들여 벌어지는 전쟁도 일어납니다만, 과연 이런 도시 간의 전쟁이 도시의 번영을 약속하고, 도시민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쟁의 대규모 파괴와 살상이 어떻게 번영이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 하는 의문 말입니다. 

 

4.15. 그 깊어진 의문을 풀 엄두도 나지 않는데, 극작가의 길로 나선 제 나이 열여덟에, 제가 성인이 되던 그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17.

 

 

4.1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전쟁이냐 아니냐 하던 그때 그 자리에서, 여러분 중에는 싸움을 피하자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테나이는 전쟁을 피하는 그 어떤 방법도 택하지 않았습니다. 스파르테의 민회에 간 아테나이 사절은 노골적으로 힘자랑을 하며, 코린토스와 메가라의 편을 들기보다 그냥 엎드려 있는 게 좋다며 스파르테를 자극하기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아테나이가 택한 것은 전쟁 하나였고, 덤빌 테면 덤벼봐라였습니다. 이유도 간단했지요. 이길 것이므로. 페리클레스는 혹시 잘못 판단했다고 나중 비난당할 것에 대비해 약삭빠르게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두었지만18,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질 수도 있지만 기어서 살기보다 서서 죽는 게 낫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는 비장함으로 전쟁을 결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이긴다 생각했고, 여러분 모두 그렇게 믿었습니다. 전쟁이 약간 길어지기는 하겠지만 패전에 대한 우려는 전혀 없었습니다. 전쟁이 가지고 올 고통도 본디 그런 것이라 치부했고, 전쟁에서 이겨 생길 전리품 생각은 여러분 모두를 행복에 겨워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이윽고 우리의 도시 아테나이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쇠락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나마 평화의 조약19이 전체 헬라스의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열다섯 해 동안이나 지켜졌던 것은 아테나이보다는 스파르테가 평화를 지켜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확실했기 때문이었는데, 특히 스파르테가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아테나이의 사소한 위반이나 도발에 대해 속만 끓이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참고 지낸 덕분이 컸습니다. 평화를 약속한 처음 다섯 해 안에 아테나이가 벌인 이탈리아에서의 새로운 식민도시 투리오이에 대한 지원이나, 사모스와 밀레토스와의 다툼에서 아테나이가 보인 자주 도시 사모스에 대한 과잉 처분, 이 두 가지에 대해 만일 스파르테가 이의를 제기했더라면, 그 두 번의 갈등으로 평화는 깨어졌을런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스파르테는 사모스 문제로 소집된 연맹회의에서 아테나이를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는데, 덕분에 아테나이는 사모스를 진압할 수 있었고, 이를 본 뷔잔티온과 뮈텔레네도 스파르테의 지원을 기대하지 못해 아테나이로부터의 이반을 접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와 사모스의 경우가 아테나이에게 가르쳐 주었던 교훈은, '스파르테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아테나이의 동맹도시들이 이탈할 수 있으며, '스파르테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페르시아가 그들을 돕고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테나이는 그 교훈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파르테가 그런 마음을 먹지 않고 평화를 지키려 노력한 고마움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스파르테의 믿어지지 않는 절제로 유지되어 오던 평화가 깨어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플라타이아이를 지배하려 잠입한 어처구니없는 테바이의 비밀 군사 행동 때문이었지만, 사실 그전에 이미 전쟁은 페리클레스가 계속 전체 헬라스의 해상 패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형편을 이해하고 그 상대의 입장을 적절하게 배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가 전쟁을 결심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해, 평화조약을 빌미로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스파르테와 그 동맹도시들, 이를테면 코린토스와 메가라를 자극한 오만의 결과물이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어 버린 데는 코린토스와 그럭저럭 잘 지내던 아테나이가 뜻밖의 일에 개입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투리오이의 일로 아테나이의 세력 확장 모습과 사모스의 일로 아테나이의 패권 선언 모습을 보고 찜찜해 하던 코린토스와 해상 패권의 구도를 놓고 부딪치는 바람에, 스파르테로 하여금 결국 아테나이를 그냥 둘 수 없다는 마음을 먹게 만들고 만 것이 결정타였습니다.

 

 

4.17.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 뜻밖의 일이 전체 헬라스의 내전이 일어나기 다섯 해 전에 헬라스 바깥의 에피담노스라는 그 당시 헬라스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케르퀴라 사람들의 한 작은 식민도시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주목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20 이 도시는 주변의 이어족인 일리리아 사람들로부터 자주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다가, 도시의 내부 권력 문제로 평시민과 귀족들 간에 정치체제를 놓고 마찰을 일으키기도 해, 도시가 점점 피폐해져 가는 와중에, 평시민들이 귀족들의 과두정을 뒤엎고 민주정을 세웠고, 이에 쫒겨난 귀족들이 일리리아와 합세하여 그 도시를 공격해 오자, 민주정을 세운 평시민들이 종주도시인 케르퀴라에게 보호를 요청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 전체 헬라스에 참극을 가져올 거대한 전쟁이 터질 줄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지요21. 처음에는 정말 별 것 아니라고 모두들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 케르퀴라는 그들의 식민도시가 보호를 요청하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었었고, 그러자 에피담노스의 평시민들은 이제 코린토스에 가서, 코린토스의 식민도시가 되겠다며 같은 부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케르퀴라는 수 세기 전에 코린토스 사람들이 세운 식민도시였음에도 페르시와의 전쟁에서 빠져 있었던 덕분에 도시가 강력해져서 종주도시인 코린토스마져 우습게 보게 되었고, 한때 펠레폰네소스의 맹주였던 코린토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헬라스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등장한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에 밀린 상실감으로 예민해져 있었는데, 에피담노스의 요청은 여러모로 자존심 상한 코린토스가 버르장머리 없는 케르퀴라에게 분명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안성마춤의 기회였습니다. 코린토스는 군대와 새로운 이주민을 몰래 육로로 에피담노스에 보냈고, 이 사실을 안 케르퀴라는 마흔 척의 함대로 바다를, 그리고 추방당한 귀족과 일리리아 군대로 육지를 포위한 뒤, 코린토스의 철수와 추방당한 귀족들의 복귀를 건방진 태도로 최후통첩처럼 주문했습니다22.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일원인 코린토스는 다른 도시들의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에피담노스에 새로운 식민도시 건설을 위한 이주자 모집에 나서면서, 서른 척의 함대에 삼천 명의 군대를 실어 에피담노스에 보냈고, 메가라나 테바이나 나머지 스파르테 동맹들의 코린토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본 비동맹의 케르퀴라는 물리적인 충돌보다 중재에 기대를 걸고, 여차하면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는 기색도 보일 겸, 아직 코린토스를 지원하지 않고 있는 스파르테를 초청하여 함께 코린토스에 사절을 보냈지만, 코린토스는 스파르테의 지지를 받는 케르퀴라의 제안에 역제안으로 피하다가 결국 전쟁을 선언하였습니다23. 스파르테로서는 만일 케르퀴라가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하고 아테나이가 동맹을 수락하는 일이 생길 경우 자기들 역시 코린토스의 처지를 도울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럴 경우 헬라스에서 평화가 더 이상 지켜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여, 어떻게 하든 코린토스를 주저앉히고 싶었지만 두 도시 간의 충돌을 막지 못했습니다.

 

4.18. 코린토스와 케르퀴라의 첫 충돌은 전체 헬라스의 내전이 일어나기 네 해 전에 벌어졌는데, 코린토스가 에피담노스로 보내는 이천 명의 군대를 실은 일흔다섯 척의 함대를 케르퀴라가 여든 척의 함대로 자기네들 케르퀴라 섬의 레우킴메 곶 앞 바다에서 맞아 격파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여세를 몰아 에피담노스의 항복을 받았고, 코린토스를 도운 레우카스를 약탈하고, 엘리스의 항구 퀼레네를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케르퀴라의 이런 행동은 코린토스를 더욱 더 자존심 상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코린토스에게 절치부심하며 또 다른 충돌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레우킴메에서의 참패 뒤에 케르퀴라의 보복을 받은 레우카스를 구조하면서 시작된 코린토스의 권토중래는, 배를 다시 만드는 일과, 헬라스 전체에서 뛰어난 뱃사람을 모으는 일까지 이태가 걸렸고, 드디어 코린토스는 케르퀴라에 대한 복수를 단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코린토스의 이러한 함대 보강을 대수롭지 않게 보던 아테나이가 코린토스와 케르퀴라의 다툼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게 된 것은 케르퀴라에서 온 사절들의 놀라운 설득 때문이었습니다24. 코린토스의 움직임에 놀란 케르퀴라는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사절단을 아테나이로 보냈고, 아테나이의 케르퀴라에 대한 지원을 막기 위해 코린토스도 아테나이에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이제 아테나이가 케르퀴라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에피담노스의 문제가 두 종주도시 간의 문제로 된 데 이어서, 이제는 헬라스의 두 강력한 세력 중 적어도 그 한 세력이 개입하는 문제로 비화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자중하고 또 자중해 오던 나머지 한 세력 스파르테의 개입을 촉발할 것은 너무나 뻔해 보였지만25, 아테나이는 눈 앞에 얻을 수 있는 너무나 큰 자기 도시의 이익을 모른 채하기에는 이미 도시가 주체할 수 없는 해상 패권에 대한 탐욕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케르퀴라를 지원이 가져올 너무나 중대한 결과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어, 헬라스 내전의 두 해 전 여름, 두 도시의 사절단을 맞아 프뉙스에 모인 아테나이 사람들은, 보통 하루 만에 토론하고 결정을 내리던 관례를 깨고 이틀에 걸쳐 토론하였는데, 첫날의 지원 반대 분위기가 이튿날은 찬성 쪽으로 바뀌어 갔고, 결국 페리클레스의 노련한 조종에 이끌리어 내놓은 케르퀴라와의 "방어동맹"26 체결을 결의하였습니다.

 

4.19. 페리클레스는 이오니아나 아이가이온에서 누리는 해상 패권으로 코린토스나 특히 케르퀴라의 해양 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두 도시 간의 분쟁으로 그들이 동원하는 함대의 규모를 보고 눈을 번쩍 뜨게 되었을 것입니다27. 그리고 케르퀴라가 자기를 설득하기 위해 늘어 놓은 말들 가운데 코린토스가 케르퀴라의 해양 능력을 장악하여 흡수할 경우28는 그냥 들어 넘길 말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코린토스는 아테나이가 스파르테와 문제를 일으켰을 때 틀림없이 곧바로 스파르테의 힘이 될 존재였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테에게 책잡히지 않을 조건으로 케르퀴라를 도우기로 마음먹었고, 최대한으로 책잡히지 않을 행동을 했습니다만, 아테나이가 코린토스의 불개입 요청을 거절한 것 자체가 이미 그런 잔재주로 거대한 전쟁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도, 약삭빠른 고양이 밤눈 어둡다고 페리클레스는 평화를 깨지 않고도 코린토스의 해양 능력을 제어할 수 있겠다고 믿었었겠지요. 어쩌면 그 약삭빠른 고양이는 코린토스와 케르퀴라의 충돌이 어느 한편의 일방적인 승리로 두 도시가 가진 능력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막으면서, 그 두 도시의 능력이 그 싸움으로 모두 없어져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곧바로 아테나이는 케르퀴라와 방어동맹을 맺었고, 가을이 되자 그 두 도시의 함대가 케르퀴라 섬의 맞은 편 쉬보타 섬들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코린토스는 그들 함대 아흔 척과 동맹들이 보낸 예순 척을 합해 백쉰 척이었고, 케르퀴라는 그들 함대 백열 척에 아테나이가 우선 보낸 열 척을 더해 대적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헬라스의 도시끼리 그만한 숫자의 함대가 동원되어 벌인 해전도 없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해전의 기술도 갖추지 못해, 서로 맞붙은 배들에서 전투는 육상전이나 다름없이 전개되었습니다. 처음 아테나이는 코린토스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 노력했으나, 좌익의 코린토스의 동맹들에게는 우세했던 케르퀴라가 코린토스와 직접 붙은 우익에서 밀리자 싸움에 뛰어들었고, 결국 코린토스와의 충돌은 필연이었습니다. 아테나이는 열 척에 더해 또 열 척 또 열 척을 보태어 서른 척까지 증원군을 늘였고, 코린토스는 늘어난 아테나이의 함선이 증원 함대의 일부인지 전부인지 알 수 없어 전투를 끝내었고, 확전을 피하려는 아테나이의 의중을 확인한 코린토스는 무사히 회군할 수 있었습니다. 코린토스로서는 조약 위반으로 찍혀 두 도시의 충돌을 바라지 않는 스파르테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었고, 아테나이 역시 스파르테로부터 조약 파기의 힐문을 받는 것이 두려워, 양쪽이 모두 소심하고 한정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던 덕분에 케르퀴라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또 한번 좌절한 코린토스의 분노는 아테나이를 응징하기 위해 스파르테와 그 동맹들을 끌어들일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4.20. 한편 아테나이는 코린토스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을 인정하고, 코린토스를 묶어 둘 몇 가지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코린토스가 팔레네 지협에 세운 도시지만 지금은 아테나이의 동맹도시가 된 포테이다이아에 압박을 가하는 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코린토스와 가깝고 펠로폰네소스와 보이오티아를 잇는 길목인 메가라를 응징하는 일이었습니다29. 포테이다이아의 경우, 아테나이는 그전에 마케도니아의 왕 페르딕카스와 잘나가던 사이였으나, 그의 아우들인 필리포스와 데르다스와 동맹을 맺는 바람에 관계가 틀어졌고, 더구나 케르퀴라 일로 코린토스와 직접 전투까지 하게 되자, 이 둘의 사주를 받아 포테이다이아가 이반이라도 하면 트라케에서의 동맹들이 같이 들고 일어날까 미리 포테이다이아를 눌러 두려 했던 것이지요. 아테나이는 이듬해 새봄이 시작되자 아무런 도발 행위도 하지 않고 조용하던 포테이다이아에게 팔레네 지협 쪽으로 쌓은 성벽을 허물고, 코린토스에서 보낸 고문관을 쫓아내고, 인질을 아테나이로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이런 요구에 대해 포테이다이아는 한편으로 아테나이에 사절을 보내 봄이 올 때까지 협상을 계속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비밀리에 코린토스의 지원을 받아 스파르테에도 사절을 보내 자기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스파르테가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메가라의 경우, 아테나이는 메가라가 아테나이의 신성한 토지에다 농사를 짓고, 국경을 수시로 넘나들었으며, 도망친 노예들을 보호해 준다는 이유로, 메가라 사람들이 아테나이의 광장이나 시장 또는 공공 건물에 들락거리지 못하게 하고, 아울러 메가라 사람들이 아테나이 동맹도시들의 항구에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시행하여, 메가라가 다시는 코린토스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응징 겸 경고를 한 것인데, 메가라 역시 스파르테에게 이 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지요30.

 

4.21.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저는 지금도 그 당시 페리클레스가 무슨 생각으로 케르퀴라와 코린토스 간의 불화에 끼어들었으며, 또 포테이다이아를 압박하고, 메가라를 봉쇄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도 스파르테가 모른 척하고 있도록, 십수 년전 플레이스토아낙스를 돌려 세우기 위해 그와 스파르테의 친아테나이파를 매수하였듯이 미리 자기 친구 아르키다모스를 매수해 둔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만약 페리클레스가 그 뒤에 일어난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처음부터 이백 척의 함대를 보내 코린토스를 박살내었든가, 아니면 애초부터 꼬리를 내리게 했으면 했지 구차하게 방어동맹이니 뭐니 하면서 열 척씩 서른 척을 보내 코린토스를 적으로 돌려세우지 않았을 것이고, 포테이다이아도 처음부터 이백 척의 함대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와 데르다스의 힘으로 단시간에 점령하고 처단을 내렸으면 내렸지 그렇게 엄청난 비용을 써 가며31, 제가 보기에, 아테나이가 포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테이다이아에게 아테나이가 묶여 있지는 않았을 것이고, 메가라 역시 처음부터 막강한 힘으로 단숨에 쓸어버렸으면 쓸어버렸지, 구차하게 조약의 파기를 피해 가기 위해 온갖 글재주를 다 부리며, 봉쇄 법령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가 진정 평화를 지켜 갈 생각이 있었다면, 그래서 코린토스에 대해, 포테이다이아에 대해, 메가라에 대해 최소한의 조치를 이행한 것이라면, 투리오이와 사모스와 그 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그들의 도발을 참아 주었던 스파르테의 낯을 보아서라도, 더구나 케르퀴라를 응징하려는 코린토스를 주저앉히려 그렇게도 노력한 스파르테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적어도 포테이다이아의 포위, 아니 메가라 봉쇄령 따위는 접었어야 했는데, 무엇이 그렇게 스파르테를 얕잡아 보게 했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경으로 상대의 감정을 달래며 조약의 정신을 지켜 가는 대신, 약싹빠른 재주로 조약의 문구를 따지며, 조약 파기의 책임을 피하기만 하면 스파르테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자연히 그리고 의당히 스파르테와의 평화가 지속되는 것으로 믿고 행동했습니다.

 

4.22. 그렇지만 스파르테가 언제까지 참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감정의 문제였습니다32. 사실 아테나이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난 스무 해 뒤이자 평화의 조약을 맺기 스무 해 전에 이미 스파르테에 존재하는 아테나이에 대한 스파르테 사람들의 악감정을 확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스파르테는 아테나이가 타소스 섬을 칠 때 타소스의 지원 요청을 들어 주려 했으나, 스파르테에 큰 지진이 일어나 페리오이코이와 헤일로테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타소스를 지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반란의 진압도 힘겨워 다른 동맹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는데, 그때 아테나이에서는 언제나 스파르테에 호감을 가지고 있어 아들 이름도 라케다이모니오스- 아테나이는 케르퀴라 방어동맹으로 지원군을 보내야 했을 때 이 아들을 지휘관으로 삼아 스파르테의 의심을 완화시키려 노력했었습니다-라고 붙일 정도였던 키몬이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침공 때 맺었던 동맹을 이유로 지원군을 보냈지만, 스파르테는 그들이 도착하자 바로 돌려 보냈을 정도로 그때 이미 아테나이에 대한 악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키몬이 결국은 실각하고 도편추방까지 당하게 되었으며, 스파르테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 아테나이는 스파르테가 추방한 반란 노예들을 모아 코린토스 해협 북쪽의 나우팍토스에 그들을 집단으로 거주시켜 스파르테를 자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경 문제로 코린토스와 다투던 메가라를 아테나이 동맹으로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의 오만을 오래 참고 지낸 까닭은 딱 하나 이제 전쟁이 헬라스에서 다시 일어난다면, 그 전쟁은 대를 이어 계속될 것이고, 그것은 전체 헬라스를 피폐시킬 것이고, 그래서 또 다시 이방인들의 침략을 받는다면 헬라스가 이방인들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 나중 스파르테가 전쟁을 결심했을 때 아르키다모스는 스파르테에게 전쟁이 대를 이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33. 이런 자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탐욕과 자만에 빠져 자신의 이익만 따지며 상대의 입장을 무시하는 아테나이에 대해 스파르테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아테나이에게 보내는 스파르타의 맨 처음 신호는 포테이다이아에게 보낸 지원 승락이었습니다. 비밀스레 지원 약정을 맺은 포테이다이아는 칼키디케와 봇티아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코린토스의 아리스테우스는 개인 자격으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용병 군대를 조직하여 포테이다이아를 지원하기 위해 출격했는데, 아테나이도 칼리아스에게 일흔 척의 함대와 삼천의 군사를 주어 포테이다이아를 치기 위해 출격케 했습니다. 헬라스 내전이 벌어지기 한 해 전 여름, 아테나이는 펠레폰네소스가 지키는 한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스파르테는 동맹회의가 아닌 자신들의 민회에 코린토스와 메가라 그리고 아테나이까지 모두 와서 그들의 입장을 스파르테 사람들에게 개진토록 하는 파격을 보이면서, 두 번째로, 이번에는 코린토스와 메가라의 입을 빌려 아테나이에 대한 자신들의 신호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신호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는 코린토스와 메가라가 가진 아테나이에 대한 반감이 스파르테에게 이전되는 것을 막기는커녕 힘자랑과 함께, 오히려 해 볼 테면 해 볼 수 있는 힘은 충분하지만 그래도 조약이 살아 있고, 조약에는 중재에 회부하도록 되어 있으니 중재에 맡기자며, 다시 한번 조약 문구를 들고 스파르테의 염장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스파르테 시민들의 아테나이에 대한 격앙된 악감정 때문에 아르키다모스는 아테나이의 중재 제안을 표결에 부칠 수 없었고, 대신 일단 아테나이에 공식적인 항의 사절을 보냄과 동시에 전쟁에 대비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는데, 이에 대해 코린토스와 메가라가 즉각적인 행동을 주장하자, 스테넬라이다스가 나서 아테나이가 평화조약을 위반하였는지 아닌지를 표결에 부치자고 제안했고, 그 결과 스파르테 사람 대부분이 아테나이가 평화조약을 위반했다고 판정하였습니다. 아테나이가 조약을 위반하였다는 판정은 바로 전쟁을 의미하였습니다. 아테나이가 필요에 따라 조약의 문구는 그대로는 지켰으나, 조약의 정신은 위반하고 있었음을 스파르테는 오랜 세월 쌓인 아테나이의 처신 행태에 대한 경험을 바탕에 둔 직감으로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4.23. 만일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의 세력 확장이 두려워서, 그래서 더 이상 두면 감당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해서 미리 제압해 둘 요량으로 전쟁을 결심했다면, 투리오이의 경우에 벌써 아테나이에게 머리 좋은 체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것이고, 사모스 때에는 아테나이가 사모스로 출격하면 스파르테는 코린토스의 요구대로 아테나이로 출격하겠다고 통보했었어야 마땅했으며, 무엇보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불화에 케르퀴라와 아테나이에게 한발짝씩 물러서라고 주의를 주었을 것이고, 포테이다이아와 메가라의 경우에는 이미 스파르테의 아르키다모스가 동맹군을 이끌고 아티케에 나타났어야 했겠지만, 그때마다 스파르테는 놀라운 자제력으로 참아 왔고, 오히려 코린토스의 도발을 억제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34. 그렇게 어렵사리 십수 년 동안 평화를 지켜 오던 스파르테가, 펠레폰네소스 너머로 케르퀴라에 아테나이의 팔이 뻗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리고 펠레폰네소스의 식민도시 포테이다이아를 사모스처럼 무슨 본보기로 삼으려는지 이유없이 무력으로 억압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펠레폰네소스가 아티케로 나가는 데 반드시 펠레폰네소스의 일원으로 있어야 하는 메가라에 대해 듣도 보도 못한 해괴망칙한 법령으로 핍박에 나서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나마도 내키지 않았았지만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전쟁을 결심하고 나왔습니다. 은인자중하던 스파르테가 도대체 아테나이에 대해 무엇을 새로 알았기에 그 일 년 사이에 갑자기 전쟁을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4.24.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평화는 사실 헬라스에서 누구보다 스파르테와 전쟁의 틈새에 끼어 있던 작은 도시들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주로 농사를 짓는 스파르테는 스파르테 시민과 동등인의 숫자보다 열 배가 많은 도시 소유의 노예들, 즉 페리오이코이와 헤일로타이에게 생산 활동을 모두 맡기고, 그들은 정치나 군사 활동만 하고 지냈는데, 전쟁 때에는 늘 그런 노예들의 반란이 걱정이 되어 청년과 노년의 병사들이 도시를 지키고 있어야 했지만, 평화가 지속되는 동안은 그런 걱정 없이 도시를 가꿀 수 있어 좋았고, 작은 도시들은 전쟁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휘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씩 부를 쌓을 수 있어 좋았는데 반해, 아테나이는 그 평화로 인해 비록 전쟁 비용은 들지 않았지만 세력 확장을 통한 새로운 부의 원천을 개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노잡이들을 위시한 전쟁으로 먹고 살았던 직업 군인들의 생계를 유지시켜 나가는 데 수입 없는 비용을 지출해야 되었으므로 더 이상 도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는데다가, 돈으로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의 환심을 사느라 동맹이 내놓은 공금도 이제는 모두 탕진하고 없었고, 더구나 평화로 여유가 생긴 작은 도시들이 자주권을 찾아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동맹의 결속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평화가 가져온 이런 역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스파르테와 작은 도시들에게는 안정을 가져다 준 반면, 아테나이에게는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아테나이의 정치적 안정도 불안해져 페리클레스의 정치 기반도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동맹들이 낸 돈으로 파르테논을 짓고 거리 축제를 여는 등 흥청망청 이런 불안을 메워 왔지만, 평화 시절에 조공을 쥐어짜는 것도 여의치 않아, 아테나이의 사회적 정치적 불안은 심화되어 갔고, 돌파구는 새로운 세력 확장 말고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동안 전쟁을 핑계로 동맹도시들에게 돈을 뜯는 재미에 흠뻑 빠졌던 아테나이가 평화 때문에 돈을 더 많이 뜯지 못해, 돈이 마르고 여기저기서 불만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익숙하고 능숙한 전쟁을 떠올린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처음 아테나이의 이런 변화에 애써 눈을 감았던 스파르테도 아테나이가 염치없이 자기의 생존 기반인 펠로폰네소스에까지 마수를 뻗치며 세력 확장을 꾀하자, 아테나이의 행동에 주목한 것은, 비단 아테나이가 자기의 영역에 침투하기 시작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족할 줄 모르는 아테나이의 탐욕이 갈 데라고는 펠로폰네소스 이외에는 헬라스에서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다시 말해 아테나이가 이미 펠로폰네소스를 제외한 모든 헬라스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가 아테나이의 식을 줄 모르는 탐욕이 가질 마지막 목표라면, 그리고 작금에 보여주는 아테나이의 태도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그 탐욕의 실체라면, 스파르테의 선택은 전쟁으로 그 탐욕을 막아 내는 것, 이 단 한 가지 말고는 없어 보였습니다.

 

4.25. 민회의 결의를 본 스파르테는 동맹회의를 곧바로 소집하였으나, 여름의 끝이 되어서야 회의를 열 수 있었을 정도로 여전히 동맹들 간에 전쟁에 대한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동맹회의의 전쟁 결의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테는 그해 가을 아티케로 군대를 끌고 가는 대신, 세 번이나 아테나이에 사절을 보내 아테나이가 생각을 바꾸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전쟁으로 도시를 번성케 할 수도 없거니와, 전쟁으로 도시가 폐망하는 것도 두고 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 스파르테로 하여금 평화에의 희망을, 아니 평화에의 미련을 버릴 수 없게 하였지만, 그래도 아테나이의 페리클레스는 사소한 것이라 하지 말라며 다가오는 전쟁에 아테나이의 앞날을 걸고 있었습니다.

 

 

4.26.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리고 그 이듬해 봄, 헬라스를 스무일곱 해에 걸쳐 전쟁의 참혹함 속에 집어 던진 사건이 뜻밖에도 플라타이아이에서 민주정을 타도하고 과두정을 세우려는 플라타이아이의 나우클리데스와 짜고, 테바이의 유력한 정치가 에우리마코스가 삼백 명이 넘는 수하를 데리고 그 도시에 잠입하여 반정을 일으키면서 터져 나왔습니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던 과두제 반정은 테바이 잠입조가 나우클리데스의 피의 숙청 요구를 무시하고 전체 시민을 포용하려 노력하는 동안, 사태를 파악한 플라타이아이 사람들의 반격으로 오히려 잠입조가 반은 죽고 에우리마코스를 포함한 반은 사로잡힘으로써 뒤집어지고 말았는데, 테바이의 응원군이 비가 와서 불어난 강을 건너지 못해 발이 묶여 있는 동안, 플라타이아이 사람들은 아테나이에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사로잡은 잠입조 백여든을 처형해 버렸습니다35. 그 처형으로 테바이의 아티케 진입을 막을 수 있었을 좋은 인질을 잃은 아테나이는 수비군만 남기고 플라타이아이 사람들을 피난시켰고, 인질 걱정이 없어진 테바이는 플라타이아이를 부담없이 공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스파르테는 즉각 동맹들에게 동원령을 내리고 아티케를 치기 위해 이스트모스에 집결시켰습니다. 이것으로 삼십 년 평화조약은 파기된 것이었습니다.

 

4.27. 헬라스 내전이 터진 전쟁 첫 번째 해36, 아테나이는 바다를 주된 전쟁터로 삼았기 때문에 성벽 바깥에 사는 사람들이나 근처의 아티케 사람들은 스파르테의 병사들이 아티케로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페리클레스가 말한 대로 농장과 집을 버리고, 값비싸거나 당장 먹고 생활할 것들만 들고 아테나이 성벽 안으로 피난해 왔습니다37. 페리클레스는 함대로 바다를 끼고 싸우겠다는 그의 전략 때문에 제일 먼저 그리 제일 오래 피해를 입을 아티케의 농부들이 전쟁을 반대하여 아테나이가 적 앞에서 분열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고, 그래서 설득만 시킬 수 있다면 차라리 아티케의 농장도 집도 다 태우고 오라고 하고 싶다고 했지만38, 농민들은 그 누구도 전쟁이 그리 오래 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다들 바로 집에 돌아가 농사 짓고 살 줄 알았지요. 한편 스파르테의 아르키다모스는 아테나이의 지상전 회피와 해상 지배 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테나이에 사절을 보내 다시 양보를 요구하는 등 평화에 대한 기대도 버리지 못했고, 따라서 아티케의 평원으로 나가는 대신 천천히 메가라를 지나 북쪽으로 보이오티아 경계의 아테네 기지인 오이노이에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고, 그래서 그때서야 엘레우시스와 트리아 평야를 유린하면서 아카르나이에 들어와 진을 치고는 아카르나이를 마음껏 뒤엎었고, 그러는 동안 아테나이가 응전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답이 없자 한 달 만에 진을 푼 뒤, 왔던 길로 가지 않고 아테나이의 다른 영지들을 유린하며 보이오티아로 둘러 돌아갔습니다39. 물론 이런 스파르테의 움직임을 본 아카르디아 사람들의 출진 요구가 거셌지만 전쟁 지휘관인 페리클레스가 막았습니다. 다행히도 이렇게 해서 전쟁 첫 해에는 스파르테가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일찌감치 철수했던 덕분에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별 큰 탈 없이 집에 돌아가 겨울을 날 수 있었습니다. 

 

4.28. 다른 한편,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가 자주 말한 대로 '페이라이에우스의 눈엣가시'이자 전쟁의 한 원인이라 보던 아이기나를 제일 먼저 평정한 뒤 주민 전체를 쫓아내고 아테나이에서 식민자들을 찾아 이주시켰지요. 쫓겨난 아이기나 사람들은 스파르테가 아테나이와 사이가 좋은 아르고스를 견제도 할 겸 티레아에 정착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는 아테나이의 백 척과 케르퀴라의 쉰 척 그리고 다른 동맹의 배들까지 근 백쉰 척이 넘는 중무장의 선단을 보내 펠로폰네소스 도 연안의 방어가 허약한 성채들을 쿡쿡 찔러 보다가, 코린토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아카르나니아로 북진해서 코린토스에 속한 솔리온과 아스타코스를 장악하여 동맹에 편입시키고, 요충지인 케팔레니아 섬을 차지한 뒤, 겨울이 오기 전에  모두 아테나이로 돌아왔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가을에 접어들자, 스파르테를 눈 앞에 두고도 출격하지 못해 앙앙불락이던 시민도 달래고, 이참에 메가라도 확실히 눌러 두기 위해 만오천에 가까운 중무장 병력을 동원해 메가리스로 직접 출진하여 메가라 평야를 황폐화시키려 했습니다. 이렇게 전쟁 첫 째 해를 보냈지만, 스파르테의 손실은 밋밋했던 반면, 아테나이는 그때까지도 포테이다이아를 점령하지 못한 채, 막대한 포위 비용을 지출해야 했고, 아티케로 들어와 스파르테가 벌인 한 달의 무력시위로 아티케의 올리브유와 포도주가 제대로 생산되지 않은 대신 식량은 모두 수입에 의존해야 했습니다40.

 

4.29. 그리고 그해 겨울, 페리클레스는 관례에 따라 전몰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열고, 죽은 자들을 위한 조사가 아니라, 산 자들을 위한 전쟁 독려사를 통해 특유의 미사여구로 우리 도시 아테나이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그 어느 부분에서도 세계 최고의 도시이며 적은 그렇지 못하다고, 그래서 아테나이를 지키고 더 나아가기 위해 전쟁은 불가결하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때 페리클레스가 자랑하던 아테나이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면서도 유약에 빠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그것을 활동하는 바탕으로 삼으며,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끄러움은 가난을 이겨내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봅니다. 모두가 공사 간에 최선을 다하고, 전사도 정치에 소홀하지 않으며, 이에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보는 것은 우리 뿐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촉진시킵니다. 비판이 실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비판으로만 흘러 해야 할 행동을 소홀히 하는 일도 없습니다....나아가 우리의 또 다른 특질은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해를 따지지 않으며, 자유를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아테나이가 전체 헬라스의 규범인 것입니다. ....."41  페리클레스는 이 자랑스러운 아테나이에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몰랐습니다. 한 권력자의 자기 도취가 도시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습니다.42

 

    

4.30.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제 저는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을 이 이야기를 끝으로  저의 전쟁에 대한 감상을 접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무엇인지를 이 이야기 이상 적나나하게 가르쳐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가 바람 잡아 떠난 시켈리아의 시라쿠사이 원정대의 전멸을 이야기하지만, -저를 낳고 저를 기르신 디오뉘소스여, 아테나이 팔백만 신들이시여, 그때 죽은 전사들의 영혼을 달래 주시길, 그리고 한없이 애통해 하는 저의 이 간절한 애도도 함께 전해 주시길- 그것은 전사들의 전투였기에 아테나이의 성벽 안에서 일반 시민이 겪어야 했던 이 일과는 어떤 잣대로도 같이 잴 수 없으므로, 전쟁이 무엇인지 말할 때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이 일을 말해야 합니다.

 

4.31. 그 이듬해, 전쟁 두 번째 해에43 아테나이에 닥친 그 끔찍한 재앙44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봄철 농사일을 끝내고 스파르테의 아르키다모스가 전쟁 둘 째 해 여름 다시 아티케로 오자, 모두 전쟁 첫 해처럼 농경지를 버려둔 채 살림을 꾸려 아테나이 성벽 안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런 피난의 아우성 속에 처음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환자들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그들의 증상은  열이 나서 눈이 충혈되고, 혀와 목구멍에 피가 나며, 호흡 곤란에 기침으로 머리와 가슴이 심하게 아팠으며, 그리고  피부 겉이 푸르죽죽하게 변하면서 곪아 갔는데, 피부의 속은 뜨거워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쉴 수도 잠들 수도 없었으며, 그리고 욕지기로 구토를 하면 빈 속이 뒤집혀 죽을 듯이 아팠고, 물을 마셔도 갈증이 그대로였으며, 설상가상 장이 짓물리어 이질까지 앓았습니다. 이런 고통 속에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앓다가 결국 쇠약해져서 죽어 갔습니다. 어쩌다 살아나도 후유증이 전신에 남아 신체의 일부분이 기능을 잃었으며, 잠시 기억을 잃을 정도로 그 고통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재앙으로 아테나이 사람들이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 꼴로 죽어 갔습니다. 이 지독한 병은 그 병만큼 무시무시한 소문들, 이를테면 스파르테가 페이라이에우스의 저수지에 독을 탔다든지, 아이티오피아에서 처음 생겼는데 아이귑토스, 리뷔에, 페르시아의 여러 곳을 거쳐 페이라이에우스로 건너왔다는 소문들과 함께, 이 전염병은 아테나이에 순식간에 퍼져 수많은 인명을 빼앗으며 맹위를 떨쳤습니다.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들도 죽어 나가는 바람에, 환자들은 의사들의 치료를 받기 힘들었습니다만, 간호를 받지 못해도, 친지들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아도, 모두 죽어 갔습니다. 환자들에게 두루 듣는 특효약이란 없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잘 듣는 약도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되었습니다. 평소 튼튼하거나 몸을 잘 챙겼어도 이 병은 예외없이 그들을 쓰러뜨렸습니다. 이런 상황이 사람들에게 이 병은 어쩔 수 없다는 낙담과 저항에 대한 무기력함을 주어, 아테나이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와 함께 끝없는 절망으로 뒤덮여 갔습니다.

 

4.32. 그리고 이 불행은 성벽 안으로 피난 온 시민들에게만 닥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사들도 이 재앙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그해에도 다시 아티케로 들어온 아르키다모스는 아카르디아에 머물지 않고 이번에는 아티케의 평원을 마음껏 유린하고, 한달 열흘이나 아티케의 거의 전 지역을 휩쓸고 다니다가, 성벽 안에서 피어나는 연기와 세작들의 보고로 전염병이 아테나이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펠로폰네소스로 돌아갔습니다. 한편으로 페리클레스는 아르키다모스가 아티케로 오더라도 피난만 하고, 절대 반격하지 못하게 조치한 뒤, 그 대신 아테네의 삼중노 백 척에 키오스와 레스보스에서 온 쉰 척을 더해 아테나이가 지금까지 배에 태운 지상군으로는 최대 병력을 싣고, 전쟁 첫 해의 해군 원정에 이어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 에피다우로스를 치기 위해 출격했다가 아테나이에 퍼진 전염병의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그 출진 전에 니키아스를 트라케로 보내 포위 중인 포테이다이아를 공격하도록 했었는데, 페리클레스와 함께 돌아온 병력의 일부를 하그논에게 붙여 니키아스를 돕도록 보냈습니다만, 그러나 미리 출진했던 니키아스의 전사들에게 이미 퍼져 있던 전염병과, 나중 도착한 하그논의 지원군들이 가져온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전투도 하기 전에 전사들의 태반을 죽음으로 몰아 그들은 아테나이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33.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그리고 무리하게 아테나이 성벽 안으로 많은 사람들을 피난시킨 것이 역병의 원인이라고 보는 분노한 시민들 앞에서 페리클레스는 이번에도 또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민회는 스파르테에 사절을 보내 평화를 타진한다고 결의했습니다. 아테나이가 겪는 재앙을 본 스파르테의 전쟁파들이 나서 평화를 저지했고, 페리클레스는 민회가 더 이상 사절을 보내는 것을 막았지만, 그 대신 그는 전에 자기가 키몬을 쫓아낼 때 썼던 수법과 똑같은 수법을 쓰는 반대파들이 주도한 공금횡령 혐의 재판에서 벌금형을 받았고, 그해 가을의 공직자들 신임투표에서 떨어져 면직되기까지 했지요. 전쟁 둘 째 해 아테나이에 닥친 전염병의 재앙이 페리클레스를 겨냥해 점점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4.34. 페리클레스 재판을 본 크세노폰이나 다른 장군들은 그 재앙 속에서도 너무 큰 지출을 강요하는 포테이다이아 포위를 끝장 내기로 하고, 그해 겨울이 오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던 태도를 바꾸고 포테이다이아 사람들이 도시를 비울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고, 극심한 기아로 사람을 잡아 먹기까지 하며 버티던 포테이다이아 사람들도 그들이 죽음으로 지키려고 했던 도시를 비워 주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된 데는 해군 증강을 위해 필요한 돈을 구하러 페르시아에 간 스파르테 동맹들의 사절단을  페르시아가 아테나이로 잡아 보냈을 때, 그 가운데서 그동안 아테나이의 포테이다이아 공격을 너무나 잘 막던 코린토스의 아리스테우스를 발견하고 그를 바로 죽여 버려, 포테이다이아로서는 전쟁 지도자를 잃은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아무리 적국 사람이라도 사절로 간 사람을 재판도 없이, 변호 받을 기회도 없이 바로 죽여 구덩이에 던져 버릴 만큼 이미 그 당시 아테나이는 전쟁과 재앙으로 사람들의 심성이 매우 참혹해져 있었습니다45. 그리고 아테나이는 그들의 골치꺼리였던 포테이다이아 문제를 해결하여, 그 빈 도시로 아테나이 사람들이 이주해 간 덕분에 트라케 방면의 핵심적 역활을 한 기지를 얻게 한 장군 셋을 민회의 동의 없이 강화를 맺었다고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4.35. 그리고 전쟁 세 번째 해46 봄이 되면서 페리클레스에 대한 반감도 많이 줄어든 아테나이 사람들이, 클레온 일파의 의도와는 달리, 그들을 모두 다 무죄로 풀어 주고 여름에는 페리클레스도 다시 복직시켰습니다만, 페리클레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재앙으로 죽고 없어 그 힘은 허전했지요. 여동생도 두 아들도 역병으로 죽어 나가자, 페리클레스는 그의 영원한 동반자 밀레레토스의 아스파시아스가 낳은 아들 페리클레스에게 상속권을 주기 위해, 스무 해 전에 자기가 만들었던 아테나이 시민권에 대한 법의 예외를 민회에 요청해야 할 정도로 페리클레스의 주변이 모두 그 재앙으로 허약해져 갔고, 드디어 그해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 페리클레스 역시 바로 그 역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가 밝혔던 바람직한 정치 지도자 모습이라는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자기의 도시를 사랑하며, 부패에 물들지 않는 사람"47으로 된 정치 지도자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희극에서 실명 비판을 금지하는 법을 곧바로 철회한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실수를 해도 그 실수를 곧바로 다시 바로잡을 수 있었던 정치 지도자를, 전쟁을 피하지 말라고 여러분을 설득했듯이, 평화를 꼭 이루어야 할 시점에 여러분을 설득해 평화를 꼭 이룰 능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를 그때 잃고 만 것이었습니다.

 

4.36. 전쟁 세 번째 해 여름, 스파르테의 아르키다모스는 역병이 겁나 아티케로 오지 않고, 테바이가 요구하는 대로 플라타이아이 공략에 나서는 한편, 아카르나니아에서 아테나이 세력을 제거해 펠로폰네소스의 안정을 도모하려 나오면서 해군력을 증강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파르테는 해군력이 없다는 페리클레스의 판단은 틀렸지만, 아테나이의 포르미온에게 스파르테의 크네모스는 상대가 되지 못한 덕분에 아카르나니아 쪽의 세력을 지킬 수 있었던 반면에, 도시 내부의 민주파와 과두파 싸움으로 인해 야기된 칼키디케 쪽 동맹도시들의 이탈은 막아 내지 못했습니다. 그해 겨울, 아무리 동맹들을 다구쳐 전비를 긁어 모아도 바닥이 보이는 전쟁 비용 때문에 트라케의 시탈케스로부터 함대 파견의 요청을 받고도 이제 마음대로 해군을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아테나이는 재정적으로도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48. 그런데다가 점점 더 헬라스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도시들 내부에서 일어난 민주정이냐 과두정이냐의 정치체제에 대한 이견과 권력 다툼 때문에 전쟁의 양상은 그 동맹도시들과 그들의 민주정을 지키기 위해 힘을 소진해야 하는 또 다른 재앙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4.37. 전쟁 네 해 째49, 페리클레스가 죽고 나서도 아테나이가 선택한 것은 전쟁이었습니다. 물론 클레온 일파가 전쟁을 계속하는 것에 앞장선 것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니키아스나 파케스가 전쟁을 반대한 것도 아니어서, 그 둘도 아테나이 주민들에게 여태껏 매기지 않던 직접세를 매기기로 한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그들도 역시 전쟁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수행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다른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겠지요. 사실 그 전에 아테나이는 동맹들에게 받는 조공을 올려 전쟁 비용을 마련하려고, 겨울이 오기 전에 배 열 두 척을 동맹도시들에게 보내 인상된 조공을 받으려 했었는데, 카리아에서는 심각한 반발을 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금을 가져 오려던 뤼시클레스가 살해당하는 것까지 보자, 더 이상 동맹으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을 강요할 형편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아테나이에서는 아무도 전쟁과 재앙에서 헤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4.38.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그리고 그 역병의 재앙은 우리 도시 아테나이를,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을 말이 아니게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전염병이 휩쓴 뒤, 아테나이는  더 이상 새 길을 내고 신전을 짓고 거리마다 흥청대던 아테나이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도 더 이상 예전 아테나이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가 치고 간 아테나이는 페리클레스에 이르자 도시가 급격하게 팽창하는데도, 성벽을 헐어 도시를 넓히기보다 작은 집들을 다닥다닥 붙여 지었습니다.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고치며 빽빽한 헌집들을 정비하고, 새 길을 내며 집터를 새로 닦아 겉보기에는 도시가 꽉 차고 야물어 보였지만, 집집마다 대문간에 둔 오물구덩이에서 일일이 막대에 단 바가지로 퍼서 도시 바깥으로 져 날라야 했던 하수처리 시설은 취약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피난민들과 인근의 동맹도시들에서 보낸 인질들이 늘어나서, 도시는 더 이상 수용할 능력이 없었는데도 아테나이로 들어오려 하는 사람들은 줄지가 않았습니다. 빈집은 커녕 빈방도 없었고, 성벽에 기대어 천막을 치고 지내는 사람들과, 평소에 들어오면 재앙이 내린다는 저주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야박한 것이 아니꼬와서 얼씬도 않던 한 신전을 꽉 메운 사람들은 그래도 양반이었고50, 많은 사람들이 푹푹 찌는 여름 피난을 노숙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이 고통스런 피난 생활은 성벽 안에 살던 아테나이 시민들과 그 성벽 밖에서 들어온 피난민 모두에게 불편함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를 쌓아 갔는데, 물론 피난민들이 더욱 심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4.39. 처음 환자가 생기자 의사들이 간호하는 사람들과 함께 돌보아 주었는데, 환자와 함께 그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환자에게서 간호하는 가족에게 옮겨가 한 집안이 죽어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병이 옮겨 올까 두려워서 병자들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려는 의사들이나 조금이라도 덕행을 베풀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희생당해 나가자 환자가 있는 집은 빈집처럼 되어 환자 혼자 죽어 가야 했습니다. 약한 사람을 도와야 된다는 덕행의 가치가 죽음 앞에 외면당하고 있었습니다. 신들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이 신을 숭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신을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이나 무차별적으로 모두 죽어 갔기 때문입니다. 신들과의 우호관계를 갖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믿음은 이 재앙이 아테나이에 들이닥쳐 신들과의 우호적인 관계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죽는 사람들이 생기자 처음에 사람들은 비록 피난민 신세로 여러가지가 불비했지만, 아테나이 전통에 따라 장례를 지내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재앙이 몰아 닥치자, 다시 말해 주검들이 너무 많아 산 사람들의 거소를 가득 채우게 되자, 신성이라든가 존엄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장례의 절차도 혼란에 빠졌고, 장례에 필요한 자재들이 부족해지자 나중에는 부끄러움도 체면도 없이 주검들을 다루었습니다. 심지어 남이 준비해 둔 장작으로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주검을 태우거나, 남이 화장하고 있는 곳에 가족의 주검을 던져 놓고 가버리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죽음을 대하는 오랜 전통과 그 속에 담겨 있다고 보아 온 존엄의 가치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4.40. 죽음이 도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자 옛날에는 뭔가 꺼려지는 것이 있어 남이 보지 않을 때나 숨어서 조용하게 움직이던 짓꺼리들을 제법 눈치 볼 필요 없이 드러내어 놓고 예사로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관습이나 도덕심 때문에 스스로를 속박해 답답하게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와 명예를 누리던 한 가족이 모두 죽자, 빈 손으로 살았던 그 친척이 졸지에 부자가 되는 세상에 돈도 젊음도 명예도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나 힘들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하는 것들이 비록 길지 않은 동안이라 해도 그것들을 참고 견디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쾌락을 즐기고 그것이 무엇이든 쾌락에 도움이 된다면 쓸모 있는 좋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의 가치를 죽음이 오기 전에 지금 즐길 수 있느냐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돈, 명예, 도덕, 믿음, 무엇이든지 그것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눈이 바뀌어 갔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이 재앙은 여러분이 삶과 죽음에 대해 새롭게 보도록 바꾸었던 것입니다.

 

('5. 전쟁과 시인'에서 계속)

 

 

 

  1. 이 두 번의 평화조약은 모두 페리클레스 시대에 맺은 것이다. 첫 번째 평화조약은 BC448 페르시아와 맺은 것인데, BC479 크세르크세스의 퇴각을 본 사모스가 페르시아에 대해 반기를 들고, 아테나이가 사모스를 지원하여 벌어진 전쟁을 시초로, 30년 동안이나 간헐적으로 끌어 온 이오니아와 아나톨리아 서안에서의 패권 다툼은, 비록 200척의 함대가 전멸하여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헬라스가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아이귑토스의 독립에 지원군을 보내는 일까지 벌어지자, 아테나이와 페르시아는 현상을 고착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보고, 아나톨리나 남부의 파세니스를 기점으로 그 서쪽은 아테나이가, 퀴프로스를 포함한 아이귑토스의 연안은 페르시아가 관활키로 하고 조약을 체결하였다. 두 번째 평화조약은 BC445 스파르테와 향후 30년 간 서로 당시 세력 분포를 유지하기로 하고 맺은 것인데, 이 역시 아테나이가 헬라스 본토에 대한 세력 확장을 꾀해, 스파르테의 동맹도시들과 끊임없이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이다, 결국 BC446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이끈 스파르테의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침공을 받자,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테 내의 친아테나이파를 움직여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다음은 이 과정에서 있었던 주목해야 할 두 사건이다. BC465 아테나이가 타소스를 침공하자, 스파르테는 마침 엄청난 지진으로 타소스에 대한 지원 약속을 지킬 수 없어, 타소스에 면목을 잃은 데다가, 지진의 여파로 내부 반란을 겪는 등 곤경에 처했을 때, 아테나이의 스파르테를 돕는 문제로 BC475 아테나이의 성벽 재건 문제 다음으로 서로 감정이 상해, 페르시아 침공에 대응해 맺었던 옛 동맹을 파기하고 적대적으로 돌아선 일 하나와, BC459 메가라가 코린토스와의 국경 분쟁에서 스파르테의 적절한 중재를 받지 못하고 몰리게 되자, 펠로폰네소스동맹에서 이탈하여 아테나이에 동맹을 요청했고, 아테나이는 메가라의 니사이아 항이나 메가리스의 산길을 통한 아테나이의 육해 침공로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어, 스파르테의 반발이 눈에 보이는데도 받아들인 일이다. 그후 메가라를 응징하는 스파르테와, 지원하는 아테나이 사이에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5년 간이나 소위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다툼이 헬라스 곳곳은 물론 시켈리아와 아이귑토스까지 돌며 벌어졌고, 결국 메가라가 다시 펠로폰네소스동맹에 복귀함으로써, 아테나이에 대한 공격로를 확보한 스파르테가 아티케로 침공한 끝에 조약 체결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본문으로]
  2. 파르테논 건립 당시부터 아테나이는 도시의 예비비로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에 황금 겉옷을 입혀놓고 있었는데 헬라스 내전 도중 신상의 황금 겉옷을 벗겨 전비로 충당해야 했고, 그후 여신은 오늘날까지 두 번 다시 황금 옷을 입을 수 없었다. [본문으로]
  3. 페리크레스는 적이 살아남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것 때문에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그것 때문에 동맹 간에 전열이 흩으져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단언했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는데,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스파르테의 지휘 아래 전쟁 내내 일사분란했던 반면, 오히려 아테나이는 무거운 전비 염출을 견디지 못한 동맹의 이탈에 더해,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정치적 공격과 알키비아데스의 스파르테 부역, 민주정 붕괴와 과두정 수립의 정변, 그리고 승전한 10명의 장군 처형 같은 내부분열로 자멸하였다. [본문으로]
  4. 투키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140-144. [본문으로]
  5. 아리스토파네스가 클레온으로부터 희극에서 실명으로 비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어겼다고 고발당했을 때 겪은 고초 가운데 제일 심했던 것이 아이기나의 농장 때문에 그가 아테나이 시민이 아니라는 고발이 함께 들어온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파라바시스 가운데서(659-660) 클레온의 음모로 돌리고 있는데, 아마 클레온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아테나이 시민이 아니라 아이기스 시민으로 몰아, 아테나이에서 내쫓아 버릴 속셈이었던 모양이다. [본문으로]
  6. BC499 다레이오스1세는 페르시아 전역에 바빌로니아 태음태양력(19년 7달 치윤)을 사용하도록 했다. [본문으로]
  7. BC421 봄 헬라스 내전이 터지고 꼭 10년이 지나, 스파르테와 아테나이는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의 같은 발효일을 두고 두 가지 날짜로 표시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스파르테는 플레이스톨라스 감독관의 해, 아르테미시온 달, 27일부터이고, 아테나이는 알카이오스 아르콘 해, 엘라페볼리온 달, 25일부터이다. 이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자기가 집권자 이름 해나 달력 달의 이름을 쓰지 않고, 전쟁이 일어난 후 몇 해째 여름 겨울로 나누어 시기를 명시한 것에 대한 정확성을 자랑하고 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5권1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투키디데스가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단순히 여름과 겨울로 나누지 않고, 아테나이나 스파르테의 달력에 따라 달 이름을 같이 적었다면, 오늘날의 달력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에 아테나이가 쓰던 달력의 개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날수는 초승달을 기준 날로 1일에서 29일까지의 빈달空月과 30일 까지의 찬달滿月을 번갈아 두었고, 둘째, 달수는 12달로 한 해로 하되, 해의 움직임을 따르기 위해 8년 주기로 세 번 윤달을 넣었다. 그 열두 달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헤카톰바이온, 2-메타게이트니온, 3-보에드로미온, 4-퓌아놉시안, 5-마이마크테리온, 6-포시데온, 윤달-포시데온2, 7-가멜리온, 8-안테스테리온, 9-엘라페볼리온, 10-모우니키온, 11-타르겔리온, 12-스키로포리온. 그리고 셋째, 햇수는 매년 하지(계절의 변화 때문에 태양을 기준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를 기준으로 하되, 초승달로 정하는 날수에 맞추는 방식으로, 하지가 지난 첫 초승달의 날을 새해로 삼아, 그 해의 대표 아르콘의 이름을 햇수로 표시하는 방법과, BC776 첫 올륌피아드가 열린 뒤로는 제전의 횟수에 몇 번째 해(1,2,3,4)로 표시하는 방법, 예를 들면 '100.2 OE'는 '100번째 올림피아드의 두 번째해'를 가리켜, 바로 BC379인데, 'P.n OE'(기원전 서력 776-4(P-1)-(n-1)이다.)으로 표기하는 방법과, 그리고 셋째, 500인 평의회의 각 부족 대표자 프뤼타니의 활동 날짜와(기간은 35-36일 간) 그의 출신 부락의 이름을 적는 방법이었다. [본문으로]
  8. 헤시오도스,'일과 나날들'노동과 계절에 대한 이야기,'아틀라스의 딸들인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아침에 떠오르면, 수확을 시작하고, 그 별들이 아침에 지면 쟁기질을 시작하라', '열기를 누그러뜨리고 제우스가 가을비를 내려 주시며, 사람의 피부가 훨씬 가벼움을 느끼는 것은 시리우스가 낮에는 단지 잠시 동안만 인간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고, 오히려 밤 시간에 더 오래 빛나기 때문이다. 이때 나무를 도끼로 쓰러뜨려도 벌레 먹지 않는 좋은 시기이고, 나무들이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성장을 멈추는 때다.'.... [본문으로]
  9. BC590경 솔론은 1년을 12달로 명시해서 정하고, 한 달을 큰달 30일과 작은달 29일로 번갈아 넣어 1년을 354일로 정했다. 그리고 2년마다 큰달 하나를 넣던 관습은 그대로 시행했다. 따라서 2년의 날수는 738일이 되어 태양 회기일수 730.5일보다 2년마다 7.5일이 길어져, 계절이 달력보다 앞당겨져 왔다. [본문으로]
  10. 솔론의 달력을 쓴지 70년이 되어 가던 BC520경에 이르자, 늘어난 날수가 쌓여 여름과 겨울이 뒤바뀌어 있었고, 테네도스(Tenedos,지금의 터키 보츠카아다Bozcaada 섬)의 클레오스트라토스(Cleostratos,c.520-432BC,바뷜론의 영향을 받은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astronomer)는 8년마다 큰달 한 달을 빼는 역치윤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8년이 2922일 99달이 되는 '8년주기octaeteris'가 만들어졌다. [본문으로]
  11. 결국 아테나이 사람들은 올륌픽 주기와 맞춘 8년 주기 달력을 쓰면서 계절과 달력을 맞추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한달을 빼는 역치윤으로 달력을 만들어 썼다. [본문으로]
  12. BC432 메톤과 에우크테몬은 19년 동안 3,5,8,11,13,16,19 번째 해에 큰달을 하나씩 넣는 치윤법을 주장하였다. 메톤의 치윤법은 BC7세기에 사용하기 시작한 중국의 장법이나 인도의 치윤법, 한 세기 늦은 BC6세기부터 사용한 바빌로니아의 치윤법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본문으로]
  13. 아리스토파네스,'구름'615-619. [본문으로]
  14. 프로타고라스와아낙사고라스에 대해 아테나이 사람들이 내린 처분에 대해서는 [본문으로]
  15. 에피담노스와 케르퀴라는 내분으로 서로를 죽이다 도시가 파멸하였으며, 사모스는 과두정파를 완전히 몰아낸 다음에 민주정 일파의 정치 권력이 도시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들 도시들의 정파들은 한결같이 그들보다 훨씬 힘이 센 외부의 힘을 빌려 그들의 승리를 도모하였기 때문에, 어느 한 정파는 이겨서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만, 도시는 그 정파를 지원한 힘 센 도시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본문으로]
  16. 플라톤,'향연'220c. [본문으로]
  17. BC431에 발발한 소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가리키는데,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과 아테나이 사람들 간의 전쟁,ho polemos ton peloponnesion kai athenaion'이라 불렀고, 이 글에서는 '전체 헬라스 내전'으로 부른다. [본문으로]
  18.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140(1),144(1). [본문으로]
  19. BC445에 체결한 30년 현상유지 조약을 말한다. [본문으로]
  20. 헤로도토스가 아나톨리아와 헬레스폰토스 그리고 흑해를 연결하는 뤼디아의 패망을 페르시아의 헬라스 침공의 원인遠因으로 보고 그의 책 '역사'의 실마리를 뤼디아에서 풀어나갔듯,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실마리를 에피담노스라는 아주 작은 도시에서 그 도시민끼리(평민과 귀족) 정치 체제를 둘러싸고 벌였던 불화에서 찾았다. [본문으로]
  21. 도시 성립의 연륜이 짧은 한 작은 도시에서 정치적인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의 다툼이 자체적으로 타협을 이루지 못해 외부의 힘을 빌릴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BC436 에피담노스 평민파의 귀족 축출로 시작한 작은 도시에서의 정변은 평민파를 지원하는 코린토스와 귀족들을 지원하는 케르퀴라 간의 다툼으로 번졌고, BC435 케르퀴라 섬의 레우킴네 곶에서의 해전을 거쳐, BC433에는 코린토스를 지원하는 도시들과 케르퀴라를 지원하는 아테나이 간의 싸움으로 확대되어 갔고, 코린토스를 도운 메가라에 대한 아테나이의 응징에 스파르테가 개입하면서, 소위 '펠레폰네소스 전쟁'이라는 헬라스 도시들 간의 27년 반에 걸친 긴 내전이 발발하였다.(투퀴디데스,'펠레폰네소스 전쟁사'제1권24-88,118-146) [본문으로]
  22. 에피담노스는 정치체제를 놓고 벌인 정파 간의 싸움이었는데, 그들이 불러들인 외세는 그들의 정치체제와는 상관없이 도시간의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본문으로]
  23. 에피담노스 정파 다툼은 두 도시 코린토스와 케르퀴의 싸움으로 번져 갔고, 이 두시는 또 다른 도시들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24. 스파르테의 확실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케르퀴라는 펠레폰네소스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영리하게도 스파르테와는 언제나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아테나이를 개입시키려 했다. 그들이 아테나이를 설득할 수 있었던 무기는 자칫 스파르테의 힘이 될 함대와, 그 섬이 이탈리아로 가는 항로의 징검다리라는 점이었다. [본문으로]
  25. BC459 아테나이는 메가라의 동맹 요청을 받아들일 경우 스파르테가 응징해 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메가라가 스파르테의 침공로를 차단해 줄 것으로 믿고 메가라와 동맹을 맺었다가 15년 동안이나 스파르테와 전쟁을 벌여야 했던 교훈을 잊고 있다. [본문으로]
  26. 헬라스에서 동맹은 공수동맹symmakia였는데, BC433 아테나이는 약삭빠르게 케르퀴라와 방어동맹epimakia을 맺음으로써, 평화조약을 어길 생각이 없음을 밝힐 생각이었지만, 문제는 아테나이의 자기 해석이 아니라, 코린토스나 스파르테가 어떤 관점에서 아테나이의 이런 태도를 평가하느냐에 달린 것이었다. [본문으로]
  27.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33(2),35(5). 케르퀴라가 처음 코린토스를 에피담노스에서 몰아내기 위해 판견한 함선은 40척이었고, 에우킴메 해전에 출격한 함선은 그 40척을 에피담노스 포위에 그냥 두고도 80척이었고, 이에 대응한 코린토스는 그들의 함선 30척에 지원 받은 38척을 더해 모두 68척이었다. [본문으로]
  28. 같은 책,제1권32(5),36 [본문으로]
  29. 메가라는 코린토스에 레우킴메 해전에는 10척의 함선을, 쉬보타 해전에는 12척의 함선을 보내 지원했다. [본문으로]
  30. 페리클레스는 케르퀴라와의 방어동맹을 민회가 승인하는 것을 아테나이 사람들 특히 민주정파이면서 해양 세력인 다수가 전쟁을 선호하고 있다는 신호로 본 것 같다. 이에 자신을 얻은 그는 이어서 포테이다이아 포위, 메가라 경제 봉쇄를 통해 사실 상의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본문으로]
  31. 아테나이는 이때부터 헬라스 내전이 난 두 번째 해에 그 도시를 접수할 때까지 포테이다이아 포위에 들인 돈이 아테나이 가용 전비의 1/3인 2000탈란트 정도였다. [본문으로]
  32. 앞에서 시정의 건달패도 손익을 따져 손해인 싸움일지라도 건달패 대장으로서의 자존심과 명예의 문제로 싸운다고 한 것에 유의하라. [본문으로]
  33. 투키디데스,'헬레폰네소스 전쟁사'제1권81(6). [본문으로]
  34. 투퀴디데스,'펠레폰네소스 전쟁사'제1권68-71. [본문으로]
  35.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2권2-5. [본문으로]
  36. BC431 [본문으로]
  37. 아리스파네스,'아카르나이 사람들'1-42. 아리스토파네스는 전쟁 때문에 아티케에서 아테나이 성벽 안으로 피난 온 디카이오폴리스의 독백으로 그의 연극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프롤로그를 여는데, 40행이 넘는 이 디카이오폴리스의 이 독백이 아티케 피난민들의 고충을 모두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38. 투퀴디데스,'펠레폰네소스 전쟁사'제1권 143(5). 페리클레스는 아티케의 농부들로는 전쟁을 이끌 수 없으며, 오로지 노꾼들과 무역으로 먹고 사는 상인들이 전쟁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페리클레스에게 아티케의 농부들은 바다로 나가려는 것을 막는 아테나이의 닻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39. 스파르테는 전쟁이 뜻하지 않게 테바이의 플라타이아이에 대한 비밀 작전으로 일어나게 된 데 대해 당혹감과 낭패감을 감출 수 없었고, 심하게 말해서 플라타이아이 사람들에게 일말의 죄의식마져 느끼고 있었다. 이런 스파르테의 심중은 전쟁 초반 내내 특히 플라타이아이와 관련된 일이면 어김없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보이오티아의 작은 도시 플라타이아이가 보여 주었던 페르시아 항쟁의 진정성과 참전 의지에 감명을 받은 스파르테가 플라타이아이에 대한 수호의 맹약을 전할 정도여서, 그런 플라타이아이를 제일 먼저 쳐야 하는 것은 스파르테가 당혹하여 낭패에 빠지기 딱 좋은 일이었다.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2권71(2),72(1),제3권54(3)를 보라.) [본문으로]
  40. 도날드 케이건은 그의 책 '펠레폰네소스 전쟁사'(허승욱,박재욱 옮김,까치,pp102-3)에서 전쟁 첫 해의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손익을 계산해 보았는데, 스파르테는 메토네가 공격받은 것, 코린토스는 아카르나니아에서 작은 도시 하나를 잃은 것, 메가라가 아타니이 함대의 공격으로 제법 넓은 지역에서 유린된 것, 그리고 아이기나를 잃은 것이었고, 아테나이는 아티케의 올리브와 포도 농장 등이 파괴되어 식량 수입과의 무역 균형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과 포테이다이아 포위 작전으로 매년 2천탈란트가 지출된 것을 주요 손실로 꼽고 있다. [본문으로]
  41.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2권35-46 가운데서 발췌. [본문으로]
  42.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페리클레스의 자기 도취가 도시의 이성을 잃게 만들고, 그래서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을 야기했다고 보고, 그의 희극 '"아카르나이 사람들"'(515-522,532-539)과 '"평화"'(601-609,615-628)에서 페리클레스와 메가라 칙령을 희극적 대치물 만들어 전쟁 야기자로 공격하고 있는데, 이처럼 아테나이 사람들 가운데는 전쟁이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곤궁(페이디아스, 프로타고라스, 아스파시아, 아낙사고라스로 이어진 자기 주변에 대한 정적들의 재판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음(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전')을 시사하고 있다. [본문으로]
  43. BC430 [본문으로]
  44. BC430-426에 걸쳐 아테나이에 오늘날의 페스트로 여겨지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아테나이 전체 인구의 1/3이 병사했다. 급격한 인구의 감소는 전력의 감소를 의미했는데, 용병과 용역에 의한 전력 충당은 급격한 전비의 상승을 가져왔고, 전비갹출에 시달리던 동맹들의 이탈을 초래했음에도, 아테나이는 놀라운 의지로 스무 해나 더 전쟁을 수행했다. [본문으로]
  45. 같은 책,제1권60-63,65,제2권67. [본문으로]
  46. BC429 [본문으로]
  47. 같은 책,제2권60(5). 페리클레스가 스스로를 평가한 말. [본문으로]
  48. 아테나이는 개전 초 포테이다이이 포위 작전 2년 동안에 매년 2천 탈란트를 지불해, 벌써 가용 전쟁 비용의 반의 반을 넘게 사용했고, 역병으로 또 그만큼의 비용을 지출하여 페리클레스가 죽었을 때는 예비비 일천 탈란트를 포함하여 반(3,300탈란트)밖에 남지 않았다. 앞의 3년처럼 전쟁을 치른다면 2년 정도 버틸 수 있었을 뿐이었다. [본문으로]
  49. BC428 [본문으로]
  50. 아크로폴리스 자락의 펠라르기콘pelargikon이라는 성소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퓌티아의 저주가 붙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와는 달리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이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