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0.개구리-1)
10. "개구리들"
"개구리들"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중에 그 연극의 첫 도입부에서 유일하게 어떤 신을 보고 듣는다. 그것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가운데 유일하게 그 연극의 사건이 그 신의 구상에 의해 진행된다. 그것이 주인과 노예 사이의 대화로 막이 열린다는 사실로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모든 연극들과는 다르다. 주인은 극장의 신인 디오뉘소스 그 자신이다. 그의 노예 크산티아스는 그에게 관객들이 습관적으로 웃을 것들 중 하나를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디오뉘소스는 그가 혐오스럽게 느끼는 표현을 쓰는 것만 빼고 그 마음대로 하라고 일임한다. 그가 금지하는 것이 야비한 것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 있는 약간의 파라바시스로부터 알고 있는 것과의 차이를 상기시키는데; 디오뉘소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보통 때 말했던 것들을 선호한다고 언급한다. 아무튼 아리스토파네스는 디오뉘소스가 키워냈다("구름" 519). "개구리들"은 확실히 연극에서 출연자가 관객들이 웃게 하겠다는 생각을 무엇으로 나타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유일한 연극이다. 이것은 "개구리들"이 단순하게 불평이나 신음 소리로 막을 올리지 않는 유일한 희극이라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크산티아스는 농담이 하고 싶어 죽겠는데, 비록 그는 그 짐을 당나귀를 타고 운반하고 점잖은 그의 주인은 걷지만, 그가 운반하는 짐으로 생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크산티아스는 어깨의 통증에 대해 불평한다. 그 자신이 운반되고 있으면서 크산티아스가 어떻게 어떤 것을 운반하고 있을 수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크산티아스는 그가 당나귀에 의해 운반되고 있을 때 받은 어떤 도움도 부인하지만, 그 통증의 어려움이 해결된다 해도, 디오뉘소스가 말할 차례에서 그가 왜 당나귀를 운반하지 않는가라고 의아해 하는데도, 그를 뒤따라가는 것은 별 볼 일 없는 짓이다. 디오뉘소스는 그가 크산티아스보다 더 좋은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보다 더 나은 논쟁자이어서; 그는 주인 대접을 받아야 한다. "개구리들"의 초입부에 불평이 빠져 있지 않지만, 불평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농담이나 혹은 웃음거리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웃는 것은 고통당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그 반대는 진실이 아니다. 하여튼 디오뉘소스는 처음 나타날 때 올바른 종류의 희극에 관심을 가진 듯하더니, 곧 무엇보다 올바른 비극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디오뉘소스는 크산티아스에게 당나귀에서 내리라고 명령하는데, 그것을 운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 신의 첫 번째 목적지인 헤라클레스의 집에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디오뉘소스는 사자 가죽을 걸치고 커다란 채찍을 든 채 거칠게 문을 두드리고, 헤라클레스 스스로 문을 열어, 그는 분명히 하인이 없는데; "아카르나이 사람들"에 나오는 에우리피데스와 "구름"에서 소크라테스가 나오는 각각의 상응하는 장면들을 대비해 볼 때, 그는 확실하게 빈둥거리고 있다. 크산티아스에게는 말하지 않은 디오뉘소스의 기대와는 반대로, 헤라클레스는 그의 이복형제가 나타나는 것에 놀라지는 않지만, 참을 수 없는 웃음에 빠지는데, 디오뉘소스가 헤라클레스의 역활을 위해 옷을 입고 있을 때 자기의 여자 같은 옷들을 벗어 버리는 것을 잊었었기 때문이다. 디오뉘소스는 명백히 그냥 헤라클레스에게 간 것이 아니라, 마치 디카이오폴리스가 에우리피데스에게 갔듯이, 또한 에우리피데스가 아가톤에게 갔듯이, 가면을 빌리러 갔고; 극장의 신은 모든 종류의 가면들을 가지고 있다. 헤라클레스가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 여행했느냐고 묻자, 디오뉘소스는 자기가 아르기누사이의 해전에 참여했었다고 대답한다: 사람이든 신이든 헤라클레스식의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반드시 많은 아테네 시민들이나 노예들조차도 행했던 것을 행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의 군사적 명예에 대한 겉치레는 마찬가지로 그가 가진 어떤 다른 성격들은 폴스타프Sir. John Falstaff of Shakespeare의 징조를 보인다. 극장의 신은 싸움꾼인 헤라클레스에서 반대되는 깃대 아래 있다. 비록 "개구리들"에서의 극중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는 배역은 신이지만, 그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에서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배역은 반드시 아테네 시민이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규칙에 따른다. 그가 헤라클레스에게 말하기를, 그가 아르기누사이로 가는 혹은 그곳에서 오는 군함에 있었을 때, 에우리피데스의 "안드로메다"를 읽었고, 그리고 그의 가슴은 죽은 작가를 위한 말할 수 없이 강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어떤 인간도(특히 헤라클레스는 아니다)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데려오기 위하여 하데스로 내려가는 것을 단념시킬 수 없는데 아직도 살아 있는 작가들은 나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디오뉘소스를 본성적으로 경멸하는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의 동생이 에우리피데스를 좋아하는 것을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왜 차라리 에우리피데스보다도 소포클레스를 하데스에서 다시 데려오려 않느냐고 묻는다: 아이스퀼로스를 다시 데려오는 것은 고려의 대상도 아니다. 디오뉘소스가 에우리피데스는 좋아하면서도 소포클레스를 좋아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이란 그가 속한 곳에서 특히 죽었다면 하데스에서 도망가려 노력하기 위해 반드시 에우리피데스처럼 악한이어야 하는데, 그러나 소포클레스는 이곳에서는 온화한 성격이었으며(그래서 꽉차고 정의롭고), 그리고 저곳에서도 온화한 성격이다(그래서 꽉차고 정의롭다). 헤라클레스는 디오뉘소스의 주목을 또 다른 비극작가들에로 이끄는데; 그들 가운데 에우리피데스를 찬양하는 디오뉘소스도 역시 찬양하는 아가톤이 있지만, 그러나 그가 보기에 그를 에우리피데스에 견줄 수조차 없다. 디오뉘소스는 그는 좋아서 미치는데도 헤라클레스는 나쁘다고 전적으로 거부하는 "시간의 발자욱"과 같은 위태로운 표현을 말할 수 있는 풍성한 본성을 가진 작가는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새들"에서 그렇게 초라하게 보이는 헤라클레스는 디오뉘소스의 심취하는 모습을 대하자, 마치 카이레폰이 "말벌들"에서 필레클레온의 마지막 광기를 대했을 때 법과 질서의 편에 서는 것으로 나타나듯이, 술이 확 깬 것 같은 냉정 그 자체이다. 디오뉘소스가 볼 때 헤라클레스는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시에 대한 이해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방문의 본래 목적으로 돌아선다. 하데스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이상 그는 헤라클레스의 안내가 필요한데 왜냐하면 그는 하데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디오뉘소스와 하데스는 똑같다라고 하는 것에 진실은 없다<주1>. 디오뉘소스는 스스로가 유약하고 아니면 편안한 것을 좋아해서 더욱 특별하게 헤라클레스의 안내가 필요하고; 그는 가장 즐겁게 내려가는 길과, 또 그가 케르베로스를 데리러 내려갔었을 때, 그 주인공이 이용하도록 해 주었던 하데스의 접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그는 그 아래에 가 있는 동안, 헤라클레스처럼 여겨지고 대접 받기 위해 그 자신 사자 가죽과 큰 채찍을 마련하였다. 그의 유약함이 왜 그가 크산티아스를 동행할 필요가 있는지 또한 설명해 주는데; 그는 제법되는 양의 짐이 필요하고, 그래서 그것을 운반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가 에우리피데스를 사랑하는 것도 그의 유약함이 그 밑에 깔린 것이 아닌가 의문스럽다. 헤라클레스는 그의 미친 것 같은 과감함에 놀라나 디오뉘소스의 마음은 이미 굳혀져 있고; 그의 극장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대단해 모든 그의 겁쟁이 같은 면들이 그 사랑 앞에 무력하다. 헤라클레스가 케르베로스를 데려오려고 하데스로 내려간 것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몰렸기 때문이었지만, 디오뉘소스가 에우리피데스를 데리러 하데스로 내려가는 것은 그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디오뉘소스는 헤라클레스가 하데스로 가는 길로 그에게 제안한 세 가지 자살 방법 중에 어느 것도 고려해 보길 거절하는데, 그는 돌아오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헤라클레스가 내려갔던 그 길을 배우고 싶어 하는데 헤라클레스는 돌아왔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그에게 크고 심연처럼 깊은 호수에 대한 섬뜩한 내용을 전하는데, 수많은 뱀들과 가장 끔직한 야수들, 그리고 불결한 뻘과 넘치는 하수구에, 가장 불의한 사람들이(그들 중에는 어머니 폭행자도 있는데 에우리피데스는 없다) 던져져 있는 그 호수는 카론의 작은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그러나 디오뉘소스는 두렵지 않다. 그는 하데스의 공포를 믿지 않는 것인가? 그는 확실히 여행의 모든 편의를 찾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비록 헤라클레스는 그가 하데스에서 받은 대접에 대해 과묵하지만, 디오뉘소스가 그런 공포스러운 곳들을 지나면, 태양과 같은 가장 아름다운 빛 속에 축복 받은 그곳에 입회한 남자들과 여자들을 보게 될 것인데, 그들은 하이데스의 대문 가까이서 살기 때문에 그가 알고 싶은 필요한 것들을 모두 그에게 말해 줄 것이라고 덧붙이는 진실함을 보인다. 이렇게 많은 말을 한 다음 헤라클레스는 더 이상 그가 여행을 못하도록 그를 단념시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디오뉘소스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한다. 그는 그에게 왜 하데스에서 그와 같이 보이고 싶어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이 이상한 희망에 대해 이런 설명이 어떨지? 디오뉘소스는 에우리피데스를 볼 수 있기 위해 그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그는 그 아래에 있는 신들이 가장 좋은 작가를 데리고 있기를 간절하게 바란다고 예상하기 때문에, 마치 헤라클레스가 케르베로스를 훔쳤듯이, 반드시 에우리피데스를 훔쳐야 하고; 헤라클레스가 어떤 것을 의심을 했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에우리피데스를 훔친다고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고; 헤라클레스의 모습이 유일하게, 다시 말해 하데스에서는 아무도 헤라클레스 차림의 사람이 작가를 찾는다는 의심을 불러 일으킬 수 없다.
크산티아스는 물론 디오뉘소스와 헤라클레스 간의 대화에서 제외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당연히 그 제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세 번이나 그에게 주목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였는데; 여하튼 그의 어깨는 아직 아프다. 그는 그의 주인이 그에게 주목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데; 디오뉘소스는 친절하지는 않아도 쉽게 쉽게 가는 주인이어서, 그 노예와 평등이라는 기초 위에 살아간다. 그는 즉시 그를 지상에 남겨 두고 그 대신에 짐꾼으로 이 상태로 하데스로 가는 송장 하나를 고용하라는 크산티아스의 요청에 응한다. 디오뉘소스는 분별 있게 방금 운반되어져 온 송장이 요구하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지불하기를 거부하고, 그래서 겨우 분별이 생긴 크산티아스가 짐을 하데스까지 기꺼이 운반하겠다고 말한다.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라기보다는 친구들 관계를 닮았다. 그 밖에도 하데스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어깨가 아픈 것이 크산티아스로 하여금 그의 주인이 그가 없이 내려가도록 하는 유혹에 빠지게 했었다.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는 카론의 배를 타고 건너가는 호수에 도착한다. 카론은 크산티아스가 그 배에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아테네의 법에 따라 그는 노예인데다가, 그가 솔직히 인정하였듯이 그가 해전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의 주인과는 달리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불쌍한 친구는 짐을 진 채 호수가를 걷게 되는데; 이는 마치 자유인과 노예의 차이가 지상에서 그렇듯이 하데스에서도 중요할 것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카론의 버릇없는 명령에 따라서 해군의 경험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디오뉘소스는 배를 저어야 한다. 카론은 '개구리들'의 노래를 들으면 그 일이 쉬워질 것이라며 그를 위로하는데 그 노래는 그들이 곧 들을 것이다. '개구리들'은 그 제우스의 아들에게 바치는 아테네 축제에서 디오뉘소스의 명예를 위해 그들이 읊었던 아름다움의 노래를 노래한다. 그들은 그 신이 이제 그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들은 디오뉘소스를 카론이 그런 것처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그러나 그들은 카론과는 다르게 디오뉘소스에게 관심을 가진다. 디오뉘소스가 '개구리들'의 음악을 혐오하는데도 계속 노래하면서, 무우사들, 판, 또 아폴론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디오뉘소스의 예민한 귀가 '개구리들'의 개굴거리는 소리로 고통을 받는 반면, 그의 예민한 손은 노를 젓느라 고통당한다. '개구리들'이 디오뉘소스를 얼마나 많이 짜증나게 굴었는지 알게 되자, 그들은 일부러 더 그를 짜증나게 한다. 그래서 디오뉘소스는 그들을 잠잠히 하려고 되려 개골 소리를 내는데 그는 그것으로 성공한다. 그래서 코러스와 연극의 내용에 책임이 있는 한 개인과의 경쟁이 벌어지고, 그 경쟁은 "아카르나이 사람들", "말벌들", 그리고 "새들"에서와 같이 "주인공"의 승리로 끝난다. 그렇지만 "개구리들"에서는 변론으로 하는 시합도 아니고, 연극의 중간부에서 벌어지지도 않는다. '개구리들"에서 주인공과 코러스 간의 불화는 단지 코러스가 주인공을 알아보는 데에 실패하는 것에 기인한다. 그 실패가 디오뉘소스의 변장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디오뉘소스가 '개구리들'과의 시합에서 이기는 것이 그의 여행에 있어 길조라고 간주할지도 모르나 ,디오뉘소스가 '개구리들'을 이겼다는 말은 오직 그 혼자의 이야기라는 것도 말해야 할 것인데; 그가 '개구리들'에게 이겼다고 주장하는 순간이 바로 카론의 배가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이어서, 즉 그 사이 '개구리들'의 지역을 지나쳤던 것이다.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가 호수의 저 먼 건너쪽에서 만났을 때 각기 헤라클레스가 말했던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어쨌든 디오뉘소스는 노를 저어 호수를 건너 오는 동안 그들을 보았다는 어떤 표시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크산티아스는 계속 걸어가자고 하는데, 그들이 있는 장소가 헤라클레스에 의하면 괴물 야수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에 의하면, 괴물 야수의 지역은 극악무도한 죄인들의 장소에 도달하기 전에 있다. 디오뉘소스는 이제 헤라클레스가 하데스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주었거나,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그래서 그가 미워하는 에우리피데스를 다시 데려오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 자신이 하데스에 내려간 것을 부풀리기 위해 하데스의 공포를 과장했다고 확신한다. 디오뉘소스가 경험한 유일한 하데스의 공포는 '개구리들'이었고 그는 그것들을 쉽사리 극복했다. 전적으로 비밀이지만 이제 그는 하데스의 진짜 괴물을 만나 보고 싶다. 크신티아스는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어 엠푸사를 보자고 주장한다. 디오뉘소스는 그것을 보지 않는데, 그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너무 겁을 먹어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나 겁을 먹어서 객석의 첫 줄에 앉은 그의 사제에게 그를 구해 달라고 촉구한다. 그리하여 그가 작가의 대변인이 되지 않았는데도 극적 환상을 깬다(297; cf. 276). 그러나 공포는- 오직 디오뉘소스가 겁 먹는 하데스의 공포- 곧 지나간다. 그 신은 자유스레 어느 신이 그를 망치려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크산티아스는 요컨데 궁금한 그 신이란 에우리피데스를 원하는 디오뉘소스의 욕구이거나, 아니면 에우리피데스가 디오뉘소스에게 위험하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해석은 별 효과가 없는데, 이 순간에 주인과 노예는 피리를 연주하는 소리를 듣고 횃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포의 지역을 지나 축복받은 자들이 입회한 지역에 들어섰다. 그들은 입회한 자들,즉 주된 코러스의 행진을 보기 위해 옆으로 물러선다. "개구리들"은 서로가 부딪치는("뤼시스트라테"에서 남자들 코러스와 여자들 코러스처럼) 일 없이 서로가 이어가는 두 코러스를 가진 유일한 연극이다. 이 연극은 주된 코러스로 그 이름이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개구리들'의 코러스로 불려지는데, 그들은 디오뉘소스와 짧은 시합을 가진 뒤 다시 들리지 않는다. 코러스들의 이중성은 하데스의 공포와 하데스에서의 행복이라는 이중성과 상응한다. '개구리들'의 코러스는 있음 직한 하데스의 극악무도한 죄인들, 즉 에우리피데스 찬양자들의 코러스의 자리를 차지 하는데 (771-80), 그것이 불의의 기본을 외치는 극악무도한 죄인들의 코러스, 즉데모스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죽은 뒤에 처벌을 받아도 바뀌지 않는다. 이 연극의 제목은 이러한 있음 직한 불가능성에 대해 주목을 끌게 한다.
하데스 입회자들의 행진은 물론 그들은 여전히 아테네 사람들인데, 살아 있는 엘레우시스 행진을 흉내낸다. 그들은 횃불지기 이아크코스에게 그와 디오뉘소스와의 연관은 어둠 속에 남겨 둔 채, 자기들과 함께 신성하고 명랑한 춤에 동참하라 부른다. 그들은 비입회자들, 즉 반- 무우사들과 정치적 범죄자들을 내보내고; 이 부분 본문에서는 희극에 관련하여 디오뉘소스를 언급하는데; 그들은 세 번이나 희극을 인용하나; 비극은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조롱만 할 뿐 그것으로 별 의미 없이 흉내내는 축제와도 일치한다. 그렇지만 입회자들은 그들 나름으로 디오뉘소스를 위한 경축을 흉내내었던 '개구리들'이 몰랐듯이, 디오뉘소스가 있다는 것을(그의 의도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 없이) 모르고 있다. 하나의 규칙으로 아리스토파네스 연극에서 코러스의 입장을 알리는 노래들과 변론들은 코러스의 극적 기능을- "아르카나이 사람들"의 코러스가 반역자 디카이오폴리스를 추격하는 늙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역할을 하는 것 등을- 엄격히 따르고 있고, 또한 코러스를 희극적인 코러스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구리들"에서는 파로드parode,parodos에서 코러스가 자신을 데메테르의 코러스로 뿐 아니라(384-86), 희극들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하는 연극의 코러스로도(392-93) 소개한다. 입회자들의 코러스는 암묵적으로 디오뉘소스가 하데스에서는 높게 예우 받는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세련된 아테네 사람인 아리스토파네스의 디오뉘소스이든, 아니면 무엇보다 야만인들이 경배하고 그리고 데메테르와 함께 그들에 속하는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 사람들bakchai"의 디오뉘소스든 상관없이(아리스토파네스의 디오뉘소스는 하데스에 있을 때조차 데메테르의 딸을 만나지 않는다), 거기서 환대를 받았었을 것이라고 알려 준다. 디오뉘소스와 크산티아스가 비록 그들 신분으로는 아니지만 코러스에게 알리고 모습을 드러내자, 코러스는 그들에게 몇 사람 아테네 시민들을 놀리는 데(416 ff.), 즉 디오뉘소스의 일을 하는 데 동참하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다. 디오뉘소스가 디오뉘소스로 하데스에 내려왔더라도 하등의 위험이 없었을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가 헤라클레스로 변장한 것은 완전히 불필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가 디오뉘소스로 나타났었다 하더라도, 그 아래의 권력자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에우리피데스를 두고 싶어 한다고 추정하더라도, 그가 작가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작가와 함께 알맞은 기회가 왔을 때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코러스가 아테네 사람 셋을 조롱하고 난 직후, 디오뉘소스는 파로드parodos에서 거론된 주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플루토스의 거처쪽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그가 하데스의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코러스는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를 계속 경축하며, 입회하여 경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둔 행복을 칭송한다. 하데스의 방법에는 완전히 문외한인 디오뉘소스는 어떻게 하데스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 모른다. 크산티아스는 그에게 변장한 모습인 헤라클레스의 방식에 따라 하라고 조언한다. 그에 따라 문을 두드리자, 아이아코스가 문을 열고, 그 자신을 헤라클레스로 그에게 소개한다. 그러자 아이아코스는 "평화"에서 헤르메스가 트뤼가이오스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이하며, 그가 케르베로스를 데리고 달아난 것에 대해 그의 귀에 욕설의 홍수를 퍼붓는다: 이제 그는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인데; 모든 하데스의 공포들이 그에게 풀어져 나오게 될 것이다. 아이아코스는 잘 알려진 하데스의 공포들에 대해 말하는데, 헤라클레스는 아마 재빠르게 철수하여 도망했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디오뉘소스는 전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을 느끼고;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 제일의 비겁자로 경멸하면서 크산티아스가 그를 도우러 와서; 디오뉘소스는 그가 비겁하다는 것은 부인하고, 그러나 그가 크산티아스보다 더욱 용감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는데, 크산티아스는 엠푸사를 두려워하는 만큼은 아이아코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노예보다 더 약삭빠른, 그리고 헤라클레스로 변장하고 하데스로 내려온 것이 비단 불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실수라고 깨달은 그는 크산티아스에게 서로 역활을 바꾸자고 제안하는데; 크산티아스는 헤라클레스의 변장을 할 것이고 또한 그 자신은 짐을 운반하는 노예로 변장할 것이다. 크산티아스는 그의 용감무쌍함을 알아주는 것이 자랑스러워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디오뉘소스는 크산티아스와 평등을 기초로 살아 가는 데 익숙하여 역활의 변경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다음 바로 그들이 하데스의 공포와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페르세포네의 처녀 하인과 대면하는데, 그녀는 헤라클레스를 환영하고, 그가 하데스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말자 페르세포네가 마련한 맛있는 음식을 그에게 대접하기 위하여 그 여신의 집에서 나선 것이며; 그 여신은 명백히 케르베로스를 도둑맞은 것을 분하게 여기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한 피리 부는 소녀와 약간의 춤추는 소녀들이 실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그가 춤추는 소녀들에 대해서 듣자, 크산티아스는 이 초대를 아주 기뻐하며 노예 디오뉘소스에게 그를 따라 짐을 들고 집안으로 오라고 지시한다. 디오뉘소스는 물론 달라진 상황이라 그가 벌렸던 역활의 변경을 철회한다. 크산티아스를 설득하기 위해 그는 굳게 항거하는 그에게 노예이면서 필멸인 그가 헤라클레스라고 믿는 바보같고 정신 나간 사람일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크산티아스는 복종한다. 그는 디오뉘소스가 그의 마음과 역활을 바꾼데 대해 후회하며 살게 될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한다. 아직 디오뉘소스의 신분을 모르는 코러스는 그를 가장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칭송하는데(533,540), 변절자 테라메네스 같은 사람, 상황마다 그에게 맞는 더 무난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디오뉘소스는 이 칭송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것은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디오뉘소스는 에우리피데스를 찬양하고, 그리고 테라메네스는 에우리피데스의 교습생이다(967-70). 디오뉘소스는 왠지 에우리피데스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진짜 하데스의 공포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아이아코스의 분노로부터 페르세포네의 개입으로 구출되었다. 이제 다른 하층의 하데스 거주자들이 아이아코스가 미완으로 남겨둔 일을 맡는다. 두 접대하는 여자가 디오뉘소스를 헤라클레스로 알아보는데, 그 악한은 옛날에 그들 사업장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먹고, 돈을 지불하라고 하니까 지불을 거절하면서 칼로 그 두 여자들을 위협하였는데; 이제 그는 그 잘못에 대한 값을 지불할 것이고; 클레온이 나와, 그가 그를 바로 이날에 정의로 다스릴 것이다. 크산티아스는 디오뉘소스가 그에게서 헤라클레스의 역활을 빼앗아 간 것에 대해 그렇게 빨리 벌 받는 것을 즐거워하며, 그가 그 두 여주인이 처벌하고 싶어 하는 누가 봐도 분명한 헤라클레스임을 확인해 준다. 디오뉘소스는 다시 대단히 겁이 나서, 그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두 여주인이 욕하는 것 정도는 응대하지 않고, 다시 또 크산티아스 노릇이 매우 하고 싶어 하면서 크산티아스가 헤라클레스로 역활하기 바란다. 극단적인 반성과 자기 비하와 그리고 크산티아스로부터 다시는 헤라클레스 역활을 빼앗지 않겠다고 최고로 굳게 맹세하며, 그 노예에게 다시 헤라클레스가 되어 달라 꼬신다. 코라스는 크산티아스에게 부분적인 신 헤라클레스로 행동하라고 촉구한다. 코러스는 크산티아스를 편들고, 아니면 두 여주인에 반하여 오히려 신의 편을 든다. 비록 디오뉘소스를 매우 비겁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여도, 여주인들이 디오뉘소스를 헤라클레스로 여기는 것이 코러스로 하여금 크산티아스가 헤라클레스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고; 코러스가 그들보다 여주인들의 판단을 더 믿고, 혹은 그렇길 바란다면, 코러스는 디오뉘소스의 변장에 속은 것이다. 코러스는 한 쌍의 스트로페에서 디오뉘소스의 다재다능함에 대해 그를 칭송했었기 때문에 그들은 크산티아스를 칭찬하지 않는데; 그들이 디오뉘소스의 월등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디오뉘소스의 행동은 헤라클레스를 위협한 것에 대한 처벌이 사법적 처리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명되어 모두 현명한 것처럼 보이는데, 클레온이 '말벌들'이 부를 때처럼 여주인들의 호출에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아코스가 약간의 노예들을 대동하고 등장하여, 그들에게 크산티아스-헤라클레스를 묶으라고 지시한다. 헤라클레스를 흉내내며 크산티아스는 스스로 싸울 준비를 하지만, 그는 아이아코스의 수하들에 쉽게 제압된다. 얼마간 겁도 나고 얼마간 크산티아스에게 보복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로, 디오뉘소스는 헤라클레스의 잘못에 대해 크산티아스-헤라클레스에게 벌 주어도 좋다고 표시한다. 이에 대해 크산티아스는 디오뉘소스에게 보복하려, 자기가 전에 하데스에 왔었다는 것을 부인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기 노예를(디오뉘소스) 가장 혹독하게 고문하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디오뉘소스에게 너무한 일이어서; 디오뉘소스는 진실하게 그가 제우스의 아들 디오뉘소스이며, 헤라클레스로 알려진 사람은 그의 노예라고 선언한다. 크산티아스는 디오뉘소스의 단언을 부인하며 그것에 집착하고; 그가 만일 신이라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므로 채찍으로 더 많이 때리라고 요구한다. 디오뉘소스가 크산티아스에게 역습한다: 크산티아스 역시 헤라클레스라며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니까, 그는 디오뉘소스가 맞는 만큼 맞아야 한다. 크산티아스는 디오뉘소스의 제안이 공정하다며 받아들인다: 그 둘을 채찍질해서 아이아코스는 어느 누가 신이 아닌지 볼 것인데; 채찍질에 먼저 비명을 지르면 그가 신이 아니다. 디오뉘소스의 제안은 채찍이 다른 고문 수단에 비해 낫기 때문에 그에게 득이고, 크산티아스도 재청한 그 제안은 단련된 노예가 유약한 디오뉘소스보다 고통에 덜 민감할 것이므로 크산티아스도 받아들인다. 크산티아스의 제안에 따라 시험될 것은 엄밀히 말해 채찍질에 대한 둔감성이 아니라, 그 둔감성이 어느 정도냐인데; 신들이 사람들과 다른 것은 (느끼느냐 아니냐라는)종류가 아니라 (얼마나 느끼느냐라는)정도이다. 고통에 대한 민감성은 상처받기 쉬운 약점과 유사해서 그것이 도덕성과 관계가 있게 된다. 여기서 "새들"에서 신들에게 나타난 부도덕성을 기억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7-3)에서 헤라클레스가 사절로 온 장면을 보라). 아이아코스는 크산티아스가 공정하다고 칭찬해서; 그가 그를 헤라클레스로 여기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그를 확실히 인간으로 간주하는데(640,652), 즉 한 사람이 사기치는 것은 채찍질로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크산티아스에게 넘어가서, 아이아코스는 둘 중 하나가 신이라고 추측하는데, 둘이 신들이라 주장하면서 서로가 다른 하나가 신이라는 것을 부인할 경우 둘 가운데 하나는 신이 틀림없다고 그는 추리하는데, 혹시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둘 중 하나가 그가 다루어야 할 헤라클레스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채찍질 시합으로는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고 판명되는데; 만일 채찍질의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신성의 표시라면, 크산티아스도 최소 디오뉘소스와 같은 신이다. 확실히 아이아코스는 채찍질 시합 이전에 크산티아스가 인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합을 하고 나자 더 이상 그것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 두 신성 수험자에게 집안으로 들어가라 지시하여 하이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신들 자기들끼리 누가 둘 가운데 신인지 결정하게 한다. 그의 행동은 마치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에서 여자들이 다른 여자들에게 여자로 알려진 존재는 여자로 변장한 남자일 수 없다는 추론을 근거로 행동했듯이(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9-2)에서 클레이스테네스의 심사 장면을 보라), 신들에게 신으로 알려진 존재는 신으로 변장한 인간일 수 없다는 추론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한 존재가 신인지 아닌지는 신들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을, 혹은 인간들은 또 그 방법으로는 신들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을 것이고; 신은 그 스스로 신이라고 선언한 존재이다deus est quem dei deum esse declarant.(이것은 분명 진정한 신들이나 혹은 추정된 신들의 진실에 대하여 더 깊은 의문으로 이끈다.) 디오뉘소스는 아이아코스가 그들을 채찍질하기 전에 하이데스나 페르세포네의 결정에 맡긴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토를 달며 그의 마지막 지시를 따른다. 이런 토는 디오뉘소스가 채찍질에 둔감하지 않다는 것 뿐 아니라 무엇보다 디오뉘소스 그 자신이 오직 신성을 가리는 진짜 시금석만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디오뉘소스가 자신의 신분을 아이아코스가 채찍질을 하기 전에 밝혔기 때문에 그가 모든 것을 무릅쓰고 자신이 디오뉘소스라는 것을 숨기고 싶어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아주 명확하다: 디오뉘소스는 선견지명이 부족하다. 하데스로 내려갈 때 헤라클레스로 변장하겠다는 그의 결정이 이것을 충분히 보여 주었었고, 그 결정은 그가 노예처럼 채찍을 맞도록 이끌었다. 그로 하여금 하데스로 내려가도록 유도했던 것이- 에우리피데스를 데리고 다시금 돌아온다는 욕구가- 같은 결점의 결과물인지 아닌지를 즉각적으로 의아스럽게 한다: 에우리피데스를 증오하는 바보같은 대식가 헤라클레스가 극장의 신인 자신보다 더 나은 비극들의 심판원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인가? 어리석음과 식탐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스의 용감무쌍함이 무우사들의 일들에 관해서도 특히 "과격한" 작가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사랑이 깔린 디오뉘소스의 성격인 난봉꾼의 유약함보다 더욱 좋은 길잡이는 아니지 않은가? 신들의 적인 에우리피데스를 다시 데려오려 노력하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사람들을 신들에 대한 경외심에서 풀어 주려 시도하였다. 그의 에우리피데스 사랑은 프랑스 혁명에 앞서 일부 프랑스 귀족들이 가졌던 철학자들philosophes 사랑과 닮았다. 디오뉘소스는 그의 유약한 버릇을 그의 사회적 지위라 해야 할 것에 의해 응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런 지위는 채찍질 시합에서 가장 분명한 의문이 되는데, 그것이 그 신성을 총체적으로 의문스럽게 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모두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신들의 신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889-94;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 451). 디오뉘소스는 채찍질을 통해, 에우리피데스의 불경이 그 동류와 그래서 그에게 끼친 손상의 첫 조짐을 느끼고, 그리고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성격의 채찍질을 통해 그의 구원을 위해 그가 동료 신들에게 의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정치적인 교습을 받는다. 그래서 디오뉘소스가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하데스로 내려가는 수고가 그의 그 사랑을 치료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디오뉘소스의 영리함과 과격함은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자들"에서 알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영리함과 과격함에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열등함은 디오뉘소스가 그의 에우리피데스 사랑을 치료하는 데- 그 치료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헤라클레스로 변장하고 하데스로 내려간다는 그의 어리석은 결정의 결과물이다-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계속)
<주1> 디엘스Diels,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Vorsokratiker', fr.1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10-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