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6.평화-3)
6. "평화"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6-2)에서 계속) 트뤼가이오스는 관객에게 신들에게 다녀온 뒤 무엇이 가장 먼저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다리가 아파 고통받고 있고, 그리고 높은 곳에서 보면 땅에서 보는 것보다 사람들이 작아 보이고 덜 나쁘게 보인다. 한번 추정해 본다면 신들이 사람들보다 분개하거나 벌을 받을 이유가 더 적다. 그리스 사람들이 전쟁을 벌리고 또 그 전쟁을 계속 이어가려는 것에 대해 제우스가 벌주는 것의 여려움을 알고 있다. 그의 하인 하나가 집 밖으로 나오다 그의 주인이 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그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묻자, 그는 단지 다리가 아픈 것만 이야기한다.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그 하인은 공중에서 배회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았었는지 계속 물어 간다. 트뤼가이오스는 단지 노래의 전주 부분을 수집하느라 날아 다니던 술의 신에게 바치는 찬양시들을 쓰는 시인의 영혼들을 서넛 보았을 뿐이다. 이것은 하인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 같지 않는데, 그는 사람들이 죽으면 공중에 있는 별이 된다고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뤼가이오스는 그 말이 사실이라며, 예를 들어 키로스의 시인 이온<주13>은 이제 샛별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이 공중에는 시인들만 있다거나- 트뤼가이오스가 시인들만 만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다- 아니면 모든 별들이 시인들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 별들은 사람들이 사는 것과 같이 산다(예를 들면 부자인 별들도 있어서 바깥으로 저녁 먹으러 나간다.). 트뤼가이오스는 별을 생각하며 작가를 패러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지어낸 해와 달의 음모 이야기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오포라의 이름도 하인에게 말하지 않고, 그에게 그녀를 데리고 가서, 그녀에게 신방을 차려주라 넘겨 주고, 그 동안 그는 테오리아를 평의회에다 복원시켜 놓으려 한다. 그 두 여자는 잘 알려진 창녀들인데- 그리고 그들이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창녀촌을 둔 신들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인의 눈에는 신들의 신분에 대하여 적대적인 영향을 주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오포라와 테오리아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신들의 음식이라면 그들도 그 음식이 필요하다. 코로스는 트뤼가이오스의 행복과 회춘에 대하여 늙은이인 그를 부러워한다. 모든 늙은이들이 평화가 오는 것을 통해 회춘하지는 않는데, 그리고 특히 코로스를 구성하는 농부들은 이를 희망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350-52). 평화가 모든 사람을 아름답게 하지는 않는데; 평화는 미화 작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여신이다. 트뤼가이오스의 관점에서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접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풍뎅이의 등에 올라 한 여행을 통해 그리스 사람들을 구했다. 오로지 아름답게 하는 사람만이 미화가 될 자격이 있다. 트뤼가이오스와 코로스 간의 대화가 그를 지체하게 하여 하인이 오포라에 관한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한다. 그가 돌아오자 그 주인은 평의회에 테오리아를 복원시키는 임무가 생각나고, 평의회가 극장에 와 있기 때문에 그는 쉽게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녀는 평의회의 공통의 즐거움이나 혹은 어쩌면 그 의원들 각각의 즐거움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 트뤼가이오스가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매력을 가르킨다 해서 무례하고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총체적으로 외설적인 이 장면은 트뤼가이오스가 더 이상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를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잊어버리게 한다. 외설은 변론이 짧은 것만큼이나 짧게 감추어져 있다. 그의 신부는 버려두고(그는 그녀의 이름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테오리아에 관한 그의 임무를 다한 뒤에 코로스는 그를 착한 시민이라며 칭찬한다- 디카이오폴리스는 '아카르나이 사람들'로부터 착한 시민이라는 칭송을 결코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코로스가 그를 모든 인간의 구원자라고 칭송하자 만족한다. 그러나 코로스가 신들 다음 두 번째이지만 그를 언제나 첫 번째로 여길 것이라는 말을 계속하자, 그는 그 자신이 모든 인간의 구원자이기에는 조금 덜하다면서 그 주장을 내려 놓는다. 코로스가 그의 공적들을 두고 정당하게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다음 단계는 에이레네에게 기도와 제물로 경배하는 것이다. 어쨌든 트뤼가이오스와 그의 하인이 보는 에이레네는 조각상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녀는 그런 것에 대해 말로만 언급되었다(923). 주인은 아테네 사람들이 서로에게 또한 동맹자들에게 양과 같아지도록 제물을 양으로 쓰자고 하인이 말하자 이를 받아 들인다: 누가 모든 그리스 사람들에게,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양 같이 되어야 한다고 소원할 만큼 어리석을 수 있겠는가? 코로스는 경건한 분위기로 반응을 보이고; 지금과 같은 경건함은 이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한 신의 뜻과, 뤼가이오스거나 혹은 그 자리에 있는 신성의 뜻과 일치하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939-46). 희생 제물의 준비가 끝났을 때, 트뤼가이오스와 하인은 여신에게 기도한다. 트뤼가이오스는 간단하고 고결하게 에이레네에게 기도하고, 결혼과 코로스의 여주인으로서 그녀는 그들의 제물을 받아 들인다. 하인은 그녀에게 더 이상 한 남자의 주의를 끌다가 그녀 자신을 숨기는 바람난 여자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기도한다: 에이레네는 전에 평화 애호자들의 소원을 가지고 놀았는데; 하인의 눈에 그녀는 그렇게 생각되는 것만큼 인정스럽지 않다. 트뤼가이오스는 하인의 기도와 연합하여 에이레네에게 특히 그리스 사람들을 어째 좀 신사답게 만들어 주고, 아테네의 시장을- 겨우 디카이오폴리스의 개인 시장 같은 것이 아니라(cf. 999-1005, "아카르나이 사람들" 729 ff.과 860 ff.)- 메가라나 보이티아의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 채우는 것으로 그들을 축복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트뤼가이오스는 위안자의 기술로 진행하고, 그의 하인은 요리 기술의 요구에 맞추어- 에이레네가 도살을 싫어하니까 그녀의 신당이 아닌 곳에서- 양이 희생된다. 코로스는 트뤼가이오스의 완성된 지혜와 기량을 갖춘 대담함과, 성스러운 도시가 파멸되기 이전에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 오뒤세우스와 같은 고통을 받은 것에 대해 칭송한다. 트뤼가이오스는 여신 에이레네의 완벽한 신자이다.
트뤼가이오스와 하인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히에로클레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신탁을 전하는 사람이며, 허풍쟁이처럼 보이고, 실제 허풍쟁이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트뤼가이오스는 그가 평화를 반대한다는 것을 아는 반면, 하인은 그가 고기 냄세를 맡고 온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처음 히에로클레스는 제물은 무엇이며 누구에게 바쳤느냐고 묻고, 이어서 첫 조각을 요구하자 주인과 하인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척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데; 그러나 결국 트뤼가이오스는 에이레네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대답하게 된다. 히에로클레스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신들의 뜻에 무지함에 충격을 받는데; 트뤼가이오스는 단지 히에로클레스가 쓰는 부지불식간의 어이없는 언사가 놀라울 따름이다. 히에로클레스에 따르면, 에이레네가 이제 풀려났던 것은 신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는데; 그 전쟁은 이리가 양과 결혼하기 전에는 끝나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다. 아무도 히에로클레스가 신들의 뜻에 대하여 진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트뤼가이오스보다 잘 알지 못하는데(cf.371-72), 그러나 그 뜻 뒤에 숨은 힘을 재어 놓고 있는 그는 어떻게 해도 흔들리지 않고; 그는 이리가 양과 결혼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만 지적하며 스스로 자제하고 있다. 여러가지 인간들이 그들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한- 그리고 특히, 아테네 사람들이 아테네 사람들로 스파르타 사람들이 스파르타 사람들로 남아 있는 한-, 평화는 없을 것이라는 의미의 신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트뤼가이오스의 조롱으로부터 히에로클레스를 옹호할 수 있을 것이나; 에이레네를 풀어 주는 것은 오로지 신들만이 바꿀 수 있고, 그리고 신들은 사람들이 그들만의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을 위하여 바꾸려 할 어떤 것들의 본성을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인데; 왜냐하면 신들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란 작은 존재이고, 그리하여 사람들끼리의 전쟁은 신들에게는 그것이 인간들 스스로에게 그런 만큼 끔직하게 보이지 않는다. 트뤼가이오스는 신들이 생활을 아름답게 만들고, 그리고 생활의 공포를 줄이는 반면에- 전쟁의 신으로서 보여진 폴레모스조차도 전쟁 그 자체보다는 덜 끔직하다-, 이러한 사실로 그들은 생활의 공포를 늘이거나, 혹은 사람들을 본디 가진 품성보다 더 나쁘게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면 더 간단하게, 어떤 것들이 본성을 지니고 있는 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전쟁의 가능성은 전쟁 사이의 오랜 평화의 시간이 요구된다거나, 혹은 영구불변의 전쟁이 지금 벌어지는 전쟁의 영구불변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 모두 진실이고; 사실은 트뤼가이오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합쳐서 그리스를 다스린다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고 보는데, 그 연합적 지배는 야만인들에 대항해서 연합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도 포함한다. 계속해서 한동안 평화가 아직 이르다고 주술적인 말투로 주장하고 난 후, 히에로클레스는 트뤼가이오스에게 희생물을 바치는 일에 무슨 종류의 신탁에 따랐느냐고 묻는다. 트리가이오스는 평화 애호가 호메로스를 따랐다. 히에로클레스는 호메로스의 권위를 거부하고, 쉬빌라와 바키스의 권위를 옹호한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제물의 고기를 먹자고 요구- 트뤼가이오스에게는 고기가 아직 익지 않았거나, 신으로부터 아직은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요구-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지만; 히에로클레스는 늑대가 양과 결혼하고 나면 바로 그 고기들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허풍쟁이는 곧 이어 도둑으로도 밝혀지는데, 주인과 하인에게 얻어 맞고 쫒겨난다.
평화의 적이 마지막으로 공격한 것을 이긴 것이 특별한 축하를 불러 왔다. 히에로클레스가 억지로 물러난 후 바로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이어진다. "평화"의 두 번째 파라바시스는 첫 번째가 가진 결함 같은 것을 벌충해 주는데; 그것은 스트로페 하나와 안티스트로페 하나, 마찬가지로 에피레마 하나와 안티에피레마 하나로 구성되며; 그것은 완전히 작가나 합창단으로서의 코로스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 없고; 그것은 평화와 시골생활을 칭송하지만, 그것은 에이레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에이레네는 첫 번째 파라바시스에서도 언급이 되지 않는데; 그러나 이것이 이상 하지 않은 것이 두 번째의 것이 연극의 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반면, 첫 번째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아직 평화가 올 때가 멀었다는 히에로클레스의 관점에는 거칠게 동의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무용을 자랑스러워 하며, 그리고 집에서는 사자처럼 행세하다가 신들에 대해서나 혹은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전투에서는 도망치는 아테네 사람들을 경멸한다(cf. "말벌들" 18-19). 여기서 네 번씩이나 신을 언급하는 이들 평범하게 경건한 사람들은 전쟁 애호가가 아닐 뿐 아니라- 헤르메스는 그들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떠넘겼었다-, 추측하건데 신들의 뜻과 카이로스의 뜻이 일치하지 않을 때나, 혹은 카이로스가 그들의 편에 서 있을 때는 신들에 대해서도 전투를 벌릴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다: 신들은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였고, 카이로스는 브라시다스와 클레온이 동시에 죽는 것을 원하였다.
농부들이 그들의 말을 마친 다음으로 수공예 장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두 집단으로 등장한다. 첫 번째 무리는 낫을 만드는 사람과 물병을 만드는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평화와 또한 그것으로 그들의 사업이 번창하게 된 것에 대해 행복해 하며, 그리하여 트뤼가이오스에게 고마워하고; 그들은 그에게 그가 원하는 만큼 그들의 제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트뤼가이오스는 이 무리의 대변자가 세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는 가운데- 히에로클레스는 결코 이름으로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을 결혼 만찬을 같이 들자며 초대한다. 두 번째 무리는 갑옷 장사꾼과, 투구 제작자, 창 만드는 사람, 그리고 장식품 만드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행복하지 않은데, 평화가 그들의 사업을 망쳤기 때문이고; 그들의 제품은 더 이상 어디 쓸 곳도 없고, 그래서 아무 가치도 없으며; 트뤼가이오스는 그저 그들을 조롱할 뿐이다. 그가 전쟁 애호가인 수공예 장인들과 나눈 대화는 그가 평화 애호자 수공예 장인들과 나눈 대화의 다섯 배는 된다. 히에로클레스 역시 기술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 수공예 장인들은 전쟁에 대해 좋아하는 편이다. 히에로클레스의 장면과 수공예 장인들 장면 사이에서 말을 했던 농부들은 이제는 평화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평화 애호자들로 간주할 수 없다. 평화 애호가인 수공예 장인들의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그들은 평화가 아닌 그들의 수입을 사랑한다. 도시는 전쟁을 위한 연합체이다. 전쟁이나 평화에 대해 실제적인 시민들의 자세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트뤼가이오스가 초대한 두 손님의 두 아들들이 소개하는 미래의 시민들의 자세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두 어린 아들들은 트뤼가이오스의 두 어린 딸을 연상시킨다.). 라마코스의 아들인 아들1은 주로 호메로스로부터 따온 전쟁 애호 운문들을 읊으려 시도한다. 트뤼가이오스는 디오뉘소스에 맹세하고 그를 제지하는데; 그는 그가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 것을 칭송한 시를 읊기를 바라는데; 그러나 트뤼가이오스가 바라는 대로 따르려 노력하였지만, 그는 전쟁을 사랑하는 습관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트뤼가이오스는 그를 쫓아 버리고, 약삭빠른 즉 비겁함으로 악명 높은 클레오뉘모스의 아들인 아들2에게 약간 다른 노래를 부르도록 부탁하여, 그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다. 라마코스의 아들을 쫓아낸 반면, 그는 클레오뉘모스의 아들을 집안으로 가자고 환영한다. 라마코스의 아들과 바꾼 것이 클레오뉘모스의 아들과 바꾼 것보다 그 의미가 꽤나 더 넓다. 그것은 오직 비겁자의 아들에게만 전쟁을 비난하는 횃불을 다음 세대에 전하도록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도시의 관점에서 보면 에이레네에게 헌신하는 것은- 단지 전쟁에 의한 피로와는 구별하여- 비겁하다. 희극작가이며, 에이레네의 완벽한 신자인 트뤼가이오스는 평화주의자의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히에로클레스와 구별하여, 라마코스는 그의 손님 가운데 한 사람이고; 트뤼가이오스는 히에로클레스에게보다는 라마코스(그리고 클레오뉘모스)에게 더 가깝다. 에이레네가 그녀의 목을 돌린 후, 아무도 그녀가 여신이라는 데 의심을 가질 수 없지만, 그러나 확실히 그녀는 모든 신들과 사람들을 다스리는 최고의 여신은 아니다. 그리고 아무도 미래에 다시, 특히 전쟁을 좋아하는 여신 팔라스 아테나의 도시에서, 그녀가 스스로를 눈에 보이지 않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주14>.
에이레네가 공공의 평화가 돌아와 있는 덕분으로 연극은 작가와 코러스간의 완벽한 조화 속에 끝난다. 디카이오폴리스의 개인적인 평화가 그런 조화를 방해하였고, 그리하여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만찬을 연극의 다음에서 빼앗아 버리도록 요구하였던 반면, "평화"의 코로스는 당연한 결과로 만찬을 함께 들게 될 것이다: 트뤼가이오스는 코로스가 마음껏 먹도록 권하고, 또한 코로스는 그 권고를 마음으로 받아 들인다. 그 뒤에 오포라가 신부의 예식을 위해 들여진다. "아카르나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화"에서 연극에 책임이 있는 사람의 전체 구도가 그가 마음으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데; 데모스테네스나, 스트렙시아데스나, 브델뤼클레온은 그 누구도 그들의 전체 구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누리지 못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작가의 최고봉임을 눈으로 보여 주며 시위한다. 결혼 후에 늙은 트뤼가이오스는 다른 농부나 포도나무 재배자들과 다름없이, 하늘에서 왔는지 혹은 어쨌든 보통이 아닌 출신 혹은 배경을 가진 그의 새 아내와 함께 시골에서 포도나무 재배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 멀리서라도 어떤 수공예 장인들이나, 페이디아스는 말할 것도 없이 또 다른 신들의 조각상을 만드는 사람이나, 혹은 신들을 연상케 하지 않을 것이고; 그는 그저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 경배하는 신들을 경배할 것이다. 확실히 이 점에서 그는 소크라테스의 반대이다. 개인적인 평화를 가진 그 자신만이 그 수혜자인 디카이오폴리스는 트뤼가이오스와 소크라테스의 사이에 서 있는데, 최소한 디카이오폴리스는 그가 전쟁이나 평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전적으로 정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관점에서 트뤼가이오스는 디카이오폴리스와 소크라테스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데; 디카이오폴리스가 가져온 평화와는 다르게, 트뤼가이오스가 가져온 평화는 신들에게 대항하는 최소한 신들에게 대항하는 소크라테스의 행동 혹은 변론과 흐릿하게 흡사한 행동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가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도시에 대해 그의 등을 돌리는 반면에,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희극작가는 도시에는 그의 등을 돌리지만 신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고 "평화"의 희극작가는 도시와는 조화를 이루면서 신들과는 그렇지 않다. 트뤼가이오스의 행동들은 디카이오폴리스나 소크라테스의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행동들을 도시가 받아 들이지 않듯이 비정치적이다. 개개인은 신들이 단순히 도시의 신들이 아니듯이, 단순히 도시의 일부분이 아니다. 개개인은 도시보다 하위이고, 그리고 신들은 도시보다 상위이며; 도시는 개개인과 신들의 사이에 있다. 그러나 신들과 개개인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모든 희생제들이나 기도들이 공공의 것은 아니다<주15>.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최상위와 최하위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그리하여 그 사이에 있는 임무를 이루어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보통 사람들의 곤궁함에서 대부분 출발하는 만큼 인생의 복사판이거나 혹은 거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 곤궁을, 웃는, 어리숙한, 멋진 태도로 극복하는지 혹은 극복하려는지 보여 준다. 그것은 통상적이고 낯익은 것에서 출발하여, 불가능한 것을 통하여, 혹은 불가능한 것으로 움직인다. 지금까지 논의하였던 연극들 중에,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이야기거리로 가장 빛나는 것이 "평화"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평화"는 "말벌들"의 깃대와는 반대 편에 서 있다. 이것은 두 연극 자체로 일치하고 있다. "말벌들"은 가장 통상적인 것, 다시 말해 가장 낮은 희극의 재료를, 본성적으로 악의를 가진 한 사람의 경우에 델파이에서 영감을 얻은 악의가 희극에서 얼마나 특별한 악의로 바뀌어 가는 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예를 들어 보여 주고 있다.("평화" 끝.)
<주13> cf. 디엘스Diels,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Vorsokratiker' 7th ed.,no.36.
<주14> "뤼시스트라테"의 마지막 말을 보라
<주15>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에 대한 회상' I 1.2.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7-1) "새들"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