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단락)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4.기사-4)

병든소 2010. 10. 29. 10:57

4. "기사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4-3)에서 계속)               젊고 아름답고 그리고 회춘의 고마움에 넘쳐서 '데모스'가 다시 등장한다. 두 사람이 나와서 대화하는데 연극의 끝까지 이어 간다. 모든 다른 연극에서, 마지막이거나 거의 마지막에 하는 말을 가지고 있는 코로스가 "기사들"의 마지막 47행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기사들'은 데모스테네스 만큼이나 엉뚱하고; 도시는 전적으로 '데모스'와, 이제 그가 그의 어린아이였던 만큼 '데모스'의 아버지가 된, 그를 회춘시킨 사람의 손 안에 있다<주9>. 언제나 후견인 안에 있었던 '데모스'는 후견인 안에 남을 것이다. 소시지장수는 고마워하는 '데모스'에게 그가 만일 그가 겪었던 변화의 끝을 알았더라면, 회춘에 감사하며 그는 그를 신으로 여겼을 것이라 말한다. 거기서 그가 그에게 변화의 끝을 알게 해 주기 때문에, '데모스'가 소시지장수를 신으로 여기고, 그렇게 대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소시지 장수는 '데모스'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는 '데모스'에게 그에게 그가 자주 저지르던 수 많은 실수들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미래의 행실을 주요 줄거리로 언급하도록 유도하고, 그가 겪었던 변화의 끝을 알게 한다. 비록 제국이나 범헬레네적 지배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지만, 해군이 허겁지겁 달아난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문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데모스' 역시 지금부터는 턱수염이 없는 젊은이들이 시장터에서 괘변이나 늘어 놓고 정치 놀음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기에 대해서 전적으로 '정의의변론'과 동의하면서 선언한다: '데모스'는 그들에게 사냥하러 가도록 강제할 것이다. 그의 선의에 대한 보답으로, 소시지장수는 '데모스'가 고대의 시절로 복구된 것을 확인하면서, 그가 사용할 건강한 소년들을 제공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30년의 휴전과 젊은 여지를 제공하면서, 그의 즐거움을 위해 젊은 여자를 데리고 들판으로 가라고 요청한다: 평화가 돌아와 '데모스'라 불리던 한 개인이 그가 그리워했던 시골에서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데모스'의 운명의 끝은 디카이오폴리스의 운명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소시지장수는 이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데모스의 회춘은 일정한 상태의 정치적인 흥분 속에 있는 두드러지게 타락한 도심의 데모스를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정부는 '더 나은 사람들'의 손에 버려 두고, 서로 자기의 일에만 신경쓰던 옛 시절의 시골 데모스로 두드러지게 바꾸는 것이다<주10>. 만일 소시지장수가 저명한 데모스테네스가 다시 등장했을 때 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기억한다면, 먼저 권력을 장악하고 난 뒤에 플라톤의 완벽한 지배자가 행사하는 첫 번째 행동의 관점으로, 소시지 장수의 행동을 더 멀리 가서 보는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플라톤의 완벽한 지배자 역시 데모스를 "들판 속으로" 보내는 것으로 그의 지배를 시작한다. 소시지장수 속에서 하나의 초-페이시스트라토스를 확실히 인지하게 될 것이다<주11>. 주인공의 마지막 세 가지 행동은 클레온에게 적절한 처벌을 할당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기대한 그대로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클레온이 성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거래하는 매춘부들과 서로 쌍소리를 하면서, 소시지를- 개나 당나귀의 고기 뿐만 아니라 나머지 부분도 넣어 만든 소시지를 팔도록 욕보인다.

 

첫 눈에 이 연극의 해피 엔딩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궁극적으로 신성한 암피테오스의 행동에 의한 것으로 보이듯이, 신탁의 완성으로 보인다.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진짜로 데모스테네스가 본 클레온의 신탁의 최종 결과물인 연극의 결말은 그 신탁에 담긴 정신의, 즉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 두 사람에 의해 해석된 신탁의 정신의 다른 변화라는 것을 보여 준다<주12>. 신탁에서 클레온이 지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 자신보다는 여전히 더 비루한 한 사람으로 승계된다는 것을 기대하도록 끌고갔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신탁은 아테네의 지속적 퇴락을 예언하는 것으로 보였다. 문자 그대로 인용된 신탁의 작은 부분만 들었고, 그 부분이 사람을 싫어한다는 해석은 품고 있지 않기에, 그 신탁이 실제로 이러한 사람을 싫어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는지 말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과 같이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가 그렇게나 다른데, 신탁의 해석에 관한 의견 일치는 그 해석에 대한 어떤 의심도 없게 하는지 모른다. 이것과는 다르게 어떤 면에서 연극의 모든 행동을 주재하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신탁의 해석이 극중에서 윤곽이 드러난, 이름하여 니키아스가 그 존재를 증명한, 오로지 신들에 관한 교육에서만 의견이 일치한다. 이것이 신탁들 중에 사람을 좋아하는 신탁들도 물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사들"에서 인용된 신탁들은 단순히 '데모스'의 영광스런 미래를 예언하는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신이나 신탁이 무엇을 의도했던지 간에, 태평스럽고 적극적이며 신을 믿지 않는 데모스테네스가 운명을 정책으로 바꾼다. 그는 이것을 처음 그 자리에서 신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므로써 처리한다: 클레온이 그의 뻔뻔스러움으로 데모스를 재미있게 하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자기보다 뻔뻔함에서 더욱 우월한 사람에게만 질 수 있다. 그밖에 그는 신탁을 믿는 '데모스'와 클레온에게 명백히 신탁이 이루어지는 효과를 예견한다. 신탁이 아닌, 한 인간의 약속이 지켜진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의 희망조차도 그 결과물에는 많이 모자란다. 데모스테네스나 다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예견하지 못한 이것은 데모스테네스가 한 소시지장수를 찾고 있었을 때, 우연히 지나쳤던 그 특별한 소시지장수가 대단히 특출한 사람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 소시지장수는 그가 클레온보더 더 나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그 이전의 정치꾼들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는 그가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증명한다. 이러한 결말이 신탁이나 데모스테네스의 계획의 다른 변화인 반면에, 그럼에도 그것이 전적으로 예상 밖은 아니다. 행동이 진행되면서 소시지장수의 성격이 그 자신과  그렇다고 믿도록 이끌어져 왔던 것과는 총체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낮은 중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 타고난 지배자로, 용어에 대한 가장 정확한 감각을 가진 '본성적인 지배자natural ruler'로 판명된다. 처음에 그는 열 자짜리 막대로도 건드리지 않을, 그리고 그것을 오직 필사적인 상황에서만 사용할 온전한 작자로 보이지만; 결국은 악취나는 수단들로 데모스테네스를 내려다 보는 것까지도 정당화되는 사람으로 되는 번쩍번쩍 빛나는 결말로 귀결된다. 행동이 진행되면서, 그가 완전히 양육이 부족한 반면에 혹은 그의 태도가 뻔뻔스러움이나 비열함에 있어 클레온을 능가하는 반면에, 그는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 이 둘의 나쁜 점을 벗어나, 이들 모두의 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만약 비극적 상황으로써 순수하게 희극적인 상황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예시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세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보다 월등한 것과 같은 소이로, 소시지장수는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보다 월등하다. 이것보다 한층 위다: 진정 지배하는 것이 마땅한 한 사람으로서 그는 지배를 갈망하지 않는데; 그는 연극에서의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덜한 참견꾼이고, 그리고 어쨌든 이런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정당하다. 그는 클레온이 이런 자질들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인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를 뛰어넘은 부러워할 수 없는 자질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이런 자질을 처음에는 그의 '더 나은 사람들'의 재판을 옹호하는 것으로, 그리고 나서 그 자신의 이해에 의해 이끌리는대로 전적으로 온전한 목적에만 사용한다(Cf. 뤼시스트라테 1109). 다른 말로, 가능한 최하의 양육이 민주정에서 권력에 가까워지는 데에 적절하거나 또는 그 이상이다. 소시지장수는 '데모스'의 변덕스런 욕구들을 만족시키는 것에 누구보다 더 능력이 있지만,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좋은 것을 잘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만 그것들을 만족시킨다. 그는 데모스테네스, 니키아스, 그리고 클레온을 능가할 수 있게 되는데, 이 특이한 최하층의 아들인 그는 혼자서 "본능적으로 데모스를 사랑하기" 때문이고(cf. "구름" 1187); 그는 데모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소년시절에나 그가 성장한 뒤에, 연극에 앞서서 이거나 연극 중에, 불온하게 놀았었을런지도 모르지만, 그는 데모스에 대해서는 결코 부적절하게나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데모스 중에 특이한 도시의 본성적인 지배자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 앞서 데모스의 애인이나 친구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 사랑은 거의 틀림없이 데모스의 자식으로부터 나온다. 소시지장수는 그가 유래한 데모스를 위하여 사랑으로 민주정을 폐지한다: 데모스를 위한 모든 것 그리고 데모스에 의한 권위, 그러나 데모스를 통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리하여 최선의 체제는 데모스와 그것의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그것의 가장 나은 자식으로 구성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최선의 체제는 상류층과 '더 나은 계층'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도록 이끌려진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실험은 최선의 체제에 데모스는 제외되고 '더 나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치학'의 마지막 두 권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험과 극적으로 반대이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 플라톤의 돼지들의 도시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소시지장수가 바람직한 지배자라면, 교육과 신사정신이 온전한 지배자정신rulership의 필수 선행조건이라는 관념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듭 말하면, 소시지장수는 '정의의 변론'이 칭송했던 고대의 교육도, 그리고 '불의의 변론'이 칭송했던 신식의 교육도 모두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는 잘 다스리기 위한 모든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의 장점이 전체적으로 본성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주13>. 그는 그 자신 속에 사물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만큼, 특히 '더 나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만큼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교육과 신사정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뒤따른다<주14>. 데모스테네스에게는 신분과 출신과 양육이 하류인사람은 성분이 낮을 수 밖에 없다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온전함은 상류층에서나 어쩌면 시골에서의 온전한 양육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도심 대중의 지꺼기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데모스테네스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지만 연극의 사건에 의해 반박당하는데; 그는 성격과장점과 단점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 충분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정치적 맹점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혹시 소시지장수가, 그가 그럴 것이라고 믿은 만큼 완전히 썩어 있다면, 소시지장수가 그와 그와 같은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하는 말에 작은 믿음이라도 가질 수 있는가? 그렇지만 그는 그 자신이 (데모스의)노예라는 단순한 사실로 그를 깨우치기에 충분해야만 한다. 시작할 때 소시지장수는 그 자신을 불한당으로, 가장 비열한 작자로 여기고, 그러므로 그가 그런 대로 시궁창에서 산다고 믿는데; 말하자면, '더 나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는 '더 나은 사람들'이 자각을 가지고 있듯이 그도 자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소시지장수와 '더 나은 사람들' 모두 자각이 부족한데; 연극의 마지막에서 소시지장수는 자각을 얻었고; 데모스테네스가 자각을 얻었는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더 나은 사람들'이 소시지장수의 부정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그가 스스로 그들에게 천진난만한 짓거리를 하였다는 것이다(cf. 483-84).

 

"기사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가장 정치적인 연극이라 부를 수 있고; 이것은 신들, 시인들, 그리고 여자들(어린이들)이 없는 유일한 연극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도시의 본성적인 지배자를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저 지배자가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도시와 교육 사이의 관계나, 또는 뮤즈들의 영역으로부터 도시를 갈라 놓는 바닷골을 드러낸다. 그 바닷골은 다른 어떤 것들과 같이 다리로 연결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리는 바닷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안에서 작가 자신이 얇게 변장한 주인공인 '기사들'과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행동을 비교해 보자. 디카이오폴리스는 데모스를 흔드는데 성공하지만( "아카르나이 사람들" 626), 그러나 거기에서의 데모스는 사실 단지 데모스의 한 부분이다: '늙은 아카르나이 사람들'이다. 디카이오폴리스는 그의 전체 행실들을 통해, 그가 데모스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가 즐기고 요술처럼 펼치는 기쁨들은 소크라테스의 즐거움과 비교할 때, 정말 모두는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러나 그는 애시당초부터 그들과 나누어 가지는 데는 관심이 없다<주15>. 다른 말로 디카이오폴리스의행동은 정의라는 면에서는 의문스럽지만, 반면에 소시지장수는 그렇지 않다. 이것에 따르면, 소시지장수가 아닌 데모스테네스와 '기사들'이 "기사들"에서 처음부터 작가의 대변인들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면 "기사들"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완전히 도시와 화해하였다는 낙관적 견해는 다시 거두어 들여 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좋은 도시 안에서는, 본성적인 지배자에 의해 회춘한 도시에서는, 비단 소크라테스 뿐 아니라아리스토파네스도 어찌 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은 간혹 동화들과 비교된다. 동화라는 것은 아마도 알맞을 때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소원성취- 불가능하나 이루진 것으로 연출되고, 통쾌하나 우스꽝스럽지 않은 소원성취-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기사들"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보다 동화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다른 배우들이나 코로스는 제쳐 놓고, 소시지장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다른 어떤 희극의 주인공만큼 우스운 것들을 많이 행동하거나 말하지만, 전부 또는 거의 대부분이 클레온의 행동이나 대사들을 의도적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그는 목적을 가지고 우스꽝스럽게 행동한다. 그 자신은 우스꽝스럽지 않다. 이것은 특히 연극의 끝 부분에 가서 명백해진다. 소시지장수가 얼마나 넝마 옷을 우스꽝스럽게 걸치고, 비속한 말들을 쓰고, 원숭이 꼼수를 쓰든지 상관없이, 한번 그 자신이 본성적인 지배자임을 완전히 드러내자, 넝마나 그것들에 딸렸던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젊고 아름다워져 있는 '데모스'보다 더욱 대단히 황홀한 의상을 걸친다. 모든 불명예스러운 것들을 묻어서 감추고 부인하는 거기에서 "본성의 올바름이 비춰서 나온다"(cf. 고르기아스 484a 6-b1). 데모스테네스를 한 마디 말없이 내보내는 것만큼 그를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결말의 관점에서 보는 소시지장수였던 본성적인 지배자는 변장한 동화 속의 왕자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진짜 동화의 왕자처럼 "기사들"의 본성적인 지배자는 그가 무언가 더 낫다는 것을 몰랐고, 무언가 더 나은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무언가 더 나은 것이 되겠다고 바라지도 않았던 진짜 한 소시지장수였다. 한 마디로 그는 어떤 의미로서도 과시자가 아니다. 아주 다듬지 않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최소한 아리스토파네스는 그들의 관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적이 결코 없다- 남다르다거나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과시자여서 우스꽝스럽다. 그러한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는 물론 과시자들이다. 소시지장수가 "무언가 특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것은 그의 매력 중에 중요한 한 부분이다. 아마도 진정한 지배자는 희극의 둥근 테두리 안에서- 군중들에게 기본적으로 전해진 작업 같은 것 안에서- 작가와 철학자보다는 우스꽝스러움에 덜 노출된다는 것 역시 생각해 두어야 할지 모른다.

 

"기사들"의 행동을 촉발하는 계획은- 클레온을 망치려고 그의 신탁을 이용하는 데모스테네스의 구상은- 더욱 더 합리적이어서, 소크라테스의 변론 수사법을 가지고 자기의 빚을 없애려는 스트렙시아데스의 계획보다, 그리고 암피테오스의 스파르타 왕복 여비를 부담하여 평화 속에서 살려고 하는 디카이오폴리스의 계획보다 덜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기사들"의 해피엔딩은 데모스테네스의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다. 스트렙시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가는 것이나, 디카이오폴리스가 스스로 암피테오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소시지장수가, 이 특이한 소시지장수가, 데모스테네스가 클레온의 신탁을 읽고 있을 때 때 맞추어 나타나는 우연에 비교하면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본성적인 지배자는 예측 불가능한 우연의 행동보다 더 나은 것을 통해 권력에 다가간다: 오로지 그러한 우연의 행동만이 본성적인 지배자에게 권력을 가져다 줄 수 있는데, 정확하게 본성적인 지배자는 반드시 최하층 데모스의 자식이어야 하면서, 그래서 반드시 최고의 익명성 속에 살아야 하고, 그리고 반드시 완벽하게 야망에서 자유스러워야 하거나, 혹은 지도자가 되도록 강요당하는 것만으로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소시지장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희극적 등치물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기사들"의 해피엔딩을 위해 '데모스'의 회춘과 그래서 데모스의 의인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더 할 말이 없게 한다. "기사들"의 행동은 다른 연극들의 말도 안 되게 우스꽝스러운 배역들의 행동과 별로 그 괘를 달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잘 양육된 사람이나 '더 나은 사람들'에 의해 도시가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합리적인 소망 밖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주16>.

 

데모스의 의인화는 구름이나 두 변론의 의인화와 다른데, '구름'과 두 '변론'은 사람의 부분들을 대신하지만, 반면에 '데모스'는 많은 인간들을 한 인간 속에 넣은 많은 인간들의 융합체이기 때문이고; '구름'과 두 '변론'은 말만 하는 반면, '데모스'는 말도 하고 또 먹고 잔다. 두 '변론'은 '구름'과 '데모스'의 사이에 있는데, 왜냐하면 오직 '구름'은 여신들이고; 사람들 모두 독재자라고 두려워하고, 아첨과 시중 받기를 갈망하며, 그들을 먹이기 위해 하인들을 살찌우는 '데모스'는(1111-20, 1131-40), 두 '변론'보다 오히려 덜 신적이다. 그렇지만 제우스처럼 보이려 노력하는 클레온은 절대적으로 '데모스'에 의존한다. 데모스의 의인화를 통해 도시는 한 가정이 된다. 도시가 가정으로 축소되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남자 친목회fraternity"로 지적된다: 모든 동료 시민들은 형제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밖에 '데모스'가 시골로 귀환하는것은 디카이오폴리스의 행동과 비교할 수 있는 과시의 세계로부터 자연적인 산물을 즐기는(그리고 구입하는) 세계로, "경제적인" 생활(805-9)로의 귀환이다. 소시지장수의 행동은 경제적인 활동들보다는 정치적인 활동들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짜여진 클레온의 행동에 의해 준비되거나 패러디된다. 데모스는 의회나 재판에 참석하여 받는 돈으로 살았다. 그러나 마치 디카이오폴리스 개인적인 평화가 공공의 평화가 아닌 것처럼, 즉 순수한 단순한 평화 시에 소시지장수는 시골로 돌아가지 않고; 경제적인 생활은 정치적인 생활 없이는 불가능하며; 데모스는 도시와 똑같지 않다(273-74, 811-12, 1005-10). "가사들"에서의 근본적인 정치적 곤경은 "기사들"에서 개개인들을 '데모스'로 불리는 개인에게로 흡수하는 것에서나, 마찬가지로 여자들(그리고 어린이들)이 불참하는 것에서 노정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 반대되는 해법으로 "여자들의 의회"에서 극적으로 실험하게 될 것이다.("기사들" 끝)   

 

 

<주9>  클레온은 데모스의 아버지라고 주장하지만(1037-39), 결코 그 자식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주10> Cf.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91b15 ff. 그리고 1318b6 ff.

<주11> Cf. 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의 정치체제' 16.

<주12> 134, 948-50, 1229-43.  

<주13> 투키디데스 I 138.3 그리고, 무엇보다, 크세노폰의 '키로스의 교육'을 생각해 보라

<주14> 플라톤의 '라케스' 179b6-d5를 생각해 보라

<주15> 디카이오폴리스와 소시지장수 둘은 모두 요리 기술의 장인이다("아카르나이 사람들" 1015-16과 "기사들"에서 여기저기 나오는 학자;

           cf. 플라톤의 '고르기아스'; 디카이오폴리스와 구별하여, 소시지장수는 그 기술을 자기보다는 '데모스'를 위해 사용하는데; 그가

           '데모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애 대해서 강조하는 것은 없다(1187).

<주16> Cf. "개구리들" 727-36 을 "기사들" 181, 185-86, 336-37과 함께. 세스 베나르데트가 지적해 주듯이, 신탁 내용에 있는 제안은 두 번째

           파라바시스의 끝 부분을 비추어 주는지도 모른다(1300-15): 무엇이 일어나든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세상에서, 클레온은 마치

           등불장수 휘페르볼로스가 대치되어 있는것처럼 보이는데; 클레온이 의인회 되어 있었던 '데모스'의 기적들과, 데모스테네스와 딱 그

           순간에 만나는 알아볼 수 없는 본성의 지배자에 의해 제지되는 것처럼, 휘페르볼로스는 말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되는 삼단노 배들의

           기적에 의해서만 제지되었을 수 있다.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5-1), 5. "말벌들"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