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2.구름-4)
2. "구름"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2-3)에서 계속) 페이딥피데스는 시험이나 가입을 거치지 않고 두 변론으로부터 교습을 받는다. 두 변론을 듣는 것이 관객들에게 소개된 그가 받는 유일한 교습일 뿐이다. 그는 계속 더 교습을 받았어야만 했었는데 왜냐하면 나중에 그가 소크라테스로부터 두 변론들로부터는 배우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배웠다는 것을 그가 증명하기 때문인데; 그의 시험이 아마도 엄격한 실내교습을 앞서 나갔었을 것이다. '구름'이 두 변론 사이의 논쟁에 사회를 보는데,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이 논쟁에 더 책임이 있다고, 아니면 소크라테스보다 더 논쟁에 가깝다고 밝히는데; 그들은 양쪽 변론 모두를 그들의 "친구"라고 부른다. 그들은 모든 것을 모방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즐기고; 그들은 양쪽 모두, 기쁨으로 신들을 칭송하는 한편, 소크라테스가 다른 신들을 거부하는 것도 기쁘게 듣는다. 그들은 무책임함 그것이며, 비실질 그것이며, 구름 바로 그것이다. 논쟁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부분은 전적으로 자발적이어서, 즉 '구름'에 의하여 조정되지 않아; 변론들은 그저 모욕하고 도발하는 말들만 서로에게 퍼붓는다. 그들 각자는 페이딥피데스를 자기 편으로 붙잡으려 노력하고; 그들이 주먹을 날릴 기세에 이르러서야 '구름'은 중재해야 하겠다고 느낀다. 그들의 모욕을 통해 변론들은 각자 그들의 성격을 드러낸다. '정의 변론'은 구식이고; '불의의 변론'은 뻔뻔하다. (그들의 관계는 투키디데스의 책 속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변론과 닮았다.) '정의의 변론'은 옳은 것들만 발언하고 (아리스토파네스가 하라고 주장하는 대로); 따라서 그는 대중들의 갈채에는 냉담하다(소크라테스와 비슷한데 아리스토파네스와는 다르다): 그는 관객을 모독한다. '불의의 변론'은 대중적이고 관객에게 현명한 것으로 비춰져 호소력이 있는데(아리스토파네스가 어떤 면에서 파라바시스에서 그의 이름으로 했던 대로); '정의의 변론'이 그를 몰염치한 것, 야비한 것, 남색자, 그리고 존속 살해자라고 부르자, 그는 이러한 욕설들을 칭송으로 받아 들인다. 이제 '정의의 변론'은 주눅들어 아테네의 빈민구호소가 되는 반면에, 전에 거지였지만 가면을 쓰고 왕인 척했던 '불의의 변론'은 이제 아테네에서 잘나간다. 이러한 사정으로 그리고 두 변론은 희극이 그러하듯 상을 타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불의가 이길 운명이다. 두 경쟁자를 진정시킨 다음, '구름'은 그들 각자에게 옛날과 지금으로 나누어 교육의 종류에 대해 그가 지지하는 경우를 진술하라고 요구한다. 그의 우월함을 확신한 '불의의 변론'은 임의로 그의 경쟁자에게 선공하라고 한다: 그는 '정의의 변론'을 어느 면에서는 전에 이미 그리했듯이 경쟁자의 논점을 바탕으로 반박하려고 한다. 논쟁의 전반부에 일어난 추론의 단 한 부분 때문에 다음과 같은 전도가 일어났다. '불의의 변론'은 올바름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마치 소크라테스가 제우스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단언했었듯이); '정의의 변론'은 올바름이란 신과 함께 있다고(즉 사람들에게는 있지 않다고, 특히 동시대의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불의의 변론'은 만약 올바름이 신과 함께 있었다면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를 족쇄로 채웠는데도 처벌 받지 않고 무사할 리 있었겠느냐고 대꾸하자; 그래서 정의의 변론은 모욕감으로 쳐졌는지, 숨었는지, 주눅들어 침묵하였다. 양쪽 변론은 제우스가 존재한다라는 논거와, 그리고 사람은 제우스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만 한다는 논거에 대해 다투었다. 그러나 '정의 변론'이 사람들은 제우스가 하라고 말한 대로 해야 한다고 암시한 반면에, '불의의 변론'은 사람은 제우스가 하는 짓을 따라서 해야 하거나 혹은 해도 좋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패배의 결과로 정의의 변론은 올바름을 지지하는 존재로서의 제우스나 다른 신들에 대한 나머지 논쟁에 완전 침묵한다.
체면의 방어자인 '정의의 변론'은 향수에 젖어 그의 긴 강론에서 그가 잘나가고 겸손이 존경받던 옛날을 회상한다. 소년들은 보였으나, 들리지 않았고; 그들은 행실이 반듯했으며, 극기와 인내로 키워졌다. 전통 음악과 시를 배웠으며; 기준을 벗어나면 엄하게 벌을 받았다. 사람들의 소년들에 대한 사랑은 관습의 한 부분이었지만 그 사랑은 모든 천박함과 무절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옛날에는 바라던 대로 지켜졌던 순결에 대하여 말할 때, '정의의 변론'은 한 사람이 순결치 않음을 혐오한다는 것이 순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들어간다. 소년들이 신체단련 훈련을 받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교육이 이제는 구식으로 우습게 되었지만 마라톤의 전사들을 키웠으며; 반면에 '불의의 변론'이 좋아하는 교육 방법으로는 나약한 자들을 키운다. '정의의 변론'의 쪽을 선택하므로써 페이딥피데스는 시장판을 질색하게 될 것이고, 놀림을 받으면 분노에 가득 찰 것이고, 그의 부모들 특히 그의 아버지에게 무례하지 않을 것이고, 노는 무희들과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연장자들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존경과 염치로 가득찰 것이다. 따라서 '정의의 변론'은 여기서 그의 강론의 중간 부분에서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고, 페이딥피데스가 해야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 삼가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 더욱 더 많이 이야기한다. 세 번째이면서 마지막인 그의 강론에서, '정의의 변론'은 여전히 더욱 분명하게 페이딥피데스가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그와 대립한다: 그는 입담 좋은 참견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인생을 시장판에서나 재판소에서 보내는 얼굴이 창백하게 되어 버린(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처럼), 황음에 빠진(소크라테스나 그의 동료들과는 다르게), 사기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는 그의 나날들을 체육관에서 보내고 건강하고 금욕적인 신체임을 나타내는 표시를 지닌 축복 받은 고상한 젊은이가 될 것인가? '정의의 변론'은 여기서 영혼의 건강에 대해 말하지 않는데; 사실 그는 결코 영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고- 무슨 다른 이유 때문인지(그는 영혼을 공기로 대체했다), 영혼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전혀 없는 소크라테스와 이 점에서 일치하여-, 반면에 '불의의 변론'은 언급한다<주17>. '구름'은 '정의의 변론'의 연설에 담긴 타고난 중용에 대하여 칭송하고; 그들은 역시 나이 든 사람들의 더 없는 기쁨에 대해 칭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화시키는 그들에 익숙한- 그들은 불의의 변론에 대해서도 역시 칭송하고 그리고 그가 정의의 변론을 논박하라고 북돋아 준다.
'불의의 변론'은 그 대안에 대해 논박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신교육을 추천한다. '정의의 변론'에 끼어들거나 수긍하면서 들어낸 그의 논점들은 자발적인 것이었으나, '정의의 변론'이 '불의의 변론'이 하는 강론 차례에서 내놓은 논점들은 '불의의 변론'이 그에게 질문을 던져 유도된 것들이다: '불의의 변론'은 '정의의 변론'에 대한 말꼬리잡기elenchos이며; '불의의 변론'은 인신공격적이다. '불의의 변론'은 그가 일반적으로 가장 강력한 것으로 인식되는 법과 정의의 처벌에 반대하는 명백하게 절망적인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덜떨어진 변론으로 불린다. 그는 법과 정의를 그것들의 바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뒤집어 버린다. '정의의 변론'은 따뜻한 물에서 하는 목욕을 그런 목욕이 사람들을 비겁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그 무엇보다 거부한다. 그러나 가장 용감하고 최고로 어려운 일들을 헤치고 나온 사람은 제우스의 아들인 인간 헤라클레스였으며 헤라클레스의 목욕탕은 온수 목욕탕이어서;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에 대한 논쟁은 박살난다: 따뜻한 물 목욕과 인생의 노고는 서로 모순이다. 양쪽 '불의의 변론'과 '정의의 변론'은 제우스의 아들을 보통 인간의 모델로 보고 논거로 삼아 시작한다. 두 번째로 '정의의 변론'은 한 사람이 그의 인생을 시장판에서 허비하는 것을, 즉 의회에서 연설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나; 호메로스는 네스토르와 또 다른 현명한 사람들을 의회에서의 명연설가로 소개했었다. 양쪽 변론들은 가장 오래 된 작가가 도덕에 대한 최고의 안내자라는 논쟁을 또 시작하는데, 왜냐하면 오래된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이어서; 양쪽 변론들은 그들의 논의를 작가에 맞춘다. 마지막으로 '정의의 변론'은 한 편으로는 오만hybris에 반대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방탕함에 반대되는 중용에 대하여 칭송하였다. 첫 번째 뜻의 중용을 다음 번의 뜻에 더하면, 그것은 소년들과 여자들로부터 사랑의 기쁨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도박 식도락, 음주, 웃음- 한마디로 인생을 사는 즐거움의 모든 것을 빼앗는다. 첫 번째 의미의 중용은 인생 그 자체를 망하게 한다. 사람들은 본능적인 충동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주18>. 아마도 그는 잡힐 것이고; 법과 정의의 약한 점에 기대는 변론으로 그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면 그는 다치거나 심지어 파멸할 것이다. 오직 '불의의 변론'의 도움만이, 제우스를 예로 들어 가며, 그가 저지런 어떠한 범죄도- 특히 에로스의 영역 안에서의-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능한 제우스가 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연약한 인간이 에로스에 저항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신들은 인간이나 신들이 본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잘못을 저지런 사람들을 합리적으로 용서할 수 없었는데<주19>; 그들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것을(혹은 우리에게 하라고 말하는 것을 잠시보류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짓을 함으로써 신들의 뜻에 복종하자! 오로지 '불의의 변론' 편에 있는 것만이 페이딥피아데스가 그의 본성이 즐기라고 부추기는 것들을 아무 부끄러울 것 없다며, 웃고, 춤추고 하는 것들을 즐길 수 있게 할 것이다. 반면에 '정의의 변론'은 침묵으로 본성에 대한 법을 지지하였고, '불의의 변론'은 법으로부터 본성에 호소한다. '정의의 변론'은 방탕으로 인생을 이끌면 페이딥피데스가 수치스러워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대답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러나 '불의의 변론'이 그로 하여금 가장 유명한 연설가들이나 비극작가들 그리고 대다수의 관객들마져도 모두 수치스럽다고 자인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하자, '정의의 변론'은 그의 패배를 인정하고 반대 쪽의 진영으로 도망가 버린다. 신들에게도, 연설가들에게도, 비극작가들에게도, 그리고 대다수의 관객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을 수가 없는 생활 방식은 변호의 여지가 없다. 아니면, 분명하게 하기 위해 좀 과장하면, 신들에게도 인간들에게도 없는 올바름은 오직 로고스로만 존재하지만, 그 로고스는 정작 로고스가 모자라는 것으로 판명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름'은 '정의의 변론'에게는 갈채를 보낸 반면, '불의의 변론'의 강론에 대해서는 박수치지 않는다.
'정의의 변론'의 완벽한 패배로 절정에 이른 두 변론 간의 논쟁이 소크라테스적 교습의 한 부분임에 반하여, '불의의 변론'에 의해 권장된 생활방식은 실수로라도 소크라테스적 생활이 될 수 없는 것인데; 성적인 즐거움의 생활은 특히 돈에 관해서나, 어떤 세련된 성적인 즐거움에 무모하게 투신하는 어쩔 수 없는 조건에서나 간에, 모든 면에서 자제심이 강한 소크리테스에게는 전적으로 이질적이다. 극에서 알려진 소문과 달리 그는 "돈을 받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가 변론의 기술을 가르치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였다면 쉽사리 부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나(876), 비록 그의 여신들이 학생들을 이용하라고 하지만 그는 수입에는 조그만치의 관심도 없고; 가난뱅이가 아닌 그의 학생들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건네는 선물은(그 선물이 돈과 같은 것인지는 모른다) 별개이다<주20>. 소크라테스의 자제력은 '정의의 변론'의 권장 사항들을 상기시키지만, 이는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른데, 왜냐하면 그는 신체의 단련을 깔보고 무엇보다 그 용어의 깊은 뜻으로 보아 중용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는 신들과 법에 비해 그 이상 되는 오만hybris한 사람이며; 그는 좀도둑이지만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죄로부터 위축 받지 않는다. 크세노폰이 구별한 것을 인용한다면, 자제력은 있으나, 그의 중용은 경건함이나 정의심으로 짜여진 것이 아니다. '불의의 변론'과 같이 그는 똑똑하고(지혜) 또 과감한 성격을 가졌으며; 중용과는 구별되는 그의 자제력과 극기력은 높이 떠 있는 것을 연구하는 데에 요구되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소크라테스의 생활 방식이 변론들이 권장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데, 후자는 신들이 인생의 희열을 이끈다는 작가들에 의해 증명된 논거에 기초하고,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지하는데; 설사 그들이 존재한다 해도 배움에서는 별로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보여준 그들의 치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모델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계획에서는 변론들 간의 논쟁은 오직 올바른 생활로 올라가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불의의 변론'은 늘 그랬듯이 신들에 의해 지지되던 정의의 자기 파괴이다. 소크라테스의 생활 방식은 신들에나, 연설가들이나, 비극작가들이나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에 의해 지지 받지 못한다. (이 점에서 '불의의 변론'의 공격으로 생긴 충격 속에 들어난 생활 방식은 '정의의 변론'이 칭송했던 생활 방식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파네스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변호의 여지가 없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올바른 것들에 대해 '정의의 변론'처럼 말하고; 그는 '불의의 변론'처럼 성적 즐거움과 웃음의 생활을 타이른다<주21>. 아리스토파네스 작품 속의 이런 두 부분은 간단하게 화목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변론들의 논쟁으로부터 도출된 주된 교훈이 될 것이다.
'불의의 변론'이 이기고 난 후에, 소크라테스는 스트렙시아데스에게 페이딥피데스를 소크라테스의 학생으로 만들려는 그의 결정을 재고하도록 기회를 주지만, 그 승리가 스트렙시아데스의 결의를 강화시킬 뿐이다: 페이딥피데스의 수업은 계속되어야만 하고, 특히 그는 "주요 과목"들은 수업을 받아야만 한다. 논쟁 전부터서도 스트렙시아데스는 페이딥피데스가 "모든 올바른 것들"을 반박하는 것을 배우기를 갈망했었지만, 모든 종류의 불명예를 좋아하는 것과, 논쟁에서 이겼던 모든 종류의 성적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간에는 아주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페이딥피데스는 논쟁이 전적으로 인상적이지 않은데; 그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모든 일들을 그전처럼 싫어하고, 다시 그의 아버지가 그의 결정을 후회할 것이라는 믿음을 표시한다. 두 변론 사이의 논쟁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 페이딥피데스에 대한 그의 교습의 초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지 못했고; 그는 또한 다른 실수도 했다. 페이딥피데스는 '불의의 변론'의 남색 생활에 대한 칭송 탓으로는 쫓겨났었을 수가 없었어야 했지만, 남색 생활은 이것이 부족한 소크라테스식에 대한 페이딥피데스의 주된 이의 사항인 건강한 겉모습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그의 단언 탓으로 쫓겨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다. 바꾸어 말하면, '정의의 변론'의 패배는 바로 신체단련의 패배이고, 신체단련과 승마 사이는 친족 관계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논쟁의 논거는- 성적인 즐거움의 생활과 상류층의 신체단련적 노력은 서로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히 틀린 것이며, 그리고 경마 트랙의 냄세보다는 "꾀 주머니"의 냄세가 나는 것으로 드러났어야 했다. 이러한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가면, 올바른 것들을 말하는 것과 감각의 즐거움을 칭송하는 것의 아리스토파네스식 조합이 본성에 의한 것이라는 살아 있는 증거로서 아직은 소크라테스에게로 전도되지 않은 페이딥피데스를 볼 것이다.
페이딥피데스에 대한 실내교습은 그의 아버지의 경우만큼이나 많이 감추어져 있다. 스트렙시아데스의 갈망에 따라 그 교습 역시 "주요 과목"에 대하여 다룰 것이며;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페이딥피데스가 능력이 있는 소피스트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소크라테스가 페이딥피데스의 교습에 치는 장막은 두 번째 파라바시스가 된다. '구름'은 그들의 신성함을 그 어느 때보다 더 힘있게 재차 단언한다. 그들은 인간들인 관객들에게 만일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대로 정의롭게 '구름'의 코러스에게 상을 줄 경우, 그들 각각의 심판이 받을 보상을 알려 주고, 마찬가지로 만일에 '구름'에게 그들이 누릴 명예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들 각각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한다: 모두가 적절한 양의 비가 적절한 때에 오기를 '구름'에게 완전히 의존하기 때문에, '구름'은 다른 어떤 신들을 더 이상 언급조차 않는다. 그들은 이제 미래형 시제로 말할 뿐이다. 그들은 관객들에게 첫 번 파라바시스에서는 그랬었지만, '구름'에 신세져서 얻은 혜택에 대해 상기시키지도 않는데, 왜냐하면 그 혜택들은 도시에 베풀어졌었기 때문이고; 반면에 지금 여신들이 말하는 보상들(그리고 벌들)은 앞으로 닥쳐올 개인들 각각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각각은 "구름"에 대해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 투표하려 한다. '구름'은 그들을 처음으로 아테네시에 여신들로 소개한 "구름"의 성공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행사한다. 그들의 호소는 서약한 심판들을 매수하려 할 만큼 되지만; 만일 아테네 사람들이 '구름'을 명예롭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인정하고, 그리고 그 속에다 이빨을 감춘 호소로 '구름'이 단지 불의를 바로 잡는 것이라면, 이것은 단순한 불의의 행동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시대의 옛날 아테네, 마라톤 시절의 아테네, 단 한 사람도 그들이 '구름'을 경배하리라고 꿈조차 꾸지 않았던 그때에는 높은 급수의 불의였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혹은 '구름'과 신식의 방어자인 '불의의 변론' 사이에 보내는 동정은 필요하거나 정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구름' 스스로 그들이 가장 오래된 고대 유물들과 과도한 신앙의 나라인 이집트에서는 전체적으로 무력하다고 명백히 말한다.
페이딥피데스의 실내교습 동안까지는 파라바시스가 계속 지속한다고 생각되어야만 하는데; 동시에 벌어지는 이 두 가지 일들의 각각에 걸리는 시간은 다른 길이의 단위로 재어진다. 페이딥피데스가 소크라테스의 힘든 훈련을 겪었던 반면에 그리고 진짜로 이런 고초 때문에 스트렙시아데스는 그의 지불 날짜가 꽉 차 오는 것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최소한 스트렙시아데스의 실질적 목적에는 필수적인 것이라 할 페이딥피데스의 공부가 이제 끝이 났다. 소크라테스에게 선물을 전하고, 이제는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능력을 넘칠 정도로 지닌 그의 아들을 돌려 받는 것으로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꾀 주머니"에서 불러낸다. 소크라테스와 스트렙시아데스 사이의 좋은 관계가 완전하게 복원되는데; 사실 그들의 관계가 그 이전에는 한번도 지금처럼 좋았던 적이 없었다. 스트렙시아데스는 열광한다. 페이딥피데스의 지금의 모습은 소크라테스가 약속했던 대로 똑똑한 소피스트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록 그의 아버지를 놀랍도록 하지는 않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겪어내야 했던 고초와 그가 함께 살아야 했던 동료들에 대한 원한으로부터 그가 완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모습과 기술로 만이 아니라 전혀 딴 사람이다. 그가 새로이 습득한 법적 추론의 한 예를 아버지에게 보여 주는 것으로 그는 그의 아버지의 마음에 미적거리고 있음직한 어떠한 우려도,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안도하게 한다.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즐겨 보지 못한 함께 사는 시민들에 대한 우월감으로 인해서 생긴 완벽한 안도감을 아버지에게 느끼게 하는데; 최소한 그의 결혼식이 진행되었던 그날 이후에 스트렙시아데스의 정신이 지금처럼 항진된 적은 없었다. 그는 그의 오만hybris에 두려움 없이 탐닉한다. 지금이 아버지와 아들이 완벽한 화목함 속에 있는 유일한 장면이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하였는데도 지금까지는 그들의 기호나 취미가 언제나 광범위하게 달랐었는데; 소크라테스에 대해 완벽하게 화해하게 되는 것으로,페이딥피데스는 그의 아버지와도 완벽하게 화해하게 되었다.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자로 알려진 사람이 그의 아들이 생애 처음으로 아들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그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완벽한 화목도 틀을 잡아 주었다. 이 축복의 순간이 지속되기를!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위한 잔치를 벌릴 순간으로는 안성맞춤이다.(계속)
<주17> Cf. 1048-49과 1046 그리고 1011-1019. 투키디데스 (I 49.1-3) 투키디데스는 그 옛 시절을, 지식이나 예술 현재의 성격에 대비하여
" 불굴의 의지spiritedness와 강인함"strength으로 성격 짓는다.
<주18> Cf. 투키디데스 III 45
<주19> 투키디데스 V 105.2
<주20> 버넷이나 A.E.테일러와는 다른 과정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들의 견해의 일부분에서만 동의하게 되었다.
서로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나, 두 가지 이유에서 그들과 불일치한다. 버넷과 테일러는 "구름"을 연극 그 자체를 이해하는
도구로보다, 하나의 소식통source으로 관심을 둔다. 무엇보다, 그들의 입장은, 더 편리한 용어를 찾기 어려우니, 화성학으로 불러도
좋을 그런 것이다. 예를들어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의 문맥들을 따르면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가 생리학자이고,
그리고 플라톤(또는 크세노폰)의 느낌으로는 군주나 정치 기술에 관심을 가진 한 사상가라는 테일러의 단정 속에 역사 단계에 대한
성향이 그 자체로 보이는데; 영혼과 이를테면 공기와의 확연한 차이를 파악하지 못하면 정치(혹은 군주) 기술에 대해 무시하게
된다는 법률Laws X에 있는 플라톤의 단정에 대해 그는 적절히 주목하지 않는다.
버넷과 테일러는 플라톤의(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가 어느 면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반동이거나 응답일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버넷에 대한 비판을 좀 더 간단히 하면, 그의 희극 해석을 위한 두 대포 중의 하나가
"사실들에 대한 진술은 재미있지않다"(그리스 철학 sect.113)라는-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라고는 결코 없을 경우에만 진실일-
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주21> 소크라테스와 정의의 변론과 구별되는,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불의의 변론 둘 다 디오뉘소스에 걸고 맹세한다.
"구름"에서 디오뉘소스에 걸고 맹세하는 또 다른 등장인물은 페이딥피데스 뿐이다.
다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2-5)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