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과 술한잔

신선과 술 한잔(술을 보내주셔 고맙습니다謝友人送酒)

병든소 2009. 5. 7. 17:21

 

청주를 성인에(已聞淸比聖), 탁주는 현자와(覆道濁如賢) 겨눈 李白이 왜 그리 견주었는지 여태 헤아리지 못하면서, 술의 청탁은 불문하고, 그저 술이 좋은 친구와 술이 같이 있으면 입이 헤벌레해지는 저에게 가끔씩 술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서울 올 일이 있을 때, 간혹 한 되짜리 펫트병에 손수 담았다는 막걸리를 갖다주던 진홍이는 요즈음 무엇하고 지내는지 소식이 없지만 그 막걸리만큼 진한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면 진홍이표 막걸리가 생각납니다.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마실 때는 소주를 마시지만, 요즘은 막걸리도 간혹 먹는데,  맛도 맛이지만 막걸리를 먹으면 우선 배가 불러 단숨에 많이 마시는 일이 없어, 천천히 조금씩 취하는 좋은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 수술을 받고 난 후에, 사실은 그전에도 그랬지만, 맥주를 취하도록 마시는 경우는 적은데 맥주 좋아하는 본룡이나 특히 정수가 많이 참아 주어 맥주를 마시는 대신 때때로 막걸리를 먹게 되었습니다.

 

막걸리를 먹을 때 좋은 점 중에 또 하나는 안주인데, 이를테면 소주에다 삼겹살은 몰라도 막걸리에다 삼겹살은 글쎄요 딱 한 잔이면 좋겠지만  취기를 느낄 만큼 먹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자연히 소찬蔬饌을 찾게 되는 점에서도 좋아합니다.

 

수 일 전에 송수권의 동영상 같은 시 하나 보여드린 적 있었지만,  옛날 막걸리는 술도가에서 걸러 큰 술통에 몇 말씩 배달해다가 술집 서늘한 한구석에 자리 잡은 한 섬짜리 독에 채워놓고, 한 되 한 되 퍼내어 먹곤 해서 술 퍼먹는단 얘기도 나왔는데, 요즈음 막걸리는 초록색 병에다 담아 나와 병으로 따루어 먹게 되었습니다. 

 

그 펫트병 막걸리는 편하기는 해도 병 뚜껑을 잘못 따 술을 튀기기도 해서 놀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 것도 넣고, 탄산가스도 넣어서 먹기 좋게 일부러 맛을 만든 것 말고, 옛날 막걸리 맛에 옛날처럼 주전자로 부어 먹고 싶어지면 비원 앞 목포집을 찾기도 하지만, 서울에는 이런 집 흔치 않고, 꼭 일부러 찾아가야 되는 점이 번거로워 손 쉬운 병 막걸리로 만족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실 요즘 나오는 병 막걸리는 그 맛이 막사이사이주와 비슷합니다. 막사이사이는 필리핀 대통령의 이름이었는데요,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이름을 따서 '막'걸리 한 되에 '사이'다 두 병을 섞어('막'+'사이'+'사이'= '막사이사이') 먹기 좋은 요즘 병 막걸리 같은 술을 만들어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청탁불문으로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그냥 먹어도 좋기만 한 걸 뭐하러 돈 더 들여가며 번거롭게 사이다 섞어 먹었겠습니까? 차라리 막걸리를 한 되 더 먹었을 것 같지 않나요? 진짜배기 주당들은 말입니다. 진짜배기 주당이라도 白雲처럼 막걸리 주체酒滯가 있다면 요즘 병 막걸리나 막사이사이주를 더 좋아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술의 청탁을 가리지 않는 저에게도 맥주는 입에 붙지 않듯,  그 옛날에도 막걸리가 몸에 붙지 않았는지 막걸리가 탐탁하지 않았던 白雲은 젊은 시절 돈이 없어서 막걸리를 주로 마시다가, 벼슬 길에 있었을 때는 미향주를 즐겼는데, 늙어서 돈이 없어지자 청주가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막걸리라도 다시 마시게 되면서, 막걸리에 대해 두보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막걸리 시를 지었답니다. 그 시를 읽기 전에 그의 설명부터 들어보시겠습니까?

 

"젊었을 때 막걸리를 마신 것은 청주 마실 기회가 적어 탁주라도 마셔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벼슬하는 동안 청주를 주로 마셨는데, 습관이 된 탓인지 막걸리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었습니다.  요즘 은퇴하니 녹봉이 줄어, 청주가 끊어지면 별 수 없이 막걸리를 마시는데, 술에 체하는 일이 잦아 기분이 나빠집디다. 두보는 그의 시에 '막걸리에 묘한 이치가 있다' 하였으나 그 까닭이 궁금합니다.  옛날에 늘 막걸리를 마실 때도 그저 마셨을 뿐 좋은 점을 몰랐었는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두보가 가난하여 그 역시 막걸리 마시던 습관에 그냥 그렇게 말했을 것 같아 제가 막걸리 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白酒詩                              막걸리 노래

 

我昔浪遊時 所飮惟賢耳*       젊을 땐 나다니며 막걸리만 마셨지       

時或値聖者** 無奈易昏醉      청주라도 마시면 쉬이 취해 버렸는데     

及涉地位高 飮濁無是理        벼슬이 높아져 가자 막걸리가 멀어지데

今者作退翁 俸少家屢櫃        지금은 퇴옹이라 녹도 줄고 빈한해서        

緣醑斷復連 篘飮亦多矣        좋은 술 끊어지면 용수 박아 떠 마시니   

滯在胸隔間 始覺督郵鄙        뱃속이 더부룩한 게 느낌이 영 아니야

濁醪稱有妙 未會杜公意        막걸리 맛 묘한 걸 여태껏 잘 몰라도     

迺知人之性 與習自漸漬        살다 보면 그 맛도 스며들어 젖는데       

飮食地使然 何有嗜不嗜        음식도 형편대로지 기호가 따로 있나

爲報中饋人 有入愼輕費        안사람께 말해 두소 생길 때 아끼자고

無使樽中酒 不作澄淸水        술잔에 술 채우거든 맑은 술만 고집말고.

                李奎報                                             이규보

 

     ***백운은 이백이 月下獨酌에서 막걸리濁酒를 현자로 취급하고濁如賢

     맑은 술白酒 즉 淸酒를 성인에 겨눈比聖者 것을 빌려

     막걸리를 賢耳 청주를 聖者로 표현하고 있네요.

 

막걸리가 몸에 붙지 않아 좋은 술을 마셔야 하겠는데 돈은 없고 그래서 막걸리라도 마시면 주체로 고생하고, 지금 제가 생각해도 白雲의 심정이 안타깝습니다. 이런 白雲이 친구 전이지全履之가 집에 찾아 오자 접대하느라 헌옷을 잡히고 술 받으러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쓴 시의 감정이 많이 격해진 것을 보면, 둘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술 꽤나 마셨던 모양입니다. 술 좋아해서 술 자주 마시는 사람은 술병 앓는 일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왕에 白雲을 모셨으니 그의 술에 대한 시 몇 편 더 보여드립니다.

 

 

冬日與客飮冷酒戱作 겨울날 찬 술 마시며                            

 

雪滿長安炭價擡   장안이 눈에 덮여 숯값도 들썩이니             

寒甁凍手酌香醅   찬 술병 언 손으로 전저리 따뤄 드네           

入腸自暖君知不   뱃속이 짜르르르 따스한 걸 아시온지            

請待丹霞上瞼來   보세요 눈꺼풀 위로 붉어 오는 술기운**      

           

        **"기다리세요 눈꺼풀 위가 붉어 오는 걸"(5-3-4-3)을

              우리 율 3-5-4-3에 맞춰 바꾸어 옮겼습니다.

 

省酒***                    술을 줄임

 

厭聽人間誚酒狂        사람들이 술꾼이라 뭐라는 게 하 싫어

邇來省飮亦無傷        술 마시기 줄였더니 속탈이야 없지만

唯於放筆高吟處        붓자루는 던져놓고 소리 높여 읊을 뿐

一翮徵摧莫欻張       하나 깃 꺾인 날갠양 확 펼 수가 없구나  

 

    ***시제 省酒의 '省'은 '생'으로 읽어야 합니다. '살펴본다'의 뜻은 

   '성'이지만(省察성찰), '덜다', '줄이다'는 '생'입니다(생략省略). '반주飯酒'는 밥에 따라오는

    '반주伴酒'인데 혹 백운이 飯酒 없이 밥을 먹었다면 그 경우가 바로 伴酒를 생략한 '생주省酒'입니다.

 

醉書示文長老     문장로께 써서 보임                                 端午郭外有感      단오 날 성 밖에서

 

一盃美酒如丹液 이 미향주 한 잔은 선약과도 같아서      舊墳新壙接相隣 옛 무덤 새 무덤이 서로서로 이웃이네

坐使衰顔作少年 가만 앉아 찌든 얼굴 소년처럼 만드네  幾許平生醉倒人 한평생 술에 절어 산 사람 몇 되겠나

若向新豊長醉倒 술상을 새로 하고 곤드레 만드레하면  今日子孫爭奠酒 오늘은 자손들이 술 올리기 다투지만

人間何日不神仙 세상이 어느 날인들 신선세계 아니랴   可能一滴得霑脣 한 방울 술일지언정 그 입술을 적실까 

 

白雲은 깜짝 놀랄 정도로 사실적인 생활 감각을 보이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단오 날 성 밖의 묘지들에서 성묘하는 것들을 보고 그 감회를 읊은 '단오날 성 밖에서'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자꾸 술 올리면 무엇 하나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아들과 조카에게 주는 시에서, '죽고 나서 무덤에 와서 절하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느냐'고 물으며, '그 무덤에 넋이 있고 없고를 누가 알겠느냐'고도 묻습니다. 

 

"살아 생전에 한 잔 술로 내 입을 적심만 못하다(不若生前一盃濡我口)"고 말하며, "좋은 안주는 필요없이 다만 술상이나 부지런히 차리는 게 옳다(不必擊鮮爲 但可勤置酒)"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술 애호가이십니다. 그에게 술은 시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를 지으면서 술이 없어 시가 되지 않은 경우는 참 많이 있었지만, 시가 있어 술 마신 것 같은 때는 한번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에게 시는 술이 아니었습니다. 

 

나중 혹시 시를 읽는 것 만으로도 술 마신 것 같은 분위기의 시가 찾아지면 좋겠습니다. 白雲이 요새 나온 진홍이표 막걸리 같이 각자 담은 술이나 목포집 막걸리 같은 걸 마시면 그 맛을 무어라 하실지, 그래도 체해서 고생하실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진홍이표 막걸리가 뜸한 즈음에 문경인聞慶人께서 참으로 고맙게도 지난 명절에 고운 미향주를 한 상자 보내주시더니 이번에도 보내주셨습니다. 혼자 마시기 과분한 미향주인데 제가 정말 좋아해서 늘 향수를 마시는 기분으로 미소지으며 즐겼던 술입니다. 부엌 찬장에 놓인 그 술병만 보아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슬며시 한 잔 마시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저번에 한라봉을 보내주어 맛있게 먹고 고맙다는 인사도 다 못챙겼는데 진양 어른께서 이번에는 호주산 덕용 포장의 붉은 포도주를 한 상자 보내주셨습니다. 아내는 사람들이 제가 딴 어떤 선물보다 술 선물을 좋아하는지 어찌 알고 술만 보내냐고 웃지만 나는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술 마시는 버릇까지 기억하고 술을 보내주시는 그 분들께 그저 고마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이따금 밖으로 불러내어 술자리 챙겨주는 본룡이는 말할 것도 없고, 어 며칠 뜸했네 싶으면, 어김없이 서로 전화하는 정수나 동식이에게 어찌 무슨 말로 고맙다 하겠습니까만,  못지 않게 집에서 책 읽고 한 잔, 마당 일하고 한 잔, 그리고 텔레비에 볼 만한 영화라도 나오면 술부터 챙겨 드는 저의 술 버릇을 위해 좋은 술을 보내주시니 어찌 고마운 마음 감출 수 있겠습니까?

 

 

이규보가 술 좋아하고 술에 대해 읊은 시가 한두 편이 아님을 누가 모르랴 싶어 가두어 두었다가 술 보내준 진홍이와 문경인 그리고 또 한 분 진양 어른 등 여러분에 대한 고마움에 그 동안 생각으로만 가두어두었던 白雲의 시 한 편을 마저 꺼내어 보여드립니다. 혹시나 새로운 시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겠기에.

 

 

謝友人送酒       술을 보내주셔 고맙습니다.

 

邇來盃酒乾       요사이 술잔에 술이 말라 버리니

是我一家旱       우리 사는 집 안에 가뭄이 들었지요.

感子餉芳醪       고마워요 보내신 향수 같이 좋은 술                     

快如時雨灌       단비가 따로 있나요 정말 기분 좋네요.

     

 

 

등록후기 :

지금도 미향주 한 잔 하고 있습니다만, 술맛도 좋고 고마운 마음에 기분도 좋습니다.

술을 보내주시어 고맙습니다.

그리고 어제 주말에 있었던 원정 산행 길에 진홍이 들고 온 진홍이표 막걸리를 한 병 아껴 가지고온

뽈갱이의 주선으로 오랫만에 걸쭉하고 시금털털한 진홍이표 막걸리 한 잔 마셨습니다.

술을 보내주셔 고맙습니다.   謝友人送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