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과 술 한잔(술잔 앞에서)
아주 정치적이라며 말을 막은 적이 이 자리 말고서도 다섯 번이 더 되었다. 사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사람이 남이 무슨 말만 하면 정치적이라고 사람의 말문을 닫게 하면 되냐고 소리를 높히고 나니,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 취했다는 소리 듣겠구나 후회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언성를 높히다니 이젠 술을 그만 먹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고개가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두런두런 들리는 얘기 소리가 술을 확 깨워놓고 말았다.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하더니 무슨 펀드에서 손해를 봤는가 짚어 보기도 하더니 급기야 자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평생 정치적으로 산 적 없는데 남의 눈에 그렇게 비쳤다면 헛 살았다는 술회를 듣게 되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머리는 이미 얼음장 같은데 눈꺼풀에 남은 술기 탓인지 정규가 따라 나오며 제 차를 타고 가라 권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말만 하고 잘 주무시라 말도 못하고서 밤을 따라 집에 와 술을 찾았다.
김지하의 애린이라는 시집에는 눈에 띄는 술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머리 속에 떠 올랐다. 밖에서 술 먹고 와서 집에서 술 찾는다고 알콜중독 아니냐는 아내의 말이 그 시를 불렀다. 시인에게 시인의 아내도, 친구도, 후배도, 모두 알콜중독이라고 다구치니 시인은 시인한다. 그리고 한밤중에 혼자 소주잔을 앞에 놓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알콜중독인가 그리고 답한다. 아니다.
같은 시집에서 세 편의 시를 보여드린다.
그 소, 애린
5.
새벽 다섯 시에 깨어 오똑 앉아
늘 소주를 마셨더라
작은 한 마리 개미마저 이젠 소름이 끼쳐
괴롭힐 것 그저
제 몸 하나 밖에 없으니
칼부림할 것 달랑
제 마음 하나밖에 남김 없으니
9.
두 달을 간신히 넘기고
술 끊기 석 달째로 막 접어든
아침 산책길
찌그러진 구멍가게 유리문에 붙어
너덜대는 서투른 먹글씨 하나
'막걸리 팜니다'
파계!
초봄 옅푸른 저 하늘빛에 또 파계!
37.
청명 무렵 한날 오후 세 시쯤
단군전 잔디밭에서 혼자서
소주 나발불며 동백을 보는데
한 병 지나기 무섭게 붉은 꽃 자취 없고
흰 연기 자욱자욱한 속에
해 묵은 원한 자락 새 핏빛으로 떠오른다
김지하
취기가 온 몸을 감돌아 더 이상 술 생각이 없었는지 반쯤 남은 술잔을 옆에 두고도 자판만 두들기고 있는데 문득 정현종이 생각났다. 다락방에 올라가 정현종의 시집을 가지고 오다가 같이 있던 시집들 몇 권도 끼웠다. 아내가 깨어 있었다면 오밤중에 술에 취해서 무슨 짓이냐고 말렸을 정도로 오르내리기 힘든 다락방인데도 오히려 낮에 정신 말짱할 때보다 더 간단히 다녀온 느낌이다. 반쯤 남았던 술잔을 비우고 새로이 한잔을 채운 다음 자판 앞에 허리를 펴고 앉아 한동안 멀리 두었던 시를 읽는다.
정현종도 정치 빼면 걸릴 것 없는 술잔 앞에서 비우면 취하는 뜻에 따라 오늘도 숨쉬는 법을 배운다. 문태준은 와병 중인 아내를 두고 어두운 술집에서 백년을 살자 하는 백년의 아내를 생각하며 눈물을 마신다. 황동규는 김현이 죽은 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다. 그리고 진짜로 태연히 아들방에서 오줌 누고 화장실가서 잔다. 태연히. 아들이 보는데. 정현종의 젊은 날 시집 중에 '고통의 축제'에는 '술의 노래'가 두 편 있는데 그 중 하나를 골랐다. 물의 향기가 젊은 날엔 원수였을까? 눈에 불을 달고 떠돌게 하는 물 향기가 원수였을까?
무엇보다 송수권의 '시골길 또는 술통'은 동영상으로 만들어 올리고 싶은 작품이다. 동영상을 보는 듯한 이 시 하나가 시골 주점에 앉아서 새 술 오기를 기다리는 주모와 장꾼들과 그리고 시詩 세상 밖의 술꾼 모두에게도 술통 실은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게 만든다. 참 좋다.
술잔 앞에서
숨 쉬는 법을 가르치는
술잔 앞에서
비우면 취하는
뜻에 따라서
오늘도 나는 마시이느니
여러 세계를 동시에 넘나드는 몸
원천 없는 메아리와도 같은 말
정치 빼놓으면 참 걸리는 데 없어
나는 마시느니 오오늘도
비우면 취하는
뜻에 따라서
정현종
百年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게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가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문태준
너 죽은 날 태연히
-같이 술 마시던 시절의 김현에게
너 죽은 날 밤
차 간신 몰고 집에 돌아와
술 퍼마시고 쓰러져 잤다.
아들의 방.
아들이 밤중에 깨어보니
내가 화장실에서처럼
소변보고 있었다
태연히.
그리곤 방을 나가
화장실에 누웠다
태연히.
황동규
시골길 또는 술통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들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 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송수권
술의 노래
물로 되어 있는 바다
물로 되어 있는 구름
물로 되어 있는 사랑
건너가는 젖은 목소리
건너오는 젖은 목소리
우리는 늘 안보이는 것에 미쳐
病을 따라가고 있었고
밤의 살을 만지며
물에 젖어 물에 젖어
물을 따라가고 있었고
눈에 불을 달고 떠돌게 하는
물의 향기
불을 달고 흐르는
원수인 물의 향기여
정현종
젊은 정현종이 이미 그때 알고 있었던 것을, 그리고 오랜 동안 술자리에서 언성 높일 일을 피해 왔던 것을, 수 십번 만났을 때도 어제도 초저녁에 만나 한밤이 이슥하도록 잘 넘겼는데 기어코 언성을 올리고 말았었다.
"원천 없는 메아리와도 같은 말, 정치 빼고는 참 걸리는 데 없는" 정현종이 나를 달래고, 문태준이 꼭두새벽에 남은 한잔을 마져 마시게 한다. 그렇다. 황동규처럼 태연히 아들방에서 오줌 누고 화장실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원천 없는 메아리와도 같은 말로" 서로 마음 상할 까닭이 없는 것을.
점심 때까지는 자다가 정수가 시간 괜찮은지 알아보고, 목포집에 가서 송수권의 술 배달 자전거가 가져다 놓은 술통의 시금털털한 막걸리로 해장할 생각하면 벌써 마음이 포근해진다. 동식이도 올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여기까지 와서 드디어 술이 취해 오고, 잠이 눈꺼풀에서 문자판 위로 떨어져 내린다.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족족 여러 시인들의 술 이야기들을 올려나가겠다. 혹 권하시고 싶은 시 있으면 알려주시길 부탁드린다.